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ilado 8

용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한 대가 멀쩡한 건 다행이었다.
‘얼추 3톤 정도구나.’
이런 류의 트럭이 보통 2.5톤에서 왔다갔다한다고 알고 있는데, 아마도 보강된 부분이 있어서 무게가 좀 더 늘어난 듯 보였다.
‘그래도 그것보단 가볍네.’
과거에 캠프에서 스캔했던 것들 중에는 5톤이 넘어가는 트럭도 있었다. 방탄 기능 때문에 철판이 더 두꺼워서 무겁다던 이야기가 기억났다.
‘이 정도면... 굳이 일부를 처분하지 않아도 되겠어.’
멀쩡한 한 대만 두고 나머지는 대충 처분할까 했는데, 당장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고장난 차량 두 대를 비어있던 특수칸 하나에 몰아넣었는데도 아직 반이 채 차지 않았다.
‘20톤 대단해.’
속으로 감탄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근처로 다가오며 물었다.
“트럭 운전, 할 수 있어요?”
시원시원하게 생긴 여성이었다.
카우보이 복장이 어울릴 법한 외모였는데, 단순히 궁금해서 물어본 건 아닌 것 같았다.
“조금 배웠어. 잘은 못해.”
“제가 면허증이 있어요. 운전을 맡아도 될까요?”
“전투가 생길 수도 있어. 그 때도 가능해?”
“네. 우리 트럭도 제가 몰았었어요.”
“그렇군. 당신이 운전해.”
최강혁은 자신의 트럭 운전 실력이 대단치 않다는 것을 알았다.
운전대를 잡는 것보다는 주변 경계와 유사시 사격을 지원하는 게 훨씬 나은 일이었다.
‘어디까지 데려가야 하지?’
아직 산에 볼일이 남아있으니, 그곳을 아주 떠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여자들에게 물어보니, 의외로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캠프 하나가 있다고 했다.
“그린 캠프?”
“네. 산 아래에 있어요.”
“제가 그곳 소속이예요.”
레드 캠프는 들어봤지만, 그린캠프가 따로 있는 줄은 몰랐다. 색깔로 이름을 짓는 거면, 옐로우나 블루 캠프 같은 곳도 있는 걸까.
‘그나저나, 그린캠프라....’
군 시절 보호 관심 병사들을 모아 힐링을 해주던 프로그램이 떠올라서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런 그의 얼굴이 마치 그곳이 내키지 않는 것처럼 보였는지, 여자들이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더했다.
“가까우면 문제 없어.”
어차피 다시 산으로 돌아와야 한다.
탐지기는 여전히 이 산에 남은 조각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곳에 욕조가 있어?”
“...아마 있을 거예요. 그렇지?”
“나무라도 괜찮다면 있어요.”
“좋아.”
욕조라면 직접 만들어보기도 했지만, 물을 데우기가 번거롭고 온도 유지가 잘 안 되었다.
여자들을 데려다준 후에, 가능하다면 그곳에서 제대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싶었다.
“이름이 뭐예요?”
“최강혁.”
“초이.”
“낫 초이. 최.”
“초에.”
“오케이.”
그녀들의 이름도 알게 되었지만, 오래 기억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다시 만날 일이 있을까.’
운전석과 그 옆에 한 사람씩 올라타고, 나머지 여자들은 뒤쪽 짐칸에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애초에 수송용 트럭이어서 의자 같은 걸 기대할 수는 없었기에, 그저 최대한 벽에 붙어서 뭐라도 붙잡는 게 최선이었다.
“이거. 잡아.”
“고마워요.”
“별 말씀을.”
그들을 위해 조합스킬을 활용, 난간 안쪽 벽에 손잡이를 만들어 붙여주었다. 그렇게 잡을 게 있으니 꽤 나아졌다.
‘이건... 기관총 거치대인 것 같은데, 당연히 비어있군.’
창고에서 루팅한 것들 중에는 기관총이 없었다. 생각해보니 무반동포나 수류탄 같은 것들도 없었는데, 그런 건 군부에서도 팔지 않은 걸까.
최강혁은 기관총 사수의 자리에 있던 벨트에 자신의 허리와 엉덩이를 감아 고정했다.
트럭이 크게 덜컹대더라도 중심을 잃지 않게 해주는 장치였다. 계속 서서 가야겠지만, 오히려 그게 편할 수도 있었다.
“방향 알아?”
“정확히는 몰라요. 산에서 내려가면 알 거예요.”
“천천히 가. 차가 사용하는 길이 있어.”
“네. 다들 꽉 잡으라고 해줘요.”
그렇게 출발했다.
트럭은 미리 치워둔 입구를 지나, 과거 그곳을 오가던 차량들이 만들어놓은 길을 따라 이동했다.
뒷칸에 타고 있던 이들은 저마다 울컥한 얼굴로 주위 풍경을 돌아보았다.
“죽은 사람도 있었어요.”
누군가 최강혁에게 말했다.
비슷하게 갇혀있다가,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게 된 이들이 있다고 말이다.
그녀들을 잡아온 자들은 사라진 이들이 협조적으로 굴었기에 풀어준 것이라 말했지만,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모든 게 괜찮아질 거야.”
최강혁은 알고 있던 영어를 이야기했다.
그의 생각과는 조금 다른 문구였지만, 그녀들에겐 적잖게 위로가 되는지 곧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 59화 〉 059.
059.
그린 캠프까지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그곳으로 향하는 도중, 해당 캠프 소속의 정찰대와 조우한 것이다. 그들에게 여성들을 인계했다.
“정말 같이 안 가실 건가요?”
그녀들이 물었다.
욕조를 쓰고 싶어하지 않았냐고.
같이 가면 무엇으로든 보답을 하고 싶다고.
“괜찮아.”
최강혁은 사양했다.
욕조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고작 그런 것 때문에 몇 킬로미터를 더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내 부탁을 들어줄 수 있어?”
“무엇이든요.”
“사라 레드우드. 그녀에게 이걸 전해줘. 다른 사람은 안 돼.”
“...아.”
최강혁은 인벤토리에서 꺼낸 나무 상자 하나와 함께, 짙은 갈색의 염료로 인쇄한 서신을 건네었다.
한글로 적혀있는 터라 내용을 읽을 수 없었지만, 받아든 여성의 표정이 왠지 모르게 조금 처연해졌다.
“당신의 연인?”
“아니. 저스트 비즈니스.”
“그렇군요. 꼭 전해줄게요.”
그들이 차량 두 대에 나누어 올라타고, 그린 캠프 소속의 군인이 최강혁에게 다가왔다.
“와일더 클랜의 거점이라고 들었다.”
“맞아.”
“위치를 알려줄 수 있나?”
“남은 게 없을 거야.”
“괜찮아.”
“잠시 기다려.”
최강혁은 그곳에서 나오면서 만들었던 지도를 적당히 축약하여 인쇄했다.
그것을 상대에게 건네주니, 축약을 했음에도 무척이나 자세한 지형도여서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그곳으로 가는 길이군.”
“좌우 폭은 100미터. 땅만 있고, 뭐가 있는지는 몰라. 당신은 조심해야 해.”
“그래. 조심하지. 정보 고맙다. 사람들을 구해준 것도. 당신은 영웅적인 일을 했어.”
“별 말씀을.”
“최강혁이라고 했지. 난 찰스다.”
“만나서 반가워.”
그렇게 말한 상대는 이어서 최강혁이 그곳에 있던 수송 트럭을 허공으로 사라지게 하는 것을 보았다.
“인벤토리?”
“알아?”
“과거에 구경해본 적 있어. 하지만, 그 정도로 거대하진 않았는데.”
“내것은 크다.”
“그렇군. 아무튼, 잘 가라.”
“그래.”
손을 흔든 최강혁은 갈대숲 저편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같은 광경을 본 정찰대원들이 얼빠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찰스라는 이름의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의 차량으로 향했다.
“방금, 뭐였습니까?”
“각성자들의 기본 스킬 중에서도 무척 드물다고 알려진 것들이 있어.”
“혹시... 루팅입니까?”
“맞아. 인벤토리를 가질 수 있게 해주지. 조금 전 본 게 그거야.”
“트럭 한 대를 집어넣는다고요?”
“내가 보았던 건 소대 규모의 개인군장 정도였지만... 뭐, 사람마다 능력이 다른 거겠지. 자! 다들 인원 다시 점검해! 복귀하자고.”
멈춰있던 차량들이 다시금 움직였다.
그렇게 최강혁이라는 이름이, 그곳에서 다시 퍼지기 시작했다.
* * *
사라 레드우드가 그린 캠프에서의 연락을 받은 건 그로부터 이틀 후였다.
다른 일정을 미뤄두고 직접 찾아가보니, 최강혁이 주고 갔다던 서신 한 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
그것은 연서도, 안부 편지도 아니었다.
그저 단순한 궁금증을 담은 내용이었지만, 그것에 대답하는 건 쉽지 않았다.
“다시 산으로 갔다고요?”
“그때, 곧바로 뒤돌아 떠났죠. 산에 볼일이 있던 것 같은데....”
“애초에, 어떻게 만나게 된 거죠? 가능하다면, 좀 더 자세한 정황을 알고 싶은데요.”
“딱히 보안 사항은 아니니까요. 어디 보자. 그날에 관한 보고서가....”
와일더 클랜이 특정 캠프와 뒷거래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이제 와 정설처럼 굳어져있긴 하나, 그 정확한 증거까지 나온 적은 없었다.
하지만 최강혁의 편지와 더불어, 그가 넘겨주고 간 상자라면 충분히 그 출처를 파악할 수 있을 듯 했다.
‘소총은 일련번호가 지워져있으니 추적이 쉽지 않아. 하지만, 전투식량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단순 소모 물자에 그렇게까지 신경쓸 이는 많지 않다. 생산 일자와 납품처를 대조해보면 결국 어느 캠프에서 나온 건지 확인이 가능할 것이다.
‘그래봐야 약탈당한 것이라 주장하고 넘어가겠지만.’
비슷한 일이 몇 번 있었다.
용의선상에 오른 캠프도 많았지만, 그들 또한 실제로 약탈을 당한 전적들이 있어서 의심의 시선에서 벗어났다.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일이야.’
하지만 최강혁이 자신에게 서신을 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적어도, 그녀만큼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아닐까.
‘지금 본인 상황이 어떤지도 모르면서.’
고개를 저은 그녀는 그린 캠프의 담당자와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눈 후, 최강혁이 남겨둔 물품들을 넘겨받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차량으로 돌아오자, 그때까지 침묵하고 있던 부하가 입을 열었다.
“모르겠어. 나름의 증거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빠져나갈 구멍은 충분해.”
“그곳에서의 상황이 사실이라면, 그 혼자서 와일더의 거점 하나를 무력화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런 거지. 한동안 조용했던 이름이 다시 도는 이유가 뭐겠어.”
그렇게 이야기하던 사라 레드우드는 문득 눈가를 꿈틀거렸다.
“설마... 그런 건가.”
“예?”
“와일더 클랜에 합류했다는 혐의를 제시한 적이 있었지. 배지현 그 여자가 말이야.”
“지나간 이야기잖습니까.”
“혐의는 벗었지만, 깔끔하게 정리된 건 아니었어. 단지 양호석 쪽의 손을 들어주었을 뿐이지. 문제는....”
“그쪽으로 가지 않았죠.”
“그래. 최강혁을 데려가기 위해서 인맥을 총동원했는데도 결국 빈손이니까. 그가 악감정을 품으면 언제든 혐의를 되돌릴 수 있어.”
최강혁이 두고 간 것들은 와일더 클랜의 뒷거래 증거로 제시하기엔 부족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의 거점 하나를 제대로 무너뜨렸다는 것에 대한 증거가 될 수는 있다.
“증거가 있고, 목격자도 있지.”
그것으로, 최강혁은 해당 혐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노리고 한 건 아닌 것 같지만.”
그녀가 생각했던 최강혁은 그렇게 머리가 좋은 남자는 아니었다. 물론 멍청한 건 더더욱 아니지만... 복잡한 걸 싫어한다고 해야 할까.
“일단 복귀하자고. 돌아가면서 생각을 정리해야겠어.”
* * *
“이쯤이었던 것 같은데.”
여자들과 트럭으로 이동하던 중에, 몇몇 몬스터들이 접근하기에 사격을 했었다.
분명히 죽은 놈들이 있었는데, 정확히 어디인지 지도에 표시를 안 해뒀더니 찾기가 어려웠다.
‘그 상황에 일일이 표시를 하기도 그렇고.’
그래도 덩치 큰 놈 두 마리는 찾아냈다.
둘 중 하나는 이미 이쪽 동네의 청소부들이 꼬여있었지만, 적당히 경고사격을 가하자 우루루 달아났다.
‘위치는 아니까, 굳이 차량 도로로 갈 필요는 없지.’
최강혁은 와일더 클랜의 거점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생각해보니, 창고만 털었지 건물을 다 털지는 않았던 게 마음에 걸렸다.
당시 상황을 생각해보면, 귀중품 같은 걸 챙길 여유가 없었을 테니까.
‘늦었을 수도 있지. 다른 곳에 있던 놈들이 돌아왔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그러면 별 수 없이 빠져야겠고.’
위치를 정확히 아니까 헤맬 일은 없었다.
차량도로가 아니라 산길을 가로질러 내달리니,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협곡으로 이어지는 절벽 한쪽 끝에 도착했다.
‘아, 참. 그러고보니.’
절벽 아래에서 죽은 여자 각성자 하나가 있었다. 아마 이 근처였던 것 같은데.
‘없어졌네.’
먼저 왔던 손님이 있었던 모양이다.
바닥에 핏자국이 남아있긴 한데, 시체가 사라지고 없었다.
‘끌려간 자국이구나. 대충 알겠다.’
포식자의 소행일 것이다.
소지품을 확인해보지 못해서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건진 게 하나는 있었다.
“음.”
그 여자가 사용하던 대검.
손잡이 길이만 30센티미터 정도에, 검신의 길이가 얼추 1.5미터는 되어보였다.
절벽에서 떨어졌음에도 망가지거나 하지 않을 만큼 튼튼한 게 마음에 들었다.
‘45킬로그램 치고는 가볍네.’
무게 중심이 좀 쏠리는 느낌이긴 한데, 애초에 특정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 같으니 오히려 이점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마나를 써야 휘두를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총을 안 쓸 땐 꽤 쓸만하겠어.’
그동안은 창을 주로 사용했었다.
찌르다보면 창촉이 뼈나 근육에 걸려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한번 걸리면 잘 안 빠졌다.
‘여분의 창이 있긴 해도... 이렇게 베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지.’
붕- 부웅-
두 손으로 쥔 대검을 허공에 대고 몇 번 휘둘러보던 그는 꽤 만족스러워서 잘 챙겨 넣었다.
‘총이 만능은 아니니까.’
지난 밤도 그렇고, 총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일들이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에 전적으로 의존하거나 맹신하는 건 지양해야 한다.
일단, 총알부터 한정적이다.
당장 저격소총의 탄약이 상당히 줄어들었다.
탄약도 탄약이지만, 무리하게 사용한다면 총 자체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재질이 좀 다른 것 같던데. 알루미늄 합금으로 때우면 안 되겠지.’
인벤토리에 쓸어담은 각종 소총들 중에서 같은 재질이 있는지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정 없으면 똑같은 형태로 새로 만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고.
‘총열은 분해가 되니까, 그 부분만 새로 만들어 끼워도 발사 자체는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영점은 다시 잡아야겠지만.’
어쩌면 내구도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만큼 해볼 뿐이다.
다만 그렇게 했을 때도 무음기능을 사용할 수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아티팩트는 없었어.’
대부분 동일한 규격의 소총들이었다.
그 외에도 권총이 몇 자루 들어왔는데, 그건 좀 반가웠다.
‘시간이 나면 만져봐야지.’
군에 있을 때도 권총을 만져본 적은 없었다. 일반병사가 권총을 만질 일이 생길 리도 없고.
‘나름대로 쓸모가 있을 테니까.’
조용히 절벽 위로 올라간 그는 별다른 움직임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아래로 내려가는 건 관두기로 했다.
‘누군가 있어.’
이런 걸 육감이라고 하는 건가.
왠지 저 아래에 누군가 숨어있는 것 같았다. 한 명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괜히 빈집턴답시고 목숨 걸 필요는 없잖아.’
쓸만한 대검 한 자루를 얻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자. 스캔도 떠두었으니, 강철로 비슷한 걸 만들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무게 중심을 좀 더 안정적으로 개량해보는 것도 괜찮겠어.’
고장난 트럭 두 대가 추가되었으니, 강철도 충분하다. 강철이 아니라면 ‘거미게’의 갑각을 활용해도 괜찮을 것 같고.
‘거미게, 게거미. 뭐가 나으려나.’
스캔한 데이터는 읽을 수 없는 언어로 되어있어서, 대충 그가 지어붙이는 게 편할 듯 했다.
그동안 비슷한 식으로 이름 붙인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보통 뒤쪽이 핵심이라고 했던가.’
고래상어는 상어고, 오리너구리는 너구리고, 인간쓰레기는 쓰레기라고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그러면 게거미가 맞겠다.’
그는 다시금 절벽 아래를 살폈다.
어느새 어둠이 드리워지는 중이라, 아래로 내려가지 않더라도 이곳에서 밤을 보내긴 해야 할 것 같았다.
‘구덩이를 파자.’
절벽 위엔 파내기 적당한 곳들이 있었다.
몇몇 큼직한 바위들 중 하나를 골라 그 아래를 파고 들어간 그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바닥과 옆을 막던 중 작은 소리를 들었다.
‘아래쪽인가본데.’
뭔가가 싸우는 듯한 소리였지만, 호기심을 억눌렀다.
어둠 속에선 그에게 유리한 측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다른 이들이 무조건 불리할 거라 생각하는 것도 맞지 않으니까.
‘숨구멍은 옆쪽으로 조금 길게 빼야겠어.’
구덩이 입구를 잘 틀어막은 그는 일단 눕기로 했다.
숙면을 취하지는 못하겠지만, 적당히 긴장을 풀고 쉬는 것만으로도 정신적인 피로가 꽤 줄어들 것이다.
‘좋은 게 있었네.’
겸사겸사, 인벤토리에 대충 쓸어담았던 것들을 정리하기로 했다.
그 중에서 의무실 천막에서 챙긴 의약품 종류에 관심이 생겼는데, 개중에는 그가 알고 있는 것도 있었다.
‘이런 건 나름 유용하지.’
유명한 이름의 연고나 자잘한 소화제, 소염 진통제, 종합 감기약 정도는 그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이건 지금 필요하겠고.’
충혈된 눈, 피로한 눈에 사용하는 안약 종류도 있었다.
잘 되었다 싶어서 눈에 넣고 몇 번 껌벅였더니 이물질이 눈물과 함께 흘러나온 듯, 뻑뻑하던 것이 무척 시원해졌다.
〈 60화 〉 060.
060.
‘같은 소총이 있긴 했구나. 잘 됐다.’
제대로 정리하지 않았던 수많은 소총들 중에서, 그가 갖고 있던 돌격소총과 동종의 총을 몇 자루 발견하기도 했다.
‘부품을 바꿔쓰기보다, 이 특수장치를 옮겨다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보조장치는 열이 받거나 하지 않는 것 같으니, 그런 식으로 총을 바꿔가며 사용하면 될 듯 했다.
‘저격소총은... 역시 같은 재질은 없구나. 일단 일반 소총 금속으로 총열이라도 만드는 수 밖에 없겠어.’
하지만 당장 행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저격소총에 너무 의존하는 것도 좋지는 않을 것 같았다.
‘돌격소총에 여분이 생겼으니, 그쪽 위주로 쓰는 것도 좋지.’
차라리 돌격소총을 개조해서 사거리를 늘려보는 방법은 어떨까. 일반 소총 정도만 되어도 범용성이 더 좋아질 것 같은데.
‘저격소총보다 탄이 작으니 그만큼 파괴력도 줄어들겠지만... 그건 보조 효과로 조금은 보완할 수 있지 않나.’
그러자면 그만큼 거리가 가까워야 하니, 이래저래 제약은 있었다.
‘차라리 보호구를 빡세게 만들어 입고, 대검을 들고 날뛰는 게 속편할 지도 모르겠어.’
각성자들 중에는 일부러 총을 안 쓰는 이들이 있다던데, 아마도 이런 고민을 하다가 결정한 방식이 아닐까 싶었다.
‘나는 애초에 비전투계열이니... 근거리 공격 스킬 같은 건 없지만.’
그래도 마나를 실어서 45킬로그램 대검을 휘두른다면, 그것 자체가 스킬에 준하는 일 아닐까.
‘어렵구나.’
쉬려고 했는데,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그러는 중에도 아래쪽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간헐적으로 자잘한 진동이나 폭음 같은 게 들려오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볼까 했던 그는 고개를 흔들며 일어나 앉았다.
철컥, 철컥.
‘군용 보급품은 아닌 것 같고, 개인 소지품인가.’
인벤토리에 있던 권총들을 종류별로 꺼내어 만져보았다.
스캔 데이터를 토대로 분해와 조립을 해보기도 하고, 어떤 것이 손에 더 잘 맞는지도 따져보았다.
‘아무래도 좀 작네. 내 손이 커져서 그런가.’
기본적으로 구경이 작은 권총들이기도 했다.
아마 보조 무기 정도의 역할로 소지하고 있던 게 아닐까 싶었다.
‘발목에 숨겨도 될 법한 느낌인데.’
그래도 권총들의 스캔 데이터가 있으니, 그것을 토대로 더 큰 권총을 만들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일반 소총탄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 크기면 좋겠지만... 하루 이틀에 될 일은 아니겠구나.’
아무리 설계도가 있다고 해도, 똑같은 제품이 아니라 개량하거나 크기를 키우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자잘한 차이가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건 드럼탄창 제작 때 겪어본 일이기도 하고.
‘음. 조금 조용해진 것 같은데.’
숨구멍 쪽에 귀를 기울이던 그는 왼쪽 옆구리에 홀스터를 장착, 그곳에 권총 한 자루를 꽂아넣었다.
‘전투에 방해 안 되려나. 허리 쪽으로 바꿀까.’
그곳에서 권총을 뽑아드는 동작을 몇 번이고 연습해보았지만, 아직은 손에 익지 않았다.
‘소총을 두고 이걸 뽑을 일이 있을까 모르겠네.’
그런 일이 생기지 않는 게 가장 좋지 않을까.
이건 무음모드도 없으니, 차라리 활을 꺼내 쥐는 게 나을 수도 있는데.
‘그러고보니, 소형 활을 만들어보겠다던 것도 계속 미루고 있었네.’
강철 와이어의 장력을 활용하는, 마나가 아니면 장전이 불가능한 수준의 소형 크로스보우.
대략적인 설계는 완성했지만, 아직 시제품 제작은 하지 않고 있었다.
‘총이 너무 좋아서 그래.’
탄약이 넉넉해지지 않았다면 아마 그쪽으로 더 집중했을 텐데, 살짝 아쉬워질 때마다 어떤 식으로든 보충되고 있으니.
‘이건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다시금 자리에 누운 그는 양을 세어보는 대신, 인벤토리 안에 있는 빈 탄창들에 총알을 채워넣는 것으로 잠을 청했다.
* * *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인벤토리 창이 여전히 열려있었다.
창을 안 닫고 그렇게 두면 마나 소모량이 더 커지는데, 워낙 기본 회복력이 좋아져서 티도 안 났다.
‘날이 밝았구나. 꽤 자버렸네.’
종종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잘 자고 일어났더니 엉뚱한 곳에 묶여있거나, 자는 동안 죽어버려서 이미 저승에 가있는 상상 말이다.
‘적어도 오늘은 아니군.’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차린 그는 어젯 밤에 꽤 효과를 보았던 안약을 다시 넣었다.
‘좋긴 한데, 남용하진 말아야지.’
잠자리를 수습하고 조심스럽게 밖에 나와보니, 절벽 위쪽은 어제나 지금이나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아래쪽은 달랐다.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지, 몇몇 건물들이 무너져있었다. 천막이 갈기갈기 찢기거나 내려앉은 모습도 보였다.
‘그정도로 시끄럽진 않았던 것 같은데.’
혹시 생각보다 훨씬 제대로 곯아떨어졌던 걸까. 살짝 반성하며 소총을 고쳐쥔 그는 그곳에 무엇이 있었든 지금은 그 존재감이 사라졌음을 느꼈다.
‘죽은 자도 있고.’
멀리 무너진 절벽 한쪽에, 하반신은 어디로 가고 상체만 남아있는 이가 보였다.
‘저기 있구나.’
그 사람이 잃어버린 하반신은 상반신이 있는 곳에서 거의 30미터 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잘리고 나서 기어간 건 아니야. 바닥에 핏자국이 없잖아.’
허리의 단면이 지저분한 것을 보니, 베어진 것이 아니라 찢기거나 뜯어낸 느낌이었다.
설마하니 허리를 갈라버리고 나서 반쪽을 집어 던지기라도 한 걸까.
‘사람 허리를 반으로 찢어버릴 정도면, 그렇게 조용할 리가 없는데 말이지.’
자신이 아무리 숙면을 취했다고 해도, 그런 괴수가 나타난 상황에서까지 잠을 자고 있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각성자들끼리 붙었다 치면, 공격계열 스킬일 수도 있겠구나.’
아무튼, 저곳에서 누군가가 싸웠다.
죽은 이가 하나 보이고, 그를 죽인 이는 아마도 떠난 것 같았다.
‘왜, 가 문제군.’
어째서, 다들 도망간 기지에서 싸움을 벌였을까. 와일더 클랜 사람들일까?
‘토벌대를 운운하던 것 같았는데.’
어젯밤 침투 과정에서 누군가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습격이라고 해서 토벌대인 줄 알았다고 말이다.
‘와일더 클랜을 사냥하는 이들이 있다고 했었지.’
사라 레드우드가 말해주었다.
다소 과장된 소문이라고 했지만, 와일더 클랜과 비슷한 무력 단체가 활동 중인 것 같다고.
‘그녀도 제대로 알지 못할 정도면, 정보가 그만큼 없다는 건데....’
그래도 과장이라고 했지 허위라고 하지는 않았던 걸 보면, 와일더 클랜과 대척점에 있는 단체가 있긴 한 듯 했다.
‘여기서 아무리 궁리해봐야 답이 나오는 건 아니지.’
그는 아래로 내려갔다.
이미 무너져버린 건물이나 내려앉은 천막은 아마도 전투 과정에서 그렇게 된 듯 보였다.
‘눈도 못 감고 갔군.’
죽은 남자의 이마에는 미국식 죄수 문신이 있었다. 팔뚝이 아니라 이마에 새겼다는 건 그만큼 흉악범이라는 뜻일까.
‘도망노비 문신 같네.’
죽은 자는 딱히 갖고 있는 게 없었다. 누군가가 이미 소지품을 뒤진 건지, 바닥의 핏자국 한쪽에 발자국 몇 개가 찍혀있는 게 보였다.
‘팔이 하나 없구나.’
외팔이 아니라, 멀쩡하던 팔이 잘린 것 같았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시선을 돌리니, 멀리 보이는 창고 입구 앞에 잘린 팔 하나가 놓여있는 게 보였다.
‘창고를 열려고 했나보네.’
성공했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하지만, 열었다고 해도 실망했을 것 같았다.
‘유감입니다.’
본의 아니게 허탕을 치게 했네요.
속으로 중얼거리던 그는 가까운 건물부터 수색을 시작했다.
어지간하면 그냥 가려고 했는데, 눈에 보이는 걸 무시하기도 좀 그랬다.
‘역시, 제대로 못 챙기고 떠났어.’
개인 숙소로 보이던 곳엔 그곳을 사용하던 이들의 물품들이 대부분 남아있었다.
그다지 쓸모 있는 것들은 별로 없었지만, 자잘한 단말기나 타블렛에서부터 무전기, 구형 라디오, 디지털 액자 따위가 그의 인벤토리로 차곡차곡 들어갔다.
“오.”
개인 캐비넷에 들어있던 의류들을 챙기던 그는 그 구석에서 누군가가 숨겨둔 종이상자를 발견하기도 했다.
그곳엔 각종 반지나 목걸이, 귀걸이 따위가 종류 구분 없이 섞여있었다.
‘죽은 이들에게서 벗긴 거겠지.’
약탈 전리품일까.
찜찜하지만, 챙기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속옷 빼고는 다 챙기자.’
입던 옷이라고 해도 어딘가엔 쓸모가 있다. 정 뭣하면 실 단위로 분해해서 써먹어도 되니까.
“아....”
그러던 최강혁은 문득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시간낭비했네.”
애초에 구석 구석 뒤지고 다닐 필요가 없었다. 그는 그냥 이쪽 저쪽을 훑으며 보이는 모든 것들을 쓸어담았다.
‘나중에 시간 나면 버릴 것만 처분하면 되잖아.’
골라서 갖는 게 아니라, 일단 챙기고 나중에 고르면 된다. 고급 인벤토리에도 여유가 있고, 특수칸도 아직 30톤은 더 담을 수 있다.
그렇게 이리 저리 뛰어다니다보니, 정말로 그 여유롭던 인벤토리마저 위태위태해졌다.
‘이건 좀 너무했나.’
공용화장실의 세면대와 수도꼭지, 수세식 변기까지 챙기던 그가 잠깐 머뭇거리며 생각했다.
‘아니야. 다 챙겨. 넘치면 인벤토리로 바꾸면 돼.’
루팅이 안 되는 게 문제지, 되면 문제될 게 없다. 쓸모 없는 잡동사니와 무게만 나가는 것들을 처분하며 돌아다니니 자잘하게 인벤토리가 늘어나기도 했다.
“건물은 포기를 안 하는구나.”
루팅이 안 되는 건물들이 있었다.
가장 안쪽의 창고가 그랬고, 그 외에도 본부 건물과 몇몇 큰 건물들이 안 되었다.
그래도 천막이나 가건물 형식의 건물들은 루팅이 가능하다고 했다. 통째로 담거나 분해할 필요 없이, 건물은 건물대로 처분했다.
‘몇 칸 안 주네.’
어느새 입구 근처까지 온 그는 그곳에 있던 바리케이트와 철조망까지 깔끔하게 치워버린 후 그곳을 나왔다.
어쩌면 죄수를 죽인 이가 돌아올 지도 모른다고 긴장했는데, 확실히 떠나버린 건지 만나지 못했다.
‘그린캠프 사람들이 오면 이곳을 접수할 수도 있을까.’
그냥 버려두기엔 아까운 곳이긴 했다.
다른 캠프에서 일종의 사냥 기지 정도로 꾸려도 나쁠 것 같지 않은데, 그렇게 보면 입구의 바리케이트는 그냥 두었어야 했나 살짝 미안해졌다.
우우웅....
‘이쪽이군.’
품속의 조각이 안내하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 그는 다시금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이틀을 더 움직였다.
“이거 좋은데?”
연습 겸 해서 대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근접 전투에선 오히려 소총보다 나았다.
‘딱히 조준할 필요도 없고, 그냥 막 휘두르면 되니까 편해.’
특수장치의 마나 잔량을 확인하느라 신경쓸 일도 없다.
어지간한 건 한 방에 썰리고, 한 번에 안 되는 것들도 도끼로 장작을 패듯 여러번 후려치면 결국 반쪽이 났다.
들고 있는 것부터 휘두르는 것까지 모두 마나를 소모한다는 게 단점이긴 하지만, 전투가 엄청나게 길어지지만 않는다면 큰 문제는 없을 듯 했다.
‘날이 조금 빠진 것 같아.’
아무래도 몬스터들의 뼈와 살, 혹은 단단한 껍질을 가르고 깨부수다보니, 날이 온전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시간이 나면 손질하기로 하고 인벤토리에 넣은 그는 앞에 자리한 동굴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이제 안 오는 건가.’
그곳으로 향하던 그를 어떻게들 알고 멀리서부터 달려와 반겨주는 놈들이 많았다.
동굴 앞까지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그 역시 적지 않은 부상을 입었지만, 몇 차례 전략적 후퇴를 하며 회복과 공격을 반복했었다.
‘고작 쇠붙이 하나 찾겠다고 이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만약 고대 유적지를 처음 발견한 날 일이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았다면, 아예 시작도 안 했을 것이다.
‘그래도 시작을 했으니 끝을 봐야지.’
천천히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무척 어두운 곳이었지만, 오히려 밖에 있을 때보다 잘 보이는 것 같았다. 블랙 퓨마 킹의 핵이 준 공능이었다.
‘싱거운데.’
동굴 밖에서 엄청나게 싸운 터라, 동굴 안쪽엔 얼마나 대단한 놈들이 남아있을까 조금 우려도 했었다.
하지만, 막상 들어와보니 무척 썰렁했다.
자연동굴은 입구에서 조금만 들어가면 거의 공동 정도의 넓은 공간으로 이어졌고, 그곳엔 몬스터들이 없었다.
‘밖으로 나와서 막으려고 했던 건가.’
생각해보면 그게 그를 막으려고 그런 건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어쩌면 단순히 사냥을 하려고 했을 수도 있고.
‘근데 내가 너무 강한 거지.’
하나 둘 썰리기 시작하고, 동족들을 돕기 위해 더 튀어나오고... 그렇게 된 거 아닐까.
〈 61화 〉 061.
061.
‘고블린들 뼈구나.’
그렇게 걷던 최강혁은 바닥 곳곳에 무더기로 쌓여있는 여러 몬스터나 짐승들의 뼈를 보았다.
아마 사냥감을 잡아먹고 뼈는 적당히 버린 것 같은데, 그런 것들이 동굴 곳곳에 쌓여있었다.
‘동쪽 왕이 생각나네. 건강하겠지?’
주기적으로 찾아가서 먹고 버린 뼈를 청소해주곤 했는데, 이제 그건 누가 하려나 궁금했다.
‘뭐, 뼈를 청소해주는 녀석들이 있긴 했으니까.’
그곳에 있던 뼈들을 비슷하게 치웠다.
청소의 개념보다는, 조각의 위치가 그곳이라고 해서 찾아보는 중이었다.
‘조각을 가진 놈이 여기서 잡아먹힌 건가.’
그렇게 루팅한 뼈다귀들 사이에서, 그가 찾던 조각을 찾아낼 수 있었다.
‘얼마나 남은 거야? 개수라도 알려주면 좋겠는데. 몇 분의 몇이든, 퍼센트든 눈에 보이면 좋잖아.’
속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을 넣었던 인벤토리의 반응이 이상했다. 정확히는 그 인벤토리 안에 모아둔 조각들이 이상해졌다.
‘뭐지.’
원래 인벤토리에 넣은 것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 조각들만 예외로, 자잘하게 빛을 내거나 진동을 하는 정도의 모습을 보였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이상이었다.
새로운 조각을 넣었더니, 그동안 모아왔던 수십 개의 조각들이 일제히 강한 빛을 발하며 인벤토리 안에서 하나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합쳐지는 건가?’
하지만, 그렇게 구체 형태를 갖추던 조각들은 그 상태로 계속 진동할 뿐 더 이상의 변화를 보이지는 않았다.
‘아직 더 남은 건가... 아차.’
최강혁은 자신이 탐지기로 사용하고 있던 조각 하나가 남아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것을 인벤토리에 넣었더니, 그게 정말 마지막 조각이 맞는지 금속 구체의 비어있던 공간에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정말 합쳐지는구나.’
일부 조각들은 깨지거나 닳은 흔적들이 있어서, 다 모으더라도 조립이 불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분명히 사이사이 존재하던 틈새들이 그 특유의 황금빛 광채와 함께 메워지고 있었다.
“......?”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빛을 뿜으며 하나로 합쳐지던 구체는 어느 순간부터 그 빛이 점점 줄어들더니, 이내 완전히 빛을 잃고 그대로 멈추었다.
‘끝이야?’
내 1년은?
그 개고생의 시간은?
최강혁은 살짝 넋나간 얼굴로 그것을 인벤토리에서 꺼냈다.
“.......”
핸드볼 공과 비슷한 크기의 황금빛 구체.
그 겉에는 뜻모를 상형문자들이 새겨져있었는데, 그것은 왠지 고대의 언어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미래의 글자 같기도 해서 신기했다.
‘그래서, 이게 끝이냐고.’
그냥 신기하면 되는 거냐고.
이쪽 저쪽을 살펴보던 그는 그제야 그것이 완전한 형태를 완성한 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조각이 모자란 건 아닐 거야. 틈새가 있긴 한데, 애매해.’
스캔을 해보았지만, 형태까진 읽을 수 있어도 그 상태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금이라도 먹여볼까.’
인벤토리에 있던 패물 중에서 아무 거나 꺼내어 대보기도 했지만, 그걸 흡수하거나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애초에 이건 금도 아니었잖아.’
시스템은 그것을 ‘알 수 없는 금속’ 이라고 했다. 시스템도 모르는 금속이 있다는 건 그 때 처음 알았다.
‘설마, 정말로 이게 끝은 아니겠지?’
머리를 벅벅 긁던 그는 그 구체를 들고 동굴을 나섰다. 그리고, 비로소 동굴 안에선 보지 못했던 희미한 기운을 볼 수 있었다.
‘이거... 마나 아닌가?’
금속 구체가 공기 중의 마나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아주 미세한 양이어서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그나마 내가 각성자니까 보이는 거겠지.’
일반인은 마나를 보거나 느끼지 못한다.
만약 느낄 수 있다면 ‘기감이 뛰어나다’고 표현하는데, 그런 이들은 머지 않아 각성자가 된다고 들었다.
‘마나를 흡수하고 있어. ...혹시, 복구하는 데에 마나가 필요한 건가?’
그는 자신의 마나 일부를 구체에 집어넣어보았다. 그리고 그의 예상이 맞았다.
‘된다.’
광채가 다시금 살아났다.
아직 남아있던 약간의 틈새를 메우기 시작하더니, 이내 완벽해진 구체가 그의 손바닥 위로 둥실 떠올랐다.
“어?”
당황해서 손을 뻗어보았지만, 아무렇지 않게 그의 손을 피한 구체는 그대로 허공에 멈춰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쪽 저쪽으로 내뿜던 광채가 곧 그 아래에 있던 최강혁을 비추었다.
‘뭐지?’
그 빛을 몸에 받은 최강혁은 자신의 모든 것이 벗겨져 알몸이 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닌데.’
옷은 멀쩡했다.
멜빵으로 걸고 있는 소총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 구체는 분명 그를 엿본 것 같았다. 당장 그 겉에 새겨져있는 문자들부터 조금씩 형태를 바꾸고 있었다.
‘영어? ...한글?’
알파벳을 보여주다가 한글 초성으로 바뀌기도 하더니, 종래에는 아무 문자도 없이 매끈한 형태가 되었다.
그리고 나서, 그 표면에 새로운 문장들이 나타나고 사라졌다.
[최소 자격을 확인했습니다]
[대상의 지능 수준 : 중]
[새로운 마스터의 인증을 마칩니다]
[저장된 기본 설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재 설정은 ‘모두 꺼짐’입니다.]
[새로운 설정을 시작하시겠습니까?]
“.......”
물끄러미 바라보던 최강혁은 이쪽 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옆에 있다면 ‘이게 뭐죠?’라고 묻고 싶었지만, 지금 그는 혼자였다.
[새로운 설정을 시작하시겠습니까?]
여전히 공중에 떠있는 구체.
그리고 그 표면에 튀어나와있는 문장.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안전한 곳에서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곳은 여전히 위험하니까.
‘마침 동굴도 있으니.’
그곳으로 향하며 뒤를 보니, 황금 구체가 그를 따라 움직였다.
왠지 그럴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인 그는 그것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확인한 후, 동굴 입구를 강철판으로 단단히 틀어막았다.
“조명을 안 켜도 되겠네.”
황금 구체의 광채가 상당했다.
그러면서도 그 표면의 글자가 눈부시지 않고 또렷하게 보이는 게 신기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티팩트 종류 같은데.’
어쩌면 지금도 마나를 소비하는 중일 지도 모르기에, 서둘러 녀석이 보여주는 대로 ‘설정’ 이라는 것을 시작하기로 했다.
“설정... 시작.”
머뭇거리며 말하니, 다시금 표면의 문장이 사라지고 매끈해진 구체가 천천히 내려와 그의 정수리 위에서 멈추었다.
‘...움직이면 안 되겠지?’
쭈뼛거리며 기다리고 있으니, 곧 그의 머리 위쪽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정수리 열받으면 머리카락 빠진다던데.’
쓸데 없는 생각이 이어졌지만, 그런 잡생각은 곧 멈추었다. 신기하게도, 그의 시야에 새로운 것이 보이고 있었다.
‘시스템 창하고 비슷하네? 근데 좀 달라.’
그것보다 더 맑고 또렷했다.
마치 HD화질에서 UHD화질로 바뀐 듯한 느낌이라 상쾌한 기분까지 들었다.
‘우리 말로는 도우미라는 거구나.’
구체의 정체를 그제야 알게 되었다.
그것은 ‘모든 도구를 활용해 사용자를 보조해주는 장치’ 라고 했다. 가장 적절한 단어는 ‘헬퍼’ 나 ‘도우미’ 라고.
‘아까 그건... 내가 가진 지능 수준하고, 알고 있는 지식을 확인한 거였구나.’
[대상의 지능 수준 : 중]
다시금 떠오른 글자에 살짝 무안해졌지만, 그래도 중간 수준이면 다행이지 생각했다.
‘중이면, 하보단 낫겠지. 내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고.’
그런 무안함보다는 신기함과 기대감이 커졌다. 지금 설명대로라면, 해당 구체를 활용해서 할 수 있는 것들이 굉장히 많았다.
‘에너지 공급이라.’
녀석을 구동하기 위해선 에너지 공급이 필수라고 했다. 전기도 가능하고 자원도 가능하지만, 지금 그가 줄 수 있는 것들 중에는 마나가 가장 효율이 좋은 듯 했다.
‘자체적으로도 주변 환경에서 흡수를 하지만, 양이 적어서 오래는 못 버티는거군.’
만약 외부에서 공급을 해주지 않을 경우, 지금 세상을 기준으로 하루 종일 흡수해도 5분 정도 활성화되는 게 고작이라고 했다.
그 오랜 세월동안 유적에 있었지만, 마스터가 없는 상황에서는 자가 회복도 멈춰버리니 내재된 마나가 충분하지 않았다고.
‘자동 링크가 가능하구나.’
그것을 설정하면, 그가 가진 마나와 실시간으로 연동해 마나 공급이 끊기지 않도록 할 수 있다고 했다.
‘음... 괜찮아.’
혹시 그쪽으로 소모되는 양이 많아져서 자동 회복에 문제가 생길까 싶었지만, 잠깐 확인해보니 그정도는 아니었다.
‘고급 인벤토리 10칸 정도 소모율이면 별 거 아니지.’
주인이 가진 모든 도구들을 활용해 보조해준다는 것.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하나 하나 확인할 수 있었다.
‘자동 링크를 다른 곳으로도 추가할 수 있구나.’
돌격소총이나 저격소총의 마나 보조 장치를 링크시키면 굳이 매번 마나 게이지를 확인하고 충전할 필요가 없게 된다.
또한 버튼을 누르지 않고도 원하는 보조 기능을 켜거나 끌 수 있다.
심지어 레이저 스타일 조준 기능의 경우, 조준경이 아니라 육안으로도 볼 수 있게 되었다.
‘뭐야, 이거.’
레이저 조준만이 아니었다.
소총의 조준경을 시야 한쪽에 자동으로 띄울 수도 있었다. 현재 총이 겨누고 있는 곳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거, 연습한 게 도루묵이 되잖아.’
도구가 너무 좋으면 사람이 게을러진다.
그동안 몸에 익힌 감각들이 사라지는 건 원하지 않는데... 그렇다고 안 쓰기도 뭣하고.
‘대단한데?’
이런 아티팩트를 누가 만든 걸까.
그리고, 어째서 고블린들이 그것을 사용하지 못하고 조각내서 나눠가진 걸까.
[그들은 최소 자격을 획득하지 못했습니다.]
“지능 수준?”
[복합적인 이유입니다.]
최소 자격.
그게 뭔지는 몰라도, 통과하지 못한 이들에겐 그저 황금빛 금속 구체일 뿐이라고 했다.
고블린들은 역시나 금붙이인 줄 알고 깨부숴서 가진 모양이고.
‘내구도가 안 좋은 건가.’
그렇게 쉽게 부서졌던 걸 생각해보면 살짝 걱정이 되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설명을 들어보니, 지금처럼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드러내지 않는 것도 설정으로 바꿀 수 있다고 했다.
고블린들이 그것을 부숴서 가진 게 아니라, 애초부터 조각난 상태로 보존되어있었다고도 했다. 오랜 시간 비활성화 상태로 놓여지면 그렇게 된다고.
아마도 고블린들은 그렇게 조각난 것들을 제멋대로 주워갔던 모양이다.
“어둡네.”
설정으로 가능하다고 해서 안 보이도록 해보았더니, 정말로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강화되는 시력은 문제 없이 발동되었고, 도우미가 보여주는 화면도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음....’
그리고, 최강혁은 이어진 도우미의 요청사항에 고민을 했다. 그것은 그가 가진 시스템에 대한 접근 권한을 요청하고 있었다.
‘시스템도 일종의 도구로 인식하는 거구나.’
마스터가 지닌 도구.
그것을 활용해 보조해주는 장치.
따져보면 그가 가진 시스템 또한 도구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긴 했다.
‘허락해도 되는 건가.’
하지만 살짝 우려되는 건, 지금의 도구가 그의 시스템을 장악해버리거나 훔쳐가면 어쩌나 하는 고민 때문이었다.
‘영화를 너무 봤나.’
잠시 고민하던 그는 새로운 질문을 건네었다.
만약 시스템 접근 권한을 공유할 경우 어떤 것이 가능해지는지에 대해서였다.
“...음.”
그러자, 많은 응용 방법들이 시야 한쪽을 메우기 시작했다. 그 하나 하나가 꽤나 유용해보이는 것들이었다.
‘자동 정렬 기능은 진짜 좋네.’
인벤토리 안에 있는 것들을 종류별로 구분해주거나, 비어있는 탄창을 자동으로 채워주거나, 미리 지정해둔 대상의 경우 루팅하자마자 대신 처분해주거나 등등... 정말로 도우미가 해줄 법한 기능들이 눈에 들어왔다.
“좋아. 접근 권한 공유 수락할게.”
만약 이 장치가 사실 나쁜 놈이 만든 거라고 해도, 지금까지 늘어놓은 것들이 그저 사탕발림이고 속임수라고 해도....
‘1년을 넘게 부었어. 그동안 헛고생을 한 거라면, 차라리 완벽하게 실패하는 게 낫지.’
하지만 그는 실패하지 않았다.
시스템 접근 권한의 공유는 문제 없이 이루어졌고, 마스터의 허가 없이는 어떤 것도 자체적으로 바꾸거나 처분할 수 없다고 했다.
‘대박... 인가?’
굉장한 도구가 생겼다.
아직은 실감이 잘 안 나지만, 왠지 각성한 것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대단한 일이 될 것 같았다.
〈 62화 〉 062.
062.
“지역 스캐닝이 자동으로 된다고?!”
더 이상 이동 중에 100미터 즈음마다 스캔을 할 필요가 없다. 트럭 타고 갈 때는 스캔하랴 주변 경계하랴 얼마나 고생했던가.
‘그건 그렇고, 이 지역의 고대에 이런 아티팩트가 있었다니....’
생각으로도 도우미와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 굳이 입을 열어 물어볼 필요가 없어졌다.
최강혁은 곧 자신의 궁금증을 해결했다.
이곳의 고대 유적에 모셔져있던 건 맞지만, 이곳에서 만들어진 건 아니라고 했다.
‘아... 우리처럼 외부인이 들어와 남겨놓고 간 거구나.’
그것은 아주 오랜 옛날에, 다른 세상에서 넘어왔던 이가 사용하던 도구라고 했다.
이후 그는 이 지역에서 높은 자리에 올랐고, 그의 사후엔 그가 지니고 있던 것들이 일종의 신물처럼 모셔졌다고.
‘유감이네. 그동안 자격을 얻은 사람이 없어서.’
유적의 벽화를 생각해보면 당시에도 인간에 준하는 지성체들이 존재했던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이들 중에서 마스터 권한을 물려받은 이가 없다는 건 좀 이상했다.
‘최소 자격이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그런 걸 통과하다니 더 이상하잖아.’
그런 생각을 하던 최강혁은 이어서 다른 추측을 더했다.
‘만약 내가 아니었다면?’
다른 사람이 그가 했던 것처럼 그 조각들을 모았다면... 그 사람이 자격을 얻지 않았을까?
도우미는 최소 자격이 뭔지 설명해주지 않았지만, 왠지 그럴 가능성이 커보였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 마지막엔 내 마나도 일부 집어넣었으니까.’
그동안 겪은 고생들을 생각해본 그는 지금 그가 얻은 것이 그 일에 대한 보상이라 여기기로 했다.
‘고작 1년 조금 넘게 개고생한 거 치곤 너무 과한 보상일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어쩔 거야?’
마스터 권한은 그가 죽지 않는 이상 바뀌지 않는다고 했다. 잃어버리거나 빼앗길 걱정도 없는 것이다.
최강혁은 적당한 곳에 앉아서 불을 피웠다.
왠지 도우미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대강 알아보는 것만 해도 꽤 오래 걸릴 것 같아서, 오늘은 이곳에서 밤을 보낼 생각이었다.
‘아주 밀폐된 공간은 아니야. 위쪽 어딘가에 공기 구멍이 있으니까 불을 피워도 문제는 없겠지.’
그렇게 작은 모닥불 옆에 앉아 쉬던 그는 이어지던 도우미의 설명을 멈추고 직전에 표시된 부분을 다시 읽어보았다.
‘처리속도?’
처리속도 향상과 호환성의 보완을 위해, 전자기기나 연산도구를 ‘흡수’하면 도움이 된다고 했다.
그의 인벤토리 안에서 예시로 든 것들은 각종 개인 단말기와 타블렛에서부터, 와일더 클랜의 아지트에서 챙겨온 자잘한 디지털 기기 등이 있었다.
‘기계를 흡수해서 능력을 올린다는 거구나.’
지금도 대단한데 능력이 더 올라가면 뭐가 좋을까 했더니, 같은 작업을 하더라도 마나 소모량이 줄어들고 동시에 더 많은 작업을 더 빠르게 수행할 수 있다고 했다.
‘흡수한다고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아니구나.’
흡수의 개념이 그가 지닌 스킬과는 달랐다. 분해해서 가져가는 게 아니라, 완제품으로 잠시 몸에 담는 느낌이었다.
추후에라도 필요할 경우 도로 꺼낼 수도 있다고 하고, 타블렛의 경우 흡수된 상태에서도 그 안에 들어있는 컨텐츠나 어플, 저장해둔 정보를 열람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 외에 완전 흡수라는 방식도 있다고 하는데, 굳이 그쪽으로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이게 더 좋은데?’
시험삼아 그가 지니고 있던 타블렛을 흡수시켜본 그는 이어서 시야 한쪽에 띄운 타블렛 화면을 보며 생각했다.
훨씬 큰 화면으로 볼 수도 있고, 터치가 아니라 생각으로도 원하는 동작을 수행할 수 있었다.
‘화면 크기도 마음대로 변환이 가능해지고... 불투명이나 반투명 같은 것도 설정으로 바꿀 수 있고. 이거, 드라마 볼 때 좋겠구나.’
마치 개인 영화관처럼 와이드화면으로 큼직하게 확대할 수도 있었다. 조금이지만, 화질이 보정되는 것 같기도 했다.
심지어, 그가 원한다면 그의 눈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눈에도 보여줄 수 있다고 했다.
‘외부 노출은 마나 소모가 늘어나는 거군.’
흥미로운 기능들이 많았다.
아직은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감이 잘 안 잡히는 것들도 있었지만, 굉장한 도구인 것만은 분명했다.
‘어디 보자... 인벤토리에 있는 타블렛이... 뭐 이렇게 많아?’
와일더 클랜 아지트에서 되는 대로 쓸어담은 것들 중 타블렛이나 휴대폰, 단말기 같은 것들이 무척 많았다.
그냥 다 흡수시켰더니, 도우미가 추가로 행할 수 있는 것들을 알려주었다.
‘데이터 통합 관리... 어, 단말기에 코인이 있었어? 이건 내쪽으로 몰아주면 좋지.’
분명 개인의 단말기에는 나름대로 보안장치가 있을 텐데, 녀석이 흡수하면 그런 것들을 무력화할 수 있다고 했다.
‘스캐닝하고 연계하는 거였구나.’
그리고 최강혁은 그것이 도우미의 고유 능력은 아니라, 지금 그가 지니고 있는 스킬들을 활용한 연계 능력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마스터의 능력을 공유해서, 시너지 같은 걸 일으키는 거였어. 정말 좋아.’
아무튼 그의 단말기로 몰아넣은 코인의 액수가 상당했다. 그걸 쓸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당연히 없는 것보단 나았다.
‘다른 타블렛에 있는 자료들이... 이건 누구 거야?’
야동만 한가득인 타블렛도 있었지만, 그건 양호한 수준이었다.
누군가의 타블렛엔 아마도 그 주인이 죽인 것으로 보이는 이들의 사진들이 폴더별로 정리되어있었다.
‘뭐 이런 미친 놈이....’
죽은이의 이름과 대략적인 소속, 죽은 장소가 폴더명이었다. 그 안에 들어있는 건 죽기 전의 모습과 죽고 나서의 모습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쳤다는 생각 밖에 안 들었다. 이런 걸 수집하는 것도 그렇고, 애초에 이것을 위해서 사람들을 죽인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이런 걸 싸이코패스라고 하던가.
‘지우진 말아야지.’
이 또한 나름의 증거가 되어줄 것이다.
어쩌면 고향에 있을 가족들이 그들의 죽음을 알지 못할 수도 있고.
‘평생을 기다리는 것보다, 차라리 일찍 슬퍼하는 게 낫잖아.’
그는 어설픈 동정이나 희망고문을 싫어했다.
자료를 잘 두기로 한 그는 그 외에도 자잘한 것들을 정리하고 쓸모 없을 만한 것들도 일단은 남겨두었다.
‘이런 것도 있었구나.’
개중에는 지도 파일도 있었다.
와일더클랜 내부에서 사용하는 것으로 보였다.
손으로 그린 거라서 실제 지형과 차이가 있을 것 같지만, 그래도 산을 경험한 그는 대충 어디가 어디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다른 거점들이 표시되어있어.’
분명 대박자료다.
그가 직접 찾아갈 필요는 없지만, 어느 캠프에 넘기든 적잖은 값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좋았어.’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그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들이 가능해졌다.
‘그런 게 된다고?’
도우미의 형체를 이루고 있는 금속은 시스템도 알지 못하는 것이라 했었다.
자가 복구는 어떻게 가능한 건지 궁금해서 알아보니, 그가 기대하지 않았던 활용법이 툭 튀어나왔다.
‘마나든 뭐든, 에너지원을 활용하면 원하는 물질을 만들 수 있다고?’
충분한 에너지만 공급된다면, 마치 녀석이 스스로를 고쳤듯 어떤 것이든 생성해낼 수 있다고 했다.
심지어 그가 스캔해두었지만 재료가 없어서 만들지 못하고 있던 것들도 만들 수 있다고 하니, 이거 치트키라도 얻은 거 아닌가 싶어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게 만약 현실이 아니라 게임이라면, 저새끼 게임 좆같이 한다고 욕먹을 수준이잖아.’
그동안 고민하거나 미뤄두고 있던 많은 것들이 무의미해졌다. 당장 저격소총의 총열 부분도 완전히 동일한 재질로 추가 제작이 가능해졌다.
‘한방에 팍 찍어내는 건 아니구나. 하긴, 그런 것까진 기대 안 했어.’
천천히, 마치 3D프린터로 제작하듯 한쪽 끝에서부터 만들어가는 방식이라고 했다.
다만 흡수한 것들 덕에 처리 속도가 빨라져서, 그런 부분에서도 도움이 될 거라고.
그리고, 물질 생성에는 핵심 조건이 있었다.
만들고 싶은 것과 동일한 물질을 실제로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건 문제 없지. 이미 있는 걸 추가로 만들고 싶은 거니까.’
만들고 싶었던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시도해보고 싶었던 건 따로 있었다.
[작업 수행을 위한 에너지원이 필요합니다.]
‘어... 이거로 하자.’
인벤토리에 쌓여있던 각종 잡동사니들을 시스템에 넘기지 않고 녀석에게 주었다. 인벤토리 몇 칸 늘리느니 그런 식으로 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모자라면 이야기하고. 혹시 작업 중간에 에너지가 모자라면 실패하는 건가?’
[아닙니다.]
[멈췄던 작업은 언제든 이어갈 수 있고, 마스터의 의사에 따라 언제든 작업을 종료할 수도 있습니다.]
작업 예상 완료 시간은 5시간 후라고 했다.
‘좀 오래 걸리긴 하네.’
일단 주변의 바닥을 정리하고 잠자리를 만든 그는 모닥불에 고기를 굽고 물을 끓였다.
‘이게 맛있으면 말뚝 박는 게 좋을 거라고 하던데.’
팔팔 끓인 물로 전투식량을 데워먹었다.
과거보다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맛으로 먹는 종류는 아닐 텐데, 이상하게 입에 맞았다.
‘물을 끓이는 것도 가능하다고?’
[끓이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미 끓고 있는 물을 별도로 저장해두신 후, 그것을 데우지 않은 물과 조합 스킬로 연결하시면 끓는 물 상태로 통합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과정에 마나가 소모됩니다.]
‘그야 조합을 할 때는 당연히 마나가 들지.’
그런 식으로 물을 끓일 수 있는 줄은 몰랐다.
그가 혼자였어도 가능한 일이라지만, 도우미가 없었으면 언제 알아냈을 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괜히 물 끓일 때마다 눈치보면서 불 피웠잖아.’
속으로 불평하던 그는 문득 다른 것이 떠올랐다.
‘어....’
물은 충분했다.
아니, 많았다.
“흐흐.”
누가 들으면 기분나쁘다고 할 법한 웃음.
그는 인벤토리 구석에 있던 빈 소총 상자를 이리 저리 만져보며 빈틈을 없애고, 내부를 매끈하게 가공한 후에 앞에 꺼내놓았다.
“이정도면 욕조지 뭐.”
도우미가 알려준 방법으로 물을 끓이고, 그렇게 펄펄 끓는 물을 급조한 욕조에 적당히 채웠다.
차가운 물을 추가로 부어 온도를 조절한 그는 걸치고 있던 것들을 다 벗고 조심조심 그 안에 몸을 담갔다.
“......최고야.”
목아래까지 잠길 정도 크기는 아니었지만,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오랜 시간 누적되었던 근육의 피로가 녹아내리고, 원인 모를 두통마저 조금씩 가라앉았다.
‘워, 때좀 봐.’
물 속에서 적당히 문지른 수준임에도, 샤워만으로는 벗겨지지 않았던 오래묵은 때와 각질이 아무렇지 않게 떨어져나왔다.
‘어우, 더러운 놈아.’
최강혁은 중간 중간 루팅으로 그런 것들을 제거하여 물을 깨끗하게 했다.
물이 좀 식을 것 같으면 일부 물을 뜨거운 물로 바꿔가며 온도를 유지하니, 거의 30분이 넘도록 뜨끈한 물을 즐길 수 있었다.
‘더 있으면 녹아서 죽을 것 같아.’
적당히 하고 나가기로 했다.
다시금 정화한 물로 머리를 감고 몸을 닦아낸 그는 깨끗한 새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더 없이 상쾌한 기분이 되었다.
[완성되었습니다.]
목욕도 했겠다. 기분도 좋겠다.
잠자리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던 그는 문득 시야 한쪽에 떠오른 도우미의 안내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 그거구나.’
살짝 비몽사몽해서, 보면서도 그게 뭘까 생각하고 있었지만 곧 정신을 차렸다.
그렇게 꺼낸 건 평범한 돌격소총이었다.
“.......”
그 옆에 부착된 특수장치에 마나를 넣고, 이런 저런 버튼을 누르다가 발사도 해보던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어 소리쳤다.
“아티팩트가 복사가 된다고!”
돌격소총은 그가 원래 지니고 있던 게 맞았다.
하지만 보조장치는 아니었다. 스캔해둔 데이터대로 도우미에게 제작을 지시했을 뿐이었다.
‘내가 한 거랑 도우미랑 한 거랑 무슨 차이지?’
들어간 금속의 차이일까?
그가 알지 못하는 특수한 무언가가 내부에 들어있던 걸까?
‘하지만, 아티팩트잖아.’
아티팩터가 있어야 만들 수 있는 것 아닌가? 마나를 불어넣든 스킬을 쓰든 할 것 같은데.
‘모르겠다. 나는 모르겠어.’
그저 지금 알 수 있는 건, 그렇게 만들어진 장치가 아무 문제 없이 잘 작동된다는 것 뿐이었다.
‘응용... 가능할까.’
해보고 싶은 것도 생겼다.
해당 장치의 결합부위를 바꾸어, 다른 일반 소총에도 쓸 수 있게 할 수 있는지의 여부였다.
‘디자인은 예전에 스케치해둔 게 있었지.’
도우미에게 그것을 설명하고 작업의 성공 여부를 물어보니,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했다.
‘그저 지정한 대로 제작할 뿐이라는 거군.’
그래도 일단 시도해보았다.
만약 일반 소총에도 해당 장치를 부착하고 활용할 수 있다면, 굳이 돌격소총을 고집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 63화 〉 063.
063.
‘음... 좀 더 잘까.’
정말 오랜만에 욕조에 몸을 담가서인지, 몸 곳곳에 뭉쳐있던 피로가 사르르 녹아서 전신으로 퍼진 느낌이었다.
한숨 푹 자면 개운해질 것 같아서, 그는 가죽 담요를 덮고 눈을 감았다.
‘불침번이 있으니까 안심이야.’
도우미 덕에 좀 더 편하게 잘 수 있었다.
만약 지역 스캐닝의 범위 안에서 변화가 생기면 녀석이 파악할 수 있다고 했다.
‘가능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
지역 스캐닝은 그곳에 뭐가 있는지까지는 알지 못하지만, 제 자리에서 반복해 사용할 경우 미세한 지형 변화까지 파악할 수 있었다.
그것을 응용한다면, 무언가가 뛰거나 걸어다니며 생겨나는 발자국 같은 것들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써먹어볼 일은 없었지만.’
그게 가능하다고 해서, 데이터를 보며 실시간으로 파악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미세한 지형변화를 육안으로 구분하는 것 역시 그리 간단하지 않은 일이고.
‘잘 부탁해.’
만약 일이 생길 경우, 도우미가 타블렛에 내장되어있는 알람 음악으로 그를 깨워주기로 했다.
‘나한테만 들린다고 하니까 문제는 없겠고... 조금만....’
조금만 자자, 라는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곯아떨어졌다.
모닥불이 줄어들어 꺼질 듯 보였지만, 적당한 시점마다 허공에서 튀어나온 나뭇가지가 불길에 얹어졌다.
그 역시 도우미가 한 것이었다.
시스템 권한을 공유하고 있기에, 미리 지시해둔 대로 지정된 땔감을 적당히 꺼내어 불에 넣었다.
너무 먼 거리까진 불가능한 일이지만, 최강혁이 평소 물건을 꺼낼 수 있는 거리까지는 가능했다.
“...헉! 시발!”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식은땀을 흘리며 벌떡 일어난 최강혁은 몇 번이고 주위를 돌아보고 나서 한숨을 내쉬었다.
“개같은 재입대 꿈.”
전투식량을 먹어서 그런 걸까.
찌푸린 얼굴로 투덜거리던 그는 여전히 은은하게 잘 타고 있는 모닥불을 보았다.
“진짜 되네. 고맙다.”
자신의 마나를 계속해서 에너지원으로 공급하고 있지만, 그 이상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
‘알람이 울린 것 같지는 않아. 내가 못 들은 건 아닐 테고, 별 문제 없었던 거겠지.’
어느 정도 긴장을 풀고 푹 잘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굉장한 일이었다.
자기 전에 지정했던 작업이 완료되었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그렇게 만들어진 장치를 일반 소총에 장착해보았다.
“켜지는데?”
마나를 넣었고, 전원을 켰다.
거기까진 문제가 없었다.
타앙!
“...음.”
무음모드가 안 먹혔다.
관통력과 파괴력 강화 쪽은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버튼을 눌러도 마나 소모가 안 된다는 건 제대로 실행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전원은 잘 들어오는데. 뭐가 문제지.’
어디를 어떻게 손을 봐야 할까.
그는 일단 지금 만들어진 장치를 분해해보기로 했다. 그동안은 하나 뿐인 장치를 고장낼 수 없어서 시도해보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리고....’
따로 도우미에게 지시할 일도 있었다.
다름아닌, 그의 특수칸 하나에 자리하고 있는 트럭을 개조하는 일이었다.
‘혼자 타기엔 너무 크다고.’
인벤토리가 있으니 짐칸은 필요 없다.
전체적으로 줄일 수 있는 부분은 줄이고, 그만큼 방호 능력을 높이는 게 좋을 것 같다.
‘잠깐만.’
하지만, 곧이어 그는 한 가지 치명적인 한계를 깨닫고 보류시켰다.
‘개조해봤자, 기름이 없으면 어차피 못 쓰잖아.’
일찍 깨달아서 다행이다.
개조 중간에 알거나, 다 해놓고 뒤에 알게 되면 얼마나 허탈한 일일까.
‘대검이나 개량해보자.’
어차피 힘과 무게를 최대로 활용하려는 무기니 지금 상태도 나쁘지는 않지만, 그래도 휘두를 때마다 손목이 시큰거리는 건 그리 좋지 못한 일이었다.
‘뒤쪽으로 무게를 좀 더 싣는 게 좋겠어. 전체적으로 더 무거워지더라도 그게 나아.’
금방 회복할 수 있다고 해도, 애초에 다치지 않는 게 낫다. 자잘한 부상이 누적되면 그걸 회복하는 데에도 마나가 낭비될 테고.
‘그리고....’
미뤄두었던 작업 중 하나를 끄집어내기도 했다. 다름아닌 게거미의 갑각을 활용한 보호복의 제작이었다.
‘도우미가 있으니까 좋네.’
시간과 노동, 정신력이 필요한 작업들을 그쪽으로 미룰 수 있게 되었다.
그 대신 자원이든 마나든 줘야 하지만, 오히려 그쪽이 더 나은 것 같았다.
‘디자인은 캠프 군인들 것을 베이스로 하는 게 좋겠지. 그게 제일 안정적이었으니까.’
게거미의 갑각은 철보다 좀 더 가벼우면서도 단단했다. 그것을 재료로 만든다면 좋은 보호복이 될 것이다.
‘보호복이 완성될 때까지만 여기 있자.’
마침 휴식이 필요한 시기였다.
그동안 너무 무리해서 달려온 건지, 목표였던 조각 찾기를 끝내고 나니 약간 현타 비슷한 게 찾아왔다.
‘번아웃 이라고 하던가? 그런 건 아닌 것 같지만, 아무튼 조금 쉬긴 해야 해.’
보호복이 완성되면, 그것을 입고 나가자.
그 다음엔....
‘그 다음엔, 뭘 하지?’
원래는 유적탐사 후 양호석의 캠프 쪽으로 가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와 와일더클랜의 뒷거래 정황을 보고 나니 그런 생각이 사라졌다.
“추방형은 예전에 끝났다고 했고.”
원래 있던 캠프로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사실 추방형을 제외하면 배지현 준장도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닐 지도 모르는데.
‘안일해.’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그린캠프로 가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소문으로 들었던 레드캠프 쪽도 생각해보았다.
“.......”
하지만 그 어떤 곳도 마음에 닿지 않는 건, 애초에 가고 싶은 곳이 있었기 때문임을 그는 알았다.
“집에 가고 싶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
조금 낡은 동네 식당.
주인 아주머니는 퉁명스럽지만, 값싸고 맛있는 국밥과 깍두기가 그립다.
다들 뭐가 그리 바쁜지 이리 저리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 짐승이나 몬스터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를 하루 종일 걸어보고 싶다.
‘이제 1년 조금 넘게 남은 건가.’
4년의 형기.
어느새 반을 훌쩍 넘겼다.
‘참 많은 일이 있었네.’
고작 세 곳에 있었을 뿐이라고 간추려서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그 각각의 장소마다 아주 많은 일들이 있었다.
‘차라리, 아무 곳에도 가지 말까.’
마침 와일더 클랜의 거점들이 표시된 지도도 손에 있다. 그곳들을 찾아다니며 깨부수다보면 남은 형기를 마칠 수 있지 않을까.
‘위험하겠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살짝 꺼려지는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왠지 결국은 그 길을 가게 될 것 같았다.
‘각성하고 나서부터일까. 아니면 원래부터 있던 걸까.’
아버지의 폭력성은 술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만 불거져나왔다. 어쩌면, 자신에겐 각성이 그 매개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이젠 내가 폭력적이지 않은 사람이라고 주장하기도 어려워졌으니.’
그의 특수 인벤토리 한칸 구석엔 지금도 수십 구의 시체가 들어있었다.
와일더 클랜의 아지트에서 루팅했던 모든 이들이 여전히 그곳에 있는 것이다.
‘수집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그것 역시 일종의 증거품이었다.
만약 캠프에 합류하지 않고 뭘 하고 돌아다녔냐고 누군가가 따진다면, 그 앞에 꺼내놓을 생각이었다.
‘흐음. 궁금한 게 많았는데.’
도우미의 과거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기본 기능 외에는 저장된 게 없다고 했다.
애초에 마스터의 능력을 보조해주는 정도의 도구일 뿐, 자체적인 저장이나 백업 능력 같은 건 거의 없다는 것 같았다.
‘과거의 마스터에 대해선 간단한 이력만 남아있는 거군.’
그저 외부에서 이 지역으로 들어왔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어 남게 되었다는 것 정도였다.
‘이런 걸 활용하는 인물이라면, 고대 수준의 세상에선 신 취급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겠지.’
유적지의 벽화를 떠올려보면 나름 이해가 갔다. 하지만, 그 시절의 인물들이 다들 어디로 사라진 건지 궁금하기도 했다.
‘이곳도 우리 세상하고 비슷한 건가.’
문명이 만들어지고, 또 쇠퇴하거나 사라지기도 하고. 그 과정에 사라진 많은 것들이 후세에 발굴되어 연구되기도 하고.
‘이쪽도 아직 개척하지 못한 곳이 무궁무진하겠지만... 쉽지는 않겠지.’
어쩌면 이곳에 있던 원주민들은 몬스터들 때문에 사라진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숫자의 몬스터들이 존재한다면, 인간 수준으로는 막아내기 어려울 테니까.
‘각성자 같은 개념은 없었던 건가.’
도우미는 그런 부분까진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그것과 비슷한 도구들이 더 있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비슷한 도구라.’
신물 취급을 받았다고 했던가.
다른 도구들은 어떤 능력을 갖고 있을지 궁금했지만, 굳이 찾아다니고 싶진 않았다.
‘이 녀석을 모으는 데만 1년이 넘게 걸렸는데, 다른 건 또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잖아.’
힌트라도 있으면 모를까.
어디에 어떤 식으로 보관되어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유적지의 벽화에도 그런 부분은 없던 것 같았고, 도우미도 알지 못했다.
‘해석이 된다고?’
다만 그가 스캔으로 저장해두었던 유적지의 벽화, 그리고 그 아래 적혀있던 상형문자의 경우 도우미가 번역을 해주었다.
‘신화에 대한 거구나.’
그것은 신이 보낸 사자와 그가 지니고 있던 신물에 대한 이야기를 그림과 글로 표현한 것이었다.
‘없네.’
그것에도 다른 신물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그저 벽화에 그려진 대로라면 검과 방패가 아닐까 짐작해볼 뿐이었다.
“오. 그런 것도 되는 거야?”
반가운 기능이 더 있었다.
그가 직접 하기엔 까다로웠던, 자신의 몸 전체를 스캔하는 것이었다.
다른 이들을 스캔하는 건 쉬워도, 스스로를 스캔하는 건 조건이 필요했다. 다름아닌 그의 몸을 비출만한 전신거울이나 물이었다.
‘내 눈으로 나를 볼 수가 없으니까.’
그동안은 팔이나 다리, 몸 등등 눈으로 볼 수 있는 부분 위주로 스캔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도우미가 있어서, 전신 스캐닝을 실시간으로도 행할 수 있다고 했다.
‘내 몸이 이렇구나.’
스캔 데이터를 보았다.
거울로 보았던 때와는 조금 다른 기분이었다.
‘건강에는 특별한 문제가 없구나.’
스캔한 데이터를 통해서 신체 강화의 방향을 구상해볼 수도 있었다.
어느 부위를 더 중점적으로 강화하고 수련할지, 어느 부분의 밸런스가 안 맞는지 등등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니 무척 좋았다.
“시간 있을 때 운동이나 좀 할까.”
인벤토리에 있던 간단한 구조의 철봉이나 평행봉 따위를 근처에 설치해둔 그는 모처럼 제대로 운동에 집중하며 땀을 흘렸다.
그렇게 운동과 휴식을 병행하며 이틀이 지나자, 도우미에게 맡겼던 제작이 완료되었다.
“좋은데.”
기존에 걸치고 있던 흉갑을 벗고, 새로 만들어진 것으로 갈아입었다.
일단 더 가벼우면서도 달라진 몸에 더 잘 맞았다. 꽉 막아주는 단단한 느낌이 좋았다.
‘굳이 전신 보호복까진 필요 없겠지.’
일단 만들어두긴 했지만, 전부 착용하지는 않았다. 상체와 어깨, 팔꿈치, 무릎과 정강이 정도면 족했다.
‘하체도 보호하는 게 좋긴 하겠지만, 거슬려서 못 입겠단 말이지.’
새로 만든 대검 역시 허공에 몇 번 휘둘러본 후, 만족스럽게 챙겨 넣었다.
“...오.”
무기를 넣고 꺼내는 부분에서도 도우미가 있어 편리해졌다. 그의 생각을 읽고, 원하는 무기를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꺼내줄 수 있는 것이다.
‘인벤토리에서 꺼내려면 좀 번거롭긴 했었지. 정확한 칸도 알아야 하고, 위치도 기억해둬야 하고.’
그런데 굳이 인벤토리를 열 필요도 없이 알아서 그의 손에 얹어주니, 마치 자동 무기 교체 슬롯 같은 게 생긴 기분이었다.
“이렇게 쏘다가... 이렇게 바꿀 수도 있고.”
저격총을 들고 있던 그는 금세 돌격소총을 쥔 모습이 되었다가, 또 한바퀴 돌면서 어느새 손에 쥔 대검으로 앞을 베는 동작을 행했다.
그 모든 과정이 딜레이 없이 이어지니, 다시 한번 지난 1년여의 고생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검을 추가로 만들어야겠어. 창도 그렇고.’
단단한 놈들을 때리는 과정에 틀어박히는 경우, 그것을 도로 뽑아내느라 잠깐 버벅이게 된다.
하지만 여분의 무기가 추가된다면, 굳이 뽑아내지 않고 새것을 바로 손에 쥘 수 있다.
‘기존에도 안 뽑고 새 것을 꺼내는 건 가능했었지만....’
창의 경우, 망가지거나 했을 때를 대비한 예비 물량이 있긴 했다.
하지만 박힌 것을 뽑는 것과 인벤토리를 열고 새 창을 꺼내는 것에 시간적 차이가 별로 없다보니, 평소에는 그냥 박힌 걸 뽑는 편이었다.
‘이젠 아니야.’
아주 많은 것이 달라졌다.
또한 앞으로도 달라질 것이 분명했다.
[수량 1,000개 확인되었습니다.]
[제작을 시작합니다.]
이제 탄약도 자체제작할 수 있다.
금속만이 아니라, 화약까지 만들어낼 수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기존에 잘 모아두었던 탄피들이 있어서, 조합 스킬과 연계하여 나머지 부분만 만들어 결합하는 방식이 되었다.
‘제작속도가 빠르진 않지만... 너무 난사만 안하면 문제 없겠구나.’
그는 잠자리를 정리하고 모닥불을 껐다.
운동기구들을 루팅한 최강혁은 동굴 입구를 막고 있던 강철판을 제거했다.
“좋은 아침이야.”
햇살이 밝았다.
발걸음도 가벼웠다.
그렇게 그곳을 떠난 최강혁은 이후 한 달 동안 와일더 클랜의 거점 다섯 곳을 지워버렸다.
〈 64화 〉 064.
064.
“최강혁... 또 최강혁이라고?”
“생존자들이 그렇게 말했답니다. 심지어 한국말을 모르는 사람인들데도 그 이름은 확실히 발음하고 있었고요.”
“크흠.”
양호석은 부하의 보고에 침중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놓친 변수 하나가 거대한 폭풍이 되어 날뛰고 있었다.
“통신 연결은?”
“수신되었습니다. 통화 가능하십니다.”
“나가있어.”
“예.”
이제는 야전 천막이 아니라 번듯하게 지어진 건물의 집무실에 앉아있던 그는, 이어서 자신의 앞에 놓인 유선 전화기를 들었다.
“양호석입니다.”
-좀 만나야 할 것 같은데. 다들 벼르고 있소.
“그래야겠지요. 날짜를 잡아봅시다.”
-잡을 필요 없소. 모두 여기로 모이고 있으니, 그쪽도 출발하시오.
통화는 길지 않았다.
제대로 된 대화는 아마도 직접 얼굴을 맞대고 하게 될 듯 했다.
“뭘 알고 그러는 건 아닐 테지만... 이미 선을 많이 넘어버렸어.”
여러 모로 곤란해졌다.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던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그러고보니, 한동안 안 보이는군.’
사라 레드우드.
다른 캠프에서 보인 적이 있다고는 하지만, 정확히 어디서 무얼 하는 건지 아는 이가 없었다.
미국에 연줄이 있다던데, 그쪽 인맥에게 물어보아도 제대로 알지 못할 정도로 비밀이 많은 여자였다.
‘연관이 있는 건 분명한데 말이지.’
그 여자가 나서서 최강혁과 와일더 클랜의 커넥션 의혹을 부숴버렸다.
그리고, 마치 그것을 증거하듯 그들의 거점이 하나 하나 박살나고 있었다.
‘혹시, 미국에서 딴 마음을 먹었나?’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해보았지만, 지금으로선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레드 캠프로 갈 테니, 준비해주게.”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방탄 트럭에 올라탄 그는 잠시 후 기지를 나섰다. 1년 전에 비해서 무척 발전한 그의 기지는 이제 슬슬 외부 방벽의 건설이 시작되고 있는 분위기였다.
방어벽 공사가 일차적으로 마무리된다면, 그곳은 더 이상 임시 개척 캠프가 아니라 정식 캠프가 될 것이다.
‘양호석 캠프가 되겠지.’
그동안 해왔던 노력이 결실을 맺게 되는 일이다. 방해가 있으면 곤란하다.
‘다들 그럴 테고.’
그를 태운 차량이 평원을 가로질렀다.
앞뒤에서 보호하는 차량들까지 단단히 뭉쳐 이동하니, 어지간한 작은 짐승과 몬스터들은 차마 달려들지 못하고 멀리 달아났다.
* * *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야. 좆된 거라니까.”
황량해보이는 숲속 공터.
원래는 공터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랬다.
그나마 남아있는 거라곤 작은 테이블 하나를 두고 마주 앉은 두 남자 뿐이었다.
“.......”
얻어맞은 건지, 퉁퉁 부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던 남자는 테이블 위에 있던 머그컵을 들어 입을 축이는 상대를 보았다.
고작 싸구려 믹스커피인데도 마치 고급 커피숍에 앉아 즐기는 것마냥 한 모금 한 모금을 깊게 즐기는 듯한 표정의 사내.
그가 바로 지금 그곳을 공터로 만들고,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을 지워버린 인물이었다.
최강혁.
최근 들어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지만, 설마하니 그곳까지 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상한 것 못 느꼈어? 정말로?”
“너무 많긴 했지.”
“그러니까!”
최강혁은 좀 알아달라는 듯 소리치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렇다는 거지, 뭐.”
그와 눈빛을 마주하더니 꼬리 마는 짐승처럼 고개를 숙이던 남자는 이어서 다시금 쥐어짜듯 말했다.
“애초에 비호가 없었으면 존재할 수도 없는 조직이었다고. 단순한 뒷거래만으로 이런 규모를 만들 수 있었겠어?”
“그래서... 기업 같은 거였다?”
“형식은 조금 다르지만, 용병회사도 일종의 기업이잖아. 비슷한 거야.”
와일더 클랜이 단순한 범죄조직이 아니라는 건, 그들의 거점을 여러 곳 청소하면서 조금씩 느끼고 있었다. 이런 저런 증언이나 증거도 쌓이는 중이었고.
애초에 범죄조직에 왜 그렇게 각성자들이 끼어있는지도 이상했다.
범죄자 외에, 일반인처럼 보이는 이들이 다수 섞여있는 것도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심증만 있던 것들에 대해서 좀 더 명확하게 정리할 수 있게 된 것은, 지금 앞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노력 중인 남자처럼 이런 저런 정보들을 풀어놓는 이들 덕분이었다.
김창술. 한국인.
다름아닌, 그가 처음 있었던 캠프 출신의 죄수였다. 굳이 따지자면 선배 입소자라고 해야 할까.
“추방형이라는 게, 그런 목적이었다는 건가.”
“처음부터 이상하지 않았어? 죽일 거면 그냥 죽이고 묻거나 태우면 되지, 왜 굳이 멀리까지 보호해가며 내쫓냐고.”
“대부분 죽는다고 들었는데.”
“서류 상으로는 그렇겠지. 어차피 이쪽으로 합류 의심되면 사망처리한다는 건 알고 있잖아.”
서류 상으로는 사망처리.
내부적으로는 리스트에 올린다.
그런 부분 때문에, 자신의 경우 죽었다가 부활하는 케이스가 되어서 기존 서류를 수정하고 폐기하느라 애를 먹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각국 정부에서 범죄집단을 일부러 지원한다고?
그건 좀 아니지 않나.
“여긴 지구가 아니야. 알고 있잖아.”
“그래서?”
“정부하고 기업들이 서로 영역 다툼을 한다는 건 알지?”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지.”
“그거야. 기업 쪽을 견제할 필요도 있고, 그들의 영역이나 자원을 공격하거나 빼앗고 싶은데,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니까....”
“너희 같은 조직을 만들어서 대리전을 하는 건가?”
“맞아. 그런 거야.”
그 말대로라면 자신이 좆된거라던 이 남자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이 컸다.
여러 국가의 정부에서 뒤를 봐주고 있던 무력조직을 박살내고 다니는 중이었으니까.
“.......”
고향으로 돌아가려면, 어떤 식으로든 캠프로 돌아가야 한다. 그곳에 연결 장치가 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되면 연결장치에 장난을 칠 가능성도 있다고 남자는 말했다. 이미 전적도 있다고.
“본국에서 이쪽으로 추방하는 케이스가 흔하지 않다는 건 알지? 적어도 살인범 이상은 되어야 한다고.”
“정상참작해줬다던데.”
“그걸 믿었어? 과실치사라고 하니까 그래보이는 거지. 애초에 외부 징역이라는 게 사형 선고라는 건 누구나 알아.”
“난 몰랐는데.”
“...그럴 수도 있긴 하지.”
아마 국선변호사가 한패였을 거라고 남자는 말했다. 외부로 죄수를 보낼 때마다 나름대로 받는 게 있다고 말이다.
“일종의 인력 수급이지. 이쪽은 죄수가 필요하니까.”
흉악범들을 나라 밖으로 보내버리니 범죄율이 줄어들고, 치안이 안정되면 국민들이 좋아하고, 범죄율이 낮아지면 정권 지지율도 올라가고.
“교도소 운영비도 줄어들고 말이지. 이래 저래 좋은 거야.”
“그러면, 추방형을 받은 죄수들은 모두 와일더 클랜으로 들어온다는 건가?”
“모두는 아니야. 정말로 재수가 없으면, 우리 쪽에서 데리러 가는 도중에 죽을 수도 있고. 위험한 세상이잖아, 이쪽은.”
“미국이 뒤늦게 합류한 건?”
“대충 알잖아. 성과가 괜찮아보이니까, 그쪽도 숟가락 얹은 거지. 애초에 흉악범 숫자는 거기가 훨씬 많기도 하고.”
오죽하면 교도소에 감방이 모자라서, 경범죄 위주로 조기 석방을 시킬 정도라고 했던가.
“그런 거였구나.”
최강혁은 얼굴을 굳혔다.
다른 건 몰라도, 고향으로 돌아가기 힘들어졌다는 건 꽤 충격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들은 말대로라면 애초에 그가 와일더클랜을 부수고 다니지 않았어도 비슷한 결과였을 거라고 했다.
“애초에, 외부 징역에서 무사히 형기를 마치고 귀국한 케이스는 없어.”
“.......”
어떤 식으로든 캠프에서 추방형을 내리고, 와일더클랜으로 보내거나 야외에서 죽도록 만든다.
외부 징역이라는 건 원래부터 ‘국가로부터의 배제’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형벌이니까.
사형과 다름 없다는 건 그런 이유에서라고.
“고향에... 갈 수 없다는 거구나.”
“.......”
남자는 최강혁의 표정을 이해한다는 태도였다.
“그래도 모범수거나, 아니면 당신처럼 각성자라도 된다면 이야기가 좀 다르긴 해.”
고향으로 가지는 못해도, 캠프 소속 군인이 되어서 복무를 이어가는 식으로 생존할 수도 있었을 거라고 했다.
급여를 받으면 고향에서 쓰이는 화폐로 환전처리해서 가족에게 송금을 할 수도 있었을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 또한 지금의 최강혁이 벌이고 있는 일 때문에 불가능해졌다.
“가족들을 인질로 잡는 경우도 있던가.”
“인질?”
“면회를 허락해준다는 식으로 꾀는 거지.”
죄수는 원칙상 형기를 마치기 전까지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
하지만, 모범수에 한해서 그 가족이나 지인이 캠프로 면회를 오는 건 가능하다.
“...아.”
처음 이쪽으로 넘어오기 전에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말썽피우지 않고 성실하게 있으면 가족들이 면회를 갈 수도 있다고 했었다.
“그게 인질이라고?”
“일단 건너오고 나면, 돌아가는 건 마음대로 안 되니까. 그들이 연결해주지 않으면 갈 수가 없잖아.”
가족들이 이쪽에 머무르게 된다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확실히 인질이라고 할 만 하다.
물론 그에겐 더 이상 가족이 없다고 보아도 되겠지만, 그래도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조카의 얼굴이 마음에 걸렸다.
“가족들 입장에서야, 간단한 면회라고 생각할 수 있지. 왔다가 돌아가지 못하게 되면 그때부터 문제가 되는 거고.”
“우리 나라가... 언제부터 그렇게 잔인했는데?”
“알잖아. 세상이 괴물들로 뒤덮였을 때부터 많은 게 달라졌지.”
그렇다. 그 때부터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최강혁은 멍해진 얼굴로 비어버린 커피컵을 내려다보았다.
‘총을 들이대면 어떨까.’
어떻게든 연결장치까지 가서, 돌려보내달라고 협박을 하면 어떨까.
하지만 그렇게 해도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이 ‘좌표’를 제대로 입력하지 않는다면, 그는 고향이 아니라 전혀 엉뚱한 곳으로 이동되어 우주의 미아가 될 수도 있다고 들었으니.
“어떻게든 이쪽에서 지지고 볶고 사는 수 밖에 없는 거야. 그래서 좆된 거라 말하는 거고.”
남자는 한숨처럼 이야기했다.
“나도 이곳이 마음에 든 건 아니었어. 하는 일도 그렇고. 그래도 여기 말고는 갈 곳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퍽-!
남자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이마 정중앙에 구멍이 뚫린 그는 의자에 앉은 채 뒤로 넘어가 털푸덕 쓰러졌다.
“유용한 정보를 많이 줘서 고맙긴 하지만... 내가 당신 얼굴을 기억하고 있어서.”
고향에서 보았던 수배 전단.
부녀자를 연쇄 납치하여, 협박으로 돈을 빼앗은 후 살인해 암매장한 흉악범.
그 얼굴과 이름이 다소 특이해서 기억에 있었다. 설마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나도 이런 놈들하고 같은 취급을 받았던 거구나.”
운이 좋았다고들 했었다.
과실치사라서, 흉악범과는 다르게 취급한다고도 들었다. 그런데, 애초에 그런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른 취급을 해준 것까지는 맞겠지만.’
착 가라앉은 눈으로 시체를 내려다보던 그는 앉아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그곳을 마저 청소했다.
‘이젠 그 취급이 또 달라지겠지.’
의외로 빠르게 생각이 정리되었다.
할 수 없게 된 것과 해야 하는 것들이 머릿속에서 적당히 분류되었다.
‘그녀를 만나야 해.’
사라 레드우드가 필요하다.
다른 이들이라면 몰라도, 그녀라면 해줄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다.
‘미국에 선을 대는 것도 무리가 있을 거야.’
이미 미국 소속의 인물들도 적잖게 죽인 상황이다. 그녀가 잘 이야기해줘서 그쪽과 연결되더라도,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는 없다.
‘또 다른 족쇄가 채워지겠지.’
숲을 내달렸다.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가까운 캠프에 가서 연락을 취하면 될 것이었다.
‘와일더 클랜 소속으로 위장하자.’
그들이 주로 거래하는 캠프 중 하나가 근처에 있었다. 아직 개척 캠프 수준이었지만, 오히려 그게 더 나았다.
‘그 전에 가볼 곳도 있고.’
〈 65화 〉 065.
065.
미국의 옛 서부를 연상케하는 술집이었다.
왁자지껄한 손님들이 테이블마다 자리잡았고, 이런 저런 무기를 착용한 이들이 바에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올인.”
“나도 올인이다, 뻥카 새끼야.”
“씨벌놈들... 난 뒤졌어.”
카드 도박을 하는 테이블도 있었고, 팔씨름 내기를 벌이는 곳도 있었다.
한 구석에선 주먹질이 오갔는데, 곧 패싸움으로 번질 기미가 보였다.
덜컹.
그런 주점의 입구가 열리고, 새로운 인물들이 들어왔다. 흘깃 그쪽을 돌아보던 이들이 곧 관심을 거두며 눈을 돌렸다.
“정말 이런 곳에 그가 있을까요?”
“연락 받았잖아.”
카운터로 다가간 사라 레드우드는 그곳의 직원에게 지인을 방문하러 왔다고 이야기했다.
“이름은?”
“존 도.”
“그런 이름으로 들어온 자가 열 명도 넘는데.”
“짬처리꾼 존 도 라고 하면?”
“짬처리꾼이라... 기다려.”
카운터의 남자가 내선 전화를 연결하더니, 곧 수화기를 내려놓고 그들에게 위쪽을 턱짓했다.
“302호야. 계단은 저쪽.”
“.......”
엘리베이터 같은 게 없는 건물이니 그곳으로 올라가야 했다. 구석진 곳에 자리한 층계 쪽에선 술과 토사물, 소변 냄새가 났다.
그렇게 3층으로 올라갔다.
302호는 복도 창문 바로 옆에 있는 방이었다. 그 앞에 다다르니, 노크를 하기도 전에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열려있습니다.
끼익.
문을 열었다.
방 안쪽, 조용히 창 밖을 응시하고 있는 남자의 넓은 등판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러니 다들 못 찾고 헤매지.’
사라 레드우드는 옆에서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부하와 비슷한 심정으로 생각했다.
각성자들이 점점 이전과 다른 외모를 갖게 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고는 하나,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까지 달라진 경우는 본 적 없었다.
‘마치... 고독한 전사 같군.’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어 접고 외투 주머니에 꽂은 그녀는 두어 걸음 더 안으로 들어가다 멈추었다.
방금 전까지 없었던 의자와 테이블이 그곳에 생겨나있었다. 앉으라는 말은 없었지만, 아마도 그런 의도일 거라 짐작하고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와일더 클랜.”
여전히 창 밖을 보고 있던 최강혁이 말했다.
“네.”
“왜 알려주지 않았습니까.”
“.......”
분명 추궁하는 말투였다.
뒤쪽에 시립하고 있던 부하가 나서려 하기에 얼른 손을 들어 저지한 그녀는 이미 예상하고 있던 질문이었음에, 준비한 대답을 꺼내놓았다.
“당신 혼자서 그들에게 대항할 줄은 몰랐....”
“그쪽은 기업 소속이고.”
이어진 최강혁의 말.
그녀는 하려던 말을 잇지 못했다.
“...맞아요.”
“토벌대라는 조직은 그쪽에서 만들고 있던 거였다던데. 성과는 없는 편이지만.”
“좀 더 시간이 필요할 뿐이예요.”
“선을 대준다는 건 토벌대에 넣겠다는 이야기였을 테고... 결국 이쪽이든 저쪽이든 나한테 목줄을 채울 생각이었다는 거지.”
“.......”
어디까지 알게 된 걸까.
사라 레드우드는 준비했던 말들을 제대로 꺼내지 못했다. 지금 상황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길게 떠들어봐야 변명이 될 수 밖에 없음을 알았다.
“저를 찾으신 이유를 듣고 싶어요.”
차라리 비즈니스로 가는 게 낫다.
애초에 그가 자신을 찾은 이유도 그런 것일 테니까. 그저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이길 바랄 뿐.
“큰 부탁이라면 들어드리기 어려울 수도 있어요. 아마 아시겠지만, 요즘 우리 쪽 입지가 좋지 못해서. 물론 당신의 상황도 우리보다 나을 건 없겠지만요.”
“가족들을 인질로 삼을 수도 있다던데. 면회를 미끼로 유인해서, 이쪽에 묶어둘 수도 있다고.”
“그건 누구한테 들었죠?”
“죽은 사람.”
“...그런 경우가 있긴 해요. 하지만, 죄수 본인의 인증이 없으면 면회는 이루어지지 않아요. 가족들이 원한다고 해도 그래요.”
“내가 몰랐다면 당했겠고.”
“그렇겠죠. 당신이 가족들을 만나고 싶어 했다면 말이예요. 하지만, 아니지 않나요?”
애초에, 가족들을 인질로 잡는 건 기업 쪽의 방식이 아니다. 그녀는 왜 그런 이유로 자신이 추궁을 받아야 하는지 조금 불쾌했다.
스윽.
그 때, 최강혁이 비로소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 크고 단단해진 남자는 과거 캠프에서 보았을 때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워져있었다.
그나마 숲에서 만났을 때의 모습이라면 조금 남아있긴 하지만, 이제는 그때보다 훨씬 더 깊고 강렬한 눈빛에 감히 마주볼 수가 없었다.
‘포식자의 눈이야.’
알 수 있었다.
단지 압박감 같은 게 아니었다.
그의 앞에서 느껴지는 건, 사자 앞의 사슴이 느끼는 두려움과 비슷했다. 죽음의 공포였다.
턱.
최강혁은 그녀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이어서 허공에서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 위에 나눠 건네니, 다름아닌 숲에서 마셔본 적 있었던 그 차였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건 이해하고 있습니다.”
최강혁이 이야기했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을 억누르는 듯한 표정이었다.
“형기가 멈췄다더군요.”
“...맞아요.”
배지현 준장이 그를 추방하면서 했던 의미심장한 말.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 여자가 벌인 일은 아닌 듯 보였다.
남은 형기는 캠프에서 추방당하던 시점이 아니라, 숲에서 지내다가 나온 시점에서 멈췄다고 들었으니까.
“누가 그런 건지는 짐작하시겠고요.”
“양호석.”
“맞아요. 당신을 놓치고 나서 그렇게 했죠.”
최강혁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뭔가를 곱씹는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던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흉악범들은 국가에서... 아니, 지구에서 배제한다. 좋은 일입니다. 아마도 인권운동가들을 제외하면 모두가 반길 일이죠.”
“.......”
“대의, 사회 질서 안정, 치안, 뭐 그런 것들... 이해합니다. 아무리 모범수라도, 이제 와서 없던 전례를 만들고 싶진 않겠고.”
“제가 도와드릴 수 없는 부분이예요.”
“압니다. 그건 됐고.”
그는 다른 이야기를 했다.
사라 레드우드의 눈썹 끝이 흔들렸다.
“생존 확인장치요?”
“좀 알아보니, 이 지역에서 사라지면 죽은 것으로 표시된다던데요.”
“그건 맞아요.”
“내가 죽어야 일이 마무리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최강혁은 허공에서 또 다른 무언가를 꺼냈다. 평범해보이는 주사기였다.
그리고, 그녀가 보는 앞에서 자신의 팔뚝에 바늘을 꽂고 소량의 피를 뽑아냈다.
“어떤 식으로든 피를 묻히기만 하면 작동한다던데요. 나중에라도.”
“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자신의 피를 남겨놓을 생각인 것 같았다. 하지만, 도통 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설마, 다른 루트로 지구 복귀를 생각하고 있나요? 누가 그런 제안을 했는지는 몰라도 속임수가 분명해요.”
“그런 건 아닙니다.”
“...설령 지구로 복귀한다고 해도, 당신 같은 사람이라면 그쪽에서도 교차검증을 할 거예요. 신체검사 때 뽑았던 혈액을 여전히 보관중일 테니까요.”
이곳에서 죽음으로 처리했더라도 지구 쪽에서 다시 검증할 테니, 만약 그곳으로 돌아가게 되면 다시금 수배 상태가 될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설명했지만, 최강혁은 여전히 그게 아니라고 했다.
“당신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나름대로 방법이 있습니다. 뭐, 이곳에서 사라지는 건 분명하겠지만.”
“설마... 정말로 죽을 생각은 아니죠?”
그녀의 물음에, 최강혁은 희미하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본 그녀가 적잖게 당황했다.
“어차피 의미도 없는 가족이잖아요. 인질이 되거나 할 이유도 없어요. 그렇게 하지 않아요.”
“아직, 아닐 뿐이겠죠. 이곳으로 불러서 해코지를 하는 게 아니라도, 지구 쪽에서도 얼마든지 괴롭힐 수 있으니까.”
“당신의 나라가 그 정도는 아니라는 걸 알고 있잖아요.”
“이곳에 범죄조직을 만들어 기업들을 공격하는 개념을 처음 구상한 게 내 조국이라던데.”
“실행한 건 최초가 아니었어요. 단지 구상만이라면 다른 나라들도 비슷한 시기에 했었고요.”
“미국사람이 우리나라를 그렇게 적극적으로 변호해주는 것도 흥미로운 광경이군요.”
“아니죠? 아닌 거죠?”
정말 죽을 생각은 아니겠지.
그녀는 거듭 그것을 물었다.
“당신이 해주었으면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최강혁은 대답 대신 테이블 위에 무언가를 꺼내놓았다.
“이 정도면 얼마나 하겠습니까.”
“...헉.”
조용히 뒤에 서있던 그녀의 부하가 헛숨을 삼켰다. 테이블 위에 놓인 건 지난 번 보았던 것보다 훨씬 커다란 몬스터의 핵이었다.
사람 머리통 크기에 달하는 핵이라니.
보고도 믿기가 힘들었다.
“...잠시만요.”
사라 레드우드가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녀의 휴대폰과, 그것에 연결하는 작은 도구 같았다.
“...2천이 조금 넘는군요.”
“그런 것도 측정 단위가 있습니까?”
“네. 간이 도구는 아주 정확하진 않지만, 그래도 오차범위가 그렇게까지 크지는 않아요.”
그녀는 몇 개월 전 지구의 경매장에서 팔린 핵의 등급이 1천 5백급이라고 했다. 이게 바깥에 풀리면 엄청날 거라고.
“그때 낙찰가격이 150억이었어요.”
“숫자 1당 천만 정도 하나보군요.”
“시세가 정해진 건 아니예요. 물량이 얼마나 풀리는지에 따라서 왔다갔다하죠. 그래도 보통 100짜리에 5억 이상은 무조건 찍혀요.”
“그럼 이건 적어도 100억은 확실히 넘긴다고 보면 됩니까?”
“네. 그건 확답을 드릴 수 있어요.”
어디에 파는지에 따라서 세금이나 사전 비용이 늘어날 수는 있지만, 그래도 가격이 크게 바뀌지는 않을 거라고.
뗄 것을 다 떼고 나서도, 판매액의 절반 정도는 손에 쥘 수 있을 거라고 그녀는 확언했다.
“지구로 오갈 수 있습니까?”
“저요?”
“내 짐작대로라면, 그쪽도 기업 쪽에 목줄을 채워진 것 같은데.”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요.”
그래도 지구로의 방문은 가능하다고 했다.
단지 오래 머물지 못하고, 휴가나 상황 보고를 위해서 잠깐씩 다녀오는 정도라고.
“이걸 내 대신 처분해주시면 좋겠는데.”
그렇게 이야기한 최강혁은 비슷한 크기의 핵 하나를 더 꺼내 옆에 더했다.
“이걸 수수료로 드리죠.”
“.......”
하나도 경악스러울 일인데, 또 하나가 튀어나왔다. 살짝 버벅거리며 측정을 해보니, 간이 도구로도 1,800이 넘어갔다.
“이게 얼마나 하는지 방금 전에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당신과 내가 서로 믿을 수 있는 관계를 구축한 건 아니라는 걸 압니다. 하지만, 적어도 당신이 받은 만큼은 확실히 처리한다는 건 알죠. 그래서 드리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는 그녀가 갖고, 나머지 하나는 처분해달라는 것. 최강혁의 요청은 아주 간단했다.
“지구 쪽에서 처분하라는 거군요.”
“네.”
“가족분들에게 주실 생각이겠고요.”
“반은 누나의 명의로, 나머지 반은 조카의 명의로. 혹시 조카가 더 생긴다면 공평하게 나눠가질 수 있게... 일종의 신탁 개념으로 맡아두었다가, 성인이 되면 지급하는 방식이 좋겠는데.”
“가능해요. 누님의 몫도 그런 식으로 할까요?”
“아니요. 누나 몫은 바로 주는 것으로.”
“...고마워할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냥 내가 만족하기 위한 일입니다.”
가족 몫이 아니라 누나 개인의 명의로 넘겨준다면, 그렇게 누나가 나름의 재력이라도 갖추게 된다면...
혹시 모를 유형적 무형적 압박감에서도 좀 더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스스로 망가뜨린 과거라고는 하지만, 그것 때문에 결혼 생활에서 언제까지나 을이 될 수도 있으니까.
‘시집살이를 시킬 집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방금 했던 말이 맞다.
이건 순전히 자기만족을 위한 일이다.
‘어쩌면 돈 때문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겠지.’
그래도, 조카들의 몫이 따로 있으니 녀석들은 큰 걱정 없이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아마 혼자라면 그가 주는 돈을 거부할 수도 있겠지만, 이제는 아이가 있고 가족이 있으니까 받을 것이다.
“그 분들이 다인가요? 최근 확인한 바에 따르면 어머님께서....”
“그쪽은 됐습니다.”
고개를 저은 최강혁은 자신 쪽에 있던 두 개의 핵을 그녀 쪽으로 밀어주었다.
뒤쪽에 서있던 그녀의 부하가 얼른 챙겼지만, 그것들을 넣을 곳이 마땅치 않아보였다.
“...고맙습니다.”
군용 배낭 하나를 꺼내주었더니, 남자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그것들을 조심조심 집어넣었다.
〈 66화 〉 066.
066.
“그리고, 이건 지구 쪽 이야기는 아닐 것 같은데... 넘길 것들이 더 있습니다.”
“뭔데요?”
“이런 저런 것들이요. 보통은 총기류인데.”
“...아.”
그러고보니, 그가 와일더클랜을 그냥 박살만 내고 다닌 게 아니라고 했다.
그렇게 지워진 거점마다 창고가 모두 텅텅 비었다는 소문을 기억한 그녀는 그곳에 있었을 것들이 어디로 갔는지 궁금하던 차였다.
“그들의 무기와 보급품이라면, 토벌대에 큰 도움이 될 거예요.”
기업들은 자체적으로 지구에 연결할 권한이 없었다. 각국 정부 소유의 연결설비를 공유하는 수 밖에 없으니, 지구로부터 무기나 보급품을 공수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나마 레드캠프 같은 곳들이 무기와 보급품을 거래하곤 하지만, 그 가격대가 상당했다.
“애초에, 그들 자체 생산보다 각국 군부에서 넘겨받은 물량이 더 많죠.”
결국 각국 정부가 범죄집단을 뒤로 지원하기도 하고, 기업 소속의 군사조직 쪽에 무기와 보급품을 팔아먹기도 하는 등 양쪽에서 돈을 벌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다지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군요.”
이미 지구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있지 않았던가.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을 뿐이다.
“트럭은 많이 가져왔습니까?”
“8대요.”
“그거로 될까 싶은데.”
“어... 필요하다면 더 구해볼게요.”
“일단 나갑시다.”
그렇게 건물을 나섰다.
그녀와 함께 온 차량들은 그곳에서 2백미터쯤 떨어진 외곽 주차장에 있다고 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녀의 다른 부하들이 가까이서 이동하며 사방을 경계했다.
“저도 감시받고 있을 거예요. 당신을 보호해줄 수 없을 텐데....”
“곧 마무리될 테니, 상관 없습니다.”
최강혁은 정말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 했다. 그렇게 주차장으로 가니, 대기하고 있던 그녀의 차량과 다수의 병력이 보였다.
다들 차량을 지켜야 하니 현재 위치에서 움직이지는 않고 있었지만, 그 중 몇몇이 최강혁을 향해 고개를 까닥이거나 눈인사를 건네는 것이 보였다.
“당신이 얼마나 유명해졌는지 알아요?”
“그런 것 같더군요.”
“그런 것 같은 게 아니고, 영웅이라고요. 당신이.”
“그런 게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었어요.”
“금방 잊혀질 겁니다. 원래 다 그런 거죠.”
“.......”
이렇게나 염세적인 사람이었을까.
슬쩍 최강혁을 돌아보려던 그녀는 관두고 앞을 보았다.
그가 지금껏 겪었던 일들을 조금만 알아보아도, 지금 그의 태도에 공감할 수 밖에 없을 것이었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가 우리 트럭입니다.”
그녀의 부하가 얼른 최강혁에게 알려주었다.
고개를 끄덕인 그는 가장 가까운 차량의 옆에서 훌쩍 뛰어오르더니, 어딜 잡거나 하지도 않은 채 그 운전석 지붕 위에 올라섰다.
그정도야 어느 정도 수련을 행한 각성자라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광경은 아무리 수련을 했더라도 보여줄 수 없는 일이었다.
“.......”
“확인해보시죠.”
비어있던 짐칸이 한계 중량까지 꽉 들어찼다.
서둘러 그곳으로 올라간 사라 레드우드는 그곳에 실려있는 것이 각종 총기류 수백정과 그것에 호환되는 탄약 상자임을 알 수 있었다.
“이쪽은....”
“수류탄입니다. 혹시 몰라서 지푸라기를 많이 채워놓았지만, 그래도 운전할 때 조심해야 할 거예요.”
“그래야겠군요.”
수류탄의 경우 다른 상자들과 달리 두터운 금속상자에 들어있었다. 혹시나 폭발할 때를 대비한 최소한의 조치였다.
“수량은 조금 있다가 종합해서 알려드리죠.”
그렇게 이야기한 최강혁은 아래로 내려가지 않고, 그곳에서 곧장 옆의 트럭으로 이동했다.
서로의 간격이 그리 멀지 않아서, 사라 레드우드 역시 징검다리를 건너듯 옆으로 따라갔다.
“.......”
비슷한 광경이 이어졌다.
비어있던 트럭들이 가득차고, 다시금 옆의 트럭으로 이동하고... 그녀가 가져왔던 8대의 트럭이 그렇게 각종 무기들로 채워졌다.
침묵하고는 있었지만, 그것을 보는 아래쪽 군인들의 눈빛이 강렬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기 있는 이들 중에도 있어요.”
“음?”
“토벌대요.”
“같이 행동하고 있습니까?”
“인원이 애매하거나 동선이 겹칠 때만요. 아직 얼굴들이 알려지지 않아서 가능한 일이죠.”
“그렇군요.”
“정말 생각 없어요? 다들 좋은 사람들인데.”
“그래보이는군요.”
뒤에 이어진 말의 대꾸일 뿐, 앞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었다.
“몇대 쯤 더 필요할까요?”
그녀는 또 한 번 거절당했음에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잠시 허공을 주시하며 손가락을 까닥거리던 최강혁이 곧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 정도 트럭으로 세 대 정도면 될 것 같군요. 혹시 냉동트럭도 있습니까?”
“냉동... 트럭이요?”
“아무래도 넘겨주고 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도합 10톤, 아니 15톤 정도 적재량이면 될 것 같습니다.”
“음... 몬스터 사체 운반용 트럭들이 있긴 할 거예요. 알아볼게요.”
“바로 되면 좋겠는데요.”
“늦어도 내일 새벽까지는 올 수 있어요.”
“그 정도면 괜찮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한 최강혁은 이어서 마지막 트럭의 옆쪽 공터를 보았다.
“이쪽은 주차비가 없죠?”
“네. 자체 경비를 서는 대신 주차비를 받지 않아요. 그런데 그건 왜....”
사라 레드우드는 이어진 광경에 다시금 멍한 얼굴을 했다. 방금 전까지 공터였던 곳에 수송트럭이 7대나 나타난 것이다.
“이, 이게 무슨....”
“기름을 채워야 할 것 같은데. 있습니까?”
“연료라면 여유분이 있어요.”
“운전병은?”
“...지원 요청 때 추가할게요.”
지금 꺼내진 트럭 역시 각각의 짐칸이 온갖 총기류와 더불어 부대에 필요할 만한 각종 보급품들로 가득 실려있었다.
“그렇군요. 무기만 챙긴 게 아니었어요.”
“겸사겸사 주워 담았더니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인벤토리에는 한계가 있다고 알고 있었다.
아무리 루팅 능력을 보유한 각성자라고 하더라도 지닐 수 있는, 또한 감당할 수 있는 정도가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오늘 이곳에서, 그녀는 그동안 갖고 있던 상식이 여러번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대체 어떤 일을 겪어온 거죠?”
사람 머리크기의 핵을 두 개나 아무렇지 않게 꺼내주었다. 아까 전 상황을 생각해보면, 가진 재산을 탈탈 털어 건네는 느낌은 절대 아니었다.
“그냥, 살다 보니 이렇게 됐습니다.”
최강혁은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어차피 말해봐야 믿기 어려울 테고, 굳이 말해주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이것들은 중고로 계산해서 가격 책정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알겠어요. 대금은 어떻게 드리면 될까요?”
“주실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한 최강혁은 손목에 감고 있던, 캠프에서 처음으로 구했던 중고 단말기를 풀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제가 가진 코인이 다 들어있을 겁니다. 잠금은 풀어두었으니까 언제든 뺄 수 있을 거고요.”
그렇게 이야기한 최강혁은 무심한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의뢰 하나, 아니 두 개만 합시다.”
“들어볼게요.”
“사람도 죽여줍니까?”
“...두 사람이라면 누군지 예상이 가네요. 배지현과 양호석이겠군요.”
“아니요. 그런 피라미들은 관심 없습니다.”
최강혁은 두 사람의 이름을 말했다.
오히려 사라 레드우드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그들의 이름은 어디서 들었죠?”
“날뛰다보니 알아서 이야기해주는 이들이 있더군요. 총구 앞에선 털어놓고 싶은 게 많아지나봅니다. 뒷받침하는 증거도 확보했고요.”
지구에 있는 이들이다.
이곳에선 무슨 짓을 해도 손을 댈 수 없는 자들.
“가능합니까? 거물이라던데.”
“...확답은 드리기 어려워요.”
“그냥 의뢰를 드리는 겁니다. 그거면 만족해요. 어차피 내 손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니.”
배지현이든 양호석이든 어차피 장기판 위의 졸일 뿐이었다. 그동안 그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들에 대한 반감 자체가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지금까지 알게 된 대로라면 그들 또한 앞날이 그리 밝지만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스스로 몰락이 확정된 이들이니, 굳이 더 일찍 끝내줄 필요는 없겠지요.”
“그렇게 쉽게 무너질 사람들은 아니예요. 다들 나름의 수완이 있으니까요.”
“그럴 수도 있고요.”
아무래도 좋다는 듯한 표정.
하지만 이어서 허공에서 꺼낸 타블렛을 건넨 그가 안에 들어있는 폴더를 열어보라 이야기했다.
“...이건.”
수많은 자료들이 있었다.
딱히 설명이 되어있지 않은 동영상과 사진들도 있었지만, 열어보는 순간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살인 증거군요.”
“약탈, 납치, 고문과 강간... 그들이 행했던 것들 중 증거로 남겨두었던 것들을 모아둔 겁니다.”
“이런 걸 남겨두다니.”
워낙 끔찍한 자료들이어서 눈살을 찌푸리던 그녀는 문득 방금 전 최강혁이 했던 말을 생각했다.
“이런 자료들이라면, 확실히 그들도 빠져나가기 힘들겠어요. 어떤 식으로 엮느나에 따라 달라지겠지만요.”
“윗선을 치면, 꼬리를 자르지 않겠습니까.”
잘려나갈 꼬리는 결국 뻔하다.
그리고, 그렇게 잘린 꼬리가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리가 없다. 결국 이곳에 남게 될 테니, 이후에는 정말로 각자도생이 될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이어서 최강혁이 건넨 USB스틱을 받았다. 타블렛에 있는 것들을 별도로 저장한 것이라고 했다.
“그건 다시 주시고요.”
“...아.”
타블렛을 통째로 주는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조금 머뭇거리며 그것을 돌려주었다.
“액수 확인 안 해보십니까?”
타블렛을 챙긴 최강혁이 물었다.
사라 레드우드는 조심스럽게 그가 건네었던 단말기를 켜보았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있는 코인의 액수를 확인한 그녀가 살짝 떨리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정말로 죽을 생각인가요?”
그녀가 보았던 이곳의 어떤 개인도 이 정도의 코인을 보유하고 있지는 못했다. 그것도 은행 계좌가 아니라 개인 단말기에 말이다.
아마도 와일더클랜의 거점들을 부수면서 그곳에 있던 자들의 것에 더해 운영자금까지 쓸어담은 게 아닐까 싶었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정말로 지구도 이쪽도 아닌 다른 지역으로 건너갈 수 있는 브로커를 구했을 수도 있고.
‘그럴 리가 없어. 이쪽의 연결 설비는 모두 각국에서 직접 관리하는데.’
양호석이 설비를 빼돌린 사례가 있긴 하지만, 그것은 간이 설비일 뿐이다. 게다가 그 일 역시 본국의 비밀스런 지원이 있어서 가능했었고.
‘모르겠어. 더 이상 계산이 안 돼.’
정말로 죽으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정리하는 사람의 태도와 눈빛이 저런 식이니까.
그런 눈빛을 했던 이들을 본 적이 있으니까.
“안 죽습니다. 누구 좋으라고 죽습니까.”
최강혁이 말했다.
하지만, 곧 다른 말이 이어졌다.
“그저, 모두에게서 떠날 뿐이죠.”
“그런 건 불가능해요.”
“가능하더군요. 페널티가 컸지만.”
“.......”
“이래저래 빈몸으로 와서 빈몸으로 가는 게 인생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비슷한 거겠지 생각 중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만, 그가 이 지역을 떠나는 것만큼은 확실해보였다. 그 방법이 무엇이든, 그녀가 막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점도 분명하게 느껴졌다.
“연락했습니다.”
보냈던 부하가 돌아왔다.
추가 운전병들과 냉동트럭 여러 대도 문제 없이 요청되었다고 하니, 이르면 오늘 밤, 늦어도 내일 새벽에는 도착이 가능할 것이다.
“그거 알아요?”
사라 레드우드는 최강혁을 보며 물었다.
“나를 그런 눈으로 보지 않은 사람은 당신이 유일했어요.”
“그런 눈?”
“범하고 싶다는 눈이요.”
그녀는 픽 웃으며 그렇게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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