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aborarção 2
렇게 쓰러져 있을 때 숨통을 끊어야 했다.
“젠장.”
별 느낌이 없다고 했던 거 취소한다.
이러나저러나 살아 있는 것의 목숨을 거두는 것은 썩 좋은 감각이 아니었다.
하지만 필요한 일이었기에 루터는 기절한 하이 코볼트들의 가슴에 차례대로 맥스의 칼을 박아 넣었다.
“후우.”
이제 다음 차례.
루터는 다시 우두머리를 돌아보았다.
괜히 하이 코볼트가 아닌지 코볼트들과 확연히 다른 구석이 하나 있었다.
옷.
사실 옷이라고 하기조차 민망한, 그냥 치부를 가리는 게 전부인 거적때기에 불과했지만 아무튼 일단 옷이라고 우길 수는 있는 것.
더욱이 기본적으로 코볼트들보다 덩치가 훨씬 큰 하이 코볼트들이 입던 것이라 그런지 인간들 중에서도 키가 큰 편인 루터 자신이나 맥스도 얼추 착용이 가능해 보였다.
다만-
‘뭔가, 뭔가 선을 넘는 기분이 들어.’
인간으로서의 소중한 무언가가 망가지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차라리 그냥 벗고 다니는 쪽이 낫지 않을까?’
자연에서 태어난 모습 그대로.
[마스터, 설마 개머리 외계 생명체들의 의복 비슷한 무언가를 벗겨서 입으실 생각이신가요?]
루터가 움찔하자 인테그라는 더 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마스터.]
[저는 마스터를 이해합니다. 아니, 응원합니다. 우리 마스터 파이ㅋ팅!]
뭐지. 마지막에 웃음소리가 섞인 것 같은데.
잘못 들은 거겠지?
그런 거겠지?
[마스터, 조금 진지하게 이야기하자면 그래도 알몸보다는 낫지 않을까 합니다.]
[이제는 일행도 있고, 급소인 생식기를 개방하고 다니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개방…….
조금만 더 단어 선택에 배려를 해줬으면 하는 루터였지만 사실은 사실이었기에 받아들이기로 했다.
루터는 일단 우두머리가 허리에 두르고 있던 가죽을 벗기기 시작했다.
[마스터, 능숙한 솜씨입니다. 익숙해지신 것 같군요.]
[마스터가 자랑스럽습니다.]
[우리 마스터 최ㅋ고.]
이 자식 이거 일부러 이러는 거 아닐까?
어찌 되었든 인테그라의 응원을 빙자한 정신 공격을 받으며 가죽을 벗겨낸 루터는 탈탈 털어낸 뒤 허리에 둘러보았다.
애당초 우두머리 녀석의 허리가 워낙 두꺼웠기 때문인지 마치 치마를 두른 것처럼 앞뒤를 깔끔하게 가릴 수 있었다.
[다시 문명의 품으로 복귀하셨군요. 축하합니다.]
“그래…….”
힘없이 답한 루터는 우두머리가 등에 차고 있던 도끼걸이는 물론이고 남은 코볼트들의 가죽 천 역시 벗겨냈다.
카렌과 맥스의 몫 역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건 바로 갈아입히는 거지만…….’
루터는 잠시 카렌의 바지를 벗기는 자신과 맥스의 속옷을 벗기는 자신을 각각 상상해 보았다.
양쪽 모두 성격만 다를 뿐 변태 같은 것은 똑같았다.
‘아니, 굳이 따지면 후자 쪽이 좀 더 정신적 데미지가 클 것 같군.’
자평한 루터는 카렌과 맥스의 바지를 갈아입히는 대신 코볼트들이 가지고 있던 막대와 독침을 살펴보았다.
새끼손가락보다 조금 더 긴 독침은 척 봐도 인공적인 것이 아니었다. 다른 괴물이나 곤충의 몸에 달린 독침을 강제로 뽑아낸 것 같았다.
‘이건 못 쓰겠네.’
독침이 커서 보통 폐활량으로는 제대로 발사하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때문에 루터는 가운데 구멍이 뚫린 막대는 버리고 남은 독침만 몇 개 챙긴 뒤 가죽에 싸서 카렌이 차고 있던 작은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마스터, 도끼도 챙기는 것을 추천합니다.]
[마정석을 제거했지만 여전히 질량병기로써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
인챈트 마법 없이 다루기에는 지나치게 크고 무거운 도끼였지만 루터 자신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다소 무겁긴 했지만 그럭저럭 다룰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튼 슬슬 이동하자.’
벌써 시간을 꽤나 지체했다.
루터는 다시 카렌과 맥스 곁에 다가간 뒤 인테그라에게 물었다.
“둘 다 상태가 어때?”
[나쁘지 않습니다.]
[해독이 끝난 데다가 독을 체외로 방출까지 했으니 시간이 지나면 깨어날 겁니다.]
인테그라의 말을 들으며 루터는 축축해진 카렌의 바지와 맥스의 팬티를 돌아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때론 무언가를 희생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었다.
“후…… 엿같구만.”
등에 도끼를 멘 루터는 양쪽 어깨 위에 카렌과 맥스를 짊어졌다. 그러자 너무나 당연하게도 양쪽 어깨가 축축해졌을 뿐만 아니라 묘한 냄새까지도 났다.
[마스터, 마스터는 좋은 사람입니다.]
“……그래.”
위로가 되는구나.
우수에 찬 눈빛으로 답한 루터는 다시 발걸음을 내디뎠다.
* * *
일단 되는대로 발걸음을 내딛던 루터는 인테그라 덕분에 몸을 숨길만한 장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무척이나 커다란 나무의 뿌리가 돌출되면서 생긴 빈틈이었는데, 나무가 워낙 큰데다가 땅도 꽤 파여 있어 그럭저럭 세 사람이 구겨져서 들어갈 공간 정도는 되었다.
루터는 제일 안쪽에 카렌과 맥스를 나란히 눕힌 뒤 자신은 입구 근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이 두 개나 되는 덕에 밤중에도 제법 밝았던 하늘이 이제는 흐리고 어두웠다.
어느새 밀려든 구름 때문이었다.
“씨X.”
군대 생각나네.
가만히 있어도 욕이 나오는 게.
루터는 그대로 잠시 상념에 빠지려 했지만 다행히도 작은 소리가 루터의 생각을 방해했다.
카렌의 목소리였다.
“으읏…… 으…….”
미간을 찌푸린 채 앓는 소리를 내던 카렌이 천천히 눈을 떴다.
얼굴색이 창백한 것이 무척이나 힘들어 보였다.
“여, 여긴…….”
“이동했다. 코볼트들은 무찔렀다.”
루터의 말에 카렌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하이 코볼트들과의 싸움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매, 맥스는?”
“옆에 누워 있다.”
루터가 턱짓하자 옆을 돌아본 카렌은 안도의 숨을 토했다.
평소에 체력이 상당했는지 맥스는 무척이나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카렌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감사하자 루터는 쑥스럽다는 듯 턱을 긁적이더니 바위 위에 올려두었던 가죽 천을 내밀었다.
“일단 갈아입어라.”
“네?”
“갈아입어라.”
거기까지 말한 루터는 다시 밤하늘을 우러르며 돌아섰고, 몇 번인가 눈을 깜박이던 카렌은 어느 순간 움찔하더니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입고 있는 바지를 돌아보았다. 축축했다.
“어, 어떻게 된 거죠?”
“독을 배출시켰다.”
“오, 오ㅈ…… 아, 아니. 그거로요?”
루터는 답하지 않았고, 카렌은 더더욱 새빨개진 얼굴로 급히 입고 있던 속옷과 바지를 벗은 뒤 옷을 갈아입었다.
대체 무슨 수를 써서 독을 배출시켰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니, 설사 알 수 있다고 해도 알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다.
참고로 갈아입은 바지는 루터가 내민 가죽 천이 아니라 옆으로 차고 있던 가방에서 꺼낸 짧은 반바지였다.
“맥스는…….”
“네가 할래?”
루터의 물음에 카렌은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러 가지 의미로 무리였다.
“그래, 나도 무리다.”
우수에 찬 눈으로 긴 숨을 토한 루터는 다시 카렌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빨개진 얼굴을 어떻게든 달래기 위해 열심히 손부채질을 하고 있는 모습이 참 귀여우면서도 딱했다.
‘어찌 되었든.’
숨을 가다듬은 루터는 카렌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은 뒤 반사적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카렌에게 물었다.
“몸은 좀 괜찮고?”
“네? 아, 네. 괜찮은 것 같아요. 루터 님은요?”
“나도 괜찮다.”
[마스터, 그런 식으로 답하면 대화가 이어지지 않습니다.]
루터 자신도 알았다.
때문에 루터는 바로 다음 질문을 던졌다.
“아까 사용한 건 초능력인가?”
“네, 염동력이에요.”
그렇게 말한 카렌이 가볍게 손가락을 들어 올리자 바닥에 있던 작은 돌멩이 하나가 둥실 떠올랐다.
“일단은 비밀이지만요.”
카렌이 빙긋 웃으며 슬쩍 윙크를 해보였다.
초능력자는 마법사보다도 더 귀했기 때문에 전투 상황에서 초능력자를 염두에 두는 자는 드물었다.
즉, 초능력자라는 사실을 감추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전술적 우위에 설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아까 루터 님이 쓰러트리신 하이 코볼트는 유성을 보고 몰려든 코볼트들 중에서 제일 강한 놈일 거예요. 머리에 알파의 상징이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놈을 쓰러트렸으니…… 한동안 코볼트 걱정은 안 해도 될 거고요. 자기들 둥지로 돌아가서 서열 다툼을 하기에도 바쁠 테니까요.”
카렌의 설명에 루터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카렌이 그렇다니까 그런 거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유성의 파편이 떨어진 방향은 어느 쪽이지?”
“어…… 잠깐만요.”
루터의 물음에 카렌은 대답 대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일단 현재 위치한 장소의 방위를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저쪽?”
루터의 등 뒤- 정확히는 대각선 왼쪽을 가리켰지만 어째 좀 자신 없다는 얼굴이었다.
“맥스가 깨어나면 좀 더 정확히 알 수 있을 거예요. 길 찾는 건 맥스가 전문이라.”
“그렇군.”
[마스터, 파편 수색을 내일 아침으로 미루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직 이 행성의 토착 생명체들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지만, 야행성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맞는 말이었다.
더욱이 여전히 쓰러져 있는 맥스도 맥스였지만 카렌 역시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오늘은 일단 여기서 하룻밤 노숙을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카렌,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다.”
“네, 루터 님.”
카렌이 관심을 표하듯 상체를 살짝 앞으로 숙이자 루터는 새삼 다시 밤하늘을 올려다 본 뒤 물었다.
“지금이 몇 년이지?”
“네? 아, 네. 지금은 ■■■년이요.”
[숫자 데이터는 아직 습득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이렇게 치고 들어오나.
루터는 가슴을 퍽퍽 두드린 뒤 다시 물었다.
“미안, 손가락으로 부탁한다.”
루터의 말에 카렌은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이했는지 빙긋 웃으며 손가락을 세워보였다.
“■, ■, ■년입니다.”
카렌이 손가락으로 1, 1, 9를 표시했다.
119년.
드래곤 헌터3의 시작 시점이 인류 제국력 120년이었으니 얼추 비슷한 시점이었다.
‘즉, 게임이 시작되기 직전인 건가?’
[마스터, 분당 심장박동 수치가 상승하고 있습니다.]
[119년에서 무언가 느끼신 겁니까?]
인테그라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루터는 숨을 한 번 크게 골랐다.
게임이 시작되기 직전인 시점.
이건 루터 자신에게 있어 호재인 동시에 악재였다.
호재는 게임 지식을 풀로 활용할 수 있는 시기라는 것이었고, 악재는 드래곤 헌터3의 온갖 막장 상황들을 직접 겪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게임이 시작되기 직전인 건 마음에 드네.’
드래곤 헌터3는 인류와 악룡들 사이의 생존을 건 투쟁을 다루고 있었다.
즉, 게임 중후반부는 이미 종족전쟁이나 다름이 없는 상황인 만큼 세상 어디를 가도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반면 게임이 시작되기 직전인 119년이라면 아직 평화로운 시기라 할 수 있었다.
“인류 제국력 119년의 가을인가…….”
이때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이랑 주요 등장인물들은 뭘 하고 있었지?
루터가 기억을 더듬으며 감상에 빠지려 할 때였다.
“인류…… 제국력이요?”
카렌이 눈을 깜박이며 되물었다.
마치 그런 것은 처음 들어본다는 얼굴이었다.
때문에 루터는 마찬가지로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인류 제국력이 아냐?”
드래곤 헌터3의 기년법은 저거 하나뿐일 텐데?
애당초 인간의 나라라고 해봐야 인류 제국 하나뿐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카렌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입술을 움츠리다 말했다.
“네, 지금은 신성 제국력인데요.”
“응?”
“신성 제국력 119년이요.”
카렌의 말에 루터는 순간 멍한 얼굴이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인류 제국력’에 대해서 모르는 카렌과 달리 루터는 ‘신성 제국력’ 역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스티아 신성 제국?”
“네, 유스티아 신성 제국. 알고 계시는군요?”
알다마다.
알 수밖에.
인류 제국력 119년이 아닌 신성 제국력 119년.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
‘드래곤 헌터3가 아냐.’
드래곤 헌터 세계관은 맞지만 드래곤 헌터3의 시점이 아니었다.
드래곤 헌터3의 프리퀄.
멸망이 약속된 세계를 살아간 영웅들의 이야기.
이 세계는 ‘드래곤 헌터 오리진’의 세계가 분명했다.
게임 속 콜라보 캐릭터가 되었다 9화
제2장 – 카렌 #2
드래곤 헌터 오리진.
드래곤 헌터3의 프리퀄.
즉, 드래곤 헌터3의 과거.
[마스터? 마스터의 심장박동에 이상이 생기고 있습니다.]
[마스터? 마스터?]
인테그라가 계속해서 물었지만 루터는 대답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생각으로 가득 차 인테그라의 말을 제대로 듣는 것조차 무리였기 때문이다.
‘드래곤 헌터 오리진…….’
드래곤 헌터3의 정식 타이틀은 다음과 같았다.
드래곤 헌터3 ‘리바이브’.
재생, 부활.
죽었다 살아나는 것.
망했다가 부활하는 것.
드래곤 헌터3의 스토리는 다음과 같았다.
먼 옛날, 선과 악을 상징하는 두 마리의 드래곤이 있었다.
신룡 볼피드와 마룡 헬카네스.
두 드래곤은 격렬한 싸움 끝에 공멸하였지만 그 결과는 다소 달랐다.
볼피드의 육신이 그대로 붕괴해 세상과 하나가 된 것과 달리 헬카네스는 강력한 마법의 힘으로 스스로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헬카네스는 더 이상 세계에 관여할 수 없었다.
강력한 마법의 힘으로 스스로의 소멸을 저지하고 있었지만, 이는 반대로 말하면 마법이 풀리는 순간 소멸할 처지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세계에는 헬카네스의 상극인 볼피드의 힘이 가득했다.
힘이 온전했던 상태라면 모를까, 마법의 힘으로 스스로의 존재를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헬카네스에게 있어 세계는 극독으로 가득 찬 공간이나 다름이 없었다.
결국 헬카네스는 세계에 관여하기는커녕 모습을 드러내는 것조차 쉽지 않게 되었고, 이는 곧 볼피드가 스스로의 목숨을 제물 삼아 헬카네스를 봉인한 것과 다름없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헬카네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스스로 나설 수 없게 된 그는 권속들을 부려 볼피드의 세계를 멸망시키려 했고, 끝내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헬카네스의 권속-
‘헤카톤 케이레스’들은 인류 최초의 통일 국가 신성제국을 무너트리고 세계를 파멸로 치닫게 하였다.
드래곤 헌터3는 그렇게 멸망해버린 ‘멸망 이후의 세계’를 무대로 했다.
드래곤 헌터 오리진으로부터 백여 년 뒤.
잿더미에서 다시 일어선 인류가 헬카네스의 권속들을 무찔러 진정한 평화를 쟁취하는 것이 드래곤 헌터3의 메인 스토리였다.
‘아이 씨팔.’
드래곤 헌터 오리진은 드래곤 헌터3가 대히트를 기록하자 출시된 외전작이었다.
파멸이 예정되어 있는 세계를 어떻게 다뤄낼지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는데, 드래곤 헌터 시리즈의 개발사인 아르카나 사는 패럴렐 월드나 if 전개를 집어넣는 대신 드래곤 헌터3의 정사대로 드래곤 헌터 오리진의 이야기를 마무리 짓겠다고 공언했다.
즉, 세계 멸망 엔딩을 내겠다는 소리였다.
‘약속된 멸망, 하지만 그 멸망에 굴하지 않고 미래로의 희망을 남긴 영웅들…….’
담담히 멸망을 마주하는 영웅들의 뒷모습이 담긴 오프닝 무비는 참으로 비장하면서도 감동적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바라보는 시점이기에 가능한 평가였다.
이 세계가 드래곤 헌터3가 아닌 드래곤 헌터 오리진의 세계라면.
카렌이 말한 119년이 드래곤 헌터3의 기년법인 인류 제국력 119년이 아닌, 구시대의 기년법인 신성 제국력 119년이라면!
‘씨X.’
이 세계는 멸망한다.
멸망이 약속된 세계다.
[마스터? 심박수는 물론이고 체온에도 이상이 생기고 있습니다.]
[마스터,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인테그라가 계속해서 말을 걸어왔지만 대답할 정신이 아니었다.
루터는 심호흡을 하며 생각을 이어나갔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막아야지.’
그냥 앉아서 당할 수는 없으니까.
더욱이 루터 자신에게는 스타 세이비어의 초과학이라는, 문자 그대로 초월적인 힘이 함께하고 있지 않은가.
자연스럽게 떠오른 생각에 루터는 새삼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9세대 나노머신 탑재 전투용 호문클루스.
성장형 범용인형결전병기.
‘그래, 결전병기.’
루터 자신은 무력한 민간인A가 아니었다.
스타 세이비어의 한 축을 담당하는, ‘별의 구원자’로 거듭날 가능성을 가진 존재였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희망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119년은 드래곤 헌터 오리진이 시작되는 해였다.
즉, 원작의 악역이자 세계 멸망의 원인인 헤카톤 케이레스 역시 아직은 본격적인 활동을 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기회가 있다.
놈들의 음모를 막아 세계를 구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해볼 만해.’
약속된 멸망이 아니다.
극복할 수 있는 시련이다.
‘그래, 정 안 되면 그때 가서 도망치면 되고.’
악룡들에 의해 세상이 사실상 망하긴 하지만 말 그대로 ‘사실상’이지 정말로 아예 망해버리는 것은 아니었다.
헤카톤 케이레스가 초래한 멸망 이후에도 인류는 20% 남짓이나마 살아남았으니 말이다.
그러니 도망칠 수 있다.
작정하고 도망치면 목숨 하나는 건질 수 있다.
[마스터, 심박 수와 호흡이 다시 안정되고 있습니다.]
[다만 쓰레기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듭니다.]
‘나도 네가 AI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들어.’
인테그라의 날카로운 지적에 마음속으로나마 답한 루터는 다시 정면을 보았다.
루터 자신이 패닉 상태에 빠진 것을 보고 덩달아 당황하고 있는 카렌이 보였다.
“루터 님?”
“아니, 어, 그래. 잠깐.”
반사적으로 답한 루터는 새삼 카렌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문득 위화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카렌.
엄청 예쁜데 마법사보다도 귀한 초능력자의 재능까지 타고난 소녀.
거기다 덤으로 남들 앞에서는 평대하지만 둘만 있을 때는 존대를 하는 연상의 호위기사가 딸린, 한 마디로 숨겨진 과거가 분명히 있을 것 같은 냄새를 팍팍 풍기는 인물.
‘그런데 등장인물이 아니라고?’
“루, 루터 님?”
카렌이 다시 말했다.
루터가 뚫어져라 쳐다본 탓인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지만 이미 자기만의 생각에 빠진 루터는 카렌의 전신을 계속 바라보며 생각했다.
‘드래곤 헌터3가 아냐. 오리진이야.’
직전까지 루터 자신은 이 세계를 드래곤 헌터3의 세계라 생각했다.
때문에 카렌을 처음 봤을 때도 드래곤 헌터3의 등장인물들하고만 비교를 했었다.
하지만 드래곤 헌터 오리진이라면 어떨까.
‘카렌이란 인물은 없었어.’
하지만 이름이야 얼마든지 바꿀 수 있었다.
아니면 애당초 ‘카렌’ 쪽이 가명일 수도 있었고 말이다.
검은 머리.
초록색 눈동자.
염동력 계열의 초능력.
인간 여성.
이 정도면 제법 조건이 모였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퍼뜩 떠오르는 인물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진짜 엑스트라인가?’
루터는 다시 한번 카렌의 전신을 훑듯이 살펴보았다.
뭔가 더 특징이 있다면.
다른 사람과 확실하게 구분 지을 수 있는, 특정 부위의 점이라든가-
“루, 루터 님……?”
카렌이 재차 겁먹은 목소리를 내었다.
지금이 몇 년이냐고 물어보더니 갑자기 혼자 당황하고, 이제는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무언가 깊게 생각하고 있는 루터.
도대체 무슨 일일까.
아니, 애당초 이렇게 빤히 쳐다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거기다 시선도 아까부터 얼굴 한 곳이 아니라 신체 곳곳을 마치 순회 공연하듯 돌고 있는 기분이었다.
카렌은 당혹과 민망함에 어깨를 좁혔고, 결국 인테그라가 한 마디를 했다.
[마스터, 변태 같습니다.]
민망해하는 소녀를 지근거리에서 뚫어져라, 그것도 신체 곳곳을 바라보는 근육질 남자.
[카렌이 마스터를 보며 ‘역시 비범한 변태였어!’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동의하는 바고요.]
“뭐? 아니, 잠깐. 네가 동의하면 안 되지.”
“네?”
차례대로 인테그라, 루터, 카렌이었다.
인테그라에게 반사적으로 답한 말을 자신에게 한 말로 오해한 카렌이 미간을 좁히며 엉덩이를 뒤로 빼자 루터는 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 네가 아니라.”
“제가…… 아니라?”
[마스터, 일단 저에 대한 것은 비밀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이 씨팔.’
마음속으로 욕을 한 루터는 변명하는 것을 포기하고 일단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아무튼, 그래. 지금이 신성 제국력 119년이라는 거네.”
“어…… 네. 119년 9월이요.”
[카렌의 눈에 처음 만났을 때처럼 경계의 빛이 어려 있습니다.]
[같이 행동해도 될까 의심하는 것 같습니다.]
[합리적이군요. 카렌에게 상점 1점을 부여합니다.]
인테그라의 말에 루터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최대한 우호적인 표정을 지은 뒤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는 나도 독 때문에 좀 상태가 안 좋았다. 하지만 지금은 멀쩡하다.”
[마스터, 저는 마스터의 몸 안에 있는 독을 완벽히 해독했을 뿐만 아니라 생식기의 요도를 통해 완벽히 배출했습니다.]
‘아, 좀!’
너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지?
하지만 당장은 카렌의 신뢰를 되찾는 일이 우선이었다.
루터는 인테그라의 말을 최대한 흘려들으며 카렌을 바라보았고, 카렌은 여전히 조금 미심쩍다는 얼굴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오늘은 이제 그만 쉬자. 어차피 밤도 늦었고, 맥스는 내일 아침이 되기 전에는 깨어나지 않을 것 같으니.”
“네, 루터 님.”
바로 답한 카렌은 어깨를 축 늘어트리더니 눈을 감으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마스터, 카렌의 전신이 이완되고 있습니다.]
[긴장이 풀려 힘이 빠진 모양입니다.]
[곧 잠들 것 같습니다.]
인테그라의 말마따나 금방이라도 쓰러져 잠들 것 같은 카렌이었다.
루터는 구겨져서 잠들어 있는 맥스의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불침번 걱정은 말고 가서 자. 일 생기면 깨워줄 테니.”
“그…… 설마 루터 님 혼자…….”
“이쪽은 다 수가 있으니까 걱정 말고.”
“……알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한 카렌은 맥스 옆에 쪼그려 눕자마자 거짓말처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밤중에 온갖 고생을 다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후우…….”
루터는 그런 카렌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인류 제국력이 아닌 신성 제국력 119년 9월.
멸망이 예정된 드래곤 헌터 오리진의 세계.
더욱이 드래곤 헌터 오리진을 기준으로 한다면 게임이 시작되기 불과 한 달도 남지 않은 상황.
‘에라 모르겠다.’
일단 나도 잠이나 자야지.
이러나저러나 아직은 게임 시작 전이었다.
아무리 멸망이 예정된 세계인 드래곤 헌터 오리진이라지만 시작부터 아포칼립스 상황인 것은 아니었고 말이다.
그러니 지금부터 조바심을 내봐야 지레 지치기만 할 뿐이었다.
일단은 진정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 자자.’
자고,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유성 파편을 찾자.
그럼 뭐라도 더 알게 되겠지.
마음을 정한 루터는 카렌 옆에 쪼그려 앉은 뒤 인테그라에게 말했다.
“잘 테니까 문제 생기면 깨워줘.”
[마스터, 아까 말씀하셨던 수가 설마 저였던 겁니까?]
[후, 어쩔 수 없군요. 저 혼자 밤새도록 불침번을 서도록 하겠습니다.]
어째 뼈가 있는 말이었지만 루터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뼈 있는 말조차 다정하게 하는 인테그라였기 때문이다.
‘인테그라는 화도 다정하게 내지 않을까?’
잠시 다정하게 화내는 인테그라를 떠올려 본 루터는 작게 웃었고, 인테그라는 그런 루터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마스터, 참고로 명령해두신 나노슈트 특화 나노머신들의 생산 완료까지는 26분 12초가 남았습니다.]
“오…… 그래도 일단 잘래.”
나노슈트가 궁금하기는 했다.
나노슈트 Lv1은 게임에서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에너지 건, 나노슈트, 드론.
스타 세이비어에서 루터의 3대 기본 스킬은 시작부터 레벨이 5였다.
워낙 기본 스킬이기 때문에 레벨 1부터 시작하면 제대로 된 전투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나노슈트 Lv1.
과연 어떤 형태일까.
레벨 1이니 에너지 건이 그랬던 것처럼 정말 딱 기초만 갖췄을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슈트는 슈트니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자야지.’
드래곤 헌터3- 아니, 오리진의 세계에서 눈을 뜨고 지금까지.
겨우 몇 시간 남짓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너무 많은 일들을 겪었다.
거기에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생각까지 하느라 몸은 둘째 치고 일단 정신이 지친 루터였다.
당장은 일단 아무 생각 없이 잠들고 싶었다.
“잘 자, 인테그라.”
[저는 불침번 서느라 못 자는데요?]
“장난치지 말고.”
루터의 말에 인테그라는 작게 웃더니 다정하게 말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마스터.]
“그래, 인테그라.”
이러나저러나 믿음직한 서포터 AI.
구덩이에 등을 묻은 루터는 수마에 몸을 맡겼다.
게임 속 콜라보 캐릭터가 되었다 10화
제3장 - 파편
[아침입니다.]
[충분한 수면 시간을 확보했습니다. 이제 그만 일어나십시오, 마스터.]
다정하면서도 딱딱한 목소리에 루터는 천천히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 대신 낯선 하늘이 보였다.
“으.”
잠긴 목소리를 흘리며 눈을 몇 번인가 꽉 감았다 뜬 루터는 결국 다시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인테그라.”
[네, 마스터. 힘세고 좋은 아침입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일어나세요. 네?]
인테그라 특유의 다정한 목소리에 ‘네?’라는 애교 섞인 후렴구까지 붙으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 루터였다.
“그런 건 어디서 배운 거냐.”
[마스터의 성향을 분석한 결과입니다.]
[전 유능하니까요.]
인테그라가 뽐내듯이 말하자 다시 웃은 루터는 억지로라도 눈을 떠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후우, 씨X.”
역시 그대로였다.
드래곤 헌터 오리진의 하늘.
자다가 눈 떠보니 게임 속이라 다시 눈 떠보면 침대 위가 아닐까 하는 기대를 살짝 했는데, 역시 무리인 모양이었다.
‘애당초 대체 왜 들어온 거지?’
그것도 스타 세이비어의 캐릭터로.
너무 어처구니없는 상황인 만큼 고민해 봐야 답이 없었지만 그래도 의문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뭐……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적당히 생각을 치운 루터는 좀 더 현실적인 부분을 고민해 보았다.
‘신성 제국력 119년의 가을.’
드래곤 헌터 오리진의 본편이 시작되기 직전인 시점.
최선은 헬카네스의 권속들로 이루어진 비밀결사 ‘헤카톤 케이레스’를 저지해 세계의 멸망을 막는 것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루터 자신이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한 수단이 유성 파편인 거고.’
인테그라의 설명대로라면 유성 파편은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예상대로 정말 탈출정이나 1인승 우주선이라면 각종 정보는 물론이고 우주선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들을 얻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즉, 업그레이드가 가능하단 이야기지.’
정보로는 소프트웨어를, 각종 물질로는 하드웨어를 업그레이드한다.
‘좋아, 명확하구만.’
강해져야 할 이유와 수단이 모두 갖춰져 있으니 실행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리고 사실 파편을 찾는 일은 업그레이드 외에도 도움이 되었다.
이윤호 자신이 갑자기 루터가 된 이유는 둘째 치더라도, 스타 세이버의 캐릭터인 루터 라이트시커가 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 드래곤 헌터의 세계에 떨어진 것인지에 대한 답을 파편이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블랙박스 같은 거라 이거지.’
루터가 가만히 앉아 생각을 정리하자 인테그라가 속삭이듯 물었다.
[마스터, 다시 주무실 생각이신가요?]
“아니, 이제 일어나야지.”
인테그라에게 답한 루터는 자리에서 일어선 뒤 카렌과 맥스를 살펴보았다.
잠든 얼굴이 둘 모두 평온하기는커녕 괴로워 보였다.
[중독으로 인한 체력 손실과 불편한 장소에서의 노숙으로 말미암아 두 사람의 수면 효율이 무척 나쁩니다.]
[하지만 생명이나 당장의 활동에는 큰 지장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음, 그래.”
당장 움직이는데 문제없으면 된 거겠지.
인테그라 같은 결론을 내린 루터는 일단 가까이에 있는 카렌부터 깨웠다.
“카렌, 카렌. 일어나. 아침이다.”
“으읏…… 으…….”
어깨를 흔들자 카렌이 앓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눈을 떴다.
루터는 그녀의 어깨를 몇 번 더 두드려 정신이 들게 한 뒤 이번에는 맥스의 몸을 흔들어댔다.
“어윽. 으.”
맥스 역시 눈을 떴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제대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기에 루터는 그나마 정신이 좀 있는 카렌에게 물었다.
“카렌, 혹시 물 같은 거 없어? 수통이라든지.”
“으…… 있어…… 요…….”
잔뜩 잠긴 목소리로 답한 카렌은 더듬더듬 손을 짚어 가방을 열더니 수통 하나를 꺼냈다.
겉에서 보면 작은 가방인데 은근 들어가 있는 물건이 많았다.
“줘봐, 열어줄게.”
“네…….”
카렌이 힘없이 건네 수통의 뚜껑을 연 루터는 일단 자신부터 한 모금 마신 뒤 카렌, 맥스 순으로 수통을 돌렸다.
확실히 잠 깨는 데는 물이 최고인지 세 사람 모두 한결 나아진 얼굴이 되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죠?”
맥스가 관자놀이를 누르며 묻자 카렌이 간결하게 어제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마비 독침을 사용하는 하이 코볼트들의 습격과 놈들을 격퇴한 루터의 활약 등등.
설명을 모두 들은 맥스는 새삼 다시 루터에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루터 님.”
맥스 자신뿐만 아니라 카렌의 목숨까지 구해준 루터였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맥스 자신의 목숨을 구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으니, 지금처럼 감사하는 것도 당연했다.
“저도 정말 감사해요.”
카렌 역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음, 그래.”
[마스터,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고 있습니다.]
“흠흠.”
인테그라의 지적에 헛기침으로 표정을 정돈한 루터는 다시 카렌을 보며 물었다.
“카렌, 혹시 먹을 건 없나?”
“어…… 간단한 요깃거리라면 있을 것 같아요. 잠시만요.”
여행을 위한 진짜 짐은 맥스가 가지고 다녔는데 코볼트들의 습격을 받는 와중에 잃어버린 모양이었다.
어찌 되었든 가방을 뒤적거리던 카렌은 오래지 않아 육포 몇 조각을 꺼내 들었다.
“여기요, 루터 님.”
“고맙다.”
그냥 짜기만 한 육포였지만 시장이 반찬이라고 제법 맛이 있었다.
‘그나저나 유능하네.’
은근 원하는 건 다 튀어나오는 것 같은 카렌의 가방.
어쩌면 인테그라보다 카렌이 더 유능한 게 아닐까?
[마스터, 무언가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고 계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응, 아냐.”
작게 웃으며 답한 루터는 맥스에게 물었다.
“맥스, 유성 파편이 떨어진 곳은 여기서 머나?”
“그……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일단 현재 위치를 좀 파악해 보겠습니다.”
맥스가 그렇게 말하자 카렌이 바로 가방을 뒤져 지도를 꺼내 들었다.
그와 더불어 어제 보았던 별자리를 근거로 약간의 정보를 전달해 주자 맥스는 거짓말처럼 금방 현재 위치를 파악해냈다.
“완전히 정확하진 않겠지만 현재 위치는 대충 이쯤일 겁니다.”
애당초 그리 정밀한 지도가 아니기는 했지만 그래도 구분할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맥스는 현재 바라보는 방향과 처음 유성을 보았던 위치 등등을 종합해 유성의 파편이 떨어졌을 거라 추정되는 곳을 짚어냈다.
“여기랑 여기로 추정되는데, 이 근방에서 루터 님과 만났습니다.”
두 지점 중 숲 외곽부와 좀 더 가까운 곳이었다.
“그럼 파편이 있는 곳은 여기일 테니까…… 그렇게까지 멀지는 않군.”
“예, 이 정도면 30분 정도만 걸어도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씩 웃으며 말하는 맥스의 얼굴이 무척이나 믿음직스러웠다.
[바지 없이 속옷만 입고 있는 남자지만 믿음직하군요.]
‘굳이 그런 걸 지적하지 말아줘…….’
마음속으로 부탁한 루터는 생각난 김에 어제 챙겨둔 가죽 천을 맥스에게 내밀었다.
지금처럼 팬티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것보다야 훨씬 나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약 10여 분 뒤.
간단한 요기에 이어 목적지 지정까지 끝낸 일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목적지가 그리 멀지 않으니 후딱 일 보고 숲 밖으로 나가는 것이 오늘의 목표였다.
“원시수의 숲 안쪽에 사는 아룡들이나 괴물들은 대부분 야행성이니 적과 조우할 일도 그리 많지 않을 거예요.”
당장 어제 마주한 코볼트들부터가 야행성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루터는 맥스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 * *
원시수의 숲은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어두워졌다.
높이가 십여 미터는 족히 될 커다란 나무들이 서로 가지를 뻗어나간 끝에 하늘을 가리는 일종의 장막을 형성한 탓이었다.
햇볕을 제대로 쬐지 못한 땅은 축축했고, 수풀이 있어야 할 곳에는 이끼만이 가득했다.
[마스터, 신호가 감지됩니다.]
[파편이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것 같습니다.]
인테그라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루터의 시야에 화살표가 나타났다.
거리는 약 100여 미터 남짓.
“루터 님?”
“찾은 것 같다.”
카렌의 물음에 짧게 답한 루터는 마른침을 삼킨 뒤 화살표를 따라 이동했다.
마음 같아서는 뛰어가고 싶었지만 언제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를 숲에서 그런 식으로 이동하는 것은 너무 위험한 행동이었다.
“인테그라, 딱히 다른 생명 반응은 안 느껴지고?”
[당장 주변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없습니다.]
[하지만 현재 제 생명 반응 감지 범위는 개방된 곳에서도 10여 미터 남짓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려해 주십시오.]
“그래.”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으니까.
작게 고개를 끄덕인 루터는 조금 더 주변에 주의를 기울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저기인 거 같아요.”
카렌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하자 맥스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터 역시 수풀 너머로 보이는 광경에 주먹을 움켜쥐었다.
[크레이터입니다.]
[크레이터 안쪽에서 신호가 발신되고 있습니다.]
불은 다 꺼졌지만 땅이 깊게 파인 크레이터가 하나 있었고, 주변의 불탄 흔적이 남은 나무들이 쓰러져 있었다.
과연 안쪽에 무엇이 있을까.
두근거리기 시작한 가슴을 진정시키듯 숨을 길게 토한 루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끼익!”
“끼이익!”
크레이터 주변의 나무들 위에서 연달아 괴성이 터져 나왔다.
원숭이처럼 생긴 회색 괴물들이 가지 위를 오가며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적어도 열댓 마리는 되어 보였다.
“라이카!”
배가 고프면 사냥감은 물론이고 동족까지 잡아먹는 원숭이 괴물들!
“키아아!”
그중에서도 특히 우렁찬 괴성이 정면에서부터 밀려왔다.
다른 놈들보다 덩치가 배는 큰 우두머리 개체였다.
가지 위를 바쁘게 오가는 다른 놈들과 달리 놈은 가지 위에 웅크리고 앉아 일행을 노려보고 있었다.
주름진 얼굴 사이에 자리한 노란 눈동자가 마치 빛이라도 나는 것 같았다.
“루터 님.”
낮게 말한 맥스가 마른침을 삼켰다.
아직 싸움이 시작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카렌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머리 위에서부터 찍어 내리듯이 모여드는 라이카들의 괴성과 시선 때문이었다.
도끼를 뽑아 든 루터는 이쪽을 주시하는 우두머리 개체와 눈을 맞춘 채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인테그라, 나노슈트 장착해.”
어젯밤 새로 업그레이드한 기능.
루터의 말에 인테그라가 즉각 반응했다.
[나노슈트 Lv1을 최초 기동합니다.]
[장착 부위를 지정해 주십시오.]
“뭐?”
[나노슈트의 레벨이 낮습니다.]
[나노머신의 숫자가 부족합니다.]
[머리와 사지 가운데 한 부분을 선택해 주십시오.]
한 마디로 레벨 1이라 전신은 안 되고 몸의 일부만 장착이 가능하다는 소리였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지만 루터는 침착하기 위해 노력했다.
머리와 사지 가운데 하나.
그렇다면 어느 곳에 장착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일 것인가.
“키아!”
우두머리 라이카가 다시 한번 괴성을 지르자 가지 위를 오가던 라이카들이 일제히 일행을 향해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오른팔!”
[나노슈트를 장착합니다.]
인테그라의 말이 끝난 순간 루터의 오른팔이 변모하기 시작했다.
손가락 끝에서 팔뚝의 중앙 지점까지가 새카맣게 물드는가 싶더니 그 위를 푸른빛과 함께 새하얀 금속들이 뒤덮었다.
“오른팔이?!”
다급한 와중이었지만 루터의 오른팔이 갑자기 빛나자 맥스와 카렌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뛰어내리던 라이카들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었다.
아직 더 놀랄 일이 남아 있었다.
[우완과 이어진 무기를 강화합니다.]
오른팔 전체가 아닌 팔뚝 절반까지만 나노슈트가 생성된 이유.
루터의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새하얀 입자의 물결이 대형도끼의 자루를 타고 올라가더니 도끼의 형태를 바꾸었다.
도끼날의 면마다 두 개씩 총 네 개의 새하얀 추진체가 추가되었고, 도낏자루 끝에는 에너지 건을 연상시키는 총구가 돋아났다.
그야말로 무기의 강화.
[힘의 차이가 느껴지십니까?]
인테그라가 웃으며 말했고,
루터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게임 속 콜라보 캐릭터가 되었다 11화
제3장 - 파편 #2
“키아악! 키악!”
모두가 놀라 주춤거리는 그때 우두머리 라이카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나무에서 뛰어내렸던 라이카들이 주저하면서도 다시 일행을 향해 돌아서거나 이빨을 세워댔다.
[옵니다!]
우두머리 라이카의 성화를 못 이긴 라이카 네 마리가 서로를 돌아보더니 동시에 달려들었다.
정면.
루터는 그런 놈들을 향해 마주 돌진하는 대신 에너지 건을 발사했다.
-파파팡!
“키악?!”
“칵!”
돌진해 오던 놈 가운데 셋이 머리나 가슴에 에너지 탄환을 맞고 나자빠졌다.
남은 한 마리가 용케 일행 앞까지 당도했지만 놈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매섭기 짝이 없는 맥스의 검이었다.
“루터 님?”
“맥스?”
맥스와 루터가 서로를 보며 놀랐다.
맥스는 에너지 건을 처음 봐서 놀란 것이었고, 루터는 맥스의 검 솜씨가 상상 이상으로 날카로워 놀란 것이었다.
‘아니지, 생각해 보니 당연한 건가?’
혼자서 코볼트 다섯을 동시에 상대해서 네 마리를 쓰러뜨린 맥스였다.
자꾸 당하기만 해서 잠시 잊고 있었는데, 맥스는 애당초 뛰어난 검사가 맞았다.
[마스터! 계속해서 옵니다!]
한눈팔 때가 아니었다.
루터는 급히 정면을 돌아보며 다시 에너지 건을 발사했다.
나노슈트를 장착하고 도끼를 업그레이드하긴 했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인 법!
‘이것이 어른의 싸움!’
귀신같은 연사로 라이카 두 마리를 더 쓰러트린 루터는 바닥에 바싹 달라붙어 돌진해 온 라이카를 걷어차 날려 버렸다.
맥스 역시 앞으로 나서며 적극적으로 검을 휘두르는데 척 봐도 솜씨가 상당했다.
한 번 휘두를 때마다 피보라가 이니 라이카들이 감히 달려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리고 카렌.
그녀 또한 만만치 않았다.
빈틈을 노리겠다는 듯 머리 바로 위에서 뛰어내린 라이카 한 마리를 초능력으로 공중에서 붙잡더니 그대로 검을 휘둘러 가슴을 갈라버렸다.
“끼, 끼익!”
“끽!”
순식간에 열 마리 가까이가 당하고 나자 남은 라이카들이 겁먹은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방심할 때가 아니었다.
“키아악!”
우두머리 라이카가 다시 한번 노성을 토하더니 그대로 가지를 박차 돌진해 왔다.
그 기세가 어찌나 거센지 에너지 건으로 저지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루터는 도끼를 휘둘렀다.
횡으로 크게 휘두르자 우두머리 라이카는 높이 도약해 공격은 물론이고 아예 루터 자체를 뛰어넘었다.
[바로 옵니다!]
인테그라의 말대로였다.
루터를 뛰어넘은 놈은 그대로 지면에 착지하자마자 반전하더니 재차 루터를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루터도 가만히 있던 것이 아니었다.
공격이 빗나가자마자 도끼를 휘두르며 생겨난 원심력에 몸을 맡겨 지면을 구른 루터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세웠다.
거리가 짧았다.
우두머리 라이카는 이미 눈앞에 있었고, 놈이 당긴 주먹이 내질러지기 직전이었다.
거리를 빼앗겼다.
선수 역시 빼앗겼다.
더욱이 지금 자세로는 아래에서 위로 올려 베는 형태의 공격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니 뒤처진다.
우두머리 라이카의 주먹이 무조건 루터 자신의 도끼보다 빠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래도 루터는 도끼를 휘둘렀다.
우두머리 라이카 역시 주먹을 내질렀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마치 찰나를 쟁취하듯 인테그라가 소리쳤다.
[부스터!]
-콰앙!
도끼날에 부착된 추진체들이 일시에 불을 뿜으며 막대한 추진력을 발생시켰다.
그리고 그 힘은 온전히 무지막지한 속도로 변환되었다.
-콰가강!
마치 벼락과 같았다.
순간적으로 가속한 도끼날이 중력을 거스르며 우두머리 라이카를 덮쳤고, 파괴적인 결과를 만들어냈다.
뼈와 가죽이 갈라진다.
등뼈가 쪼개지고 붉은 피가 허공에 비산한다.
-쿠웅!
두 동강이 난 우두머리 라이카의 몸이 지면에 떨어졌다. 그리고 그 위로 붉은 피가 후두둑 쏟아져 내렸다.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맥스와 카렌은 물론이고 라이카들까지도 작금의 상황을 멍청한 얼굴로 바라만 볼 뿐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전투 데이터를 미량 획득했습니다.]
[장비를 정지합니다.]
평소보다 살짝 더 발랄한 인테그라의 목소리에 꼬리를 잇듯 도낏자루를 타고 올랐던 푸른 선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몇 초.
숨을 길게 토한 루터는 대형도끼를 머리 위로 돌린 뒤 바닥에 늘어트렸고, 그 동작이 침묵을 깨트렸다.
“끼아악!”
“끼익! 끽!”
“끽!”
남아 있던 라이카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마치 고양이를 본 쥐 떼 같은 모습이었다.
[원숭이 형태의 외계 생명체들이 전의를 상실했습니다.]
[마스터의 승리입니다.]
인테그라의 다정한 목소리에 루터는 미소를 지었지만, 그 미소는 금방 쓴웃음으로 변하고 말았다.
무지막지한 참격을 펼친 대가가 녹록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끼를 휘두른 양팔은 물론이고 어깨와 등을 비롯한 전신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마스터, 마스터의 현재 상태로는 부스터를 이용한 참격을 연속해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추진체의 에너지 문제도 있으니 한 번의 전투에서 사용할 수 있는 횟수는 현재 기준으로 최대 3회입니다.]
[이 점에 유의해 주세요. 아셨죠?]
“그래.”
작게 답한 루터는 자신의 손에 들린 도끼와 바닥을 뒹굴고 있는 우두머리 라이카를 번갈아 보았다.
정말 무지막지한 위력이었다.
인테그라가 말한 제약이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루터는 계속해서 경악만 하고 있지 않았다.
이 무지막지한 힘은 다른 누가 아닌 루터 자신의 것이었으니 말이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
더욱이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지는 것도 가능하다.
깊은 고양감 속에 미소를 지은 루터는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라이카들은 이미 도망친 지 오래였지만, 이 자리에는 아직 남아 있는 이들이 있었다.
[맥스와 카렌 모두 크게 놀란 것 같습니다.]
[맥스에게서 마스터에 대한 존경심이 느껴집니다.]
인테그라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이쪽을 쳐다보는 맥스의 두 눈이 마치 샛별처럼 반짝이는 것 같았고, 카렌 역시 어찌나 놀랐는지 작은 입술을 멍하니 벌린 채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흠흠.”
괜히 민망해진 루터는 헛기침을 토한 뒤 두 사람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두 사람 모두 다치진 않았지?”
“네? 아, 네! 무, 무사해요!”
멍해 있던 카렌이 다급히 답하자 루터는 다시 미소 지었다. 허둥거리며 얼굴을 붉히는 모습이 무척이나 귀여웠기 때문이다.
[마스터는 역시 얼빠입니다.]
“미인은 세상의 보배니까.”
예쁜 거 싫어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니.
되는대로 답한 루터는 맥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마른침을 꿀꺽 삼킨 맥스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저도 무사합니다. 그런데 루터 님, 팔에 차고 계신 그건…… ‘하늘의 성갑’인 겁니까?”
하늘의 성갑.
유스티아 신성제국을 세운 건국황제 클라우제비츠가 입고 다녔다는 천사들의 갑옷.
당연히 아니었다.
루터의 오른팔에 장착된 것은 초과학의 산물인 나노슈트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맥스뿐만 아니라 카렌까지도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답을 기다리자 루터는 괜한 말을 붙이는 대신 그냥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역시…….”
“진짜 천사셨어…….”
맥스와 카렌의 얼굴이 꿈꾸는 소년과 소녀처럼 변했다.
구시대의 사람들에게 ‘하늘의 성갑’이 가지는 의미는 상당했기 때문이다.
몬스터들의 위협으로부터 인류를 지켜내고 최초의 국가를 세운 성황- 검제 클라우제비츠의 무구인 만큼 그 자체만으로도 전설이라 할 수 있었는데, 무려 ‘천계’의 물건이기도 하니 그 위상이 실로 굉장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맥스와 카렌이 루터의 무구를 클라우제비츠가 입었던 하늘의 성갑이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비슷한 종류의, 천사들이 입는 천계의 갑옷이라 생각하는 것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지금 같은 반응을 보이기에는 충분했다.
[마스터, 별생각 없이 시작한 사기 행각으로 인해 패가망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날카로운 인테그라의 지적에 움찔한 루터였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괜히 수습하겠다며 이야기를 덧붙이는 대신 상황을 진행시켰다.
“아무튼 서두르자. 괜히 다른 놈들까지 몰려들기 전에.”
루터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카렌과 맥스가 저마다의 무기를 갈무리한 뒤 크레이터 쪽으로 다가갔다.
루터 역시 도끼에 묻은 피를 한 번 털어낸 뒤 크레이터로 향했다.
[마스터, 파편으로부터 특수한 에너지가 방사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해가 될 수도 있으니 카렌과 맥스가 접근을 차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인테그라의 말에 움찔한 루터가 물었다.
“그럼 나는?”
[마스터는 인간이 아닌 전투형 호문클루스입니다.]
[더욱이 저 파편은 애당초 마스터와 함께 있던 것이니 마스터에게는 이렇다 할 해가 되지 않을 겁니다.]
제법 타당한 이야기였기에 루터는 더 묻는 대신 크레이터에 막 들어가려던 카렌과 맥스를 제지했다.
“일단 내가 먼저 살펴보겠다.”
일반적인 보물탐사 중이었다면 루터의 이런 행동은 반발을 샀을 터였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카렌과 맥스에게 있어 루터는 천사였고, 저 파편은 하늘의 물건이었다.
더욱이 루터 덕분에 몇 번이나 목숨을 건졌으니 말을 잘 듣는 것이 당연했다.
“네.”
“기다리겠습니다.”
얌전히 답한 카렌과 맥스는 정말로 크레이터 가에 쪼그리고 앉아 기다렸다.
루터는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픽하고 웃음이 나왔지만 애써 참은 뒤 크레이터 안으로 들어섰다.
“우주선…… 같지는 않은데?”
크레이터 중심에 반쯤 파묻혀 있는 원통 형태의 물건.
루터 자신의 나노슈트처럼 새하얀 금속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우주선이라 하기에는 그 크기가 너무 작았다.
파묻힌 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런 것을 감안한다 해도 성인 남성이 들어가기에는 턱없이 작아 보였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네다섯 살쯤 되는 어린아이 하나가 간신히 들어갈 정도?
[그래도 살펴볼 가치가 있습니다.]
[우주선이 아닌 비상탈출용 포트라 해도 마스터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루터 역시 옳게 여겼다.
더욱이 나노슈트처럼 확장되는 기능이 있을지도 몰랐다.
“가까이 가 볼게.”
나직이 말한 루터는 파편 바로 앞까지 다가간 뒤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기본적인 형태는 원통에 가까웠는데, 가까이서 보니 윗부분이 심하게 파손되어 안쪽이 드러나 있었다.
검은 금속.
그 사이를 오가는 푸른 선들과 중심에 위치한 새하얀 큐브.
[마스터, 일단 파편의 본체를 크레이터에서 꺼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인테그라의 말을 옳게 여긴 루터는 두 손으로 파편을 붙잡은 뒤 가볍게 흔들어 당겼다.
라이카들이 이미 한 번 파헤치려 시도를 했던 것인지 생각 이상으로 쉽게 뽑혀져 나왔다.
예상대로 조금 찌그러진 원통형 물체.
루터는 이왕 일어선 거 아예 크레이터 밖에 파편 본체를 올려놓은 뒤 루터 자신도 크레이터를 빠져나왔다.
[마스터, 큐브에서 신호가 발산되고 있습니다.]
[큐브와 접촉해 주세요.]
가로세로 각 10㎝쯤 되어 보이는 정육면체.
각 면의 중심에는 은은한 빛을 발하는 초록색 보석이 박혀 있었다.
‘에너지 큐브.’
스타 세이비어에서 비슷한 물건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에너지의 저장소인 동시에 상당량의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소형 컴퓨터.
쪼그려 앉아 큐브를 바라보던 루터는 천천히 큐브를 향해 손을 뻗었다.
카렌과 맥스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루터와 파편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쿵!
멀리서 굉음이 일었다.
루터는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고, 카렌과 맥스 역시 뒤를 돌아보았다.
-쿵! 쿵! 쿵!
단발이 아니었다.
연속해서 들려왔다.
더욱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쿵!
다시 땅이 울렸다.
카렌이 급히 루터를 향해 돌아섰고, 맥스가 급히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모두에게 닿지 않았다.
지축이 울리던 소리마저도 단 하나의 소리에 집어삼켜지고 말았다.
“키아아아아아아-!”
그것은 마치 폭발과 같았다.
하늘과 땅이 진감했고, 숲 전체가 포효 앞에 침묵했다.
루터는 저 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순간이지만 숨을 멈추고 말았다.
-쿵! 쿵! 쿵! 쿵!
다시 땅울림이 시작되었다.
이 모든 상황을 만들어낸 존재가 이쪽을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거대한 괴물.
이미 한 번 조우했던 그것.
[마스터.]인테그라의 부름에 루터는 답할 수 없었다.
강룡 조그레스.
놈의 포효가 다시 한번 하늘과 땅을 진감시켰다.
게임 속 콜라보 캐릭터가 되었다 12화
제3장 - 파편 #3
“키아아-!”
그것은 단순히 커다란 소리가 아니었다.
포효 자체가 하나의 무기였다.
고막을 뒤흔드는 데 그치지 않고 생존본능을 자극하는 그것에 카렌은 주저앉아 숨을 헐떡였다.
맥스는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은 채 이를 악물었고, 루터는 멍한 얼굴로 조그레스를 바라보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마스터!]
인테그라가 그런 루터의 정신을 일깨웠다.
덕분에 퍼뜩 정신을 차린 루터는 다시 정면을 보았다.
조그레스가 달려오고 있었다.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놈의 머리가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콰가강!
무시무시한 속도로 돌진해 온 조그레스의 거체가 단숨에 거목들을 쓰러트렸다.
적어도 백 년 이상을 살아왔을 나무들이었지만, 지금은 수수깡처럼 부러지고 꺾여 바닥을 구를 뿐이었다.
“커헉.”
루터는 숨을 쉬었다.
바닥에 엎드린 상태였다.
몸을 굴려 피한 것인지, 아니면 놈에게 치여 튕겨 나간 것인지 순간 판단이 되지 않았다. 파편 역시 보이지 않았다.
[마스터,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마스터, 놈이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집중하세요! 마스터!]
-쿠구구!
다시 커다란 소리가 났다.
조그레스의 머리 위를 뒤덮고 있던 거목들의 잔해가 떨어지며 난 소리였다.
루터는 숨을 쉬었다.
시야에 조그레스를 담았다.
거대한 꼬리와 육중한 두 다리.
백악기의 패자라 불린 티라노사우르스를 연상시키는 생김새.
루터는 상체를 일으키며 도낏자루를 움켜쥐었다. 조그레스가 거칠게 몸을 돌리는 것이 보였다. 굵은 두 다리가 대지를 밀어내는가 싶더니 놈의 꼬리가 지면을 휩쓸었다.
-콰가가!
기절해 쓰러져 있던 라이카들이 산채로 짓뭉개졌다.
육편이 뒤섞인 검붉은 피가 지면을 물들이는 광경은 끔찍하다기보단 비현실적이었다.
“키아아-!”
조그레스가 재차 포효하며 고개를 높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루터는 확신할 수 있었다.
어젯밤 보았던 그놈이 분명했다.
크레이터에 누워 있던 자신을 향해 달려들었던 조그레스.
우연이 아니었다.
루터 자신이 놈을 알아보았듯이, 놈 역시 루터 자신을 알아보고 있었다.
애당초 이 자리에 나타난 것부터가 루터 자신을 쫓아서였다.
어째서.
대체 무엇 때문에!
[마스터! 놈이 옵니다!]
의문을 떠올린 순간 조그레스가 다시 지면을 밀어냈다.
“피해!”
루터가 반사적으로 소리쳤지만 조그레스 쪽이 더 빨랐다.
놈은 다시 한번 지면을 훑듯이 꼬리를 휘둘렀고, 그 궤적 안에는 맥스와 카렌이 있었다.
-콰가강-!
맥스와 카렌이 튕겨져 나갔다.
공격이 적중하기 직전에 카렌이 초능력을 발동했지만 조그레스의 꼬리치기를 완벽히 막아내는 것은 무리였다.
하나로 포개진 두 사람은 십여 미터 이상을 날아간 뒤 엉망진창으로 바닥을 뒹굴었다.
그 이상은 알 수 없었다.
맥스의 것인지, 아니면 카렌의 것인지 모를 피가 두 사람 사이에 흥건할 따름이었다.
[정면에서 옵니다!]
[횡으로 피하십시오!]
인테그라의 목소리가 압축되어 전달되었다.
루터는 눈앞에 그려진 예상경로를 따라 몸을 던졌다.
이마에 돋아난 큰 뿔을 앞세운 조그레스의 거체가 그런 루터의 옆을 스치듯 지나쳤다.
-콰가강!
다시 거목들이 무너졌다.
간신히 옆으로 몸을 굴린 루터는 자리에서 일어섬과 동시에 대형도끼를 당겼다. 눈앞에 조그레스의 꼬리와 뒷다리가 보였다.
놈이 아직 돌아서지 않은 지금이 기회였다.
반드시 치명적인 타격을 입혀야만 했다.
루터는 머리 뒤로 대형도끼를 넘기며 달렸다.
거목의 잔해를 떨쳐낸 조그레스가 돌아서려는 순간 지면을 박차며 소리쳤다.
“부스터!”
-콰강!
도끼날의 추진체로부터 불꽃이 솟구쳤다.
무지막지한 추진력으로 가속된 도끼날이 조그레스의 꼬리를 향해 유성처럼 쏟아져 내렸다.
-쾅!
도끼날이 지면을 찍었다.
붉은 피가 눈앞을 가득 채웠고, 루터는 도끼날에 걸린 뜨거운 감각을 분명히 자각했다.
하지만 얕았다.
가죽은 물론이고 두꺼운 근육 역시 갈랐지만 뼈를 베어내지 못했다.
“키아!”
조그레스가 고통과 분노가 뒤섞인 포효를 내지르며 머리를 휘둘렀다.
루터는 그것을 보았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부스터 공격의 대가인 경직이 루터의 다리를 붙잡았기 때문이다.
[마스터!]
인테그라의 비명이 머릿속을 울렸다.
조그레스의 거대한 머리에 무방비 상태로 치인 루터가 엉망진창으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머리가 아팠다.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순간이지만 의식이 끊긴 것 같았다.
“커흑, 컥.”
루터의 입에서 새된 소리가 흘러나왔다.
갈비뼈를 다친 것인지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이마를 따라 흐른 피가 시야를 붉게 물들였다.
손끝에 감각이 없었다.
나노슈트 덕분에 도낏자루를 놓치진 않았지만 그 대신이라도 되듯 오른팔이 기묘한 각도로 꺾여 있었다.
[자가회복을 실시합니다.]
[자가회복을 실시합니다.]
[마스터, 정신 차리십시오! 마스터!]
인테그라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윙윙 울렸다.
온몸이 부서질 것만 같은 통증 때문에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진통제를 투여합니다.]
[자가회복을 실시합니다.]
인테그라의 필사적인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루터는 다시 숨을 토했다.
여전히 아팠지만 조금 전보다는 한결 쉽게 숨을 쉴 수 있었다.
부러지거나 내려앉았던 갈비뼈가 복구된 모양이었다.
통증이 가라앉았다.
고통이 줄어들자 다시 정신을 집중할 수 있었다.
강룡 조그레스.
놈이 루터 자신이 있는 방향을 돌아보며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꽉 닫힌 놈의 이빨 사이로 불꽃이 새어나왔다.
루터는 저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움직이지 않는다면 남은 미래는 오직 죽음뿐이었다.
“크악…… 큭!”
간신히 돌아누운 루터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똑바로 서지 않았다.
오히려 몸을 웅크린 채 양 다리에 의식을 집중했다.
조그레스가 입을 벌렸다.
그 순간 루터의 허벅지가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르더니 이내 폭발적인 도약력을 발생시켰다.
-쾅!
루터가 조그레를 향해 쏜살처럼 나아갔다.
그리고 동시에 조그레스의 입에서 거대한 불꽃이 마치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츠콰하-!
허공을 불사르며 돌진한 그것이 지면을 휩쓸었다.
그리고 루터는 계속해서 돌진했다.
간발의 차로 불꽃을 지나쳐 보낸 그는 뜨거운 열기를 뒤로한 채 있는 힘껏 도끼를 휘둘렀다.
[“부스터!”]
세 번째이자 마지막 부스터였다.
추진력이 낳은 무지막지한 횡베기가 조그레스의 아랫배를 강타했고, 놈의 배를 찢어놓았다.
하지만 아직이었다.
이번에도 루터의 공격이 충분하지 않았다.
놈의 가죽을 가르고 붉은 피를 쏟아내게 만들었지만 치명상에는 이르지 못했다.
루터의 잘못이 아니었다.
대형도끼의 문제였다.
반복된 부스터의 위력을 견뎌내지 못한 도낏자루가 꺾이며 위력이 반감된 탓이었다.
[마스터!]
“키아악!”
배가 찢어지는 고통에 정신이 나간 조그레스가 루터를 걷어찼다.
이번에도 공격 직후의 경직 때문에 움직이지 못했던 루터는 속절없이 발에 채 바닥을 뒹굴었고, 조그레스는 그런 루터를 놓치지 않았다.
배의 상처에서 피를 질질 흘리는 와중에도 루터에게 다가선 놈은 그대로 루터를 짓밟았다.
-콰앙!
“커헉!”
굉음이 루터의 비명을 짓뭉갰다.
다행히 땅이 물러 몸이 짓뭉개지는 대신 땅속에 박혔지만, 어마어마한 타격을 입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온몸의 뼈가 으스러졌고, 입에서 터져나온 피가 얼굴은 물론이고 상반신을 뒤덮었다.
[마스터! 피해야 합니다!]
[마스터! 움직이세요! 제발!]
인테그라가 비명처럼 외쳤지만 무리였다.
그리고 사실 한계에 달한 것은 인테그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루터를 치료해야 했지만 에너지가 부족했다. 나노머신을 통한 자가회복에도 한계가 있었다.
“커흑…… 큭…….”
루터가 가느다란 숨을 토했다.
어지러운 가운데 가까스로 눈을 떠 앞을 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오직 절망뿐이었다.
조그레스의 발.
놈이 다시 오른발을 들어 올렸다.
땅이 무르든 말든 이제는 끝이었다.
더 이상 놈의 공격을 막아내거나 피할 방법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키아악!”
루터를 짓밟기 위해 오른발을 들어 올렸던 놈이 비명을 지르며 뒤뚱거렸다.
놈의 오른쪽 눈에 박힌 검이 그 원인이었다.
[카렌! 카렌입니다!]
인테그라가 기뻐 외쳤다.
루터는 볼 수 없었지만 인테그라는 순식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파악했다.
맥스가 전력을 다해 던진 검을 카렌이 초능력으로 조종해 조그레스의 눈알에 박아 넣은 것이 분명했다.
“여기다! 여기야!”
저만치 나무 아래에서 맥스가 크게 소리쳤다.
온몸이 피투성이였지만 눈빛이 살아 있었다. 더욱이 맥스의 손에는 검이 한 자루 더 들려 있었다.
조그레스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하나 남은 눈으로 맥스를 노려본 놈은 이 전장에 나타난 이래 처음으로 루터가 아닌 다른 자에게 분노를 발산했다.
-쿵! 쿵! 쿵!
조그레스가 루터를 버리고 맥스를 향해 돌진했다.
그러자 인테그라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스터, 지금입니다. 도망쳐야 합니다.]
[조그레스의 주의가 맥스에게 쏠린 사이에 탈출해야만 합니다.]
[움직이세요!]
하지만 무리였다.
이 와중에도 쓰레기 같은 말이냐며 농담을 건넬 힘조차 없었다.
부상이 너무 심했다.
더 이상의 전투는 무리였다.
아니, 의식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겨웠다.
[……스터!]
인테그라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루터는 천천히 눈을 감았고, 그대로 의식을 끈을 놓고자 하였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이었다.
“루터 님!”
또 다른 목소리가 루터의 정신을 일깨웠다.
카렌.
눈이 떠지지 않았다.
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인테그라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강력한 에너지원입니다!]
[시스템 복구를 개시합니다.]
[코어 시스템을 복구합니다!]
-쾅!
충격이 전신을 꿰뚫었다.
인테그라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나노슈트 레벨 2를 진행합니다.]
[효율성을 포기하는 대신 생산 속도를 끌어올립니다.]
[코어 시스템의 복구가 진행 중입니다.]
[연산 속도가 상승합니다!]
흐릿했던 시야가 점점 더 또렷하게 변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피와 눈물로 범벅이 된 카렌의 얼굴이었다.
루터는 숨을 쉬었다.
길게 내쉬며 오른팔을 보았다.
주먹만 한 크기의 하얀색 큐브가 나노슈트의 손바닥에 꽂혀 있었다.
‘에너지 큐브.’
파편 안에 박혀 있던 것.
루터가 마정석을 흡수하던 모습을 기억해 낸 카렌이 재치를 발휘한 것이었다.
[코어 시스템 복구 완료!]
[첫 번째 코어 가동합니다!]
-츠확-!
에너지 큐브의 표면이 버터처럼 녹아내리는가 싶더니 나노슈트와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팔뚝의 반밖에 덮고 있지 못했던 나노슈트가 오른팔 전체를 뒤덮기 시작했다.
-쿵!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루터의 전신에서 뜨거운 열기가 솟구쳐 올랐다.
[장비를 강화합니다.]
[장비를 가동합니다.]
자루가 부러졌던 대형도끼.
다시 하나가 되었다. 네 개뿐이던 추진체는 여덟 개가 되었고, 도끼날은 더욱 크고 길어졌다.
루터의 오른팔부터 이어진 푸른 선이 마치 혈관처럼 도낏자루를 타고 올라 도끼 전체를 빛나게 했다.
“하아-”
루터는 뜨거운 숨을 토하며 돌아섰다.
다리 힘이 풀린 카렌이 털썩 주저앉은 그때 있는 힘껏 소리쳤다.
“조-그-레-스!”
포효와 적의에 놈이 반응했다.
맥스를 찾아 주변을 뒤지던 놈이 루터를 향해 돌아섰다.
“키아!”
놈도 다시 소리쳤다.
한쪽 눈을 잃고, 아랫배에서 피를 쏟고 있었지만 놈의 기세는 처음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강맹하기 짝이 없었다.
[아드레날린을 분비합니다.]
[‘전투가속’을 시행합니다.]
[지속 시간은 5초입니다.]
[5!]
-쾅!
루터가 질주했다.
[4!]
놈이 꼬리를 휘둘렀다.
[3!]
“인테그라!”
[불가시 모드를 기동합니다!]
[2!]
루터가 사라졌다.
꼬리가 지면을 휩쓸었고, 순간 사라진 루터의 모습에 조그레스가 당황했다.
[1!]
루터가 조그레스의 등을 타고 올랐다.
전신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조그레스는 루터를 감지했지만 그때는 이미 루터가 놈의 머리를 박차 하늘로 솟구친 이후였다.
[0!]
[전투가속을 해제합니다.]
[불가시 모드를 해제합니다.]
허공에 루터의 모습이 나타났다.
조그레스가 하나뿐인 눈으로 그런 루터를 보며 볼을 한껏 부풀렸다.
불꽃.
하지만 이쪽이 더 빠르다. 루터가 도낏자루에 힘을 준 순간 인테그라가 소리쳤다.
[부스터!]
-콰과쾅!
여덟 개의 추진체가 동시에 불꽃을 내뿜으며 무지막지한 회전력을 만들어냈다.
도낏자루를 쥔 루터를 축으로 하여 회전한 그것은 절묘한 밸런스를 유지하였고, 회전하는 칼날이 되어 조그레스를 강습했다.
불꽃을 뿜어낼 틈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츠콰악-!
그것은 이미 단순한 베기가 아니었다.
회전하는 도끼날에 걸린 조그레스의 가죽과 살이 뼈와 함께 분쇄되었다.
가른다기보다는 부순다에 가까운 일격이었다.
-쿵!
루터가 거칠게 착지했다. 그리고 뒤를 잇듯 엉망진창으로 찢긴 조그레스의 머리가 지면에 떨어졌다.
머리를 잃은 조그레스의 거체가 앞으로 고꾸라진 것은 직후의 일이었다.
-쿠구궁!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머리 잃은 조그레스의 단면에서부터 붉은 피가 왈칵왈칵 쏟아져 지면을 뒤덮었다.
“후우…… 후우…… 후…….”
루터는 거친 숨을 토하며 돌아섰다.
머리가 떨어진 조그레스의 시체가 눈앞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가슴이 뛰었다.
도낏자루를 쥔 손을 따라 전율이 일었다.
승리.
생존.
격파.
“으아아아!”
루터는 두 손을 높이 들며 승리의 포효를 내질렀다.
고양감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조그레스와의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전투 데이터를 대량으로 습득했습니다.]
[대형도끼 전투술 Lv1을 확립했습니다.]
[대형도끼 스킬 : ‘회전 회오리’를 확립했습니다.]
[마스터가 이기셨어요!]
루터 이상으로 흥분한 인테그라가 비명까지 질러가며 소리쳤다.
아마 몸이 있다면 제자리에서 방방 뛰고 있었으리라.
그랬기에 루터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바닥에 털썩하니 주저앉은 뒤에도 이상한 기술명을 놀리는 대신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 인테그라.”
그냥, 그냥 전부 고마워.
루터의 감사에 인테그라는 감동이라도 했는지 잠시 말을 못 하다가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도 고맙습니다.]
[오늘 너무 멋있습니다.]
[너무 멋진 마스터에게 상점 2점을 부여합니다.]
[멋져, 진짜 멋져.]
[우리 마스터 최고!]
잔뜩 신이 난 목소리에 루터는 결국 작게나마 웃음을 터트린 뒤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웠다.
그러자 인테그라가 다시 속삭이듯 말했다.
[맥스의 생명 반응이 감지됩니다.]
[카렌 역시 많이 지쳤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고 푹 쉬세요, 마스터.]
세 사람 모두 목숨을 건졌다.
아직 큐브에 대한 문제와 조그레스가 왜 유독 루터 자신을 그렇게 노렸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아 있었지만, 일단은 세 사람 모두 살았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
일단 살았으니 된 거겠지.
작게 답한 루터는 잠시나마 몸을 길게 늘어트리며 다시 한번 승리의 쾌감을 만끽했다.
게임 속 콜라보 캐릭터가 되었다 13화
제4장 - 인테그라
[나노슈트를 해제합니다.]
[자가회복을 시작합니다.]
오른팔 전체를 뒤덮고 있던 나노슈트가 마치 시간을 거스르듯 흩어지더니 아무런 문양 없는 검은색 팔찌가 되었다.
“오.”
작게 감탄한 루터는 팔을 이리저리 흔들어보다가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때마침 맥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루터 님!”
환히 웃으며 자신을 부르는 맥스의 모습에 루터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이마에서 흐른 피 때문에 범벅이 된 얼굴로 활짝 웃는- 그것도 다리를 절뚝이면서 다가오는 모습이 실로 기괴했기 때문이다.
[마스터의 거부감은 합리적입니다.]
[알몸의 근육질 남성이 실실 웃으며 다가오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과 같죠.]
“저기요?”
[맥스가 도착했습니다.]
인테그라의 말대로였다.
루터 앞에 도착한 맥스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대형도끼와 조그레스의 거대한 머리를 번갈아 보더니 새삼 다시 감탄을 표했다.
“정말, 정말 굉장합니다. 정말 대단한 일격이었습니다. 역시 천사님다우십니다.”
하늘 높은 곳에서 마치 천벌처럼 쏟아진 루터의 일격은 실로 전설 속의 한 장면과 같았다.
“흠흠.”
거듭된 칭찬에 다소 민망해진 루터는 헛기침을 터트린 뒤 물었다.
“다친 곳은 없고?”
[마스터, 눈을 다치신 건가요?]
피를 철철 흘리며 절뚝거리는 사람한테 다친 곳은 없냐니.
맥스 역시 조금 황당했는지 잠시 멍해 있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견딜 만합니다.”
한 마디로 다치긴 다쳤다는 이야기였다.
루터는 맥스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치료해 줄 테니 가까이 와봐라.”
루터의 말에 맥스가 다가오자 인테그라가 말했다.
[이마가 찢어지고 전신에 타박상을 입은 상태입니다.]
[오른쪽 다리를 삔 것 같습니다.]
[이마의 열상을 치료해 피를 멎게 하는 정도가 효율적인 처치일 것 같습니다.]
다행히 골절은 아닌 모양이었다.
루터는 맥스의 이마를 치료해 준 뒤 카렌 쪽을 돌아보았다.
아까 주저앉은 자리에서 아예 쓰러진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부상 정도는 맥스보다 가볍습니다.]
[다만 체중이 훨씬 더 가볍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타격이 더 크고, 정신적으로 훨씬 더 지친 상태인 것 같습니다.]
아마 체력적으로 몰린 상태에서 쥐어짜듯이 초능력을 사용한 영향도 있을 터였다.
“카렌도 치료하자.”
낮게 말한 루터가 카렌에게 다가가자 맥스 역시 다리를 절뚝이며 뒤를 따랐다.
“카렌.”
“……맥스.”
가늘게 뜬 눈으로 맥스를 확인한 카렌은 엷은 미소를 짓는가 싶더니 루터를 돌아보았다.
초록색 눈동자에는 전보다 훨씬 큰 경탄과 친근감이 묻어났다.
“천사님…….”
지친 상태로 가냘프게 미소 짓는 모습이 무척이나 가련하면서도 아름다웠다.
루터가 저도 모르게 빤히 바라보자 인테그라가 말했다.
[마스터, 정신 차리십시오.]
[치료가 우선입니다.]
기분 탓인지 어째 평소보다 덜 다정한 것 같은 인테그라의 목소리였지만 맞는 말이었기에 루터는 카렌의 치료를 시작했다.
[열상의 치료를 완료했습니다.]
[많이 지쳤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인테그라의 설명에 루터는 안도의 숨을 토한 뒤 카렌에게 말했다.
“고맙다. 덕분에 살았다.”
카렌이 큐브를 가져다준 덕분에 조그레스를 이길 수 있었다.
이번 전투의 1등 공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루터의 감사에 카렌은 어설프게 웃으며 말했다.
“저희도 루터님 덕분에 산 걸요.”
“그래.”
마주 웃은 루터는 다시 카렌을 살펴본 뒤 인테그라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에너지 큐브에 영향을 받지는 않았지?”
[조금 더 시간을 두고 관찰해 봐야 확신할 수 있겠지만 당장의 상태만 보면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
새삼 다시 안도의 숨을 토한 루터는 피곤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떴다 하는 카렌에게 말했다.
“카렌, 뒤처리는 맡기고 일단 푹 쉬어라.”
“……네, 루터 님.”
희미한 목소리로 답한 카렌은 그대로 눈을 감더니 거짓말처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지금까지 깨어 있던 것도 거의 억지로 버티는 수준이었던 모양이었다.
맥스는 그런 카렌을 가만히 바라보다 루터에게 말했다.
“루터 님, 다른 놈도 아닌 조그레스의 시체 근처이니 오히려 다가오는 놈들이 없을 겁니다.”
맞는 말이었다.
조그레스의 시체가 있다는 것은 곧 조그레스보다 강한 자가 근방에 있다는 소리였으니 말이다.
[이 숲에는 조그레스보다 강한 괴수가 없다고 알려진 모양입니다.]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원시수의 숲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더 강한 아룡들- 혹은 아예 다른 조그레스들이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심층부와 외곽부의 경계선이라 할 수 있을 이 근처라면 조그레스가 최강이었다.
맥스의 말처럼 당분간은 오히려 이 근처가 안전할 터였다.
“맥스 너도 쉬고 있어라. 난 조그레스의 시체를 살펴보고 오겠다.”
“네, 루터 님. 도움이 필요하시면 말씀하십시오.”
이미 루터가 쟈칼로부터 마정석을 적출하는 모습을 본 맥스였다.
루터는 고개만 한 번 끄덕인 뒤 조그레스의 시신을 향해 걸으며 말했다.
“인테그라, 에너지 큐브의 힘은 다 흡수한 거야?”
[모두 흡수하지는 못했지만 모두 사용하기는 했습니다. 속도를 높이느라 효율성을 포기해야 했지만, 그렇다 해도 코어 시스템을 복구한 것은 실로 큰 성과입니다.]
“그러고 보니 코어 시스템이 대체 뭐지?”
[마스터의 근간을 이루는 시스템입니다.]
[총 여덟 개의 코어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스터는 현재 첫 번째 코어만을 개방한 상태입니다.]
[낙하의 영향으로 코어 시스템 자체가 망가져 있었는데 다행히 이번 에너지 큐브 흡수를 통해 정상화에 성공했습니다.]
“잠깐, 그럼 지금까지 내가 망가져 있었다고?”
[그럼 지금까지 마스터가 정상인 줄 아셨습니까?]
“아니, 그…….”
뭐지.
괜히 욕을 먹고 있는 것 같은 이 기분은?
[마스터?]
“아니, 그…… 아니다. 됐고. 아무튼 코어 시스템이 복구되었다 이거구만.”
[그렇습니다. 코어 시스템 복구와 더불어 에너지 큐브 내의 데이터들을 불완전하게나마 입수해 제 소프트웨어들을 업그레이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제 마스터의 기능들을 보다 높은 단계까지 개발할 수 있습니다.]
“높은 단계라면?”
[각 기능의 개발 한계치가 레벨 5로 상승했습니다.]
“과연.”
[더불어, 앞서 말씀드렸듯이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를 통해 저 또한 성능상의 개선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달라진 게 느껴지시나요?]
인테그라의 물음에 루터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그레스와 싸우기 전보다 살짝 더 인간적으로 변한 것 같은 인테그라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정보가 있습니다.]
[에너지 큐브가 파손되어 데이터가 온전하지 않지만, 이번에 발견된 파편은 탈출용 보호구였던 것 같습니다.]
“탈출용 보호구?”
[그렇습니다. 마스터와 분리된 뒤 원통형으로 변모했지만 본래는 관 같은 형태로 확장되어 마스터를 보호하고 있던 것 같습니다.]
“과연.”
루터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인테그라가 계속해서 말했다.
[탈출용 보호구가 있다는 것은 곧 마스터가 보호구가 설치된 비행체에 탑승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에너지 큐브가 기능을 정지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포착한 정보에 따르면 현재 위치에서 동남쪽으로 약 50㎞ 떨어진 곳에서 에너지 큐브의 신호가 발신되고 있습니다.]
[근방까지 가면 정확한 위치를 감지할 수 있을 겁니다.]
“에너지 큐브면…… 이번에야말로 우주선 같은 게 있는 건가?”
[그것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발견된 파편보다 더 많은 에너지와 데이터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과연, 이게 내 메인 스토리인가.’
너무 웹소나 게임적인 발상이었지만 그럭저럭 말이 되는 것 같았다.
파편을 찾아 스스로를 업그레이드하는 동시에 우주선의 자취를 좇는다.
그리고 다음 파편이 있는 위치는 동남부로 50㎞ 떨어진 지점.
당장의 목표로 괜찮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조그레스.”
정확히는 조그레스의 마정석.
드래곤 헌터3에서는 아룡을 사냥할 경우 가죽과 뼈, 발톱 등을 채집해서 새로운 장비를 만드는 데 사용했는데, 루터에게는 다른 무엇보다 마정석이 중요했다.
‘물론 다른 것들도 챙길 수 있는 것들은 챙길 생각이지만.’
게임에서는 기껏 잡아봐야 부위 아이템이 드랍되지 않으면 손에 넣을 수 없었지만, 현실에서는 그냥 채집하면 될 일이었다.
루터가 조그레스에 대해 언급하자 바로 알아들은 인테그라가 물었다.
[마스터, 나노슈트를 장착하시겠습니까? 이전과 달리 근력 강화 기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오, 좋아.”
루터가 허락하자 오른팔은 물론이고 어깨까지 새하얀 나노슈트가 장착되었다.
시험 삼아 주먹을 쥐어본 루터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전능감이라고 해야 할까.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좋아, 시작해 보자고.”
루터는 도낏자루를 짧게 쥔 뒤 도끼날로 조그레스의 가슴을 천천히 갈랐다.
도축은 생전 처음 하는 것이었지만, 애당초 심장 부근에 박혀 있는 마정석 채취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힘으로 대충 해결이 되었다.
그리하여 손에 넣게 된 주먹만 한 크기의 붉은색 마정석.
크기도 크기였지만 발색부터가 쟈칼의 마정석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빛이 제법 선명한 데다 색도 밝은 것이 마치 보석 같았다.
‘비록 초반이긴 해도 나름 중간 보스급 녀석이니까.’
드래곤 헌터3를 시작하는 유저들이 처음 마주하게 되는 첫 번째 ‘통곡의 벽’이 바로 조그레스였다.
기존의 소형 아룡들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덩치와 맷집, 강력한 공격력을 보유한 녀석이었으니 말이다.
[두 번째 코어를 개방하는 것까지는 무리겠지만 흡수하면 상당한 성장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스터, 괜찮으시다면 다음 성장 방향은 제가 결정해도 되겠습니까?]
“응? 뭔가 키우고 싶은 방향이라도 있어?”
[그렇습니다. 마스터에게도 분명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좋아.”
다정하면서도 힘 있는 말에 루터는 오래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테그라가 루터 자신에게 해가 될 선택을 할 리는 절대로 없으니 과연 어떤 계통을 선택할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에너지원의 흡수를 시작합니다.]
[코어 시스템이 복구되어 나노머신 생산 속도가 향상되었습니다.]
[30분 후에 보여드릴 테니 기대해 주세요. 아셨죠? 네?]
애교를 부리듯 제법 잔망스럽게 말하는 인테그라였다.
‘귀엽네.’
피식 웃은 루터는 조그레스의 시체를 마저 해체하기 시작했다.
도축 자체가 처음이라 부위 채집이 제대로 될지 의문이긴 했지만, 여차하면 그냥 고기라도 잘라 먹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30여 분 뒤.
조그레스의 시체 앞에 걸터앉은 루터는 인테그라의 재롱에 다시 미소를 지었다.
[짜라자잔~]
루터의 눈앞.
500원짜리 동전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의 하얀색 드론 하나가 둥둥 떠 있었다.
루터의 나노슈트처럼 검은색 바디 위에 하얀색 금속판이 덧대어져 있는 형태였는데, 아직 레벨 1이라 그런지 네모난 동체 각 모서리에 프로펠러가 달려 있는, 21세기 지구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프로펠러 드론이었다.
하지만 인테그라는 마치 뽐내기라도 하듯 한 바퀴 곡예비행을 하더니 우쭐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마스터, 우월한 과학의 힘이 느껴지십니까?]
작고 귀여운 드론의 모습으로 저리 말하니 어째 평소보다 더 귀엽게 느껴지는 인테그라였다.
루터는 그런 드론 앞에서 손바닥을 펼쳐 보였고, 드론은 마치 작은 새라도 된 것처럼 루터의 손바닥 위에 안착했다.
“인상적이네. 이걸로 또 뭘 할 수 있지?”
스타 세이비어에서는 에너지 건과 나노슈트는 물론이고 드론 역시 레벨5에서 시작이 되었다.
‘드론의 역할은 키우기 나름이었고.’
정찰용부터 전투 보조까지 키우기에 따라 그 성능이나 외형이 천변만화하는 것이 바로 드론이었다.
루터의 물음에 인테그라가 답했다.
[일단은 역시 정찰용입니다.]
[드론에 달린 카메라를 통해 마스터와 시야 공유를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상공에서의 감시 역시 가능하니 이전보다 색적 능력이 우수해질 것입니다.]
‘아, 그래서였나.’
갑자기 왜 드론 쪽으로 의욕을 보였나 했더니 공격당하기 직전에나 적의 존재를 파악하고는 했던 일들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기특하네.’
루터는 마치 인테그라의 분신을 대하듯 드론의 본체를 손가락 끝으로 톡톡 두드려보았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특별한 기능이 있습니다.]
“뭔데?”
루터가 묻자 드론이 다시 붕하고 날아오르더니 본체 한가운데 박혀 있던 노란색 보석에서 빛이 투사되었다.
[이번에야말로 우월한 과학의 힘이 느껴지십니까? 휴먼?]
드론 위에 형성된 손바닥보다도 작은 홀로그램.
그런데 그 형태가 실로 범상치 않았다.
“인테……그라?”
[얼빠인 마스터의 취향을 고려했습니다.]
미니 메이드 복을 입은 은빛 머리칼의 아름다운 소녀.
황금빛 눈동자를 장난스럽게 빛낸 그녀는 인사하듯 치맛단을 살짝 들어 올리며 요망한 미소를 머금었다.
게임 속 콜라보 캐릭터가 되었다 14화
제4장 - 인테그라 #2
10㎝ 남짓이나 될까.
정말로 인형 같은 인테그라의 등장에 루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원작에서는 볼 수 없었던 기능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홀로그램이야 있었지만 인테그라는 목소리만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홀로그램으로나마 외형을 만들었다.
회색 머리칼을 엉덩이 부근까지 길게 기른 황금빛 눈동자의 미녀.
루터가 놀란 얼굴로 쳐다만 보자 인테그라는 우후후 웃더니 치맛단을 살짝 흔들며 말했다.
[마음에 드십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쳐다보시면 부끄럽습니다.]
다시 우후훗 웃는데 전혀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쪽을 놀리는 얼굴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그보단 신이 난 얼굴?’
저런 표정이라면- 아니, 디자인이라면 만화나 게임에서 많이 보았다.
주인님을 가지고 노는 요망한 메이드 그 자체.
그러고 보니 지금 인테그라의 복장은 치마가 좀 짧고 민소매라 그렇지 메이드 복이었다.
[마스터, 마스터의 감상을 요구합니다.]
미니 인테그라가 이쪽을 올려다보며 말하자 루터는 잠깐의 고민 끝에 말했다.
“왜 메이드 복이지?”
[두 가지 이유입니다. 하나는 제가 서포터 AI이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위에 말한 것처럼 마스터의 취향을 고려했기 때문입니다.]
[메이드 복 좋아하시죠?]
인테그라의 물음에 루터는 순간 움찔했다.
메이드 복.
좋아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사견이었지만 세상에 메이드 복 싫어하는 남자도 있냐는 것이 루터의 평소 지론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메이드 복을 좋아한다고 답한다?
‘역시 비범한 변태다운 대답입니다.’- 라고 답하며 매도하는 시선을 보내는 인테그라.
‘우후후, 귀여우셔라.’- 라고 말하며 내려다보는 시선을 보내는 인테그라.
막상 상상해 보니 양쪽 모두 좀 끌리기는 했지만 루터는 의식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끌리기는 개뿔이.
어느 쪽이든 사회적 매장으로의 지름길이었다.
루터 자신에게도 지켜야 할 사회적 지위와 명망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 그냥 그래.”
그래서 나온 대답이 그냥 그래.
상황을 넘기기에 좋은 부정도 긍정도 아닌 애매모호한 대답.
하지만 루터의 대답에 인테그라는 눈을 가늘게 뜨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웃으며 말했다.
[마스터의 혈압과 분당 심장박동 수치가 빠르게 상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배려심 넘치는 서포트 AI이기 때문에 이 정도에서 넘어가겠습니다.]
[이번만입니다.]
그리고 다시 유들유들 웃는 모습이 마치 고양이- 아니, 여우라도 되는 것 같았다.
‘쟤도 나처럼 뭔가 이상이 생긴 건가?’
스타 세이비어에서도 제법 인간다운 면모를 보여준 인테그라였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었다.
그냥 어느 정도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는 AI라는 느낌이었으니 말이다.
[마스터?]
“어, 그래. 아무튼…… 예쁘긴 하네. 잘 어울려.”
전체적으로 늘씬하니 길쭉길쭉한 몸매에 살짝 날카로우면서도 사랑스러운 인상의 이목구비가 딱 인테그라답다는 느낌이었다.
‘저 얼굴로 쓰레기 같은 말을 다정하게 하는 건가.’
잠시 상상해 본 루터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뭔가 부조리의 결정체 같은데 그게 또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후후훗.]
예쁘다는 말이 마음에 든 것일까.
몸을 살짝 꼬며 수줍게 웃던 인테그라는 다시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그 순간 홀로그램이 해제되었다.
“인테그라?”
루터가 깜짝 놀라서 묻자 다시 머릿속에서 인테그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습니다.]
[드론의 크기가 작아 아직 홀로그램을 오래 유지하지 못합니다.]
[HUD를 통해 증강현실로 마스터에게만 보이게 하는 것과 달리 홀로그램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까지 보이게 하려면 에너지가 소모되는데, 드론의 에너지 충전량이 작아 홀로그램을 남용할 수 없습니다.]
대충 알 것 같았다.
루터 자신의 몸에서 분리되어 활동하는 드론이다 보니 자연 별도의 에너지원이 필요했는데, 덩치가 워낙 작다 보니 비행에 쓰는 에너지만으로도 빠듯한 모양이었다.
“굳이 홀로그램 장치를 달 필요 없었던 거 아냐?”
[홀로그램 장치 자체는 상당히 유용하게 쓰일 수 있습니다. 마스터 외의 일행에게 지도 등의 시각 정보를 전달하기 위함입니다.]
“과연.”
확실히 유용할 것 같았다.
더욱이 홀로그램으로 입체적인 지도를 구현한다면 손으로 그리는 것 따위보다 몇 배나 더 정확한 정보의 전달 역시 가능할 터였고 말이다.
[드론은 제가 원격으로 조종할 계획입니다.]
[아직 레벨이 낮아 색적 및 정찰 활동에밖에 쓸 수 없겠지만 레벨이 높아지면 전투 보조용도로 사용할 예정입니다.]
인테그라의 설명에 루터는 미소를 지었다.
스타 세이비어에서 직접 운용했던 전투용 드론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입맛대로 키우는 맛이 있었지.’
에너지 건과 나노슈트 역시 성장 방향을 결정할 수 있긴 했지만 아무래도 그 변화의 폭이 제한된 편이었다.
반면 드론은 애당초 외부장비이기 때문인지 수백, 수천 가지 이상의 조합이 존재할 정도로 자유로운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했다.
‘장비 뭐 끼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드론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실탄 계열의 중화기를 잔뜩 달아서 화력 보조용으로 쓸 수도 있었고, 나노슈트와 연계해서 합체용 유닛으로도 활용이 가능했다.
‘덩치를 완전 키워서 타고 다니는 것도 가능했고.’
약간 오토바이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지금은 500원짜리 초소형 드론에 불과하지만.’
홀로그램 메이드가 딸려 있는.
[마스터, 미소가 소름 끼칩니다.]
[객관적으로 평가했을 때 반라의 근육질 남성이 초점 없는 눈으로 킥킥 웃는 모습은 변태로 오인- 정정하겠습니다. 그냥 변태입니다.]
다정한 목소리로 잔인한 말을 하는 것은 평소와 똑같았는데 어째 느낌이 달랐다.
지금까지와 달리 인테그라의 얼굴과 표정이 절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흠흠.”
[수상한 헛기침이군요.]
“아무튼.”
맥락 없이 이어지던 흰소리를 끊은 루터는 프로펠러를 접고 납작해진 드론을 오른손 팔찌에 부착시킨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단 조그레스의 부산물들을 가지고 다시 숲 외곽부로 이동할 생각이야. 맥스 말마따나 이 근처가 오히려 안전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계속 머물고 있을 수도 없으니까.”
[합리적인 판단입니다.]
[부산물 정리를 하고 계시면 제가 드론으로 야영할 만한 장소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오.”
역시 일단 뭐든 생기면 쓸 곳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루터가 허락하듯 오른팔을 들어 올리자 다시 프로펠러를 꺼낸 드론이 두둥실 날아올랐다.
[일단 상공에서 이 근방 일대 및 숲의 전체적인 형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믿음직하네.”
[저니까요.]
도도하면서도 장난스럽게 답한 인테그라는 그대로 드론을 높이 날려 보냈다.
“후, 좋아. 그럼 난 부산물 정리 좀 해볼까.”
[가죽은 부피가 너무 크니 포기하고 이빨과 발톱 위주로 챙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어?”
자연스럽게 돌아온 인테그라의 대답에 루터는 반사적으로 하늘 높이 치솟고 있는 드론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인테그라가 말했다.
[AI에게 멀티태스킹은 손쉬운 일입니다, 휴먼.]
“그러네.”
생각해 보니 애당초 드론에 인테그라의 본체가 옮겨간 것도 아니고.
고개를 끄덕인 루터는 인테그라의 조언을 받아가며 부산물들을 챙겼다.
그리고 한나절 뒤.
숲 외곽부 근처의 개울가에 자리를 잡은 루터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노을과 함께 붉게 타올랐던 하늘이 어느새 보랏빛으로 물들며 어둠에 잡아먹히고 있었다.
[날씨가 춥습니다. 체온 조절에 유의해 주세요.]
“그래.”
작게 답한 루터는 모닥불에 장작을 몇 개 더 던진 뒤 정면을 보았다.
카렌과 맥스가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두 사람 모두 꼴이 엉망진창이었다.
그나마 개울가에서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은 덕에 얼굴 자체는 깨끗했지만 입고 있는 옷들이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이다.
[마스터는 아예 벗고 계시지만요.]
여전히 하이 코볼트에게서 뺏은 거적때기만 두르고 있는 루터에게 맥스가 자기 망토를 양보하려 했지만 정중히 사양했다.
위에 아무것도 안 입은 상태로 망토를 두르고 있자니 뭔가 소중한 것을 포기해 버리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모닥불 앞에서 데운 물을 먹은 덕분인지 제법 혈색이 돌아온 맥스와 카렌이었지만 여전히 피곤한지 꾸벅꾸벅 반쯤 졸고들 있었다.
‘필요한 이야기만 후딱 하고 다시 재워야겠군.’
마음을 정한 루터는 카렌과 맥스에게 말했다.
“일단 다시 한번 감사한다. 둘 덕분에 파편을 찾을 수 있었다.”
루터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맥스는 당황해서 덩달아 고개를 숙였고, 카렌는 엷게 미소 지으며 마주 예를 표했다.
“루터 님, 그 파편은…… 하늘의 성갑의…… 조각인 건가요?”
카렌이 조심스럽게 묻자 맥스는 눈을 크게 뜨더니 납득이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댔다.
카렌 역시 가만 보면 묻고는 있었지만 자신의 이야기에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진 눈빛이었다.
‘하긴, 그렇게 보이려나.’
에너지 큐브를 흡수한 뒤 나노슈트가 커진 데다가 도끼 역시 강화되었으니까.
루터가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대신 감탄했다는 듯 호-하는 얼굴로 카렌을 바라보자 맥스가 흥분해서 말했다.
“과연, 그랬던 거군요. 루터 님의 성갑이 왜 건틀릿밖에 없나 했는데 이제야 알았습니다. 성갑이 부서져서 조각난 거였군요. 그 조각을 모두 모으면 성갑이 다시 완성되는 것이고요! 그렇지? 카렌?”
맥스가 확인하듯 카렌을 돌아보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빙긋 웃으며 루터를 돌아보았다.
뭐라고 해야 하나, 적극적인 동의는 아니었지만 은근한 동의로 보이는 행동이라고 해야 할까?
[착각하는 모습들이 귀엽군요.]
[하지만 유용한 착각인 것 같습니다.]
[그냥 이걸로 가는 게 좋겠습니다.]
[어차피 우주선 운운해 봐야 믿어주지 않을 테니 말이죠.]
인테그라의 말에 루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괜히 스타 세이비어 운운해 봐야 괜한 혼란만 일으킬 뿐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예방조치는 해놔야지.’
카렌과 맥스가 하늘의 성갑을 지닌 천사를 보았다고 소문을 내기라도 하면 이래저래 곤란한 처지에 처할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음…… 그런 것 같다.”
“그런 것 같다……고요?”
맥스가 눈을 껌벅이자 카렌 역시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루터는 그런 두 사람에게 웃으며 말했다.
“전에 말했듯이 나는 기억을 잃었다. 파편…… 아니, 성갑의 조각을 모을 때마다 조금씩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아직은 무어라 확실히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루터 스스로 ‘성갑의 조각’이란 언급을 했기 때문인지 카렌과 맥스는 그냥 그렇군요-정도의 반응만을 보였다.
그렇기에 루터는 다시 말을 이었다.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나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언급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 기억을 온전히 찾기 전까지는 가능한 비밀로 하고 싶으니.”
“알겠습니다.”
“예, 루터 님.”
맥스가 손바닥으로 가슴을 탕탕 두드리자 카렌 역시도 자기 가슴을 살며시 두드렸다.
드래곤 헌터 시리즈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맹세의 표식이었다.
“그런데 루터 님. 그럼 이제 성갑의 다음 조각을 찾으러 떠나시는 겁니까?”
맥스가 다소 긴장된 얼굴로 물었다.
카렌 역시도 입술을 살짝 움츠린 채 루터의 대답을 기다리는데, 약간의 초조함과 기대가 뒤섞인 얼굴이었다.
[마스터와 계속 같이 다니고 싶어 하는 눈치입니다.]
[이쯤에서 그만 헤어지는 건 어떨까요?]
‘응, 아냐.’
인테그라의 말과 달리 루터는 카렌과 맥스와의 동행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당장 이번 조그레스와의 싸움에서 큰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드래곤 헌터의 세계에 적응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아직 두 사람에게 딱히 해준 게 없다는 것도 마음에 걸리는 루터였다.
“그래, 다음 조각을 찾으려고 한다. 여기서 동남쪽으로 70㎞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것 같다.”
“동남쪽으로 70㎞면…… 베누스 시 인근일 것 같네요.”
카렌이 동의를 구하듯 맥스를 돌아보자 그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도 그쪽으로 가던 길이었습니다. 북부에서 서부로 내려와 베누스 시 근방으로 가던 중에 유성을 보고 원시수의 숲에 들른 것이거든요.”
“오.”
말하는 모양새를 보니 꾸며낸 말이 아니라 진짜인 것 같았다.
다음 목적지가 겹친다니, 이 정도면 진짜 인연이라도 있는 것이 아닐까?
루터의 얼굴이 밝아지자 카렌 역시 활짝 웃으며 말했다.
“잘 됐네요. 그럼 루터 님, 베누스 시까지 동행해도 될까요?”
“나야말로 부탁하고 싶다.”
“하하하, 그럼 결정되었군요.”
[후우, 어쩔 수 없죠.]
차례대로 카렌, 루터, 맥스, 인테그라였다.
맥스는 다시 밝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원시수의 숲 인근에는 큰 마을이 하나 있습니다. 그곳에서 조그레스의 부산물들을 처리한 뒤 베누스 시로 향하면 될 것 같습니다.”
“과연.”
역시 동행하기를 잘한 것 같았다.
드래곤 헌터 오리진이라면 몇 번인가 반복 플레이를 한 루터였지만, 게임을 해본 것과 실제로 그 게임 속 세계에 들어온 것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오늘은 이만 쉬도록 할까요?”
화제가 화제다 보니 잠시 활력이 돌았던 카렌과 맥스였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피곤함이 가득했다.
“음, 그래. 하지만 마지막으로 한 가지 말해둘 게 있다.”
동행하기로 한 이상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
카렌과 맥스가 호기심을 보이자 루터는 자기 머리를 검지로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내 머릿속에는 성령이 살고 있다.”
“성령……이요?”
“그래, 성령. 종종 내게 말을 걸어오는데, 그래서 나도 대답을 해야 할 때가 있다.”
지금까지는 그냥 얼버무리고 넘어갔지만 계속 동행하기로 한 이상 대강이라도 이야기를 만들어줄 필요가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시도 때도 없이 혼잣말하는 미친놈으로 보일 테니 말이다.
그리고 과연 루터의 우려는 기우가 아니었는지, 서로를 돌아본 카렌과 맥스는 비로소 납득했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 그래서 지금까지…….”
“성령과 대화를 하셨던 거군요.”
루터가 작게 한다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숨길 수는 없는 혼잣말이었다.
더욱이 전투 중에 몇 번이나 인테그라의 이름을 부르짖기까지 한 터라 루터를 이상하게 보고 있던 카렌과 맥스였다.
하지만 이제 의문이 풀렸다.
다른 사람이 머릿속의 성령 어쩌고 하면 미친놈 취급했을 터였지만 카렌과 맥스에게 있어 루터는 하늘에서 온 천사였다.
성령과 대화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성령 : 성스러운 영혼.]
[아름답고 상냥하며 다정하고 친절한 존재.]
[그랬군요. 마스터는 저를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군요.]
[귀여우셔라.]
‘아니다, 이 악마야.’
그리고 대체 뭐가 귀여운 건데.
성령의 뜻은 왜 저렇고.
하지만 여기서 말을 이어봐야 인테그라의 페이스에 말릴 뿐이라는 것을 잘 아는 루터는 괜한 말을 늘어놓는 대신 카렌과 맥스에게 팔찌를 내밀며 말했다.
“인테그라, 지도.”
[지도를 송출합니다.]
팔찌의 노란 보석에서 방출된 홀로그램에 카렌과 맥스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마법이 실존하고, 마법을 사용한 도구들 역시 실생활에 쓰이는 세계에서 살아온 두 사람이었지만 이런 종류의 마도구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이거…… 설마 지도인 겁니까?”
맥스의 물음에 루터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짤막한 감탄이 터졌다.
“이렇게 정밀한 지도는 처음입니다.”
“원시수의 숲이…… 이렇게 생겼군요.”
하늘에서 내려다본 원시수의 숲.
루터는 일행이 있는 장소를 붉은 점으로 표시한 뒤 말을 이었다.
“현재 우리 위치는 여기다. 내일 아침에 숲을 빠져나가서 이동할 생각인데 주변 지리를 알겠나?”
“예, 알 것 같습니다. 일단 숲을 빠져나가면 제가 길을 안내하겠습니다.”
맥스가 지도를 유심히 바라보며 답하자 카렌이 어깨를 늘어트렸다.
새삼 긴장이 풀렸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그만 자자. 내일 아침 숲을 나가도록 하고.”
“불침번은…….”
“괜찮다, 성령이 대신 서줄 거다.”
[또 저만 못 자는 건가요?]
넌 애당초 안 자잖아.
마음속으로만 답한 루터는 성령의 쓰임이 놀랍다는 듯 감탄하는 맥스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여준 뒤 자리를 잡고 누웠다.
“잘 자라.”
“안녕히 주무십시오, 루터 님.”
“안녕히 주무세요.”
[잘 자요, 마스터.]
모두의 인사를 들으며 루터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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