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gricultura 6
그와 동시에 여성의 낯뜨거운 신음이 귓가에 울려퍼졌다.
“하앙!”
“어머나!”
헬렌 부인은 크게 당혹스러워하며 급히 창문의 커튼을 쳐버렸다.
“대낮부터 무슨 짓들이람!”
마차는 빠르게 현장을 지나쳤고, 헬렌 부인은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애를 먹었다.
워낙 강렬했던 장면이라 쉽게 잊혀지지가 않았다.
그것도 불과 몇 초전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기억이 선명했다.
나무 기둥을 붙잡고 서 있는 여자의 드레스 치마를 걷어올린 채 그 뒤에서 바지를 반쯤 벗어내린 남자가 허리를 튕겨 올리듯 신나게 박아대던 광경!
둘 다 뒤통수만 보여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활어처럼 힘차게 펄떡이던 사내의 엉덩이는 적나라하게 보였다.
“엉덩이는 진짜 힘 좋게 생겼네……”
남녀가 은밀히 뒤엉키는 광경이야 사교모임때 숱하게 봐서 그리 충격적으로 다가오진 않았으나, 자꾸만 뇌리에 떠오르는 사내의 탄탄한 엉덩이가 꽤나 자극적이었다.
그와 같은 근육진 엉덩이 흔치 않다.
흘러내리는 남편의 엉덩이랑 비교조차 안됐다.
“어머, 어머, 나도 참. 남사스럽게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헬렌 부인은 금세 자책하며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사내의 엉덩이를 잊으려 죄를 씻듯 여러차례 손으로 눈을 비볐다.
“하여튼 요즘 젊은 것들이란!”
혹시나 신들께서 지켜보실까 두려운 나머지 도둑이 제 발 저리듯 혼자 막 화를 냈다.
때와 장소를 구분치 못하고 아무데서나 문란한 행위를 일삼는다며 그녀는 목적지까지 가는 내내 젊은세대의 행태를 비판했다.
그러는 사이 마차는 이내 목적지에 도달했다.
으리으리한 대저택을 소유한 훅스 가문의 현관앞에 이르자 평소 친분이 깊은 메건 부인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어서오세요, 부인.”
“많이 기다렸죠?”
헬렌 부인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메건 부인에게 몸을 기대듯 서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왜 그래요?”
“아뇨.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잘 지냈어요?”
“그럼요. 어서 안으로 드세요.”
두 사람은 환담을 주고 받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 후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고,
“방금 거실 구석에서 페어리가 시무룩하게 앉아있던데 어디 아픈가요?”
“딸의 남자친구가 급한 볼일이 생겨 잠시 맡기고 갔답니다. 주인이 없다고 삐쳐있네요.”
“페어리가 사람을 잘 따르긴 하죠. 저도 예전에 키웠었는데 오랜만에 보네요.”
두 사람은 점심 식사를 같이 한뒤, 잠깐 정원에서 쉬면서 대화를 나누다가 어느덧 헬렌 부인이 돌아갈때가 되었다.
“가시기 전에 양배추 좀 몇 개 챙겨가세요.”
“양배추요?”
“저랑 딸의 남자친구가 같이 재배한건데 농사가 무척 잘됐어요.”
귀족들은 보통 채소에 관심이 없었기에 농사가 잘된건지 안된건지 볼줄 아는 안목이 없었다.
죄다 시종들한테만 시켰기 때문이다.
메건 부인이 텃밭을 보여줘도 헬렌 부인의 눈에는 특별할 게 없는 일반 양배추 밭으로만 보였다.
“크기가 더 큰 것 같기도 하고 색이 진한 것이 싱싱해보이긴 하네요.”
어찌되었든 그녀는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며 메건 부인이 뽑아준 양배추 세 통을 들고 집으로 귀가했다.
저녁때가 되자 식탁앞에 앉은 남편이 왼쪽 가슴을 움켜쥐며 얼굴을 찡그렸다.
“아구야, 또 속이 쓰리네……”
헬렌 부인이 걱정스러운 안색으로 쳐다봤다.
“또 뭐가 찌르는 것 같아요?”
“응, 위가 따가워.”
황도의 치안대장직을 맡고 있는 그녀의 남편 조레비치는 1년전부터 원인 모를 위통을 앓고 있었다.
그동안 몸에 좋다는 것은 전부 먹어봤으나 당최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돼지고기 나왔습니다.”
하녀가 노릇노릇하게 익은 돼지고기 접시를 조레비치 앞에 내려놓았다.
조레비치는 아픈 것도 잊고 그새 군침을 꿀꺽 삼켰다.
“잘 먹어야 빨리 낫지. 자자 당신도 드시오.”
“혹시 육류 위주의 식사 때문에 아픈게 아닐까요?”
“허허, 그게 뭔소리요. 초대 황제께서는 매일 고기만 먹고 살았는데도 장수하셨소. 당신도 요즘 채소쟁이들이 하는 소리를 믿는거요?”
채소쟁이란, 마족과의 전쟁이 길어지면서 식량 위기론이 대두되자 몇몇 학자들이 근미래 식량난 해결을 위해 채소 연구를 시작한 것이 계기였다.
이후 채소의 다양한 효능이 학계에 보고되기 시작하면서 채소를 많이 먹어야 건강해진다는 주장을 펼치는 학자들이 점차 생겨났다.
그들은 하루 세끼를 고기만 먹는 귀족들을 비판하면서 채소의 위대함을 널리 알렸다.
즉 채소를 찬양하는 학자들과 그들의 주장을 지지하는 귀족들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 채소쟁이였다.
“고기가 최고야. 가끔 심심하면 과일을 먹으면 되지 뭐하러 더러운 땅에서 자라는 작물을 먹어. 우리가 매일 굶주리는 사람들도 아니고.”
조레비치는 손으로 족발을 집어들었다.
킁킁 냄새를 맡더니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맛있는 고기를 어떻게 포기해?”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야심차게 족발을 뜯었다.
우물우물 부드럽게 씹히는 고기.
그리고……
“으윽!”
삼킨 고기가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내려가는 순간 그는 인상을 찡그렸다.
“젠장! 속에서 뭔가 핏물이 분수처럼 솟구치는 기분이야!”
그는 다급히 술잔을 집어들었다.
벌컥벌컥 술을 마시고나자 그는 재차 칼로 쑤셔지는듯한 고통을 느꼈다.
“아악! 더 아프잖아!”
“여보!”
헬렌 부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조레비치가 손바닥을 들어보였다.
“괘, 괜찮아! 시간 지나면 나아져……!”
남편을 근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던 헬렌 부인은 도저히 안되겠는지 급히 하녀를 불렀다.
“예, 마님. 부르셨습니까?”
“아까 가져온 양배추로 샐러드를 만들어 오거라. 어서!”
“네.”
하녀는 인사를 올린뒤 후다닥 주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조레비치는 심호흡을 하고 나서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수저를 들었다.
“괜찮다니까. 이 정도 아픔쯤이야 이젠 익숙해.”
“오늘은 채소만 먹어봐요. 고기 먹지 말고요.”
“양배추는 전에 누가 위장에 좋다고 해서 한 번 구해다 먹어봤잖아. 별 효과도 없었어.”
“메건 부인이 그러는데 농사가 잘 됐데요. 다른 양배추랑 품질이 다르다나 뭐라나. 자랑하는 소리를 한 시간여를 들었어요.”
“아, 그 과부? 아직도 과부로 지내? 예전에 어디를 가든 그 여자 얘기만 나와서 금방 괜찮은 사내 하나 물줄 알았는데.”
“당신 주변엔 여자를 함부로 대하는 무식한 사람들만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하는 말은 듣지마요.”
“그 말은 나까지 무시하는거야. 그리고 내 주변이 어때서? 칼 잘 쓰는 멋진 친구들만 있다고. 남자는 칼이 최고야.”
하녀가 잘게 썬 양배추에 노란 소스가 뿌려진 접시를 들고 나타났다.
“어서 주인님께 드리거라.”
“네.”
하녀가 접시를 내려놓고 떠났다.
조레비치는 앞에 놓인 양배추 샐러드를 소스와 섞으며 푸념을 뱉었다.
“이미 먹어봤다니까.”
“알았으니 일단 먹어봐요.”
“당신 그러다 채소쟁이 되겠어.”
조레비치는 아내의 강권에 못이겨 양배추 샐러드를 한숟갈 크게 떠먹었다.
우걱우걱.
잠시 맛을 음미하던 그가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흐음, 단맛이 진하네. 신선해.”
아삭아삭한 양배추를 잘게 씹고서 꿀꺽 삼켰다.
그러자 느낌이 아까 고기때와 달랐다.
“으음? 잘 넘어가는데?”
“위 안아파요?”
“괜찮은데?”
헬렌 부인은 가슴에 손을 얹으며 한시름 놓았다.
“오늘 저녁은 양배추만 드세요.”
잠시 후, 양배추만 먹던 남편이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이상해.”
“뭐가요?”
“위장이 아무렇지 않은데?”
“아까 괜찮다면서요.”
“아니, 찌르는듯한 통증이 싹 사라졌어. 아깐 조금씩 찌르는 기분이 있었거든. 근데 지금은 없네?”
조레비치는 양배추를 한숟갈 퍼서 씹어먹은뒤 곧바로 옆에 밀어놓았던 돼지고기에 손을 가져갔다.
“여보, 고기 그만 먹으라고 했잖아요.”
“잠깐만.”
그는 족발을 들고 와구와구 뜯어먹었다.
이윽고 입안의 내용물을 꿀꺽 삼킨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희한하네. 하나도 안아파.”
“예? 그럴리가요.”
“아냐, 정말 안아파……!”
조레비치는 믿기지 않는다는듯이 멍한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하! 고놈 참 신기하네!”
그는 양배추 샐러드를 마구 퍼먹어대기 시작했다.
“맛도 좋고 소화도 잘 되고 끝내줘!”
순식간에 양배추 샐러드를 해치운 그는, 이어 돼지고기 접시를 화끈하게 비워버리고 더불어 술까지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그럼에도 위가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튼튼해진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음식만 먹으면 체한 것처럼 매일 더부룩 하던 배가 지금은 소화가 잘돼 포만감이 느껴졌다.
이 얼마만의 즐거운 식사란 말인가!
조레비치는 건강해진 위를 보며 기쁨이 넘쳐났다.
“여보! 훅스 가에 가서 양배추 좀 더 받아오면 안돼?”
“당신도 이제 채소쟁이가 된거예요?”
“난 앞으로 채소쟁이야! 만약에 돈 달라면 달라는대로 주고 다 사와!”
양배추에 포함된 특수 성분이, 양배추의 품질이 오르자 한층 더 강화되면서 찢어진 위벽에 기존보다 더욱 튼튼한 보호막을 형성했다.
조레비치는 이 같은 사실을 평생 모르고 살지도 모른다.
그러나 훅스 가의 양배추가 특별하다는 것 하나는 제대로 알아챈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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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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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최고 번화가로 꼽히는 황도 브라간스트 내 하이니스 스트리트 라는 동네에 와있었다.
이곳은 원래 예정에 없던 곳이었는데 모니카 때문에 잠깐 들르게 되었다.
“부럽다……”
모니카는 뒤로 고개를 꺾어 위풍당당하게 세워진 상회 건물을 경외심이 가득한 시선으로 올려다봤다.
“여기가 메디나 상회야?”
“응. 건물 죽이지?”
리안도 고풍스런 건물을 함께 올려다보았다.
높이는 2층이지만 건물 면적이 가로로 꽤 길었고, 원뿔 형태의 지붕이 족히 20미터는 되는 것 같았다.
지붕을 끝까지 보려면 고개가 자동으로 뒤로 젖혀졌다.
“그러니까 여기가 업계 1위라고?”
“전국에 지점이 수백개나 되고 농수산물 운반용 대형 선박도 수십척이나 보유하고 있어. 황도에 들어오는 해산물은 전부 메디나 상회의 손을 탄 것들이야.”
“굉장하네.”
“난 언제 이렇게 될까?”
“최소 20년은 걸리지 않을까?”
“힝……”
리안은 모니카의 등을 토닥이며 웃었다.
“다 봤으니까 가자.”
“잠깐만 기운 좀 받아가고.”
모니카는 건물 주변 공기를 빨아먹는답시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뱉었다를 반복했다.
“스으읍 하! 스으으으읍 하아! 스읍!”
리안은 바보짓을 하는 모니카를 놔두고 마부석에 올라탔다.
두 사람이 다음으로 향한 곳은 울라프의 식당이었다.
한달전 울라프와 헤어지기전 그에게 초대를 받았고, 황도에 들른 김에 그곳에서 점심식사를 해결할 생각이었다.
모니카는 전에 한 번 와봤기에 길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알려주는대로 짐마차를 몰았다.
“다 왔어. 여기가 고몽 드 마리아야.”
“여기라고? 와 사람 많다.”
널따란 1층 건물 안과 야외 테라스까지 손님들로 꽉 차있었다.
그속에서 흰 앞치마를 걸치고 갈색 머리를 단정하게 말아올린 여종업원이 눈에 띄었다.
음식이 담긴 쟁반을 들고 부지런히 테이블 사이를 돌아다니는 그녀.
“저 사람 세이라지?”
“그러네.”
모니카는 관심없다는 투로 대답하며 배고프니 빨리 들어가자고 보챘다.
리안은 건물 뒤편으로 가서 마구간에 짐마차를 세웠다.
근처에 쪼그려 앉아있던 소년 하나가 잽싸게 뛰어왔다.
고몽 드 마리아 직원인지 식당 마크가 새겨진 뱃지를 가슴에 달고 있었다.
“주차비 30코퍼예요. 누가 못 훔쳐가도록 잘 지켜드릴게요.”
리안은 손으로 모니카를 가리켰다.
소년은 이내 그녀를 돌아보며 손을 내밀었다.
모니카가 웃으며 지갑을 열었다.
“누나가 5코퍼 더 줄테니까 확실히 지켜.”
“네!”
리안과 모니카는 나란히 건물 앞으로 걸어갔다.
“청소도 잘해놨네. 골목이 깨끗하다.”
모니카는 딴청을 부리는 척하며 리안의 옆구리에 슬그머니 손을 집어넣고 팔짱을 꼈다.
그러자 리안이 즉시 옆으로 한 걸음 떨어지며 팔짱을 풀었다.
모니카가 입술을 빼죽 내밀었다.
“잘차려 입은 사람들끼리 좋은 식당 앞에서 연인 기분 좀 내보자는데 불만이야?”
“벌써 잊었어? 난 상회 대표 김리안, 당신은 내 보좌관인척 하기로 했잖아.”
“아참 그렇지!”
“그 머리로 퍽도 메디나 상회 따라잡겠다.”
그녀는 리안의 등을 툭 때렸다.
“잠깐 감성에 취해서 그랬거든?”
툴툴대는 그녀와 함께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입구에서 쟁반을 들고 밖으로 나가려던 세이라와 눈이 마주쳤다.
“헉!”
그녀는 리안을 보더니 눈을 휘둥그레 뜨며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리안은 밝게 웃으며 한손을 들어보였다.
“안녕하세요. 놀러왔습니다.”
“리, 리안 님……”
“야, 저리 비켜줄래? 우리 들어가게.”
“아, 네, 네!”
당황한 세이라가 황급히 몸을 비켜주자 모니카는 도도한 귀족 여성처럼 엉덩이를 씰룩이며 홀안으로 당당히 걸어들어갔다.
리안은 그녀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면서 세이라를 향해 웃어보였다.
“고생하세요.”
세이라는 수줍어하면서 시선을 내렸다.
“가, 감사합니다.”
시끌벅적한 홀안으로 들어가자 울라프의 아들 다렌이 보였다.
그는 모든 손님이 볼 수 있게 설치된 화덕 앞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통구이를 굽고 있었다.
시선을 돌리다 우연히 리안과 모니카를 발견하자 먼저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네왔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죠?”
“물론이죠.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그땐 감사했습니다.”
“뭘요.”
정중하게 인사를 나누는 리안과 달리 모니카는 매우 편하게 그를 대했다.
“안녕 다렌~ 아버지 어디 계셔?”
“주방에 계세요.”
“우리 왔다고 알려줄래?”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다렌은 싹싹하게 대답한뒤 곧장 주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요리사 모자를 쓴 울라프가 젖은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홀안으로 나왔다.
“오, 리안! 모니카!”
“잘 지내셨어요?”
“공짜밥 얻어 먹으러 왔어요~”
“줘야지 줘야지! 잘왔어!”
울라프는 크게 반가워하며 리안과 모니카를 한번씩 안아주고 악수를 나누었다.
“지금 자리가 꽉 찼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선 채로 즐겁게 대화를 나누다 그는 금세 주방으로 들어갔다.
손님이 많아서 쉴 틈이 없었다.
“좀 여유 있을때 올걸 그랬다.”
“그러게. 아저씨도 애들도 되게 정신없어 보이네.”
그렇게 홀 구석에서 잠시 멀뚱히 서서 기다리는데 마침 식사를 마친 손님들이 일어났다.
세이라가 뛰어와서 리안과 모니카를 잽싸게 그곳으로 안내했다.
“이쪽에 앉으세요.”
모니카는 자리에 앉자마자 세이라를 쳐다보았다.
“바빠 보이니까 대충 먹고 갈게. 알아서 갖다줘.”
“아니에요. 아무리 바빠도 대접을 해드려야……”
세이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리안이 끼어들며 모니카의 말을 거들었다.
“저희도 시간이 없어서 그러니 금방 먹고 갈만한 걸로 갖다주세요. 얼른 먹고 가봐야 해요.”
세이라는 그를 향해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뭔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말이 잘 안나오나보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죄송하다는 말만 거듭하며 자리를 떠났다.
“쟤 내숭 떠는 것봐. 나랑 완전 상극이야.”
모니카가 나무잔에 담긴 미지근한 물을 마시며 코웃음을 쳤다.
“내숭이 어때서.”
“자꾸 우리 자기 꼬시려드니까 문제잖아.”
“언제?”
“보면 몰라? 계속 여성스러운척 하잖아. 오글거리게.”
“내성적인 성격인가보지.”
“저래놓고 사람들 없을때 시팔시팔 하면서 본색을 드러내는거 아냐?”
리안이 어이없이 웃었다.
“물이나 더 마셔.”
40여분 정도 기다렸을까.
마침내 요리가 나왔다.
“너무 많아!”
적당히 갖다 달랬는데 미안할 정도로 양이 푸짐했다.
심지어 요리를 총 3코스로 나눠 각 코스마다 매번 다른 지역에서 생산된 비싼 포도주까지 제공됐다.
시칠리노산 포도주.
바리카드산 포도주.
요코른산 포도주.
설탕에 절인 오렌지.
왕새우 찜요리.
아몬드를 갈아넣은 우유에 닭고기를 넣고 끓인 수프.
오트밀 죽.
공작새로 만든 고기파이.
구운 아스파라거스.
고급 치즈를 바른 한마리에 1골드를 호가하는 직화 연어구이 등등!
막상 음식이 나오자 리안과 모니카는 나이프와 수저를 들기 무섭게 정신없이 먹어대기 시작했다.
“이야, 이 수프 맛있다.”
우유에 닭고기 조합이라 맛이 개떡같을줄 알았는데 느끼함 없이 칼칼한게 맛을 절묘하게 살려놓았다.
사골국물처럼 깊은 맛이 있었다.
왕새우찜은 새우마다 살이 굉장히 통통했다.
한 입 베어물면 입안 가득 새우살이 들어찼고 씹으면 씹을수록 단맛이 우러나와 씹는 내내 입이 즐거웠다.
고소한 맛에 야들야들 쫄깃한 식감이 정말 일품이었다.
닭고기 수프와 왕새우찜 말고도 칭찬할 요리가 한 두 개가 아니었다.
저마다 뚜렷한 개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공을 들여 만들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을만큼 훌륭한 맛을 자랑했다.
반대편에 마주앉은 모니카도 나오는 요리마다 맛이 기가막힌지 양볼이 빵빵해질 정도로 음식을 입에 넣고 연신 함박웃음을 지어댔다.
그러던 그녀가 문득 말했다.
“맛있어서 좋기는 한데 왠지 긴장되네. 걱정도 생기고.”
“왜?”
“요리에 들어간 재료들이 전부 외지에서 들어온 것들이야.”
그런 사실쯤이야 리안도 음식을 입안에 넣기 시작한 시점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직화 연어구이에 곁들어진 구운 버섯은 남쪽 땅에서 온것이고, 아스파라거스는 서쪽 땅, 오트밀에 사용된 귀리 및 공작새 고기파이에 들어간 밀가루는 제국밖 다른 나라에서 일제히 수입해온 것들이었다.
“이놈, 이놈, 이놈, 이놈들 저언~~~부.”
모니카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모든 요리를 한번씩 콕 집어 가리키더니 무표정으로 리안의 눈을 마주봤다.
“메디나 상회가 운송해온 것들이야.”
그녀는 이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황도는 이미 메디나 상회가 거의 장악하다시피 했는데 과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리안의 대답은 간단했다.
“욕심부리지 말고 소소하게 벌어. 그러면 되지.”
“그 전에 나랑 거래해줄 사람들이 있느냐가 문제지. 다들 메디나 상회랑 하고 있을텐데.”
“걱정마. 상품만 좋으면 사가지 말래도 사가.”
모니카가 수저를 든 채 히죽거렸다.
“그럼 내 운명이 당신한테 달렸네?”
리안은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너무 기대하지마. 농사는 사람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을 때가 있어.”
“천재지변?”
“응.”
리안은 왕새우를 들고 껍질을 뜯었다.
그러면서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늘이 화나면 제아무리 농사의 신이라 할지라도 못 당해.”
“마왕은?”
“갑자기 웬 마왕?”
“마왕은 엄청나게 힘이 세니까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지면 마법으로 그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모니카의 발언에 리안은 무심코 웃음이 터졌다.
“나야 모르지. 내가 마왕도 아니고.”
얼마 후, 두 사람은 음식에 곁들여진 채소 한 조각까지 말끔히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습니다.”
“벌써 가려고? 천천히 놀다가지.”
“다음에 또 올게요.”
식당 밖에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배웅을 나온 울라프에게 폐를 끼칠 수 없어 또 보자는 인사만 남기고 도망치듯 식당을 빠져나왔다.
어차피 한번 오고 말곳이 아니라서 작별인사를 길게 할 필요도 없었다.
“저…… 리안님!”
뒤를 돌아보니 세이라가 나와 있었다.
그녀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꾸벅 허리를 숙였다.
“또, 또 오세요!”
“네, 또 올게요!”
그녀와 식당 앞에서 헤어진뒤 짐마차에 올랐다.
현재 시각 오후 1시.
식량정책국 담당자와 만나기로한 시간은 저녁 6시.
뱃속도 든든하겠다 시간도 많겠다 황도 좀 구경하며 모니카와 여유롭게 데이트를 즐길 생각이었다.
“가자.”
“어디부터 갈거야?”
“당연히 시장이지.”
이후 시장에 가서 작물의 종자를 사고 쓸만한 농기구가 없나 둘러도 보고 인력시장에도 잠깐 들렀다.
그곳에서 요즘 인건비가 얼마하는지 시세를 파악했다,
……가 아니라 이 세계에는 인력시장이란게 없다지 뭔가!
노예시장만 있었다.
“일용직 근로자들 소개시켜주는 가게나 길드 같은데는 없어?”
“없지만, 그 비슷한 곳으로 용병 길드는 있어. 거기 한번 가볼래?”
“칼쓰는 사람들한테 농사일 시키면 투덜대지 않을까?”
“글쎄? 아마 잡일도 할걸? 돈 벌려면 뭐든 못하겠어?”
그녀가 말했다.
“싫으면 당신이 직접 광장 게시판에 방을 붙여 모집하거나 지인들끼리 알음알음으로 구하는 수 밖에 없어.”
결국 다음에 가보기로 하고 포기했다.
돈이 없는데 지금 가서 뭐하랴.
“당신 볼일은 끝났지? 자 이제 내 차례야. 따라와!”
남은 시간에는 모니카를 따라다니면서 군것질을 하며 이것저것 쇼핑을 했는데 완전 죽을맛이었다.
이윽고 고대하던 저녁이 되었을 무렵, 리안과 모니카는 약속 장소인 고급스러운 여관 앞에 서있었다.
결전을 앞둔 두 사람은 약간 긴장한 기색으로 심호흡을 했다.
“모니카, 준비됐어?”
“준비됐어.”
“명심해. 당신은 보좌관이고 나는 김리안 상회의 대표야. 나한테 항상 존대를 쓰고 예의바르게 행동해야 해.”
“뭔가 마음에 안들지만, 알았어.”
“들어가자.”
“자, 잠깐만, 잠깐만.”
“왜?”
모니카는 다급히 팔을 내려 자신의 사타구니를 더듬거렸다.
“좋아, 속옷 안입었어. 오케이. 됐어.”
“참나.”
리안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앞장서서 여관으로 들어갔다.
여관 주인에게 식량정책국 담당자를 만나러 왔다고 설명하자 그는 기다렸다는듯이 리안과 모니카를 2층 구석에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여관 주인이 방문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방안으로 들어가자 널따란 원형 테이블에 식량정책국 담당자로 보이는 중년사내가 홀로 앉아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인자한 인상을 가진 사내였다.
일이 잘 풀릴듯한 예감이 들었다.
리안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안녕하세요 김리안입니다.”
“반갑습니다. 식량정책국에서 나온 니콜체라고 합니다.”
리안은 짧게 인사를 나눈뒤 텅 빈 원형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니콜체와 마주앉았다.
모니카는 리안의 뒤쪽으로 가서 약간 거리를 두고 섰다.
리안은 일부러 방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1층 홀을 놔두고 방에서 만나자고한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침대까지 있는 말그대로 일반 여관방이다.
니콜체는 전혀 망설임 없이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조금 있으면 높으신 분께서 오실 겁니다.”
“높으신 분이라면……?”
“황제 폐하의 지근거리에서 보좌하시는 분이죠. 그처럼 높으신 분들은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매우 신중하십니다. 특히 남의 눈에 띄는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죠.”
그 말을 듣자 리안은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일개 상인 허가 내주는데 어째서 폐하의 보좌관께서 오시는 거죠?”
그러자 그도 영문을 모르겠다는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저도 의문입니다. 며칠전 갑자기 찾아오시더니 이번 건을 직접 처리하시겠다길래 저는 그저 주선자 역할만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예……? 니콜체 님께서 허가 내주시는게 아니었나요?”
“저는 그분이 오실때까지 자리만 지키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무 권한이 없지요.”
그가 사람 좋게 웃어보였다.
갑자기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리안은 심각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실례가 안된다면 그 높으신 분의 존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때였다.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리며 짧은 치마를 입은 리사 아스트리드가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
“!?”
리안은 난데없는 상황에 깜짝 놀라며 그녀를 멍하니 쳐다봤다.
또각또각.
경쾌하게 걷는 구두소리.
리사는 성큼성큼 다가와 리안의 코앞에서 딱 멈춰섰다.
조막만한 얼굴.
어두운 색상의 원피스 치마 아래 검은 스타킹을 신고 긴 기럭지를 자랑하는 그녀.
그런 그녀가 리안을 내려다보며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잡았다.”
리안의 눈이 점점 커지더니, 돌연 자리에서 냅다 일어나 문쪽으로 도망쳤다.
‘Fucking shit!’
뒤에서 모니카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가 리안!”
쏜살같이 문앞에 다다른 순간!
케스티리아와 에밀리가 불쑥 나타나 앞을 가로막았다.
돌진하던 발걸음이 우뚝 멈춰섰다.
에밀리는 싱긋 웃으며 리안의 얼굴쪽으로 두 장의 문서를 들어보였다.
“어디 가세요? 허가 받으셔야죠.”
팔랑팔랑.
사업 허가를 요청하는 문서 두 장이 리안의 눈앞에서 춤을 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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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회
*경고* 지금 보고 계신 화면은, 조아라에서 지원하는 정상적인 경로의 뷰어가 아닙니다.해당 방식으로 조아라에서 제공하는 작품을 무단으로 추출하는 것에 사용하거나 협조할 경우, 저작권법에 위배되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되실 수 있으니,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작품감상을 부탁드립니다.(5년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 부과)----------------------------------------밭농사 준비, 농지 구매의 시간“리사 님께서 오셨으니 전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니콜체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후다닥 방을 빠져 나갔다.
모니카는 상황파악이 안돼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리, 리안 님? 설명 좀…… 헤헤.”
그녀가 머쓱하게 웃으면서 다가오자 에밀리가 끼어들었다.
“윗분들께서 편히 말씀을 나누실 수 있도록 우리 아랫사람들은 나가 있는게 좋겠습니다.”
“아뇨, 전 리안 님 곁을 지켜……”
“자, 나가죠.”
에밀리가 말을 자르며 그녀의 몸을 잡아당겼다.
“이리오세요.”
모니카는 영문도 모른 채 에밀리와 케스티리아에게 거의 끌려가다시피 복도로 나갔다.
에밀리는 나가기전 문서 두 장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미소지었다.
“두 분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대로 문이 닫히고 실내엔 리안과 리사만이 남게 되었다.
적막감이 감돌았다.
또각또각.
리사가 먼저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문앞에서 우두커니 서있는 리안을 바라봤다.
“뭐해? 앉아.”
그때 문밖에서 모니카의 말소리가 들렸다.
“저분이 황실자문단에 소속된 리사 아스트리드 백작님이시라구요!? 어머 세상에나!”
깜짝 놀라던 그녀의 목소리는 곧 기쁨이 가득 넘쳐흘렀다.
“부디 얘기가 잘됐으면 좋겠네요! 호호호!”
리안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자리에서 혀를 차고는 이내 리사쪽으로 몸을 돌렸다.
마지못해 그녀를 마주보고 앉았다.
리사는 그의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쭉 훑어보았다.
잘차려입은 그를 보고 미소지었다.
“옷 예쁘네.”
“……”
“나 안보고 싶었어?”
“……”
리안의 대답을 잠시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얕은 한숨과 함께 창밖을 바라보기만 했다.
리사가 다시 입술을 열었다.
“난 보고 싶어 죽을뻔 했는데.”
리안은 무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봤다.
“리사 님.”
“그래, 어떤 말이든지 해봐. 말없으니까 무섭잖아.”
그녀는 팔짱을 끼며 스타킹을 신은 다리를 꼬았다.
“해봐.”
리안은 두 손으로 공손히 테이블 위의 문서 두 장을 가리켰다.
“허가, 부탁드리겠습니다.”
“싫어.”
라고 리사의 입에서 즉답이 흘러나왔다.
“웃어.”
그녀가 덧붙였다.
“날 보고 기뻐하란 말이야.”
“알겠으니 서명 좀.”
“표정 풀어. 왜 굳어 있어?”
리안은 짐짓 방긋 웃어보였다.
“풀었으니 서명 좀……”
“싫어. 억지로 웃었잖아.”
리안은 눈을 감으며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다시 눈을 뜨고 리사를 응시했다.
“간절히 청컨대 서명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시키는대로 해주면 나 좋아해줄래?”
“불가능합니다.”
“어째서? 나 아름답잖아. 내 미모에 반해서 집적대는 남자들 많아. 넌 남자가 아닌 다른 생물이야?”
그녀는 대답할 틈도 주지않고 계속 말했다.
“에밀리가 집주소 가르쳐줬다며. 왜 안찾아왔지?”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리사 님께서 이러시는게 너무 갑작스럽고 이해가 안되서 그랬습니다.”
“이해하지마. 사랑만 해.”
리안은 이 여자가 정말 진심인가 싶어서 조심스레 물었다.
“절 노예로 고용하는게 아니라 정말 남자친구로 생각하시는 겁니까?”
리사가 고개를 저었다.
“남자친구라니? 어느 세월에 연애하고 결혼하니. 난 성미가 급해서.”
그녀가 싱긋 웃어보였다.
“남편하라니까.”
리안은 황당한 나머지 실소를 터뜨렸다.
“오 마이 갓.”
“너도 좋지? 말 나온 김에 오늘 바로 아기 가질까? 신혼방은 이미 준비해놨어. 아주 예쁘게 꾸며놨다? 나 딱 한번 보고 일부러 안들어 가보고 있어. 너랑 같이 들어 가서 감동 받으려고.”
리안은 헛기침을 하며 웃음기를 지운뒤 말했다.
“저는 누구랑 결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왜?”
그녀가 과장된 표정으로 깜짝 놀란다.
“혹시 고자야? 안 서? 괜찮아, 돈이면 안되는게 없을거야. 내 전재산을 쏟아부어서라도 거기 잘 고치는 명의를 찾아줄게. 걱정하지마.”
“아뇨, 그런게 아니라……”
리안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결심을 굳히고 나서 입을 열었다.
“제게는 꿈이 하나 있습니다.”
그렇게 운을 떼며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진정성을 알아주길 바라며, 몇몇 부분은 빼거나 얼버무리면서 최대한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홀로 외로이 지내실 스승님을 떠올리면 마음이 몹시 초조해집니다. 지금 여기서 뭐하는가 싶기도 하고, 돈이고 뭐고 일단 출발해야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아무튼, 이게 현재 제 심정입니다.”
리안의 이야기가 끝나자, 그때까지 진지하게 듣고 있던 리사는 그제야 의문이 풀렸다는듯 얼굴에 미소가 깃들었다.
“그래서 날 밀어냈구나? 별 것도 아니었네.”
“네?”
리사가 뜻밖의 반응을 보이자 리안은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별 것 아닌 이야기라니요. 저한테는 중요합니다. 그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제 인생을 바치고 있어요.”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지. 사람을 너무 믿지마. 네 예상과 다르게 흘러갈 수도 있어. 잘 생각해봐.”
그녀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스승이라며. 제자가 너 하나뿐이겠어? 널 잊고 벌써 새 제자를 들였을지도 모르지. 혼자서만 짝사랑하는거 아니야?”
“예?”
리안은 순간 욱했다.
아무리 공감이 안되는 이야기였어도 말을 너무 심하게 하는 것 아닌가?
격해지려는 감정을 억누르며 그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설령 새 제자를 들이더라도 스승님은 결코 저를 잊지 않으셨을 겁니다. 우리가 함께 지낸 세월이 몇년인데…… 분명 저를 그리워 하실 겁니다.”
리사가 피식 웃었다.
“마족 한 마리가 너희의 안락한 보금자리를 침입했다고 했지? 그리고 너는 침입을 막아내는 과정중에 어쩌다 보니 그 마족과 이곳까지 멀리 날아왔고.”
“네.”
“그 여자는 네가 죽은줄 알고 있겠네.”
“아마도요.”
“그렇다면 뻔해. 인간이란 자신만 죽지 않으면 돼. 살았다는 것에만 안도하며 다른 이들의 희생따위 쉽게 잊어버리지. 내가 장담컨대 그 여자는 널 잊었어. 완전히.”
“……”
리안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그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리사의 말은 계속 그를 화나게 했다.
그것도 모르고 그녀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사람들은 놀랄 정도로 잘 잊어. 자신을 절대 안잊을 것 같은 사람도 세월이라는 파도 혹은 과거의 인연을 대체할 새로운 인연을 만남으로서 쉽게 잊어버리지.”
리사는 신이난듯 말했다.
“넌 이미 잊혀졌어. 그 여자는 그새 딴 제자랑 히히덕 거리며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거야. 그러니 가지마. 여기 남아서 나랑 살아.”
그 말을 끝으로 긴 침묵이 이어졌다.
말없이 테이블만 바라보던 리안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사가 그를 올려다봤다.
“어디가?”
“집에.”
리안은 말을 함부로 하는 그녀에게 내심 화가 났다.
백작으로도 안보일 지경이었다.
“허가는?”
“필요없어.”
“정말?”
“이만 갑니다.”
“거기 서. 허가 받아야 하잖아.”
리안은 무시하고 복도로 나가버렸다.
리사는 제자리에 앉은 채 고함을 쳤다.
“아무데도 못가! 케스티리아!”
복도에서 케스티리아가 리안을 막아섰다.
그녀는 봉긋 솟은 가슴이 리안의 가슴에 닿을락말락할 정도로 가까이 붙어서는 엄중히 경고했다.
“다시 방으로 돌아가십시오.”
당장 칼이라도 꺼내들 것처럼 위압감을 풍겼다.
그러나 리안은 빡쳐서 뵈는게 없었다.
웃으며 대꾸했다.
“싫은데?”
말도 안되게 빠른 속도로 두 팔을 뻗어 케스티리아를 공주님 안기 자세로 번쩍 들어올렸다.
“!?”
너무 맥없이 제압 당하자 케스티리아는 놀라 당황했다.
‘어째서……?’
그녀가 잠시 경직된 사이 리안은 침대에 눕히듯 그녀를 얌전히 복도에 내려놓고,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당황하고 있던 모니카를 쳐다봤다.
“가자.”
“어? 어!”
그렇게 리안은 모니카를 데리고 사라졌다.
케스티리아는 복도에 누운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처럼 빨랐어……”
싸우다 바닥에 누워본 기억이 견습생 시절 말고는 정말로 오랜만이라 충격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거예요?”
에밀리가 황급히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리사는 팔짱을 낀 채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아있었다.
“나 상처받았는데 그래도 그가 좋아. 어쩌지? 나 정말 미친걸까?”
“대체 뭐라고 하셨길래 저 사람이 화났어요?”
“별말 안했어. 고향에 기다리는 스승이 있다길래 그 사람은 이미 너 같은건 잊었으니 새출발 하라고 조언해줬을뿐이야.”
에밀리는 황당하다며 가슴을 쳤다.
“누가 누굴 조언해줘요! 오히려 조언 받아야할 분이! 내가 환장해!”
그녀가 언성을 높였다.
“오늘 같은 날엔 즐겁게 당근 얘기나 하셨어야죠! 우리가 땅줄테니까 열심히 키워보라는 식으로 살살 꼬드기셨으면 저렇게 화나지 않았을 거예요!”
리사는 이제야 생각났다는듯 눈을 크게 떴다.
“아, 그러고 보니 그 얘기를 잊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빨리 가서 잡아와. 당근 얘기하면 기분이 풀어질거야.”
“늦었어요!”
“안늦었어. 방금 나갔잖아.”
“거리에서 소란 피우며 사방팔방 소문 내고 싶어요?”
“그럼 어떡해?”
“어떡하긴 뭘 어떡해요. 오늘은 여기서 끝내야지.”
리사의 얼굴에는 일이 뜻대로 안풀려 속상한 기색이 역력했다.
“화가 나. 난 그에게 칭찬을 받고 싶었어.”
“다음부턴 조언 같은거 하지말아요. 리사 님은 누굴 캐어해줄 수 있는 레벨이 아니야. 본인이 받아야지.”
“난 인간을 증오할 뿐이야. 그외에는 다 괜찮아.”
“그게 가장 큰 문제라고요!”
에밀리는 테이블 위에 놓인 문서 두 장을 집고 탁탁 내리쳐 정돈했다.
“이렇게 된 이상 훅스 가로 직접 사과의 선물을 들고 찾아갈 수 밖에 없겠네요.”
“어떤 선물?”
그녀는 문서 두 장을 리사에게 내밀었다.
“여기다 서명해주세요. 그래야 그가 기뻐할거예요.”
* * *
다음날.
리안은 아침부터 한 손에 식칼을 들고 하인들과 양배추를 뽑고 있었다.
조금전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메건 부인이 말하길,
“황도의 치안대장을 맡고 있는 조레비치 씨 댁에서 텃밭에 있는 양배추 전량을 구매하고 싶다며 부탁을 해왔습니다. 나는 원래 팔 생각이 없었지만, 리안 씨를 위해 파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팔아서 얻은 수익금은 전부 리안 씨가 가지세요.”
라면서 같이 황도에 가자는 것이다.
“모니카에게 듣기로 가진 돈이 얼마 없다고 들었어요.”
“예, 뭐. 그렇긴 합니다.”
리안은 어제 황도에 다녀온 상태여서 오늘도 황도에 가는게 내키지 않았으나 돈 번다는 소리에 살짝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텃밭의 양배추를 전부 뽑아봐야 100포기 밖에 안된다.
그리 큰 돈을 버는 것도 아니라 주저하고 있는데, 다음에 이어진 메건 부인의 말이 그를 움직였다.
“마침 나도 황도에 들려 사야할 것도 있고 가는 길에 겸사겸사 조레비치 씨 댁에도 들릅시다. 같이 장 보면서 수고 좀 해줘요.”
자신에게 호위 역할 아니면 아들 역할을 시키려는 욕심이 살짝쿵 보인달까.
그녀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기에 리안은 어쩔 수 없이 요청을 받아들였다.
집주인한테 잘보여야할 것 아냐.
밥도 공짜로 주는데.
방값도 무료고.
“돌쇠랑 허수보고 오늘도 밭이나 지키라고 해야겠네……”
그리하여 그는 현재, 양배추의 뿌리와 연결된 밑둥부분을 시원하게 칼로 잘라주며 수확한 양배추를 하나씩 짐마차의 짐칸에 차곡차곡 실었다.
짐마차는 모니카 것이 아니라 훅스 가문의 것이었다.
황도로 갈때 짐마차는 하인이 몰고 가고 리안은 메건 부인과 나란히 좋은 마차에 타고갈 예정이었다.
모니카는 삐쳐서 아침에 얼굴도 못봤다.
아침 식사 자리에도 나오지 않았다.
어젯밤 그녀는 리안에게 모든 이야기를 전해듣고 밤새 술을 퍼마시며 펑펑 울어댔다.
“망했어! 흑흑, 이놈 때문에 다 망했다고……! 딸꾹! 앞으로 지방으로 내려가던가 해야해! 꺼억! 쩝쩝. 에헤헤 기왕 이렇게 된 김에 죽을때까지 놀아버리자! 이놈 등골이나 빼먹고 살아야겠어. 딸꾹!”
리안은 그녀의 술주정을 받아주느라 새벽녘까지 고생하다 나중에는 그냥 버려두고 방으로 돌아가버렸다.
모니카는 사업 허가를 못받아서 화난게 아니라 밤에 술먹을때 자기를 버려두고 갔다고 삐친 것이었다.
여자의 몸으로 어찌나 잘마셔대는지.
웬간한 남자 정도는 가볍게 압도할 주량이었다.
메건 부인은 외출용 드레스로 갈아입고 나오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
리안은 일찍이 일을 끝내고 그늘에서 쉬면서 그녀를 기다렸다.
향단이가 주위를 날아다녔다.
오늘, 같이 황도에 갈 예정이라 향단이가 무척 신이나 보였다.
“르리리?”
“그곳에 벌레 많냐고? 없어 거기는. 사람들만 있어.”
“르리이!”
얼마뒤 메건 부인이 풍성한 치맛자락을 질질 끌며 현관 밖으로 나왔다.
리안은 얼른 그녀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모두 실었습니다.”
“고생했어요.”
평소에는 한줄로 땋아서 돌돌 말고 다니던 어두운 금발 머리가 오늘은 정수리쪽으로 높이 말려올라가 있었다.
그로 인해 그녀의 가녀린 목선이 시원하게 드러나 왠지 여리여리하고 열살은 더 어려보이는 느낌을 주었다.
아울러 그녀가 입은 드레스는 화창한 날씨만큼이나 화사하고 고왔다.
전체적으로 우아한 자태를 뽐내면서 여성만이 가진 신체적 특징을 오버하지 않고 아름답게 강조하는 옷이랄까.
풍만한 가슴골과 잘록한 허리선이 과하지 않게 드러나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결과적으로 외출복을 입고 나온 그녀는 마친 딴 사람 같았다.
40중반의 나이에 몸매 관리를 잘해 옷 맵시가 살다보니 조금 거짓말을 보태 아가씨라고 해도 믿겠다.
하지만 리안의 눈에는 그저 모니카의 엄마로만 보일뿐 긴장되거나 설레이지는 않았다.
그는 줄곧 담담했다.
잠시 후 아담하고 깔끔한 분위기의 마차가 도착하자 메건 부인이 손으로 권했다.
“타죠.”
“네.”
메건 부인과 전담 하녀가 먼저 마차에 올랐고, 그다음 리안과 향단이가 탔다.
마차는 곧바로 출발했다.
그 뒤를 양배추를 실은 짐마차가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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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회
*경고* 지금 보고 계신 화면은, 조아라에서 지원하는 정상적인 경로의 뷰어가 아닙니다.해당 방식으로 조아라에서 제공하는 작품을 무단으로 추출하는 것에 사용하거나 협조할 경우, 저작권법에 위배되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되실 수 있으니,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작품감상을 부탁드립니다.(5년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 부과)----------------------------------------밭농사 준비, 농지 구매의 시간마차 안에 하녀와 향단이가 타고 있었으나 메건 부인과 가는 길은 괜히 어색했다.
평소에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였으나 비좁은 공간에서 잘 꾸민 그녀와 그녀가 뿌린 향수 냄새를 맡으며 마주보고 있자니 그녀가 높은 신분이라는 것이 새삼스레 와닿았다.
왠지 어려워졌고 공손히 있어야할 것 같았다.
가는 동안 조용하다시피했고, 가끔씩 향단이의 재롱에 웃으며 그녀와 잠깐 몇 마디씩 나누는게 전부였다.
그러다 꽃들이 만발한 산길을 지날때였다.
그녀가 창밖을 보며 문득 입을 열었다.
“알리숨이네요. 언제 핀거지.”
“저 하얀 꽃들 이름이요?”
“네. 저 꽃들을 보니 남편이 결혼 전에 보라색 알리숨 꽃다발을 선물해줬던게 기억나네요.”
“낭만적인 분이시네요. 좋으셨겠어요.”
“……”
메건 부인은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혹시 말실수라도 한건가 하고 고민하고 있을때, 창밖을 바라보던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리안을 돌아보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나한테만 준게 아니더군요.”
그녀의 음성은 메마른 사막 같았다.
“이따가 돌아오다가 시간나면 저 꽃들을 전부 뽑아버립시다.”
* * *
마차는 황도에 입성하자 곧장 상류 귀족들이 모여사는 생 블라트 지구로 향했다.
넓은 정원을 가진 저택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얼마 후 다 왔다는 마부의 말에 리안은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드레스 치마를 접고 조신하게 내리는 메건 부인의 손을 잡아주며 그녀가 내리는 것을 도왔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메건 부인.”
귀부인 두 명이 시종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둘 다 메건 부인처럼 점잖으면서도 화려한 차림이었다.
“오시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 벌써 점심때가 되었네요.”
메건 부인은 먼저 저택의 안주인인 헬렌 부인과 인사를 나눈 후 그 옆에 나란히 서 있던 통통한 귀부인과 가볍게 악수를 나누었다.
“안젤라 부인, 오랜만입니다. 같이 계신줄 미리 알았더라면 작은 선물이라도 챙겼을텐데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네요.”
“신경쓰지 마세요. 헬렌 부인께서 좋은 양배추를 보여준다길래 잠시 들린 거랍니다. 금방 갈거예요.”
세 부인이 서로 손을 마주잡고 반갑게 얘기를 나누는 동안, 리안은 양배추를 하차하라는 명령만 기다리며 조금 떨어진 곳에서 향단이랑 놀고 있었다.
“리안 씨!”
메건 부인이 이리 오라며 손짓했다.
리안은 얼른 뛰어갔다.
“부르셨습니까?”
메건 부인은 곁에 다가온 리안을 가리키며 두 부인에게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이 사람이 저랑 양배추를 키웠답니다.”
“이 청년하고요?”
“어머나 듬직하게 잘 생겼다.”
두 부인은 리안의 전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환하게 웃었다.
“우리 제국 사람은 아닌가보죠?”
“우리가 사는 곳에서 정반대편에 있는 아주 먼 땅에서 왔다는군요.”
“어머……”
두 부인은 안타까운 눈길로 다시금 리안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고향 생각이 많이 나겠어요.”
“그러게요. 불쌍해서 어쩐담……”
그녀들은 리안과 직접적으로 대화를 나누지 않고, 메건 부인하고만 말을 주고 받았다.
눈앞에 있음에도 없는 사람 취급.
그러는 것이 귀부인들의 예법인지 아니면 리안의 신분이 하찮아보여서 일부러 말을 안섞는 것인지, 어쨌든 리안은 다소 의아했으나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저쪽 현관 앞에다 내려놓으면 된다네요. 수고해줘요.”
“네, 부인.”
메건 부인이 양배추를 내리라고 지시하자 리안은 바로 짐마차쪽으로 걸어갔다.
헬렌 부인과 안젤라 부인은 여전히 리안을 주시한 채,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팔에 근육봐……”
“다리도 기네요. 마치 튼튼한 다리를 가진 말을 보는 것 같아요.”
뒤에서 그의 몸을 훔쳐보며 감탄하건 말건 리안은 아무 생각없이 짐칸에 실린 양배추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가 현관 앞에 차곡차곡 양배추를 쌓아올리는 동안 향단이는 양배추잎에 붙어서 따라온 벌레들을 학살하는 임무를 맡았다.
“르리!”
벌레를 찾아내는 것이 마치 자신의 숙명인 것 마냥 쌓여있는 양배추 주위를 빙빙 날아다니며 야무지게 일을 잘했다.
그렇게 리안과 향단이가 열심히 일하는 사이 세 귀부인은 계속 현관 앞에서 잡담을 나누며 들어갈 생각을 안했다.
다양한 주제로 수다를 떨며 깔깔 웃기도 하고 ‘어머, 어머’ 하면서 놀라기도 하고 ‘그런 일이 있었어요?’ 하며 탄식을 내뱉기도 했다.
미용 얘기도 빠지지 않았다.
“요즘 얼굴에 얼룩덜룩한 잡티가 많이 올라오더라구요.”
리안은 묵묵히 일하면서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듣고 싶지 않아도 거리가 가까워서 잘 들렸다.
“화장때문에 피부가 상한건지, 그렇다고 화장을 안하기도 그렇고 고민이랍니다.”
갑자기 자신이 아는 이야기가 나오자 리안은 무심코 오지랖이 발동했다.
겨우 100포기 밖에 안되는 양배추도 거의 다 날랐고, 솔직히 가만히만 있기에는 입이 좀 근질거렸다.
혼자 있을때도 곧잘 춤을 추며 솔로파티를 즐기는 리안의 성격상 자기도 막 수다를 떨고 싶었다.
따라서 그는 들고 있던 양배추를 현관앞에 내려두고 아무 거리낌없이 부인들에게 다가갔다.
“실례가 안된다면 제가 잡티 제거에 도움이 되는 방법을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네?”
“예?”
“음?”
어느새 상반신이 땀에 젖은 건장한 체격의 그가 불쑥 나타나자 부인들이 살짝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이내 호의가 담긴 시선으로 변했다.
“내 얼굴 피부에 도움이 될 방법을 안다고요?”
안젤라 부인의 물음에 리안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집에서도 손쉽게 할 수 있는 간단한 방법입니다. 혹시 밤마다 마스크팩 하고 주무시나요?”
“마스크팩은 매일 하고 있어요.”
“뭘로 하세요? 아니. 재료가 뭐죠?”
“벌꿀하고 계란, 콩가루에 살짝 포도주를 가미해서 반죽한뒤 얼굴에 붙여요.”
“아.”
리안은 그녀가 하는 마스크팩이 어떤 효능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일단 아는척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아는 방법을 권했다.
“제가 아는 방식은요. 도르긴 이라는 샐러드에 넣는 채소 있잖아요. 그걸 얇게 잘라서 얼굴에 붙이시면돼요. 참 간단하죠?”
도르긴은 오이처럼 수분이 많고 시원한 성질의 열매 채소였다.
안젤라 부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채소를 얼굴에 붙인다고요? 정말 그것만으로도 얼굴의 잡티가 사라져요?”
“그럼요. 도르긴에는 피부 재생 및 노화를 방지하는 성분이 많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며칠 꾸준히 해주시면 달라진게 느껴지실거예요.”
“하지만 생 채소를 그대로 얼굴에 붙인다니…… 들어본적도 없는데.”
안젤라 부인에 이어 헬렌 부인도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신기한 방법이네요.”
반면 메건 부인은 리안의 말을 거들었다.
“오늘밤에 한 번 해보세요. 리안 씨는 실없는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에요.”
“생 채소를 얼굴에 붙이는게 생소한가보죠?”
“누가 채소를 얼굴에 붙여요. 마녀들이나 할 행동이라고 오인 받을지도 몰라요.”
안젤라 부인의 설명에 리안은 어리둥절했다.
“마녀요? 이건 마녀랑 아무 상관없습니다.”
“땅에서 자라는 식물을 얕잡아 보는 시선이 있어서 생 채소를 그대로 얼굴에 붙이면 마녀가 하는 짓 처럼 해괴하다는 거죠. 아무도 알아볼 수 없게 빻거나 가루로 만들면 혹시 모르지만.”
“흠, 그렇군요.”
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들이 망설이는 것으로 보아 안되겠다싶어 그냥 돌아서려던 찰나였다.
그때 헬렌 부인이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소리없이 방긋 웃으며 모두에게 말했다.
“이참에 다 같이 도르긴 팩이나 해볼까요? 여기 잘생긴 청년이 뭘 좀 아는 것 같은데, 모두 안으로 들어가서 피부 관리나 받아봅시다.”
“네?”
리안이 당황했다.
그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안젤라 부인이 맞장구를 쳤다.
“좋은 생각이네요. 도르긴 사놓은 게 있나요?”
“아뇨, 그런게 있을리가요. 시장에 가서 사오라고 하겠습니다.”
헬렌 부인은 메건 부인을 쳐다봤다.
“어떠세요? 우리 같이 해봐요.”
“얼굴에 화장도 했는데……”
메건 부인은 어색하게 웃으며 떨떠름한 기색이었으나 헬렌 부인과 안젤라 부인이 계속 권하자 마지못해 수락했다.
그녀는 리안에게 가까이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그를 나무랐다.
“불필요한 말을 꺼내서 귀찮게 하는군요. 사교성은 칭찬하지만 낄데 안낄데를 좀 가려가면서 하세요.”
“…죄송합니다.”
메건 부인은 아침부터 공들인 헤어스타일과 화장을 지우는 것을 싫어했다.
귀부인들과의 만남 이후 시장도 가야하니까 더욱 그랬다.
헬렌 부인과 안젤라 부인이야 집이 황도 내에 있으니까 괜찮겠지만 메건 부인은 그렇지 않다.
“남들과 어울릴 생각만 하지 말고 당신과 같이 다니는 여성을 먼저 배려하세요.”
“네……”
리안이 귀부인들 모르게 메건 부인에게 따끔한 충고를 받는 사이, 그들이 있는 곳으로 조레비치가 나타났다.
“오, 저기들 모여있군.”
지금은 치안대 본부에서 일할 시간이지만, 순시를 핑계로 잠시 짬을 내서 집에 들렀다.
가벼운 경갑옷 차림의 건장한 부하 세 명이 그를 뒤따르고 있었다.
그는 부하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메건 부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올테니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빨리 갔다오십쇼.”
조레비치는 성큼성큼 걸어가서 세 부인과 이내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양배추를 팔아달라는 무례한 부탁을 들어줘서 고맙소이다 부인.”
그 모습을 부하들이 멀찌감치 서서 지켜보았다.
치안대 소속의 그들은 하나 같이 여자와 도박, 싸움을 좋아하며 마초적인 성격을 가진 자들이었다.
“저기 봐. 얼마전에 남편을 잃고 자유를 되찾은 과부가 보이는 군.”
빌리 라는 이름을 가진 사내의 말에 주변에 있던 두 사내가 낄낄 웃었다.
“저게 어떻게 과부야. 와꾸랑 몸매를 보라고. 저런 여자가 암캐처럼 애걸복걸하면서 나한테 달려들면 기분이 어떨까?”
“기분 째지지.”
“복상사할지도 몰라.”
그들은 또 낄낄 웃었다.
“그런데 저놈은 누구지? 피부가 하얗고 머리색이 진하게 검네.”
“황도에 저런놈이 있었나?”
“과부랑 잘 아는 사이인가본데? 서로 가까이 붙어서 자주 뭐라뭐라 말을 주고 받네. 거참 부럽게.”
“옷을 보면 하인인듯한데.”
“샘나네 고새끼.”
때마침, 모여서 대화를 나누던 세 부인과 조레비치가 건물안으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자자, 안에 들어가서 차나 한잔 마십시다.”
조레비치의 권유에 못이겨 세 부인은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고, 검은 머리 청년은 현관앞에 홀로 남아 양배추를 마저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안으로 들어갔던 메건 부인이 도로 나와 청년에게 물한잔을 건넸고, 청년이 이내 말끔히 물잔을 비우자 그녀는 빈 잔을 들고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부하들은 유심히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스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제보니 외로운 과부한테 젊은 종마 새끼가 붙어 있었네?”
“밤에 쓸쓸하지 않겠어.”
낄낄 거리던 그들은 슬그머니 샘이났다.
“심심한데 저놈한테 시비나 걸어볼까?”
“생긴게 왠지 마음에 안들어.”
“조금만 울려주자고. 따라와.”
세 사람은 곧바로 청년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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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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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이보쇼.”
짐칸에서 양배추를 빼내던 리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경갑옷 차림의 기사 세 명이 보였다.
“황도에서 처음보는 얼굴 같은데 어디서 왔소?”
“당신들은 누구요?”
리안이 되묻자 그들이 피식거렸다.
가운데에 서있던 콧수염이 입을 열었다.
“우린 황도 치안대에서 나왔소. 기병 1중대장 빌리외다. 여기 왼쪽은 부하인 마레크 우측은 네할이오.”
그는 소개를 마친뒤 손으로 리안을 가리켰다.
“당신은?”
“난 훅스 가문에서 신세를 지고 있는 리안이오.”
“하인이 아니고?”
“손님일 뿐이오.”
“손님이 종 같이 일해서 난 또 하인인줄 알았지.”
세 사람이 낄낄 웃었다.
무언가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리안은 다시 양배추를 나르기 시작했다.
“난 일해야 하오. 그럼 이만.”
향단이는 메건 부인한테 가서 과자를 얻어 먹느라 현재 이 자리에 없었다.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잠깐 얘기 좀 나누자니까.”
“할 얘기 없소.”
“훅스가의 손님이라고 했나? 자꾸 대화를 피하면 정말 손님이 맞는지 치안대 본부로 끌고가서 조사를 하는 수가 있어.”
빌리에 이어 그 옆에 서있던 마레크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요즘 도시에 마족이나 불법체류자가 많아서 말이지. 불심검문을 거부하면 현장에서 체포해 조사할 권한이 있거든.”
리안은 하던 일을 멈추고 그들을 돌아봤다.
“원하는게 뭐요?”
“그냥 잠깐 얘기나 하자는거요.”
빌리가 활짝 웃어보였다.
“심심하니까.”
옆에 있던 네할이 호기심 어린 눈길로 즉시 캐물었다.
“이봐, 훅스가에 요즘 재미난 소문 없어? 혼자만 알지말고 있으면 좀 얘기해봐. 메건 부인 방에서 밤마다 신음 소리가 들린다든가 그런거 있잖아. 몰래 드나드는 사내놈들 없어?”
리안은 픽 웃었다.
“딴데 가서 알아보시오.”
“거참 사람 싱겁네.”
“어쩌면 본인이 소문의 당사자라 부끄러워서 저럴 수도 있지.”
빌리가 비아냥댔다.
“몸 좋구만. 쓸데가 많겠어. 특히 밤에.”
“물론, 이 몸으로 농사 짓느라 고생이 많소.”
리안은 담담이 대꾸하며 양배추를 옮겼다.
“뭐야 농부였어?”
세 명의 기사는 삐뚤하게 선 채 계속 옆에서 빈정거렸다.
“그 좋은 몸으로 농사나 지으면 주변 사람들이 한심하다고 안해?”
“나 같으면 아무 영주 밑에 들어가서 기사가 되려 노력했을거야.”
“전쟁터에 나가서 싸워야 진정한 사내지. 이 난리통에 젊은 사내가 농사나 짓고 있으면 사람들이 계집애 같다고 비웃어.”
리안은 결국 참다못해 한숨을 크게 내쉬고 그들을 바라봤다.
“농사짓는 사람들을 무시하지 마시오. 당신들이 힘을 내서 싸울 수 있는 이유도 후방의 농부들 덕분이오.”
“옳은 말이야. 물론이지. 그런데 우리는 농부들을 욕하는게 아니라 당신한테 하는 말인데?”
빌리가 조롱하는 얼굴로 웃어보였다.
옆에 있던 마레크가 얄밉게 한입 더 거들었다.
“그 나이에 칼은 다룰줄 알아? 나랑 연습삼아 함 붙어볼래?”
“어이어이 그만하라고. 이 친구한테 괜히 칼자루 쥐어줬다가 벌벌 떨면서 오줌싸면 어쩌려고?”
세 사람은 재차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얼굴 봐. 잘못하다간 한 대 치겠네.”
빌리의 말과 달리 리안은 팔짱을 낀 채 태연히 서서 듣고 있었다.
그가 잠자코 있다 말을 꺼냈다.
“내 칼은 잘 못다루오. 허나 힘 쓰는데는 자신있지.”
리안은 그들에게 제안을 했다.
“우리 팔씨름 내기해서 진사람이 이마에 세 대씩 딱밤 맞기 어떻소?”
“팔씨름?”
“서로 칼 들고 험악한 분위기 조성하는 것보다 평화롭게 팔씨름이나 하자는 거요.”그들이 거절할 수 없게 멍석을 깔아놓았다.
“남자는 자고로 주먹 아니겠소? 백날 칼을 잘 써봐야 뭐하오? 무기 없으면 쪽도 못쓰는 겁쟁이인데. 맨주먹으로 싸워야 진짜 남자지. 근데 여기서 서로 치고 박고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 대신 팔씨름으로 겨뤄보자는 거요.”
리안이 영리하게 팔씨름으로 미끼를 던진 순간 그들은 승부욕이 발동했다.
“이놈 봐라?”
빌리, 마레크, 네할이 가소롭다며 코웃음을 쳤다.
그도 그럴것이 그들도 힘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자신 있었다.
평소 치안대에서 꾸준히 체력을 길러왔고, 몸이 건장하다보니 승부욕도 넘쳐났다.
“큭, 스스로 무덤을 파는군.”
“겨우 농사 근육 주제에 전투 근육으로 단련된 우리한테 덤비겠다고?”
리안이 만면에 웃음을 짓고 당당히 덤비자 그 모습이 아니꼬와서 배로 가소로웠다.
리안은 그들을 더욱 도발했다.
“당신들 셋이서 한판만 이기면 승리로 쳐주겠소. 난 세 판 다 이기면 승리하는걸로 치지.”
“셋이서 한 판? 나참 어이가 없구만.”
그 무렵, 거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메건 부인은 현재 바깥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조금전부터 예의주시하는 중이었다.
커다란 거실 창문을 통해 현관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고스란히 보였다.
‘서로 무슨 대화를 나누는 거지?’
그녀는 리안의 주변을 에워싼 세 명의 기사를 보고 괜스레 불길했다.
‘리안 씨에게 해코지를 하는걸지도 몰라.’
불안해진 그녀는 곧장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가 그녀를 쳐다봤다.
상석에 앉아있던 조레비치가 물었다.
“부인, 어디 가시오?”
“조레비치 님. 저 밖을 보십시오. 치안대 소속으로 보이는 기사들이 제 사람에게 무언가 하는 듯싶습니다.”
“뭐라구요?”
조레비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밖을 내다본 그는 곧 혀를 찼다.
“저것들을 내 그냥. 부인 제가 정리하고 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조레비치는 그대로 나가버렸고, 헬렌 부인과 안젤라 부인도 창밖을 내다보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우리 남편 부하들이 배운게 없어 거칠긴 해요. 왜 저런데 정말……”
“착한 청년을 왜 건드는 거야. 못된 사람들 같으니.”
“안되겠어요. 나도 나가봐야겠습니다.”
“부인!”
메건 부인이 밖으로 나가자 헬렌 부인과 안젤라 부인도 급히 찻잔을 내려놓고 따라나섰다.
밖으로 뛰어나온 조레비치는 부하들을 다그쳤다.
“얌전히 기다리라고 했더니 여기서 뭣들하는게야!”
빌리가 시치미를 떼며 대꾸했다.
“글쎄 이놈이 우리한테 팔씨름을 하자네요.”
곧바로 뒤따라나온 메건 부인이 그 소리를 듣고 언성을 높이며 따졌다.
“무턱대고 제안을 하진 않았겠죠! 리안 씨, 이 세 사람이 뭐라고 했죠?”
그녀의 물음에 리안은 양팔을 들어보이며 가볍게 대답했다.
“남자라면 칼을 쥐어야지 농사나 짓냐고 하면서 아무튼 뭐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세 명의 부하들이 낄낄 웃는다.
조레비치도 동의하는지 그도 입술을 씰룩이며 웃다가 말했다.
“하긴 틀린 말은 아니고만?”
메건 부인이 성을 냈다.
“틀린 말이 아니라니요? 각자 맡은 바 일에 충실하면 되지 직업에 귀천이 어딨습니까?”
금세 뒤따라나온 헬렌 부인과 안젤라 부인도 그녀의 주장에 공감했다.
“당신의 위가 안아픈 이유가 누구 덕택인지 떠올려보세요! 고마워할줄을 알아야지!”
헬렌 부인에 이어 안젤라 부인도 리안의 옆으로 모여들며 그의 편을 들어주었다.
“사내들은 정말 자기 밖에 모른다니까요. 이 성실하고 순수한 청년을 본 받으세요!”
여자들이 리안을 감싸고 돌며 자신의 부하들을 무시하자, 싸움을 제지하러 왔던 조레비치는 도리어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황도의 치안을 책임지는 우리들과 매일 더러운 작물을 매만지는 농부 따위랑 비교가 되나.’
그리고 은근히 리안에게 질투심도 솟구쳤는데, 여자들이 리안에게 몰려들어 괜찮냐고 하면서 그를 다독이는 모습이 참…… 솔직히 부러웠다.
그래서 문득 든 생각.
‘저놈 망신살 좀 뻗치게 해줘야겠다.’
다치지 않을 정도로만 창피를 주자며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그는 과장되게 큰소리로 외쳤다.
“뭐어!? 저 성실하고 순수한 사내가 너희들한테 팔씨름을 제안했다고? 에잇! 하는 수 없지! 먼저 도전을 해왔으니 받아들이는 수 밖에! 안받아주면 나중에 뒤탈이 생길테고 말이야! 여기서 깔끔히 마무리 지으려면 무조건 팔씨름을 해야해!”
그는 부하들에게 물었다.
“너희도 동의하지? 할거지? 아니 꼭 해야한다?”
“예!”
“맡겨주십시오!”
“물론입니다!”
빌리, 마레크, 네할은 즉시 팔을 걷어붙이고 몸을 풀었다.
조레비치는 리안을 바라봤다.
“난 말릴 생각이었는데 아이쿠 어쩌나 내 부하들이 자네의 도전을 받아주겠다는구만?”
“여보! 뭐하는 거예요!”
“조레비치 님! 말리셔야죠!”
“다들 여기서 그만두세요!”
세 여자가 동시에 조레비치에게 따졌으나 그는 양손으로 귀를 막은 채 꿈쩍도 안했다.
“남자들끼리의 승부에 여자들은 끼어들지 말아주쇼. 저짝으로 가서 구경만 하시라니까.”
“남자들은 정말 한심해요!”
“우리끼리 다른 곳으로 가죠!”
“그래요, 그게 좋겠어요.”
조레비치에게 몰려들었던 여자들이 뒤로 돌아 리안에게 우르르 다가왔다.
“리안 씨 우리를 따라오세요.”
그러나 리안은 이미 소매를 걷어붙이고 오른팔을 뱅뱅 돌리는 중이었다.
그는 여자들에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 대결, 저도 꼭 해보고 싶습니다.”
“남편 부하들은 힘이 장난이 아니에요. 다들 소처럼 힘이 장사라고요. 거기다 거칠기까지 해요. 승패보다는 저 불량배 같은 사람들이 막 대해서 다칠까봐 그래요.”
“염려마세요.”
리안은 자신을 만류하는 여자들을 겨우 설득한뒤 앞으로 나섰다.
조레비치를 마주보며 말했다.
“룰은 그쪽이 한 판, 제가 세 판 이기면 끝나는 걸로 하죠.”
“뭐라고?”
조레비치는 황당하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웃긴 놈이네! 와하하하!”
그가 웃음기를 싹 지우고 험악하게 말했다.
“네가 한 명이니 우리도 한 명만 내보내겠다. 승부는 단판 승부. 지고서 찌질하게 다시 붙자고 하지마.”
마치 사자가 으르렁 대는 것 같았다.
치안대장이라더니 그에 걸맞은 위압감을 충분히 지닌자였다.
하지만 리안은 기세에 눌리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시작하죠.”
이후 하인들이 의자 두 개와 탁자를 가져와 정원에 설치했다.
대결 장소가 마련되자 리안이 먼저 의자에 앉았다.
“지면 딱밤 세 대 맞기 잊지마세요.”
“자네 이마에 뿔나게 생겼구만. 으하하하.”
조레비치는 빌리, 마레크, 네할 중에 그나마 덩치가 작은 네할에게 턱짓을 했다.
“훗, 역시 접니까?”
네할은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으며 탁자를 사이에 두고 리안과 마주앉았다.
조레비치는 그가 앉기 무섭게 리안에게 머리를 들이밀며 이죽댔다.
“이봐 네할은 말이야. 작년에 우리 치안대에서 열린 팔씨름 대회 우승자야. 각오하라고.”
“뭐하러 그런걸 알려줍니까. 이 녀석 쫄게시리.”
네할은 씩 웃으며 오른팔을 탁자 위에 올렸다.
탁.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메건, 헬렌, 안젤라는 순간 깜짝 놀랐다.
어깨위까지 소매를 걷어올린 그의 팔뚝 굵기가 어마무시했다.
세 부인은 저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세, 세상에……!”
“팔에 붙은 근육이 사람 머리통보다 크네요!”
“리안 씨가 지면 어쩌죠?”
신체 비율과 어울리지 않는 그의 우락부락한 팔 크기는 가히 경이롭다고 할 수 있었다.
조레비치를 비롯해 그의 두 부하들은 흡족하게 웃었다.
“리안이라고 했나? 쫄지마. 아직 시작도 안했어.”
주위에서 난리법석을 떨어대도 리안은 그저 차분했다.
“……”
향단이는 곁에서 열심히 응원을 해주고 있었다.
“르리! 르리! 르리!”
리안은 탁자 위에 팔을 올렸다.
그러자 상대와 확연히 비교되는 작은 팔근육 크기에 부인들은 재차 소란스러워졌다.
헬렌 부인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긴건 리안 씨 팔이 훨씬 멋있는데 근육량 차이가……”
안젤라 부인은 두 손을 가슴에 모았다.
“절대 못이기겠네요……”
메건 부인은 침착했으나 속이 타는건 마찬가지였다.
‘질땐 지더라도 다치지나 말았으면.’
세 부인이 크게 걱정을 하는 가운데 조레비치가 한 팔을 높이 들어올렸다.
“준비!”
리안과 네할은 서로 손을 맞잡았다.
심판을 자처하는 조코비치의 팔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며 순간 침묵이 감돌았다.
꿀꺽!
하도 조용해서 부인들의 침 넘어 가는 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긴장감은 오로지 구경꾼들만의 이야기일뿐!
시합 당사자들은 이미 속으로 결과를 눈치채고 있었다.
팔씨름의 승패는 선수끼리 손만 맞잡아봐도 알 수 있다던가?
리안은 줄곧 아무런 동요가 없는 차분한 표정.
반면에 네할은 경악하고 있었다.
그는 리안과 손을 맞잡는 순간 소름이 끼쳤다.
‘이, 이 새끼 뭐야!?’
누군가의 손을 잡으면서 자신의 손이 왜소하다는 느낌이 들기는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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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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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보지 않고는 아직 몰라……!’
고작 농부따위한테 질 수 없지.
젖먹던 힘까지 쏟아부어주마.
눈을 감으며 각오를 다진 그때, 조레비치가 팔을 내리며 힘차게 외쳤다.
“땡!”
시작과 동시에 네할은 눈을 부릅뜨며 전신의 힘을 팔에 쏟아부었다.
“으으으으으!”
그는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사력을 다했다.
그러나 아무리 힘을 줘도 리안의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자식 안넘어가! 어째서!?’
네할은 더욱 이를 악물었다.
“으으으으!”
두 사람의 팔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처음 그대로 계속 중앙에서 멈춰 있는 가운데, 주위에서 지켜보던 부인들은 가슴을 옹졸이며 리안을 응원하고 있었다.
“잘하고 있어요!”
“조금만 더 힘내요!”
“버티고 있는 것도 대단한거예요!”
긴장한 여자들과 달리 조레비치와 부하들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승부를 관전하고 있었다.
‘왜 안넘어가?’
시작하자마자 결판이 날줄 알았건만, 농사나 짓는 청년이 괴물 같은 힘을 가진 네할을 상대로 이렇게까지 버틸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네할 저놈은 죽을려고 하는데 이놈은 뭐지? 아직 반의 반도 힘을 안썼다는듯한 저 여유만만한 표정은?’
한편, 단단한 바위처럼 우두커니 버티고 있던 리안.
네할의 팔이 커서 힘 좀 쓸줄 알았는데 의외로 손쉬운 상대였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넘겨버리고 싶었으나, 승부가 너무 빨리 끝나면 관중들이 재미없어 할 것 같아서 잠깐 놀아주는 중이었다.
‘흠, 한 3분 지났나? 이 정도면 됐겠지.’
리안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흡!”
그가 팔에 제대로 힘을 준 순간 팔뚝의 근육이 부풀어 오르며 핏줄이 튀어나왔다.
“으으으으으!”
“으랏차!”
쾅!
기합 소리와 함께 가뿐히 넘겨버렸다.
“크윽!”
네할의 손등이 탁자 위로 떨어지자 조레비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이 친구 승리!”
그가 리안을 가리키자 여자들은 서로를 얼싸안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걸 이기다니!”
“멋져요 리안 씨!”
“힘 진짜 좋네요!”
조레비치와 부하들에게선 탄식이 흘러나왔다. 놀랍기도 하고 황당함에 할 말을 잃은 표정들이었다.
“혹시 어딘가 아픈거 아니야?”
“맞아, 네할이 질리가 없어. 몸이 아파서 힘을 못쓴거야.”
빌리와 마레크는 네할의 몸상태가 안좋아서 진게 아니냐며 결과를 믿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조레비치가 그들의 머리를 한대씩 쥐어박았다.
“우리가 졌어 멍청이들아.”
네할은 패배의 충격으로 얼이 빠져 있었다.
“이놈 힘 장난이 아니야……”
리안은 크게 기뻐하는 기색없이 향단이를 안고 담담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주위로 부인들이 몰려와 정말 대단하다며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다 헬렌 부인이 응큼한 시선으로 그의 팔을 바라봤다.
“팔 좀…… 만져봐도 될까요?”
“네 만져보세요.”
리안이 거리낌없이 팔을 내밀어 보이자 헬렌 부인은 그의 팔을 꾹꾹 눌러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어머, 어머! 단단한 것 좀 봐!”
“나도 만져볼래요!”
안젤라 부인도 손가락으로 살포시 리안의 팔뚝을 눌러보더니 행복한듯 입가를 씰룩였다.
“우리 남편도 이랬으면 좋겠다.”
리안의 팔에 정신이 팔려있는 두 부인과 다르게 메건 부인은 점잖은 표정으로 빤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헬렌 부인이 바보같이 뭐하냐는듯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부인도 한 번 만져봐요. 바위처럼 단단해요.”
“아, 아뇨. 전 괜찮아요.”
“빼지 말고 어서 만져봐요. 지금 아니면 우리가 언제 총각 몸을 만지겠어요. 호호호!”
“괜찮다니까요.”
“그러지 말고 손 줘봐요.”
헬렌 부인은 곤란한 표정을 짓는 메건 부인의 손을 잡고 리안의 팔뚝을 만지게 했다.
“자 여기요 여기. 여기 꾹꾹 눌러봐요. 피부가 굉장히 탄력있죠?”
메건 부인은 살살 어루만지듯 피부를 만져보더니 깜짝 놀랐다.
“어쩜……”
리안의 팔근육은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욱 단단했다.
그녀는 쑥스러워 하면서도 입가에 살며시 웃음이 흘러나왔다.
“몸이…… 좋군요. ”
리안의 팔을 만져대는 여자들을 보면서 조레비치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여튼 사내 새끼들보다 아줌마들이 더 음탕하다니까. 저러다 잡아먹겠네 잡아먹겠어.”
조레비치는 리안에게 다가가 소리쳤다.
“어이! 한판 더 해!”
“단판 승부 아니었나요?”
“원래 팔씨름은 오른손 왼손 번갈아가며 한 팔씩 하는거야!”
리안은 그의 억지에 어이없는 미소가 흘러나왔다.
여자들이 나서서 조레비치에게 따졌다.
“그런게 어딨어요!”
“빨리 졌다고 인정해요!”
“리안 씨에게 혹시 원한이라도 있는 거예요?”
조레비치는 양손으로 귀를 틀어 막았다.
“제발 여자들은 좀 빠지쇼! 그리고 당신은 내 아내야! 누구 편 드는거야!”
“착한 청년한테 자꾸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니까 그러죠! 나이는 점잖게 먹어가지고 젊은 사람을 괴롭혀서야 쓰나요!”
“아이구 엄마 납셨네. 당신이 저 친구 엄마라도 돼?”
“못할건 또 뭐 있어요!”
“뭐야!? 이 사람이 보자보자 하니까!”
생뚱맞게 부부 싸움이 날것 같아 리안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조레비치에게 다가갔다.
“알겠습니다. 이번엔 왼팔로 하죠.”
“정말이지?”
“네.”
조레비치는 히죽 웃었다.
“이번엔 진짜 각오하라고.”
그는 마레크를 돌아봤다.
“네 차례다. 저 친구 팔을 완전히 작살내버려.”
“맡겨주십시오.”
마레크는 복수를 다짐하며 리안을 노려봤다.
그는 왼손잡이로서 치안대에서 왼손 팔씨름 최강자였다.
리안과 마레크는 이내 서로를 마주보고 앉았다.
“준비!”
다시금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두 사람이 왼손을 마주잡았다.
조레비치가 곧바로 외쳤다.
“땡!”
마레크는 초반부터 리안의 손을 아작낼 기세로 덤볐다.
“으랴아아아아아!”
탁!
결과는 바로 나왔다.
너무 빨리 끝나 모두가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어……?”
“이렇게 쉽게……?”
“벌써?”
리안의 승리였다.
순식간에 패배한 마레크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못들었다.
여자들은 기뻐하며 소리를 질렀다.
“이런 썩을……”
조레비치는 혀를 찼다.
믿었던 두 사람이 허무하게 당해버리자 결국 리안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 이런 괴물이 다 있지?’
그런 생각을 하는 찰나 리안이 말했다.
“기왕 두 판한 김에 마지막으로 한 판만 더 하죠.”
“한 판 더?”
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레비치의 뒤에 서 있던 빌리를 가리켰다.
“저 사람과 붙고 싶네요.”
“나, 나랑?”
빌리는 움찔하며 당황했다.
앞서 두 판을 통해 리안의 힘이 강하다는 것을 여실히 깨달았다.
체면이 있는데 자신까지 창피를 당할 수 없었다.
“대장 여기서 그만합시다. 저놈 센거 알았으니 가자구요.”
“너 쫄았어?”
“쪼, 쫄기는요.”
“그럼 해.”
“예?!”
얼마뒤.
빌리까지 패배하며 승부는 리안의 승리로 완벽히 끝났다.
패배한 자들에게 남은건 딱밤 세 대씩이었다.
리안은 침통한 표정을 짓는 세 사람을 나란히 한줄로 서게했다.
그리고……
“움직이지 말고 딱 대.”
딱!
딱!
딱!
리안의 손가락이 튕길때마다 비명이 터져나왔다.
딱!
딱!
딱!
마레크는 쓰러지더니 이마를 감싸쥐고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딱!
딱!
딱!
빌리는 나름 잘 참았으나 그 자리에서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씨부랄 겁나 아프네…… 흑흑.”
세 사람의 이마에 제각각 주먹만한 혹이 생겼다.
조레비치는 그들에게 호통을 쳤다.
“니들 앞으로 어디가서 힘자랑만 했단봐! 가만 안놔둬!”
그러고는 리안에게 다가가 대뜸 목에 팔을 두르며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우리 애들이 자네한테 시비건건 미안했어.”
“다 끝난 일인걸요. 딱밤으로 해결봤으니 됐습니다.”
“깔끔해서 좋구만. 아무튼 농사는 어때? 힘들지 않아?”
“농사요? 힘들어도 제 천직인걸요.”
“아냐, 힘들면 말해.”
조레비치의 목소리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다정했다.
“언제든 우리 치안대에 가입시켜줄게.”
아하 그게 목적이었군.
“쟤들이 왜 싸가지가 없어진줄 알아? 시민들이 우리 치안대만 보면 벌벌 떨어대니까 거만해져서 그래. 그게 뭘 뜻하게?”
“뭘 뜻하죠?”
“그만큼 편하다는 소리야. 장담컨대 농사짓는 것보다 벌이도 좋고 몸도 훨씬 편할걸? 일과시간에 거리만 돌아다니면 장땡이거든. 부럽지?”
“많이 쉴 수 있으면 부럽죠.”
“농사는 할게 많잖아. 매일 잡초도 뽑아줘야하고 무거운 것도 날라야 하고 그러다 병충해 피해라도 입으면 손해가 만만치 않잖아?”
“뭐 그렇죠.”
그가 씨익 웃었다.
“그러니까 우리 치안대에 가입하자. 어때?”
“제안은 감사하지만 저는 계속 농사를 지을 생각입니다.”
“아냐, 아냐, 그러지 말고……”
그는 거듭 제안을 해왔으나 리안은 정중히 거절했다.
결국 조레비치는 아쉽다는듯 입맛을 다셨다.
“문은 항상 열려있으니까 언제든지 찾아와. 자네의 그 힘이 아까워서 그래. 남들 돕는데 쓰면 무척 보람찰거야.”
부하들이 창피를 당했음에도 호의를 갖고 대하는 것을 보면 리안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조레비치는 나중에 또 보자는 말과 함께 부하들을 데리고 떠났다.
* * *
점심시간이 지난 오후.
헬렌 조레비치 부부의 저택.
양배추를 다 날랐음에도 아직 할 일이 또 남아있었다.
점심 식사 후 리안을 비롯해 메건 부인, 헬렌 부인, 안젤라 부인까지 모두 응접실로 모였다.
일제히 드레스를 벗고 편한 가운 복장으로 갈아입은 부인들은 저마다 들뜬 기색이 엿보였다.
“얼마나 좋아질까 기대돼요.”
“남자랑 이런걸 해보긴 처음이네요. 호호호.”
“저도 좀 부담스럽지만 좋다니 해봐야지요.”
그녀들은 전부 얼굴의 화장을 지운 상태였다.
헤어스타일도 땋았던 머리를 풀고 길게 늘어뜨렸다.
셋 모두 머리카락이 길어 허리까지 내려왔다.
리안은 메건 부인의 맨얼굴을 보긴 처음이었다.
화장을 지우니까 부잣집 마님다운 성숙한 느낌이 사라지고 평소보다 어린 티가 난달까, 한마디로 청순해보였다.
리안은 그녀의 모습이 신기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담담이 부인들에게 말했다.
“모두 누워주세요.”
그는 방한가운데를 차지한 세 개의 침대를 가리켰다.
나란히 배치된 침대들은 하인들이 급히 가져다 놓은 것이었다.
전문 마사지숍도 아니고 전용 침대가 있을리가 없다.
임시방편으로 손님방에 있는 싱글 침대 세 개를 가져와 나란히 배치했다.
“누워요?”
“그럼요. 어서 누우세요.”
“눕는다니까 왠지 어감이…… 부끄러워라.”
부인들은 훤칠한 청년한테 피부 미용을 받는다는게 설레이고 낯설어서 그런지 어쩔줄 몰라하며 약간 망설이는 기색이 있었다.
“괜찮은 걸까…… 하하.”
“쑥스럽네요.”
“저도요 부인.”
귀부인들의 내숭인지 뭔지 아니면 체면을 차리는 것인지 그녀들은 한참을 주저하며 어색한 미소만 지었다.
그래서 리안은 일부러 이름을 호명하며 침대를 지정해줬다.
무작정 침대에 누우라고 하는 것보다 자리를 지정해주는 것이 그녀들의 망설임을 줄여주는데 도움이 될것 같았다.
“헬렌 부인은 우측 침대에 누워주세요. 안젤라 부인은 가운데입니다. 메건 부인은 그 왼쪽에 누우시면 됩니다.”
“네.”
“그러죠.”
“알았어요.”
그제야 부인들이 움직인다.
“잘 부탁해요 리안 씨.”
헬렌 부인이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침대에 반듯이 누웠다.
가운이 살짝 벌어지면서 가슴의 일부분이 드러나자 그녀는 황급히 목깃을 여몄다.
리안은 신속히 다가가 그녀의 몸위에 기다란 천을 덮어주었다.
“고마워요.”
그녀가 한결 편안한 얼굴로 눈웃음을 지었다.
리안은 싱긋 웃어준 후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어머, 나 왜 이리 두근거리지. 호호, 주책이네요.”
안젤라 부인은 침대에 눕더니 흥분을 가라앉히려는듯 심호흡을 했다.
그녀 또한 가슴에 입은 속옷이 언뜻 내비쳤기에 리안은 얼른 가서 천을 덮어주었다.
“상냥하네요.”
“당연히 해야할 일인걸요.”
리안은 메건 부인을 쳐다봤다.
“……”
그녀는 조용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
다른 부인들에 비해 비교적 차분해보였으나 갑자기 말수가 적어진 것으로 봐선 그녀도 긴장한 것이 틀림없었다.
리안은 그녀에게도 천을 덮어주고 나서 모두에게 말했다.
“누운 채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는 대접에 담긴 맑은 물에 깨끗이 손을 씻었다.
그 다음 도마에 도르긴을 올리고 식칼을 잡았다.
빠른 속도로 도르긴을 썰기 시작했다.
탁탁탁탁탁!
도르긴은 리안이 치안대원들과 팔씨름을 하고 있을때 이 집 하녀들이 시장에 가서 사온 것이다.
탁탁!
탁!
이윽고 썰기 작업이 끝나자 리안은 얇게 썰린 도르긴 조각들을 조심스레 접시에 옮겨 닮았다.
부인들은 긴장을 누그러뜨리려는듯 수다를 떨고 있었다.
“흐음 누구부터 먼저 붙이지?”
리안은 접시를 든 채 잠시 고민했다.
우측의 헬렌 부인?
중앙의 안젤라 부인?
좌측의 메건 부인?
여기서 누가 더 서열이 높지?
아랫사람한테 먼저 갔다가는 결례가 될텐데 큰일이다.
머릿속에는 메건 부인을 제외하고 나머지 두 부인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가 없다.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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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주말 되세요!!!
48회
*경고* 지금 보고 계신 화면은, 조아라에서 지원하는 정상적인 경로의 뷰어가 아닙니다.해당 방식으로 조아라에서 제공하는 작품을 무단으로 추출하는 것에 사용하거나 협조할 경우, 저작권법에 위배되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되실 수 있으니,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작품감상을 부탁드립니다.(5년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 부과)----------------------------------------밭농사 준비, 농지 구매의 시간아무나 먼저 붙이자.
리안은 쉽게 생각하기로 하고 집주인인 헬렌 부인에게 먼저 다가갔다.
“부인, 눈 감아주세요. 올리겠습니다.”
“얼마 동안 하고 있어야 하죠?”
“30분이면 됩니다.”
“알겠어요. 잘 부탁드려요.”
“네.”
헬렌 부인이 눈을 감았다.
리안은 그녀의 얼굴에 도르긴 조각을 하나씩 올려놓기 시작했다.
찬 성질의 채소라 하나씩 얹을때마다 헬렌 부인이 시원하다며 좋아했다.
향단이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더니 리안에게 날아왔다.
“르리리?”
“너도 해보고 싶다고?”
“르리!”
“해봐.”
“르리!”
향단이도 거들기 시작했다.
도르긴 조각을 두 손으로 들고 날아다니며 헬렌 부인의 얼굴에 하나씩 얹어놓았다.
남자의 큰손으로 하는 것보다 향단이가 얹어주는게 좀 더 섬세한 느낌이 있었다.
“잘하네.”
“르리!”
헬렌 부인이 잠시 말을 못하는 동안, 안젤라 부인과 메건 부인은 둘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엿듣고 싶지 않아도 그녀들의 얘기가 자연스레 귓가에 들려왔다.
“…심는 것마다 시들어서 죽는 거예요 글쎄.”
“신성한 땅인데 왜 그렇죠? 이상하네요.”
“신전에서 키우는 작물이면 신의 가호를 받아 더 잘자라야 할텐데 그러질 못하고 있으니 신도들 눈치도 있고 우리 남편 입장이 곤란하다니까요.”
“악마가 장난을 치는걸지도 모르겠네요.”
얘기를 들어보니 안젤라 부인의 남편 직업이 빛의 신 에스메랄다를 모시는 고위 신관이란다.
신전이 소유한 농지에 작물을 심으면 잘 자라지 못하고 금방 시들어서 죽는다나?
현재 그런 얘기를 하는중이었다.
“농사에 관해서 리안 씨가 잘 아니까 자문을 받아보면 어때요?”
메건 부인의 말에 안젤라 부인이 손뼉을 쳤다.
“어머, 그러면 되겠네요. 저기 리안 씨.”
“네?”
“우리 남편 신전에 방문해줄 수 있어요? 농사가 잘 안되서 골치를 썩고 있어서요. 와서 한번 봐줘요.”
“음.”
리안은 짧게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저도 제 밭을 돌봐야해서 지금 당장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저런. 정말 못와요?”
“밭일이 밀려서 다른 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네요. 시간이 나는대로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와줘요. 정말 급해요.”
“네, 빠른 시일내에 찾아뵙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헬렌 부인의 얼굴에 도르긴을 다 올리고 난 후, 리안은 다시 도르긴을 얇게 썬 후에 그것을 안젤라 부인의 얼굴에 붙였다.
이어 세 번째 도르긴을 썰었고, 마지막으로 메건 부인의 얼굴에 붙여주었다.
세 부인의 얼굴에 도르긴을 붙이고 나자 더이상 할 일이 없었다.
도리긴의 좋은 성분이 부인들의 피부에 흡수되기를 기다리면서 향단이와 놀았다.
부인들은 얼굴에 도르긴을 붙인 채 계속 떠들어댔다.
세 명 다 입술을 제대로 벌리지 못해 발음이 좀 우스꽝스러웠다.
“료듬 우뤼따리 뜽마를 배유는뒈 재미따꼬 랄뤼예요.”
“뜽마 재밌됴. 저더 예떤에 뜽마를 배웠덨는뒈 허뤼 아퍄서 오뤠 못해떠여.”
“두 뷴은 뜽마도 해보뗬군용. 저능 무떠워떠 말를 아예 못탸료.”
그렇게 30분이 흘렀다.
리안은 부인들의 얼굴에서 도르긴 조각을 떼어낸 후 그녀들에게 세수를 시켰다.
“얼마나 예뻐졌을려나. 호호호.”
세수를 마친 부인들은 각자 손거울을 들고 자신의 얼굴 이곳저곳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녀들은 곧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기뻐했다.
“피부가 더 하얘졌어요!”
“효과가 너무 좋은데요?”
“비싼돈 주고 마스크팩 하는 것보다 훌륭하네요. 어머나 여기 잡티가 조금 사라졌어.”
예상외로 도르긴팩이 효과가 좋자 부인들은 한 목소리로 리안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감사합니다.”
리안은 열심히 한만큼 좋은 결과가 나와서 기뻤다.
그리고 세 부인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보람차고 즐거웠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또 해주고 싶다.’
마사지샵도 의외로 재밌네 라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 * *
양배추를 갖다주고 받은 돈 1골드.
생활비로 쓰고 남은 돈 6골드 70실버.
총 7골드 70실버가 리안의 전재산이었다.
“아직도 멀었네……”
리안은 아침부터 오천평 밭에 나와 있었다.
돈에 대한 걱정을 잊고 넓게 펼쳐진 순무와 상추 밭을 바라보았다.
전보다 한층 더 크게 자라난 순무와 상춧잎들.
하루가 다르게 커가며 싱그러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누가봐도 잘 키웠다고 할만큼, 잎사귀가 윤기있고 오밀조밀 붙어 자란 모양새도 무척이나 훌륭했다.
수확은 아직 한달반 가량 남았지만 벌써부터 수확이 기대됐다.
“얼마나 벌려나.”
입가에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게 휴식을 끝마치고 다시 밭으로 들어가려는데, 밭에서 벌레를 잡고 있던 향단이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
반친구한테 맞고 온 애처럼 울상을 짓고 날아왔다.
“왜 그래? 어디 아파?”
“르리……”
“뭐? 커다란 사마귀가 있어? 걔한테서 도망쳤다고?”
리안은 시무룩한 향단이를 두 손으로 안고 얼른 밭으로 들어가 보았다.
향단이가 알려준 곳으로 가보니 정말 중지 손가락 길이만큼 커다란 사마귀가 뱃살이 통통한 채 위풍당당하게 잎에 붙어 있었다.
녀석은 겁대가리를 상실했는지 리안을 보고도 도망치기는 커녕 마치 이곳은 내 구역이니 꺼져 라는듯 낫 모양의 앞발을 세우고 공격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날카로워 보이는 두 앞발도 녀석의 체구에 비해 커보였다.
뭐랄까.
확실히 대장급 사마귀로 보였다.
사마귀 중에서도 으뜸가는 우두머리 사마귀.
“이놈이 우리 향단이를 울렸단 말이지……”
리안은 발로 콱 밟을까 하다가 좋은 생각이 났다.
그것은 바로……
“향단아, 기회다!”
리안은 향단이를 바라보며 기대감을 내비쳤다.
“네 싸움 실력을 한단계 상승시킬 기회!”
“르리?”
“어떻게 하냐고? 기다려봐.”
리안은 즉시 라그레아닐을 목공용 칼로 변신시켰다.
주변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워 향단이가 손에 쥘만한 크기로 깎아서 뾰족한 창을 만들었다.
“방패는 나중에 만들어줄게. 우선 이걸 들고 싸워봐.”
“르리리~”
향단이는 창을 쥐고 허공에 몇 번 휘둘러보더니 주먹을 불끈쥐었다.
“르리!”
두 눈에 투지가 가득했다.
목표는 대장 사마귀.
향단이는 곧바로 놈에게 날아가서 싸움을 걸었다.
“르리!”
처음에는 잘 공격하는가 싶더니 이내 대왕 사마귀에게 창을 빼앗기고 말았다.
향단이는 다시 울상을 짓고 날아왔다.
“르리……”
애당초 향단이는 싸우는 법을 몰랐다.
자기보다 힘없고 덩치가 작은 애들 위주로 그간 학살을 해왔을뿐, 상대의 덩치가 자신과 비슷하거나 무기를 가지고 있으면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그냥 포기할까?”
“르리? 르리!”
“싫다고?”
“르리!”
“안돼.”
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자칫하다 네가 다칠 것 같아. 좀 더 수련을 쌓고 다시 도전해보자. 응?”
향단이는 잠시 고민하는듯 하더니 활짝 웃어보였다.
“르리리!”
“좋았어.”
사실 향단이는 숲속의 귀여운 페어리이지 벌레 잡는 사냥꾼이 아니다.
천성이 전투 종족이 아니다보니 향단이는 의지는 있어도 싸움꾼으로서의 자질이 매우 부족했다.
그러한 향단이를 진정한 투사로 거듭나게 하려면 정말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아무튼 리안은 라그레아닐을 잠자리채로 변신시킨 다음 대장 사마귀를 잡았다.
녀석을 밭 밖에다 풀어주고 향단이를 훈련시킬 방법을 고민했다.
“흠…… 뭐부터 가르칠까.”
“르리~”
향단이는 얼굴 주위를 정신없이 날아다니며 빨리 알려달라고 보챘다.
대장 사마귀한테 패배한 것이 분했는지 힘을 기르고픈 열의가 대단했다.
“라카제트를 부르면 좋을텐데 영혼 모은게 하나도 없네.”
몇주전 라카제트의 말이 떠올랐다.
‘타인의 능력을 일시적으로 향상시켜주는 주문서입니다. 예를들어 저 사역마한테 주문을 걸어주면 평소보다 배는 더 일을 잘할 것입니다.’
마법 부여 주문서.
그 주문서만 있다면 향단이를 충분히 강하게 만들 수 있을텐데.
“영혼만 있었어도…… 채소라든지……”
리안이 아쉬움에 혀를 차며 거듭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개의 모습으로 밭을 돌아다니던 허수가 다가왔다.
“주인 뭐해?”
“생각중.”
“돌쇠가 이상하다.”
“어디가?”
“저기 봐봐. 갑자기 안움직인다.”
“뭐?”
돌쇠가 있는 곳을 쳐다보니, 허수의 말대로 돌쇠는 밭 한가운데서 웅크린 채 미동이 없었다.
리안은 서둘러 달려가 보았다.
“돌쇠야!”
리안의 지시로 거름을 주고 있던 돌쇠는 거름 바구니를 떨어뜨린 채 바위처럼 굳어 있었다.
“돌쇠야! 돌쇠야! 인마!”
돌쇠의 어깨를 마구 흔들어봐도 도무지 깨어날 생각을 안했다.
“얀마! 얀마! 일어나! 얀마!”
깨어나면 눈부분이 파랗게 빛나는데, 현재 불빛이 꺼져있었다.
“왜 이러지……?”
잠자코 지켜보던 허수가 말했다.
“혹시 마력이 떨어진게 아닐까?”
“마력이라니? 돌쇠한테 마력이 필요해?”
자동차에 넣는 기름처럼?
“골렘은 나 같은 마물이 아니다. 얘들은 누군가가 마력을 주입시켜 만들어낸 무생물이지.”
“아……”
리안은 그럴듯한 의견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 나보다 잘 안다? 제법이네.”
허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물컹물컹한 허수 본체가 아닌 환영의 머리를.
허수는 별 반응없이 계속 말했다.
“마력을 넣어줘라. 그럼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 있다.”
“어떻게? 난 마력을 주입시키는 법을 몰라. 돈 주고 사람을 구해야 하나?”
황도에 가서 사람을 구할까 말까 고민하던 중에 불현듯 논길을 걸어오는 리사가 보였다.
그녀의 뒤에는 에밀리와 케스티리아가 따라오고 있었다.
“저 여자들이 여길 왜 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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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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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해나 할것 같아서 반갑지 않았다.
“허수야, 혹시 모르니 멀리 가 있어.”
“알았다, 주인.”
허수의 환영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사라졌다.
잠시 후 리사와 마주보고 서게 되었다.
세련된 검은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옷차림에 어울리지 않게 농사용 장화를 신고 있었다.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리안의 무뚝뚝한 물음에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사랑하는 사람 보러온게 잘못이야?”
“우린 연인이 아니니 잘못 찾아오신 것 같네요.”
“아냐, 똑바로 찾아왔어.”
리사는 뒤에 서 있던 에밀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에밀리는 즉시 가방안의 문서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리사는 받아든 문서 두 장을 리안에게 자랑스럽게 내밀어보였다.
“자, 허가.”
리안은 그녀가 내민 문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허가를 내주는 서명란에 그녀의 서명이 확실히 기입되어 있었다.
문득 방구석에 처박혀 울고 있을 모니카가 떠오르며 리안은 자기도 모르게 기쁜 미소가 흘러나왔다.
“감사합니다.”
리안은 문서를 잡을 생각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리사가 재빨리 엉덩이뒤로 감추었다.
리안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무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또 장난이십니까?”
리사가 방긋 웃었다.
“소원 들어줬으니까 너도 내 소원 들어줘.”
그녀는 눈을 감고 입술을 내밀었다.
“키스해.”
“……”
“어서.”
“……”
리안은 입술을 다문 채 미간을 살짝 구겼다.
한동안 그러고 있자 리사가 눈을 떴다.
“아, 미안. 또 화나게 만들었어? 인상펴.”
그녀가 문서를 내밀었다.
“받아.”
“……”
리안이 가만히 있자 그녀가 재차 말했다.
“걱정 마. 내 욕심을 조금만 줄일게.”
뒤에 서있던 에밀리가 소리쳤다.
“받으세요! 이젠 진짜 주실거예요!”
리안은 잠시 뜸을 들이다 문서 두 장을 잡았다.
리사는 그에게 문서를 건네주고 팔짱을 꼈다.
“지난번 일은 사과할게. 내가 말이 심했어.”
문서를 훑어보던 리안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그 일은 잊었습니다. 마음에 두지 마세요.”
“화 풀었어?”
“별로 화난 것도 없었어요.”
“그 말이 더 아프게 들리네. 나 같은건 신경도 안썼다는 거잖아.”
“리안 님! 리안 님!”
에밀리가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우리 리사 님이 왜 여기 왔는줄 아세요?”
“……?”
“듣고 놀라지 마세요! 오늘 하루 리안 님의 농사를 도와주러 오셨답니다!”
“일하러 왔다고요?”
“에밀리, 같이 있겠다고 했지 일한다고는 안했어.”
“그 말이 그 말이죠! 어쨌거나 리안 님 많이 부려먹으세요!”
에밀리는 밭을 쳐다봤다.
푸릇푸릇한 녹색으로 생기 넘치는 밭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세상에나! 저 밭 좀 봐!”
그녀는 입을 쩍 벌리더니 곧장 순무와 상추가 심어진 밭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엄청 잘 키웠네요! 이거 순무 맞아?”
리사 역시 무심코 밭을 봤다가 이내 흥미를 보이며 밭으로 들어갔다.
그때까지 묵묵히 서있던 케스티리아도 그녀를 뒤따랐다.
“언제 이런걸 키웠어?”
리사는 유심히 밭을 둘러보더니 범상치 않게 자란 순무와 상추를 보고는 상당한 호기심을 보였다.
“네가 키운거야?”
“제가 키우지 누가 키웠겠어요.”
리안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혹시 마법으로 키웠어?”
“마법으로 키우는 방법도 있어요?”
“몰라?”
“모릅니다.”
식량농업정책 자문관을 맡고 있는 리사이기에 채소를 볼줄 안목과 지식을 겸비하고 있었고, 그녀의 눈에 리안이 키운 순무와 상추는 그야말로 일반 품질을 뛰어넘는 최상급 품질로 자라고 있었다.
이는 보통의 노력으로는 안되는 일.
농부의 노력, 기후, 토양, 이 삼박자가 골고루 맞아떨어져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예술이야……”
리사는 리안의 실력에 감탄했다.
몇 달전 맛본 리안의 당근은 결코 우연으로 탄생한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풉, 후훗, 아하하하.”
리사는 갑자기 고개를 젖히고 크게 웃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놀라 모두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에밀리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또 시작이시군.”
케스티리아는 담담이 쳐다볼뿐이었다.
“……”
리안은 리사가 역시 미쳤구나란 생각밖에 안들었다.
‘이 여자는 정말이지 이해가……’
리사는 돌연 웃음을 뚝 그쳤다.
그녀는 도도한 표정으로 리안에게 다가왔다.
서로의 숨결이 닿을만한 거리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녀가 나직이 물었다.
“나한테 원하는게 뭐야?”
“질문이 좀 이상하지 않나요?”
“어떤 점이?”
“제가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처럼 들리잖아요.”
“요구해. 원하는 것 전부 요구해.”
“없어요.”
“왜 없어? 나는 많은데. 불공평하잖아.”
그녀는 얼굴을 더욱 들이밀었다.
“원하는게 있으면 말해봐. 무엇이든 다 들어주겠다니까? 하다못해 좋아하는 음식이라도 사달라고 졸라봐.”
“아뇨, 저는 그럴 생각이 눈꼽만치도……”
그때 밭을 둘러보던 에밀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이 골렘은 뭐예요? 고장났나?”
탁! 탁!
그녀는 돌쇠를 몇 차례 발로 찼다.
“뭐야 마력이 떨어진건가?”
그 순간 리안은 허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눈을 크게 뜨고 리사를 바라봤다.
“혹시 마력을 주입해주실 수 있나요?”
“마력? 어디에?”
“저 골렘이요.”
리안은 돌쇠를 손으로 가리켰다.
“마력을 주입해야합니다.”
그는 짧게 리사에게 설명했다.
사정을 전해들은 리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골렘의 주인들은 기본적으로 마력을 주입할줄 알아야해. 그래야 계속 데리고 다닐 수 있을테니까. 설마 마력을 주입 하는 방법도 모르고 받은거야?”
“예, 그렇게 됐습니다.”
“내가 알려줄까?”
리사는 뜻밖의 제안을 건네며 미소를 지었다.
약간 음흉함이 느껴졌다.
“마력 주입하는 방법이요?”
“응.”
“누구나 할 수 있는거예요?”
“우선 체내의 마나량이 얼마나 되는지부터 파악해봐야겠지. 그리고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몸인지도 확인해봐야 하고.”
리안은 이미 자신이 마나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현재 그가 사용하는 용언은 마나의 힘으로 구현되는 것이었으니까.
게다가 이속 마법까지 익힌 그였다.
“마나 측정은 안해도 되고 바로 마력 주입 방법만 알려주시면 됩니다. 마나는 마법사들처럼 능숙하지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 다룰줄 알아요.”
“그래? 역시 평범한 농부는 아니었나보네?”
“평범해요. 마법을 한 두 개 밖에 모르니 거의 못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마법을 거의 모른다라.”
리사는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웃었다.
“알려주는 대신 조건이 있어.”
“뭔데요?”
“나랑 지금 입맞춰.”
이 여자는 정말이지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훅 들어온다.
“아 그건……”
리안은 단호히 거부했다.
“힘듭니다.”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 내가 무료로 가르쳐 준다고 하잖아.”
“지난번에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이곳에 오래 머물 생각이 없습니다. 제가 이러는게 리사 님한테도 좋은거예요.”
리안은 나름 진정성있게 말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꼭 이해해주길 바랐다.
그런데 리사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나도 따라갈래.”
리안은 귀를 의심했다.
“따라가다뇨? 어디를요?”
“네 고향. 나도 데려가.”
그녀는 엄청난 일을 대단히 쉽게 말하면서 해맑게 웃었다.
“남들이 부러워 하는 백작 작위도 포기해야해요. 영지도 없어지는데 괜찮으세요?”
리사는 일말의 고민도 않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너만 있으면 돼.”
“……”
리안은 잠시 말을 잃은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따라오겠다라……
그는 비로소 자신을 생각하는 그녀의 마음이 어느 정도 크기인지 대충이나마 가늠하게 되었다.
“아니 어쩌다 저 같은 놈한테 푹 빠지신 거예요?”
“날 위해 죽으려고 했잖아. 그 모습에 반했어.”
“그때 그 일은 사람이라면 당연한건데……”
리안은 이해할 수가 없어 고개를 기울였다.
상식적으로 이런 일이 가능한가?
한동안 깊은 고민을 하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키스 대신 포옹으로 하면 안될까요?”
리사의 마음을 받아준건 아니었으나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하는게 느껴졌기에 마음이 조금 열리고 말았다.
“포옹도 좋아.”
리사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리안을 와락 껴안았다.
“헙.”
“아아, 넓다……!”
그녀는 부드럽게 리안의 등을 어루만지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반면 리안은 매너손을 한 채 그녀를 껴안고 있는 시늉만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한번은 괜찮겠지. 마력 주입도 가르쳐준다는데.’
허나 리안은 자신이 무슨 실수를 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가볍게 생각한 포옹이 리사를 더욱 매달리게 만들었다는 것을.
‘지금처럼 될때까지 계속 두드리면 결국 날 받아줄거야. 쿡쿡.’
* * *
현장에서 바로 가르침이 시작됐다.
리사는 리안의 말만 믿고 그가 마법의 기초부터 시작해야하는 초짜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리안이 마력 주입을 배우기까지 일주일 아니면 그 이상 걸릴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리안의 습득력은 굉장히 빨랐다.
에밀리와 케스티리아가 업무 때문에 먼저 돌아간 그날 저녁.
리안은 단 8시간만에 마력 주입을 터득해버렸다.
“벌써 원리를 이해했다고?”
“원리를 이해한건 아니고 그냥 어떻게 하다보니까…… 되네요?”
“우리 당근이, 농사 말고 다른쪽으로도 재능이 있었네.”
리사는 리안이 천재가 아닐까 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지만 막상 그녀의 입밖으로 나온 말은 많이 절제되고 단조로웠다.
“소름 돋네.”
놀랍다고 오도방정 떠는 성격은 아니었다.
한편, 리안은 속으로 죽은 마왕의 몸에서 나온 노란 구체를 떠올리고 있었다.
‘내가 빨리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아무래도 그 노란 구체 때문인 것 같아.’
그날 이후로 조금씩 변해가는 자신을 느끼고 있었다.
사람 눈으로 보기 힘든 마족이 보인다든지,
무희의 미약이 통하지 않는다든지,
지금처럼 마법을 빨리 배운다든지,
분명 자신의 몸에 무언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어떻게 조사해볼 방법이 없을까? 오드리아 님이 곁에 있었다면 물어봤을텐데 아쉽네.’
잠시 후.
은은한 달빛이 흩뿌려지는 밭.
리사는 진지한 눈빛으로 리안을 응시했다.
“이제 실전이야.”
“네.”
“실수하면 피가 역류해 죽을 수도 있어. 알지?”
“겁주지 마세요. 떨립니다.”
두 사람은 밭 한가운데 돌쇠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리안은 앉아있는 돌쇠의 등을 바라보고 섰다.
“후우.”
짧게 심호흡을 하고 오른손을 뻗었다.
등 중앙부분에 손바닥을 대고 리사가 가르쳐준대로 마력 주입을 시전했다.
그 직후, 손이 빛나면서 손바닥을 통해 돌쇠에게 마력이 흘러들어가기 시작했다.
팔짱을 낀 채 잠자코 지켜보던 리사가 말했다.
“일단은 성공했네. 축하해.”
“감사합니다.”
리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금 정적이 찾아오며 약 5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웅웅.
우우우웅.
미동이 없던 돌쇠의 몸이 갑자기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두 눈에 푸른 불빛이 켜지며 마침내 돌쇠가 깨어났다.
“돌쇠야!”
리안은 자신보다 두 배는 큰 돌쇠를 껴안고 대단히 기뻐했다.
돌쇠도 다시 주인을 봐서 반가운지 양팔을 높이쳐들고 왼쪽 오른쪽 꽃게처럼 왔다리 갔다리 하면서 리안에게 재롱을 떨었다.
허수도 슬그머니 다가와서 기뻐했다.
‘하나뿐인 내 친구 돌쇠가 되살아 나서 다행이다. 고마워 주인.’
향단이는 자고 있었다.
돌쇠와 반가운 재회를 끝마치자 어느덧 자정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내일 보자.”
리안은 돌쇠와 허수에게 작별인사를 한뒤 잠든 향단이를 한손에 들고 짐마차에 몸을 실었다.
리사는 그의 옆자리에 탔다.
“이런 초라한 짐마차는 오랜만에 타보네.”
“죄송하게 됐습니다.”
리안은 농담처럼 말한뒤 고삐를 쥐고 짐마차를 출발시켰다.
연신 하품이 흘러나왔다.
그에 반해 리사는 팔짱을 낀 채 피곤한 기색없이 허리를 펴고 꼿꼿하게 앉아있었다.
리안은 그녀를 힐끔 보며 입을 열었다.
“많이 늦어서 어쩌죠? 책임지고 황도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정면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홱 돌아본다.
“이 시간에? 미쳤어?”
“집에 가서 주무셔야 편하시잖아요.”
“황도까지 두 시간이야.”
“어쩔 수 없죠. 저 때문에 고생하셨으니 바래다 드릴게요.”
“훅스 가는 무너졌어?”
“예?”
“훅스 가는 잘데 없냐고.”
“있긴 한데…… 흐음.”
리안은 곤란한 표정으로 뒷목을 긁적였다.
“백작님이 오시면 난리날텐데.”
돌연 리사가 활짝 웃으며 그를 쳐다봤다.
평소에 안웃는 사람이 저렇게 웃으니까 괜히 무섭다.
“니 방에서 몰래 자면 되잖아.”
역시 그럴줄 알았다.
그녀의 당돌한 발언에 리안은 당황한 눈으로 쳐다봤다.
“어떻게 저랑 자요? 저 남자입니다.”
“너 남자인거 알아. 난 여자고.”
리사가 실실 웃었다.
“그러니까 우리 둘이 꼭 같이 자야지. 피곤해도 두 번은 하고 잘 수 있지?”
리안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뭘 두번 해요!?”
“오늘은 밀당하지마. 무조건 해주겠다고만 대답해.”
“싫습니다!”
“나 처녀인데도?”
솔직히 몸이 피곤해서 이 시간에 황도까지 가는건 무리였다.
한밤중인데다 가는 길에 행여나 괴물까지 만나면 큰일이다.
리안은 결국 리사를 데리고 훅스 가의 저택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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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회
*경고* 지금 보고 계신 화면은, 조아라에서 지원하는 정상적인 경로의 뷰어가 아닙니다.해당 방식으로 조아라에서 제공하는 작품을 무단으로 추출하는 것에 사용하거나 협조할 경우, 저작권법에 위배되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되실 수 있으니,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작품감상을 부탁드립니다.(5년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 부과)----------------------------------------밭농사 준비, 농지 구매의 시간***
울창한 나무로 둘러싸인 저택은 어두웠다.
1층부터 2층까지, 수십개가 넘는 방중 단 두 곳만이 불이켜져 있었다.
당직을 서는 시종들이 머무는 방들이었다.
리안은 저택을 빙 돌아 건물 뒤편으로 향했다.
마구간 처마에 매달린 램프가 바람에 살살 흔들리며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마구간의 빈 공간에 조용히 짐마차를 주차시킨뒤 찢어진 누더기를 리사에게 건넸다.
“이거 머리에 쓰세요.”
리사는 냄새를 맡아보더니 다시 내밀었다.
“싫어.”
“잠깐만 써요.”
“왜 숨어들어가야해? 대범하게 살아.”
“제 방에서 자고 싶으면……”
리안은 두 번은 없다는듯 강하게 말했다.
“빨리 써요.”
리사는 냅다 누더기를 머리에 뒤집어 썼다.
“이렇게 하면 돼?”
그녀가 싱긋 웃어보인다.
“예.”
리안은 마부석에서 내렸다.
“얼굴 보이지 않게 잘 가리고 계세요.”
리안은 말들의 고삐를 풀어 마구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말들도 집에 돌아와 기쁜지 순순히 그를 따라갔다.
이윽고 다시 돌아온 리안은 리사를 데리고 뒷문을 통해 저택안으로 들어갔다.
넓고 어두운 실내는 몇 군데만 불이 켜져 있었고 몹시 조용했다.
리안과 리사는 최대한 시종들을 피해가면서 2층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한치앞도 안보이는 캄캄한 실내.
방에 들어오니 술냄새가 진동을 했다.
“음냐…… 자기야…… 으음.”
침대쪽에서 불쑥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어둠속에서 리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니 방 아니지?”
“여기 맞아요.”
“지금 잠꼬대 못들었어? 혹시 여자랑 동거해?”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리안은 전혀 보이지 않음에도 자연스럽게 삼단 촛대를 찾았다.
그것을 들고 나가서 복도에 걸린 램프를 이용해 불을 붙이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실내가 조금은 환해졌다.
리안은 잠든 향단이부터 나무상자에 눕힌뒤 곧바로 자신의 침대쪽으로 가서 불을 비추었다.
짐작대로 술에 곯은 모니카가 침대에서 퍼질러 자고 있었다.
옷도 거의 안입은 수준이나 다름없다.
속옷이 말려올라가 한쪽 유방이 드러나 있었다.
“으음…… 자기야…… 거긴 부끄러워. 에헤헤……”
“……”
그녀를 잠자코 내려다보던 리사는 소리도 없이 자신의 치마속으로 손을 넣었다.
이내 단검을 빼들고 모니카의 목을 내려찍으려는 찰나, 삼단촛대를 탁자에 내려놓던 리안이 재빨리 달려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리안은 낮게 소리쳤다.
“뭐하는 거예요!”
“내 남편 침대에서 잤어. 이년 죽여야 해.”
리안은 급히 핑계를 둘러댔다.
“우리 친해서 그래요. 칼 내놔요.”
신속히 칼을 빼앗은뒤 책상 서랍에 넣었다.
“친하면 남자 방에 들어와서 자도 되는 거야?”
“같이 야영하던 추억이 있어서 그럽니다. 리사님도 아실걸요. 스톤 쉴드 기사단때. 그때 이 친구랑 같이 야영하면서 황도에 왔습니다. 그때 기억이 그리웠나봐요.”
말도 안되는 소리란 걸 알지만 리안은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만약 리사가 없었다면 리안은 아무 생각없이 모니카와 관계를 나누고 잤을 것이다.
그런데 리사가 있으니 아무 사이도 아닌 것처럼 꾸며야했다.
“오늘부터 절교해.”
“계약으로 묶여있어서 힘들어요.”
“파기해.”
그녀의 말을 흘려듣고 말을 돌렸다.
“방에 데려다 주고 올테니 여기 얌전히 계세요.”
리안은 잠든 모니카를 공주님 안기 자세로 들어올렸다.
힘이 좋아 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허가가 난 문서 두 장을 손에 쥐고 그대로 방을 빠져나가 모니카의 방으로 향했다.
“음냐, 채소다, 채소. 에헤, 에헤헤……”
잠꼬대를 하는 모니카를 그녀의 방 침대에 무사히 눕히고 이불을 목아래까지 덮어주었다.
리안은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열심히 일해서 꼭 성공하자.”
책상 위에 두 장의 문서를 올려놓고 조용히 방을 나왔다.
그후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자 리사가 괴상한 짓을 하고 있었다.
침대 시트를 전부 벗겨내고 이불이랑 같이 돌돌 말아서 창밖에 던지려는 것이 아닌가!
“뭐해요?”
“아까 그년 냄새나서 못자겠어.”
리안은 재빨리 달려가서 그녀를 막았다.
“덮고 잘게 없어지잖아요!”
“시종들한테 달라면 되지!”
“이 밤에 갑자기 그러면 오줌싼줄 알아요!”
“쌌다고 해!”
한참을 티격태격하다 결국 아무것도 깔지 않고, 아무것도 덮지 않고, 리안과 리사가 나란히 침대에서 자는 것으로 합의 봤다.
원래 바닥에서 따로잘 생각이었던 리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하니까 진짜 잠만 잡시다.”
“나랑 안하고 잘거야?”
리안은 신발을 벗어서 가지런히 놓으며 애원하듯이 대꾸했다.
“졸려요. 빨리 자자구요.”
그러면서 윗옷을 벗고 바지도 벗어내렸다.
팬티만 걸친 채 침대에 드러누웠다.
벽쪽으로 몸을 움직여 리사가 누울 자리를 만들어준뒤 바로 눈을 감았다.
“나 먼저 자요. 좋은꿈 꾸세요.”
“……”
리사는 무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다 곧이어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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