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ilado 12

변 살펴. 호각 챙기고.”
“알겠습니다.”
후다닥 달려간 헤인즈는 정말 그동안 열심히 했는지 제법 능숙한 동작으로 나무를 올라갔다.
그렇게 마차와 사람들이 대기하는 동안, 최강혁은 두어 시간쯤 걸려서 캠프가 들어설 땅을 확보했다.
“이제 들어와.”
마차를 들여놓은 후, 청소 과정에 얻은 나무들을 활용해 울타리를 둘렀다.
기존에 자리하고 있던 석재들 중 일부는 그대로 활용하고, 나머지는 일단 루팅했다.
‘애초에 괴롭히려는 목적이었던 건가.’
〈 89화 〉 089.
089.
루팅이 되었을 때, 오히려 조금 놀랐다.
가문에서 그들의 땅임을, 소유하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면 루팅이 되지 않았을 테니까.
‘그냥 돌도 아니고, 옛 성의 일부니까. ...가문의 재산까지 서로 공유하는 건 아닐 거 아냐.’
그러니 이게 된다는 건 결국 어느 정도는 이곳을 버렸다고 생각한다는 뜻인데....
아마도 그들은 이곳을 다시 농경지로 바꾸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루팅 되면 좋지 뭐.’
울타리를 마저 둘렀다.
넓게 두르는 게 아니라서 오래 걸리진 않았다.
“아....”
뭔가 도와줄 게 있는지 기웃거리던 엘리사벳이 멍하니 고개만 저었다.
목재를 다듬는 일이라면 도울 수 있다던 에밀리 역시 그 옆에서 구경 중이었다.
“넘겨주기 아깝네요.”
그녀가 말했다.
고작 땅을 조금 비우고 울타리만 둘러놓았음에도, 꽤 괜찮은 목조 성채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안쪽에는 어느새 간이 막사와 헛간이 생겨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마치 호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놓듯 이것 저것 허공에서 꺼내는 모습이었다.
“뭐... 처음부터 우리 것은 아니었으니. 욕심을 내는 건 맞지 않겠죠.”
에밀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남편을 바라보았다.
그가 굳이 캠프부터 만들고 있는 건, 생각보다 이곳에 오래 머물게 될 것 같아서였다.
원래대로라면 혼자 왔다가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계획이 바뀌었으니까. 이곳에서 좀 머물다가, 다 같이 도시에 방문하기로 말이다.
마침 이곳이 도시 쪽과 좀 더 가깝기도 하다던가. 주로 사용하던 오솔길과는 떨어져있기에, 별도의 길을 새로 뚫어야 할 모양이지만.
“얼추 됐다.”
주변을 정리한 최강혁은 캠프의 중앙에 새로운 구조물을 올렸다. 속을 비운 통나무를 활용한 망루였다.
비어있는 내부엔 사다리를 넣었고, 꼭대기엔 네 사람 정도가 여유롭게 누울 수 있을 면적의 옥상을 배치했다.
“음. 지붕은 반만 놓자.”
주변 정찰과 경계 목적도 있지만, 일종의 전망대 역할도 하면 좋겠지 싶었다. 하늘을 좀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을 테니까.
지금도 좋긴 한데, 밤에는 그곳에서 보는 하늘이 더욱 괜찮을 것 같았다.
“비가 오면... 뭐, 어떻게든 되겠지. 바람이 불어서 옆으로 내리는 것만 아니면.”
“멀리까지 잘 보이는군요.”
엘리사벳이 망루 위에 섰다.
헤인즈와 교대로 근무하기로 했다고.
‘역시. 사람이 부족해.’
적어도 세 배 병력은 있어야 한다.
최소 두 명씩 3교대 정도는 가능해야 할 테니.
‘지금 있는 사람들을 동원하기도 애매하고.’
남은 이들이라고 해봐야 두 명의 메이드가 전부인데, 그녀들을 불침번으로 세우는 건 좋지 못하다. 설령 아무 일이 생기지 않더라도, 심적 부담이 클 테니.
‘상황 대처 능력도 확신할 수 없고.’
도시에 가면 용병이라도 구해볼까.
단순 경계근무라면 급여가 저렴한 편이라던데.
다들 용병에 대한 인식이 별로인 것 같아서 그리 끌리는 대안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일단 염두에 두기로 했다.
“고생해. 일 생기면 알지?”
“예. 걱정 마십시오.”
망루 옆에 작은 창고를 지었다.
부식거리와 음식 재료 등을 꺼내놓았다.
혹시라도 그가 제 때 돌아오지 못할 경우, 이곳 사람들끼리라도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일단 금부터 그어야겠어.’
농경지로 만들어야 할 가문 소유의 땅.
그곳이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 경계선을 확보해놓고 시작할 작정이다.
‘어차피 이번 방문으로 다 끝낼 수는 없을 것 같고, 견적부터 내보고 나서 일정을 짜든 해야지.’
아내에게 이야기한 후 캠프를 떠났다.
도우미 덕분에 지도 확보가 가능했다.
더 나아가서 어느 쪽으로 나무들을 베어가야 하는지, 시야에 네비게이션처럼 표시해주고 있었다.
‘가자.’
남은 건 길을 내는 일 뿐이다.
2.5미터 길이의 대검을 번쩍 드니, 두 팔의 근육이 불끈 부풀어올랐다.
“이쪽은 확실히 사람 손 안 탄지가 오래 됐네. 그나마 오는 동안 길을 냈던 곳 나무들은 덜 굵었던 것 같은데.”
지름 3미터에서 5미터 가까이 되는 나무들이 적잖게 섞여있었다.
이러니 에밀리아의 가문에서도 절대 성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 아닐까.
“이 정도면 불을 질러도 잘 안 탈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다.
하지만 이쪽 세상은 대규모 산불 같은 개념이 없다고 했다.
번개든 뭐든 터져서 불이 나기 시작하더라도, 크게 번지지 않고 적당히 꺼지는 편이라고.
‘흐음.’
에밀리아는 그것이 신이나 정령들의 존재 때문이라고 했다. 그들이 재해를 막고 세상을 보호해준다고 말이다.
그저 미신 같은 이야기였지만, 마법이 존재하는 세상이니만큼 아주 허황된 이야기는 아닐 것 같기도 했다.
‘신도 있기는 한 것 같고.’
길을 내면서 나아가다보니, 문득 문득 옛 성터의 흔적을 추가로 발견하기도 했다.
제대로 가고 있다는 뜻이기에 반가웠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고개가 저어졌다.
‘이거... 테두리 금 그어놓는 것도 며칠 갖고 안 되겠는데.’
아직 확정된 지도조차 만들지 못했다.
그의 인식 범위를 넘어서는 영역이었다.
도우미도 그 부분은 도움을 줄 수 없었다.
‘대충 봐도 장난 아니잖아.’
지금 있는 지도는 육안으로 훑어본 것들을 토대로 구성한 임시 지도였다. 실시간으로 주변 스캔 데이터가 더해져 보정되는 중이었다.
‘그렇지. 없으면 이상하지.’
뭔가가 후다닥 달아나는 소리도 들렸다.
자잘한 짐승들이 보였다.
이런 숲에 아무도 살지 않는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니, 그들의 터전을 없애고 쫓아내는 일이라 할 수도 있었다.
‘철거용역이 된 기분인데.’
이렇게 돼서 유감이지만, 주변에 다른 숲과 산도 많으니 적당히 이사를 가면 좋겠다.
‘그것도 철거용역 같은 생각이잖아.’
* * *
일주일동안 캠프를 오갔다.
뒤로 갈수록 처음 시작했을 때보다 폭을 줄여가며 겨우 영역 경계선을 그었다.
초기의 폭을 유지했으면 한달이 걸려도 못 끝냈을 것이다.
“피곤해보여요. 괜찮은 거예요?”
“괜찮아.”
“괜히 나 때문에....”
“아니야. 나한테도 이득이 돼.”
“이득?”
아내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이득이 되고 있다.
인벤토리도 만들고, 마나도 채우고, 겸사겸사 멈췄던 몬스터 핵의 제작도 다시 시작했다.
‘이런 미친.’
그렇게 완성된 경계선을 지도로 확인했다.
단순 길이만 4킬로미터에 육박했다.
그녀가 가난할 수는 있지만, 그녀 가문은 절대 아니라는 걸 확실히 알게 되었다.
‘여의도의 3분의 1은 된다는 거잖아.’
이만큼의 땅이 추가된다면, 그가 살던 고향을 기준으로 해도 대단한 성과다.
‘뭐, 지역에 따라서 땅값이 편차가 크긴 하겠지만... 이쪽은 어떨까.’
농경지라고 하니, 그곳에서 얻을 수 있는 소출을 고려해보면... 그들 가문에 적잖은 이득이 될 것은 분명해보였다.
그러면, 아내의 입지도 강해질까?
‘글쎄.’
오히려 이곳을 개발하면 그들의 병력과 관리인들이 주둔하러 올 텐데.
어쩌면 얼마 전 보았던 남자가 올 수도 있고.
‘불편한 이웃이 생기는 거 아닌가.’
속으로 품고 있던 생각.
혼자 고민할 일은 아닌 것 같아서 아내에게 털어놓으니,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이사를 가도 괜찮아요.”
“이사?”
끄덕끄덕.
그녀는 이곳에 온 것이 부모가 물려준 땅이어서가 아니라, 이곳 말고는 갈 곳이 없어서였다고 했다.
“애초에, 저쪽의 땅이 부모님 명의로 남아있던 게 맞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그건 무슨 말이야?”
“이상하잖아요. 가문 소유의 땅 가까이에 부모님 명의의 땅이 있다는 게. 그것도 본가도 아니고, 소영지라면 우리와는 관계 없는 곳인데.”
이곳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지금의 조건을 받았을 때와 같다고 했다. 그 전까진 부모가 그런땅을 남기고 갔는지도 알지 못했었다고.
“처음 그곳에 도착했을 때... 하하.”
“할 일이 많았죠. 엉망이었습니다.”
엘리사벳이 말했다.
에밀리아는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당시 모두 같이 고생하던 게 생각나는지 고개를 내저었다.
“그땐 사람이 좀 더 있었어요. 열 명 정도.”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들을 반긴 건 부서진 건물들의 흔적과 관리가 안 되어 숲처럼 변한 정원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힘을 합쳐 그곳을 살 수 있는 풍경으로 만들어놓았다.
하지만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잘 보였다. 좋지 않은 미래가.
“그렇게 한 명씩 떠나갔어요.”
가장 마지막에 떠난 이는 모든 하인들을 관리하던, 일종의 집사 역할을 하던 이라고 했다.
나이가 들어 고향으로 은퇴를 했다는데, 만약 이곳에 미래가 있었다면 그렇게 떠났을까 싶었다.
“내 고집이었죠. 결국.”
“아닙니다.”
엘리사벳은 짧게 말했다.
그리고는 머뭇거리다 한 마디를 더했다.
“최선이었습니다. 여러모로.”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다만 에밀리아가 의심하는 건, 이곳의 그 어떤 것도 그녀가 기억하는 부모의 성격이나 취향과 어울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정원에 심어진 꽃도 어머니께서 싫어하시는 종류였어요. 가시가 있는 꽃들이었거든요.”
“야생화가 아니었어?”
“네. 인위적으로 조성된 정원이었어요. 다년생이라서 남아있었고.”
혹시라도 부모의 소유가 맞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라면 그 상태로 오랫동안 방치할 리가 없었다.
“돌아가신 시점하고도 맞지 않아요. 서류 정도야 쉽게 꾸밀 수 있으니....”
결국 퇴로를 만들어놓고 몰아넣었다는 뜻이다.
그녀에겐 유일한 선택지였지만, 결국 그 선택지마저 가문에서 만들어 내민 것 같았다.
‘괜히 헛일했잖아.’
최강혁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 줄 알았다면, 어차피 이사를 갈 거였다면, 굳이 애써가며 이런 저런 것들을 짓지 않았을 텐데.
‘뭐, 나쁘진 않았지.’
그래도 다들 좋아하고 있으니 딱히 후회하진 않았다. 그런 일을 안 했다고 해도 따로 할 일이 있던 것도 아니었고.
“그러면, 이사는 어디로 가?”
“모르겠어요. 갈지 안 갈지도 확실하지 않고... 만약 간다면, 가본 적 없는 곳이 좋을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한 그녀는 무엇을 상상하는지 조금 즐거워진 표정이었다.
“그래도 일단, 연구부터 마치고 싶은데....”
그녀가 하는 연구가 무엇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곧 보여준다고 약속했다.
“뭐가 되었든... 빨리 끝내줄게.”
“네?”
에밀리아가 고개를 돌리니,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남편의 굳건한 턱선이 눈에 들어왔다.
“여길 농경지로 바꾸면, 자유를 얻는 거잖아.”
“...아.”
“딴 말 못하게 만들어줄게. 그리고, 떳떳하게 떠나자. 다 같이.”
베티와 루시아가 조용히 둘의 찻잔을 채워주었다. 그 옆에서 검을 닦던 엘리사벳이 자기는 되었다며 미소지었다.
그 때였다.
고로롱거리던 말이 고개를 높이 들었다.
거의 동시에 망루 난간으로 얼굴을 보인 헤인즈가 수신호를 보였다.
간단한 의미였다.
뭔가를 보았다는 것이다.
“.......”
엘리사벳이 얼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최강혁은 식구들을 미리 준비해둔 지하 공간으로 대피시킨 후, 마찬가지로 망루 위를 향했다.
“어디야?”
“저쪽입니다.”
헤인즈가 멀리 한 지점을 가리켰다.
“숲속에서, 뭔가 움직이는 걸 봤습니다.”
“확실해?”
엘리사벳이 가늘게 뜬 눈으로 그쪽을 보았다.
딱히 보이는 게 없었다.
하지만 최강혁은 달랐다.
그의 시야 한쪽엔 저격총의 조준경을 닮은 확대창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나마 유리가 생겨서 다행이었지.’
캠프에서 쓰던 저격총 조준경보다는 못한 수준이었지만, 나름대로 조잡하나마 망원경을 만들어냈다.
그것을 도우미 덕에 시야에 띄울 수 있게 된 것인데, 확대할수록 화면이 멍해지긴 해도 멀리 볼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만족스러웠다.
‘육안으로는 잘 안 보이는 거리야. 운이 좋았어.’
헤인즈의 말이 맞았다.
숲 속에 뭔가가 있었다.
하나였지만, 결코 작지 않았다.
탁. 탁.
뒤를 돌아보니, 에밀리아가 올라오고 있었다.
잊고 있던 게 생각났다고 했다.
“엘리사벳경, 기억해요? 이곳에 대한 소문.”
“...아.”
그러자 잠시 생각에 잠겼던 엘리사벳이 일순간 얼굴을 굳혔다.
“설마 이곳이....”
“맞아요.”
“이런.”
무슨 이야기일까.
궁금해하면서도 숲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최강혁도 곧 이곳에 대한 소문을 알게 되었다.
〈 90화 〉 090.
090.
“이곳이 제가 아는 곳이 맞다면... 과거, 아주 비옥한 토지를 가진 영지였을 겁니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이 말했다.
나름대로 번성하고 있던 소영지.
하지만 어떤 사건으로 인해서 몰락했다고.
이후로는 지명조차 기억하는 이가 드물다고.
“사건?”
“몬스터 습격이라고 들었습니다. 종류를 가리지 않고, 아주 많은 몬스터들이 몰려왔다고....”
왕이 내려준 땅.
그 상징성도 있지만, 당시만 해도 이런 숲이 아니라 농작물로 가득한 평야지대였다고 했다.
“소영지라고는 하지만, 일종의 직할령이었죠. 영주로 앉힌 이가 은퇴한 기사였거든요. 기사들 사이에 내려오는 전설 같은 이야기입니다.”
어려운 단어들이 많이 있었지만, 말을 끊을 필요는 없었다.
앞뒤 문맥과 더불어, 그동안 쌓인 데이터 덕분에 해당 단어의 의미를 어느 정도까지는 유추해볼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최강혁이 원할 경우, 그는 말하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 그들이 말하는 내용을 문장으로 띄워볼 수 있었다.
마치 증강현실과 비슷했다.
그 역시 데이터 저장소와 연계한 도우미의 기능이었다.
아직은 오류가 날 때도 있지만, 조금씩 정보가 더해지고 보정되면서 완벽에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토벌대를 보냈어요.”
이어진 이야기는 에밀리아의 입에서 나왔다.
본가의 주 병력에 더하여, 다른 소영주들에게서 끌어모은 병력까지 상당한 규모의 토벌대를 구성해 내려보냈었다고.
“하지만, 실패했죠.”
강한 몬스터들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숫자였다.
“기록으로 남아있던 걸 우연히 봤어요.”
당시 아군의 피해가 상당해서, 사병들을 보냈던 소영주들의 반발이 심각했다.
“그들의 기사들도 많이 잃었으니까요.”
결국 소영주들에게 보상해주기 위해서 제대로 된 피해를 조사한 서류가 가문에 남아있었다는 것.
아버지를 따라 가문의 역사서들을 열람하다 우연히 보았다고 했다.
“그런 일이 있었으니, 새로 토벌대를 꾸릴 엄두도 내지 못했죠.”
“포기한 건가.”
“네. 나라에 반납하자는 의견도 있던 것 같지만, 일단은 갖고 있기로 했어요. 당시엔 의문점이 많았거든요.”
멀쩡하던 평야에 몰려와 터를 잡기 시작한 몬스터들. 아무리 그곳이 농경지대라고는 해도, 모든 몬스터들이 곡식을 먹는 건 아니었다.
혹여 어떤 사특한 마법이나 음모와 연관된 것이 아닌지 뒷조사도 해보았던 것 같지만, 그리 뚜렷한 결과는 나오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렇게 잊혀진 땅이 되었죠.”
“몇년에 한 번... 상황 파악을 위해서 정찰대를 보낸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지 못했습니다만.”
쉬쉬하는 이야기라고 했다.
그리 자랑스럽지 못한 이야기니까.
게다가 정확한 위치를 알게 되면 차출된 이들의 사기가 떨어지거나, 아예 거부할 수도 있다고.
“그래도... 나는 잊으면 안 되는 거였어요.”
에밀리아가 그것을 기억한 건, 다름아닌 아까 전 발견한 어느 주춧돌 때문이었다.
그곳에 새겨져있던 문구가 왠지 낯설지 않아서 뇌리에 남아있었는데, 이제야 가문의 서류 속에서 보았던 지명임을 깨달았다고.
“경솔했어요. 당연히 쉬운 조건은 아닐 거라고 짐작했지만....”
이곳으로 떠나오기 전, 좀 더 자세히 알아봤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더 나은 선택을 했을 텐데.
“.......”
하지만, 만약 이 사실을 알았더라도 당시의 선택이 달라졌을까를 생각해보면... 쉽게 대답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괜찮아.”
“아니에요. 정말 미안해요.”
“진짜 괜찮은데.”
최강혁은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오히려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이곳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는 다 알지 못해. 경계선 작업을 하는 동안 마주친 녀석들은 약한 놈들 뿐이었고.”
세월이 흘렀다.
당시에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그 정도로 위험해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저 녀석은 좀 달라.”
“네?”
“아는 놈이야.”
그는 숲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나쁜 놈 아니야. 뭐, 모르는 상태에서 만나면 공격 안 하고는 못 배길 생김새긴 한데.”
망루 난간 밖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곧장 울타리 정문으로 향했다.
“문 닫아 걸어.”
“어쩌실 생각입니까!”
망루 위에서 눈을 크게 뜬 엘리사벳이 외쳤다.
“멀리 보낼 거야. 저 녀석도 그걸 원해.”
“......?”
마치, 몬스터의 마음을 안다는 듯이.
그런 말을 하는 가주의 모습에, 엘리사벳은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헤인즈를 돌아보았다.
“그때하고 비슷해요.”
“그때?”
“곰이요. 분명 비슷하게 대화하실 수 있을 거예요.”
“...대화라니.”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
그녀는 헤인즈에게 뒤를 맡긴 후, 서둘러 망루를 내려가 가주의 뒤를 따랐다.
얼마나 빠른지, 점점 거리가 벌어졌다.
그가 먼저 그녀를 발견하고 속도를 줄여주고 나서야 합류할 수 있었다.
“왜 따라와?”
“어떻게 혼자 보냅니까.”
“뒤에 있어. 위험하니까.”
“그러니까요. 위험한데 어째서....”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멀리, 빼곡이 들어차있는 나무들 사이로 거대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그그긍....
마치 작은 동산과도 같은 시커먼 형체.
지난 번 보았던 거대한 곰의 가죽 같은 건 더 이상 기억도 나지 않았다.
혹시, ‘사냥꾼의 운’이라던 오우거일까?
행운이든 악운이든 만나는 순간 결정된다던데.
“적대감 보이지 마. 그거 안 좋아하니까.”
“...예?”
“친하게 굴어.”
“......?”
적대감을 보이지 말라니.
그녀는 제멋대로 떨리는 몸을 제어하려 노력하던 것 뿐이었다.
“안 되겠다. 따라오지 말고 여기 있어.”
나직이 말한 최강혁은, 이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구나. 생각보다 더 크네. 이 거리도 안심 안 되겠다.”
“무슨....”
“뒤로 더 물러나. 저기까지.”
“저 바위 말씀이십니까?”
“어? 바위가 있었네.”
오히려 최강혁이 그쪽으로 달려가더니, 그 바위를 사라지게 했다.
“이쪽으로.”
“예.”
아무런 거리낌 없는 행동.
정말 그가 아는 몬스터일까.
서둘러 가주가 가리킨 곳까지 물러난 엘리사벳은, 이어서 그가 천천히 저 거대한 무언가를 향해 접근하는 모습을 보았다.
“...으으!”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달려가고 싶었지만, 가주의 명령이 있었다. 자칫 잘못 행동하다가 문제가 생긴다면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어.
가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도 이런 거 좋아하냐?
그그긍....
정말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걸까.
나무들 사이에 멈춰있던 거대한 그림자가 움직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아래에서 뭔가가 뻗어나와 가주를 낚아챘다.
“...가주!”
-움직이지 마!
움찔!
이미 두어 걸음 나서고 있던 그녀는 길쭉한 밧줄 같은 것에 붙잡혀 허공에 들어올려진 가주를 보았다.
이미 반쯤 뽑혀나왔던 검을 애써 도로 꽂아넣을 즈음,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대충 알겠다.
뭘 알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도저히 안 되겠어서 그쪽으로 접근하던 그녀의 눈이 일순간 멍해졌다.
* * *
“다쳤구나.”
자신을 바라보는 눈들을 마주보며 말했다.
생김새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그건 사람들이 제각각 다르게 생긴 것과 비슷한 느낌의 차이였다.
[바위먹는자]
녀석이 이쪽 세상에도 있는 줄은 몰랐다.
게다가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촉수가 몇 가닥 안 남았어. 잘려나간 것들이 보이는데.”
거대한 바위몸통.
하지만 땅에서 거의 들리지 못한 상태로 비비적거리는 수준이었다.
이유는 분명했다.
몸을 들어올리고 이동할 촉수가 부족했다.
“이상하네. 다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의아한 부분은 따로 있었다.
녀석을 스캔해보니, 그렇게까지 나이가 많아보이진 않았다.
‘덩치는 크지만.’
몸에 붙어있는 바위 부분은 상대적으로 근래에 추가된 것으로 보였다.
그 아래에 자리한 몇가닥 안 남은 촉수 부분은, 애초에 제대로 자라지 못해서 작고 가느다란 느낌이 있었다.
“그럼 네가 아닐 수도 있겠어.”
아내의 본가에서 이곳을 포기한 이유.
몰려왔다던 수많은 몬스터들.
‘무슨 웨이브도 아니고.’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일단 나무를 싹 제거하고 나서 조사해봐야 감이라도 잡힐 듯 했다.
다만 지금 이 녀석이 아니라면, 이 녀석을 이렇게 만든 놈들이 범인일 수도 있었다.
‘아직 살아있다면 말이지. 어쩌면 놈들의 후손일 수도 있고.’
바위먹는자의 바위몸통 한 곳에 녀석과는 관련 없는 것이 하나 박혀있었다.
무언가가 할퀸 듯한 흔적 끄트머리에 꽂혀있는, 부러진 발톱을 발견한 것이다.
‘바위를 긁을 정도의 절삭력, 혹은 파괴력... 그래도 부러지긴 한다는 건가.’
대략 30센티미터.
그 끝에 엉겨붙은 살점을 보니, 단순히 부러진 것이 아니라 아예 뽑혀나온 듯 했다.
‘시간이 꽤 됐어. 발톱의 노화 상태를 보면 오히려 저게 더 오래된 몬스터 같고.’
아무튼, 이 녀석은 아니다.
물론 해롭냐고 묻는다면 반반이라 하겠지만.
‘상황이 안 좋아.’
그를 공격하진 않고 있다.
하지만, 녀석이 처한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으니... 혹시 오해라도 산다면 그의 몸에 촉수를 박고 체액을 빨아먹으려 들 것이다.
“이럴 땐 뇌물이지.”
바닥에 바위를 흘렸다.
그 옆에는 대형 욕조 하나를 꺼내놓았다.
꺼내자 마자 시큼한 비린내가 풍기는 건, 그 안에 몬스터의 피가 가득 차있어서였다.
“입에 맞을까 모르겠... 맞나보네.”
슬그머니 뻗은 촉수 하나가 마치 확인을 하듯 욕조를 건드리더니, 이내 그안에 푹 들어가 안에 든 것들을 빨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촉수가 적은 것 같기도 하고... 뭐, 몇 가닥 잘린 건 분명해보이는데.”
잘린 건지, 뜯겨나간 건지 불분명했다.
절단면을 보면 두 가지가 다 있었다.
“오.”
녀석이 그를 내려주었다.
생각해보면, 몬스터와 좋은 기억을 쌓은 건 녀석이 처음 같았다.
‘이 녀석은 아니지만... 친척이라고 칠까.’
거의 비어가는 욕조에 피를 더 채워주었다.
이러려고 쟁여놓은 건 아닌데, 잘 두면 쓸 일이 생기겠지 했더니 정말 생겼다.
“더 있으니까, 마음껏 먹어라.”
그동안 굶주렸을까.
피를 빨아먹고 있던 녀석의 촉수가 좀 더 굵어지고, 잘려나간 것들이 조금씩 최복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래도 그 거대한 몸을 제대로 들어올릴 정도는 아닌 모양이었다.
애초에 그렇게까지 바위를 더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마치, 식탐이 심한 어린아이를 보는 것 같았다.
‘어디 보자. 여기에 계속 둘 수는 없으니.’
녀석의 몸통 위로 올라갔다.
근처에서 기겁하는 숨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인근까지 접근하고 있던 엘리사벳에게 괜찮다는 신호를 준 그는, 바위 틈새에 박혀있던 무언가의 발톱을 루팅했다.
“저쪽에서 온 것 같은데... 억지로 비집고 들어오다가 끼어버렸구나.”
녀석의 이동 경로를 확인했다.
그렇게 힘이 좋은 녀석인데도 단단히 뿌리를 박아내린 거목들은 어쩔 수 없었을까.
‘그나저나....’
동선을 보면 단순 이동이 아니었다.
뭔가에 쫓겨 도망친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곳에 억지로 들어올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원인부터 해결해야겠지.”
이 녀석을 다른 곳으로 보내기 전에, 도망친 이유를 찾아 해결해주는 게 먼저일 것 같았다.
“.......”
사실 죽일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이 녀석은 잘만 사귀면 사람보다 나았다. 적당히 거리를 두면 주변 몬스터들을 막아주는 역할도 해줄 수 있을 것 같고.
“엘리사벳.”
“예. 여기 있습니다.”
“이름 알아? 이 녀석.”
“처음 봅니다.”
“바위먹는자 라고 불러. 내 고향에선.”
“바위를 먹는 게 아닌 것 같은데요.”
“주로 피를 먹지. 촉수 보이지?”
“예.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먼저 공격하는 성격은 아니야. 가만히 있으면 괜찮아.”
“그런 몬스터는 들어본 적 없습니다.”
“있더라고. 그런 녀석이.”
최강혁은 바위먹는자가 왜 이곳에 있는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녀석이 헤집고 들어오며 생겨난 숲속 통로와, 그 좌우 나무들이 망가진 모습을 가리키기도 했다.
“도망친 거야.”
“그렇다면....”
“아마 그 놈들 같아. 확인해봐야지.”
“굳이 확인해야 할까요?”
“왜 이 땅을 콕 집어서 내밀었을까?”
엘리사벳의 표정이 굳었다.
〈 91화 〉 091.
091.
“어렴풋이 짐작만 했습니다.”
막다른 길로 몰아넣었다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세한 내막을 다 알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을 준 거야. 나름 근거도 있었겠지. 대충 보이지?”
“예... 보입니다.”
“여길 다 밀어버리고 농경지로 만들더라도, 그걸 처리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아. 그쪽에서도 그 부분을 트집잡을 테니까.”
“하지만....”
“당장 싸우자는 게 아니야. 일단 조사부터 해봐야지. 어떤 놈들인지. 얼마나 있는 건지.”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혼자가 더 조용해.”
“...아.”
짐이 된다는 뜻이다.
그런 취급을 받아본 적은 없었는데.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가족들을 부탁해. 헤인즈 혼자만으론 마음이 안 놓여.”
“그건 그렇죠.”
“빨리 돌아가. 일 생기면 호각 불고.”
“...조심하셔야 합니다.”
“아내에게 잘 이야기해줘. 위험한 일 아니라고.”
“쫓아 나오실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잘 말해달라고.”
최강혁이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엘리사벳은 어느새 자신을 보며 촉수를 꾸물렁거리고 있는 거대한 몬스터에 소름이 돋았다.
“먼저 공격하진 않는다고 하셨지만....”
그래도 친해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주춤주춤 물러나던 그녀는 어느 정도 거리에 이르자, 전속력으로 내달려 캠프로 복귀했다.
* * *
“이거, 옛날 생각나네.”
새삼 숲에서의 기억이 떠오른다.
사냥 한 번 한 번에 목숨을 걸어야 했던 시절.
수도 없이 다치고, 또 그만큼 도망치기도 했다.
당연히 좌절도 여러번 느꼈다.
하지만 왜일까.
그렇게 힘들었던 시절인데.
왜 조금은 그리워지는 걸까.
‘매일 매일 달라졌으니까.’
어제와 오늘이 달랐다.
내일은 오늘과 다를 거라는 희망도 있었다.
그 끝엔, 결국 형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꿈이 자리했다.
‘흐음.’
고향을 잊기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도 잊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다 놓고 온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남겨둔 게 많은 것 같아.’
미련일까.
아니면 악감정일까.
정확히 정의를 내리기 애매한 무언가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 여자가 잘 하고 있으려나.’
하지만, 만약 사라 레드우드가 그가 부탁했던 것들을 제대로 처리한다고 해도.
왠지 그리 후련해질 것 같지는 않았다.
“역시, 다 죽이고 왔어야 했을까.”
너무 성급하게 결정했던 것 아닐까.
적당히 똥을 뿌리는 수준이 아니라, 제대로 피를 보고 왔어야 맞았을까.
“어려서부터 이랬지.”
문제가 생기면 피하려고 노력했다.
나중에는 아예 문제가 생길 조짐만 보여도 자리를 뜨는 편이었고.
‘당신 때문이잖아요.’
괜시리 죽은 아버지를 떠올려보던 그는 이어서 거의 최초라 할 수 있었던, 문제를 피하지 않았던 일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일은 오히려 그가 문제를 만든 게 되어버렸다. 그 결과가 살인이었고.
‘왜 중간이 없냐.’
진지하게 생각해볼 문제일까.
‘에밀리아도 비슷한 성격 같던데.’
상황을 회피하고, 거리를 두거나 떠나는 것.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왠지 그의 삶과 엇비슷하게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결국 도망 아니냐고 하면 화를 내겠지. 나도 그럴 테니까.’
적어도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새삼 부창부수라는 말이 떠올라 픽 웃었다.
‘도망 좋아하는 사람끼리 만난 거네.’
그래도, 언제까지 피하기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 그가 노력하고 있는 것도 결국 그런 이유 때문이고.
‘나와 결혼한 걸 후회하게 하고 싶지 않아.’
그녀 역시 판단력이 흐렸을 수도 있다.
십중팔구는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을 실수로 만들고 싶지는 않다.
‘여기 있구나.’
잡생각을 흩어버렸다.
나뭇가지에 남겨진 흔적을 스캔했다.
무언가의 발톱 자국이었다.
‘표범 계열하고 비슷한 느낌이네. 체중은 좀 나가는 편인데... 워낙 날쌔게 이동해서 나뭇가지가 거의 상하지 않았어.’
한 놈이 아니다.
그것도 알 수 있었다.
마치 늑대무리처럼 평소에 뭉쳐다니지는 않아도, 기회가 포착되면 일순간에 몰려드는 습성이다.
‘사냥을 마치면 다시 흩어지는 거야. 이런 놈들이 더 짜증나지.’
상대하는 방식은 결국 둘 중 하나다.
한 놈씩 추적해서 각개격파하거나, 한 곳으로 유인해서 몰살을 시키거나.
‘지금은 수류탄도 총도 없잖아. 각개격파가 최선이야.’
이럴 때는 새삼 화약냄새가 그립다.
고개를 흔든 그는 추적을 이어갔다.
* * *
“그 몬스터는요? 안 보이는 것 같던데.”
해가 뜰 즈음 돌아온 최강혁.
그는 아내의 말에 한쪽을 가리켰다.
“북서쪽에 계곡으로 통하는 길이 있었어. 그쪽으로 빼냈어.”
“정말 갇혀있던 거였어요?”
“누가 가둔 건 아니고, 나무 사이에 낀 거지.”
엘리사벳이 잘 이야기해둔 것 같았다.
별 일 없었다며 웃어보인 그는 인벤토리에서 뭔가를 꺼냈다.
“이런 녀석이야. 아는 사람?”
나무를 깎아 만든 판자였다.
종종 그런 걸 내밀어 보여주는 일이 있었다.
오늘도 그랬다.
판자 위엔 나이테 대신 다른 것이 그려져있었다. 어느 날렵해보이는 몬스터의 옆모습이었다.
“검은 발톱입니다. 이쪽 지역에선 샤칸이라고도 부르죠.”
그것을 본 엘리사벳이 곧장 말했다.
잘 아는 몬스터인 모양이었다.
“본 적 있어?”
“토벌대에 참여한 적이 있었습니다.”
“결과는?”
“실패했습니다. 한 마리 죽이긴 했지만, 둥지를 찾아내진 못했으니까요.”
이놈들이 다수 섞여있었다면, 가문에서 토벌하지 못한 것도 이해가 간다고 그녀는 말했다.
“오히려 저희 쪽이 물러났습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어요. 마치 포위나 몰이를 당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거 맞을 거야.”
“보셨습니까?”
“멀리서.”
그렇게 답한 최강혁은 옆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아내를 마주했다.
“멀리서 봤어. 안 갔어.”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음.”
그리고 다시 엘리사벳을 보았다.
“놈들. 사람 먹은 적 있어.”
“예?”
“부서진 마차 여러 대 있었어. 얼마 안 됐어.”
“아... 아마 모험가나 상인들이었을 겁니다. 가문의 정찰대는 적어도 제가 있었을 때까진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근래에 보냈을 가능성은 있어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이런 게 있던데.”
최강혁이 꺼내 보여준 건 몇 사람의 신분패였다. 하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것과는 성분이나 형태가 조금 달랐다.
“다른 도시에서 쓰이는 신분패입니다. 상호 제휴가 이루어진 도시라면 똑같이 사용할 수 있죠.”
“상호 제휴?”
“예. 귀족이나 영주들이 모두 친하게 지내는 건 아니니까요. 도시들 간에도 이해관계가 있습니다.”
“그렇군. 이건 버려야 하나?”
“뒤에 보시면 소속된 가문이나 기관이 있을 겁니다. 네. ...상인조합이군요.”
“상인조합이라면, 그쪽에 전해주고 보상금을 받을 수 있어요.”
에밀리아가 말했다.
“많이 줘?”
“많이는 아니지만, 유가족들에게 그들의 죽음을 알려줄 수는 있죠.”
“음... 일단 갖고 있어야겠네.”
식사를 마저 했다.
베티와 루시아는 몬스터 이야기를 듣게 된 후부터 무척 겁을 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야겠어.”
“당신. 혼자 올 생각이군요.”
“그게 편해. 도망치기도 쉬워.”
“도망, 확실히 칠 거예요?”
“나 도망 잘 쳐. 다음에 보여줄게.”
“...보여줄 필요는 없고요.”
지금 도시로 향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려면 추가로 길을 내야 한다.
아무 것도 모르고 왔던 때와 달리, 안전을 확신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집으로 복귀한 후에 그곳에서 도시로 가거나, 아니면 이곳에서 제대로 마무리짓고 가야 한다.
그르릉.
말이 또 고개를 높이 들었다.
바람만 조금 강하게 불어도 그런 모습을 보이곤 하지만, 상황이 이래서인지 다들 신경이 쓰이는 것 같았다.
결국 일단 집으로 복귀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도시에서 용병을 구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
이젠 길을 낼 필요가 없어져서 마차에 함께 타고 가는 중이었다.
문득 엘리사벳이 그런 말을 꺼냈다.
에밀리아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실력은?”
“좋을수록 비싸죠.”
“죽을 수도 있을 텐데. 그런 경우는?”
“그건 계약에 따라 달라집니다. 보통은 따로 안 거는데, 이번 건처럼 위험할 경우엔 특약을 걸기도 하죠.”
“손 안 맞춰보면 오히려 꼬일 텐데.”
“예?”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 방해돼.”
“아... 그런 부분도 있죠.”
돌아가는 길은 무척 조용했다.
오히려 찜찜할 정도였지만, 다행히 별 일 없이 밤이 되었다.
따로 야영지를 꾸리지는 않았다.
이제야 알게 된 것이 있었는데, 그들의 말은 밤새도록 걸어도 지치지 않는다고 했다.
“졸면서 걷습니다.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지요.”
“그래도 돼?”
“닷새 정도라면 크게 무리가 없습니다. 지금은... 더욱 괜찮죠.”
에밀리아가 말에게 회복마법을 걸어주고 있었다. 그렇게 하면 열흘까지도 쉬지 않고 걸을 수 있다는 것 같았다.
‘동물 학대 아닌가.’
속으로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오히려 다행인 것 같기도 했다.
“풀이 많이 필요할 거예요. 자체 회복력을 가속하는 방식이거든요.”
“음?”
“식욕이 늘어요.”
“아....”
쉬지 않고 갈 수는 있지만, 그래도 중간에 뭔가 먹을 시간은 줘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어떤 이들은 특수하게 제작된 먹이통을 앞에 고정해, 먹으면서 걷게 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그건 진짜 학대 같은데.’
마침 휴식을 줄 때가 된 것 같아서 적당히 멈추게 한 그는 녀석의 앞에 인벤토리에 있던 풀과 나뭇잎을 잔뜩 꺼내놓았다.
보자 마자 곧장 먹어치우는 걸 보니, 정말 먹성이 좋아진 것 같았다.
배를 채운 녀석이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그것을 출발 신호삼아 이동을 이어갔다.
* * *
“으음.”
“좀 찜찜하네요.”
“그러게요.”
집으로 돌아왔지만, 다들 표정이 어두웠다.
위험한 몬스터들을 뒤에 두고 돌아온 것에 대한 찜찜함에, 혹시 뒤를 쫓아오는 놈들이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까지 더해졌다.
최강혁의 표정도 비슷했다.
더 이상 쉽게 도망치지 않겠다고 생각한 건 맞지만, 그래도 억지로 전면전을 만들 필요까진 없다고 여겼는데.
‘그래도 뭔가, 안 닦고 나온 느낌인데.’
혼자서라면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돌아오고 나니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만약 이곳을 비우고 혼자 그곳으로 갔을 때, 그 사이에 이곳에 문제가 생기면 대응할 수 없다는 부분이 마음에 걸린 것이다.
“도시로 가자.”
결국 그게 최선이었다.
집으로 돌아오기로 했을 때 올라왔던 두 가지 의견 중 하나. 모두 다 같이 도시로 가기로 했다.
‘일단 도시로 간 다음, 그곳에 모두 머무는 동안 내가 숲으로 가서 정리하면 돼.’
도시에서 용병을 고용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일단 가서 확인해보고 결정할 생각이었다.
만약 영 마음에 차지 않는 이들만 있으면, 차라리 혼자가 나을 테니까.
“귀중한 것들 있으면 말해. 다 챙길 수 있어.”
다시금 긴 여정이 될 것이다.
지난 번보다 더 많은 것들을 챙기라고 한 건, 혹시 그 사이에 이곳에 불이라도 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설마 그러려고요.”
“아니야. 몬스터만 문제가 아니잖아.”
베티가 말했다.
루시아에게 고개를 저어보인 그녀는 가주께서 우려하시는 것에 공감할 수 있다고 했다.
“표정 봤잖아. 다들 벼르고 있었어.”
“그건 그렇지만....”
다행히 아직 별 일 없었다.
그러나, 도망치듯 떠났던 자들이 돌아와서 빈집에 불을 질렀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거라고 베티는 주장했다.
“남색한다는 것까지 들켰잖니.”
“아....”
가주께서 어떻게 아셨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미 그런 소문이 있던 인물이다.
헤인즈가 넌지시 알려드린 건가 했는데, 이후에 물어보니 그런 적 없다고 했다.
“뭘 챙겨야 할지 모르겠어요. 옷도 챙겨야 할 것 같고. 근데 너무 짐이 많아지면 안 될 텐데....”
“다 챙기라고 하셨으니까, 다 챙겨도 되지 않을까?”
“설마요. 우리 짐만 해도....”
“다 챙겨.”
“엄마야!”
“것 봐. 다 챙기라시잖니.”
“애매하면 그냥 두고.”
그녀들의 대화를 들었는지, 가주께서 직접 오셨다. 하지만 그냥 두라는 의미는 그녀들이 생각한 것과 많이 달랐다.
〈 92화 〉 092.
092.
“예?”
“서랍장하고 옷장. 통째로 챙기는 게 더 간단하니까. 꺼내고 정리하고 안 해도 되잖아.”
“그건 그렇긴 한데요....”
“당장 갖고 있어야 되는 것만 챙겨. 나머지는 그냥 둬.”
“...알겠습니다.”
모처럼 멍한 얼굴이 된 베티가 서둘러 짐을 가방에 챙겼다.
가방 또한 가주께서 주신 것으로, 튼튼하고 질긴 가죽으로 만들어져있었다.
“옷은?”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던 최강혁이 물었다.
“예?”
“안 갈아입어?”
“갈아입다니요?”
“도시에 가잖아.”
“네.”
“거기서도 메이드야?”
“아... 저흰 괜찮습니다. 매번 이 차림으로 가기도 했고요.”
“흐음.”
“정말 괜찮아요.”
“알았어.”
다들 가방에 넣을 만한 짐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금방 끝났다고 하기에, 그곳에 있던 가구들을 모두 루팅하고 건물을 나왔다.
이미 비슷한 방식으로 본채와 다른 숙소에 있던 것들을 챙긴 터라, 다들 정원 앞에 모여있는 분위기였다.
“아가씨는요?”
“본채에.”
“아... 고민이 많으시겠네요.”
루시아는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아가씨의 작업실이야말로 귀중한 것들로 가득한 곳일 텐데.
하지만, 지금껏 아무에게나 보여준 적 없는 곳이니 망설이시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두 사람한테는 보여줬다면서?”
“저희는....”
“봐도 모르니까요. 하하.”
베티가 웃었다.
그 때, 본채 현관이 살짝 열렸다.
고민이 끝났는지, 얼굴을 조금 내민 에밀리아가 최강혁을 향해 손짓했다.
“많아?”
그녀를 따라 복도를 걸어가며 물었다.
작업실 앞까지는 가보았지만, 들어가본 적은 없었다.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그녀가 문을 열어주었다.
당장 느껴지는 건 탁한 먼지 냄새였다.
“원래 이러진 않아요. 지금 청소를 해서....”
“알아.”
청소를 했다는 건 빈말이 아닌 것 같았다.
일단은 이쪽 저쪽 적당히 쌓여있는 종이뭉치들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 챙겨야 하는 거지?”
“맞아요.”
최강혁은 그 내용을 들여다보지 않고, 고스란히 챙겨 넣었다.
이미 그녀가 허락해서인지, 아니면 부부사이여서인지 루팅에는 문제가 없었다.
“아....”
“왜?”
“아니에요. 보여달라고 할 줄 알았어요.”
“봐도 돼?”
“네. 괜찮아요. 당신이라면.”
많이 고민했었나보다.
그렇게 답하면서도 우물쭈물하는 모습이었다.
‘음.’
최강혁은 그녀의 책상 위에 펼쳐져있는 종이를 보았다. 뭔가가 그려져있었다.
처음엔 건물인 줄 알았다.
건물의 일부 구조를 도식화한 건가.
그런데, 다시 보니 아니었다.
‘기계장치 같은데?’
톱니바퀴가 들어가있다는 건 알겠다.
아니. 나사라고 봐야 하나?
그런데 이건...
살짝 뒤로 물러나, 전체 그림을 살펴보았다.
“왜요?”
“더 잘 보려고.”
“...잘 볼 필요 없어요. 실패작이니까.”
“아냐. 멋진데.”
“.......”
그녀는 얼굴이 조금 화끈거렸다.
그저 잘 모르는 사람의 겉치레식 칭찬임을 알고 있음에도, 이 사람이 그렇게 말해주니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실패작이라는 게 변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무척 깊어진 눈으로 보고 있는 게 이상하다.
“왜 그래요?”
“아니야. 이것도 다 챙겨야 하는 거지?”
“응.”
“그래. 다른 건?”
“일단 여기엔 없어요.”
“남기지 말고 챙겨야 해. 왠지 찜찜해.”
“알아요. 나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녀의 작업실에 있던 것들을 모두 넣었다.
낡아보이지만, 그녀에겐 익숙할 책상과 의자도 남기지 않았다.
그렇게 본채를 나왔다.
모두 마차에 타있는 동안, 최강혁은 다시금 빠르게 돌아다니며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부엌 찬장에서부터 뒤뜰의 땔감, 창고의 잡동사니 하나 까지 싹 쓸어담았다.
“됐나.”
누가 보면 완전히 떠날 거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여차하면 정말로 그럴 생각도 있었다.
‘쉽게 버리지 못할 성격인가. 도망치는 습성도.’
검은 발톱이라고 부른다던가.
이름이 뭐가 되었든 상관 없다.
놈들을 제거하지 못하면 그 숲만이 아니라 이쪽도 안전하지 못할 것이다.
‘놈들만 있던 것도 아니니까. 아마 바위먹는자하고 비슷한 녀석들이 일종의 억제장치처럼 있었던 것 같은데....’
제방이 무너지면 결국 물이 넘친다.
그나마 제 때 알아낸 걸 다행으로 여기자.
‘음....’
지어놓은 건물과 시설들이 아깝긴 하지만, 시간과 자재만 있으면 충분히 다시 지을 수 있다.
‘오히려 더 좋게 지을 수도 있지. 아쉬웠던 부분도 많았으니.’
마차로 돌아갔다.
복귀하고 하룻밤조차 쉬지 못했지만, 그들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그렇게 유명해?”
모두가 검은 발톱을 알았다.
지역마다 이름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 같지만, 어떤 식으로든 알려져있다고 했다.
늦잠을 자거나 말썽을 피우는 어린아이들을 혼낼 때 쓰이기도 하고, 어느 은퇴한 용병의 허풍 속에서 등장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놈들에게 가족이나 친척, 지인을 잃기도 하고, 운 좋게 살아남은 이들에겐 악몽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것.
‘호랑이하고 비슷한가? 호랑이도 따로 있던데.’
토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건, 완전한 몰살이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번식력이 좋은 놈들이다보니, 씨를 말리지 않는 이상 결국 다시금 숫자를 불린다.
그럼에도 놈들이 세상을 가득 채우지 못한 건, 그나마 짙은 농도의 마나를 좋아하기 때문일까.
적어도 해당 지역을 벗어나지는 않는 편이니.
‘문제는 놈들 등쌀에 밀려나게 될 놈들이겠지.’
다각 다각 다가닥.
말이 고마웠다.
복귀한 후 잠깐 눈을 붙이는 것 같더니, 금방 이렇게 쌩쌩해졌다.
에밀리아의 회복마법 덕분도 있겠지만, 녀석 자체가 무척 튼튼했다. 좋은 품종이다.
‘도시에 가면 추가로 구해봐야겠어.’
느리다는 단점을 상쇄할 장점들이 많다.
둘이서 끈다고 마차가 크게 빨라지는 건 아니겠지만, 외로움을 타는 녀석이라고 하니 가족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 * *
숲길이 이어졌다.
아마도 가문에서 왔던 이들의 흔적인 듯, 예전에 지나간 마차의 바퀴자국이 남아있기도 했다.
‘딴 마음을 먹진 않은 모양이군.’
부상자가 있었다.
죽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서둘러 도시로 데려가 치료해야 했을 것이다.
‘이쪽 길은 마나 농도가 낮은 편이야.’
다행인 부분이다.
정말 굶주린 경우가 아니라면, 강한 몬스터가 이런 곳까지 나오진 않는다.
몬스터가 아니라 짐승의 경우라면 조금 다르지만, 단순한 맹수 정도라면 앞에서 걷고 있는 말 정도로도 감당이 가능하다던데.
‘의외로 싸움도 할 수 있다는 거지.’
그저 머리로 들이받고 물어뜯는 정도라고 했다. 그런데 워낙 덩치가 크고 목이 길어서, 이목을 집중시키고 견제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한다고.
그 사이에 헤인즈나 엘리사벳이 거들면 적당히 수습이 된다나. 애초에 그런 일이 자주 벌어지지도 않는 모양이고.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숲이 끝납니다.”
“그 다음엔 어디로 가?”
“바로 아실 수 있을 겁니다.”
헤인즈의 말대로였다.
점점 나무들의 간격이 넓어지더니, 어느 순간 숲이 끝나고 드넓은 평원이 눈 앞에 펼쳐졌다.
“아.”
숲을 벗어나면 어디로 가야 할지 바로 알 수 있을 거라던 녀석의 말도 맞았다.
대략 2시 30분 방향.
지평선 근처에 볼록 솟아있는 인위적인 구조물이 육안으로도 얼핏 보였다.
‘성벽? 아니, 조금 다른 것 같은데.’
전통적인 느낌의 성벽에 뭔가가 섞여있는 느낌이었다. 좀 더 가까이 가야 알 수 있겠지만, 그는 문득 아내의 작업물이 생각났다.
어쩌면, 그게 정말로 어떤 건축물의 일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
“예?”
“좀 바글바글하네.”
딱히 숲 같은 건 보이지 않는, 그럭저럭 짧은 풀과 자잘한 돌, 물줄기 정도로 이루어진 평원.
최강혁은 그 멀리에서 그들처럼 움직이고 있는 다른 무리들을 보며 말하고 있었다.
“근방에서 그나마 큰 도시니까요. 일종의 거점처럼 굳어지고 있습니다.”
“신흥도시라고 하지 않았었나?”
“맞습니다. 생긴지 10년도 안 되었죠. 영주가 의욕적으로 일하고 있다 들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던 벌판에 도시를 만들어냈다.
어느 세상이든 인간의 저력은 역시 대단한 것 같았다.
물론 다른 대단한 것들도 눈에 띄고 있었다.
“저건 뭐지?”
“예?”
“저거. 도시 옆에.”
“그게 보이십니까?”
“.......”
여러 개 만들어두었던 망원경 중 하나를 꺼내어 건네었다.
사용법이 어렵지 않았는지, 한쪽눈에 대고 멀리 바라보던 헤인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배군요.”
“배?”
“예. 그쪽엔 없었습니까?”
“아니. 배는 있었지. 근데, 왜....”
“예?”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헤인즈는 이어서 지나가듯 중얼거리는 가주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왜 배가 하늘에 떠있냐고.”
거리가 좁혀질수록 확실히 보였다.
도시의 성벽에 일부 다른 것이 섞여있는 것 같더니, 다름아닌 기계장치들이었다.
“한창 공사 중입니다. 선착장이 없었거든요.”
“선착장....”
“예. 저런 배들은 아무데나 착륙할 수 없으니까요. 선착장이 있으면 배들이 오갈 수 있으니 도시의 규모가 확 달라집니다.”
“배는 강이나 바다에 있지 않나?”
“예?”
“그게 배잖아.”
“혹시, 물 위에 띄우는 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아. 그거.”
“몬스터가 없는 호수 중에는 그런 걸 띄우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부들의 배죠.”
몬스터.
헤인즈가 했던 말에 힌트가 있었다.
문득 이전 지역의 강물 속에 살던 놈들이 생각났다.
‘하긴. 그런 게 있으면 배를 못 띄우지.’
아무리 그래도, 배를 하늘에 띄울 수가 있나?
기구나 비행선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물론 그가 생각하는 배와도 달랐다.
처음부터 배의 형태였다면 저게 뭐냐고 묻지도 않았을 테니까. 배가 왜 저기 있냐고 했겠지.
‘아. 각도의 차이였나?’
그렇게 바라보고 있으니, 슬쩍 움직인 배의 모양이 바뀌었다. 살짝 옆으로 돌아간 것 같은데, 그렇게 보니까 조금 배 같기도 했다.
‘돛대가 없는 옛날 범선 비슷한 느낌도 들고.’
물이 아니라 하늘을 날더라도 유선형의 선체가 유리한 걸까.
그런데, 딱히 엔진이나 프로펠러도 없어뵈는 것들이 어떻게 하늘에 떠있는 거지?
‘역시, 마법일까.’
그 때 머리를 스친 것이 있었다.
다름아닌, 아내의 연구 자료였다.
“배를 그린 거였어?”
“...아.”
짐칸에 앉아 쉬고 있던 에밀리아는 문득 들려온 물음에 어색하게 웃었다.
“배는 아니고. 그 심장이요.”
“심장?”
“심장이 있어야 배를 하늘로 띄울 수 있어요.”
“엔진 같은 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왜 그 일에 매달려있는지도 곧 듣게 되었다. 부모가 물려준 유산 중에, 부서진 배가 한 척 있다고 했다.
다만 부모를 잃게 된 사고 당시 심장이 부서져서, 다시는 떠오르지 못하게 되었다고.
“그 배는 어디 있어?”
“본가에 있어요. 항구 창고에.”
짐마차에 싣고 나올 수 없어서, 두고 올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대신 그것과 관련된 자료들만 챙겨왔다고.
“그림만 그려서 알 수 있어?”
그대로 만들었을 때 작동을 하는지 못 하는지. 그게 중요한 것 아닐까.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녀는 이미 알고 있던 것 같았다.
“제대로 작동되는 설계라면, 마나가 느껴져요. 도면 검증 스크롤이라 가격은 비싸지만.”
그냥 넓은 종이인 줄 알았는데, 그 또한 마법도구였던 모양이다.
“마침 도시에 갈 일이 생겼으니, 보충을 해야겠어요.”
그녀가 무엇으로 돈을 버는지도 조금 알게 되었다. 작업실에서 챙겨온 상자들 중에, 마치 보온병을 연상케하는 길이와 굵기의 돌이 있었다.
정확히는 그런 돌들을 세로로 적재해놓은 상자였는데, 평범한 돌이 아니었다.
‘마나를 집어넣는거구나.’
일종의 충전식 배터리였다.
마나를 채워 납품하면 돈을 받는다고 했다.
“저 배의 연료로 쓰인다는 거구나.”
“맞아요. 다른 곳에도 쓰이고요.”
“.......”
그동안 아주 큰 오해를 하고 있었다.
보아온 게 있다보니, 조금은 미개한 곳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숲을 벗어나자 마자 전혀 다른 세상이 눈앞에 있었다. 지구에서 본 적도 없던 것들이 있기도 하고.
하지만, 점점 다가오는 도시의 풍경은 여러 모로 어색한 느낌을 주었다.
대단히 인상적이면서도, 왜 저런 것이 남아있나 할 정도로 옛날 느낌도 보였다.
“유물에서부터 시작됐어요.”
에밀리아는 이 세상의 발전에 수많은 유물들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했다.
유물을 연구하고, 그것을 따라 만들면서 발전해왔다고 말이다.
“지금도 흉내내지 못하는 유물들이 많아요.”
‘유물학자’라는 직업이 있다고 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고고학자과 과학자를 섞은 듯한 느낌으로 이해되었다.
“혹시, 유물 중에 이런 건 없었어?”
최강혁은 나무판자를 보여주었다.
그곳엔 간단한 구조의 라이플과 권총, 여러 발의 탄약이 그려져있었다.
〈 93화 〉 093.
093.
“이건....”
“알아?”
“아니요. 무슨 도구죠?”
“음.”
다들 모르는 눈치였다.
기관총이나 대포, 수류탄을 보여줘도 비슷했다.
‘역시, 못 가져오게 한 이유가 있는 건가.’
조금 실망할 때였다.
마부석에서 슬쩍 뒤를 돌아본 헤인즈가 입을 열었다.
“비슷하게 생긴 것 같은데....”
권총 옆에 그려진 총알을 가리키고 있었다.
“최근에 본 적 있습니다. 좀 누렇게 생긴 금속이었어요.”
“이거야?”
인벤토리에서 총알 하나를 꺼내 보여주었다.
이쪽 세상에서 만든, 화약이 없어서 모양만 갖춘 녀석이었다.
“맞습니다. 이것보다는 작았지만요.”
“어디서 봤어?”
“그게....”
“어딘데.”
잠시 고민하던 헤인즈가 입을 열었다.
“교수형장?”
“지난 번에 베티씨하고 같이 왔었을 때요.”
“아, 그때 처형식이 있었어요.”
베티가 이야기를 보탰다.
헤인즈는 그 때 처형장에서 특이한 목걸이를 걸고 있던 이가 있었다고 했다.
“가까이 있었거든요. 집행자들 중 한 명이었어요. 다른 이와 대화를 나누는 걸 들었죠.”
집행자는 교수대 옆에서 레버를 당겨, 바닥의 고정장치를 푸는 사람이라고 했다.
지역마다 처형 방식이 다른데, 집행자를 일컫는 말은 비슷하다는 것 같았다.
“그 집행자가 옆사람하고 잡담을 하는 게 들렸어요. 처음 보는 목걸이라며 동료가 물어보니, 처형 대상자가 준 거라고 했었죠.”
처형 예정자가 그것을 유물이라 했다고.
그것을 줄 테니, 처형 전에 빼달라고 청탁을 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게 될 리가 없죠.”
유물인지 아닌지 모를 그 목걸이는 집행자의 목에 걸렸고, 그 목걸이의 주인은 대신 밧줄을 목에 걸었다.
마지막에 뭐라 뭐라 소리쳤다는데, 그건 같은 사형수들도 마찬가지인데다가 광장이 워낙 시끄럽다보니 묻혀버렸다고 했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베티는 이웃집 가족을 독살했다던 여성 사형수 쪽을 보느라 그쪽은 잘 알지 못한다고 했다.
다만 시커먼 천으로 머리와 상체를 가리고 있는 와중, 목걸이를 찬 집행자 한 명이 있던 건 기억했다.
“계속 소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엘리사벳이 말했다.
아마 유물이 아닐 거라 생각했을 거라고.
귀한 것이라 생각했다면 남들에게 자랑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말이다.
“만약 유물이 맞다고 해도, 마나가 느껴지지 않는 종류는 값어치가 적으니까요.”
“그런 거야?”
“보통은 그렇습니다. 마법 도구가 아니라면 복제하기도 쉬운 편이고요.”
처형 집행자라면 가면을 쓰고 있어서 신분 확인이 어렵다.
하지만 결국 영주의 부하일 테니, 특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다들 이야기했다.
“알아볼까요?”
“문제 없어?”
“나쁜 일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니까요.”
만약 그 목걸이를 찾게 될 경우, 적당한 가격을 주고 구입할 수도 있는 일이다.
훔치거나 빼앗을 게 아니니, 조용히 찾아보면 문제 없는 걸까.
‘정말 총알일까.’
만약 맞다면, 그 안에 화약이 남아있을까.
어쩌면 목걸이로 만들기 위해서, 구리만 빼고 나머지를 버렸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으음.’
화약을 직접 만들어볼 수도 있겠지만, 어디서 재료를 구해야 할지 조금 막막했다.
만약 그렇게라도 구할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는 일이었다.
‘곧 알 수 있겠지.’
도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성벽 한쪽에 거의 붙어 떠있는 배 한 척.
멀리서도 왠지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엔진 소음이라기보다는 진동이나 파장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따로 빛이나 열기를 내뿜지는 않아보였다.
뭔가를 연소시키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유지비용이 많이 들겠지.’
에밀리아에게 물어보니, 마나 배터리 하나를 충전해서 납품하면 5에서 7골드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매입 시세가 왔다갔다해요.”
빈 배터리의 가격이 1골드 정도라고 하니, 하나를 충전해 넘기면 평균 5골드 정도의 수익을 본다고 치면 될 것 같았다.
다른 형태와 규격의 배터리들도 있지만, 그녀가 다루는 배터리가 가장 보편적으로 활용되는 제품이라고 했다.
“수요가 많아서, 가격대가 안정적이거든요.”
“안정적인 게 좋지.”
도시는 성벽 바깥부터 시작되었다.
내부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들이 나름대로 성 밖에도 거주지와 상업구역을 형성해 살아가고 있었다.
먼 외곽으로 빠질수록 대규모 이동 행렬의 임시 캠프가 주로 보였다.
천막 막사가 주를 이루고 있는데, 먼 지역에서 온 건지 막사들의 형태와 색깔도 여러 종류였다.
“저쪽입니다.”
헤인즈가 가리킨 곳.
탈 것을 거래하는 시장이었다.
멀리서부터 알아볼 수 있었다.
지금 그들의 마차를 끌고 있는 녀석과 같은 종도 있었고, 다른 크고 작은 짐승들이 각각의 우리 안에 모여있는 모습이었다.
‘저건 진짜 말을 닮았네.’
고향의 말과 비슷한 짐승도 보였지만, 크기가 좀 작았다. 조랑말 정도라고 보면 될까? 지금의 그가 타기엔 너무 작은 느낌이었다.
‘새도 있어?’
그 한켠에는 쇠사슬과 족쇄에 단단히 묶인, 여러 종류의 날짐승들이 보였다.
새라고 해서 무시할 수도 없는 게, 하나 하나가 사람 두명 정도는 거뜬히 태울 수 있는 몸집을 갖고 있었다.
‘타조 같은 느낌은 아닌데. 정말 저걸 타고 다니는 건가.’
실제로 안장을 얹은 녀석도 보였다.
마침 새 주인을 찾은 것 같은데, 바로 타고 가는 건 아니었다. 녀석을 가둘 만큼 커다란 철장으로 옮기는 모습이 보였다.
“새 주인을 받아들이려면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바로 올라타려고 하면 사고가 나죠.”
“진짜로 저걸 타고 날아다니는 거야?”
“예. 유지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 말고는 무척 좋은 이동수단이라고 들었습니다.”
당연히 좋겠지.
하늘을 날 수 있는데.
‘갖고 싶은데.’
좀 위험해보이긴 하지만, 여기서 다들 타고 다닐 정도라면 나름대로 검증이 된 것 아닐까.
‘정 뭣하면 안전벨트를 더 만들고... 낙하산 같은 걸 등에 매면 좀 나으려나.’
생각해보니, 낙하산도 만들어야 한다.
저렇게 새를 타고 하늘을 날기도 하고, 아예 하늘을 돌아다니는 배도 있다고 하니... 수요가 있지 않을까.
‘뭐. 이미 있을 지도 모르지.’
어쩌면 그것도 유물로 왔을지 모른다.
생각해보니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저것도 탈 수 있는 거야?”
날짐승들도 여러 종류가 보였다.
얼핏 좀 더 작고 날렵해보이는 녀석이 보여서 물어보니, 탈 수 있긴 한데 잘 팔리는 종류는 아니라고 했다.
“태울 수 있는 무게가 적어서요. 대신 속도가 빨라서, 긴급한 전령 같은 걸 운용할 때 쓴다고 들었습니다.”
“전령?”
“예. 서신 같은 걸 배달하는....”
“마법으로 통신을 하지는 못하는 건가?”
“통신이요?”
“먼 거리에서 이야기를 주고 받는 거. 그런 건 없는 건가 해서.”
그의 말에, 헤인즈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잘 이해가 안 갑니다. 먼 거리에서라면, 깃발이나 봉화, 발광 장치 같은 걸 쓸 것 같은데요.”
“그렇구나.”
통신 마법이 없다는 걸까.
마법이 무척 발달한 곳 같았는데, 또 이런 부분에선 의아해졌다.
‘아니지.’
애초에 통신마법이라는 개념이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지 않나.
이것도 일종의 선입견 같은데.
‘그나저나, 어디가 더 안전하지?’
일단 숙소부터 결정해야 한다.
성벽 바깥에서 캠프를 꾸릴 수도 있고, 아니면 안으로 들어가서 여관방을 잡거나 별채를 빌리는 방법도 있다.
물론 성벽 안쪽으로 들어가는 게 좀 더 안전할 것 같지만, 만약 그곳에 아내의 본가 사람들이 있다면 조금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을까.
‘이쪽이 좋아보이는데. 사람들도 많고.’
숨을 곳이 많다.
사람들 틈도 마땅치 않으면, 저 드넓게 펼쳐진 농경지 한쪽에 터를 잡아도 된다.
“그쪽이라면, 농부들에게 돈을 조금 주어도 됩니다. 살고 있는 집까지 내어줄 겁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고.”
농부 가족들이 사는 집이라는 게, 그저 말만 집이지 비바람 정도만 막는 게 고작인 수준이라는 걸 들은 바 있었다.
농부야 돈을 받으면 좋아하겠지만, 그런 집마저 빼앗고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정리해보자. 일단 성 안에 들어가야 하는 건 맞지.”
“네. 용무가 있으니까요.”
사람들과 의논했다.
아내는 어디든 상관 없다고 했지만, 마차를 가져왔으니 밖에 캠프를 꾸리는 건 피할 수 없다고 조언해주었다.
“아. 그런 거였어?”
“외부인의 짐승은 반입이 안 되니까요.”
마차의 경우, 사람이 끌 수 있는 크기는 성문 출입이 가능하다. 하지만 지금처럼 짐승과 같이 있다면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다.
“이전 방문 때에도 같았습니다.”
헤인즈가 알려주었다.
밖에서 일단 마차를 맡겨놓고, 팔 것들만 정리해서 작은 수레에 옮겨 갖고 들어갔다고.
“그런 곳이 있구나.”
“어지간한 일은 돈으로 다 됩니다.”
돈을 받고 마차와 말을 보호해주는 상단도 있다고 하니, 그쪽으로 향했다.
* * *
“여어! 오랜만이야.”
“그렇게 오랜만도 아닌 것 같은데요.”
“다시 볼 수 있으면 오랜만인 거지.”
얼굴이 짙은 갈색으로 그을린 중년의 남자.
누런 색의 두건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던 그가 헤인즈를 보더니 아는 척을 해왔다.
“이번엔 며칠?”
“그건 봐야 알 것 같아요.”
“오래 있으면 우리야 좋지.”
영주에게 돈을 주고 땅을 임대받은 걸까.
상당한 영역을 확보한 그들은 마차와 짐을 맡아두는 사업을 하는 상단이라고 했다.
그들이 부리는 용병들이 이곳 저곳에서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리 강해보이진 않네.’
그래도 누구 손에 들렸든 칼붙이는 위험한 법이니, 저렇게 경비를 세워두는 것도 효과는 있을 것 같았다.
“성 분위기는 어때요? 별 일 없어요?”
“뭐, 여기가 항상 그렇지.”
남자는 마차와 짐을 살핀 후, 들고 있던 종이에 뭔가를 적었다. 인원과 짐마차의 종류, 말의 연령과 특징 등등이었다.
만약 도둑을 맞거나 하면 그것을 토대로 피해를 보상해준다고 했다.
그래도 귀중품까지 보상해주진 못하기에, 그런 건 알아서 잘 챙기는 게 좋다고 덧붙였다.
“공사장에서 사고가 났어. 지금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시끄럽거든.”
“어느 공사장이요?”
“어디긴, 선착장이지.”
“멀쩡해보이던데요?”
“시설 사고가 아니라, 습격 사고였으니까.”
“아....”
선착장 건설은 마법 자재가 많이 들어가는 공사다보니, 그것을 노리는 도둑들이 자주 출몰한다고 했다.
성벽 안쪽이 아니라 밖에서 갈고리와 로프를 갖고 올라간 모양인데, 아주 날을 잡고 온 건지 숫자가 상당했다고.
“평범한 도둑들이 아니었던 것 같아.”
“그래도 다 잡긴 했나보네요. 조용한 거 보면.”
“그게, 일이 좀 복잡해졌어.”
대부분 붙잡거나 죽인 건 맞다고 했다.
하지만, 일부가 배 안으로 들어가 그곳의 마법사와 인부들을 인질로 잡고 있다는 모양이었다.
“배를 장악했다고요?”
“그렇다니까.”
“근데 왜 도망을 안 가요?”
“그게 복잡하다는 거지.”
배를 움직이려면 마법사의 도움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들이 제대로 협조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아직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한 것일 수도 있고... 다른 이유일 수도 있고.”
“다른 이유요?”
“생포된 자들 중에, 우두머리가 있던 것 같아.”
“아....”
대장을 두고 도망치지 못한다는 것.
바로 그 부분이 어중이 떠중이 도둑들이 아니라는 증거가 될 수도 있었다.
“서로 인질을 잡고 있는 것 같네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그렇게 조용한 대치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때문에 성벽 출입 절차도 좀 더 빡빡해졌다고 남자가 이야기했다.
“영주가 화가 많이 났어. 안 그래도 공사기간이 길어지고 있었잖아. 거기다가 불을 붙인 거지.”
선착장은 말처럼 쉬운 공사가 아니다.
상당한 숫자의 마법사와 건축가, 때로는 유물학자들까지 동원된다.
그것은 단순히 배가 접안할 수 있는 부두의 역할만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선착장은 정박하는 배의 심장이 멈추더라도 계속 공중에 잡아둘 수 있게끔 마법적인 힘을 갖추어야 했다.
“돈이 많이 들겠죠?”
“많이 들다마다. 저기 저 배 저거, 지금처럼 계속 떠있는 동안에도 돈이 날아가고 있는 거잖아.”
그렇게 이야기한 남자가 지나가듯 말을 흘렸다.
“괜히 자체제작한다고 나서서는.”
〈 94화 〉 094.
094.
최강혁은 가만히 듣고 있었다.
지금까지 함께 지냈던 이가 아님에도, 그럭저럭 알아들을 수 있게 된 것이 기꺼웠다.
‘선착장을 지어주는 이들이 있나보군.’
상단? 혹은 회사?
정확한 개념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것만 도맡아 하는 기업집단이 있는 모양이었다.
보통은 그곳에 돈을 주고 전적으로 맡긴다.
그런데 간혹 자체역량을 확보하고 자금 소모를 줄여보겠다는 이유로 직접 사람과 자재를 구해 건설을 시도하는 영주나 상인들이 있다고 했다.
물론 결과는 그리 좋지 못하다는 것 같았다.
노하우가 부족하니 시행착오가 잦고, 그 과정마다 추가로 자금이 소모되니까.
“선착장 지으려다 망하는 이들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야.”
그나마 이곳 영주는 자금력도 뒷배도 튼튼한 편이라는데, 그래도 지금처럼 공사가 멈춘 상태로 돈만 나가는 상황을 반길 리는 없었다.
“돈을 걸었어.”
“돈이요?”
“용병단이든 개인이든, 배를 되찾아주면 1천 골드를 주겠다고.”
“1천 골드라....”
분명 적지 않은 액수였다.
하지만, 건수에 비해선 좀 애매하지 않나.
이쪽에 대해 잘 모르는 최강혁도 그런 생각을 할 정도였다.
“.......”
그 때, 에밀리아가 그를 보았다.
그녀가 본 남편은, 아닌 것 같으면서도 관심이 있어보이는 얼굴이었다.
“그 정도 돈이면 누가 도전해도 했을 것 같은데, 아무도 없었어요?”
“없긴. 오늘 새벽에도 한 무리가 들어갔는데.”
“근데요?”
“나온 사람은 없는 모양이야.”
역시.
평범한 도둑들이 아니라는 걸까.
“혹시, 처음부터 배를 노렸던 것 아닐까요?”
헤인즈의 추측이 그럴싸하다.
남자 역시 그런 이야기도 돈다고 했다.
‘흐음.’
고개를 끄덕이던 최강혁이 여전히 성벽 위에 있는 배를 쳐다보다가 눈을 내렸다.
에밀리아가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있었다.
시선을 마주하니, 살짝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안 괜찮아요.”
“어차피 긁으려면 들어가봐야 할 것 같고.”
“긁어요?”
“그런 게 있어.”
“만약 돈 때문이라면, 그 정도는 얼마든지 벌 수 있어요. 당신이 목숨을 걸지 않아도....”
“안 걸어. 말했잖아. 나 도망 잘 쳐.”
물론 당장 저길 가겠다는 건 아니었다.
그것 말고도 할 일이 많으니까.
‘게다가... 저대로 있어도 돈이 계속 나간다고 하면, 머잖아 보상금이 오를 수도 있겠지.’
배정받은 자리를 돌아보았다.
굵은 말뚝들과 밧줄로 울타리 비슷한 것이 쳐져있었다. 그것으로 공간을 구분하는 것 같았다.
‘한산하군.’
다른 무리의 공간과는 많이 떨어져있었다.
붐비는 시기엔 바로 옆 구역들까지 꽉꽉 찬다고 했다. 보통 추수 시즌에 그렇게 된다고.
“고생들 했어. 좀 쉬자.”
마침 오후로 접어들고 있었다.
오늘은 쉬고, 내일 일찍 성으로 가기로 했다.
‘어디 보자.’
짐마차를 잘 놓고, 말을 풀어 옆에 매어두었다. 공간이 널찍하니 좋았지만, 하룻밤에 1골드라는 금액은 비싸지 않나 싶었다.
“배고팠구나.”
그르릉.
말에게 먹이를 준 후, 간이막사를 크게 한 동 지었다.
이미 뼈대는 다 지어져있던 걸 고스란히 꺼내놓은 수준이어서, 남은 부분은 모두 힘을 합치니 금방 완성할 수 있었다.
커다란 막사는 그 내부에 칸막이를 만들어서, 따로 막사를 추가하지 않고도 탈의실이나 욕실을 구분할 수 있었다.
‘비누를 팔아볼까. 싼 값에.’
그런 생각을 해보는 건, 한동안 잊고 지냈던 냄새가 다시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많으니 잘 씻는 사람도 아닌 사람도 있게 마련이겠지만....
‘후각을 막아주는 스킬 같은 건 없나?’
마스크를 만들어볼까.
진지하게 생각했다.
‘호흡이 어려울 정도로 빡빡하게 만들면 냄새가 못 들어오지 않을까.’
추가로 안에 들풀즙을 넣거나 제작 과정에 아예 조합을 해버리면, 그 냄새로 덮어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일단 염두에 두자.’
막사 안은 훈훈했다.
모닥불을 피우진 못했지만, 강철로 만든 아담한 스토브가 자리하고 있었다.
장작을 넣어 불을 붙이고, 연통은 막사 천장에 구멍을 뚫어 빼냈다.
“향이 좋아요.”
“그래서 끓이는 거야.”
스토브에 차를 끓였다.
데우는 정도는 인벤토리에서 해도 되지만, 차를 끓이면서 퍼지는 향기가 심신에 안정을 주었다.
다들 조금씩 긴장을 풀고 식사를 했다.
번갈아가며 옷을 갈아입고 씻고 나니 어느새 밤이 되었다.
“바깥에 나와서 침대를 쓰다니....”
헤인즈는 말도 안 된다는 얼굴이었다.
보통 바닥을 대충 치우고 깔개를 깔거나, 아니면 짐마차 위에서 담요를 깔고 눕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지금 막사 안에는 가주가 허공에서 꺼낸 침대들이 곳곳에 배치되고 있었다. 집에서 각자 사용하던 그 침대들이었다.
“불편하면 칸막이 더 쳐줄까?”
“저희는 괜찮은데요....”
베티도 루시아도 아가씨를 보았다.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고 있던 에밀리아가 괜찮다며 웃었다.
최강혁은 그녀의 머리 수분을 루팅해주고 막사를 나섰다. 엘리사벳이 따라 나가니, 헤인즈가 얼른 막사 입구 쪽을 보호하듯 섰다.
“직접 하시는 겁니까?”
“소리가 거슬리더라고.”
“안 그래도 손을 봐야 할 것 같았습니다.”
마차 바퀴 중 하나가 조금 헛도는 느낌이 들었었다. 살펴보니, 축과의 연결부분이 마모되어있었다.
‘미리 만들어두어서 좋네.’
여유 부품들이 많아서, 어차피 교체하는 김에 전체 축과 바퀴를 한 번에 바꾸었다.
“성문 통과가 더 엄격해진다는데, 내가 못 들어갈 수도 있는 건가?”
“이곳에서 발급되는 신분패가 있으니, 문제 없을 겁니다. 보통 다른 지역에서 온 이들이 애를 먹는 편이죠.”
“그런 건가.”
숲에서도 그랬지만, 아예 주변에 나무가 없는 곳에서 밤하늘을 보니 훨씬 대단했다.
도시에선 볼 수 없을 무수한 별과, 여전히 무서우리만치 크게 느껴지는 달의 모습.
‘이전 지역에서도 밤하늘은 좋았지.’
여기 저기 불을 피운 곳들이 눈에 띄었다.
어딘가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취한 목소리로 따라부르는 이도 있었다.
고기를 굽는 냄새.
술냄새.
어디선가 들려온 고함.
병 깨는 소리와 비명.
웃음소리와 욕설이 제멋대로 뒤섞였다.
“정체되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엘리사벳이 말했다.
“맞서 싸우지 못했으니 패배나 마찬가지라고. 결국 도망친 기사에게 미래는 없다고 말입니다.”
“도망치는 건 나쁜 게 아니야. 아무도 다치지 않잖아.”
최강혁이 답했다.
“괜히 허튼데다 화풀이하는 것보단 낫지.”
“그러신 적이 있습니까?”
“화풀이?”
“예.”
“있지.”
아무래도 죽였어야 했을 인간들을 그대로 두고, 정작 엉뚱한 무리를 지우고 다녔다.
명분이야 있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단순한 화풀이 아니었을까 싶은 것이다.
“당시엔 최선이라 생각했는데, 지나고 나면 아닌 것 같을 때가 있어.”
“알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상황에 맞춰가며 사는 거지.”
후회든 반성이든 산 자의 몫이다.
죽으면 뉘우칠 기회도 없으니.
“다시 가문으로 돌아가고 싶은 거야?”
“예?”
“문제가 있었다고 들었어. 다른 기사들하고.”
그녀에겐 기회가 있다.
언제든 원하면 다시 돌아갈 수 있을 테고.
“아닙니다.”
하지만 엘리사벳은 고개를 저었다.
“어느 순간부터 생각이 바뀌고 있습니다. 결국 장소나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디에서든, 눈에 보이는 경쟁이 없이도 발전을 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게 아니지.’
사실은 조금 다르다.
당사자는 잘 모르겠지만, 그녀에겐 정말 따라잡고 싶은 새로운 기준점이 생긴 것이었다.
“배우고 싶은 게 많습니다.”
“난 실전 위주라서, 근거도 체계도 없어. 다칠 수도 있고.”
“감수하겠습니다.”
“그렇다면야.”
고개를 끄덕인 최강혁이 막사로 향했다.
내일부터 바빠질 테니 일찍 눈을 붙일 생각이었다.
* * *
성문 밖에서 대기하는 인파가 굉장히 많았다.
리어카 비슷하게 생긴 수레를 끄는 이들도 있었고, 단순한 봇짐이나 배낭 같은 것을 메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나이든 이들부터 엄마 품에 안긴 어린아이까지. 모두 성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선 모습이었다.
“오래 걸리겠는데요.”
“그러게. 이대로라면 정오를 넘길 거야.”
“빡빡해졌다고 말만 들었지,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물론 프리패스존도 있었다.
줄을 서지 않고 옆쪽의 쪽문을 이용하는 이들은 보통 영주의 심부름꾼이거나, 타 도시의 전령이거나, 아니면 현장에서 속행권을 구매한 이들이었다.
‘3실버라.’
3실버면 0.3골드라던가.
좀 일찍 들어가겠다고 내기엔 큰 돈인 것 같지만, 앞에서 줄을 선 이들을 보고 있자니 그리 큰 돈 같지 않게 느껴졌다.
“저, 저희는 괜찮습니다.”
“가는 김에 같이 가야지. 누군 들어가고 누군 기다리면 꼬이잖아.”
최강혁의 말에, 에밀리아도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조용히 줄에서 빠져나와 앞을 향하니, 멀리서 알아본 경비병 하나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지?”
속행권이라는 건 실존하는 개념이 아니다.
단지 경비병들에게 뒷돈을 주는 것일 뿐.
6사람 몫은 1골드 8실버겠지만, 에밀리아는 2골드를 헤인즈에게 건네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급한 용무가 있어서 그러는데, 확인이 가능할까요?”
헤인즈가 자신의 신분패를 보여주며, 동시에 자연스럽게 경비병의 손에 금화 두 닢을 건네었다.
뇌물을 주면서 차액을 거슬러달라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니, 경비병은 살짝 흡족해진 얼굴로 쪽문 쪽을 턱짓했다.
애초에 뇌물에 액수가 정해져있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그런 것에 의문을 가지는 이는 없던 모양이었다.
“아직 신분패가 없다고? 그럼 못 들어가지.”
“여기, 여기 있소!”
속행권을 샀더라도, 신분패가 없으면 들어가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다행히 마침 성문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 소리쳐 알려주었다. 예전에 보았던, 그들의 결혼식에 왔던 신관 하나도 보였다.
‘이런 식으로 수령하는 건가.’
애초에 신분패가 없으면 들어가질 못하니, 관련 부서에서 나온 이들이 성문 바로 안쪽에 임시 사무소를 두고 있는 것 같았다.
“초에... 강혁.”
“예.”
“여기 서명하시고.”
최강혁의 이름과 생김새를 건성건성 확인한 남자는 수령 확인서로 보이는 곳에 그의 서명을 받고 관청의 직인을 찍었다.
‘뭐, 다행인가.’
사실 그의 생김새가 달라서 문제가 될까 생각도 했었는데, 정작 도시에 와보니 정말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있었다.
오히려 저 사람이 다른 세상에서 건너온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괴상한 외모까지 보였으니, 최강혁 정도는 단지 키가 좀 큰 것을 빼면 평범한 축에 속했다.
‘민증 받는 기분이네.’
신분패가 생겼으니, 이제 문제 없이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을 앞뒤로 살펴보던 그는 옆에서 비슷하게 수령받고 있는 아내를 보았다.
“당신도 받아?”
“이름이 바뀌었으니까요.”
그녀가 웃으며 보여준 신분패엔 ‘에밀리아 초에’ 라는 이름이 새겨져있었다.
“당신 가문은?”
그렇게 물으니,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굳이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이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성벽 안쪽의 풍경은 상상했던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적당히 섞여있는 느낌이었다.
생각보다는 덜 더러웠다.
그리고 생각보다 덜 발전했다.
‘길은 잘 해놨네.’
대로가 넓게 뻗어있었다.
바닥에 자갈들을 촘촘하고 단단히 박아넣은, 일종의 포장도로였다.
그리고 대로의 양쪽 가장자리엔 대략 2미터 정도 깊이의 하수로가 자리했다.
이런 저런 오물이 섞인 생활하수가 지금도 어디론가 흘러가는 중이었다.
‘해자하고도 연결되어있던 것 같았지.’
지하에 관을 묻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오염수를 따로 흘러보낸다는 게 어디인가.
‘길바닥에 쏟아버리는 걸 상상했었는데... 아. 그건 거의 맞구나.’
마침 건물 하나에서 나온 이가 양동이에 담긴 무언가를 하수로에 쏟아버리고 있었다.
‘밟고 다닐 정도만 아니면 되겠지.’
신분패를 받았으니, 도시 방문의 1차 목적은 이미 달성했다.
남은 건 충전한 배터리의 납품, 여러 생필품 구매, 장터와 상점을 돌아보는 일 등등이었다.
‘유물을 취급하는 상점이 따로 있다고 했지.’
용병사무소에도 들러야 한다.
할 일이 많으니 적당히 사람을 나눠 갈라질까도 생각했지만, 왠지 뭉쳐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같이 움직이기로 했다.
〈 95화 〉 095.
095.
“소매치기를 조심하셔야 합니다.”
“성 안에도 있어?”
“물론이죠. 어디에나 있지 않겠습니까.”
“성문은 어떻게 통과해?”
“도적들끼리만 공유하는 쥐구멍들이 있게 마련이죠.”
일부러 땅굴을 파기도 한다는 모양인데, 도시의 안정과 관련된 일이니 걸리면 즉각 처형이라는 것 같다. 그래도 그렇게들 한다고.
“목숨 참 쉽게들 거네.”
“하하....”
헤인즈가 웃을 때, 에밀리아가 옆에서 말했다.
“당신 일 먼저 봐요.”
“아니야. 가까운 데부터 가.”
“가까운 곳이라면, 마법 상점이 맞습니다.”
웃음을 멈춘 헤인즈가 안내를 자청했다.
그동안 적지 않게 와보았기에, 위험해서 들어가지 않았던 뒷골목을 제외하면 대부분 알고 있다고 했다.
“아. 그러고보니, 신전이 더 가까울 것 같은데요. 헌금을 하고 가시겠습니까?”
“돈은 아까 주지 않았어?”
에밀리아를 돌아보니,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신관께 드리는 수고비였어요.”
“아.”
그래서 신전부터 방문했다.
도시의 성벽 안에 있기엔 그리 어울리지 않는, 인위적으로 조성된 작은 숲이 그들을 반겨주었다.
‘어머니의 종교라고 했었지.’
떠돌이 모험가라고 들었다.
오지를 탐사하고 유적을 조사하는, 겸사겸사 유물 발굴도 하던 분이라고.
처음 들었을 땐 도굴꾼 아닌가 싶었지만, 관련 면허가 있었다고 하니 다행이었다.
‘도굴꾼과 고고학자는 자격 유무의 차이일까.’
그러다 남편을 만나고, 에밀리아를 낳았다.
모험을 그만 두고 한 곳에 정착했지만, 가문의 의뢰를 받아 이동하던 도중 부부가 함께 사고를 당했다.
그것이 아내로부터 들었던 이야기였다.
“어서 오십시오.”
의외로 나름 신도들이 있었다.
다들 절약을 좋아할 것 같은 차림새였다.
방문객들을 반겨주는 예비신관들을 지나, 나무와 가죽으로 지어진 본채에 방문했다.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아내에게 전적으로 맡겨 적당한 금액을 헌금하고 나왔는데, 왠지 다들 비슷한 표정이었다.
“.......”
“...허, 허험.”
뭔가를 참고 있는 얼굴.
하지만 차마 냄새난다는 말을 꺼내는 이는 없었다. 그저 적당히 신전에서 멀어지고 나서야, 조금 참고 있던 숨을 티나지 않게 몰아쉴 뿐이었다.
‘얼마 전까진 당신들이 그랬거든.’
최강혁은 속으로 생각했다.
* * *
다음 방문한 곳은 마법 도구 상점이었다.
이름만 들어보면 수정구나 지팡이, 고깔모자 같은 걸 팔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직접 가보니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달랐다.
‘상점이 아니라 시장이잖아.’
한 구역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었다.
벽이 있긴 하지만 건물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게, 지붕이 없이 벽만 올라가있었다.
그 안에는 마치 기업 박람회 현장처럼, 수많은 크고 작은 부스들이 자리해있는 모습이었다.
“각각 다른 소속이라고?”
“소속이 없는 이들도 있고요.”
개인적으로 물건을 파는 사람도 있었고, 어느 상단이나 단체에 소속되어 본격적으로 장사를 하는 곳도 있다고 했다.
‘되게 억울한 표정이네.’
개중에는 정말 팔기 싫은 듯한 얼굴로 무언가를 내놓은 이들도 보였는데, 아마 형편 때문에 개인 물품을 파는 것 같았다.
-무엇을 찾으십니까?
-언니! 마법사죠? 이거 한 번 봐봐요.
-회복 포션 팝니다! 부작용이요? 없어요, 없어!
호객하는 소리를 들으니 고향의 재래시장, 혹은 동대문 옷가게들이 생각났다.
그런 호객꾼들을 상대하는 마법사들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걸걸한 목소리로 상인들과 흥정을 하거나, 좌판을 엎을 듯이 성질을 부리는 모습도 보였다.
‘이게 마법사들인가.’
마법사들은 나름 고상하거나 학식있는 이들 아닐까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어디 가도 이 이상은 못 쳐드려요.”
“한바퀴 돌아보고 올게요.”
“그러세요. 어차피 다시 오실 텐데. 근데, 그 때는 지금 가격 쳐드릴 수 없을 지도 몰라요.”
상인들의 응대 방식은 상상했던 대로였다.
충전된 배터리를 매입하는 곳이 한 곳이 아니다보니, 이 안에서도 나름대로 발품을 팔아야 하는 것 같았다.
‘담합 같은 건 안 하는 건가.’
분명 있을 것 같은데.
최강혁은 눈에 보이는 온갖 것들을 스캔해보며, 그 도구의 목적이 뭘까를 생각했다.
“발광 램프입니다! 한 번 충전하면 닷새는 거뜬히 유지됩니다!”
“온갖 마법 시약 있습니다! 일단 보고 가세요!”
“절삭력 강화 단검 팝니다! 중고지만, 사용감 거의 없어요! 메켈렌 학파 인증 있습니다!”
마지막에 들었던 말이 신경쓰였다.
최강혁은 그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갔다.
아마도 가장 작은 면적으로 보이는 부스에 좌판을 깔고 앉아있던 젊은 여성은, 모처럼 방문한 손님을 올려다보다 움찔 굳었다.
“어, 어서오세요. 손님...이시죠?”
“절삭력 강화 마법?”
“예. 메켈렌 학파에서 공인한....”
“그런 게 있어?”
옆을 보며 물었다.
에밀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유명한 학파예요.”
“볼 수 있나?”
“여, 여기 있어요.”
이미 앞에 놓고 있던 모양이다.
바로 집어가진 못하게 반구형의 마나벽에 막혀있었는데, 그건 이곳에 부스를 빌리면 자동으로 적용해주는 마법이라고 들었다.
기본 비용에 들어가는 혜택이라고.
그 여성은 주인이라서 그 마나벽과는 상관 없는 건지, 안으로 손을 뻗어서 단검으로 작은 철붙이를 긋거나 베어보였다.
“흐음.”
“단돈 10골드입니다. 새 제품이 30골드라는 걸 생각하면 엄청난 할인이죠.”
“메켈렌 학파의 공인 제품이라면, 그 정도 가격이 맞을 거예요. 사고 싶어요?”
에밀리아가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니, 그녀가 값을 지불했다.
최강혁은 이미 그것을 스캔했지만, 그래도 본제품이 있어야 더 자세히 연구해볼 수 있을 것 같아서 구입하기로 한 것이다.
‘부인 지갑을 자꾸 열게 만드는군.’
에밀리아의 주머니 사정을 정확히 알지는 못해도, 그렇게까지 여유롭지는 않은 것 같던데.
‘그러고보니, 여기서 팔 수도 있겠구나.’
주위를 둘러본 그는 구매한 단검을 인벤토리에 넣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
“각종 몬스터 부산물 구매합니다. 일단 가져와보세요. 가격 책정은 무료입니다.”
“가죽 삽니까.”
“예. 예. 다 삽니다.”
조금 무료해하는 얼굴의 남자.
널찍한 부스에 비해서 별거 없어보이는 곳이었지만, 지역 스캔을 하고 있던 최강혁은 이 부스에 지하창고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오래 장사한 느낌인데.’
그가 부스를 살필 때, 남자는 그를 흘끔 올려다보았다.
가죽을 판다더니 수중에 없는 걸 보면, 아마도 아공간 아티팩트를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다 받아줄 수 있을까 신경 안쓰셔도 되니, 일단 보여주세요. 여기보다 잘 쳐주는 집 없습니다.”
“다들 그러던데요.”
“뭐, 그렇긴 하죠. 그래도....”
기지개를 켠 남자가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여기서 가격 듣고 가시면, 사기를 당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글쎄. 다른 매입자들하고 짜고서 헐값을 공유할 수도 있지 않나.’
속마음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저 인벤토리에 있던 가죽들을 하나 하나 꺼내놓았다.
“늑대 가죽이군요. 품질이 상당히... 늑대 가죽... 늑대가, 계속 나오는군요.”
“좀 많아요.”
“음. 여기서 이러실 게 아니라, 이 안쪽에 놓으시겠습니까? 카운터가 좁아서요.”
다른 분들도 앉아서 쉬시라며 의자를 내어주었다. 본격적으로 그가 내어놓은 가죽을 살펴보는 솜씨가, 한두해 해본 게 아닌 듯 익숙했다.
“흠.”
“왜요?”
“아니요. 좀 특이해서요. 성장기 흔적인가.”
심지어 육안으로 확인하기 어려웠던, 여러 가죽들을 짜깁기했던 흔적도 어렴풋이 알아본 듯 했다.
하지만, 다행히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품질은 문제 없군요. 좋은 수준입니다.”
거대 곰가죽은 내어놓지 않았다.
뒤쪽에서 아내가 귀뜸해주어서였다.
이런 데서 파는 것보다, 나중에 경매에 올리는 게 낫다고 말이다.
“비슷한 상태로 28장 더 있습니다. 마저 보여드릴까요?”
“몇 장이요?”
“늑대가 28장이고, 웨어울프가 그 반 정도 됩니다.”
“어... 일단 보죠. 매입할 돈이야 있으니까요.”
생각보다 큰 손님이었다.
졸음기가 날아간 얼굴로 눈을 고쳐뜬 남자는 새로 꺼내진 가죽들을 연이어 살펴보며, 그 옆에 있던 종이에 숫자들을 적었다.
그렇게 최강혁은 늑대 가죽과 웨어울프 가죽, 사슴 가죽과 일반 곰 가죽 등등 인벤토리에 있던 것들 다수를 털어냈다.
멧돼지 가죽들도 있었지만, 그건 팔기엔 값어치가 낮기도 하고, 여기 저기 막 써먹기도 좋아서 그냥 갖고 있기로 했다.
“이런 것도 취급합니까?”
“아이고, 없어서 문제죠. 다 받습니다.”
그 외에도 각종 몬스터와 짐승의 부산물들 역시 감정을 받고 팔아넘겼다.
“어디 길드에서 나오셨습니까? 처음 뵙는 것 같은데....”
남자는 그가 개인 고객이 아니라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길드 차원에서 쌓아두었던 물량을 털어내는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다 해서... 117골드3실버인데, 120골드 쳐드리겠습니다. 대량이니까요.”
그는 각각의 가치를 매려놓은 종이를 보여주며 말했다. 가격이야 의문이 있을 수 있지만, 계산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쳐주시는 김에 좀 더 주시면 좋을 텐데요.”
“하하. 저도 먹고는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좋습니다. 125골드 드리죠.”
“음....”
“한 바퀴 돌아보시고 오셔도 괜찮습니다.”
“뭐 굳이.”
그냥 넘기기로 했다.
125골드를 받은 그는 비상금으로 적당히 챙긴 후, 나머지를 에밀리아에게 건네었다.
“네?”
“받아. 팔 아파.”
“.......”
엉겁결에 돈을 받은 그녀는 조심조심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저쪽 가보자.”
이어서 다른 부스들을 돌아다녔다.
이전 가게보다 더 잘 쳐주는 곳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배터리를 세 개 넘겼다.
평소였다면 다섯 개에서 열 개 가까이 넘기곤 하지만, 근래 들어서 마나를 다른 곳에 쓸 일이 자주 생긴 탓에 충전량이 적은 편이었다.
“빈 배터리는 몇 개나 사시겠어요?”
“하나에 1골드죠?”
“네.”
“세 개만 주세요.”
그는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사실 이제 사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니 아주 그런 것도 아니었다.
‘재질 자체는 그렇게까지 특별하진 않은데, 마법이 들어가서 그런가.’
마나 배터리를 그대로 본따 만드는 것까지는 가능한데, 들어가는 마나량이 상당했다.
차라리 배터리는 지금처럼 이런 곳에서 사고, 그가 가진 마나를 그곳에 충전하는 게 더 효율적일 것 같았다.
‘지금도 충전은 할 수 있는데... 이 자리에서 바로 팔긴 좀 그렇지.’
당장 큰 돈이 필요한 건 아니다.
만약 그렇다고 해도, 다른 이들의 이목이 없을 때 처리하는 게 나을 것이다.
‘에밀리아한테는 어느 정도 이야기를 해두는 게 좋겠어. 계속 이것 저것 자잘하게 숨기는 것도 답답하니까.’
그나저나, 마법 도구의 시세가 엉망이었다.
그다지 쓸모 없어보이는데도, 마법이 내장되어있으면 가격이 확 올라갔다.
“모험가들은 벌이 수준이 다르니까요.”
엘리사벳이 말해주었다.
“그들은 돈을 아끼지 않는 편입니다. 아주 약간의 이점이 늘어나는 것에도 거금을 투자하죠.”
몸이 재산인 이들이니, 스펙업에 예산을 쏟아붓는다는 뜻인 것 같았다.
그래서 오히려 악인들의 목표로 노려지기도 한다고, 그녀는 덧붙였다.
‘길드라는 게 그래서 있는 거구나.’
모험가 길드, 용병단, 혹은 이런 저런 클랜 같은 곳들이 바로 그런 이들이 모여 만들어지는 거라고 했다.
이름 있는 곳에 소속이 되면, 함부로 건드리는 이들이 그럭저럭 줄어든다고 말이다.
‘조폭 같은 느낌인데.’
계속 돌아다녔다.
하루종일 걸려도 다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서로 중복된 상품도 적지 않았지만, 사이사이 눈길을 끄는 것들이 많았다.
“아....”
에밀리아가 문득 한 곳에 시선을 멈추었다.
슬쩍 보니, 화염계열의 마법이 내장된 스태프라고 했다.
일회성이 아니라, 마나를 주입하는 대로 마법을 발동시킬 수 있다고 하니, 설명만 읽어도 꽤 좋아보였다.
‘이런 미친.’
하지만, 가격이 2,500골드.
다들 고개를 저었다.
“저정도면 경매장으로 갔어야 할 텐데.”
에밀리아의 말에, 뒤쪽에서 주변을 경계하던 엘리사벳이 한 마디 거들었다.
“아마 팔 생각이 없을 겁니다.”
“그렇겠지.”
팔려고 내놓은 게 아니라, 호객 목적으로 걸어놓은 것 같다고 둘은 이야기했다.
‘그럴 수도 있겠네.’
고가의 상품을 올려놓고, 그것으로 이목을 끈 다음에 자잘한 걸 팔아보려는 것.
실제로 해당 부스에선 잡다한 시약과 포션 종류를 팔고 있었다. 마법사들이 주로 사용하는 소모품이었다.
“더 볼 거 없을 것 같은데.”
“저도요.”
“저희도 괜찮습니다.”
사람이 붐비는 곳은 이래저래 신경 쓸 일이 많아진다. 엘리사벳은 거듭 사방을 주시하고 있었고, 헤인즈도 비슷했다.
경매장 이야기가 나온 김에, 그쪽으로 향했다.
거대곰 가죽을 팔기 위함이었지만, 최강혁은 겸사겸사 다른 것들도 준비해두었다.
〈 96화 〉 096.
096.
경매장은 상상했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다만 구매자가 아니라면 마음대로 안쪽에 들어가진 못하고, 별도의 출입구를 사용해야 했다.
이는 경매 의뢰인도 마찬가지였다.
경매 행사 중에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는 비공개 경매도 있는데, 참여자들의 신분 노출을 막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 같았다.
“어떤 물품을 등록하시고 싶으십니까?”
“짐승 가죽. 곰. 크기가 큽니다.”
“얼마나 크죠? 기록을 해야 해서요.”
“직접 보시죠.”
“......감정사가 곧 도착할 겁니다. 잠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예.”
바닥에 대충 꺼내놓았던 거대곰 가죽을 도로 루팅하자, 접수원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아공간 마법은 애초에 희귀하기도 하고, 관련 아티팩트도 비싸다고 하니 그런 것 같았다.
“안녕하십니까, 자일라프라고 합니다. 곰 가죽을 가져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잠시 쉬고 있으니, 금방 감정사가 도착했다. 별도로 안내된 곳으로 가서 다시금 그것을 꺼내놓자, 그가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모처럼 큰 녀석을 구경하는군요. 직접 잡으신 겁니까?”
“예. 뭐.”
“대단하시군요. 가죽에 별다른 상처도 없는 걸 보면 아마도 쇼크웨이브 계열 마법으로 기절을 시키셨을 것 같은데....”
이런 저런 나름의 분석을 하고 있지만, 하나도 맞지 않았다. 감정사의 실력에 의문이 가긴 했지만, 이미 잘라진 걸 도로 붙였다는 걸 상상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겠지 싶었다.
‘아까 그 매입상 실력이 더 좋아보이던데.’
그쪽에서 감정을 받아보고 오는 게 나았을까 싶지만, 거기서 꺼냈으면 왠지 그쪽에서 팔아줘야 했을 것 같았다.
‘난 마음이 약하니까.’
그 때, 조심조심 가죽을 살피던 자일라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가죽이면, 어느 곳을 가든 150에서 잘 받으면 200까지도 가능할 겁니다.”
그는 경매에 올릴 경우 초기 등록 가격으로 150골드를 추천했지만, 잠시 생각해보던 최강혁은 200으로 신청하겠다고 말했다.
“충분히 가치가 있긴 합니다만, 경매장에 곰가죽을 찾는 이가 없을 수도 있으니까요. 유찰이 될 수도 있는데, 괜찮으십니까?”
“예. 상관 없습니다.”
옆에서 대기중이던 경매장 직원이 등록 신청을 도와주었다.
‘돈의 가치가 대충 감이 오네.’
아직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쪽의 1골드는 고향에서 10만원 정도의 가치를 갖고 있는 것 같았다.
‘1실버를 만원이라 치면 얼추 맞는 것 같아.’
1골드는 10실버, 1실버는 100쿠퍼라고 했다.
발행하는 곳마다 주된 금속의 함유량이 조금씩 다르다는 모양이다.
그래도 해당 은행이나 공인해준 국가, 혹은 영주의 재정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면 해당 가치를 인정해준다고 한다.
흥미로운 건, 위조 주화의 경우 과학적인 분석이 아니라 마법으로 찾아낼 수 있다는 점이었다.
‘마법이 그렇게 범용성이 좋으면, 과학이 발전하지 않을 것 같은데.’
가죽 등록을 마친 그는 감정사의 테이블에 작은 돌조각을 올려두었다.
“이건....”
“이런 것도 보십니까?”
“담당자가 있긴 합니다만, 저도 못 보는 건 아닙니다. 맡겨보시겠습니까?”
“부탁드립니다.”
그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자일라프가 의자를 가져와 제대로 앉았다.
그리고는 돋보기를 들이대며 이리 저리 살펴보더니, 품에서 젓가락을 닮은 막대기를 꺼내 그것에 대어보았다.
“......?”
뭐하는 도구인가 생각할 때였다.
돌에 접촉한 막대기가 그 끝에서부터 빛나기 시작했다. 눈이 부실 정도는 아니고, 야광물질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마치 게이지를 채우듯 접촉부분에서부터 위쪽으로 조금씩 빛이 올라가더니, 5센티미터 정도에서 멈추었다.
“좋군요.”
그것을 확인한 자일라프가 말했다.
“품질이 괜찮아요.”
그가 책정한 가치는 45골드였다.
고작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돌이 그 정도로 비싸다는 건 놀라운 일이겠지만, 그것이 몬스터의 핵이라고 하면 다들 이해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곳에서 경매에 올리시기보다는 일반 매입점으로 가시는 걸 추천드리고 싶군요.”
이 정도 크기라면 일반 매입점에서도 취급할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이쪽은 낙찰 수수료가 크니까요.”
“아. 그렇군요.”
“혹시 대량이거나, 크기가 큰 게 있다면 이쪽이 낫긴 합니다.”
“이 정도는 어떻습니까.”
조그마한 핵을 도로 챙긴 최강혁은 이어서 당구공 크기의 핵을 꺼내놓았다.
눈을 꿈벅이던 감정사는 다시금 표정을 고치고 그것을 살펴보았다.
“호오.”
그렇게 감정을 해보았다.
마지막으로 조금 전에 사용했던 측정 막대를 접촉하니, 그 끝까지 차오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처음 부분에서부터 새로운 색의 빛이 추가로 이어졌다.
그렇게 다섯 번을 더 채워지고 나서야 멈추니, 감정사가 종이에 뭔가를 적었다.
“이 정도 급은 간만에 보는군요.”
그의 추천 가격은 520골드.
상황에 따라선 550골드도 가능하리라 짐작했다.
‘10배가 넘는구나.’
그곳 경매장에서 팔아도 되겠지만, 아니라면 1골드를 받고 감정서를 써줄 수 있다고 했다.
“제 입으로 말씀드리기 민망합니다만, 그래도 제가 서명하고 이곳 경매장에서 공인한 감정서라면 어지간한 곳에서는 다들 인정해줄 겁니다.”
“그냥 여기서 팔죠.”
등록 가격은 520골드로 넣었다.
흔한 종류라면 추천가격보다 낮춰서 시작가를 넣는 게 맞지만, 그 정도 급의 핵은 드물게 올라오니 그대로 올려도 될 거라고 했다.
“좋은 상품 구경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자일라프가 돌아가고, 경매장 직원이 이런 저런 설명을 해주었다. 낙찰과 유찰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만약 유찰이 된다면 1차 유찰은 비용 소모가 없고, 그 상태에서 가격을 낮추지 않고 다시 올린다면 그때부터 추가 유찰 시에 나름의 비용을 받는다고 했다.
“경매는 지금 당장 올라가지 않습니다.”
일정을 확인해보니, 거대 곰 가죽은 오늘밤, 몬스터의 핵은 내일 오전 중에 올라갈 듯 했다.
“연락할 곳을 알려주시면, 경매 결과를 알려드리러 사람이 방문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직접 방문해주시는 방법도 있고요.”
“직접 오겠습니다.”
최강혁은 제시된 서류에 서명을 하고, 손바닥을 올려 스캔 비슷한 절차를 거쳤다.
그 또한 마법 도구인 것 같았다.
지문 인식은 아닌 것 같은데, 뭘 확인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Comentários

Postagens mais visitadas deste blog

novel 4

civilização 15

magia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