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idade 3

나는 목청을 돋웠다.
"가라! 가서 모조리 다! 죽여버려 라!"
지금 돌진하는 아군의 수는 고작 오십여 명에 불과하다.
반면 적의 수는 약 백여 명.
거의 두 배에 달하는 숫자다.
허나 지지 않을 것이다.
적은 갑작스러운 화살공격에 흐트러져있다. 게다가 놈들은 그 허접 한 공국군. 제대로 된 훈련도 변변 찮은 장비도 없는 허접쓰레기들이다.
하지만 이쪽은 정규군이다.
오랜 훈련 기간, 더 나은 장비. 더해 이쪽은 완벽한 통제를 되찾았다.
절대 질 수가 없다.
- 콰앙!
제국 병사들이 적진으로 난입해 창과 검으로 공국군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잘 통제된 오십의 충격력이 허술한 공국의 전열을 깨부숴 들어 간다.
지휘관이랍시고 뒷짐 지고 있을 생각은 없다. 나 또한 병사들과 함께 놈들의 전열에 난입했다.
다리로 지면을 박차고, 앞으로 도약했다. 당혹에 찬 공국 병사들의 모습이 시야에 잡힌다.
"뒈져!"
쉬익!
검을 찔러 넣었다. 민첩이 드디어 20을 돌파한 덕분일까.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빠른 쾌검이 발현되었다.
시퍼런 검광이 적을 향해 파고들었다.
콰직. 공국 병사의 모가지를 파고들어 가는 나의 검날. 적병의 목에서 피 분수가 치솟는다.
녀석을 발로 차 쓰러뜨리며, 검 날을 회수. 또 다른 적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다른 적의 옆구리에 검날이 파고 들어갔다. 손잡이를 비틀어 장기를 난자한다. 놈의 입에 피거품이 올라 왔다. 녀석을 지나치며 외친다.
"적 지휘관은 어디 있나!"
달려 나가며 계속해 적병을 베었다.
하나, 둘, 다섯, 일곱. 내 앞을 가로막는 공국 병사들을 베고 죽이며, 앞으로 전진해갔다. 절삭음과 고통에 찬 비명이 청각을 어지럽힌다.
일개 병사들은 결코 나를 막아내지 못했다.
그렇게 몇이나 베었을까.
"망할! 물러서지 마라!"
공국 병사들 사이, 보였다.
유독 화려한 갑주를 입고 있는 이의 모습. 그리고 그 갑주의 투구 와 가슴팍에는 공국군 백인장 마크 가 선명하게 아로새겨져 있다.
미소가 흘러나왔다.
"찾았다."
내가 나직이 읊조리는 동시,
- 띠링!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루디아 램퍼][공국군 증강백인장]
기억에 없는 이름이다.
그럴 수밖에. 백인장이라곤 하나, 게임 초창기에 죽어버린 녀석이다. 기억할 가치도 없는 잡몹일 터.
분명 가진 능력도 변변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놈이 가진 계급은 백인장 이다. 잡는다면 나름의 전공이 되리라.
"후욱."
숨을 한껏 내쉬며, 돌진했다. 내가 향하고자 하는 곳은 적장이 서 있는 중앙.
가로막는 공국군이 좀 많다. 하지만 괜찮다.
나는 혼자가 아니니까.
콰앙! 콰직!
내 돌진을 인식한 것일까. 바로 주위에 있던 병사들 또한 내 양옆을 보좌해줬다.
기다란 창날이, 날카로운 검광이. 내가 향하는 방향의 적병을 배제해 간다. 나는 열린 길을 따라 계속해 달려나간다.
"도망치지 마라! 빌어 처먹을 새끼들아아아!"
놈이 악을 내지르는 것이 또렷이 보였다.
루디아 램퍼. 공국군 백인장. 녀석은 지금 명백히 분노해있다. 겁먹 은 공국군이 하나둘 전열을 이탈하고 있기에.
사실 같은 지휘관인 입장으로서 약간의 측은한 감정이 올라왔다. 지휘하는 병사들이 제국군 같은 강군 이었다면 전열이 이리 쉽게 무너지 진 않았을 터다.
하지만 부하를 잘 만나는 것은 운이다. 그리고 운도 실력. 녀석을 봐줄 생각은 없다.
파앙!
검을 휘두르며 발걸음을 옮겼다.
잡병이 하나둘 피 흘리며 쓰러져 간다. 내 검날은 민첩하게 가로막는 적을 하나둘 배제해갔다. 검광이 번 뜩일 때마다 나와 놈 사이를 가로 막는 병사가 쓰러져간다.
그렇게 몇의 공국 병사들을 베어 지나치자, 나는 마침내 적 지휘관의 지척에 이를 수 있었다.
놈이 나를 발견했다.
"너는…!"
이쪽을 확인한 녀석의 얼굴에 경악이 떠오른다. 나는 무어라 말하지 않고, 그저 검을 내찔렀다.
파앙!
파공성. 그리고 곧게 나아가는 검광. 일개 병사들은 결코 막을 수 없는 검격이다.
허나, 꼴에 백인장이라는 것인가.
채앵!
놈이 기민하게 반응해 내 검격을 막아냈다.
녀석의 검술은 나름대로 출중했다. 적어도 내 공격을 막을 수 있을 정도라니. 일개 병사 수준의 무력으로는 결코 불가능한 일.
놈이 내 검날을 비껴치고는 순식간에 반격해온다.
"병사 주제에, 감히 나를 노리는 것이냐!"
검날이 사선으로 내리쳐진다. 그에 검신을 비스듬히 치켜들었다.
키기기기기기직!
녀석의 검날이 내 검신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갔다.
무난한 홀리기.
그러나 놈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죽어라! 죽어!"
녀석이 계속해 검을 휘둘러 공격 해왔다. 중갑을 입은 만큼 근력은 출중한 것일까. 놈의 검격은 그리 빠르지 않았지만 실린 힘이 퍽 중 후했다.
쾅! 콰앙!
파공성과 검격음이 쩡쩡 울려댔다. 나는 놈의 모든 공격을 막아내 거나, 흘려냈다.
확실히 백인장이기에, 나름의 무력을 지니고 있다. 더해 꽤나 높은 수준의 근력까지. 묵직한 충격이 내 검신을 계속해 두드린다.
하지만.
'뭐. 이 정도인가.'
그래봤자 나에게는 안된다.
재차 기세를 끌어올린다.
- 띠링! 띠링!
['엑스트라 스킬 : 집중'이 활성 화됩니다.]
['엑스트라 스킬 : 전투분석'이 활성화됩니다.]
드디어 엑스트라 스킬이 발동되었다. 그러자 내 오감이, 온몸의 감각이 날카롭게 벼려져 절호조에 달 한다.
사고가 가속되었다. 온몸의 피가 들끓는다. 그리고 녀석의 검이 쇄도 해오는 것이 또렷이 보였다.
이제는 익숙해져버린 집중 스킬 의 가속효과.
'이만 죽어라.'
가속된 사고 속. 검을 움직였다.
집중이 능력을 증폭시켰다. 전투 분석이 놈의 자세를 읽고 드러난 허점을 찾았다. 검술 스킬이 검로를 인도했다.
검을 당기고, 자세를 낮췄다. 하체에 힘을 모은다.
그리고 쏘아지듯, 검을 내찔렀다.
- 콰앙!
터져 나오는 파공성. 공간을 꿰뚫는 한 줄기 검광.
검날이 녀석의 검신을 스치듯 지나쳐, 놈의 목을 꿰뚫었다.
퍼억!
붉은 피가 후드득 튀었다.
"커…'?!"
목이 꿰뚫린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인가. 놈이 검을 들어 올려 다시 나를 치려 한다. 하지만 녀석 의 손아귀에는 힘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다.
탱그랑.
결국 놈의 손에 들려있던 검이 떨어지고, 무너지듯 바닥에 쓰러진다.
"지휘관 처치."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나는 성장했다. 이제 공국 백인장 정도의 적이라 한들, 내적수가 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백인장을 죽인 건 처음이군."
중얼거리며 검을 뽑아들고는, 주위를 살폈다.
어느새 내 주위에는 제국군 병사들밖에 없었다. 보이는 공국 놈들이 라곤 주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뿐.
조금 더 떨어진 곳으로 시선을 던지니 제국 병사들이 계속해 공국 병사들을 몰아붙이고 있다.
'완전히 압도하고 있어.'
예상대로였다.
제국군에 밀린 공국 전열이 뒤로, 뒤로 물리다가 결국 완전히 붕 괴되었다. 놈들이 뿔뿔이 흩어진다. 도망치는 공국군을 제국측이 추격 한다.
"백인장님!"
내가 그 꼴을 멍하니 주시하고 있을 때, 한 병사가 다가왔다.
4번 전투조장 라이들렘이다.
녀석이 감탄한 눈으로 말해왔다.
"방금 전 모습을 봤습니다. 단신 으로 적 장교를 처치하다니, 대단하 셨습니다!"
"그러냐. 일단 현황 보고부터."
"알겠습니다!"
처억. 녀석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경례했다.
나 또한 병사이니만큼 평대를 할 법한데, 어째 존경심 가득한 눈치다. 방금 전 내가 보인 모습이 그만큼 대단하게 여겨진 듯했다.
"현재 적의 전열을 완전히 파훼 했고, 남은 잡뉘湧?뒤로 도망치고 있습니다."
"전투피해는?"
"아군의 피해는 아직 정확히 확인할 순 없지만, 경미합니다. 도망 치는 공국 놈들을 추격한다면 완전 섬멸할 수 있습니다."
"좋아."
부응! 검을 휘둘러 피를 털어냈다. 붉은색 핏물이 녹음 어린 대지 위로 후드득 떨어진다.
"나머지 잔당들까지 추격해 모조리 죽여 버려라. 굳이 살려줄 이유는 없겠지."
"알겠습니다!"
라이들렘이 재차 경례하고는 뛰어갔다. 이제 내지시는 다른 전투 조원에게도 전파되어 공국 놈들을 계속해 추격할 것이다.
나는 군복 소매로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제 전쟁인가."
이거점 점령전 미션이 전면전 전 마지막 퀘스트였다. 다음 전투부터 군단 규모의 전쟁을 볼 수 있으 리라.
"자, 그럼 이제 남은 건…."
시선을 돌려, 거점 한 켠에 설치 중 방치된 '비콘'을 바라봤다.
비콘. 마나를 이용해 좌표 정보 와 음성을 송수신하는 , 군사용 마법 아이템.
그것이 공터 한 켠에 덩그러니 자리해 있다.
나는 천천히 그곳으로 향했다.
"몇 포인트나 받을 수 있으려나."
와해되었던 부대를 재규합했고, 백인대를 지휘해 승리했으며, 더해 적 지휘관까지 직접 처치했다.
나름대로 보상을 기대할 수 있을 상황.
이제 비콘으로 전투 결과를 보고 하면, 포인트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기대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20화.
"파트라헴 전진기지 총괄, 천인장 그레드입니다."
처억. 그레드가 경례했다.
그의 경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절도 있고 정확했다. 그만큼 그의 앞에 자리해있는 상관들이 모두 대 단한 이들이었기 때문에.
그레드의 긴장한 눈이 앞으로 향했다.
"천인장. 그동안 수고 많았다. 앞 으로 자네의 천인대와 전진기지는 우리 제 3군으로 병합되었다."
짙은 갈색 머리를 지닌, 중후한 분위기를 품은 중년 남성이었다. 그 의 제복 가슴팍에 달려있는 호화로 운 약장이 빛을 반사해 반짝였다.
"오스카 디 로드게리스. 3군단장 이다."
그가 손을 뻗어 악수를 청했다. 그레드는 굳은 눈으로 자신의 상관을 바라보며, 손을 맞잡았다.
'오스카 디 로드게리스.'
후작작위를 가진 고위 귀족이자, 명망 높은 군인이었다. 북부에서도 최고 정예군이라 일컬어지는 제 3군단의 최고지휘관.
오스카와 악수를 마친 뒤,
"볼로냐 전투기사단장. 베르겐 라 프랜시스다."
다른 이가 입을 열어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화려한 중갑을 입고 있는 기사였다. 그의 중갑 가슴팍에는 여러 화려한 장식 사이, 붉은색 킬 마크가 빽빽이 아로새겨져 있다. 그만큼 네 임드 기사를 처치한 강자라는 소리.
그레드는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베르겐 라 프랜시스.'
볼로냐 전투기사단의 단장, 베르 겐. 그 또한 백작위를 가진 고위 귀족 중 하나였다.
특이하게도 그는 아직 중년의 나이에도 불구, 머리가 하얗게 세어있었다.
그레드의 시선이 다음 상관에게 로 향한다.
"나는 알고 있겠지, 그레드?"
라브리에 전투마법단장 제피르. 그는 여전히 궐련을 뻑뻑 피워대며 회색 연기를 뿜고 있었다.
그레드는 자신의 앞에 자리해있는 상관의 모습들을 똑똑히 망막에 새겨 넣으며, 나직이 긴장의 한숨을 내쉬었다.
'군단장, 기사단장, 전투마법단장 이라.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군.'
무려 단급 부대의 수장이 세 명 이나 모여 있는 상황이다. 더해 그 들 모두가 전장에서 구를 대로 구 른 정예 중의 정예.
천인장인 자신은 결코 범접할 수 없는, 강대한 무력과 날카로운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다. 그가 위축되는 것은 당연한 일.
잠시 그레드를 주시하던 오스카가 입을 열었다.
"좋아. 천인장 그레드, 보고해주 게."
그가 시선을 돌려, 집무실의 어떤 것을 주시했다.
"먼저 기지와 병력 현황부터."
오스카가 바라보는 것은 지도. 다름 아닌 테이블 위에 자리해있는 커다란 전술지도였다.
그에 그레드가 고개를 주억였다.
"명령을 받듭니다. 군단장 각하."
굳어있는 것은 처음뿐. 그는 보고할 때가 되자 곧장 긴장을 훌훌 털어버리고는 자신의 본분을 다하기 시작했다.
상관에게 하는 보고는 그가 일개 병사일적부터 천인장에 이른 지금까지 항상 하던 일이었다.
그가 전술지도의 구석구석을 가 리키며 보고한다.
"저희 파트라헴 전진기지의 증축 은 완료되었습니다."
그레드의 시선이 파트라헴 구역 으로 향했다. 지도에 자리해있는 기 지의 크기는 몹시 커져 있었다.
기존 천인대 규모의 인원을 수용 할 수 있던 기지가 증축에 증축을 끝없이 거듭해 더욱 대규모로 바뀌어 있는 것이다.
"방어시설, 부대시설, 그리고 창고와 도로망까지 완벽하게 정비했습니다. 앞으로 있을 북진의 병참을 완벽하게 지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말에 주위 상관들이 고개를 주억였다.
파트라헴 전진기지의 증축.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공국군의 침공을 틀어막는 가장 최전선의 요새이자, 아군의 보급로 를 확보할 수 있는 위치.
파트라헴은 전략적 요충지였다.
"수고했다. 이런 단기간에 대규모 증축이라니. 쉽진 않았을 터인데."
"공병대가 힘써준 덕분입니다."
사실 파트라헴을 이리 단기간에 증축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 이었다. 천인대 수준의 전진기지를 군단 규모로 바꾼 것이니.
많은 자원이 단기간에 집중된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제국 황제는 공국을 순식간에 제 압해버리기를 바란다. 그렇기에 정 예인 3군단과 볼로냐 기사단, 그리고 라브리에 마법 전투단을 급파했다.
"오천여 명에 달하는 공병이 있어서 빠르게 기지 증축이 가능했습니다."
그런 황제의 의향은 파견한 공병 대의 수로도 나타났다. 기지를 증축 하고 도로를 닦는 공병 약 오천여 명을 곧장 파견했던 것이다. 그들이 있었기에 파트라헴은 단기간에 군단 규모 기지로 확장될 수 있었다.
"천인장. 그럼 적의 동향은 어떤 가. 놈들이 침공해오는데 얼마나 더 걸릴 것 같나?"
오스카가 그리 물으며 다시금 시선을 지도로 향했다. 그에 그레드는 아무런 머뭇거림 없이, 곧장 대답했다.
"최소한 일주일 안으로 침공해 올 겁니다."
그가 손가락을 돌려 지도의 북쪽 방향, 공국군 주력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기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군단 규모의 적을 상징 하는 커다란 깃발 모형, 그리고 마법사와 기사 모형이 놓여있다.
"근 일주일 동안 집중정찰을 해 온 결과, 공국 놈들이 마법사 병력 뿐만 아니라 기사 병력까지 완전히 편제한 것을 파악했습니다. 게다가 병참선까지 완전히 정비해놨지요.
공국의 대규모 공세 준비가 완성되 었습니다. 이르면 내일, 늦어도 일주일 안에 놈들이 침공해올 것입니다."
그레드의 말에 오스카가 고개를 주억였다. 군단장인 그의 눈으로 보 아도 지도의 정보는 공국군의 공세 가 목전이라는 확신을 갖기에 충분했다.
그레드와 오스카의 회의가 점차 길어져 갔다. 지도의 여러 곳을 가 리키며 그레드가 보고했고, 오스카는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질문했다.
그들이 회의에 열중하는 그때였다.
- 우우우웅….
갑자기, 푸르른 빛이 아른거렸다. 그에 집무실 안에 있는 모든 이가 시선을 돌려 빛이 일렁이는 방향을 바라봤다.
빛을 발한 것은 집무실 한켠에 자리해있는 수정구. 비콘 수신기였다.
"…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그레드가 양해를 구하듯 오스카 를 바라봤다.
보고 도중 통신을 받아도 되겠냐는 물음. 지금 이자리에는 부관이 없기에 자신이 움직여야했다.
오스카가 고개를 끄덕여 허가하고, 그레드는 발걸음을 옮겨 수신기 로 다가가 통신을 받았다.
"파트라헴 천인장 그레드다. 갈랜 인가?"
그는 백인장 갈랜이 통신을 해온 것이리라 예상했었다. 고지대를 점 령하러 갔던 백인대는 갈랜의 지휘 를 따랐었으니 .
허나 그는 의외의, 그러나 익숙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4번 임시 백인장 한지훈입니다. 전투 결과 보고 드리겠습니다.
수신기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놀랍게도 한지훈의 목소리였다.
나는 비콘으로 다가갔다.
비콘의 외형은 다소 독특했다. 자그마한 제단 위에 올려져있는 수정구. 푸른색 기운을 어스레하게 품고 있는 그것에는 여러 기하학적인 문양이 아로새겨져 있다.
나직이 중얼거렸다.
"비콘이라."
비콘.
군에서 통신과 위치 정보를 송신 하기 위해 운용하는 마법 아이템. 현대 항공기 운항에 사용하는 TACAN (Tactical Air Navigation) 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물건이었다.
방향 정보와 거리 정보를 쏘아 보내 항공기 운항을 돕는 전술 항법 장비처럼. 비콘은 설치지점의 위치좌표를 송신해 마법사의 장거리 도약을 돕는다.
더해 마나통신 기능까지 달려있어, 전략적 요충지에 설치하는 물건.
"원래는 내가 다룰 수 없는 물건 이지만."
손을 뻗어 비콘을 마저 설치했다.
어째서인가. 나는 능숙하게 그것을 설치했을 뿐만 아니라 조작까지 할 수 있었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백인대 전투지휘술 스킬 덕분이 겠지.'
백인대 전투지휘술 스킬을 얻는 순간, 여러 지식이 내 뇌리에 주입 되었다. 그중에는 비콘의 설치와 조 작방법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비콘을 설치한 직후.
"4번 임시 백인장 한지훈입니다. 전투 결과 보고 드리겠습니다."
나는 곧장 통신을 보냈고, 곧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한지훈? 어째서 자네가 보고하는 건가? 갈랜은 어디 있지?
"갈랜 백인장은 전사했습니다."
간결하게 대답했다.
"갈랜 백인장과 차석은 적의 매 복에 의해 전사했습니다. 1번 척후 조장인 제가 지휘권을 계승, 백인대 를 지휘하고 있습니다."
- …백인장과 차석 둘 다 전사라. 꽤나 힘든 전투였겠군.
힘든 전투인 건 맞았다. 적이 강 해서 힘든 것이 아니라, 상관이 빡 대가리라 힘든 것이었지만.
그레드의 말이 이어진다.
- 좋아. 전투 결과를 보고하라, 한지훈. 거점은 어떻게 되었지?
"거점은 무사히 장악했습니다. 지금은 적 증강백인대를 완전히 제압 했고, 적 지휘관인 백인장을 처치했 으며, 잔당을 추격중입니다."
- 훌륭하다. 그의 말과 동시.
- 띠링!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서브 퀘스트]
[고지대 거점을 확보하라.] (완료)
[서브 퀘스트 - '고지대 거점 점 령전'을 '훌륭하게' 완수했습니다!]
[시나리오보다도 더 높은 점수를 얻었습니다. 포인트가 추가로 정산 됩니다!]
[정산 포인트 : 10pt]
[추가 정산 포인트 : 20pt]
(남은 포인트는 30pt입니다.)
30pt를 얻었다. 예상보다도 더욱 많은 포인트다.
다음 미션을 꽤나 여유롭게 준비 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기분 좋아 미소 짓는 그때,
- 한지훈.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제국은 공국과의 전면전을 목전에 두고 있다.
그레드의 말이 계속해 비콘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입가의 웃음을 추스르고는, 그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 그곳은 우리 마법사들이 배치 될 중요 거점이다. 이해했나?
"이해했습니다. 천인장님."
- 그래. 그곳을 사수해야 한다. 하지만 공국측의 병력과 조우했다는 것을 보아, 공국 놈들도 해당 거점을 노리고 있을 거다.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사실이었다. 내가 백인대 를 운용해 거점을 장악하긴 했으나, 곧 공국 놈들 또한 이거점을 노릴 터였다.
훌륭한 시야, 방어에 유리. 양측 모두가 탐낼 만한 요충지이니.
- 삼백 명 규모의 지원군을 보내 겠다. 아마 내일 아침 무렵에 도착할 것이다. 그들이 있다면 공국측이 다시 거점을 노리더라도, 능히 방어 해낼 수 있겠지.
내일 아침 무렵 도착이라면, 야간행군까지 감수하며 병력을 보내 겠단 소리였다. 지휘부가 이거점을 꽤나 중요하게 여긴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
역시 제국군은 무능하지 않다. 그들은 요충지의 중요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 그리고, 한지훈. 축하한다.
그때 그레드가 말했다.
- 본래라면 당장 정식 백인장을 그곳으로 파견해야 한다. 임시 백인 장인 자네는 정식 군사 교육을 받은 적이 없기에, 사관으로서의 자격 이모자라기 때문이지.
무언가 중요한 말을 하려는 것일 까. 그레드의 목소리가 퍽 중후하다.
- 하지만 현재 파트라헴에는 남는 백인장 사관이 없다. 더해 지금은 전면전을 앞에 둔 급박한 상황. 평시처럼 새로운 지휘관을 보낼 수 없다.
물론, 나는 그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알고 있다.
- 천인장의 전시 인사권한에 따 라, 자네를 정식 백인장으로 인정한다. 한지훈, 4번 백인대를 계속 지휘하라.
"알겠습니다. 천인장님."
내지휘권의 인정.
이로서 나는 천인장에게 당당히 인정받은, 정식 백인장이 되었다.
"4번 백인대장 한지훈. 명령을 받듭니다."
- 띠링!
홀로그램 속, 내 계급이 변화한다.
[한지훈][4번 백인장]
'임시'가사라진 '정식'으로.
나는 완전한 백인장이 되었다.
그때였다.
- 띠링!
재차 알림음이 울리고,
[업적 달성!]
['업적 : 백인장'을 달성했습니다! 포인트가 수여됩니다.]
[정산 포인트 : 10pt]
(남은 포인트는 40pt입니다.)
처음 보는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21화.
보고 직후. 나는 전장을 정리했다.
전사한 병사들의 시신을 수습했다. 천막을 세워 야영 준비를 서둘 렀으며, 비콘을 사용해 위치좌표까지 본영으로 전송하기도했다.
그렇게 병사들을 지휘해 거점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백인장님. 이걸 봐주십시오."
한 병사가 나무상자를 들고 내게 다가왔다. 나는 무슨 일이냐는 듯 녀석을 주시하고, 녀석은 꺼림칙한 얼굴로 상자를 건넸다.
"전장을 정리하다 발견한 물건인 데…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말입니다."
상자를 받아들었다. 뭐가 들어있는 건지 몰라도, 꽤나 묵직하다.
금화 같은 거라도 들어 있으려 나.
나는 기대하며 상자를 열었고, 고
"Q w 표정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상자 속에는 전대 백인장인 갈랜 의 목이 잘려 담겨있었다. 아마 전공을 증명하기 위해 수급으로 보관 한 것 같은데. 퍽 징그러워 역겨웠다.
상자를 닫으며 중얼거렸다.
"이 쓰레기 새끼는 죽어서도 기분 더럽게 하네."
상자를 병사에게 돌려주며, 몸통 이랑 같이 찾아 잘 수습해놓으라고 지시했다.
갈랜이 쓰레기인 것과는 별개로 놈은 귀족이다. 기껏해야 남작위에 불과하지만, 일단 귀족인 만큼 수습 은 해놔야 하리라.
내가 그렇게 전장을 하나둘 정리 해갈 때. 다른 병사가 와서 보고해 왔다.
"백인장님! 살아남은 공국 포로 를 데려왔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 니까?"
척 경례하며 알리는 병사. 나는 병사의 뒤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줄줄이 굴비 엮듯, 밧줄에 묶인 포로 대여섯 명이 자리해 있었다.
그것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포로."
아마도주 중 투항한 공국 병사들인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그곳으로 다가가,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일단 꿇려."
털썩!
포박된 포로들이 병사들에 의해 눌려 무릎 꿇려졌다. 나는 녀석들을 바라보며 하나하나 물었다.
"이중 귀족인 자는 없나?"
당연히 없을 것이다. 귀족이었으 면 장교 계급으로 복무했지 이렇게 평범한 병사로 전장을 구르진 않았을 테니.
포로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살폈다. 녀석들은 두려운 것일까. 내 눈길이 닿는 족족 고개를 아래로 처 박고, 어깨를 떨어댔다.
다시 물었다.
"혹은 십인장 이상 지휘관인 자 가 있나?"
녀석들의 군복을 살폈다. 역시나 지휘관 계급장을 단 포로는 없다.
마지막으로 물었다.
"공국측의 중요 정보를 알고 있는 놈. 없나?"
역시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나는 고개를 주억이며 지시했다.
"모두 죽여."
"……!"
"살려주십시오!"
"맙소사! 제발!"
내 말에 포로들이 경악하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들이 오열하듯 목숨을 구걸한다.
하지만 나는 재차 지시했다.
"살려줄 이유가 없지. 죽여라."
나는 인도주의자가 아니다. 하물 며 이 세상에는 제네바 협약 같은 고상한 조약도 없다.
몸값을 받을 수 있는 귀족도 아니고, 지휘관도 아니며, 심지어 뽑아낼 정보도 없는데 .
포로를 살려줄 이유. 없다. 저렇게 살려놔 봐야 식량을 소모할 뿐 이니.
나는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돌려, 임시로 설치된 지휘관 천막으로 향했다.
푹. 콰직.
등 뒤로 병사들이 포로들을 베고 찌르는 소리가, 그리고 째진 단말마 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지휘관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후우!"
경갑을 해제하고 투구를 벗어 구석에 내팽개쳤다. 그리고는 임시 침 구류에 몸을 눕혔다.
일반 병사들의 천막보다 더욱 커다란 백인장 천막. 그곳에 나는 누 워 있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내 정보."
- 띠링!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한지훈][제국 백인장]
[스킬 : 백인대 전투지휘술]
[스킬 : 제국 검술(하급)]
[엑스트라 스킬 : 집중]
[엑스트라 스킬 : 전투분석]
[근력 14]
[민첩 23]
[내구 5]
[체력 9]
[마나 0]
(남은 포인트는 40pt 입니다.)
그동안 성장한 내 능력치가, 홀로그램의 형식으로 시야에 자리했다.
시선을 내려 어떤 부분을 주시했다.
(남은 포인트는 40pt 입니다.)
여유 포인트가 무려 40pt.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이 보유하게 된 포인트다.
그것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상해."
보고가 끝난 직후, 포인트를 수 령 받았을 때.
그때는 마냥 기분이 좋았다.
이 세상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한다. 여러 강적을 해치우고, 퀘스트를 공략하며 능력치를 상향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포인트. 이 염병할 게임 속 세상에서 나를 강화시켜주는 시스템의 보 정이다.
그렇기에 잠깐이나마 기분이 좋았었다.
40pt.
꽤나 많은 포인트다. 이 정도 포인트가 있다면, 지금의 나와는 비교 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질 수 있다.
하지만.
"정말 이상해."
곰곰이 생각해볼수록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째서 이렇게 포인트를 많이 퍼주는 거지?'
지금 시점은 게임으로 따지자면 튜토리얼에 불과했다. 소설로 따지 자면 도입부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초반에 불과한 상황.
헌데 벌써부터 포인트를 이리 많이 퍼준다니.
말이 안된다.
"업적 포인트라."
조금 억지 같지 않나?
고작 백인장으로 진급했을 뿐이었다. 헌데 시스템에서는 업적 포인트랍시고 10pt를 더 얹어 줬다.
절대 이런 게임이 아니었는데 .
[블랙 오케스트라.]
현실에 있을 적. 내가 그것을 클 리어 하긴 했지만, 더럽게 어려운 게임이었다.
불친절한 UI. 쓸데없이 세세한 명령. 점차 강대해지는 적. 빈약한 아군. 제한된 정보량. 시시때때로 튀어나오는 이벤트.
절대 쉬운 게임이 아니다.
클리어 한 것은 내 실력, 그리고 운이 따라준 결과물이었다. 만약 운 이 조금만 안 따라줬다면, 그리고 내 실력이 조금만 뒤떨어졌다면 결코 그 게임을 클리어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 나는 기억하고 있다.
[유저의 점수가 너무 높습니다!]
[난이도를 조율합니다.]
검은색 공간 속. 난이도를 변경 한다는 통보.
[적정 난이도 : 악몽 (Nightmare)]
[난이도를 변경합니까?]
[수락/거절]
난이도 이름이 '악몽(Nightmare)' 이라고했다. 그 괴랄할 정도로 어려운 게임이, 더욱 어려워졌다.
헌데 지금의 나는 잘 해나가고 있다.
백인장으로 진급했다. 스킬과 능력치를 해금하고 상승시켰다. 여유 포인트 또한 40pt에 달했다.
이 정도의 스펙이라면, 게임의 초반부쯤이야 아주 쉽게 헤쳐 나갈 수 있을 정도.
하지만 그럴수록 의문이 든다.
"이렇게 쉬운 게임이 아닐 텐데."
본래는 포인트를 받은 즉시 사용 하려고 했었다. 이 정도 포인트를 가지고 있다면 완벽하게 다음 퀘스 트를 클리어 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많은 포인트를 준다는 것은 그만큼 앞으로 일어날 일이 어려워서가 아닐까.'
섬뜩한 생각이었다.
물론 나는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알고 있다.
어째서 공국이 침공해온 건지. 그이면의 배후가 어떻게 움직이는 지. 공국을 멸망시킨 다음의 복잡해 지는 전황, 뒤이어 일어날 일들. 점차 등장하는 강적.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모니터 너머로 겪었으니까.
때문에 확신하고 있었다.
이 게임 속 세상에서, 내가 했던 방향대로 일이 흘러갈 것이라고.
하지만 정말 그럴까.
난이도가 바뀌었다. 그리고 그 말은 시나리오 따위야 얼마든지 바 뀔 수 있다는 소리.
"… 빌어먹을."
왠지 느낌이 좋지 않다.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포인트를 주시했다.
(남은 포인트는 40pt 입니다.)
여유 포인트창. 그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당장이라도 소모해버리고 싶은 충동이 든다.
어차피 미래 일어날 일을 알고 있다. 지금 당장이라도 어떤 능력치 를 얼마만큼 올려야 보다 유리하게 게임을 진행할 수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허나.
포인트를 소모하는 것이 꺼려진다.
게임을 할 적의 나는 신중했다.
얻을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취한 다음에야 움직였다. 전장의 안개 너머 자리한 적의 움직임을 끝없이 추측하고 예상했다. 신중하고도 정 교하게 병력을 움직였다.
그렇게 해서야 겨우 게임을 클리 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너무 방심 하고 있지 않나.'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알고 있는 시나리오가 비틀리고 더욱 어렵게 바뀔 것 같은 예감. 짙은 안개가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만 같은 불쾌한 감각.
혹,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포인트는 아껴놓자."
너무 예감이 안 좋다.
결국 나는 포인트를 사용하는 것을 뒤로 미뤘다.
홀로그램을 꺼트리고, 눈을 감았다. 어지러운 머리가 점차 진정되어 갔다.
점차 밤이 찾아온다.
- 띠링!
[시스템 관리자가 시나리오에 개 입합니다.]
잠결에, 어떤 환청을 들은 것 같다.
"부르셨습니까, 공작 각하."
살풍경한 집무실. 그곳의 문을 어떤 청년이 밀고 들어왔다. 기다란 갈색 장발을 가진 이였다. 허나 그 의 장발은 중간에서 볼품없이 잘려 흐트러져 있었다.
한스 요한바르첸. 공국의 후계자 이자, 한지훈과 대등한 전투를 벌였던 이.
그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한 노인이 차가운 눈으로 그를 주 시한다.
"왔느냐. 쓸모없는 놈."
공국의 지배자. 헤임스 요한바르 첸 공작.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 한스에게 접근한다.
쯧. 공작이 혀를 차며 중얼거린다.
"패배한 개나 다름없군. 일개 병사 하나 죽이지 못하다니."
헤임스의 말에 한스는 무어라 항 변하지 못했다.
검은 머리의 병사 때문에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던 것. 명확한 사실이 었으니까.
헤임스는 냉엄한 눈으로 한스를 주시하고, 한스는 그저 침묵해 아비 의 차가운 시선을 감내한다.
집무실에 침묵이 인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네놈은 이제부터 백인장이다."
문득, 헤임스가 그리 말했다.
그에 한스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분명 한스는 일개 제국 십인대 하나 처치하지 못하고, 거점 확보조차 하지 못한 채 귀환했다. 그렇기에 그는 더욱 심한 처벌이 뒤따를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헌데 처벌은커녕 오히려 진급해 백인대를 지휘하라니. 무슨 일인 것 일까.
아직 해임스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야습을 준비하라. 우리는 오늘 새벽, 군단을 진군시킬 것이다."
"공작 각하, 그게 무슨 말씀이십 니까? 본래라면 일주일 뒤 침공 아니었습니까?!"
한스는 당황해 물었다.
한스는 헤임스 공작의 아들이자, 공국의 후계자였다. 그렇기에 그는 대략적인 전쟁 계획을 알고 있었다.
본래 공국군의 침공일은 일주일 뒤였다. 그때쯤 모든 부대의 재정비 와 병참선이 완성되기 때문이었다.
일주일 뒤, 공국의 군단병력이 진군. 그와 동시 다수의 백인대가 고지대 거점을 장악하기 위해 산개 후 장악. 그것이 공국의 계획이었던 것이다.
헌데 지금 헤임스는 말하고 있다.
당장 몇 시간 뒤 공국 군단이 진군할 것이라고. 그리고 백인대를 지휘하라고.
갑작스럽게 바뀐 침공계획.
한스가 당황하고 있을 때. 헤임 스가 후욱,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뇌까렸다.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라니.
그에 한스는 불안한 눈으로 제 아비를 주시하고, 헤임스는 멍하니 이어 말했다.
"갑작스레 목소리가 들렸다. 계획을 수정해야 한다고. 일주일 뒤 진군하는 것은 오직 패배뿐이라고. 지금 당장, 가능한 빠르게. 군을 진군 시켜야 한다고…."
헤임스의 목소리에서 점차 기운 이 빠져나간다.
그리고 한스는 볼 수 있었다.
헤임스의 눈동자가 점차 풀려간다. 마치 약에 취한 사람처럼 초점 이 흐트러지고 생기가 흐릿해진다.
"당장… 진군해야… 한다."
헤임스는 그렇게 뇌까리고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의 눈동자는 어느새 평소처럼 또렷하게 되돌아와 있다.
"한스. 네놈은 증강백인대를 움직여라. 가문 친위대인 바첼부대 병사 삼백을 주지."
"…저도 본대와 함께 진군합니까?"
한스는 갑작스런 헤임스의 변화에 당황스러웠지만, 무어라 지적하지 못했다. 그 변화가 아주 일순간에 불과했으므로.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임무를 물어볼 뿐.
그에 헤임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너는 본대가 아닌, 다른 곳을 노린다."
"다른 곳이라 하시면."
"네놈이 꼴사납게 쫓겨났던 곳이다."
한스가 흠칫, 몸을 떨었다.
"제국 놈들이 고지대 거점을 점 거했던 우리 군을 몰살시켰다. 필시 그곳에 마법사를 배치할 요량이겠지. 하지만 어림없다."
그가 날카롭게 웃었다.
"네놈은 아군 주력이 출발하는 것과 동시, 삼백의 병력을 이끌고 그곳을 탈환하라. 놈들이 마법사를 부르기도 전에 그곳을 몰살시켜버린다."
한스는 멍한 눈으로 제 아비를 바라봤다.
무언가 심상치 않았다.
갑작스러운 계획의 변경, 헤임스 의 이상한 행동, 그리고 눈가에 일 렁이는 미약한 광기까지.
그는 꺼림칙한 감정을 숨기며 경 례했다.
"명령을 받듭니다. 공작각하."
"썩 꺼져라. 거점을 탈환해라. 반드시, 네 목숨을 걸고."
덜컹.
한스는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는 기묘한 불안감에 표정을 찌푸 렸지만, 재차 발걸음을 옮겼다.
명령받은 이상 따라야 한다. 아 비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곧 제국 침공이 시작된다.
22화.
"백인장님!"
나는 눈을 떴다.
지휘관 천막 안에서 잠시 누워 있던 와중, 깜빡 잠들었던 것 같다.
고개를 털어냈다. 잠기운에 몽롱 하던 정신이 점차 또렷해진다.
"백인장님! 나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펄럭!
누군가가 지휘관 천막을 젖히며 들이닥쳤다. 다름 아닌 카일이었다.
녀석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러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다급 함에 가득 찬 녀석의 눈동자.
"망할."
직감했다.
뭔가 일이 생겼구나.
그것도 엿 같은 일이.
"카일. 안내해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장비를 착용하며 천막 밖으로 뛰어나갔다.
나와 카일은 달려서 거점 외곽으로, 침공로를 주시할 수 있는 감시 구역으로 달려갔다.
자리에 도착한 직후. 카일이 손을 들어올려 어딘가를 가리켰다.
"백인장님. 저길 보십시오."
녀석이 가리킨 방향을 주시했다. 그러자 보였다.
저 멀리 마치 꼬리를 잇듯 대량 의 불꽃들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이 고 있는 모습.
횃불의 줄이다. 수많은 병사들이 횃불을 들고 어둠을 헤치며 행군하고 있다. 그 규모가 너무나도 많다.
명백히 군단 규모의 행군.
"… 침공."
확신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공국 놈들은 대규모 공세작전을 시작했다. 군단 규모 의 병력이 예상 진군로를 타고 움직이고 있다.
공국의 제국 침공.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시나리오랑 달라.'
본래 공국군은, 일주일 뒤에 침공해왔어야 할 터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미래가 달라졌다. 놈들은 일주일 뒤가 아닌, 오늘. 그것도 새벽의 야 음을 타고 행군해오고 있다.
"어쩐지 예감이 안 좋더니."
불길한 예감은 어째 항상 맞는다. 시나리오가 달라질 것 같은 예감이 결국 적중해버렸다.
고개를 들어올려, 다시금 전진해 가는 불꽃의 줄을 바라봤다.
횃불을 들고 움직이는 대량의 적. 아무리 봐도 군단 규모다. 최소한 일만, 혹은 그이상의 병력이 움직이고 있다 봐야겠지.
"여기서 놈들을 주시해. 나는 보고하러 가겠다."
병사들에게 지시하고는 발을 굴 렀다.
파앙!
상향시켰던 민첩을 살려 빠르게 움직였다. 향하는 것은 비콘이 설치 되어있는 중앙 공터.
그곳으로 달려가는 와중, 여러 것들을 볼 수 있었다.
허둥지둥 경갑과 투구를 갖춰 입는 장병. 창과 검을 불안한 손으로 집어 드는 병사들. 그리고 저 멀리, 군단 규모의 진군에 압도당해 멍하 니 서 있는 이들까지.
나는 그들을 순식간에 지나쳐 비콘이 설치되어있는 공터에 도달했다.
곧장 통신을 시도했다.
- 우우우웅….
비콘의 수정구가 푸르스름한 빛을 일렁이며 활성화 된다. 통신이 연결된 것을 확인한 직후 다급하게 외쳤다.
"4번 백인장 한지훈입니다! 적의 침공을 확인했습니다!"
- 한지훈인가. 무슨 일… 잠깐, 뭐?!
수정구에서 그레드의 당황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쏟아내 듯 말했다.
"횃불을 들고, 야음을 타 월경해 오는 공국군 군단 규모 병력을 발견했습니다. 놈들은 예정된 침공로 를 따라 계속해 이동 중입니다."
- 염병할! 믿기지 않는군. 이토록 빠르게 침공해오다니. 확실한 가? 공국군이 움직이고 있나?
"확실합니다. 군단 규모의 월경입 니다. 놈들은 지금, 제국으로 침공 해오고 있습니다."
수정구 너머에서 한탄 어린 한숨이 흘러나온다.
나는 물었다.
"저희 4번 백인대는 어떻게 행동 합니까?"
퇴각할지, 혹은 이 위치를 계속 점거하고 있을지 묻는 질문.
물론 어떤 명령이 내려올지, 이미 나는 알고 있다.
- 한지훈. 자네의 백인대는 그곳을 사수해야 한다.
역시나.
- 곧 라브리에 전투마법단이 그리로 향할 것이다. 그리고 이쪽으로 진군해오는 놈들에게 폭렬마법을 갈겨주겠지.
원래 계획이 그러했다.
전투가 일어나는 즉시, 마법사들 이 고지대 거점으로 도약 마법을 발현해 이동한다. 그리고 침공로를 따라 움직이는 적 주력에게 폭렬마 법을 난사. 강력한 화력으로 놈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다.
게임 속에서도 이 세상에서도 바 뀌지 않은 개전 당시의 작전이다.
- 하지만, 마법사들이 초장거리 도약 마법을 시전하는데 나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레드의 목소리 뒤로, 여러분주한 소음이 일었다. 기지에서도 공국의 침공이 전파되어 전쟁을 준비 하고 있을 터.
- 한지훈! 마법사들이 도착하는데 약 2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그동안 거점을 방어하라. 비콘을 사수 하라.
그가 그리 말함과 동시,
- 띠링!
[서브 퀘스트]
[마법사가 도착할 때까지 거점을 사수하라.]
[남은 시간 : 120: 0이 퀘스트가 부여되었다.
거점 방어전. 마법사들이 이곳에 도착할 때까지 막아내는 임무다.
이를 악물며 답했다.
"명령을 받듭니다."
- 자네만 믿겠다. 한지훈.
통신이 끊겼다.
시선을 돌려 홀로그램을 주시했다.
[남은 시간 : 118: 37]
2시간. 마법사가 초장거리 도약 마법으로 이곳에 도착할 때까지 걸 리는 시간이다.
그때까지 이거점을 방어해야 한다. 그래야만 공국의 침공을 효과적 으로 저지할 수 있다.
후우.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서고는, 지시했다.
"전투 준비 끝난 십인대부터 보고해."
"1번 척후조! 이상 없습니다."
"2번 척후조. 이상 없습니다."
"3번 전투조. 이상 없…."
어느새 내 주위에 도열한 병사들이 차례로 보고한다. 나는 녀석들의 보고를 귀담아 들으며.
"개 같은."
욕지거리를 뇌까렸다.
시나리오가 점점 뒤틀리고 있다. 일주일 뒤에 있을 놈들의 침공이 지금, 너무나 일찍이루어졌다.
덕분에 이쪽은 전의 전투로 손실 이 있음에도, 충원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시나리오의 비틀림으로 인한 불이익.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게임 속 전장의 안개가 내 머릿속을 휘젓는 것만 같다. 다시금 미 지의 공포가 스멀스멀 싹틔워간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시나리오.'
그딴 것 없어도 게임을 이겨 왔었다.
이미 한번 클리어 한 게임이다. 그 시나리오가 바뀌었든, 난이도가 올랐든 나는 이겨낼 것이다.
과거의 내가 그러했듯이.
나직이 읊조렸다.
"백인대 전투지휘술. 활성화."
- 띠링!
['스킬 : 백인대 전투지휘술'이 활성화됩니다.]
이제 개같이 싸울 때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한스 요한바르첸. 재능 있는 젊은 검사이자, 요한바르첸 공국의 후 계자.
그가 긴장한 눈으로 사방을 살폈다. 주위는 야심한 어둠 속. 그리고 그 어둠을 몰아내듯 횃불을 든 수 많은 병사들이 도열해 있다.
무려 삼백에 달하는 수의 병사들.
모두 정예병들이었다. 징집제로 이루어진 공국군 중에서도, 모두 자원입대해 오랜 군 생활을 해온 이 들.
공국의 친위대. 바첼부대의 병사들.
강군인 제국 병사들에게도 뒤지 지 않을 정도로 단련된 이들이었다.
"모두 주목."
한스가 나직이 병사들을 불렀다. 각 조장들이 그를 주시한다.
그는 주위에 도열해 있는 조장들 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쳤다. 화르륵 타오르는 횃불이 반사되어 , 눈동자 가 붉게 일렁인다.
한스 아래에 배속된 십인장들.
그들을 향해 한스가 말했다.
"우리가 가야할 곳은, 저 산의 정상이다."
그가 손가락으로 어떤 산을 가리 켰다.
주위의 그 어떤 산보다도 더욱 높은 야산이었다. 주위 침공로와 진군 경로를 완전히 관측할 수 있는 곳.
한스의 말이 이어진다.
"분명 저곳을 장악한 제국군은, 마법사를 배치하려 할 것이다."
공국은 멍청하지 않다. 제국이 저곳에 마법사를 배치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진즉에 파악했다.
그만큼 지형이, 얻을 수 있는 시야가 너무나 좋았으니까.
"거점의 모든 제국군을 죽이고, 비콘을 파괴한다. 마법사가 거점에 도착하기 이전에 비콘을 부숴버리는 거다."
조장들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 이 세상에서 가장 강대 한 힘을 지닌 인간들.
그들의 신체는 기사들에 비해 훨씬 빈약할지언정 마나를 운용해 발현하는 마법의 힘은 몹시 강렬했다.
만약 저거점 위에 마법사가 배치된다면 공국군 주력은 순식간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게 될 터.
막아야 한다.
"병력을 두 개로 나눈다. 1번 부대는 정면으로, 2번 부대는 좌측으로 우회해 들어간다. 궁병대는 거리를 두고 따라와라."
백 오십여 명으로 나누어진 두 개의 부대가 방향을 나눠 움직인다.
진군하는 병사들을 바라보는 한스.
그가 문득, 손으로 목 부분을 더듬었다.
목 부분이 허전하다. 평소였다면 찰랑이며 손에 걸렸을 자신의 장발 이 잡히지 않는다.
저릿한 아픔이 올라왔다. 그의 상처는 이미 포션으로 완전히 치유 되었음에도 불쾌한 감각이 목덜미를 타고 올라왔다.
한스는 자신의 목을 더듬으며 누 군가를 떠올렸다.
'검은 머리의 병사.'
이름은 모른다. 하지만 녀석의 생김새와 느낌은 또렷이 기억해낼 수 있었다.
보기 드문 검은색 머리카락, 심 연에 가라앉아 있는 듯 짙은 암흑색 눈동자, 그리고 전신에서 뿜어지는 강렬한 패기까지.
일개 병사 주제에 자신을 죽음 직전까지 몰아붙였던 이다. 자연히 기억날 수밖에.
그는 목덜미를 재차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놈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 군."
근거 없는 직감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는 이번 전투에서 그 병사를 마주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한스가 이를 갈며 뇌까렸다.
"이번에는 죽여 버린다. 반드시."
검은 머리의 병사를 좌시할 생각 이 없었다.
죽여 버릴 것이다. 놈을 죽여 자신의 실수를 만회할 것이다. 다시금 아버지에게 인정받을 것이다.
그는 발걸음을 옮겼다.
삼백의 군사가 반으로 갈라져 산을 타고 오른다.
"그럼 그렇지."
나는 산 아래로 시선을 던졌다.
완전한 어둠 속에 파묻힌 산속 오르막길. 그곳에 꽤나 많은 수의 횃불이 산개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신중하게, 그러면서도 빠르고 신 속하게 산을 타고 접근해오는 횃불 들.
쯧 혀를 찼다.
'정예병들인가.'
험악한 산악지형을 타고, 횃불의 좁은 시야에 의존한다는 것이 믿기 지 않을 정도로 빠르다. 아마 공국 측에서도 고르고 고른 정예병력일 터다.
시선을 돌려 아군 병사들을 바라 봤다.
"적 부대가 접근하고 있습니다!"
"보이는 횃불만 백에 달합니다!
분명 이쪽으로 접근해오는 수는 그이상……"
"백인장님. 어떻게 합니까?!"
병사들이 겁먹은 듯 움츠러들었다.
이쪽으로 올라오고 있는 백여 개 의 횃불. 많은 수다. 모든 공국 병사가 횃불을 들지는 않는 것을 고려한다면 최소한 이백, 많으면 오백 의 병사들이 이쪽으로 향하고 있을 터.
병사들이 겁에 질리는 것은 당연 한 일이다.
그에 나는,
- 스르릉.
검을 뽑아들었다.
시퍼런 검날이 검집에서 빠져나 와, 달빛을 반사해 은은히 빛났다.
검날에 비친 내 눈동자를 바라보 며 병사들의 의문에 답한다.
"어떻게 하긴. 버텨야지."
비콘을 지켜야 한다.
비콘이 없다면 마법사가 없고, 마법사가 없다면 승리도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주력과 한참이나 떨어진 이곳이 승리의 분수령이 된 것이다.
검을 쥐어든 채 다시금 시선을 아래로 던졌다.
"보이는 횃불만 백여 개라. 적 병력이 최소 이백, 최대 오백은 되 겠어."
빌어 처먹을 정도로 많은 수다.
본래 시나리오에서라면 이미션에서 고작 백 오십의 적을 마주했을 터였다.
과거보다 적 병력의 수가 늘어났다.
"더해 이쪽은 증원도 없고."
녀석들이 너무 빠르게 침공을 시작했다. 이쪽으로 향하고 있는 증원이 아무리 빠르게 움직인다 한들, 시간 내에 맞춰 도착하기란 요원하다.
70을 겨우 넘긴 병사들. 그들을 움직여 최소 이백, 최대 오백의 적을 막아내야 한다.
거의 불가능한 미션.
하지만.
"다행히, 아주 최악은 아니야."
읊조리며 시선을 옮겼다. 시야 구석에 자리한 홀로그램이 보인다.
[남은 시간 : 101: 29]
1시간 하고도 40분만 더 버틴다 면. 이쪽이 이긴다.
적을 섬멸시키는 임무였다면 결코 승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적아의 전력 차이는 너무나 심 각했으니 .
하지만 지연전이라면 다르다. 비록 극심한 수적 열세를 안고 있지 만.
승산이 아예 없진 않다.
"게다가 포인트도 남아있고."
40pt. 이전 미션을 클리어 한 대가로 받은 무지막지한 보상을 아직 쓰지 않았다.
그것들을 모조리 사용한다면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는 능력을 가지게 될 수 있으리라.
"… 망할."
그래봐야 눈앞의 적이 버겁다는 사실은 변치 않지만.
전술창을 바라봤다. 홀로그램 속 떠오른 미니맵을 읽고, 지형을 파악 했으며, 적과 아군의 전력 차를 가 늠한다.
그리고 고뇌했다. 최선의 방법을 찾기 위해 끝없이 생각했다.
잠시 침묵한 뒤.
나는 궁병대에게 지시했다.
"9번, 10번 궁병조. 너희들은 동쪽 능선을 타고 올라오는 적을 견 제해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맞 출 수 없습니다."
궁병대는 내지시에 난색을 표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나와 병사들이 놈들의 접근을 눈치챈 것은 횃불 덕분이었다. 이 정도 거리라면 육안 으로 적을 발견하기 힘들 정도로, 머나먼 거리.
사거리가 닿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쏴야 한다.
"견제만 하라는 거다. 적당히 횃 불이 보이는 방향으로 화살을 계속 쏴라. 반드시 맞출 필요는 없다. 그저 이쪽으로 오는 속도를, 조금이라 도 늦출 수 있도록. 거슬리게 만들 란 말이다."
"… 알겠습니다."
궁병조 조장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뒤이어 전투조에게 지시했다.
"3번부터 7번 전투조. 너희들은 예비대다. 이곳 거점지점에서 대기 해. 공국 놈들이 정상에 접근하면, 싸워서 막아라. 목숨을 버려서라 도."
목숨을 버려서라도.
그 부분을 강조해 말했다.
전투조 조장들이 숨을 삼키고는, 결의에 찬 눈으로 답한다.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시선을 돌려. 내 앞에 자리한 척 후조 조장들을 바라봤다.
"1번, 2번 척후조."
1번 척후조 조장 카일. 그리고 2번 척후조 조장 에시.
녀석들과 하나하나 눈동자를 마주치며 지시했다.
"너희들은 나와 같이 아래로 내려간다. 공국의 쓰레기들을 사냥할 것이다."
"그게 무슨…?!"
"여기서 죽치고 앉아있어봤자 모두 죽을 뿐이야. 능동적으로 움직여 야 해."
카일과 에시가 경악했다.
무리도 아니었다. 저 아래에 득 시글거리는 공국 병사들에게 제발 로 뛰어 들어간다는 소리였으니 말이다.
그것도 고작 스무 명으로.
하지만 이것이 최선이다.
"놈들은 산개해 움직이고 있다.
게다가 시야도 좋지 않지."
시선을 내려 미니맵을 주시했다. 다수의 붉은색 점들이 천천히, 이쪽 으로 접근해오고 있다.
"우리가 내려가 놈들의 관심을 끈다. 접근하는 녀석들을 하나하나 처치하고, 놈들의 접근을 최대한 지연시켜야 해."
"하지만…."
"내가 선두를 맡겠다."
겁먹은 것일까. 녀석들이 주저했다.
허나 설득할 시간이 없다.
"명령 불복종은 즉결처형이다. 나를 따라라!"
지금은 다소 강압적으로 나가야 할 때.
파앙!
나는 자리에서 도약하듯, 앞으로 뛰쳐나갔다. 척후조 병사들이 마지 못해 따라온다.
곧 격렬한 싸움이 시작된다.
23화.
나는 지면을 박차고 달렸다.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스 쳤다. 어둑한 시야를 헤치고 나무 사이를 누비듯 산을 달려 내려갔다.
고개를 들어 올려 시선을 아래로 던졌다.
시야 곳곳에 반짝이는 것은 적의 횃불.
거점을 향해, 산개해서 접근하고 있는 공국 놈들의 횃불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놈들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물론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척후조 병사들.'
달리는 와중 슬쩍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니, 스무 명의 제국 척 후병들이 힘겨운 얼굴로 뒤쫓아 오고 있었다.
야밤에 산악지형을 달리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 강군인 제국군에서도 힘든 일일 정도로.
하지만 지금 나를 뒤따르는 이들은 모두가 제국 척후병이었다. 그 강군인 제국군에서도 한층 정예인 이들.
그런 그들이기에, 야밤의 산을 뛰어다닐 수 있다. 내가 굳이 전투 조원이 아닌 척후조원들을 데려온 이유가 이것이었다.
파앙!
나는 더더욱 속도를 높였다.
한시가 급하다. 어서 가서 공국 놈들을 교란해야 한다. 그래야만 시간을 벌 수 있으므로.
그렇게 나와 병사들은 계속해 산 의 아래로, 아래로 뛰어내려갔다.
횃불의 붉은 빛이 점차 가까워진다.
'백인장님.'
카일은 달려가며 시선을 앞으로 던졌다. 저 앞에 달려 나가는 한 병사의 뒷모습이 보였다.
검은 머리를 지닌 병사였다. 한때는 그의 직속상관인 십인장이었 으나 지금은 어느새 백인장의 지위에 이른 이.
한지훈.
카일은 한지훈의 뒷모습을 ?으 며 속으로 생각했다.
'어떻게 저리 빠르게 성장하실 수 있는 건지….'
분명 과거의 한지훈은 그리 강하지 않았었다.
체력은 모자랐으며. 민첩과 근력 또한 평균 이하였다.
허나 어느새 그는 성장했다.
검술 실력이 늘었고, 민첩과 근력이 자신을 아득히 넘어섰다. 전투 가 있을 때마다 눈에 띄게 성장해 갔다.
지금도 그렇다.
그가 아무리 다리를 놀려 질주한 다 한들, 한지훈과의 거리는 도무지 좁혀지지 않았다.
카일이 이를 악물었다.
'백인장님께서는 우리의 속도에 맞춰주고 계신다.'
한지훈의 움직임을 보면 알 수 있다.
저토록 빠르게 움직이지만, 사실 그에게 있어선 전력질주가 아닐 것 이다. 전혀 힘든 기색이 보이지 않았으니 .
한지훈은 아슬아슬하게 부하들이 따라올 수 있도록 속도를 조절하고 있었다.
카일은 새삼 한지훈의 성장을 느 꼈다.
분명 그 또한 달리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
후욱!
그는 뜨거운 숨을 뱉으며 한지훈 의 뒤를 따랐다. 숨이 가빠진다. 전 신에서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문득, 그가 생각한다.
'백인장님은 어디까지 올라가실 까.'
이토록 빠르게 성장하는 한지훈 이었다. 그리고 그의 성장세는 도무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상상해 보았다.
더 높아진 한지훈의 모습. 백인 장을 넘어 천인장, 혹은 그이상의 경지에 달한 그의 모습.
씨익. 숨 가쁘게 달리는 와중에 도, 카일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
'한지훈 님을 따른다면, 승리할 것이다.'
카일은 한지훈의 등이 믿음직스 럽게 보였다.
* * *
나와 병사들은 계속해 달려 내리 막을 타고 내려왔다. 그러자 어느새 횃불을 들고 있는 공국 병사들 인근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병사들을 향해 작은 목소리로 지시했다.
"모두들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라."
"알겠습니다, 백인장님."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기 전, 놈들의 정보를 최대한 수집해야했다.
숲의 음영에 몸을 숨기고 놈들을 주시했다.
모두 합해 아홉 명으로 이루어진 병사들이었다. 그중 횃불을 들고 있는 병사가 셋, 검과 창을 들고 움직이는 병사가 여섯. 그들이 횃불의 제한된 시야에 의지해 산을 오르고 있다.
놈들의 모습을 보고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경갑을 입고 있어.'
본래 공국군의 무장이란 조잡했다. 그들은 절대다수가 징집병이었 으며, 그렇기에 가진 무기는 그 품질이 좋지 않았고, 방어구는 거의 없다시피했다.
하지만 지금 저기 보이는 공국 병사들은 달랐다.
제대로 된 경갑을 입고 있다.
복부와 가슴팍을 보호해주는 흉 갑, 그리고 머리 위에 을려져있는 것은 잘 만들어진 투구.
간간히 기다란 가죽장갑을 착용 한 놈들도 있다.
'…정예인 만큼 무장은 제대로 챙겨줬다는 이야기인가.'
아마 그럴 것이다. 그 허술한 공국군이라 한들 정예병력까지 홀대 하진 않을 것이니.
검을 들어올리고, 숨을 골랐다.
"무기, 꺼내 들어."
내지시에 병사들이 하나둘 무장을 준비한다.
스르릉, 하는 소리는 역시나 들리지 않는다. 척후조 병사들 중 이런 상황에서 소음을 내는 멍청이는 없다.
나는 낮은 목소리로 전파했다.
"보다시피 놈들의 무장이 예사롭 지 않다. 아마 평범한 공국군 병사들보다 더 높은 전투력을 지녔다 봐야겠지. 다들 주의해라."
내 말에 병사들이 고개를 끄덕여 수긍한다.
바스락, 사각.
놈들이 산을 타고 오른다. 녀석 들의 시선이 닿는 것은 오직 횃불 로 밝혀진 좁은 시야뿐. 주위에 내가 숨어있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절호의 기회.
"지금이다. 가라!"
주저 없이 급습했다.
파앙!
다리로 땅을 박차고, 앞으로 돌진했다. 그제야 이쪽을 발견한 것일 까. 놈들 중 하나가 검을 꺼내들었다.
꽤나 기민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녀석이 방어태세를 갖추는 것보다, 내 검격이 파고드는 것이 빨랐다.
"일단 하나."
후욱!
한껏 달궈진 숨을 내뱉으며 검을 찔러 넣었다.
내 검날이 공기를 꿰뚫듯 쏘아져 녀석의 목에 박혔다. 놈이 피를 울컥 흘렸다. 검을 빼내자 녀석이 각 혈하며 무너진다.
"적! 적이다!"
"거점에 있어야 할 놈들이, 어째서……"
"매복인가!"
놈들이 하나둘 무기를 꺼내들었다. 그 자세가 허술한 공국군 답지 않다.
역시 놈들은 정예였다. 허나 나 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더 강하니까.
"제국군이다! 교전해!"
공국 병사들이 냉병기를 들고 달 려들었다. 그들이 검과 창을 휘둘러, 나와 병사들을 노린다.
허나 느리다.
그 지랄 맞게 강한 한스의 검조 차 막은 나다. 아무리 공국 정예라 한들 고작 일반병보다 강한 수준에 불과하다.
부웅!
적병의 검이 반월을 그리며 쇄도 해온다. 하지만 녀석의 검날은 나를 베지 못했다.
고개를 숙여 검격을 피해냈다.
쿵! 검날이 허공을 가르며 내 뒤에 있는 나무를 쳤다. 나는 놈에게 몸을 낮춰 파고들듯 돌진, 검을 위로 치켜들다시피 올려 찔렀다.
푸우욱.
"끅…!"
내 검신이 적병의 아래턱을 찌르고 들어갔다. 검날이 병사의 구강까지 꿰뚫었다. 놈이 바로 즉사해 축 늘어진다.
"흐읍!"
힘을 줘, 녀석의 시체가 쓰러지 지 않게 붙잡았다. 방패로 쓰기 위해.
푹! 퍼억! 공국 병사들의 검격과 창격이 제 동료에게 쇄도했다. 방금 죽은 공국 병사의 등짝이 난자된다.
"제기랄! 감히!"
"시체를 방패로 쓰다니!"
놈들은 제 아군 시체를 찔렀지만 당황하지 않았다. 다시 검과 창을 회수해, 나를 죽이기 위해 움직인 뿐.
"쯧."
꽤 성가시다. 나는 검을 뽑아내고, 재차 휘둘렀다.
파앙!
파공성과 함께 공기를 가르는 검 날. 횃불에 의해 붉게 칠해진 검광 이 반월을 그렸다. 나에게 창을 내 찌르려 하던 적 하나가 모가지가 베였다.
놈이 목에서 피를 줄줄 뿜으며 비틀거렸다. 놈을 발로 차 쓰러뜨리 고 앞으로 도약.
부웅!
방금 전 내가 서 있던 곳을 적의 창격이 스쳐지나갔다.
설마 피할 줄 몰랐다는 것인가. 창을 쥔 적병이 당황한다. 나는 그대로 파고들어, 검격을 가했다. 검 날이 수직으로 내려쳐진다.
서걱.
검날이 녀석의 손가락을 베었다. 손가락 여러 개가 잘려 후드득 떨 어진다.
"끄아아아!"
아픈 것일까. 제 손을 베인 놈이 부들거리며 고통어린 비명을 토했다. 덕분에 틈이 드러났다.
아래로 향했던 검을 빙글 돌리듯 휘둘렀다. 검날이 큰 궤적을 그리며 놈의 목을 스쳐 지나갔다. 피가 팍 튀어 나온다.
"짜증나는 놈들."
얼굴에 묻은 피를 닦으며 그리 중얼거렸다.
본디 공국 병사들은 처치하기 쉬운 적이었다. 방어구가 없었기 때문에, 복부나 가슴을 노려도 일격사 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경갑은 입은 정예놈들은 달랐다. 놈들의 방어구 때문에 단번에 처치하기 힘들다. 더해 일반병보 다 기민한 움직임도 다소 귀찮았고 말이다.
나는 시선을 돌려, 주위의 상황을 살폈다.
"으아아아악!"
"커헉…."
제국 병사들이 공국군을 완전히 압도하고 있다. 내가 순식간에 네 명을 처치한 덕분에 나머지 스무 명의 척후조 병사들은 아주 손쉽게 공국군을 요리할 수 있었다.
나는 시선을 돌려 홀로그램을 주 시했다.
[남은 시간 : 73: 29]
산을 내려오고, 적 분견대 하나 를 제압하니 30분이 흘러있다.
남은 시간은 약 70분.
"얼마나 버틸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일단은 최선을 다해볼 수밖에.
내가 그렇게 홀로그램을 주시하고 있을 때였다.
"백인장님! 놈들을 완전히 정리 했습니다."
카일이 이쪽으로 다가와 보고해 왔다. 나는 고개를 주억였다.
"카일. 느꼈지?"
"네. 모두 평범한 공국 병사들보 다 훨씬 잘 싸웠습니다."
"맞다. 놈들은 정예다. 장비로 보 나 실력으로 보나 평범한 공국 병사들이라고 생각할 순 없지."
나는 검을 휘둘렀다. 부웅! 하는 소리와 함께 검날의 피가 후드득 지면으로 떨어져 내린다.
"방심하지 마라. 녀석들은 강하다."
내 심각한 표정을 본 것일까. 척 후병들이 긴장해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직후. 나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우리보단 약하지만."
제국 척후병은 강하다.
본디 강군인 제국군 중에서도, 정예를 뽑아서 꾸린 것이 바로 척 후병들이다.
척후병들의 임무는 힘들고 가혹 하다. 초계망을 돌파해 적진을 탐색 하고, 본대의 앞에서 지형과 공격로 를 탐색해 아군을 선도하며, 소수로 험지를 뒤돌아 적의 뒤통수를 치기도했다.
제국 일반병들중 가장 높은 수준 의무력을 지닌 것이 바로 척후대다. 그 허접쓰레기인 공국군에서 정 예를 뽑았다 한들 우리보다 강하진 않다.
"그럼 이제 움직이자."달칵. 나는 피를 털어낸 검을 검 집에 수납했다.
"백인장님. 앞으로 어찌하시려는 겁니까?"
"지금 적들은 산개해 움직이고 있다."
카일의 질문에 대답하고는, 고개를 돌려 어둑한 야산을 바라봤다. 많은 수의 횃불이 흩어져 산을 오르고 있다.
"방금 전 우리가 처치한 한 개 조는 고작 아홈 명 규모였다. 아마 다른 조들도 그 정도 규모로, 뿔뿔이 흩어져 산을 오르고 있을 거다."
다른 병사들도 고개를 들어 올려 산을 주시했다.
"이제부터 흩어져있는 놈들을 하나하나 각개격파 할 것이다. 시간이 없어. 빠르게 움직여야 해."
놈들이 병력을 산개해 운용한 것은 실수였다.
물론 이해는 한다. 횃불 때문에 위치가 훤히 노출되니 화살공격과 매복을 염려했을 터다. 그렇다고 이런 야심한 밤 깊은 산속을, 횃불도 없이 움직이는 건 대량의 낙오자를 만드는 일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 었을 터.
그렇지만 그것 또한 잘못된 선택 이었다.
덕분에 승산이 보였다.
"어서 움직여. 다음 적을 급습한다."
나는 다른 적을 찾아 달렸다. 내 뒤를 척후병들이 따라온다.
다음 적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산을 듬성듬성 밝히는 횃불을 향해 가면 되니.
나와 병사들이 움직인다.
* * *
한스는 산을 주시했다.
해가 떨어진 산은 고즈넉하고 적 막했다. 어두운 음영이 드리워진 산. 그 산의 곳곳에는 붉은색 빛이 흩어져 일렁이고 있다.
산을 타고 올라가는 붉은 반짝임 들. 병사들이 들고 있는 횃불의 빛이다.
그것을 바라보며 한스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횃불의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 같다만."
분명 처음에는 횃불의 수가 더욱 많았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지금 그의 시야에 잡히는 횃불의 빛은 그 수가 다소 적어져 있다.
거슬린 것일까. 한스는 시야에 잡히는 횃불들의 수를 헤아려 보았다.
그리고 그때였다.
후욱.
문득, 그의 시야에 자리해있던 불빛들 중 하나가 사라졌다. 한스의 표정이 찌푸려진다.
"역시."
산을 돌아다니며 그들의 접근을 배제하는 적이 있다.
한스는 주위에 있는 병사들을 바라봤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산을 타고 오르는 와중이기에 그 수는 십 여 명에 불과했다.
그가 나직이 말했다.
"놈들이 우리 병사들을 사냥하고 있다."
제국의 병사들이 야음을 타고 아군의 병력을 각개격파 하고 있다.
거점을 틀어박히지 않고 오히려 앞서 나와 미리 교전하다니. 대담한 적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병력이 분산되어있는 지금이라면 더욱 쉽게 처리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자신의 병사들이 각개격파 당하는 걸 그저 관찰하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우리도 올라간다. 병력을 규합하고, 이쪽을 사냥하는 적을 찾아 죽 인다."
이미 적의 규모가 예상보다 적다는 것을 눈치챈 한스였다. 그리고 적은 수의 적을 사냥할 때는, 병력을 뭉쳐 밀어버리는 것이 제일.
철그럭.
한스가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무거운 중갑이 철컥이는 소음을 울리고, 병사들이 뒤따른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방금 전 횃불의 빛이 사라진 곳이었다.
한스가 움직인다.
24화.
퍼억!
내 검신이 공국 병사의 목을 꿰뚫었다. 놈이 모가지에서 피를 뿜어 내고는, 허탈한 표정으로 나자빠진다.
나는 검을 뽑아내고는 물었다.
"다 처치했나?"
"예. 모조리 죽였습니다."
내 질문에 카일이 답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살폈다.
바닥에는 횃불이 나뒹굴고 있고, 시체가 어지러이 나자빠져있다.
자리해있는 시체의 수는 정확히 여덟. 모두 나와 척후조 병사들이 처치한 시체들이다.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제 육십 명 정도 죽였네."
처음 전투 이후. 나와 병사들은 산의 등고선을 따라 이동. 거점으로 접근하는 적 조들을 하나둘 급습했다.
무려 일곱 번의 접전이 있었다.
스무 명의 병력을 운용해 육십에 달하는 적을 처치했다. 그것도 공국 측의 정예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을 말이다.
결코 낮은 수준의 전공이라고는 할 수 없는 상황. 허나 내 얼굴에는 불만족스러운 감정이 번져 나왔다.
"위험한데."
시선을 돌려, 시야 한 켠에 자리 해있는 홀로그램을 주시했다.
홀로그램에는 미니맵이 떠올라있다. 내 얼굴에 근심이 더욱 깊어진다.
'많이 밀렸다.'
미니맵에 자리해있는 붉은 점들 이 점차 산을 타고 올라오고 있다.
물론 나와 척후조 병사들은 노력했다. 바쁘게 움직이며 놈들을 하나하나 처치했고 정상에 인접해있는 적 분견대를 각개격파했다.
그 덕분에 놈들의 진군속도를 상당히 지연시킬 수 있었다. 아마 우리가 이렇게 뛰어다니지 않았다면 놈들은 지금쯤 하나둘 정상 거점에 도달했을 것이다.
내가 가만히 고뇌하고 있는 그때였다.
"백인장님. 저걸 보십시오!"
2번 척후조 십인장 에시가 나를 불렀다. 녀석이 어딘가를 가리키고. 나는 그곳을 주시했다.
"… 망할."
적이 진형을 바꾸고 있다.
시야 이곳저곳에 흩어져있던 횃 불들이 어딘가로 모이기 시작했다. 산개했던 적 병력이 한군데로 병합 되어갔다.
아마 자신들을 각개격파하고 있는 이가 있다는 걸, 그리고 우리 측의 궁수가 그리 많지 않다는 걸 깨달았을 터다.
그렇기에 저들은 산개했던 병사들을 다시 병합하고 있다.
"놈들이 뭉치면 지금처럼 하나하나 죽일 수는 없습니다. 이제 어떻게 합니까?"
카일이 그리 물었다.
확실히 저들이 뭉치면 답이 없다. 이쪽의 수는 고작 스무 명. 반면 놈들의 수는 수백. 병력의 차이 가 크다. 전면으로 붙어서는 결코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잊으면 안된다. 우리의 임무는 '지연'이다. 전투가 아니다.
나는 미니맵을 보며 카일에게 명령했다.
"너희들은 산을 타고 놈들의 제 2부대를 쳐라. 녀석들을 각개격파 해. 여태껏 우리가 했던 것처럼."
놈들은 부대를 양쪽으로 나눠서 공략하고 있다.
북쪽은 놈들이 산개를 풀고 병합 되고 있지만, 동쪽은 아직 산개되어 있는 상태다. 척후조 병력이 그쪽으로 가 움직인다면, 지금처럼 지연시 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북쪽은 어떡합니까? 놈 들이 집결해서 밀어닥치면 막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 북쪽이 남아있다. 그에 나는 고개를 주억이며, 대답했다.
"내가 북쪽 놈들을 유인하겠다."
"… 백인장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일까. 카일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손에 들린 피 묻은 검날을 바라 보며 이어 말했다.
"듣지 못했나? 유인이다. 녀석들 의 주의를 끌어 나를 ?아오게 한 다면 좀 더 시간을 벌 수 있을 거다."
"혼자서 수백의 병력을 유인하겠다니요? 너무 위험합니다!"
"맞습니다. 지금이라도 거점으로 가 전열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병사들이 만류한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지금 거점으로 가방어전을 준비 한다 한들, 버티기 힘들다. 아군의 모든 전력은 고작해야 칠십여 명에 불과한 상황. 아무리 용을 써도 수백을 막기에는 무리다.
슬쩍 시선을 들어올려, 홀로그램을 주시했다.
[남은 시간 : 51: 47]
50분. 50분만 도망쳐 다니면 된다.
꽤 위험한 일이지만. 나름대로 자신이 있다.
살아남을 자신이.
나는 내 능력치와 남은 포인트를 상기했다.
[근력 14]
[민첩 23]
[내구 5]
[체력 9]
[마나 0]
(남은 포인트는 40pt 입니다.)
40pt가 남아있다.
이걸 모조리 능력치에 갈아 넣는 다면. 승산이 있다.
나는 나직이 읊조렸?
"체력. 10포인트 상향."
- 띠링!
['능력치 : 체력'을 10포인트 상향합니다.]
[상향에는 10pt가 필요합니다.]
[상향하시겠습니까?]
[수락/거절]
"수락."
변화가 일었다.
몸속 뜨거운 혈기가 끓어 넘쳤다. 심장이 쿵쾅이고 근육이 맥동했다.
언제까지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은 자심감이 올라왔다. 폐부 깊숙이 들어온 산소가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것 같다.
기묘한 고양감.
허나 아직 내 강화는 끝나지 않았다.
"민첩. 30포인트 상향."
- 띠링!
[능력치 : 민첩'을 30포인트 상향합니다.]
[상향에는 30pt가 필요합니다.]
[상향하시겠습니까?]
[수락/거절]
"수락."
내가 그리 읊조린 즉시.
몸에 변화가 일었다.
전신의 근육이 개변하기 시작했다.
더 빠르게, 더욱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변화는 그것에 그치지 않았다.
"크으으윽!"
내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안구에 저릿한 통증이 이었다. 마치 칼로 후비듯, 날카롭고도 강렬 한 통각. 그것이 안구에서 시작해 시신경을 따라, 두뇌를 헤집는 듯했다.
너무나 심후한 고통. 그에 나는 눈과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때였다.
- 띠링!
안내창이 떠오른다.
['능력치 : 민첩' 이 50을 돌파했습니다!]
[동체시력-리미터가 해제되었습니다!]
[반응속도-리미터가 해제되었습니다!]
지금 내 근육뿐만이 아닌, 안구 와 신경까지 강화되고 있다.
안구의 시신경부터 시작해 그것을 받아들이는 두뇌. 그리고 전신에 퍼져있는 운동 신경망까지. 그 모든 것을 상향시키는 것이다.
더 빠르게 적을 인식하고, 더욱 신속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만큼 내가 성장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백인장님?"
병사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 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때.
휘몰아치던 고통이 가라앉아있다.
나는 천천히 머리로 가져갔던 손을 떼고 바로 섰다. 그리고는 내 몸을 훑었다.
군복을 입고 있어 내 근육을 관찰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알 수 있었다.
신체가 개변되었다. 지금 내 몸 은 과거의 나보다도 훨씬 높은 능력을 지니고 있다.
"내 정보."
능력치를 확인했다.
- 띠링!
[한지훈][4번 백인장]
[스킬 : 백인대 전투지휘술]
[스킬 : 제국 검술(하급)]
[엑스트라 스킬 : 집중]
[엑스트라 스킬 : 전투분석]
[근력 14]
[민첩 53]
[내구 5]
[체력 19]
[마나 0]
(남은 포인트는 0pt 입니다.)
민첩이 53, 체력이 19가 되었다.
아주 불균등한 능력치라고밖에 할 수 없다. 다른 능력치는 많아봐 야 20에 근접할 정도인데, 오직 민 첩만이 무려 50을 돌파해버렸다.
방금 전보다 두 배에 달하는 민 첩 수치.
"하하."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몸이 가볍다. 아예 무게가 느껴 지지 않는 듯 아주 편안하다. 이 몸뚱이를 한계까지 가속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더해 온몸에서 기력이 끓어 넘쳤다. 언제까지나 달리고 움직일 수 있을 것만 같다.
막대한 능력치의 성장.
"카일."
"…예. 백인장님."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호출에 대답했다.
그의 표정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 는데, 아무래도 내 분위기가 변화한 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나는 녀석에게 말한다.
"지시했던 내용을 이행해라. 산의 동쪽 방면으로 가, 산개해있는 적 사냥."
카일이 불안한 눈으로 나를 바라 본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저 어 둑한 야산을 바라봤다. 산 곳곳에 흩어져있던 횃불의 빛이 완전히 모 여 정렬되어있다.
공국군이 부대를 재규합했다. 곧 놈들은 이쪽으로 들이닥칠 것이다.
"나는 놈들을 유인한다."
무려 수백이다. 제아무리 능력치 를 상향했다 한들, 혼자서 놈들을 제압하거나 하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 정도 능력치라면.
유인하며 시간을 끄는 것 정도 는, 가능할 것이다.
"가라, 카일."
"… 백인장님."
내 무모한 행동에 염려하는 것일 까. 녀석이 불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미처 발을 떼지 못하는 모습.
이쪽을 걱정하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지금은 한시가 급하다.
나는 재촉했다.
"어서 가라, 카일! 명령 불복종은 처형이다."
검을 들어올렸다. 지금 당장이라 도 휘두르려는 듯이.
하지만 카일의 눈동자에 일렁이는 불안의 빛은 꺼지지 않았다. 녀석 또한 알고 있다. 내가 정말로 처형하진 않을 것이라는 걸.
놈은 잠시 이쪽을 주시하더니.
"명령을 받듭니다!"
처억.
절도 있게 경례하고는, 병사들을 데리고 동쪽으로 향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북쪽을 바라봤다.
시야에 보이는 것은 수십여 개의 횃불. 놈들이 마침내 움직이고 있다.
눈깔을 굴려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남은 시간 : 44: 07]
약 45분. 그동안 바쁘게 도망쳐 야 한다.
파앙!
내 신형이 앞으로 향했다.
* * *
한스는 날카로운 눈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그의 주위에는 약 백에 달하는 병사들이 도열해, 산을 타 오르고 있다. 그들이 질서정연하게 앞으로 향한다.
한스가 나직이 읊조렸다.
"아직 제국군은 찾지 못했는가."
"예! 백인장님. 적의 모습을 찾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퇴각한 것 같습니다."
병사의 보고에 한스는 고개를 끄 덕였다.
'병력을 규합하니 적의 공격이 멎었다.'
사실, 이런 야전에서 병력을 뭉 치는 것은 지양해야 하는 행동이다. 밤의 어두운 시야 속, 횃불의 빛은 위치를 대놓고 드러내는 것이나 다름없다.
즉, 매복과 원거리 화살공격에 취약하다는 이야기.
하지만 그렇다고 각개격파당하는 것은 안 될 일. 때문에 한스는 다시 병력을 추슬러, 백인대로 병합했다. 그러자 적의 공격이 멎었다. 덕분에 수월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한스와 휘하 공국군은 산을 타고 전진해갔다. 백이 넘는 대규모 인원이 밤의 어둠을 헤치며 앞으로, 산의 정상으로 향해간다.
얼마나 갔을까.
"백인장님!"
한 병사가 소리 질러 한스를 찾 았다. 대열의 가장 선두에 있던 병사였다.
한스가 그 병사를 바라보고, 병사는 큰소리로 알려왔다.
"저길 보십시오! 제국군을 발견 했습니다!"
병사가 어딘가를 가리킨다. 그에 한스는 시선을 옮겨 병사가 가리킨 곳을 주시했고.
"뭐 순간, 숨을 멎을 수밖에 없었다.
대열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바위 위. 어떤 청년이 우뚝 서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라고 알리는 것일 까. 청년은 한 손에는 횃불을, 다른한 손에는 장검을 들고 있었다.
청년이 천천히, 아래로 늘어뜨렸 던 횃불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음영에 가려졌던 놈의 얼굴이 드러났다.
투구 밖으로 삐져나온 검은색 머리카락.
"설마…!"
익숙한 얼굴이었다.
청년이 가슴팍까지 횃불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투구 안쪽, 얼굴이 훤히 보이게 되었다.
검은색 머리카락 뒤, 번들거리고 있는 암흑색 눈동자. 차갑게 가라앉 은 얼굴.
청년은 그가 알고 있는 이였다.
자신의 초계망을 돌파했던 병사, 그리고 거점에서는 자신을 제압했 던 병사.
번번이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았 던, 검은머리 병사.
그가 저 바위 위에서 한스를 주 시한다.
한스가 크게 외쳤다.
"저놈을 쏴 죽여라!"
그의 외침과 동시.
화살 세례가 쏘아졌다.
25화.
화살 세례가 쏘아졌다.
수십의 화살이 공기를 가르며 이쪽으로 날아왔다. 피잉, 핑. 날선 파공성이 공기를 어지럽힌다.
그와 동시,
- 띠링!
['엑스트라 스킬 : 집중' 이 활성화 됩니다!]
스킬이 발동되었다.
시야 속 움직임이 점차 느려져 간다. 온몸의 신경이 반응한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신기한 감각 이다.
시야가 일순 느리게 흘러가고, 공기의 음파가 웅웅 울리는 것처럼 들리는 감각.
마치 세계 그 자체가 느려진 것 만 같다.
나는 뒷걸음질 치며, 검을 휘둘 렀다.
부웅.
들고 있는 횃불의 빛이 검날에 반사되었다. 평소와는 다른 붉은색 검광이 반월을 그리며 회전한다.
파직. 퍼석.
내 머리를 노리며 날아오던 화살 두 개가 허공에서 박살났다.
재차 검을 놀렸다. 회전했던 검 날을 아래에서 위로 추켜올렸다. 붉은색 궤적이 사선으로 그어진다.
콰직.
복부에 꽂힐 화살이 허공에서 반 토막 났다.
몇 걸음 더 뒤로 걸었다.
화살이 계속해 날아온다. 가속된 시야 속 그것은 빠르지만 느리게, 흐릿하지만 선명하게 느껴졌다.
몸을 비틀어 피해냈다. 검을 휘둘러 쳐냈다.
나는 화살을 피하고 부수면서 어떤 희열을 느꼈다.
' 대단해.'
그것은 높아진 능력치에 대한 감탄.
날아오는 화살을 쳐내다니.
과거의 나였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묘기였다.
하지만 지금은 능력치의 힘을 빌려, 그리고 스킬의 발현을 통해 이리 훌륭하게 보이고 있다.
- 콰직. 퍼적.
몇 걸음 더 걸어 뒤로, 공국 궁 수의 사선이 안 닿는 뒤로 물러났다. 바닥에 부서진 화살 파편이 흩 어진다.
"휴."
뜨거운 숨을 토하며 몸을 숙였다. 아직 화살이 날아오고 있긴 하지만 바위 뒤로 물러났기에 이쪽을 결코 맞추지 못한다.
나는 검을 굳게 쥐고 숨을 골랐다. 청각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자 한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개자식!
품위 없는, 그저 악에 받친 욕지 거리다.
나는 가만히 숨죽여 녀석의 목소리를 훔쳐들었다.
- 네놈을 죽여 버리겠다!
어지간히 빡쳤나보다.
나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저 새끼가 왜 여기 있어?"
본래 이번 미션에서 한스는 등장 하지 않는다.
적어도 과거 게임에서는 그러했었다. 놈이 다시 백인장으로 진급한 것은 공국의 침공군이 전멸당했을 때였다.
하지만 놈은 벌써 백인장이 되어 있다. 더해 원래라면 이곳에 없을 녀석이 지휘관으로서 내 앞에 자리 해있다.
어째서일까. 나는 곰곰이 생각해 봤고 곧.
'악몽 난이도.'
난이도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한스가 벌써 백인장이 될 이유가 없다.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어떤 개입이 있다고 봐야 할 터다.
예를 들자면 난이도 변경으로 인 한 시나리오의 개변이라던가.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 병사 삼십을 이끌고 놈을 죽이 러 가겠다! 나머지 너희들은 계속 해 산을 타고 움직여라.
한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녀석 은 한껏 흥분한 듯, 목소리가 높아 져 있다.
나는 표정을 찌푸렸다.
"그러면 안 되는데 ."
지금 놈이 이끌고 있는 병력은 약 백여 명 안팎. 헌데 나를 죽이 기 위해서는 일부인 삼십 명의 병력만을 운용하겠다 한다.
곤란한 일이다.
놈들을 유인하고, 기만해, 시간을 끌어야 한다. 하지만 고작 삼십의 병사들만 유인한다면 나머지 적이 거점으로 가버릴 터.
그래서는 안된다. 놈들을 모조리 유인해야 한다.
나는 자리에 앉아 고민했고 그때.
"아."
무언가가 내 시야에 잡혔다.
바닥에 흩어져 있는 화살 파편들 이었다. 반으로 쪼개지고 갈라진 그것들이 바위 위 아무렇게나 흩뿌려 져 있다.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
나는 화살들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중간이 잘려 반 토막 난, 화살촉이 달려있는 화살 파편이었다.
"좀 더 놀려줄까."
벌떡, 일어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자 바위 아래 나를 추격하기 위해 병사들을 선별하고 있는 한스가 보였다.
나는 주웠던 화살토막을 들었다. 그리고는 손목에 스냅을 실어, 그것 을.
휙.
던졌다.
화살토막이 빙글빙글 회전하며 날아간다. 그리 빠르지 않게 날아간 그것은 정확히 병사들 사이에 있는 한스의 투구 위에, 툭.
명중했다.
튕겨 나온 화살이 힘없이 떨어진다.
한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나를 바라봤다.
놈과 눈이 마주쳤다.
"하하."
문득, 웃음이 흘러 나왔다.
한스의 표정이 너무나 웃겼기 때문에.
분노와 어이없음이 뒤섞인 저 표정. 현실에 있을 적 나조차도 몇 번 본 적 없는 표정이다.
나는 입을 열었다.
"고작 삼십 가지고 되겠냐?"
놈을 도발할 것이다. 안 ?아오 고는 못 배기도록.
천천히, 엄지로 목을 그으며, 이어 말했다.
"꼴값 떨지 말고 다 덤벼. 전처럼 목을 다시 베어 줄 테니까."
한스의 얼굴에 어이없음의 감정 이사라지고, 그 공백이 분노로 메 꿔져 갔다.
격렬한 분노에 물들어가는 녀석 의 눈.
하지만 나는 그에 만족하지 않고, 한마디 더 덧붙이며 이죽였다.
"이번에는 포션 잘 챙겨왔냐?"
그 순간.
"네놈---!"
한스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 졌다.
콰앙!
놈이 흉성을 토하며 이쪽으로 돌진해왔다. 중갑을 입었음에도 무지 막지하게 빠른 속도였다.
"개자식! 죽여버릴 테다! 빌어 처 먹을 쥐새끼-!"
정말 단단히 빡친 것 같다.
나는 몸을 내뺐다.
자리를 박차 산길을 비스듬하게 달렸다. 위로 향하지는 않고 등고선을 따라 이동하듯 수평 서쪽 방향 으로.
내가 도망치자 악에 받친 것일 까. 한스가 커다란 목소리로 포효한다.
"저놈을 당장 죽여 버려라! 화살을 쏴라! 놈을 몰아붙여라!"
뒤늦게 병사들이 한스의 뒤를 따 라온다. 화살 여러 발이 내가 있는 방향으로 날아왔다.
- 쉬익!
화살촉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
하지만 헛수고다.
- 퍽! 퍼벅!
내가 방금 전 지나친 나무에 화살이 박혔다.
산악전에서, 그것도 이토록 나무 가 빽빽한 숲에서 활은 그리 효율적이지 않다. 나는 나무 사이를 누 비듯 움직였고, 그 덕분에 화살은 쏘는 족족 수풀에 떨어지거나 나무에 박혀댔다.
"놈을 몰아라! 반드시, 저 염병할 놈을 죽여 버려!"
성공적으로 어그로를 끈 것 같다.
나는 한스와 병사를 매달고 서쪽 으로, 서쪽으로 달려 나갔다.
* * *
한스는 거센 숨을 내쉬며 달렸다.
철그럭, 철컥. 그가 발을 내딛어 지면을 박찰 때마다 중후한 전신갑 주의 소음이 울렸다.
'죽여 버린다.'
그가 충혈된 눈으로 전방의 인영, 검은 머리의 병사를 주시했다.
분노가 진하게 일어난 얼굴.
한스의 광기 어린 시선이 적의 뒷모습을 ?는다.
"놈을 포위해! 3번, 4번 십인대! 뒤돌아서 놈의 퇴로를 막아!"
격노한 그는 병사들을 지휘해, 제국 병사를 몰아넣기 시작했다.
지금 그의 최우선 목표는 다름 아닌 비콘의 제거.
허나 한스는 목표를 도외시한 채, 저 병사를 ?고 있다.
지극히 비합리적인 일이었다.
그 스스로도 미련한 짓이라는 건 알고 있다. 지금 당장이라도 병력을 돌려, 거점으로 향하는 것이 이치에 맞으리라.
그러나 한스는 저 병사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검은 머리의 병사.
이름난 기사도, 강대한 마법사도 아닌, 그저 하찮은 평민에 불과한 이다.
허나 저 평민 병사 때문에 한스는 여러 굴욕을 맛봤다.
초계망을 돌파당해 천인장에서 십인장으로 강등되었다.
빈사 상태에 이르러 목숨을 잃을 뻔했다.
아버지에게 실망을 안겨드렸다.
- 꼴값 떨지 말고 다 덤벼. 전처럼 목을 다시 베어 줄 테니까.
더해 방금 전 겪었던 모욕까지.
무려 백여 명의 병사 앞에서 적 병사에게 모욕당했다. 저놈을 죽이 지 못한다면 그의 자존심에 그리고 가문의 위신에 상처가 나리라.
게다가 그는 아직 임무를 포기하지 않았다.
'놈을 죽이고 바로 거점으로 향 한다면, 비콘을 파괴할 수 있을 것 이다.'
한스 휘하의 병력은 많다. 그리고 지금의 전투양상으로 볼 때, 제국측의 병력은 적은 상황.
아직 승산이 남아있다. 저 병사를 죽이고 곧장 거점으로 향한다면, 복수와 임무 달성 두 가지를 동시에 이룰 수 있으리라.
적어도 그는 그리 여겼다.
때문에 한스는 추격을 멈추지 않았다. 온 힘을 다해 검은 머리 병사를 ?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쥐새끼 같은 놈!"
놈이 도무지 잡히지 않는다.
잡힐 듯 말 듯한 거리에서 녀석 이 더 이상 가까워지지 않았다. 놈 은 기민한 몸놀림으로 나무와 수풀 사이를 헤치며 움직였다.
고작해야 일개 병사.
하지만 녀석의 움직임은 일개 병사의 것이 아니다. 과거 거점에서 마주했을 때보다도 명백히 성장해 있다.
그럼에도 한스는 그를 포기하지 않는다.
"퇴로를 막아! 화살을 쏴!"
한스의 이글거리는 눈이 제국 병사의 뒤를 ?았다.
그의 가슴속 맹렬한 복수심이 타오른다.
?피잉!
날카로운 파공성이 울렸다. 그에 자세를 낮춰, 고개를 숙였다. 화살 이 머리 위를 스쳐지나가 바닥에 꽂힌다.
"놈을 몰아넣어라!"
"거의 다 포위했다! 빠르게 움직여!"
꽤나 가까운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아군의 목소리는 아니다. 나를 추격하는 공국 병사들의 목소리.
후욱, 뜨거운 숨을 토하며 다리 를 움직였다.
"유인이 너무 잘됐는데 ."
지금 나는 녀석들을 유인하고 있다.
한스를 도발한 뒤. 아슬아슬하게 녀석들을 피해 움직였다. 화살이 투 구와 경갑을 스쳐지나갔고, 병사들 이 나를 포위하듯 압박해온다.
모두 의도한 움직임이었다.
지금의 나는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놈들의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다. 막대한 민첩과 체력 능력치를 지니고 있었으니 .
하지만 나는 일부러, 잡힐 듯 말 듯. 놈들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내 추적을 포기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리고 시간을 끌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얼마나 도망쳤을까.
"놈을 몰아넣었다!"
"진열 갖춰! 빠져나가게 하지 마!"
사방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공국 병사들이 내 주위를 둘러싼 듯했다.
그리고 직후.
바스락.
숲의 나무와 수풀 사이를 헤치 며, 병사들이 등장했다.
놈들이 창칼을 이쪽으로 내밀었다.
"잡았다!"
"이 약삭빠른 놈. 더 이상 도망 치지 못할 거다."
녀석들의 얼굴에는 의기양양한 기색이 떠올라있다. 아무래도 완전히 포위했다 여긴 모양.
하지만 놈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 했을 것이다.
내가 일부러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을.
철컥, 스르릉.
녀석들이 창과 검을 들어 올려 이쪽을 겨눴다. 빙글 원을 그리듯 공간을 좁혀온다.
빈틈없는 포위. 빠져나갈 구석이 없다.
평범한 병사라면 꼼짝없이 죽었 으리라.
하지만 나는 평범한 병사가 아니다.
눈동자를 굴려 홀로그램을 확인했다.
[남은 시간 : 3: 46]
시간을 뻐길 만큼은 뻐겼다. 더 이상 놈들을 유인할 필요가 없다.
그 말인 즉.
"이제 굼벵이처럼 움직일 필요가 없다는 거지."
파앙!
지면을 박차 전방으로 도약했다. 보다 강화된 나의 신체가 움직임을 가속시켰다. 마치 바람을 가르듯, 내 몸이 순식간에 앞으로 쇄도한다.
"뭣…?!"
공국 병사 놈들이 당황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여태껏 이렇게 빠른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 내 움직임을 전혀 예상하지 못 했으리라.
순식간에 창병의 간격 안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검을 수평으로 휘둘 렀다.
서걱.
반월 모양의 검광이 번뜩였다.
"커, 헉…!"
놈의 목을 베었다. 녀석의 모가 지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액체가 지면에 후드득 떨어진다.
하지만 아직 내 검날은 멈추지 않았다. 비틀거리는 녀석을 지나쳐 검의 가속을 유지한 채 다음 적을 노렸다.
파앙!
터져 나오는 파공성. 어둑한 시야 속에서 반짝이는 검광. 시퍼런 검광이 위에서 아래로, 기다란 궤적을 그린다.
"끄으으으!"
다음 적의 발목을 베었다. 녀석 이 신음하며 바닥에 주저앉는다.
이제 놈은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되었다.
'가벼워.'
몸이 가볍다. 원하는 동작이 스 스럼없이 나온다.
일개 병사 따위 몇 명이든 해치 울수 있을 것만 같다.
"망할! 막아라! 놈을 막아!"
병사 여럿이 달려들었다. 이쪽으로 향하는 검날과 창격. 시퍼런 날 붙이들이 나를 노리고 쇄도해온다.
그 모든 것들을 수월하게 회피했다. 고개를 숙여 목을 노리는 검날을 피했고, 검신을 세워 허리를 노 리는 창격을 흘려보냈다.
직후 반격했다.
파앙!
아래에서 쏘아진 내 검날이, 적 병의 옆구리에 틀어박혔다. 정확히는 골반의 바로 위에.
검날이 엉덩이뼈를 긁고, 장기를 난자하는 감각이 손잡이를 타고 느껴졌다. 날을 비틀어 후벼 팠다. 놈 이 고통에 찬 비명을 터트린다.
"꺼져."
퍽. 발로 휘청거리는 놈을 차 쓰러뜨렸다. 녀석은 지면에 쓰러져 경련한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춤.
나를 포위하고 있던 공국 병사들. 놈들이 하나둘 뒷걸음질 쳐, 물 러서고 있다.
?善?湧?얼굴에는 경악과 공포 가 가득했다.
하기야, 순식간에 세 명의 적을 죽이고 무력화시켰다. 그것도 포위 된 상황에서.
가장 먼저 덤비는 병사가 죽는 것이 확실할 터이니. 무섭겠지.
"머저리 놈들."
나직이 읊조리고는, 검을 휘둘렀다.
부웅.
검날에 뭍은 핏물이 지면에 흩뿌 려진다. 나는 검을 굳게 쥔 상태로 주위를 둘러보았고, 병사들은 여전히 겁에 질려 물러난다.
그리고 그때였다.
"놈."
병사들 사이를 헤치며,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너를 죽여 버릴 것이다. 반드시."
한스 요한바르첸.
놈이 드디어 내 앞에 섰다.
스르릉.
녀석이 검을 뽑아들었다. 다른 병사들보다 훨씬 화려한 장검이 놈 의 손에 쥐어 들린다.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들 법한 모습.
그에 나는 피식 웃었다.
"도망 안 가냐?"
"도망? 개소리!"
내 말이 도발로 들렸던 것일까. 耆별?더욱 악에 받친 얼굴을 하며 기세를 끌어올렸다.
"네놈 같은 일개 병사에게 도망 치라고? 그런 수치를 내가 감당 할 것 같으냐."
저벅. 그가 한 걸음 다가왔다. 서 늘한 안광이 어둠 속에서 빛난다.
"이번에는 기필코, 네놈을 죽여 버리겠다."
저벅. 그가 한 걸음 더 다가온다. 놈의 날카로운 검날이 바로 세워진다.
그에 나는 이죽 웃으며 말했다.
"아니. 나 말고, 마법사 말이야."
"마법사…? 설마?!"
한스가 경악하고, 나는 시선을 내려 홀로그램을 확인했다.
[남은 시간 : 0: 00]
"타임 오버다. 개자식아."
내가 그렇게 말함과 동시.
번쩍!
푸르른 빛이 어둑했던 하늘을 환 하게 밝혔다.
드디어 마법사가 도착했다.
26화.
산의 정상 위. 그곳에 푸르른 광 휘를 휘감은 수십의 인영이 등장했다.
모두 로브를 입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들이 입고 있는 로브에는 하나같이 어떤 문양이 박혀 있었다.
타오르는 붉은색 불꽃, 그리고 그 불꽃을 휘감은 푸른색 원.
제국 라브리에 전투마법단의 문양이었다.
"드디어 공국 놈들이 쳐들어왔 군."
한 마법사가 나직이 읊조리며 로 브의 후드를 벗었다. 그러자 나타난 것은 자잘한 주름이 아로새겨진 중년의 얼굴.
중년은 라브리에 마법전투단의 단장, 제피르였다.
그가 시선을 돌려 북쪽을 바라봤다. 그의 시야 속에 보이는 것은 수많은 횃불의 빛.
어둠을 뚫고 천천히 행군하고 있는 공국군의 모습이다. 무려 일만이 넘는 수의 군대가 침공로를 따라 움직이고 있다.
그들을 주시하는 제피르의 입가에 천천히, 질척한 미소가 떠올랐다.
"오랜만의, 정말 오랜만의 전쟁이다."
중년인의 모습을 한 노인의 눈에서, 결코 숨길 수 없는 희열이 피 어오른다.
그는 진심으로 전쟁을 반기고 있다.
부웅.
제피르가 커다란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그러자 공기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 쿠르르르르르릉…
장중한 기운이 몰려들고, 지팡이 끝에 박힌 보석이 푸른색 빛을 번 들거렸다. 그가 지팡이를 치켜든 채, 나직이 지시했다.
"자, 마나공조를 시작하라. 합동 마법이다."
그의 지시와 동시, 뒤에 도열해 있던 수십의 마법사들 또한 마나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푸르른 기운이 일렁이더니, 수십 마법사들의 마나가 서로 이어졌다.
직후 허공에 커다란 마법진이 떠오른다.
그들은 서로의 힘을 모아, 보다 대규모 마법을 발현하고자 한다.
"시전할 마법은 폭렬폭풍 50중 첩. 목표는 전방의 공국 침공군 대열."
마법진이 붉은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패도적인 기운이 일렁이며 대량의 마나가 유동한다.
"침공군을 궤멸시킨다. 놈들을 쓸 어버려 제국의 강대함을 알려라."
막대한 양의 마나가 모여들었다. 허공에 붉은색 마법진이 점차 선명해졌다. 강렬한 붉은색 광휘가 주위 로 퍼져나간다.
그들은 대규모 공격마법을 준비 한다.
* * *
고개를 들어 올려 하늘을 바라봤다.
푸르른 기운이 퍼져나가 암흑색 어둠을 지워버렸다. 달빛을 가리는 밤구름이 밀려나 흩어 사라진다.
신비하고도 장중한 마나의 파장. 그것이 산의 정상 거점지역에서 퍼져 나오고 있다.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자. 어떡할 거냐, 한스 요한바르 첸."
시선을 내려, 내 앞에서 있는 녀석을 바라봤다.
한스 요한바르첸. 게임 속에서도 그리고 이 세상에 떨어진 지금에서 도 나와 악연으로 엮인 이다.
녀석의 표정을 살폈다.
"마법사…."
반쯤 정신이 나간 것일까. 놈은 허탈한 얼굴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믿기지 않을 것이다.
마법사. 마법이라는 이능으로 인간을 뛰어넘은 힘을 발하는 이들.
그들이 마침내 전장에 등장했다.
"그래. 결국 임무 실패로군."
한동안 하늘을 바라보던 한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내려, 이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녀석과 눈동자가 마주쳤다. 헌데 어째서인가. 방금 전까지 복수심에 불타오르던 녀석의 눈동자가 차갑 게 가라앉아있다.
"네놈. 이름이 뭔가."
문득 녀석이 내게 물었다.
이름을 묻는 말. 별로 꺼릴 이유 가 없기에 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한지훈이다."
"한지훈… 한지훈이라."
놈이 내 이름을 되뇐다. 똑똑히 기억하겠다는 듯이.
녀석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검을 들어올렸다.
"한지훈. 나는 직감했다."
녀석이 그립을 양손으로 잡고, 검날을 수평으로 뇌였다.
"네놈을 살려놓는다면 계속해 나 를 방해할 것이라고. 지금 그 어떤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말이다."
철그럭.
녀석이 검의 첨단을 내게 조준했다. 검날이 빛을 반사해 시퍼런 빛을 번뜩인다.
당장이라도 전투를 준비하는 모양새. 그에 나 또한 검을 들어올렸다.
"마법사가 도착했는데 . 도망치지 않는 건가."
"그쪽의 마법사는 아군의 본대를 노릴 것이다. 당장 이쪽을 신경 쓰 지는 않겠지. 그리고…."
놈이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겨 다가왔다.
"어차피 실패한 임무다. 이렇게 된 이상 네놈이라도 죽일 것이다."
"미련한 놈."
저 미친놈은 끝까지 나를 노릴 셈이다.
하긴, 제대로 성질을 긁어두긴했다. 더해 나 때문에 엿 먹은 것 이 한두 번이 아니니 끝장을 보고 싶을 터.
나는 이를 악물었다.
'좋지 않아.'
사실, 놈이 임무 실패에 포기하고 퇴각하기를 바랐었다.
이쪽 또한 한계에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에.
나는 내가 가진 능력치를 상기했다.
[내구 5]
[체력 19]
내구가 5. 체력이 19. 50이 넘는 민첩에 비해 심하게 모자란 능력치 들이다.
두 시간 동안이나 산 곳곳을 달렸기에 체력을 심하게 소비했으며, 격렬한 운동 때문에 온몸의 관절이 삐그덕 거렸다.
즉 내가 움직일 수 있는 한계가 그리 머지않은 상황.
좋지 않다.
"한지훈."
녀석이 다시 한 발자국 접근해오 며 나직이 말했다.
"죽여버리겠다. 반드시."
순간, 나는 위기감을 느꼈다.
녀석의 전신에 강렬한 기세가 일기 시작했다. 여태껏 그 어떤 적에 게서도 느끼지 못했던 묵직한 위압 감.
그 불안한 기척에 뒷걸음질 쳤다. 그 순간, 
콰앙!
녀석이 검을 내찔렀다. 막대한 힘이 실린 흉악한 검격이었다. 날카로운 검날이 공기를 찢어발기며, 내 목을 향해 파고들었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키기긱!
검날이 투구의 윗면을 긁었다. 쇠와 쇠가 마찰하는 소음이 울린다.
"여전히 잽싸군. 하지만 언제까지 나 피할 수는 없을 거다, 한지훈!"
놈의 공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콰앙!
한스가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우상단에서 좌하단으로, 강맹한 힘을 품은 검광이 사선으로 내리그어 진다.
녀석이 노리는 것은 나의 어깨. 검신을 들어올려 놈의 검격을 흘려 보냈다.
카가가가가각-!
녀석의 검날이 불똥을 튀기며 내 검신을 따라 미끄러진다.
이를 악물었다.
"힘 한번 더럽게 세네."
역시 녀석의 근력은 장난이 아니었다.
놈의 검격을 정면에서 막지 않고 흘려보냈음에도, 검이 미칠 듯 흔들렸다. 충격에 손목이 시큰거린다.
한스는 더욱 성장해있다. 검격은 더욱 민첩해져있으며, 검날에 실린 힘 또한 이전의 그것보다 더욱 중 후했다.
꽤나 빠른 성장속도. 거점방어전 당시의 놈보다도 더욱 상대하기 까다로워졌다.
하지만 성장한 것은 놈뿐만이 아니다.
나 또한 성장했다.
후욱.
뜨거운 숨을 토하며 앞으로 파고 들었다. 한스가 내 접근에 반응해 반격한다.
콰앙!
놈의 검날이 나를 저지하기 위해 휘둘러졌다. 커다란 검광이 공기를 양단하며 수평을 그리고, 검풍이 지면의 잡풀을 뒤흔들었다.
꽤나 강대한 힘이 실린 일격. 하지만.
' 보인다.'
강대한 힘이 실린 만큼 검로가 단순하다. 저 정도라면 쉽게 피할 수 있다.
상체를 뒤로 젖혀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놈의 검날이 가슴팍의 경 갑을 스쳐 지나간다.
키기긱, 쇠를 긁는 소음. 경갑의 표면 위로 기다란 스크래치가 아로 새겨졌다.
"뭣..!"
내가 당하리라 확신했던 것일까. 녀석이 당혹어린 신음을 냈다.
나는 씩 웃었다.
"느려 터졌잖아."
녀석의 공격은 분명 치명적이지만, 그리 빠르지 않다. 그리고 맞지 않는 공격은 의미 없다.
방금 전공격을 피해낸 덕분에 놈의 자세가 흐트러졌다. 빈틈이 훤 히 드러난 상황.
기회는 지금이다.
"뒈져!"
외치며 녀석의 간격 안으로 파고 들어가, 검을 내뻗었다. 노리는 것은 놈의 목. 두터운 중갑을 입은 녀석의 유일한 약점이었다.
내 검날이 한스의 목을 향해 움직인다.
그때였다.
"백인장님!"
부웅!
시야의 사각에서 검날이 쇄도해 왔다. 나는 한스에게 쏘아진 검의 방향을 바꿔, 내 등을 노리는 검을 쳐냈다.
쩌엉!
배후의 공격을 튕겨냈다. 시선을 돌려 나를 공격한 이를 확인했다.
"염병…!"
공국 병사였다.
제 지휘관이 밀린다는 것을 인식 하자, 나와 한스의 전투에 끼어든 것이다.
이를 갈았다.
'죽일 수 있었는데 .'
방금 전 나는 한스를 압도했다. 막대한 민첩 능력치를 살려 놈에게 파고들었고, 치명타를 가할 기회를 얻었었다.
허나 방해가 있다. 지금 나와 한스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공국 병사들이다. 놈들은 언제든지 나를 공격할 수 있다.
잊으면 안된다. 나는 놈들에게 둘러싸여 홀로 고립되어있다.
"놈을 공격해!"
"죽여어어!"
한 병사가 끼어들자, 용기를 얻 은 것인가. 다른 공국 병사들도 하나둘 나를 노리고 공격을 가해왔다.
다수의 창격과 검격이 나를 노리고 쏟아져 들어온다. 사방을 에워싸는 듯한 공격.
선택해야했다.
위험을 감수하며 한스를 처치할 지, 아니면 일단 내 목숨을 구하기 위해 몸을 뺄지.
내 선택은 후자였다.
"흐읍!"
몸을 던져 지면을 굴렀다. 방금 전 내가 서 있던 공간을 검날과 창 격이 난자한다.
가까스로 적 병사들의 공격을 피해냈다. 하지만 내게 공격을 가하는 것은 병사들뿐만이 아니었다.
"죽어라, 쥐새끼!"
한스 또한, 어느새 자세를 추스 르곤 나를 노리고 있다. 놈이 바닥을 구르고 있는 나를 향해 검을 내 리친다.
퍼억!
녀석이 검을 내리그었다. 나는 손과 발로 지면을 박차 튕겨지듯 일어났고, 놈의 검날은 방금 전 내가 있던 흙바닥에 처박혔다. 충격에 흙먼지가 튀어 오른다.
"염병할 놈들."
고작 나 하나 잡는데 여럿이 덤 벼들고 있다.
결국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못 죽인다.'
일대일 상황이라면 한스를 죽일 자신이 있다. 50이 넘어가는 민첩 은 충분히 그럴만한 능력이 있었으 므로.
하지만 지금은 한스를 보조하는 병사들이 너무나 많다. 죽일 수 없다. 놈을 죽이기 위해 무리한다면 다른 병사들이 나를 노리고 가세할 것이다.
그러니,
'도망쳐야 해.'
도망쳐야 한다. 무리해서 한스를 처치한다 한들, 내가 죽으면 본말전 도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천천히 물러났다.
숨을 고르고는 주위를 살폈다. 녀석의 포위망 중 허술한 부분을 노려 도주하기 위해.
"도망치려는 것인가."
그런 내 움직임을 간파한 것일 까.
한스가 저벅, 발걸음을 옮겨 이쪽으로 접근해왔다.
"도망치게 놔두지 않는다, 한지훈. 임무를 실패한 이상, 네놈만은 반드시 죽일 것이다."
녀석의 눈동자에 집념이 일렁인다.
"망할."
절로 욕지거리가 흘러나왔다.
이쪽을 둘러싼 병사들의 포위망. 돌파하려면 할 수 있다. 하지만 한스가 정면에 있는 이상 그리 쉽게 틈을 드러낼 수 없다.
놈은 느리지만 강하다. 아니, 느리다는 것도 어디까지나 나와 비교할 때의 이야기다. 녀석은 일개 병사들 따위보다 훨씬 빠르고 기민하 게 움직인다.
아무리 나라 한들, 쉽게 틈을 보 일 순 없다.
"네놈은 이곳에서 죽는다."
저벅, 저벅.
녀석이 계속해 다가온다. 동시에 이쪽을 포위한 병사들도 점차 간격을 좁혀온다.
압박이 점차 심해지고 있다. 이대로 있다간 꼼짝없이 포위되어 죽을 판이다. 나는 계속해 주위를 살 폈고, 빈틈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 쿠르르르르르르릉…!
장중한 소음이 사방천지를 뒤엎었다. 나무가 흔들리고, 강렬한 충격파가 공기를 진동시켰다.
갑작스레 일어난 굉음. 그리고 온몸을 저릿하게 하는 중후한 진동 까지.
나는 이것이 뭘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시작됐네."
고개를 들어올려, 다시금 하늘의 광경을 시야에 담았다.
밤하늘에 커다란 마법진이 떠올라있다. 마법진의 색은 타오르는 불꽃처럼 선명한 붉은색이었다.
게임 속에서 자주 보았던 거대 마법진.
어쩌면, 한스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얻을지도 모른다.
- 쿠르르르르르르…!
소음과 함께, 마나의 파장이 더욱 중후해졌다. 허공에 떠오른 마법 진의 빛이 더더욱 강렬해진다.
마법진은 계속해 그 크기를 늘려 가며, 보다 웅혼한 파장을 발해갔다.
곧 일렁이는 빛이 절정에 이는 그때.
나는 눈을 감았다.
직후 이변이 일어났다.
- 번쩍!
마법진이 환한 빛을 터트렸다.
순간 차마 눈을 뜰 수 없을 정도 의 막대한 광량이 사방천지를 뒤덮었다. 주위에 있던 공국 병사들이, 그리고 한스가 그 강렬한 빛에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때, 나는 눈을 떴다.
녀석들은 갑작스러운 섬광의 여 파로 아직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상황.
지금이라면,
'죽일 수 있다.'
파앙!
나는 자리를 박차고 도약했다.
27화.
공국군 제 1군단 군단장, 페라다 루고 후작.
그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읊 조렸다.
"마법진…."
어둑한 밤하늘 위, 거대한 마법 진이 떠올라 있다.
마법진의 색은 너무나도 불길했다. 마치 피처럼 붉은 진홍색. 그것 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밝은 빛을 발해갔고, 장중한 파장을 일렁이고 있다.
페라다는 다급한 목소리로 수석 마법사에게 물었다.
"마법단장! 적의 마법이다! 저 마법진의 술식을 해석할 수 있나?"
그의 옆에 있던 수석 마법사는 침묵했다.
어째서 대답하지 않는 걸까. 답 답한 페라다 후작이 재차 물었다.
"마법사!"
"장군. 병력을 당장 뒤로 물리십시오."
마침내 입을 연 마법사가 한 말 은, 다름 아닌 병력을 뒤로 물리라는 소리.
"그게 무슨 소리인가?"
"저 마법진은…."
마법사들이 하나둘, 품속에서 푸른색 액체가 넘실거리는 병들을 꺼내 마시기 시작했다. 마나포션이었다.
명백히 전투를 준비하는 모습.
수석 마법사가 알린다.
"저 마법진은 폭렬폭풍마법. 제국 라브리에 전투마법단이 자랑하는 광역공격 마법입니다."
"라브리에 전투마법단이라니. 설마…."
"맞습니다. 후작."
마나포션을 들이킨 마법사가 입가를 훔치며 마나를 끌어올렸다.
우우우웅….
신비한 푸른색 기운이 그의, 그리고 그의 배후에 도열해있는 마법사들에게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지금 저 고지 정상에 있는 것은 라브리에 마법단입니다. '그' 라브 리에 마법단 말입니다."
"… 맙소사."
페라다 후작은 침읍성을 흘렸다.
라브리에 마법전투단. 어찌 모를 수 있을까. 적어도 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나라의 군관이라면, 그 잔혹한 집단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다.
수십 년간 제국 정복 전쟁에 종 군, 수많은 전장에서 무패의 화력을 자랑하던 최강의 전투마법단. 그들 의 공조마법은 군단을 쓸어버렸고, 성벽을 무너뜨렸으며, 도시를 불태 우고 왕궁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라브리에 전투마법단이, 그들의 앞에 있다.
"저희 마법사들이 전력을 다해 방호마법을 펼치겠습니다. 하지만, 막을 수 있으리라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저쪽 마법사들은 온갖 전장을 경험한 전쟁의 전문가."
마법사들이 스태프를 치켜들었다. 푸르른 기운이 상승하고, 커다란 마법진이 생성되어간다.
"막아봐야 찰나를 버티는 것에 불과할 터입니다. 후작. 당장 병력을 뒤로 물리십시오."
마법사의 말이 끝남과 동시, 허공에 푸르른 장벽이 펴졌다.
공국 마법사들이 발현할 수 있는 가장 고위의 방호마법, 천공의 수호 벽이었다. 무려 백여 명에 달하는 마법사들이 발현한 방호마법.
그리고 그때.
제국 전투마법사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 번쩍!
찬란한 섬광이 허공에서 터져 나 왔다. 드넓은 영역에 있는 모든 이 의 시력을 일순간 손상시킬 정도로 웅장한 빛이었다.
직후, 허공에서 무수히 많은 수 의 붉은 궤적이 비산해, 이쪽으로 쏟아져 내렸다.
- 콰과과과과과광!
붉은 궤적 하나하나가 강렬한 힘을 품고 있는 '폭렬구'였다. 그것은 허공에 펼쳐진 방호마법을 사정없 이 두드리고, 폭발했다.
수많은 폭발이 허공에서 일어나고, 고막을 뒤흔드는 폭음이 청각을 유린했다. 푸른색 장벽이 충격에 흔들렸다.
그 순간, 페라다 후작은 희망을 가졌다.
'막고 있다!'
분명 제국 마법사들의 화력은 강대했다. 저토록 많은 폭렬구가 쏟아 져 내리는 광경이라니. 몇 번의 전 면전을 경험해본 페라다 후작조차 처음 보는 웅장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분명 막아내고 있다. 적의 폭렬구는 방벽을 파훼하지 못했 으며, 상공에 떠오른 거대한 방호마 법이 제국의 폭렬구를 막아내고 있다.
'그래. 라브리에 마법단이라 한 들, 그래봤자 일개 마법단에 불과하다.'
페라다 후작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간 들려오던 놈들의 무위는, 예전 전공이 부풀려진 헛소문에 불과할 터다. 우리 또한 백여 명의 종군마법사를 이끌고 왔다. 무력하 게 지지는 않을 터!'
라브리에 전투마법단. 분명 우수 한 이들일 터다.
하지만 이쪽에도 마법사가 있다. 그것도 우수한 마법전력으로 유명 한 카렌 왕국의 마법사들이.
그들이 있다면, 할 만하다!
페라다 후작은 우습게도 그리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생각은 곧 깨지고 말았다.
"쿨럭, 커헉!"
마법사들이 하나둘 입가에서 피 를 토하기 시작했다. 그에 페라다 후작은 놀라고, 수석 마법사는 입에서 피를 토하면서도 외쳤다.
"장군! 오래 버티기는 힘듭니다!"
콰득, 콰지직.
허공에 자리해 있던 푸른색 방벽에 점차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것 은 불길한 파쇄음을 일으키며 점차 무너져 내리려 한다.
수석 마법사가 마나포션을 마시 며 힘겹게 읊조렸?
"광역 마법을 이토록 오래 난사하다니. 마나량이 말도 안 되는군. 제국의 마법사들은 정녕 괴물이란 말인가…."
마법사의 눈동자에는 체념의 빛 이 떠올라있다.
그제야 페라다 후작은 상황을 파악했다.
지금 마법사들은 자신의 생명마 저 갉아먹으며 분투하고 있다. 저 고통스러운 표정과 입에서 흐르는 선혈이 그것을 증명했다. 필시 자신 의 마나하트와 연산력을 한계까지 운용해가며 아군을 지키고 있는 것 일 터.
시간이 얼마 없다. 군단장이 큰 목소리로 명령했다.
"깃발을 올려라! 전군, 전속 퇴 각! 흑기를 올려라!"
"흑기 올려!"
부관이 복창하고, 신호병들이 커다란 깃발을 올렸다.
올린 깃발의 색은 검은색. 전멸 의 위기이니 가능한 가장 빠른 속도로 전장을 이탈하라는 뜻의 깃발 이었다.
- 부우우우우---.
뿔피리가 울린다. 군단장 기수가 검은색 깃발을 들어 올린 것을 확인한 다른 기수병들 또한, 검은색 깃발을 높이 들어 퇴각 명령을 전 파했다.
공국 군대가 퇴각하기 시작한다.
"포트 갈레이까지 후퇴한다!"
"보급마차는 버려라! 병장기만 챙겨서 뒤로 빠져나와!"
"이곳에 있다면 모두 죽는다!"
제국 방향으로 남하하던 그들이 순식간에 뒤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질서정연하게 행군하던 모습은 그 어디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그저 살기 위해,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공국 방향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그때.
- 콰직, 콰지지직!
허공에 떠올라있던 커다란 방벽 이 깨져나가기 시작했다. 커다란 균 열이 하나둘 생겨난다.
피를 쏟던 마법사가 하늘을 바라 보며 중얼거렸다.
"끝이군."
직후.
콰드드드득!
방호마법이 완전히 깨져버렸다.
- 콰과과과과광!
유린이 시작되었다.
붉은색 궤적이 지상으로 낙하했다. 커다란 폭발이 일고, 불길이 일어나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차마 세기 힘들 정도로 많은 수의 폭렬구 가 공국군 진영에 틀어박혀갔다.
"끄아아아아!"
"살려줘, 살려줘!"
병사들이 후폭풍에 휘말려 날아 갔다.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길은 지면을 뒤덮었고, 보급마차와 병사들을 불태웠다.
핏빛처럼 붉은 불길이 퍼져나간다.
번쩍! 콰르르르릉!
허공에서 빛무리처럼 반짝이는 섬광. 직후 수없이 터져 나오는 굉 음과 폭발. 병사들의 시체가 허공으로 비산하고, 그들의 파편이 핏물로 화해 지면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화르르륵!
화마가 번져나갔다. 광활한 침공 로는 순식간에 불꽃의 붉은 빛으로 물들어갔다. 나무와 숲이, 사람과 마차가 타올랐다. 마법사들의 무차 별 광역공격으로 이 드넓은 침공로 가지옥으로 변하는 데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지옥 속, 수많은 생명 이 스러져갔다.
공국군 제 1군단이 와해되었다.
나는 앞으로 달려나갔다.
50을 넘은 민첩 능력치가 동작을 보조했다. '엑스트라 스킬 : 집중' 이사고를 가속시켰다. 전투분석이 최적의 경로를 도출해냈다.
지면을 딛고 달렸다. 내 몸이 앞 으로 향한다.
검의 그립을 꽉 쥐었다.
'한스 요한바르첸.'
내 코앞에, 놈이 있다.
빌어 처먹을 나의 대적자. 게임 속에서도, 그리고 이 개 같은 세상에서도. 내 앞을 가로막는 개자식.
'죽여버린다.'
녀석은 아직 섬광의 여파로 시야 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절호의 기회. 지금이라면 죽일 수 있다.
"흐읍!"
기합을 내지르며 검격을 가했다.
파공성이 터져 나오고, 검광이 번뜩였다. 내 검날이 수평을 그리며 한스의 모가지로 쇄도한다.
하지만,
- 채앵!
한스가 검을 들어 올려 내 검격을 방어해냈다. 분명 녀석은 아직 시야를 온전히 회복하지 못했을 터 인데도.
내심 이를 갈았다.
'직감에 의지해 막은 것인가.'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만큼 놈 의 직감은 비상식적인 것이었으니 .
하지만 그래봤자 느리다. 나는 검날의 방향을 비를어, 재차 놈의 목을 노리고 휘둘렀다.
쉬익!
쾌검이 그어진다. 보다 높은 각 도로 휘둘러진 횡 베기.
허나 놈은 그것마져 수월하게 막 아냈다.
- 키기기기긱!
녀석이 검신을 비스듬히 뉘여 내 공격을 흘려보냈다. 마찰에 불똥이 튀고, 쇳소리가 울렸다.
내 검끝은 놈의 뺨을 스쳐지나가는 것이 고작.
미량의 핏물이 치솟았다.
"백인장님이 위험하다!"
"도련님을 보호해!"
마침내 상황을 파악한 것일까. 공국 병사들이 허겁지겁 가세하기 위해 달려온다.
하지만 늦었다. 나는 이미 녀석을 몰아넣고 있으니 .
치켜 올라간 검날을 빙글 돌려 회수, 검의 손잡이를 굳세게 쥐었다.
가속된 인지 속, 한스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제는 반쯤 시력을 회복 한 것인가. 놈의 눈동자는 정확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한스의 눈동자에 떠오른 감정을 읽었다.
당황, 분노, 그리고 미약한 불안.
검을 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다음 일격으로 끝내주마.'
두 번의 검합을 나눴고, 그 덕분에 한스의 자세가 흐트러져있다. 때문에 빈틈이 드러난 상황.
물론 빈틈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극한에 달할 정도로 민감해진 내 동체시력이기에 겨우 잡을 수 있는 기회.
그리고 나는, 그 기회를 놓칠 정도로 허술하지 않다.
"후욱."
숨을 들이키며 자세를 낮췄다.
시야가 낮아진다.
극도로 흥분한 덕분일까. 사고가 더더욱 가속되고, 시야가 보다 느려 져갔다.
그리고 좀 더 명확하게 놈의 빈 틈이 눈에 들어왔다.
흐트러진 자세 속, 비어있는 중단. 가슴과 목까지 드러난 작은 틈.
나는 그곳을 노리고 검을 내찔렀다.
제국 검술의 마지막 초식, 찌르 기.
콰앙!
묵직한 파공성과 함께 검신이 곧게 뻗어나갔다. 검날의 끝이 번뜩이 며 반사광을 흩뿌렸다.
이 순간 나는 놈의 죽음을 확신했다.
녀석은 아직까지 시야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상황. 더해 두 번의 검합 덕분에 자세까지 흐트러져있다. 막을 수 있을 리 없다.
슬며시 미소가 올라왔다.
승리를, 그리고 대적자의 죽음을 확신했기에. 가슴 깊숙한 곳에서 자신감과 기쁨이 용솟음친다.
직후.
- 퍼억.
내 검신이 한스의 목을 꿰뚫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때문일까. 한스는 자신의 목에 검날 이 박혔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 것인지, 멍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하하."
멍청한 얼굴이다. 내 입가에 다시금 미소가 떠오른다.
놈이 부들거리는 오른손을 들어 올려 검을 휘두르려 한다. 그에 나는 아무 말없이 검신을 비틀었다.
콰드득.
녀석의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
"쿨럭!"
한스가 부글거리는 피거품을 뱉 어냈다. 질척한 핏물이 내 뺨에 튀었다.
하지만 전혀 불쾌하지 않다. 오히려 유쾌한 기분이 올라온다.
나는 검을 빼내며, 녀석의 몸을 발로 찼다.
쿵.
실 끊긴 인형처럼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놈의 육신. 한스의 커다란 덩치가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비릿한 혈향이 올라온다.
- 띠링! 띠링!
[대적자 NPC를 처치했습니다.]
[업적 달성!]
['업적 : 대적자 NPC 처치(1)'를 달성했습니다! 포인트가 수여됩니다.]
[수여 포인트 : 10pt]
(남은 포인트는 10pt입니다.)
[서브 퀘스트 - '고지대 거점 방어전'을 '완벽하게' 완수했습니다!]
[시나리오보다도 더 높은 점수를 얻었습니다. 포인트가 추가로 정산 됩니다!]
[정산 포인트 : 15pt]
[추가 정산 포인트 : 20pt]
(기존 보유 포인트는 10pt입니다.)
(남은 포인트는 45pt입니다.)
나는 미소 지었다.
28화.
한스의 처치, 그리고 미션의 완 수그 덕분에 45포인트를 얻었다.
나는 홀로그램을 확인하고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도련님…."
"맙소사."
차마 믿기지 않는 것일까.
공국 병사들이 경악한 채 입을 벌리고 있다.
나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큰 골칫거리를 없앴어."
부웅! 검을 휘둘러 피를 털어냈다. 붉은색 핏물이 후드득 떨어지며 대지를, 그리고 바닥에 쓰러져있는 한스의 시신을 적셨다.
나는 놈들, 내 사방을 포위하고 있는 공국 병사들을 바라봤다.
"… 도련님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
문득, 어떤 병사가 그리 읊조렸다.
"포위망을 견고히 해라. 녀석을 몰아서, 확실하게 죽여버려."
"방심하지 마라. 녀석은 강하다."
"포위진 좁혀."
공국 병사들은 지휘관의 죽음에 도 당황하지 않고, 나를 몰아넣기 위해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역시 놈들은 정예였다. 조금씩 신중하게 좁혀오는 꼴이 꽤나 유기 적이다. 더해 차갑게 가라앉은 저 눈동자란. 반드시 나를 처치하겠다는 집념이 이글거리고 있다.
하지만 그래봤자 일반병.
반면 나는 시스템의 보정을 받는 유저다.
"내 정보."
나에게는 포인트가 있다.
방금 전 미션을 완주하고, 한스 를 죽여 얻은 45pt의 포인트가.
- 띠링!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한지훈][4번 백인장]
[스킬 : 백인대 전투지휘술]
[스킬 : 제국 검술(하급)]
[엑스트라 스킬 : 집중]
[엑스트라 스킬 : 전투분석]
[근력 14]
[민첩 53]
[내구 5]
[체력 19]
[마나 0]
(남은 포인트는 45pt 입니다.)
공국 병사들은 이쪽을 경계하며 조금씩 간격을 좁히고 있는 상황.
덕분에 포인트를 사용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나직이 읊조렸다.
"내구. 10포인트 상향."
- 띠링!
['능력치 : 내구'를 10포인트 상향합니다.]
[상향에는 10pt가 필요합니다.]
[상향하시겠습니까?]
[수락/거절]
"수락."
변화가 일었다.
과도한 운동에 의해 삐그덕 거리 던 관절이. 그리고 수풀을 헤치며 자잘하게 긁혔던 작은 상처들이 조금씩 아물어 간다.
나는 신체가 보다 강건해져 가는 것을 느꼈다.
물론 여기서 멈출 생각은 없다.
"체력. 10포인트 상향."
- 띠링!
['능력치 : 체력'을 10포인트 상향합니다.]
[상향에는 10pt가 필요합니다.]
[상향하시겠습니까?]
[수락/거절]
"수락."
점차 탈진 상태에 접어들었던 내 몸에 기력이 충만해져 갔다.
근육에 힘이 되돌아온다. 혹사당 해 피곤함이 가득 찼던 온몸의 근육들이 풀어진다. 거칠어졌던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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