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ilado 7
어디서 그런 사람들을 모아온 건지 몰라도, 여성 손님들이 바글바글했다.
‘노린 거구만.’
사진과 함께 있던 문서 파일을 열어보니, 고윤호의 근황이 기록되어있었다.
다행히 불명예 전역은 아니었고, 제대로 퇴직금까지 수령해서 창업에 보탰다는 듯 했다.
‘하하.’
재미있는 건 집안의 성화로 맞선을 연거푸 보고 있다는 부분이었다.
아직 인연을 찾지 못했는지, 교제로 이어지는 경우는 없었다고 적혀있었다.
‘이런 것까지 알아본 건가.’
고윤호에 대한 자료는 그리 많지 않은 편이었다. 이어서 그는 운전병이었던 황수찬의 자료가 담긴 폴더를 열어보았다.
그곳엔 사진 같은 건 없었지만, 그래도 문서파일에 담긴 내용은 다행히 부정적이지 않았다.
‘전역을 하셨구나.’
설마 죽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계속 이쪽에 계시는 건가 했는데, 부서가 바뀌고 나서 빠르게 은퇴를 결정한 모양이었다.
‘좋은 판단 같아.’
다만 결과적으로 돈을 제대로 벌지 못하고 돌아간 터라, 고향으로 복귀한 후엔 일자리를 구하려 고생을 했다는 듯 했다.
그래도 최근에 몬스터 사체를 수송하는 업체에 취직을 했다고 하니, 아마도 이쪽에서의 운전경력을 높게 산 게 아닐까 싶었다.
“다행이네, 다들.”
내심 안도한 그가 이어서 본 것은 자신이 이곳에 들어온 이유. 피해자 가족들의 상황에 대한 자료였다.
의외로 그쪽 사람들은 다들 잘 살고 있는데, 아마도 이전부터 금전적으로는 여유가 많았던 집안이어서 그런 것 같았다.
‘자식들도 다들 독립해서 자기 삶을 살고 있었으니... 그쪽으로 문제는 없나보네.’
하지만 당시의 사건 때문에 죽은 이가 갖고 있던 특이한 성벽이나 평소의 행실이 일부 가십으로 돌아다녀서 곤란을 겪었다고 했다.
알고 보니 죽은 이가 비슷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이가 그의 누나 한 명만이 아니었다고 했다.
밝혀진 것만 다섯 명이었고, 더 많을 가능성도 있었다고.
‘내가 망친 게 아니라, 처음부터 망가져있던 것 같은데.’
만약 누나가 지금 앞에 있다면 이 자료를 보여주면서 말해주고 싶었다.
‘그렇다고 내가 저지른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니겠지.’
고개를 저은 그는 다음 폴더를 보았다.
어쩌다보니 누나에 대한 자료를 마지막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음.’
그곳은 다른 폴더에 비해 더 많은 사진과 영상이 들어있었다.
일단 가장 위쪽부터 살펴보았다.
“.......”
자료가 많은 건 근황을 정리한 것만이 아니라 과거의 이야기까지 조사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이 많았다. 심지어,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자료도 있었다.
‘정황 증거일 뿐이라고....’
아버지의 죽음 이전, 누나에게 어떤 일이 생긴 것 같았다. 아주 좋지 않은 일이.
‘그러고 보니, 그 전까진 평범했던 것 같은데.’
아버지의 죽음 이후부터 달라졌던 것이 기억났다. 성격도 날카로워지고, 질이 나쁜 친구들과 어울렸다.
지금의 자료들을 보니, 그동안 알지 못했던 부분이 마치 퍼즐을 맞추듯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비록 정황증거일 뿐이라는 첨언이 붙어있었지만, 그 정도의 자료라면 누가 보아도 진실이라 생각할 만큼 자료의 수준이 높았다.
‘아버지....’
술만 마시면 보이는 대로 때려부수는 사람이었지만, 적어도 가족을 때린 적은 없었다.
밤새도록 주사를 부려도, 아침이면 멀쩡히 출근해 돈을 벌어왔다. 낡은 아파트 전세나마 유지하고 있던 건 그래서였다.
그런 아버지는, 아마도 누나가 당한 일을 알게 된 것 같았다.
어쩌면 누나가 말했을 수도 있지만, 자료 내용으로 보면 아버지가 뭔가를 목격했을 가능성이 더 높아보였다.
“.......”
이어진 자료들.
아버지의 자살과 비슷한 시기에, 그 일대에서 몇몇 남학생들의 실종사건이 벌어졌다는 내용과 당시 수사 기록.
‘둘은 찾았군.’
뒤늦게 다섯 중 둘의 시체가 나왔다.
나머지는 아직도 미제였지만, 경찰 쪽에선 죽은 아버지를 용의선상에 올려둘 정도의 정황 증거를 확보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죽은 사람이어서, 끝난 사건을 다시 들쑤시고 싶지 않아서 내부적으로 적당히 묻었다는 모양이다.
이런 자료는 어떻게 얻어낸 걸까.
새삼 사라 레드우드의 능력이 감탄스러웠지만, 그보다는 자신이 그동안 알지 못했던 일들을 뒤늦게 알게된 충격이 적지 않았다.
‘대체 왜 나한테까지 숨긴 거야.’
단지 조금 늦게 찾아온 사춘기 정도로 생각했었다. 이후엔 어렸을 적 도망친 어머니를 닮아서 막나가는 건가 원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쩌면.
아버지와 함께 묻었던 혼자만의 비밀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따라다니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렇다고 그 모든 방황과 실수들을 옹호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귀엽게 생겼네.’
사진이 보였다.
작은 음식점의 카운터에 앉은 누나의 모습.
무척 피곤해보이는 얼굴로, 품에 안은 아기의 입에 젖병을 물리는 중이었다.
‘이 녀석이 내 조카인가.’
좋아보였다.
피곤해보이지만, 괴로워보이진 않았다.
그 언젠가부터 얼굴에 가득하던 그 뜻모를 악감정들이, 지금의 사진에선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어쩌면, 과거를 지우고 싶다는 건 단순히 그가 저지른 일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여러 가지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누나가 겪었던 일들과, 겪고 싶지 않았던 일들과, 하지 말았어야 했던 일들까지.
‘그래도, 다행이야.’
다른 사진에 찍힌, 아마도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는 그가 보기에도 무척 좋은 사람 같았다.
“그럼 된 거지.”
입을 열어 그렇게 중얼거렸다.
왠지 공허해져서, 다시금 같은 말을 두어 번 더 반복해보던 최강혁은 그제야 조금 나아진 기분으로 폴더를 닫았다.
“오.”
그렇게 뒤쪽으로 나와보니, 자료 폴더 외에 다른 폴더들이 더 있었다.
그 중 하나에 들어있던 건 그가 보다가 끊겼던 웹툰을 비롯한 여러 가지 만화와 소설, 영화나 드라마 파일들이었다.
‘센스가 좋아.’
가죽을 깐 바닥에 벌러덩 누운 그는 이내 킥킥거리며 거듭 페이지를 넘겼다.
지금은, 그렇게라도 웃고 싶은 기분이었다.
〈 51화 〉 051.
051.
“내 몸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어야 해.”
원숭이들을 보며 느낀 게 있었다.
두 다리가 튼튼하다고 해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왜 진작 이 생각을 못 했을까.”
이미 한쪽 다리가 잘라져본 경험도 있다.
얼마나 막막했었던가.
당장 움직이는 것부터 애를 먹었었다.
“그래서 이러는 거야. 미친 거 아니야.”
삑! 삐익!
새끼 새가 옆에서 알짱거리며 날개를 파닥였다.
최강혁은 여전히 물구나무를 선 채, 두 팔을 다리삼아 나무 위를 걷는 중이었다.
벌써 오늘만 세 번, 아니 네 번 추락했다.
하지만 첫날에 비해서 확실히 발전하고 있음을, 그렇게 움직이고 있는 스스로가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후웁!”
단순히 나뭇가지 위에서 중심을 잡고 걷는 정도가 아니다.
정말로 두 팔을 다리와 발 삼아서,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뛰어다니는 것까지 행하고 있었다.
물론 앞발로 걸어다니는 건 원숭이들도 하지 않는 일이지만, 그들에게서는 단지 아이디어를 얻었을 뿐, 애초에 동작까지 따라하려는 건 아니었다.
“아, 씁.”
그러던 최강혁이 훌쩍 몸을 뒤집은 건 손바닥에 박힌 나무껍질 때문이었다. 종종 가시처럼 작은 파편이 그렇게 박힐 때가 있었다.
장갑 같은 걸 끼면 낫겠지만, 그것보다 굳은살이 생기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견디는 중이었다.
“손바닥도 강화가 될 것 같긴 한데....”
삑삑!
“미친 거 아니라니까.”
박혀있던 조각을 빼낸 그는 금세 아무는 상처를 보았다. 각성자라는 것을 감안하고 보아도 무척 빠른 속도였다.
‘이 숲의 효과일까.’
여러 캠프에서 탐을 내는 이유라고 했다.
비슷한 장소가 또 있다던데, 그쪽은 이미 거점 확보가 마무리 단계라고 들었다.
‘이건 이 정도로 마무리하고....’
시간을 확인한 그는 새끼 새에게 고기 한 점을 던져주고 그곳을 떠났다.
이어서 찾아간 곳은 최근 수련을 목적으로 마련해둔 숲 한쪽의 공터였다.
‘어디까지 했더라.’
지금도 나무들이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어서 공터라고 하긴 뭐했지만, 그래도 다른 곳에 비해 나무들의 간격이 좀 더 넓은 편이었다.
그곳에 자리한 거목 중 하나.
한쪽 껍질이 잔뜩 갈리고 부서진 모습이 된 건 그가 하고 있는 수련 때문이었다.
‘얼추 이 쯤이었는데.’
최강혁은 데이터 저장소에서 특정한 자료를 찾아 열어보는 중이었다.
‘맞네. 밀어차기 할 차례네.’
사라 레드우드에게 부탁했던 자료들 중에는 각종 무술과 전투술, 서바이벌 스킬에 관한 것들도 있었다.
‘군대에서도 태권도는 안 했었지.’
과거엔 나름 빡빡하게 시켰던 적도 있다던데, 그가 복무할 땐 그다지 강요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단증을 따면 포상휴가를 받을 수도 있다고 하니 열심히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는 포상을 나가봐야 갈 곳이 없었다.
“일단 스트레칭부터... 어우씨.”
각성자의 신체가 일반인보다 강해진다고는 하지만, 유연성까지 자동으로 좋아지는 건 아님을 최근에 확인했다.
그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가랑이를 찢기 시작했다. 어차피 인대나 근육이 손상되더라도 회복할 수 있으니, 좀 과할 정도로 찢는 게 좋았다.
‘누가 눌러주면 좋을 것 같은데. 혼자 하려니 나도 모르게 몸을 사리는 것 같아.’
그래도 거의 일주일 동안 애를 썼더니, 그럭저럭 가랑이가 바닥에 닿을까 말까 한 수준까지 내려왔다.
“으으... 된다.”
그리고 오늘, 아주 살짝이지만 바닥을 느꼈다.
가랑이 쪽에서 진짜로 뭔가 찢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잠시 쉬면 나을 것이다.
‘품세는 봐도 잘 모르겠고, 동작 위주로 가자.’
어차피 단증을 따거나 할 목적으로 익히려는 게 아니다. 유사시에 써먹을 만한 전투기술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수련하는 것 뿐.
“각성자니...까!”
퍼억!
“그냥 차도 세긴 한... 데!”
퍼어억!
앞에 서있는 고목을 발바닥으로 거듭 밀어차며, 그는 거듭 한쪽 허공에 열어둔 자료와 지금 자신의 자세를 비교해 보완해나갔다.
글이나 그림으로 배우는 건 한계가 있겠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없이 혼자서 뻘짓하는 것보다는 낫지 싶었다.
“어우, 씨!”
가시는 손바닥에만 박히는 게 아니다.
맨발로 밀어차기를 하다보니, 발바닥이 다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피부를 전체적으로 강화하는 게 좋을까.”
설마하니 강철처럼 단단해지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이런 가시 정도는 안 박히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오전 내내 밀어차기만 반복숙달하던 그는 오후 들어서 다시금 스트레칭을 한 후, 이번엔 두 손으로 거목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퍽! 탁! 뻐걱!
누구나 한번쯤 흉내내봤을 법한 권투 방식의 주먹질에서부터 손바닥이나 손날을 활용한 공격.
그 중간 중간 가까이 붙어 팔꿈치로 돌려치는 식의 연계까지, 첫날에 비해서 상당히 부드럽고 자연스러워보였다.
굳이 마나를 써가며 하고 있는 건 아니어서, 거목 한쪽의 벗겨진 껍질 안쪽은 어느새 검붉은 피얼룩으로 가득했다. 최강혁의 피였다.
“어우, 따가워.”
지금도 그의 손 곳곳이 까져 피가 나고 있었지만, 회복속도가 워낙 빠르다보니 가벼운 찰과상 정도는 심호흡 몇 번 할 시간이면 다 나아버렸다.
굳이 쉬거나 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실시간으로 회복이 되니까, 지금도 피가 흐르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고 계속 주먹질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이상하게... 진정이 돼.’
손이 아픈 건 그럭저럭 익숙해졌다.
오히려 이렇게 뭔가를 때리고 있으면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건지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폭력적인 성향이 된 건 아닌 것 같은데.’
그저 몸을 움직이고 있어서 그런 걸까.
주먹이 얼얼해질 즈음 뒤로 물러난 그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두 손을 거듭 쥐었다 펴며 땅에 털었다.
서서히 아무는 동안 약간의 열감이 느껴지던 손은 곧 피가 흘렀던 자국만 남아있을 뿐, 별다른 흉터조차 보이지 않았다.
‘출출하네.’
마침 근처에 마련해둔 곳이 있었다.
거목의 상단부를 베어버리고 나서 남은 부분을 다듬었는데, 주변 나무들과 제법 떨어져있어서 쉽게 건너오지 못할 거리였다.
“나무 위에서 불을 피우는 게 좀 이상하긴 한데....”
지상에서 30미터 높이의 나무 단면.
그 지름만 해도 10미터 정도가 되는 터라, 공중 쉼터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 중심부는 안쪽으로 조금 파여 흙과 돌로 채워져있었다.
언제든 불을 피울 수 있도록 꾸며놓은 것인데, 나무 꼭대기에서 조심조심 불을 피웠던 시절을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라 할 수 있었다.
‘냄새가 안 나는 게 아니지.’
마른 잔가지들을 쌓고 장작을 두른 그는 안쪽에 불씨를 넣으며 생각했다.
곧 불이 붙어 한 줄기 연기가 피어오르고, 이내 그 위에 얹은 고기들이 덩달아 좋은 냄새를 사방에 풍기고 있었다.
그럼에도 예전처럼 주변 눈치를 보지 않는 건 적어도 그 일대에선 지금의 최강혁을 노리는 이가 없기 때문이었다.
‘기왕 굽는 김에 좀 많이 해서 쟁여놓자.’
모닥불을 좀 더 크게 키운 그는 거치대를 추가로 설치하고, 그곳에 강철 장대에 꽂은 큼직한 고기들을 척척 걸쳐놓았다.
고기에서 녹아내린 기름이 뚝뚝 떨어져 타탁거리는 소리를 내는 동안, 그 옆에 의자를 꺼내 앉은 그는 타블렛으로 드라마를 보았다.
* * *
다시금 비슷한 하루 하루가 이어졌다.
숲은 여전히 혼란스러웠고, 동쪽 숲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지역에 걸쳐 새로운 왕이 나타나기도 하고, 또 사라지기도 했다.
동쪽의 왕에게도 몇 번 더 찾아갔다.
주기적으로 청소를 해주러 가곤 했지만, 오늘은 그쪽에서 그를 찾기에 가는 것이었다.
“뭐하다 또 이모양이 됐어?”
분명 전보다 더 강해졌음에도, 상당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렇다고 다른 왕들이 습격해오거나 한 것도 아닌 것 같아서 물어보니, 다름아닌 인간들이 와서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인간? 한 명이 아니었다고?”
병력이 몰려왔다면 그가 모를 리가 없다. 작은 친구들이 먼저 알고 그에게 알려주었을 테니까.
하지만 어째서 몰랐나 했더니, 소수정예로 내부 침투를 행한 모양이었다.
“처음부터 너만 노린 거구나.”
왕을 치료해주었더니, 그가 자신의 잠자리에 모아두었던 것을 가져가라고 했다.
뭔가 해서 가보니, 그를 공격했다가 죽었다던 인간들의 유품이 있었다.
갈기갈기 찢기거나 으깨진 듯한 보호복.
소음기가 부착된 소총.
개중에는 검이나 단검 같은 종류의 부무장도 있었지만, 제대로 휘둘러보지도 못한 건지 거의 새것 느낌이었다.
‘어디 소속인지 알 수는 없는 건가... 아. 여기 있네.’
보호복 한쪽에 아마도 캠프의 상징으로 보이는 심벌이 새겨져있었다.
처음 보는 종류라서 일단 스캔해둔 그는 그곳에 있던 것들을 모두 인벤토리에 쓸어담았다.
‘아예 왕만 노리고 들어왔다는 건, 슬슬 이 숲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고 봐도 되는 건가.’
왕을 죽이면 해당 지역에 혼란이 발생한다.
그 과정에 핵을 챙길 수 있다면 더더욱 좋은 일이 될 테고.
‘무장이 허술한데.’
왕에게 물어보았지만, 그것 외에는 없었다고 했다. 두 사람이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역시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고작 두 명이라... 혹시 각성자였나?’
만약 그런 거라면 그 정도의 무장도 납득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무기가 문제가 아니라 스킬이 문제였을 테니.
‘왕한테 통할 만한 공격 스킬이 있을까.’
전투 계열 각성자들의 싸움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보니, 그다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당분간 안정을 취해야 해. 뛰어다니지 말라고.”
크허엉.
“와서 덤비는 놈들이야 어쩔 수 없지. 또 다치면 부르고.”
그렇게 거처로 돌아가는데, 문득 나무 위쪽에서 다람쥐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저 소리만으로는 많은 뜻을 담기 어려웠지만, 간단한 의미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둘이 다가 아니었구나.’
다람쥐들이 이야기하길, ‘나무 위’ 그리고 ‘인간’ 이라 했다. 그는 나무 위에 있지 않으니, 결국 다른 인간이 더 있다는 뜻이었다.
‘왕이 그냥 보내주지는 않았을 테니, 처음부터 전투에 끼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고... 나무 위라면, 저격수일까.’
속으로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던 그는 다람쥐들의 소리를 토대로 상대의 위치를 파악했다.
그가 있는 곳에서 대략 2백미터 쯤 떨어진 곳에 숨어있다고 했다.
‘으음.’
그냥 두는 게 맞을까. 아니면 어떤 식으로든 이야기를 나누는 게 나을까.
‘내 입장이 애매하긴 하네.’
숲의 주민 입장에서라면 왕을 도와야 맞다.
하지만 인간의 입장에서 몬스터의 편을 들어 같은 인간을 붙잡거나 제거한다는 건 역시 좀 이상한 일 아닐까.
‘이런 것도 딜레마라고 할 수 있을까.’
일단 어떻게 생겼는지라도 볼까 싶어서, 가까운 나무로 올라갔다. 이제는 로프를 걸어놓거나 하지 않아도 나무를 올라갈 수 있었다.
타타탁.
미리 흡수해둔, 가시 박힌 철제 장갑을 손 위에 재구성하면 마치 영화 속의 거미인간 비슷한 느낌으로 등반이 가능했다.
그렇게 중간 나뭇가지 위에 올라선 그는 장갑을 다시 흡수하며 주위를 살폈다.
‘저 쪽이라고 했는데.’
지금도 다람쥐들이 상대의 위치를 알려주고 있었다. 그가 그쪽을 향하고 있음을 아는 것이다.
‘근데 너무 시끄럽잖아. 내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어도 충분히 수상하게 생각할 것 같은데.’
가볍게 움직였다.
상대는 역시나 저격수였다.
거의 나뭇가지와 하나가 된 듯한 자세로, 위장천으로 몸 대부분을 가린 모습이었다.
‘동쪽 왕을 겨누고 있구나. 그럼 내가 거기서 어울리는 건 이미 보았겠고.’
어느새 지근거리까지 접근했지만, 그쪽에선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베테랑 군인이라고 해도,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며 접근하는 상대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자리를 잡은 저격수는 쉽게 움직이지 못하지.’
영화 같은 곳에서 보면 소변도 그냥 지려버려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있던데, 사실일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최강혁은 여전히 동쪽의 왕을 겨누고 있는 저격수의 뒷목에 총구를 갖다댔다.
“......?”
그런데,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프로정신이란 이런 걸까.
속으로 감탄하던 그는 곧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뭐지?’
툭툭.
총구로 두드려보기도 했지만, 역시나 마네킨처럼 굳은 모습.
그저 겁을 먹은 걸까 생각하기에도 이상해서, 발로 상대의 위장막을 걷어낸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
〈 52화 〉 052.
052.
“뭔데, 이거?”
그의 발 아래.
굵은 나뭇가지에 엎드린 군인은 움직이지 않는 게 아니라 그럴 수가 없는 상태였다.
“살아있다더니.”
찍찍!
옆에 다가왔던 다람쥐들이 쪼르르 멀어졌다.
녀석들도 위장막 때문에 착각한 걸까?
‘시취도 없었고... 애초에 피가 안 보이잖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일단 시체를 스캔해보았지만, 그 전부터 어느 정도 사망 원인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시체의 피부에 남아있는 흔적과 그가 있는 나무 곳곳에 나있는 작은 흠집들.
‘거미들이 왔었나본데.’
숲에는 독거미가 많다.
크기도, 독의 종류도 각양각색인데, 잘못 물리면 각성자인 그조차도 상당히 고생해야 할 정도다.
괜히 ‘독 저항력’을 필수라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역시.’
스캔 결과도 예상대로였다.
아마 저격을 하기 위해 자세를 잡고 가만히 있는 동안 독거미에 당했을 것이다.
‘마비독이었겠고... 살아있는 상태에서 피를 빨렸구나.’
주변에 피가 묻어있지 않은 건, 시체 안에 피가 거의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단... 수습은 해주자.’
시체를 루팅한 그는 한 편으로 ‘이렇게 된 게 다행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자 살짝 불편해졌다.
‘내가 인간이라는 것까지 무시할 수는 없겠지.’
숲의 이웃들이라고 해서 인간들과 적대하면서까지 지켜줄 필요는 없다. 그것은 동쪽의 왕 또한 마찬가지다.
‘내 주제에 누굴 지켜주네 마네 할 상황도 아니고.’
그래도 이렇게 계속 숲에 남아있는다면 곧 비슷하게 불편한 상황을 거듭 겪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은 든다.
다시금 고개를 저은 최강혁은 집으로 돌아가, 맹수들이 돌아다니지 않는 한적하고 햇빛 잘 드는 곳에 죽은 이를 잘 묻어주었다.
‘그나저나.’
본의 아니게 저격소총이 생겼다.
혹시나 해서 살펴보니, 무음 기능을 자체적으로 갖추고 있는 특수 저격총이었다.
‘기존 소총하고 탄 호환은 안 되는구나. 이건 당연한가.’
좀 더 큰 구경의 탄약을 사용하는데, 죽은 이가 지니고 있던 걸 다 합치면 20발 정도 밖에 안 되었다.
하지만 그가 지니고 있는 게 따로 있었다. 근처에서 주웠던 것들 중 해당 구경의 탄약이 있던 것이다.
‘쓸 일이 없을 것 같았는데, 그래도 챙겨두니까 빛을 보는구나.’
저격소총의 무음 거리는 최소 1백미터까지라고 했다. 그곳부터 150미터까지 효과가 감소하고, 그 이후에 완전히 사라진다고.
‘그 정도면 충분해.’
돌격소총도 그렇지만, 단지 격발음만 가려주는 것 정도로도 상당한 이점을 가질 수 있다.
‘연발 사격은 불가능하지만, 이건 감수해야지.’
다음번 사냥때 써먹어보기로 한 그는 며칠동안 쌓여있던 스팸메시지들을 하나 하나 정리했다.
‘가지가지 하는구만.’
같은 곳에서 여러 번 보낸 메시지도 있었고, 한글이긴 한데 뭘 말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메시지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메시지를 보낸 곳은, 역시나 이세계에서 행복을 찾으라던 곳이었다.
‘지금 여기도 이세계잖아. 엄밀히 따지면.’
그다지 행복하진 않은 것 같은데.
물론 보람차게 보내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행복까진 아니다.
“이세계에서 행복을... 지금 행복하신가요? ...언제까지 그렇게 살텐가는 또 뭐야.”
메시지 제목만 훑어보고 지우길 반복하던 그는 지금 막 도착한 메일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이세계 처녀와 결혼하세요]
‘정말 그러고 싶을까.’
누가 보낸 건지 모르겠지만, 이런 제목을 적으면서 자괴감 같은 거 안 느끼나.
“.......”
하지만 (사진 첨부)라는 부분에서 시선이 멈춘 그는 차마 삭제를 누를 수가 없었다.
“나도 확실히 문제가 있어.”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최강혁은 결국 메시지를 열어보았다.
‘그런데 혹시, 이세계의 처녀라는 건 눈 다섯 개에 단단한 갑각을 가진 우주 괴수 같은 것 아닐까?’
문득 그런 무서워지는 상상도 해보았지만, 정작 메시지 안에 들어있던 사진은 그런 게 아니었다.
“금발이네. 서양인인가.”
마치 중세 서양 배경의 영화에서 본듯한 복장을 입은 이가 저 멀리 석양을 바라보며 서있는 모습이었다.
“근데 왜 뒷모습이냐고.”
블라인드 데이트 같은 거냐.
혹시 옆으로 드래그하면 회전하나 싶어서 손가락으로 휙휙 그어보기도 했지만, 그저 민망해질 뿐이었다.
[이세계 처녀가 당신을 기다립니다]
‘엉뚱한 쪽을 보면서 뭘 기다린다는 거야.’
뒷모습만 보면 미인일 것 같긴 하지만, 그건 그저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상상의 효과일 뿐이다.
[지금 상담하시면 수수료 면제!]
“됐거든요.”
사진 아래에서 반짝이고 있는 광고문구를 보며 고개를 저은 그는 메시지를 지우고 창을 닫았다.
‘내가 외롭긴 한가보네.’
그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불쾌하고 불편하지만, 또 문득 문득 캠프에서 지내던 시간들이 떠올라 그리워지기도 했다.
“굳이 이세계에서 찾을 필요 있나.”
형기를 제대로 마치고 나면, 고향으로 돌아가서... 그가 저지른 일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봐야지.
물론 쉽지는 않겠지.
그래도 어딘가엔 있지 않을까.
“조카가 귀여웠어.”
조용히 타블렛을 꺼낸 그는,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조카의 사진을 또 열어보았다.
“예쁘게, 행복하게 잘 크면 좋겠네.”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 역시 그렇게 예쁜 자식들을 낳고 키우며 살 수 있을까.
‘난 술은 안 마시니까, 주정꾼이 되지는 않을 거야. 폭력... 적이지도 않을 거야. 아마.’
최근 주먹에서 피가 흐를 정도로 생나무를 두들겨패고 있긴 하지만, 그건 수련의 일환일 뿐이다.
‘돈은... 각성자니까, 그래도 괜찮게 벌 수 있지 않을까.’
전과자라는 걸 감안해도, 능력이 있으면 써주겠지. 정 안 되겠다 싶으면 사라 레드우드의 말대로 미국 쪽에 선을 대는 것도 나쁘지 않겠고.
‘고향이라.’
아직은 이른 고민일까.
지금 당장 어떻게 해야 하는지부터 결정해야 할 텐데 말이다.
“남은 형기를 문제 없이 좋게 좋게 마치자면, 역시 양호석 사령관 쪽으로 가는 게 맞아.”
그는 기회주의자이긴 하지만, 적어도 캠프에 있었을 때 자신에게 많은 것을 베풀어주었다.
‘내 능력을 좋게 평가해주었지. 그만큼 투자도 해주던 사람이고.’
이용당한다고 생각하면 불쾌하지만, 나름대로 윈윈이 가능한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다.
적어도 배지현 준장보다는 말이 통하는 사람이지 않던가.
‘너무 벽을 치고 있는 것도 좋지는 않겠지.’
이용당하지 않겠어! 라며, 모든 사람들을 적으로 돌리는 것도 그리 바람직하지는 않다.
사람이라는 건, 인간 관계라는 건 어느 정도는 서로 서로 이용하고 도움을 주면서 발전해온 것 아닌가.
‘발전이라.’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과연 양호석 쪽으로 가게 될 경우 자신의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인가 하는 의문.
그것은 사실 지금의 숲을 벗어나면 여태까지 이어져왔던 상승 곡선이 꺾여버리는 것 아닐까 하는 우려였다.
‘그렇다고 평생 여기서 살 수도 없는 거지.’
결정을 내려야 한다.
머지않아 사람들이 올 테니까.
“으음.”
사실, 이미 결정은 내리고 있었던 것 같다.
다만 그게 맞는지 아닌지 갈팡질팡하고 있었을 뿐.
“.......”
인벤토리에서 꺼낸 뜨끈한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인 그는 오랫동안 고민하던 것을 어느정도 정리해볼 수 있었다.
“미리 인사를 다녀오는 게 좋겠구나.”
* * *
숲 외곽에서부터 이웃들을 만나며 자신이 곧 그곳을 떠날 것임을 알렸다.
애초에 숲에서의 삶은 그저 서로 살아있으면 다행인 수준이었기에, 아쉬워하거나 붙잡는 이들은 없었다.
찍찍!
“그래. 빈 집들은 너희가 써도 좋아. 어디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지? 가족 친척 다 데리고 들어가 살아.”
찍찍찍!
“밤을 채워놓았냐고? 그건 아니고.”
다람쥐들에게 그가 만든 집들을 넘겨주었고, 가장 처음 만났던 이웃인 새들에게는 각각 주먹크기의 핵을 하나씩 꺼내주었다.
상대적으로 약한 편인 그들이 그것이나마 먹게 된다면 적잖은 도움이 될 것이었다.
“고생해.”
꾸루룩.
어미새는 여전히 신경질적인 모습이었지만, 그것이 화를 내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사냥할 때 주변 꼭 살피고. 아줌마는 너무 몰입하는 경향이 있어서 위험할 수 있거든.”
꾸룩.
늙은 호랑이는 최근의 전쟁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기에 인사를 건넬 수가 없었다.
대신 평소 녀석이 자주 휴식을 취하던 나무 둥치에 앉아 잠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크허엉.
“그래. 떠날 때가 됐어.”
호으엉.
“간다고. 숲 밖으로.”
동쪽의 왕.
그는 떠난다는 최강혁의 말을 굉장히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당황한 것 같기도 한 모습으로 거듭 뭔가 제스쳐를 만들다 마는 것을 반복하더니, 곧 무거운 눈빛으로 그를 향했다.
“뭐?”
크으엉.
“너가 왜 가?”
크오옹.
“......?”
따라간다니.
이게 무슨 소리야.
최강혁은 이어진 대화로, 녀석이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 수 있었다.
“내가 왜 네 주인이야?”
크허엉!
“아니. 그 때 그건 잠깐, 잠깐만 소유권을... 아, 이거 어떻게 이해시켜야 되나.”
언제부터 그랬나 했더니, 예전 개천가에서 목숨을 구해주었을 때부터인 모양이었다.
당시 조합 스킬을 위해서 소유권을 달라고 했던 게, 의미 전달이 조금 어려워서 쉽게 설명했었는데 그걸 엉뚱하게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 지금은 아니야. 난 네 주인이 아니라고.”
크호옹....
왕의 표정이 여러번 바뀌었다.
신이 난 것 같다가도 살짝 고개를 갸우뚱거렸고, 또 답답한 것 같으면서도 기분이 좋은 듯 했다.
‘뭐지.’
안 그래도 변덕이 심한 성격인데, 혹시 문제라도 생길까 걱정되었다. 그리고 그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달라고?”
크엉.
“벌써 먹었는데.”
크르르....
“아니, 너가 먹으라고 했잖아?”
왕들의 핵.
왜 그걸 나한테 주나 아직도 모르겠던 그걸 갑자기 돌려달라니.
게다가 몬스터처럼 몸 속에 담고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이제는 배를 째도 나오지 않는데.
크워어!
“으아아!”
왕의 포효.
최강혁은 주저 없이 전속력으로 달아났다.
다행히 뒤를 쫓아오지는 않는 것 같았지만, 일단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왜 그걸 나한테 줬는지 이제 알겠다.”
동쪽의 왕은, 그 당시에 최강혁을 주인으로 섬기기로 했던 것 같았다. 그것이 치료의 대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변덕이 심한 녀석이긴 해도, 자신의 목숨을 구한 대가까지 무시하진 않았다.
다만 자신의 주인이 훨씬 약해빠진 인간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아닐까.
‘나를 키워주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렇게 왕들의 핵을 넘겨주었는데, 이제 와서 주인이 아니라고 하니 도로 뱉으라는 것.
어찌 보면 맞는 반응이긴 한데, 이쪽도 나름 억울한 측면이 있다.
‘그래도 할 말은 다 하고 왔으니, 됐지.’
인간들을 조심할 것.
작은 친구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
쉽게 흥분하지 말 것.
어차피 이것 저것 길게 설명해봐야 기억하지 못할 테니, 핵심적인 것만 간추려서 강조했다.
그의 조언대로 행한다면 좋겠지만, 만약 그러지 못해서 문제가 생기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웃이었을 뿐, 가족은 아니니까.’
사실 녀석이 오해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냥 같이 가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곧바로 떠오른 건 녀석의 먹성이었다.
“절대로 못 먹여살려.”
그나마 지금 살고 있는 곳이 사냥감 넘치는 숲이라 다행이지, 바깥에서 놈의 배를 채워주려면 하루종일 들판을 뛰어다녀도 모자랄 것이다.
“이것도 참 오래 버텨줬네.”
가장 처음 만들었던, 지금까지도 쭉 집으로 사용하고 있던 중심 거처.
아래층에 있던 가죽 카펫에서부터 욕실의 도구들까지 잘 수거한 최강혁은 여전히 잘 고정되어있던 그물망과 전투복 천을 회수하고 돌아섰다.
이곳은 다람쥐들에게 주지 않았다.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나무가 스스로 회복할 테니까.’
나무에게 있어서 그의 집은 일종의 내상이다.
그가 있을 때도 주기적으로 확인하며 깎아내야 했었으니, 그가 없으면 자연스럽게 메워질 것이다.
1년이 넘도록 아프게 했다.
다시 회복할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그동안 고마웠어. 덕분에 편하게 지내고 간다.”
집 밖으로 나온 그는 나무의 껍질에 손을 얹고 작별인사를 건네었다.
“그럼, 가볼까.”
그렇게 최강혁은 숲에서 떠났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일단의 인물들이 그곳을 찾아왔다.
“저게 뭐지?”
하지만 그들이 숲으로 들어서기 전에 발견한 것은 눈에 잘 띄는 곳에 세워진 나무 패널과, 그곳에 고정된 누군가의 짧은 메모였다.
[ 등산하러 갑니다 –최강혁- ]
〈 53화 〉 053.
053.
“징하다, 징해.”
숲으로 그를 찾아왔던 이들이 빈손으로 돌아갔을 무렵.
최강혁은 거칠고 가파른 산 비탈, 그나마 평지라 할 수 있는 한 구석에서 숨을 고르는 중이었다.
“더 올 놈 없나.”
그의 주변엔 몸 곳곳이 터지고 부서진 거미들이 가득했다. 그 하나 하나가 성인 남성보다 큰 것들이었다.
껍질도 갑각 수준이어서, 일반 총알은 박히지도 않았다.
그나마 파괴력 강화에 관통력 강화까지 더해야 뚫리는데, 총알낭비가 심해져서 도중에 창으로 바꾸고 조졌다.
‘그래도 좀 수월했지.’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이 있었다.
일단, 거미도 아마 벌레로 취급되는 것 같았다.
그가 흡수한 맨티스 킹의 핵이 효과를 보였다.
‘잘못 이해하고 있었어.’
그 핵의 효과 중에는 ‘그보다 작은 벌레들에게 공포심을 준다’ 라는 것이 있었다.
최강혁은 그것을 흡수한 자신의 몸을 기준으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맨티스 킹의 크기가 기준이었던 것 같았다.
‘분명 나보다 큰 놈들이 많았는데도 다들 움찔거리고 우물쭈물했지.’
단순한 경계심이 아니었다.
그들에게서 분명히 두려움을 보았다. 덕분에 여러 마리를 상대하면서도 나름 여유가 있었고.
‘그거는 맞는 것 같고.’
반면 ‘더 큰 대상에 대한 두려움이 줄어든다’ 라는 효과는 지금 그의 몸을 기준으로 적용하는 것 같았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
‘그거 몇 번 찔렀다고 벌써 망가졌네.’
쥐고 있던 강철창을 본 그가 고개를 저었다.
창촉의 끝이 반뼘 정도 줄어들어있었다.
‘별 수 없겠지.’
마나를 잔뜩 소모할 정도로 강하게 찔러야 그나마 놈들을 뚫을 수 있었으니, 무기가 상하는 것도 당연하지 싶었다.
사실, 놈들을 거미라고 말하기도 애매했다.
굳이 묘사하자면 게와 거미를 합친 것 같은데, 가느다랗긴 해도 집게팔이 있다는 게 무척 기괴했다.
그래도 몸통 껍질은 분명 쓸모가 많아보였다.
‘강철보다 단단하다는 건가.’
최강혁은 주변에 죽어있는 놈들을 루팅하며 생각했다. 놈들의 갑각을 활용하면 새로운 무기를 만들 수 있을 법 했다.
‘아니면 방어구도 좋고.’
그렇게 루팅을 마친 그는 산의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반나절 쯤 더 가면 또 하나를 넘어갈 수 있을 듯 했다.
그가 산으로 올라가고 있는 이유.
그것은 캠프에서 추방되고 나서 처음 세웠던 목표였기에, 그것부터 이뤄보려던 것이 첫 번째였다.
하지만 굳이 그런 이유만으로 움직이진 않았다. 더 큰 이유라 할 수 있는 건 과거에 동쪽의 왕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확인해보고 싶어서였다.
‘산에서 내려왔다고 했었지.’
좀 더 어렸던 시절이라고 했다.
당시엔 지금보다 약했고, 고블린들이 떼로 몰려와 그가 살고 있던 영역을 차지했다던가. 그래서 떠밀리듯 산을 떠나 내려와 숲에 정착했다고.
‘역시, 궁금해.’
고블린들이야 그렇다 치지만, 그보다는 다른 이야기가 신경쓰였다.
다름아닌 고블린들이 차지하고 있다는 ‘오래 된 성채’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동쪽의 왕은 그것을 ‘아마도 인간이 만든 것 같다’고 했었다.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았지. 사라 레드우드도 다들 산 쪽은 개척하지 않고 있다고 했으니.’
지금의 지역에 지구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지는 나름 되었지만, 그래도 오래된 유적지 같은 게 생길 정도는 아니었다.
‘던전일 수도 있어. 아니라고 해도 이계인들의 고대 유적지일 가능성이 크고.’
던전이든 유적이든 가볼 이유는 충분하다.
고향에 있었을 때도 인터넷에서 그런 것들과 관련된 이야기를 본 적이 있었다.
만약 아직 남겨진 것들이 있다면, 분명 큰 돈이 될 만한 것들일 것이다.
‘그나저나, 고블린이라.’
이름만 보면 흔한 몬스터 같다.
소설이나 영화, 게임 같은 곳에 등장하는 그런 하급 몬스터로 잘 알려져있지 않나.
그러나 동일한 몬스터가 아니다.
그저 조금 비슷하게 생겨서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들었다.
대략 인간과 비슷한 키에, 매부리코와 더불어 늘어질 정도로 커다란 귀 정도가 특징일까.
‘이쪽도 비슷하겠지.’
고향에서, 도로변의 사체를 청소하다가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원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되었지만, 그 중에서 나름 온전한 상태의 머리통을 본 기억이 났다.
‘덩치에 비해 머리가 컸어.’
크기만 한 게 아니라 단단하기도 해서, 어지간하면 머리가 아니라 몸을 노리는 게 낫다던가.
그래봐야 총알이 아주 안 뚫리는 건 아닌 모양이지만.
‘움직이자.’
물을 조금 마신 그는 계속 이동했다.
동쪽 왕의 이야기만으로는 유적지의 정확한 위치까지 알아낼 수가 없어서, 일단 산에 올라가 고블린들의 흔적부터 찾아내야 할 것 같았다.
‘좀 깊은 곳일 가능성이 커.’
동쪽 왕도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게다가 이미 고고도 드론을 운용중인 곳들이 있는 모양인데, 그런 걸 발견하고도 손을 쓰지 않을 리가 없기도 하고.
‘산이라서 드론을 못 보내는 걸 수도 있고, 아니면 나무나 골짜기에 가려졌을 수도 있고.’
땅 속 유적은 아니라고 했었으니, 둘 중 하나 아닐까.
어림 짐작을 해보며 걷던 그는 숲에 있던 것들에 비해서 작은, 하지만 나름 거목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나무에 등을 붙여 기대었다.
이어서 짧게 숨을 고른 그는 미리 흡수해두었던 강철 가시 장갑을 손 위에 재구성하고 재빨리 위로 올라갔다.
“.......”
그곳에서 대략 100미터 앞쪽에 뭔가가 있었다. 얼핏 보인 거였지만, 일단 높은 곳으로 온 다음에 확인해도 늦지 않겠다 싶어서 바로 움직인 것이다.
‘거미들 영역이 저곳이었나.’
아까 상대했던 놈들은 영역 밖에서 활동하던 것들일까? 그가 바라보는 숲 안쪽으로 더 많은 숫자의 거미들이 조용히 자리를 잡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방금 전 눈에 띈 움직임은 그곳에 있던 거미줄인 듯 했다. 그 한 구석에서 버둥거리고 있는 작은 짐승이 보였다.
‘다람쥐잖아.’
녀석들은 거미줄에 잘 안 걸리는데, 어쩌다 저기 붙었나 싶었다.
하지만 적당히 유감이네 하고 넘어가지 않는 건, 녀석을 구해볼 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말이 통할 지는 잘 모르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유적지를 아는지 물어볼 수 있을 테니까.
‘거미줄을 끊는 것보다, 차라리 주변 놈들을 다 제거하는 게 빨라.’
빠르게 판단한 최강혁은 인벤토리에 있던 저격소총을 꺼내들었다.
‘음.’
무음모드를 활성화했지만, 그렇다고 반동 자체가 줄어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좀 더 나무 기둥에 몸을 기대어 자세를 잡은 그가 잠시 후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치 동굴 깊은 곳의 박쥐들처럼 죽은 듯이 매달려있던 거미들이 하나 둘 퍽!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땅으로 추락했다.
일부 한 발에 끝내지 못한 탓에 발악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쪽의 위치를 발견하지는 못했기에 그저 제자리에서의 몸부림일 뿐이었다.
‘숨는구나.’
몇몇 눈치 빠른 거미들을 시작으로 많은 녀석들이 나뭇잎들 사이에 몸을 숨겼다.
일부 주변을 수색하는 듯한 반응을 보이는 놈들도 있었다.
‘네 마리가 넘어가면,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겠단 말이지.’
멀리서 저격으로 죽일 경우 그런 부분이 문제였다. 사체가 어디 즈음 있는지 잘 기억이 안 나서 포기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거미는 냄새가 거의 없기도 하고.’
고개를 흔든 그는 다시금 방아쇠를 당겼다.
발사와 장전, 다시금 발사와 장전이 기계처럼 맞물렸다. 그렇게 잠시 후, 숲속에는 바람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만이 남았다.
‘애매한데.’
완전히 숨어버린 놈들이 적지 않았다.
이 위치에선 확인하기 어려우니, 저격은 불가능한 일이다.
다람쥐가 있는 근방은 별 문제 없을 것 같긴 한데, 그렇다고 무턱대고 접근하다가 숨어있는 놈들에게 포위당할 수도 있다.
‘아무리 맨티스 킹의 효과가 있다고 해도, 절대적인 건 아니니까.’
그는 저격소총을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대신 강철 크로스보우를 꺼냈다.
지난 번처럼 볼트에 뭔가를 꿰었는데, 개미 유인용 점액질이 아니라 주먹 절반 크기의 고깃조각이었다.
핏기가 아주 빠지지 않아서, 후각에 민감한 이라면 약간의 누린내를 맡을 수도 있을 상태의 고기.
그것을 꿴 볼트가 곧 여러 번에 걸쳐 숲 곳곳으로 날아갔다.
애초에 어딘가에 명중시키려고 쏜 게 아닌 터라, 고깃조각 때문에 제대로 날아가지 못해도 상관 없었다.
‘좋아. 기다리자.’
그리고 잠시 후, 조용하던 숲에 미묘한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숨어있던 거미들이 고기가 풍기는 피냄새에 관심을 보인 것이다.
“.......”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거미들을 저격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조용히 움직인 그는 얼른 다람쥐가 붙어있던 거미줄로 가서 녀석과 시선을 마주했다.
‘통하면 좋겠는데.’
숲에 사는 다람쥐들과 하던 제스쳐를 그대로 보여주니, 녀석이 반응을 보였다.
발버둥치다 오히려 더 강하게 얽혀버린 거미줄 때문에 제대로 된 동작을 보이진 못하고 있지만, 분명 알아본 것 같았다.
‘좋아.’
최강혁은 거미줄로 손을 가져갔다.
쉽게 끊거나 잘라낼 수 없을 정도로 질긴 거미줄이었다.
차라리 그 주인인 거미를 죽이는 게 빠르다고 일치감치 결정한 것도 그런 부분 때문이었다.
‘이렇게 하면 되니까.’
그렇게 주인이 사라진 거미줄을 루팅해버리자, 허공에 묶여있던 다람쥐가 그대로 그의 손바닥에 착지하고는 쪼르르 어깨 위로 올라왔다.
‘다른 놈들 루팅은 이따가 하면 되고.’
얼른 그곳을 빠져나왔다.
안전한 곳에서 다람쥐를 내려놓은 그는 인벤토리에서 반으로 자른 밤 열매를 건네주었다.
“고블린 말이야. 음. 그렇게 말하면 모르겠구나. 코가 이렇고, 귀가 이런 놈들인데....”
찍찍!
“그래. 어디 있는지 알아? 가장 많이 뭉쳐있는 곳 말이야.”
찍!
“음....”
지금의 다람쥐는 고블린들을 알았다.
그리고, 놈들이 어디에 많은 지도 알았다.
정확한 좌표 따위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래도 지금 위치에서 어느 쪽으로 얼마나 가야 하는지는 대충 파악했다.
“고맙다.”
찍찍!
죽을 위기에서 구함을 받은 다람쥐는 밤열매를 실컷 갉아먹고 나서 쪼르르 멀어졌다.
‘시작이 좋아.’
첫끗발이 개끗발이라던 이야기가 슬쩍 머릿속으로 떠올랐지만, 애써 고개를 흔들어 떨쳐낸 그는 돌격소총을 꺼내 들고 다시금 움직였다.
그가 죽인 거미들을 모두 챙기진 못했지만, 그래도 9마리를 인벤토리에 담을 수 있었다.
‘그 정도 거리면... 넉넉잡고 이틀 정도면 될까.’
최강혁은 다람쥐가 이야기했던 방향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경로 상에 무엇이 있는지에 따라서 왔다갔다 할 것 같긴 하지만, 그렇게 오래 걸릴 것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땅 위를 걷는 것도 아니다.
이곳 역시 나름 빼곡하게 들어선 나무들이 존재하니까.
‘가지가 좀 더 가늘고 약하니까 조심해야겠어.’
하지만, 오해가 있었다는 걸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지났을 때였다.
‘아....’
바위절벽 꼭대기에 엎드린 그는 아래로 보이는 풍경에 말문이 막혔다.
‘고블린들이 많은 곳이 맞긴 한데.’
아무리 보아도 유적지는 아니었다.
그저 고블린들이 모여 사는 그들의 거주지 정도라고 해야 맞다.
사실 이곳까지 오는 중에도 비슷한 규모의 거주지를 몇 곳 지나치기도 했다.
‘이건 뭐, 산 자체가 고블린 영역이라고 봐도 될 정도잖아.’
오죽하면 동쪽의 왕이 밀려났을까.
‘어쩌지.’
고블린은 ‘공존’할 수 없는 종류의 몬스터다. 숲에 살 때도 이웃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그 숲에도 종종 고블린들이 내려올 때가 있었지만, 왕들이 그들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일단 번식이 빨라서 숫자가 금방 늘어나버린다. 또한 주변의 자원과 식생을 순식간에 소모하고, 오염시키고, 파괴한다.
‘말이 통하는 놈들도 아니고.’
고블린들의 언어는 알지 못했다.
나름의 언어체계가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왠지 그들의 언어를 안다고 해도 대화가 가능할 것 같지도 않고.
‘여기도 아니고, 이제 어디로 가지?’
또 다람쥐를 찾아 물어봐야 할까?
하지만 녀석들이 알고 있는 대로라면 결국 비슷한 규모의 마을일 것이다. 어쩌면 이미 지나왔던 마을을 이야기할 수도 있고.
‘유적지를 설명하긴 힘드니까.’
그나마 동쪽의 왕쯤 되니까 인간들이 만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거지, 다람쥐들은 그런 복잡한 것까진 이해하지 못한다.
‘발품을 좀 오래 팔아야 할 것 같은데... 그러려면, 역시 잠부터 챙겨야겠구나.’
벌써 이틀째 잠을 자지 않았다.
아직은 쌩쌩하지만, 다음에 언제 잘 수 있는 기회가 올지 모른다.
‘이쪽에선 거처를 마련하기도 애매하니까.’
계속 움직여야 한다.
잘 수 있을 때 자야겠지.
‘마침 장소도 괜찮고.’
최강혁은 절벽 꼭대기의 바위 아래에 작은 구덩이를 파냈다.
이젠 땅 속에서 자는 건 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은 지면이 아니라 바위절벽 꼭대기니까 좀 낫지 않을까 싶었다.
‘이 정도면 얼추 됐나.’
혼자서 적당히 누울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 그는 그 안의 바닥과 옆에 각각 강철판을 꺼내어 배치했다.
자잘한 벌레 같은 건 그 정도로도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음...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더니.’
딱딱하고 차갑긴 했지만, 털가죽을 몇 장이나 꺼내 깔고 누우니 그럭저럭 괜찮아졌다.
‘불은 못 피우니까, 옷을 좀 더 껴입자.’
구덩이 입구를 틀어막고 숨구멍만 확보한 후, 미루었던 잠을 청했다.
중간에 몇 번이고 눈을 뜨긴 했지만, 숲에서도 비슷했으니 별일 아니었다.
‘이런 데서 중간에 안 깨고 푹 자버리면, 그게 더 문제지.’
나름대로 괜찮게 잤다.
구덩이 안을 잘 치우고 밖으로 나왔다.
인벤토리가 넉넉해지니까, 임시로 만든 잠자리의 수준도 훨씬 나은 것 같았다.
‘어디로 갈까.’
그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만약 자신이 이 산에 유적지를 만든다면 어디로 할까 생각해보았지만, 애초에 이런 험한 산 속에 뭔가를 짓는다는 상상부터가 잘 안 되었다.
‘별 수 없지. 뭐,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이니.’
가볍게 몸을 푼 그는 절벽 아래로 향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지금의 여정이 그렇게 장기전이 될 줄은 차마 짐작하지 못했다.
〈 54화 〉 054.
054.
“두고 보실 겁니까?”
부하의 물음에도, 사라 레드우드는 가만히 차창 밖을 응시했다.
열린 창문 밖으로 담배연기 섞인 한숨을 내쉰 그녀는 곧 꽁초를 밖에 던져버렸지만, 창문을 닫지는 않았다.
“우리가 낄 판이 아니야. 자칫하면 덤터기 쓰기 좋은 일이고.”
“하지만, 누가 봐도....”
“누가 봐도 그래. 그림이 안 좋아.”
창문턱에 팔을 얹은 사라 레드우드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시금 고개를 젓고 나서 입을 열었다.
“마지막 목격 장소 업데이트는 안 됐고?”
“산으로 올라간 것까지만 확인됩니다.”
“후...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이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고.”
최강혁이 숲에서 사라졌다고 알려진 지도 벌써 1년. 많은 것들이 변해가고 있지만, 그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우리 일에나 집중하자고.”
팔을 내린 그녀는 창문을 닫고 시트에 몸을 묻었다.
* * *
“아오, 썅놈의 새끼들.”
온몸에 피칠갑을 한 최강혁.
그는 아저씨들이나 입에 담을 법한 걸걸한 욕설을 내뱉으며 쥐고 있던 단창을 탁탁 털었다.
창에 묻어있던 피와 살점들이 적당히 땅에 흩뿌려질 때, 그의 시선은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수십 구의 사체들을 돌아보고 있었다.
고블린들.
그리고 놈들이 부리던 늑대와 들개, 온갖 맹수들이 그곳에 처참한 꼴로 널려있었다.
탁탁.
다시금 신경질적으로 단창을 털고 고쳐쥔 그는 주위를 돌아다니며 마치 진공청소기를 돌리듯 일대의 사체들을 허공으로 빨아들였다.
그의 손이 향하는 곳마다 사체들이 사라지니, 곧 바닥에 남은 피얼룩만이 그곳에서 뭔가 벌어졌음을 짐작케 했다.
“음....”
이어서 그가 향한 곳.
전장으로부터 50미터쯤 떨어진, 상대적으로 후방이라 할 수 있는 그곳엔 바닥에 대각선으로 내리꽂힌 강철창이 있었다.
창만 덩그러니 있던 건 아니었다.
등을 보인 채 달려가던 고블린 하나가 그 창에 가슴팍이 뚫린 채로 죽어있었다.
즉사한 건지, 미동도 없었다.
“도굴꾼 새끼들이...”
이미 죽은 고블린을 루팅하며 악담을 퍼부은 그는 놈의 발치에 떨어져있던 작은 쇠붙이를 집어들었다.
“아직도 멀었나.”
인벤토리를 열었다.
비슷한 형태의 조각 수십 개의 옆에 방금 주운 것을 넣어두니, 은은한 빛을 발하며 상호작용을 하는 게 보였다.
‘정확하진 않지만, 점점 빛이 강해지는 건 알겠다.’
그가 모으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단지, 반년만에 겨우 찾아낸 이계의 고대 유적지에서 그 벽에 새겨진 그림들을 통해 보았던 것이었다.
그림과 함께 새겨져있던 상형문자들을 해석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당시에 유적에 보관되어있던 것들 중 핵심이라는 건 짐작이 가능했다.
“아오, 썅놈들.”
문제는 때려죽일 고블린 새끼들이었다.
그가 찾아갔을 때, 이미 유적지는 텅 비어있었다. 그곳에도 고블린들이 살고 있었고, 아마도 그곳에 있었을 유물들을 아무렇지 않게 다루는 모습도 보였다.
특히, 핵심이었을 유물이 가장 심했다.
뭘 알고 그런 건지는 몰라도, 그걸 제멋대로 분해해서 나눠가진 것이다.
아마 겉이 황금빛이어서 그런 건가 싶기도 한데, 실제로는 금이 아니라 다른 물질이라는 건 아는지 모르는지.
‘그놈들 생각을 어떻게 알겠어.’
아무튼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줄곧 고블린들을 상대해오고 있었다.
그래도 겸사겸사 놈들이 챙긴 다른 유물들도 확보하고는 있지만, 그렇게 대단한 가치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아보였다.
‘뭐... 이계의 고대유물이면 대충 경매장 같은 데다가 팔아도 되려나.’
아닌가.
그런 게 있다고 하면 나라에서 압수할 수도 있을까. 우리 나라는 그런다던 것 같은데.
뒷머리를 긁던 그는 손에 묻었던 고블린의 피가 지금 머리에도 묻었음을 깨닫고 얼굴을 구겼다.
“...근처에 물 없나.”
한숨을 내쉰 그는 바닥으로 손을 뻗고 스캐닝을 시작했다.
‘지역 스캐닝’기능은 그동안 단계가 오르면서 생겨난 새로운 기능 중 하나였다.
처음엔 반경 50미터 범위에 걸쳐 지형을 스캔하는 정도에 그쳤지만, 거듭 사용하다보니 조금씩 늘어나 지금은 반경 100미터까지 가능했다.
다만 지형만 확인이 가능하고 그곳에 뭐가 있는지 같은 건 나오지 않아서 숲인지 풀밭인지, 아니면 몬스터들의 소굴인지 같은 건 그가 직접 알아내야 했다.
‘그래도 데이터 저장소하고 연계가 되니까.’
수시로 활용하고 있는 건 그것으로 나름 정밀한 지도를 만들 수 있어서였다.
‘저쪽에서 뭔가 느낌이 오는데.’
왠지 물이 있을 것 같은 곳으로 이동을 시작한 그는 손상된 창들을 인벤토리에 넣고 이미 보수가 끝난 창을 꺼냈다.
“숲이면 짜증나는데....”
지금 같은 개활지에선 창이 유용하지만, 나무나 덩굴들이 우거진 곳에선 여러 모로 번거로워졌다.
하여 어지간하면 넓은 공간으로 적들을 유인해서 정리하는 편이었지만, 왠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아오. 또 숲이네.’
언덕을 넘어가자 보이는 광경에, 그는 창을 도로 집어넣고 날 길이가 짧은 편인 정글도를 꺼내 쥐었다.
하지만, 어지간하면 그것을 쓸 일이 없을 거라 짐작했다. 숲에선 가급적 전투 자체를 지양하는 편이니까.
‘저 방향에 물이 있어야 하는데. 벌써 사흘 째 못 씻었잖아.’
가진 물이 없는 건 아니지만, 식수로 쓰기에도 간당간당한 양이었다.
숲의 초입에 다다른 그는 주저 없이 나무 위로 올라가 위쪽에서 이동을 이어갔다.
그 중간 중간 지역 스캐닝도 빼놓지 않았기에, 이동 속도는 그리 빠르지 못했다.
‘한 번에 몇 킬로미터쯤 팍팍 스캔되면 속 시원하겠는데 말이지. 뭐, 나중가도 그런 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다행히 그가 짐작하던 곳에서 작은 냇물을 발견했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 이동한 것은 더 큰 물줄기로 이어지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오....”
짐작했던 대로였다.
마치 풍경화라도 보는 듯한 느낌의 호수를 발견한 그는 이제 이 산의 지형을 좀 알게 된걸까 나름 뿌듯했다.
‘그래도 아직 10퍼센트가 안 돼.’
물이 있을까 싶어서 갔다가 아니었던 게 9할이 넘는다. 솔직히 이번엔 운이 좋았다고 해야 맞다.
‘선객은... 없는 것 같고.’
혹시 모르기에 거듭 주변을 돌아본 그는 자잘한 동물이나 새들만 보이는 호수 쪽으로 천천히 접근했다.
‘이런 곳은 보통 뭐라도 있을 법 한데, 없다는 건....’
호수 주변에 몬스터가 없다는 건, 호수 안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정글도를 집어넣고 돌격소총을 꺼내 쥔 그는 지역 스캐닝으로 확인한 호수의 깊이가 생각보다 깊다는 것에 경계심을 가졌다.
“.......”
아주 가까이까지 다가가지는 않아서일까.
그럭저럭 거리를 둔 채 루팅만으로 물을 퍼담으니, 시간이 지나도 뭔가가 튀어나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들어가긴 찝찝하고.’
욕심 같아선 홀딱 벗고 뛰어들어 간만에 목욕이라도 하고 싶지만, 그다지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았다.
‘담는 김에 많이 담자. 목욕은 안전한 곳에 가서 하면 되지.’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문득 호수 저편의 수풀을 헤치고 나온 고블린들이 눈에 띄었다.
“.......”
얼른 자세를 낮추었다.
놈들은 이쪽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물을 길러 온 건지, 양동이 따위를 들고 왔던 고블린들을 가만히 지켜보던 최강혁은 그것들이 호수에 다가가기 전 뭔가를 물 안으로 던지는 것을 보았다.
‘고기 같은데.’
제대로 가죽도 벗기지 않은 토끼, 혹은 사슴의 넓적다리 같은 것들이 연거푸 물 속으로 던져졌다.
그리고, 곧 수면 안쪽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저게 뭐야?’
왜 이런 곳에 문어가 있어?
아니. 크기를 보면 당연히 문어가 아니겠지만, 꾸물거리는 거대한 촉수를 보고 떠오르는 건 문어 아니면 낙지였다.
‘들어갔으면 좆될 뻔 했네.’
고블린들은 그렇게 일단 먹이를 던져주고 나서 물을 퍼가는 모양이었다.
‘저쪽인가.’
조심조심 나무 양동이로 물을 퍼낸 고블린들이 다시금 수풀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그는 놈들의 뒤를 쫓으려 했지만, 곧 발을 멈추었다.
‘뭔데, 또.’
인벤토리가 아니라 가슴팍의 안주머니에 넣어둔, 그 이상한 조각 중 하나가 반응하고 있었다.
일종의 탐지기로 쓰고 있는 조각인데, 다른 조각들이 있는 방향과 대략적인 거리를 빛과 진동으로 가르쳐주었다.
“.......”
그리고, 그것을 꺼내본 최강혁의 표정이 굳었다.
내심 방금 전 사라진 고블린들 쪽이길 바랐지만, 유감스럽게도 아니었다.
‘이 방향에, 이 거리면....’
호수 안쪽이다.
빌어먹을 거대 문어새끼가 들어있는 곳 말이다.
‘뭐... 내 인생이 이렇지.’
* * *
호숫가 근처의 숲에서 사흘을 보냈다.
놈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보기 위해서였다.
‘작은 짐승들은 건드리지 않아.’
특정한 행동패턴이 있었다.
물가에서 느껴지는 진동 같은 걸 느끼는 것 같지만, 그게 아주 작다면 관심을 갖지 않는 모습이었다.
다만 예외가 있다면, 새들의 경우였다.
물가에서 물을 먹는 정도면 상관 없는데, 종종 호수 안쪽의 물에 뛰어들거나 몸을 담그고 헤엄치는 경우엔 달랐다.
그럴 때마다 여지 없이 놈들을 노린 촉수가 튀어나왔다. 일부 놓치기도 했지만, 촉수의 속도가 적잖게 빨라서 위협적이었다.
‘어디가 약점인지도 잘 모르겠고.’
호수의 깊이와 촉수의 길이를 따져보면 그 몸통의 크기도 대강 짐작이 되었다.
문제는 지금 이곳에서, 호수 바깥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총도 안 먹힐 테고.’
총을 쏴봤자 물에 들어가면 회전력이 줄어들다 결국 작은 쇳조각이 될 것이다.
화살은 좀 덜하긴 할 텐데, 놈의 크기를 생각하면 이쑤시개나 바늘 정도도 안 될 것 같다.
‘결국 밖으로 끌어내야 한다는 거지.’
놈을 어떻게 끌어낼 수 있을까.
사실 그 방법은 알고 있었다.
‘끌어내는 건 아니지만.’
놈이 그곳에 그대로 있어도, 수면 밖으로 드러내는 방법. 다른 이들이라면 몰라도 지금의 그라면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물을 퍼내면 돼.’
그리 어렵지 않다.
특수칸을 활용하면 한 칸당 10톤의 물을 퍼낼 수 있으니까. 그걸 어디에 버리느냐가 문제긴 한데, 그거야 천천히 생각해보면 될 일이고.
‘문제는, 놈한테 있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저 호수 아래에 있는 건지가 불확실하다는 거야.’
만약 저 문어가 먹어치운 거라면 아직 그 조각이 남아있을 리 없지 않나? 소화가 될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면 그냥 호수 밑바닥에 가라앉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속단은 금물이었다.
‘일단 물부터 빼보자.’
다만 그 전에 사전작업을 조금 해둬야 한다. 아무렇게나 물을 퍼다 부어버릴 수는 없으니까.
‘계곡이 가까워서 다행이네.’
다시금 사흘 동안 이어진 작업.
계곡 쪽에서부터 호수 근처로 연결되는 작은 고랑이 생겨났다.
작업 과정에 맞닥뜨린 몬스터들과 전투도 벌어졌지만, 사실 이쪽의 몬스터들은 왕들이 있는 숲에 비해서 강하지 않은 편이었다.
‘어쩌면 내가 강해진 걸 수도 있고.’
내심 생각한 그는 자신이 작업한 곳을 다시금 확인했다. 아예 호수와 연결하지 않은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물길을 완전히 터버리면 호수의 수량이 줄어들겠지.’
이쪽의 생태계를 훼손할 생각은 없었다.
퍼다 붓는 건 직접 할 생각이었다.
‘얼추 주변 정리도 되었고... 시작할까.’
나무 위에서 훌쩍 뛰어내린 그는 천천히 호숫가로 다가가 물을 퍼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번에 10톤의 물이 사라졌지만, 호수의 크기가 나름 되는 터라 수면이 확 내려가거나 하지는 않았다.
‘좀 걸리겠는데.’
미리 만들어두었던 물길로 향한 그는 그곳에 퍼낸 물을 쏟아부었다.
대량의 물이 콸콸콸 흘러내려가며, 그가 만들어둔 고랑을 좀 더 깊고 넓게 만드는 것이 보였다.
같은 방식으로 거듭 호수와 그곳을 오가니,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수면이 내려가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수면이 1미터쯤 내려갔을 때 놈이 반응을 보였다.
〈 55화 〉 055.
055.
‘움직이는구나.’
그곳에 아무 것도 없음에도 수면 가까이 촉수를 뻗어보던 놈은, 거듭 뭔가를 확인하듯 다른 촉수들을 비슷하게 수면 위로 꿈지럭거렸다.
그러더니 가까운 물가로 촉수를 내밀어 훑기도 했지만, 미리 뒤로 물러나있던 최강혁은 그것에 닿지 않았다.
‘물이 없으면 안 되는 건가?’
바깥으로 튀어나왔던 촉수들이 그 짧은 시간동안에도 바싹 마르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기분탓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큰 전투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쉽게 해결할 수 있으면 좋긴 하지.’
그 때, 고블린들이 나타났다.
나무 뒤로 숨은 최강혁은 수면이 줄어든 것을 본 고블린들이 당황하는 것을 보았다.
‘퍼가기 애매하긴 하지.’
양동이를 집어넣으려면 살짝 비탈이 된 가장자리 안쪽으로 더 들어가야 했다.
미리 미끼를 던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안전해지는 건 아니니 우려가 되는 것도 당연했다.
‘그렇다고 그냥 가냐.’
위험한 것 같으니 그냥 가버렸다.
오히려 머리가 좋다고 해야 할까.
‘음... 시간이 지나면 물이 다시 채워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겠구나.’
다시 내려간 그는 멈췄던 작업을 이어갔다.
고블린들과 달리, 그는 아래로 내려가지 않고도 어느 정도까지는 루팅을 이어갈 수 있었다.
‘딱히 수면을 건드리지도 않으니. 답답하긴 할 거야.’
놈에게 눈이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그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하는 건 분명해보였다.
2미터. 3미터.
거듭 내려가던 수면은 결국 놈이 위로 뻗지 않아도 그 촉수들을 노출시키기 시작했다.
‘진짜네. 마르고 있어.’
놈은 수면 밖으로 몸을 내밀지 않기 위해서 납작하게 퍼진 형태가 되었지만, 그것으로도 오래 버티진 못했다.
그러자 반대로 호수 밑바닥을 파고 들어가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그 또한 큰 성과를 얻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
최강혁은 물 위로 드러난 놈의 촉수와 몸통이 그 끝에서부터 바싹 쪼그라드는 모습을 보았다. 마치 말린 오징어를 연상케하는 모습이었다.
‘문어보다는 낙지 쪽이네.’
그 즈음 품 속에 들어있던 조각의 반응이 좀 더 강해졌다. 그 위치를 대강 짐작해보니, 다행히 놈이 있는 쪽은 아닌 듯 했다.
‘조금만 더 퍼내고 들어가자.’
낙지는 호수 한 구석에 쭈그리고 있지만, 완전히 마르거나 굳어있는 건 아니었다.
잘하면 촉수 몇 가닥 정도는 뻗을 수 있을 것 같으니, 너무 성급하게 들어가는 건 좋지 않았다.
‘굳이 죽일 필요도 없을 것 같고.’
조각만 찾아내면 된다.
그렇게 거듭 물을 퍼낸 그는 뻘처럼 바뀐 호수 한쪽으로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이쪽인데.’
혹시 낙지가 움직이지는 않을지 거듭 신경을 쓰며 그 일대를 뒤져보니, 바닥에서 대략 1미터 깊이에 찾던 것이 있었다.
심지어 하나가 아니었다.
같은 자리에서 두 개 이상 찾아낸 건 한 달 전쯤 이후로 두 번째였다.
“.......”
그제야 새삼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낙지가 먹지 않고 버린 것으로 보이는, 누군가가 걸치고 있었을 누더기 가죽이나 녹슨 쇠붙이 칼.
그 외에도 몽둥이나 가죽 방패 따위가 호수 바닥에 쌓여있었다.
굳이 루팅해봐야 가치가 없을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처분하면 소량의 마나라도 건질까 싶어 가까운 것들 위주로 루팅한 후 올라왔다.
‘고생해라.’
반대쪽 바닥 구석에 잔뜩 웅크리고 있는 낙지를 본 그는 마지막에 루팅했던, 10톤씩 두 칸에 달하는 물을 그쪽에 도로 부어주었다.
말라가던 낙지가 몸을 완전히 담그기엔 부족한 양이었지만, 그래도 왠지 죽지는 않을 것 같았다.
‘어떻게 이런 곳에 있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을 죽여서 챙겨봐야 인벤토리나 몇 칸 받는 정도일 것이다. 덩치를 생각하면 이상하지만, 스캔해보니 핵 같은 것도 없었고.
‘나는 이 정도면 됐어.’
1톤 정도의 물을 따로 남겨둔 그는 그곳에서 돌아섰다.
품 속의 조각이 지금까지 중 가장 강하게 반응하는 걸 보아, 이제 정말 거의 다 찾아낸 것 같았다.
‘저 쪽이구나.’
방향은 확실하지만 거리는 애매하게 느껴진다는 건 상당히 멀다는 뜻이다.
진흙으로 엉망이 된 전투화와 바지를 내려다본 그는 일단 그것부터 수습해야 할 것 같았다.
‘좀 씻고, 옷도 갈아입어야 되겠다.’
마침 물길을 내던 중에 찾았던 작은 동굴이 있었다. 입구만 제대로 막으면 하룻밤 자고 가기에 충분할 것이다.
찌걱 찌걱.
‘...빨리 가자.’
걸을 때마다 느껴지는 찝찝함에, 그는 서둘러 발을 재촉했다.
* * *
깊은 산 속에서 만날 수 있는 것들 중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몬스터가 돌아다니는 세상에선 그저 우스개 취급할 수도 있는 이야기지만, 그리 틀린 말도 아니었다.
최강혁은 본의 아니게 마주친 광경에, 문득 그런 농담을 떠올렸다.
‘아무리 봐도 고블린 솜씨가 아닌데.’
나무에 묶여있는 누군가의 시체.
머리와 하반신이 뜯겨나가고 없었지만, 분명히 인간임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뼈와 살점은 남아있었다.
이런 곳에서 인간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죽은 인간을 말이다.
‘죽고 나서 묶인 건지, 묶이고 나서 죽은 건지가 불분명해.’
성별도 확실하지 않다.
스캔 데이터를 보면 여성일 확률이 높다고 나왔지만, 100퍼센트는 아니었다. 골격이 작은 남성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이건... 문신인가.’
그곳에 남아있는, 왼쪽 상완 즈음의 피부에 뭔가가 있어서 살펴보니 멍이나 흉터가 아니라 문신인 듯 했다.
워낙 주변 피부가 다 검게 죽어있어서 제대로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그 부분만 떼어 루팅한 후에 인벤토리에서 조금 만져보니 또렷한 문양이 나타났다.
‘죄수 번호군. 미국식인 것 같은데.’
미국 죄수들은 피부에 바코드와 숫자로 이루어진 문신을 새긴다고 들었다.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고윤호가 직접 보았다고 했으니 확실할 것이다.
‘근데 왜 미국 죄수가 이런 곳까지 와서 뜯어먹힌 거지?’
뺨을 긁던 그는 어느 순간 조용히 물러났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이질적인 기척이 있었는데, 풀숲에 숨어서 살펴보니 다름아닌 또 다른 인간들이었다.
-으읍! 으으읍!
-아직 힘이 덜 빠진 모양인데?
-한방 쑤시든가.
-여기서 피 흘리면 곤란하잖아.
적어도 세 사람 이상의 목소리.
최강혁은 조금 전 자신이 서있던 곳까지 접근한 무리를 보았다.
묶여있는 사람 하나를 끌고 온 네 명의 남자... 아니, 다시 보니 세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였다.
“.......”
그냥 보아도 묶인 자와 똑같은 죄수들로 보였는데, 그것은 그들 중 둘의 드러난 팔뚝에 똑같은 방식의 바코드와 숫자가 새겨져있었기 때문이었다.
‘죄수끼리도 파벌이 생긴 건가.’
어느 캠프 소속인지는 모르겠지만, 죄수들을 이런 곳에 풀어놓는 건 좀 이해가 안 갔다.
어쩌면 탈옥한 자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즈음, 곧이어 눈에 띈 것이 있었으니 남자 하나가 걸치고 있던 청조끼의 등판이었다.
마치 락카나 페인트 따위로 대충 그려놓은 듯한 문양은 그가 확실히 기억하고 있던 깃발 속의 그것과 동일했다.
‘와일더 클랜이라고 했던가.’
그들을 이런 곳에서 마주칠 줄은 몰랐다.
범죄집단이고, 그 거점이 어디인지 불명확하다더니, 설마 이 산 속에 아지트를 만들어두기라도 한 걸까.
‘붙잡힌 사람도 죄수군.’
어떤 사연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잡혀온 사람도 그리 정의롭거나 유순해보이지는 않았다.
이마와 뺨에도 문신이 가득했고, 눈가에는 눈물문신도 보였다.
‘저곳이 처형 장소 같은 건가보네.’
기존에 매달려있던 뜯겨나간 사체도 죄수였던 것을 생각해보면, 아마 클랜에서 문제를 일으킨 이들을 처리하는 곳인 것 같았다.
실제로 그곳으로 데려간 이를 사슬과 밧줄을 이용해 단단히 묶은 그들은 마지막으로 각자 허리춤이나 품 속에서 제각각의 쇠붙이를 꺼내들었다.
푹! 푸푹!
그렇게 한 명이 한 번씩 묶인 자를 찌르고 난 후,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급소는 하나도 안 찔렀네. 일부러 그런 건가.’
네 번 찔렸지만, 묶인 자의 눈에 힘이 풀리지 않은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하지만 최강혁은 그 남자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미국에서 보내올 정도의 죄수.
게다가 온몸이 도화지인 것마냥 새겨져있는 수많은 문신들 중에는 갱단의 표식으로 보이는 것들도 더러 섞여있었다.
‘결국 죄수들끼리의 다툼인 거겠지.’
구할 수는 있겠지만, 뒷수습이 안 될 것이다.
‘이미 늦었기도 하고.’
고개를 저은 그는 수풀 너머로 더욱 깊이 몸을 감추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그가 잘 알고 있는 체취가 천천히 접근하고 있었다.
“.......”
입에 재갈을 물려놓았기에, 비명이라 할 만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살점이 뜯기고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이어질 즈음, 최강혁은 이미 멀어지고 있던 무리들을 조용히 뒤따랐다.
오해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들을 추적하는 건 아니었다.
‘왜 하필 그 쪽이냐고.’
품 속의 조각 탐지기가 가리키는 곳이, 유감스럽게도 그들이 향하는 곳과 같았다.
* * *
상당히 교묘한 위치와 지형이었다.
그들의 아지트는 외부에서는 도저히 찾아보기 힘든, 가파른 협곡 안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두 곳의 입구를 제외하면 안쪽에서도, 바깥 쪽에서도 오르는 것이 불가능할 법한 바위절벽.
바로 그 깎아지른 듯한 절벽 정상에 엎드린 최강혁은 안쪽에 있는 와일더 클랜의 아지트를 내려다보다가 슬쩍 시간을 확인했다.
‘교대 시간이 되었나본데.’
바깥과 달리, 안쪽에서는 절벽 위로 올라오는 길이 만들어져있었다.
암벽에 쇠말뚝을 박고, 그것에 밧줄을 걸거나 나무판자를 엮어 만든 사다리와 계단이었다.
지금도 그곳으로 두 명의 남자가 올라오고 있었다. 곧이어 둘 중 하나가 하품을 하더니, 어깨에 느슨하게 걸치고 있던 소총의 멜빵을 훌쩍 고쳐 메는 것이 보였다.
‘무장 상태가 나쁘지 않아.’
특정 캠프들과 뒷거래를 한다는 이야기가 있더니, 정말로 기본 무장 수준이 괜찮은 편이었다.
지금 보이는 두 남자 중 하나는 어느 캠프의 것인지 몰라도 정식 군인의 보호복 흉갑을 착용하고 있었다.
‘어쩌면 약탈한 장물일 수도 있겠지.’
이제는 2년도 더 된 이야기.
하지만 여전히 기억에 선명한 들판에서의 처형 장면이 다시금 떠올랐다.
최강혁은 슬쩍 고개를 돌려, 옆쪽에 쓰러져있는 두 구의 시체를 보았다.
‘루팅을 하는 게 나을까.’
대략 서른살 안팎으로 보이는 남자와 여자.
경계 근무는 내팽개치고 섹스에 열중하던 두 사람은, 바위절벽을 거미처럼 올라오던 최강혁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
‘굳이 따지자면 적이라고 봐야 맞긴 하겠지.’
그들을 죽인 죄책감은 그리 크지 않았다.
애초에 첫인상부터 좋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사라 레드우드로부터 들었던 이야기까지 더하면 역시나 범죄집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지금 보이는 모습도 그렇고.’
아지트에는 와일더 클랜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들이 약탈 대상을 모조리 죽이는 건 아닌지, 한쪽 구석에 자리한 ‘우리’안에 몇 명의 사람들이 갇혀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굳이 우리라고 표현하는 건, 취급하는 태도를 보자니 감옥보다는 그 쪽이 더 어울리는 모습이어서였다.
‘내가 나설 일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철창 안에 갇혀있는 이들은 모두 젊은 여성이었다. 그 상태나 표정을 보면 어떤 일을 당했는지, 혹은 당하고 있는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뭐, 어차피 정리하긴 해야 할 것 같은데.’
저 아래에 그가 찾는 것이 있다.
가장 안쪽에 자리한 창고건물로 짐작되는데, 그곳까지 아무도 모르게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시피 하니까, 결국 무력으로 뚫는 수 밖에 없다.
‘각성자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블랙 퓨마 킹의 핵 덕분에 은신 능력이 좋아지고 어둠 속에서 더 잘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이곳에선 써먹기 애매하다.
‘오히려 밤에 더 경계가 삼엄해지니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다음 경계자들이 절벽 위로 올라오는 마지막 사다리까지 도착했다.
최강혁은 인벤토리에서 꺼낸 것들을 이쪽 저쪽으로 던지고, 조용히 바위 뒤로 숨었다.
〈 56화 〉 056.
056.
-뭐야? 왜 아무도 없어?
-이건 뭐지?
-팬티잖아.
-에라이. 또 어디 구석에서 붙어먹고 있구만.
-둘이 선다고 했을 때 알아봤지.
-어디 숨었어, 이 연놈들!
-교대하자고! 교대!
-근무를 교대하든지, 씹질을 교대하든지.
놀리듯이 소리치며 이쪽 저쪽으로 움직이던 두 남자는 곧 비슷하게 땅에 떨어진 옷가지들을 발견하고 히죽거리며 그리로 향했다.
하지만 그쪽엔 아무 것도 없었다.
바닥에 떨어져있는 핏자국이 그제야 눈에 들어올 즈음, 서로 시선을 마주하던 두 남자가 동시에 쓰러졌다.
“.......”
최강혁은 숨어있던 바위 뒤에서 걸어나왔다.
멀리 반대편 절벽에도 경계근무자가 있기에, 그쪽에서 다른 곳을 볼 때 처리하느라 시간이 지체된 것이다.
‘무음 기능이 확실히 사기야.’
적어도 효과 범위 안쪽에선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총알이 그 범위를 넘어가게 되면 바람 가르는 소리 정도는 나는 것 같고.
‘오히려 총에 맞는 소리가 더 시끄러울 정도니까.’
거의 오리발 수준으로 자세를 낮추고 움직인 그는 각각 정확히 머리에 한 발씩 맞고 즉사한 두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이전 근무자들이 복귀하지 않으면 의심을 하겠지.’
대충 보니 그 남자와 여자가 유명한 커플이었던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없어지거나 말거나 신경을 끄지는 않을 것이다.
길어봐야 한 시간 정도 아닐까.
‘일단 치우고 생각하자.’
시체들을 루팅했다.
주변 땅에 남아있던 핏자국 역시 깔끔하게 지우고 나서, 다시금 아까의 자리로 돌아가 엎드렸다.
‘좀 이상하긴 해.’
거리낌이 없어졌다.
오늘 네 사람을 죽인 것 아닌가.
아무렇지 않은 게 이상한 일 같은데.
‘살육에 익숙해진 건지.’
숲에서 살면서 많은 것들을 죽이고 잡아먹었다. 인간보다 더 크고 더 강한 것들을 상대한 일도 많았다.
그래서일까.
사람을 죽이고도 아무렇지 않은 건.
‘단순히 적이라서, 범죄자들이라서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
어쩌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격이 변해버린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냉혈한이 되었다고 말하기엔, 꽤 열이 받는 중인데 말이야.’
그는 다시금 아지트 구석의 철창들을 보았다.
여러 명의 사내들이 총구를 앞세워 다가가더니, 그 안에서 여성 한 명을 끌고나와 어디론가 향했다.
비슷하게, 어딘가에서 끌고 온 여성을 짐짝 던지듯 그 안으로 넣는 모습도 보였다.
‘다들 목숨 걸고 건너온 거긴 하겠지만, 저런 일을 겪을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겠지.’
여군들일까.
지역 사정상 어느 캠프든 남자 군인 위주로 뽑는 편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래도 여군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여군이 아니라면 각성자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이들이 저렇게 갇혀있을 것 같지는 않아.’
아마도 기업 쪽에서 들어온 이들일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지금은 옷이라고 할 만한 것도 거의 넝마처럼 찢겨져있으니 그 직업을 유추하기 어려웠지만, 왠지 그래보였다.
‘유감이지만, 우선순위는 확실해.’
그는 영웅이 되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
저들을 구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하겠지만, 그게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면 그가 찾던 것만 확보하고 떠날 생각이었다.
‘그래도, 기회 정도는 만들어줄 수 있겠지.’
이곳이 유일한 아지트인지는 모르겠다.
나름 규모가 있긴 하지만, 그가 들었던 와일더 클랜의 악명을 생각하면 다소 초라한 느낌도 있었다.
‘겸사겸사 내 입장에서도 챙길만한 것들이 많기도 하고.’
다시금 안쪽을 둘러보았다.
제법 탐나는 것들이 많았다.
한쪽에 별도로 철조망을 치고 보관 중인 각종 탄약박스도 그렇고, 그 옆쪽에 세워져있는 수송트럭도 그렇고.
‘침착해야지. 욕심이 과하면 탈이 나.’
가만히 숨을 고르며 생각을 정리한 최강혁은 돌격소총을 옆에 내려놓고 저격소총을 새로 꺼냈다.
‘대략 250에서 300미터.’
반대편 절벽 위쪽을 겨누었다.
조준경의 십자선에 누군가의 얼굴이 잡혔지만, 바로 방아쇠를 당기지는 않았다.
‘파공음 정도는 들릴 거야. 한 호흡에 정리해야 돼.’
머릿속으로 여러 번의 시뮬레이션을 반복하던 그는 기회를 포착하자 주저 없이 쏘았다.
탁, 탁, 탁, 탁.
“휴....”
두 사람에게 네 발을 쏘았다는 건 실패나 다름 없는 일이었다. 역시 상상과 현실은 달랐지만, 그래도 다행히 큰 소음 없이 끝났다.
‘위쪽은 정리했고.’
아래쪽은 어떻게 공략해야 할까.
정석적인 방법이라면 외부에서 소란을 만들고 빈틈을 노리는 것이 있겠지만, 그리 내키지는 않았다.
‘각성자들이 있을 것 같은데. 분명 와일더 중에도 있다고 했었어.’
다른 각성자들에 맞서 싸운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그와 달리 전투 계열일 가능성이 크기에, 쉽게 생각하고 들어가는 건 멍청한 일이었다.
‘저들을 이용할까?’
철창에 갇힌 이들을 보았다.
그곳의 자물쇠 정도라면 이 거리에서도 저격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사람을 미끼로 쓸 생각을 하다니. 내가 달라지긴 했나보다.’
게다가, 그들을 풀어준다고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았다. 고개를 저은 그는 턱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작해도 될 것 같은데.’
아주 밤이 되지는 않은, 애매하게 해가 저물어가는 시점이 가장 취약한 타이밍이다.
‘미리 연습 좀 더 해둘걸.’
그리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저격실력.
그의 총구가 다시금 소리 없는 불꽃을 뿜어내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10여분 후의 일이었다.
쿠콰쾅!
한쪽 외곽에 자리하고 있던 유류저장고가 폭발하는 것을 시작으로, 반대쪽 구석에 있던 탄약창고의 경계병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본부에서 서둘러 상황을 파악해보려 했지만, 통신에 문제가 생겼는지 무전기가 먹통이었다.
‘가능하면 챙기고 싶었던 설비인데, 아깝다.’
중앙에 자리한 통신 타워를 박살낸 최강혁은 본부 건물로 짐작되는 곳에서 튀어나온 이들을 조준경으로 살폈다.
‘아니야. 저 사람도 아니고....’
본다고 다 아는 건 아니지만, 왠지 각성자가 아닐 것 같은 이들 뿐이었다.
어쩌면 저곳에 각성자가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즈음, 그는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싸늘함에 움찔하며 옆으로 굴렀다.
콰직!
땅에 내리꽂힌 거대한 칼.
대검이라고 부르기에도 너무나 커서, 사람이 휘두를 수나 있을까 싶은 그것은 박혀있던 땅에서 아주 쉽게 뽑혀나왔다.
“씨발놈이, 좋은 총 쓰네?”
욕설과 함께 등장한 상대.
어깨에 걸치고 있는 외날 대검보다 오히려 작은 키를 가진 젊은 여성이었다.
여리여리한 몸으로 어떻게 그런 무기를 다루는 건지를 신기해할 필요는 없었다.
“각성자?”
“다 알면서 뭘 물어, 씹새야.”
짧은 머리의 여자는 그렇게 대꾸하며 질겅거리던 껌으로 풍선을 불었다.
그러면서도 이쪽을 날카롭게 살펴보는 것이, 바닥에 두고 물러난 저격총 외에 또 숨겨진 뭔가가 있을까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혼자 왔냐?”
“절벽은 어떻게 올라왔지? 아무도 안 보였는데.”
“다른 새끼들은 어느 쪽으로 보냈어? 빨리 정리하고 가야되니까 빨리 불어. 안 아프게 죽여줄게.”
“다른 길이 더 있는 건가. 바깥 암벽을 타고 올라온 것 같지는 않아보이고.”
각자 자신의 이야기만 하고 있어서 대화가 되지 않았다.
“야이 개새꺄. 내 말이 말같지 않아?”
“어려보이는데. 말이 험하네.”
“미친새낀가. 뭐 그렇게 당당해?”
짐짓 사나운 태도를 보이면서도 쉽사리 다가오지 않는 건, 아마도 이쪽 역시 각성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어서일까.
게다가, 지금의 최강혁은 겉모습만 보아도 상당히 위압적인 편이었다.
키는 2미터에 육박했고, 체중은 공복이냐 아니냐에 따라 90에서 95, 많을 땐 100킬로그램을 오갔다.
누군가 잘 모르는 이가 이곳을 본다면, 지금 저 젊은 여자가 들고 있는 대검이 원래 최강혁의 것이라 생각할 것 같았다.
“씹새끼... 마음에 안 들어.”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았길래 그렇게 욕질이냐.”
와일더클랜은 다국적 집단이라던 것 같은데, 지금 여자는 분명 한국인이었다.
“그렇게 악쓰지 않으면 만만하게 보일까봐 그런 건가? 실력을 키우면 결국 인정받을텐데.”
“뭔 개소리를....”
정곡을 찔린 걸까.
얼굴을 구긴 여자가 대검을 어깨에서 살짝 떼어내어 수직으로 세워들었다.
아무리 각성자라도 그런 몸으로 그 거대한 검을 휘두르는 건 말이 안 되니, 마나를 쓰고 있는 것이 분명해보였다.
“뒤져!”
거의 5미터에 달하는 거리.
하지만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여자가 훌쩍 뛰어올랐다.
이어진 것은 아주 정직한 내려베기였다.
우우웅-
강맹한 기세와 함게 공기를 크게 가르는 압박감이 그를 향해 짓쳐들어왔다.
정수리에서부터 반으로 쪼개버리겠다는 듯 광포한 살기가 피부에 느껴졌지만, 최강혁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그저 한 손을 들어올릴 뿐이었다.
‘바닥에서 발을 떼면 안 될 텐데.’
스윽.
그 잠깐의 시간.
여전히 공중에서 최강혁을 향해 뛰어들고 있던 여자는 뭔가 찜찜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검을 회수하거나 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더 악을 쓰며 대검에 힘을 더할 때, 문득 여자의 오른쪽 허공에서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뭐....”
“살수대첩이다. 썅년아.”
푸확!
허공 한 곳이 터져버린 것 같았다.
무지막지한 양의 물이 그녀를 향해 옆으로 뿜어졌다. 아직 허공에 있던 여자는 그것을 피하지 못하고 정통으로 휩쓸렸다.
-이런 씨바알!
절벽 바깥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여자에게서 다시금 욕설 섞인 외침이 들려왔다.
“5톤을 한 방에 부었네. 돌아가는 길에 강에 다시 들러야겠다.”
무심히 중얼거린 최강혁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재빨리 움직여 저격소총과 돌격소총을 챙겼다.
‘고작 이 높이에서 떨어진다고 죽지는 않아.’
상대는 각성자다.
저격소총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그는 돌격소총의 탄창을 빼내고 다른 탄창을 꽂아넣었다.
총알 낭비가 너무 심해져서 어지간하면 사용하지 않는, 그가 시간이 날 때마다 연구하고 실험한 끝에 완성시킨 드럼 형태의 탄창이었다.
“묵직하구나.”
탄창 하나에 250발이 들어간다.
그렇게 엄살을 피울 정도의 차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앞으로 겨눈 자세를 오래 유지하면 나름 팔이 피곤해지긴 했다.
특수장치의 전원을 켜고 무음모드와 파괴력, 관통력에 레이저 스타일 조준기능까지 모두 켠 그는 중간에 마나가 바닥날 게 뻔하니 미리 가득 채워놓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자가 다시 올라오지 않았다.
혹시 이곳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간 건가 싶어서, 총구를 겨눈 채로 절벽 바깥을 향한 그는 멀리 바닥에 보이는 광경에 눈을 껌벅였다.
“음?”
여자가 있었다.
물이 흥건한 돌바닥에 누운 모습이었는데, 죽은 건 아닌지 조금씩 꿈틀거리긴 했다.
“어딘가 부러지기라도 했나.”
최강혁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이래서 평소에 높은 곳에서 자주 추락을 해봐야 해. 그래야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좋은 착지 자세가 나오는 거지.’
숲에서의 수련은 여러 방면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고 내심 생각하던 그는 돌격소총을 아래로 조준하고 몇 발 쏴보았다.
첫발은 경고, 두 번째는 경고는 아니었는데 조금 빗나갔고... 세 번째와 네 번째 탄이 분명 상대의 몸에 박혔는데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욕설 섞인 비명이 들려왔지만, 정작 움직이지 못하는 걸 보면 역시나 그럴 만한 상태인 듯 했다.
“.......”
빨간색으로 빛나는 점이 곧 그 여자의 이마 근처에서 일렁거렸다.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머저리가 아니라면 알 수 있을 것이었다.
욕설 섞인 협박과 고함은 곧 욕설이 사라진 외침이 되었고, 이내 회유와 유혹이 뒤섞이더니 결국 애원으로 바뀌었다.
탁.
최강혁은 그저 방아쇠를 한 번 당겼다.
3초 정도 후에 손가락을 떼고 나서 보니, 여자의 얼굴이나 머리는 분간이 어려워진 대신 그 주변으로 터져나온 핏덩이들이 눈에 띄었다.
연발로 갈긴 탓에 명중률은 형편 없었지만, 그래도 상대를 죽이기엔 충분한 듯 했다.
“죄수는 아닌 것 같았는데.”
마지막엔 한번 주네 어쩌네 하는 말을 떠들던 것 같았지만, 오히려 역겨움이 느껴졌다.
애초에 지척에서 아무 죄 없는 여성들이 끔찍한 일을 당하고 있는 걸 분명 알고 있었을 텐데도 아무렇지 않았던 건지.
‘움직이자.’
엉뚱한 일 때문에 시간을 지체했다.
조금 가라앉은 눈으로 발을 옮긴 그는 대형 탐조등부터 저격하고 나서 절벽 안쪽으로 내려갔다.
〈 57화 〉 057.
057.
“.......”
온갖 언어들이 뒤섞여 들려왔다.
영어도 있었고, 한국어나 일본어도 들리는 것 같았다. 그 외에도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더러 있었는데, 가장 많이 들리는 건 역시 영어였다.
“야! 너 어디가!”
가까이 있지 않으면 서로의 얼굴을 분간하기 어려운 시간.
그렇기에 주저 없이 기지 안으로 들어갔는데, 누군가가 최강혁을 향해 소리를 치며 다가오고 있었다.
“한국 사람 맞지? 누구 분대야?”
그렇게 물으며 다가오던 이는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지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무래도 평소 보아왔던 얼굴이 아니어서 그런 것 같았지만, 의아함에서 의심으로 이어지려던 얼굴은 더 이상 변하지 않았다.
“윽!”
코앞에서 쏜 총이 빗나간다는 건, 외계인과 싸우는 설정을 가진 특정 게임이 아니라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보호복을 걸치고 있었음에도 가슴팍을 뚫고 들어온 총알이 그대로 심장에 박혔다.
남자는 자연스럽게 옆에 붙은 최강혁의 부축을 받으며 꺽꺽 숨 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
병원으로 사용되는 대형 천막을 알고 있었다.
지금 막 숨이 넘어간 남자에겐 의미 없는 일이 되겠지만, 적어도 그곳 방향으로 접근하는 동안 다른 이들의 의심을 누그러뜨리는 것에는 유용했다.
“뭐야. 습격이야?”
“어딘데?”
아마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아본 건지 그를 향해 묻는 이도 있었다.
대충 턱짓으로 입구 쪽을 가리켰다.
마침 그쪽에서 여전히 유류저장고가 활활 타고 있는 터라 다들 그리로 몰려갔다.
“환자야? 이쪽으로....”
푸슥. 푸슥.
그렇게 병원 천막으로 들어갔다.
죄수복 겉에 하얀 가운이라는 이질적인 복장을 하고 있던 남자가 그대로 쓰러졌다.
목적이 확실하니 주저할 것이 없었다.
최강혁은 부축하고 있던 시체를 고스란히 루팅한 후 돌격소총을 고쳐쥐었다.
‘총소리가 없어서 그런가.’
자신이 쏜 총에 맞아 쓰러지는 이들이 보여도, 그들의 몸에서 튀어나온 피가 뺨에 묻어도... 이상하리만치 무덤덤했다.
침대에 누워있던 환자와, 간호사로 보이는 남녀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쩌면 그들 역시 어딘가에서 납치되어 어쩔 수 없이 일하고 있는 이들일 지도 모르겠지만, 최강혁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실수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
오해로부터 비롯된 과실치사.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무척이나 익숙한 문장.
그는 잠시 멈칫했지만, 그렇다고 하던 일을 멈추지는 않았다.
“...넌 뭐냐.”
가장 안쪽의 커튼을 걷으며 나타난 남자.
마약이라도 한 건지 뭔가에 취한 듯 흐느적대는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눈빛만은 그럭저럭 살아있었다.
“창고 열쇠. 댁이 갖고 있지.”
“......?”
대답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이미 그가 지니고 있음을 알기에 이곳으로 온 것이다.
“이런 씹...!”
뭔가를 하려고 했는지, 온몸에 힘이 들어가던 남자의 이마 중앙에 작은 구멍이 뚫렸다.
그대로 풀썩 쓰러진 남자를 말없이 루팅한 최강혁은 침상 너머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던 여자에게로 총구를 향했다.
“.......”
하지만 방아쇠를 당기지 않은 건, 그녀가 철창에 갇혀있던 이들 중 하나임을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영어 할 수 있어?”
서양인으로 보여서 어설픈 영어로 물으니, 그녀가 잔뜩 겁먹은 얼굴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안다. 당신은 이곳에 속하지 않아. 저쪽 프리즌에 있었어. 그렇지?”
“...네! 맞아요! 혹시 저희를 구하러....”
“놉.”
“아....”
“지금 아니야. 하지만 기회 만들 수 있어. 믿을 수 있어?”
“...네! 믿을 수 있어요.”
유일한 희망이라 생각했을까.
무슨 일을 당했던 건지 짐작이 가는데, 어떻게든 비슬비슬 일어나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그 옷. 쓰레기. 이거 입어.”
최강혁은 인벤토리에 있던 여분의 전투복을 꺼내 건네었다.
그가 예전에 입던 것이어서 지금보단 사이즈가 작았지만, 그래도 여자에 비해선 큰 편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여성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니 키나 골격이 좀 큰 편이었다. 허리에 벨트를 채워 조이니, 흘러내리지는 않았다.
“고마워요.”
“별 말씀을.”
교과서에서 본듯한 겸양의 말을 건넨 최강혁은 잠시 그곳을 돌아보다 손을 뻗었다.
‘되네.’
이곳의 책임자가 살아있지 않아서일까.
환자용 간이 침대에서부터 옆에 자리한 캐비닛이나 의약품, 각종 의료 도구들에 이르기까지 루팅이 문제 없이 이어졌다.
어디에 쓰는 것들인지 잘 모르긴 하지만, 일단 챙겨두면 쓸모가 있겠지 싶어서 되는 대로 싸그리 담았다.
‘항생제는 많을수록 좋아.’
이어서 그곳에 있던 시체들까지 모두 치운 그는 우물쭈물 따라 나선 여자에게 죽은 이들 중 하나가 쓰던 헤드기어를 꺼내 건네었다.
거의 헬멧에 가까운 형태여서 그녀의 얼굴을 가려줄 수 있었고, 이어서 전투화까지 착용하니 겉모습만 보면 이쪽의 일원이라고 생각할 법 했다.
“환자야, 환자! 좆같은 고블린 새끼들이 쳐들어왔다고!”
그 때, 의무실의 문을 부술 듯이 열고 들어오는 이들이 있었다.
떠드는 말은 영어긴 한데, 동남아쪽 억양이 섞여있어서 간신히 알아들었다.
“근데 여긴 왜 이렇게....”
천막 내부가 휑하니 이상하게 보일 수 밖에 없었지만, 그걸 따져 묻는 것보다 총알이 머리에 박히는 게 더 빨랐다.
시체들을 수습한 최강혁은 그들이 지니고 있던 소총 중 하나를 여자에게 넘겨주고 어깨에 메도록 했다.
“쏘는 방법, 몰라요.”
“쏘지 마.”
“...알았어요.”
고블린들이 왔다니, 오히려 잘 되었다.
아마도 불이 크게 나서 주의를 끈 모양이다.
최강혁은 대부분의 인원이 모두 그쪽으로 빠져나간 것을 확인하고, 여자와 함께 철창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
그곳을 지키는 병력은 없었다.
애초에 그 정도로 중요하게 취급한 적도 없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콰직!
철창의 자물쇠를 간단하게 부순 그는 그 안에 있던 이들에게도 적당한 옷이나 야상, 망토 따위를 골라 꺼내주었다.
모두 맨발이었기에, 전투화를 꺼내주기도 했다.
“제가 총을 쏠 수 있어요.”
“저도, 조금요.”
혹시나 해서 물어보았더니, 군인은 아니지만 총을 쏴본 경험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총과 탄약을 적당히 건넨 최강혁은 고블린들이 습격 중이니 당장 움직여도 갈 곳은 없을 거라고 조언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죠?”
“차를 구하면 될 거야.”
누군가는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는 듯 발만 구르며 울었고, 다른 이가 옆에서 도닥이며 방법을 강구해보려 했다.
최강혁은 통신설비가 박살났으니 외부로 구조를 요청하는 것도 어려울 거라는 조언을 해준 후, 그들을 도와 가까운 건물 하나를 차지하게 해주었다.
“만약 기다리면, 내 일 하고 돌아온다.”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나요?”
“만약 가능하다면.”
“알겠어요. 고마워요.”
“별 말씀을.”
훌쩍 사라진 최강혁은 곧장 후방의 창고 건물로 향했다.
병력들이 빠져나갔어도 그곳만은 여전히 경계 인력이 배치되어있었지만, 이제는 적잖게 드리워진 어둠 속에서의 저격을 멈출 수는 없었다.
‘각성자였던 것 같은데.’
분명 무음모드여서 격발음은 들리지 않겠지만, 베테랑들은 총알이 날아오는 소리만으로도 방향을 파악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숲에서도 그랬었지. 멀리서도 어떻게 아는지 이쪽으로 달려왔었어.’
그렇게 그가 있는 곳을 짐작했는지, 일반인이라면 불가능한 속도로 달려오던 남자.
하지만 무음 범위 안에선 그런 식의 예측조차 불가능했기에, 연거푸 소리 없이 날아든 탄에 결국 쓰러졌다.
‘각성자들도 총 앞에선 별 수 없다더니, 확실히 실감이 나네.’
고개를 젓던 최강혁은 죽은 이들의 시체를 루팅하며 창고로 접근했다.
‘어디 있더라.’
그 입구에 선 그는 인벤토리를 열어, 의무실에서 죽였던 남자의 오른팔을 손목 즈음에서 잘라 꺼냈다.
[확인되었습니다.]
창고 열쇠는 그 남자의 오른손이었다.
죽은 직후 상태로 유지되었기에 온기도 남아있어서, 별다른 문제 없이 인식되었다.
‘역시. 그냥 왔으면 좀 애먹었겠다.’
간이 창고라 하기엔 벽체나 입구의 두께가 상당했다. 그 안에 들어있는 게 뭐길래 그러나 싶었던 그는 안으로 들어가자 마자 훌쩍 옆으로 굴렀다.
“.......”
하지만 이어서 이쪽 저쪽을 돌아본 그는 어색하게 일어나 몸을 털었다.
‘나였다면 안쪽에도 병력을 배치했을 텐데.’
그게 당연한 것 아닌가 싶었지만, 여기선 아니었던가보다.
‘나름 이해가 되네.’
애초에 범죄집단이니만큼, 그런 곳의 창고에 사람을 집어넣으면 이래저래 훔쳐가는 놈들이 생겼을 것 같았다.
‘어디 보자.’
창고 안에는 일반적인 보급 물자들부터 시작해 각종 총기나 탄약박스도 보였다.
분명 탄약창고는 따로 있는 걸 보았는데, 아마도 한 곳에 몰아서 보관하면 안 된다고 여긴 듯 했다.
‘루팅이... 안 되는구나.’
몰살이라도 시켜야 되는 건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돌아선 그는 품 속에 있던 금속 조각을 꺼내어 이쪽 저쪽으로 몸을 돌려보았다.
‘이쪽인 것 같은데.’
한쪽 구석에 자리한 것들.
그곳에 어울리지 않는 쓰레기들 같았지만, 최강혁은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고블린들의 것인가.’
어설픈 가죽옷부터 해서 석기시대에 쓸법한 돌도끼와 돌창, 그리고 몇몇 쇠붙이로 만든 무기나 활 따위.
아마도 고블린들과의 전투 후에 그들이 지니고 있던 것들을 벗겨서 이쪽에 모아두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 이유도 짐작이 되었다.
‘놈들의 피가 묻어있겠지. 조금 깊이 묻거나, 아니면 이런 밀폐된 곳에 두어야 추적을 받지 않아.’
고블린들은 동족의 피냄새를 쫓아다닌다.
이는 복수의 목적도 있지만, 때로는 상처입거나 죽은 동족을 잡아먹으려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
그리고 최강혁은 그렇게 쌓여있던 잡동사니들 중에서 그가 찾던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느다란 끈에 길게 묶여있는 걸 보니, 아마도 목걸이로 하고 다녔던 것 같았다.
‘이것들은 루팅이 되네. 몬스터의 것들이어서 그런가.’
고블린들의 물품을 싹 챙긴 그는 그것들을 한꺼번에 처분하여 몇 칸의 일반 인벤토리로 바꾸었다.
‘음... 두고 가긴 아까운데.’
다시금 돌아서서 나오려는데, 역시 창고 안에 들어있는 것들이 눈에 밟혔다.
‘그렇다고 몰살을 시키기도 쉽지는 않을 것 같고.’
시간과 상황, 약간의 운이 더해진다면 가능할 것 같다. 하지만 너무 과한 욕심 아닌가 싶기도 했다.
‘대충 30명 정도는 남아있을 것 같고... 고블린들하고 붙었다면 더 줄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 때, 창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총 적재함 뒤에 몸을 숙인 그는 입구 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집중했다.
“거 봐. 창고는 멀쩡하잖아. 지문 방식으로 바꾼 게 다행이라니까.”
“그래도 이상합니다. 분명 핏자국이 있었는데 시체가 안 보이잖아요.”
“고블린이 왔잖아. 그새끼들이 우리 고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서 그래?”
“그럼 모두 끌려갔다는....”
“됐으니까 빨리 탄박스부터 챙겨. 탄약고 물량 벌써 바닥이란다.”
“왜 갑자기 유류창고가 터진 걸까요.”
“몰라 시발. 습격이라고 해서 토벌대가 온 줄 알았더니.”
한국인들이었다.
아마도 선임과 후임으로 짐작되는 대화.
그것을 통해서 현재 상황을 조금 더 잘 알 수 있게 된 최강혁은 잔탄을 확인하고 나서 총구를 내밀었다.
탕! 타탕!
“...마나가 떨어졌었네.”
두 남자를 사살하면서 동시에 놀란 건 무음 모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였다.
어느새 특수장치의 마나가 남아있지 않음을 확인한 그는 그나마 창고 문이 열려있지 않아서 다행이라 여겼다.
‘음?’
그런데, 죽은 자들 중 하나가 왠지 낯이 익었다. 어디서 보았나 기억을 더듬어보니, 과거 그가 속해있던 캠프에서 본 것 같았다.
“군인 식당에서 본 것 같은데.”
분명 그곳의 군인이었다.
누가 선임이고 누가 부하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두 남자 중 하나는 확실히 기억났다.
‘코 옆에 있는 사마귀는 잊어버리기 힘들지.’
탈영이라도 한 걸까?
아니면 그쪽 캠프에서도 와일더 클랜과 뒷거래를 하고 있는 걸까.
‘그 시절이면 양호석이 부사령관으로 있을 때인데....’
설마, 다른 개척 캠프를 만들기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서 이런 자들하고도 손을 잡았을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쪽으로 합류하지 않은 건 잘한 일인지도 몰랐다.
“음?”
그렇게 시체들을 루팅한 후, 최강혁은 무의식적으로 그들이 나르려 했던 탄박스까지 루팅하게 되었다.
“되네?”
〈 58화 〉 058.
058.
몰살을 시켜야 하는 게 아니었나.
혹시, 이미 몰살을 당한 상황인가?
‘어쩌면, 이들이 이 창고의 책임자였을 수도 있겠지. 아무튼 잘 됐다.’
버리기 아까운 것들이 많았다.
마침 특수칸에도 여유가 많아서, 창고 안에 있던 것들을 되는 대로 집어넣었다.
‘너무 넣었나? 트럭 넣을 칸이 하나 쯤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이미 집어넣은 것들 중에서, 크게 필요 없는 것들은 도로 꺼내놓았다.
세면도구나 수건 같은 자잘한 것들부터 꺼낸 그는 전투식량까지 뺄까 하다 그건 그냥 두기로 했다.
‘이건 분명히 군부에서 유출된 건데.’
그가 먹으려는 목적과 별개로, 만약 필요한 일이 생긴다면 증거품으로 내밀 생각이었다.
‘얼추 됐다.’
인벤토리만 충분하다면 남은 것들도 챙기고 싶긴 하지만, 욕심을 부리면 탈이 난다는 걸 알기에 꾹 눌러 참았다.
‘욕심 같아선 창고를 통째로 집어넣고 싶지만.’
고개를 저으며 돌아선 그는 돌격소총의 보조장치에 마나를 채워넣고 탄창을 새로 갈아끼웠다.
‘어라.’
인터폰이 있어서 외부 상황을 확인해보니, 액정화면에 보이는 건 다름아닌 고블린들이었다.
‘뚫렸나본데?’
설마하니 정말로 몰살을 당한 건 아니겠지.
그는 일층의 입구가 아니라 지붕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달려올라가, 그쪽에 잠겨있던 철문을 열고 나갔다.
그곳엔 유사시 일종의 벙커로 쓸 수 있도록 나름의 초소가 만들어져있었다.
모래자루로 만들어진 방벽 뒤에서 고개만 내밀어 지상을 살펴본 그는 상황이 예상보다 심각해졌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몰살까진 아닌 것 같아. 하지만....’
현재 남아있는 차량의 숫자가 그가 기억하고 있던 것과 맞지 않았다.
‘이곳을 버리고 튀었군.’
현명한 선택이다.
또한, 이곳이 그들의 유일한 아지트가 아닐 가능성이 높아졌다.
“으음.”
남은 건 지금 보이는 고블린 놈들을 어떻게 하는가였다.
돌격소총의 방아쇠울을 만지작거리던 그는 뺨을 씰룩이며 그것을 집어넣고, 인벤토리에서 저격소총을 꺼내 잡았다.
“안 그래도 연습이 필요했지.”
마침 여자들이 피신해있는 건물의 입구를 부수려 드는 놈들이 눈에 띄었다.
모래자루 위쪽을 조금 당겨 허물고, 그곳에 총을 거치한 그는 주저 없이 그쪽을 조준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아앙!
“아놔.”
이건 또 언제 마나가 떨어졌지?
서둘러 다시 채워넣었지만, 총소리를 들은 놈들이 꽤 많았던 모양이다. 그만큼 큰 소리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다시금 하던 일에 열중하는 놈들이 대부분이었고, 그가 있는 창고를 향해 접근하는 놈들은 개중 소수였다.
‘소수라고 해도 열 마리는 되잖아.’
대체 얼마나 몰려온 걸까.
아니, 지금도 저렇게 불이 활활 타고 있으니 앞으로도 계속 올 것 같은데.
‘설마 이 산의 고블린들이 몽땅 오진 않겠지?’
최강혁은 인벤토리 안에 있는, 지금의 저격소총에 호환되는 탄약의 수량을 가늠해보았다.
마침 이 아래의 창고에서 해당 탄약을 꽤 보충해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왠지 모르게 찜찜했다.
* * *
퍼억!
다가오던 고블린 하나의 머리가 목에서부터 뜯겨나가고, 그 옆에서 기겁하던 놈의 가슴팍에 큼직한 구멍이 뚫렸다.
어떤 놈은 달아나고, 어떤 놈은 반대로 달려왔다. 하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휘이이...
총구에서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연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최강혁은 비어있던 탄창을 꽉 찬 것으로 다시 바꾸고 나서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
마치 좀비 디펜스 종류의 게임을 보는 듯한 광경이 그곳 아래에 펼쳐져있었다.
창고 건물 전방에 반원형으로 자리잡은 놈들의 사체. 그 너머에는 같은 놈들의 죽은 몸뚱이가 마치 부채꼴로 퍼지듯이 넓게 깔려있었다.
‘이제 안 오는 건가.’
금방 끝나지 않을 거라는 예상은 했다.
하지만 밤을 새우고 새벽과 아침을 지나, 이제는 정오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느 정도 거리까지는 몽땅 몰려온 것 같은데.”
유류 창고의 불길은 이미 줄어들어 거의 꺼졌다. 다행히 그 주변에 불이 번지지 않도록 미리 대비를 해두었는지, 그곳만 타고 끝난 것이다.
“아직도 남았네.”
최강혁은 들고 있던 저격소총 방아쇠를 다시금 당겼다.
좀 더 거리가 가까웠다면 지금 그의 옆에 널려있는 일반 소총들 중에서 아무 거나 집어 갈겼겠지만, 살짝 멀었다.
탁. 탁. 탁.
밤 사이 저격소총도 돌격소총도 총열에 무리가 가는 것 같아서 일반 소총들까지 꺼내 사용했다.
무음 모드 기능을 쓸 수 없게 되니, 총소리를 듣고 몰려오는 놈들이 늘어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금방 식은 편이었어.’
요령이 생기고 나서는 저격소총을 중간 중간 섞어 사용하며 지금까지 왔다.
‘그런데도 남아있단 말이지.’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놈들이 있었다.
창고 근방이 아니라 멀리 입구 쪽에서 어슬렁거리는 놈들이 보였다.
‘연습이 필요하긴 했지만, 이건 너무 과하잖아.’
저격소총을 고쳐들고 남은 놈들을 모두 정리한 그는 거듭 이쪽 저쪽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것을 거두었다.
‘고생했다.’
총열이 버텨줘서 다행이었다.
중간에 사용을 조절하긴 했지만, 그래도 튼튼한 건 분명했다.
‘어느 회사 제품이지?’
고향에 돌아가면, 그 회사의 주식을 사볼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상장을 했을까? 무기회사도 그런 걸 하나 모르겠네.’
옆을 돌아보았다.
각종 총들과 탄창, 비어버린 탄약박스와 잔뜩 쌓여있는 탄피가 보여 싹 쓸어담았다.
“웃차.”
창고 지붕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고블린들의 사체 중 가까운 것들부터 루팅한 그는 따로 가죽과 뼈 따위를 분리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그저 들어오는 족족 스캔만 해보고, 바로 인벤토리로 바꿔버렸다.
‘오. 핵이 있네.’
콩알만한 크기여도 핵은 핵이었다.
그런 게 있으면 따로 빼놓았다.
‘하나 하나는 별 가치가 없는데, 그래도 이렇게 숫자가 많아지니까 무시할 수가 없구나.’
숲에서도 맡을 수 있는 놈들 특유의 체취에, 죽은 놈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냄새까지 뒤섞여 코를 찔렀다.
‘이러니 멀리서도 동족 냄새를 맡고 쫓아오는 거겠지.’
얼른 일을 마무리하고 나서 몸을 씻어야 할 듯 했다. 이곳에도 숙소 비슷한 것이 있으니, 아마 샤워 시설도 갖춰져있을 것이다.
‘고급칸이 많이 늘었는데... 챙겨도 되겠어.’
창고에 남겨두고 왔던 것들도 도로 들어가 다시 챙겼다. 이어서 협곡의 입구까지 걸어가며 고블린과 인간의 사체를 모두 수습했다.
‘아직 냄새가 나긴 하는데, 내 몸에 배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협곡의 양쪽에 자리한 출입구 중, 고블린들이 쳐들어왔던 곳은 한 쪽이었다.
다른 곳은 계곡과 낭떠러지로 이어져있어서인지 그쪽으로 들어온 녀석들은 없던 것 같았다.
“일단 막자.”
그는 그곳 입구를 근처에 있던 철조망과 바리케이트를 이용해 단단히 틀어막은 후, 여자들이 기다리고 있을 건물로 향했다.
이미 창고 옥상에 있었을 때부터 그쪽으로 향한 창문을 통해 그녀들과 소통하고 있던 터라, 오해를 받고 총을 맞거나 하지는 않았다.
“고블린들을 치우는 걸 봤어요.”
“끝난 건가요?”
“나는 몰라. 하지만 우리는 가야 해.”
“지금 가나요?”
“아직. 나는 씻고 싶어.”
“그러면 기다릴게요.”
최강혁은 일단 씻기로 했다.
다들 밤 사이에 교대로 샤워를 했는지 깨끗했지만, 그는 아니었다.
‘온수샤워. 오랜만이야.’
욕조가 있었다면 푹 담가볼 텐데, 이곳에서도 그런건 사치인지 보이지 않았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기다리고 있던 이들에게 먹을 것을 꺼내주고 같이 식사를 했다.
그나마 먹을 만한 건 전투식량 정도였지만, 무척 허기져있던 이들에게는 그정도로도 다행인 것 같았다.
그렇게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각자 화장실을 사용하게 한 후 건물을 나섰다.
‘역시. 탄약창고는 비었군.’
남아있던 자들이 도망을 결정한 이유가 있었다. 탄약 보급이 끊겼으니 더는 가망이 없을 거라 판단했을 것이다.
‘트럭 세 대가 전부인가. 근데 이쪽은 분해한 것 같은데. 수리 중이었나.’
그곳에 자리하고 있던 차량들을 스캔해본 최강혁은 한 대를 제외한 나머지는 어딘가에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고장까진 아니지만, 일부 부품이 아예 없구나. 이리 저리 돌려막기 식으로 떼었다 붙였다 한 것 같은데.’
아마도 동종의 차량이라서 부품을 공유하며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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