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ilado 5
그래도 이곳에서 죽은 물고기들을 지불해 얻은 인벤토리가 70칸 정도는 되지만, 개수만 많을 뿐이지 실제 공간은 그리 대단치 못했다.
‘그래도 몇 장 정도는 될 것 같기도 하고.’
일단 루팅을 해보았다. 계속 집어넣어보니, 어떻게든 꾸역꾸역 들어가긴 했다.
기존에 들어있던 것들도 더욱 더 압축되어서, 제 위치를 정확히 파악해두지 않으면 꺼내는 데 시간이 필요할 듯 보였다.
“그래도 다 집어넣긴 했네.”
인벤토리가 필요하다.
아주 많이.
‘총알이 박힐 정도면, 창으로도 뚫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최강혁은 아직도 근방의 물 속에서 얼쩡대고 있는 놈들을 보았다.
바위먹는자 때문인지, 강물 속으로 번진 피가 거의 사라져 묽어지고 있음에도 접근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총알은 좀 아낄 필요가 있어.’
멀리 달아났던 들개들도 돌아오지 않았다.
“.......”
그는 옆쪽을 돌아보았다.
바위먹는자는 아까와 달리 촉수 다리를 굽혀 그곳에 내려앉거나 하지 않고, 여전히 서있는 상태로 꾸물렁거리고 있었다.
“왜. 돌 달라고? 근데 여긴 돌이 없는데.”
최강혁은 녀석이 싫지 않았다.
그가 총알을 부어가며 사냥한 것들 중 10마리가 사라졌지만, 나름 구해졌다고 볼 수도 있으니까.
“난 저쪽으로 가야 해. 저쪽 보이지? 강물 너머 말이야.”
녀석이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그는 거듭 강조하듯 말했다.
왠지 그런 식으로라도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지 않으면 조금 쓸쓸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그래도 네가 여기 있어서 저 놈들이 접근을 안 하고 있으니까. 나름 기회 같은데 말이야.”
계속 지켜보니 분명했다.
저놈들은 이 녀석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몬스터들이라서 비선공 같은 개념은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아니, 애초에 무슨 평화주의자도 아니고 비선공이 뭐야.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오겠어.”
그렇게 중얼거린 최강혁은 들고 있던 소총을 인벤토리에 넣으려다 멈추었다.
“와, 씨. 어쩐지 아까 잘 들어간다 했다. 이거 넣을 자리까지 다 채운 거네.”
소총을 넣을 공간이 없었다.
어떻게든 집어넣어보려고 하는데, 반 정도 들어가다가 도로 밀려나오길 반복했다. 도저히 공간이 없다는 뜻이었다.
“내가 봐도 참 알뜰하게 채워놨구만.”
어쩔 수 없나.
일단 탄창과 약실의 탄을 제거하고, 그것만이라도 집어넣었다.
‘잠깐 젖는 건 나중에라도 수습할 수 있어. 녹이 슬거나 하기 전에 물기를 제거하면 돼.’
근데, 생각해보니 그건 또 좀 아닌 것 같았다. 차라리 악어물고기의 비늘가죽 몇 장을 제거하면 자리가 생기지 않을까?
‘3마리 분량을 줘야 1칸을 준다고? 야이....’
그래서 시스템을 열어 확인해보니, 역시나 후려치기 당했다. 그래도 3마리 분량을 넘기고 나니 소총이 여유롭게 들어갔다.
“후우.”
그는 자리에서 가볍게 체조를 행한 후, 한 걸음 한 걸음 물로 향했다.
“간다. 건강해라.”
그가 물로 들어가고 있지만, 악어물고기들은 역시나 접근하지 않았다.
하여 어느새 무릎까지 들어가있던 그는 두어 번 숨을 고른 후 본격적으로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대충 20미터 정도 될 것 같은데.’
좀 더 강을 따라 내려가면 가느다란 곳이 나올 것 같긴 하지만, 그곳이 이곳보다 안전할 거라 장담할 수가 없었다.
‘속도를 내자.’
바위먹는자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 거리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었다.
강의 중간 즈음을 지나며, 그는 마나를 소모해 헤엄 속도를 높였다.
‘그래도 수영을 할 줄 알아서 다행이야.’
얼핏 물고기 놈들이 접근하려 하는 모습이 보였지만, 이 정도 속도면 별 문제 없이 건너편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그런데 이상했다.
접근하던 놈들이 다시 우루루 흩어졌다.
의아해하면서도 헤엄을 멈추지 않은 최강혁은 건너편 강둑에 도착하고 나서 얼른 인벤토리를 열었다.
젖은 몸을 털기도 전에 소총을 꺼내 잡은 그는 이어서 탄창을 채우고 사방을 경계했다.
“음?”
그 때 보인 것.
바위먹는자가 강의 중간 즈음에 불쑥 그 거대한 바위대가리를 내민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물에 떠있기라도 한 것처럼 둥실둥실 움직이는 모습이, 원래부터 그곳에 살고 있던 녀석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 강바닥엔 돌이 있을 수도 있지.”
어쩌면 지금 물 속에서 녀석의 촉수들이 바삐 움직이는 중일 수도 있을까.
‘아무튼 잘 됐어.’
녀석 덕에 더 안전하게 강을 건넌 것 같다.
“고맙다.”
최강혁은 맑디 맑은 강물을 빈 페트병 여러 개에 가득 채우고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러고 나서야 몸과 옷 위에 남아있던 물기를 흡수해 제거한 그는, 마치 이쪽을 바라보는 듯한 모습의 바위먹는자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고 돌아섰다.
“달리자.”
운이 좋았다.
운도 실력이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생존과 관련된 상황이라면 그런 말은 형편없는 농담이 되어버린다.
‘솔직히 개뽀록이었지.’
자기객관화가 필요하다.
일단 첫날밤 바위 아래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갔을 때 그 벌레들을 마주쳤다면, 제대로 도망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어둠 속이었고, 다른 몬스터들도 멀지 않은 곳에 있었으니까.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여러 모로 운이 좋았다.
아니, 애초에 각성을 한 것부터가 운이 좋았다고 봐야 할 것 같은데.
‘각성자가 아니었으면, 정말로 하루를 버티지도 못했을 거야. ...운이 아니라, 진짜 실력이 필요해.’
캠프에서부터 꾸준히 체력단련을 해왔다.
하지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들, 특히 빠른 달리기 능력이 그것을 통해서 얻은 건지... 아니면 단순히 각성자의 육체에 마나를 연료로 써서 가능한 건지 명확하지 않았다.
‘헛고생을 한 건 아니겠지?’
지금도 조금 먼 거리를 그렇게 달리고 나면 근육에 경련이 와서, 잠시지만 제대로 걷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런 걸 보면 육체 자체는 그리 강해지지 못한 것 같기도 한데.
‘아니야. 애초에 보통 사람은 그렇게 뛰지도 못하잖아.’
어떤 걸 기준으로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다.
일반인을 기준삼으면 왠지 자만하게 될 것 같은데, 그렇다고 이쪽에 돌아다니는 놈들을 기준으로 하면 밑바닥인 것 같기도 하고.
‘애매하네.’
차라리 밑바닥이라 가정하고 행동하는 게, 첫날처럼 모든 것에 신중하게 생각하는 게 바람직할까.
다소 겁쟁이같긴 하지만. 그래도 덜 위험하지 않을까.
‘잠깐.’
가볍게 달리던 그는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주변에 널려있는 종아리 높이의 잡초들 사이로, 언뜻 다른 것이 보인 것 같았다.
‘총?’
살아 움직이는 종류가 아니었다.
금속 느낌의 검은색.
언뜻 바람결을 따라 움직이던 잡초 이파리 사이로 다시금 보인 그것은 분명 소총으로 보였다.
‘왜 이런 곳에 총이....’
그는 주변을 훑어보았다.
혹시 모를 몬스터들이 있는지 잔뜩 긴장되었지만, 당장 눈에 띄는 것도 공기에 섞인 이질적인 냄새도 없었다.
“.......”
조심스럽게 소총이 떨어져있는 곳으로 가보던 그는 곧 얼굴을 구겼다. 그쪽엔 단순히 총만 떨어져있던 게 아니었다.
‘이런 경우도 있다고 했었지.’
해당 소총은 여전히 그것을 움켜쥔 주인의 팔과 함께 있었다. 그 팔의 주인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이곳엔 보이지 않았다.
‘미안합니다.’
이름 모를 이에게 속으로 사과를 전한 최강혁은 반쯤은 썩고 반쯤은 말라붙은 팔뚝을 발로 밟고 그 손아귀에서 흙먼지 묻은 소총을 떼어냈다.
인벤토리에 넣어서 이물질들을 제거하고 나니, 전체적인 형태가 제대로 나타났다.
아마도 비가 오면서 그렇게 된 듯 흙덩어리가 붙어있던 곳도 말끔히 제거되어서, 스캔 결과대로라면 당장 사용해도 큰 문제는 없을 듯 했다.
‘지금 소총하고 다른 회사 제품인가보네.’
스펙은 대동소이했다.
다만 총열이 더 짧아서인지 유효 사격 거리가 그만큼 덜 나오는 것 같았다. 돌격 소총이라고 봐야 할까.
‘연사력은 더 강하네. 같은 총알을 쓰는 것도 다행이고.’
더욱 눈에 띄는 건 소총 옆에 자리한 특이한 장치였다. 착탈식이라서 벗겨낼 수도 있었는데, 그 생김새는 얼핏 군대 사격장에서 사용하던 탄피받이를 연상케 했다.
‘이런 게 된다고?’
스캔 데이터는 해당 장치를 어떻게 사용하는 건지 알려주었다. 실제로 그 장치 옆에 달린 버튼 쪽에 각각 어떤 버튼인지도 새겨져있었다.
‘말도 안 되지.’
오히려 그래서 더 믿기 어려웠다.
‘무음 모드에, 이건 파괴력 강화, 이건 관통력 강화... 레이저 스타일 조준 기능도 있네.’
마나를 충전해서 사용하는 방식이라고 했다.
지금은 방전 상태여서 테스트가 불가능했지만, 고장은 아닌 것 같았다.
‘이것도 아티팩트인가 하는 종류인가?’
특수한 제작 스킬을 가진 각성자들이 만들 수 있다는 제품들.
그의 피를 묻혀 생사를 확인할 수 있다던 장치를 떠올린 최강혁은 이것도 비슷한 도구 아닐까 싶었다.
‘그래도 기능이 너무 황당하잖아.’
마나를 활용해서 여러 효과를 내는 걸까?
좀 더 살펴보니, 모든 효과는 30미터 거리 안에서만 유효하다고 첨언이 되어있었다.
‘20미터까지는 확실하고, 거기서부터 30미터까지는 효과가 점점 반감되는구나. 30미터를 벗어나면 기본 총의 효과만 남는 거고.’
일회성으로, 한시적 효과만 발휘된다고 하니까 그나마 조금 현실적으로 보였다.
‘써보고 싶은데. 마나는 어떻게 넣는 거지?’
혹시나 했는데, 어렵지 않았다.
그가 가진 체내 마나를 그쪽에 넣어보려 하자, 문제 없이 수행되었다.
‘마나 잔량 게이지가 따로 있구나.’
게이지는 999까지 표시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마나와 정확히 일치하는 단위는 아닌지, 그가 체내 마나 50을 떼어 넣었음에도 충전량은 20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오차가 있는 건가? ...손실 같기도 하고.’
이어서 다시금 50을 더 넣었더니, 이번엔 30정도가 찼다. 아마 집어넣는 과정에서 일부가 새어나가는 모양이었다.
‘지금 소총에는 결합이 안 되네. 이쪽 총 전용인가보다.’
지금 소총이 사거리가 더 길긴 하지만, 어차피 멀리에 있는 놈을 쏠 상황은 딱히 없었다.
지금은 돌격 소총이 더 나을 것 같아서, 그는 들고 있던 총에서 탄창을 빼고 인벤토리에 있던 총을 꺼내어 결합했다.
‘다행히 녹슨 곳은 없어.’
하지만 오늘 밤 안전한 곳을 찾으면 제대로 분해해 닦고 기름칠을 해줄 생각이었다.
인벤토리에서도 할 수 있는 조치이긴 하지만, 그래도 직접 눈으로 보면서 하는 게 마음이 놓이니까.
철컥, 철컥.
그동안 몸과 손에 익었던 소총보다는 확실히 가벼운 편이었지만, 그 옆에 특수 장치를 결합하니 무게 균형이 살짝 바뀌어 조금 이상한 느낌이 되었다.
‘어쩔 수 없겠지. 익숙해지는 수 밖에.’
해당 장치의 사용법은 이미 배웠다.
일단 전원을 켜면 실시간으로 소량의 마나가 지속적으로 소모된다.
특정한 기능의 버튼을 누르면 해당 효과가 총, 혹은 장전된 총알에 부여되면서 그만큼의 마나가 더 줄어든다.
‘무음모드는 시간 단위로 닳는구나.’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3초에 1정도의 마나가 줄어들고 있었다. 파괴력 강화와 관통력 강화는 각각 5정도 줄어들었다.
‘한 발에 여러 효과를 중첩해서 입힐 수도 있나보네. 근데 마나 소모가 너무 크잖아.’
이미 부여했던 효과를 다시 회수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복구되는 마나량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건지는 게 어디야.’
일단 전원을 끈 그는 그 사이에 40 안쪽으로 줄어든 마나 배터리 잔량을 보았다.
‘전원을 켜기만 해도 10초에 1정도씩 계속 줄어든다고 했지. 끄고 나면 거의 소모되지 않는다고 하니까 꺼야겠어.’
켜는 데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니 그게 좋을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총을 쏘아야 할 상황이 온다면 버벅댈 수도 있지만, 애초에 아직 각각의 기능 버튼들이 손에 익지 않은 터라 그것부터 연습해야 했다.
‘그나저나....’
아마도 비가 오면서 주변이 청소되었던 것 같지만, 그래도 전투의 흔적들이 아주 지워진 것은 아니었다.
아직은 어색한 돌격소총을 고쳐쥔 그는 바닥에 새겨져있던 흔적들을 따라 잠시 이동을 이어갔다.
〈 35화 〉 035.
035.
‘역시.’
최강혁은 잠시 후 더 많은, 누군가의 신체 일부를 보게 되었다.
아마도 몬스터들이 뜯어먹어서, 혹은 전투 과정에서 찢어발겨진 탓에 여기 저기 흩어진 게 아닐까 싶었다.
‘전투부대 치고는 방어복이 허술해. 거의 평상복 수준이잖아.’
그가 있던 캠프의 전투부대는 기본적으로 금속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흉갑 비슷한 것들을 입었고, 팔다리에도 비슷한 보호대를 착용했다.
엑소 스켈레톤 류의 강화 외골격 까지는 아니지만, 그와 엇비슷한 장치도 종종 본 적이 있었다.
‘소대에 한 두 명 정도는 있다고 했었지. 중화기는 무거우니까.’
일반 전투병이라고 해도 갑옷 느낌의 복장은 얼추 통일이 되어있었다. 그게 있어야 그나마 자잘한 공격을 버틸 수 있다던가.
지금 그가 걸치고 있는, 전투화 가죽으로 비슷하게 구현한 것도 그것의 원형을 따른 것이었다.
‘하고 싶은 건 많은데 말이지.’
트럭에서 얻은 강철로 방어복을 만드는 것.
기존 소총의 스캔 데이터를 토대로 일부 개조해보는 것.
그동안 염두에 두고 있던 건 그 두가지였는데, 예기치 않게 새로운 소총을 얻게 되어서 기존 소총의 개조는 좀 미루어도 될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이런 총을 들고 다니는데도 털려버릴 정도면 뭐에 당한 거지?’
끔찍한 상태의 시체들을 보고도 구역질을 하지 않는 건 이미 몬스터들의 사냥과 식사, 그 결과물들을 적잖게 보아왔기 때문일까.
물론 그 대상이 인간이라고 해도, 느껴지는 감정이 크게 다르진 않은 것 같았다.
‘아.’
그러던 그는 보폭을 조금 더 좁히며 속도를 줄였다. 기껏해야 팔이나 다리, 그것도 온전치 않은 상태였던 흔적이 비로소 달라졌다.
‘비슷한... 아니지. 같은 시기였겠군.’
말라붙어 거의 해골 상태가 된 누군가의 머리.
양쪽 안구는 새가 쪼아먹기라도 했는지 보이지 않았고, 머리 아래에는 다 뜯어먹혀 뼈만 남은 상체가 보였다.
‘팔이 없네.’
그가 처음 발견했던 팔이 이 사람의 것일 수도 있을까.
하지만 상체에 남아있는 찢겨진 옷을 대충 보니, 소총을 쥐고 있던 팔에서 보았던 것과 맞지 않았다.
‘규모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셋 이상은 죽은 것 같은데. 많으면 다섯 이상.’
낙오병일까.
아니면 정찰 실패일까.
애초에 복장 상태가 허술한 건 왜인지.
“.......”
많은 궁금증을 품고 그 주변을 수색한 최강혁은 반경 50미터 범위에서 역시나 다섯 구 이상의 시체를 더 찾아냈다.
그 어느 하나 성한 상태가 없었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들의 종류도 하나가 아닌 듯 했다.
아마 일차적으로 포식을 하고 지나간 놈들이 있고, 이후에 다른 것들이 와서 남은 부분을 청소했던 것으로 짐작되었다.
‘여기서 불을 피운 흔적이 있고... 야영을 한 건가?’
텐트 같은 건 없었지만, 땅을 편평하게 고른 듯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살짝 파낸 땅에 주변 풀을 베어 깐 것 같은데, 아마도 잠자리를 만든 게 아닐까 싶었다.
‘미친 거지. 이렇게 사방이 탁 트인 곳에서 잠을 자다니.’
게다가 모닥불이라니.
여기 인간이 있다고 널리 알리는 짓이다.
‘성별은... 한 명은 여자였고, 나머지는 남자인 것 같아. 아마도 저쪽에서부터 도보로 이동해온 것 같은데, 자국이 다 지워져서 정확히는 모르겠네.’
그가 가려던 방향과는 달라서, 굳이 그쪽으로 가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쩌면 죄수 호송 중이었을 수도 있겠고.’
총을 가진 이는 한 명 뿐이었던 것 같다.
게다가 시체들의 복장이 전부 허술하다 못해 헐벗은 수준이었다.
어쩌면 호송 중에 탈출한 죄수들일 수도 있겠다는 짐작이 섰지만, 그 역시 확실하지는 않았다.
‘모르겠다.’
어딘가에서 도망을 쳐온 건지, 아니면 일부 병력이 정찰을 나온 건지는 몰라도 무척 경솔했다는 것 하나만큼은 확실해보였다.
‘반면교사로 삼아야지.’
이제는 정말 어딘가에서 잠깐이라도 눈을 붙여야 하지 않나 생각하고 있었지만, 다시금 정신을 차리기로 했다.
적어도 ‘여기서 자다 죽으면 그건 진짜 어쩔 수 없는거다’ 할 정도의 장소를 찾기 전까진 버텨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사람을 꽤 자주 보네. 지난 번에도 그렇고.’
그다지 반가운 장면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쪽 지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오지에서는 오히려 인간이 더 위험하다고는 하던데. 몬스터나 인간이나 마찬가지로 취급하는 게 나으려나.’
속으로 생각하며 이동하던 그는 문득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동작으로 소총을 견착, 더듬거리며 마나 장치의 전원을 올렸다.
‘무음 기능이... 여기군.’
들릴 듯 말 듯 딸깍 하는 버튼음이 들렸다.
어느새 한쪽 무릎을 꿇은 최강혁은 총구를 전방으로 겨누었다.
굳이 마나 장치의 ‘레이저 스타일 조준’ 기능을 활성화하지 않아도, 육안으로 조준해도 무방할 만큼 대상과의 거리가 멀지 않았다.
‘이런 데서 볼 줄은 몰랐네.’
빅버드.
성질나면 무섭다던 거대 괴조가 그곳에 서서 부리로 날개 깃털을 고르는 중이었다.
‘한 마리 뿐이야.’
놈은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무리를 지어 다니지 않는 편이라 했다.
둥지 근처에선 이야기가 달라진다고는 하는데, 다행히 이곳은 둥지가 아닌 듯 했다.
탁.
날개 안쪽을 오가던 놈의 머리가 잠깐 나왔을 때, 최강혁은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기면서도 조금 의아해 했다.
‘불발인가?’
하지만 곧바로 눈에 보인 광경에, 확실히 발사가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빅버드의 머리 한쪽이 퍽, 하고 터지며 놈의 몸뚱이가 풀썩 쓰러진 것이다.
‘진짜 무음이잖아.’
이 정도면 들어가는 마나를 감안하고도 굉장한 효과였다. 총 활용에 있어서 가장 큰 단점이라고 할 수 있는 소음을 아예 없앨 수 있다니.
‘가보자.’
그는 약간의 마나를 더 채워넣은 후, 반쯤 쪼그려앉은 모양새로 빅버드를 향해 접근했다.
‘역시, 즉사는 아니구나.’
머리 한쪽이 터지긴 했지만, 아주 죽지는 않았다. 그래도 회복하기엔 큰 부상인지, 바닥에서 버둥거리는 꼴이 조금 애처로울 정도였다.
푸욱!
인벤토리에서 꺼낸 알루미늄합금 창이 비로소 적절한 상대를 만났다.
이미 부서진 놈의 머리 쪽을 그대로 노려 힘껏 찌르니, 별다른 저항 없이 깊이 틀어박혀 뇌를 헤집었다.
날개를 크게 펼치고 두어번 퍼덕대던 놈은 곧 사지를 늘어뜨리며 동작을 멈추었다.
‘이거, 고기가 나름 맛있다고 들었는데... 넣을 곳이 없잖아.’
기존에 있던 고기를 빼고 이걸 넣어야 할까.
하지만 이놈은 깃털빼고 뼈 빼고 하다 보면 고기는 얼마 안 나온다고 하던데.
‘에이. 바꾸자.’
고민이 길면 안 된다.
이대로 버리고 가기도, 그렇다고 이걸 인벤토리로 바꾸기도 아깝다.
최강혁은 특수칸 4번에 있던 남은 고기와 뼈를 모두 인벤토리로 바꾼 후, 그 빈 곳에 지금 녀석을 집어넣었다.
‘피냄새가 번지기 전에 빠지자.’
근처엔 녀석이 싸지른 것으로 보이는 배설물도 있으니, 그 냄새를 맡고 추적하는 놈들도 있을 법 했다.
아무리 위협적인 녀석이라고 해도, 놈을 사냥할 수 있는 놈들은 분명 있을 테니까.
‘이제야 진짜 사냥에 성공한 기분이네.’
강변에서 악어물고기를 죽였을 때보다 지금의 성취감이 더 컸다.
상대가 알아채지 못한 상태에서 머리를 노려 명중시켰다는 것이, 온전히 자신의 실력으로 인한 것 같아서.
‘그래도 총이 있어서 가능한 거였지만.’
무척 좋은 총이다.
이런 걸 들고도 죽은 사람은 얼마나 억울할까.
‘탄창이 비어있었지. 아마 총알이 다 떨어졌을 거야. 나도 조심해야 하는데.’
탄피는 최대한 챙기고 있지만, 그 안쪽을 채울 재료를 구할 수가 없다.
탄두야 대충 비슷한 재료로 만들면 되겠지만, 화약이 문제였다.
‘나무다.’
갈대를 닮은 풀숲을 어느 정도 벗어나자, 슬슬 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멀리 숲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단지 숲일 뿐, 나무 하나 하나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제는 그게 보였다.
‘흥분하지 말자. 끝난 게 아니야.’
이미 짐작하고 있다.
숲에는 그곳을 터전으로 삼은 온갖 것들이 있을 것이다. 안전을 위해 그곳으로 가고 있지만, 오히려 이곳보다 위험할 수도 있다.
‘근데, 여기서 저정도면....’
나무의 크기가 상당해보였다.
멀리서 실개천처럼 보였던 것이 알고 보니 강줄기였던 것처럼, 지금 저정도로 보이는 나무라면 가까이 갔을 때 얼마나 커질까.
‘일단 가보자.’
최강혁은 전원을 꺼둔 소총의 마나장치임에도 계속 버튼 누르는 것을 연습하며 이동을 이어갔다.
식사는 인벤토리에 있는 것을 루팅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닳아버린 전투화 밑가죽을 손볼 때를 제외하곤 이동을 멈추지 않았다.
총은 두 번 더 쏘았다.
쉭쉭거리며 후방에서 접근하고 있던 뱀 하나를 죽였고, 놈의 사체를 빼앗으려던 설치류 계열의 몬스터 하나를 더 죽였다.
전투 횟수는 두 번이었지만, 소모된 탄약이 두 발인 건 아니었다.
‘이거 안 좋은데.’
좋은 총이라서, 또 그만큼 성과가 있다보니 이제는 도망치지 않고 방아쇠를 당기는 게 당연한 듯 여겨지고 있었다.
‘이러면 안 돼.’
물론 그 성과로 얻은 것들이 있지만, 그만큼 탄약이 줄어들고 있는 건 좋지 않았다.
‘70발이 조금 넘게 남은 건가.’
애매한 숫자.
고개를 저은 그는 총을 집어넣고 창을 들까 생각했지만, 그건 또 너무 위험할 것 같았다.
‘활이라도 만들어볼까? 강하진 않겠지만.’
캠프에 있을 때 스캔해두었던 병사들의 개인 무기가 몇 종류 있었다.
그 중에는 컴파운드 보우 같은 것들도 있었는데, 강철이나 알루미늄 합금이 있으니 그럭저럭 비슷하게 구현이 가능할 것 같았다.
‘화살은 카본으로 만들어야 한다던데... 그건 없으니 별 수 없고.’
약하거나, 아니면 어딘가 금이 가는 등 문제 있는 화살의 경우엔 쏘는 과정에 부서져서 그 파편이 손에 박히는 사고도 생긴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건 팔과 손에 보호구를 차는 것으로 어느 정도 대비할 수 있다.
‘몬스터한테는 소용 없다고 했었지만.’
컴파운드 보우를 소유하고 있던 병사는 ‘짐승 사냥용’이라고 했었다. 몬스터들에게는 먹히지 않으니, 갖고 나가지 않게 되어서 취미가 되어버렸다고.
‘현장에선 총이 최고라고 했었지만... 어쩔 수 없잖아. 뭐라도 해봐야지.’
몬스터에게 먹히지 않는다면, 아예 장력을 더 키워서 먹히도록 만들면 어떨까. 강철로 와이어를 만들어서 시위를 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래도 시위를 당길 수는 있어야겠지만, 마나를 쓰면 어느 정도는 될 거야.’
안전한 장소를 발견하면, 그동안 미루고 있던 것들을 하나 하나 확인하고 시도해볼 생각이었다.
살짝 아래로 내려가있던 돌격소총을 고쳐든 최강혁은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에 애써 힘을 주었다.
* * *
“오늘부로 열흘이 넘었군.”
“그렇습니다.”
“공식적으로 기록을 남기도록 해.”
“와일더 합류 가능성이 높다고 말씀이십니까?”
“그래. 본국에 보내야 하니까 정식 서류를 만들어 제출하고.”
“알겠습니다.”
모처럼 기분 좋은 아침이다.
부하에게 간단한 지시사항을 내린 배지현 준장은 이제 의미 없으니 최강혁의 생존 확인 기기를 초기화시키라고 덧붙였다.
기존에도 와일더에 합류할 가능성이 높은 이들의 경우 생존 확인을 중단하고 본국에 보고했었으니, 특별할 것 없는 조치였다.
“초기화 전에 영상 증거 남기도록 하고. 오늘임을 확실히 알 수 있게.”
“알겠습니다. 충성!”
“충성.”
이곳 캠프의 사람들은 어딘가 이상한 측면이 있다. 본국에서 왔고, 그곳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곳의 영향력을 무시하고 싶어 한다.
일종의 치외법권 같은 식으로 생각하는 경향도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이전까지 이곳에 있었던 부사령관의 영향도 있는 것 같지만....
‘지금쯤 파악하고도 남았겠지.’
그녀는 부사령관의 표정이 기대되었다.
죄수를 비호하던 이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선을 넘으면 곤란해.’
한낱 살인범일 뿐이다.
‘성실한 청년’이라고?
‘선처를 해달라’라고?
웃기지도 않은 탄원서를 받기도 했다.
‘이제 좀 바뀌겠지.’
많은 것들이 정상궤도로 돌아올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자신을 보낸 것이니.
그녀는 반쯤 남아있던 커피를 단숨에 마시고 빈 잔을 내려놓았다.
〈 36화 〉 036.
036.
“흔적도 없었단 말인가?”
양호석.
한때는 대형기지의 부사령관 직위에 있던 남자.
곧 자신의 자리가 될 테니, 일찌감치 사령관 호칭을 사용하던 그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커다란 집무실의 소파가 아니라 흙먼지 자욱한 야전 막사의 접이식 의자에 앉아 보고를 받고 있었다.
“예.”
대답은 짧았다.
고개를 저으며 답한 남자는 옆쪽에 서있던 제 동료들을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좋지 않군.”
“뒤통수를 맞은 거 아니오?”
누군가가 그렇게 물었다.
뒤쪽의 나무상자에 반쯤 걸터앉아, 뭔가를 질겅질겅 씹고 있는 풍성한 수염의 남자였다.
부사령관에게 보일 만한 태도는 아니었지만, 아무도 그런 부분을 지적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곳은 그들이 있던 기지가 아니었다.
물론 이곳에서만큼은 양호석이 온전히 사령관이라는 칭호를 받고 있긴 하지만, 캠프의 규모와 성격이 많이 달랐다.
“사라 레드우드 쪽에서 통화를 청하고 있습니다.”
그 때, 막사에 들어선 병사 하나가 양호석에게 목례한 후 이야기했다.
병사가 들고 온 것은 과거 군부에서 쓰였던 것과 비슷한 크기의, 등에 메고 다녀야 할 것 같은 통신장치였다.
“양호석이오.”
그렇게 수화기를 든 사령관의 뺨이 씰룩거렸다.
“역시, 그런 건가.”
상대 쪽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한참을 듣고 있던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답했다.
“정보 고맙군. 나중에 봅시다.”
수화기를 내려놓자, 통신병이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목례를 한 뒤 물러났다.
“자네 의견이 맞았군. 그 여자가 뒤통수를 친 모양이야.”
“거 보쇼. 관상은 과학이라니까.”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수염 남자에 이어, 옆쪽에 짝다리로 서있던 선글라스의 여성이 물었다.
그녀는 양쪽 소매를 찢어버린 전투복을 걸치고 있었는데, 드러난 팔뚝에는 온갖 문신들로 빈 자리가 없었다.
“최강혁에 대한 추방형에 합의했고, 미리 장소를 정해두었었지.”
“그건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고요.”
“뻔하잖아. 그쪽에서 장소를 바꾼 거지.”
“뭐야. 그런 거야? 거 썅년이네!”
“아 좀 닥쳐봐! ...이야기하십쇼.”
제멋대로 떠들던 이들을 조용히 만든 문신 여자가 사령관을 향하니, 잠시 침묵하던 그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 이야기가 맞아. 그 여자가 멋대로 추방형 집행 장소를 바꿨고... 사라 레드우드 쪽에서 그쪽을 확인해봤는데 아무 것도 없다더군.”
“죽은 걸까요?”
“각성자라며?”
“각성자가 별거냐. 여기서 죽은 놈들 한 둘 본 것도 아닌데.”
“애초에 전투계열도 아니었다고 들었어. 벌써 열흘이 넘었으니, 죽었다고 봐야지.”
“죽은 게 확실하답니까? 그쪽 캠프에 생존 확인 장치가 있을 텐데요.”
다들 한 마디씩 할 때, 마지막 질문을 던진 인물은 역시나 문신 여성이었다.
사령관은 별다른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열흘이 지났으니, 알지 않나. 어떤 수순으로 진행되는지.”
“와일더 합류 혐의군요.”
“그게 아니어도, 그렇게 보고되겠지.”
“그러면 일단 열흘은 버틴 거 아닙니까? 혼자서 그 정도 버텼으면 뭔가 한 수 있는 거라고 봐도....”
그렇게 이야기하던 남자는 스스로도 뭔가 말이 안 된다는 듯이 뒷말을 흐리며 옆 땅에 침을 뱉었다.
“생존 모니터링은 당연히 종료시켰겠군요.”
“그렇겠지. 유지하는 데도 돈이 들어가니까.”
사령관이 고개를 끄덕이자 한 구석에 앉아있던, 커다란 복고풍 조종사 고글을 이마에 올려 쓴 여성이 슬쩍 입을 열었다.
“혹시... 정말로 와일더 쪽에서 데려간 건 아닐까요?”
“놈들 활동 영역이 아니잖아.”
“종종 넘어올 때도 있어.”
“최근엔 아니었지.”
“가능성이 0은 아니지 않아?”
“놈들이 굳이 그쪽으로 갈 일이 없다니까? 누가 그쪽에 정보를 흘린 게 아니라면 말이야.”
“우리 중에 쥐새끼가 있다는 거야?”
“그렇게 말하진 않았어.”
“그 말이 그 말이잖아!”
“자, 자! 다들 흥분 가라앉히고, 우리가 할 일부터 하자고. 갈 길이 멀어.”
다들 언성이 높아지려 했다.
적절한 타이밍에 박수를 치며 이목을 집중시킨 사령관이 말하자, 제멋대로 서거나 앉아있던 이들이 어슬렁 어슬렁 일어나 각자의 위치로 향했다.
막사 바깥.
그곳은 높은 장벽 대신 흙과 모래주머니 방벽이 자리한 작은 거점이었다.
“그래도 그 각성자... 이름이 뭐랬지?”
“최강혁.”
“그래. 그, 아무튼 덕분에 무기 수급 문제를 덜었는데 말이야. 재생 전투화도 좋았는데. 여러 모로 아깝게 됐어.”
“어쩔 수 없지. 레드 캠프 쪽에서 구해보는 수 밖에.”
“거긴 너무 깐깐하게 굴어서 짜증나니까.”
“별 수 있나.”
막사를 나온 이들 중 서너 명의 사내들이 그런 대화를 하기도 했다. 사령관의 계획대로 되었다면 그들의 개척캠프에 큰 도움이 되었을 거라고.
“잘만 되었다면 머잖아 그쪽 캠프처럼 될 수 있었을 텐데.”
“다 끝난 것처럼 굴지 마. 우리도 할 수 있어. 일단 자리만 잡고 나면 기업들이 끼어들 테고.”
“흐음.”
“본국과 연결할 수 있는 간이 설비도 곧 올 거라고 들었잖아.”
“부품 단위로 빼돌리느라 좆빠졌다던가.”
“아. 나도 그건 들었지.”
“수송대가 문제 없이 도착해야 할 텐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총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들은 놀라거나 하지 않았다.
이곳은 아직 제대로 안전을 확보하지 못한 개척지역이었고, 기존까지 터를 잡고 살다 갑자기 밀려난 녀석들은 지금도 계속해서 자신들의 땅을 되찾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서쪽 벙커에 소총탄 보충해줘!”
문득 통신병이 소리쳤다.
어슬렁 어슬렁 걷던 이들이 얼른 탄약 창고로 달려갔다.
원칙대로라면 굳이 그들까지 나서지 않아도 될 일이지만, 개척 기지의 특성상 이곳에선 병과나 근무지를 그렇게 철저하게 따지지 않는 편이었다.
누군가 요령을 피운다면 그만큼 모두에게 부담이 될 것이다. 그러니 모두가 나서고, 모두가 돕는다.
“탄 받아갈게.”
“어느쪽?”
“어디랬지?”
“서쪽 벙커라던데.”
“그렇대.”
탄약고를 지키던 병사들이 군용 타블렛에 반출 수량과 장소를 입력하고 내어주자, 그것을 받아든 이들이 다시금 달리기 시작했다.
“며칠 안에 보충해야겠는데? 넉넉하게 잡아도 보름은 안 갈 것 같아.”
“일단 오늘 들어오는 것들까지 가공해서 물량 맞추겠죠. 어느 쪽으로 넘길 지는 봐야겠지만.”
“수송대 꾸리면 따라갈 거야?”
“글쎄요. 딱히 가봤자 할 일도 없는데.”
“레드 캠프 쪽이면 회포 좀 풀 수도 있잖아.”
“애들도 아니고, 이제 피곤해요.”
“벌써부터 그러면 어쩌냐.”
탄약고의 군인들은 30대에서 40대가 많아보였다. 군인보다는 기술자에 가까운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다들 전투복을 입은 모습이었다.
“여기, 수량 안 맞는 것 같은데?”
“아. 그거, 저쪽 타블렛이 클라우드 공유가 자주 끊기더라고요. 연결 되면 정리할게요.”
“내부 통신망 정도는 안정을 시켜야 하는데.”
“그래도 이정도나마 되는 게 어디예요. 통신부 사람들도 고생 많아보이던데.”
“뭐. 다들 그렇지.”
그렇게 모두 움직이고 있었다.
그 중에는 최강혁이 알아볼 만한 이들도 몇몇 섞여있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와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 * *
“다 왔다.”
최강혁은 눈 앞에 자리한 숲을 보았다.
마치 들어오지 말라는 경고처럼, 그의 앞엔 종류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뼈들이 있었다.
마치 무언가가 사냥한 것들의 살점을 발라먹고, 나머지는 그곳에 버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개꿀인데?”
하지만 두려움보다는 반가움이 더 컸다.
그는 얼른 그것들을 루팅해 인벤토리로 바꾸었다. 워낙 양이 많아서인지, 뭉텅이로 넘겨 총 2백칸 가량을 확보했다.
‘그런데....’
멀리서 보았을 때도 어느 정도 짐작했지만, 가까이 와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한 그루 한 그루가 어디 전설에나 나올 법한 느낌의 거목들 아닌가.
‘둘레가 대충... 이거 감도 안 올 정도네.’
어지간히 물러나지 않으면 한 눈에 보이지도 않으니, 길이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나마 가까이 있는 나무를 스캔해보고 나서야 그 크기를 정확히 알게 되었다.
‘밑둥 근처 지름이 10미터가 조금 안 되는구나. 저쪽 나무들은 더 굵은 것 같고.’
지름 10미터에 높이 또한 수십 미터에 이른다. 지구에도 이런 나무가 있을까? 어디 아마존 깊은 곳에 가면 있을 지도 모르겠다.
‘흡수가... 안 되는구나.’
죽은 나무가 아니니 안 되는 게 당연할까.
가까운 나무에 손을 대고 흡수를 시도해보던 그는 적잖은 반발력과 함께 그의 손이 저절로 떨어지는 걸 느꼈다.
마치 내 몸에 손대지 말라는 듯한 느낌.
‘미안하지만, 나도 지금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이라서 말이지.’
더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가보면 혹시 말라 죽은 나무가 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중간 어디쯤 안쪽으로 파인 곳이 있는 나무도 있을 수 있고.
하지만 더 이상 수면을 배제하면 몸이 말썽을 일으킬 것 같았다.
나무 밑둥을 살펴본 최강혁은 그 뿌리 안쪽을 파고 들어갈까 생각했지만, 땅 속은 역시 찜찜했다.
하여 그곳에 등을 기대어 후방을 방어한 그는 인벤토리 안에 있던 천과 가죽을 적당히 찢어 섞어 로프를 만들었다.
‘이거, 직접 해본 적은 없는데.’
강철을 일부 떼어내 만든 갈고리에 로프를 단단히 연결한 그는 조금 어색한 동작으로 그것을 빙빙 돌리다 위로 던졌다.
“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위쪽 가지에 제법 단단하게 걸렸다.
로프를 붙잡고 위로 올라간 그는 비슷한 방법으로 계속해서 올라간 끝에 원하던 장소에 도착했다.
굵은 나뭇가지는 그가 누워도 될 정도로 넓었고, 크고 푸르른 이파리들이 그곳을 외부로부터 가려주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자겠다는 건 아니었다.
‘역시, 맞잖아.’
최강혁은 그곳에서 안쪽, 나무 중심쪽의 껍질을 살짝 두드려보았다. 속이 빈듯한 울림이 들렸다.
이미 스캔을 통해서 확인했던 부분이다.
제대로 찾았다.
그는 대검과 손도끼를 활용, 그곳 껍질에 작은 틈을 내고 안쪽의 공간으로 들어갔다.
“.......”
혹시 거대한 벌레 따위가 들어있는 건 아닌가 우려했지만, 다행히 그런 건 없었다.
안쪽 공간은 가장 넓은 가로 지름이 2미터를 조금 넘는, 위아래로 길쭉한 형태를 이룬 모습이었다.
“어떻게 하면 되나....”
최강혁은 그곳 내벽에 말뚝을 박고 해먹을 걸쳐볼까 했지만, 곧 그것보다 나은 방법이 있음을 깨달았다.
“조금만 더 힘내자.”
대략 두 시간 쯤 걸렸을까.
내벽 곳곳에 단단히 박힌 큼직한 나사, 그 머리에 자리한 원형 고리에는 각각 고정된 로프가 있었다.
로프는 마치 거미줄처럼 안쪽으로 이어지며 옆으로 연결되어있었는데, 그 중심부로 갈 수록 촘촘해져서 마치 아이들이 뛰어노는 트램폴린 같은 모습이 되었다.
실제로 최강혁이 밟고 있는 부분이 아래로 살짝 살짝 들어갔다 올라오며 흔들리는 모습이 그것을 연상케 했다.
그 위에 전투복 천으로 만든 깔개를 넓게 깔아 고정하고 나니, 그럭저럭 바닥 비슷한 형태가 갖춰진다.
“미안하지만, 더 확실히 고정해야겠어.”
말뚝을 박고, 큰 나사를 만들어 돌려 끼워대는 중이었다. 나무에게도 입이 있다면 그만 하라고 소리를 지를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그에겐 식물의 고통을 헤아려줄 만한 여유가 없었다.
몇 가지 보조 고정장치를 추가 설치한 그는 그제야 조금 안심한 얼굴이 되었다.
‘출입구를 제대로 막아야 해.’
그가 들어왔던 구멍은 천으로 대충 가려두었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그는 다시금 한 시간을 넘게 투자하여 그곳에 튼튼한 문짝을 만들어 달았다.
‘얼추 된 건가.’
공기 구멍도 이쪽 저쪽에 뚫어놓은 터라, 그곳을 통해 외부의 희미한 빛이 새어들기도 했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쳐자자.”
살짝 출렁이는 듯한 느낌의 바닥.
최강혁은 그곳에 대자로 누워버렸다.
조금 출출한 기분이긴 했지만, 먹는 것보다 자는 게 먼저였다.
‘이젠 정말 자다가 죽어도 어쩔 수 없어.’
〈 37화 〉 037.
037.
“.......”
눈을 떴을 때, 여전히 작은 구멍들로 빛이 새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눈을 비비며 일어난 최강혁은 자신이 그리 오래 잠을 자지 못한 게 아니라, 반대로 훨씬 많이 잔 것임을 직감했다.
시스템으로 시간을 확인한 그가 고개를 저었다.
“어우... 하루를 넘게 잤냐.”
더 없이 개운했다.
하지만 텅 빈 위장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는 인벤토리에서 빅버드의 살점을 조금 떼어내 루팅으로 섭취했다.
‘이제 여유가 되면 익혀서 먹고 싶긴 한데.’
워낙 해야 할 일이 많다.
그동안 미뤘던 일들을 하나 하나 해결해야 한다.
‘주변 정찰도 해야겠지만, 그 전에....’
강철로 방어복을 보완하려던 계획.
그것부터 처리한다.
‘컴파운드 보우도 만들어야겠지. 테스트까지 해야 하니, 완성품은 좀 오래 걸리려나.’
아무리 스캔 데이터가 있다고 해도, 그것 그대로 만들 생각은 없었다. 병사가 갖고 있던 활은 실전용보다는 대회용에 가까웠다.
‘연사도 어렵고... 좀 부실했지. 애초에 컴파운드보우가 내구성이 그리 좋은 건 아니라고는 하지만.’
전투에 쓸 물건이다.
그럭저럭 빠른 연사를 감당할 수 있을 수준의 내구성이 필요하다.
‘어디 보자. 흉갑 데이터가....’
데이터 저장소를 뒤적이던 그는 찾던 것을 발견하고 별도 창으로 꺼내 열었다.
‘굳이 수납 슬롯을 만들 필요는 없으니 떼어버리고....’
인벤토리가 있으니 여분의 탄창이나 보조 무기를 넣기 위한 부분은 쓸모가 없다.
또한 너무 무거우면 곤란해질 테니 두께 역시 적절하게 조절한다.
애초에 전신갑옷을 만들 생각은 아니니, 가죽 보호복 위에 일부 강철 파츠를 덧대는 형식이 좋을 것 같다.
‘완전 강철로 만들면 무게도 무게지만, 너무 시끄러워.’
연결 부위를 아무리 유연하게 해도 쇳소리를 아주 없앨 수는 없다.
최강혁은 이것 저것 고려하며 새 보호복의 형태를 잡아나갔다.
그렇게 최종 형태가 확정되고 나니, 남은 건 마나를 부어가며 재료를 가공하는 일 뿐이었다.
‘이쪽은 마나만 있으면 되고.’
구상했던 것과 실물에 약간의 차이가 있어서 몇 군데 손을 보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꽤 만족할 만한 녀석이 나왔다.
아무래도 강철 보호대가 추가되었으니 무거워질 수 밖에 없지만, 그런 무게감은 그만큼 안전해진 것 같은 기분을 주기도 했다.
‘이 정도로 무너지진 않겠지?’
문득 지금 그가 앉아있는 곳이 허공에 고정된 그물망이라는 것이 생각났지만, 워낙에 과도할 정도로 단단히 박아놓아서인지 큰 문제는 없어보였다.
“이 정도로 그칠 게 아니라, 아래하고 위쪽 공간도 더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의 바닥은 사실 반쯤 임시였다.
단순히 해먹을 만들어 고정하면 자는 동안 옆으로 돌다 떨어지거나 할 것 같아서 좀 넓게 만들 생각으로 한 것 뿐.
‘내 잠버릇이 안 좋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충분히 자고 일어나 개운한 상태가 되니 여러 모로 부족한 부분이 눈에 띄었다.
또한, 굳이 그런 식의 바닥이 아니라 나무 안쪽을 파내어 제대로 된 집을 만들어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속을 조금 깎아낸다고 죽진 않겠지.’
워낙 커다란 나무니까, 그가 만들 공간 정도는 다람쥐 구멍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좋아. 이건 굳이 해체하진 말고... 이 아래쪽으로 깎아보자.’
나무의 속살은 생각 외로 단단했지만, 단단한 쇠칼과 망치, 각성자의 완력과 넉넉한 시간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그로부터 꼬박 이틀을 투자한 최강혁은 정말로 제법 그럴싸한 내부 공간을 만들어냈다.
기존 그물망의 한쪽 옆으로 아래로 향하는 계단을 냈고, 바깥쪽으로 나선형을 그리며 내려가면 위쪽 못지 않은 원형 공간이 나왔다.
“이제 끈끈하지 않네.”
깎아내면서 흘러나온 수액과 물기가 무척 찐득거렸지만, 그 과정에 생겨난 톱밥과 나뭇조각들을 얇은 판으로 가공해서 벽지나 장판처럼 붙였더니 그럭저럭 괜찮아졌다.
‘굳이 이쪽에도 문을 낼 필요는 없겠고.’
그래도 창문 정도는 있어도 좋을 것 같아서, 한쪽 벽에 여닫을 수 있는 작은 원형 창을 냈다.
“좋았어.”
거처가 생겼다.
동시에, 갖고 다니기 애매한 것들을 보관할 창고가 생겼다고도 할 수 있었다.
“뭐가 이렇게 많냐.”
최강혁은 그곳 바닥에 이것 저것 꺼내놓았다.
여분의 전투화 몇 켤레와 옷, 속옷, 자잘한 잡동사니들을 내어놓으니, 그제야 빡빡하던 인벤토리가 제법 여유로워졌다.
‘슬슬 먹을 것도 찾아봐야 하는데.’
활을 만들어야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게 식량 확보였다.
아직 총알이 아주 떨어진 것도 아니니, 지금은 그것을 들고 나서기로 했다.
‘숲에 뭐가 있는지도 파악해야 하고. 가능하면 지도도 만들어야겠지.’
길을 잃으면 곤란하다.
그 나무가 그 나무 같으니까, 자칫하면 집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제일 바깥 나무를 고른 건 잘한 것 같아. 안쪽 나무를 대충 골랐으면 정말 헷갈렸을 거야.’
그래도 별도의 표식을 남겨두긴 해야겠다.
로프를 적당히 잘라서 나무에 묶어 거는 정도로도 충분하겠지.
‘바깥에 사다리 같은 걸 만들어야 하나?’
이곳은 지면에서 적어도 20미터 이상 올라와야 하는 곳이다. 아무리 각성자라도 훌쩍 뛰어 들어올 수 있는 높이는 아니었다.
‘나무 외벽을 깎아서 발판을 만들 수도 있고, 아니면 로프를 매달아 내릴 수도 있고....’
편한 건 발판 쪽이 제일이겠지만, 보안 측면에선 로프나 사다리가 나을 듯 했다. 올라온 후에는 끌어올려서 숨기면 되니까.
‘뭐 하나를 하고 나면 꼭 일이 두 세 개가 늘어난단 말이지.’
괜찮다.
조급해지지 말자.
‘잠도 충분히 잤고... 이제부터는 시간이 내 편이라고 믿어보자.’
고개를 끄덕인 최강혁은 단단히 채비를 갖춘 후 그곳을 나섰다.
지금처럼 전투복 원단의 섬유를 뽑아내어 가죽과 섞어 만든 로프를 써도 되겠지만 그러면 낭비가 너무 심해지는 것 같았다.
‘주변에 널린 게 나무하고 풀이니까, 이제 저쪽에서 섬유를 뽑아 쓰면 되겠지.’
그가 집으로 삼은 나무는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대신 근처의 나무로 조심 조심 건너다니며 적당한 가지를 베거나 나뭇잎을 뜯어 모았다.
‘어떤 친구들이 사는지 몰라도... 발이 크구나.’
나무에서 다른 나무로, 또 다른 나무로 훌쩍 훌쩍 뛰어 건너던 그는 종종 멈춰서서 지상을 바라보기도 했다.
개중에는 그 높이에서 보아도 명확히 눈에 띌 정도로 커다란 발자국들도 있었는데, 스캔이 가능한 거리는 아니어서 일단 눈에만 담아두었다.
‘가급적 나무 위로만 움직이는 게 좋겠어.’
왠지 이곳에선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종종 눈에 띄는, 그 주인을 짐작키 어려운 뼈다귀 따위를 보면 그런 생각이 더 강해졌다.
“음....”
상대적으로 온순한 이웃들도 만났다.
어떤 나무의 옆쪽에 마치 딱따구리가 파놓은 것 같은 구멍이 있어서 슬쩍 보니, 알을 깨고 나온 지 얼마 안 되어보이는 새끼 새들이 있었다.
“나 엄마 아닌데.”
그를 보고는 삑삑거리며 부리를 벌리는 모습이 귀엽긴 했지만, 각각의 크기가 칠면조 하나 정도는 되어보이니 다 자라면 얼마나 커질까 좀 무서운 느낌도 들었다.
“.......”
그리고 곧 그 답을 눈으로 확인했다.
근처 나무에 날아와 가지에 앉은 새 하나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새로 이사 왔는데. 거... 친하게 지냅시다.”
빅버드는 동네 아는 동생 정도로 보일 만큼 커다란 녀석이었다. 녀석의 부리에 물려있는 짐승만 해도 어지간한 대형견 크기는 되었다.
신기한 건 크기가 아니라 깃털이었다. 푸르다가 붉다가, 마치 카멜레온처럼 색이 변했다.
‘저 보송보송한 솜털 녀석들이 저렇게 자란다는 건가.’
최강혁은 슬금슬금 물러났다.
가만히 앉은 새의 고개가 그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그냥 안 보내줄 것 같은 눈빛이네. 그렇지?”
그는 조심조심 인벤토리에서 꺼낸 빅버드의 살점 한 덩이를 딛고 있던 가지에 내려놓았다.
“뇌물이 먹히려나.”
들고 있는 총으로 쏴갈길 수도 있겠지만, 왠지 이 숲에 있는 모두를 적으로 삼지는 않아도 되지 않나 싶었다.
‘총을 쏴도 한 방에는 안 죽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 내가 죽겠지.’
그동안 그는 자신의 판단을 별로 믿지 않았지만, 캠프 밖으로 추방된 이후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육감이라고 해야 하나. 이상하게 잘 맞는 편이야.’
위험할 것 같아서 우회하거나, 아무 것도 없지만 뭔가 쎄해서 일단 엎드려 숨어보면 꼭 그가 가려던 쪽에서 뭔가가 나오곤 했다.
‘그런 것도 각성자의 능력일까.’
최강혁은 가지가 서로 얽혀있던 다른 나무 쪽으로 건너가며 생각했다.
그제야 펄럭펄럭 날아온 성체 새가 물고 있던 짐승 사체를 나무 구멍 안으로 넣어주더니, 그가 놓고 갔던 빅버드 살점은 자기가 쪼아먹었다.
“받아줬다고 쳐도 되려나.”
여전히 이쪽을 보면서도 공격하지 않는 건 좋은 징조일까. 최강혁은 인벤토리도 적당히 채워졌으니 슬슬 돌아가기로 했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최강혁은 캠프에 있었을 때처럼 하루 하루 충실하게 보내고 있었다.
숲 한쪽 외곽을 겉핥는 수준이던 지도도 조금씩 자세하게 바뀌어가고 있었고, 몇몇 구역에는 그곳에 서식하는 몬스터의 생김새를 그려넣기도 했다.
‘다들 자기 영역이 정해져있는 것 같았지. 침범하면 싸우는 거고.’
일부러 침범하는 경우도 많았다.
몬스터들에게 평화 협상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으니,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인 건 당연했다.
콰득!
‘나도 그 안에 얽혀있는 거고.’
최강혁은 건너편 나무에 틀어박혀있는 큼직한 화살과, 그것에 몸통이 꿰여 버둥거리는 사슴벌레를 보았다.
벌레라고 하기엔 역시나 덩치가 커서, 거의 허벅다리 정도 크기를 가진 녀석이었다.
‘그래도 나름 단백질이 많아. 갑각도 쓸만하고.’
그는 당장 놈을 마무리하러 가기보다, 그 화살을 쏘았던 활을 스캔해 점검하는 것부터 우선했다.
“32발째... 금이 갔군.”
계속된 시행착오와 보완을 거쳐, 이제 그럭저럭 쓸만한 활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내구성이 완벽하진 않았다.
인벤토리에 넣고 수리하면 되겠지만, 그래도 가급적 튼튼한 활을 만들면 더 좋을 텐데.
‘역시, 통짜 강철을 써야 하나? 그럼 잘 안 휘는게 문젠데.’
결국 강철 바디에 강철로 만든 와이어를 사용해야 할 것 같다는 결론이 나왔다.
문제는 그런 활을 만들게 되면 마나를 소모하지 않는 이상 시위를 당길수조차 없다는 것이었다.
‘별 수 없지. 마나 관리에 좀 더 신경쓰면 될 거야.’
당기기 어려운 활은, 다시 말하면 그만큼 위력이 강한 활이 될 거라는 뜻이다.
지금의 활을 인벤토리에 넣은 그는 건너편 나무로 가서 아직 꿈틀거리고 있던 사슴벌레를 마무리하고 챙겨 넣었다.
‘아직 조용하네.’
오늘 새벽에 꽤 큰 싸움이 있었다.
숲 깊은 안쪽에서 제법 큰 영역을 갖고 있던 놈들이 맞붙은 것 같은데, 그 여파가 이쪽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몬스터들 사체가 꽤 나오겠지만... 그걸 욕심내다간 같이 휩쓸려 죽기 딱 좋지.’
적어도 이곳에선 가늘고 길게 갈 생각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표범 같은 종류의, 나무 위까지 올라와서 돌아다니는 몬스터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만약 그런 게 있다면 지금처럼 곳곳에서 구멍을 파내어 살아가는 새들이 온전할 리가 없었다.
‘나무 위를 고른 건 좋은 판단이었어.’
단단히 박혀있던 화살을 루팅으로 회수한 그는 지도를 열어본 후 방향을 돌렸다.
‘오늘 좀 무리하면 마무리될 것 같은데. 아슬아슬하려나.’
숲에서 확인한 것들 중 하나는 그가 어느 정도 거리까지 뛰어 건널 수 있는지였다.
제대로 마나를 소모하며 뛰었을 때 5미터를 조금 넘겼으니, 무거운 보호복을 벗어버리면 그보다 좀 더 먼 거리도 가능할 듯 했다.
‘좋아. 가자.’
처음엔 그저 나무와 나뭇가지로 보였던 것들도 이제는 갈 수 있는 길과 그렇지 않은 곳 정도로 구분이 갔다.
그렇게 나무에서 나무로 거듭 연결된 길을 따라 이동한 그가 도착한 곳은 거처에서 적잖게 떨어진 곳에 자리한 평범한 나무 한 그루였다.
“후....”
그 나무의 중간 높이 즈음.
지금 최강혁이 바라보는 곳은 마치 쥐가 갉아먹은 것처럼 깊이 파여있었다.
사실 쥐가 아니라 그가 그렇게 한 것이다.
〈 38화 〉 038.
038.
‘오늘까지 치면 일주일인가.’
나무 한 그루를 베어내는 데 들어간 시간.
오늘 다 못하면 일주일도 넘기게 된다.
‘해야지.’
아직 해가 질 시간까지는 많이 남아있었다.
그쪽으로 건너간 그는 마치 모래시계의 중간부분처럼 가운데만 조금 남아있는 나무의 절단면에 섰다.
“도끼를 쓸 수 있으면 좀 더 빠르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시끄러워서 곤란하니까.”
그가 꺼내든 것은 톱과 정, 그리고 가죽을 씌운나무망치였다. 나름대로 조용히 작업하기 위해 이것 저것 해보다 정착한 도구들이었다.
‘이쪽으로 유도해야겠지?’
나무를 쓰러뜨릴 방향을 정해야 한다.
벌목을 마치면 그에게 소유권이 올 테니 루팅이 가능해지겠지만, 이 거대하고 무거운 나무는 그가 가진 인벤토리로 감당할 수가 없었다.
‘흡수를 하거나, 아니면 통째로 넘겨야겠지.’
얼마나 받을 수 있을지는 일단 해봐야 안다.
어쩌면 트럭보다 못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형편 없이 적게 주지는 않을 것 같았다.
‘몬스터는 안 보이고... 냄새도 없고.’
주변을 거듭 살핀 후.
그는 천천히 신중하게 작업을 이어갔다.
어쩌면 오늘 안에 못할 수도 있겠다고 여겼지만, 생각보다 금방 되었다.
우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한쪽으로 넘어가기 시작해서 더 이상 안쪽을 깎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방향은 제대로 유도했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얼른 그곳에서 벗어나 거리를 벌렸다.
곧 그의 등 뒤에서 거목이 쓰러지며 산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쪽을 돌아보지 않고 움직인 최강혁은 얼른 미리 준비해두었던 다른 나무의 내부 공간에 몸을 숨겼다.
‘궁금해서 와볼 녀석들이 많을 거야. 적어도 하루 정도는 여기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과연 얼마나 받을 수 있을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객기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그는 인벤토리에 넣었던 사슴벌레의 속살을 루팅으로 섭취하고 나서 조용히 휴식을 취했다.
* * *
예상했던 것보다 여파가 더 컸다.
큰 소리가 났으니 근처에 사는 놈들이 와볼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이 정도 까지는 아니었다.
‘이거, 못 나가겠는데.’
당장 근방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소리들.
괴성과 비명, 둔탁한 타격음과 뭔가가 나가 떨어지는 소리.
‘내가 죄인이네.’
평화롭던 숲에 분란을 일으킨 꼴인가.
그럭저럭 하루면 될 것 같더니, 패싸움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며칠째 이어지고 있었다.
‘피냄새가 여기까지 풍길 정도면....’
그럭저럭 조용해진 건 닷새가 지난 후였다.
조심조심 숨어있던 나무 틈새를 열고 나온 그는 당장 지상을 내려다보고 질린 얼굴을 했다.
‘독가스라도 풀어놓은 꼴이네.’
끔찍한 광경이었다.
그 종류를 파악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은 몬스터들이 저 아래에 죽어있었다.
멀리서 보자 마자 도망쳐야 했던 맹수들도 더러 섞여있었는데, 뜯어먹힌 듯 훼손된 것도 있었고 상대적으로 멀쩡해보이는 것도 있었다.
‘내려가도 되나?’
인벤토리에서 나무토막 하나를 꺼낸 그는 멀찍이 떨어진 바닥을 향해 던져보았다.
터억, 하고 나름 큰 소리가 울려퍼졌지만 아무런 움직임도 볼 수 없었다.
‘나무는... 이야.’
그저 위로 올려다보기만 했던 나무 하나가 옆으로 쓰러져있는 걸 보니, 그 밑둥에서 베어낸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거대했다.
‘저러니 다들 몰려왔지.’
나름 빈 곳으로 쓰러뜨렸다고 생각했는데, 옆으로 쓰러진 나무가 그쪽에 있던 나무 두 그루를 덮여 부러뜨린 것 같았다.
도합 세 그루가 쓰러지고, 그 뒤쪽으로 여러 나무들이 더 꺾여있었다.
‘그래도 걸리면서 힘이 줄어들었나. 저쪽은 꺾이긴 했어도 쓰러지진 않았네.’
바로 내려가는 대신, 그는 주변 나무들을 빙 둘러 이동하며 지상의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살폈다.
혹시나 살아 움직이는 놈들이 있는지 자세히 보았지만, 얼핏 눈에 띄는 건 잔치라도 열린 것처럼 바글거리는 개미떼 뿐이었다.
‘이상하네. 청소부 놈들이 안 보여.’
평소대로라면 개미들보다 더 바글거려야 할 녀석들이 보이지 않았다.
‘저쪽 싸움도 컸었지.’
어쩌면 벌목 이전에 벌어졌던, 숲 저편의 싸움 뒷정리가 아직 끝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워낙 큰 싸움이라, 청소부들도 같이 휘말려 피해를 입었을 수도 있고.
‘그러면 얼른 움직여야지.’
조심조심 지상으로 내려간 그는 멜빵을 걸고 오른손으로 쥔 소총을 이리 저리 겨누며 경계하면서도, 왼손으로 사체들을 접촉하며 스캔과 교환을 멈추지 않았다.
-인벤토리 3칸을 획득하였습니다.
-인벤토리 2칸을 획득하였습니다.
-인벤토리 7칸을....
거듭 이어진 시스템 알림이 어느덧 조금씩 줄어들 즈음, 그 일대에 자리하던 짐승과 몬스터의 사체들도 그만큼 사라졌다.
‘고기도 좀 챙겼고.’
개중에 곰을 닮은 커다란 녀석이 하나 있어서 스캔해보니 먹을 수 있는 종류였다.
가죽도 쓸모가 있어보여서, 돌을 채우는 데 쓰고 난 후 비워두었던 특수 칸 2번에 넣어두었다.
‘6백 킬로그램이 넘어가네.’
나머지 사체들도 저마다 쓸모가 있을 것 같았지만, 당장 챙길 수 없다면 얼른 치워버리는 게 낫기에 바로바로 시스템에 넘겼다.
‘흡수가 되는구나.’
현장을 정리하는 과정에 그가 벌목한 나무를 지나가게 된 최강혁은 그 껍질 한쪽에 손을 얹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 흡수하고 처리하려면 하루 종일 해도 안 되겠지.’
역시, 그것도 시스템에 넘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하여 확인해보니, 지금 것을 넘기면 182칸을 주겠다고 했다.
‘애매하네.’
일주일로 나누면 하루에 20칸을 조금 넘게 번 걸까. 어쩌다 같이 쓰러진 것들까지 처분하면 더 많아지겠지만.
‘그래도 사체들을 처리한 것 못지 않게 많이 받는 건 맞아.’
몬스터 사냥의 위험성과 난이도를 생각해보면, 그저 시간만 투자해서 얻는 성과로는 대단한 수준이라 할 수도 있다.
‘휴우.’
쓰러져있던 거목이 고스란히 사라졌다.
그 곳곳의 틈새에 터전을 삼으려 했었는지, 작은 짐승과 벌레들이 화들짝 놀라 이리 저리 달아다는 모습이 보였다.
최강혁은 계속 움직였다.
비슷하게 쓰러져있던 다른 두 그루의 나무를 처분한 그는 그 과정에 부러지고 떨어져나온 수많은 가지들이 사라지지 않고 바닥에 남아있는 것을 보았다.
‘나무가 필요하면 이것들을 주워가면 되겠구나.’
지금은 넣을 곳이 없었기에, 챙길 수 있는 만큼만 챙기고 돌아섰다.
-키킥, 키키킥!
그 때, 멀리서 숲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결에 희미한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오긴 오는구나.’
청소부들임을 직감한 그는 얼른 로프를 매어둔 나무로 달려갔다.
‘허탕 치게 만들어서 유감이야.’
그래도 아주 허탕은 아닐 것이다.
인벤토리 1칸도 못 받을 만큼 자잘한 것들은 그냥 두기도 했으니까.
그는 서둘러 거처로 향했다.
얻은 것들이 많아서, 정리를 해야 했다.
‘시스템 알림도 많이 쌓인 것 같은데. 제대로 확인을 못했어.’
제법 익숙해진 몸놀림.
금방 거처가 있는 나무 근처에 도달했지만, 곧장 그쪽으로 가지는 않았다.
‘아무도 없지?’
그 주위를 한 바퀴 돌며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고 나서야 거처 나무로 향한 그는 오늘 하루도 무사히 돌아왔음을 감사히 여겼다.
“어디 보자. 인벤토리... 대박이네.”
거목 세 그루에 몬스터와 짐승들을 넘겨 얻은 인벤토리가 도합 8백 칸이 넘어갔다.
기존에 갖고 있던 것과 합치면 얼추 2천 칸에 가까운 숫자였다.
‘마나 회복 속도가... 역시 느려졌어.’
그래도 회복이 되긴 한다는 건 다행이었다.
자연회복이 안 되면 외부에서 수시로 마나를 확보해 공급해야 할 테니.
‘일단 인벤토리 획득 알림은 다 치우고....’
누적되어있던 시스템 메시지를 능숙하게 추려낸 그는 그 사이에 끼어있어서 미처 보지 못했던 몇 가지 알림을 찾아냈다.
‘흡수 스킬 단계가 올랐다고? 아까 나무 팔기 전에 조금 해보면서 올라갔나?’
흡수 쪽에 파생 스킬이 새로 생겼다고 해서 확인해보니, ‘마나 흡수’ 라는 명칭이었다.
‘접촉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거리까진 흡수가 된다고? 단계가 오르면 거리도 늘어나는구나.’
하지만 그 부분은 기존 흡수스킬의 단계가 올라가서 생긴 것 같았다.
정작 마나 흡수 쪽 스킬 설명을 보니, 다소 추상적이어서 감이 잘 안 왔다.
‘자연의 마나를 흡수할 수 있다는 게 무슨 말이지? 자연에 마나가 있는 건 알고 있지만.’
혹시 공기 중의 마나도 흡수할 수 있다는 걸까. 궁금해서 해보니, 아주 미량이지만 정말로 흡수가 되었다.
“으음.”
하지만 패시브 스킬이 아니어서, 필요할 때마다 직접 의식해서 활용해야 하는 것 같았다.
‘휴식할 때 틈틈이 하면 되려나.’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공기의 마나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자연의 마나를 흡수할 수 있다는 것 같아서 이것 저것 해보니 그야말로 놀라웠다.
‘물에서도 흡수하고....’
심지어 예전에는 불가능했던, 벌목하지 않은 나무에서도 마나를 흡수하는게 가능했다.
‘살아있는 대상인데도 된다고?’
이건 뭐 흡성대법인가 뭔가 하는, 옛날 중국 영화 같은 데서 나오는 그런 거 아닌가.
‘나무는 뭔가 다른 건가.’
어쩌면 하나의 생명체가 아니라 그저 자연이라는 카테고리에 묶어놓은 것 아닐까 싶기도 했다.
아니면 정말로, 살아있는 대상의 마나를 갈취하는 개념일 수도 있고.
아무튼 지금 그가 있는 나무의 내벽에 손을 얹고 흡수를 해보니, 그곳으로 조금씩 들어오는 마나가 느껴졌다.
‘무척 느리긴 하지만, 쓸모는 있겠어.’
그렇게 마나를 잃은 부분의 나무가 조금 푸석푸석해진 느낌이었다. 그런 특성을 활용하면 멀쩡한 나무에 구멍을 뚫거나 하는 일도 더 쉬워질듯했다.
‘...이젠 정말 벌목 뿐이야!’
사흘에 한 그루만 넘어뜨려도 하루에 50칸 이상을 벌 수 있다. 이 거대한 숲에서 나무 조금 없앤다고 티가 날 것 같지도 않고.
‘지금 있는 일반 인벤토리가... 1,872개구나.’
그 중에서 150칸을 떼어냈다.
50칸은 1번 특수칸을 업그레이드했고, 100칸은 마찬가지로 2번 칸에 부었다.
[특수 인벤토리 내역]
-1- 499.7kg (282.3kg+217.4kg) / 1,500kg
-2- 755.7kg (623.3kg+132.4kg) / 1,500kg
-3- 898.2kg / 1,000kg
-4- 0kg / 1,000kg
‘다음 번 업그레이드는 50이 아니라 100씩 따지는구나.’
1번과 2번 칸은 이제 2종류를 1.5톤까지 넣을 수 있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3종류를 넣고 싶다면 100칸을 써야 한다.
또한 무게까지 올리려면 또 100칸을 써서 500킬로그램을 추가할 수 있으니, 2백칸을 쓰면 3종류에 2톤까지 채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차라리 새로 만드는 게 낫잖아.’
기존 칸을 업그레이드하는 게 아니라, 2백칸을 별도로 쓰면 2종류를 1.5톤까지 넣을 수 있는 칸을 추가로 만들 수 있는데.
‘냄새가 나는데?’
지금의 방식을 보니, 특수 인벤토리의 슬롯 숫자가 한정되어있는 것 아닐까 싶었다.
‘아무튼, 그건 됐고.’
다른 시스템 메시지는 평범했다.
일단 신체 강화 단계가 올라갔다는 메시지가 있었는데, 그건 원래 수시로 뜨는 거였다.
‘체내 마나 최대치가 또 올랐고.’
그것 역시 올라갈 때마다 나오는 알림이었다. 그래도 새삼 처음에 비해서 최대치가 꽤 많이 오르긴 했다.
[체내 마나]
412 / 624
아마 처음이 130대였던 것 같은데, 그 시절과 비교하면 거의 5배에 달하는 숫자였다.
다만 인벤토리가 점점 커질수록 그걸 감당해야 하는 양도 많아져서, 실질 체감은 적은 편이었다.
‘음? 이건 뭐지.’
평범한 메시지들을 이쪽 저쪽으로 치워내던 그는 안쪽에 묻혀있던 알림 하나를 발견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귀하의 인적사항이 열람되었습니다.
‘열람?’
뭔소리야.
최강혁은 해당 메시지를 선택해 세부 설명을 띄웠지만,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그저 누군가가 그의 인적사항을 열람했고, 그 대가를 지불했다는 이야기 뿐이었다.
〈 39화 〉 039.
039.
‘개인정보도 팔아먹는 건가?’
시큰둥하게 여기던 그는 시스템의 ‘임시 보관함’ 이라는 것을 찾아보았다.
열람의 대가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일단 그쪽에 먼저 받아놓는 방식인가본데.
그는 그곳을 열자 마자 그대로 굳어버렸다.
‘뭔데?’
싯누런 황금덩어리였다.
아니, 덩어리라고 하기엔 작았지만 그래도 계란 정도 크기는 되어보였다.
‘내 개인정보가 이렇게 비쌌어?’
이정도면 얼마든지 열람해도 좋다.
근데 어떤 부분을 열람한다는 건지, 또 열람해서 어디에 쓴다는 건지 궁금했다.
‘나도 다른 각성자들 인적사항을 열람할 수 있는 건가?’
그런 기능은 없는 것 같았는데.
어쩌면 그런 스킬을 가진 각성자가 따로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어디에 있는 줄 알고 열람을 하는 거야? 생각할수록 이상하네.’
혹시 근처 어딘가에 숨어있는 각성자가 있는 걸까? 잔뜩 긴장한 그가 창문을 살짝 열고 바깥을 살펴보았지만, 그저 평소대로의 숲이었다.
“모르겠다.”
울퉁불퉁한 황금을 만지작거리다 살짝 깨물어보기도 하던 그는 그것을 인벤토리에 잘 넣어두었다.
‘넓다, 넓어.’
150칸이 줄어들어 1,700칸 정도가 되었지만, 그래도 기존의 두 배 정도 느낌이라 무척 넓어보였다.
‘가로 세로 1미터에... 높이 1.7미터짜리 육면체로 보면 되나.’
지금은 필요에 따라서 형태를 조금 바꾸었지만, 모양을 바꾸면 그렇게 될 듯 했다.
‘그렇게 보면 아직 작은 것 같기도 하고... 뭐, 마나 자연회복으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적당히 관리해야겠지.’
그렇게 보면 당장 벌목을 계속 이어가야 할 필요는 없을 수도 있었다. 일단 체내 마나량을 계속 높여가면서 천천히 성장하는 게 좋을까.
‘신체 강화 쪽에도 투자하고 있긴 한데... 그러면 그쪽 비중을 확 올려야겠구나.’
방향이 명확해야 버벅대지 않는다.
인벤토리에서 손질한 곰계열 몬스터의 가죽을 꺼낸 그는 하층부의 바닥에 그것을 깔았다.
의자나 테이블도 놓으면 좋을 것 같은데. 시간 나면 만들어볼까.
원래 이 숲은 거쳐가는 경로에 불과했지만, 이쯤 되니 굳이 멀리 있는 산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여기서 5년을 버틸 수 있느냐가 문제긴 한데... 확실한 건 아무 것도 없으니 말이지.’
곰가죽 카펫 위에 드러누운 그는 넉넉해진 인벤토리를 들여다보며, 그 안에 들어있는 재료들을 가공해 새로운 활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신체 강화를 팔근육 위주로 가야 시위를 당기기 좋으려나.’
전체적인 밸런스가 무너질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겠지만, 그래도 팔힘이 좋아서 나쁠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어차피 마나를 써서 시위를 당길 거면, 차라리 크로스보우 계열이 다루기 편할 것 같기도 하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그저 금속 조각에 불과하던 여러 재료들이 조금씩 형태를 갖추며 하나로 합쳐졌다.
‘손으로 하려고 했으면 절대 못할 작업이지.’
알맞은 도구가 있어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강철을 이런 식으로 떡주무르듯이 원하는 형태로 가공할 수 있을까.
‘조합 작업을 하면 할수록 더 세밀한 가공이 가능해지는 것 같아. 기분탓은 절대 아니야.’
하루 하루 열심히 할수록, 그만큼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당장은 그리 큰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시간은 그의 편이 분명하다.
‘열심히 살자. 열심히... 살자고.’
최강혁은 숨구멍 사이로 들어오는 저녁의 희미한 빛을 바라보며, 거듭 삶을 생각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 * *
“살아있다고 하셨소?”
“네.”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눈을 가늘게 뜬 양호석이 물었다.
사라 레드우드는 뒤쪽에 있던 부하를 돌아보며 앞쪽을 턱짓했다.
“......?”
그녀의 부하가 가져온 것은 알만한 이들은 아는, ‘생존 확인 장치’ 였다.
하지만 그것이 누구를 보여주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게 그의 상태라는 건가?”
“그 여자가 초기화시키지 않은 거야?”
다들 궁금해했다.
그들이 조용해지기를 기다리고 있던 사라 레드우드는 곧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관리병에게 미리 이야기해두었었죠. 초기화 명령이 떨어지면, 새 물건을 대신 줄 테니 팔라고.”
“그럼 이게 정말....”
“믿고 싶으면 믿고, 아니면 말아요. 안 그래도 슬슬 초기화할 생각이었으니.”
생존 확인장치는 유지비용이 들어간다.
고작 며칠 정도라면 큰 문제가 없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아주 조금씩 유지비용이 늘어나게 된다.
와일더에 합류했다고 간주된 인원들의 경우, 더 지켜보지 않고 장치를 초기화하는 건 그런 이유가 컸다.
“일단 맞다고 치면....”
양호석이 추궁하듯 물었다.
“그가 어디 있는지도 아는 거요?”
“네.”
“그것도 값을 치러야 말해줄 건가?”
“당연하잖아요. 들인 게 있는데.”
“끙....”
양호석은 이건 아닌 것 같다는 표정의 부하들에게 애써 고개를 저어보이고는 그녀와 자신의 단말기를 맞대고 일정 코인을 넘겨주었다.
“좀 더 쓰시면 안 돼요?”
“여기 사정을 보시오. 하루 하루 버티는 것도 어렵소.”
“그러게 왜 무리해서 개척 캠프를....”
“그래야만 했으니까.”
양호석은 단호히 이야기했다.
많은 이들에게는 그저 ‘딴 주머니를 차고, 뇌물을 좋아하는 부사령관’ 으로 알려져있는 남자.
하지만 사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독립을 꿈꾸고 있었다는 것을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고인 물은 썩지. 그곳이 그랬소.”
“뭐... 그럴 수도 있겠죠. 아무튼, 용건은 끝났으니 가볼게요.”
사라 레드우드는 대충 그려진 것처럼 보이는 지도 한 장을 건네고 돌아섰다.
“여기는....”
양호석은 그 어설픈 지도가 어딜 가리키고 있는지, 또한 그곳에 표시되어있는 위치가 어디인지 어렵지 않게 알아보았다.
“그 숲에서... 1년을 넘겼다고?”
“어딘데요?”
“숲? 숲이라고 하신 것 같은데.”
주위에 있던 부하들이 우루루 몰려왔다.
양호석이 그 지도를 야전 탁자 위에 잘 보이게 펼쳐놓자, 그것을 본 이들 중 몇몇이 얼굴을 찌푸리거나 고개를 저었다.
“속은 것 같은데요.”
“이거, 거기지?”
“거인의 숲.”
“맞네. 악어강 건너서... 거기야.”
“아니, 애초에 거기까지 혼자서 갈 수도 없고... 운이 좋아 강을 건넜다고 쳐도 숲에 도착하기 전에 독사들 서식지가 있을 텐데? 여기, 이 일대 말이야.”
“각성자잖아. 뭔 수를 썼겠지.”
“숲까지 갔다고 해도... 이건 말이 안 되는데요.”
자그마치 1년이다.
어지간히 강한, 각성자들만으로 이루어진 소대, 아니 중대를 집어넣는다고 해도 그 정도 시간은 버틸 수가 없다.
애초에 안정적인 목재 수급을 위해서 주기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캠프도 있지만, 매번 성공하지 못하고 오히려 피해를 입은 채 퇴각을 반복하고 있다 들었다.
“그냥 속았다고 치는 게 맞겠습니다.”
사령관의 참모격인 남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만약 사라 레드우드가 제대로 된 정보를 판 게 맞다고 해도, 사람을 보내지 않는 게 낫다고.
“너무 위험합니다. 병력 손실 가능성도 크고... 어떻게 거기까지 간다고 해도 그를 만날 수 있을지 없을 지도 장담이 어렵습니다.”
“그렇겠지.”
양호석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다른 곳이라면 모를까, 거인의 숲이라니... 대체 어떻게 아직까지 살아있는 거지?”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사라 레드우드는 적어도 거짓말을 하는 여자는 아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혼란스러웠다.
게다가 그녀는 어떻게 그 정보를 파악한 걸까. 생존 확인 장치를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었던 게 맞다고 해도, 그것이 현재 위치까지 알려주진 않는데.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저쪽에 지인이 있으니까요.”
“그래주겠나?”
“예. 떠나기 전에 최종 정비를 하고 있을 테니, 시간은 충분합니다.”
부하 하나가 얼른 막사를 나섰다.
양호석 사령관은 여전히 탁자 위에 펼쳐져있는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정말로 그가 아직도 살아있는 거라면, 오히려 더더욱 그를 영입해야 맞지 않나.
욕심이 생겼지만, 애써 억눌렀다.
“생각보다 안정적인 것 같습니다. 이곳 말입니다. 이젠 자리를 잡았다고 봐도 될까요.”
부하 남자의 말에, 사라 레드우드는 어깨를 한번 으쓱거리며 주머니에서 전자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고인 물은 썩는다고? 큭....”
양호석이 했던 말을 따라하듯 중얼거리던 그녀는 그냥 웃어버렸다.
“그 고인 물이 자신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은 걸까.”
“듣는 귀가 많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말했잖아.”
무색 무취의 연기를 내뿜은 그녀는 다시금 한 모금을 깊게 빨아들이고 나서 한숨처럼 내뱉어 말했다.
“결국 꼰대들은 별 수 없는 거야. 시야가 좁아지거든. 아랫사람들만 불쌍하지.”
“어떻게 하실 겁니까?”
“뭘 어떻게 해? 알려주라고 하셔서 그렇게 했으니, 이제 우리 갈 길 가면 되지.”
“다시 가보지 않습니까? 그대로 두기엔....”
“불가능이야.”
“.......”
“알잖아. 우리 그릇엔 못 담아.”
“그를 담을 그릇이 있긴 할까요?”
“적어도 여기엔 없겠지. 늙은이들이 다들 욕심들만 많아서.... 저거 봐, 저거.”
막사에서 보았던 군인 하나가 차량을 점검하던 이들 중 하나를 슬쩍 불러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보였다.
“막을까요?”
“됐어. 숨길 필요도 없잖아. 직접 만난 걸 뭐라고 둘러대.”
전자담배를 주머니에 쑤셔넣은 그녀는 대기하고 있던 차량에 올라탔다.
“호크 캠프로 갈 거야. 그렇게 알고 준비시켜.”
“알겠습니다.”
“.......”
시트를 뒤로 기울여 반쯤 누운 사라 레드우드는 지금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당시의 광경에 잘게 어깨를 떨었다.
-역시, 맞네.
그리고, 그 악몽같던 상황을 아무렇지 않게 해결해준 남자의 목소리도.
-우리 구면이죠?
해맑게 웃던 얼굴을 떠올린 그녀는 오히려 어깨를 더욱 움츠렸다.
‘그 땐 괜찮았는데... 오히려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잊을 수가 없어. 그 눈빛.’
밝은 미소.
하지만 그 두 눈엔 다른 것이 담겨 있었다.
같은 인간을 바라보는 눈이 아니었다.
물론 금방 바뀌긴 했지만, 처음 보았을 때의 눈빛은 지금도 도저히 떨쳐낼 수가 없었다.
“담을 수가 없지. 나는 못 해.”
그녀는 잘게 떨리는 손으로 다시금 주머니를 뒤적여 전자담배를 꺼냈다.
“.......”
다시금 탁한 연기를 들이마시는 그녀의 머릿속에, 얼마 전 겪었던 그와의 만남이 다시금 어제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 * *
“그래서. 걔가 그렇게 했다고?”
삑! 삐익!
“아이고. 많이 아팠겠네.”
높다란 나뭇가지 위에 걸터앉은 최강혁은 날개를 퍼덕이며 그의 앞에 떠있는 새에게 맞장구를 쳐주고 있었다.
녀석은 어느새 적잖게 자란 ‘카멜레온 새’ 의 새끼였는데, 그 어미가 없는 사이 다른 영역에 들어갔다가 얻어맞고 온 모양이었다.
“내가 너희들하고 나름 의사소통이 되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근데 너는 왜 혼자 거길 가서 맞고 오냐. 살아서 온게 용하다.”
웃음 섞인 말투로 그렇게 이야기한 그는 허공에서 꺼낸 고기 한 점을 앞으로 살짝 던져주었다.
그러자 덥썩 받아먹은 새가 훌쩍 날아와 그의 옆에 앉았다.
“너네 엄마가 보면 화낸다. 나하고 놀지 말라는 것 같던데.”
삐익!
“전에 못 봤냐? 날 아주 죽일 듯이 보더라고. 아니, 그쪽이 먼저 노리던 사냥감이었는지 내가 알았겠냐?”
삑! 삑!
“그래서 양보도 해줬잖아. 근데 왜 화를 내냐 이거야. 자존심을 상한 건지....”
꽤나 자란 터라 이리 저리 성가셔서 뒤쪽으로 묶어버린 머리카락.
그 안쪽으로 손가락을 넣어 긁적거리던 그는 손가락에 묻은 기름기를 허벅지에 슥슥 문질렀다.
“혼자서 자르자니 겁나서 못하겠고... 제 때 감기라도 해야지.”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는 자연스럽게 들어올린 오른손을 살짝 털어, 그 손목의 스트랩에 걸려있던 릴리즈를 세워 잡았다.
강철로 만든 작은 집게 형태의 그것은 컴파운드 보우의 시위를 좀 더 편하게 당기고 발사하기 위한 보조도구였다.
맨손으로 당기다가 손가락 피부가 갈려보기도 하고, 활골무를 만들어도 얼마 못 가 깎여나갈 정도로 와이어의 장력이 어마무시했다.
하여 최종적으로 정착한 것이 릴리즈였고, 지금도 익숙한 동작으로 시위에 걸어 당겼다.
기긱.
들릴 듯 말 듯한 소리와 함께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가 곧 최대치에 이르렀다.
옆에서 삑삑거리던 새끼 새가 움찔 놀랄 즈음, 조준을 끝낸 최강혁이 릴리즈의 방아쇠를 살짝 건드렸다. 그러자 시위를 물고 있던 집게가 열렸다.
그러자 투웅! 하는 소리와 함께, 통짜 강철로 만들어진 화살이 허공을 가르며 내리꽂혔다.
투칵!
대략 50미터쯤 될까.
어슬렁 어슬렁 지나가던 덩치 큰 숲사슴 하나가 그대로 머리 옆을 관통당했다.
나름 단단한 머리뼈를 부수고 들어간 강철화살은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아예 그 머리를 지나 반대편 땅에 대각선으로 내리꽂혔다.
〈 40화 〉 040.
040.
삑! 삐익!
“넌 여기 있어. 아마 나를 봐서 널 살려보낸 것 같은데. 보답이라도 주고 와야지.”
그렇게 이야기한 최강혁은 지금껏 앉아있던 가지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거의 20미터를 넘는 높이였지만, 지면을 딛는 소리는 고작 2층 침대 정도에서 뛴 것과 비슷했다.
부스럭.
그렇게 즉사한 숲사슴의 사체에 다가갈 때.
문득 근처의 풀숲에서 고개를 내미는 늙은 호랑이 하나가 있었다.
“살아있었냐?”
이미 녀석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최강혁이 아무렇지 않게 묻자, 마치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늙은 호랑이가 혀를 날름거렸다.
“음?”
이어서 한쪽 귀를 쫑긋거리고는 제 턱을 긁는 모습이, 나름의 언어라는 것을 알게 된 건 녀석의 동족들을 관찰한 지 몇 달이나 지나서였다.
이 숲에는 일반적인 짐승이나 몬스터보다 더 높은 지능과 능력을 지닌 개체들이 산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언어를 익혀보려 시도한 건 그보다 좀 더 후의 일이었다.
“인간이라고? 얼마나 왔는데.”
활을 인벤토리에 넣은 최강혁은 마치 녀석을 흉내내듯 자신의 두 손을 이용해 이런 저런 동작을 하며 말했다.
신기하게도 녀석이 그 괴상한 수화를 알아보고는 다시금 몇가지 행동을 했다.
“숫자가 적은데? 중화기도 없으면 지난 번 그 사람들은 아닌 건가... 갔다 오면서 들러야겠군. 알겠어. 말해줘서 고맙다.”
그렇게 대답을 전한 후, 그는 인벤토리에서 뼈다귀를 잘 발라낸 몬스터 고기를 한 덩이 크게 떼어내서 녀석 쪽으로 던져주었다.
어흥!
늙은 호랑이의 턱과 이빨은 이제 단단한 뼈를 제대로 부수기 어려워져서, 그가 주는 살코기를 무척 좋아했다.
녀석과 친해진 건, 늙어버린 녀석을 노리고 떼로 덮쳐오던 젊은 호랑이들의 공격에서 구해준 다음부터였다.
“원래는 자연의 순리에 맡겨야 맞지만, 내가 이곳에 끼어든 것부터가 문제였으니.”
사실 나름의 이유도 있었다.
그에게 이곳 호랑이들의 언어를 가르쳐줄 만한, 상대적으로 만만한 녀석이었기 때문이었다.
“뭐, 다들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그런 식으로 숲에 친구들이 늘어났다.
그동안 생존해온 건 그렇게 하나 둘 늘어난 지인과 친구들이 도와준 덕분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그들이 최강혁을 숲의 이웃으로 인정해준 건, 그가 그만큼 이곳에 어울리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어디 보자. 동쪽 숲의 왕이라면 지금쯤 거기에 있겠구나.”
숲은 수많은 동식물들, 또 그보다 많은 몬스터들의 영역으로 나뉘어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몬스터들을 기준으로 보면, 대략 10곳 정도로 구분할 수 있었다.
숲의 주민들은 그들을 일종의 왕으로 여기고 있는데, 지금 그가 가려는 곳은 동쪽 숲의 왕이 있는 곳이었다.
새끼 새가 혼자서 그쪽 영역에 갔다가, 몇 대 맞기는 했어도 살아서 돌아온 건 그쪽 왕의 배려일 가능성이 컸다.
그를 보아 봐준거라던 식의 이야기는 농담이 아닌 것이다.
“이 정도면... 두 마리 쯤 더 잡으면 되겠다.”
자신의 몸집보다 훨씬 커다란 숲사슴을 아무렇지 않게 인벤토리에 넣은 그는 비슷한 몸집의 짐승 두어 마리를 더 사냥하며 동쪽 영역으로 진입했다.
끼익! 우끽!
“잘 있었어? 왕을 만나러 왔어.”
동쪽 영역의 경계 초입에서부터 시작된 수많은 시선들.
작은 다람쥐에서부터 제법 커다란 앵무새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들의 이목이 그를 향해 꽂히는 듯 했다.
그리고 최강혁은 나뭇잎 저편에 숨은 채로 그를 내려다보던 원숭이를 발견하고 또 다른 방식의 수화를 행했다. 그것은 호랑이와는 다른, 원숭이들이 사용하는 언어체계였다.
우끼끽!
그것을 본 원숭이가 반대쪽으로 휙휙 움직였다. 안내해주는 것임을 알기에, 얼른 그쪽 방향으로 움직이니 머지 않아 동쪽 숲의 왕을 만날 수 있었다.
그호옹.
작은 동산처럼 쌓여있는 짐승과 몬스터의 뼈들.
지난 번에 왔을 때 대충 청소해주고 간 것 같은데, 또 이렇게 쌓여있으니 참 대단했다.
‘이렇게 잡아먹어도 여전히... 아니지. 이렇게 줄이지 않으면 숲이 터져나갈 정도로 번식력들이 좋은 거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던 최강혁은 뼈무덤의 안쪽, 나무에 등을 대고 긁는 중이던 거대한 곰을 볼 수 있었다.
사실 비유할 만한 대상이 곰일 뿐, 정말 곰은 아니었다. 애초에 몸집부터가 3층짜리 건물 하나 정도에 달했으니.
“새끼 새를 살려 보내줬더군. 그 어미가 고마워할 거야.”
최강혁이 전한 제스쳐에, 등을 긁던 것을 멈춘 곰이 별 거 아니라는 듯 가볍게 콧바람을 내뿜었다.
고작 그 정도에도 근처에 있던 뼈무덤 꼭대기가 살짝 무너져버리는 게 보였지만, 최강혁은 나름 안심했다.
‘지금은 기분이 좋은 편이네. 다행이다.’
동쪽 왕이 화가 나면 인근의 다른 왕들까지 몸을 사리곤 한다. 같은 왕이지만 격이 다르다고 해야 할까.
“보답이라기엔 뭐하지만, 입가심은 될 거야.”
최강혁은 왕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가 그 앞에 이것 저것 꺼내놓았다.
오면서 잡은 것들에 더해, 그 이전에 잡았던 것들까지 몇 마리 섞어 거의 10마리에 달하는 대형 사냥감들이 수북하게 쌓였다.
흐오옹-
동쪽 왕은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거의 사람 크기에 달하는 앞발톱으로 땅을 긁었다.
“그럼 가볼게. 아. 이것들 치워줄까?”
가까이 있던 뼈무더기를 가리키며 간단한 동작을 보이자, 큼직한 짐승 하나를 거의 절반 가까이 입에 넣고 우지끈 씹던 왕이 마음대로 하라는 듯 무시했다.
“무시는 허락이지.”
최강혁은 그곳에 있던 뼈들을 치워주었다.
적지 않은 마나를 얻을 수 있는 양이었다.
“갈게.”
벌써 그가 준 것들의 절반 이상을 먹어치운 왕을 향해 다시금 인사를 건넨 그는 조용히 뒷걸음으로 물러났다.
아무리 왕과 안면을 트고 지낸다고 해도 친구가 된 것은 아니었기에, 그 앞에서 등을 보이는 건 그리 현명한 행동이 아니었다.
“인간들을 보았다고 했었지.”
늙은 호랑이가 알려준 정보.
최강혁은 다시금 원래의 영역으로 돌아간 후 그쪽 외곽으로 향했다. 그를 경계하는 녀석들은 많았지만, 직접 나서서 공격하는 경우는 없었다.
한 지역의 왕까지는 아니어도, 최강혁 역시 나름의 영향력을 가진 지역 영주 정도는 되었다.
경계심이 아니라 두려움의 시선으로 보는 이들이 있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휘익-
그렇게 걷던 최강혁이 짧게 휘파람을 불자, 나무 위에 있던 다람쥐 하나가 쪼르르 내려와 그의 눈높이에 멈추었다.
“오. 이제 다 나았네.”
얼마전 나무전갈로부터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다친 녀석이었는데, 다행히 목숨을 건진 모양이었다.
“들고 갈 수 있겠냐?”
그는 틈틈이 주워 모았던, 밤과 비슷한 나무 열매 중 하나를 꺼내 내려놓았다.
녀석의 몸집과도 비슷한 크기라 어떻게 가져가나 했는데, 역시 들고 가긴 무리였는지 다시금 나무 위쪽으로 쪼르르 올라갔던 녀석이 제 가족들을 데리고 내려와 그 자리에서 갉아먹기 시작했다.
“하나 갖고 안 되겠구나.”
최강혁은 같은 열매를 몇 개 더 꺼내주었다.
이유 없이 베푸는 건 아니었다.
뭔가 이질적이거나 위험한 것이 숲에 접근할 경우, 가장 먼저 알려주는 이들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작은 친구들이었다.
‘평소에 잘해주면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받지.’
그 근처에서 로프를 매어둔 나무를 발견한 그는 그곳으로 올라가, 나무 위에서 이동을 이어갔다.
“음... 전투가 있었던 모양이네.”
늙은 호랑이가 알려준 곳에 도착했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바닥에 남아있는 흔적들과 피에 젖어 버려진 헝겊, 곳곳에 남아있는 탄피를 보니 확실히 전투의 흔적이었다.
“저쪽인가.”
지상에 내려가지 않고도 온갖 흔적들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시력이 좋아진 그는 방향을 바꾸어 나아갔다.
“이쪽은 안 좋은데.”
동쪽 왕의 영역으로 향하는 길목이긴 하지만, 그의 영향력이 조금 약한 곳.
그곳엔 좀 더 촘촘하게 우거져있는 나무들과, 그 사이사이를 메우는 거미줄들이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곳에서 위험한 건 거미들이 아니었다. 머리 위를 가득 덮은 거미줄에 시선을 빼앗긴다면 큰 낭패를 볼 것이다.
“저런 식으로 말이지.”
-아아악!
나뭇가지에 복부를 꿰뚫린 남자의 비명.
다급히 그를 끌어낸 동료들이 사방으로 총을 갈겨댔지만, 그들이 쏜 총알은 거대한 나무 괴물들에겐 그저 모기가 문 정도의 위력에 불과했다.
“흐음.”
최강혁은 적당한 거리에서 지켜보았다.
인간이니까 당연히 구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은, 아마도 1년 전쯤의 그였다면 해볼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다들 제 욕심대로 사는 거지.’
그동안 벌목을 목적으로 숲에 접근했던 무리들이 있었다. 상당한 병력을 앞세우고, 대형 벌목 기계와 중장비를 밀어붙였지만 결과는 퇴각.
‘숲을 너무 쉽게 봤어.’
그 또한 부수적인 피해를 입었다.
그가 사는 나무 쪽으로 박격포를 자꾸 쏴대서 다른 쪽을 노리는 게 어떻겠냐고 좋게 이야기했더니, 이쪽에 대고 총을 쏴댄 것이다.
‘그땐 나도 좀 화가 났었지.’
그들을 죽이진 않았다.
하지만 죽임을 당하는 이들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아마 그 때부터 지금 같은 태도가 되었던 것 같기도 했다.
“음?”
하지만 무심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최강혁의 얼굴이 조금 바뀌었다.
모여있던 한 분대 정도의 인원 중에서 아는 얼굴을 발견한 것이다.
“그 여자네.”
사라... 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인벤토리를 열어본 그는 아직 그곳에 있던 명함을 찾아냈다.
“맞아. 사라 레드우드.”
저 여자가 이런 곳엔 어쩐 일일까.
나무를 하러 온 모양새는 아닌데.
“구해야 하나... 뭐, 궁금한 것도 있으니.”
자신이 있던 캠프의 근황은 어떻게 되는지, 혹시 고윤호씨나 황수찬씨가 어떻게 지내는지 아는 게 있는지.
“어디 보자. 여기있군.”
인벤토리에서 컴파운드 보우가 아닌, 평범한 구조의 강철 크로스보우를 꺼낸 그는 새총의 고무줄을 당기듯 쉽게 볼트를 장전하고 그 앞에 뭔가를 부착했다.
투웅- 퉁! 투웅-
연거푸 장전과 발사를 이어갔다.
물론 그런 평범한 볼트가 총알도 소용 없는 저 나무 괴물들에게 타격을 줄 수 있을 리 없었다.
“이 정도면 대충 되겠지.”
하지만 그가 노린 건 따로 있었다.
볼트 앞에 부착했던 것.
숲의 식물들과 여러 종류의 꽃에서 추출해 극도로 농축시킨 점액질.
그것은 볼트가 명중함과 동시에 그곳에 부착했던 작은 주머니에서 터져나와, 그 주변에 찐득하게 달라붙었다.
그리고.
잠시 후 변화가 시작되었다.
“역시, 맞네.”
멀리서부터 소리를 내며 접근한 그는 다급히 그를 겨누다 얼른 아래를 향하는 총구들을 보았다.
“우리 구면이죠?”
나름 웃는 얼굴로 다가갔지만, 왠지 다들 경계하는 표정이었다. 특히 그 안쪽에서 보호를 받고 있던 사라 레드우드의 얼굴이 가장 심각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이쪽을 마주보던 그녀는 애써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고는 얼른 주위를 돌아보았다.
마치 악몽 속의 괴물들처럼 사방을 에워싼 채 날카로운 가지들을 찔러오던 거대한 나무들.
총알에 유탄까지 쏴댔음에도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던 놈들이, 어느 순간 갑자기 사방으로 흩어져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놈들은 개미를 무서워하죠. 특히 흰개미를.”
그가 사용한 점액질은 흰개미들이 환장하는 것들만 골라 농축한 것이었다.
아주 먼 거리에서도 그 냄새를 맡고 몰려올 정도니까, 그걸 몸에 묻힌 나무들이 어떻게 될 지는 뻔한 이야기였다.
“...아.”
그저 개미 운운할 뿐 자세한 설명은 없었다.
하지만 사라 레드우드는 지금 나타난 최강혁이 그것들을 몰아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얼핏 나무에 틀어박히는 화살 비슷한 걸 보기도 했고.
“역시, 당신이 맞군요.”
“최강혁입니다. 명함은 잘 갖고 있어요.”
“아....”
그녀는 할 말이 많아보였지만, 무엇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최강혁은 일단 부상자들을 수습하라 이야기한 후, 지금보다는 덜 위험한 곳으로 그들을 데리고 갔다.
〈 41화 〉 041.
041.
“내 흔적을요? 그런 걸 남겼었나.”
“거의 없었어요. 발자국을 발견했는데, 보폭이 너무 넓어서 추적하기 어려웠죠. 거의 걷지 않고 달린 것 같던데요?”
“맞아요. 그게 남아있었구나.”
“그걸 찾은 건 꽤 되었어요. 설마하니 이곳에 계실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거든요.”
“좀 위험한 곳이긴 하죠.”
“조금이 아닌 것 같은데....”
사라 레드우드는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들었다. 최강혁은 그것을 ‘숲 깊은 곳에 있는 꽃잎을 따서 달인 물’ 이라고 했다. 피로를 풀고 심신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과하게 마시면 너무 늘어져서 아무 것도 못하게 될 수 있지만, 적당히 한 두잔 정도는 괜찮다는 모양이었다. 다른 이들에게도 한잔씩 나눠주었다.
“캠프는 어때요?”
“어느 캠프요? 아... 최강혁씨가 계셨던 곳 말이군요.”
“예.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은데, 그래도 궁금하네요.”
“뭐, 괜찮아요. 적어도 겉으로는요.”
“속은 안 괜찮다는 건가요?”
최강혁은 의아해했다.
“그... 사령관이 오고 나서 안정시킨 것 아니었나요? 강하게 휘어잡을 생각인 것 같던데요.”
“그랬었죠. 낙하산이 한 명만 떨어졌다면 문제 없었을 거예요.”
“...누가 또 왔어요?”
“또 왔고, 또 왔고, 계속 왔죠.”
부대 사령관은 한 명 뿐이다.
하지만 위원회의 간부라느니, 기업 합의체의 대변인이라느니 하는 온갖 감투들이 찾아와 캠프에 숟가락을 얹었다고 했다.
“정부에서 지분을 쓸어담았다고 알고 있었는데요.”
“군부의 지분은 그렇지만, 해당 캠프는 군인들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 이미 반 이상 민간 기업이 차지한 모양새였죠.”
초기에는 기지 방어와 외부 정찰 및 확장 모두에 걸쳐서 당연히 군부의 입김이 가장 강력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 어느 정도 안정된 캠프에선, 그들의 영향력이 줄어들 수 밖에 없다는 것 같았다.
“더 이상 군인들만이 유일한 무장세력인 것도 아니고요.”
“예?”
“새로 온 이들에, 그들이 데리고 온 인원들까지 추가되었죠. 사병들이요.”
“사병들이 있어요?”
“개인경호라고 하지만, 결국 말장난이니까요.”
그렇게 이야기하던 사라 레드우드는 이어진 최강혁의 물음에 잠깐 생각에 잠겼다.
“고윤호씨라면... 아. 그 분은 그 때 문제 없이 은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어요.”
“그렇군요. 잘 됐네요.”
“그리고, 황수찬씨라는 분은 제가 잘 모르는 사람이라서. 어디 소속이죠?”
“전투수송부였나? 그 비슷한 느낌이었던 것 같은데요. 그 이후엔 제가 추방되어서 소식을 못 들었고요. 운전병이거든요.”
“전투수송부가 맞을 거예요. 하지만 그쪽은...”
“아마 위험하겠죠.”
“그래도 운전병이면 최우선 보호 대상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그쪽 캠프는 외부 활동도 방어적으로 운용하니까요.”
“그러면 좋겠네요.”
듣고 싶은 이야기는 다 들었다.
하지만, 사라 레드우드의 이야기는 그때부터 시작인 것 같았다.
알고보니 그녀는 최강혁을 찾기 위해 찾아왔다고 했다.
그의 생존을 알고 있었고, 그 근거를 직접 보여주기도 했다. 그의 피를 묻힌 생존 확인 장치였다.
“이게 그거라고요? 왜 그쪽이 이걸?”
이어진 설명.
최강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종의 테러단체 소속이 되어버렸다는 걸 듣고 황당해했다.
“와일더 클랜이라... 혹시 상징 같은 게 있나요? 깃발 같은 거.”
“깃발이라면 아마 찍어둔 게 있을 거예요.”
사라 레드우드는 얼른 부하에게서 넘겨받은 타블렛을 켜, 사진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뭔가를 찾아 보여주니, 최강혁의 눈썹 끝이 꿈틀거렸다.
“보신 적 있나요?”
“예. 어쩌다 보니.”
추방 초기, 벌판에서 사람들을 처형했던 무리가 다름아닌 와일더 클랜이었다.
‘징벌이 아니라 약탈 상황이었던 걸까.’
최강혁은 인벤토리에 갖고 있던, 당시 수습한 깃발을 꺼내 보여주었다.
“그러면 혹시, 이건 어디 소속인지 아시나요?”
“이건....”
사라 레드우드는 이곳에서 그걸 볼 줄은 몰랐는지 의아해했다.
“호크 캠프의 깃발인데, 어디서 나신 거죠?”
“호크요?”
“이곳에서 멀리, 동쪽에 있는 캠프입니다.”
사라의 부하가 짧게 끼어들었다.
고개를 끄덕인 최강혁이 말을 이었다.
“그곳의, 소규모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10명 규모의 수송대를 약탈한 것 같더군요.”
당시 보았던 상황을 이야기해주니, 그녀가 그럴 법 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송대는 10명 규모로 운용되지 않아요. 아마 다른 곳에서 습격이 있었고, 도피 과정에 대열에서 낙오된 이들일 거예요.”
“그렇군요.”
“혹시 유류품 같은 건 없나요?”
“그런 건 없지만... 종이 가진 것 있어요?”
“종이요? 잠시만요.”
그녀가 주위를 돌아보자, 부상자들을 돌보고 있던 이가 자신의 배낭에서 서류철을 꺼내어 한 장을 뽑아 주었다.
“더 드릴까요?”
“아니요. 이거면 될 것 같아요.”
그것을 받은 최강혁은 인벤토리에 넣은 후, 데이터 저장소에서 당시 스캔했던 희생자들의 목록을 찾아냈다.
‘얼굴하고 신체사항, 몇몇 특이한 것들만 기록해주면 되겠지.’
스캔 데이터를 종이에 옮기는 건 간단했다.
잉크 대신 쓸만한 염료도 있었기에, 검은 색이 아니라 짙은 녹색이긴 해도 누구나 알아볼 만한 수준의 인쇄물이 만들어졌다.
“이건....”
“당시에, 뭐 사진 비슷하게 찍어두었다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숨겨진 한 수 정도는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정말이었군요.”
그녀는 각성자들 중 여러 부류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누군가는 가진 능력보다 훨씬 부풀려 몸값을 높이려 하고, 누군가는 오히려 능력을 숨기고 평범하게 살아가기도 했다.
그리고 최강혁.
그는 죄수라는 특수한 상황에 있는 터라, 아마도 본래 능력 일부를 감추고 있을 거라는 판단을 했다. 가진 능력이 좋을수록 이용당하기 쉬운 입장이니까.
‘이젠 숨길 생각이 없다는 걸까.’
그녀는 숲에서 보았던 그의 눈빛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많이 쓰죠? 그래도 몸에 좋아요.”
“아. 네.”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그런 곳에서 야영을 할 수는 없었는데, 다행히도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최강혁이 안내한 곳으로 이동했다.
평범한 나무인 줄 알았는데, 그 내부에 작은 집이 들어있었다.
“이런 게... 10곳이 넘는다고요?”
“돌아다닐 일이 많아서요.”
최강혁의 주 거처는 따로 있다고 했다.
지금 이곳은 일종의 별장이라고.
사람 수가 있으니, 좀 넓은 곳이 좋을 것 같아 데려왔다고 말이다.
“불을 피우거나 음식 냄새를 풍기는 게 아니면 큰 문제 없을 겁니다. 저쪽이 간이 욕실이거든요. 물 채워두었으니까, 샤워까진 어려워도 간단하게 씻는 정도는 될 겁니다.”
씻고 나면 어떻게 배수구를 열고 오수를 버리는지 같은 것을 이야기해준 그는 마지막으로 사라 레드우드에게 돌아왔다.
“혹시 주변 지도 같은 것 있습니까? 제가 가진 것하고 비교 좀 해보려는데.”
“아. 당연히 있죠. 잠시만요.”
그녀는 아까처럼 타블렛을 보여주었다.
거의 항공사진에 준하는 수준의 상세 지도가 수십 장이나 되었다.
“드론으로 찍은 건가요?”
“맞아요. 고고도 드론이죠. 오래 띄우진 못하지만, 그래도 쓸모가 많아요.”
“여기가....”
“최강혁씨가 있던 캠프죠.”
“위에서 보면 이런 모습이군요. 이쪽은 뭐죠?”
“확장 공사 당시에 찍었던 거예요. 지금은... 이쪽까지 장벽이 넓어졌죠. 미국 구역이고요.”
“아. 미국.”
“원한다면 그쪽으로 선을 대줄 수도 있는데. 생각 있어요?”
그녀가 물었다.
미국에서 나서준다면, 어떤 식으로든 그를 빼줄 수도 있을거라고. 하다 못해, 영주권이라도 줄 수 있다고.
“글쎄요.”
“이곳에서 나가고 싶지 않아요?”
“나가봐야 갈 곳이 있을까 모르겠는데.”
“집은요? 가족들이 있잖아요. 듣기로는 누님 한 분이....”
그렇게 묻던 사라 레드우드는 아무렇지 않게 웃어넘기는 최강혁의 반응을 보자 왠지 더 묻기 어려워졌다.
아마도 그녀가 알지 못하는 사연이 더 있는 것 같았다.
“그러면, 사령관과 부사령관이 작당모의를 했다는 이야기네요.”
대화는 다시금 원점 근처로 돌아왔다.
캠프 사령관은 최강혁에게 추방형을 내리길 원했고, 양호석 부사령관은 그것에 동의하는 대신 자신이 정한 위치를 건의했다.
이는 부사령관 쪽에서 그곳에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구출하는 방식으로, 그를 데려가려 한 것이다.
하지만 사령관이 부사령관과의 합의를 깼고, 여러 불협화음이 얽혀 지금같은 결과가 되었다.
“그렇게 된 거군요.”
최강혁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억울하거나 화가 난 얼굴은 아니었다.
만약 부사령관의 생각대로 되었다면 지금쯤 큰 발전 없이, 또 다른 개척캠프에서 그들이 원하는 일을 하고 있었을 것 같았다.
‘능력을 숨기느라 애를 먹어야 했겠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사라 레드우드가 한 가지 더 알려주었다.
“지금은 둘 다 사령관이 되었어요.”
“양호석씨도요?”
“네. 말씀드렸던 그 개척캠프를 혼자 세우다시피 했으니까요.”
기존 캠프에선 비위혐의로 파면되었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 조금씩 자신의 사람들을 만들어두었던 그였다.
사령관이 새로 부임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양호석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사람과 물자를 밖으로 빼돌렸다고 했다.
아마 그게 당시에 외부로 자주 나간다던 이유인 것 같았다.
“뭔가 이상하긴 했어요. 내가 고쳐준 것들이 바깥으로 반출된다는 이야기가 들려서.”
예비 물자 정도로 창고에 쌓아둘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현장에서 쓰이는 것들에 비해서 그렇게 좋은 장비들도 아닌 것 같았는데, 사실은 그렇게 고친 것들을 또 다른 개척 캠프에 보급하고 있던 걸까.
“한두푼 드는 게 아닐 것 같은데요.”
“그만큼 뒤로 챙긴 게 많았죠. 지금은 그러지 못하고 있지만... 그 대신 이제 그쪽 본국과 별도의 라인을 두고 있어요.”
“본국이면, 한국이요?”
“네.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 기존 캠프에서 연결 설비를 빼돌린 것 같더군요. 수완이 좋다고 해야 할지....”
“그러면 그곳에서도 한국 사람들이 오가고 그러는 건가요?”
“아니요. 양호석의 캠프에 있는 건 간이설비거든요. 일정량의 물자까지는 주고 받을 수 있지만, 사람은 통과하지 못해요.”
“아....”
“하지만 정식 설비를 공수받아 이쪽에서 조립하는 건 가능하죠. 그도 그것을 계획하고 있는 것 같고요.”
“이곳이, 돈이 많이 되나보네요.”
“엄청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겐 기회의 땅이 되기에 충분하죠.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만 제외하면요.”
“그쪽도 돈을 벌려고 하는 건가요?”
최강혁이 물었다.
사라 레드우드는 조금 민망해진 얼굴이었지만, 짐짓 아무렇지 않게 찻잔을 들었다.
“그것도 이유 중 하나겠지요.”
“위험한 곳인데요.”
최강혁이 말했다.
그녀는 그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 수 있었다. 당장 오늘만 해도 그렇다.
최강혁이 제 때 구해주지 않았다면, 오늘 이 숲에서 적지 않은 이들이 죽었을 것이다.
‘전부 죽었을 수도 있지.’
그녀는 복부에 붕대를 감은 채 누워있는 부하를 보았다.
다행히 늦기 전에 조치를 취해서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워낙 유능한 인물이었기에 당분간 전력 외로 분류해야 하는 건 뼈아팠다.
“정말 생각 없어요?”
이미 거절의 의사를 들었지만, 그녀는 다시금 물어보았다.
생각을 바꿀 수만 있다면 열 번이고 백번이고 물어볼 수 있었지만, 그의 대답은 여전히 같았다.
“5년의 추방형이었죠. 마저 채울 생각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미....”
“캠프에서 그렇게 분류했다고 해서, 제가 그곳을 포기해야 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최강혁은 단단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
“제가 죄인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적어도 고향에서 받았던 형량 만큼은 제대로 치를 생각입니다. 그게 제 죗값이니까요.”
“추방형은 이곳에서만 존재해요. 당신 본국에서 내린 형이 아니잖아요.”
“하지만 그곳에서 보낸 사령관이죠.”
“.......”
이런 눈빛을 가진 이는 설득할 수 없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왠지 매달리고 싶어졌다.
“이런 곳에서 몇 년씩 썩힐 이유가 있을까요? 당신은 젊어요. 성장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
“썩지 않아요.”
“네?”
“성장하고 있어요. 충분히.”
그의 대답.
그저 말꼬투리를 잡는 게 아니었다.
단호한 눈빛은 정말로 자신이 성장하고 있음을 강변하고 있었다.
〈 42화 〉 042.
042.
‘그러고 보니.’
사라 레드우드는 문득 지금까지 의식하지 못했던 최강혁의 변화를 새삼 깨달았다.
그의 눈빛과 존재감에 가려져있던 많은 것들.
당장 키도 전보다 커진 것 같고, 두텁게 자리잡은 단단한 근육도 그때와 달랐다.
‘아니. 그 때도 몸은 좋은 편이었지만....’
한 번 눈이 가기 시작하자, 이상하게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민망해질 것 같아서, 그녀는 애써 찻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여기까지 오셨는데 빈손으로 돌아가긴 좀 곤란하시겠네요.”
“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녀는 말 뒤를 흐렸다.
최강혁이 허공에서 꺼낸 주먹 크기의 돌을 보자 저절로 입술에 힘이 풀렸다.
“이건....”
“그쪽이라면 알 것 같은데요.”
“몬스터의 핵이잖아요.”
“역시 알아보시네요.”
“하지만, 이 정도 크기라면 적어도....”
“드릴게요. 잘은 모르지만, 나름 값어치가 있을 거예요.”
“당연히 값어치가 있죠! 그렇게 쉽게 이야기할 수준이 아닌데.”
몬스터의 핵.
수많은 몬스터들을 사냥하고 그 사체를 헤집어도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광석.
혹자는 몬스터의 몸에 쌓이는 일종의 사리와 비슷한 것이라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몬스터의 종이 달라도 그 핵은 대부분 비슷한 효과를 갖고 있었다.
“가공해서 아티팩트에 넣을 수도 있고, 정제 가공해서 인간이 복용할 수 있는 약을 제조할 수도 있어요.”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수명 연장의 효과도 있다던가. 그것을 노리고 몬스터 사냥에 뛰어드는 이들도 있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나오진 않는데....”
“대신 부탁 좀 들어줘요.”
“얼마든지요. 무얼 해드릴까요?”
“일단은....”
생각에 잠겨있던 최강혁이 입을 열었다.
사라 레드우드는 경청하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여겼는지, 서둘러 타블렛을 켜고 메모하기 시작했다.
* * *
“그래서, 뭐라고 하던가?”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돌아온 남자가 쭈뼛거리며 말했다.
“믿기 힘들지만....”
“힘들지만?”
“직접 보았다고 했습니다.”
“직접? 눈으로 보았다는 건가?”
양호석 사령관의 물음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눈으로 보기만 한 게 아니라, 그가 제공한 거처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떠났다고 했습니다. 떠날 땐 숲 바깥까지 안내와 보호도 해줬고요.”
“야이 씨! 구라잖아.”
“그러니까 믿기 힘들다고 했잖아요.”
“조용, 조용!”
양호석은 투덜대던 부하를 향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이야기했나?”
“대충 들었습니다. 숲 속에서 몬스터들과 조우했고....”
간략한 설명.
그것을 들은 이들은 저마다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충분히 꾸며낼 수 있을 이야기지만, 또 그렇게까지 말을 지어낼까 싶기도 했다.
“사라 그 여자는 구라 안쳐.”
“그 부하는 칠 수도 있지.”
“애초에 말이 되냐?”
“거기서 산다고? 일년을 넘게?”
부하들의 반응은 대부분 불신 쪽이었다.
양호석의 생각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다르지 않았다.
그녀의 영입 제안을 거절했다면, 지금 그들이 가도 비슷한 결과일 테니.
“방식을 바꿔야겠군. 본국에 서신을 써야겠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그는 지금도 자신의 죄를 반성하고 있는 거야. 나라에서 부여한 형량을 충실히 이행하겠다는 것만 보아도 그렇지.”
짐짓 고개를 끄덕인 양호석은 본국에 보낼 서신의 형식과 내용을 생각했다.
“그러니까... 국가의 명령으로 그의 소속을 가져오면 된다.”
최강혁이 와일더 클랜에 합류한 것이 아님을 밝히고, 그것을 활용해 겸사겸사 배지현 준장의 실책을 공격한다.
“아무리 죄수라고 해도, 각성자는 국가의 유용한 자산이다. 그런 이를 죽음에 이르게 할 목적으로, 국가 자산에 손실을 끼치려 했다.”
그렇게 그녀의 판단력에 의문을 제기함과 동시에, 해당 죄수의 보호 관찰 권한을 이쪽으로 가져온다.
“국가의 명령이 떨어진다면 수긍할 거야. 그런 인물일 테니.”
“뭐, 나름....”
“그렇게 쉽게 될까요?”
“일단 뭐라도 해봐야지. 아무 것도 못하고 가만히 있는 것보단 나을 테니.”
정말로 최강혁이 그 숲에서 1년을 넘게 거주하고 있다면, 그만큼의 무언가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그를 데려온다면...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것이다.
부하가 가져온 군용 랩탑을 책상 위에 올려둔 양호석은 자못 진지한 얼굴로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 * *
킥킥킥.
겉보기엔 평범한 거목.
그런데 문득 그 내부에서 의문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다름아닌 최강혁이었다.
“아, 이게 여기서 끊기네.”
한창 재미있게 보고 있던 웹툰이 계속 이어지지 못하고 끝나버렸다.
“별 수 없지.”
당시엔 완결이 나지 않은 작품이었다고 했다.
그나마 본국과 소통할 때마다 아는 이들에게 부탁해, 최신화를 구매해 담은 USB스틱을 넘겨받는 정도가 최선이라나.
“이건 완결까지 있구나.”
지금 그가 만지고 있는 건 사라 레드우드가 주고 간 타블렛이었다.
몬스터의 핵이 워낙 값진 물건이라서 그냥은 갈 수 없다더니, 그들이 지니고 있던 것들 중 몇 가지를 남겨두고 갔다.
“비쌀 것 같긴 했지.”
최강혁에게도 그리 흔히 얻을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 어떤 효과를 갖고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의 경우, 흡수를 통해서 몸에 담으면 최대 마나량을 증가시킬 수도 있었다.
‘단순히 회복하는 게 아니라, 그릇 자체를 키워주니까. 당연히 비싸겠지.’
그래도 그 정도는 내밀어야 자신이 약하지 않다는 걸 알아줄 것 같았다.
약해보이지 않아야 그의 부탁을 무시하지 않을 것 같기도 했고.
“음. 배터리가 얼마 안 남았네.”
그녀가 두고 간것들 중에는 야전용 태양광 충전장치와 대용량 보조배터리도 있었다.
아까 오전에 나무 꼭대기 근처에다가 설치해두었으니, 지금쯤 적잖게 충전이 되었을 듯 했다.
“아직 남아있었나? 대충 털었더니.”
문득 목덜미가 간지러워서 긁어보니 잘린 머리카락 두어 가닥이 떨어져나왔다.
머리는 감았지만, 옷에 붙어있던 것들이 아직 남아있던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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