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gricultura 9
리안의 손에 책 한 권이 쥐어져있었다.
근처에서 지켜보고 있던 리사가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어떻게 했어?”
“그냥 하니까 되던데?”
“그냥이라니? 그동안 아무도 못 열었어.”
그녀가 빠르게 다가왔다.
바닥에 떨어진 나무조각들이 굽 높은 구두에 밟히는 소리가났다.
“이전에도 마력 주입을 빨리 배우길래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리사는 책보다 리안을 더 관심있게 쳐다봤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근심이 서렸다.
“혹시 어디 아픈건 아니지?”
그녀의 엉뚱한 소리에 리안은 그만 웃음이 터져나왔다.
“아픈데 없어.”
리안은 말을 돌렸다.
“이거 봐봐. 책이네, 책이야.”
그녀에게 내밀었다.
“뭐라고 적혀있는지 읽어봐.”
리사는 얼결에 책을 받아들었다.
책을 펼치고 페이지를 휙휙 넘겼다.
잠시 그러고 서있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어.”
“왜 몰라?”
“고대어로 적혀있네.”
“고대어?”
리안은 그녀에게서 책을 건네받았다.
대충 아무데나 펼친 후 쳐다보았다.
리안은 어리둥절했다.
‘고대어? 난 우리말로 보이는데?’
희한하다는 생각을 하던 찰나 그는 깨달았다.
용언.
자신은 용언을 익혔기에 고대어가 보이는 것이리라.
‘이런.’
리사에게 뭐라고 말하지?
글자를 알아볼 수 있다고 솔직하게 말해야하나?
그녀가 안다고 해서 딱히 잘못될 것은 없었으나 자신이 용언으로 말한다는 것을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말한적이 없어 괜히 조심스러웠다.
“리사, 내 얘기 잘들어.”
“알아볼 수 있겠어?”
“아니, 책 얘기가 아니야.”
거듭 고민해본 결과 리사에게 숨길 이유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모든 것을 말해줘야지 나중에 오드리아와 만날때 충격이 그나마 덜할 듯싶었다.
오드리아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알면 크게 놀랄테니까.
“나 사실 제국말을 하나도 몰라.”
리안은 자신이 용언을 구사한다는 것을 털어놓았다.
이윽고 이야기가 끝나자 리사는 담담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리 놀랍지도 않은 모양이다.
그녀의 입가에 작은 미소만 지어져 있었다.
“재밌네. 신선하다.”
“어쩌다 배웠는지 안물어봐?”
“사실 나, 내 과거를 다 말하지 않았어. 하지만 니가 원하면 지금이라도 전부 말해줄게. 아프고 잔혹했던 과거를. 왜 미쳤는지를. 대신 너도 나한테 전부 말해줘야 해. 어디서 어떻게 용언을 배웠는지를. 그리고 지금까지 만난 여자의 숫자도.”
리안은 헛기침을 했다.
“책 보자.”
그는 첫페이지를 펼쳐놓고 일부러 소리내서 읽었다.
-부그티어력 34년 11월 8일.
오늘부터 내 삶을 기록하기로 마음먹었다.
공무로 지친 심신을 이렇게라도 달래고 싶다.
“이거 일기장 같은데?”
“계속 읽어봐.”
-부그티어력 34년 11월 9일.
아침밥을 먹고 밭에 나가보았다.
실험이 실패했다.
밭을 갈아 엎었다.
오후에는 전하께 꾸중을 들었다.
“되게 짧게 썼네.”
-부그티어력 34년 11월 10일.
실험 재료를 구하기 위해 아침 일찍 트림슨 항구로 향했다.
태풍이 와서 배가 뜰 수 없다는 소리를 들었다.
비를 흠뻑 맞은 채로 집에 돌아왔다.
오후에는 전하께 꾸중을 들었다.
-부그티어력 34년 11월 11일.
오늘도 비가 쏟아졌다.
오후에 밭에 나가보니 홍수로 논과 밭이 물에 잠기고 돼지가 물에 둥둥 떠내려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전하께 또 혼날 생각을 하니 한숨이 흘러나왔다.
내일은 아프다고 해야겠다.
-부그티어력 34년 11월 12일.
KOOO fucking satan!
리안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라? 이건 King인가?”
“왜?”
“K만 쓰고 나머지는 동그랗게 칠해놨어.”
“어떤 단어인지 밝히고 싶지 않았나보네.”
리안은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간에 이 책은 비법서가 아니라 단순 일기장 같아. 특별한게 없어.”
“기대했는데 아쉽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매일 조금씩 읽어나가보자. 쓸만한걸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일기장이 굉장히 두꺼웠으나 리안은 내심 기대가 됐다.
바닷물로 작물을 재배한다라, 고대의 농사법을 익힌 오드리아에게서도 배워본적 없는 참신한 기술이었다.
꼭 배워두고 싶었다.
이후 리안은 리사와 함께 서재를 나왔다.
에밀리가 다가와서 저녁식사 준비가 끝났다고 알려왔다.
곧바로 이어진 단 둘만의 저녁식사는 무척이나 즐거웠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특별히 마련된 둘만의 신혼방에서 휴식을 취했다.
리안은 낮에 다짐한대로 리사를 몇 차례나 천국에 보내주었다.
그렇게 아스트리드 가 저택과 오천평땅을 오가며 리사와 무려 일주일간을 꼬박 붙어지냈고, 어느덧 첫 수확의 시기가 성큼 다가와 있었다.
무럭무럭 자라난 상추와 순무가 리안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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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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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리안은 모니카와 함께 오천평땅에 와있었다.
작업복을 입고 있는 모니카가 물었다.
“거기서 했어?”
“뭘?”
“그거 했냐고. 그 여자랑.”
리안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일주일 동안 살았잖아.”
“나쁜놈!”
모니카는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쳤다.
힘이 실리지 않아 아프지 않았다.
“짜증나. 미치겠어. 답답해. 그런데 내 탓이니까 화를 낼 수도 없어.”
모니카는 여전히 리안이 리사에게 성접대를 하는 중으로 안다.
그녀의 가게를 위해서.
“그 여자 당신이 마음에 들었나봐. 계속 불러대는거 보니까. 난 속이 탄다 속이 타.”
한참을 울상을 짓던 그녀는 갑자기 실실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모니카는 언제 슬퍼했냐는듯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기왕 이렇게된 바에 우리가 그 집을 접수해버리자. 당신 꼭 그 여자랑 결혼해. 그 다음 나를 첩으로 불러들여. 나도 귀족 소리 듣고 살아보자.”
리안은 기가막힌 나머지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누가 셈 밝은 상인 아니랄까봐.
음흉하기 따로 없다.
“지금도 귀족들하고 살면서 무슨 소리야.”
“훅스 가에서 귀족 대접 받는건 어머니랑 아들들뿐이지 나는 아냐. 그 흔한 사교 모임에도 못 가봤어.”
“메건 부인께서 안데려가줬어?”
“당신이 오고 나서 전보다는 많이 나아지셨지만 여전히 나한테 쌀쌀맞으셔.”
“사람 마음이 갑자기 변하기는 어렵겠지.”
“그러니까 그 여자 삶아먹어서 결혼한 다음에 날 첩으로 불러들여. 나도 떵떵거리며 살아보게.”
“첩으로 사는게 좋아?”
“그러엄! 첩이 어때서! 사랑하는 남편과 자식 새끼 그리고 돈만 있으면 되지.”
“본처 눈치는 안보냐?”
“당신이 별채를 지어주면 되잖아. 일주일에 두 번만 본처랑 자고 나머지 5일은 나한테 와. 그러면 충분해.”
그녀가 즐겁게 웃는다.
“나한테 하녀들도 많이 붙여줘. 머리 잘하고 옷 고르는 센스가 있는 애들로.”
“그런 일이 실제로 이루어지면 그렇게 할게. 허무맹랑하지만.”
“당신이 노력하면 실제로 이루어질지도 모르지.”
모니카는 열심히 해보라면서 리안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무런 배경없는 상회보다 백작을 등에 업은 상회가 더 쑥쑥 잘 크는거 알지? 게다가 리사 아스트리드는 황실 자문단 멤버야. 식량농업정책 자문관이라고.”
그녀는 상상만으로도 즐거운지 연신 키득거리며 수다를 떨어댔다.
“리사 백작이 손만 써주면 우리 상회가 크는건 금방일거야. 그러니 잘 꼬셔봐. 피를 쪽쪽 빨아먹게. 실컷 이용해먹자!”
“관둬.”
리안은 가당치도 않다는듯이 코웃음을 쳤다.
“불순한 생각으로 아스트리드 가에 들어올거면 우선 나부터 당신을 첩으로 안받아줄거야.”
“이 씨!”
모니카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녀가 고함을 쳤다.
“너 빠졌지!”
“뭘 빠져?”
“그 여자한테 푹 빠졌냐고! 정신차려! 당신이랑 내가 같은편이야! 그 여자는 당신을 성노리개 따위로 생각한다고!”
“알아요, 알아.”
리안은 능청스러운 웃음을 지으면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밑으로 손을 뻗어 엉덩이를 주물럭 거렸다.
“만약 아스트리드 가에 들어가면 첩으로 받아줄테니까 걱정마.”
그럼에도 모니카는 계속 씩씩 거렸다.
첩으로 안받아준다는 말이 괜스레 서운했던 모양이다.
“내가 그 여자보다 당신을 먼저 만났고 우린 계약서도 있어. 앞으로 6년동안 절대 나한테 벗어날 수 없는 계약서 말야. 따라서 편을 들어주려면 내 편을 들어줘야지 감히 그 여자 편을 들어? 상회고 뭐고 다 때려치울거야! 그년이랑 헤어져! 헤어지라고!”
화가 나서 괜히 하는 빈 말이다.
리안은 그녀가 상회를 절대 접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거상이 되는게 그녀의 꿈이기 때문이다.
그 야망이 얼마나 대단하냐면,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랑 바람을 피워도 사업의 성공을 위해 눈 감아줄 정도니 말 다했다.
“저기 온다.”
문득 짐마차를 타고 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오늘은 손꼽아 기다려온 수확의 날.
원래는 상추의 수확시기가 일주일 더 빨랐으나 순무의 성장이 의외로 빨라져서 둘의 수확시기가 겹쳤다.
야네트, 히메나, 케이로스, 베라까지 김리안 상회의 점원들이 총출동했다.
“회장님! 모니카!”
케이로스가 모는 짐마차의 짐칸에 타고 있는 세 여성이 밝게 손을 흔들었다.
수확 일을 돕기 위해 모두 작업복차림이다.
리안과 모니카도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어서와!”
“잘왔습니다!”
개의 환영을 비추고 있던 허수도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돌쇠는 오늘 수확한 채소들을 짐마차에 실어나르는 운반역을 맡았다.
폰타나도 일을 도울 예정이다.
현재 그녀는 쫓기는 처지였으나 리안은 굳이 사람들한테 숨길 필요성을 못느꼈다.
김리안 상회의 점원들은 한 가족이니까.
그들을 믿었다.
폰타나도 하루종일 비좁은 오두막에만 갇혀있으면 답답할 것이다.
그래서 일은 적당히 해도 되니 나와서 바람이라도 쐬라고 했다.
“이 켄타우로스는 설마……?”
짐마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제일 먼저 폰타나한테 관심을 보였다.
모니카가 나서서 적당히 둘러대자 다들 이해가고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그와중에 야네트는 광활한 밭을 둘러보고 욕설을 내뱉었다.
“씨발 오지게 넓네. 퉷.”
다른 사람들은 폰타나에 이어 돌쇠에게도 큰 관심을 보였고 향단이와 허수에게도 다가가 한번씩 쓰다듬어주며 귀엽다고 요란을 떨어댔다.
그런식으로 간단히 인사를 끝마치고 본격적인 작업에 앞서 리안은 순무와 상추 뽑는 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순무는 잎이 약해서 위에서 잡아당기면 잎만 뜯겨요. 그러니 한 손은 줄기의 밑을 잡고 다른손으로는 순무를 감싸잡고 뽑아야 합니다.”
리안은 먼저 시범을 보였다.
허리를 굽히고 아주 능숙하게 뽑아냈다.
“이렇게 하는겁니다. 각자 해보세요.”
뽑아낸 순무를 바닥에 내려놓고 한 사람씩 봐주러 돌아다녔다.
모니카는 잎만 뜯겼다.
그녀가 울상을 짓는다.
“아, 왜 안되는거야.”
“잘 봐. 이렇게 해야돼.”
리안은 그녀의 손을 잡고 같이 뽑아주었다.
깨끗하게 잘 뽑혀나왔다.
“느낌 알겠어?”
“어! 내가 한번 해볼게!”
모니카가 혼자 도전해본다.
그녀는 이내 말끔하게 순무를 뽑아냈다.
“아싸!”
한 손에 순무를 들고 깡총깡총 뛰면서 신나했다.
“좋아, 합격! 바로 시작해!”
“맡겨줘!”
리안은 다음 사람을 가르치러 자리를 이동했다.
자신을 제외하고 유일한 남자인 케이로스한테 가봤다.
그는 벌써 척척 뽑아내는중이었다.
많이 해봤는지 별 어려움 없이 뽑아냈다.
“잘하시네요.”
“뭐 이런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죠.”
“왔다갔다 하려면 피곤하니까 너무 힘빼지마요. 살살하세요.”
“이동하면서 쉬면 됩니다.”
케이로스는 오늘 오천평땅과 황도를 두 세 번 오가야한다.
짐마차의 짐칸에 순무가 가득 실리면 그것을 싣고 김리안 상회의 창고에 하차한 뒤 다시 이곳으로 와야했다.
참고로 현재 가용가능한 짐마차는 모니카가 소유한 짐마차와 케이로스가 소유한 짐마차 단 두 대뿐이었다.
“혼자서 잘하시니 가르칠게 없네요. 옆사람한테 가보겠습니다.”
“고생하십시오.”
케이로스 다음으로 그 옆에 있던 베라에게 다가갔다.
남편인 케이로스처럼 그녀 역시 순무를 쑥쑥 뽑아댔다.
“많이 해본 솜씨네요?”
“집에서 많이 뽑아봤거든요.”
“무농사 지었어요?”
“어릴때 부모님이 지으셨어요.”
리안은 웃는 표정으로 베라가 하는 것을 잠시 지켜봤다.
그녀는 꼼꼼하고 일솜씨가 좋았다.
딱히 지적할 점이 없었다.
“뽑은건 바닥에 놔두세요. 돌쇠가 알아서 옮길겁니다.”
“골렘이란걸 오늘 처음봤어요. 정말 신기해요.”
“저도 처음 봤을때 신기했어요. 그럼 계속 수고해주세요. 다음 사람한테 가보겠습니다.”
“네.”
베라에 이어 히메나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투덜투덜대면서 뽑는데 애를 먹고 있었다.
“존나게 안뽑히네.”
무잎사귀들이 뜯겨진 채 주변에 널브러져 있었다.
순무는 땅속에서 나올 생각을 안했다.
“빌어먹을, 이놈도 그러네 씨입……”
“잘 안되요?”
“어머!”
욕설을 뱉으려던 히메나가 깜짝 놀란다.
“회장 님!”
그녀는 리안을 보더니 금세 얼굴이 붉어지며 어쩔줄을 몰라했다.
남자만 보면 긴장한다더니 그래서 그런 듯싶었다.
리안은 웃으면서 시범을 보였다.
“이걸 잘 뽑으려면 이렇게 해야합니다.”
쑥!
조금전까지 안뽑히던 순무가 아주 시원하게 뽑혀져 나왔다.
히메나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좋아라했다.
“멋지세요!”
“다시 가르쳐줄테니 쪼그려 앉아봐요.”
“네……?”
“어서요.”
리안이 쪼그려 앉자 그녀도 수줍어하며 쪼그려앉았다.
“손 줘봐요.”
리안은 그녀를 마주보고 앉은 채 손을 잡았다.
그가 덥썩 잡자 히메나가 움찔거린다.
“이 손은 여기에 놓고, 저 손은 여길 잡으면 됩니다. 제가 손을 뗄테니까 혼자서 뽑아보세요.”
“떠, 떨려……”
히메나는 얼굴이 시뻘개진 채로 안절부절 못했다.
리안은 손을 떼고 말했다.
“해봐요.”
“네?”
“뽑아 보세요.”
“예? 뭐, 뭘요?”
“이거요 이거. 지금 잡고 있는거요.”
“아, 아, 맞다. 이거…… 어, 어떡하면 된다고요?”
“확 잡아당겨보세요.”
“네, 으읏!”
그녀가 힘을주며 뽑으려고 하는데 잘 안된다.
계속 낑낑거렸다.
“왜 안되지…… 내가 연약해서 그런가……?”
그녀가 울상을 짓는다.
그러자 모니카가 냅다 달려와 그녀의 등짝을 후려쳤다.
“내숭 떨지마 이년아!”
짝!
“꺄악!”
히메나는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찡그렸다.
“아우 저 씹년이. 등 따가워 죽겠네.”
“이년 힘 엄청 좋아. 속지마.”
“야! 나도 니 과거 죄다 까발려볼까? 같이 죽자 이거지?”
“까봐, 까보라고.”
“진정해요 히메나. 모니카, 당신은 빨리 일하러 가.”
리안은 모니카를 멀리 떨어뜨려놓고 히메나에게 미소지었다.
“가르쳐줬으니 혼자서 잘 할 수 있겠죠?”
히메나는 머리를 귀뒤로 쓸어넘기며 수줍어했다.
“저기…… 모니카 저년이 한 말은 믿지마세요. 저 그렇게 힘센 여자 아니에요.”
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그럼 수고하세요.”
히메나에 이어 다음은 야네트였다.
야네트는 무잎줄기를 잎에 물고 열심히 뽑아대는 중이었다.
상의를 바닥에 벗어놓고 가슴골이 보이는 속옷만 입고 있었다.
“쌀쌀한데 안추워요?”
그렇게 묻자 야네트가 씨익 웃었다.
“더워서 팬티까지 벗으려다 참았다.”
혼자서 킥킥 웃더니 다시 허리를 숙이고 순무를 뽑았다.
일을 잘해서 따로 가르칠 것은 없어보였다.
리안은 폰타나에게 향했다.
폰타나 곁에는 향단이가 날아다니는 중이었다.
그녀에게 털이 있어서 그런지 파리처럼 날개 달린 벌레들이 자꾸 그녀의 몸에 달라붙었다.
향단이가 벌레들을 잡아주고 있었다.
“다리는 괜찮아?”
폰타나에게 다가가 묻자 그녀가 싱긋 미소를 짓는다.
“덕분에 많이 나아졌다.”
“무리하지 말고 쉬어가면서 해.”
“모두 고생하는데 나만 쉴 수 없지. 난 걱정마라. 이래봬도 전사 출신이다. 다리 하나가 아프면 세 발로 일하면 된다.”
“그러다 다리만 더 안좋아진다니까.”
그때 폰타나의 꼬리쪽에 있던 향단이가 잽싸게 날아왔다.
“르리!”
죽은 날파리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것을 자랑스럽게 내밀어보이며 신나게 떠들어댔다.
“르리리!”
“헉, 벌써 다섯마리나 잡았다고? 대단한데?”
“르리!”
“벌도 있었어? 그래서 죽였어?”
향단이는 고개를 저었다.
“르리!”
“쫓아냈다고? 잘했어. 벌한테 침 쏘이면 큰일나.”
“르리~”
향단이와 잡담을 나누면서 리안은 웃었다.
그리고 일을 하기 위해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자리를 잡자 그는 예사롭지 않은 손놀림으로 순무를 빠르게 뽑아나가기 시작했다.
일하는 중간중간 모니카와 야네트가 언제 다 뽑냐고 푸념했지만, 작업은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두 시간만에 짐마차의 짐칸을 가득 채웠다.
그 즉시 케이로스는 아내인 베라와 함께 짐마차를 끌고 농지를 떠났다.
“다녀오겠습니다!”
“조심히 갔다와요!”
“돌아오면 점심때겠네!”
남은 사람들은 잠시 휴식을 가졌다.
다들 나무밑 그늘에 모여앉았다.
“하, 피곤해.”
모니카는 지친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논길을 달리는 짐마차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녀의 입가에 뿌듯한 미소가 걸렸다.
“몸은 힘들어도 저걸 보니 기운이 나네. 내일 열심히 팔아야지.”
“야, 점심 뭐줄거야?”
옆에서 쉬고 있던 야네트가 배를 어루만졌다.
“맛 없는거 주면 도망갈거야.”
“염려마. 니들 때문에 식재료 사느라 큰돈 나갔다.”
“저번처럼 고기 사왔어?”
“몰라 이년아. 밥 먹을때 봐.”
근처에 앉아있던 리안이 야네트를 돌아보면서 미소지었다.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요.”
“또 신기한 요리야?”
야네트의 표정이 급 밝아진다.
“잘생긴 회장님아. 지난번처럼 맛있으면 보답으로 내가 대딸 쳐줄게. 손으로.”
“지랄하고 있네 미친년.”
모니카는 어처구니 없다는듯 헛웃음을 터뜨리면서 자신의 어깨를 툭툭 때렸다.
“오늘 새벽에 일어나서 그거 만드느라 죽을뻔했어. 내가 니들보다 더 피곤해.”
먼 곳을 무심코 바라보던 그녀의 눈이 커졌다.
“어? 저거 혹시 아스트리드 가 마차 아니야?”
리안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저 멀리 화려한 마차 한 대와 말을 탄 케스티리아가 보였다.
분명 리사가 오고 있었다.
‘오늘 수확한다고 말했는데 연락도 없이 웬일이지?’
리안은 절로 반가운 미소가 지어졌다.
‘잘됐다. 리사한테도 먹여야겠어.’
점심식사로 야심차게 준비한 지구식 요리.
모두의 소감이 어떨지 벌써부터 기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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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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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안은 큰길로 나가서 리사를 마중했다.
말 위에 앉아있던 케스티리아가 즉시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녀는 머리를 숙이며 정중히 인사를 건네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리안 님.”
“예, 어서 오세요.”
에밀리가 마차에서 내리며 손을 흔들었다.
“리안 님!”
“여긴 어쩐 일입니까?”
“리사 님한테 물어보세요!”
리사가 마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깔끔한 흰 바지에 장화를 신고 있었다.
“리사.”
리안이 다가가자 그녀의 도도했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많이 뽑았어?”
“말도 없이 웬일이야?”
“우리가 연락을 해야만 만나는 사이였나?”
리사는 리안을 올려다보며 땀으로 젖은 그의 머릿결을 매만졌다.
“땀 흘린 모습도 멋있네.”
“일하느라 같이 있을 시간도 없어.”
“알아. 구경하러 왔어.”
“심심할텐데 괜찮겠어?”
“안심심해. 니가 있는데 왜 심심해?”
그녀는 웃으며 그를 껴안았다.
“바라만보고 있어도 재밌는데.”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야네트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저거 뭐야. 회장 님한테 애인있었어?”
모니카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어쩌다 보니 생겼어.”
“회장 님 좆 빨아주면서 꼬시려고 했는데 망했네.”
“미친년.”
히메나가 자지러지게 웃었다.
“이 상황 뭐야. 진짜 웃긴다. 모니카랑 회장님이랑 분위기가 좋길래 둘이 벌써 잔줄 알았는데 반전이 있었네.”
“이년 원래 호구잖아.”
“그만해라 니들.”
모니카가 열받는다는듯 입으로 바람을 불어 제 앞머리를 날렸다.
“니들 모르는 사이에 나도 회장 님이랑 할거 다 했그등?”
“잤어?”
“말하는투 보니까 잤나본데?”
모니카는 양허리에 손을 집고 자랑스럽게 떠벌렸다.
“그래, 잤다.”
그녀는 야네트와 히메나에게 그동안 리안과 있었던 일을 전부 이야기했다.
그의 페니스 길이와 굵기가 어떻고……
잠자리 기술이 어떻고……
하룻밤 동안 최고 많이 했던 횟수가 얼마고……
장소불문하고 여기저기서 했다며……
리사와 포옹한 리안에게 질투가 나기도 하고 친구들에게 호구 소리 듣는게 싫어 다 말했다.
“진짜……?”
“어쩐지 잘 할 것 같더라.”
야네트와 히메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리안에게 과대한 환상을 품었다.
“벗은 몸 한 번 보고 싶다.”
“부럽다, 이년아.”
“시끄러워. 내가 방금 한 말 회장 님 귀에 들어가면 니들 다 죽을줄 알아.”
얼마 후 휴식이 끝나자 리안과 여자들은 작업을 재개했다.
리사는 전망 좋은 곳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그곳에 앉아 리안만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리고 모니카와 야네트, 히메나의 손놀림은 처음할때보다 제법 빨라졌다.
열심히 뽑고 또 뽑다보니 어느새 짐마차의 짐칸이 반절이나 채워졌다.
‘슬슬 올때가 됐는데.’
곧 점심시간을 앞두고 리안이 중얼거렸다.
이른 아침 저택을 나올때, 오늘 새벽에 만들어놓은 음식을 훅스 가 하인들에게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이미 완성되어 있었기에 따로 조리할 필요가 없었다.
“리안 님 식사 가져왔습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하인들이 마침내 수레를 끌고 나타났다.
리안은 하던 일을 멈추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같은시각 훅스 가 저택.
메건 부인이 식당에서 홀로 식사중이었다.
그녀는 숟가락 위에 놓인 음식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보리밥 위에 연어살이라니…… 처음 보는 음식이야.”
맛있으려나?
보지도 듣지도 못한 음식을 리안이 먹어보라며 오늘 아침에 두고 갔다.
그러나 메건 부인은 여태 자라오면서 연어를 생으로 먹어본적이 없다.
날 것을 먹는 문화는 야만인들이나 하는 짓.
솔직히 그녀는 불결하고 메스꺼운 기분이 들어 먹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예뻐하는 청년인 리안이 만들었다 하니 안먹기도 또 그렇다.
먹어보고 맛이 어땠는지 그와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
“킁킁.”
작게 뭉쳐진 보리밥 위에 올려진 연어살의 냄새를 맡아보니 신선함 그 자체다.
주황색 살결과 사이사이 선명하게 드러난 새하얀 마블링을 보아하니 시각적으로도 매우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한번쯤 경험삼아 먹어보는 것도 좋겠지.”
그녀는 과감히 입안에 넣었다.
조심스레 씹어보니 연어살이 아주 탱탱하고 쫄깃했다.
의외로 식감이 좋다.
게다가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하고 달기까지했다.
메건 부인의 눈이 커졌다.
‘괜찮은데……? 전혀 비리지 않아. 그런데 좀 느끼한 듯싶기도 하고……’
그 순간 기다렸다는듯이 입안에서 알싸하게 톡 쏘는 맛과 향이 느껴졌다.
“콜록!”
그녀는 가볍게 기침을 하며 향신료 하나를 떠올렸다.
‘호스래디시잖아?’
귀족들이 먹는 요리에 자주 사용되는 향신료였다.
호스래디시의 매운맛이 연어의 느끼한 맛을 제대로 잡아주었다.
입안에 든 음식물을 천천히 씹어먹는 메건 부인의 입가에 자기도 모르게 미소가 그려졌다.
‘식재료의 궁합이 좋네. 맛있어. 고기도 부드럽고.’
담백하고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여자들의 입맛에 딱 맞는 음식이었다.
먹기도 간편해서 손으로 찢거나 혹은 기름이 묻거나 땀을 흘릴 일도 없다.
작아서 품위있게 먹기 좋았다.
메건 부인은 하나를 다 먹고는 금세 하나 더 입안에 넣었다.
‘보리밥에 연어, 호스래디시 조합이라……’
어떻게 이런 요리를 생각해냈을까?
리안의 재주에 그녀는 감탄했다.
정말이지 못하는게 없는 사랑스러운 남자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 * *
하인들이 갈대를 엮어 만든 돗자리를 펼쳤다.
돗자리 가운데에 보자기가 덮인 동그란 쟁반 세 개를 내려놓았다.
리안은 손뼉을 치며 밭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자자 모두 모여주세요! 식사합시다 식사!”
근처에 있던 리사도 불렀다.
다들 배고팠는지 순식간에 달려왔다.
리안, 모니카, 야네트, 히메나, 폰타나, 허수, 향단이까지.
보자기가 덮인 쟁반 세 개를 가운데 두고 모두 동그랗게 둘러앉았다.
리사와 에밀리, 케스티리아는 리안의 뒤에서 멀뚱히 서있었다.
“맛있게 드셔주세요.”
리안은 환하게 웃으며 보자기를 치웠다.
보리밥을 감싼 연어 초밥이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이 일제히 신기하게 쳐다봤다.
쟁반마다 연어 초밥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쟁반 세 개를 모두 합쳐 300피스는 족히 넘었다.
양은 그야말로 푸짐했다.
야네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 이게 뭐야?”
그녀는 별것 없어보이는 음식에 실망한 듯했다.
히메나는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날고기 잖아?”
리사를 비롯해 에밀리, 케스티리아도 희한하게 쳐다봤다.
“…생연어살?”
“마족들이 좋아하겠네요. 맛있겠다.”
“리안 님의 몸매 유지 비결은 설마 생연어인가?”
폰타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시, 신선한 고기. 빨리 먹고 싶어……”
허수는 근처에서 기웃거렸다.
“나도 하나 주면 좋겠다, 주인.”
향단이는 호기심 어린 눈길로 날개를 접고 쟁반 앞에 서있었다.
“르리?”
새벽에 리안과 같이 초밥을 만들었던 모니카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얼른 먹어봐. 이거 진짜 맛있어.”
먼저 먹어봤다고 행동에 거리낌이 없다.
그녀는 주저없이 손을 뻗어서 초밥을 집어먹었다.
야네트랑 히메나가 그녀를 신기하게 바라봤다.
“날것인데 먹어도 돼?”
“맛있어?”
“내가 다 먹기 전에 빨리 먹는게 좋을걸?”
리안이 웃으며 거들었다.
“어제 잡은 연어로 만들었습니다. 다들 드셔보세요.”
“생선을 생으로 먹어도 돼?”
“회 뜬지 반나절 정도 밖에 안지나서 아직 신선해요. 배탈날 우려는 없습니다.”
“아니, 배탈은 둘째치고 당최 이런걸 먹어본적이 없어서……”
야네트는 뒷목을 긁적이며 말끝을 흐렸다.
그에 비해 히메나는 눈을 딱 감고 입안에 던져 넣었다.
“으윽……!”
누가 강제로 먹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벌벌 떨며 씹던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 제기랄! 뿅갈 정도로 맛있어! 콜록! 콜록! 근데 왜 맵지?”
“매운 향신료가 조금 들어갔어요.”
“아!”
리안의 말에 그녀는 연거푸 기침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매운데 맛있어요 회장 님!”
“맛있다고……?”
히메나를 지켜보던 야네트도 용기를 내어 초밥을 입에 가져갔다.
조심조심 씹던 그녀는 기침을 한번 하더니 이내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고기가 달어! 맨날 훈제만 먹었는데 훈제보다 더 맛있네 씨발!”
“야네트. 욕 좀 안하면 안되겠니?”
모니카가 우물우물 씹으면서 말하자 야네트는 그딴건 중요한게 아니라는 표정으로 연어 초밥을 마구 먹어대기 시작했다.
“회장 님아! 나 이따 만드는 법 알려줘! 맛 죽이네!”
“여기 포도주도 있으니까 목 안막히게 같이 드세요.”
리안이 그녀에게 포도주병을 건네주자 그녀는 벌컥벌컥 들이마시고 다시 초밥을 빠르게 집어먹었다.
“끝내준다!”
야네트가 감탄하는 사이, 리안은 작은 접시 세 개에 초밥을 따로 담았다.
뒤에 서 있던 리사와 에밀리, 케스티리아에게 초밥이 담긴 접시를 하나씩 건네주었다.
“먹어봐.”
리안은 리사를 마주보며 웃었다.
“맛이 어떤지 말해줘.”
“남편이 해준 요리를 먹게 될줄은 몰랐네. 고향에선 다들 이래?”
“응. 남자들이 요리 많이해.”
“신기한 곳이네.”
리사는 담담하게 초밥을 입에 넣었다.
“으음. 식감이 굉장히 쫀득쫀득하고 부드럽네.”
“숙성이 잘돼서 그래. 그리고 원래는 쌀밥으로 해야하는데 구하기 어려워서 보리밥으로 대체했어. 그 점이 조금 안타까워.”
“나는 처음 먹어서 그런지 보리밥도 괜찮은 것 같아.”
담백하게 고소한데다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살살 녹아내리면서 목구멍속으로 훌렁 넘어갔다.
“엣취!”
“괜찮아?”
“매워.”
“호스래디시라고 매운 향신료가 들어갔어.”
“연어의 느끼한 맛을 잡아줘서 좋네.”
리사는 곧바로 하나를 더 집어먹었다.
호들갑스러운 리액션은 나오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러는 것이 그녀다웠다.
“내 남편, 요리 잘해서 좋다. 다음엔 내가 해줄게.”
“기대할게.”
리안은 그녀가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에밀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접시에 놓인 초밥을 벌써 절반이나 먹어치웠다.
양볼이 볼록해져서는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
“얼마만의 생식인지 모르겠네요.”
“평소에 생식을 좋아하나 보죠?”
“당연하죠! 그런데 날 것을 먹으면 악마나 야만인이라고 욕지거리를 해대서 눈치보느라 못 먹었어요.”
“누가요?”
“이 나라 귀족들이요.”
“아하……”
앞으로 초밥을 만들때 조심해야겠구나.
그런 사정이 있음에도 먹어주는 사람들이 고마웠다.
“먹고 또 드세요.”
“네!”
다음으로 케스티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직 하나도 입에대지 않았다.
접시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는데, 마치 연어초밥과 눈싸움을 하는 것처럼 진지한 표정이었다.
‘리안 님께서 멋진 몸매를 만들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이 녀석 때문이었나? 좋아, 나도 뒤쳐질 수 없지.’
전부 먹어치우기로 작심한 그녀는 초밥 두 개를 한꺼번에 입안에 넣었다.
리안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하나씩 드시지. 목 안막혀요?”
케스티리아는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괭창듭니다. 마싱네용.”
입안에 음식물이 가득 들어있어서 발음이 좋지 못했다.
리안은 웃으며 사람들이 모여앉은 곳으로 돌아갔다.
야네트와 히메나가 초밥맛에 눈을 뜨더니 그 많던 초밥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었다.
모니카는 천천히 좀 먹으라고 그 옆에서 투덜댔다.
그 와중에 폰타나는 알아서 잘 집어 먹고 있었다.
허수는 폰타나가 하나씩 바닥에 놔두는걸 슬렁슬렁 기어와 액체로 덮치듯 주워 먹는중이었다.
향단이는 입이 작아서 초밥을 아주 작게 썰어줘야했다.
리안이 작은 칼로 썰어주는 족족 르리~ 르리~ 거리면서 맛있게 집어먹었다.
‘점심 메뉴를 초밥으로 하길 잘했어.’
초밥은 회를 써는 것 말고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치 않아 선택한 것이었는데 결과가 매우 만족스러웠다.
소스로 쓰인 호스래디시는 겨자과의 식물이었고 시장에서 구하기가 쉬웠다.
아무튼, 지난번 삼겹살에 이어 오늘 초밥까지 다들 잘 먹어주니 기분이 좋았다.
사람들이 접해보지 못한 요리를 또 해주고픈 욕심이 새록새록 피어올랐다.
‘다음에는 또 뭘 만들어줄까……?’
불을 써서 조리를 해야되는 복잡한 요리는 못한다.
쉽고 간편한 자취생 요리만 가능할뿐.
‘계란으로 뭐 맛있는거 못만들려나?’
잠시 후 황도에 다녀온 케이로스와 베라도 합류했다.
두 사람 역시 생전 처음 먹어보는 연어초밥을 보고 당황했으나, 곧 맛을 보더니 엄지를 척 추켜세웠다.
“식감이 끝내주네요! 살이 두툼해서 씹는 맛이 있습니다!”
“전 부드럽고 달아서 좋아요.”
그렇게 즐거운 점심식사가 끝나고 다시 수확이 시작되었다.
* * *
“에밀리.”
점심식사후 나무 그늘 밑에서 따분하게 앉아있던 리사.
그녀는 현재 열심히 순무를 뽑고 있는 폰타나를 유심히 바라보는 중이었다.
에밀리는 나른한 표정으로 배부른 배를 문지르며 다가왔다.
“하실 말씀있으세요?”
“저기 있는 켄타우로스 말야. 아무리 생각해도 며칠전 황도에서 도망쳤다는 그 켄타우로스 같은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
“맞아요. 그 켄타우로스.”
에밀리에게서 즉답이 흘러나왔다.
“전 아까부터 알고 있었는데, 리사 님도 아시는 줄 알고 일부러 아무말 안했죠.”
폰타나의 소유주였던 노예상인은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거리에 벽보를 붙여 아직도 그녀를 찾고 있었다.
켄타우로스 사이에서도 폰타나는 워낙 고귀한 존재였기에 그 값어치가 대단했다.
팔아서 벌 돈을 생각하면 도망갔다고 해서 쉽게 잊을 일이 아니었다.
노예상인은 귀족들과도 연줄이 꽤 닿아있었기에 도망간 켄타우로스에 관한 소문은 황궁에도 흘러들어와 나름 화제가 되고 있었다.
“멋대로 생각하지마. 알 것 같아도 얘기를 했어야지.”
“설마 저 켄타우로스의 일에 끼어드시려고요?”
“이미 내 일이야.”
리사는 그렇게만 말하고 케스티리아를 불렀다.
밭일하는 리안의 몸을 지근거리에서 훔쳐보던 그녀가 잽싸게 뛰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케스티리아, 지금 황도에 다녀와.”
케스티리아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황도에 말입니까?”
한편, 초밥 덕분에 다들 힘이 나는지 속도가 오전보다 훨씬 빨랐다.
노을이 지기도 전에 수확을 끝마쳤다.
이후 수확물은 리안과 케이로스가 두 대의 짐마차를 가지고 열심히 실어날랐다.
그러면서 리안은, 몇 달 전 모니카와 계약할때 그녀에게 요구한대로 수확물중 2할은 자신이 챙겼다.
그 2할로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라카제트를 만날 생각이었다.
부디 우마족 소녀의 입맛에 맞길 바라면서.
이윽고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자 마침내 모든 작업이 끝났다.
황도의 창고는 갓 수확한 순무와 상추로 절반이 들어찼다.
창고가 절반 정도 차있는 모습은 상회를 설립한지 처음있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전원 창고앞에 모여 손뼉을 마주치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만세!”
“김리안 상회 만세!”
그날 밤.
모두 창고에서 잠이 들었다.
피곤했지만 아무도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한시도 쉴 틈이 없었다.
채소는 신선함이 생명.
다음날 새벽에는 배송을 해야했다.
즉, 내일은 김리안 상회의 채소가 드디어 세상에 나오는 날.
리안과 모니카를 비롯해 점원들은 저마다 행복한 꿈을 꾸며 빨리 내일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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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리아는 농한기에 만납니다
6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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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도 브라간스트.
노예시장.
거리는 노예를 파는 상인들과 구매하려는 사람들로 생기가 넘쳐났다.
최근 마족의 활동이 잠잠해지면서 전투는 확연히 줄어들었으나 노예시장은 여전히 호황기를 맞고 있었다.
노예상인들의 얼굴에선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단 한 사람만 제외하고.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이 망할 치안대놈들은 지금이 며칠째인데 못찾는거야!”
노예상인 론스는 책상앞에서 왔다갔다하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며칠전 도망친 암컷 켄타우로스.
그 계집을 사오는데 무려 500골드를 들였다.
무리한 지출이었으나 그만큼의 값어치가 있었다.
한눈에 봐도 남다른 켄타우로스였으니까.
듣기로는 켄타우로스족 공주의 호위무사였다고 한다.
사람보다 아름다운 미모하며 흔히 보기 힘든 붉은 머리칼, 백마처럼 하얀 몸통의 털에서 윤기가 좔좔 흐르는 것이 일반 켄타우로스와는 종자가 남달랐다.
평생 살면서 한 번 볼까말까한 켄타우로스였다.
그렇기에 500골드에 사서 3000골드 이상에 되팔려고 했건만!
“흐윽……! 내 돈! 내 도온……!”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1년이 뭐야 3년, 5년, 10년이 지나도 계속 찾아다닐 것이다.
“두고 보자. 꼭 찾고야 말 것이다!”
감히 내 손에서 도망치다니 괘씸한 년!
론스는 서둘러 외투를 챙겨입었다.
안되겠다.
이 게으르고 느려터진 치안대놈들 같으니!
또다시 찾아가서 닥달을 해야겠다.
요즘 반나절은 치안대 본부에서 소리치는게 일과였다.
“조레비치 이 똥꼬에 막대기를 꽂아도 시원찮을 새끼! 화를 안내면 도무지 일을 안해!”
치안대 본부를 뒤집어 엎을 생각으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조수가 급히 달려왔다.
“나리,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요.”
“니가 상대해! 잠시 나갔다오마!”
“며칠전 도망친 켄타우로스를 사러오셨다는뎁쇼?”
“뭐!?”
론스는 귀를 의심했다.
“물건이 없는데 어떻게 사?”
“그, 그게……”
조수의 말을 들어보니 도망친 켄타우로스를 노예신분에서 해방시켜줄 목적으로 찾아왔다고 한다.
즉 지금 어딨는지도 모를 켄타우로스를 건네받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였다.
노예문서만 내놓으라나?
“이런 행운이 있나! 어서 들어오시라 해라!”
돈만 받으면 그 암컷 켄타우로스 따위 어디가서 뒈지든 말든 신경 안쓴다.
론스도 투자한 돈이 아까워서 잡으러 다닌 것이지 하다못해 원금만 회수해도 미련 없었다.
그는 기뻐하며 즉시 손님과 만났다.
“여기 앉으십시오.”
자신을 ‘K’ 라고만 밝힌 상대는 검은 로브로 온몸을 감싸고 그와 마주앉았다.
상대가 정체를 감추든, 노예를 사는 목적이 불순하든, 노예시장 세계에선 딱히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론스는 돈만 받으면 그만이었다.
“도망친 켄타우로스를 사시러 왔다고 들었습니다.”
“얼마에 팔지?”
후드를 깊게 눌러 쓴 K에게서 씩씩한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론스는 짐짓 고민하는척 턱을 어루만졌다.
“워낙 고귀한 품종이라서 말입니다. 따로 가격을 책정하진 않았습니다. 먼저 말씀줘보시지요.”
“10골드.”
“예에!?”
론스는 기가막혀서 책상을 내려칠뻔했다.
“하하, 최소 3천 이상은 주셔야……”
“번거롭게 굴지말고 진작에 속내를 밝히면 좋았잖나.”
K는 들고온 자루에서 금괴 15개를 꺼내 책상에 올려놓았다.
깎아달라는 소리도 없었다.
그녀는 아주 깔끔하게 론스가 요구한 금액을 지불할 의도를 내비쳤다.
“허걱……!”
론스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휘황찬란한 금빛을 자랑하는 금괴에 눈이 부셨다.
“제국 공인 금괴다. 총 열다섯덩이면 금화 가치로 3천골드가 조금 넘을 것이다. 어떤가?”
“헉……!”
론스는 눈을 휘둥그레떴다.
더는 흥정할 것도 없었다.
그는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낼름 받아먹었다.
“좋습니다! 거래하지요!”
이후 론스는 도망친 켄타우로스와 관련된 모든 노예서류를 K에게 넘겼다.
K는 가게를 떠나기전 론스에게 말했다.
“오늘 이후로 그 켄타우로스에 관한 소문이 나돌지 않았으면 하네. 뒤처리까지 말끔하게 해주길 바라.”
“당연히 해드려야지요! 지금 당장 치안대로 달려가겠습니다! 염려놓으십시오!”
론스는 K가 떠나자 치안대 본부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그곳에서 치안대 기사들에게 힘차게 선언했다.
“켄타우로스 찾는 일을 멈춰주시오! 이제 볼일 없소이다!”
* * *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한 모니카는 기존 상회들의 텃세로 거래처를 뚫기가 쉽지 않았다.
따라서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인맥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인맥이 아닌 메건 부인의 인맥.
덕분에 김리안 상회의 채소는 주로 귀족들에게 팔려나갔다.
대표적으로 헬렌 부인의 남편 조레비치가 치안대장으로 있는 치안대 본부 식당.
그리고 안젤라 부인의 남편이 고위 신관으로 있는 빛의 신전 식당.
이 두 곳이 순무와 상추를 가장 많이 사갔다.
“여기 구석에 놔주세요.”
“네.”
새들이 지저귀는 이른 아침.
리안은 짐마차에 순무와 상추를 가득 싣고 케이로스와 함께 에스메랄다 신전에 와있었다.
“영차!”
두 사람은 여사제가 지정해준 장소에 순무와 상추를 차곡차곡 쌓아나갔다.
주방일을 전담하는 여사제들은 주방 구석에 쌓여가는 순무와 상추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거 순무 맞아요? 진짜 크다.”
“되게 싱싱해. 그냥 생으로 먹어도 맛있겠어요.”
“상태가 너무 좋다. 앞으로 여기랑만 거래해야겠는데?”
“첫거래라서 일부러 품질 좋은 것만 갖다준게 아닐까?”
한 여사제가 상추를 뜯어 먹어보더니 손뼉을 쳤다.
“달고 맛있어!”
“그래?”
“안써?”
“하나도 안써. 달아.”
여사제들이 우르르 달려가서 저마다 한입씩 뜯어먹는다.
“어머, 이걸로 샐러드 해먹으면 진짜 맛있겠다.”
“잘 키웠다. 잘 키웠어.”
“오늘 점심은 상추랑 순무를 이용해 볼까요?”
“스튜랑 튀김으로 먹어봅시다. 맛이 어떨지 궁금하네요.”
어느덧 시간이 지나 리안이 마지막 순무를 쌓아올렸다.
“끝났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절 따라오십시오.”
리안은 신전의 총무를 담당하는 중년 남성 튀르난 대사제를 따라 어떤 방으로 들어갔다.
튀르난 대사제는 방안에서 리안에게 일시불로 대금을 치뤘다.
40골드가 넘는 돈을 받은 리안은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감사합니다.”
“혹시 안젤라 부인께 말씀 들으셨나요?”
“아, 신전 밭 좀 봐달라는거요?”
“오늘 봐주실 수 있으십니까?”
튀르난 대사제가 인자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리안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봐드릴게요. 밭이 어디죠?”
몇주전 안젤라 부인에게 도르긴 마사지를 해줄때 그녀에게 부탁 받은 일이 있었다.
“우리 남편 신전에 방문해줄 수 있어요? 농사가 잘 안되서 골치를 썩고 있어서요. 와서 한번 봐줘요.”
“죄송하지만 저도 제 밭을 돌봐야해서 지금 당장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당시 일이 바빠서 거절했는데, 이후에도 계속 미루기만 하다가 오늘 채소를 팔러 온김에 밭상태를 봐줄 생각이었다.
사실 얼마전 안젤라 부인이 김리안 상회에 찾아와 모니카에게 채소 납품을 의뢰하면서 재차 요청했다고 한다.
“채소 사줬으니까 리안 씨에게 신전 밭 좀 봐달라고 말해줘요. ”
이런 이유로 이번만큼은 거절 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반드시 안젤라 부인의 요청을 들어줘야만 했다.
그래야 다음에도 신전에 채소를 납품할 수 있을테니까.
“여기입니다.”
“네.”
리안은 대사제 옆에 나란히 서서 농지를 둘러보았다.
신전이 가꾸는 농지는 약 천평에 달했다.
수확한 작물들을 신도들에게 무료로 나눠주기 위해 큰 규모로 텃밭을 운영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현재 텃밭에 심어진 작물들은 모두 말라 죽어있었다.
“농사를 지은 첫해에는 그럭저럭 잘됐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해부터 이상하게 새싹이 나오기만 하면 시들어 죽어버리더군요.”
리안은 튀르난 대사제의 설명을 들어가며 쪼그리고 앉아 땅의 상태를 살폈다.
땅에서 오줌 냄새가 아주 미세하게 났다.
리안은 그 단서만으로도 원인이 무엇인지 금세 파악했다.
오줌 냄새, 즉 땅에서 암모니아 가스가 발생하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농부가 땅을 너무 사랑해서 그렇다.
사랑을 듬뿍 주는 바람에 땅이 탈이 나고 만것이다.
‘비료가 원인이군.’
땅을 한참동안 살펴보던 리안은 미소를 짓고 일어났다.
“지력을 회복하는데 오래걸리겠지만 큰 문제는 아니네요.”
“큰 문제가 아니라고요?”
“네.”
튀르난 대사제가 놀란 표정을 짓는다.
“지난 3년간 속을 썩였는데 간단히 해결될 수 있는 겁니까?”
“그럼요. 제가 말씀드리는 것만 그대로 해주시면 됩니다.”
리안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튀르난 대사제에게 말했다.
“작물이 시드는 원인은 땅에서 암모니아 가스가 발생해서 그렇습니다.”
“제 견문이 부족한건지 몰라도 땅에서 가스가 발생한다는 소리는 처음 듣습니다.”
“농사짓는 사람들은 종종 겪는 현상입니다.”
리안은 손으로 흙을 집어 대사제에게 보여주었다.
“이 땅은 석회질 성분을 다량 함유한 토양입니다. 전문 지식이 가미된 좀 어려운 말입니다만, 석회질 토양에 비료를 과하게 주면 서로 화학반응을 일으켜 암모니아 가스를 발생시킵니다. 토질도 알칼리화 되고요. 그러면 작물이 절대 못 자랍니다. 만약 자라도 얼마 안있어 금방 시들죠. 지금처럼요.”
튀르난 대사제는 연금술사들이나 좋아할법한 전문 용어가 섞여있어 리안의 말을 잘 알아듣지는 못했으나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작물이 너무 안자라니까, 저를 비롯해서 다른 분들이 비료를 마구 퍼주기는 했습니다. 땅에 영양분이 부족한줄 알고요.”
“4년 동안 계속 그러셨습니까?”
“아뇨. 첫해에 농사지을때는 농사 지식이 없어 언제 비료를 줘야하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때는 비료를 거의 안주다시피했고, 이듬해부터 책을 보고 공부하면서 제대로 비료를 주기 시작했죠. 비료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건 첫해 1년만 빼고 올해로 3년째입니다.”
“그게 원인입니다.”
튀르난 대사제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비료가 원인이란 말입니까?”
“네.”
“땅에 유익한 비료를 줬는데 어째서 문제가 된거죠?”
리안은 손에 쥐고있던 흙을 버린 다음 손을 털었다.
“비료에는 질소라는 성분이 들어있습니다. 질소는 퇴비화된 석회질 토양과 만나면 가스를 일으키기 쉽죠. 말씀드렸다시피 이 땅은 석회질 토양인데다 너무 비옥져서, 여기에 또 질소가 많이 함유된 비료를 줘버리면 작물에 해가 되는 가스가 발생하기 쉽습니다.”
“그렇다면 저희 땅에는 비료를 주면 안된다는 말씀이십니까?”
리안이 되물었다.
“비료는 직접 만드십니까?”
“네, 저희 신전에서 기르는 가축의 배설물과 인분을 섞어서 만들고 있습니다.”
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단호히 말했다.
“앞으로 비료 만들때 똥은 넣지 마세요.”
“똥을 안넣으면 뭘로 만들죠?”
“낙엽이나 짚으로 만드세요. 그리하면 질소 발생이 줄어들어 땅상태가 많이 좋아질겁니다. 비료는 무조건 두 달에 한번씩만 주시고요.”
리안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유황가루를 구해서 땅에다가 조금만 뿌려주세요. 유황가루는 알칼리성으로 변한 토양을 중성으로 만들어주는데 도움을 줍니다.”
“그렇게 하면 작물을 키울 수 있는 겁니까?”
“당장은 힘들고 반년 정도 지력이 회복되길 기다리셔야 할겁니다. 일단 제가 만든 비료를 써보십시오. 몇 번 만들어다 드리겠습니다.”
“오오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
리안은 성심성의껏 여러가지를 가르쳐주었다.
그의 입에서 해결책 및 각종 지식들이 술술 흘러나오자 튀르난 대사제는 감탄했다.
‘젊은 사람이 어찌 이리 잘 알고 있을꼬.’
이윽고 모든 설명이 끝나자 그는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안젤라 부인께서 말씀하신대로군요. 정말 큰 도움이 됐습니다.”
리안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제게 스승 님이 한 분 계시는데, 그냥 그분이 가르쳐주시는대로 열심히 배웠을 뿐입니다.”
“훌륭하신 분을 스승으로 뒀다 할지라도 제자에게 의욕이 없거나 머리가 영특하지 않으면 모든 노력이 허사지요. 겸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좋은 가르침 잘 받았습니다.”
“저야말로 저희 채소를 사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까 사제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보니 채소가 무척 신선해 보인다고 하더군요. 맛이 기대가 됩니다.”
리안은 이후에도 튀르난 대사제에게 몇 가지 주의점을 더 설명해주고 신전을 떠났다.
“정말 친절한 청년이로군. 귀찮을텐데도 꼼꼼이 가르쳐줘서 어찌나 고맙던지.”
튀르난 대사제는 흐뭇하게 웃었다.
“안젤라 부인께 훌륭한 사람을 보내줘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려야겠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방문밖에서 여사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사제 님, 성녀 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성녀 님께서?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그는 퍼뜩 자리에서 일어나 예복을 갖춰입었다.
“알겠네! 바로 나가겠네!”
그날 오후 에스메랄다 신전에서는 전쟁터에서 무사귀환을 한 성녀와 그녀가 이끄는 성기사단을 맞이하는 대규모 환영식이 열렸다.
환영식이 끝난뒤에는 조촐한 만찬을 가졌다.
성기사들이 둘러앉은 식탁에는 싱싱한 식재료로 만들어진 요리들이 채워졌다.
성녀의 식탁에도 양고기 순무 스튜와 더불어 상추에 밤가루를 입혀 돼지기름으로 튀긴 상추 튀김이 올려졌다.
“모두 맛있게 들어요.”
“네!”
성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양고기 순무 스튜에 들어간 순무 조각부터 숟가락으로 떴다.
‘난 매콤한 고기국물에 무랑 같이 떠먹는게 제일 맛있더라.’
평소 스튜를 먹으면 고기보다 채소를 먼저 집어먹는 그녀였다.
그녀는 아무 생각없이 순무 조각을 입안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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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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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우물 씹는 순간 놀라고 말았다.
그녀가 알고 있던 무맛보다 훨씬 신선한 식감과 맛이 느껴졌다.
아삭한듯 부드럽게 씹히면서 달짝지근한 것이 예사스럽지가 않다.
무라는 식재료가 원래 이런 맛을 가지고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맛있었다.
‘비싼 무를 사왔나?’
음식이 너무 맛있어도 문제.
성녀는 고민에 잠겼다.
‘이상하다. 신전 사람들이 돈을 헤프게 쓸 일은 없을텐데.’
식재료를 사와도 근처 시장에 가서 싸고 저렴한 것 위주로만 사올 것이다.
그런데 이게 뭔가.
귀족, 아니 황제의 밥상에나 오를 법한 이 신선하고 맛있는 무는?
그때였다.
함께 식사중인 성기사들에게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야 이 상추튀김 되게 맛있네.”
“나도 방금 맛있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요리사가 바꼈나? 솜씨가 좋아졌어.”
“아냐, 아냐. 식재료가 좋아졌어. 상추튀김 말고 여기 무도 먹어봐. 무맛도 끝내줘.”
“어디, 어디. 오옷! 무가 뭐이래? 이거 무 맞아? 맛있어!”
“고기만 주워먹었는데 무도 맛있다고?”
“얼른 먹어봐.”
성기사들이 너나할 것 없이 상추튀김과 무를 맛보더니 맛있다며 끊임없이 칭찬했다.
“풀떼기 주제에 왜 이렇게 맛있어?”
“요리는 8할이 식재료맛이라더니 그 말이 맞구만. 재료가 신선하니까 입이 즐거워.”
성기사들이 먹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성녀는 상추튀김을 쳐다봤다.
‘상추튀김도 맛있다고?’
그녀는 즉시 튀김을 집어 작게 깨물어 먹었다.
튀김옷을 입은 상춧잎이 사각사각 씹히며 고소한 맛이 입안 가득 번졌다.
무처럼 상추도 맛있었다.
‘이런 고급스러운 식재료들을 도대체 어디서……’
성녀는 혹시나 해서 신전 요리장을 불렀다.
“무와 상추가 굉장히 신선하네요. 어디에서 구하셨죠?”
중년의 남자 요리장이 대답했다.
“최근에 새로 생긴 채소상회가 있는데 거기서 납품 받았습니다.”
“가격이 비싸지 않았나요?”
“비싸긴요. 안젤라 부인의 소개로 알게된 곳인데 시장 가격보다 조금 높긴 했지만 맛이나 신선도를 보면 합리적인 가격이었습니다. 요리해보니까 차원이 다르더라구요. 드셔보니 맛 있으시죠?”
“네, 맛있긴 하더군요.”
“다음에도 지금처럼 맛있는 채소들로 갖다주면 앞으로는 계속 거기하고만 거래할 생각입니다. 솔직히 지금은 저희랑 처음 거래하는 거라서 특등급 채소로 갖다준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그렇게 하세요.”
성녀는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리장의 얘기로 보아 돈을 헤프게 쓴 것은 아닌 듯하다.
‘사치를 부리지 않고 양질의 채소를 사왔다는 것인데……’
그녀는 의문이 풀리자 이 신선한 채소들을 납품한 가게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상회 이름이 뭐죠?”
“김리안 상회라고 합니다.”
“김리안……? 무슨 뜻이죠?”
“상단주 이름을 상회 이름으로 썼다더군요. 그 김리안이라는 사람이 오늘 아침에 직접 왔다갔습니다. 텃밭도 보고 가고요.”
“텃밭을요?”
“그 사람이 채소 키우는데 재주가 있다보니 튀르난 대사제 하고 같이 텃밭에 가서 여러가지 알려주고 간 모양입니다. 튀르난 대사제가 드디어 해결책을 찾았다며 좋아하더군요.”
“원인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글쎄요. 자세한건 튀르난 대사제에게 물어보시는게 좋을듯합니다. 저는 그 자리에 없었기에 잘 모르겠습니다.”
요리장이 주방으로 돌아가고 난뒤 성녀는 즉시 튀르난 대사제를 불러 아침에 있었던 일을 상세히 전해들었다.
“…이상 입니다.”
튀르난 대사제는 즐거운듯이 덧붙였다.
“정말 모르는게 없는 대단한 청년이었습니다.”
그가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자 성녀는 문득 김리안이라는 사내를 한 번 만나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 역시 농작물이 자라지 않는 텃밭 때문에 가슴앓이를 한적이 많았고 스스로 해결해보려고 나름 애를 써봤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어려운 문제를 쉽게 해결했다니 듣고 나서 놀라웠다.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얼굴이 궁금했다.
‘상회에 찾아가 볼까?’
라는 생각을 하는데, 때마침 튀르난 대사제가 솔깃한 발언을 했다.
“본인이 비료를 만들어 가지고 온다더군요.”
“언제 온다든가요?”
“아마…… 조만간 오지 않을까요? 정확한 날짜는 모르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튀르난 대사제가 떠나고 난 후 그녀는 다시 수저를 들었다.
양고기 순무 스튜에 들어간 무 조각을 입에 넣었다.
식어도 맛있었다.
입속에 든 것을 우물우물 씹으면서 김리안을 생각했다.
‘어떤 사람일까.’
그가 신전에 오거든 꼭 만나야겠다고 다짐했다.
물어볼 것이 많았다.
그리고……
‘이 양질의 무를 모두가 키워서 먹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그녀는 성녀.
자나깨나 배고픈 백성들 생각뿐이었다.
김리안이 아는 재배 방법을 널리 보급하면 백성들의 삶이 좀 윤택해질 것이란 기대를 가졌다.
‘그건 어려운 부탁이려나?’
상인마다 영업비밀이란게 있으니까.
대가를 바랄지도 모르겠다.
* * *
치안대 본부 식당.
오늘도 야근이 예정된 조레비치의 부관 하리스는 저녁식사를 위해 식당에 들렸다.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요리사에게 배식을 받은 그는 음식이 담긴 식판을 들고 부하 두 명이 앉아있는 곳으로 향했다.
“너희는 퇴근 안해?”
“집에 밥해줄 마누라가 없어서 저녁 먹고 가려고요.”
“오늘도 야근이십니까?”
“야근이야. 난 마누라가 있어도 집에 가질 못하는군.”
하리스는 푸념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식판에 담긴 음식을 내려다봤다.
파릇파릇한 상추가 중간에 끼워져 있는 사과파이와, 후추와 소금이 뿌려진 으깨진 순무가 눈에 들어왔다.
그외에도 그냥 먹으라고 준듯한 생상추 몇 장과 얇게 썬 생순무가 보였다.
“우리 치안대가 요즘 돈이 없나, 밥상에 맨 상추랑 순무뿐이네.”
하리스가 음식을 갖고 투덜거리자 부하 두 명이 킥킥 웃었다.
“그, 몇 달전에 과부된 여자 있잖습니까? 그 집 손님으로 온 새끼가 상회를 열었다드만요. 치안대장 님한테 뇌물을 꽂아넣었나봐요.”
“뇌물?”
“상추랑 순무랑 다 그놈이 판거래요. 아무 기반도 없는 놈이 어떻게 우리 치안대에 납품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리스가 피식 웃었다.
“조레비치 님은 뇌물을 받으실 분이 아니야. 우리가 모르는 합당한 무언가가 있었나 보지.”
“하긴 상추랑 순무가 맛있긴 하더만요.”
“맞어. 맛있긴 해.”
“맛있어?”
“예.”
“드셔보십쇼. 이전에 먹던 것보다 맛은 좋더라구요.”
하리스는 으깬 순무를 수저로 떠서 사과파이 윗면에 발랐다.
그리고 중간에 끼워진 상추와 함께 한입 깨물어 먹었다.
“으음……”
아삭아삭.
“신선하네?”
“맛 좋죠?”
“재료가 좋으니 비싼 사과파이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잠시만.”
하리스는 눈을 감고 깊게 맛을 음미해보았다.
‘과연.’
제법이다.
부하들이 말했던대로 신선한 채소가 요리의 맛을 제대로 살려주고 있었다.
잘 구운 사과파이의 맛이야 늘 먹어보던 평균적인 맛이었으나 사과파이를 떠받쳐주는 채소들의 식감과 맛이 남달랐다.
상추는 씹을때마다 시원한 식감과 함께 단맛이 느껴졌고, 으깨진 순무는 사과파이와 조화를 이루며 입안 가득 고소한 감칠맛을 더해주었다.
이건, 지금까지 그가 알고 있던 사과파이의 맛이 아니었다.
“오…… 맛있군.”
하루종일 지친 몸에 생기가 솟았다.
덩달아 행복한 기분이 들면서 야근이 팍팍 하고 싶어졌다.
“조레비치 님께서 그자와 거래한 이유를 알 것 같아.”
순간 하리스의 뇌리에 지난날 조레비치가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메건 부인은 어쩌려나 모르겠는데, 그 댁에 머무는 젊은 친구가 하나 있어. 양배추 농사를 둘이 같이 지은 모양인가 보더라고. 아무튼 그 친구가 조만간 채소 장사를 한다고 들었거든? 나중에 거기나 한 번 찾아가 보든지.’
하리스의 눈이 번쩍 떠졌다.
“양배추!”
부하들이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뜬금없이 양배추?”
“왜 그러십니까?”
“이 자가 그 자였어!”
“이 자가 그 자라니요?”
“이 자가 양배추를 키운다던 그자였다고!”
하리스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곧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얼마 후.
그는 야근도 잊고 자택에 도착해 있었다.
“헉! 헉! 여보!”
“오늘 늦는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게 문제가 아냐! 김리안 상회가 문 열었어! 내일 아침에 거기 가서 채소 좀 사와!”
그의 갑작스러운 귀가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아내가 환하게 웃는다.
“문 열었대요?”
하리스의 아내, 마리야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얼마나 대단한 곳이길래 남편과 치안대장님이 칭찬하는지 가서 눈으로 봐야겠어.’
평소 똑순이 소리를 듣는 그녀였다.
깐깐한 주부의 시선으로 냉혹하게 평가해줄 작정이었다.
“거기 창고가 파크 포인트에 있다고 했죠?”
“응! 양배추든 뭐든 아무거나 사와서 내일 저녁에 먹자고!”
마리야는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당신과 우리 아이들을 생각하면 아무거나 사올 수 없죠. 내가 보고 판단할게요.”
“그래, 그래! 그럼 난 이만 다시 갈게!”
“예? 어디가요?”
“야근하다 말고 왔어!”
먹는 것을 좋아하다보니 맛집이나 맛있는 요리만 보면 환장하는 하리스.
정말이지 못말리는 남편이었다.
* * *
스톤 쉴드 기사단 본부.
모니카는 기사단장 집무실에서 깽판을 치고 있었다.
“사줘! 사줘! 사줘! 으아앙! 사줘어!”
그녀는 바닥에 대자로 누워서 생떼를 부렸다.
책상에 앉아있던 라일이 답답한듯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된다니까!”
“사줘! 사달라고! 사줘! 사줘!”
“안돼!”
“넌 소꿉친구로서 의리도 없냐 나쁜놈아!”
“아무리 단장이라도 기사단 자금을 내 마음대로 못써!”
“식당에 정당하게 납품하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식자재 납품처는 이미 오랫동안 해오던 곳이 있어! 위에서 지켜보시는 분들도 계시고 내 마음대로 변경할 사항이 아냐! 그럴 권한이 없다고!”
호소하듯 외쳐보지만 모니카는 듣는 척도 안했다.
그녀는 계속 바닥에 드러누운 채 발을 구르면서 소란을 피웠다.
“그동안 뭐 했길래 단장이 돼서 왜 힘이 하나도 없어! 힘이!”
“간단하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니깐.”
“다 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상추랑 순무, 딱 두 개만 받아달라는 것도 안되냐!”
“그 두 가지가 가장 많이 쓰이는 식재료야. 달리 말하면 지금 거래하는 사람들한테 가장 돈이 되는 식재료라고.”
“일주일치만! 일주일치만 사가!”
“조금도 안돼. 다른 곳이랑 조금이라도 거래했다는걸 알면 그쪽이 기분 상해한다.”
“쓸모없는 놈!”
라일은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으름장을 놓았다.
“기사들 부른다. 빨리 일어나. 쫓겨나기 싫으면.”
“싫어! 싫어! 싫어! 사줘! 사줘! 사줘어!”
그는 으름장이 안통하자 마음을 바꿔 달래는 수법을 썼다.
“모니카, 미안하다. 정말 어쩔 수 없어. 대신 내 사비로 사줄게. 1골드치면 되겠냐?”
“1골드?”
모니카는 벌떡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언제 울부짖었냐는듯이 해맑게 웃었다.
“할 수 없지. 봐줬다.”
라일은 책상 서랍에서 금화를 꺼냈다.
“채소는 됐고, 돈만 받아가. 나한테 팔려고 했던건 다른 사람한테 팔아서 돈이나 더 벌어.”
“역시 라일이라니까. 착하고 의리가 있어.”
모니카는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일이 건네준 돈을 받고 킥킥 웃었다.
그녀는 손을 흔들었다.
“다음에 또 올게.”
“오지마. 와도 절대 안만날거야.”
“만나줄거면서.”
그녀는 밖으로 나가기전 순무 한묶음을 집무실 바닥에 내려놓았다.
“집에 가져가서 맛이라도 봐봐. 나 간다. 안녕~”
철컥.
문이 닫혔다.
집무실에 홀로 남겨진 라일은 그제야 살 것 같았다.
귀가 편안했다.
그는 잠시 묵묵히 순무를 바라보기만 했다.
“…크긴 크네. 잘 키웠어.”
그날 저녁.
라일은 순무 한 묶음을 들고 집으로 귀가했다.
“웬 순무예요?”
“모니카한테서 샀어. 순무 장사를 하나봐.”
“아……”
아내는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조금 뒤에 식사할때 드실래요?”
라일은 그다지 내키지 않았으나 모니카가 떼 쓴 것을 생각하면 복수를 해주고 싶었다.
한 번 먹어본뒤 만약 맛이 없으면 내일 그녀를 찾아가서 신랄하게 비평을 쏟아낼 생각이었다.
눈물 콧물을 질질 짤 정도로 악랄하게.
“해줘봐. 얼마나 맛있는지 보게.”
그러나 저녁식사 시간.
잘게 썬 무 한 조각을 먹어본 라일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맛이 좋잖아……?”
아내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당신이 사온 순무 덕분에 수프맛이 더 좋아졌어요. 많이 사다 놓고 싶다.”
그녀의 의견에 라일도 대찬성이었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수프에 넣은 무만 골라 집어 먹고 있었다.
모니카가 판다고 해서 우습게 보았더니 이거야 원 의외로 물건이다.
“당신, 내일 아침에 모니카네 가게에 가서 순무 좀 사와.”
아내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인들한테도 나눠줄겸 짐마차를 가져가야겠어요. 이 맛있는 걸 혼자 먹을 수 없잖아요.”
다음날 아침.
김리안 상회의 문 닫힌 창고앞에는 열명이 넘는 귀부인들이 몰려와 있었다.
김리안 상회는 아직 무명이다.
상회의 존재를 아는 이가 별로 없을 정도로 인지도는 처참했다.
그러나 그들이 파는 순무와 상추를 직접 맛본 여자들과 아직 먹어보지는 못했으나 알음알음 소문을 듣고 찾아온 여자들로 인해 창고앞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녀들의 하인들까지 합하면 모두 50명에 달했다.
게다가 귀부인들마다 두 대 혹은 세 대씩 마차를 가져오는 바람에 창고앞은 그야말로 발 디딜곳이 없을 정도로 미어터졌다.
“여기 상회 사람들은 대체 언제 출근하는거야? 왜 문을 안열지?”
“가게가 급해보이지 않으니까 왠지 고급스러운 느낌이 들지 않나요? 콧대도 높아보이고.”
“망상은 자제합시다.”
“어? 저기온다! 저기 김리안 상회의 김리안 씨 출근하네요!”
어제 리안의 얼굴을 기억한 사람들이 그를 향해 우르르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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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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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무 좀 살 수 있을까요?”
“다들 뭐하는거예요! 내가 먼저 왔어요!”
“저는 유명한 라테가르 백작가에서 나왔습니다! 저희에게 먼저 파시면 백작 님께서 무척 기뻐하실 겁니다!”
창고앞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예고도 없이 사람들이 몰려들었기에 리안은 어안이 벙벙했다.
“예, 알겠습니다. 예, 예. 바로 문 열테니 잠시만 줄서서 기다려주세요.”
뒷문을 통해 얼른 창고에 들어가니, 어제 밤늦게까지 일한 모니카와 야네트, 히메나가 뒤늦게 일어나 졸린 눈을 비비고 있었다.
그녀들의 잠자리 주변에는 빈 술병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무슨 일이야?”
속옷만 입고 있던 모니카가 하품을 하며 물었다.
밖의 상황을 전혀 모르는 눈치다.
“사람들이 채소 사러왔어. 빨리 팔아달라고 난리야.”
“뭐?”
세 여자는 부랴부랴 옷을 챙겨 입었다.
술냄새 나는 창고안을 빠르게 정리한뒤 문을 열었다.
“한꺼번에 들어오면 복잡하니 두 분씩 들어와서 구매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같이 온 하인들하고 들어와주세요!”
리안과 모니카가 창고안에서 손님들을 상대하고 야네트와 히메나는 밖에 나가서 미리 주문을 받았다.
부부인 케이로스와 베라도 금세 도착해 서둘러 일을 거들었다.
“뭐 드릴까요?”
“순무 30kg치 주세요.”
“예, 이쪽으로 오세요. 하인분들, 여기 다섯묶음만 들고 가시면 됩니다. 계산은 저쪽에 가서 해주세요. 자 다음분.”
“순무랑 상추 사러왔어요. 지인들에게도 나눠줄거라 넉넉하게 살거랍니다.”
어제 팔고 남아있던 순무와 상추는 빠른 속도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김리안 상회의 창고가 아침부터 소란스럽자 주변에 물류창고를 둔 다른 상회의 점원들이 떼지어 구경나오기도 했다.
“으메, 저기 장사 잘되는고만.”
“여기가 시장도 아닌디 사람들이 여기까지 찾아온겨?”
“도매가로 후려치나 보지.”
아침부터 몸은 힘들었지만 리안과 모니카의 입가에선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도매가가 아닌 소매가에 그것도 프리미엄까지 붙여서 팔고 있었다.
그럼에도 잘 팔렸다.
돈은 계속 들어왔다.
야네트, 히메나, 케이로스, 베라도 신이나서 열심히 손님을 응대했다.
“사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오십시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오전을 보냈다.
어느덧 창고앞이 한산해졌다.
리안을 비롯해 점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만세! 다 팔렸다!”
“믿기지 않아요!”
“지린다 진짜!”
점원들은 서로를 얼싸안고 기쁨을 나누었다.
그와중에 모니카는 돈을 세느라 여념이 없었다.
베라가 그 옆에서 도와주고 있었다.
한 시간쯤 지나자 그녀는 리안에게 판매대금을 정산해줬다.
“자, 당신 몫.”
35골드.
돈 자루를 받아든 리안의 얼굴에 기쁨이 서렸다.
하루아침에 큰돈을 벌어서 실감이 나지 않았다.
농사를 지어 얻은 수확이라 정말로 감격스러웠다.
아울러 기존에 생활비로 쓰고 있던 돈까지 합치면 전재산이 무려 41골드 80실버!
한국돈으로 4180만원!
갑자기 큰돈이 생기니까 사야할 것들이 우수수 떠올랐다.
‘향단이 옷 사주고, 폰타나 안장 사주고, 돌쇠랑 허수에게도 작게 하나씩 챙겨줘야지.’
그전에 자신이 키운 농산물을 열심히 팔아준 점원들에게도 답례를 하지 않으면 안됐다.
“오늘은 내가 쏩니다!”
“와!”
“회장 님 최고!”
“코 삐뚤어지게 마셔보자!”
그날 저녁, 리안은 모니카와 점원들을 데리고 좋은 식당에 가서 크게 한턱을 쐈다.
그리고 그는 이내 점심식사나 사줄걸 하며 저녁에 회식을 한걸 후회했다.
모니카, 야네트, 히메나가 술고래라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평소보다 더 마셔대줄은 꿈에도 몰랐다.
제대로 판을 깔아주니 그녀들은 술을 물처럼 퍼마셨다.
“마셔, 이년들아! 인생은 즐기자고 사는거야!”
“나 술 조금밖에 못마시는데, 오늘은 희한하게 잘 들어간다. 헤헤.”
“회장 님아, 바지벗고 탁자에 올라가서 춤 춰봐. 딸꾹!”
케이로스와 베라는 집에 있는 아이들 때문에 일찍 귀가했으나 세 여자는 멈출줄을 몰랐다.
그녀들이 공언했던대로 새벽 내내 퍼마셔댔다.
결국, 술값으로 예상했던 50실버가 훌쩍 넘는 3골드가 나왔다.
거기에 여관값까지 또 들어갔다.
리안은 살짝 속이 쓰렸지만, 그래도 내 사람들에게 돈을 썼다고 생각하니 아까운 기분은 금세 사라지고 어느 순간부터 흐뭇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잘 먹었으면 됐어.”
퀸 사이즈 침대가 놓인 여관방.
리안은 끙끙거리며 술에 취해 정신을 잃은 세 여자를 하나씩 침대에 눕혔다.
“힘들다 힘들어.”
전부 눕히고 나자 몸이 비틀거렸다.
시야가 약간 어지러웠다.
“후ㅡ”
내뱉는 긴 한숨에 술냄새가 진하게 섞여 있었다.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술꾼 3명을 혼자서 상대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주량을 훨씬 넘어섰다.
지치고 졸렸다.
모든게 귀찮았다.
“리사한테 못가겠다.”
리안은 하품을 하며 침대에 나란히 누운 여자들을 내려다봤다.
“헤헤, 헤헤헤. 으음냐.”
“쿠울……”
“술 줘 술…… 드르렁……”
그녀들이 불편할 것 같아서 신발을 벗겨주었다.
마음 같아선 옷도 편하게 벗겨주고 싶은데 그건 너무 나간 듯해서 관뒀다.
다만 가운데 누워있는 모니카만 상의랑 바지를 벗겨주었다.
그녀는 속옷 차림이 되었다.
“모두 잘자요.”
세 여자에게 이불을 덮어준뒤 리안도 바닥에 베개를 놓고 드러누웠다.
원래는 방을 하나 더 얻어야했지만 왠지 술값보다 아깝게 느껴졌다.
세 여자는 넓은 침대에서 재우고 자신은 그냥 바닥에서 자면 되는데 뭐하러 또 돈을 쓰지? 하면서 큰방 하나만 빌렸다.
그렇게 리안은 세 여자와 같은 여관방에서 잠이 들었다.
* * *
잠든지 얼마나 지났을까.
“으음……”
리안은 슬며시 눈을 떴다.
실내는 여전히 깜깜했다.
창문을 통해 달빛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아직도 밤인가. 왜 벌써 깬거지……’
의식이 몽롱했던 리안은 다시 잘 생각에 눈을 감았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랫도리가 시원하면서 축축한 기분이 들었다.
‘자다가 바지가 벗겨졌나……’
무심코 손을 뻗어 하반신을 더듬거리는데 불쑥 사람 머리 같은게 만져졌다.
아래위로 빠르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뭐, 뭐지?’
리안은 번쩍 눈을 떴다.
‘설마 모니카가……?’
황급히 고개를 쳐들고 밑을 내려다보자 금발의 야네트가 엎드린 채로 그의 페니스를 빨고 있었다.
“쥬븝, 쥽!”
전혀 상상치도 못했던 인물이 자신의 물건을 뱉었다 삼키는 것을 보자 리안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야네, 야네트……?”
“부륩. 쭙.”
그녀가 페니스를 뱉어내고 위를 올려다봤다.
술이 덜깬 흐리멍텅한 눈빛으로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짓는다.
“젠장, 걸리고 말았네.”
“뭐하는 거죠……?”
“술 마시고 그냥 자긴 아쉽잖아. 옆에 근사한 사내도 있는데.”
그녀는 혀를 내밀어 귀두를 핥아올렸다.
“으윽……!”
몸이 민감했다.
귀두가 엄청 예민한 것으로 보아 딱 봐도 사정직전이었다.
대체 언제부터 빨아댄건지!
“회장 님꺼 빨면서 자위중이야.”
자신의 다리쪽에 납작 엎드려있는 야네트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니, 야네트의 한 손이 그녀의 사타구니쪽에 가있었다.
‘헉.’
스스로 음부를 문지르면서 페니스를 빨고 있었던 것인가?
쾌감을 얻으려 몸부림치는 그녀의 손짓을 보면서 리안의 두 눈이 커졌다.
뭐 이런 음탕한 여자가 다 있나!
“야네트, 이러면 안돼요.”
“쉿, 조용해.”
그녀가 속삭였다.
“고작 페니스 빠는걸로 야단떨지마. 넣지도 않았어.”
그녀는 후훗 하고 미소짓더니 입을 벌리며 고환을 머금었다.
입안에서 사탕을 굴리듯 쪽쪽 빨아먹었다.
“빨아주기만 하는건데 뭘. 쮸븝.”
“으읏……!”
리안은 잠이 확 달아났다.
빨리는 쾌감이 장난 아니었다.
그녀를 내버려두고 싶은 충동이 치솟을 정도로 더할나위 없이 황홀했다.
“머, 멈춰요……! 윽……!”
그러나 그를 비웃듯 고환을 물던 입술이 페니스를 쭈욱 삼켰다.
많이도 들어갔다.
뿌리까지 먹어버렸다.
그녀는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이며 강하게 빨아대기 시작했다.
페니스는 수차례 그녀의 따뜻한 입안으로 들어갔다 빠져나오기를 반복했다.
“으읏!”
리안은 아찔한 자극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 아무 생각도 안났다.
그저 야네트의 입술을 실컷 즐길뿐!
리안은 곧 한계에 봉착했다.
“나오오옵…… 니다!”
낮게 끓는 목소리로 외치는 순간 야네트의 입안에 붙잡혀 있던 페니스에서 세차게 정액이 분출됐다.
그와 동시였다.
야네트에게도 절정이 찾아왔다.
자기 위로를 하던 그녀의 손짓이 과격하게 빨라졌다.
다리 사이를 부르르 떨면서 연거푸 낮은 교성을 질러댔다.
“아흥, 아항, 흐응, 흐응, 이야응!”
바닥에 오줌을 싸듯 물방울들이 뚝뚝 떨어졌다.
그녀는 흐느껴 울면서도 입안에 든 정액을 꿀꺽꿀꺽 삼켰다.
리안이 쏟아낸 액체들은 모조리 그녀의 목구멍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그후, 함께 절정을 맞이한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숨만 헐떡였다.
“하아, 하아……”
“아으응…… 아직도 다리가 떨려.”
침대 위에선 가끔씩 모니카의 잠꼬대 소리가 들렸다.
히메나는 꿈속에서 누구랑 대화하는지 욕설을 드문드문 내뱉었다.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있던 야네트가 키득 거렸다.
“모니카가 알면 죽이겠네.”
그녀는 졸린 목소리로 계속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근데 술 취하니까 꼴리잖아…… 어떡해 씨발…… 떡치고 싶은걸……”
말이 점점 흐릿해지더니 이내 잠들어버렸다.
“쿠울……”
속편하게, 생각도 없이, 뒷정리도 팽개치고 코를 곯아 재꼈다.
일은 멋대로 저질러놓고 정말 대책없는 여자다.
리안은 한숨을 내쉬며 바지를 끌어올렸다.
야네트가 싹싹 빨아준 덕분에 페니스에서 윤기가 흘렀다.
축축한건 마찬가지지만.
“다음부터 절대 같이 자면 안되겠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야네트에게 다가갔다.
다리 사이에 애액이 흥건했다.
대충 속옷을 입혔다.
허리 위까지 말려올라간 치마를 밑으로 내린 다음 번쩍 들어올렸다.
그리고 조심스레 침대에 눕혔다.
바닥의 흔적을 적당히 정리한 다음, 다시 베개를 베고 드러누웠다.
눈을 감은 채 속으로 중얼거렸다.
‘꿈 같아……’
방금전 일이 당황스러운 것도 잠시, 리안은 채 1분도 안돼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
그대로 곯아 떨어졌다.
* * *
다음날.
리안을 비롯해 세 여자는 정오가 되어서야 깨어났다.
여관을 나갈때까지 모니카와 히메나는 활기차게 수다를 떨며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고, 야네트는 어젯밤 일에 관해 딱히 별말이 없었다.
평소처럼 행동했다.
너무 자연스럽다 보니 리안은 헷갈렸다.
어젯밤 일이 술과 잠에 취해 몽롱한 가운데 벌어진 일이었고, 다음날이 되자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야네트가 그럴리가 없지. 자다가 몽정했나봐.’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현실감이 없었다.
설령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어도 묻어두는게 낫다.
입밖으로 꺼낼 일이 아니었다.
모른척 넘어가는게 최고다.
“이따 집에서 봐~”
여관에서 나온 직후 리안은 세 여자와 헤어졌다.
모니카는 바빴다.
리안이 재배한 순무와 상추가 전부 팔렸기에 그녀의 창고는 널널해진 상태였고 곧 다가올 겨울을 대비해야 했다.
현재 겨울에 작물을 파는건 김리안 상회의 수준으로는 어림없었다.
큰 상회들은 자체 유통망을 통해 외국에서 수입을 해온다지만 김리안 상회는 전국에 지점이 하나도 없거니와 전적으로 리안에게 의지하고 있기에 그가 농사를 쉬면 거의 팔게 없어진다.
그래서 모니카가 생각한 것이 창고 단기임대.
겨우내 작물을 파는게 불가능한 까닭에 창고를 단기임대 하는 식으로 돈을 벌 계획이었다.
따라서 최근, 겨울동안 창고를 빌려쓸 상인들을 모집하고 있었다.
그들을 만나보러 그녀는 야네트와 히메나를 데리고 가게로 출근했다.
한편, 리안은 홀로 훅스 가에 돌아왔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비료 세 포대를 짐마차에 싣고 다시 황도로 향했다.
그는 빛의 신 에스메랄다 신전을 방문했다.
튀르난 대사제가 그를 반겨주었다.
“오오!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대사제 님. 전에 말씀드렸던 비료 가져왔습니다.”
“아, 직접 만드셨다는 그 비료요? 아이쿠 고마워라. 신께서 기뻐하실겁니다.”
리안은 비료를 창고에 옮겨놓은뒤 신전의 텃밭으로 가서 밭 상태를 점검했다.
“유황 가루 뿌리셨어요?”
“네, 그날 말씀하시자마자 바로 사다 뿌렸습니다.”
“잘하셨습니다.”
텃밭에서 튀르난 대사제와 짧게 대화를 나누고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튀르난 대사제가 갑자기 뜻밖의 얘기를 꺼냈다.
“잠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으십니까? 성녀 님께서 리안 씨를 만나보고 싶어하십니다.”
“성녀 님이요?”
리안은 생각치도 못한 제안을 듣고 깜짝 놀랐다.
지구에 있을때 온갖 미디어에서 신성하고 순결하게 표현하던 그 고귀한 성녀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고……?
급 기대가 차올랐다.
어떻게 생겼을까?
왜 나를 보고 싶어할까?
좋은 선물 같은거 안주려나?
어쨌든 기사도 아닌 농부 주제에 언제 성녀를 만나보랴.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뵙고 가겠습니다. 어디로 가면 될까요?”
“저를 따라오시지요. 이쪽입니다.”
“근데 혹시 손거울 있으신가요?”
“손거울은 갑자기 왜 찾으십니까?”
“머리 좀 만지게요.”
그 시각.
방에 있던 성녀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어, 어떻게……? 어떻게 황도에 나타날수가……!”
지금으로부터 20분전.
신전에 쳐놓은 결계에 엄청난 힘을 가진 존재가 침입했다.
침입자는 한 명이었고, 그의 몸속에 잠재된 힘은 그녀가 2년전 전쟁터에서 느껴본 익숙한 기운이었다.
성녀는 본능적으로 몸을 떨었다.
“그럴리가 없어…… 그럴리가……”
2년전 일을 떠올린 성녀.
당시 전장을 지배한 소름끼치도록 무섭던 기운.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어마무시한 힘.
그녀의 예상이 맞다면 지금 신전에 침입한 존재는 바로 마왕이었다.
“신전을 파괴하러 온걸까?”
그런데 의아했다.
마왕은 어째서인지 난폭한 힘을 발휘하지 않고 잠잠했다.
그의 기운은 평화로웠다.
그렇기에 성녀도 일단 잠자코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의 의도를 몰라서.
“성녀 님.”
문득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튀르난 대사제 입니다. 엊그제 말씀드렸던 김리안 상회의 김리안 씨가 우리 신전에 찾아왔습니다.”
문밖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성녀의 표정이 한층 더 심각해졌다.
“김리안? 설마 그자가 마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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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회
*경고* 지금 보고 계신 화면은, 조아라에서 지원하는 정상적인 경로의 뷰어가 아닙니다.해당 방식으로 조아라에서 제공하는 작품을 무단으로 추출하는 것에 사용하거나 협조할 경우, 저작권법에 위배되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되실 수 있으니,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작품감상을 부탁드립니다.(5년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 부과)----------------------------------------밭농사 준비, 농지 구매의 시간성녀는 만남을 신중히 고민했다.
마왕의 목적.
어쩌면 자신을 해치러 온게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지금은 잠잠한 그가 자신과 마주한 순간 살의를 드러낼테고 곧바로 격렬한 전투가 벌어질 터.
혼자서 싸운다면 이길 자신이 없다.
그러나 두렵지는 않다.
목숨을 희생해서라도 싸울 각오는 되어 있다.
하지만……
싸움이 벌어지면 신전의 사제들을 비롯해 무고한 신도들까지 휘말리게 된다.
그리고 제국의 역사보다도 더 유서 깊은 이 에스메랄다 신전이 크게 훼손당할 우려도 있었다.
“장소가 안좋아.”
일단 피하는게 낫겠다는 판단이 섰다.
한발 물러선뒤 만반의 준비를 하여 후일을 기약하는 수 밖에.
성녀는 문을 쳐다봤다.
“튀르난.”
“네, 성녀 님.”
“에스메랄다 님의 계시를 받는 중입니다. 누군가를 만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다음에 방문해달라고 하십시오.”
문밖에서 튀르난이 탄성을 자아냈다.
“오오, 계시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자리에 있음에도 만나지 아니하면 손님께서 서운해하시니 밖에 용무가 있어 외출했다고 말씀해주십시오. 즉 저는 신전에 없는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튀르난이 떠나고 난뒤 성녀는 아직 풀지못한 짐속에서 수정구를 꺼내들었다.
그것을 탁자에 올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동료들에게 연락이 가능한 투명한 수정구.
성녀는 마왕을 퇴치하기 위해 모인 여섯 용사중 한 명이었다.
인간
기사
트레이트.
드워프 전사
흐라프.
하프엘프 정령사 헤르미나.
인간
마법사 쿠셀라.
엘프
궁사
이에르타.
마지막으로 성녀 안네로제까지.
세상은 이들을 일컬어 ‘마왕을 심판하는 여섯별’ 이라는 뜻의 <디에스 디타스>라 불렀다.
디에스 디타스는 지난 3년간 세계 각지를 떠돌아다니며 마족을 토벌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왕과 결전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마왕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바람에 계획이 어긋나버렸다.
마왕을 퇴치하기 위해 모인 팀인데 무려 반년이 지나도록 마왕에 관한 소식이 들리지 않자 그들은 점점 지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떠돌이 생활을 한 까닭에 전쟁에 싫증도 났다.
다들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했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모르겠어! 해산합시다!”
결국, 여섯 용사는 마왕이 나타나면 다시 모이기로 기약하며 각자의 고향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아울러 급한 연락이 있을땐 서로 수정구로 통신하자며 저마다 대마법사 쿠셀라가 만들어준 수정구를 가지고 떠났다.
“모두 잘 지내고 계실려나……”
성녀 안네로제는 제일 먼저 파티의 리더 트레이트에게 연락을 취해보았다.
지이잉.
밝게 빛나던 수정구의 빛이 사그라들더니 어느 방안을 비췄다.
“아앙! 하앙! 흐으앙!”
“허억! 헉! 싸, 싼다! 으윽!”
뜬금없이 들려오는 남녀의 교성!
침대 위에서 헐떡이는 트레이트와 어떤 여자가 보였다.
안네로제는 질끈 눈을 감고 비명을 질렀다.
“꺄아악!”
-어?
트레이트는 흠칫하며 밑에 깔려있는 알몸의 여인을 내려다봤다.
-니가 소리 질렀어?”
-아니? 나 아냐. 어멋! 저거봐! 저 수정구에 여자 얼굴이 보여!
-뭐?!
트레이트는 급히 침대를 걸어나와 책상 위에 올려진 수정구를 들여다봤다.
-당신은! 안네로제 님 아니십니까?
“빨리 옷 입으세요!”
-가, 가렸어요. 죄송합니다.
안네로제는 조심스레 눈을 뜨고 수정구를 들여다보았다.
이불로 몸을 두른 트레이트가 멋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연락하실줄 몰랐어요.
“갑자기 연락해서 미안합니다. 급한 일이 생겨서…… 상황을 보아하니 대화하기 어려워 보이는데 잠시 후에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아, 아뇨! 괜찮습니다. 제 소꿉친구라서요. 저에 관한건 다 알아요. 아무튼 무슨 일이세요?
안네로제는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고 진지한 얼굴로 또박또박 말했다.
“놀라지 마십시오. 마왕이 나타났습니다.”
-예!? 마왕? 마왕이라고요!?
트레이트는 이내 다부진 표정을 지었다.
그야말로 용사다운 씩씩한 표정!
-놈은 어디에 있죠? 지금 당장 달려가겠습니다!
“여기는……”
안네로제가 말을 이으려는 찰나 수정구속에서 여자의 화난 음성이 들려왔다.
-너 또 떠나게?
-아냐, 아냐. 금방 끝내고 올거야.
-이번에 떠나면 몇 년이 걸릴줄 어떻게 알아? 내 나이가 지금 23살이야! 널 3년이나 기다리느라 노처녀가 됐다고! 내 친구들은 다 시집갔어! 나만 못간게 얼마나 창피한데! 두고 봐! 또 떠나면 나도 확 바람피울테니까!
-오우, 안돼, 안돼! 진정해 티나! 이건 세계를 구하는 일이야!
-세계고 뭐고 돌아온지 얼마나 됐다고 또 떠나려는 거야! 내가 외로워! 외롭다고!
트레이트는 소꿉친구 사이라는 여자에게 쩔쩔매면서 그녀를 달래는데 한참이나 걸렸다.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안네로제는 입장이 참 난감했다.
-안간다니까, 안가, 안가.
-진짜지? 빨리 수정구에다 대고 말해.
이윽고 여자를 간신히 진정시킨 트레이트가 말을 걸어왔다.
머리를 긁적이며 무척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네로제 님. 죄송하지만 저는 며칠 늦게 합류하겠습니다. 그래도 될까요?
-합류 안해요! 당신들끼리나 잡으세요!
-티나! 쉿! 성녀 님이라고!
-성녀가 대수야?
-쉿!
트레이트는 다시 수정구를 보고 말했다.
-며칠 시간 좀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그의 뒤에서 소꿉친구라는 여자가 팔짱을 낀 채 앙칼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안네로제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세요.”
-얼른 설득하고 달려가겠습니다. 그럼 건강히 계세요!
-뭘 설득해? 웃기고 자빠……
픽!
수정구가 꺼졌다.
안네로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트레이트 님은 왠지 못오실 것 같네.”
그 소꿉친구 라는 여자의 성격이 참 유별났지만 안네로제는 오히려 그녀의 심정을 헤아리며 가엾게 여겼다.
왜냐하면 그녀는 성녀니까.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마왕만 빼고.
“나 때문에 괜히 두 분의 사이만 나빠졌어. 나중에 소꿉친구 분께 사과 드려야지.”
그렇게 다짐하며 다음 사람에게 연락을 취했다.
밝게 빛나던 수정구의 빛이 사라지며 벽난로 속 장작이 타고 있는 어느 거실을 비추었다.
-껄껄, 얘들아 그러다 넘어진다. 집안에선 걸어다녀야지.
-할아버지, 이것봐! 이것봐!
드워프 전사 흐라프가 손주들과 단란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는 수정구가 켜진걸 알고는 가까이 다가왔다.
-안네로제 양이군. 잘지냈나?
“네, 아직까지는…… 잘지내는 중입니다.
-안색이 좋지 못하군. 무슨 일이지?
안네로제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마왕이 나타났습니다.”
-마왕이? 어디에……?
“웨르타뉴 제국의 수도 뮈드마르 입니다.”
-뭐? 흐음. 한 나라의 수도가 침략 당할 정도면 여기까지 소식이 들렸을텐데 어찌된 일인지 잠잠하군.
“현재 정체를 감추고 활동중입니다.”
-그 말인 즉슨 마왕이 숨어서 지낸다는 뜻인가?
“네. 아직까지는요.”
흐라프가 갑자기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마왕이 정말 맞는게야?
“……?”
안네로제는 잠시 생각하다 확신을 갖고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마주친건 아니지만 느낌으로는 분명합니다.”
-에이, 에이, 에이.
흐라프가 손을 휘휘 저었다.
-강대한 힘을 가진 마왕이 쫀쫀하게 숨어서지내는게 말이 안되지.
“2년전 마왕에게서 느꼈던 기운과 똑같았습니다. 지금도 여기에 있어요. 저희 신전에요.”
-신전에서 뭘하는데?
“모르겠어요. 농부처럼 행세를 하는데 미처 의도를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
-농부?
그가 재차 웃음을 터뜨렸다.
-좀 더 살펴보다 확실해지면 연락주게. 내가 볼땐 아닌 것 같아.
“하지만 흐라프 님. 마왕이 갑자기 본색을 드러내기라도 하면……”
-할아버지 이거 해죠!
안네로제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손자가 달려와 흐라프를 귀찮게했다.
-껄껄, 이리 줘보거라. 이 할애비가 해줄게.
흐라프는 마냥 즐거운듯 보였다.
그리고 손주들과 보내는 달콤한 휴가를 방해받고 싶지 않아보였다.
그 마음을 헤아린 성녀 안네로제.
그녀는 속으로 어쩔 수 없다며 흐라프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좀 더 알아보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래. 고생해주게. 무리하지는 말고. 내가 볼땐 마왕이 아닌 단순 마족 같아.
“네, 그럴 수도 있겠네요. 건강하세요.”-건강은 드워프지! 자네도 몸 조심하게!
픽.
수정구가 꺼졌다.
안네로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흐라프 님도 안되는건가……”
이제 세 명 남았다.
부디 나머지 세 사람만이라도 협력해주길 간절히 바라며 연락을 취했다.
-마왕이 황도에?
농염한 몸매를 가진 대마법사 쿠셀라.
그녀는 마왕이 나타났다는 소리를 듣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섣부른 판단 아냐?
“확실해요!”
-마왕이 확실히 얼굴 까면 연락해. 쉬는 동안 가슴에 살쪄서 움직이기가 힘드네. 나는 왜 가슴에만 살이 찌는지 몰라. 그럼 나중에 봐~
“자, 잠깐만요 쿠셀라 님!”
픽.
또다시 수정구가 꺼졌다.
안네로제의 마음속에는 점점 초조함이 깃들었다.
‘마왕을 막아야 하는데……’
근심이 가득한 와중에도 그녀는 동료들을 탓하지 않았다.
저마다 바빠보인다며 그들의 사정을 이해해주려 노력했다.
곧이어 네 번째 연락.
정령사 헤르미나와 통신을 주고 받았다.
-웨르타뉴 제국에 마왕이 나타날 확률 30% 그곳에서 그가 건질게 없다고 예상됩니다. 마왕이 인간의 탈을 쓰고 활동할 확률 10% 마왕으로서 위엄이 안서는 행위라고 봅니다. 마왕이 굳이 농부 행세를 할 확률 0% 저 같으면 귀족 행세를 하겠습니다. 귀족 행세를 하는게 활동하기 더욱 수월할테니까요.
헤르미나는 어떤 현상에 대해 분석하는걸 좋아하는 여자였다.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아주 지루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고로 마왕일 확률이 총 25%가 나왔습니다. 추후 단서를 더 제공해주시면 재판단 해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추천드리는 건.
그녀는 강조했다.
-우리가 헤어진지 고작 3주. 마왕은 잊고 휴가를 마음껏 즐겨주세요. 업무를 잊으라고 있는게 휴가니까요.
얼마뒤 수정구가 꺼졌다.
헤르미나 역시 안네로제의 말을 신뢰하지 못했다.
아니, 신뢰하지 못하는게 아니라 오랜만에 얻은 휴가를 깨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이곳에 와서 같이 살펴봐주면 좋을텐데.”
안네로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지막.
엘프 궁사 이에르타에게 연락을 걸었다.
잠시 후 이에르타가 아닌 다른 여자 엘프의 얼굴이 수정구속에 비쳤다.
-현재 이에르타 님은 더욱 강해지기 위해 수련의 샘에 들어가셨습니다.
“저…… 언제 끝나죠?”
-한 번 들어가면 최소 한달 이상 걸립니다.
“도중에 못나오는 건가요?
-네.
적당히 작별인사를 한뒤 통신을 끊었다.
안네로제는 기운이 빠졌다.
“정말 잘못본 걸까……”
하지만 지금도 생생히 전해지는 이 느낌은 분명 마왕에게서 느꼈던 기운.
풀 죽은 표정을 짓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들고 눈에 힘을 줬다.
“마왕이 확실해.”
단단히 결심을 굳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자리에서 성녀복을 벗어던지고 옷장을 열어 전투용 복장을 착용했다.
“성기사 분들도 고향에 복귀한지 얼마안됐으니 피곤할거야. 일단 혼자서 미행하는 수밖에 없겠어.”
양다리에 금빛 십자가가 새겨진 흰색 스타킹.
짧은 치마차림의 그녀는 금빛과 흰색으로 치장된 밝은색 전투복 위에 갈색 로브를 두르고 후드를 뒤집어 썼다.
이어 그녀의 무기인 성스러운 지팡이를 꺼냈다.
안네로제의 키보다 한 뼘이나 더 기다란 지팡이의 끝은 원형으로 구부러져 있었고, 원 가운데에는 영롱한 빛을 내뿜고 있는 마나석이 허공에 떠있었다.
안네로제는 지팡이를 회색천으로 감싸 외관을 가렸다.
“마왕, 가만 두지 않겠어.”
그녀의 눈빛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성녀는 모든 이에게 사랑을 베풀고 자비롭지만 세상에서 단 하나 만악의 원흉 마왕만은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일찍이 마왕은 여신 나드레를 죽이고 그 힘을 흡수했다.
안네로제는 리안에게서 악한 기운과 더불어 신성한 기운이 담긴 여신 나드레의 힘까지 느꼈다.
불쾌했다.
신을 섬기는 자로서, 사악한 마왕이 여신의 기운을 풍기고 다니는 것이 매우 화가 났다.
‘반드시 멸하고 말리라!’
안네로제는 굳게 다짐을 하며 한 손에 지팡이를 쥐고 방을 떠났다.
* * *
“…갑자기 자리를 비우셔서 오늘은 힘들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바쁘시면 어쩔 수 없죠. 다음에 와서 만나뵐게요.”
리안은 미안해 하는 튀르난 대사제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신전을 나섰다.
마부석에 앉아 짐마차를 몰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었는데 아쉽네. 내일 또 와볼까. 어차피 할일도 없고.”
그런 그를 뒤에서 말을 타고 미행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성녀 안네로제였다.
‘가까이 있으니 기운이 또렷하게 느껴져. 저자는 마왕이 확실해!’
그녀는 그 순간 화가 치밀었다.
미행만 하려던 계획을 수정했다.
오늘 반드시 마왕을 제거하고야 말리라.
‘언제 덮칠까? 지금?’
신전과 도시 사이에 이어진 도로는 인적이 드문 숲길.
공격하려면 지금이 기회였다.
그가 방심하고 있는 지금이!
“나스 가르벨……”
성녀는 주저하지 않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거대한 빛의 망치를 소환해 마부석에 앉아있는 마왕을 내려칠 심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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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회
*경고* 지금 보고 계신 화면은, 조아라에서 지원하는 정상적인 경로의 뷰어가 아닙니다.해당 방식으로 조아라에서 제공하는 작품을 무단으로 추출하는 것에 사용하거나 협조할 경우, 저작권법에 위배되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되실 수 있으니,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작품감상을 부탁드립니다.(5년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 부과)----------------------------------------밭농사 준비, 농지 구매의 시간“리안!”
돌연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짐마차를 타고가는 리안의 맞은편에서 어떤 여성이 말을 타고 달려오는 중이었다.
‘칫!’
안네로제는 즉시 주문 영창을 중단했다.
“모니카?”
리안은 서둘러 고삐를 당겨 짐마차를 세웠다.
모니카도 말의 속도를 줄이며 그에게 다가갔다.
“워워.”
“나 찾아온거야?”
“그럼 자기 만나러 오지 누굴 만나러 오겠어.”
“신전에 있는건 어떻게 알았어?”
“아까 신전에 들른다고 말해줬잖아.”
“아, 그랬지. 근데 왜? 오늘 할거 없잖아.”
“오늘 저녁에 나랑 같이 가…… 꺄악!”
말 위에 앉아있던 모니카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웅크렸다.
순간 로브를 뒤집어 쓴 사람이 모는 말이 그녀의 옆을 아슬아슬하게 지나쳤다.
그러고는 사과 한마디 없이 로브를 휘날리며 저 멀리 사라졌다.
모니카가 뒤를 돌아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저 사람 뭐야 짜증나게. 부딪히는줄 알았잖아.”
“운전을 왜 저 따위로 하지? 낮술했나.”
“운전? 기발한 표현이네. 쿡쿡. 아무튼 내 얘기 들어봐봐.”
그녀는 신이난 표정으로 떠들어댔다.
“오늘 저녁에 식량정책국 주최로 송년회가 있대. 거기 원래 무명 상인들은 초청을 안하거든? 근데 우리보고 참석해달라고 초청창이 왔어. 놀랍지 않아? 우리가 인정을 받았다는거야!”
“축하해.”
리안은 웃으면서 말했다.
“잘 다녀와. 드레스 예쁜거 입고가야겠네.”
“당신은?”
“나? 나는 왜? 나도 가야 돼?”
“당연한거 아냐? 명의가 당신으로 되어있는데.”
“난 바지사장이잖아. 대신 왔다고 해.”
“그런 곳에 회장이 빠지면 윗사람들 눈밖에 나. 내가 망해도 좋아?”
리안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꼭 가야 돼?”
“이참에 다른 상회 회장들한테 얼굴 좀 비쳐주자. 다들 김리안이 누군지는 알아야 할 것 아냐.”
“흠, 내키지 않는데……”
나중에 속세를 떠날때를 대비해 가능하면 인맥을 늘리고 싶지 않았으나 모니카의 간곡한 요청에 못이겨 어쩔 수 없이 당일 저녁 송년회에 참석하기로 약속했다.
몇 시간 뒤.
날이 저물고 달이 떠올랐다.
리안과 모니카는 멋지게 차려입고 번화한 거리를 걷고 있었다.
다정하게 걷는 그들을 멀리서 지켜보는 이가 있었으니…….
성녀 안네로제는 지붕위에서 리안을 감시하는 중이었다.
“저 여자에게선 사악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
안네로제는 모니카를 주시하며 의문을 품었다.
누구길래 단짝처럼 붙어다니지?
애인 사이일까?
아니면 어둠의 마법으로 세뇌를 당한 것일까?
어쨌거나.
“마왕 주제에 사람처럼 행동하고 다니다니 가증스럽군.”
도대체 무엇을 노리고 인간들과 어울리는 것일까?
안네로제는 답을 찾기 위해 오늘밤 내내 리안을 미행할 예정이었다.
잠시 후, 리안은 자신이 미행을 당하는줄도 모르고 모니카와 함께 송년회가 열리는 술집안으로 들어갔다.
널따란 술집안은 시끌벅적했다.
종업원들은 음식을 나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상인들은 술과 음식 앞에서 웃고 떠드느라 바빴다.
술기운이 오른 어떤 사내는 1층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2층 복도 난간에 올라가 크게 노래를 불러댔다.
사람들은 그를 올려다보며 깔깔거리고 자지러졌다.
“재밌게들 노네.”
“상인들이라 목소리가 엄청 커.”
리안과 모니카는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주문하시겠어요?”
종업원이 다가오자 모니카가 손을 저었다.
“아뇨, 금방 갈거예요.”
오래 머물 생각이 없었다.
무명 상회라 알아보는 사람도 없고, 곧있음 시작될 식량정책국 관리의 연설이 끝나면 곧바로 귀가할 생각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황도에서 잘나가는 상회의 주인들은 다 볼 수 있어서 지루하지는 않았다.
황궁 식량정책국 주관 공식행사였기에 내로라 하는 상인들이 다 모였다.
업계 1위라는 메디나 상회의 주인도 참석해 있었다.
전국에 지점이 수백개나 되고 농수산물 운반용 대형 선박도 수십척이나 보유하고 있다는 그 대형 상회.
상회의 주인은 놀랍게도 중년 여성이었다.
금발 머리에 세련되고 우아한 기품이 어린 귀부인이다.
그녀 주위로 메디나 상회 사람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대거 앉아있었다.
그들끼리 모여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업계 1위라 그런지 풍기는 아우라가 대단했다.
돈 잘 버는 사람들은 확실히 다르게 보였다.
“저 사람 이름이 뭐야?”
“카일리 메디나.”
“여자는 상회의 주인이 될 수 없다고 하지 않았어?”
“나랑 같냐? 저 여자는 부모님이 귀족이야. 배경이 좋아서 다 해먹을 수 있어.”
“권력 앞에 모두가 평등하군.”
모니카가 옆으로 다가와 슬쩍 팔짱을 끼며 애교를 부렸다.
“자기가 나 돈 많이 벌게 해줘. 저 여자처럼 보석 박힌 드레스 좀 입어보자. 알았지?”
“땅이 오천평 밖에 없는데 어느 세월에.”
“우리 어머니 좀 꼬셔봐. 만평만 달라고 해.”
“메건 부인을?”
“난 싫어해도 자기는 굉장히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더라. 부탁하면 뭐든 다 들어주게 생겼던데?”
“아무리 그래도 만평씩이나 어떻게 달라고 해. 나참.”
리안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웃어넘기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의도치 않게 근처에 앉은 상인들끼리 주고받는 대화소리가 들렸다.
“남부지방 사정에 대해서 잘 아는 애들 없어?”
“우리 가게는 그쪽이랑 거래 안해서 없지. 왜? 그쪽에서 장사하게?”
“아니, 지난주엔가 우연히 들었는데 남부지방에 왜 유명한 소금광산있잖아? 그곳이 무너졌다는 소문이 있더라고.”
“진짜? 거기 무너지면 내년에 소금 없어서 큰일나겠네.”
“그러니까 내 말이. 그래서 말야. 소문이 확실하면 소금 좀 미리 사올까 하는데 아~ 소문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그들의 대화를 무심코 집중해서 듣고 있던 리안은 무언가 떠오르는 것 같았다.
‘소금?’
그러고보니……
얼마전 귀부인들 세 명에게 얼굴 마사지를 해줄때였다.
“전쟁때문에 이번 겨울에 소금이 부족할거래요. 사려면 지금 빨리 사두세요.”
“소금값은 안올랐던데요?”
“그러다 갑자기 오른다니까요. 이 얘기는 우리 신도님께서 말씀해준거예요. 상단을 운영하시는 신도님께서. 지금 남부지방의 유명한 소금광산이 무너졌다는 걸 아는 사람이 별로 없대요.”
소금이 부족하다라.
그 말이 진짜였는가 보네?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자신도 괜스레 남들에게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미리 대비해야할듯한 조바심이 들었다.
‘소금? 소금? 소오금……? 난 살 곳이 있나?’
소금을 사올 곳이 있어야 나중에 실컷 팔아먹지.
싸게 사올 곳도 없는데 어떻게 남겨먹지?
“자기야, 왜 말이 없어?”
“응? 뭣 좀 생각하느라고.”
“무슨 생각? 생각 그만하고 나 화장 잘 됐나 봐줘.”
“모니카 씨 아닙니까?”
옆에서 불쑥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리안은 슬그머니 모니카와 팔짱을 풀며 옆으로 떨어져 앉았다.
모니카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이내 활짝 웃어보였다.
“알베르토 씨!”
“여기서 만나뵐 줄이야. 반갑습니다.”
둘은 서로 악수를 나누었다.
모니카는 리안을 돌아보며 그를 소개했다.
“우리 옆 창고. 한스 상회의 주인 알베르토 씨야.”
“아……”
“알베르토 씨? 이분은 우리 상회의 상주 님이신 리안 님입니다.”
“아, 김리안 씨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알베르토는 리안과 악수를 나눈뒤 잠시 의자에 앉았다.
“모니카 양이 순무와 상추를 가져다 줘서 저도 맛을 보았습니다. 정말 잘 키우셨더군요. 혹시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품종을 키운겁니까?”
“아뇨. 시장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순무와 상추 씨로 키웠습니다.”
“호오…… 일반 품종으로 그런 맛과 크기가 나오다니 믿기지가 않습니다.”
알베르토는 오십이 넘어보이는 대머리 사내였다.
상인답지 않게 말투가 의외로 교양있고 부드러웠다.
상당히 점잖은 사람이었다.
“귀부인들이 몰려와서 전부 사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완판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그때였다.
2층 난간에서 종소리가 들렸다.
딸랑! 딸랑!
“모두 집중해주십시오!”
딸랑! 딸랑!
1층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2층 난간으로 향했다.
그곳에 잘차려 입은 식량정책국 관리가 서있었다.
리안의 눈에 낯익은 사람이었다.
그는 바로 니콜체!
예전에 상회 허가를 받기 위해 여관방에서 만났던 자였다.
‘쫄따구인줄 알았는데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구나.’
니콜체는 모두를 향해 간단히 인사말을 한 후 새로운 사람을 소개했다.
“황실 식량농업정책 자문관이신 리사 아스트리드 백작 님께서 오셨습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주십시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리안은 깜짝 놀랐다.
‘리사가 왔다고?’
그도 얼결에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2층 복도의 방문이 열리며 안에서 우아하게 차려입은 리사가 걸어나왔다.
그리고 그녀를 뒤따라 에밀리와 케스티리아도 방에서 나왔다.
“오오, 저분이 아스트리드 백작님이신가? 아름다우셔!”
사람들은 그녀를 보자 환호성을 지르며 더욱 열심히 박수를 쳐댔다.
모니카가 꾹꾹 옆구리를 찔렀다.
“우리한테 초청장 보낸 사람이 혹시 저 여자인가?”
“그런가?”
같이 합석해있던 알베르토는 기립박수를 치며 감탄했다.
“저토록 젊은 나이에 황실 자문관이 되셨다니 정말로 놀랍습니다.”
리사는 잠시 밑을 둘러보다 리안이 서있는 곳에서 시선이 멈췄다.
그녀는 리안을 향해 빙긋 미소지었다.
“음? 누구한테 미소지으신거지?”
“누굴 쳐다보는 것 같은데?”
사람들이 뒤를 돌아보자 당황한 리안은 슬그머니 일어선 사람들 뒤로 숨었다.
2층 난간에 서있던 리사도 모두를 내려다보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11월의 추수가 끝났습니다. 올해를 되돌아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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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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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사는 곧바로 떠날 채비를 했다.
그녀는 케스티리아의 호위를 받으며 술집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가면서 에밀리에게 귀를 대라는듯 손짓했다.
에밀리가 잽싸게 다가와 귀를 기울였다.
“김리안한테 가서 오늘밤엔 집에 와서 자라고 해.”
“바로 가서 전하겠습니다.”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라고도 전하고.”
“당연하죠.”
리사는 그대로 케스티리아가 열어준 출입문을 통과해서 밖으로 나갔다.
에밀리는 즉시 리안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사람들은 2층 난간에 서있는 니콜체의 말을 듣느라 여념이 없었다.
“안녕하세요 리안 님.”
“에밀리 씨? 저랑 만나도 되나요?”
조금 전에 앉아있던 알베르토는 다행히 다른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럼요. 잠깐 귀 좀 빌려주시겠어요?”
“예, 그거야 뭐……”
리안이 귀를 내밀자 에밀리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리안 님을 위해 리사 님께서 선물을 준비하셨어요. 그러니 오늘밤에는 꼭 집에 와서 주무세요. 만약 안오시면 제가 서큐버스의 마법을 부려서 어떻게 해버릴지도 몰라요.”
“예?”
리안이 당황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에밀리는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찡긋 윙크를 날렸다.
“꼭 오세요. 그럼 이만.”
그녀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옆에 앉아있던 모니카가 난데없이 리안의 팔을 세게 꼬집었다.
“아야……!”
“저 여자가 뭐라고 했어?”
“집에 오라고.”
“또?”
모니카는 기가막히다는듯 팔짱을 꼈다.
“발정난년 같으니. 아주 제대로 빠지셨네.”
그녀는 씩씩거렸다.
“백작 그년 엿 먹여야겠다.”
“어떻게?”
모니카는 가까이 붙어앉더니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내 애액이 잔뜩 묻은 꼬추를 그년한테 빨게 할거야. 어때? 나랑 먼저 하고 그 집에 가.”
“미쳤어.”
리안은 황당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천박해.”
“나 원래 천박한년인거 몰랐어? 내 친구들은 못 배운년들뿐이고. 하지만 우린 남자를 기쁘게 하는 법을 알지.”
모니카는 손으로 페니스를 잡고 빠는 시늉을 하며 혀를 낼름거렸다.
리안은 그 모습을 시큰둥하게 쳐다봤다.
“사람들 있는 곳에서 그러지마.”
“저년만 아니었으면 오늘밤 당신 옆자리는 내 차지였단 말이야. 왜 뺏어가는데?”
모니카는 몸을 흔들며 투정을 부렸다.
“가지 마. 응? 안된다고 해.”
그렇지 않아도 리안은 마침 고민중이었다.
현재 그의 머릿속에는 소금뿐이었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라카제트를 떠올리고 있었다.
‘라카제트가 소금도 팔려나……?’
그에게 소금을 살 방법이야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이번에 수확한 순무와 상추.
모니카에게 8할을 넘기고 남은 2할이 지금 오천평땅에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었다.
다만 얼마로 쳐줄지가 의문.
시들기 전에 빨리 팔아야했다.
‘그 우마족 소녀가 가치를 높게 평가해주면 좋으련만.’
리안의 계획은 다음과 같다.
송년회가 끝난뒤, 모니카를 오천평땅으로 데리고 가서 그녀와 응응을 한다.
그 다음 라카제트를 불러서 순무와 상추를 판뒤 소금이 있는지 물어본다.
이것이 그의 구상!
리사에게는 미안하지만 내일 만나야할 듯싶다.
“모니카. 이따 끝나고 나가서 심부름꾼 좀 불러줄래?”
“심부름꾼은 왜?”
“리사 님께 바쁜 일이 생겨서 못 간다고 전하게.”
“얼마든지 불러줄게!”
모니카는 신이난 얼굴로 리안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아유 사랑스러워라. 역시 자기 밖에 없어.”
“야야,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어차피 다들 위만 쳐다보고 있어서 몰라. 우린 구석 자리잖아.”
2층 난간에 서있는 니콜체의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자자, 기다리고 기다리시던 내년 ‘큰 호박 선발대회’에 쓸 호박 종자를 나눠드리는 시간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식량정책국 직원으로 보이는 젊은여자가 호박 종자가 가득 담긴 투명한 그릇을 양손으로 들고 나타났다.
니콜체는 종자 하나를 집어 모두에게 들어보였다.
“내년 대회에서 사용될 품종은 ‘빅 오우거 호박’ 입니다!”
“와아!”
실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쳐대며 환호했다.
“이른 봄에 파종해야 여름에 열리는 대회 일정에 무사히 맞출 수 있을겁니다. 다들 규정을 아시겠지만 빅 오우거 호박이 아닌 다른 품종의 호박들은 전부 실격처리 됩니다. 오로지 빅 오우거 호박만 참가가 가능합니다!”
리안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모니카를 돌아봤다.
“저게 뭐하는거야?”
“큰 호박 선발대회라고 무게가 가장 많이 나가는 호박을 키운 사람한테 상을 주는거야. 2년에 한번씩 송별회때 상인들한테 씨앗을 나눠주고 이듬해 여름에 대회를 열어.”
“씨앗을 왜 상인들한테 줘? 농부들한테 줘야지.”
“상인들이 자기랑 거래하는 농부들한테 전해줄거야.”
리안은 재밌는 대회라면서 웃었다.
“상금도 줘?”
“작년에 얼마줬더라…… 아마 1000골드인가 줬을걸?”
“처, 천골드?”
리안은 입이 쩍 벌어졌다.
“로또잖아?”
“로또?”
“우리 고향에서 쓰는 단어인데 인생 역전의 기회라는 뜻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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