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mensional 23

겠지?’
소파에 앉아 잠깐 고민하던 수호가 몸을 일으켰다.
윌슨이 물었다.
“수호, 어인족 세상에서 돌아온 지도 얼마 안 됐는데, 또 어딜 가려고?”
“여왕을 고쳐야 하거든… 영혼의 상처라니까 보통 방법으로는 안 될 것 같아서, 물어보려고.”
“물어봐? 누구한테?”
“내 지인(?) 중에 제일 오래 산 존재?”
말을 마친 수호가 냉장고로 다가갔다.
냉장실 속.
엘프 도시 레드우드의 풍경이 보였다.
“아, 어머니 나무!”
“응, 금방 다녀올게.”
말을 마친 수호가 【차원 여행】을 사용했다.
* * *
모처럼 들른 레드우드.
수호는 녹음이 우거진 풍경을 잠시 감상하다가, 걸음을 옮겼다.
도시 저편 거대한 나무가 가까워졌다.
“요즘은 정말 살맛 난다니까.”
“맞아. 정말 하루하루가 즐거워.”
“으흐흐, 특히 밤이 더 즐겁지!”
“이게 다 위대하고 고귀하신 우리 정령님 덕분!”
“나는 아침저녁으로 기도해. 우리 정령님께 행운이 가득하라고.”
엘프들의 대화를 들으며 얼마나 걸었을까.
갑자기 목소리가 뚝 끊겼다.
하나같이 움직임도 멈췄다.
저벅저벅- 수호의 발소리만이 울렸다.
묘한 분위기.
수호가 걸음을 멈췄다.
“맞지? 확실하지?”
“맞아! 진짜로 정령님이셔.”
누군가의 속삭임이 기점이 되었다.
봇물 터지듯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와아- 정령님이 오셨다!”
“레드우드의 은인이 돌아왔다!”
“정령님! 왜 이렇게 오랜만에 오셨어요?”
“같이 다니시던 드래곤님은 어디 두고 혼자 계세요?”
“정령님! 식사 안 하셨으면 우리 집에서…….”
울려 퍼지는 환성 속에서 수호가 대답했다.
“하하, 반갑습니다, 여러분.”
좀 자주 올 걸 그랬나.
어쨌든 이렇게 반겨 주니 기분이 좋다.
한동안 인파에 둘러싸여 있을 때 누군가 달려왔다.
시장인 선예였다.
“정령님! 방문하실 거면 미리 말씀해 주시지 그러셨어요? 그랬으면 준비를 할 텐데.”
“갑자기 어머니 나무님을 뵐 일이 생겨서요. 그런데…….”
대답하던 수호의 눈에 무언가 걸렸다.
수호가 시장에게 물었다.
“쟤들은 왜 데리고 다니십니까?”
떡갈나무 마을부터 레드우드까지의 여정을 함께했던, 국영수 트리오.
그중 영식과 수철이 시장의 뒤에 서 있었던 것이다.
시장이 입을 떼기도 전에 그들이 끼어들었다.
“하하, 정령님! 저희 경비대 됐어요.”
“정령님한테 싸우는 법을 배운 덕분이에요.”
어, 그래.
시장이 물었다.
“혹시 바로 어머니 나무께 가시겠습니까? 정령님 덕분에 힘을 회복하셔서, 요즘은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시거든요.”
“네, 그런 것 같네요.”
세쿼이아가 활발하다는 것은 진즉 깨달았다.
『이놈의 자식, 여태 그걸 못해? 머릿속에 뇌 대신 도토리만 가득 찼냐? 몇 번을 가르쳐 줬는데, 아직 못하는 거야! 이 호박씨 발라먹을 자식아!』
레드우드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원기 왕성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으니까.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 *
『내가 약간 흥분했더니, 우리 수호 님이 오신 걸 미처 몰랐네. 호호호-』
“…네. 건강해 보이셔서 좋습니다. 하하.”
『그렇죠? 아니, 내가 웬만하면 흥분을 안 하려고 그랬는데, 저 빡… 저 녀석이 워낙에 말귀를 못 알아먹어서 그래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 건 고사하고, 하나 깨우치는 데도 한나절이 다 지나가니까. 호호-』
세쿼이아가 가지를 파르르 떨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낯익은 얼굴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흐흐, 정령님. 저 국진이가 바로 레드우드의 새 제사장입니다! 아직은 수습이지만요.”
국영수 트리오의 수장(?), 떡갈나무 마을 출신 국진이었다.
그는 그렇게 욕을 먹고도 좋은지,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출세했네, 근데 너희 셋 다 마을로는 안 돌아갔네?”
“도시 물 먹었다고, 시골로는 못 돌아가겠지 뭡니까. 제사장의 반지가 저한테 잘 맞기도 했고요.”
[제사장의 반지]는 수호가 거대 슬라임 뱃속에서 찾아낸 전전대 제사장의 유품.
재능 있는 엘프에 한해 어머니 나무의 목소리를 듣게 해 준다.
“그랬구나. 축하해.”
“전부 정령님 덕분입니다. 제가 조금만 더 성공해서 은혜 꼭 갚을 테니까. 기다려 주십시오.”
“그래.”
수호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대화 잘 나누시고요,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국진이 눈치껏 자리를 비켰다.
어머니 나무가 용건을 물어 왔다.
『우리 수호 님이 몸소 찾아온 걸 보니 나한테 긴히 할 말이 있어 보이는데, 뭐든 말해 봐요. 안 그래도 요즘 몸이 근질근질해서 힘을 좀 쓰고 싶었던 참이야. 호호-』
“힘쓰실 일은 아니고요. 여쭈고 싶은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그래요? 어서 물어봐요.』
“혹시 영혼에 입은 상처를 회복하는 방법에 대해 아시나요?”
수호는 어인족 여왕이 당한 일과 증상에 대해 설명했다.
이야기가 끝나자 세쿼이아가 목소리를 전해 왔다.
『수호 님은 그사이에도 다른 분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고 있었군요. 역시.』
“어쩌다 보니, 하하. 혹시 치료할 방법이 있을까요?”
『음- 미안하지만 내 힘으로는 치유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영혼이란 그만큼 굉장히 민감하고 상서로운 것이라.』
“아…….”
『아마 어머니께서는 치료하실 수 있을 테지만…….』
“세계수님이요?”
『네, 세계수님이요. 그분께서는 필멸의 굴레를 벗어난 분, 영혼의 상처도 고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분의 안위조차 파악되지 않은 상황이라.』
원정대가 아직 세계수에 닿지 못했다.
세계수의 도움을 바라는 건 무리였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미안해요. 나로서는 역부족이에요. 다만…….』
“……?”
『생명의 그릇이 있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네요.』
“생명의 그릇이요?”
『생명을 담도록 만들어진 물건이에요. 워낙 희귀해서, 수호 님도 본 적은 없을 거예요.』
높은 경지에 다다른 존재가 공들여 만들어 내야 하는 물건이라.
덧붙이는 세쿼이아에게 수호가 되물었다.
“그게 있으면 영혼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건가요?”
『내 힘으로 영혼을 치유할 수 없지만, 순수한 자연의 생명력을 그릇에 담아 줄 수는 있어요. 그것을 환자에게 전하면, 상태가 호전될 거예요.』
세쿼이아가 말을 끝냈다.
수호의 눈빛이 빛났다.
“생명의 그릇이라.”
이거 왠지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135화 습격 (1)
엘프 도시에 다녀온 다음 날 아침.
수호는 발룡이와 마주 앉았다.
“발룡아, 가자.”
『싫다.』
“어째서? 어차피 더 잃을 것도 없잖아?”
『싫은 것은 싫은 것이니라.』
“금세 다녀올 수 있을 텐데… 혹시 뭐 감추는 거라도 있어?”
『본좌는 떳떳한 드래곤이니라!』
“흐음, 레어 한번 돌아보자는 게 그렇게 싫어? 리치가 남겨 놓은 게 있는지 찾아보자니까. 너도 딱히 손해 볼 것 없잖아? 아! 혹시 필요한 거라도 생긴 거야?”
『…….』
그럼 그렇지.
“오케이, 말해 봐. 나쁜 일만 아니면 들어줄 테니까.”
한동안 눈알을 굴리던 발룡이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핸드폰, 정상적으로 개통된 핸드폰이 필요하느니라!』
수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상한 짓 하려는 건 아니지?”
『무, 물론이다.』
“지금 가지고 있는 폰으로도 웬만한 건 다 될 텐데?”
배달 앱이 깔린 발룡이의 핸드폰은 수호가 예전에 쓰던 것으로, 와이파이를 이용하면 웬만한 기능은 다 사용할 수 있다.
『이, 인증이 필요하단 말이다.』
발룡이는 주민 등록 번호도 없고, 전화번호도 없다. 인터넷 사이트 인증이 불가능하다.
“어딜 그렇게 가입하려고? 어차피 배달 앱만 들여다보면서.”
『그런 게 있느니라. 줄 것이냐 말 것이냐?』
수호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딜. 대신 오늘 잘 협조할 것.”
단, 핸드폰으로 이상한 짓 하다가 걸리면 무조건 압수다.
수호의 선언에 발룡이가 파닥 날아올랐다.
『좋다, 가자! 크큭- 위대한 본좌의 보금자리를 구경시켜 주도록 하마.』
어, 그래.
근데 전에 한 번 봤단다.
“근데 어째 말투는 원래 대로 돌아왔네?”
발룡이가 움찔했다.
『마, 말투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느니라.』
“…그래.”
말투가 뭐가 중요하겠어.
사고나 안 치면 다행이지.
수호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파에서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윌슨이 다가왔다.
“수호, 발룡이 님의 레어에 가려고?”
“응. 어인족 여왕을 치료하려면, 생명을 담는 아이템이 필요하다네.”
리치.
라이프 베슬에 생명을 따로 보관하여, 불사不死를 이룬 존재.
발룡이의 레어는 원래 그 리치의 던전이었다.
영혼이나 생명과 관련된 물건이 남아 있을 수도 있다.
“그렇구나. 가게는 내가 볼 테니 마음 놓고 다녀와.”
“땡큐, 그럼 갔다 올게.”
밝게 인사한 수호가 발룡이에게 고갯짓했다.
파닥.
날아오른 발룡이가 수호를 뒤따랐다.
“티격태격해도, 잘 어울린다니까.”
그럼 나는 가게 오픈 준비나 해 볼까?
윌슨이 싱긋 웃으며 가게로 향했다.
* * *
드워프 마을, 성 안.
수호와 발룡이가 나타났다.
“앗! 거인님이다!”
“어? 정말?”
“거인님 오셨다아아-!”
“안녕하세요, 거인님!”
수호를 발견한 드워프들이 저마다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네, 안녕들 하세요.”
수호가 마주 인사하고 있을 때, 저편에서 누군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오오- 거인님, 오셨습니까!”
붉은 망치 드워프 족장 타룽가였다.
그 뒤로 달콩과 블톤, 새로 합류한 바순까지 족장들이 줄줄이 달려왔다.
“족장님들도 안녕하셨어요?”
“저희야 거인님 덕분에 늘 안녕하지요. 껄껄- 근데 오늘은 무슨 일로 이렇게 직접 찾아오셨습니까?”
“잠깐 발룡이 레어에 들러야 해서요.”
“아! 혹시 또 무슨 위험한 일이라도……? 저희가 돕겠습니다. 뭐든 시켜만 주십시오!”
타룽가의 선창에 나머지 족장들도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수호가 웃으며 대답했다.
“위험한 일은 아니고요… 그냥 좀 둘러보려고요. 하하- 굳이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다니 다행이군요. 껄껄-”
한동안 대화를 나눈 후, 수호가 막 레어를 향해 나서려 할 때.
타룽가가 슬그머니 입을 뗐다.
“저, 거인님. 혹시…….”
“왜 그러세요?”
“저도 함께 가면 안 되겠습니까? 요즘 성안에만 있었더니, 좀이 쑤시는군요. 폐를 끼치지는 않겠습니다!”
달콩과 블톤이 정찰대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타룽가는 성을 지켰다.
좀이 쑤실 만도 했다.
바순이야 합류한 지 얼마 안 되었고.
‘타룽가 님 실력이면… 방해되지는 않겠지?’
벌목용 도끼로도 여유롭게 오크 머리통을 쪼개던 타룽가다.
지금은 번듯한 전투용 장비를 마련한 상태.
폐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명장의 안목을 빌릴 수도 있을 테고.
“그럼 같이 가죠.”
“으하하하- 감사합니다! 드디어 제게도 거인님과 대모험을 떠날 기회가 오는군요.”
뭐, 대모험까지야.
“거인님, 저도…….”
“요즘 성에 별일도 없고…….”
“저, 저도.”
나머지 세 족장도 슬그머니 나섰지만.
“오늘은 타룽가 님과 다녀오겠습니다. 나머지 분들은 다음에 함께 가요.”
수호의 말에 다들 토를 달지 않고 물러섰다.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타룽가 자네도 너무 들뜨지 말게나.”
“내가 어린앤가? 집이나 잘 지키고 있게.”
그렇게 타룽가까지 합류한 일행은 드워프 성을 나섰다.
* * *
몇 시간 후.
배틀 웨건을 타고 달린 일행은 곧 레어가 있는 산맥에 다다랐다.
『열려라!』
발룡이의 마법에 따라, 산맥에 구멍이 뻥 뚫렸다.
타룽가가 목소리로 말했다.
“드래곤의 레어라니, 정말 가슴이 두근두근합니다. 껄껄-”
얼굴에 수염을 대걸레처럼 드리운 아저씨가 두근두근 이라니.
“가죠.”
수호는 어이없이 웃으며 앞장섰다.
발룡이가 머리 옆에서 방향을 지시했다.
『저쪽 통로다. 자세히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그쪽에 뭔가 있을 것이니라.』
발룡이는 레어 중앙 공동을 차치하고 공간 이동으로 드나들었을 뿐, 변두리는 손대지 않았다.
레어 외곽.
리치가 설치한 함정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오케이, 뭐 있으면 미리 말해 주고.”
『알았느니라.』
발룡이가 고분고분 협조했다.
* * *
『저기 앞, 바닥에 함정이 설치되어 있느니라, 난쟁아. 밟았다가는 오븐에 구운 치느님처럼 될 것이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드래곤님. 껄껄-”
타룽가가 웃으며 함정이 설치된 곳을 훌쩍 뛰어넘었다.
수호도 함정을 피해 나아갔다.
‘별로 어렵지는 않네.’
발룡이가 함정을 미리 간파한 덕분이었다.
그렇게 함정을 헤치며 얼마나 나아갔을까.
『여기가 본좌가 말한 곳이니라.』
레어의 변두리 중, 가장 농밀한 기운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수호는 발룡이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봤다.
두꺼운 철문이 통로를 막고 있었다.
“열 수 있어?”
『상당한 수준의 잠금 마법이 걸려 있지만, 크큭- 본좌의 전능안 앞에서는 한 줌의 가치도 없는 것일 뿐… 열려라!』
철컥!
발룡이의 몸에서 마력이 흘러 나간다 싶은 순간, 잠금이 풀렸다.
문이 저절로 열리기 시작했다.
“키이이이이-”
문 너머에서 괴이한 소리가 흘러 나왔다.
“저런 게 있으면 열기 전에 미리 말했어야지!”
『본좌도 몰랐다. 문에 수준 높은 마력 차단 결계가 설치되어 있었느니라. 그것까지 해제하기에는 마력 소모가 너무 컸단 말이다!』
레어를 여는 데 마력이 크게 소모된다.
이전번에는 승격의 고양감으로 인해 마력이 일시적으로 증폭된 덕에, 넉넉히 문을 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빠듯했다. 통로를 돌파하는 동안에도 마력이 소모됐고.
발룡이로서는 지당한 변명이었다.
“됐어, 보조나 해!”
수호가 누더기처럼 몸을 이어 붙인 괴물을 향해 달려 나갔다.
“크하하- 저도 돕겠습니다, 거인님!”
타룽가가 도끼를 뽑아 들고 그 뒤를 쫓았다.
* * *
몬스터가 쓰러졌다.
[네임드 몬스터 누더기 키마이라를 처치하셨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레벨 업!]
[근력이 1 증가합니다.]
[화염 저항이 1 증가합니다.]
메시지를 보며 수호가 빙긋이 웃었다.
‘레벨 업까지? 쏠쏠한걸.’
전투는 제법 격렬했지만 위기는 없었다.
덕분에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은 느낌?
수호가 즐거운 기분을 만끽하고 있을 때, 타룽가가 다가왔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거인의 격노가 거인님의 손에서 더 빛이 나는군요.”
무기를 만든 장인으로서 가장 뿌듯한 순간.
그것은 무기가 뛰어난 전사의 손에 들렸을 때다.
마치 그렇게 말하듯, 타룽가의 표정에 흐뭇함이 가득했다.
“워낙 뛰어난 녀석이라, 제가 업혀 가는 느낌인 걸요.”
“그럴 리가요. 껄껄-”
전투의 흥분을 가라앉힐 겸, 약간의 대화가 오간 후.
“그럼 들어가죠. 발룡아, 또 뭐 있는 거 아니지?”
『함정이나 몬스터는 없느니라. 안에서 상당한 기운이 느껴지니, 살펴보도록 하여라.』
오, 발룡이가 저렇게 말할 정도니.
기대되는걸.
수호가 서둘러 방 안으로 들어섰다.
어슴푸레한 조명 아래 음침한 전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리치의 연구실인가 보네.”
곳곳에 마법 연구를 한 듯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다른 곳엔 별것 없다. 저기서 가장 강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느니라.』
발룡이가 방 끝자락에 놓인 상자를 가리켰다.
수호가 그곳으로 다가갔다.
상자는 뚜껑이 깨어진 상태.
그 바람에 흘러나온 것인지, 상자 앞에 하얀색 판때기가 떨어져 있었다.
“이건 뭐지? 철판인가? 묘한 느낌이네.”
수호가 발룡이를 바라봤다.
마법적인 장치가 되어 있는지 묻는 시선이었다.
발룡이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으음…….』
“왜?”
『일단 살펴보거라, 위험은 없으니.』
수호가 판때기를 주워 들었다.
무겁다.
같은 부피의 철판보다 몇 배는 더.
무게를 체감하는 사이, 수호의 눈앞에 설명이 떠올랐다.
수호가 눈을 치떴다.
판때기의 정체는 놀라웠다.
[조각난 화이트 드래곤의 비늘]
- 전투 중에 떨어져 나온 화이트 드래곤의 비늘이다. 강한 충격으로 부서졌다. 오랜 시간 방치되어 본래의 격을 대부분 상실했지만, 드래곤 특유의 기운이 약간은 남아 있다.
- 재료 아이템
- 아이템 등급 : 영웅
- 내구도 1,999
“드래곤의 비늘!”
수호가 놀라 외쳤다.
타룽가가 깜짝 놀라 물었다.
“이게 드래곤의 비늘이란 말씀입니까?”
“그런 것 같아요. 근데 오래 방치되는 바람에 많이 상했다네요.”
“제, 제가 한번 만져 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수호가 드래곤 비늘을 건넸다.
어차피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드워프에게 맡겨 무언가로 재탄생할 물건.
건네지 못할 이유가 없다.
『상자 안에 뭔가 더 있느니라.』
드래곤 비늘을 본 탓일까.
발룡이가 어딘지 무거워진 음성으로 말했다.
수호가 상자 안을 살폈다.
‘구슬?’
그곳에 있는 것은 주먹만 한 구슬.
한데 중앙에 크게 금이 가 있었다.
느껴지는 기운도 썩 활기차지 않다.
찜찜한 느낌에 수호가 발룡이를 바라봤다.
“건드려도 괜찮을까?”
『뭔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흐음… 이리저리 자극해 봐도 반응이 없다. 만져도 무방하느니라.』
수호가 구슬을 집었다.
이번에도 설명이 떠올랐다.
[리치 로드의 부서진 라이프 베슬]
- 리치 로드가 생명력을 보관하던 그릇이다. 담겨 있던 생명력은 모두 빠져나간 상태. 생명을 보관하는 기능은 남아 있지만, 부서진 탓에 기운이 샌다. 잠깐이라면 괜찮을지도?
- 아이템 등급 : 영웅
- 【생명 수납(제한)】
- 수리 불가
- 내구도 50
【생명 수납(제한)】
- 생명력을 보관한다.
- 라이프 베슬의 파괴로 기술의 격이 크게 훼손되었다.
- 지속 시간 10분.
“이거다!”
리치의 라이프 베슬.
비록 부서졌고 수리할 수 없지만, 수호가 원하던 아이템이 딱 나와 준 셈.
‘운이 좋았어.’
이제 세쿼이아에게 생명의 기운을 얻으면, 여왕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드래곤 비늘을 살피던 타룽가가 다가왔다.
“오- 그것도 굉장한 기운이 느껴지는군요!”
눈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수호가 베슬을 내밀었다.
“한번 보시겠어요?”
“껄껄, 그럼 감사히 구경하겠습니다.”
타룽가가 베슬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발룡이가 소리친 것은 그때였다.
『잠깐! 뭔가 반응이……!』
늦었다.
경고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타룽가의 손이 베슬에 닿았다.
화아악-
베슬에서 쏟아져 나온 자줏빛 광채가 온 방을 뒤덮었다.
* * *
딸랑-
가게 문이 열리고, 손님이 들어왔다.
원격으로 공방 설비를 조종하던 윌슨이 눈을 떴다.
손님의 모습이 보였다.
희끄무레한 백발의 노인이었다.
웃는 듯 올라간 입꼬리와 달리 무감정한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온 순간.
오싹.
“…어서 오세요, 손님.”
윌슨은 있지도 않은 심장이 덜컥 떨어져 내리는 듯한 심정을 숨기며 태연히 인사를 건넸다.
136화 습격 (2)
라이프 베슬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온 방을 채웠다.
대처하기에는 너무 갑작스러웠다.
수호와 일행은 빛에 휩싸였다.
‘도대체…….’
만취한 듯 정신이 아득해진다.
감각도 흐릿하다.
곧 빛이 사그라졌다.
정신과 감각이 돌아왔다.
수호는 주변을 살폈다.
‘여긴 어디지?’
사방이 보랏빛으로 물든 공간이었다.
마치 보라색 구슬에라도 들어온 듯, 주변 풍경이 흐릿하게 보였다.
문제는 ‘보랏빛 광경’이 아니었다.
‘몸이 잘 안 움직여.’
반응이 늦다.
격류 속에 던져진 듯, 저항감이 느껴졌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주변에 발룡이와 타룽가가 느껴진다는 것 정도.
“아이고, 여긴 도대체…….”
『제기랄, 난쟁이에게 닿으면 발동하는 마법이었을 줄이야.』
당황한 타룽가의 목소리와 발룡이가 툴툴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거다.
그때, 수호는 또 다른 존재가 근처에 있음을 깨달았다.
고개를 돌렸다.
저편, 희끄무레한 그림자가 보였다.
그것으로부터 소리가 흘러나왔다.
- 네 것이 아니다! 너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한 서린 음성이었다.
심령으로 곧장 쏘아 보내는 듯한.
그러면서도 발룡이나 어머니 나무의 것과는 또 다른 형식의 목소리였다.
『저놈은 리치의 사념이다.』
발룡이가 상황을 전했다.
“사념이라고?”
『죽으며 남긴 영혼의 찌꺼기다. 그것을 매개로 마법을 걸었느니라. 드워프가 베슬에 닿으면 발동하는 마법을… 젠장, 본좌의 전능안을 속이다니…….』
보랏빛 공간 자체가 놈의 사념체.
놈의 정신에 통째로 집어삼켜진 상태와 비슷하다.
발룡이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사이에도 사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 이 난쟁이 년! 나의 것이다! 나야말로 ■■의 주인이다! 나야말로 ■■를 가져 마땅하다는 말이다!
중간중간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가 끼어 있었다.
‘어째서 저 단어만……?’
【소통】 스킬로도 이해가 안 된다.
분명히 특별한 이유가 있을 터.
하지만 고민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 네년의 난쟁이 따위보다 내 죽음의 군단이야말로 ■■■의 ■■■■에 훨씬 어울린다.
처절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마디마디 원망이 배어 나왔다.
원망은 차차 분노가 되더니.
- 내놓아라! 내놓아라! 내놓아라아아아아아-!
광기가 되고.
- 내놓지 않는다면, 죽이겠다! 죽여서 빼앗겠다!
이내 살의로 변했다.
그 순간.
번쩍-!
놈으로부터 자줏빛 광선이 일행을 향해 쏘아졌다.
『정신 공격이다, 수호. 대비를! 보호하라!』
발룡이가 경고했다.
동시에 마력을 움직여, 일행 앞에 방어 마법을 시전했다.
몸이 민활하게 움직이지 않는 상황.
피하는 건 불가능하다.
‘정신 방벽!’
빠르게 판단을 내린 수호는 즉시 【정신 방벽】을 발동, 반격을 시전했다.
가각-
심령의 칼날이 자줏빛 광선을 갈랐다.
완전치 못했다.
잘린 듯하던 광선이 이어지더니, 발룡이의 방어막을 관통.
일행의 몸을 강타했다.
“쿠헉-”
타룽가가 고통에 신음을 흘렸다.
『큭- 감히 사념 따위가!』
발룡이도 타격을 받은 듯 이를 갈았다.
수호 또한 정신이 아찔한 고통을 느꼈다.
‘크윽- 안 통해, 모자라.’
【정신 방벽】의 ‘반격’은 대상과 수호의 마력 양과 운용 능력에 따라 성패가 결정된다.
이번에는 마력 양과 운용 능력이 충분치 못했다.
사념의 힘이 강했다.
반격이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완전한 실패는 아니었다.
‘놈의 광선이 잘리긴 했어… 곧 다시 이어졌지만.’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경계.
그곳을 기점으로 아주 약간 실패 쪽으로 기울어진 상태였다.
- 크크크크크, 난쟁이 년아. 맛이 어떠냐! 네년도, 네년의 하찮은 흰색 도마뱀도 모조리 죽여 내 노예로 삼아 주마. 내가 ■■■가 될 것이다! 내가 ■■■ 전장으로 나갈 것이다!
득의양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도 이해되지 않는 단어들이 드문드문 섞였다.
의미심장했다.
추측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번쩍-!
광선이 다시 쏘아졌다.
‘막아야 해, 방법이…….’
찰나의 순간, 수호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이윽고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수호가 차원 보따리를 열었다.
[레비아탄의 뿔피리]를 꺼내 입으로 가져갔다.
그때, 광선이 일행을 두드렸다.
“쿨럭-”
타룽가가 입으로 피를 토했다.
수호 또한 재차 아찔한 충격을 느꼈다.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다잡으며, 피리를 입에 물었다.
뿌우우우우우우웅-
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뱃고동 같기도 하고, 고래의 울음처럼도 들리는 특이한 음색이 보랏빛 공간을 채워 나갔다.
‘됐어! 효과가 있다!’
수호와 일행에게 버프가 걸렸다.
몸이 약간 가벼워졌다.
리치의 사념이 반응했다.
- 크윽- 이건 뭐지? 어째서 나의 죽음의 기운이……?!
사이한 존재를 약화하는 것이 [레비아탄의 뿔피리]가 지닌 또 다른 효과.
‘리치라면 통할 줄 알았어.’
리치는 언데드다.
게다가 적은 그 리치의 사념체.
극단적일 정도로 죽음에 가까운 존재다.
예상대로 뿔피리 소리는 사념체의 힘을 약화했다.
- 소용없다! 네년이 무슨 수작을 부리든… 죽이겠다! 죽여 버릴 것이다!
사념체가 소리쳤다.
광선이 재차 쏘아졌다.
수호도 스킬을 시전했다.
‘정신 방벽!’
통해라!
염원하며, 심령의 칼날을 휘둘렀다.
서걱-!
한결 명쾌한 절삭음이 수호의 머릿속에 들려왔다.
동시에.
- 크허억! 무슨 짓이냐! 무슨 짓이냐아아아아!
사념체가 비명을 지르며 발악했다.
흐릿한 얼굴에 고통이 떠올라 있었다.
수호는 머뭇거리지 않고 스킬을 시전했다.
‘정신 방벽!’
이번에는 심령의 칼날이 사념체 바로 앞에 생성됐다.
‘그렇지! 공격할 수 있을 것 같았어!’
이 공간 자체가 사념체의 뱃속.
정신 공격을 되받아치는 ‘반격’이라면, 광선을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사념체를 직접 타격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수호의 생각이었다.
서걱-!
생각은 맞아떨어졌다.
-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반격의 칼날에 맞은 사념체가 처참한 비명을 토했다.
- 죽이겠다! 죽여 버리겠다아!
발광하던 놈이 광선을 내뿜으려 했다.
‘정신 방벽!’
수호가 다시 칼날을 휘둘렀다.
광선이 끊겼다.
‘사라져라!’
승기를 잡은 수호가 연이어 반격을 시전했다.
서걱-
서걱-
서걱-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 내가, 이 내가! ■■이 되어야 했을 내가아아아-!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남긴 사념체가 사라졌다.
보랏빛이 걷혔다.
일행은 여전히 리치의 연구실에 머물러 있었다.
[리치 로드의 사념체 ■■■■를 처치하셨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레벨 업!]
[레벨 업!]
[레벨 업!]
[레벨 업!]
[감각이 1 증가합니다.]
[마력이 1 증가합니다.]
.
.
.
* * *
증오와 흐뭇함.
윌슨은 요즘 들어 일견 모순적으로 보이는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 마인에 대한 미움.
마인 탐지기를 만듦으로써, 지구를 지키는 데에 기여한다는 뿌듯함.
그 두 가지였다.
지금.
윌슨은 그중 한 가지 감정을 극한까지 느끼고 있었다.
증오였다.
‘마인이야!’
방금 가게에 들어온 노인은 분명히 마인이었다.
마기를 꼭꼭 숨겼지만, 마인을 누구보다도 많이 보아 온 윌슨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아마도 종복…….’
느껴지는 기운을 생각하면, 평범한 마인도 아닐 터.
어쩌면 이번 사달의 원흉일지도 모른다.
윌슨의 마음에는 분노가 가득 차올랐다.
‘죽인다.’
저놈을 죽이고 싶다.
윌슨은 폐부에서 올라오는 강한 살의를 간신히 억눌렀다.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싸움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수호에게 알린 후에…….’
윌슨은 차원 전음을 통해 수호에게 연락했다.
- 수호, 큰일이야! 가게에 마인이 나타났어!
- 마기가 아주 음흉하고 강해, 마족의 종복 같아.
대답이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왜인지 차원 전음의 감도가 평소와 달랐다.
‘뭐지? 왜 이렇게 먹먹한 느낌이……?’
【차원 전음】은 차원을 넘어 음성을 전하는 스킬.
안 통할 리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말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기분이 들었다.
수호가 리치의 사념에 갇힌 상태이기 때문이었다.
윌슨은 몰랐지만.
‘어쩔 수 없어… 일단 나 혼자라도 버티는 수밖에.’
그동안 준비해 놓은 것들이 있다.
어느 정도는 해볼 만할 것이다.
가게 문이 열리고, 마인이 들어선 짧은 순간.
윌슨은 여기까지 생각을 끝마쳤다.
그때, 마인이 입을 열었다.
“사장이 드래곤 라이더 맞는가?”
“네, 맞습니다. 손님.”
“사업에 관해 중요한 할 말이 있어 찾아왔네만, 자네가 드래곤 라이더는 아닌 것 같군… 사장은 어디 있나?”
“외출했습니다. 말씀 남기시면, 사장님께 전해 드리겠습니다. 나중에 다시 오시겠습니까?”
윌슨이 차분히 응대했다.
싸움을 수호가 돌아온 뒤로 미룰 수 있다면 나쁠 것 없다.
마인이 싸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네, 10분만 기다려 보지.”
“사장님이 그 전에 돌아오시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흐음, 그전에 돌아오면 좋겠는데… 늦으면 아주 중요한 비지니스를 망치게 될 것 같거든.”
마인의 눈빛 깊은 곳에 살기가 흐른다.
감추고 있었지만, 오랜 세월 마인을 상대해 온 윌슨은 놈의 내심을 눈치챘다.
‘공격할 생각이야.’
10분.
놈은 그 후에 이곳을 쑥대밭으로 만들 생각이 분명했다.
위기감과 동시에 분노가 끓어올랐다.
애써 감정을 숨겼다.
차분히 대답했다.
“…그럼 휴게실에서 잠깐 기다리시겠습니까?”
“기다려 보지.”
“따라오십시오.”
윌슨이 마인을 휴게실로 안내했다.
* * *
탁.
테이블에 찻잔이 내려앉았다.
마인이 차를 들어 올렸다.
“향이 좋군, 보통 차가 아닌 듯한데?”
윌슨이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저희 가게 특제 차입니다. 마시면 몸에 좋습니다.”
“그런가? 그것참 고맙군.”
마인이 차를 음미했다.
윌슨 또한 찻잔을 들고 마인의 맞은편에 앉았다.
“용건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급하시면 제가 사장님께 연락을 드려 볼 수 있는데…….”
“굳이 자네가 들을 필요는 없네.”
“그럼, 성함이라도 말씀해 주십시오. 혹시라도 사장님을 못 뵈면, 전해 드려야 하니까요.”
“뭐, 그거야 어렵지 않지.”
어차피 지워 버릴 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듯한 눈빛으로, 마인이 이름을 입에 담았다.
“나는 무토 다다노리네.”
“일본인이셨군요. 한국말이 워낙 자연스러워서 한국인이신 줄 알았습니다.”
“자네도 백인인데, 한국어가 몹시 유창하군. 어디 출신인가?”
“저는 이곳이 고향입니다.”
“그런가? 이민 2세대인가 보군.”
다다노리가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슬쩍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본다.
그사이 10분이 흘렀다.
탁.
텅 빈 찻잔이 테이블에 놓였다.
윌슨이 입을 열었다.
“이민 2세대는 아닙니다, 오히려 이민 1세대에 가깝습니다.”
다다노리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방금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하지 않았나?”
윌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싸늘하게 미소 띤 입에서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 번 죽고, 이곳에서 다시 태어났거든요.”
다다노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윌슨의 태도도 말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윌슨은 드래곤 라이더가 운영하는 상점의 종업원일 뿐.
윌슨과의 대화 또한, 스스로 정한 데드라인을 기다리는 동안의 유흥일 뿐이었고.
“무슨 말을 하는……!”
질문을 던지려던 다다노리의 말이 끊겼다.
표정도 일그러졌다.
쿨럭!
다다노리의 입에서 핏물이 울컥 쏟아져 내렸다.
몸에 좋다던 차가 그 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무슨 말은 무슨 말! 죽어라, 이 쓰레기만도 못한 마인 놈아!”
윌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한 줄기 신호가 휴게실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투콰아앙-
휴게실이 발사됐다.
다다노리가 앉은 의자와 테이블.
바닥과 천장 그리고 벽까지.
윌슨이 선 자리만 빼고, 통째로 뽑혀 날아갔다.
쿠장창차장-
휴게실은 가게를 뚫고 길가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리고 길가에 떨어져 내린 즉시.
쿠콰콰콰콰콰콰콰쾅-!
휴게실 내부가 강력한 폭발에 휩싸였다.
137화 습격(3)
깨어진 쇼윈도.
쓰나미라도 온 듯 쓸려 나간 진열장.
다다닥-
윌슨이 그 사이를 달렸다.
동시에 공방에 설치된 제어 시스템을 향해 신호를 보냈다.
‘전투 모드! 전투 모드로 변경! 빨리!’
송신이 완료되자 건물이 변하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우우우웅-
철컥, 철컥, 촤르르르-
외벽이 마도 공학 특수 합금으로 빈틈없이 둘러싸였다.
쇼윈도가 있던 곳 앞에 바리케이드가 솟아났다.
옥상 난간에는 마력 기관총 수십 문이 고개를 내밀었다.
건물이 바뀌는 사이.
윌슨은 바리케이드 앞에 다다랐다.
시야 확보를 위해 틔워 둔 바리케이드의 투명 패널 너머, 마인이 갇혀 있는 휴게실의 모습이 보였다.
‘해치웠나?’
발사된 휴게실.
컨테이너같이 생긴 그것은, 안에서 발생한 폭발로 인해 연기를 흘리고 있었다.
저저적.
휴게실이 갈라졌다.
마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쳇, 역시 안 죽었어.’
윌슨이 혀를 찼다.
미리 준비한 대對 마인용 독약은 통했다.
먹여야 효과가 있기 때문에, 존재 사실이 널리 알려진 노움 세상에서는 사장된 물건.
그래도 지구에서는 유용했다.
가게에 침입한 적을 유인, 바깥으로 내쫓고 퇴치하기 위한 휴게실 함정.
그 또한 제 기능을 했다.
그럼에도 마인은 살아 있었다.
화상을 입은 채, 온몸에서 검은 체액을 줄줄 흘리고 있었지만 말이다.
‘역시 보통 놈이 아니었어.’
윌슨이 이를 악물고 마인을 노려봤다.
마인 다다노리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하며 이를 갈았다.
“네놈은… 보통 놈이 아니구나. 크르르, 이것들은 다 뭐지?”
부서진 육체를 검은 마기로 틀어막은 채 다다노리가 물었다.
그사이.
미처 제어하지 못한 광기가 짐승의 울음처럼 흘러나왔다.
꿈틀꿈틀.
흘러나온 마기는 어느새 촉수가 되어 주변을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너야말로 보통 마인이 아니겠지? 누구의 종놈이냐?”
윌슨이 신랄한 목소리로 맞받아쳤다.
다다노리의 몸이 흠칫 굳었다.
“진짜였군. 진짜로 죽어 마땅한 놈이 있었던 거야. 위대한 분의 신께서 내리신 말씀처럼.”
“뭐? 신?”
“잘했어. 여기 오길 참으로 잘했다는 말이다. 크흐흐흐.”
다다노리가 광소했다.
동시에 놈의 몸에서 뭉클- 마기가 피어났다.
윌슨이 재빨리 신호를 보냈다.
마력 기관총이 일제히 화염을 뿜었다.
투타타타타타타타탕-
늦었다.
아니, 아무리 빨랐어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위대한 분의 힘을 빌려 원하노니, 이곳이 바로 위대한 분의 땅이다!”
다다노리의 입에서 광기에 찬 외침이 흘러나왔다.
그 순간.
화아아아아악-
사위가 어둠에 잠겼다.
세상이 잿빛으로 바뀌었다.
‘점등.’
윌슨이 건물에 신호를 보냈다.
옥상에 설치된 플래시가 사방을 비췄다.
사방을 대낮처럼 밝혀야 할 광도였지만, 세상은 여전히 어슴푸레했다.
‘미친! 이게 뭐야?’
다다노리를 중심으로 반경 50m.
반구형 돔이 주변을 덮고 있다.
밖이 보이지 않는다.
돔 안은 잿빛으로 변했다.
흑백 사진 속 풍경처럼.
마치 그곳에만 전혀 다른 공기가 흐르는 것처럼.
‘꼭 다른 세상에라도 온 것 같잖아!’
윌슨의 머릿속에 시끄러운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
- 경고! 경고!
- 대기 중의 마기 농도가 한계치를 초과하고 있습니다.
- 즉시 현장을 탈출하십시오.
- 즉시 현장을 탈출하십시오.
“설마……!?”
윌슨의 안색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 과도한 마기에 노출되어 마력 융합로의 출력이 50% 저하됩니다.
- 과도한 마기에 노출되어 시각 센서의 성능이 30% 저하됩니다.
- 과도한 마기에 노출되어 운동 모듈의 성능이 40% 저하됩니다.
- 과도한 마기에…….
끊일 줄 모르고 이어지는 경고음.
윌슨의 입이 벌어졌다.
“마계라도 불러온 거야!?”
윌슨의 감각 센서가 주변을 훑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가, 가슴이 답답해.”
“으윽- 머리가 아파.”
옆 건물에서 신음이 들려왔다.
돔 안으로 딸려온 민간인들이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고 있었다.
“빌어먹을…….”
다다노리가 마족 헤즈루에게 받은 권능.
그것은 차원과 공간을 조작하는 능력이었다.
그중에서도 큰 힘을 소모하는 기술이 바로 지금 사용된 ‘마계 소환’.
세상에 마계를 뒤집어씌워 마인에게는 축복을, 적에게는 재앙을 선사하는 기술이었다.
“위대한 분의 권능이 이 땅에 재현됐다. 이제 이곳은 위대한 분의 세상, 마계! 하등한 인간 따위가 살아갈 공간은 없다.”
다다노리가 광신의 눈빛을 번뜩이며 외쳤다.
그가 손을 들어 텅 빈 눈앞을 내리그었다.
슥-
허공이 갈라졌다.
그 사이에서 괴물이 나타났다.
“핼 하운드!”
아가리에서 검은 침을 질질 흘리는 지옥의 사냥개.
마계의 마물, 핼 하운드였다.
윌슨이 이를 악물었다.
‘저놈까지는 괜찮아. 하지만……’
핼 하운드라면 노움 세상에서 질리도록 상대해 본 것들.
습성도, 전투력도 잘 안다.
상대해 낼 자신이 있다.
‘문제는 핼 하운드가 끝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야.’
눈앞의 마인이 가진 특성은 까다롭다.
언제고 다른 마계의 마물을 불러낼지 모른다.
‘쯧, 일단 버텨야 해.’
윌슨에게 선택의 자유는 없었다.
그저 싸우고 버틸 뿐.
“크르렁-”
“컹컹-”
핼 하운드 무리가 달려들었다.
투타타타타타타탕-
마력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깨갱-”
“깨개갱-”
몇 마리가 마탄에 맞고 죽어 나자빠졌다.
여전히 달려드는 놈들이 많다.
윌슨이 바리케이드 위로 오른손을 얹었다.
철컹.
손목이 수직으로 꺾였다.
손목 아래 구멍이 드러났다.
‘죽어라!’
포옹.
구멍에서 둥근 덩어리가 발사됐다.
핼 하운드 무리가 재빠르게 흩어져 덩어리를 피했다.
하지만.
푸콰아아앙-!
핼 하운드 무리 중앙쯤 다다른 덩어리가 폭발했다.
작은 마력 칼날이 사방으로 비산.
핼 하운드를 난도질했다.
“깨갱-”
“깨애앵-”
온몸에 자상을 입고 쓰러진 핼 하운드 무리.
그 위로 기관총이 마력탄을 쏟아부었다.
하나 윌슨은 안도하지 못했다.
‘또 오잖아!’
허공에 뚫린 차원문에서 또 다른 핼 하운드 무리가 튀어나왔다.
“하등한 인간 주제에 감히 위대한 분께 대항하는 무도한 것들. 오늘 내가 위대한 분의 뜻에 따라 씨를 말려 주마.”
광인처럼 중얼거린 다다노리가 허공에 다시 손끝을 내리그었다.
스윽.
그어진 금 사이로 커다란 괴물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육중한 몸매.
울긋불긋한 피부.
양손에 달린, 중식 칼처럼 생긴 손톱.
‘하아- 이블 부쳐까지?’
마계에서 마물을 사냥하며 살아가는 괴물, 이블 부쳐.
핼 하운드는 저놈의 먹이에 지나지 않는다.
윌슨 또한 기록으로만 본 괴물이었다.
“고오오오오오오기-”
이블 부쳐가 쿵쿵 달려들었다.
마도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핼 하운드와 달리 이블 부쳐는 별 타격을 입지 않았다.
‘젠장, 일반 마탄이 안 통해.’
촛농 같은 이블 부쳐의 피부는 탄환에 극도로 강했다.
좀 전에 핼 하운드를 날려 버린 마력 확산탄을 쓸까?
윌슨은 떠오른 생각을 곧바로 바꿨다.
이블 부쳐가 때마침 좋은 위치에 다다랐기 때문이었다.‘이거나 먹어라!’
윌슨이 신호를 보냈다.
가게 앞 도로.
이블 부쳐와 핼 하운드가 달려오고 있는 곳으로 마력이 흘러들어 갔다.
철컹.
아스팔트가 걷히고, 구멍 숭숭 뚫린 바닥이 노출됐다.
콰르르르르르르-
불길이 솟구쳐 올랐다.
화염의 장막이 마물을 태웠다.
쿵쿵쿵, 쿵쿵, 쿠웅-
불길 너머 들려오던 무거운 발소리가 차차 느려진다.
‘됐다! 죽였어!’
윌슨이 환호하던 순간.
화악.
불길을 가르고 각진 칼날이 휘둘러졌다.
윌슨이 뒤로 훌쩍 물러났다.
찌이이익-
바리케이드가 천조각처럼 찢어져 나갔다.
“젠장!”
윌슨이 이를 갈았다.
왼손에서 마력 확산탄이 발사됐다.
약간의 저지력을 발휘했지만, 이블 부쳐를 죽이지는 못했다.
‘그걸 써야 하나?’
비장의 수법이 남아 있다.
수호의 차원문이 있는 공간만 제외한, 건물 모든 곳을 날려 버릴 수법이.
공방까지 부서지는 탓에 윌슨은 결정을 망설였다.
“고오오오기이-”
후웅-
이블 부쳐의 칼날이 떨어져 내렸다.
윌슨이 뒤로 펄쩍 뛰어 물러섰다.
‘어쩔 수 없어.’
더는 미룰 수 없다.
자칫하다 차원문까지 잃는다.
윌슨의 송신 모듈로 한 줄기 마력이 흘러들어 갔다.
신호가 막 발신되려던 순간.
훅-
뭔가 어깨 옆을 스치며 날아간다 싶더니.
퍼억!
이블 부쳐의 대가리가 터져 나갔다.
* * *
사념체와의 전투가 끝났다.
발룡이는 멀쩡했고, 타룽가도 치유 물약 한 병에 완벽히 회복했다.
“껄껄, 거인님 덕분에 신기한 모험을 다 해 보는군요.”
사념체의 공격을 받았음에도 타룽가는 즐겁게 웃었다.
반면 수호는 웃지 못했다.
찜찜했기 때문이다.
‘이상해. 사념체가 한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려.’
하얀 도마뱀.
난쟁이.
그리고 알아들을 수 없던 단어들이 수호의 마음을 개운치 못하게 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거 말고도 왠지… 뭔가 놓친 것 같은데.’
아주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듯한 느낌.
자다가 중요한 전화를 못 받았을 때에 들 것 같은 찜찜함이 자꾸 마음을 찔렀다.
아무리 고민해도 정확한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자.”
『좋다. 본좌도 하양이가 보고 싶던 참이니라.』
“이번 대모험은 여기서 끝이군요. 껄껄.”
일행은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갔다.
얼마 후, 레어 밖.
“여기서부터는 혼자서 충분히 복귀할 수 있습니다. 거인님께서는 여기서 바로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타룽가가 말했다.
수호의 찜찜한 표정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수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 볼게요. 타룽가 님도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수호는 차원 여행을 시전해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놀라운 메시지가 눈앞을 가렸다.
[차원 마계-9342를 발견하셨습니다.]
[마계-9342와는 교류할 수 없습니다.]
[────이 불가능합니다.]
[교류 등급이 낮아 ────을 할 수 없습니다.]
* * *
‘마계라고?!’
생소한 메시지.
게다가 읽을 수 없는 부분까지 존재한다.
수호가 내용을 곱씹으려는 순간.
『마기다!』
발룡이의 경고가 들려왔다.
수호도 느꼈다.
‘주변에 온통 마기가 들어찼잖아! 도대체 무슨 일이야?’
서둘러 주변을 관찰한다.
분명히 집안 풍경이 맞다.
‘집으로 돌아온 건 맞는데….’
【차원 여행】 스킬이 잘못되어, 어디 이상한 차원으로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쿠콰콰쾅-
밖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뭔가 벌어지고 있어.’
정확한 상황은 모르지만, 분명히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방금 들려온 폭음과 연관이 있을 터.
수호는 서둘러 공간 결계로 만들어진 벽을 향해 다가갔다.
한데 한 발 움직이자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몸이 무거워.’
이상이 느껴졌다.
수호가 상태창의 비고 항목을 열었다.
못 보던 문구가 적혀 있다.
▶ 비고
- 【마기 침식】 적용 중.
【마기 침식】
- 마족의 권능에 의해 주변 환경이 마계와 똑같이 변했다. 모든 능력치가 30% 감소한다.
디버프다.
능력치가 감소했다.
그런데 그것 이상으로 거슬리는 내용이 보였다.
‘마족의 권능이라고!?’
깜짝 놀랐던 수호는 빠르게 진정했다.
‘벌써 마족이 나타났을 리는 없어.’
마족의 등장에는 분명히 엄격한 조건이 필요하다.
다른 차원의 예를 떠올려 보면, 벌써 조건이 충족되었을 확률은 낮을 터.
그렇다면…….
‘종복!’
남은 확률은 하나였다.
마족에게 권능을 내리받은 종복이 습격해 온 것이다.
윌슨은 어디에?
하양이는 괜찮을까?
떠오르는 근심을 억누르며 수호는 밖으로 달렸다.
가게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부서진 집기.
휴게실은 아예 통째로 날아가 버렸다.
뻥 뚫린 쇼윈도 너머 바리케이드가 보인다.
그 앞에 윌슨이 서 있었다.
웬 괴물이 윌슨을 덮치려 하고 있었다.
‘윌슨!’
수호가 거인의 격노를 뽑았다.
손잡이에 석화비도를 감고, 던졌다.
전력이 담긴 망치가 바람을 찢으며 날아갔다.
퍽-!
괴물의 대가리가 대번에 박살 났다.
사슬을 당겨 망치를 회수하며 수호가 윌슨에게 다가갔다.
“윌슨, 괜찮아?”
“왔구나! 아깐 왜 연락이 안 됐던 거야?”
윌슨의 물음에 수호는 사정을 깨달았다.
리치의 사념에 당한 상황이라 차원 전음이 전해지지 않았음을.
하나 일일이 설명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크르르릉-”
“왕왕-”
핼 하운드 무리가 달려들고 있었다.
“일단 저것들부터 처리하자.”
수호가 망치를 들어 올렸다.
윌슨이 급히 외쳤다.
“저 마인 놈이 뭔가 수작을 부렸어. 주변에 마기가 가득 찼어. 꼭 마계라도 불러온 것처럼.”
“맞아. 여긴 마계로 바뀌었어.”
이미 메시지를 통해 확인한 사실이다.
이곳을 마계라 상정하고 전투에 임해야 한다.
“조심해야 해. 평소처럼 힘을 쓸 수가 없어.”
“평소처럼은 힘들어도, 조금 덜 불리하게는 싸울 수 있을 거야.”
수호가 차원 보따리에서 [레비아탄의 뿔피리]를 꺼내며 대답했다.
138화 습격 (4)
뿌우우우우우우웅-
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다노리는 몸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저 피리 소리…….’
마기.
위대한 분이 친히 내려 주신 기운이 피리 소리에 닿아 요동쳤다.
마치 자신을 억누르려는 소리에 저항하듯.
“깨갱-”
“깨애앵-”
저편에서는 이미 핼 하운드가 학살당하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나 이블 부쳐의 대가리를 날려 버린 존재.
아울러 다다노리의 목표물이 벌인 짓이었다.
‘저놈이 드래곤 라이더!’
놈은 굉장했다.
이블 부쳐를 처치한 솜씨가 우연이 아님을 증명하듯.
빗나가는 망치질도, 한 방을 버티는 핼 하운드도 없었다.
다다노리가 입매를 일그러뜨린 채, 손을 들어 올렸다.
‘대단하구나. 하지만…….’
건물에 설치된 이상한 무기도, 금발 종업원의 전력도 예상외로 강했지만.
그게 끝이라면…….
‘죽일 수 있다.’
분명히 해치울 수 있다.
다다노리가 아껴 둔 힘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니까.
‘계속 힘을 아끼고 있을 수만은 없겠지. 좋다. 죽여 주마.’
다다노리는 들어 올린 손을 내리그었다.
스윽.
허공이 갈라졌다.
차원문이 열렸다.
“나와서 저놈을 죽여라!”
수많은 인영이 차원문을 넘어 튀어나왔다.
“맡겨 주십시오!”
“죽여라! 저놈을 죽여라!”
“회장님께서 명하셨다. 놈을 죽여라!”
부하 마인들이 드래곤 라이더를 향해 달려갔다.
다다노리는 그들의 싸움을 지켜봤다.
“뭐가 또 튀어나왔잖아!”
“수호, 모조리 마인이야!”
핼 하운드에 이어 수많은 마인까지 합류했다.
드래곤 라이더와 금발 백인 또한 슬슬 지쳐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흐흐흐, 하등한 인간 주제에 위대한 분에게 대항한 자의 말로다. 죽어라! 비참하게 죽어 가라!’
다다노리가 눈을 번들거리며 웃었다.
이제껏 모아 온 마인들이 하나둘 쓰러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승리한다. 모조리 죽여, 위대한 분께 바치겠다!’
드래곤 라이더도, 금발 종업원도.
그 외의 모든 인간도.
모조리 죽여, 위대한 분이 오실 길에 밑거름으로 뿌리리라!
다다노리는 광기에 휩싸여 전투를 지켜봤다.
이변이 생긴 것은 그때였다.
고오오오-
건물 안에서부터 강맹한 기운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감히 본좌의 영역에 이딴 쓰레기 같은 기운을 끼얹은 것이 어떤 놈이냐아아-』
고막을 찢을 듯한 목소리가 사방을 울렸다.
곧이어 검은 드래곤이 나타났다.
펄럭.
드래곤은 건물 앞에 떠올라 불타는 눈빛으로 주변을 노려봤다.
가공할 기세가 퍼져 나갔다.
모두가 놀라고 있을 때, 드래곤이 재차 소리쳤다.
『네놈들 때문에 하양이가 놀랐잖아! 어떻게 책임질 거야!』
크롸롸롸롸롸롸롸-
드래곤의 분노가 피어가 되어 쏟아져 나왔다.
“깨갱-”
핼 하운드가 꼬리를 말았다.
“끄어어억!”
“크흑- 귀, 귀가…….”
“쿠웨에엑-”
마인들이 피어에 담긴 기운에 주춤했다.
개중 약한 자는 입에서 피를 쏟으며 무릎을 꿇었다.
콰르르르르르르르-
그 위로 불길이 끼얹어졌다.
드래곤의 브레스였다.
“크아악!”
“깨갱-”
주춤하던 마인과 핼 하운드가 불에 타 재가 됐다.
“발룡아, 잘했어!”
틈을 놓치지 않고 드래곤 라이더가 날뛰었다.
퍽!
“끄악-!”
“제, 제기랄!”
콰콰콰콰쾅-!!
마인들이 추풍낙엽처럼 휩쓸려 날아갔다.
“이 빌어먹을 것들이!”
다다노리가 이를 갈았다.
허공을 베어 연신 차원문을 열었다.
핼 하운드, 이블 부쳐 등 마물이 쉼 없이 쏟아져 나왔다.
다시금 힘의 균형이 맞춰졌다.
한숨 돌린 다다노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대로는… 마기 소모가 너무 심해.’
상대의 전력이 예상보다 너무 강했다.
고작 셋.
그중에서 하나는 존재조차 몰랐던 종업원.
나머지 하나는 그저 소환수라 여긴 짐승이다.
제대로 된 적은 드래곤 라이더 하나라고 봐도 무방할 텐데…….
‘어째서 그토록 강할 수가 있는 것이냐.’
놈이 정보는 이미 숙지하고 있다.
각성한 지 고작 1년.
던전 출입 횟수도 적다.
거대 길드를 등에 업은 것조차 아니다.
‘말이 안 돼.’
목전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임에도 불신이 인다.
그럴수록 다다노리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 대적자의 씨앗이 움트고 있다.
- 찾아서 죽여라!
위대한 분의 신께서 내린 신탁.
저놈이야말로…….
‘대적자!’
다다노리는 이 순간 확신했다.
‘놈이다. 놈이 대적자다!’
그렇지 않고서는 말이 안 된다.
신탁을 내려 미리 밟아야 할 정도의 씨앗.
그렇기에 저토록 기적 같은 일을 벌일 수 있는 것이리라.
다다노리는 결심했다.
‘전력을 다해야 한다.’
설사 위대한 분을 부르기 위해 모아온 기운을 쓰는 한이 있더라도!
다다노리가 이를 악물고 손을 내리그었다.
스윽-
스윽-
스윽-
차원문이 끊임없이 열렸다.
수많은 마물이 파도를 이루며 드래곤 라이더를 향해 달려갔다.
다시금 이변이 생겨난 것은 그때였다.
* * *
밀려드는 마물 떼에 수호가 헛숨을 토했다.
‘허- 뭐 저렇게 끝도 없이 나오는 거야!’
적은 하나다.
처음엔 분명히 하나였다.
한데 지금.
그놈이 불러온 적들이 가게 앞 도로를 가득 메웠다.
죽이고 또 죽였다.
그럼에도 적은 넘쳐났다.
‘발룡이 덕에 한숨 돌리나 했더니.’
적절한 시점에 합류한 발룡이 덕분에 한시름 덜었다 싶었다.
그런데 적의 수괴인 노인이 허공에 연이어 차원문을 열었다.
마물이 쉼 없이 뛰쳐나왔다.
‘저 차원문, 그때 그것과 같은 종류야.’
허공을 수놓은 보랏빛 차원문.
저것은 던전 브레이크를 일으켰던 이낙길의 것과 똑같았다.
수호는 확신했다.
‘저놈이 모든 일의 원흉이었구나.’
전 세계를 뒤집어 놓은 던전 브레이크.
원인은 저편에 선 마인이다.
놈이야말로 대참사의 원흉이었다.
‘죽여야 해!’
원인을 제거하면 앞으로 일어날 참사를 막을 수 있을 터.
수호는 당장에라도 놈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몸을 뺄 수가 없어.’
눈앞에 마물과 마인이 파도처럼 밀려든다.
망치질을 멈출 수도 없는 상황.
몸을 뺐다가는 가게까지 대번에 밀려 버릴 터였다.
‘마물부터 밀어내야 해.’
원흉을 처치하려면 밀려드는 파도부터 처리해야 한다.
방법은 있다.
다만, 상황이 허락지 않아 쓰지 못하고 있었을 뿐.
‘마력은 어느 정도나 찼나……?’
리치의 사념체와 싸우는 동안 마력 소모가 컸다.
그 뒤로 회복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거대화】를 쓰기 어려웠다.
거대화에 마력을 소모하면 싸울 마력이 동난다.
그랬기에 수호는 버텼다.
마물과 마인을 잡으면서도 최대한 마력을 아꼈다. 한 가지 스킬을 믿고.
【마력 흡수】
거인의 격노에 달린 스킬.
적을 죽이는 순간, 주검으로부터 미량의 마력을 빨아들이는 기술이다.
그리고 지금.
‘됐다. 이 정도면 할 수 있어.’
마력이 충분히 차올랐다.
수호는 곧바로 스킬을 시전했다.
‘거대화!’
수호의 몸이 커졌다.
죽죽 자라난 몸이 2층 높이에서 멈췄다.
공간과 마력이 허락하는 크기는 이 정도가 한계였다.
하지만 충분했다.
콰아아아앙-!
수호가 휘두른 망치에 핼 하운드가 무더기로 죽어 나갔다.
날아가던 핼 하운드에 맞은 마인이 중상을 입고 나뒹굴었다.
“미친! 저게 뭐야! 갑자기 왜!”
“커졌어! 놈이 커졌다고!”
“젠장! 저 스킬은 쓰지 못하는 것 아니었나?”
마인들이 놀라 소리쳤다.
【거대화】를 위해 특별한 소모 아이템이 필요하다고 오해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것은 다다노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저, 저럴 수가! 어째서 저 스킬을!’
그는 경악한 눈으로 수호를 응시했다.
추풍낙엽.
마인도 마물도.
돔 안 어떤 존재도 드래곤 라이더의 한 수를 받아내지 못했다.
‘…어쩔 수 없다.’
빠드득.
다다노리가 이를 갈았다.
‘그분의 현신을 조금 미루는 한이 있더라도.’
저놈.
드래곤 라이더를 죽이는 것이 먼저다.
결심한 다다노리가 웅얼웅얼 기도했다.
“대적자를 먼저 죽이겠나이다, 위대한 분이시어. 부디 종복의 충심을 헤아려 주소서. 부디 힘을 내려 주소서!”
꿈틀.
심장에서 마기가 용솟음쳤다.
그것은 손끝으로 향했다.
“이리 와라.”
다다노리는 비서를 불렀다.
“예, 회장님.”
전투에 끼어들지 않고 대기하던 비서가 재빨리 다다노리 앞에 섰다.
서걱.
다다노리의 손이 비서의 목을 벴다.
후드득 피가 쏟아졌다.
푹-
매끈하게 잘린 목의 단면으로 다다노리의 손이 파고들었다.
꿀렁꿀렁.
비서의 몸이 마기를 한껏 받아들였다.
다다노리가 마족의 현신을 위해 몸에 쌓았던 기운, 대부분을.
“크흑.”
허탈감에 몸서리치며 다다노리가 물러섰다.
비서의 시체는 쓰러지지도 않고 서 있었다.
곧 변화가 일어났다.
쩌어어억-
비서의 잘린 목 단면이 팔방으로 갈라졌다.
시뻘건 혈화血花.
비서의 몸을 세로로 쪼개며 인육으로 만든 꽃이 피어났다.
꽃망울이 있어야 마땅할 자리.
그곳에 검은색 차원문이 입을 벌렸다.
* * *
수호가 사력을 다해 망치를 휘둘렀다.
‘더 빨리!’
거대화를 이용해 마물을 해치운다.
한꺼번에 최대한 많이!
공백을 발생시킨 후 그 틈을 노려 종복을 친다.
그것이 수호의 계획이었다.
‘더 빠르게!’
마물의 파도를 한 차례 밀어내기 위해.
수호는 사력을 다해 망치를 휘둘렀다.
“깨갱-”
수호가 핼 하운드의 옆구리를 후려친 순간이었다.
오싹.
소름이 돋았다.
무언가 이변이 발생했음을 직감했다.
“수호! 저기야!”
『차원문! 강력한 존재가 소환된다. 막아야 하느니라.』
윌슨과 발룡이가 동시에 경고했다.
수호의 고개도 이미 그들이 가리키는 곳으로 향해 있었다.
‘꽃?’
핏물을 줄줄 흘리는 꽃.
꽃망울이 있어야 할 곳에 차원문이 열렸다.
그것은 이제껏 본 어떤 차원문보다도 불길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막아야 해.’
무엇이 튀어나올지는 모른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나오게 둬서는 안 돼.’
저 차원문에서 넘어올 존재는, 수호로서도 쉽게 감당할 수 없는 놈이란 점이었다.
그만큼 차원문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불길했다.
‘방법이…….’
수호가 고민했다.
눈앞을 가득 메운 마물의 파도를 헤쳐나가더라도, 혈화 앞에는 종복이 있다.
종복을 지키는 마물과 마인도 남았다.
저들을 모두 뚫어야 혈화를 부술 수 있을 터.
『수호, 가라!』
발룡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콰르르르르-
한 줄기 브레스가 뿜어졌다.
이전의 것보다 한결 약했다.
그러나 마물의 파도에 가느다란 길을 뚫는 데 성공했다.
‘헤이스트!’
‘근력 폭발!’
‘무기 강화!’
수호가 전력을 끌어 올렸다.
브레스가 만든 길을 따라 달렸다.
스사사사사삿-
【차원보】가 극한까지 발휘된다.
수호가 바람처럼 전진했다.
딱- 딱-
핼 하운드의 이빨이 허공을 물었다.
쾅! 쾅!
마인의 공격이 허공을 쳤다.
‘제기랄! 막힌다.’
하지만 브레스가 뚫은 길은 가늘었고 적은 너무 많았다.
금세 길이 사라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다시 파도에 휩쓸릴 거야.’
마물과 드잡이질을 피할 수 없다.
그러면 시간이 지체된다.
시간을 끌다 보면 소환이 완료될 것이다.
‘그래서는 늦어. 다른 방법이…….’
사라져 가는 길을 달리며.
망치를 휘두르며.
수호는 혈화를 파괴할 방법을 궁리했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수호의 머리를 스쳤다.
‘그래, 마계! 여긴 지금 마계야!’
집으로 돌아온 후 들었던 메시지에 명시되어 있었다.
이곳은 【마계-9342】였다.
‘지구가 아니야. 내가 소속된 차원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이곳이 지구가 아니라면!
쓸 수 있는 스킬이 한 가지 있다.
저 멀리 보이는 불길한 피의 꽃.
그것을 향해 수호가 정신을 집중했다.
스킬을 시전했다.
차원 여행자가 소속된, 원소속 차원이 아닌 곳으로만 쓸 수 있는 스킬을.
‘차원 통로!’
우우웅-
수호의 몸에서 마력이 급격히 빨려 나갔다.
통로를 통과하는 대상의 격에 맞추어 마력이 소모되는 탓이다.
‘견딜 만해.’
아슬아슬하지만 버틸 만했다.
버텨야 했다.
차원문에서 나올 놈보다는 피의 꽃을 향해 스킬을 쓰는 편이 나을 테니까.
‘제발 열려라.’
억겁과도 같은 찰나가 지나고.
【차원 통로】가 완성됐다.
위치는 혈화 바로 아래였다.
쾅!
망치를 휘둘러 마물을 밀쳐낸 수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잘 가라.”
동시에 누군가에게 차원 전음을 시전했다.
- 갑자기 죄송합니다. 처리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순간.
스팟-
빨려들 듯, 혈화가 사라졌다.
139화 습격(5)
경악과 불신.
다다노리의 마음에 가득 찬 것은 바로 그 두 가지 감정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혈화血花에서 소환되던 것은 마계에서도 경원시하는 마물.
최악의 상황에서만 소환을 허락받은 위험한 존재였다.
‘분명히 위대한 분의 권능은 제대로 작동을 했어.’
소환을 위한 마기는 충분했다.
차원문 또한 위대한 분을 위해 공들여 준비하던 것.
문제가 없어야 한다.
‘그런데 어째서! 위대한 분의 권능이 한낱 헌터의 스킬에 간섭받는다는 말인가?!’
드래곤 라이더가 만든 차원문이 혈화를 집어삼켰다.
다다노리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콰콰쾅- 콰쾅-!
그가 고민에 빠진 사이에도 드래곤 라이더는 날뛰었다.
“깨개갱!”
“크헉-!”
마물과 부하들이 거의 다 죽어 나자빠져 있었다.
다다노리의 입에서 노성이 터져 나왔다.
“네 이놈! 대적자아아아-!”
죽여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기서 죽여야 한다.
다다노리가 온몸의 마기를 쥐어짰다.
뭉클.
마기가 숙주의 염원에 반응해 솟아올랐다.
숙주의 신체가 파괴되는 것도 무시한 채.
수호가 그 모습을 포착했다.
‘마기를 쥐어짜고 있어.’
한 방울 마기까지 남김없이 발산되고 있다.
대적자는 또 무슨 말이지?
문득 드는 궁금증을 미뤄 둔 채.
쾅.
수호가 바닥을 박차고 쇄도했다.
뒤에서 발룡이의 외침이 들려왔다.
『또 마기를! 이 하찮은 쓰레기 놈이, 하양이가 놀란다고 했잖아!』
드래곤 하트가 맹렬히 박동했다.
수호가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콰르르르르르-
브레스가 수호의 발밑을 지나, 다다노리에게 적중했다.
치이이이익-
수호에게 쏘아지던 다다노리의 마기 촉수가 녹아내렸다.
“이놈, 이노오옴-!”
다다노리가 공중에 뜬 수호를 노려봤다.
놈이 어떻게든 반응하려 마기를 더 쥐어짜는 순간.
투다다다다-
윌슨의 마탄이 놈의 움직임을 견제했다.
그사이.
공중에 뜬 수호가 거인의 격노를 들어 올렸다.
던전 브레이크로 죽어 간 사람들.
마인에게 잡혀, 노예로 부려지던 드워프들.
허무하게 부서진 노움 세상의 쉘터.
그리고 쉘터 주인이 마지막으로 눈을 감던 장면이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갔다.
“지구에서!”
마지막 한 줌의 마력까지 끌어모아 발동한 【5연격】.
“사라져라!”
그것이 다다노리를 내리찍었다.
콰콰콰콰콰아아아앙!!!
전 세계에 참사를 불러일으킨 마족의 주구가 소멸하는 순간이었다.
* * *
다다다다다다닥-
식칼이 도마 위를 오간다.
호박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은 간격으로 썰려 나간다.
석비룡이 마련된 재료들을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이만하면 됐군. 물만 끓으면 끝이야.”
저녁 시간이 머지않았다.
곧 손님이 들이닥칠 터.
바쁜 일을 앞에 두고도 석비룡의 표정은 즐겁기만 했다.
“이게 다 그 녀석 덕분이지.”
석비룡은 행복한 은퇴 생활을 도와준 은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요리 및 객잔 영업의 스승.
무도에서는 후배.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 수호는 어느새 석비룡의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어 있었다.
“요즘 바쁜가, 아침 대련을 자꾸 빼먹는다는 말이지.”
또 어딘가 다른 세상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후배의 본업(?)이 그런 것이니 어쩔 수 없다고는 하나, 매일 보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은 석비룡으로서는 조금 섭섭한 일.
그가 어딘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다음에 오면, 바짝 굴려야겠군. 후후.”
잠깐 즐거운 상상을 하는 사이.
보글보글.
솥에 물이 끓었다.
찬장을 열었다.
커다란 항아리가 있다.
석비룡이 항아리 뚜껑을 열어, 그 속에 든 것을 국자로 떴다.
“내 보물… 자, 오늘도 마법을 부려다오.”
불그스름한 가루가 솥으로 들어갔다.
보그르르-
물이 넘칠 듯 끓어오르며 코로 매운 향이 후끈 밀려든다.
“좋구나.”
라면 스프가 끓어오르는 솥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석비룡이 기를 끌어 올렸다.
둥실.
허공섭물에 의해 썰어 놓은 호박과 버섯이 떠올랐을 때였다.
- 갑자기 죄송합니다. 처리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수호의 차원 전음이었다.
‘무슨 뜻이지?’
한데 갑자기 뭘 처리해 달라니.
그 뜻이 도통 이해되지 않는다.
의문은 금세 풀렸다.
찬장 안.
수호가 오가던 차원문이 뚫리던 곳 옆쪽.
허공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무언가 툭 하고 나타났다.
‘꽃? 이 기운은…….’
마기를 줄줄이 흘리는 꽃.
꽃망울이 있을 곳에 열린 것은 차원문이 분명했다.
‘이걸 왜?’
굳이 이 괴상한 꽃을 이곳으로 보낸 이유가 뭐지?
부숴 버리란 소린가?
스스로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고민은 길지 않았다.
푸스스.
꽃이 말라비틀어졌다.
동시에 차원문에서 무언가 튀어나와 주방 바닥에 착지했다.
그것이 머리를 들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크르르르-
석비룡을 발견하더니 살기 띤 괴성을 흘린다.
“더러운 것이 튀어나왔구나.”
차원문에서 튀어나온 것의 몰골은 흉악했다.
질질 흘러내리는 고름과 핏물.
사방으로 퍼지는 악취.
그 이상으로 농후한 마기.
“처리해 달라던 건 이거였나 보군.”
석비룡이 중얼거렸다.
그 순간.
쿠르르카아악──────!
괴물이 괴성을 내질렀다.
마기가 주변으로 확 퍼져 나갔다.
“쯧, 시끄럽게.”
손님 올 시간 다 됐는데…….
석비룡의 단전에서 한 가닥 내공이 움직였다.
그것이 강기가 되어 비룡객잔을 감쌌다.
마기를 잔뜩 머금은.
듣는 자를 공포에 빠트리고, 심지어 격이 낮은 자를 죽일 수도 있는 마물의 괴성은 주방 안을 맴돌다 사라졌다.
“쿠케르레?”
괴물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석비룡을 쳐다봤다.
“지저분한 것. 신성한 주방을 더럽히지 마라.”
석비룡이 식칼로 허공을 그었다.
소리도 기세도 없었다.
하지만…….
투둑.
괴물이 반으로 갈라져 쓰러졌다.
석비룡이 무감정한 눈으로 괴물을 주검을 들여다봤다.
“이건 녀석에게 직접 치우게 하는 편이 좋겠군.”
석비룡이 허공섭물의 기예를 발휘.
괴물의 사체를 주방 뒤편으로 옮겼다.
냄비 앞으로 돌아와 장사 준비를 이어 가던 석비룡이 문득 입을 열었다.
“근데 저 정도를 못 이겨서 내게 보냈다는 말인가?”
아직 멀었군.
역시 바짝 굴려야겠어.
* * *
움찔.
‘싸우느라 너무 무리했나.’
갑자기 든 오한에 수호가 몸을 떨었다.
파닥.
발룡이가 날아왔다.
『마기 청소는 끝났다.』
발룡이는 수호를 도와 잔존 마기를 없애고 있었는데 그것이 방금 끝났다.
“고생했어.”
『본좌는 하양이를 돌보러 들어가겠느니라.』
“응, 가 봐. 아참! 마계는 언제쯤 사라질까?”
수호가 주변을 덮은 잿빛 돔을 가리키며 물었다.
『마법의 매개가 사라졌으니 길어야 1시간이니라.』
“다행이네… 그럼 들어가 봐. 하양이 부탁할게.”
『본좌에게 맡기거라.』
발룡이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저편에서 윌슨이 걸어왔다.
그는 마계에 딸려 들어온 주변 주민을 살피러 갔었다.
“죽은 사람은 없었어.”
“다행이네… 마계는 저절로 걷힐 거래. 좀 앉아서 쉬어.”
“응.”
윌슨이 수호 옆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았다.
“가게 수리하려면 고생 좀 하겠는데…….”
수호가 날아가 버린 가게 쇼윈도를 보며 중얼거렸다.
윌슨이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 마.”
그그그긍.
바닥에서 벽과 쇼윈도가 솟아올랐다.
전투의 흔적만 제외하면 원래와 다를 바 없는 상태였다.
“와우, 저런 것도 준비했었어?”
“부서질 걸 예상하고 만들었으니, 원상 복구할 방법도 만들어 둬야지. 하하.”
윌슨이 환하게 웃었다.
화아아악-
때마침 마계를 불러온 잿빛 돔이 사라지고, 환한 빛이 비춰 들었다.
* * *
“괜찮을 겁니다.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협회장님.”
헌터 협회장 진무백은 옆에서 들려온 신성현의 목소리에 깨달았다.
자신이 걱정하고 있음을.
걱정을 넘어 불안 초조해하고 있었음을.
검병을 쥔 손안에 땀이 가득한 것을 보면 분명한 사실이었다.
“괜찮아야지… 꼭 괜찮아야 해.”
진무백이 나직이 대답했다.
시선은 돔을 떠나지 않았다.
“수호 씨는 이런 일로 어떻게 될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 어떻게 되어서도 안 되는 사람이야. 그 친구가 이제껏 해 온 일을 생각해서라도. 앞으로 우리나라에, 온 세상에 베풀 일을 생각해서라도 절대로 여기서 어떻게 되어서는……!”
염원을 가득 담은 진무백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돔이 없어집니다!”
어떤 충격을 가해도 꿈쩍 않던 돔.
마치 다른 세상에라도 있는 듯, 간섭 자체가 불가능하던 그것이 사라지고 있었다.
“원수호 헌터!”
그 안에 기다리던 얼굴이 서 있었다.
왠지 당황한 표정으로 그가 중얼거렸다.
“아, 하긴… 협회가 코앞이니, 다 보였겠구나.”
진무백은 빠른 걸음으로 수호에게 다가갔다.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어디 다친 곳은 없나?
마기가 느껴지던데, 어떻게 된 건가?
가게 앞이 쑥대밭이야.
전투가 있었군!
줄줄이 질문이 이어졌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느낀 걸까.
수호가 바로 입을 열었다.
“습격을 당했습니다.”
“습격?!”
놀라는 진무백에게 수호가 속삭였다.
“확증은 없지만, 아마 이번 난리를 일으킨 주범이었을 겁니다.”
“뭐라고?! 그놈은 어떻게 됐나? 어디로 갔어? 인상착의는?”
“처치했습니다.”
“아……!”
감탄, 경악, 탄복.
진무백이 복잡한 표정으로 수호를 바라봤다.
잠시 후에야 진무백이 입을 뗐다.
“어떻게 된 게, 온 세상이 한 일보다 자네 혼자 해치운 일이 더 큰 것 같군.”
“딱히 그렇게까지는…….”
“아닐세, 자네의 공이 너무 커. 이래서는 어떻게 신세를 갚아야 할지 모를 지경이야. 정말… 정말 고맙네.”
“괜찮습니다. 그리고… 그놈 하나로 끝이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아직 마음 놓을 때는 아니에요.”
진무백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수호 말대로 종복은 더 있을 수도 있다.
게다가 마족은 아직 나타나지도 않았고.
“알겠네, 앞으로 더 주의할 수밖에… 어쨌든 피곤할 테니 자네는 좀 쉬게. 자세한 이야기는 차후에 들려주고.”
파괴된 도로와 건물.
딸려 들어왔던 주민에 대해서는 협회가 조치하기로 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수호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진무백이 수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진짜 대단한 친구야.”
* * *
“협회랑은 이야기 잘됐어?”
윌슨이 빗자루를 든 채 물었다.
어느새 가게 안이 깨끗하게 변해 있었다.
“주변 처리는 협회에서 알아서 하겠대,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기로 했어.”
“그럼 어서 가서 쉬어, 가게는 내가 깔끔하게 복구해 놓을게.”
윌슨에게 청소를 도맡기기엔 미안하다.
하지만 수호는 따로 할 일이 있었다.
“부탁할게, 난 잠깐 어디 좀 다녀올 데가 있어서.”
“안 쉬어? 어디 가려고?”
“짐을 떠넘겼으니, 감사 인사는 하고 와야지.”
“아, 잘 다녀와. 하하.”
윌슨에게 손을 흔들어 준 수호가 공간 결계로 만든 벽을 통과했다.
호리병 뚜껑 앞에 가 섰다.
‘선배님이 잘 처리하셨겠지?’
설마 거기서 튀어나온 놈한테 당하시지는 않았겠지?
수호가 호리병을 통과했다.
“이제 왔군.”
설거지 중이었던지, 국자를 든 석비룡이 수호를 바라봤다.
‘역시 기우였어.’
선배님이 당하실 리 없지.
안도와 함께 수호가 고개를 숙였다.
“괴상한 걸 보내서 죄송합니다, 선배님.”
석비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힘든 일도 아니니 상관은 없네만, 그런데.”
“……?”
“그 정도도 처리하지 못해서 내게 떠넘기다니, 아직 갈 길이 멀었군.”
석비룡이 웃었다.
분명히 웃는 얼굴인데…….
수호는 오한을 느꼈다.
“하, 하하… 그게 상황이 어떻게 된 거냐면요. 그놈 하나만 있었던 게 아니라…….”
“나와만 대련을 하는 바람에 다수를 상대하는 능력이 부족했던 건가?”
“아니요, 그게 아니고요.”
“흐음, 그렇군. 내일부터는 그 점도 고려하도록 하지.”
“…….”
수호가 기대와 걱정을 동시에 느끼고 있는 사이, 석비룡이 말을 이었다.
“참, 자네가 보낸 건 저쪽에 치워 뒀네.”
혹시나 싶어서 안 없애고 남겨 뒀지.
“아, 뒤처리는 제가 하겠습니다.”
마기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깨끗이 불태우는 편이 좋다.
종복이 사력을 다해 소환하려던 것이 뭔지 궁금하기도 했고.
수호가 주방 뒤편 쓰레기통 근처로 다가갔다.
괴상한 몰골의 마물이 반듯이 잘린 채 놓여 있었다.
‘으, 생긴 것만 봐도 끔찍하구나.’
주검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강력했다.
크기도 3, 4층 건물 높이는 되어 보였고.
“어? 근데…….”
죽은 마물을 관찰하던 수호는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이거 왜 마기가 안 느껴지지?”
중얼거림을 들었을까.
석비룡으로부터 대답이 들려왔다.
“나쁜 기운은 베어 버렸지, 주방에 그냥 둘 수가 없어서.”
그러니까 마물을 베면서 마기까지 소멸시켰다는 말?
하긴 선배님이라면 못 할 것도 없지.
납득하던 수호는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마기가 소멸했으면… 이거 그냥 몬스터 사체 아니야?’
그럼 【도축】 스킬로 도축할 수도 있겠는데?
140화 회상
쿠쾅- 콰콰콰쾅-!
에에에에엥-
폭음과 사이렌이 어지럽게 울린다.
“우라질! 외부 방호벽이 뚫렸어.”
“이런 개같은! 마족 놈이 마도 전자포만 박살 내지 않았어도…….”
“마물이 밀려들어 올 거야! 빨리 수리 로봇 내보내!”
“수리로 될 일이 아니야… 저길 봐.”
누군가 연구소 제어 센터 한쪽 벽면을 손가락질했다.
설비를 바쁘게 조종하던 윌슨의 시선도 그곳으로 향했다.
“저 빌어먹을 놈이……!”
“지금 우리 보고 있는 거 맞지? 개자식이!”
마족.
연구소를 침공하여 함락 직전의 상황에 몰아넣은 범인이 카메라를 향해 빙긋이 미소 짓고 있었다.
시뻘건 눈알에, 입가에 흘러내리는 것은 연구소 외부 경비팀의 피였지만.
놈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미소가 분명했다.
‘으으으-’
몸이 떨린다.
공포와 분노가 미친 듯이 심장을 두드린 탓이다.
“제기랄, 아직 안 늦었어! 막을 수 있다고.”
“전자포까지 박살 났는데 뭐로 막는다는 거야?”
“방법이 있어! 저 개자식을 끌어들인 다음에 연구실 마력 융합로를 폭발시켜 버리면 돼.”
“뭐? 그, 그랬다간…….”
누군가 말을 하다 멈췄다.
아마 그랬다가는 모두 다 죽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려 했겠지.
하지만…….
‘그러지 않아도 어차피 다 죽을 테니까.’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승산은 없다.
마족이 레이더를 피해 마도 전자포를 먼저 파괴해 버렸을 때, 이미 승패는 결정됐다.
‘그래, 기왕 죽을 거라면…….’
안간힘을 써 벌벌 떨리는 몸을 다잡았다.
공포를 애써 누르고 분노를 끌어 올렸다.
“자폭할 때 하더라도…….”
누군가 결연한 목소리로 입을 뗐다.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언젠가 했던 이야기 있지? 우리 망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할지.”
“아, 그거? 맞다. 전에 합의 본 게 있었지.”
“맞아,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해야 할 것 같아.”
“미리 약속했던 거 말이야.”
“더 늦으면 안 될 거야.”
조금 전까지 공포와 분노에 사로잡혔던.
혹은 비참함에 빠져 있던 동료들의 얼굴에 설핏 미소가 어렸다.
그것은 힘없고 서글펐지만, 따뜻하기도 했다.
“무슨 말이야? 난 들은 적 없는데?”
윌슨이 물었다.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뭔가 이야기를 나눴다면, 나 빼고 했을 리가 없는데…….
“그럴 거야.”
“너 빼고 이야기했거든.”
“흐흐- 너 없을 때, 우리끼리 합의한 내용이야.”
“그래도 모두의 뜻이니까 이해해 줘야 해.”
무슨 말이야?
나만 빼고 무슨 이야기를 했다고?
이해하라니, 뭘?
“윌슨, 이쪽으로 와.”
그건 공간 이동 장치잖아.
갑자기 그건 왜?
어차피 연구실 동력으로는 한 명이나 제대로 이동시킬 수 있을까.
당장 마물이 밀려들 텐데.
지금 그게 무슨 소용이라고…….
“공간석이라도 100개쯤 있었으면, 모두 탈 수 있는 큰 공간 이동 장치를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그래도…….”
“한 명분 동력은 채워 뒀어.”
마력 아깝게 그걸 왜 채웠어?
마탄 쓸 마력도 아슬아슬한 마당에.
“내부 방호벽도 뚫렸어! 이제 곧 들이닥칠 거야.”
“윌슨, 어서 와!”
“빨리 타. 널 탈출시키고, 융합로까지 터트리려면 시간이 빠듯해.”
탈출? 나 혼자?
그게 무슨 개소리야.
다 같이 지키기로 했잖아.
마족 놈들을 모조리 몰아낼 때까지 힘을 합쳐서 싸우기로 했잖아!
“네 마음은 알아.”
“그래도 부탁이야. 제발 타, 윌슨.”
“시간이 없어.”
이러려고… 그랬던 거야?
도대체 왜 나야.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고!
“네가 우리 중에 제일 똑똑하잖아.”
“앞에서는 절대로 인정 안 했지만, 다들 알고 있었어.”
“네가 최고야.”
“세계 제일의 마도 공학자.”
“마족에게 대항하기 위해 온 세상에서 모은 마도 공학 영재들 사이에서도 독보적인 천재.”
아니야.
그렇지 않아.
“너는 천재가 맞아, 윌슨. 그러니까…….”
“살아.”
“한 명에게 희망을 걸어야 한다면 가장 확률 높은 쪽에 걸어야 하잖아.”
“천하의 윌슨이 이 정도 확률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 문과생처럼?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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