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ilado 6

사라 레드우드와 같이 왔던 이들 중 전직 미용사였던 이가 있었다.
그렇게 좋은 실력은 아니었다고 당사자도 이야기했지만, 그래도 일반인보단 낫겠지 싶어서 부탁해보았다.
“으음.”
듣기로는 샤기컷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거울에 비춰보면 그냥 더벅머리 같았다.
“뭐, 시원해지긴 했지.”
머리카락이야 어차피 계속 자라는 거고, 번거롭게 뒤로 묶고 다닐 필요가 없어졌다는 건 만족스럽다.
아예 짧게 쳐달라고 했었지만, 빗도 없이 일반 가위로 그렇게 해버리면 굉장히 이상하게 될 거라던가.
‘지금보다 더 이상해질 수도 있나.’
웃으며 고개를 저은 그는 계단으로 올라갔다.
과거와 달리 나무의 내부엔 일종의 굴뚝처럼 위로 통하는 통로가 있었다. 그 한쪽 내벽에 단단한 사다리가 부착된 모습이었다.
“상부상조하는 거지.”
살아있는 나무의 속살을 깎아내는 일이다.
그 대신 최강혁은 숲을 돌아다니며 썩은 낙엽과 여러 배설물 따위를 모아 일종의 비료를 만들었다.
그것을 이 나무 주변에 적당히 뿌려주었더니, 하루 하루 눈에 띌 정도로 생기가 회복되었다.
“음.”
내부 사다리를 통해 나무의 꼭대기 근처까지 올라간 그는 그곳의 문을 열었다.
틈이 벌어지자 마자 제법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눈이 시렸지만, 곧이어 기분 좋은 광경이 눈앞 가득 펼쳐졌다.
“오늘도 좋은 날씨구나.”
지상에서 50여미터 높이.
그곳 바깥의 풍경을 보고 있으면, 위험한 곳이긴 해도 제법 살만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디 보자. 40퍼센트가 조금 안 되네.’
배터리의 충전 상태를 확인했다.
생각보다 많이 차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지도 않았다. 용량이 큰 배터리라서, 지금 잔량으로도 타블렛을 10번은 완충하고 남을 정도였다.
“전선이 길면 안쪽으로 길게 빼겠는데... 만들 재료가 마땅찮네.”
배터리만 뽑아서 안으로 가져가자니 더 충전시키지 못할 게 아깝고, 그렇다고 매번 여기로 올라와서 타블렛을 충전시키자니 또 애매했다.
‘탄피도 구리니까, 이걸 잘 해보면 구리선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겉을 감쌀 절연체가 마땅찮네. 트럭 타이어 고무를 쓰기도 그렇고.’
나중에라도 기회가 되면 전선을 구해보는 게 좋을까. 종종 퇴각하는 병력이 일부 물자를 두고가기도 하니까.
‘그래도 전선 같은 걸 두고 가진 않으려나.’
시원한 바람이 그의 더벅머리를 거칠게 훑고 지나갔다.
주변 나무보다 약간 더 높게 자란 지금의 나무 덕에, 숲의 사방을 조금은 내려다보는 위치에서 감상할 수 있었다.
“저쪽에 뭔가 죽은 게 있나보네.”
사체를 쪼아먹는 종류의 새들이 숲 한쪽의 상공에 우글우글 모여 있었다.
그쪽은 여러 영역이 겹치는 구역이라, 평소에도 죽고 죽이는 싸움이 자주 벌어지곤 했다.
‘거인의 숲이라고 부른다 했었지.’
이곳에 붙은 지명.
그 이유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숲의 주변에서 흔히 발견되는 커다란 발자국들 때문이라고 했다.
“사람 발자국은 아니지만, 비슷하긴 하니까.”
몬스터들 중에는 뭉뚱그려서 인간형이라 우겨볼 수도 있을 법한 이족보행 계열이 꽤 있었다.
개중에는 거대 원숭이과도 있어서, 그것들을 거인이라고 칭하는 것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무서운 종류도 많고.’
1년이 넘게 지나고 있지만, 아직 숲의 전체를 속속들이 다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그럭저럭 편하게 다닐 수 있는 곳은 현재 거처로 삼고 있는 남동쪽 인근과 동쪽, 동북쪽 영역 정도였다.
“초반에 터를 잘 잡았어.”
그나마 동쪽이나 동북쪽의 왕들은 다른 영역을 공격하는 성향이 아니었다.
그들은 추종세력이 아니라 혼자서도 강력해서, 그저 살아가다보니 지역의 왕이 된 케이스라고 볼 수 있었다.
‘다른 지역은... 특히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좀 그렇던데. 북쪽으로 갈수록 더 하고.’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나무들이 촘촘해지고, 그만큼 숲이 어두워진다.
외곽에선 볼 수 없는 동식물들을 볼 수 있어서 종종 들어가곤 하지만, 그 때마다 만반의 채비를 갖추어야 했다.
지금 그가 이야기한 ‘북쪽’의 경우, 숲 안쪽을 거쳐가는 것과 아예 바깥으로 빙 둘러 가는 두 가지 경로가 있었다.
몇 달 전인가.
산으로 가는 길이라도 대충 파악해둬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날을 잡고 움직였었다.
당시에 그럭저럭 경로는 파악해두었지만, 그 이후 그쪽으로 가지 않고 있는 건 사실 두려워서였다.
아직 이 숲 하나도 마음 놓고 돌아다니지 못하는데, 저 높고 깊은 산은 또 얼마나 위험한 곳일지 장담할 수 없으니까.
“또 쓰리네. 분명히 다 나았는데.”
왼쪽 다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그는 당시에 떨어져나갔던 정강이의 모습이 생각나 고개를 저었다.
‘각성자가 아니었으면 수습 못 했겠지.’
떨어진 다리를 간신히 회수해서 이어붙였다.
차라리 깔끔하게 잘렸다면 좀 더 간단했을 텐데, 거의 짓이겨진듯한 단면이라 애를 많이 먹었다.
‘조합스킬 없었으면 붙이지도 못 했을 거야.’
각성자들은 자체회복력이 무시무시해서, 과다출혈이나 쇼크로 죽는 것만 아니면 어지간한 부상은 알아서 회복한다고 다들 말했다.
하지만 그건 반만 맞는 이야기였다.
일정 이상의 부상은 제대로 복구가 안 된다.
‘여긴 힐러도 없고.’
치료 계열의 스킬을 가진 각성자가 있다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저 절단면의 출혈을 막고 그대로 메워버리는 수준에서의 회복에 그칠 수도 있다.
‘마나만 충분히 공급하면 떨어져나간 팔다리도 재생되는 경우가 있다고는 하는데... 도시전설 같은 이야기니까.’
과거 인터넷으로 보았던 이런 저런 이야기들.
출처도 근거도 없는, 제대로 신뢰하기 어려운 ‘카더라’ 가 대부분이어서 그냥 믿기는 어려웠다.
하여 그는 떨어진 다리를 회수했고, 어떻게든 자신이 가진 능력으로 해결해보려 노력했다.
그 결과가 지금이다.
겉보기에도, 스캔을 해보아도 아무 문제가 없는 다리를 되찾은 것이다.
회복과 조합을 병행하며 어긋난 부분을 바로잡았고, 때로는 이미 붙었던 뼈와 근육을 다시 분리하기도 했다.
“그건 진짜 미친 짓이었어.”
결과가 좋으니 망정이지.
속으로 생각한 그는 지금의 시큰거림이 일종의 심리적 후유증이 아닐까 짐작했다.
‘뭐, 한번 해봐서 그런가... 비슷하게 또 잘리면 빨리 붙일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젊을 땐 뭐든 경험해보는 게 좋다는 건 이런 경우에도 해당되는 걸까.
‘그나저나... 또 보냐?’
시스템 알림이 떠올랐다.
그의 인적사항이 열람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주기가 점점 빨라져.’
〈 43화 〉 043.
043.
열람되었다는 알림을 처음 본 후.
같은 알림을 보게 된 건 두 달 쯤 후였다.
이후 한 달이 조금 안 되어 또 열람이 되더니, 갈수록 짧아져서 최근에는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 보기도 했다.
‘무슨 공공재도 아니고.’
마치 지금도 중국에서 돌아다니고 있을 그의 개인정보와 비슷한 상황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적어도 매번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긴 하니까 기분이 그리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좋아.’
처음 받았던 건 계란 크기 정도의 황금이었다.
항상 그런 걸 받는 건가 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때로는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불분명한 돌멩이를 받기도 했고, 또 어떨 땐 그에게 더 없이 필요한 것을 받기도 했다.
“오....”
이번에도 그런 경우였다.
임시 보관함을 열어본 최강혁은 그곳에 들어있는, 은은한 하늘색으로 발광하는 일종의 상품권을 조심조심 집어들었다.
[고급 인벤토리 교환권 1장]
‘이깟 인적사항, 얼마든지 들여다보라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속으로 그렇게 이야기한 그는 들고 있던 것을 곧장 사용했다.
-고급 인벤토리 1칸을 획득하였습니다.
고급 인벤토리.
그것은 가로세로높이 1미터짜리의 정육면체 정도 공간으로, 일반 인벤토리로는 1천칸에 해당했다.
지금은 그의 인벤토리 취급 단계도 많이 올라가서, 실제 일반으로 1천칸을 그렇게 고급 한 칸으로 바꾸는 것도 가능은 했다.
하지만 신중해야 하는 건, 그렇게 바꾸면 반대로는 되돌릴 수 없다는 점이었다.
‘특수칸 업그레이드에도 필요하니까.’
어차피 같은 공간인데 바꿀 필요가 있냐고 묻는다면, 고급 1칸의 경우 일반 1천칸보다 유지에 들어가는 마나량이 훨씬 적다고 답할 수 있다.
‘거의 일반 10칸 정도 되나? 그것보다 조금 안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동급의 공간이지만, 유지비용이 100분의 1로 줄어드는 것이다. 되돌릴 수 없으니 신중해야 한다는 것만 빼면 무조건 바꿔야 할 정도다.
‘그래도 벌써 14칸이나 되었네.’
하지만 일반 인벤토리를 고급으로 바꾼 건 두 번 정도 뿐이었다.
인적사항 열람 대가로 그것의 교환권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굳이 일반칸을 그쪽에 쓰기보다는 특수칸 업그레이드에 몰아주는 쪽으로 바뀌었다.
‘이쪽에 엄청 부었지.’
[특수 인벤토리 내역]
-1- 6.87t (9 / 10) / 10t
-2- 4.31t (3 / 10) / 10t
-3- 0kg (0 / 7)/ 5t
-4- 0kg (0 / 5)/ 2t
-5- 639.1kg (1 / 2) / 2t
특수 인벤토리의 경우 5칸이 최대라는 건 일찌감치 알아냈다.
이후에는 각 칸을 업그레이드하는 수 밖에 없었는데, 2톤 이후에는 비용으로 요구하는 칸이 오르지 않고 동일한 건 다행이었다.
하여 그 이후부터는 1번 칸부터 차례차례 최대치까지 올리는 중이었다.
또한 때때로 ‘고급 인벤토리 교환권’ 과 비슷한 ‘특수 인벤토리 무게 증가권’ 같은 것도 열람의 대가로 들어올 때가 있었다.
그것들까지 섞어서 사용하니, 벌써 1번과 2번을 최대로 올리고 이제 3번을 업그레이드하는 중이었다.
‘전부 최대치까지 올리면 단계가 상승한다고 했었지.’
슬롯을 더 만들 수 있게 되거나, 아니면 업그레이드 가능한 최대 무게가 확장되지 않을까 싶었다.
‘10톤도 애매할 때가 있으니.’
숲 깊은 곳에 서식하는 몬스터들은 한 개체의 무게가 수백 킬로그램을 넘어서 거의 1톤에 육박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그런 녀석들을 쉽게 사냥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종종 다람쥐나 새 같은 작은 친구들이 좋은 정보를 줄 때가 있었다.
나이가 들어 쇠약해진 몬스터, 혹은 수명이 다 하여 자연사한 몬스터가 어디 있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요샌 자연사 케이스가 잘 안 나오던데.’
사라 레드우드에게 준 몬스터의 핵도 그런 녀석들 중 하나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그가 직접 사용했다면 마나 최대치를 100이상 올려주었을 테지만, 한동안 마나가 부족할 일은 없을 것 같아 쟁여두었었다.
그 때였다.
-귀하의 인적사항이 열람되었습니다.
“뭐야. 하루에 두 번?”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나, 혹시 인기가 있는 건가?”
딱히 특별할 것 없는 수준이라고 생각했는데, 대체 어디서들 그렇게 들여다보는 걸까.
“음. 이번엔 이거구나.”
열람의 대가로 들어온 건 ‘마나량 증가의 비약’ 이었다. 병의 크기를 보아 하급이었고, 지난 번과 같은 효과라면 아마도 최대치를 10에서 20정도 늘려줄 것이다.
“이것도 일단 키핑.”
비슷한 비약이 인벤토리에 몇 개 더 있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몬스터의 핵을 취하지 않은 것이기도 하고.
‘이게 어느 정도 수준인지 모르겠네.’
[체내 마나]
2,781 / 3,218
아마 최대량 3천을 달성하고부터 추가적인 섭취나 흡수를 행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발전해, 벌써 2백이 더 올라가있는 것이다.
‘전투 계열이면 아쉬울 수도 있겠구나.’
한 번 사용할 때마다 마나를 소모하는 식의 스킬이라면, 3천이 넘는 양으로도 금방 바닥을 보이지 않을까.
‘나도 전투 방식이 달라지면 그렇게 될 수도 있고.’
돌격소총에 부착된 특수장치.
마나를 충전해 활용하는 방식이기에, 대놓고 쓰다보면 비슷하게 될 것이다.
‘마침 탄약도 보충했으니까.’
사라 레드우드와 그녀의 일행을 숲 바깥까지 배웅했을 때였다. 그곳에서 위장막과 풀더미로 덮어둔 무장차량과 수송차량들을 보았다.
혹시 탄약이 남으면 조금 사고 싶다고 했더니, 아마 못 살 거라고 그녀가 답했었다.
‘가난하다고 여기는 건가 했었지.’
알고 보니, 테러 집단에 가담하게 되면 계좌를 막고 자금을 압류해가는 모양이었다.
단말기에 빼놓은 것까지 가져가진 못한다지만, 그가 수중에 지닌 코인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거저 줄 줄은 몰랐어.’
탄약은 그리 비싸지 않은 편이라던가.
알고 보니, 본국에서 넘겨받지 않고 이쪽 현지에서 구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했다.
‘레드 캠프라고 했지.’
그런 것들을 취급하는 캠프가 있다고 했다.
무기에서 탄약까지, 관련 기업들이 들어와 이쪽 지역에서 자체 생산을 한다고.
‘나중에 기회되면 방문해볼까.’
당장은 하루 하루 살기 바쁘다.
이제는 첫날에 비해 무척이나 여유가 생긴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 지금의 평화는 그가 있는 곳이 그리 매력적이지 않은 외곽이라 그런 것이었다.
‘자생하는 식물들도, 서식하는 짐승들도... 하다 못해 공기 속에 들어있는 마나까지도 모두 저 안쪽이 훨씬 좋아.’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숲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더욱 크고 강력한 녀석들이 서식하는 것 말이다.
‘음?’
어차피 저녁부터는 소용 없으니 태양광 충전기를 수습하려던 그는 오늘따라 자주 뜨는 시스템 알림창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이건 또 뭐야.’
메시지라니.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종류의 알림이었다.
챙기던 것을 마저 끝낸 그는 조심스럽게 알림 창을 건드렸다.
그곳엔 ‘메시지 보관함’ 이라는 것이 새로 생겼다는 내용과 함께, 도착한 메시지가 1개 있다고 적혀있었다.
‘역시, 지금 생긴 거구나.’
그러니까 몰랐지.
최강혁은 메시지 보관함을 찾아 열어보았다.
“......?”
마치 메일함을 보는 듯한 인터페이스는 익숙한 구조여서 위화감이 없었다.
하지만 그곳에 도착한 메시지는, 그 제목부터가 뭐지 싶었다.
[있습니다. 여러 비약. 할인 판매 중]
“딱 봐도 스팸인데 이거.”
괴상한 특수문자 같은 건 섞여있지 않았지만, 제목부터 약을 팔고 있으니 더 볼 것도 없는 수준이었다.
‘설마, 열어본다고 랜섬웨어에 걸리거나 하진 않겠지?’
그렇다고 안 보기도 애매해서 열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약장수였다.
“아. 조금 전 그 비약을 준 곳이구나.”
그의 인적사항을 열람한 곳.
하급 비약을 대가로 준 곳이 알고보니 그런 제품들을 취급하는 곳인 모양이었다.
‘신기하네.’
통신도 연결이 안 되는 지역인데.
이걸 보낸 곳은 어디일까.
아무튼 그들이 보낸 하급 비약은 일종의 호객 상품이고, 그것보다 효과가 좋은 비약들을 사라고 광고를 보낸 것이었다.
‘중급 비약이 일반 인벤토리 2백칸이네. 이걸 화폐처럼 쓰는 게 맞나보구나.’
중급도, 상급도 살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좋은 무기 같은 걸 판다고 하면 혹했을 것 같은데.”
해당 메시지를 지울까 하다가, 혹시 나중에라도 필요한 일이 생길지 모르니 그냥 두기로 하고 창을 닫았다.
‘잠깐... 그러면, 지금까지 내 인적사항을 열람한 곳들은 나한테 용건이 없어서 메시지를 안 보낸 건가?’
인기남인 줄 알았더니 반대였나보다. 약장수 말고는 말을 걸 이유도 없던 거겠지.
“쓸쓸하구만.”
마침 저녁노을이 지고 있었다.
멀리 지평선 너머로 기울어지고 있는 이쪽 지역의 태양과, 주황색에 녹색이 섞인 느낌의 노을을 바라보던 그는 조심조심 나무 안으로 돌아갔다.
* * *
찍! 찍찍!
“멋지지? 턱걸이는 이렇게 스릴 있게 해야 하는 거야.”
지상에서 30미터 높이의 굵은 나뭇가지.
그곳에 철봉을 만들어 박아넣은 건 사실 운동 목적이 아니라 로프를 감으려던 것이었다.
하지만 더 편한 경로가 생긴 후에는 그곳에 묶었던 것을 풀고, 시간이 날 때마다 턱걸이를 하고는 했다.
“왜 그런 눈으로 보냐.”
별 뻘짓을 다한다는 듯한 눈으로 찍찍거리던 다람쥐는 곧 쪼르르 달려가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딱히 그에게 용건이 있거나 해서 온 게 아님을 알고 있었다. 평소에도 그렇게 주변에 관심이 많은 친구들이어서 아는 정보도 많았다.
“으어... 온다. 자극이 온다.”
풀업에 집중하던 최강혁은 몇 번만 더 하면 팔에 힘이 빠져서 추락할 것 같을 때가 되어서야 그만두었다.
실제로 추락한 적도 있었다.
다행히 착지가 잘 되었는지, 오른쪽 대퇴골에 금이간 것 빼고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쾅! 쿠콰쾅!
그 때, 멀리서 시작된 거센 폭음.
최강혁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또 시작이네.”
그렇게들 포기를 못하고 또 몰려온 건가.
하긴, 이렇게 좋은 목재들을 구할 만한 곳이 많지는 않겠지만.
‘욕심이 너무 커.’
문제는 저들의 목표가 적당한 수준의 벌목이 아니라, 이 숲을 점령하는 것이라는 부분이었다.
어쩌면, 단순히 나무를 원하는 게 아니라 숲 자체를 차지하려는 것 같기도 했다.
‘제대로 알지 못해서 부릴 수 있는 객기지.’
숲의 외곽은 상대적으로 덜 위험하다.
적당히 쾅쾅 시끄럽게 하면 달아날 만한 녀석들이 대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만 갖고 이곳을 평가하면 피를 보게 된다.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음? 나름 방식을 바꿨나보네.”
외곽부터 야금야금 들어가보겠다는 기존 방식이 아니라, 숲 안쪽 깊은 곳을 처음부터 타격해서 그곳에 있는 놈들을 이끌어내자는 작전인 듯 보였다.
진형을 갖춘 상태로 유인해서 섬멸하겠다는 생각이야 당연히 옳은 것 같지만....
쾅! 콰앙-!
와지지지직!
또 몇 방의 박격포탄이 숲에서 조금 깊은 곳의 나무와 땅에 내리꽂히고 있었다.
서둘러 지금 있는 나무의 꼭대기로 올라간 최강혁은 그곳에 의자를 놓고 앉아서 구경했다.
“오. 넘어간다.”
그렇게 포격이 계속되자, 워낙 커서 벌목조차 힘들던 거목들이 하나 둘 쓰러지고 있었다.
“아... 화났나본데.”
그리고, 최강혁은 지금 얻어맞고 있는 영역의 주인이 움직이기 시작했음을 직감했다.
그 주변의 나무들이 요동치고 있었고, 겁을 먹은 울음소리들이 사방으로 번져갔다.
포탄이 맞지 않았음에도 쓰러지는 나무가 보이기도 했다. 그 사이로, 얼핏 무언가의 실루엣이 스쳐 지나갔다.
“왕이 직접 나섰구나. 저건 못 막지.”
동쪽의 왕.
한동안 기분이 좋았는데, 요즘 들어 조금 민감해졌다고 알고 있었다. 거기에 포탄을 퍼부었으니.
“.......”
포격이 끊겼다.
아마 상공에 떠있는 몇 기의 드론이 무언가를 포착한 모양이다.
“음. 저쪽 지휘관은 어느 쪽일까.”
‘좆됐다’ 일까?
아니면 ‘좋아! 걸려들었어!’ 일까.
잠시 이어진 고요함 직후.
마치 파도처럼 이어진 총성과 포성의 향연에, 최강혁은 아마도 후자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크게 실수했어.”
동쪽의 왕은 홀로 군림하지만, 그렇다고 혼자서 움직이는 건 아니다. 그를 추종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 하나 하나가 무시무시했다.
그들이 움직였으니, 일부나마 퇴각이라도 하면 다행일 것이다.
벌써부터 총성과 포성이 한 풀 꺾이고 있었다. 이곳에선 현장이 보이지 않지만, 왠지 안 봐도 어떤 상황일지 상상이 되었다.
“뭐 주워올 거 있나 가봐야겠네.”
〈 44화 〉 044.
044.
옆으로 훌쩍 뛴 최강혁은 근처의 나뭇가지들을 적당히 밟아가며 현장으로 향했다.
분명 죽는 이들이 나올 것 같지만, 애초에 그들의 욕심이 불러온 참사였다.
크호오옹-!
거리가 좁혀지자, 동쪽 왕의 포효가 들려왔다.
벌써 끝내버렸나 싶어서 속도를 높이니, 비슷하게 이동 중인 녀석들이 보였다.
“막지 말고 비켜.”
퍽!
인벤토리에서 꺼낸 밤 한 알을 집어던지자, 그것에 맞은 원숭이가 끼엑! 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 아래로 떨어졌다.
녀석이 사라진 틈으로 몸을 날린 그는 더욱 더 빨리 달려가 현장에 도착했다.
쓰러진 나무들.
분명 사이사이 틈이 넓어서 그냥 지나가도 되었을 텐데, 아마 화가 난 동쪽의 왕이 후려쳐서 그렇게 된 것 같았다.
나무가 부러지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한쪽 옆이 깊게 패여있었고, 비스듬하게 쓰러지며 반대쪽 뿌리가 땅에서 뽑혀나온 모습이었다.
“무시무시하구나.”
총성은 들려오지 않았다.
가장 외곽의 나무 위에 도착해 잠시 멈춘 최강혁은 숨을 고르며 그 바깥의 광경을 눈에 담았다.
“이야....”
전멸인가 했는데, 그건 또 아니었다.
미리 후퇴할 것까지 계산하고 진형을 구축했던 건지, 멀리 달아나고 있는 병력이 눈에 들어왔다.
동쪽의 왕이 그 뒤를 쫓고 있는데, 요즘 화가 나있던 걸 생각하면 꽤 오래 추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뒷덜미를 잡힐 수도 있고.
“그나저나, 처음부터 대비했다고 해도....”
사상자가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쓰러져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일부는 아직 숨이 붙어있는지 그 자리에서 꿈틀거리거나, 어딘가로 기어가는 모습이었다.
‘음.’
대충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전투 과정에 쓰러진 이들도 있겠지만, 대부분 시간을 끌기 위해 후방에 남은 인원으로 보였다.
‘구하는 게 좋겠지.’
이대로라면 동쪽의 왕이 돌아오기도 전에 다른 몬스터들에게 죽을 것이다.
“봤는데 무시하기도 그렇고.”
훌쩍 나무에서 뛰어내린 그는 인벤토리에서 꺼낸 큼직한 리어카에 부상자와 시체를 구분하지 않고 제멋대로 실으며 뛰어다녔다.
“오. 탄약 박스.”
그러는 와중, 근처에 떨어져있는 것들을 되는 대로 루팅하기도 했다.
현장에서 퇴각한 이들의 물품들은 대부분 소유권을 포기한 것으로 간주되기에, 루팅이 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루팅이 안 된다면 더더욱 챙겨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을 만큼 값진 것일 테니까.
덜컹 덜컹.
리어카라기보다 작은 트럭의 짐칸이라고 해야 맞을 법한 크기였지만, 그걸 끌고 달리는 최강혁은 마치 맨몸인 것처럼 가볍고 빨랐다.
“대충 됐다. 빠지자.”
그렇게 주변을 헤집고 돌아다닌 그는 쫓아오던 몬스터들을 발견하고 경고사격으로 거리를 벌렸다.
“저쪽으로 가야겠네.”
아직 동쪽의 왕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의 눈에 띄어서 좋을 일이 없었다.
그는 숲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리어카를 끌어갔다.
“으으! 으아악!”
“내 팔... 으으!”
“정현아! 정현아, 눈 떠봐!”
생존자들은 저마다 처한 상황에 맞는 신음, 혹은 비명이나 한탄, 울음 따위를 내보이고 있었다.
원칙적으로는 이런 곳에서 소리를 내면 안 되니까 닥치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
적당히 떨어진 곳에 리어카를 멈춘 그는 훌쩍 그 위로 올라가 안에 있는 이들을 보았다.
얼마나 빠르게 달렸는지, 죽은 이와 아닌 이가 뒤섞여 뒤쪽에 뭉쳐있었다.
그들 중 누군가가 이쪽을 보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나름 낯이 익은 남자였지만, 반가운 상황은 아니었다.
“좋은 꼴 못 볼 거라고 했던 것 같은데요.”
“어쩌겠습니까. 까라면 까야지.”
“간부 쯤 되면 오히려 까라고 시키는 쪽 아닙니까?”
왼팔이 부러져 덜렁거리는 남자.
그는 고통 때문인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어디 봅시다.”
그 사이에 죽은 이와 아닌 이들을 적당히 나눠놓은 최강혁은 그 남자에게로 다가와 주저 없이 팔을 잡고 뼈를 맞추었다.
“으아아악!”
“가만있어봐요. 정 아프면 기절시켜드리고.”
“괘, 괜찮....”
“아직 안 끝났다니까. 속에서 파편 떨어져나왔어요. 엉뚱한 데 찌르면 큰일나요.”
투시라도 하는 듯 자신의 팔을 바라보며 말하는 최강혁의 모습에, 남자는 그저 맡길 뿐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최강혁은 허공에서 송곳 같이 생긴 꼬챙이를 꺼내 들고 물었다.
“선택하세요. 하나는 아프고 빨리 회복하는 거, 다른 쪽은 덜 아픈데 오래 걸리는 거.”
“얼마나 빨리 회복합니까?”
“그건 나한테 물으면 안 되고.”
본인 몸에 달렸지.
최강혁의 말에, 남자가 떨리는 눈으로 답했다.
“...빠른 쪽으로 해주십시오.”
하지만 곧 후회했다.
최강혁이 아무런 주저 없이, 부러진 팔뚝을 꼬챙이로 찌르고 쑤셔댔던 것이다.
더는 비명을 지를 힘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을 즈음, 꼬챙이가 몸을 빠져나갔다.
“됐습니다. 파편도 제 위치로 돌려놨어요.”
“혹시, 덜 아픈 방법은 뭐였습니까?”
“일단 그쪽 팔의 소유권을 나한테 달라고 한 다음에... 왜요?”
“팔을 달라고요?”
“뭐, 그런 게 있습니다.”
최강혁은 왠지 능숙한 것처럼 보이면서도 무척 투박하고 거친 손놀림으로 부목을 대고 묶어주었다.
주변에 비슷하게 다친 이들에게도 나름대로의 조치를 취해주었는데, 허공에서 꺼낸 이름 모를 연고 같은 걸 발라주기도 했다.
“이건 잘라야겠다.”
정강이 아래가 뭔가에 깔려서 으스러진 남자는 당장 쇼크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래도 의식은 멀쩡한지, 벌벌 떨면서도 최강혁의 팔을 붙잡았다.
“살려주십쇼.”
“아니. 죽을 정도는 아닌데. 잘라서 고쳐갖고 다시 잘 붙이면 됩니다.”
“예?”
“이젠 외부에서도 조합이 되니까.”
“......?”
그곳에서도 최강혁은 소유권을 운운하는 이야기를 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각성자인 것 같으니 치료술 쪽의 스킬일 거라 짐작한 남자가 얼른 수락했다.
“음. 기절해있는 게 낫겠구나.”
“으윽?!”
“힘 빼요. 저항하지 말고.”
주저 없이 환자의 경동맥을 조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을 잃었다.
자칫 잘못하면 뇌에 손상이 갈 수도 있는 방법이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두 분, 요대 풀어서 여기 기준으로 지혈하고 있어봐요. 금방 되니까. 예. 여기요.”
최강혁은 남자의 으스러진 다리를 그대로 루팅했다. 소유권을 받은 터라, 굳이 썰거나 하지 않아도 그 부분만 챙길 수 있었다.
“......!”
환자의 두 다리를 지혈하고 있던 두 군인이 화들짝 놀랐지만, 그런 반응에는 관심도 없는 듯 최강혁의 시선은 허공에 떠있는 인벤토리로 향해있었다.
“손상된 부분이 적잖은데... 그래도 근육을 좀 줄여서 때우면 얼추 되겠어. 재활이야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곧 살짝 가늘어진, 하지만 멀쩡해보이는 다리가 나타나 환자의 잘린 곳에 붙었다.
최강혁은 조금 비틀어졌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중얼거리며 뭔가를 더 행하는 것 같았지만, 모두 합쳐도 3분을 넘기지 않았다.
“역시, 해본 거라 쉽네.”
남의 다리는 처음 붙여보는 거지만, 조합으로 다시 붙일 때를 대비해 소유한 부위를 조금 남겨두고 떼어낸 것은 좋은 발상이었다.
“저런... 치료는 처음 봐.”
“굉장해.”
이미 그의 조치를 받은 이들도, 그렇지 않은 이들도 저마다 경악과 감탄의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하지만, 대단해.”
그건 아무리 봐도 의술이 아니었다.
간단한 지혈이나 부목, 붕대 감는 것들이야 평범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의 조치가 필요한 부상은 굉장히 거칠고 기괴한 방식으로 해결되었다.
“허리 아래에... 감각이 없어요.”
“그럴 만 하네. 제대로 끊어졌는데요.”
“...흑, 어흐흑!”
조금의 배려도 없는 직설적인 표현에 다 큰 남자 군인이 울음을 터뜨렸지만, 잠시 후 그 울음에 환희가 섞였다.
“섰어! 제가 섰어요!”
“성가시니까 도로 누워요.”
그렇게 치료한 이가 열 명이 넘었지만, 이미 리어카에 싣기 전부터 죽어있던 이들도 그만큼 많았다.
그 외에도 너무 심각한 상태여서 자신의 차례가 올 때까지 버티지 못한 이들이 또 몇 명 되었다.
“대충 됐나....”
최강혁은 죽은 이들을 보았지만, 그들에게 미안하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환자의 상태에 따라서 정한 순서였다. 가망이 없는 이들에게 매달렸다면 더 많은 이들이 죽었을 것이다.
“이쪽으로 와보세요.”
최강혁은 두 명 있는 생존 간부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은 이곳에 처음 온 것이 아니었고, 아까 전 대화를 나누었듯 이전에 최강혁을 만났던 이도 있었다.
“그쪽 본대에 연락할 방법 있습니까?”
“100킬로미터 안쪽까지는 무전이 가능합니다.”
“머잖아 해가 질 텐데요. 바로 올 수 있습니까?”
“그건....”
“이미 피냄새를 풍기고 있어요. 당장 이곳을 떠야 합니다.”
최강혁의 말에 그들은 서둘러 본대에 무전을 연결, 현재 상황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본대 쪽이 더 심각한 상황임을 들을 수 있었다. 후퇴 과정에 다른 몬스터들의 습격을 추가로 받았다는 것이다.
“아....”
본대에서 해줄 수 있는 건 현재 위치에서 두 시간까지 기다리는 정도라고 했다.
그 안에 본대로 귀환할 수 있다면 같이 퇴각할 수 있게 하겠다고.
“.......”
간부들도, 무전 내용을 들은 나머지 생존자들도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한쪽으로 모였다.
가만히 서있던 최강혁이 입을 열었다.
“거리, 위치.”
“이쪽으로 대략... 32킬로미터 정도 됩니다.”
얼른 휴대폰을 꺼낸 간부 하나가 지도를 열어보이고 어딘가를 표시했다.
좀 전에 본대 쪽에서 좌표를 불러준 것 같던데, 그것으로 위치를 알 수 있는 모양이었다.
‘좌표 체계는 캠프마다 조금씩 다르다고 했었지. 배울 수 있으면 그러는 게 좋을까.’
고개를 끄덕인 최강혁은 기대감에 찬 이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1킬로당 10코인. 절반은 선불입니다.”
안 그래도 코인이 없어서 문제였는데, 이런 식으로라도 보충을 해야 할 듯 했다.
“어....”
“없습니까?”
“아니요. 있습니다.”
간부들은 판단이 빨랐다.
그들은 얼른 생존자들에게서 코인들을 끌어모아 320코인을 그에게 넘겨주었다.
“절반만 선불이라고 했는데요.”
“속행도 가능합니까? 1시간 안에 갈 수 있다면 그만큼 더 드리겠습니다.”
“속행이라....”
고개를 끄덕인 최강혁은 다들 제대로 앉아서 리어카 옆을 붙들라고 이야기했다.
“거기, 고정한 거 풀리려고 하는데, 다시 잘 묶어봐요. 많이 덜컹거릴 거니까, 그거 풀리면 아까처럼 됩니다.”
시체들을 감싸 덮은 천을 고정한 밧줄.
최강혁의 말에 얼른 그곳으로 가 단단히 고정한 이가 재차 점검을 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후... 나름 도전이군.”
천천히 출발한 리어카는 조금씩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덜컹거리는 비탈을 지나 완만한 평지로 이어진 후에는, 정말 엔진이라도 단 거 아닌가 싶을 만큼 빨라졌다.
1시간이 아니라 50분이 채 걸리지 않아 본대의 숙영지에 도착한 그들은 최강혁에게 320코인을 흔쾌히 지불했다.
“바퀴가 고장난 것 같던데, 괜찮으십니까?”
“이건 고치면 됩니다. 이쪽 상황이 더 걱정이실 것 같은데요.”
“음....”
무전을 통해 들었던 것보다 현장의 상황은 훨씬 좋지 않았다.
막사조차 꾸리지 못해 각각의 차량에 눕혀놓은 부상자들의 신음이 가득했고, 아예 시체조차 찾지 못한 인원도 스무 명이 넘는다고 했다.
“혹시, 이곳 부상자들도....”
“아니요. 당신들은 본대를 위해서 뒤에 남았으니까 도움을 준 겁니다.”
그가 짐작했던 대로였다.
처음부터 짜여진 작전이었다고 했다.
유사시 후퇴할 이들과 남아서 시간을 끌 이들이 미리부터 정해져있었다고.
“행운이든, 두 번째 기회든. 아무에게나 오지 않아서 값진 것 아닐까요.”
“.......”
군 간부는 침묵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겐 두 번째가 아니라 세 번째 기회였지만, 최강혁은 굳이 그 부분을 집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숲은 공략이 안 될 겁니다. 진지하게 생각해보세요.”
“저는 그저....”
“그럼 진지하게 생각해보라고 하시거나요.”
그렇게 이야기한 최강혁은 부상자들과 시체들을 내려놓은 리어카를 허공에 집어넣은 후, 슬슬 어둠이 드리워지는 평원 저편으로 순식간에 멀어졌다.
“어떻게 보고해야 할까요?”
“사실 그대로.”
짧은 대화를 주고 받은 두 간부는 대기하고 있던 부상자들을 이끌고 이동했다.
〈 45화 〉 045.
045.
“간만에 멀리까지 나왔네.”
이미 밤이 되었지만, 주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어두운 건 아니었다.
최강혁은 문득 굳이 숲으로 돌아가야만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고급 인벤토리가 늘어나고 나서는 딱히 외부에 꺼내서 보관할 필요도 없어졌고.’
거처에 설치해둔 자잘한 가구나 시설들이 아까운 것도 아니었다. 그가 원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숲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었다.
‘정이 들었나.’
하지만 결국 방향이 바뀌지는 않았다.
오히려 달리는 속도가 더욱 빨라지고 있는 건 이미 그곳을 단순한 임시 거처가 아니라 ‘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후다다닥.
멀찍이서 몇 마리의 몬스터들이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추방 초반에는 그가 숨거나 도망쳐야 했던 들개 무리였는데, 이제는 그를 보고 달려드는 게 아니라 반대쪽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그런 게 보이나?”
자신이 성장했음을, 그 때보다 강해졌음을 그것들도 알아볼 수 있는 걸까.
‘하긴. 겉으로도 꽤 바뀌긴 했지.’
사라 레드우드도 얼굴이 아니었다면 몰라보았을 거라고 했었다.
[사용자 내용]
이름 : 최강혁
나이 : 23
키 : 191 센티미터
몸무게 : 82 킬로그램
키도 몸집도 더 크고 단단해졌다.
이제는 활이 아니라 창이나 도끼가 더 어울리는 몸 같기도 하지만, 그가 사는 숲에선 그저 외곽 주민일 뿐이었다.
“어?”
그렇게 달려가던 최강혁이 걸음을 멈춘 곳은 숲에서 10여 킬로미터 쯤 떨어진 위치였다.
왠지 익숙한 냄새가 맡아져서 저도 모르게 발을 멈추었는데, 지도를 확인해보니 근방에 강의 지류가 한 가닥 있었다.
‘물냄새에 피냄새가 섞여있어. 그리고....’
그가 아는 냄새가 분명했다.
서둘러 그쪽으로 움직인 그는 멀리 물가에 죽은 듯이 엎드려있는 거대한 몸체를 발견했다.
“.......”
동쪽의 왕.
그가 거기에 있었다.
“왜 여기서 그러고 있어?”
그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가만히 엎드려있던 왕의 귀가 쫑긋거렸다.
“합공이라도 당한 거야?”
최강혁은 왕이 혼자 있는 게 아님을 깨달았다. 왕의 근처에는 그 못지 않게 거대했던, 원래는 그의 추종자였던 것들이 이리 저리 찢기거나 구겨져있었다.
크호오옹.
“다쳤나보네. 그러니까 인간들은 그냥 두라고 했잖아. 하나 하나는 약해도 종종 센 무기를 들고 온다고.”
그우울.
왕이 약점을 드러낸 것 같았다.
아마도 인간들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제법 큰 부상을 입었던 모양이다.
그의 약점은, 추종자들에겐 기회가 되었을까.
“모두 다 있는 건 아니구나.”
주변에 널려있던 사체들을 루팅해본 최강혁은 그가 기억하는 추종자들보다 숫자가 적음을 알 수 있었다.
“나머지는 숲으로 도망쳤겠고... 맞지?”
크흥.
“움직이지도 못하는 거야?”
그르릉거리던 왕은 그의 제스쳐에 답하지 않았다.
최강혁은 왕이 당장 죽을 정도의 부상을 입은 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싸움을 이어갈 수 있을 정도도 아님을 알았다.
그호옹....
“됐어. 내가 그 자리에 가봐야 지키지도 못해. 난 내 그릇을 알아.”
크흐응.
“멀쩡해보이는데 왜 죽여달라는 거야? 한 번 얻어맞았다고 살기가 싫어졌어?”
크흥.
“음? 어디, 뭐.”
천천히 몸을 뒤집은 동쪽의 왕.
최강혁은 어둠 속이라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 인벤토리에서 꺼낸 타블렛의 플래시를 켰다.
“와 씨.”
엎드려있을 땐 몰랐는데, 왕의 뱃가죽 한쪽이 길게 찢겨있었다.
내장이 흘러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지만, 아마도 엎드려서 압박해 버티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냥 찢어진 게 아니네. 마나 무기라도 쓴 건가.”
추종자들이 이렇게 한 건 아닌 듯 했다.
아마도 인간의 무기였을 것이다.
“다른 캠프에도 각성자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었지. 그래서. 죽였어?”
크흐엉!
“튀었구나. 그럼 결국 아무 것도 없잖아. 쓸데 없이 뛰쳐나와서는.”
크르르....
“화내지 말고, 거기 잡고 눌러봐봐. 이쪽하고, 거기. 여기 보고. 이걸 눌러보라고. 그렇지. 그쪽 배하고.”
동쪽의 왕은 자신의 배 위에 훌쩍 올라온 최강혁을 물끄러미 볼 뿐, 굳이 후려쳐 떼어내거나 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에서 무엇을 본 건지, 시키는 대로 뱃가죽 양쪽을 눌러주었다.
“에이. 맞네. 찢긴 게 아니라 터진 거구나. 여기 이 부분은 아예 없어.”
이건 꿰매서 될 게 아니네, 라며 뒷머리를 벅벅 긁던 최강혁은 그래도 할 수 있는 만큼은 해보기로 했다.
크호옹....
“됐다니까. 내가 널 죽여서 뭘 얻겠냐. 오히려 네가 동쪽에 있어서 득보는 게 많은데. 가만있어봐. 이걸 뭐로 꿰매지?”
강철로 만든 창을 바늘 대신 써볼까 하던 그는 고개를 저었다. 바늘도 문제지만 실도 문제였다.
어지간한 실은 놈이 조금만 움직여도 끊어지거나 터져버릴 것이다.
“잠깐만. 가죽만 문제가 아닌가본데?”
그러던 최강혁이 플래시를 더 안쪽으로 비춰보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게 다 죽은 피야? 뭐가 이렇게... 이거, 창자가 터진 모양인데?”
이상하긴 했다.
몬스터들은, 특히 이 정도로 강한 종류는 거의 각성자 후려칠 정도로 회복력이 좋은 편이었다.
놈들이 마나가 많은 곳을 좋아하는 건 그 육체와 힘을 유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충분한 마나가 있다면 부상의 회복 또한 별 문제 없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주변에 널려있던 놈들을 왜 안 먹나 했더니... 못 먹고 있던 거였어.”
크호옹....
싸움이 끝나고, 승자가 패자를 씹어 삼키는 건 그 과정에 다친 몸을 치료하기 위한 양분을 공급하려는 의도도 있다.
이런 부상을 입었음에도 먹지 못하던 건 내장에 문제가 생겨서 그런 거였을까.
“음. 이거 답이 안 나오네.”
스캔을 해본 최강혁은 창자만 문제가 아니라 내장이 전반적으로 손상되어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던 왕을 향했다.
“이게 이해가 되나 모르겠는데... 잠깐 네 소유권을 나한테 줘봐. 그러면 될 것 같아. 가죽하고... 아니. 아니야. 죽여서 가져가겠다는 게 아니라고.”
인간의 언어만큼 복잡하고 구체적이지 못하다보니, 그저 최대한 비슷한 것을 찾아 뜻을 전할 수 밖에 없었다.
“돌려줄 거야. 살게 해준다고. 잠깐만 주면 돼. 그래. 나한테 너를 달라고. 됐지? 허락한 거지?”
제대로 이해를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왕의 뱃가죽 안에 고여있던 죽은 피가 루팅되는 걸 보면 문제는 없었다.
최강혁은 플래시를 비춰가며 왕의 뱃속을 깨끗하게 치웠다. 그렇게 살펴보니, 역시나 찢겨나간 뱃가죽 안으로 추가적인 공격이 있었던 것 같았다.
“수류탄을 까넣은 건가... 한 두 개로는 이렇게 안 될 것 같은데.”
응고된 죽은 피들이 떨어져나가자, 막혀있던 부분이 다시 뚫리면서 출혈이 이어지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천천히라도 회복을 해야 할 텐데, 그것조차 안 된다는 건 왕의 마나 상태가 그만큼 바닥이라는 뜻이었다.
“어디 보자....”
최강혁은 스캔 데이터를 참고하여, 문제가 있는 부분부터 보수공사에 들어갔다.
공사라고 표현하는 건, 역시나 그것이 의술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속도가 생명이지.”
그는 왕의 찢겨나간 창자 부분을 적당히 골라, 그 일부를 떼어내고 남은 부분을 이어붙였다.
그리고 떼어낸 부분을 재료삼아, 구멍나고 찢긴 다른 부위에 조합하여 땜질을 해나갔다.
크으허엉....
“조금만 버텨봐. 뱃가죽이 찢어졌으니 몸에 힘이 들어갈 리가 있나.”
하지만 그래서 발버둥을 못 치는 것 같아 다행스러운 면도 있었다.
비슷한 방법으로 왕의 내장을 마저 보수한 최강혁은 찢기고 떨어져나간 뱃가죽 역시 비슷한 방법으로 고치기 시작했다.
“겨드랑이 쪽은 두께가 조금 얇아도 문제 없을 테니까... 회복하고 나면 그것도 원래대로 될 거고.”
다른 곳의 여유를 끌어모아서, 없는 부분을 채워나가는 방식. 당장은 그것이 최선이었다.
“동족 가죽이라도 있으면 섞어보겠는데... 근데, 몬스터도 혈액형 같은 게 있으려나? 그럼 아무거나 섞으면 안 되겠구나.”
찢겨나간 부위보다 더 넓은 가죽이 사라졌다가 다시 생겨나는 것을 반복하는 동안, 조금씩 부상 부위가 메워져갔다.
“됐다.”
일단 다 고쳤다.
하지만 왕은 여전히 거동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무슨 수의사도 아니고.”
녀석의 배 위에서 내려간 최강혁은 바로 옆에 있던 물가로 향했다.
그곳에서 물을 루팅한 그는 인벤토리에 들어있던 온갖 몬스터들을 적당히 분쇄해 그것과 섞었다.
“대충 됐나.”
끓이지만 않았을 뿐, 일종의 죽이나 이유식 같은 느낌이 되었다.
그것을 왕의 벌어진 입 안으로 적당히 꺼내어 흘려주니, 꿀꺽 꿀꺽 하며 주는 대로 삼켰다.
“먹는 것에서도 마나를 끌어다 쌓을 테니... 꽤 많이 필요하겠는데.”
주변에서 루팅했던, 추종자들의 사체들도 고스란히 왕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그 중 누군가는 반란을 생각했을 테고, 또 누군가는 그런 배신자들로부터 왕을 지키려고 했을 것이다.
‘모두 다 배신자라고 생각하는 건 슬프니까.’
물가를 다섯 번 정도 오가며 비슷한 일을 반복하자, 그제야 눈에 힘이 돌아온 왕이 천천히 몸을 뒤집어 엎드렸다.
“좀 살만해?”
그리고는 어슬렁 어슬렁 물가로 가서 직접 물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아예 입과 코를 물에 처박고 그대로 빨아대는 느낌이었는데, 얼핏 보니 작은 물고기들이 휩쓸려서 같이 빨려들어가기도 했다.
“아. 물에도 마나가 있었지.”
그렇게 보니, 단순히 목이 말라서 마시는 것만은 아닐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분간이나 물을 마신 왕은 굽어있던 등이 서서히 펴지고 흐느적대던 몸에도 힘이 들어갔다.
“음. 다 된 모양이네.”
최강혁은 동쪽의 왕이 귀환하게 되면 그쪽이 무척 시끄러워질 것이라 짐작했다.
도망친 배신자들이 남아있을 테고, 왕이 그들을 용서할 리 없으니까.
“음? 가야지, 이제.”
물가에서 입을 뗀 왕의 몸짓과 눈빛에 그렇게 답하던 그는 이어진 물음에 뒷머리를 긁었다.
그러자 왕이 다시금 같은 것을 물었다.
크흐엉.
“왜 살렸냐니. 너도 죽고 싶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크응.
왕은 대답을 원했다.
사실 별 생각 없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런 걸 이유라고 한다면, 누군가는 비웃을 지도 모르겠지만.
“네가 기억하고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너도 나를 살려준 적이 있었잖아.”
최강혁은 슬쩍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쪽을 손바닥으로 탁탁 쳐보였다.
“네 부하가 내 다리를 잘랐었지. 뭐, 결국 그곳에서 죽은 건 내가 아니긴 했지만.”
단지 다리가 잘렸고, 그것을 수습한 정도가 아니었다. 그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리고, 최강혁은 당시 동쪽의 왕이 자신을 살려보내주었음을 알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찢어발길 듯이 몰려오던 것들이 아무렇지 않게 물러난다는 건, 위에서 내려온 절대명령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니.
그 이유는 여전히 모른다.
어쩌면 그저 왕의 변덕일 수도 있고.
“기억 안 나지?”
으흐엉.
“그냥 그렇다는 거야. 너 한 번, 나도 한 번. 서로를 살려주었다고 치자고.”
조금 후련한 마음이 들었다.
여전히 동쪽의 왕은 강력하고 무서운 존재였지만, 그런 존재에게 큰 도움을 줄 정도로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들고.
“뭐라고?”
그 때, 왕이 코를 킁킁거리며 고갯짓을 했다.
“그래도 되나?”
크흐옹.
“음... 어차피 같은 방향이니, 신세좀 질까.”
* * *
“최근에 찍은 사진입니다.”
“......?”
사라 레드우드는 부하가 보여준 타블렛 화면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뭔데, 이게? 곰인가?”
“주변 지형을 잘 보십시오.”
“대충 어디인지는 알겠... 잠깐만. 이거 확대 배율이 왜 이래? 이 크기가 맞아?”
“거인의 숲에서 포착되었던 그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놈이 밖으로 나왔다고?”
“숲으로 복귀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모종의 이유로 외유를 나왔다가 돌아간 모양입니다.”
“모종의 이유라면... 저쪽 캠프 곡소리나던 그건가보네.”
“그렇게 추정 중입니다.”
“근데... 뭐지?”
사라 레드우드는 해당 사진을 확대했다.
그럴수록 화질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 거대한 몬스터의 머리 위에 누군가가 앉아있는 모습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이거, 봤어?”
“예?”
“여기 이거. 사람이잖아.”
“......설마요.”
“설마는 무슨 설마야. 누군지도 알겠는데.”
“어...?”
그렇게 다시금 사진을 살펴본 부하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야기를 듣고 다시 보니, 그의 머릿속에도 떠오르는 남자가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나도 몰라. 아무튼, 이거 보안 걸어. 너하고 나만 아는 거야.”
“알겠습니다. 어디 말해봐야 믿어주지도 않을 것 같고요.”
“아니. 이제는 믿을 거야. 다들 의심보다 욕심이 더 커져버렸으니까.”
그렇게 말한 사라 레드우드는 문득 최강혁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성장하고 있어요. 충분히.
‘대체 뭘 어떻게 성장하고 있기에....’
그가 생각하는 성장은 자신이 생각하는 그것과 많이 다른 것 같았다.
거듭 고개를 저은 그녀는 자신이 가진 이 정보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 46화 〉 046.
046.
고작 10킬로미터 정도였다.
혼자서 달려갔다면 금방 도착했을 거리임에도 다음날 새벽 즈음에야 숲 언저리에 다다른 건 여러 이유가 있었다.
일단 왕이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그가 해준 건 손상된 부분의 보수 정도였을 뿐, 완벽한 치료는 아니었다.
겉보기에는 멀쩡한 것 같아도, 걸을 때마다 곳곳이 불편한지 움찔거리거나 다리를 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또 다른 이유는 왕을 배신했던, 한때는 충실한 부하였던 자들이 모두 숲으로 돌아간 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새벽이 올 때까지 수 차례의 전투가 있었다.
최강혁은 왕을 도우려 총을 쏘기도 했다.
어차피 돕기 시작한 일이기도 했고, 굳이 위치를 정하자면 왕 쪽에 서는 것이 낫다고 여겼다.
“겨드랑이 가죽은 얇아도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네. 혈관들이 몰려있어서 위험하구나.”
크흐어엉...
“가만있어봐. 벌써 움직이면 터진다고.”
왕은 거듭 상처를 입었고, 그는 전투가 끝날 때마다 고쳐주었다.
다행인 건, 한 번의 전투가 끝나면 그만큼의 전리품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죽은자들의 사체는 왕의 몸과 힘을 회복하는 데에 적잖은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숲이 가까워질 즈음에는 더 이상 부상당하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고, 여럿의 합공에도 오히려 압도하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턴 혼자 갈 거지?”
크흥.
동쪽의 왕.
그는 숲의 외곽에 이르자 자신의 머리에서 훌쩍 뛰어내린 최강혁의 물음에 긍정의 눈빛을 보였다.
“혼자 괜찮겠어? 아니지. 괜찮지 않을 리가 없겠구나.”
크흥.
콧김을 내뿜은 왕이 약간 긴 제스쳐를 보였다.
그것에 담겨있는 의미를 이해한 최강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어차피 당분간 조용히 지낼 생각이었기도 하고.”
집에 있어라.
숲으로 들어오지 마라.
왕은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간단히 끝날 일은 아닐 테니까.”
단순히 약점을 보인 왕에게 이빨을 드러낸 정도가 아니었다.
왕도 그것을 알고 있었고, 당분간 시끄러워질 테니 집에서 나오지 말라고 조언한 것이다.
“어설프게 봐주지 말고.”
크흐흥.
최강혁의 동작을 본 왕은 마치 코웃음을 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어슬렁 어슬렁 멀어졌다.
조용한 숲.
거대한 나무들 사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왕의 뒷모습은 일견 쓸쓸해보이기도 했지만, 최강혁은 그런 모습에서 다른 것을 보았다.
“진짜... 나오지 말아야겠다.”
동쪽의 왕은 분노하고 있었다.
꾹꾹 억누른 분노가 곧 터져나올 것이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당장은 잠깐이나마 여유가 있다.
그는 서둘러 돌아다니며, 지금까지 친분을 쌓아온 이웃들의 집을 방문했다.
“동쪽 왕이 화가 났어. 외곽으로 피하는 게 좋아.”
찍! 찍찍!
다람쥐 가족에서부터 시작해, 평소 그를 좋아하지 않던 어미새에게도 위급 상황임을 알렸다.
꾸르륵.
“고맙긴. 애들 잘 챙기고.”
홀로 새끼들을 키우느라 그랬는지 성격이 날카롭던 어미새도 이번엔 그를 경계하지 않고 순순히 감사를 표했다.
그렇게, 아침이 밝기 전 곳곳에서 조용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을 때마다 좀 더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곤 했기에, 이번에도 별다른 혼란은 벌어지지 않았다.
혼란은 역시나 동쪽 숲에서 시작되었다.
최강혁은 주 거처의 나무 꼭대기에서 그쪽을 바라보았다.
“나무들이 흔들리고 있네. ...역시, 몸 사리고 있는 게 맞아.”
그가 나설 일이 아니다.
왕을 돕겠다는 명분으로 근처에 있게 된다면 이래 저래 떡고물이 떨어질 수야 있겠지만,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이 좀 심각해졌다. 동쪽의 왕이 배신자들을 처단하고 뒷정리를 하는 수순이 아니라, 그 이상의 무언가로 번져가는 분위기였다.
찍찍!
여기 저기 소식 전하기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바삐 오가며 전장의 정보들을 알려주기도 했다.
그의 짐작대로였다.
단순한 복수가 아니라, 숲 전체를 아우르는 전쟁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게 이렇게 되네.”
왕이 약해졌다는 소문이 퍼졌던 모양이다.
아주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는 식으로 알려지니, 그의 영역을 노리고 공격한 자들이 있던 것이다.
배신자들의 처단에서 끝나지 않고 전쟁으로 번진 건, 그렇게 외부에서부터 공격해들어간 왕들 때문이었다.
그 과정에 휘말리는 자들이 생기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의 영역을 비우고 왔다가 죽임을 당한 왕들이 생기니 그 공백을 차지하기 위한 또 다른 전쟁이 계속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마치 불이 번져가는 것과 비슷했다.
아니, 그 속도를 보면 불보다는 연쇄폭발 정도로 이야기해야 더 정확할 것 같기도 했다.
어부지리를 노리는 이들.
각자의 욕심대로 이루어지는 이합집산.
그 과정에 죽은 왕이 다섯을 넘어간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정확한 건지는 확인이 불가능했다.
다만 일반 몬스터들이라면 정말로 셀 수 없이 죽어나가고 있음을 모두가 알았다.
“이제 조금 정리된 건가.”
거의 열흘을 집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던 최강혁은 그제야 움직였다.
슬슬 사냥도 해야 할 것 같지만, 그보다는 동쪽의 왕이 자신을 찾는다는 소식이 전해져서 그런 것이었다.
“.......”
그곳으로 가는 길.
그 경로 상에도 사체들이 널려있었다.
전쟁의 흔적들.
하지만 이상한 것은 청소부들의 부재였다.
“왜 안 보이지.”
평소대로라면 청소부들이 신나서 움직일 텐데, 그런 녀석들까지 같이 휩쓸려 죽어버리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이런 외곽까지 오지 못할 정도로 다른 곳의 상황이 훨씬 심각한 걸까.
“벌레들만 포식하는군.”
벌레들도 물론 숲의 이웃이긴 하지만, 너무 많아지면 여러 가지로 곤란했다.
최강혁은 상대적으로 상태가 괜찮은 사체들을 적당히 루팅하며 나아갔다.
“음....”
동쪽 숲의 초입에 이르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예전처럼 수많은 시선들이 그를 향했지만, 경계나 적의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딱히 누군가에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모두가 왕이 있는 곳으로 이끌어주는 느낌이었다.
그대로 향하니, 곧 왕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
초토화.
한때 거목들이 우거져있던 동쪽 숲 깊은 곳은 정말 그런 단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있었다.
‘하늘이 보이네.’
원래 그곳에선 기대할 수 없던 일이었다.
그런데 수십 그루의 나무들이 쓰러지고 부서져, 그 위로 맑은 하늘이 드러나있었다.
그리고 그곳.
거목과 수많은 사체, 또한 수많은 뼈무덤들의 너머 그 중앙에 왕이 있었다.
반쯤 부러진 거목에 등을 기대고 앉은 왕은 오전의 햇살을 몸에 받으며 기분 좋게 그르렁거리는 중이었다.
“...전부 다?”
천천히 그의 앞으로 간 최강혁은 자신을 바라보며 전해온 왕의 의지에 모처럼 당황했다.
다시금 그 주위를 돌아본 그가 입을 열었다.
“이걸 다 가지라고?”
왕좌를 넘겨주겠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지금 보이는 온갖 것들을 준다는 것. 즉, 현장에서 챙길 수 있는 것들을 모두 챙기라는 것이다.
“.......”
그 중에는 다름아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른 지역의 왕이었던 자들의 사체까지 포함되어있었다.
동쪽의 왕은 입을 크게 벌려 하품하고 난 후, 그런 왕들의 몸 안에 있는 것들까지 챙기라 덧붙였다.
정확히는 ‘먹으라’고 표현했는데, 어떤 의미인지는 최강혁도 잘 알고 있었다.
‘핵이 있어.’
죽은 왕들의 몸에는 몬스터의 핵이 들어있었다. 정말로 왕에 걸맞은 크기였다.
“내가 가져도 되는 거야? 직접 먹어도 되잖아.”
크흥.
“지금도 강한 거야 알고 있지만... 음.”
그래도 세 번까지는 사양해야 하지 않나 생각하다 얼른 멈춘 건, 문득 상대가 인간이 아니라는 걸 깨달아서였다.
형식적인 거절이, 상대에게 오히려 불쾌감을 줄 수 있으니 여러 모로 신중해야 했다.
‘준다는 데 받아야지.’
짐짓 고개를 끄덕인 최강혁은 제멋대로 올라오는 입꼬리를 애써 힘주어 참으며, 일단 왕의 근처에서부터 청소를 시작했다.
죽은 것들을 루팅해 가죽과 뼈 등 쓸모 있는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지금의 인벤토리 상태로도 단번에 모두 루팅하는 건 불가능해서, 적당히 챙긴 다음 정리해 다시 공간을 확보하는 방식이 될 것 같았다.
‘이것들은 따로 두자.’
왕이 좋아할 만한 고기라면 별도로 쟁여놓았다. 다 가지라고 하긴 했지만, 변덕이 심하니까 어떻게 될지 모른다.
‘장난 아니네.’
죽은 왕들의 사체를 거두었을 땐 그 하나 하나가 가진 것들에 경악을 숨기지 못했다.
‘이런 존재들이 지금도 더 많이 남아있다는 거잖아.’
그리고, 동쪽의 왕은 그런 자들을 죽이고도 멀쩡할 정도로 강하다는 것이 놀라웠다. 아니, 오히려 전보다 더 강해진 것 같기도 했다.
‘핵의 크기가 무슨....’
죽은 왕들이 지니고 있던 핵.
겉에 붙어있는 내장과 살점을 제외하고 실질적인 크기만 지름 1미터 정도는 되었다.
‘비슷했었지. 아니, 조금 더 작았던가.’
부상당한 동쪽 왕의 몸을 고칠 때, 스캔을 하면서 그가 가진 핵을 확인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보면 핵의 크기만으로 강함을 따질 수는 없는 건가 싶었다.
‘와....’
왕들만 핵을 가진 건 아니었다.
주변 사체들을 청소하다보니 그보다 작은 크기의 핵들도 적잖게 추가할 수 있었다.
사람 머리통 크기의 핵이라면 누가 보아도 경악할 것 같은데, 왕들의 핵을 먼저 보아서인지 그리 대단해보이지 않았다.
왕의 것들보단 못해도 상당히 큰 핵들이 또 있었으니, 사라 레드우드가 경악했던 주먹 크기의 핵 정도는 그저 돌멩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음. 그 정도인가.’
시스템은 왕들의 핵 가치를 각각 고급 인벤토리 5개에서 7개 정도로 평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친 게 아니라면 그걸 바꿀 수는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스스로 흡수해서 마나량을 늘리는 게 낫지.
크르릉.
왕은 주변이 정리되는 것을 보며 기분 좋은 콧소리를 냈다.
중간에 인벤토리를 정리하면서 슬쩍 물어보니, 공터가 된 지금이 햇빛을 볼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나무들이 조금 사라져서 공기의 마나량이 달라지긴 한 것 같지만, 과거하고 비교해서 그렇게까지 큰 차이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러면, 자잘하게 남은 나무들도 마저 청소해줄까?”
크호옹.
“알았어. 기다려봐.”
워낙 정리할 것들이 많았다.
인벤토리를 정리할 때만 잠깐 숨을 돌리며 계속 움직이니, 오후에서 저녁으로 넘어갈 즈음이 되어서야 죽은 것들의 정리가 끝났다.
그 때부터는 쓰러진, 혹은 쓰러지다 만 거목들과 부러진 파편, 가지, 이파리 따위를 치우기 시작했다.
“여기, 이거 좀 때려줄래? 완전히 끊어버리게.”
크르릉.
“나는 한 방에 못 하니까. 도와주면 빨리 끝낼 수 있어. 나 혼자 하면 오늘 안에 안 끝나.”
크흥.
“아니.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은 없는데.”
귀찮다고 알아서 하라니.
누가 왕 아니랄까봐.
최강혁은 반쯤 꺾여서 거의 쓰러진 나무의 남아있는 부분으로 다가가 마나 흡수를 시작했다.
지직... 지지직...
팽팽하게 휘어있던 속살이 마나를 잃으면서 푸석푸석해지자, 그 끝에서부터 조금씩 끊어지며 가죽을 찢는 듯한 소리를 냈다.
‘톱질을 따로 하진 않아도 되겠네. 음. 이렇게 마저 끊어지면 얼추... 이쪽 방향에 서야 하나.’
혹시라도 튕겨나올 가지나 파편에 맞으면 곤란하니까 미리 미리 대비해야 한다.
꽈지지직-!
그렇게 남은 부분이 줄어들자, 간신히 버티고 있던 나무가 완전히 꺾였다.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진 거목의 위쪽은 그대로 두고, 최강혁은 딛고 있는 밑둥 쪽을 마저 정리했다.
‘와. 이 정도로도 10톤이 넘는구나. 특수 한 칸을 완전히 비웠는데도 못 넣는 건가.’
먼저 정리한 몬스터들 덕에 엄청난 양의 인벤토리를 얻은 터라, 특수칸의 4슬롯을 풀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다.
나머지 한 칸도 5톤에 5개까지 늘려놓아서, 머지 않아 다음 단계를 볼 수 있을 듯 했다.
하지만 막막할 일은 없었다.
이미 소유권을 얻었기에, 그 일부를 잘라서 루팅하는 건 가능했다.
‘이건 언제 얻은 기능이더라? 기억이 잘 안 나네.’
초기에는 본래의 상태 그대로가 아니면 루팅이 안 되었던 것 같은데, 아마 단계가 올라가면서 생긴 추가 기능일 것이다.
최근 부상자들의 신체 일부를 절단 없이 루팅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기능이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고.
‘굳이 10톤을 꽉 채울 필요 없잖아. 적당히 빨리 빨리 가자.’
〈 47화 〉 047.
047.
10톤짜리 특수칸 한 칸을 풀로 사용할 수 있게 되니, 거대한 나무들의 청소도 무척이나 쉬워졌다.
‘완전히 베어지지 않으면 소유권이 안 생기는구나.’
다만 그곳의 왕이 벌목과 청소를 허락했다고 해도, 아직 베어지지 않은 나무는 죽지 않은 몬스터와 비슷하게 취급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제대로 베어내기만 한다면, 치우는 것 자체는 무척 쉬웠다.
‘너무 특수칸만 올려도 좀 그렇겠지.’
일반 인벤토리가 일정 이상 늘어나면 고급 인벤토리로도 몇 개 정도 바꾸었다.
그렇게 거목들을 마저 치우고 나니, 어느새 깊은 밤을 지나 새벽나절이 되었다.
“.......”
슬쩍 뒤쪽을 돌아보니, 왕은 원래 있던 곳에서 그릉 그릉 콧소리를 내며 자는 중이었다.
‘겁나 밉상이구만.’
좀 도와줬으면 해가 지기 전에 끝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지.
그래도 받은 걸 생각하니 스르르 풀리며 오히려 얼굴엔 한껏 미소가 지어졌다.
‘어디 보자. 청소만 해주고 가기는 좀 그런데.’
공터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이곳.
중간 중간 나무 밑둥과 뿌리가 제거되어 움푹 들어간 땅들과, 여기 저기 남아있는 죽은 것들의 체액과 피얼룩이 쓸쓸함과 불쾌감을 주기도 했다.
‘땅을 좀 갈아 엎어야겠는걸. 겸사겸사 해볼 만한 것도 있겠네.’
10톤짜리 특수칸이 있으니, 땅 고르는 작업이야 별 게 아니다.
천천히 주위를 돌아다니며 일을 시작하니, 날이 밝을 즈음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크흐응.
중간중간 깨어난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긴 했어도 몸을 일으키진 않던 왕이 비로소 어슬렁 어슬렁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멈춰선 곳.
마침 그곳에 있던 최강혁이 왕을 돌아보았다.
“그래도 그늘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공터의 후방엔 전에 없던 작은 동산이 만들어져있었다. 그 한쪽의 아랫부분이 안으로 조금 파고 들어간 형태였다.
“아주 동굴로 만들자니 재료가 안 좋더라고. 튼튼하게 해봤자 조금 부딪치면 무너질 것 같고.”
그냥 혼잣말일 뿐, 자세히 소개할 필요는 없었다. 왕은 그의 의도를 정확히 알아보았는지, 그렇게 동산 아래의 오목한 부분으로 들어가 몸을 뉘여보았다.
적당히 고운 흙을 모아서 깔아둔 바닥.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온 돌 따위는 없었다.
또한 태양의 위치를 고려한 터라, 한낮에도 눈이 부시지 않고 적당히 그늘을 유지할 수 있는 방향이었다.
그릉 그르릉
‘또 자냐.’
최강혁은 기존에 왕이 누워있어서 정리하지 못했던 공터 중앙 쪽을 마저 청소했다.
그리고 그곳에 하나 남아있던 반쯤 부러진 거목 역시 적당히 보기 좋게 다듬어놓았다.
그것을 아예 치우지 않는 건, 왕이 등을 긁을 나무 기둥 하나 정도는 가까이에 있어야 할 것 같아서였다.
“며칠 지나면 잡초들이 올라오겠지. 나중엔 이런 저런 꽃도 필 테고... 나름 보기 좋을 것 같아.”
그는 왕에게 인사를 전하고 물러났다.
왕은 다른 영역에도 챙길 것들이 많겠지만, 돌아다니지 말고 집으로 갈 것을 조언해주었다.
“어차피 배가 불러서 더 먹을 수가 없어.”
크흥.
“어쩔 수 없잖아. 난 인간이라고. 왕처럼 크지 않아.”
그렇게 말한 최강혁은 미리 준비해두었던, 몬스터 사체를 정리하며 따로 챙긴 여러 고기들을 왕의 앞에 꺼내놓았다.
거의 3톤에 달하는 양이었지만, 왕에게는 그리 대단한 양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크흐응.
고기를 본 왕의 눈에서 즐거움이 보였다.
역시 따로 챙겨두길 잘한 듯 했다.
“아무튼, 건강하게 지내. 갈게.”
과거처럼 왕의 주위를 호위하는 추종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오히려 편안해보이는 건 왜일까.
‘집으로 가자.’
왕의 말대로, 다른 곳에 더 많은 몬스터들의 사체가 남아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은 아직 끝난 게 아니다.
고요함을 되찾은 곳은 동쪽 숲 일대 뿐이었고, 다른 곳들은 여전히 혼란 속에 있었다.
“외곽까지 번지지 않아서 다행이야.”
거처로 돌아온 그는 인벤토리에 쟁여놓은 것들을 다시금 찬찬히 확인했다.
‘일단... 고급 인벤토리가 20칸이 되었네.’
중간 중간 바꾼 정도로도 그렇게 늘어난 걸까. 하지만 당시에는 어떤 식으로든 바꾸지 않으면 마나량 유지가 어려울 정도였으니 불가피한 일이었다.
‘특수칸도... 풀 업그레이드가 가능한 상황이고.’
그건 잠시 후에 하기로 하고, 일단 이것 저것 분리해나갔다.
특수 칸에 넣어두었던 대형 몬스터들의 가죽과 뼈를 일부 고급칸으로 옮겼고, 딱히 쓰임새가 마땅치 않은 종류는 그런 것들끼리 잘 쌓았다.
예전이었다면 애매한 것들은 모두 처분을 했겠지만, 지금은 사정이 조금 달라졌다.
언제가 될 지는 몰라도 사람들과 교류, 혹은 거래를 할 일이 생길 것 같으니, 그 때를 대비해서 나름대로 팔 만한 것들을 만들어두어야 했다.
‘내 기준으로는 애매해도, 그쪽 기준으로는 아닐 수 있으니까.’
엄청나게 쌓여있던 뼈들도 일부는 처분하고 일부는 가루를 내어 섞었다. 몬스터의 뼛가루는 지혈할 때 좋아서, 따로 챙겨두면 쓸모가 있었다.
체액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것이든, 결국 쓰임새가 있었다.
“어떤 것이든, 말이지.”
최강혁은 문득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이라도 아무 캠프에나 투신한다면 반겨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사라 레드우드도 그렇게 말했었고.
“.......”
하지만, 그가 이곳에 남은 건 단순히 그가 행한 일의 죗값을 마저 치르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여기가 편해질수록, 왠지 사람들이 더 불편해지는 기분이야.”
작은 벌레들도, 짐승들도, 심지어 몬스터들도 다들 순수한 무언가를 갖고 있었다.
때로는 그 순수함이 과격한 살육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의도 자체는 투명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적어도, 겉과 속이 다른 놈은 없다.
“단순히 지능차이라고 하긴 뭣하고. 이쪽도 머리 좋은 녀석들은 있으니까.”
그저 인간불신일 뿐일까.
만약 의사 선생님께 상담을 받아본다면 대부분 비슷한 이야기를 할 테지만.
‘유년기에 겪은 가족 불화에... 학창시절의 차별 같은 것도 있겠고.’
거의 정석에 가까운 것들 아닌가.
그가 5년형을 받은 것에도 그런 부분이 적잖게 참작되었다고 들었다.
유일하게 남은 가족을 아끼는 마음이, 큰 오해를 일으켜 벌어진 사고였다고 말이다.
‘잘 지내고 있겠지?’
사라 레드우드에게 했던 부탁 중에는 누나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아봐달라는 것도 포함되어있었다.
누나만이 아니었다. 겸사겸사 고윤호 쪽도 궁금했고, 그 외에도 그의 손에 죽은 남자의 가족들이 어떻게 지내는지도 알고 싶었다.
‘형기를 마치고 돌아가면, 가장 먼저 할 일은 그분들에게 용서를 비는 거야.’
오해였다고 얼버무릴 수 없는 일이다.
기억은 여전히 흐릿하지만, 그렇다고 현실까지 흐릿해지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형을 제대로 마치고 나면 각성자로서 돈을 벌 수 있겠구나.’
이곳에서도 코인을 버는 건 가능하지만, 그건 이쪽에서나 통용되는 화폐일 뿐이다.
환전 절차도 까다롭고, 액수에 따라서는 세금을 많이 내야 할 수도 있다.
“어디 보자....”
그렇게 대충 정리를 끝낸 그는 마지막으로 특수칸 하나에 몰아넣어둔 왕들의 핵을 보았다.
“흡수해야겠지?”
당장은 마나가 부족할 일이 없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신주단지처럼 모셔두는 것도 멍청한 일 같았다.
자잘한 것들이야 어디다 팔든 할 수 있겠지만, 그 정도 되는 걸 남한테 팔기도 아깝고.
“일단 하나 먼저 해보자.”
몬스터의 핵을 흡수하는 건 그가 가진 흡수 스킬의 매커니즘하고는 많이 달랐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흡수스킬이 없는 이들도 흡수가 가능할 것이다. 핵 자체가 그런 성질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으음.”
그 크기에 비해 흡수 과정은 상당히 빠르게 완료되었다.
최강혁은 연이어 떠오른 시스템 알림을 한 눈으로 훑어보았다. 그 중에서 당장 눈에 띄는 건 최대 마나량의 변화였다.
[체내 마나]
2,912 / 7,501
“미쳤냐?”
처음엔 잘못 봤나 싶었다.
근데 아니었다. 시스템에 버그 같은 게 있지 않은 이상 그 숫자가 잘못된 것 같지는 않았다.
“워어.”
게다가, 갑자기 변한 마나량을 뒷받침해주는 또 다른 변화가 있었다. 체내 마나의 자연회복속도가 기존에 비해 확실히 빨라진 것이다.
“4천이 넘게 올라버렸네.”
숲에서만 1년을 넘겼고, 그 이전 캠프때까지 하면 거의 1년 반에서 2년 가까운 시간이었는데, 그런 노력을 고작 한 번의 흡수로 넘겨버렸다.
“이래서 핵이 비싼 거구나.”
클수록 비싸다더니, 그럴 만 했다.
그는 아직 흡수하지 않은 핵들을 보았다.
비슷한 크기의 ‘왕 급’ 이 두 개 더 있었고, 그보다 못하지만 지름 50센티미터 쯤 되는 급들이 5개 있었다.
그 아래 급들은 거의 무더기라 할 만큼 많았는데, 그것은 동쪽 왕을 공격했던 무리가 그만큼 강력한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핵을 갖지 않은 몬스터들이 그렇게까지 강해지는 건 쉽지 않았다.
“만약 없던 녀석이라도, 어떤 식으로든 핵을 몸에 담으면 강해진다고 했지.”
죽은 자의 몸에 있던 것을 먹어서 넘겨받는 것이 가장 흔한 일이었다.
그런 식으로 다른 핵을 가진 이를 잡아먹어 자신의 핵을 키우는 것도 가능하다 했고.
‘왜 왕은 이걸 나한테 양보한 거지? 본인이 먹어도 될 텐데.’
어쩌면 이미 그만큼 먹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이번에 왕을 스캔해보지 않은 것을 조금 후회했다.
“음?”
그런데, 시스템 알림 중에서 눈에 띈 것이 더 있었다. 마나량 증가 쪽에 시선을 뺏겨서 상대적으로 묻혀있었던 내용이었다.
-맨티스 킹의 핵을 흡수하였습니다.
-그보다 작은 벌레들에게 공포심을 줍니다.
-더 큰 대상에 대한 두려움이 줄어듭니다.
“사마귀 같이 생긴 왕이 하나 있긴 했지. 거기서 꺼낸 거였나.”
그나저나, 작은 벌레한테 공포심을 준다는 건 그렇다 치고 큰 대상을 덜 두려워한다는 건 뭘까.
“아. 이거 그건가.”
문득 언젠가 인터넷에서 보았던 사마귀 사진들이 떠올랐다.
으르렁거리는 개 앞에서 덤비라는 듯이 깐죽대거나, 자동차 앞에서 비슷하게 앞발을 올리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아마 그런 것 아닐까.
“그냥 객기잖아.”
그래도 덤빈다는 게 아니라 두려움을 줄여주는 거라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지난 번에 작은 핵을 흡수했을 땐 이런 게 없었던 것 같은데.”
왕급 정도로 큰 핵이어야 생기는 능력일까.
그는 남아있던 것들 중 다른 왕급 핵을 추가로 흡수해보았다.
-스콜피온 마스터의 핵을 흡수하였습니다.
-‘맹독 생성(고유)’ 스킬을 획득하였습니다.
-최대 마나량이 급격히 확장되었습니다.
-기본 마나 회복량이 크게 상승합니다.
‘맞아. 전갈도 하나 있었어.’
이번엔 부가 능력 같은 건 추가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생각지 못했던 고유스킬 하나를 얻었다.
‘마나를 재료로 써서 독을 만들어내는 스킬이구나.’
맹독의 수준은 얼마나 많은 마나를 집어넣었는지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했다.
“상대가 강할수록 더 강한 수준의 독이어야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거고... 이건 화살촉에 부여하면 좋겠네.”
흥미로운 부분은 마나로 형성하는 독이기에, 일정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는 점이었다.
일반적인 독의 경우 사냥감을 못 먹게 만들 수도 있겠지만, 이건 아니었다.
“아마 마지막 핵이... 그래. 기억났다.”
-블랙 퓨마 킹의 핵을 흡수하였습니다.
-은신 관련 능력이 강화됩니다.
-어둠 속에서 시력이 증가합니다.
-최대 마나량이 급격히 확장되었습니다.
-기본 마나 회복량이 크게 상승합니다.
상대적으로 약한 왕이라 알고 있었다.
평소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움직이다 급습하는 식으로 활동한다던가.
그런 자가 왜 동쪽 숲에서 죽은 걸까.
전쟁을 틈타 동쪽 왕을 노리기라도 한 건지.
“와....”
새로 얻은 능력들도 좋긴 하지만, 역시나 당장 눈에 들어오는 건 방금 전보다 훨씬 커진 마나통이었다.
[체내 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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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꽉 채우면 다 쓰지도 못하겠는데.”
돌격 소총의 특수장치를 상시로 켜놓고 지내도 괜찮지 않을까? 전투 때는 막 사방에 난사를 해도 될 것 같고.
“다른 것들은 어떻지?”
좀 더 작은 크기의 핵을 이어서 흡수해보았지만, 역시나 추가되는 능력이나 스킬은 없었다.
“왕 정도 되어야 주는구나.”
마나량 상승폭도 왕의 것들보다는 확실히 못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지름 50센티미터급을 모두 흡수하고 나니, 그럭저럭 최대량 2만을 넘길 수 있었다.
‘더 작은 것들은... 나중에 필요하면 하자.’
당장은 마나가 남아 돌 상황이다.
혹시 나중에라도 급전이 필요하면 팔 수 있을 테니, 그대로 두기로 했다.
〈 48화 〉 048.
048.
“아....”
그런데, 마나통이 커지니까 간도 같이 커진 걸까? 슬그머니 다른 욕심이 고개를 들었다.
‘왕이 가지 말라고 할 정도면, 그만큼 위험하다는 이야기일 텐데.’
돌아다니면 적잖은 것들을 챙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운이 좋다면 왕급은 아니어도 50센티미터 급의 핵은 더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흐음.”
하지만 그런 욕심은 다시금 가라앉았다.
당장이 아니어도, 핵 같은 것들은 어떤 식으로든 기회가 닿으면 얻을 수 있었다.
‘결국 누군가가 먹을 테니까.’
인연이 닿는다면 또 얻을 수 있겠지.
아니면 할 수 없고.
애초에 지금 간다고 해서 무조건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나저나... 왕을 치료해준 게,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이야.’
그는 과거의 구원에 대한 보답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마도 왕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마나가 이렇게 빨리 차면, 일반 인벤토리를 계속 찍어내는 것도 좋겠어.’
마나통을 꽉 채우는 건 멍청한 짓이다.
계속해서 소모하고 회복하다보면 자연적으로 최대량이 늘어나기도 하기에, 어떤 식으로든 소모는 해야 했다.
그러니 적당히 찰 때마다 일반 인벤토리를 만들어내는 것도 좋은 소모 방법이 될 것이다.
‘새 조합식들도 괜찮아보이고.’
‘맹독 생성’이라는 신규 스킬이 생긴 터라, 혹시 기존 스킬과의 조합이 어떨까 이것 저것 연결해보기도 했다.
그 중에서 눈에 띄는 건 네 가지였다.
[신체 강화] + [맹독 생성] = [독 저항력]
[스캐닝] + [맹독 생성] = [독성 분석]
[흡수] + [맹독 생성] = [독성 흡수]
[조합] + [맹독 생성] = [독액 제조]
‘독 저항력’은 말 그대로의 의미인 것 같았다. 위험한 세상이니만큼, 어떻게 보면 필수라고 할 수 있었다.
‘막 나중가면 만독불침 같은 것도 가능할까.’
‘독성 분석’은 여러 방향에 사용할 수 있을 만한 스킬이었다.
그 중 한 가지는 중독된 대상의 상태나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를 분석하는 것.
또 한 가지는 타겟 대상을 중독시키기 위해 어느 정도의 맹독이 필요한지를 계산하는 것.
‘만들어진 독약의 수준을 분석하는 것도 가능하구나. 이것도 쓸만하겠는데.’
‘독성 흡수’ 는 살짝 애매한 스킬이었다.
중독된 대상으로부터, 혹은 만들어진 독을 흡수하는 개념이라는데 그 과정에 최강혁이 중독되는 모양이었다.
‘루팅 같은 게 아니라 흡수라서 그렇구나. 루팅은 따로 조합식이 안 뜨던데.’
굳이 그런 걸 쓸 일이 있을까 싶었지만, ‘독 저항력’과 함께 활용하면 의외로 쓸모가 있을 법도 했다.
‘나한테는 문제 없을 수준의 독이라면, 누군가에게서 빨아내는 정도로 쓸 수는 있겠구나.’
근데 그런 상황을 대비해 칸 하나를 배정해야 한다는 건 좀 아닌 듯 보였다. 고개를 저은 그는 ‘독액 제조’ 스킬을 확인했다.
‘이건 미리 독액을 만드는 거구나.’
다른 재료들과 조합하여,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일반적인 독을 만드는 개념인 모양이었다. 다만 그것 역시 당장은 크게 쓸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음... 독이라.’
좀 비겁한 이미지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효과가 확실하다면 배제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상대가 인간이 아니라 몬스터라면 굳이 비겁하다는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굉장히 이기적인 태도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현실이 그렇다.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그 때였다.
또 약장수가 광고를 보냈나 해서, 시큰둥한 얼굴로 메시지함을 열어본 최강혁이 멍하니 눈만 껌벅였다.
[당신은 무엇을 원하십니까?]
“이건 또 무슨 컨셉이야.”
눌러보니, 약장수의 메시지와는 다른 방식의 내용이 이어졌다.
[당신이 10살 때 원한 것은?]
안에 적힌 내용은 짧았다.
하지만 그 아래로 뭔가 입력하는 칸이 있었다.
‘10살 때라.’
상대의 장단에 맞춰줄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만, 그래도 왠지 옛날 생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평범한 가족.”
대충 꾸며낸 말이 아니었다.
그 시절의 그가 가장 원했던 건, 남들처럼 평범하고 평화로운 가족이었다.
“음? 음성 인식 같은 건가.”
그의 대답이 고스란히 입력된 것을 본 최강혁은 메시지가 저절로 다음 단계로 넘어가자 헛웃음을 흘렸다.
‘뭐하자는 건데.’
[당신이 20살 때 원한 것은?]
내가 20살이 넘었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같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의 인적사항을 열람한 곳에서 보낸 것일 테니, 그런 것들을 활용한 거겠지 싶었다.
‘그나저나, 20살이라....’
많은 것들이 떠올랐다.
군생활도 생각났지만, ‘빠른 전역’ 같은 것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군시절은 나름 즐거웠어. 좋은 사람들이 많았고... 미래에 대한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지.’
그래도 말뚝을 박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웃으며 고개를 흔든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가족.”
평범한 가족이 아니었다.
그저, 가족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맞아. 가족이 있었으면 했었지.’
어머니는 어렸을 적 사라졌고, 아버지는 그의 학창시절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스무살의 그에겐 무슨 일을 하는지 몰라도 매일 새벽에 들어오는 누나와 점점 줄어들어 어느새 원룸이 되어버린 집. 우편함에 쌓여가는 대출 상환 독촉장 정도가 일상이었다.
‘평범하지 않더라도, 그냥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아.’
중얼거리다 다시금 앞을 보니, 어느새 메시지가 다음 단계로 넘어가있었다.
[지금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추상적이었다.
아주 쉽게 답할 수도, 너무나 어려워서 답하지 못할 수도 있는 질문.
최강혁은 메시지창을 그대로 띄워둔 채 한참을 바라보았다.
“가족.”
그리고, 어느 순간 그의 입이 열렸다.
“행복한 가족.”
원하는 것을 물었다.
이루고 싶은 것을 묻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제는 이룰 수 없게 된 것이라도 괜찮지 않을까.
“누나가 행복하면 좋겠어. 그리고 나도.”
나도 행복하고 싶다.
최강혁은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왠지 조금 찌질하게 느껴져서 슬쩍 웃음이 나왔다.
[행복한 가족을 원하시는군요?]
[지금의 가족은 의미가 없는 수준이니까요!]
[그렇다면....]
‘글투가 좀 짜증나네. 뜸도 너무 들이고.’
그런 생각을 할 즈음, 갑자기 메시지 창 속에서 폭죽과 불꽃놀이를 연상케하는 시각 효과가 터져나왔다.
파팡팡-!
[당신의 소원을 이루어드립니다!]
[이세계에서 새로운 인연을!]
[행복한 인생을!]
[현재 무료 상담 이벤트 중입니다!]
“.......”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던 최강혁은 이내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뭘 기대한 거야.’
김이 팍 샜다.
메시지는 지금도 온갖 찬란한 효과와 함께 거듭 ‘이세계’ 와 ‘새로운 인연’, ‘행복한 인생’ 따위의 문구를 강조하고 있었다.
‘아니 근데, 왜 이세계야?’
지금의 가족이 의미가 없는 수준이라는 건 좀 짜증나긴 해도 딱히 부정할 수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렇다고 왜 그걸 ‘이세계’까지 가서 찾아야 하는 거냐고.
가만 보니 지구에선 행복한 가족을 만들 수 없을 거라고 놀리는 것 같아서, 솔직히 조금 화가 났다.
“삭제버튼이....”
최강혁은 여전히 열려있던 메시지를 그대로 지워버렸다. 차라리 약장수의 광고메일이었다면 이렇게 허탈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하던 거나 마무리짓자.’
특수 인벤토리의 마지막 칸을 최대로 업그레이드했다.
이미 그렇게 하면 다음 단계로 올라간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떤 식으로 바뀔지까지는 알지 못했다.
‘무게가 늘어나면 좋겠는데. 이제 10톤도 애매해졌어.’
앞으로도 이번 일 같은 대규모 전쟁이 벌어질 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그래도 만일의 상황에 준비가 되어있는 편이 좋지 않을까.
“음...?”
그렇게 생각하던 최강혁은 이어진 시스템 안내 메시지를 찬찬히 읽어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건 좀 묘하네.”
일단 슬롯 5개는 변함이 없었다.
대신 무게 제한이 20톤 까지 해제되었고, 1톤을 올리려면 일반 인벤토리 500칸 씩을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5백칸은 좀 너무하긴 하지만, 그래도 뭐.’
그보다 눈에 띄는 건 ‘갯수 제한 해제’ 였다.
기존의 최대 업그레이드 상태에서 10개까지 넣을 수 있었는데, 그 조건이 아예 사라졌다.
‘갯수하고 상관 없이 무조건 10톤까지 채울 수 있다는 거잖아. 업그레이드하면 20톤까지고.’
이건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서 고급 인벤토리보다 훨씬 대단하다고 볼 수 있었다.
‘부피가 크고 가벼운 것들은 특수 칸에 쌓고, 상대적으로 작고 무거운 것들은 일반이나 고급 칸에 넣으면 되겠어.’
또한 그동안은 처리가 마땅치 않아서 적당히 처분하던 몬스터의 부산물들도 이제 개수 제한이 사라졌으니 되는 대로 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개체 씩 계산이 되어서, 뼈 같은 건 많이 못 넣었지.’
크기에 비해 가치가 낮아서, 고급 인벤토리에서도 자리만 차지하는 것 같아 배제하던 것들.
하지만 이제 정말 무게가 허락하는 만큼 챙겨도 된다.
“다섯 칸을 다 20톤으로 만들려면... 2만 5천칸이 필요하네.”
갑자기 스케일이 너무 커진 것 아닌가 싶었지만, 그래도 장기적인 목표 하나가 생긴 것 같아서 나름 동기부여가 되었다.
‘일단... 지금 인벤토리 상태부터 정리를 좀 해보자. 고급 칸도 많이 늘었고, 특수칸도 재배치를 해야 할 것 같고.’
하나 하나 꺼내고 다시 루팅하는 식의 일이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각각의 인벤토리를 시야 가득 펼쳐놓은 최강혁은 그것들의 종류와 무게, 접근성을 고려하여 전체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새삼스레 예전 캠프에 있었을 때가 생각났다.
‘밤을 새워서 5칸 만들고 그랬었는데.’
어떻게든 더 많은 마나를 얻으려고, 더 많이 먹고 흡수하려 했던 기억.
잔반 수거를 도맡아 하다가, 일터가 바뀌면서 막막해졌던 기억들이 이어서 떠올랐다.
‘좋은 사람들이 많았어.’
그때를 생각해보면, 상대하기 불편한 이들만 있던 건 아니었다.
잔반 담당자도, 쓰레기장의 사수 김환수와 다른 선배들도, 고윤호나 황수찬도 다들 좋은 사람들이었다.
‘결국 몇 사람이 문제라는 건가.’
그런 좋은 기억들을 가볍게 눌러버릴 정도로 커다랗게 자리잡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에 대한 기억들.
‘배지현도, 양호석도 그리 다르지 않아.’
각자의 욕심에 따라 결정하고 움직이는 이들이었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 누군가를 이용하고 휘두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느낌이었고.
‘캠프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 그렇다고 양호석이 사령관을 하고 있다는 그곳으로 가고 싶지도 않고.’
하지만 정말로 이곳에서 나머지 시간을 모두 채우는 게 좋을까에 대해선 여전히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내 생존을 알렸으니, 앞으로 좀 번거로운 일이 생길 것 같기도 한데 말이지.’
사라 레드우드부터 그랬다.
그녀의 인사는 ‘다음에 다시 만나요’ 였다.
또 온다는 뜻이다.
물론 그녀에게 부탁한 일들도 있으니, 적어도 한 번은 다시 만나야 하는 건 맞지만....
‘딱히 달라보이지도 않던데.’
좀 더 젊고, 매력적인 표정을 갖고 있을 뿐.
그녀의 눈웃음은 마치 남들 모르게 그 몸 안에 지니고 있는 금속들처럼 겉과 속이 다른 듯한 느낌을 주었다.
‘휘둘리지 않겠어.’
그 누구에게도 쉽게 이용당하지 않겠다.
그는 거듭 속으로 다짐했다.
* * *
“이건 또 뭔데?”
다음 날 새벽.
눈을 뜨자 마자 보이는 건 자는 동안 온 건가 싶은 시스템 알림이었다.
새로운 메시지가 있다고 해서 열어본 그의 얼굴이 천천히 구겨졌다.
[‘행복’하고 싶으십니까?]
‘어제 그놈들인가?’
그냥 지우려다가 멈추었다.
보지도 않고 지워버렸는데 알고 보니 다른 거였으면 후회할 일이 될 수도 있으니까.
‘메시지 수신은 따로 대가를 안 주는 건가. 그런 거라도 주면 좀 낫겠는데.’
그렇게 메시지를 열어보니, 그 내용이 예상과 조금 달랐다.
-‘행복’을 원하시나요?
그렇다면 이 제품을 추천합니다.
흡입하자마자 알 수 있는 극락의 ‘행복’!
지금 구매하시면 3회분을 무료로 증정!
“마약이잖아. 미친놈들이....”
그런 것도 거래가 되는 건가.
시스템 쪽은 따로 법이나 경찰 같은 개념이 없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이어서 눈에 띄는 건 ‘행복’이라는 키워드가 도드라지게 강조되어있는 부분이었다.
마치 다른 문구를 대체해서 넣어도 될 법한 느낌인데, 잘 생각해보니 조금 알 것 같았다.
“이런 썅.”
어제 그 메일을 보냈던 놈들이 그가 했던 답변 내용을 유출시킨 게 분명했다. 그것을 토대로 또 다른 광고가 들어온 것이다.
“.......”
그 짐작이 맞다는 것을, 그날에만 다섯 통의 비슷한 광고 메시지를 받아보며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왜 스팸차단 기능도 없어?”
낮게 투덜거린 그는 장비를 다시 점검하며 길을 나섰다. 인벤토리에 있던 물을 대부분 써버려서, 다시금 채울 때가 되었다.
〈 49화 〉 049.
049.
‘어느 쪽이 좋을까.’
그가 평소 물을 떠오는 곳은 많게는 다섯 곳, 적게는 세 곳이었다.
그 중 가장 자주 가는 곳은 숲 안쪽의 호숫가였는데, 오늘은 좀 무리일 것 같았다.
‘제일 가깝긴 하지만, 평소에도 조금 위험한 곳이었으니까. 지금은 정말 살벌하겠지.’
다른 곳들을 떠올려본 그는 결국 숲 바깥으로 3킬로미터쯤 떨어진 개천으로 가기로 했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편이면서도, 겸사겸사 사냥도 노려볼 수 있는 곳이어서였다.
‘숲에 사는 종류보다 작은 편이지만, 그래도 사냥 난이도가 낮으니까.’
또 운이 좋아서 물소나 누우떼의 이동 행렬과 타이밍이 맞으면, 한번에 많은 숫자를 노려볼 수도 있었다.
‘그런 행운이 자주 오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나무 위를 걸었다.
처음엔 자칫 떨어질까 한 걸음 한 걸음을 신중하게 내딛었는데, 지금은 마치 평지를 걷는 듯 아무렇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가 경솔해진 건 아니었다.
나뭇가지 위에서 어딜 밟고 어느 정도 체중을 실어야 할지, 이제는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찍찍!
“어. 좋은 아침. 난 물 뜨러 간다.”
찌익!
“아니. 거기 말고. 저 바깥. 왜?”
이동 중에 만난 다람쥐가 전해준 이야기.
최강혁은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호수가 피로 물들 정도면 아주 대단하겠네. 너도 거긴 가지 마. 위험하잖아.”
찍찍!
“그래. 나중에 보자고.”
숲을 벗어난 그는 지난 번에 제대로 훑지 못했던 게 있었는지,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로 가보기도 했다.
“오호.”
정말로 그가 놓친 것이 몇 가지 있었다.
버려진 소총 한 자루와 빈 탄창 여러 개, 또 반쯤 탄약이 남아있는 철제 박스 따위를 루팅한 그는 인벤토리에 들어온 소총들을 확인했다.
“고장나서 버린 거였구나. 현장에선 그럴 수 있지.”
소총은 강한 타격, 혹은 무언가에 밟힌 듯 파손된 상태였다.
하지만 그가 고치지 못할 정도는 아니어서, 시간이 나면 손을 보기로 했다.
‘마나 보조장치 같은 건 없네.’
그때 그것을 찾아낸 건 정말 운이 좋았던 일 같았다.
일단 스캔은 해두었지만, 비슷한 재료로 동일하게 만들어봐도 그런 효과는 발생하지 않았다.
‘아티팩터가 괜히 있는 게 아니겠지.’
아마도 관련 스킬의 부재 탓일 것이다.
단순히 모양만 흉내내서 똑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면, 기업들이 공장에서 그대로 찍어낼 테니까.
“음.”
마침 돌격소총을 들고 있던 그는 옆에 부착된 해당 장치를 만지작거리다, 그 자리에 조용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무음모드하고... 관통력 강화 정도면 되겠어.’
두 번을 누른 그는 위로 세운 무릎을 활용, 소총을 단단히 고정한 후 조준경에 눈을 가져갔다.
그건 원래부터 있던 부품은 아니었다.
언제인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번처럼 퇴각한 군인들이 두고 갔던 것들 중에서 망가진 소총을 발견해 수습했었다. 그곳에 달려있던 것이다.
렌즈는 깨져있었고, 애초에 지금의 소총과 호환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을 장착이 가능하도록 개조한 후에는 꽤 잘 써먹는 중이었다.
탁. 탁. 탁.
짧게 끊어치는 세 발의 사격.
소리 없이 날아간 총알은 어느 정도 거리를 지나며 갑작스런 파공음을 만들었지만, 뒤늦게 그걸 알게 된 녀석들의 반응이 살짝 늦었다.
“하나 놓쳤네.”
한데 모여 짐승 사체를 뜯어먹고 있던 들개 중 두 마리가 그 자리에 널브러졌다.
나머지 하나는 간신히 피한 듯 보였지만, 이미 멀리 달아나고 있는 터라 굳이 사격을 이어가지는 않았다.
“물을 마시러 가던 중이었나.”
물소의 사체였다.
보통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녀석들인데, 혼자만 덩그러니 죽어있는 걸 보니 해당 무리는 이미 떠났거나, 아니면 무리로부터 낙오된 것 같았다.
최강혁은 반쯤 먹힌 물소 사체와 더불어 그 근처에 쓰러져있던 들개 사체를 모두 남김 없이 루팅했다.
이어서 소총의 마나 장치에 다시금 마나를 채워넣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늦지 않았을 수도 있겠어.’
물가가 가까워지면서, 이런 저런 짐승들의 체취가 바람에 실려 풍겨오고 있었다.
서둘러 물이 보이는 작은 언덕 위로 가보니, 역시나 그의 기대대로 상당한 숫자의 물소떼가 개천 한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
신중해야 했다.
어딜 쏴도 맞을 것 같아 보이지만,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쏴갈기는 건 좋지 못한 선택이다.
놈들은 집단의식 비슷한 걸 갖고 있어서, 포식자에 대한 방어 역시 집단으로 뭉쳐 대응한다.
‘전에는 식겁했었지.’
비슷한 무리를 본 적이 있었다.
당시엔 그가 지금만큼 실력이 좋지 못했고, 현장에 다른 녀석들도 많아 그저 멀리서 구경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 시절 보았던 광경.
무리에서 살짝 떨어져나온 어린 물소를 노린 사냥꾼들이 있었지만, 오히려 다른 물소들의 포위에 갇혀버렸다.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르지만, 물소들이 떠나고 나서야 드러난 것은 완전히 다져진 사냥꾼들의 사체였다.
‘짓눌려서 압사당한 건지, 아니면 밟혀 죽은건지 애매했지만.’
아무튼, 쉽게 볼 상대가 아니다.
저격을 할 거라면 이쪽을 완전히 숨길 수 있는 곳에서 해야 한다.
‘마나 장치의 효과는 최대 30미터까지니까. 그다지 의미 없을 정도의 거리지.’
무음 효과를 기대하고 어설프게 접근하기보다, 차라리 대놓고 장거리 저격을 노리는 게 낫다.
하지만, 지금 사용하는 소총의 특성 상 거리가 멀어지면 명중률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
‘50미터 정도라면 확실할 것 같은데.’
직전에 들개들을 쏘았을 때, 그런 부분을 보완하려고 ‘관통력 강화’ 효과까지 씌운 거였다.
원래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기능은 아니겠지만, 그걸 추가하면 유효 사격 거리를 조금이나마 더 늘릴 수 있었다.
사실 더 먼 거리라고 해도 명중 자체는 가능할 것 같지만, 노린 곳을 정확히 맞출 수 있는지가 중요하니까.
‘이 거리에선 머리를 못 뚫어.’
물소의 두개골은 무척이나 단단하다.
제대로 명중해도 부수기 어려울 정도인데, 거리까지 멀면 더할 것이다.
‘다리를 맞춰서 기동력을 약화시키는 게 먼저 같은데... 아니면 간이나 폐 쪽을 노리는 것도 좋겠고.’
남 좋은 일이 될 수도 있겠지만, 가로채기를 노리는 놈들이 있다면 겸사겸사 같이 처리하면 된다.
‘새끼는 안 건드리는 게 좋아.’
어지간한 짐승들은 새끼를 더 아낀다.
저 물소들도 마찬가지다.
유사시에 뒤에 두고 달아나는 것도 보통 늙어서 오래 달리지 못하는 물소들 위주니까.
‘별 수 없는 현실이지.’
그렇게 타겟을 고른 최강혁은 그 자리에 엎드려 전방을 겨누었다.
거리가 멀다보니, 관통력 강화로 얻을 수 있는 명중률 보정보다 오히려 효과가 사라진 후의 왜곡이 더 커질 것 같았다.
하여 이번에는 무음 모드만 사용하기로 했다.
타악. 타악. 탁.
대신, 이번에는 3점사로 쐈다.
한발만으로는 아무리 잘 맞춰도 큰 피해를 입히기 어려울 듯 보여서였다.
하여 세 마리를 타겟 잡고 각각 발사하니, 곧 물소 무리 쪽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적어도 격발음은 안 나서 다행이야.’
늙은 물소 세 마리가 피를 흘리며 비틀거렸다. 그 중 하나는 곧바로 쓰러졌고, 나머지 둘은 제대로 걷지 못하지만 어떻게든 무리의 안에 남으려 했다.
피냄새를 맡은 포식자들이 어슬렁 어슬렁 물가로 접근하고 있었지만, 역시나 떼로 뭉쳐 대응하는 물소 무리에 쉽게 달려들지는 못했다.
‘어딜 숟가락을 얹으려고.’
최강혁은 잔뜩 으르렁거리며 기회를 살피던 놈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주었다.
근처에서 비슷하게 접근하던 놈들이 화들짝 놀라 거리를 벌리는 게 보였다.
물소들 역시 그런 분위기에 덩달아 흥분한 모습이었다. 한 곳에 뭉쳐 흙먼지를 피우고 있었지만, 어느 샌가 의견이 모아졌는지 물가를 따라 멀어지기 시작했다.
“좋아.”
탄창을 갈아끼운 최강혁은 엎드려있던 자세를 풀고 후다닥 달려갔다.
물소들을 쫓는 놈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이 자리에 남아있는 사체와 부상당한 물소를 노리는 녀석들에게만 가차 없이 구멍을 내주었다.
개중에는 총알 몇 발 정도에 쓰러지지 않을 놈들도 있었지만, 몇 발이 아니라 몇 십발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총알을 너무 낭비한 것 같기도 하고.’
오랜만이라 너무 기분냈나.
주변에 널린 사체들을 수습한 그는 아직 목숨을 잃지 않은, 무리를 따라가지 못하고 절룩이는 물소들도 마저 조치했다.
“좀 더 상류로 가야겠네.”
물가에서 좀 떨어진 곳을 노렸는데, 다친 녀석들이 물로 뛰어든 탓에 강물에 피가 조금 번져있었다.
어차피 루팅한 후에 걸러내면 상관 없지만, 그래도 기분이 좀 그랬다.
해서 좀 더 상류로 올라간 그는 그곳의 맑은 물을 루팅해 인벤토리에 적당히 채워넣었다.
‘또 당분간 넉넉히 쓰겠구나.’
일부러 물만 담는 용도로 따로 배정한 고급 인벤토리 한 칸이 있었다.
별다른 그릇이나 병 없이도, 한 칸을 통째로 그릇삼아 활용하면 물을 담는 것이 가능했다.
“음?”
한 칸으로는 왠지 모자랄 것 같아, 한 칸을 더 담던 그는 자연스럽게 소총을 고쳐 쥐며 고개를 돌렸다.
평소 듣지 못할 소리가 들려서 귀를 기울여보니, 역시나 멀리서 인간들의 차량 소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벌써 재도전을 한다고?”
왜들 그렇게 숲을 노리는 걸까.
혹시, 왕들이 보유하고 있는 핵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걸까?
최강혁은 서둘러 숲으로 복귀하다, 이미 전방 멀리에서 그곳으로 향하고 있는 일단의 차량들을 보았다.
“어라?”
왠지 낯이 익은 차량들이어서 다시 보니, 곳곳에 걸려있는 깃발이 눈에 들어왔다.
“맞네.”
사라 레드우드가 온 모양이었다.
아마도 자신이 부탁했던 것들의 결과를 가져온 것일 테니, 얼른 그리로 달려갔다.
* * *
“필수니까요.”
신기했다.
그가 가까이 가기도 전에, 이미 멀리서부터 그의 접근을 알고 멈춰선 차량들.
그리고 그 한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라 레드우드의 모습에 의아했는데, 그녀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드론이 있어요. 지난 번 사진 기억하시죠?”
“아. 그거군요.”
눈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그곳에 있다고 했다. 작전활동을 할 땐 그렇게 상공에서 주변을 파악하는 것이 필수라고 말이다.
“좋겠네요. 위에서 보면 시야도 넓어지고.”
“그렇죠.”
“많이 비싸겠죠?”
“네.”
“그렇군요.”
“비싼 것도 비싼 거지만, 지속적으로 운용하려면 별도의 팀이 붙어야 해요. 취미용 드론과는 많이 다르거든요.”
“...아.”
평원 한복판.
몰고 왔던 차량들로 일종의 바리케이트를 둘러친 그들은 그 안에 모닥불을 피우고 대기했다.
“익숙해보이네요.”
“현장에서 조금씩 보완하며 만들어진 방식이죠.”
차량을 방벽삼고, 일부는 그 위에 올라가 사방을 경계한다. 그렇게 별다른 엄폐물이나 방어벽이 없는 야외에서도 숙영 비슷한 것을 할 수 있다.
“완벽하진 않아요. 강력한 몬스터를 상대하기엔 어설픈 대응책이죠.”
“그래도 평범한 야생 맹수 같은 것들한테는 괜찮을 것 같은데요.”
“네. 그런 목적이죠.”
고개를 끄덕인 사라 레드우드는 품에서 꺼낸 작은 케이스를 열어, 그 안에 들어있던 usb스틱을 최강혁에게 건네었다.
“부탁하셨던 건 그 안에 다 있어요.”
“전부요?”
“네. 제가 구두로 말씀드리기엔 양이 많아서요. 직접 보시는 게 나을 만한 것들도 있고.”
“.......”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일단 인벤토리에 넣었다.
이어서 모닥불에 끓인 커피를 대접한 사라 레드우드가 다른 이야기를 건네왔다.
“바뀌었다고요?”
“네. 양호석 사령관이 본국의 인맥을 총동원했더군요.”
기존 캠프의 사령관을, 총알이나 테러 따위가 아니라 서류와 증거로써 공격한다.
그리고 유용한 각성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여론을 만들어, 그 소속을 가져온다.
겸사겸사 자신이 구축한 개척캠프를 공인받는 것까지 노리는 한 수. 그것을 위해 정부에 캠프 지분의 30퍼센트 정도까지 넘겼다던가.
“오히려 잘 된 거죠. 정부에 빼앗긴 게 아니라, 정부에서 인정하고 지원해주는 캠프가 되었다고 볼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겠네요. ...기분은 좀 나쁘지만.”
그가 알지 못하는 사이, 그의 소속 캠프가 바뀌어버렸다는 것. 아무리 죄수라고는 하나 유쾌하게 넘어가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배지현 준장의 입지가 다소 축소되었어요. 안 그래도 그쪽 캠프 내부에서 주도권 싸움 중이었는데, 악재가 더해진 거죠.”
“.......”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최강혁씨에게 내려졌던 추방형도 취소되었어요.”
〈 50화 〉 050.
050.
“그렇군요.”
“그쪽에선 일단 한 번 복귀해서 서명을 해야 한다고 주장 중이지만, 그럴 필요 없고요.”
애초에 추방형이라는 형벌 자체가 본국에서 인정하지 않는 방식이다.
알음알음 보고서 형식의 서류를 주고 받긴 하나, 문제가 될 경우 완벽하게 없는 것으로 만들 준비가 되어있다고 들었다.
“그러면, 저를 그쪽으로 데려가려고 오신 건가요?”
“그럴 리가요.”
돈이라도 받았다면 모를까, 그런 의뢰도 없었다고 했다. 아마 양호석 쪽에서 귀환을 위한 수송대를 꾸릴 것 같다고.
“귀환이라. 애초에 그쪽 캠프엔 소속된 적이 없었는데 말이죠.”
“어떻게 하실 건가요?”
“가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글쎄요. 이런 경우는 없었거든요. 이미 각성자로 들어왔다가 죄수가 되는 경우는 있었지만요.”
그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네. 본국이 아니라는 이유로 멋대로 굴다가, 넘으면 안 되는 선까지 넘어버린 거죠.”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살이요.”
“.......”
“선을 아주 많이 넘었거든요.”
“서류상에는 그렇게 적히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몬스터와의 전투 중에 전사했다는 식으로 정리했을 거예요. 보통 그러니까요.”
캠프 합류를 거부한다면, 그에게도 비슷한 처벌이 가해질까?
그녀는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 했지만, 그 말을 믿기엔 이미 짐작대로 흘러가지 않았던 경험이 있었다.
‘추방형 때도 그랬지.’
고윤호는 추방형까진 안 갈 거라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바깥에 있다.
결국 권한을 가진 이가 어떻게 휘두르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고민하는 얼굴의 그를 보며, 사라 레드우드가 조용히 말을 건네왔다.
“제가 드렸던 제안은 아직 유효해요.”
“미국에 선을 대라던 것 말입니까?”
“나쁜 조건은 아닐 거예요.”
“음....”
그쪽도 전혀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지만, 딱히 끌리지가 않았다.
최강혁은 다른 생각을 했다.
“만나지 못하면 될 것 같은데.”
“네?”
“애초에 만나지 못하게 되면... 캠프 합류를 거부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
사라 레드우드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국가의 명령이 떨어졌다 하더라도, 그에게 전달하지 못하면 끝이다. 나중에라도 몰랐다고 하면 되는 거니까.
“쉽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이야기했다.
드론을 운용하는 곳은 자신들만이 아니라고.
“지금까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겠지만, 본격적으로 살펴보기 시작하면 당신이 어디 있는지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니니까요.”
“그렇겠군요.”
고개를 끄덕인 최강혁은 문득 떠오른 것이 있는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왜들 그렇게 저 숲에 욕심을 내는 겁니까?”
처음엔 목재 때문인 줄 알았지만, 그건 아닌 듯 했다. 어쩌면 몬스터를 노리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생각해봐도 손실이 너무 컸다.
왕들이 가진 핵을 노린다기엔, 오히려 너무 적은 수준의 병력과 화력이었고.
“숲이요. 그 자체가 목적이죠.”
“숲 전체를요?”
“굳이 전체가 아니어도, 그곳에 거점을 구축하려는 게 목적일 거예요.”
“왜요?”
“글쎄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혹시 숲 안쪽과 이 바깥쪽이 많이 다르다는 걸 느끼시지 않았나요? 동식물이나 몬스터들도 더 강하고.”
“마나 농도가 짙죠.”
“네. 그거예요. 잘 아시네요.”
사라 레드우드는 그런 지역이 어떤 메리트를 갖고 있는지 이야기해주었다.
“일반적으로는 각성자들에게 도움을 준다고 해요. 단순히 호흡하거나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마나 회복량, 또 신체나 스킬 성장률이 더 빠르다고 하죠.”
“그렇군요.”
“몰랐어요?”
“네.”
“으음. 그와 관련해서, 스킬 성공률 같은 것도 높아진다고 알려져있어요.”
“성공률이요?”
“아티팩트 제작 같은 것들도, 무조건 성공하는 개념이 아니라는 건 알고 계시죠?”
“대충은요.”
“그 쪽에도 도움이 된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일단 영역을 제대로 확보할 수만 있다면... 그곳에 본국과 소통로를 개척해서, 상품화할 수 있죠.”
“아....”
“기업들이 돈을 싸들고 몰려올 거예요.”
숲 전체를 욕심낼 정도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비슷한 목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거구나.’
문제는 그곳에 자리잡은 몬스터들의 역량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는 부분일까. 지금도 그런 분위기가 아주 사라진 건 아닌 모양이고.
‘왕들을 만만히 보면 곤란할 텐데.’
최강혁은 별다른 조언을 건네지 않았다.
애초에 사라 레드우드는 숲 점령과는 관계 없는 사람이었고, 설령 있다고 해도 굳이 그가 그들을 도울 이유는 없었다.
“커피 잘 마셨습니다.”
“정말 생각 없어요?”
“네.”
“언제든 괜찮으니, 염두에 둬요.”
용건을 마친 터라 숲으로 돌아가는 최강혁.
그녀는 금세 사라진 그에게서 몸을 돌렸다.
“현장 정리해. 철수하자고.”
“거대 곰에 대해선 말씀 안 하시더군요.”
이어서 다가온 부하의 말에 고개를 저은 그녀는 차에 올라타 벨트를 두르며 말했다.
“우리가 감시한다는 뉘앙스로 비칠 수도 있잖아. 안 그래도 좋은 소식만 가져온 게 아닌데.”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글쎄. 이젠 모르겠어. 정말로 실시간으로 모니터링을 한다고 해도, 그라면 왠지 아무렇지 않게 빠져나갈 것 같기도 하고.”
고개를 저은 사라 레드우드는 어느새 현장을 정리한 인원들이 모두 차량에 탑승했음을 보고받고 출발을 지시했다.
“오늘은 아니야.”
* * *
usb스틱을 타블렛에 연결했다.
그 안에 들어있는 건 여러 폴더에 들어있는 자료들이었다.
‘생각보다 많은데? 그렇게 빨리 된 건가.’
단순히 문서로 정리된 것들도 있었고, 사진과 영상이 들어있는 폴더도 있었다.
그 중에서 ‘고윤호’라 적힌 폴더로 들어가본 그는 가장 먼저 보인 사진에 웃음을 지었다.
“장사를 하겠다더니.”
작은 가게 하나 열 정도의 돈은 벌어두었다고 들었는데, 정말로 회사들이 모여있는 곳에 작은 테이크아웃 커피샵을 연 모습이었다.
‘다들 잘생겼네.’
직원인지 알바생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같이 키도 크고 훤칠해서 모델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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