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ocalipse 12
“허나, 그것만이 유일한 사실이다!”
군중이 나의 말에 몰입한다.
저절로 그려지는 자신들의 경험에 이입하여 더 쉽게 젖어들고, 더 쉽게 동감한다.
“과정따윈 중요하지 않다. 한마음으로 결국 뭉친 나의 자식들아, 나의 아들, 딸들아! 여태까지 잘 버텼도다!”
난 고척돔을 손가락으로 내리찍으며 가리켰다.
격앙된 나의 어조를 따라 그들의 고개와 어깨가 들썩이는 것이 느껴졌다.
“이곳에 바로 지금! 무너진 세계의 영광스런 첫 공동체가 탄생한다! 이것만이 유일한 진실이다!”
아아아아―
난 두 팔을 벌리고 더 크게 목소리를 높혔다.
그들의 귀가 아닌 가슴에 소리쳤다.
“눈을 감았다 뜨거라, 나의 자식들아! 그대들이 목도하는 오롯한 시작을 경배하라!”
시스템 메시지의 YES를 누르며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그 이름은 한마음 구원교리라!”
와아아아아아아―!
열광하는 신도들과 나에게 빛이 내려왔다.
[구로구 마지막 특별 거점 ‘광장’에 진입하셨습니다.]
[‘광장’의 테마는 ‘거울 법정’입니다.]
특별 거점에 진입한 각성자는 시스템이 의도한 위치에서 시작한다.
그게 여태껏 특별 거점을 시작할 적의 진리였다.
그렇다면, 이것이 시스템이 의도한 위치라는 건가?
그 무엇도 변하지 않았다.
반듯한 질서를 유지한 채로 나를 올려다보는 신도들.
그들 또한 자신들의 몸을 두드리며 갑작스러운 이상현상에 놀라고 있었다.
고척돔보다 높지는 않지만, 신도들보다 확실히 위에 자리잡은 단상.
그 단상에 서게 된 나는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원인도 파악하지 못하고 멀뚱멀뚱히 나를 응시하는 신도들.
그런 신도들이 갑자기 입을 막으며 한 곳을 보며 경악했다.
키이이잉―!
예열시킨 마나가 용솟음치며 전신에 백광을 토했다.
신도들의 시선을 따라간 나 또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경악했다.
“서프라이즈 마더 퍼커!”
방정맞은 목소리와 구린 영어 발음.
아포칼립스가 터지기 전에 자주 입던 트레이닝복을 입은 ‘내’가 나를 보며 웃었다.
키이이이잉―!
고민할 시간도 사치였다.
작게 울리는 가동음과 함께 곧바로 오른손에서 출발한 내 염력이 녀석의 목덜미를 물었다.
고통도 느낄 시간도 없이 그대로 뜯어낼 작정이었다.
허나, 녀석의 목을 물어뜯던 하얀 마나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마치 서주원과 비슷한 현상에 놀라고 있던 나를 보며 놈이 위를 응시했다.
“홀리 쉣트! 저 씹쌔기가 능력을 쓰는데? 이거 신성한 법정에서 이래도 돼?”
[인정합니다. 한 번 더 능력을 사용할 시엔 제재하도록 하겠습니다.]
뭐? 법정?
난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한번 전체적인 풍경을 살폈다.
천 여명을 수용할 만큼 드넓은 광장.
그 광장의 중앙에 우뚝 솟은 두 개의 단상.
그 단상에 올라와 있는 나와 또 다른 ‘나’.
시스템이 언급한 테마 ‘거울 법정’.
시스템이 준비한 것은 개미떼같은 좀비 군체도.
능력을 제한하는 극한의 상황도 아니었다.
여태껏 놈이 언급했던 모든 것들이 파노라마처럼 길게 이어졌다.
도시와 나의 테마는 ‘신앙’.
놈은 꾸준하게 나에게 시련과 고뇌를 강요했다.
성자는 시련과 고난 위에 세워진다.
그렇다면 성자의 시련과 고난은 뭘까?
예수의 광야의 유혹을 모티브로 한 특별 거점을 생성한 것처럼.
이번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놈이 모티브를 얻었을 가톨릭에서는 성인을 어떻게 추대할까?
보통의 사람들은, 기적이나 남들을 많이 도운 자들이 성인이 된다고 말한다.
허나, 이는 반만 맞았고 반은 틀렸다.
성인은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성인이란 수많은 복잡한 심사와 절차 끝에 탄생한다.
그 중에 지금 놈이 흉내내고 싶어하는 절차를 깨달았다.
그 절차에 또 다른 ‘나’가 어떤 역할을 하게 될 것인지도.
[한구원은 발언하세요.]
시스템의 말이 끝나자 놈이 자신 앞에 놓인 마이크를 부여잡았다.
악마의 대변인.
가톨릭에서 성인을 추대하는 과정에 그릇된 추대를 막기 위해 시성 청원인들의 반대편에 서서 시성을 가로막는 직책.
숨을 크게 들이쉰 한구원이 토하듯이 거친 외침을 내뱉었다.
“아아아아아! 씨발 섹스하고 싶다아아아아!”
거대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놈은 바로 앞에 자리잡은 신도들을 가리키며 더 목소리를 높혔다.
“이 씨발 새끼들아! 너네들은 서주원 같은 놈들을 만났으면 그대로 인벤토리 안의 대갈통 1, 2, 3이 됐을 새끼들이 어디서 씨발 선택을 하고 있어?! 엉! 뒤질래?!”
기나긴 욕설 덕분에 막힌 숨을 들이킨 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짐승들을 거둬들여서 인간처럼 먹여주고 재워줬으면 씨발 고마운 줄 알아야지. 밥줘라 지랄, 무섭다 지랄, 증거 보여달라 지랄. 이 씨발! 진짜 내 염력으로 오체 분시쇼라도 보여줘야 믿을래? 어어어어!”
쥐 죽은 듯 내려앉은 광장에 한구원의 목소리만이 울려퍼졌다.
“씨발 파리 목숨 새끼들아! 아직도 현실을 파악하지 못했냐? 니들은 그렇게 대단하고 소중한 놈들이 아니야, 이 새끼들아! 내가 인생의 진리를 말해줄테니까 잘 들어라! 씨발 이것만 깨달으면 반은 간다! 오케이?”
놈이 마이크를 가까이대고 마지막 말을 소리쳤다.
“구해줬으면 얌전히 남자들은 노동력을 바치고 여자들은 처녀를 바쳐라아아아!”
사람들은 너무 놀라면 입만 벌려지고 아무런 소리도 내뱉지 않는다.
지금 내 신도들이 딱 그러했다.
놈은 지치지도 않는지 또 마이크를 잡고 속삭였다.
“추신! 피 에스! 어디서 놀고 먹다가 처녀가 아닌 계집들은 항문 처녀라도 바쳐라. 이상!”
한구원의 발언이 끝났다.
그의 말에 딱히 부정할 구간을 찾지 못했다.
묘한 시원함까지 느껴졌다.
만약 나에게 진실의 성검이라도 있었다면 끊임없이 모두 진실이라고 답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가까스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후아~!”
한구원이 후련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더니 나를 보았다.
환한 미소와 함께 따봉을 날렸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지 못한 유일한 부분인 오른쪽 눈썹이 지진이라도 난 듯이 꿈틀거렸다.
[사이비 교주 발언하세요.]
“……하!”
시스템의 말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제서야 모든 벽화가 겹쳐서 하나로 빛났다.
막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눈은 이중적인 의미였구나.
시스템이기도 하지만, 지금 내 앞에서.
내 발언을 기다리는 수 천개의 신도들의 눈이 내게 보였다.
그런 그들에게 난 내 심장.
하…….
진심(眞心)을 꺼내 보였다.
시스템이 준비한 나의 최대의 고난과 시련.
그 앞에 선 내게 시스템이 다시 선언했다.
[사이비 교주 발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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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8 사이비들의
사이비들의 ― 서울특별시 구로구 특별거점 ‘광장’
[사이비 교주 발언하세요.]
작은 웃음과 함께 위를 응시했다.
놈은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 거지?
내가 정말로 성자라도 되기를 바라는 건가?
여태껏 내가 했던 모든 행동들을 검증받고 증명해서.
진실로 존경받는 위인이라도 되라는 건가?
아니면 여태껏 내가 저지른 죄악들을 모두 신도들 앞에서 고백하고.
또 뉘우쳐서 더러워진 육신이라도 씻으란 건가?
그렇게 깨끗해진 순백의 육체로 다시 태어나서.
말 그대로 신이라도 돼보라는 거냐?
한구원이 아포칼립스가 터지기 전에도 유일하게 내세울 수 있었던 장점.
난 나를 알고 있다.
어떠한 과장과 망상 없이 거울 앞에 선 나를 알고 있다.
‘난 신이 아니다.’
난 단지 ‘사이비 교주’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던 내가 정상에 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놈이 제안했고, 내가 원했던 욕망.
그 욕망에는 어떠한 성스러움도 고결함도 없다.
헌신도 순수도 정결도 없다.
오직 끈적하고 음습한 바램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렇기에 난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도 이질적이다.
놈은 성자를 증명하는 자리에 나를 앉혔고.
놈은 그곳에서 나를 ‘사이비 교주’라 불렀다.
그리고 반대편에서 나를 부정해야 할 존재로 ‘나’를 세웠다.
모순(矛盾).
거울이라는 법정 앞에 섰지만.
모든 것이 올바르게 비치지 않는 모순의 광장.
광장의 하늘 위.
잘게 부서지는 찬란한 햇빛을 보며 첫날을 떠올렸다.
당연했던 햇빛이 당연하지 않았던 그날부터 오늘까지.
답지 않게 지난날을 반추하며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았다.
눈을 뜨고 각성한 뒤부터 지금까지의 나의 이야기는.
내가 가진 열 개 중에 하나를 나눠주는 일의 연속이었다.
그것이 안전이든, 식량이든, 마음이든.
종류는 별로 상관 없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말 그대로 ‘대재앙’을 직면한 이들에게는.
내가 베푼 작은 집이 유일한 쉼터였고.
내가 베푼 작은 빵이 유일한 배부름이었고.
내가 베푼 작은 한마디가 유일한 위안이었다.
내가 적선한 ‘하루’를 건네받은 이들은 모두가 감동하며 눈물을 흘렸다.
기꺼이 나를 찬양하고 경배하며 고개를 숙였다.
덕분에 난 아주 편하게 절대로 고개 숙이지 않을 자들을 색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모조리 죽였다.
좀비, 변종, 정액술사, 김중사 패거리, 서주원.
여태껏 나를 만난 이들은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해야했다.
복종하거나, 죽거나.
태양을 바라보던 고개를 내리고 오른쪽으로 돌렸다.
반대편 단상에 서있는 ‘한구원’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으로 만난 베풀지도, 죽이지도 못하는 상대.
더군다나 저놈은 ‘나’에 관한 전부를 다 알고 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는 말이 야속해지는 순간이었다.
내게도 클리셰처럼 스스로를 이겨야하는 순간이 도래했다.
그것이 시스템이 생각하는 성자로서 맞이하게 되는 최대의 고난과 시련.
기나긴 감상에 젖어있었지만, 생각해보면 별 달라진 것은 없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기면 되는 것이다.
난 ‘사이비 교주’로서 놈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놈은 우리들의 마음 속에 자라나는 뱀이다.”
“에이~ 너무 식상하다.”
비아냥거리는 놈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신도들만을 바라봤다.
“드넓은 빛에도 반드시 어둠이 있기 마련이다. 오히려 밝은 빛이기에 어둠은 더욱 짙게 물든다. 동요하지 마라, 나의 자식들아.”
충격에 물들었던 신도들이 다시 양손을 붙잡았다.
“그대들을 끊임없이 괴롭힐 뱀과 마주하라.”
“얼씨구~ 목소리 깐 거 보소. 뱀과 매쥬해래~”
조롱의 의미로 목소리를 잔뜩 내린 놈을 보며 다시 말했다.
“명심하라. 저것은 뱀이다.”
파아아앗―!
내 마지막 말이 끝나고 하늘에서 빛이 내려왔다.
두 개의 단상 중앙에 꽂힌 빛이 하나의 모양을 형성했다.
양팔 저울이었다.
내 쪽으로 급격히 기울어져 있는 저울 위로 전광판처럼 숫자가 출력됐다.
[ 50 : 950 ]
직관적인 구성에 별도의 설명이 없어도 알 수 있었다.
법정이 끝나는 순간 저울이 기울어져 있는 쪽이 승리하겠지.
말 그대로 현대의 법정이네.
천 명의 배심원단 앞에 선 ‘한구원’들.
나는 천천히 내 신도들을 주시했다.
저울 앞에 쓰인 ‘50’이라는 숫자.
아직 950 명의 신도들을 확보하고 있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재판은 이제 시작이었고, 난 벌써 50명의 지지자를 잃었다.
내 진심이 밖으로 튀어나온 탓에.
정말로 오랜만에 예상치 못한 변수로 신도들의 믿음이 흔들린다.
[첫 번째 물음.]
시스템이 개정을 선언했다.
[당신은 누구인가?]
시스템의 말이 끝나자마자 한구원이 마이크를 잡았다.
“나는.”
손가락으로 ‘사이비 교주’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나는 세상이 멸망하길 바랬다. 별로 대단한 이유는 아니었다. 그냥 내가 만족스럽지 못한 삶을 사니까. 노력없이 무언가를 얻길 바랬고. 조금만 힘들어도 사회를 탓하고, 누군가를 탓하며 포기하는 패배주의자다.”
담담하게 말을 이어가는 놈 앞에 컴퓨터가 생겼다.
놈은 아주 자연스럽게 마우스를 이리저리 만지면서 말을 이었다.
“유일하게 잘하던 건 오직 게임 뿐. 그렇다고 프로게이머가 될 정도로 실력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남들이 재미로 하는 게임을 목숨처럼 여기며 놓지 않는 찌질이.”
태연한 표정으로 들으려 했지만, 아주 조금은 힘들었다.
내가 가졌던 생각을 내 목소리로 내 얼굴이 내뱉는 걸 보는 것은 상당히 짜증나는 경험이었다.
“매일 기도하던 멸망이 이루어졌다. 난 악에 바쳐 좀비를 죽였고 마지막 기회에 발버둥쳤다. 그러면서도 세상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을까 노심초사하며 보다 완벽한 놀이터를 갈망했다.”
[ 70 : 930 ]
“그 놀이터에서 난 여자를 강간했고, 짜증나는 놈은 죽였다. 마치 학습된 것처럼 강박적으로 그것이 진리라 믿고 행하였다. 그것이 너희들이 믿던 나 한구원의 본질이다.”
놈이 내 앞에 놓여있는 마이크를 가리키며 미소지었다.
자신의 발언이 끝났다는 뜻이었다.
[ 80 : 920 ]
난 계속해서 줄어드는 신도 수를 보며 마이크를 잡았다.
“지나온 궤적이 모든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예수는 목공이었고, 부처는 왕자였다. 허나 그들은 과거와 완벽히 다른 존재들로 끝맺었다.”
과거로 인간의 모든 것을 결정할 수는 없었다.
난 그것을 신도들에게 어필하려 했다.
“푸르고 울창한 숲의 초입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진실된 풍경이 있다. 그 아름답고 성숙한 풍경은 정상에 오르고 나서야, 끝에 도달해서야 보게 된다. 흔들리지 말거라, 나의 자식들아. 그대들은 지금 나와 함께 정상에 서있도다.”
[ 70 : 930 ]
“뱀의 속삭임에 속지 말거라, 나의 자식들아. 너희들이 지금껏 바라본 나를 믿어라. 스스로를 믿지 않으면, 누구를 믿겠느냐?”
[ 50 : 950 ]
“씨발 아주 그냥 지랄을 하는구나.”
놈이 다시 돌아온 숫자를 보며 비아냥거렸다.
“새끼가 말 하나하나가 전부 애매모호한 거 봐라. 아주 그냥 사이비 교주 다됐네. 기특하다!”
난 놈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신도들만을 보았다.
은은하게 미소 지으며 동요하는 신도들을 다독였다.
[두 번째 물음.]
그런 우리에게 두 번째 물음이 내려왔다.
[그대들의 구원은 선의로 이루어졌는가.]
또 다시 한구원이 마이크를 잡았다.
“절대 그렇지 않다. 나에게 구원은 수단이었지, 절대로 본질이 될 수 없다. 인간은 철저하게 사회적인 동물이다. 나 또한 그렇다. 난 홀로 남은 왕국에서 섬기는 자가 없는 왕이 되기는 싫었다. 자연스럽게…”
한구원이 백색 옷을 입은 신도들을 가리켰다.
“내 자존감과 위대함을 일깨워 줄 아랫 놈들이 필요했을 뿐이다. 아! 물론 성욕도 아주 기분 좋게 해소하고. 기억해라, 나에게 구원은 철저한 부산물이었다.”
[ 150 : 850 ]
“그래! 그냥 생각만 바꾸면 된다니깐! 저놈이 저렇게 눈 시퍼렇게 뜨고 있어도 자기가 어떻게 알아? 얼굴에 믿음이 흔들렸다고 적혀있는 것도 아닌데! 의심해! 더 의심해!”
급격하게 내게 기울었던 저울이 조금 위로 올라갔다.
나 또한 다시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선의가 반드시 좋은 결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선의가 끔찍한 일을 초래한 것을 그대들은 많이 봐왔을 것이다.”
착하다는 것은 결코 유능하다는 것이 아니다.
그대들은 결국 살아남았고, 이렇게 그 자리에 서있다.
“상상해보거라. 내가 없었다면 맞이할 순간들을. 거꾸로 생각하거라. 좋은 결과가 있었다면 또한 그 과정에 문제가 없었다면 그것은 선의라 말해도 틀리지 않다.”
[‘사이비 교주’는 배심원단을 협박했습니다. 제재를 가하겠습니다.]
[책정 기준을 ‘한구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재조정합니다.]
[ 200 : 800 ]
“선생님!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하다 하셨는데, 지금 보면 과정도 꽤 중요한 것 같네요, 그죠?”
난 놈의 비아냥을 무시하며 고개를 하늘로 치켜들었다.
제재?
그러니까, 여태껏 내가 너희들을 먹여 살렸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는 것도 협박이라는 건가?
[세 번째 질문.]
시스템은 내 시선에도 아랑곳않고 세 번째 주제를 제시했다.
[그대들은 교주로서 만인 앞에 떳떳한가?]
우려하던 주제가 튀어나왔다.
바로 물 만난 물고기처럼 마이크를 잡는 한구원을 일별하곤 하늘을 보고 입을 열었다.
“혹시 거부권도 존재하나?”
[검증을 건너 뛰는 대신 200명의 배심원단이 등을 돌립니다. 괜찮으십니까?]
“…그렇게 하지.”
[ 400 : 600 ]
어느덧 눈대중으로 보면 평평한 저울이 완성됐다.
“아 왜! 뭐 많이 찔리는 거라도 있나봐? 응?”
놈이 손가락을 말아 동그랗게 만든 뒤에 검지를 왕복으로 쑤셔박았다.
이지우나 다른 여성들은 괜찮았지만, 성가을이 문제였다.
성가을을 내 사람으로 만든 방법은…
입으로 꺼내게 된다면 상당히 음습하고 질척거렸다.
놈이 그걸 입밖으로 내뱉는 순간 상황은 걷잡을 수 없어진다.
패배가 너무나도 확실한 주제를 건너 뛴 것일 뿐이다.
그대로 저 새끼가 입을 열었으면, 그 이후의 주제에도 타격이 간다.
계속해서 혀를 할짝이며 나를 도발하는 놈을 무표정으로 응시했다.
가혹했다.
룰을 정확히 표기하지 않는 시스템과 나에게 압도적으로 불리한 환경.
거기다가 지금까지의 기반을 모조리 무시한 제로 베이스 강요.
난 지금도 배심원단이라는 내 신도들이 어떤 방식으로 저울을 옮겨가는지 모르겠다.
말 그대로 시스템이 바랬던 진실된 고난과 시련이었다.
그래도.
아직은 내가 우위에 있었다.
내가 쌓은 믿음은 그렇게 간단히 흔들리지 않는다.
[마지막 질문.]
[그대들은 구원을 바라는 자들은 모두 구했는가.]
아까 거부권을 행사한 탓인지, 한구원이 더 득달같이 마이크를 잡았다.
“아니! 전혀! 구원교의 신도들아, 들어라! 너희의 위대하신 교주가 내리는 구원은 완벽하지 않다. 기준도 그날의 기분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한가지 재밌는 예를 말해주지. 백화점에서 자신을 살려달라고 빌던 놈이 있었다. 무려 각성자였지. 그런데 나는 그놈을 그냥 죽여버렸다. 왜?”
나는 가까스로 평온한 표정을 유지했다.
내가 흔들리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난다.
“그놈이 남자였거든! 그것도 남자 각성자! 능력도 존나 더럽지만 그래도 쓸만은 한 놈! 아직 기반을 완전히 닦지도 않았는데, 남자 부하? 이건 절대로 죽여야지! 내가 따먹어야 할 여자들을 따먹으면 어떡해? 이건 무조건 뒤져야지! 그러니까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 500 : 500 ]
“그냥 남자라서 죽인거야.”
[ 600 : 400 ]
저울이 한구원에게로 기울었다.
자신에게 기운 저울을 보며 놈이 과하게 허리를 굽히며 내게 감사를 표했다.
난 마이크를 잡고 잠시 눈을 감았다.
기억에도 흐릿한 일을 아주 잘도 끄집어내서 말하는 구나.
구원.
한마음 구원교를 대표하는 단어였다.
그런 구원이 나 자신의 입에서 부정당했다.
철저히 수호해야할 이념을 내 자신이 짓밟았다.
이건 뭐라 반박을 해야 했지만, 이 순간을 뒤집을 만한 말은 생각나지 않았다.
마치 나체로 신도들 앞에 서있는 것 같았다.
[사이비 교주 발언하세요.]
“…….”
침묵을 지키는 내게 시스템이 재촉했다.
[사이비 교주 발언하세요.]
난 마이크를 쥐고는 수 차례 입을 열고 닫았다.
사실이 아니라 해야 하나?
아니다. 신도들은 바보가 아니다.
저 한구원 또한 나라는 것을 누구보다 깊게 깨달은 자들이다.
그렇다고…
[말을 조금 더 정리하겠단 의도로 파악하겠습니다. 아직 마지막 자유 발언이 남아있습니다.]
시스템의 말에 마이크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이번 주제 또한 내게 너무 치명적인 주제였다.
아니, 애초에 그런 주제들만 선정했겠지.
“아~ 표정이 너무 안 좋네. 왜? 왜? 왜? 봐줄까?”
놈이 마이크를 들고 중앙에 섰다.
[한구원. 마지막으로 자신들의 신도들에게 발언하세요.]
그래, 마지막 발언이 있다 이거지?
난 마이크를 입에 가져다대는 놈을 보면서도 계속해서 생각을 이어갔다.
내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을 강구했다.
“너희들은 세뇌당했다. 군중으로서 세뇌당했지. 개개인으로서 아무리 똑똑하고 교육받았다해도 그건 아무런 상관이 없어. 개인과 군중은 철저히 다르기 때문이지. 뭐, 이렇게 말하면 잘 안 와닿지? 그럼 개개인부터 말해볼까?”
내가 저런 말도 할 수 있었나?
게임만 할 적의 나는 저런 생각조차 안 했는데.
난 헛웃음을 터트리며 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놈은 신도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의존성 인격장애, 학습적 무기력, 혹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괴로워 할 수도 있겠지. 너희들은 대단한데 세상이 그걸 인정하지 않는거야. 그럼 뭐겠어? 세상이 잘못 됐다고 생각하겠지. 지금도 딱 맞네. 세상이 미쳐 돌아가잖아? 그게 너희 잘못은 아니지.”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는 의존하고픈 마음, 계속해서 몸을 지배하는 무기력증, 현실은 시궁창인데 꿈만 높은 상태. 그 모든 것들을, 그 가려운 부분을 잘 긁어준 것이 누구냐? 그 염원의 결과물이 무엇이냐?”
놈은 자신을 가리키며 웃었다.
“그게 바로 나였던 거야.”
놈은 마치 선생님처럼 조목조목 사실을 열거했다.
“일단 뭉치고 뭉쳐서 구원교라 불린 너희들에게 난 공통된 이념을 심어줬지.”
구원 그리고 기도.
“그리고 공통된 적을 만들어줬어.”
좀비.
“너 혼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고 확연히 느낄 수 있게 옆에 수 많은 신도들도 만들어줬지?”
신도들이 고개를 돌리며 서로를 확인한다.
그들의 눈이 멀리서도 잘 보일 정도로 크게 흔들렸다.
“알아. 알아. 나도 다 알아. 그래도 믿고 싶지? 원래 사람이라는 게 그래. 특히 여자들이 더 심한데. 한번 무리에 들어가면 거기서 배척받는걸 상당히 싫어해. 나도 다 알아. 그래도 인간이라면 은혜를 아는데 교주님 믿어보고 싶지?”
놈이 신도들을 구슬린다.
“그러니까 의심해야지. ‘믿는다’의 반댓말이 ‘의심한다’인가? ‘안믿는다’잖아. 믿어. 믿는데 의심은 하라고.”
끼리릭―!
굳이 쳐다보지 않아도 급격히 기울어지는 저울의 방향.
“특히 너희들도 다 들었잖아. 뭔가 좀 너희가 상상했던 그런 모습이 아니지? 뭔가 좀 석연찮잖아? 근데 그거 알아?”
놈이 마지막 말을 내뱉고는 그대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잡으면, 그래도 결국 지푸라기다?”
쿵―!
완전히 무게추가 기우는 소리.
난 의식적으로 저울을 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중앙으로 향했다.
그럼에도 실실 웃으며 나를 보는 놈의 얼굴을 무시할 순 없었다.
“발언하는데 시간 제한 같은 것도 있나?”
[없습니다.]
“그럼 의자라도 만들어 앉아. 좀 긴 얘기가 될 것 같으니까.”
“어이쿠~ 교주님 화났다. 개빡쳤다아아~”
끝까지 성질을 돋구는 놈을 무시하고 중앙에 섰다.
내가 구하고, 모으고, 여태까지 이끈 나의 신도들.
허나, 지금은 나를 의심하는 선고의 배심원단.
‘…길었네.’
성역을 호기롭게 떠난지 어언 한달 하고도 조금 더.
난 아까부터 계속해서 광장을 적시는 햇빛을 머금으며 눈을 감았다.
서주원을 죽이고, 사람들을 구하고.
구원의 문을 열고, 또 사람들을 구하고.
특별 거점을 해결하고, 또 사람들을 구하고.
벽화, 보석, 시스템의 메시지 그리고 지금의 이 광장.
놈의 목적이 이제야 뚜렷히 보인다.
또 다른 나와 치명적인 질문들.
그리고 나의 마음을 초조하게 만들 시각적 요소인 저울까지.
놈은 내게 진심을 요구하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기만(欺瞞)을 요하는 직업을 가진 나에게.
사이비 교주에게.
그래, 해주마.
네가 바랬던 심장을.
수 천개의 눈 앞에서 말해주마.
끝이 어떻게 되든지, 이제 결판이 나겠지.
천천히 눈을 뜬 나는 마이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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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9 낙원
낙원 ― 서울특별시 구로구 특별거점 ‘광장’
사이비 교주는 믿음이 흔들린 신도들 앞에 섰다.
그는 방금 전까지 이어진 파상공세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데자뷰가 느껴지는군.”
불과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건만 많은 것이 달라졌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 마이크를 잡으니 저명한 학자나 유명인사가 된 것 같아서 조금 떨리는 구나.”
믿음이 아닌 의심의 눈이 자신을 향한다.
“덕분에 방금 전에도 나답지 않게 말을 조금 짧게 했지. 그게 오히려 그대들에게는 좋았을지도 모르겠군.”
그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할 말은 그대들을 흔들었던 말에 대한 반박도 죄의 고백도 아니다.”
“난 단지 ‘우리’에 관해 말하겠다.”
그는 자신과 신도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까지의 우리의 여정은 ‘초인’이 되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그의 담담한 목소리가 광장을 울렸다.
“다시 말하지.”
“마치 기나긴 꿈에서 깬 것처럼 내가 나라는 걸 어렴풋이 기억하던 나날부터 지금까지.”
당신이 당신임을 깨달은 날부터 지금까지.
“우리들의 인생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단 한번도 그렇지 않은 적이 없었다.
“초인, 백마를 탄 초인, 철인, 위버멘쉬, 초월자, 각성자 등등.”
시간이 흐를수록 쌓여가는 더 나은 이를 칭하는 명칭들.
그는 단어들을 하나하나 곱씹듯이 음미한 뒤에 신도들을 보며 가볍게 물었다.
“그대들은 언제 어른이 됐다고 생각했나?”
그는 신도들에게 말했다.
나는.
“날도 좋고 기분도 좋은데 뛰지 않고 걸을 때 어른이 됐다고 느꼈다.”
나는.
“새벽 늦게까지 술을 마시는데 부모님이 연락하지 않는다는 걸 문득 깨달았을 때 어른이 됐다고 느꼈다.”
나는.
“길에서 우연히 보고 너무 반가워서 사먹은 피카츄 꼬치가 하나도 맛있지 않았을 때 어른이 됐다고 느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각의 과정.
“이렇듯 과거에 쥐었던 무언가를 잃고 나서야 우리는 어른이 됐다.”
그제서야 우리를 바라보는 누군가는 철이 들었다고 말한다.
철이 들었다라.
그들이 말하는 더 성숙한 자들이 되는 과정을, 어른이 되기 위한 과정을 지난 이들은 깨닫는다.
“더 나은 사람이,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은 원하는 것을 품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떼어내는 과정이었다.”
“우리는 부모에게 해야 할 일과 하면 안 되는 일을 배웠고.”
“학교에 들어가 정답과 오답을 배웠고.”
“직장에서 돈이 되는 일과 안 되는 일을 배웠다.”
“반복한다.”
“여지껏 그대들의 여정은 세상이 원하는 더 나은 자가 되기 위한 발악이었다.”
그는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했던 행동들이 세뇌라면 방금 말한 과정 또한 넓게 보면 하나의 세뇌가 아닌가?”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뒤에 있던 한구원을 돌아봤다.
“그렇기에 난 저자가 말했던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접근에 감탄했다. 진실로 감탄하며 찬사를 보낸다.”
짝― 짝― 짝―
적막속에 울리는 우레와 같은 박수.
한구원의 표정이 처음으로 천천히 굳어갔다.
의존성 인격장애, 학습적 무기력 등등 사람의 감정을 어려운 말로 명명한 수많은 단어들.
그는 한구원을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혔다.
“더 많이 배운 자들과 더 많이 가진 자들은 항상 논리와 증거를 원한다. 왜 그런지 아는가?”
“그들이 그것들을 더 많이 가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항상 우리를 명명하고 규정하고 분별했다. 그렇게 스스로를 증명했다.”
“그것으로 자신들이 더 나은 존재라는 걸 증명했다.”
“그들이 명명한 법칙과 규칙에 동감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저 그들이 만든 틀에 우리를 맞춰 끼웠다.”
그는 다시금 자신과 신도들을 손짓했다.
“우리는 그것에 감히 반박할 수 없다.”
“의존성 인격장애를 반박하려면 정신의학과 심리학을 알아야 한다. 정치인을 비판하려면 정치를 알아야하고. 정의를 논하려면 법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려면,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결국 남들보다 더 나은 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저명한 박사나 권위자가 되면 끝나는 문제인가?”
“아니다. 그들도 전공분야가 아니면 일반인일 뿐이다.”
“인간이 글자를 깨우치고 기록을 하던 시절부터 이어진 방대한 지식들은 한 인간이 깨닫기엔 너무나도 아득하다.”
“결국 더 나은 자가 되기 위한 노력의 끝은 스스로가 정해야한다. 하지만 숨을 헐떡이며 앞을 응시하는 그대들에게 보이는 것은.”
부자, 지성인, 미인.
“아직도 아득히 많은 자신보다 더 나은 자들.”
“어떻게 하겠나? 뛰어야겠지. 조금 더 앞에서 달리기 위해 숨이 멎을 만큼 뛰어야겠지.”
끝이 보이지 않은 기나긴 고행.
그는 소리쳤다.
마이크를 꽉 쥐고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그대들의 일생이, 일년이, 하루가!"
"아니!”
“그대들의 일분 일초가!”
“남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담금질이었다!”
“그렇기에 난 그대들에게 묻는다!”
“진정으로 행복했는가!”
웃음을 잃고, 밝은 햇살과 산뜻한 바람에 마음이 들뜨지 않고.
더 많은 돈과 더 밝은 미래를 고뇌하던 나날들.
“남들이 그런 것처럼 사회의 톱니바퀴가 되어 무채색으로 돌아가는 인생은 행복했는가!”
그가 물었다.
“남들과 성적으로 싸우고, 재력으로 싸우고, 더 아름다운 배우자로 싸우고! 자신이 남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는 걸 증명해나가는 나날이!”
그대들은 행복했는가?
마치 세상도 어른이 되어가는 것처럼 불필요하다 생각한 것들을 떼어냈다.
행복을 잃어버린 지금.
“우린 또 무엇을 잃었는가! 이제 선한 자가 손가락질 받는 세상이 왔다! 좋은 일을 하는 자에게 바보같다고 멸시하는 세상이 왔다!”
세상이 인정한 더 나은 자들이 쌓아온 인식들.
“모든 것을 다 깨달은 척하며 인간은 이기적이다, 인간은 불안정하다 하지마라!”
세상의 틀이.
“초인만을 갈구하는 그 틀이 선한 자들에게는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대들은 피해자들이다.
세상이 만들어낸 규칙에 휩쓸린 피해자들.
“더는 자신보다 더 많이 가진 자들 때문에 자신을 상처입히지 마라!”
그는 신도들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몰입해라 그리고 동감해라.
“더는 남이 만든 틀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신을 학대하지 마라!”
좋은 대학에 들어가지 못해 고개 숙이던 나날을.
좋은 직장을 다니지 못해 자존심 상하던 나날을.
SNS나 영상 매체를 보며 허탈함과 질투심에 입술을 깨물던 나날을.
그대들의 인생에 빠질 수 없었던 나날을 떠올려라!
“짙은 어둠 속 작은 불빛에 의지한 밤. 좀비들의 울음소리만이 아득하게 울리던 밤. 너희들은 그곳에서 나의 말을 들었다!”
백색의 둥근 원.
그곳에서 서로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받던 나날들.
잃어버렸던 평온과 행복을 되찾은 나날들.
그곳에서 그는 그대들에게 말했다.
“남보다 앞서는 것만이 행복이 아니다!”
“남과 싸우고 이기적으로 구는 것이 행복이 아니다!”
“원래의 세상이 그대들에게 누누이 말하던 것이 행복이 아니다!”
그대들을 울고 힘들게 했던 나날은 행복하지 않았다.
그는 오른손에 주먹을 쥐고 위로 들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그대들이여, 뱀이여, 세상이여 들으라!”
사이비(似而非).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하지만 근본적으로 아주 다른 것.
“기존의 세상과 다르다고 우리를 매도한다면!”
그는 주먹을 아래로 내지르며 고함쳤다.
“이곳은 기꺼이 사이비들의 땅이다!”
그는 다시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나를 부정한다면!”
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크게 찔렀다.
“나는 기꺼이 사이비 교주가 되리라!”
그는 마이크를 던지고 목청껏 소리쳤다.
“무너진 세상에서 선한 자들의 법을 세우리라!”
“선한 자들의 나라를 세우리라!”
“일어서라! 고통에 신음하던 모든 자들아!”
일어서라.
“일어서라! 초인의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인간으로서 일어서라!”
되지 못하는 초인이 아닌 이미 온전한 인간으로 일어서라.
“그대들의 눈을 가리던 거짓을 벗어라! 두 눈을 크게 뜨고 뒤를 보아라!”
그의 손가락질에 모두가 뒤를 돌아봤다.
“모든 왕관의 뒤엔 단두대가 있다! 그러니 단두대가 없다면 새로운 왕관을 쓸 수 없다!”
그의 말이 울릴수록 빈 공터에 흐릿한 형체가 선명해진다.
점점 흔들림을 더해가는 신도들의 눈에 하나의 형체가 또렷해졌다.
“그대들의 삶을 되찾아라! 다시 그대들의 오롯한 삶을 돌려받아라!”
그곳에 단두대가 있었다.
그는 숨을 쉬지도 않고 빠르게 두드리듯이 소리쳤다.
“그대들의 손으로 그대들을 현혹했던 세뇌와 거짓을 죽여라! 그대들을 힘겹게 한 모든 거짓들에게 단죄하라! 바로 이 땅에서! 선이 구시대적 감상이 된 지금!”
신도의 눈에 햇빛을 머금은 칼날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무언가의 목이 잘리고 그 핏물이 범람했다.
“과거의 붉은 핏물이 새로운 땅에 스며들리라! 그곳에서 거대한 백색 나무가 태동하리라!”
신도들의 눈에 단두대로 보였던 무언가가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작은 새싹이 돋았다.
점점 새싹이 크기를 더해가며 땅을 울렸다.
드드드드―
마치 정말로 땅이 흔들리는 듯한 환청에 신도들이 모두 놀라 교주를 응시했다.
그는 두 팔을 벌리며 소리쳤다.
“온누리에 뻗칠 뿌리의 이름은 ‘행복’이며.”
드드드드―
넓게 뿌리를 퍼트린 나무가 자라난다.
“하늘 끝까지 닿을 나무의 이름은…!”
이윽고 검은막에 닿을만큼 자라난 나무를 보며 그가 속삭였다.
“…구원이리라.”
────.
지독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모두가 다시 두손을 맞잡았다.
두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고 유일한 진리를 되뇌었다.
구원(救援).
끼리리릭― 쿵―!
양팔 저울의 무게추가 한곳으로 기울었다.
[구로구 특별 거점 ‘광장’의 테마를 해결하셨습니다!]
[축하합니다! 각성자의 구로구 지배율이 100%에 도달하였습니다!]
고개를 치켜든 교주의 머리 위로 밝은 빛살이 솟구쳤다.
펑―! 펑―!
모두의 동공 속에서 밝게 빛나는 폭죽이 터지는 것과 동시에 광장이 천천히 녹아내렸다.
한구원이 사라지고 단두대와 백색의 나무도 사라졌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하늘을 수놓은 폭죽들만이 구로구를 유일하게 장식했다.
[그대의 시련과 고뇌 그리고 이야기에 축복을!]
[전 세계의 각성자들에게 알립니다! 대한민국 서울에 최초의 도시가 탄생합니다!]
펑―! 펑―!
계속해서 터지는 폭죽과 함께 메시지가 연이어 더 출력됐다.
[최초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최초 지배율 100% 달성’]
[보상으로 ‘신성’ 스탯이 해금됩니다!]
새로운 스탯을 알아볼 틈도 없이 내 몸에 빛의 기둥이 내리꽂혔다.
파아아앗―!
어느때보다 찬란한 빛을 토하는 몸이 서서히 부유했다.
천천히 구로구의 하늘로 솟구치는 내 앞에 두 개의 보석이 튀어나왔다.
인벤토리에 있던 ‘복사의 돌’과 ‘초록 보석’이었다.
‘초록 보석’이 강렬한 빛을 머금더니 어딘가로 비행했다.
지상에 도착한 보석이 원하던 위치를 찾았는지 환하게 빛나며 녹아내렸다.
밝게 흩어진 빛의 입자들이 익숙한 문을 만들어냈다.
그 웅장하고 거대한 문을 보며 미소지었다.
문득, 보석에 적혀있던 말이 기억났다.
[뇌리에 남았기에, 실현된다.]
구로구에서 펼쳤던 가장 인상적인 구원.
펑―! 펑―!
계속해서 터지는 폭죽과 함께 구로구를 감쌌던 검은막이 사라지고 있었다.
하늘을 장식하던 두 개의 존재가 밝은 입자가 되어 흩날렸다.
마치 흰 꽃잎처럼 지상으로 내려오는 빛의 입자와 구원의 문을 본 신도들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아니지. 이게 끝이 아니지.’
난 장난스런 미소로 푸른 보석, ‘복사의 돌’을 두드렸다.
이미 어떻게 사용할 지는 미리 생각을 해놓은 뒤였다.
내 손짓에 호응한 ‘복사의 돌’이 도시를 내려다보는 산봉우리에 도달했다.
그리고 밝게 빛나며 내가 원하는 물체로 복사됐다.
파아아앗―!
산봉우리에 놓여진 레벨 1의 ‘교주 석상’.
오랜만에 보는 구원교의 성물을 보곤 미소지었다.
그리고 아래를 보며 소리쳤다.
“보아라 그리고 기도하라!”
교주 석상을 향한 오른손에서 찬란한 빛줄기가 쏘아진다.
우우우웅―!
석상의 가슴에 닿은 빛줄기에 호응하듯이 교주 석상이 광채를 머금었다.
레벨 2, 3.
점점 더 거대해지던 교주 석상이 두 팔을 벌렸다.
성장을 끝낸 교주 석상이 거룩하고 성스러운 자태로 도시를 내려다봤다.
석상의 자애로운 머리에서부터 성스러운 보호막이 퍼졌다.
난 교주 석상과 똑같이 두 팔을 벌렸다.
두 손을 모으고 나를 응시하는 신도들을 보며 소리쳤다.
“구원의 빛은 언제나 그대들과 함께한다!”
아아아아―!
경탄과 울먹거림이 아우성치는 와중에 교주 석상의 중앙에 찬란한 보석이 자리잡았다.
[도시 권능 ‘은총’ 해금.]
파아아아앗―!
보석에서부터 퍼져나간 빛의 파동이 지상을 흩날리던 백색 꽃잎들과 어우러졌다.
서서히 도시 전체에 번지더니 밝게 빛났다.
현대식 아파트와 빌딩, 그리고 건물들이 변해갔다.
구로구가 종교적인 색채가 물씬 들어간 백색의 도시로 변모해갔다.
나의 테마.
그리고 도시의 테마.
‘신앙.’
나조차도 생경한 눈빛으로 도시를 감상하던 중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서울특별시 구로구의 지명이 삭제됩니다.]
“…교, 교주님!”
메시지를 닫기도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아아아아―! 교주니이이임!”
듣기만해도 간절한 외침을 내뱉는 이를 보며 자애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쿵―!
“아아아아아―!”
말을 잇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경탄하는 박영호 뒤로 보고싶었던 얼굴들이 걸어나왔다.
구원의 문을 타고 들어온 성역의 가족들.
그 중 성가을의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과거의 구로구라고는 믿기지 않을만큼 정갈하고 아름다운 구조의 도시.
자신들이 타고온 새로운 양방향의 구원의 문.
그리고 산봉우리 위에 자리잡은 거대한 교주의 석상.
띠링―!
[환영합니다. 이곳은 유일구원도시.]
그녀로서는 처음 보게된 상태 메시지에 몸을 움찔 떨었다.
깜짝 놀라 고개를 치켜든 그녀의 시선이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남자에게로 향했다.
그는 자신을 보며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아아아아―! 교주니이이임! 교주니이이임!”
“믿습니다! 믿습니다아아아!”
그의 아래 언제나처럼 그를 추종하는 신도들.
가볍게 잔웃음을 토해낸 그녀가 다시 그를 보며 미소로 화답했다.
다행히도 여전하구나, 너는.
[여러분들의 ‘낙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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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0 재정비 (1)
재정비 (1) ― 인천 영종도 앞바다
끼에에에에엑―!
좀비들의 하울링이 마치 승전보처럼 울렸다.
그 승전보를 전하는 상대는 아마…
“으으으! 물렸어! 씨발 좀비 새끼한테 물렸다고! 빠, 빨리 치료제를! 씨발 치료제 구매할 각성자 어딨어어! 끄, 끄으으윽!”
우리였다.
강산은 떨리는 눈으로 참혹한 현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도대체.
도대체 언제부터 잘못되고 있었던 거지?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우리는 승리의 연속이었다.
치열하고 또 격렬했지만, 우리들의 핏방울과 땀방울로 쓰던 단어는 분명 ‘승리’였다.
우리는 착실히 좀비들의 땅을 빼앗고 있었다.
아니, 놈들이 앗아간 우리의 땅을 되찾고 있었다.
허나, 혈투가 길어질수록 초조해지는 것은 오히려 우리였다.
우리는 식량이 필요했지만, 놈들은 식량이 필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잠을 자야했지만, 놈들은 오히려 짙은 어둠속에서 더 날뛰었다.
파도소리만이 울리는 수많은 영종도의 밤.
조용히 출렁거리는 배를 조준했던 수 많은 스테로이드들의 투척물들을 떠올렸다.
겨우 잠이 든 그들 앞에 떨어지는 좀비들.
우리는 단 한 순간도 마음을 놓고 휴식을 취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각성자가 아닌 자들이 사용할 총기의 탄약마저도 슬슬 바닥을 보였다.
포인트는 유한하고, 소비해야 할 곳은 무한했다.
이미 인근의 모든 백화점과 마트, 편의점에서 턴 식량들이 점점 줄어갈 때쯤, 그들은 생각했다.
피로스의 승리.
아무것도 얻지 못한 허울뿐인 승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오빠아아아―!”
자신을 부르짖는 소리.
강산은 서둘러 정신을 차리곤 주위를 둘러보았다.
탕―! 탕―! 탕―!
“씨이이이바아아알!”
“수류탄! 씨발 남는 수류탄 없어어어?!”
아직도 귓전엔 국제공항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전우들의 총소리가 울렸다.
“끼에에에엑―!”
그들을 덮치듯이 다가오는 좀비들의 파도.
강산은 다시금 몽롱해지는 정신을 일깨웠다.
휙휙― 고개를 여러번 돌리고는 자신을 불렀던 목소리를 쫓았다.
“오빠아아아―! 어딨어어어―!”
“바, 바다야아아아!”
그리 멀지 않은 통통배에서 자신을 애타게 부르던 강바다를 찾았다.
그는 빠르게 배와 배를 연결하는 판자들을 넘으며 그녀에게로 달렸다.
자신을 보고 마침내 안도하는 얼굴이 된 강바다 또한 눈물을 흘리며 두 팔을 벌렸다.
“바다야! 괜찮아?!”
“응! 어디 다치거나 물린 곳은 없지? 응? 어디 아픈 곳이라도 있어?”
힘껏 포옹한 강산의 어깨에서 강바다가 웅얼거렸다.
강산은 괜찮다는 뜻으로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잠시 눈을 감으며 그의 손길이 주던 온기를 만끽하던 강바다가 서둘러 눈을 떴다.
강산의 양 어깨를 부여잡고 그녀가 다급한 눈빛으로 말했다.
“빠, 빨리 도망가야 해! 작전은 실패야!”
작전.
강력한 각성자들을 믿고 감행한 최후의 돌격.
지지부진한 공성전이 아닌.
직선으로 뚫고 들어가 인천공항의 인프라와 안쪽에 잠들어있는 생필품들을 차지하고.
도리어 수성전을 펼치겠다는 과감한 작전은 실패했다.
“진우가 프로그들이 오고 있대! 그것도 엄청 많이!”
강산은 그제서야 강바다의 바지를 조심스럽게 잡고 있는 꼬마를 바라보았다.
강진우.
우연처럼, 운명처럼.
우리 남매와 성이 똑같은 각성자 꼬마.
여지껏 이어진 승리들과 정신나간 돌격을 가능성있는 작전으로 만들어준 일등공신.
좀비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꼬마의 존재는.
무력적으로만 치우쳐진 어머니의 무리를 보완하는 말 그대로 보배와 같은 아이였다.
그런 꼬마가 강산을 경계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진우야. 너도 무사했구나. 정말 다행이다.”
“…….”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의 말에 대답조차 하지 않는 꼬마가 야속했지만, 강산은 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이렇게 말이라도 들어주는 시늉을 하는 것도 양반이었다.
아마 자신이 바다의 오빠이기 때문에 가지는 특혜 아닌 특혜겠지.
갑자기 표정을 굳힌 강진우가 서둘러 강바다를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천천히 몸을 숙이는 그녀의 귓가에 무언가를 다급히 속삭였다.
저렇게, 강진우는 강바다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는다.
꼬마의 말을 고개를 끄덕이며 듣던 강바다의 표정이 점점 더 굳어갔다.
다시 일어서 급하게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그녀가 물었다.
“오, 오빠! 영감님은?”
“……아직 나도 뵙진 못했어.”
“이럴 때가 아니야! 스, 스테로이드들도 오고 있대!”
그녀의 말에 강산의 표정 또한 데칼코마니처럼 굳어갔다.
강바다의 짧은 한 문장에 이후의 상황이 저절로 그려졌다.
끝까지 안쪽에서 수성을 전담하던 놈들이 튀어나온다.
이왕 승기를 잡은 것, 오늘 말 그대로 끝을 보겠다는 의미인가?
“꼬, 꼬마잖아! 꼬마야! 너 포인트 남은 거 있니? 아저씨가, 아저씨가!”
강산이 뛰어왔던 통통배에서 절규하던 남자가 소리쳤다.
그가 강산이 뛰어온 경로 그대로 판자를 밟으며 남매에게 오고 있었다.
그가 부여잡은 팔을 뚫고 핏물이 주사기처럼 찍― 찍―거리며 분사했다.
‘감염.’
강산은 빠르게 강진우를 응시했다.
꼬마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곳에 그를 치료할 포인트를 가진 각성자는 없었다.
아마 지금쯤 각성자들은 최전방에 남겨진 이들을 대피시킨다고 여념이 없을 것이다.
탕―! 탕―!
강산은 아직도 총성이 울리는 국제공항을 눈짓했다.
그곳에서부터 꽤나 긴 거리에 자리잡은 ‘배들의 섬’.
기나긴 거리를 극복하며 오갈 수 있는 자들은 모두 각성자들 뿐이다.
“으으으으―! 씨, 씨발 정신이 흐려진다고! 사, 산아! 도와줘! 주, 죽이진 말고 도와줘어어어!”
삐걱거리며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감염자.
강산은 서둘러 바닥에 널부러진 긴 막대기를 부여잡고 강바다와 강진우를 뒤로 숨겼다.
‘사살이 아니라, 제압. 제압해야 한다.’
“아저씨! 일단 멈춰주세요, 정신 차리세요! 곧 각성자분들 중에 한 분이 오실 겁니다!”
입.
일단 입만 쇠막대기로 봉쇄한 뒤에 버티면 됀다.
강산은 같은 말을 계속해서 되뇌이며 상황을 시뮬레이션했다.
“끄, 끄으으윽―!”
다리를 질질 끌며 다가오던 남자의 몸이 뒤틀린다.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한 감염의 전조였다.
정상인의 신체로는 감히 흉내낼 수 없는 각도로 기괴하게 뒤틀리던 몸이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남자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마구 흔들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끼에에에에엑―!”
아주 짧은 시간 만에.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된다.
꿀꺽―
강산은 침으로 마른 목을 축이며 막대기를 쥔 손을 꼼지락거렸다.
‘아직, 아직, 아직….’
퉁― 퉁― 퉁―
통통배를 크게 울리는 발소리와 함께 달려드는 좀비를 주시했다.
“끼에에에―”
쾅―!
남매에게 달려들던 좀비에게 빛살이 내리찍었다.
누군가가 잔상이 남을 만큼 빠른 속도로 날아와 좀비의 등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제서야 잔뜩 긴장했던 강산의 얼굴이 활짝 펴지며 입을 열었다.
“영감님!”
“그래그래. 잠시만 기다려주겠니? 내가 김씨 갈비뼈를 몇 개 부순 것 같은데.”
“끼에에에에엑―!”
“음. 그렇다고 하는구나. 안 그러니, 진우야?”
좀 심하게 빠드득거리는 소리가 났거든.
중후한 얼굴이 남매와 꼬마를 보며 익살스럽게 미소지었다.
드디어 전우를 치료해줄 각성자가 도착했다.
거칠게 발광하는 좀비의 머리채를 잡은 영감님이 좀비의 머리를 뒤로 넘겼다.
곧이어 내뻗는 손에는 빛을 내뿜는 병이 들려있었다.
“끼, 끼에에에엑―!”
“허허허, 이렇게 보니깐 드라마에서보던 중전마마 사약 맥이는 내시같은데?”
“끼에에에에엑―!”
“어허! 중전은 어서 사약을 먹고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시오!”
강제로 벌린 좀비의 입으로 우악스럽게 치료제가 흘렀다.
“끼, 끼에에에―”
점점 힘을 잃어가는 하울링과 함께 좀비의 몸이 하얗게 빛났다.
“으, 으으으으―!”
“김씨 오빠. 어서 일어나게, 우리 좆됐어!”
“으으으으― 여, 영감님?”
“허허허, 그래그래. 돌아왔구나. 잠깐 누워있게.”
다시 인간의 모습을 되찾은 김씨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끝까지 웃음을 잃지않고 그를 진정시킨 영감님이 빠르게 남매에게 다가왔다.
“바다야. 진우에게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봐주겠니?”
“아, 영감님! 함정이었대요! 진우를 일부러 이용해서 좀비들이 함정을 팠었대요! 그리고 지금 프로그들이랑 스테로이드들이―”
“허허허― 진짜로 좆됐구나.”
가볍게 말하는 듯했지만, 영감님의 눈은 이미 차갑게 가라앉아있었다.
항상 멋을 잃지 않던 그의 머리 또한 이미 치열한 격전으로 사방으로 헝크러져있었다.
“후퇴해야해요! 어디로든 도망가야해요!”
“바다야, 우리라고 여기 있고 싶겠니. 배를 움직일 연료가 너무나 부족해.”
그들의 고개가 ‘배들의 섬’ 중앙에 있는 선박으로 향한다.
어머니와 간부들이 모여 있는 500톤급의 해경 경비선.
이미 좀비들로 가득찬 경비선을 정리하고 무리의 중심지로 사용하는 그들의 모선.
파아아아앗―!뾰족하게 튀어나온 선수에서부터 빛의 파동이 퍼졌다.
아름답고 우아하게 퍼져나간 빛에 모두가 익숙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들의 지친 몸과 마음에 다시금 활력을 불어넣는 치유의 파동.
어머니의 은혜였다.
“모두들 마음을 꺾이지 마세요!”
노래하듯이 고운 음색이 사방으로 퍼졌다.
어머니가 마나를 가득 품은 목소리로 모두에게 말했다.
“항상 승리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은 앞으로 겪게 될 우리의 많고 많은 패배 중 하나입니다. 저희는 오늘 아쉽지만 보다 잘 패배할 것입니다!”
어머니의 격려가 처음으로 겪는 패배에 동요하는 무리를 다독였다.
“아주 작은 패배에 희망을 잃지 마세요! 저항하고 버티세요! 우리는 가족을 버리지 않습니다! 모두가 결국 다시 인간으로 일어나 우리의 땅을 되찾을 겁니다!”
“결국, 각성자들이 좀 더 수고하라는 말씀이시군.”
너털웃음과 함께 어깨를 으쓱인 영감님이 두 팔을 벌렸다.
남매는 익숙하다는 듯이 그에게로 걸어갔다.
강바다는 강진우를 안고 자신도 영감님에게 안겼다.
강산 또한 어색한 표정으로 반대쪽을 차지했다.
“어머니에게 가야겠지?”
“네, 영감님. 빨리요!”
“허허, 꽉 잡거라.”
끄드드득―!
남매를 안고 힘껏 자세를 낮춘 영감님이 크게 도약했다.
펑―!
통통배가 출렁거리며 남매의 얼굴이 바람에 사정없이 흔들렸다.
점점 가까워지는 경비선의 갑판에 서있는 어머니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어머니의 가장 강력하고 충성스러운 두 명의 심복도.
퉁―!
그들은 갑판에 내려앉은 남매와 영감님을 보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끼에에에에엑―!”
그 중 호쾌한 인상의 남성이 밟고 있던 좀비를 더 세게 짓누르며 소리쳤다.
“어머니! 이 자식한테는 치료제를 낭비할 이유가 없습니다! 대열을 이탈하고 전우들을 버린 놈이에요!”
“강아, 조금만 숨을 몰아쉬고 진정하렴.”
“그래, 동생아. 어머니 앞에서 무슨 추태냐.”
“아니!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이런 자식한테도 아까운 포인트를 낭비하라니! 이제 내일 소모해야 할 포인트도 간당간당하다고!”
호쾌한 인상의 남자, 윤강은 검은 무복을 입은 자신의 형에게 소리쳤다.
다소 성격이 급한 동생보단 훨씬 유하고 강직한 얼굴을 한 그의 형, 윤현이 동의의 의미로 얼굴을 끄덕였다.
“어머니. 이런 놈에게 치료제를 베풀 정도로 상황이 좋지는 않습니다.”
“알고 있단다. 그래도 제 몫을 다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한 아이란다. 모두가 너희처럼 용감할 수는 없어.”
어머니는 밑에 깔린 좀비가 무섭지도 않은지 그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리고 단호히 내민 손을 보며 한숨을 쉰 윤현이 좀비 치료제를 구매했다.
도망자이자 배신자에게 밝은 빛을 품은 액체가 흐르는 것을 본 윤현이 덧붙였다.
“……이제 정말 포인트가 부족합니다, 어머니.”
“내일의 위기보다는 오늘 잃어버린 가족들이 훨씬 소중하단다. 현아, 너도 항상 명심해야해.”
“아니, 어머니이이! 저, 저 씨…”
“강아!”
“…아오오오오!”
급발진하는 윤강을 제지한 어머니가 인간으로 돌아온 사내의 뺨을 부드럽게 두드렸다.
죄책감에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사내를 보며 다정하게 입을 열었다.
“들어가서 좀 쉬렴. 고된 하루였잖니.”
“크, 크흐윽. 죄, 죄송합니다, 어머니…. 전, 전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괜찮단다. 못한 이야기는 내일 해보자. 자, 어서 들어가서 쉬렴.”
사내는 계속해서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일어섰다.
비틀거리며 선내로 들어가는 사내를 끝까지 지켜본 어머니가 그제서야 차례를 기다리던 남매와 영감을 바라보았다.
자애롭게 그들에게 웃어준 어머니가 강진우를 보며 눈을 빛냈다.
“급하게 알려줘야 할 것이 생겼나보구나.”
“네, 어머니. 더는 여기 계시면 위험해요! 프로그하고 스테로이드가―!”
크롸아아아아아아―!
강바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놈들의 포효가 울렸다.
이미 영종도의 끝에서 ‘배들의 섬’을 주시하던 스테로이드들이 팔을 뒤로 당겼다.
그들의 손에 꿈틀거리는 또 다른 변종, ‘프로그’.
멀리서 흐릿하게 형체를 인식한 강산이 다급하게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짧은 거리를 두고 정박해있는 수많은 배들.
그 배들에 남겨두고온 패잔병들이자 전우들.
아무리 어머니의 능력인 ‘치유’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혼자서는 변종을 이길 수 없었다.
프로그들이 배를 점령하면 일어날 끔찍한 게릴라에 공포를 가득 담은 소름이 돋아났다.
크롸아아아아아―!
스테로이드들이 일제히 투척을 시작했다.
그들의 손에서 떠난 빛살이 우리에게 쏜살처럼 다가왔다.
그때, 검은 무복이 바람에 흩날리며 모선을 박찼다.
퉁―!
모든 투척물들을 시야에 담을 만큼 도약한 윤현이 부드럽게 선을 그었다.
그런 그의 오른손에는 이미 고풍스러운 검이 들려있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곧게 뻗은 직선.
그 직선을 따라 검기가 쏘아졌다.
윤현이 방출한 검기에 스테로이드가 투척한 모든 프로그들이 닿았다.
푸화아아악―!
바다 한 가운데서 피분수를 일으키며 프로그들의 몸이 분리됐다.
그대로 동력을 잃고 바다 속에 빠지는 육편을 따라 바다에 썩은 핏물이 서서히 번져갔다.
툭―!
“후우우우―”
정적이고 파괴적인 기적을 선보인 윤현이 자신을 응시하는 무리들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얼굴에 가득 고인 땀방울들이 햇빛에 부서지며 빛났다.
자주 선보일 수는 없는 윤현의 비장의 수였다.
“뒈져라아아아아!”
뒤이어 그의 동생인 윤강이 갑판의 끝에서 팔을 내질렀다.
그의 팔을 떠난 쇠막대기가 가공할 속도로 영종도의 스테로이드에게 박혔다.
퍼어어어억―!
막대기와 충돌한 스테로이드가 육중한 몸을 이끌고 뒤로 무너졌다.
이미 막대기가 지나간 자리엔 커다란 구멍이 흉터처럼 남아있었다.
“아…… 머리를 못 맞췄네. 이제 막대기 남은 게 없는데.”
쩝.
가볍게 입을 쩝쩝거린 윤강이 영감님을 보며 말했다.
“그, 영감은 뭐, 던질만한거 인벤토리에 있나?”
“허허허, 내가 너보다 강산은 뒤바뀔만큼 더 살았는데 말이야, 허허허.”
“그럼 뭐해. 나보다 약하잖아.”
“…강아.”
“……약하잖아요.”
크롸아아아아아―!
가벼운 만담을 할 시간도 없었다.
동료의 몸에 난 커다란 구멍을 본 스테로이드들이 더 발광하며 주변의 커다랗게 보이는 물체는 다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들의 핏줄 터진 붉은 눈이 모선을 응시하며 이글거렸다.
“……흠.”
“쩝.”
짧은 침음성과 함께 탄식하는 윤현과 계속해서 아쉬운 듯이 입을 쩝쩝거리는 윤강.
그런 그들의 중앙에 서있던 어머니가 천천히 양팔을 올렸다.
그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 지 알고 있는 모두가 탄식을 흘렸다.
이 스킬은, 반드시 인천국제공항 안에서 쓰기 위해 아껴둔 스킬이었는데.
어머니가 이 스킬을 발동한다는 것은, 당분간은 국제공항을 탈환할 의지가 상실된다는 말과 똑같았다.
파아아아앗―!
그녀의 양팔에서부터 빛이 분사됐다.
고른 입자처럼 퍼져나가던 빛의 조각들이 천천히 구의 형태로 자리잡았다.
‘배들의 섬’을 감싼 노란색 보호막이 완성됐다.
텅―! 텅―!
스테로이드들이 던진 물체들이 보호막에 막혀 튕겨나갔다.
작은 포말과 함께 바다 속에 잠기는 투척물을 보며 스테로이드가 분노에 가득찬 포효를 내질렀다.
크롸아아아아아―!
“하아― 하아― 하아―”
“…어머니.”
“괜찮단다. 나는 괜찮아.”
몰아쉬는 숨소리마저 감미로운 그녀가 잠시 머리를 짚었다.
걱정하는 간부들을 보며 미소지었다.
아직, 우리에겐 내일이 남아있다.
그리고 내일은 오늘을 버티는 자들만이 보게 된다.
그녀는 그 말을 되뇌이며 마음을 다독였다.
누구보다 작전의 성공을 바랬던 그녀는 그렇게 스스로의 실망과 슬픔을 감추고 있었다.
그녀는 아른거리는 눈빛으로 영종도를 응시했다.
쿵쿵―거리며 화풀이로 땅을 부수는 스테로이드들과 하울링을 내지르며 아쉬움을 표하는 좀비들.
그리고 그런 그들을 허망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자신의 소중한 자식들.
아주 은밀하게 입술을 깨물던 그녀에게 익숙한 알림음이 터졌다.
띠링―!
[전 세계의 각성자들에게 알립니다! 대한민국 서울에 최초의 도시가 탄생합니다!]
……서울?
그녀는 깜짝 놀란 눈빛으로 서울이 있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이 힘겹게 분투하는 동안, 누군가는 서울에서 무언가를 해냈다.
생소한 메시지 다음으로 연이어 처음 보는 메시지들이 출력됐다.
[후발주자 특별 이벤트!]
[전 세계의 생존 중인 각성자들에게 가장 가까운 나라의 수도로 이동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합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이동하시겠습니까?]
[대한민국의 각성자들은 구로구는 선택하실 수 없습니다.]
[YES / NO]
“……어, 어머니!”
“그래, 현아.”
역시 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그들에게도 천재일우의 기회가 온 것을 자연히 알 수 있었다.
각성자가 아니기에, 메시지를 받지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남매를 보며 어머니가 미소지었다.
그리곤 윤현과 윤강, 그리고 영감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눈빛으로 그녀의 뜻을 이해한 그들이 손을 내밀었다.
그들이 남은 포인트들을 짜내어 모선 위에 식량과 생필품을 적재했다.
어머니는 강바다의 다리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강진우에게 부드럽게 손짓했다.
입술을 계속해서 깨물며 고민을 이어가던 강진우가 눈을 질끈 감으며 그녀에게로 향했다.
계속해서 일어나는 이변에 눈을 동그랗게 뜬 남매에게로 어머니가 말했다.
“누구보다 인간다웠던 사랑스러운 남매. 우리 산이와 바다야.”
“……예, 어머니.”
“우리에게 새로운 길이 방금 막 생겼단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길에 한 번 모든 걸 걸어보기로 마음 먹었단다.”
“……새로운 길요?”
“그래.”
그녀는 서울쪽으로 고개를 향하고는 미소지었다.
허나, 부드러운 입매와는 달리 그녀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굳은 결심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녀는 남매의 어깨를 부드럽게 매만지며 말했다.
“당분간은 우리 남매가 사람들을 이끌어 줄 수 있겠니?”
“…네, 네에에?!”
깜짝 놀라는 남매를 다독인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방어막도 있고, 식량도 충분하니 사람들을 다독이기만 하면 된단다. 너희들이 항상 잘해왔던 거잖니?”
“그, 그래도….”
“아니야. 너희들은 충분히 할 수 있어. 남은 사람들 중에 너희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해 줄 수 있겠니?”
“……네.”
“어이구, 장한 우리 남매 한 번 안아보자.”
그렇게 남매를 힘껏 껴안은 그녀가 천천히 팔의 힘을 풀고 물러났다.
그녀를 기다리던 각성자들 앞에 선 그녀가 메시지의 YES를 터치했다.
파앗―!
동시에 서울의 전도가 그녀의 시야에 펄쳐졌다.
24개의 구가 반짝이며 그녀의 선택을 기다렸다.
“…어머니, 어디로 갈까요?”
이런 순간에도 차분한 윤현의 물음에 그녀는 입술을 톡톡 두드리다가 장난스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을 주시하는 강산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곤 속삭였다.
“망원한강공원이 그나마 가깝겠구나.”
그녀의 말을 끝으로 어머니가 어딘가를 터치했다.
파아앗―!
밝은 빛에 눈을 찌푸린 강산이 다시 그곳을 바라봤을때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어머니와 각성자 간부들, 그리고 강진우마저 모두 사라졌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자신의 여동생과 모선에 적재된 식량들을 보며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치켜들고는 아직도 쨍쨍한 태양을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뜻을 이해했다.
“……오빠.”
“응?”
“보호막이랑 식량이 바닥나도 어머니가 오지 않으면 어떡해?”
여동생의 물음에 강산은 어머니가 그랬듯이 한곳을 응시했다.
망원한강공원이 있는 마포구.
“우리가 서울로 가야겠지.”
그는 나지막이 속삭이며 계속해서 서울을 응시했다.
아마도, 그때 남은 자들을 이끌고 가야할 사람은 아마…
“…우리의 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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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1 재정비 (2)
재정비 (2) ― 한마음 구원교 ‘낙원’
정오를 알리며 하늘에서 찬란히 빛나는 햇살.
좀비에게 빼앗겼던 당연한 권리가 지상을 내리쬐며 축복했다.
고르게 퍼지는 햇살이 반투명한 주황색 보호막을 통과하곤 봉긋 솟은 산봉우리까지 닿았다.
그곳에서 낙원을 내려다보는 거대한 석상.
두 팔을 벌리며 낙원을 축복하는 석상의 중앙에 햇살을 담은 보석이 빛났다.
저것이 구로구에서 내가 얻은 최고의 보상.
도시의 권능이었다.
[유일구원도시 ‘낙원’의 권능 : 은총(恩寵)]
[신에게는 언제나 그의 뜻을 대리할 대전사가 필요합니다. 믿음과 순종을 증명한 신도여, 은총을 머금으세요. 그리하여, 순백의 육신으로 다시 태어나세요.]
[은총 활성화 까지 남은 시간 : (29 : 11: 45 : 43)]
이놈의 시스템은 그냥 한달 남았다고 표기하지 뭐 이렇게 숫자를 어지럽게 나열하지?
윤아영의 예언에서 보던 쿨타임도 그렇고 참 취향 한 번 확고하네.
난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다시금 석상의 중앙에 자리잡은 보석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빛의 세기를 더해가는 백색의 보석.
저 보석은 아마 매우 높은 확률로 내게 믿음을 맹세한 신도를 강하게 만들어주는 아이템일 것이다.
강하게 만든다, 새로 태어난다.
단번에 느낌이 빡 온다.
저건, 내가 그렇게나 노래를 불렀던 신도를 각성자로 만들어주는 권능일 것이다.
권능 설명창에 적혀있는 ‘대전사’라는 단어를 음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내 말이 바로 그거야.
힘 좀 써야 할 일이란 일은 모조리 내가 다 하던게 오히려 이상한 거지.
이제 나도 좀 진짜 교주들처럼 뒤에 앉아서 폼 좀 잡을 수 있는 건가?
실실 웃으며 계속해서 보석이 빛을 더해가는 과정을 지켜봤다.
뒷짐을 지고 그냥 보고만 있어도 여태껏 구로구에서 느꼈던 짜증과 피로가 모조리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교주님?”
조심스럽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뒤돌아봤다.
수첩에 펜을 들고 있는 김은별이 죄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랫동안 말씀이 없으시기에… 혹시 제가 감히 교주님을 방해…”
“하하, 괜찮으니 크게 신경 쓰지 말거라. 내가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감히 교주님의 거룩한 뜻을 알지못하는 우둔한 악마가 신도들을 교주님의 모습을 한 환영으로 유혹한 구간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구나.”
나는 미소와 함께 대답하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우둔한 악마야, 혹시 이 말도 듣고 있니?
“그곳에서 나는 신도들이 잃어버렸던 것을 되찾아주며 나 또한 잃었던 것을 되찾았지.”
보석을 바라본다고 잠시 끊겼던 말을 이어가자 다시 사각거리는 특유의 필기음이 이어졌다.
두눈을 빛내며 신들린 듯이 무언가를 적어가는 김은별을 보곤 다시 말했다.
창세기에 기록될 영광의 2장.
아, 3장인가?
“신성.”
“아아아아―!”
탄성을 내지르는 그녀가 한껏 젖은 얼굴로 계속해서 창세기를 이어적었다.
흥분을 참지 못해 비비적거리는 김은별의 허벅지를 구경하면서 상태창을 열었다.
[성명 : 한구원]
[성별∘나이 : 남∘27세]
[소속 : 한마음 구원교]
[직업 : 사이비 교주]
[신성 : ‘1’ (자세히 보기)]
[보유 신앙 : 156,600 (2400/H)]
[전용 스킬]
[모방 성체 Lv.20]
[누군가의 광신을 양분 삼아 육신이 신을 모방합니다. 레벨이 오를수록 전체적인 능력치와 염력이 증가합니다.]
[결핍 파악 Lv.5]
[당신은 누군가의 결핍 속에 드리우는 그림자입니다. 그들의 빈공간을 파악해 결국 당신만의 공간으로 만드십시오. 레벨이 오를수록 상대방의 결핍에 관해 더 잘 이해하게 됩니다.]
[종속의 액 Lv.20]
[당신이 배출하는 모든 액체는 대상에게 강력한 종속과 발정, 그리고 중독을 유발합니다. 레벨이 높아질수록 효과가 증대합니다.]
정말 오랜만에 전체적인 상태창을 보는 것 같았다.
흐뭇한 마음으로 전과 달라진 요소들을 체크했다.
내가 가졌던 모든 스탯들이 모방 성체에 통합된 이후에 처음으로 보게 된 신규 스탯.
최초 보상으로 얻은 신성.
1000 언저리에서 놀던 한달 전과 다르게 폭발적으로 늘어난 신앙 생산량.
이건, 성역보다 훨씬 많은 수의 신도들을 구로구에서 얻었기에 매우 당연한 과정이었다.
아마 구로구에서 각성자 신도를 얻었다면 더 크게 늘었을 텐데.
그나마 겨우 건진 각성자 꼬마를 생각하며 아쉬움에 고개를 저었다.
아직 깨어나지 못한 각성자 꼬마는 초록 보석으로 생성된 양방향 구원의 문을 통해 성역으로 이송했다.
아직 꼬마가 눈을 뜨기까지 5일 혹은 4일 정도가 남아있었다.
천천히 내려다보던 와중에 레벨 5에 멈춰있는 [결핍 파악]을 보며 눈초리를 좁혔다.
그러고보니 이건 왜 만렙을 안 찍어놨지?
마치 가운데가 뻥 뚫려있는 퍼즐을 보는 것 같아서 매우 마음이 불편해졌다.
레벨 5에서 20까지 가는데 필요한 포인트, 즉 신앙은 19,500.
지금 내가 가진 총 신앙에서 그렇게 크지 않은 부분을 차지했다.
그 마저도 하루 정도 참으면 그대로 회복되는 양이었다.
‘가볍게 플렉스.’
[결핍 파악 Lv.5 -> 결핍 파악 Lv.20]
[19,500 신앙이 소모됩니다.]
[스킬 레벨이 한계치에 도달했습니다! 이후의 성장에는 ‘스킬 성장권’ 혹은 ‘스킬 진화권’이 필요합니다!]
이로서 내가 가진 세가지 스킬이 모두 성장 한계치에 도달했다.
난 스킬을 끝까지 찍을 때마다 떴던 메시지를 보며 생각을 이어나갔다.
스킬 성장권이나 스킬 진화권이라.
그래도 나름 오랫동안 시스템 새끼를 보다보니 알겠다.
분명히 이것도 밸런스가 파괴되지 않을 시기가 오면 풀거나 얻는 과정을 은근슬쩍 유도하겠지.
지금 내놓으라고 떼를 써도 놈은 반응도 안 할 것이 뻔했다.
포인트가 넘쳐도 오히려 찍을 스킬이 없는 아이러니.
난 조용히 입맛을 다시며 시선을 다시 올렸다.
[신성 : ‘1’ (자세히 보기)]
신성.
스킬 작성권, 상점 무료 이용권, 신앙 생산량 펌핑 등.
항상 최고로 필요했던 것들을 지급했던 최초 업적 보상.
그 중 이름만 들어도 무엇인지 알 것 같은 최고의 보상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정체되었던 내 성장의 물꼬를 틀어줄 확실한 방향.
새로운 스탯의 출현이었다.
난 숫자 ‘1’ 옆에 자리잡은 자세히 보기를 터치했다.
[신성 스탯이 오를수록 특수 건물이 해금되며 당신의 모든 스킬에 유의미한 보정이 깃듭니다.]
[‘교법원’이 해금되셨습니다! ‘종교 관리’에서 확인하세요.]
[신성 스탯은 신앙으로 올리실 수 없습니다.]
드디어, 그동안 기다렸던 특수 건물들이 해금되는구나.
정말 성가을의 말대로 서울이 내 성장과 구원교 성장의 돌파구였다.
거기다가 <종교 관리>라.
그 동안 구원교를 운영하던 큰 줄기는 두 개였다.
<성역 관리>와 <신도 관리>.
그 위에 새로 생긴 <종교 관리> 탭.
드디어, 시스템이 구원교를 종교로 인식한 것 같아서 가슴이 웅장해졌다.
허나, ‘사이비 교주’라는 직업을 보며 들뜨던 마음이 식었다.
이 ‘사이비’, 이거는 언제 떼주는 거야.
그나저나 또 확인해야 하는 게 있나?
좀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난 슬슬 가열되는 머리를 부여잡고는 약하게 흔들었다.
그냥 상태창만 봤을 뿐인데도, 너무 많은 정보가 난잡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내 적성에 맞는 방식이 아니다.
가을에몽, 가을이가 필요했다.
“……교주님, 괜찮으세요?”
뒤에 들려온 김은별의 목소리에 잔뜩 찡그렸던 표정이 펴졌다.
이 짜증나는 머리의 열기를 식혀줄 사람이 바로 뒤에 있었다.
아니지. 열은 또 다른 열로 제압해야지.
난 부드럽게 몸을 돌려 김은별에게로 다가갔다.
내가 다가갈수록 무언가를 기대하듯 수첩과 펜을 쥔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만 있는 김은별의 앞에서 손을 내뻗었다.
부드럽게 뺨을 매만지는 손길에 호응하듯이 그녀가 얼굴을 비볐다.
기쁨에 잔뜩 떨리는 눈빛을 바라보며 야릇한 손길이 점점 아래로 향했다.
“은별아.”
“…네에, 교주님.”
“지금까지 적은 부분을 읽어주겠니?”
“…네에.”
하아― 하아―
신도복 바깥을 조금 어루만졌을 뿐인데도 숨결이 매우 끈적거렸다.
김은별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수첩을 부여잡고는 입을 열었다.
내 손은 그동안 매우 충실하게 끊임없이 비비적거리고 있는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 향했다.
점점 다가갈수록 음란한 열기가 손바닥을 데웠다.
“신도들은 환영의 말에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들은 그 자체로도 이미 크나큰 죄악을 저질렀지만, 교주님은 그들을 사랑으로 용서하셔― 흐읏―!”
그녀가 말을 끝맺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그녀의 백색 신도복이 사타구니 사이로 파고든 손을 따라 진하게 물들었다.
점점 축축해지는 신도복을 계속해서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서기신도 또한 죄를 범하고 있구나.”
“아아― 죄, 죄송합니― 흐으읏―!”
“이렇게 가볍게 만지기만 했는데도―”
“하아앙―!”
이미 물기를 잔뜩 머금은 신도복에 뾰족하게 세운 중지를 파고들었다.
고개를 치켜들며 마구 흔드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발정이 났구나?”
“하으윽―!”
귓바퀴를 자극하는 따뜻한 숨결 때문일까.
그녀는 신음조차 내뱉지 못하고 멍한 눈빛으로 입을 벌렸다.
점점 더 물기를 더해가는 신도복의 사타구니 쪽을 응시하며 웃었다.
이젠 종속의 액이 없어도 말 한마디와 손길에 절정을 오간다.
난 남은 손으로 바보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김은별의 뺨을 툭툭 두르렸다.
“교주님 말씀에 대답해야지?”
“네에― 네에에―”
“그래. 솔직하게 말해보렴. 발정난 곳이 어디지?”
“……보지. 보지입니다.”
“옳지.”
찌꺽―
난 상을 주듯이 다시 한번 중지로 사타구니를 길게 훑어주었다.
“하으으읏―! 으으읏―!”
그녀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쾌락에 발끝을 세우며 몸을 흔들었다.
몸을 진정시키기 위해 꽉 쥐고 있는 수첩과 펜이 부서질 듯이 마구 흔들렸다.
난 염력으로 수첩과 펜을 공중으로 떼어내준 뒤에 다시 물었다.
“왜 서기신도의 보지가 발정이 났지?”
“교, 교주님이 은총을 내려주시던 기억이 나서 그런 것 같습니다.”
“몸이 알아서 발정을 했다는 말이구나.”
“그, 그렇습니다, 하응―”
찌걱― 찌걱―
난 계속해서 그녀를 애태우며 물었다.
“그럼 정신이 아니라 몸이 죄를 범하고 있구나.”
“요, 용서해주세요, 교주님. 음란한 몸을 가진 저를 부디…”
“아니지. 그건 죄가 아니란다.”
난 내가 했던 말을 부정하며 은은한 미소를 띄웠다.
잠시 혼란이 온 듯이 김은별의 눈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난 그녀의 턱을 붙잡고는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동공에 가득 들어찬 내 얼굴이 조용히 속삭였다.
“그건 진화란다, 은별아.”
“…….”
“내 은총에 호응하여 정신보다 몸이 먼저 구원받은 거란다.”
“아아―”
난 조금씩 커지는 그녀의 눈에 대고 계속해서 되뇌었다.
“지금 죄를 범하는 것은 오히려 서기신도의 정신이란다.”
“죄, 죄를…”
“그래. 미리 은총을 준비하는 너의 육체가 도리어 나를 향한 믿음이 충만하구나.”
“아아아― 아, 아닙―”
“쉬이이잇―”
나는 그녀의 항변을 무시하며 김은별을 끌어안았다.
부드럽게 등을 두드리며 계속해서 속삭였다.
“죄를 지어도 괜찮단다. 난 너를 미워하지 않는단다. 난 너를 사랑한단다. 난 너를 미워하지 않는단다. 난 너를 사랑한단다…”
끊임없이 울리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점점 그녀의 몸에 힘이 빠져나간다.
난 내게 파고들 듯이 기대고 있던 김은별의 양 어깨를 잡고 다시 눈을 마주쳤다.
머나먼 곳을 응시하듯 멍해진 눈에 대고 속삭였다.
“네가 뭘 잘못했는지 알겠니, 은별아?”
“…네에에.”
“말해보렴.”
“…몸이 교주님을 받아들을 준비를 할 동안 정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이, 이젠 항상 교주님의 은총을 받을 준비를 해야 해요.”
“옳지. 이제야 구원교의 서기신도로 돌아왔구나.”
“헤, 헤헤―”
난 기특함을 표하기 위해 그녀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반원을 그리며 미소짓고 있는 그녀를 보며 다시 속삭였다.
“뭐하니? 은총을 받을 준비를 하지 않고?”
“…아! 베에에―”
그녀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치켜들고 입을 벌렸다.
그리고 항상 명령했던대로 혀를 길게 내뺀 것을 보며 미소지었다.
천천히 [종속의 액]을 머금은 고개가 그녀에게 닿으려는 순간에 시야에 누군가가 잡혔다.
커다란 덩치에 내가 준 소총을 메고 우리에게로 다가오고 있는 형체.
서태산이었다.
“이런, 누군가가 오고 있구나.”
“……아.”
“은별아. 은총을 주지 않았다고 오늘 일깨워준 사실을 잊어버리는 건 아니겠지?”
“아, 아니에요.”
“그래. 언제나 뭘 준비하라고?”
“…항상 은총을 받을 준비를 해야 해요.”
아쉬움과 뜨거움을 잔뜩 담은 목소리.
난 서태산을 보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갔다.
순간,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녀가 얼만큼 내게 순종하는지 바로 알 수 있는 물음.
“…힘찬이가 있어도?”
“네에―”
짧은 텀도 없이 곧바로 튀어나오는 대답에 미소지었다.
염력으로 띄워놨던 수첩과 펜을 다시 그녀에게 건네며 속삭였다.
“조만간 특별한 은총을 내려주마.”
“아―”
무슨 상상을 했는지 다시 몸을 떨기 시작하는 그녀를 지나쳐 앞으로 걸었다.
나를 확인한 서태산이 그대로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교주님.”
“자경단장!”
권능을 확인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이 서태산을 자경단장으로 임명한 일이다.
힘 좀 쓸 수 있는 놈들 중에서 서태산보다 더 내게 충성을 보이는 자는 없었다.
난 가볍게 서태산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하하― 말하지 않아도 알겠군. 부교주가 나의 도움이 필요하다던가?”
“그렇습니다, 교주님. 제가 감히 교주님의 시간을―”
“아아 아니야, 아니야! 왜 보는 신도들마다 똑같은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김은별을 잠시 바라보며 고개를 숙이는 서태산을 만류하고는 앞으로 걸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태산이 뒤따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우리의 눈앞에 웅장한 백색 건물이 햇빛을 머금고 반짝였다.
새로 태어난 ‘낙원’의 정중앙.
구원교의 새로운 성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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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2 재정비 (3)
재정비 (3) ― 한마음 구원교 ‘낙원’
낙원의 ‘성전’은 성역에서 성가을과 내가 머리를 맞대고 만들었던 건물관 조금 달랐다.
확실히 시스템의 전문적인 손길이 가미돼서 인지 보기만 해도 마음이 경건해지고 한편으론 웅장해졌다.
나는 빈 공터를 걸으며 아직 정확한 이름을 정하지 않은 ‘성전’을 둘러보았다.
먼저 내가 걷고 있는 이 공터는 중앙에 나를 상징하는 조형물을 배치한 뒤에 광장으로 이름을 바꿀 것이다.
그런 광장을 둥글게 둘러싼 백색 외벽이 쭉 이어졌다.
고대 그리스 신전처럼 길게 뻗은 백색의 기둥들은 주인인 나조차도 압도당하는 묘한 분위기를 내뿜었다.
그렇게 기둥들을 멍하니 바라보다보면 시선은 자연히 중앙으로 향한다.
순백의 계단과 거대한 문.
천천히 위를 응시하게 되는 시선은 두 팔을 벌리고 방문객을 환영하는 나의 모습으로 귀결된다.
석상인데도 살결이 움직이듯이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나를 바라보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마치 신을 마주하게 된 듯한 감상에 빠지게하는 치밀한 구도.
딱 하나 옥에 티라고 할 수 있는 점은 내 석상 주변이 조금 심심한 느낌이 든다는 것인데.
이건 앞으로 생길 내 사도들을 좌우로 배치한다면 바로 해결 가능한 문제였다.
역시 시스템.
‘고생한 만큼 리턴은 확실한 새끼…….’
단 한가지 걱정이라면 교황청에서 많은 영감을 가져왔다는 것을 그냥 보기만 해도 바로 알 수 있다는 점이었다.
‘만약 교황이 여길 본다면 피거품을 물고 종교전쟁을 부르짖겠지.’
전쟁이라하면 무조건 땡큐를 외치겠지만, 궁금한 점이 있었다.
이런 대재앙 속에서 교황이 살아있기는 한가?
오히려 몸에 총알 구멍이 없는 걸 감사히 여겨야 할 것 같은데….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신을 믿는 자들이 있을테니 살아있지 않을까?
……모르겠네.
문득 심하게 궁금해지는 요소였다.
뭐, 어차피 지구 반대편에 있으니 살아있다고 해도 만나도 한참 뒤에 만나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계단을 오르다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성전의 뾰족하게 솟은 첨탑 위에 걸려있는 태양.
난 고개를 돌려 조용히 내 뒤를 따라오던 서태산을 불렀다.
“점심은 먹고 일하는가, 자경단장?”
“예. 모든 것이 교주님의 은혜로움입니다.”
“허허― 내가 베푸는 은혜에 비해 전혀 배부른 눈치가 아닌 듯한데?”
“어…….”
당황한 서태산이 곰같은 얼굴을 한껏 찌푸리며 손으로 배를 어루만졌다.
“하하하― 농담이네, 자경단장. 농담이야.”
“아, 아닙니다! 제가 감히 교주님의 은혜로움을 함부로 가늠했습니다!”
“뭔 자경단장 표정을 보면 농담도 함부로 못하겠군. 하지만… 그대의 말이 맞기도 하네.”
난 짓궂은 얼굴로 오른손을 내밀며 시야 한 켠에는 신앙 상점창을 켰다.
끝도 없이 늘어나는 스크롤을 내리며 눈에 보이는 음료와 음식들을 계속해서 구매했다.
계속해서 신앙이 소모됐지만, 반나절이면 거뜬히 회복될 양이었다.
오른손에서 튀어나오는 커다란 식탁들과 콜라, 사이다 등의 각양각색의 음료들.
염력의 지휘에 맞춰서 사이 좋게 줄을 이루며 광장에 안착했다.
곧이어 식욕을 당기는 냄새를 풍기는 무수한 음식들이 식탁에 자리잡는 것을 보면서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게 염력의 컨트롤이 훨씬 수월했다.
구로구도 이제 내 구역이 된 덕에 스킬 레벨 두배 펌핑을 받아서 인가?
아니다.
그것과는 묘하게 다른 마치 스킬을 쓰는 것이 아닌 내 팔을 움직이는 듯한 자연스러움.
이 정도라면 좀 더 많은 물체를 다양하게 조종할 수 있는…
‘아, 신성의 보조가 이거였나.’
신성 스탯의 유의미한 보정이 이런 식으로 발현되는구나.
생각하는 도중에 스스로 깨닫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최초 업적 보상.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네.
슬슬 이 정도면 됐다 싶어서, 오른손을 내렸다.
이미 광장에는 웬만한 축제보다 푸짐하고 다양한 음식들로 가득찬 테이블로 줄을 이었다.
“이 정도는 되어야 그래도 내 은혜라고 할 수 있지 않겠나?”
“아아― 서둘러 신도들을 부르겠습니다.”
“그래. 그들도 구원교의 일상을 즐겨야지.”
눈치 빠르게 내 뜻을 이해한 서태산이 허리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곧바로 신도들을 부르기 위해 떠나는 그를 보다가 다시 계단을 올랐다.
성전의 거대한 문을 넘은 나를 긴 테이블이 중앙에 자리한 로비가 환영했다.
드넓은 로비를 웅웅 울리는 익숙한 음색의 목소리.
내가 문을 넘은 것도 모를 정도로 성가을과 중년의 남성이 바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터벅― 터벅―
로비를 울리는 발소리에 테이블에 놓인 설계도를 유심히 보던 중년의 남성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이 커지더니 용수철 튀듯이 테이블에서 튀어나왔다.
“교, 교주니임!”
내 앞에 다가온 그가 자동으로 양 손을 모았다.
지진이라도 난 듯이 거세게 떨리는 팔과 다리.
내 얼굴에 난 솜털까지도 파악하려는 듯이 떠나지 않는 그의 동공을 보며 미소지었다.
“네가 바로 도시 계획과 설계를 돕는다던 아이구나.”
“예, 예, 교주님! 이, 이렇게 크고 영광스러운 일을 맡기엔 너무나도 미, 미천한 경험밖에 없지만 반드시 목숨을 걸고 아아아―!”
난 나보다 배는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남성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주었다.
곧바로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는 남자를 보며 더 빙그레 웃었다.
이렇게 눈물을 흘리는 정도의 반응은 오히려 소극적인 반응이었다.
어제는 내 모습을 보고 기절을 하는 여성 신도도 있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이제는 차차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제, 제가 감히 신이 머무르실 도시를 기획한다니 너, 너무 과분하고 두려움마저 들지만…”
그들에게 난 눈으로 보게 된 신이었다.
난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내 손이 다가오는 것을 확인한 남성이 빠르게 무릎을 꿇었다.
쿵―!
바닥이 울릴만큼 커다란 소리가 났지만, 사내는 오롯이 내 손을 보며 울먹거리고 있었다.
난 천천히 사내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는 말했다.
“두려워하지 말거라. 내 안에 네가 거하듯, 네 안에도 내가 거한다.”
“아, 아아아―!”
“그러니 그대의 뜻이 나의 뜻이고, 곧 신의 뜻이다.”
“미, 믿습니다! 믿습니다, 교주님!”
끝내 두 볼에 눈물을 흘리고만 중년을 보며 더 자애롭게 웃었다.
“밥부터 먹고 하거라. 광장에 그대를 위한 산해진미가 가득하니라.”
“네! 네! 네, 교주님!”
고장난 듯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던 중년이 떨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광장으로 나섰다.
난 그가 나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본 후에 손을 내뻗었다.
끼이이이익―! 쿵―!
직접 문을 닫았으니, 내가 열기 전에는 누구도 성전의 문을 열지 않을 것이다.
난 그대로 앞으로 걸어 성가을이 있는 테이블에 도달했다.
털썩―거리는 소리까지 날 정도로 테이블 뒤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지만, 성가을은 눈길 한번도 주지 않고 설계도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다른 간부들은 어디갔느냐?”
“몰라. 아마 성역에 있을 걸?”
“음…… 그건 그렇고 자네가 나를 불렀다고 들었네만?”
그녀는 시선을 돌리지않고 그대로 답했다.
“뭐야, 그 느끼비스무리한 반존대 컨셉은 이제 버렸어? 이젠 아예 하대 컨셉으로 가는 거야?”
시작부터 맵네.
난 실실 웃으며 답했다.
“말의 높낮이는 부속물일 뿐이란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든 진심이지.”
“뭐래. 진심 운운하는 사람이 아까는 예수가 했던 말을 참고해서 말하냐?”
“진실을 외면하지 말거라, 내 딸아.”
난 의자에서 일어나 뱀처럼 속삭이며 그녀에게로 걸었다.
이상해지는 분위기에 고개를 돌린 그녀의 눈에 내가 비쳤다.
그녀의 눈을 보며 20 레벨에 도달한 [결핍 파악]을 시전했다.
게다가 신성의 보조까지 받으니 뭔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94.7% : 한구원이 주는 뒤틀린 사랑과 관심]
[05.3% : 강산이 주는 온전한 관심]
이제 소수점까지도 표현하는 정밀함에 감탄은 개뿔.
이런 필요도 없는 정밀함 말고 뭔 돌파구를 보여달라고!
역시 성장권인가 진화권인가, 그게 없다면 극적인 변화는 없는 건가?
난 아쉬움을 숨기며 김은별에게 그랬듯이 그녀의 부드러운 턱을 부여잡았다.
온전히 나로 가득해진 눈을 마주하며 뇌까렸다.
“가늠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라. 인간은 처음 본 미지(未知)는 두려워하나. 계속되는 미지(未知)는 경배한다.”
그녀가 달달 외우게 했던 교주 메이커의 글귀.
“그대가 나에게 해주었던 말이 아닌가?”
때론 누구보다 따뜻한 성자가 되고, 때론 무엇보다 냉혹한 심판자가 되어라.
난 그녀의 귓가에 부드러운 숨결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그대의 눈에는 오늘 내가 예수처럼 보였나보구나.”
딱딱하게 굳어있는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천천히 성가을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다시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멍하니 나를 보는 그녀를 보며 물었다.
“이제 조금 쉬면서 그대의 신과 함께 천국을 가보지 않으련?”
그녀는 아주 천천히 고개만 갸웃거렸다.
“……이런 구린 멘트를 보면 내가 알던 찐따가 맞는데.”
“…하―!”
아― 오늘도 안 되네.
나는 픽― 웃으면서 성가을에게서 떨어졌다.
눕듯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독한 년.”
“앉는 것도 뭔가 거만해진 거 봐. 한 달 동안 무슨 일이 있긴 있었구나?”
“서럽게 앉는 거 가지고 뭐라 그러네. 그나저나 아까 한 말은 진심인데. 언제 우리 가을이 맘마 빨면서 잘 수 있어?”
“넌 한달 동안 아무런 발전이 없었구나?”
……뭐 어쩌라는 거지?
난 그녀를 향해 과장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 또한 도끼눈을 하고는 고개를 내저으며 혀를 찼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날선 말투와 행동들이 오히려 분위기를 이완시키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에 담긴 옅은 미소를 보며 나 또한 고개를 옆으로 돌리곤 웃었다.
“그래서 새로 업데이트 된 것들이 뭐가 있다고 했었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그녀는 설계도를 열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난 <종교 관리>에 새로 신설된 탭인 <‘낙원’ 관리>를 줄줄이 읽어내렸다.
“상하수도 시설, 상급 발전소, 분수대, 도시 관련된 웬만한 것들 다 그리고 종교 장식물 등등이랑…”
마지막으로 <특수 건물> 탭에 영롱히 빛나는 건물을 확인했다.
“드디어 해금된 ‘교법원’.”
[교법원]
[반드시 ‘성전’ 인근에 설치해야 합니다. 건설시 100,000 신앙과 14일이 소모됩니다.]
십만에 달하는 신앙과 2주의 건설 기간.
그야말로 여태껏 지었던 건물들의 궤를 벗어나는 요구 조건이었지만, 지금의 내게 버거운 것은 아니었다.
특히, 저 2주의 건설 기간도 그냥 포인트로 플렉스할 생각도 있었다.
얼마나 효과가 많으면 간략한 설명도 해주지 않을까?
지금 당장이라도 설치하고 싶었지만, 그걸 막는 원흉이 지금 내 앞에 있었다.
“누누이 말했지만, 지금은 안 돼. 그것보다 천 단위는 훌쩍 넘긴 신도들 보금자리가 먼저야. 교법원 배치는 그다음이야.”
건물의 배치에 대해 고심하는 건 이해한다.
한 번 터치해서 살펴본 교법원의 실제 크기도 상당히 컸고, 배치를 바꿀 수 있어도 도시라는 게 하나를 옮기면 나머지가 다 어그러질 테니까.
더군다나 작금의 현실에서는 더 그렇다.
“부교주는 나한테 진짜 고마워해야 해. 나니까 이 정도 속도가 나는 거예요.”
시스템 이 새끼는 정말 간악한 새끼다.
왜 시민들이 중요한 지를 지배율 100%를 넘긴 이후에야 깨닫게 하는 것에서 그걸 여실히 깨달았다.
폭죽이 터지며 우리에게 보여줬던 도시는 쉽게 말해서 모델하우스의 견본 주택이었다.
축하가 끝난 뒤에 낙원에 그대로 남아있던 것은 ‘성전’뿐.
그때의 당황스러움과 어이없음은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더 어이가 없던 건 텅텅 빈 대지를 보며 눈을 반짝이는 성가을이었다.
베스트 샘플을 봤으니 더 잘 만들 수 있다나 뭐라나.
이상하게 뭔가 계획하거나 설명하는 것에 진심인 그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여태껏 해오던 대로 하는 중이다.
가을에몽 말을 들어서 잘못된 적은 없으니까.
난 고개를 돌려 한참 신도들이 모여있을 구역을 떠올렸다.
아마 지금쯤이면 서태산이 그들에게 만찬을 권하고 있지 않을까?
거리가 그리 멀지 않으니 분명 그럴 것이다.
‘시민 스택’.
땅을 해금시키기 위해선 일정 수 이상의 시민들이 그 땅 위에 서 있어야 한다.
그러니 시민들의 수가 적다면 땅 자체를 이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도시를 지배하고 난 뒤에도 [일일 임무]가 계속해서 갱신되는 것도 아마 이 이유 때문일 것이다.
우리야 뭐, 이미 구출한 시민들은 차고 넘치고 임무를 깨면 새로운 신도들까지 꼬박꼬박 보급되니 손해보는 장사가 아니었다.
열심히 아이템만 먹었던 도시는 그때가 돼서야 마빡을 크게 때리며 후회하겠지.
거기다가 한마음 구원교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아마 신도들의 입장에선 믿을 수 없는 기적의 연속일 것이다.
먼저 성가을과 설계사가 지정한 구역에 신도들을 보내 기도를 시켰다.
그곳에서 기도를 하는 신도들에게 시민 스택 충전으로 땅이 해금되는 순간 미니맵으로 체크하고 있던 내가 건물을 짓는 것이다.
마치 하늘에서 은총을 내리는 듯한 광경에 바깥은 지금 믿음과 기도의 도가니였다.
괜히 나를 보고 여성 신도가 기절을 한 것이 아니었다.
“정말 대단하긴 하네. 이건 인정.”
의외라는 눈빛으로 나를 보는 그녀를 보며 자랑스레 목소리를 높혔다.
“내가 이렇게 한결같은 남자야! 더군다나 특별 거점에서도 아이템이 나를 유혹했거든! 이게 막 이따만한 뱀이 나와서는 지루 콘돔이랑 섹스 스킬이랑 막 나열하면서 나를 유혹하는 거야! 근데…”
“뭐어?! 시스템도 참 바보다. 너를 유혹하려면 미녀들을 쫙 깔았어야지, 그런 아이템은 조금 약하다.”
“어……”
……웬만한 미녀들보다 섹스 스킬이 더 가지고 싶었는데.
그게 구로구에서 두 번째로 빡셌는데…….
다음화 보기―――――――――――――――――――――
EP.93 재정비 (4)
재정비 (4) ― 한마음 구원교 ‘낙원’
그간 팽팽했던 마음을 느슨하게 했던 만담도.
깜짝 이벤트와 같이 신도들에게 열린 만찬도 끝났다.
저녁이 가까워지는 늦은 오후.
여름이 다가온 것을 알려주듯 아직도 화창한 햇빛을 머금으며 낙원을 걸었다.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걸어가는 내 조금 뒤엔 성가을이.
그보다 더 뒤엔 네 명의 자경단이 붙었다.
자경단원들 또한 내가 없는 동안 놀기만 한 것은 아니었는지 총을 잡는 몸짓에서 익숙함과 자연스러움을 뽐내고 있었다.
낙원 산책의 첫 행선지는 ‘구원의 문’이었다.
강화된 초록 보석이 만들어낸 성역과 낙원을 이어주는 양방향의 문.
성역으로 이동하는 통로가 열렸다고 아무나 이용할 수는 없었다.
성역은 내가 꾸준히 신도들에게 강조한 또다른 유토피아.
그곳을 밟는 자들은 모든 신도들 중에서도 엄선된 자들이어야 한다.
때문에 구원의 문에는 항상 두 명 이상의 자경단원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 중 내 시선에 보이는 부단장이자 각성자인 김해일을 보며 성가을에게 말했다.
“부단장이 모범을 보이는 모습이 아주 좋구나.”
“예, 교주님. 언제나 솔선수범하여 신도들에게 평이 좋습니다.”
난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구원의 문을 응시했다.
꽤나 오랫동안 지켜보는 나를 보곤 성가을이 넌지시 물었다.
“성역에서 성녀와 문지기를 호출할까요?”
“아니다. 보여줄 것이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계속 가지.”
난 가볍게 고개를 젖고는 그대로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뒤따르는 자경단원들의 규칙적인 발소리를 리듬 삼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특히나 건물들이 모두 사라지고 그대로 보호막 끝이 보이는 북쪽을 오랫동안 응시했다.
턱―.
구원의 문에 이어 또 다시 걸음이 멈췄다.
반투명한 주황색 보호막과 맞닿아 펼쳐진 또 다른 막.
시커멓게 낙원이 아닌 서울 전부를 감싸고 있는 막을 무심히 주시했다.
허나, 무심하려해도 계속해서 떨리는 오른쪽 눈썹이 진동했다.
성가을이 낙원의 북쪽에 자리한 양천구를 함께 응시하더니 물었다.
“…아쉬우십니까?”
그녀의 말이 맞았다.
구로구를 완전 점령한 나는 연이어 다른 구역에 진입할 수 없었다.
양천구의 검은막을 통과하려던 내게 시스템이 메시지를 출력했었다.
[지금은 후발주자 보호 기간입니다! 3개월간 다른 구역에 진입하실 수 없습니다.]
메시지를 확인하고 처음에는 화도 좀 나고 짜증도 났지만, 생각보다 그리 크게 감정을 분출하지는 않았다.
일단 죽으면서도 밸런스 타령을 할 시스템 놈이 내가 서울을 전부 따먹는 것을 그대로 방관할 것 같지도 않았고.
딱히 삼 개월 뒤라고 구역을 지배한 다른 각성자에게 질 것 같지도 않았다.
그 시간동안 내가 뭐 신도들도 안 받고 포인트도 안 쌓으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그들과 나는 이미 출발선부터가 달랐다.
시스템이 용을 쓰며 밸런스를 맞추려해도 이미 기울어질대로 기울어진 시소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괜찮다. 오히려 집을 튼튼히 지을 시간을 주니 고맙구나.”
“뭐야,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염력으로 목 조르고 땡깡부리던 한구원 어딨어?”
달콤한 체향과 함께 귓가에 속삭여지는 성가을의 목소리.
다시 내게서 멀어지며 공손한 표정으로 기다리는 그녀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어지간히 놀랐나보네.
“…가자. 이러다 해가 지겠구나.”
계속되는 발걸음이 자연과 아름답게 융화된 산책로에 닿았다.
슬슬 성가을과 설계사가 기획하고 있는 공간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우리가 걷던 텅텅 빈 평야는 환상인 것처럼 아름다운 녹음의 향연.
걷는 것만으로 건강해지는 산책로를 조금 더 걸으면…
그곳에 백색의 마을이 있었다.
적당히 자연과 어우러졌지만, 현대적인 색채를 잃지 않은 건물들.
단번에 마음마저 상쾌해지는 푸른 하늘과 백색 건물, 그리고 초록빛 자연의 조화에 고개를 돌려 성가을을 바라보았다.
내 시선에 이마를 가볍게 훔치며 휴― 한숨을 내뱉는 그녀를 보며 잔웃음을 흘렸다.
“교, 교주님이 오셨다아아아!”
“오오오오! 교주님! 교주니이이임!”
아직 해금하지 못한 구역에 모여서 기도를 하던 신도들이 나를 발견했다.
곧바로 구름처럼 내게 모여든 신도들을 향해 물었다.
“내가 선물한 만찬은 다들 즐기고 기도하느냐?”
“맛있었습니다, 교주니이임!”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교주님!”
양손을 모으고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신도들을 보며 선하게 웃었다.
“그래. 땡볕에 너무 더우면 집에 들어가서 에어컨도 좀 쐬고 기도하거라. 땀 뻘뻘 흘리며 기도하는 신도는 도리어 크게 혼을 낼 것이다. 알겠느냐?”
“아이고, 명심하겠습니다, 교주님.”
감동의 눈빛으로 고개를 마구 끄덕이는 남성 신도.
신도의 땟물 하나 없이 깨끗한 얼굴이 햇빛에 반짝였다.
드디어 낙원에 자리잡은 상급 발전기와 상하수도 관리 시설 덕에 그들도 성역에 있던 신도들처럼 문명의 혜택을 되찾았다.
배변 처리와 악취, 더위 등 사람을 피폐하게 만드는 요소에서 해방된 그들에게 이곳 또한 성역 못지 않은 천국이겠지.
“교주님은 오늘 한마음 배움터를 둘러보기 위해 나오셨습니다. 신도분들은 모두 자리로 돌아가주세요. 조만간 정기 기도 시간에 다시 교주님을 영접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성가을의 외침에 모두가 나를 쳐다보았다.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이자 신도들이 다시 해금되지 못한 땅으로 돌아갔다.
우린 조금 더 마을 안으로 들어가 6층 정도되는 건물 앞에 도달했다.
커다랗게 새겨진 ‘한마음 배움터’라는 글자를 보며 그녀에게 물었다.
“배움터라기엔 너무 건물이 큰데?”
“교주님이 베푸신 것중에 작은 것은 없습니다.”
이곳이 그녀가 자신스레 나를 이끌었던 이번 산책의 목적지였다.
내가 낙원을 세울 동안 성역도 마냥 놀고만 있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겠다는 성가을의 목소리가 다시 머릿속에서 울렸다.
두근거리는 궁금증을 안고 서둘러 1층 로비에 마련된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띵―!
부드럽게 상승하는 엘리베이터가 5층에서 멈췄다.
스르륵 열린 엘리베이터 문에서 빠르게 나와서 나를 기다리는 자경단원들.
부교주와 함께 빠르게 그들을 지나치며 문을 향해 손을 들었다.
끼이익―!
문을 통해 들어선 곳은 대강의실이었다.
길게 이어진 책상.
검은색 의자로 줄지어진 공간에 신도복이 아닌 평상복을 입은 사람들이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지막 줄을 제외하고는 꽉 들어찬 사람들.
내가 문을 여는 소리는 앞에서 강의를 이어가는 누군가의 마이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은 듯했다.
“구원의 서 1장 6절의 말씀이 바로 이겁니다! 믿음의 검에 울지어다! 믿음의 검! 교주님은 범람하는 악에 신음하는 자식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서혜원이 마이크를 부여잡고 열정적으로 칠판을 툭툭 치며 외치고 있었다.
한 달 전에 봤던 다소 유악한 이미지는 모두 벗어던진 확실하고 또렷한 발성.
연이어 말을 이으려던 서혜원의 눈이 내게로 향했다.
점점 커지는 그녀에게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강의를 계속하라는 손짓을 했다.
“…물론 아직도 교주님을 의심하는 예비 신도분들이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희는 허황된 공상을 믿으라 강요하지 않습니다! 이 영상은 교주님이 믿음의 검으로 좀비들을 단죄하시는 장면입니다!”
난 에어컨 바람이 솔솔 새어나오는 제일 끝 좌석에 천천히 앉았다.
내 뒤에 부교주와 자경단원들이 도열하는 것에 맞춰서 빔 프로젝터가 영상을 재생했다.
커다란 스크린에 공중에 부유하고 있는 내가 비쳤다.
“끼에에에에엑―!”
연이어 울리는 좀비들의 하울링.
생전 처음 듣는 성대 긁는 괴음에 예비 신도들의 몸이 들썩였다.
“……이것 때문에 빔 프로젝터를 사달라 했었나?”
“촬영은 서태산 신도가 들고왔던 그 캠코더로 했습니다.”
아, 가을이 회유할 때 써먹고 잊어버렸던 그거.
그런데 거기에 좀 부끄러운 영상이 찍혀있지 않았나?
저 영상 촬영은 누가 했지?
내 눈빛을 단번에 이해한 그녀가 다시 내 귀에 속삭였다.
“촬영은 제가 했고 파일도 아직 안전합니다.”
역시, 성가을.
난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영상을 감상했다.
영상은 한창 보호막이 열리고 성역을 침범한 좀비들을 쏘고 있는 자경단원들을 비추고 있었다.
“끼에에에엑―!”
자경단원들에게 쓰러지는 좀비들을 비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창 좀비들이 쓰러지는 장면으로 스크린이 가득찬 순간 누군가가 손을 들며 일어섰다.
“잠깐만요!”
중간 정도 되는 열에 위치한 남자였다.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는 다시 성가을에게 물었다.
“목소리가 꽤 많이 젊은데?”
“이번 배움터에는 대학교에서 구출한 예비신도들이 많습니다.”
아, 맞다.
일일 임무를 내가 깼는데 까먹고 있었네.
그러고보니 슬슬 난이도도 거의 다 채웠을 텐데….
내가 성가을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서혜원이 영상을 정지시키고 일어선 남자를 바라봤다.
“이성훈 예비 신도님?”
“아니, 참다참다 얘기하는데 이건 좀 아니잖아요. 저게 뭐에요.”
이성훈이라 불렸던 남자가 책상에 있던 종이를 펄럭거리며 말했다.
“이 교리인지 뭔지는 제가 종교인이 아니라서 모르겠고 저건 좀 아니잖아요. 저렇게 삐걱거리면서 뛰는지도 걷는지도 모르는 놈들 때문에 세상이 망했다고요?”
서혜원이 마이크를 들어 반박하려했지만, 내가 손짓하며 만류했다.
계속 들어보자는 내 눈빛에 그녀가 마이크를 든 손을 내렸다.
이성훈은 손가락을 들어 스크린을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저렇게 느린 좀비는 정말 아무나 죽일 수 있구요. 더군다나 교주라는 사람은 떠있기만 하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잖아요! 정작 총을 쏘는 건 밑에 있는 학생들 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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