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idade 4
흡 이 가라앉고, 정신이 또렷해졌다.
그간 격전으로 소모했던 체력을 회복했다. 나는 더욱 오래, 보다 많이 싸울 수 있게 되었다.
능력치를 확인했다.
[근력 14]
[민첩 53]
[내구 15]
[체력 29]
[마나 0]
(남은 포인트는 25pt 입니다.)
20포인트를 소모해 내구와 체력을 보충했다. 25포인트는 나중을 위해 남겨 놨다.
다시금 시선을 돌려, 공국 병사들의 모습을 확인했다.
"……."
놈들은 여전히 신중하게 간격을 좁혀오고 있다.
나름대로 합당한 행동이었다. 내 무력을 여태껏 보아왔으니 , 섣불리 덤벼들고 싶지 않은게 당연할 터.
덕분에 무사히 능력치를 상향시켰다.
이제는 놈들을 따돌리고, 거점으로 귀환해야 할 때.
'포위망을 돌파해야 한다. 허점을 찾아야 해.' 시선을 움직여 포위망의 빈틈을 찾았다. 나무와 수풀이 울창하고, 굴곡이 심한 산악지형인 탓에, 놈들은 완벽하게 나를 둘러싸지 못하고 있다.
간간히 보이는 허점을 눈여겨 둔다. 머릿속으로 동선을 짜냈다.
"이미 패배한 이상, 얌전히 물러 나는 게 좋을 텐데. 나 하나 잡기 위해 몇 명이나 죽을지 모른다만."
"헛소리!"
저벅. 놈들의 포위망에서 한 병사가 걸어 나왔다. 놈의 가슴팍에는 백인대 부관 계급장이 달려있다.
놈이 흉흉한 눈으로 이쪽을 노려 본다.
"네놈은 우리 공작가의 도련님을 살해했다. 네 녀석만은 절대 놔주지 않겠다."
"충성심이 대단한데. 공작가 사병 이라도 되나?"
"우리는 공작 각하의 친위대, 바 첼부대다. 공작가의 일원을 살해한 이상 네놈을 죽일 것이다. 반드시. 우리의 목숨을 걸고."
쯧, 혀를 찼다.
놈들이 정예라고는 생각했는데 . 아무래도 공작가 직속사병 같은 놈 들인 듯했다.
하긴, 공국군 주제에 실력과 무 장이 범상치 않았으니 . 아마 실력과 충성심이 검증된 놈을 뽑아 자기 수하로 두었던 것이었으리라.
나를 노려보던 적 부관이, 검을 내려그으며 외쳤다.
"놈을 죽여라! 죽여서 도련님의 원수를 갚아라!"
"오오오오오오!"
그러자 내 사방을 둘러싸고 있던 공국 병사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돌진해오기 시작했다.
이미 놈들은 지척까지 포위망을 좁혀왔던 상황. 평범한 제국 병사라 면, 순식간에 온몸이 고슴도치처럼 꿰뚫리리라.
하지만 나는 평범한 병사가 아니다.
'유저' 한지훈이다!
- 콰가가가각!
다수의 창격과 검격이 허공을 가 르고 뒤엉켰다. 그때 나는 옆으로 도약,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잽싼 놈!"
다른 창병이 나를 찌르기 위해 도약해온다. 나는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서며 검을 휘둘렀다.
파앙!
내 검날이 녀석의 창날을 쳐냄과 동시, 놈의 간격 안으로 파고들어 가 목덜미를 그어버렸다.
"컥, 커헉!"
녀석이 목을 붙잡고 켁켁거린다. 피를 질질 흘리는 놈의 멱살을 붙잡고, 밀어 붙였다.
쿵! 녀석의 뒤에 있던 공국 병사 두셋이 나자빠진다. 나는 그 틈을 타 미리 봐두었던 수풀 속으로 몸을 던졌다.
"놈이 수풀 속에 몸을 숨겼다!"
"가서 죽여!"
놈들이 창과 검을 휘둘러 내가 뛰어든 수풀을 마구잡이로 헤집어 댔다. 기다란 풀더미가 우수수 잘려 나간다.
하지만 놈들의 반응은 한 차례 늦었다. 이미 나는 수풀을 가로질러 밖으로 빠져나온 상태.
"저기 있다! 놈이 저기 있다!"
"망할 놈! 더럽게 빠르…."
수풀 밖으로 나오자 다시 공국 병사들이 보였다. 그에 곧장 돌진, 가속을 살려 검을 휘둘렀다.
수평으로 그어지는 검날. 번뜩이는 검광이 어둠 속에서 빛나고, 붉은색 핏물이 치솟았다.
"끄아아아아!"
공국 병사 한 놈의 목을 베었다. 쓰러지는 녀석을 즈려밟으며 전진, 다음 적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푸욱.
이쪽으로 창을 내찔러오던 병사 의 옆구리에 검날을 박아 넣었다. 경련하는 놈을 발로 차버리며, 또다시 앞으로 도약했다.
"절대 살아서 돌려보내지 마라! 도련님의 원수를 갚아라!"
"궁병대! 사격해!"
나를 노리고 무수한 수의 공국 병사들이 돌진해온다.
그에 굴하지 않고 포위망의 허술 한 부분을 찔러 들어갔다. 전투분석 으로 도출해낸 경로를 밟고, 집중의 힘으로 적의 공격을 피하거나 홀려 보냈다.
검을 휘두르며 계속해 달려나갔다.
파공성이 울리고, 검광이 번뜩일 때마다 적병 하나가 쓰러진다. 나를 노리고 쇄도해온 화살은 오히려 제 아군을 맞췄으며, 놈들의 포위망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까지 남은 힘을 쥐어짜며 달려갔다.
"끄아아악!"
"막아라! 막아!"
병사들을 하나둘 처치하며 산을 타고 올랐다.
그 급박한 와중에 여러 개의 자 상이 내 피부에 새겨졌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전신에 휘몰아치는 전투의 흥분, 그리고 샘솟는 아드레날린 덕분이었다.
"후욱, 후욱!"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달리고 또 달렸다. 가로막는 적을 처치하거나 회피하고, 날아오는 화살을 쳐냈다. 놈들의 포위망을 피해 계속해 허점을 찾아 파고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공국 병사들이 더 이상 앞에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놈이 도망친다!"
"추격해! ?아가서 죽여!"
나는 어느새 공국 놈들의 포위망을 돌파, 녀석들의 추격을 따돌린 상태였다.
놈들이 횃불을 치켜들고 이쪽으로 ?아오고 있다. 간간히 화살이 날아왔지만, 야음 때문에 제대로 조 준하지 못하는 것일까. 녀석들의 화살은 내 주위의 나무와 바위를 맞 힐 뿐이었다.
나는 고개를 다시 앞으로 해 달 려나갔다. 산을 타고 거점으로 향했다.
달려가는 와중, 문득.
"하하."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하하하하!"
나는 크게 웃었다.
전투의 긴장이 점차 가라앉아가 기에, 웃으며 공기를 토할 때마다 저릿한 고통이 올라왔다.
하지만 도무지 웃음이 멈추지 않는다. 나는 피부 곳곳에서 아릿한 통각이 올라오는 것조차 무시하며, 시원하게 웃어 재꼈다.
"드디어 죽여버렸다!"
분명 녀석은 강적이었다. 검술에 재능을 타고났으며 무지막지한 직 감을 가진 놈은 추후 거대한 세력을 이루어 내 앞길을 막아설 녀석 이었다.
하지만 놈은 이제 죽어버렸다.
모가지에 검날을 박아넣고, 비틀 어 목뼈까지 부숴버렸다.
완벽한 즉사.
포션이 있다 한들 살려낼 수 없을 터다.
미래의 큰 장애물을 치워버렸단 생각에, 나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였다.
- 띠링!
[시스템 관리자가 시나리오에 개입합니다.]
불길한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 * *
"도련님께서 결국, 전사하셨다."
공국 병사 몇이 주위에 도열해 있다.
그들은 모두 한스의 휘하 병사들 이었다. 공작가 친위병력인 바첼부 대의 병사들. 그들의 눈동자에는 죄 스러움이 가득했다.
자신들의 상관인 한스. 공작가의 후계자인 그를 지켜내지 못했다. 그렇기에 죄책감이 그득한 그들이었다.
"도련님의 시신을 수습해라. 시신 만이라도 수도로 모셔 안장해야 하니."
"알겠습니다…."
병사들이 하나둘 한스의 시신을 수습하려했다.
그의 시신은 그다지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목이 꿰뚫리고, 목뼈가 부러져 덜렁거렸으니 .
하지만 그럼에도 병사들은 성심 껏 시신을 수습했다. 그들은 공작가 친위대인 바첼의 부대원들. 공국의 후계자인 한스의 시체를 아무렇게 나 처리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막 한스의 시신을 들어 올릴 때였다.
- 이런… 한발 늦었군.
목소리가 들렸다.
중후하고도 질척한. 기분 나쁜 목소리였다.
분명 마나가 스며들어 있는 웅혼 한 목소리.
"누구냐?!"
"주위에 적이다!"
"경계해! 제국 마법사일 수도 있다!"
그에 병사들이 하나둘 창과 검을 꺼내들고 주위를 경계했다.
그리고.
저벅.
검은색 로브를 뒤집어쓴 하나의 인영이 수풀 속에서 걸어 나왔다. 그에 병사들은 멍한 눈으로, 인영을 주시한다.
검은색 로브. 그것이 상징하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했다.
"검은색 로브라니. 설마…."
"흑마법사! 흑마법사다!"
"저주받은 자다! 죽여라!"
병사들이 달려들어 흑마법사를 처치하려 한다.
허나 그들의 발악은 쓸모없었으니 .
- 꺼져라.
화르르르르륵!
흑마법사를 중심으로 검푸른 불 길이 치솟고, 달려들던 병사들을 휩 쓸었다. 병사들이 순식간에 회색 재 로 화해 바람에 쓸려나갔다.
단숨에 병사 십여 명을 증발시킨 흑마법사.
그는 혀를 차며 천천히 걸어가, 한스의 시신 앞에 섰다.
그가 로브를 벗으며 읊조렸다.
- 아까운 인재를 잃었도다.
흑마법사의 얼굴은 괴기했다.
안면에는 온갖 기하학적인 문신 이 아로새겨져 있었으며, 눈동자는 흉흉한 붉은색으로 반짝였다.
마치 피의 결정을 안구에 새겨넣 은 것 같은 모습.
그는 손을 한스의 시신을 향해 뻗더니, 질척한 웃음을 지으며 읊조렸다.
- 하지만 상관없다. 죽었긴 하지만, 그렇다고 쓸모가 없는 건 아니 니.
쿠르르르르….
흑마법사의 손바닥에서 흑색 기운이 일어났다. 직후 그 흉흥한 기운은 천천히 하강해, 한스의 시신으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했다.
그가 웃었다.
- 운이 좋구나, 한스 요한바르첸. 나 크라함 덕분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아, 대업을 완수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흑마법 학파 '불라바아'의 종주.
크라함.
그가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
29화.
공국군 추격대를 따돌린 뒤. 나는 계속해 산을 타고 올라갔다.
발걸음을 옮기는 와중,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건 뭐였지."
한스를 죽이고 도주할 당시까지 만 해도. 나는 기분이 좋아 입가에 웃음이 멈추지 않았었다.
하지만 막상 살아남아 거점으로 향하는 지금. 내 감정은 완전히 가 라앉아 있다. 심상치 않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시스템 관리자가 시나리오에 개 입합니다.]
시스템 관리자가 시나리오에 개 입한다는 홀로그램. 한스를 죽이고 도주하는 와중 떠올랐던 안내창이다.
표정을 찌푸렸다.
"관리자의 개입이라니."
과거, 이 염병할 세상 속에 처음 들어왔을 적. 무수히 떠올랐던 홀로그램들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냈다.
[적대 NPC의 잠재력이 상승합니다.]
[우호 NPC의 잠재력이 하락합니다.]
[유저 보정이 하향 조정됩니다.]
[대적자 NPC의 보정이 상승 조정됩니다.]
[시나리오 무작위 이벤트를 생성 합니다.]
불길해 보이던 수많은 안내창들.
개중에는 분명 이런 안내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시스템 관리자의 시나리오 개입을 허용합니다.]
당시에는 순식간에 스쳐지나간 문구였기에 무어라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눈여겨봤어야했다.
그 관리자인지 뭔가 하는 놈이 직접 시나리오에 개입해 주무르고 있었다니.
후욱. 한숨을 내뱉었다.
"난이도 나이트메어. 이런 의미였 나."
게임에서는 결코 이런 일이 없었다.
게임을 움직이는 것은 오직 내 마우스와 키보드, 그리고 적 AI였다. 초월적인 무언가는 게임의 전개에 관여하지 않았고, 나는 그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적을 쳐부수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관리자의 개입이라니.
"빌어처먹을."
기분이 정말 좋지 않다.
그 말인 즉슨, 관리자라는 놈이 언제든지 시나리오에 개입해 나를 방해할 수 있다는 소리다.
아니, 이미 방해당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시나리오와 달리 틀어 진 부분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으니 .
본래 일주일 뒤였을 공국군의 침공이 당겨졌다.
시나리오대로라면 공국 침공군에 없었어야 할 한스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놈은 이전보다도 더욱 빠르게 백인장으로 진급했다.
명백한 시나리오의 비틀림.
분명 그 관리자라는 놈의 소행이 리라.
"… 망할 놈."
앞으로 녀석은 더욱 노골적으로 내 앞길을 방해할 터.
나는 고개를 들어올려, 암흑색 하늘을 바라봤다.
빗줄기처럼 떨어져 내리는 폭렬 구의 궤적. 그리고 그보다도 높이 떠올라있는 별과 달이 보인다.
"다음에도 나를 방해하겠지. 관리 자."
왠지 저 밤하늘 위, 놈이 나를 주시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瀏릴藪?하늘을 바라보며 말해 본다.
"계속 방해해라. 나는 네놈의 개 수작을 모조리 쳐부수고, 이 엿 같은 세상에서 나갈 거다."
오기가 생겼다.
관리자인지 뭔지 하는 놈의 방해 를 물리치고, 이 게임을 클리어 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오 기가.
나는 계속해 길을 걸어 산 위로 향했다.
아군의 거점이 점차 가까워진다.
- 쿠구구구구궁….
밤하늘에는 여전히 무수히 많은 수의 폭렬구가 떨어져 내리고 있다.
"백인장님! 살아계셨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내가 거점으로 가자 가장 처음으로 마주한 것은 척후조 병사들이었다.
걱정했던 것일까. 녀석들은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카일이 기쁘다는 듯 말해왔다.
"정말, 정말 다행입니다! 혼자서 백인대를 상대하고도, 무사히 살아 돌아오시다니 말입니다."
"내가 그렇게 쉽게 죽을 것 같 냐?"
"그렇게 말하실 줄 알았습니다."
나는 카일의 말에 짐짓 여유 있는 척 해보았다.
사실은 거짓말이었다.
'정말 죽을 뻔했지.'
이번 전투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야산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놈들의 분견대를 격파했다. 백인대 규모의 적을 혼자서 유인해야 했으 며, 나중에는 적에게 포위되어 몰이 사냥까지 당했다.
내가 평범한 병사에 불과했다면 죽어도 수십 번은 죽었으리라.
나는 녀석들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어딜 가려고 짐을 싸 고 있던 거냐? 임무는 거점 방어였을 터인데."
척후조 병사들은 하나같이 완전 무장 상태였다. 등에는 식량과 잡동 사니를 담은 군장을 메고 있었으며, 가진 무기까지 모두 챙긴 상태였다.
마치 어딘가로 이동하려 하는듯 한 모습.
그에 카일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사실, 백인장님을 찾으러 가려 했었습니다."
"나를?"
"그렇습니다. 저희 상관을 홀로 버려둘 순 없지 않겠습니까?"
나는 카일의 대답에 미소 지었다.
녀석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하고 있었지만,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다. 자칫 잘못한다면 백인대 규모의 적과 조우할지도 모르는 일이 었으니 .
"위험한 일이었을 텐데. 그리고 내가 죽어있었다면 헛고생이었을 테고 말이야."
"존경하는 백인장님입니다. 살릴 수 없다면, 시체라도 찾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미련한 녀석들."
나는 피식 웃고, 카일과 척후조 병사들은 그에 반응하듯 낄낄 웃어 댔다.
그간 있던 여러 전투들 덕분일까. 녀석들은 보다 나를 의지하고 있다. 내가 혼자 떨어지자 굳이 구출해오려 할 정도로 말이다.
"잠깐, 백인장님! 많이 다치셨습니다."
문득 내 몸 상태를 알아차린 것 일까. 카일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그에 나는 시선을 내려 내 몸을 살 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무리하긴 했어.'
녀석의 말대로, 내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온몸에는 자잘한 자상이 수도 없이 아로새겨져 있다. 근육은 한계에 가까운 운동으로 인해 부들부들 떨 려왔으며, 전투의 긴장이 풀어진 탓에 묵직한 피로감이 온몸을 짓눌러 댔다.
당장 생명의 위협은 없지만, 그럼에도 무시하기엔 힘든 부상.
"백인장님.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약과 붕대를 가져오겠습니다."
"아니. 치료 전에 먼저 상황 보고부터 받지."
"명령을 받듭니다."
카일이 척 경례하며 보고해왔다.
"현재 상황 보고드립니다. 마법사들이 거점에 도착, 적 공국 침공군 주력을 향해 광범위 폭렬마법을 갈 겨대고 있습니다."
"그래. 마법사라."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그때.
- 콰르르르르릉!
커다란 폭음이 울렸다. 익숙한 소음이었다.
마법사들이 마법을 발현할 때 울리는 마나의 울음. 꽤나 강력한 마법을 발현하고 있는 것일까. 진동이 느껴질 정도로 소음의 기세는 흉포했다.
카일이 질린 표정으로 말해왔다.
"마법사들이 휴식을 끝내고 다시 공격하는 것 같습니다. 굉장히 시끄 럽지 않습니까?"
"카일, 나를 마법사들에게 안내해라."
"마법사들에게 말입니까? 먼저 치료하신 다음에 뵈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아니. 보고가 우선이다. 치료는 나중에 받아도 되니."
"… 알겠습니다."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녀석의 뒤를 따라갔다.
뒤따라가는 와중 중얼거렸다.
"마법사들이라면, '녀석'이 와있 겠지."
사실 내가 마법사를 보러가는 이유. 단순히 보고하러 가는 이유가 아니었다.
눈도장을 찍어놔야 할 녀석이 있었으니 .
피식 웃었다.
'그 괴팍한 녀석을 실제로 보게 될 줄이야.'
마법사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지 랄 맞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무리는 아닌 일이었다. 거의 평생을 골 방에 갇혀 마법이라는 학문에 자신을 갈아 넣어야 얻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마법사라는 지위일 터이니.
그리고 지금 내가 만나러 가는 마법사는 그중에서도 한층 괴팍한 놈이었다.
나는 계속해 카일의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잠시 후, 마침내 볼 수 있었다.
- 마나 동조. 폭렬마법 50중첩. 준비해라.
마나 어린 음성. 그리고 지상에 도열해 있는 수십의 마법사들.
하나같이 두터운 회색 로브를 머리끝까지 뒤집어 쓴 녀석들이다. 그 들의 전신에서는 푸른색 기운이 일 렁이며 신비한 빛을 발하고 있었으 며, 들고 있는 지팡이에서는 장중한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나는 그들 중 가장 선두에 있는 이를 바라봤다.
- 타격점 조율은 내가 하겠다. 전원, 준비.
다른 마법사들보다 훨씬 더 밝은 마나를 전신에 두르고 있는 이였다.
그가 마법지팡이를 휘저을 때마다 허공에 떠올라있는 마법진이 시 시각각 변화했다. 푸르게 빛나던 마법이 점차 붉은색으로 물들어가고, 보다 강렬한 빛을 발하며 번들거린다.
직후. 그가 지팡이를 내려그으며 읊조렸다.
- 발현. 폭렬폭풍.
그러자 이변이 일었다.
번쩍!
사방 천지를 뒤덮을 듯 강렬한 섬광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허공에 생겨난, 무수히 많은 수의 불덩어리 들. 그것들은 매끄럽게 하강해 공국 침공군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나는 그 꼴을 멍하니 바라봤다.
- 번쩍! 번쩍! 번쩍!
저 멀리, 허둥지둥 움직이며 퇴 각하고 있는 공국 침공군. 그들 사이에서 다수의 섬광이 번뜩였다.
직후 대규모의 폭발이 연속해서 일었다. 불기둥이 치솟고, 핏빛 섬 광이 터져 나왔다. 퍼져 나온 화마 가 광활한 공간을 유린했다. 야음으로 뒤덮인 어둑한 야산이, 수많은 폭발과 넘실거리는 불길의 빛으로 물들어갔다.
- 콰과과광!
그리고 몇초 후 들려오는 폭음 들.
나는 나직이 읊조렸다.
"역시 장관이야."
과거 블랙 오케스트라를 할 적. 마법사들의 광역 마법을 볼 때마다 내뱉었던 말이었다.
마법사들의 마법은 화려하고, 웅 장하며, 강력하다. 그들 수십이 모 여 발현하는 광역마법은 순식간에 군단 규모의 적을 와해시킬 정도로 몹시 패도적이었다.
"마법이 라."
역시 탐이 난다.
전장을 지배하는 강대한 힘. 게임 속에서도 마법사는 위대한 힘을 지닌 이들이었고, 그것은 게임이 현실이 된 지금 또한 마찬가지다.
계속해 침공로를 주시했다.
침공로에는 계속해 폭렬구가 틀어박히고, 폭발이 일었다. 불길이 번져나가 침공로 전체가 불바다로 화해있다. 이글거리는 불길, 뭉게뭉 게 피어오르는 연기.
저기, 저 불타오르고 있는 침공 로에서는 몇이나 되는 생명이 바스 러 졌을까.
적어도 수십 수백 단위는 아닐 것이다.
나는 그 모습을 잠시 구경한 뒤.
재차 발걸음을 옮겨 마법사들을 향 해 다가갔다.
- 다음 폭렬폭풍 마법을 준비하라. 이번에도 50중첩… 잠깐, 누가 왔군.
내 접근을 확인한 것일까. 선두 의 마법사가 천천히 시선을 돌려 이쪽을 바라본다.
척. 나는 주먹을 심장에 가져다 대며 경례했다.
"4번 백인대 지휘관 한지훈입니다. 마법사님을 뵙습니다."
"그래, 네놈이…."
마법사가 이쪽으로 다가온다. 나는 긴장한 눈으로 그를 주시했다.
마법사. 일반인을 아득히 뛰어넘 는, 강대한 이능을 지닌 이들. 그들은 하나하나가 고명한 학자이자, 뛰어난 기술자였으며, 전장의 지배자였다.
그리고 그런 마법사들 중에서도 한층 더욱 드높은 존재가 내 앞에 자리해있다.
그가 로브의 후드를 벗으며 입을 열었다.
"라브리에 전투마법단 단장 제피르다. 네 녀석이 한지훈이로군."
드러난 것은 마법사로선 흔치않게 중년인의 외양을 한 얼굴이었다.
그와 시선을 마주치자. 내 시야 한켠에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제피르][라브리에 전투마법단 단장]
제국의 불꽃이라는 이명을 가지 고 있는 전투마법사. 다수의 전장을 전전하며 기나긴 정복 전쟁 동안 무수히 많은 수의 전공을 세운, 제국의 전쟁영웅.
라브리에 전투마법단의 단장 제피르.
그가 내 앞에 등장했다.
30화.
과거 내가 게임을 할 적. 나는 인재 욕심, 정확히는 유닛 욕심이 많았다.
블랙 오케스트라에는 다양한 계 급과 직종을 가진 유닛이 많았다. 단순한 전투병부터, 지휘관을 보좌 하는 참모, 돌격해 적진을 유린하는 기사, 강대한 화력으로 적을 쓸어버 리는 마법사까지.
나는 그들 중 두각을 드러내는 이들을 아군으로 영입하는데 주저 가 없었다. 높은 잠재력을 가진 이 를 휘하에 둔다면, 보다 수월하게 승리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영입하려 했던 이들 중 하나가 바로 눈앞의 마법사, 제피르였다.
나는 제피르를 영입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었다. 그리고 게임의 후반기, 마침내 녀석과 독대할 수 있었다.
[제피르][연합군 마법군단장]
["네놈 아래로 들어가라고? 거절 하지. 한지훈."]
하지만 그는 내 영입제안을 거절 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나는 흑마법사를 거느리고 있었고, 제피르는 그대칭점이라 할 수 있는 백마법사였으니 .
흑마법사와 백마법사는 서로 적 대관계. 결코 함께하지 않는다. 거절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터.
허나 그가 거절한 진짜 이유는 내 예상과 달랐으니 .
[제피르][연합군 마법군단장]
["나는 전쟁이 좋다."]
그는 전쟁광이었다.
[제피르][연합군 마법군단장]
["한지훈. 네놈은 확실히 강하다."]
["네 군대는 제국을 집어삼켰고, 연방을 몰락시켰으며, 유목연합과 상인연합 또한 갈기갈기 찢어발겼지."]
["만약 내가 연합군을 이탈해 네 놈에게 합류한다면. 연합은 순식간에 무너져내리고 종전이 찾아올 터."]
그의 말대로, 당시 내 세력은 강 대했다. 강력한 군대를 운용해 여러 적대 세력을 파괴했고, 광활한 영토 를 차지했으며, 대륙의 절반을 정복했다.
그런 상황에서 연합군의 중추세력중 하나인 제피르의 마법군단이 이쪽에 합류한다면. 내 군대는 순식간에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었다.
허나.
[제피르][연합군 마법군단장]
["그래서는 재미없지 않나."]
그는 전쟁을 일찍 끝낼 생각이 없었다.
[제피르][연합군 마법군단장]
["나는 더욱 오래전쟁을 즐기고 싶다."]
["오직 전쟁만이 내가 살아가는 의미. 나는 여태껐 강한 적에 맞서 싸우기를 고대해왔다."]
["그리고 한지훈. 네 녀석이 바로 내가 그동안 바라마지않던 적이다."]
["제국 황위 찬탈자, 잔혹한 전장 의학살마, 위대한 대륙의 정복 자!"]
["나는 네 녀석과 싸울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만족스럽다."]
미친놈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그는 진정 전쟁광이었다. 전쟁의 승패와 상관없이, 적을 죽이고 파괴하는것에 희열을 느끼는.
놈은 나를 대적하는 것에 만족하는 듯했다.
[제피르][연합군 마법군단장]
["자, 한지훈. 전쟁을 계속하자. 여태처럼 나를 즐겁게 해다오. "]
["내 생명이 다할 때까지!"]
결국 나는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제피르를 포섭하지 못했었다. 그가 죽기 직전까지 전장에서 싸우는 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나는 상념을 끝내고, 고개를 들어 을려 앞을 바라봤다. 그러자 보 인다.
제피르.
내가 마지막까지 손에 넣지 못했 던, 강력한 마법사.
그런 그가 지금 내 앞에 있다.
"네 녀석. 부상이 심각하군."
잠시 내 몸을 훑어보던 제피르가 입을 열었다.
"그런 부상을 입고서도 멀쩡히 움직이고 있는 것이냐. 꽤 터프한 녀석이군."
그는 한 손으로 품속을 더듬더니 무언가를 꺼내보였다.
작은 유리병 속 찰랑이는 붉은색 액체.
포션이었다.
"자, 받아라."
그는 포션을 가볍게 내 쪽으로 던졌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는, 다시금 제피르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의 말이 이어진다.
"우리가 올 때까지 시간을 버는데 네 공이 컸다고 들었다. 공을 세운 사관을 홀대할 수는 없는 법. 그 포션으로 치유하라."
미리 병사들에게 거점의 상황을 들은 듯. 그는 내가 한 일을 알고 있었다. 덕분에 포션을 얻었다.
나는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 이고는, 포션을 들이켰다.
은은한 기운이 신체 속에 퍼져나 가며 자잘한 부상을 치료해간다. 상처가 아물며 흘러나오는 피가 줄어 들어갔다.
제피르는 품속에서 궐련을 꺼내 물더니 말을 이었다.
"백인장. 치료하면서 대답해라."
화르륵.
그가 손가락 끝에서 작은 불꽃을 일으켜 궐련에 불을 붙였다.
"혼자서 증강백인대 규모의 적병을 유인했다고 들었다. 틀림없는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클클거리며 웃었다. 마치 재밌는 걸 찾았다는 듯, 유쾌 한 반응이었다.
"혼자서 적병 백여 명을 유인하 다니. 나만큼 정신이 나간 미친놈이 로군. 마나도 못 다루는, 일개 보병에 불과한 네 녀석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나?"
"거점을 지키기 위해선 방법이 이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성공해 살아 돌아왔고 말입니다."
"그래. 성공했지. 그래서 신기한 거다. 고작 병사 하나가, 수만 규모 회전의 승패를 좌우했다니 말이다."
아니. 백인장이니 병사가 아니라 사관이군. 그는 그리 중얼거리며 담배연기를 내뱉었다.
후욱, 회색 연기가 뿜어진다.
"만약 네가 저 덜떨어진 공국 병사들을 유인하지 않았다면, 우리 마법전력은 전장에 뒤늦게 도착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아군의 피해가 극대화 되었겠지."
제피르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더 니, 말해왔다.
"잘 싸웠다. 한지훈 백인장."
나는 빈 포션병을 갈무리한 뒤. 다시금 고개를 들어 올려 제피르를 바라봤다.
그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 고 있었다.
"나는 네가 한 일에 매우 감명받 았다."
"감사합니다. 단장 각하."
"추후 네 공훈은 내가 직접 상부에 보고하지. 못해도 훈장쪼가리 하나쯤은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리 말하고는 뒤돌아 걸어 갔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훈장이라."
말은 훈장 '쪼가리' 였지만, 아마 생각보다 꽤 괜찮은 훈장을 받을 수 있으리라. 그만큼 내가 해낸 일 은 꽤 컸으니까.
나름의 보상을 기대해도 좋겠지.
"들어가서 쉬어라, 백인장. 정확 한 보고는 나중에 듣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백인장 막사로 돌아갔다.
들어가는 와중 생각한다.
'제피르를 동료로 영입해야 한다.'
과거 게임 속에서는 그러지 못 했었다. 당시에는 녀석이 원하는 것 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에.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거다.
'녀석이 만족할 만한 전장을 만들어준다면.'
그렇다면, 제피르는 내 아군으로 영입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 당장 녀석을 내 동료 로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고작 일개 백연장에 불과하기에.
하지만 추후 천인장, 군단장, 그리고 북부군 사령관에 이르러, 제국을 적대할 때. 그때라면.
놈을 동료로 영입할 수 있으리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백인장 막 사 안으로 향했다.
한지훈이 막사로 돌아간 뒤. 제피르는 자리에 남아서 계속해 마법사들을 지휘했다.
그가 지팡이를 휘저을 때마다 허공에 거대한 마법진이 떠오르고, 지팡이를 내려 그을 때마다 수많은 붉은색 궤적이 우수수 떨어져 내려 공국군을 유린했다.
그는 멍하니 앞을 바라봤다.
저 멀리, 공국군의 침공로. 그 광 활한 면적은 이미 불바다로 화해 있다.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길. 뭉게 뭉게 피어오르는 연기. 침공로 전체 가 넘실거리는 불길에 삼켜져 화려하게 타오르고 있다.
꽤나 장엄하고도 압도적인 광경.
허나 제피르는 그런 광경을 주시 하면서도,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했다.
"한지훈이라."
막 마법 하나를 발현한 그가 마나 포션의 코르크 마개를 따며 그리 중얼거렸다.
그가 생각하는 것은 한지훈. 다름 아닌 이거점을 사수한 백인대 의지휘관인 이였다.
"꼴이 말이 아니었었지."
제피르는 한지훈의 모습을 떠올렸다.
검은색 머리에는 반쯤 마른 피가 질척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온몸에 아로새겨진 자상에서는 피가 흘러 나오고 있었으며, 근육을 혹사시켰 던 것인지 손끝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처참한 모습. 그 누가 보더라도 절로 딱하게 여겨질 법한 안쓰러운 모습이다.
허나 청년은 그저 처참하기만 한 모습은 아니었다.
'녀석은 눈빛이 살아있었다.'
한지훈의 눈동자는 또렷했었다.
분명 온종일 격렬한 전투를 겪었고, 전신에 걸쳐 심각한 부상을 입었음에도.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총 기를 진하게 머금고 있었다.
마치 계속해 싸울 수 있다는 듯이.
씨익. 제피르의 입가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쓸 만한 놈이야.'
그는 오랜 시간 전장에서 살아온 전투마법사. 여러 전쟁을 겪어온 그는 여러 영웅들을 보아왔었다.
강렬한 카리스마를 지녔던 장군, 압도적인 무력을 지녔던 기사, 강대 한 마나의 힘을 자유자재로 운용하 던전투마법사, 그들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승리를 달성했고 아군에게는 존경을, 적에게는 절망을 이끌어 냈다.
그리고 그가 보아왔던 영웅들은 하나같이 그런 눈을 하고 있었다.
격렬한 전투로 인한 짙은 피로에 도, 치명적인 부상에도. 빛바램 없이 또렷하고 총기 어린 눈.
한지훈이 보였던 눈이다.
"나중에는 꽤 볼만하겠어."
제피르는 직감했다.
한지훈이 더욱 성장할 것이라고.
그래서 언젠가는 자신이 보아왔 던 영웅들처럼, 드높은 존재가 되리라고 말이다.
"고작 일개 병사가 영웅의 눈을 가지고 있다니. 정말 재밌는 일이 야."
제피르는 웃으며 지팡이를 휘저었다. 다시금 거대한 마법진이 하늘 높이 떠오른다.
그는 날이 밝을 때까지 마법사들을 지휘해 공국 침공군을 타격했다.
굉음과 섬광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 * *
넓고 화려한 공국 왕궁의 알현실. 그곳의 옥좌 위에 한 노인이 앉아있었다.
헤임스 요한바르첸. 제국 침공을 시도했던 공국의 공왕이자 한스 요 한바르첸의 아비 되는 이.
그는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로 눈앞의 전령을 바라봤다.
"다시 말해봐라, 병사. 군단이 어떻게 되었다 했지?"
"말하라 하지 않았나."
전령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더욱 깊이 박고는, 외쳤다.
"대패입니다, 공작 각하! 제 1군단은 진격 도중 적 마법사와 조우, 광역 마법공격에 당해 와해되었습니다!"
헤임스 요한바르첸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2만. 무려 2만의 병력이 한순간에 와해되어 무너져 내렸다. 너무나 커다란 패배였다.
허나 지금 그의 심상을 채운 것은 침통함이 아닌, 의문이었다.
'어째서 패배한 것인가. 분명 나는 신의 명을 이행했을 터인데.'
제국 침공을 준비할 당시 그의 머릿속에 들려왔던 음성. 그것은 분명 위대한 존재의 목소리였다.
너무나 장엄하고도 고귀한 음성 이었다. 그렇기에 헤임스는 승리를 확신했다. 위대한 존재의 명령을 충 실히 따른다면 반드시 이길 것이라 믿었기에.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의 군단은 무력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는 잠시 생각하고는, 확신했다.
"시련인가."
시련. 헤임스는 이번의 패배가 시련이라고 생각했다.
일개 인간에 불과한 그가 신의 목소리를 의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지 확인해보는 시련. 그에 헤임 스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아무리 광역 마법에 의해 타격 되었다 한들, 아군의 병력이 2만이었다. 생존자가 적어도 몇 천 이상 은 남아있겠지."
"그렇습니다. 생존한 병력들은 모두 포트 갈레이로 후퇴하는 중입니다."
"좋아. 갈레이 요새까지 후퇴한 뒤, 방어태세를 다져라. 놈들은 우리 군을 격퇴한 것에 만족하지 못 하고 공격해올 것이다."
제국은 몹시 호전적이다. 비록 공국의 침공군을 손쉽게 격퇴했다 한들. 놈들은 여기서 전쟁을 끝낼 생각이 없을 터다.
그들은 분명 진격해오리라. 그래서 공국의 영토를 유린하고, 공작을 비롯한 귀족들을 처형해 공국 그 자체를 집어삼키리라.
막아야 한다.
헤임스가 명령했다.
"포트 갈레이에 제 2, 3군단과 기사단을 급파한다. 침공로의 잔존 병력을 추슬러 후퇴, 요새에서 놈들을 틀어막아라."
"알겠습니다, 공작 각하!"
"어서 움직여!"
전령은 급하게 알현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헤임스 공작은 턱을 괴고는 중얼거렸다.
"마법전력이라. 분명 한스가 임무에 실패한 것이겠지. 모자란 놈."
헤임스는 한스에게 친위대인 바 첼부대의 병력까지 주어가며 중요 거점의 탈환을 명했었다. 그곳으로 마법사들이 도착할 것이었기에.
하지만 한스는 실패했다. 그리하여 제국의 마법사들은 제시간 안에 거점에 도달했고, 침공군에게 광역 마법을 난사. 그들을 완전히 와 해시켜버렸다.
쯧. 그는 혀를 차며 읊조렸다.
"역시 놈은 후계자의 그릇이 아니었다. 다음 후계자를 정해야겠 군."
헤임스는 결정했다. 한스가 살아 돌아온다 한들 그에게 공국을 넘기 지 않으리라고 말이다.
그는 눈을 감고 앞으로의 일을 고뇌했다.
31화.
우리 4번 백인대는 거점방어 임무를 완수했고, 마법사들은 공국 침공군을 성공적으로 퇴각시켰다. 덕분에 이후 며칠 동안은 평화로웠다.
모처럼 얻은 짤막한 여유.
그에 나는 평소의 훈련을 재개했다.
- 파앙!
번뜩이는 검광. 터져 나오는 파 공성. 깔끔한 검로가 그어지며 검날 이 공기를 갈랐다.
땀방울을 흘리며 계속해 검격을 내질렀다.
수직 베기, 수평 베기, 사선 베 기, 찌르기. 기억 속에 있는 여러 검술 동작을 수행했다.
그러자 체감할 수 있었다.
'확실히. 성장했다.'
나는 강해졌다. 가진 능력치는 초창기의 그것을 아득히 넘어섰으 며, 이제는 평범한 병사들은 결코 나를 해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하지만 나는.
"모자라."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검을 내렸다.
능력치를 확인해 보았다.
[근력 14]
[민첩 53]
[내구 15]
[체력 29]
[마나 0]
(남은 포인트는 25pt 입니다.)
나름대로 대단한 능력치였다. 그야말로 일반 병사들 따위 얼마든지 처치할 수 있는 능력치.
하지만 나는 내 능력치에 만족할 수 없었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마법사."
시선을 돌려 북쪽 방향, 침공로 가 펼쳐져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그러자 보였다.
저 멀리, 불에 타 완전히 잿더미 로 변한 침공로.
벌써 며칠이 지난 상태이기에 불 길은 완전히 사라져 있지만, 아직도 매캐한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 고 있다.
얼마 전 마법사들의 힘을 보았다.
고작 오십에 불과한 인간들이 펼 친 이능의 힘.
마법. 그들은 광역공격마법을 사용해 적 군단을 타격했고, 2만의 군대를 말 그대로 와해시켜버렸다.
그 강력한 무위에 비해 일개 병사인 내 무력은 아무것도 아니었으니 .
나직이 중얼거렸다.
"정말 괴물들이구만."
나는 강하다. 하지만 그건 어디 까지나 '평범한' 병사 중에선 강하다는 이야기다.
마나 유저들을 대상으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법을 발현하는 마법사. 오러를 끌어올리는 기사. 그들은 마나를 다 뤄 이능을 발현하거나 자신의 신체 를 강화시킨다.
그리고 마나를 다룰 수 없는 나는 그들에게 결코 대적할 수 없다.
다시금 능력치를, 그중에서도 마나 능력치를 확인했다.
[마나 0]
당연하겠지만, 나에겐 마나 따윈 쥐뿔도 없다.
여태껏 포인트를 투자한 적 없기 에.
"이제 슬슬 마나를 올려야 할 텐 데."
다른 능력치는 전투에 충분할 정도로 키워 올렸다. 이제 일반병 따 위에게는 절대 지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기사 혹은 마법사를 적으로서 마주하게 된다면.
나는 무력하게 죽어버릴 것이다.
마나 유저를 대적할 수 있는 건 오직 같은 마나 유저들뿐이다. 그 말인 즉, 이제부터는 나 또한 마나 유저가 되기 위해 기반을 닦아야 한다는 소리.
물론 방법은 있다.
"제국 중급 검술 상향."
제국 중급 검술은 마나 유저인 기사들이 수련하는 검술이다. 그 말 인 즉, 마나와 포인트를 모아 중급 검술을 개화한다면, 나 또한 기사들 처럼 강대한 무력을 지닐 수 있다는 소리.
허나 아직은 까마득한 이야기이다.
- 띠링!
['스킬 : 제국 검술(하급)'을 상향 합니다.]
[상향에는 50pt가 필요합니다.]
[상향에는 '능력치 : 마나'가 50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포인트가 모자랍니다.]
[요구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습니다.]
[상향할 수 없습니다.]
"… 쯧."
역시나 포인트가 문제다.
지금 내 마나는 0. 이걸 50까지 키워야 한다. 더해 중급 검술로 상향시키기 위해서는 50pt가 더 필요하다고 한다.
그 말인 즉, 오러 유저가 되기 위해서는 무려 100pt에 달하는 포인트가 필요하다는 소리.
하기야 다름 아닌 기사급 무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많은 포인트가 필요하리라.
"포인트를 모아야 하는데 . 매번 전투 때마다 포인트를 사용해야 버 틸 수 있으니… 도무지 모이지 않는군."
나는 그리 읊조리며 한탄했다.
지독한 딜레마다.
포인트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격렬한 전투에서 버틸 수 없다. 그렇다고 포인트를 사용하며 퀘스트를 진행하자니 도무지 모이지 않는다.
이대로라면 오러를 각성하는 데는 너무나 오랜 시간이 소모될 것 이다.
내가 그리고심하고 있는 그때였다.
"백인장님."
저벅. 누군가 나를 부르며 다가왔다.
시선을 돌려 살펴보니, 4번 전투 조장 라이들렘이었다. 녀석은 척 경 례하더니, 내게 다가오며 고했다.
"파트라헴에서 명령이 하달되었습니다."
"명령이라. 뭐지?"
"이 시간부로 거점에서 캠프를 철수, 파트라헴 전진기지로 복귀하 라 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진격인가."
시나리오 대로 제국은 곧 공국으로 진격할 것이다.
앞으로 공국령을 향해 북진하리라.
"좋아. 캠프 해체해. 바로 파트라 헴으로 이동한다."
나는 병사들을 이끌고 거점지역에서 철수했다.
파트라헴에 도착하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이게 파트라헴입니까?"
"… 규모가 상당히 커졌습니다만."
파트라헴 전진기지의 모습은 우리가 알던 그 모습이 아니었다.
증축에 증축을 거듭해 파트라헴 의 크기는 몹시 방대해져 있었다. 기지를 통과하듯 기다란 도로가 나 있었으며, 성벽과 시설 또한 완전히 건설되어 있었다.
군사기지라기보다는 하나의 도시 처럼 변한 모습.
하지만 내가 눈여겨보는 것은 파 트라헴의 커다래진 모습이 아닌, 그곳의 안에 있는 병력의 수였다.
"북진 준비를 모두 마쳤나본데."
파트라헴 전진기지 안에는 수많 은 병력이 있었다.
아무리 봐도 군단 규모에 달하는 무지막지한 수의 병사들. 나는 건물 위에 올라와있는 깃발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북부 제 3군단, 그리고 볼로냐 전투기사단인가."
파트라헴 기지 곳곳에 꽂혀있는 깃발들이 눈에 익었다.
북부 제 3군단과 볼로냐 전투기 사단의 군기들. 분명 이번에 공국으로 쳐들어갈 병력이리라.
카일이 허탈한 듯 웃었다.
"정말 사람이 바글바글 하군요. 저들과 함께 공국으로 쳐들어가는 겁니까?"
"든든하군요. 군단 규모의 아군이 라…."
군단 규모의 인원에 내심 질린 듯한 병사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저게 끝이 아닐 거다."
"끝이 아니라니요. 그게 무슨 뜻 이십니까?"
"저기, 3군단과 볼로냐 기사단은 선봉에 불과하다. 우리가 공국군 영토까지 제대로 파고든다면 더 많은 병력이 파병되겠지."
제국의 목적은 무력시위가 아닌, 공국의 멸망과 합병이다. 황제는 더 많은 병력을 추가로 증원해 공국을 완전히 집어 삼키리라.
"자, 그럼 너희들은 막사로 가 쉬어라. 나는 천인장님께 보고하겠다."
"명령을 받듭니다."
척. 카일과 병사들이 경례하고는 막사 방향으로 갔다.
나는 발걸음을 옮겨 천인대 지휘 소로 향했다.
"오랜만이군, 한지훈 백인장. 한 일주일 만인가?"
천인대 지휘소로 가자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천인장 그레드. 그가 씩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이번에 꽤 대단한 전공을 세웠 다고 들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나는 담담히 그레드의 말에 대답했다. 그에 그의 입가에 아로새겨진 미소가 더욱 진해진다.
그는 잠시 내 얼굴을 주시하더 니, 테이블 위 놓여있던 서류를 집 어 들었다.
그레드의 말이 이어진다.
"혼자서 백인대 규모의 적을 지연시켰다고 하지. 용케도 살았어."
"운이 따라줬습니다."
"운도 실력이지. 자, 여기 앉아 라. 자네에게는 해야 할 말도, 건네 줄 것도 있으니 ."
그레드가 자신의 바로 앞에 있는 목제 의자를 가리켰다. 나는 허리에 매달린 검집을 풀고 의자에 앉았다.
그가 서류를 들여다보며 말한다.
"한지훈. 상부에서 전해 듣기로는 라브리에 전투마법단장 제피르 각하께서 자네에게 훈장 수여를 추천 했다는군."
나는 가만히 고개를 주억였다.
제피르가 내 전공을 상부에 보고, 훈장 수여를 추천했다는 것.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기에.
그는 서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서류에는 내 이름이 박혀있다. 이번에 내가 세운 공훈의 보고서였다.
"사실, 원래대로였다면 자네는 혼 장을 받지 못한다."
?어째서입니까?"
나는 표정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이번에 내가 세운 공훈은 결코 미약하지 않았다. 중요 거점을 끝까지 지켜냈을 뿐만 아니라, 혼자서 적 백인대 병력을 지연시켰다. 만약 내가 목숨 걸고 거점을 사수하지 않았다면 제국군은 승리하더라도 큰 피해를 입었으리라.
헌데 그런 공훈을 세웠음에도 훈 揚?받지 못한다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에 그레드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자네가 평민이기 때문이지. 나처럼 말이다."
순간 그레드의 말에 침묵했다. 그의 얼굴에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착잡한 표정이 올라왔기에.
슬쩍 시선을 내려 그레드의 제복 가슴팍을 바라봤다. 많은 수의 약장 이 그의 가슴팍에 부착되어 있다.
"중앙의 행정직 군관들은 모두가 귀족이다. 그리고 그 귀족 출신 행 정 군관들이 훈장 수훈을 심사하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나?"
"평민들의 공훈을 무시할 가능성 이 높다는 말이군요."
"그렇다."
그레드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제 복 가슴팍에 달린 약장들을 짚었다.
"나 또한 전장에서 나름대로 많은 공훈을 세웠다. 하지만 그중 인 정된 공훈은 반에 반이 안 되지. 이내가 받은 약장과 훈장들은 그야말로 내가 세운 전공의 일부에 불과하단 거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을 주워듣기로, 과거 제국 정복 전쟁 당시 그레드가 세운 공훈은 대단했었다. 분명 그는 뛰어난 무력과 폭넓은 전략적 능력을 지니 고 있다.
아마 그가 귀족 출신이었다면, 그리하여 세운 공훈을 모두 정당하 게 평가받았다면. 지금쯤 그는 전도 유망한 중앙의 참모로서 복무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중앙은커녕, 변방 전진기지의 천인장으로서 복 무하고 있다.
세운 공훈에 비해 박한 인사조 치.
그가 평민 출신이기에 겪은 일이다.
"…그렇다면, 저 또한 훈장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군요."
내심 한숨 쉬며 그리 말했다.
훈장. 사실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물건이다. 훈장을 수여받았다 한들 내 능력치가 오르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본래 받아야 한다는 것을 받지 못하는 것은 짜증나는 일이다. 그것도 단순히 신분이 낮아서 훈장을 받지 못한다니. 신분제도가 없는 현대에서 살아왔던 입장으로선 다소 억울한 일.
허나 내 예상과는 다르게 그레드 의 입에선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아니. 너는 이번에 한해 확실하 게 훈장을 수여받을 것이다."
"어째서입니까? 방금 전에는 평 민이기에 훈장을 받지 못한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자네를 추천한 사람이 다름 아닌 제피르 단장 각하이기 때문이다. 한지훈."
그레드가 슬쩍 시선을 돌려 테이블 위 서류를, 정확히는 서류의 추천인란을 바라봤다.
분명 추천인란에는 지저분한 글씨체로 '제피르, 라브리에 전투마법 단 단장'이라 써 있었다.
"제피르 단장 각하는 수많은 전쟁을 제국의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 막대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제아 무리 콧대 높은 귀족들이라 한들 그분의 추천을 묵살할 순 없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인 즉, 제피르의 이름값이 있기에 귀족들도 제대로 심사할 것 이란 말이었다.
씨익. 그레드가 웃었다.
"하여튼, 훈장 수훈 축하한다 한지훈. 자, 이제 그이야기는 그만 하고. 자네에게 줄 것이 있다."
미리 준비했던 것일까. 그레드는 자신의 발치에서 어떤 나무상자를 꺼내들었다.
그리 큰 상자는 아니었다. 기껏 해야 현대의 서류가방만 한 작은 상자. 그는 그것을 내밀며 권했다.
"열어봐라."
그에 나는 천천히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고급스런 천에 싸인 작은 단검 하나가 들어있었다.
그것을 쥐어 보았다.
"단검이군요."
"그래. 제국군 사관용 단검이다."
단검의 모습을 살폈다.
그리 실용적인 단검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날은 짧았으며, 그립은 쥐기 불편했다. 꽤나 공들여 만든 물건인지 광택과 장식이 남달랐지 만 그저 그뿐. 전투에서 쓸 법한 물건은 아니다.
"백인장. 그 단검의 용도가 무엇 일 것 같나?"
"글쎄요. 전투에는 못써먹을 것 같은데. 사과라도 깎아먹을 때 쓰는 겁니까?"
"자결용이다."
나는 시선을 들어 올려 그레드를 바라봤다.
32화.
나는 시선을 들어 올려 그레드를 바라봤다.
어느새 그의 눈가는 참참히 가라 앉아, 진중한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한지훈. 백인장부터는 사관의 영역이다. 즉, 장교라는 말이지. 그리고 장교는 일반 병사들은 모르는 중요 정보를 지니고 다닌다. 그런 사관이 적에게 사로잡힌다면…."
"아군의 중요 정보가 빠져나가겠 군요."
즉, 적에게 사로잡힐 것 같을 때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표정을 찌푸렸다.
"정보누출을 막기 위해 생포당하 기 전자결하라니. 처음 듣는 소리 입니다. 거짓말 아닙니까?"
나는 평민 출신이지만 대부분, 아니 절대 다수의 제국 사관들은 모두 귀족 출신이다. 아무리 제국이 라 한들 귀족에게 자결을 강요할 것 같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그레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 여겼다.
피식. 그레드가 웃었다.
"들켰군. 그래, 거짓말이다."
그럼 그렇지.
"사실 이 단검은 네 신분을 증명 할 때 쓰는 증표다. 여기 보면 단검에 네 백인장 계급과 이름이 각 인되어 있지."
"표정이 너무 진지하셔서 하마터 면 진담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저 농담인 것은 아니다."
그레드가 보다 진중해진 얼굴로 고한다.
"만약 사로잡힌다면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을 겪게 될 거다."
"고문 말입니까?"
"맞다. 고문. 어찌 보면 잡혀서 고통받다 모든 정보를 토해내고 죽 느니,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지."
고문이라.
상상하기 싫다.
"자네도 알다시피, 주변국들은 제국을 증오하니 말이다. 그 망할 놈 의 정복 전쟁 덕분이지. 사로잡히면 절대 좋은 꼴은 못 볼 거다."
"…새겨두겠습니다."
나는 단검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하긴, 제국과 국경을 접한 국가 들은 모두 제국을 증오했다. 그들 대다수가 영토를 빼앗겨왔기 때문. 정복 전쟁으로 제국은 영토를 확장 할 수 있었지만, 그만큼 적대적인 국가를 많이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그런 제국군 장교가 생포 당한다면, 아마도 그 처우는 꽤나 혹독할 터.
"물론 사로잡히지 않는 게 제일 최선이겠지. 그렇지 않나?"
"맞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결심했다.
'포로로 잡히는 것만은 절대 피해야해.'
나 또한 게임 속에서 포로수용소 를 본 적이 있다. 덕분에 적국이 포로를 어찌 다루는지는 대략적으로나마 알고 있다.
아마 그레드 또한 포로수용소를 본 적이 있을 터였다. 그렇지 않다 면 저런 말을 하지 않았을 터이니.
"그럼, 당당한 제국의 정식 사관 이 된 걸 축하한다. 한지훈. 여기다음 임무다."
덜컹. 그레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며 어떤 서류를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었다.
다음 작전의 지령서였다.
"바로 내일 아침, 아군주력이 공국군 영토로 진격할 것이다. 그리고 자네의 4번 백인대는 선도 정찰대 임무를 맡게 되었다."
나는 표정을 구겼다.
선도 정찰대라니.
"어째서 하필 저희 부대가 선도 정찰대 입니까?"
"자네가 침공로 지리를 잘 알지 않나? 십인장 시절부터 계속 들락날락 했으니 말이다. 유능한 길잡이 를 안 써먹을 순 없지."
반박할 수가 없다.
"그럼, 내일 진격에 대비해 잘 쉬어두게. 개인 정비도 제대로 해놓 고 말이야."
그레드는 그 말은 남기고는 집무실 밖으로 향했다.
혼자 남은 집무실 안, 나는 나직 이 읊조렸다.
"위험한데."
나는 이번 진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다. 때문에 안전한 대열의 중간이 되길 바라마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내 바램 은 빗나가 버리고 말았다.
"하필이면 선도 정찰대라니."
선도 정찰대. 군단보다 한 발자국 앞서 진로를 개척하고 아군을 선도하는 가장 앞선 자리.
다른 이들에겐 가장 먼저 적 영토를 밟는 영예로운 자리였지만, 나 에게는 위험천만한 자리에 불과했다.
쯧 혀를 찼다.
"망할. 이번에도 힘들겠어."
나는 다음 임무를 준비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 띠링!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서브 퀘스트가 부여되었습니다.]
[서브 퀘스트]
[포트 갈레이까지 아군을 선도하라.]
이제 움직일 때다.
"좋아. 모두 주목."
그날 저녁. 나는 각 조의 십인장 들을 백인장 막사로 불러 모았다. 작전 브리핑을 하기 위함이었다.
천천히, 내 주위에 도열해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1번 척후조장 카일, 2번 척후조 장 에시, 3번 전투조장 브리든, 4번 전투조장 라이들렘… 열 명의 십인 장들이 또렷한 눈으로 나를 주시한다.
녀석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 에는 평소와 다른 감정이 일렁이고 있었다.
다름 아닌 존경과 경외.
저들은 나를 깊이 존경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하긴. 이번에 좀 활약하긴 했지.'
내가 거점지역에서 세운 전공은 꽤 대단한 것이었다. 혼자서 목숨 걸고 적 백인대 병력을 유인했고 멀쩡히 살아 돌아왔으니 .
말 그대로 훈장을 받을 정도로 대단한 일이었다. 저들에게 존경스 러운 상관으로 보여지는 것은 당연 한 일. 그에 자연스럽게 병사들의 눈동자에는 존경의 감정이 서려있다.
나쁜 일은 아니다. 저들이 나를 존경하는 만큼, 내 입지가 확고해 질 터이니.
나는 그들을 잠시 둘러보고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드디어 진군이다. 이제 우리 제국군은, 공국 영토로 진격한다."
병사들이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손에 들린 지휘봉으로 벽에 걸려있는 지도를 짚었다. 다름 아닌 침공로였다.
"어제의 마법 공격으로 공국 침공군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더해 놈들의 후속대 또한 보이지 않는 상황. 공국 놈들의 침공 의지는 완전히 꺾였다."
확실히 마법사들의 화력은 대단했다. 고작 백이 안 되는 전투마법사들이 발현한 합동마법은 만 단위 의 군세를 유린했고, 통제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덕분에 침공로가 깔끔하게 정리 된 상황.
"우리 북부 3군단은 침공로를 따 라 이동, 공국령에 발을 들여놓을 거다."
공국 침공. 드디어 본격적인 전쟁의 시작이다. 그것도 방어가 아닌, 공격측으로.
"그리고, 그 영광스러운 침공군의 가장 선두자리, 군단 선도 정찰대에…"
ご?말을 끊고는 한숨을 푹 내 쉬었다.
"우리가 서게 되었다. 군단의 앞에서 아군 후열을 선도하는 거다. 정말 기쁘지 않나?"
"선두라니요!"
"오… 맙소사."
"며칠 전까지만 해도 거점에서 죽어라 싸웠는데 선도 정찰대 배치 라니요. 너무합니다."
십인장들의 반응은 격렬했다. 하긴, 군단 대열의 제일 앞 선도 정 찰이라니. 가장 위험한 자리다.
선도부대를 비유하자면 고기방패다. 아군 본대보다 훨신 앞에서 병력을 선도하며 위험요소를 탐색한다.
본대와 떨어져 한발 앞서 진군하 니 매복과 적의 습격에 취약. 전투 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꺼려지는 건 당연한 일.
"어쩔 수 없다. 우리가 침공로를 매일 밥 먹듯이 돌아다닌 덕분에 길잡이 역할을 맡게 되었다. 빌어 처 먹을."
나도 가급적 선봉을 서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미 명령은 하달되었고, 군인인 이상 명령은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
카일이 물었다.
"백인장님. 그래도 군단 규모의 진군입니다. 저희들만 선도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 그나마 다행히도 우리만 앞서진 않는다."
지휘봉으로 지도를 짚으며 설명을 이었다.
"파트라헴 예하 1번, 2번, 3번, 그리고 우리 4번 백인대. 이렇게 4개 백인대가 군단을 선도한다."
"4개 백인대라… 다른 지원은 없습니까?"
"군단 기병대 측에서 전령 역할 기병을 몇 붙여주기로했다. 물론 전력으로 사용할 수는 없다. 오직 연락용으로만 쓰일 것이니."
기병 몇 기를 받았지만, 전령 역할이다. 기껏해야 몇 기에 불과한 수. 아마 제대로 된 전력으로는 기대할 수 없으리라.
"아침 동틀 무렵부터 바로 출발 이다. 그럼 모두 푹 쉬어라. 내일 부터는 계속 행군할 테니까."
나는 그리 말하고는 브리핑을 끝 냈다.
곧 제국군이 공국령으로 진격을 시작한다.
요한바르첸 공국 왕궁의 알현실. 그 화려하고도 넓은 공간에는 단 한 명의 인영밖에 보이지 않았다.
공왕 해임스 요한바르첸. 그는 알현실에 옥좌에 앉아 수정구에 대 고 대화하고 있었다.
- 면목 없습니다. 공작 각하.
수정구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퍽 중후했다. 하지만 중후함 이상으로, 죄책감과 슬픔이 스며있는 목소리기도했다.
제국을 침공해간 공국측 선발대. 침공군 제 1군단 사령관, 페라다 루고 후작.
그는 공작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 대패입니다. 2만의 병사 중 1만 5천을 잃었습니다.
공국 제 1군단은 커다란 손실을 입었다. 그들은 2만을 상회하는 군 세 중 과반이 넘는 병력을 잃었다.
명백한 대패. 허나 공작은 차마 후작을 나무랄 수 없었다.
"라브리에 전투마법단이라니. 상대가 너무 안 좋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 너무 자책하지 말게."
공작 또한 가망 없는 싸움이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
그는 턱을 괴고 생각했다.
'만약 라브리에 전투단이 나설 것임을 알았다면. 카렌 왕국에서 더 많은 마법사를 지원받았어야했다.'
라브리에 전투단 상태로 고작 백 명의 마법사는 너무 부족한 전력이었다. 그들은 괴물, 정복 전쟁 시기 수많은 국가를 파괴한 전장의 지배자들이다.
아무리 카렌 왕국의 마법전력이 우수하다 한들, 라브리에 전투단의 상대로는 부족한 감이 있었다.
공작이 페라다 후작에게 물었다.
"포트 갈레이까지 후퇴했다 들었다. 현상황을 보고하도록."
- 병력을 정비해 방어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포트 갈레이 수비군을 합쳐 병사 육천, 기병 천, 기사는 약 이백이 남아있습니다.
"마법전력은?"
- …마법전력은 전무합니다. 저희에겐 마법사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공국 침공군의 마법전력은 전멸 해버렸다. 주력을 살리기 위해 방어 마법을 한계까지 운용하며 마지막 까지 버텼기 때문이다.
그들 마법사들의 분투가 없었더 라면. 나머지 병력조차 살아남지 못 했을 것이리라.
"확실히 놈들의 공세를 막기엔 턱없이 부족하군. 특히 마법전력이 없는 것이 큰 문제야."
- 그렇습니다. 공작 각하, 증원이 필요합니다.
후작의 증원 요청. 그에 공작은 고개를 주억이며 말했다.
"이미 제 2군단과 3군단을 보냈다. 마법사 또한 카렌 왕국과 협상 해 더 증원해보지. 마법사들은 초장 거리 도약 마법으로 금방 도착할 것이다."
- 감사합니다, 공작 각하.
"포트 갈레이를 사수하라. 포트 갈레이는 제국과의 전쟁에 대비해 만든 견고한 요새. 그곳이 무너진다 면 뒤로는 평야지대뿐이다. 반드시 지켜야 할 곳이니."
- 명심하겠습니다.
수정구 속 후작의 모습이 사라지고, 은은하게 일렁이던 마나광이 가 라앉았다.
수정구 통신을 종료한 후. 공작 이 나직이 읊조렸다.
"제국이라."
사실, 후작은 제국의 국력을 다소 과소평가한 감이 있었다.
공국은 작은 약소국이다. 그렇기에 병사들의 무장과 훈련 정도 또한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군단 단위의 군대를, 고작 단 한번의 회전으로 쓸어버릴 줄은 몰랐다.
그것도 제국은 아주 최소한의 피해만 입으며 말이다.
"과연 대단한 놈들이군. 정복 전쟁 당시 제국 놈들의 위명은 헛것 이 아니었다."
공국 제 1군단의 파멸. 비록 몇 천의 병력이 살아남아 포트 갈레이 로 후퇴했다 하나 그럼에도 커다란 손실이었다.
1만 5천의 병사, 1천의 기병, 3백의 기사. 단 한번의 전투로 잃은 병력이었다.
너무나 치명적인 손실.
허나 그럼에도 공작의 얼굴에는, 아직도 여유가 남아있었다.
"이제 슬슬 동맹이 움직일 때가 되었는데 . 아직인가…."
사실, 공국이 움직인 것은 전혀 무모한 일이 아니었다.
제국의 적은 오직 공국뿐만이 아니었다. 곧 공작과 비밀동맹을 맺은 다른 국가들 또한, 하나둘 제국에 선전포고 하리라.
"제국 본토를 유린할 날이 기대 되는군."
공국이 제국을 침공한 것. 그것 은 단순히 제국의 이목을 집중시키 려는 수작에 불과했다.
아직 제국은 모르고 있다. 그들을 노리는 국가는 요한바르첸 공국 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헤임스 공작이 질척한 웃음을 지었다.
33화.
다음날 아침. 제국 북부 제 3군단이 진군을 시작했다.
수많은 깃발이 올라가고, 대량의 사람들이 움직였다. 진형의 좌우로 기사단과 기병대가 엄호하며 천천히 북상했다.
무려 2만이 훨씬 넘어가는 대규모 행렬. 그리고 그대행렬의 최선 두에는, 우리 4번 백인대가 있었다.
"하필이면 선도 정찰대라니. 정말 재수가 지지리도 없군요."
"제일 위험한 자리 아닙니까?"
병사들은 긴장을 유지한 채 앞으로 향했다.
그들이 긴장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선도 정찰대. 본대보다 한 발자국 앞서 움직여 주변을 정찰하고, 위협요소를 파악하며, 아군 주력군 의 행군을 선도한다.
고상한 말로 표현했지만 사실은 고기방패에 불과하다. 본대의 안전을 담보하기 위한 제물. 극심한 피해를 상정하고 운용하는 자리이니.
정말 개 같은 포지션이 아닐 수 없다.
"공국 놈들은 바로 며칠 전 마법사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는데, 설마 또 기어 나오겠습니까?"
하지만 이미 적 군단은 마법으로 초토화 시켜놓은 상황. 그렇기에 병사들의 사기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저희 혼자만 앞서가는 것도 아 닙니다. 무려 4개 백인대 규모입니다."
"맞습니다. 그러니 크게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설마 4백 명이나 있는데 큰일이 나겠습니까?"
더해 같이 행군하는 다른 백인대 들까지.
때문에 병사들은 희망찬 미래를 그리기 시작했다. 아무런 위협 없이 선도 역할을 끝낼 수도 있으리라 낙관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한숨을 푹 쉴 수밖에 없었다.
'그 큰일이 일어난다고.'
이번 미션도 게임 속에서 겪어봤기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대략적으로나마 알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표정을 필수가 없었다.
그렇게 잡담을 하며 얼마나 갔을 까. 곧 우리는 볼 수 있었다.
"침공로가… 완전히 불타있습니다."
"아무것도 없군요."
침공로 중간으로 들어갔을 때. 불타서 아무것도 남지 않은 구간이 드러났다.
광활한 영역의 숲속이 완전히 불 타서 잿더미가 되어있었다. 모든 나무와 풀이 타 잿더미로 화해있으며, 매캐한 탄내가 후각을 자극했다. 곳곳에서는 아직도 시커먼 연기가 자 욱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그리고 이곳저곳에 널려있는, 불 타 죽어있는 시체들까지.
"윽…."
처참하고 소름끼치는 광경. 그에 질린 것일까. 병사들이 하나둘 표정을 구겼다.
나 또한 얼굴을 찌푸렸다.
' 역겹다.'
시체 타는 냄새가 역하다. 절로 표정이 구겨진다.
병사들의 안색을 살폈다. 몇몇 비위 좋은 이들은 멀쩡했지만, 대부분의 병사들은 표정이 심히 안 좋았다. 헛구역질을 하는 애들도 있었다.
시선을 내려 발치의 시체를 바라 봤다. 시체들은 하나같이 시꺼멓게 타있었다.
"… 이게 전쟁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공국 병사의 시체였다. 몸은 까 맣게 타올라 있었고, 군복은 완전히 불타 재로 변해 있다.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은 것일까. 시체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망할."
마법사들이 광역공격마법을 갈 겨댔을 땐, 그저 멋있었다. 마치 스 크린 속 전쟁 영화처럼 호쾌하게 보였다.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 잔 해들을 바라보니 .
"기분 더럽네."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
나는 검을 뽑아들었다. 스르릉, 하는 쇳소리가 울린다.
"모두 긴장해라. 공국은 이곳까지 진출했었다. 살아남은 적 잔당이 공격할 수도 있다."
"알겠습니다!"
"무장 확인하고, 주변 경계하면서 움직여."
병사들이 하나둘 무기를 꺼내들었다. 그들이 긴장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
이후 우리들은 계속해 앞으로 행 군했다. 지면을 밟을 때 풀 대신 타다만 나무잔해만 밟혔다. 매캐한 연기가 시야를 가렸다. 역한 고기 타는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그렇게 한참 가는 와중이었다.
"백인장님! 이걸 보십시오!"
병사 하나가 날 불렀다. 나는 그리로 곧장 뛰어갔고, 녀석이 바닥을 가리키며 알려왔다.
"공국군 생존자를 찾았습니다. 어떻게 처리합니까?"
그에 나는 시선을 내려 아래를 살폈다.
반쯤 타다 만 나무 아래, 한 공국 병사가 드러누워 있었다. 그 불 지옥 속에서 어찌 살아남은 것일까. 신음하며 가슴을 미약하게나마 움직이는 게 명백히 생존자였다.
"어떻게 처리합니까? 포로로 생 포해갑니까?"
병사가 물어왔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죽여."
"… 정말입니까?"
"살릴 이유는 없다. 죽여라."
"하지만…."
차마 화상에 고통받고 있는 적병 까지 죽이는 건너무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병사들이 주저했다.
"뭐, 내키지 않다면 죽이지 않아 도 된다. 어차피 곧 알아서 절명할 거니까."
나는 주저 없이 고개를 돌렸다.
"작열통에 고통받다 죽도록 놔둘 지, 아니면 이자리에서 바로 편하 게 해줄지. 마음대로 하도록."
사실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공국 병사는 이미 다 죽어가는 상태. 가만히 놔둬도 자연스럽게 절명 할 것이다.
- 서걱!
배후에서 절삭음이 들려왔다. 병사가 적 생존자를 처형하는 소리였다.
그렇게 우리는 계속해 진군했다.
* * *
우리들은 계속해 북진하며, 살아 남은 적 생존자들을 하나둘 처치해 갔다.
퍼억!
내 검날이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 던 적병의 모가지를 꿰뚫었다. 녀석 은 끄르륵, 하며 피거품을 흘리더 니. 곧 절명해버렸다.
푹 한숨 쉬었다.
"이게 몇 명째냐."
마법사의 광역공격 속에서도 살아남은 공국 병사들이 생각보다 많 았다. 하기야 놈들의 수는 무려 2만에 달했다. 그 모두가 그 자리에서 즉사하지는 않았을 터니. 분명 가까스로 살아남은 적병 또한 많았다.
그렇게 적 생존자들을 처치하며 앞으로 진군할 때였다.
"백인장님. 전쟁이란 정말 잔인한 것 같습니다."
문득 카일이 그리 말해왔다.
녀석을 바라보니, 막 작열통에 몸부림치던 적 병사 한 명의 생명을 끊어놓고 있었다.
파앙! 검을 휘둘러 피를 털어낸 녀석이 이어 말했다.
"칼로 베고, 창으로 꿰뚫고, 불에 태워버리고. 온갖 기상천외한 방법 으로 사람을 죽이려합니다. 정말 끔 찍한 일 아닙니까?"
아무래도 카일은 전쟁이라는 것 에, 그리고 자신이 군인이라는 것에 깊은 회의감을 느낀 듯했다.
보이는 것은 불에 구워진 적병의 시체들. 그리고 불길에 휩쓸려 썰렁 해진 대지뿐이니. 더해 지금 하고 있는 일이라고는 저항조차 못하는 적 부상병을 하나하나 처치하며 그저 앞으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회의감을 느낄 만도 하다.
"뭐 그렇지. 전쟁이란 참 염병할 짓이야."
나는 카일에게 대답하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할 말은 아니긴 한데.'
나는 게임 속에서 그 누구보다도 사람을 효율적으로 죽이려했다.
당시 내 칭호[냉혈]
,[학살]
은 괜히 받은 것이 아니었다. 모니터 속의 나는 위대한 정복자임과 동시, 잔혹한 학살마였다.
물론 게임 속이었지만. 아무튼 그랬다.
"고작 땅덩어리 차지하려고 사람이 사람을 죽입니다. 이게 같은 사람새끼가 할 짓인지 모르겠습니다."
카일이 하늘을 바라보며 그리 중얼거렸다. 나 또한 녀석을 따라 하늘을 바라보니, 뭉게뭉게 피어오른 연기 덕에 잿빛으로 보였다.
문득, 나는 게임 속에서 마주친 NPC들의 대사를 떠올렸다.
[롬스턴 리 아르그만트][2번 천인장]
["… 당신은 악마야. 피도 눈물도 없는 개자식! 한지훈, 나는 네 명령에 따르지 않겠다!"]
도시를 몰살시키란 소리에 반발 하던 천인장.
놈은 결국 내 손에 의해 처형당했다.
[아르테니아 가이나스 비 오르페우스][제국 황제]
["… 한지훈, 너는 괴물이다. 권력에 미쳐버린 괴물!"]
나를 권력에 미친 괴물이라 매도 하던 황제.
녀석 또한 죽어버렸다.
[크라울러 디 아르마][동부 제 2군단 군단장]
[신이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다. 한지훈.]
[에일리 하르만][남부 제 1군단 군단장]
[전쟁광. 어서 나를 죽여라.]
[카르만 실버 프리드리히][중앙군 최고사령관]
[네놈은 지옥 속에서 영겁토록 불타리라!]
제국 점령 후, 내 통치에 반발하 던 고위 장성들.
놈들 또한 모조리 처형해버렸다.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건 정말 게임이었나."
어쩌면, 정말 사람이지 않았을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긴장해야 한다. 이제 곧 적이나 올 것이니. 잡생각을 하느냐 집중을 흐트러트리면 안된다.
그렇게 내가 막 긴장을 끌어올리는 그때였다.
"백인장님."
누군가 나를 불렀다. 시력 좋은 병사 아르덴이었다.
그가 긴장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오더니,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기, 먼지구름이 일어납니다."
고개를 돌려 아르덴이 가리킨 곳을 바라봤다.
저 멀리 먼지구름이 일렁이고 있다.
직감했다.
"기병대인가."
먼지구름을 일으키는 무언가가 이쪽으로 빠르게 달려오고 있다. 아직 멀어서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저건 분명 기병대일 터.
후,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놀람은 없었다. 적이 출현할 것을 미리 알았기에.
하지만 그렇다고 유쾌한 감정은 아니다.
"모두 전투준비!"
나는 큰 목소리로 외쳤다.
곧 전투가 시작된다.
"모두 전투 준비!"
"전투 준비!"
내 목소리에 병력들이 기민하게 반응했다.
확실히 힘든 전투를 여러 번 겪 었기 때문일까. 그들은 빠르게 움직여 순식간에 경계대형을 짰다.
"공국 놈들인가. 다 죽여버린다!"
"쓴맛을 보고도 다시 덤벼오는군."
병사들의 사기 또한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들은 최근에 대승을 거둔 상황. 더해 공국군이 허접쓰레기라는 건 여기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사기가 곤두박질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백인장님! 적은 기병으로 추정 됩니다!"
"잠깐, 기병이라고?!"
"기병이라니!"
아르덴의 이어진 보고에, 병사들 이 크게 당황했다.
녀석의 보고가 이어졌다.
"확인되는 적 기병… 약 백여 기. 일개 기병연대 규모입니다. 속도를 보니 경기병인 것 같습니다 만."
"맙소사."
병사들의 사기가 순식간에 하락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일반 보병이 아닌, 기병. 그것도 무려 백여 기에 달하는 병력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상황이니까.
기병.
말을 타는 병사. 그들은 커다란 덩치와 빠른 속도로 무시무시한 충격력을 가한다. 일개 보병들이 차마 대적할 수 없는 상대가 바로 기병 이었다.
나는 크게 외쳤다.
"닥치고 대기병 방진 짜! 멍하 니 있다가 놈들에게 사냥당한다!"
"대기병 방진!"
병사들이 허겁지겁 방진을 짜기 시작했다. 뭉쳐서 창병이 외곽에, 그 뒤를 검병이 보좌하고, 궁병은 가장 안쪽에 자리한다.
과연 베테랑이라 할까. 그들이 방진을 짜는 건 몹시 빨랐다.
하지만 내 표정은 펴질 줄 몰랐다.
'희생자가 나오겠어.'
급한 대로 방진을 구축하긴 했지 만 저기병들을 제대로 막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기병을 제대로 저지하기 위해서는 기다란 장창-파이크-가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 우리 부대가 가지 고 있는 창은 모두가 일반창이다. 기병을 저지하기엔 리치가 모자라다.
생각은 길지 않았다.
'후열이 도착할 때까지 일단 버텨야 한다.'
곧 선발대의 위협을 감지한 후열에서 기사나 기병을 출격시켜 놈들을 요격할 터. 그때까지 버텨야 한다.
나는 전령에게 지시했다.
"기병! 후열로 가위협을 알려라. 적 병력과 조우. 기병 약 백여 기."
"알겠습니다!"
기병이 크게 외치고는, 말을 박 차 뒤로 달려 나갔다. 나는 시선을 돌려 앞을 주시한다.
쯧 혀를 찼다.
'염병할 선도 정찰대.'
선도 정찰대의 진짜 존재의의가 이것이었다.
적의 매복 병력에 미리 두드려 맞는 것.
대집단인 주력군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한 고기방패. 우리가 정보 를 전하고 적의 공격에 두드려 맞을 동안, 본대에서 대응을 결정할 것이다.
나는 앞을 노려봤다.
"적 기병대! 이쪽으로 달려옵니 다!"
"놈들이 가속합니다!"
단단히 벼르고 있는 건지, 기병 놈들이 우르르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 기세가 무시무시하다.
이를 악물었다.
34화.
"처음부터 제압해버릴 심산인가."
기병의 최대무기는 바로 충격력. 놈들은 저 충격력을 살리기 위해 저 멀리서부터 가속해 달려오고 있다. 놈들이 이곳에 도착할 때쯤이면 최대속도에 달해있을 터.
구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가급적 오래 버텨야 한다.
"망할! 우린 죽었어!"
"어머니!"
몇몇 병사들이 공포에 질려 울부 짖었다. 대부분 최근에 보충된 전투 조 신병들이었다.
나는 이를 갈며, 주먹을 들어올렸다.
"닥쳐라, 병사!"
퍼억.
징징 짜고 있는 신병의 아구창을 갈겨버렸다. 녀석이 나자빠지며 비명을 내질렀다.
쓰러져있는 신병의 멱살을 잡고, 윽박질렀다.
"징징 짜봤자 아무도 안 도와준다. 일어나라, 신병! 창을 붙잡아!"
"하지만, 백인장님! 적은 기병입 니다…!"
"기병이 뭐!"
녀석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놈이 구르며 흙먼지가 일어났다.
나는 주위에 도열해있는 십인장 들에게 지시했다.
"사기관리 똑바로 해. 징징거리는 놈 있으면 홈신 패버려라."
"알겠습니다!"
십인장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병사들은 다독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다독인다'는 것은, 잔뜩 쫄아있는 신병들의 엉덩이를 걷어차는 일을 고상하게 표현한 것이었다.
"주저앉지 마! 당장 일어서!"
"창 잡아!"
"죽기 싫으면 일어나라! 방진을 짜라!"
비척거리던 신병들이 일어나, 하나둘 창을 잡고 들어올렸다. 그들의 손은 떨렸지만. 그나마 제정신을 차 리고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전투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선 실 전이 답이다. 하지만 실전경험 없는 신병들이 전투 공포를 극복하게 하는 방법이 하나 더 있었으니 , 바로 폭력이다. 두들겨 맞은 신병들이 억 지로 몸을 일으켜 창을 부여잡았다.
"온다!"
두두두두두.
기병대가 이쪽으로 쇄도해왔다. 나는 검을 꽉 쥐고 대열 속에서 놈 들의 모습을 바라봤다.
저 멀리서 달려오는 기병들. 놈 들이 접근해오고, 그 모습이 점점 크게 보였다.
다가오는 것은 순식간. 곧 적 기 병이 방진에 맞닥뜨려 기병창을 내 찔렀다.
콰과광!
"끄아아아아!"
병사들이 하나둘 창에 꿰뚫리고 밀려나며 쓰러졌다. 적 기병대를 저지하기 위해 방진을 짰지만, 그리 큰 효용은 없었다. 창병들이 쥐어든 창의 길이가 짧았기에.
기병 다수가 차례로 다가와 병사들을 무너뜨리고, 선회해 돌아갔다.
나는 이를 갈았다.
'빌어 처먹을. 숙련된 놈들이다.'
적 기병들은 척 보기에도 잘 단 련된 놈들이었다.
허접한 기병이라면 첫 돌진 후 방진 앞에서 멈추어 서버리는데, 놈들은 적절한 거리에서 방진을 타격 하고는 바로 선회해 퇴각했다.
만만치 않은 상대다.
- 피잉! 피잉!
궁병조가 퇴각하는 기병을 향해 활을 쐈다. 아군의 화살이 파공성을 내며 날아간다.
하지만 궁병의 화살은 대부분 빗 나가 버렸다. 적 기병의 속도가 너무 빨랐기 때문에.
- 쉬익!
- 퍽!
"으아아악!"
오히려 화살을 제대로 명중시키는 것은 적 기병이었다. 놈들은 선 회해 돌아가는 와중 단궁을 꺼내들 어, 이쪽으로 사격하며 퇴각했다.
피잉!
화살 하나가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릿한 통각이 올라온다.
나는 손등으로 뺨의 피를 훔치고 는, 지시했다.
"물러나지 마라! 방진이 파훼되 면 끝장이다!"
나는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치는 신병을 걷어찼다. 내키지 않는 일이 었지만, 방진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방진을 지켜야 한다. 비록 파이 크 장창병 없이 일반 창병에 의지 해 만든 조잡한 방진이지만. 무너진 다면 놈들에게 완전히 사냥당 할 터.
내가 그렇게 방진을 지키기 위해 발악하고 있을 때였다.
"백인장님!"
"또 뭔데?"
시선을 돌려 나를 호출한 이를 바라봤다. 카일이었다. 녀석은 어딘 가를 바라보며 외쳤다.
"2번 백인대가 무너졌습니다!"
"뭐?"
나는 시선을 돌려 2번 백인대가있는 곳을 바라봤다.
분명 처음에는 이쪽처럼 방진을 짰던 녀석들. 놈들의 전열이 점차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망할."
절로 욕지거리가 올라왔다.
"으아아아악!"
"크아아아!"
적 기병들이 2번 백인대가 무너 진 걸 확인한 것일까. 놈들이 집중적으로 그쪽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기병들이 무너진 틈을 파고들어 병사들을 살육했다. 말이 병사의 머리를 짓밟고, 기병이 기다란 기병창을 휘둘러 적 병력을 도륙했다.
그 와중에 적 기병 두셋이 죽긴 했지만, 2번 백인대는 완전히 통제 를 잃고 뿔뿔이 흩어졌다. 그런 병사들을 기병들이 사냥한다.
"1번 백인대도 무너집니다!"
"3번 백인대는… 위험하군요."
병사들이 하나둘 알려오기 시작했다.
역시 파이크 없는 방진은 기병에 게 무력하다. 그들이 하나둘 무너져 내리고, 기병들이 틈새를 파고들어 적병을 유린해간다.
나는 악에 차 외쳤다.
"염병할 파이크 좀 보급해달라니까!"
사실 이번에 출전할 때 파이크 장창을 미리 보급해달라고 요청했었다.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예상했 었기에.
하지만 내 보급요청은 반려당했다. 어차피 산악지형이기에 적 기병 이 나올 가능성이 희박하니, 평소 장비를 그대로 사용하라는 게 이유였다.
덕분에 지금 병사들이 우수수 죽 어나가고 있다.
"크아아아아!"
"살려줘!"
1번 백인대도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적 기병의 돌격에 의해 방진 이 파훼되고, 공국 기병들이 빈틈을 비집고 들어와 제국병을 하나둘 쳐 죽여 갔다.
3번 백인대 또한 위험한 건 마찬가지. 녀석들 또한 전열이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다. 그리 머지않아 파훼당 할 터.
"개 같은 기병새끼들."
나는 욕지거리를 뇌까리며 읊조렸다.
이미 4개 백인대 중 두 개가 무너지고, 우리 4번 백인대와 3번 백인대만 간신히 버티고 있다.
아니, 버텼었다.
"끄아아아아!"
"으아악!"
3번 백인대가 무너져 내렸다. 그 들 또한 분투했지만, 결국 한계에 다다랐다. 병사들이 적 기병에 의해 죽어나간다. 간신히 살아남은 녀석 들 또한 도망치는 와중 기병대에 등을 꿰뚫려 죽어갔다.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우리 4번 백인대뿐.
- 콰앙!
- 콰지직!
마지막 남은 백인대라 이건가. 놈들은 우리를 집중적으로 공략하 기 시작했다.
콰광!
기병창에 꿰뚫려 앞 전열이 무너 져 내리고, 병사들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순식간에 창병들이 갈려나간다. 앞의 병사들이 죽어가며 핏물을 지면에 흩뿌려댔다.
나는 이를 악물며 검을 들어올렸다.
"지원군은… 도대체 언제."
많은 수의 병사들이 죽거나 다친 상황. 이를 악물고 앞을 노려봤다.
그리고 다시 돌진해오는 적 기 병.
- 두두두두두두!
놈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온다. 적 기병은 여러 차례 돌격에 의한 손실로 약 20기를 잃었지만, 그럼에도 80기나 남아있다.
그리고 80기의 기병은, 우리 백인대를 순식간에 갈아버리기에 충 분한 전력이다.
놈들이 돌진해온다.
나는 바닥에 떨어져있는 방패를 주워들었다.
부웅!
기병창이 정확히 나를 노리고 쇄 도해왔다. 나는 방패를 들어올려 막 으려했다.
- 터엉!
커다란 충격음이 울렸다. 놈의 기병창이 내 방패를 정확히 찔렀다.
묵직한 충격이 이쪽을 강타했다. 그에 나는 충격에 밀려 뒤로 부응 날아갔다.
'망할!'
말의 무게와 속도를 살려 가한 창격이다. 당연히 무시무시한 운동 에너지를 담고 있다. 그것을 정통으로 막은 내 몸이 뒤로 날아간다. 쿵! 내 몸이 바닥을 굴렀다.
"백인장님! 위험…."
나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너무 멀리 튕겨져 날아온 건가. 어느새 나는 대열 밖을 구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나를 적 기병들이 포착했다.
"저기, 제국 백인장이다!"
"놈이 지휘관이다. 저놈부터 죽 여!"
두두두두두.
기병 셋이 이쪽으로 돌진해왔다. 놈들이 노리는 것은 나. 다름 아닌 백인장 계급장을 달고 있는 나다.
앞을 바라봤다.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달려오는 기병 셋. 놈들이 기다란 기병창을 뻗어 나를 죽이려 한다.
순식간에 놈들이 내 코앞까지 쇄 도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타이밍을 맞춰.
파앙!
옆으로 뛰었다.
- 콰가가가가각!
다수의 철제 기병창이 방금 전까지 내가 있던 지면을 홅고 지나갔다. 소름끼치는 소리가 울리고, 간 발의 차로 말발굽이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하마터면 말에 치일 뻔했다.
"이걸 피하는군."
"잽싼 녀석. 이것도 피해봐라!"
다른 기병이 또다시 이쪽으로 돌진해왔다.
"크윽!"
나는 튕겨지듯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한번 몸을 던졌다.
후웅!
묵직한 파공성과 함께 기병창이 허공을 가르고 지나간다. 투구의 윗 부분에 기다란 스크래치가 그어졌다.
"개자식들."
놈들을 죽이고 싶다.
하지만 녀석들의 돌진을 가까스 로 피하는 것이 고작이다. 놈들의 충격력은 무시무시하고 병기의 리 치 또한 압도적이니 이쪽이 너무나 도 불리하다.
나는 생각한다.
'놈을 죽일 수 있는 방법.'
일개 보병이 녀석들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방법.
과연 무엇이 있을까.
- 두두두두두!
재차 기병이 이쪽으로 돌진해왔다. 나는 또다시 옆으로 도약, 놈의 공격을 피하려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완벽히 피하지 못했다.
"죽어!"
부웅!
기다란 철제 기병창이 공기를 갈 랐다. 그것은 중후한 파공성을 일으 키며, 막 도약한 내 등을 긁고 지나갔다.
"크아으빌어 처먹을!
강렬한 통각이 등짝을 타고 올라 왔다. 나는 신음을 삼키며 바닥을 굴렀다.
등 쪽 피부에 뜨뜻한 액체가 흐 르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도 내 피 이리라.
개 같이 아프다.
"쯧. 스쳤군."
"다음 돌진으로 끝장내라. 놈을 먼저 죽이고, 휘하 병사들은 차근차 근 사냥하지."
스쳐 지나간 기병들이 크게 선회 하며 전열을 다잡기 시작했다. 명백히 다음 돌진을 준비하는 모양새.
"제기랄."
날카로운 고통에 신음하며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기병을 어떻게 처리하라는 것인 가. 놈들은 상위 병종. 고작 일반 보병을 이끌고 있는 이쪽에서는 어찌 상대할 수 없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다.
"죽여버린다. 개자식들."
지면에 떨어진 검을 주웠다. 고개를 치켜들고 앞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때, 문득 내 시야에 어떤 것이 잡혔다.
"창."
아군 창병이 죽으며 떨어뜨렸던 창이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것을 주워들었다.
창대에는 핏물이 질척하게 묻어 있었다.
두두두두두!
어느새 선회한 적 기병이 이쪽으로 돌진해오고 있다. 주워든 창을 꽉 쥐었다.
나는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투창."
해본 적은 없다. 하지만 직감했다.
투창이라면, 적 기병을 처치할 수 있다. 적어도 장면에서 장검을 휘적거리는 것보다는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으리라.
나는 어수룩하게나마 투장 자세 를 취해보였다.
그리고 그때였다.
- 띠링!
[새로운 행동으로 인해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스킬 : 투창 (입문)]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35화.
기병 하나가 이쪽으로 돌진해온다. 나는 심호흡하고는, 자세를 고 쳐 잡았다.
허리를 낮춰 무게중심을 아래로했다. 오른손으로는 창을 쥐고, 왼손으로는 간격을 쟀다. 전신의 근육을 팽팽히 긴장시켰다.
- 띠링! 띠링!
['엑스트라 스킬 : 전투분석' 이 활성화 됩니다.]
['엑스트라 스킬 : 집중' 이 활성화 됩니다.]
스킬이 활성화되고, 시야가 천천히 흘러감과 동시. 머릿속에 정리된 지식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투창 공격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놈들이 어느 정도 거리까지 왔을 때 얼마나 많은 힘을 들여 창을 날려야 하는지?
새로이 습득한 스킬 '투창'의 보정이었다.
긴장에 침을 삼켰다.
"후우."
뜨거운 숨을 내뱉고 쿵쾅거리는 심장을 추슬렀다.
기병이 다가온다. 아직은 거리가 너무 멀다. 놈이 가까이 다가올 때 까지 기다려야 한다.
"하하하하!"
광소를 내뱉으며 달려오는 기병.
무력한 보병들을 일방적으로 죽 이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것일까. 놈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떠올라 있다.
저 싸이코새끼.
"죽어라!"
충분히 접근한 놈이 기병창을 이쪽으로 들이밀었다. 녀석의 얼굴표 정, 그리고 눈동자에 어린 감정까지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
지금이다.
종아리부터 허벅지, 허리와 등, 그리고 어깨와 팔뚝에 이르기까지. 전신의 근육을 모조리 활용해 손에 쥐인 창을 날려보냈다.
- 후웅!
묵직한 파공성이 울림과 함께, 창대가 내 손을 떠나 적 기병에게 로 날아간다. 순간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직감한 것일까. 놈의 표정 이 일순 굳었다.
직후.
- 퍼억!
"끄아아아아!"
기병의 옆구리에 창이 틀어박혔다.
녀석은 비명을 내지르며 말 위에서 휘청이더니, 말에서 떨어져내려 바닥을 굴렀다.
나는 달려가 녀석의 모가지에 검을 쑤셔 박았다.
"크억, 컥, 끄륵…."
녀석이 피거품을 내뱉으며 절명했다.
하하,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게 되네."
투창. 해본 적은 없다. 그저 내 직감과 전투분석의 도움을 받아 처음 시도해본 일이다.
하지만 운이 좋았던 것일까. 단 한번의 투창 공격으로 기병을 처 치했다.
나는 시선을 돌려 시야 구석에 떠올라있는 홀로그램을 주시했다.
[새로운 행동으로 인해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스킬 : 투창 (입문)]
새로운 스킬이 개안했다고 한다.
홀로그램을 꺼트리고는, 내 손바닥을 바라봤다. 방금 전투창에 의 해 쓸린 것일까. 벌겋게 부어있다.
주먹을 꽉 쥐었다.
'새로운 무기를 쓰면 스킬이 생 성되는 건가.' 처음 안 사실이다.
그동안 오직 장검만을 사용했기에 깨닫는 것이 늦었다.
"백인장님! 조심하십시오!"
카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
두두두두두.
다른 기병 둘이 이쪽으로 쇄도해 왔다. 이번에도 나를 노리는 것 같다.
이를 악물고 바닥을 굴렀다.
- 콰가가가각!
기병창 두 개가 동시에 내가 서 있던 지면을 홅고 지나간다.
간신히 피해냈다.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달려 방진으로 복귀했다.
"맙소사! 백인장님, 저기서 살아 돌아오신 겁니까?"
"괜히 거점 방어전에서 살아 돌아오셨던 게 아니군요."
병사들의 놀란 눈빛. 하기야 방금 나는 놈들의 기병돌격을 몇 차례나 회피했고, 오히려 투창으로 기 병 하나를 처치하기까지했다.
허나 내 심기는 그리 좋지 않았다.
"그래. 하마터면 정말 뒈질 뻔했어."
손을 등 뒤로 가져다 대 더듬었다. 내 등짝에는 놈들의 기병창에 긁혀 생긴 기다란 자상이 아로새겨 져 있다.
아릿한 고통이 신경을 타고 올라 왔다.
얕아서 다행이었다. 만약 조금만 더 깊었다면, 놈들의 창날이 내 등 근육을 헤집고 척추를 부숴버렸을 터이니.
"그나저나. 상황이 너무 안 좋아."
아군의 상태를 살폈다.
다른 백인대는 모조리 부서졌다.
그들은 소수의 생존자만이 살아남 아 도주하고 있으며, 몇몇 공국 기 병이 추격해 하나하나 죽여버리고 있다.
그리고 지금 선발대 중 살아남은 것은 우리 4번 백인대가 유일.
공국 기병대다수가 이쪽을 공략 하고 있다.
나는 이를 악물었고, 그때.
"무얼 꾸물거리는 거냐!"
어디선가 묵직한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려 소음이 들린 곳을 바라봤다.
적 기병연대의 지휘관일까. 기병들 중에서 유독 화려한 장식을 지닌 이가 보였다.
"남은 것은 적 백인대 하나에 불과하다!"
그가 창을 드높이 치켜들었다.
"일제 돌격 준비해! 단번에 쳐부 숴 버린다."
두두두두!
생존자들을 사냥하던 적 기병들 이 단숨에 방향을 반전, 저 멀리 물러나기 시작했다.
"적 기병들이 물러나고 있습니다!"
"저희를 포기한 겁니까? 갑자기 후퇴하는 것 같습니다만."
병사들의 희망 어린 관측.
"그럴 리가."
그에 나는 부정했다.
"방금 적 기병중대장이 말했지. 일제 돌격을 준비한다고."
후욱.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온몸의 긴장을 끌어올렸다.
"놈들은 일단 후방으로 퇴각. 다시 대열을 가다듬고, 돌진해올 것이다. 가속력을 살려 동시에 말이야."
"그 말씀은."
"지금 남아있는 적 기병 팔십여 기가, 단숨에 이쪽을 두드릴 거라고."
주위 병사들의 얼굴에 핏기가 가 셨다.
지금 남아있는 내 백인대원들은 거의 절반이 죽어나갔다. 헌데 무려 80에 달하는 기병들이 동시에 몰아 쳐온다면.
"우린 엿 된 거지."
나는 검을 수납하고, 바닥에 떨 어져 있는 창을 꼬나 쥐었다. 역시 나 핏물과 흙먼지가 엉켜 질척했다.
창을 써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장검보단 나았다. 적어도 창은 투창공격이라도 가할 수 있으니 .
병사들이 믿기 힘들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방법이 없겠습니까?"
"이대로 죽을 순 없습니다. 정 녕… 살아날 방책이…."
나는 무어라 대답할 수 없었다.
기병 80기를 반파된 백인대로 막을 수 있을 리 없다. 그나마 여기 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은 일.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 최대한 버텨라. 지원군이을 거다."
전령이 뒤로 적 기병대의 출현을 보고하러 갔다. 곧 지원군이 올 것 이다.
"우리가 무너지기 전에 지원군이 온다면."
그렇다면 살아날 수 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보였다.
- 두두두두두!
저 멀리, 적 기병 80여 기가 다시 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이번에야말로 끝장을 내주겠다는 것 일까. 놈들의 가속력이 심상치 않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끝인가.'
놈들의 기병돌격이 점차 가까워 진다.
무려 80의 기병이다. 놈들이 우리 방진에 도달한다면 이쪽은 단숨에 갈려나가리라.
하지만 아직 포기하기엔 이른 듯 싶었다.
- 두두두두두!
아군의 배후에서도 말발굽 소리 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후방에서 기병대! 약 이백여 기!"
"제기랄. 공국 놈들이 앞뒤로 포 위한 겁니까?"
"이런 개 같은…."
병사들이 절망했다. 당장 앞에 보이는 적 기병을 막는 것도 버거 운데 후방에서도 기병이 등장하다 니. 앞뒤로 갈려나가는 꼴이 눈앞에 생생하리라.
허나 나는 웃었다.
"아니. 잘 봐라. 뒤의 기병은 적 이 아니다."
내 말에 병사들이 고개를 돌려, 뒤를 주시한다.
그들의 얼굴에 화색이 피어났다.
"3군단 기병대다."
뒤에서 달려오는 기병대의 기수 가 들고 있는 깃발은, 분명 제국군 깃발이었다.
드디어 배후에서 반격을 보낸 것 이다.
"아군 지원군이다!"
"살았다!"
"와아아아아!"
병사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기뻐했다. 나는 앞을 바라봤다.
이쪽으로 쇄도해오던 적 기병들. 그들은 우리 배후에서 등장한 기병대를 발견한 것일까. 기수를 재차 반전, 뒤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번에는 진짜 죽는 줄 알았네."
"동감입니다."
전멸하기 전, 겨우겨우 지원군이 제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앞을 바라봤다.
아군 기병대가 우리를 스쳐지나 가 적 공국 기병들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고생이 많았다. 한지훈 백인장."
전투가 끝난 뒤. 나는 본대로 복 귀, 그레드 천인장을 만났다.
그가 딱하다는 표정으로 말해왔다.
"하필이면 적 기병대를 만나다니. 운도 없구만."
"네.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나는 표정을 찌푸렸다. 그레드의 말이 불쾌해서가 아닌, 등에서 아릿 한 통각이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그레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자네는 그나마 살아남아 서다행이다. 자네 4번 백인대를 제외한 1, 2, 3번대 백인장들은 모두 전사했어."
그가 서류를 꺼내들어 내게 보여 줬다. 이번 전투가 요약된 보고서였다.
나는 그것을 받아 훑어보고는 중얼거렸다.
"정말 호되게 당했군요."
이번 전투는 그야말로 완패였다.
아군 선도부대 4백여 명 중 과반 수가 전사. 1번, 2번, 3번 백인대 백인장 전사. 중경상자 다수.
반면 적병은 고작 스무 명밖에 전사하지 않았다.
"한지훈. 자네 부대 또한 가까스 로 살아남긴 했지만 손실이 막대하 군."
"그렇습니다. 절반이나 갈려나갔 으니 ."
우리 4번 백인대 또한 큰 피해를 입었다.
정원 /백 명 중 오십여 명이 죽 거나, 중상을 입었다. 신병들은 아주 소수만을 제외하고는 거의 갈려 나갔으며, 베테랑 병사들 또한 꽤 많은 수가 전사했다.
심각한 손실이다.
"천인장님. 저희 부대는 더 이상 작전이 불가능합니다. 고작 오십에 불과한데 백인대라고 부를 수도 없지 않습니까?"
"으음. 그렇지."
"그렇다면 이제 저희 4번 백인대는 어떡합니까? 후방으로 빠집니까?"
내 질문에, 그레드가 한숨을 내 쉬며 답했다.
"확실히, 자네 4번 백인대는 더 이상 작전행동이 불가능하다. 본래 라면 후방으로 이송, 재편성 후 전장에 복귀해야 하지."
"그렇다면…."
"하지만."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이곳은 전장이다. 지금 당장 후송은 여의치 않다."
나는 침묵했다.
심상치 않은 것을 깨달았기에.
"더해 우리 파트라헴 천인대가 이곳 침공로의 지리를 가장 잘 알 고 있다. 우리는 길 안내를 해야 해. 본대가 안전하게 포트 갈레이에 도착할 수 있도록 말이다."
후송할 수 없다는 말.
나는 잠시 침묵하곤, 그레드를 바라봤다. 그의 눈가에는 참담함이 가득하다.
나는 한숨 쉬며 말했다.
"귀족 놈들이 개수작을 부렸군요."
"그게 무슨 소리지 한지훈?"
"4개 백인대가 갈려나갔습니다. 파트라헴 천인대 천 명의 병력 중 40퍼센트가 손실된 것이란 말입니다. 헌데 계속해 작전에 투입시킨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
이미 게임에서 겪었던 일이다.
파트라헴 천인대의 대규모 손실. 하지만 게임 속에서도, 그리고 이곳에서도. 우리 천인대는 계속해 선봉을 맡아 전진한다.
어째서일까. 본래라면 후방으로 퇴각 후 재편해야 할 터인데.
게임으로 접했을 때는 몰랐다. 하지만 지금 이 이상한 세상 속에 들어온 지금의 나는, 그이유를 알 게 되었다.
"귀족들이 파트라헴 천인대를 압 박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계속해 고기방패가 되도록. 아닙니까?"
"… 어떻게 알았나."
"생각해보면 간단합니다. 비정상 적인 소모에도 진군하라는 합당하지 않은 명령. 그리고 천인장님의 출신. 거기에 천인장님의 그분하다는 표정까지."
과거, 그레드는 나에게 말했었다. 자신이 평민이기에 전공이 평가절하 되었다고.
평민 출신 장교. 대부분이 귀족 으로 이루어진 군 지휘부에서 좋게 볼 리 없다.
"지금 천인장님께선 전투를 강요 당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소모가 계속되어도, 후퇴할 수 없도록 말입 니다."
그레드는 모두가 기피하는 선두 자리에 병력을 투입했다.
당연히 자의일 리 없다.
그가 평민 출신이기에 맡은 위험 한자리.
"…예리하군."
피식. 그레드가 허탈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기분 좋아서 지은 미소 가 아닌, 체념의 빛이 어린 미소였다.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자조적으로 말해왔다.
"맞다. 한지훈. 이게 바로 평민 출신 사관의 한계다."
평민 출신 사관의 한계.
분명 그레드는 그리 말했다.
"나 또한 천인대의 손실이 크니, 군단 회의에서 후방배치를 요청했다. 허나 군단 참모와 천인장들은 하나같이 반대의견을 보이더군. 이곳 지리를 잘 아는 게 우리 천인대 이니, 천인대가 전멸하는 한이 있어 도 계속해 선도 정찰대 자리를 지켜야 한다나."
그의 인자하면서도 중후한 얼굴 에는, 흐릿하게나마 분노의 기색이 떠올라있다.
"위험한 일은 절대 맡기 싫다는 거다. 내가 평민 출신이라고, 모두 합당해서 이쪽에 위험한 일을 떠넘 기는 거지."
그레드는 시선을 내려 테이블을 보더니, 곧 고개를 들어 올려 나와 눈을 맞췄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안타까움의 감정이 그득했다.
"자네들에게는 정말 미안하네. 상관인 내가 평민 출신이라, 위험한 임무만 맡는군."
나는 가만히 그를 쳐다봤다.
36화.
"자네 4번 백인대는 곧 보충해주 겠네. 3개 백인대 잔병들을 모두 합친다면 4번 백인대를 완편할 수 있을 걸세. 조금만 더 고생해주게."
결국 그레드는 4번 백인대에 보병을 충원해줄 테니, 계속해 선도부 대 역할을 맡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인장 막사에서 나왔다.
"신분이라."
백인장 막사로 걸어가는 와중, 생각한다.
신분이란 뭘까.
지구에서 살 적에 나는 내 스스로 비천한 신분이라 생각해 본 적 이 없었다. 스스로의 능력이 부족한 걸 탓할지언정 혈통을 탓해본 적은 없었다.
허나 이 세상은 다르다.
이 세상은 명백한 신분제 사회다. 가장 높은 곳에 황제가 있고, 그 아래 귀족이 있으며, 귀족 아래 평민이 있다. 상위 계급을 가진 이들은 하위 계급인 이들을 도구로서 부린다.
"그깟 신분이 뭐라고."
시선을 돌려 군영의 모습을 살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파트라헴 천인대 군영이었다. 그리고 군영의 분위기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반나절 전 수백의 사람이 적 기 병대에 의해 죽어버렸다. 같은 천인대인지라 나름의 교류가 있던 만큼. 전우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들이 많 았다.
다시 고개를 돌려, 다른 천인대의군영을 바라봤다.
다른 천인대는 평온했다. 그들은 그저 하루 종일 행군한 피로에 불평하고 있을 뿐, 슬퍼하거나 괴로워 하지 않았다.
기분이 나빠진다.
오직 우리 파트라헴 천인대만 손실을 입었다. 천인장 그레드가 평민 이기에. 상부 귀족들은 우리 파트라 헴 천인대에 모든 손실을 강요했다.
덕분에 다른 천인대들은 아무런 손실 없이, 평온하게 움직였다.
문득 카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 그 잘난 귀족과 장군 나리들은 일반 평민들을 개만도 못하게 보고 있습니다.
녀석의 말이 맞았다. 놈들은 평 민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오직 도구로서 인식하고 있다.
자신들의 피해를 감수하기 싫어 서, 만만한 평민 지휘관에게 위험부 담을 몰아넣고 있으니 .
역겨운 놈들.
"…가서 쉬자."
나는 터덜터덜 걸어 백인장 막사로 향했다. 내일을 대비해, 피로를 풀어야 한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후우…."
적막한 천인장 막사 안. 그곳에서 그레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 그는 부하에게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 보였다.
평민 출신이기에 받는 핍박과 억 압. 그레드는 평민 출신 사관이었고 그렇기에 위험한 임무를 억지로 떠안았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다.
"한지훈. 이건 너로서도 기회다. 전공을 세울 기회."
그가 시선을 돌려 테이블 위에 자리해있는 서류를 바라보았다.
지령서. 파트라헴 천인대는 계속 해 아군 군단을 선도하라는 상부의 명령.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성장의 발판이 될 수 있다.
"전공을 세우는 데는 위험이 따르지."
그는 손을 뻗어 서류뭉치를 뒤적거렸다. 다름 아닌 병사와 사관들의 인사정보가 담긴 서류들이었다. 그는 그중 한 장의 서류를 뽑아들었다.
그가 뽑아든 것은 한지훈의 인사 서류였다.
"그리고 전공을 착실히 쌓아간다 면, 진급한다."
그의 눈이 한지훈의 인사서류를 훑었다.
한지훈은 분명 애송이었다. 군 경력은 짧았으며 나이 또한 어리다. 하지만 그의 인사서류에는 그럴듯 한 전공이 다수 기재되어있었다.
척후병으로서 공국의 전면전 의도를 읽어내었다.
침공로의 중요 거점을 장악, 사 수했다.
어디 그뿐인가.
한지훈은 단신으로 적 증강백인 대를 지연시켰다.
아마 훈장까지 수여된다면 이 인사서류에 또다시 그의 공훈이 기록 되리라.
"어서 성장해라. 한지훈."
그레드는 아직도 바라고 있다.
한지훈이 성장해 높은 자리에 도 달하기를. 그리하여 평민 출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보다 대단한 사람이 되기를 말이다.
한지훈은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
전성기의 그레드를 뛰어넘을 정도로,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니 .
평민 출신인 고위 군관을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보이는 것. 그것이 그의 염원이었다.
그는 우묵한 눈으로 한지훈의 인사서류를 바라봤다.
다음날 4번 백인대가 충원되었다. 내가 그들을 받아들여 가장 먼저 한 일은, 십인장을 뽑는 것이었다.
"자네. 1번 백인대에서 십인장이 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백인장님!"
"그럼 우리 5번 전투조 조장을 맡아라. 저번 전투 때 팔이 잘려서 불구가 되어버렸거든."
"명령을 받듭니다!"
1번에서 3번 백인대의 생존자들은 고스란히 4번 백인대에 흡수되었다. 나름대로 생존한 이들이 많은 것일까. 그들을 모두 받아들이니 4번 백인대의 총원은 150여 명이 되었다.
"백인장님. 이 정도면 일반적인 백인대보다 훨씬 큰 규모군요."
"그래. 증강백인대 규모지."
본래 백인대는 112명이다. 각 조에 십인장과 병사를 포함 열한 명, 조 10개가 뭉쳐 110명. 지휘관격인 부관과 백인장을 포함하면 112명. 이것이 제국군 백인대 정식 편제였다.
하지만 지금 4번 백인대의 전력 은 무려 150여 명. 일반적인 백인대의 규모를 명백히 상회했다. 이 정도라면 증강백인대 급이었다.
"전투조 애들 중 창병 비율이 어떻게 되지?"
"대략 절반 정도가 창병입니다."
"좋아. 그럼 숫자 맞춰서 파이크 장창 지급 요청해. 일반 창으로는 기병에게 대항할 수 없다."
"이번에도 보급관이 거절하면 어떻게 합니까?"
더해 나는 보급대에게 파이크 보 급을 요청했다. 다음에도 기병이 출 현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대비해 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병사에게 말했다.
"이번에도 파이크를 지급 안 해 준다면, 내가 직접 가서 보급관새끼 를 죽여버리겠다고 전해."
"… 알겠습니다."
"만약 그래도 거절한다면 이 말 도 함께 전해. 내가 부하 절반을 잃어서 눈깔이 돌아갔기 때문에 정말 보급관이고 뭐고 쳐 죽여버릴 것 같다고. 그러면 어련히 승낙하겠지."
저번 전투 전, 나는 보급부대에 게 파이크 장창 지급을 요청했었다. 당연히 기병대에게 습격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하지만 보급관이 거절했었다. 산 악지형이기 때문에 기병이 나타날 확률이 적다는 것이 그이유였다.
덕분에 아군 4개 백인대는 적 기 병대에게 아주 쉽게 갈려버렸다.
"염병할 보급관 새끼."
보급장은 천인장 계급이었지만, 보급관은 백인장 계급이다. 일단은 같은 계급. 그렇기에 나는 병사를 시켜 보급관을 협박케했다.
나중에 문제시 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저번처럼 커다란 피해를 입는 것은 사양이다.
물론 녀석은 일단 귀족 계급이긴 했지만 알게 뭔가.
"백인장님. 이번에도 저희가 선도 정찰대 배치입니까?"
한 십인장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그에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말 영광스럽게도 말이다."
"망할."
"선두는 이제 싫습니다."
병사들이 칭얼거렸다. 하긴, 군단 선도부대 자리에서 적 기병대에게 두드려 맞았다.
그리고 일단 적이 기병을 운용하 기 시작한 이상, 언제 다시 또 다른 기병을 운용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그에 한탄을 내쉬는 병사들 이었다.
"선도부대는 그냥 고기방패 아닙 니까? 적 병력이랑 마주치고, 일단 얻어맞고, 후열에 보고하는 역할 말 입니다."
"맞다. 그래서 아주 개 같은 자리지."
나는 이를 갈았다.
고기방패 짓거리를 더 해야 한다 니. 화가 날 수밖에 없다.
"백인장님. 그럼 이번 선도부대는 몇이나 갑니까? 1번부터 3번 백인대가 무너졌는데 . 설마 저희 4번 백인대만 단독으로 선도합니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아군 참모 부가 그 정도로 생각 없진 않아."
"그렇다면…."
"5번, 6번, 7번, 8번 백인대가 함께한다."
1번부터 3번 백인대는 이제 없는 상황. 대신해 5번부터 8번 백인대 가 함께 선도 역할을 하기로했다.
그에 병사들이 표정을 찌푸렸다.
"백인장님. 그럼 이번에도 저희 파트라헴 천인대만 선도부대 역할을 맡는 겁니까?"
"… 그래."
"이상합니다. 아무리 저희 천인대 가 인근 지리에 익숙하다 해도 손실이 이衙?큰데 계속 선도 역할을 맡는다니요. 다른 천인대는 어째서 선도부대를 맡지 않는 겁니까?"
"으음…."
나는 병사에게 무어라 대답을 해 주려다 그만뒀다. 천인장 그레드가 평민이기에 우리가 피해 입는다는 사실을 알려줄 순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상부에서는 그렇게 결정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상부 결정이라는, 전형적인 변명 밖에 없었다.
"선도부대 역할이 고되고 힘들겠 지만 조금만 참아라. 포트 갈레이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거기까지만 간다면, 이 지랄 맞은 고기방패 짓 도 안 하게 되겠지."
나는 병사들을 다독였다.
다음날, 우리는 다시 행군을 시작했다.
배치는 역시나 선도 정찰대. 진군중인 아군 본대보다 훨씬 앞에 진출해있다.
침공로를 따라 계속해 걸었다. 나는 주위에 도열해있는 병사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주억였다.
"이번에는 제대로 파이크를 지급 해줬군. 다행이야."
"그렇게 보급관을 협박했으니 , 당연히 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내 혼잣말에 옆에 있던 카일이 답했다.
지금 내 휘하 창병들은 모조리 기다란 창-파이크 장창-을 장비하고 있었다. 평소에 사용하던 2.5m 언저리인 보급창에 비해 훨씬 긴, 무려 5m에 달하는 길이였다.
이것이 있다면 적 기병에게 대항 할 수 있을 터.
"하지만 괜찮겠습니까? 저리 기다란 장창을 든다면, 대인전투력은 오히려 하락할 것 같습니다만."
카일의 말은 사실이었다.
사실 파이크는 보급창에 비해 보다 긴 리치를 지니고 있지만 그만큼 다루기 힘들었다. 아마 기병이 아닌 일반 병사가 상대라면 오히려 더 불리할 터.
허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저번처럼 기병에게 갈 려나갈 수는 없잖냐. 대 보병 전투력 하락은 감수해야지."
"하긴, 그렇지요. 다시 기병 놈들에게 갈려나가는 건 사양입니다."
저번 전투로 기병의 위력을 절절 히 체감했다.
기병은 전장의 악몽이다. 놈들은 먼 거리서부터 달려와 강력한 충격을 투사하고, 진형을 무너뜨리며, 기병창의 리치와 말의 높이를 살려 일반 보병을 도륙한다.
말 그대로 일방적으로 말이다.
때문에 대 보병 전투력을 다소 희생하더라도 파이크를 장비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더해 나는 알고 있다.
'적은 보병이 없다.'
이곳 침공로에서 조우하는 적은 무조건 기병이다. 적인 공국 1군단 의 보병은 모두 요새의 방어에 전 념하고 있다.
그 말인 즉, 행군 중에는 오직 기병만 신경 쓰면 된다는 소리.
"… 좋아. 모두 경계태세 확실히 하고, 전진하자."
5개 백인대. 제국군 5백 명이 침공로를 따라 북진했다.
나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기병새끼들을 찢어 죽인다."
이번에도 기병을 조우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 모든 능력을 살려 녀석들을 죽여버릴 것이다.
반드시 말이다.
아군이 진군한다.
"연대장님. 보고드립니다."
공국군 기병 중 하나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에 나무 그루터기에 멍하니 앉아있던 한 중년 남성이 반응했다.
"부관인가. 무슨 일이지?"
"침공로를 따라 진군하는 제국 놈들을 발견했습니다. 보병대입니다."
"드디어 왔군."
남성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경갑을 갖춰 입기 시작했다.
그의 갑옷 가슴팍에는 계급장이, 그것도 기병부대 연대장 계급장이 선명하게 박혀있었다.
철컥. 남성이 허리춤에 장검을 패용하며 물었다.
"제국 선발부대인가. 수는?"
"백인대 다섯 개. 약 오백여 명 입니다."
"오백이 라."
그는 피로가 그득한 얼굴로 나직 이 읊조렸다.
"제국 놈들. 어제 그렇게 당해놓 고기어이 몰려오는군. 녀석들에겐 학습 효과란 게 없는 모양이야."
중년인의 이름은 클락. 무려 백 여 명의 기병들을 통솔하는 , 공국 기병연대의 수장인 이었다.
그가 투구를 뒤집어쓰며 씩 웃었다.
"좋아. 가자. 이번에도 선발대 놈 들을 괴롭혀 주자고."
다시금 공국 기병부대가 제국군을 급습한다.
백여 명의 기병이 한지훈과 그의 동료들을 노린다.
37화.
나와 병사들은 계속해 전진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백인장님."
아르덴이 입을 열었다.
머나먼 곳을 주시하고 있던 그가 조심스럽게 알려왔다.
"적 기병대를 찾은 것 같습니다."
그가 어딘가를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군 대열의 좌측, 음영 진 산맥 안쪽이다.
나는 고개를 주억였다.
"그렇네. 잘 찾았다, 아르덴."
아르덴은 눈이 좋다. 그렇기에 나는 녀석에게 경계 임무를 맡겨놨었다. 그는 좋은 눈을 이용해 항상 멀리 있는 적을 잘 찾아내곤했다.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모두 주목."
주위의 병사들이 이쪽을 바라본다. 나는 굳은 얼굴로 이어 말했다.
"적 기병대를 발견했다."
"맙소사…!"
"또다시 기병이라니."
역시나라고 할까. 병사들의 낮빛 이 꺼멓게 죽어갔다.
바로 어제, 적 기병대에 의해 지옥을 경험했던 그들이다. 그에 단숨에 사기가 곤두박질친다.
하지만 어제와는 다르다.
'공포에 질리진 않는다.'
병사들은 어제와 달리 좀 더 침 착해보였다. 얼굴에 공포와 두려움 의 감정이 올라오긴 하지만, 그렇다 고 패닉을 일으키는 이들은 없었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신병이 얼마 없으니 .'
어제 전투에서 죽은 건 대부분이 신병들이었다. 즉, 지금 남아있는 이들은 대부분 베테랑 병사들이란 소리.
신병들이 대부분 전투에서 소모 된 까닭에 비교적 강한 병사들로만 백인대가 구성된 것이다.
물론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파이크도 제대로 갖췄다.'
시선을 돌려 창병들이 들고 있는 장창을 주시했다.
파이크 장창. 무려 5미터 가량이나 하는 기다란 창이다. 저장창으로 방진을 짠다면, 기병 놈들 또한 섣불리 이쪽을 노리지 못할 터.
나는 지시했다.
"지금 당장 대기병 방진을 짜 라. 전령은 후방 본대로 가 적 기 병대의 등장을 보고하고."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듭니다!"
병사들이 방진을 짜고, 전령 역할을 맡은 기병이 뒤로 달려 나갔다.
나는 고개를 주억이며 적 기병대 를 바라봤다.
"이번에는 쉽게 당하지 않는다."
나는 검의 그립을 굳세게 쥐어 잡았다.
"저기 오는군."
공국 기병연대장 클락. 그는 산 의 고지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그리 읊조렸다.
그의 눈길이 침공로로 향한다.
조심스레 전진하는 제국 보병들. 그들의 수는 고작해야 5백 명에 불과했다.
백여 명의 기병들을 상대하기에 너무나 적은 수.
문득 클락이 중얼거렸다.
"잠깐. 저놈 저번에 본 것 같은 데."
클락의 시야에 어떤 이가 들어왔다.
검은색 머리에 검은색 눈동자를 지닌 청년. 왠지 모르게 눈에 익다.
그는 잠시 청년의 모습을 살피고, 곧 떠올릴 수 있었다.
"어제 그 투창 보병이군."
기억에 있는 얼굴이다.
투창 공격을 가해 자신의 부하 하나를 죽였던 제국의 백인장.
"과연. 어째서 저 백인대만 저리 기다란 창으로 무장했나 싶었는데 . 어제 우리한테 혹독하게 당했던 녀석들이었어. 학습을 할 줄 아는 기 특한 녀석이야."
클락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래봐야 우리에겐 안된다."
그는 그리 읊조리며 말 위에 올 랐다. 안장에 엉덩이를 붙이고, 등 자에 발을 집어넣은 다음, 고삐를 꽉 쥐었다.
"연대장님. 어찌하시겠습니까? 바로 돌격합니까?"
클락의 부관이 물었다. 그에 클 락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돌격해. 놈들의 측면을 친다. 가 자!"
파앙! 그가 말의 배를 박찼다. 흥분한 말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클락이 고삐를 꽉 쥐고 앞으로 달려 나간다.
"나를 따라라!"
공국 기병대가 돌진한다.
"온다!"
병사들이 하나둘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장창이 지면에 비스듬히 박 히고, 주위를 향해 겨눠졌다. 고슴 도치처럼 빽빽한 장창방진이 완성 되었다.
나는 심호흡하며 몸의 긴장을 끌어올렸다.
'적 기병의 수는 약 백여 명.'
날카로운 눈으로 놈들을 노려봤다.
산의 내리막을 타고 내려오는 공국 기병대. 놈들은 하나같이 기다란 기병창으로 무장한 상태.
'모두 경기병. 방어력은 약하다.'
놈들 중 그 누구도 중갑을 입지 않았다. 기껏해야 몸통의 급소를 방어하는 경갑과, 머리를 보호하는 철 제 투구뿐.
그렇다고 얕볼 순 없다.
'경기병은 빠르지.'
경기병의 최대 장점은 바로 기동력이다. 놈들은 가벼우며, 그렇기에 기민하게 움직여 전장을 뒤흔든다.
나는 곧장 궁병들에게 지시했다.
"화살을 쏴."
"사거리 밖입니다! 맞힐 수 없습니다!"
"굳이 맞힐 필요는 없어. 다만 이쪽으로 섣불리 접근하지 못하게 사격해. 지속 견제사격이다!"
"명령을 받듭니다!"
피잉! 핑!
궁병대가 화살을 날려대기 시작했다. 미약한 파공성이 일고, 수십 의 화살 세례가 적 기병대에게 향 한다.
하지만 활 소리는 곧 적 기병의 말발굽 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 두두두두두!
놈들이 다가온다. 나는 이를 악 물었다.
'제발 다른 곳부터 먼저 쳐라.'
다소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나는 놈들이 다른 백인대부터 노리기를 기원했다. 그래야 이쪽이 더욱 오래 버틸 수 있을 테니.
내 바람은 헛되지 않았다.
- 쾅! 콰쾅!
파이크를 들고 있는 우리들이 부담됐던 것일까. 아니면 단순하게 측 면부터 파고들려 하는 것일까.
기병 놈들이 다른 백인대를 공격 하기 시작했다. 5번 백인대였다.
"으아아악!"
"살려줘!"
"커헉!"
기병 백여 명이 순차적으로 돌진, 기병창을 차례로 내질러 5번 백인대의 보병을 도륙해갔다. 병사들이 피를 흘리고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그들은 얼마 버티지 못했다.
"5번 백인대, 붕괴되었습니다!"
"망할. 잠깐을 못 버티는군."
5번 백인대가 붕괴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녀석들이 최대한 오래 버티기를 바랐건만, 아무래도 무리인 듯싶다.
"모두 죽여라!"
"하하! 죽어라!"
공국 기병대가 5번 백인대 잔당을 척살하기 시작했다.
기병 앞의 보병은 나약하다. 더 해 방진이 붕괴되어 흩어진 보병은 더더욱 나약하다. 기병대가 이곳저곳을 누비며 도망치는 생존자들을 사냥했다.
이를 갈았다.
"역시 기병은 기병인가. 아무리 그 공국군이라지만, 기병대는 얕볼 수 없어."
공국의 보병은 약하다. 그들은 징집병. 장비도, 훈련도, 심지어 개인의 각오도 그 무엇조차 챙기지 못한 허접쓰레기가 바로 공국군이 었으니 .
허나 그 공국이라 한들 기병은 정예였다.
애당초 기병은 일반 보병보다 훨씬 육성하기 힘든 상급 병종. 그들은 일반 병사들에 비해 훨씬 단련 되어있다.
"8번 백인대! 위험합니다!"
5번 백인대는 대충 정리되었다는 것일까. 기병들이 다시금 기수를 돌려 8번 백인대를 타격하기 시작했다.
쾅! 콰직!
기병들이 연달아 돌격해 8번 백인대의 방진을 타격했다. 전열이 흔들리고, 병사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 져갔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봤다.
'제발 오래 버텨라.'
아마 8번 백인대는 붕괴를 면치 못할 것이다. 허나 나는 그들이 최대한 오래 살아남아 마지막까지 발 악하기를 바란다.
그래야 이쪽이 생존할 가능성이 더 높아지므로.
하지만 역시나.
"8번 백인대! 방진 붕괴!"
"빌어 처먹을!"
8번 백인대 또한 쉽게 무너졌다.
나는 재빨리 적 기병의 남은 병력을 살폈다.
'두 개 백인대를 부수는데 고작 10기 손실인가.'
기병들의 손해는 역시나 경미했다. 이쪽은 무려 두 개 백인대, 약 200의 손실을 입었지만. 놈들이 잃은 기병의 수는 고작해야 십여 기.
승산이 없다.
"후우."
슬슬 결정할 때다.
이자리에 앉아서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틸지. 아니면 뭐라도 해볼 지.
계속해 전장을 주시했다.
그때 예상치 못한 보고가 들어왔다.
"백인장님! 6번 백인대가 뒤로 물러나고 있습니다!"
"뭐?!"
나는 놀라 6번 백인대가 있는 곳을 바라봤다. 그러자 정말로 볼 수 있었다.
"저 새끼들은 왜 뒤로 가는 거 야'?!"
분명 이쪽과 대열을 맞춰 대기 병 방진을 펼쳤던 6번 백인대.
헌데 어째서일까. 놈들은 지금 천천히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비록 방진을 꾸린 상태였지만, 이동하는 와중이기 때문에 형태가 비를리고 있다.
어째서 병력을 뒤로 물리는 것인 가.
무언가 전술적인 행동을 하려고?
아니, 혹시.
설마.
"저 겁쟁이 새끼들! 도망치는 거냐!"
6번 백인대는 도주 중이었다. 슬 금슬금 뒤로 물러나던 녀석들은, 어느새 방진조차 풀고 뒤로 우르르 달려 나갔다.
이해는 한다. 순식간에 두 개 백인대가 붕괴되어 갈려나갔으니까. 겁도 났을 거다.
하지만.
"개새끼들!"
열 받는 건 어쩔 수 없다. 동료 인 이쪽이 목숨 걸어 버티고 있는데 도주하다니!
물론 놈들의 행동은 멍청한 짓이었다. 적 기병들이 도망치는 것을 놔둘 리 만무.
- 퍼억! 콰직!
느려터진 보병들은 결코 기병을 따돌릴 수 없었다.
공국 기병들이 도주 중인 6번 백인대 병사들을 순식간에 추격, 하나하나 처치해갔다.
"끄아아아아!"
"으악!"
"살려줘! 살려…!"
병사들이 바닥에 쓰러지고,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병들이 아주 손쉽게 6번 백인대를 요리했다.
나는 숨을 골랐다.
'이제 남은 건 우리 4번 백인대, 그리고 7번 백인대뿐인가.'
시선을 돌려 전장을 주시했다. 그리고 보인다.
"다음 백인대를 친다! 내 주위로 모여!"
적 기병대를 지휘하는 지휘관 놈. 백여 기의 기병을 통솔하고 있으니 , 아마도 계급이 기병 연대장이 리라.
결심했다.
'놈을 처치한다.'
기병은 고도로 훈련된 정예군이다. 놈들은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지휘관의 지휘에 따라 집단적인 공격력을 발휘한다.
즉, 지휘관이 몹시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일반 보병에게도 지휘관 이중요하지만 기병들에게는 더더욱 말이다.
그런 놈들의 지휘관을 처치한다 면.
놈들의 공세를 약화시킬 수 있을 터.
"후우."
숨을 고르며, 지면에 있는 창을 주워들었다. 내가 미리 챙겨왔던 일반 보병창이었다.
그것을 들고 숨을 고른다.
'투창.'
내가 유일하게 적 기병을 타격할 수 있는 방법이다.
창을 쥐어 들고, 전신의 근육을 긴장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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