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aboração 1
게임 속 콜라보 캐릭터가 되었다 - 취룡
SF, 판타지, 밀리터리 등등 게임이라면 배경을 가리지 않고 하던 이윤호.
어느 날 눈 떠보니 판타지 액션 게임 드래곤 헌터3의 세계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Now Loading...]
[9세대 나노머신 탑재 호문클루스]
[범용인형결전병기 루터 라이트시커]
이게 뭐야.
여기 드래곤 헌터3 아니었어? 왜 캐릭터는 스타 세이비어지?
게임 속에 들어왔는데 캐릭터만 다른 게임이라고?
무슨 콜라보 이벤트야?
이딴 게 어디 있-
“오히려 좋아.”
판타지 게임 속 SF 캐릭터라니 이거 완전 사기 아냐?
나노머신과 함께하는 판타지 생존기.
[게임 속 콜라보 캐릭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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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콜라보 캐릭터가 되었다 1화
프롤로그
좋아하던 판타지 게임 속에 들어왔다.
인류가 사악한 악룡들에 맞서 투쟁을 펼쳐나가는 드라마틱 액션 롤플레잉 게임 드래곤 헌터3의 세계에.
여기까지는 좋다.
이해할 수 있다.
클리셰니까.
익숙한 전개니까.
그런데-
[형식넘버 : ZX-999]
[9세대 나노머신 장착 호문클루스]
[성장형 범용인형결전병기]
[개체명 : 루터 라이트시커]
내 캐릭터가- 아니, 내가 이상하다.
이거 분명 판타지 게임인데…….
SF 아닌데…….
‘드래곤 헌터3’가 아니라 옆 동네 SF게임인 ‘스타 세이비어’ 캐릭터 같은데…….
“콜…… 라보?”
아무래도 게임이 섞인 것 같다.
제1장 - 유성
이윤호의 게임 취향은 잡식이었다.
SF와 판타지를 가리지 않았고, FPS와 RPG를 두루 플레이했다.
그래서 소위 말하는 최애 게임도 어느 하나를 고르지 못했다.
이윤호가 제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게임은 둘.
하나는 악룡들과 인류의 생존을 건 투쟁이 펼쳐지는 판타지 배경의 ARPG인 드래곤 헌터3였고,
다른 하나는 우주를 배경으로 초능력자, 외계인, 강화인간, 호문클루스 등등이 돈과 이권을 놓고 경합을 펼치다 끝에 가서는 우주를 구하는 SF…… 라기보다는 스페이스 오페라에 가까운 FPS RPG 스타 세이비어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낯선 천장을 넘어 낯선 밤하늘과 불타는 대지 사이에서 눈을 뜬 이윤호는 당혹감에 젖어 있었다.
“뭐야 이게.”
처음엔 꿈인가 했다.
침대 위에서 잠들었는데 눈 떠보니 야외, 그것도 밤하늘엔 달이 두 개나 떠 있고 주변은 불바다가 되어 있으며, 무슨 운석이라도 충돌한 것 같은 크레이터 한가운데에 누워 있는 상황 따위는 있을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다시 눈을 감았지만 10초도 안 되어서 다시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꿈이 아니다.
꿈이면 이렇게 생생할 수가 없다.
절로 가빠지기 시작한 숨을 가다듬으며 이윤호는 일단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알몸이었다.
그런데 어째 좀 낯선 느낌이 들었다.
크레이터 밖에서 넘실거리는 불꽃의 빛 때문일까?
아니었다.
이 낯섦은 명암의 변화 같은 것에서 유발된 것이 아니었다.
“뭐야 이거.”
근육이 실하다.
피부가 이전보다 훨씬 하얀 건 둘째 치고 전신의 근육이 굉장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허벅지를 만져본 이윤호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허벅지가 무슨 강철 같았기 때문이다.
피부는 아기 피부처럼 부드러운데 그 밑으로 느껴지는 밀도가 장난이 아니다.
당연히 손과 팔도 달랐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그곳 역시 기억과 달랐다.
전보다 훨씬 더-
“아니지,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이윤호는 스스로의 몸을 더듬으며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 같은 크레이터.
불바다가 된 주변.
하늘에 떠 있는 붉고 하얀 두 개의 달과 서울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없이 많은 별들로 가득 찬 밤하늘.
이윤호는 잠시 편견을 버리고 생각해 보았다.
일단 크레이터.
크레이터 중앙에 누워 있는 자신.
이거 설마 이윤호 자신이 떨어지면서 생긴 크레이터인가?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지만 이윤호는 어쩐지 모를 타당함을 느끼며 생각을 이어보았다.
그리고 밤하늘에 떠 있는 두 개의 달.
묘하게도 저건 익숙했다.
판타지의 단골손님이기도 했고, 제일 좋아하는 게임 중 하나인 드래곤 헌터3에서 질리도록 본 것이었으니까.
‘판타지에 달 두 개는 국룰이지.’
그런데 자꾸 보다 보니 정말 드래곤 헌터3의 달들 같았다.
특히 하나는 노랗고 하나는 하얀 것이 말이다.
“에이 설마.”
아무리 클리셰라지만 게임 속에 들어왔을 리가.
아무래도 요즘 게임을 너무 많이 한 모양이었다.
그러니 다시 자면, 자면-
“씨X.”
꿈이 아니다.
꿈일 수가 없다.
그리고 정말 드래곤 헌터3의 세계에 들어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어딘지 모를 세상에 덩그러니 떨어진 것만은 확실하다.
“후우, 후우.”
다시 숨이 가빠졌다.
이윤호는 눈을 부릅뜬 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두 개의 달.
하나는 하얀색, 다른 하나는 노란색.
드래곤 헌터 시리즈와 같았다.
“생각하자.”
이윤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정신착란이 일어날 것 같은 상황이었지만 유체이탈 화법을 하듯이 최대한 객관적으로 말을 이어보았다.
우습게도 웹소설과 만화 등등에서 이런 식의 이세계 진입을 하도 많이 봐서 그런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묘하게 침착한 사고가 가능했다.
만약 이곳이 정말 드래곤 헌터3의 세계라면.
이윤호 자신이 드래곤 헌터3의 세계에 들어온 것이라면.
여긴 어디지?
지금은 언제지?
아니, 그보다 ‘나’는 누구지?
게임 속에 들어가면 게임 속 등장인물이 되는 게 국룰 아닌가?
“몸이 달라지긴 했어.”
아무리 봐도 이건 이윤호 자신의 몸이 아니었다.
즉, 몸이 바뀌었다.
다른 누군가의 몸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기억을 아무리 뒤져봐도 크레이터에서 시작하는 캐릭터 따위는 생각나지 않았다.
물론 이윤호 자신이 드래곤 헌터3의 모든 캐릭터들을 다 꿰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주인공이나 조연, 악역 같은 것들은 기억해도 엑스트라까지는 전부 꿰찰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불타는 크레이터 사이에 누워 있는- 그리고 하늘에서 유성처럼 떨어졌을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 일개 엑스트라일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설마 3편이 아닌가?’
막 3편 엔딩 이후의 세계라든지?
만약 그렇다면-
순간 덜컥 겁이 났다.
드래곤 헌터 3라면 잘 안다.
웹소설에 나온 것처럼 게임지식으로 무쌍을 펼치는 것까지는 솔직히 좀 무리일 것 같았지만, 그래도 아는 게 많으니 이것저것 활용은 가능할 터였다.
하지만 3편 이후라면 아는 것이 없다.
물론 전작의 스토리나 인물들을 꿰고 있는 것 자체도 큰 힘이 되어주긴 하겠지만, 그래도 앞날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간극이 존재했다.
‘내가 웹소를 많이 보긴 했구나.’
이 와중에 이런 식의 사고를 이어가는 걸 보면.
그런데 그때였다.
웹소설.
게임 속 세상.
그렇다면-
“사, 상태창?”
마치 누가 볼까 봐 겁내듯이 소심하게 외쳐보았지만 반응이 없었다.
민망함에 얼굴을 붉힌 이윤호는 헛기침을 몇 번인가 하더니 다시 소리 내어 말해보았다.
“스테이터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Now Loading...]
머릿속에 딱딱한 기계음이 울렸고, 눈앞에 빛의 문자가 나타났다.
저도 모르게 흥분한 이윤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먹을 움켜쥐었다.
“지, 진짜야?”
게임 속에 들어왔고, 정말로 게임처럼 상태창이 생긴 건가?!
흥분한 이윤호의 눈앞에 연속해서 빛의 문자들이 떠올랐다.
[재기동 시퀀스]
[서포트 AI 인테그라]
[데이터가 유실되었습니다.]
[데이터가 부족합니다.]
[코어 시스템이 손상되었습니다.]
[메인 프레임과의 연결이 불가능합니다.]
[현재 환경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
[시스템을 초기화 중입니다.]
[3]
[2]
[1]
[안녕하세요, 마스터. 처음 뵙겠습니다. 서포트 AI 인테그라입니다. 아름다운 밤이에요.]
딱딱한 기계음이 돌연 청명하고 단아한 여인의 목소리로 바뀌었다.
밖이 아닌 내부- 머릿속에서 들려온 목소리.
그런데 이윤호에게는 저 밤하늘의 달들만큼이나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랬기에 이윤호는 혼란에 빠졌다.
“자, 잠깐.”
여기 드래곤 헌터3 아니었어?
왜 인테그라 목소리가 들리는 거지?
서포트 AI 인테그라.
스페이스 오페라를 표방하는 FPS RPG ‘스타 세이비어’에서 전투형 호문클루스 ‘루터 라이트시커’를 선택하면 추가되는 서포트 AI.
막상 정신 차리고 보니 빛의 문자의 글씨체나 창의 형태도 스타 세이비어에서 보던 것과 똑같았다.
“이, 인테그라.”
[말씀하시죠, 마스터.]
“사, 상태창 좀 보여줘.”
[알겠습니다.]
인테그라가 대답한 직후였다.
* * *
[형식넘버 : ZX-999]
[9세대 나노머신 탑재 호문클루스]
[성장형 범용인형결전병기]
[개체명 : 루터 라이트시커]
* * *
참으로 익숙한, 중2병의 스멜이 진하게 느껴지는 문구들.
이윤호는 저 문구들을 알고 있었다.
아니, 알 수밖에 없었다.
이윤호 자신에게 있어 드래곤 헌터 3에 버금가는 최애겜에 나오는 문장들이었으니까.
“스타…… 세이비어?”
확실했다.
스타 세이비어의 등장인물들 가운데 하나인 전투형 호문클루스 루터가 분명했다.
“뭐지 대체?”
저 밤하늘은 드래곤 헌터3의 것이 분명한데 캐릭터는 스타 세이비어라고?
“코, 콜라보?”
게임에 다른 게임의 캐릭터들을 등장시키는 특별 이벤트.
뭔가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그럴싸한 것 같기도 했다.
애당초 게임 속에 들어온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상황이지 않은가.
더욱이 여기서 타당성을 따지는 것도 우습지만 실제로 드래곤 헌터 시리즈는 스타 세이비어와 콜라보 이벤트를 한 적도 있었다.
‘상황을 정리해 보자.’
스타 세이비어의 캐릭터인 나노머신 탑재 전투형 호문클루스 루터 라이트시커가 되어 판타지 월드인 드래곤 헌터3의 세계에 들어왔다.
‘뭔가 정리만으로 정신이 나갈 것 같아.’
하지만 만약 저 전제가 사실이라면, 그리고 이윤호 자신이 좋든 싫든 드래곤 헌터3의 세계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해볼 만해.’
평범하게(?) 드래곤 헌터3의 등장인물 가운데 하나가 되는 것보다 훨씬 더.
망나니도, 귀족 집안도, 치트 스킬도 없지만 존재 자체가 사기인 나노머신이 있다.
더욱이 평범한 인간도 아닌 강화인간이다.
한마디로 판타지 세계에 초월적 과학문명의 산물인 SF전사가 들어온 셈이었다.
뭔가 문장만으로도 개사기의 냄새가 나지 않는가?
더욱이 드래곤 헌터3는 장비의 교체- 소위 말하는 템빨이 중요한 게임이었다.
‘그냥 인간도 존나 세게 만들어주는 장비를 존나 센 인간이 장착한다면?’
상상만 해도 가슴이 웅장해지는 개사기 캐릭터의 탄생이었다.
그리고 이윤호는 생각했다.
역시 너무 당혹스러운 상황 때문에 정신이 반쯤 나간 게 분명하다고.
그렇지 않으면 이 와중에 이딴 생각이나 진지하게 이어갈 리가 없다고.
‘좀 더 현실적인 생각을 해보자.’
여긴 어디고 자신은 왜 이곳에 있는 것인지.
“인테그라,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내가 눈을 뜨기 전의 정보…… 그래, 내가 눈을 뜨기 전 상황에 대해 아는 것이 있어?”
이윤호의 물음에 인테그라가 즉답했다.
[데이터가 유실되었습니다.]
[마스터가 눈을 뜬 직후 저 역시 초기화되어 지난 행적에 대한 데이터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인테그라 역시 모르겠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마스터, 생체반응이 다가옵니다.]
[작지 않습니다.]
[무척 빠릅니다.]
[적의가 느껴집니다!]
뒤로 갈수록 빨라지는 인테그라의 목소리에 이윤호는 퍼뜩 고개를 돌려 수풀 너머를 보았다.
“키아아-!”
수풀을 박살내며 등장한 것은 거대한 괴물의 다리.
잿빛 철갑을 두른 것 같은 용의 머리와 전체 길이가 십여 미터는 족히 될 것 같은 거대한 몸.
굳이 따지자면 백악기의 폭군이라 불린 티라노사우루스와 흡사한 생김새.
드래곤 헌터3의 간판 몬스터들 가운데 하나인 강룡 조그레스가 분명했다.
놈이 파충류 특유의 빨려들 것만 같은 노란 눈으로 이쪽을 보았다.
아니, 애당초 저 포효 자체가 이윤호 자신을 위협하기 위함이었다.
[마스터! 옵니다!]
인테그라가 소리친 그때.
조그레스가 이윤호를 향해 돌진했다.
게임 속 콜라보 캐릭터가 되었다 2화
제1장 - 유성 #2
뱀 앞의 개구리라는 말이 있다.
압도적인 강자 앞에서 꼼작도 못 하는 약자를 비유한 말이었다.
“키아아!”
조그레스가 포효한 그 순간 이윤호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모골이 송연했다.
온몸에서 비지땀이 흘렀다.
하지만 비명을 지르거나 도망칠 수 없었다.
문자 그대로 얼어붙었기 때문이다.
죽는다.
여기서 죽는다.
죽는 수밖에 없다!
[마스터!]
인테그라의 외침이 이윤호를 움직였다. 반사적인 움직임이었다.
-쾅!
조그레스가 지면을 발로 찍으면서 난 소리인지, 아니면 한발 앞서 이윤호 자신이 지면을 박차며 난 소리인지 알 수 없었지만 굉음이 터졌다.
조그레스의 거체가 크레이터를 가득 채웠고, 간발의 차로 크레이터에서 빠져나온 이윤호는 바닥을 굴렀다.
[마스터, 정신 차려야 합니다.]
[정신이 어지럽다면 소수를 세십시오.]
이윤호는 소수를 세는 대신 숨을 쉬었다. 등 뒤로 어마어마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조그레스가 이쪽을 돌아보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윤호는 다시 전력을 다해 지면을 박차 달리기 시작했다.
“키아아!”
조그레스의 포효에 주변 일대의 대기가 뒤흔들렸고, 수풀이 요동치며 온갖 소음이 탄생했다.
이윤호는 달리며 생각했다.
전투형 호문클루스는 레벨 1에도 이미 여간한 운동선수보다 우월한 신체능력을 자랑한다.
하지만 등 뒤에서 진짜 괴물이, 그것도 사람 하나쯤은 한입에 집어삼킬 수 있을 것 같은 괴수가 쫓아오는 마당이니 겨우 그 정도로 안심할 수 없었다.
“인테그라!”
[말씀하십시오, 마스터.]
[8초 뒤에 따라잡힐 예정입니다.]
[7]
[6]
“씨X!”
카운트다운 하지 말라고!
하지만 필요한 일이기도 하였다.
이윤호는 다시 지면을 박차며 소리쳤다.
“불가시 모드! 불가시 모드 켜!”
[3]
[불가시 모드를 가동합니다.]
인테그라의 말이 끝난 그 순간 이윤호의 몸이 투명하게 변했다.
전투형 호문클루스의 몸에 탑재되어 있는 수백만 개의 나노머신들을 피부에 두른 뒤 빛을 굴절시켜 불완전하게나마 투명화 상태를 만드는 기술이었는데, 대략적으로만 알 뿐 자세한 원리 따위는 당연히 모르는 이윤호였다.
하지만 이 기술의 유용성만은 명확히 알고 있었다.
“키아?!”
조그레스가 등 뒤에서 당혹스러운 목소리를 토했다.
눈앞의 표적이 갑자기 사라졌기 때문이다.
조그레스는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여전히 보이는 것이 없었다.
수풀이 좀 흔들린 것 같았지만 그뿐이었다.
“키아아.”
조그레스는 지면에 착지한 뒤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불가시 모드를 켜자마자 수풀로 몸을 던진 이윤호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불가시 모드의 가동시간은 3초.
레벨이 오르면 시간이 좀 더 연장되지만 레벨 1일 때는 3초가 한계였다.
켜고 수풀에 몸을 숨긴다.
조그레스는 눈은 밝아도 후각 같은 다른 감각은 둔한 편이니 눈치채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제발 그래야만 했다.
“크르르…….”
낮은 울음소리를 낸 조그레스의 존재감이 점점 더 멀어졌다.
[대상이 멀어집니다.]
[단념하고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인테그라의 설명에 이윤호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토했다.
“하아, 씨X.”
입 밖에 새어 나온 것은 욕지거리였지만 이윤호의 얼굴에는 이내 옅은 미소가 번졌다.
이러나저러나 살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일단 목숨을 건지고 나자 비록 도망치는 데 쓰긴 했지만 이윤호 자신의 능력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었다.
‘게임이랑 똑같아.’
아직 아무런 강화도 거치지 않은 초기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성인 남성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우월한 신체능력.
여기에 불가시 모드를 비롯한 나노머신의 각종 능력들을 모두 활용 가능하다고 생각하니 새삼 가슴이 웅장해지는 기분이었다.
사실 나노머신 능력이 어쨌든 게임 속 세상, 그것도 악룡들과 인류가 생존을 건 투쟁을 벌이는 세계에 들어온 것 자체가 엿 같은 상황이었지만 이윤호는 괜한 생각으로 스스로를 우울하게 만들지 않았다.
일단 상황이 닥쳤으니 살아남는 게 우선이었다.
‘레벨을 올리자. 레벨을 올리면 개사기가 될 수 있어.’
루터의 몸에 장착된 9세대 나노머신은 자가학습형인 동시에 자가증식형이었다.
레벨이 오르면 나노머신의 숫자 자체가 늘어나면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늘어났다.
지금이야 도망만 치는 입장이었지만 레벨이 충분히 오르면 저 조그레스조차도 맨손으로 때려잡을 수 있을 터였다.
“하아…… 읏.”
마음을 놓자 아릿한 통증이 몸 이곳저곳에서 밀려왔다.
알몸으로 질주한 데다가 수풀 속에서 구르기까지 한 터라 온몸에 잔상처가 잔뜩 난 탓이었다.
하지만 파상풍 같은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자가수복을 시작합니다.]
인테그라의 차분한 목소리와 함께 몸 곳곳에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더니 이내 거짓말처럼 상처들이 사라졌다.
마치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오…….”
문자 그대로 자가수복.
부상을 치유하는 나노머신의 힘!
지금이야 레벨 1이다 보니 작은 상처 치유 정도밖에 못 했지만 레벨이 높아지면 잘려나간 사지조차도 재생할 수 있었다.
‘역시 개사기야.’
이것이 콜라보 캐릭터의 위엄.
다 같이 주먹질만 하는 게임에 총 쏘는 캐릭터가 들어간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아악!”
멀리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의 것이 분명했다.
[인간 남성의 비명 소리입니다.]
[들려온 방향은 남서쪽입니다. 안전을 위해 북동쪽으로 이동할 것을 권유합니다.]
“어?”
[비명 소리가 들렸다는 건 위험이 있다는 뜻입니다. 위험에서는 멀어지는 것이 좋습니다.]
인테그라의 말에 이윤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남성의 비명이라고 하니 더더욱 인테그라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아니지.’
남자든 여자든 사람의 목숨은 중요한 법.
인테그라의 말처럼 그냥 무시하고 튀는 쪽이 더 안전할 건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그냥 도망칠 수는 없었다.
‘정보도 모아야 해.’
비명을 지른 남성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정말 답 없는 위기 상황이면 모를까, 구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구하고 정보를 얻는 편이 나았다.
그리고 혹시 모르지 않는가.
어쩌면 드래곤 헌터3의 등장인물 가운데 하나일지도.
“인테그라, 그래도 일단 가서 상황을 살펴보자.”
[알겠습니다. 비명이 들려온 곳까지 안내하겠습니다.]
[내비게이션 모드를 가동합니다.]
인테그라의 말이 끝난 순간 이윤호의 눈앞에 익숙한 화살표와 몇 개인가 되는 숫자가 떠올랐다.
화살표는 가야 할 방향이었고, 숫자는 남은 거리와 예상 도착 시간이었다.
“오…….”
게임에서 이미 본 것들이지만 현실이 되니 느낌이 남달랐다.
작게 감탄한 이윤호는 조심스럽게 수풀을 헤치며 나아갔다.
이러나저러나 알몸이다 보니 걸을 때마다 하반신 쪽의 허전한 감각이 참으로 묘했지만 당장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혹시 갔는데 죽어 있으면 옷이라도 벗겨서 입어야 하나.’
뭔가 상상만 해도 끔찍했지만 그렇다고 지금처럼 계속 알몸으로 다닐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마스터,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안내를 종료합니다.]
시야에서 화살표가 사라지자 루터는 자세를 낮추고 수풀 너머를 바라보다 흠칫했다.
‘너무 가깝잖아!’
겨우 4~5미터 남짓 너머에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부상을 입은 청년이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정면을 노려보고 있었고, 개머리 괴물인 코볼트 한 마리가 조잡한 돌칼을 거머쥔 채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주변에 코볼트 네 마리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보니 5 대 1로 싸우다가 지금 같은 상황에 처한 모양이었다.
[현지인으로 추정되는 인간 남성이 부상당한 상태입니다. 특히 복부의 손상이 심합니다.]
[하지만 인간 남성에게 아직 전의가 있습니다.]
[인간 남성과 개의 머리를 가진 외계생명체 가운데 살아남는 쪽을 기습하는 게 좋겠습니다.]
이번에도 맞는 소리기는 했지만 그대로 따르자니 거부감이 드는 조언이었다.
‘다정한 목소리로 쓰레기 같은 말을 하고 있어…….’
아무튼 중요한 것은 눈앞의 상황이었다.
이윤호는 다시 남자와 코볼트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비지땀을 흘리고 있는 남자는 어쩐지 낯이 익었지만 주요 등장인물은 아니었는지 팍하고 떠오르는 이름은 없었다.
짙은 갈색 머리칼과 제법 잘생겼음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인상이 흐릿한 얼굴.
누구일까.
강룡 조그레스뿐만 아니라 코볼트까지 보이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서부 지대인 것-
[코볼트가 이쪽을 돌아봅니다.]
[피 냄새를 맡은 것 같-]
인테그라의 설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코볼트가 이윤호가 숨어 있던 수풀을 향해 돌진했다.
“크헝!”
조그레스의 포효 정도는 아니었지만 넋을 빼놓기에는 충분했다.
순간 움찔한 이윤호는 반격하거나 뒤로 몸을 빼는 대신 일단 바닥을 굴렀다.
-콰지직!
코볼트의 돌진에 수풀이 부서지며 나뭇가지들이 흩날렸다.
알몸으로 바닥을 구른 이윤호의 몸에 잔상처가 잔뜩 났지만 지금은 아픔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크헝!”
코볼트가 다시 크게 짖었다.
이윤호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며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하나는 정보 수집 운운하며 위험에 머리를 내민 스스로에 대한 욕설이었고, 다른 하나는 작금의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지에 관해서였다.
코볼트.
개머리 괴물.
키는 1미터 50센티가 겨우 됨직한 작은 놈이었지만 그 근력은 사람을 찢어발길 정도로 막강했다.
무장은 돌칼.
반면에 이쪽은 맨손.
“컹!”
코볼트가 돌칼을 휘두르며 돌진해 왔다.
전투형 호문클루스의 우월한 동체시력 덕분인지 코볼트의 움직임을 죄다 인지할 수는 있었지만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알 수 없었다.
태어나서 직접 싸워본 횟수는 열 번이 채 못 되는 이윤호였으니 말이다.
“으어어!”
당황한 이윤호는 괴성을 토하며 허우적거리다 뒤로 자빠졌고, 덕분에 코볼트의 공격을 이번에도 회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행운은 여기까지였다.
다음 공격이 들어오면 이번에는 피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마스터, 싸우는 법을 모르는 겁니까?]
“몰라!”
반사적으로 외친 대답에 인테그라는 한심해하는 대신 인공지능답게 바로 답을 내주었다.
[기본 전투 스킬이 기본 데이터 안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기본 격투기 Lv1을 설치하겠습니다.]
“뭐?”
목소리를 토한 순간이었다.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가 싶더니 어마어마한 정보량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윽엑윽?”
고작해야 1초 남짓.
하지만 그 1초에 많은 것이 달라졌다.
이윤호의 선 자세가 바뀌었다.
무게중심을 낮추며 상체를 비스듬히 틀었고, 두 팔을 들어 자연스럽게 가드를 했다.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방식조차 이전과는 달랐다.
그 갑작스러운 변화에 가장 놀란 것은 코볼트였다.
바닥을 구르던 나약한 인간이 돌연 괴상한 목소리를 내더니 노련한 전사와 같은 풍모를 보인 탓이었다.
어떻게 된 것일까.
눈앞의 인간이 힘을 숨기고 있던 것일까?
사유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아주 잠깐의 망설임이 야기한 빈틈.
-빡!
교본 그 자체라 해도 좋을 로우 킥이 코볼트의 다리를 강타했다.
게임 속 콜라보 캐릭터가 되었다 3화
제1장 - 유성 #3
“크앙!”
로우킥을 맞고 다리가 꺾인 코볼트가 새된 소리를 뱉은 그때 이윤호는 바로 다음 공격을 펼쳤다.
머리로 생각하고 하는 것이 아닌, 반사적인 움직임이었다.
-뻑!
로우 킥에서부터 물 흐르듯이 이어진 레프트 훅이 코볼트의 가슴을 후려쳤다.
안 그래도 다리에 힘이 풀리던 놈은 그대로 나자빠졌고, 이윤호는 놈의 몸 위에 올라타 재차 주먹을 휘둘렀다.
목표는 놈의 머리가 아닌 가슴, 그중에서도 심장이 있을 부위였다.
-콰앙!
주먹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감각이 주먹 끝에 걸렸다.
“키아…….”
한 차례 경련한 코볼트가 새된 신음을 흘리더니 혀를 길게 빼물었다.
죽은 게 분명했다.
[전투 데이터를 미량 획득했습니다.]
인테그라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윤호는 거친 숨을 토했다.
주먹에 남은 감각이 끔찍했지만 상황 때문인지, 아니면 사람이 아닌 괴물을 죽였기 때문인지 소설에서 보던 것처럼 끔찍하고 기묘한 감각은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게 요즘 소설다운 건가.’
사람이나 괴물 죽이고 패닉 상태 빠지면 고구마라고 욕먹으니까.
“후으.”
얼토당토않은 생각까지 드는 걸 보면 당황하긴 당황한 모양이었다.
‘씨X, 당황하는 게 당연하지.’
더욱이 방금 일어난 일은 무엇이란 말인가.
기본 격투기 레벨 1의 설치.
그 결과 단 몇 초 만에 이윤호 자신은 격투기 챔피언으로 거듭났다.
‘아니, 기본 격투기 레벨 1이니 챔피언까지는 아니려나.’
어찌 되었든 전력이 급증한 것은 분명했다.
‘게임에서 나오던 스킬 습득…… 같은 거겠지?’
확실히 스타 세이비어의 루터는 각종 DLC를 통해 새로운 전투 스킬들을 순식간에 습득하는 것이 가능했었다.
‘이것이 미래 기술.’
가슴이 절로 두근두근해질 정도의 일이었지만 이윤호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은 이런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애당초 이곳에 온 목적.
비명도 비명이었지만 굳이 찾아온 것은 정보 수집을 위함이었다.
때문에 이윤호는 청년이 기대어 서 있던 나무쪽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어?”
나무에 청년이 없었다.
뭐지?
왜 없는 거지?
[개머리 외계 생명체와 마스터가 싸우는 사이에 도망친 것 같습니다.]
[합리적인 판단이군요.]
하지만 이윤호는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윤호 자신과 코볼트가 싸운 시간이라고 해봐야 1분이 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작해야 1분 남짓.
그런데 청년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은 곧 싸움이 시작된 직후- 아니, 코볼트가 이윤호 자신에게 돌진하자마자 청년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니, 보통은 좀 상황을 보거나 해야 하지 않나? 같이 싸우려고 한다거나?’
어떻게 바로 도망칠 수가 있지?
[현명한 행동입니다.]
[인간 남성에게는 마스터와 개머리 외계 생명체 모두가 적성 개체로 보였을 겁니다.]
“나까지?”
[이 행성의 문명 수준과 문화에 대해서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남성은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즉, 발가벗은 채 숲을 걷고 있던 인간 남성은 충분히 수상하게 여겨질 수 있다고 봅니다.]
인테그라가 차분한 목소리로 사실을 나열하자 이윤호는 새삼 허전한 하반신을 내려다보았고, 이내 납득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아무튼 멀리는 못 갔을 거야. 아까 부상도 입었고. 혹시 찾을 수 있겠어?”
[찾을 수 있습니다.]
[인간 남성- 청년은 부상을 입었고, 상처에서 떨어진 핏방울을 처리하기에는 체력과 시간이 모두 부족했습니다.]
[나무 근처 바닥을 보십시오.]
인테그라의 말대로였다.
딱히 미래 기술을 동원하지 않아도 청년을 찾을 수 있는 흔적이 버젓이 자리하고 있었다.
“좋아, 일단 가보자.”
이윤호는 핏자국을 따라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예상대로 얼마 가지 않아 청년을 발견할 수 있었다.
“■■■!”
나무 밑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청년이 억지로 칼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그런데 문제는 청년이 무어라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이제 와서 현실성을?’
게임 속에, 그것도 콜라보 캐릭터로 들어온 마당에?
하지만 개연성이야 어쨌든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이윤호는 일단 적의가 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왜인지 청년이 더욱 격하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 ■ ■■!”
[변태.]
[마지막 말은 변태라고 외친 게 분명합니다.]
[현재 마스터의 상태와 작금의 상황, 청년의 반응을 조합했을 때 추론할 수 있는 가장 타당한 단어입니다.]
인테그라의 해석에 이윤호는 순간 자신의 하반신을 돌아보았고,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두 손을 내렸지만 잠깐뿐이었다.
어차피 남자끼리인데 뭐 어떻단 말인가.
‘아니, 그것도 아닌가.’
확실히 이윤호 자신도 길거리에 갑자기 발가벗은 남자가 다가오면 존나 무서울 것 같긴 하니까.
하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이윤호는 숨을 길게 내쉰 뒤 최대한 선량한 미소를 지으며 청년을 마주했다.
“나는 수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마스터, 그건 좀…….]
인테그라의 말을 애써 무시한 이윤호는 다시 청년에게 한 걸음을 내디디며 말을 이었다.
“당신을 돕고 싶습니다.”
언어에는 뉘앙스라는 것이 있었다.
이쪽이 저쪽 말을 못 알아듣듯 저쪽 역시 이쪽 말을 못 알아듣겠지만 대충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정도는 느낄 수 있을 터였다.
더욱이 웃는 얼굴이라는 것이 중요했다.
원래 말 안 통하는 외국에 가도 눈빛이나 표정으로 대강 의사표현을 할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 이윤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청년은 무기를 내리며 진정하는 대신 질색하며 소리쳤다.
“■, ■■ ■■! ■ 변태 ■■아!”
[언어 정보를 수집 중입니다.]
[청년이 패닉 상태에 빠진 것 같습니다.]
[발가벗은 근육질 남성이 실실 웃는 얼굴로 알 수 없는 언어를 중얼거리며 다가오고 있으니 패닉 상태에 빠질 만도 합니다.]
이윤호는 잠시 골목길을 걷다가 마주친 근육질 남성이 발가벗은 채로 다가오며 실실 웃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음, 인정.’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이윤호는 최대한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청년에게 다가섰고, 청년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이윤호에게 검을 겨누었다.
[청년의 부상이 작지 않습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가운데 흥분까지 해서 상태가 더 안 좋아진 것 같습니다.]
확실히 실시간으로 상태가 안 좋아지고 있는 청년이었다.
이윤호는 덜덜 떨리는 청년의 검을 바라보며 인테그라에게 물었다.
“치료할 수 있겠어?”
[상처 부위에 직접 접촉하면 가능합니다.]
자가수복과 비슷한 원리였다.
이윤호는 일단 발걸음을 멈춘 뒤 숨을 크게 골랐다.
청년의 부상을 치료해 신뢰를 얻는다.
언어 데이터를 수집해 이 세계- 그러니까 드래곤 헌터3의 언어를 습득한 뒤 청년에게서 여기는 어디인지, 지금은 언제인지 같은 정보들을 획득한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과정.
“후우으-”
다시 숨을 길게 내쉰 이윤호는 청년을 보았다.
공포와 당황과 경멸과 절망을 비롯한 온갖 감정이 뒤섞인 얼굴에 역시 좀 짜증이 났다.
심정은 이해하지만 이쪽 역시 썩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방금 결심한 것처럼 일단 청년의 신뢰를 얻는 것이 우선이었다.
“불가시 모드.”
[불가시 모드를 가동합니다.]
3초.
더욱이 완벽한 투명화도 아니었다.
자세히 보면 이질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밤이었고, 청년은 부상까지 입은 상태였다.
이윤호가 순간 사라지자 청년은 당황했고, 그 당황은 충분한 틈을 만들어주었다.
“억?!”
청년의 팔을 세게 쳐 검을 놓치게 했다.
연이어 왼손으로 청년의 입을 틀어막았고, 오른손을 청년의 복부- 그러니까 부상 부위에 얹었다.
[불가시 모드를 종료합니다.]
“므읍?!”
손바닥에 입이 막힌 채로 청년이 비명을 질렀다.
“씨X, 나도 싫거든?!”
게임이나 만화였으면 징그러운 사내자식이 아니라 미소녀를 만났을 텐데.
이윤호는 몸부림치는 청년의 복부를 손바닥으로 압박하며 빠르게 명령했다.
“치료해!”
[청년의 부상을 치료합니다.]
[나노머신이 소량 소실됩니다.]
[타인을 치료할 때는 주의해 주십시오.]
인테그라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윤호의 손바닥에서 작은 빛이 일었다.
“므읍!”
그렇지 않아도 겁을 먹은 상태였던 청년이 다시 몸부림을 쳤지만 잠깐뿐이었다.
청년이 자신의 몸에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고통이 줄어든다.
상처가 아문다.
부상이 치유된다.
“므, 므므므븝?”
청년이 놀란 눈으로 이윤호를 보았다.
이윤호는 그런 청년에게 씩 웃어주었고, 청년은 징그러운 것을 본 것처럼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씨X놈, 나중에 무조건 한 대 때린다.’
그리고 다시 몇 초.
상처 치유가 끝나자 이윤호는 천천히 청년의 복부에서 손을 뗀 뒤 청년의 파란 눈을 보며 말했다.
“나는 적이 아니다. 수상한 사람도 아니다. 이제부터 손바닥을 뗄 거다. 소리 지르지 마라. 소리 지르면 뒤진다.”
뉘앙스가 전달된 것인지 청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동성 간에는 온건한 대화보다는 약간의 협박 쪽이 훨씬 더 잘 먹히는 모양이었다.
“후우.”
작게나마 안도의 숨을 토한 이윤호는 청년의 입에서 손을 뗀 뒤 말했다.
“나는 이- 아니, 루터다. 루터.”
윤호 발음을 못 해서 유노 어쩌고 하는 클리셰를 꼭 볼 필요는 없었으니까.
이윤호- 루터가 자신을 가리키며 ‘루터’라는 말을 반복하자 청년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루터.”
“그래, 나는 루터다.”
[언어 데이터를 수집 중입니다.]
[청년의 눈동자를 분석해 본 결과 마스터를 여전히 경계하고 있지만 아까 같은 적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람 새끼면 그래야지.
루터가 그렇게 생각한 때였다.
“맥스. 맥스. 맥스.”
청년이 스스로를 가리키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아무래도 청년의 이름인 모양이었다.
“그래, 맥스.”
역시 퍼뜩 떠오르는 인물이 없는 걸 보면 그냥 엑스트라인 모양이었다.
“나는 루터고 너는 맥스다. 우린 적이 아냐.”
손가락질까지 곁들이며 말하자 얼추 알아들었는지 청년- 맥스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마스터, 청년- 맥스가 곧 의식을 잃을 것 같습니다.]
[이미 피를 너무 많이 흘린 상태였는데, 극도의 긴장 상태까지 해소된 영향으로 보입니다.]
[맥스가 잠들면 저항할 수 없을 테니 제압하고 옷을 빼앗는 것을 추천합니다.]
‘아니, 왜 또 쓰레기 같은…… 아니지, 바지 정도는 뺏어 입어도 괜찮겠지?’
루터는 길거리에 만취한 상태로 누워 있는 취객의 주머니를 털 정도로 준법정신이 마비된 인물은 아니었지만 언제까지 발가벗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상태라면 누구를 만나든 일단 적대적인 상태로 시작할 수밖에 없을 터이니 말이다.
‘목숨도 구해줬고.’
목숨값 대신 바지 하나라면 맥스도 싸게 먹혔다고 생각하리라.
‘그래, 발가벗은 근육질 남자보다는 바지라도 입고 있는 근육질 남자가 훨씬 덜 수상할 테니까.’
마음을 다잡은 루터는 얼른 기절하라는 마음을 담아 맥스를 바라보았고, 맥스는 물밀듯이 밀려오는 불길함 속에 의식을 잃었다.
[완전히 의식을 잃었습니다.]
[바로 지금입니다.]
“그래.”
루터는 맥스를 눕힌 뒤 바지를 벗기기 위해 맥스의 허리춤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신속하게 바지를 벗기는 대신 잠시 주저했다.
[마스터?]
“아니, 그냥 좀 자괴감이 들어서…….”
난 누구고 여긴 또 어디인가.
왜 자신은 알몸인 상태로 처음 보는 사내자식의 바지를 벗겨야 하는 것일까.
‘흑흑, 웹소나 게임이면 미소녀가 나왔을 텐데.’
눈물을 삼킨 루터는 주섬주섬 맥스의 허리띠를 풀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 ■■! 이 변태 ■■야!”
등 뒤에서 날카로운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게임 속 콜라보 캐릭터가 되었다 4화
제1장 - 유성 #4
“변태! 맥스에게서 ■■■!”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본 루터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미소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고 긴 머리칼과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하얗고 아름다운 얼굴, 색이 진하면서도 밝아 보석처럼 보이는 초록색 눈동자.
몸에 딱 달라붙는 검은색 가죽 바지에 하얀 셔츠를 입었고, 그 위에 다시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검은색 외투와 짙은 녹색 망토를 두른 상태였다.
깜짝 놀랄 만큼 아름다운- 하지만 이쪽을 향해 검을 겨눈 채 적의를 폭발시키고 있는 소녀의 등장에 당황한 루터는 급히 일어서며 빠르게 말했다.
“자, 잠깐! 난 수상한 사람이 아니다.”
[마스터, 설득력 없는 설득인 것 같습니다.]
[더욱이-]
“■, ■■■■! ■■■! ■■■■!”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소녀가 다급히 외쳤다.
검은 여전히 이쪽을 겨눈 상태였지만 눈동자는 가야 할 곳을 잃은 것처럼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마스터, 소녀가 보지 않는 척하면서 마스터의 하반신을 보고 있습니다.]
[소녀의 분당 심장박동 수치가 급격히 상승하고 있습니다.]
“그, 그래.”
소녀와 루터 자신을 위해 일단 두 손을 내려 하반신을 가린 루터는 그대로 소녀의 눈을 보며 말했다.
“나는 수상한 사람이 아니다. 내가 맥스를 구했다.”
[아직 언어 데이터가 부족해 온전한 의사소통이 불가능합니다.]
[조금 더 많은 데이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마스터, 설사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작금의 상황에서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마스터의 주장에는 설득력이 없을 것이라 추정됩니다.]
‘씨X.’
맞는 말이라 뭐라 할 수도 없었다.
그냥 발가벗고 있는 근육질 남자만 해도 수상할 텐데, 그 남자가 지인의 바지를 벗기고 있었으니까.
‘씨, 씨X. 진짜 X같네.’
논리적인 설득은 불가능하다.
애당초 말도 안 통하는 상황이니 강경수단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인테그라, 불가시 모드 쿨 타임이 얼마나 남았지?”
[무리한다면 앞으로 20초 뒤에 사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무리한 운용이기 때문에 이번에 사용하고 나면 향후 12시간 동안은 불가시 모드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후우, 좋아.”
마음을 정한 루터는 다시 소녀를 보았다.
빨개진 얼굴로 이쪽을 노려보는 소녀.
많이 놀랐는지 눈가에는 눈물까지 조금 고여 있었다.
나이는 십 대 중반에서 후반이나 되었을까.
맥스와는 달리 묘하게 낯이 익었지만 퍼뜩 생각나는 이름은 없었다.
‘평범한 엑스트라 같지는 않은데.’
저렇게 예쁜 소녀가 엑스트라일 리가.
하지만 퍼뜩 생각나지 않는 것을 보면 주요 등장인물의 친척 같은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변태! 물러서! 맥스한테 ■■ ■■■ ■ ■■!”
소녀가 이쪽을 보며 다시 소리쳤다.
루터는 일단 시간을 벌기 위해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꺅?!”
소녀가 다시 비명을 지르며 당황했고, 인테그라가 빠르게 말했다.
[불가시 모드 재사용까지 10초가 남았습니다.]
[소녀의 반응에 마스터가 흥분하고 있습니다.]
“아, 아니거든?”
뭐라는 거야 이게.
덕분에 소녀와 마찬가지로 얼굴이 빨개진 루터는 소녀에게 한 걸음을 다가서며 말했다.
“나는 루터다. 맥스의 친구다.”
“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소녀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서자 루터는 두 걸음을 내디뎠다.
“나는 당당하다.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
[마스터, 그건 사람으로서 좀…….]
루터는 못 들은 척 발걸음을 다시 내디뎠고, 소녀는 더 물러서는 대신 이를 악물더니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채 루터의 하반신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마치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듯이 말이다.
[마스터, 마스터가 흥분하고 있-]
“불가시 모드!”
10초는 충분히 지났다.
루터가 크게 소리치자 소녀는 퍼뜩 놀라 다시 루터의 얼굴을 보았고, 당황해서 눈을 크게 떴다.
루터가 눈앞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녀는 이내 다시 정면을 보았다.
돌진해 오는 루터의 기척을 읽은 것이었다.
하지만-
“하앗!”
루터의 접근이 훨씬 더 빨랐다.
소녀가 제대로 대응하기도 전에 루터의 주먹이 소녀의 복부를 파고들었다.
“커헉!”
붕 떠오른 소녀가 그대로 튕겨 나가더니 바닥을 뒹굴었고, 루터는 당황했다.
“아, 아니.”
만화에 나온 것처럼 복부를 쳐서 기절시킬 생각이었지 저렇게 날려 버릴 생각은 아니었는데!
“커흑! 컥!”
더욱이 소녀는 기절조차 하지 않았다. 복부를 감싸 쥔 채 헛구역질을 하며 괴로워했다.
[마스터의 무자비함에 감탄했습니다.]
[소녀의 전력이 급감했습니다.]
“아니…….”
당황해서 잠시 주저하던 루터는 이내 마음을 다잡고 쓰러져서 웅크리고 있는 소녀에게 다가섰다.
일단 누가 더 오기 전에 기절시켜서 맥스와 함께 다른 곳으로 데려갈 생각이었다.
“으음…… 목 같은 곳을 가격하면 되려나.”
[마스터, 소녀의 생명활동을 중단시킬 생각이시라면 급소를 표시해 드리겠습니다.]
“아니, 기절만 시킬 건데.”
[마스터의 현재 기량으로는 깔끔하게 기절시킬 수 없습니다.]
[머리를 강하게 타격해 정신을 잃게 하거나 전기 충격을 추천 드립니다.]
“오, 전기 충격도 돼?”
[가능합니다. 다만 에너지 소모가 적지 않습니다. 현재 상태라면 24시간에 2회 사용이 가능합니다.]
“그럼 전기 충격으로 가자.”
[알겠습니다, 마스터. 소녀의 몸에 직접 접촉하시면 전기 충격을 가하겠습니다.]
인테그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루터는 여전히 바닥에서 꺽꺽거리며 괴로워하는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음…….”
뭔가 첫 단추부터 단단히 잘못 끼운 느낌이지만 어쩔 수 없지.
“■…… ■■…….”
욕설이 분명했다.
인테그라가 해석해 주지 않아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이미 전술했듯이 말에는 뉘앙스라는 것이 있었으니 말이다.
“미안하다.”
작게 말한 루터는 소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전기 충격을 가합니다.]
“끼아아?!”
소녀는 눈을 크게 뜨며 몸을 떨더니 이내 픽하고 고개를 떨어트렸다.
의식을 잃은 게 분명했다.
“후…… 좋아. 그럼 얘도 일단 데려가자.”
사람이 더 오면 일만 더 꼬일 것 같으니 맥스와 함께 한적한 곳에 데려간 뒤 정보를 수집할 생각이었다.
언어 데이터도 좀 더 모아야 했고 말이다.
뭣보다 연달아 일어난 상황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지만 여긴 강룡 조그레스 뿐만 아니라 코볼트들까지 돌아다니는 곳이었다.
언제 어디서 또 다른 몬스터들이 나타날지 알 수 없었다.
“음…… 그래. 그러니 일단 움직이자.”
깊이 생각하지 말고.
아무튼 게임 속에 들어왔고, 미소녀를 만났다는 것이 중요하니까.
‘역시 정상은 아니구나.’
이딴 식으로 머리가 돌아가는 것을 보니.
한숨을 한 번 내쉰 루터는 소녀를 어깨에 짊어진 뒤 맥스에게 다가가 바지를 벗겼다.
[마스터, 속옷은 벗기지 않습니까?]
“그것까지는 좀…….”
남이 입던 속옷을 세탁도 안 하고 바로 입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으니까.
루터가 주섬주섬 맥스의 바지를 주워 입자 인테그라가 말했다.
[마스터, 문명인으로의 첫걸음을 내딛으셨습니다. 축하합니다.]
“그래.”
알몸보단 나으니까.
루터는 맥스와 소녀를 양쪽 어깨에 짊어진 채 발걸음을 내디뎠다.
* * *
당장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판국이니 ‘안전한 장소’ 같은 것을 찾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때문에 루터는 일단 소녀가 등장했던 방향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소녀의 다른 일행이 있다면 만났을 때 트러블이 발생할 수도 있었지만, 몬스터들을 만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개머리 외계 생명체와 도마뱀 머리 거대 외계 생명체의 출현 지점과도 멀어질 수 있으니 좋은 선택입니다.]
“그래, 좋은 선택이지.”
되는대로 답한 루터는 적당해 보이는 나무 아래에 맥스와 소녀를 내려놓은 뒤 맥스의 품을 뒤져보았다.
소녀처럼 맥스 역시 망토와 짐승 가죽으로 만든 외투를 입었는데 허리춤에 이것저것 차고 있는 것들이 많았다.
단검, 밧줄, 작은 가죽 주머니 등등.
루터는 일단 밧줄을 풀어 소녀와 맥스를 각각 묶었다.
맥스는 몰라도 소녀는 루터 자신에게 공격받아 기절한 것이었으니 깨어나면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맥스는 소녀가 묶인 걸 보고 지랄할 가능성이 있고.’
그러니 일단 둘 다 묶는다.
두 사람을 단단히 포박한 루터는 맥스의 가죽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오, 포션.”
연한 붉은색 액체인 걸 보니 기초 체력 회복 포션 같았다.
‘드래곤 헌터3에는 여느 게임과 달리 회복마법을 쓰는 법사 같은 존재가 거의 없으니까.’
드래곤 헌터3 세계의 마법사들은 대부분 전투직이 아닌 연구직에서 활약하는 편이었다.
‘거대한 드래곤들에 맞서기 위해 필요한 것은 대형병기.’
사람보다 큰 도끼나 도신의 길이만 3미터는 됨직한 태도, 무지막지한 크기의 방패와 랜스 등등.
‘거대한 무기를 쓰려면 초인적인 근력이 필요하고…… 자연히 근력 강화나 아이템의 경량화 같은 인챈트 기술이 발전하게 되었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른 다채로운 도구들 역시 함께 개발되었는데, 눈앞의 포션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인테그라, 맥스와 소녀의 상태는 어떻지?”
[소녀 쪽이 좀 더 양호합니다만 정신을 차리려면 다소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맥스는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피를 너무 많이 흘렸습니다.]
“그렇군.”
고개를 끄덕인 루터는 주저 없이 포션 병을 연 뒤 맥스의 입안에 흘려 넣었다.
아마 루터 자신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맥스 스스로 마셨을 포션이었다.
[마스터, 맥스의 상태가 좋아지고 있습니다.]
[물약의 성분 분석을 위해 조금 남겨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그래.”
게임에서야 무조건 원샷이었지만 현실이니 그럴 필요는 없겠지.
루터는 맥스에게 포션을 2/3쯤 먹인 뒤 인테그라에게 물었다.
“남은 건 어떻게 하지?”
[손바닥 위에 부어주시면 흡수해서 성분 분석을 해보겠습니다.]
“음, 좋아.”
손바닥 위에 포션을 붓자 인테그라가 바로 말했다.
[데이터가 부족합니다.]
[분석 설비가 부족합니다.]
[성분분석에 24시간 이상이 소요될 것 같습니다.]
“분석 끝나면 혹시 개량 같은 것도 가능한가?”
[분석을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그래.”
고개를 끄덕인 루터는 다시 맥스를 보았다.
포션을 먹였기 때문인지 아까보다 훨씬 안색이 좋아 보였다.
“음…… 시간이 없으니 어쩔 수 없지.”
작게 중얼거린 루터는 그대로 맥스의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으윽?”
“오, 일어났나?”
루터의 물음에 맥스는 멍한 목소리를 흘리다 눈을 부릅떴다.
“■, ■■■?! ■■■■■?!”
“루터. 나는 루터다. 너는 맥스고.”
루터의 말에 맥스는 무어라 답하는 대신 밧줄로 묶인 스스로를 보았다.그리고 이어-
“이- 카렌 ■■■?! 루터! ■■■ 카렌 ■■■■!”
흥분한 맥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다 말고 다시 눈을 부릅떴다.
자신이 바지가 벗겨진 채 팬티만 입고 있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벼, 변태?! ■, ■■ 나를?!”
“아니다. 그건 절대로 아니다.”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하게 말한 루터는 흥분하는 맥스를 진정시키려는 듯 두 손바닥을 보이더니 이내 또박또박 말하기 시작했다.
“루터. 맥스. 소녀.”
차례차례 손가락으로 가리킨 뒤 검을 들어 올린 루터는 제자리에서 방향을 바꿔가며 일종의 1인극을 펼치기 시작했다.
“누구냐!”
“루터다.”
“맥스!”
“씁, 어쩔 수 없군.”
대충 요약하면 소녀가 덤벼서 어쩔 수 없이 기절시켰다는 내용이었는데, 몇 번이나 반복하자 맥스도 대강은 알아들은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루터, 카렌 ■…… 아니, 카렌은 ■■■■■ ■■■■■■ ■■■■■!”
“뭐라는 거야.”
일단 소녀 이름이 카렌이라는 건 알겠는데.
[마스터, 좀 더 효율적인 언어 데이터 수집이 필요합니다.]
확실히 지금처럼 마구잡이로 떠드는 것을 뉘앙스나 상황 추정만으로 언어를 분석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때문에 루터는 다시 한번 맥스를 진정시키듯 손바닥을 내보인 뒤 천천히 입을 열어 말했다.
“나는 루터. 너는 맥스. 저건?”
하늘을 가리키자 맥스는 미간을 좁히더니 작게 답했다.
“하늘?”
“그래, ‘하늘’. 저건?”
연이어 루터는 나무를 가리켰고, 맥스는 참으로 복잡한 얼굴이 되었지만 이내 다시 답해주었다.
그런 식으로 단어를 수십 개 정도 인식하자 인테그라의 분석 속도가 월등히 빨라졌다.
[마스터,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가능할 것 같습니다. 말씀하시면 제가 자동으로 번역하도록 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루터는 다시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늘. 나. 내려왔다. 하늘에서 내려왔다.”
눈 떠보니 크레이터 안이었던 걸 보면 정말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았으니까.
스타 세이비어는 우주를 무대로 한 게임이었으니 우주에서 유성처럼 내려온 이성인~ 같은 이야기가 콜라보 스토리일지도 모르고 말이다.
루터가 몇 번인가 같은 설명을 반복하자 맥스는 돌연 마른침을 삼켰다.
“루터 당신이…… 유성과 ■■ ■■■ 자? ■■……님?”
뭔가 반응이 있었다.
더욱이 유성.
어쩌면 정말 루터 자신은 유성처럼 이 세계에 등장한 것일지 몰랐다.
‘잠깐, 그럼 설마 유성이 떨어진 걸 보고 조그레스나 코볼트들도 모여든 건가?’
제법 가능성이 있는 추측이었다.
어쩌면 맥스와 카렌 역시 유성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일지 몰랐다.
“오오…… ■■님. ■■■■ ■■에 ■을…….”
맥스가 돌연 무릎을 꿇고 마치 기도하듯 고개를 조아리자 인테그라가 말했다.
[맥스가 원시신앙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마스터를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은 존재로 여기는 것이라 추정됩니다.]
유성이 되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그거 완전 티리- 아니지,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작금의 상황.
루터 자신을 천사로 여기는 맥스.
진짜 천사 행세를 할지, 부정할지는 정보가 좀 더 모여야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조금 더 대화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으윽…….”
쓰러져 있던 소녀- 카렌이 눈을 떴다.
게임 속 콜라보 캐릭터가 되었다 5화
제1장 - 유성 #5
“카렌 님! ■■이 ■■■■?”
맥스가 화색이 되어 묻자 소녀는 여전히 쓰러진 채로 앓는 소리를 내더니 이내 눈을 부릅떴다.
“맥스?!”
“예! 카렌 님! 맥스입니다!”
소녀의 얼굴이 순간 밝아졌지만 잠깐뿐이었다.
몸을 일으켜 세우려다가 팔이 묶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고, 끝끝내 바지가 벗겨진 맥스가 밧줄에 묶여 있다는 사실과, 근육질 변태가 맥스의 바지를 입고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변태! 기, 기어코!”
“미리 말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절대 아니다.”
[마스터, 카렌의 생각을 읽으신 겁니까?]
얘는 또 뭐라는 거야.
인테그라의 말에 무어라 답하는 대신 루터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맥스에게 눈짓을 주었다.
적당히 알아서 진정시키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카렌이 잠들어 있던 시간 동안의 커뮤니케이션에 의미가 있었는지 맥스가 제법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카렌 님, 저자는 평범한 변태가 아닙니다.”
‘이 새끼가?’
하지만 루터는 흥분해서 맥스의 멱살을 잡지는 않았다.
정상참작의 여지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래, 바지가 벗겨졌으니까. 내가 이해한다.’
때려도 나중에 때려야지.
지금 때리면 원활한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길 테니까.
루터는 숨을 길게 토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진정시킨 뒤 다시 맥스와 카렌을 보았다.
‘평범한 변태가 아니다’라는 맥스의 말에 카렌이 열렬히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카렌은 비범한 변태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역시 그냥 개입해서 일단 저놈의 변태 의혹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루터가 그렇게 생각한 때였다.
“맥스, 저자는 날 공격했어. 거기다 내가 처음 ■■했을 때는 발가벗은 상태로 네 바지를 벗기고 있었고.”
나름 작게 소리 죽여 말하고 있었지만 애당초 거리가 가까운 데다가 평범한 인간의 청력 따위는 가볍게 초월하는 루터의 청력이니 다 들렸다.
‘씨X.’
반박하고 싶은데 전부 사실이라 반박할 수가 없다.
루터가 참담한 얼굴이 되자 맥스는 다급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카렌 님- 아니, 카렌. 저자…… 루터는 내 부상을 치료해 주었어. 마치 ■■■■처럼.”
“■■■■? 저자가?”
“그래. 그리고 어쩌면…… 아니, 내 생각이 맞다면 루터는 유성을 타고 지상에 내려오신 천사님일 가능성이 높아.”
맥스의 말에 카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비범한 변태를 천사라고 주장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굳이…… 아니다.”
루터는 다시 한숨을 뱉었고, 맥스는 루터의 눈치를 살피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카렌, 혹시 너도 루터의 능력을 봤니? 저자는 ■■■■으로 치유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눈앞에서 투명해질 수도 있어.”
“그건…… 나도 봤어.”
애당초 기습에 당한 것도 루터가 순간 눈앞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니까.
카렌이 어느 정도 동조하자 맥스는 더욱 적극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쪽의 언어도 처음에는 전혀 못 하다가 엄청난 속도로 익히고 있어. 더욱이…… 발가벗고 있는 것도 유성과 함께 나타났기 때문일지 몰라. 평소에도 벗고 다니는 걸 즐긴다면 변태겠지만, 알몸으로 이곳에 떨어진 것이라면, 그래서 알몸으로 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면 변태라 할 수 없겠지.”
“으으음…….”
입술을 움츠린 카렌은 슬쩍 루터를 돌아보았고, 이내 다시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하지만 맥스, 우릴 공격했어. 거기다 지금도 이렇게 묶어둔 상태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 않았을까? 그럼 일단 밧줄을 풀어달라고 요구해 보자.”
그렇게 말한 맥스는 루터를 돌아보았고, 루터는 아주 작게 말했다.
“풀어줘도 되겠지?”
[맥스에게는 적의가 없고, 카렌 역시 적의를 많이 거둔 상태입니다.]
[다만 불가시 모드를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니 2:1로 싸우게 될 경우 반드시 승리한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카렌과 맥스의 복부를 강타해 전투력을 급감시킨 뒤 밧줄을 푸는 것은 어떨까요?]
이 녀석 설마 일부러 이러는 건 아니겠지?
잠시나마 진지하게 서포트AI의 인성에 대해 고민한 루터는 이내 다시 생각을 돌렸다.
지금 중요한 건 맥스와 카렌에게서 적의를 완전히 거두는 것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약간의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었다.
“풀어주마.”
짤막하게 말한 루터는 일단 맥스의 밧줄부터 풀어주었다.
“카렌의 밧줄은 내가 푼다.”
루터를 배려하기 위함인지 딱딱하면서 단순한 문장으로 말한 맥스는 카렌의 밧줄을 풀기 시작했다.
그렇게 1분 남짓.
밧줄이 풀린 카렌은 복잡한 얼굴로 루터를 보더니 별안간 얼굴을 붉혔다.
[마스터의 하반신이 생각난 것 같습니다.]
“흠흠.”
덩달아 얼굴이 붉어진 루터는 모두를 위해 이야기를 진전시켰다.
“나는 유성과 함께 왔다. 충격으로 과거 잊었다. 기억나지 않는다.”
[마스터, 기억 상실이셨습니까?]
“어, 일단은.”
게임 속에 들어왔다고 해봐야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고 과거를 급조해내기에는 상황이 좋지 못했다.
숲 속에 발가벗고 있는 남자를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는 과거 따위 있을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기억상실.
일단은 이렇게 간다.
물론 싫든 좋든 항상 붙어 다녀야 하는 인테그라에게는 게임 속에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언젠간 하긴 해야겠지만 지금이 아닌 나중의 일이었다. 일단은 눈앞의 두 사람이 중요했다.
“유성…… 그럼 정말 천사인 거야?”
카렌이 약간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스스로에게 묻듯이 작게 말했다.
[환상이 무너져 상심한 것 같습니다.]
[작고 귀여운 요정을 상상했는데 실상은 커다란 나방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와 비교할 수 있을 겁니다.]
“내가 나방이라는 거냐.”
[카렌의 머릿속에서 마스터는 발가벗은 상태로 지인의 바지를 벗기는 비범한 변태이니 타당한 비유라 생각합니다.]
역시 일부러가 아닐까.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인테그라는 본래 이런 거 같기도 했다.
다정한 목소리로 쓰레기 같은 말을 하는 초(超)이과감성의 AI.
어찌 되었든 카렌이 싫은 얼굴로나마 납득하는 모습을 보이자 맥스는 한결 밝아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카렌, 유성이 내려온 것과 그 유성과 함께 온 천사를 만났다는 것 모두 좋은 ■■야. 카렌 네게 운이 따르고 있다는 증거지.”
저건 또 무슨 소리인가.
루터가 미간을 좁히자 맥스가 설명했다.
“루터- 아니, 루터 님. 우리는 하늘에서 내려온 유성을 보고 이곳에 왔습니다. 루터 님을 만나기 위해서요.”
[마스터를 만나기 위해 왔다는 것은 날조 같지만 전자- 즉, 유성을 보고 이곳에 왔다는 말은 사실 같습니다.]
루터도 동의했다.
어쩌면 처음 예상했던 것처럼 코볼트들이나 조그레스도 유성을 보고 찾아온 것일지 몰랐다.
“일행은 너희 둘뿐인가?”
루터의 물음에 맥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와 카렌, 둘뿐입니다. 저흰 모험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모험가.
분명 현실에도 존재하긴 하지만 참으로 판타지적인 직업의 등장에 루터는 새삼 카렌과 맥스를 번갈아 보았고, 인테그라는 언제나처럼 말했다.
[모험가 : 강도, 강간범, 살인자 등의 범죄자로 언제든 돌변할 수 있는 날품팔이.]
[위험한 자들인 것 같습니다.]
‘아니, 그건 좀.’
하지만 사실 인테그라의 말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었다.
드래곤 헌터 시리즈의 모험가들은 단순히 거친 수준을 넘어 위험한 자들이 태반이었기 때문이다.
‘애당초 모험가라는 게 목숨 내놓고 하는 일이니까.’
탐험이나 발견 같은 것에 흥미를 가지고 꿈을 찾아 모험에 나서는 이들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 그대로 그냥 그런 사람들도 있긴 하더라- 수준에 불과했다.
모험가들 가운데 대부분은 그저 먹고살기 위해 칼을 든 칼잡이들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인적이 드문 변경처럼 치안이 부실한 지역에서는 눈앞의 이익에 눈이 먼 모험가가 범죄자로 돌변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카렌과 맥스가 그런 치들로는 보이지 않지만.’
물론 루터 자신의 역량을 보았기 때문에 저러는 것일지도 몰랐지만, 어찌 되었든 이쪽을 천사라고까지 생각하는 상황이니 딱히 위험한 행동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더욱이…….’
카렌이 막 깨어났을 때, 맥스는 그녀에게 존댓말을 했다.
카렌 ‘님’이라며 말이다.
그런데 중간부터는 평대하는 걸로 말투를 바꾼 것으로 보아 무언가 사연이 있는 사이인 것이 분명했다.
‘그래, 소설로 따지면 신분을 숨긴 귀족가 영애와 그 호위기사 같은 조합이라 이거지.’
그리고 보통 저런 조합이 나오면 귀족가 영애는 주인공에게 반하기 때문에 살신성인하던 호위기사는 닭 쫓던 개 꼴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여기서 주인공은 설마 나인가?’
[마스터, 뭔가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하고 계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듭니다.]
“흠흠.”
인테그라의 날카로운 지적에 헛기침을 터트린 루터는 의아하다는 듯 미간을 좁히는 카렌과 여전히 미소 짓고 있는 맥스를 보며 생각했다.
‘아무튼 카렌과 맥스. 드래곤 헌터3의 주요 등장인물 같지는 않지만 아무튼 모험가인 두 사람. 그럼 남은 건 현재 시점과 위치 정도인가.’
여긴 어디고 대충 몇 년쯤인가.
루터가 그것에 대해 물으려는 찰나였다.
카렌이 돌연 흠칫 놀라며 몸을 일으켜 세우는 것과 동시에 인테그라가 경고했다.
[마스터, 후방에서 생체 반응이 다가옵니다!]
루터는 급히 뒤돌아섰다.
수풀 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표범 크기 정도 되는 괴물이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쟈칼!”
카렌이 크게 소리쳤다.
쟈칼.
루터에게도 익숙한 괴물이었다.
드래곤 헌터3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소형 아룡이었기 때문이다.
고양잇과 맹수와 공룡을 뒤섞어 놓은 것 같은 녀석이었는데, 속도가 무척 빠른데다가 무리활동을 하기 때문에 항상 세 마리 이상이 몰려다녔다.
“인테그라! 숫자는?!”
[한 마리뿐입니다.]
[부상을 입은 것 같습니다.]
인테그라의 말대로였다.
애당초 이쪽을 노리고 나타난 것이 아닌지 으르렁거리는 쟈칼로부터 당혹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더욱이 등과 배를 걸쳐 크게 물린 자국이 있었다.
‘조그레스!’
아마 놈에게 물린 것이 아닐까?
같이 다니던 무리는 조그레스에게 잡아먹힌 것이고?
[마스터! 옵니다!]
어찌 되었든 지금은 전투 상황이었다.
쟈칼이 크게 포효하며 돌진해 오자 루터는 즉각 전투 자세를 취했다.
눈앞에 쟈칼의 예상 경로가 그려졌다.
직선.
하지만 루터 자신을 노리는 것이 아니다.
맥스를 노리고 있다.
그렇기에 루터는 즉각적으로 판단했다.
한 발자국 옆으로 이동해 쟈칼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쟈칼이 맥스를 공격하는 틈을 이용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쟈칼의 부상.
조그레스에 의해 생긴 상처. 허리에 난 커다란 구멍.
루터의 신체가 마치 기계처럼 정밀하게 움직였다. 루터가 작전을 구상한 순간 몸이 절로 반응한 것에 가까웠다.
-촥!
“크헝!”
두 가지 소리가 동시에 겹쳤다.
쟈칼이 크게 포효한 순간 루터의 수도가 놈의 허리를 파고들었다.
“키악!”
쟈칼이 비명을 지르며 도약하던 자세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수도를 박아 넣은 상태였던 루터는 그대로 쟈칼과 함께 바닥을 뒹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인테그라! 전기충격!”
[발동합니다!]
24시간에 2회밖에 사용하지 못하지만 횟수제한이 붙은 만큼 강력한 기술!
“끄아아-!”
내장이 산 채로 불타는 것 같은 고통에 쟈칼이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몇 번인가 경련하던 놈은 어느 순간 몸을 축 늘어트리더니 혀를 길게 빼물며 기절했다.
[전투 데이터를 미량 획득했습니다.]
[아직 숨이 붙어 있습니다. 마무리를 지으십시오.]
인테그라의 말이 맞았다.
루터는 깜짝 놀란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는 카렌과 맥스에게 말했다.
“칼.”
다행히 바로 알아먹은 카렌이 자기가 들고 있던 칼을 루터에게 내밀었고, 루터는 피 묻은 손으로 칼을 받은 뒤 배를 까고 기절한 쟈칼의 가슴을 찔렀다.
“칵!”
심장이 찔린 순간 쟈칼이 움찔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생명활동이 정지했습니다.]
[그런데 마스터, 놈의 가슴으로부터 미지의 에너지원이 감지됩니다.]
인테그라의 말에 루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룡들은 결국 악룡들로부터 비롯된 존재였다.
그렇기에 놈들의 몸에는 평범한 몬스터들에게는 없는 특별한 기관이 하나 존재했다.
‘이걸 직접 하는 날이 오네.’
숨을 길게 한 번 내쉰 루터는 쟈칼의 가슴을 가른 뒤 두 손으로 상처를 크게 벌렸다.
그러자 심장 부근에 박혀 있는, 작게 빛나는 노란 돌멩이 같은 것이 보였다.
드래곤 하트가 퇴화해서 만들어진 기관.
아룡들의 몸에 하나씩 존재하는 마정석.
게임에서는 이 마정석들을 모아 장비를 강화하거나 화폐 대신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루터가 마정석을 회수했을 때였다.
[마스터, 미지의 에너지원을 활용 가능할 것 같습니다.]
[활용하실 의사가 있으시다면 에너지원을 왼손 손등 위에 올려주십시오.]
드래곤 헌터3의 마정석과 스타 세이비어의 전투형 호문클루스가 만났을 때.
절로 가슴이 뛰기 시작한 루터는 바로 마정석을 손등 위에 올려보았다.
[에너지원의 흡수를 시작합니다.]
마정석이 루터의 손등에 박혔다.
아니, 손등 안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대, 대체?”
처음 보는 현상에 맥스가 깜짝 놀라 눈을 떴고, 카렌 역시 놀란 얼굴로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제일 놀란 것은 루터였다.
마정석을 몸에 박아 넣는다니.
소켓 뚫린 무기에 마정석 박아서 강화하는 것처럼 루터 자신도 강화할 수 있는 건가?
[에너지원으로부터 미량의 에너지가 생산됩니다.]
[마스터의 출력을 높일 수 있습니다.]
[나노머신들의 자가증식이 가능합니다.]
[원하시는 성장 방향을 선택해 주십시오.]
루터의 눈앞에 빛의 문자들과 기호화된 그림들이 떠올랐다.
* * *
[에너지 건 Lv1]
[나노슈트 Lv1]
[드론 Lv1]
* * *
9세대 나노머신 탑재 성장형 범용인형결전병기 루터 라이트시커.
루터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게임 속 콜라보 캐릭터가 되었다 6화
제1장 - 유성 #6
스타 세이비어의 플레이어블 캐릭터들 가운데 하나인 루터 라이트시커는 9세대 나노머신이 탑재된 전투형 호문클루스였다.
나노머신을 어떤 형태로 발전시키느냐에 따라 루터의 최종적인 진화 형태가 달라졌는데, 크게 세 종류로 구분할 수 있었다.
‘원거리 포격형, 근접 전투형, 군단형.’
단순 화력만 따지면 원거리 포격형이 최고였지만 개별 전투력만을 논한다면 근접 전투형이 최강이었다.
물론 수많은 드론들을 동시에 부리는 군단형도 강점이 있었다.
일단 숫자가 많다 보니 화력을 퍼부을 수 있는 범위가 원거리 포격형을 능가했고, 결국 혼자인 근접 전투형보다 정찰이나 포위공격 등등 할 수 있는 일들의 범주 자체가 넓었다.
‘고민되네.’
셋 모두 테크를 올릴 수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결국에는 셋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딱히 정해진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고, 밸런스 조정 차원의 문제였다.
루터가 저 세 가지 테크의 궁극진화 상태를 한 몸에 갖추면 다른 캐릭터 전부를 씹어 먹는 개사기 캐릭터가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여긴 현실이니까…… 전부 다 올릴 수 있지 않을까?’
더욱이 마정석을 흡수해서 루터 자신의 출력을 높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나노머신들을 생성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상황이었다.
‘쟈칼 같은 소형종이 아니라 대형종이라면.’
조그레스처럼 제대로 된 아룡이라면.
마정석이 아닌 악룡들의 드래곤 하트라면.
루터는 잠시 드래곤 하트를 장착한 스스로를 상상해 보았다.
전함의 주포급 화력을 단신으로 쏘아대고 수많은 드론 군단을 거느린 채 전장을 제압하는 진정한 의미의 결전병기.
살짝 중2병 냄새가 나긴 했지만 가슴이 웅장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인테그라.”
[말씀하십시오, 마스터.]
[마스터의 흥분 지수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남에게 말하기 부끄러운 망상을 하고 있다면 자제하시기를 추천합니다.]
“흠흠.”
정곡을 찔린 탓에 얼굴이 붉어진 루터는 애써 평정을 되찾은 뒤 인테그라에게 물었다.
“세 가지 테크를 동시에 올리는 게 가능할까?”
[가능은 합니다만 다소 비효율적인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 기본을 갖추신 후에는 한 가지 기능에 자원을 집중하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그래, 아무튼 나중에는 다 올릴 수 있다는 거구나.”
[충분한 자원을 확보한다면 가능할 겁니다.]
이 정도면 되었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루터는 다시 눈앞의 빛의 문자들을 바라보았다.
에너지 건과 나노슈트와 드론.
‘당장 필요한 걸 익히자.’
지금 이 장소는 스타 세이비어의 세계가 아닌 드래곤 헌터3의 세계였다.
‘역시 에너지 건인가.’
근접전 능력을 크게 상승시켜주는 나노머신 슈트도 무척 끌렸지만 역시 당장은 원거리 공격 수단을 하나라도 갖추는 쪽이 좋을 것 같았다.
‘드래곤 헌터3에서 하지 못하는 걸 할 수 있다는 게 콜라보 캐릭터인 루터의 이점이니까.’
마음을 정한 루터는 허공에 떠 있는 빛의 문자를 건드려 에너지 건을 선택했다.
[에너지 건 특화 나노머신들을 생성합니다.]
[생성까지 31분 27초가 소요될 예정입니다.]
인테그라의 말에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인 루터는 빙긋 미소 지은 뒤 카렌과 맥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두 사람은 미묘한 얼굴이 되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음…… 갑자기 혼잣말을 엄청 한 걸로 보일 테니까.’
하지만 말도 잘 안 통하는 마당에 인테그라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버거웠던 터라 루터는 다시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쟈칼 쓰러트렸다. 쟈칼이 있다는 건 쟈칼을 공격한 조그레스도 근처에 있을 수 있다는 거다. 피 냄새 번진다. 피 냄새 맡고 올지도 모른다. 일단은 이동하자.”
번역 중에 오류가 적도록 최대한 단문으로, 간단한 문장으로 말을 하자 맥스와 카렌 모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그런데…… 방금은 뭐야…… 요?”
걷고 있자니 카렌이 기묘한 존댓말로 물어왔다.
첫인상 때문에 여전히 루터를 어려워하는 것 같았지만, 눈이 초롱초롱 빛나는 것이 호기심 가득한 10대 소녀다웠다.
[카렌의 적대감이 많이 희석되었습니다.]
[비범한 변태에서 어쩌면 정말 하늘에서 온 변태 천사일지도 몰라- 정도로 인식이 바뀐 것 같습니다.]
‘변태는 어떻게 안 되는 거냐.’
마음속으로 한숨을 쉰 루터는 카렌의 파란색 눈을 돌아보았고, 카렌은 입술을 움츠렸지만 눈을 돌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루터는 생각했다.
‘역시 남자든 여자든 잘생기고 예쁜 게 최고구나.’
가만히 보고 있다 보면 마음이 약해졌으니까.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은 루터는 나름의 대답을 내주었다.
“마정석을 흡수한다. 나는 강해진다.”
“마정석을 흡수했다고……요?”
“그렇다.”
루터의 대답에 카렌은 새삼 작게 감탄하더니 루터를 위아래로 살펴보다 얼굴을 붉혔다.
[카렌이 또다시 마스터의-]
“그래, 뭔지 아니까 설명해 주지 않아도 돼.”
나까지 민망하니까.
인테그라의 설명을 끊은 루터는 맥스를 돌아보았다.
“이쯤이면 되지 않을까?”
이동하자고 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쟈칼의 시신으로부터 멀어지자는 뜻이었다.
벌써 20분 이상 이동했으니 슬슬 다시 멈춰서 이야기를 나눠도 될 것 같았다.
“예, 저쯤에서 잠시 휴식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죠.”
루터가 부상을 치료해 주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 피를 많이 흘린 탓인지 지쳐 보이는 맥스였다.
세 사람은 적당히 커다란 나무 아래 옹기종기 모여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딱히 느껴지는 인기척 같은 것은 없었다.
[제법 커다란 숲인 것 같습니다.]
[수령이 오래된 나무들도 많습니다.]
인테그라의 설명을 들으며 루터는 드래곤 헌터3의 지도를 떠올려보았다.
아무래도 역시 서부 지역 쪽이 맞는 것 같았다.
“루터 님,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저희는 하늘에서 내려온 유성을 보고 이곳에 왔습니다.”
맥스가 이야기를 시작하자 루터는 카렌을 돌아보았다. 입술을 살짝 움츠린 채인 그녀는 루터가 쳐다보자 맥스의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지?”
유성에 접근한 이유는 무엇인가.
루터의 물음에 맥스가 바로 답했다.
“유성의 낙하지에는 특수한 금속인 운철뿐만 아니라 각종 신비한 물품들이 발견되는 경우가 잦습니다. 아마 코볼트들이나 아룡들이 모여든 것도 비슷한 이유 때문일 겁니다.”
“음, 과연.”
확실히 게임에서도 가끔씩 비슷한 랜덤 이벤트가 발생한 적이 있었다.
루터가 고개를 끄덕이자 맥스는 마른침을 한 번 삼키더니 조금 흥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몇 시간 전…… 그러니까 해가 질 때의 일입니다. 노숙을 하기 위해 잠자리를 찾던 중에 노을 진 하늘을 가로지르는 유성을 발견했죠. 참 아름답고 신비한 광경이었습니다. 중간에 둘로 갈라지긴 했지만, 둘 다 원시수의 숲에 떨어진 것이 분명했기에 비교적 숲 외곽부에 떨어진 유성의 조각을 찾아 숲에 들어왔다가 몬스터들의 습격을 받아 카렌과 헤어졌고…… 우여곡절 끝에 루터 님을 만난 거죠.”
맥스의 다소 장황한 설명을 듣던 루터는 순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맥스의 이야기에서 이상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둘로 갈라져?”
“네, 요렇게 내려오던 유성이 둘로 쫙 갈라져서 각기 원시수의 숲에 떨어졌습니다. 아마 파편 같은 것이 갈라져 나간 거겠죠.”
맥스가 그렇지 않냐는 듯 카렌을 돌아보자 그녀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모두 확실하게 목격한 모양이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유성.
둘로 갈라졌고, 그중 하나에 루터 자신이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파편 하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인테그라?”
낮은 목소리로 묻자 곧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스터도 아시다시피 현재 제 데이터는 초기화된 상태이기 때문에 마스터가 크레이터에서 눈을 뜬 이후의 기억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합리적인 추론에 따라 한 가지 가설을 세워볼 수 있습니다.]
“어떤?”
[마스터는 크레이터에 알몸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 아무리 마스터가 전투형 호문클루스라 해도 맨몸으로 대기권 돌파를 해내지는 못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맞는 말이었다.
맥스와 카렌의 말처럼 루터 자신이 정말 유성과 함께 나타났다면 우주에서 대기권 돌파를 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맨몸이었다면 진즉에 불타 가루도 남지 않았으리라.
[마스터가 탑승하고 있던 소형 우주선 같은 것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긴급탈출로 마스터가 튕겨져 나간 것이라면, 맥스가 목격했다는 다른 유성의 파편은 마스터가 탑승해 있던 우주선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구미가 확 당기는 이야기였다.
1인승 우주선.
찾을 수만 있다면 뭐가 되었든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터였다.
어쩌면 우주선이 아직 가동 가능한 상태일지도 모르고 말이다.
뭣보다 루터 자신이 어쩌다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알게 될 단서이기도 했다.
“감지할 수 없어?”
[현재 감지 범위 내에서는 신호가 잡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근에 가면 감지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인테그라의 말에 루터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어느 날 눈 떠보니 스타 세이비어의 캐릭터가 되어 드래곤 헌터3의 세계에서 눈을 떴다.
게임 속에 들어온 것도 황당한데 전혀 다른 두 게임이 콜라보레이션까지 된 상황.
‘그럼 이건 내 콜라보 스토리인 건가?’
콜라보 캐릭터를 무식하게 그냥 집어넣는 경우는 오히려 별로 없었다.
보통은 짤막하게라도 콜라보 캐릭터만의 스토리를 붙여주는 편이었다.
어떻게 왔는지, 왜 왔는지, 어떻게 돌아갈 것인지 등등.
‘아무튼 찾아볼 가치가 있어.’
아니, 가치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찾아야만 했다.
마음을 굳힌 루터가 눈을 뜨자 지금껏 침묵하고 있던 카렌이 루터를 보며 물었다.
“파편을 찾으러 가실 건가요?”
초록색 눈동자가 마치 빛나는 것만 같았다.
호기심과 흥분, 약간의 속셈 등등.
‘생각해 보니 당연한가.’
애당초 유성이 떨어진 자리에서 뭔가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숲에 들어온 두 사람이었다.
파편을 찾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럴 생각이다.”
“역시.”
루터의 대답에 카렌은 빙긋 미소 짓더니 웃는 얼굴 그대로 루터에게 말했다.
“루터 님, 저희가 파편 찾는 일을 도와드려도 될까요?”
그렇지 않아도 예쁜 카렌이 활짝 웃기까지 하니 정말 꽃이 피는 것 같았다.
덕분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뻔한 루터였지만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
‘왜?’
왜 도와주는가.
루터가 굳이 입으로 말하는 대신 대답을 지체하자 카렌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맥스를 구해주셨으니까요. 은혜를 갚고 싶어요.”
확실히.
루터 자신이 없었다면 맥스는 죽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남은 코볼트야 어찌어찌 처리한다 쳐도 이미 피를 너무 많이 흘린 상태였기 때문에 기절이라도 했다가는 아룡이든 코볼트든 피 냄새를 맡고 온 놈에게 습격당했을 가능성이 높았으니 말이다.
[아주 거짓말 같지는 않지만 숨은 의도 역시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들 기준으로는 ‘천사’라 생각되는 마스터에게 은혜를 입히려는 것 같습니다.]
[어리석군요. 이쪽에서 은혜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그만인 것을.]
[파편을 찾을 때까지 이용하다가 손절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언제나처럼 쓰레기 같은 말을 참으로 다정다감하게 말하는 인테그라였다.
‘아무튼 나쁘지 않다 이거군.’
현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나쁠 것이 없었다.
더욱이 갈라진 파편이 어디에 떨어졌는지 아는 것은 현재 카렌과 맥스뿐이었다.
두 사람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좋다. 함께 하겠다.”
루터가 결정을 내리자 카렌은 다시 빙긋 웃더니 가볍게 예를 표하듯 왼쪽 가슴을 주먹으로 가볍게 두드린 뒤 말했다.
“정식으로 인사드려요. 카렌입니다.”
“맥스입니다.”
맥스 역시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자 루터는 똑같이 가슴을 두드린 뒤 말했다.
“루터다.”
[마스터, 전 인테그라입니다.]
설마 모르겠니.
아무튼 그렇게 통성명을 마치고 나자 루터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이곳은 어디이고 언제인지.
그리고 유성의 다른 파편이 떨어진 곳은 어느 쪽 방향인지.
눈치 빠른 카렌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이곳은 제국 서부의…… 아?”
말하다 말고 카렌이 움찔하더니 몽롱한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그건 맥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스터! 적습입니다!]
카렌의 가느다란 목에 굵직한 독침이 박혀 있었다.
루터는 급히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상대방이 더 빨랐다.
-피슉! 피슉! 피슉!
수풀 곳곳에서 독침이 연속해서 발사되니 어찌 막거나 피해볼 도리가 없었다.
팔과 등, 어깨 등에 독침을 맞은 루터가 무너지듯 쓰러지자 수풀 속에 숨어 있던 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컹! 컹!”
“컹컹컹!”
코볼트들이었다.
독침을 든 막대를 하나씩 손에 쥔 것을 보니 코볼트의 상위종인 하이 코볼트가 분명했다.
‘씨…… 씨X?’
독.
코볼트.
시작하자마자 베드 엔딩.
동시에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지만 이내 흩어졌다.
독이 그만큼 강해서였다.
순식간에 의식이 멀어지며 눈앞이 흐려졌다.
설마…… 이대로 죽는 걸까?
루터는 눈을 감았다.
더 이상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코볼트들이 쓰러진 일행에게 다가서는 그때.
[체내에 독극물이 투입되었습니다.]
[해독 작업을 개시합니다.]
[독극물을 체외로 방출합니다.]
인테그라의 목소리가 루터의 정신을 일깨웠다.
게임 속 콜라보 캐릭터가 되었다 7화
제1장 - 유성 #7
[마스터, 정신을 차리십시오.]
[개머리 괴물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확인사살을 하려는 것 같습니다.]
인테그라의 목소리가 조금씩 또렷하게 변했다.
아니, 정확히는 듣고 있는 루터의 정신이 점점 더 명료해지고 있는 것이었다.
“으으으…….”
아주 작게 신음을 흘린 루터는 눈을 뜨는 대신 인테그라에게 전달받은 상황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독침을 맞고 쓰러진 일행과 확인사살을 위해 다가오고 있는 코볼트들.
애당초 떨어져 있던 거리 자체가 얼마 안 되다 보니 다가오는 것도 순간이었다.
[마스터, 에너지 건의 사용이 가능해졌습니다.]
[독을 배출해야 합니다. 마스터의 생식기를 통해 배출하도록 하겠습니다.]
‘자, 잠깐. 뭐라고?’
에너지 건은 그렇다 치고 뭘 어디로 배출해?
[배출을 시작합니다.]
‘야!’
루터는 급히 마음속으로나마 소리쳤지만 의미 없는 일이었다.
하반신을 통해 강렬한 해방감과 수치심, 강렬한 찝찝함이 느껴졌다.
“크헝! 컹!”
“커커컹!”
[이 자식 지리는데?]
[낄낄낄, 원래 뒈지면 저래- 정도의 대화가 아닐까 합니다.]
원하지 않는 해석을 들으며 루터는 이를 악물었다.
축축한 바지만큼이나 마음까지 눈물에 젖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연연할 때가 아니었다.
침을 질질 흘리며 다가온 하이 코볼트들이 조잡하고 더러운 검들을 뽑아 드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인테그라!”
[에너지 건 발동합니다!]
소리침과 동시에 몸을 옆으로 뒤집은 루터는 오른손을 높이 들었다.
이미 인테그라를 통해 위치를 파악해두었기에 조준 역시 순간이었다.
루터의 눈앞에 새하얀 조준경이 나타났고, 의식한 순간 손바닥에서부터 구슬만 한 크기의 푸른색 에너지 탄이 발사되었다.
-팡!
“키엑?!”
제일 가까이에 있던 놈이 미간 사이에 에너지 탄을 맞고 쓰러졌다.
기본적으로 타격에 가까운 레벨 1의 에너지 탄이었기 때문에 머리가 터지거나 관통상이 나지는 않았지만 효과는 충분했다.
짧은 비명과 함께 무너지는 놈에게서 눈을 돌린 루터는 연달아 에너지 건을 쏘아댔다.
-팡! 팡! 팡!
3연사.
카렌과 맥스에게 접근하던 하이 코볼트 두 마리가 각기 머리와 목에 에너지 건을 맞고 나자빠졌다.
그리고 마지막 한 발은-
-탕!
거대한 도끼날이 에너지 탄을 막아냈다.
가장 뒤쪽에 서 있던 하이 코볼트였다.
우두머리라도 되는지 다른 놈들보다 덩치가 배는 좋았는데, 들고 있는 도끼도 범상치가 않았다.
“연사로 간다!”
에너지 탄환에 깜짝 놀란 놈이 주춤하는 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루터는 다시 한번 에너지 건을 연사했다.
-파파팡!
탄속이 제법 빨랐지만 우두머리도 녹록지 않았다.
다시 한번 도끼의 옆면으로 에너지 건을 막아낸 놈은 아예 도끼를 방패처럼 세우고 루터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속도가 상상 이상으로 빨랐다.
[마스터! 거리를 벌려야-]
대답은커녕 인테그라의 말을 전부 들을 시간조차 없었다.
우두머리가 순식간에 코앞으로 다가오는가 싶더니 괴성을 지르며 도끼를 휘둘렀고, 그 순간 루터의 눈앞에서 벼락이 쳤다.
-쾅!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지축이 뒤흔들렸다.
우두머리의 힘이 굉장한 것도 있었지만 도끼 자체의 힘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인챈트 마법이 걸린 대형 도끼.
아룡들을 상대하기 위해 개발된 특수 병기가 분명했다.
“커헉.”
간발의 차로 공격을 피한 루터가 비틀 거리며 거친 숨을 토했다.
물러나는 게 조금만 늦었어도 머리가 두 쪽이 났을 터였다.
[마스터, 에너지 건의 탄환이 네 발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불가시 모드는 현재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전기 충격을 사용할 수 없-]
[다시 옵니다!]
순식간에 이어지던 인테그라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높아졌다.
덕분에 정신을 차린 루터는 다시 이를 악물었고, 그 순간 우두머리의 도끼가 이번엔 횡으로 루터를 덮쳐왔다.
-콰가가가가!
수직으로 휘두를 때 벼락이었던 도끼는 횡으로 휘두를 때 역시 벼락이었다.
비정상적으로 거대한 도끼날이 대기를 가르며 쏟아지는 광경은 비현실적이기까지 했다.
죽는다.
공격이 너무 빠르다.
제대로 보고 피하는 것 따위는 불가능하다!
-부웅!
큰 소리가 울렸다.
도끼날이 사람을 찢어발기는 소리가 아니었다.
거대한 질량 덩어리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였다.
[마스터?!]
루터는 바닥에 있었다.
우두머리의 손에서 대형도끼가 휘둘러진 그 순간 반사적으로 주저앉듯 자세를 낮춘 결과였다.
보고 피한 것이 아니었다.
순간의 직감이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그렇기에 두 번은 불가능했다.
한 번 더 공격을 허락하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었다.
그러니 타이밍을 빼앗는다.
놈이 공격할 틈을 애당초 주지 않는다!
“우오오!”
머리 위에서 도끼의 궤적이 사라지자마자 루터는 크게 소리치며 우두머리에게 달려들었다.
마치 태클을 하는 것 같은 낮은 자세였는데, 목적은 오직 하나- 우두머리와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었다.
‘대형도끼!’
그것도 평범한 대형도끼가 아니었다.
아룡들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초대형 도끼였다.
그래서 컸다.
도끼날은 과장 조금 보태 사람의 상반신 크기였고, 도끼대의 길이 역시 여간한 대검을 방불케 했다.
그러니 거리를 좁힌다.
놈이 도끼를 제대로 휘두를 수 없도록 놈의 품 안으로 파고든다!
“키악?!”
루터가 낮게 파고들며 허리를 붙잡자 우두머리가 당혹스러운 목소리를 토했지만 잠깐뿐이었다.
밀려나는 대신 두 발로 버티고 선 놈은 오른팔에 쥔 도끼를 내던지더니 양손으로 루터의 허리를 붙잡으려 했다.
[마스터! 손을 놓으십시오! 무리입니다!]
인테그라의 말대로였다.
여기서 놈의 허리를 붙잡고 버텨봐야 답이 없었다.
하지만 마냥 손을 놓는 것 역시 답이 아니었다.
루터는 우두머리의 손을 피하기 위해 더욱 몸을 낮추면서 오른쪽으로 몸을 돌렸다.
사실 말이 좋아 몸을 돌리는 것이지 거의 구르다시피 해서 빠져나간 것이지만, 어찌 되었든 루터가 우두머리의 등 뒤로 돌아간 것이 중요했다.
“키아!”
루터를 놓친 우두머리가 성질을 낸 그때 루터는 놈의 가랑이 사이로 오른손을 뻗었다.
-팡!
다급히 내쏜 에너지 탄환이 놈의 급소에 명중했다.
“키아아아아아아아!”
우두머리가 무지막지한 괴성을 지르며 무릎을 꿇더니 마구잡이로 양손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루터는 다시 바닥을 굴러 그런 우두머리와 거리를 벌렸다.
숨이 막혔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지만 루터는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놈이 도끼를 던졌다.
놈에게는 더 이상 대형도끼가 없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어찌할 것인가.
남은 세 발의 에너지 탄환으로 어떻게 놈을 쓰러트릴 것인가.
[마스터! 놈이 회복했습니다!]
루터가 다시 몸을 일으킨 것과 거의 동시에 우두머리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까 이상으로 루터에 대한 살기를 강하게 뿜어낸 놈은 땅에 떨어진 도끼를 찾는 대신 마치 고양잇과 맹수라도 된 것처럼 양손의 손톱을 날카롭게 뽑아냈다.
“죽. 인. 다!”
우두머리가 어설픈 발음으로나마 노성을 토하며 루터에게 돌진해 왔다.
마치 덤프트럭이 덮쳐오는 것 같은 공포였지만 루터는 계속해서 생각했다.
이성을 잃은 놈의 공격은 단순할 수밖에 없다.
직선.
그러니 이번에도 피한다.
어떻게든 회피한 뒤 놈의 등 뒤를 점한다.
[옵니다!]
놈이 오른손을 휘둘렀다.
괴력이 더해진 날카로운 손톱은 이미 참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빨랐다.
하지만 역시나 단순했다. 미리 대비하고 있던 루터는 대각선 위에서 아래로 쏟아지는 사선 공격을 오른쪽으로 크게 몸을 던지는 것으로 피해냈다.
-부웅!
우두머리의 오른손이 허공을 갈랐다.
그러니 이제 다시 몸을 놀려 놈의 등 뒤를 점하면 된다.
하지만 무리였다.
너무 어설픈 생각이었다.
공격을 피하기 위해 몸을 던지기는 했지만, 바닥을 뒹군 만큼 일어서서 움직이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놈이 다시 온다.
이번에는 대각선으로 휘둘렀던 오른손을 왼쪽 어깨 쪽으로 당기더니 아까보다 훨씬 더 빠르게 내리그었다.
“크윽!”
피하지 못했다.
놈의 손톱이 루터의 오른팔을 베었다. 살이 뭉텅이로 뜯겨져 나가며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아프다. 너무 아프다. 정신이 나갈 것만 같다.
[지혈을 개시합니다, 진통제를 투여합니다!]
[마스터! 정신을 차리세요!]
루터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이미 균형을 잃고 뒤로 쓰러진 상황이었다.
우두머리가 그런 루터의 머리 위에서 다시 한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이번에는 루터의 가슴을 후벼 팔 것이 분명했다.
쏟아진다.
놈의 공격이, 벼락이, 심장을 파헤칠 일격이!
“키악?!”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우두머리가 돌연 신음을 토하며 움직임을 멈췄다.
아니, 숫제 얼어붙기라도 한 것처럼 부자연스러운 동작을 취한 채 움직이지 못했다.
어떻게 된 것일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이유 같은 것이 아니었다.
루터는 머리 위에서 덜덜 떨리는 놈의 오른팔을 본 순간 몸부림치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크아!”
놈이 다시 괴성을 질렀다.
놈의 오른팔이 조금이지만 다시 움직였다.
하지만 잠깐뿐이었다. 놈은 다시 거미줄에 얽매이기라도 한 것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이 루터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다.
루터의 오른손이 오른팔을 휘두르느라 낮아진 놈의 목에 닿았다.
루터는 그대로 손바닥을 강하게 밀착시키며 에너지 건을 연사했다.
-콰가가!
제로거리에서 발사된 에너지 탄환이 우두머리의 목을 파고들었다.
루터의 손바닥 역시 손상을 입었지만 우두머리 쪽의 피해가 훨씬 더 컸다.
피부가 꿰뚫렸다. 에너지 건이 놈의 목구멍을 찢어 구멍을 만들었다.
“크윽!”
에너지 탄환을 모두 소모한 루터가 뒷걸음질 치며 물러선 순간 마개를 잃은 우두머리의 목구멍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크아아…….”
다시 몸의 자유를 찾은 듯 우두머리는 서둘러 자신의 목을 틀어막으려 했지만 이미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피를 너무 흘린 놈은 비틀비틀 거리더니 그대로 쿵 소리를 내며 고꾸라졌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크허.”
우두머리와 거리를 벌리기 위해 뒷걸음질을 치던 루터는 털썩하고 자리에 앉았다.
인테그라가 진통제를 투여한 덕분에 화상을 입은 오른손이 아프지는 않았지만, 그와 별개로 몸의 기능이 극도로 저하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집중력을 너무 많이 소비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대로 쓰러져 잠들고 싶었다.
하지만 루터는 다시 이를 악물고 정신을 일깨웠다.
거친 숨을 토한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카렌과 맥스가 쓰러져 있던 방향.
엎드려 누운 채 땀을 뻘뻘 흘리며 손을 뻗고 있는 카렌이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루터는 우두머리에게 일어난 기현상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옅게나마 빛나고 있는 카렌의 초록색 눈동자와 부들부들 떨리는 손, 보이지 않는 힘에 얽매인 것처럼 움직이지 못하던 우두머리.
카렌이 무언가 했다.
어쩌면 초능력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역시.’
저렇게 예쁜 애가 그냥 엑스트라일 리 없지.
저도 모르게 떠오른 생각에 헛웃음을 흘린 루터는 다시 숨을 크게 골랐다.
인테그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스터, 카렌으로부터 미약한 사이킥 에너지 반응이 감지됩니다.]
[카렌의 생명 반응이 현격히 약해져 있습니다.]
[맥스의 생명 반응 역시 미약합니다.]
[움직여야 합니다.]
인테그라의 말대로였다.
루터는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마치 합을 맞추기라도 하듯 카렌이 신음과 함께 머리를 떨어트렸다.
깜짝 놀란 루터는 카렌을 향해 달리며 소리쳤다.
“인테그라!”
[아직 살아 있습니다.]
[하지만 생명 반응이 미약합니다. 치료를 서둘러야 합니다.]
루터는 카렌을 급히 돌아 눕혔다.
땀에 흠뻑 젖은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독도 독이지만 약해진 상태로 무리하게 능력을 쓴 탓에 탈이 난 모양이었다.
“인테그라! 치료할 수 있겠어?”
[가능합니다. 다만 나노머신이 다량 소실될 것 같습니다.]
[맥스에게 주입해둔 나노머신들을 재활용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부족합니다.]
[치료 후 마스터의 전력이 급감할 수 있습니다.]
“젠장.”
그래도 해야만 했다.
이해득실이고 뭐고 따질 때가 아니었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고 있고, 치유할 힘이 있다. 그럼 일단 치유하는 것이 인지상정이지 않은가.
“잠깐!”
맥스와 카렌을 나란히 눕힌 루터는 순간 우두머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두머리의 움직임 같은 것을 감지해서가 아니었다.
인테그라의 말.
새로운 에너지원이 필요하다.
“저거, 쓸 수 있을까?”
우두머리가 사용하던 대형도끼.
원시수의 숲에 들어온 인간들의 것을 빼앗은 모양인지 도끼에는 무려 인챈트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드래곤 헌터 세계관에 등장하는 인챈트 무기들은 모두 한 가지 특징을 공유했다.
‘마정석!’
대형도끼에는 마정석이 박혀 있다.
루터의 말에 인테그라가 즉답했다.
[가능할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을 치료한 직후 미지의 에너지원들을 흡수하면 전력의 급감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아! 그럼 바로 치료하자!”
[알겠습니다. 두 사람의 복부에 손을 올려주십시오.]
[맥스를 치료했을 때처럼 맨살에 닿아야 합니다.]
“그래.”
루터는 급히 두 사람의 상의 속으로 두 손을 밀어 넣었다.
똑같은 인간인데 감촉은 천지 차이였다.
[마스터, 지금은 음란한 생각을 하실 때가-]
“닥치고 치료하자.”
[치료를 시작합니다.]
순간 양손이 뜨거워지는가 싶더니 카렌과 맥스의 뱃살이 착! 하고 루터의 손바닥에 달라붙었다.
[카렌과 맥스의 몸에 나노머신을 주입합니다.]
타인의 몸, 그것도 중독된 것을 치료하는 것이라 그런지 맥스의 외상을 치유할 때처럼 단숨에 치료가 끝나지는 않았다.
거의 5분- 아니, 10분 남짓이 지나자 겨우 다시 인테그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독의 채집이 끝났습니다.]
[생식기를 통해 독을 배출합니다.]
“어?”
이번에도 말릴 틈 따위는 없었다.
카렌의 바지와 맥스의 속옷이 동시에 축축해지는가 싶더니 두 사람의 얼굴색이 한결 밝아졌다.
“후으으…….”
작게 앓는 소리를 낸 카렌은 몸을 축 늘어트렸고, 맥스는 여운이라도 즐기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두 사람의 치료가 끝났습니다.]
[의식을 회복하는 데는 다소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 그래.”
바닥까지 적시기 시작한 무언가를 피해 얼른 몸을 일으킨 루터는 약간의 고민 끝에 결단을 내렸다.
[마스터, 다시 벗는 겁니까?]
“……말하지 말아줘.”
축축해진 바지를 벗은 루터는 긴 한숨을 토한 뒤 우두머리가 누워 있는 곳으로 향했다.
기절한 다른 녀석들과 달리 우두머리는 목이 꿰뚫려 즉사한 것 같았다.
“후우.”
오늘만 벌써 세 번째 살생이었다.
하지만 애당초 이쪽을 죽이려고 한 괴물이라 그런지, 아니면 원거리에서 사격으로 쓰러트렸기 때문인지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내가…… 본래 이런 사람이었나?’
아니면 루터가 되면서 뭔가가 달라진 것일까.
루터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드래곤 헌터3의 세계에서 눈을 뜬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 상황이었다.
지금은 합리적으로 사고하며 움직일 때였다.
“인테그라, 어때? 흡수할 수 있겠어?”
도끼날과 자루의 연결 부위에 박혀 있는 주황색 마정석 위에 손을 올리며 묻자 인테그라가 대답했다.
[가능합니다.]
[다만 이미 가공된 것이기에 원석보다 에너지 효율이 낮습니다.]
“아무튼 가능은 하다는 거네.”
[네, 치료로 인한 전력의 손실을 방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른 능력은 무리지만 나노슈트 Lv1은 현재 자원만으로도 발전이 가능합니다.]
“좋아.”
상황은 모르겠지만 일단 업그레이드부터 하자.
레벨이 깡패라고 아무튼 세지면 어떻게든 되겠지.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결심한 루터는 숨을 길게 내쉰 뒤 눈을 감았다.
마정석의 힘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게임 속 콜라보 캐릭터가 되었다 8화
제2장 - 카렌
[나노슈트 특화 나노머신들을 생성합니다.]
[생성까지 97분 31초가 소요될 예정입니다.]
[남은 에너지원과 자원들은 기본 나노머신 증산에 돌리겠습니다.]
“그래.”
짧게 답한 루터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길게 쉬었다.
이러나저러나 한고비 넘겼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저앉아 쉴 때가 아니었다.
제법 시끄럽게 요란을 떨었으니 언제 또 아룡들이나 몬스터들이 다가올지 몰랐다.
최대한 빨리 이 자리를 떠나야 했다.
‘일단…….’
루터는 하이 코볼트들을 돌아보았다.
목에 구멍이 난 우두머리와 달리 나머지 놈들은 의식만 잃었을 뿐 목숨 자체는 붙어 있었다. 지금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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