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ia 11
“이런 미친!”
강민혁의 예선 상황을 지켜보던 감독관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강민혁의 검술.
순식간에 아르마딜로를 난도질하는 그의 모습을 보는 순간, 떡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이게 말이 돼?”
세상에는 상식이라는 것이 있다.
검이라는 무기로는 아르마딜로의 외피를 절대 베어낼 수 없다. 그 틈을 노리고 공격한다 할지라도, 아르마딜로의 질긴 피부를 뚫으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터. 강민혁이 10분 안에 끝냈어도 정말 대단한 실력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게 마법 문명의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허용할 수 있는 선이었는데, 강민혁은 이대로라면 전부 처리하는 데 5분도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말이 되질 않았다.
검에서 뿜어내는 마나의 칼날과 단단한 피부도 단번에 베어버리는 오라는 상식을 완전히 벗어났다.
얼떨떨했다.
그 사이, 다른 참가자들이 예선을 끝냈다.
[참가번호 031]
[예선 통과 시간 3분 34초]
[참가번호 035
[예선 통과 시간 4분 2초]
[참가번호 039]
[예선 통과 시간 4분 9초]
그들의 실력은 대단했다.
모두 5분 안에 아르마딜로를 처리했지만, 그건 예상이 가능한 범위였다.
앞선 3명의 통과자.
그들은 모두 5서클 이상의 마법사였다.
5서클의 강력한 화력은 아르마딜로라 해도 버틸 수 없었고, 그래서 이른 시간 안에 통과하는 것이 가능했다. 문제는 이번 결투 대회에 참가한 5서클 이상의 마법사는 결코 64명을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4서클 마법사부터는 5분 이상의 기록이 나올 텐데, 때마침 강민혁이 5분 안에 통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참가번호 038]
[예선 통과 시간 4분 52초]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강민혁이 예선전에서 통과하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는데, 이렇다면 본선 진출의 가능성이 보였다.
그때였다.
“아쉽네. 조금 더 빨리 끝냈어야 했는데.”
강민혁의 말.
그게 카메라를 통해 들렸다.
그러자, 예선 감독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새끼 대체 정체가 뭐야?”
상식 밖.
강민혁의 참가는 예선전에서부터 파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89화. < 24. 두 문명이 싸우는 방식(2) >
예선전이 끝났다.
그리고 곧바로 공개된 성적에, 강민혁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마법 문명의 마법사들은 다르다 이건가.”
[클리스만]
[60위, 본선 진출]
60위.
64명만을 선발하는 결투 대회 본선에서, 간신히 끝자락에 걸친 기록이었다.
클리스만은 아르마딜로를 공략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클리스만의 육체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고, 때문에 자신감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결과는 아슬아슬한 통과. 그것도 60위부터는 2~3초의 차이로 순위가 갈렸다. 65위로 탈락한 사람의 기록이 5분 4초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강민혁이 조금만 늦었다면 본선 진출에 실패했을 것이다.
재밌었다.
마법 문명의 마법사들이 기대 이상이라는 사실은, 굴욕감보다는 강민혁을 들뜨게 만들었다.
저들은 자신의 미래다.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목에 있는 사람들의 수준이 떨어졌다면, 강민혁은 오히려 실망했을 것이다.
1위의 기록.
그 참가자는 바로 ‘엘리샤’였고, 결과는 압도적이었다.
[1위 엘리샤]
[1분 38초]
피식, 웃음만 나오는 기록이었다.
자신이 아무리 빠르다 할지라도, 그리고 자신이 아니라 정판호가 시험을 본다 할지라도 저렇게 빨리 아르마딜로 30마리를 처리할 수는 없다. 그야말로 괴물 같은 기록. 그리고 강민혁보다 앞선 기록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4서클 마법사도 여럿 있었다. 확실히 다수의 적을 처리하는 데 있어, 강화 문명은 마법 문명의 마법사를 앞설 수 없었다.
그래도 통과해서 다행이었다.
마법사들의 실력을 조금이나마 확인하고 나니, 진심으로 그들과 붙어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그런데 웃긴 건, 강민혁이 마법사들의 기록에 감탄한 것처럼 마법사들은 그보다 더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탈락할 줄 알았던 강민혁의 합격에, 마법사들은 현실을 믿지 못했다.
“...클리스만이 본선에 진출했다고?”
“말도 안돼!”
“어떻게 마법을 사용하지도 않고 아르마딜로 30마리를 4분 52초 만에 처리할 수 있지? 이건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야. 아르마딜로의 외피는 질긴 데다, 그 많은 아르마딜로를 처리하려면 못해도 10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 텐데. 대체 클리스만이 무슨 마법을 부린 거야?”
그들의 충격은 더했다.
강민혁은 양쪽 세계를 이해하고 납득하고 있다면, 그들에게 ‘강화 문명’은 너무나도 생소한 것이었다.
강민혁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래도 강민혁에게는 한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예선전이야 어중이떠중이들을 걸러내는 과정이라면, 본선 진출자들은 정말 실력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대진표]
[64강 클리스만 vs 크리스 카일(Chris Kyle)]
강민혁의 본선 상대.
그는 왕실 아카데미 졸업반에 속한 마법의 천재였다.
현재 왕실 마법 아카데미가 인정하는 최고의 마법 천재는 바로 엘리샤다.
학생의 신분으로 6서클의 경지에 오른 그녀는, 화이트 캐슬의 입성 가능성이 벌써부터 논의되고 있다.
그렇다면 그 밑에.
압도적인 천재를 제외하면 어떤 인물이 있을까?
그중 하나가 크리스 카일이었다.
5서클 마법사이며 완벽주의자라고 불리는 그는, 엘리샤만큼은 아닐지라도 항상 최고의 성적을 보여주었다. 그의 예선전 기록은 2분 58초. 강민혁의 상대로는 과할 정도로 뛰어난 마법사였다.
본선 직전.
아카데미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왕실 마법 아카데미는 영국의 자랑이다.
그곳에서 진행되는 행사는 모두 방송으로 내보내 지기 때문에, 출전자들의 감정과 포부 같은 것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래야, 사람들이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천재들을 보며 자긍심을 갖는다.
크리스 카일의 인터뷰.
MC가 물었다.
“상대가 검을 사용하는 클리스만입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깔끔하게 넘긴 올백의 금발 머리.
그 아래로 차가운 인상의 크리스 카일은, MC의 질문에 표정을 살짝 일그러트렸다.
“저는 어째서 클리스만 같은 녀석이 결투 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린 드래곤 상황에서 클리스만이 좋은 활약을 했다고는 들었습니다만, 결투 대회는 마법사들의 축제입니다. 그건 다른 사람들을 배척하려는 목적으로 부르는 명칭이 아닙니다. 마법사 외에는 감히 발을 들일 수 없기에, 그간 마법사가 아닌 이들은 결투 대회에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앞.
크리스 카일의 시선이 닿는 끝에는, 다음 인터뷰를 기다리고 있는 강민혁이 있었다.
이건 들으라고 하는 말이다.
자신의 상대가 강민혁이라는 사실이 공개되었을 때, 크리스 카일은 진심으로 자존심이 상했다.
‘신성한 무대에 근본도 모르는 녀석이 발을 들이다니.’
화가 났다.
4분 52초?
대단한 기록이다.
예선전을 통과한 것은 인정해줄 만하나, 마법사와의 1대1 대결을 전혀 다른 문제다.
"장담하는데 클리스만은 제 몸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 이번 경기는 기대하지 마십시오. 일방적인 경기가 될 것이고, 의료팀은 부상당할 클리스만을 위해서 준비하고 계셔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인터뷰가 끝났다.
상대에 대한 존중도, 상대를 쓰러트릴 전략 같은 것도 없었다.
보통은 결투의 예를 지키며 전략에 대해서 말하는데, 크리스 카일은 강민혁을 인정하지 않았다.
마법 문명.
마법이 고도로 발달된 이 세상에서, 2000년의 역사를 무시하는 것 같은 강민혁의 모습은 학생들의 반발을 일으켰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이곳이 만약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였다면, 강민혁의 힘에 검을 가르쳐달라고 요청하는 사람들이 많을지도 모른다. 마법이라는 소수에게만 허락된 권한이 없는 사람들에게, 물리적인 능력은 동아줄처럼 보일 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곳은 다르다.
결투 대회는 왕실 마법 아카데미에서 치러지는 것이고, 왕실 마법 아카데미는 마법사의 성지다.
수많은 대마법사가 탄생한 땅.
그러니, 강민혁의 존재는 부정될 수밖에 없었다.
강민혁의 차례.
MC의 질문은 전과는 달리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
“크리스 카일님의 마법을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충분히 인지하고 계십니까?”
이 세상의 상식.
마법에 맞으면 최소 중상이다.
그리고 아무리 몸놀림이 재빠르다 할지라도, 마법을 피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
마법 문명의 마법사들은 빠른 캐스팅과 그리고 순간적인 상황을 대처할 충분한 능력을 갖추었다.
강민혁이 카메라를 보았다.
재밌었다.
이들의 감정이 들끓으면 들끓을수록, 강한 흥미가 돌았다.
“간절히 부탁하는데, 저를 상대로 제발 쉽게 쓰러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크리스 카일 선배님이 본인의 말처럼 대단한 마법사이길 간절하게 바랍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우승이 아니라, 뛰어난 마법사와의 좋은 승부입니다. 결투장 위에서 저에게 중상을 입히셔도 절대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좋은, 아니 재밌는 승부를 기대하겠습니다.”
".........?!"
MC의 눈이 커졌다.
과할 정도로 당돌한 발언.
고개를 돌리니, 아직 나가지 않은 크리스 카일의 달아오른 얼굴이 보였다.
도발이었다.
강민혁은 지금 크리스 카일을, 아니 왕실 마법 아카데미 전체를 도발했다.
화이트 캐슬의 보물?
탐난다.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한 명성만큼이나 그에 어울리는 보상을 내놓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강민혁에게 중요한 건 보물이 아니다.
바로 경험.
강민혁은, 마법 문명 마법사들의 진짜 실력을 보길 원한다.
‘이번 결투 대회는 내 성장의 자양분이 될 거야.’
그들이 싸우는 방식.
그들이 근접전에서 사용하는 마법.
그 모든 것을 기억할 것이다.
전력을 다해 그들을 쓰러트리고자 노력한다면, 그들 또한 본인들의 밑천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터.
그래서 도발했다.
그리고, 도발은 먹혔다.
“클리스만 선수는 사전 인터뷰에서 ‘크리스 카일’ 선수가 제발 전력을 다하길 원한다는 발언을 했었죠. 그래서 시작부터 많은 말들이 있었습니다. 크리스 카일 선수는 완벽주의자, 혹은 프로페서(professor)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는 마법사입니다. 그런데 그런 선수에게 전력을 다하라니요. 클리스만 선수는 지금, 잠자는 맹수의 코털을 건드렸습니다.”
결투장 위.
MC의 발언에, 결투를 지켜보러 찾아온 사람들이 흥미 어린 반응을 보였다.
강민혁의 도발로 경기에 스토리가 생겼다.
단순히 검을 사용하는 특이한 참가자의 도전이 아니라, 검과 마법의 대결로 상황이 변해버렸다.
“자, 그럼 결투를 시작하겠습니다!”
삐익-
결투를 알리는 신호.
끓어오르는 마나를 억지로 억누르고 있던 크리스 카일이, 시작과 동시에 마나를 폭발시켰다.
“체인 라이트닝."
치지지지직!
파바박.
각인 마법.
그의 손등에서 하얀 불빛이 일어나며, 전기 다발이 그대로 강민혁을 덮쳤다. 곧바로 땅을 박차는 강민혁. 상대의 공격에 쉽게 당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순간 시야에서 사라질 정도로 강민혁의 스피드는 빨랐고, 강민혁은 그대로 크리스 카일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그때.
“어딜!”
확!
파바바박!
전기 다발의 방향이 변했다.
전기 다발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강민혁을 따라잡았고, 강민혁은 황급히 뒤로 빠질 수밖에 없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이미 사용한 마법의 좌표를 바꾸다니. 크리스 카일은 실시간으로 체인 라이트닝의 좌표를 새로이 입력하며, 강민혁과 최대한 거리를 벌렸다.
무빙 캐스팅.
근접 전투의 기술들이 나왔다.
그리고 곧바로 더블 캐스팅으로 하나의 마법을 더 사용하려고 하자, 강민혁의 검에서 마나가 일었다.
확!
사사삭!
오라 웨이브.
강민혁이 크리스 카일의 캐스팅을 방해했다.
정확히 마나의 흐름을 끊는 공격이었는데, 크리스 카일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순식간에 회수되는 체인 라이트닝의 힘. 5개의 서클이 팽팽 회전하며, 2서클 마법을 캐스팅 없이 완성시켰다.
“실드(shield).”
카앙!
카카카캉!
오라의 칼날이 막혔다.
그러나 강민혁도 그러한 사실을 예상했다.
근접전에 자신을 보인 크리스 카일이, 제임스 체스터처럼 허무하게 당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빠르게 접근하는 강민혁.
결국 결투의 관전 포인트는 명확했다.
강민혁의 검이 닿느냐, 크리스 카일의 마법이 먼저 강민혁을 무너트리느냐.
그 사이 크리스 카일의 손에 불길이 일어났다.
“파이어 버스트(Fire Burst)."
콰앙!
화르르르르륵!
불길이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그뿐만이 아니라, 크리스 카일은 마나를 일으키며 캐스팅이 필요 없는 2서클 마법을 연속적으로 사용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작렬하는 마법. 거의 3서클의 위력을 발휘하는 2서클 마법의 위력에, 강민혁은 섣불리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마법의 폭격이 얼마나 대단한지, 강하게 타오르는 화염으로 인해 피부가 화끈거릴 정도였다.
서클의 상관관계.
캐스팅 없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 생기면서, 마법 문명의 마법사는 근접전에 약하지 않았다.
더블 캐스팅과 즉발 마법.
크리스 카일은 양손의 검을 적극적으로 휘둘렀다.
“썬더 캐논(Thunder Cannon)."
치지지지직!
5서클 전기 계열 마법.
시야를 가득 메울 정도로 강력한 전기가 일어났다.
그리고 크리스 카일은, 동시에 강민혁의 주변으로 마법을 뿌리며 그가 피할 수 있는 길을 제한했다.
그렇다면 택할 수 있는 길목은 딱 하나.
그곳에, 썬더 캐논이 작렬했다.
쾅!
치지지지지지지직!
엄청난 위력이었다.
MC가 격양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 정말 대단합니다! 역시 크리스 카일 선수입니다. 완벽주의자라는 별명답게, 촘촘하게 연계되는 마법으로 클리스만 선수를 밀어 붙입니다. 이대로라면 클리스만 선수의 충격이 매우 클... 어?!”
확!
강민혁이 번개 다발을 뚫고 나타났다.
당황으로 얼룩진 MC의 표정.
어떻게 피했냐고?
‘마나를 안력(眼刀)에 집중하면 마나의 흐름이 보인다.’
간발의 차이.
강민혁은 마나가 움직이는 흐름을 파악했고, 마나가 작렬하기 직전에 몸을 먼저 피했다. 2서클 마법의 위력은 몸으로 버텼다. 아무리 3서클의 위력을 보인다고는 하나, 마나를 두른 피부는 그 정도로는 충격이 크지 않다.
선택과 집중.
그게, 사람들에게는 썬더 캐논을 버틴 것처럼 보였다.
전기 다발을 뚫고 나타나는 강민혁의 모습에, 관중석에서 감탄성이 들렸다.
‘대단해.’
상대를 인정했다.
크리스 카일.
그는 뛰어난 마법사였다.
각인 마법과 좌표 컨트롤로 선공을 시도한 그는, 폭발적으로 이어지는 연계 공격으로 강민혁을 궁지에 밀어붙였다. 보통의 강화 전사였다면 그 공격에 당할 것이다. 상대가 5서클 마법사라고는 하나, 웬만한 강화 전사들은 감히 다가가지 못할 정도로 순간적인 공격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건방진 새끼.”
크리스 카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마법의 실패?
그걸로 포기하는 눈빛이 아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언제든 강민혁을 압살할 수 있다는 확신에 찬 표정.
곧바로 마나를 일으키는 그의 모습에, 강민혁은 마법사가 이 세상의 주류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이 대회에서 우승하고 싶어졌어.’
확실했다.
이 세상은 달랐다.
진짜로 싸울 줄 아는 마법사들.
이들과의 경험은, 마법사로서의 자신에게 엄청난 도움이 될 터.
‘아니, 반드시 우승한다.’
타닥!
강민혁이 땅을 박찼다.
지금부터가, 진짜 승부였다.
90화. < 24. 두 문명이 싸우는 방식(3) >
보통의 마법사들.
그러니까 강화 문명의 마법사들은, 강화 전사들이 달려들기 시작하면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손은 꼬이고 캐스팅은 실패하고.
그러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강화 전사에게 당하는 것이, 강민혁이 기억하는 마법사의 현실이다.
그런데 크리스 카일은 달랐다.
마법 실패.
썬더 캐논을 뚫고 나온 강민혁의 모습에도 그의 눈빛에는 ‘강한 확신’이 있었다. 강화 문명의 마법사들처럼 패배를 직감하고 덜덜 떠는 것이 아니라, 그는 침착하게 마나를 마법으로 변화시켰다.
확-
“라이트닝 볼(Lightning Ball).”
찌지지지직.
전기의 구체 수십 다발이 생성되어 강민혁을 덮쳤다. 아무리 서클의 상관관계로 2서클 마법은 캐스팅 없이 사용할 수 있다지만, 수십 다발을 한 번에 일으킨 것은 분명히 경이로운 장면이었다. 촘촘하게 전기의 망을 형성하는 크리스 카일. 만약 강민혁이 라이트닝 볼을 맞으면서 달려드는 선택을 내린다면, 크리스 카일의 의도대로 판이 진행될 것이다.
전기 마법.
그것의 데미지는 겹겹이 쌓인다.
마비의 효과로 육체적인 움직임에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고, 내부에 남은 잔여 전기는 후속 마법의 피해를 증폭시킨다. 그뿐만이 아니라 전기 마법으로 인한 피해 범위가 넓어진다. 주변으로 번지는 전기의 충격이 내부의 잔여 전기를 타고 올라오기 때문에, 크게 위협적이지 않다고 판단한 라이트닝 볼 하나가 어느새 사람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는다.
이건 덫이다.
매우 치명적인 덫.
그리고 강민혁의 선택은, 크리스 카일의 의도를 예상했다는 듯이 라이트닝 볼을 전부 피해냈다.
“와!”
“저걸 다 피해내다니!”
관중석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마치 한 마리의 짐승처럼 날랜 움직임에, 간발의 차이로 라이트닝 볼이 터져나갔다. 항상 한발 빠르게 치고 나가는 강민혁. 그러한 모습에 크리스 카일은 무빙 캐스팅으로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강민혁과의 거리를 최대한 벌리면서, 강민혁의 접근을 방해할 마법을 끊임없이 사용했다.
“아쿠아 볼(Aqua Ball).”
펑!
물의 마법.
그건 미끼였다.
마법이 발사되는 도중에 터져버렸고, 수백 개가 넘어가는 물방울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그리고.
“라이트닝 쇼크.”
찌지지지직!
물방울을 타고 번지는 전기의 힘!
그건 정말이지 정석과 같은 플레이였다.
완벽주의자라는 별명답게, 크리스 카일은 교과서에서 나온 근접 몬스터의 공략법을 그대로 실행하고 있었다. 보통은 이쯤 되면 덫에 발이 빠질 법도 하건만, 강민혁의 반응 속도는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또한 단순히 피하기만 하는 것도 아니었다.
크리스 카일이 캐스팅을 진행하는 모습에, 강민혁은 오라를 일으켰다.
‘오라웨이브의 변형.’
파바박!
마나의 파편이 발사되었다.
오라 웨이브는 다수의 적을 상대하는 기술이다.
그것의 형태를 축소시켜서, 위력이 강하지는 않지만 정확히 마나의 흐름을 끊어내는 암기로 사용했다.
“크윽."
크리스 카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찰나의 틈.
마법의 캐스팅이 무산되고, 이동을 방해하는 마법의 공격이 중단되었을 때.
강민혁은 순식간에 크리스 카일의 품을 파고들었다.
‘이게 끝이야?’
만약.
크리스 카일에게 비장의 수가 없다면, 강민혁은 이대로 승부를 끝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강화 전사.
강민혁의 세상에서 그들은 마법사의 천적이라고 불린다. 빠른 움직임은 마법을 모두 피해내는 데다, 마나를 두른 피부는 마법에 맞아도 큰 피해를 입지 않는다. 그리고 마법을 방해하는 기술까지.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힘의 발현에 시간이 필요한 마법사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강민혁은 그중에서도 특별한 강화 전사다.
그 결과, 강민혁은 결국 크리스 카일의 앞에 도달하고야 말았다.
‘끝났다.’
나쁘지 않은 승부였다.
마법사의 가능성을 보았으나, 결국 마법사는 한계가 있었다.
붙으면 끝난다는 것.
그런데.
히죽.
‘웃어?’
크리스 카일이 웃었다.
그리고.
“블링크(Blink).”
팟.
서걱!
강민혁이 검을 휘두르는 순간, 크리스 카일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트랩(trap) 발동!”
화악!
파파파팍!
미처 반응할 틈도 없었다.
바닥에서 일어나는 푸른 불빛은 ‘강제성’을 가지고 있었고, 강민혁의 몸을 강하게 억압하였다.
‘대체 언제?’
트랩이라니.
그걸 설치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애초에 크리스 카일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고, 그렇다면 트랩의 위치도 고정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크리스 카일은 마법 트랩으로 강민혁을 묶었다. 홀드(hold)의 효과를 보이는 수십 다발의 실이 강민혁의 사지를 붙잡았고,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크리스 카일이 웃으며 말했다.
“왜? 근접해서 붙으면 끝날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말했잖아. 넌 내 털끝도 건드리지 못할 거라고.”
화악-
마나가 일었다.
또 다른 각인 마법.
다른 손등에서 빛이 뿜어지더니, 마법이 발현되었다.
“썬더 캐논.”
펑!
찌지지지지지직!
이번에는 피할 수 없다.
또한 버틸 수도 없다.
아무리 상대가 단단한 방어력을 지녔다 할지라도, 무려 6서클에 버금가는 상위 마법의 위력을 버텨내기는 힘들 것이다. 잘 짜인 함정. 자잘한 마법으로 시간을 끄는 사이에, 크리스 카일은 결국 승부를 끝낼 판을 만들었다. 썬더 캐논이 강민혁에게 작렬하는 순간, 크리스 카일뿐만 아니라 결투를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이 ‘크리스 카일의 승리’를 확신했다.
당연하다.
인간이라면.
5서클의 마법을 맨몸으로 버텨낼 수는 없다.
“의료진! 얼른 치료를...."
의료진을 호출하는 관계자.
그런데 그가 무대를 확인하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푸스스스스스슥.
연기가 일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당연히 쓰러졌을 거라고 생각한 강민혁이 무사한 모습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를 보호하는 무형의 막.
그건, 마법사들조차 처음 보는 생소한 것이었다.
“어, 어떻게?!”
크리스 카일의 동공이 흔들렸다.
실드일까?
아니다.
1서클 마법사인 강민혁은 실드를 사용할 수 없다. 아니, 사용한다 할지라도 5서클의 썬더 캐논을 버텨낼 정도의 방어력은 절대 아니다. 그렇다면 강민혁을 보호하는 저 힘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강민혁은 찌릿하게 올라오는 통증에, 크리스 카일을 바라보면서 사납게 웃었다.
“좋아, 아주 좋아.”
재밌었다.
공간 마법이라니.
이들이 ‘공간’을 지배한 문명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방금 강민혁이 사용한 기술.
그것은 바로 검막이었다.
오러를 얇게 펼쳐 몸을 보호하는 방법.
만약 검막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마나를 두른 피부로도 방금의 공격은 버터내지 못했을 것이다.
‘대단해.’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끝까지 반격하는 마법사.
그건 자신의 세계에서 경험해보지 못했다.
그렇기에.
‘더 보여달라고, 크리스 카일.’
강민혁은 상대를 한계까지 밀어 붙여보고 싶었다.
5서클 마법 블링크.
그건 참 특별한 마법이다.
공간 자각 능력이 뛰어난 사람일 경우, 특별한 캐스팅 없이 마나와 정신력만 소모하고 발현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5서클을 경계선으로 두는 것이다.
각인 마법.
블링크.
그 모든 것의 기준점이 5서클이니 말이다.
파밧.
이번에도 크리스 카일의 모습이 사라졌다.
강민혁과 멀리 떨어진 곳에 나타난 크리스 카일. 그에게서 파란 마나가 일어나며, 수십 다발의 라이트닝 볼이 강민혁을 그대로 덮쳤다. 이미 그가 준비한 비장의 수는 모두 사용한 상태. 그러나 크리스 카일로서는, 마나가 아직 남아있는 한 승부는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어디 얼마나 버티나 보자고!”
파지지지직.
전기의 다발이 일어났다.
그것을 일일이 컨트롤하며, 크리스 카일은 강민혁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그의 공간을 좁혀들어갔다.
강민혁의 반격은 통하지 않았다.
기어코 마법을 뚫고 다가와도, 블링크로 피하면 그만이다.
파밧.
크리스 카일은 확실히 마법의 천재였다.
블링크를 이 정도로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는 많지 않다. 보통 평범한 5서클 마법사는 2~3번 정도 연달아 사용하는 것이 한계인데, 크리스 카일은 벌써 5번이 넘도록 사용했다. 속에서 역한 기운이 올라왔지만 억지로 억누르며, 크리스 카일은 이 승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상대는 자신을 공격하지도 못했다.
그러니 포기할 이유가 없다.
딱 한 번.
강민혁이 전기의 덫에 발을 들이는 순간, 크리스 카일은 상대를 무너트릴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 모습.
크리스 카일을 상대하며, 강민혁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공간 마법.’
대단했다.
마법 문명은 공간을 지배했다.
아무리 쫓아가도 거리를 벌릴 수 있는 공간의 힘은, 이들이 왜 마법에 대한 자신감을 보였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럴 만한 자격이 있었다.
이들은 정말 강했고, 수호문 제자들의 실력으로도 크리스 카일을 이길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 크리스 카일 정도라면, 웬만한 강화 전사들은 다가가지도 못하고 당해버릴 것이다.
그러나.
‘이기지 못할 상대는 아니야.’
클리스만의 육체.
그리고 강민혁의 경험.
강민혁은 평범한 강화 전사가 아니다.
강민혁이 정신을 집중하자, 예민한 감각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초감각(起感覺).’
수호문의 비기.
그중 하나가 발현되었다.
그러자 크리스 카일이 사용하는 마나의 흐름이 보였다. 라이트닝 볼을 사용하면 마나가 강하게 일어났고, 블링크를 사용할 때는 이동하는 위치에 따라 마나의 흐름이 쭉 이어졌다. 그건 정말 찰나의 순간에 포착되는 흐름. 그것만으로도, 강민혁은 크리스 카일의 움직임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파밧.
크리스 카일이 사라지면.
타닥.
강민혁이 위치를 확인하기도 전에 땅을 박찼다.
그리고 크리스 카일이 나타났을 때.
".........?!"
강민혁은 어느새 그를 공격하고 있었다.
크리스 카일의 표정이 당황으로 얼룩졌다. 그는 황급히 블링크로 도망쳤지만, 강민혁은 점점 빠른 반응 속도로 크리스 카일의 움직임을 따라붙었다. 머리가 팽팽 돌았다. 블링크는 마나와 정신력의 소모가 대단하기에, 아무리 크리스 카일이라 할지라도 무한정 사용할수 있는 마법이 아니다.
마나가 바닥을 드러냈다.
반응 속도도 점점 느려졌다.
크리스 카일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공간을 따라잡는 강민혁의 움직임은, 크리스 카일이 보았던 교과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파밧.
“웩.”
공간을 이동하자마자 크리스 카일이 바닥에 무너졌다. 결국 블링크가 그의 몸에 무리를 준 것이다. 크리스 카일은 힘겹게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이미 승부는 결정이 난 상태였다.
척.
“이만 포기하지?”
목을 겨누는 검.
크리스 카일이 고개를 들자, 자신을 내려다보는 강민혁의 모습이 보였다.
치열했던 승부.
마침내 경기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경기장이 침묵에 빠졌다.
사람들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크리스 카일이 패배했다고?”
크리스 카일.
우승 후보는 아니다.
그 위에 쟁쟁한 마법사들이 있지만, 그래도 64강에서 떨어질 만한 실력자는 아니다. 더구나 상대는 검을 사용하지 않았던가. 이 세상의 상식에서는, 검사는 마법사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쓰러지는 그림이 상식적이다. 그런데 강민혁은 크리스 카일이 사용한 공간 마법조차 따라붙는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충격.
사람들이 넋을 잃은 반응을 보였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장면의 연속이었다.
“대체 내가 뭘 본 거지?”
“검 하나로 마법사를 저렇게 몰아붙일 수가 있다니.”
검으로 다양한 것을 했다.
오라의 파편을 뿌려 마나의 흐름을 방해했고, 오라로 막을 형성해서 썬더 캐논을 막기까지 했다.
상식 밖의 일.
MC가 뒤늦게 소리쳤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요? 클리스만이 크리스 카일을 무너트렸습니다! 도저히 믿기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요? 마법 트랩에 발이 묶이고 썬더 캐논에 맞았을 때 클리스만의 목숨이 위험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결국 크리스 카일을 굴복 시켰습니다. 이변입니다. 결투 대회 64강에서, 생각지도 못한 클리스만이 32강에 진출합니다!”
이변.
그야말로 이변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이변의 제물이 되어버린 크리스 카일은, 패배라는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절망에 빠졌다.
천재라고 불리는 마법사.
그에게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91화. < 24. 두 문명이 싸우는 방식(4) >
사람들의 환호성.
MC의 격정적인 목소리.경기장에서 내려오자, 점점 옅어지는 소음이 터널의 침묵에 잡아먹혔다.
“...내가 지다니.”
크리스 카일.
경기장으로 통하는 긴 터널을 그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걸었다. 경기 전에 인터뷰를 진행할 때만 하더라도 이러한 상황을 예상하지 못 했다. 클리스만이 그린 드래곤 상황 때 얼마나 대단한 활약을 보여주었는지는 들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의 승리를 의심하진 않았다.
그게 당연한 일이다.
자신은 5서클 마법사다.
그것도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일반 학생이라고 볼 수 없는 뛰어난 마법사.
그런데 패배하고 말았다.
결투의 순간을 떠올리면,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이 많았다.
‘클리스만은 모든 것이 미스터리였어. 골렘 슈트를 착용한 것도 아닌데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육체적인 능력을 보여주었고, 마나의
활용법도 모든 것이 상식을 벗어났어. 특히 블링크로 공간 이동을 하자마자 따라붙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처음 겪어보는 절망감이 들었어.’
괴물.
다른 단어로는 표현되지 않았다.
패배의 무력감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그때, 크리스 카일의 길목을 막아서는 사람이 있었다.
“나랑 얘기 좀 할까?”
“...넌?"
바로 강민혁이었다.
강민혁은 결투가 끝나고, 곧바로 크리스 카일을 찾아왔다.
크리스 카일의 표정에 적의가 떠올랐다.
강민혁이 왜 자신을 찾아왔겠는가.
경기 전에 내뱉은 말이 있으니, 당연히 그 대가를 치르려는 것일 터.
“마음껏 조롱해라. 내뱉은 말을 지키지 못했으니, 네게 조롱당하더라도 나로서는 할 말이 없다.”
“그럴 의도로 찾아온 건 아닌데.”
“그럼 왜지?”
강민혁이 피식 웃었다 크리스 카일은 예민했다.
절망으로 얼룩진 표정은,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일단 난 네가 매우 뛰어난 마법사라고 생각해. 솔직히 말해서 내가 조금만 부족했어도, 이 결투에서 패배한 사람은 나였겠지.”
“놀리는 건가?”
“아니. 나는 너의 능력을 진심으로 인정하기에 대화를 나누어보고 싶었어. 나는 마법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해. 그래서 네가 나를 상대할 때, 어떤 방식으로 마법을 사용했는지 알고 싶어. 만약 너도 내가 사용한 기술에 대해서 알길 원한다면, 나 또한 기꺼이 말해줄 의향이 있어.”
크리스 카일에 대한 감정은 잊었다.
결투는 끝났다
원래 결투라는 것은, 시작 전에는 상대를 철천지원수처럼 생각하는 법이다.
무대에서 내려온 강민혁은, 크리스 카일에게 지난 일의 감정이 아니라 앞으로의 발전을 말했다.
강민혁은 이번 대회를 발전의 자양분으로 삼고자 한다. 그러니 크리스 카일에게 직접, 본인이 사용한 마법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었다. 왜 그런 판단을 내렸는지, 마법 트랩과 같은 것은 어떤 타이밍에 설치를 했는지. 그게 분명히 도움이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크리스 카일이 자존심이 강한 인물이라면, 오히려 자신이 내미는 손을 뿌리치지 못할 확률이 높다.
정정당당한 대결.
순수하게 실력으로 붙어서 패배했으니, 그도 결과를 부정하는 찌질한 모습을 보여주긴 싫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에 대해서 알고 싶겠지.’
강화 전사.
이들에게는 낯선 세상이다.
강민혁이 크리스 카일을 궁금해하는 것처럼, 크리스 카일 또한 강민혁을 바라보는 눈빛이 흔들렸다.
이미 답은 정해졌다.
패배를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느냐.
패배를 부정하고 현실을 외면하느냐.
크리스 카일은 적어도, 현실을 인정하는 삶을 살았기에 남들보다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제길.’
인정하기 싫은 상대.
패배의 쓰라림이 사라지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지만, 크리스 카일은 퇴보가 아니라 발전을 택했다.
“네 제안을 승낙하지.”
크리스 카일이 말했다.
“좌표를 수정하는 방법은 간단해. 마법을 발현한 이후, 마법과의 연결고리를 완전히 끊어내는 것이 아니라 추가적으로 새로운 좌표 값을 입력하는 거야. 그럴 경우에 추가적인 마나 소모가 생기지만, 대신 마법이 빗나간다 할지라도 상대의 움직임을 끝까지 따라갈 수 있지.”
심화 이론이었다.
보통 한 학년은 올라가야 배우는 것인데, 크리스 카일을 통해서 유용한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마법 트랩은 ‘오토 캐스팅’을 이용했어. 마법 트랩은 마법진의 한 종류. 마법진의 형태에 따라 마나를 지속적으로 사용하면, 마나는 마법 트랩의 형태를 기억하게 돼. 나는 너와 싸우는 도중에 오토 캐스팅으로 마법 트랩을 형성했고, 네가 나에게 접근하자마자 그것을 바닥에 흘려보내서 마법 트랩을 발현시켰지. 그리고 블링크. 사실 이 방법으로 난 네가 쓰러질 거라고 생각했어. 홀드 트랩과 썬더 캐논의 연계는, A급의 몬스터라고 해도 버틸 수 없거든.”
마법 트랩.
새로운 정보였다.
마나의 기억이라는 것은, 마법이라는 넓은 분류 안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크리스 카일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못마땅한 기색을 보이던 크리스 카일도, 진지하게 경청하는 강민혁의 태도에 눈빛이 바뀌었다.
‘이 녀석, 진심이야.’
처음에는 의심했다.
어쩌면 이것이 자신을 놀리는 하나의 방식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런데 강민혁의 태도는 진지했다.
상대방이 자신을 깎아내렸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발전을 위해 지난 일을 잊었다.
강민혁이란 그런 사람이었다.
강민혁에게는 선이 있다.
그 선만 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했든 간에 ‘이득’에 따라 수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크리스 카일이 했던 일. 그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전사에 대한 편견에, 그리고 승부에 대한 욕심에. 경기 전에 상대를 도발하는 것은 매우 흔하다. 중요한 것은 경기가 끝난 이후의 태도고, 크리스 카일은 결국 패배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강민혁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강민혁의 어린 시절.
후계자로서 발전하기 위해서는 싫은 사람을 모두 배척할 수는 없었다.
정판수를 끌어안고 그와 같이 다녔던 것처럼, 강민혁은 싫어하는 사람도 상황에 따라 활용하는 법을 알았다.
크리스 카일의 설명이 끝났다.
이제 강민혁의 차례.
강민혁이 말했다.
“네가 제일 궁금한 건 블링크의 이동을 따라잡은 방법이겠지. 그건 사실 일반적인 방법이 아니야. 체내에 있는 마나를 각 신경에 부여해서, 감각을 최대한 예민하게 만들면 ‘초감각의 경지’에 들어서게 되지. 이때 나는 인간의 한계를 벗어났다고 할 수 있어. 네가 내쉬는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감각이 극한으로 발달하거든. 덕분에 나는 마나의 흐름이 보였어. 블링크가 사용된 직후, 그로부터 이어지는 마나의 끝이 네가 도착할 지점인 게 확실했거든. 덕분에 곧바로 따라잡을 수 있었지.”
강민혁의 설명.
경악의 연속이었다
강민혁은 초감각, 검막, 오라 웨이브에 대해서 말했다.
굳이 숨기지 않았다.
어차피 이들이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다.
그 기반이 되는 단전의 힘, 그리고 각 기술의 체계를 모른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사용할 수 없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했다.
이건 정보의 거래다.
자신의 것을 알려준다고 해서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강민혁은 새로운 것을 얻어 더욱 발전한다.
‘..대단해.’
크리스 카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강민혁의 기술.
그건 상당한 체계를 갖추었다.
그냥 어중이떠중이들이 사용하는 기술 같은 것이 아니다.
마치 마법처럼, 오랜 세월 공을 들여 완성한 하나의 체계.
이런 대단한 기술을 강민혁이 직접 만들었다고 생각하자, 크리스 카일은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이 녀석은 진짜 괴물이었어.’
새로운 세상.
새로운 문명.
그것이 ‘클리스만’이라는 사내로부터 비롯되고 있었다.
남들은 마법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는 이 세상에서, 그는 새로운 길을 직접 개척하고 있었다.
‘이래서 엘리샤가 클리스만을 조심하라 했던 건가.’
엘리샤.
크리스 카일이 아무리 발악해도 따라잡지 못한 왕실 마법 아카데미 최고의 재능. 사실 강민혁을 인정하지 못한 이유는 엘리샤의 탓도 있었다. 엘리샤가 그런 말을 하면서, 크리스 카일은 강민혁을 반드시 쓰러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실패하고 말았지만, 엘리샤가 강민혁을 인정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대화는 끝났다.
강민혁은 원하는 것을 모두 얻자,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짧은 대화.
짧은 만남.
시작은 좋지 않았으나, 강민혁은 크리스 카일과의 대결에서 많은 것을 얻었다.
지금으로부터 몇 개월 전.
처음 마법 학과에 입학했을 때, 강민혁은 솔직히 마법을 무시하는 감정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헌터로서 난 끝났어.’
검을 버렸다.
아버지는 항상 힘을 강조했고, 그의 말처럼 마법사는 도구로서의 역할이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상은 불가능하다.
A급 몬스터조차 쓰러트리지 못하는, 그리고 강화 전사를 상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마법사는 결국 한계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크리스 카일.
그는 왕실 마법 아카데미 최고가 아니다.
이번 결투 대회 우승 후보도 아니다.
그런데 그런 마법사를 상대로도 궁지에 몰렸다는 사실에, 자신도 모르던 ‘편견’이라는 것이 사라졌다.
‘마법사는 강해.’
크리스 카일과의 결투가 끝나고.
강민혁은 곧바로 숙소에 틀어박혔다.
결투 대회는 넉넉한 기간을 두고 진행된다.
그 안에 결투의 경험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얻고 싶었다.
크리스 카일이 사용했던 기술을 분석하였고, 마법사로서 자신이 익힐 수 있도록 머릿속에 넣었다. 그리고 강화 전사로서 그 기술들을 공략할 방법을 찾았다. 처음 겪는 상황이라 당시에는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제는 절대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말이다.
수호문.
그곳에서 강민혁은 많은 것을 경험했다.
실수도 했고, 실패도 맛보았다.
하지만 그런데도 강민혁이 동기들 중에서 최고로 올라설 수 있었던 이유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경험.
그게 실수든, 실패든.
그리고 자만에 빠질 수도 있는 승리의 경험이든.
강민혁은 어떻게든 ‘발전의 가능성’을 얻고자 노력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강민혁은 자존심을 버리고 크리스 카일에게 먼저 다가감으로써, 발전의 가능성을 얻었다.
남들이 어떻게 보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모든 과정은 결과로 평가받을 테니까.
결투 대회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강민혁은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다음 상대도 차례로 쓰러트리는 강민혁의 모습에, 결투 대회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난리가 났다.
“아니, 정말 엄청나다니까? 마법사들이 상대가 되질 않아.”
“난생 이런 광경은 처음 봐. 마법사들의 마법이 적중하지도 않는 데다, 이상한 막 같은 것을 형성하더니 마법도 막아내더라고. 블링크? 에이, 이 사람아. 클리스만은 블링크를 사용해도 개 코가 달렸는지 귀신같이 따라붙는 능력이 있어. 마법사는, 클리스만을 상대로 도망가지 못해.”
“어쩌면 클리스만이 우승할지도 몰라.”
소문이 부풀었다.
그만큼 강민혁의 활약은 충격적이었다.
다음 상대들.
그들은 크리스 카일보다 뛰어난 마법사가 아니다. 5서클 마법사이기는 하나 다소 능력이 떨어지는 부류였고, 크리스 카일과의 결투로 많은 발전을 이룬 강민혁의 상대가 되질 않았다. 그래도 크리스 카일은 강민혁을 몰아붙이기라도 했지, 그들은 마법을 몇 번 사용하지도 못하고 항복을 선언했다.
연전연승.
마침내 8강전이 이루어졌다.
상대는 제법 실력이 있다고 알려진 5서클 마법사였지만, 이번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팍!
“크악!”
오라의 파편.
그것을 정확히 마나의 흐름에 작렬시켰다.
블링크로 사라지려던 상대는 큰 충격을 받았고, 강민혁은 곧바로 달려들며 상대를 궁지에 몰았다.
상대는 끝까지 발악했다.
각인 마법을 발현시켰으나, 이미 패색(敗色)은 짙었다.
관중석의 중심.
위에서 경기를 내려다보고 있는 아비드에게, 옆에 있던 마법 학과의 교수가 말했다.
"총장님은 클리스만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 녀석은 이 세상의 상식을 무너트리는 괴물입니다. 마나도 서클이 아니라 단전에서부터 비롯되며, 마나를 사용하는 방식이 이 세상의 상식과는 모두 다릅니다.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어디서 저런 괴물이 나타난 겁니까?”
경악에 찬 목소리.
아비드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결투 대회 참가를 승인한 것은 아비드였으나, 그렇다고 이런 결과를 예상했던 것은 아니었다.
‘대체 너의 정체가 무엇이냐.’
클리스만.
그는 시련의 탑에 도전했었다.
그곳에서 무엇을 얻었을까?
그리고 마법이 아니라 왜 검을 사용하는 것일까?
머릿속의 정보들이 서로 어긋났다.
지금의 모습을 본다면, ‘그들이’ 클리스만을 주시하고 뒤를 봐주는 것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아비드가 말했다.
“위험한 힘이다. 마법은 몬스터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고, 그렇기에 사람들은 마법을 중심으로 하나의 문명을 이루었다. 그런데 만약 클리스만이 결투 대회에서 우승하면 어떻게 될까? 상식이라는 것이 무너지겠지. 사람들은 더 이상 마법만이 이 세상의 진리라고 생각하지 않을 테고, 마법이 아니라도 차선책을 택하는 사람이 생겨날 것이다. 어쩌면, 마법이 최선책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수장.
그로서는 바라지 않는 일이다.
마법의 힘이, 마법의 문명이 유지되길 바란다.
그러나 걱정하진 않았다.
적어도, 이번 결투 대회에서 클리스만이 우승할 일은 없을 테니까.
“8강이 끝이다. 크리스 카일을 상대로 보여준 모습이라면, 4강전에서는 절대 이길 수 없다.”
엘리샤.
그녀의 결승전 진출은 확정적이다.
그리고 강민혁의 4강 상대는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졸업생이자, 장벽에서 워 메이지(War Mage)로 명성을 떨친 사람이다.
게다가.
‘6서클 마법사이기도 하지.’
사람들은 말한다.
5서클부터는 모든 단계가 전혀 다른 세상이라고.
강민혁이 4강전에 진출한 것은 분명히 대단한 일이나, 모두가 이번만큼은 그의 탈락을 단언했다.
전장에서 닳고 닳은 6서클 워 메이지.
온실 속의 화초인 크리스 카일과는 다르다.
그는 강력한 우승 후보이자, 마법 문명에서도 강자로 인정받는 인물이었다.
92화. < 24. 두 문명이 싸우는 방식(5) >
해리 윌슨.
그린 드래곤 상황에서 강민혁의 도움을 받았던 그는, 4강 상대가 정해지자마자 쪼르르 달려와 떠들어댔다.
“정말? 정말 도미닉 그린(Dominic Green)이 누군지 모른다고?”
“어."
“너 진짜 대박이다. 어떻게 도미닉 그린을 모를 수가 있어? 5년 전에 왕실 마법 아카데미에서 수석 졸업을 하고, 곧바로 장벽에 자원해서 화제가 되었던 선배잖아. 적어도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학생이라면 그 정도의 이름은 알아야 되는 거 아니야?”
해리 윌슨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도움을 받은 이후로, 그는 강민혁을 생명의 은인이라 생각했다.
그렇다고 강민혁이 그를 친근하게 대해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로서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4강전을 치르려면 도미닉 그린이 어떤 인물인지는 알아야 해.”
강제로 설명이 시작되었다.
강민혁으로서는 들어서 나쁠 것이 없는 정보기에, 해리 윌슨이 하는 말을 경청했다.
“너도 알다시피 장벽은 매일 같이 몬스터의 위협을 받는 땅이야. 일정한 주기로 발생하는 몬스터 웨이브 현상이 아니더라도,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 공격은 장벽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 그래서 사실 졸업생들은 장벽행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아. 마법이 몬스터에 대항하기 위해서 배우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도 장벽은 너무 위험하거든. 그래서 수석 졸업생이 장벽행을 지원하는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야. 수많은 마탑에서 도미닉 그린 선배를 영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도미닉 그린 선배는 옳은 일에 힘을 쓰고 싶다고 모두 거절했거든.”
도미닉 그린.
당시 그의 선택은 엄청난 화제가 되었다.
그렇게 장벽으로 떠난 그는, 온갖 위험한 임무를 자처하면서 워 메이지로서의 명성을 떨쳤다.
3년 전에 있었던 몬스터 웨이브.
그 재앙에서 도미닉 그린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몬스터들을 상대했고, 1년에 1번 진행되는 토벌대에도 참여하는 적극성을 보여주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도미닉 그린은 6서클의 경지에 올라섰다. 그의 성장에, 장벽에서는 도미닉 그린을 강철의 심장을 가진 마법사라고 불렀다.
크리스 카일?
그와는 비교할 수 없는 인물이다.
전장에서의 경험도, 그리고 실력도.
크리스 카일이 졸업하고 만약 장벽행을 택한다면, 빠르게 발전한다는 전제하에 5년 뒤에나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도미닉 그린인 것이다.
“사실 이번 결투 대회는 엘리샤 선배의 참가 소식으로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출전을 포기했어. 학과생의 신분으로 6서클에 오른 엘리샤 선배는 정말 역대급의 천재고, 그녀의 우승은 사실상 확정된 것이나 다름이 없거든. 벌써 화이트 캐슬 입성이 논의되는 것을 보면 말 다 한 거지. 그런데 만약 엘리샤 선배가 우승하지 못한다면, 그 상대는 도미닉 그린 선배일 거야.”
유일한 대항마.
도미닉 그린은 엘리샤와 같은 선상에 두는 이름이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4강전이라는 높은 자리에 오르면서, 드디어 ‘진짜 실력자’들과 붙는 자리가 마련되었다는 사실을.
강민혁이 말했다.
“그런데 만약 내가 검으로 도미닉 그린을 쓰러트린다면 어떻게 될 것 같아?”
궁금했다.
도미닉 그린은 이 세상에서 강자라고 불린다.
그런 사람이 ‘새로운 힘’에 쓰러지는 모습은, 모두가 상상하지 못한 그림일 터.
해리 윌슨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떻게 되긴. 당장 왕실 마법 아카데미를 때려치우고, 검을 수련하는 데 집중해야지. 평범한 마법사들은 평생 노력해도 도미닉 그린 선배의 수준으로 올라설 수 없는데, 그걸 검으로 이루었다면 마법을 익힐 이유가 없잖아. 그리고 그런 결과라면, 전 세계가 널 주목하게 될 거야.”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라는 듯한 뉘앙스.
그게, 바로 4강전의 현실이었다.
강민혁이 고개를 들었다.
원형의 경기장.
빼곡하게 자리한 관중들.
그리고 눈앞에 위치한 그 대단하다는 4강전 상대.
어느새 4강전 결투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 강민혁은 전신에서 올라오는 피로감을 마나로 진정시켰다.
‘피곤하네.’
어제 저녁.
강민혁은 장벽 너머로 떠났다.
그건 어제 하루로 끝나는 일이 아니다.
강민혁은 대회가 진행되는 내내 장벽에서의 사투를 벌였고, 바닥에 흘린 피만큼이나 육체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하루에 자는 시간이라고는 3~4시간 정도. 몬스터들에게 당한 상처로부터 올라오는 욱신거리는 통증이 아직도 생생했지만, 강민혁은 상대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최악의 상태?
아니다.
오히려 최상의 상태라고 할 수 있었다.
끊임없이 이루어진 전투로 인해, 강민혁의 기세는 마치 잘 벼려진 한 자루의 검과 같이 변했다.
사실 클리스만의 육체는 강민혁에게 적합한 상태가 아니었다. 수호 심법을 단련하지 않은 몸이라 수호문의 기술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고, 다소 투박한 움직임에 애를 먹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장벽 너머에서의 시간 덕분에 클리스만의 몸은 점점 변했다. 끝도 없이 밀려드는 몬스터들을 상대하면서, 강민혁은 검사 클리스만으로서 완벽하게 적응해나갈 수 있었다.
꽉.
검이 알맞게 잡힌다.
투박한 굳은살은, 이제 강민혁에게 믿음을 주었다.
“드디어 여러분들이 기다리시던 4강전입니다! 모든 상대를 압도적으로 쓰러트린 장벽의 워 메이지 도미닉 그린과 최초로 검을 사용하는 참가자인 클리스만의 대결! 과연 어떤 참가자가 이번 대결의 승자가 될까요?”
MC의 목소리가 들렸다.
곧 시작될 결투.
강민혁은 기세를 숨기지 않았다.
예민하게 피어오르는 감각에, 도미닉 그린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보통 녀석이 아니로군. 마치 짐승 같은 기세야.”
강민혁이 웃었다.
상대가 자신의 기세를 느끼는 것처럼, 강민혁도 도미닉 그린이 예사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주변.
도미닉 그린으로부터 엄청난 마나가 일렁이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아무런 준비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지만, 그는 이미 전투를 시작할 준비를 마쳤다.
강자다.
해리 윌슨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강민혁의 감각이 그가 얼마나 위협적인 상대인지를 알려주었다. 그를 이길 수 있을까? 그건 확신할 수 없다. 클리스만의 육체는 겨우 몇 개월의 성장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엄청나게 발전했지만, 상대는 그것을 뛰어넘는 힘과 경험이 있다.
고로.
‘전력을 다한다.’
삐익-
“결투를 시작하겠습니다.”
MC의 외침.
시작 신호에, 강민혁이 곧바로 땅을 박찼다.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 표현이 딱 적절했다.
빠르게 시야의 사각지대를 돌아가는 강민혁의 움직임에, 도미닉 그린은 땅을 힘껏 밟았다.
“그라운드 웨이브(Ground Wave).”
쿵!
크그그그극.
땅이 흔들렸다.
물결치는 땅으로 인해 지반의 형태가 이상하게 변했고, 불쑥 튀어 오르는 땅이 강민혁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강민혁으로서는 돌아가 거나 넘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 가벼운 몸놀림이 솟아오른 땅을 넘어가는 순간, 도미닉 그린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강력한 화염 다발을 일으켰다.
“파이어 랜스(Fire Lance).”
화르르르르륵!
캐스팅 과정은 없었다.
서클의 상관관계로 인해서, 6서클 마법사인 그는 3서클의 마법을 캐스팅 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그대로 작렬하는 화염!
강하게 일어나는 불길이 강민혁을 집어삼켰다.
펑!
화르르륵!
간발의 차이로 피했다.
그러나 도미닉 그린의 후속타는 계속되었다.
그는 크리스 카일과는 다르게 전기 계열의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전기 계열의 마법은 한 번만 적중하면 매우 효율적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이나, 문제는 강민혁이 쉽게 맞아줄 상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전략을 바꾸었다. 정석적인 플레이가 아니라 전장에서의 경험에서 비롯되는 판단. 화염 마법의 강력함은, 굳이 상대를 맞추지 않아도 피해를 입혔다.
“파이어 랜스.”
펑, 펑!
화르르르르륵.
강민혁의 움직임을 따라 폭발이 일어났다.
주변으로 퍼지는 화염의 뜨거움에 강민혁은 마나로 피부를 보호했다.
3서클 마법이라고는 하나, 6서클 마법사가 사용하는 상급 3서클 마법은 절대 만만히 볼 수 없다.
도미닉 그린의 시선이 차분하게 강민혁을 따라붙었다. 일반인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움직이었지만, 파란색으로 번들거리는 그의 눈동자는 강민혁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파악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사용되는 마법. 그라운드 웨이브의 효과로 움직임에 방해를 받고 있는 강민혁으로서는, 도미닉 그린의 마법 연계에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말 짐승 같은 녀석이네.”
강민혁은 빨랐다
솟아오르는 땅을 밟아서 튀어 오르며, 점점 도미닉 그린과의 거리를 좁혀가고 있었다.
그 순간.
“파이어 필드(Fire Field).”
화르르르륵!
주변에 화염이 타올랐다.
강민혁과 자신의 앞에 불의 경계선을 만들더니, 강민혁이 넘어설 수 없는 ‘불의 벽’을 형성하였다. 그러한 상황에도 도미닉 그린의 마법은 계속되었다. 강민혁에게 숨을 돌릴 조금의 시간도 주지 않겠다는 듯이, 빡빡하게 작렬하는 마법에 강민혁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불의 벽?
돌아가면 상대의 의도에 걸려드는 것일 터.
강민혁이 마나로 강한 회전을 일으켰다.
‘검풍.’
화악-
파바바바박!
검에서 일어나는 마나가 불길을 밀어냈다. 그건 일시적인 효과. 강민혁은 잠깐 생겨난 틈으로 몸을 내던졌다. 파이어 필드의 화력은 인간의 피부를 단번에 태워버릴 정도로 매우 강력하였으나, 마나로 보호한 강민혁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정도로 버틸 수 있었다. 그건 관중들로서는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설마, 파이어 필드를 맨몸으로 돌파할 거라 생각하진 못했다.
히죽.
도미닉 그린이 웃었다.
그는 마나가 담긴 목소리로, 강민혁이 들을 수 있도록 속삭였다.
동시에 캐스팅도 끊임없이 진행되었다.
“장벽 너머에는 너와 같은 짐승들이 정말 많아. 너무 빨라서, 매직 아이(magic eye)를 사용한 눈으로도 움직임을 따라잡기가 힘들지. 참 곤란한 상황이야. 마법사의 마법은 적중해야 그 의미가 있거든. 그럴 때마다, 내가 어떤 방법으로 그 괴물 같은 녀석들을 제압했는지 알아?”
신경 쓰지 않았다.
속삭이는 말들을 흘려보내며, 강민혁은 도미닉 그린의 품을 파고들었다.
뚫었다.
그리고 혹시 ‘블링크’를 사용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강민혁은 감각을 예민하게 일으키며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파사사사삭-
그의 몸이 흩어졌다.
마치 신기루처럼.
“생과 사의 경계선. 상대가 내 목숨을 끊으려고 다가오는 그 순간은, 스피드도 의미가 없지.”
미라지(mirage).
환상 마법이 사용되었다.
그런데 도미닉 그린은 멀리 도망친 것이 아니라, 상체만 살짝 뒤로 뺀 모습으로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바로 눈앞에서 휘둘러지는 강민혁의 검을 피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기가 라이트닝(Giga 니ghtning).”
콰앙!
빠지지지지지직!
강력한 6서클 마법이 작렬했다.
그 엄청난 위력에 강민혁은 황급히 검막을 형성하였다. 다행히도 강민혁의 대응은 빨랐으나, 검막을 타고 들어오는 충격에 강민혁의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강민혁으로서는 일단 기가 라이트닝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판단에 도미닉 그린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인탱글 (entangle).”
확!
파바바박!
바닥에서 일어나는 나무줄기들.
그것이 강민혁을 포박하려고 했다.
강민혁은 날랜 움직임으로 나무줄기를 피해내더니, 검이 몇 번 번뜩이자 나무줄기가 모두 잘려나갔다.
탁-
뒤로 착지했다.
앞을 올려다보며, 강민혁의 표정이 굳었다.
‘워 메이지는 다르다 이건가.’
숨 가빴던 공방.
그 상황에서 도미닉 그린은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처음 그 자리에 서서 강민혁의 접근을 견제했고, 눈앞에서 검을 휘두르는 상황에도 그는 상체를 뒤로 젖히는 동작으로 강민혁의 공격을 피했다. 그에 강민혁은 당할 수밖에 없었다. 미라지의 환상은 공격이 통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고, 강민혁은 상대의 공격에 노출당하고 말았다.
대체 언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미라지를 사용한 걸까.
“대단하네요. 워 메이지는 다들 이런가요?”
“아니.”
도미닉 그린이 마나를 사납게 일으켰다.
“내가 특별한 거야.”
해리 윌슨의 말은 옳았다.
그는, 강민혁으로서도 승산을 장담할 수 없는 진짜 강자였다.
93화. < 24. 두 문명이 싸우는 방식(6) >
크리스 카일.
그와의 결투 이후, 강민혁은 그가 강화 문명에서 어느 정도의 실력자인지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었다.
‘정확히 어느 정도라고는 단정할 수 없어. 하지만 크리스 카일의 실력이라면, 황금 세대를 제외하고 웬만한 일급 제자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야. 강화 문명에서는 5서클의 마법사가 대우를 받지 못하지만, 그는 같은 5서클이라 해도 보여주는 파괴력이 전혀 달라.’
황금 세대.
강민혁을 시작으로 이준호로 이어지는 멤버들은 크리스 카일을 충분히 제압하겠지만, 그 밑에 일급 제자들은 조금 애매했다. 그만큼 크리스 카일은 강했다. 아직 전투의 미숙함이 보였지만, 강력한 마법으로부터 비롯되는 연계 공격은 강화 전사를 무너트릴 만한 힘을 갖추었다.
그렇다면 도미닉 그린은 어느 정도의 수준일까.
‘최소 황금 세대와 동급이고,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펑!
화르르르륵.
화염 마법이 펑펑 터졌다.
피한다고 해서 숨을 돌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활화산처럼 분출되는 마나는 끊임없이 마법을 쏟아냈다.
사람들이 왜 5서클부터 한 단계 상승할 때마다 전혀 다른 세계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3서클 마법을 캐스팅 없이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강력한 이점이었고, 도미닉 그린은 처음 위치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채 강민혁을 구석으로 몰아붙였다. 마나를 두른 덕분에 큰 피해는 없었지만, 강민혁으로서는 섣불리 도미닉 그린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야 한다.’
화악-
오라가 일어났다.
마나의 파편이 도미닉 그린의 틈을 노림과 동시에, 강민혁은 마나를 다리에 집중시키며 땅을 박찼다.
그러나.
“그런 잔재주는 통하지 않아.”
쿵!
파바박!
도미닉 그린이 땅을 힘껏 밟자, 그라운드 웨이브의 효과로 돌멩이가 위로 튀어 올랐다. 그것들이 절묘하게 마나의 파편을 막아냈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정교한 컨트롤이었고, 흔들리는 땅은 강민혁의 접근을 막아내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보았다.
장벽 너머.
그곳에서 도미닉 그린은 수많은 몬스터를 상대했다.
그러한 경험으로 인해, 그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不動心)을 얻을 수 있었다.
상대는 모른다.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마법을 사용하는지.
상대가 정신없이 마법에 휘둘리는 사이, 도미닉 그린은 상대를 무너트릴 판을 차분하게 만들어갔다. 6서클 마법을 캐스팅하고 미라지로 자신의 ‘환상’을 만들어내고. 상대의 검에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전혀 없었다. 장벽 너머에서는 항상 목숨을 걸어야만 했다.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야만, 위기의 상황에서 오히려 상대의 목숨을 끊어내는 워 메이지로 완성될 수 있다.
펑펑펑!
화르르르르르륵!
폭발하는 마법!
도미닉 그린의 표정에 희열이 떠올랐다.
“마법사는 적을 상대함에 있어 도망칠 이유도, 필요도 없다. 이걸 나는 매직 스페이스(magic space)라고 부른다.”
마법의 공간.
무빙 캐스팅?
그런 것은 필요하지 않다.
대체 왜 마법사가 도망가야 한단 말인가.
고정된 위치에서 오로지 마법에만 집중하는 것.
마법을 효율적이고 빠르게 사용하며, 그로 인해 상대가 다가오기도 전에 쓰러트릴 수가 있다.
마법의 폭격을 버텨내도 상관없다.
확-
기어코 또 다시 마법을 뚫어낸 강민혁.
그가 몸을 날리는 모습에, 도미닉 그린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찰나의 순간에 승부수를 거는 강철의 심장만 있다면, 마법사의 매직 스페이스는 상대에게 지옥을 선사한다.’
서걱!
파사사삭!
도미닉 그린의 몸이 흩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기가 라이트닝."
콰앙!
빠지지지지지직!
다시 한번, 6서클 마법이 강민혁에게 작렬했다.
도미닉 그린은 강하다.
인정한다.
도미닉 그린 정도의 실력자라면, 강화 문명에서도 그 실력을 인정받을 것이다.
문제는.
‘그는 아직 강화 전사가 어떤 존재인지를 모르고 있어. 우리는 그가 상대했던 몬스터와는 달라.’
그러한 생각에서 차이점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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