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gricultura 4
모니카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건 안돼. 일 벌려놓고 사라지면 난 어쩌라고?”
“3년정도는 같이 있어줄게.”
“안돼, 20년.”
“뭐?”
모니카가 계약기간을 장난 아니게 지르는걸 보고 리안은 깜짝 놀랐다.
“너무 길어, 4년.”
“상단이 자리를 잡으려면 최소한 10년 이상은 기다려야 한다고. 봐줬다. 18년으로 해.”
리안 역시 모니카의 심정이 이해안가는 것은 아니었다.
일을 같이 시작해놓고 동업자가 초반에 도망가버리면 모니카도 암담할 것이다.
리안은 좀 더 선심 쓰기로 마음 먹었다.
“할 수 없지. 많이 양보해서 5년.”
“하늘이 내려준 인재를 겨우 5년만 데리고 있으란 소리야? 5년뒤엔 나보고 폭망하라고? 절대 안돼. 16년. 이 이상은 무리야. 대표 명의도 넘겨주고 땅도 공짜로 빌려주잖아. 내가 호구야?”
모니카가 열변을 토하며 말하자 리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16년이나 묶여있을 바에 내가 그냥 다른 일을 알아보고 말지. 16년이면 나 못해. 하루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한다고.”
리안이 계약파기를 선언하며 강하게 나왔다.
그러자 그를 놓칠까봐 두려웠는지 모니카가 발빠르게 태세전환을 했다.
리안에게 가까이 달라붙더니 그의 어깨를 문지르며 아양을 떨었다.
“난 앞으로 당신만 믿고 살려는데 이러지마. 내가 말을 안들어주겠다는 것도 아니잖아.”
그녀가 애교 섞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
“자기야, 계약기간은 15년으로 하고 대신에 최소 의무 기간을 추가하는건 어때? 최소 의무 기간은 총 8년. 8년 동안 반드시 계약을 유지해야하고 이후부터는 언제든 떠나고 싶으면 떠나는 식으로. 다만 의무 기간이 끝나도 계약이 유지되는 남은 7년 동안 다른 상단에는 가입할 수 없어. 왜냐하면 내가 질투나니깐. 또 개인적으로 수확물을 팔고 싶을땐 꼭 우리 상단을 통해야 돼. 어때 이 조건?”
리안한테는 최소 의무 기간 8년도 너무 길었다.
그녀가 한 발 물러선만큼 리안도 한 발 양보했다.
“5년.”
그는 재차 강조했다.
“계약기간 20년, 최소 의무 기간 5년. 이걸로 합의보자.”
모니카한테는 5년이란 숫자가 너무 짧게 느껴졌다.
“1년만 더 해줘. 제발. 딱 6년만 같이 있자. 더이상 안바랄게.”
결국 그녀의 간곡한 부탁에 못이겨 6년으로 결론이 났다.
리안은 앞으로 6년 동안 모니카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만약 계약기간을 다 채우기도 전에 오드리아님과 만나면…… 할 수 없이 속세에서 잠시 살다 가자고 해야겠다.”
“뭐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거야?”
“아니야 아무것도.”
“밥이나 먹자. 다 식었네.”
모니카는 싱글벙글 웃으며 탁자에 올려둔 음식 접시로 향했다.
“밥? 아!”
리안은 순간 방에 두고온 향단이가 떠올랐다.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이만 가볼게.”
“왜? 밥 안먹어?”
“방에 아기를 두고 왔어.”
“아기?”
모니카는 생뚱맞은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신 애 있어?”
“아, 그러고 보니……!”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오른 리안은 손가락을 튕기며 모니카를 바라봤다.
침을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모니카.”
“표정이 왜 그리 진지해? 뭔데?”
“저기…… 오해하지마?”
“뭔 오해?”
“그러니까 있잖아.”
“뜸 들이지 말고 빨리 얘기해. 만약 계약 파기한다는 말이면 접시를 얼굴에 처박아줄거야.”
“괜찮으면……”
리안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뒷목을 긁적였다.
“젖 좀 줄래?”
* * *
잠시 후, 리안의 방.
모니카는 배고파서 울부짖는 향단이를 조심스레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넘흐~ 귀엽다~!”
손바닥 위에서 발버둥치는 아기는 생각보다 무척 가벼웠다.
차라리 무거우면 좋으련만, 깃털처럼 가벼우니 자칫 떨어질까봐 불안했다.
“허락해줘서 고마워.”
“감사 인사는 됐어. 앞으로 서로 돕고 살아야할 사이인데 뭐. 근데 페어리는 어디서 난거야?”
“도시로 오는 길에 주웠어.”
“진짜 운 좋다. 얘들은 사람들이 접근하기 힘든 깊은 숲속에서만 산다고 들었는데, 매정한 부모가 버리고 간거 아닐까?”
모니카는 그런 말을 하면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입고 있던 가운의 앞섶을 벌리고 왼쪽 가슴을 내밀었다.
모유 방울이 맺힌 유두가 적나라하게 보였다.
리안은 헛기침을 하며 다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모니카는 손바닥 위에 누워있는 향단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준다.”
“응.”
그녀는 왼쪽 가슴쪽으로 향단이를 가져갔다.
향단이의 얼굴은 너무나 작아서 모유 한방울만 떨어져도 얼굴이 흠뻑 젖을 정도였다.
게다가 유두의 크기가 향단이의 얼굴만했다.
모니카는 모유가 묻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를 기울이며 향단이의 입술에 유두를 가져다댔다.
모유 향기를 맡은 향단이는 울음을 뚝 그쳤다.
입술을 잠시 오물오물 거리더니 곧 혀를 내밀어 유두에 맺힌 모유 방울을 조금씩 핥아먹기 시작했다.
“어머, 귀여워~!”
작은 입으로 열심히 모유를 먹는 모습을 보며 모니카는 절로 흐뭇한 웃음이 지어졌다.
이런 일은 처음 있는 일이라 신비로운 기분이 들며 만감이 교차했는지 모유를 받아먹는 향단이에게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체격이 워낙 작은만큼 향단이는 입이 짧았다.
세 방울 분량의 모유를 먹고 금세 배불렀는지 입술을 떼고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잠든 향단이를 내려다보며 모니카는 아쉬운 한숨을 토해냈다.
“에, 이게 다야? 많이 먹어주길 바랐는데.”
“예뻐서 많이 먹이고 싶어?”
“얘가 예쁘다는게 아니라, 아니 물론 예쁘고 귀엽긴한데 가슴에 젖이 많이 찼으니 그것 좀 화끈하게 빼달라는 소리지.”
리안은 그제야 의미를 알아듣고 멋쩍어하며 말이 없어졌다.
모니카는 조심스레 향단이를 침대 위에 내려놓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아, 누가 좀 시원하게 쪽쪽 빨아줬으면 좋겠네. 무겁고 답답해.”
“……”
리안은 향단이를 신경써준 모니카를 위해 무언가 해줄까 없나 하며 속으로 고민하다가 이윽고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내가 가슴 마사지 해줄까? 조금 서툴지만.”
“마사지?”
그녀가 피식 웃더니 애교 섞인 말투로 짓궂게 되묻는다.
“마사지는 오또케 하는 거언데? 설마 둘이 홀딱 벗고 살을 맞대면서 하는 고오야?”
표정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음란한 짓을 하자는줄 알고 오해한듯 싶다.
리안은 아주 정직하고 순수한 의미의 마사지를 말한 것 뿐이었다.
‘남자가 다 변태인줄 아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의 내려봐.”
기세좋게 말해서 놀랐는지 그녀가 두 눈을 크게 뜨고 빤히 쳐다본다.
“진짜로 하게?”
“응.”
“아까는 싫다더니 웬 바람이 불었대?”
그녀야말로 아까는 당당하게 젖을 짜달라더니 지금은 머뭇거리는게 보였다.
상의를 내려보랬더니 안내리고 계속 딴소리만 해댔다.
“정말로 하려고?”
“몇 번을 되묻는거야. 쫄지마, 딴짓은 안하니까.”
“누, 누가 쫄았다고. 할거면 뜸들이지 말고 빨리해.”
그녀는 살짝 오기가 생겼는지 가운을 허리춤까지 벗어내렸다.
풍만한 유방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두 개의 유두가 발딱 일어선 채 모유로 번들거렸다.
과하게 부풀어 있는 것이 한눈에 봐도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오른쪽 왼쪽 짝짝이로 부풀어 있었다.
방금전에 향단이한테 모유를 준 왼쪽 유두에 비해서 오른쪽 유두가 많이 부어있는 상태였다.
‘저쪽은 젖이 안빠져서 그런가?’
리안은 힐끗 유두를 관찰한뒤 의자를 가져와서 모니카를 앉혔다.
“서투니까 아프면 말해.”
“여자 가슴 만져본적은 있어?”
그녀가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었다.
“난 동정인줄 알았는데.”
“도발하지마.”
“덮치면 소리질러야지.”
“나랑 헤어지고 싶으면 그러시든지.”
“계약으로 협박하는 거야?”
“입 좀 다물어.”
리안은 다그치듯 말한뒤 그녀의 뒤에 가서 섰다.
뒤에서 그녀의 가슴쪽을 내려다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자기도 모르게 수술실에 들어간 집도의 처럼 양손을 들고 있었다.
‘후…… 야동에서 본대로만 따라하자.’
마사지물 야동의 초반 부분은 그나마 정상적인 마사지로 시작한다.
초반부분만 따라하자며 그는 과감히 손을 뻗었다.
먼저 양어깨부터 주무를 생각에 어깨에 손을 대자 그녀가 미세하게 움찔 거렸다.
“손이 따뜻하네.”
“힘 빼. 긴장 안해도 돼.”
“남자가 주물러주는건 처음이야.”
“기분 좋을거야.”
여기저기 주무르며 가볍게 탐색해보니 어깨 곳곳이 뭉친게 느껴졌다.
리안은 적당히 힘을 줘서 뭉친부분을 집중적으로 공략하기 시작했다.
“윽, 윽.”
“아퍼?”
“아냐 계속해. 윽. 윽.”
때로는 약하게 때로는 강하게, 꾹꾹 누를때마다 그녀의 양쪽 발가락이 잔뜩 오므려졌다 펴졌다를 반복했다.
그렇게 시간이 갈수록 모니카의 표정은 한결 편안해졌다.
“후아…… 시원해……!”
“거봐, 기분 좋지?”
“당신 내 전속 마사지사 해라. 너무 좋다.”
그녀가 만족해하니 리안도 잘하고 있는 것 같아 내심 뿌듯함이 느껴졌다.
“난 마사지사가 아니라 상단 대표야. 당신은 내 직원이고. 감히 대표를 부려먹어?”
리안이 농담을 던지자 모니카가 쿡쿡 웃었다.
“바지사장 주제에 어디서 까불어. 우리 상단의 실세님께서 가슴 만지게 해주는 것만도 고마운줄 알아.”
얼마 후. 뭉친 어깨가 어느 정도 풀어졌다는 판단이 들었을때 리안은 풍만하게 솟아있는 유방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가슴 갈거야.”
“응. 지금처럼 시원하게 해줘, 자기.”
“자기란 소리는 빼. 낯간지러우니까.”
“친근하게 들려서 좋잖아.”
“전혀.”
두 손으로 유방을 움켜잡고 모유부터 쫙 짜줄 생각이었다.
리안은 일단 구석에 가서 빈 양동이를 가져왔다.
바닥이 젖으면 안되니까.
그때였다.
창문밖에서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당근상인을 찾고 있소! 그자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즉시 나와서 알려주시오!”
모니카의 가슴으로 향하던 리안의 손길이 멈칫했다.
“당근상인?”
난데없는 소리에 놀란 그는 급히 창가쪽으로 뛰어가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세 명의 병사 무리가 보였다.
그들은 거리를 돌면서 집들을 향해 계속 소리치고 다녔다.
“어제 서쪽 시장에서 당근을 팔던 상인을 찾고 있소이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은 밖으로 나와서 알려주시오!”
모니카가 곁으로 다가와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근상인이라면 당신 아냐?”
“아마도?”
“저들이 왜 당신을 찾아?”
“나도 모르지……”
잠시 생각에 잠긴 채 어제 일을 되짚어보던 리안.
갑자기 뇌리에 무언가가 스쳐지나갔다.
리안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혹시 그것 때문인가?!”
“왜? 뭔데?”
“어제……”
리안은 어제 성문에서 있었던 일을 모니카에게 솔직히 털어놓았다.
“당근 40%를 상납하라는 경비병의 요구를 무시하고 몰래 성안으로 들어왔어. 그 일이 걸렸나본데?”
“아……”
모니카는 골치 아프다는듯 머리를 긁적였다.
“영지법을 어긴건 맞네.”
“처벌받겠지?”
리안의 진지한 물음에 그녀는 신중히 고민하다 대답했다.
“요즘 마족과 전쟁중이라 먹는 것과 관련된 문제는 처벌이 매우 엄격해. 재수없으면 최소 1년은 감옥에서 썩어야할지도 몰라.”
“뭐?”
리안은 황당했다.
제자리에서 한참을 고심하던 그는 끝내 중대한 결심을 내렸다.
“튀어야겠어.”
리안은 황급히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던 모니카도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도망가야겠지?”
그녀는 흘러내린 가운을 제대로 챙겨입으며 서둘러 문쪽으로 향했다.
“나도 짐싸고 있을게. 끝나면 내 방으로 와.”
리안은 혼자 도망갈 생각이었는데 모니카까지 나서자 의아했다.
“당신은 아무 죄도 없는데 왜 따라와?”
“왜 따라오냐니? 그걸 말이라고 해?”
그녀가 기막혀하며 화를냈다.
“계약 잊었어? 우리 이제부터 한 목숨인거 몰라?”
“아차, 그랬지.”
리안이 멋쩍게 웃었다.
“미안, 깜빡했어.”
그녀가 뚱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많이 서운하네.”
하지만 이내 화가 풀리며 모니카의 얼굴에 웃음이 머금어졌다.
“이참에 황도로 튀어버리자.”
“알았어. 빨리 가서 준비해.”
“난 챙길게 많으니까 짐 다 챙기면 빨리 와서 도와줘.”
“응.”
그 순간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왠지 모르게 피어나는 엷은 유대감을 느꼈다.
괜스레 좋고 든든한 그 기분을 간직하며, 각자의 방에서 신속히 짐을 꾸렸다.
“짧지만 정들었던 도시여 안녕. 나는 뉴요커가 되기 위해 수도로 떠난다.”
혼자있을때면 곧잘 나오는 리안의 헛소리는 긴박한 순간에도 여전했다.
한편, 백여명의 병사들이 도시 전체를 돌아다니며 당근상인을 찾고 있었다.
개중 몇몇은 영문도 모르고 무작정 당근상인을 찾아다니는 중이었다.
“근데 당근상인이 뭔 잘못을 저질렀기에 찾으라는 거여?”
“얘기를 자세히 안해줘서 나도 잘 모르겠어. 어이, 자네는 아는가?”
두 병사의 시선이 한 병사에게 향했다.
그가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확실치는 않은데 아까 대충 주워 듣기로는 리사 백작님의 요청이 있었는가 보더라고. 우리 지역 당근맛이 기가막혀서 먹고 싶다나 뭐라나.”
“고작 그걸로? 어메 우리 영주님도 아닌디 우리가 왜 수발을 들어야 하는지 모르겄네. 환장해 디지겄어.”
“명령은 영주님이 내리셨으니 어떡하겠어. 시키면 찾아야지.”
“아이구 귀찮구먼. 왜 남의 땅까지 와서 사람을 부려먹는가 몰러.”
“그러게 말이여.”
세 병사는 투덜대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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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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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오늘 친구가 황도로 갈 예정이야. 그 사람들이랑 함께 움직이자.”
“친해? 우릴 신고하면 어쩌려고.”
“어릴때부터 알던 소꿉친구니까 걱정마. 어차피 성문을 빠져 나가려면 별 수 없어.”
짐마차에 마지막 짐을 실은 리안과 모니카는 재빨리 마부석에 올랐다.
그동안 행상인 생활을 해온 까닭에 모니카에게는 말 세 마리가 끄는 짐마차가 있었다.
고삐를 쥐고 있던 모니카는 막 옆자리에 앉은 리안을 보며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예쁘다, 잘 어울리네.”
“시끄러워.”
현재 리안은 여장을 하고 있었다.
머리에 긴 머리 가발을 쓰고 얼굴에 화장도 했다.
모니카가 입던 옷중에 제일 큰 사이즈의 여성용 드레스까지 챙겨 입었으나 큰 골격에서 드러나는 이질감은 숨길 수가 없었다.
떡대 큰 여장군으로 보인다고나 할까.
모니카보다 거의 세 배는 덩치 큰 여자였다.
“도착할때까지 고개 숙이고 있어. 그럼 아무도 몰라볼거야. 풉.”
“이건 속는 놈이 멍청이야.”
리안의 불평에 모니카는 재차 웃음을 터뜨렸다.
곧 모니카가 고삐를 후려치자 말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의를 살피며 한동안 상체를 웅크리고 있던 리안이 속삭이듯 말했다.
“너무 천천히 가는거 아니야?”
“평범하게 가야 의심을 안해.”
“친구는 어디 있어?”
“동쪽 성문쪽에. 여기서 가까워.”
“뭐하는 사람인데?”
“기사단장.”
“더 위험한거 아니야?”
모니카는 고삐를 쥐고 정면을 주시한 채 히죽 웃었다.
“여기 병사들과 아무 관련없는 황도의 기사단이야. 전쟁 때문에 잠깐 파병 나왔다가 복귀하는 중이지.”
리안은 고개를 끄덕인뒤 무심코 혀로 입술을 적시다가 입술에 바른 화장품을 먹어버렸다.
“퉷, 퉷. 그런데 기사단장 소꿉친구는 어떻게 알게 됐어? 대단한데?”
“양아버지 집 주변에 귀족들이 많이 살았어. 그 덕분에 귀족 친구들 좀 알게 됐지.”
“당신은 귀족 아니고?”
“나는 평민이야. 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양아버지께서 거둬주셨거든.”
“그쪽 집안도 사연이 복잡한가 보구나……”
리안은 중얼거리듯 말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빠르게 지나치는 집들과 건물의 풍경을 바라봤다.
‘아무튼간에 무사히 탈출이나 했으면.’
두 사람의 짐을 가득 실은 짐마차는 길을 따라 달리며 동쪽 구역으로 향했다.
거리에 병사들이 보일때는 모나지 않게 천천히, 병사들이 없을때는 빨리, 그렇게 적절히 속력을 조절해가며 말을 몰았다.
이윽고 동쪽구역에 다다르며 몇 번인가 골목을 꺾어 들어가자 넓은 공터에 주둔중인, 모니카가 말한 친구가 이끄는 기사단이 보였다.
스톤 쉴드 기사단.
주요 거점 방어를 위한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부대.
몇 달 간 이 지역에서 머물며 임무를 완수한 그들은 황도로 복귀하기 위해 바삐 짐을 싸는 중이었다.
“얘가 어디 있으려나.”
길가에 짐마차를 주차시킨 모니카는 마부석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가서 얘기 하고 올게. 여기 있을래?”
“나도 같이 갈게.”
그 말에 그녀가 싱긋 웃는다.
“내가 없으면 안달이나?”
리안은 콧방귀를 뀌었다.
“나도 같이 가보는게 좋을 것 같아서.”
우연도 이런 우연이 또 어딨을까.
리안은 펄럭이는 깃발에 새겨진 스톤 쉴드 기사단의 문장을 보자마자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바위처럼 굳건하게 버티고 버틴다! 스톤 쉴드 기사단! 도와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만약 그자들이 맞다면 자신은 기사단장, 즉 라일의 은인이다.
“친구말이야. 이름이 혹시 라일이야?”
“어? 어떻게 알았어?”
리안은 피식 웃었다.
“전에 우연히 만났었어.”
“언제?”
모니카에게 예전 일을 설명해주면서 짐을 나르는 병사들 사이를 가로질러 라일을 찾아다녔다.
병사들은 가끔씩 여장을 한 리안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떠, 떡대봐. 저거 여자 맞아……?”
“종아리 근육이 장난아니네……”
“따귀 한 대 맞았다간 죽겠는데?”
얼마뒤 짐을 실은 마차와 말들이 줄지어 늘어선 곳에서 지휘를 하고 있던 라일과 만날 수 있었다.
“나 또 왔어 라일!”
“황도에 갈지 말지 결정했어?”
“그 얘기하러 온거야.”
평소에도 틈틈이 교류하면서 지내왔던 것인지 모니카와 라일은 어제 만났던 친구처럼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이 분은……”
라일은 짙은 화장을 한 리안을 보더니 눈을 껌뻑거렸다.
여자냐고 묻고 싶은데 실례가 될까봐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겠나보다.
“같이 오신 분……?”
리안은 부끄러운 기색없이 가발을 훌러덩 벗었다.
“나요.”
모니카는 웃음을 터뜨렸고 라일은 당황하며 뒷걸음질 쳤다.
“누, 누구시오?!”
“예전에 악령을 잡아줬던.”
“악령……?”
라일은 리안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소리쳤다.
“아! 당신!”
“기억나오?”
“잊을리가 있겠소?”
리안은 웃으며 그와 반갑게 악수를 나누었다.
“당신이 모니카의 친구일줄은 몰랐소.”
“나도 놀랐소! 그런데 여장은 왜 한거요?”
“지금부터 모니카가 말해줄거요.”
스톤 쉴드 기사단을 이끄는 젊은 기사단장 라일.
그는 은혜를 아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어떻게 갚아야 하는지를 잘 아는 명예롭고 훌륭한 기사였다.
“아무 잘못도 없는데 열심히 키운 당근을 강제로 압수해 가려고해서 피신 중이야.”
모니카가 약간 왜곡을 해가며 리안과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자, 사정을 전해들은 라일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곤경에 처한 백성을 모른체 할수는 없지. 좋소, 같이 갑시다.”
라일은 리안을 마주보았다.
“난 빚지고는 못사는 성격이오. 황도까지 동행하는 것만으로는 양심상 빚을 다 갚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소이다. 차차 또 부탁할 일이 있으면 개의치 말고 말해주시오.”
“고맙소.”
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이후 모니카는 스톤 쉴드 기사단원들이 몸에 걸치는 휘장을 받아온다며 라일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휘장을 몸에 걸치고 스톤 쉴드 기사단원으로 변장할 계획이었다.
그리하여 잠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데, 저 멀리 사각철창에 갇힌 어떤 물체가 문득 눈에 들어왔다.
“희한하게 생겼네.”
흥미를 느낀 리안은 성큼성큼 그것에게 다가갔다.
주위에서 잡일을 하던 병사들은 자주 철창 안을 쳐다보며 찬사를 마다하지 않았다.
“와…… 어쩜 저렇게 예쁜 여자가 다 있지?”
“아무리 마족이라지만 만약 저 계집이 나한테 시집온다고 하면 받아줄 것 같아.”
“정말 섹시한 계집이야.”
리안은 철창으로 다가가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들 눈이 삐었나……’
지나가던 병사를 붙잡고 물었다.
“혹시 저 안에 있는게 여자로 보입니까?”
“저게 여자가 아니면 뭐요? 내 눈에는 아주 겁나게 예쁜 마족으로 보이는데.”
“……?”
“그런데 당신이야말로 여자야 남자야? 남자가 화장한 것 같이 생겼네.”
“갈길 가시오.”
리안은 그대로 병사를 지나쳐 철창 안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이 떡고물 같이 생긴게 마족 여자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는데 불쑥 목소리가 들렸다.
“너너너……”
“음?”
“내가 보이는 것이냐?”
위엄이 서린 소년의 목소리.
리안은 놀라는 기색없이 담담이 대답했다.
“보여.”
“이럴수가, 큰일났군.”
“너 정체가 뭔데? 왜 다른 사람들 눈에 네가 여자로 보이지?”
리안의 눈에 그것은 마치 슬라임을 닮은 녹색액체였다.
바닥에서 흐물흐물거리는 마물.
녀석이 키득거렸다.
“아름다움은 생존을 보장하는 최고의 무기다. 특히 인간들은 미녀를 보면 사족을 못쓰지. 나를 보호하기 위해 저들의 눈에 미녀로 보이는 환영을 만들었다.”
“음…… 마법의 종류인가……”
녀석이 물었다.
“내 환영술은 실력이 뛰어난 마법사나 마족이라할지라도 쉽게 알아보지 못해. 그런데 너는 뭐지? 정체가 뭐야? 인간이 맞아?”
“맞으니까 여기 서서 철창에 갇힌 널 내려다 보고 있겠지?”
“내 정체를 알아챈거보면 평범한 인간이 아닌게 확실해.”
비슷한 소리를 석달전 라카제트에게도 들었다.
‘흐음, 인간이 저를 알아볼줄이야. 놀랍군요.’
리안은 턱밑을 긁적였다.
화장때문에 분가루가 손끝에 묻었다.
“뭐하다 잡혔냐? 사람이라도 죽였어?”
“난 아무것도 안했어. 그저 던전에서 벌레만 잡아먹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여기 기사단장 녀석이 부하들과 함께 던전에 쳐들어왔지. 놈들은 던전에 있는 괴물이란 괴물은 전부 죽였어. 그래서 난 살기 위해……”
“아리따운 마족 여자로 보이게 했다고?”
“그렇게 됐지.”
녹색 액체는 키득거리며 비웃었다.
“나한테 반한 녀석들이 갑자기 얼굴을 붉히면서 칼을 집어넣는 꼴을 봤어야 하는데. 그 후 여기로 끌려왔다. 맨날 나보고 인간의 편이 되어달래. 잘 살게 해준다고.”
“호오……”
리안은 아쉬워했다.
“나는 못봐서 아쉽네. 얼마나 예쁘게 생겼는지 궁금해.”
“너……”
액체 괴물은 사뭇 달라진 음성으로 물었다.
“저들에게 고자질할거야?”
끈적한 녹색 액체속에 떠있는 두 눈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녀석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리안은 그 기분을 알아채고 속으로 웃었다.
잠시 고민하는척하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나한테 뭐 줄거 없냐?”
“무슨 소리야?”
“뇌물 몰라 뇌물? 뇌물이 있어야 봐줄거 아냐. 기브 앤 테이크 라고.”
멀리서 모니카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리안!”
돌아보니 그녀의 손에 회색빛 휘장이 쥐어져 있었다.
그것을 리안을 향해 자랑스럽게 흔들었다.
리안도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든뒤 다시금 액체 괴물을 내려다봤다.
“가봐야겠다.”
“잠깐,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뇌물이라고 말했잖아. 천천히 잘 생각해봐. 좋은 대답 기다리고 있을게.”
리안은 윙크를 한뒤 자리를 떠났다.
“뇌물이라니 악마 같은 놈이잖아.”
철창에 남겨진 액체괴물은 심각하게 고민했다.
“내가 줄거라고는…… 그것 뿐인데.”
얼마 후, 스톤 쉴드 기사단의 휘장을 가슴에 찬 리안과 모니카는 성문을 나서는 기사단 행렬에 섞여 무사히 도시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계속 스톤 쉴드 기사단과 함께하며 황도로 향하는데……
* * *
“모니카 그년이 갑자기 방을 뺀다는 겁니다. 소인은 그래서 고향에 급한 일이 생긴줄 알고 잘 다녀오라고 했죠. 백작님의 부름을 거역할 생각에 도망쳤을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리사는 에밀리 및 케스티리아와 함께 리안이 묵었던 여관에 와있었다.
“이름이 리안이라고……?”
“네, 부, 분명 자기 입으로 김리안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성이 김입니다.”
주인 아주머니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모니카가 묵었던 방으로 리사 일행을 안내했다.
“김리안을 저희 여관에 데리고 온 모니카가 지내던 방입니다.”
“……”
리사는 굽 높은 구두를 신고 방으로 들어가서 묵묵히 방안을 살펴보았다.
누가 헤집어 놓은듯 어질러진 실내에는 옷장 및 서랍장이 전부 열려있었고 미처 들고가지 못한 짐들이 많았다.
누가봐도 급하게 도망친 모양새.
“왜 도망갔지?”
리사의 뒤에 서있던 에밀리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옆에 나란히 서있던 케스티리아도 의문이 들었다.
“우리가 무서웠나?”
리사는 대충 방안을 둘러본 후 복도로 나갔다.
“이제 김리안이 묵었던 방을 보여주세요.”
“네, 배, 백작님.”
뚱뚱한 주인 아주머니는 후다닥 리사 일행을 3층으로 안내했다.
“흐아~ 그 사내의 땀냄새~”
에밀리는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몸서리를 치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
리사는 조용히 텅 빈 방안을 둘러보았다.
조금전 모니카의 방과 달리 아주 깔끔한 방이었다.
“저희집 가구만 있어서 단서로 추정할만한게 없죠? 그 친구 짐이 별로 없었어요. 등에 보따리만 메고 있더라고요.”
주인 아주머니가 그렇게 말하자 리사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차갑다 싶을 정도로 무뚝뚝하게 말을 건넸다.
“이 방을 잠시 살펴볼테니 밑에 내려가 있으세요.”
“네? 알, 알겠습니다. 느긋이 살펴보십시오. 그, 그럼.”
주인 아주머니가 복도로 허둥지둥 나가자마자 리사는 방문을 닫았다.
실내에 자신을 포함해 에밀리와 케스티리아만 남게 되었다.
“에밀리, 혼돈의 힘을 해방해.”
“그러실줄 알았어요.”
“저는 망을 보겠습니다.”
케스티리아는 즉시 밖으로 나가서 문앞을 지켰다.
리사는 의자를 가져다 놓고 자리에 앉았다.
“시작해.”
“자,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볼까요?”
힘의 해방을 허락받은 에밀리는 희열에 가득찬 미소를 흘리며 모습을 변화시켰다.
머리에서 두 뿔이 솟아나고 등에는 악마의 날개가, 엉덩이에서는 끝이 하트모양으로 생긴 검은 꼬리가 튀어나왔다.
손톱들은 길고 날카롭게 자랐고 눈동자는 노랗게 물들었다.
어두운 기운이 감싼 그녀의 육체.
에밀리는 해방의 자유를 만끽하며 방안을 그윽한 눈빛으로 둘러보았다.
“계집애의 모유 냄새가 나요. 발칙한 년.”
에밀리는 혀로 자신의 손가락을 핥으면서 다른 손으로는 음부를 천천히 문질렀다.
그녀의 음성은 느리고 끈적끈적했다.
“사내는 흥분했어요. 하지만 사정은 하지 않았어요. 아니, 아랫도리에 달린 물건을 애초에 꺼내지도 않았어요. 알 수 있어요. 그는 아무짓도 안했어요. 계집애 혼자 발정난거예요.”
리사는 앉아서 팔짱을 낀 채 흥미로운 눈길로 에밀리를 응시했다.
“두 사람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겠어?”
“계집애의 모유 냄새를 쫓아가면 될 것 같아요. 후훗.”
잠시 후.
세 사람은 여관을 벗어나 동쪽 성문 앞에 서 있었다.
“스톤 쉴드 기사단은 세 시간전 이곳을 떠났습니다.”
경비병의 보고를 들은 리사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흐음, 황도로 갔단 말이지.”
가는 길이 똑같았다.
게다가 황도로 복귀하는 부대의 이동 속도는 숫자가 적은 자신들보다 느릴테고, 따라서 당근상인을 따라잡는 건 시간문제였다.
“에밀리, 케스티리아. 그만 돌아가자.”
“네~”
“넷.”
이후 성으로 돌아온 리사는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그녀는 가신들과 함께 길을 떠났다.
호화로운 마차 세 대와 짐마차 다섯대, 수십명의 하인들을 비롯해 말을 탄 호위 기사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김리안이라고 했던가?”
마차에 타고 있던 리사는 해가 뜨는 광경을 바라보며 야심 찬 미소를 지었다.
“조금만 기다려. 내 밑에서 평생 당근 재배만 시켜줄테니까.”
그녀는 하나에 꽂히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그것만 파고드는 성격이다.
불우했던 어린시절로 인해 성격이 뒤틀린 나머지 세상을 원망하며 깔보고 있었기에 적당히를 몰랐다.
일정이 늦어져 황제가 화를 낸다한들 그녀는 황제가 왜 화를 내는지 이해조차 하지 못할게 뻔했고 심지어 겁도 안났다.
그런 리사의 머릿속에 각인된 명령은 오직 하나.
‘김리안을 잡아라’
사라졌던 어머니의 당근맛을 되찾아준 남자를 사로잡을때까지 황도에 안갈 작정이었다.
“네가 키운 당근만 질리도록 먹어주겠어.”
그녀는 정말 적당히를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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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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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간 마족이 세상에 맹위를 떨치면서 그와 함께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이 있다.
바로 괴물들이다.
서식지의 먹이가 부족할 정도로 개체수가 늘어났고, 그로 인해 여행 도중 괴물들과 마주치는 일은 흔한 일이 되었다.
지금 스톤 쉴드 기사단의 처지가 그러했다.
원숭이를 닮은 체구가 작고 날쌘 괴물들이 대거 출몰하여 숲을 지나가던 스톤 쉴드 기사단을 공격했다.
“빌어먹을, 피야리 몽키 무리다!”
“모두 당황하지 말고 세 명씩 한 조로 싸워라!”
피야리 몽키의 수는 무려 이백여마리가 넘었다.
놈들은 나무에서 떨어지거나 기사들의 어깨를 폴짝폴짝 정신없이 뛰어다니면서 현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따라다니면서 힘 뺄 필요없어! 자리만 지켜!”
라일은 크게 외치고 나서 곧바로 칼을 내려치며 피야리 몽키의 몸통을 두동강냈다.
놈들의 무기는 입으로 물거나 날카로운 손톱으로 얼굴을 할퀴는 게 전부였다.
피부를 보호하는 털조차 없고 얼굴은 쭈글쭈글했다.
몸이 날렵한 것 빼고는 두려운 대상이 아니었다.
“그쪽으로 갔다! 그놈 잡아!”
“나한테 맡겨!”
기사들이 곳곳에서 열심히 피야리 몽키를 때려잡는 동안 다른 한켠에서는 식자재가 가득 실린 짐마차를 지키느라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기사단원들의 삼시세끼를 책임지는 출장 요리사 울라프와 그 자식들이었다.
“세이라! 오빠 옆에 바짝 붙어있거라!”
“네, 아버지!”
“다렌! 네 동생 잘 지켜! 너만 믿는다!”
“예!”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아버지와 20대 아들 딸들은 각자 후라이팬을 들고 바싹 긴장해 있었다.
앞쪽에선 기사들이 요령 좋게 벽을 이뤄 피야리 몽키의 접근을 막아주는 중이었다.
“어?”
기사 하나가 무심코 머리 위를 올려다보다가 높이 자란 나무 줄기를 타고 뒷쪽으로 넘어가는 피야리 몽키 무리를 발견했다.
그가 크게 소리쳤다.
“아오 제기랄, 방어선 무너졌다!”
“야 인마 방심하면 어떡해!”
“위에서 가는걸 어떻게 막아!”
기사들은 일제히 뒤돌아보며 소리쳤다.
“울라프님, 조심하십시오!”
피야리 몽키 무리는 상당히 재빨랐다.
“이놈들이!”
울라프가 즉시 앞으로 나서서 후라이팬을 휘둘러보았으나 허사였다.
피야리 몽키들은 그를 비웃듯 폴짝 뛰더니 머리와 어깨를 밟고 등뒤로 넘어가버렸다.
“저한테 맡기세요!”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들 다렌이 나서며 황급히 후라이팬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 역시 허공만 갈랐다.
세 방향으로 흩어졌다 한데 뭉친 피야리 몽키들은 쏜살같이 내달리며 짐마차 앞에 서 있던 여동생 세이라를 향해 돌진했다.
괴물들도 짐승처럼 먹잇감을 사냥할때 누가 약하고 빨리 죽는지 본능으로 알 수 있었다.
놈들은 인간 암컷을 재빨리 죽여버리면 채식동물이 그러하듯 인간이 동료의 시체를 버리고 갈 것이라 생각했다.
버리고 간 것을 포식할 목적.
“꺄악!”
세이라는 겁에 질린 나머지 바닥에 주저앉아 몸을 웅크렸다.
피야리 몽키들은 송곳니를 드러내며 그녀를 향해 몸을 날렸다.
“세이라!”
아버지와 오빠가 절망하며 소리친 그때였다.
오들오들 떨던 세이라 앞에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옜다, 이거나 처먹어라.”
퍽!
퍽!
퍽!
소리없이 다가온 누군가로 인해서 머리가 터져버린 피야리 몽키들이 동시에 나가떨어졌다.
“괜찮아요?”
“예……?”
“괜찮냐고요.”
세이라는 고개를 들어 겁에 질린 눈으로 목소리의 주인을 쳐다봤다.
손잡이가 짧은 쇠망치를 들고 있는 사내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심해요.”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다른 방향을 향해 망치를 휘둘렀다.
퍽!
피야리 몽키의 머리가 박살이 났다.
뛰어난 무인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동작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몸 조심해요.”
그는 이내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세이라!”
아버지 울라프와 오빠 다렌이 서둘러 뛰어와 그녀를 감싸안았다.
“다치지 않았니?”
“전 괜찮아요. 그, 근데 저 분은 누구세요?”
세이라가 멍한 얼굴로 묻자 울라프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쇠망치를 든 검은 머리 사내와 그 옆에 있는 연두색 머리 여자를 보며 말했다.
“모니카의 친구라고 들었다.”
피야리 몽키들은 여전히 득달같이 달려들고 있었다.
기사들은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놈들을 처리하느라 분주했다.
“이 약삭 빠른 놈들!”
“짐칸에 한마리 들어갔어!”
“내가 죽일게!”
그속에서 리안도 열심히 한몫 거드는 중이었다.
라그레아닐을 변형시킨 쇠망치를 들고 다니면서 괴물들의 머리를 퍽퍽 터뜨려댔다.
예상외로 잘 싸우는 그의 모습에 모니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싸움 실력이 대단하네?”
“이게 뭐라고. 그냥 두더지 게임 하듯이 잡는거야.”
“두더지 게임이 뭐야?”
“우리 고향에서 유명한 놀이 있어.”
“고향에서 농사 말고 다른 일도 했었어? 검술을 배웠다든지.”
“아니.”
“거짓말마.”
“진짜인데?”
리안은 재차 말했다.
“칼을 다룰줄 알면 칼을 썼겠지 누가 폼 안나게 망치를 써.”
그런 말을 하면서 오래전 오드리아와 함께 했던 맹훈련을 떠올렸다.
오드리아가 밭에다 괴물을 풀어놓으면 그는 그것을 잡기위해 단맛 쓴맛을 다 맛봤었다.
애써 가꾼 밭을 조금이라도 덜 망치게 하려고 악착같이 쫓아다녔던 조바심과 집중력이 지금의 뛰어난 운동신경을 만들었다.
여기에 더해 오드리아가 제 살을 깎아 몰래 먹인 덕분에 신체능력이 크게 향상된 것도 작용했다.
리안은 그런 사실을 꿈에도 몰랐지만.
“라일님이 저 사람 농사꾼이라고 하지 않았어? 왜 저리 잘싸워?”
“그러게. 싸우는 방식도 특이하네. 농사꾼스럽다고 해야할지.”
리안의 주변에서 싸우던 기사들은 저마다 리안을 볼때마다 신기하게 쳐다봤다.
그들이 보기에 리안의 싸움방식은 참으로 단순하면서도 기묘했다.
피야리 몽키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냥 쇠망치를 휘두르면 무조건 맞았다.
자신들처럼 놓쳐서 뒤쫓는 일은 전무했다.
그 광경을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지켜보던 라일도 감탄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었다.
“저번에 어둠의 영주 리스갈을 단숨에 죽이는걸 보고 느꼈지만 정말 신기한 사내야……”
좌우지간 기사들과 리안이 고군분투한 끝에 배고파서 미쳐날뛰던 피야리 몽키 이백여마리를 모조리 잡을 수 있었다.
“영혼불꽃 엄청 많네. 대박이다.”
리안은 남들 몰래 영혼보관함을 꺼냈다.
뚜껑을 열자 허공에 두둥실 떠다니고 있던 피야리 몽키의 영혼들이 쑤우욱 전부 빨려들어왔다.
리안은 미소지었다.
“조만간 라카제트를 만나야겠군.”
이후 스톤 쉴드 기사단은 빠르게 안전한 장소로 이동해 야영지를 세웠다.
“헉, 헉, 쓰러지겠다!”
괴물들과 싸우는 것도 모자라 야영지를 세우느라 기운이 다 빠진 기사들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저마다 숨을 고르기에 바빴다.
그러한 상황에 기사들의 보호 덕분에 힘이 넘치던 출장 요리사 울라프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는 다렌과 세이라를 향해 외쳤다.
“얘들아, 이제 우리의 시간이다!”
그는 즉시 자식들과 함께 야외 조리실을 설치했다.
그리고 그 앞에 기사들이 앉아서 먹을 수 있는 기다란 식탁과 의자도 가져다놨다.
“기사분들의 기운을 되살리는게 바로 우리가 할 일이다! 어서 재료 가져와!”
“예!”
“네!”
그들이 요리에 전념하는 사이, 평소 식재료에 관심이 많던 리안은 모니카와 함께 야외 조리실 앞을 기웃거렸다.
“오, 당신이군.”
울라프는 그를 발견하자마자 즉시 조리대 앞에 자리를 제공해줬다.
“여기 앉으시오. 내 아무리 바쁘더라도 당신만은 꼭 챙겨주리다.”
리안과 나란히 앉은 모니카가 싱글벙글 웃었다.
“딸 구해줬다고 서비스해주는거야?”
“암. 그게 인간의 도리지.”
모니카는 리안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 아저씨 누군줄 알아?”
“난 모르지.”
“놀라지마. 이 아저씨가 한창 잘나갈땐 황실 주방장도 했었어. 수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한 요리사야.”
“정말? 성함이……?”
도마를 쳐다보던 울라프의 눈길이 리안에게 향했다.
“내 이름은 울라프요. 당신은?”
“리안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리안. 리안 씨구만. 아까는 고마웠소.”
“별말씀을요.”
“그쪽이 아니었으면 난 지금쯤 식칼 대신 다른걸 안고 있었을지도 모르오. 정말 감사하오.”
“아버지, 여기 닭 가져왔어요.”
세이라가 방금 막 털을 뽑은 생닭을 들고 나타났다.
그녀는 울라프에게 생닭을 건네주며 리안을 힐끔 바라보고는 이내 수줍어하며 긴 갈색 머리를 귀뒤로 쓸어넘겼다.
“아까는 감사했어요.”
“아뇨, 해야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
리안은 목소리를 내려깔며 멋지게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헤벌쭉 거렸다.
“호, 혹시 저도 뭔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잠자코 지켜보던 모니카는 장난기가 발동했다.
“야, 이 사람 내 남편이야. 꼬리치지마.”
“예?!”
“뭐?”
리안은 황당한 나머지 웃음을 터뜨렸다.
“그,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죄, 죄송합니다!”
세이라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며 도망치듯 사라졌다.
“남자를 한번도 못 만나봐서 숫기가 없습니다.”
울라프는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며 생닭을 도마 위에 올렸다.
네모난 식칼을 들고 거침없이 토막내기 시작했다.
탁!
탁! 탁!
칼을 내려칠때마다 닭의 몸통이 깔끔하게 잘려나갔다.
탁!
탁탁, 탁!
생닭을 순식간에 8등분을 내버리자 그때까지 이동식 화덕에서 불을 지피고 있던 아들 다렌이 기다렸다는듯이 철판을 들고 나타났다.
“불 어떠냐?”
“화력이 좋아요. 주세요.”
“잘했다.”
울라프는 토막낸 생닭을 닭머리까지 철판에 담은 뒤 그 자리에서 암염을 갈았다.
암염 가루를 적당히 뿌리고 다렌에게 건네줬다.
“닭머리는 안빼요?”
벌써부터 군침을 흘리던 리안이 침을 꿀꺽 삼키며 묻자 울라프가 갸우뚱하며 쳐다본다.
“머리가 젤 맛있는 부위인데 안먹게?”
“닭머리도 먹어요?”
모니카가 끼어들었다.
“닭머리가 얼마나 맛있는데. 한번 먹어봐.”
다렌은 이동식 화덕 앞으로 가서 닭고기를 바삭하게 구워냈다.
잠시 후 그가 돌아와서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닭고기를 건네주자 울라프는 그 위에 매콤한 냄새가 나는 빨간 소스를 뿌리고 치즈가루를 곁들였다.
“다 됐습니다.”
울라프는 접시에 담긴 닭고기를 리안과 모니카 사이에 내려놓았다.
“닭은 2인당 한마리씩이니 양이 부족해도 이해해주시오.”
“와 맛있겠다!”
모니카는 닭다리부터 집어들었다.
야외라 그런지 나이프나 포크 같은건 따로 준비되지 않았기에 리안도 손으로 남은 닭다리 한쪽을 집어들고 곁들어진 소스를 듬뿍 발랐다.
입에 넣기전 잠시 향기를 맡아보니 군침이 꿀꺽 넘어가는 제대로된 불향기가 가득했다.
그대로 한입 깨물었다.
씹는 순간 바삭한 닭껍질의 느낌과 부드럽고 촉촉한 식감을 자랑하는 고기에서 육즙이 터져나왔다.
리안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며 감탄사를 외쳤다.
“맛있어……!”
고기가 마치 혀 위에서 녹는 것 같았다.
“입맛에 맞소?”
“죽이는데요?”
엄지를 추켜세우며 그렇게 말하자 울라프가 흐뭇하게 웃는다.
리안은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준 그가 존경스러웠다.
“말씀 편하게 해주십시오. 그게 좋습니다.”
“그러지.”
옆에 앉은 모니카도 구운 닭고기를 음미하며 행복하다는 감탄사를 연발해댔다.
뜨거운 고기를 호호 불어가며 그녀와 정신없이 먹고 있는데, 세이라가 또 모습을 드러내더니 수줍은 얼굴로 샐러드 접시를 내밀었다.
“고, 고기만 드시면 느끼하실까봐 만들어봤어요.”
귀까지 새빨개진 얼굴로 그 말만 남겨놓고 그녀는 쏙 사라져버렸다.
모니카는 질투인지 뭔지 모를 장난기가 발동해 샐러드 접시를 구석으로 밀어넣었다.
“안신선해보이는데 이건 먹지 말자.”
그녀가 시치미를 뚝 떼며 방긋 웃는다.
“알았지?”
하지만 리안은 샐러드 접시를 직접 손으로 옮겨서 자기 앞으로 가져다놨다.
아무리 고기가 맛있어도 고기만 먹을 수는 없는 노릇.
지구에 있을때 고기와 채소를 같이 먹는 식습관을 길러왔기에 리안은 꼭 샐러드가 먹고 싶었다.
그때 울라프가 툭 한마디 뱉었다.
“어라 쟤 봐라. 귀한 채소를 줬네?”
“귀한 채소요? 이게?”
모니카가 묻자 울라프가 곧바로 대답했다.
“중요한 손님이 방문할때만 쓰려고 준비한 상추야.”
“내 눈에는 평범한 상추로만 보이는데?”
모니카와 달리 리안은 별다른 말없이 재빨리 손으로 집어 먹어보았다.
사각사각 씹히는 상추.
새콤한 소스 덕분에 기름의 느끼함을 잡아주며 시원한 느낌이 났다.
“음……”
맛을 잠시 음미하던 그가 말했다.
“이거 그건가 보네요. 마나로 상추 맞죠?”
“오오.”
울라프가 깜짝 놀란다.
“어떻게 알았나?”
“맛을 보니 금방 알겠던데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걸 맞추다니 대단하구만.”
“마나로 상추가 뭔데?”
모니카의 물음에 리안은 재차 샐러드를 집어먹으며 대답했다.
“마나로 상추는 웨르타뉴 제국에서는 보기 힘든 채소야. 이곳과 기후가 다른 지역인 베른 왕국, 또와트리체 왕국, 바실리 왕국쪽에서 많이 재배되는 편인데, 일반 상추와 달리 엽육이 두껍고 아삭하면서 쓴맛이 적고 씹을수록 상큼한 맛도 난다고 할까?”
“정답일세!”
이번에는 울라프가 엄지를 추켜세웠다.
“혹시 베른이나 또와트리체, 아니면 바실리에서 살다온건가?”
“아뇨.”
“그럼 어찌 그리 잘 아는겐가?”
리안은 자신있게 대답했다.
“농사로 먹고 살려면 이 정도야 기본이죠. 황도로 농사지으러 갑니다.”
“오호라 농사라. 나는 황도에서 식당을 운영하네. 잘하면 자주 보겠구만?”
“잘하면이 아니라 자주 봐야죠. 어떻게 만난 인연인데. 식당하시면 제 채소 좀 사가세요.”
“와하하하!”
재밌는 친구라며 울라프가 웃음을 터뜨렸다.
=============================※ 조아라에 게시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에 의거 보호받고 있습니다 ※※ 저작권자의 승인 없이 작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복제, 전송, 배포 및 기타의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손해배상 청구를 포함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됩니다.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작품후기]낼 30화네요!
30회
*경고* 지금 보고 계신 화면은, 조아라에서 지원하는 정상적인 경로의 뷰어가 아닙니다.해당 방식으로 조아라에서 제공하는 작품을 무단으로 추출하는 것에 사용하거나 협조할 경우, 저작권법에 위배되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되실 수 있으니,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작품감상을 부탁드립니다.(5년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 부과)----------------------------------------밭농사 준비, 농지 구매의 시간모니카도 이때다 싶어 거들었다.
“우리랑 거래해요. 여기 리안 씨가 농사 전문가야. 어떤 채소 필요해? 원하는대로 납품해줄게. 키우는데 시일이 좀 걸리겠지만.”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리안과 모니카는 동시에 대답했다.
“진심입니다.”
“우린 진심인데?”
“흐음.”
울라프는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턱을 어루만졌다.
그가 여태껏 요리사로써 쌓아온 명성이 있기에 제 아무리 딸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라 할지라도 무턱대고 거래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루 아침에 모든게 무너질 수 있기에 이는 감성으로 판단할 일이 아니었다.
“채소를 키워야 한다고?”
“네.”
“응.”
“그러면 나중에 채소 상태를 보고 판단하지. 아스파라거스라든지 상추, 콩, 양갓냉이, 순무를 자주 써. 이 중 뭐든 좋다네.”
“좋습니다.”
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물었다.
“근데 기사단 전속 요리사가 아니신데 어쩌다 여기까지 오신겁니까?”
울라프는 한숨을 내쉬며 먼 하늘을 쳐다봤다.
날이 어두워지는 중이었다.
“나라가 위험에 처했는데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있어야지. 조금이나마 힘이 될까 싶어 무작정 자식들 데리고 전장으로 나온거야. 짧다면 짧겠지만 딱 1년 생활했네. 황도에 도착하면 스톤 쉴드 기사단과의 계약이 끝나니 그때부턴 식당 일에만 전념할 생각이야. 시간나면 한 번 놀러와. 우리 딸의 생명을 구해준 보답으로 한턱 쏘지.”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금부터 울라프는 백명에 달하는 기사단원들의 음식을 만들어야하느라 무척 바쁜 사람이었다.
계속 붙잡고 있으면 민폐다.
리안과 모니카는 식사를 마친뒤 그가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자리를 떠났다.
“아스파라거스가 당기는데 한번 심어볼까나……”
아스파라거스는 지구에서도 인기 있는 채소였기에 ‘채소의 왕’이라 불리게한 그 효능만 제대로 광고하면 대박이 나지 않을까?
가장 큰 문제는 아스파라거스의 종자가 현재 자신의 손에 없다는 것.
더구나 이곳에서는 어떤 평가를 받는지 모르겠지만, 만약 귀족이나 먹는 고급 채소 대우를 받고 있다면 종자가 비쌀지도 모른다.
즉 지금 형편에 대량 구매가 어렵다는 소리.
“돈이 없어 돈이. 싼놈부터 시작해야하나……”
그렇게 리안은 울라프에게 팔 채소를 고민하면서 짐마차로 향하던 중이었다.
나란히 걷던 모니카가 갑자기 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발걸음을 멈췄다.
“리안, 나 이상해.”
“어디가?”
무언가 꺼림칙한듯 그녀의 표정이 안좋아보였다.
“가슴에서 또 모유가 나오기 시작했어.”
“갑자기?”
“계속 줄줄 흐르네. 어쩌지?”
모니카의 눈빛이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녀는 진심으로 도움의 손길을 원했다.
유방에 젖이 꽉 차 있어 지금 많이 불편했고, 혼자서 해결하기에는 이곳은 야외고 누군가의 도움없이는 적당한 장소를 찾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자신의 상황을 매우 잘 아는 리안을 찾을 수 밖에.
아파서 불안한 그녀는 지금 이 순간 리안에게 의지하고 싶었다.
“도와줄거지?”
모니카가 애원하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 눈빛에 불안한 감정이 엿보였다.
리안은 솔직히 내키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모른척 할 수는 없는 노릇.
그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하며 손가락을 풀었다.
“사람들이 밥 먹고 있을때 빨리가서 빼고 오자.”
그녀는 안도하며 환하게 웃었다.
“좋은 곳이 있을까?”
“찾아봐야지. 따라와.”
두 사람은 짐마차에서 수건을 하나 챙긴뒤 야영지를 벗어나 숲속으로 들어갔다.
어느새 날이 저물어 환한 달빛이 스며드는 어두운 숲속.
주변에 손과 몸을 씻을 만한 개울이라도 있었으면 했으나 물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아쉬운대로 적당한 장소를 골라 자리를 잡았다.
“누워서 하려고 했는데 누워서하면 모유를 온몸에 뒤집어 쓸 것 같아. 사정상 씻기가 불편하니까 서서하는게 좋겠어.”
“편한대로 해.”
리안은 의자로 삼을만한 바위를 찾아 그곳에 걸터앉았다.
위치가 높아서 서 있는 모니카를 살짝 내려다보는 높이였다.
다리를 쩍벌남처럼 양옆으로 벌렸다.
“나한테 가까이 와.”
“응.”
모니카는 정면을 보고 선 채로 뒤에서 다리를 벌리고 있는 리안의 몸에 바짝 몸을 붙였다.
리안은 망설임없이 그녀의 드레스 치마를 붙잡고 돌돌 말아 걷어 올리며 머리 위로 벗겼다.
은은한 달빛 아래 가슴에 흰 붕대를 칭칭 감은 그녀의 상체와 큼지막한 느낌이 드는 엉덩이가 드러났다.
건강미 넘치는 갈색 피부에 허리가 잘록하고 아름다웠다.
엉덩이에는 속바지와 비슷한 헐렁하고 얇은 속옷을 입고 있어서 아기 기저귀 같기도 하고 섹시미가 좀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허리에서 엉덩이까지 이어지는 아름다운 굴곡은 리안의 가슴을 설레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모니카도 여자긴 여자구나……’
처음에는 건전한 생각으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막상 벗기고 보니 조금 흥분은 됐다.
리안은 애써 관심을 끊으며 등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붕대를 풀려고 손을 대는 순간 축축한 감촉이 전해져 왔다.
“많이 젖었네.”
“하루 종일 이러고 다녔어. 얼마나 불편한지 몰라.”
“양팔 들어봐.”
“이렇게?”
“응.”
모니카는 시키는대로 양팔을 좌우로 펼쳤다.
붕대를 풀면서 부드러운 가슴의 살결이 자주 닿았다.
리안은 붕대를 다 풀고나서 깔끔하게 접은뒤 마른 수건 옆에 내려놓았다.
모니카의 뒤태를 잠시 바라보았다.
이어 어깨로 시선을 향했다.
“주무를게.”
“응.”
모니카는 바위에 걸터앉은 리안의 다리사이에 들어와 앞만 바라보고 서 있어서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볼 수 없었다.
리안도 그걸 알기에 행동 하나하나마다 그녀에게 먼저 말해주고 시작했다.
“날갯죽지.”
역삼각형 모양으로 툭 튀어나온 뼈 주위를 동그랗게 원을 그리듯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리안은 마사지 전문가는 아니지만 가슴이 무거우면 견갑골이 아프지 않을까 예상이 되었기에 우선 견갑골 위주로 공략을 해나갔다.
로션이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없으면 없는대로 최선을 다하는 수 밖에 없다.
리안은 진지했다.
육감적인 성인 여성의 몸을 만지면서 불순한 생각은 전혀들지 않았다.
“아……”
마사지를 해주니 몸이 나른한지 모니카는 그새 기분 좋은 한숨을 토해냈다.
“시원해?”
“응, 시원해.”
리안은 살포시 웃으면서 그녀의 겨드랑이 밑으로 손을 넣었다.
유방의 밑둥이 닿을듯 말듯 약간 앞으로 손을 뻗어 옆구리 부분을 강하게 주무르자 그 간지러움에 그녀의 몸이 살짝 반응했다.
“으응……”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이번 신음은 조금 야릇하게 들려왔다.
쾌감이 조금씩 차오르며 점점 민감해지고 있는 것일까.
리안은 속으로 생각했다.
‘의식하지 말자. 오직 마사지만 생각해.’
리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더욱 과감하게 손을 움직였다.
등에 이어 어깨.
뭉쳤던 근육이 풀어지는 시원함이 끊임없이 밀려오자 모니카의 신음은 더욱 잦아졌다.
“하응…… 으음……”
모니카는 그의 손길을 음미하며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현재 기분 상태가 어떠냐면, 자신에게 편안함과 쾌감을 동시에 선사해주는 리안이 너무 사랑스러운 나머지 연인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성과 본능 사이를 오락가락할만큼 많이 고양되어 있던 탓일까.
아무 말이나 쉽게 흘러나왔다.
“사랑해 자기.”
“내 자기는 다른 곳에 있어. 되도 않는 고백하지마.”
“고백이 아니라 칭찬하는거야. 마사지 잘한다고.”
“그럴거면 돈으로 줘.”
리안의 말에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리안은 연신 들썩이는 어깨를 꾹꾹 주물러주며 말했다.
“이제 가슴이다.”
“드디어 내 가슴을 만지는거야? 다 큰 처녀 가슴도 주무르고 좋으시겠네.”
“아무 느낌 없으니까 오해마.”
“영광이라는 생각은 안해?”
“팔만 아플 뿐이야.”
“피. 매정하긴.”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젖을 빼줄 차례가 왔다.
기사단원들이 저녁식사를 마치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혹시나 식후 산책한답시고 이곳에 나타나면 안되니까.
처음에는 지금까지 해온 것들을 복습하듯이 그녀의 옆구리에서 등뼈를 가볍게 주무르고 이어 양어깨와 뒷목을 꾹꾹 눌러주었다.
그 다음 양겨드랑이 밑을 통해 자연스레 앞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어떠한 예고도 없이 양가슴을 살며시 움켜쥐었다.
“흐응……”
모니카의 입술에서 녹아내리는듯한 신음이 나지막이 흘러나왔다.
손바닥의 온기가 부풀어 오른 유두를 감싸자 그 민감한 자극에 뇌속까지 쾌감이 전해졌을 것이다.
유방은 손으로 전부 움켜쥘 수 없을만큼 컸다.
모유로 흠뻑 젖은 살결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움과 동시에 미끌거렸고 퉁퉁 부어오른 유륜과 유두는 단단한 감촉을 주면서 모니카라는 한 여자의 중요한 신체 부위라는 생각이 미치자 리안은 묘한 정복감과 함께 흥분을 느꼈다.
그래서 일까.
바지속이 꿈틀 거리며 부풀어오르려는 징조가 보였다.
사실 모니카의 몸을 만졌을때부터 그의 건강한 신체는 반응이 오기 시작했었다.
여태껏 이성으로 짓누르고 있었을 뿐이지.
리안은 입맛을 다시며 침을 꿀꺽 삼켰다.
‘건전한 생각. 건전한 생각.’
마사지 전문가가 아니라서 그런지 여자의 가슴을 만진 것만으로도 온갖 망상이 밀려들어왔다.
리안은 평온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 힘을 썼다.
‘최고의 마사지 전문가가 되려면 이겨내야 해……! 발정난 개 마냥 회원이란 회원은 다 건들고 다니는 변태 마사지사는 필요없다고!’
속으로 헛소리를 떠들어대가며 그는 점차 이성을 되찾아갔다.
“왜 가만히 쥐고만 있어? 안해?”
“아, 할거야.”
“당신 방금 이상한 생각했지?”
그녀가 키득 거린다.
리안은 코웃음을 쳤다.
“웃기지마. 잠시 팔 아파서 쉰것 뿐이야.”
그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가슴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조금전 모니카의 웃음 소리가 살짝 괘씸한 느낌도 들었기에 리안의 손길은 거침없었다.
그녀를 애태우고 싶었다.
더욱이 등이나 어깨를 주무를때보다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듯이 마사지 하는 자세가 편했기에, 리안의 손길은 움직임이 시원시원해지고 힘이 넘쳐 흘렀다.
“으응……”
리안의 커다란 손바닥은 모유로 번들거리는 유방을 마구 주무르고 일그러트렸다.
본격적으로 모유를 쥐어짜기 전의 예열 작업이라고나 할까.
저 밑바닥에 가라앉은 모유까지 모조리 빼내기 위해 기를 모으듯 시간을 들여 가슴을 마사지했다.
아울러 민감한 부위를 캐어해주는 만큼 모니카의 입에서는 신음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말은 없었지만 스스로 수줍은지 최대한 억누르려는 기색이 있었다.
“아아…… 흐으응……”
유방이 출렁일때마다 단단해진 유두에서는 모유가 줄기차게 흘러나왔고 리안은 그 모유를 손바닥으로 주워담아 가슴에 펴바르듯 문질렀다.
로션 대신 쓰기에 효과만점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유방을 주물러주다보니 덩달아 모니카까지 한껏 달아오른 모양이다.
여느때보다 크게 부풀어오른 유륜과 유두를 만지고 비비며 희롱하는 와중에 갑자기 그녀가 몸을 움찔하며 리안의 손목을 붙잡았다.
동시에 리안도 동작을 멈췄다.
“왜?”
“아, 아니…… 계속해.”
어색한 미소를 지은 그녀는 손목을 놔주며 다시금 허리를 곧게 폈다.리안은 속으로 그만 끝내야할때라고 생각했다.
시간은 충분히 가졌고, 이제부터 그간 쌓아둔 것들을 힘껏 방출할때다.
사실 리안도 한계였다.
그의 아랫도리는 어느새 민망스러울 정도로 분기충천하여 바지를 찢어버릴듯이 하늘에 삿대질을 해대고 있었다.
모니카가 정면을 바라보고 있어서 참으로 다행스러웠다.
리안은 모니카의 뒷목덜미에 대고 각오를 다지듯 말했다.
“이제 마지막이야. 준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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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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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됐어.”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리안의 손이 양겨드랑이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와 모니카의 양가슴을 움켜쥐었다.
“으응……”
이미 달아오를대로 달아오른 유두는 매우 민감했다.
리안이 쥐어짜자 두 가닥의 우윳빛 물줄기가 허공으로 솟구쳐 나갔다.
“히읏……”
모니카는 급히 지탱할 것을 찾으며 리안의 양무릎을 붙잡았다.
엉거주춤 자세로 계속 모유를 내뿜었다.
“기, 기분이 이상해…… 흐읏……!”
“아픈게 나으려고 그러는 거야.”
리안은 모유의 물줄기가 갈수록 약해지자 손에 힘을 풀었다.
유방을 유두쪽으로 쓸듯이 마사지하며 체내의 모유를 끌어모았다.
다시 한 번 강하게 그러쥐자 모유가 정면을 향해 힘차게 발사됐다.
유방을 비틀고 쥐어짜며 물줄기가 약해질때까지 계속해서 뽑아냈다.
“흐읏……! 미, 미치겠네……!”
“힘들면 말해.”
“아, 아니……! 신기하게 기분이 조, 좋아서, 으읏……!”
몸서리를 치며 골반을 이리저리 비틀어대던 모니카는 서있기조차 버거운지 리안의 하체에 아예 엉덩이를 갖다붙이며 반쯤 앉아버렸다.
앉아서 엉덩이를 비비는데 리안은 쾌감과 통증을 동시에 느꼈다.
일찍이 발기해 있던 그의 물건은 엉덩이에 짓눌리는 자극 때문에 더욱 성을 냈다.
그럼에도 리안은 아랑곳 하지 않고 오로지 모유를 짜내는데만 열중했다.
힘차게 뻗어나가는 물줄기처럼 모니카의 신음도 시간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하으응……!”
엉덩이를 들썩이고, 발가락을 꼼지락 대고, 머리를 흔들어 대고, 이윽고 메마른 대지에 폭우가 쏟아진 것처럼 바닥이 흥건히 젖었을 즈음 마침내 모유는 더이상 나오지 않았다.
말라버린 샘에서는 방울만 뚝뚝 떨어졌다.
할일을 끝마친 리안은 수건으로 조심스레 유두를 닦아주었다.
유두에 이어 가슴 전체를 닦아주고 자신의 두 팔도 닦았다.
팔 전체가 끈적거리는건 둘째치고 비린내가 진동했다.
모니카는 지친 사람처럼 고개를 떨군 채 가쁜 숨을 골랐다.
온몸에 열이 올라 몸이 뜨거웠다.
그녀는 곧 실성한 사람처럼 웃어댔다.
“죽는줄 알았어. 진짜 미쳐버릴뻔했다니까. 큭큭.”
“그래도 빼니까 후련하지?”
“응, 한결 나아졌어. 몸이 몹시 가벼워.”
그녀는 꽤나 좋았나 보다.
다음에도 또 부탁한다는 말을 거리낌없이 해왔다.
그에 리안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나았으면 좋겠다.”
“고마워.”
리안은 여전히 하반신에 앉아있는 그녀를 가볍게 밀쳤다.
“나와봐. 옷 입어야지.”
하지만 모니카가 일어설 생각을 안했다.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더니 뒤를 돌아보며 그를 쳐다봤다.
그녀의 표정이 왠지 모르게 진지했다.
“이대로 갈거야?”
“또 뭐 할거있어?”
모니카는 서슴없이 손을 뻗었다.
부풀어오른 바지 앞섶을 매만졌다.
“이건 뭔데?”
그녀가 짓궂게 웃었다.
“왜 꼴렸는데?”
리안은 담담이 대꾸했다.
“나도 지금 알았네?”
“웃기지마, 내 가슴 만지니까 좋았지?”
“그냥 그랬어.”
“솔직히 말해. 만지니까 기분 좋았잖아 거짓말쟁이.”
“빨리 비켜.”
“우리 솔직해지자구. 너 빼고 싶지? 난 여기서 더 이어가고 싶어.”
“……!”
리안은 뜸을 들이다 나직이 대꾸했다.
“…나 고향에 애인있다고 말했잖아.”
“아, 철벽을 치시겠다?”
모니카는 손가락으로 바지끝을 집요하게 자극했다.
그러면서 귓가에 요염하게 속삭여왔다.
“나만 조용하면 되는 거잖아. 그리고 그 애인 여기서 아주 먼 곳에 있어서 오기도 힘들다며.”
리안은 짓궂은 장난을 치는 그녀를 냅다 들어올릴 수가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몇 달 전 마을 축제때 처음으로 낯선 여자와 사랑을 나누며 여자에 대해 이제 막 알아가고 있던 그는 그때의 쾌감을 또 한번 맛보고 싶은 유혹을 떨쳐내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리안은 혈기왕성한 남자였다.
모니카의 젖을 짜주느라 치솟은 욕정은 그를 현상황에 계속 미련을 두게 만들었다.
“걔는 너를 좋아하긴 해?”
그 순간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들며 오드리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곳에 인간 여자가 없으니 떠나도 좋아. 너도 이제 결혼할 나이가 되었잖니.’
리안은 수백, 수천번 고민해보았지만 아직도 오드리아의 뜻을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저 말을 들었던 당시의 구체적인 감정은 희미해지고 말의 의미는 더욱 모호해졌다.
지금에 와서는 마왕으로부터 자신을 구해주기 위해 했던 말인지 아니면 진심이 섞였던 말인지 분간이 안갔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에게 있어 그녀는 우러러 봐야할 위대한 존재라는 것.
수백년을 사는 존재와 맺어진다는건 정말 꿈만 같은 일이다.
일개 인간 주제에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소리.
따라서……
분수에 맞게……
리안은 모니카를 덥썩 끌어안으며 입술을 포갰다.
애무는 필요없었다.
오랜시간 시뻘겋게 분노하고 있던 불덩어리가 마침내 해방구를 찾으며 모니카의 몸안 깊숙이 파고들었다.
모니카는 한치의 모자람 없이 바싹 죄어드는 환희에 몸을 떨었다.
“흐읏……! 너, 너무 굵잖아……! 흐으으, 아앙……!”
리안은 크게 부풀어오른 유두을 한껏 빨아재끼면서 하나가 된 그녀의 구멍을 향해 불기둥을 쉴 새없이 처박아댔다.
젖줄이 메마른게 못내 아쉬웠지만 모니카의 농염한 육체와 기막힌 맛을 자랑하는 다리 사이는 그를 폭군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하앙……! 하아아앙!”
모니카는 바위에 걸터앉은 리안과 마주보고 앉은 채 엉덩이를 들썩이며 마구 울었다.
그렇게 서로의 육체에 흠뻑 빠진 두 사람은 혼신을 다해 사랑을 나누다가 어느 순간 둘이 동시에 몸을 떨었다.
“아……!”
“헉, 헉.”
잠시 경직됐던 두 사람의 몸에 힘이 빠진 직후, 모니카의 허벅지 안쪽에서 희고 비릿한 액체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 * *
활활 치솟았던 불길을 끄고 기사단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길.
모니카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어딘가 즐거워 보였고 리안은 현자가 되어 있었다.
“우린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염려마. 나도 6년뒤에 떠날 사람이랑 사귄다는 소문 나기 싫어. 그리고 동업자끼리 추문나는 것도 제일 꼴보기 싫더라. 일하려고 만났으면 일만해야지. 안그래?”
모니카가 곧바로 장난스럽게 웃어보였다.
“그냥 여기서 살지 않을래?”
리안은 가당치도 않다는듯이 대꾸했다.
“난 돌아가야 해. 애인은 둘째치고 고향에 남겨두고온 재산도 엄청 많아. 그 돈으로 왕국도 살 수 있다고.”
“정말?”
리안은 웃으며 금세 말을 바꿨다.
“농담.”
야영지에 도착한 두 사람은 짐마차 근처에 돗자리를 펼쳤다.
아직 초저녁이지만 빠듯한 일정 때문에 내일을 위한 달콤한 잠을 청해야했다.
주위 기사단원들도 불침번을 제외하고 벌써부터 곯아떨어진 사람이 많았다.
모니카는 잠들기 전 리안이 지켜보는 가운데 슬쩍 가슴을 까고 향단이에게 젖 세 방울을 먹였다.
“너네 아빠가 다 먹어서 없어.”
리안이 즉시 억울하다는듯이 대꾸했다.
“나도 없어서 못 먹었어.”
맛있게 냠냠 거리며 모유를 핥아먹던 향단이는 금세 입술을 떼고 잠이 들었다.
아기라서 그런지 현재까지는 잠이 많았다.
모니카는 옷매무새를 단정히하고 잠자리에 반듯하게 누웠다.
“아, 피곤하다…… 그런데 기분은 좋아.”
그녀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씩 웃었다.
리안은 작은 상자에 담긴 향단이를 마차의 짐칸에 놔두고 왔다.
그리고 곧장 모포를 덮고 그녀와 나란히 누웠다.
“잘자.”
“당신도 잘자. 오늘 즐거웠어.”
그녀가 쿡쿡 웃는다.
리안은 등을 돌리고 누운 채 가볍게 대꾸했다.
“잊어.”
“어떻게 잊겠니.”
웃으며 계속 장난을 쳤다.
리안은 귀찮다는듯 한숨을 내쉬었다.
“마사지 받고 싶으면 잊어.”
“그럼 잊을 수 밖에 없겠네. 잘자.”
그녀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침묵했다.
얼마뒤 새근새근.
풀벌레 소리와 함께 규칙적인 모니카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때까지 안자려 발악을 하고 있던 리안은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모니카의 얼굴에 대고 손바닥을 흔들었다.
전혀 모른다.
깊이 잠든 모양이다.
안심한 리안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니카의 모포를 잘 덮어준뒤 홀로 야영지 밖으로 향했다.
도중에 불침번과 마주쳤지만 적당한 핑계를 대고 무난히 빠져나왔다.
그는 곧장 모니카와 정사를 나누었던 장소로 향했다.
한 손에는 영혼보관함을 쥐고 있었다.
라카제트!
리안의 머릿속에는 라카제트에게 물건을 살 기대감에 꽉 차 있었다.
어둠의 영주 리스갈의 영혼, 대지의 큰 지렁이 무무카르의 영혼, 피야리 몽키 이백여마리의 영혼까지.
나름 영혼을 많이 모았다고 생각한 리안의 발걸음은 빨라졌다.
‘녀석이 뭘 준비했을까.’
라카제트와 만나기 위해선 남녀가 뜨거운 사랑을 불태운 곳, 오직 그곳뿐!
그렇게 부푼 기대를 안고 아직 모유가 마르지 않은 바위가 있는 곳에 바람처럼 도착했다.
‘누구 없겠지?’
우두커니 서서 주위를 둘러본 그는 붉은 보석 반지를 손가락에 끼웠다.
그리고 속으로 라카제트의 이름을 외치려는 순간……
“익숙한 모유 냄새에 이끌려 와봤더니 행운이네요. 당신을 발견할 줄이야.”
낯선 여자의 목소리였다. 리안은 황급히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봤다.
“스톤 쉴드 기사단과 부딪힐 일이 없어져서 다행이에요.”
노란빛의 눈동자가 어둠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여자는 달빛이 비치는 밝은 쪽으로 걸어나왔다.
“혹시 절 기억하시나요?”
“……?”
리안은 가까이 다가온 그녀를 유심히 쳐다봤다.
가슴골과 배꼽, 매끄러운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는 노출이 심한 검정색 가죽옷.
누가 봐도 ‘쟤 서큐버스다!’ 라고 할만한 마족이 눈앞에 서 있었다.
박쥐 같은 날개와 하트 모양의 꼬리까지.
저게 서큐버스가 아니면 무엇이랴.
그리고 기억?
기억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그녀는 이미 며칠전부터 리안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란테스성에서 당근을 팔때였다.
당시 저 여자는 인간인듯 굴었으나 리안의 눈에는 지금의 서큐버스 모습 그대로 비쳐졌었다.
“저기…… 당근 하나 주시겠어요?”
“오, 당근 당근! 1개씩은 안팔고 3kg에 3실버 되겠습니다! 죄송하지만 포장지가 없어서 그냥 들고 가셔야 합니다. 사시겠어요?”
“물론이죠. 가슴에 안고 갈게요.”
“여깄습니다!”
그때 무척 신기했으나 말을 걸지 못했던 이유는 장사가 너무 잘돼 바빠서 지나쳤을뿐.
자신에게 피해를 준것도 없기에 당근만 팔고 넘어갔었다.
길거리에서 흔하게 지나치는 사람들처럼 아무 의미 없이 만나고 의미 없이 헤어지며 자신의 인생과 영영 상관없을줄 알았던 그녀가 도대체 왜 나타났을까?
설마 양기를 뽑아먹으려고?
“기억 안나.”
리안은 우선 방어적으로 나갔다.
너 그때 봤다느니 하면서 이러쿵 저러쿵 떠벌리고 싶지 않았다.
“그건 아쉽네요.”
“나한테 용무가 있나?”
“네. 중요한 용무가 있습니다.”
그녀가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입술에 뭐라도 바른 것처럼 붉고 윤기가 흘렀다.
“소개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저는 제국 백성 천만명을 구원하신 위대한 리사 아스트리드 백작님을 섬기는 충실한 종 에밀리 라이트블렛 입니다.”
서큐버스는 정중히 예를 갖추며 허리를 숙였다.
대접을 해주려는 것을 보니 잡아먹을 의도는 없다는 건가?
“리안님, 저와 같이 가주셨으면 하는 곳이 있습니다.”
“당신의 주인한테 가자는건가?”
“그렇습니다.”
밝게 웃는 그녀의 모습에 일절 적의는 보이지 않는다.
“백작님께서 무슨 연유로 나를 보자고 하시는거지?”
“얼마전 리안님께서 재배한 당근을 맛보시고는 그 매력에 흠뻑 빠지셨답니다.”
에밀리는 자기 일처럼 기쁜 얼굴로 덧붙였다.
“후원해드릴려고요.”
“후원?”
미처 생각지도 못한 단어가 나와서 놀랐다.
“얼마나?”
“리안님이 깜짝 놀라실 금액이 아닐까요? 자세한건 직접 만나보면 알게 되실겁니다. 바로 요 근처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근처에 있다고?”
“스톤 쉴드 기사단의 야영지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저희도 야영중이거든요.”
후원이란 소리에 귀가 솔깃한건 사실이다.
솔직히 오천평의 땅은 생겼으나 작물의 씨앗 대량 구매, 밭을 관리할 노동력 및 관개수로 등의 시설 설치, 각종 장비 같은 것을 구매하려면 자본금이 필요했다.
‘가까우면 한 번 만나나 볼까……?’
에밀리는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듯 웃으며 말했다.
“두 분이서 편히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저를 믿고 따라와주세요. 부탁입니다.”
리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곰곰이 고민하다 고개를 들고 제안을 했다.
“당신들의 야영지에 들어가지 않고 단 둘이 야외에서 만나겠다. 가능한가?”
백작이라니 직접 만났을때 위압감도 있을테고 만약을 대비해 도망갈 구멍을 만들었다.
“물론입니다.”
저쪽은 개의치 않는지 무척 시원한 대답이 나왔다.
좋다.
어디 얘기나 들어보자.
결국 리안은 에밀리를 따라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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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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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바람이 부는 들판.
저 멀리 야영지의 불빛이 보인다.
그곳을 등지고 귀족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걸어왔다.
‘와……’
그녀와 처음 마주섰을때 오드리아와 견줄 정도로 아름답다는 첫 인상을 받았다.
서로 다른 매력이 있었다.
오드리아는 고양이상이라면 이 여자는 강아지상 얼굴이었다.
“네가 김리안이야?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생겼네.”
하지만 아름다운 금발을 가진 그녀와의 대화는 시작부터 불길했다.
너무 예의가 없어 보였으니까.
뭐, 귀족이니까 아랫사람을 깔보는 시선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생각하고 일단 넘어갔다.
“리안이라고 불러주십시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김리안이든 리안이든 난 너한테 관심 없어. 허나 네가 재배한 당근에는 관심이 있지.”
좆같네.
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하자.
리안은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서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백작이라지만 아랫사람을 대하는 기본적인 예의조차 없잖아.
리안은 일부러 강조했다.
“제가 ‘제 실력으로’ 재배한 당근입니다.”
“너를 인정해 달라고?”
제법 눈치는 빠르네.
그녀는 도도하고 차가운 눈동자로 리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다 같잖다는듯이 코웃음을 쳤다.
“그래, 네가 네 실력으로 재배한 당근. 얼마에 먹을 수 있어?”
“이제 못 먹습니다. 다 팔아서 남은게 없거든요.”
“말장난 하지마. 없으면 다시 키우면 돼.”
리안은 확신했다.
이 사람은 나랑 안맞는다는 걸.
상성이 안맞는 사람은 몇 마디 대화해보면 금방안다.
이 여자랑은 평생 같이 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리안은 단호히 선언했다.
“어차피 인간은 돈이 전부잖아. 그러다 시체가 되고.”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내밀었다.
“읽어봐.”
리안이 종이를 잡으려 하자 휙 하고 뒤로 숨겼다.
“대신 읽어줄까?”
“글 읽을줄 압니다.”
“그래? 노예는 글을 알아봤자 골치만 아픈데.”
리사는 다시 종이를 건넸다.
리안은 손을 내밀어 잡기전 그녀의 눈을 한 번 쳐다봤다.
그러자 그녀가 싱긋 눈웃음을 짓는다.
“의심이 많구나? 빨리 받아.”
리안은 종이를 받아들고 내용을 확인했다.
제목부터 어이가 없었다.
-노예 계약서
같은 시각.
에밀리와 케스티리아가 멀리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잘 하고 계시겠죠?”
에밀리는 왠지 불안했다.
리사가 또 문제를 일으킬까봐.
옆에서 나란히 지켜보고 있던 케스티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리사님이 좋아하는 당근을 재배한 사람이니 귀한 물건을 다루듯 대하실거야.”
“제발 그러길 바랄뿐이에요.”
리안은 종이를 읽어내려 갈수록 점점 고개가 삐뚤어졌다.
대충 요약하면 이렇다.
노예 계약서.
1. 노예는 어떠한 경우에도 주인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해야한다
2. 아름답고 위대한 리사 아스트리드는 노예의 봉급을 아스트리드 가문의 최고 기사 수준과 동등하게 지급한다
3. 노예는 평생 아스트리드 가문의 노예가 되어 오직 당근만 재배한다
4. 노예는 당근이 아닌 다른 작물을 몰래 재배할시 아름답고 위대한 리사 아스트리드 님이 임의로 정한 처벌을 달게 받는다
5. 노예는 일과 시간에 당근을 재배하는 일에만 전념한다 만일 이를 어겼을시 24시간 동안 잠들지 못하는 처벌을 받는다
6. 아름답고 위대한 리사 아스트리드는 노예에게 일년에 90일간의 휴가를 제공한다
마음에 드는 항목도 눈에 띄었으나 결과적으로 리안은 어이가 없어서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특히, 평생 노예짓을 해야한다는게 제일 마음에 안들었다.
“혹시 문서를 잘못 가져오셨나요?”
“줘봐.”
종이를 홱 가로채가더니 내용을 확인했다.
그녀는 이내 리안을 쳐다봤다.
“뭐 하자는 거야. 어디가 마음에 안드는데?”
“저랑은 좀 안맞는 것 같습니다. 죄송하지만 이만 돌아가보겠습니다.”
“누구 마음대로?”
“전 백작님의 노예가 아니니 자유로이 떠날 수 있습니다.”
리안은 등을 돌리고 걸어갔다.
더 얘기할 것도 없었다.
기사들을 부르기 전에 튈 생각이었다.
“백작님, 만수무강 하십시오!”
미운 애 떡 하나 더 준다잖아.
영영 안볼테니 덕담이라도 해주고 작별하는게 낫겠다 싶었다.
굳이 덕담 따위 안해도 욕 배불리 처먹고 오래살 것 같은 양반이지만.
“거기서!”
리사가 긴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성큼성큼 뒤쫓아왔다.
“서라고 했잖아!”
리안을 금세 따라잡은 그녀는 그의 팔을 붙잡고 돌려세웠다.
“내 말이 우스워?”
그때였다.
어두운 밤하늘.
난데없이 괴물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며 두 사람의 머리위에서 포획용 그물이 떨어졌다.
리안과 리사는 속수무책으로 그물에 갇혀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포획당한 리안은 화들짝 놀랐다.
“뭐야 이 개 같은 전개는!?”
괴물의 등 위에 타고 있던 누군가가 그대로 그물을 건져올렸다.
멀리서 그 광경을 목격한 에밀리와 케스티리아는 크게 당황했다.
“리사님!”
“빌어먹을!”
케스티리아는 칼자루를 집어들고 신속하게 튀어나갔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날개 달린 괴물은 포획용 그물에 갇힌 두 사람을 밧줄에 매단 채 멀리 날아가버렸다.
* * *
높다란 언덕 꼭대기에서 장작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장작불 주변에는 다섯의 건장하고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둘러 앉아있었다.
그들은 곧 상공에서 괴물이 날아오는 것을 발견하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털복숭이 사내가 먼 곳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성공하셨군.”
잠시 후.
괴물이 언덕 위로 날아왔다.
괴물의 등에 타고 있던 자가 밧줄을 내리자 리안과 리사가 갇힌 포획용 그물망이 밑으로 내려왔다.
사내들은 민첩하게 괴물과 연결된 밧줄을 잘라냈다.
이어 포획용 그물망도 칼로 찢어 해체했다.
“죽음의 언덕에 온 것을 환영한다.”
사내들은 사로잡힌 리안과 리사를 향해 사악하게 웃어보였다.
리안과 리사는 서로 등을 맞댄 채 자신들을 에워싼 사내들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얼굴에 화상 흉터가 있는 자.
귀가 없는 자.
이빨이 없어 웃을때 바보처럼 보이는 자.
외모는 정상이어도 풍기는 분위기가 본인이 쓰레기라는걸 말해주는 자.
전부 산적이 아니면 야만인스럽게 보였다.
‘환장하겠네.’
리안은 혀를 찼다.
납치를 당할줄을 전혀 예상 못했다.
“너흰 누구지?”
리사가 묻자 얼굴에 화상 흉터가 있는 사내가 대꾸했다.
“지옥에서 온 사자님들이다.”
주변에 있던 사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흉터가 있는 사내는 리안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리사 아스트리드는 계집이라고 들었는데 얘는 뭐지? 이놈은 왜 딸려 온거야?”
“모르지. 나리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때마침 날개 달린 괴물이 언덕에 착지했다.
괴물의 등위에서 마법사 로브를 입은 중년 사내가 훌쩍 뛰어내렸다.
주변의 험상궂은 사내들과 달리 준수한 외모에 지적으로 생긴 사내였다.
그는 가까이 다가와 리안을 먼저 쳐다보며 웃었다.
“이 친구는 필요 없었는데 얻어 걸렸지 뭐야.”
“전 잘못 온건가요?”
“말하자면 그렇지.”
“그럼 없어도 되니 돌아가도 되는거죠?”
“없어도 되지만 이곳에 온 이상 이제 없어도 되는 사람이 아닌게 됐지. 우리를 봤으니까.”
그 말에 리안은 속으로 벙쪘다.
‘지가 일을 개떡 같이 해서 엄한 사람 데려와놓고선……!’
리안을 바라보던 사내의 시선은 리사에게 고정되었다.
그가 미소짓는다.
“그간 빈틈이 없으시던 분이 어쩌다 홀로 나와 계셨습니까. 저로선 좋은 기회였습니다.”
“……”
리사는 적의가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왜 나를 납치했지? 그리고 넌 누구야?”
사내는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저를 아는 형제들은 저를 ‘불 위를 걷는 라간’ 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의뢰인분들은 저를 ‘돈을 준만큼 반드시 보답하는 라간’ 이라고 부르지요.”
“의뢰인?”
리사가 물었다.
“날 죽이라고 귀족들에게 사주 받았나?”
라간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몇 귀족들은 벼락 출세한 당신을 귀족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보고 있지요. 그들에게 당신을 죽여달라는 의뢰를 받았습니다.”
“어떤 놈들이 사주했지? 그들의 이름을 말하라.”
“누가 의뢰했는지 아셔봐야 이미 늦었습니다. 리사님은 조금 뒤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닐테니까요.”
리사가 소리치며 분개했다.
“상관없으니까 이름이나 말해! 저승에 가서라도 그놈들을 꼭 죽여버릴테니까!”
곁에 있던 리안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쉬부럴, 난 재수가 없나봐…… 하필 이 여자랑 같이 있는 바람에…… 젠장, 하늘이시여……’
라간은 점잖으면서도 언뜻 교활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경국지색으로 소문났던 리트아르 왕비님 이후로 제가 본 여인 중에 가장 아름다운 여인입니다.”
그는 귀가 없는 사내에게 손가락을 까닥 거렸다.
그러자 귀 없는 사내가 허리춤에 꽂아두었던 칼을 뽑아 그에게 건넸다.
“저는 당신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습니다. 다만 리트아르 왕비님에 이어 이 땅의 미인이 또 한 명 단명한다니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지요.”
“잡소리 치우고 어서 이름이나 말해! 누가 날 죽이라고 의뢰했어!”
리사가 고함을 치자 라간은 낄낄 웃었다.
그는 사내들에게 그녀를 묶으라고 지시했다.
“강간 안하고 그냥 죽이실 겁니까?”
많이 아쉬운 표정의 사내들.
그들의 물음에 라간은 미간을 구겼다.
“나의 예술에 강간이라는 더러움이 묻는건 용납치 않아. 위대한 암살자인 나를 고작 파렴치범 따위로 만들 생각인가?”
“쩝, 알겠습니다.”
사내들은 곧바로 저항하는 리사의 두 팔을 뒤로 묶고 무릎을 꿇렸다.
라간은 천천히 리안에게 다가갔다.
“방금 막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고래잡이 그물에 얻어걸린 새우가 의외로 쓰일 곳이 있더군.”
그의 손에 들려진 칼날이 서슬퍼렇게 빛났다.
리안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봐 운 없는 친구. 이름이 뭐지?”
“리, 리안입니다.”
리안은 상대에게 병신처럼 보여 이곳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이들의 목적은 리사 백작인듯 하고, 자신은 싸가지 없는 그녀와 아무런 관련이 없으니 말만 잘하면 순순히 풀어주지 않을까?
“어디 출신인가?”
리안은 일부러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더듬었다.
“고향은 없습니다. 불쌍한 고아에 매일 구걸하며 살아왔습니다. 심지어 몹쓸 병까지 걸려서 오늘 내일 하는 중이죠. 콜록! 콜록!”
“환자라고 보기에는 잘 먹은 사람처럼 몸이 건장한데?”
“비, 비대증입니다. 근육이 커지는 비대증이죠. 불치병이라고 하더군요. 콜록!”
“그런 병도 있었나? 음……”
밧줄에 묶인 리사가 코웃음을 치며 리안을 노려봤다.
리안의 정체를 알고 있는 그녀는 별다른 말은 안했지만 대신 경멸의 눈빛을 보냈다.
리안은 별 개의치 않았다.
‘너나 죽어. 난 살아 남을거야.’
오드리아를 만나러 가야하는데 여기서 왜 죽어.
여기서 죽으면 진짜 영화속 엑스트라의 죽음보다 못한 개죽음이라고 생각했다.
“고아에 불치병까지 걸렸다라, 더할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군.”
라간이 흡족하게 웃었다.
뜻밖의 소리에 리안은 당황했다.
“예? 뭐가 좋다는 거죠……?”
“돈.”
그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리안의 눈을 마주봤다.
“돈이 필요하지 않나?”
“돈이요?”
리안은 갸우뚱하며 대답했다.
“필요하긴 합니다만……?”
“그럼 이 여자를 죽이게.”
“예?”
라간은 칼을 내밀며 리사를 가리켰다.
“리사 아스트리드를 살해하면 평생을 먹고 살 수 있을만큼 많은 양의 돈을 대가로 지급하겠네.”
“……?”
리안은 귀를 의심했다.
“왜 제가 해야하죠……?”
“살고 싶잖아. 그렇지 않은가?”
라간은 손가락 두 개를 펴보였다.
“이 자리에서 자네의 선택지는 두 개뿐이네. 하나, 리사 아스트리드를 살해해 돈을 받고 떠난다. 둘, 리사 아스트리드와 함께 죽임을 당한다. 자 어느 것을 선택하겠나?”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리안은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이 개자식, 나한테 모든걸 뒤집어 씌우려고……’
이놈도 백작 작위를 가진 귀족을 살해하려니 쫄리긴 쫄렸나보다.
하긴 백작 정도면 그 밑에 딸린 식구의 친인척만 해도 어림잡아 수백 수천명일텐데 개중에 리사 아스트리드를 위해 복수하러 나설 자가 하나도 없을까.
게다가 백작급의 죽음은 황제의 큰 관심도 받을테고 많이 부담스러울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손을 빌어 리사 아스트리드를 제거할 속셈인가 본데, 리안은 놈들의 속셈을 꿰뚫어 봤으면서도 할 수 있는게 아무 것도 없었다.
‘이 여자를 죽이면 살 수 있고…… 이 여자를 죽이지 못하면 오드리아님과 영영 못 만나는건가……?’
그는 멍한 눈빛으로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강력해보이는 마법사 한 명.
인상은 험상궂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듯한 노련한 전사들 다섯 명.
날개 달린 괴물 한 마리.
농사 밖에 모르는 자신이 이들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확률은 대략 0%
리안은 혼란스러웠다.
‘제기랄. 난 사람을 죽여본적이 없다고! 하지만 오드리아님을 만나려면……!’
고민을 거듭하는 그를 보며 리사는 조소했다.
‘저런 눈빛, 예전에 봤지.’
리사는 단념하며 눈을 감았다.
‘저자가 고를 답은 하나야. 인간들은 결국 뻔해.’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며 잔혹했던 과거를 떠올렸다.
15년전.
가족이 몰살 당하던 날.
집안에 있던 온 가족이 끌려나와 마을 사람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당시 리사의 가족을 악마로 내몰았던 촌장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 하기위해 평소 리사의 가족들과 친하게 지내던 이웃 여자를 앞으로 내세웠다.
“이들과 밀접하게 교류해오면서 수상한 점은 못 느꼈는가?”
“그, 그게……”
평소 사람 좋고 친절했던 이웃 아주머니는 처음에는 용기를 내서 리사의 가족을 대변해주려는듯 보였다.
하지만 촌장을 비롯해 그와 가까이 지내는 무리들이 그녀를 겁박하고 나서자 자신도 악마로 내몰릴게 두려웠는지 갑자기 돌변했다.
“제가 볼때도 이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뭔가에 홀려서 밤마다 이상한 춤을 추고 알 수 없는 말들을 중얼대는걸 자주 목격했습니다!”
그녀는 촌장보다도 악랄하게 리사의 가족을 악마로 내몰았다.
믿었던 사람이 배신하여 비수를 꽂았을때처럼 리사에게 이보다 더 큰 충격은 아직 없었다.
리사는 그날 이후로 사람을 믿지 않게 되었다.
아무리 선량한 사람이라할지라도 궁지에 내몰리면 결국에는 배신한다는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오래 알고 지낸 사람도 쉽게 배신을 하는 마당에 하다못해 오늘 처음 만난 당근상인이라고 다를게 있으랴.
그도 자기 살길만을 모색할 것이고, 결국에는 자신을 찌를 것이다.
답은 정해져 있다.
자신은 결국 당근상인에게 살해당한다.
리사는 속으로 그런 상상을 하며 쿡쿡 거렸다.
그녀는 죽음 앞에서 태연했다.
사실 반격의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백작이된 자신을 시기하는 무리들이야 이전부터 많이 존재해왔다.
암살자를 한 두 번 만나본 것도 아니고 지금처럼 불시의 습격에 대한 대처 방안은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 그려져 있었다.
‘당근상인이 나를 칼로 찌를때가 적기야.’
그러는 사이 마침내 생각을 정리한 리안이 입을 열었다.
“나도 이 여자가 마음에 안들긴 하더라고.”
그렇게 운을 떼며 말했다.
“사람을 대할때 정말 예의가 없는거야. 입도 험하고.”
다음 말을 이어가려던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으로 오드리아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씨발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나 살자고 더러운 짓 안해. 차라리 내가 죽고 말지.”
미처 생각지도 못한 말이 리안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리사는 번쩍 눈을 떴다.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그를 돌아봤다.
리안은 눈에 힘을 준 채 라간을 응시하고 있었다.
“서로 의지가 될테니 가는 길에 외롭지는 않겠네. 난 그냥 이 여자랑 죽을래.”
그 순간 리사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동시에 전신에 박혀 있던 증오와 원한들이 한꺼번에 봇물 터지듯 와르르 떨어져 나갔다.
이제껏 느껴 본 적 없는 환희가 새로이 몸을 감싸며 그녀는 전율했다.
심하게 요동치는 그녀의 눈동자에 운명처럼 다가온 한 남자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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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회
*경고* 지금 보고 계신 화면은, 조아라에서 지원하는 정상적인 경로의 뷰어가 아닙니다.해당 방식으로 조아라에서 제공하는 작품을 무단으로 추출하는 것에 사용하거나 협조할 경우, 저작권법에 위배되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되실 수 있으니,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작품감상을 부탁드립니다.(5년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 부과)----------------------------------------밭농사 준비, 농지 구매의 시간“배부른 개미가 있었네?”
라간은 실망했다는 투로 쳐다보더니 사내들에게 손짓했다.
그 즉시 사내 두 명이 리안에게 달려들어 양팔을 붙잡았다.
얼굴에 화상을 입은 사내가 리안을 마주봤다.
“울지 말라구.”
사내는 주먹을 꽉 움켜쥐더니 곧바로 리안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퍼억!
리안의 얼굴이 돌아갔다.
사내는 재차 얼굴을 때릴 생각에 주먹을 들어올렸다.
라간이 제지했다.
“리사 아스트리드와 같이 죽어서 남는게 뭐가 있지? 삶을 왜 포기하려고 드나?”
리안은 바닥에 침을 뱉고 그를 쳐다봤다.
“내가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 근데. 여기 묶여계신 백작님을 죽여가면서까지 만나봐야 그분이 좋아해주실 것 같지가 않더라고. 나도 부끄럽고.”
라간이 킥킥 웃었다.
그는 지그시 리안을 응시하다가 사내들에게 더 때리라는 신호를 보냈다.
“정신차리게 해주겠슴다.”
퍽!
퍽!
사내들은 리안의 얼굴을 여러차례 가격하고 옆구리도 걷어찼다.
무릎꿇고 앉아있던 리사는 리안이 사정없이 처맞는 모습을 보면서 이유를 알 수 없이 가슴이 크게 일렁거렸다.
불안하게 눈알을 굴리는 그녀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져갔다.
“헉, 헉, 헉, 헉!”
그녀의 내면 깊숙한 곳, 오랜 세월 잊고 살았던 감정이 조금씩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그만.”
라간이 신호를 보내자 사내들은 구타를 멈췄다.
라간은 리안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할 마음이 생기나?”
“후……!”
얼굴에 멍이든 리안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내쉬었다.
그는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가 죽거든 이 언덕에 묻어줘. 전망 좋네.”
“그래?”
라간은 머리를 도리도리 저으며 큭큭 웃었다.
“안됐지만 자네의 소원은 들어줄 수가 없을 것 같아.”
라간은 천천히 뒤로 물러나면서 리안의 양팔을 붙잡고 있는 사내들에게 떨어지라는 손짓을 했다.
“왜냐하면……”
사내들이 후다닥 양쪽으로 물러서자 그는 주문을 영창했다.
“활활 타올라 재가 될테니까!”
그가 앞으로 팔을 뻗자 손바닥에서 거센 화염이 솟구쳐나와 리안을 덮쳤다.
화르륵!
리안은 반사적으로 불길을 두 팔로 막으며 질끈 눈을 감았다.
‘제기랄!’
도저히 피할 방법이 없어서 ‘이제 죽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오드리아를 떠올렸다.
‘죄송합니다 공주님! 평생 함께 하자는 약속을 못지키게 되었어요……!’
그때였다.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더니, 그 무언가가 혈관을 따라 쫙 퍼져나가면서 온몸을 휘감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한 느낌이 들고나서 몸이 달라졌다.
리안은 온몸에 불이 붙으리라 예상했지만 자신을 덮친 화마는 전혀 뜨겁지 않았고 옮겨붙지도 않았다.
심지어 화염속에서 눈도 뜰 수 있었다.
“어?”
“아니!?”
라간은 깜짝 놀랐다.
리안이 화염에 맞고도 아무 이상이 없자 그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즉시 화염을 거두었다.
“무슨 짓을 한거지?”
“글쎄?”
리안이 되묻고 싶었다.
자신에게 대체 어떤 변화가 일어났던 것일까?
“내가 실수한게 있었나?”
라간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몇 발자국 앞으로 나가더니 재차 화염을 퍼부었다.
화르륵!
거리가 가까워진 상태에서 거센 불길을 맞았으나 리안은 이번에도 끄덕 없었다.
주위에 있던 사내들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여 씨벌……?”
“저놈 몸에다가 단열시켜주는 약 같은거 바른거 아냐?”
누군가 그런 말을 하자 라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리안에게 다가가서 그의 피부를 살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크나큰 실수였다.
몸이 자유로웠던 리안은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잽싸게 손을 뻗었다.
라간의 목을 움켜쥐고 번쩍 들어올렸다.
“빙고.”
리안이 활짝 웃었다.
“커억!”
방심하다 난데없이 봉변을 당한 라간은 숨이 막히는 듯 오만상을 찡그리며 허공에서 발버둥을 쳤다.
“그분을 놔줘!”
주변에서 지켜보고 있던 다섯명의 사내들은 화들짝 놀라며 즉시 무기를 빼들었다.
리안은 목을 움켜쥔 채로 라간을 그들 앞에 내밀었다.
“한발자국이라도 움직였다간 이놈은 죽는다.”
리안은 힘이 장사였기에 그대로 목뼈가 부러져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그의 아귀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사내들은 혀를 찼다.
“젠장!”
“이 자식 보통놈이 아니었어!”
그들은 제자리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욕설만 퍼부어 댔다.
리안은 괴로워하는 라간을 올려다봤다.
“긴말 안할게. 우리를 풀어줘.”
“큭! 컥!”
“좋으면 손으로 엉덩이를 세 번 쳐.”
말을 알아들은 라간이 급히 손바닥으로 제 엉덩이를 치려는 순간이었다.
주인이 공격당하는 광경을 발견한 괴물이 갑자기 포효하며 난동을 부렸다.
녀석은 날개를 펼친 채 두 발로 뒤뚱뒤뚱 기어와서 리안을 물어뜯으려고 덤벼들었다.
“크아아아아!”
“우옷!”
리안은 신속하게 괴물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다녔다.
그로 인해 현장은 아수라장이 됐고, 황소만한 괴물이 난리를 치자 다섯명의 사내들도 정신이 없었다.
그들은 아무도 리사를 신경쓰지 못했다.
그때까지 묵묵히 있던 리사가 어느새 밧줄을 풀고 사내 한명에게 달려들었다.
“조심해!”
리사를 발견한 누군가가 재빨리 소리쳤으나 그녀는 어디서 무기를 구했는지 몰라도 손에 단검을 쥐고 있었다.
리안과 괴물에게 정신이 팔려있던 사내에게 전속력으로 뛰어가 그의 목에 단검을 찌르고 비틀었다.
사내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리사는 곧장 단검을 뽑은뒤 지체하지 않고 옆에 있던 사내의 목을 그었다.
“끄아악!”
피가 분수처럼 튀었다.
그때 리사를 향해 철퇴가 휘둘러졌다.
그녀는 뒷걸음질치며 공격을 피했다.
“저년 죽여!”
“개 같은 년!”
리사에게 모든 이목이 집중되는 사이 괴물을 피해 달아나던 리안은 문득 손에 쥐고 있던 라간의 목이 덜렁덜렁 하는게 느껴졌다.
“엥?”
라간의 상태를 살펴보니 그는 목이 부러진 채 혓바닥을 내밀고 죽어 있었다.
쫓아오는 괴물을 피해 달아나는 사이 자기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었나보다.
정말 어이가 없었다.
“죽을 것 같으면 신호라도 보냈어야지 이 망할 자식아!”
그가 외치는 순간 괴물이 돌진해왔다.
리안은 즉시 라간의 시체를 집어던지고 몸을 날렸다.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 와중에 리안 대신 사내 한명이 괴물에게 들이받혔다.
괴물의 머리에 들이받힌 사내는 허공으로 날아가며 언덕 밑으로 떨어졌다.
“으아아악!”
괴물은 라간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울부짖었다.
그리고 리안을 향해 다시금 달려들었다.
리안은 양손에 침을 뱉었다.
“네가 자꾸 덤빈다면 하는 수 없지.”
괴물을 죽이지 않고서 이 위기를 빠져나갈 방법은 없어보였다.
리안은 생각을 거듭한 끝에 힘으로 짓누르기로 마음 먹었다.
괴물은 덩치가 컸지만 기다란 목의 굵기가 겨드랑이에 끼고 조이기 알맞은 두께였다.
“잘 되려나 모르겠네.”
그는 왼팔에 차고 있던 라그레아닐을 올가미로 변형시켰다.
올가미 줄을 팽팽히 잡아당기며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녀석을 노려보았다.
이윽고 외쳤다.
“지금이다!”
* * *
리사의 단검이 두 사내를 빠르게 훑었다.
“으악!”
“키익!”
사내들은 각자 목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리사는 바닥에 떨어진 철퇴를 주워 쓰러진 사내들의 머리를 한번씩 후려쳤다.
머리가 으깨지며 바닥에 피가 번져나갔다.
“……”
무표정으로 시체를 내려다보던 그녀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은 조용했고 상황은 끝나있었다.
근처 바닥에 대자로 퍼져있는 리안의 숨소리만 주기적으로 들려왔다.
“헉, 헉.”
그의 옆에는 죽은 괴물의 사체가 보였다.
목졸려 숨진듯 기다란 목 한가운데가 움푹 들어가있다.
“……”
리사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문득 라간의 시체가 보였다.
걸음을 멈추고 내려다보았다.
목부위에 손자국이 보였다.
리사는 리안을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라간을 내려다봤다.
그녀는 이내 허리를 굽혀 라간의 몸을 수색했다.
가슴 안주머니에서 접혀있는 종이를 찾아낼 수 있었다.
펼쳐서 내용을 확인해보니 자신을 죽이라고 의뢰한 자들의 명단이 적혀 있었다.
총 세 명이었다.
모두 황궁의 대신들.
잠시 우두커니 서서 그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여태껏 교류는 없었으나 얼굴은 한번씩 본 자들이었다.
이놈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곰곰이 생각하는 와중에 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떠나려 하고 있었다.
리사는 서둘러 종이를 접고 그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 * *
“야영지에는 언제 돌아가냐. 환장하겠네.”
리안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겼다.
홀로 언덕을 내려가는데 뒤에서 리사가 불렀다.
“어디가?”
리안은 뒤도 안돌아보고 귀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집에 가려구요.”
그녀가 따라오며 물었다.
“집이 어딘데?”
“스톤 쉴드 기사단 야영지요.”
“거긴 집이 아니잖아.”
“거길 그냥 집이라고 한 겁니다.”
“그건 틀린 말이야.”
“알아요.”
리안은 걸음 속도를 높였다.
귀찮게 쫓아오는 리사를 최대한 멀리 떨어뜨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뒤쳐지지 않고 바짝 쫓아왔다.
“천천히 가.”
“싫습니다.”
“왜?”
리안이 우뚝 멈춰서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리사를 향해 짐짓 웃는 얼굴로 말했다.
“무사히 탈출했으니 이제 각자 갈길 가야죠. 백작님은 본인 소유의 야영지로. 저는 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야영지로. 아셨죠?”
“……”
리사는 별다른 말없이 리안을 빤히 응시하기만 했다.
그러다 불쑥 말했다.
“사랑해.”
“네?”
리안은 귀를 의심했다.
잘못들었는가 싶어 귀를 파며 물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그녀는 수줍은 기색도 없이 무표정으로 말했다.
“니가 좋아.”
리안은 멍한 눈빛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혹시 그 못된 마법사한테 세뇌당하셨어요?”
“아니.”
“머리에 큰 충격을 받았다던가?”
“멀쩡해.”
“멀쩡한데 그러면 설마 장난치는 건가요?”
“난 장난치는 성격이 아니야.”
그녀는 곧바로 물었다.
“좋아하는게 뭐야? 사귀는 여자는 없지?”
“……”
“그런 눈으로 보지마. 난 진심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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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회
*경고* 지금 보고 계신 화면은, 조아라에서 지원하는 정상적인 경로의 뷰어가 아닙니다.해당 방식으로 조아라에서 제공하는 작품을 무단으로 추출하는 것에 사용하거나 협조할 경우, 저작권법에 위배되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되실 수 있으니,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작품감상을 부탁드립니다.(5년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 부과)----------------------------------------밭농사 준비, 농지 구매의 시간리안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다가 무시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거기 서.”
“놀이 상대가 필요하면 다른데 알아보시길 바랍니다.”
“서라고 했어!”
“늦었어요. 먼저 갑니다.”
리사가 뛰어와서 그의 팔을 붙잡았다.
“명령이야!”
리안이 멈춰서며 뒤돌아봤다.
“뭔가 착각하시나 본데, 난 아스트리드 가의 노예가 될 생각이 없어요.”
“너야말로 착각중이야.”
리사는 구두 뒤축을 들어올려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두 사람의 거리가 숨결이 닿을만큼 가까워졌다.
그녀는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누가 노예하랬어? 내 남편하랬지.”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리안은 너무 황당한 나머지 웃음이 빵 터졌다.
“하하하하하! 아스트리드 가문은 노예 구하는 방식이 참 신선하네요. 아주 공격적인 마케팅 잘 봤습니다. 그럼 이만.”
허무맹랑한 말을 하니까 왠지 덫이 있는 것 같고 사기꾼처럼 보이지 뭐야.
리안은 뒤도 안돌아보고 냅다 뛰기 시작했다.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멈춰!”
리사가 빠른 속도로 뒤쫓아왔다.
하지만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있던 그녀는 움푹 파인 곳에 걸려 넘어지면서 발을 접질렀다.
“아야!”
콰당!
뒤에서 리사의 비명소리가 들려오자 리안은 뛰는 것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픈 발목을 어루만지며 주저앉아있는 그녀가 보였다.
“하아.”
리안은 한숨을 내쉬며 뒷머리를 박박 긁었다.
정신 나간 여자는 두고 떠날 수 있어도 아픈 여자를 두고 떠나는 것은 그의 양심이 허락지 않았다.
이대로 두고 갔다간 괴물에게 잡아 먹힐 수도 있고 괜히 기분이 찜찜했다.
어쩔 수 없이 리사에게 다가갔다.
“못 걸어요?”
“아파. 못 걷겠어.”
리안은 혹시 몰라 그녀의 발목 상태를 꼼꼼이 살폈다.
그러나 거짓말이 아니라는듯 그녀의 발목 부분 살이 순식간에 주먹만큼 부어올랐다.
리안은 동이 트기 시작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 골치 아프네.”
버리고 갈 수도 없고.
같이 있자니 헛소리나 해대고.
“내가 아프니까 걱정돼?”
밑을 내려다보자 리사가 발목을 어루만지며 웃고 있었다.
“고향은 어디야? 부모님은 살아계셔?”
“이와중에 그건 왜 물어봅니까?”
“결혼식때 초대해야 하잖아. 야외 결혼식이 좋아 성당 결혼식이 좋아?”
“둘 다 싫어요. 어차피 안할거니까.”
리안은 허리를 숙여 리사를 공주님 안기로 번쩍 들어올렸다.
리사는 자연스럽게 두 팔을 뻗어 리안의 목을 감쌌다.
그러고는 해맑게 웃으며 리안을 올려다보았다.
“나 깃털처럼 가볍지?”
“……”
리안은 무시해버렸다.
그녀를 든 채 성큼성큼 들판을 걸어나갔다.
“거리가 꽤 멀텐데 괜찮겠어?”
“그래도 해야죠.”
“표정 좀 풀어. 내가 안겨있잖아. 다른 남자들은 이런 영광 한번도 못 누려봤어. 너한테만 특별히 선사하는거야.”
“백작님이 아닌 다른 여자였다면 영광이었겠네요.”
“나는 싫어?”
“……”
리안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리사는 잠시 리안의 얼굴을 감상하다 입을 열었다.
“내가 아닌 다른 여자라면…… 혹시 좋아하는 여자 있어?”
“예, 있습니다.”
“어디 사는 여자야?”
“왜요?”
“죽여버리게.”
그 순간 리사 아스트리드는 리안의 마음속에서 -30점을 받았다.
그녀의 매력이 하락했다.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죠?”
“뭐가?”
“처음 만났을때와 너무 다르잖아요.”
리안은 그녀가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읊었다.
“김리안이든 리안이든 난 너한테 관심 없어. 허나 네가 재배한 당근에는 관심이 있지.”
“아하, 그 말.”
리사는 별일 아니라는듯 가볍게 대꾸했다.
“평생의 반려자를 못 알아본 내가 바보 같았어. 사과할게. 미안. 이러면 됐지?”
“제가 말하는 포인트는 제가 왜 백작님의 반려자냐고요.”
“날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는 사람이잖아. 그거면 충분하지 않아?”
“충분하지 않아요. 같이 죽자는 말 한마디로 고마워 하기는 해도 결혼까지 하자는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여기 있잖아. 리사 아스트리드 라는 여자가.”
리사는 손을 뻗어 정면을 보고 걷고 있는 리안의 뺨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녀가 그윽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너처럼 따스한 말을 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넌 정말이지 치명적인 남자야. 사랑스러워.”
“혹시 주머니에 약 같은거 갖고 계시나요?”
“없어. 왜?”
“아뇨, 그냥 혹시나해서요.”
“나보고 미친년이라고 말하고 싶은거야?”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
“날 제대로 봐주길 바랐는데 아쉽네. 난 내가 미쳤다고 생각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죽이는게 내 꿈이거든.”
“농담이죠?”
“진심이니 믿어줘. 질병을 유발하는 독초를 개발해서 그걸 인류에게 먹일 생각이야. 어때?”
리안은 소름이 끼쳤다.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감당하기 힘든 여자란 생각만 들었다.
그리하여 리안이 보는 리사의 매력 마이너스 50점.
그녀의 매력이 큰 폭으로 하락했다.
그런 속사정도 모르고 리사는 리안의 목을 한층 더 끌어안으며 밝게 웃었다.
“하지만 이제 포기하기로 했어. 새로운 희망을 봤거든.”
“사람들을 안죽이겠다고요?”
“응. 갑자기 삶이 행복해.”
“다행이네요.”
“단 네가 곁에 있어줘야 해. 네가 사라지면 난 또 인간들을 죽이려들거야.”
리사는 그런 말을 하면서 리안의 코를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코도 멋지게 생겼어.”
멋진 코를 가진 남자 리안은 코를 잡힌 채 먼 곳을 응시했다.
말을 탄 기사들이 먼지 바람을 일으키며 이쪽으로 달려오는 중이었다.
“누가 오는데요?”
리사는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바라봤다.
저 멀리 펄럭이는 깃발의 문장을 알아본 그녀는 혀를 찼다.
“눈치 없기는.”
“아, 백작님의 기사들이구나.”
“정감없게 백작이라고 부르지마. 다정하게 부인이라고 하든지 아니면 리사라고 불러.”
그건 아닌 것 같아서 리안은 못 들은척을 했다.
오늘 이후로 다시는 리사를 안볼 생각이었다.
리안은 오드리아처럼 평화로운 삶을 사는 여자에게 더 마음이 갔다.
간단히 말하자면 유유자적한 농부의 삶!
반면에 리사는 뭐랄까.
그녀와 알고 지냈다간 스펙타클한 인생을 살게될 것 같아 무서웠다.
암살자, 권력, 정치, 파벌싸움, 전쟁 등등 평화를 깨는 무시무시한 단어들만 연상됐다.
잠시 후.
가까이 다가온 기사들이 말을 멈춰섰다.
“리사님!”
에밀리와 케스티리아가 동시에 말에서 뛰어내렸다.
두 사람은 리안에게 공주님 안기 자세로 안겨있는 리사를 보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어, 어떻게 된겁니까……?”
당황하는 케스티리아.
방긋 웃는 에밀리.
“두 분 벌써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신건가요? 대단해라!”
한술 더 뜨는 리사.
“앞으로 내 방과 막사에 침대 하나 더 설치해놔. 최고 비싼걸로.”
“리사님은 조용하세요!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어머, 남편 됐다고 벌써 나한테 호통치는 것 봐.”
“그만!”
리안은 급히 리사의 입을 틀어막고는 에밀리와 케스티리아에게 전후사정을 설명했다.
이후에는 아스트리드 가문 사람들과 함께 스톤 쉴드 기사단의 야영지가 있는 곳까지 이동했다.
도중에 리사는 발목 치료를 위해 본인의 야영지로 돌아가야했는데, 리안에게 자신을 따라오라며 고집을 피우는 해프닝이 있었다.
그녀의 고집은 에밀리가 적극적으로 달래고 만류한 덕분에 겨우 멈출 수 있었고, 홀로 스톤 쉴드 기사단의 야영지까지 따라온 에밀리는 헤어지기 직전 리안과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리사 님과 있었던 일은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분은 어릴적 트라우마로 인해 사람을 사귀는데 서투세요. 이해 부탁드립니다.”
“내일되면 잊혀질 얘기겠지?”
리안은 꼭 그러길 바라며 물었으나 에밀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신 말씀은 아마 진심일걸요?”
“진짜?”
“네.”
그녀는 쪽지를 하나 건넸다.
“리사 님이 머무는 저택 주소입니다. 리사님의 마음이 나중에도 지금과 한결 같은지 확인도 할겸 황도에 오시거든 꼭 방문해주시길 부탁드려요.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알았어. 이대로 곧장 황도에 가는건가?”
“네, 리사 님께는 아직 일정을 보고드리지 않았지만 경호 문제도 있고 암살자건도 조사해봐야 해서 하루빨리 황도에 가봐야할 것 같습니다.”
“만약 리사 님이 황도에 가기 싫다고 떼를 쓰면?”
걱정말라는듯 에밀리가 웃어보였다.
“발목이 부러져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한동안 저도 편히 지내겠어요.”
서큐버스만의 인사법인지 몰라도 에밀리는 손을 흔드는 대신 손키스를 날리고 떠났다.
“나중에 또 봬요.”
그녀가 떠난뒤 리안은 홀로 남아 쪽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곧 그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그려졌다.
“후후후.”
웃음은 더욱 크게 번졌다.
“음오하하하하!”
손에 쥐고 있던 쪽지를 산산이 찢어버렸다.
동시에 그의 웃음도 사그라 들었다.
진지한 얼굴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다시는 보지 말자고. 아디오스.”
그가 떠난 자리.
산산이 조각난 종이쪼가리들이 바람에 휘날렸다.
* * *
황도 브라간스트 근교.
훅스 가문의 대저택.
얼마전 영주였던 남편과 사별한 메건 부인은 밝은 햇살이 내려쬐는 오후 한통의 편지를 받았다.
‘모니카 브루니 훅스’
죽은 남편의 수양딸에게서 온 편지였다.
자신은 인정하지 않은 남의 딸.
여전히 정이 안붙은 남의 딸.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편지를 읽었다.
역시나 반갑지 않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어머니, 유산으로 상속 받은 땅에 농사를 지으려고 합니다
곧 찾아뵐게요
건강하세요
메건 부인은 편지를 탁자에 올려놓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황금빛 갈대 물결이 춤을 추고 있었다.
갈대를 응시하는 그녀의 눈은 점점 가늘어졌다.
“왜 오는 거니.”
얼마 후 그녀는 하인 발라스를 불렀다.
“찾으셨습니까 마님.”
“바쁜가요?”
“아뇨, 잠깐 하면 끝나는 일입니다.”
“그럼 내가 시키는 일 하나만 하세요.”
“네, 마님. 어떤 일입니까?”
메건 부인은 모니카가 상속받은 토지의 위치가 그려진 종이를 내밀었다.
발라스가 받아들자 그녀가 말했다.
“이따 밤에 조용히 그 땅에 가서 ‘베르킨텐산’을 살포하세요.”
“예? 그러면 땅을 못 쓰게 될텐데요? 오염이 최소 5년은 갈겁니다.”
“상관없습니다.”
메건 부인은 말했다.
“절대 아무것도 자라나지 못하도록 땅을 망가뜨리세요.”
그날 밤.
베르킨텐산이 줄줄 흐르는 짐마차를 끄는 두 마리의 말이 오천평의 토지를 힘껏 내달렸다.
* * *
황도와 가까워질수록 향단이도 부쩍 자랐다.
페어리의 성장 속도는 가히 놀라웠다.
맨날 누워서 응애응애 거리더니 단 3주만에 두 발로 아장아장 걸어다니는 수준에 이르렀다.
등에 자그맣게 솟은 날개도 서서히 빛깔을 드러내며 성큼성큼 자라는 중이었다.
“향단아, 밥줘 해봐. 밥줘.”
“르리.”
“밥줘.”
“르리리.”
향단이가 빨리 자라서 기쁘긴한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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