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ilado 11

헤인즈는 배움의 자세로 받아들였다.
‘숲에선 숲의 방식이 있는 거야.’
문득 가문에서 겪었던 기사들의 고압적인 태도와, 곧 그들의 뒤를 따를 듯 보이던 선배 종자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들이 이곳에서도 강할 수 있을까?’
어느 정도는 그럴 것이다.
하지만 곧 한계가 올 것이 분명하다.
‘더 많이 배워야 해.’
조금 느슨해지려는 마음을 다시금 다잡았다.
〈 82화 〉 082.
082.
“숙여.”
“......!”
헤인즈가 다급히 몸을 숙였다.
그의 머리가 있던 곳을 지나 땅에 내리박힌 무언가가 있었다.
퉁-!
그와 거의 동시에, 최강혁이 쏜 볼트가 나뭇잎 사이를 뚫고 무언가를 맞추었다.
끼익! 하는 작은 소리에 이어, 아래로 툭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이게 그 놈.”
수풀을 헤치고 가보았다.
바닥에 떨어진 놈을 보며 최강혁이 말했다.
“그놈이요?”
“독침.”
“아....”
들었던 대로였다.
작고, 딱히 가져갈 것도 없어보였다.
하지만 치명적인 독을 갖고 있다는 걸까.
“피하는 게 낫겠네요.”
“그래도 집중. 조심.”
“네. 방심은 안 되죠.”
잡은 걸 버리지는 않았다.
최강혁에겐 마법 공간이 있으니, 사냥한 것들로 가르침을 줄 때를 제외하면 모두 그 안으로 넣었다.
“열 일곱이랬지?”
“나이 말씀입니까? 맞습니다.”
그렇게 저녁 무렵이 되었을 즈음.
높은 나무 위에서 휴식을 취했다.
평소였다면 올라오지 못했을 텐데, 최강혁이 마치 짐승처럼 날쌔게 올라가더니 밧줄을 내려주었다.
“가족은?”
“고향에 있습니다. 농부죠.”
“농부?”
“아. 농사요. 곡식을 키웁니다.”
“농부라고 하는군.”
“네. 그렇습니다.”
“농노하고는 다른 건가?”
“아. 맞습니다. 신분이 다릅니다. 자영농이거든요.”
“잘 모르겠네.”
“스스로 농사를 짓습니다. 신분은 평민이고, 영주에게 세금을 냅니다.”
“평민 농부.”
“예.”
“괜찮아? 농부.”
“뭐, 다들 어렵죠. 농사도 어렵고, 흉년이 오면 굶을 일도 생기고....”
“기사가 되면, 가족들 좋겠네.”
“하하....”
“형제 많아?”
“열 두 명 있습니다.”
“두 명?”
“아뇨. 열 두 명.”
“열 둘?”
“네. 왜 그러십니까?”
“많구나.”
“좀 많긴 하죠.”
“몇번째?”
“아. 제 아래로 다섯 더 있습니다.”
“중간?”
“그렇죠.”
농부 집안이라.
그런 걸 감안해도 열 두 명이나 자식을 낳는 건 이쪽 세상이 인력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뜻일까.
‘도시 이야기를 들어보면 좀 다른 것 같던데.’
아주 중세 같지는 않았다.
아직 단어를 다 알지는 못하지만, 쉬운 말로 우회하여 설명해주는 걸 들어보면 좀 특이한 부분이 많았다.
‘마법 때문일까.’
어쩌면 과학이 마법을 어느 정도 대체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도시에 가로등 비슷한 게 있다고 했으니까.’
전기를 활용하는 게 아니라면, 마법이 맞겠지.
“움직이자. 한 곳, 오래 휴식, 위험해.”
“알겠습니다.”
“강해지면 괜찮아. 몬스터들이 도망간다.”
“하하... 그렇게 되면 좋겠네요.”
“될 수 있어. 많이 굴러.”
“...아.”
해가 지기 전에 집으로 복귀했다.
오늘 곰을 잡지는 못했다.
밤까지 추적하면 찾아낼 수도 있겠지만, 어두워진 숲은 낮과 많은 것이 바뀐다고 최강혁이 말했다.
“아직 제게는 허락되지 않은 세상이라고 하셨어요.”
“흠... 그 정도야?”
벗어둔 갑옷을 기름 묻힌 헝겊으로 닦고 있던 엘리사벳이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헤인즈는 허리 뒤쪽으로 돌려 메고 있던 사이드백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녀가 그것을 알아보았다.
“뿔멧돼지도 있었어? 희귀종일 텐데.”
“예. 원래 다른 발자국을 쫓고 있었는데, 가주께서 이게 낫다면서 목표를 바꾸셨어요.”
“뿔은 널 주셨고?”
“예. 잘 갈아서 반은 제가 먹고, 반은 드리라고 하셨어요.”
“아....”
“뼈에 좋다고 하셨는데, 정말인가요?”
“맞아. 뼈에 좋고, 마나 성장에도 좋고.”
뿔멧돼지는 그 뿔을 제외하면 일반적인 멧돼지와 다를 게 없는 종이다.
다만 덩치가 크고 포악한데다가 영리하기까지 해서, 어지간한 사냥꾼은 섣불리 욕심을 부리지 않는 놈이기도 했다.
“그거 비싼 약재인데.”
“그래요? 그냥 주시던데....”
“뭐, 가주님 성격이 그렇긴 하지. 가는 법은 배웠어?”
“가는 방법이 따로 있어요?”
“그냥 아무데나 갈면 안 돼. 깨끗한 물에 하루 내지 이틀동안 푹 담가놓았다가, 그 물 안에 고운 돌판을 놓고 천천히 가는 거야. 물 밖에서 가는 게 아니고.”
“아... 그냥 막 갈뻔 했네요.”
“이리 줘. 어차피 소일거리가 필요했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딱히 체력이 필요한 일은 아닌데, 시간은 많이 잡아먹으니까.”
헤인즈는 따로 할 일이 있었다.
가주께서 몇 가지 일을 가져가셨지만, 자잘한 일거리가 여전히 많았다.
“다친데는 없고?”
뿔을 받아들며 물으니, 헤인즈가 고개를 저었다.
“도마뱀 독침에 맞을 뻔 했는데, 가주께서 알려주셔서 간신히 피했어요.”
“독침이라... 내가 아는 놈인가?”
“요 정도 크기에, 색깔은 자주색이었어요.”
“좀 다르네. 그래도 독이면 위험하겠지. 내일도 간다고 했나?”
“예. 원래 곰이 목적이었는데, 아직 못 잡았으니까요.”
“가주께서 계시다고 방심하지 말고.”
“네. 조심하고 있어요.”
“그래.”
“물 떠다드릴까요?”
“피곤하지 않아?”
“그 정도야 뭐.”
간이세면장에서 물을 떠 가져온 헤인즈는 문을 잘 닫고 그곳을 나섰다.
“이야.”
그는 새로 지어진 샤워장에 도착했다.
각각의 입구 위엔 ‘남성용’ 과 ‘여성용’이라는 팻말이 붙어있었다. 따로 입구 하나가 더 있었는데, 그쪽은 가주 전용이라고 들었다.
“어? 내 이름이네.”
탈의실 안을 채운 많은 옷장.
그 중 하나에 그의 이름이 있었다.
문을 열어보니, 비어있을 줄 알았던 안쪽에 여분의 옷가지와 속옷들이 잘 개어져있었다.
“어.”
다시 문을 닫고, 그의 이름을 확인했다.
“내 이름 맞는데.”
하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옷은 그의 옷이 아니었다. 조심조심 살펴보니, 새옷이었다.
“아....”
다른 칸에는 이름이 없었다.
슬쩍 열어보니 비어있었다.
“이거, 내 옷이구나.”
새옷을 사본 게 언제였던가.
지금까지 갖고 있는 옷들은 가문의 기사나 선배 종자들이 입던 것이 대부분이었다.
옷을 살 돈이 없던 건 아니다.
그 돈을 아끼면 나중에 좋은 검이나 갑옷을 살 때 보탤 수 있을 테니, 최대한 아꼈을 뿐이다.
“헤헤.”
모처럼 소년같은 웃음을 흘린 헤인즈는 얼른 옷을 벗고 샤워장으로 들어갔다.
시설의 사용법은 이미 배웠기에, 조심스러우면서도 서툴지 않게 이것 저것을 만졌다.
“와씨....”
고작 하루 같이 다녔는데.
벌써 가주의 말버릇이 전염된 걸까.
간단히 몸을 씻고 1인 욕조로 들어간 그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내일은 곰을 볼 수 있을까.”
하늘에 뜬 달을 올려다보며, 헤인즈는 오늘 숲에서 본 것과 들은 것, 수많은 가르침들을 하나 하나 되새겼다.
* * *
곰의 흔적을 다시금 포착한 건 헤인즈를 데리고 다닌 지 닷새 째였다.
그동안 발자국이나 배설물을 발견한 건 꽤 되었지만, 상대적으로 새끼거나 약한 놈들 뿐이었다.
최강혁은 놈이 아니라고 했다.
곰이면 그냥 죽이는 게 맞지 않나 싶었지만, 가장 강한 놈이 아니라면 오히려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헤인즈가 죽으면, 엘리사벳 화가 나겠지?”
“...아.”
간단한 비유였다.
과연 엘리사벳경이 화를 내줄까 싶긴 하지만, 무슨 말씀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가장 강한 놈 죽으면, 아랫놈들 서로 싸워. 대장 되고 싶으니까.”
“그렇군요.”
“아닐 수도 있어. 모든 곰, 같지 않아.”
그래도 강한 놈부터 죽이는 게 여러 모로 낫다는 것이 가주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숲 바깥 흔적. 강한 놈이었어.”
놈의 발자국은 충분히 사람들을 노릴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곳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니 죽여야 한다.
그리고, 지금 그 흔적을 찾았다.
“긴장해. 놈 배고파. 무게 줄었어.”
과거의 헤인즈라면 ‘발자국만 보고 어떻게 아나요’ 같은 질문을 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지난 며칠의 속성교육 중에는 발자국의 깊이를 통해 무게를 유추하는 것도 있었다.
물론 풀바닥인지, 흙바닭인지, 진흙이나 자갈이 섞여있는지에 따라서 제각각 다르기에 지금도 눈으로 봐서는 잘 모르겠지만.
‘굶주린 곰이라니.’
말만 들어도 뒷골이 서늘해졌다.
그동안 추적해오면서 본것들 중에는 포식자들이 먹어치운 사냥감들의 흔적도 더러 있었다.
‘그런 꼴은 되고 싶지 않아.’
사냥은 한 방향이 아니다.
사냥을 할 수도, 사냥감이 될 수도 있다.
가주의 말을 거듭 되새기며 긴장을 끌어올렸다.
그 때였다.
최강혁이 손을 들어 주먹을 보였다.
멈추라는 수신호였다.
“.......”
호흡조차 조심하며 소리를 죽였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최강혁이 살짝 고개를 저었다.
“이쪽 안 좋다.”
“위험한가요?”
“늑대들. 사냥 중이야.”
들어보니, 이미 특정한 목표를 정하고 추적중인 늑대들이 있는 것 같았다.
“사이에 끼면 위험해.”
늑대는 한 놈이 아니라 무리를 지어 돌아다니기에, 이미 목표가 있더라도 중간에 변수가 생기면 그것이 바뀌기도 한다.
자세히 풀어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헤인즈도 늑대 정도는 알고 있는지 대충 이해한 듯 보였다.
“혼자서 다 죽일 수 있으면 괜찮아.”
“...하하.”
가벼운 농담으로 과한 긴장감을 조금 낮춰준 최강혁은 계속해서 곰의 흔적을 추적했다.
“으음.”
하지만, 비슷한 정지신호가 거듭되었다.
최강혁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조심스레 물었다.
“우리 목표, 늑대들 목표. 같아.”
“늑대들이... 곰을 노립니까?”
어쩐지 자꾸 동선이 겹치는 것 같더니.
하지만, 그렇게 강한 곰을 고작 늑대들이 상대할 수 있을까?
“웨어울프 알아?”
“그게 뭐죠?”
“늑대. 하지만 두 발로 걸어.”
“늑대인간이군요.”
“그렇게 부르는구나.”
알고 있으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최강혁은 바닥의 수풀을 헤치고 특정한 발자국을 보여주었다.
“이게 놈들 발자국인가요?”
“달려갔어. 발자국 부족해.”
하지만 방향만은 확실했다.
그리고, 의도도 명확했다.
“곰, 포위 중이야.”
“포위요?”
“이쪽, 저쪽 둘러싸서 조여.”
두 손으로 표현하니, 헤인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몬스터들도 그런 걸 하는군요.”
“머리 좋아. 사람보다 좋은 놈들 있어.”
최강혁은 이곳에 처음 왔을 때를 떠올렸다.
당시에 보았던 웨어울프들은 강하지 않았다.
“긴장해.”
“예.”
하지만, 지금 보이는 흔적만 봐도 알겠다.
이놈. 만만치 않다.
‘하지만, 내가 더 만만치 않을걸.’
사냥에는 룰이 없다.
상대의 룰은 더더욱 따를 이유가 없다.
“가자.”
가까운 나무로 올라갔다.
헤인즈를 위로 이끌어준 그는 나무 위에서 이동을 이어갔다.
며칠동안 배우긴 했지만, 그래도 떨어질 위험이 있으니 그와 헤인즈의 허리를 로프로 묶어두었다.
“저기.”
“...으.”
그리고 어느 순간.
나뭇잎 뒤에 몸을 숨긴채 볼 수 있었다.
“저게 이곳의 웨어울프....”
“아니야. 상위종이다.”
“상위종이요?”
“더 높은 놈. 하위종이 농노, 상위종이 자영농.”
“이해가 잘 되는 비유군요.”
온몸이 시커먼 털로 뒤덮여있는 늑대인간.
사실 그것은 늑대인간이라는 범주에 넣을 수 있는건가 싶을 정도로 체구와 체형이 달랐다.
하지만 놈이 능숙하게 부리고 있는 십여 마리의 늑대들을 보면, 확실히 늑대인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귀족은 아니야.”
늑대들이 많다고 해서 숲을 지배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 증거가 지금 저 앞에 있었다.
그르르...
그들의 목표였던 바로 그 놈이다.
웅크리고 있는데도 그 높이가 3미터는 될 법한 곰. 그 주변엔 제멋대로 찢겨나간 늑대들의 사체가 김을 모락모락 피워올리고 있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부상을 입고도, 여전히 숨이 붙은 채 고통스러워하는 늑대들도 보였다.
‘근데도 포기를 못 하는 건 이유가 있을 텐데.’
최강혁은 의구심을 품었다.
아무리 숫자 상으로 유리하다 해도, 그가 보기에 저울추는 거대 곰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있었다.
‘가족이 죽었나? 분노한 느낌은 아냐.’
부리는 늑대들이 적잖게 죽었음에도, 후방에 서있는 늑대인간의 기색은 그리 흥분한 것 같지 않았다.
‘영역 싸움도 아닌 것 같은데.’
영리할수록 도망을 잘 친다.
당장 목숨을 내던져 싸우는 것보다, 회복하고 후일을 도모하는 게 낫다는 걸 아는 것이다.
“알았다.”
지켜보던 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저놈. 핵이 있었구나.”
〈 83화 〉 083.
083.
“핵이요?”
“몬스터 속에 있어. 돌 비슷해. 그거 있으면 강해.”
“아....”
“알아?”
“소문은 들었습니다.”
근데, 있는지 없는지는 어떻게 압니까?
그렇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헤인즈는 입을 다물었다.
멀리서 다시금 싸움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잘 봐둬.”
최강혁이 말했다.
늑대들이 뛰어오르는 높이, 달려드는 거리, 공격해오는 방식 등등을 하나 하나 눈에 담으라고.
하지만 워낙 일방적인 살육이었다.
늑대들은 제대로 된 공격조차 하지 못한 채 이리 저리 날아가 처박히거나, 그 자리에서 물어뜯기고 찢어졌다.
“가망이 없어보이는데요. 왜 포기하지 않는거죠?”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으니까.”
“네?”
“저 곰. 핵이 있어. 앞으로 계속 강해져.”
두 가지 이유일 것이다.
하나는 욕심.
그리고 하나는 이성.
서로 어울리지 않을 법한 두 가지.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래서 더 어울린다.
‘지금이 그나마 가장 약할 때니까.’
저대로 두었다간 계속해서 강해질 것이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음은 없다.
부스럭.
‘역시. 올인이군.’
사방의 수풀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낸 것들.
훨씬 많은 늑대들과 그 사이의 늑대인간들이 제각각 짙은 살기로 으르렁대며 곰을 향했다.
“...아.”
헤인즈가 어깨를 움츠렸다.
그 누가 이런 광경을 구경할 수 있을까.
자칫 불똥이 튈까 두려웠지만, 앞에 쪼그리고 앉은 가주의 등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 눈에 담자.’
그들의 싸움은 아니다.
하지만 배울 점은 있을 거다.
그렇게 전투가 이어졌다.
수십 마리의 늑대들이 차륜전을 벌이듯 곰을 노렸다. 그 사이에 늑대인간들이 달려들어 발톱을 휘두르거나, 멀리서 돌을 던지기도 했다.
아까 전만 해도 절대 꺾이지 않을 거목처럼 보였던 곰이지만, 그런 파상공세에 결국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크아아!
성난 포효.
잔인한 살육이 이어졌다.
숲속 한켠이 다른 색으로 물들어갔다.
어느 순간부터 코를 찌르는 피냄새.
헤인즈는 앞에 있던 가주께서 조용히 허공으로 손을 뻗는 모습을 보았다.
‘처음 보는 활이야.’
지난 며칠동안 본 것은 다소 평범해보이는 크로스보우였다.
‘도르래 같은 게 있네.’
그런데, 지금 가주가 손에 쥔 활은 조금 특이한 구조를 갖고 있었다.
일단 크기가 큰 것도 눈에 띄지만, 통짜 강철로 보이는 화살도 평범하지 않았다.
“곰을 쏘실 건가요?”
“아니.”
최강혁은 짧게 답했다.
화살을 매기고, 기긱거리며 시위를 당긴 그는 주저 없이 한 곳을 조준해 쏘았다.
퍼억!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머리가 박살나는 검은색 늑대인간이 보였다.
분명 다른 놈들에 비해 한 배 반은 더 커서, 그만큼 강하고 날쌜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야. 화살이 너무 빨랐어.’
단지 그 뿐이었다.
그리고, 그 늑대인간 하나의 죽음이 현장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도 볼 수 있었다.
“곰을 쐈으면, 놈들하고 싸워야 해.”
“...그렇군요.”
하지만 늑대들의 우두머리를 죽였더니, 놈의 지휘력이 사라졌다. 모두 우왕좌왕 정신이 없어보였다.
곰도 그것을 알았다.
갑자기 강하게 몰아치기 시작하는 모습이, 마치 상대를 몰살시키려는 것보다는 겁을 주어 쫒아내려는 것 같았다.
“아... 도망치네요.”
곰의 의도대로 되었다.
남아있던 놈들이 이쪽 저쪽으로 흩어졌다.
현장에는 달아나지 못할 만큼 크게 다친 녀석들과, 이미 죽어서 식어가고 있는 것들만 남아있었다.
으드득. 으득.
그리고, 피웅덩이 한가운데에 퍼질러앉은 거대한 곰은 가까운 사체를 집어들고 아무렇게나 씹어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때.
놈이 이쪽을 보았다.
“히익!”
거리도 수십 미터나 떨어져있고, 나뭇잎으로 가려져있는데도 마치 모든 걸 꿰뚫어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
하지만, 헤인즈는 그 눈빛이 자신이 아니라 가주를 향해 고정되어있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으적... 으적...
놈이 먹는 속도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그러더니 결국 멈추었다.
“......?”
헤인즈가 눈을 껌벅였다.
이어진 곰의 동작이 조금 괴상해서였다.
마치 모기를 쫓는 듯 앞발을 허공에 휘젓기도 하고, 악취를 맡은 것처럼 코를 킁킁거리기도 했다.
‘...어?’
그런데 곧이어 더욱 놀랐다.
앞에 있던 가주께서 왠지 비슷한 느낌으로 두 팔을 움직이시더니, 이어서 그와 연결한 허리의 로프를 풀고 아래로 훌쩍 뛰어내리신 것이다.
“가, 가주!”
“거기 있어. 움직이지 마.”
활을 집어넣은 최강혁은 빈손으로 그 곰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분명 좋지 않은 행동이다.
그가 가르친 어떤 것과도 맞지 않았다.
“...아.”
하지만, 헤인즈는 곧 보았다.
수십 마리의 늑대 사체들 사이로 아무렇지 않게 걸어간 가주가 저 거대한 곰의 앞에 멈춰섰다.
“대... 대화를 하시는 거야?”
말로 하는 대화는 아니었다.
하지만, 마치 수화와 비슷한 느낌으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무도 안 믿을 거야.”
조금 허탈해진 얼굴로 중얼거리던 헤인즈의 두 눈이 문득 경악으로 흡떠졌다.
푸확!
서로 대화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곰이 가주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니, 달려들려고 했다.
“.......”
무시무시한 앞발이 동시에 허공을 날았다.
그 절단면에서 피가 터져나올 즈음엔, 달려들던 놈이 그대로 땅에 처박혀 앞으로 주욱 미끄러졌다.
-헤인즈. 내려올 수 있으면 와.
“...네!”
나무에서 내려가는 법은 이미 배웠다.
아래에서 풀 수 있는 방식의 매듭을 짓고, 로프를 붙잡고 내려간 그는 서둘러 그것을 챙기고 가주가 계신 곳으로 달려갔다.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죠?”
두 앞발이 잘린 거대한 곰.
놈은 바닥에 엎어진 상태로 헐떡이고 있었다.
목의 한쪽이 거의 절반가량 베여있었다.
마치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것처럼 피가 울컥울컥 쏟아졌다.
“대화를... 하신 것 아니었습니까?”
“말이 안 통하더라고.”
“예?”
최강혁은 거대한 대검을 고쳐 쥐며 말하고는 놈의 남아있던 목을 마저 베어냈다.
“피냄새 너무 나네.”
“아....”
이어진 것은 현장 정리였다.
여기 저기 잘려나간 거대 곰의 사체도, 그 주변에 널려있던 다른 녀석들의 사체도 한쪽에서부터 지워지듯 자취를 감추었다.
사체만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바닥에 고여 웅덩이를 만들고 있던 피까지 함께 없어졌다.
그래도 여전히 냄새는 남아있었다.
최강혁은 헤인즈를 데리고 멀리 빠졌다.
“설득하려고 했어. 핵을 가진 놈들은 머리가 좋아져.”
“설득이요?”
“말. 대화. 인간은 사냥하지 말라고 말했어.”
“아....”
“싫다. 다 죽인다. 다 먹는다. 이 숲은 내 거다.”
“곰이 그랬군요. 그래서....”
“죽였지.”
상황을 이해하게 되었지만, 오히려 이해가 안 가기도 했다.
헤인즈는 지금껏 가주께서 활을 쏘아 사냥을 하는 모습만 보았을 뿐, 근접전투를 벌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 거대한 검은 뭐였습니까?”
“내 칼. 좋아.”
“...좋아보이긴 하더군요.”
그런 걸 사람이 휘두를 수가 있나?
엘리사벳경께서도 가주가 강한 분이라고 거듭 말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마법사가 맞긴 한 거야?’
육체를 단련하는 마법사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이정도는 못 들어봤다.
그렇게 강하시니까 거대 곰의 앞까지 당당히 걸어가셨을 것이다. 만약 나라면....
“마지막 거는 배우지 마.”
“...그야 물론이죠.”
목표를 처리했으니, 집으로 향했다.
엘리사벳경에게 숲에서의 경험을 이야기했더니, ‘허풍도 적당해야 웃어줄 수 있다’며 콧방귀를 뀌었다.
“사람 키만한 대검을 휘두른다니. 그정도면 무게만 해도...... 왜 진짠데?”
“음?”
“가주를 뵙습니다.”
샤워장으로 향하며 중얼거리던 그녀는 근처의 공터에서 최강혁을 발견하고 멈추었다.
일부러 남긴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은 그의 옆에, 헤인즈가 이야기했던 것이 분명한 대검이 있었다. 아마도 손질을 하고 내려놓은 것 같았다.
“그럼 그 이야기가 정말이라는 겁니까?”
“뭐라고?”
“거대한 곰. 사냥하셨습니까?”
“맞아. 가죽 보여줄까?”
“...네.”
엘리사벳은 공터 한쪽 바닥을 적당히 채울 만큼 커다란 가죽을 보았다.
그제야 헤인즈가 한 말이 정말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앞발이 멀쩡하네요?”
“음?”
“앞발. 자르셨다고....”
“아. 가죽 붙였어. 상처난 가죽, 돈 조금 받아.”
“.......”
그게 붙인다고 붙는 건가.
아무튼, 돈을 이야기하시는 걸 보니 아마도 팔 생각인 것 같았다.
“파실 거군요.”
“도시에 가면.”
“네.”
“얼마야? 이 정도 가죽.”
“글쎄요. 저도 이런 건 처음 봐서... 차라리 경매장에 올리시는 게 나을 겁니다. 수수료가 꽤 붙긴 해도, 후려치진 않으니까요.”
“말이 길어. 어려워.”
“아. 경매장. 사람들 많고, 서로 돈 더 많이 올려서 싸웁니다. 이기면 물건 삽니다.”
“경매인가. 뭐, 어디든 팔 수는 있겠지.”
가죽을 챙긴 그는 다시금 멍한 얼굴을 했다.
“고민이 많아보이십니다.”
“많아.”
“그렇군요.”
“왜 말이 통하지?”
“예?”
“아니야.”
엘리사벳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헤인즈도 그랬으니까.
‘전혀 다른 세상이야. 같은 곰도 아니고. 그런데... 조금 다르긴 했어도 통했어 분명.’
굳이 비유하면 표준어와 사투리 정도의 차이였다. 그런 차이를 이해하고 보정하는 자신의 능력이 또 놀라울 뿐이고.
‘그나저나, 이쪽에도 몬스터 핵이 있네.’
크기는 작았다. 당구공 정도.
하지만 이정도만 해도 나름 값어치가 있을 것임은 짐작해볼 수 있었다.
‘여기에도 있는데 왜 못 가져오게 한 거야?’
오랜만에 상담사를 욕했다.
가져오지 못하게 해서, 그냥 다 흡수해버렸던 핵들이 새삼 아까웠다.
‘초기 정착자금으로 쓰려고 했었는데.’
그나저나, 이쪽에서도 비쌀 것 같은데.
나름의 수익원을 얻은 걸까.
‘많지는 않겠지. 고정 수입이 될 수는 없어.’
핵보다는 짐승이나 몬스터 가죽, 부산물 같은 것들이 더 안정적인 소득원이 되어줄 것이다.
당장 오늘 건진 늑대가죽만 몇 장인가.
찢겨나간 부분을 적당히 짜깁기했지만, 도우미의 실력이 워낙 좋다보니 아무리 봐도 티가 안 난다.
“헤인즈. 보살펴줘.”
고개를 돌린 그는 여전히 옆쪽에 서있던 엘리사벳에게 말했다.
“헤인즈요?”
“피. 죽은 것들. 많이 봤어. 잊지 못해. 오래가.”
“아... 알겠습니다. 제가 보살피겠습니다.”
“그래.”
그녀는 군례를 취하고 물러났다.
그리고 반성했다.
‘생각 못하고 있었어.’
정말로 그런 것들을 겪고 보았다면, 후유증이 없을 수가 없다. 누군가가 살펴줘야 했다.
“.......”
하지만, 샤워장 가까이 가던 그녀는 반성하던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아 글쎄. 곰이 그냥 크기가....
-에이. 그런 곰이 어디 있어요.
-진짜라니까요?
샤워장의 입구 바깥.
이미 씻고 나온 것으로 보이는 헤인즈와 베티가 벤치에 앉아 떠들고있었다.
‘뭐... 저것도 해소의 수단이 되지.’
녀석은 단지 허풍을 떨고 수다를 늘어놓는 게 아니었다.
그런 경험을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다 같이 겪은 것처럼 생각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봤다. 곰가죽.”
“어? 오셨습니까. ...그쵸? 보셨죠?”
“아주 저 헛간보다 크던데.”
“에이. 그정도는 아니었죠.”
“맞다니까?”
“...아. 생각해보니까, 가죽을 벗겨서 펼쳐놓으면 얼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아주 두 분이서 주고 받고 잘 하시네요.”
베티는 여전히 못 믿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재미는 있는지 빙그레 웃었다.
“진짜라니까요? 어? 어디 가십니까.”
“나도 씻어야지, 인마!”
틱탁대는 두 사람을 보며, 베티가 또 웃었다.
“기사님 목소리가 커진 걸 보니, 이제 다 나으신 모양이네요.”
“아주 귀한 약을 먹었거든.”
“귀한 약이요?”
“보답하려면 더 열심히 일해야지.”
그렇게 답한 엘리사벳이 샤워장으로 들어갔다.
남아있던 헤인즈에게서 뿔 멧돼지에 대해 듣게 된 베티는 역시 가주님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요. 그 가주님이 길이가 여기서 저기까지 닿는 대검을 허공에서 딱 꺼내 쥐시는데....”
“에이.”
“진짠데?”
〈 84화 〉 084.
084.
‘가만있어봐. 그럼 내 손이 늘어난 것하고 비슷해진다는 거야?’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그거 좋다.’
도우미의 능력이 늘어났다.
이미 있던 기능이지만, 가능범위가 조금 확장된 것이다.
다름아닌 루팅이었다.
원래 최강혁의 능력을 기준으로 똑같이 적용되었지만, 이제 도우미를 활용하면 거기서 1미터쯤 더 떨어진 곳까지도 루팅이 가능해졌다.
‘당장 쓸 일이 많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미리 설정해두면 바쁠 때 자동으로 루팅해줄 수도 있으니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남은 지붕 판자를 제 위치에 조합했다.
그 위로 올라가 추가로 곳곳에 못질을 하니, 비로소 건물 하나가 완성되었다.
‘어디 보자... 스캔 결과는 이상 없고.’
백년 이백년 갈 건물은 아니다.
하지만, 주변에서 얻은 재료로 지은 것임을 감안하면 제법 괜찮은 수준이었다.
‘내부 가구만 마저 채우면... 완성.’
인벤토리에 준비되어있던 것들을 실내에 꺼내 배치하니, 비로소 건물이 완성되었다.
하녀들에게 새로운 숙소가 생긴 것이다.
‘지금 쯤이면 본채 청소 중일까.’
조금 놀라게 해줄까.
그는 짓궂은 얼굴로 그곳을 떠났다.
* * *
“어....”
앞서 가던 베티가 엉거주춤 멈춰섰다.
왜 그러는지 물어보려던 루시아도 비슷하게 멍해진 얼굴로 그 옆에 섰다.
“없네요.”
“그러게.”
숙소가 사라졌다.
분명 아침때만 해도 있었는데.
지난 밤도 거기에서 잤는데.
잘못 온 건 아니었다.
건물이 있었던 흔적이 바닥에 남아있었다.
“어?”
빈 흔적만 있던 건 아니었다.
바닥에 놓인 작은 나무판자에는 화살표가 그려져있었다. 그쪽 방향을 본 베티의 눈이 커졌다.
“저거, 가주께서 작업하시던 건물이지?”
“아... 맞아요.”
“저게 우리 숙소였어?”
잘은 모르지만, 가봐야 할 것 같았다.
왠지 흥분이 돼서 둘 다 반쯤 달리듯 가보니, 정말로 입구에서부터 그녀들의 숙소임을 알 수 있었다.
“그네 의자!”
어쩌다 농담으로 했던 이야기.
어린 시절 이웃집에 있던 그네 의자가 부러웠다던 말을 가주께서 들으셨을까.
그저 철없던 시절의 소심한 질투였을 뿐인데.
그때 부러워했던 이웃집의 것보다 훨씬 튼튼하게 만들어진 그네 의자가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우리 숙소 맞나봐요. 우리 짐이 있어요.”
단층 건물이었다.
하지만 옆으로 조금 길었다.
입구가 막힌 빈방이 세 칸 있었고, 그녀들의 방은 활짝 열려있었다.
두 사람이 한 방을 쓴다고 아쉽진 않았다.
기존의 숙소도 그랬었다.
오히려 혼자 쓰면 쓸쓸하다고, 새 숙소에서도 한 방을 쓰게 해달라고 청을 올렸다.
“넓어요.”
“두 배, 아니 세 배는 되겠는데? 여기 봐. 옷장도 있어. 서랍장도.”
“...어.”
“...아.”
옷장과 서랍장은 비어있지 않았다.
그녀들이 원래 지니고 있던 옷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옷들도 보였다.
마치 그녀들의 옷을 참고해서 만든 듯 보이는 새옷들이 여러 벌이나 있었다.
“아하하! 가주님도 참... 속옷은 좀 민망하네요.”
조금 과장된 웃음을 보이며 말하고 있었지만, 그런 베티의 눈가는 조금 불그스레했다.
“침대가 이상해요.”
그 때, 루시아가 말했다.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으려다 얼른 다시 일어난 그녀는 조금 두툼한 듯 보이는 침대보를 살짝 걷어보았다.
“이게 뭐야?”
“모르겠어요. 철 같은데.”
팔뚝 크기의 천주머니 안에, 마치 불에 그을린 머리카락처럼 배배 꼬인 것들이 세로로 들어있었다.
그런 것들이 수십, 아니 수백개나 침대보 아래에 자리한 것이다.
“물렁물렁해서 이상해요.”
“그러게. 멀미날 것 같아.”
하지만, 그런 이상한 침대는 의외로 빠르게 적응되었다. 제대로 누워보니 이상하게 편해서, 하마터면 샤워장도 못 가고 잠들어버릴 뻔 했다.
“얼른 씻고 오자.”
“네.”
샤워를 어떻게 했는지 모른다.
얼마나 넋을 놓고 있었는지, 새 숙소가 아니라 기존 숙소 쪽으로 갈 뻔 했다가 얼른 방향을 틀기도 했다.
그렇게 돌아온 새 숙소.
그곳에선 쥐와 벌레들의 배설물 냄새가 아니라 향긋한 꽃향기가 났다.
아까 전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둘의 개인 사물함엔 전혀 상상도 못한 선물들이 들어있었다.
“목걸이네요.”
가느다란, 아마도 은으로 보이는 줄 끝에 앙증맞은 크기의 펜던트가 있었다.
펜던트 중앙에 박힌 건 분명 보석인 듯 한데, 둘의 머리색과 비슷한 것으로 일부러 고르신 것 같았다.
“...이런 걸 받아도 되나 모르겠다.”
“아가씨께 여쭤야 할 것 같아요.”
“알고 계시지 않을까?”
“그래도요.”
“음... 오늘은 일단 자고, 내일 말씀드리자.”
“못 잘 것 같아요.”
“그러게.”
밤 사이에 목걸이가 어디론가 사라질 것 같아서, 둘은 각자의 침대 협탁 서랍에 잘 넣어두고 누웠다.
하지만 못 잘 것 같다던 이야기와 달리, 누워서 이불을 덮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다들 숙면에 들어갔다.
“다들 좋아해요?”
“몰라.”
“안 줬어요?”
“그냥 놓고 왔어.”
“...그러면 걱정할 거예요.”
“걱정?”
최강혁은 자신의 팔뚝을 베고 누운 에밀리아를 보며 눈썹을 올렸다.
“당연히 걱정하죠. 나 몰래 주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테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당신은 이상한 부분에서 너무 둔감해요.”
“어려운 단어가 많아.”
“아니에요. 내가 내일 말할게요.”
“그래.”
두 사람의 걱정과 달리, 에밀리아는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아예 디자인부터 참여했다.
“내 아내, 그림 잘 그려.”
“하하. 고맙네요.”
에밀리아가 안경을 벗으며 웃었다.
“나는, 그걸 그려준 대로 정확히 만들어주는 사람이 더 대단한 것 같은데.”
“오늘따라 말이 길어.”
“에이, 참.”
“왜 꼬집어?”
“알아들었으면서 모르는 척 하지 마요. 이제 나도 당신이 진짜 모르는지 아닌지는 구별할 수 있어요.”
“들켰어? 아, 꼬집지 마. 손톱 길어.”
“...미안. 다듬어야겠어요.”
“어떻게?”
“잘라내죠. 볼래요?”
조용히 일어난 그녀가 옆쪽에 있던 서랍장 상부 칸에서 뭔가를 꺼내왔다.
고운 비단 안쪽에 쌓여있던 것을 꺼내니, 그것을 본 최강혁의 표정이 묘해졌다.
“손톱깎이네.”
“당신 고향에도 있어요?”
“응.”
“비슷해요?”
“똑같아.”
“정말? 신기하네요.”
“그러게.”
재질은 조금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구조 자체는 이상하리만치 같았다.
이 세상이 혹시 지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니야.’
분명, 이곳이 지구가 아니라는 건 시스템으로 확인할 수 있다.
‘혹시, 나처럼 건너왔던 사람이 있나?’
손톱깎이 정도라면 통과시켜줬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걸 비슷하게 만들어서 팔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게다가 이거. 이거 뭐냐고.’
손톱깎이 뒤쪽에 글자가 새겨져있다.
그가 배운 이쪽 글자는 아니었다.
“이거요? 나도 잘 몰라요. 최초 유물에 새겨져있던 걸 본뜬거라고 들었어요.”
“유물?”
“종종 발견돼요. 던전에서 나오기도 하고, 아무 것도 없던 평지에서 나타나기도 하고.”
“어려워.”
“음... 갑자기.”
“갑자기?”
“갑자기 나와요. 여러 곳에서.”
“아....”
“이해 됐어요?”
“사람은 없어?”
“사람?”
“갑자기. 나처럼.”
“아... 내가 알기로는 없었어요. 물건만.”
“그렇구나.”
다른 세상 물건이 발견된다는 건가.
그걸 유물이라고 부르고.
‘아직 잘은 모르겠지만, 그렇게 들어온 거겠지.’
최초 유물 손톱깎이.
그곳에 있던 걸 그대로 본떴다는 글자.
MADE IN KOREA
‘유물이 한국산이었나본데.’
* * *
유물이라니.
그런 건 생각도 못했다.
손톱깎이를 계기로 유물에 대해 많은 걸 물어보았지만, 에밀리아도 그쪽으로 모든 걸 다 알지는 못했다.
‘여기 저기서 갑자기 나타난다는 건데... 진짜로 고대 유물처럼 출토되기도 하고.’
지구에서만 오는 건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도 오는 건지는 불확실했다.
다만 ‘마법 유물’이라는 개념도 있는 걸 보면, 여러 세상에서 건너오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지구의 아티팩트일 수도 있지.’
변수가 너무 많다.
그래도 한 가지는 알게 되었다.
그녀의 연구도 유물과 관련된 일이라는 것.
-아직 보여줄 만한 게 없어요.
-당신은 괜찮겠지만, 내가 안 괜찮아요.
-처, 청소라도 하고 나서요.
무슨 연구인지 보여달라고 했더니, 마치 일기장을 들킨 소녀처럼 얼굴이 붉어져서 횡설수설했다.
“아가씨의 연구 말씀이십니까? 저는 잘 모릅니다. 방에 들어갈 수 있는 건 베티씨와 루시아씨 뿐이거든요.”
“엘리사벳은?”
“못 들어가죠. 청소는 그분 몫이 아니니까요.”
“청소구나.”
“네? 아니요. 청소 연구가 아닙니다.”
“알아. 이해했어.”
“네.”
고개를 끄덕인 헤인즈는 전방을 보았다.
최강혁이 만들어준 큼직한 금속판이 있었다.
마치 벌집처럼 수많은 구멍이 촘촘하게 뚫려있었고, 그 각각의 구멍 위에 숫자가 있었다.
“137번 두 번, 32번 다섯 번.”
“후욱!”
나무 창을 움켜쥔 헤인즈가 힘껏 내질렀다.
일곱 번의 공격이 모두 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다 틀렸네.”
“죄송합니다!”
창술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엘리사벳은 그쪽을 알지 못한다고, 혹시 아시냐고 묻기에 실전용도 괜찮냐고 했더니 더 좋다고 했다.
그 결과가 지금이었다.
2미터 떨어진 거리.
정확한 구멍에 창을 찔러넣어야 한다.
구멍 사이의 간격은 손가락 한 마디 정도.
“.......”
한쪽 구석.
최강혁이 설치한 철봉에 매달려있던 엘리사벳은 두 번의 풀업을 더 하고 내려왔다.
‘저게 될까.’
1미터 앞에서 해도 쉽지 않을 일이다.
창이라는 게, 그렇게까지 세밀한 타격을 노리는 무기가 아니니까.
‘아니. 아니지.’
못 해서 그런 거지, 가능하면 그만큼 강해질 수 있다. 상대의 약점을 정확히 공략할 수 있게 되니까.
‘실제로 보여주셨고.’
못 하는 걸 시킨 게 아니었다.
이미 그가 직접 시범을 보여주었다.
그녀와 헤인즈가 말한 숫자의 구멍으로, 2미터가 아니라 2.5미터 거리에서 정확히 찔렀다.
심지어 같은 구멍을 열 번이나 반복해서 찌르기도 했다. 모두 제대로 힘이 실린 찌르기였다.
‘마법사가 아닐 수도 있다더니.’
곰사냥 후 헤인즈가 했던 말.
어쩌면 마법이 부업이고 주업은 다를 수도 있다고 했었는데, 슬슬 설득력이 생기고 있었다.
“좋아졌어.”
최강혁이 헤인즈의 어깨를 두드렸다.
“망설임 없이 찔렀어. 구멍에도 들어갔어.”
“다 틀렸는데요.”
“하다보면 늘어. 첫날 생각해.”
“...아.”
헤인즈는 다시금 떠오르는 그날의 기억에 몸서리를 쳤다.
구멍에 맞추기는커녕 그 사이의 막힌 곳을 찔러댔다. 나무창의 촉을 수도 없이 망가뜨렸다.
그래도 하루 하루 나아졌다.
가주께서도 지금 실력을 갖출때까지 노력을 많이 하셨다고 들었으니, 계속 정진할 뿐이다.
“엘리사벳. 다 했어?”
“예.”
“뼈 괜찮아?”
“문제 없습니다. 완벽하게 붙었습니다.”
“좋아. 버피 50번.”
“예.”
듣도 보도 못한 수련법도 배웠다.
잘은 모르겠지만, 몸이 무척 고된 것을 보면 어떤 식으로든 효과가 있는 게 분명했다.
“헤인즈는 푸쉬업 10세트. 엘리사벳이 봐줘.”
“알겠습니다. 어디 용무 있으십니까?”
“새들이 모여있어. 죽은 것들이 많아. 청소 안 하면 멀리서도 몰려와서 눌러살아.”
최강혁은 훌쩍 숲으로 향했다.
그런 가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엘리사벳은 문득 방금 전 마지막 문장은 제법 그럴듯했다고 생각했다.
“무척 빨리 배우시지 않아?”
“예?”
푸쉬업을 하다 멈춘 헤인즈가 고개만 들어서 되물었다.
“우리 말 말이야.”
“가주님이요? 굉장하시죠. 곰하고도 대화하신다니까요. 언어 쪽에 뛰어나신 것 같습니다.”
“흐음.”
“왜요?”
“다음에 도시에 가면 애들용 낱말책이라도 사드릴까 했는데, 지금 속도라면 필요 없을 것 같아서.”
“그건 그렇겠네요. 아가씨께선 개인교사를 생각하시는 것 같던데요.”
“그게 낫겠다.”
“그러고보니, 슬슬 나올 때 됐죠?”
“신분패? 이번에 가서 수령해야지.”
“시간 참 빠르네요.”
“그러게. 아무튼 계속 하자, 땀 식는다.”
“좋습니다.”
멈췄던 수련이 다시 이어졌다.
온전히 수련에만 열중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가 생긴 것은, 그들에게는 고된 만큼 기쁜 일이었다.
〈 85화 〉 085.
085.
“맛있냐.”
말의 먹이통에 온갖 풀들을 쏟아주었다.
벌목을 하는 과정에서 나온 주변 풀들과, 나무들을 루팅한 후 따로 분류한 나뭇잎 등이었다.
그르릉.
녀석은 식성이 무척 좋았다.
그러면서도 잡초에서부터 나뭇잎에 이르기까지, 못 먹는 게 없었다. 심지어 버섯도 잘 먹었다.
‘되새김질하고는 좀 다르지만.’
몇 단계에 걸쳐 오래 소화해, 영양성분을 최대한 활용하는 듯 했다.
먹는 양이 많지만 연비도 나쁘지 않은 느낌.
다만 그런 과정이 끝나고 나온 배설물은 악취가 굉장히 심했다.
속에서 발효라도 된 것처럼 술냄새 비슷한 것까지 섞여있는데, 제 때 치우지 않으면 땅으로 스며들어서 그 일대에 고약한 냄새를 풍겼다.
‘뭐, 쓸모가 있어서 좋긴 한데.’
다른 몇 가지 재료들과 함께 약간의 가공만 더하면 퇴비로 쓸 수 있었다.
녀석이 싸는 족족 루팅하고 있는 건 악취 방지보다는 그쪽의 이유가 더 컸다.
“근데, 너가 싼 걸 너가 싫어하는 건 양심이 없는 거 아니냐?”
크르릉.
웃기는 건, 놈 역시 제가 싼 배설물의 냄새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헛간에 매여있을 때도, 그렇게 한 무더기 싸놓고는 얼른 치우라는 듯 크게 소리를 내곤 했다.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녀석은 일찌감치 그와 친해졌다.
아마도 자신이 싼 것을 주로 치워주는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너도 가족을 만들어줘야 할 텐데.”
크릉.
“혼자는 쓸쓸하잖아.”
나뭇잎과 풀들을 입안 가득 채우고 질겅거리는 녀석은 그가 하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베티에게 듣기론, 가문의 마굿간을 나올 때 무척 힘들어했다고 했다.
착하고 정이 많은 품성이라고.
‘도시에 가면 구할 수 있을 거라고 했지.’
일종의 마시장 같은 곳이 있다고 들었다.
도시 안쪽이 아니라 밖에 있다던가.
하긴, 이런 놈들이 우루루 몰려있을 테니 도시 안에 들이기가 어려울 것이다.
‘다른 종류도 있고.’
지금 이 녀석 같은 품종도 있고, 다른 종류의 탈것도 많다던가. 잘 상상은 안 되지만.
‘살 것도 많고, 팔 것도 많아.’
그동안 챙겨놓은 것들이 상당했다.
짐승과 몬스터의 가죽과 뼈에서부터 약재로 쓸 수 있는 말린 내장, 혹은 가루로 만든 것들.
‘생각보다 못 받더라도 문제는 없지.’
몬스터 핵도 있다.
당구공 크기가 하나.
새끼손톱 크기가 다섯 개.
작은 것들은 새로 사냥해서 얻은 게 아니라, 그가 만든 것이었다. 마나를 재료로 썼다.
‘소모량이 너무 많았어.’
정작 그렇게 만들어진 핵을 흡수할 때보다, 그것을 만들 때 들어가는 양이 훨씬 많았다.
‘그래도 최대 마나량을 늘릴 수 있으니까.’
아주 낭비는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또 한 편으로는, 그 정도의 마나라면 차라리 인벤토리를 제작하는 게 실용적인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일단 다섯 개만 만들고 멈춘 것이다.
‘약초도 몇 뿌리 있고.’
산 깊은 곳에서 쓸만한 식물들을 발견했다.
미량이지만 마나를 품고 있는 종류도 있었고, 향신료로 쓸 수 있는 풀이나 열매도 찾았다.
특히 생강과 비슷한 맛과 향을 가진 뿌리작물은 가까운 숲 쪽 공터에 심어볼 생각이었다.
‘고추가 없어.’
굳이 한국사람 티를 내고 싶은 건 아니지만, 이곳 음식들이 왠지 심심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름 후추 비슷한 게 있긴 한데, 그건 칼칼한 느낌이지 매운 느낌은 아니니까.
도시에 가면 식료품점에도 들른다고 하니까, 그쪽에 뭐라도 없을지 찾아봐야겠다.
‘많이도 필요 없지. 소량만 사면 돼.’
일단 샘플만 구하면, 이후엔 그가 만들어내면 된다. 매운 성분만 골라서 강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너는 싸면서도 먹는구나.”
크릉.
“그래. 장하다.”
녀석의 등은 코끼리와 낙타를 섞어놓은 느낌이었다. 위에 올라타기엔 여러 모로 불편할 것 같으니, 차라리 지금처럼 마차를 끌게 하는 게 나아보였다.
‘빠르게 달리지 못한다고 했지.’
순하고, 먹는 것에 비해 힘도 좋다.
장거리 이동에도 문제가 없지만... 속도가 느린 것이 단점이라고.
‘누구에게나 장단점이 있겠지.’
녀석의 넓적다리를 탁탁 두드리고 쓰다듬으니, 기분 좋은 듯한 소리를 냈다.
그런데 쓰다듬는 게 좋은 건지, 먹는 게 즐거운 건지, 아니면 배설의 쾌감인지는 잘 모르겠다.
“언제까지 싸는 거야?”
나오는 족족 도우미가 자동으로 루팅하고 있으니 정확한 양은 인벤토리를 봐야 알 수 있겠지만, 그걸 굳이 눈으로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이게 아직 애라는 거지.’
아주 어린 건 아니지만, 덜 자란 건 맞다고.
다 자라면 무게가 지금의 세 배 까지도 갈 수 있다고 들었다. 그러면 거의 5톤이다.
‘얼마나 더 커지는 거야?’
그 쯤 되면 진짜 공룡 아닌가.
아니, 공룡까진 못 되어도 코끼리하고는 얼추 비슷할 것 같은데.
‘헛간도 넓혀야 되겠구나.’
지금도 녀석에겐 그리 넓지 못한 느낌이었다.
날 잡아서 확장공사를 하든, 아예 새로 짓든 해야겠다.
‘손 댈 곳이 아직도 많아.’
그동안 많은 것이 달라졌다.
본채를 보수했고, 메이드 숙소를 새로 지었다.
병사 훈련장과 부속 건물들을 만들었다.
워터타워를 세우고, 샤워장을 지어 연계했다.
그쪽과 연결한 하수관과 오물, 오수 처리장도 최근에 마무리지었다.
‘이쪽이 먼저였어야 할 것 같은데.’
요즘 구상하고 있는 건 화장실이었다.
기존 건물에 넣으려니 애매했다.
아무래도 건물 옆에 붙여 지어서 연결하는 방식이 최선일 것 같았다.
‘나는 일을 안 보니까 신경을 안 썼지.’
이전 지역에서부터 그랬다.
먹는 것들로부터 마나를 최대한 추출하면, 배설물이 거의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조금씩 누적된 것들은 시스템으로 제거할 수 있었고.
‘용변 볼 때가 가장 위험하니까.’
캠프에서는 혹시 그러다 변비가 걸리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추방되고 나서는 오히려 다행으로 여겼다.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해.’
도기 재질의 양변기는 만들 수 있었다.
이미 인벤토리에 몇 개 있다.
‘도자기 찻잔이 있어서 다행이었지.’
지구의 변기와 아주 같은 느낌은 아니지만, 혹시 문제가 생기더라도 교체하고 보완하면 된다.
다만 제작기간이 긴 건 흠이었다.
재료를 과하게 요구받는 건 아니지만, 하나를 제작하는 데에 사흘이 필요했다.
‘미리 만들어두는 게 나을까.’
기존에 사용하던 변기는 마치 요강과 비슷한, 큼직한 나무 상자였다.
본채의 구석에도 그것을 놓은 공간이 있었다.
메이드들이 자주 확인하고 처리한다고 들었다.
‘아무리 그게 직업이라고 해도, 쉬운 일은 아니겠지.’
워터타워와 연결이 어려운 것도 아니니, 수세식 변기를 활용하는 것도 문제는 없다.
지하에 정화조를 만들어 묻으면, 메이드들이 오물 처리를 할 필요도 없어질 테고.
‘화장실 청소 정도는 해야겠지만.’
정화조는 오수처리장 쪽으로 연결해야 한다.
앞으로 땅을 팔 일이 많아질 것 같았다.
크릉.
“왜. 다 먹었어? 아닌데.”
그르릉.
“아. 물통이 비었구나.”
풀 속에 나름 수분이 있으니 물을 따로 마실 필요 없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한데, 의외로 물도 상당히 많이 마셨다.
‘뭐, 우리도 그렇지. 채식주의자라고 물을 안 마시는 건 아닐 테니까.’
먹이통과 똑같이 커다란 물통에 깨끗한 물을 부어주었다. 오수를 루팅 및 정화하고 남은 순수한 물이었다.
식수로도 쓰고 있다.
처음엔 그런 물을 마시기가 찜찜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고향에서의 수돗물도 딱히 다를 게 없던 것 같았다.
‘난 생수를 마셨지만.’
아무튼 이물질이 남는 것도 아니고, 순수한 물만 남기는 거니까 굳이 마시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슬슬 또 채우러 가야겠네.’
사용한 물을 최대한 재활용한다고 해도, 중간에 소모되는 양이 적지 않았다.
종종 숲으로 들어가 새 물을 보충해야 했다.
‘주변 풍경이 좋았지.’
베티가 알려주었던 수원지는 작은 연못이었다.
산의 계곡 하류와 연결되어있는데, 작년 여름엔 비가 많이 내려서 계곡이 넘쳐 위험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가 가는 곳은 따로 있었다.
연못의 물로는 양이 부족해서, 계곡 상류로 계속 올라가다가 발견한 곳이었다.
제법 커다란 폭포.
그 아래에 서있으면, 도우미가 알아서 물을 루팅했다.
단점은 늑대와 표범들의 영역이라는 것.
하지만 놈들이 먼저 이빨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조용히 물만 담아오는 편이다.
‘요즘은 좀 사리고 있는 것 같던데.’
거대곰 사건 때 늑대들의 개체수가 꽤 줄어들었다. 당분간은 안정과 번식에 주력할 것이다.
끄으윽.
“에이, 트림은 저쪽 보고 해라.”
예전에 들었던 한 달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만 그가 나서서 먹거리를 조달해줘서인지, 딱히 도시에 나갈 일이 안 생기고 있다.
게다가 그쪽에서 한 달을 이야기했어도 보통 어느 정도는 늦어지기 일쑤라던가.
넉넉잡고 보름쯤 더 있다가 가는 게 확실하다고 엘리사벳이 이야기해주었다.
‘괜히 제 때 갔다가 아직 안 나왔다고 하면 기분 나쁘긴 하겠지.’
공무 처리도 한국이 빨랐는데.
이곳이 어떤지는 잘 모르지만, 고향보다 빠르진 않을 것 같았다.
‘급행료가 있다던가.’
돈을 추가로 주면 더 빨리 처리해준다는 모양인데, 아마도 뇌물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그런 건 주지 않았다고 하니, 그냥 느긋하게 있다가 가면 될 것이다.
‘딱히 문제도 없을 테고.’
그가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건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출신은 모르지만, 단지 숲에서 나왔다는 식으로 말했다고.
‘하긴. 그게 나은 것 같아.’
유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세상이니, 사람도 비슷하게 건너왔다고 하면 무척 시끄러워질 것이 분명하다.
어차피 출신이 불분명한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하니 문제될 것도 없다.
뭐라고 하는지 정확히 이해는 못 했지만, 여러 사례가 있는 모양이었다.
‘도시에 가면, 입구에서 기다렸다가... 신분패를 갖고 나오면 받아서 들어가면 된다고 했지.’
결혼식 때 봤던 그 신관들을 또 만날 예정이다. 얼굴은 잘 기억 안 나는데, 이상하게 그들의 냄새는 또렷하게 남아있었다.
‘뭐, 종교적인 이유라니까.’
물을 아끼기 위해 덜 씻는다니.
그건 덜 씻는 게 아니라 안 씻는 거던데.
아무튼 신관들이 당시에 그를 거듭 살펴본 것은, 그저 ‘신께서 연결해주신 남자’ 가 맞다는 것을 확인했기에 그런 것이라고 했다.
정식 신관들은 신이 연관된 특정한 사안에 대해서 그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는 모양이다.
‘그거 대단한 능력 아닌가.’
온갖 사이비와 사기꾼들을 제대로 검증할 수 있을 테니까.
“...하늘이 안 좋은데. 비가 올 것 같아. 넌 어떻게 생각해?”
그르릉.
“그렇구나.”
딱히 대화를 나누는 건 아니다.
하지만 만약 헤인즈가 본다면, 곰하고 그랬던 것을 생각하며 오해를 하겠지.
‘소질은 있어.’
헤인즈는 괜찮은 녀석이다.
나이에 비해 삭은 얼굴이지만, 다섯 살 때부터 가족을 도와 농사를 지었다고 하니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상태에서도 골격이 남다르게 성장하니, 평소 눈여겨본 이웃의 소개로 귀족가에 들어갔다던가.
허드렛일부터 시작했다고 들었다.
종자가 된 건 일년이 지나서였다고.
당시엔 엘리사벳의 밑에 있지 않았는데, 이리 저리 옮겨다니다 그곳에 정착했다고 했다.
‘좋은 사람끼리 만났어.’
급여 수준은 높지 못했지만, 별다른 조건 없이도 이런 저런 가르침을 주는 이는 그녀 뿐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좌천이라 할 만한 상황에도 떠나지 않고 그녀를 따라온 것이다.
‘좋아하나 싶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고.’
헤인즈는 고향에 연인이 있다고 했다.
열 다섯에 마지막으로 보고 2년을 넘게 못 보았으니, 지금쯤 어쩌면 다른 남자와 결혼해 아이가 있을 지도 모른다고.
-그래도 다른 여자는 눈에 안 들어옵니다.
딱히 예쁜 것도 아닌데, 잊을 수가 없다던가.
‘평생 그러겠지.’
사랑이든 아니든 비슷할 것이다.
처음이라는 건, 결국 기억 속 가장 첫 페이지에 그려지니까.
“여기 계셨습니까?”
그 때, 마침 헤인즈가 헛간으로 달려왔다.
“무슨 일 있어?”
“가문에서... 사람들이 왔습니다.”
녀석의 표정이 적잖게 굳어있었다.
〈 86화 〉 086.
086.
“이거 참....”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
남자는 거듭 실내를 돌아보았다.
지금 앉아있는 원목 의자의 손잡이와 그 앞의 테이블을 지나, 그 위에 놓인 고급스런 찻잔에서 그의 시선이 멈추었다.
“1년 사이에 달라진 것이 많군요.”
“그런가요.”
무표정한 얼굴의 에밀리아는 자신의 찻잔을 들어 향을 즐기며 답했다.
“달라지지 않은 것도 있는 것 같고 말입니다.”
“그렇군요.”
남자는 찻잔 옆에 놓여있는, 잘 펼쳐진 서류 한 장을 보았다. 그 안에 적힌 내용을 이미 외울 수도 있을 만큼 반복해서 읽은 차였다.
“그렇지 않아도 이상한 이야기가 돌더군요. 에밀리아 아가씨께서 누군가와 이미 혼인을 하셨다는 허황된 소문 말입니다.”
“소문이 아니고, 그 앞에 증거가 있어요.”
“글쎄요.”
남자는 향유를 바른 금빛 곱슬머리를 가볍게 쓸어넘겼다. 그의 시선이 테이블 옆쪽에 대기하고 있는 여기사를 향했다.
“땅을 파셨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요.”
“판 적 없어요.”
“그런가요. 신기하군요. 그러면 어디에서 이런 여유가 생기셨을까요.”
여기사의 갑주를 흘깃 본 남자.
그는 다시금 실내 곳곳을 눈에 담았다.
조금 멀찍이서 대기하고 있던 두 명의 메이드가 그의 시선을 받고는 어색하게 앞을 가리는 것이 보였다.
“고작 메이드들에게 보석 박힌 목걸이를 주실 정도의 재력과 아량이라니. 제가 그동안 아가씨를 잘못 보았던 모양입니다.”
“보이는 대로 보세요. 저도 그렇게 할 테니.”
“뭐... 길게 끌 이야기는 아닙니다.”
다시금 테이블 위의 서류를 보았다.
그의 입가에 약간의 웃음기가 맺혔다.
“나름대로 방법을 찾으셨다고 생각하셨겠지요. 위장결혼이라니.”
“위장이 아니고, 제대로 신께 알렸어요. 기뻐하셨고요.”
“신?”
“아실 텐데요.”
“.......”
“맞아요. 나는 더 이상 처녀가 아닙니다. 한 사람의 아내가 되었죠. 신전에 확인해봐도 좋아요.”
“그렇습니까.”
웃음기가 사라졌다.
하지만 남자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뭐, 상관 없지요. 가치가 낮아졌다면 그 가치에 맞는 구매자를 찾아보면 될 일이니.”
스윽.
그녀의 여기사가 허리춤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도중에 멈추었다.
왼쪽, 그리고 테이블 너머 남자의 뒤쪽에서 그녀를 주시하는 두 명의 기사가 있었다.
“이거, 제가 말 실수를 했나봅니다. 유일한 기사께서 발끈하시는 걸 보면.”
남자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맞은편의 에밀리아를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우스워보였습니까.”
“.......”
“적당히 넘어갈 거라 생각하셨다면 아주 큰 오해입니다. 이제부터 이어질 조치에 대해선 이견이 없으시리라 믿습니다.”
에밀리아는 무심히 마력을 일으켰다.
하지만 곧이어 그녀의 눈가가 잘게 흔들렸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지만, 마법은 사용하지 못하실 겁니다. 지난 번 방문의 소동에서 배운 게 있으니까요.”
맑게 웃은 금발 남자.
그는 여전히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서류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고작 이런 종이쪼가리로 무엇을 바라셨던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을 두 손 끝으로 잡고 찢어버리려던 그는 문득 동작을 멈추었다.
“......?”
그의 시선이 현관 쪽을 향할 때였다.
쾅!
퍼억-!
갑자기 안쪽으로 폭발하듯 박살난 현관.
무척 두터운, 철로 보강된 문짝이 앞쪽에 있던 기사 하나를 그대로 덮쳤다.
“......?”
모두가 흠칫 놀랄 때, 그렇게 열린 현관 밖에서 저벅저벅 걸어들어오는 남자가 있었다.
온갖 크고 작은 흉터로 뒤덮인 상체를 위압적으로 드러낸 거한이 입을 열었다.
“뻑뻑해서 안 열렸어. 새로 만들어줄게.”
“당신....”
에밀리아는 눈가를 찌푸리면서도 왠지 웃음을 참는 듯한 표정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상반신을 드러내고 있는 남편에게 다가갔다.
“감기 걸려요. 왜 벗고 있어요?”
“기선제압이 필요할 것 같아서.”
“기선제압?”
“초전박살하고 비슷한데. 그것도 모르겠구나.”
“응.”
“몰라도 되니까, 뒤에 있어.”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아. 마법 못 쓰잖아.”
“어떻게 알았어요?”
“느껴져. 장난감이 있는 것 같아.”
문짝에 맞고 쓰러진 기사를 흘끔 바라보던 또 다른 기사. 그가 검 손잡이로 손을 가져가는데, 나직한 목소리가 귀에 박혔다.
“너, 그거 뽑으면 죽는다.”
거한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작 그런 도발에 넘어갈 리 없었지만, 이성과 달리 손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래도 억지로 손을 뻗어보는데, 이번엔 그 남자가 아니라 옆쪽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여기사였다.
“.......”
무심한 눈빛.
하지만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젓고 있었다.
이미 검파에 손을 대고 있는 모습이었다.
* * *
저벅 저벅.
최강혁이 안쪽으로 더 들어오며 생각했다.
‘그런 대사가 있었지. 재밌는 영화였어.’
타블렛에 들어있던 영화 중 하나의 대사였다.
나중에 이쪽 말과 글에 익숙해지면, 도우미한테 이쪽 글로 자막을 넣어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내 고향이 어떤 곳인지도 보여줄 수 있고... 아, 그러면 범죄영화는 곤란한가.’
이곳 식구들하고 고향의 영화와 드라마를 같이 보면 좋을 것 같았다. 마나를 좀 더 쓰면 같이 보기가 된다고 하니까.
“그냥 누워있어.”
바닥에 엎어져있던 기사 하나가 꿈틀꿈틀 일어나려 했지만, 가슴팍 위에 올라온 발 때문에 움직이지 못했다.
기기긱.
금속이 찌그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실제로 기사의 갑옷 가슴팍이 안쪽으로 조금씩 들어가고 있었다.
컥! 하는 소리와 함께 입에서 피가 터져나왔지만, 최강혁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허공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조금 전 남자가 찢으려던 결혼 증명서였다.
뒤늦게 자신이 빈손임을 깨달은 남자가 당황했다.
“내가 갖고 있을까? 누가 찢으면 안 되잖아.”
“네. 그게 좋겠어요.”
에밀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증명서가 다시 사라졌다.
“끄으윽....”
가슴팍을 짓눌리고 있던 기사는 점점 사색이 되어가고 있었다.
팔 한쪽이 부러진 듯 보였다.
나머지 팔 하나와 두 다리를 버둥거리고는 있지만 가슴에 얹힌 다리를 치우지는 못했다.
“손님이야?”
최강혁이 물었다.
에밀리아가 조용히 방문자들을 보았다.
“글쎄요. 손님이라고 해야 할지.”
“오던 길에 사고가 났어.”
최강혁이 말했다.
“사람들이 사라졌어. 그렇게 해줄까?”
서툰 언어.
하지만 뜻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괜찮아요. 손 더럽힐 필요 없어요.”
“씻으면 되는데.”
“그래도요.”
그녀는 웃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조금 울고 싶었다.
자신이 고개를 끄덕이면, 이 남자가 정말로 그 말대로 해줄 것 같아서였다.
“.......”
맹목적인 보호.
부모가 살아있었을 때 느꼈던 근거 없는 안도감이, 이 사람 옆에서 비슷하게 느껴졌다.
“나름 믿는 구석이 있으셨나봅니다.”
침묵하고 있던 남자가 말했다.
싸늘히 식은 눈빛이었다.
“어디서 용병이라도 구하신 모양인데....”
“이 분이 제 남편입니다. 이어질 언행은 신중하게 해주시면 좋겠군요.”
에밀리아의 말에, 남자의 입이 멈추었다.
“흠.”
최강혁이 그를 보았다.
이어서 허공을 흘끔거리는 듯 하더니, 다시금 남자를 향했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치질인가?”
“그게 뭐예요?”
옆에서 에밀리아가 물었다.
그는 남자를 턱짓했다.
“항문. 찢어졌어.”
“아....”
뭔가 알 것 같다는 표정과 눈빛.
남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런 식의 모함은 불쾌합니다.”
하지만, 그 얼굴에 떠오른 건 불쾌감이 아니라 당황스러움에 가까웠다.
남자만이 아니라, 그 뒤에 서있던 기사도 비슷한 표정으로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손님으로 오셨다면, 하룻밤 정도는 머무르게 해드리죠.”
에밀리아가 말했다.
“하지만, 다른 말씀을 하실 거라면 환영해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한참동안 침묵하며 에밀리아를 마주보았지만, 거한의 발 아래에서 죽어가는 기사를 외면하지는 못했다.
* * *
“자고 갈 줄 알았는데.”
멀리 떠나고 있는 마차 행렬이 보였다.
최강혁의 말에, 에밀리아가 웃었다.
“이제 와서 손님대접을 요구할 수는 없잖아요. 어지간히 뻔뻔한 자가 아니라면요.”
“뻔뻔해보였는데.”
“...저 사람도 결국 가문의 심부름꾼일 뿐이니까요. 실제로는 약해요. 몸도 마음도.”
“흠.”
최강혁은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떠나기 전 남겼던 마지막 말이 신경쓰였다.
1년 남았다고.
1년 후 결과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감당해야 할 거라고 했었다.
‘이따가 물어봐야지.’
베티와 루시아가 부서진 현관의 파편을 줍느라 고생 중이었다. 워낙 잘게 부서진 것들이 많아서, 손에 가시가 박힐 것 같으니 물러나라고 했다.
‘싹 훑어줘.’
-알겠습니다.
세밀한 루팅 작업이라면 그가 육안으로 확인하는 것보다 도우미가 나서는 게 나았다.
그렇게 남아있던 부분도 마저 제거했다.
‘미리 만들어둔 게 없구나.’
일단 적당한 크기의 가죽을 꺼내서 위쪽에 고정해 걸어두었다. 밤바람이라도 막아볼 생각이었는데, 그래도 약간씩 펄럭이며 새어들었다.
“거봐. 춥잖아요. 소름 돋은 것 봐요.”
에밀리아가 그의 팔뚝을 쓰다듬으며 작게 혼내듯 말했다.
“괜찮아. 껍데기만 이래.”
“껍데기 말고 피부.”
“아. 피부만 이래.”
원래는 정장을 입을 생각이었다.
귀족의 남편이 되었으니, 혹시라도 필요할까 싶어서 연미복 스타일의 옷을 만들어두었다.
‘가문에서 왔다고 해서 잘 보이려고 했는데.’
하지만 현관 안에서 들려오는 대화가 심상치 않았다. 조금 다른 방식으로 첫인상을 심어줄 필요가 있어보였다.
‘그래도 좀 춥긴 하구나.’
인벤토리에서 옷을 꺼내려다 말았다.
기왕 벗은 김에, 샤워장에 가서 욕조에 몸을 담그기로 했다.
“같이 가자고요?”
“해야 할 이야기도 있고.”
“아.”
고개를 끄덕인 에밀리아가 따라나섰다.
그렇게 가기 전, 뒤로 고개를 돌린 최강혁이 엘리사벳을 향해 끄덕여주었다.
“잘했어.”
“제 일을 할 뿐입니다.”
그녀가 아내를 지켜주고 있으니 다른 일을 하는 동안에도 걱정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처럼 적대적인 이들의 숫자가 둘 이상일 경우에는 좀 문제가 있어보였다.
‘헤인즈가 빨리 실력을 쌓으면 좋겠지만.’
* * *
“기사요?”
욕조로 들어온 에밀리아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조금 난감해했다.
“가문에 없어? 충성심 있는 사람.”
“가문에는 있겠죠, 충성심이. 하지만, 나한테 충성심을 가진 사람은 없을 거예요.”
“음....”
“엘리사벳경도 충성심보다는 그곳에 환멸을 느껴서 같이 나온 거니까요.”
“환멸?”
“나쁜 사람들이 있었어요. 좀 싸웠어요.”
“어딜 가나 있지.”
최강혁은 안 들어도 알 것 같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남편을 보며, 에밀리아가 웃었다.
“내가 약해보여요?”
“약하잖아.”
“...마법산데?”
“못 쓰던데. 마법.”
“.......”
마나 교란 아티팩트를 가져올 줄은 몰랐다.
물론 지난 번 방문때 물리적인 충격이 있을 뻔 하긴 했지만, 그정도로 대비했을 줄이야.
어쩌면 단순한 방문이 아니라, 다른 목적이 더 있었을지도 몰랐다.
지난 번엔 한 명만 동행했던 기사를 두 명으로 늘린 것도 의심스럽고.
만약 이 사람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는 남편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안 늦었어.”
“네?”
“치워줄 수 있어. 아무도 못 찾아.”
“.......”
살짝 고민되긴 했다.
하지만 결국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그럴 필요 없어요.”
“1년 남았어. 무슨 말이야?”
“아. 그건....”
에밀리아는 잠시 숨을 고르고 나서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의 부모가 죽고, 가문에서 그녀를 활용하려던 방식에 대해서.
“아버지는 서자 출신이셨거든요.”
“서자?”
“첩의 아들. 사생아.”
“첩이 뭐야?”
“아내 말고 다른 여자. 후처.”
“아. 조금 알겠어.”
가문에서 내놓은 서자.
게다가 아내로 맞이한 이는 귀족도 아닌 떠돌이 모험가.
그런 이들의 딸이니, 자유로운 삶 따위는 그저 허황된 꿈이 되었다.
그나마 부모가 지켜주었지만, 그들이 죽고 난 후엔 더 이상 보호해줄 사람이 없었다.
“어떻게든 상황을 피하고, 문제를 일으켜 방해하면서 버텼어요. 그래도 한계가 있었죠.”
더 이상 도망치지 못할 막다른 곳에 이르렀다.
그녀는 가문이 내민 조건을 수락해야 했다.
“농지를 확보하기로 했어요.”
“농지?”
“농사지을 땅이요. 여기, 부모님의 땅 말고 가문 소유의 토지도 있거든요.”
“그렇군.”
“그곳을 농경지로 만들기로 했어요. 5년 안에.”
“쉬운데.”
“모르잖아요? 어딘지.”
“어딘데?”
그의 물음에, 주위를 돌아본 그녀는 한쪽을 가리켰다. 울타리에 막혀있지만, 어느 방향인지 대충 알 수 있었다.
“저쪽 산 너머에 있어요. 지금은 울창한 숲이죠. 여기 있는 숲보다 더 큰 숲. 나무들도 있고....”
“쉬운데?”
“본 적도 없으면서 쉽대.”
꼬집으려고 손을 뻗던 그녀가 멈추었다.
그녀의 눈 앞 허공.
반투명한, 마치 사각형의 창문 같은 것이 크게 펼쳐져있었다.
〈 87화 〉 087.
087.
“어....”
이게 뭐야?
어리둥절한 그녀의 귀에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뭐라고요?
“저쪽?”
“아.”
남편을 돌아보았다가 다시 앞을 보니, 열려있던 창문 같은 곳에 뭔가가 나타나있었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다본 것 같은 느낌의, 무척이나 자세한 지도였다.
그리고 남편이 가리킨 곳.
붉은 테두리로 표시된 일정 구역에 그녀의 시선이 멈추었다.
“어....”
에밀리아는 잠시 그곳과 더불어 지도 곳곳을 살펴본 후에 고개를 저었다.
“저기 말고, 그 왼쪽에 산 있잖아요.”
“이거.”
“네. 그 산 북쪽이요.”
“거긴 안 가봤는데.”
“근데 지도는 어떻게 구했어요?”
“안 가본 곳. 눈으로 본 대로 그렸어. 정확하지 않아.”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는 문득 눈을 껌벅이더니, 지도를 다시 보았다.
“그러면, 나머지는요?”
“음?”
“다른 곳은 모두 직접 가봤다는 거예요?”
“저만큼은.”
이어서 조금 전처럼 특정한 구역이 초록색으로 강조되었다. 아주 먼 곳을 제외한 대부분이었다.
“쉬웠어.”
“.......”
숲에 다녀오는 건 알고 있었다.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들어오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지도대로라면, 단순히 숲을 다녀온 수준이 아니다. 숲과 산을 제 집 앞마당처럼 뛰어다녔다는 뜻이다.
“아니. 그건 그렇다 치고... 이게 뭐예요? 이런 마법은 본 적 없어요. 환상 계열인가요?”
“설명하기 어려워. 그냥 받아들여.”
“그렇게 말하는 게 어디 있어....”
조금 토라진 듯한 목소리.
최강혁이 슬쩍 지도 한 지점을 강조했다.
낮에 육안으로도 볼 수 있는, 근처에서 가장 높은 산이었다.
“저 산, 가봤어?”
“아니요... 가까운 숲 말고는 가본 적 없어요.”
“그럼 저 산 정상에 있는 호수도 못 봤겠네.
“호수?”
“죽은 화산. 물이 고여있어.”
지도창이 뒤로 멀어지더니, 새로운 창이 그 앞에 생겨났다.
그곳에 보인 건 당시에 녹화해두었던 산 정상과 그곳 호수의 전경이었다.
“아....”
멀리서 산을 본 적이야 있지만, 그곳 정상에 저런 풍경이 있을 줄은 몰랐다.
“멋져요.”
“호랑이가 살아.”
“위험하지 않아요?”
“도망갔어. 호랑이가.”
“.......”
조금씩 제대로된 대화가 되면서부터, 그가 하는 말이 진짜인지 허풍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워졌다.
하지만 이어진 화면을 본 그녀는 남편이 거짓말을 한 게 아님을 알았다.
멀찍이서 이쪽을 보자 마자 꽁무니를 빼며 달아나는 호랑이의 모습이 영상으로 재생되었다.
“신기한 마법이네요.”
장면이나 소리를 저장해주는 도구는 이쪽에도 있다. 하지만 고가의 매개체가 필요하다.
게다가 이렇게 선명하고 오래 저장되지도 않는다고 알고 있었다.
‘만약....’
만약 나에게 이런 마법이 있었다면, 엄마 아빠가 살아있었을 때를 기록해두었을 텐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남편이 어깨를 감쌌다.
“슬퍼보이네.”
“아....”
애써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방금 전 들었던 생각을 이야기하니,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 많이 남겨놓자.”
“지금부터?”
“앞으로도 많이 생길 거야. 기억하고 싶은 것들. 추억하고 싶은 장소.”
“아....”
“우리 아이가 생기면, 기록도 해둬야지. 첫걸음 같은 것들.”
“그래요. 그렇게 해요.”
상상해보면 왠지 조금 행복해졌다.
“그런데... 어떻게 하는 거예요?”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그녀는 남편의 이야기대로 적당히 자세를 취했다.
“손가락을 이렇게 할 필요가 있어요?”
“사진찍을 땐 보통 그렇게 해.”
“아... 그쪽 문화군요. 저쪽을 보면 되나요?”
“맞아. 반짝거리는 거 보이지?”
“네.”
도우미를 완전히 드러내지 않고, 작은 반짝임 정도로 표현할 수 있었다.
그렇게 녀석을 카메라 삼았다.
사진과 영상을 남겨놓았다.
그리고 꼬집혔다.
“지금 벗고 있잖아요!”
“나도 벗었지.”
“그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그거, 지울 수 있어요?”
“응.”
“안 지울거죠.”
“지워?”
“마음대로 해요.”
“흐음. 화났어?”
“맞아요. 지금 나 화내고 있는... 뭐예요? 왜 점점 가까이.....”
“어디 가.”
“왜, 왜 이래요? 저기... 아이, 정말!”
버둥거리긴 했지만, 금세 그쳤다.
못이긴 척 그의 품으로 끌려간 에밀리아가 슬그머니 눈을 감으며 턱을 들었다.
“입술 뭐야. 왜 내밀...아, 꼬집지 말고.”
부부 사이엔 두근거림이 없다고 들었다.
하지만, 순서가 바뀌어서일까.
무척이나 즐거웠다.
어쩌면 호르몬 분비가 결혼 후부터 시작되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싫으면 지울게. 사실 벌써 지웠어.”
“...고마워요.”
“눈으로 직접 보는 게 더 좋아.”
“당신... 이상한 말 많이 해요.”
“싫어?”
“싫다고는 안 했어요.”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 수도 있겠지.
그래도, 지금은 괜찮다.
아마 그 때도 괜찮을 것이다.
그렇게 할 것이다.
“뭐예요? 왜 벌써 이렇게 됐어?”
“우리 아이가 딸이면, 에밀리아를 닮아서 예쁠 거야.”
“갑자기 왜 그런 얘기를....”
“아기가 그냥 생기진 않아. 부부가 노력해야지.”
“이럴 때는 왜 말을 잘 하는 건데....”
남편의 두터운 허벅지 위에 반쯤 걸쳐 앉아있던 그녀는 욕조에서 일어나려다 다시 붙잡혔다.
“왜요?”
“거기. 잡아봐.”
“여기? 왜... 아앗, 뭐예요?”
“긴장하지 말고.”
“...여기서 하려고?”
최강혁은 미쳤냐고 숨죽여 소리치면서도 조심조심 욕조 난간에 앞을 기대는 아내의 허리를 살짝 들어올려 세웠다.
이어서 부드럽게 다리 사이를 열고 들어가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힘 빼야 돼.”
“안 빠지는 데 어떻게 해요.”
“왜?”
“몰라. 장소도 그렇고... 긴장이 안 풀려요.”
에밀리아는 조금 울먹이는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침실에서 하면 안 돼요?”
“안 될 리가.”
욕조의 물이 사라졌다.
에밀리아는 자신의 허리를 번쩍 들어올리는 남편의 의욕에 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나 옷! 옷!”
“가운 걸쳤잖아.”
“이러고 어떻게 가요!”
“어차피 벗을 거잖아. 효율을 따져야 해.”
“왜 이럴 때만 말을 잘 하냐고...!”
“다른 것도 잘해.”
그렇게 목욕가운으로 둘둘 싸맨 아내를 어깨에 얹은 그가 샤워장에서 본채까지 바람처럼 달려갔다.
멀리 훈련장에서 걸어오던 헤인즈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저기 두 분 뭐하는....”
“그냥 넘겨. 봤어도 못 본척 할 일도 있어.”
“그렇군요.”
엘리사벳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그는 목욕가방을 고쳐들었다.
* * *
그곳에 가보기로 했다.
가문의 땅.
농경지로 바꿔야 한다던 지역.
다만 혹시 남아있는 이들이 공격을 받거나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모두 데려가기로 했다.
숲을 통과해서 가는 길 말고 멀리 우회하는 길이 따로 있는데, 그쪽은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해서 그렇게 결정한 것이다.
“흐음.”
“이런 상황은 몰랐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아니야. 괜찮아.”
허리를 숙이는 엘리사벳을 위로한 최강혁은 전방을 가득 메우고 있는 풀과 나무들을 보았다.
“원래는 길이 있었어야 한다는 거지?”
“예. 마차 한 대 정도는 무리 없이 지나갈 폭이었습니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요.”
“흔적이 좀 남아있긴 하네.”
워낙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길.
그렇게 도로 메워지는 게 당연했다.
“가장 최근에 와본 게 2년 전이랬나?”
“맞습니다. 그 때만 해도 그럭저럭 사람이 오갈 수 있는 정도는 되었는데....”
“식물을 무시하면 곤란해. 알고 보면 가장 강력한 생물이거든.”
“예?”
“식물이 제일 강해. 시간만 주면 다 이겨.”
“아....”
그나저나, 이래서야 마차는커녕 사람도 못 지나갈 판이다. 최강혁이 마차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어?”
“가주께서 가셨어요.”
베티와 루시아의 말에, 짐칸 한쪽에 앉아 책을 읽던 에밀리아가 얼른 일어났다.
“무슨 일이죠?”
“길이 막혀있습니다. 직접 뚫으실 생각이신 것 같습니다.”
“가능해요?”
“그게, 저로서는....”
“여기 계세요.”
가주를 따라 내리려던 엘리사벳을 만류한 그녀가 훌쩍 날 듯이 지상으로 향했다.
그리 멀지 않은 전방에, 사람 키에 육박하는 대검을 꺼내 쥐고 있는 남편이 보였다.
“파편 튀어. 오지 마.”
“할 수 있는 거예요?”
“쉬워.”
“...도와줄까요? 나도 몇 그루 정도는 할 수 있을 텐데.”
“마나 아껴. 나무 베는 데 쓰기엔 아까워.”
“서두를 필요 없으니까, 힘들면 이야기해요.”
대답 대신 나무 쪼개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최강혁은 대검을 마치 도끼처럼 휘둘러대고 있었는데, 한 그루당 다섯 번에서 열 번 정도 후려치면 완전히 베어졌다.
나무에 틀어박힌 대검을 뽑아내지도 않았다.
그대로 사라졌다가 다시 손에 쥐어지니, 쉬지 않고 계속 휘두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완전히 베어진 나무는 우지직 쓰러지려 하는 도중에 사라져버렸다. 그것이 붙어있던 밑둥도 마찬가지였다.
“헤인즈!”
“예, 가주님!”
“이거 메워. 마차에 문제 없을 정도면 돼.”
“알겠습니다!”
나무 그루터기가 사라져 움푹 파인 땅.
그가 직접 메워도 되겠지만, 그 작업까지 하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았다.
그저 주변의 돌과 흙을 적당히 퍼다 던져넣는 정도면 되기에, 헤인즈 혼자서도 제법 잘 했다.
엘리사벳은 마차 마부석 위에 서서 거듭 주변을 살폈다. 혹시나 접근할 지도 모를 맹수, 혹은 몬스터를 경계하는 것이다.
“힘들면 말해. 교대해줄 테니.”
그녀가 말하자, 헤인즈가 걸치고 있던 상의를 벗어 마부석에 올려두며 웃었다.
“저 농부 아들입니다. 삽질하고 낫질, 곡괭이질은 하루 종일도 할 수 있거든요.”
“그러면 창 말고 낫을 들지 그랬어.”
“사실 그 생각도 해봤는데....”
“일해, 인마.”
“예.”
그러는 와중에도 벌써 열 그루가 넘어가는 나무가 사라져있었다. 저만치 앞서가있는 가주의 모습에 헤인즈가 믿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대체 아공간이... 얼마나 크신 건가요?”
“음?”
마침 나무 하나를 더 없앤 최강혁이 그쪽을 돌아보곤 픽 웃었다.
“다 챙기는 거 아니야. 일부는 제물로 바친다.”
“제물이요?”
“나한테도 신이 있어.”
그는 그렇게 말했다.
자신이 믿는 신이 있다고.
나무들을 제물로 바치는 중이라고.
“나무라면, 숲의 신인가요?”
“후웁! 아니, 이쪽 신하고는 달라.”
“하긴... 숲의 신이라면 나무를 베는 것에 화를 냈을 거예요.”
“......?”
마지막 한 방을 남겨둔 채로 멈춘 그가 돌아보자, 삽질을 하던 헤인즈가 움찔 놀라더니 멋쩍게 웃었다.
“아. 그냥 그쪽 교리가 그렇습니다. 실제로 화를 냈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봤어요.”
“그렇군.”
콰직!
계속 나무를 뚫고 길을 냈다.
허리 높이로 자라난 풀들도 대검을 적당히 휘두르자 싹둑싹둑 베어졌다.
그 안에 숨어있던 뱀이나 숲전갈이 덩달아 잘려나가거나 덤벼들기도 했지만, 그 정도는 헤인즈의 삽으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다.
“자아. 먹어라. 싱싱하다, 아주.”
그렇게 베어진 풀들이 많다보니, 대기하던 말에게도 먹거리가 실컷 제공되었다.
그런데, 풀더미를 들어 옮겼던 헤인즈가 후다닥 달려왔다.
“와씨!”
“왜?”
“그게 어떻게 계속 들어가나 했더니....”
녀석이 코를 틀어막았다.
왠지 알 것 같았다.
최강혁은 앞으로 먹고 뒤로 내보내는 녀석에게 가, 잠시 휴식하며 청소를 시작했다.
그렇게 하루를 꼬박 이동했다.
중간에 야영을 하기도 했다.
마차를 세워두고, 옆쪽에 모닥불을 피워놓은 조촐한 캠프였다.
하지만 주변에서 뭐가 달려들지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최강혁이 신기한 것들을 꺼내놓았기 때문이었다.
“이게 뭐죠? 가시가 달려있는데요.”
“나도 처음 본다.”
엘리사벳이 고개를 저었다.
한 바퀴 돌아보고 온 최강혁이 말해주었다.
“윤형철조망이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쉽게 보면 곤란해.”
마침 쉽게 보고 가까이 갔던 헤인즈가 옷자락이 걸려 애를 먹는 중이었다.
“이거 손에 껴봐.”
두터운 가죽 장갑.
두 사람은 가주에게서 철조망 다루는 법을 간략하게 배울 수 있었다.
나무를 교차해 만든 목책을 먼저 배치하고, 그 바깥과 위에 철조망을 벌려서 두르는 것이다.
짐마차에 실어온 것도 아닌데, 그의 아공간에서는 그런 것들이 쉴 새 없이 튀어나왔다.
원래 갖고 있던 것들이란 말에, 엘리사벳이 고개를 끄덕였다.
‘쇠붙이로 장애물을 만들다니.’
그녀는 가주의 고향이 궁금했다.
아마도 철이 아주 흔한 곳 같았다.
“우리 땅에도 이런 것들을 둘러놓으면 좋을 것 같군요.”
“슬슬 울타리가 필요하긴 하지.”
그녀의 말에 최강혁도 동의했다.
하지만 워낙 많은 작업들이 밀려있어서, 당장은 좀 어려운 일이었다.
‘하나씩 하자. 하나씩.’
〈 88화 〉 088.
088.
두 번째 날은 첫날과 비슷했다.
다만 달라진 것은 저녁 무렵부터 꾸리기 시작한 야영장의 풍경이었다.
오늘은 어제와 달리 제대로 된 공터를 구축하고 주변을 정리했다.
그 중심에 모닥불을 피웠다.
제대로 저녁식사를 즐겼으며, 즐거운 잡담이 이어졌다.
몬스터가 존재하는 세상이 아니었다면, 한가한 여가생활이라고 할 수도 있을 법한 모습이었다.
“다 됐다.”
그리고, 제대로 캠프를 마련한 이유중 하나가 마무리되었다. 나무틀과 천으로 만들어진 가림막. 그 각각에 자리한 간이 욕실이었다.
‘좋아. 좋아.’
고작 어제 하루 못 씻었을 뿐인데.
다들 알게 모르게 찝찝해하는 모습을 보았다.
‘계획대로야.’
종교고 뭐고, 일단 깨끗해지면 이전까지 문제 없었던 것들도 새롭게 느껴진다. 냄새도 그렇고, 몸에 묻은 흙먼지도 그렇고.
“감사합니다, 가주님.”
“별 거 아냐.”
여성들이 한쪽으로 들어가고, 헤인즈와 둘이서 다른 곳을 썼다.
엘리사벳은 나중에 혼자 씻겠다며, 지금은 갑옷을 벗지 않았다.
“누군가는 경계를 서야 합니다.”
“그, 그러면 저도... 억!”
“넌 이따가 나랑 교대해야지.”
“아. 그렇군요.”
엉덩이를 차인 헤인즈가 욕실로 돌아왔다.
씻는동안 별 문제는 없었다.
메이드들이 아가씨와 같이 씻을 수는 없다고 약간의 실랑이가 있긴 했지만, 에밀리아가 허락하니 조용해졌다.
모두가 씻고 나왔다.
엘리사벳을 위해 따로 욕조를 준비해주었다.
그녀가 씻는 동안 헤인즈가 눈에 불을 켜고 주위를 노려보았지만, 이쪽은 별로 위험하지 않다던 말처럼 딱히 접근하는 몬스터는 없었다.
“좀 쉬지 그래?”
“괜찮습니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곳이어도, 불냄새가 풍기면 궁금해하는 녀석들이 있다고 배웠습니다.”
“그건 그렇지.”
“아시는군요.”
“한동안 숲하고 산에서 살았거든.”
“아... 역시.”
헤인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손아귀가 짓무르고 터질 만큼 열심히 수련 중인 장창을 굳게 움켜쥐는 모습이, 적어도 기세만으로는 기사에 육박하지 않나 싶었다.
“늦었습니다.”
“아니. 안 늦었는데.”
엘리사벳이 씻고 나왔다.
최강혁이 손을 뻗으니, 그녀의 몸과 머리카락에 남아있던 수분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아. 고맙습니다.”
그녀가 얼른 벗어두었던 갑옷을 걸쳤다.
헤인즈가 도와주는 동안, 최강혁은 슬쩍 한쪽으로 향했다.
엎드려 자고 있던 말이 어느샌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방향이었다.
갑옷을 다 입은 엘리사벳이 서둘러 달려왔다.
“짐승 냄새가 나는 것 같습니다.”
“맞아.”
“적어도 셋 이상인 것 같군요.”
“간 보는 것 같은데.”
“간이요?”
“정찰. 만만하면 공격할 테고.”
“아.”
가서 죽여도 되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최강혁이 철조망 너머 어둠 속을 가만히 바라보니, 몰려왔던 놈들이 슬그머니 물러났다.
그날 밤은 전날과 달랐다.
다들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모처럼 밖에 나와서 걱정이 되는 마음 반, 설레는 마음이 반 정도일까.
젊은이들은 어디든 비슷한지, 모닥불가에 모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정겨웠다.
지켜보고 있자니, 종종 이렇게 밖에 나오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다녀올게.”
최강혁은 헤인즈를 억지로 재우고 불침번을 서고 있는 엘리사벳에게 이야기했다.
“예?”
“미리 길을 만들 거야. 낮에 하려면 이동이 느려지니까.”
“아....”
“너무 멀리 가진 않아. 중간중간 돌아올 테니 걱정마.”
“알겠습니다. 부디 조심하시길.”
“그래.”
그렇게 훌쩍 사라졌다.
엘리사벳의 귀에 멀리서 장작패는 소리 비슷한 게 나기 시작하더니, 조금씩 멀어져갔다.
왠지 그 속도가 낮보다 빠른 느낌이었다.
콰드득- 쿠적!
실제로 그랬다.
지금 최강혁이 휘두르고 있는 건 낮에 쓰던 것과 다른 대검이었다.
그것보다 한 배 반 길이.
무게는 거의 두 배에 달하는 놈.
사실, 만들어놓고 써먹을 일이 없었다.
‘이걸 갖고 나무나 팰 줄은 몰랐는데. 뭐, 좋네.’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마나가 10에서 20, 많게는 50가까이 줄어들 정도로 무지막지한 놈이다.
그래도 지름 2미터 급의 나무가 한 방에 반 이상이 갈라지니 시원시원해서 좋았다.
적게는 두 방, 좀 꼬여도 다섯 방이면 한 그루가 사라졌다.
“후우....”
마나 소모량이 상당했지만, 그만큼 회복되는 양도 대단했다.
‘자연회복량으로는 커버가 안 되지만.’
루팅한 나무가 있어서 보충이 된다.
오히려 넘칠 정도여서, 일부는 인벤토리로 교환하고 나머지는 마나를 뽑아내 채우는 것이다.
덕분에 마나를 소비하지 않는 것과 거의 비슷해서, 휴식을 취하지 않고도 계속 벌목을 이어갈 수 있었다.
‘에밀리아를 돕는 일이라 생각했더니, 이거 오히려 나한테 더 좋은 일 같은데.’
특수칸의 업그레이드도 필요하던 참이다.
최대치였던 20톤이 30톤으로 바뀐 지도 좀 되었고, 숫자도 5칸에서 2칸이 늘어 7칸이 되었으니까.
‘다섯 칸이 20톤에, 나머지 2칸은 10톤 정도... 일단 10톤 두 개 먼저 20톤으로 올리고 다시 1번부터 올리면 되겠지.’
최대 무게를 20톤에서 30톤으로 올리려면 1톤 당 일반 인벤토리 1천 칸을 요구했다.
위로 갈수록 부담이 커지는 건 예상하고 있었으니, 그다지 화가 날 일은 아니었다.
‘지금 있는 것만 해도 다 합쳐서 120톤이네. 완전히 업그레이드하면 210톤이 되는 거고. 장난 아니구나.’
물론 지금부터 완전 업그레이드까지는 8만 칸 가량이 필요하다.
답이 안 나오는 숫자라고는 하지만, 지금처럼 나무들을 마구 베어 넘기다보면 조금씩이라도 진행이 될 것이다.
‘한 그루에 적어도 10칸에서 20칸은 나오고 있으니까.’
이전 지역, 왕들이 살던 숲의 거목들은 한 그루에 1백칸에서 많게는 2백 칸도 받을 수 있었다.
그것에 비교하면 확실히 적지만, 그만큼 크기도 작으니 납득할 수 있는 숫자였다.
‘베어 넘기는 속도도 비교가 안 되고.’
한참 날뛰던 그는 얼른 멈추고 뒤로 돌아섰다.
중간마다 얼굴을 비추기로 했으니, 돌아가지 않으면 걱정할 것이다.
“음.”
“오셨습니까.”
그렇게 돌아가보니, 엘리사벳을 제외하곤 모두 잠들어있었다. 에밀리아도 그를 기다리다 방금 전에 잠들었다는 듯 했다.
“엘리사벳도 좀 자.”
“괜찮습니다. 낮에 자면 됩니다.”
“낮에?”
“예. 지금 상황대로라면 내일 낮에도 길 내는 작업을 하게 될 텐데, 제가 나설 부분이 없을 것 같아서요. 헤인즈에게 마부석을 맡기고 잠을 보충할까 합니다. 괜찮을까요?”
“뭐, 내 생각에도 그게 나을 것 같아.”
헤인즈는 오늘 밤 푹 재운다.
어차피 내일부터는 땅을 메울 필요가 없으니 마부석을 맡기는 게 맞다. 그동안 삽질하느라 고생도 했고.
고개를 끄덕인 그는 인벤토리에서 뭔가를 꺼내 건네었다. 조심스레 받아든 엘리사벳이 뭔지 알겠다는 얼굴로 끄덕였다.
“호각이군요.”
“여기도 비슷한 게 있다던데.”
“좀 더 긴 형태입니다. 이것도 멀리까지 들립니까?”
“지금 불지마. 시끄러울 거야.”
“그런가보군요.”
“무슨 일 생기면 불어.”
“알겠습니다.”
목걸이 형식으로 되어있어서, 그것을 목에 건 엘리사벳이 군례를 올렸다.
“해 뜰 즈음에 올 거야.”
그 말을 남긴 최강혁이 다시 사라졌다.
정말로 날이 밝을 때 돌아왔는데, 전혀 지친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즐거워보였다.
“무슨 좋은 일 있어요?”
잠에서 깬 에밀리아가 물었다.
부스스한 눈을 비비고 안경을 쓰던 그녀가 이어진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길을 잘못 들었어.”
“...그게 좋은 일이예요?”
“엉뚱한 나무를 많이 베었어.”
“......?”
요리는 새로 할 필요 없었다.
어제 먹었던 스튜와 빵 남은 것을 꺼내어 나눠주었다. 불가에 데우지 않아도 이미 뜨끈했다.
엘리사벳은 잠을 자야 해서 조금만 먹었다.
“와... 밖에서 이렇게 잘 먹는 건 처음인 것 같아요.”
“어제 남은 건데?”
“그래도요.”
헤인즈가 웃었다.
불을 피울 수는 있지만, 몬스터를 유인할 수 있으니 요리는 거의 하지 않는다고.
“일단 밖에 나오면 뭐든 짐이기도 하고요. 식료품이고 뭐고 다 양을 줄여야 하니...”
“그럼 뭘 먹어?”
“보통은 육포를 물에 끓여서 불려먹거나 하죠. 딱딱해진 빵을 넣거나 곡물가루가 있으면 풀어 먹기도 하고요.”
“그거 참 맛 없게 들리는군.”
“맞습니다. 맛은 없죠.”
다들 기분 좋게 식사를 하고 야영지에서 철수했다. 짐마차에 여유공간이 있어서, 엘리사벳을 위한 잠자리와 햇빛가리개를 만들어주었다.
“굳이 이런 것까지....”
“쉴 때 제대로 쉬어야지.”
그녀가 황송한 얼굴로 누웠다.
하지만 다시 일으켰다.
갑옷을 벗을 수 없다며 그냥 누우려고 하기에, 말린 풀을 채운 매트와 털가죽을 더 많이 깔아서 푹신하게 해주었다.
“좀 나을 거야.”
“예....”
조심조심 자리에 누운 그녀는 간밤의 피로가 제법 있었는지 금세 고른 숨소리를 냈다.
“길이 뻥 뚫렸는데요?”
“밤에 뚫었지.”
“...아.”
헤인즈는 너무 푹 잔게 죄송한 모양이다.
마부석 옆에 앉은 그의 눈치를 보았다.
“자.”
최강혁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에게 머그컵을 꺼내주었다. 후식으로 마시기 좋은 꽃차였다.
“호각 받았어?”
“네. 여기.”
“일 있으면 불어.”
“알겠습니다.”
지난 이동 과정에서 거듭 확인했지만, 말의 속도는 역시나 느릿느릿했다.
강하게 재촉하면 시속 20킬로미터 정도는 내는 것 같은데, 그런 속도로는 오래 가지 못하니 보통 50퍼센트 정도 속도를 유지하는 편이었다.
다시금 길을 뚫던 최강혁과 마차의 일행은 점심 즈음 합류했다.
이미 휴식할 곳을 마련하고 모닥불을 피워놓았다. 낮이긴 해도, 숲속이다보니 공기가 차서 불을 피우는 게 좋았다.
“고생하셨습니다.”
“잘 잤어?”
“덕분에 편히 잤습니다.”
엘리사벳은 나름 개운해진 얼굴이었다.
마부 일도 주변 경계를 동시에 하자면 정신적으로 피곤해지니, 헤인즈와 교대를 하기로 했다.
그렇게 식사를 했다.
다시금 이동을 하고, 야영을 했다.
같은 방식으로 사흘을 더 가서야 에밀리아가 말했던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성?”
“아... 맞아요. 가문의 소영지 중 하나였대요. 나무로 성을 지었었다는데,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죠.”
바위라면 좀 더 오래 남았을 텐데.
나무로 만든 성은 결국 누군가가 계속 보수하지 않으면 삭고 썩어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래도 주춧돌을 비롯해 성벽의 일부 등등 몇몇 곳에 석재를 썼던 터라, 그 부분의 흔적을 토대로 가문의 땅을 유추할 수 있을 듯 보였다.
‘뭐, 그럴 필요도 없지.’
에밀리아에게 있던 서류 중에는 이런 저런 글과 그림이 그려진 것들이 있었다. 가문의 땅을 표시한 지도와 관련 자료였다.
‘너무 주먹구구식이긴 해도, 이것 저것 교차검증하면 각이 나오겠지.’
그곳에 묘사된 내용과 간략한 지도를 실제 지도에 대입하면, 최대한 정확한 토지를 산출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 틀려도 상관 없어요. 어차피 그 주변이라고 해도 다른 이의 소유거나 한 건 아니니까요.”
“그러면?”
“국가 소유죠. 왕의 땅이요.”
“그렇구나.”
이곳도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땅이라고 했다.
워낙 오래 전 일이긴 하지만, 가문이 사라지거나 한 게 아니니 도로 회수해가진 않았던가보다.
‘넓긴 하네. 치울 게 많아서 그렇지.’
고성이 자리하고 있던 곳에도 이미 나무와 풀들이 빼곡하게 들어서있었다.
최강혁은 일단 그곳부터 청소에 들어갔다.
야영캠프를 꾸리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
“여기서 기다리고... 헤인즈.”
“예!”
“이제 나무 좀 타나?”
“맡겨주십시오.”
“저기 저게 나아보이네. 일단 저기 올라가서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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