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mensional 22
수호는 기척을 죽인 채 핏자국을 따라 빠르게 걸었다.
‘시체! 아까 차를 내어온 어인족 시종이야.’
주검은 하나만이 아니었다.
드문드문.
핏자국과 함께 백작가 소속 어인족들이 죽어 있다. 시신이 마치 선을 그리듯, 어딘가로 이어지고 있었다.
수호가 조용히 주검의 선을 쫓았다.
두꺼운 여닫이문이 달린 방이 나타났다.
빼꼼 열린 문 사이로, 방 안의 전경이 비쳤다.
‘전투다!’
방에서는 사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백작으로 보이는 남자.
그리고 전신을 검은 타이츠로 감싼 채 두 발을 재게 놀리는 날씬한 체형의 어인족.
둘이 바짝 붙어 무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암살자?’
검은 옷 어인족은 척 보기에도 백작을 노리고 잠입한 살수였다.
그런데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고민할 틈이 없었다.
‘이런… 끝났어.’
순식간에 전투가 끝났다.
승자는 암살자였다.
수호가 도착했을 때, 이미 승기가 완전히 기울어 있었던 것이다.
‘백작이 죽었어.’
골치 아프게 되었다.
백작이 죽었으니 정보를 얻으려던 목적은 실패다.
자칫 암살자로 몰릴 수도 있는 상황.
‘물러나야 하나?’
아니면 암살자를 잡아 괜한 오해를 벗어야 할까.
한데 이번에도 판단을 내리기 전에 상황이 결정되어 버렸다.
“배, 백작님! 이럴 수가, 백작님이 돌아가셨어?”
뒤늦게 쫓아온 멕복이 고함을 질렀다.
암살자가 고개를 돌렸다.
날카로운 시선이 이쪽을 응시한다.
“귀족이 더 있었어? 칫, 조용히 처리하고 가려 했는데…….”
암살자의 입에서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나 그도 잠시뿐.
“어차피 너희도 한 패거리겠지?”
쿵-
중얼거린 암살자가 바닥을 박차고 쇄도했다.
살기가 넘실 흘러넘쳤다.
“쯧, 곤란하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때려눕히고 생각하는 수밖에.
스슷-
수호가 전진했다.
나날이 몸에 익은 【차원보】가 수호의 몸을 섬전처럼 밀어냈다.
그 결과 먼저 출발한 것은 상대였지만, 부딪친 곳은 방 안쪽.
상대에게 훨씬 가까운 위치였다.
‘무기는 양손에 하나씩 든 망치.’
호리호리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상대의 무기는 둔기였다.
서로의 공격이 닿는 거리.
적이 먼저 망치를 휘둘렀다.
수호도 피하지 않고 거인의 격노를 뻗었다.
꽈아아아아앙!
굉음이 방을 뒤흔들었다.
충격에 온 저택이 떨릴 정도.
수호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밀렸어?’
상대도 두어 걸음 튕겨 났다.
하지만 수호로서는 적잖이 충격적인 결과였다.
‘힘 싸움에서 밀린 건 오랜만인데…….’
여력은 남았다.
힘으로 완전히 패배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수호는 놀랐다.
거인의 격노를 얻은 후 같은 체급의 상대에게 힘으로 밀릴 거로 생각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이럴 수가! 내가 밀렸어?”
상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악이 담긴 것을 보니, 그 또한 힘에는 자신 있었던 듯.
“…….”
서로의 놀람이 만들어 낸 짧은 대치.
그 속에서 수호가 상대를 가늠했다.
‘힘이 강하긴 하다만…….’
추측건대 상대는 강한 근력이 장점인 듯했다. 수호가 압도하지 못할 정도니, 높은 확률로 사실일 터.
하나 수호는 상대와 형편이 달랐다.
‘힘으로 압도할 수 없다면 다른 걸 쓰면 되지.’
스슷.
수호가 다시 쇄도했다.
동시에 헤이스트가 시전됐다.
“이익- 도대체 어디서 이런 놈이…….”
중얼거린 상대방이 맞서 달려왔다.
양손의 망치가 수호의 머리와 옆구리를 노리고 휘둘러졌다.
푸른 기운에 둘러싸인 채.
기이한 궤도로 휘어져 들어오는 망치의 공격.
수호는 1mm도 어긋남 없이, 그것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수호가 고개를 슬쩍 비틀었다.
망치가 빗나갔다.
슷.
이번에는 한 걸음 교묘하게 전진했다.
숨 쉬듯 【차원보】가 발동.
옆구리를 노리던 망치 또한 적회색 수호자를 스치듯 지나갔다.
적의 경악한 눈빛이 코앞이다.
숨결마저 닿을 지근거리.
수호가 짧게 쥔 거인의 격노를 휘둘렀다.
퍼억!
적중했다.
위치는 명치.
놈이 훨훨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벌떡.
상체를 세운 암살자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끄윽-”
신음과 함께 털썩 쓰러졌다.
입가로 선혈이 줄줄 흘렀다.
“후우- 이게 다 무슨 일인지…….”
호흡을 고른 수호가 혀를 찼다.
표정이 떨떠름했다.
만나려던 백작은 죽었고, 암살자와 싸우기까지 하다니.
계획이 완전히 어긋나 버렸다.
그쯤 암살자에게 변화가 생겼다.
스르륵.
정신을 잃으며 마법이 풀렸는지, 하체가 지느러미처럼 변했다.
온몸을 뒤덮은 검은색 쫄쫄이(?)도 사라져 갔다.
‘저 검은 타이츠도 마법이었구만.’
머잖아 타이츠가 전부 사라졌다.
가죽조끼를 입은 상반신.
그 위에 스물은 되었을까 싶은, 앳된 여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역시 여자였네.’
별로 놀랍지는 않았다.
상대가 여성임은 전투 중에 이미 눈치챘기 때문이다.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멕복이 미적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도, 도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약골이라.”
괜히 책잡힐까 변명을 늘어놓는 모습.
수호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안 도망간 게 용하네. 뭐, 도망갔으면… 알지?”
부르르.
떨리는 몸을 간신히 진정시키는 멕복에게 수호가 물었다.
“저기 죽은 사람, 백작 맞지?”
“…예.”
“이제 어쩌나? 다른 인맥은 없어?”
“…….”
멕복의 입이 닫혔다.
딱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는 모양.
돌파구가 필요한 상황.
수호는 궁여지책으로 멕복을 압박해 보았다.
“흐음, 그럼 네가 더 필요할까?”
그런데 멕복의 표정이 이상하다.
“어?”
겁을 집어먹고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릴 거라는 예상과 달리, 경악에 찬 시선으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뭘 보고 저리 놀란 거지?’
수호가 멕복의 눈길을 따라갔다.
쓰러진 암살자의 얼굴에 멕복의 시선이 꽂혀 있었다.
“왜? 아는 사람이야?”
제법 예쁘장하긴 하다만.
상황을 생각하면 미모에 혹할 때가 아닐 텐데?
수호의 물음에 멕복이 소리쳤다.
“고, 고, 공주님!”
뭐?
갑자기 뭔 인어공주 노가리 굽는 소리야?
129화 공주, 여왕, 마녀 (1)
멕복이 후다닥 다가왔다.
쓰러진 암살자의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마, 맞습니다! 진짜로 공주님이 맞아요. 이 아름다운 얼굴! 분명합니다. 예전에 먼발치에서 한 번 뵌 적이 있습니다.”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일전에 멕복에게 알아낸 어인족 사회의 정보와는 다른 점이 있었다.
수호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공주? 여왕에게 딸이 있을 리 없을 텐데?”
어인족 나라의 지배자인 여왕은 미혼이다.
공주가 있을 리 만무하다.
“이분은 여왕님의 언니입니다! 이건 진짜, 말도 안 되는 일인데…….”
얼굴을 보고 확신에 찼던 멕복이 갑자기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죽은 사람이라도 본 듯한 얼굴이었다.
“여왕의 언니라고?”
전대 왕의 딸.
그렇다면 공주라는 호칭이 이해가 간다.
근데 왜 저렇게 놀라는 거지?
수호의 표정을 읽은 멕복이 서둘러 대답했다.
“그러니까 이분은 도,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셨다고 알려졌다고요!”
“무슨 말이지?”
“이분은 전대 폐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사고로 먼저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여왕님께서 왕위를 물려받은 거고요.”
“으음.”
수호가 침음했다.
왠지 굉장히 복잡한 일에 얽힌 기분이었다.
“이분을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살려야 하지 않을까요?”
멕복이 은근슬쩍 물었다.
수호가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움찔한 멕복이 설명을 덧붙였다.
“제 지인 중 수도 소식에 제일 통달한 사람이 백작이었는데, 방금 죽었습니다.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도 공주님을 살리는 편이 나을 듯한데…….”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걸까.
멕복은 공주가 살아났으면 하는 눈치.
굳이 이유를 캐묻지는 않았다.
그럴 틈이 없었던 까닭이다.
“쯧, 경비병들이 건물로 다가오고 있다.”
“으힉- 이제 어떻게 합니까?”
경비병에게 사실을 말하는 건 썩 좋은 방법이 아니다.
접객실을 떠나 여기 와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심을 살 터.
그리고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도 죽은 백작의 편에 설 필요가 없다.
‘일단 살려서 이야기를 듣는다.’
뒤는 그 후에 판단하면 된다.
공주가 죽어 마땅한 자라면…….
‘여차하면, 이야기를 듣고 나서 원래대로 되돌려 놓는 방법도 있으니까.’
결정을 내린 수호가 차원 보따리에서 치유 물약을 꺼냈다. 공주에게 그것을 먹인 후 둘러업었다.
“가자, 뒤처지면 두고 간다.”
“예, 예. 빨리 가죠, 빨리!”
수호가 백작의 방 창문을 훌쩍 뛰어넘었다.
* * *
어인족 수도 귀퉁이.
빈민가의 허름한 헛간.
백작가를 빠져나온 수호는 멕복의 안내를 받아 이곳으로 피신했다.
치유 물약을 몇 병쯤 더 먹이자 공주의 부상이 대부분 회복되었다.
‘왜 안 일어나?’
불러도 보고 흔들어도 보았다.
공주는 깨어나지 않았다.
‘좀 일어나라. 그래야 이야기를 듣지.’
처우도 결정하고.
한동안 기다리던 수호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짝!
* * *
15살 때였다.
“아바마마, 저는 결혼하지 않겠습니다.”
어린 공주가 왕에게 선언했다.
“역시 우리 아리아는 이 아비 곁에 영원히 함께하고 싶은 것이지? 맞다. 남자 따위 아무 필요가 없단다. 세상의 남자는 이 아비를 제외하면 모조리 범고래 같은 놈들이다. 조심해야 하느니라. 허허허.”
공주의 말이 흡족했던지, 왕의 근엄하던 표정이 단박에 풀어졌다.
하지만 아리아의 말은 ‘아빠랑 영원히 살래요’ 같은 것이 아니었다.
“오늘 무예 선생님이 그만두었습니다.”
“……?”
뜬금없는 말에 왕의 얼굴에 궁금증이 일었다.
아리아가 말을 이어 갔다.
“그 전의 선생님도 석 달을 못 채웠고, 그보다 전에는 한 달을 못 버틴 사람도 있습니다.”
“크흠.”
왕도 슬슬 말을 속뜻을 눈치챘다.
“아바마마, 저는 어려서부터 저보다 더 강한, 저를 꺾을 수 있는 사람에게 시집가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것이 이 나라의 공주인 제가 해야 할 일이니까요.”
“아리아, 꼭 그럴 필요는…….”
“하지만! 5년만 지나도 왕국 내에서 박투로 저를 꺾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꼭 그렇게 박투를 고집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 귀족 중에는 다양한 기술을 가진 자들이 있느니라. 싸움이 아니라도 뛰어난 마법으로 나라에 보탬이 될 수 있을 터야.”
“아닙니다. 저는 오직 무武로써 나라에 기여할 운명을 타고났습니다. 다른 부분은 어떻게 해도 에리얼을 따라가지 못할 테니까요.”
아리아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표정에 한 점의 씁쓸함도 없다.
뛰어난 동생에 대한 질투도, 미움도 보이지 않았다.
왕은 도리어 그것이 가슴 아팠다.
“…그래, 네 마음 가는 대로 하려무나. 하나 차후에라도 생각이 변할 수도 있으니, 미리부터 강박에 사로잡히지는 말도록 하여라.”
그렇기에 딸의 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약간의 여지를 남겼을 뿐.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바마마.”
아리아가 왕에게 인사했다.
허락을 얻었으니, 기뻐야 마땅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어째선지 웃을 수 없었다.
뺨이 제멋대로 떨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통증마저 느껴졌다.
짝!
볼에서 이는 화끈한 느낌에 아리아는 깨달았다.
‘꿈이구나.’
눈을 떴다.
주변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둑한 헛간.
아리아는 그 한가운데 누워 있었고, 옆에 누군가 앉아 있다.
입에 쌉쌀한 맛이 도는 것을 보니 약을 먹인 모양.
아리아가 억지로 상체를 들어 고개를 돌렸다.
‘아…….’
훤한 얼굴이 아리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젠가 유모 몰래 높은 바다에 올라갔을 때 본 햇빛과도 같은 얼굴이었다.
그제야 아리아는 기억해 냈다.
‘내가 졌어.’
비록 남겨 둔 한 수가 있다고는 하나, 그것은 상대 또한 마찬가지일 터.
변명의 여지 없는 패배였다.
전후를 따지면, 눈앞의 인물이 자신을 패퇴시킨 사람으로 보였다.
물끄러미 상대를 응시하던 아리아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자신을 때려눕힌 자에게 하는 말치고는 지나치게 부드러운 말투였다.
* * *
수호가 들었던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기절했다 깨어난 탓일까?
공주의 표정이 영 이상했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표정이 아니라, 사실 확인.
수호가 공주에게 물었다.
“나는 여행자입니다. 당신이 이 나라의 공주라던데, 사실입니까?”
“한때는 그랬었죠.”
멕복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뭔가 사연이 있다는 말인데…….
“백작은 왜 죽였습니까?”
“죽어 마땅한 자였어요. 하위 귀족들을 쥐어짜, 백성을 수탈하게 한 주범 중 하나니까요.”
명분은 있었다는 말이지?
수호가 질문을 이었다.
“혹시 최근 몇 년 사이 일어난 수도의 변화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수도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저만큼 아는 사람도 드물 거예요.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보세요.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기이할 정도로 대답이 순순히 돌아온다.
수호는 의아했다.
‘왜 이렇게 고분고분한 거야?’
공주의 얼굴이 발그무레했다.
눈빛도 몽롱하니 좀 이상했다.
따귀가 너무 강했나?
수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공주를 바라봤다.
그 모습이 어떻게 보였는지, 공주가 입을 뗐다.
“질문을 생각하실 시간이 필요하다면, 그전에 제가 먼저 하나 물어도 될까요?”
“으음…….”
“당신은 누구세요?”
이미 한 차례 받았던 질문이다.
수호는 설명을 약간 덧붙여 대답했다.
“여행자입니다. 다양한 세상을 여행하며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 제 일입니다.”
“이름이 듣고 싶어요.”
“원수호입니다.”
“원수호 님이셨군요. 저는 아리아예요.”
시종일관.
핀트가 약간 어긋난 듯한 태도였지만 수호는 개의치 않았다.
당장 질문해야 할 것들을 정리하기 바빴으니까.
‘수도로 온 목적을 잊지 말자.’
첫 번째는 해루석을 구하기 위함이고.
두 번째는 어인족 마을에 세금이 과하게 부과되는 이유를 찾기 위함이다.
수호는 떠올린 것을 곧바로 물었다.
“해루석은 어디서 구할 수 있습니까? 대량으로 구할 만한 방법이 있을까요?”
“…수도의 귀족들에게 살 수 있을 거예요. 아주 조금이라면요.”
아리아가 약간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어딘지 마뜩잖은 기색이 담겼다.
“사는 것 말고, 직접 채취할 방법은 없습니까?”
“네, 없어요.”
단호한 대답.
수호가 되물었다.
“혹시 채취에 특별한 방법이 필요한 건가요?”
윌슨이나 드워프의 기술을 동원하면 수월하게 채취할 방법이 있을지도…….
“해루석은 대량으로 구할 수 없어요. 포기하세요.”
공주가 수호의 기대를 재차 부정했다.
앙다문 입술이 고집스럽다.
뭔가 사정이 있는 건가?
해루석에 대한 반감이 느껴진다.
수호는 해루석 건을 약간 뒤로 미루기로 했다.
‘해루석에 관해서는 수도 사정을 듣고 나서 다시 묻자.’
괜히 심기를 자극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럼 다른 질문을 하겠습니다. 갑자기 수도의 세금이 늘어난 원인을 알고 있습니까?”
“아…….”
아리아가 얕게 탄식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대답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제법 긴 이야기였다.
* * *
공주의 이야기를 들은 수호가 물었다.
“그러니까 선대 왕과 왕비가… 공주이자 당신의 동생에게 살해당했다는 말입니까? 당신도 습격을 당한 끝에 목숨만 부지했고요?”
공기 방울 섬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에는 몬스터가 산다.
몰래 소풍을 나갔던 아리아는 함께 갔던 동생에게 공격받고 몬스터 무리에게 내팽개쳐졌다.
“네, 우연히 그 자리를 지나가고 있던 무예 선생님께서 저를 구해 주셨어요.”
아리아는 구출된 후에도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상황이 복잡하게 돌아감을 파악한 무예 선생은 궁 밖에서 그녀를 돌봤다.
며칠 후.
아리아가 정신을 되찾았을 때는 이미 왕과 왕비마저 죽어 있었다.
“으음.”
“부모님까지 돌아가신 후 동생 에리얼이 왕위에 올랐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해정석을 악착같이 끌어모으기 시작했죠. 이유는 모르겠지만요. 그리고…….”
고민하는 듯, 잠시 말꼬리를 늘이던 아리아가 말을 이었다.
“해루석은 에리얼의 마법으로 해정석을 정제해서 만드는 물건이에요. 자연에서 채취하는 것이 아니랍니다. 그래서 포기하라고 말씀드린 것이고요.”
귀족인 멕복도 전혀 몰랐던 은밀한 정보였다.
“…그렇군요.”
모두 엮여 있었다.
‘결국은 전부 지금의 여왕과 관련된 이야기인가.’
해루석도 세금 문제도.
모두가 여왕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여왕을 만나러 가 봐야 하나?’
아무런 인맥도 없는 상황에서 대뜸 찾아간다고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을까?
듣자 하니, 여왕의 성정이 썩 훌륭해 보이지도 않는데.
‘마냥 힘으로 해결하기도 꺼림칙하고…….’
과정이 어찌 되었든 일국의 왕이다.
공주의 말이 완벽한 사실이란 보장도 없다.
그런 상황에서 막무가내로 왕궁으로 쳐들어갈 수는 없는 일.
‘어떻게 해야 하지?’
고민하는 수호의 귀에 영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와 함께해 주실 수 없을까요?”
아리아가 상체를 완전히 일으켜 수호 앞에 바짝 다가앉았다.
수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비려!’
농후한 비린내가 훅 끼쳐 왔다.
작위가 높을수록, 마법적 힘이 강할수록 냄새가 심한 건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냄새가 독했다.
수호가 슬쩍 물러났다.
아리아가 처량한 눈빛으로 다시 물었다.
“저를, 저희 어인족을 도와주실 수는 없는 건가요?”
“어인족을 돕고 싶은 마음은 있습니다. 하지만 꼭 당신을 도와야 어인족을 돕는 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에리얼은… 여왕은 폭정을 일삼고 있어요. 세금이 과하게 부과되는 것도, 귀족들이 주민과 부하 귀족을 쥐어짜는 것도 모두 여왕으로부터 비롯된 일이에요. 그래서 저는 여왕을 막으려 합니다.”
그 아이가 저를 해쳤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에요.
공주가 처량한 눈빛으로 덧붙였다.
‘결국… 여왕을 막는 것이 이번 차원의 주 임무인 건가?’
수호는 잠시 더 고민했다.
은근슬쩍 다가오는 아리아 때문에 자꾸 생각이 끊겼지만, 결국 결정을 내렸다.
‘일단 공주를 따라간다.’
공주와 함께 가기로.
그녀의 말이 진실인지 알아보려면 함께 가 볼 필요가 있었다.
‘그러다 보면 결국 여왕도 만나게 될 거야.’
해루석 문제는 그때 알아보면 될 터.
정 안되면 해정석을 다량 구하는 것도 대안이 될 테고.
결정을 내린 수호가 대답했다.
“당신 말이 사실이라면, 저도 당신을 돕겠습니다.”
메시지가 수호의 눈앞을 수놓았다.
[차원 임무 【수도 조사】를 완수하셨습니다.]
[어인족 만족도가 10 상승합니다.]
[차원 임무 【수도 조사】가 【여왕의 폭정】으로 연계됩니다.]
『여왕의 폭정』
- 여왕은 알 수 없는 이유로 해정석을 긁어모으는 중. 그 탓에 온 어인족 사회가 고통받고 있다. 공주 아리아를 도와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고, 여왕의 폭정을 막아라.
- 보상 : 어인족 만족도
임무의 내용은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한 부분 의미심장한 구절이 있었을 뿐.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라고? 흐음.’
공주가 말하지 않은 진실이 있는 건가?
혹은 공주가 모르는?
문구를 음미하고 있을 때, 아리아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가요, 저희 아지트에.”
130화 공주, 여왕, 마녀 (2)
아리아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와 뜻을 같이하는 어인족이 있었는데, 그들은 수도 근처 작은 공기 방울 섬에 살고 있었다.
수호는 아리아를 따라 그들의 섬에 도착했다.
“공주님! 도대체 어디를 다녀오시는 길입니까?”
저편에서 어인족 중년 남성이 빠르게 다가왔다. 만만찮은 기세가 느껴졌다.
아리아가 마주 다가가며 대답했다.
“백작을 처치하고 오는 길이에요, 선생님.”
무예 선생이 있다더니.
그게 저 중년 어인족인 모양이었다.
“뭐라고요? 위험하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어쩌자고 혼자 수도에 들어가신 겁니까!”
“백작이 하부 귀족을 쥐어짜는 바람에 피해가 컸잖아요. 가뜩이나 여왕이 혹정을 펼치는 와중에 그놈까지 날뛰게 둘 수는 없었어요.”
“그렇다고 해도 날을 잡아서 함께 갔어야…….”
대화가 이어졌다.
수호는 천천히 다가가다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앗, 공주님이다! 공주님이 돌아오셨다.”
“공주님, 혼자 어디 다녀오셨어요?”
“갑자기 사라지셔서 걱정했다고요.”
“말씀 좀 하고 가세요.”
목소리를 듣고, 스물 남짓한 어인족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모두 젊은 귀족이었다.
수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딘가를 응시하던 수호의 눈빛에 의혹이 일었다.
‘흐음, 헷갈리네. 발룡이라도 데려올 걸 그랬나?’
그때쯤 아리아가 어인족들에게 수호를 소개했다.
“이분은 여행자 원수호 님이에요. 우리를 도와주시기로 하셨습니다.”
좌중의 시선이 수호에게 향했다.
“어? 두 다리로 걷고 있어.”
“비늘이 없는데?”
“어인족이 아닌 거야?”
“여행자? 뭐 하는 사람이지?”
웅성거림 속에 무예 선생이 나섰다.
“여행자라고요? 혹시 어인족이 아닌 겁니까?”
아리아가 나서서 대답했다.
“네, 어인족은 아니지만, 우리 어인족을 돕기로 약속하셨어요. 다들 환영해 주세요. 저를 꺾을 정도로 강한 분이시니까, 큰 도움이 될 거예요.”
공주의 말이 끝나자 좌중에 큰 소란이 일었다.
“헉! 정말이에요, 공주님?”
“저 사람이 공주님을 꺾었다고요?”
“정말 그렇게 강해요?”
무예 선생이 수호에게 다가왔다.
“저는 한때 무예를 가르친 인연으로 공주님과 함께하고 있는 스퀴드라고 합니다.”
“저는 원수호입니다.”
“공주님을 꺾을 정도로 강한 분께서 저희를 도와주신다니, 든든하기 이를 데 없군요.”
스퀴드의 눈이 묘한 빛으로 번뜩였다.
수호가 대답하려 할 때, 큰 소리가 들려왔다.
“말도 안 돼! 난, 난 인정할 수 없어!”
* * *
유독 큰 덩치의 청년이었다.
그가 붉게 상기된 얼굴로 외치고 있었다.
시선이 공주와 수호를 오갔다.
수호를 잡아먹을 듯한 시선이 공주에게 닿았을 때는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튜너, 네가 인정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야.”
아리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덩치 큰 청년, 튜너의 표정이 한층 더 불쌍하게 변했다.
하나 곧 활활 타오르는 눈빛으로 수호를 노려봤다.
“난 인정 못 해요. 저 이방인이 우리와 함께한다는 것도, 공주님을 꺾었다는 것도! 딴마음을 품고 있을지 알 게 뭐예요?!”
그의 외침에 몇몇 어인족이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등장한 이방인.
게다가 어인족도 아닌 수호를 신뢰하기는 힘들었다.
하물며 상의도 없이 공주의 독단으로 데려왔으니…….
공주의 태도는 단호했다.
“내가 간절히 청해서 모셔온 분이야. 또다시 내 앞에서 이분을 모욕하면 가만히 안 있을 줄 알아!”
공주의 호통에 튜너가 움찔했다.
하지만 수긍할 마음이 없는 듯, 이내 이글이글한 눈으로 수호를 노려봤다.
“…아무리 그러셔도, 갑자기 나타난 이방인을 신뢰할 수는 없잖아요.”
한결 누그러진 말투였지만, 고집이 느껴졌다.
공주의 아미가 파르르 떨렸다.
무예 선생 스퀴드가 끼어들었다.
“공주님께서 데려오신 분이니, 저분을 받아들이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신뢰는 억지로 만들 수 없는 법이지요.”
“선생님까지…….”
“그러니 간단히 대련이라도 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저분에게 우리 어인족을 돕겠다는 마음이 있는지 확인할 수는 없겠지만, 실력이라면 확인 가능하지 않습니까?”
실력 검증을 해 보자는 소리였다.
“내가 하겠어. 공주님을 꺾은 게 사실이라면, 나 정도는 이길 수 있겠지.”
튜너가 대번에 나섰다.
“맞아, 공주님보다 강하다면 튜너는 쉽게 이기겠지.”
“맞아, 튜너 따위야 간단할 거야.”
“튜너는 힘은 강하지만 머리는… 강하지. 하하.”
어인족들이 한마디씩 더했다.
공주가 입술을 달싹였다.
무예 선생 스퀴드가 한발 먼저 수호를 바라봤다.
“어쩌시겠습니까?”
“그러죠. 기왕이면 서로 간에 신뢰가 있는 편이 좋을 테니까요.”
수호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호로서도 한 번쯤 확인해 볼 것이 있었다.
대답이 떨어지자 튜너가 한 걸음 나섰다.
수호가 마주 다가갔다.
누군가의 시선이 수호의 몸을 바쁘게 오갔다.
“불상사가 있어서는 안 되니, 무기는 사용하지 않도록 하지요. 서로 다치지 않도록 배려하시기 바랍니다.”
말과 함께 대련이 시작됐다.
* * *
“간다아앗!”
튜너가 재빨리 쇄도했다.
불끈.
하박이 기이할 정도로 부풀어 올랐다.
‘주먹의 위력을 끌어 올리는 기술인가?’
수호가 튜너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사이, 튜너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주먹이 휘둘러졌다.
퓨슝-
로켓이 발사되듯, 순식간에 가속.
수호를 노리고 쏘아져 왔다.
‘해치려는 생각은 없군.’
아주 막돼먹은 자는 아닌 모양이야.
튜너의 주먹은 수호의 급소를 노리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도 간신히 비껴 맞는 정도.
무예 선생이 미리 주의한 대로였다.
수호가 측면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주먹이 빗나갔다.
“이익-”
허무하게 빗나간 공격에 튜너가 이를 악물었다.
반대편 주먹이 곧바로 날아왔다.
‘강하고 빨라. 하지만…….’
수호는 아침마다 석비룡과 대련한다.
석비룡의 주먹은 산이라도 쪼갤 듯 강렬했고, 맞고 나서야 깨달을 정도로 은밀했다.
튜너의 것과는 비교조차 미안할 만큼 위력적이었다.
그런 주먹에 단번에 나가떨어지지 않으려면…….
스슷-
숨 쉬듯 자연스럽게 【차원보】를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처럼.
후웅-
“또 빗나갔어!”
“오- 대단한걸? 튜너의 주먹이 스치지도 않잖아!”
“어쩜 저렇게 움직일 수 있지?”
관객들의 감상을 들으며, 수호가 주먹을 휘둘렀다.
튜너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팡-
이번에는 수호의 주먹이 허공을 쳤다.
맞출 수 있었지만 일부러 빗맞혔다.
상대의 배려에 응해 준 것이다.
‘적당히 양보는 했고, 슬슬 마무리… 어?’
한데 그 순간 무언가 수호의 감각을 자극했다.
‘마력? 외부로 신호를 보낸 건가?’
어인족 사이에서 섬 바깥을 향해 한 가닥 마력이 뻗어 나갔다. 마치 어딘가로 신호를 보내는 듯한 모습이었다.
‘쯧, 빨리 끝내야겠어.’
부드럽게 마무리하려 했는데 돌아가는 상황이 그렇지 않다.
여유 부릴 틈이 없다.
푸슝-
튜너의 주먹이 다시금 수호를 노리고 뻗어 왔다.
수호는 피하지 않았다.
손바닥을 뻗어 튜너의 주먹 아래를 건드렸다.
휘청.
주먹이 결을 따라 미끄러졌다.
튜너가 비틀거렸다.
“으억-”
깜짝 놀라는 튜너의 옆구리에 수호의 주먹이 꽂혔다.
털썩.
숨이 막힌 튜너가 그 자리에 무너졌다.
수호가 그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일어나. 어서.”
“지, 지금 무슨……?”
갑작스런 수호의 태도에 튜너가 깜짝 놀랐다.
“일어나, 뭔가 온다.”
급한 목소리에 튜너가 일어섰다.
그러고 보니 맞은 곳이 아프지 않다.
수호가 힘을 조절한 까닭이다.
“도대체……?”
튜너가 패배의 감정을 곱씹을 틈도 없이 이변이 시작됐다.
* * *
튜너는 억울했다.
‘젠장, 괜히 얕보다가…….’
비록 갑자기 공주님과 함께 나타났다고는 하나, 상대가 크게 다치기를 원치 않았다.
그랬기에 힘을 아꼈다.
급소를 노리지도 않았다.
‘전력을 다했더라면 이렇게 허무하게 패하지는 않았을 텐데.’
공주님이 언젠가 말했다.
자기를 꺾는 강자에게 시집갈 거라고.
그것이 나라를 위한 길이라고.
튜너는 노력했다.
강한 어인족이 되어, 나쁜 여왕을 징치하고 공주님을 배필로 맞이한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한데 그것이 단숨에 물거품이 되려 하고 있었다.
‘하필 정체도 모를 이방인에게…….’
이방인의 주먹에 맞고 쓰러진 짧은 시간 동안.
튜너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도 복잡하게 돌아갔다.
한데 생각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일어나!”
이방인의 외침.
그 뒤로 아지트 밖에 몰려든 괴물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마, 망치 새우다! 망치 새우가 나타났다!”
어인족의 두 배는 될 크기.
망치처럼 생긴 앞발은 바위도 쉽게 깰 정도로 강했다.
“많아. 백 마리도 넘겠어!”
“젠장, 저것들이 왜 여기 나타난 거야. 먼바다에서만 사는 놈들일 텐데.”
“해류를 어떻게 뚫고 들어온 거야!”
먼바다에 사는 몬스터가 수도 인근의 아지트에 나타날 이유라면 뻔했다.
‘여왕의 수작이야. 제기랄!’
튜너가 등에 멘 장창을 끌러 들었다.
“모여! 방진을 짜!”
“적이 많아요. 힘을 합쳐서 싸워야 해요!”
스퀴드 선생과 공주님이 어인족을 독려했다.
튜너도 재빨리 무리 속으로 합류했다.
진형을 갖춘 어인족을 향해 망치 새우가 덤벼들기 시작했다.
‘너무 많아. 이길 수 없어.’
이곳의 어인족은 기껏해야 스물.
몬스터는 100이 넘는다.
일대일이라면 이길 수 있겠지만, 저 정도 숫자 차이를 극복하기에는 전력이 태부족했다.
‘도망쳐야… 공주님이라도 피신시켜야 해.’
튜너는 죽음을 각오했다.
어떻게든 포위망을 뚫고 공주라도 내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데 상황은 생각만큼 나쁘게 돌아가지 않았다.
콰아아아아앙!
폭음이 터졌다.
어느새 망치 새우 무리에 달려든 이방인이 망치를 휘두른 것이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대가리가 박살 난 망치 새우 한 마리가 날아가며 다른 놈의 몸을 덮쳤다.
콰직.
놈에게 부닥친 망치 새우의 앞다리가 허무하게 부러졌다.
‘마, 말도 안 돼! 한 방에 두 마리를…….’
한 마리는 즉사.
나머지는 주 무기를 상실했다.
둘이 대번에 전투 불능 상태가 됐다.
‘설마 아깐 살살했던 거였어?’
자신이 상대를 배려했다고 생각했다.
방심했기에, 혹은 힘을 아꼈기에 졌다고 여겼다.
그러나 아니었다.
‘진짜로 공주님을 꺾은 거였어?’
이방인이야말로 실력의 반의반도 발휘하지 않았다.
튜너가 다치지 않도록 배려했던 것이다.
“멍하게 있지 말고 창 찔러, 튜너!”
공주님이 빽 소리쳤다.
어느새 눈앞에 망치 새우의 앞발이 날아들고 있었다.
“으합-”
튜너가 기합과 함께 창을 내질렀다.
창이 망치 새우의 가슴을 찔렀다.
캉-!
급하게 찌른 탓이다.
마법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창이 갑각을 파고들지 못하고, 튕겨 나왔다.
망치 새우의 커다란 앞발이 튜너의 머리로 떨어졌다.
튜너가 창을 뉘여 머리 위를 가렸다.
‘젠장, 제발 버텨라!’
창이 부서지지 않고 버티기를.
자신의 팔심이 몬스터의 앞발을 감당해 내기를.
튜너가 염원했다.
‘공주님을 지켜 주지도 못하고,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어.’
살아야 한다.
하지만 튜너가 망치 새우의 앞발에 시험당하는 일은 없었다.
푹-
이방인이 던진 단검이 새우의 앞다리에 파고들었다.
단검에 연결된 사슬이 잡아 당겨졌다.
휘익-
놀랍게도 망치 새우가 사슬에 끌려 이방인 앞으로 날아갔다.
‘저, 저런 힘이……!’
오래 놀라고 있을 틈도 없었다.
콰아앙-!
끌려간 망치 새우의 대가리가 대번에 터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 순간 튜너는 완전히 승복했다.
‘강해, 공주님보다. 어쩌면 그 어떤 어인족이 와도 이기지 못할 만큼.’
어인족 역사상 그 어느 귀족을 데리고 와도 저 이방인보다 약하지 않을까.
승복하고 나니, 오히려 시야가 트였다.
상황이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목숨을… 이방인이 우리 모두의 목숨을 구하고 있어.’
이방인이 없었다면, 이곳의 스물 남짓한 어인족은 모두 죽었으리라.
끽해야 공주님만이라도 피신시키기 위해 애쓰는 게 전부였을 터.
‘이대로 뒤처질 수는 없어.’
오랜 세월 공주를 사모해 온 튜너였다.
비록 이방인의 실력을 인정했으나, 이대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가 힘껏 창을 내질렀다.
이번에는 바다 기운이 듬뿍 담겼다.
푸욱-
창이 망치 새우의 갑각을 뚫고 박혔다.
‘터져라!’
콰아앙-!
가슴이 터진 망치 새우가 풀썩 쓰러졌다.
‘인정하겠어. 당신이 공주님과 조금 더 어울린다는 걸.’
하지만 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
당사자가 알았다면 경기를 일으킬 생각을 하며, 튜너가 창을 휘둘렀다.
튜너의 창에 또 한 마리의 망치 새우가 목숨을 잃었을 즈음이었다.
“쉬르으으이이이이이임-”
괴성과 함께 온 공기 방울 섬이 진동했다.
구우웅-!
일반적인 망치 새우 3마리를 합쳐 놓은 것만 한, 커다란 놈이 공기 방울을 뚫고 지면으로 내려섰다.
“미, 미친! 천둥 새우야! 천둥 새우까지 나타났어!”
“먼바다에서도 깊은 곳에만 사는 놈이 어째서 여기에…….”
“선생님, 어떻게 해요?”
“도, 도망쳐야 해.”
어인족들이 겁에 질렸다.
천둥 새우 앞발 끝에 달린 두 개의 공이는 망치 새우의 것의 10배는 될 크기.
천둥 새우가 그것을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꽈르르릉!
폭풍이 일 때.
먼바다를 항해하다 보면 들을 수 있는 천둥소리가, 온 섬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 안에 담긴 살벌한 기운에 모든 어인족이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는?’
겁먹은 몸을 다잡는 와중에도 튜너는 눈을 움직였다.
묘한 기대감을 안고서.
‘어디 있지?’
이방인은 좀 전에 서 있던 장소에 없었다.
튜너가 서둘러 시선을 움직이려는 순간.
콰콰콰콰콰아아앙!!!
천둥 새우가 일으킨 굉음은 비교도 안 될 만큼 압도적인 충격파가 사방을 휩쓸었다.
어인족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심지어 망치 새우마저 몸을 움츠러뜨렸다.
기대감 때문이었을까.
모두가 굳어 있을 때, 튜너만은 한발 빠르게 굉음의 진원을 발견했다.
“천둥 새우가… 죽었어!”
천둥 새우가 있던 곳.
거대한 크레이터가 파였다.
그 한가운데.
망치를 땅에 내려찍은 자세로 이방인이 서 있었다.
주변에 흩뿌려진 것은 천둥 새우의 잔해가 분명했다.
“저, 저럴 수가!”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어떻게……?”
모두가 얼빠진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이방인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계속 여기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요. 탈출하죠.”
뭐가 더 나타날지 모르니까요.
모두가 홀린 듯이 이방인의 말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131화 공주, 여왕, 마녀 (3)
얼마 전 기절한 공주를 데리고 머물렀던 헛간.
아지트를 탈출한 수호와 어인족들은 그곳으로 향했다.
둘러앉은 어인족들 틈에서 무예 선생 스퀴드가 입을 뗐다.
“아무래도 아지트의 위치가 들통난 것 같습니다.”
공주가 말을 받았다.
“이제 어떻게 하죠? 이대로는 머물 곳조차 마땅치 않은데.”
공주의 말에 모두의 얼굴에 근심이 어렸다.
한동안 헛간 안에 적막이 흘렀다.
얼마나 지났을까.
스퀴드가 마지못해 말한다는 듯 찡그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 정보통에게서 들어온 소식이 있습니다. 며칠 후, 수도 근처 왕가의 별장에 여왕이 행차한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들은 어인족들의 표정에 희망이 떠올랐다.
“이대로 도망만 다니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차라리 싸우죠.”
“그날 여왕을 습격하는 거예요. 여왕을 처치하고, 나라를 바로 세웁시다!”
“맞아요. 여왕만 처치하면 우리에겐 공주님이 계시니까요.”
“여행자님이 도와주시면 여왕을 처치할 수 있을지도…….”
어인족들이 한마디씩 던졌다.
수호는 묵묵히 그 장면을 지켜봤다.
얼마간 의견이 더 오간 후, 아리아가 수호를 바라봤다.
“여행자님, 도와주시겠어요?”
눈빛이 처연했다.
수호가 어인족들을 죽 훑었다.
한 바퀴 돈 시선이 다시 공주에게 닿았다.
“알겠습니다.”
수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여행자님!”
“우와- 대박! 여행자님이 도와주신대.”
“여행자님이 도와주신다면, 여왕의 친위대도 무찌를 수 있을 거야.”
“당연하지. 이제 희망이 생겼어.”
시끌벅적한 소란 속에서 수호는 눈앞에 뜬 메시지를 확인했다.
[차원 임무 【여왕의 폭정】을 완수하셨습니다.]
[어인족 만족도가 5 상승합니다.]
[차원 임무 【여왕의 폭정】이 【여왕 처치】로 연계됩니다.]
* * *
『여왕 처치』
- 며칠 후 여왕이 별장으로 외유를 나선다. 그곳을 습격해, 폭정을 일삼으며 공주를 죽이려는 여왕을 처치하라.
- 보상 : 어인족 만족도
수호가 가라앉은 눈빛으로 새 임무를 확인했다.
‘어인족 만족도라.’
몇 번의 연계를 거쳤다.
그럼에도 보상은 만족도에 그쳤다.
‘역시… 뭔가 있어.’
수차례 느낀 찜찜함이 점차 확신으로 변해 갔다.
멕복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그가 수호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여행자님, 도대체 왜 그러십니까?”
공주의 무리에 합류한 후, 멕복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혹여 백작의 지인이라는 게 들통나기라도 했다가는,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몸을 사리던 멕복이 지금 수호에게 따져 묻고 있었다.
“뭐가?”
수호가 무덤덤하게 되물었다.
멕복의 인상이 더더욱 찌푸려졌다.
“아실 만한 분이,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제안에 응하시냐고요?”
여왕을 처치하러 가자는 제안을 뜻하는 것이었다.
“글쎄, 여왕만 해치우면 다 끝낼 수 있으니까?”
“말이 안 되잖아요! 여왕이 보냈는지 어떤지 모를 몬스터조차 못 이기는 자들입니다. 무슨 수로 여왕을 죽인다는 말입니까. 물론 여행자님이 강하시지만, 여왕의 주변에는 어마어마한 병력이 따라다닐 거라고요. 굳이 여행자님이 저들을 위해 위험을 감수할 이유도 없잖아요? 게다가 저 무예 선생이란 자가 말한 정보통도 의심스럽고요.”
“호오- 생각보다 날 대단히 생각해 주는걸?”
“…….”
멕복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동안 약간의 정이 들기는 했지만 수호를 위하는 마음은 크지 않았다.
그저 이대로 끌려다니다가는 요절하겠다는 위기감 때문일 뿐.
“어쨌든 넌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돼.”
“저 그럼… 이제 저는 필요 없지 않을까요?”
수호가 씩 웃었다.
- 필요해. 그러니까 괜히 도망갈 생각은 하지 마. 어디 있어도 내가 찾아낼 테니까.
차원 전음이 멕복의 머리를 파고들었다.
“으헉-”
멕복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차원 전음은 말을 전하는 것일 뿐 대상의 위치를 찾는 기능은 없다.
하지만 멕복에게는 세상 어디로 숨어도 수호가 찾아올 것처럼 느껴졌다.
“쉬어 둬.”
수호가 멕복의 어깨를 툭 치고는 정좌한 채 눈을 감았다.
차원 호신무가 수호의 몸속을 휘돌았다.
* * *
어인족 왕궁의 대전.
“다들 돌아가서 업무 보세요.”
여왕의 명에 신하들이 대전을 나갔다.
여왕이 시녀를 대동하고 방으로 향했다.
“방에 아무도 들이지 말도록.”
“예. 여왕 마마.”
뒤따르던 호위 무사들이 방 앞을 막아섰다.
방 안에는 시녀와 여왕뿐.
지키는 자가 없지만 호위 무사들은 반문하지 않았다.
그들은 밤새 방문 앞을 지키다가 여왕이 방에서 나오면 그제야 다시 호위를 시작할 터였다.
찰칵.
방이 닫혔다.
빛나던 여왕의 눈빛이 몽롱하게 변했다.
여왕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흐느적거리며 침상에 올라 눈을 감았다.
“곤란하구나.”
침소에 나직한 목소리가 흘렀다.
여왕의 것이 아니었다.
침상 앞 의자에 앉은 시녀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쓸모가 다한 사냥개가 축사를 뛰쳐나가 버렸어.”
하필이면 잡아먹으려던 시점에 말이야…….
시녀의 놀라운 독백에도 여왕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흐응- 목줄을 채워 뒀으니 원하면 언제고 잡을 수 있겠지만… 일이 잘되어 가다 보니, 작은 변수 하나조차 눈에 거슬리는구나.”
시녀, 우르슬라가 미간을 살포시 찌푸렸다.
“어찌 이룩한 내 왕국인데, 미꾸라지 한 마리가 흙탕물을 만들게 둘 수는 없지 않겠니?”
그녀는 평민으로 태어났다.
왕궁의 시녀가 되고도 한동안은 자신의 재능을 몰랐다.
어느 귀족이 남긴 해정석을 우연히 훔쳐 먹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날 후, 우르슬라의 삶은 변했다.
그녀는 마법을 쓸 수 있는 귀족이 되었다.
그녀의 마법은 어인족 역사상 누구도 갖지 못한 위대한, 그리고 위험한 마법이었다.
“이제 왕궁의 권력자는 모두 내 정신 지배 아래에 있으니.”
정신 지배.
다른 어인족을 자기 마음대로 부리는 것이 우르슬라의 마법이었다.
심지어 몬스터조차 그녀의 마법을 피해 가지 못했다.
시녀, 시종장…….
처음엔 그런 주변 인물부터였다.
얻어 낸 것도 그저 약간의 편의뿐이었고.
그러던 어느 날.
우르슬라는 깨달았다.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어인족 왕국을 통째로 손에 넣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이 왕국은 내 것이란다.”
문제는 있었다.
정신 지배 마법은 바다 기운의 효율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대상이 강한 능력을 보유할수록 정신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더 큰 바다 기운을 소모했다.
“에리얼, 네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구나.”
우르슬라가 여왕 에리얼의 뺨을 쓰다듬었다.
에리얼의 능력은 해정석을 응축해 해루석으로 변환하는 것.
덕분에 우르슬라는 바다 기운의 소모를 충당할 수 있었다.
“그래도 네 언니를 더 이상 살려 둘 수는 없단다.”
아리아는 어인족 최고 수준의 전사.
직접 그녀를 지배하기엔 기운의 소모가 너무 컸다.
그렇기에 이목을 가리고 속여 원하는 방향으로 써먹어 왔다.
이제 아리아의 쓰임새가 다했다.
해정석을 빼돌리던 백작을 끝으로 수도에 우르슬라를 거역할 귀족은 더 이상 남지 않았다.
“그러니 마지막은 네가 직접 끝내려무나.”
우르슬라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 * *
며칠 후, 오후.
어인족 수도의 헛간.
수호는 차원 전음으로 윌슨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 수호, 아까 아침에 상왕련주님이 직접 와서 마인 탐지기를 받아 갔어.
- 몇 개나 만들었어?
- 해루석까지 써서 간신히 200개 채웠어.
- 수고했어. 그 정도면 국내에 던전 브레이크가 더 일어나는 건 막을 수 있겠네.
수호가 어인족 세상에 와 있는 동안에도, 전 세계에 던전 브레이크가 이어졌다.
첫날만큼 동시다발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끝나지 않고 드문드문 계속됐다.
수호를 비롯한 헌터들의 발 빠른 대처로 비교적 빠르게 사태를 진정시킨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마인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거였지.’
던전 브레이크의 원인은 마인.
그들이 활개 치는 한 사태를 미연에 방지할 수가 없었다.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발룡이조차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은밀한 수법이 동원됐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막을 수 있어. 마인이 던전 코어에 접촉하는 것만 차단하면 되니까.’
곧 마인 탐지기가 유통된다.
던전 게이트에 탐지기를 설치하면 브레이크를 막을 수 있다.
- 응, 일단 국내는 확실히 정리될 거야. 문제는 한국이 전부가 아니라는 거지만.
윌슨이 마뜩잖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 세계적으로 마인들이 날뛰는 현 상황이 유쾌하지 않은 탓이었다.
- 유통은 어떻게 한대?
- 국내에 먼저 풀 거래. 수출은 국내의 던전 브레이크를 완전히 잠재운 뒤야. 성능을 입증한 후에 마정석과 바꿀 생각이래. 그래야 마인 탐지기를 더 만들어 낼 수 있을 테니까.
- 전 세계를 감당할 만큼 만들 수 있으려나?
세상 모두가 한마음으로 마정석을 모아다 주면 충분할 터.
하나 그렇게 간단하게 돌아가지 않을 거란 걸 수호는 직감했다.
- 가능한 만큼이라도 만들어야지, 뭐. 그리고 마인 탐지기만 만들고 끝낼 건 아니니까. 마정석을 꾸준히 구할 루트도 찾아봐야겠지.
- 흐음…….
- 수호 너는 좀 어때? 갔던 일은 잘되고 있어?
- 글쎄, 아직은 며칠 전과 다름없어. 하지만…….
- 하지만?
- 해루석을 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일은 오늘 안에 끝마칠 수 있을 거야.
- 오늘?
- 응, 오늘.
- 알았어, 그럼 조심해서 잘 처리하고. 어서 돌아와, 친구. 하양이가 보고 싶은 모양이야, 하하.
- 그래, 곧 볼 수 있을 거야.
수호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게 윌슨과의 대화가 끝났을 무렵.
“여행자님.”
공주, 아리아가 수호를 불렀다.
“예.”
“이제 가실 시간이에요.”
수호가 몸을 일으켰다.
어인족들이 결의에 찬 눈빛으로 수호를 바라봤다.
“가죠.”
수호가 어인족을 이끌고 헛간을 나섰다.
* * *
어스름이 막 내려앉을 무렵.
멀리 수도가 내려다보이는 작은 공기 방울 섬.
수호와 일행이 그곳에 나타났다.
“여기는 왕가의 별장이 있는 곳이에요.”
공주가 설명했다.
시선을 돌리니 유독 작은 공기 방울 섬 끝에 그럴 듯하게 지어진 저택이 보였다.
“저곳에 여왕이 와 있을 겁니다.”
무예 선생 스퀴드가 설명을 덧붙였다.
어인족들이 결연한 표정으로 각자 무기를 꼬나쥐었다.
“가죠.”
수호가 조용히 앞장섰다.
얼마 후, 일행은 저택 가까이 도착했다.
저택에는 담장조차 없었다.
담벼락을 대신한 것은 이름 모를 꽃으로 채워진 화단.
일행은 그 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
“불이 켜져 있어요. 역시 에리얼이 저기에…….”
아리아가 복잡한 표정으로 저택을 바라봤다.
돌연 저택의 발코니 문이 열렸다.
하늘하늘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왕이다!”
누군가 숨죽여 외쳤다.
모두의 시선이 여왕에게 향했다.
놀랍게도 여왕은 똑바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집 나간 사냥개가 제 발로 돌아왔으니.”
여왕의 목소리가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일행이 당황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여왕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사냥개를 잡을 차례군요. 물론, 그 전에 쓸데없이 끼어든 들개를 먼저 처리해야겠지만. 호호호-”
여왕의 말이 끝나는 순간.
화악-
저택 앞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동시에 아무런 기척도 없이.
기세조차 감춘 채.
날카로운 칼날이 수호의 등으로 쏘아졌다.
덥썩.
칼날은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허공에 멈췄다.
“어, 어떻게……?!”
수호에게 칼 든 손목을 붙잡힌 스퀴드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뇌까렸다.
수호는 스퀴드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찜찜하더라니… 이제 확실히 알겠다.”
대신 중얼거리며 망치를 휘둘렀을 뿐.
콰직!
132화 공주, 여왕, 마녀 (4)
털썩.
머리통이 사라진 스퀴드의 시신이 바닥에 쓰러졌다.
“스, 스퀴드 선생님?!”
“여행자님이 스퀴드 선생님을 죽였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배신자?! 여행자가 배신을?!”
어인족들이 단박에 혼란에 빠졌다.
하나 그중 몇은 진실을 보았다.
“아니야, 스퀴드 선생님이 먼저 여행자님의 등을 찌르려 했어.”
“맞아, 먼저 여행자님을 기습하려다가 오히려 당한 거라고!”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아리아 공주 또한 그 장면을 제대로 목격한 어인족 중 하나였다.
그녀가 얼빠진 표정으로 수호를 쳐다봤다.
“여… 행자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수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차원 임무 【여왕 처치】가 【진실한 원흉】으로 연계됩니다.]
대신 갑자기 떠오른 메시지에 신경 쓰고 있었다.
『진실한 원흉』
- 여왕은 모든 일의 배후인 ‘원흉’의 정신 지배 마법에 당한 상태다. 진실한 원흉을 제거하지 않고는 어인족 왕국에 평화는 없다. 놈을 찾아라, 그리고 제거하라!
- 보상 : 아리아의 보답, 고유 스킬.
보상 항목에 시선을 끌 만한 내용이 적혀 있었지만, 수호는 신경 쓰지 않았다.
훨씬 더 놀라운 문구 때문이었다.
“여왕이 꼭두각시였어?! 진짜 원흉이 따로 있었다고?”
스퀴드를 처음 봤을 때부터 찜찜했다.
그의 몸속에는 기이한 기운이 머물고 있었다.
대상에게 악의적인.
마기와는 묘하게 달랐지만, 불길하기 그지없는 기운.
발룡이를 대동하지 않은 것을 잠시 후회한 것도 그 탓이었다.
‘스퀴드가 아군이 아니란 것은 짐작했었는데.’
단지 찜찜한 기운 때문만은 아니다.
아지트에서 망치 새우가 나타나기 직전, 외부로 신호가 발신됐다.
그것은 스퀴드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그랬기에 수호는 스퀴드를 믿지 않았다.
‘한 방에 깔끔하게 해결하고 끝내려 했더니.’
그럼에도 스퀴드의 제안에 응한 것은 자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복잡한 일을 단순하게.
한 번에 깔끔하게 마무리할 자신이.
그런데 예상외의 상황이 펼쳐졌다.
‘이제 싹 정리하려는 차에 이게 무슨…….’
스퀴드와 여왕을 처치하면 일이 끝날 줄 알았다.
한데 뜬금없이 임무가 연계되다니…….
심지어 여왕은 ‘적’조차 아니었다.
그렇게 수호가 고민하던 찰나의 순간.
“죽여라! 친위대는 저것들을 처치하라!”
여왕이 외쳤다.
별장 문이 열리고 친위대가 뛰어나왔다.
수가 많다.
기세 또한 흉흉했다.
“고, 공주님, 이제 어떻게 하죠?”
“설마 스퀴드 선생님이 배신자였어?”
“완전히 함정에 빠진 거야.”
“다, 다 틀렸어.”
친위대의 기세에 일행이 동요했다.
그때 수호는 다른 것을 읽었다.
‘친위대의 몸에서도 똑같은 기운이 느껴져.’
스퀴드의 몸에 있던 기분 나쁜 기운.
그것이 친위대의 몸에도 파고들어 있었다.
수호는 임무의 내용을 확실히 깨달았다.
‘스퀴드도 친위대도 같아. 아마… 여왕도 똑같겠지?’
멀어서 감지할 수 없지만 여왕의 몸에도 같은 기운이 흐를 것이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모두가 놈의 흉계에 당했구나!’
차원 임무에 언급된 진실한 흉수.
지금 파악한 대상뿐 아니라 훨씬 많은 어인족이 놈에게 당했으리라.
생각이 거기에 이른 순간.
쾅-
수호는 바닥을 박차고 돌진했다.
‘어디 있냐?’
원흉을 찾는다.
근처에 없다면 온 수도라도 뒤져야 한다.
만약 근처에 있다면…….
‘이 자리에서 끝내 주마.’
친위대가 황급히 수호 앞을 막아섰다.
“온다!”
“막아라!”
“저놈을 죽여!”
삼지창으로 수호를 겨눴다.
수호는 굳이 상대하지 않았다.
‘헤이스트!’
수호의 몸이 가속했다.
스슷-
자연스럽게 【차원보】가 발휘.
속도를 더한다.
마치 어인족 세상을 휘도는 급류처럼.
수호의 몸이 곡선을 그리며 움직였다.
후웅-
후웅-
창이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그때 이미 수호는 친위대를 한참이나 지나쳐 있었다.
“막아! 저놈을 막으란 말이다!”
여왕이 악을 썼다.
별장 문이 열리고 귀족들이 나타났다.
언뜻 보기에도 백 명이 넘었다.
그들이 각자의 마법을 준비했다.
쾅.
그 순간 수호가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드래곤 스탭!’
허공을 박차며 다시금 도약.
발코니를 향해 쭉 미끄러졌다.
“막아!”
“쏴!”
귀족 중 하나가 손을 들어 올렸다.
커다란 물방울이 수호를 향해 날아들었다.
심상치 않은 기세.
수호가 공중에서 거인의 격노를 휘둘렀다.
콰아앙-!
물방울이 터져 나갔다.
충돌의 여파로 추진력을 상실한 수호가 발코니에 닿지 못하고 떨어져 내렸다.
“떨어졌다!”
“잡아.”
“죽여라!”
귀족들이 수호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하나 수호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표정이 일그러진 것은 여왕.
아니, 발코니 안쪽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우르슬라였다.
‘저놈은 도대체 뭐야?’
망치 새우를 처치한 것까지는 그러려니 하겠지만.
여왕 친위대를 허수아비로 만드는 것으로 모자라, 왕국 최정예인 귀족들의 스킬이 날아드는 와중에도 발코니까지 닿을 뻔했다.
자칫했다가는 여왕을 잃을 위기.
심지어 우르슬라 자신의 안위조차 지키지 못할 뻔했다.
한데 잔뜩 찌푸려졌던 우르슬라의 얼굴이 펴졌다.
사이한 웃음이 떠올랐다.
‘저놈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굳이 여왕을 앞세우지 않아도 된다.
‘힘으로 온 왕국을 찍어 누를 수 있어.’
어쩌면 먼바다 너머에 있다는 히스파니올라의 황금 도시까지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우르슬라의 마음에 욕망이 타올랐다.
그녀가 옆을 더듬었다.
커다란 상자에 가득 찬 해루석이 손에 닿았다.
우르슬라가 그것을 한 줌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까득.
차오르는 바다 기운을 느끼며, 그녀가 마법을 시전했다.
‘자, 이방인이여. 나의 것이 되어라.’
한 줄기 은밀한 기운이 수호를 향해 뻗어 나갔다.
* * *
발코니를 향한 쇄도가 막히고도, 수호는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표정이 밝아졌다.
의도한 바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찾았다!’
발코니에 선 여왕의 뒤편.
스퀴드와 같은 종류의 기운을 그곳에서 발견했다.
그것은 훨씬 더 짙고 음험했으며 지독했다.
수호는 확신했다.
‘저놈이 원흉이야.’
이제 끝을 낼 순간이다.
한데 그 순간, 원흉으로부터 한 가닥 기운이 수호를 향해 밀려들었다.
바로 그 기분 나쁘고 음험한 기운이었다.
수호가 곧바로 스킬을 시전했다.
‘정신 방벽!’
수호에게만 보이는 한 자루 칼날이 눈앞에 생겨났다.
칼날이 사이한 기운을 향해 가차 없이 휘둘러졌다.
서걱-
기운이 끊겼다.
동시에 발코니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끼아아아아아악-”
우르슬라가 여왕 앞으로 쓰러질 듯 걸어 나왔다.
턱.
발코니 난간을 짚고서야 몸을 세웠다.
눈과 코에서 선혈이 줄줄 흘러내렸다.
핏기 어린 눈빛이 수호를 향했다.
“죽여 버리겠다. 죽여 버리겠다. 네놈들 모조리, 몬스터의 밥으로 만들어 버리겠다!”
저주를 터트린 우르슬라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 순간.
“해 보시던지.”
픽 웃은 수호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아아- 이럴 수가…….’
아리아는 경악했다.
목숨을 구해 주고 지금까지 돌봐 준 무예 선생 스퀴드.
‘선생님이 배신자였다니.’
주변 정황은 스퀴드가 배신자임을 말하고 있었다.
심지어 스퀴드가 여행자를 찌르려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기까지 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럼 도대체 난… 이제까지 무엇을 한 거지?’
지난 세월이 떠올랐다.
스퀴드의 인도에 따라 여러 귀족을 죽여 왔다. 주민들에게 해를 끼친 자라고 했다.
하지만 여왕의 말은 그것을 부정했다.
‘사냥개. 나는 여왕의 사냥개였어.’
그녀는 잔인한 진실을 깨달았다.
부모님을 살해하고, 자신 또한 죽이려 든 동생.
그녀를 처단하기 위해 바쳐 온 세월이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오히려 원수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음을.
‘아…….’
정신이 아득했다.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공주님!”
누군가 옆에서 잡아 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이대로 쓰러져 깨어나지 않았으면…….’
그녀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을 때.
문득 귓가로 누군가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여왕이 꼭두각시였어? 진짜 원흉이 따로 있었다고?”
아리아는 그 목소리를 기억해 냈다.
‘여행자님의 목소리?’
그 속에 담긴 내용은 아리아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었다.
‘여왕이, 에리얼이 꼭두각시?!’
아리아가 부축을 뿌리치고 몸을 세웠다.
여행자에게 물어야 한다.
지금 그 말이 사실인지.
도대체 상황이 어찌 되어 가는 건지.
하나 그녀에게는 기회가 없었다.
쾅!
바닥을 박차고 여행자가 달려 나갔다.
별장을 향해 곧게 쇄도했다.
‘아! 나와 싸우셨을 때는…….’
여행자의 실력은 놀라웠다.
단숨에 친위대 사이로 파고든 여행자는 그들의 공격을 쓸모없게 만들었다.
‘힘을 반도 쓰지 않았구나.’
수십 자루의 창은 여행자의 몸에 생채기조차 내지 못했다.
‘부디 여행자님이… 이대로 모든 진실을 밝혀 주셨으면.’
여왕을 사로잡아 진실을 밝혀 주었으면.
절망에 질식하기 직전인 아리아는 지푸라기라도 잡듯 빌었다.
쾅-
여행자가 다시금 도약했다.
그의 몸이 발코니로 쏘아졌다.
“아……!”
아리아가 안타까움에 탄식했다.
갑자기 나타난 귀족들이 여행자의 발목을 붙잡은 까닭이었다.
한데 또다시 예측 밖의 일이 생겼다.
“끼아아아아악-”
처절한 비명.
그리고 발코니에서 튀어나온 여자.
아리아는 그녀를 알아 봤다.
‘우르슬라?’
동생의 전담 시녀였다.
최소한 아리아가 궁에서 떠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설마 아까 여행자님의 말은…….’
여왕이 꼭두각시라던 여행자의 말.
그리고 마치 공격이라도 당한 듯 피 흘리며 나타난 우르슬라.
‘설마 우르슬라가?’
벼락이라도 맞은 듯.
아리아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만약 동생이 아무런 죄가 없다면.
모든 것이 누군가의 음모라면.
‘우르슬라가 원흉이었어?’
아리아의 시선이 우르슬라에게 고정됐다.
우르슬라는 눈에서 피를 흘리며 저주에 찬 말을 내뱉고 있었다.
“죽여 버리겠다. 죽여 버리겠다. 네놈들 모조리, 괴물의 밥으로 만들어 버리겠다!”
구구구궁-
저주의 말이 끝나는 순간, 공기 방울 섬이 흔들렸다.
온 섬이 점점 어두워졌다.
“어, 어어? 저, 저게 뭐야?”
누군가 얼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아리아의 고개가 하늘로 향했다.
섬을 휘감을 정도로 거대한 수십 개의 촉수가 물속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둥근 머리통에서 두 개의 광망이 태양처럼 번뜩였다.
“크라켄?!”
아리아의 눈이 경악으로 치뜨였다.
나머지 어인족들 또한 놀람과 공포에 울부짖었다.
“크, 크, 크라켄이다!”
“왜 심해 괴수가……?!”
“미친! 저게 어떻게 수도 바로 앞에 나타날 수가 있는 거야?”
“말도 안 돼. 저주야. 큰 바다의 어머니께서 노하신 게 틀림없어.”
“우, 우린 다 죽을 거야.”
모두가 공포에 질렸다.
심지어 친위대와 여왕 측 귀족들조차 한순간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 순간, 아리아는 퍼뜩 고개를 돌렸다.
‘그분이라면.’
왜인지는 몰랐다.
온 왕국의 귀족이 모두 달려들어야 승부를 가늠할 수 있는 심해 괴수 크라켄.
그런 괴물이지만…….
여행자라면.
그녀를 꺾은 운명의 상대이자 이제라도 그녀에게 진실을 깨닫게 해 준 은인이라면.
‘어쩌면 크라켄을 이길 수 있을지도…….’
아리아의 소망은 덧없이 부정당했다.
그녀는 고개를 바쁘게 움직여 보았지만 어디에서도 여행자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없어, 여행자님이 사라졌어.’
여러 세상을 돌아다니는 것이 여행자의 일이라고 했다.
언제든 다른 세상으로 떠날 능력이 있을 터였다.
압도적인 괴물.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
그 앞에서…….
‘여행자님은… 가신 거야.’
차마 도망쳤다는 말은 속으로도 하지 않았다.
이미 여행자에게 목숨을 빚졌으니까.
그래서 그저 처량하게 위를 올려다보았다.
크라켄의 수십 개 다리가 온 공기 방울 섬을 휘감으려 다가오는 모습을.
어인족 왕국의 희망이 사라지는 모습을.
한데 크라켄의 뒤편.
이상한 모습이 겹쳐 보였다.
‘손?’
커다란 손.
그것이 높은 바다에서 흘러들어 오는 빛을 가리며, 아래로 뻗어 오고 있었다.
‘어디서 본 적이 있는 듯한…….’
아리아가 눈을 비볐다.
아무리 봐도 그것은 여행자의 손과 판박이처럼 닮아 있었다.
그렇게 그녀가 의아해하는 사이.
덥석.
커다란 손이 크라켄의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133화 공주, 여왕, 마녀 (5)
사건의 전말을 파악한 뒤.
수호는 【차원 시야】를 시전, 현 위치를 차원문이 열리는 곳으로 지정했다.
그리고 곧바로 지구로 건너갔다.
‘저건 웬 오징어야?’
열린 샤워 부스 문 너머.
커다란 오징어 괴물이 섬으로 다가가는 장면이 보였다.
촉수 다리가 섬을 통째로 휘감으려 들었다.
‘어딜!’
수호가 왼손을 뻗었다.
오징어 괴물의 목덜미가 손아귀에 잡혔다.
‘크기도 하네.’
놈은 매우 컸다.
크기가 왜곡된 수호의 손아귀가 놈의 목덜미에 딱 맞을 정도.
그 탓에 손아귀 위쪽으로 괴물의 대가리가 삐죽 튀어나왔다.
수호가 망치를 뽑았다.
튀어나온 부분을 겨냥하고 휘둘렀다.
‘터져라!’
망치가 물살을 가르며 움직였다.
오징어 괴물의 대가리에 적중했다.
둥-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수호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허! 안 터져?’
연체동물을 닮은 생김새답게 놈은 흐물거렸다.
망치에 맞고도 단박에 죽지 않았다.
둥둥둥-
몇 번을 후려쳤음에도 놈은 죽지 않고 버텼다.
‘와, 이런 경우가 다 있네.’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던 수호가 문득 망치를 갈무리했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던 까닭이다.
‘한번 지져 볼까?’
수호의 왼손에는 [전격의 반지]가 끼워져 있다.
푸른 보석 드워프 블톤이 실력을 발휘해 만든 아이템이다.
손에 닿아야 사용할 수 있기에 사용 빈도가 낮았는데, 가만 보니 지금 상황에 딱이다.
수호가 스킬을 시전했다.
파지지직-
반지가 전격을 토했다.
괴물이 전기 구이 오징어처럼 몸을 비비 말았다.
그러길 잠시.
축.
놈이 몸을 늘어트렸다.
‘잘 구워졌네.’
그래도 마무리는 확실히 해야지.
수호가 석화비도를 뽑았다.
서걱-
서걱-
구워진 크라켄의 몸통이 여러 등분으로 잘려 해류에 떠내려갔다.
* * *
그사이 공기 방울 섬 안에서는 난리가 났다.
특히 우르슬라는 피범벅 된 얼굴을 악귀처럼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저게 뭐야! 어디서 저런 괴물이……?!’
정체 모를 거인의 손.
비장의 무기인 크라켄마저 거대한 손에 당해 죽었다.
무력하게.
힘 한번 못 써 보고.
왕국을 손에 넣고, 나아가 먼바다까지 정복하려던 원대한 꿈이 무너지려 한다.
‘안 돼! 내 꿈을, 내 왕국을 이대로 뺏길 수는 없어!’
우르슬라가 손을 뻗었다.
해루석 상자가 손에 잡혔다.
우르슬라가 해루석을 입속에 들이부었다.
콰르르르르르-
급류 같은 바다 기운이 우르슬라의 몸을 채웠다.
‘키히히히- 할 수 있어! 모두 다 내 거야! 온 바다의 모든 것을 내 것으로 만들 거야!’
눈과 코에서 멎었던 피가 다시 흘러내렸다.
우르슬라는 느끼지 못했다.
외려 터질 듯한 고양감과 광기만이 우르슬라를 가득 채웠다.
‘모두 모여라! 모여서 저 손을 찢어 죽여라!’
우르슬라가 정신 지배를 사용했다.
이제껏 썼던 것은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한 기운이 발휘됐다.
해류 너머 먼 곳으로 마법이 퍼져 나갔다.
온 바다의 움직이는 것들이 종류를 가리지 않고 몰려들기 시작했다.
* * *
‘뭐가 이렇게 많아?’
수호는 깜짝 놀랐다.
섬에서 갑작스레 강력한 기운이 느껴지더니, 온 바다에서 무언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수호의 손에 적의를 내뿜으며.
수호가 곧바로 반응했다.
‘염동력!’
우뚝.
다가오던 것들이 물속에 멈춰 섰다.
‘아니, 뭐가 이렇게 끝도 없이…….’
그런데 우르슬라의 마법은 예상 이상이었다.
어쩌면 바다의 품이 너무도 컸던 탓일지도 모른다.
너무 많은 생물이 수호의 손을 노리고 덤벼들었다.
고작 ‘하급’ 염동력으로는 계속 붙잡아 두기 힘들 정도로.
‘징글징글하네. 쯧.’
혀를 찬 수호가 시선을 공기 방울 섬 안으로 돌렸다.
손에 달려드는 것을 일일이 상대할 필요가 없다.
‘원흉을 죽이면 끝나겠지?’
수호가 손을 뻗으려 할 때.
이번에는 친위대가 아리아 일행을 덮쳤다.
심지어 여왕마저 눈을 까뒤집고 달려들었다.
‘정신이 나가서 저지르는 일이니, 다 죽이기도 뭣하고.’
전말을 파악했더니, 저들을 모조리 때려잡을 마음이 들지 않는다.
특히 여왕은 해루석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수호가 서둘러 외쳤다.
“발룡아! 발룡아! 잠깐만 와 봐!”
동시에 손을 뻗었다.
손바닥이 아리아 일행 앞에 벽을 만들었다.
정신이 나간 여왕과 귀족이 손에 들러붙었다.
그들이 빠짐없이 손바닥에 붙었을 때.
수호가 손을 휘둘렀다.
후웅-
어인족들이 공기 방울 밖으로 날아갔다.
‘해류에 떠내려갈 테니, 다시 덤비지는 못하겠지.’
어인족이니까 바다에 빠져 죽을 일도 없을 테고.
아리아 일행의 안전은 확보했다.
그사이 바닷속 몬스터들이 섬 앞까지 당도했다.
그때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여어- 히사시부리. 잘 지냈나, 수호?』
짧은 앞발을 든 채, 발룡이가 인사했다.
수호가 몸을 움찔했다.
‘도대체 인터넷에서 뭘 배운 거야?’
수호는 혼미해지려는 정신을 다잡으며, 물속 몬스터 떼를 가리켰다.
“…몬스터 좀 막아.”
발룡이의 몸에서 한 가닥 마력이 뻗어 나갔다.
『그 정도 부탁은 이 친절한 발룡이 님이 흔쾌히 들어주겠네. 멈추어라!』
물속 몬스터들이 굳었다.
‘그래, 뭐 언제는 멀쩡한 말투였다고…….’
일만 잘하면 되지.
애써 납득한 수호가 빠르게 섬 안을 살폈다.
저택 뒤편.
우르슬라가 산발을 한 채 도망치고 있었다.
‘어딜 도망치려고.’
수호가 손을 뻗었다.
그림자가 드리웠다.
우르슬라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 안 돼! 내 왕국이… 왕국은 내 것이란 말이다!”
거대한 손이 모기라도 잡듯 우르슬라를 내리쳤다.
쁘직.
그것이 어인족 왕국을 혼란으로 몰고 간 마녀의 최후였다.
* * *
『전 세계를 휩쓴 재앙! 그 원인은 마인?』
『던전 브레이크를 일으킨 마인, 그 정체는?』
『마인의 목적은 무엇인가?』
『랭커가 말하는 마인 구별법!』
.
.
.
포털 사이트의 기사를 확인하던 무토 다다노리가 스마트폰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제 시작이군.”
세상은 마인을 대중에게 숨겼다.
마인의 존재가 드러났다가는 혼란이 일어날 거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혼란은 이미 일어났다.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이 차례로 마인의 존재를 공표했다.
마인의 존재가 밝혀지자, 세간의 관심이 온통 그것으로 쏠렸다.
다다노리의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계획대로였으니까.
“위대한 분이 오실 그날까지…….”
다다노리가 결의에 찬 눈빛을 빛냈다.
똑똑.
노크와 함께 부하가 들어왔다.
“회장님, 꼭 보셔야 할 소식이 있습니다.”
“……?”
부하가 태블릿을 내밀었다.
영상이 재생됐다.
『세계 최초로 마인 탐지기가 완성되었다는 소식입니다. 한국의 비전투 계열 길드인 상왕련이 마인 탐지기를 개발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한국 헌터 협회와 공조하여 마인 탐지기를 각 던전 입구에 설치했으며, 마인을 완벽히 구별해 낼 수 있다는 결과를 얻었다고 합니다. 어제부터 한국에서 던전 브레이크가 한 차례도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상왕련 측의 발표에 신빙성이…….』
영상을 보는 다다노리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마인 탐지기라고?”
위대한 분의 현신을 위해서는 많은 피가 필요하다.
그를 위해 던전 브레이크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
한데 그 던전 브레이크가 막히고 있으니…….
다다노리가 심각한 표정을 짓는 사이에도 영상은 계속 재생됐다.
『…상왕련 측에서는 재료 수급 문제로 인해 생산량에 제한이 있으나, 머지않아 전 세계로의 유통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말을…….』
콰직!
다다노리의 손에서 태블릿이 부서졌다.
“불가능한 일이야!”
이번 일을 계획하며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이 은밀성이다.
던전 코어에 접촉할 때까지 들키지 않는 것이 작전의 핵심.
그렇기에 마기 특유의 전염성을 대폭 희생해, 은밀성을 살리는 데 힘썼다.
한데 그런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있었다.
“위대한 분의 현신을 위해,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란 말이다!”
예기치 못한 장애물의 등장.
다다노리는 분노했다.
그가 서늘한 눈빛으로 부하에게 물었다.
“방금 상왕련이라고 했나?”
“예…….”
다다노리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상왕련, 상왕련이라…….’
상왕련에는 이미 몇 차례 손을 썼다.
매번 실패했다.
그때마다 연관됐던 인물이 있었다.
‘드래곤 라이더!’
눈 밑을 파르르 떤 다다노리가 벌떡 일어섰다.
“한국으로 간다.”
“준비하겠습니다.”
부하가 서둘러 방을 달려나갔다.
천천히 뒤를 따르는 다다노리의 눈에 위험한 불길이 끝없이 일렁였다.
* * *
수호는 해류에 떠내려가던 어인족을 건져 섬으로 돌려보냈다.
주르륵- 털썩.
‘이만하면 다 건진 거 맞지?’
더 이상 해류에 떠다니는 어인족은 안 보였다.
수호가 섬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공주는… 음, 마음이 복잡한가 보군.’
아리아는 진즉 건져 올려놓은 여왕을 껴안고 오열하고 있었다.
이제껏 쌓아 온 증오는 동생도 피해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회한과 미안함이었다.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하겠지.’
여왕이 살아 있으니, 때가 되면 마음이 정리될 터.
수호는 공주를 내버려 두고, 전투가 끝난 순간 떠올랐던 메시지를 확인했다.
[차원 임무 【진실한 원흉】을 완수하셨습니다.]
[어인족 만족도가 80 상승합니다.]
[고유 스킬 【차원 통로】를 획득하셨습니다.]
만족도 상승 폭이 크다.
‘이 정도면 어인족 문제는 다 해결한 것 같고, 스킬이나 살펴볼까.’
수호는 편안해진 마음으로 새 스킬을 확인했다.
【차원 통로】
- 교류 차원 사이에 통로를 연다. 통로의 유지 시간, 통로를 통과하는 대상의 격, 대상의 크기에 따라 마력 소모량이 증가한다. 단, 차원 여행자의 원소속 차원으로는 통로를 연결할 수 없다.
- 재사용 대기 시간 24시간
‘이건… 대박이야!’
수호가 눈을 크게 떴다.
스킬의 성능이 놀라웠기 때문이다.
‘타 차원 간에 통로를 열 수 있다니!’
교류 차원에 치명적인 위험이 닥치면, 다른 차원으로 대상을 피신시킬 수 있다.
각 차원에 마족의 마수가 뻗어오고 있음을 생각하면, 굉장히 든든한 스킬이었다.
게다가…….
‘마력을 계속 늘리다 보면 선배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대상의 격과 크기에 따라 마력이 소모된다.
당장에 석비룡을 타 차원으로 이동시키기는 힘들 터.
하지만 수호가 꾸준히 성장하다 보면, 언젠가 석비룡이라는 밸런스 붕괴급 히든카드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씨익.
수호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미소 지었다.
* * *
얼마 후, 어인족 왕궁.
“여행자님! 고맙습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꼼짝없이 죽을 거로 생각했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수호가 궁으로 들어서자 아리아의 일행이 쫓아 나와 반겼다.
생명의 은인.
나라의 위기를 막아 준 영웅에 대한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중에는 공주 아리아도 섞여 있었다.
“여행자님, 오셨군요! 정말 고맙습니다!”
아리아가 반색하며 빠르게 다가왔다.
그대로 품에 파고들 기세.
농후한 비린내가 훅 끼쳤다.
수호가 차원보를 발휘, 육탄 공세를 피했다.
“하하, 네. 나라가 빠르게 수습되었다니 다행입니다. 잘 됐어요.”
“덕분에요. 정말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아쉬운 표정을 짓던 아리아가 이내 고개를 깊이 숙였다.
“혹사당하는 주민이 없어졌으니,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아니에요, 큰 은혜를 입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어요. 안 그래도 여행자님이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말과 함께 아리아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뿔처럼 생긴 주먹만 한 아이템이었다.
수호가 궁금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봤다.
주변에서 소란이 일었다.
“어? 저, 저건!”
“왕실의 보물인 레비아탄의 뿔피리 아니야?”
“맞아. 몇 년 전 개국 기념일에 선왕 폐하께서 부는 걸 본 적이 있어.”
“설마 왕실의 보물을 여행자님께 드리는 거야?”
“저건 초대 국왕 폐하께서 만들고, 큰 바다 어머니께 축성祝聖 받은 물건이잖아?”
“여행자님이 우리 어인족에게 해 주신 일을 생각하면, 초대 폐하께서도 당연하게 생각하실걸?”
소란에 섞인 내용에 수호가 놀랐다.
아리아가 손을 내밀었다.
“어서 받으세요.”
“귀한 물건인 것 같은데, 제가 받아도 될지……?”
“물론이죠, 여행자님은 우리 어인족 왕국을 구해 주신 나라의 은인이시니까요. 그리고 저의, 저의…….”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린 아리아가 손을 쭉 내밀었다.
수호가 뿔피리를 받아 들었다.
그것을 확인한 수호의 얼굴에 경탄의 미소가 걸렸다.
134화 공주, 여왕, 마녀 (6)
[레비아탄의 뿔피리]
- 전설의 바다 괴수 레비아탄의 뿔을 벼려 만든 뿔피리. 바다의 신의 축성을 받아, 소유자를 삿된 기운으로부터 지킨다. 마력을 주입해 불면 상서로운 기운이 소리를 따라 퍼진다.
- 아이템 등급 : 영웅
- 【신성한 메아리】
- 내구도 400
【신성한 메아리】
- 소리가 닿는 공간 내, 모든 아군의 공격력, 방어력 및 마력 회복 속도가 30% 증가한다.
- 죽음, 마기 등 사특한 속성을 가진 대상의 공격력과 방어력을 30% 감소시키며, 해당 기운의 회복을 방해한다.
- 10분간 지속.
아이템의 성능을 확인한 수호가 감탄했다.
‘대박! 범위 버프 스킬이잖아!’
깔아 두면 주변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일명 ‘장판 스킬’이다.
다수에게 적용되기에 지구에서는 귀한 대접을 받는다.
‘게다가 사특한 속성의 적에게 디버프를 건다니…….’
수호의 눈이 번뜩였다.
‘이건 마인과의 싸움에서 크게 쓰일 거야.’
비린내를 참아 가며 임무를 수행한 보람이 있었다.
수호가 환한 표정으로 아리아에게 인사했다.
“왕실의 보물답게 굉장한 물건이네요. 고맙습니다.”
이방인에게 내어 주기 쉽지 않았을 텐데.
“나라가 안정되는 대로, 해정석 여유분도 보내 드릴게요. 이전처럼 주민들을 쥐어짜서 생산할 수는 없겠지만요.”
“고마워요. 너무 과분한 보상인 것 같아서, 오히려 제가 미안하네요.”
“아니에요! 절대로! 수, 수호 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뭐든 드릴 수 있답니다.”
어, 음.
눈빛이 좀 부담스러운데…….
수호가 왠지 모를 위기감에 불안해하고 있을 때, 공주가 돌연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사실은 큰 문제가 남았답니다.”
어인족 나라의 문제는 다 해결된 거 아니었나?
수호가 공주에게 물었다.
“문제라고요?”
“네, 아주 큰 문제요. 잠깐 따라와 주시겠어요.”
공주가 앞장섰다.
잠시 후, 수호는 호화로운 방 안에 들어섰다.
‘침실인가?’
침실이 맞았다.
방 안에는 침대가 있었고, 그곳에 누군가 누워 있었다.
“제 동생이자 여왕인 에리얼이에요.”
“그렇군요. 근데 왜……?”
“한번 보아 주세요.”
아리아가 이불을 젖혔다.
반쯤 가려져 있던 여왕의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정신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군요.”
“네, 마녀를 처치했음에도 정신이 계속 이 상태에요.”
여왕은 멍한 눈으로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우르슬라를 막 처치했을 때와 같은 상태.
마법의 후유증이라 곧 회복될 줄 알았는데…….
“시간이 제법 흘렀는데도 변화가 없군요. 혹시 말은 통하던가요?”
“음식을 입에 넣어 주면, 받아 먹는 정도밖에는… 별다른 반응이 없어요.”
“음…….”
곤란하다.
여왕이 이 상태라면…….
‘해루석을 구하는 일은 실패인가.’
수호가 속으로 혀를 찼다.
공주가 말을 이었다.
“귀족들과 친위대도 마찬가지 상태랍니다. 덕분에 왕궁을 장악하고 수도를 정상화하는 데는 쉽게 성공했지만, 앞일이 막막하네요. 당장 심해 몬스터라도 나타났다가는 수도가 풍비박산 날 거예요.”
“일단 이거라도 먹여 보도록 하죠.”
수호가 치유 물약을 꺼내, 여왕의 입에 흘려 넣었다.
차도가 없다.
“…안 되는군요.”
기대를 걸었던지, 아리아의 얼굴에 진한 실망감이 떠올랐다.
‘방법이 없을까?’
잠시 궁리하던 수호가 차원 전음을 시전했다.
- 발룡아! 발룡아!
.
.
.
수호는 발룡이를 불러 여왕을 살피게 했다.
발룡이가 입을 열었다.
『본좌의 위대한… 큭, 내가 보기엔 보통 수법으로는 치유할 수 없는 상처야.』
응?
말투가 또 바뀌었네?
잠시 어이없는 눈빛으로 발룡이를 쳐다본 수호가 물었다.
“물약으로는 안 된다는 말이지?”
『물약뿐 아니라, 치유 계열 마법으로도 고치는 것이 불가능해. 영혼에 상처를 입은 탓이니… 탓이야.』
언어 패치를 하다가 오류라도 생겼나.
인터넷에서 뭘 배운 건지 일 끝나면 꼭 알아봐야겠다.
“그럼 치유 방법은?”
『생명이나 영혼과 관련하여 몹시 격 높은 수단이 필요해.』
자존심 강한 발룡이가 저렇게 말할 정도면, 웬만한 방법으로는 안 된다는 소리다.
‘방법이 없을까?’
없는 재주를 발휘할 수는 없으니, 스스로 해결은 불가능.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선배님은… 고치는 쪽보다는 부수는 쪽에 능하실 테고.’
누구에게 조언을 구해야 하려나?
고민하고 있는데, 코로 슬금슬금 냄새가 느껴졌다.
‘비려! 왜 은근슬쩍 기대는 건데!’
수호는 어깨로 다가오는 아리아의 머리를 잽싸게 피했다.
처연한 표정으로 탄식한 아리아가 곧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
“네?”
“에리얼이 이런 상태라, 자칫 왕실의 대가 끊기게 생겼답니다. 그러니 저라도 대를 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겠지요?”
“도와주세요.”
“뭘요?”
“대를 잇는 일이요.”
“아니, 그걸 왜 저한테…….”
수호는 당황했다.
아리아의 호감이야 진즉 알았지만,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나올 줄이야.
게다가 사귀자는 것도 아니고, 대를 잇자니…….
“그야 수호 님은 큰 바다의 어머니께서 점지해 주신 저의 짝이니까요.”
“…아닐걸요?”
“어째서요?”
아리아가 물었다.
수호가 그녀의 하체를 가리켰다.
“종種의 차이를 생각해야죠. 대를 잇고자 한다면 특히나 더요.”
“그거라면 문제없어요.”
자신만만하게 대답한 아리아가 바다 기운을 움직였다.
펑-
아리아에게 다리가 생겼다.
신기하게도 반바지를 입고 있어 불상사는 없었다.
아니, 불상사는 있었다!
‘저게 뭐야!?’
수호가 깜짝 놀라 아리아를 바라봤다.
“사, 상체에 비늘이……?”
떠듬떠듬 물었다.
그만큼 당황스러웠기 때문이다.
‘왜 상하 반전이 된 거야!?’
다리가 생기는 순간, 상체가 물고기로 변하는 법이 어디 있어!
동화 속의 인어 공주는 어디로 갔냐고!
그러고 보니 멕복이 자꾸 투구를 벗지 말라고 했던 것이 떠오른다.
수호의 얼굴에 비늘이 없는 게 들키면 난리가 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멕복, 이 자식!
설명을 제대로 했어야지!
이를 갈고 있을 때, 아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름답죠? 제 입으로 말하기 부끄럽지만, 저는 유독 상체의 비늘 빛깔이 곱답니다.”
아리아가 방긋 웃었다.
수호가 일어섰다.
“여왕님을 깨울 방법에 대해서는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세요.”
“앗! 아아- 더 있다가 가시지…….”
“바쁜 일이 있어서요. 가자, 발룡아.”
수호는 재빨리 여왕의 침실을 빠져나왔다.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젠가 얘기한 것 같은데, 수호 너는 특이한 것들에게 참 인기가 좋구나. 크큭-』
한글 패치는 갑자기 왜 사라졌냐?
수호는 채 따지지도 못하고 서둘러 지구로 돌아왔다.
* * *
『여왕 깨우기』
- 인어족 여왕 에리얼은 정신 지배 마법에 당한 후유증으로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상태. 영혼의 상처를 치유하여, 여왕의 정신을 깨우자.
- 보상 : 여왕의 보답
‘그 와중에 또 임무를 얻었네.’
황급히 도망 나오는 와중에 차원 임무가 떴다.
내용은 예상 그대로.
보상 또한 예측되었다.
‘여왕을 깨우면, 아마 해루석을 공급받을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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