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idade 2

근력이 13, 민첩이 16이라.
처음으로 두 자리 수의 능력치를 가지게 되었다.
'이 정도라면.' 이길 수 있을까.
모르겠다. 놈과 직접 싸워본 적 이 없으니 .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나는 주위에서 있는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카일. 너는 병사 다섯을 데리고 우측 수풀에 몸을 숨겨라."
"… 후퇴하지는 않는 겁니까?"
"그게 가능하다 생각하나?"
카일은 아무래도 후퇴를 생각한 것 같았다.
하긴, 삼십의 적이다. 과거 여섯 으로 격파한 적이 있지만, 그때가 비정상적인 것이고. 이런 야지의 전투에서는 전력이 적은 측이 후퇴하는 것이 타당한 일이니.
후퇴. 물론 하고 싶다.
허나 그렇게 할 순 없다.
"이곳까지 오는데 너무 많은 체력을 소모했다. 후퇴하고 싶어도, 체력이 안 돼. 싸워야 한다."
한스를 피하고 싶어 서둘렀던 내 결정은 실책이었다. 병사들은 무리 한강행군 때문에 지쳐있고, 그렇기에 곧장 후퇴한다 한들 금방 따라 잡힐 터.
교전해야 한다.
나는 시선을 재차 아래로 내려,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공국 놈들을 주시했다.
"아직 놈들은 우리가 있다는 걸 모른다. 일단 매복해, 이곳에 오는 순간 공격한다."
내지시에 카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의 얼굴은 전투의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있다.
하지만,
"믿습니다. 십인장님."
나를 신뢰하는 것일까. 녀석의 긴장된 안색과 달리, 눈동자에는 어떤 믿음의 감정이 일렁였다.
과거 척후조 퇴각전 때처럼 내가 그들의 목숨을 구해주리라 바라는 것일 터.
기분이 나쁘진 않다. 내 능력을 의지한다는 것이니.
녀석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나를 믿어라. 내지휘를 믿어라. 나의 전투능력을 믿어라."
그렇다면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 턱.
카일은 자신의 주먹을 심장에 가 져다 대 경례했다.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녀석과 다섯의 병사가 매복지점을 찾아 천천히 이동했다. 소음이 일지 않게 조심하는 것일까. 그 움직임에는 신중함이 그득하다.
나는 시선을 돌려 내 주위의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우리도 매복한다."
주위 병사들을 바라봤다.
방금 전 카일이 데려간 병사들은 저번 척후조 퇴각전에서 살아남은 이들이었다. 그렇기에 나에 대한 신 뢰가 있었다.
허나 지금 내 주위에 있는 네 명의 병사는 아니었다.
그들은 이번이 내 아래에서 경험 하는 첫 전투일 터. 아직 나를 신 뢰하지도, 그리고 생존을 확신하지 도 못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교전에 들어간다 면, 여차할 때 도망치거나 전투를 포기할 수 있으니 .
사기를 끌어올려 놔야 한다.
"아르덴, 리버, 하비, 앤더슨."
녀석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 며, 눈을 맞췄다.
그들의 눈동자 속에 자리한 것은 역시나 공포. 전투의 긴장이 아닌, 목숨을 잃을 수 獵募?불안이다.
놈들에게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강하다."
정말로 , 나는 강하다. 일개 병사치고는 나름대로의 무력이 있으니 .
"내가 너희들을 살릴 것이다."
적어도 살리려고 노력해볼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도 나를 믿어라. 내지시에 따라라. 나와 함께 싸워 라."
다시금 병사들과 눈동자를 맞췄다.
내 허세가 먹힌 것일까, 놈들의 두려움이 약간이나마 가라앉아있다.
피식 웃었다.
'이딴 짓거리는 게임에서도 해본 적 없었는데 .'
과거 블랙 오케스트라를 진행할 적. 내가 하는 것이라고는 그저 마 우스를 휘적거리는 것밖에 없었다. 유닛을 지정하고, 적을 참하고, 명령을 하달하고, 전투를 진행하고. 그 모든 행동이 마우스와 키보드 조작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지금 나는 아군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입을 열고 있다.
게임에서도 없던 행동, 사기 진 작이라.
"좋아. 그럼."
마지막으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더더욱 가까워진 공국의 병력이 보인다. 여전히 놈들의 선두에 있는 것은 중갑을 입은 갈색머리의 청년.
한스 요한바르첸.
확실히 강적이다. 검술과 전술의 재능이 있으며, 성장에 대한 의지도 충만하다. 시나리오의 극 후반부까 지, 저 개자식은 나에게 복수하기 위해 온갖 짓거리를 걸어왔다.
하지만 그것은 게임 속 이야기.
녀석은 아직 성장하지 않았다. 지금은 게임의 초반부에 불과하니까.
현재의 녀석은 꽤 귀한 혈통을 가진 재능 있는 검사. 그이상도, 이하도 아니니.
이 정도라면 할 만하다. 아니, 전혀 할 만하진 않지만, 해내야만 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으므로.
나는 마지막으로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모두 매복해. 놈들이 우리를 통과할 때, 공격한다."
나와 병사들이 수풀 사이로 몸을 파묻었다.
적이 다가온다.
한스 요한바르첸. 요한바르첸 공국의 후계자.
그는 산을 오르며 생각했다.
'별 볼일 없는 임무다.'
정찰 겸 거점 장악. 고작 삼십여 명으로 진행하는 그저 그런 임무다. 과거 그가 수행했던 일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수준의, 조잡한 임무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산의 정상을 바라봤다.
그러자 보인다.
청아한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서있는 산 정상의 모습.
저곳을 확보한다면, 임무를 완수 할 수 있다.
그는 한탄하듯 읊조렸?
"어서 내 능력을 증명해야 한다."
한스의 얼굴에는 수심이 그득했다.
그는 본래 공국 천인장이었다. 무려 천 명의 병사를 통솔하는 고위장교의 자리. 스무 살을 갓 넘 긴 젊은이에게 몹시 과분한 직책이었다.
사실, 혈통 덕분에 얻었던 자리였다. 그의 아비가 다름 아닌 공국의 군주, 헤임스 요한바르첸 공작이 었으니 .
비록 그는 첩의 자식이었으나, 공작의 슬하에는 남자라곤 자신밖에 없던 상황. 덕분에 그는 후계자 로 인정받고, 천인장 직책을 가질 수 있었다.
처음 천인장 자리를 얻었을 때만 해도 그는 자신이 있었다.
스스로가 가진 재능이 범상치 않다고 여겼기 때문에.
모의 전투에서는 항상 이겼고, 검술 실력 또한 쟁쟁한 엘리트 장 교들에게 뒤처지지 않았다.
뛰어난 혈통, 넘치는 재능.
언제나 출세가 보장되어 있다 생각했다.
허나 그것 또한 과거의 이야기. 지금의 그는 공국군 삼십인장에 불과하다. 천 명의 병사를 통솔하던 고위 장교에서, 일개 소규모 부대의 지휘관급으로 추락한 것이다.
한스가 이를 까득 악물며 독백했다.
"너무 안일했다."
제국의 척후부대를 우습게 봤다.
고작 열 명의 병사들이었다. 놈 들은 한스가 미리 배치해둔 초계망을 은밀히 돌파했고, 더해 침공 정보까지 알아내 무사히 후퇴했다.
그리고 초계망이 뚫렸던 방면은 다름 아닌 한스의 담당구역.
변명할 수 없는 패배였다.
그는 고개를 들어올린다.
'만회해야 한다.'
한스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은 비록 공국군 삼십인장에 불과하지만, 곧 전공을 세워 다시금 아비의 눈에 들리라. 그래서 언젠가 아비의 자리를 물려받으리라.
그는 그리 결심하며 발을 놀렸다. 병사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공국 병사들은 천천히, 산의 정상을 향해 접근해갔다.
제국 병사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나는 수풀 속에 숨어 홀로그램을 주시했다.
바라보고 있는 홀로그램은 역시 나 전술창 홀로그램. 십인대 지휘술 스킬 덕분에 발현된 자그마한 미니 맵이다.
그것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접근하고 있어."
지도의 붉은 점이 조금씩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경계는 전혀 하지 않는 것일까. 속도가 전혀 느리지 않다. 더해 병사들의 분포 또한 제멋대로 어지러이 흐트러져있는 상황.
저런 대형으로 이동한다면 기습에 취약할 텐데.
피식 웃었다.
"하긴. 공국 놈들이 좀 허접하긴 하지."
군대에 온갖 공을 기울이는 제국 과 달리, 공국의 군대는 조잡하다. 국력의 차이 때문이었다.
제국군은 대륙 남부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신흥 열강이었다. 그 들은 오랜 정복전쟁과 중앙집권화 덕분에 강대한 힘을 지니게 되었다.
반면 공국은 작은 소국에 불과했다. 왕국의 막대한 지원을 받은 덕분에 그 국력이 마냥 약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제국에 비해 한참 못 미치는 것이 사실.
하물며 그들의 병사 대부분은 징 집병이었다.
잘 훈련받은 제국의 정규병, 그리고 농사와 생업에 종사하다 징집 영장에 끌려온 공국 징집병.
차이가 클 수밖에 없다.
당장 훈련 기간과 축적된 전투경 험이 다르다. 같은 신병이라 한들 제국 병사가 훨씬 더 잘 싸우고, 더욱 오래 살아남았다.
1: 3의 교전비라. 힘들겠지만, 나름대로 할 만하다. 더해 이쪽이 기 습하는 입장이니. 어느 정도의 승산 은 있을 터.
하지만,
"…적 지휘관이 가장 큰 문제인데."
한스를 우습게 볼 수는 없다.
나는 알고 있다. 놈의 집념과 복 수에 대한 의지를.
물론 별다른 악연을 쌓지 않은 지금의 녀석은 그저 그런 도련님에 불과하다. 허나 놈의 아비를 죽이고, 공국을 멸망시킨다면.
녀석은 복수에 미친 악귀로 변해 버린다.
"이번 전투에서 녀석을 죽여야 해."
철그럭. 검의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제발 죽어줬으면 좋겠다.
내가 이 염병할 게임 속에서 생 존하기 위해서.
그때, 문득.
- 바스락, 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다수의 발자국이 풀을 지르밟으 며 전진하는 소리.
시선을 내려 다시금 홀로그램을 주시했다. 붉은색 점이 거의 지척에 다가왔다.
후우, 심호흡했다.
'아직이야.'
아직, 완전히 녀석의 대열이 매 복과 매복 사이에 자리하지 않았다.
입술을 씹으며 홀로그램을 노려 보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오면. 완벽한 기습 타이밍이다.
손바닥에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온 근육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심장 의 뛰는 속도가 빨라진다.
'거의 다 왔어.'
붉은색 점이, 완전히 지척에 다 가왔다.
전투가 가깝다.
나는 생각한다.
'어떤 게 한스지?'
기습의 기회가 있을 때, 한스를 노리고 싶다. 그래야 죽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니.
하지만 고작 미니맵 만으로는 누 가 한스인지 판별할 수 없다.
놈을 가장 먼저 치고 싶은데.
훅, 후욱.
긴장에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검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바로 뛰어나갈 수 있게 하체를 긴장시켰다. 대퇴근이 팽창한다.
나의 전투감각이 날카롭게 벼려 졌다.
- 바스락!
바로 앞에서 소음이 일었다.
지금이다.
파앙!
나는 수풀 속에서 검을 내찔렀다.
11화.
나는 수풀 속에서 검을 내찔렀다.
시야 없이 내지르는 공격이었지만, 성공을 확신했다. 홀로그램의 붉은 점이 있는 지점을 향해 정확히 검날을 밀어 넣었으므로.
푸우욱.
감촉이 있다.
검격이 수풀과 공기를 꿰뚫고, 인간의 연약한 살과 장기를 헤집는 감각. 그 물컹하고도 불쾌한 감각 이, 검의 손잡이를 타고 전해진다.
손목을 돌려 검날을 비틀었다.
"꼬으, 끄아아아아아!"
한 박자 늦은 비명.
나는 얼굴도 모르는 적병의 장기 를 헤집었다.
"일단 한 명."
이렇게 장기를 난자해 놓으면, 포션이 없는 한 무조건 죽는다.
지면을 박차며 외쳤다.
"기습해! 전투 시작이다!"
내 돌진과 동시, 수풀에 몸을 파 묻고 있던 병사들이 하나둘 뛰쳐나 와 적병을 참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다수의 공국 병사들이 피를 흘 리며 쓰러져갔다.
미리 매복을 준비하고 있던 제국 군. 그리고 무방비하게 산을 오르던 공국군.
기습이 실패할 리 없다.
놈들은 당황해 우리의 공격에 제대로 반응치 못하고 있다.
이때 최대한 많이 죽인다.
나는 검을 움직였다.
파앙!
검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울리는 파공성. 반월 모양으로 번뜩이는 검광. 그리고 잘려나가는 적병의 목.
허전한 공국 병사의 모가지에서 피가 뿜어진다. 녹음으로 이루어진 대지 위로 붉은색 얼룩이 흩어졌다.
"무슨, 무슨 일이냐?!"
누군가가 당혹성을 내었다. 그쪽을 바라보았다.
'거기 있었나.'
노리던 녀석을 찾았다.
[한스 요한바르첸][공국 삼십인장]
"당장 무기를 꺼내들어라! 진형을 갖춰라! 방어태세를 다져라!"
한스. 내가 죽여야 할 네임드 유닛.
놈이 검을 뽑아들고는 병사들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그에 공국 병사들이 녀석의 주위로 몰려든다.
아마도 방어진형을 갖추려는 것 일 터.
"어림없다!"
공국 병사들이 진형을 짜기 전에, 놈을 죽여야 한다.
나는 지면을 박차고 돌진했다. 극대화된 민첩 능력치 덕분에 몹시 빠른 속도였다.
자신의 지휘관을 노리는 것을 직 감한 것일까. 공국 병사 여럿이 가로막는다.
허나 쓸데없는 짓이다.
"다 죽어라!"
포효하며 검을 내찔렀다.
가장 처음은 사선 베기.
촤악!
검이 우상단에서 좌하단으로, 기다란 사선을 그리며 내리쳐졌다. 나를 가로막으려던 공국 병사 하나의 가슴이 베어졌다. 녀석은 허탈한 얼굴로 주저앉았다.
쿵. 진각을 밟듯 한 발자국 전진. 내 오른발이 앞으로. 검날은 약간 뒤로. 검의 첨단이 지면에 닿을 듯 말 듯 멈춘다.
다시 한번, 사선 베기.
파앙!
또 다른 적병이 베였다. 녀석이 겨드랑이부터 가슴팍에 이르는 자 상을 입고 휘청인다.
녀석을 발로 차 넘어뜨리고, 몸을 낮췄다.
파바박!
방금 전 내 상체가 있던 곳에 여러 개의 창격이 스쳐지나갔다.
과연. 그래도 후계자 놈의 병사 인 만큼, 나름대로 베테랑 병사를 배치한 것인가. 놈들은 다른 공국 병사들보다 기민하게 움직인다.
하지만 그래봤자 나보다 약하다.
"뒈져!"
몸을 낮춘 그대로, 적병에게 달 려들었다.
퍼억! 놈의 복부에 내 검날이 박 혀 들어갔다. 창병인 놈은 간격 안에 들어온 내게 반응할 수 없었다.
검을 비틀어 빼냈다. 녀석의 입가에서 울컥 피가 흘러나온다.
재차 날카로운 창격이 쇄도한다. 나는 비틀거리는 공국 병사를 밀어, 적의 창격을 대신 맞게했다. 휘청 이던 놈이 내 대신 창격에 꿰뚫려 절명한다.
"허억!"
아군을 찌르자 당황한 것일까. 공국 창병 놈이 당혹성을 내질렀다.
그때를 노려 검을 휘둘렀다. 파 공성이 일고, 제 아군을 찌른 놈의 목을 긁었다.
붉은 피가 뿜어진다.
"후욱, 후욱!"
전투의 흥분에 거친 숨이 흘러나 온다.
나와 한스의 경로에 자리한 적병 은 더 이상 없다. 한스는 당황한 눈으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을 뿐.
이제 놈을 베어 죽일 차례다.
파악! 지면을 박차고 달렸다. 검을 뒤로 당겨 내찌를 준비 동작을 마친다.
악을 내지르며 검을 뻗었다.
"뒈져라!"
내 검격이 한스를 향해 쇄도했다.
날카로운 검날이 공기를 양단하고, 푸르른 검광이 반월을 그리며 녀석의 목을 노린다.
허나. 놈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한스가 장검을 들어 올려 방어했다.
쩌엉!
검과 검이 맞부딪혀 커다란 검합 음을 토했다. 충격에 검신이 찌르르 울었다.
손이 얼얼하다.
"망할."
욕지거리를 뇌까리며 검을 회수.
간격을 벌려 한스에게서 물러났다.
단 한번의 검합에 불과했다. 허 나 그 잠깐의 접전 동안, 나는 절 절히 체감할 수 있었다.
'너무 강해.'
예상대로라 할까. 지금의 내게 힘든 적이다.
방금 전공격은 전력을 다한 공격이었다.
더욱 많은 힘을, 보다 민첩하게, 좀 더 정확하게. 놈의 모가지에 박 아 넣고자했다.
하지만 그런 내 공격은 너무나도 간단하게 막혀버렸다.
쯧, 혀를 찼다.
'능력치의 차이가 너무나.'
당연한 일이긴했다.
놈은 공작의 후계자라는, 꽤나 고귀한 출신을 지니고 있다.
고등 군사 교육과 검술 교육을 받았을 것이 당연할 터. 더해 녀석 의 재능은 결코 허접하지 않다. 분명 나름의 경지를 이루었겠지.
아무리 민첩과 근력을 상향시켰 다 한들, 현재 능력치로 이길 수 있는 적이 아니다.
후욱,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도망쳐야 하나?'
이미 목표했던 거점 정찰은 완료했다. 굳이 공국 놈들과 전투할 필요 없이, 후퇴해서 보고하기만 한다 면 임무를 완수할 수 있다.
물론 이쪽의 체력은 거의 방전되었다. 하지만 방금 전기습 덕분에 열에 달하는 적병을 처치했다. 놈들 도 어느 정도 피해를 입은 만큼, 추격해오진 않으리라….
내가 그렇게 고뇌하고 있을 때였다.
"검은색 머리."
한스가 입을 열었다.
나 또한 고개를 들어 올려 녀석을 바라봤다. 그러다 시선이 마주쳤다.
녀석의 갈색 눈동자가 천천히 이쪽을 훑고 있었다.
"검은색 눈동자."
놈이 뇌까리고 있는 건 내 생김새인 듯하다.
한스가 나를 천천히 살펴보더니, 뒤이어 말했다.
"그리고, 십인장치고는 날카로운 검격."
그가 고개를 내려, 들고 있는 검을 바라봤다.
놈의 호화로운 장식이 박혀있는 장검에는 약간이나마 이가 나가있었다.
녀석은 검날을 지그시 살펴보고 는, 중얼거렸다.
"부하들에게 들었던 특징과 똑같다."
한스가 검을 고쳐 잡았다. 날카로운 검날이 이쪽으로 겨눠진다.
"네놈이 내 초계망을 돌파한 제국 병사로군."
흠칫. 순간 오한에 몸을 떨었다. 놈의 눈동자에서 강렬한 살기가 일 렁였기 때문에.
심호흡했다. 그리고는 녀석과 눈동자를 마주했다.
기세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듯이.
한동안 검은색 눈동자와 갈색 눈동자가 서로를 노려본다.
어째서 내게 저리 날카로운 살기 를 끌어올리는 것일까. 단순히 자신을 공격해서라고 여기기 힘든, 무시 무시한 적의다.
녀석이 입을 열었다.
"네놈 때문에. 아버지께 실망을 안겨드렸다. 덕분에 삼십인장으로 강등되었지."
곧 한스가 천천히 검을 당겨, 수 평으로 뉘였다. 녀석이 들고 있는 검은 아무런 흔들림 없이 고요하다.
그 기세가 심상치 않다.
"네 목을 베 아버지께 진상하겠다. 그리하여 내 실책을 약간이나 만회하고자 하니."
나 또한 검을 들어올렸다.
아무래도, 내가 돌파했던 공국군 초계망은 놈이 담당하던 구역이었 나 보다.
이런 지랄 맞은 우연이.
게임에서도 듣지 못했던 정보다.
"죽어라."
콰앙!
커다란 파공성이 터져 나온다.
그래, 말 그대로 '콰앙' 이었다. 놈의 검격이 발하는 파공성은 나의 그것과 차원이 달랐다.
이쪽보다 아득히 강력한 놈의 검격이, 찰나에 공기를 꿰뚫어 내 머리를 노린다.
섬뜩.
순간 죽음을 직감했다. 머리가 새하얘진다.
몸을 움직인 것은 본능이었다.
"큭!"
신음하며 상체를 숙였다. 녀석의 찌르기가 방금 전 내 머리가 있던 공간을 꿰뚫었다.
뒷목으로 느껴지는 강렬한 검풍 이 방금 전 검격의 위력을 증명했다.
"쥐새끼 같은 놈"."
빙글. 녀석이 손목을 움직여 검 의 진로를 틀었다. 노리는 것은 숙여진 나의 목.
이를 악물고 옆으로 도약. 녀석 의 검격을 피해내려했다. 검날이 아슬아슬하게 군복자락을 스쳐 지나간다.
허나 완벽히 피해내지는 못했다. 놈의 검로가 변화한다.
쿠궁!
굉음이 일고, 충격이 가슴팍을 강타했다.
"커헉!"
나는 녀석의 검격에 튕겨지듯 날 아가 지면을 굴렀다. 데굴데굴, 시야가 어지럽다. 땅바닥에 안면을 처 박았다. 흙먼지가 입에 파고든다.
"갑주 덕분에 목숨을 건진 건가. 운도 좋군, 버러지."
나는 비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 났다.
빌어 처먹을! 엿같이 아프다. 가슴을 묵직한 통증이 짓눌러댄다.
슬쩍 시선을 내려 내가 착용한 경갑을 바라보니, 움푹 패여 찌그러 져 있다.
일격에 경갑을 이렇게 완전히 우 그러뜨리다니. 저 괴물 자식. 근력 이어떻게 되어먹은 걸까.
"… 퉤!"
입에 고인 핏물을 내뱉었다. 흙 과 피가 섞인 질척한 액체가 지면에 떨어진다.
"더럽게 아프네."
전투를 시작할 때만 해도. 어쩌면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놈은 아직 본격적인 성장을 하지 않았으니 .
하지만 오산이었다. 저래 봬도 고위 귀족의 자제라는 것인가. 아니 면 본래 가진 재능이 뛰어난 덕분 인가.
녀석은 아직 완전히 성장하지 않았음에도, 강대한 무력을 지니고 있다.
적어도 일반 병사들쯤이야 간단히 쳐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살아나가기 힘들 것 같은데.'
불길한 상상이 머리를 스쳤다.
녀석, 한스는 나를 증오하고 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다. 내가 녀석의 초계망을 돌파했기 때문에 삼십인장으로 강등된 것이니.
나를 죽여, 자신의 실책을 조금 이나마 만회하고자 하겠지.
'이런 개 같은.'
욕밖에 안 나온다.
저렇게 강력한 힘을 지닌 놈이 살기등등해 이쪽을 죽이려 한다. 절 로 포기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아른 거린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검의 손잡이를 더욱 굳세게 부여 잡았다. 이를 악물고, 눈에 독기를 품었다.
강적. 게임에서 많이 봤었다.
나는 천생 게이머였다. 어려운 적을 쳐 죽이고, 고득점을 올릴 때마다 희열을 느끼는.
그리고 그 강적이 지금 내 앞에 있다.
"죽여 버린다."
악을 끌어올렸다. 정신을 집중했다.
놈의 움직임을 살폈다. 녀석의 보폭, 시선, 그리고 날 끝의 방향과, 섬세한 근육의 움직임까지.
그 모든 것들을 예의주시했다. 녀석의 행동을 예측했다.
저 개자식을 죽여 버리기 위해 서.
그러자.
- 띠링!
['엑스트라 스킬 : 집중' 이 활성화 됩니다.]
스킬이 발동되었다.
그와 동시,
"이제 죽어라."
놈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콰앙!
녀석이 이쪽으로 돌진해와 중후 한 검격을 내질렀다.
횡 베기. 내 검격보다도 더욱 크 고 웅장한 기세를 가진 그 검광이, 공기를 가르고 쇄도한다.
나로선 어찌 할 수 없는 공격이다.
막아내자니 내 근력이 부족하고, 피하자니 민첩이 모자라다. 나는 저 검격에 의해 목숨을 잃을 것이다.
본래라면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내게는 스킬이 발동되어 있다.
두근!
심장이 맥동했다.
모든 감각이 첨예하게 벼려졌다. 근육의 움직임이, 귓가에 들려오는 파공성이, 날아오는 놈의 검광까지. 선명하게 인식되었다.
그리고 보였다.
'놈의 검로.'
아니. 보인다기보단, 예측할 수 있었다.
녀석의 검이 어디로 향할지. 무엇을 베어버리려 하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러자.
- 띠링!
[각성!]
['엑스트라 스킬 : 전투분석'을 각성했습니다!]
뭔가 안내창이 떠올랐다.
12화.
뭔가 안내창이 떠올랐다.
하지만 무시한다. 지금은 미처 안내창을 확인할 만한 여유가 없기에 정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허나 안내창에 시선을 주지 못했 음에도, 그 효과를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검로가 읽힌다.'
신기하게도, 놈의 검로가 또렷이 읽혀졌다. 분명 내 경지로는 읽을 수 없는 검격임이 분명한데도.
아마도 스킬의 보정 덕분이리라.
"큭!"
나는 급히 상체를 뒤로 젖혔다. 그리고 거의 동시.
피잉!
놈의 검 끝이 내 목을 아슬아슬 하게 스쳐지나갔다. 가느다란 핏물 이 치솟는다.
' 얕다.'
다행히 상처가 얕았다. 목의 겉 피부만 살짝 베어졌다.
나는 뒷걸음쳐 재차 녀석과의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는 손을 들어 올려 목덜미를 만져보았다.
붉은 핏물이 아주 약간 묻어나왔다.
등골이 서늘해진다.
'방금 죽을 뻔했어.'
너무나 날카로운 검격이었다. 나 스스로 죽음을 직감할 정도로.
만약 놈의 검이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깊이 파고들었다면. 나는 목의 동맥을 베여 피분수를 쏟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살아났다. 막 발현된 스킬 덕분이었다.
시선을 돌려 홀로그램을 주시했다.
[각성!]
['엑스트라 스킬 : 전투분석'을 각성했습니다!]
[엑스트라 스킬 : 전투분석' 이 활성화 됩니다.]
전투분석이라.
군복 소매로 목을 닦아내며 읊조렸다.
"적의 행동을 예상하는 스킬인 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전투 중 얻은 정보를 조합해 분석하는 스킬 이리라. 놈의 움직임을 보고는 다음 행동을 예측했던 것이니.
검의 손잡이를 굳게 움켜쥐었다.
"그럼 싸울 수 있겠네."
상향된 능력치. 그리고 새로 각 성한 스킬까지.
이것들이 있다면 적어도 무력하 게 지지는 않는다.
후우.
심호흡하며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다시금 정신을 집중했다.
포인트가 모자라 체력까지는 키우지 못했다.
그리고 내 체력은 거의 고갈되어 가는 상황.
단기결전으로 끝내야 한다.
전방의 한스를 노려봤다. 그러자 놈이 비웃듯, 천천히 검을 들어올린다.
"여러 번이나 내 검을 피해 내다 니. 확실히 너는 우수하다. 고작 일 개 병사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 로… 허나."
철그럭. 녀석의 날카로운 검날이 다시금 이쪽으로 겨눠졌다.
검신이 환한 정오의 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언제까지 피할 수 있을 것 같 나."
동감이다. 언제까지 피하기만 해 서는 안된다.
이제는 이쪽이 공격해야 한다.
나는 돌진 자세를 취했다.
검을 당겨서 뒤로. 상체를 숙여 바닥에 더욱 가깝게.
지면을 언제든지 박찰 수 있도록 다리에 힘을 주고, 팔 근육을 긴장 시킨다.
"멍청한 놈."
내가 돌진하려 하는 걸 무모하다 생각한 것일까. 녀석이 눈가를 찌푸렸다.
불에 뛰어드는 부나방이나 다름 없어 보이겠지. 능력치 차이가 까마 득한데 덤벼오다니 말이다.
하지만 곧 저 얼굴은 놀람과 경악으로 바뀔 것이리라.
후욱. 숨을 내쉬며 지면을 박찼다.
파앙!
내 신형이 앞으로 도약한다.
"제 명을 단축하는군."
콰앙!
놈이 검을 휘둘렀다.
돌진하는 나를 순식간에 베어버 릴 만큼 패도적인 공격이었다. 녀석 의 검신이 품고 있는 힘은 무시무 시했고, 그 검날의 속도는 몹시 빨 랐다.
본래의 나라면 결코 피할 수 없는 공격.
허나 지금은 다르다.
'전투분석.'
적의 검로를 예상하는 스킬이다. 그 덕분에 녀석이 내 어디를 베려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놈이 노리는 것은 나의 옆구리.
자세를 낮추고, 허리를 비틀었다. 한스의 검날이 아슬아슬하게 내 옆구리를 긁고 지나간다.
"크윽!"
날카로운 통각과 함께 핏물이 새 어 나온다. 내 입에서 신음성이 홀 러나왔다.
허나 얕다. 치명상이 아니다. 놈을 향해 계속해 파고들었다.
"뭣…!"
녀석이 놀라 당혹성을 내었다.
그야 놀랄 수밖에. 방금 전공격 은 놈 스스로가 완벽하다 여겼을 법한 훌륭한 검격이었다.
하지만 나는 가까스로 놈의 공격을 피해내 이렇듯 녀석의 간격 안 으로 들어와 있다.
이를 악물고 지면을 홅듯 검격을 가했다.
파앙!
울려 퍼지는 파공성. 푸르른 검 의 궤적.
내 검날이 녀석의 목덜미를 노린다.
허나 유효타를 먹이지는 못했다.
"어림도 없다!"
놈이 장검을 휘둘러 방어해냈다.
카앙!
내 검은 힘없이 튕겨 나왔다. 이 를 악물었다.
'포인트를 사용해도. 새로운 스킬을 각성해도. 완전히 따라잡지는 못 한 것인가.'
역시나 능력치가 모자라다. 아직 도 놈의 근력이 이쪽을 압도하고 있다.
힘 싸움은 불리.
다만 민첩은 대등.
'확실히 내 근력은 모자라다. 하지만….'
나는 재빨리 검을 회수. 몸을 크게 회전시켰다.
'원심력으로 검의 힘을 증폭시킨 다면!'
부웅!
내 몸을 중심으로, 검이 커다란 궤적을 그리며 한 바퀴 빙글 돌았다. 가속도가 붙었다. 그것을 그대로 녀석의 어깨에 박아 넣었다.
쩌엉!
꽤나 강한 힘이 실린 일격.
허나 놈은 부상당하지 않았다. 녀석이 입고 있는 두터운 중갑 때문이었다.
녀석의 어깨 장갑이 부서져 떨어져 나갔다.
"크윽…!"
놈이 신음하며 비틀거렸다.
중갑 덕분에 이쪽의 공격을 무사 히 막았지만, 꽤나 큰 중격을 받은 것일까. 녀석이 무게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리고 나는 그 잠깐의 틈을 놓칠 정도로, 약하지 않았다.
키기기직! 
놈의 갑주를 긁듯이 검을 회수, 다음 공격을 감행했다.
이번엔 사선 베기였다.
번뜩이는 검광이 위에서 아래로, 비스듬히 그어진다. 노리는 것은 녀석의 안면. 검날이 공기를 가르며 파고든다.
허나 놈은 그것 또한 막아냈다.
이번에 내 검격을 막아낸 것은 놈의 중갑도, 들고 있는 검도 아닌, 왼손의 철제 건틀릿이었다.
쾅! 금속 장갑과 내 검날이 부딪 쳤다. 둔탁한 소리가 일었다. 검이 찌르르 운다.
"쯧."
자세가 흔들린 상황임에도 불구, 건틀릿으로 방어했다. 아쉬움에 혀 를 찼다.
그러고 보니, 녀석은 저 무거운 중갑을 입고도 몹시 기민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어쩌면 민첩 능력치마저 나를 압도할지 모른다.
빌어 처먹을. 이걸 어떻게 이기 냐.
"감히!"
여러 합 동안 자신이 줄곧 밀렸 다는 것을 깨달은 것일까.
한스 또한 검을 고쳐 잡아 이쪽을 공격하려했다.
녀석이 검을 크게 들어올려, 내 리친다.
부웅!
반월 모양으로 내려꽂히는 푸르른 궤적. 묵직한 파공성. 선명한 검 날이 내 머리를 쪼갤 듯 내려쳐진다.
'막을 수 없어.'
방어, 할 수 없다. 놈의 근력이 이쪽을 아득히 압도하니 섣불리 막 는다면 오히려 자세가 무너져 치명 적인 빈틈이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흘려낼 수는 있다.'
나는 검을 머리 위로 들어올려, 사선으로 세웠다. 그러자 그 비스듬 한 검날을 내려치듯 놈의 공격이 틀어박힌다.
스르르르릉!
검날이 마찰한다. 쇠와 쇠가 비 벼져 불똥이 튀겨댔다.
녀석의 검날이 내 검신을 훑어 내려갔다. 마치 미끄럼틀을 타는 듯. 아주 매끄럽게.
'좋아!'
무사히 놈의 검격을 흘려냈다.
나는 손목을 휘저어 원을 그렸다. 아직도 내 검날을 타고 내려오 던 놈의 검이 휘청, 밖으로 튕겨나 간다. 녀석의 자세가 다시금 무너졌다.
검을 회수해 뒤로 당겼다. 내찌르기 위해서.
"… 아."
가속된 시야 속. 문득, 녀석과 눈동자가 마주쳤다.
당황한 눈. 경악에 벌어진 입.
녀석의 빈틈이 훤히 드러나 있다.
기회다.
"죽어!"
악을 내지르며, 검을 앞으로 밀 어 넣었다.
제국 검술의 네 번째 초식. 찌르 기.
콰앙!
위압적인 파공성이 일고, 섬광이 앞으로 쏘아진다. 차가운 철검이 공기를 꿰뚫어 도약한다.
노리는 것은 녀석의 목. 단 한번에 절명시킬 수 있는 급소다.
하지만 녀석 또한 가만히 있지 않았다.
"흐읍!"
검을 고쳐 쥐기엔 시간이 부족했 던 것일까. 놈이 왼 주먹을 내질렀다.
금속 건를릿이 햇살을 반짝이며 이쪽으로 쇄도한다.
내 검날과, 놈의 주먹이 교차했다.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콰앙!
강렬한 일격이 가슴팍을 때렸다. 묵직한 운동 에너지가 경갑을 꿰뚫고, 내 장기를 뒤흔들었다.
엿같이 아프다.
내 몸이 뒤로 부웅 날아갔다. 지면이 멀어진다.
자동차에 치이면 이런 느낌일까.
곧 나는 배후의 나무에 충돌했다.
쿵.
등짝이 나무 밑동을 치고 굴러 떨어졌다.
망할. 팔이 후들거린다. 충격에 몸이 말을 안 듣는다.
하지만 안간힘을 쓰며 사지를 움직여냈다.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땅을 짚고 고개를 들어올려 앞을 주 시했다.
보이는 것은 대치하고 있는 제국군과 공국군의 모습. 나와 한스의 전투를 주시하고 있던 것일까. 그들은 병장기를 들고는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 놈이 보였다.
우두커니 서 있는 한스의 모습.
녀석은 내게 주먹을 뻗었던 그 자세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
으득. 이를 갈았다.
'실패한 건가.'
마지막 일격으로, 놈을 죽일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
허나 내 실망은 많이 이른 듯했다.
사락. 놈의 장발 일부가 절삭되어 후드득 떨어졌다. 갈색 머리칼이 지면에 내려앉는다.
직후, 푸슉.
한스의 목덜미에서, 붉은색 핏물 이 뿜어졌다.
"커, 어…."
녀석이 휘청거리며 목덜미를 부여잡았다.
상처 부위를 두 손으로 틀어막으 려고 하지만, 질척한 핏물은 놈의 손가락 사이에서 계속해 줄줄 새어 나왔다.
문득. 한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녀석의 갈색 눈동자가 또렷이 보였다.
"말도 안…."
눈동자 안에 자리한 것은 경악과 공포. 그리고 약간의 의문이다.
일개 병사에 불과한 내가 , 어떻게 이길 수 있었던 건지. 차마 수 긍하기 힘들겠지.
휘청.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일 까. 녀석은 몇 발자국 주춤거리더 니, 곧 고개를 앞으로 거꾸러뜨렸다.
"이겼다."
내가 나직이 중얼거리는 것과 거의 동시.
털썩.
놈이 지면에 쓰러졌다.
순간 숨 막히는 적막이 자리했다.
가장 먼저 침묵을 깬 것은 공국 병사들이었다.
"지휘관님께서 당하셨다!"
"어서 도련님을 보호해!"
방금 전까지 제국군과 전투하고 있던 공국 병사들이, 한스가 쓰러진 곳을 향해 달려갔다.
그야 큰일일 터다. 다름 아닌 공국의 후계자가 당해버렸으니 .
"하하."
내 입가에서, 시원한 웃음이 홀 러나왔다.
"하하하하하!"
장기의 타격이 심하기에, 웃으며 공기를 토할 때마다 저릿한 고통이 올라왔다.
허나 그럼에도 웃음이 멈추지 않는다. 나는 아릿한 통각이 올라오는 복부와 가슴팍을 눌러가며, 미친 듯이웃었다.
"꼴좋다!"
개운하고도, 상쾌하다.
한스 요한바르첸. 놈은 추후 성장해 내 오랜 적이 될 이였다. 다른 강적들처럼 강대한 무력과 광활 한 세력을 이루어. 이쪽을 막아내 는.
허나 놈은 죽어버렸다. 아니, 정확히는 죽어가고 있다.
쓰러져있는 한스를 바라봤다.
녀석이 꿈틀거리며 경련했다. 쇼 크가 오기 시작하?것일까. 꺽꺽거리며 피를 질질 흘리는 것이 참으로 애처롭다.
하지만 내게 있어선 너무나 속 시원한 광경.
미래의 큰 장애물을 하나 치워버렸다.
그러나 아직, 안심하기엔 이른 듯했다.
"당장 포션을 사용해!"
한 공국 병사가 그리 외쳤다. 그에 다른 병사가 쓰러진 한스의 몸을 더듬더니,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낯익은 물건이다.
투명한 유리병 안에 담긴 붉은 액체. 그 어떤 부상도 목숨만 붙어 있다면 회복시켜주는, 지랄 맞게 비싼 마법 아이템.
포션.
"… 망할."
욕을 뇌까리며 바닥을 더듬었다. 나무에 부딪힐 때 떨어뜨렸던 검이 잡혔다.
포션을 사용해 한스를 살리려 한다. 그렇게 놔둬서는 안된다.
"어떻게 죽인 놈인데."
한스가 포션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
하긴, 놈은 공국의 후계자다. 포 션쯤이야 상비하고 있을 법하다.
빌어 처먹을 금수저 새끼.
저렇게 놔줘서는 안된다. 확실히 죽여 버려야 한다.
나는 이를 악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했다. 허나.
"크윽…!"
일어서지 못했다.
다리의 근육이 고통을 호소했다. 검을 쥔 팔이 부르르 떨렸다. 복부 의 내장이 뒤엉킨 듯 묵직한 통각을 발한다.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상황.
허나 그럼에도, 움직여야 한다.
고통을 이겨내며.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일!"
"예! 십인장님."
카일을 불렀다. 그에 다른 쪽에서 있던 카일이 이쪽으로 뛰어왔다.
녀석에게 지시한다.
"저기 쓰러져있는 적 지휘관. 확실히 죽여 버려라."
빈사 상태인 적 지휘관을 마저 죽이라는 명령. 그에 카일이 시선을 돌려 앞을 바라봤다.
"놈을 살려두면 안 돼."
공국 병사들이 한스의 목에 포션을 붓는 것이 보였다.
보글보글.
놈의 상처 부위에서 기포가 일었다. 곧 목에서 흘러나오는 피의 양 이 점차 줄어든다.
빈사 상태에 빠졌던 만큼, 당장 일어서지는 못할 거다. 허나 이렇게 멀뚱히 바라본다면 곧 공국 놈들이 한스를 데리고 후퇴할 터.
재촉했다.
"어서!"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병사를 이끌었다. 나 또한, 후들거리는 발걸음을 옮겨 앞으로 전진했다.
공국 놈들이, 접근해오는 제국 병사들을 포착했다.
"놈들이 온다!"
"어서 지휘관님을 본진으로 이 송…."
놈들이 한스를 들쳐 업었다. 명백히 뒤로 내빼려는 듯한 움직임.
놓칠 수 없다. 발악하듯 외친다.
"가서 죽여!"
파앙!
병사들이 앞으로 돌진했다. 그들 이 검과 창을 내찔러 가로막는 공국 병사들을 차례로 베어냈다.
노리는 것은, 의식을 잃고 들쳐 업힌 적 지휘관 한스. 녀석을 보호 하기 위해 공국 병사들이 하나둘 방패가 된다.
상관을 살리기 위해 미끼를 자처 하는 모습.
눈물겨운 희생정신이 아닐 수 없다. 제 상관을 살리기 위해, 계속해 목숨을 내던지고 있다니.
허나 저들 또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일 터다. 전투에서 귀족 지휘관을, 그것도 공국 후계자라는 고귀한 혈통의 지휘관을 죽게 했다는 건 살아 돌아가도 처형당하는 것을 뜻 한다.
돌아가서 처형당하느니. 여기서 명예롭게 죽는다는 것이겠지.
이 세상은 그런 곳이다.
"저리 꺼져라! 제국의 개!"
공국 병사 몇 명이 나와 부하들 의 앞을 가로막았다. 놈들은 공포에 질렸을지언정 도망치지는 않았다.
"제기랄."
성가시다.
나는 내 앞을 가로막은 적병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고통에, 그리고 근육의 경련 때문에 매끄러운 검격을 발현하지는 못했다.
허나 일개 병사들에게는 그 정도 로도 충분하다.
서걱.
한 공국 병사의 목이 베였다. 녀석의 모가지에서 피분수가 뿜어진다.
비틀거리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기며, 다음 검격을 내질렀다.
팡.
평소보다도 미약한 파공성. 흔들리는 검로. 매가리 없는 검날.
허나 그럼에도 날붙이다. 내 검 날은 적 창병의 복부에 깔끔하게 파고들었다. 비틀며 빼내고, 다시 전진.
"막아!"
공국 병사들이 발악한다. 놈들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잠깐의 시간을 벌기 위해 목숨을 내던져온다.
서걱.
다른 병사를 하나 더 베었다. 놈 이 옆구리가 베어 쓰러진다.
나와 부하들은 앞으로 향하며 공국 병사들을 도륙했다. 놈들을 꿰뚫고, 베어, 쓰러뜨린다.
그렇게 몇 명의 적을 처치했을 까.
"… 망할."
나는 고개를 들어올려,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적병을 바라봤다.
한스를 들쳐 업은 공국 병사가 산의 내리막을 타며 다급히 도망쳤다. 놈의 모습이 점점 멀어진다.
녀석을 놓쳐버렸다.
13화.
"빌어먹을."
전투가 끝난 뒤. 나는 나무에 기대어 나직이 욕지거리를 뇌까렸다.
한스를 놓쳐버렸다.
내 검격은 분명 치명상이었다. 목의 피부 아래에 자리해있는 놈의 동맥까지, 확실히 절삭해버렸다. 녀석은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허나 한스에게는 포션이 있었다.
"염병할, 개 같은 새끼들!"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크게 소리 쳤다.
억울해 미칠 것 같다. 다 죽인 네임드 유닛을 살려 보내다니.
그놈의 포션만 없었다면, 놈을 확실히 죽일 수 있었을 텐데.
"으윽……"
크게 소리쳤기 때문일까. 가슴과 복부에 아릿한 고통이 올라온다. 부 들거리는 손으로 다시금 내 배를 눌렀다.
부상이 너무나 심각하다.
나는 장비하고 있는 경갑을 벗어 살폈다. 그리고는 혀를 쯧 찼다.
"나 어떻게 안 죽었냐."
내 경갑은 이곳저곳이 움푹 패어 있었다. 모두 한스 놈에게 얻어맞아 생긴 흔적이다.
검격, 그리고 권격. 놈의 공격은 한 방 한 방이 묵직했고, 위협적이었다.
이 작은 갑옷이 내 목숨을 구했다.
만약 갑옷이 없었다면 진작 가슴을 꿰뚫렸거나, 혹은 장기가 진탕이 되어 쓰러졌을 것이리라.
"새끼, 더럽게 세네."
확실히 한스는 강했다.
놈에게는 고귀한 혈통이, 그리고 재능이 있다. 녀석의 능력치는 나를 압도했고, 검술의 경지 또한 이쪽을 상회했다.
아마 저 정도 무력이라면 기사 후보생 정도는 되지 않을까.
본래 내 능력이었다면 결코 생존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살아남은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스킬이 없었다면 진작 죽었겠지.'
엑스트라 스킬 '집중'과 '전투분 석'.
집중은 가진 모든 능력을 전투에 끌어다 쓸 수 있게 해줬다. 전투분 석은 다양한 정보를 받아들여, 적의 움직임과 행동을 예상할 수 있게 해 줬다.
만약 내게 스킬이 없었다면, 결코 살아남을 수 없었으리라.
후우, 나는 한숨을 내쉬며 찌그 러진 경갑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때였다.
"십인장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한 병사가 말을 걸어왔다. 시선을 돌려 확인해보니 역시나 카일이었다.
나는 녀석에게 반파된 경갑을 보여주며 말했다.
"너는 이게 괜찮아 보이냐?"
"음. 그렇게 멀쩡하게 말하시는 걸 보면, 괜찮아 보이는군요."
"망할 놈."
카일이 이죽 웃고, 나는 표정을 찌푸렸다.
녀석은 한동안 낄낄거리더니 문득 읊조렸다.
"그나저나. 많이도 죽였군요."
카일이 고개를 돌려 주위를 훑어보았다. 그에 나 또한 녀석을 따라 지척을 살폈다.
공국 병사들의 시신이 지면에 어지러이 흩어져있다.
"적병 열다섯을 처치했습니다. 꽤 괜찮은 전공입니다."
"… 아군 피해는?"
"다행이 전사자는 없습니다. 다만 중상이 둘입니다."
중상자라. 하긴, 교전비 1: 3의 전투였다. 부상자가 없을 리가 없다.
"누가 다친 거지?"
"아르덴이랑 리버입니다."
둘 다 이번에 배치된 신병들이다.
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아프지만 부상자의 상태를 확인해야했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부상자들 로 향했다.
"아르덴. 리버. 상태는 좀 어떠 냐."
"십인장님…."
녀석들의 상태를 살폈다.
둘 다 상태가 좋지 않다. 아르덴 은 팔이 부러졌고, 리버는 허벅지를 깊게 베였다.
다행히 목숨에는 지장이 없는 모양.
나는 녀석들의 곁에 다가갔다.
그때.
"감사합니다."
부상자 아르덴이 그리 말했다.
감사하다니? 다소 생뚱맞은 말에 나는 녀석과 시선을 마주했다.
녀석의 말이 이어진다.
"십인장님께서 저희를 살릴 거라는 말. 사실 믿지 않았습니다. 그저 다른 지휘관들처럼 전투 전 으레 하는 말이라 여겼었죠."
전투 시작 전. 내가 녀석들에게 한 말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 나는 강하다.
- 내가 너희들을 살릴 것이다.
- 그러니 너희들은 나를 믿어라. 내지시에 따라라. 나와 함께 싸워 라.
되는대로 주워섬긴 말이었는데 역시 당시에는 그다지 믿음을 주지 못했나 보다.
"하지만 십인장님의 말은 거짓말 이 아니었습니다. 십인장님께선 공국 놈들을 해치웠고, 결국 저 괴물 같은 놈과 싸워 이기셨습니다."
그 괴물 같다는 놈은 아마도 한스를 말하는 것이리라.
아르덴이 감격에 찬 눈을 하며, 내 손을 꽉 붙잡았다.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십인장님."
픽. 가벼운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저 전투 전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한 말이었다.
하지만 전투가 끝난 지금, 그 말이 좀 다르게 느껴졌나 보다. 저리 감격한 모습을 보이다니.
나는 아르덴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래. 고마우면 나중에 술이나 사라."
아르덴이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나직이 중얼거렸다.
"… 일단은 살아남은 것에 만족하 자."
살아남은 것 자체가 기적이다.
더해 네임드 유닛인 한스에게 나름의 타격 또한 먹였으니 , 어느 정도의 포인트를 기대해도 좋을 터.
나는 주위에 자리해있는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좋아. 임무는 끝났다. 부상자 추 스르고, 짐 챙겨. 이제 복귀한다."
나와 부하들이 기지로 귀환한다.
* * *
파트라헴 전진기지의 지휘관 그 레드. 그가 자신의 손에 들린 서류 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곧 지원군이 도착하겠군."
그의 손에 들려있는 서류는 다름 아닌 전쟁 전 작전 계획서였다.
지원군의 규모, 소속, 그리고 보 급계획과 기지증축계획까지 기재되 어있는 두터운 종이 뭉치.
그레드의 눈?서류를 홅었다.
그는 서류에 올라와 있는 지원군 의 목록을 하나하나 살피며 파악하 기 시작했다.
"북부 제 3군단. 보병 2만 1천. 기병 3천."
먼저, 제 3군단.
제국 북부에 배치되어있는 군단 이다. 총원 2만 4천에 달하는 대군. 본래는 북부 주요 도시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지만, 곧 재정비해 이곳 접경지대에 배치된다 한다.
제국 정복전쟁 당시 북쪽으로 진군했던 정예군이다. 나름대로 활약하리라.
"볼로냐 전투기사단. 총원 천."
다음으로 볼로냐 전투기사단.
볼로냐 전투기사단은 제국 서쪽에 자리해있던 대규모 기사단이다. 그리고 마나를 다루는 기사들이 으레 그러하듯, 무지막지한 무력을 지 니고 있다.
만족스러운 것일까. 그레드가 고개를 주억였다.
"다른 기사단도 아니고, 볼로냐 전투기사단이라. 정말 든든하군 그래."
수없이 전열을 돌파하고 적의 전선을 붕괴시키던 엘리트 기사단이다. 그리고 그런 볼로냐 기사단을 북부에 배치하겠단 것은, 순식간에 공국군을 쓸어버리겠다는 것을 뜻했다.
하지만 아직 놀라기에는 일렀다.
그레드의 시선이 계속해 서류를 읽어 내려가고, 곧 익숙한 단체의 이름이 나왔다.
"…라브리에 전투마법단."
그가 멍하니 서류를 바라봤다.
라브리에 전투마법단.
정복전쟁 당시, 다수의 소국을 파괴하고 왕궁을 날려버렸던, 호전성으로 따지면 제국 제일의 전투마 법단.
그 라브리에 전투단이 이곳에 배치된다니.
"황제 폐하께선. 아예 공국을 멸망시켜 버릴 심산이신가."
막대한 화력을 가진 마법사들이다. 그들이 이곳에 배치된다라.
제 3군단에, 볼로냐 전투기사단, 더해 라브리에 전투마법단까지.
무시무시한 전력이다.
이 정도 전력이라면. 공국 따위 금세 멸망시켜 버릴 수 있으리라.
"……."
그레드는 시선을 돌려, 자신의 집무실 한 켠에 걸려있는 한 쌍의 대검을 바라봤다.
그가 현역일 적 수많은 적병을 베고 쓰러뜨렸던 쌍검.
"전면전이라."
더 이상 없을 줄 알았다.
제국은 팽창을 멈추고 내실을 다 지고 있다.
마지막 전쟁이 10년 전. 제국은 오랜 시간 전쟁을 멈추고 평화를 향유했으며, 발전의 시기를 거쳤다.
그리고 10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다시금 전쟁이 일어나려 한다.
"이번에는 공국인가. 멍청한 놈 들."
확실히 공국은 어리석었다.
다름 아닌 제국을 건드리다니. 녀석들은 제국의 호전성을 얕봤다.
이전쟁이 끝났을 때, 공국이라는 국가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리라.
그가 그렇게 검을 바라보고 있는 그때였다.
"천인장님!"
벌컥.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 왔다.
그레드가 시선을 돌려 입장한 이 를 바라보니, 다름 아닌 그의 부관이었다.
"부관이군. 무슨 일인가?"
"한지훈의 척후조가 돌아왔습니다."
"…그래. 한지훈이 돌아왔다고."
그레드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 났다. 그가 부관에게 지시한다.
"녀석을 호출해라. 직접 보고받고 싶군."
나는 문을 열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예전에 와 봤을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테이블 위 자리해있는 커다란 전술지도, 제국기, 그리고 벽 면에 걸려있는 한 쌍의 검까지.
달라진 게 있다면 책상 위에 수 북이 쌓여있는 서류일까.
"아, 드디어 왔군. 척후조장 한지훈. 기다리고 있었다."
바스락. 그레드가 읽고 있던 서류더미를 정리했다.
그가 한탄하듯 말했다.
"전쟁 준비 때문에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단 말이지."
저 두터운 서류량을 볼 때, 확실히 그래 보인다.
하긴. 군단 규모의 병력이 배치 되고 움직이는 것이다. 그에 따른 인사처리, 보급안과 예산안, 전투계 획까지.
업무량이 폭증할 수밖에 없다.
내 쪽을 바라보던 그가 문득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자네. 그 몰골은 뭔가?"
나는 시선을 내려 내 몸 상태를 확인했다.
착용하고 있는 경갑의 이곳저곳 이 패이고 찌그러져 있다. 몸 곳곳에는 크고 작은 자상이 아로새겨져 있고, 군복자락에 피가 묻어있다.
말 그대로 처참한 모습.
"꽤나 힘든 전투였나 보군."
맞다. 더럽게 힘든 전투였다.
하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고 경례했다. 그에 그레드가 내 경례를 받는다.
"좋아. 십인장 한지훈, 일단 보고 하게. 목표지점의 정찰 결과. 그리고 전투 내용까지."
"알겠습니다."
나는 천천히 걸어가 테이블 앞에 섰다.
손을 뻗어 지도를 짚으며 보고를 시작했다.
"저희는 야음을 타 움직였고, 하루 동안 행군해 정오 무렵 목표지 점에 도착했습니다."
"잠깐. 야간에 움직였다고? 위험 했을 터인데."
"밤에도 길을 찾을 자신이 있었습니다."
내게는 미니맵이 있었으니까.
"뭐, 무사히 도착했다면 다행이지. 하지만 다음부터는 야간행동을 지양하도록 하게. 자네가 길을 잘 찾는다 해도 병사들이 낙오될 수도 있으니 ."
"명심하겠습니다."
사실 야간에 움직이는 건 꽤나 위험한 일이긴했다. 만약 한스가 없었다면, 안전한 주간에 움직였을 거다.
하지만 그 정도로 한스가 위협적인 존재였다. 야간에 움직이는 것 따위는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결국 만나버리긴 했지만.
나는 보고를 계속했다.
"정찰 결과, 목표 지점이었던 고 지대는 완벽한 입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공국군의 진군로를 완전히 관측할 수 있는 시야를 가졌고, 매 복과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었습니다. 마법사를 배치하기에 최적의 장소입니다."
"그런가. 역시 마법사는 그곳에 배치해야겠군."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내 말에 그레드가 시선을 올려 나를 바라본다. 나는 잠시 뜸들이고는 이어 말했다.
"적 또한 그곳을 탐내고 있습니다. 저희가 정오 무렵 도착해 모든 조사를 마쳤을 때, 공국군 삼십인대 가 우리가 있는 곳으로 접근해왔습니다. 놈들 또한 시야 확보를 위해 고지대를 정찰하려 했겠지요."
예상했던 것일까. 그레드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우리가 갔던 고지대는 너무나 완벽한 곳이었다. 적도 아군도 탐낼 만한 시야를 가졌으니 .
공국측에서 요충지로 여길 법할 터.
"… 저희는 인근 수풀에 매복했고, 이동하던 공국군을 덮쳤습니다. 그리고 전투를 진행했습니다."
내가 손가락으로 어떤 지점을 툭짚었다. 전투가 일어났던 고지대 숲 이었다.
"적병 삼십여 명 중 스물셋을 처 치했습니다. 지휘관은 처치하지 못 했습니다."
"아군의 피해는?"
"중상 둘입니다."
"정찰 임무를 완벽히 완수하고. 더해 아무도 죽지 않고 삼십인대를 격파한 건가… 훌륭하다, 한지훈."
그레드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그려졌다. 내가 세운 전공이 꽤 마음에 드는 모양.
그의 미소와 동시.
- 띠링!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서브 퀘스트]
[고지대 거점을 정찰, 결과를 본 진에 전달하라.](완료) 
[서브 퀘스트 - '고지대 정찰'을 '완벽하게' 완수했습니다!]
[시나리오보다도 더 높은 점수를 얻었습니다. 포인트가 추가로 정산 됩니다!]
[정산 포인트 : 10pt]
[추가 정산 포인트 : 7pt]
(남은 포인트는 17pt입니다.)
17포인트라. 꽤 괜찮은 수확이다. 이 정도 포인트가 있다면, 능력치를 훨씬 더 상향할 수 있으리라.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어떤 능력치를 상향시킬까.' 이 포인트를 어떻게 써야 할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부족한 체력을 상향시켜 보완할 까. 아니면 민첩을 더욱 늘려 내 강점을 살릴까.
선택지는 다양하다. 확실한 건, 나는 훨씬 더 강해질 수 있다는 거다.
내가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아, 한지훈. 그러고 보니 알려주 지 않은 게 있었군."
문득 그레드가 말했다.
"네 소속이 바뀌게 되었다."
"소속이라 하시면."
"자네는 여태까지 십인대 규모의 작전 활동을 해왔다만. 앞으로는 달라질 것이다. 자네의 척후조는 4번 백인대에 배치될 것이다."
"4번 백인대…."
갑작스러운 소속의 변경.
…기억나는 것이 있다. 나는 그 레드에게 물었다.
"혹시 제 상관 백인장의 이름을 알 수 있겠습니까?"
"어려운 것 아니지."
그레드는 고개를 주억이고는, 서류를 뒤적거렸다. 아무래도 인사서 류인 것 같다.
그는 잠시 서류를 훑더니, 알려 줬다.
"갈랜 알디니. 이번에 자네가 소속된 4번 백인대의 지휘관이다. 얼마 전 군사학교를 수료하고 배치된 신입 백인장이지."
"갈랜 알디니…."
알고 있는 이름이다.
표정을 찌푸렸다.
'그 새끼가 등장할 때가 되긴 했 지.'
한스 요한바르첸이 외부의 대적자라 한다면, 갈랜 알디니는 내부의 적이었다.
나는 고민한다.
'놈을 어떻게 처리할까.'
나는 알고 있다. 녀석이 내게 얼마나 많은 피해를 끼칠지.
하지만 놈은 공국군이 아니다. 같은 제국군, 더해 내 직속상관이 되는 이다.
죽여야 할까. 아니면 눈에 안 보이는 곳으로 치워버려야 할까.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고민했다.
14화.
나는 달렸다.
"후욱!"
가슴속 공기를 토하며, 다리를 움직였다.
숨이 찼다. 폐가 터질 것 같다. 심장이 가혹한 운동에 격렬히 맥동 한다.
지금 나는 파트라헴 전진기지 인근 야산을 달리고 있었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체력을 높여야 해.'
나는 내 능력치를 상기했다.
[근력 13]
[민첩 16]
[내구 5]
[체력 7]
[마나 0]
(남은 포인트는 17pt 입니다.)
상당히 불균등한 능력치다.
근력과 민첩은 이제 두 자리 수에 이르렀다. 허나 내구, 체력, 마나는 제자리걸음.
워낙 올리기 힘든 마나는 차치하고, 내구와 체력이 문제다.
[내구 5]
[체력 7]
이전 능력치에 비해, 내구가 1올라 있었다. 아무래도 한스에게 얻 어맞아 능력치가 소폭 증가한 것 같다.
쯧, 혀를 찼다.
'이래서야 오래 싸울 수 없어.' 내구는 개인의 신체가 충격에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아픔을 얼마나 감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수치다.
현실의 맷집이나 방어력 같은 느낌.
그리고 체력은 말 그대로 현실의 '체력'이다.
얼마나 달릴 수 있는지,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기력'이나 '지구력'쯤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지금 내 능력치에서 가장 시급한 것이 저 둘이다.
내구 그리고 체력.
둘 다 순간적인 전투 능력보다, 전투의 지속능력을 결정짓는 능력치다.
사실, 여태까지는 문제 되지 않았다.
접전이 있다 한들 십인대 규모의 작은 싸움뿐이었다. 교전은 순식간에 끝났고, 방어구 덕분에 낮은 내 구를 보완할 수 있었다.
허나 이제부터는 아니다.
고개를 돌려, 주위 풍경을 바라 봤다. 그러자 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다름 아닌 증축된 전진기지 파트라헴의 모습.
기지 인근에 다수의 구조물이 만들어지고 있다.
어느새 높아진 성벽, 정비된 도로, 그리고 주위를 살피는 망루와 순찰중인 군인들까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보다 대규모로 확장되어가는 기지의 모습.
그것들을 바라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제 정말 전면전이 코앞이네."
곧 전쟁이 시작된다.
때로는 백 명, 때로는 수천수만 단위의 싸움에 휘말린다.
전투가 오래 지속되는 것은 당연 한 일.
근력과 민첩은 충분히 성장시켰다. 이제 단순히 적 병사 정도는 순식간에 처치할 수 있게 되었으니 . 앞으로는 체력과 내구를 키워야 한다.
"후욱!"
폐의 공기를 내뱉으며 달렸다. 땅을 박차고, 울퉁불퉁한 산길을 뛰어갔다. 몸에 흐르는 땀이 지면으로 후드득 떨어진다.
그렇게 나는 하루 종일 질주했다. 더 이상 뛸 수 없을 때까지.
[체력 +1]
체력이 조금씩 늘기 시작한다.
"어서 오십시오. 마법단장님."
처억. 천인장 그레드가 경례했다.
과연 오랜 군 생활을 한 군인이 라는 것일까. 그의 경례에는 절도가 넘쳤다.
하지만 그런 그의 경례를 받은 이, 라브리에 마법단장 제피르는 표정을 찌푸렸다.
"참 군인이라는 족속은 이해가 안 되는군. 이 경례라는 것을 무슨 사명인양 하고 있어. 어딜 가기만 하면 경례, 경례, 경례… 지겹다 지 겨워."
"하지만 단장님, 군의 위계…."
"됐다. 위계 따지는 건 내 마탑 으로 족해. 밖에서는 좀 편하게 지 내고 싶다."
제피르. 그는 제국에서도 가장 호전적이라는 라브리에 전투마법단 의 수장이었다.
회색에 간간히 붉은색으로 장식 되어있는 로브. 그 아래에 자리해있는 얼굴은 놀랍게도 중년에 불과했다. 보통 마법사가 초로의 노인인 것을 생각하면 몹시 놀라운 일.
허나 제피르의 젊은 얼굴은 오히려 그의 유능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고작 중년이라는 젊은 나이에, 노화 가 억제될 정도의 경지를 이루었다는 것이니.
"즐거운 전쟁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제피르는 집무실의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그러고는 입가에 검은색 궐련을 물더니, 화르륵.
손가락에서 불꽃을 만들어내 불을 붙였다.
"자, 서류 받게. 중앙에서 내려온 작전계획서다."
"…확정입니까?"
"그래. 기지증축계획부터 개전까 지. 모든 것이 정리된 확정계획서다. 거기 보면 황제 폐하의 직인까지 박혀있지."
그레드는 제피르의 말에서류를 살폈다. 그리고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확실히…."
제국 황제의 인장까지 박혀있다.
후욱-. 제피르가 연기를 내뿜었다. 잿빛 구름이 흩어져 연해진다.
"개전 시기는 공국 놈들이 쳐들 어오는 즉시."
궐련을 피며 제피르가 말한다. 그가 말하는 것은 다름 아닌 전쟁 계획과, 황제의 의중.
그레드가 경청했다.
"전쟁방침은 반격, 섬멸, 전진, 파괴. 목표는 공국 수도 점령과 공국가의 몰살, 그리고 공국령의 흡수다."
치이익. 제피르가 연초를 손가락 으로 비벼 껐다.
평범한 이라면 화상을 입었겠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제피르는 불의 가호를 받은 고위 마법사였기 때문에.
화염과 열기는 그에게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한다.
"10년 만의 전쟁이다."
제피르가 클클 웃었다. 그는 다 가오는 전쟁이 진정으로 기쁜 듯했다.
"하지만 아쉬워. 카렌 왕국이나 유목연합, 혹은 연방 자치령 같은, 좀 괜찮은 놈들과 전쟁을 했다면 더 오랫동안 즐길 수 있었을 터인 데. 하필이면 공국이라. 이래서야 전쟁을 한 달은 할 수 있겠나?"
"아마, 한 달 전에 종전될 것 같습니다만."
"그래. 그게 문제야. 오랜만의 전쟁이지만 그 상대가 그 약해빠진 공국 놈들이라니. 맥이 빠지는군."
그레드는 속으로 질려했다. 제피르가 전쟁광이란 이야기를 듣긴 했으나. 실제는 그보다 더했다.
그는 진정으로 전쟁을 바라고 있다.
"아, 그러고 보니 . 자네의 보고서 를 읽었다, 천인장."
문득 제피르가 시선을 돌려 집무실의 어딘가를 바라봤다. 그가 주시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중앙의 테이블. 그 위에 을려져있는 지도다.
덜컹. 제피르가 자리에서 일어나 지도를 살폈다.
그가 손가락으로 어떤 부분을 가 리 켰다.
"확실히, 이 고지대 거점이 우리 마법사들이 주둔하기에 좋아 보이 는군. 여기라면 우리의 화력을 제대로 놈들의 옆구리에 투사할 수 있다."
"그렇습니다."
"거점은 확보된 상태인가?"
"아직 입니다."
"그러면 비콘도 설치하지 못했겠 군."
제피르가 턱을 쓰다듬으며 지도 를 주시하곤, 다시 물었다.
"무시하거나 포기하기엔 너무나 아까운 거점이다. 확보하는데 얼마나 걸리지?"
"이주일 뒤, 거점 확보를 위해 한 개 백인대를 보낼 생각입니다."
"한 개 백인대라… 그 정도면 적 정 병력이군."
제피르는 지도를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하지만 공국 놈들도 가만히 있진 않겠지."
정찰 정보가 확실하다면, 저거 점은 너무나 좋은 곳이다. 분명 제국과 공국, 양측에서 차지하기 위해 전투를 벌일 것이리라.
허나 마법사인 제피르에게는 상관없는 일.
"거점을 차지한다면 보고하게. 그렇다면 내 휘하 전투마법사를 보내 지."
거점을 차지하고 방어하는 것은 병사들이 해야 할 일이다. 그는 고개 돌려 집무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덜컹. 문이 닫히고, 천인장 그레 드는 한숨 쉬었다.
"좋아. 그럼…."
그는 흘깃, 시선을 옮겨 자신의 책상 위를 바라봤다. 책상 위에는 어떤 서류들이 어지러이 널려있었다.
거점 점령전 계획서. 시야에 유리한 고지대를 차지하기 위한 군사 작전의 계획서였다. 그는 그것을 바라보며, 누군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한지훈."
이 주 뒤에 있을 거점 점령전에는, 한지훈의 십인대 또한 편성에 들어간다.
그는 기대한다.
"이번에도 전공을 세워라."
한지훈이 다시금 전공을 세우기 를.
그레드는 여전히 평민 출신 장교 가, 자신의 아래에서 등장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번 임무가 끝난다면, 전쟁이 코앞이다.
* * *
시간이 흘러갔다. 이주일 동안, 나는 계속해 단련을 거듭했다.
아침에는 달리기, 오전에는 근력 운동, 저녁에는 검술 훈련.
나는 적당한 짬이 날 때마다 몸을 움직였고, 결국 나름대로의 성과 를 얻을 수 있었다.
[근력 14]
[민첩 16]
[내구 5]
[체력 9]
[마나 0]
근력은 1올랐고, 체력은 2올랐다. 민첩과 내구는 변화 없음.
나직이 중얼거렸다.
"역시 능력치가 높아질수록, 훈련 으로 올리기 힘들어져."
내 예상이 맞았다.
밑바닥일 때는 성장이 쉽다. 하지만 잠재력을 개발해나가면 나갈 수록, 성장 속도는 더뎌지게 된다. 능력치를 키우는 건 그만큼 힘든 일이니.
나는 남은 포인트를 확인했다.
(남은 포인트는 17pt 입니다.)
17포인트.
포인트는 중요한 자원이다. 허투 루 쓸 수 없다. 가급적 아껴놓다가, 더 이상 훈련으로 성장이 힘들어질 때. 갈아 넣는 것이 효율적이리라.
사실, 마음 같아선 그냥 지금 당장 포인트를 써버리고 싶지만.
그래서는 안된다. 이번 미션에서는 요긴하게 쓸 데가 있다. 필요 할 때 사용해야 한다.
내가 그렇게 고뇌하고 있을 때였다.
"모두 주목!"
덜컹.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들어왔다. 그가 저벅저벅 걸어 중앙으로 향하더니, 스스로를 소개했다.
"갈랜 알디니다. 이번에 재편된 4번 백인대를 지휘할 백인장이지."
그가 말하는 동시.
- 띠링!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갈랜 알디니][4번 백인장]
역시나 알고 있는 이름이다.
덜컹, 덜컥. 회의실 안에 있는 열 명의 십인장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경례했다. 백인장이 경례를 받자 십인장들이 다시 착석한다.
"자네들이 이곳에 모인 이유를 잘 알겠지."
그가 전면의 커다란 지도 앞에서서, 이쪽을 둘러보았다.
내가 앉아있는 이 방은 파트라헴 기지 지휘부 한 켠에 있는 브리핑 룸이었다.
오늘 아침, 갈랜 알디니가 휘하 십인장들을 모조리 이곳으로 호출했다.
이유야, 당연히.
'곧다음 미션이 있겠지. 여기로 부른 건 임무 전 브리핑을 위해서일 거고.'
이미 게임에서 겪어봤다. 이번에 무슨 미션이 있고, 어떤 이벤트가 일어날지.
이번에도 똑같을 거다.
나는 천천히, 갈랜의 얼굴을 주 시했다.
쯧, 혀를 찼다.
'게임에서 보다 더한데.'
각진 사각턱, 커다란 키, 오만한 눈동자.
녀석이 마음에 안 든다. 이미 게임 속에서 여러 가지 일을 겪었으 므로.
재수 없는 새끼.
그가 지도를 가리키며 설명한다.
"천인장께서 우리 4번 백인대에 명령을 하달하셨다. 임무는 고지대 점령 및 방어. 목표지점은 이곳이다."
그가 지도의 한지점을 가리켰다. 익숙한 지형이었다.
내가 정찰했고, 한스와 전투했던 그곳.
갈랜이 시선을 돌려 이쪽을 주시 한다.
"한지훈. 자네는 이곳을 정찰했었 지."
"그렇습니다."
나는 갈랜의 대답에 답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갈랜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묘한 감정이 어 려 있었다.
혐오. 어쩌면 증오.
' 역시.'
게임과 똑같다. 이미 예상한 반응.
녀석의 말에 무덤덤하게 반응했다. 놈의 말이 이어진다.
"… 길잡이는 자네의 1번 척후조다. 2번 척후조는 추후 한지훈을 보조해 경계한다."
녀석은 나를 바라보던 눈을 거두고, 서류를 꺼내들었다. 그가 이어 설명을 시작한다.
"일단 우리 4번 백인대의 전력은 척후조가 2개 조, 전투조가 6개, 궁 병조가 2개다. 중장보병은 없다."
방금 전 녀석이 보였던 기색을 뒤로하고, 설명에 집중했다.
척후 2개조, 전투 6개조, 궁병 2개조. 이렇게 4번 백인대를 이룬다.
정석적인 구성이다. 중장보병이 없는 건 아쉽지만, 사실 중장보병은 군단급 군영에서나 볼법하다. 아마 제 3군단이 배치된다면 보게 되리라.
"진군 경로는…."
이후 본격적인 갈랜의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그의 손가락이 지도의 이곳저곳 으로 향하고, 동선이 그어진다. 녀석은 열성적으로 무어라 말하지만.
나는 내심 한숨 쉴 수밖에 없었다.
'형편없네. 게임에서 봤던 그대로 야.'
예상대로라고 할까. 갈랜의 전술 적 능력은 너무나 허접했다.
뻔히 노출되어있는 곳에 군을 이 끄는가 하면, 아무런 이유 없이 험 지로 돌아가기도했다. 더해 적의 정찰이나 습격에 대한 대책은 전무.
보는 내가 계속해 한숨을 푹푹 내쉴 정도로, 근본 없는 계획이다.
저게 사람새끼인가.
"… 이상이다. 출발은 내일 정오. 그때까지 조원들에게 전파하고 휴식을 취하도록. 이상."
녀석의 브리핑이 끝났다. 그와 동시.
- 띠링!
[서브 퀘스트]
[고지대 거점을 확보하라.]
서브퀘스트가 생성되었다.
백인대 규모 전투. 하지만 지휘관이 노답이다.
이번에도 굴러야 할 것 같다.
15화.
다음날 정오.
4번 백인대가 기지를 나서 진군을 시작했다. 목적지는 과거 내가 갔던 고지대 거점.
백여 명의 제국군이 대열을 가지 런히 해 진군한다. 그 선두에는 나와, 내가 지휘하는 척후조가 자리해 있다.
문득, 옆에서 같이 행군하던 카일이 말했다.
"백 명 규모 작전이라. 이런 적은 처음이군요."
녀석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사실 척후조는 열 명 이상 규모 로 몰려다닐 일이 거의 없었다. 주 임무가 다름 아닌 척후와 탐색이었 기에. 대규모 인원으로 움직일 필요 가 없었으니 .
하지만 이번 작전에서는 아니었다.
"길잡이라…."
나는 슬쩍 뒤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갈랜을 비롯한 나머지 병력 이 뒤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이번 임무에서, 우리 척후조는 행군의 길잡이 역을 맡았다. 앞서서 움직여 정찰하고 본대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역할이다.
"하지만 백 명이나 있으니 , 든든 하군요. 열 명이서 다닐 때랑은 전혀 다른 기분입니다."
"그렇지. 이 정도면 소규모 적과 조우한다 한들 순식간에 제압할 수 있으니 ."
머릿수는 절대적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무려 백 명의 병력이 함께 이동하는 상황. 항상 날카롭게 긴장하며 움직이던 척후조 병사들에게 생소한 일이었다.
그렇게 나와 카일이 시답잖은 대화를 하며 걸어갔다.
얼마나 행군했을까. 문득,
"… 십인장님."
척후조의 다른 병사, 아르덴이 목소리를 내리깔며 나를 불렀다.
나는 무슨 일이냐는 듯 녀석을 바라보고, 녀석은 어딘가로 손가락을 뻗어 가리켰다.
"저길 보십시오."
아르덴이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보였다.
멀리 떨어진 수풀 속, 어렴풋이 빛나는 무언가.
"… 설마."
나는 눈을 찌푸려가며 해당 지점을 노려봤다. 그러자 가까스로 발견 할 수 있었다.
수풀 사이에 숨어있는 공국군 병사들. 그들은 시퍼렇게 번들거리는 창과 검을 들고, 이쪽을 주시하고 있다.
아르덴이 봤던 것은, 놈들이 들 고 있는 창의 반사광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열 명 규모의 공국 병사들입니다. 창병 일곱, 검 병 셋. 모두 방어구는 입지 않았습니다."
"적 척후조인가."
대견해 아르덴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 찾았다. 저걸 용케도 찾다니, 잘 보이지도 않았을 터인데."
"제가 눈이 좀 좋습니다."
내 칭찬에 아르덴이 히죽 웃었다.
아르덴은 제국 서부 대평원 출신 이라고 한다. 끝없는 지평선이 자리 해있는 그곳 출신 사람들은 대부분 눈이 좋았다. 척후병으로선 좋은 자 질이다.
"모두 정지!"
나는 붉은 천이 묶여있는 손을 높게 치켜들었다. 미리 정해둔 정지 신호였다.
그에 대열이 정지하고, 후열에 있던 갈랜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정지 신호를 보냈더군. 척후조 장, 무슨 일이지?"
"적 척후조를 발견했습니다."
나는 손을 뻗어 방금 전, 아르덴 이 짚었던 부분을 가리켰다. 수풀 속 번들거리는 반사광이 보인다.
갈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적 척후조인가."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고민하는 것일까. 갈랜은 턱을 괴고 생각을 시작했다.
하지만 녀석의 고민은 금방 끝나지 않았다. 눈깔을 뒤룩뒤룩 굴려가 며 계속 고민하는 꼴이 이 갑작스 러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 듯했다.
우유부단하고도 무능한 녀석. 살짝 도와줄까.
"백인장님. 놈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놈들이 이쪽의 진군 정보를 본대에 전달한다면, 적들이 방비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나름대로 진지한 표정을 지 어보이며, 백인장에게 의견을 밝혔다.
"저희 1번 척후조와 2번 척후조 가 들키지 않게 놈들의 뒤로 돌아 가 매복하겠습니다."
슬쩍, 눈동자를 돌려 시야의 구석을 바라봤다.
이미 전투지휘술 스킬을 발동시 켜놨기에, 미니맵이 떠올라있다.
"본대가 전진한다면 녀석들은 후 퇴할 것이고, 그때 놈들의 퇴로에 매복해있는 저희 척후조가 덮친다 면 수월하게 놈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
미니맵을 보는 순간 떠오른다.
어디로 가서 매복해야 할지. 아 군 주력의 접근에 적 척후조가 어디로 퇴각할지. 어떤 지점에서 덮쳐 야 최대의 공적을 얻을 수 있을지.
내 제안을 따른다면 손쉽게 적 척후조를 전멸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갈랜은.
"건방지군."
"… 백인장님?"
노골적으로 불쾌하단 표정을 지으며, 윽박질렀다.
"한지훈! 네놈이 전공을 몇 번 세운 걸 알고 있다. 공국의 전쟁의 도를 알아낸 것도 자네의 척후조라 고 했지. 하지만,"
저벅, 갈랜이 발걸음을 옮겨 내 게 성큼 걸어왔다. 녀석의 커다란 키가 더욱 가까워진다.
"하지만 네놈은 병사다. 나는 사 관이고."
그가 손가락으로 꾹, 내 가슴팍을 찔렀다. 정확히는 가슴팍에 매달 려있는 십인장 계급장을.
"군사 교육조차 받지 않은 애송이가, 어디서 내게 제안이지?"
갑작스러운 행동. 그에 대한 내 감상은 실로 단출했다.
'뭐지? 미친놈인가.'
제국군은 상하체계가 엄하다. 허 나 그것은 명령하고 수행하는 것에 한해서였지, 오히려 하급자의 의견 상신은 장려하고 있다.
헌데 갈랜은 내 제안이 아니, 제안했다는 행위 그 자체가 마음에 안 든 듯했다.
마치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한 것 마냥 말이다.
"자네는 군사학교라도 나온 건가? 아니면 귀족작위라도 가지고 있는 건가?"
놈이 내 계급장을 계속해 찔러댔다. 마치 너는 일개 병사에 불과하다고 강조하는 것처럼.
기분이 더럽다.
"병사면 병사답게, 평민이면 평민 답게 명령을 따라라. 다시 주제넘게 제안한다면, 그때는 이렇게 끝나지 않을 거다."
나는 녀석의 말을 듣고는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역시 신분제 사회라는 것인가.'
잊고 있었다. 이 세상은 신분제 사회다. 평민과 귀족, 지배자와 피 지배자가 나뉘어있는.
그동안 내가 알고 지내던 상급자는 천인장 그레드가 고작이었다. 그는 병사 출신인 자라 격 없이 휘하 를 대했고, 그렇기에 이 세상이 신분제라는 것을 거의 느끼지 못했었다.
"천인장이 평민이니, 이런 멍청한 놈이 활개치고 다니는군."
하지만 눈앞의 백인장은 귀족 출신이었다.
기껏해야 남작위에 불과했지만, 그럼에도 귀족은 귀족. 그리고 갈랜 은 귀족들 중에서도 권위 의식이 특히 강한 편이었다.
"좋아. 명령이다."
그는 공국 척후조가 있는 방향을 똑바로 가리켰다.
"척후조장 한지훈. 너희 1번 척 후조가 단독으로 공국 놈들을 제거 해라."
"… 무슨 말씀이십니까."
"못 들었나? 지금 당장 가서, 공국 척후 놈들을 찾아 전멸시키라는 거다."
말도 안 되는 명령이었다.
물론 나는 강하다. 더해 내 휘하 병사들 또한 전투경험 풍부한 베테 랑이 다수. 약해빠진 공국 척후조따 위는 별다른 위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놈들이 물러서지 않고 싸울 때의 이야기.
"불가능합니다. 분명 놈들은 도주 할 겁니다."
척후조의 제 1목표는 정보의 수집과 전달이다. 놈들은 우리가 접근 하는 것을 알아채는 즉시, 온 힘을 다해 도망칠 것이 분명할 터.
"놈들을 추격한다 한들. 모조리 전멸시킬 수 없습니다."
만전의 상태일 때라면 몰라도, 우리 또한 행군하며 체력을 소모했다. 퇴각하는 적을 추격해봤자 놓칠 것이 뻔한 일.
"명령을 재고해주십시오."
갈랜이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나 또한 지지 않고 놈을 마주봤다. 그러자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놈의 눈동자 속에 자리해있는 것은 경멸. 평민에 대한 멸시였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병사."
이제 녀석은 내 이름조차 입에 담지 않았다.
"가서 죽이라고."
"하지만."
"명령 불복종인가?"
스룽. 녀석이 장검을 뽑아들었다. 시퍼런 소음이 인다.
"작전 중 명령 불복종은 즉결처 형이다. 내 명령을 듣지 않을 건가? 아니면 설마, 그 '평민' 천인장 이라도 믿고 있는 건가?"
이제야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놈은 내가 말한 작전안이 합당한지, 그렇지 않은 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내가 싫은 것이다.
평민 주제에 전공을 세운 내가 , 평민 출신 천인장 그레드의 비호를 받는 내가 .
'염병할 놈.'
이를 악물며, 경례했다.
"…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쯧."
철컥. 녀석이 검을 검집 안에 수납했다.
"가서 공국 척후조를 죽여라."
갈랜은 그리 말하고는 본대 방향 으로 걸어갔다.
나는 돌아가는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낮게 읊조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조금 가닥이 보이는 것 같은데."
사실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갈랜을 어떻게 처리할지.
놈은 무능하고 질투심 많은 쓰레기다. 허나 그럼에도 내 상관이며, 아군이었다. 그렇기에 甦ㅐ?미루 고 있었다.
놈을 죽여 없애버릴지. 혹은 안 보이는 곳으로 처박아 버릴지.
하지만 방금 전 놈의 태도를 마주하고는, 반쯤 결정이 기울었다.
'역시 죽여야 하나.'
생각하고는 피식 웃었다.
'조금만 더 두고 보자. 어차피 기회는 아직 멀었으니까.'
짜증나고 무능한 놈이기는 하다 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죽여버리는 건 곤란하다. 프래깅의 시도는 조심 해야 하니. 만약 적발된다면 오히려 이쪽이 위험해질 것이다.
고개를 가로젓고는,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자! 모두 준비해. 공국 척후조를 처치하러 간다."
병사들이 하나둘 움직인다.
"… 평민 주제에."
갈랜은 한지훈의 뒷모습을 바라 보며 중얼거렸다.
검은색 머리, 검은색 눈동자. 들었던 특징과 똑같다.
그는 재차 혀를 차며, 읊조렸다.
"저딴 놈이 백인장이라. 말도 안 되지."
갈랜은 며칠 전 배속 당시, 다른 백인장들에게 주워들었던 소문을 떠올렸다.
- 한지훈?
- 천인장님은 그 병사를 백인장 까지 키울 심산이라는군.
- 병사가 백인장이라니. 힘든 일 아닌가?
- 전공이 있다. 공국의 대규모 공세를 알아차렸으니 .
- 더해 병사치고는 검술에 조예 가 있다는군. 저번에 훈련하는 것을 보았는데, 꽤나 검을 잘 다뤘다. 우리 백인장급에 전혀 뒤지지 않을 정도로 말이야.
- 혼자서 죽인 적병이 벌써 수십이라지.
- 그리고 곧 공국과의 전쟁이 있다. 전공을 세울 기회는 많아.
- 하긴, 그레드 님도 전쟁 중 사 관이 되었지 않았나?
불쾌한 이야기였다.
고작해야 병사. 일개 평민에 불과한 이가, 자신처럼 백인장 계급을 달 수도 있다니.
"망할. 이 기지에 배속된 것부터 가 마음에 안 들어. 평민 아래에서 복무해야 한다니."
사실 갈랜은 지독한 귀족주의자였다. 그리고 그런 그의 상관은 다름 아닌 평민 출신 사관, 천인장 그레드.
남작위를 가지고 있는 자신이, 평민 출신 장교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그에게 있어 더없이 불쾌한 일이었다.
"한지훈…."
그는 다시금 고개를 들어 올려 앞을 바라본다. 한지훈은 어느새 저 멀리 멀어져 있다.
녀석을 주시하며 갈랜은 중얼거렸다.
"기회만 생기면 쳐내버려야지."
지금은 곤란하다. 자신이 속한 백인대의 길 안내를 해야 하니.
하지만 거점에 도착하고, 한지훈 의 이용가치가 사라진다면.
그는 한지훈을 어떻게든 희생시 킬 생각이다. 녀석이 눈가에 계속 거슬렸으므로.
갈랜이 질척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없애버릴 기회는 많아."
한지훈이 자신의 휘하 병사가 된 이상, 그를 제거할 법한 방법은 너무나 많았다.
위험지역에 밀어 넣거나, 혹은 녀석의 척후조를 미끼로 쓰거나, 아니면 무모한 돌격을 지시해도 된다.
명령권을 쥐고 있는 이상. 한지훈은 자신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다. 작전 중 명령 불복종은 즉결 처형이니.
그가 허리춤에 매달린 검의 손잡이를 매만졌다.
"놈이 죽는다면, 그레드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 그래."
갈랜이 한지훈을 노린다.
16화.
나는 조원들을 이끌고 조심스레 공국 척후조에게 접근했다.
본대의 모습을 살피느냐 여념이 없는 것일까. 아직 우리들의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직이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모두 무기 준비해."
내지시에, 병사들이 검을 뽑아들고 창을 들어올렸다. 나 또한 천천히 검을 빼들었다.
스르릉, 하는 날 선 발검음은 들리지 않았다. 적이 눈치챌까 조심해 뽑아들었으므로.
"병력을 나눠 움직인다. 카일, 데 이드, 그리고 람펠과 아르덴. 너희 들은 저기 놈들의 퇴로지점으로 가 매복해있어라. 나머지는 나와 함께 녀석들을 급습한다."
"명령을 따릅니다."
바스락, 바스락, 부스럭.
네 명의 병사들이 천천히 매복지 점으로 향했다.
나는 그들이 자리 잡을 때까지 기다리곤, 주위 병사들에게 나직이 지시했다.
"내가 먼저 돌진하겠다. 나머지는 뒤따라 와라."
"알겠습니다."
병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금 시선을 돌려, 공국 병사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열 명으로 이루어진 공국 척후 조. 놈들 전부를 처치하는 건 힘들 겠지만, 적어도 지휘관 놈이라도 잡아야 한다.
나는 날카로운 눈으로 녀석들을 살폈고, 곧.
"찾았다."
적의 지휘관을 찾을 수 있었다.
다른 공국 병사들과 달리, 간소 하게나마 경갑을 갖춰 입은 놈. 녀석의 투구에는 십인장 마크가 확실히 그려져 있다.
저놈이 대가리다. 저놈부터 죽여 야 한다.
지휘관은 공격의 제 1목표이므 로.
"후우."
심호흡하고, 검을 쥐었다.
지휘관이 어디 있는지 알았으니 .
이제 급습을 준비할 차례.
최적의 타이밍을 잡아야 한다. 놈들의 긴장이 사라지고, 불의의 습격에 곧장 대처하지 못하는 순간. 그 순간을 포착해야 하니.
숨죽여 공국 병사들을 관찰했다.
놈들이 바라보는 방향, 보폭, 시야, 동선. 그것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곧, 최적의 순간을 잡을 수 있었다.
아무도 이쪽을 보고 있지 않고 있을 때. 경계가 옅어지고 긴장이 풀린 순간.
바로 지금이다.
"가자!"
파악!
나는 수풀을 헤치며 앞으로 뛰어 들어갔다. 자잘한 나뭇가지와 풀을 지르밟으며, 도약한다.
내가 노리는 것은 적 지휘관.
"뭐.4"
방금 전 점찍어놨던 사냥감이다.
지휘관이라곤 하나, 경험이 일천 한 것일까. 놈은 내 급습에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그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
저 정도라면 쉽게 죽일 수 있다.
파앙!
도약력을 살려 검을 휘둘렀다. 한껏 가속된 검날이 반월 모양의 검광을 그리며 녀석에게 짓쳐들었다.
서걱. 미약한 절삭음. 그와 함께 붉은색 핏줄기가 놈의 목에서 치솟 았다.
"꺽…."
공국 십인장은 핏물이 울컥이는 자신의 목을 부여잡더니, 힘없이 쓰 러 졌다.
순식간이었다.
"지휘관 처치."
놈 또한 나와 똑같은 십인장 계 급을 지녔으나, 경지의 차이가 너무나 압도적이었다. 녀석은 일격에 죽 어 버렸다.
쿠응!
진각을 밟으며 검날을 회전. 바로 옆에 있던 다른 공국 병사를 향 해내뻗었다.
푸욱! 내 검신이 적병의 복부를 꿰뚫었다. 녀석의 입에서 피가 울컥 치솟는다.
단숨에 두 명을 처치하고는, 크 게 외쳤다.
"다 죽여 버려!"
그와 동시, 숨어있던 제국 병사들이 하나둘 급습해 공국 병사들과 접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적 병사 여럿이 쓰러져갔다.
성공적인 급습.
나와 병사들은 순식간에 적의 반 절가량을 처치할 수 있었다.
"후퇴, 후퇴하라!"
"당장 몸을 빼…!"
상대가 안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일까. 녀석들은 잽싸게 몸을 돌려 달려 나갔다. 하지만, 
"카일! 그쪽으로 도망친다! 막 아!"
놈들이 도망치려 한 방향에는, 이미 내 병사들이 매복해 있다.
퇴로에 자리 잡고 있던 내부하 들이 도망치는 공국군을 쳤다. 소수 의 적병이 추가로 제거된다.
적 두셋이 창칼에 꿰뚫려, 피를 흘리며 흙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병사들이 창칼을 내려 박아 놈들의 숨통을 확실히 끊어버린다.
허나 완전히 놈들을 전멸시킬 순 없었다.
"젠장! 두 명 놓쳤습니다!"
카일이 분하다는 얼굴로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녀석의 검날에 들러붙어있던 핏물이 후드득, 지면으로 떨어져 내린다.
"십인장님! 어떻게 합니까? 추격 합니까?!"
녀석이 내게 물어왔다. 그에 나는 시선을 돌려, 도망가는 공국 병사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산을 탄 경험이 나름대로 있는 것일까. 살아남은 두 명의 적병은 재빠른 몸놀림으로 수풀을 헤치고, 울퉁불퉁한 오르막을 타고 올랐다.
쯧, 혀를 차며 대답했다.
"아니. 추격해봤자 잡을 수 없을 거다."
놓친 적 둘 모두 아무런 방어구나 배낭을 착용하지 않았다. 더해 들고 있던 창과 검마저 버렸으니 , 몸이 가벼울 터.
체력과 민첩이 어지간히 높지 않다면 잡긴 힘들 것이다.
백여 명의 본대가 우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포기하는 것 이 현명한 일.
"포기해라.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으니 ."
"… 망할!"
카일이 아쉬움에 욕지거리를 뇌까렸다. 나 또한 기분이 썩 좋지 않아, 이를 갈았다.
"갈랜 알디니. 빌어 처먹을 개자 식."
놈은 전투에 사사로운 감정을 개 입했다. 때문에 완벽하게 전멸시킬 수 있던 적 척후조가 살아 돌아가 게 되었다.
아마 놈들은 우리 주력의 움직임을 보고할 거다. 앞으로의 전투에 방비할 것은 분명할 터.
전투가 더욱 힘들어 질 것이리라.
"본대로 돌아간다. 다들 이동 준비해."
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적 지휘관의 투구를 주워들었다.
척후조가 복귀한다.
"…적 척후조 여덟을 제거했고, 두 명을 놓쳤습니다. 여기 적 십인 장의 투구입니다."
나는 병사들을 데리고 본대로 귀 환. 갈랜에게 보고하며 적 지휘관의 투구를 내밀었다.
갈랜이 투구를 받아들며 피식 웃었다.
"두 명이나 놓친 건가. 1번 척후 조장 한지훈. 귀관은 내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나 보군."
그가 피 묻은 투구를 이리저리 만지더니. 휙, 내던졌다.
탱그랑! 철제 투구가 지면을 구 른다.
"분명 명령하지 않았나? 적 척후 조를 전멸시키라고."
이미 알고 있었다.
"헌데. 꼴에 지휘관을 처치했다고 투구는 들고 왔군. 네놈 같은 평민 놈은 원래 이렇게 염치가 없는 건가?"
놈이 이렇게 나올 것이라는 걸.
그러나 속에서 분노가 이는 건 어쩔 수 없다.
'빌어먹을.'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확실하 게 공국 척후조를 전멸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갈랜은 내 제안을 받아들 이지 않았다. 오히려 실패할 수밖에 없는 명령을 내리고, 그것을 문책하고 있다.
"쓸모없는 놈. 하긴, 평민이니 어 쩔 수 없었겠지. 제대로 된 군사 교육도 안 받은 놈이니. 아니. 애초교육이란 걸 받아본 경험 자체가 없겠지. 네놈, 글은 읽을 줄 아나?"
녀석이 계속 비아냥거린다. 나는 반응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서 있었다.
"네깟 버러지가 아무리 발악하든 비천한 신분을 뒤집지는 못한다. 네 어미가, 네 아비가, 계속 보잘槁愎?평민으로 살았던 것처럼."
제 말에 제가 심취한 것일까. 갈 랜의 언사는 점차 그 수위를 높여, 어느덧 패륜의 경지에 이르고 있다.
화가 날 수밖에 없다. 모욕당하는 걸 좋아하는 변태는 아니므로.
가슴속에, 조금씩 분노가 싹튼다.
나는 마침내 결정했다.
'역시 죽여야겠어.'
일단 녀석이 행동하는 꼬라지를 두고 보려했다. 상관 살해를 시도 하는 건 나에게도 나름의 위험이 존재했으므로. 정 방해된다면, 그때 가서 결정해도 늦지 않다 여겼었다.
허나 이번 일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갈랜의 태도는 절대 변하지 않을 거다. 아무리 전공을 세우고 몇 번이나 목숨을 구원해준들.'
놈의 눈동자를 보면 알 수 있다.
저 갈색 눈동자 뒤로는 짙은 오 만과 일그러진 우월의식이 잠들어 있다.
그러고 보면 게임 속에서도 그랬다.
나는 항상 녀석을 구해줬었다. 놈의 허술한 명령을 억지로 수행해 임무를 기적적으로 완수해냈고, 녀석의 목숨이 위험했을 때마다 기꺼 이 구출해줬었다.
하지만 갈랜의 저 태도는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변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결국 놈을 포기해버렸었지.
'그래. 죽여버리자. 게임 속처럼.' 달라진 것은 없다.
녀석은 게임 속에서 나에게 죽었 었고, 이곳에서도 내게 죽을 뿐이다. 다만 그 시기가 심히 앞당겨 졌을 뿐.
죄악감은 없다. 장기적으로 해가 될 장애물을 미리 치워버리는 것뿐 이니.
그리고 내가 그렇게 결정하는 그 순간.
나는 묘한 감정의 변화를 느꼈다.
"네놈 평민들은 그저 우리 귀족 의 말에 복종하면 된다. 너희들은 본래 그러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니."
신기하게도 분노가 점점 가라앉 아갔다. 분명 놈은 계속해 내게 모 욕적인 언사를 쏟아붓고 있음에도 말이다.
고개를 들어 올려 다시금 녀석의 얼굴을 바라봤다.
오만한 눈동자, 일그러진 입술, 놈의 입가에는 그 어느 때보다 비 열한 웃음이 떠올라있다. 이렇게 나 를 대놓고 멸시하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것이리라.
하지만 여전히 화가 나지 않는다. 감정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그때 문득.
' 아.'
갈랜의 모욕에도 전혀 화가 나지 않는 이유. 깨달을 수 있었다.
녀석은 얼마 못 가죽을 목숨이었다. 그렇기에 그 어떤 모욕을 듣 는다 한들, 아무렇지도 않았다 송장이 주절거리는 것과 다를 바 없었으므로.
"…재미없군. 길이나 안내해라."
내 얼굴에 표정 변화가 없자 흥 이 식은 것일까. 갈랜이 고개를 돌려 후열로 돌아갔다.
나 또한 뒤돌아 척후조로 돌아갔다. 조원들이 이쪽을 바라보며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였습니다."
"그 상황에서 고작 두 명 놓쳤다 고 그런 모욕이라니요. 너무한 것 아닙니까?"
병사들이 갈랜의 험담을 주절주 절 떠들었다. 방금 전 험한 꼴을 당하고 온 내 기분을, 나름대로 풀 어주려 하는 것이리라.
씩, 절로 미소가 흘러나왔다. 이미 내 척후조원들과는 충분한 유대 를 쌓았다.
"자! 모두 주목."
목소리를 높여 분위기를 환기했다. 병사들이 말을 멈추고 이쪽을 주시한다.
나는 천천히, 조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어보고는. 그들에게 지시했다.
"정상 거점에 진입하면, 절대로 백인장 근처로 가지 마라."
"… 어째서 입니까?"
다소 뜬금없는 지시.
그에 카일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어왔다.
이미 시나리오를 겪었던 나는 앞 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갈랜이 어떤 일을 당할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허나 곧이곧대로 알려줄 수는 없다. 내 계획이 비틀려버릴 수도 있으니 .
잠시 고민하고는, 대답했다.
"지금은 설명할 수 없군. 아무튼, 백인장에게 접근하지 마라."
이유는 알려줄 수 없다. 하지만 어거지로 밀어붙일 수는 있다.
내 말에 병사들이 석연찮은 얼굴 로나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여러 사선을 함께 거쳐 온 그들은 나를 완전히 신뢰하고 있다. 명확한 이유를 밝히지 않아도 이렇게 말해두면 일단 따를 것이다.
'뭐. 궁금해 하는 것 같지만.'
나는 항상 무언가를 지시할 때 합당한 이유를 밝혔었다. 지금처럼 막무가내로 밀어붙인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괜찮다. 병사들은 반나절 뒤, 내가 그리 지시한 이유를 알게 될 것이므로.
"좋아. 그럼 이제 갈까."
고개를 들어 올려 전방에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다른 산들보다도 한층 높은 산이 보인다.
우리가 확보해야 할 고지대다.
저 산의 꼭대기, 목표 거점에 도착한다면.
갈랜은 죽는다.
"내가 앞장서겠다. 주위 경계하고, 잘 따라와."
백인대가 진군한다.
17화.
척후조를 움직여 계속해 산을 타고 올랐다.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 보니, 본대가 약간 멀어진 곳에서 천천히 뒤따라오고 있다.
본대의 가장 선두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갈랜.
피식 웃었다.
"이번에는 살려주지 않을 거다."
과거 게임 '블랙 오케스트라'를 했을 적.
나는 갈랜을 여러 번이나 살려줬었다.
사실, 살린 이유는 별것 없었다.
아군이었으니까. 내 상관이었으니까.
다소 짜증나는 NPC이긴 하지만, 위기에서 건져낸다면 점수를 많이 얻으리라 기대했었다. 그래서 나는 녀석이 위기에 빠졌을 때마다 구하 기 위해 움직였었다.
허나 나중에는 후회했었다. 놈의 개짓거리가 점차 심해졌으므로.
[갈랜 알디니][4번 백인장]
[적 천인대가 이 근처에 자리해 있다. 놈들의 동향을 파악하라.]
[갈랜 알디니][4번 백인장]
[돌격! 돌격하라, 한지훈! 놈들의 전열로 뛰어들어 시선을 끌어라!]
[갈랜 알디니][4번 백인장]
[아군이 퇴각해야 한다! 한지훈, 네놈의 척후조가 시간을 벌어라! 놈들의 발을 묶어두란 말이야!]
때로는 척후로, 때로는 돌격대로, 때로는 주력이 퇴각하기 위한 미끼 로.
제멋대로 이용당했었다.
그야말로 개고생이란 개고생은 다 했었다. 놈의 말도 안 되는 명령 때문에 게임오버 될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러려니 했었다.
그저 게임이었으니까.
아무렇게나 막 퍼주는 NPC가 있는가 하면 짜증나는 NPC도 있기 마련이라고. 그렇게 여겨 마우스를 놀려 댔었다.
당시에는 어째서 그리 지랄 맞게 행동했는지. 그이유를 몰랐다.
하지만 직접 놈의 언사를 온전히 경험한 지금, 나는 마침내 깨달을 수 있었다.
'갈랜은 평민을 혐오한다.'
지독한 귀족주의자.
놈은 오직 귀족만이 다른 이들의 위에 군림할 수 있으며, 평민은 소모품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게임에서 그리 나를 굴렸 던 것이다. 평민 주제에 전공을 세우는, 꼴 뵈기 싫은 병사를 치워 없애버리려고.
"그래봤자 남작에 불과하지만."
픽 웃으며 고개를 앞으로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꼴값 떤다는 감상밖에 안 떠오른다. 작위 중 가장 아래인 남작에 불과한 놈이 평민에 대한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으니 .
뭐. 지금 와서 생각해봤자 쓸데 없는 일이다.
어차피 놈은 곧 죽을 테니.
"십인장님. 정상입니다."
앞서 가던 카일이 그리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면을 주시했다.
오르막이 끝나고, 산의 꼭대기에 도달했다.
나는 조원들에게 다시금 강조했다.
"내가 한 말. 잊지 마라."
"백인장 근처에 가지 말란 것 말씀입니까?"
"그래."
카일을 비롯한 병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여러 번이나 강조했기에, 그들은 결코 백인장 근처에 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좋아! 드디어 도착이군."
갈랜이 이끄는 백인대 주력이 정상에 도착했다.
오랜 행군 끝에 도착해서 기쁜 것일까. 아니면 어서 임무를 완수하고 싶은 의욕에 찬 것일까.
놈은 아무런 방비 없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본래라면 거점 정찰을 지시해야 할 터인데도.
"… 자."
나는 시선을 돌려, 내 휘하 병사들을 바라봤다.
그들에게 나직이 지시했다.
"우리는 외곽 숲속에 몸을 숨긴다."
"몸을 숨긴다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병사들 중 몇몇이 물어왔다. 하기야 궁금할 것이다. 목표 거점에 도착했으니 , 이제 주위를 장악해야 할 이때. 난데없이 매복지시라니.
"일단 움직여. 설명은 좀 있다 해주지."
이후 우리는 거점 인근 숲속에 매복했다.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 눈길이 잘 안 가면서도, 시야를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나와 병사들이 막 몸을 숨겼을 때였다.
"십인장님.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카일이 나무에 등을 기대며 그리 불평했다.
"정상 거점을 차지했습니다. 이제 여기를 완전히 정복하고 비콘만 설치하면 우리 임무는 모두 끝나는 것 아닙니까? 백인장 근처에 접근 하지 말라는 것도 그렇고.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내가 여태껏 명확한 이유를 알려 주지 않았기에, 많이 답답한 듯했다.
슬쩍 시선을 돌려 다른 병사들을 바라보니 그들 또한 눈가를 찌푸리 고 있었다. 어째서 영문 모를 명령을 내리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모습.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이유를 알려주지."
슬슬 알려줘도 될 때다. 이쯤이 면 다른 변수가 생기지 않을 터이 니.
"네. 이유가 도대체 뭡니까?"
"어서 알려주십시오."
내 말에, 병사들이 다시금 이쪽을 주시한다.
녀석들의 얼굴에 자리해있는 감정이 바뀌었다. 불만에서 호기심으로.
시커먼 사내자식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퍽 웃겨, 나 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나는 잠시 주위를 둘러본 후. 설명을 시작했다.
"갈랜 알디니. 놈은 치명적인 실수를 몇 가지나 저질렀다."
병사들이 집중해 내 말을 경청한다.
나는 검지를 치켜들며 말했다.
"먼저 첫 번째. 놈은 적 척후병 이 있던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우리가 행군 중 봤던 척후조. 생각해보면 명백히 이상했다.
하필이면 거점으로 가는 길목에 놈들이 있었다. 평소 적 척후들은 기지 근처를 탐색하는 것이 고작일 터인데 말이다.
물론 수상한 건 놈들의 위치뿐만 이 아니었다.
"더해 공국 척후 놈들은 아무런 짐이 없었다. 완전히 맨몸이었어.
공국군 주둔지에서 왔다면 분명 식량을 가지고 있어야 했었는데 ."
저 멀리, 공국군 기지에서 정찰 나왔다면 식량이 든 커다란 배낭을 지고 있어야 할 터인데. 녀석들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마치 바로 인근 지역에서 온 것 마냥.
이는 단 한 가지만을 의미했다.
"거점은 이미 놈들의 손아귀에 떨어져 있다."
공국 놈들은 이미 거점을 장악하고 있었다. 진군 중 발견했던 척후 조는, 거점으로 접근하는 제국군을 관측하기 위한 공국측 초계병력에 불과했다.
하지만 백인장 갈랜은 그 점을 깨닫지 못했다.
"거점이 이미 장악되었다니요? 하지만 지금 이곳에는 적병이 안 보입니다."
"안 보일 수밖에. 계속 들어 봐 라."
나는 검지에 이어 중지까지 피고는 계속해 말했다.
"두 번째. 녀석은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려 공국측 척후병을 놓쳐버렸다."
척후조는 반드시 죽여 버려야 하는 적이다. 놈들이 살아 돌아간다면 아군의 움직임이 그대로 새어나가 므로.
허나 갈랜은 적 척후조를 완전 섬멸할 수 있었는데도 놓아줘 버렸다. 오직 내게 책임을 전가하고 모 욕하기 위해서.
"덕분에 공국 놈들은 우리 움직임을 파악하게 되었다. 즉 아군 백인대 규모 병력이 고지대 거점으로 향한다는 것을 놈들이 미리 알게 된 거다."
"… 설마."
병사들의 얼굴 표정이 점점 굳어 진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점차 깨달아가는 것 같다.
약지를 펴며 이어 말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놈은 정찰 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다."
제국 백인대는 대부분 2, 2, 6구성을 취했다.
척후조 2개 십인대. 궁병조 2개 십인대. 전투조 6개 십인대.
당연히 우리 백인대 또한 같은 구성을 따랐고, 스무 명의 척후병이 포함되어 있었다.
척후병의 주요 임무는 다름 아닌 정찰.
허나 갈랜은 척후병을 제대로 운 용하지 못했다.
"놈은 척후조를 정찰에 사용하지 않고 오직 길잡이로만 운용했다."
멍청한 짓이었다. 전투에서 정보 의 중요성을 간과하다니.
갈랜은 임무를 시작한 이후 내내, 척후조에게 정찰 임무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저 길안내만을 맡기고 태평하게 군을 움직였을 뿐.
"만약, 거점에 진입하기 전 정찰을 명령했다면… 괜찮았겠지만. 녀석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무슨 말씀을 하려하시는 겁니까?"
병사들이 불안한 눈으로 나를 주 시한다. 그에 나는 고개를 돌려 거점 중앙을 바라봤다.
내가 바라보는 것은 다름 아닌 백인장 갈랜.
녀석은 병사들에게 비콘을 설치 하라 지시하고 있다.
"간단하다. 이거점은 이미 공국 놈들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우리의 접근을 눈치챘고, 심지어 이쪽은 거점 정찰조차 하지 못했다."
"그 말은."
병사들이 긴장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검의 그립을 잡으며 이어 말했다.
"공국 놈들은 이미 매복해있다. 곧 기습이 있겠지."
"기습이라니! 그럼 백인장에게서 떨어져 있으란 건…."
"그래. 공국 놈들이 기습한다면 가장 계급이 높은 갈랜을 먼저 노 릴 거다. 지휘관은 언제나 제 1목 표이니까."
슬쩍, 시선을 돌려 거점의 갈랜을 바라봤다. 녀석은 여전히 탁 트인 공간에서 비콘 설치를 진행하고 있다.
"위험한 놈 근처에 있으면 안 되 잖아."
내가 그리 말하는 즉시.
- 피잉!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화살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였다.
나는 검을 뽑아들었다.
화살 세례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핑, 피잉, 쉬익. 파공성이 어지러이 울려댔다.
수십여 발의 화살 궤적. 그것들 이 향하는 것은 다름 아닌, 중앙에 무방비하게 서 있던 지휘관 갈랜이었다.
"크악!"
갈랜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의 왼팔에 화살이 박혔다.
퍽, 콰직. 푹.
화살이 계속해 날아와 갈랜과 그 주위에 쇄도한다. 녀석의 정강이에, 무릎에, 옆구리에. 날카로운 화살촉 이 파고들어 갔다.
갈랜이 신음하며 바닥을 뒹굴었다.
경갑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그 의 머리와 가슴팍을 보호해줄 뿐이었다. 다수의 화살이 갈랜에게 적중했다.
장소가 너무 좋지 않았다. 공국 군은 갈랜이 몸을 가릴 수 없는 공 터로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공격을 시작했다.
"매복! 매복이다! 당장 전열을… 허억!"
백인장 옆에 있던 차석이 소리치던 와중, 말을 잇지 못하게 되었다. 공국군의 화살이 그의 모가지를 꿰뚫었으므로.
목이 꿰뚫린 차석이 나자빠졌다. 화살이 계속해 날아온다. 병사들이 화살을 피해 뿔뿔이 흩어졌다. 도망 치는 이들 중 상당수가 화살에 맞 아 쓰러진다.
나는 그 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역시. 기습당하니까 어떻게 하지 를 못하네."
너무나 무방비한 상태에서, 너무나 완벽하게 기습당했다.
제아무리 강군인 제국군이라 한 들, 이렇게 무방비한 상황에서 기습 당했으니 어찌 할 도리가 없는 일 이다.
나는 검을 쥔 채 갈랜을 바라봤다.
"커허, 커어어…!"
녀석은 신음하며 바닥을 기고 있었다.
화살이 팔다리에 박혀있고 옆구리에도 깊이 파고들어있다.
꽤나 중상. 아직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거의 죽어가고 있다.
녀석을 가만히 놔둔다면 곧 죽을 목숨이리라.
"모두 주목!"
나는 주위 조원들을 둘러보았다.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있는 척후 조 대원들이 나를 주시한다.
"백인장은 중상을 입어 지휘를 할 수 없게 되었다."
백인장은 곳곳에 화살을 맞아 바닥을 기고 있다. 정상적인 지휘를 바랄 수 없다.
"차석은 죽어버렸다."
백인장 옆에서 있던 차석은 화살에 맞아 목이 꿰뚫려 즉사했다.
"카일, 대답해라. 백인장과 차석이 모두 지휘 능력을 상실했을 때, 백인대 지휘권은 누구에게 계승되지'?"
"백인장과 차석 둘 다 지휘할 수 없게 되었을 때는 가장 앞 번호 조 의 십인장이…."
"그렇지."
나는 1번 척후조의 십인장이다.
백인장과 차석이 없는 지금, 가장 최선임 병사.
"내가 백인대 지휘권을 계승하겠다."
- 띠링!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이제 '스킬 : 십인대 전투지휘 술'을 상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킬을 상향하시겠습니까?]
[상향에는 10pt가 필요합니다.]
[수락/거절]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백인대 지휘권을 계승받아, 스킬을 상향할 수 있게 되었다는 안내.
나직이 대답한다.
"수락."
직후, 정보가 내 뇌리에 몰아치 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백인대를 장악할 수 있는지. 어찌 움직여야 보다 효율적 으로 군을 움직일 수 있는지.
승리하기 위해선 무얼 해야 하는 지.
다양한 지식이 머릿속을 가득 메 워갔다.
내가 그 정보를 모조리 받아들였을 때,
- 띠링!
다시금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스킬 : 십인대 전투지휘술' 이 '스킬 : 백인대 전투지휘술'로 상향 되었습니다!]
['전술창' 의 등급이 올라갑니다!]
['부대원 정보' 가 해금되었습니다!]
"좋아."
검을 들어올렸다. 슬쩍 시선을 돌려, 탁 트인 거점을 바라봤다.
공국 놈들의 활 공격이 조금씩 가라앉아 갔다. 동시 수풀의 음영 진 곳에서 하나둘 놈들이 모습을 드러내 전열을 갖추고 있다.
활 공격이 끝나고. 돌진을 준비 하는 모습.
나는 나직이 읊조렸다.
"백인대 지휘술 활성화."
- 띠링!
['스킬 : 백인대 전투지휘술'이 활성화됩니다.]
상향된 스킬을 발현시켰다.
이제 공국 놈들을 쳐부수는 것만 이 남았다.
18화.
백인대 전투지휘술 스킬을 발현 시키자, 내 앞에 두 개의 홀로그램 이 떠올랐다.
하나는 전술창.
게임 속 미니맵처럼 지형과 적아 의 위치를 알 수 있는 화면이다.
허나 그전술창의 크기가 달라져 있었다.
['전술창'의 등급이 '백인대'로 상향되었습니다!]
[더 넓은 시야, 더 많은 정보를 표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화면이 더욱 커다래져 있었다.
운용할 수 있는 병력의 규모가 늘어났으니 그에 맞춰 전술창의 크기와 축적이 변화한 것이다.
더 넓은 영역을 주시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정보를 표기할 수 있도 록.
그리고 스킬의 상향이 불러온 변화는, 단순히 전술창에 그치지 않았다.
- 띠링!
['부대원 정보' 가 해금되었습니다!]
[4번 백인대의 부대원 정보를 표 기합니다.]
새로운 기능 또한 생겨났다.
[4번 백인대]
[임시 백인장 한지훈]
[총원 112/생존 89/중상 3/전사 23]
[1번 척후조장 한지훈] (11)
[2번 척후조장 에시](10)
[3번 전투조장 브리든] (5)
[4번 전투조장 라이들렘] (9)
[5번 전투조장…]
부대원 정보창. 말 그대로 부대 의 구성 인원을 한눈에 확인하는 기능이다.
어떤 부대의 누가 살아남았는지, 누가 부상당했는지.
그리고 누가 죽었는지.
휘하 병력을 확인할 수 있는 홀로그램이 시야 앞에 자리한다.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전사가 스물 셋이라."
방금 전공국측의 화살공격 때 스물 셋에 달하는 병사들이 죽은 모양이었다.
꽤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백인대의 사분지 일이 죽어버린 것이 므로.
하지만 괜찮다. 이길 수 있다.
'게임 속에서도 이겼지.'
당시에는 십인장에 불과했었다. 내가 갈랜을 살려줬었기에 지휘권을 승계받기 못했기 때문이다.
허나 지금의 나는 백인장의 지휘 권을 승계 받았으며 골칫거리인 갈 랜조차 완전히 배제해버렸다.
지려야 질 수가 없다.
"카일."
"예! 백인장님!"
처억.
카일이 빠릿하게 경례한다.
내 호칭은 어느새 백인장으로 바 뀌어 있다.
"네가 1번 척후조를 맡아라. 나는 백인대 운용에 집중하겠다."
"알겠습니다!"
홀로그램이 변화한다.
[1번 척후조장 카일] (10)
1번 척후조의 지휘관이 카일로 변경되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녀석에게 지시했다.
"카일. 네 1번 척후조와 2번 척 후조는 적 궁병 놈들을 사냥한다."
"궁병대를 사냥하라니요?! 놈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카일이 시선을 돌려 거점을 바라 봤다.
공국 병사들이 등장해, 전열을 다듬고 있다. 곧 돌격할 듯한 모습.
그중에 활을 든 적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겠지. 놈들은 아직도 숲속에 매복해있으니까."
공국 놈들은 근접전투를 할 수 있는 병사들을 드러냈을 뿐 궁병대는 감춰두고 있다.
전혀 위치를 모르는 상황.
하지만 괜찮다. 대충 어디쯤에 숨어있는지 알고 있으니 .
나는 손을 들어올려 숲 곳곳을 가리켰다.
"공국 궁병 새끼들은 저기, 저기, 저기에 숨어있다. 모두 합해 약 사십 내지 오십 명 정도."
"… 어떻게 알아내신 겁니까?"
카일이 놀란 눈을했다. 어떻게 궁병이 숨어있는 곧을 짚었는지 믿기지 않는 모양.
그에 답한다.
"화살 궤적을 봤다."
아까 전, 갈랜이 활에 맞아 죽어 갔을 때 나는 그저 자리에 앉아 손가락만 빨고 있지 않았다.
어디 방향에서 어떤 궤적을 그리 며 화살이 날아오는지, 그리고 몇 발의 화살의 화살이 날아오는지.
그것들을 관찰해 궁병의 규모와 위치를 추측해냈다.
"적 궁병대 오십인대 규모 정도 라면 너희 2개 척후조가 충분히 처 치할 수 있을 것이다. 숲을 타며 이동하면 화살에 맞을 염려 없이 움직일 수 있겠지."
내 말에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녀석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서 가!"
"명령을 받듭니다!"
카일이 병사들을 데리고 움직이 기 시작했다. 그가 향하는 곳은 2번 척후조장이 숨어있는 바위 뒤.
그는 그곳으로 가 2번 척후조와 합류한 다음, 함께 움직이며 적 궁 수들을 사냥할 것이다.
나는 고개를 주억이고는, 전술창을 살폈다.
"… 염병할."
입에서 절로 욕지거리가 터져 나 왔다.
제국 병사들이 흩어져있다. 공국 병사들은 이제 돌진을 준비 중인데.
이래서야 각개격파 당할 꼴이다.
"일단, 병력을 추슬러야 해."
적어도 전투병과 놈들이라도 모아야 한다. 그래야 공국 놈들의 돌진을 막을 수 있으니 .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까.
게임이랑은 다르다.
게임 '블랙 오케스트라'는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었다. 마우스와 키보드로 조작하는 .
하지만 지금 이곳은 현실이다.
지금 내게는 편리하게 병력을 운 용하는 마우스도, 쉽게 명령을 하달 하는 키보드도 없다.있는 것이라고는 오른손에 쥐어 있는 장검과, 튼튼한 육체뿐.
피식 웃었다.
"결국 발로 뛰어야 하는 건가."
공국 놈들이 전열을 갖추고, 돌진을 준비하고 있다. 허나 지금 제국군은 십인대 단위로 뿔뿔이 흩어 져있는 상황.
시간이 얼마 없다.
공국군이 움직이기 전에 전열을 추슬러야 한다.
나는 나직이 읊조렸다.
"민첩 상향. 7포인트."
아직 내게는 포인트 7pt가 남아 있다.
그것을 모조리 '민첩'에 갈아 넣었다.
- 띠링!
[능력치 : 민첩을 7포인트 상향 합니다]
[상향에는 7pt가 필요합니다.]
[상향하시겠습니까?]
[수락/거절]
"수락."
직후, 익숙한 감각이 몸을 휘감 았다.
무언가 이형의 기운이 내 몸 곳곳을 손보는 듯한 감각. 몸이 능력치의 상승에 맞춰 변화하는 감각.
나의 민첩이 상승해간다.
[민첩 23]
드디어 민첩이 20을 넘어갔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미니맵의 파란 점들을 향해 뛰어나갔다.
병사들을 다시 규합하기 위해서.
"백인장님. 기습은 성공적입니다."
한 공국 병사가 달려 나와 보고했다. 그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것은 루디아 램퍼. 공국군 중강백인대 의지휘관직을 지닌 이다.
공국 병사들 중 유독 화려한 갑 주를 입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몇이나 죽었지?"
"약 스무 명을 처치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달칵.
병사가 나무상자를 들어 올려 열었다.
상자 안에는 사람의 목이 잘린 채 담겨있었다.
"적 백인장의 목을 베었습니다."
제국군 백인장 갈랜 알디니. 그 가수급으로 화해, 상자 안에 자리 해 있는 것이다.
루디아가 피식 웃었다.
"이놈이 저 멍청한 제국군의 지휘관인가."
"그렇습니다. 분명 갑주에는 백인장 계급장이 달려있었습니다."
"웃기지도 않는군. 제국군은 강군 이라 들었는데 거점에 정찰조차 안 하고 들이닥쳤어. 덕분에 일이 쉬워 졌군."
루디아가 보기에도, 제국군의 움직임은 너무나 멍청했다.
제국군은 거점정찰조차 하지 않 고 마구 들어왔다. 그 덕분에 그의 병력은 매복을 들키지 않았고, 완벽 한 기습을 가할 수 있게 되었다.
모두 이 지휘관 덕분이었다.
"치워라. 역겨우니."
"알겠습니다."
달칵. 공국 병사가 상자를 닫았다.
루디아가 시선을 앞으로 던진다. 그는 흐뭇한 눈으로 전장의 모습을 살폈다.
산의 거점 고지대 곳곳에 병사의 시체가 널려있다. 화살에 맞아 죽은 적병들은 모두 하나같이 제국군 군복을 입은 이들.
그가 씩 웃었다.
"적 지휘관이 죽었으니 . 남은 건 오합지졸을 사냥하는 것밖에 없군."
군대를 운용하는데 있어 지휘관은 몹시 중요한 존재였다.
부대의 사령탑이자 중심점.
지휘관 없는 군대란 곧 머리 없는 사람과도 같았다.
지휘관을 잃은 저들은 구심점을 잃어 뿔뿔이 흩어져 있으리라. 이제 남은 것은 병력을 전진, 놈들을 하나하나 격파하는 것뿐.
"좋아. 부대 정렬됐나?"
"정렬 끝났습니다."
"그럼 전진해. 제국군 잔당을 밀 어버려라."
그가 명령하는 동시.
철그럭!
백여 명의 공국 병사들이 전진하 기 시작했다.
공국 병사들의 모습은 그리 훌륭하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경갑 하나 없는 맨몸. 조잡하게 만들어진 창과 검.
그들 대부분은 징집병이었고, 그렇기에 무장 상태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는 일이었다.
"승기는 이쪽에 있다."
무장과 훈련이 빈약하지만 잘 통제된 공국군.
반면 첫 기습에 의해 지휘관이 전사하고 통제되지 못해 뿔뿔이 흩 어진 제국군.
이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니.
'질래야 질 수 없는 싸움이군.'
루디아는 그리 생각했다.
"… 백인장님!"
그때는 말이다.
후방에서 한 공국군 궁병이 비척 거리며 다가왔다. 그의 가슴팍에는 십인장 마크가 새겨져 있었다.
루디아는 병사에게 물었다.
"궁병대 십인장인가. 무슨 일이 지'?"
"아군 궁병대가…!"
십인장은 말을 멈추고, 고통스러 은 얼굴로 숨을 골랐다.
그가 힘겹게 고한다.
"배후의, 아군 궁병대가 사냥당하고 있습니다!"
"뭐?"
순간, 루디아는 병사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냥이라니.
적은 이미 반쯤 와해되었는데, 어떻게 아군 궁병대를 노린단 말인 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허나 그때.
- 털썩!
궁병대 십인장이 쓰러졌다. 그제야 루디아는 그 궁병대 병사의 등을 볼 수 있었다.
병사의 등에는 기다란 자상이 아 로새겨져 있었다. 붉은색 핏물이 군복을 적셔 천천히 번져나간다.
"무슨…."
루디아의 눈가에 당황이 어렸다.
분명 적 지휘관을 처치하고 놈들을 와해시키는 것이 성공했다.
이대로 주력 전투부대를 전진. 제국의 낙오병들을 제압하기만 한 다면 끝나는 싸움일 터.
헌데 배후의 궁병대가 사냥당하고 있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백인장님!"
루디아는 생각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그를 다시 불렀으므 로.
그는 고개를 들어 올려 자신을 찾는 병사를 바라봤다. 병사가 믿기 지 않다는 얼굴로 보고한다.
"적, 제국군이…."
병사가 말끝을 흐린다. 루디아는 병사의 얼굴 너머, 전방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보인다.
천천히 집결해 전열을 다듬고 있는 제국군.
"진형을 갖추고 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지휘관이 죽어 완전히 흩어졌어 야 할 제국군이 다시 전열을 갖추고, 전투를 준비하고 있다.
루디아가 시선을 옮겨, 제국군 방진의 가장 선두에 선 이를 바라 봤다.
검은색 머리를 가진 이였다.
"놈이 지휘관인가."
루디아는 그리 직감했다.
저 검은색 머리를 지닌 병사는, 또렷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마치 자신을 노리는 것처럼.
문득 루디아의 뇌리를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 검은 머리의 병사가 공국의 초 계망을 돌파, 전쟁의도를 읽어냈다.
- 검은 머리의 병사가, 한스 요 한바르첸 도련님께 중상을 입혔다.
- 검은 머리의 병사가….
병사들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이 있었다.
일개 병사라기엔 범상치 않은 실력을 지닌 병사가 제국에 있다는 소문.
그리고 그 병사의 머리색은 검은색이라 한다.
우연일까, 저 병사의 머리색도 검은색이다.
"멍청한."
루디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저 헛소문이었다. 일개 병사 주제에 장교 이상의 무력을 지닌 병사라.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루디아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져 갔다.
저 병사의 눈동자는 너무나 날카 로웠다. 마치 사냥 전 맹수의 그것 과도 같은 기세.
나름의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루디아는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불안한 기분이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그리고 그때였다.
"놈. 뭐하는 거지?"
검은 머리의 병사가,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주먹을 쥐 고 엄지를 편다. 직후.
스윽.
그가 엄지로 목을 그었다. 자신을 죽여 버리겠다는 제스처였다.
명백한 도발.
"감히…!"
붉으락푸르락. 루디아의 얼굴에 분노가 일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이쪽이 훨씬 유리한 상황이었다.
아군의 수는 백여 명. 반면 저기 보이는 제국 놈들의 수는 오십여 명에 불과한 상황.
그가 악을 쓰듯 명령한다.
"당장, 돌격해! 저 빌어먹을 새끼 의 목을 잘라버려라!"
루디아가 분노에 차 명령하는 그때.
- 피잉!
화살의 파공성이 들렸다.
그에 루디아는 당연히 아군인 공국측의 화살이라 생각했다.
이쪽에는 4개 십인대 규모의 궁 병을 매복시켜 놨으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 퍼억!
"크윽!"
루디아의 바로 앞에 있던 공국 병사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병사의 어깨에는 화살이 박혀있다.
화살은 공국의 것이 아닌, 제국 의 것이었다.
제국의 화살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19화.
화살이 쏟아져 내렸다. 탁 트인 거점 공터 지역의 양옆 숲속에서 쏘아지는 화살 세례였다.
궁병대의 일제사격. 뒤이어 계속 되는 무차별 사격이 놈들을 노린다.
"화살 공격이다! 당장 몸을 피해!"
"으아아? 공국 병사들이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한다. 기껏 갖춰놨던 전열이 흐트러지고 혼돈과 공포가 놈들을 잠 식해갔다.
나는 그 꼴을 바라보며, 목에 가 져다 댔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좋아. 제대로 먹혔네."
방금 전 했던 목을 긋는 제스처. 그것은 적장에게 하는 도발임과 동시, 궁병대에게 보내는 사격개시 신호였다.
시선을 내려 전술창 미니맵을 바라봤다.
"완벽해."
절로 흡족한 미소가 지어졌다.
1번, 2번 척후조가 놈들의 후방 으로 파고들어 숨어있는 궁병들을 사냥했다. 아군의 궁수대가 좌우 숲에 배치되어 양각을 잡아 사격을 개시했다.
모두 내가 지시한 일이었다.
나는 백인대 지휘권을 계승받고, 스킬과 능력치를 올린 직후 재빠르 게 움직여 병력을 추슬렀다.
이곳저곳에 흩어져있던 병력들을 규합. 전투조에겐 전열을 세우라 명 했고, 궁병조에겐 좌우 숲속으로 파고들어 대기하라 지시했다.
그리고 지금 이상황이 되었다.
"망할! 전열을 망치지 마라!"
"화살 공격은 곧 멎을 것이다! 자리를 지켜라! 도망치지 마!"
공국 놈들의 전열이 흐트러진다. 적 지휘관은 병사들을 추스르려 하지만, 화살에 맞을까 겁에 질린 공국 병사들이 하나둘 진형을 벗어나 달려나간다. 그 수가 퍽 많다.
결국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것일까.
"탈영은 즉결 처형이다!"
적 백인장이 도망치는 병사들을 하나둘 참했다. 뒤로 달려가던 공국병사들이 제 지휘관에 의해 등이 베여 쓰러졌다.
허나 그럼에도 병사들은 도망쳤다. 제대로 훈련되지 않은 병사들의 한계였다. 날아오는 화살에도 도망 치지 않을 정도로 단련되기 위해서 는, 오랜 훈련과 나름의 실전경험이 필요하다.
화살 세례에 위축되어 혼란에 빠진 공국군.
기회는 이때다.
"돌진 준비!"
칼을 치켜들며 크게 외쳤다.
지휘술 스킬이 강화된 덕분일까.
내 목소리는 더욱 중후하고, 카리스마 있게 바뀌어 있었다.
철그럭, 철컥!
병사들이 검과 창을 들어올린다. 나와 병사들이 들어 올린 냉병기가 햇빛을 반사해 번쩍인다.
검을 아래로 내려그으며, 명령했다.
"돌격!"
제국 병사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발을 굴렀다. 지면을 즈려밟고, 검 과 창날을 앞으로 내민다.
동시. 화살 세례가 멈췄다. 아군 의 돌격을 인식한 내 궁병대가 사격을 중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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