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ilado 9

하지만 최강혁은 웃지 않았다.
“딱딱할 것 같던데. 무겁고.”
“...역시 보이는군요. 다른 스킬이 더 있는 거죠? 스캐닝이라거나.”
최강혁은 말이 없었지만, 부정하지 않는 것으로 이미 대답이 되었다.
“좋은 처세술이었어요. 능력을 숨기지 않았다면 다른 방식으로 피곤해졌을 거예요.”
“지금도 피곤한데요.”
“그건 어쩔 수 없잖아요. 본인이 하신 일들이 있으니.”
“그건 그렇군요.”
“커피 한 잔 할래요?”
그녀가 가까운 여관겸 술집을 바라보며 물었다. 하지만 대답 대신 이어진 건 향긋한 커피 내음이었다.
“.......”
최강혁은 아까 차 한잔을 주었던 것처럼, 허공에서 따뜻한 커피 한 컵을 꺼내주었다.
“왜 그렇게 봅니까.”
“...아니예요.”
살짝 고개를 젓던 사라 레드우드는, 끝내 웃어버리며 그가 건넨 컵을 받아들었다.
〈 67화 〉 067.
067.
자정이 조금 지났을 무렵, 사라 레드우드 쪽의 추가 지원이 도착했다.
그렇게 온 수송트럭 세 대에 남은 물자들이 실렸지만, 그녀가 가장 관심을 보이는 건 냉동트럭 쪽이었다.
처음엔 몬스터 사체라도 넘겨주려고 그러는 걸까 생각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짐작가는 바가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녀의 짐작이 맞았다.
냉동트럭에 채워지기 시작한 수십구의 시체들은 그것을 보는 이들의 안색을 창백하게 만들었다.
“저, 저게 다 뭐야....”
“문신들이 보이는데. 죄수들인 것 같아.”
“아닌 것도 있잖아.”
“저기 봐. 옷에 마크가 있어.”
“와일더였군.”
“전부 그들인가?”
“아마도.”
대부분 총을 맞은 듯 보였지만, 개중에는 신체 일부가 절단된 것으로 보이는 시체도 더러 있었다.
다만 그 절단 부위가 마치 대충 용접이라도 해놓은 것처럼 적당히 붙어있어서 오히려 기괴한 느낌이었다.
“와일더 클랜 인물들입니다. 어지간히 괜찮은 상태만 남겨둔 거라서, 아마 신원조회가 가능할 겁니다.”
그 외에도 ‘괜찮지 않은 상태’의 경우 신체 일부나마 따로 보관해둔 상자가 있었다.
“이들의 죽음을 알리고 싶으신 거군요.”
“아까 전 드렸던 자료는... 고향에서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니, 그들의 죽음이라도 알려주는 게 희망고문보다는 낫다고 생각해서 그런 겁니다.”
“그런 부분도 있을 것 같았어요.”
하지만 이건 다르다.
“원래는 제 변호 목적으로 확보해두고 있던 건데, 그게 오히려 각국 정부에 대한 도발이 될 것 같더군요.”
그러니까, 아예 그쪽으로 활용하고 싶다는 것.
최강혁은 이것을 일종의 경고이자 선동으로 사용하라고 했다.
와일더 클랜에 합류하거나 선을 대려는 이들에겐 공포심을 주고, 반대로 토벌대 쪽에는 사기를 높여줄 수 있을 테니.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들을 죽인 사람에 대한 정보도 나갈 수 밖에 없어요. ...괜찮겠어요?”
“이미 누가 그런 건지 뻔히 알 텐데요. 여기서 더 나빠질 게 있겠습니까.”
고향에 있는 누나의 가족들이 핍박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 부분은 몬스터 핵을 판매한 돈이 어느 정도 커버해줄 것이다.
“그러면, 정부에서 해당 단체를 지원한 부분까지 폭로하실 생각이신가요?”
“저는 그런 위인이 못 됩니다.”
그런 거창한 이유로 나선 것이 아니었다.
단지, 뭐가 되었든 누군가는 청소해야 할 것 같았다. 그 뿐이었다.
“이것도 드리죠.”
“이게....”
“시간 상 청소하지 못한 곳들입니다. 아직 많이 남았어요.”
“그들의 거점이군요. 정말 좋은 정보예요.”
“몇 곳은 이동했을 겁니다. 최근에는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 분위기라서.”
와일더 클랜의 거점에 대한 정보와 지도 묶음까지 건넨 그는 시원섭섭한 얼굴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나눈 그녀의 손에, 최강혁은 아까전 스스로 뽑아낸 혈액을 담은 작은 용기를 쥐여주었다.
“여러 가지로, 잘 부탁합니다.”
“가족 분들에 대한 의뢰라면 문제 없게 처리할게요. 다른 건에 대해서도 최선을 다할 거고요.”
“최선까진 안 해도 됩니다. 적당히 한 방 먹이는 정도면 충분해요. 당신 쪽이 노출되지 않을 정도만 하세요.”
역시나 아무래도 좋다는 표정.
그렇게 돌아선 그는 터벅터벅 새벽의 어둠 속으로 멀어졌다.
하지만 그가 여관이나 술집으로 향하는 게 아님을, 그 뒷모습을 보는 모든 이들은 왠지 알 것 같았다.
“붙잡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잡을 수는 있고?”
“바짓단을 잡으면, 민망해서라도 멈추지 않을까요.”
“왠지 진심같아서 웃을 수가 없잖아.”
“진심입니다.”
“.......”
최강혁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고 나서야 그들은 서둘러 움직였다.
그렇게 상당한 규모의 수송대가 캠프를 떠났다.
날이 밝을 즈음 뒤늦게 해당 캠프에 도착한 이들이 있었지만, 그때는 이미 충격적인 소식이 각지로 전파되는 중이었다.
* * *
“...죽었다고?”
“그의 혈액임이 확실히 인정되었습니다. 생존 확인 장치로 죽음이 확인되었고요.”
“본국 쪽은?”
“긴급 통신으로 전파했습니다. 방금 전 답신을 받았고... 마찬가지랍니다.”
배지현 준장은 다소 허탈한 얼굴로 보고서를 주시했다.
그곳엔 최강혁의 혈액이 맞다는 유전자 검사 결과와 더불어, 그가 더 이상 이 지역에 생존해 있지 않다는 장치 결과 또한 나타나있었다.
“이 혈액 샘플. 그 여자가 가져왔다고 했지?”
“사라 레드우드입니다.”
“최강혁과 접점이 있는 것 같더니. 미국에서 수를 쓴 것 아닌가?”
“그쪽에서도 우리 쪽에 문의를 해오는 중입니다. 서로 말을 맞춘 게 아니라면, 그쪽과 연계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음... 그쪽도 연결 장치라면 연방정부에서 직접 관리하긴 할 테니.”
의심이 가는 부분이 많았다.
혈액을 가져왔지만 시체가 없었다는 점도 그렇고. 그걸 가져온 인물도 그렇고.
하지만 당장 뭔가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었다.
“이곳에도 본국 쪽에도 없다면, 그걸로 된 거겠지. 우리가 신경쓸 일은 아니야.”
그런 일 말고도 처리해야 할 안건은 무척이나 많이 있었다. 해당 보고서를 적당히 옆으로 치워둔 그녀는 다른 서류들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면서도 픽 웃으며 한 마디 덧붙였다.
“양호석 표정이 볼만하겠군.”
문득 과거 그가 제시했던 타협안이 생각났다.
최강혁을 와일더 클랜 쪽이 아니라 자신에게 넘겨준다면, 추후 이득을 공유하겠다고 했었던.
“결과적으로 양쪽 다 물을 먹었지만.”
그도 놓쳤고, 이쪽도 놓쳤다.
와일더 클랜이 해당 위치에 도착했을 땐 이미 아무도 없었다고 나중에 전달받았다.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클랜 쪽에 추가 습격이 없다면 어떤 식으로든 모습을 감춘 게 맞을 거다.’
사라졌으면 된 거다.
배지현은 다시금 그런 생각을 하며 앞에 놓인 서류에 서명을 했다.
* * *
“비우고 오셨습니까?”
순백의 공간.
그 끝이 어디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그곳의 한복판에는 마찬가지로 화이트 일색의 접대용 테이블과 의자들이 있었다.
맞은 편에 앉아있는 백색 정장 차림의 사내에게 눈인사를 건넨 최강혁은 자연스럽게 의자 하나를 당겨 앉으며 입을 열었다.
“깔끔합니다.”
“어디 봅시다. ...흐음.”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남자.
그는 ‘이계에서 행복을 찾으세요’라는 식의 메시지를 주기적으로 날리던 업체 소속의 직원이었다.
보낼 때마다 짜증이 나서 나중엔 열어보지도 않았지만, 언젠가... 아마도 어딘가에서 루팅했던 술을 마시고 나서 상담 요청을 수락했던 적이 있었다.
그 때 이곳에 처음 방문하게 되었다.
“아주 가관인데요.”
“뭐가 또 가관입니까. 비우래서 비우고 왔더만.”
당시 상담을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엔 술주정 비슷한 토로였지만, 이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그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지금 앞에 보이는 남자의 외모가 실제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와 언어가 통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일단 서류부터 다시 작성해주시고요.”
“또요?”
“날짜도 바뀌었고... 이래저래 해야됩니다. 누군 좋아서 이러겠습니까?”
“에이....”
남자가 건넨 서류를 다시금 읽어보았다.
지난 번과 동일한 서류라는 건 그 때 스캔했던 데이터와 비교해봐도 알 수 있었다.
“오늘 날짜가 어떻게 되죠?”
“그걸 왜 저한테 묻습니까.”
“아. 그렇지.”
시스템을 확인하며 작성한 최강혁은 그 서류에 적혀있는 문구들을 흘깃 보았다.
‘다른 세계’ 나 ‘새로운 시작’ 같은 문구 외에도 ‘결혼 계약’이라거나 ‘복귀 불가’같은 경고성 강조 문구 또한 눈에 들어왔다.
“사진 없습니까?”
“뒷모습은 싫다면서요.”
“그러니까요. 앞을 보여줘야죠.”
“가서 보시면 되잖습니까. 어차피 조건 따져서 하시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그게 아니잖아요. 뭐, 너무 그렇다 싶으면 좀 나중에 할 수도 있고.”
“지금 상황이 그렇게 여유로우시던가요?”
“.......”
“그리고, 지난 번 보여드렸던 분은 이미 결혼을 하셔서 대상이 바뀌었습니다.”
“또요?”
“그러게 일찍 하시라고 했잖습니까.”
“뒷모습은 좋았는데....”
“이번엔 워낙 급하게 들어온 요청이어서 사진이없습니다. 그래도 그쪽하고 같은 계열이라는 건 확인했고요.”
“같은 계열이요?”
“인간 말입니다.”
“아.”
그나마 인간이면 다행이다.
지난 번 상담할 때 들었던 이야기대로라면 이종간의 결혼도 주선한다는 모양이니까.
‘이런 식으로 결혼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지만.’
사실 반쯤은 자포자기 상태였다.
어떤 식으로든 그곳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라면 어느 곳이나 상관 없기도 했고.
‘누나에겐 해줄 만큼 해줬으니, 그쪽도 됐고.’
고향에 돌아가면 멀리서라도 조카를 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봤지만, 사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차라리 ‘삼촌이 남긴 돈’ 정도가 그들에게도 훨씬 나을 것이다.
누나에겐 별도의 편지를 써서 단말기에 넣어두었으니, 사라 레드우드가 그것을 출력해서 전달해줄 테고.
“그러면, 넘어가고 나서 결혼 대상을 만난다는 거죠?”
“그렇다고 몇 번을 설명합니까.”
“손님 응대가 너무 불친절한데요?”
“좆같습니까?”
“조금요.”
“많이는 아니군요.”
“네.”
이 남자와의 대화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사실 첫 상담 이후 몇 번을 더 찾아온 건, 결혼 상담보다는 편한 마음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그랬던 거였다.
“뭐, 이런 대화도 오늘이 마지막이겠지요.”
“그렇겠네요.”
서류작성을 끝낸 최강혁은 그것을 테이블 위로 주욱 밀어 건네었다.
그것을 들어 금세 읽어내려간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금 최강혁을 바라보았다.
“왜요.”
“뭐가 왜요입니까? 여기다가 꺼내놔요.”
“.......”
“취지 설명했잖습니까. 밸런스 패치라고.”
그랬다. 그렇게 말했다.
밸런스 패치라고.
해당 지역에 가져갈 수 없는 것들, 혼란을 주거나 위험을 초래할 만한 것들은 두고 가야 한다고.
“그래도 비누 정도는 봐줍시다 진짜.”
“도우미 있으면 복제할 수 있는 거 뻔히 아는데 봐주겠습니까? 그걸 못 뺏으니까 이러는 겁니다.”
“...너무하네.”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려면 모든 것을 비워야 한다고 했다.
심지어 입고 있는 옷까지도 그쪽 세상에 없는 특수한 재질일 경우 인정되지 않는다고.
“에이, 시발 진짜.”
“좆같습니까?”
“조금요.”
테이블 위에 비누 두어 개를 꺼내놓은 최강혁은 맞은 편에서 빤히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에, 다시금 투덜거리며 다섯 개를 더 꺼내놓았다.
“그게 다 보입니까?”
“그렇다니까요. 그냥 다 털어내시면 될 걸 왜 그렇게 집착합니까?”
“이거 모으느라 개고생했으니까요. 아니... 그쪽 세상엔 비누가 없어요?”
“비슷한 게 있긴 할 겁니다만, 적어도 공장식 비누는 아닐 겁니다.”
“...좆됐네, 진짜.”
대체 어떤 세상과 연결된 걸까.
듣기로는 그가 가진 조건과 매칭하여 대상을 검색한다는데, 그가 가진 조건이 워낙 좋지 않다보니 그런 매칭조차 자주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단 결격사유라 할 만한 게 시작부터 걸리니까.
-범죄를 저지른 적이 있습니까?
-네.
-흐음... 사람을 죽이거나 한 건 아니죠?
-죽였습니다. 많이.
-.......
첫 상담때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런 조건인데도 받아주는 세상은 뭐고, 그런 남자라도 결혼하겠다는 여자는 또 뭘까.
‘어쩌면 똥통을 벗어나려고 지옥불로 들어가려는 게 될 수도 있어.’
문득 다 포기하고 정부에 투신해 바싹 엎드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배지현 준장에게 굽히지 않았던 때나 지금이나 딱히 달라진 건 없다고 여겼다.
“그곳에 가면, 행복해질 수 있는 거죠?”
최강혁이 물었다.
첫 상담때부터 비슷한 물음을 건네곤 했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반쯤 농담에 가까웠다.
하지만, 반쯤 농담이라면 나머지 반은 진심이다.
처음 상담할 때부터 그랬다.
최강혁이 원하는 건 결국 하나 뿐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정장 남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 68화 〉 068.
068.
“알잖습니까. 어떻게 대답할지.”
“판에 박힌 대답과, 그렇지 않은 대답이겠죠.”
“예.”
“지금도 똑같습니까?”
“달라질 이유가 없지요.”
판에 박힌 대답이라면 ‘행복은 본인께서 만드는 겁니다. 노력하시면 분명히 만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였던가.
그렇지 않은 대답은 ‘내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였었고.
“인벤토리에 남겨두신 것들이... 일단 그 전투식량 10인분 꺼내놓으시고요.”
“먹는 건 좀 봐줘도 되잖아요?”
“그곳에도 먹을 게 있을 겁니다.”
“왜 가정법인데요?”
“그리고, 그 권총 뭔데요. 전투화 안에 넣으면 안 보일 것 같습니까?”
“.......”
테이블 위에, 그곳으로 모자라서 옆쪽 바닥에 계속해서 적발된 것들을 꺼내놓았다.
“이곳에서도 시간은 가고 있어요. 이미 말씀드렸지만, 긴급 요청건이라서 언제 취소되거나 종료될지 모릅니다. 다른 신랑 후보들 쪽에도 연락이 갔을 거라 이말입니다.”
“...무슨 홈쇼핑 매진 임박도 아니고.”
“실제로 매진 임박이니까요.”
“.......”
홈쇼핑이 뭔지나 알고 그러는 걸까.
참 신기한 남자였다.
본체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지만, 그건 말해줄 수 없다고 이미 들었고.
“결혼도 다 타이밍이 있는 겁니다. 할 수 있을 때 서두르세요.”
“결혼 하셨습니까?”
“아니요.”
“......?”
잠깐 황당해졌던 최강혁은 다시금 정신을 차리고 의자에서 일어나 옆으로 갔다.
“차라리 다 꺼내놓을 테니까, 가져갈 수 있는 걸 알려주세요.”
“저도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온갖 것들을 마구 쏟아냈다.
가만히 그것들을 주시하던 남자가 잠시 후 그 중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건 되겠습니다.”
“이거요?”
“왜 그걸 집습니까? 내려놓으세요.”
“그럼 이겁니까?”
“예. 그거요.”
“...대검이 돼요?”
“뭐, 그쪽에도 강철이 있긴 하니까요. 순도의 차이가 나겠지만, 그 정도는 허용범위 안쪽일 겁니다.”
“또 가정법이네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도구는 허용범위가 넓은 편이거든요.”
“그런 거라면 이것도....”
“권총은 안 된다니까요.”
“총알은 안 가져갈게요.”
“아. 그 이야기가 나와서 말입니다만.”
남자가 최강혁을 보았다.
“인벤토리에서 뺐다고 끝난 게 아니죠.”
“.......”
“꺼내놓으세요.”
“뭘요?”
“꼭 말해야 압니까? 흡수하신 것들 말입니다.”
땡그랑.
최강혁의 팔뚝에서 뭔가 흐르듯 튀어나와 모습을 갖추어 떨어졌다. 소총탄약 한 발이었다.
“더요. 더.”
땡그랑. 땡그랑.
비슷한 탄약이 몇 발 더 튀어나왔다.
이어서 강철가시장갑도 나왔지만, 그건 가져도 된다고 했다.
“왜 더 안 꺼냅니까?”
“방금 장갑이 끝인데요.”
“좀 좋게 좋게 가시죠. 다 보인다니까요.”
“...시력 겁나 좋으시네.”
토독.
마치 작은 흙알갱이 같은 것들이 그의 손 아래로 떨어졌다. 총알 안에 들어있던 화약이었다.
“아시잖습니까. 서류에 서명하신 순간부터 제 직권으로, 완전히 알몸 상태로 전이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알죠.”
극미량의 화약만 있어도, 도우미의 능력을 활용하면 복제할 수 있다.
그러니 남자가 왜 그렇게 빡빡하게 보는지 이해는 갔다. 다만 아까울 뿐.
“도우미가 흡수한 것들도 꺼내세요. 아니면 완전히 흡수시키거나.”
“그런 것도 압니까?”
“말씀드렸잖아요. 그게 제 능력입니다.”
도우미가 흡수한 것들.
여러 대의 타블렛과 단말기, 각종 전자기기들은 확실히 다른 세상에 가져가기엔 오버테크놀로지일 가능성이 컸다.
‘자세히 듣지는 못했어도, 일단 굉장히 낙후된 곳 같으니까.’
도우미에게 완전 흡수를 지시했다.
그것은 대상의 형체를 남기지 않고 아예 도우미의 일부로 만드는 개념이어서, 해당 장치의 기능들을 그대로 활용할 수는 있지만 원래의 상태로 되돌릴 수는 없었다.
“이건 괜찮겠고, 이것도 담으시죠.”
이어서 남자가 골라주는 것들을 인벤토리에 담았다. 간단한 침구류에서부터 그가 캠프에서 만들었던 전투복 천 원단도 허용되었다.
“이게 돼요?”
“뭐, 천이니까요. 재질이 굉장히 특수한 것도 아니고요.”
“되면 좋긴 하죠.”
군말없이 루팅했지만, 곧 예의 그 눈빛을 본 그는 겸사겸사 같이 루팅했던 총알을 도로 뱉었다.
“좋게 갑시다, 진짜.”
“예. 예.”
밸런스패치라고 표현하지만, 결국 그쪽 세상에 혼란을 초래할 만한 것들은 가져가지 않는 것 뿐이었다.
‘이런 게 의미가 있나.’
사실 그의 존재 자체가 혼란을 줄 수도 있지 않나 싶기도 했다.
이런 저런 물품들을 배제한다고 해도, 그가 가진 시스템이나 스킬은 잃지 않는다고 하니까.
심지어 도우미까지 가져갈 수 있다고 하고.
‘음... 애초에 시스템이 없었으면 이런 곳과 연결될 일도 없었긴 하지.’
이후엔 별다른 마찰 없이 고분고분하게 지시에 따랐다.
최강혁에게도 이번 기회를 놓치면 지금 이 공간에 언제까지 머물러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쪽으로는 복귀할 수 없으니까.’
상담을 종료한다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가 만들어둔 모든 안배가 어그러질 것이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언제쯤 다시 가능할까요?”
“글쎄요. 지난 번에는 메시지를 보내도 오지 않으셨잖습니까.”
“그렇죠.”
“이게 뭐, 언제 또 새 고객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긴 하지만, 대충 두 달 정도 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더 걸릴 수도 있고요.”
“두 달....”
“빨리 정리해야겠죠?”
“예.”
이곳은 먹을 것도 뭣도 없는 공간이다.
그가 챙겨온 전투식량 10인분만으로는 오래 버틸 수 없다.
“빨리 합시다. 빨리. 뭐합니까?”
“처음부터 협조하셨으면 벌써 끝났을 겁니다.”
땔감으로 베어둔 나무도 허용되었고, 의약품 중에도 일부가 허용되었다.
“약이 돼요?”
“이쪽은 됩니다. 방식은 다르지만, 비슷한 효과를 가진 치료법이 있다는군요.”
“음.”
허용된 약은 아스피린과 더불어 몇 가지 진통 소염제, 상처용 연고 등이었다. 다만 전문의약품 종류는 대부분 불가처리되었다.
“수술도구도 돼요?”
“어차피 스캔 데이터 있잖습니까. 대검이나 다른 무기도 허용해드렸고.”
“음....”
“그쪽이야 아주 같은 재질은 아니겠지만, 이런 것들은 재질도 같죠.”
“아.”
가위와 과도가 허용되었다.
그 재질이 분명 수술도구와 같은 듯 보였다.
사실 그런 걸 쓸 일이 있을까 싶지만, 뭐라도 더 가져갈 수 있으면 좋겠지 싶었다.
“대충 됐군요.”
“대충 말고, 좀 더 꼼꼼하게 봐줘요.”
“꼼꼼하게 할 거면 그 대검도 회수해야 할 텐데요.”
“대충 좋습니다.”
최강혁은 게거미 갑각으로 만든 보호구마저 벗어놓아야 했지만, 그리 아쉽지는 않았다.
마치 무거운 족쇄를 벗어놓은 것 같은 기분도 들어서, 뭔가 새롭게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좋게 생각하자고.’
열심히 모은 것들을 다 털어내야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만, 새출발이라는 게 다 그런 것 아닐까.
‘활 종류도 허용되었으니, 다시 숲시절로 돌아갔다고 생각하면 되겠어.’
그리 아쉬울 것 없던 시절이다.
총을 주무기로 쓰면서부터 조금 후순위가 되어버렸지만, 활 또한 무척 매력적인 무기였다.
“그러면 이것들은 어떻게 하나요?”
“버리고 가셔도 되고... 아니면 그쪽 시스템에 넘겨셔도 되겠지요.”
바닥과 테이블에 놓여있는 각종 물품들.
최강혁은 뭐라도 건지는 쪽이 나을까 해서 시스템에 넘기려다, 그 대가로 주겠다는 인벤토리칸이 너무 적어서 관두었다.
“그냥 두고 갈게요. 혹시 상담하러 오는 사람들한테 필요하면 가져가라고 하세요.”
“권총을 말입니까?”
“필요할 수도 있죠.”
“흐음. 짬처리하는 느낌인데....”
“직접 쓰셔도 되고요. 상담하러 와서 행패를 부릴 수도 있잖아요.”
“술주정을 부리던 사람은 있더군요.”
“뭔가 사연이 있겠죠.”
그렇게 준비가 끝났다.
적어도 알몸 상태로 건너가진 않아도 된다는 건 제법 큰 위안이 되었다.
‘어떤 세상일까.’
떠밀리듯 가는 게 아니다.
원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살아 버틸 수 있겠지만, 그런 식으로 살고 싶지 않아서 떠나려는 것이다.
‘아니. 이것도 결국 떠밀리는 것 같지만.’
뭐, 아무렴 어떤가.
어찌되었든 새출발이다.
자신이 작성한 서류를 어딘가로 보낸 남자와 다시금 인사를 나눈 최강혁은 그의 조언대로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약간 어지러울 수 있습니다. 구토가 나올 수도 있고요.”
“도착하자마자 만날 수 있는 거 맞죠?”
“아마 그럴 겁니다.”
“뭔 다 가정법이야.”
“요청 승인되었습니다. 행운을 빕니다.”
“그걸 빌어줘야 할 정도였습니까?”
마지막 물음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할 듯 했다.
사방의 시야가 제멋대로 뒤섞이는 물감처럼 어지럽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눈을 감지는 않았다.
어느 샌가 어둠으로 뒤덮인 시야에 이어, 다시금 사방이 밝아올 때까지도 그는 두 눈을 뜬 채 바라보았다.
“.......”
숲 속이었다.
아마도 신전이나 예식장 같은 곳으로 가는 걸까 생각했는데, 뭔가 잘못된건가 싶었다.
‘뭔데?’
나무들의 크기는 고블린 산에서 본 것과 비슷했지만,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호흡을 통해 느껴지는 마나의 밀도는 그럭저럭 괜찮은 수준이었지만, 그가 원래 있던 곳과는 확실히 달랐다.
‘평범한 숲인 것 같은데.’
일반인보다 강화된 후각을 통해 몇몇 식물들과 벌레들, 그 사이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짐승들의 냄새가 느껴졌다.
“.......”
대검을 뽑기엔 공간이 협소한 편이었다.
비슷하게 허용되었던 정글칼을 손에 쥐었다.
‘도우미는 잘 작동 중이야. 시스템도... 일단 바뀐 건 없는 것 같고.’
도우미는 그의 생각을 인지하고 해당 무기를 꺼내주는 일을 문제 없이 수행해주었다.
화약 무기들을 가져오지 못하게 된 건 유감이지만, 시스템과 도우미가 있으면 어떻게든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잘 된 것 같기도 하고.’
총을 허용해주지 않는 부분에서 약간은 안도하기도 했다.
그것들을 갖고 가지 못한다는 건, 결국 이쪽 세상에 총기류가 없다는 뜻일 테니까.
“그나저나, 어디에 있는 거야? 도착하면 만날 수 있을 거라면서.”
‘아마 그럴 거다’ 라고 했었다.
빌어먹을 가정법.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잖아.
실제로 이렇게 되었고.
“사진도 못 봤는데.”
일단 숲을 빠져나가서 사람들이 있는 곳을 찾아봐야 할까? 근데 그런 곳을 찾아도 문제다.
뒷모습이라도 봤으면 누군지 짐작이라도 해볼 텐데, 이건 뭐 어쩌라는 건지.
‘긴급 요청이라고 했었지. 아주 긴급하게 결혼을 해야 할 상황이라서, 이계의 남자를 데려와야 했을까?’
그게 무슨 긴급 상황이야.
생각할수록 황당한 설정인데.
-꺄아악!
그 때, 귓가에 들려온 비명이 있었다.
분명 젊은 여성의 목소리였기에, 최강혁은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무섭게 달려갔다.
‘내 부인이 될 사람인가?’
잘은 모르겠지만, 긴급한 상황 같긴 했다.
어쩌면 남편을 원한 게 아니라 그저 도움을 청한 것일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즈음, 그는 앞을 막고 있던 가시덩굴을 그대로 훌쩍 뛰어넘었다.
“......?”
주저앉아 나무에 등을 기댄 여자가 있었다.
순간적으로 눈에 들어온 복장은 마치 하녀복이라 말하는 종류 같았다.
그 앞쪽 조금 떨어진 곳에 뒹구는 작은 열매들과, 그것이 담겨있었을 바구니가 이어서 보였다.
‘이런.’
하지만 최강혁이 그쪽에서 시선을 뗀 것은 지금의 여성을 향해 접근하고 있던 한 마리의 몬스터 때문이었다.
늑대를 떠올리게 하지만, 두 발로 걸어다니는 족속들. 흔히 웨어울프라고 부르는 종류였다.
‘몬스터가 없는 세상이길 바랐는데.’
어쩐지 대검을 허락할 때부터 그럴 것 같긴 했다. 최강혁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이리 저리 꺾었다.
우둑. 우둑.
놈들은 고블린 산에서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늑대들을 부하처럼 부리기도 했는데, 지휘 능력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크르르...
갑자기 튀어나온 다른 인간을 본 웨어울프가 잔뜩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어지간한 인간들보다 덩치가 큰 녀석이었지만 지금의 인간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게다가, 방금 전까지 들고 있던 짧은 쇠붙이가 사라지더니, 갑자기 거대한 칼을 두 손으로 움켜쥐는 모습이 무척이나 위협적이었다.
“새끼구만. 털색깔이 옅어.”
그렇게 중얼거리던 최강혁이 녀석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만약 짐작대로 새끼가 맞다면, 이 자리에서 죽이는 건 그리 좋지 못했다.
“여기선 적당히 겁만 주면 되나.”
〈 69화 〉 069.
069.
부우웅-
묵직한 강철대검이 바람을 갈랐다.
가볍게 휘두른 대검의 끝이 웨어울프의 가슴팍을 길게 긋고 지나갔다. 놈은 뒤로 물러났지만, 완벽히 피하지는 못했다.
크앙!
털 위로 번져가는 피.
잔뜩 으르렁대며 달려들었지만, 최강혁은 놈의 간격에 들어가지 않은 채 연거푸 장난처럼 대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크릉...
몇 차례나 비슷한 부상을 입으니, 녀석의 눈빛이 처음과 달라졌다. 자신의 상대가 아님을 뒤늦게 깨달았을까? 결국 등을 보인 채 달아났다.
“음.”
이제부터 추적의 시간이다.
하지만 당장 구해야 할 사람이 있다.
최강혁은 멍해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하녀복의 여자에게 다가갔다.
‘어린 것 같은데. 스물은 된 건가.’
금발에 가까울 만큼 밝은 갈색 머리카락과, 겁을 먹고 잔뜩 흔들리는 커다란 눈. 밤색 눈동자.
가느다란 목선.
그 아래 얼핏 보이는 쇄골 옆의 작은 점.
그리고 더 아래....
“흐흠, 흠.”
서양 쪽의 외모였지만, 사라 레드우드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인터넷에서 러시아나 동유럽의 미인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그런 느낌에 가까웠다.
다만 나이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서양 쪽은 일찍 조숙해진다던데, 이쪽도 비슷하다면 생각보다 어릴 수도 있어보였다.
“당신입니까?”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들려온 대답은 그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다.
“맞다. 언어가 다르구나.”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세상으로 왔는데, 말이 통할 리가 없다.
“당신이 내... 아니지.”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인사나 확인 같은 건 나중으로 미루었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니까.
조심조심 여자를 붙들어 일으켜준 그는 곧장 그 허리를 덥썩 붙들어 안고 가까운 나무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꺄아악!
적어도 비명은 어느 세상이든 비슷한가보다.
적당한 높이에 자리한 굵은 가지에 그녀를 앉혀놓은 그는 당부하듯 말했다.
“여기 있어봐요. 지금쯤 가족들한테 갔을 테니까, 뭉쳐있을 때 싹 치워야 돼.”
아마 그가 그녀의 말을 알지 못하듯 그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표정이나 눈빛은 알아보지 않을까 싶어서, 마치 왕들이 살던 숲에서 그랬던 것처럼 바디랭귀지를 했다.
“여기. 여기 있으라고. 스테이. 오케이?”
영어라고 통하겠냐.
스스로에게 핀잔을 주며 훌쩍 뛰어내린 그는 어느새 대검을 치우고 강철 크로스보우를 쥐었다.
그의 입장에서 빠른 연사라면, 컴파운드보우보다 이쪽이 나은 편이었다.
‘우회할 생각도 못하는군. 흔적도 못 감추고. 역시 새끼가 맞아.’
그렇게 피냄새와 흔적을 쫓아 웨어울프의 은신처를 찾아냈다.
그곳엔 놈의 식구들이 모여, 어딘가에서 사냥해온 것으로 보이는 사슴 비슷한 짐승을 뜯어먹고 있었다.
“오자 마자 살육이라....”
유감이지만, 별 수 있나.
너희가 운이 나빴던 모양이다.
푹!
아비로 보이던 놈의 목에 볼트를 꽂아넣었다.
미간을 노린 거였는데, 쏘는 순간 놈이 움직여서 빗나갔다.
곧바로 장전한 볼트는 어미의 복부에 틀어박혔다.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두 번의 사격에,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놈들이 그를 향해 달려왔다.
‘아... 거치적거리는 게 너무 많네.’
숲은 이럴 때 안 좋다.
대검을 휘두를 각도가 안 나온다.
‘뭐, 언제는 내 위주로 돌아갔나.’
오른손엔 정글도를 움켜쥐고, 왼손엔 단검을 역수로 잡았다. 공간이 협소할 때 주로 사용하는 조합이었다.
‘시간 나면 도끼나 메이스 종류도 만들어봐야겠어.’
최강혁은 정면에서 달려들던 놈을 옆으로 살짝 빗겨 피하며, 놈의 관자놀이에 단검을 찔러 박았다.
콰드득!
뼈가 갈리는 소리와 함께 단단히 박힌 단검을 도로 뽑아낼 필요는 없었다.
아무렇지 않게 옆으로 빠진 그의 왼손엔 어느새 새로운 단검이 쥐여있었다.
캬아울!
“시끄럽네. 또 누굴 부르려고.”
아니다.
차라리 지금 부르는 게 낫나?
아내 될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이런 위험한 놈들은 없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캐앵!
배에 볼트를 맞고도 사납게 덤비던 어미를 걷어차 날려버린 그는 그 틈에 옆쪽에서 접근하는 새끼 하나를 일별하고 단검을 집어던졌다.
푸칵!
눈에 박히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뒤통수를 뚫고 나간 단검이 그 뒤쪽 나무에 틀어박혔다.
머리에 구멍이 뚫린 녀석이 그 자리에서 비틀대다 고꾸라질 즈음, 다시금 달려온 어미의 목이 뎅겅 잘려 그 머리가 옆으로 떨어졌다.
남은 건 새끼 하나와 부상당한 아비 하나.
놈들은 이미 전의를 잃은 모습이었지만, 그렇다고 살려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곳도 결국 숲일 테니까.’
숲에는 자비가 없다.
기회가 있을 때 제대로 죽이지 않으면, 나중에 더 큰 위협이 되어 돌아온다.
치울 수 있을 때 치우는 게 좋다.
‘친구가 될 사이는 아닌 것 같고.’
주저 없이 남은 녀석들을 정리한 그는 역시나 근방에서 몰려온 늑대 몇 마리를 비슷하게 처리했다.
“오자마자 스펙타클하네.”
언뜻 나뭇잎 사이로 비친 하늘을 보니 저녁이 조금 안 된 오후 같았다.
현장에 남아있던 사체들을 깔끔하게 루팅한 그는 서둘러 ‘아마도 부인이 될 것 같은 여자’ 가 있는 곳으로 향했지만, 어디가 어딘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와씨, 나 방향치였나?”
그나마 도우미가 있어 다행이었다.
지역 스캐닝을 자동실행한다는 설정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서, 데이터 저장소에 그가 움직였던 경로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확실히 총이 아쉽긴 해.’
밸런스패치라고 하니 할말은 없지만, 정말 안 되는 걸까.
‘스캔 데이터는 멀쩡해. 화약만 어떻게 잘 만들면 될 것 같은데.’
화약 제조법은 대강이나마 알고 있었다.
이런 저런 영화나 소설에서 본 기억도 있고, 별도로 화약만 스캔해두기도 했었고.
하지만 설명서가 있다고 해서 누구나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재료를 어디서 구하고 그걸 어떻게 가공하는지가 더 중요한 거니까.
‘모르겠다.’
총싸움하려고 온 건 아니다.
어찌되었든 결혼계약으로 왔고, 계약을 이행하지 않으면 문제가 될 거라고 했으니.
‘아니 시발. 누군지도 모르는데 뭘 어쩌라는 거야. 그 여자가 맞긴 맞아?’
잠깐 보았던 얼굴이 떠올랐다.
‘뭐... 맞으면 좋긴 하겠는데.’
얼른 가보자.
말이 안 통하긴 해도 그림대화 정도는 할 수 있겠지. 그렇게 그는 걸음을 재촉했다.
바스락.
그렇게 우거진 수풀을 헤치고 그녀가 있는 곳으로 도착했을 때였다.
앞쪽에서 갑자기 달려오는 자가 있었다.
‘뭐야?’
언뜻 금속성의 빛도 보였다.
칼날이 분명했다.
거의 본능적으로 움직여 옆으로 피한 그는 동시에 들어올린 오른발로 강하게 밀어찼다.
콰앙-!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앞을 보았다.
멀리 날아가 나무에 처박힌 사람 하나가 보였다.
가죽위에 철판을 덧댄 갑옷을 입었는데, 그 한쪽이 우그러져있었다.
“여자잖아.”
어깨에 닿지 않을 정도 길이의 머리카락.
굴곡 없는 갑옷 때문에 살짝 헷갈렸지만, 얼굴과 전체적인 골격을 보니 분명 여자였다.
“뭐야. 어느 쪽이야?”
최강혁은 당황했다.
그는 어떻게 나무에서 내려온 건지, 그렇게 처박힌 갑옷여자 옆으로 달려가 쩔쩔매는 하녀복 여자를 보았다.
‘상담요청 다시 못 하나?’
이거 클레임 걸어야 할 상황 같은데.
저 둘 중에 누구냐고.
아니, 애초에 저 둘 중에 있긴 한 거냐고.
“...아.”
아니, 그보다.
방금 전에 살짝 진심으로 밀어찬 것 같은데.
정신 못 차리는 것 같은데.
철로 덧댄 게 저정도로 구겨졌으면, 갈빗대 두어 개 정도는 나갔을 텐데.
“.......”
하녀복 여자가 그를 향해 달려와서 뭐라 뭐라 소리쳤다.
표정을 보니 화를 내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쓰러진 여자 쪽을 가리키고 다른 곳을 이어서 가리키는 모습이, 아마도 어딘가로 데려가달라는 듯 했다.
“뭐... 그렇게 해야겠지요.”
잘은 모르겠지만, 시작이 좋지 않다.
액땜했다고 치면 될까.
아니, 그런 이야기를 하면 저기 구겨져있는 여자한테 좀 미안해지긴 한데.
“.......”
쓰러진 여자에게로 갔다.
의식이 없는 건 분명해보이는데, 그럼에도 손아귀에서 검을 놓지 않는 건 오랜 수련의 결과일까. 조금은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나갔구만.’
스캔을 해보았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갈비뼈가 둘 부러지고, 하나에 금이 갔다.
아예 꺾여버린 건 아니라 다행이겠지만, 자연회복에 기대려면 상당히 오래 안정을 취해야 할 듯 했다.
‘으음.’
조합으로 붙여볼까 하던 그는 일단 멈추었다.
뭐가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가진 재주를 늘어놓는 건 현명하지 못한 일 같았다.
‘그래도 내가 저지른 일이니 수습은 하는 게 좋을 텐데.’
하지만, 애초에 소유권도 없는 터라 뭔가 해볼 수도 없었다. 여자에게 의식이 있다고 해도, 말이 안 통하니 어찌 설명할 방법도 없고.
‘안쪽의 갑옷이 단단하게 압박해줘서 당장은 괜찮을 것 같은데... 그래도 그림으로 그려두면 상태를 파악하는 데에 도움이 되겠지.’
능력의 일부를 감춰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래도 부상자에게 보여줄 그림 정도는 괜찮겠지 싶었다.
‘서두르자.’
일단 가죽 갑옷 겉에 덧댄 철판은 떼어냈다.
구겨진 부분을 주먹과 발로 적당히 두드려 펴낸 그는 그것을 다시 잘 입혀서 일종의 압박붕대처럼 조치했다.
이어서 인벤토리에 있던 땔감 나무들 중 적당한 것을 골라, 5밀리미터 정도 두께로 썰어냈다.
그리고 그 한쪽 면에 상대의 상체 뼈와 부러진 부위, 금이 간 곳 등을 보기 쉽게 새겨넣었다.
‘얼추 됐다.’
그것을 허공에서 꺼낸 그는 옆에서 울상을 짓고 있던 하녀복 여자에게 건네주었다.
허공에서 물건을 꺼내는 모습을 보았음에도, 잠깐 놀랐을 뿐 의외로 담담해보이던 여자.
그녀는 그 나무판에 새겨진 그림을 보더니, 의미를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이 사람. 여기. 뼈가 부러졌다고. 요렇게.”
여전히 쓰러져있는 여자를 가리키고, 그녀의 갈비뼈 쪽을 가리킨 그는 뭔가를 부러뜨리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제야 안색이 창백해진 그녀가 그의 옷깃을 붙잡고, 얼른 가자는 듯 다시금 어딘가를 가리켰다.
‘음.’
그때, 문득 느껴지는 게 있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움직인 최강혁은 방금 전 인벤토리에서 완성된, 급조한 외륜수레를 꺼냈다.
‘나무는 금방 되니까 다행이다. 철이 들어갔으면 오래 걸렸을 거야.’
이런 숲에선 리어카를 제대로 끌고 갈 수가 없으니, 외륜 수레 정도가 있으면 편할 듯 했다.
‘울퉁불퉁한 곳이 있으면 충격이 있겠지만, 그야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어설프게 안거나, 업거나, 어깨에 들어 메거나 하는 게 더 안 좋을 것 같아서 선택한 것이었다.
다시금 허공에서 뭔가가 튀어나오자, 이제는 별로 놀라지도 않던 하녀복 여자가 그를 돕겠다는 듯 쓰러진 여자의 두 다리를 붙들었다.
“잠깐만 침착해봐요.”
두 손바닥을 아래로 향하고 살살 눌러주는 제스쳐는 어디에서든 적당히 통하는 법일까.
최강혁은 그렇게 여자를 진정시킨 후, 조심조심 외륜수레에 쓰러진 여자를 실었다.
‘살짝 공간이 있는 모양인데. 제대로 압박 상태는 아닌 것 같아.’
여자의 가죽 갑옷을 벗기기는 애매했기에, 그저 자신이 좀 더 조심하는 수 밖에 없었다.
“부지런하네.”
하녀복 여자는 벌써부터 저만치 앞에서 이쪽 방향이라는 듯이 안내하고 있었다.
잠시 주위를 돌아본 최강혁은 그쪽으로 수레를 밀었다.
역시나 땅이 패여서 덜컹댈 만한 곳들이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아예 수레를 살짝 들어올리는 식으로 충격을 감소시켰다.
‘이거 나름 팔운동이 되겠는데. 돌 같은 걸 재료로 만들어서 수련을 해볼까.’
엉뚱한 상상을 하는 동안, 숲의 풍경이 조금씩 달라졌다.
아마도 외곽 쪽으로 빠져나가고 있는 걸까.
좀 더 작은 풀들과, 드문드문 벌목된 듯 밑둥만 남은 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열매를 따러 왔다가 공격을 받은 건가. 다치진 않은 것 같은데. 내가 늦지는 않았나보구나.’
이쪽 세상의 문명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 감이 안 잡혔다.
두 여자의 복장을 보면 상당히 우려되긴 한데, 어쩌면 유럽의 시골 같은 분위기일 수도 있을 것 같고.
‘내가 서양 여자들 취향인가.’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는데, 두 사람 다 예쁘장한 느낌이었다.
아니, 다들 젊은이들 특유의 생기가 있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늙은이 같은 생각이군.’
나도 이제 20대 중반인데.
그는 애늙은이가 되었다며 속으로 투덜댔다.
〈 70화 〉 070.
070.
“그래서? 많이 다치셨어?”
피곤한 얼굴.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양쪽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여성의 물음에, 그녀의 잔에 차를 따라준 메이드가 공손히 입을 열었다.
“갈비뼈를 다치셨다고 해요. 두 대 부러지고, 한 대엔 금이 갔다고 들었어요.”
“가봐야겠구나. 정신은 차리셨고?”
“조금 전에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어둑어둑한 골방.
책상 위에, 옆에, 바닥에는 온갖 두루마리 종이들이 널려있었다.
하지만 메이드는 그것들을 치우거나 하지 않았다. 그 모두가 아가씨의 연구 자료였기에, 어느 하나 손을 댈 수 없는 것이었다.
의자에서 일어난 그녀는 방을 나섰다.
메이드가 조금 뒤쪽으로 따라붙었다.
“그래서. 엘리사벳경을 모셔온 남자는?”
“일단 헤인즈씨의 숙소에 모셨어요. 그쪽에 침대 하나가 비었잖아요.”
“음....”
얼마전 그곳을 떠난 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와 가장 오랜 시간 알고 지냈던 나이든 하인.
주름진 얼굴로 짓는 미소가 지금도 생생했다.
‘건강하시겠지.’
이제는 고향으로 가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이야기에 은퇴를 받아주어야 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의 빈자리가 무척 크다는 것을 알았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뭔가 말하긴 하는데, 전혀 모르는 언어였어요. 루시아도 헤인즈씨도 처음 들어보았다고....”
“숲에서 만났다면서?”
“네. 루시아를 구해주셨다고 했어요. 오해가 생겨서 엘리사벳경이 그렇게 되신 것 같다고 해요.”
“오해라.”
엘리사벳경은 가문에서도 촉망받던 젊은 기사였다. 원래대로라면 이런 오지가 아니라 본가에서 출세의 길을 걷고 있어야 맞겠지만....
“아가씨 오셨습니까.”
엘리사벳경의 방문 앞.
그녀의 종자이자, 이제는 이곳의 집사 역할까지 도맡아 하고 있던 헤인즈가 그곳에서 그녀를 맞이했다.
“좀 어떤가요?”
“생각보단 나쁘지 않은 편입니다. 그가 알려주었던 부상이 정확히 맞았고... 당분간 안정을 취하면 회복할 수 있을 겁니다.”
헤인즈는 어린 시절 도시 의원의 조수로 일한 경력이 있었기에, 크지 않은 부상 치료나 간단한 응급조치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뼈가 부러졌다고 들었어요.”
“격한 동작만 하지 않으면 문제 없는 수준입니다. 부러지긴 했지만 안에서 꺾이진 않았습니다.”
“다행이네요.”
“이곳까지 오는 동안, 아마도 최대한 충격 없이 신경을 쓴 것 같았습니다.”
진중한 성격의 헤인즈는 허튼말을 길게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아가씨라 불린 여성은 그제야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 들어갈게요. 뼈를 붙게하는 건 할 수 없어도, 가벼운 치료술 정도라면 가능하니.”
끼익.
그렇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침대에 누워있던 그녀의 기사가 얼른 일어나려다 얼굴을 구겼다.
“윽! ...아가씨 오셨습니까.”
“괜찮으니 그냥 있어요. 식사는 한 거예요?”
“아직....”
“왜요. 먹을 수가 없어요?”
“아닙니다. 눈을 뜬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헤인즈가 죽을 데워다주기로 했습니다.”
“그래요. 일단, 잘 누워봐요.”
“.......”
그렇게 환자를 안정시킨 아가씨가 이어서 투박한 천 재질의 옷 소매를 걷자, 새하얗고 가는 손이 팔뚝까지 드러났다.
그리고 곧, 그녀의 손 끝에 은은한 초록색의 빛이 모여들었다.
“아가씨.”
“뼈까지는 못 붙이지만, 그래도 조금은 도움이 될 거예요.”
간단한 회복마법이었다.
아가씨는 자신의 기사에게 연거푸 같은 마법을 행하고는, 조금 지친 듯 숨을 몰아쉬었다.
“그와는 만나보았나요?”
“네. 정신을 차리고 나서 봤습니다. 제가 오해를 했다고... 루시아가 말하더군요.”
“그래도 뼈가 부러질 정도로 반격한 건 과한 것 같아요. 내가 한 마디 해야겠어요.”
“아닙니다. 성급하게 검을 들이댄 제 잘못이 큽니다. 게다가 제가 부족해서... 제대로 막거나 피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엘리사벳 경이 부족했다고요?”
“어느샌가 자만을 하고 있던 것 같습니다.”
그녀의 기사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오히려 큰 배움을 얻었다는 듯이 뿌듯함마저 보이기에, 역시 기사들은 별 수 없다며 웃던 아가씨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혹시....”
그런데 엘리사벳 경이 다시금 뭔가 말하려다 멈추었다. 방을 나서려던 아가씨가 돌아보자, 그녀는 머뭇거리는 얼굴로 다시금 입을 열었다.
“지난 번 마을에 갔을 때, 신전에 들르셨다 들었습니다.”
“맞아요. 신께 빌었죠.”
그리 답하던 아가씨는 문득 여기사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깨닫고 고개를 저었다.
“아닐 거예요. 신께서 그렇게 직접적인 대답을 들려주시진 않는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정말 생소한 느낌의 인물이었습니다. 언어도, 복색도... 생김새도요.”
“그런가요.”
“네, 아가씨.”
“일단 만나봐야 알겠네요. 정말로 신께서 응답을 주신 것인지.”
“나쁜 인물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엘리사벳경도, 헤인즈씨도... 그 남자를 좋게 본 것 같네요.”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지만, 분명 진지하게 사과를 했습니다. 그 대가라긴 뭣하지만, 받기로 한 것도... 있고요.”
“네?”
“제가 잘못 이해한 것일 수도 있지만....”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었다.
아가씨는 기사에게 다시금 몸을 잘 추스르라 이야기한 후 그곳을 나섰다.
“그 남자에게 가볼 거예요.”
“앞장서겠습니다.”
“그럼 부탁할게요.”
헤인즈가 자신이 사용하는 별채 숙소로 그녀를 이끌었다. 두 사람의 뒤쪽에선 호기심 가득한 얼굴의 메이드가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
* * *
“음... 좆된 것 같은데.”
최강혁은 앉아있던 낡은 침대의 끄트머리에서 다시금 방 안의 모습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많이는 아니지만, 아무튼 좆된 것 같아.”
상담직원과 대화하면서 입에 붙어버린 말버릇.
분명 좋은 말은 아니지만, 지금 상황을 표현하기에는 더없이 적절하지 않나 싶었다.
‘산 속의 오두막이라.’
사실 오두막이라 하기엔 좀 크다.
그렇다고 저택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애매해.’
이런 걸 뭐라고 하더라.
장원? 그 단어가 규모를 설명하는 게 맞나.
“목조로 된 2층짜리 중심건물 하나에, 별채가 둘, 헛간이 하나, 제대로 벽을 두른 창고가 하나.”
이곳에 도착해서 본 것들.
그 모두가 나무로 이루어져있었고, 그 자재는 아마도 가까운 숲에서 조달했을 듯 보였다.
‘지은 지는 얼마 안 된 것 같지만, 그래도 뭔가... 새 집 같지가 않아.’
걸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바닥, 바람이 숭숭 새어드는 벽, 아마도 비가 샐 것 같은 지붕.
마치 예전 캠프에서 만든 흙집의 침대를 연상케하는, 단지 나무로 만들었을 뿐 매트리스따윈 없는 침대.
‘하인이 거주하는 건물이라 이런 것일 수도 있겠지. 설마 이게 보통이면 곤란한데.’
이곳에서 여러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 이래저래 이름까지 알아두었다.
‘내가 처음 구했던 여자아이가 루시아라고 했어. 나이는 잘 모르겠지만, 스캔 데이터대로라면 20세 정도 노화 상태라는 거지.’
지구의 기준이었기에, 이쪽에선 어떤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좀 더 많은 대상을 스캔해볼수록 정확해진다던가.
그래도 이름들은 왠지 익숙한 어감이었다.
영미권이나 유럽식인 것 같은 느낌. 마치 지구 사람이 건너와서 지어주기라도 한 것처럼.
그런데 왜 언어는 이렇게 생소한 건지.
‘내가 걷어찼던 여자가 아마도 여기 주인의 경호원 같은 위치인 것 같고. 이름이 뭐랬지? 엘리자베스였나. 그 비슷한 발음이었는데.’
루시아보다는 나이가 많아보였지만, 그래도 자신보다는 아래인 것 같았다.
그녀의 부하로 보이는 남자도 그랬다.
나름 철이 든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분명 18세 아래로 보였으니.
‘에밀리아라고 했지. 이곳의 주인 이름이.’
만나본 적 없는, 이곳에서 가장 높은 사람.
뒤에 뭐가 더 붙는 것 같은데, 이름이 긴 걸 보면 아마도 귀족이 아닐까 싶었다.
귀족이 어째서 이런 오지에 사는지는 모르겠지만, 애초에 귀족이라고 해서 도시에만 살라는 법은 없으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중세 판타지는 그냥 판타지일 뿐이라고들 하니까.’
고증을 빡세게 들어가면 아주 가관일 거라던가. 뭐,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런 걸 기대하는 이들은 없을 테니 어느 정도 미화해서 그리겠지만.
‘아무튼... 내가 제대로 찾아온 건가 모르겠다는 게 문제지.’
애초에 그가 찾아온 것이 아니라, 보내졌을 뿐이었다. 이후엔 상황에 끌려다닌 거고.
똑똑.
그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뭐라 뭐라 말하는 소리도 들렸지만, 그 목소리의 주인이 헤인즈라는 것 말고는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대충 짐작은 되는데.”
들어가도 되겠냐는 이야기거나, 아니면 반대로 그에게 나오라고 하는 거거나.
‘여기는 좀 그러니까, 내가 나가는 편이 좋겠다.’
그렇게 문 앞으로 가 열어보니, 아마도 문을 두드렸을 헤인즈의 뒤쪽으로 두 명의 여성이 더 보였다.
한 명은 루시아와 같은 복장을 한 것으로 보아, 한 명 더 있다던 메이드 베티로 짐작되었다.
하지만 다른 한 명은 짐작이 안 되었다.
언급하지 않은 인물이라곤 이곳의 주인이라던 에밀리아 뿐일 텐데, 지금 여성의 복장은 귀족이라기엔 너무... 너저분했다.
‘로브?’
흔히 게임이나 영화에서 마법사들이 착용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는 모자 달린 망토.
그녀가 걸치고 있는 건 바로 그것이었다.
언제 빨았는지도 모를 만큼 먼지가 잔뜩 묻어있었고, 애초에 그 재질조차 그리 고급스럽지 않고 투박한 느낌의 천이었다.
‘뭐, 이쪽의 위생 상태야 이미....’
여전히 내색하지 않고 참는 중이다.
하지만 아까 전 숲에서의 루시아에게서도 그랬고, 지금의 헤인즈에게서도... 솔직히 참기 힘들 만큼의 악취가 풍겼다.
‘이런 걸 암내라고 하는 건가.’
서양인들의 몸에서는 그런 냄새가 난다던데.
그래서 데오드란트 같은 게 필수라던가.
잘 모를 땐 단순히 상술일까 생각했는데, 만약 지금 나는 냄새가 지구의 서양인들에게서도 똑같이 난다면... 그게 정말 필수긴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놓고 비누를 불허때린다고?’
상담사가 앞에 있으면 한방 갈겨버릴 텐데.
-좆같습니까?
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그래요. 좆같습니다. 조금 아니고 많이.
‘그나저나, 뭐라고 하는지 모르니 답답하네.’
앞에서 헤인즈가 바디랭귀지를 섞어 이야기하고 있다.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바디 랭귀지는 단어의 의미라도 제대로 몸으로 표현해야 하는데, 그냥 이것 저것 강조하는 식으로 쓰고 있으니 답답했다.
‘으음.’
그나마 알아들은 건 있었다.
뒤쪽에 있던 이들의 이름을 소개해주는 것.
짐작대로, 메이드 여자는 베티였다.
하지만 예상과 달랐던 건, 로브를 걸친 인물이 다름아닌 이곳의 주인이라던 에밀리아라는 것이었다.
‘대충 태도를 보면 귀족이나 거상 정도일까 했는데... 생각보다 어리네.’
나이는 대략 루시아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어려보였다. 여자들 중에선 베티, 혹은 엘리사벳이 가장 나이가 많은 듯했다.
‘건강이 안 좋은가.’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
눈 밑에는 언뜻 다크서클 비슷한 게 보이고, 벌써부터 미간에 잔주름이 있는 걸 보니 평소 찡그리는 일이 잦은 듯 했다.
‘보통 야근 많은 사무직이 저런 얼굴을 하는 것 같던데.’
이런 곳에 그런 일이 있을 것 같진 않은데.
의아했지만, 그래도 얼른 자세를 고치고 살짝 허리를 숙였다.
예법이라는 게 어딜 가나 다르겠지만, 그래도 정중한 태도라면 의미는 전달되는 법이니까.
“아....”
그러자 상대도 자세를 바로하며 살짝 무릎을 숙이는 것이, 마치 영화에서 본듯한 귀족의 인사를 연상케 했다.
‘좋아. 다들 아름답고 젊은 여성들이야.’
속으로 수긍했지만, 오히려 더 답답해졌다.
‘그러면... 누구냐고?’
이곳에 와서 만난 여자가 한 명이 아니다.
매칭 대상은 나이도 고려된다고 들었었으니, 자신과 아주 많은 차이는 아닐 것을 알고 있었다.
‘뭐 이런 경우가.’
그런 부분을 감안하고 보아도 여기서 본 모든 여성들이 다 포함되는 것 아닌가.
지금의 에밀리아부터 두 명의 메이드인 루시아와 베티, 그가 갈비뼈를 부러뜨린 엘리사벳까지 말이다.
세부적인 사항이나 신체적인 특징 같은 것을 전혀 모르니, 소거법을 들이댈 여지도 없다.
‘뒷모습 사진이라도 있었으면....’
적어도 머리색이라도 알았으면 누군지 확실할 텐데. 아니, 애초에 이곳에 없을 수도 있잖아.
‘그래도, 그 중에선 가장 신분 높은 사람인 게 나을까.’
조금 얄팍한 생각이 들었지만, 아마도 귀족인 사람이 그런 식의 결혼을 하지는 않을 것 같기도 했다.
‘골치아프군.’
〈 71화 〉 071.
071.
그 때였다.
조금 앞으로 나선 에밀리아가 조용한 목소리로 뭔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목소리도 좋구나.’
이곳 사람들은 다들 미남 미녀들만 있는 걸까.
이제 보니 헤인즈도 지구에 갔으면 배우를 했을 법한 외모였다.
괜히 민망해지는 건 일종의 사대주의일까.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던 어깨에 힘을 주었다.
‘그래도 외모에 신경을 더 쓸걸 그랬나.’
각성자들 중에는 신체 강화를 활용해서 얼굴을 조금씩 변화시키는 케이스도 있다고 들었다.
그 대단한 능력 갖고 성형에 쓴다며 흉을 보는 이들도 있는 모양이지만, 누구나 잘생기고 예뻐지고 싶은 건 비슷할 테니 나름 이해는 갔다.
‘으음.’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도 에밀리아는 계속 말을 하고 있었다.
알아듣지 못하는데 그렇게 열심히 말을 하고 있으니, 조금 미안해지기도 했다.
‘아차.’
그 때였다. 난감한 얼굴로 눈만 깜박이던 최강혁은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계약서! 거기 뭔가 있었는데.’
데이터 저장소를 열 필요는 없었다.
그의 생각을 읽은 도우미가 먼저 그것을 찾아 시야 오른쪽에 열어 보여주었다.
‘맞아. 여기 있잖아.’
결혼 상대를 만나면 해야 하는 말이 있다고 했다. 그것이 그부분에 적혀있었다.
‘여기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쪽의 언어는 맞겠지.
최강혁은 한글로 적혀있는, 몇줄 정도의 문장을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겁나 민망한데.’
이게 맞는 발음인가 알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그가 말을 시작하자 모두가 표정을 고치며 집중하는 것을 보니 아마도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 듣고 나서도 다들 뭔가 긴가민가한 표정이었다.
헤인즈가 뭐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왠지 다시 말해보라는 제스쳐 같아서 처음부터 다시 천천히 읽어주었다.
이전보다 더 느리게 또박또박 읽고 나니, 그제야 약간의 의구심을 보이던 얼굴들이 뭔가에 대한 확신으로 바뀌었다.
“......?”
그리고, 헤인즈와 베티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다름아닌, 살짝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최강혁을 향하는 에밀리아를 보는 것이었다.
이어서 그녀가 특정한 단어를 이야기했다.
뭔가를 확인하려는 듯이, 같은 단어를 두 번 세 번 반복해 말하고 있었다. 마치 그게 맞냐고 묻는 듯한 얼굴이었다.
‘뭐지.’
최강혁은 난감해졌다.
그저 한글로 적인 문장을 그대로 읽었을 뿐이니, 그녀의 궁금증을 해결해줄 수가 없었다.
‘아... 이건가.’
하지만, 여전히 열려있던 계약서의 문장에서 특정한 부분이 눈에 띄었다.
그녀가 몇 번이고 반복하고 있는 단어와 같은 발음으로 보였다.
그것을 그대로 읽어주자, 에밀리아가 안 그래도 큰 눈을 조금 더 크게 뜨며 아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것은 언뜻 탄식 같기도 하고, 감탄 같기도 했다. 표정도 그렇고,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제대로 찾아온 게 맞는 것 같긴 한데.’
몸은 괜찮지만 정신적인 피로감이 컸다.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 즈음, 그들이 최강혁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
‘또 뭔데?’
잘은 몰라도, 헤인즈가 쓰는 숙소의 빈 침대를 쓰라고 이해했었다. 그런데 이어서 이동한 곳은 다름아닌 본채 건물이었다.
그곳의 2층.
구석 쪽에 방 하나가 있었다.
아마도 창고로 쓰이고 있었는지 잡동사니가 잔뜩 들어있었지만, 대충 눈치를 살피니 아마도 그 방을 그에게 내어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아. 치워야 되는구나.”
헤인즈가 두 팔을 걷어붙이고는 그 안에 있던 것들을 밖으로 나르기 시작했다.
어디론가 달려갔던 베티는 뭘 하고 있었는지 두 팔이 젖어있는 루시아를 데려와 함께 일을 거들었다.
‘으음?’
에밀리아도 놀고 있지는 않았다.
그녀가 로브 밖으로 하얀 손을 내밀어보이자 제법 강한 바람이 일어나더니, 닫혀있던 창문이 저절로 열렸다.
“......!”
그곳에 잔뜩 쌓여있던 온갖 먼지와 죽은 벌레 따위가, 그렇게 일어난 바람과 함께 열린 창 밖으로 빠져나갔다.
‘마법사가 있었어?’
아무리 봐도 마법이었다.
생긴 것도 마법사였고.
‘황당한 세상에 와버린 것 같은데.’
잠시 멍해졌지만,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그정도로 놀라기엔, 이미 그가 살던 고향도 그 못지 않게 황당해져있었으니까.
‘애초에 나도 평범하진 않고.’
뭔가 도와야 할 것 같아서, 그는 애매한 곳에 놓여있던 누군가의 석상으로 향했다.
낡은 책상을 들어 옮기던 헤인즈가 뭐라 뭐라 하는게 아마도 말리려는 것 같았지만, 아무렇지 않게 들어올리니 하던 말을 멈추고 멍한 얼굴을 했다.
“왜?”
설마 이정도도 못 들거라고 생각했을까.
마나를 좀 써야 할 정도로 무겁긴 하지만, 그래도 전력을 다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디로 가면 되지? 다 같은 데로 가져가는 건가?”
석상을 든 채 이쪽 저쪽을 돌아보니, 얼른 다가온 루시아가 그를 안내하려는 듯 앞으로 손을 내밀며 나아갔다.
‘다른 쪽이구나.’
잡동사니를 꺼내놓는 곳과는 다른 방향이어서 어디로 가나 했더니, 1층의 구석 쪽에 있는 방 앞이었다.
복도 구석을 가리키며 뭐라 뭐라 이야기하기에 그곳에 적당히 내려놓았다. 이어서 좀 더 보기 좋게 살짝 살짝 위치와 방향을 손보았다.
짝짝짝!
루시아가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그렇게 좋아할 일인가.’
조금 의아했다.
그래도 이곳 역시 박수 개념은 있구나 생각하며 다시금, 아마도 그의 방이 될 곳으로 되돌아갔다.
‘루팅만 할 수 있으면 금방인데 말이지.’
그래도 다들 힘을 합쳐 짐을 옮기니, 그럭저럭 빠르게 방을 비울 수 있었다. 비워놓고 보니 제법 널찍했다.
‘여긴 비는 안 새겠다.’
확실히 헤인즈가 사용하는 숙소와는 차이가 있었다. 역시 신분의 차이일까.
최강혁은 밖에 내다놓은 잡동사니를 다른 창고 건물로 옮기는 것을 마저 도왔다.
* * *
“그걸 들었다고?”
“전혀 무거워하지도 않더군요.”
“하하... 윽.”
복부에 붕대를 감고 있던 엘리사벳은 황당하다는 듯이 웃다가 움찔 굳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아직 과하게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웃음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잖아.”
통증이 가라앉을 때까지 호흡을 고르던 그녀는 이어진 헤인즈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평범한 남자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 이국적인 외모도 그렇지만....”
당시의 공격은 단순한 견제 수준이 아니었다.
숲에서 튀어나온 몬스터라고 생각했기에, 죽이진 못하더라도 피는 볼 생각으로 공격한 것이다.
그런 공격을 그렇게 쉽게 피해버리다니.
게다가 그 무지막지한 반격은....
“그 상황에 그런 식의 발차기가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그렇게 대단했습니까? 뭐, 지금 꼴을 보면 상상은 갑니다만.”
“젠장. 못 움직인다고 막말하는 거냐.”
투덜대던 엘리사벳은 이어서 말했다.
“그러면, 그 방을 쓰게 된 건가? 아니지... 이제 말을 높여야 맞나.”
“아직 불분명한 것 같습니다. 유일하게 할 수 있던 말이 그렇긴 했는데....”
“설마하니 그런 식으로 이루어질 줄은 몰랐겠지. 아무도. 아가씨도.”
“그렇죠.”
무언가를 원할 때.
혹은 무언가를 원하지 않을 때.
신께 비는 건 흔한 일이다.
물론 기도를 들어달라며 간절히 빌긴 하지만, 설마 그런 기도가 이렇게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질 거라 믿는 이는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하시겠대?”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설마 진짜로 하실 생각은 아니겠지?”
“모르지요. 아가씨의 성격이 일반적이진 않지 않습니까. 애초에 이곳도....”
“흐음.”
엘리사벳은 살짝 찌릿거리는 옆구리에 손을 갖다대 압박하며 생각에 잠겼다.
“하실 것 같은데.”
“저도 왠지 그러실 것 같긴 합니다.”
“본가에는 일을 저지르시고 나서 통보하실 테고.”
“그렇겠죠. 미리 알리면 어떤 식으로든 막으러 올 테니까요.”
그렇게 이야기한 헤인즈가 조금 막막한 얼굴로 엘리사벳을 보았다.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직 아무 말씀도 안 하셨다면서.”
“그래도요. 정황이라도....”
“우리는 모르는 거야. 알더라도 모르는 거라고. 기사는 정치에 끼지 않아.”
“하지만, 이건 정치라기보다....”
헤인즈가 뒷말을 흐렸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지는 알았다.
엘리사벳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씨 마음도 이해 못 할 건 아니니까.”
“그거야 그렇죠. 아무리 정략결혼이라고 해도 그런 상대를 붙이려고 하다니 말입니다.”
“둘 중 하나겠군. 도시로 가거나, 그곳의 신관을 이쪽으로 불러오거나.”
“불러오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럼 너를 보내시겠군.”
“아마도요.”
똑똑똑.
-엘리사벳 경. 아가씨께서 헤인즈씨를 찾고 계세요.
그 때.
노크에 이어 들려온 목소리.
두 사람의 표정이 비슷하게 바뀌었다.
“저지르실 모양입니다.”
“가는 길에 앵두주 한 병만 사와.”
그녀가 협탁 서랍에서 돈주머니를 꺼내며 말하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그것을 받은 헤인즈가 방을 나섰다.
“나중에, 좀 더 뼈가 붙으면 드시는 겁니다.”
“그 정도는 알아. 또 언제 나갈지 모르니까 부탁하는 거지.”
“예.”
문을 여니, 살짝 상기된 얼굴의 베티가 기다리고 있었다.
뭔가 말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얼굴이라, 헤인즈도 엘리사벳도 픽 웃어버렸다.
“뭐예요? 제 얼굴이 그렇게 티가 나요?”
“대충 분위기 정도는 파악이 되니까.”
“맞아요. 하실 생각이래요.”
“신관을 모셔오겠지?”
“그건 또 어떻게 아셨어요? 준비할 게 많아요. 정원에서 하실 거라서 그쪽 정리도 하고 있고.”
“나도 도울 일이 있을까? 몸이 이렇긴 해도 자잘한 건 할 수 있는데.”
“그냥 누워계세요. 환자분이 나서지 않아도... 굉장한 분이 계시니까요.”
“...누군지 알 것 같긴 한데, 그분한테 일을 시켜도 되는 거야?”
“본인께서 나서서 움직이시던데요. 뭐라 하기도 전에 막....”
그렇게 말하던 베티가 문득 표정을 고쳤다.
“그리고, 그분도 마법사인 거 아셨어요?”
“아차. 루시아가 그런 것 같다고 말은 했었는데, 아가씨께 보고를 못 드렸네. 헤인즈, 네가 했어?”
“루시아가 했을 겁니다.”
“그럼 다행이고. 근데 무슨 계열이래?”
“잘 모르겠지만, 일단 아공간이 있는 것 같았어요.”
“루시아가 이야기했던 것도 그거였지.”
“그런데... 그렇게 몸을 키우는 학파도 있나요?”
“신체 단련이야 학파와는 상관 없이 개인적인 성향이니까. 뭐, 그런 몸을 갖고 썩히는 것도 아까워보이고.”
“.......”
“왜 그런 눈으로 봐?”
엘리사벳은 자신을 돌아본 헤인즈와 베티를 보며 얼굴을 구겼다.
“이상한 뜻이 아니야. 우리 같은 사람들은 상대가 어딜 어떻게 수련하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으니까.”
“그건 그렇긴 하죠.”
헤인즈가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나섰다.
조용히 문을 닫은 그는 베티와 함께 걸으며 아가씨가 계실 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분은 그곳에 없다며 베티가 다른 곳으로 안내했다.
거의 하루 종일 작업실에 틀어박혀계시는 분이 이 시간에 다른 곳에 계시다니 당황스러웠지만, 어디 계시는지 듣고 나니 이해가 갔다.
“.......”
한동안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잡초가 무성했던 정원이 무척이나 깔끔해져있었다.
그리고, 헤인즈는 조금 멍한 얼굴로 그 한쪽의 벤치에 앉아있는 아가씨를 발견하고 그리고 향했다.
그러면서도 그 또한 비슷하게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게 되니, 그곳에 있는 건 제멋대로 자라고 있던 정원수들을 이리 저리 오가며 멋지게 다듬고 있는 검은 머리 남자의 모습이었다.
“와....”
그가 들고 있는 과하게 커다란 가위나 다른 도구들도 눈에 띄었지만, 그보다 그가 다듬어놓은 정원수들의 모습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정원수야 적당히 네모각지게, 혹은 둥글둥글하게 깎아놓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그런데 지금 보이는 광경은 각각의 개별적인 작품들이 모여 커다란 하나의 대작을 이루는 듯한 모습이었다.
오죽하면 평소 정원 관리는 남에게 맡기지 않던 아가씨마저 말리거나 화내지 않고 그저 감상 중이실까.
그곳을 바라보는 얼굴에는 언뜻 경외마저 담겨있었다. 평소 아가씨에게서 보기 드문 감정이었다.
〈 72화 〉 072.
072.
“.......”
정원은 본채의 규모에 비해 넓은 편이었다.
널찍한 사각형의 땅.
테두리를 두르는 느낌의 정원수를 보면, 오히려 본채나 주변 건물들보다 오래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렇게 바깥을 두르고 있던 정원수들은 마치 높고 거대한 산맥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모습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지금 최강혁이 작업중인 건, 중앙에 자리한 정원수들 쪽이었다.
전체적으로 조금 낮게 깎고 있었지만, 일자로 잘라버리는 게 아니라 세밀하게 고저차를 만들어 마치 작은 숲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숲의 중심에는 주변과 달리 높은 상태로 유지한 정원수가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형태만 다듬어두고 주변을 깎아내니, 마치 조용한 숲 중심에 홀로 선 거대한 나무 한 그루를 연상케했다.
사각 사각.
작업에 몰두한 최강혁은 즐거운 얼굴이었다.
그가 만든 전지가위가 정원수 끝을 잘라낼 때마다, 걷어붙인 소매 아래로 굵은 팔뚝에 도드라진 힘줄이 꿈틀거렸다.
-와씨, 나 이쪽에 소질 있었나?
그는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헤인즈는 아마도 창작의 고뇌를 토로하는 것이 아닐까 짐작했다.
“아가씨. 저 왔습니다.”
“...아.”
비로소 정신을 차린 헤인즈는 서둘러 에밀리아의 앞에 가 예를 취했다.
그러자 비슷하게 정신을 차린 그녀가 고개를 끄덕여 예를 받고는, 그와 엘리사벳이 예상하던 이야기를 꺼냈다.
“정식 신관으로 모셔와야 해요. 내 이름을 말해도 곤란하다면, 가문의 이름을 대어서라도.”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기도에 대한 신의 응답이었음을 증명하는 문서가 필요해요. 그건 쉽게 해주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정식 신관이 필요한 거고.”
“직접 확인해야 하니까요.”
“맞아요.”
“그리고, 가는 김에 생필품도 사와야 할 것 같습니다.”
“엘리사벳 경은 갈 수 없으니 사람이 더 필요하겠네요. 베티가 갈래?”
“네!”
그 즈음, 정원수가 모두 다듬어졌다.
마지막으로 남겨두었던 정중앙의 높은 정원수가 정말로 한 그루의 거목처럼 바뀌어있었다.
이어서 정원을 전반적으로 돌아보던 최강혁이 이마의 땀을 소매로 훔쳐내더니, 짐짓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정중앙에 자리한 원형의 숲.
거대한 산맥이 그 숲을 지키듯 사방을 에워싼 모습이었다.
숲 중앙에는 전설 상의 세계수를 연상케하는 커다란 나무가 우뚝 솟아있었다.
단지 정원수 한 그루를 깎아놓았을 뿐인데, 조금은 경건함마저 느껴졌다.
‘아....’
에밀리아는 자신이 가보지 못했던 세상의 많은 곳들 중 저런 곳도 있지 않을까 상상해보았다.
이어서 그녀는, 아마도 신께서 보내주셨을 남자가 이런 저런 도구와 사다리를 허공에 집어넣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혹시, 그의 고향 풍경을 재현해놓은 건 아닐까.
‘저 남자가....’
나의 남편이 된다.
말도 통하지 않고, 어디서 무얼 하던 사람인지도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그가 자신과 결혼하기 위해서 이곳에 왔다는 건 알았다.
[본인은 결혼계약을 통한 조건부 체류 자격을 얻었음을 알립니다. 이 계약은 결혼과 동시에 확정되며, 이는 이쪽 지역 신의 대리인과 맺은 상호 협약에 의해 증명됩니다.]
그가 유일하게 알고 있던 이쪽의 말.
몇몇 단어가 부정확하긴 했지만, 분명히 신의 대리인을 언급했고 결혼을 언급했다.
‘결혼’ 부분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마치 뭔가를 읽는 듯 허공을 보며 이야기하던 그의 발음은 분명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남편을 보내달라고 기도한 건 아니었지만.’
그저, 지금의 일을 계속 할 수 있기를 원했다.
가문에서 밀어붙이려는 정략결혼을 하지 않을 수 있게 도와달라고 신께 빌었다.
‘그리고 이것이, 신께서 내려주신 답이겠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누군가와 혼인을 해버리는 것 말고는 가문의 정략결혼에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어떻게든 몇 년을 유예시키긴 했지만, 그 대신 받아들인 건 달성 불가능한 조건이었으니.
“.......”
에밀리아는 다시금 자신의 남편이 될 남자를 보았다.
어쩌면 경솔한 선택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기도 했다.
* * *
헤인즈가 도시에 간다고 했다.
아니. 도시인지 마을인지 정확하지는 않았다.
‘그림엔 소질이 없구나.’
그가 건넨 나무판에 숯으로 그린 그림은 여러 건물들이 모여있는, 방벽으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방벽이라. 아무데나 깔진 못하겠지. 일정 규모가 되어야 공사를 벌일 수 있을 테고, 다 깔더라도 계속 보수해야 하니까 유지비용도 들어갈 테고.’
개척지역의 캠프에서 보았던 것과 이쪽의 방벽이 다르겠지만, 기본은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결국 몬스터를 막기 위한 벽이겠지.
‘근데 이게 방벽이 맞나.’
어쩌면 그냥 울타리일 수도 있어보였다.
그래서 도시인지 마을인지가 불분명한 것이고.
‘둘이서 간다는 건 알겠어.’
헤인즈와 베티.
둘이 그곳으로 가서 누군가를 데려온다는 것 같았다. 그들이 타고 갈 마차도 헛간에서 꺼내왔고.
‘말... 이라고 해야겠지.’
새삼, 이곳의 말을 처음 보았을 때가 생각났다. 물론 지금도 아주 익숙해지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구의 말과는 생김새가 달랐다. 애초에 말이라는 이름도 그가 임시로 지어 붙였을 뿐이었다.
1톤을 넘기는 무게.
그만큼 커다란 덩치.
다리가 네 개가 아니라 6개였으며, 목이 정말 굵고 길다. 언뜻 보면 말과 기린을 섞어놓은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만큼.
‘목을 잘리거나 물리기 쉬울 것 같은데. 몬스터가 있는 곳에선 위험하지 않나?’
털의 느낌도 단순한 짐승의 그것이 아니라, 살짝 깃털 같은 느낌이 났다.
그렇게 보면, 마치 공룡들이 새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깃털이 남아있었다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것과 함께 실려있던 상상도가 저 말과 비슷했던 것 같은데.
‘눈빛은 무척 순해.’
이미 스캔해보았다.
초식동물이 맞았다.
지금도 근처 나무의 가지를 입으로 훑으며 나뭇잎들을 따먹는 중이었다.
“으음.”
헤인즈에게 같이 갈 수 있는지를 제스쳐로 물어보았지만, 곤란하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면서 보여준 것이 있었으니, 마치 암행어사의 마패를 닮은 동그란 금속패였다.
‘구리에 잡철이 조금 섞여있었지.’
일종의 신분패로 보였다.
도시에 들어가려면 그런 게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되었다.
어쩔 수 없이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헤인즈도 비슷한 얼굴로 마주 끄덕였다.
‘고갯짓의 의미도 같은 건 다행이야.’
적어도 긍정과 부정의 제스쳐는 새로 익히지 않아도 되니까. 지구에서도 의미가 반대인 나라가 있다고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굳이 지금이 아니어도 괜찮지 뭐.’
단지 호기심이었을 뿐이다.
당장은 불가능하더라도, 언젠간 가볼 수 있겠지 생각했다.
‘이쪽에서도 할 일이 있으니까.’
그곳에서 함께 식사를 하며 생각한 건, 먹는 게 좀 부실한 것 같다는 부분이었다.
나름대로 이것저것 갖춰놓은 모양새긴 한데, 왠지 그것조차도 평소 먹는 것보다 조금 더 무리한 듯 보였다.
‘무리한 수준이 그거면 곤란하지.’
인벤토리에 있는 늑대와 웨어울프의 사체들을 생각했었지만, 이쪽에서 그것들을 먹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어서 꺼내지 않았다.
‘늑대는 좀 애매한데, 웨어울프는 확실히 못 먹지. 피에 독도 있고.’
맹독까지는 아니지만, 위장이 강한 몬스터가 아니면 소화하지 못하고 배탈이 날 수준이었다.
인벤토리에 있으니까 제거하는 것도 가능은 한데, 애초에 이족보행하는 몬스터는 먹기가 좀 그런 느낌이었다.
‘고블린산에서도 안 먹었고.’
차라리 사냥용 미끼로 쓰는 편이었다.
이쪽도 비슷하지 않을까.
‘먹을 만한 걸 사냥해봐야겠어.’
잘은 모르겠지만, 다들 분주하게 움직이는 걸 보니 아마도 결혼식을 준비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약식으로 하더라도 나름대로 만찬은 있어야 할 텐데, 차려놓은 게 별로면 여러 모로 곤란하지 않을까.
‘평생 한 번 있는 일이니까.’
경우에 따라선 두 번도 하고 세 번 네 번도 한다지만, 그래도 가볍게 여기고 싶지는 않았다.
덜컹 덜컹-
멀리 헤인즈와 베티를 태운 짐마차가 천천히 출발하는 것이 보였다.
숲 사이로 난 오솔길로 마차가 멀어지는 동안, 목이 긴 말이 거듭 이쪽 저쪽을 돌아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목이 기니까 더 높은 곳에서 멀리까지 볼 수 있구나.’
만약 몬스터들이 접근한다면 더 일찍 알아챌 수도 있을까? 그야 청각으로 먼저 알 수도 있겠지만, 나름 도움이 될 것 같긴 했다.
‘굳이 저 두사람만 가는 것도, 별로 위험하지 않아서일 거고.’
그들의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특히 베티의 경우, 긴장감보다는 기대감이 더 커보였다.
‘저 정도면 기대감을 넘어서 신남이지.’
최강혁은 몸을 돌렸다.
마침 이쪽으로 오고 있던 엘리사벳이 보였다.
편한 복장.
느슨하게 열려있는 상의 안쪽으로 붕대를 단단히 둘러 감은 모습이 보였다.
“.......”
한 손을 들어보이니, 그쪽도 비슷하게 손을 들었다. 처음엔 미안하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해서 좀 데면데면한 느낌이었지만, 지금은 꽤 나아졌다.
“음? 도시로 갔어.”
엘리사벳이 저 멀리 사라지고 있는 마차를 턱짓하며 뭐라 뭐라 하기에, 아마도 그들에 대해 묻는 모양이라 가볍게 답했다.
그러자 다시금 말을 해오는데, 다른 건 몰라도 ‘결혼’ 부분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결혼식 준비가 맞나보네.”
최강혁도 이제 그 단어를 포함해 몇 개의 단어는 이야기할 수 있었다.
알고 있다는 얼굴로 결혼을 말하자, 고개를 끄덕인 엘리사벳이 이어서 그가 손질하고 있던 크로스보우를 흘깃거렸다.
“사냥가려고.”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왠지 뭐라 묻는지 알 것 같았다.
가까운 숲 쪽을 가리키며 답하자, 그녀가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걱정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어쩌면 이쪽이 강하다는 것을 몸으로 겪어 알고 있기에 그런 걸까 싶기도 했다.
그렇게 정원을 거닐던 엘리사벳은 중앙 벤치에 앉아 푹 늘어지며 햇살을 즐겼다.
최강혁은 손질이 끝난 크로스보우를 인벤토리에 넣고 전투화 끈을 고쳐 묶었다.
손질 정도는 인벤토리 안에서 해도 되겠지만, 왠지 직접 만져보고 싶을 때가 있었는데 오늘도 그랬다.
‘이것도 이제 구할 데가 없구나.’
그는 새삼 전투화를 살펴보며 생각했다.
물론 아직 예비 전투화들도, 전투화 가죽 덩어리도 남아있긴 했다. 가죽은 별로 문제가 안 되었는지 상담사가 오케이해서 챙겼다.
‘그래도, 새로 보충하지 못하면 소모될 거야.’
대체할 재료를 찾아야 한다.
숲에 들어가면, 일단 사냥에 집중하기보다는 일정한 범위를 돌아다니며 지도를 확보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곳의 분위기와 더불어, 어떤 것들이 서식하는지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것이다.
‘평소에도 루시아나 베티가 혼자 들어갈 정도면, 그렇게까지 위험한 숲은 아닌 거겠지.’
최근의 웨어울프 사건은 새끼녀석이 평소 오지 않는 곳까지 나와서 벌어진 일이었다. 당시를 기억해보면, 녀석들의 서식지가 꽤 멀리 있었다.
‘몬스터들은 어지간해선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 편이니까.’
마나의 농도는 마치 습도와 비슷하다.
몬스터들은 저마다 좋아하는 농도가 있어서, 적절한 장소를 찾으면 그곳에 주로 터를 잡고 살아간다.
마나의 농도가 짙을수록 더 강한 몬스터가 서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건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이전 지역에 있었던 숲이 그랬다.
‘이쪽은 마나 농도가 변변찮은 수준이었어. 적어도 숲의 외곽은 말이지.’
사박.
그런 생각과 함께 숲으로 들어섰다.
초입은 잡초조차 크게 자라지 않았을 만큼 탁 트인 느낌이었다.
그곳엔 사람들이 오간 흔적들이 다수 남아있었고, 몇 군데엔 꽤 오래 전에 잘린 듯 보이는 나무의 그루터기들이 남아있기도 했다.
‘남이 베었어도, 버렸다고 간주하면 루팅이 되는 게 맞긴 해.’
그곳을 지나며, 그런 그루터기와 그 아래 땅속에 남아있던 죽은 뿌리를 고스란히 루팅했다.
단순히 청소의 의미만은 아니었다.
그런 것들도 쓸 곳이 많았는데, 원목의 결을 살린 테이블이나 서랍장 같은 가구를 만들 수도 있었다.
‘정 안 좋으면 조각내서 땔감으로 써도 되고.’
그것들이 사라져 움푹 들어간 땅이 일종의 함정처럼 되어버린 것 같아서, 그는 주변의 흙을 적당히 모아 메워놓고 지나갔다.
‘그루터기가 꽤 많구나.’
땔감이 아니라 판자로 가공해서, 헤인즈가 사는 숙소를 고쳐주는 것도 괜찮을 듯 했다.
‘거긴 확실히 비가 샐 거야. 벽의 구멍도 좀 막아주는 게 좋겠고. 여기 계절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겨울이 있다면, 그런 집에선 얼어죽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벽난로가 보이긴 했지만, 바깥바람이 숭숭 새는 곳에선 아무리 불을 때도 따뜻하지 않을 테니.
‘평화롭네. 일단은.’
오자 마자 이런 저런 일을 겪긴 했지만, 적어도 지금 정도 수준이라면 조용한 편 아닌가 싶었다.
몇몇 나무껍질에 달라붙어있는 벌레들의 모습은 이전 지역의 숲에서 본 것처럼 커다랗거나 위험하지도 않았다.
“여기였구나.”
그리고, 최강혁은 루시아가 위험할 뻔 했던 장소까지 오게 되었다.
이후로 그곳에 오지 않았는지, 현장에는 그녀가 차마 챙기지 못한 바구니가 여전히 땅에 남아있었다.
〈 73화 〉 073.
073.
하지만, 열심히 따서 모았을 열매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이곳 역시 나름의 청소부들이 있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루팅이 안 되네.’
바구니를 챙기려고 했던 그는 멋쩍은 얼굴로 그것을 집어들었다. 루팅이 안 된다는 건 그것의 주인이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알뜰한 성격인가.’
이리 저리 살펴보니, 그저 마른 풀로 엮어 만든 평범한 바구니였다.
형태는 장바구니와 비슷했고, 어깨에 걸쳐 들수 있게 긴 고리 손잡이가 붙어있었다.
‘돌아가는 길에 돌려주면 되겠어.’
그대로 들고 다니기엔 애매해서, 적당히 눈에 잘 띄는 나무 옆에 내려놓았다.
‘지도에 이 위치 표시해줘. 장바구니라 적고.’
[표시 완료하였습니다.]
이제 도우미를 활용해 시스템을 간접적으로 다루는 것에도 그럭저럭 익숙해졌다.
‘상담사도 못 가져갈 정도면, 어딘가에 빼앗길 일은 없다고 봐도 되겠지.’
계속 움직였다.
야생의 베리 근처에 두어 사람의 발자국이 보였고, 몇몇 식용 가능한 풀들 옆엔 누군가가 뽑아간 흔적이 남아있었다.
‘식탁에서 본 적 있는 풀이구나.’
당근과 비슷하지만, 흰색에 좀 더 가느다란 느낌을 갖고 있는 뿌리작물.
‘맛도 당근하고 비슷했지.’
온 김에 몇 뿌리 캐서 인벤토리에 넣었다.
냉장고가 없기에, 이곳 사람들은 적당히 채집하고 나머지는 자연에 남겨두는 방식을 취했다.
그는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그래도 보이는 대로 다 뽑아가지는 않았다.
‘이건 먹을 수 있는 종류인데, 아무도 안 건드리는 건가.’
근처에서 찾아낸 건 사람의 머리보다 커다란 버섯이었다. 미량의 독이 있긴 하지만, 물에 잠깐 담가두는 정도로도 중화가 가능한 종류였다.
‘찜찜하면 인벤토리에서 아예 중화시켜도 되고.’
그것도 몇 송이 챙겨 넣었다.
돌아다녀보니, 그가 아는 식물들이 꽤 보였다.
‘그쪽에서도 그랬지.’
그리 놀라지 않는 건, 이미 이전에 있었던 지역에서도 겪어본 일이어서였다.
‘조물주의 상상력에도 한계가 있을 거야.’
몇 가지 샘플을 만들어두면, 그것을 복사해서 여기 저기 붙여넣기 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요즘 그가 해보는 생각이었다.
찍찍!
생김새가 조금 다르지만, 다람쥐도 발견했다.
혹시나 해서 인사의 의미를 담은 제스쳐를 해보았는데,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쪼르르 사라졌다.
‘민망하구만.’
그는 도우미가 표시해주는 지도창을 중간중간 확인하며 숲을 누볐다.
‘역시. 오늘 안에는 무리가 있겠어.’
더욱 깊은 안쪽, 아마도 야생 맹수나 몬스터들이 있을 법한 곳까지 들어가진 않았다.
외곽만 하더라도 상당히 넓어서, 하루 안에 돌아다니긴 어려워보였다.
‘으음.’
그리고, 바닥에 남아있는 몇몇 흔적들을 발견하기도 했다. 멧돼지들이 흙에 뒹군듯한 자리도 있었고, 사슴 계열의 발자국도 눈에 띄었다.
‘뭐라도 잡아가긴 해야 할 텐데.’
주 목적은 주변 탐색이지만, 그래도 빈손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애초에 사냥까지 생각하고 들어온 거였고.
‘이거 괜찮다.’
마침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흔적과 배설물을 발견한 그는 조용히 왼손을 옆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은 정원에서 손을 보았던 크로스보우가 아닌, 강철 와이어의 컴파운드보우였다.
마찬가지로, 비어있던 오른손엔 전용 화살이 쥐어졌다.
‘도우미가 참 좋아.’
* * *
“숲으로 가셨다고?”
“네. 엘리사벳경께서 그러셨어요. 오전에 정원에서 보셨다고....”
오전이라면 이미 지나갔다.
벌써 점심 때가 되었는데,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아서 알아보던 참이니까.
“괜찮을까? 이곳 지리도 익숙하지 않으실 텐데.”
“숲을 잘 아시는 것 같았어요. 첫날에도 멀리 가셨다가 다시 오셨었고요.”
어쩌면 다른 세상에서도 숲에서 살았을지 모른다는 루시아의 말에, 에밀리아는 설마 그렇겠냐며 웃었다.
하지만 이어서 떠오른 것은 그 남자가 깎아놓은 정원수의 풍경이었다. 그리고, 그가 평소 걸치고 있는 특이한 옷도 생각났다.
‘마치 숲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았어.’
이런 저런 염료들을 제멋대로 부어 염색한 듯한 복장. 그런 옷을 입고 숲 속에 들어가면, 육안으로는 쉽게 알아보지도 못할 것 같았다.
“그분도 결혼식을 준비하시는 것 아닐까요? 사냥을 하시려던 건지, 활을 손보고 계셨다고 들었어요.”
“...그런 걸까.”
이미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자신이 너무 황당한 짓을 벌인 게 아닌지, 에밀리아는 점점 생각이 많아졌다.
‘신관이 오면 확실해질 거야.’
만약 그가 정말로 신께서 보내주신 사람이라면, 그땐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그것이 신께서 주신 답변일 테니.’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루시아를 돌아보았다.
“그러면 나도 점심은 거를게.”
“네? 하지만....”
“아직 부부가 아니지만, 그래도 나 혼자만 식사를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아.”
그리 이치에 맞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주인의 성격을 알기에, 루시아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방문을 두드렸다. 평소와는 다른, 조금 급한듯한 느낌의 노크였다.
“무슨 일이야?”
직접 문을 열고 나와본 에밀리아는 이어진 루시아의 말을 듣고 서둘러 따라나섰다.
“.......”
건물의 뒤뜰.
잡초가 자라있던 그곳은 어제 오후에 깔끔하게 청소되어있었다. 그 또한 최강혁이 와서 한 일이었고.
“대체....”
그리고, 에밀리아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이미 멀리서부터 풍기던 냄새로 짐작했지만, 직접 와보니 확실했다.
간단한 구조의 모닥불.
그 위에는 금속 장대에 꿰뚫린 채 천천히 돌아가고 있는 새끼 멧돼지 한 마리가 있었다.
그 장대의 한쪽 끝엔 상의를 벗은 채 손잡이를 돌리며 굽고 있는 최강혁이 있었다.
“걱정 마요. 수컷이긴 한데, 아직 덜 자란 거라서 누린내는 적으니까. 그것도 인벤토리에서 마저 처리했고.”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무척 뿌듯해 한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에밀리아는 이상하게도 기름을 뚝뚝 흘리며 구워지고 있는 새끼 멧돼지보다, 웃고 있는 남자의 드러난 상체에 눈이 갔다.
그건 옆에 있던 루시아도 비슷했다.
“상처가....”
“오늘이 아니야.”
루시아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
약간 갈색 빛으로 그을린 듯한 피부.
단단한 근육질로 뒤덮여있는 상체 곳곳엔 어떤 싸움을 겪었는지 몰라도 목숨을 위협했을 법한 흉터들이 적지 않게 새겨져있었다.
‘저런 흉터는 기사들에게서도 본 적 없어.’
가문에 있었을 때도, 그곳에서 수련하는 기사들의 맨몸을 보는 일이 종종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이런 몸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종종 날붙이에 다친 흉터는 보았지만, 이런 느낌은 아니었다.
“당신은, 어떤 싸움을 겪으며 살아온 건가요.”
에밀리아는 저도 모르게 그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만져보며 물었다.
“음?”
최강혁은 그녀가 자신의 흉터를 짚으며 말한 것을 깨닫고 멋쩍게 웃었다.
“그건 진짜 안 잘라진 게 다행이었지. 덜렁거리긴 했어도 붙어있었으니까, 회수하러 갈 필요가 없었어요. 운이 좋았지.”
비슷한 흔적들이 몸 곳곳에 있었다.
숲에서의 삶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며 입지를 다지기 전까지는 하루 하루가 그야말로 사투였으니까.
“영광의 상처죠.”
사실 적당히 줄이거나 없앨 수도 있는 흉터들이었다. 하지만 그대로 남겨두었다.
“얼굴이면 고쳤겠지만, 몸의 흉터는 훈장 같은 거니까.”
살아남았다는 증거.
그리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동기부여. 그에게는 여러 의미가 담긴 흉터들이었다.
“뭐, 솔직히 말하자면 얼굴을 안 다치려고 하다가 몸을 더 다치긴 했지.”
그렇게 이야기한 최강혁은 어차피 상대가 알아듣지 못할 거라 생각하니 멋쩍어져서 웃었다.
“그나저나, 물탱크도 만들긴 해야 하는데.”
이곳엔 우물이 없다.
오늘 아침에 알았다.
왜들 냄새가 나는 걸까.
설마 씻는데도 그런 건가 싶어서 자세히 관찰하니, 일단은 물이 귀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베티에게 인벤토리에 있던 물을 꺼내 보여주면서 물어보니, 숲으로 조금 깊이 들어간 곳에서 떠온다는 식으로 제스쳐를 보였다.
우물이라는 개념이 있긴 했다.
그가 그린 그림을 이해했으니까.
하지만 뭔가 여건이 안 되었는지 만들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여 다들 물로 몸을 씻는 게 아니라, 물에 적신 천으로 몸을 닦는 것을 보았다.
그나마 에밀리아의 경우 머리를 감는 정도는 하는 모양이지만, 샤워를 하는 건 아닌 것 같고.
‘머리도 매일 감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뭐, 그건 지구에서도 그런 케이스가 있긴 하지만.’
아무튼 그런 생각도 했다.
혹시 가난하거나 몰락한 집안 아닐까 하고.
우물 정도야 인부들을 사서 동원하면 금방 파낼 수 있으니까. 어딜 파든 암반이 막고 있는 게 아니라면 결국 물은 나오게 마련이니까.
‘나올 때까지 파면 되는 거지.’
그런데 없다는 건, 결국 인부를 살 돈이 없다는 뜻일 텐데....
최강혁은 여전히 자신의 흉터를 바라보고 있는 에밀리아를 흘끔거렸다. 가까이 있으니, 다른 이들만큼은 아니어도 조금 시큼한 냄새가 났다.
‘우물이야 시간을 내서 파면 될 거고. 지금은 오히려 물탱크가 빨라.’
우물은 경우에 따라서 물의 양이 많을 수도, 적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그가 구상한 것은 커다란 워터타워였다. 어차피 물은 그가 가서 대량으로 퍼다가 넣으면 되니까.
‘샤워장이 필요해. 욕조 목욕도 해야 하고.’
하수 처리 시설도 만들면 좋다.
사용한 오수를 따로 모이게 만들면, 그것을 그가 다시 루팅한 후에 이물질을 제거하고 깨끗한 물로 되돌릴 수 있다.
그렇게 하면 100퍼센트는 아니어도, 일부 회수가 가능할 것이다.
‘식수로 쓰기엔 찜찜하지만, 다른 곳에는 쓸 수 있지.’
아무튼 물이 필요하다.
지금 상태로는 결혼식을 올리더라도, ‘이후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고작 냄새 때문에 이런다는 건, 누가 들으면 비웃을 지도 모르겠지만.’
씻겨야 한다.
어떻게든.
‘비누도 만들어야 해.’
아니. 정확히 말하면, 만드는 게 아니라 개선해야 한다. 이미 있으니까.
‘빨래비누보다 못한 느낌이야. 쓰려면 못 쓸 것도 없긴 하지만.’
이곳에서 얻은 게 아니다.
인벤토리 안에 재료들을 넣고 조합으로 만들어냈다.
의외로 어렵지 않았다.
벽난로와 부엌 아궁이에서 재를 구했고, 물이 있었고, 기름이 있었다.
‘동물성 기름으로 만들어도 좋다고 어디서 봤었는데. 종류가 문제였을까.’
늑대의 지방이어서 결과가 별로였을까.
아니면 인벤토리 안에서 조합스킬로 만들어서 그런 걸까.
‘마침 멧돼지 기름도 얻었고... 1차 레시피는 확보했으니까 미세조정은 도우미에게 맡기자.’
숲에서 향이 좋은 풀과 야생화도 좀 뜯어왔으니, 섞어서 만들어도 좋을 듯 했다.
‘조합스킬 최고야.’
그게 아니었으면 잿물 만드는 것부터 해서 기름에 섞고 적당한 곳에 건조시키는 것까지, 굉장히 오래 걸렸을 것이다.
‘이렇게 간단한 걸... 그냥 갖고 오게 해주지, 그렇게 깐깐하게 말이야.’
속으로 상담사를 욕하던 최강혁은 문득 귓가에 들리는 에밀리아의 말에 그쪽을 보았다.
왠지 아는 단어인 것 같아서 눈을 껌벅이니, 그녀가 지금 한창 구워지고 있는 멧돼지를 가리키며 ‘결혼’ 이 포함된 말을 다시금 반복했다.
“결혼?”
끄덕끄덕.
“아... 이게, 결혼식에 쓰일 거냐고 묻는 건가. 아니. 아니예요.”
고개를 저어보이니, 잘 모르겠다는 듯 갸우뚱거리는 게 새삼 귀여웠다.
“그럴 거면 지금부터 구우면 안 되지. 아직 헤인즈하고 베티도 돌아오지 않았잖아요. 그때 쓸 건 따로 있어.”
“헤인즈, 베티.”
“맞아. 헤인즈, 베티... 여기에 돌아오면, 우리 결혼.”
끄덕끄덕.
“우리... 정원... 결혼....”
“맞아요. 우리 정원에서 결혼해요.”
장족의 발전이다.
적어도 세 가지 단어는 알아듣잖아.
그 외에도 익힌 단어가 더 있긴 하지만, 쉽게 배운 건 아니었다.
‘그것도 도우미 덕분이야.’
각종 전자기기들을 흡수한 도우미는 그것들이 가진 기능들을 수행할 수 있었다.
간단하게는 숫자 계산 같은 것도 있지만, 요즘 그에게 특히 도움이 되는 건 녹음과 녹화 기능이었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말과 장면을 저장해두었다가, 시간이 날 때마다 계속 반복해서 보고 들으며 그 의미를 추측하고 발음을 따라해보는 것.
궁한 사람이 찾아야 하는 법이고, 이들의 세상에 자신이 들어온 거니까 결국 그가 열심히 배워야 했다.
다만 신기한 것은, 노력도 노력이지만 그가 가진 언어 습득 능력이 꽤 뛰어난 편이라는 점이었다.
숲에서 동물과 몬스터들의 언어를 익혔던 것은 각성자로서 지닌 특수한 감각과 눈썰미 덕분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동안 알지 못했던 특기를 발견한 것인지도 몰랐다.
‘의사소통이 가능해야 해. 그게 기본이지.’
세상을 살아가려면 결국 말이 통해야 한다.
그는 옆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에밀리아를 보며 더더욱 그런 생각을 했다.
물질적인 거리와는 다르게, 그녀와는 여전히 상당한 심리적 거리가 있었다. 만약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면 달라지지 않을까.
‘다들 사연이 있는 거겠지.’
이런 식으로 결혼을 하게 된 이유.
언젠가 그녀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게 되길 바라며, 그는 다시금 손잡이를 돌려 새끼 멧돼지를 뒤집었다.
〈 74화 〉 074.
074.
헤인즈와 베티가 돌아온 건, 그들이 출발한 지 나흘이 지난 날의 오후였다.
‘뭐가 많이 늘었네.’
떠났을 때와 달리, 돌아올 땐 세 대의 마차가 추가되어있었다.
그 중 한 대는 다른 마차에 비해서 좀 작은 편이었지만, 지붕도 있고 장식도 달려있는 것을 보니 짐마차가 아니라 사람용인 듯 했다.
‘보편적으로 쓰이는 거구나.’
멀리서 바라보던 최강혁은 그런 마차들 역시 목이 긴 말들이 끌고 있는 것을 보며 생각했다.
그렇게 그들이 도착했다.
그는 조금 피곤해보이는 헤인즈와 인사를 나누었다. 이제는 간단한 인사 정도는 문제 없이 주고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신... 신전... 방문. 당신은 만남....”
“신전에서 나를 만나러 왔다고? 누가?”
헤인즈는 적잖게 놀란 얼굴이었다.
최강혁이 하는 말 전체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 사이 사이에 분명 그들의 언어가 끼어있었다.
“이 단어는 몰라? 신의 사람이야.”
“신하고 사람이라... 사제 같은 건가.”
조금 복잡한 단어로 들어가면 다시금 며칠 전과 비슷한 모습이 되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간단한 단어는 제법 많이 알고 있었다.
“최강혁. 노력하고 있어.”
“맞아. 내가 아주 많이 노력하고 있지.”
“하하.”
마차에서 짐을 내리고 있던 베티가 신기해하는 얼굴로 흘끔거리더니, 이쪽의 잡담이 길어질 것 같은지 입을 열어 소리쳤다.
“그러고 있지 말고, 좀 도와주세요!”
“아. 그렇지.”
헤인즈가 얼른 그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뒤따라간 최강혁의 말에, 그와 베티가 같이 일을 멈추고 그를 보았다.
“갖고 싶다고?”
“내 마법. 짐을 옮겨. 소유 필요해. 잠깐동안. 다시 돌려줄 거야.”
투박하고, 딱딱 끊기는 문장.
하지만 듣는 이들이 의미를 알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그것은 최강혁이 지금처럼 필요할 때를 대비해서 알아두고 연습한 단어들의 조합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들의 주인이 아니야. 아가씨에게 여쭤봐야 해.”
“에밀리아?”
“오, 맞아. 에밀리아 아가씨께 여쭤봐야 해.”
“아.”
고개를 끄덕인 최강혁은 바람처럼 사라졌다가 잠시 후 다시 돌아왔다.
그 사이에 몇 개의 짐을 더 내려놓고 있던 두 사람은 갑자기 짐마차에 실려있던 온갖 것들이 뭉텅이로 사라지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
“마법....”
바닥에 내려놓았던 것들도 사라졌다.
그리고, 최강혁은 어떤 것을 어디에 갖다 놓아야 하는지 묻지 않았다.
지난 며칠동안 이곳의 모든 것을 파악이라도 한 것처럼, 아무런 실수 없이 모든 것을 그것이 있어야 할 곳으로 가져간 것이다.
“굉장해....”
베티가 멍한 얼굴로 말했다.
그녀는 비슷한 표정의 헤인즈를 보았다.
“계속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글쎄요. 그러면야 좋겠지만, 곧 아가씨의 부군이 되실 테니까....”
“아, 참. 그렇겠네요. 이런 일을 하실 수는 없겠죠.”
“괜찮아.”
“......?”
최강혁은 둘의 대화를 대강이나마 이해했다.
잘은 몰라도, 결혼하고 나면 신분이 올라가니까 잡일은 못하지 않겠냐는 뜻 같았다.
“다른 것 없어. 나는 일할 수 있어. 나는 일을 좋아해. 돼지가 아니다.”
“돼지?”
“먹고, 자고, 싸고.”
“하하!”
그쪽에선 그런 식의 비유가 없었을까?
두 사람이 비슷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헤인즈는 빈 마차를 몰아 헛간으로 향하고, 베티는 서둘러 본채로 향했다.
‘조금이나마 대화가 되기 시작하니까, 확실히 덜 답답해. 뭐, 오히려 더 답답할 때도 있지만.’
아예 모르면 그냥 넘어가는데, 어설프게 알면 오해를 하거나 왜곡이 될 수 있다.
지금 그가 사용하는 단어들도 완벽히 그 상황에 맞는 것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다들 적당히 걸러서 듣는 거겠지.’
고개를 끄덕인 최강혁도 본채로 향했다.
‘그나저나, 뭐였을까.’
소유권에 대한 허락을 받으려고 갔었을 때, 에밀리아를 만나고 있던 인물들을 보았다.
‘근데, 그 중에 신관이 있었나? 설마....’
생각나는 이들이 있었다.
상인으로 보이는 이들 사이에, 무척 다른 차림새를 하고 있던 인물이 두 명 있었다.
짐승 가죽으로 된 옷과 망토.
게다가 머리에도 짐승의 머릿가죽을 후드처럼 덮어쓰고 있어서 좀 기괴한 모습이었다.
‘드루이드 같은 건 줄 알았지.’
그를 본 그들은 마침 잘 되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뭐라 뭐라 이야기했다.
같은 언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억양도 다르고 속도도 빨라서, 그동안 이곳 사람들이 그와 대화할 때 많이 배려해주고 있었음을 새삼 실감하기도 했다.
‘적어도 한 단어는 알아들었어.’
신.
다른 건 몰라도 그건 확실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그들이 진짜 종교인들이 맞았던가보다.
‘음... 내가 갖고 있는 종교의 이미지가 너무 고정적이었던 거겠지.’
종교라고 하면 기독교 계열이나 불교의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다른 종교라고 해도 이슬람교나 힌두교 정도만 생각나고.
‘뭐라 그러더라? 애니미즘이었나.’
동물을 숭배하는 신앙도 있다고 학교 다닐 때 얼핏 배운 것 같은데.
‘아. 그건 토테미즘인가.’
아무튼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그들이 진짜로 뭔가 할 수 있던 걸 보면, 이쪽은 종교가 단순한 신앙이 아니라 실질적인 힘을 갖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게 신성력이었구나.’
그들이 무언가를 했었다.
일반적인 마나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는데, 부정적인 느낌은 아니어서 가만히 받아들였다.
‘딱히 문제는 없던 것 같고.’
적당히 끝난 것 같아서 물어보니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들이 제각각이라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짐을 옮겨야 한다는 이유로 얼른 돌아나온 것이다.
‘경솔했어.’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런 외부인들 사이에 아내 될 사람을 혼자 두는 건 옳지 않은 일 같았다.
‘아무리 마법사라도, 그저 한 명의 사람일 뿐이니까.’
물론 엘리사벳이 함께 있었지만, 그녀는 환자였다. 오히려 보호를 받아야 할 입장 아닌가.
“......?”
그렇게 본채로 들어가려던 최강혁은 도로 물러났다. 안에 있던 이들이 오히려 우루루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정원으로 갈 거예요.”
조용히 옆에 다가온 루시아가 말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느리고 정확한 발음으로 이야기해주곤 했다. 이제는 그것이 그녀의 배려심이라는 걸 알았다.
‘단어 습득에 도움을 많이 받았어.’
고개를 끄덕인 그는 무리지어 이동하는 이들을 따라갔다.
슬쩍 슬쩍 그를 흘끔거리는 사제들의 시선이 신경쓰이긴 했지만, 그래도 시비를 걸거나 경계하는 눈빛은 아니었다.
‘호기심인 것 같은데.’
동물원 원숭이를 보는 느낌까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비슷한 것 같았다.
‘음.’
그나마 다른 느낌의 시선이 있어서 그쪽을 보니, 앞서가던 에밀리아가 이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뭔가 생각이 많아진 듯한 얼굴이었는데, 그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고개를 끄덕여주는 게 보였다.
‘잘 되고 있다는 뜻일까.’
잘 모르니 묻어가는 수 밖에.
어차피 결혼식과 관련된 건 신부 쪽이 하자는 대로 하는 게 베스트라고 어디서 보았다.
‘세상이 달라도, 비슷하겠지.’
그나저나, 아무리 보아도 드루이드 아닌가.
최강혁은 마침 이쪽을 보던, 이름 모를 맹수의 머릿가죽을 뒤집어쓴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웃어?’
왜 웃는 걸까.
아무리 신관이라고 해도, 털복숭이 남자의 미소에 기분이 좋아지진 않았다.
‘냄새도 심하고.’
짐승 가죽에서 나는 냄새가 아니다.
일부러 그러나 싶을 만큼 악취가 심했다.
‘다른 사람들은 괜찮은 편인데. 오히려 이곳 사람들보다도 덜해.’
상인들은 평범한 느낌이었다.
그들이 데려온 인부들이 좀 지저분한 행색이긴 했지만, 그래도 더럽다 말할 정도는 아니었다.
‘제대로 된 종교가 맞는 거야?’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의심을 적당히 밀어놓으며 걷다보니 어느새 정원에 도착했다.
그곳에 모인 이들이 다시금 대화를 시작했다.
그곳에서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라서, 이것 저것 준비할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의견차이가 있나본데.’
신관들은 딱히 나서지 않았다.
다만 상인들이 좀 시끄러웠다.
‘싸우는 말투는 아닌 것 같고....’
조금 뒤에 물러나 사람들의 표정을 이쪽 저쪽 살펴보던 그는 왠지 상황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강매 같은데.’
멀리 길목에 주차되어있는 짐마차들.
그곳에 실려있는 것들은 아마도 결혼식에 쓰일 여러 물품들일 것이다.
‘뭔가 잔뜩 실어오긴 했었지.’
너무 소박하게 하는 것 아닌가 내심 우려했는데, 그래도 나름대로 사람을 쓰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사전 협의가 덜 된 건가.’
그쪽을 가리키며 이야기하는 상인들.
무덤덤한 얼굴의 에밀리아와 달리, 그 뒤에 선 엘리사벳이 오히려 표정관리를 못 하는 편이었다.
‘강매까진 아닌 것 같은데. 아예 적당히 가져와서 현장에서 고르는 건가? 비효율적인 방식 같은데.’
조금 더 지켜보니, 무표정한 듯 했던 에밀리아 또한 알게 모르게 소매 속에 가려진 손가락이 꼼지락거리고 있음을 알았다.
‘실시간 스캔을 이런 식으로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혹시 저들 중에 위험한 무기를 숨기고 있는 이가 있을까 싶어서 한 명 한 명 긁어보던 차였다.
다행히 호신용으로 짐작되는 단검 정도 말고는 눈에 띄는 게 없었다.
그러다 에밀리아를 스캔해본 적은 없다는 걸 기억하고 해보았더니, 마치 수면 위의 백조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저런 것도 외강내유... 라고 할 수 있나.’
그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단순한 버릇이 아니라, 특정한 패턴이 있었다.
‘계산을 하고 있어.’
대충 알겠다.
상인들이 제시하는 것들을 들으며, 얼마가 필요한지 계산을 하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넉넉한 형편은 아닌 것 같아.’
부잣집이라면 ‘그냥 다 해주세요.’ 라고 할 텐데. 이곳도 별다를 것 없지 않을까.
기대감에 차있던 상인들의 표정이 살짝 가라앉아있는 건 생각했던 것과 달라서인 것 같고.
“.......”
그의 시선을 느꼈을까.
엘리사벳이 이쪽을 보더니 눈썹을 올렸다.
무슨 일이냐는 듯한 모습에, 최강혁은 조용히 뒤쪽을 턱짓했다.
“왜?”
“돈. 없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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