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ilado 10

정원 바깥쪽으로 나온 후, 그녀는 최강혁의 물음에 살짝 난감해했다.
“아니야.”
“적어?”
“...음.”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런 고민을 표정에 담던 엘리사벳이 이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와씨.’
방금 뭔가 떨어진 것 같은데.
슬쩍 뒤로 물러나던 최강혁은 이어진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딴에는 쉬운 단어를 이야기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그가 알지 못하는 단어가 더 많았다.
‘대충... 다른 뭔가를 하고 있어서, 돈을 많이 쓰지 못한다는 것 같은데.’
결국 돈이 부족한 건 맞는 모양이다.
그리고 이어진 엘리사벳의 말에, 그가 손을 들어 멈추게 했다.
“가죽?”
방금 전 그런 단어를 들은 것 같은데.
“가죽 필요해. 짐승의 가죽.”
엘리사벳이 여러 번 반복해서 이야기했다.
속터지는 대화였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의미를 파악했다.
‘종교의식인가.’
결혼식도 결국 그 안에 들어가는 모양이다.
그 때 동물의 가죽이 필요하다고 했다.
결혼하는 이들도 저쪽의 신관들처럼 가죽을 뒤집어쓰는 모양이었다.
“강한 짐승 가죽 좋아. 하지만 비싸.”
“이거, 좋아?”
최강혁은 그렇게 물었다.
옆쪽 바닥에 꺼낸 것은 숲에서 사냥한 늑대들의 가죽이었다. 엘리사벳의 눈이 커졌다.
“좋아. 하지만, 옷 아니야. 옷 필요해. 만들기 돈 들어.”
“내가 만들어.”
“최강혁 가죽 옷 만들어?”
“만들어.”
“아....”
한 시름 덜었다는 얼굴이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짐승의 가죽이 더 있냐고 물어왔다. 부부가 같은 가죽을 입지는 않는다는 것 같았다.
“남편. 더 강한 짐승 입어야 해.”
“왜?”
“나는 몰라. 오래 됐어.”
“...종교적인 풍습인가.”
딱히 걱정은 없었다.
지난 며칠 놀고만 있던 건 아니었으니.
“있어.”
“있어?”
그렇게 되물은 엘리사벳은 바닥에 있던 늑대가죽들이 다시금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이어서 그곳에 나타난 것을 본 그녀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나며 반대쪽 허리로 손을 뻗었다.
“...아.”
검손잡이를 움켜쥐었지만, 그것을 뽑기 직전에 멈추었다.
갑작스런 동작 때문에 옆구리가 아팠다.
하지만, 엘리사벳은 지금 눈에 보이는 것에 시선이 팔려 그런 통증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 75화 〉 075.
075.
“.......”
커다란 곰의 사체.
놈은 지금이라도 벌떡 일어나 날뛸 것처럼 생기가 남아있었다.
“빨리 한다. 괜찮아.”
최강혁이 말했다.
아직 가죽을 벗기지 않았지만, 인벤토리 안에서 가공하면 현실보다 훨씬 빠르게 작업할 수 있었다.
“이거, 좋아?”
“좋아. 많이 좋아.”
멍한 얼굴이던 엘리사벳이 퍼뜩 정신을 차리며 답했다. 최강혁이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에밀리아에게 말해줘. 우리 가죽 있어. 내가 옷 만들어. 내 마법, 옷 빨리 만들어.”
“그래.”
그녀가 얼른 달려갔다.
그 사이에 아가씨가 뭐라도 샀을까 싶었지만, 다행히 아니었다.
“......?”
그녀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에밀리아가 놀란 얼굴로 정원수를 돌아 뒤쪽을 향했다.
그러나 그곳엔 최강혁이 보이지 않았다.
“가죽을 사지 않아도 되니까, 대신 다른 것을 더 주문할 수 있겠어요.”
“...다행이네.”
에밀리아는 조용히 답했지만, 뺨이 살짝 달아올라있었다.
소매 속에서 움직이던 손가락들이 어느새 멈추고, 그녀는 주먹을 꼭 쥐었다.
* * *
최강혁은 한시간 쯤 후에 돌아왔다.
그가 허공에서 꺼낸 두 벌의 가죽옷을 본 이들이 저마다 잔뜩 흥미를 보였다.
특히, 상인들보다 신관들이 더 달려들었다.
‘우왁!’
뭐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알아듣지 못해서 답답한 것보다는 조금 떨어져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지금?”
“지금. 입어요.”
“...알았어.”
스캔한 데이터대로 만든 거라서 수선할 필요는 없을 텐데. 그래도 한번 입어보긴 해야겠지.
신관들의 복장을 참고해서 만든 늑대가죽옷을 에밀리아에게 건네주고, 그는 곰가죽 옷을 챙겼다.
‘너무 비슷하게 만들었나. 좀 약식으로 해도 됐을 것 같은데.’
신관들의 옷은 여러 겹으로 이루어져있었다.
바지 위에 치마 형식의 가죽을 더 걸치고, 윗도리도 속에 입는 것과 겉에 입는 게 따로 있었다.
‘겨울엔 따뜻할 것 같긴 한데, 그래도 굳이 이런 방식으로 하는 건 좀... 땀띠 나지 않으려나.’
오늘만 입는 거겠지.
옷을 다 입은 그는 그 위에 망토를 걸친 후, 그것에 붙어있던 머릿가죽 후드를 올려 썼다.
‘이건 뭐라고 안 하겠지.’
신관들과 달리, 그는 후드에 살짝 와이어를 넣었다. 덕분에 그들처럼 얼굴 절반 이상을 덮어버리지 않고, 적당히 이마 앞 정도에서 고정되었다.
‘어우. 벌써 땀나.’
그렇게 다 입고 돌아가니, 비슷하게 에밀리아가 도착했다. 늑대가죽 풀셋을 갖춰입은 그녀는....
‘귀엽다고 하면 화내려나.’
속으로만 생각하기로 했다.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 헤인즈나 베티에게 듣기로는 화났을 때 무섭다던 것 같았다.
‘마법사를 화나게 하면 안 되겠지.’
그렇게 다시금 에밀리아와 상인들의 대화가 이어졌다. 아니, 이제는 신관들까지 끼어들어 토론 비슷한 분위기가 되었다.
‘좀 뻘쭘한데. 이거 계속 입고 있어야 되나?’
그가 나설 상황은 딱히 없었다.
애초에 이런 쪽은 아는 분야도 아니었고, 이쪽 세상의 결혼식 문화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만약 안다고 해도, 한 자리 끼어들어 대화를 나눌 만한 언어능력은 없었고.
‘무난한 느낌이네.’
특별하게 눈에 띄거나 이상하게 여겨지는 부분은 없었다. 다만 그녀가 따로 초대할 이들이 없는 것 같다는 부분은 좀 신경쓰였다.
‘의자를 뺀다는 건 그런 의미잖아.’
축복받는 결혼은 아닌 모양이다.
하긴, 조금만 생각해봐도 당연할 것 같았다.
‘어깨가 무겁구만.’
한 여자의 인생에 개입하는 일이다.
물론 자신의 인생도 걸려있는 일이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진지한 생각으로 결정한 일이 아니라는 점에서 조금 미안한 기분이었다.
‘노력해야지.’
적어도 아버지처럼 살지는 않을 것이다.
좋은 남편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쁜 남편이 되지는 말아야지.
그 때, 상인들과 함께 왔던 인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짐마차에서 이것 저것 내려놓더니, 정원 곳곳에 세팅하는 것이다.
정원 중앙에 세로로 길게 깔린 하얀 천.
그 위엔 딴지 얼마 안 된 듯 싱싱해보이는 꽃잎이 뿌려졌다.
‘잠깐. 지금 뿌린다고?’
준비만 하는 줄 알았다.
일종의 예행연습 정도일 거라고.
그런데, 가만 지켜보니 그게 아니었다.
“이쪽으로.”
헤인즈가 그를 이끌었다.
본채 뒤쪽으로 가보니, 언제 준비했는지 모를 나무욕조가 있었다.
“씻어?”
“맞아. 최강혁 씻어. 곧 결혼식이 있어.”
“오늘? 지금?”
“맞아.”
“원래 이런 식이야?”
“무슨 말인지 몰라.”
“이곳, 결혼식.”
“응.”
“다른 사람들, 결혼식. 모두, 같아?”
“아....”
헤인즈가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으로 대답이 된 것 같아서, 최강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끝내면 나도 좋지 뭐.”
훌렁 훌렁 옷을 벗었다.
옆쪽으로 물러난 헤인즈, 기사의 종자마저 감탄할 만큼의 육체가 드러났다.
욕조의 물은 데워지지 않았지만, 아직 추운 계절은 아니어서 괜찮았다.
최강혁이 헤인즈를 돌아보았다.
“에밀리아도 씻어?”
“맞아. 아가씨, 씻어.”
“물이 차가울 텐데.”
나직이 중얼거린 그는 인벤토리에서 끓는 물 한 양동이를 퍼내어 내려놓았다.
“이거. 에밀리아에게 줘. 부탁할게.”
“...아.”
무슨 뜻인지 이해한 헤인즈는 얼른 그것을 받아 어딘가로 사라졌다.
최강혁 역시 욕조에 담겨있던 물을 일부 인벤토리에 넣고, 뜨거운 물을 꺼내 부어 온도를 맞추었다.
그의 몸을 집어넣기엔 욕조의 크기가 작았다.
그렇다고 큰 욕조를 꺼내 들어가기엔 왠지 시간이 촉박한 것 같아서, 작은 바가지로 퍼다 뿌리는 식의 샤워를 해야 했다.
“음... 좀 낫긴 한데, 그래도 공장제만큼은 아니네.”
그는 가장 최근에 만든 비누를 사용해보았다.
실사용에 문제가 없을 수준은 되었지만, 내다 팔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들풀과 야생화를 섞은 건 좋은 선택인 것 같아. 향이 괜찮아.’
이 정도면 팔지는 못해도 선물할 정도는 되지 않을까 생각할 때, 헐레벌떡 돌아온 헤인즈가 보였다.
“그건 뭐야?”
“비누. 알아?”
“...아. 비누.”
서로가 말한 단어는 달랐다.
하지만 그 의미는 같았다.
그렇게 이곳에도 비누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역시나 비싸다고 했다.
게다가, 돈이 충분히 있어도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종교적인 이유라고?’
몸을 씻는 행위.
이어진 이야기는 다소 복잡하고 어려운 단어들로 이루어졌지만, 대충 느낌은 알 수 있었다.
“씻는 종교가 있고, 안 씻는 종교가 있다는 거잖아.”
이유까지는 잘 모르겠다.
종교에서 씻는 걸 막는다는 걸까.
‘씻는 걸 왜 종교적으로 받아들여?’
그리고 최강혁은 에밀리아의 가문이 바로 후자에 속한 종교를 믿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더 안 씻었냐!’
하지만, 다행히 오늘은 아니라는 모양이다.
신께 결혼을 알리고 축복을 구하는 자리이니만큼, 적어도 오늘은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고.
‘새로 태어난다는 건가.’
그동안 몸에 쌓여있던 모든 것들을 다 씻어내고, 오늘부터 새로운 삶을 이어간다는 걸까.
‘제대로 해석한 게 맞나.’
아무튼, 그는 인벤토리에서 새 비누를 하나 꺼내어 헤인즈에게 내밀었다.
뜨거운 물을 줄 때 같이 줄 걸 후회했지만, 아직은 그리 늦지 않았을 것 같았다.
“이거. 부탁할게.”
“알았어.”
그러자 전혀 귀찮아하지 않고 얼른 받아든 헤인즈가 다시금 후다닥 사라졌다.
“어우, 며칠 됐다고 땟국물 봐.”
비누가 제 몫을 하고 있다는 건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바닥에 고여 흘러가는 오수를 도로 루팅하지 않고 그냥 바라보는 건, 바로 어제 완성해서 설치한 큼직한 물탱크가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3톤 정도면 당장은 충분하겠지.’
인벤토리에서 워터타워의 하단부가 제작 중에 있으니, 그게 완성되면 저 물탱크를 그 위에 올려놓을 예정이었다.
‘그러면 나름 수압이 생겨날 테니까, 제대로 된 샤워장도 만들 수 있겠고.’
그나저나.
다른 것도 아니고, 종교 때문이라니.
그걸 어떻게 바꾸지?
‘...그냥 냄새난다고 할까?’
충격요법이다.
나름 효과 있을 것 같지만, 오히려 반발심을 줄 수도 있다.
‘일단 샤워장부터 만들자. 만들면 쓰겠지.’
물탱크를 만들고 가득 채워놓은 후, 아직 하루 밖에 안 되었지만 의외로 소모량이 좀 되었다.
‘씻기 싫어서 안 씻는 건 아닌 것 같으니까... 조금씩 분위기를 바꿔보자.’
좀 씻고 삽시다.
물이야 어떻게든 구해올 테니까.
* * *
결혼식은 생각보다 길었다.
어쩌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이쪽의 종교용어들 때문에 지루해서 그렇게 느껴졌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국 끝이 났다.
‘짐승 가죽을 걸치는 것 말고는 딱히 이상한 건 없었어.’
아마도 신성력으로 만든 듯 보이는 샤방샤방한 효과의 빛무리가 그와 에밀리아에게 쏟아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주변에 모여있던 이들의 환호와 박수가 이어졌다.
원래부터 이곳에 살던 이들.
이번 결혼식을 준비해준 이들.
그들 외에는 어떤 초대손님도 없었지만, 에밀리아는 아쉬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
그녀는 자신의 왼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곳 약지엔 최강혁이 끼워준 금반지가 있었다.
그곳의 결혼에는 그런 식의 증정 행위가 존재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남편의 고향에서 행하는 의식일까 싶어 거부하지 않았다.
그런 반지는 그녀와 남편의 같은 손 같은 손가락에 끼워져있었다. 단지 크기만 다를 뿐, 같은 모양의 반지였다.
겉은 평범한 민무늬였지만, 그 안쪽엔 둘의 이름이 새겨져있었다.
어쩐지 최근에 그녀의 이름을 어떻게 적는지 알려달라고 하더니, 그런 이유였던 모양이다.
금은 어디서 구한 건지, 그것으로 반지는 언제 어떻게 만든 건지 궁금한 것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다시금 고개를 들고, 그저 사람들의 박수에 인사로 화답할 뿐이었다.
‘다행이야.’
옆에서 비슷한 얼굴로 사람들의 축하에 화답하던 최강혁은 속으로 안도했다.
‘확실히, 비누를 썼어.’
악취가 거의 사라졌다.
아주 없어진 것까지는 아니지만, 왠지 그녀가 아니라 뒤쪽에 서있는 신관들에게서 나는 냄새 같기도 했다.
‘거봐. 씻으면 되는 거잖아.’
하지만, 이들과 완벽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더라도 왠지 그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다들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는데, 너희들 냄새난다고 하면 분명 기분이 나쁠 테니까. 충격요법에도 정도가 있지.
‘샤워장을 빨리 설치하고... 모두에게 나눠줄 만큼 비누를 만들어야겠어.’
멧돼지 기름은 넉넉하다.
재와 물도 있으니, 비율만 조금씩 더 조정해보면서 최적의 조합을 찾아보자.
‘들꽃을 더 꺾어와야겠구나. 있는 걸 복제해도 되겠지만, 마나가 좀 아깝지.’
속으로 생각하던 그는 에밀리아가 손을 꼼지락거리는 것을 보았다. 아마도 처음 손에 끼워본 반지가 어색한 모양이었다.
‘이쪽에도 악세사리는 있던 것 같은데. 거추장스러워하는 성격인가.’
금은 인벤토리에 있었다.
의외로 상담사도 그가 갖고 있던 패물을 내놓으라고 하지는 않았다.
값어치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쪽 세상에 가져가도 되는지의 여부였다.
금의 경우는 문제가 없었다.
대신, 뭉쳐서 덩어리로 만들라고 했다.
보석은 따로 떼고, 나머지는 순수한 성분끼리만 모아놓으라고.
그렇게 분류한 것들 중 몇 가지는 가져오지 못했지만, 적어도 순금은 챙겼다.
그리고 그것의 일부와 소량의 구리를 섞어 반지로 만들었다. 에밀리아와 자신의 이름을 안쪽에 새겨넣었고.
‘보석은 마땅한 게 없어서 빼버렸지만... 애초에 중고 느낌도 들고.’
그것들을 기준으로 새 보석을 만들더라도 비슷할 것 같았다.
나중에라도 이쪽 세상의 보석을 구하게 되면, 그것을 활용해서 더 좋은 반지를 만들어볼 생각이었다.
‘만찬 시작인가. 과식하지 말자.’
오늘밤을 위해선 체력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이미 충분하고 넘칠 정도였으니, 적당히 배를 채우는 수준이면 족하지 않을까.
“.......”
옆을 돌아보다 에밀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는 그녀의 뺨이 발그레했다.
술은 안 마신 것 같은데.
늑대가죽 옷이 더워서 그런 걸까?
얼굴만 보면 몇 병은 마신 것 같았다.
살짝 오른손을 뻗어 손을 잡았다.
그녀가 움찔했지만, 뿌리치지는 않았다.
‘손이 차네. 좋은 걸 많이 먹여야겠다.’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그의 손을 살며시 쥐는 것이 느껴져서 옆을 보니, 여전히 다른 곳을 향하고 있는 옆얼굴이 보였다.
‘내 아내 예쁘다.“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안 그래도 붉던 얼굴이 조금 더 붉어졌다.
〈 76화 〉 076.
076.
중앙의 테이블에는 최강혁이 며칠 전 사냥해온, 다 자란 멧돼지고기가 모락모락 김을 피워올리고 있었다.
통구이는 아니었지만, 인벤토리에서 끓는물과 조합하여 통째로 삶아진 상태였다.
단순히 물질을 가공하고 합치는 것만이 아니라, 특정한 과정을 조합하는 방식으로 스킬을 활용할 수도 있게 된 것이다.
덕분에 요리 쪽으로도 활용성이 무척 커졌다.
‘좀 싱겁긴 하지만, 나름 괜찮네.’
누린내를 유발하는 물질도 겸사겸사 제거했고, 숲에서 찾아낸 풀을 태워 그 향만 입혔다.
별다른 향신료나 조미료는 없었지만, 사람들의 반응이 무척 좋았다.
특히 한창 먹을 나이인 헤인즈와 더불어, 굉장히 빠르게 회복 중인 엘리사벳이 엄청나게 먹는 중이었다.
“맛 괜찮아?”
“좋습니다. 냄새도 없고.”
“냄새?”
“짐승 냄새. 나쁩니다.”
“냄새....”
“왜요?”
“아니야. 먹어.”
헤인즈의 어깨를 두드려준 그는 그 옆에서 식칼로 멧돼지 살을 베어내고 있는 엘리사벳을 보았다.
‘기사도 각성자하고 비슷한 위장을 가진 건가? 요즘 먹는 양이 확 늘어났던데, 살이 안 찌는 것 같아.’
평소에도 커다란 식탁에 모여 함께 식사를 했기에, 신분의 고하와 상관 없이 다들 같은 것을 먹었다.
그리고, 최강혁이 온 이후로 식탁에 올라오는 고기의 양이 늘어났다.
모두가 알게 모르게 피부가 좋아지고 체력이 늘어난 것은 그런 영향도 있었다.
‘사람이 풀만 먹고 어떻게 살아.’
엘리사벳은 기사였다.
단어의 뜻을 몰라서 헤맸지만, 결국 알게 되었다. 경호원 같은 게 아니라 귀족 가문의 기사라고.
하지만 그저 기사일 뿐 사냥꾼은 아니었다.
종종 덫에 걸린 토끼 정도나 건질까, 제대로 된 사냥은 성공한 적이 없다고 했다. 종자인 헤인즈도 비슷한 것 같았고.
차라리 몬스터 사냥이라면 가능할 것 같지만, 그것들은 못 먹는 놈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아가씨를 두고 멀리 다닐 수는 없어서 깊은 숲으로 들어가지는 못했던 것 같고.
“활. 가르침, 주십시오.”
그를 본 엘리사벳이 거듭 말했다.
살짝 취기가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가문의 기사들이 활을 다소 경시하는 경향이 있어서, 제대로 된 궁술을 배운 적이 없다던가.
조금 달라진 것은 그런 엘리사벳과 더불어 헤인즈도, 메이드들도, 심지어 에밀리아까지도 기존과 다른 말투를 사용하고 있다는 부분이었다.
여전히 제대로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그들의 표정이나 사용하는 단어가 달라졌다는 건 분명히 느껴졌다.
이제는 아가씨의 남편이자 이곳의 또 다른 주인이 되었으니, 그에 맞는 예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부부는 재산을 공유한다는 것 같은데. 이제 매번 소유권을 달라고 부탁할 필요가 없어진 건가.’
최강혁은 상인 하나가 와서 건넨 술잔을 기쁘게 받아들었다.
술이 강한 편은 아니었지만, 이곳의 술은 도수가 낮은지 쉽게 취하지 않았다.
축하연은 밤새도록 이어졌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결혼식과 관련된 종교 행사가 3단계로 구성된다고 했다.
첫 번째는 부부의 혼약과 축복이었고, 두 번째는 지금 하고 있는 축하연, 세 번째는...
‘내가 이해한 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깨끗한 피 라고 한 것 같은데.’
짐작가는 부분은 있었다.
아마도 처녀혈을 말하는 것 아닐까.
‘모르겠네.’
만약 처녀혈과 관련된 이야기가 맞다면, 재혼하는 사람들은 어쩌라는 걸까.
‘알아서들 하겠지.’
괜시리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는 건, 사실 이제야 자신이 결혼을 했다는 실감이 확 몰려와서였다.
‘으음....’
첫날밤이라.
솔직히 조금은 기대했다.
에밀리아는, 그가 지구에 있었다면 평생 만나보지 못했을 미녀였으니까.
그런데 막상 이렇게 되자 부담도 생겼다.
‘많이 아프다던데.’
진짜 처녀인지 아닌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헛물을 켜고 있는 건 아니었다.
신체 스캔이라는 건,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알게 해주었다. 때로는 굳이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을 알게 되기도 하고.
‘왜 떨리냐.’
숫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경험이 없던 여성과 잠자리를 해본 적은 없었다. 그저 이런 저런 무용담 비슷한 이야기들을 들어보았을 뿐.
‘애초에, 사랑이란 걸 해본 적도 없고.’
누군가를 만나고 사귀어본 적은 있었다.
철없던 어린 시절, 비슷한 처지의 또래들과 어울려다니며... 그중 누군가와는 동질감을 애정이라 착각하고 서로를 보듬었던 기억.
‘알고 있었지.’
사랑이 아니었음을.
서로가 잘 알면서도 사랑을 말했고, 그것을 무시하거나 바로잡지 않았다.
오래 가지는 못했다.
별다른 상처 없이 각자의 길을 가게 된 것은, 애초에 그것이 사랑이 아니었다는 걸 시작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지금은 뭐가 다른 걸까.’
정식으로 식을 올렸다는 것 말고는, 그때와 다를 게 없는 것 아닌가.
이 결혼은 사랑의 결실이 아니다.
그도, 그녀도 알고 있다.
‘그러니까 더더욱.’
가벼이 여길 수 없다.
알면서 시작한 거니까.
무언가에 취해서 끝까지 달려온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냉정한 상태에서 판단하고 결정한 일이니까.
‘아니 뭐, 그렇게 냉정하진 않았던 것 같지만.’
술기운이 조금 올라왔다.
이 사람 저 사람이 건네는 걸 넙죽넙죽 받아 마셨더니 결국 반응이 오는 모양이다.
살짝 기분이 좋아져서일까.
아직까지 남아있는, 이방인 내지는 신기한 생물을 보는 듯한 눈빛들이 더 이상 불편하지 않았다.
서툰 언어지만 먼저 다가가 말을 건네니, 어색해하던 이들도 금세 경계심을 적당히 풀고 어울려주었다.
사실 그를 향한 경계심은 이방인이라서가 아니라, 그들보다 더 큰 체구와 강렬한 눈빛 때문이 컸다.
그것은 살육에 익숙한 사냥꾼이나 용병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었기에, 다들 저도 모르게 긴장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먼저 다가와 인사를 나누고 이름을 소개하는 모습이, 귀족의 남편이 된 인물 같지 않아서 신기할 정도였다.
당연하게도 술잔이 오갔고, 최강혁은 자신의 주량이 생각보다 강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각성자가 되고 나서 이쪽도 강해진 걸까.’
밤이 지나갔다.
새벽까지 이어진 축하연은 해가 떠오르고 나서야 정리 수순으로 넘어갔다.
두 명의 신관은 서류에 인장 같은 것을 찍어서 에밀리아에게 건네주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믿기 어렵다는 듯한 눈으로 최강혁을 흘끔거렸다.
‘결혼 증서 같은 건가.’
서류는 한 장이 아니었다.
둘둘 말리는 종이로 다섯 장 정도 되었는데, 슬쩍 스캔해보니 같은 내용을 담은 서류도 있고 아닌 것도 있었다.
‘내 이름이 적혀있는 것도 한 종류가 아니네. 양쪽이 다 적힌 건 결혼 관련 서류인 것 같고.’
스캔 데이터를 확보해두었으니, 나중에라도 이쪽의 말과 글이 익숙해지면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이 떠나자, 떠들썩하던 정원에 고요함이 찾아왔다.
‘축제가 끝나면 어디든 비슷해지는구나.’
남은 이들을 도와 정원을 정리하기로 했다.
“.......”
“...아.”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피곤해질 거라 생각한 이들의 얼굴이 곧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최강혁이 정원을 돌아다니며 슬쩍 손을 뻗자, 그쪽에 있던 온갖 것들이 모두 허공으로 사라져버렸다.
사용하고 난 뒤의 식기나 남은 음식도,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도, 결혼식 과정에 쓰였던 자잘한 장식품이나 소모품들도 모두 없어졌다.
하지만 그들이 나설 일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단순히 현장에서 치웠을 뿐이라서, 적당한 곳에 꺼내놓은 식기와 장식품들은 결국 그들이 각각 원래 있던 곳으로 가져다놓아야 했다.
다만, 그정도만 하더라도 일감이 확 줄어든 건 분명했다. 쌓여있던 접시들을 내려다본 베티가 루시아를 돌아보았다.
“설거지를 할 필요가 없어졌어. 이것봐.”
뽀득뽀득.
어지간하면 나지 않는 소리가 들렸다.
베티가 거듭 같은 소리를 내며 익살스런 표정을 지었지만, 루시아는 마냥 웃지 못했다.
그 이유를 알기에, 베티는 그저 그녀의 어깨와 등을 쓰다듬어줄 뿐이었다.
‘뭐지?’
최강혁 역시 루시아의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간단하게 차를 마시는 정도로 지나간 점심과, 그정도는 아니지만 역시나 밤새도록 먹은 여파가 남아있던 저녁 식사때도 비슷했다.
“.......”
무슨 일이 있는 걸까.
하지만 다른 이들도 아는 눈치인데 뭐라고 묻거나 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가 참견할 만한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지금 남 걱정할 여유가 어디 있냐.’
분명 취기는 다 빠진 지 오래였다.
그런데도 여전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제는 옆자리로 옮겨앉아있는 에밀리아가 처음보다 오히려 더욱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음... 이것도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숲에서 하루 하루를 버티며 떠올렸던 생각.
그때와는 여러 모로 다른 입장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는 그 문구를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 * *
“와 씨.”
방의 이쪽에서 저쪽을 거듭 오갔다.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있다가도, 다시금 일어나 서성대는 것을 반복 중이었다.
‘문제 없지?’
침대를 다시 살펴보았다.
헤인즈의 숙소에 있던 것과 달리 삐걱거리지도 않았고, 침대 위엔 깨끗한 보가 깔려있었다.
그래도 매트리스가 없으니 딱딱한 건 마찬가지여서, 침대보 아래쪽에 여러 털가죽들을 집어넣어 나름의 쿠션으로 삼았다.
‘매트리스를 만들어봐야겠어. 철은 있으니까.’
스프링이라면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강도를 어느 정도로 하느냐가 문제지.
‘독립 스프링 구조가 오히려 더 간단할 것 같은데. 허리 쪽을 좀 더 강하게 받쳐준다고 광고하던가?’
기억속에 있던 침대 광고를 떠올려보며 한쪽 다리를 떨던 그는 고개를 저으며 창문으로 가서 걸쇠를 열고 밀어 열었다.
유리같은 게 없다보니, 통짜 나무판으로 되어있는 창문은 확 열거나 닫거나 둘 중 하나였다.
“후우....”
아직은 춥지 않고 선선한 바람이 그의 긴장을 조금 가라앉혀주었다. 사실 이제는 긴장감인지 기대감인지 뭔지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아졌다.
‘이곳 달은 볼 때마다 무섭단 말이지.’
하늘을 보았다.
달이 두 개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지구에서와 달리 이쪽의 달은 훨씬 가까운 느낌이었다.
크기가 큰 걸까.
아니면 정말로 거리가 가까운 걸까.
‘둘 다일 수도 있지.’
손을 쭉 뻗어 손바닥을 펴니, 그것으로 다 가리지 못할 만큼 커다랬다.
똑똑....
그 때, 올 것이 왔다.
조용한 노크소리.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열려있어요. 들어오세요.”
직접 열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언질을 받았다.
오늘 밤, 남편 되는 사람은 어떤 것도 직접 개입해선 안 된다고 했다.
‘정확하게 이해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가만히 있어야 된댔어.’
대체 뭐하는 종교인지, 이상한 부분이 많다.
아니, 애초에 종교라는 것 자체가 다들 어느 정도는 이상한 구석이 있게 마련일까.
아무튼 문이 열리고, 조용한 발소리가 이어졌다. 다시금 문이 닫히는 소리에 천천히 뒤로 돌던 그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
당황스러웠다.
얼굴을 찌푸린 건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상상했던 상황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루시아?”
방에 들어온 늑대 옷의 여인.
그 늑대옷은 아까 전 에밀리아가 돌려주었던 것이 맞았다. 깨끗하게 해줄 수 있냐고 했고, 그렇게 해서 돌려주었다.
‘오늘 밤에 쓰일 거라고 했었지.’
그런데 왜 다른 여자가 입고 있는 걸까.
에밀리아가 아니라 루시아였다.
평소 입고 있던 하녀복이 아니라서 낯설기도 했지만, 에밀리아의 사이즈에 맞춰서 만들어서인지 조금 큰 느낌도 들었다.
“의... 의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잔뜩 떨리는 목소리로, 루시아가 말했다.
이미 배웠던 말이라, 의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모르겠다.
“의식?”
“말씀하시면 안 돼요.”
개입하면 안 된다는 건 말도 포함되어있던 거였을까?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최강혁은 더욱 황당한 기분이었다.
‘분명 세 가지가 있다고 했어. 부부의 혼약과 축복, 즐거운 축제, 그리고 이제 남은 건....’
깨끗한 피.
아마도 초야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에밀리아가 아니라 루시아가 여기에 있는 걸까. 오만가지 생각이 이어졌다.
〈 77화 〉 077.
077.
‘혹시... 아니야.’
에밀리아는 숫처녀가 맞다.
본의 아니게 확인했다.
그런데 왜....
‘이게 무슨, 야구도 아니고.’
대타라니. 뭐하자는 거야.
설마, 나 같은 놈한테 처녀를 줄 수는 없다는 걸까? 그 대신 하녀를 대신 보낸 거 아니냐고.
‘비즈니스라 이건가? 아니, 아까 좋다고 손도 잡았잖아. ...이건 좀 찌질하네.’
한 손을 들어 머리를 감싸쥐었다.
풀리지 않는 의문에 두통이 생기는 와중에도, 왠지 어깨를 잘게 떨고 있는 루시아가 조심조심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역시, 그런 건가.’
결혼은 했지만, 그것 뿐이라고.
일종의 선을 그은 것 아닐까.
마치 정략결혼처럼.
각자의 목적에만 충실하자고.
그 이상을 바라지는 말라고.
‘하지만... 정말 대신 품으랍시고 루시아를 보낸 거라면, 좀 화가 날 것 같은데.’
왠지 지금까지 기대하고 긴장하던 마음이 조금 식어버리는 기분이었다.
그것이 표정에 드러났을까?
다가오던 루시아가 그의 얼굴을 보고는 움찔 놀라며 다시금 고개를 푹 숙였다.
‘생각해보면, 결혼식 이후에도 줄곧 그 방에만 있었지.’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늘 그랬다.
뭐하는 곳인지 몰라도 방안에 하루종일 틀어박혀있는 게 보통이고, 종종 정원의 벤치에 앉아있는 것 말고는 산책 같은 걸 하지도 않았다.
허약한 체질일까 생각했었지만, 스캔한 대로라면 크게 문제도 없던 것 같은데.
아니, 지금 그런 게 문제가 아니지.
‘내가 너무 많은 걸 기대했던 걸까.’
조금 냉정해지기로 했다.
살짝 호흡을 가다듬으니, 화가 나려던 것이 스르르 가라앉았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조금은 에밀리아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다를 것도 없나.’
이쪽이 결혼을 구실삼아 생존을 꾀한 것처럼, 그녀 또한 나름의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예쁘다고 해도, 싫다는 여자를 강제로 범하는 취미는 없었다. 설령 부부관계가 되었다고 해도.
‘아니야. 아직 확실한 건 없어.’
그리 오래 보아오진 않았지만, 그런 일을 할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잖아.’
그저, 아직은 서로를 잘 모르니까.
그리고... 어쩌면 두려워서일 수도 있고.
‘의외로 단순한 이유일 수도 있고.’
그는 루시아가 걸치고 있는 늑대옷을 보았다.
종교의식의 마지막 단계.
어쩌면 그것과 연관된 일일 수도 있지 않을까.
‘모르겠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노력하겠다는 마음은 여전해.’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임하고 있든, 그는 자신이 생각한 대로 행할 생각이었다.
대충 할 생각으로 온 게 아니니까.
‘그나저나....’
두 걸음 정도 앞에 멈춰선 루시아는 여전히 어깨를 떨고 있었다.
창문으로 들어온 달빛에 비친 모습이 무척 여리고 가여워서, 보듬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여러 모로 그럴 수가 없었다.
‘내가 개입하면 안 된다고 했었지.’
살짝 올라가려던 손을 도로 내렸다.
그것이 나름의 신호가 되었을까.
루시아가 스스로 옷을 벗기 시작했다.
“.......”
머리에 후드처럼 쓰고 있던 늑대의 머릿가죽이 벗겨지고, 그 아래에 있던 망토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비슷하게 한 겹 한 겹 걸치고 있던 것들이 줄어드는 동안, 그 안에 감춰져있던 연약한 여인의 몸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
“이건 아니다.”
그 때였다.
최강혁이 나직이 말했다.
동시에 조용히 뻗은 단단한 손이, 한 겹 남아있는 상의를 벗으려던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아.”
루시아는 움찔 굳었다.
하지만 뭐라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달싹이던 입술을 억지로 움직여볼 뿐이었다.
“말씀하시면, 안 돼요.”
“아니. 아니야. 이건 아니지.”
최강혁은 그렇게 거듭 무언가를 부정하고 있었다. 이어서 다시금 뒤로 물러난 그는 조금 막막한 표정이 되어 창가로 걸어갔다.
“루시아.”
“네.”
“에밀리아가 당신을 보냈어?”
“네.”
“...맞나보네.”
의도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녀를 대신해서 보낸 건 확실한 모양이다.
‘이해할 수가 없네.’
그렇게 잔인한 사람이었을까.
아니, 어쩌면...
애초에 귀족과 평민, 평민보다 못한 신분들이 여전히 존재하는 세상이라면 그런 것도 당연한 걸까.
‘메이드는 평민보다 못한 신분이라고 했지.’
베티가 더 어린 헤인즈에게 경칭을 쓰는 것도 신분의 차이 때문이다.
기사의 종자일 뿐 기사가 아님에도, 적어도 그녀보다는 높은 신분이니까.
헤인즈 또한 나름의 예의를 갖추어 그녀를 대하고 있을 뿐, 원래는 하대를 해도 무방하다고 들었다.
“미치겠다.”
최강혁은 입을 열어 중얼거렸다.
루시아는 그가 한 말이 이쪽 언어가 아님을 알기에, 조용히 바라볼 뿐이었다.
“아니... 맞아.”
잠시 심호흡을 한 그가 고개를 돌려 루시아를 보았다. 가죽 한 장만 아슬아슬하게 걸친 그녀의 몸이 위태롭게 떨리고 있었다.
“당신이 싫어서가 아니야.”
“.......”
마다할 이유가 없다.
아내가 허락한 일이다.
어쩌면 종교적인 이유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루시아는 예뻐.”
예쁜데... 맞아. 예쁜데....
“아름다운 여자야.”
누가 봐도 그럴 건데.
이걸 마다하면 미친놈인데....
“...아.”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은 없었을까.
루시아가 얼굴을 들지 못하고, 가슴 앞에 모은 두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런 반응을 보이면 오히려 이쪽이 무안해지는데.’
아무튼, 그녀가 취향에서 벗어나는 건 아니다.
분명 예쁘다.
아담한 체구지만 그건 서양인 기준이고, 160중후반 정도는 된다. 아직 자라고 있는 건가 싶기도 하고.
“분명 객관적으로 보아도 굉장하지.”
다시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루시아는 주눅이 든 것처럼 어깨를 움츠렸다.
“.......”
최강혁은 여전히 그녀를 보고 있었다.
가녀린 몸이지만, 나올 곳은 나오고 들어갈 곳은 들어갔다. 신기할 정도였다.
‘착한 사람이지.’
무척 여린 여자다.
평소에도 그렇다.
지켜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으아, 죽겠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있어서인지, 한편으로는 품에 안거나 섹스를 할 때 어떤 표정이 되고 어떤 소리를 낼지 궁금하기도 했다.
손만 뻗으면 된다. 아니, 그냥 그녀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기만 해도 될 것이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
‘못 하겠어.’
그는 결국 고개를 저었다.
창문 밖을 향한 채로 크게 심호흡을 한 그는 성큼성큼 루시아에게 다가가, 바닥에 떨어져있던 옷들 중 가장 커다란 망토를 집어 잘 걸쳐주었다.
“...안 돼요.”
“나는 못해. 에밀리아에게 말해.”
그렇게 이야기한 최강혁은 땀으로 젖어있던 그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주었다.
“.......”
왠지 조금 전보다 더 발갛게 된 얼굴.
그런 루시아는 다시금 같은 말을 한 최강혁이 그녀를 복도로 이끌어주자, 마지못해 밀려나면서도 거듭 뒤를 돌아보았다.
“에밀리아에게 말해.”
“...알겠습니다.”
하지만 결국 평소대로의 침착함을 되찾은 그녀가 메이드 특유의 자세로 예를 취했다.
그렇게 복도 너머로 멀어지는 루시아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최강혁은 조용히 문을 닫고 들어와 얼른 창문쪽으로 달려갔다.
“뚜와씨! ...뒤지는 줄 알았네.”
솔직히 눈 딱 감고 저지르고 싶었다.
이건 공인된 행위니까. 명분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마음도 바닥으로 쑤셔박혔다.
그 정도로 강렬한 냄새였다.
“루시아는 예뻐.”
예쁜데 냄새나.
“아름다운 여자지.”
아름다운데 냄새나.
‘이게 무슨 빌어먹을 갭이냐고.’
아무리 보기 좋은 음식이어도, 냄새가 구리면 입으로 안 들어간다.
뭐, 개중에는 악취가 심해도 맛있는 케이스가 있긴 하지만... 역시, 이건 좀 아니었다.
‘냄새가 나서 못하겠다고 이야기할 순 없잖아.’
어떤 마음으로 에밀리아에게 뜨거운 물을 보냈는데. 어떤 마음으로 비누를 보냈는데.
‘일이 왜 이렇게 되는 거야.’
미세먼지가 전혀 없을 듯한 상쾌한 밤공기.
조금 전까지 맡았던 악취와 암내가 기억속에서 조금씩 흐려지자,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
‘조금만 참아볼걸 그랬나.’
자발적으로 와서 벗고 있었잖아.
그런데도 안 한 건 역시 바보짓이지.
벅벅 씻기고서라도 했어야 맞지.
아니. 인벤토리에 욕조도 있고, 물도 있고, 비누도 있잖아.
‘근데 그건 씻겨서 될 냄새가 아니었어.’
스스로에게 항변해보았다.
그다지 깔끔떠는 성격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그건 역시 좀 아니었다고.
‘그래도 씻겼으면... 아니야.’
그는 여전히 방안에 남아있는 냄새의 잔재에 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오늘은 아니야.’
종교적으로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만, 못하는 건 못 하는 거다. 각성자라고 후각을 차단하거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후각이 더 강해졌다고.’
방에 있으려니 냄새가 계속 나는 것 같아서, 창문을 더욱 활짝 연 그는 복도쪽의 문도 열고 환기를 시키기로 했다.
‘안 되겠다. 나갔다와야지.’
왠지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열려있던 창문 밖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냄새도 뺄겸, 생각도 정리할겸 정원 산책이나 좀 하다 들어올 생각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 쯤 밖에 있다가 들어왔다.
창문으로 되돌아가려는데 왠지 몰라도 닫혀있어서, 일단 현관으로 들어가 이층 복도로 향했다.
‘어라.’
그런데, 분명히 열어두었던 복도 쪽의 문도 다시 닫혀있었다.
그 사이에 루시아나 베티가 와서 닫은 걸까.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그는 발을 멈칫했다. 방 안에서 왠지 낯설지 않은 냄새가 느껴졌다.
악취나 암내가 아니었다.
이정도면 향기라고 해도 무방했다.
“......?”
침대 끝에 걸터앉은 에밀리아가 이쪽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평소 입던 옷 위에, 아까 전 루시아가 걸치고 있던 늑대 가죽 망토를 두르고 머릿가죽을 올려쓴 모습이었다.
“의식. 해야 해요.”
그녀가 입을 열어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면서도 왠지 어깨를 떠는 건 아까 전의 루시아와 다르지 않았다.
“...네.”
“말하면 안 돼요.”
끄덕끄덕.
최강혁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한 것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그냥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할 듯 했다.
‘첫날밤을 이렇게 치러도 되는 건가.’
생각이 복잡해졌지만, 천천히 후드와 망토를 벗는 에밀리아를 보자 고민이 사라졌다.
‘그냥 닥치고 있자.’
침대 옆 협탁.
방문 옆 벽의 위쪽.
구석의 책상 위.
세 곳에서 등잔불이 일렁였다.
창문을 열어 달빛을 들이지는 않아도, 그 안에 있는 것들을 분간하지 못할 만큼 어둡지는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옷을 벗고 있는 에밀리아의 머리카락.
낮의 햇살을 받을 땐 조금 분홍 빛을 띄지만, 지금 이렇게 보면 좀 더 붉은 듯 보이는 금발.
‘로즈 골드 같은 느낌이야.’
손을 뻗어 만져보고 싶은 머릿결이 희미하게 찰랑거릴 즈음, 그 아래에 자리하고 있던 마지막 한 꺼풀의 천이 완전히 사라졌다.
“.......”
그리 작지도, 그렇다고 과하게 크지도 않은 가슴이 협탁 등잔의 불빛을 받아 부드러운 굴곡을 드러내고 있었다.
조금은 앙증맞은 느낌의 유두를 바라보던 그는 흘끔 자신을 보는 그녀와 눈이 마주쳐 멋쩍게 웃었다.
“.......”
잠시, 그가 바라보던 곳이 어디인지를 가늠해보듯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던 에밀리아는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도 하던 일을 멈추지는 않았다.
완전한 나신을 드러낸 그녀는 이어서 그의 옷을 벗겨주었다. 최강혁은 곰가죽옷을 입지 않았던 터라, 벗기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음?’
이어서, 그녀가 다가와 두 손을 그의 가슴팍에 붙였다. 뭘 하는 건가 싶었는데, 왠지 애를 쓰는 것 같아서 다시 보니 나름대로 힘을 주어 밀고 있는 것 같았다.
‘아. 침대로 가라는 거구나.’
이렇게 힘이 없어서야.
역시 좋은 걸 많이 먹여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녀가 미는대로 밀려가 침대에 누웠다.
“.......”
에밀리아 역시 침대 위로 올라왔다.
그의 하반신 쪽으로 조심조심 내려가는 모습이, 뭔가 알고 하는 게 아니라 어디서 배운 것을 처음으로 실습해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더니 움찔한다.
이미 잔뜩 성이 나있는 그의 성기를 보고 놀란 것 같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그 앞에 어색하게 멈춰있는 손이 왠지 귀여웠다.
‘아하.’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도 그걸 세워야 한다고 배운 모양이다.
그런데 배운 것과 달리 이미 벌떡 서있으니, 거기서 막힌 거지.
‘내가 잘못했네.’
뭐라 알려주고 싶지만, 말하면 안 된다고 하니까 입을 다물고 있었다.
‘화이팅이야.’
그저 속으로 응원해줄 뿐이었다.
〈 78화 〉 078.
078.
“.......”
에밀리아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손 끝으로 그것을 만져보더니, 이내 용기를 낸 듯 두 손으로 위아래를 감싸쥐었다.
“...아.”
그리고는, 또 뭔가 배운 것하고 다른지 살짝 난감한 얼굴을 했다.
살살 위아래로 쓸어보던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던 그와 눈이 마주치고는,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왜 웃어.’
마주 웃어줘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에밀리아가 천천히 그의 위로 올라왔다.
아마 기승위를 생각하는 것 같은데, 어디에서 허리를 내려야 할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나도 웃고 싶어지네.’
그래도 어떻게 어떻게 더듬어가며 위치를 맞추었다.
여전히 단단하게 솟아있는 그의 성기 끝을 조심히 자신의 아래로 가져가는 모습에 왠지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살짝 아래에 힘을 주었더니, 그의 성기가 덜렁거리며 그녀의 손을 빠져나갔다.
“아....”
비슷하게 다시금 자세를 잡을 때, 또 그렇게 빠져나갔다.
그녀도 비로소 그가 장난을 치고 있음을 깨달았는지, 이쪽을 살짝 흘겨보고는 그의 아랫배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때렸다.
‘젖어있지 않으면 곤란할 텐데.’
최강혁은 그런 생각을 했다.
눈에 보이는 그녀의 아래쪽은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순백색이었다.
조금은 붉은 느낌의 등잔불에 비쳤음에도 이정도면, 드러난 얼굴과 팔과 비슷할 만큼 창백한 느낌일 것이다.
음모가 조금 자라있었지만, 마치 일부만 남겨놓고 왁싱을 한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양이 적고 가늘었다.
‘진짜네. 머리하고 같은 색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의 귀두 끝에 느낌이 왔다. 에밀리아가 자신의 아래에 맞추고 천천히 몸을 누르고 있었다.
“으....”
아픈 것 같았다.
그저 닿기만 한 정도인 것 같은데,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안쓰럽게 바라보는 그를 보더니, 개입하면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어보였다.
이어서 다시금 천천히 자신의 체중을 그의 몸에 실었다.
‘들어가고 있어.’
의외로 그리 뻑뻑하지 않았다.
나름 젖어있던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절반도 안 들어갔는데 그녀는 벌써 기진맥진한 얼굴이었다.
‘올려쳐줄까.’
한 방에 끝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그것도 개입이라고 할까?
‘가만히 있자.’
태어나 처음 겪는 일이다.
두 번 겪을 수도 없는 일이고.
그러니 허튼 짓으로 방해할 수는 없다.
안타깝지만, 꾹 참고 지켜보았다.
“.......”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에밀리아가 두 손을 내밀어, 안쓰러움에 아래로 쳐져있던 그의 입술 양쪽 끝을 위로 올려주었다.
마치, 찡그리지 말고 웃으라는 듯이.
“괜찮아요.”
그리고, 다시금 한참을 애쓴 끝에 그녀의 엉덩이가 그의 허벅지 즈음에 닿았다.
마지막에는 드득, 하면서 살짝 좁은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것으로 완전히 삽입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괜찮은 걸까.’
굳이 그쪽을 강화한 적은 없지만, 전체적으로 몸이 달라지면서 덩달아 커지긴 했다.
그래서 조금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삽입에는 문제가 없던 것 같았다.
‘근데,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되는 거지?’
의식이라는 게, 단순히 깨끗한 피를 보이기만 하면 되는 건지, 아니면 거사를 다 치러야 하는 건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허벅지에 주저앉아 숨을 고르고 있는 에밀리아를 보니 아직 안 끝난 것 같았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왠지, 조금은 뿌듯해진 눈으로 살짝 고개를 끄덕이기에, 비슷하게 웃어주며 마주 끄덕여주었다.
‘고생하네.’
이건 사랑도 욕정도 뭣도 아니다.
섹스가 아니라 일종의 과제 수행 같다.
열심히 해서 성과를 얻었으니 칭찬을 해주고 싶지만, 아직 입을 열면 안 되겠지.
“으음....”
에밀리아가 천천히 몸을 세워 올렸다.
단단히 박혀있던 자신의 성기가 조금씩 도로 드러날 때, 최강혁은 분명히 그곳에 묻어있는 혈흔을 볼 수 있었다.
‘막 흐르고 그러진 않는구나.’
개인차가 있다고 듣긴 했는데, 그래도 출혈이 심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중간 즈음까지 보이던 그의 성기가 다시금 내려온 허벅지와 둔덕에 가려졌다.
“아흑...!”
그렇게 확 내려오면 당연히 아프겠지.
안타까워하던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흑...!”
아니. 그게 그렇게 계속 하라는 의미는 아니었는데. 또 그렇게 세게 내려앉으면....
보다 못한 그는 살짝 들어올린 손으로 손바닥을 보였다. 천천히 느릿느릿하게 하라는 제스쳐를 보이자 그녀가 이해한 듯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나름대로 애쓰고 있던 그녀가 문득 그를 보았다. 왠지 뭔가를 묻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나와야 한다고 했어요.”
“......?”
“배운 것하고 달라요.”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뭐가 나온다는 거지.’
지금 나올 만한 게 있나.
잠시 생각해보니, 문득 떠오른 게 있었다.
‘내가 싸야 되는구나.’
근데, 지금 상태로는 사정은커녕 발기를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런 쪽의 감정은 거의 사라지고, 안쓰러움과 기특함이 적당히 버무려진 기분이었으니까.
‘뭐, 이미 길은 낸 것 같으니, 적당한 수준이면 괜찮을까.’
이래도라면 밤을 새워도 끝나지 않을 것 같으니, 조금만 개입하기로 했다.
여전히 노력 중이던 에밀리아는 문득 지금까지와 다른 감각을 느꼈다.
규칙적으로 느껴지던 충격과 아픔이 좀 더 빠르게 찾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아, 아앗!”
아팠다.
하지만, 그녀가 혼자 애를 쓸 때보다 오히려 나은 느낌이었다. 비로소 그녀는 남편이 아래에서 허리를 살짝 살짝 올려 쳐주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를 바라보자, 괜찮냐는 듯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도 잘은 모르겠지만, 그런 것까지 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모르겠어요.”
끄덕끄덕.
최강혁은 적어도 안 된다는 건 아니라는 것에 확신을 가졌다. 그가 제대로 돕기 시작하자, 이전보다 그녀의 표정이 좀 더 좋아진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뭔가....’
약간 부족하다.
‘그래도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도우미의 기능을 활용해서 야동이라도 추가로 틀어볼까 생각했지만, 그건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아.’
오히려 아내에게 집중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과 가쁜 호흡.
아픔에 찡그리면서도, 그 사이 사이 희미하게 보이는 다른 감각에 대한 반응.
거듭 이쪽을 바라보며 뭔가를 확인하려는 듯한, 왠지 울 것 같은 두 눈.
분명 그것은 사랑이 아닐 테지만, 적어도 지금 이순간 만큼은 왠지 조금 비슷한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어... 조금 오는데.’
그렇게, 비로소 희미하게 느껴지던 사정감의 끝을 붙잡았다.
“학, 하악.... 아윽, 윽!”
단지 아픔 뿐인지, 아니면 그 안에 조금이라도 쾌감이 섞여있는지. 그녀의 달뜬 교성이 방안을 울렸다.
“...윽.”
그리고, 최강혁은 막혀있던 벽을 뚫듯 쾌감의 끝에 달했다.
울컥거리며 터져나온 대량의 사정.
단순히 오랜만이어서가 아니라, 그 힘이나 양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오래 쌓아두긴 했지.’
그가 사정하고 있는 걸 아는 걸까.
어느새 함께 움직이던 것을 멈춘 에밀리아가 가만히 숨만 헐떡이고 있었다.
조금 의아한 건, 그가 사정을 시작하면서부터 그녀의 몸이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해서였다.
‘이게 그건가?’
사정을 해야 한다는 이유.
아마도 종교적인 의식의 마지막 부분일까.
그렇다면, 정말 단순한 풍습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신에게 바치는 뭔가가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다 되었어요. 의식, 끝났어요.”
온몸이 땀으로 흥건해진 에밀리아가 탄식처럼 말하고는 그의 품으로 풀썩 쓰러졌다.
여전히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그녀를, 최강혁은 조심조심 두 팔로 감싸 안아주었다.
얼굴을 간질이는 그녀의 젖은 머리에선 땀과 비누냄새에 섞인 체취가 느껴졌다.
“노력했어요. 잘했어.”
아는 단어 중에서 골라 이야기해주었다.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머리를 토닥여주니, 그의 품 속에서 잘게 어깨를 떨며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슬퍼?”
이런 식으로 처녀를 잃고 싶지는 않았겠지.
미안한 마음에 다시 꼭 안아주니, 그녀가 눈물을 흘리면서도 애써 웃는 얼굴로 말했다.
“기뻐요.”
“음?”
“신께서 기뻐해요.”
“알아?”
“빛나요. 신의 대답.”
“아....”
“의식, 잘 끝났어요.”
“글쎄.”
최강혁은 그녀를 안고 있던 그대로 번쩍 들고 일어났다.
“...아?”
그의 일부는 여전히 그녀의 안에 있었다.
분명 사정을 했는데도 발기가 풀리지 않고 여전히 단단했다.
“의식 끝났어.”
“네.”
“나는 안 끝났어.”
“......?”
조금 어리둥절하던 그녀는 곧 그가 한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 * *
“...아.”
멍한 얼굴로 하늘을 보던 루시아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언제 왔는지 앞에 선 베티가 그녀를 살펴보고 있었다.
“괜찮은 거야?”
“네. 괜찮아요. 아가씨는 일어나셨어요?”
“눈은 뜨셨는데, 오늘은 못 움직이실 것 같아. 그래도 회복마법이 있으시니까 금방 일어나시겠지.”
“아....”
“뭘 그렇게 죽상이야? 그분께서 그렇게 요구하셨으니 어쩔 수 없던 거지.”
“그래도요. 애초에 제가 들어온 건....”
“걱정 마. 일이 이렇게 되었다고 잘리기야 하겠어?”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준 베티가 종종걸음으로 멀어지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거 알아?”
“네?”
“우리 숙소, 새로 지어주신대.”
“...네?”
“숙소 말이야. 지금 건물은 고치는 것보다 새로 짓는 게 낫다고 하셨어.”
“누가요?”
“누구긴 누구야. 새 가주님이지.”
신이 난 듯 말한 베티는 그래도 먼저 시작된 일들이 있으니 좀 더 걸릴 거라고 덧붙였다.
“샤워장을 만드신대. 그건 들었어?”
“아니요.”
“창고 뒤쪽 공간에 가봐. 지금쯤 터는 다 닦였을 거니까. 너무 넓은거 아닌가 했는데 글쎄, 우리가 쓸 곳도 같이 만들어주신다는 거야!”
다들 굳이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씻는 걸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단지 이런 저런 여건에 맞춰서 적응하다보니 지금처럼 되었을 뿐.
“신께서 좋은 분을 보내주셨어. 아가씨에게 딱 어울리는 사람이잖아.”
“네. 그러네요.”
루시아는 조금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베티의 말이 맞았다.
그분이 오시고 나서부터 많은 것이 달라졌다.
고작 한 달도 되지 않았음에도, 이미 이곳에 없어선 안 될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런 저런 생각들에, 애써 고개를 저어 흩어버린 그녀는 옷 매무시를 다시 점검하고 본채로 향했다.
“괜찮아.”
에밀리아는 정말 괜찮은 얼굴로 말했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본채 바깥까지 흘러나오던 이런 저런 소리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었다.
“신께서 기뻐하셨어. 그거면 된 거야.”
“.......”
“걱정하지 마. 네가 노력한 걸 알고 있어. 그분도 그렇게 말했어.”
“그러셨나요?”
“응. 널 걱정하셨어. 나중에, 좀 더 많은 대화가 가능해지면 그 때 제대로 이야기해볼 수 있을 거야.”
“...아가씨는 괜찮으신건가요? 거동이 불편하시다고 들었어요.”
“아. 못 걸을 정도는 아니야. 아까는 좀 그랬는데, 지금은 많이 괜찮아졌어.”
“제가 밖에 대기하고 있을 테니, 무엇이든 필요하시면 불러주세요.”
“그래.”
루시아가 조용히 방을 나섰다.
에밀리아는 다시 누웠다.
그녀의 방에 있는 침대와는 뭔가 달랐다.
좀 더 따뜻하고, 푹신하고, 그의 체취가 있었다.
그렇게 누워있으니 스르르 잠이 왔다.
‘못 잤으니까.’
자기는 안 끝났다더니, 그 이후로도 밤 새도록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처음이었단 말이야. 사람이 배려심이 없어.’
죽을만큼 아팠다.
이상하게 화가 나지는 않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쪽을 신경써주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입을 맞추는 건 좋았어.’
그쪽 언어로 키스라고 했다.
다른 이들이 하는 걸 얼핏 본 적은 있지만, 직접 해보니까 상상과 많이 달랐다.
‘능숙했어. 화나.’
다른 여자랑 해본 거겠지.
괜시리 질투가 나기도 했지만, 그래도 지금은 자신의 남편이니까 괜찮았다.
‘앞으로는 여기서 살게 되는 거니까.’
신기한 남자였다.
지금까지 보여준 것보다, 숨겨진 재주가 더 많을 것 같기도 했다.
“.......”
어느 계열의 마법인지는 몰라도, 거사를 치른 흔적이 남아있는 침대보가 순식간에 깨끗해져서 다시 깔리는 건 좀 신기했다.
‘세탁 쪽은 정령계열 말고는 드물다고 하던데. 순수 원소 쪽에도 그런 식의 응용법은 없었고.’
정령 마법은 아니었다.
그쪽 계열을 익히진 않았지만, 그래도 정령이 있다면 알았을 텐데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세상의 마법은 좀 더 실용적인 쪽으로 발전한 걸까.’
그러면, 혹시 내 연구에도 도움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쉽게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신분패를 신청했으니, 다음달 정도면 도시에 함께 가볼 수도 있겠구나.’
그가 말과 글을 배우고 싶어하니, 그쪽의 서적이나 사람을 소개해줄 생각이었다.
돈이 적잖게 들겠지만, 그정도는 괜찮았다.
‘기뻤어. 조금.’
상황을 잘 모르고 그런 거겠지만, 그래도 루시아를 돌려보냈을 때 조금 좋았다.
‘무섭게 생겼지만. 좋은 사람 같아.’
베개에서 좋은 향기가 났다.
이불속으로 푹 파고든 그녀는 손가락의 반지를 만지작거리다 잠이 들었다.
〈 79화 〉 079.
079.
좋은 아침이다.
지쳐 잠든 아내의 이마에 입을 맞추니, 우웅 거리며 투정을 부린다.
이불을 잘 덮어주고 나왔다.
짹짹!
“그래. 섹스했다.”
새들의 소리가 짓궂은 농담처럼 들려왔다.
밤의 잔재가 섞인 새벽의 찬바람도, 서서히 걷혀가는 안개와 그만큼 드러나고 있는 먼 숲의 전경도 모두 어제와 달랐다.
“유부남이야. 이제.”
어깨가 무거울 줄 알았다.
부담감이 커지고, 도망치고 싶어지고.
그럴 줄 알았는데.
‘좋은데. 엄청.’
아직 제대로 겪지 못해서일까.
지금은 마냥 좋았다.
‘아기가 생길 수도 있겠지.’
피임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았으니.
어쩌면 내년 이맘 땐 아빠가 되어있을지도.
‘말과 글을 익혀야 해.’
에밀리아가 있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언어능력이 떨어지면 어떤 식으로든 자식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주먹구구식 대화였지만, 에밀리아와도 그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 달 정도면 도시에 갈 수 있을 거라 했지.’
신분패를 신청했다는 것 같았다.
아마 신관이 돌아가는 대로 결혼 인증을 처리하면, 그것을 토대로 그의 신분이 보장되는 모양이다.
‘그렇게 쉽게 되는 건가.’
다른 세상에서 온 이방인인데.
‘음... 에밀리아의 신분이 확실해서겠지.’
아무튼 도시에 가보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이 어떤 수준의 문명을 갖고 있고, 앞으로 그가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
‘딱히 튀고 싶진 않은데.’
조용히, 평화롭게 살고 싶다.
그런 점에선 에밀리아라는 여자를 잘 만난 것 같긴 한데....
‘좋게 말하면 집순이인데, 좀 은둔형 폐인 비슷한 느낌도 들고.’
뭐든 적당한 게 좋으니까, 자주 데리고 나와서 햇빛이라도 쬐게 해야 할 것 같다.
탁탁.
바닥을 두어 번 굴러본 최강혁은 흐뭇한 얼굴로 숲을 향했다. 앞으로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적지 않았다.
“일단, 나무가 많이 필요해. 마구 베어주마.”
* * *
“저... 잘린 겁니까?”
헤인즈가 멍한 얼굴로 물었다.
엘리사벳이 손바닥으로 등짝을 후려치고 나서야 정신이 조금 돌아온 듯 했다.
“억!”
“잘리긴 누가 잘려? 어디서 뭔 소리를 듣고 왔길래 이래?”
“오늘부터, 벌목일을 하지 말라고 하셔서요.”
“아가씨께서 그러셔?”
“아니요. 가주님이요.”
“...음.”
벌목일은 중요하다.
아직 겨울은 아니지만, 평소 부엌에서 쓰이는 양도 제법 되니까.
게다가 슬슬 추워지고 있다.
벽난로를 때는 시간이 늘어난다.
“오히려 더 많이 베어야 하지 않아? 땔감 적재량 좀 아슬아슬하던데.”
“그러니까요.”
그녀가 다치기 전엔 함께 했었는데, 그렇게 되고 나서는 온전히 헤인즈의 몫이 되어버렸다.
원래대로라면 평소 쓰는 양에 겨울 용으로 비축할 땔감까지 필요하지만... 헤인즈는 그 일 말고도 온갖 일을 하고 있어서 시간이 부족했다.
“좀 쉬고 있어. 내가 알아봐줄게.”
“같이 가면 안 됩니까?”
“그러면 따지러 가는 것처럼 보이잖아.”
헤인즈를 그곳에 남겨둔 엘리사벳이 곧장 움직이려다 멈칫했다.
“근데, 그 분 어디 계시지?”
“숲으로 가셨다고 했어요.”
“숲이라. 알았어.”
최강혁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숲 안으로 들어간 게 아니라, 그 초입 즈음에서 뭔가를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엘리사벳은 가주께서 헤인즈를 자르려는 것이 아님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헤인즈는 엘리사벳의 부하지?”
“네.”
“기사가 될 수 있고.”
“자격을 얻으면요.”
“자격?”
“확인합니다. 실력을 확인하고, 시험을 통과.”
“아. 대충 알겠다.”
고개를 끄덕인 최강혁은, 앞에 자리한 그루터기를 제거하고 땅을 메웠다.
조금 전에도 비슷한 광경을 보았지만, 엘리사벳은 여전히 신기한지 그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기사. 수련 필요해. 맞지?”
“네.”
“헤인즈. 지금 기사 아니야. 하인이다.”
“.......”
“놀리는 것 아니야. 헤인즈, 시간 부족해. 일을 줄여. 수련 필요해.”
“그 말씀은....”
“내가 더 잘하는 일, 내가 해. 헤인즈는 시간 생겨. 수련해.”
“...아.”
그렇지 않아도 우려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현실 앞에서 그런 우려조차도 거의 무뎌졌지만, 이제와 다시금 뜻 모를 기대감이 생겨났다.
“엘리사벳.”
“네.”
“헤인즈, 굴려.”
“굴려요?”
“수련. 강하게.”
“...이해했습니다.”
잡일을 하느라 수련 시간을 빼앗겨왔다.
그만큼 뒤쳐졌으니, 따라잡으려면 더 강하게 몰아붙여야 한다.
얼굴 가득 기쁨을 숨기지 못한 엘리사벳은 이어진 최강혁의 말에 눈이 더 커졌다.
“완성이요?”
“조금 다듬고 있어. 이따가 저녁에 줄게.”
그녀의 갈비뼈들을 부러뜨린 것이 미안하다며, 대신 주기로 했던 것.
그것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당장 볼 수 없겠냐고 여쭙고 싶었지만, 가주를 귀찮게 할 수는 없으니 얼른 군례를 취하고 물러났다.
‘그나 저나 헤인즈, 이 자식.’
잘리긴 뭘 잘려.
가주의 명령이 떨어졌으니, 제대로 굴려주마.
“굴린다는 표현, 꽤 괜찮은데.”
왠지 입에 붙는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헤인즈가 이리 저리 굴러다니는 모습이 그려졌다.
“어디 보자. 아직도 많이 남았네.”
평소 지나다니며 볼 때와 달랐다.
제대로 제거하려고 하니, 상당히 오래되어보이는 그루터기들까지 새롭게 눈에 들어왔다.
“이쪽까지 끝나면 얼추 공간이 나오겠어.”
슬슬 점심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에밀리아도 이제 거동에 문제가 없으니, 오늘은 함께 식사할 수 있을 것이다.
‘못 걸을 정도일 줄은 몰랐지.’
중간부턴 왠지 덜 아파하는 것 같았는데, 생각해보니 그녀의 몸이 진통성분이라도 뿜어냈던 걸까 싶었다.
그 후유증이 제법 컸다.
거의 하루는 꼬박 방에서 지내고, 이제 조금 바깥 활동이 가능해졌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침실이 따로 있다고 했다.
지금 자신이 사용하는 방은 임시로 쓰게 했던 곳이고, 그녀가 사용하던 큰 침실이 별도로 있다고. 앞으로는 그곳에서 자면 된다고.
‘각방을 쓰는 건 안 되겠지.’
혼자만의 공간도 필요할 것 같지만, 당장은 아니었다. 어차피 잠을 잘 때 말고는 방에 가지도 않았고.
‘잠은 그쪽에서 자기로 하고... 일단 가서 상태를 보고 고칠 만한 게 있으면 손을 봐야겠다.’
보수할 곳이 많았다.
멀쩡해보이던 본채도 조금 꼼꼼하게 살펴보니 손 댈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었다.
‘나무로 만들었으니 어쩔 수 없겠지.’
지붕 곳곳이 삭아있었다.
나름대로 송진 같은 걸 발라서 방수처리를 한 것 같은데, 그리 솜씨 좋은 기술자가 작업한 게 아닌 듯 보였다.
‘난로 굴뚝도 청소해야 하고.’
하녀들의 숙소는 아예 새로 짓기로 했다.
지금의 숙소 상태가 너무 열악해서, 미리 알아두지 못한 것이 미안할 정도였다.
‘쥐들하고 같이 사는 건 너무하잖아.’
헤인즈가 사는 별채는 그나마 나았다.
조금 보수하면 나름 괜찮겠지만, 그래도 내보낼 계획이었다.
‘좋아.’
다름아닌, 지금 그가 확보하고 있는 공간에 지어질 건물이 헤인즈와 엘리사벳을 위한 곳이었다.
‘건물이 아니라 시설이라고 봐야 하나.’
기사라면 훈련이 필요할 것이다.
연병장 느낌으로 공터를 만들고, 그 옆에 작은 숙소와 창고 건물을 붙여놓을 생각이었다.
‘창고에는 훈련 도구나 각종 장비들을 넣어두면 되고, 숙소는... 적어도 한 개 분대 정도는 들어가야겠지.’
형편상 그런 병력을 유지하긴 어려워보이지만, 그래도 처음 지을 때 넉넉하게 짓는 편이 좋을 듯 했다.
‘점심 먹고 와서 저쪽까지 마저 치우면, 얼추 축구장 절반 정도는 나오겠어.’
이곳은 에밀리아의 땅이라고 했다.
그녀의 부모에게서 받았다고.
‘비슷한 처지지.’
그녀의 부모가 이미 세상에 없다는 것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부친의 형인지 동생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남자 형제가 그녀의 보호자가 된 모양인데... 아마도 그 후에 가문과 척을 지게 된 것 같았다.
‘그래서 멀리 떠나왔고.’
아직 다 알지는 못한다.
그저, 다른 세상 남자를 불러와서 결혼해야 할 만큼 절박한 상황이었음을 짐작해볼 뿐.
‘그렇게 절박해보이진 않았는데.’
그리 풍족하진 않아도 나름 돈은 있는 것 같고, 어디까지인지 몰라도 상당히 넓은 땅까지 갖고 있다.
시녀가 둘.
기사 하나에 종자까지 해서 병력이 두 명.
거기에 본인은 마법사인 걸 생각해보면, 조건이 괜찮은 것 아닐까.
‘이쪽 세상의 생활 수준을 모르겠네. 그래도 가난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조금 이상한 부분은 있었다.
뭘 해서 먹고 사는 건지가 불분명했다.
‘나가는 돈은 있는데, 들어오는 돈이 안 보여.’
듣기로는 주기적으로 도시로 가서 생필품을 사온다는데, 그러려면 돈이 있어야 하지 않나.
‘부모 유산을 까먹고 있는 걸까.’
[점심식사 10분 전입니다.]
도우미의 알림을 본 그는 현장을 적당히 정리하고 집으로 향했다.
매일 정확히 같은 시간에 식사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거의 비슷한 편이어서 지금쯤 가면 얼추 맞았다.
“왔어?”
조금 혈색이 돌아온 에밀리아를 보며 웃었다.
“.......”
그녀가 그를 흘겨보더니 식탁 아래에서 그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아니, 꼬집으려 했지만 너무 단단해서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그러자 이어서 옆구리로 손을 뻗었지만, 비슷하게 내려온 그의 손에 붙잡히곤 얌전해졌다.
한번 꼭 잡아준 후에 놓았다.
‘음. 오늘 점심도 좋네.’
고기가 듬뿍 들어간 스튜에 화덕에 구운 빵을 찢어서 담갔다. 고기는 그가 제공한 것이고, 밀가루도 마찬가지였다.
밀가루는 지구산이 아니었다.
이곳에도 밀가루가 있다는 건 와서 알게 되었지만, 그 양이 많지는 않았다.
지난 번 결혼식 준비를 이유로 헤인즈가 도시에 다녀올 때 한 포대를 사왔는데, 결혼식이 끝난 후에 그 중에서 한 줌을 챙겼다.
‘밀가루 제작은 마나가 별로 안 들었지.’
제작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생산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인벤토리에 샘플이 생긴 터라 도우미를 활용해서 만들어내는 게 가능해졌다.
‘대량까진 무리가 있지만.’
금속 같은 것에 비해서는 들어가는 마나량이 적지만, 그래도 적당한 양이었을 때의 이야기였다.
‘지금처럼 소소하게 식구들 먹을 빵을 만드는 정도라면 문제 없지.’
20킬로그램을 만들었다.
별도로 제작한 포대에 담아서 부엌에 꺼내놓았다. 베티와 루시아가 놀라던 게 기억난다.
원래 갖고 있던 것이라고 해두었다.
아무리 같이 사는 이들이라고 해도, 적어도 아직은 알려줄 수 없는 이야기니까.
에밀리아에게도 따로 설명해주지 않았다.
‘이쪽 언어를 제대로 배우면, 그 때 많은 걸 이야기할 수 있겠지.’
식사는 풍족했다.
고기와 채소,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고 조화롭게 차려진 식단이었다.
최강혁은 헤인즈와 눈을 마주쳤다.
왠지 고마움이 가득하면서도, 조금은 구조요청과 비슷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벌써 굴리고 있나보네.’
땅에 굴리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건 이해했을 것이다. 엘리사벳은 뛰어난 기사라고 들었으니, 잘 가르치겠지.
‘이들에게 맞는 장비들을 만들어주는 것도 좋겠어.’
지금까지 아내를 지켜주었던 이들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많을 거야.’
* * *
오후가 지나갔다.
어느덧 저녁노을이 질 즈음, 다들 본채 식당으로 모였다. 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적어도 얼굴과 손은 깨끗하다는 것이었다.
“또 하루가 가네요.”
“그러게.”
아직 샤워장이 다 지어진 것은 아니지만, 임시로 세면장을 설치해두었다.
식사 전엔 손과 얼굴을 씻어야 질병을 예방할 수 있다고 새로운 가주가 손짓 발짓으로 이야기했기에, 다들 그것을 존중하여 따라주었다.
신기한 것은 세면장에 설치된 수도꼭지였다.
두 개의 관과 연결되어있는데, 이리 저리 비틀어 올리면 수온이 조절되어 원하는 온도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것이 연결된 금속탱크 안에 각각 찬물과 뜨거운 물이 담겨있어서 가능한 일이라는데, 따로 끓인 적도 없는 물을 어디에서 구하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마법사인 에밀리아조차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일이 많아졌다. 일반적인 마법에서 살짝 궤를 달리하는 일들이었다.
특히 두 관을 동시에 연결한 통합형 수도꼭지는 도시에서도 근래 들어서야 조금씩 퍼지기 시작한 방식이었다.
기존까지는 각각 개별적으로 열고 닫는 밸브형 장치가 보통이었다.
남편이 살던 세상에 대해 아는 게 없던 터라, 그렇게 새로운 것들을 보여줄 때마다 그쪽 세상에 대한 상상이 크게 흔들리곤 했다.
〈 80화 〉 080.
080.
“엘리사벳. 기다려.”
저녁 식사가 끝났을 때.
가주가 기사를 불러세웠다.
자기가 불린 게 아님에도, 모두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자.”
최강혁이 그녀 앞에 뭔가를 꺼내놓았다.
작은 기둥 같은 나무 조형물 위에 걸쳐진, 금속성의 갑주였다.
“.......”
“엘리사벳 몸, 숫자, 만들었어. 잘 맞을 거야.”
“아....”
보는 순간 입을 열지도 못하고 쳐다만 보던 그녀는 이제 너의 것이라는 말에 비로소 조심조심 손을 뻗어 그것을 만져보았다.
어떻게 만든 걸까.
단순한 한 두겹의 철판이 아니다.
작고 얇으면서도 무척 단단한 느낌의 철조각들이 파충류의 비늘처럼 촘촘이 고정되어있었다.
“비늘갑옷. 이곳에도 있나?”
“이런 방식은 처음 봅니다.”
사각형의 철편을 각각 꿰어 이은 방식의 갑옷은 있다. 하지만, 이것처럼 촘촘하거나 정교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우와.”
“멋져요.”
주변에 있던 이들이 감탄했다.
단지 살짝 걸쳐보았을 뿐, 별도의 조임쇠는 그대로 두었음에도 그녀의 몸에 정확히 들어맞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제야 조금 전 최강혁이 이야기했던 알아듣지 못할 말이 뒤늦게 이해되었다.
그녀의 몸, 숫자.
아마도 신체 치수를 이야기한 것 같았다.
“가문과 계약한 공방도 이 정도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좋아?”
“네. 좋습니다. 저에겐 과분한 선물입니다.”
“다음 말은 모르겠어.”
“아... 많이 많이 좋습니다.”
“오.”
고개를 끄덕인 최강혁은 옆쪽에서 물끄러미 보고 있는 헤인즈를 향했다.
“굴렀어?”
“예? ...아, 예!”
“많이 굴러. 충분히 강해져. 내가 선물 준다.”
“......!”
눈이 왕방울만해지는 헤인즈에게서 고개를 돌린 최강혁이 다시금 엘리사벳을 보았다.
“헤인즈가 충분히 강해져. 나에게 말해.”
“알겠습니다.”
“응.”
어깨를 두드려준 후 식당을 나갔다.
식사 중에도 이야기했지만, 오늘은 마무리할 일이 있어서 늦게 들어올 수도 있다고 했다.
아마도 샤워장 작업일 것이다.
늦은 밤까지 일을 한다는 건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지만, 워낙 당연하다는 얼굴이어서 에밀리아도 차마 반대하지 못했다.
“엘리사벳 경, 축하드려요.”
“멋진 갑옷이예요.”
베티와 루시아가 한 마디씩 하자, 엘리사벳은 얼른 에밀리아를 향해 예를 취했다.
“과분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지난 번에 이야기했던, 그거군요.”
“네. 제가 부족한 탓에 부상을 입었는데 오히려 이런 귀한 것을... 부끄럽습니다.”
“아니요. 그 사람도 엘리사벳경이 내게 얼마나 필요한 사람인지 알고 있는 거예요.”
빨리 회복해서 많이 도와달라는 아가씨의 덕담에, 엘리사벳은 다시금 예를 취했다.
“이것도 같이 가져가야....”
“제가 하겠습니다.”
갑옷은 몸에 걸쳤지만, 빈 거치대는 들고 가야했다.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닌 터라, 옆에 있던 헤인즈가 번쩍 들었다.
“묵직하군요. 속이 꽉 찬 나무 같습니다.”
“갑옷을 걸어두려면 그래야겠지.”
그녀의 방 창가 근처에 거치대를 놓은 후, 그곳에 조심조심 벗은 갑옷을 다시 잘 걸어놓았다.
“와....”
이렇게 다시 보니 또 달랐다.
금속임에도 빛이 그리 강하게 반사되지 않는 것 같아 자세히 보니,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색깔까지 고려하신 것 같은데요?”
“그래보이지?”
“예.”
언뜻 검은 색으로 보이지만, 빛을 받으면 살짝 청록빛이 감도는 갑옷.
그녀의 머리색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내 신체를 정확히 알아보시다니....”
“눈썰미가 좋으신 것 같습니다. 결혼식 때 가죽옷 만드실 때도 그러셨잖습니까.”
“배울 점이 많아.”
정확하게 볼 수 있다는 것.
아주 작은 간격 차이로 죽음을 오갈 수 있는 그들에게 더 없이 필요한 능력이었다.
“배울 수 있을까요? 선천적인 것일 수도....”
“더 구를래?”
“안녕히 주무십시오.”
헤인즈가 후다닥 달아났다.
그러면서도 방문을 닫는 건 잊지 않았다.
혼자 남게 된 엘리사벳은 다시금 손바닥으로 갑옷을 쓸어내렸다.
수많은 철조각들이 정말로 비늘처럼 붙어있는데, 어느 하나 마감이 덜 되어 날카롭거나 하지 않았다.
“.......”
살며시 마나를 불어넣어보니, 역시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느낌도 기존의 갑옷과 격을 달리했다.
“이 정도면....”
기사라면 누구나 갖고 싶어할 수준이다.
가문에서 이런 걸 지니고 있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빼앗으려 할 인간들도 몇 떠오른다.
“뺏길 수는 없지.”
이것은 선물임과 동시에 자격시험이다.
이 갑옷을 능히 지켜낼 수 있을 만큼의 실력을 요구받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오히려 기뻤다.
“음....”
구석에 있던, 물이 담긴 양동이를 향한 그녀는 그 한쪽에 걸쳐놓은 천을 담가 적시다가 멈칫했다.
“오늘은 좀 뜨뜻한 물로 씻고 싶은데.”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픽 웃어버렸다.
“욕심은 날이 갈수록 늘어난다더니.”
언제부터 제대로 씻었다고.
그나마 매일 깨끗한 물로 닦는 것만 해도 다행인 일인데.
“.......”
문득 떠오른 것은 간이 세면장이었다.
그곳에 아직 따뜻한 물이 남아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가보자.’
양동이를 들고 방을 나섰다.
아직은 옆구리가 조금 불편하지만, 그래도 통증까지는 아니었다.
회복 속도가 그렇게 빠른 것은 그만큼 잘 먹고 잘 쉬기 때문이었다.
그 역시 새로 오신 가주 덕분이다.
“개종을 할까....”
그녀의 종교는 아가씨와 달랐다.
하지만 이렇게 정말로 ‘신의 증거’를 직접 겪고 있다보니, 자신이 믿던 종교에 조금은 상대적 회의감 같은 게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어?”
그렇게 간이 세면장에 도착했다.
의외로 그곳에 사람들이 있었다.
“엘리사벳경도 오셨네요.”
“이리 주세요.”
입에 뭔가를 비슷하게 물고 있던 베티와 루시아가 반겨주었다.
루시아가 얼른 그녀의 양동이를 받아, 담겨있던 물을 오수 처리용 배출구에 부었다.
“후식인가?”
“아. 이거요? 아니요. 칫솔이요.”
“......?”
“저기 있어요.”
세면장에는 그녀들이 물고 있던 것과 비슷한 길쭉한 막대가 있었다.
가서 하나를 집어드니, 가느다란 나무 막대 한쪽 끝에 자리한 부드러우면서도 탄력있는 털들이 보였다.
“이건... 소금?”
“네. 이를 닦으라고 하셨어요.”
“누구인지 알 것 같군.”
“그렇죠.”
별도로 담겨있는 소금.
고작 이를 닦는 용도로 소모해버리기엔 아까운 것 아닌가 싶다가도, 그분이 시키는 걸 해서 손해볼 일은 없다는 생각이 이어졌다.
“으에.”
그래도 이 정도의 소금을 그냥 입에 넣어본 적은 없어서, 그 짠 맛에 얼굴이 찌푸려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충치를 막아준대요.”
“.......”
충치라면 치료사를 찾아가도 될 일이겠지만, 돈이 제법 든다는 걸 생각하면 이 방법이 나을 것 같긴 했다. 확실히 효과가 있다면 말이다.
“뜨거운 물 받아드려요?”
루시의 물음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곧 손을 휘저어 만류했다. 수도꼭지에서 김이 펄펄 나는 강온수가 나와서였다.
“아직 안 식었어?”
“네. 왔다 가신 것 같았어요.”
“...어디서 이런 물을.”
방금 전 아궁이에 끓인 것 같은 물이 양동이에 반 정도 차있었다.
수도꼭지를 적당히 중간 정도로 돌리고 나서야 그녀가 생각한 수온에 맞춰졌다.
“빨래도 바뀌었어요.”
베티가 말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해서 그녀를 보니, 이어진 말이 괴상했다.
“삶는다고?”
“네. 가죽옷 같은 건 안 되고, 천으로 된 것들은 모두 삶아요.”
“...왜?”
“저희도 잘 몰랐는데, 해보고 나니까 얼룩도 잘 빠지고, 말리고 나서 보아도 확실히 깨끗하더라고요.”
“흐음.”
빨래를 삶는다고?
어디서 얼핏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것 같기도 하지만, 확실하진 않았다.
“좋아지는 거라면, 적응해야죠.”
“그래야지.”
베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가 지시하신 일이 모두 옳은 방향으로만 가는 건 아닐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지금은 최대한 따라주는 게 맞을 것 같았다.
가산을 낭비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가솔들이 먹는 게 부실하다며 직접 숲에서 사냥을 해오는 분이니.
“그래도 이건 너무 짠데.”
침과 섞이면서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소금은 소금이었다.
칫솔로 적당히 이쪽 저쪽을 문질러보던 그녀는 정말 이게 맞나 하는 얼굴로 연거푸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 * *
‘왜 아직도....’
늦게 올 거라는 건 이미 들어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게 밤을 새운다는 의미였을까?
에밀리아는 혼자만의 침실에서 제대로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뭔데.’
이상했다.
분명 평소 잘 자던 침실이고 침대였다.
그런데 왜 지금은.
‘안아줬으면서.’
어제만 해도 밤새 안고 잤는데.
벌써 질렸나?
남자들은 금방 질린다던데.
“.......”
로브를 걸치고 방을 나섰다.
그가 일하는 곳이 어딘지는 이미 알았다.
멀리서도 여러 개의 등불을 볼 수 있었다.
“아.”
그리고, 보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니 오늘 저녁까지만 해도 없었던 것이 그곳에 있었다.
촘촘한 나무판자로 이루어진 높은 울타리는 외부에서 안쪽을 볼 수 없도록 사방을 막아주고 있었다.
입구는 세 곳이었다.
어떤 식으로 구분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신분이나 성별을 기준으로 나누는 것 아닐까 짐작되었다.
-와씨.
울타리 너머에서, 그 사람 특유의 뜻모를 감탄사가 들려왔다.
-이거 누가 만들었냐?
이어진 말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쪽 언어였으니까.
이제는 혼잣말도 이쪽 말로 하는 건가 싶어서, 조금은 기특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뭘 만들었기에.’
입구 안으로 들어갔지만, 곧 도로 나왔다.
그가 있는 곳과 다른 입구 같았다.
돌아나와 새로 들어간 곳에서, 그녀는 비로소 남편을 볼 수 있었다.
그의 앞에 자리한 큼직한 석상도.
“...이게 뭔가요?”
“어?”
최강혁은 장난치다 들킨 아이처럼 흠칫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멋쩍은 얼굴로 웃으며 그것을 탁탁 두드렸다.
“해태. 우리 나라 전설.”
“몬스터인가요?”
“비슷해. 하지만, 좋은 몬스터.”
“아....”
이곳에도 비슷한 전설들이 있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이어진 광경에는 좀 황당해졌다.
“입에서 물이 나오네요.”
“멋지지?”
“......?”
옆에 있는 레버를 조작하자, 살짝 벌리고 있던 해태 석상의 입에서 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좀 더 열수록 수량이 많아져서, 결국은 콸콸 터져나오는 수준이 되었다.
“아.”
그리고, 그것이 단순히 물 낭비나 장식품은 아니라는 것을 곧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게 흘러나온 물이 하나의 욕조를 채우고 있었다.
바위를 깎아 만든 듯한 느낌의 욕조는 조금 큰 체구를 가진 성인도 온전히 들어가 누울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평균 체형이라면 두 사람 정도는 들어가 앉아도 될 것 같은데, 그런 욕조가 옆으로도 두 개 더 붙어있었다.
“......?”
그러면 다른 욕조 쪽에도 해태상을 새로 만들어 설치해야 하는 걸까 생각했는데, 역시나 허공에서 그것과 동일하게 생긴 석상이 튀어나와 배치되었다.
“아. 엇나갔네.”
그 뒤쪽을 살펴보던 최강혁은 그것을 다시 없앴다가 도로 꺼내는 등 몇 번을 반복한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꼭지로 하면 물 받는 게 오래 걸리니까.”
“샤워시설 아니었어요?”
“샤워? 저쪽.”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한쪽 벽쪽에 가지런히 설치된 기이한 것들이 있었다.
마치 대도시에서 볼 수 있는 마법 가로등을 연상케 하는데, 불이 들어오지는 않았다.
“이게 샤워 수전.”
그쪽으로 간 최강혁이 수도꼭지를 움직였다.
머리 높이까지 뻗어 올라간 파이프.
직각으로 꺾여 나온 연결관 아래엔 둥근 판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가느다란 물줄기가 수십 가닥 쏟아졌다.
“새벽까지 하면 얼추 될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일이 많아.”
“네?”
“밤에 안 끝나. 아침까지 일해. 그러면 끝나.”
“잠을 자야 해요.”
“어, 내일 자면 괜찮아.”
“.......”
“화났어?”
“잠을, 자야 해요.”
“...응.”
그렇지 않아도, 왠지 철야를 하게 될 것 같아서 적당히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해태상은 원래부터 계획에 있었다.
그런데 기존에 생각했던 샤워기를 해바라기 수전 방식으로 바꾸느라 일이 늘었다.
‘나무로 만든 거라 내구성이 안 좋긴 한데, 계속 교체해야겠지.’
금속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런 쪽에 쓰기엔 좀 아까웠다. 나중에 대량으로 확보되면 조금씩 바꿔나갈 생각이었다.
“씻을래?”
에밀리아에게 물었다.
살짝 토라진 것 같으면서도 싫다고는 하지 않아서, 그녀의 손을 잡고 다른 입구로 향했다.
〈 81화 〉 081.
081.
“여기는 우리만 사용해.”
“...아.”
어쩐지.
서로 붙어있던 두 입구와 다르게 좀 더 떨어져있어서 혹시나 했는데 정말이었다.
그곳으로 들어가보니, 이미 완성이 된 건지 이런 저런 시설들이 설치되어있었다.
해태상과 욕조도 있었지만, 다른 곳에 비해서 욕조의 크기가 더 크고 하나 뿐이었다.
“여기가 탈의실.”
“탈의실?”
“옷 벗고, 새 옷 입어.”
“아. 탈의실이군요.”
중간에 자리한 별실에는 벽을 가득 채운 진열장이 있었다.
그 한쪽엔 부드러운 재질의 수건들이 있었는데, 그곳에 원래 있던 것이 아니니 그 역시 최강혁이 갖고 있던 것일 터였다.
“여긴....”
유일하게 비어있는 자리를 보며 말하자, 최강혁이 뒷머리를 긁었다.
“유리 필요해.”
“유리?”
“거울 만들어. 여기.”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큰 거울을 이런 곳에 설치한다니. 낭비 아닌가 싶었다.
“도둑. 훔쳐가요.”
“괜찮아요. 또 만들어.”
“만들어?”
“응. 만약 유리 있으면, 내가 만들어.”
“유리 있어요.”
“있어요?”
“네.”
“못 봤어.”
“나한테 있어요. 이따 줄게요.”
“오.”
“거울 만들어요.”
“아니.”
“......?”
“거울보다 먼저 만들어야 할 게 있는데.”
“네?”
마지막 말은 무슨 뜻인지 모른다.
하지만, 웃으며 그녀의 뺨을 쓰다듬으니 왠지 닭살이 돋아서 아무 생각도 못 하게 되었다.
“씻자. 나 더러워.”
“아....”
최강혁이 옷을 벗었다.
이미 다 본 몸이었지만, 이런 곳에서 보니까 또 달랐다.
“나, 갈아입을 옷 없어요.”
“이거.”
이어서 그녀는 최강혁이 꺼내놓은 것들을 보았다. 수건과 비슷한 느낌의 천이었는데, 잠옷처럼 생긴 듯 했다.
“씻고 나서 입어. 지금 옷은 내가 깨끗하게 해.”
“네.”
그의 말대로였다.
해태상의 입은 수도꼭지보다 훨씬 커서, 금방 욕조를 가득 채웠다.
다만 그녀가 믿기 힘든 건 따로 있었다.
그런 석상을 어떻게 만들고 설치하는가가 아니라, 그렇게 쏟아져나오는 물을 어디서 구했는지였다.
그러나 막상 욕조에 들어가 몸을 담그니, 다른 건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뜨겁지만 과하진 않은 정도의 수온.
금세 긴장이 풀리고 나른해졌다.
“걱정 마.”
그녀의 옆에 다가온 남편이 말했다.
“에밀리아의 종교. 물을 아낀다고 들었어.”
그녀의 우려를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렇지 않아도 기회가 되면 그 부분을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맞아요.”
“물. 낭비 아니야. 다시 쓸 수 있어.”
그는 욕조에 담겨있던 물을 일부 사라지게 한 후, 다시 그곳에 채웠다.
“더러운 물, 내가 가져. 깨끗하게 해. 다시 쓸 수 있어.”
“이해했어요.”
어떻게 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지금처럼 씻는 것도 그렇게 낭비는 아닐 것이다.
“아....”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밤하늘이 있었다.
그제야 이곳에 지붕이 없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래서 좋았다.
밤하늘 아래에서 이렇게 있으니, 왠지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혼자가 아니야.’
그녀는 은근슬쩍 가까이 오는 남편의 옆구리를 쿡 찔렀지만, 피하지 않고 마주 다가가 단단한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 * *
“좋아. 좋아.”
샤워장이 완성되었다.
개시도 했다.
연결된 물탱크들의 소모속도가 상당한 건, 그만큼 다들 잘 씻고 있다는 뜻이겠지.
“확실히, 이중 구조라 열 손실이 적어.”
보온병을 상상하고 비슷하게 적용했다.
열손실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냥 나무 물탱크나 한겹짜리 물탱크였을 때와 비교하면 꽤 오래 지속되었다.
짬이 나면 한번씩 가서 물을 교체해주면 된다. 사용하는 이들은 항상 따뜻한 물이 나오니 신기해할 것이다.
‘그래도 겨울엔 빨리 식겠지. 물탱크를 아예 건물로 둘러싸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이런 저런 아이디어들이 떠올랐지만, 그쪽은 당장 손을 댈 필요까진 없을 듯 했다.
“하나 하나 바꿔보자.”
몸이 깨끗해져도, 주변이 더러우면 밑 빠진 독과 다를 바가 없다. 작은 것을 바꾸었으니, 이제 큰 걸 바꿔나갈 차례다.
하지만 그 전에....
“......?”
에밀리아는 최강혁이 건넨, 주먹 두 개 크기의 길쭉한 나무 상자를 보았다.
상자만 보아도 평범하지 않았다.
그 겉이 매끈하게 다듬어져있고, 위에는 얇게 기름칠 같은 것도 되어있었다.
그녀의 이름도 새겨져있었다.
“내 이름이네요.”
“선물.”
열어보라는듯한 눈짓에, 그녀는 조금 의아한 표정으로 그렇게 했다.
딱히 선물을 받을 만한 일이 있는 것도, 그런 날인 것도 아닌데... 생각하며 안을 보니, 그녀가 알고 있는 물건이 보였다.
“안경?”
“안경이 뭐야?”
“이게 안경.”
“아. 알았어.”
어제, 그녀가 갖고 있던 유리를 주었다.
작은 백조 형상의 공예품이었다.
그것을 오늘 아침에 돌려받았다.
‘이제 괜찮다’는 이유였다.
뭐가 괜찮은 건지는 알지 못했다.
그 유리를 소모해서 거울로 만든다는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이것을 받았다.
두 개의 둥근 유리알.
그 테두리를 감싼, 조금은 붉은 빛이 감도는 금빛 금속이 정원의 햇살을 받아 빛났다.
“하지만....”
안경은 고가품이다.
기술자도 적고, 요즘은 마법도구로 시력을 보완하니 점점 사장되는 추세기도 했다.
그녀도 하나 갖고 있었다.
아버지의 선물이었다.
하지만, 시력이 좀 더 나빠지면서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가볍네요.”
가느다란 테가 약해보였지만, 직접 만져보니 생각보다 단단한 느낌이었다.
더 놀라게 된 건, 그것을 착용했을 때였다.
“.......”
에밀리아는 옆에 앉은 남편을 보았다.
그가 웃었다.
“좋아?”
“완벽해요.”
세상이 밝아졌다.
안경 기술자들도 이 정도까지 하지는 못할 것이다. 평범한 렌즈가 아닌 것 같았다.
마법일까?
하지만 마나는 느껴지지 않는다.
“도우미가 도와줬어.”
“도우미?”
“내 친구.”
“......?”
아직 이쪽 말이 서툴러서일까.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자신을 위해서 만들었다는 것만큼은 알았다. 이건 그 누구도 아닌, 그녀의 눈에 맞춘 안경이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그녀의 물음에, 웃고 있던 남편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가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평소 표정을 따라하고 있음을 알아보았다.
“아.”
시력이 나빠지면서 생겨난 버릇.
단지 잘 보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어느새 두통까지 생겨나면서 굳어져버린 습관.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고치지 못했었다.
“그래도 그 정도까진 아닌데.”
“음?”
“아니에요.”
고개를 돌려 주변 곳곳을 돌아보았다.
멀리 하늘의 구름과, 그 근처를 지나가는 새도 또렷하게 보였다.
세상이 넓어진 기분이었다.
“고마워요.”
“만약 불편해, 만약 고장나, 그러면 말해요. 고칠 수 있어.”
“응.”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니, 최강혁이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고 일어났다.
“오늘은 뭐해요?”
“숲에 갈 거야. 곰 발자국 가까이 왔어. 위험해. 죽일 거야.”
“아... 조심해요.”
“괜찮아요. 나 안 죽어. 곰이 죽어.”
“그래도 조심해요.”
“네.”
정원 바깥에 새 갑옷을 걸친 엘리사벳이 보였다. 그 옆엔 평소 잘 입지 않던 가죽갑옷 차림의 헤인즈가 있었다.
“같이 가는 거예요?”
“헤인즈가 갈 거야. 엘리사벳 아직 아파요.”
갑옷을 입은 건, 헤인즈가 없어서 생길 빈자리를 더 보완하기 위해서일까. 유사시엔 그녀가 나서야 할 테니까.
‘방어나 보조 계열 마법을 배웠더라면.’
에밀리아는 멀어지는 남편과, 그 옆에서 긴장한 듯 뻣뻣하게 움직이는 헤인즈를 보며 그들의 무사귀환을 빌었다.
* * *
“이게 곰 발자국. 알아?”
“예. 본 적 있습니다.”
“곰 봤어?”
“아니요. 그랬으면 여기 없겠죠.”
“음?”
“못 봤습니다.”
“그래.”
최강혁은 헤인즈에게 사냥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것은 엘리사벳의 요청 때문이었다.
‘그쪽 가문에선 안 가르치는 모양이지만.’
가문마다, 혹은 지역마다 그곳 기사들의 주특기가 달라지는 모양이었다.
대인 전투술을 위주로 단련하는 곳도 있고, 대 몬스터 전투를 상정하고 수련하는 이들도 있고.
‘이곳 환경에 맞춰서 키워보려는 거겠지.’
아마도 본래 가문으로 돌아가지 못할, 혹은 돌아가지 않을 상황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지금은 그 내막을 잘 모르지만, 어쨌든 헤인즈가 강해지면 아내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바람. 항상 집중.”
“바람... 예.”
“냄새. 짐승, 몬스터 코 좋아.”
“그렇죠.”
최강혁의 가르침은 가문 기사들이나 훈련관보다 훨씬 구체적이었고, 또한 실전적이었다.
“풀 위를 밟지 마. 이렇게, 발을 아래에 끼워 넣고 흙을 밟아.”
“예?”
“봐. 이렇게.”
“아래쪽을 파고들듯이 밟는 거군요. 왜죠?”
“풀 위를 밟으면 발자국 안 생겨. 좋아.”
“네.”
“하지만, 풀이 꺾여. 이렇게.”
“그렇죠.”
“이거. 아는 놈들 있어.”
“이런 것까지요?”
“눈 좋은 놈들. 위험해.”
“그렇군요.”
“그리고, 이런 거. 마른 가지. 썩은 가지. 잘 안 보여.”
“나뭇가지 말씀이군요.”
“위에서 밟으면 부러져. 소리 커. 귀 좋은 놈들. 위험해.”
“아. 그러면 이렇게 밑에서 밀면서 가는 게 도움이 되겠습니다.”
“쉽지 않아. 반복해. 버릇 만들어.”
“예.”
어디에서도 배운 적 없던 것들을 배웠다.
그것이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았다.
한 가지도 놓치지 않으려 거듭 집중했다.
“찾았다.”
그렇게 숲을 돌아다니다 멈추었다.
평소 와본 적 없는 곳이어서 긴장하고 있는데, 최강혁이 그를 불렀다.
“이 발자국. 기억해.”
“...이게 뭐죠?”
“도마뱀. 이 정도 크기. 하지만 독침 있어. 맹독.”
“독침이 뭔가요?”
“독. 음... 몸에 들어가면 아파. 죽어. 화살촉에 바르기도 해.”
“아, 혹시 독인가요?”
“독. 그걸 쏴. 몸에 바늘 있어.”
“독침이군요.”
“독침. 위험한 놈이야. 이 발자국 보면, 반대쪽으로 피해. 이쪽이 앞이야.”
“피해야 하는 거군요.”
“작아. 위험해. 가죽 쓸모 없어. 고기 못 먹어. 사냥 필요 없어.”
“아하.”
“나는 괜찮아. 너는 안 괜찮아.”
“...그렇겠죠.”
계속 움직였다.
곰의 발자국이 이어졌고, 간간이 다른 발자국도 보였다.
그냥 보고 들는 것만으로는 금방 잊어버릴 것 같았는데, 최강혁이 따로 그려서 주겠다고 해서 안심했다.
“들켰다. 빠져.”
몇 번인가는 그런 이야기와 함께 서둘러 물러나기도 했다. 적당한 곳에 멈추고 나서야 그들을 노리는 놈들도 있음을 들었다.
“사냥. 한 방향 아니야.”
최강혁이 진지하게 말했다.
“죽일 수 있어. 죽을 수 있어. 공평해.”
“공평....”
“최선을 다 해. 죽으면, 노력 남아도 못 써.”
“알겠습니다.”
단순한 지식만이 아니라, 마음가짐에 대해서도 많은 걸 배웠다.
그것이 그저 경력자의 과장이나 허세 따위가 아니라는 건, 이미 보았던 가주의 육체만으로도 증명할 수 있었다.
그의 몸에 새겨진 수많은 흔적들이, 지금 이야기하는 것들을 증거해주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음?”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목숨을 걸고 얻었던 것들을 이렇게 쉽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헤인즈는 저도 모르게 남아있던 조금의 의구심을 완전히 던져버렸다.
그런 마음은 첫 번째 사냥에 성공했을 때 더욱 강해졌다.
그저 우연히 발견한 녀석을 운 좋게 죽인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녀석의 흔적을 발견하고 추격해 정확히 노려 잡은 것이어서 의미가 달랐다.
“선택 필요해.”
“선택.”
“피 흘렸어. 냄새 있어. 다는 못 가져가. 나눠줘야 해.”
“아.”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는 것도 배웠다.
간단하게나마 사슴의 가죽을 벗기는 방법도 배웠고, 어느 부위가 맛있는지, 어떻게 해야 피를 더 빨리 뺄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배웠다.
냄새가 강한 풀을 구별했다.
으깨어 그 즙을 몸에 바르는 것도 배웠다.
기사의 방식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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