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ilado 4

〈 26화 〉 026.
026.
최강혁, 고윤호, 운전병 황수찬.
그렇게 세 사람은 지난 몇 달간 거의 친구처럼 가까워졌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근처에서 생활했고, 식사 또한 같은 차를 타고 함께 가서 먹었다.
이런 저런 잡담 속, 그저 분위기에 따라 한 두 마디 꺼내놓던 각자의 개인사 또한 조금씩 쌓여가다보니 이제는 적지 않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기도 했다.
“본인 의사는 아니었겠네요.”
최강혁은 기존 운전병이었던 황수찬과 달리, 차량에서 내리지 않고 의자를 뒤로 눕히는 새 운전병을 흘깃 보았다.
다소 게을러보이는 모습이긴 했지만, 얼핏 스치는듯한 눈빛이 자신을 향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뭔가 있는데.’
그런 생각을 할 때, 앞에서 슬쩍 몸을 돌려 차량을 등진 고윤호가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차출이었죠.”
“아주 바뀐 겁니까?”
“그렇습니다. 저도 곧 그렇게 될 거고요.”
“예?”
“일주일 후, 사령관이 새로 부임합니다. 전에 이야기했던....”
“낙하산이요.”
“예. 지금부터 일주일동안, 내려오기 전 마지막으로 터를 닦는 작업이 진행될 겁니다. 이미 시작되었고요.”
건너와서 이것 저것 손을 대려면 마찰도 있을 거고 반감도 나올 것이다.
그러니 그 전에, 부임하기 전에 미리 수족들을 깔아놓고 사전작업을 하는 것. 고윤호는 몇 달 전부터 벌어진 일들이 그런 작업의 일환이었다고 했다.
“갑자기 파견 직원들이 늘어났던 그것부터 시작이군요.”
“예.”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일단,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은데요.”
“안으로 들어가시죠.”
지금의 운전병은 상시 배속이 아니라 오늘 하루만 임시로 데려온 거라고 했다.
물론 감시 역할도 있는 모양이지만, 정확한 사정은 알지 못한다는 것 같았다.
“후우.”
작업장으로 들어온 고윤호는 최강혁이 내민 의자에 앉았다.
이어서 슬쩍 코에 맡아지는 향에 고개를 돌리니, 어디서 났는지 뜨끈한 커피 한잔이 최강혁의 손에 들려있었다.
“부대식당의 후식입니까?”
“리필을 좀 많이 받았거든요.”
“...각성자는 좋네요.”
“저도 동감합니다.”
살짝 입을 축인 고윤호는 머릿속으로 정리한 이야기들을 천천히 풀어놓았다.
그 중에는 지금까지 자신이 알지 못했던, 오늘에서야 비로소 확인했던 사항들도 섞여있었다.
“본국에 보고를 안 했다고요?”
“각성자가 있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지내기로 협의했다는 정도만 보고한 것 같습니다. 이곳 작업장이나 재생품 같은 건 보고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야기는 부사령관이 개인적으로 행했다는 뜻이었다. 분명 그 일을 통해 금전적인 이득이 발생했을 텐데.
“착복입니까?”
“가능성 높지요.”
“.......”
비리 사건이다.
이렇게 되면 자신도 엮이는 것 아닌가 싶어 고윤호를 보니, 그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탄원서를 준비 중입니다.”
그동안 최강혁이 정말 모범적인 생활을 해왔다는 것은 캠프에서 그를 아는 누구라도 증언해줄 것이다.
“그게 소용 있겠어요?”
“뭐라도 해봐야겠지요.”
“최악의 상황이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형량이 늘어납니까?”
“경우에 따라 다릅니다.”
이곳에서는 지구의 법이 통용되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이 죽어나가도 별 말 없이 넘어가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쓸모 없는 죄수였다면 추방형을 내렸겠지요. 죽게 만들고, 개인 계좌는 압류했을 겁니다.”
“은행이 그걸 내어줍니까?”
“계좌를 만드실 때 서명을 하셨을 겁니다. 이곳에서 죽을 경우 남은 자산은 캠프에 귀속된다는 부분이요.”
“...아.”
기억났다.
분명 그런 조항이 있었다.
계좌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어쩔 수 없다고 넘어갔었지만, 그런 식으로 활용되는 거였을까.
“하지만 최강혁씨는 각성자니까요.”
고윤호는 그 부분이 다르다고 했다. 캠프에서도, 더 나아가 국가 입장에서도 함부로 버릴 수 없는 카드라고.
“형량이... 추가될 수도 있겠지요.”
새로 올 사령관의 의지에 따라 달라질 거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니 탄원서라도 만들어보려는 것이고.
“부사령관은 어디에 있습니까?”
“외부로 나갔다고 들었습니다.”
“대체... 뭐하는 인간입니까?”
쌍욕이 나올뻔했지만, 애써 참았다.
고윤호에겐 상관이니까.
충성심 같은 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가 속한 조직을 존중해주고 싶었다.
“저도 아직 다 파악하지 못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행정부에서 협조해주지 않는 것도 있고.”
“행정부요?”
“아마 새로 올 사령관쪽과 연계하기로 결정한 것 같습니다.”
그들로서는 그게 맞는 거라고 했다.
부사령관과 사령관은 단순히 직위 차이가 아니라고. 지금처럼 적당한 선에서 대립하고 견제하는 게 가능한 관계가 아니라고.
“결국 한 정부 소속이니까요.”
“정말로 정부에서 손을 댄 거예요?”
“예. 현역 장성이 건너올 겁니다.”
“누군데요?”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원스타라고 하더군요.”
별이 내려온다.
이후엔 지금껏 곳곳에 들어와 박힌 자들도 제 계급을 온전히 드러낼 것이다.
“괜찮으신 겁니까? 저야 어차피 죄수지만, 그쪽은 더 복잡할 것 같은데요. 현역하고 아닌 사람들하고 차이도 있고.”
“기존 간부들을 한직으로 내보낸 게 사전작업이었던 거죠. 이제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많은 이들이 사직서를 냈다고 했다.
“은퇴하실 겁니까?”
그의 물음에, 고윤호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예전부터 해왔던 이야기여서 놀라진 않았다.
“슬슬 집에 돌아가야지요. 너무 오래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빚 때문에 왔다고 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 때문이었다고.
가족 모두가 힘들어하는 것보다, 혼자서 고생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마치 원양어선을 타듯 그렇게 왔다고.
어느새 빚은 다 갚았고, 나름 작은 가게 하나 열 정도의 돈도 벌었다고 들었다. 그만 두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는 편이라 했다.
“그래도 형량 마치실 때까지 같이 하게 될 줄 알았는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사과하실 일은 아니죠.”
작업 책상에 기대어 선 최강혁은 그동안 느꼈던 왠지 모를 찜찜함의 원인이 이거였나 생각했다.
“아, 참. 이걸 깜박했군요.”
그 때.
고윤호가 품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편지요?”
“예. 가족 분이 보내셨다고.”
원래는 받을 수 없어야 맞다.
이메일이나 문자 같은 건 통신 상으로 기록이 되기 때문에, 이곳으로 넘겨주지 않고 차단되었을 것이다.
“차라리 종이에 쓴 편지가 적당히 끼워서 보내기 좋죠.”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이들이 있었다.
고향에 편지를 보내고 싶으면 이야기하라고 했던 이들을 떠올려보던 최강혁은 앞에서 내밀어진 편지봉투를 받아들었다.
“안 뜯어졌네요? 원래 교도소에는 뜯어서 확인 후에 들이지 않아요?”
“어차피 공식으로 전달된 건 아니니까요. 이상한 게 들어있지 않다는 건 알았으니 된 거죠.”
“음.”
봉투엔 생소한 주소가 적혀있었다. 뒤집어서 반대쪽을 본 최강혁의 눈이 살짝 떨렸다.
“누님이시죠?”
“예.”
“전 잠시 저쪽에 가있겠습니다.”
고윤호가 멀찍이 떨어지고, 최강혁은 그가 앉아있던 의자에 앉았다.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어보니, 두 장의 편지지가 잘 접혀 들어있었다.
“.......”
이상하리만치 평범한 안부인사가 보였다.
누나가 보낸 것이 맞나 의심이 될 즈음, 이어진 내용을 보니 그런 생각이 스르르 사라졌다.
‘이런 것도 기억하고 있었나.’
어렸을 적의 일화에 대한 이야기.
그나마 가족들이 모두 있었던 시절. 그 중에서도 얼마 없던, 다 같이 웃었던 때.
무엇 때문에 웃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누나는 그것까지 알고 있던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짓던 최강혁은 뒤에 이어진 내용을 계속 읽어내려갔다.
‘좋은 사람을 만났구나.’
그렇게 적혀있었다.
좋은 사람을 만났다고.
동네에서 작은 음식점을 하는 남자인데, 대학을 나오자 마자 부모가 하던 곳을 돕다보니 그대로 물려받게 되었다고.
손님으로 갔다가, 혼자 술을 마시며 신세한탄을 하다가, 말동무를 하다 보니 어느새 친해지고...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다행이네.’
누나가 행복하길 바랐다.
편지에는 행복하다고 적혀있었다.
잘못된 길로 가지 않게 도와준 것에 대한 고마움도 짧게나마 언급되었다.
“.......”
하지만 다음 장으로 이어진 편지 내용은 그의 미소를 조금씩 사라지게 했다.
약혼자에겐 지금의 사정을 다 이야기했고, 그녀의 동생에 대한 이야기까지 다 했다고.
그는 아무 문제 없으니 형기를 다 마치면 같이 살자고 이야기했다고.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고.
‘뭐... 그렇겠지.’
아무리 좋게 봐준다고 하더라도 결국 살인자다. 그것이 누나를 구하기 위한 의도였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찜찜함만 점점 커질 것이다.
[너를 볼 때마다, 그 사람은 내 과거를 떠올리게 될 거야. 그런 건 원하지 않아.]
각자의 행복을 위해서 살자.
서로의 길을 가자.
누나의 편지는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여기서 죽으라는 말은 안 하는구나.’
네가 다 망쳤다며 죽일 듯이 노려보던 시선이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났다.
그 때를 생각해보면, 지금은 정말로 행복해서 순해진 거 아닐까 싶은 느낌이 들었다.
후....
잠시 두 눈을 감고 깊은 숨을 내쉰 그는 천천히 눈을 뜨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명이라도 행복하면 됐지.’
편지를 다 읽은 그는 원래대로 잘 접어서 봉투에 넣었다.
“건강하시답니까?”
“그런 것 같네요.”
“답장을 쓰실 거면, 지금 하세요. 제가 본국에 갈 때 챙겨갈 수 있습니다.”
“아....”
답장.
보내야 할까?
누나가 그걸 원할까?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다.
“.......”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허공에서 펜 하나를 꺼내 쥐었다. 이어서 지금도 들고 있던 편지봉투의 뒤쪽에 몇 글자를 적었다.
알겠다고. 행복하라고.
그게 전부였다.
“.......”
그것을 건네받은 고윤호는 볼 생각이 없어도 자연스럽게 보게되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최강혁은 아무렇지 않은 듯 웃어보였다.
하지만 고윤호는 그 웃음 속에서 깊은 슬픔을 볼 수 있었다.
“이 주소지로 보내면 됩니까?”
“아마도요. 저도 처음 보는 주소라서요.”
“음. 알겠습니다.”
편지봉투를 품속에 잘 갈무리한 고윤호는 왠지 허탈해보이는 최강혁의 얼굴을 보았다.
“다 놓아버린 것 같은 표정이군요.”
“힘이 좀 빠지네요.”
적어도 돌아갈 곳은 있다고 여겼다.
원망을 듣긴 했지만, 그래도 가족이라고.
아주 오래 사과를 해야 하겠지만, 언젠간 괜찮아질 수 있을 거라고.
‘가족... 해산이군.’
속으로 드는 생각에, 오히려 또렷해지는 것들도 있었다. 잠시 멍한 눈으로 앉아있던 최강혁이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일주일이라고 하셨지요?”
“예. 오늘까지 포함해서입니다.”
“준비를 해야겠네요. 여러모로.”
“예. 일단, 더이상의 물자 공급은 없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비리 사건이 되어버렸다.
당연히 계속 일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있는 물량까지 회수해가지는 않는 것 같으니, 현장 정리 정도는 해도 될 것 같았다.
“이제 가시는 겁니까?”
“지금 당장은 아니고요. 저도 숙소를 정리해야 하니까요. 한두시간쯤 걸리겠지요.”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얼마나 널럴하게 일했는지 잘 아시면서.”
“그래도요.”
그동안 그를 위해 여기 저기 발로 뛰며 편의를 봐주려 노력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작업장을 나가는 고윤호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인 최강혁은 다시금 조용해진 그곳을 주욱 돌아보았다.
‘어떤 식으로 치우는 게 좋을까.’
어쩌면 이곳에 있는 것들을 비리의 증거라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먼지 한톨 남겨두지 않는 게 좋다.
‘단순히 보면 마나를 뽑아내서 지워버리는 게 편하긴 한데. 그러기엔 아까운 것들이 많아.’
아직 일주일이 남아있다.
하지만, 낙하산이 내려오는 날이 그 날이라는 거지, 그쪽 사람들이 이미 몇 달 전부터 들어와있었다는 걸 간과할 수는 없다.
‘지금부터 해야 해.’
〈 27화 〉 027.
027.
짐작대로였다.
고윤호가 미처 짐을 다 싸기도 전에, 사령부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아니, 다시 보니 사령부만이 아니라 행정부 소속의 공무원들도 끼어있었다.
“점심 먹으러 가려던 참인데요.”
숙소에 있던 최강혁은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밖으로 나와 말했다.
“점심은 나중에 드리고, 일단 협조해주시죠.”
“그럼 그쪽 잔반은 대신 치워주시는 거로 알면 되겠습니까? 저쪽 동부에 있는 뷔페 식당인데요.”
“.......”
빈정대는듯한 말투를 그대로 돌려주었더니, 상대의 눈꺼풀 끄트머리가 살짝 경련했다.
‘공무원은 아니고 군인 쪽인 것 같은데... 어쩌면 군무원일 수도 있겠네.’
상대 남자는 길게 끌지 않을 거라고 했다.
차에 태워 가려는 건가 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이쪽 건물엔 무엇이 있었습니까?”
남자가 가리킨 곳은 그의 작업장이었다.
잠금장치를 해제하고 문을 개방한 것 같은데, 그 내부엔 아무 것도 없었다.
“.......”
슬쩍 근처로 다가오던 고윤호가 남들 모르게 엄지를 세워보였다. 그 너머엔 고윤호의 숙소를 뒤지는 듯 보이는 군인들이 보였다.
“같이 엮이시는 겁니까?”
“어쩔 수 없지요. 전담 연락책이었으니까요.”
그는 어차피 퇴직할 생각이라, 별다른 동요조차 생기지 않는 듯 했다.
‘내가 문제네.’
최강혁은 그럭저럭 평범함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내심은 그렇지 않았다.
방금 전 숙소에서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쉬는 게 아니라 내부 정리를 하던 것이었으니.
“별 문제 없을 겁니다. 요식행위가 끝나면, 형식적인 절차만 남죠.”
“처벌은요?”
“글쎄요. 부사령관이 어디로 갔는지 안 보이는 것 같은데... 그래도 각성자를 배제할 수는 없을 겁니다. 유용한 카드니까요.”
정 뭣하면 이번 일을 명분삼아 목줄 비슷한 걸 채우려고 할 수도 있다. 형량이 남아있으니까.
하지만 그 육신에 제약을 둘 만한 일은 없을 거라는 것이 고윤호의 짐작이었다.
“제보에 따르면....”
빈 작업장.
그 너머의 더 작은 작업장 또한 마찬가지로 텅텅 비어있었으니, 이곳에 몰려온 이들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식식거리는 숨을 애써 참으며 다가온 인물이 그렇게 운을 띄우자, 옆에 서있던 고윤호가 슬쩍 끼어들었다.
“무슨 제보요?”
“그쪽에게 말하는 게 아닙니다.”
무뚝뚝하게 대꾸한 남자.
그가 다시금 최강혁을 보았다.
“이곳에서 무기의 수리가 이루어졌다던데요.”
“무기요?”
“총기류 말입니다.”
“......?”
최강혁은 눈을 껌벅였다.
“제가 죄수라는 건 알고 계시죠?”
그는 연기에 소질이 없었지만, 나름 비꼴 줄은 알았다. 그러니 그 반문이, 일종의 대답이 되어주길 바랐다.
“이것들이 나왔습니다.”
그 사이, 최강혁의 숙소에 들어갔던 이들이 이것 저것 들고 나왔다. 재생된 전투화 몇 켤레와 개인 소지품들이었다.
“총기는 잘 모르겠고, 전투화 수리는 좀 했습니다.”
“저렇게 큰 작업장을, 그것도 두 동이나 일부러 지어가면서 말입니까?”
“글쎄요. 전 원래 쓰레기장에서 일했었는데, 부사령관님께서 이쪽에 있으라면서 저걸 지어주시더군요.”
“그러면 그 옆건물은 뭡니까?”
그쪽에 대한 정보는 없던 걸까.
오히려 그쪽이 더 큰 건일 텐데.
“그건 저도 모르죠.”
최강혁은 그냥 오리발을 내밀었다.
고윤호가 다시금 끼어들었다.
“죄수들 숙소를 지을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만.”
“......?”
“이쪽이 원래 그런 목적의 공터였습니다. 조사해보시면 관련 서류들이 있을 겁니다. 과거엔 몬스터들의 쓸모 없는 부산물들을 매장했었던 곳이죠.”
사실이다.
그리고, 죄수들이 지내도록 한 곳도 맞다.
고윤호는 적당한 사실에 큰 거짓을 섞어 말했다. 오래 갈 것 같지는 않은 이야기였지만, 상대는 딱히 반박할 만한 근거가 없는 모양이었다.
“공병대에 연락해서 알아봐.”
“예!”
대신, 나름대로 조사를 이어가려는 듯 했다. 어차피 이런 공사를 할 만한 이들은 정해져있으니 그들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거라 판단했을까.
‘좋은 생각이네.’
그리고 곧 남자의 전화기가 울렸다.
조금 멀리 물러나 잠시 통화를 하던 남자의 표정이 그리 좋지 못했다.
“괜찮으신 겁니까?”
최강혁은 옆에 서있던 고윤호를 보았다.
그 때, 고윤호가 뭔가를 품에서 꺼냈다.
“이거... 일단 다시 챙기시죠.”
그가 주었던 누나의 편지였다.
고윤호가 지니고 있으면 조사 과정에서 압류를 당할 거라고 해서, 얼른 루팅했다.
“미처 숨기질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본국에 가기 전에 한번 꼭 뵙겠습니다. 그 때 다시 받죠.”
“그럼 저도 좋지요.”
조사는 계속 이어졌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더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다 지나가고 있었다.
“같이 가시죠.”
의사를 묻지도 않았다.
어차피 죄수니까, 끌고 가는 대로 가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식당에 연락 부탁드립니다.”
최강혁이 고윤호에게 부탁했다.
손목의 단말기를 인벤토리에 넣어버린 터라, 지금은 다른 곳과 연락할 수단이 없었다.
“예. 문제 없게 하겠습니다.”
고윤호는 연행되지 않는 분위기였다.
믿고 맡기라는 듯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며, 군용 차량에 올라탔다.
“최강혁씨. 지금 뭔가 착각을 하고 계신 것 같은데 말입니다.”
이어서 문이 닫혔다.
앞좌석에 앉은 이가 그렇게 말했다.
최강혁은 자신의 좌우를 포위하듯 앉아있는 건장한 체격의 군인들을 보았다.
“.......”
하지만 오히려 그들이 더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표정과 몸짓으로 알 수 있었다.
‘그랬지. 나는 각성자였지.’
잘은 모르지만, 제대로 발악한다면 적어도 한 명 정도는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럴 이유가 있나. 다들 할 일 하는 거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저은 그는 등받이 깊숙이 몸을 묻었다.
* * *
-충성!
조사실 밖에서 들려온 경계 소리에, 꾸벅꾸벅 졸고 있던 최강혁이 그쪽을 향했다.
철컥, 하는 소리에 이어 문이 열리더니 이어서 몇 사람의 발소리가 이어졌다.
묵직한, 혹은 가벼운.
정확히 네 명으로 짐작되는 발소리는 제각각 그가 앉아있는 의자를 기준으로 사방을 점했다.
그리고 마지막 발소리 하나가 터벅터벅 다가왔다. 맞은편 의자에 앉은 인물은 얼추 50정도 되어보이는 외모의 여성이었다.
‘별이군.’
전투복에 부착된 빛나는 원스타.
소문의 그 낙하산이 온 걸까.
“최강혁이라고 했나?”
상대가 말했다.
어둑어둑한 실내였지만, 부착된 이름을 읽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배 지 현]
“내가 묻고 있다.”
배지현 준장이 말했다.
짐짓 불쾌한듯한 음성이었지만, 어둠에 가려진 얼굴이 아무 표정도 짓지 않고 있음을 알았다.
“벌써 일주일이 된 겁니까? 여긴 시간 흐름을 알기가 어려워서.”
거짓말이다.
시스템은 시계 기능도 지원한다.
“웃긴 농담이군.”
배지현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농담임을 아는 것을 보니, 아마도 시스템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각성자는 아니야.’
스캔해본 상대는 특별한 것을 지니지 않았다. 나이든 일반 여성의 육체였다.
살이 찌진 않았지만, 따로 운동을 행하는 것도 아닌지 근육량이 적었다. 만약 각성자였다면, 단순히 먹고 마시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근육이 붙어있을 것이다.
‘나이가 들면 다를 수도 있나? 아마 아니겠지.’
그 때, 배지현이 둘 사이에 놓여있던 책상을 턱짓했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이들 중 하나가 조용히 다가와 그곳에 군용 랩탑을 내려놓고 화면을 올려주었다.
배지현은 익숙한 동작으로 랩탑을 다루었다.
그리고 곧 그것을 휙 돌려, 그 화면을 최강혁의 눈에 보이게 했다.
“.......”
보안 카메라 영상이었다.
여러 상자들을 실은 군용트럭이 그의 작업장 옆에 가서 멈추고, 그곳에서 내린 군인들이 그곳의 상자들을 들어다 작업장 안으로 옮기고 있었다.
잠시 후, 작업장에서 나온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바깥 벤치에 앉아있던 고윤호에게 다가와 어슬렁거리는데, 아마 잡담을 나누던 때 같았다.
“납품을 받았지. 서류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분명 들어간 건 있었어.”
배지현이 말했다.
최강혁은 조금 의아해졌다.
‘아직도 제대로 파악이 안 되는 건가?’
이상한 일이었다.
그동안 이곳에서 그를 조사하던 이들도 비슷한 것을 캐물었지만, 그냥 입을 다물고 있었더니 그 이상 뭔가를 추궁하지는 못했다.
“다들 비협조적이란 말이지.”
그리고 그 이유를 지금 알게 되었다.
아마도, 기존에 근무하던 군인들이 새로 온 현역 군인들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주지 않고 있던 것 같았다.
‘괜찮은 건가?’
그만둘 생각이 아니라면, 위험한 행동일 텐데. 고작 자신 같은 죄수를 위해서 그런 희생을 해줄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단순한 알력 다툼일 수도 있겠지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던 그는 졸음기가 남아있던 눈을 들어 배지현을 보았다. 방금 전 들었던 단어가 신경쓰였다.
“추방형?”
“지휘체계가 존재하는데, 그것을 따르지 않겠다면 징계할 수밖에. 그렇지 않나?”
입을 다물고 있는 자들을 벌하겠다는 이야기였다. 아마도 그들을 인질삼아 자신의 입을 열려는 것이리라.
“이미 알고 계실텐데요. 쓰레기장에서 나온 군용품들이었다고. 전투화나 전투복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더군. 난 믿지 않지만.”
“못 믿을 수도 있죠. 그런데... 그래도 되는 겁니까?”
“추방?”
그렇게 되물은 배지현이 처음으로 표정을 지어보였다. 가벼운 웃음이었다.
“전시에 항명을 일으키면 어떻게 되는지 대충 알고 있을 것 같은데.”
“항명이라고 할 정도인가요?”
“본국에선 그렇게 보고받겠지.”
“그렇겠군요. 하지만 퇴직자들의 입까지 막을 수 있겠습니까?”
“퇴직자? 그런 게 있던가?”
배지현은 전혀 모르겠다는 듯 말했다. 최강혁은 등 뒤쪽 구석에서 누군가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현재 본국과의 소통은 물자에만 한정 허가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는군.”
배지현이 이어서 말했다.
‘그런 건가.’
고윤호가 오지 않은 건, 그냥 가버린 것이 아니라 아직 떠나지 못하고 있어서였을까.
“그럼, 이제 할 말이 좀 생겼나?”
“글쎄요. 이미 다 말한 거로 기억하는데.”
최강혁은 무심한 눈으로 상대를 마주보았다.
항명이네 뭐네, 추방을 해버리겠다는 식의 엄포를 들었지만 사실 그렇게 와닿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진심이군.”
배지현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녀는 조금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세상이 쉬워보이는 건가? 각성자에, 설마하니 고문 따위를 하지도 못할 테고. 해봤자 금방 회복해버릴 수도 있고 말이지.”
딱히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굳이 반박하지도 않았다.
“하긴. 텃세를 좀 부린다고 추방까지 할 수야 있나. 결국 내 기지의 일꾼들인데 말이야. 좋게 좋게 지내야지. 그렇지?”
배지현은 혼자 묻고 혼자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내려다보았다.
“죄수번호 6327 최강혁에게 추방형을 내린다.”
“.......”
“기간은 5년. 거리는 50킬로미터. 그대로 기록해.”
“알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답한 누군가가 랩탑을 챙겨들었다. 최강혁은 조용히 한 손을 들었다.
“질문해도 됩니까?”
“얼마든지.”
“제 형량보다 긴 것 같은데요. 5년은.”
“글쎄. 과연 그럴까?”
배지현은 픽 웃으며 돌아섰다.
총을 든 이들이 그녀를 지키며 뒤를 따르는 것이 보였다. 최강혁은 들고 있던 손을 내려 머리를 긁적였다.
“적당히 넘어갈 거라면서요.”
고윤호는 너무 느슨하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새로 온 사령관은 각성자를 써먹으려 하지 않는다. 아니, 방향이 좀 다를 뿐일까.
‘각성자까지도 죽여버릴 정도의 결단력을 보일 수 있겠지. 여러 모로 경고가 될 거야.’
아마도 캠프 내부의 불협화음을 단번에 찍어누를 생각이겠지. 꽤 멋진 한 수 아닌가.
‘아니. 난 이제 죽게 생겼는데.’
왜 이렇게 무덤덤한 걸까.
하품까지 나오던 그는 살짝 뺨을 쳐 정신을 차리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 28화 〉 028.
028.
‘5년 추방이라.’
캠프 장벽 바깥이 어떤 세상인지는 이미 여러 사람을 통해서 충분하고 넘치게 들어왔다.
개중에는 과장된 것 아닌가 하는 이야기들도 더러 있었지만, 그래도 그런 과장조차 기본 뼈대가 있어야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고, 살려달라 매달리고 싶진 않아.’
어차피... 돌아갈 곳도 없지 않나.
“최강혁씨. 나오십쇼.”
그 때, 군인 둘이서 그를 불러냈다.
그제야 조사실을 나온 그는 그들이 이끄는 대로 차에 올라탔다.
‘이 방향은....’
어디로 가는 건가 했더니, 그의 숙소가 있는 쪽이었다. 실제로 그곳 앞에 도착해 차를 멈춘 그들이 말했다.
“혹시 챙겨갈 것이 있으면 챙기십시오.”
“.......”
그제야 군인들을 다시 돌아본 그는 그들이 새로 온 이들이 아니라 원래부터 근무하던 이들임을 알아보았다.
“배려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별 말씀을요.”
“혹시 총 같은 거 있으십니까?”
둘 중 하나가 물었다.
그러면서 슬쩍 자신의 안주머니에서 권총 하나를 꺼내기도 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괜찮은 게 아닙니다. 뭐라도 들고 가셔야 그나마....”
“장벽 출입구에 금속 탐지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챙겨봐야 들키잖아요.”
“그, 있잖습니까. 루팅이니 뭐니 하는 거요.”
“잘 아시네요.”
핑계를 대보려고 했는데, 저쪽도 알만큼 아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을 받지는 않았다.
“일련번호 있을 것 같은데요. 구입 기록도 있으실 테니, 언젠가 소지한 총기를 확인하게 되면 곤란해지실 겁니다.”
“그건 그렇지만....”
“전 걱정하지 마세요. 각성자 아닙니까.”
웃으며 차에서 내린 최강혁은 가벼운 걸음으로 숙소를 향했다.
그러다 문득 뭔가 달라졌음을 깨닫고 옆을 보니, 그 곳에 있던 두 동의 작업장이 보이지 않았다.
‘그 며칠 새에 철거를 해버린 건가. 여러 모로 빠르네.’
숙소는 멀쩡했다.
아마 다른 이가 쓸 수도 있겠지 싶었다.
그곳으로 들어간 그는 마지막으로 뜨끈한 물에 샤워를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후....”
밖으로 나오니, 그를 데려다준 군인들의 차량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멀리서 좀 더 묵직하게 느껴지는 소리와 진동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동안 고마웠다.”
다시금 뒤로 돌아선 최강혁은 잘 닫은 현관을 탁탁 두드리며 말했다.
도로 쪽으로 나가서 기다리니, 다섯 대가 넘어가는 군용 장갑차량이 눈에 들어왔다.
“타십쇼.”
“묶는다고 들었는데요.”
“묶여주실 겁니까?”
군인의 물음에서 다소의 긴장감이 느껴졌다. 최강혁은 웃으며 두 손을 내밀었다.
“절차대로 하셔야 문책이 없겠지요.”
“협조 감사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군인이 포승줄로 그의 두 손목을 감아 묶었다. 아주 세게 묶지 않은 것은 그의 배려에 대한 나름의 보답인 듯 했다.
“이곳으로 갈 겁니다.”
배려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다른 군인이 타블렛 화면을 보여주며 말했다. 주변 지도인 듯 했는데, 캠프가 있는 곳에서부터 정확히 50킬로미터 떨어진 위치였다.
“이쪽에 있는 게 호수입니다. 작은 물줄기가 이쪽으로 나있고... 여기 강으로 이어집니다.”
“호숫가 근처에서 최대한 버티시는 게 유리할 겁니다. 그곳은 다른 사냥감들도 넘쳐서... 인간만큼 작은 것들은 굳이 노리지 않는 녀석들이 많아요.”
“좋은 정보군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최강혁은 문득 주위를 돌아보고 나서 물었다.
“혹시, 고윤호씨는 어디 계시는지 아십니까?”
“누구요?”
“고윤호씨라고... 퇴직을 신청했을 겁니다.”
“퇴직 요청자들은 따로 숙소에 격리 중입니다.”
“그렇군요.”
붙잡혀서 취조를 당하진 않나 걱정했는데, 아니라면 다행이었다.
“그쪽에, 저는 괜찮으니 걱정 말라고 전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음... 노력해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럼 가시죠.”
장갑차에 올라탔다.
죄수를 추방하는 일이지만, 정해진 위치까지 다녀오는 동안의 위험은 어쩔 수 없으니 제대로 된 병력이 호송하는 것이었다.
“.......”
내부엔 자그마한 창도 나있지 않았다.
대충 방향을 짐작한 최강혁은 어느 순간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차량이 위아래로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옆에 앉은 군인들을 보니, 그들 중 하나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밖으로 나온 것이다.
‘블러핑은 아니었구나.’
어쩌면 그럴 가능성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밖으로 내보내려고 하면 그가 알아서 길 거라고, 그러니 강하게 밀어붙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하지만 그가 보았던 사령관은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실제로 허장성세가 아니었고, 그는 계속해서 기지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이거 받으시죠.”
누군가가 낡은 더플백을 건네었다.
뭔가가 가득 들어차있었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가 지금까지 알고 지냈던 이들이 저마다 이것 저것 넣어준 것이라고 했다.
“김환수라는 분이 주시더군요. 원칙대로라면 허용되지 않습니다만....”
“고맙습니다.”
새로 온 군인들이라고 해서 다들 매정한 이들은 아니었다.
어차피 가는 마당에 그 정도는 괜찮지 않냐는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것이다.
“세 시간 정도 걸릴 겁니다.”
“미리 잠을 보충해두시는 것도 좋습니다.”
지금 상황에 잠을 잘 수 있을까 싶지만, 나름 그를 배려한 조언이었다.
“이제 풀어드리죠.”
옆에 있던 군인이 그의 손을 자유롭게 해주었다. 최강혁은 더플백 입구를 살짝 열어보고 픽 웃었다.
‘자리만 차지하게....’
쓰레기장에서 쓰던 것으로 보이는 안전모가 있었다. 바깥이 위험하다고 하니, 헬멧 대신에라도 쓰라는 걸까.
‘마음은 고맙네.’
그 옆을 조금 벌려서 안쪽을 들여다보니, 옷이나 속옷, 망치와 펜치 같은 각종 도구, 접이식 다용도 칼 따위가 제멋대로 섞여있었다.
‘다들 고맙습니다.’
조금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가족도 더는 없고, 이젠 정말로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던 걸까.
더플백을 다시 잘 닫은 그는 그것을 앞에 내려놓고나서 눈을 감았다.
돌 밟히는 소리.
거칠게 흔들리는 차량.
어딘가와 무전을 주고 받는 목소리.
“......?”
그러던 중, 얼핏 총소리 비슷한 게 들렸다.
잘못들은 게 아닌지, 무전병이 확인을 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빅버드랍니다. 저격 성공했고요.”
“알았다.”
빅버드라면 들어본 적이 있었다.
타조처럼 날지 못하는 새라던가. 덩치는 타조보다 크고, 굉장히 포악하다고 했다.
“총소리를 내도 됩니까?”
“그냥 가다가 마주치는 것보단 낫습니다.”
한 자리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군인이 말했다.
‘음.’
총소리를 들어서일까.
그제야 조금씩 긴장이 되었다.
‘정말 이곳에서 죽게 되는 건가.’
여전히 실감이 나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지금의 멍함은 일종의 현실도피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버틸 수 있을 만큼 버텨야지.’
가만히 죽어줄 수는 없다.
할 수 있는 것을, 아니 그 이상을 해볼 것이다.
* * *
“다 왔습니다.”
이동하던 장갑차가 정지했다.
최강혁은 군인이 내민 장치를 보았다.
“이게 뭐죠?”
“여기에 피를 묻혀주셔야 합니다. 생존 확인 장치죠.”
“피요?”
“예. 잠깐 따끔하실 겁니다.”
군인이 볼펜 비슷하게 생긴 도구를 그의 손가락 끝에 가져가 찰칵, 하니 정말로 잠깐 따끔하며 그곳에 피가 맺혔다.
“여기 묻히면 된다고요?”
“예. 됐습니다.”
“그 장치로 제가 죽었는지 아닌지를 알아요?”
“네. 정확한 위치 같은 것까진 알 수 없지만, 생사 여부 하나는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아티팩트죠.”
“비쌀 것 같네요.”
“보급형이라서, 그렇게 비싸진 않습니다.”
장비를 도로 챙기는 군인에 이어, 밖에서 장갑차 후면을 열어 젖힌 이들이 서두르라는 듯 손짓을 했다.
“내리셔야 합니다.”
“네. 갑니다.”
그렇게 떠밀리듯 차량 밖으로 내리니, 어느새 낮이 지나고 어둑어둑한 저녁이 되어가고 있었다.
“저쪽이 호수입니다. 지도 기억하시죠?”
“예. 대충.”
“건투를 빕니다.”
군인들은 별다른 이야기를 길게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거나 눈을 마주친 후에는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재빨리 각 차량에 올라타 그대로 멀어졌다.
“.......”
허허벌판에 혼자 남은 최강혁.
그는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바깥이 이렇게 생겼었구나.’
지구와 그렇게 다르진 않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었지만, 이렇게 보니 정말 그랬다.
드넓은 평원 한복판.
한쪽으로 길게 나있는 차량들의 바퀴자국을 제외하면 그저 푸른 풀들과 멀리 보이는 숲, 그너머에 병풍처럼 자리한 높은 산들 뿐이었다.
인간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곳.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좋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는 적어도 핍박을 받을 일은 없을 것 같아서.
‘이곳에선 죄수가 아니니까.’
죄수와 사냥감.
어느 쪽이 나은 걸까.
“움직여야지.”
크고 시끄러운 차량들이 잔뜩 왔다 갔으니, 예민한 녀석들이 있다면 관심을 보일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전에....’
최강혁은 바닥에 내려놓았던 더플백을 고스란히 루팅해버리고, 반대로 인벤토리 안에 있던 것들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제법 단단해보이는 가죽 재질의 전투조끼도 있었고, 무릎과 팔꿈치를 보호해주는 장비도 착용했다.
헬멧은 아니지만, 머리를 감싸는 형태의 헤드기어도 있었다.
눈에 띄는 부분은 그런 장비들이 모두 같은 재질로 보인다는 점이었는데, 다름아닌 전투화에 쓰이던 가죽이었다.
‘몇겹 겹쳤더니 나름 단단해.’
몬스터들의 공격까지 막아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천 재질의 옷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었다.
각 장비들은 전투부대원들의 것들을 스캔한 대로 본따 만들었기에, 형태가 그럴싸한 건 당연했다.
스으으-
이어서 그의 두 팔을 통해 흘러나온 검은 물질이 곧 하나의 형상을 이루었다. 미리 흡수해둔 보병소총이었다.
인벤토리 안에서 꺼낸 탄창을 결합하여 장전한 그는 안전 상태로 레버를 돌린 후 어깨에 견착해 이쪽 저쪽으로 겨누어보았다.
후우.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최강혁은 총기 멜빵을 어깨에 걸고 사이즈를 조절한 후, 비로소 주위를 돌아보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물가 근처에 있는 게 상대적으로 안전할 거라고 했었지.’
하지만 그것은 ‘다른 사냥감들이 더 먹음직스러울 테니까’라는 이유였다.
나름 근거가 있는 조언일 테지만, 그다지 설득이 되는 기분은 아니었다.
‘난 운이 나쁜 편이니까. 뭐, 이쪽에 들어와서는 계속 좋았지만... 결과가 이렇잖아.’
새로 온 사령관에게 바싹 기어야했을까.
그랬다면 뭐가 어떻게 되든 계속 캠프에 남을 수 있었을까.
‘목줄이 채워지고 싶진 않아.’
자신에게 반골 기질이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그때는 왠지 굽히고 싶지 않았다.
‘잔탄이... 음?’
조금 걷던 그가 발을 멈춘 건 얼핏 지나왔던 곳 인근에서 빛나는 무언가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차량 바퀴자국 근처에 뭔가가 있었는데, 다시 보니 수상한 무언가가 아니라 금속 상자였다.
“뭐지?”
군인들이 뭔가 빼놓고 간 건가 싶어서 조심조심 다가간 그는 바닥에 놓여있던 것이 다름아닌 탄약상자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일부러 두고 간 거구나.”
총도 없이 총알만 두고 가는 건 뭐냐, 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왠지 짐작이 되었다.
‘나한테 총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아무튼 고마운 일이다.
총과 달리 탄약은 부대에서 수량 파악을 하더라도 ‘외부에서 사용했다’는 식으로 얼버무릴 수 있을 것이다.
‘이게 몇 발이야?’
탄약상자는 새것이 아니었다.
열어서 안쪽을 보니, 10발 단위로 클립이 채워진 소총 탄약이 2백발 정도 되어보였다.
수류탄도 두 개나 있었다.
‘대검도 한 자루 넣어줬네.’
그것들을 잘 루팅한 최강혁은 소총 끝에 대검을 결합하고, 탄창을 뽑아 여분의 탄약을 더 채워넣었다.
‘어지간하면 쏘지 않는 게 좋을까?’
총소리를 듣고 몰려오는 놈들도 있어서, 전투가 쉽게 끝나지 않는다던 경험담을 들어본 바 있었다.
‘일단 혼자서도 안전을 보장할 수 있을 만한 장소가 필요해.’
〈 29화 〉 029.
029.
동굴이든 바위틈이든,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한다.
다만 지금은 산이나 언덕과는 거리가 멀고, 가까이에 물길이 있을 정도로 평지라서 쉽지 않을 듯 했다.
‘지도가....’
시스템을 불러낸 그는 아까 전 스캔했던 것들 중 하나를 열었다.
그가 내리게 될 장소를 설명해주며 보여주었던 타블렛의 화면이었다. 그곳엔 현재 위치 인근의 지도가 있었다.
만약 ‘스캐닝 강화’스킬을 확보했다면 타블렛 안의 데이터 전체를 빼왔을 수도 있었을까?
그런 게 정말로 가능하다면 사기 소리를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없는 걸 아쉬워할 수는 없지. 어디 보자. 이쪽이 동쪽인 건가?’
다행히 방위까지 표시된 지도였다.
주변 지형과 비교하며 현재의 위치와 방향을 파악한 그는 떠났던 군인들이 물이 있는 쪽을 제대로 알려주었음을 확인했다.
‘일단... 제일 가까운 저 산까지 간다.’
지도에 표시되지 않을 정도로 먼 곳.
하지만 몸을 숨길 만한 곳을 찾자면 결국 숲이나 산이어야 할 듯 했다.
‘발소리가 신경쓰이는데.’
단단한 전투화 굽 때문에 걸을 때마다 철걱철걱하는 소리가 났다.
잠시 걷다 멈춘 그는 신고 있던 전투화를 그대로 흡수한 후, 단단한 굽 아래에 가죽을 조금 덧대는 식으로 조합하여 다시 만들었다.
‘좀 낫네.’
가죽이 금방 닳아버릴 것 같긴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여분으로 만들어두었던 특수 인벤토리칸.
지금 그곳에 들어있는 건 넉넉하고 넘치는 양의 가죽이었다.
작업장에 쌓여있던 전투화들을 모두 해체하여, 그 가죽만 모아 한 덩어리로 뭉쳐서 넣어둔 것이다.
‘가죽은 어디에 써도 쓸 일이 생기니까.’
인벤토리 안에 넣으면 염색이나 약품처리된 것들을 제거하고 기본 가죽 상태로 돌려놓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지금 착용하고 있는 장비들은 검은 염색을 제거하지 않았다.
밤에 이동할 땐 위장색이 필요할 것 같아서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았다.
‘그래도 기본 전투복 위장색은 이쪽 환경하고 살짝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
아예 패턴부터 새로 짜기엔 예산이 부족했을까 생각하던 그는 문득 동작을 멈추었다.
‘뭐지.’
일반적이지 않은 냄새가 풍겨오고 있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변질된 잔반에서 얼핏 맡아본 것 같은... 일종의 악취였다.
‘거리가 꽤 있는 것 같은데. 각성자들은 감각도 더 강해진다고 했던가.’
짐승, 혹은 몬스터의 냄새일까.
난감하게도 냄새가 풍겨오는 방향이 그가 가고 있던 방향에 걸쳐있었다.
‘우회하는 게 좋을까.’
어차피 어디로 가야 한다는 식의 이정표 따위는 없었다. 악취로부터 거리를 벌리며 천천히 물러나던 그의 귀에 날카로운 괴성이 연이어 들려왔다.
‘이제 좀 실감이 나네.’
이곳은 몬스터들의 땅이다.
그는 이방인이고, 자칫 잘못하면 사냥감으로 전락한다. 각성자고 뭐고, 혼자서 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다.
‘전투 스킬도 없고 말이지.’
들려오는 소리로 보아 분명 싸움이 벌어진 듯 했다. 단순한 사냥이라면 저런 괴성이 아니라 짧은 비명이었을 것이다.
가만히 바닥에 앉아 손바닥을 땅에 얹어보았다. 영화 같은 곳에서 보면 이런 식으로 손을 대거나, 아예 귀를 대어보기도 하던데.
‘진짜 느껴지네.’
미세한 진동이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 방향까지 얼핏 가늠이 되었다.
‘각성 좋구만.’
방향을 파악했으니, 더욱 확실히 우회할 수 있게 되었다. 좀 더 멀리 이동하던 그는 문득 큼직한 바위 하나를 발견했다.
‘...오.’
숲이나 산을 찾아가야만 피신처를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운이 좋았다.
마치 고인돌의 지붕을 연상케하는 크고 넓적한 바위 앞으로 다가간 그는 그 아래쪽의 흙을 적당히 흡수하고 배출하며 구덩이를 만들었다.
‘오늘밤만 보내는 거라면 충분할 것 같은데.’
그곳에 집을 짓거나 할 수는 없다.
가능하다고 해도 미친 짓이다.
‘야행성 몬스터들이 많다고 했었으니까.’
차에서 내렸던 곳을 가늠해보니, 대략 5백미터 정도 될 것 같았다.
애매한 거리긴 하지만, 이곳을 놓치면 비슷한 곳을 언제 찾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일단 오늘은 여기서 보낸다.’
구덩이 안으로 들어가 내부를 좀 더 넓힌 그는 그렇게 확보한 흙을 굳혀 입구를 틀어막았다.
미리 루팅해두었던 주변의 풀들을 활용, 풀냄새로 체취를 덮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알게 모르게 주워들은 이야기가 많아.’
고윤호와 황수찬.
두 사람과의 대화는 항상 즐거웠다.
‘윤호씨는 고향으로 갈 테고... 수찬씨가 전투 수송대로 빠졌으면 이런 곳을 자주 오갔겠구나.’
그땐 반쯤 과장된 이야기인 줄 알았던 외부 지역에서의 경험들이, 지금은 더 없이 소중한 조언이 되어주고 있었다.
그르릉...
크릉.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짐승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크기나 울림으로 짐작해보면, 그리 크지 않지만 여럿이 몰려다니는 종류인 듯 했다.
‘더 막자.’
최강혁은 안쪽을 더 파고, 그 흙으로 입구를 아예 틀어막듯 했다.
풀냄새로 체취를 가려도, 단순히 가려볼 뿐이지 완전히 제거하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아서였다.
‘숨구멍은... 이쪽에 뚫으면 돼.’
흙이 아니라 바위쪽.
그는 손가락으로 조심조심 흡수를 해가며 작은 구멍 하나를 뚫는데 성공했다.
‘후....’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었지만, 긴장이 아주 풀린 건 아니었다.
‘잠은 못 자겠지.’
그래도 밤동안 멍하니 앉아있을 수는 없으니,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보기로 했다.
‘인벤토리 정리부터 하자.’
더플백 안에 들어있는 것들을 제대로 분류하지 못했다. 그것을 인벤토리에서 꺼낸 그는 이어서 작은 장식용 LED촛불을 켰다.
‘유용하네.’
아마 식당에서 누군가의 생일에 쓰던 소품 같은데, 챙겨두니 이럴 때 쓰게 되었다.
바위의 구멍으로 막 새어나갈 정도로 눈부신 빛은 아니지만, 주변 분간 정도는 되는 수준이니 지금 상황엔 더 없이 좋았다.
‘옷은 옷대로... 이건 속옷이고.’
더플백에서 꺼내자 마자 바로 바로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리 넓지 못한 공간이다보니, 한쪽 구석에 모여있는 의류들은 마치 진공압축을 행한 것처럼 단단히 눌려있었다.
‘통조림도 있었네?’
식당용 참치 빅캔.
그 한쪽엔 뷔페 식당의 잔반 담당자 이름이 매직으로 쓰여있었다. 역시 좋은 사람이다.
‘대충 분류는 됐고.’
그러는 사이, 짐승들의 소리가 점점 멀어져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전자촛불을 끄고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그는 어둠 속에 앉아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총 말고 다른 무기가 필요해.’
총만큼 강하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조용한 무기가 필요하다.
‘창이 무난해.’
인간이 더 강한 짐승이나 맹수를 상대하는 데 좋은 무기는 역시 창 아닐까.
‘거리를 확보하면서 견제할 수도 있고.’
재료는 있다.
특수 인벤토리는 아니지만, 약간의 알루미늄 합금을 따로 뭉쳐 챙겨두었다. 창 한 자루 정도 만들 양은 될 듯 했다.
‘그리 강한 재질은 아닌 것 같지만, 지금 갖고 있는 것들 중에선 그것 밖에 없지.’
그것과 함께, 인벤토리에 있던 닳아빠진 칼 따위를 적당히 섞어 창 한 자루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묵직한 언월도 같은 촉이 아니라, 그냥 평범하게 찌르는 형태로.
‘창대의 길이는... 2.5미터는 되어야지.’
어차피 잡는 위치에 따라 거리 조절이 될 테니, 기본 길이가 있어야 한다.
‘여긴 좁아서 못 하니까, 일단 구상만 해두자.’
머릿속에 개념만 잡혀있다면, 만드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내일 날이 밝으면, 이곳을 나가자 마자 만들 것이다.
‘별도로 해야 할 것도 있고.’
최강혁은 인벤토리 안에 있는 특정 색상들의 실뭉치를 보았다. 그것은 전투복 천을 섬유 단위로 풀어낸 후, 비슷한 색끼리 잘라 붙인 것이었다.
‘쓸모가 있었네.’
그것을 활용하면 새로운 패턴의 천도 만들 수 있지만, 별도로 활용할 만한 데가 더 있었다.
가령 지금 그가 보고 있는 지도를 비슷하게 구현할 수도 있었다.
수를 놓듯이 하는 게 아니라 실을 분해 결합하여 얽어내는 방식이기에, 시간이 많이 필요한 작업은 아니었다.
‘색소를 뽑아서 나중에 입히는 것보다 이게 더 나은 것 같았지.’
앞으로도 지도가 필요할 것이다.
그가 가진 스캔 지도는 그리 먼 곳까지 나와있지 않으니, 그 이상 범위는 직접 만들어야 한다.
또한, 별도의 실물 지도를 만들어두면 스캔 데이터를 열어볼 필요 없이 직접 눈으로 보기도 편할 테고.
‘일단... 이쪽에 산이 있었지.’
색깔을 빼내서 하얗게 된 천.
그 위에 이런 저런 색깔의 실이 여기 저기 파고들어, 원래 그곳에 있던 것처럼 하나가 되었다.
금세 지도의 형태가 갖춰졌다.
스캔 화면에 나온 부분은 금방 구현되었고, 그 바깥은 가까운 곳보다 오히려 훨씬 먼 곳 위주로 얼기설기 그려졌다.
‘계속 확인하면서 틈틈이 수정해야겠어.’
GPS연동 같은 건 기대할 수 없으니, 어느 정도의 오류는 불가피할 것이다. 그저 할 수 있는 만큼 해볼 뿐.
‘물도 채워야 해. 공간 비우느라 많이 못 담았으니까.’
인벤토리에서 꺼낸 물병으로 목을 축인 그는 적당히 오려낸 전투복 천을 담요삼아 몸에 덮어 체온을 유지했다.
‘이상한 기분이야.’
사지로 가면서도 멍한 기분이더니, 지금은 무척 또렷해졌다. 하지만 무척 긴장이 되면서도, 그와 엇비슷한 기대감이 생겼다.
‘내가 이런 성격이었나?’
각성을 했다고, 전에 없던 자신감 같은 게 생긴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자만으로 이어진다면 죽음과 직결될 수 있음을 간과할 수는 없었다.
‘출출하네.’
최강혁은 문득 느껴지는 허기에, 인벤토리로 손을 뻗었다. 그대로 꺼내서 입에 넣은 건 두툼하게 토막낸, 양념고기 한 점이었다.
‘미리 챙겨둬서 다행이야.’
음식을 넉넉하게 지니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은 괜찮았다.
‘현지조달을 해야 할 텐데....’
물에 가면 물고기라도 잡을 수 있을까?
‘물 속에도 몬스터가 있다는 소문이 있던데 말이지. 들어가본 이들이 없어서 그렇지.’
피라냐 같은 물고기를 생각해보면 제법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물론 피라냐도 잡아먹을 수 있는 물고기니까, 그것도 비슷하지 않을까.
‘정 안 되면 풀이라도 뜯어서 흡수해야겠고.’
먹는 게 아니라, 흡수하거나 루팅을 한다면 어느 정도 양분을 빼낼 수 있다.
그에게 필요한 성분이 있을 지는 알 수 없지만, 다른 건 몰라도 마나만 제대로 보충된다면 생존 기간을 늘리는 데 적잖은 도움이 될 것이다.
‘흙속에도 마나가 있긴 하지만, 흡수하거나 빼내는 데 들어가는 마나가 더 많아서 손해야.’
바위에 뚫은 구멍에서 쉬익 쉬익 하며 바람소리가 새어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시스템으로 확인한 그는 인벤토리에서 손목 단말기를 꺼내 화면을 켜보았다.
‘역시. 안 터지는군.’
이런 곳에서 통신 연결을 기대하는 건 욕심이었을까. 다시금 화면을 끈 그는 그것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곳에 넣어둔 상태에선 모든 것들의 상태가 고정되기에, 배터리 역시 더 소모되지 않고 기존 상태로 유지될 수 있었다.
‘당신들 마음대로 되진 않을 거야. 아주 놀라게 해줄게.’
그의 생존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다른 건 몰라도, 목숨이 붙어있는지 아닌지까지는 알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러니까, 기록을 세워줄 생각이다.
‘놀랍다 못해서 시끄러워질 만큼 살아서 버텨줄 테니.’
죽지 않는다.
5년을 꽉꽉 눌러 채우고, 당당하게 캠프로 복귀할 것이다.
‘근데 좀 춥네. 장벽 안은 안 이랬는데.’
전투복 천을 거듭 잘라 꺼내어 여러 겹으로 덮고 나니, 그제야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바람막이를 만들어볼까? 망토나 판초우의 같은 형태면 대충 될 것 같은데.’
체온 유지를 겸해서, 위장색으로 몸을 가리는 목적에도 좋을 것이다.
‘낮에는 검은 색이 오히려 눈에 띌 테니까.’
멍하니 앉아있기보다는 뭐라도 찾아서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는 주변에서 보았던 색깔들을 기억하고 새로운 패턴의 천을 조합하기 시작했다.
‘오. 나도 꽤 실력이 늘었네.’
그렇게 제작한 ‘위장망토’.
너무 늘어져서 거추장스럽지도 않고, 무게감도 적당했다.
‘팔을 넣을 곳도 있고.’
판초우의처럼 옆을 걷어 올리지 않아도 된다. 굳이 비교하자면 간부우의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보온도 괜찮아. 안쪽에 가죽을 얇게 덧댄 게 좋은 생각이었나.’
웅크린 상태에서 그것을 걸치려니 불편했지만, 제대로 입어보니 꽤 마음에 들었다.
후드를 올려 머리에 덮어쓴 그는 바위 구멍으로 희미한 빛이 새어들 때까지 휴식을 청했다.
〈 30화 〉 030.
030.
“살아있다고?”
“그렇게 표시됩니다.”
“오늘로... 며칠 됐지?”
“해당 날짜를 포함하면 사흘 째입니다.”
배지현 준장은 부하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이었다. 서명을 하려다 멈춘 펜이 그녀의 손 위에서 가볍게 빙글 돌아 제자리에서 멈추었다.
“그 정도야, 어딘가에 잘 숨으면 버틸 수 있지 않던가?”
“가능합니다.”
“운이 좋았나보군.”
운이어야 한다.
그녀의 표정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입을 다문 부하는, 차마 장벽 바깥은 하루조차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곳이라던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그 어디에 숨어도 ‘사냥꾼’들을 완전히 피하는 건 불가능하다던 경험자들의 이야기 또한, 지금은 꺼내지 않는 편이 좋을 듯 했다.
“계속 지켜봐. 사망 확인되면 보고하고.”
“알겠습니다. 충성!”
“충성.”
건성으로 경계를 받은 그녀는 다시금 서류로 눈을 돌렸다.
부사령관이 작성해둔 서류는 무척이나 상세하고 꼼꼼해서, 집중해서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캠프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설마하니, 위치가 노출된 건 아니겠지.”
부사령관이 원하는 대로 되진 않을 것이다.
그녀는 다시금 손 위에서 돌고 있던 펜을 고쳐 쥐고 서명을 이어갔다.
* * *
“이건 뭐, 하이에나도 아니고....”
최강혁은 눈 앞에 놓인 것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벌써 죽은 지 며칠은 되어보이는 몬스터의 사체에선 코를 찌르는 악취가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가는 건, 썩어가는 사체라고 해도 여전히 적잖은 마나를 품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미 몸통 대부분이 누군가에게 뜯어먹혔지만, 그래도 네 다리와 뼈는 그럭저럭 남아있었다.
“먹는 건 아니니까 다행이지.”
버릇처럼 주위를 한번 돌아본 그는 가까이 있던, 뾰족 튀어나와있는 갈비뼈 하나에 손을 댔다.
그렇게 흡수가 시작되었고, 몇 분이 채 걸리지 않아 그 자리에 있던 커다란 사체가 완전히 사라졌다.
“루팅을 하려면 잘라야 한다는 게 짜증나네. 그게 아니면 손을 댈 필요도 없는데.”
인벤토리가 엄청 넓어진다면, 방금 전 같은 것들은 한 번에 루팅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먼 이야기였다.
손에 묻은 체액과 썩은 피, 약간의 지방을 수건으로 닦아낸 그는 그것을 인벤토리에 넣고 오염물질들을 제거했다.
그렇게 하면 다시금 새것같은 상태가 되지만, 그래도 왠지 찜찜해서 그것으로 얼굴을 닦고 싶지는 않았다.
“냄새가 배었으려나.”
그리 오래 있지 않았지만, 시취라는 게 그리 쉽게 빠지는 종류가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또 채워야겠네.”
이어서 꺼낸 것은 화장품 견본품을 담는 손가락 크기의 플라스틱 병이었다.
그 안에는 거의 바닥까지 줄어있는 끈적한 액체가 있었다. 최강혁은 그것을 손에 찍어 목 양쪽 옆과 손목 등에 발랐다.
“어느 정도는 가려주겠지.”
상당한 양의 풀들을 모아서, 그 안에 들어있는 수액만 뽑아내어 물기를 대부분 제거한 것이 지금 그가 바른 것이었다.
너무나 강해서 조금은 역할 정도로 압축되어있는 풀냄새. 그렇게 향수처럼 바르면 체취를 가릴 수 있었다.
“움직이자.”
한 자리에 오래 있으면 안 된다는 건 지난 이틀동안 충분히 체득했다. 그는 방금 전 흡수했던 몬스터의 스캔 데이터를 흘깃 보며 걸음을 재촉했다.
‘초식 몬스터였어?’
어쩐지 덩치도 크고 생긴 것도 사슴과 소를 섞어놓은 것 같더니, 이쪽에도 초식 계열은 있는 모양이었다.
‘근데, 이 냄새를 맡으면 나를 잡아먹으려고 할까. 풀냄새 엄청 나는데.’
호수에 가까워질수록 그런 식으로 죽어있는 몬스터 사체를 발견하는 횟수가 잦아지고 있었다.
흡수할 마나가 생겼다는 건 반가운 일이지만, 그만큼 위험한 곳으로 가고 있다는 뜻이었으니 긴장감도 더욱 강해졌다.
‘여유가 생기면, 차라리 100칸을 더 써서 특수 인벤토리를 한 칸 더 만드는 게 낫겠는데.’
문득 든 생각.
특수칸은 크기가 아니라 무게로 계산하기도 하고, 몬스터 사체라면 하나로 세는 게 맞으니 문제 없이 루팅이 될 것이다.
‘1톤이 넘어갈 만한 건 아직 못 봤으니까.’
죽은 몬스터라면 그 사체가 온전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방금 전에 보았던 것처럼 다리 쪽이 멀쩡한 것도 드문 편이었고.
“......!”
그렇게 천천히 걷던 최강혁은 소리 없이 바닥에 엎드렸다. 걸치고 있던 위장 망토가 가볍게 펄럭이며 사방으로 펼쳐지듯 그의 몸을 가려주었다.
그것에 그치지 않고 바닥의 흙을 흡수하기 시작한 그는 땅 속에 몸을 완전히 묻고, 그 위를 흙으로 덮어버렸다.
다닥. 타닥.
크르르...
자잘한 발소리, 그 가벼운 진동에 이어진 가래 끓는듯한 울음.
‘스토커냐.’
놈들을 처음 눈으로 확인한 건 어제 낮이었지만, 사실 그 존재를 파악한 건 그보다 빨랐다.
바로 첫날 밤 주변에서 들렸던 그 소리의 주인이 바로 이놈들이었다.
‘걸리면 죽는다.’
생긴 건 들개와 비슷하지만, 덩치는 늑대에 준할 정도로 커다랗다. 적어도 세 마리 이상이 몰려다니는 족속들이기도 하다.
‘야이 비겁한 새끼들아!’
일대일로 붙으면 승산이 있을까?
아직 제대로 된 전투를 해본 적이 없지만, 그다지 자신은 없었다.
‘각성자도 초인은 아니라고 했어.’
주먹으로 바위를 부수고, 발길질로 집을 무너뜨리는 그런 건 불가능하다.
전투 쪽 스킬이 있는 이들은 비슷한 일도 할 수 있다고는 하는데, 그는 아니니까.
‘그나마 체력단련을 해둔 게 헛된 일은 아니었지.’
하나 확인한 건 있다.
그의 달리기가 굉장히 빠르다는 것.
‘진짜 죽는 줄 알았는데.’
이름 모를 몬스터와 조우한 후에, 첫 전투고 뭐고 일단 튀기로 결정한 것은 역시 잘한 생각 같았다.
죽어라 달렸더니, 무섭게 쫓아오던 놈이 오히려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마나까지 적잖게 써버렸지만, 그래도 잘 도망칠 수 있다는 건 꽤 쓸만한 재주야.’
만들어두었던 알루미늄 합금창은 아직 개시하지도 못했다. 지금은 3단 형태로 나누어서 인벤토리에 넣어둔 상태고.
‘안 가냐?’
그러는 동안에도 조금씩 조금씩 더 깊은 지하로 내려가고 있던 그는 여전히 느껴지는 지상에서의 진동이 짜증났다.
‘그냥 오늘도 두더지로 살까.’
어제 하루는 대부분 지하에 있었다.
위쪽에 돌아다니는 놈들이 워낙 무섭다보니, 차라리 땅 속에서 굴을 파 이동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였다.
하지만 마나를 회복하려면 결국 체력이 소모되는 건 당연한 일이고, 그것을 보충할 음식이 점점 떨어져가니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썩지 않은 고기를 확보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마나가 아니라 영양을 채울 수 있어야 한다.
지금처럼 풀과 흙에서 얻을 수 있는 건 필수 영양소 쪽은 아니니까.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거의 1미터 정도 지하까지 들어간 그는 이제 아래가 아니라 방향을 꺾어 공간을 확보하며 이동을 이어갔다.
중간에 숨구멍도 뚫어야 해서 전진이 무척이나 더졌지만, 그래도 한 시간 쯤 지나니 얼추 100미터 정도를 이동할 수 있었다.
“흙이 축축한데? 물하고 거리가 이정도인데도 벌써 젖는 건가.”
물이 있는 곳과 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주 가까운 건 아니었다.
어쩌면 작은 물줄기가 지하에 더 있는 것일 수도 있으니, 자칫하면 수몰당할 지도 몰랐다.
‘슬슬 나가야 해.’
자세를 바로잡은 그는 주변의 진동에 집중하며 지상으로 길을 냈다.
그렇게 작은 구멍이 생겨난 후에는, 누가 넣어줬는지 모를 작은 손거울을 내밀어 외부를 살폈다.
‘음?’
그러던 그가 움찔 멈춘 건 조금 떨어진 수풀 쪽에 뭔가가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잔뜩 웅크린 채로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는, 얼핏 표범 비슷한 느낌의 맹수였다.
‘저쪽은... 놈들이 있는 방향인데.’
일단 거울을 도로 수습하고 소총을 고쳐쥐었다.
혹시나 이쪽의 냄새가 나갈까 싶어 다시금 위쪽을 덮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냥감을 나로 바꾸면 안 되니까.’
아마도 저 스토커자식들의 천적 같은 게 아닐까 싶었다. 단순히 풀숲에 숨어서 경계하는 기색이 아니었으니까.
-캬아오!
‘시작했다.’
그의 추측이 맞았다.
1분 정도 지났을 즈음 묵직한 진동이 빠르게 이어지더니, 뚫어놓은 숨구멍 안으로 여러 괴성들이 뒤섞여 들려왔다.
‘지금 가야 해.’
싸움의 결과에 따라 행동하겠다는 생각은 좋지 않다. 벌써부터 저렇게 시끄러워졌으니, 이미 귀가 밝은 녀석들의 관심을 끌었을 것이다.
‘지금 아니면 늦어.’
얼른 지상으로 올라간 그는 한쪽에서 맞붙어 싸우고 있는 커다란 고양잇과 괴물과, 그에 맞서는 개과 괴물들을 흘깃 보았다.
‘어부지리는 지금 생각할 게 아니지.’
그것도 실력이 있을 때나 가능할 일이다.
소총을 굳게 쥔 그는 일단 달리기 시작했다.
‘총이 있어도 쓰질 못하니, 이게 뭐냐고.’
뒷수습이 가능할 것 같으면 이미 두어 마리 정도는 총으로 쏴죽였을 것이다.
‘어디, 높은 나무 같은 거라도 있으면 올라가서 쏘든 할 텐데.’
탕!
타타탕!
“뭐야, 시발!”
그러던 최강혁이 깜짝 놀랐다.
실수로 당겼나 싶었지만, 아직 안전상태를 풀지도 않았다. 다시 생각해보니, 들려왔던 총소리의 거리가 제법 있던 것 같았다.
‘너무 긴장하고 있었나.’
그냥 총소리라는 생각에 기겁했을 뿐일까.
하지만, 지금으로선 그 어떤 것보다 반가운 소리이기도 했다.
‘설마, 인간 말고도 총을 쏘는 놈들이 있진 않을 테니까.’
그는 달려가던 방향을 급하게 꺾었다.
여전히 들려오는 총소리를 향한 것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소규모는 아니겠지.’
어느 캠프인지 몰라도 전투부대일 것이다.
굳이 합류를 청하거나 할 생각은 없지만, 그 주변 몬스터들이 다들 그쪽으로 몰려갔을 테니 그 근처는 비어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후우, 후우.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작은 언덕을 넘어가려던 그는 얼른 발을 멈추고 엎드렸다. 이틀만에 익숙해진 동작이 부드럽게 이어졌다.
‘뭐야?’
총소리는 멈췄다.
하지만 몬스터와의 전투가 끝난 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몬스터 조우 상황이 아니다.
“.......”
최강혁은 전방 300미터 정도 거리에 보이는 상황이 일종의 ‘처형’이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우리 캠프 사람들은 아니야. 군인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복장이 좀 제멋대로라 용병 같은 느낌도 드네.’
무장한 이들의 숫자는 대략 20명.
그들의 뒤쪽엔 여러 대의 장갑차와 지프 형태의 차량, 수송트럭 같은 것들이 섞여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는 이미 죽은 자들의 시체가 주변으로 피웅덩이를 만들며 번져가는 중이었다.
‘싸움이 아냐. 확실히 처형이야.’
죽은 이들은 비무장 상태의, 특별히 갖춰입은 옷도 없이 속옷차림의 모습이었다.
죽을 만한 죄를 지은 이들일까?
어쩌면 징벌의 현장일 수도 있다.
‘이쪽은 지구의 법을 따르지 않으니까.’
원칙적으로는 해당 국가의 법을 지킨다고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저런 식의 처형도 있을 법 하다.
실제로 그가 속한 캠프 또한. 총으로 쏴죽이진 않아도 야생에 방치하는 식으로 간접 처형을 행하고 있고.
‘하지만....’
뭔가 찜찜하다.
그동안 그가 보았던 캠프의 전투부대원들과 지금 보이는 저들의 차이.
단순한 복장이나 무장만이 아니라, 풍겨오는 분위기부터 이상하게 달랐다.
‘...아.’
그리고, 최강혁은 자신의 짐작이 맞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군가가 수송트럭 중 하나에 꽂혀있던 깃발을 뽑아 바닥에 던지는 것을 보았을 때였다.
‘깃발을 바꿔달았어. 캠프의 표식일 텐데.’
그러고보니, 그곳에 있는 각각의 차량에 모두 같은 깃발이 있는 게 아니었다.
두 종류였고, 그 중 하나가 사라졌다.
‘약탈인가?’
고윤호와 황수찬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들 중 비슷한 내용이 있었다. 외부에서 타 캠프의 병력을 만나게 되면 긴장을 타야 한다고 말이다.
‘비무장지대 너머에서 경계 작전을 하다가 북한군과 조우하면 비슷한 느낌이 들 것 같다고 했었지.’
긴장해야 하는 이유.
지금 보이는 광경이 바로 그것이었다.
〈 31화 〉 031.
031.
탕!
타앙! 탕!
멈췄던 총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이미 쓰러져 피흘리고 있는 이들임에도 확인사살까지 행한 것이다.
그리고 나서야 하나 둘 모여들었다.
‘떠나는 건가.’
그들은 제각각 차량에 올랐지만, 일부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작은 트럭 하나 옆에 모여있는 이들이 뭐라 뭐라 대화를 하더니, 고개를 흔든 이가 수신호를 보이고 나서 다른 차량에 올라탔다.
‘두고 가는 것 같은데?’
이어서 출발하는 차량들.
현장에 남은 건 십여 명의 시체와 트럭 한 대 뿐이었다. 최강혁은 차량들이 시야 멀리까지 멀어진 후 주위를 다시금 돌아보았다.
‘위험하지만... 가야 돼.’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
정말 목숨을 걸어도 될 만한 상황 아닌가.
“......!”
마나를 소모해가며 후다닥 달려간 그는 시체들이 흘린 피웅덩이를 지나 빈 트럭 한 대에 도착했다.
“으음.”
운전석 바깥엔 역시나 옷이 벗겨진 남자가 죽어있었다. 깨진 차창과 운전석 주위에 뿌려져있는 피를 보면 어떤 상황이었는지 짐작되었다.
“루팅도 못하고, 흡수도 못하고....”
일단 트럭에 대고 스캔을 긁어보니, 고장난 것이 맞았다. 총이나 유탄에 맞았는지, 몇 군데가 파손된 상태였다.
‘이건 몇 톤이나 나갈까? 1톤은 당연히 아니고... 2톤도 당연히 넘을 것 같은데.’
그리 큰 트럭은 아니지만, 군용 차량이라는 것을 감안해보면 아마 무거운 철을 사용했을 듯 했다.
하여 조금이라도 흡수하고 마나를 빼내려던 그는 차에 손을 얹었다가 다시 멈추었다.
‘잊고 있었어.’
그동안 행할 필요가 없었던 것.
인벤토리 제작이 무조건 마나만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 생각난 것이다.
‘오히려, 마나 말고는 지불할 만한 게 없어서 그걸 쓴 거였지.’
하지만, 이건 어떤가.
지금 보이는 트럭은, 비록 고장이 나긴 했지만 나름 가치가 높지 않을까?
“...이야.”
시스템으로 확인해보니, 트럭을 고스란히 지불하면 무려 인벤토리 427칸을 주겠다고 했다.
“미쳤냐?”
하지만, 그는 코웃음을 쳤다.
4백칸을 모으려면 얼마의 시간이 필요한지 잘 알고 있긴 하지만, 적어도 그것보다 이 트럭의 가치가 높다는 걸 확신했다.
‘어딜 후려치려고.’
하지만 지금 당장 이것을 챙길 수 없다는 것도 분명했기에, 어쩔 수 없이 그 중간 어딘가에서 타협할 수 밖에 없었다.
‘이걸 어떻게 잘 고쳐본다고 해도... 막 몰고 다닐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시스템의 기준에 의하면 트럭의 소유권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는 듯 했다.
비록 함께 있던 이들이 죽긴 했지만 그래도 소속된 캠프가 있을 텐데, 아마도 그들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상황이어서 그런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배우는 게 있구나.’
최강혁은 서둘러 트럭에 손을 접촉했다.
각 부위별로 세분화한 그는 몇몇 부분을 남기고 나머지를 지불했다.
-인벤토리 300칸을 획득하였습니다.
그렇게 얻은 인벤토리 중 100칸을 특수 칸으로 만든 그는, 시스템에게 지불하고 남은 것들을 그러모아 그 안에 넣었다.
‘한 대에 있던 부품들이라 그런가.’
다행히 완전히 해체한 개념으로 인식하지는 않는지, 적당히 뭉쳐놓자 한 칸에 몰아넣을 수 있었다.
‘엄청 무겁긴 했나보네.’
그렇게 남은 부분만 넣었음에도 9백킬로그램이 넘어갔다. 자칫하면 1톤 제한에 걸릴 뻔 했다.
‘이게 안 되면 그냥 통째로 넘길 수 밖에 없었지. 다행이야.’
그렇게 사라진 트럭.
최강혁은 주변에 널려있는 시체들을 돌아보았다.
‘도덕과 양심을 따르자면 묻어주는 게 맞긴 한데, 그러다간 나까지 같은 처지가 될 것 같아서 곤란하네.’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죽은 이들에겐 유감이지만, 그들을 묻거나 불태워줄 시간은 없었다.
그 대신 얼른 움직여 그들 각각을 스캔해 데이터를 저장해두었다.
나중에라도 해당 캠프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면, 그들에 대해 이야기해주기로 했다.
‘어느 캠프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깃발은 챙겨뒀으니까.’
그때였다.
우우-
휘우우-
‘온다.’
늑대를 연상케하는 울음소리.
최강혁은 놈들을 알았다.
‘무슨 의미인지도 대충 알지.’
근처에 먹을 것이 있다는 신호일 것이다.
서둘러 그곳을 벗어났다.
* * *
목숨을 걸 가치가 있었다.
최강혁은 방금 전 한방에 루팅해버린 짐승 사체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당했을 거야.’
이상한 작은 놈이 후다닥 달려 지나가는데, 그곳에 있던 죽은 사냥감이 홀랑 사라져버린 상황 아닌가.
물론 그 주변에 비슷하게 죽은 것들이 더 있긴 했지만, 그래도 얼마쯤 쫓아오던 걸 생각하면 화가 난 건 분명해보였다.
‘적어도 몬스터한테는 소유권을 인정해주지 않으니까, 내 입장에선 좋아.’
그것 또한 야생에서 얻은 경험이었다.
고작 일주일도 되지 않는 시간이지만, 많은 것을 시도하며 배워가고 있었다.
‘예상대로 되었고.’
어제, 의문의 처형 현장에서 달아나 적당한 곳에서 숨을 고르던 그는 인벤토리 100칸을 추가로 사용, 특수칸을 하나 더 늘렸다.
그것은 이미 염두에 두고 있었던, 몬스터나 짐승의 사체를 한 번에 루팅하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활용도가 무척 좋았다.
‘심지어 이건 썩지도 않았어.’
야생 짐승 특유의 누린내가 지독하긴 했지만, 그래도 없어서 못 먹는 상황이니까.
‘이건... 12칸인가.’
인벤토리 안에 들어있는 사체는 일전에 보았던, 사슴과 소를 섞어놓은 듯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당시에 보았던 썩어가던 사체보다는 그 몸집이 많이 작았는데, 아마도 더 어린 녀석인 것 같았다.
원래는 더 큰 놈을 루팅할 생각이었는데, 녀석들을 사냥한 몬스터가 그쪽에 더 가까이 있어서 무리하지 않았다.
‘아직까진 추측이 맞고 있어.’
놈은 곰처럼 생겼었다.
덩치 크고, 살이 많이 찐 포악한 형상.
물론 실제 곰들은 달리기 속도가 상상 이상으로 빠르지만, 적어도 그 수준이라면 도망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먹잇감을 두고 멀리까지 쫓아올 수 없다는 것도 있었고... 아무튼, 이번에도 무사히 성공했구나.’
스르르 풀리려던 긴장감을 억지로 끌어올린 그는 지평선 근처에 보이는 숲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이제 겨우 손에 닿을 느낌이네.’
1차 목표는 저곳으로 가는 것이었다.
산으로 가기 위한 경로 상에 있는 숲.
그리 넓은 느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거리가 좁혀지면서 그런 생각은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움직이자.’
살짝 경련하던 다리가 멀쩡해지자, 그는 다시금 속도를 높였다.
숲이라면 역시 그 나름대로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 서있는 곳보다는 낫지 싶었다.
‘어젯밤엔 정말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어.’
평소처럼 땅을 파고 들어가 밤을 보내려고 했는데, 이미 그곳에 선객이 있었다.
마치 겨울잠을 자는 뱀처럼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던, 얼핏 쥐며느리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던 벌레 괴물.
놈도 그런 곳에 누가 더 들어올 거라는 생각은 못 하고 있었는지, 실뭉치처럼 말려있던 더듬이들을 풀어내며 몸을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도망칠 수 있었지.’
사실 만남과 도망 사이에 약간의 접촉 과정이 더 있긴 했다.
모처럼 꺼낸 알루미늄 합금 창이 놈의 껍질에 생채기도 내지 못했다거나, 그럭저럭 커다란 개 정도의 크기라 조금 만만하게 여겼더니, 그 안쪽으로 더 깊은 토굴과 다른 벌레들의 모습이 보였다거나.
‘다행히 속도가 느렸어.’
등 뒤에서 쫓아오는 수십 마리 괴물벌레들.
그나마 쥐며느리 형태라 나름 귀여운 느낌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지, 바퀴벌레 쪽이었으면 무서웠을 것 같았다.
“여긴 뭐든 큰 건가... 으익!”
그렇게 중얼거리며 가볍게 달리던 그는 갑자기 휘청하며 앞으로 고꾸라질 뻔 했다.
다행히 중심을 잃지 않고 멈추었지만, 얼른 뒤를 돌아본 그의 시선이 땅바닥을 향했다.
‘분명 평지였는데... 왜 여기만 움푹 패여있는 거야? 함정도 아니고.’
가까이 가서 살펴본 그는 그것이 왠지 무언가의 발자국처럼 보였다. 스캔을 해보니 확실했다.
‘이건 뭐라고 써있는 거야?’
시스템 상에 대상의 이름이 나오긴 했는데, 그가 알고 있는 문자가 아니었다.
‘지금까진 몬스터 이름도 한글 아니면 영어로 나왔던 것 같은데.’
혹시 아직 발견된 적 없는 몬스터라 이름이 지어지지 않은 걸까?
‘그럴 리가 있나. 사람들이 이쪽 지역으로 진출한 지가 얼마나 됐는데.’
고개를 저은 그는 다시금 발자국을 살폈다.
시스템이 알려준 정보는 읽을 수 없는 이름 뿐이었기에, 나머지는 그가 알아서 파악해야 했다.
‘적어도 몬스터라는 건 표시해주니 다행인가.’
몬스터.
시스템이 그렇게 표시한 종류는 인간을 해칠 수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비가 왔던 때에 만들어진 발자국 같고... 시간이 좀 된 것 같아. 방향은... 저쪽인가? 다행히 숲이 있는 쪽은 아니네.’
근처에서 몇 개의 발자국을 더 발견했지만, 모두 한 개체의 것으로 보였다.
집단 생활을 하는 종류는 아닌 모양이었지만, 그렇다고 가볍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발자국만 봐도 덩치가 꽤 클 테고. 혼자서 이런 곳을 돌아다닌다면 그만큼 강하다는 뜻이겠지. 조심해야 해.’
이곳을 지나간 지는 꽤 된 모양이지만, 그것의 영역이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경계심을 갖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최강혁은 어깨에 걸쳐 메고 있던 소총을 앞으로 돌려 잡았다. 이제부터는 다시금 속도를 줄이고 걸어가야 할 듯 했다.
‘물이 간당간당한데, 저기서 채워야겠네.’
숲에 이르기 전, 작은 물줄기 하나가 가로로 지나가고 있었다.
어쩌면 저것 역시 지금 보이는 것보다 더 큰 물길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그곳에서 물을 보충해야 했다.
다만 그보다 더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어느새 오후에 접어드는 터라, 슬슬 밤을 보낼 장소도 물색해둬야 했다.
‘아직은 괜찮지만, 슬슬 무리가 되는 것 같아.’
수면 부족.
마나를 충분히 회복한다고 해도, 체력에 문제가 없다고 해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삐걱거림이 거슬리고 있었다.
이전보다 더 날카로워진 느낌.
하지만 때로는 오히려 멍해진 기분이 제멋대로 들쑥날쑥 감각을 흩트리는 기분이었다.
‘잠을 자야 해. 잠깐이라도.’
하지만 그 잠깐이 자신도 모르게 꿀잠이 되어버릴 수도 있으니, 확실한 장소를 찾아야 한다.
소총을 고쳐쥔 그는 주변 경계를 행하며 이동을 이어갔다.
* * *
“일주일을 버텼다고?”
“아직 표시가 바뀌지 않았습니다.”
부하의 보고가 늦어지자 직접 물어보았던 배지현 준장은 자신이 이곳에 대해 잘못 들었던 건가 생각했다.
“기존 최고 기록이 얼마나 된다고 했지?”
“21일입니다만, 비공식입니다.”
“비공식?”
“내부자와 연계해서 캠프와 인접한 장소에 숨어 버텼다고, 추후에 알려졌습니다.”
“그러면 공식은?”
“공식적으로는... 이탈자들을 제외하면 이틀입니다.”
“이탈자라. 와일더에 합류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건들 말인가?”
“예. 맞습니다.”
배지현은 자신이 입에 담은 무리들의 명칭이 탐탁지 않은지, 입술을 아래로 내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왜 아직도 토벌이 안 되고 있는 거지?”
“소재가 불분명하고... 특정 캠프들과 연계하고 있다는 추정입니다.”
와일더.
또는 와일더 클랜.
혹자는 그들이 초기 개척 단계에서 사라져버린 몇몇 캠프들의 생존자라 이야기하기도 하고, 인위적으로 꾸며 만들어진 가상의 조직이라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시작이 어떤 식이었든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무리였다.
이쪽 캠프의 외부 정찰대나 수송부대를 습격한 전적도 있었기에, 몬스터들 못지 않게 위험한 자들이기도 했다.
“최강혁도 그쪽에 합류했을 가능성이 있나?‘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만약 열흘을 넘긴다면,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보여집니다.”
“형량을 더 늘릴 수도 있겠군. 정말로 그렇다면 말이야.”
본국에 관련 사항을 보고해야겠다고 중얼거린 배지현은 마침 최강혁과 관련된 답신을 출력한 것을 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그저 한 명의 죄수일 뿐인데 말이지. 다들 각성자라면 벌벌 기는 게 문제야.”
본국에선 그녀가 보낸 자료를 충분히 검토했지만, 형량을 늘리는 건 불가하다고 했다.
법적인 절차와 조치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사항이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런 게 아니라는 건 누가 봐도 알 것이었다.
‘그래도 와일더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
배지현은 차라리 최강혁이 더 오래 생존하기를 바랐다.
“추방형 기간인 5년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남은 형기가 오히려 더 늘어있으면 어떨까.”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부하 또한 침묵한 채 차렷 자세를 유지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추방되지 않게 넙죽 빌기라도 할걸, 후회할까? 궁금하군.”
〈 32화 〉 032.
032.
“그냥 넙죽 기었어야 했어. 그게 맞아.”
나직이 뇌까리던 최강혁은 고개를 저었다.
“근데 내가 긴다고 해서 그 여자가 생각을 바꿨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
그는 이어서 입에 넣은, 누린내 나는 고기를 억지로 씹어 삼켰다.
나름대로 위험을 무릅쓰고 불까지 피워 구웠지만, 어째 수분이 빠지면서 오히려 누린내가 더 압축된듯한 느낌이었다.
“담당자님 고맙습니다.”
그나마 식당에서 챙겨준 후추와 고춧가루, 고추장이 있어서 어떻게든 먹을 수 있었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 가지는 못할 것 같았다.
“부대식당 셀프버거가 진짜 최고였는데. 배양육이긴 했지만, 이거에 비하면....”
거듭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남은 고기를 억지로 먹던 그는 문득 그것을 멈추었다.
‘그래. 장기적으로 봐야지.’
매번 이런 식으로 구역질을 참아가며 식사를 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는 지금 상황을 타개할 방법도 알고 있었다.
‘오늘 아침만 해도 아니었지만....’
조합 스킬의 단계가 하나 더 올라갔다.
그러자, 스킬 조합의 슬롯을 추가할 수 있게 되었다. 역시나 인벤토리 100칸을 지불해야 했다.
‘인벤토리를 무슨 화폐처럼 취급하는 것 같아.’
기존에 있는 조합식 두 개 중에서 다중 조합을 빼고 다른 걸 넣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 또한 알게 모르게 자주 쓰고 있으니 빼버리면 문제가 생길 것이다.
“뭐, 인벤토리는 계속 만들고 있으니까.”
-100칸의 인벤토리를 사용하여 ‘조합 스킬 슬롯’을 획득하였습니다.
이제는 습관처럼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본 그는 다시금 시스템으로 눈을 돌렸다.
‘둘 중 하나인데....’
[스캐닝] + [흡수] = [선택 흡수]
[신체강화] + [루팅] = [즉시 섭취]
언뜻 비슷한 효과를 가진 듯 보이는 두 가지 조합식. 그 중 ‘선택 흡수’ 의 경우, 흡수 대상이 갖고 있는 것들 중 원하는 성분만 골라 흡수하는 것이다.
지금도 일단 흡수한 다음에 특정한 성분을 뽑아내 활용하는 정도는 가능하다.
하지만 그 과정이 너무 오래 걸린다.
각각 소모되는 마나도 무시할 수 없다보니, 오히려 손해를 볼 수 있었다. 괜히 그 냄새를 참아가며 직접 씹어먹고 있던 게 아니었다.
‘이거라면 굳이 입으로 먹지 않고도, 원하는 영양소만 골라서 몸에 담을 수 있지.’
과정 또한 간략해지니, 마나 소모 역시 크지 않을 것이다.
다만 지금 최강혁의 눈에는 그것보다 ‘즉시 섭취’ 쪽이 더 좋아보였다.
‘루팅으로 먹어버리는 건데....’
특정 영양소만 골라서 쓰진 못한다.
하지만 속도가 무척 빠르다.
그냥 루팅해버리면, 그것을 씹고 삼키고 소화하는 데 들어가야 할 모든 과정이 생략된다는 것.
‘이것도 입으로 먹을 필요가 없어지는 건 같지.’
단점이라고 한다면 쓸모 없을 부분까지 먹어야 한다는 건데....
‘그래도 루팅이 편해.’
최강혁은 새로 만든 슬롯에 [즉시 섭취]를 꽂아넣었다. 이어서 아직 남아있는 고기 몇 점을 루팅해본 그는 그제야 한결 후련한 얼굴이 되었다.
“이거야.”
누린내가 없어지는 건 아니지만, 아직 입과 목 근처에서 느껴지는 정도지 루팅한 것들 때문은 아니다.
“익히지 않아도 먹을 수 있겠고... 일단 인벤토리에서 선조치는 해야겠지만.”
혹시 모를 병균이나 오염물질 같은 게 들어있을 수 있다. 인벤토리에서 먹을 수 있는 부분만 골라내 저장해두고, 필요할 때마다 루팅하면 된다.
‘선택 흡수도 좋은 조합이긴 한데... 나중으로 미루자.’
최강혁은 모닥불이 있던 흔적을 루팅해 없애버리고 일어났다.
타다 만 풀 같은 것들도 나중에 이어서 태울 수 있으니까 챙겨두는 게 좋았다.
‘슬슬 나갈까.’
모닥불이 사라지니, 당장 주변이 컴컴해졌다.
그가 있는 곳은 물줄기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자갈과 바위로 이루어진 지대의 한 귀퉁이였다.
“.......”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가 앉아있는 곳 주변에만 마치 청소라도 한 것처럼 돌이 보이지 않았는데, 이는 몇 미터쯤 떨어진 곳에 자리한 집채만한 바위 때문이었다.
[바위먹는자]
아마 번역체인 것 같은데, 한글로는 그렇게 표시되어있었다. 몬스터였다.
하지만 최강혁이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는 건 [비선공] 이라는 설명이 뒤에 붙어있어서였다.
‘수상해서 스캔해봤는데, 비선공은 처음 봤지.’
인간만 봐도 도망치는 짐승들의 경우에도 그런 표시는 없었다. 하여 일정 거리까지 다가가보니, 살짝 꿈틀거리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오히려 다른 몬스터들이 접근하지 않아서 좋고.’
다른 몬스터들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 녀석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덕분에 그는 이곳에서 밤을 보냈다.
그래도 안심하고 잠을 잘 정도는 아니어서, 이제는 조금씩 두통까지 생겨나는 중이었다.
‘몸엔 문제가 없는데... 정신적인 문제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최강혁은 근처에 있던 돌을 하나 주워 바위먹는자 쪽으로 가볍게 던졌다.
휘익- 텁!
그러자 바위 틈 어딘가에서 날카롭게 뻗어나온, 혀 혹은 촉수 같은 것이 그 돌멩이를 낚아채 그대로 가져갔다.
‘이름대로야.’
누가 이름을 붙인 건지 아주 직관적이었다.
돌은 먹는데 흙은 안 먹는 것도 신기하고.
‘돌만 먹고 살 수가 있나?’
몬스터들이 두려워하는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어째서 비선공인 건지.
‘호기심은 사람을 죽인다던데.’
굳이 더 알려고 하지 않기로 했다.
조금 더 묵직한 돌을 집어 그쪽으로 굴려 보내준 그는 고개를 돌려 강물 쪽을 향했다.
‘역시, 멀리서 봤을 때보다 큰 물줄기였어.’
도시에서 살던 때의 거리 개념 때문일까.
이렇게 먼 곳을 바라볼 일이 그다지 없어서, 적잖은 시행착오를 겪는 중이었다.
‘오늘은 물을 건너가서... 저쪽으로 가야겠다.’
가야 할 경로를 대강 정하고 집중해 살피니, 그쪽 물가에 모여있는 크고 작은 짐승들이 보였다.
어느 곳이든 물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게 마련일까. 그래서 그쪽을 노리는 포식자들도 있고.
“와, 씨.”
그렇게 물을 바라보며 걷던 그의 입에서 짧은 욕설이 튀어나왔다.
“왜 악어가 나와?”
마침 물을 마시는 상황을 노리는 포식자를 상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바라보던 곳 근방의 물 속에서 정말로 뭔가가 확 튀어나와, 앞에 있던 작은 짐승을 덮치는 것이다.
“아.”
다시 보니, 악어가 아니었다.
색깔이 비슷하고 덩치가 거대해서 잠깐 착각을 했던 모양이다.
‘가물치 쪽에 더 가까운가?’
어류와 파충류를 합쳐놓은 듯한 생김새.
그러고보니 비슷한 형태의 물고기를 자연다큐 프로에서 얼핏 본 것 같기도 했다.
‘엘리게이터가아 였던가.’
생긴 게 워낙 특이해서 기억에 남아있었다.
그걸 훨씬 크게 만들고 겉에 비늘가죽을 붙이면 얼추 비슷할 듯 했다.
‘문제는 저게 육식이라는 건데... 어떻게 건너가지?’
이동 목표를 잘못 잡은 걸까.
이제라도 바꿔야 하나.
‘어쩔 수 없잖아. 평지에선 오래 못 버텨.’
산이든 숲이든, 높은 곳으로 가야 한다.
물길을 따라가다보면 상대적으로 바닥이 얕거나 폭이 좁은 곳이 나오지 않을까.
‘위험할 것 같은데.’
지금이야 이 바위먹는자가 옆에 있어서 괜찮지만, 순간순간 날카로운 눈빛들이 그를 찌르듯 훑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포식자의 시선.
그가 이곳을 떠나는 순간부터 그것은 더 이상 시선으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뭐, 방법이 없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시간이 많이 필요하겠네.”
고개를 좌우로 꺾은 그는 가까이에 있던 돌들을 루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유공간이 그리 넉넉하지 못한 상황이라, 얼마 담지 못하고 멈춰야 했다.
‘특수칸을 하나 더 만들 정도는 아닌데... 역시, 해야 되나.’
100칸이 아니라 50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 바로 어제의 일이었다.
기존 1톤 제한의 특수 인벤토리 한 칸을 업그레이드하여, 무게 제한은 그대로되 다른 대상 하나를 더 넣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손해 같아서 안 했는데, 나름 혹하긴 해.’
[특수 인벤토리 내역]
-1- 282.3kg / 1,000kg
-2- 217.4kg / 1,000kg
-3- 937.1kg / 1,000kg
-4- 211.4kg / 1,000kg
현재 1번 칸에는 전투복을 해체해 조합한 얼룩무늬패턴 원단이, 2번 칸에는 폐 전투화에서 비슷하게 얻은 가죽이 있었다.
3번은 트럭에서 남은 부분이었고, 4번에는 몬스터에게서 도둑질해온 짐승이 들어있었다.
‘저것도 쓰긴 해야 하는데.’
트럭에 사용된 철.
무거운 만큼 상당히 단단해서, 무기든 방어구든 만들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하려는 게 아니니 다시금 1번과 2번 칸으로 시선을 옮겼다.
‘한쪽으로 두 개를 몰아주면, 50칸을 써서 특수한 하나를 만든다고 볼 수도 있잖아.’
인벤토리를 낭비하는 건 아니다. 추후에 50칸을 더 쓰면, 그렇게 업그레이드한 칸의 무게제한을 500킬로그램 더 늘릴 수 있다고 하고.
‘두 갈래라는 거지.’
100칸을 쓰면 무게 2톤 제한의 칸으로 만들거나, 아니면 1.5톤 제한에 2개까지 들어가게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절반인 50칸을 쓰면 무게만 1.5칸으로 늘리거나, 무게 제한은 그대로되 2개를 넣을 수 있게 된다.
‘투자라고 생각하자.’
고민은 길지 않았다.
루팅했던 돌들을 그 자리에 도로 쏟아낸 그는 50칸을 지불하여 특수칸 1번을 업그레이드했다.
이어서 곧바로 2번에 있던 것들을 1번으로 옮겼다. 그렇게 한 곳에 합쳐졌음에도 총 무게가 5백킬로그램 정도였다.
‘됐어. 1톤 확보했다.’
문제는 돌의 경우 각각이 다른 대상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특수칸 한 칸에 몰아넣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어쩔 수 없지.’
그는 루팅으로 일단 일반 인벤토리에 넣은 후, 다중 조합을 거듭 활용하여 그것들을 하나로 합치기 시작했다.
‘굳이 1톤을 다 채울 필요는 없어.’
징검다리를 만들 생각이다.
강물이 너무 깊지 않기를 바랄 뿐.
‘마나는 넉넉해.’
아직 고기도 많이 남아있다.
벌써 절반 정도 먹어치웠음에도 아직 2백킬로그램이 넘어간다.
‘뼈 무게가 있어서 그런 것 같긴 하지만.’
뼈에도 마나가 있다. 오히려 고기보다 많은 곳도 있을 정도니까 문제는 없다.
‘좀 더 강물쪽에 가까운 곳에 자갈밭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해보던 최강혁은 문득 움찔 놀라 옆으로 몸을 피했다.
“뭐지?”
뭔가 달라진 것 같아서 본능적으로 움직인 거였는데, 주위를 보아도 아무 변화가 없었다.
“...아니야.”
하지만 위화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시금 사방을 돌아보던 그는 한 곳에 시선을 멈추었다. 바위먹는자를 본 것이다.
‘움직였지?’
보지는 못했지만, 아주 조금 이쪽으로 다가온 것 같았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도 이어서 깨달았다.
“아. 이거 때문이구나.”
그가 아까 전에 인벤토리에 넣었다가 공간을 비우느라 도로 쏟아냈던 돌들. 그것을 향해 접근하고 있던 것이다.
“움직일 수 있었구나.”
그것을 생각한 최강혁은 계획을 조금 수정하기로 했다. 그래도 돌들이 필요한 건 마찬가지여서, 하는 일을 중단하지는 않았다.
‘이젠 오히려 1톤을 다 채워야 하는 상황 같은데.’
유용한 방법도 찾아냈다.
지금처럼 조합으로 합치는 게 아니라, 특수 칸 안에 있는 돌에 그대로 합칠 수도 있다는 걸 발견한 것이다.
‘따로 넣으려고 해서 안 들어갔던 거구나.’
서로 다른 돌이긴 하지만, 집어넣으면서 기존의 돌과 합치려고 하면 합쳐졌다. 덕분에 더 이상의 마나 소모를 줄이고 더 빠르게 돌을 모을 수 있게 되었다.
‘1톤으로 되려나. 생각보다 얼마 안 될 것 같은데.’
돌의 무게를 조금 만만하게 생각했을까.
그리 많이 뭉친 것 같지도 않은데 벌써 3백킬로그램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1톤을 거의 꽉 채운 그는 특수칸 안에서 그것들을 적당한 크기로 나누었다.
‘되겠지?’
바위먹는자가 내뻗는 촉수의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는 대강 파악해두었다.
그러니 그것이 닿을 듯 말 듯한 정도의 위치에 돌을 부어놓으면 그쪽으로 움직이지 않을까?
‘된다.’
녀석이 정말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너무나 느린 속도여서 답답하긴 했지만, 계속 돌을 먹으면서 조금씩 속도가 빨라지는 것 같기도 했다.
‘좋아. 이렇게 계속 가자.’
몬스터들은 이 녀석을 두려워한다.
그러니 강물 근처까지만 데려가도, 어느 정도 안전한 구역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근데 저쪽에선 왜 못 움직이고 있던 걸까.’
궁금한 점이 많았다.
그렇게 돌을 먹이던 그는 인벤토리 칸이 벌써부터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을 확인하고 얼른 움직였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라. 다시 담아올게.”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예상 밖으로 흘러가게 마련일까. 분명 거리를 계산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보다 훨씬 먼 그가 있는 곳까지 뻗어온 촉수가 있었다.
〈 33화 〉 033.
033.
“억!”
갑작스레 허리를 감아챈 촉수.
얼른 허리춤의 칼을 뽑아 잘라내려던 그가 멈춘 건 그것이 그리 꽉 조여들고 있지 않아서였다.
“......?”
유연하면서도 강한 힘이 있는 게 분명함은 그를 공중으로 들어올리고 있는 것을 통해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녀석은 그렇게 들어올리기만 했을 뿐, 끌어당겨 삼키려 하지는 않았다.
“아. 그게 눈인가?”
지면에서 5미터쯤 올라간 후에야, 최강혁은 녀석의 위쪽에 자리한 것들을 볼 수 있었다.
“몸통인 줄 알았는데, 그게 머리였나? 하긴, 어떤 생김새인지 모르니까.”
그나저나, 왜 이렇게 공중에 들고 있는 건지.
차라리 어디로 던져버리기라도 하면 수습하고 움직일 텐데 답답했다.
“.......”
바위먹는자의 눈이라 짐작되는 수십 개의 둥근 것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분석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10초 정도 더 지났을까.
녀석이 그를 다시 내려주었다.
“좋아. 너 거기서 가만히 있어.”
알아들을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친해지고 싶은 녀석이었다.
괜히 몇 마디 더 건넨 그는 얼른 자갈밭으로 달려가 다시금 돌들을 채워넣고 돌아왔다.
이번엔 1톤까진 안 되었지만, 그래도 녀석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서 서두른 것이다.
“아니, 아니. 그 쪽 말고 이쪽.”
그런데 유인을 하기 위해 돌을 부어놓았더니 그걸 먹으면서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촉수의 길이가 전보다 길어져서 생긴 문제였다.
“더 멀리에 두어야 하나? 그러다 화내면 큰일 날 것 같은데.”
촉수의 길이가 달라진 것처럼, 숨겨진 무언가가 더 있을 것 같았다. 어째 생긴 것도 좀 달라지고 있는 것 같고.
“어?”
그런데, 이제는 녀석이 그가 돌을 부어주지 않아도 알아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나 했더니, 자갈밭으로 돌아가는 듯 했다. 그동안 유인한 게 도루묵이 된 것이다.
“.......”
하지만 조금 허탈하긴 해도 화가 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쪽으로 접근한 녀석이 거의 10가닥이나 되는 촉수들을 마구 뿜어내며 작은 돌부터 큰 것들까지 마구 끌어모으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배가 고팠다고 보면 되나.’
왜 못 움직였던 걸까.
부상이라도 당했을까.
그런 최강혁의 궁금증이 곧 풀렸다.
자갈밭을 흙바닥으로 만들며 모든 돌을 모조리 삼키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점점 바뀌고 있었다.
“도망... 쳐야 하나?”
기존의 형태는 그저 둥글납작한 거대한 바위 정도였는데, 점점 그 아래가 채워지더니 이제 마치 바위로 만들어진 해파리와 비슷한 형태가 되어가고 있었다.
“촉수가... 수를 셀 수도 없겠네.”
몇 가닥만 움직이던 건 체력 안배 차원이었던 건지, 그렇게 위로 올라온 바위 아래로 수십이 아니라 수백 단위의 촉수들이 잔뜩 얽혀있었다.
그것은 팔이자 다리인 듯 했다. 그 거대한 바위 몸체를 지탱하며 움직이고 있었고, 일부는 주변으로 뻗어나가 돌들을 가져왔다.
‘비선공이라 다행이야.’
어떻게 저런 녀석 옆에서 밤을 보낼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니 소름이 돋았다.
‘그러고보니, 비선공이라서 공격을 안 한 건가?’
만약 그가 어떤 식으로든 반항을 하거나 반격을 했다면 녀석이 그에 맞춰 반응했을까?
‘무섭잖어.’
비선공이라는 게, 아예 방관하는 개념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나중에라도 기회가 된다면 더 알아봐야 할 일 같았다.
‘저게 진짜 속도인가?’
제대로 체력을 회복한 건지, 바위먹는자의 움직임이 처음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부드럽고 빨라졌다.
주변 자갈밭을 아예 지워버린 녀석은 잠시 그 자리에 멈춘 채 여러 촉수들을 더듬이처럼 사방을 향해 뻗었다.
‘뭘 하는 거지?’
잘은 모르겠지만, 곧 그렇게 뻗었던 촉수들마저 천천히 내리고는 거대한 바위 몸체 또한 바닥을 향해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엄청 커졌잖아.’
얼핏 보아도 처음 보았을 때의 5배 이상 커진 듯 했다. 멀리서 지켜보던 몇몇 짐승과 들개 형상의 몬스터들이 꼬리를 말고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하긴, 녀석들은 저걸 어떻게 해볼 수도 없겠지.’
강할 것 같은 건 둘째 치고, 애초에 바윗덩어리다. 잡아먹을 수가 없는 거 아닌가.
‘그나마 촉수는 먹을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위험부담이 커.’
그나저나, 주변의 돌들이 사라졌으니 애초 계획했던 ‘징검다리 작전’ 도 불가능하다.
강가에도 자잘한 돌멩이가 있긴 하겠지만, 그걸 어느 세월에 모을까.
“뭐, 그래도 하룻밤 잘 보냈으니까... 고마웠다.”
바위먹는자를 향해 인사를 건넨 그는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녀석의 근처로 다가가 인벤토리에 남아있던 돌들을 남김 없이 털어냈다.
“돌만 먹는 건가... 근데 주변에 돌이 또 어디 있는지 모르잖아.”
그가 버린 돌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것을 보며 중얼거리던 최강혁은 아까 전 녀석의 촉수에 감겨서 오르락내리락 하느라 흐트러진 옷과 장비를 다시 점검했다.
“이제 정말 갈게. 좀 달려야 할 것 같아. 보는 눈이 많으니까.”
일단 강물까지 달려가서, 그곳 상황을 본 후에 어느 쪽으로든 방향을 꺾자.
‘멈추면 안 돼. 계속 달려야 하니까... 전투화 상태는 문제 없군.’
인벤토리에 넣어두고 있었던 소총도 제대로 꺼내어 멜빵을 사선으로 걸었다.
타타탁.
이어서 가볍게 달리기 시작한 그는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그곳에 자신을 노리는 녀석들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잡힐 것 같냐? 다른 건 몰라도 내가 달리기 하나는 자신 있거든.”
무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는 제대로 파악할 기회가 없었다. 바위를 주먹으로 때려보긴 했지만, 주먹만 아팠다.
‘마나를 실으니까 금이 좀 가긴 하던데. 내 뼈에도 금이 가서 문제지.’
각성자라서 금방 회복하긴 했지만, 굳이 주먹을 쓸 거면 건틀렛이라도 만들어야 할 것 같다는 깨우침을 얻었다.
‘다 왔다.’
추방 첫날엔 금방 도착할 줄 알았던 물줄기.
하지만 그때의 목적지와 지금의 강물은 다른 곳이었다.
중간에 이런 저런 사정이 생기면서 우회하다보니 이제야 이곳에 도착하게 되었다.
“오. 생각보다 얕아.”
물이 너무 맑아서 본래의 깊이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것과는 달랐다.
순간적으로 좌우를 돌아본 그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이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지류가 나올 것 같은데... 그쪽에서 건너자.’
하지만 절대 멈추지 않겠다고 정했던 그는 우습게도 그곳에서 몇 발짝을 채 가지 못하고 다급히 멈춰섰다.
“아이, 깜짝이야!”
예측샷이라도 하겠다는 걸까.
이제는 그의 왼쪽에 자리하게 된 강물 속에서 뭔가가 확하고 튀어나와 시야 앞쪽을 가렸다.
발을 제 때 멈추지 못했다면, 방금 튀어나온 ‘그놈’ 의 커다랗고 소름끼치는 아가리에 그대로 물려버렸을 듯 했다.
“이 악어새끼가....”
멀리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컸다.
성인 한 명 정도는 그대로 먹어치울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다행인 건 놈에게 팔다리가 없다는 부분이었다. 덩치가 커도 결국 물고기였던 터라 지느러미를 세우고 이리 저리 버둥거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
죽일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시도하지는 않았다. 강물 쪽에서 거무티티한 것들이 잔뜩 몰려오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썅....”
마치 포탄처럼 물 밖으로 펑펑 튀어나오기 시작한 놈들이 자그마치 열 마리를 넘어갔다.
이제 보니, 가장 처음 그를 노리고 뛰쳐나왔던 놈은 그나마 덩치가 작은 편이었다.
가장 큰 놈은 주둥이에서 꼬리지느머리까지 거의 3미터는 되어보였다.
타앙!
상황이 그런 수준인데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는 건 총을 장식품으로 쓰겠다는 것 밖에 안 된다.
주저 없이 안전장치를 풀고 한 발 쏴제낀 그는 총탄이 한 녀석의 커다란 눈깔을 터뜨리는 것을 보았다.
“먹히는데?”
이놈들은 상대적으로 껍질이 약한 걸까?
아니면 눈쪽이 약점인 건가.
아무튼 상관 없다.
“어차피 쏴버렸으니.”
소총을 제대로 견착한 최강혁은 가장 가까이 있는 놈의 머리를 조준하고 점사를 갈겼다.
그렇게 강변에서의 학살이 시작되었다.
순식간에 죽어나간 악어 닮은 물고기들의 사체 너머로 새로 몰려온 놈들이 꾸역꾸역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잘못 건드린 것 같은데?”
죽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총알은 쏘는 족족 맞았고, 비늘은 그리 단단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소총에 꽂혀있는 건 무한탄창이 아니었다. 거듭 새로운 탄창으로 갈아끼다 정신을 차려보니, 잔탄이 절반도 안 되었다.
‘내가 무적이라고 착각했어.’
순간적으로 정신줄을 놓았다.
이곳에서도 총이 먹힌다는 것과,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착각.
수면부족으로 인한 판단력 저하였을까.
아니, 그런 식의 핑계는 좋지 않다.
“좆된 것 같은데.”
악어 닮은 물고기 따위는 문제가 아니다.
이미 몰려왔던 놈들도 강변이 사체들로 막혀있어서 그런지 튀어나오지 못하고 버둥대다 물러나는 분위기였다.
“.......”
최강혁은 반대쪽을 흘깃 보았다.
멀찍이 거리를 둔 채 반원 형태로 에워싼 놈들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끈질긴 새끼들이구나. 친구들까지 불러왔냐?”
늑대를 닮은 몬스터 무리.
얼마 전 표범을 닮은 몬스터에게 죽은 줄 알았는데, 분명 그 놈들이 섞여있었다.
‘그러면 오히려 그 놈이 죽은 건가?’
속으로 생각하며, 최강혁은 탄창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 안에 있던 탄약들이 가벼운 손짓만으로 새롭게 탄창에 채워졌다.
일일이 꽂아 넣어야 했다면 상당히 번거로웠을 것이다.
철컥.
새 탄창을 끼우는 동안에도, 놈들은 그렇게 반쯤 포위한 상태로 더 다가오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이쪽에서 보여준 광경 때문일까.
“적당히 타협할 수 없을까?”
죽은 물고기는 무척이나 많다.
놈들에게 넘기면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까?
“안 보내줄 것 같은 눈빛이네.”
뭔 말이 통해야 제안이라도 넣든 하지.
왠지 바보가 된 것 같아 씁쓸히 웃던 그는 슬쩍 등 뒤를 돌아보았다.
갈색 빛깔의 피를 흘리고 있는 물고기들 너머, 그놈들의 피로 얼룩져 번져가는 강물 한 귀퉁이가 보였다.
“그냥 뛰어들면 저놈들 식사가 될 테고.”
강물 안에는 여전히 죽은 것들의 동족들이 대기를 타는 중이었다. 그런 것들이 어찌 그렇게 많이 있는 지 모를 노릇이었다.
“타협할 생각은 없는 것 같고....”
최강혁은 가까이에 죽어있던 물고기를 향해 다가가 전투화 앞굽으로 살짝 접촉했다.
‘이 정도에 3칸인가.’
그것 한 마리를 지불해서 얻을 수 있는 인벤토리의 숫자. 사냥한 시간으로 계산하면 상당한 성과지만, 그것을 온전히 수습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그르르....
우두머리일까.
포위하고 있던 놈들 가운데서 성질을 부리는 놈이 생겨나더니, 그런 분위기가 주변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뭐. 해보자고?”
소총을 고쳐쥔 최강혁은 이어서 왼손을 허공에 집어넣었다 빼냈다. 그 손에 쥔 건 두 개 있던 수류탄 중 하나였다.
“아끼다 똥되지.”
주저 없이 안전클립을 제거하려 할 때였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보이던 놈들이 갑자기 좌우로 후다닥 물러나기 시작했다.
“......?”
단순히 물러나는 게 아니었다.
분명 도망치고 있었다.
“또 뭔데?”
뭐가 자꾸 오냐.
최강혁은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얼른 주변에 있던 물고기 사체 몇 구를 인벤토리로 바꿨다.
그러면서 강물로 이어진 틈이 조금 생기긴 했지만, 워낙 핏물이 흘러들어가서인지 그쪽으로는 동족들이 오지 않았다.
“됐다. 나머지는 포기하고....”
수류탄을 도로 인벤토리에 넣은 그는 포위망이 사라진 틈을 타 달아나려고 했지만, 두어 발짝 딛던 걸음을 바로 멈추었다.
“어라?”
포위하고 있던 놈들이 도망친 이유.
그것이 다름아닌 거대한 바위를 얹고 다니는 촉수 괴물 때문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다름아닌 ‘바위먹는자’였다.
“설마, 도와주러 오는 거야?”
돌 좀 먹여줬다고 이럴 때 구해주는 건가.
왠지 가슴이 뭉클해지는 기분이었다.
“뭐, 서로 위기일 때 한 번씩 도와준 거니까 비겼다고 치면... 뭔데? 야!”
푹! 푹!
그 때, 아주 스무스한 움직임으로 강변까지 다가온 놈의 촉수 몇 가닥이 죽은 악어 물고기 몇 마리의 몸을 뚫고 들어갔다.
빨대를 꽂듯 쑤셔박힌 촉수가 울룩불룩 기괴하게 움직이자, 그것이 박혀있던 물고기가 겉비늘만 남기고 바람빠진 튜브처럼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이것들 때문이었냐....”
휘감아서 끌고 가거나 하는 게 아니라, 그런 식으로 몸 안에 든 것들을 뽑아먹는 모양이었다.
“비선공이라며?”
이미 죽은 녀석들이라서 그런 건가.
“돌만 먹는 게 아니라는 건 알겠다.”
고개를 끄덕인 최강혁은 놈의 촉수가 박혀있지 않은 놈들 위주로 다시금 인벤토리 교환을 이어갔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먹잇감을 없앤다고 저놈이 화를 내거나 할지도 몰라 긴장이 되었다.
하지만 놈은 10마리 정도 그렇게 빨아먹고 나서는 촉수를 거두고 더 먹지 않았다.
“.......”
내가 잡았는데 왜 내가 눈치를 봐야 하지?
슬쩍 투덜거리면서도 하던 일을 이어간 최강혁은 어느새 핏물을 제외하면 깨끗해진 강변 한쪽으로 향했다.
〈 34화 〉 034.
034.
“음....”
강변에는 바위먹는자가 속만 뽑아먹고 버렸던 물고기들의 비늘가죽이 널려있었다.
스캔을 해서 살펴보니, 역시나 방어력 같은 걸 기대하긴 어려운 수준이었다.
“어쩐지 총알이 잘 박히더라.”
그래도 아주 가치가 없는 건 아니었다.
비린내만 제거하면 천막 같은 걸 만들 용도로 쓸 수도 있을 법 했다. 아니면 각 비늘들을 긁어내서 활용할 수도 있겠고.
‘근데, 넣을 데가 없잖아.’
천막을 만들자면야 전투복 원단을 쓰면 되겠지만, 그것들은 방수가 아니다. 이건 방수가 가능하니 챙기고 싶은데, 공간이 될까 모르겠다.
“음....”

Comentários

Postagens mais visitadas deste blog

apocalipse 9

magia 10

magia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