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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유닛 001-390(완결) 1화.
게임을했다.
[블랙 오케스트라]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었다. 게임 이름을 말해도 아무도 모를 정도로, 완벽히 묻힌. 듣보잡 게임.
플레이하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자주 방문하던 검색엔진 대형배너에 광고가 떠올랐었다. 화려한 일러스트도 없이, 검은색 배경에 흰색 글씨로 '블랙 오케스트라'라 박혀있는 광고.
그에 흥미를 느껴 클릭했고, 게임을 받아 설치, 실행했다.
[환영합니다! 유저 한지훈.]
[시나리오를 준비합니다.]
[진영을 선택해 주세요.]
처음, 게임을 시작하고 느낀 것은 단순히 그래픽이 좋다는 감상이었다.
지형 묘사가 사실적이었으며, 사람은 진짜처럼 움직였다. 바람에 휘날리는 깃발은 그 어떤 게임보다도 자연스러웠다. 피어나는 먼지구름은 실제 전장을 방불케했다.
이때 이상한 걸 느꼈어야 했는데 .
게임은 판타지 세계관이었다. 마법사가 있고, 기사가 있으며, 엘프 니 드워프니 하는 타 종족이 있는 흔한 양산형 판타지 세계관.
세계관 속 여러 집단이 전투를 벌여 승리를 갈구한다.
나는 인간, 그중에서도 제국 진영을 선택했다.
[위대한 제국을 위해!]
게임에 진입해 전투를 수행했다.
게임 방법은 여타 다른 전략 게임들과 별다를 것 없었다. 마우스로 부대를 지정해 원하는 위치로 보내 지휘한다.
이렇게 지휘해 적 전력을 모조리 죽이거나 목적을 달성하면 승리. 아니면 패배.
[9번 십인대 부대원 목록]
[베르닝][중급 검병]
[마흐트][중급 검병]
[클리아스][중급 창병]
[게이트만][하급 검병]
[아르트][하급 창병]
하지만 이 게임은 너무나도 정교 하고, 불친절했다.
유닛마다 능력치가 달랐다. 같은 유닛이라도 어떤 유닛은 쉽게 죽었고, 어떤 유닛은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유닛은 전투에서 살아남으면 살아남을수록 강해지고 계급이 올랐다.
[이동]
[공격]
[방어]
[경계]
[휴식]
…
명령커맨드가 다양했다. 공격, 방어, 경계, 휴식, 후퇴… 심지어 탈주병이나 포로를 처단하라는 명령 도 있었다.
물론 고작 이 정도에 불과했으면 그저 다름 게임보다 그래픽 더 좋고, 명령이 세세한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게임의 유닛은 저마다 '의사'가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아르트][하급 창병]
[휴식 요청]
["더 이상 걸을 수 없습니다.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수락/거절]
[베르닝][중급 검병]
[주검 수습 요청]
["동료의 주검을 수습하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수락/거절]
[칼리아드][중급 검병]
[부상자 후송 요청]
["십인장님! 부상자를 후방으로 보내야 합니다."]
[수락/거절]
이런 식으로 말이다.
게다가 웃기는 건, 내 상급자까지 게임에 구현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라스 리 바르티아][백인장]
[방어지시]
["역적 놈들은 이 길목을 타고 침입해 올 것이다. 길목을 사수하라. 절대, 물러서지 마라."]
[좌표 A31]
이렇게 말이다.
상명하복이란 건가. 상급자의 명령은 거절옵션 조차 없다. 명령이 하달되는 동시, 지도의 해당 좌표에 하이라이트 표시된다. 저리로 이동 해 방어명령을 수행하라는 것이겠지.
꽤나 마니악한 게임이다. 그래픽 은 쓸데없이 좋고, 전투는 극한으로 사실적이며, 유닛 하나하나가 개별 의지를 가지고 있다.
[베르닝][중급 검병]
[후퇴 요청]
["더 이상 버틸 수 없습니다! 후퇴해야 합니다!"]
[수락/거절]
[게이트만][하급 검병]
[후퇴 요청]
["이대로 가다간 전멸입니다!"]
[수락/거절]
전황이 불리할 때는 '후퇴 요청'을 해온다.
하지만 나는 거절을 누른다. 상급자인 백인장 NPC가 길목을 사수 하라 했으니까.
그에 병사들이 싸운다. 싸우다, 와해된다. 병사들이 죽어 대지에 나 자빠졌다. 붉은색 피가 흐른다.
챙, 챙, 퍼적, 콰직, 그리고 비명 과 단말마.
격렬한 소음이 작은 길목에서 울렸다. 효과음이 꽤나 사실적이다.
[게이트만][하급 검병]
[전사]
[베르닝][중급 검병]
[전사]
[클리아스][중급 창병]
[전사]
…
병사들이 쓰러질 때마다 안내창 이 튀어나온다. 전사, 전사, 전사, 전사, 부상, 중상, 전사, 전사… 곧 내 병력이 모두 죽었을 때.
[게임 오바]
검은색 화면이 떠오른다.
나는 다시 새로운 게임을 시작했다.
다른 맵이 로드 되고, 새로운 병사를 지휘했다.
* * *
[칼슨][4번 십인장]
[지원 요청]
["저희만으로는 이곳을 지킬 수 없습니다! 지원군을 투입해주십시 오!"]
[수락/거절]
거절. 너희는 버린 말이다. 그곳에서 실컷 어그로를 끌어줘야 주력 이 손쉽게 파고들 수 있다.
나는 거절 버튼을 눌렀다.
["… 이곳이 내가 죽을 곳인가."]
병력이 전투에 진입. 적병의 무리가 쳐들어온다. 적의 주력이 제대로 양동에 걸린 모양. 수가 상당히 많다.
[4번 십인대]
[전멸]
열 명의 병사들이 적들에게 짓밟혀 죽는다. 모든 병사가 죽어 시야 가까맣게 물들었다. 나는 화면을 바꿔, 다른 방향에 있는 병력을 운 용했다.
4번 십인대가 어그로를 끌어준 덕분에, 내 주력이 손쉽게 적의 거점으로 침투했다. 마을을 하나 점령했다. 그곳에 민간인들이 있었다.
[아르딘][1번 십인장]
[포로 처우 결정]
["마을에서 민간인 삼십여 명을 생포했습니다. 이들을 어떻게 처분 하시겠습니까?"]
[방치/후송/해방/제거]
포박해 방치하자니 찜찜하다. 후송하자니 그럴 짬이 없다. 해방은 할 이유가 없다.
나는 제거 버튼을 눌렀다.
[아르딘][1번 십인장]
["… 알겠습니다."]
직후 병사들이 마을 광장에 모인 포로들을 향해 다가갔다. 내키지 않다는 묘사일까, 부하들의 움직임에 망설임이 가득하다.
하지만 명령에는 충실히 따라야 하는 법. 다시 한번 버튼을 눌러 재촉했다.
[제거]
곧 병사들이 검과 창을 내찔러 민간인들을 도륙했다. 사람들이 하나둘 실 끊긴 인형처럼 바닥을 굴렀다. 붉은 피가 번져 나오고, 병사들의 검 끝에서 시뻘건 액체가 뚝 뚝 흘러내린다.
모든 민간인들이 죽은걸 확인한 뒤. 다음 명령을 지시.
[이동]
내 주력이 진군한다.
* * *
계속해 게임을했다.
처음에는 십인장이었다. 열 명의 병력을 지휘했다. 반복된 전투로 전공이 늘어갔고, 백인장으로 진급했다. 열 개의 십인대를 운용했다.
백인장 다음으로는 천인장. 천인장 다음으로는 군단장. 승리하면 승리할수록 내 캐릭터 계급이 올라갔고, 지휘할 수 있는 병력이 늘어갔다.
[롬스턴 리 아르그만트][2번 천인장]
["군단장 각하. 적의 도시를 완전 장악했습니다. 이 도시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도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더해 시민들이 적 세력에 합류하면 골치 아파진다. 망설임 없이 버튼을 눌렀다.
[몰살]
[롬스턴 리 아르그만트][2번 천인장]
["각하! 이 도시에는 수천의 민간 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을 모두 죽이라는 말입니까?!"]
천인장쯤 되면 고급 장교다. 더 해 뒤에 붙어있는 성씨는 귀족혈통 이란 것일 터. 그렇기에 간간히 반발해오곤했다.
하지만 내 계급이 더 높다. 다시 한번 버튼을 누른다.
[몰살]
[롬스턴 리 아르그만트][2번 천인장]
["… 당신은 악마야. 피도 눈물도 없는 개자식! 한지훈, 나는 네 명령에 따르지 않겠다!"]
이렇게 아주 가끔, 명령에 불복 족하는 NPC가 있기도 하다. 그럴 때를 위한 커맨드가 여기 있다.
[즉결처형]
롬스턴이 병사의 창칼에 꿰뚫려 죽는다. 녀석의 후임이 지휘권을 계 승했다.
[헬리오 윈테[2번 천인장]
["…지휘권, 이양 받았습니다. 사령관 각하."]
[몰살]
["명령을, 수행, 하겠습니다…!"]
천인대 차석이 지휘권을 꿰차고 부대를 운용한다. 그들이 달려가 도시의 시민들을 학살했다.
도시가 화려하게 불타오른다.
오랜 시간 게임을했다.
많은 전투가 있었고, 계급이 올 랐으며, 다양한 이벤트가 나타났다.
[크라함][흑마법 학파 '불라바아' 의 종주]
[동맹 제의]
["제국 북부군 최고사령관, 한지훈 각하. 저희 흑마법사를 귀하의 군대에 합류시키는 것은 어떻겠습 니까? 아아… 보수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시체! 저희는 인간들의 시체와, 실험에 쓸 포로들만 있으면 됩니다. 백마법사 놈들이랑 달리 저희는 돈이 필요 없습니다. 시체만 공급해 주신다면 힘을 빌려드리겠습니다."]
[수락/거절]
바로 수락을 눌렀다.
흑마법사는 음침한 놈들이지만 강력하다. 더해 값싸다. 포로와 시체들만 공급해 준다면 놈들을 운용 할 수 있다. 백마법 전투마법사를 고용하는데 많은 비용이 드는 것을 생각한다면, 거의 거저인 수준.
[크라함][흑마법 학파 '불라바아' 의 종주]
["크히히힛! 멋진 선택이십니다! 역시 '학살'! 듣던 그대로의 위인이 야! 우리를 받아들이다니!"]
어느새 칭호가 생성되어있었다.
[학살],[냉혈]
이 그것이었다. 그저 단순한 게임이었지만, 그럼에도 기분 나빴다. 나는 다만 효율적으로 군대를 운용했을 뿐인데.
헌데 그런 내가 마음에 안 들었 던 것일까.
[갈람프 디 브리기테][황실 기사단장]
["흑마법사와 손을 잡은 배신자, 한지훈! 황실에서 축출 명령이 내려왔다. 순순히 죽어라."]
[르왈로우 테일런스 엠프리아][근위군단장]
["한지훈을 단두대 위로 올려라. 놈은 제국 전복 음모를 꾸미고 있다."]
제국 황실에서 나를 제거하려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간 쌓아온 전략 센스와, 모아둔 막대한 병력이 있었다.
나는 가진 병력을 효율적으로 운 용해 황제의 군대와 맞섰고, 여러 큰 회전 끝에 전멸시켰다. 그리고 제국 수도로 군대를 몰고 가,
[아르테니아 가이나스 비 오르페우스][제국 황제]
["… 한지훈, 너는 괴물이다. 권력에 미쳐버린 괴물!"]
[제거]
황제를 죽였다.
내 계급이 황제로 격상되었다.
이후 군대를 몰아 전 대륙을 쳐 부쉈다.
드워프의 대산맥, 엘프의 숲, 크 고작은 왕국과 공국까지. 다양한 국가를 파괴하고 짓밟았으며, 가로 막은 모든 적을 처치했다. 대지가 황폐화되고 시체가 끝없이 쌓여간다. 대량의 피가 흐르고 또 흘렀다.
그리고 내가 마지막으로 남은 도시, 대륙 북부 끝단 윈터아르비엔에 제국기를 꽂았을 때.
- 띠링!
[게임 클리어.]
게임이 끝났다.
[게임 클리어.]
[귀하의 점수를 계산하고 있습니다.]
[처치한 지성체의 수-]
[정복한 영토의 면적…]
[아군의 피해…]
[적의 피해…]
[얻은 포로…]
[얻은 재화…]
"… 끝인가?"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검은 모니터 화면에는 여러 문자 와 숫자가 줄줄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점수를 계산하는 것 같은 데, 꽤나 오래 걸리는 것 같다. 멍 하니 5분쯤 화면을 바라봤음에도 끝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점수를 보지도 않고 게임을 꺼버렸다. 이미 클리어한 게임에 미련은 없기에. 굳이 기다려가 면서 점수를 확인하고 싶진 않았다.
"진짜 끝났네."
후우! 한숨을 내쉬며 둥받이 깊숙이 몸을 묻었다.
자그마치 두 달이다. 두 달! 이 게임의 끝을 보기 위해 이번 학기 방학을 통째로 갈아 넣은 것이다.
블랙 오케스트라. 매니악 하지만, 그만큼 몰입도 있었다. 마치 내가 진짜 지휘관이 된 것처럼 군대를 움직였다. 전투가 이어지면 이어쩔 수록 상황은 복잡해졌고, 이벤트가 끊이지 않았다.
물론 게임을 클리어 하는 것은 꽤나 힘들었다. 이토록 긴 시간을 소모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나는 매일 밤을 거의 새다시피 하며 몰입했고, 결국 게임을 완전히 클리어 해냈다.
"…재밌었지."
정말, 재밌었다. 기회가 된다면 나중에 다시 해보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당장은 이미 클리어 한 게임에 미련은 없다. 나는 곧장 컴퓨터를 종료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벌써 며칠 내내 잠을 자지 않고 게임에 몰두했다. 지금은 수면을 취 해야 할 때.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수마 가 덮쳐온다.
[정산이 완료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귀하의 시나리오가 최고점을 기록하였습니다.]
[시나리오가 채택되었습니다.]
잠결에, 어떤 환청을 들은 것 같다.
2화.
눈을 떴다. 그러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암흑색 공간.
천천히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 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칠흑의 장막만이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다.
여기는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내가 멍하니 서 있는 그때.
- 띠링!
어떤 소음이 울렸다. 경쾌하고도 맑은 알림음이었다.
고개를 돌려 소음이 들려왔던 곳을 바라봤다.
그러자 볼 수 있었다.
[블랙 오케스트라]
검은색 공간 속, 오연히 떠올라 있는 하얀색 문양.
블랙 오케스트라. 익숙한 게임의 로고가 환하게 빛나며 어둠을 밝히고 있다.
"블랙 오케스트라…."
나는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천천히 걸어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로고가 서서히 사라지고, 새로운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새로운 시나리오를 시작합니다.]
[유저의 정보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뭐야 이건?"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그만큼 지금 이상황은 다소 생뚱맞았다.
게임을 완전히 끝내고, 잠자리에 들었던 것까지는 기억난다. 하지만 난데없이 검은색 공간 속 홀로그램 이라.
도대체 무슨 상황일까.
멍하니 홀로그램을 바라보고 있자니, 표시되고 있는 화면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유저의 정보를 확인했습니다.]
[유저 ID : 한지훈]
[칭호 : 학살]
[칭호 : 냉혈]
[칭호 : 정복자]
[칭호 : 제국 황제]
[업적 : (잠겨있음)]
[스킬 : (잠겨있음)]
홀로그램에 떠오른 건 다름 아닌 내 캐릭터의 정보였다.
ID 한지훈. 그리고 떠올라있는 칭호들까지. 왜인지 업적과 스킬란 은 표시되지 않았지만, 분명 게임블랙 오케스트라 속 내 캐릭터의 정보였다.
이쯤 돼서 나는 마침내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거 꿈이네."
지금 이곳은 꿈속임이 분명했다. 그야 어둑한 공간에 홀로그램이 떠 올라있고, 홀로그램 속에는 내가 했 던 게임 속 캐릭터의 정보가 자리 해있다니.
꿈이라고밖에 설명이 안된다.
얼마나 게임에 미쳐있었으면 이런 꿈까지 꿀까.
나는 이 개꿈에서 깨어나기 위해 뺨을 꼬집었다.
[유저의 점수가 너무 높습니다.]
[시나리오 난이도를 조율합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뺨이 아릿하게 아프다. 하지만 꿈에서 깨어나지는 않았다.
양손으로 강하게 뺨을 쳐 보았다. 짝! 하는 소리가 공허한 공간을 울렸다.
너무 아프다.
[적정 난이도를 찾았습니다!]
[적정 난이도 : 악몽(Nightmare)]
[난이도를 변경합니까?]
[수락/거절]
하지만 그럼에도 꿈에서 깨어나지 않는다. 강하게 친 뺨이 발갛게 부어오르는데도. 아직 내 의식은 또 렷하다.
마치 꿈이 아니기라도 하다는 듯.
고개를 들어 올려 홀로그램을 바라봤다.
[난이도를 변경합니까?]
[수락/거절]
여전히 떠올라있다.
난이도를 '악몽 (Nightmare)'으로 변경하냐는 물음이 자리해있는 홀로그램.
혀를 차며 손을 홀로그램으로 가 져다 댔다.
"별 이상한 꿈이 다 있어."
나는 홀로그램의 '거절' 버튼을 터치했다.
그저 직감이었다. 섣불리 저기 '수락' 버튼을 누른다면 뭔가 잘못 될 것 같은 직감.
봐라, 난이도 악몽이라 하지 않은가. 불길한 냄새가 풀풀 난다. 아무리 꿈속이라 한들 너무 꺼림칙했다.
하지만 내 행동은 헛짓거리였다.
[거절할 수 없습니다.]
[난이도가 변경됩니다.]
[적용 난이도 : 악몽(Nightmare)]
"뭐야?"
이럴 거면 왜 물어본 걸까.
내가 표정을 찌푸리는 그때.
-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알림음이 연속되며, 홀로그램 속 문자가 갱신되어갔다.
[기존 이벤트 로그가 삭제됩니다.]
[새로운 이벤트 로그를 작성합니다.]
[전장의 안개가 증가합니다.]
[지형 정보가 변경됩니다.]
[오브젝트의 배치가 변경됩니다.]
[시나리오 불확실성이 증가합니다.]
기다란 텍스트들이 홀로그램을 가득 채워간다. 띠링거리는 소리가 계속해 울려대며 청각을 어지럽혔다.
나는 그 꼬라지를 멍하니 바라봤다.
-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차가운 알림음이 끝없이 이어졌다. 문자열이 계속해 갱신되어간다.
[적대 NPC의 잠재력이 상승합니다.]
[우호 NPC의 잠재력이 하락합니다.]
[유저 보정이 하향 조정됩니다.]
[대적자 NPC 보정이 상향 조정 됩니다.]
[시나리오 무작위 이벤트를 생성 합니다.]
[시스템 관리자의 시나리오 개입을 허용합니다.]
쏟아지는 문자열은 하나같이 불길한 내용들.
나는 그 내용들에 압도되어 , 멍 하니 중얼거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직감했다.
무언가 끔찍한 일에 휘말려들었다. 그것도 내가 감히 항거할 수 없는, 어떤 초월적인 존재에 의해 서.
서늘한 감각이 뒷목을 간지럽힌다.
- 띠링!
[시나리오를 시작합니다.]
[적용 난이도 : 악몽(Nightmare)]
[깨어날 수 없는 악몽.]
[시나리오-챕터 -1]
마지막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내 시야가 천천히 가라앉아갔다.
나는 정신을 잃었다.
"… 십인장님! 십인장님!"
누군가가 내 몸을 거칠게 흔들었다. 그에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흙바닥.
나는 지면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퉤! 입안에 들어온 흙을 뱉고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자 방금 전 까지 나를 뒤흔들고 있던 이를 볼 수 있었다.
"십인장님! 어서 일어나십시오!"
철제 투구와 경갑을 착용한, 기 골이 장대한 병사였다.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자 내 시야 한 켠에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카일][상급 검병]
"…카일?"
왠지 모르게 익숙한 이름인데.
내가 중얼거림과 동시, 녀석은 나를 확 잡아 일으켜 세웠다.
비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띵한 어지럼증이 두개골을 뒤 흔들었다.
"으윽…"
절로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몸 곳곳이 아프다. 팔다리에서 저릿한 고통이 올라왔다. 머리는 무 언가에 얻어맞기라도 한 듯 웅웅 울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일까.
내 몸을 일으켜 세운 병사, 카일 이외쳐왔다.
"적의 추격이 너무 거셉니다! 십 인장님, 후퇴해야 합니다!"
나는 잠시 휘청거린 뒤 곧바로 섰다. 직후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고 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 뭐야?!"
시체들이 이곳저곳에 널브러져 지면을 피로 적시고 있다. 비릿하고 도 역한 혈향이 후각을 자극했다.
속에서 메스꺼운 감각이 올라오 려 한다. 나는 가슴팍을 부여잡고, 구역질을 억누르며 중얼거렸다.
"뭐야, 이게 도대체 무슨…."
방금 전 어떤 꿈을 꾸었다. 검은색 공간에서, 난생 처음 보는 홀로그램들이 어지럽게 떠오르는 꿈.
그리고 꿈에서 깨어나 보니 주위에 시신과 피가 낭자해있다.
아직도 그이상한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쏟아지려는 구역질을 억누르며, 천천히 발자국을 옮겨보았다. 그러자.
- 철그럭.
하는 쇳소리가 일었다.
고개를 내려 소리가 인 허리춤을 바라봤다. 내 허리 혁대에는 웬 장검 하나가 메어져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하지만 왠지 모르게 익숙하게 느껴지는 장검.
그것을 뽑아들었다.
스르릉 소리가 시리다.
[제국군 보급 장검]
염병할 홀로그램.
"십인장님! 추격대가 다시 접근 중입니다!"
"수는 약 삼십… 십인대 세 개 규모입니다. 저희 전력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교전한다면 전멸입니다! 도망쳐 야 합니다!"
병사들이 다급한 목소리로 알려 왔다. 시선을 돌려 그들이 주시하고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그러자 보였다.
저기 까마득하게 먼 숲, 자잘한 수풀을 헤치며 수십의 병사가 이쪽 으로 달려오고 있다. 그들이 들고 있는 검과 창이 햇빛을 반사해 반 짝였다.
"십인장님!"
카일이 나를 바라보며 외쳤다. 녀석의 눈동자에는 공포가 깊숙이 자리해 일렁이고 있다.
나는 녀석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십인장…."
카일은 분명 나를 십인장이라고 불렀다.
십인장. 열 명의 병사를 지휘하는 일선 지휘관. 현실의 내가 결코 들을 리 없을 호칭.
곧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설마. 게임 속인가."
블랙 오케스트라. 근 두 달 동안 내가 매달렸던 게임.
지금 이상황은 그 게임 속과 너무나도 비슷했다.
주위에서 있는 병사들의 복장은 분명 제국군의 그것. 그리고 저 멀리서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놈들은 공국군 병사였다.
그 말인 즉, 이곳은 제국 북부 접경지대라는 소리.
내가 그리 깨닫는 동시.
- 띠링!
알림음이 머릿속을 울렸다.
[퀘스트 시스템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메인 퀘스트]
[시나리오를 완성하라.]
[서브 퀘스트]
[본대로 퇴각해 척후결과를 전달하라.]
[도움말 : '퀘스트창' 명령어를 통해 임무 현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퀘스트. 게임이랑 똑같다.
정말 이곳이 게임 속 세상이란 말인가?
"십인장님! 어서 명령을!"
멍하니 홀로그램을 바라보고 있는데, 카일이 악을 내질렀다. 그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는 전방을 주시했다.
공국의 추격대가 이리로 달려오고 있다. 놈들은 내가 멍 때리고 있는 동안에도 계속해 접근해온 상황. 그리 머지않아 이곳까지 당도할 것이고, 곧 접전이 일게 될 터.
적들이 들고 있는 창 끝 반사광 이날카롭다.
그것을 보며 생각한다.
'저 창에 찔려 죽으면 꿈에서 깨 어날까.'
저 창에 꿰뚫리면 나는 죽고, 이 꿈속에서 깨어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이곳이 꿈속이라면 말이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꿈이라기엔 너무 이상해.'
- 띠링!
['시스템 : 유저 정보'가 활성화 되었습니다!]
[유저 정보를 불러옵니다]
알림음이 울리고,
[한지훈][척후조 십인장]
[스킬 : 십인대 전투지휘술]
[스킬 : 제국 검술(입문)]
[엑스트라 스킬 : 집중]
[근력 4]
[민첩 2]
[내구 3]
[체력 3]
[마나 0]
(남은 포인트는 10pt 입니다.)
[도움말 : 할당 포인트로는 스킬 이나 능력치를 상향시킬 수 있습니다.]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3화.
나는 멍하니 홀로그램을 바라봤다.
[한지훈][척후조 십인장]
[스킬 : 십인대 전투지휘술]
[스킬 : 제국 검술(입문)]
[엑스트라 스킬 : 집중]
[근력 4]
[민첩 2]
[내구 3]
[체력 3]
[마나 0]
(남은 포인트는 10pt 입니다.)
[도움말 : 할당 포인트로는 스킬 이나 능력치를 상향시킬 수 있습니다.]
꽤나 익숙한 형식으로 정리되어 있는 홀로그램 창. 그것을 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내 정보…?"
안내창에 표시되어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게임 속 내 캐릭터의 정보였다.
가장 위에 표시되어있는 것은 나의이름 한지훈. 옆에 있는 것은 계급과 직책이었고, 그 아래로는 스킬과 스펙이 표시되어있다.
허,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가지고 이상황을 타개하 라는 건가?'
막 적과 조우하자마자 이런 홀로그램이 떠오르다니. 마치 이걸 활용 해 살아남으란 것만 같다.
내가 멍하니 홀로그램을 바라보고 있자니,
"십인장님! 어서 퇴각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카일이 재차 악을 질러왔다. 나는 녀석을 바라봤다.
카일은 접근해오는 공국 병사들을 바라보며 겁에 질려있었다.
하기야 여섯이서 삼십을 상대해 야 하는 상황이다. 자신 없을 수밖 에.
접근해오는 공국 병사들을 바라 봤다. 놈들은 내가 멍 때리고 있는 동안에도 꾸준히 접근해와, 이제는 얼굴을 판별할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와 있다.
더 이상 시간이 없다.
나는 곧장 포인트를 분배했다.
"제국 검술 상향."
- 띠링!
['스킬 : 제국 검술(입문)'을 상향 합니다]
[상향에는 10pt가 필요합니다.]
[유저의 능력치가 모자라 스킬의 모든 성능을 이끌어 낼 수 없습니다. 그래도 상향하시겠습니까?]
[수락/거절]
"수락."
내가 포인트를 투자한 것은 다름 아닌 제국 검술 스킬.
능력치가 모자라 제 성능을 낼 수 없다는 경고가 나왔지만, 그럼에 도 수락했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다른 능력치가 높더라도, 검 자체를 다를 줄 모르니. 검술에 투자 해야 한다.'
기본 능력치. 예를 들어 근력이나 민첩에 투자한다면 더 나은 움직임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검을 휘둘러본 적이 없다. 아니, 애초 현실의 내 몸을 움직여 누군가와 싸워본 경험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런 내가 검으로 적을 벨 수 있을까?
당연히. 힘들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검술을 상향시켰다.
- 띠링!
['스킬 : 제국 검술(입문)' 이 '스킬 : 제국 검술(하급)'으로 상향되 었습니다!]
직후 변화가 일었다.
머릿속에 지식이 흘러들어왔다.
어떻게 검을 휘둘러야 하는지, 어떤 동작으로 움직여야 하는지.
마치 하루 종일 검을 휘둘렀던 검사처럼,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시선을 내려 손에 쥔 검을 바라 봤다.
[제국군 보급 장검]
검을 쥔 손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힘을 빼고,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자세를 바꿨다. 허리를 숙이고 시선을 낮췄다. 다리의 간격을 벌렸다.
검을 쥔 손을 약간 뒤로. 다리는 언제든지 박찰 수 있게 힘을 주고, 등과 어깨를 바싹 긴장시킨다.
"… 십인장님?"
내 변화를 눈치챈 것일까.
카일이, 그리고 다른 병사들이 나를 보고 경악한 눈을했다.
그야 당연한 반응이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후퇴해야 할 지금 이때, 마치 전투라도 하려는 듯 기세를 끌어올리고 있으니 말이다.
카일이 믿기지 않다는 듯 물었다.
"설마 싸우시려는 겁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들의 얼굴에 자리한 경악이 더욱 짙어진다.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저희는 놈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적병이 삼십이란 말입니다! 후 퇴해야 합니다!"
병사들의 안색이 창백해져 갔다.
후퇴하지 않고 맞서 싸운다니 두 려워진 모양.
하지만 물러설 순 없다.
"후퇴하면 죽을 뿐이다."
시선을 돌려 가장 커다란 덩치를 지닌 병사를 바라봤다.
카일. 처음 봤을 때 왠지 모르게 익숙했던 이름.
드디어 떠올렸다.
내가 과거 이미션을 어떻게 클 리어 했었는지, 기억해 낸 것이다.
사실, 클리어 방법은 너무나 간 단했다.
'단순 후퇴였었지.'
병력을 무작정 뒤로, 뒤로 물린 다면 이미션을 클리어 할 수 있다. 미션의 목표는 '생존"그리고 '귀환'이지, 전투의 승리가 아니니까.
즉 단 한 명이라도 살아남아 제국군 본대에 도착한다면 미션을 클 리어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과거 게임처럼 퇴각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후퇴한다면. 카일, 너 혼자만 살아남고 다 죽는다."
게임에서는 체력이 좋은 카일 혼자만 살아남고, 나머지 병사들은 모두 죽어버렸었다.
물론 이것이 정말 모니터로 바라 보는 게임이라면 상관없는 일이었다. 카일이든, 혹은 다른 병사든. 한 명만 살아남아 본대에 도착한다 면 미션을 클리어 하게 되니까.
하지만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나다. 내가 살아서 이 땅을 밟고 있다.
카일이 살아남아 미션을 클리어 한다 해도, 내가 죽어서는 안된다.
나는 다시 한번 내 능력치를 상 기했다.
[민첩 2]
[체력 3]
개쓰레기 같은 능력치다. 만약 10포인트를 투자해 상향한다 한들, 이 정도 능력치로는 절대 제국군 본 대까지 후퇴할 수 없다. 그전에 지쳐 쓰러지거나, 혹은 추격대에게 따라잡혀 죽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전투를 선택했다. 그쪽이 생존할 가능성이 조금이라 도 남아있으므로.
다시금 목소리에 힘을 실어 명령했다.
"전원, 전투 준비!"
"… 망할!"
외치며 검을 굳세게 쥐었다. 병사들 또한 가진 병장기를 하나둘 들어올렸다.
이쯤 되면 병사들이 탈영해 도망 칠 만도 한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과연 기강이 잡힌 제국군인 덕이라 할까.
그렇게 우리가 전투를 막 준비하고 있을 때.
"으아아아아아!"
지척까지 접근해온 공국 병사들 이달려들었다.
놈들이 시퍼런 창날을 이쪽으로 찔러왔다. 나는 검으로 놈의 창날을 비껴 쳤다.
- 키기기직!
검날이 창대를 긁어냈다. 나무부 스러기가 튀겨 나오고, 둔탁한 소음 이 울렸다.
가까스로 나를 노리는 창격의 궤 도를 틀어낼 수 있었다.
결코 의식해서 한 행동이 아니었다. 하지만 상향된 검술 스킬이, 이렇게 움직여야만 한다고 알려주었다.
스킬의 인도를 따라 검을 놀렸다.
곧장 검의 진로를 회전, 그대로 병사의 복부에 박아 넣었다.
푸욱.
물컹한 장기를 가르고 헤집는다. 그 질척하고도 불쾌한 감각이 손잡이를 타고 전해졌다.
"커허…!"
적병이 눈을 크게 뜨고 휘청이더 니, 몸을 축 늘어뜨렸다. 녀석의 몸 뚱이가 지면으로 털썩 쓰러진다.
검을 놈의 복부에서 빼냈다. 검 날에는 붉은 핏물이 질척하게 묻어 있다.
"망할…."
엿같은 기분이다.
다시금 확신할 수 있다. 이곳은 꿈이 아니다. 살을 가르고 찌르는 느낌이 너무나도 리얼하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사람을 찔렀 음에도, 죄악감보다는 불쾌감이 강 하게 느껴졌다.
내 의식 한 켠에서는, 아직도 이곳을 꿈속이라 생각하는 것일까.
후욱.
숨을 한껏 내쉬며 다시 검을 휘둘렀다. 스킬이 내 움직임을 보조한다.
서걱!
달려오던 적병의 목이 베었다. 녀석의 목덜미에서 핏물이 확 뿜어 졌다. 그 질척한 붉은 액체가 내 얼굴에 후드득 뿌려진다.
역겨워 구역질이 나온다.
"저놈부터 죽여라!"
적병 둘을 처치하자, 내가 눈에 뜨인 것일까. 공국 병사 셋이서 한번에 나를 향해 돌진해왔다. 시퍼런 창날 세 줄기가 이쪽을 노리고 찔 러 들어온다.
나는 이를 악물며 바닥으로 몸을 던졌다. 방금 전까지 내 머리가 있던 공간을, 창날이 스쳐 지나갔다. 머리카락이 서걱 하고 잘려나갔다.
바닥을 구르며 검을 횡으로 그었다.
콰직.
적병 하나의 종아리를 깊게 베었다. 힘이 모자라 뼈까지 절단할 수는 없었지만. 무력화시키기엔 충분했다.
"끄으으!"
종아리를 베인 녀석이 신음하며 주저앉았다. 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서려했다. 허나 그렇지 못했다.
"죽어어어어!"
또 다른 적병이 검을 내리그었다. 검날이 내 머리를 노리고 내려 쳐진다.
피할 수 없다. 죽음의 위기에, 시야가 천천히 느려져갔다.
최후를 직감했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렇게 죽는 건가.
"십인장님!"
그때 누군가가 난입했다. 다름 아닌 예의 커다?덩치를 가진 병사, 카일이었다.
쾅!
카일이 어깨로 적병을 들이받았다. 공국 병사가 뒤로 튕겨져 나자 빠졌다. 카일은 바닥을 구르는 놈의 목덜미에 검을 박아 넣었다.
퍼억! 피가 튀고, 낮은 비명이 울렸다.
적병을 처치한 카일이 나를 단숨에 잡아 일으켜 세웠다.
"십인장님! 조심하십시오!"
"… 고맙다."
휘청. 녀석의 손아귀에 이끌려 다시금 바로 섰다.
힘 한번 무식하게 센 놈이다. 한 손으로 나를 이렇게 일으켜 세우다 니.
가쁜 숨을 고르며 지면에 떨어진 검을 다시 쥐어 들었다. 검날은 적의 피로 범벅되어있다.
검을 쥔 손이 떨린다.
'무섭다.'
방금 죽을 뻔했다.
현실에 있을 적, 나는 보잘것없는 학식충이었다. 게임하는 것을 좋아하고, 공부에 질색하던.
하지만 지금 이상황은 뭐란 말 인가.
게임 속에서나 봐왔던 중세 군인 들이, 병장기를 꼬나 쥐고 나를 죽 이기 위해 달려들고 있다. 그리고 나는 온 힘을 다해 놈들을 죽이고 말이다.
분명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평소 와 같은 일상이었는데 .
어째서 나는 검을 휘두르고 있는 것인가.
두려움이 척수를 타고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때 문득.
"스무 명만 더 죽이면 됩니다."
카일의 말이 들렸다. 그에 나는 상념에서 빠져나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에는 십여 구의 시체가 나자 빠져 있었다. 모두 공국 병사들의 시체였다.
어느새 나와 병사들은 공국 병사 십여 명을 처치했던 것이다.
고개를 치켜들었다.
'설마, 승산이 있는 건가.'
그 잠깐 사이 나는 두 명의 병사 를 죽였고, 한 명의 병사를 무력화 시켰다. 다른 병사들 또한 도합 일곱의 적을 눕혔고 말이다.
순식간에 적의 삼분지 일을 제압 한 상황.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고작 여섯이서 삼십여 명을 막고 있다니.
제아무리 군율과 기강이 튼튼한 제국군이라 해도, 그리고 상대한 적 이 조잡한 공국군이라 한들.
수적 차이를 생각해본다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조금만 더 노력한다면.'
살아서 후퇴할 수 있다.
사라져가던 희망이 다시 생겨나 기 시작했다.
"후우우우…."
심호흡하며 검을 들어올렸다.
검을 잡아든 손아귀가, 그리고 팔과 어깨, 등허리까지.
온 근육이 욱신거렸다.
이런 장검 따위 쥐어본 적도 없던 내가 온 힘을 다해 휘둘러댔다.
고작 몇 번의 검격이라 한들 몸에 큰 부담이 될 수밖에.
허나 그럼에도,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나는 살아남을 것이다. 반드시.'
처음의 두려움과 공포는 어느새 희미해졌다. 지금 내 가슴을, 그리고 머릿속을 채우는 것은 오직 전투의 흥분과 생존의 열망이었다.
이를 갈았다.
어째서 이 세상에 떨어진 건지, 이곳이 정말 꿈인지 현실인지, 그리고 내가 왜 이런 꼬라지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죽고 싶지 않다. 살아남을 것이다.
무슨 짓을 해서든.
"아아아아아?!"
공국 병사 다수가 함성을 내지르 며 이쪽으로 돌진해왔다. 조잡한 검을 들고 있는 이들이었다. 놈들의 검끝이 향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나.
여러 줄기의 검광과 창격이 쇄도 해온다. 나는 몸을 뒤로 빼냈다. 시 퍼런 창날이 아슬아슬하게 스쳐지 나간다.
핑.
"크윽!"
뺨에 시큰한 통각이 올라왔다. 방금 전 창격에 스쳐 베인 것 같다.
하지만 치명상은 아니다. 주춤거 리는 자세를 추스르고 자리를 박찼다. 내 몸이 앞으로 돌진한다. 어느새 나는 적 창병의 간격 안으로 들어와 있다.
악에 차 외쳤다.
"뒈져!"
퍼억!
돌진을 살려, 내 뺨을 벤 놈의 겨드랑이에 검날을 박아 넣었다. 놈 이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트린다. 그 틈에 검을 회수해, 다시 찔러 넣었다.
쿠드득! 적병의 가슴팍에 내 검 신이 깊숙이 박혀 들어갔다.
"끄르으으!"
놈의 입가에서 검붉은 피거품이 울컥 올라왔다.
검을 비틀어 빼냈다 날이 갈비 뼈를 긁는 것이 손잡이를 타고 느껴졌다.
검을 완전히 빼내자 적병이 허물 어지듯 쓰러졌다.
파앙!
내가 적 하나를 처치하기 무섭게, 다음 적이 돌진해왔다. 놈이 달 려오며 창격을 내찔렀다. 나는 몸을 기울여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하지만 이번에도 완전히 피해내 진 못한 것인가. 팔뚝에 얕은 자상 이 아로새겨진다.
이를 악물며 검을 횡으로 그었다. 검날이 적의 목을 긁었다.
핏줄기가 치솟았다.
"커, 헉…!"
녀석은 달려오던 기세 그대로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다른 적들이 재차 돌진해온다. 나는 또다시 기세를 끌어올리고, 검을 휘둘렀다.
살기 위해서.
그때였다.
- 띠링!
[각성!]
['엑스트라 스킬 : 집중'을 각성 했습니다!]
['엑스트라 스킬 : 집중' 이 활성화 됩니다.]
무언가 안내창이 떠올랐다.
4화.
- 띠링!
[엑스트라 스킬 : 집중' 이 활성화 됩니다.]
무언가 안내창이 떠올랐다.
하지만 무시한다.
나는 눈앞의 적을 처치하는 것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무아지경에 빠져 검을 휘둘렀다.
아드레날린이 뿜어지고, 심장이 맥동한다. 시야가 좁아졌다. 호흡이 가빠졌다.
그리고, 통각이 사라져갔다.
아릿한 뺨의 상처도, 팔뚝에 그 어진 자상도.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전투에 필요 없는 감각을 모조리 소거해 버린 것만 같다.
익숙한 현상이었다.
과거, 게임에 몰입할 때마다 느 꼈던 감각. 다른 잡생각이 사라지고, 눈앞에 보이던 모니터와 스피커에 온 신경이 쏠리던 그 감각.
그것이 검을 휘두르는 지금 느껴 졌다.
- 서걱!
내 검이 푸르스름한 궤적을 이루 며 적의 목을 그었다. 적병이 목에서 핏줄기를 뿜으며 휘청였다.
녀석을 발로 차 쓰러뜨리며, 검을 고쳐 잡았다.
"다 뒈져버려라!"
악바리처럼 외치며 앞으로 뛰쳐 나갔다.
쏟아져 들어오는 적의 검로와 창격의 궤도를 비틀고, 피하며. 돌진 해 검을 내찔렀다. 푸르스름한 검광 이번뜩이고, 검의 첨단이 공국 병사의 모가지를 꿰뚫는다.
"커헉…!"
공국 병사가 목을 부여잡으며 쓰 러진다. 놈을 지나쳐, 계속해 검을 휘둘렀다.
이쪽으로 쇄도해오는 창격을 몸을 숙여 피했다. 적병의 간격 안으로 파고들어 적병의 옆구리를 베었다. 연약한 살이 터져나가고, 질척 한 붉은 액체가 뿜어진다.
심장이 타오른다. 전신의 근육이 맥동한다. 격렬한 흥분이 전신을 달 궜다.
"오오오오오!"
뜨겁게 덥혀진 폐부의 공기를 내 뱉으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검술 스킬이 나를 보조했다. 집중 스킬이 내 한계 그이상의 힘을 발하도록 도왔다.
그리고, 나는 시간이 점차 느려 지는 것만 같은 감각을 느꼈다.
그 덕분에.
'보인다!'
내게 쇄도해오는 검날과 창격이 선명하게 인식되었다.
그 모든 공격을 피하고 흘려보냈다. 간간히 놈들의 참격이 내 피부 를 스쳐지나가긴 했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팽팽히 당겨진 감각 이모든 고통을 소거해버렸다.
"괴물 놈!"
"막아! 놈을 막아!"
내 기세에 위축된 걸까. 공국 병사들이 질색하며 뒤로 물러났다. 나는 녀석들을 놓치지 않고 몰아붙였다.
달려나가 녀석들을 도륙했다. 푸 르스름한 검광이 시야에 계속해 점멸한다.
"으아아아아아--!"
함성을 내지르며 미친 듯이 검을 휘둘러 댔다.
감각이 한없이 예민해져 날카롭 게 벼려졌다. 적의 움직임 하나하나 가 망막에 박혔다. 여태껏 경험 해 본 적 없는 흥분과 긴장이 두뇌를 들쑤셨다.
"살려줘…!"
검을 휘두르는 와중 적의 얼굴을 보았다. 놈들의 눈동자 속에는 두려움의 감정이 깊숙이 아로새겨져있다.
하지만 내 검날은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저 불편한 얼굴을 치워 버리기라도 하겠다는 듯, 더욱 거세 고 날카롭게 허점을 찔러 들어갔다. 붉은색 피가 치솟고, 비릿한 혈향이 후각을 자극했다.
그렇게 얼마나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을까.
"허억, 헉!"
뜨거운 숨을 내뿜으며 주위를 둘 러봤다.
나는 내지척에 더 이상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검을 지면에 박고, 몸을 기대 숨을 골랐다.
그때였다.
"십인장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나를 부른 이를 바라 보았다.
역시나 카일을 비롯한 부하들이었다. 녀석들이 거친 숨을 헐떡이 며, 내 바로 뒤에 도열해 있다. 방금 전 내 돌진에 맞춰 따라온 듯했다.
"무모하셨습니다. 갑자기 돌진이 라니!"
푸욱. 카일이 바닥에 나자빠져 경련하고 있는 공국 병사의 숨을 끊으며 그리 말했다.
허나 나를 나무라는 말과 달리, 녀석은 웃고 있었다.
"하지만 대단하셨습니다."
카일이 검을 붕 휘둘러 검날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그러곤 시선을 앞으로 던지며 알린다.
"이제 열 명밖에 안 남았습니다. 이 정도면, 할 만합니다."
녀석의 말에 나 또한 시선을 앞 으로 던졌다. 그러자 보였다.
내가 서 있는 이곳에서 조금 떨 어진 곳에서, 공국 병사들이 주춤주 춤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그러다 한 공국 병사와 눈이 마주쳤다. 그 공국 병사의 눈동자 속 에는 공포가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저놈이 적 지휘관인 듯합니다 만."
카일의 말에, 놈의 모습을 자세히 살폈다.
다른 공국 놈들과 달리 간소한 경갑이나마 갖춰 입고 있는 모습. 그리고 투구와 가슴팍에 아로새겨 진 계급장까지.
확실히. 적의 지휘관처럼 보이는 놈이다.
나는 고개를 들어올리고, 다시금 검을 쥐어 올렸다.
'저놈만 죽이면.'
확신은 아니다. 단순한 추측.
'살아날 수 있다.'
허나 신빙성 있는 추측이다.
적은 가진 병력의 삼분지 이를 잃었다. 그 상황에서 지휘관마저 처 치한다면, 놈들은 전투를 포기할 수 밖에 없을 터.
그러니,
"죽여버린다."
검의 그립을 굳게 잡았다. 검날을 적 지휘관에게 겨눴다.
이를 갈며 투지를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적 지휘관을 부릅뜬 눈으로 노려봤다.
반드시 죽여버리겠다는 듯이.
"으윽…!"
내 기세에 눌린 것일까. 공국 지휘관이 흠칫 몸을 떨었다.
하지만 차마 물러서지는 못하고 있다. 놈은 일선 전투부대의 지휘관. 녀석이 몸을 내빼면 단숨에 사기가 곤두박질친다.
나는 천천히,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벅.
그러자 적 지휘관이 한 걸음 뒷 걸음질 친다. 녀석의 얼굴에 있는 공포가 더더욱 진해진다.
"카일."
"네. 십인장님."
나직이 내 옆의 병사, 카일을 불 렀다. 그가 고개를 주억이며 응답한다.
나는 지시했다.
"마지막 돌진이다. 준비해."
끄덕. 카일이 재차 고개를 주억 여 수긍하고는, 검을 들어올렸다.
이번이 마지막 돌진이다. 나는 곧장 적 지휘관에게 돌격해, 놈을 베어버릴 것이다.
숨을 골랐다. 그리고 전신의 근육을 긴장시켰다. 감각을 날카롭게 벼렸다.
투지와 흥분이 전신에 휘몰아쳤다.
현실의 유약했던 내가 결코 경험 해본 적 없는 감각.
기분이 고조된다.
나는 입을 벌려,
"오오오오오오오!"
함성을 내질렀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용솟 음친다. 그와 동시, 나와 제국군이 앞으로 돌진했다.
땅을 박차고 달린다. 내 시선이 향하는 곳은 오직 하나, 공국군 삼십인장.
녀석을 노리고, 돌진했다.
"크윽!"
공국 삼십인장 놈이 급히 검을 들어올렸다. 내 돌진에 반격하려는 듯한 행동.
소용없다. 놈은 죽을 운명이다.
순식간에 달려가 놈의 지척에 달했다. 녀석이 검격을 내찔러왔다. 날카로운 검의 첨단이 내 얼굴을 노리고 쇄도해온다.
나는 검을 빙글, 휘둘러 녀석의 검을 쳐냈다.
채앵!
청아하게 울리는 쇳소리. 직후, 팔을 당겨 검을 회수했다. 놈은 충격에 자세가 흐트러진 상태.
주저 없이 검날을 찔러넣었다.
- 피잉!
곧게 직선으로 나아가는 내 검 로. 시퍼런 검광이 번뜩인다.
퍼억.
검날이 녀석의 투구 아래, 드러 난 목을 정확히 꿰뚫었다.
"컥…."
놈이 폐부의 공기를 힘없이 내뱉었다. 나는 검을 아래로 내려박았다. 꿰뚫린 녀석의 목에서 내 검이 빠져나온다.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겼다."
나는 고개를 돌려, 전장의 다른 이들을 살폈다.
"적 지휘관이 죽었다!"
"몰아붙여라! 공국 놈들을 모조리 죽여버려라!"
제국 병사들 또한, 공국 병사들을 하나둘 죽이고 있었다.
그들이 검격을 가할 때마다 공국 병사가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참 격 한번에 핏물이 치솟았고, 창격 하나에 적병 하나가 꿰뚫렸다.
분명 수적 열세였을 제국군. 허 나 그들은 공국 병사들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이유야 다름이 아니었다.
"지휘관님께서 전사하셨다!"
"맙소사…!"
공국 병사들은 이미 상당한 손실을 입은 상태. 더해 지휘관마저 방금 전 내게 죽어버렸다.
그 말인 즉,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졌다는 이야기.
그리고 제대로 된 훈련조차 받지 않은 놈들에게 사기의 부재는, 몹시 치명적이었다.
"이길 수 없다! 도망쳐! 도망쳐 라!"
"후퇴해!"
"으아아악!"
한 공국 병사가 전투를 포기하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 병사가 시발점이었다.
전투를 진행하던 공국 병사들이 모두 우르르 뒤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검이나 창을 내던지고 달려가는 이들도 있었다.
카일이 도망치는 공국 병사들을 바라보며 비웃었다.
"아무리 지휘관이 전사했다곤 하지만, 정말 오합지졸입니다. 하기야 절반 이상 죽어버렸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래를 내려다 봤다.
내 발밑에는 다른 공국 병사들과 달리, 경갑을 제대로 갖춰 입은 군인이 하나 죽어 나자빠져 있었다. 방금 전 죽인 놈들의 지휘관이다.
카일이 바닥에 쓰러져있는 적 지휘관의 철제 투구를 주워들어 내게 내밀었다.
"십인장님의 전공입니다."
카일이 내미는 투구를 받아들었다. 투구에는 피가 질척하게 묻어있었다.
이것으로 전공을 증명하라는 것 이겠지.
나는 투구를 대충 옆구리에 끼워 들었다.
"십인장님. 이제 어떻게 합니까? 도망친 공국 놈들을 추격합니까?"
카일이 검을 고쳐 잡으며 내게 물었다. 녀석의 얼굴 표정을 바라보건데, 아무래도 잔당을 추격해 마저 죽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피식. 절로 허탈한 웃음이 흘러 나왔다.
아까만 해도 공포에 질려 벌벌 떨던 자식이, 지금은 은근히 전투를 바라고 있다.
그만큼 자신도 공훈을 세우고 싶다는 것이겠지. 내가 싸우는 것을 보았을 테니.
더해 적은 무기마저 내던지고 도망치는 상황이다. 승기를 완전히 잡았다. 추격해 마저 섬멸해도 무리는 없으리라.
하지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추격은 하지 않는다."
"어째서입니까? 적은 고작 열 명 이 채 남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놈 들의 사기마저 바닥이지요. 지금 놈 들을 추격한다면 완전섬멸 할 수 있습니다만."
"힘들어. 내가 ."
나는 그리 말하고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체력이 넘치는 카일과 달리. 이 게 내 한계였다.
전투를 끝낸 뒤. 나와 병사들은 인근 숲으로 이동해 휴식을 취했다.
사실 지금 당장이라도 안전한 본 대로 향하고 싶었지만. 그렇기엔 전투에 소비한 체력이 너무 막중했다. 휴식이 절실하다.
"새로운 추격은?"
"없습니다. 공국 놈들은 추격을 완전히 포기한 것 같습니다."
"좋아."
후방 정찰을 다녀왔던 병사의 보고. 그에 나는 푹 한숨을 내쉬고는,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전투의 흥분이 가라앉아가는 것 일까.
심장이 터질 것 같이 아프다.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 힘들다. 몸 이곳저곳에 아로새겨진 자상이 날카로운 고통을 토한다.
손을 들어 올려 바라봤다.
평소 굳은살 하나 없던 내 손에 는, 어느새 물집과 잔 상처가 자리 해 있다.
주먹을 꽉 쥐었다.
'살아남았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1: 5의 전력 비를 극복하다니.
사실 여러 요소가 중첩되어 만들어진 이변이었다.
병사 개개인의 기량이 공국군보 다 압도적으로 뛰어난 제국군. 검술 스킬의 상향. 그리고 때마침 발현된 엑스트라 스킬 '집중'까지.
그중 단 하나라도 모자랐다면, 지금쯤 나는 싸늘한 시체가 되어있을 것이었다.
고개를 들어 올려 하늘을 바라봤다. 창연했던 하늘에는 어느새 노을 이 짙게 내려깔리고 있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이렇게 난데없이 게임 속 세상에 떨어졌다니.
- 달칵.
허리춤에 매어져있는 장검을 뽑아들었다.
스르릉, 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끈적한 피가 검날에 들러붙어 있었으므로.
붉게 칠해진 검날을 바라봤다.
"… 후우."
재차 한숨이 새어나왔다.
사실, 방금 전까지는 이 세상에 떨어진 것이 체감되지 않았다.
주위에서 있는 제국 병사들도, 현실에서 보기 힘들었던 이 녹음어린 경관도.
잠에서 깨어난다면 덧없이 사라 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 피 묻은 검을 보고는, 마침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세상은 현실이야."
손으로 검날을 쓰다듬어봤다. 반 쯤 말라붙은 피가 질척하게 묻어나 온다.
절로 씁쓸한 표정이 지어졌다.
"그리고 나는 살인을 했고."
나는 한동안 피 칠갑 된 검을 멍 하니 바라봤다.
5화.
그리 크지도, 혹은 작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의 집무실 안. 그곳에 한 중년 남성이 앉아있었다.
적당하게 기른 턱수염에는 하얀색 새치가 드문드문 나 있었다. 눈가에는 인자한 주름이 잡혀있었으 나 그 시선은 날카로웠고, 전신에는 은은한 카리스마를 두르고 있었다.
중년인의 이름은 그레드. 제국 북부군 천인장이자, 파트라헴 전진 기지의 수장이었다.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무언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지도. 그것도 이곳 파트라헴 인근 제국과 공국군의 세력을 정리해둔 전 술지도였다.
한참 동안 지도를 주시하던 그가 중얼거렸다.
"공국 놈들은 뭘 꾸미고 있는 것 인가."
그의 눈동자가 지도 위에 올려져 있는 각종 모형으로 향했다.
모형의 외양은 다양했다. 깃발 모양, 사각형, 작은 삼각형. 그것들 이 지도의 이곳저곳에 흩어져 시선을 어지럽히고 있다.
툭, 툭.
그레드가 손가락으로 집무실 책상을 두드리며 고뇌했다.
"분명. 놈들은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
공국군의 움직임이 너무나 수상 하다.
그들은 쉴 틈 없이 배치를 바꿔대고 있다.
평소 방어하던 거점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병력을 보내는가 하면, 여러 개의 자잘한 전진기지를 통합 시켜 보다 대규모 부대로 개편하기 도했다.
게다가 눈에 띄게 늘어난 공국군 의견제병력들까지.
확실히 무언가가 있다.
한참 동안 지도를 바라보던 그레 드가 쯧 혀를 차고는, 집무실 한 켠에서 있던 부관에게 물었다.
"부관. 아직도 귀환한 척후조는 정말 없는 것인가."
"천인장님."
부관이 나직이, 상관의 말에 대답했다.
"척후조를 보낸 것이 벌써 일주일 전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그 어떤 척후도 귀환하지 않았습니다. 알 고 계시지 않습니까. 척후조는 모두 전사했습니다."
"…그렇지."
그레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답답하다는 듯 신음했다.
얼마 전, 갑작스러운 공국군의 움직임을 경계한 그레드는 다섯 개 의 척후조를 적진으로 급파했다.
그것이 일주일 전이었다.
그리고 그 일주일 동안, 다섯의 척후조중 그 어떤 조도 아직까지 귀환하지 않고 있다.
전멸했다고 보는 게 타당 할 터.
"하지만 믿기지 않는군. '그' 공국 놈들에게 우리 척후가 모조리 전멸하다니."
그레드가 복잡한 눈으로 다시금 지도를 주시했다.
제국군 척후조가 모조리 전멸하 다니. 본래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수한 제국의 군인이, 하물며 일반 병들중 가장 정예인 척후병들이, 허술한 공국군 경계망을 뚫지 못했을 리 없을 터인데 말이다.
"놈들은 경계망을 강화한 것이 분명하다. 그게 아니라면 우리 척후 가 귀환하지 못하고 있는 게 말이 안 돼."
파견했던 척후조의 수는 한두 개 가 아닌 무려 다섯 개, 병사들의 수만 오십여 명이다. 그 모두가 전 멸할 정도로 경계망을 강화했다라.
공국 놈들은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
"제기랄. 답답해 미치겠군. 누군 가 살아 돌아온 이가 있다면 뭐라도 알 수 있을 터인데."
털썩. 그레드가 주저앉듯이 집무실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전장의 안개가 모든 것을 가리고 있다. 분명 적이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데, 도통 놈들의 의도를 알 수 없다.
부족하다. 정보가.
그는 답답한 마음에 애꿎은 책상 만을 계속해 두드려댔다.
그가 그리고뇌하고 있는 그때였다.
"천인장님!"
벌컥!
누군가가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 왔다. 그레드가 시선을 돌려 바라보니 이곳 지휘소를 지키고 있던 당 직 병사였다.
병사가 급한 표정으로 알렸다.
"척후조가 귀환했습니다!"
"뭐?"
그레드가 얼빠진 소리를 내고, 부관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만큼 병사의 말은 믿기 힘든 일이었다.
그레드는, 심지어 그의 부관마저 척후조의 전멸을 기정사실로 받아 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가까스로 귀환한 척후조 가 있다니.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 병사에게 물었다.
"귀환한 척후조의 지휘관이 누구 지?"
"한지훈입니다."
"한지훈이라."
기억에 없는 특이한 이름이다.
허나 상관없는 일.
그가 곧장 지시했다.
"당장 이곳으로 불러와라. 보고를 듣고 싶군."
"알겠습니다."
병사가 집무실을 빠져나가 밖으로 향했다.
그레드는 팔짱을 끼고 고민했다.
'일주일 만에 귀환한, 유일한 척 후조라.'
흘깃. 그는 마지막으로 집무실에 자리해있는 지도로 시선을 던졌다.
지도 위에는 여전히 각종 모형이 어지러이 널려있다.
'무언가. 공국 놈들의 의도를 파악할 만한 정보를 가져왔다면 좋겠 군.'
그레드가 자리에 앉아 한지훈을 기다린다.
"어서 오게, 2번 척후조장 한지훈."
나는 앞에 보이는 광경을 살폈다.
살풍경한 집무실의 광경이 시야 를 채웠다. 제국기가 책상 뒤에 펼 쳐져 있고, 중앙에 있는 테이블 위 에는 커다란 지도가 자리해있다.
더해 장식용인지, 혹은 실전용인 지 모를 제국 사관용 장검이 한 쌍벽에 걸려있다.
"역시. 보고받은 대로 많이 다쳤 군."
시선을 돌려 말을 건넨 이를 바라봤다.
온화한 얼굴을 지닌 중년 남성이었다.
"미처 치료도 못하고 부른 건 미 안하네. 하지만 그만큼 정보가 급해 서 말이지."
그를 바라보자, 내 시야에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 띠링!
[그레드][전진기지 '파트라헴'의 기지장. 제국 천인대장]
천인장 그레드. 역시나 알고 있는 이름이다.
내가 안내창을 바라본 그때였다.
척.
나는 주먹을 심장에 가져다 대며 경례했다.
제국식 경례였다.
'뭐야?!'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스스로 경례를 하다니.
의식해 나온 행동은 아니었다. 마치 이래야 자연스럽다는 듯, 나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제국군의 경례 따위는 본 적도 없을 터인데.
천인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경례 를 받았다.
"그래. 척후조장 한지훈. 자네도 오는 길에 들었겠지만,"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으로 걸어왔다.
"자네의 척후조가 유일하게 살아 남은 척후조다. 다른 녀석들은 아직 도 귀환하지 못하고 있지."
나는 당황한 감정을 추스르고는, 고개를 끄덕여 천인장의 말에 긍정했다.
내가 살아남은 유일한 척후조라는 것.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게임에서 여러 번이나 언급되었으 니까.
"알고 있다면 설명이 빠르겠군. 자, 한지훈."
그가 테이블 위에 있는 지도를 가리켰다.
"내게 모두 알려주게. 자네가 보고 경험했던, 공국 놈들의 움직임을"
나는 천천히 그레드의 모습을 살 폈다.
겉으로는 인자한 분위기를 품은 중년인이다. 희끗희끗 난 허연 새치는 지저분하다기보단 인간다웠으며, 눈가에는 인망이 쌓여 만들어진 주름이 자리해있다.
하지만 시선을 약간만 내려, 그 의 몸을 본다면.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마냥 온화 한 이가 아니란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제국군 사관정복을 입고 있었다. 회색으로 이루어진 그 군복위, 중년의 나이에 맞지 않는 근육 의 음영이 자리해 있다.
더해 정복의 가슴팍 위로 자리해 있는 각종 약장들까지. 그것은 그가 일개 병사로 시작해 수많은 전공을 거쳐, 천인장의 자리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오랜 시간 전장을 굴러 성장한, 경험 많은 제국군 장교. 그게 바로 천인장 그레드였다.
나는 그레드에게서 시선을 떼 지도를 주시했다.
"… 척후 결과를 보고하겠습니다."
지도 위에는 여러 모형이 자리해있다. 난생 처음 보는 모형들이지만, 그 의미는 파악할 수 있었다.
깃발 모형은 적 천인대 본영의 위치. 삼각형은 십 인 단위 소수병력이 출현한 장소이며, 사각형은 백인대 이상 병력이 등장한 장소다.
내가 이사실을 아는 이유는 단순했다.
'게임 인터페이스에서 봤던 아이 콘들이다.'
과거, 블랙 오케스트라를 했을 적. 게임 전술 창에서 수도 없이 봤던 아이콘들.
그것들이 지금은 모형의 형태로지도 위에 올려져 있다.
씁쓸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설마 이런 부분까지 게임이랑 똑같을 줄 이야.
그나저나 곤란하다.
'척후 결과라. 이걸 어떻게 설명 한다.'
나는 난데없이 이 게임에 끌려 들어왔다. 그것도 척후조가 공국에 추격에 ?기는 그때.
하지만 그레드가 지금 내게 묻고 있는 것은 퇴각 과정이 아닌, 퇴각 전 척후에서 얻은 정보다.
당연히 척후 내용을 기억하고 있을 리 없다. 게임 속에서든, 혹은 이 세계에 끌려 들어온 이후로든. 척후 그 자체를 경험해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때.
"… 아."
내 머릿속으로 어떤 기억들이 홀 러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사진 뭉텅이처럼 단편적인 장면의 연속이었다.
산 능선을 타고 움직이는 제국군 척후조. 적의 삼엄한 경계망. 초계 병력의 추격. 그리고 공국 진영에서 본…
곧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무언가가 나를 보조하고 있다.'
천인장에게 했던 제국식 경례. 그리고 지금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척후 당시의 '경험.'
현대인인 내게 모자란 지식과 행동을 채워주고 있다. 마치 내가 이 세상에 더욱 자연스럽게 녹아들기 를 바라는 것처럼.
' 염병.'
기분이 더럽다.
내 행동과 사고를 정체 모를 무 언가가 주무르는 감각은 그리 유쾌 하지 않다. 마치 누군가의 장난감이 된 것만 같다.
허나 지금은 보고해야 할 때.
속으로 불쾌한 감정을 삼키고, 손끝으로 지도를 훑으며 입을 열었다.
"… 저희는 새벽에 출발해, 동쪽 산지 능선을 타고 이동했습니다."
머릿속에서 낯선 기억이 떠오른다.
동쪽에서 떠오르기 시작하는 태양. 새벽의 어둑한 공기를 헤쳐 전 진하는 제국군 척후조. 경갑과 간소한 짐을 지닌 그들이 천천히 산 능 선에 몸을 숨겨 이동한다.
"공국군의 영역에 도달하자, 경계 가 너무나 삼엄했습니다. 절대 일반적인 경계 수준이라 볼 수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평소와 달리 증원된 적 경계병 들. 십인대 규모의 적 초병이 주기 적으로 침입로를 정찰하고, 산지 이곳저곳에 놈들의 초소가 깔려있다.
계속해 내 것 아닌 기억이 떠오른다.
"저희는 공국군의 경계를 피해 밤공기를 타고 이동, 공국군의 본영을 찾아 움직였습니다."
해가 떨어져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린 병사들이, 발소리를 숨겨가며 움직인다. 그들은 사방에서 일렁이는 초소의 불빛과 초병의 횃불을 피하며 전진했다.
운이 좋았던 것일까. 병사들은 적 경계 병력에게 탐지되지 않고 이동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막 동이 틀 무렵. 저희는 고지대에 도착해 적의 본영을 자세히 볼 수 있었습니다."
높은 곳에서 바라봤던 적 본영의 광경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대량의 적, 그리고 다른 병사들 과 전혀 다른 복색의 이들.
나는 시선을 돌려 그레드에게 물었다.
"천인장님. 지도 모형의 위치를 바꿔도 되겠습니까?"
"…해보게. 어차피 이 배치는 한참 전의 것이니."
"감사합니다."
나는 손을 뻗어 모형의 위치를 바꾸기 시작했다.
깃발 모형을 움켜쥐고, 지도 위에 올려놨다.
하나, 두 개, 세 개… 지도 위에 모형을 올려놓을수록 그레드의 눈가에 경악이 깃든다.
"이 배치는…."
모형을 다 올려놓은 뒤. 나는 나직이 읊조렸다.
"천인장님."
"공국군이 집결하고 있습니다. 제 가 봤던 적 규모만 해도 군단 규모 였습니다."
"허."
그레드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지도를 바라봤다. 지도 위에는 열 개에 달하는 깃발이 한군데에 몰려 있다.
천인대 열 개 이상의 규모. 즉 군단급 적이 집결하고 있다는 소리.
믿기지 않는 것일까. 그레드는 아무 말 않고 침음을 삼킨다.
하지만 아직 내 배치는 끝나지 않았다. 나는 지도 밖에 있는 모형을 집어 들었다.
이번에 집어든 모형은 동그라미. 언뜻 보면 카지노 칩처럼 보이는 모형이다.
그것을 적의 본영 위치에 배치했다.
"맙소사."
결국 그레드의 입에서 경악성이 튀어나왔다.
방금 전 내가 배치한 동그라미 모형. 그것은 다름 아닌 적의 '마법 전력'을 의미하는 모형이었다.
그레드가 믿기지 않다는 듯, 나 에게 다급히 물어왔다.
"마법사. 마법사라니! 공국 놈들, 전면전이라도 하려는 것인가? 한지훈! 마법사를 본 것이 확실한가?!"
"확실합니다. 저희가 본 적의 마법사 전력만 수십여 명이었습니다. 분명 더 많은 마법사가 있겠지요."
"맙소사. 제기랄, 맙소사!"
나는 그레드를 멍하니 바라봤다. 잠시간 바라봤음에도 그의 경악은 도통 가라앉질 않는다.
저리 놀라하는 것은 당연하다. 마법사란 전장에서 최대의 화력을 지닌 이들. 그들은 소수이지만 강력 하며, 막대한 운용비를 처먹는다.
그리고 이런 국지전에서는 마법사가 등장하지 않는다. 절대로.
기껏해야 수십 명단위의 교전이 일어나는 곳에, 혼자서 백인대 규모 를 쓸어버리는 괴물을 투입하는 건 전력과잉이 될 터이니까.
하지만 그 염병할 마법사가 나타났다. 다름 아닌 우리와 마주보고 있는 적진에.
'마법사의 발견.'
결코 심상치 않은 일이다.
비록 제국과 공국은 국경분쟁으로 잦은 소규모 국지전을 벌이고 있다고는 하나, 아직 전면전에는 이 르지 않았다.
허나 지금 공국은 군단 규모의 병력을 집결하고 있다. 더해 적의 본영에 출현한 '마법사'까지.
이것은 단 한 가지만을 의미한다.
"천인장님. 공국은 대규모 공세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전면전을 대비해야 합니다."
내 말이 끝나는 동시.
- 띠링!
[서브 퀘스트]
[본대로 퇴각해 척후 결과를 전달하라.] (완료)
[서브 퀘스트 - '척후조 퇴각전'을 '완벽하게' 완수했습니다!]
[시나리오보다도 더 높은 점수를 얻었습니다. 포인트가 추가로 정산 됩니다!]
[정산 포인트 : 10pt]
[추가 정산 포인트 : 5pt]
(남은 포인트는 15pt입니다.)
내 시야에 안내창이 떠올랐다.
6화.
내 보고가 끝난 후. 천인장 그레 드는 상부에 보고해야겠다며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집무실 밖으로 떠나기 전, 나에게 이런 말을 던졌다.
"십인장 한지훈. 만약 네 말이 사실이라면, 그건 정말로 공국 놈들 이전면전을 걸어올 거란 이야기다."
그의 표정은 더없이 냉철하고도 진중했는데, 절로 등에 오한이 스쳤다.
그만큼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일 터.
"자네 세대의 군인들은 전면전을 겪어본 적 없지. 하지만 나는 경험 해봤다."
시선을 내려 그의 정복 가슴팍에 달려있는 약장들을 살폈다.
여러 약장이 자랑스레 그의 가슴 팍에 달려있다. 저리 많은 약장을 받을 정도로, 그는 전장에서 구를 대로 굴렀다는 이야기다.
물론 전면전 규모의 전장에 끌려 간 적도 있었겠지.
"그건 지옥이다. 국가와 국가가 서로의 모든 것을 파괴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붓는 거다. 정말… 미친 짓이지."
이미 알고 있다. 경험해봤으니까.
물론 현실에서 경험해본 것은 아니다. 간접적으로, 그것도 게임에서 경험해본 것이니.
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무제 한 동원해 적 세력을 처부순다. 막 대한 인간을 갈아 넣고, 자원을 끌어 모아, 군대를 양성해 적을 짓밟는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기 위해 모든 걸 시도하는 전쟁. 지옥이라 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전면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유서를 다시 써놔야겠군."
달칵.
그레드는 그리 말하고는 먼저 집무실을 나가버렸다. 덕분에 이 살풍 경한 집무실에는 나 혼자만이 남아 버렸다.
나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치료나 할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지휘소에서 나온 뒤, 나는 곧장 길을 걸어 치유소로 향했다.
천천히 걸으며 전진기지 파트라 헴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현대인이었던 내 눈으로 보자면, 그리 큰 규모의 마을은 아니었다.
전진기지라 하나 그래봤자 전투 병력 천여 명, 비전투 인원까지 포함해봐야 이천여 명이 살 만한 규모의 마을에 불과하다. 외곽을 따라 빙 둘러쳐진 성벽과 시야에 보이는 군인들의 모습만 아니라면, 그저 평 범한 중세 마을의 모습이라고 여길 수 있을 정도.
하지만 나는 이 도시가 어떻게 될지 알고 있다.
"곧 증축하겠지."
내 척후 정보 덕분에, 제국이 공국의 전면전 의도를 읽어냈다. 그리고 제국이 가만히 있을 리는 없을 터.
증원을 보낼 것이다.
군단 단위에 달하는 대량의 병사들. 말을 타고 다니는 기병대. 오러를 다루는 기사. 그리고 강대한 마법으로 적진을 쓸어버리는 마법사 까지.
일개 병사부터 마법사라는 고위 병종까지, 많은 이들이 이 기지에 모일 것이다. 그리고 곧 파트라헴은 증축에 증축을 거듭해 군단급 본영 으로 탈바꿈하게 되리라.
"뭐. 그것도 몇 달 뒤의 이야기 이지만."
지금은 아직 천인대 규모의 작은 전진기지에 불과하다.
나는 천천히 걸어 진료소로 향했다.
덜컹.
진료소의 문을 열자 빼곡한 침상 이 보였다. 붕대를 감은 다수의 병사들이 침상에 누워있다.
개중에는 낯익은 녀석들도 있었다.
"십인장님. 보고는 끝내신 겁니까?"
덩치 큰 병사"카일이 호쾌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녀석이 누 워있는 침상으로 다가갔다.
"몸은 좀 어떠냐."
"온몸이 욱신거립니다. 뭐, 그만큼 편하지만요. 덕분에 며칠 훈련도 빠지고 잘 쉴 겁니다."
"… 그래라."
카일의 익살스러운 태도에도 불 구하고, 나는 녀석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녀석 또한 격렬하게 싸웠다. 비록 치명상을 입진 않았지만, 사지 곳곳에 적의 창격과 검격으로 수많 은 자상이 아로새겨져 있을 터.
물론 나도 남 말 할 처지는 아니 지만.
시선을 내려 내 몸을 살폈다.
몸 이곳저곳에 날카로운 자상이 남아있다. 손을 가져다 대 상처를 건드리자 저릿한 통각이 신경을 자극했다.
' 망할.'
절로 욕지거리가 올라왔다.
통각이 올라올 때마다, 절대 꿈 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만 같다.
내가 그렇게 상처를 주시하고 있을 때였다.
"그나저나, 십인장님. 출세길이 열리신 것 같습니다."
카일이 뜬금없는 소리를 해왔다.
나는 이유가 뭐냐는 듯 녀석을 주시하고, 녀석은 이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까 전 천인대 차석이 와서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 뭐라고 했는데 ?"
"십인장님께 포션을 사용하라 하더군요."
"뭐?"
이해가 가지 않아 절로 의문성이 튀어나왔다.
포션. 이 이상한 판타지 세상 속, 그중에서도 한층 더욱 판타지스러 운 물건.
흔히 알고 있는 그 포션이 맞다. 마시거나 상처 부위에 바르기만 해 도 순식간에 부상을 치유하는 , 이세 계의 무안단물 같은 그것.
물론 포션의 가격은 더럽게 비싸다. 군대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 제국군에서도 기사나 백인장 이상의 중요 병종에게만 사용할 정도로.
그런 포션을 어째서 내게 쓴다는 것일까.
"십인장님이 마음에 들었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야 유일하게 적진에서 살아 돌아왔고, 더해 혼자서 적병 십 수명, 추가로 적 지휘관 까지 처치했습니다. 저희들이 기껏 해야 적병 한두 명을 눕힐 동안 말 입니다. 이 정도면 꽤 대단한 전공 아닙니까?"
팔에 감은 붕대가 불편한 것일 까. 카일은 자신의 팔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천인장 그레드도 저희처럼 병사 출신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뭐, 십인장님을 더욱 마음에 들어 했다 이거겠지요. 그 귀한 포션을 일개 병사에게 줄 정도로 말입니다."
그런 건가.
내가 자리에 멍하니 서 있는 와중이었다.
"2번 척후십인장 한지훈."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에 뒤를 돌아보니, 제국군 정 복에 하얀색 약장을 단 의무장교가 서 있었다.
척. 경례했다. 역시나 무의식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자네가 한지훈이군. 자, 받아 라."
의무장교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투명한 유리병이었다.
유리병 안에는 분홍빛 액체가 넘 실거리고 있다.
"포션이다. 천인장께서 자네에게 특별히 하사하라는군."
아무래도, 카일의 말은 사실인 것 같다.
나는 포션을 받아 들이켰다.
그다지 맛있진 않았다.
치료소에서 나온 뒤. 나는 곧장 숙소로 향했다.
숙소는 기지 외곽에 배치되어있는 십인대 막사. 열 명이 함께 지내는 곳이었으나 안에는 나 혼자뿐 이었다. 나머지 병사들은 지금 치료 소에 처박혀 있기 때문이다.
털썩. 자리해있는 침상에 몸을 누였다.
멍하니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목제로 이루어진 허술한 천장이 보 인다.
그걸 보며 나직이 읊조렸다.
"내 정보."
- 띠링!
['유저 정보' 시스템이 활성화 되 었습니다!]
[유저 정보를 불러옵니다.]
안내창이 떠올랐다.
[한지훈][척후조 십인장]
[스킬 : 십인대 전투지휘술]
[스킬 : 제국 검술(하급)]
[엑스트라 스킬 : 집중(Lv.1)]
[근력 4]
[민첩 2]
[내구 3]
[체력 3]
[마나 0]
(남은 포인트는 15pt 입니다.)
검술 스킬이 하급으로 올라있고, 남아있는 포인트는 15pt가 있다 한다.
안내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누구냐. 넌."
저 안내창 너머, 나를 가지고 노는 존재에게 묻는 질문이었다.
그저 게임을 했을 뿐이었다.
여러 적을 쳐부쉈고, 높은 점수 를 내기 위해 열중했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게임 속 세상이라.
"얼탱이가 없네."
이게 솔직한 감상이었다.
안내창을 쥐어주고, 기억과 행동에 보정을 가미해, 게임 속 세상에 내던져버리다니.
목적이 뭘까. 어째서 이런 일을 하는 걸까. 누구의 소행일까.
멍하니 생각해봤지만, 알 수 없었다.
쯧, 혀를 찼다.
"염병할."
기분이 좋지 않다.
내 운명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기분이다.
나는 다음 안내창을 호출했다.
"퀘스트창."
- 띠링!
[퀘스트 시스템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메인 퀘스트]
[시나리오를 완성하라.]
[서브 퀘스트] (아직 서브 퀘스트가 부여되지 않았습니다.)
퀘스트창이 떠오른다.
나는 퀘스트창의 위, '메인 퀘스 트' 부분을 눈여겨봤다.
[시나리오를 완성하라.]
시나리오라. 무슨 시나리오를 말하는 걸까.
마지막으로 현실에 있던 날, 잠 결에 들었던 환청을 떠올렸다.
[정산이 완료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귀하의 시나리오가 최고점을 기록하였습니다.]
[시나리오가 채택되었습니다.]
여기서도 분명 '시나리오'라고했다.
게임 속 내 기록을 그리 부르는 모양.
아무래도. 나를 이 세상 속에 던 져 넣은 빌어먹을 누군가는, 내가 게임 속 나처럼 행동했으면 하는 모양이다.
엿이나 먹으라지.
"몇 명이나 죽이라는 거야."
내가 블랙오케스트라에서 몇 명 이나 죽였을까.
정확한 숫자는 모른다. 정산이 끝나기도 전에 게임을 꺼버렸으니까.
하지만 결코 적을 리가 없다.
제국과 국경을 접한 공국을 시작 으로, 수많은 국가를 쳐부수고 파괴했다.
아니. 어디 인간들의 국가뿐이었 나.
나중에 제국이 대륙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을 때는, 이인종들마저 나 서 상대진영 연합군에 가담했다.
엘프, 드워프, 수인, 요정 , 그리고 대륙 곳곳에 흩어져 있던 여러 자유 마탑들까지.
나는 그것들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조리 쓸어버렸다.
"단순히 게임이었는데 ."
읊조리며 눈을 감았다.
그저 게임이었다. 모니터에 표시 되는 유닛은 사람이 아닌 폴리곤 덩어리였고, 그것의 죽음은 가상의 소멸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게임 속 세상에 내가 있다.
다시 ダ?떠 안내창을 시야에 담았다.
[메인 퀘스트]
[시나리오를 완성하라.]
시나리오를 완성하라는 퀘스트창. 추측해본다.
"대륙을 정복하면. 현실로 돌아갈 수 있는 건가?"
그렇다면 몇이나 죽여야 할까. 나는 가만히 안내창을 주시했다.
황궁의 알현실. 기다란 붉은색 카펫이 깔려있고, 사방이 아름다운 장식으로 꾸며져 있는 화려한 공간.
그곳에 수십의 사람이 도열해 있었다.
도열해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나이를 지긋이 먹은, 호화로운 복색을 갖춰 입은 노인들이었다.
제국의 중심을 이끌어가는 중앙 의 귀족들.
"위대하신 황제 폐하! 급히 보고 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들 중 한 노인이 다급한 표정 으로 말했다.
노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알현실의 가장 상석, 화려한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되어있는 옥 좌였다.
옥좌에는 한 청년이 앉아있었다.
청년의 외양은 너무나 고귀했다.
머리는 찬란한 황금색을 띄고 있다. 피부는 고귀한 신분임을 증명하 듯 새하?R으며, 금색으로 물들어있는 눈동자에는 장엄한 빛이 스며들 어 있다.
아르테니아 가이나스 비 오르페우스. 젊은 나이에 황위를 계승한 제국의 황제였다.
"… 말하라."
젊은 황제가 웅위한 목소리로 발 언을 허가했다. 그에 노인은 고개를 숙이며 고한다.
"북부전선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공국측이 움직이고 있다 합니다."
"공국이라면."
"요한바르첸 공국이옵니다. 폐 하."
노인이 고개를 더욱 깊이 숙이 며, 이어 말했다.
"척후의 보고에 따르면, 공국은 제국 접경지역에 대량의 군대를 집결시키고 있다 합니다. 척후가 목격 한 규모만 군단급. 그리고…."
노인이 잠시 뜸을 들이고는, 고개를 들며 말한다.
"마법사 전력이 목격되었다 합니다."
"마법사!"
"그게 정말인가?!"
주위에서 있던 다른 귀족들이 당황했다.
그만큼 마법사의 목격은 중요한 일이었다.
사실, 군단급 병력의 이동은 나름대로 자주 있는 일이었다.
마물이 출몰하는 이 세상이다. 때문에 군대는 주기적으로 미개척지역의 마물을 소탕하기 위해 군사 행동을 벌였으며, 간간이 대규모 마물집단을 상대로 군단급 군대가 움직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군대에 마법사가 등장 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마법사. 인간의 몸으로 마나를 운용해 이능을 발하는 존재.
그들은 막대한 운용비와 마나자 원을 소모할지언정, 회전에서는 절대의 화력을 발한다.
그리고 그 마법사가 적진에 자리 해있다니.
"공국 놈들. 제정신이 아니군. 전 면전을 준비하는 건가."
황제가 나직이 읊조렸다.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알현실에 자리해있는 대신들의 면면을 훑었다. 그에 고위 귀족들이 흠칫 어깨 를 움츠렸다.
황제가 단호한 목소리로 지시한다.
"접경지역에 병력을 증원하라. 북부 제 3군단과 볼로냐 전투기사단을 배치하라. 그리고…."
그가 강조하듯, 말했다.
"제국 전투마법사를 급파해라. 공국 놈들을 쓸어버린다."
제국 북부에 전력이 집중되기 시작한다.
7화.
나는 검을 내리쳤다.
파앙!
파공성이 울리고, 검날이 공기를 가르며 아래로 쇄도했다. 은은한 검광이 수직으로 그어진다.
계속해 검을 휘둘러, 기억 속에 있는 다양한 검로를 그려보았다.
수직 베기, 수평 베기, 사선 베기, 그리고 찌르기. 더해 간간히 방어 자세를 취해보기도했다.
그렇게 얼마나 검을 휘적거렸을 까.
나는 손등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쳤다.
"더럽게 힘드네."
지금 이곳은 파트라헴 전진기지 외곽에 있는 훈련장이었다.
병사들이 제각기 자신의 무를 갈 고닦는 장소.
그곳에서 나는 홀로 검술을 단련 하고 있었다.
"조금 쉬자."
털썩. 자리에 주저앉아 수통의 물을 들이켰다. 미지근한 물이 식도 를 적신다.
온 근육이 뻐근하다. 피로감에 몸이 물에 젖은 솜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분은 그리 나 쁘진 않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한지훈][척후조 십인장]
[스킬 : 십인대 전투지휘술]
[스킬 : 제국 검술(하급)]
[엑스트라 스킬 : 집중]
[근력 6]
[민첩 4]
[내구 4]
[체력 5]
[마나 0]
(남은 포인트는 15pt 입니다.)
근력과 민첩, 체력이 2씩. 더해 내구가 1이 올라있다.
척후조 퇴각전 미션을 클리어 한 뒤. 나는 근 일주일 동안 이곳 훈련장에서 거의 살다시피했다. 능력치를 올리기 위함이다.
그리고 일주일 내내 단련한 결과 가 바로 이것이었다.
능력치의 소폭 상승.
"역시. 훈련으로 능력치를 키울 수 있어."
게임 속에서도 그러했었다. 훈련 장에 유닛을 처박아두면, 수련을 통 해 능력치를 키우곤했다. 그리고 나는 그때의 기억을 살려, 훈련장에 와 검술을 단련하는 중이고 말이다.
역시 내 추측은 맞았다. 포인트 뿐만이 아닌, 훈련과 실전 경험으로 도 능력치를 키울 수 있다.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뭐, 힘들긴 하지만."
나는 손을 들어 올려 손바닥을 살폈다. 내 손바닥에는 이전보다도 더욱 많은 굳은살과 물집이 자리해 있다.
단련하는 거. 고되고 힘들다. 지금 당장이라도 포기해버리고 싶다.
살짝 고민해봤다.
'그냥 포인트를 써버릴까?'
지금 내게는 15pt의 여유 포인트 가 있다. 이 포인트를 쓴다면 내 능력치를 당장 눈에 띄게 올릴 수 있으리라.
하지만 잠시 생각해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언제 포인트가 필요해질지 모르 는데 . 급하게 써버릴 필요는 없지.'
척후조 퇴각전에서 검술 스킬을 상향했고, 그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나중에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 때문에 나는 포인트를 일단 아 껴두려고 한다. 포인트로 인한 상향 은 바로 적용되는 만큼, 나중에 필요할 때 올릴 수 있으므로.
주먹을 꽉 쥐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능력치와 포인트를 최대한 모아 놔야 한다.'
공국과의 전쟁이, 그것도 마법사 가 참전한 대규모 전쟁이 가깝다.
마법사의 화력은 무시무시하다.
놈들의 마법은 아무렇지도 않게 수십의 병력을 증발시켜버리며, 다수의 마법사가 발현한 합동마법은 수백, 수천의 병력을 단숨에 궤멸시킨다.
때문에 일개 병사에게 있어 전면 전은 지옥이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각종 마법. 휘말리는 군대.
순식간에 대량의 목숨이 사라지는 그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당장 내 능력을 끌어올리는 것이 중요하다.
능력이 출중해진다면 그만큼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질 것이니.
더해 나는 잊지 않았다.
[유저의 능력치가 모자라 스킬의 모든 성능을 이끌어 낼 수 없습니다. 그래도 상향하시겠습니까?]
과거 '제국 검술' 스킬을 상향할 당시 떠올랐던 안내창.
능력치가 모자라 스킬이 제 성능을 낼 수 없다 한다.
당연한 일이었다. 제아무리 검을 다루는 법을 안다 한들, 그 검을 휘두르는 본인이 약하면 제대로 싸울 수 없는 법.
기왕 올린 스킬. 제대로 써먹어 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나는 일주일 동안 단련에 단련을 거듭했다. 최소한 검술 스킬 의 능력을 제대로 이끌어 낼 수 있는 경지를 목표로 말이다.
"후."
다시금 일어서 검을 쥐었다. 몸 이 적당히 식었기에, 재차 단련을 계속할 참이다.
막 검을 휘두르려는 그때였다.
"열심이군."
문득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돌려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바라보니, 천인장 그레드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경례하려했다. 하지만 그 레드는 손을 뻗어 그런 나를 제지했다.
"경례는 됐다. 편히 있어라."
그레드가 성큼 이쪽으로 다가오 며 말했다.
"일주일 내내 훈련장에 처박힌 대견한 병사가 있다 들어서 와봤는데, 자네였군."
어디서 내 이야기를 들은 듯하다.
하긴,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여유시간이 날 때마다 훈련 장에 가서 검을 휘적거리는 별종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
마침내 내지척에 다가온 그레드 가지시했다.
"자, 한지훈. 훈련을 계속하라."
나는 얼떨떨하게 서 있었다. 그 레드가 다른 곳으로 안 가고 나를 멀뚱히 바라봤기 때문이다.
그가 재차 말한다.
"나는 지켜보기만 할 테니. 부담 가지지 말고 검을 휘두르면 된다."
엄청 부담되는데 .
하지만 내 상급자, 그것도 천인 장이라는 까마득하게 높은 이를 꺼 지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나는 검의 그립을 굳세게 쥐고, 휘둘렀다.
파앙!
파공성이 울리고, 은은한 검광이 수직으로 내려쳐졌다. 스킬의 보조 덕에 꽤나 깔끔한 검로가 그려진다. 검을 직접 휘두른 내가 만족할 정도.
생각보다 훌륭한 일섬이었을까. 옆에서 바라보던 그레드가 감탄했다.
"굉장히 정돈된 검격이군. 나름대 로 검에 대한 기본기는 갖춰져 있어."
다음 검격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수 평베기였다.
후웅! 검이 움직인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검광이 반월을 그리며 공기를 양단했다.
옆에서 그레드의 말이 이어진다.
"음. 자세도 좋고, 근육의 움직임 도 좋다. 시선처리 또한 효율적이 군. 제국 검술교범을 그대로 옮겨온 것만 같아."
거 엄청 신경 쓰이네.
나는 왼편으로 향한 검날을 지그 시내려, 땅에 닿을 듯 말 듯하게 멈췄다. 직후, 우상단을 향해 검날을 치켜 올렸다.
팡! 재차 튀어나오는 파공성.
제국 검술의 세 번째 동작, 사선 베기였다.
하지만 이번 공격은 그리 깔끔하지 못했다.
'망할. 능력치가 모자라.'
내 눈가가 절로 찌푸려졌다.
검로의 중간에 미약한 틀어짐이 있었다.
이유는 능력치의 부족.
나는 일주일 내내 단련했음에도, 검술 스킬을 완전히 살리지 못하고 있다.
"으음…."
그 모자란 검격을 본 것일까. 그 레드의 입에서 안타까움의 신음이 흘러나왔다.
무시하고 다음 검격을 가했다.
이번엔 찌르기였다.
피잉!
날카로운 검끝이 공기를 꿰뚫고 곧게 앞으로 향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완벽하지 못했다.
찌르는 와중 날 끝이 휘청였다. 방금 전사선 베기보다도 더욱 큰 굴곡이었다.
"…처음의 검격은 완벽했지만. 금세 한계가 찾아오는군."
보다 못한 그레드가 내 검술을 평하기 시작했다.
"자세와 동작은 안 좋은 버릇 하나 없이 완전히 체화되어있다. 하지만…."
그레드의 말을 흘려들으며, 재차 검을 휘둘렀다.
파앙! 터져 나오는 파공음. 허나 이전보다도 틀어진 검로. 그에 그레 드의 말은 멈추지 않는다.
"근력이 모자라 검로가 불안정하 며, 체력이 부족해 처음의 기세를 오래 유지하지 못하니."
후욱, 뜨거운 숨을 토하며 검을 반전한다. 그립을 고쳐 쥐고, 사선 베기.
"순발력 또한 아쉽군. 동작은 정 확하고 효율적이지만, 그 속도가 느리다. 속도가 느리니 검에 힘을 제대로 싣지 못한다."
나는 검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고, 천천히 검날을 내렸다. 그레드 가 나를 보며 마지막으로 평했다.
"자네의 검술 재능은 분명 뛰어나다. 꽤나 훌륭한 자질을 가지고 있지. 다만,"
그가 팔짱을 끼고는 내 몸을 훑 어보았다.
"그 자질을 살릴 신체능력이 부족해. 보다 단련이 필요해 보이는 군."
그레드의 혹평.
하지만 나는 그의 혹평에 불쾌보 단 감탄을 느꼈다.
'잠깐 옆에서 본 것만으로. 저렇게 정확하게 파악하다니.'
내가 보여준 검격은 기껏해야 네 다섯 합에 불과했다. 시간으로 따지 자면 채 1분이 안 되는 아주 잠깐 의 순간.
하지만 그 잠깐의 순간 동안, 그 레드는 내 경지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스킬 덕분에 얻은 검술의 경지. 허나 그 경지를 못 따라가는 내 능력치까지.
그레드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확실히 재능은 있다. 단련을 계속해라. 어느 정도 몸을 만들어 놓는다면, 분명 훌륭한 전투능력을 지 니게 될 것이니."
그리 말한 그레드는 천천히 걸어 내게서 멀어졌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천인장 그레드. 병사 출신으로 천인장까지 오른 경험 많은 군인.'
수많은 사선을 넘어 고급 장교자 리를 꿰찬 이다. 많은 전투경험 덕분에 나름의 경지를 이루었을 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인간 아래라면. 살아남을 확률이 더 높겠지.'
상관이 쓰레기나 무능력자가 아니라 다행이다.
나는 검을 다시 들어올렸다. 단 련을 계속하기 위해서.
허나 그때였다.
"아. 그러고 보니 이 말을 안 해 줬군."
다른 곳으로 걸어가던 그레드가, 뒤돌아 나를 바라봤다.
"한지훈. 자네의 척후조가 완편 되는 즉시 다음 명령이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단련에 너무 무리하지는 말도록. 작전에 차질이 생기면 곤란하니."
"… 언제쯤 움직입니까?"
"아마 일주일 뒤쯤일 거다."
그가 씩 웃었다.
"기대하고 있다, 한지훈. 이번에 도전공을 세워보도록. 저번처럼 말이야."
그레드는 그리 말하고는 다시 터덜터덜 걸어갔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는, 중얼거렸다.
"망했다."
게임을 했던 나는 다음 퀘스트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거 개같이 어려운데.
푹 한숨을 내쉬었다.
"포인트. 정말 써야하나."
포인트는 가급적 안 쓰고 모아두 고 싶었다. 하지만 다음 임무가 고작 일주일 뒤에 있다 한다.
그리고 일주일이라는 기간은, 내가 살아 돌아올 만큼 성장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아무래도 포인트를 써야할 것 같다.
* * *
"부관. 한지훈을 어떻게 생각하 나?"
살풍경한 천인장 집무실. 책상 앞에 앉은 그레드가 자신의 손에 들린 투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에 부관이 대답한다.
"한지훈이라면. 그 유일하게 살아 돌아왔던 척후조의 조장입니까?"
"그래. 녀석을 어떻게 보나?"
"어떻게 보냐니, 무슨 의미로 하신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부관은 서류를 정리하며 그레드 의 말을 받았다.
그에 천인장 그레드가 씩 웃으며 투구를 책상 위에 올려놨다.
달칵.
그가 올려놓은 투구에는 피가 말 라붙어 있었다.
"자. 이게 뭐 같나?"
"공국군 투구 아닙니까? 장식을 보니 소규모부대 지휘관의 것 같습니다만."
"그래. 공국군 삼십인대 지휘관 투구다. 한지훈이 처치했던 지휘관 놈의 투구지."
그레드가 손가락으로 투구를 툭 툭 두드리며, 이어 말했다.
"한지훈은 열이 넘는 적병을 혼자서 처치하고, 지휘관까지 죽여 전공으로 삼았다. 그리고 훌륭히 척후 정보를 전달했지. 덕분에 이렇게,"
그레드가 책상 위에 올려져있는 서류를 집어 들었다.
서류는 고작 한 장에 불과했고, 적힌 내용도 그다지 길지 않았다. 하지만 그 서류의 하단에는 제국 군인이라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박혀있었다.
위대하고도 고귀한 제국 황제, 아르테니아의 직인.
서류는 황제가 증원군을 이곳 북부 국경지대에 급파했다는 내용이었다.
"적의 대규모 공세작전을 읽게 되었고, 증원군을 부르게 되었다. 한지훈이 없었다면 우리 천인대 혼자서 군단급 전력을 마주하게 될 뻔한 거다.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이곳 파트라헴은 개전하자마자 쓸 려나갔겠지."
"확실히, 무시할 수 없는 공이군요."
"그래. 녀석은 나름대로 공훈을 세웠다."
그레드는 서류를 천천히 책상 위에 올려놨다. 혹시나 황제의 직인이 새겨진 귀한 종이가 구겨질까. 그 손놀림에는 조심이 가득했다.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나는 한지훈을 진급시켜 줄까 하는데 . 어떤가?"
"진급이라니요. 안 됩니다."
부관은 그레드의 말을 단칼에 잘 라냈다.
"십인장까지는 일선 병사에 불과 합니다. 하지만 그다음인 백인장 부터는 사관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한지훈은 일개 병사. 병사 출신이 사관까지 진급하는 예는 그다지 많 지…."
부관은 말하는 와중 입을 다물었다. 천인장 그레드가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켰기 때문이다.
병사 출신으로서 고급장교인 천 인장까지 오른 상관이 바로 앞에 있는데, 무작정 안된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
그에 부관은 한숨을 쉬고, 이어 말했다.
"…하지만 한지훈은 어립니다. 군인이 된 지도 얼마 안 되었고, 제대로 된 군사교육도 받지 않았지요. 공훈이 있다한들 금전적 보상으로 해주어야지, 백인장으로의 진급은 힘듭니다."
"그렇긴 하지. 하지만 나는 녀석 이마음에 든다."
그레드가 씩 웃었다.
"아직 햇병아리라 약하지만. 검의 조예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훌륭했다. 재능이 있다는 것이겠지."
"병사의 검술과 사관의 전술은 다릅니다."
"아니. 나는 녀석이 전술적 재능 또한 가지고 있다 확신한다."
"어째서입니까?"
"저걸 봐라."
천인장 그레드가 테이블 위에 자리해있는 지도를 가리켰다. 지도에는 한지훈이 배치해놨던 모형이 그대로 자리해있다.
"배치도가 어때서 그렇습니까?"
"배치 말고, 한지훈의 이동방향을 봐라. 녀석의 동선은 푸른색 잉크로 표시해 뒀으니 ."
그레드의 말에 부관은 지도를 들 여다보았고, 곧 눈을 크게 떴다.
"이건…."
"어떠나? 완벽하지 않나?"
부관은 그레드의 말에 그저 침묵했다. 그만큼 놀라운 일이었으니 .
한지훈이 이끈 십인대의 침투로는 그야말로 완벽. 아무런 결점이 없었다.
편한 길을 포기하고 산을 타면서 까지 적의 초소와 감시망을 피했다. 항상 시야의 확보가 편한 지역을 따라 이동했다.
그것은 퇴각할 때도 마찬가지.
어디든 지형적 이점이 있는 곳만을 통과했다. 적의 탐색을 의식한 듯 은신이 수월한 곳에는 여지없이 푸른 잉크가 지나쳐있다.
마치 지도를 보며 움직인 듯한 완벽한 동선.
임무인 정찰과 십인대의 귀환, 두 목표를 모두 충족하기 위한 이동경로다. 제국 사관학교를 수료한 엘리트 장교도 이리 완벽한 동선을 짜기는 힘드리라.
"어떤가?"
"… 대단하군요. 이게 정말 일개 십인장이 짠 동선이라니."
한지훈의 경로를 본부관은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는 전술적 재능 또한 출증 함을.
"하지만 그래도 백인장은 미릅니다. 상부에서도 어지간한 전공이 아니라면 인정해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건 알고 있다. 나도 당장 녀석을 백인장으로 추천하려 하는 것은 아니니."
부관의 대답에 만족한 것일까. 그레드는 의자 깊숙이 몸을 파묻으 며 말했다.
"녀석이 더 많은 전공을 세우고, 더욱 강해지면. 그때 진급시켜야겠지."
전진기지 파트라헴의 지휘관. 천 인장 그레드가 한지훈을 주시한다.
8화.
"새로 배치된 중급 검병, 아르덴 입니다."
"중급 창병 리버입니다."
"중급 검병…."
나는 복잡한 눈으로 앞을 바라봤다.
똘망똘망한 눈으로 이쪽에 경례 하는 새로운 병사들의 모습이 보인다. 모두 막 훈련소를 수료한 완전 풋내기들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베테랑인 상급 병사들에 비해선 손 색이 있는 이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내심 한숨 쉬었다.
'벌써 일주일이 지나버렸다.'
내가 그레드와 대화한 지 일주일 이 지났고, 새로운 신병이 들어와 십인대가 완전편성 되었다.
그리고 십인대가 완편되었다는 것은, 다음 퀘스트를 진행할 때가 되었다는 이야기.
입술을 짓씹었다.
'아직 능력치를 제대로 끌어올리지 못했는데 .'
근 일주일 동안 노력하긴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훈련장에서 검을 휘적거렸고, 몸을 움직여 근육을 혹 사시켰다.
그 치열한 노력 덕분에, 나는 나름의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근력 8]
[민첩 6]
[내구 4]
[체력 7]
[마나 0]
꽤나 눈에 띄는 능력치의 상승.
참고로, 처음 내가 이 염병할 게임 속 세상에 끌려 들어왔을 당시 의 능력치는 이러했다.
[근력 4]
[민첩 2]
[내구 3]
[체력 3]
[마나 0]
정말 처참한 능력치였다.
이런 허접쓰레기 능력치를 저 정도로 상승시키다니. 그야말로 일취 월장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게임 속 세상인 덕분인가. 아니 면 내 노력이 뛰어난 것일까. 능력치가 꽤나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근력, 민첩, 체력이 두 배 가량 상승했으며, 내구도 약간이나마 올랐다.
하지만 아직도 부족하다. 이 정도 능력치로는 하급 검술 스킬조차 제대로 살릴 수 없으니 .
시선을 내려 여유 포인트를 확인했다.
(남은 포인트는 15pt 입니다.)
15포인트라.
이 정도 포인트가 있다면 이번 퀘스트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십인장님."
내가 고뇌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카일이 말을 걸어왔다. 그에 시선을 돌려 녀석을 시야에 담았다.
온몸에 자잘한 자상을 가졌던 카일은 어느새 완전히 회복해있다. 근 이주일 동안 치료소에 처박혀있던 덕분이었다.
녀석이 내게 묻는다.
"지휘소에 다녀오시던데. 뭔가 새로운 임무라도 받으셨습니까?"
아까 전 내가 지휘소로 가는 것을 본 것같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품속에서 어떤 종이를 꺼냈다.
작전 지도였다.
"그래. 염병할 임무를 맡았다. 자, 모두 주목. 신병들도 편하게 와 서 봐라."
나는 지도를 십인대 숙소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열 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몰려들어 지도를 살핀다.
"또다시 척후임무 같군요."
"하지만 적진정찰이 아닌 것 같은데."
"여기는 왜 가는 겁니까?"
병사들의 의문 어린 목소리가 홀 러나온다.
그에 나는 손가락으로 지도에 표시된 지점을 하나하나 짚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여기 붉은색 화살표는 적의 예상 진군로다. 최소한 군단급의 병력 이 이쪽으로 밀고 들어오는 거지."
지도에는 두터운 붉은색 선이 여러 개 그어져있다. 군단 규모의 적 이 올 것으로 예상되는 적의 침공 로였다.
"그리고 여기. 산 위 고지대에 보이는 여러 개의 푸른 점들은, 아 군의 방어거점 후보지들이고."
나는 손을 옮겨, 다수의 푸른색 점들 중 유독 높은 곳에 있는 점을 짚었다.
"이곳이 우리가 이번에 가야 할 곳이다. 주위에서 가장 높은 시야를 지닌 곳이지."
천인장 그레드는 다수의 척후조 를 풀어, 고지대 거점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있다.
그리고 그중 우리가 가야할 곳이 바로 이곳. 접경지대에 널려있는 산 들 중, 가장 커다란 산의 꼭대기 지점이다.
"우리는 이 산의 정상이 적의 진군로를 제대로 시야에 담을 수 있는지, 그리고 안전하게 거점을 확보 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정찰을 나간다."
"… 이해가 안 되는군요. 보통 방어전을 치른다면 진군로를 틀어막는 식으로 하지 않습니까?"
내 설명이 미흡했던 걸까. 한 병사가 의문 어린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야 이해 가지 않을 것이다. 군단 규모의 적이 몰려오는데, 방어병력을 높은 산꼭대기에 배치한다니. 심지어 화살이 닿지도 않는 머나먼 곳이다. 이래서야 적의 병력이 이동 하는 것을 멀뚱히 바라볼 뿐, 전혀 방어할 수 없을 터이다.
거점에 일반 병사들이 배치된다 면 말이다.
나는 녀석의 말에 간단하게 답했다.
"우리가 확보해야 할 거점은 마법사가 배치될 곳이다."
"마법사!"
그제야 깨달은 것일까. 다시금 병사들이 지도를 시야에 담았다.
나는 지도를 보며 말을 이었다.
"이 푸른 점을 우리가 미리 정찰 하고, 이상 없이 확보할 수 있다면. 마법사들이 배치될 것이다. 추후 공국 놈들이 진군할 때 여기서 화력을 쏟아 붓는다는 거지."
나는 말하고는 병사들의 표정을 확인했다.
병사들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일 렁이고 있었다. 내 입에서 마법사라는 단어가 나오자, 그제야 그들은 전면전이 코앞임을 체감했으리라.
뭐. 두려운 것이 당연하다. 여태 껏 경험했던 소규모 국지전이 아닌, 제대로 된 전면전이 있을 터이니.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지도를 집어 들었다.
"모두 지도를 확인했겠지. 그럼 소각하겠다."
나는 품속에서 성냥을 꺼내 불을 피웠다.
타닥, 화륵. 작은 불꽃이 피어올 랐다.
그것을 지도에 떨어뜨렸다. 얇은 종이로 되어있는 지도는 순식간에 불타 재로 화했다.
제국 척후부대는 기밀을 유지하 기 위해, 이렇게 작전 실행 전 지도를 소각하도록 하고 있다.
"자. 모두 무장해라. 30분 뒤 출발한다."
나는 풀풀 날리는 재를 손바닥으로 휘저으며, 이어 말했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이번 임무는 정말 힘들 거다."
내 말에 병사들이 이해 안 간다는 눈을했다. 그야 위험한 적진정 찰도 아닌데, 괜히 힘준다고 생각하 겠지.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거점을 노리는 건 제국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갈 거점은 침공로를 옆에 끼고 있는 산의 고지대다. 인근에서 가장 높아 시야를 확보하기도, 그리고 방어하기에도 몹시 좋은 지형.
제국측만이 거점을 노릴 리 없다. 공국측 또한, 정찰과 시야 확보 를 위해서 해당 거점을 노릴 것이 분명할 터.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이번 미션에는 그 새끼 가 나오지.'
이번 퀘스트에는 빌어먹을 네임 드 유닛 놈이 하나 나온다.
게임 속에서 온갖 악연으로 다져 진 적.
놈을 마주쳐서는 안된다.
- 띠링!
[서브 퀘스트가 부여되었습니다.]
[서브 퀘스트]
[고지대 거점을 정찰, 결과를 본 진에 전달하라.]
퀘스트가 시작되었다.
* * *
"천인장님. 한지훈의 십인대가 막 출발했다고 합니다."
부관이 천인장에게 보고했다. 그에 천인장 그레드는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 이제 막 출발했나 보군."
그레드가 시선을 돌려 테이블 위 지도를 바라봤다.
지도 위,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 은 다름 아닌 이번 한지훈이 정찰 할 거점. 공국의 침공로를 관측할 수 있는 산의 고지대다.
문득 부관이 물었다.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걱정? 그게 무슨 소리지?"
"2번 척후조장 한지훈. 천인장님 께서 아끼는 병사 아닙니까? 이번 임무는 나름대로 위험할 텐데요."
부관이 시선을 지도로 옮겼다.
그가 바라보는 곳 또한 지도의 고 지대.
"공국군은 약하나 멍청하지 않습니다. 분명 그들도 고지대에 척후를 보내려 하겠죠. 아니, 어쩌면 이미 선발대를 보내 점령해놨을 수도 있습니다."
부관의 말에 그레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관측에 유리한 고지대는 공격과 방어 양측 모두에게 이점이 있는 장소였다.
방어측에서는 마법사를 보내 적을 효율적으로 타격할 수 있고, 공격측에서는 보다 유리한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
그리고 공국은 약하나 정찰 없이 진군하는 멍청이들은 아니다. 분명 놈들은 시야 확보에 유리한 고지를 먼저 점한 후, 진군하려 하리라.
즉 한지훈의 척후조는 고지대에서 공국군과 마주할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
하지만 그런 부관의 말에 그레드는 코웃음 쳤다.
"부관의 눈에는 내가 그렇게 유 한 성격으로 비쳐졌나 보군."
그레드가 지도에 박혀있는 시선을 떼, 다른 것을 바라봤다.
그가 보는 것은 벽에 걸려있는 한 쌍의 장검.
그가 병사 시절 사용했던, 수많 은 적병의 목을 벤 장검이다.
"부관. 자네도 알겠지만 나는 일반 병사로 시작해 천인장까지 올라 왔다."
부관 또한 이미 알고 있는 사실 이었다. 그레드는 병사 출신 천인장 으로서 꽤 이례적인 인물이었으니 . 그만큼 그의 이름은 군부에서 나름 유명했다.
"그리고 나는 병사일적,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겼지. 일개 병사가 천인장이 되려면 얼마나 많은 전공을 세워야 한다 생각하나?"
본래 병사가 사관 계급이 되는 것은 몹시 힘든 일이다. 엘리트주의 가 팽배한 제국에서 일개 병사란, 그저 명령을 하달받아 발로 뛰는 존재에 불과했으니 .
그렇기에 그레드는 이례적인 인물이었다. 병사라는 신분을 극복해 장교 계급에 이른 이. 제국 군부 내에서 몇 없는 병사 출신 고급 장 교였다.
"한지훈을 키울 것이다. 부관,"
그레드가 부관을 바라봤다. 부관 또한 고개를 들어 올려 그레드와 눈을 마주한다.
"대답해보게. 병사가 사관이 되려 하면 뭐가 필요하지?"
"개인의 무력과 전술적 소양 이…."
"아니. 그것 말고."
그레드가 테이블 위에 자리해있 던 서류를 들어올렸다.
"병사의 '인사고과'에 뭐가 필요 하지?"
"… 전공."
부관의 대답이 흡족한 것일까.
그레드가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 그 빌어먹을 전공이 필요하다. 아무리 강대한 무력을 가졌 든, 혹은 뛰어난 전술적 재능을 보였든. 그 실적을 상부에 증명하지 않으면 안된단 말이다."
그레드가 이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부관 말대로 나는 한지훈을 눈 여겨보고 있다. 녀석에게서 재능을 보았기 때문이지. 그 젊은 나이에 믿기지 않는 날카로운 검술. 그리고 고등 군사 교육조차 받지 않은, 일 개 병사의 것이라 보기 힘들 정도 로 완벽한 지휘 능력."
그레드가 보기에 한지훈은 막대 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젊 었을 적 가졌던 재능을 훨씬 상회 하는 , 정말 대단한 재능이.
제아무리 강군인 제국군이라 한 들, 일개 병사 하나하나에게까지 고급 검술을 가르치진 않는다. 하물며 전술적 소양은 제국 사관학교는 가 야 얻을 수 있는 것.
하지만 한지훈은 경력이 일천한 일개 병사임에도 대단한 모습을 보여 줬었다.
거의 완벽에 가까웠던 제국 검 술. 더해 단순히 훌륭하다고 형용할 수 없는 전술적 움직임까지.
"한지훈은 나처럼 평민 출신이라는 것이 아까울 정도로, 대단한 재능을 품고 있단 말이다."
부관 또한 고개를 주억여 수긍했다.
그 역시 한지훈의 작전기록을 본 적이 있기에. 녀석의 전술적 재능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녀석은 아직 병아리다. 경험이, 그리고 전공이 더 필요하다."
그레드가 서류를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서류에는 한지훈이라는 이름이 박혀있다.
"놈이 진급하고자 한다면, 스스로 의 능력을 증명해야 할 거다."
부관이 설마, 하는 눈으로 그레 드를 바라봤다.
그레드는 씩 웃었다.
"나는 녀석을 사지로 밀어 넣을 거다. 계속해 시련을 부여하고, 그 걸 극복하게 할 거다. 중분한 전공 이 쌓일 때까지 말이야."
"…허."
"죽지 않는다면 진급할 수 있겠지. 죽지만 않는다면 말이야. 뭐, 고지대 정찰이라. 적당히 몸 풀기로 좋아 보이는 임무군."
부관은 멍하니 천인장을 바라보고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지훈이라는 그 병사. 꽤나 고생하게 될 것 같군요."
부관은 잠시나마 한지훈에게 안쓰러운 감정을 느꼈다.
9화.
정오 무렵. 나와 휘하 병사들은 기지 밖으로 나와 행군을 시작했다.
막 기지 밖으로 나와 걸어가는 와중, 문득 카일이 말했다.
"저기, 아군 공병대로군요."
녀석의 말에, 나 또한 그가 주시 하고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그러자 볼 수 있었다.
이곳저곳에 각종 시설을 만들고 있는 제국 공병대의 모습. 그들은 바쁘게 움직이며 건설작업에 열중 하고 있었다.
증원될 병력이 지낼 수 있는 막 사건물. 병사들이 식사할 취사장. 주위를 감시할 망루와, 적병을 막아 낼 성벽까지.
꽤 대규모의 증축작업이다. 나는 그것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했다시피 곧 전면전이 일어날 거다. 그리고 그 최전선이 이곳 파 트라헴이다. 많은 병력이 이곳에 주 둔하게 되겠지."
과거 게임에서 경험했었다.
이 파트라헴 전진기지는 본래 천 여 명의 병사를 수용하는 것에 불과한 규모였다. 접경지대 곳곳에 흔히 널려있는 전진기지에 불과했으니 .
하지만 곧 파트라헴의 규모는 극 대화되어 , 군단 규모의 병력이 주 둔, 추후 침공군을 지원할 수 있는 대규모 병참기지로 변화하게 된다.
"정말 전쟁이로군요. 언제까지나 평화로운 줄 알았는데 ."
"하지만 그래봤자 공국 아닙니까? 아마 전쟁은 그렇게 오래가지 않을 것입니다."
"하긴, 우리 제국이 공국 따위에 고전할 리 없지."
병사들이 걸으며 두런두런 대화했다.
그들의 말은 합당했다. 공국은 약소국이고, 제국은 강대한 국력을 지닌 열강이다. 공국과의 전쟁은 순식간에 끝나버릴 것이 분명할 터.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공국과의 전쟁은 시작에 불과하다만.'
공국의 침공은 대전쟁의 프롤로 그에 불과하다.
곧 대륙 전체가 휘말려들 거대한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그야말로 수 많은 생명이 소멸하는 , 아주 거대한 전쟁이.
후우. 한숨을 내쉬며 주위의 병사들을 바라봤다.
'저들 중 몇이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내 주위에 있는 열 명의 병사들. 저들은 결코 약한 이들이 아니다. 그 강군인 제국군에서도, 한층 정예 인 것이 바로 척후조의 병사들.
하지만 앞으로 기나긴 전쟁이 일어난다. 아무리 정예인 저들이라 한들,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이는 얼마 되지 않으리라.
이후 나와 병사들은 오랜 시간 전진했다.
가고자 하는 방향은 북쪽. 그중에서도 공국군의 침공로를 한눈에 주시할 수 있는 산맥 방향이다.
그렇게 얼마나 행군했을까.
"십인장님."
해가 거의 떨어져 갈 무렵. 누군 가가 나를 불렀다. 확인해보니 이번에 새로이 배치된 신병, 하급 창병 리 버였다.
녀석이 작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곧 날이 저물 것입니다. 야영을 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리버의 의견은 타당했다. 곧 해 가 완전히 떨어지면 시야가 어두워 질 터. 슬슬 야영자리를 찾아야 하는 것이 합당한 일이니.
하지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밤이 되어도 우리는 계속 이동한다."
"계속 이동이라니… 위험합니다."
녀석은 밤중의 행군이 두려운 듯했다.
이 세상의 밤은 완전한 야생이다. 이곳저곳에 마물이 튀어나오며, 개중 포악한 종류는 인간의 마을을 습격하기도 한다.
그런 야밤에, 아무런 대비 없이 움직인다니.
당연히 두려울 수밖에.
"그리고 밤이 깊어진다면, 제대로 된 길을 찾기 힘들 것입니다. 자칫 낙오될 수도 있습니다."
더해 길을 찾는 것도 문제다.
우리가 밟아 행군하는 이 땅은 말 그대로 자연의 대지였다. 인위적인 길이나 이정표는 눈 씻고 찾아 봐도 없는.
헌데 불빛 하나 없는 이 새카만 밤. 그것도 울창한 숲속을 지도 하나 없이, 감에 의지해 움직이는 것은 어찌 보면 자살행위였다.
하지만 괜찮다. 내게는 나름의 보정이 있었으므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십인대 지휘술."
- 띠링!
['스킬 : 십인대 지휘술' 이 활성화 됩니다.]
내 시야에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이번에 떠오른 홀로그램에는 아무런 문구가 없었다. 그대신, 나름 대로 상세한 '지도'가 떠올라있다.
세세하게 표기되어있는 등고선. 가운데에 박혀있는 하얀색 점. 그리고 그 하얀색 점 주위에 자리해있는 푸른색 점들까지.
익숙한 화면이다.
게임 속 표시되던 지도. 전투를 벌일 때마다 정신없이 점멸하던 그 미니맵이 지금 홀로그램의 형태로 자리해 있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낙오될 걱정은 하지 마라. 이곳 지리는 모두 꿰고 있으니 말이야. 잘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
"……."
내 말에 리버는 입을 닫고 발걸음을 옮겼다.
슬쩍 표정을 보아하니 아직도 많이 불안해 보이지만, 어쩔 수 없다. 공국군에게 들키지 않고 이동하기 위해서는 야음을 타는 것이 최선이다.
쯧, 혀를 찼다.
'아침에 움직이는 것이 편하긴 하다만….' 사실은 나도 주간에 움직이고 싶었다. 적절히 시선이 안 닿는 지형 으로만 조심스레 이동한다면 적에 게 관측당하지도 않고, 보다 안전하 게 움직일 수 있으니 .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놈에게 걸리면. 많이 힘들어진다.'
이미션에서는 네임드 유닛이나 온다.
지금은 일개 기사 후보생 정도의 무력에 불과하지만. 아직 능력치가 낮은 내게는 그 정도만 해도 몹시 치명적이다.
'…일단 녀석을 만나지 않는 것 이 최선이야.'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였다.
현재 내 능력치로는 녀석을 상대 할 수 없다. 만약 놈과 조우한다면 목숨을 건사하기만 해도 다행이라 할 수 있으리라.
녀석을 처치하기 위해서는 더 성장해야 한다.
그렇게 나와 병사들은 천천히, 밤공기를 헤치며 행군해갔다.
* * *
"제국이 우리의 움직임을 알아차 린 것 같다."
삭막한 공간이었다.있는 것이라고는 자그마한 책상 과 약간의 병장기들. 그리고 벽면에는 커다란 지도가 걸려있는, 넓고도 공허한 방안.
그곳에 두 명의 인영이 자리해 있었다.
"필시 네놈이 놓쳤다는 척후가 우리의 움직임을 전달했던 것이겠지."
한 명의 인영은 중후한 인상을 지닌 노인이었다.
하얀색 턱수염은 기다랗고도 뻣 뻣했으며, 시선은 날카롭고도 강렬했다.
그는 화려한 의복을 입고 있었는데, 일견 그 신분이 범상치 않아보였다.
"… 죄송합니다."
그리고 노인의 맞은편에서 있는 이가 있었으니 .
갈색 머리카락을 어깨 너머로 길 게 늘어뜨린 젊은 청년이었다.
철그럭. 그가 몸을 움직여 고개를 깊게 박았다. 그러자 그가 입고 있는 중갑이 쇳소리를 일으켰다.
청년은 고개를 깊이 숙인 채. 진 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멍청한 놈'."
노인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에 청년이 입술을 잘근 씹었다.
"우리의 전쟁 계획이 완전히 노 출되었다. 모두 네 실수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한스."
노인의 말에 한스라 불린 청년은 무어라 대답할 수 없었다.
명백한 그의 실책이었다. 자신이 맡은 방면에서 제국 척후조의 침입을 저지하지 못하다니.
심지어 추격으로 보냈던 삼십인 대도 놈들에게 격파되었다.
결국 제국 척후조는 정보를 들고 무사히 귀환했고, 공국의 대규모 침공 계획을 읽어버렸다.
"첩자가 보고해오기를, 군단 규모 의 병력이 북으로 이동하고 있다 한다. 그중에는 마법사도 포함되어 있다는군."
더해 제국은 공국군의 침공을 대비하고 있는 상황.
공국의 계획과는 점점 틀어지기 시작한다.
만약 한스가 제국의 척후조를 제대로 막았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한스. 고개를 들어라."
노인의 말에 한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러자 그의 시야에 자리한 것은 노인의 눈동자. 너무나 차갑고도 날카로운 눈동자였다.
노인이 고한다.
"너는 강등이다."
"… 강등이라 하시면."
"천인장 직위를 해제하겠다. 삼십 인장부터 다시 시작해라."
덜컹.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천천히 문 쪽으로 걸어가며 말을 이었다.
"네놈에게 천인장의 자리는 아직 이른 것 같군. 삼십인장으로 시작해 네 능력을 중명하고, 실수를 만회하라."
노인이 문고리를 잡았다.
"먼저 시야가 보장된 고지대를 확보해 놔라. 고작해야 십인대 수준 의 임무다. 이 정도는 할 수 있겠지."
"…하겠습니다."
"쓸모없는 녀석."
쿵. 노인은 말을 남기고는 문밖 으로 나가버렸다.
적막한 공간 속. 혼자 남은 청년 이 나직이 읊조렸다.
"반드시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아버지……"
청년의 이름은 한스 요한바르첸.
그는 요한바르첸 공국의 후계자였다.
한스는 천천히 일어나, 벽에 걸 린 지도를 주시했다.
지도에는 확보해야 하는 고지대 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날이 밝아갑니다."
한 병사가 그리 말했다. 그에 시선을 돌려 동쪽을 바라보니 해가 서서히 떠오르고 있다.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만나지 않았어.'
저번 게임을 했을 때는, 이동 중에 그네임드 적을 만났었다. 덕분에 게임오버 될 뻔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나는 야음을 타 행군했고, 그런 노력 덕분에 이동하는 와중에 놈과 조우하지 않았다.
이제 남은 건 목표지역을 탐색하고 귀환하는 것뿐.
"자. 이제 고지대를 확보하러 간다. 다들 무장 점검해."
나는 그리 말하고는 검을 뽑아들었다.
스르릉. 오랜만에 듣는 서늘한 소리.
몇 번을 들어도 그다지 익숙해지 지 않는다.
"이상 있는 병사 보고해."
"좋아. 아무도 없군. 이동하자."
나는 한 손에는 검을, 다른 한 손으로는 나무를 짚어가며 이동했다.
날이 밝은 덕분일까. 병사들의 이동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밤새 걸었기에 피로한 기색은 있었지만, 그럼에도 움직여야 한다.
'녀석이 나타나기 전에 정찰하고 가야 해.'
아마 그네임드 적 또한 고지대 정찰 임무를 맡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게임에서 마주칠 일이 없었 으니까.
하지만 내가 먼저 해당 구역을 확인하고 돌아간다면.
그렇다면 녀석과 마주치지 않고 무사귀환 할 수 있다.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나와 병사들은 빠른 속도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 한계에 근접한 것일 까.
"십인장님. 더 이상 걸을 수 없습니다."
"휴식?취해야 합니다!"
병사들이 가쁜 숨을 헐떡이며 휴식을 요청해왔다.
마음 같아선 들어주고 싶다. 적 절한 휴식을 취해야 일정 이상의 전투력을 유지할 수 있으므로.
하지만 들어줄 수 없는 요청이다. 지금 잠깐 힘든 것이 전투에서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물론 나도 힘들다.
혹사당한 다리의 근육과 관절은 비명을 내지르고, 전신에는 땀이 쉼 없이 흐른다.
허나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는 노릇.
나는 가장 앞장서 산을 타고 올라갔다. 그에 병사들은 어쩔 수없이 내 뒤를 따라온다.
그렇게 우리 십인대는 쉴 새 없이 산을 올랐고, 곧.
"…도착했다."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탁 트인 시야. 청아한 산꼭대기 의 공기.
고개를 들어 올려 하늘을 바라봤다. 벌써 정오인 것일까. 태양은 어느새 머리 위에 자리해있다.
"좋아. 시야 상태 확인하고. 주위에 적 있는지 찾아봐."
"알겠습니다."
나는 병사들을 시켜 주위를 정찰 하게했다.
곧 열 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이곳저곳을 들쑤시며 적병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한동안 수색하던 병사들이 하나둘 보고해왔다.
"적의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곳은 안전합니다."
"… 좋아. 훌륭해. 아주 좋아."
내 입가에 절로 만족스러운 미소 가 번져나갔다.
병사들이 별다른 흔적을 못 찾았다는 것은, 네임드 유닛 놈이 아직 이곳에 안 왔다는 소리였다.
정말 다행인 일.
이제 시야 상태만 확인하고 기지 로 복귀한다면,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칠 수 있으리라.
나는 산 아래. 탁 트인 시야를 내려다보며 읊조렸다.
"시야 상태 매우 좋음. 적의 침공로를 완전히 포착 가능한 위치. 마법사 배치에 최적… 적의 흔적 없음. 지형의 이점 덕에 먼저 점령 한다면 비교적 수월하게 방어 가능."
내 눈으로 이곳을 분석한 내용이다.
귀환해서 천인장에게 똑같이 읊 어주기만 한다면, 내 임무는 완벽하 게 끝난다.
고개를 끄덕이며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정찰은 끝났다. 이제 귀환한다. 모두 철수 준비해."
"… 십인장님."
하지만 어째서인가.
병사들의 표정이 안 좋아 보인다.
문득,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 쳤다.
'설마.'
주먹을 꽉 쥐었다.
제발 아니기를.
"적 병력을 발견했습니다."
망할!
나는 눈동자를 굴려 시야 한 켠에 떠올라있는 미니맵을 바라봤다.
미니맵의 끝단, 병사들의 시야가 가까스로 닿는 그곳에 붉은색 점이 하나둘 등장하고 있다.
"규모는 약 삼십인대."
병사의 보고가 이어진다. 그리고 미니맵에 자리해있는 붉은색 점이 더더욱 늘어났다.
이 정도면 삼십인대 수준.
나는 앞으로 달려 나가, 병사들 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을 주시했다.
그러자 보였다.
"적들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저 산 아래, 자잘한 수풀과 나무 를 헤치며 올라오고 있는 적병의 무리.
삼십여 명의 적. 그리고 그중 유 일하게 중갑을 착용한 귀티 흐르는 놈. 기다란 갈색 머리.
모니터에서 봤던 모습이지만, 낯 익다.
"빌어처먹을."
아무래도 네임드 유닛과 만나버 린 것 같다.
나는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모두 전투준비."
이런 일이 없었으면 싶었는데 .
아무래도 네임드 유닛과 싸워야 할 것 같다.
나는 이를 강하게 악물었다.
10화.
주위에서 병사들이 검을 뽑아들었다. 스르릉, 하는 시린 소리가 일 렁 인다.
시선을 내려 산을 타고 올라오는 공국의 병사들을 바라봤다.
경갑조차 착용하지 않은 조잡한 무장 상태. 제대로 된 군사 교육을 받지 않은 듯, 허술한 경계태세까 지.
내가 보아왔던 공국군의 모습 그대로가 자리해있다.
허나 공국군 모두가 허약한 놈들 인 것은 아니다.
놈들의 가장 선두에 있는 놈을 주시했다.
익숙한 모습이다. 입고 있는 것은 질 좋은 중갑, 귀태가 흐르는 외모에, 남자인 주제에 계집마냥 길 게 기른 갈색 머리까지.
내가 녀석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 띠링!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한스 요한바르첸][공국 삼십인장]
익숙하고도 증오스러운 놈의 이름.
그것이 내 시야 속 홀로그램으로 표시되어 있다.
으득, 이를 갈았다.
'지긋지긋한 새끼.'
녀석의 이름은 신물이 나도록 많이 봤었다. 그만큼 게임에서 자주 마주쳤던 놈이니.
한스 요한바르첸.
공국의 후계자였으나, 결국 일가 가 모조리 죽고 공국이 멸망당해 내게 증오심을 품은, 게임 속 나의 대적자 같은 녀석.
놈은 게임 내내 이쪽을 괴롭혀 왔었다.
나는 악연으로 점철되어있던 그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한스 요한바르첸][공국 삼십인장]
["녀석을 죽여라."]
처음 녀석과 조우했을 때.
[한스 요한바르첸][공국 천인장]
["여기서 또 만나는군, 한지훈. 이번에는 정말 죽여주지."]
나중에, 제국과 공국군이 본격적 으로 전쟁을 벌일 때.
[한스 요한바르첸][공국 군단장]
["…결국 우리 공국은 멸망하는 가. 허나,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한지훈! 네놈을 죽여 버리겠다. 반드시, 내 목숨을, 영혼을, 나의 모든 것을 걸고!"]
공국이 멸망할 때.
[한스 요한바르첸][연합군 남부 사령관]
["막다른 길이로군… 이것이나 의 최후인가."]
놈을 마침내 사로잡아, 목을 칠 때.
지독한 놈이다.
놈은 자신의 세력이, 그리고 가 진 병력이 모조리 죽어 갈려나가도 매번 빠져나가 후일을 도모했다. 그리고 이전보다도 더욱 강대한 힘과 세력을 가진 채 내 앞에 나타나곤했다.
게임 초창기부터, 까마득한 극후 반까지.
항상 나를 가로막았다. 공국을 멸망시켰던 내게 복수하기 위해서.
그만큼 녀석의 복수는 집요하고 도, 성가셨다.
쯧. 혀를 찼다.
'…최대한 성장한 뒤에 놈을 만 났으면 했는데 .'
녀석과 마주하는 걸 피하고 싶었다. 너무나 성가시고 집요한 놈이었 으므로. 가진 능력을 키워, 단번에 죽여 버리려 했었다.
후환을 없애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내 계획은 파탄 나 버렸다. 지금, 놈은 내 앞에 자리해 있다.
어쩔 수 없다. 싸울 수밖에.
후우.
크게 한숨을 내쉬고, 읊조렸다.
"민첩. 10포인트 상향."
포인트. 아끼고 싶었다.
하지만 네임드 유닛과 싸움이 목 전이다.
지금은 망설임 없이 포인트를 사용해야 할 때.
- 띠링!
['능력치 : 민첩'을 10포인트 상향합니다.]
[상향에는 10pt가 필요합니다.]
[상향하시 겠습니까?]
[수락/거절]
"수락."
곧 변화를 느꼈다.
몸이 가뿐해지고, 발놀림이 경쾌 해졌다. 마음만 먹는다면 바람같이 빠르게 달릴 수 있을 것만 같다.
신기한 감각이었다.
이토록 단숨에 내 신체가 발전하다니.
하지만 아직 포인트는 남아있다. 재차 읊조렸다.
"근력. 5포인트 상향."
- 띠링!
['능력치 : 근력'을 5포인트 상향 합니다]
[상향에는 5pt가 필요합니다]
[상향하시겠습니까?]
[수락/거절]
"수락."
다시금 내 신체가 변화했다.
들고 있는 검이 가벼워졌다. 몸에 걸치고 있는 경갑이, 마치 천 쪼가리처럼 느껴졌다.
민첩과 근력의 상승.
나는 보다 진보한 내 능력치를 확인했다.
[근력 13]
[민첩 16]
[내구 4]
[체력 7]
[마나 0]
모든 포인트를 근력과 민첩에 꼴 아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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