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mensional 21

는… 서면으로 보장해 드릴 수 있는 것 이상의 서비스를 제공해 드릴 수도 있답니다.”
윤지수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그때 누군가 끼어들었다.
“원수호 헌터님은 저희 상왕련과 이미 업무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거든요. 헛심 빼지 마시고 회의 준비나 하시죠.”
정현아가 윤지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디서 꼬리를 쳐.’
수호에게 이성으로서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볼 때마다 움츠러든다.
첫 만남 때, 수호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하고 홀대한 탓이다.
그런데 너무 노골적으로 수호를 꿰려는 윤지수의 행태에 자신도 모르게 끼어들고 말았다.
‘또! 또 저런 식으로 사람을 빼 가려고!’
윤지수는 저런 식으로 접근해 상왕련 장인을 빼 간 전적이 있었다.
정현아로서도 쌓인 것이 터진 셈.
“흐응… 밀접한 관계라. 어떤 관계인지 모르겠네. 혹시 정현아 씨는 어려서 진짜로 밀접한 관계가 어떤 건지 모르는 것 아닐까요? 그렇죠, 수호 씨?”
윤지수가 콧소리까지 섞으며 수호에게 물었다. 웬만한 남자라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만큼 매력적인 자태.
하나 수호는 여전히 무덤덤했다.
‘엘프를 봤더니 누굴 만나도 썩… 에휴…….’
엘프 도시 레드우드에서 잡초 뽑던 아줌마도 윤지수보다 예뻤다.
2m를 훌쩍 넘기는 신장 탓에 이성으로 생각이 안 들었지만 말이다.
‘이러다 정신적 고자라도 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엘프에게 고자병(?)이 옮은 건가?
잠시 시답잖은 생각을 하던 수호의 머릿속에 궁금한 것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세계수는 어떠려나? 소식이 없네.’
수호는 레드우드에서 마족의 종복이었던 제사장을 처치했다.
그날 이후로 엘프 세계로 직접 넘어간 적이 없다.
시장에게 제초제와 비아그뤠를 전하며 몇 차례 대화를 나눴을 뿐.
‘세계수 원정대는 진즉 출발했는데 아직 도착하지 못한 걸까.’
시장은 무력이 출중한 엘프를 모아 원정대를 꾸렸다.
세계수의 안위를 확인하고, 제초제를 널리 퍼트리려는 목적.
한데 여태 소식이 없다.
세계수에 도착하지 못한 모양이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생각해야지.’
수호가 생각을 미뤄 뒀다.
그리고 아직도 정현아와 티격태격하고 있는 윤지수에게 대답했다.
“상왕련과는 업무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두 여자의 희비가 엇갈렸다.
정현아가 한껏 콧대를 세운 반면 윤지수는 일순 주춤했다.
하나 오성의 실무를 책임지는 부길드장답게, 윤지수는 금방 평정을 회복했다.
“한쪽과 좋은 관계라고 꼭 다른 쪽과 관계를 맺지 말란 법은 없잖아요? 다다익선이란 말도 있고요. 호호.”
수호가 대답을 고민하는 사이.
벌컥.
문이 열리며 좌중의 시선이 집중됐다.
* * *
협회 건물에서 조금 떨어진 곳.
선팅된 차 안.
초로의 남자와 청년이 앉아 있다.
각성자 관리국 국장 전일수.
그리고 같은 소속이자 랭커급 헌터인 계동호였다.
손에 든 서류를 살피는 전일수에게 계동호가 물었다.
“슬슬 시간 다 되어 가는데, 안 들어가십니까?”
“진무백을 긁어 놓으려면 15분쯤 늦는 편이 좋아.”
“일부러 늦는다고요?”
“그래. 중요한 회담이니 잠깐 지각했다고 죽자 살자 하지는 못하지. 그렇다고 15분 만에 중요한 안건이 결정되지도 않거든? 그러니 15분이 딱 좋아. 그게 진무백 성격상 제일 기분 나빠 할 시간이기도 하고.”
10년 넘게 실험해서 알아낸 내용이니 확실해.
전일수의 말에 계동호가 낄낄대며 무릎을 쳤다.
“킬킬, 대단하시네요. 그런 것까지 신경 쓰시고.”
“칼만 휘두를 줄 아는 놈한테 안 뒤처지려면 머리를 써야 했지.”
대화 중에도 전일수는 서류를 휙휙 넘겼다.
계동호가 물었다.
“근데 그놈에 관해서는 뭐 좀 나왔습니까?”
“보면 볼수록 이상한 놈이야. 각성한 지는 1년이 채 안 됐는데 실력은 벌써 랭커급. 던전 출입 횟수는 동급 실력자들 대비 극단적으로 적어. 연수원부터 재능을 인정받은 것 같긴 한데… 영 의심스럽단 말이지.”
“혹시 협회에서 키운 비밀 병기 아닐까요?”
“글쎄. 그랬다면 진즉 불러다 썼어야 할 텐데. 2차 격변 후에 협회가 인력난으로 얼마나 허덕였나.”
“그렇게 되도록 뒤에서 열심히 움직이신 국장님이 하실 말씀은 아닌데요?”
“내가? 자네도 참… 재밌는 말을 다 하는군.”
비릿하게 웃은 전일수가 말을 이었다.
“어쨌든 의뢰 두어 번을 제외하면 협회가 그놈에게 맡긴 일이 없어. 감출 거면 확실히 감추고, 쓰기로 했으면 제대로 썼겠지. 비밀 병기를 이렇게 어중간하게 쓸 리가 없네.”
“흐음, 그럼 진짜로 갑자기 튀어나온 천재? 부숴 버리고 싶어지는데… 킬킬.”
계동호가 눈빛을 사이하게 빛내며 웃었다.
전일수는 서류를 다 넘긴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역시 드래곤이 핵심이야.”
“무슨 말씀이신지?”
“놈의 능력의 근원이 드래곤에게 있다는 말이지. 여길 봐.”
전일수가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사진이 프린트되어 있었다.
수호가 [타니아의 눈물]을 마시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이건 거인으로 변신 직전에 찍힌 장면이네요.”
“그래. 망설이고 있지?”
“그러네요. 근데 그게 드래곤과 무슨 상관입니까?”
“저 정도 위력의 스킬은 전 세계를 뒤져도 몇 없어. 근데 아무리 봐도 저 물약 덕분에 시전할 수 있는 거로 보이거든.”
“그런데요?”
“저런 대단한 물약을 어디서 구했을까? 끽해야 협회 아니면 상왕련인데 그들에게 저런 물약이 있었을까? 있다고 원수호에게 내어 줬을까?”
“물약의 원천이 드래곤이다?”
“그거 말고는 이유가 설명되지 않으니까.”
전일수가 의미심장한 눈빛을 빛냈다.
계동호가 씩 웃었다.
“왜 말을 빙빙 돌리시나 했더니 목적은 그거였군요. 좋습니다. 제가 알아보죠. 그 약을 어떻게 구했는지. 놈의 정확한 능력이 뭔지.”
“할 수 있겠나?”
“내 스킬 아시면서 왜 그런 말씀을 하실까.”
계동호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클래스 명 앙신의 사도인 계동호는 다양한 스킬을 사용한다.
그중의 하나가 【앙신의 응시】다.
상대를 위압감에 빠트리고, 상태창을 훔쳐볼 수 있다.
최근 며칠간의 기억도 읽어 낸다.
그동안 전일수는 계동호의 스킬을 여러 헌터에게 사용해 왔다.
빼낸 정보를 이용해 헌터를 겁박하거나 회유하는 등.
쓰임새가 무궁무진했다.
“그래, 자네라면 잘하겠지. 참 좋아. 자네가 저 건물에 들어앉은 늙은이처럼 답답하게 굴지 않아서.”
전일수가 협회 건물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근데 괜찮을까요? 마기가 날뛰는 판국에 괜한 놈 건드렸다가 불똥 튀면 골치 아픈데.”
“마기? 그게 언제는 없었나? 그냥 쉬쉬하고 있었던 거지.”
“그래도 어제는 좀 심했는데요? 엄청 죽어 나자빠지던데… 킬킬.”
“어차피 한동안 날뛰다 말 거야. 신경 쓰지 말고 맡은 일이나 하게. 책임은 내가 질 테니.”
계동호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시키시는 대로 하죠. 애송이 신상 터는 일은 저한테 맡기시고, 국장님은 협회장이나 잘 상대하십쇼.”
“그래, 슬슬 시간이 다 되어 가는군. 조금만 더 있다가 올라가세.”
“예.”
한동안 조용히 앉아 있던 전일수가 중얼거렸다.
“살살해.”
“……?”
“회의장에 드래곤을 소환해 두지는 않을 테니 드래곤 라이더도 힘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할 거 아닌가. 그러니 적당히 하란 소리야. 괜히 탈 나면 곤란해.”
“흠집 안 나게 적당히 하겠습니다. 킬킬. 어쩌면 밑에 두고 부릴지도 모르는데 기왕이면 온전하게 데려가야죠.”
* * *
민소매 티를 입은 장년의 남성이 회의실에 들어섰다.
드러난 어깨 근육이 사람 머리보다 컸다.
“안녕들 하십니까?”
그가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오셨으면 시끄럽게 굴지 말고 어서 앉으세요. 백 길드장님.”
수호와 대화가 끊겨 심통 난 윤지수가 쏘아붙였다.
백 길드장이라 불린 남자가 터벅터벅 걸어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았다.
그를 보고 있던 수호와 눈이 마주쳤다.
“오- 어제의 영웅도 와 계셨군. 반갑습니다. 나 백호 길드의 백승관입니다.”
수호도 알고 있었다.
3대 길드의 하나인 백호 길드의 마스터가 바로 백승관이었으니까.
“저도 반갑습니다.”
“흐음- 영상으로는 커서 참 좋았는데, 실물은 생각보다 작군. 혹시 나랑 운동해 볼 생각 없습니까?”
백승관이 씩 웃으며 물었다.
멸치를 헬스장에 등록시키려는 트레이너 같은 미소였다.
“…운동은 따로 하고 있어서요.”
“그러시군. 그럼 어쩔 수 없지. 어쨌든 앞으로 잘 부탁합시다. 하하하.”
“예.”
내심이야 어떨지 몰라도, 호탕한 태도가 썩 나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시간이 흘러갔다.
회의 시작을 5분쯤 남겼을 때, 문이 열렸다.
강민제가 수행원을 데리고 들어섰다.
그는 말없이 정해진 자리에 앉았다.
무덤덤한 시선이 장내를 훑었다.
수호에게 닿았을 때만은 묘하게 이글거렸다.
“사회성이라고는 없다니까.”
윤지수가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오성과 이카루스가 사이가 안 좋던가?’
오성은 상왕련과도 썩 안 좋은 것 같던데.
이카루스는 아예 다른 모든 곳과 담을 쌓은 듯한 태도고?
수호가 장내의 역학 관계를 추측하고 있을 때, 시계가 11시를 가리켰다.
“제시간에 맞춰 나타나는 적이 없군. 쯧.”
정해진 자리 중 한 곳이 비었다.
그곳을 응시하며 혀를 찬 협회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간이 되었으니 이번 사태에 대한 긴급회담을 시작하겠습니다.”
123화 맞서는 자 (9)
천풍 길드 정명훈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증언했다.
“…그런 다음에 시커멓게 변한 코어가 저절로 깨어지더니, 몬스터가 리젠되기 시작했습니다. 간신히 다 처리하고 던전을 탈출했는데, 전국에 난리가 나 있더군요.”
천명훈의 설명이 끝나자 오성의 윤지수가 물었다.
“사실인가요?”
“무, 물론입니다. 저기 계신 원수호 헌터께서 함께 있었으니,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흐음, 그럼 천풍 길드의 길드장과 아키라 길드에서 파견했다는 간부들을 조사해 봐야겠군요.”
윤지수의 말에 정명훈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주, 죽었으니까요. 모조리.”
“죽었다고요?”
“예, 어제 저희가 던전에 갔던 시각 길드장과 간부들이 던전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브레이크가 일어났고, 한 명도 살아 나오지 못했습니다.”
길드장이 던전에 가는 줄 몰랐다고 정명훈이 덧붙였다.
‘안색이 초췌하다 했더니 그래서였구나.’
하루아침에 10년을 몸담은 길드가 공중분해된 셈.
그 와중에 [마력 토파즈]를 챙겨다 준 게 용하네.
수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윤지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리를 잘랐군요.”
말을 한 것은 윤지수 혼자였지만 다들 같은 생각이었다.
“이 정도면 거의 작정하고 테러한 거나 다름없잖아. 협회장님, 어쩌실 생각입니까?”
백호 길드의 백승관이 협회장에게 물었다.
한참이나 생각에 잠겼던 협회장이 입을 뗐다.
“문제는 이낙길이 아키라의 사주를 받았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지. 심증은 충분하지만 그걸로 타국의 길드를 압박할 만한 명분이 없어. 강제로 소환할 역량도 없고.”
“그럼 이대로 당하고 가만히 있자는 말입니까? 헌터만 해도 수백 명이 던전 브레이크에 휩쓸려 죽었을 겁니다. 민간인 사상자는 몇 명인지 아직 추산도 안 되고요. 근데 그냥 넘어가겠다고?”
백승관이 눈을 부릅뜨며 역정을 냈다.
백호 길드 또한 이번 일로 헌터를 잃었기에, 그의 분노는 온당했다.
“어떤 수를 쓰든 대가는 받아 내야겠지. 마인이 엮였으니 애초에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고.”
“으음.”
모두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깨어진 던전은 수습했지만, 마기까지 말끔히 청소되지는 않았다.
차후에 어떤 피해가 발생할지 모르는 상황.
게다가 같은 일이 또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하지만 그 전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네.”
“……?”
“던전 브레이크의 원인을 교차 검증해 볼 필요가 있어. 그래야 누군가 일부러 수작을 부렸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으니까.”
조사는 그것을 확인한 후에 시작한다.
협회장의 말에 좌중의 시선이 강민제에게 향했다.
정명훈 일행과 수호를 제외하면,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난 던전에서 살아 나온 헌터가 없다.
예외가 있다면 유일하게 강민제의 파티뿐.
모두의 시선이 강민제에게 향했다.
묵묵부답.
강민제는 말이 없다.
대신 함께 온 수행원이 입을 열었다.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몇 달간 부상으로 빠졌던 파티원이 어제 복귀했습니다. 던전에 입장하자마자 그가 사라졌고 얼마 후 브레이크가 일어났습니다.”
협회장이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물었다.
“정선 던전은 코어가 보스와 동떨어진 곳에 상시로 노출된 형태지? 그렇다면 대충 이야기가 맞아떨어지는군. 혹시 그자의 행동에 의심할 만한 부분은 없었나?
“안색이 창백하고 말이 없었습니다만, 그건 부상 후유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낙길과 여러모로 일치했다.
백승관이 말을 받았다.
“마인이 던전 브레이크를 일으키는 방법을 개발했고, 그것을 한국의 던전에 실행했다. 물증은 없지만 이카루스 길드가 의심스럽다. 결론은 이 정도군.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시렵니까? 이대로 마인이 설치도록 뒀다가는 온 나라가 개판이 될 것 같은데.”
질문이 끝났을 즈음.
철컥.
방문이 열렸다.
전일수와 계동호가 들어섰다.
* * *
“약속 시간을 어기는 버릇은 여전하군.”
협회장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일수가 웃으며 대답했다.
“나라의 녹을 먹는 공인 아닌가. 자네 같은 민간인과는 달리 좀 바빠야지. 목소리 큰 것치고 능력은 형편없는 단체 덕분에 일이 너무 많다네.”
협회의 능력 부족을 비꼬는 말이었다.
전일수와 협회장의 눈길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번개라도 튀겠네. 뭐 하는 사람인데 협회장과 저렇게 사이가 안 좋은 거지?’
의문을 느끼는 수호를 향해 전일수가 시선을 돌렸다.
“오- 여기 대단히 유명한 분이 계셨군. 나는 각성자 관리국장 전일수네. 여기는 부하 직원인 계동호고. 드래곤 라이더를 만나게 되어 영광이야.”
각성자 관리국.
정부 소속 기관이다.
어제처럼 던전이나 각성자 관련 사건이 생겼을 때.
직접 양성한 각성자 병력을 투입하거나, 군부대와 공조하여 사건을 처리한다.
협회가 헌터의 이권을 대변한다면, 각성자 관리국은 헌터를 제어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관.
국장인 전일수를 비롯해 랭커급 헌터가 여럿 포함된 강한 집단이다.
설립 후로 협회와는 줄곧 대립하고 있다.
“예. 반갑습니다.”
수호가 적당히 대답했다.
상대의 소속 탓에 썩 신뢰가 가지 않았다.
협회장이 전일수를 채근했다.
“왔으면 빨리 앉게. 쯧.”
전일수와 계동호가 자리에 앉았다.
착석과 동시에 전일수가 입을 열었다.
“나 없을 때 무슨 이야기들을 그렇게 하셨나? 나라의 녹을 먹는 입장이라 보고를 해야 하거든. 그러려면 꼭 들어 둬야 한다네. 그러니 요약해서 다시 설명해 보게.”
다시 한번 시선이 부딪혔다.
“쯧. 정명훈 헌터, 설명해 주게.”
정명훈이 이야기를 반복했다.
직접 겪은 데다가 방금 한번 들었던 이야기다.
지루해하던 수호의 감각에 무언가 걸렸다.
‘응? 뭐야?’
흐릿한 마력의 사슬.
계동호로부터 시작된 그것이 수호를 향해 슬그머니 다가오고 있었다.
‘스킬?’
윤지수에게 느꼈던 것과는 다르다.
정확히 수호를 타깃으로 삼아 명확한 의지를 갖고 접근한다.
음침하고 집요한 기운도 느껴졌다.
‘이건… 악의가 담겼어.’
좋은 의도가 아님이 확실했다.
그렇다면 수호가 할 일도 명확하다.
‘정신 방벽!’
마음이 일자 【차원 호신무】가 반응했다.
마력이 움직인다.
수호의 눈에만 보이는 칼날이 눈앞에 만들어졌다.
서걱-
그것이 계동호의 기운을 베었다.
“쿠웨에엑-.”
계동호가 괴성을 질렀다.
몸을 부르르 떨더니 입에서 피를 한 사발 토했다.
【정신 방벽】의 반격이 성공한 것이다.
수호가 그 모습을 차갑게 응시했다.
계동호는 금세 몸을 추슬렀다.
여전히 얼굴이 창백하고 손을 떨었지만 강자답게 수습이 빨랐다.
그런데 몸을 추스르는 것만큼 마음을 가다듬는 것에는 능하지 못한 것일까.
“이런 개같은……!”
계동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것이 분노한 기색이 역력했다.
【앙신의 응시】는 만능이 아니다.
상대의 마법 방어력이 높으면 막힐 수 있다.
하나 이렇게 스킬이 깨진 적은 처음.
주력 스킬이 파훼당했다는 분노가 계동호의 화를 부채질했다.
“애송이 새끼가.”
계동호의 소매에서 단검이 흘러나와 손에 쥐어졌다.
수호가 곧바로 반응했다.
‘해보자는 거지?’
수호가 일어섰다.
촤르르- 적회색 수호자의 투구가 얼굴을 가렸다.
고오오오오-
수호에게서 가공할 기세가 흘러나왔다.
장내의 모두가 몸을 움찔했다.
- 덤비면 죽는다!
입을 열어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느꼈다.
수호가 뿜어내는 투기가 말보다 명확하게 의지를 표출하고 있었다.
‘이… 정도라고?’
금방이라도 쏘아질 것 같던 계동호의 단검은 움직이지 못했다.
움직이는 순간 목이 달아날지도 모른다고 직감한 까닭이다.
그때 새파란 오러를 머금은 칼날이 계동호의 어깨에 얹혔다.
칼의 주인 협회장 진무백이 입을 열었다.
“계동호, 지금 이게 무슨 짓이지?”
대답은 전일수에게서 터져 나왔다.
“도대체 이게 무슨 개 같은 상황이야! 지금 각성자 관리국 소속 직원에게 위해를 가하는 건가?”
전일수가 적반하장으로 외쳤다.
목소리는 컸지만 그의 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이게 무슨 빌어먹을 경우냐고!’
계동호의 스킬에 대해서는 전일수도 잘 안다.
그랬기에 설사 스킬이 실패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꼴이 될 줄은 몰랐다.
“수작은 네 부하가 먼저 부렸다. 무기를 꺼낸 것도 마찬가지고.”
협회장이 싸늘하게 대꾸했다.
전일수는 여기서 말로 밀리면 걷잡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누가 피를 흘리고 있지? 피해자가 이토록 명확한데 어디서 억지를 부리나? 지금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국 직원을 민간인이 공격해 상처를 입혔어! 내가 그냥 넘어갈 줄 아나?”
장내의 모두가 눈치챘다.
전일수가 억지를 부려 상황을 타개하려 한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나온다는 말이지…….”
진무백의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벌컥-
갑자기 열린 회의실 문 때문에 과열되던 분위기가 차갑게 식었다. 
협회 직원이 들어와 신성현의 귓가에 속삭였다.
신성현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보셔야 할 게 있습니다.”
* * *
신성현이 회의실에 마련된 스크린을 작동시켰다.
뉴스로 유명한 CNM 채널이 재생됐다.
『미국 전역에 최소 100개소 이상의 던전이 브레이크를 일으켰으며 아직도 진행 중인 상황입니다. 이에 따라 정부는…….』
“맙소사. 미국에도 똑같은 일이…….”
누군가 중얼거렸다.
한국처럼 미국에서도 대규모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했다.
한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인도와 일본까지, 세계 수십 개 국가에서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신성현이 심각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모두 망연자실한 표정이 되었다.
쾅.
전일수가 테이블을 내리치며 계동호에게 외쳤다.
“당장 관리국으로 돌아간다! 따라와.”
한 차례 수호를 노려본 계동호가 전일수를 쫓았다. 더 이상 그들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은 없었다.
적막이 감도는 회의실 안.
누군가 중얼거렸다.
“…전쟁인가?”
마인과의 전쟁.
이제껏 겪었던 자잘한 싸움과는 확연히 다른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신색을 가장 먼저 회복한 것은 뜻밖에도 윤지수였다.
“드래곤도 소환하지 않고 랭커급이라 여겨지는 계동호를 손쉽게 상대하다니……. 더 탐이 나네요. 점심시간도 다 됐는데 식사라도 하면서 미래에 관해 이야기해 볼까요. 수호 씨?”
밥은 먹어야 마인이든 던전 브레이크든 막지 않겠어요?
윤지수가 방긋 웃으며 제안했다.
* * *
회의는 어수선하게 마무리됐다.
수호는 윤지수의 제안을 거절하고 집으로 향했다.
복잡한 생각만큼이나 걸음이 느렸다.
‘관리국이야 평소에도 소문이 흉흉했으니 그러려니 하겠지만.’
놀라운 소식 때문에 계동호와의 사건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못했다. 찝찝했지만 당장은 넘어가는 수밖에 없다.
진짜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전 세계에 던전 브레이크라니. 도대체 어떻게 되어 가는 거야?’
단순히 아키라 길드를 조사하는 수준을 아득히 넘어서 버렸다.
온 세상.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 되었다.
‘어쩌면… 마족을 부르기 위한 준비일지도…….’
수호는 문뜩 떠오르는 생각을 애써 떨쳤다.
안 된다.
지구는 마족을 상대할 만한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제 나 혼자 잘 사는 것이 의미가 없다.
지구가 마인의 수작에 무너지지 않게.
마족의 침략에도 버틸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지?’
고민이 거듭됐다.
그러는 사이 집 앞에 도착했다.
쇼윈도 안 윌슨의 모습이 보였다.
‘그래, 윌슨이라면……!’
문득 답이 떠올랐다.
정답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상황을 개선할 방법이.
수호가 빠르게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수호, 잘 다녀왔어?”
아직 상황을 모르는 듯 윌슨은 태연했다.
“음…….”
수호가 가게에 놓인 TV를 켰다.
뉴스 속보가 흘러나왔다.
“저, 저럴 수가… 던전 브레이크가……!”
경악으로 윌슨의 목소리가 떨렸다.
수호가 부탁했다.
“윌슨, 던전 브레이크를, 마인을 막을 수 있는 아이템을 만들어 줘. 재료는 내가 구해 볼게.”
수호의 목소리에 윌슨이 놀란 마음을 추슬렀다.
그리고 결의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만들게. 지구를 지키고 마인 놈들을 박살 내 버리자. 수호.”
재료 수급이 가능하면서 현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물건이 뭘까?
자칫 수호에게 위협이 되지는 않을까?
유통은 어떻게 하지?
고민거리가 넘쳤지만 괜찮았다.
수호를 돕고 지구를 지키겠다는 마음만은 확고했으니까.
딸랑-
그때 가게 문이 열렸다.
상왕련주였다.
“으음, 중요한 이야기 중이면 이따 다시 오겠네.”
분위기를 읽은 상왕련주가 발길을 돌리려 했다.
수호가 상왕련주를 붙잡았다.
“괜찮습니다. 들어오세요.”
* * *
휴게실 안.
수호가 상왕련주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이렇게 따로 찾아오셨어요?”
용건이 있다면 협회 회의 때 말할 수도 있었을 텐데.
“각성자 관리국장은 신경 쓰지 말게. 이럴 때 쓰려고 만들어 놓은 연줄이 있거든. 아까 있었던 일로 자네가 공식적으로 핍박당하는 일은 없을 걸세. 그건 내가 보장하지.”
계동호와 부딪힌 것이 걱정되어 찾아온 모양.
수호가 고개를 숙였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얼, 동맹 아닌가. 그런데 말이네…….”
상왕련주가 한참이나 뜸을 들이다가 덧붙였다.
“자네 혹시 나랑 사업 한번 해 보지 않겠나?”
말과 함께 상왕련주가 테블릿PC를 꺼냈다.
화면에서 낯익은 장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124화 맞서는 자(8)
부서진 노란색 버스.
그 옆에 건물 잔해를 쌓아 만든 네모난 공간.
안에는 옹기종기 유치원생들이 모여 있다.
“크르르르-”
그 앞으로 몬스터가 지나간다.
놀랍게도 놈은 유치원생들을 발견하지 못한 채 다른 곳으로 향했다.
영상이 끝났다.
상왕련주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사업이라고 하면 자네가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을 거로 생각하네. 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꼴이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더군. 그래서 하는 말일세.”
이야기가 변두리를 맴돈다.
그만큼 상왕련주의 태도는 신중했다.
수호가 묵묵히 기다리는 사이 상왕련주가 말을 이었다.
“영상 속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자네가 아이템을 설치했다지? 혹시 그걸 자네가 혹은 자네 드래곤이 만들 수 있다면, 많이 만들어서 내다 파는 게 어떻겠나? 돈은 내가 대겠네.”
“…….”
“내가 이득을 보려고 자네에게 무리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네. 나야 자네 손에 목숨이 달린 입장이니 그럴 수도 없네만. 그저 세상이 상상 이상으로 위험하게 변하고 있으니, 재주껏 힘을 써 보자는 뜻일세.”
좀 전, 윌슨과의 대화와 일맥상통하는 이야기다.
수호로서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단, 마냥 승낙할 상황이 아니란 것이 문제.
“영상에 나온 아이템은 원한다고 막 찍어 낼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영상에 나온 [미완성 최상급 은폐 결계 생성기]는 영웅 등급 아이템.
윌슨이 4성 던전에서 나온 마정석을 10개 가까이 투자하여 만든 물건이다.
재료 수급도 어려울뿐더러, 외부에 내돌릴 수도 없다.
“그럼 내가 오해한 모양이군. 자네가 원체 기상천외한 물건들을 가지고 있기에 만들어 낼 수 있는 줄 알았네.”
“그렇지만.”
“……?”
“안 그래도 상황을 개선한 방법이 있을지 고민하던 중이었습니다. 꼭 영상 속의 물건이 아니라도 세상에 도움이 될 무언가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상왕련주의 표정이 밝아졌다.
“역시! 자네라면 옳은 판단을 내릴 줄 알았어. 재료 수급과 유통은 상왕련에서 맡겠네. 생각해 보고 필요한 재료가 있으면 연락하게.”
“알겠습니다.”
상왕련이 적극적으로 나서 준다면 유통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수호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상왕련주가 첨언했다.
“당장은 모두 자네의 전투 능력에 관심이 쏠려 있네. 나야 장사꾼이고 원래 자네가 신비한 사람인 걸 알고 있었으니 그나마 눈치챈 거지만. 그러나 머잖아 누군가는 자네의 특별함을 알아볼 걸세.”
“…….”
“조심하게. 내 가능하면 방패가 되어 주겠네만 상왕련의 힘으로도 역부족인 경우가 있으니… 미리 염두에 두게.”
“조언 감사합니다.”
“아닐세. 나야 자네 덕에 살아 있는 목숨 아닌가. 그럼 나는 가 보겠네. 자세한 이야기는 생각해 보고 따로 이야기하세나.”
* * *
상왕련주가 떠났다.
수호는 윌슨과 마주 앉았다.
“윌슨, 상왕련에서 재료를 지원하기로 했어. 유통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야.”
“아, 잘됐네. 하지만…….”
반색하던 윌슨이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너무 높은 등급의 물건을 풀면 문제가 생길 거야.”
“알고 있어.”
결계 생성기를 못 만든다고 말한 것도 그 때문 아닌가.
“그리고 마도 공학의 핵심 재료는 마정석이야. 전 세계에 풀 정도로 물건을 만들려면 그만큼 엄청난 양이 필요할 텐데.”
“으음.”
“상왕련이 그만한 마정석을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상왕련이 국내 굴지의 장인 길드라고 해도 전 세계를 감당할 만한 역량은 없다.
“문제는 마정석이구먼. 일단 상왕련 쪽에 말할게. 여차하면 수입을 하더라도 최대한 구해 보는 수밖에.”
고등급 아이템은 국외 반출이 어렵다.
마정석은 그나마 아이템보다는 낫지만 마력 함량이 높은 것일수록 수출을 꺼린다.
“응, 나도 최대한 재료가 적게 들면서 등급도 낮은 물건을 궁리해 볼게.”
“그럼 부탁해. 상왕련 쪽에 어서 마정석부터 긁어모으라고 전해야겠어.”
“오케이. 수호, 넌 충분히 잘하고 있어. 힘내.”
세상을 잃고도 다시 일어선 친구의 격려는 수호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고마워. 너도 힘내.”
* * *
다음 날 아침.
“후우- 오늘도 가차 없으시구먼.”
수호가 이마에 땀방울을 훔쳤다.
석비룡과의 대련을 마치고 지구로 돌아온 것이다.
“윌슨은 일하는 중이고.”
윌슨이 가게 카운터에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고민 끝에 결정한 물건은 시험 제작 중.
수호는 윌슨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방으로 향했다.
“발룡이는 어디 갔나?”
곧 발룡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녀석은 침대 구석에 엎드린 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어째서 아직도 문을 연 가게가 없는 거지? 이 하찮고 나약한 것들! 어서 문을 열어! 치느님을 생산하라는 말이다!』
잔뜩 골난 표정으로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부터는 그래도 문 여는 곳이 있을 것 같은데.’
녀석은 온종일 전국을 누비고도 치킨을 못 먹었다.
그 후로 계속 오매불망 치킨집 오픈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렇다고 아침 댓바람부터 저러고 있어 봐야… 음, 그냥 두자.’
최소한 점심시간은 되어야 치킨집이 문을 열 텐데…….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발룡이를 만류하지는 않았다.
괜히 건드렸다가는 투정만 부릴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수련이나 하러 가야겠다.’
결정을 내린 수호가 바비니 차원 마력의 호수로 향했다.
딸랑-
가게 문이 열리고, 오늘 첫 손님이 들어섰다.
* * *
일본 모처.
무토 다다노리가 TV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홋카이도 20개, 규슈 17개 등 총 100개 가까운 던전에서 브레이크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희생당한 헌터의 숫자는 수백 명을 초과할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 수십 개 국가에서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 원인은 아직 밝혀내지 못했으며, 아키라 길드의 수뇌부가 모두 던전 브레이크에 휘말린 것으로 파악되어 충격을 더하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던전 브레이크의 시작이 한국인 것으로 보아, 한국에서 비인도적인 실험을 하다가 재난을 초래했다는 의견이…….』
뉴스가 끝났다.
옆에 서 있던 부하가 다다노리에게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회장님. 계획하신 대로 일이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일이 끝날 때까지 절대로 방심해서는 안 돼.”
“명심하겠습니다. 아키라 쪽도 정리했으니, 노출의 위험은 완벽하게 차단한 셈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위대한 분의 현신까지는 많은 기운이 필요해. 들뜨지 마라.”
“예!”
대화가 이어지는 사이 TV에서 해외 소식이 흘러나왔다.
『…다음은 한국에서 발생한 5성 던전 브레이크를 촬영한 영상입니다. 혜성같이 등장한 신예, 드래곤 라이더가 거인으로 변신해 보스 몬스터를 처치하는 장면입니다. 보시죠.』
화면에서 영상이 흘러나왔다.
거인이 망치로 몬스터를 장작 패듯 부숴 버리는 장면이었다.
콰직.
보스 몬스터가 죽는 순간, 다다노리의 손에서 호두가 깨어졌다.
“던전에서 살아 나왔군. 하긴 저런 실력이면 그 정도로 죽을 리 없겠지.”
다다노리가 화면을 보며 뇌까렸다.
눈에 스산한 기운이 어렸다.
“죄송합니다. 놈의 실력이 예상 이상이었습니다.”
“오판했어.”
“하, 하지만 사전에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저런 모습은 도저히 말이 안 됩니다. 그사이에 어떻게 저토록 성장한 것인지…….”
톡톡톡.
호두 가루를 털어 버린 다다노리가 손가락으로 의자 손잡이를 두드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말이 안 되는 성장이라…….”
문득 그의 뇌리를 스치는 목소리가 있었다.
- 대적자의 씨앗이 움트고 있다.
- 찾아서 죽여라!
위대한 분의 신께서 내린 사명.
그것을 떠올린 다다노리의 미간에 골이 파였다.
“찜찜하군.”
그가 화면을 응시한 채 나직이 뇌까렸다.
* * *
점심시간, 수호의 가게.
전 세계에 난리가 난 탓인지, 장사진을 이뤘던 기자들은 사라졌다.
한산한 것은 바깥만이 아니었다.
점심시간이 다된 지금까지 손님이 거의 없다.
지금도 가게에 손님은 딱 한 명뿐.
한데 그 한 명의 손님 때문에 윌슨은 곤란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
“손님, 자꾸 왜 이러세요?”
“손님이라니! 목숨 걸고 위기를 함께 헤쳐 나온 동료한테 그게 무슨 섭섭한 호칭이에요? 윌슨 씨도 나처럼 그냥 이름 불러요. 이름.”
떨떠름한 표정으로 묻는 윌슨에게 양수정이 대꾸했다.
콧김이라도 뿜을 듯 단호한 말투.
문제는 진짜로 콧김이 닿을 만큼 둘의 거리가 가깝다는 데 있었다.
“그, 저, 좀 물러나서 이야기하면 안 될까요?”
“안 돼요. 그럼 손을 못 만지잖아요.”
손을 자꾸 만지작거리는 거 자체가 문제라고!
윌슨은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양수정의 눈빛이 위험하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지작만지작.
그사이에도 양수정은 윌슨의 왼쪽 손을 열심히 조몰락거렸다.
그때 곤경에 빠진 윌슨을 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윌슨, 점심 안 먹어? 아, 손님이 있었네?”
오전 수련을 끝낸 수호가 가게로 나오며 물었다.
“수호!”
윌슨이 반색했다.
수호가 등장하자 양수정이 손을 슬그머니 놓았다.
“사장님 나오셨네요.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하하.”
그사이 일어난 윌슨이 수호 옆으로 잽싸게 이동했다.
“수, 수호, 가게 좀 볼래?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와.”
윌슨이 방 쪽으로 향했다.
“하악-”
양수정이 괴상한 소리를 냈다.
윌슨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눈에서 아쉬움이 뚝뚝 떨어졌다.
잠시 후, 양수정이 수호에게 인사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네, 안녕히 가세요.”
“윌슨 씨한테 또 보자고 말씀 전해 주세요.”
양수정이 가게를 나갔다.
윌슨이 돌아왔다.
“가, 갔어?”
“응, 갔어. 확실해.”
수호의 감각에 걸리지 않으니, 간 게 분명하다.
“후우- 진짜 곤란하단 말이야.”
“왜, 보기 좋던데.”
사실 수호는 한동안 둘의 모습을 구경하다가 말을 붙였다.
“자꾸 입맛을 다시는데… 으으- 위험해.”
“네 정체를 눈치챈 걸까?”
“그건 아니고, 의수라고 속인 내 왼손이 아이템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음, 그럴 수도 있겠네.”
윌슨의 몸은 현대 과학 기술로는 불가능할 정도로 정교했다.
손이 부서지는 장면을 직접 본 양수정이라면 그렇게 오해할 만했다.
“저런 사람은… 노움 세상에는 없었어.”
하긴 저 정도 장비성애자(?)는 지구에도 몇 없을 터였다.
“그래도 단골이니까 너무 박대하지는 말고.”
“드워프한테 말해서 마체테보다 더 나은 장비를 만들면 안 될까? 그럼 관심이 나한테서 좀 멀어질 것도 같은데.”
윌슨이 간절한 눈빛으로 물었다.
“알았어. 어쨌든 적당히 상대해. 정 못 견디겠으면 나한테 말하고.”
안 그래도 드워프제 아이템을 더 팔아 볼 생각이었다. 양질의 장비를 공급하면 상황 개선에 도움이 될 터였다.
“고마워, 수호.”
“오케이, 그럼 손님도 없는데 가게 닫아 놓고 점심이나 먹을까?”
고개를 끄덕이던 윌슨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아, 다 됐다!”
“다 되다니?”
“공방에서 만들던 시제품이 완성됐어. 가지고 올게. 점심은 구경하고 나서 먹자.”
“알았어.”
2층으로 달려갔던 윌슨은 곧 돌아왔다.
손에 주먹만 한 아이템이 들렸다.
“자, 한번 봐 봐.”
수호는 윌슨이 내미는 아이템을 받아 들었다.
[설치형 마인 탐지기]
- 버튼에 손을 올리면 마인 여부를 밝혀낼 수 있다. 문에 설치해 사용한다.
- 아이템 등급 : 희귀
- 설치 아이템
- 내구도 80
수호가 아이템을 살피는 사이 윌슨이 설명을 시작했다.
“지금 상황에 급선무는 마인을 찾아내는 일이라고 봐. 그래야 던전 브레이크가 더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만든 물건이야.”
“잘 생각했어.”
“휴대용으로 만들까 하다가 재료 절감을 위해 설치형으로 만들었어. 솔직히 이것도 마구 찍어 내기는 힘들지만.”
윌슨이 멋쩍은 말투로 설명을 이었다.
아이템은 도어락처럼 문틀에 설치.
손을 가져가 대면 마인 여부를 판별하여 문을 여는 방식이었다.
손에 미세한 상처를 내어 새어 나오는 마기를 감지하는 것이 장치의 원리였다.
“그래도 하루 만에 이런 걸 뚝딱 만들어 내다니. 역시 대단해, 윌슨.”
“하하, 마인 놈들을 처치하기 위해서라면 나는 뭐든 할 수 있다네, 친구. 그럼 설명은 끝마쳤으니 한번 작동해 볼까?”
시험 작동이 필요하다.
문에 장착해야 하는데 어디가 좋으려나?
주변을 둘러보던 수호가 방에 딸린 욕실로 향했다.
욕실 안에는 고급스러운 욕조와 세면대, 그리고 샤워 부스가 따로 설치되어 있었다.
건물을 선물할 때, 상왕련주가 내부 인테리어까지 신경 써 준 덕분이다.
“샤워 부스에 설치해 보자.”
설치용 아이템이다. 잘못되면 문틀을 뜯어내야 할지도 모른다.
나사 몇 개만 풀면 이동 가능한 샤워 부스가 제격이었다.
“알았어. 설치할게.”
윌슨이 마인 탐지기를 샤워 부스 문틀에 가져다 댔다.
약간의 소음과 함께 탐지기가 설치됐다.
윌슨이 샤워 부스 문을 당겼다.
덜컥.
탐지기의 걸쇠에 걸려 문이 열리지 않았다.
수호가 탐지기를 가리키며 물었다.
“여기 손을 올리면 문이 열리는 거지?”
“맞아. 네가 마인이 아니라면, 하하.”
“오케이, 그럼 작동되나 한번 해 보자.”
수호가 손을 올렸다.
탐지기에 붙은 등이 푸른색으로 빛났다.
철컥.
걸쇠가 탐지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통과! 역시 수호는 마인이 아니었어!”
윌슨이 농을 담아 소리쳤다.
“잘 되네.”
마주 웃은 수호가 잠금장치가 풀린 샤워 부스 문을 잡아당겼다.
문은 문제없이 열렸다.
“어?”
“으힉!”
그런데 수호와 윌슨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쿠르르르르-
열린 샤워 부스 안에서 격류가 소용돌이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125화 언더 더 씨(1)
[차원 【DPA-10002】을 발견하셨습니다.]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수호가 샤워 부스 안을 응시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한가득 물이 차 있다.
콰르르르르-
그 안에 소용돌이치듯 격류가 흐른다.
“수호, 이거 설마 다른 차원인 거야?”
윌슨이 어안이 벙벙한 목소리로 물었다.
새로운 차원과 연결되는 모습을 처음 본 까닭이다.
“맞아, 근데 사람이 안 보이네.”
교류 대상을 발견했다는 메시지가 뜨기 마련인데…….
“이제까지는 늘 사람이 있었어?”
“대부분은 그랬지.”
시험의 거울처럼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면, 매번 누군가 있었다.
“저기 완전 물속이라 들어가기도 힘들 것 같은데… 잠수함이라도 만들어야 하나?”
윌슨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괜찮아, 수중에서 호흡할 수 있는 스킬이 있거든.”
수호는 예전에 바비가 준 황금 잉어를 먹고 【수중 호흡】 스킬을 얻었다.
“오, 정말? 역시 수호는 대단해!”
과한 칭찬에 수호가 멋쩍어 하고 있을 때 샤워 부스 안에서 변화가 생겼다.
“끼야아아아- 히이잇-”
비명인지 환성인지 모를 소리가 들리더니 뭔가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수호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새로운 대상 【어인족】을 발견했습니다.]
[새로운 대상 【어인족】과 교류를 시작합니다.]
“어인족?”
빠른 속도로 눈앞을 스쳐 지나간 이종족.
수호는 날카로운 감각으로 그 모습을 파악했다.
‘상체는 사람이고, 하체는 물고기?’
인간을 닮은 상체. 비늘이 돋은 하체.
간단한 옷가지를 걸친 몸은 덩치가 지구인과 비슷했다.
각종 미디어와 전설에 등장하는 인어와 흡사한 모습.
‘근데 뭐가 저리 빨라?’
드디어 새 교류 대상을 발견했지만 말을 붙여 볼 틈도 없었다.
급류에 휘말린 어인족이 어느새 사라졌기 때문이다.
제대로 보지 못한 윌슨이 물었다.
“어인족이라고? 어디로 사라진 거야?”
“떠내려갔어.”
수호가 차원 시야를 움직여 봤지만 보이는 거라고는 격류뿐.
어인족의 모습은 찾지 못했다.
“어떻게 하게?”
잠시 고민한 수호가 대답했다.
“둘러보고 와야겠어.”
【차원 여행】 스킬을 이용하면 언제든 되돌아 나올 수 있다.
최소한의 안전은 확보된 셈.
들어가서 어떤 곳인지 확인해 봐야 한다.
“그럼 조심해서 다녀와. 나는 재료 되는 대로 마인 탐지기 만들고 있을게.”
“그래, 이따 봐.”
수호가 샤워 부스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 * *
‘이건 아무리 봐도…….’
급류에 떠내려가면서 수호가 생각했다.
‘교통수단 같아.’
사방이 바다다.
그 속에 특정한 방향으로 거센 해류가 흐른다.
해류에 몸을 던지면 정해진 곳으로 떠내려간다.
해류를 교통수단이라 생각하면, 아까 본 어인족이 내지른 ‘비명인지 환성인지 헷갈리는 목소리’도 이해된다.
얼마나 떠내려갔을까.
바닷물뿐이던 광경 속에 이질적인 것이 나타났다.
‘어? 공기 방울?’
투명한 막으로 둘러싸인 둥근 공간.
그 안에는 물 대신 공기가 있었다.
바닥에는 땅도 존재했다.
‘저 소라 껍데기 같은 건 집인가?’
공기 방울 안, 땅 위에 소라 껍데기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사람이 살 만큼 크기가 충분히 컸다.
‘사람이 있을 것도 같은데…….’
집 같은 것이 있으니 어인족이 있을 만했다.
기대하는 사이에도 해류는 수호를 운반했다.
소라 껍데기가 가까워졌다.
수호는 소라 껍데기 주변에서 인영을 발견했다.
‘있다. 어인족이야!’
수호가 서둘러 차원 패널을 확인했다.
『어인족』
- 소속 차원 : DPA-10002
- 구성원 수 : 403
- 만족도 : 5/100
그리 많지 않은 구성원 수.
아주 낮은 만족도가 눈에 띈다.
‘내려서 이야기해 봐야겠어.’
사람이 있다.
그러니 이곳에 관한 기본적인 정보는 얻을 수 있을 터였다.
만족도가 낮으니, 어쩌면 차원 임무를 받을 수 있을지도…….
수호가 몸을 비틀었다.
거센 흐름을 생각하면 생각보다 수월하게 몸이 격류에서 빠져나왔다.
수호가 헤엄쳐 공기 방울로 다가갔다.
쏙-
방울이 저항 없이 수호를 빨아들였다.
수호가 어인족 마을에 도착했다.
소라 껍데기 주변에 모여 있던 어인족들이 고개를 돌렸다.
“누가 왔지? 올 사람이 없는데…….”
“헉! 귀, 귀족이다!”
“귀족님이다. 죄, 죄송합니다. 귀하신 분을 몰라뵙고.”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어인족들이 고개를 땅에 박고 빌었다.
‘왜 이러는 거지?’
당혹스러운 상황.
하지만 이종족과 교류 경험이라면 쌓일 만큼 쌓인 수호였기에 자연스럽게 대응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는 여행자인 원수호라고 합니다. 우연히 들르게 되었는데 이곳이 어디인지, 여러분이 어떤 분이신지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수호가 친절하고 미소 띤 얼굴로 말을 건넸다.
보통 이 정도면 말이 통하고는 했다.
“죄, 죄송합니다. 살려 주십시오.”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제발…….”
“때리지 마십시오.”
어인족들은 고개를 처박고 들지 않았다.
‘이거 오래 걸리겠는데?’
수호가 다시금 미소를 머금고 입을 뗐다.
* * *
수호는 자신이 ‘귀족’이 아니란 것을 수십 번을 반복해 설명하고 나서야, 어인족과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저, 정말로 귀족이 아니란 말씀입니까?”
“네, 아니라니까요. 저는 다양한 세상을 여행하는 여행자예요. 이곳에는 진짜로 우연히 오게 된 거고요.”
“그럴 수가…….”
어인족들이 못 믿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도대체 왜 저를 귀족으로 오해한 겁니까?”
“귀, 귀족만이 하체에 비늘이 없는 모습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다, 당신께서는 부, 분명히 두 다리를 가지고 있는데… 귀족이 분명한데…….”
“두 다리를 가진 형태로 변신하면 귀족이란 말인가요?”
수호가 되물었다.
아무래도 귀족이란 자들은 인간처럼 변신할 수 있는 모양이다.
“마, 맞습니다.”
어인족의 말을 들은 수호의 미간에 골이 파였다.
‘근데 왜 이렇게 무서워하는 거지?’
왠지 귀족이란 족속들이 썩 친절할 것 같지가 않다.
한동안 대화를 나누던 수호가, 티 나지 않게 이를 악물었다.
‘아, 미치겠다. 못 견디겠어. 냄새가 너무 심해.’
썩은 생선 상자에서나 날 냄새가 어인족들에게서 풍겨 왔다.
비린내라 부를 수준을 넘어선 악취.
관계 개선을 위해 간신히 참고 있었는데 이제 한계다.
표정 관리가 너무 어렵다.
‘차원 자꾸 발견하다 보니 우웁- 이런 경우도 생기는구나.’
엘프든 드워프든 가까이 있는 것으로 힘겨운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야말로 ‘차원 여행자’로서 최고의 고비였다.
한데 참느라 슬쩍 고개를 숙인 수호의 눈에 이상한 모습이 들어왔다.
‘상처? 심하게 곪았어.’
어인족들은 모두 몸에 상처를 입고 있었다.
주로 비늘이 있는 하체와 손 쪽에 몰려 있었는데 고름이 줄줄 흐른다.
‘악취는 상처 때문인가?’
수호는 간신히 표정을 관리하며 입을 열었다.
“다치신 것 같은데, 괜찮으세요?”
“…괘, 괜찮습니다. 으윽.”
한참이나 머뭇거리던 어인족이 대답했다.
인식하는 바람에 통증이 느껴졌는지 미약한 신음이 뒤따랐다.
‘일부러 치료하지 않는 것은 아닐 테고.’
대화를 나누는 사이 주변은 다 관찰했다.
소라 껍데기 집은 궁벽했다.
멀리서 거창하게 보였던 것과는 천양지차.
뚫린 문틈으로 보니 제대로 된 침구조차 없었다.
어인족의 생활 양식을 모르니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었지만, 이들이 썩 여유롭지 않다는 점만은 분명했다.
‘치료하지 못할 만큼 상황이 안 좋은 건가? 그렇다면…….’
수호는 차원 여행의 베테랑.
이럴 때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다.
수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상처를 봐 드려도 될까요?”
어인족이 깜짝 놀랐다.
“혹시 의사십니까?”
“의사는 아니지만, 상처 치료에는 일가견이 있거든요. 그 정도 부상은 치료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인족이 망설였다.
수호가 거듭 청했을 때야 어인족이 치료를 허락했다.
“그,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차원 임무 【어인족 부상 치료】를 획득하셨습니다.]
『어인족 부상 치료』
- 가난한 어인족들은 혹사로 인한 부상을 치료할 방법이 없다. 제대로 쉬지도 먹지도 못하여 곪고 덧난 상처가 어인족의 목숨을 위협한다. 그들의 상처를 치료해 주자.
- 보상 : 어인족 만족도
‘역시 임무였어.’
어인족이 가까이 다가와 환부를 내밀었다.
강한 악취가 풍겨왔다.
숨쉬기는커녕 눈을 뜨기도 힘들 정도.
수호는 간신히 참아 냈다.
차원 보따리에서 서둘러 하급 치유 물약을 꺼냈다.
‘물약이 질병에는 썩 효과가 없지만…….’
부상의 원인을 먼저 파악하는 편이 좋다.
질병으로 인한 상처라면 치료해도 재발할 수 있다.
하나 냄새가 극심해 오래 붙잡고 있을 엄두가 안 났다.
‘그래도 상처 자체는 치유될 테니까 나머지는 그 뒤에 해결하자.’
당장 눈에 보이는 환부만 아물게 하면 통증이 한결 가실 터.
냄새도 좀 나아질 것이다.
기대와 함께 수호가 물약을 부었다.
부글부글.
약간의 거품이 올라오더니 이내 어인족의 상처가 나았다.
“나, 나았어! 상처가 나았다!”
“상처를 순식간에 아물게 하다니! 저 약이 뭐기에?”
“저 사람은 정체가 뭐지?”
“의사가 아니라고 했으니… 서, 설마 마법사?!”
“마법사라고?”
마법사는 또 뭔데?
수호가 의아해하는 사이 어인족들이 다시 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마법사 아니고 여행자요. 자꾸 겁내지 마시고 줄 서세요. 치료받으셔야죠.”
수호가 서둘러 그들을 만류했다.
마법사가 뭔지, 귀족은 또 왜 그렇게 겁내는지 궁금하지만.
저들을 치료하고 첫 임무를 완수하는 게 먼저다.
‘일단 치료부터… 궁금증은 만족도를 올린 다음에 풀면 되니까.’
수호가 적극적으로 나서자, 어인족들이 다시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가게에서 팔기 위해 하급 치유 물약을 잔뜩 떼어다 놓은 것이 다행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수호가 마지막 어인족을 치료했다.
[차원 임무 【어인족 부상 치료】를 완수하셨습니다.]
[어인족 만족도가 50 상승합니다.]
임무 완수를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 이제 안 아파! 흑- 더는 끙끙 앓아 가며 일하지 않아도 되겠어.”
수호를 둘러싼 어인족들이 다 함께 고개를 조아렸다.
수호는 만류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두려움이 담겨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 * *
치료를 마치자 어인족의 태도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냄새도 약간이지만 줄어들었고.’
악취가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지만 숨은 쉴 수 있을 정도로 완화됐다.
덕분에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된 수호가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그 결과 귀족과 마법사에 대해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귀족은 여러분 같은 평민을 다스리며, 모두 마법을 쓸 수 있다. 가끔 평민을 다스리지 않고 홀로 살아가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사람들을 마법사라고 부른다. 맞나요?”
“예, 예. 맞습니다.”
마을 대표로 보이는 어인족 청년이 공손히 대답했다.
“그럼 그 귀족은 지금 어디 있나요? 근처엔 안 보이는데.”
“나, 남작님은 마을 북쪽의 저택에서 살고 계십니다. 여기서 해류를 타고 몇 분쯤 가야 도착할 수 있습니다.”
하긴 여기는 권력자가 살 만한 곳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사정을 파악한 수호는 마지막으로 미뤄 둔 질문을 던졌다.
“마을에 몸이 멀쩡한 분이 거의 없던데 도대체 어쩌다 그렇게 다친 겁니까?”
어인족 청년이 머뭇거렸다.
수호는 진득이 기다렸다.
수호의 진중한 태도에서 믿음을 느꼈는지 청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급류에서 해정석를 채취하다가 생긴 상처입니다.”
급류에 섞인 자갈이나 조개 껍데기 때문에 일하다 보면 상처가 생길 수밖에 없다고.
상처가 아물 틈이 없어 악화됐다고 어인족이 덧붙였다.
“해정석요? 그게 뭔가요? 채취하는 일이 그렇게 위험한데 왜 계속하시는 겁니까?”
상처가 덧날 때까지 하는 이유가 뭐지?
수호의 물음에 또다시 한참을 머뭇거린 청년.
이번에도 수호는 묵묵히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청년이 결심했다는 표정으로 입을 때려던 순간이었다.
추르륵-
추르륵-
추르륵-
마을 저편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으힉! 나, 남작님이다. 남작님이 오셨어.”
“빠, 빨리 채취장으로 돌아가! 서둘러!”
“잘못하면 경을 칠 거야. 골병이 들 때까지 두들겨 맞을 거라고.”
어인족들이 부리나케 어딘가로 향했다.
‘두들겨 맞는다고?’
누군가의 외침을 되새긴 수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보아하니… 꼭 부드럽게 처리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나직이 뇌까린 수호가 일어섰다.
126화 언더 더 씨 (2)
추르륵-
추르륵-
수호는 어인족들을 따라 괴상한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향했다.
곧 소리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가마?’
건장한 어인족 넷이 어깨에 가마를 메고 다가왔다.
가마의 무게 탓에 비늘이 바닥에 끌려 괴상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가마 위.
메기처럼 생긴 둥글번번한 몸집의 어인족이 앉아 있다.
‘가마에 탄 사람이 남작인가?’
메기야, 복어야?
살찐 몸매가 복어를 연상시키는 어인족.
그가 입을 열었다.
“네놈들은 왜 일을 멈추었지? 할당량은 다 채웠느냐?”
“…….”
“…….”
어인족들이 입을 열지 못하고 고개만 조아렸다.
“이것들이 감히 대답이 없어? 오늘 모은 해정석은 다 어디 있느냐? 당장 가지고 오너라!”
남작이 심술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깜짝 놀란 어인족 청년이 급류가 흐르는 곳으로 달려갔다.
돌아온 청년의 손에는 커다란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수호는 바구니 바닥에 깔린 자잘한 조각을 발견했다.
‘저게 해정석? 뭐 하는 데 쓰는 물건이기에…….’
어인족 청년과 나누던 이야기가 남작의 등장으로 중간에 끊겼다. 그 바람에 해정석에 관해 제대로 듣지 못했다.
하나 어인족이 상처를 무릅쓰고 채취한 물건.
모르고 넘어가서는 안 된다.
‘알아봐야 해.’
수호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천한 것들이 감히 할당량도 안 채우고 게으름을 부려?”
바구니가 뒤집혔다.
청년도 바닥을 뒹굴었다.
가마꾼에게 얻어맞은 탓이다.
“죄, 죄송합니다. 당장 채취를 시작하겠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청년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를 따라 모든 어인족 주민이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불호령이라도 내릴 듯.
메기 같은 입꼬리를 씰룩이던 남작이 행동을 멈추었다.
뒤편에 멀뚱히 서 있는 수호를 발견한 까닭이다.
“다, 당신은 귀족?”
수호가 어인족 주민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섰다.
“저는 여행자입니다. 귀족도 어인족도 아닙니다.”
“뭐, 뭐라고?!”
남작이 수호를 경악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럴 리가 없는데.
어째서 다리가…….
한동안 중얼거리던 남작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천한 것들의 상처가 다 아물었잖아!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엎드려 비느라, 어인족 주민들의 하체가 드러났다.
상처가 있어야 할 부위가 매끈하게 나았다.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던 남작이 입을 열었다.
“진짜로 귀족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저는 여러 세상을 돌아다니는 여행자입니다. 여기는 우연히 도착했고요.”
“정말 귀족이 아니라고? 하긴 귀족 특유의 바다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 으음…….”
중얼거리던 남작의 눈빛이 한순간 변했다.
“그럼 네가 저 천한 것들의 상처를 치료했느냐?”
말투도 바뀌었다.
눈빛에는 탐욕이 어렸다.
수호도 대번에 느낄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그렇습니다만, 그건 왜 묻습니까?”
수호의 말투도 달라졌다.
상대의 노골적인 태도에 슬슬 짜증이 나고 있었다.
“네 이놈! 네놈은 감히 내 공기 방울 섬에 함부로 들어와, 허락도 없이 내 재산에 손을 댔다! 지금이라도 죄를 용서받고 싶으면, 당장 가진 것을 다 내어놓고 무릎을 꿇어라!”
재산?
주민들을 재산이라고 일컫는 건가?
중얼거린 수호가 들으란 듯 혀를 찼다.
“귀족이란 작자가, 깡패도 아니고, 쯧.”
“뭣이? 여봐라. 저놈을 죽여라! 아니, 잡아라! 사로잡아라!”
화를 터트리던 남작이 급히 말을 바꾸었다.
‘저놈을 사로잡아야, 천한 것들을 치료하는 방법을 알아낼 수 있지. 크흐흐.’
남작이 탐욕에 번들거리는 눈빛을 보이는 사이.
가마꾼 하나가 수호에게 다가왔다.
‘다른 어인족과는 덩치가 비교가 안 되는구먼.’
못 먹고 혹사당한 주민들과 달리, 가마꾼은 수호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다.
놈이 솥뚜껑만 한 주먹을 수호에게 휘둘렀다.
수호가 고개를 까딱였다.
가마꾼의 주먹이 빗나갔다.
동시에 수호의 주먹이 놈의 옆구리를 쳤다.
퍽-
커다란 가마꾼이 한쪽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끄어어억-”
놈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남작이 분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감히 귀족의 병사를 건드려? 네놈이 기어이 험한 꼴을 보고 싶은 모양이구나.”
말이 끝나는 순간, 나머지 세 가마꾼이 앞으로 나섰다.
그와 동시에, 수호는 남작의 몸에서 묘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것을 감지했다.
‘마력?’
뭉클, 흘러나온 마력이 가마꾼의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가마꾼이 변하기 시작했다.
키가 점점 자라고, 근육도 몇 배로 부풀어 올랐다.
“크하하, 저놈의 팔다리를 모조리 부러트려 버려라.”
남작이 득의에 차 외쳤다.
수호가 피식 웃었다.
‘지금 크기로 한번 해 보자는 건가?’
생각과 함께 거인의 격노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거대화를 시전했다.
굳이 마력을 많이 불어넣지도 않았다.
고작 2할 정도?
그럼에도 수호는 가마꾼들의 정수리를 훤히 내려다볼 수 있을 만큼 커졌다.
“미, 미친! 귀족이 맞았잖아!”
남작이 꽥 소리쳤다.
그 순간 수호가 움직였다.
차원보를 시전.
벼락처럼 움직인 수호가 세 번 망치질했다.
퍽!
퍼퍽!
세 가마꾼이 모조리 마을 저편으로 날아갔다.
죽이지는 않았다.
하나 처음 덤볐던 놈 이상으로 다쳤으니, 굴신도 못 할 것이다.
“이야, 뛸 줄도 알았어?”
가마꾼을 순식간에 처리한 수호가 어이없다는 듯 뇌까렸다.
어느새 가마에서 내린 남작이 해류를 향해 부리나케 도망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덥석.
수호가 놈의 뒷덜미를 쥐고 들어 올렸다.
남작의 입에서 비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 고위 귀족이시면 진작에 말씀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제가 알아서 모셨을 텐데…….”
“귀족 아니라니까?”
“마, 마법을 쓰는데 귀족이 아닐 리가?”
“나는 차원 여행자야. 차원을 무사히 여행하려면, 내 한 몸 지킬 힘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
“그럴 수가…….”
인지 부조화에라도 걸린 듯한 표정의 남작에게 수호가 물었다.
입에는 왠지 섬뜩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럼 우리 조용히 이야기를 좀 나눠 볼까?”
남작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 * *
“크흑- 귀, 귀족을 이렇게 때리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온몸이 푸르뎅뎅하게 멍 든 남작이 울먹이며 외쳤다.
“그러게,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했으면 좋았잖아.”
탁탁.
수호가 구타용, 아니 보급형 강철 창으로 손바닥을 두드리며 대답했다.
‘모처럼 써서 그런지 손맛이 기가 막히네.’
드워프제 강철 창의 손맛에 새삼 감탄하는 사이, 남작이 낙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다 말할 테니 제발 그만 좀 때리십시오. 제가 아는 건 뭐든 다 알려 드리겠습니다.”
“잘 생각했어, 멕복. 그럼 먼저…….”
몸의 대화를 나누는 동안 알아낸 남작의 이름을 부르며, 수호가 생각을 정리했다.
머지않아 가장 궁금한 것이 떠올랐다.
“해정석이 뭐기에 채취에 그렇게 열을 올리는 거지?”
그게 주민들 목숨보다 더 소중한가?
한동안 침음하며 망설이던 남작 멕복이 입을 뗐다.
“그것은 귀족이 마법을 쓸 수 있도록 해 주는 힘의 원천입니다.”
“뭐? 자세히.”
“해정석을 복용하면 마법을 쓸 수 있는 어인족이 낮은 확률로 태어납니다. 그들을 귀족이라고 부르고요. 마법을 자꾸 쓰다 보면 몸속의 바다 기운이 고갈되는데 그때 해정석 가루를 잘 정제해 복용하면 바다 기운이 다시 차오릅니다.”
멕복의 마법은 부하의 강화.
그런 식으로 귀족마다 각자 특유의 기술이 있으며, 바다 기운을 소모하면 해정석으로 충전해야 한다.
‘바다 기운?’
왠지 낯설지 않은 내용이 섞여 있다.
수호가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마법을 쓰는 데 필요한 기운이라면, 마력 아니야?”
“마력이요? 그게 뭡니까? 저희는 그저 바다 기운이라고만 불러서…….”
“흐음, 그렇단 말이지. 내놔 봐.”
“네? 무, 무얼 말입니까?”
남작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수호가 손바닥을 내밀며 으름장을 놓았다.
“정제한 해정석. 내놔, 가진 거 전부.”
“……!”
“없다는 소리는 하지 말자, 서로 괜한 힘 안 빼도 되게.”
해정석이 마력을 채워 준다면, 그걸 모조리 집에 두고 다닐 리가 없다.
어깨를 축 늘어트린 멕복이 상체에 걸친 조끼의 품을 뒤적였다.
작은 주머니가 손에 쥐여 나왔다.
수호가 그것을 냉큼 받아 들었다.
주머니 안에 엄지손톱만 한 푸른 결정이 들어 있었다.
‘이게 해정석? 마력이 느껴져.’
가루 상태로는 느껴지지 않던 정순한 마력이 느껴졌다.
수호가 감탄하고 있을 때, 아이템 설명 창이 떠올랐다.
[정제된 해정석]
- 해정석을 잘 정제한 결정체. 큰 바다의 순수한 기운이 응축되어 있다. 어인족이 복용하면 바다 기운이 충전된다.
설명을 확인한 후, 수호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해정석과 비슷한 물건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거… 마정석과 비슷해.’
몬스터의 체내에 마력이 응축되어 생기는 마정석.
해정석은 그것과 몹시 흡사했다.
등급이 표시되지 않은 아이템 설명 창도, 수호가 감각을 통해 파악한 느낌도 모두가 그랬다.
‘이걸 먹어서 마력을 채우는 용도란 건 알겠는데.’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수호는 의문을 느꼈다.
‘굳이 이게 많이 필요한 이유가 뭐지? 전쟁이라도 치르려는 건가?’
궁금한 것을 묵혀 둘 필요는 없다.
수호가 바로 질문했다.
“이게 왜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얼마 전부터 수도에 상납할 세금이 크게 올라서 어쩔 수 없이 많이 모아야 했습니다.”
귀족이니 뭐니 봉건 사회 비슷하다 싶더라니.
수도에 세금도 바쳐야 하는 모양.
“세금이 왜 올랐는데?”
“무슨 일이 터졌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진짜입니다. 저 같은 하급 귀족 나부랭이가 수도 상황까지 어떻게 자세히 알겠습니까. 그냥 바치라면 바치는 거지요.”
남작이 처량한 표정을 지었다.
수호는 딱히 동정심을 느끼지 않았다.
치료하느라 본 어인족 주민의 상처가 떠오른 까닭이다.
“어디서 불쌍한 척이야?”
한 차례 남작을 구박한 수호가 이것저것 질문을 이어 갔다.
그 결과 어인족 사회에 대한 제반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이제 다 말씀드린 것 같은데… 그, 그만 돌아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희 영지는 해정석 생산량도 최하고, 볼 만한 것도 없습니다.”
남작이 슬그머니 제안했다.
수호가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왠지 등골이 서늘해진 남작이 수호를 쳐다봤다.
수호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일어서, 가자.”
“가, 가다니, 어딜 말입니까?”
“네 집.”
들을 이야기는 다 들었다.
이제 이놈의 말이 사실인지 집을 한번 털어 볼 차례다.
* * *
수호가 소라 껍데기 집 밖으로 나왔을 때, 문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주민 대표로 나섰던 청년이었다.
뭔가 용건이 있는 듯했다.
수호가 물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세요? 어려워하지 말고 말하세요.”
“그, 저…….”
수호의 말에도 청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우물쭈물 계속 어딘가를 흘끔거렸다.
수호는 대번에 상황을 눈치챘다.
‘남작이 보고 있어서 말을 못 하는구먼.’
수호가 곧바로 거인의 격노를 뽑아 들었다.
퍽-.
뒤통수를 맞은 남작이 단숨에 기절했다.
강철창으로 이리저리 두들기는 사이, 어인족의 신체구조를 깨우친 덕분이었다.
“아!”
“자, 이제 됐죠?”
“가, 감사합니다.”
“인사는 됐으니까, 어서 말해 보세요.”
청년이 바로 용건을 꺼냈다.
“여행자님이 떠나시면, 저희는 또 위험해질 겁니다. 남작님, 아니, 저자 때문에요.”
당연한 이야기였다.
수호도 남작을 여기 남겨 두고 떠날 생각은 없었다.
“이놈은 제가 가기 전에 해결할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여행자님.”
“그동안 고생하셨을 텐데, 가서 푹 쉬세요.”
수호는 거듭 인사하는 청년을 돌려보내려 했다.
한데 청년은 발을 떼지 않았다.
“혹시 남작의 집에 가시려고 합니까?”
“그렇습니다만.”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어릴 때 남작의 저택에서 하인으로 지냈습니다.”
그릇을 깨트려서 쫓겨나기 전까지는요.
청년이 눈을 빛내며 덧붙였다.
먼지 한 톨 남지 않게 탈탈 털어 버리겠어!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럼 부탁할까요?”
수호가 흔쾌히 대답했다.
127화 언더 더 씨 (3)
수호는 멕복과 청년을 대동한 채 해류에 올랐다.
해류는 조금 전 그들이 머물던 공기 방울 섬을 끼고 흘렀다.
1분쯤 지났을까.
저편에 조개가 나타났다.
아까 본 소라 껍데기는 상대도 안 될 만큼 큰 조개였다.
“저기입니다, 여행자님!”
청년이 조개를 가리키며 외쳤다.
“내립시다.”
수호가 멕복의 뒷덜미를 붙잡고 해류에서 뛰어내렸다. 청년이 그 뒤를 따랐다.
잠시 후, 그들은 조개 껍데기 집에 들어섰다.
“제가 내부 구조를 잘 아니, 안내하겠습니다.”
“이익- 네놈이 감히… 악!”
“어디서 눈을 부라려?”
청년을 위협하는 멕복의 뒤통수를 후려친 후, 수호가 손짓했다.
청년이 앞장서 나아갔다.
잠시 후.
“여기가 창고입니다.”
청년이 수호를 창고로 인도했다.
안에 해정석이 쌓여 있었다.
“이 정도면 거의 100kg은 되겠는데, 혹시 이거 마을에 필요한가요?”
“아닙니다. 저희 같은 평민은 먹어도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그럼 제가 챙겨도 될까요?”
“네, 당연합니다. 그러시라고 제가 일부러 안내해 드리는 건데요.”
“고마워요.”
“아닙니다. 여행자님이 치료해 주시지 않았으면, 지금쯤 몇 명은 버티지 못했을 겁니다. 목숨을 살려 주셨으니, 이런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수호가 해정석을 차원 보따리에 수납한 후, 주변을 둘러봤다.
잡다한 물건이 쌓여 있었지만 아이템은 없었다.
수호가 청년에게 물었다.
“나만 뭘 가지고 가려니 영 찜찜한데, 혹시 여기 있는 것 중에 뭐 필요한 거 없어요?”
잠시 머뭇거리던 청년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음식을 좀… 저희가 근래 바다로 나갈 시간이 부족해서, 식량을 제대로 못 구했습니다.”
창고 한편에 식자재가 쌓여 있었다.
“원하는 만큼 챙겨요. 아니지, 차라리 마을 사람들과 다시 오는 편이 낫겠네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군데만 더 안내해 드린 후에요.”
“더 갈 데가 있나요?”
“제일 귀한 물건이 있을 만한 곳을 알고 있습니다.”
청년이 대답하는 순간, 멕복이 눈에 띄게 몸을 움찔거렸다.
“흐음, 그렇군요. 가죠.”
청년이 당차게 앞장섰다.
수호가 미적거리는 멕복의 엉덩이를 걷어차 가며, 그 뒤를 따랐다.
* * *
소라 껍데기 집 최심부에 위치한 큰 방.
어인족 청년이 방문을 밀고 들어섰다.
“저기 의자 뒤쪽입니다.”
청년이 방문 맞은편으로 보이는 거창하게 생긴 의자를 가리켰다.
왕좌처럼 꾸며진 그것의 뒤로 휘장이 드리워진 벽이 있었다.
수호가 그쪽으로 다가갔다.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마력?’
휘장 뒤에서 퍼지는 기운은 마력이 분명했다.
수호가 휘장을 응시하고 있을 때, 청년이 덧붙였다.
“저자가 은밀하게 이곳을 들락거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숨겨 놓은 보물이라도 보고 온 사람처럼, 그때마다 기분 좋은 티를 내었습니다.”
“네, 네놈이! 이익-”
청년의 말이 끝나자, 분을 참지 못한 멕복이 이를 갈았다.
수호가 망치를 뽑아 들었다.
멕복이 꼬리를 내렸다.
수호가 뽑아 든 망치를 그대로 휘둘렀다.
콰직.
벽이 부서져 내렸다.
장방형 공간이 벽 뒤에 숨겨져 있었다.
용도는 뻔했다.
‘금고네.’
금고 안에는 자그마한 상자가 놓여 있었다.
수호가 상자를 꺼내 열었다.
화악-
주변으로 청량한 기운이 퍼져 나갔다.
‘보석? 농후한 마력을 품고 있어.’
그것은 눈물 모양 보석이었다.
해정석처럼 푸른색이지만 한 번씩 금빛이 일렁거렸다.
수호가 보석을 상자에서 꺼냈다.
아이템 설명이 떠올랐다.
[해루석]
- 큰 바다의 힘이 기이할 정도로 강하게 응집된 보석. 어인족이 복용할 경우 즉시 바다 기운을 완전히 회복하며, 낮은 확률로 마법의 힘이 영구히 강화된다.
해루석의 정체를 확인한 수호는 멕복이 왜 그렇게 이것을 아까워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만하면, 멕복이 아낄 만하네. 근데…….’
어인족 귀족에게는 보물과도 같은 물건.
수호에게도 쓸모가 있어 보였다.
‘이건 진짜 마정석보다도 더 진한 마력을 품고 있단 말이지.’
마인의 발호를 막기 위해서는 윌슨의 발명품을 양산해야 한다.
그러자면 마정석이 너무 많이 소모된다.
상왕련의 힘을 빌려도 충당하기 힘들 만큼.
‘어쩌면 해루석이 마정석을 대체할 수 있을지도…….’
왠지 예감이 좋다.
수호가 멕복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 봐, 멕복. 이 해루석 어디서 구했냐?”
“해루석은 오직… 수도에서만 구할 수 있습니다. 수도요, 수도. 수도! 먼 수도에까지 가서 구해 온 내 보물인데, 이 도둑놈아!”
말을 하던 멕복이 소리를 내질렀다.
보물을 뺏긴 게 너무 억울했던지, 수호에게 달려들었다.
퍽-!
물론, 결과는 뻔했다.
부하를 거느리고도 못 이긴 수호에게 상대가 될 리 만무.
대번에 뒤통수를 맞고 기절했다.
‘자식이 덤비기는…….’
멕복을 내려다본 수호가 손에 들린 해루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걸 수도에 가면 구할 수 있다는 말이지?”
생각대로만 되면 마정석 수급을 위해 고생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수호가 기대감에 차 있을 때였다.
털썩.
어인족 청년이 무릎 꿇었다.
* * *
어인족 청년 새먼은 마을 대표를 맡고 있었다.
남작의 눈총만 받고, 얻는 것은 없는 자리.
그래도 마을 사람들의 안위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끝이었다.
‘결국 다 죽을 거로 생각했는데…….’
의지나 공포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다.
죽음이 코앞까지 닥쳤음을 깨달았기에, 마을 주민을 모아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모든 것이 해결됐다.
‘여행자님 덕분에 살았어.’
갑자기 나타난 여행자는 강했다.
그 무섭던 남작의 부하조차 상대가 안 됐다.
감사한 마음에 남작의 창고를 터는 일을 솔선해서 도왔다.
한데 막상 일이 끝날 무렵이 되자 새먼의 머릿속에는 근심거리가 떠올랐다.
‘하지만… 이대로는 결국 파멸뿐이야.’
공기 방울 섬을 유지하려면, 귀족의 바다 기운이 필수.
남작이 사라지더라도 결국 마을은 망한다.
혹은 또 다른 귀족에게 수탈당하거나.
‘어떻게 해야 하지?’
고민했다.
하나 알고 있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고민이라면 이미 머리가 깨어져라 반복해 왔으니까.
털썩.
그랬기에 새먼은 무릎을 꿇고 말았다.
여행자.
아니, 하늘이 내려 준 구원자에게 고개 조아려 빌었다.
“여행자님.”
“갑자기 왜 그러세요?”
여행자가 황급히 물었다.
새먼은 이마를 바닥에 댄 채 간절히 읊조렸다.
부디 자신의 말이 여행자의 마음을 움직이기를 바라면서.
“여행자님이 남작을 처리해 주신다면, 한동안은 평화롭겠지요. 하지만 평화가 계속될 수는 없습니다. 공기 방울 섬이 유지되려면 귀족이 주기적으로 섬에 기운을 주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랬었군요.”
남작에게 미처 듣지 못한 내용인 듯, 여행자의 표정이 굳었다.
새먼이 이야기를 이었다.
“새로운 귀족이 나타나야 이곳이 유지되겠지요. 하지만 세금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결국… 똑같은 일이 반복될 겁니다.”
“으음.”
여행자가 침음했다.
고민하는 모습.
새먼은 그 이유를 알았다.
“여행자님은 여행을 하셔야 하니, 저희를 영원히 지켜주실 수 없다는 것은 압니다. 그러니 부디…….”
한참이나 망설였다.
주민들의 상처를 치료해 준 것만으로도 큰 은혜다. 아울러 남작까지 징치해 주었다.
염치가 없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괜찮으니 말씀해 보세요.”
여행자가 따뜻한 목소리로 말을 청했다.
새먼은 왠지 근심이 사라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입이 저절로 열렸다.
“아까 집 밖에서 기다릴 때, 수도에서 세금을 많이 요구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혹시라도 여행자님이 수도에 가신다면… 세금을 과하게 걷는 것을 막아 주실 수 없을까 하고… 죄송합니다. 너무 염치없는 부탁을…….”
울음이 터질 것 같아 새먼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염치없음을 알면서도, 부탁해야 하는 상황이 서글펐다.
그만큼 여행자에게 미안했다.
“너무 미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차피 수도에 가 볼 생각이었으니, 겸사겸사 알아볼게요. 제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면 해결해 드리고요.”
여행자는 새먼의 부탁을 수락했다.
이렇게 흔쾌히?
의문을 느낄 새도 없이 새먼의 눈에서 눈물이 터졌다.
“흑-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새먼은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아울러 빌고 또 빌었다.
‘위대한 큰 바다의 어머니시어, 부디 여행자님을 보살펴 주십시오. 저분의 앞길에 행운이 가득하기를 간절히 비나이다.’
* * *
어인족 청년의 부탁을 수락하는 순간 메시지가 떠올랐다.
[차원 임무 【수도 조사】를 획득하셨습니다.]
[차원 패널을 통해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세요.]
‘임무가 뜰 것 같더라니.’
수호가 곧바로 임무를 확인했다.
【수도 조사】
- 세금이 줄어들지 않는 한, 어인족 마을의 평화는 요원하다. 수도로 가 세금이 급격히 증가한 원인을 파악하고, 가능하면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자.
- 보상 : 어인족 만족도.
예상대로 수도로 가는 임무였다.
‘잘 됐어. 어차피 해루석 때문에라도 수도에 들러 볼 생각이었으니까.’
마을의 딱한 사정과 청년의 간절한 표정도 수도행을 결정한 이유였지만 말이다.
수호는 여태 엎드린 청년을 일으켜 세워 다독였다.
청년이 곧 마음을 추슬렀다.
수호가 차원 보따리에 손을 넣었다.
‘갈 때 가더라도, 그 전에.’
덕트 테이프가 들려 나왔다.
수호가 그것으로 기절한 멕복을 꽁꽁 싸매기 시작했다.
‘윌슨한테 간다는 말은 전하고 가야겠지? 해루석의 가치도 알아봐야 할 테고.’
멕복이 누에고치처럼 변했다.
“이놈 잘 지키고 있어요. 부하를 다 잃어서 힘을 못 쓸 테지만, 혹시라도 덤비면 돌 같은 거로 찍어 버려요.”
쓸 데가 있으니까 죽이지는 말고.
“예! 찍어 버리겠습니다!”
청년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 * *
“흐으으읍- 이제 살겠네.”
지구로 돌아온 수호는 숨부터 크게 들이마셨다.
“수호, 무슨 큰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기다리고 있던 윌슨이 곧바로 다가오며 물었다.
“아, 위험한 일은 없었는데, 저쪽 세상 냄새가…….”
“냄새?”
“응, 냄새. 너무 비려. 후우-”
어인족 주민을 치료하기 전에는 진짜 코가 썩는 줄 알았다. 치료 후 그나마 나아졌지만 그래도 고등어 상자 안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었다.
“…고생했어. 그럼 냄새 말고 특별한 일은 없었던 거야?”
“아니, 있었어. 이야기하기 전에, 이것 좀 봐 봐.”
수호가 해루석을 꺼내 내밀었다.
윌슨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굉장한 마력이 느껴지는걸? 잠깐, 이럴 때 쓰려고 추가한 기능이 있지. 하하.”
말이 끝나는 순간, 윌슨의 왼쪽 눈에서 초록색 빛줄기가 쏘아졌다.
그것이 해루석 위를 몇 차례 오갔다.
“새로운 기능이야?”
“응, 마력 스캔 기능이야. 네가 가져다준 마력 토파즈 덕분에 만들 수 있었어. 오! 역시 대단해!”
말하는 중에 스캔이 끝났다.
윌슨이 탄성을 터트렸다.
“어때? 그거로 마정석을 대체할 수 있을까?”
“당연하지! 이건 마력 농도가 4성 던전 마정석의 3배도 넘어. 대체 정도가 아니라, 훨씬 더 좋아!”
그새 이런 걸 어떻게 구한 거야?
윌슨이 깜짝 놀라며 방방 뛰었다.
‘사용에 무리가 없다는 말이지…….’
수호는 내친김에 해정석도 꺼냈다.
촤르르륵-
욕조에 해정석이 가득 찼다.
“이것도 쓸 만할까?”
윌슨이 해정석을 스캔했다.
“이건 마정석보다 좀 못하네. 그래도 마인 탐지기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네. 가서 부딪혀 봐야겠지만, 어인족 수도에서 해루석을 구할 수 있대. 안 되면 해정석이라도 많이 구해 올게.”
“바로 가려고?”
“그 전에 급한 일만 처리해 놓고.”
“그렇구나. 수도로 간다니 하루 만에 돌아오지는 못하겠지?”
“아마도? 무슨 일 있으면, 차원 전음으로 연락해.”
“알았어. 그럼 나는 네가 돌아올 때까지, 마인 탐지기 열심히 만들어 둘게. 이것들이면, 아마 몇백 개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거야.”
윌슨이 해루석과 해정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급한 불은 끌 수 있겠네. 그럼 상왕련주님한테 미리 말해 놓을게. 며칠 뒤에 가게로 와서 찾아가라고.”
유통은 상왕련에서 맡아 주기로 했으니 걱정 없다.
“응, 그렇게 전해 줘. 나는 바로 시작해야겠어.”
“그래, 수고해.”
수호가 방으로 향했다.
* * *
잠시 비룡객잔에 들렀던 수호가 집으로 돌아왔다.
‘대충 정리는 끝났고.’
석비룡에게 인사했고, 상왕련주에게도 사정을 설명했다.
‘급한 일 생기면 윌슨이 알려 줄 테니, 이제 출발을… 저 녀석은 뭐 하는 거야?’
막 어인족 마을로 돌아가려던 수호의 눈에 발룡이가 들어왔다.
녀석은 침대에 엎드려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한데 표정이 괴상했다.
『크큭- 조금만 기다려라, 수호 놈아. 본좌가 곧 하양이 애정 서열의 왕좌를 탈환할 것이니라.』
화면을 보며 중얼거리는 발룡이.
수호가 그 뒤로 슬그머니 다가갔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발룡이는 눈치채지도 못했다.
스마트폰 화면이 수호의 눈에 들어왔다.
‘핵인싸 되는 법? 인기 많은 남자 되기? 도대체 뭘 보고 있는 거야?’
수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양이에게 홀대받은 것이 어지간히도 충격이었던 모양.
‘같이 갈까 했더니, 이번엔 그냥 두고 가야겠다.’
하는 꼴이 짠하다.
차마 함께 가자는 말이 안 나왔다.
‘정 필요하면, 돌아와서 데리고 가든지 해야지…….’
발룡이를 포기한 수호가 다시 샤워 부스로 향했다.
* * *
“가자, 멕복. 수도까지 안내해.”
“내, 내가 왜……?”
“그럼 여기서 깔끔하게 끝낼까?”
“제가 소싯적에 수도에서 좀 놀았습니다. 비록 바다 기운이 부족해 남작에 머물렀지만, 수도 지리만큼은 통달한 몸입니다.”
“그렇지? 그럴 것 같았어.”
“예에, 암요.”
수호가 웃으며 멕복을 바라봤다.
멕복이 돌에 찍혀 시퍼렇게 멍든 눈으로, 애써 웃음을 지었다.
“그럼 출발할까?”
“…예.”
수호가 멕복의 목덜미를 붙잡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둘은 해류를 따라 빠르게 떠내려갔다.
수도를 향해.
* * *
시간이 흘렀다.
멕복의 안내에 따라 해류를 갈아타 가며, 계속 이동했다.
어느 순간.
저편 멀리, 거대한 도시가 나타났다.
이제껏 본 이종족 마을 중 가장 규모가 컸다.
수호가 서둘러 차원 패널을 열었다.
『어인족』
- 소속 차원 : DPA-10002
- 구성원 수 : 101727
- 만족도 : 20/100
‘도시 인구가 10만 명이 넘는구나. 엄청나네.’
교류 대상 수가 10만 명이 넘게 증가했다.
반면에 만족도는 하락했다.
수도의 어인족이 교류 대상에 포함되는 바람에 평균이 내려간 탓이다.
‘어쨌든 한번 가 볼까?’
수호가 멕복의 목덜미를 잡고 해류를 벗어났다.
잠시 후.
거대한 공기 방울 섬 끝자락에 수호가 첫발을 내디뎠다.
128화 언더 더 씨 (4)
어인족 남작 멕복이 눈알을 굴렸다.
‘제기랄, 이제 어쩌지?’
비교적 무탈하던 멕복의 인생은, 큰 변곡점을 맞이했다.
‘살아만 있으면 영지는 어떻게든 되찾을 수 있겠지만…….’
되찾는 건 문제없다.
여차하면 다른 영지를 구할 수도 있다.
어차피 공기 방울 섬은 귀족이 있어야 유지되니까.
‘하지만 저놈이 날 쉽사리 놓아주지는 않을 거야.’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여행자.
어쩌면 고위 귀족도 쌈 싸먹을 것 같은 괴물은, 자신을 쉽게 놓아주지 않을 터였다.
그랬다가는 영지의 주민이 경을 칠 거라는 사실을 알 테니까.
결국 멕복은 선택해야 했다.
‘어떻게든 저놈을 처치하든가.’
수도의 인맥을 총동원해서 놈을 공격한다.
그러나 그 방법은 즉시 기각됐다.
멕복의 지인 중에 여행자를 처치할 만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면 열심히 도와서… 저 자식 눈에라도 들어야 할까?’
그럼 살 수 있을까?
겉보기엔 인상 좋아 보이는 여행자지만, 결코 심지가 물렁하지 않다.
강철창을 휘두르던 장면을 되새겨 보면, 명백한 이는 사실.
‘모르겠다, 모르겠어.’
멕복은 갈수록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일단 백작님에게 가자. 다음은 백작님 이야기를 들어보고 결정하자.’
멕복의 지인 중 최강자인, 망상 백작.
멕복은 여행자를 그에게 데리고 가고 있었다.
어쩌면 여행자를 처치하기 위해 백작이 힘을 빌려줄지도 모르니까.
생각을 하느라 멕복의 걸음이 느려졌다.
여행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이렇게 미적거려. 무슨 수작이라도 부리려고?”
멕복이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그, 그럴 리가요? 제가 어떻게 감히.”
“농담이야. 뭘 그렇게 놀라?”
“그런 농담은 좀…….”
여행자와 눈이 마주친 멕복은 따지지도 못했다.
강철창에 어찌나 두드려 맞았던지, 대거리할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그래, 어쨌든 그 백작이 수도 소식에 정통한 건 확실하지?”
“암요. 그건 진짜 장담할 수 있습니다. 망상 백작님은 수도에서 내로라할 만큼 인맥이 두터운 분이니까요.”
“그건 장담한다고? 그럼 장담 못 하는 건 뭔데?”
“무, 무슨 그런 말씀을! 그냥 상투적인 표현일 뿐입니다.”
눈치 빠른 새끼.
멕복이 얼른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걸음을 서둘렀다.
여행자가 뒤에서 느긋하게 따라왔다.
‘하아-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위대한 큰 바다의 어머니시어.’
그러면 앞으로는 진짜 착하게 살겠습니다.
평소 믿지도 않았던 신의 이름을 뇌까렸다.
잠시 후.
저편에 큰 저택이 나타났다.
멕복의 조개껍데기 집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했다.
“저기가 백작가야?”
“예, 인제 다 왔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투구는 벗지 마시고, 꼭 필요한 게 아니면, 말씀도 하지 마십시오.”
여행자가 두 다리로 걸어 다니는 탓에, 가뜩이나 이목을 끈다.
저 상태로 투구까지 벗으면, 진짜 큰일이 날 터였다.
“알았어. 가자.”
곧 저택 입구에 도착했다.
어인족 경비병 둘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앞장선 멕복에게 물었다.
“누구십니까?”
“나는 남작 멕복이니라. 백작님과는 깊은 인연을 맺은 사이이니, 어서 안으로 안내하라.”
“안에 기별할 테니, 기다리십시오.”
말투는 정중했지만 경외심은 없다.
멕복의 꼴이 썩 대단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수호가 멕복의 옆에 다다랐다.
막 안에 기별하려던 경비병이 깜짝 놀랐다.
“귀, 귀하신 분께서 어쩐 일로 방문하셨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수호가 입을 다문 채 멕복을 돌아봤다.
멕복이 호통쳤다.
“이분은 내 일행이다. 그리 알고, 어서 문을 열어라!”
“예, 예. 알겠습니다. 제가 접객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흥!”
멕복이 호가호위를 만끽하며 경비병을 따랐다.
잠시 후, 수호와 멕복은 거창하게 꾸며진 응접실로 안내됐다.
“백작님께 기별하겠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시종이 테이블에 다과를 내어 놓고 사라졌다.
그제야 수호가 입을 열었다.
“왜 다들 나를 보고 그렇게 놀라는 거지?”
경비병도 시종도 수호에게 지나치게 공손했다.
“그야 두 다리로 걸어 다니시니 그렇지 않습니까?”
“그게 어때서?”
“신체 변형 마법은 상당한 바다 기운을 소모합니다. 차라리 가마를 타면 탔지, 변신해서 자기 발로 걸어 다니는 귀족은 별로 없습니다.”
고위 귀족이나 되어야 소모되는 기운을 감당할 수 있으니까요.
멕복이 덧붙인 말에 수호가 되물었다.
“그래? 네가 날 처음 봤을 때는 경비병만큼 놀라지는 않던데?”
“투구를 쓴 채 주민들 사이에 섞여 있으셔서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나중에는 그냥… 저, 정신이 좀 이상한 귀족인 줄 알았고요.”
해정석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먹으면 미친다는 괴담이 돈 적이 있거든요.
멕복이 첨언했다.
차게 식은 시선이 날아와 꽂혔다.
맥북이 비굴한 표정을 지었다.
한동안 시간이 흘렀다.
수호가 입을 뗐다.
“근데 너, 백작과 친한 거 맞아?”
“맞습니다! 제가 수도 생활을 할 때 가장 많이 도와주신 분이 백작님이십니다.”
아울러 지금 멕복이 내는 상납금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처먹는 것 또한 백작이다.
“흠, 이상한데.”
“진짭니다. 바쁜 일이 있어서 그럴 겁니다. 곧 시종이 다시 부르러 올 거라고요.”
멕복이 강하게 항변했다.
또 몽둥이찜질을 당하고 싶지는 않았던 까닭이다.
한데 수호의 미간은 좀체 펴지지 않았다.
“아니야, 이상해.”
“진심으로 진짭니다. 목숨을 걸고 진짜라고요. 믿어 주십시오!”
“아니, 그거 말고.”
“……?”
“여기, 원래 이렇게 조용해?”
“그, 글쎄요.”
평소에 어떤지 알 리가 없다.
백작과 친하다고 했지만, 집에 편히 드나들 정도는 아니었다. 철저한 갑을 관계였으니까.
“진짜로 이상한데.”
“…….”
영문을 모르는 멕복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모를 땐 그편이 차라리 낫다.
벌떡.
수호가 일어섰다.
“이상한 게 맞았어. 가자.”
“어, 어딜 가십니까? 괜히 나갔다가는 백작님께 경을 칠 수도…….”
“싫으면 거기 있던가.”
단, 도망치면 알지?
스산한 눈빛을 던진 수호가 접객실 문을 열고 나갔다.
“하아- 내가 어쩌다가…….”
멕복이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뒤따랐다.
* * *
수호는 감각이 이끄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손님이 함부로 돌아다니는 데 제지하는 사람이 없다.
‘역시 뭔가 일이 터졌어.’
얼마 지나지 않아 수호는 직감했다.
저택에 이변이 생겼음을.
직감은 머잖아 확신으로 변했다.
‘피다.’
바닥에 선혈이 흩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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