kuro 1
악신에게 총애받는 자 1편
<-- 모든 것을 잃다. -->
(독자 여러분의 피드백을 받아 2019.06.05 기준, 초반부 내용을 전반적으로 수정했습니다.)
침체沈滯의 저주.
이 이름 모를 판타지 세계에 떨어진 후 강현에게 내려진 저주다.
저주의 효과는 명료하다. 말 그대로 발전을 방해하여 그 어떤 성장도 이룩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저주에 걸린 당사자는 능력치 한 자리조차 올리지 못하며 새로운 능력을 습득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게임처럼 능력치를 상승시키고 어빌리티를 얻어 강해지는 이세계에서 이러한 저주는 치명적이기 그지없다.
자신처럼 이세계로 온 지구인들, 통칭 스트리머들이 새로운 힘을 얻을 때 강현은 조금도 발전하지 못한다.
다른 이들의 성장을 올려다보기나 하면서 계속 초기 스테이터스를 유지하는 나날, 강현은 줄곧 그런 불공평한 현실 속에서 곤욕을 치러야만 했던 것이다.
한 때 강현은 같은 기수의 스트리머들을 이끄는 지도자였다.
이 이름 모를 판타지 세계, 통칭 이세계에는 많은 사람들이 소환되며 이 주기적인 소환에는 그 어떤 공통점도 없다.
아직까지 현재진행형인 여신의 부름은 평범한 직장인이나 학생, 군인을 분간 없이 소환했고 심지어는 어린아이나 임산부까지 불러들였다.
낯선 타지와 괴물들의 위협, 난데없이 세상을 구해달라는 일방적인 부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안과 공포에 시달렸다.
강현은 그런 사람들을 지탱해주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항상 선두에 서서 갖은 위협과 맞서 싸웠고, 불안해하는 이들을 독려해주는 믿음직스러운 리더였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강현의 입지는 점차 바닥을 치게 되었다.
강현과는 달리 동료들은 경이로운 수준의 성장을 이루어냈고 날이 다르게 강해져갔다.
그런 와중에 강현 혼자 초기 스테이터스를 유지하고 있었으니 도태되는 건 당연했다.
그렇게 3년이 지나 지금에 이르렀다.
‘스테이터스.’
이름- 진강현.
성별- 남성.
나이- 28세.
등급- 언랭크.
클래스- 없음.
소속- 없음.
구독자- 0명.
은총- 칠흑이 낳은 알.
어빌리티- [검술 LV. 1], [콜드리딩 LV. 1]
[체력 10] [내구 11] [근력 15] [민첩 13] [기교 16] [마력 10] [의지 17]
강현의 스테이터스는 여전했다.
막 이세계에 온 지구인의 능력치가 10 안팎인 걸 고려하면 강현의 능력치는 꽤 높은 편에 속했다. 은총과 어빌리티도 가지고 있고 이것들의 성능 또한 나쁘지 않다.
그러나 성장을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
활동을 시작한지 1년을 갓 넘긴 초급 스트리머의 능력치 합산은 최소 강현의 세 배. 여기에 어빌리티까지 더해지면 그 격차는 더욱 처참해진다.
동료들은 그보다 몇 배는 더 성장했다. 아니, 정확히는 옛 동료라고 하는 게 맞겠지.
그들은 아득히 높은 경지로 올라가 더 이상 강현과는 비교조차 안 되는 강자가 되었으니까.
그런 동료들 곁에 있던 강현은 늘 조롱받기 일쑤였으며 동료들과 지겹도록 비교 당했다.
모멸, 열등감,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을 비참하게 만든 동료들의 연민.
수많은 감정들이 강현을 괴롭혀왔고 이는 점점 심해져 동료들과의 갈등으로까지 이어졌다.
결국 강현은 동료들을 떠났다.
지긋지긋했다. 더 이상 비교당하고 싶지도, 무시당하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을 업신여긴 놈들을 모조리 짓밟을 만큼, 예전처럼 동료들에게 신뢰받을 만큼만이라도 좋았다. 지겹기 짝이 없는 초기 스테이터스에서 벗어나 자신도 강해지고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몇 달이나 이곳을 찾아 헤맸어. 이번에야말로 이 악순환을 끝내는 거야.’
지난날을 회상한 강현은 발걸음을 옮겼고, 그 뒤를 한 백발의 남성이 따랐다.
그의 이름은 채홍. 강현과는 이세계에 온 직후부터 알고 지낸 사이이며 강현이 동료들을 떠날 때 유일하게 그를 따라온 파트너다.
그들이 발을 들인 곳은 깊은 숲속에 숨겨진 커다란 동굴.
천연 동굴 같은 외부와는 달리 내부엔 수 천 년은 족히 지난 고대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외벽엔 벽화가 가득했고 안쪽에서부터 뻗어 나온 푸른색 빛이 통로 전체를 은은하게 빛냈다.
강현과 채홍은 이 빛에 의지해 동굴 내부로 들어갔다. 얼마간 벽을 따라 걷자 이윽고 두 사람은 자신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것을 발견했다.
“드디어……!”
강현이 소리쳤다. 곁에 있는 채홍도 환희에 찬 얼굴로 두 눈을 빛냈다.
아무런 탄성도 내지르지 않은 채홍이었지만 그는 실성증으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대신 온몸을 흔들며 기쁨을 표출했고, 강현 또한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약 20미터 높이의 거대한 문과 그 앞을 지키고 있는 푸른색 기둥.
석재로 만들어진 문에는 정교한 조각이 새겨져 있었으며 기둥은 입체 퍼즐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기둥의 크기는 강현보다 조금 더 큰 정도, 그 커다란 직육면체 주위에는 퍼즐 조각 같은 물체가 둥둥 떠다녔다.
경이로운 그 모습을 보며 강현이 말했다.
“도서관에서 본 기록과 똑같아. 틀림없어, 여기가 바로 던전이야……!”
던전, 마가 봉인되어있는 전설의 유적.
스트리머들이 활동하기 시작한 이래 수차례나 발견된 이 지하 유적에는 수많은 보물들이 잠들어 있다.
방대한 양의 금은보화와 진귀한 자원, 잊혀져버린 고대의 비술, 존재 자체가 전설인 강력한 장비들까지.
던전은 발견하는 것 자체가 로또나 다름없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언랭크 등급의 스트리머라도 던전 하나만 발견하면 최상위 스트리머인 플레티넘 등급까지 수직 상승하는 것이 가능하다.
굳이 스스로가 던전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던전은 최초 발견자에 의해서만 입장이 가능하니 입장료를 받는 것만으로도 일확천금이 쏟아진다.
동료들의 곁을 떠난 뒤, 강현과 채홍은 3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이 던전을 필사적으로 찾았다.
변경의 숲과 산을 모조리 뒤졌으며 위험한 괴물들에게 쫓겨 수 십 번이나 죽을 위기에 처했다. 마을로 돌아온 후에도 도서관에서 관련된 서적들을 밤새도록 독파해 던전의 정보를 찾았다.
실낱같은 희망을 잡기 위한 고난의 연속.
지금 이 순간 비로소 보상의 시간이 찾아왔다.
[여기엔 꼭 저주를 풀 방법이 있으면 좋겠다.]
한동안 던전 입구를 바라보던 중 채홍이 수화로 말했다.
두 사람이 여기까지 온 근본적인 이유는 강현의 저주를 풀기 위해서였다. 이 전설의 비경 속에는 정체불명의 저주를 풀 방법이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 하지만 굳이 저주를 못 풀어도 상관없어. 던전을 발견한 이상 우리 형편은 지금과는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좋아질 테니까.”
강현이 성장을 못해 도태되었듯이 채홍 또한 신체적 장애와 약해빠진 능력 탓에 동료들 사이에서 소외당했다.
열등아들로 결성된 듀오였지만 두 사람은 끝내 성공했다. 설령 저주를 풀지 못하더라도 던전 안에선 막대한 보상이 기다리고 있다.
지금처럼 무시당하고, 짓밟히고, 소외당하기만 하던 날과는 작별을 고하게 될 것이다.
“일단 동기화부터 하자. 기록대로라면 기둥은 처음으로 접촉한 사람에게 관리권한을 넘겨준다고 했어. 동기화가 끝나면 바로 들어갈 수 있을 거야.”
던전은 기본적으로 입구가 봉쇄되어 있다. 웅장하기 그지없는 문은 항상 굳게 닫혀 있으며 어떤 방법으로도 열지 못한다.
대신 입구 앞에 세워진 기둥을 통해 던전 내부로 워프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 워프 기능의 관리권한은 오직 첫 발견자에게만 주워지기 때문에 모든 스트리머들이 던전의 첫 발견자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 사실을 상기하며 두 사람은 기둥으로 다가갔다.
몇 걸음인가 기둥을 향해 다가간 순간.
“……! 채홍아 기다려!”
“……?!”
무언가를 직감한 강현이 갑작스레 자리에 멈춰 섰다. 그와 동시에 앞서 가고 있던 채홍의 뒷덜미를 황급히 잡아끌었고, 지면을 걷어차 후방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바닥에서 수 십 개의 철가시가 매서운 기세로 튀어나왔다.
철컥! 카아앙! 철컥! 카아앙!! 철컥! 카아앙!!
마치 이빨을 연상케 하는 가시는 끊임없이 왕복운동을 하며 침입자에게 살의를 드러냈다. 그 광경을 보며 강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시 함정……. 하긴, 침입자 대처가 없을 리 없지.”
가까스로 함정을 피한 채홍도 식은땀을 흘리며 수화를 했다.
[……해제할 수 있을까?]
“가능하긴 하지만 많이 힘들어. 위험 부담도 크고, 무엇보다 수 십 개나 있으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지?]
난감한 표정으로 수화를 하는 채홍. 그에 강현은 고민하듯 주위를 살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시가 나오지 않는 부분을 발견했다.
“저쪽으로 우회하자. 공간이 그리 넉넉하진 않지만 조심하면 문제없어. 이참에 정비를 하고 천천히 들어가기로…….”
루트를 발견한 강현이 차분히 진입 계획을 세울 때였다.
어디선가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방향은 강현과 채홍이 지나온 길. 각기 다른 대여섯의 발소리가 한 데 섞여 다가왔고, 발소리의 주인공들은 머지않아 두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갑옷과 무기를 걸친 여섯 명의 남녀였다. 행색을 보아하니 스트리머 파티가 틀림없었다.
누군가는 검을, 다른 누군가는 지팡이를 손에 들고 있었다. 척 봐도 필요한 역할군을 고루 갖춘 수준 높은 파티였다.
그 중 망토를 걸친 젊은 남성이 선두에 나섰고 그는 곧 오만방자한 태도로 두 사람에게 말했다.
“야, 거기 너희. 지금 뭐하자는 짓거리냐?”
예의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말투였다. 나이는 강현보다 훨씬 어린 것 같은데 첫인상부터 강현과 채홍을 자신의 아래라고 생각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에 강현이 불쾌한 눈빛으로 되받아쳤다.
“너흰 뭔데?”
“하, 우리를 몰라? 우리 헤비레인 클랜이야. 클랜 마스터의 동생, 주진호 도련님 휘하 파티라고. 우리 영지에서 활동하면서 그것도 못 알아보냐?”
“헤비레인 클랜?”
분명 들어본 적 있다. 헤비레인이라는 클랜도, 주진호의 이름도 말이다.
강현과 채홍은 던전 탐사를 위해 리델타인이라는 영지를 거점으로 삼았다. 그곳을 지배하는 클랜이 바로 변경 최대의 클랜 중 하나인 헤비레인 클랜이었다.
영지를 지배하는 클랜이라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세간에 퍼진 악명이 자자해서 못 들을 수가 없는 이름이다. 그 중에서도 주진호와 그의 패거리는 무소속 스트리머들 사이에서 욕설과 이음동의어로 취급될 정도로 평판이 좋지 않다.
클랜 마스터의 동생이라는 것을 내세워 부조리란 부조리는 다 저지르는 쓰레기.
남의 공로를 빼앗고 자기보다 약한 스트리머들을 짓밟으면서 우월감에 빠지는 것이 그의 대표적인 악행이었다.
제일 듣고 싶은 않은 이름에 보고 싶은 않은 얼굴들이다.
뒤늦게 알아본 강현은 같잖다는 듯이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클랜원을 이끌고 이곳에 온 이상 목적은 뻔했으니까.
“네가 주진호 부한데 나보고 뭐 어쩌라고.”
관심 없다는 투로 말하며 강현은 등을 돌렸다.
지극히 무심한 말투에 남자는 잠시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여전히 오만한 눈빛으로 강현을 윽박질렀다.
“하, 상황 파악이 안 되냐? 이 던전은 우리가 먼저 발견했다고. 그런데 잠깐 정비를 하러 다녀온 사이에 선수를 쳐? 게다가 그게 언랭크들이라니 주제는 알고 설치는 거냐?”
예상했던 대로 남자는 던전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주워섬기자 곁에 있는 클랜원들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킥킥 웃어댔다.
물론 그의 말이 사실일 리는 없다. 만약 그의 패거리가 첫 발견자라면 워프 장치의 관리권한은 이미 그들에게 넘어갔을 테니까.
여전히 직사각형을 유지하고 있는 기둥. 그것은 이 던전이 아직 누구의 손에도 넘어가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어떻게 알고 따라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들의 뒤를 밟았다는 것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를 파악한 강현은 함정들을 지나며 남자에게 물었다.
“너희가 먼저 발견했다면 왜 워프 장치를 그대로 둔 거지? 동기화도 하지 않고 정비를 하러 나간 건 어떻게 설명한 건데,”
“너 따위한테 그걸 왜 말해줘야 되냐?”
“소유권을 주장하려면 납득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해야할 거 아니야.”
“아, 아, 됐고! 마음 같아선 당장 너희에게 벌을 내려주고 싶지만 이번 한 번만 기회를 주지. 던전을 포기하고 여기서 꺼져. 그러면 너희들이 저지른 부정행위는 특별히 눈감아주겠어.”
“…….”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억지에 강현은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어느새 강현은 기둥 앞에 도착했고, 푸르게 빛나는 직육면체가 그의 눈앞에 있었다.
애초에 남자의 말 따위 제대로 들어줄 마음도 없었다. 그가 얼마나 허황된 소리를 해댈지 들어보고 싶었을 뿐이다.
“헛소리 하려면 다른 데 가서 알아봐라. 네 잘난 도련님한테 가서 징징거리기라도 하던가.”
남자의 말을 일축한 강현은 기둥을 향해 손을 뻗으려 했다.
더 이상 저런 놈들과 놀아줄 이유는 없다. 그러니 빠르게 동기화를 끝내고 던전 내부로 진입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주먹만 한 빛 덩어리가 강현을 멈춰 세웠다.
콰앙!
눈부신 빛과 함께 무언가 폭발했다.
지근거리에서 일어난 폭발에 강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선 남자가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야, 너 진짜 뒤지고 싶냐?”
========== 작품 후기 ==========
독자분들의 피드백을 받아 1편부터 15편까지의 내용을 전반적으로 수정했습니다. 중요하니까 두 번 말합니다.
(본 작품의 내용은 모두 픽션이며 현실의 인물, 단체, 사상과 일절 관계가 없습니다. 또한 이 작품에는 잔혹하고 충격적인 묘사, 선정적인 장면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ntr 없습니다.
맨 마지막에 독자님 이름 나오는 거 이벤트 때문에 그런 거라나 봐요.
채홍이가 앓고 있는 장애는 실어증이 아니라 실성증이 맞습니다. 실어증은 뇌에 문제가 있어서 언어 구사를 못 하는 거고 실성증은 발성기관에 문제가 있어서 목소리를 아예 못 내는 겁니다. 채홍이는 전자입니다.
악신에게 총애받는 자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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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로브를 걸친 마법사가 주문을 영창하고 있었다.
그녀는 언제라도 마법을 쏠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강현을 향해서 빛 덩어리, 정확히는 빛 계열의 기초 마법 라이트 미사일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마법사뿐만 아니라 궁수와 도적까지 활과 암기를 겨누며 강현을 위협했다. 한 번만 더 기둥에 손을 댔다간 벌집으로 만들어버리겠다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그들 사이에서 남자가 매섭게 말했다.
“우리 헤비레인 클랜이라고, 이 하찮은 언랭크 새끼야. 몇 번이나 말했는데 그걸 못 알아 처먹어? 영지 근처에선 뭐가 됐든 다 우리 거라 이 말이야. 너 같이 소속도 없는 언랭크 새끼가 숟가락 얹을 곳이 있을 줄 알아? 어?! 만년 언랭크 진강현!”
말로 해결할 생각은 버렸는지 남자는 대놓고 협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강현의 주위를 끈 것은 그의 협박이 아니었다. 자신의 이름을 들은 강현은 정색하며 남자에게 물었다.
“……너 나 알아?”
“하! 알다마다! 성장을 방해하는 저주에 걸렸다면서? 던전을 찾은 이유도 저주를 해제할 방법을 찾기 위해서겠지! 정말 같잖은 발버둥이야. 저주를 해제한다한들 너처럼 뭐하나 잘난 거 없는 병신새끼는 평생 밑바닥이나 구를 텐데!”
격정적인 어투로 남자가 모욕을 쏟아냈다. 강현을 향해 욕설을 내뱉은 그는 질리지도 않게 클랜을 내세우며 협박을 이어갔다.
“잘 들어라. 밑바닥에서나 구르는 네 놈들하고 다르게 우리 헤비레인은 변경에서 제일가는 클랜이 될 거야. 우리 마스터는 곧 챔피언이 될 테고 이 변경에서 우리에게 거스를 수 있는 놈들은 아무도 없게 된다고! 너희 같은 찌질이 듀오가 우리한테 덤벼서 무사할 줄 알아?!”
챔피언. 그것은 아홉 단계로 이루어진 스트리머의 등급 중 최고의 등급이다.
확실히 변경 최대의 클랜 중 하나인 헤비레인의 마스터라면 그 자리에 도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클랜 마스터가 변경 최강자인 것은 결코 아니다. 하물며 이들이 도련님이라고 모시는 주진호는 잘 해봤자 중하위 등급인 브론즈에 그칠 것이다.
확실하지도 않은 자기 마스터의 미래를 운운하며 유세를 떠는 꼴은 추하다고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만년 언랭크랑 말도 못하는 목 병신 새끼야. 좋은 말로 할 때 기둥에서 떨어져. 저 티어 쓰레기들은 저 티어 쓰레기답게 강자에게 설설 기라고!”
남자가 검을 뽑아들었다. 여기서 대항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자신의 패거리와 함께 덤벼들 것이다.
하지만 강현은 두렵지 않았다.
얌전히 대화로 끝내기엔 너무나 많은 모욕을 들었다. 고작 두 단계 높은 브론즈들이 강자를 운운하며 우월해하는 모습을 두고 볼 수 없기도 했다.
게다가 강현에겐 믿을 구석이 있다. 일말의 성장도 하지 못한 그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겠는가.
“나도 경고하겠는데.”
강현 또한 검을 꺼내들었다.
직경 70센티미터의 한손검이 헤비레인 패거리에게로 향했다.
날카로운 칼끝을 남자에게 겨누며 강현이 말을 이었다.
“내가 얌전히 당해줄 거라 생각하지마라.”
강현의 반응에 헤비레인 일당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언랭크의 스트리머가 자신들에게 대항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것이리라.
그것만으로 모자라 위협까지 하다니. 지금껏 약자들을 짓밟으며 농락해온 그들에게는 신선한 경험이었다.
“풉, 푸흡…… 푸하하하핫!”
“크흐흐흐흣!”
“킥킥킥……!”
하지만 놀라는 것도 잠시, 그들의 당황은 곧 비웃음으로 바뀌었다.
“아하핫! 저 아저씨 너무 멍청한 거 아니야? 저런 식으로 센 척하면 우리가 겁이라도 먹을 줄 아나봐?”
“눼가 얌저니 당해줄 거라 생가카지마롸아~! 참나, 가오 잡는 것도 상황 봐가면서 해야지, 저 새끼 그냥 병신인 거 같은데!”
“밑바닥만 핥아대니 대가리가 썩은 거겠지. 저런 놈은 맞아봐야 정신 차린다.”
누군가는 조소를 터뜨렸고, 누군가는 야유와 함께 강현의 행동을 허세로 간주했다. 강현을 무시하며 그를 어떻게 팰지 떠들어대는 이도 있었다.
다른 파티원들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모두 강현을 비웃었다. 성장도 못하는 열등아라고, 무엇 하나 잘난 것 없는 밑바닥 인생이라고 조롱하는 것이었다.
‘검사 둘에 원거리가 셋, 그리고 힐러가 하나…….’
그 와중에 강현은 상대방을 관찰하며 대응책을 강구했다.
적들이 전부 근접전에 특화됐다면 굳이 상대하지 않고 던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가시 함정을 지나치는 사이에 동기화를 끝내고 그대로 던전 내부로 워프하면 될 테니까.
하지만 궁수에 도적, 마법사까지 있는 조합이다. 도망치듯 동기화를 하려했다간 맞추기 쉬운 표적이 될 뿐이다.
기록에선 동기화를 하는 데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최소 수초 동안의 시간을 무방비하게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결국 저들을 전부 제압하기 전에는 던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크크큭. 그래, 그렇게 나오겠다면 어쩔 수 없지. 저 티어 쓰레기가 주제도 모르고 먼저 칼을 뽑아들었다, 이렇게 말하면 우리도 명분이 생기니까!”
클랜원들의 조소 속에서 남자가 소리쳤다. 그의 외침이 신호가 되듯 클랜원들은 준비해둔 원거리 공격을 발사했고 강현을 향해서 마법과 화살, 암기가 빗발쳤다.
하지만 이들 중 그 무엇도 강현의 몸을 꿰뚫지 못했다.
“뭐……?!”
궁수가 경악을 터뜨렸다.
그의 조준은 한 점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러나 강현은 가벼운 동작만으로 화살을 물 흐르듯 흘려보냈다.
그것은 마법과 암기 쪽도 마찬가지였다. 강현은 보이지 않는 속도로 날아온 암기를 걷어내듯 쳐냈으며 빛 덩어리는 옆으로 살짝 비켜서는 것만으로 피해냈다.
마치 투사체가 날아올 방향과 타이밍을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원거리 포지션은 당황에 빠졌고 그들의 공격이 끝나자 강현이 입을 열었다.
“끝났냐?”
직후, 강현이 지면을 박찼다.
그는 워프 장치를 발판 삼아 패거리를 향해 도약했다. 몇 미터나 이어진 가시 함정을 가뿐히 넘어선 후, 그는 선두에 있는 마법사에게 검을 휘둘렀다.
“그럼 내가 간다.”
“히, 히이익?!”
귀신 같이 육박 해온 강현을 보며 여마법사는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순식간에 목이 달아날 위기에 놓였으나 곁에 있던 남자가 강현을 막아섰다.
“어딜 감히!”
매섭게 검을 치켜든 남자. 허나 이마저도 강현의 상정 내였다.
검을 휘두르는 줄 알았던 강현은 급격하게 몸을 숙였다.
강현이 있던 자리를 남자의 검이 횡으로 베었고, 검을 피한 강현은 마치 처음부터 남자를 노리고 있었다는 듯이 몸을 튕겨 그를 걷어찼다.
빠아아아악!
“커허억……!”
시원하게 뻗은 올려 차기가 정확하게 턱을 가격했다. 남자는 단말마와 함께 나가떨어졌으며 강현은 한손검의 폼멜로 마법사의 목을 가격했다.
“……!”
둔중한 타격에 마법사는 금세 의식을 잃었다. 이를 본 클랜원들은 당황에서 벗어나 뒤늦게 공격을 퍼부었다.
“이, 이 새끼가아아!”
“깝치지 말라고!!”
도적과 검사가 전력으로 돌진해왔다. 양 방향에서 단검과 장검이 날아들었고, 그들 너머에선 궁수가 활시위를 당겼다.
“애쓴다.”
이번에도 그들의 행동은 모조리 읽혔다.
강현은 날아오는 화살을 맨손으로 잡고 이를 좌측에서 달려드는 도적의 팔에 꽂아버렸다.
“크아악!”
아니, 정확히는 도적이 스스로의 팔을 화살에 꽂았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강현은 그저 도적이 공격할 방향을 향해 화살을 가져다대었을 뿐이다.
고통에 신음하는 도적의 멱살을 낚아채어 그대로 엎어 쳤다.
도적의 몸이 바닥에 내쳐지는 타이밍은 검사가 돌진하는 타이밍과 정확히 일치했고, 검사는 강현에게 다가오지도 못한 채 도적의 몸에 깔려 쓰러졌다.
강현은 그런 그들의 머리를 사정없이 가격했다.
다리를 뒤로 당겨 온 힘을 다해 걷어찼고, 이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퍽! 퍼억! 콰악!
“자, 잠깐! 악! 아악!”
“크허억……!”
연이은 사커킥에 검사와 도적이 비명을 질렀다. 도중에 궁수가 몇 번이나 화살을 쐈지만 강현은 모두 낚아채어 두 사람을 향해 다트처럼 집어던질 뿐이었다.
“말도 안 돼……. 뭐야 저 놈…….”
자신의 화살이 먹히지 않자 궁수는 아연실색한 채 강현을 바라보았다. 그때쯤엔 이미 도적과 전사는 의식을 잃었고, 남은 건 궁수와 사제뿐이었다.
“다, 다가오지 마! 난 사실 궁수가 아니라 헌터야! 활보다 칼을 더 잘 쓴다고! 가까이 오면 이 칼로 두 동강을 내버릴…… 크헤엑!!”
강현을 향해 헌팅 나이프를 뽑아든 궁수였지만 그가 나이프를 꺼내들자마자 강현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나이프를 휘두를 틈도 없이 양손으로 궁수의 머리를 붙잡은 후 무릎으로 찍어버렸다. 안면을 가격당한 궁수는 이빨을 몇 개나 흩날리며 나가떨어졌다.
“야, 약자와 병자를 포용하는 자애로운 치료사시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빛을 가져오는 평화의 화신이시여…… 부디 그대의 종에게 다친 자를 치료할 힘을 주소서…….”
전투원들이 모두 당하자 한 쪽에서 사제가 치료의 법술을 영창했다.
그녀가 기도를 올리는 것과 동시에 주위에는 온화한 빛이 모여들었다. 그것은 머지않아 패거리에게 스며들어 강력한 치유 효과를 발휘할 것이 분명했다.
“선신 엘리누스 라제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다친 자는 아픔을 잊고 일어서리…… 꺄아악?!”
디링~, 딩딩~ 딩~!
궁수를 상대하느라 자칫하면 법술을 허용할 뻔했으나 어디선가 들려온 선율이 사제의 영창을 방해했다.
맑고 청아한 기타 소리가 동굴 전체에 울려 퍼졌다. 기타를 연주한 이는 다름 아닌 채홍이었다.
그가 자신의 머리색과 같은 새하얀 기타를 튕기자 신비로운 음색이 귓가에 들려왔다.
누군가에게는 듣기 좋은 소리겠지만 누군가에게는 끔찍한 소음으로 들릴 것이다. 바로 채홍의 어빌리티인 마법의 선율 때문이었다.
귀를 틀어막으며 비명을 지른 탓에 사제가 올리던 기도는 보기 좋게 끊겨버렸다. 당연히 법술의 발동도 취소되었다.
“아, 안 돼…… 빠, 빨리 다시 영창해야…… 히익!”
소음의 방해로 영창을 실패하자 사제는 다급히 새로운 법술을 영창하려 했다.
하지만 채홍은 이를 가만두지 않았다.
어느덧 지근거리까지 다가온 그는 사제의 목에 칼을 들이댔고, 주저앉아 있던 사제는 숨을 집어삼키며 목에 닿은 날붙이를 내려다보았다.
날카롭게 날이 선 폴딩 나이프였다. 스트리머가 사용하는 무기치고는 보잘 것 없었지만 사제의 숨통 정도는 간단하게 끊을 수 있을 흉기다.
[쉬이잇.]
사제의 행동을 가로막으며 채홍은 스스로의 입가에 검지를 가져갔다. 침묵을 강요하는 그 행동에 사제는 겁을 집어먹고 입을 다물었다.
사제까지 제압당하는 것으로 패거리는 모두 쓰러졌다. 이를 확인한 강현은 곧바로 남자에게 다가갔다.
“크으윽…… 이, 이 새끼가아아……! 감히, 감히 우리가 누군 줄 알고……!”
턱을 정통으로 얻어맞았지만 남자는 어떻게든 의식을 붙잡고 있었다.
그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힘겹게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그런 남자의 머리를 강현이 다시 한 번 걷어찼다.
빠악!
”끄하악!!”
남자를 보기 좋게 차버린 후, 강현은 그의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리곤 채홍이 사제에게 그랬듯이 강현 또한 남자의 목에 칼을 가져갔다.
“뭐하나만 묻자, 우리를 어떻게 따라온 거지?”
던전을 찾는 동안 단 한 번도 경계를 늦춘 적이 없다.
던전은 모두가 원하는 마르지 않는 금광. 만약 던전을 찾았다는 정보가 누설된다면 이를 노리는 이들이 끊임없이 강현과 채홍을 위협해올 것이다.
하물며 자신들은 약하기 짝이 없는 언랭크.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강현은 항상 신중을 기울였고 최소한의 이들에게만 던전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어떤 경위로 자신들을 쫓아왔는지, 누구에게 무엇을 들었는지 알 필요가 있다.
하지만 남자는 대답하기는커녕 강현에게 거드름을 피웠다.
“하! 내가 왜 대답해야 되는데? 넌 알 필요 없으니까 당장 이거나 놔! 내가 마음만 넘으면 너 같은 새끼는 눈 감고도 쳐 죽일 수 있어!”
시원찮은 대답에 강현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유언치곤 조악해. 시간 줄 테니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봐.”
아무렇지도 않게 살의를 드러내며 칼을 더욱더 들이밀었다. 한손검의 날이 남자의 살을 파고들었고 그의 목에선 서서히 피가 배어나왔다.
이놈은 진심이다. 죽음을 느낀 남자는 분통한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어떻게 너 같은 언랭크가 이런 힘을 가지고 있는 거지?! 네 녀석 성장을 못 하는 게 아니었냐?!”
“곧 죽을 놈한테 알려줄 이유는 없다. 묻는 말에나 대답해.”
“끄하아아악!!”
무덤덤하게 대답한 강현은 일말의 주저 없이 남자의 어깨를 찔렀다.
칼날이 뽑히며 새빨간 핏물이 사방에 튀었다. 남자는 고통에 비명을 내질렀으며 강현은 다시금 남자의 목에 칼을 겨누었다.
남자의 말대로 강현이 가지고 있는 힘은 무척이나 이질적이었다.
언랭크, 그것도 초기 스테이터스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강현이 브론즈 등급의 스트리머를 여섯 명이나 때려눕히다니,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놀라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현이 패거리를 쓰러뜨릴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강현의 어빌리티에 있었다.
어빌리티란 여신의 부름으로 소환된 자들이 발휘하는 일종의 초능력을 말한다.
어빌리티의 종류는 수도 없이 많으며 그중에는 강력한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종류도, 사용자에게 놀라운 재능을 부여하는 종류도 있다.
한 번도 잡아본 적 없는 검을 몇 분 만에 숙달하거나 마법의 재능을 하루아침에 터득하는 것쯤은 어빌리티의 보정이 있는 스트리머들에겐 일도 아닌 것이다.
강현의 경우에는 재능을 부여하는 ‘검술’과 초자연적인 능력을 부여하는 ‘콜드리딩’ 이렇게 두 가지의 어빌리티를 가지고 있다.
이중 강현이 패거리를 때려눕힐 수 있게 도와준 능력은 후자다.
- 어빌리티: 콜드리딩.
상대방의 다음 의도를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된다. 자신이 예측할 수 있는 행동만으로 한정되므로 알지 못하는 능력이나 처음 보는 움직임 등은 읽어낼 수 없다.
상대방의 의도를 간파하는 최상위 어빌리티.
거의 예지에 가까운 수준으로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하는 이 능력 덕분에 강현은 원거리 포지션들의 집중 사격도, 근접 포지션들의 맹렬한 공세도 전부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뛰어난 성능에 반해 마력을 소비하는 등의 부담은 전무하여 브론즈 등급의 파티 정도는 가볍게 때려눕힐 수 있다.
“자, 잠깐만 기다려……! 너 이 미친 새끼, 정말로 죽이려는 거냐?! 우리는 주진호 도련님 휘하라고! 날 죽이면 도련님이 가만있을 것 같아?!”
상황이 불리해지자 남자는 비굴한 태도를 취했다.
이번에도 클랜과 자기네 대장을 내세웠지만 조금 전과 같은 오만함은 없었다. 그것은 흡사 궁지에 몰린 쥐가 보잘 것 없는 이빨을 드러내는 것과 같았다.
끝까지 허세를 떠는 남자를 보면서 강현은 담담히 말했다.
“그래서 말했잖아, 당하고만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말라고.”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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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신에게 총애받는 자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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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들어줄 만큼 들어줬다. 남자는 강현의 질문에 끝까지 함구할 생각이다.
조금이라도 반성하는 기미를 보이면 죽이는 것까진 참았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태도는 여전히 마음에 안 들었다.
애당초 이대로 그를 살려 보냈다간 다음에는 더 많은 클랜원들을 몰고 와 강현을 위협할 터. 그런 일을 허락할 만큼 강현은 멍청하지 않다.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찍히게 될 거라면 그들이 움직이는 것을 최대한 늦추는 게 정답이다.
“그리고 너희가 숲 속에서 짐승들한테 뜯어 먹힌다면 내가 죽인 건지 어떻게 알겠어?”
자비라곤 찾아볼 수 없는 말과 함께 강현은 팔을 움직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차가운 날붙이가 남자의 목을 베었다.
“자, 잠깐만! 살려……! 크허억……!!”
남자의 목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목을 움켜쥐며 발악하는 그였으나 소용없었다. 남자는 괴로움에 몸부림치다가 끝내 힘없이 늘어졌다.
확인사살을 하듯 다시 한 번 검을 꽂아 넣은 후, 강현은 칼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그쪽은 어때?”
[전부 해치웠어.]
마침 채홍 쪽도 처리가 끝난 모양이었다.
강현에게 쓰러진 놈들은 모두 숨을 거둔 채였다. 남자를 심문하는 사이 채홍이 그들의 숨통을 끊어놓은 것이었다.
[필요한 일이었다지만,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아.]
피 묻은 나이프를 집어넣으며 채홍이 숙연하게 수화했다.
그에 강현도 착잡한 기색으로 이야기했다.
“대응하지 않았으면 지금쯤 쓰러져 있는 쪽은 우리였을 거야. 전부 이놈들의 인과응보라고 생각해.”
살인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지만 이 냉혹한 이세계에선 흔한 일이다.
이쪽에서 죽이고 싶지 않더라도 저쪽에서 죽일 각오로 덤벼오면 방법이 없다.
망설이는 쪽이 먼저 죽는다. 강현과 채홍은 이미 수차례의 전투 끝에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주진호 일당의 시체를 하나하나 밖으로 옮겼다.
신원을 확인하지 못하도록 장비를 전부 가로채고, 얼굴을 돌로 내리찍어 형체도 분간할 수 없게 만들었다.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시체들은 인근 숲에 유기하기로 했다.
이 근방에는 딕커나 늑대 같은 들짐승들이 수도 없이 돌아다니니 놈들의 시체는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뼈만 남게 될 것이다.
그렇게 사후 처리까지 마친 후 강현과 채홍은 비로소 던전 안으로 진입했다.
“워프 장치, 우리를 안으로 들여보내줘.”
기둥에 손을 대고 말하자 푸른빛의 기둥이 모습을 바꾸었다.
해체된 입체 퍼즐 같은 형태로 변한 기둥은 강현과 채홍을 빨아들였고 어느새 그들은 던전 내부로 들어와 있었다.
“여기가……. 말로만 듣던 던전인가……?”
[세상에…….]
내부로 들어온 두 사람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던전이라는 이름을 듣고 내부는 지하 미궁이나 땅굴 같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들어온 내부는 상상과는 차원이 달랐다.
[말도 안 돼, 여기가 그 문 너머인 거야?]
“확실히…… 이래서야 안으로 들어왔기 보단 완전 다른 곳으로 온 거 같아.”
말 그대로였다.
던전 내부에는 하늘이 있었고 두 사람을 반긴 것은 칙칙한 동굴이 아닌 광활한 꽃밭이었다.
하늘 위에는 보랏빛으로 물든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자주색의 달이 기묘한 빛을 내고 있었으며 길게 늘어선 은하수는 환상적이기 그지없었다.
지상에 펼쳐진 꽃밭엔 보라색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이름 모를 그 꽃들은 스스로 빛을 내고 있었고 자주색의 달빛과 어우러져 주위를 요야한 색으로 물들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굉장하군. 왜 비경이라고 부르는지 알 것 같아.”
저주를 해제할 생각으로 가득한 강현도 이런 절경 속에서는 넋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주위를 둘러보며 감탄을 터뜨릴 때, 채홍이 근처에 있는 꽃을 따며 강현을 불렀다.
“……! ……!!”
“응? 채홍아 왜 그래.”
소리 없이 발을 구르는 채홍의 부름에 강현이 다가갔다.
그에 채홍은 보라색 꽃을 내밀면서 빠르게 수화를 했다.
[이것 좀 봐 강현아! 대박이야!]
“이게 뭔데?”
수화를 하는 것만으론 부족했는지 그는 품 안에서 메모지와 펜을 꺼냈다. 휘갈기듯 빠르게 쓴 글을 내밀면서 채홍은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이 꽃 리비우스 미르나였어! 색이 진해서 몰랐는데 잎을 보니까 틀림없이 그 꽃이야! 한 송이에 10만 골드는 족히 받을 수 있는 희귀 약재라고!]
채홍의 말에 강현은 눈이 휘둥그레져선 꽃을 바라보았다.
리비우스 미르나. 수도에서도 좀처럼 구할 수 없다는 초 희귀 약재.
포션으로 가공하면 마법적인 치료 효과를 일으켜서 어떤 해로운 효과라도 해제할 수 있으며 다른 재료와 섞어 복용하면 영구적으로 마법 저항력과 마법 방어력이 상승하는 재료다.
마법과 대치할 상황이 많은 스트리머들 사이에선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진귀한 물건이다.
비교적 저급품으로 취급받는 건조화도 10만 골드를 가뿐히 넘기는데 여기 있는 꽃들은 생생하게 자라나고 있는 최상품이었다. 못 해도 건조화 보다 다섯 배 이상의 가격을 받을 것이다.
원화와 금화의 환율을 계산하는 건 무척 어렵지만 10만 골드면 중하층 가정의 한 달 수입과 맞먹는다.
원화로 치면 약 150에서 200만원, 하지만 생화의 가격은 건조화의 다섯 배 이상이니 꽃 하나가 최소 700만원을 넘는 것이다.
그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아직 던전에 발을 들인 직후인데 이 꽃들만 가져다 팔아도 호화 저택 몇 채 정도는 거뜬히 살 수 있을 정도였다.
“하, 하하…… 세상에…….”
채홍의 말에 강현은 실성한 것처럼 웃었다. 던전이 가진 어마어마한 가치에 전율이 돋은 것이었다.
이제 막 던전 내부로 들어왔을 뿐인데, 이 이상 나아가면 어떤 진귀하고 값진 물건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생각만 해도 미소가 떨어지지 않는다. 꿈에만 그리던 일이 비로소 현실이 되는 것만 같았다.
[어쩔까? 이대로 전진할까?]
들뜬 기색으로 채홍이 물었다. 그에 강현은 그를 진정시키며 이야기했다.
“아니, 시체를 처리하는데 너무 오래 걸렸어. 여기까지 오느라 보급품도 많이 소비됐고. 재정비하고 다시 오는 게 좋을 것 같아.”
밖에선 슬슬 해가 지고 있을 것이다. 마땅한 야영 장비도 갖추지 않은 강현 일행으로선 이 이상 던전을 나아가는 것도, 숲에서 야영을 하는 것도 어렵다.
영지로 돌아가려면 지금 돌아가야 한다. 그 말에 채홍도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그 순간.
“응?”
강현의 귓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채홍아, 방금 나한테 뭐라고 했어?”
[……? 아니?]
분명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였는데 채홍이가 부른 건 아니었다.
근처에 적이라도 있는 걸까. 강현은 검을 뽑아들었고, 채홍 또한 긴장한 기색으로 악기를 준비했다.
“저기다, 저기 뭔가 있어.”
머지않아 강현은 소리의 근원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꽃밭 한가운데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돌을 던져보았지만 별 다른 반응은 없었다. 적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위험이 없다는 걸 확인한 강현은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다가갔고, 이내 꽃들 사이에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건…….”
산양, 혹은 염소의 모양을 한 조각상이었다.
정확히는 염소의 두개골 형태였으며 매끈한 석재로 만들어져 있었다. 크기는 한 손으로 충분히 쥘 수 있는 정도였으나 반으로 갈라져 왼쪽 부분 밖에 없었다.
나머지 반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근방에는 없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참 신기하게도 생겼네.’
한동안 조각상을 살펴보던 강현은 그것에 시선을 고정했다.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형언할 수 없는 매력이 느껴졌다. 어딘가 익숙한 기분도 들었다.
예전에도 이런 걸 본 적이 있던가? 보면 볼수록 익숙함을 넘어서 친숙하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툭툭.
[강현아?]
“응?”
홀리기라도 한 듯 조각상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채홍이 강현을 불렀다. 그가 보기엔 강현이 이상할 정도로 조각상에 꽂힌 것처럼 보인 모양이었다.
[그 조각상이 그렇게 신경 쓰여?]
“잘은 모르겠지만 평범한 물건은 아닌 것 같아. 딱히 함정도 아닌 것 같고, 고대 유물이나 그런 거 같은데…….”
[어쨌든 던전에서 얻은 첫 수확이네.]
강현의 설명에 채홍이 해맑게 웃어보였다. 강현도 어렴풋이 미소를 지으며 산양머리 유물을 가방에 챙겨 넣었다.
“그래, 기왕 챙겨가는 김에 꽃도 좀 따가자. 그 정도 여유는 있으니까.”
영지까지 걸어갈 시간을 계산한 후 강현은 허리에 차고 있던 가방을 손에 들었다.
- 아이템: 차원낭.
마법적인 구조로 이루어진 주머니 가방. 겉으론 작지만 내부는 커다란 상자 정도의 크기다. 고가의 희귀품으로 물건들을 보관할 때 유용하다.
이것은 이세계의 인벤토리 같은 물건으로, 헤비레인 패거리들을 쓰러뜨리고 얻은 전리품이다. 놈들이 사용하던 장비도 이 안에 넣어두었다.
누가 보면 날강도가 따로 없다고 하겠지만 손에 들어온 물건을 안 쓸 이유가 없다.
몇 분가량 꽃들을 쓸어 담은 강현과 채홍은 다시 워프장치로 돌아갔다. 입구와 마찬가지로 던전 초입에도 같은 장치가 놓여 있는 것이었다.
워프장치는 빠르게 두 사람을 빨아들였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입구로 돌아와 있었다.
동굴 밖으로 나가니 벌써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저녁놀에 물든 하늘을 보면서 강현과 채홍은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렇게 숲을 지나 영지로 돌아가려 할 때 채홍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
“왜 그래 채홍아?”
[시선이 느껴져서.]
“시선?”
[응.]
채홍의 수화에 강현도 뒤를 돌아보았다.
특별한 점은 없었다. 딱히 인기척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다.
“들짐승들 아닐까. 영지 밖에선 흔하잖아.”
[역시 그렇겠지?]
마음에 조급해진 탓일까. 한 번 습격당한 탓에 예민해진 것일 수도 있겠다.
강현도 조금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곧 이를 털어내며 영지로 향했다.
* * *
영지에 도착하니 어느덧 해가 저물었다.
거리 곳곳을 마법등불이 밝혀주고 있었으며, 메인 스트리트는 하루 일과를 마친 스트리머들로 북적거렸다.
스트리머들은 물론 현지인 모험가들도 곧잘 드나드는 이 길은 다양한 시설과 유흥업소로 가득한 번화가다.
술잔을 기울이는 모험가들과 호객 행위를 하는 여점원들은 거리에 활기를 더했다. 그 사이를 지나면서 강현이 말했다.
“채홍이 넌 먼저 들어가 있어. 난 잠깐 들를 데가 있거든.”
[어디 가려고?]
“꽃들 가격 좀 알아보려고. 이제부터 탐사 시작하려면 자금이 필요하잖아.”
강현의 대답에 채홍은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테사한테 가는 거구나.]
“이 근방에선 그 녀석이 제일 잘 아니까.”
테사는 영지에 오기 전부터 알고 지낸 행상인이다.
꽤 오랫동안 만나면서 친분을 쌓았는데, 이상하게 채홍만은 싫어한다. 채홍 쪽에서 이렇다 할 피해를 끼친 적도 없는데 말이다.
[그러면 어쩔 수 없네. 먼저 들어가 있을게.]
“그래, 쉬고 있어. 그 귀찮은 분홍이는 내가 상대하고 올 테니까.”
농담 섞인 어조에 채홍은 웃음을 터뜨렸다.
인파 사이로 사라지는 강현을 배웅한 뒤 채홍은 홀로 숙소에 들어갔다.
두 사람이 머무는 숙소는 뒷골목에 있는 작은 여관으로, 장소가 장소인 만큼 주위가 조용한편이었다.
메인 스트리트만 해도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았는데 이 골목으로 들어오니 인기척은커녕 말소리마저 뚝 끊겨버렸다. 마법등불도 별로 없어서 길 자체가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마치 다른 세상으로 온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채홍은 계단을 올랐다. 채홍과 강현의 방은 2층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방 앞에 도착한 순간 채홍은 낯선 이들과 마주했다.
“여어, 이제야 들어오는구먼. 왜 이렇게 늦은 거야?”
“……?”
처음 보는 남성이었다. 염색한 티가 나는 금발에 길게 찢어진 눈이 특징적이었다. 척 봤을 때 그리 호감이 가는 인상은 아니었다.
그의 주위엔 5명의 일행들이 함께 있었다.
행색을 보아 스트리머였는데, 파티 구조가 던전 입구에서 상대했던 패거리와 비슷했다.
대신 장비는 그들보다 훨씬 좋아서 먼저 상대했던 패거리의 상위 호환격인 느낌이었다.
낯선 이들의 방문에 채홍은 주머니에서 메모장과 펜을 꺼내들었다.
[무슨 일이시죠?]
채홍이 글을 쓰자 그들은 갑자기 비웃음을 터뜨렸다.
“푸흡, 뭐야 이 새끼. 왜 말로 안 하고 글로 써?”
“사람이 물어봤으면 입으로 대답해야지. 아니면 뭐야? 말도 못하는 목 병신이냐?”
노골적인 도발에 채홍은 눈살을 찌푸렸다.
허나 여기서 일일이 대응하는 건 그의 성미와 안 맞았다. 괜한 싸움은 피하기로 하며 채홍은 메모장을 보여줬다.
[볼 일 없으시면 지나갈게요. 거기 저희 방이거든요.]
“아아, 물론 그렇겠지. 우리도 알아 여기가 너희 숙소인 거.”
“……?”
“너희들이 나가 있는 동안 다 조사했거든.”
남자의 말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우리 숙소란 걸 알고 있다. 게다가 조사를 했다고?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채홍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등을 돌렸다.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허~! 어딜 가려고! 우리 말 아직 안 끝났거든?!”
“이야기는 마저 하고 가셔야죠~ 아니면 도망가지 못하게 만들어드릴까요?”
하지만 이미 늦었다. 내려가는 계단을 다른 이들이 막고 있었던 것이다.
채홍이 식은땀을 흘릴 때, 리더로 보이는 남자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여기서 이러는 것도 뭐하니 들어가서 이야기하자고. 던전 탐사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 미치겠거든?”
========== 작품 후기 ==========
떡씬이 11화부터, 본격적인 사이다가 13화부터 있으니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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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신에게 총애받는 자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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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혀어어어언!!”
“아, 깜짝이야.”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웬 땅딸막한 여자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온 것이었다.
“보고 싶었어! 왜 한동안 연락 없었던 거야?! 나랑 쌩까려는 거 아니지?! 그렇지?!”
여자는 무척이나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 밑도 끝도 없는 불안함에 질색하면서도 강현은 그녀를 진정시켰다.
“진정해 테사. 그동안 바빴던 것뿐이니까. 그리고 우리 안 본지 이틀 밖에 안 됐어.”
“이틀도 길어어! 무려 172800초라고!”
“아, 그래…….”
이 산만한 여성의 이름은 테사. 강현이 감정을 맡기러 온 행상인이었다.
짧은 분홍머리에 분홍색 눈을 가진 여성은 상당히 예쁘장한 외모였다. 하지만 특유의 정신 사나운 분위기 때문인지 미모가 빛을 바래고 있었다.
옷도 후줄근한 티셔츠에 핫팬츠 하나만 입어서 더욱 그래보였다. 그 모습에선 외모 따위 가꾸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그나저나 그 하얀 머리는 어디 있어?! 또 데려온 거 아니지?!”
한참이나 조잘거린 그녀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채홍을 찾았다.
“채홍이는 먼저 숙소로 갔어. 보면 또 난리 피울 거잖아.”
“물론이지! 그 기생오라비한테 강현을 빼앗길 수는 없다고! 옆에 있는 것도 싫어! 의절해!”
“꺼져…….”
아무래도 테사는 채홍을 이상한 시선으로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듣기만 해도 소름 돋는 망상에 질겁하면서 강현은 본론을 꺼냈다.
“헛소리 그만하고 의뢰나 받아.”
“오, 또 뭔가 가져온 거야? 뭔데? 뭔데?”
“네가 좋아할 만한 거.”
강현의 말에 테사가 눈을 빛냈다. 그녀는 가게 안쪽으로 그를 끌고 갔고, 두 사람은 자그마한 작업실 안으로 들어갔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강현은 차원낭에서 물건을 꺼냈다.
“이, 이것으으으으은!”
“그래. 보는 대로 리비우스 미르나야. 방금 막 채집한 물건이지.”
역시 행상인답다고 할까. 테사는 물건의 가치를 금세 알아봤다.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손을 부들부들 떠는 테사. 이윽고 그녀는 눈에 불을 켜며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어, 어디서 났어! 이렇게 생생한 건 처음 봐! 맨날 건조화로만 봐서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다구!”
“찾은 곳은 비밀이야. 그보다 얼마나 할 것 같아? 좀 많은데.”
“많다고?!”
다시 한 번 경악하는 테사에게 가지고 있는 수량을 대략적으로 이야기해줬다. 그에 테사는 빠르게 주판을 튕겼고,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거, 이거…… 아무래도 이 동네에서 다 처분하기는 힘들겠는걸.”
“왜?”
“가격이 어마어마해! 게다가 여긴 리델타인이잖아. 이런 건 전문적인 약초 상인이나 대형 상단에 팔아야 돼. 이 동네엔 그런 사람이 없고. 뭐, 돈이 급하다면 못 팔 것도 없지만 이런저런 헛소리 해대면서 가격을 후려치려 들걸.”
리델타인도 작은 영지는 아니다. 하지만 역시 변경에 위치해 있다 보니 상업이 활발하지는 않다. 이런 고가의 물건을 구입해줄 상업시설은 당연하게도 없었다.
몇 개 정도는 자신이 매입해줄 수도 있지만 전부 처분하려면 중앙도시 같은 곳으로 가봐야 할 거다. 가는 데 시간이 꽤 걸려도 그곳에서라면 하나당 50만 골드는 족히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을 들으면서 강현은 흡족히 웃어보였다.
“마음에 드는군. 고마워 테사.”
“좋아, 그러면 이제 중요한 이야기를 해보자고. 대가로 뭐 줄 거야?”
“꽃 하나 10퍼센트 할인해줄게.”
“치사해애앳! 기껏 알려줬는데 좀 더 성의를 보여줘!”
“그러면 뭐 하나만 더 확인해줄래?”
벌떡 일어나는 테사를 다시 앉히며 강현은 또 다른 물건을 꺼냈다.
꽃밭에서 찾은 산양머리 조각상이었다. 반쪽 박에 없는 조각상을 본 테사는 조금 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흥미를 보였다.
“호오…… 이런 건 또 처음 보네. 고대 유물 같은 건가?”
“나도 그게 알고 싶어서 보여주는 거야. 감정할 수 있겠어?”
“흐으응, 잠만 기달. 살짝 뒤져보면 알 수도 있음.”
강현을 두고 테사는 잠시 방을 나섰다.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려 뽈뽈뽈 달려가는 그 모습은 참 땅딸막해보였다.
몇 분이 지나자 테사가 다시 돌아왔다. 그녀의 손에는 몇 권이나 되는 책들이 들려 있었다. 전부 유물이나 마법 아이템에 관련된 서적들이었다.
“어디 보자 어디 보자…… 양식 자체는 흔하네. 개척 시대 이전, 흔히들 말하는 고대시대의 양식이야.”
“뭐 고대의 장식품 그런 거야?”
“비슷하지만 달라. 단순한 장식품이라기 보단…… 으음, 아마 의식용 도구? 그 왜 있잖아. 종교적인 상징물 같은 거.”
종교적 상징물이라.
처음 봤을 때부터 어딘가 신비로운 분위기가 느껴졌는데, 옛 종교의 상징물이라고 하니 그럴싸했다.
“상징물 말고 다른 사용처는 없어? 뭐 마법적인 힘이 담겨 있다든지.”
“아쉽게도 거기까진 모르겠는걸. 고고학 쪽은 잘 몰라서 말이양. 어차피 구매자 찾으려면 시간도 많이 걸릴 텐데, 그동안 네가 직접 조사해보는 게 어때?”
결국 뭐에 쓰는 물건인지는 직접 알아봐야한다는 걸까.
당장 팔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나쁘지 않겠다. 어쩌면 던전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도 있으니까 일단은 잘 간직하기로 했다.
“좋아. 꽃 하나 20퍼센트 할인해줄게. 당장 계산해줘.”
“뭐야 그게! 사람 너무 막 부려먹는 거 아니야?! 상단에 블랙리스트 올려버린다?! 앞으로 쭉 나한테 밖에 못 팔게!”
“싫으면 정가 받던가.”
이후로도 협상을 이어간 테사였지만 강현은 굴하지 않았다. 결국 강현은 꽃 하나만 20퍼센트 할인해주었고, 리비우스 미르나 10개를 거액에 팔아넘겼다.
“나 간다, 테사. 잘 지내.”
“이잇! 분하군! 하지만 다음에 또 와! 보고 싶으니까!”
분해하면서도 손을 흔들어주는 테사였다. 그런 그녀를 뒤로 하고 강현은 숙소로 돌아갔다.
* * *
“응?”
숙소 앞에 도달했을 때 강현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뭐지, 갑자기 왜 피 냄새가…….’
그리 깔끔한 건물은 아니지만 피 냄새가 진동할 정도는 아니다. 이 근처에는 푸줏간 같은 가게도 없다.
이에 강현은 의아함을 느꼈고, 의아함은 곧 불안함으로 변모했다. 계단 위에 어떤 광경이 펼쳐져 있는지 확인한 것이었다.
“……!”
핏자국이 늘어져 있었다. 엄청난 출혈량이었다. 사지라도 잘려나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의 피가 복도를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강현과 채홍의 방으로 이어져 있었다.
“채홍아!!”
이를 깨달은 강현은 다급히 방문을 열어젖혔다.
“크윽?!”
문을 열자 피 냄새가 진동했다. 그에 강현은 냄새의 근원지를 쫓았고, 머지않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채홍을 발견할 수 있었다.
“채, 채홍아…….”
채홍 앞에 멈춰선 강현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쓰러져 있는 채홍의 모습이 너무나 처참했던 것이다.
무언가가 채홍의 몸을 수도 없이 관통했다. 정황상 검이나 창 같은 날붙이 같았다.
웅덩이가 고일 정도로 어마어마한 출혈이 일어났고 다리와 팔은 너덜너덜해져서 이상한 방향으로 뒤틀렸다.
욕지기가 일어날 만큼 끔찍한 광경이었지만 더 끔찍한 건 따로 있었다.
“커흑……! 허억…… 허억……!”
“……!”
내장이 터지고, 팔다리가 너덜너덜해졌는데도 채홍은 살아있었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상태였지만 채홍은 가까스로 목숨을 잃지 않았다. 그는 온몸이 꿰뚫린 고통을 고스란히 느끼며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던 것이다.
“채홍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누가 널 이렇게 만들었어?!”
재빨리 채홍을 업으며 강현은 밖으로 나갔다.
이대로 두면 분명 죽는다. 살리기 위해선 신전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만 한다.
이를 상기하며 신전으로 달렸다. 그동안 채홍은 강현의 질문에 대답하려고 힘겹게 손을 움직였다.
그나마 온전한 오른손으로 강현의 등에 무언가를 적는 것이었다. 그에 강현은 등 뒤에 신경을 집중했고, 채홍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헤……비, 레……인……]
[주진, 호……]
[도망……쳐……]
헤비레인, 주진호.
그것만으로도 강현은 사건의 정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채홍을 이렇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주진호였다.
헤비레인의 마스터 주진형의 동생. 자신들이 쓰러뜨린 패거리가 도련님이라고 불렀던 인물.
그 사실을 깨달은 강현은 분노에 앞서 당혹에 빠졌다.
‘말도 안 돼. 시체는 확실하게 처리했어. 어떻게 우리가 그랬단 걸 안 거지?’
시체를 유기하는 내내 몇 번이나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가끔씩 딕커가 훼방을 놓는 것 외에는 어떤 위험도 없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자신들의 존재를 알아차렸단 말인가. 또 자신들의 숙소는 어떻게 찾아낸 거지?
온갖 의문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깊게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채홍의 손에서 점점 힘이 빠져가는 것이었다.
“젠장……!”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강현은 필사적으로 달렸다. 그렇게 온힘을 다해 달리자 머지않아 신전이 나타났다.
“어서 오십시오, 형제님. 무슨 일로 찾아오셨…… 신이시여 맙소사!”
“허억…… 허억…… 치료…… 빨리…… 급합니다, 제발 빨리……!!”
강현을 맞이한 사제는 채홍의 상태를 확인하자 비명을 질렀다.
강현은 숨을 몰아쉬며 치료를 촉구했고, 사제도 황급히 강현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사제는 강현을 안내하는 내내 다른 수습 사제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어서 따라오십시오! 이런 맙소사! 거기 자네, 리베나 수녀님 불러 오게나! 다른 법술 사용자들도 가능한 한 많이 데려오게!”
* * *
신전에 도착한 강현은 치료실 앞을 떠나지 않았다.
이곳은 영지 초입에 위치한 엘리누스 라제의 신전.
이세계의 신전은 대부분 종교 시설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의료 시설로서의 기능까지 겸비하고 있다.
신전의 사제들은 일사분란하게 채홍을 치료실로 데려갔다.
보호자인 강현은 원활한 치료를 위해 치료실 밖에서 대기하게 됐고 그것이 벌써 한 시간 동안 이어지고 있었다.
치료실의 문에는 평화와 빛의 신인 엘리누스 라제의 삼감이 새겨져 있었다.
자애로운 표정으로 부상자를 돌보는 신의 얼굴을 노려보며 강현은 절실히 기도를 올렸다.
그것은 기도라기 보단 협박에 가까울 것이다.
채홍의 치료가 성공적으로 끝날 수 있게 해달라고.
당신이 정녕 평화와 빛을 관장하는 선신이라면 부당하게 다친 채홍의 몸을 어떻게든 낫게 만들라고.
공갈협박이나 다름없는 태도로 끊임없이 되뇌고 있을 때, 복도 한 편에서 누군가가 걸어왔다.
난데없는 인기척에 강현은 반사적으로 고개 돌렸고 그곳에는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강현 오빠……?”
친숙한 호칭과 함께 강현을 부른 건 묘령의 여성이었다.
이제 갓 성인이 된 것 같은 그녀는 소녀의 티를 벗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푸른빛이 섞인 은색 단발머리에선 청초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맑은 겨울 호수 같은 하늘색 눈동자에는 앳된 눈빛이 여려 있었다.
길게 내려온 앞머리가 눈가를 가리고 있어서 다소 음울한 분위기가 느껴졌지만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절세의 미녀였다.
특히나 맑은 하늘색 눈동자는 소환의 영향이 아닌 태생적인 것이었다. 눈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서양인의 특징이 섞여 있어서 그녀의 미모를 한층 더 돋보이게 했다.
강현은 그녀를 익히 알고 있었고 힘없는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시아야…….”
그녀의 이름은 윤시아.
강현과 채홍이 리델타인 영지에 오면서 알게 된 한국인 혼혈 스트리머다. 그와 동시에 강현이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했다.
강현이 부르기 무섭게 시아는 금세 그의 앞까지 걸어왔다. 그녀의 얼굴에는 초조한 기색이 가득했고 불안한 목소리로 강현에게 물었다.
“괜찮은 건가요……? 사람들에게 들었어요, 피투성이가 된 채홍 오빠를 업고 신전으로 달려갔다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채홍 오빠는 어떻게 됐어요? 강현 오빠는 다친 데 없고요……?”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질문에 강현은 아무런 답변도 주지 못했다. 그것은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무언으로 전하는 것이었다.
그에 시아는 눈시울을 붉히며 강현의 곁에 앉았다. 채홍의 피로 더러워진 강현의 얼굴을 소매로 닦아주면서 시아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괜찮아요…… 분명 괜찮을 거예요…… 다른 누구도 아니고 채홍 오빠잖아요?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웃으면서 나올 테니까요…….”
강현을 안심시키기 위해 열심히 그를 격려한 시아였지만 그녀의 목소리도 한껏 젖어들었다.
강현은 그런 시아의 격려에 주먹을 부르쥘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굳게 닫혀 있던 치료실의 문이 열렸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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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신에게 총애받는 자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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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이 열리자마자 강현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열린 문을 통해선 여러 명의 사제들이 걸어 나왔으며 그들 모두 초췌한 얼굴이었다.
그중에서 제일 먼저 나온 수녀를 붙잡고, 강현은 절박한 기세로 물었다.
“치료는……! 부상자의 치료는 어떻게 됐습니까?! 당연히 성공했겠죠?!”
무서울 정도로 강현이 캐묻자 수녀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베일과 기다란 금발 탓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분명 당황으로 물들어 있을 것이다.
대답을 주기 전까지는 손을 놓지 않을 거라는 강현의 태도에 수녀는 시선을 회피하며 입을 열었다.
“……치료는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목숨에 지장도 없고 지금은 충분히 안정된 상태예요. 다만…….”
“다만……?”
연이어 들려오는 희소식에 강현의 얼굴은 점차 밝아졌다. 하지만 마지막 한 마디에 그의 표정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뭔가 잘못되기라도 한 걸까. 수녀는 대답하기를 꺼려했으며 계속 말끝을 흐렸다.
강현이 대답을 촉구하듯 그녀를 노려보자 수녀가 하는 수없이 입을 열었다.
“형제님은 더 이상 모험가로 활동하실 수 없을 거예요. 전투에 참가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으세요.”
이세계의 현지인들은 스트리머들의 일을 모험가와 동일하게 여기고 있다.
모험가로 활동할 수 없다는 말은 곧 스트리머로서 활동할 수 없다는 말이며, 이는 신체적으로 큰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기도 했다.
불안이 엄습해왔다.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형제님, 우선은 그녀를 놓아주십시오. 자세한 설명은 저희가 드릴 테니 부디…….”
강현이 수녀를 놓아주지 않자 다른 사제들의 제지가 들어왔다.
사제들의 말에 강현은 수녀에게서 손을 뗐다. 그러나 다음 순간, 강현은 치료실의 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혀, 형제님!”
“갑자기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부상당한 형제님은 안정을 취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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