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gricultura 2
“조용히 숨어 있으라는 말씀을 어겨서 죄송해요. 공주님이 다치는 것을 바보처럼 지켜볼 수가 없었어요.”
리안은 빠르면서도 침착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공주님은 모르시겠지만, 당신이 제 가슴에 뿌려놓은 씨앗이 많이 자랐거든요. 아주 울창한 나무가 되었어요. 인간인 저를 신뢰하지 않아도 좋아요. 제 가슴에 자리잡은 당신이란 존재는 제 목숨보다 소중해요. 당신이 아플때마다 고통스럽고 괴롭다구요. 전 죽어도 공주님과 함께 죽을거예요! 맹세합니다!”
오드리아는 그의 말을 듣자 깊은 감명을 받으며 저도 모르게 눈물이 펑펑 흘러내렸다.
“나도 맹세하마. 나도 꼭 너랑 같이 죽을거야……! 너뿐이니까!”
그녀는 뺨에 흐르는 눈물을 급히 닦으며 비틀비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꼭 붙잡고 있어! 마무리는 내가 하마!”
온몸의 힘을 쥐어짜내 다리를 떨면서 힘겹게 일어선 그때였다.
‘이게 어찌된거지?’
마왕 반데어자르는 칼에 찔린게 평소와 다름을 깨닫고 두려움에 떠는중이었다.
‘대체 무어란 말인가! 육신이 녹고 있다! 이 무슨……!’
그는 현재 자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눈치챘다.
소름이 끼쳤다.
갑작스레 찾아온 공포는 그에게 서둘러 도망치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점점 정신이 혼미해지던 마왕은 살기위해 재빨리 주문을 외쳤다.
“일레퀴움!”
그 직후, 그는 언제 이곳에 있었냐는듯이 바람처럼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를 찌르고 있던 리안과 함께……, 없어져 버렸다.
“어……?”
정적이 감돌았다.
모든게 파괴되고 텅 빈 농장에 홀로 남게된 오드리아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주변을 멍하니 둘러보았다.
“날 놀리는거지? 그렇지? 평소처럼 장난치는거지? 그렇지……?”
곧 그녀는 크게 울부짖었다.
“리안아!”
당장 리안을 찾으러 떠날 생각에 그녀는 드래곤으로 변신했다.
그러나 드래곤의 모습을 유지하던 그녀는 이내 본 모습으로 되돌아오며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그녀는 이미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한계에 달해있었다.
“리안……, 아…….”
얼마 지나지 않아 노을진 하늘 저편에서 고니떼가 날아왔다.
고니들은 한데뭉쳐 바닥에 쓰러진 오드리아의 전신을 완전히 뒤덮었다.
저마다 그녀의 원피스를 입으로 물고 다시 하늘로 날아 올랐다.
옷을 입으로 문 녀석.
머리카락을 입에 문 녀석.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입에 문 녀석.
대가리로 몸밑을 떠받치는 녀석.
고니들은 그렇게 레어로 향했다.
칼날같은 눈발이 휘몰아치는 레어로 가는 길은 고니들에게 험난한 여정이었다.
도중에 눈폭풍에 휘말려 추락하는 녀석들이 속출했다.
그럼에도 고니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하나가 떨어져 죽으면 뒤에서 따라오며 대기하고 있던 하나가 그 자리를 메꾸었다.
마침내 레어에 도착했을때,
정신을 잃은 오드리아를 겨우겨우 얼음침대에 눕혔을때, 수백에 달했던 고니의 숫자는 절반 이상 줄어있었다.
산 녀석들은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고니들은 침상 주변에 빙 둘러 앉으며 오드리아의 호위기사처럼 그녀를 지켰다.
* * *
“드레스 가져왔어요.”
시녀가 금색과 흰색으로 치장된 아름다운 드레스를 들어보였다.
“예쁘네요.”
방금 막 목욕을 끝마친 여자는 옷감을 만져보았다.
“부드럽고, 비싸보이고,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워.”
도도하고 차가운 인상을 가진 여자의 입가에 처음으로 환한 미소가 그려졌다.
리사 아스트리드.
평민 출신의 그녀는 오늘 눈앞에 있는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황제에게 작위를 하사 받을 예정이다.
“폐하 앞에 서려니 긴장되시죠? 술 좀 가져다 드릴까요?”
그녀의 몸을 닦아주던 시녀가 그렇게 물었다.
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갈증이 났다.
긴장 따위가 아닌 다른 이유로.
“데운 포도주로 부탁해요.”
예쁜 드레스였던만큼 옷을 입는데 시간이 걸렸다.
“허리를 쭉 피세요.”
“잠깐. 가슴이 너무 커보이지 않나요?”
리사는 풍만한 가슴라인이 노골적으로 도드라져보여 어색했고, 허리는 꽉 조여서 숨쉬는게 답답했다.
하지만 시녀가 밝게 웃었다.
“괜찮아요. 다들 이렇게 입어요. 숙녀의 매력은 가슴에서 나온답니다.”
“아, 그런가요? 몰랐네요. 그럼 더욱 커보이게 해주세요.”
“네.”
리사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천한년이 드디어 귀족 같다.
작은 보석들로 장식된 그녀의 길고 풍성한 금발머리.
희고 가느다란 목에 걸린 값비싼 목걸이.
부드러운 원단이 몸에 착 달라붙어 상체의 곡선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다가 허리에서부터 풍성하게 퍼지는 우아한 드레스.
정말……, 그녀가 바라던 귀족 여인의 모습이었다.
“내가 아닌 것 같아.”
“어딘가의 공주님 같으세요.”
시녀는 침이 마르도록 그녀를 칭찬했다.
옷을 다 입고 머리를 빗질하는데 술을 가지러 나갔던 시녀가 돌아왔다.
술잔이 담긴 쟁반을 오른손으로 들고 있던 시녀는 왼손에 쥔 것을 흔들어보였다.
“아주 예쁜 구두가 도착했습니다.”
화장대 앞에 앉아있던 리사는 거울에 비치는 값비싼 구두를 바라보면서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이래서 사람은 성공해야한다니까.’
시녀가 술잔을 건넸다.
“말씀하신대로 데워왔어요.”
“고마워요.”
리사는 술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그대로 마시려다 멈칫거렸다.
‘음?’
술잔을 든 채 잠시 향기를 맡아보던 그녀의 시선이 다시금 시녀에게로 향했다.
술잔을 도로 내밀었다.
“당신이 먼저 마셔보세요.”
“예?”
리사는 웃음을 머금고 시녀를 바라봤다.
“꾸며주느라 고생들했는데 한모금씩 돌려마셔요. 우리.”
“괘, 괜찮습니다. 저희가 어찌 감히…….”
“저희는 술 마시면 안돼요.”
리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을 가져온 시녀를 똑바로 마주보며 천천히 다가갔다.
당황한 시녀의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저, 저희는 마실 수 없어요. 혼난다구요.”
“뭘 꺼리는거죠?”
“말씀드렸잖아요. 일 중입니다.”
“일? 정말 열심히 일하네. 지독할 정도로.”
리사는 피식 웃는가 싶더니 갑자기 시녀의 뒷목을 움켜잡고 술을 입속에 콸콸 들이부었다.
“이딴거 너나 처먹고 뒈져.”
“커억! 컥! 그, 그만! 우웁! 웁!”
술을 마신 시녀의 안색이 삽시간에 초록색으로 변하며 코피가 흘러내렸다.
“멈춰!”
다른 시녀가 치마를 들추며 허벅지에 착용한 단검을 빼드는 찰나 리사는 그보다 빠르게 시녀의 입술을 빈 술잔으로 가격했다.
“큭!”
충격을 받은 시녀가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뒷걸음쳤다.
리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화장대에 있던 가위를 쥐고 시녀의 목을 찔렀다.
푹!
“커억!”
피가 튀면서 리사가 입은 드레스의 목 주변과 뺨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리사는 뺨에 묻은 피를 손등으로 닦아냈다.
“너희 때문에 이게 뭐니. 예쁜 옷을 입은 보람이 없잖아.”
그러면서 툭 밀자 가위에 찔린 시녀의 몸이 뒤로 넘어가며 털썩 쓰러졌다.
눈을 부릅뜬 채 나자빠진 몸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앞서 술을 마신 시녀는 피부가 초록색으로 변한 채 입에 거품을 물고 죽어 있었다.
“내가 이 자리까지 어떻게 올라왔는데…….”
리사는 두 시체를 가소롭게 쳐다봤다.
“고작 너희 따위가 내 상대가 되겠니?”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선생님 저 왔어요! 여기 시종장님도 계시는데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옷 다 입으셨죠?”
리사의 조수 에밀리의 목소리였다.
리사는 바닥에 쓰러진 시체를 넘어서 문쪽으로 걸어갔다.
방문을 열자 동글동글한 에밀리의 얼굴이 보였다.
“여기서부터 홀까지 동선체크 다 했어요. 그러니까 홀 구조가 어떻게 생겼냐면……, 어머나!”
에밀리는 무심코 안으로 들어오다가 바닥에 쓰러져있는 시체 두 구를 발견하고는 기겁했다.
그녀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리사를 바라봤다.
“또 당하신거예요!?”
“얘들은 쉬는 날이 없나봐. 잠시도 가만히 두질 않네.”
리사는 담담이 대꾸하며 문쪽을 돌아봤다.
흰 머리가 나있는 시종장은 제자리에서 굳은 채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 맙소사……!”
리사는 고자세로 팔짱을 끼고 그를 쳐다봤다.
“저들이 날 죽이려고 했어요. 당신도 알고 있었나요?”
“저,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정말로?”
그녀의 목소리는 냉담했다.
시종장은 급히 허리를 숙이며 머리를 조아렸다.
“리, 리사님의 안전을 위해 철저한 조치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불미스러운 일을 막지 못해 정말로 송구스럽습니다. 부디 너그러운 이해를 부, 부탁드립니다!”
최근, 평민의 신분에서 벼락 출세를 하게된 리사를 향한 귀족들의 질투와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리사는 하루가 멀다하고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이었고, 오늘 같은 경우에도 그녀를 담당하는 시종장에게 미리 사정을 알려 엄중한 경호를 취해달라고 요구한 상태였다.
그러나 결과는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사람은 정말 외모로 판단해선 안되겠군요. 이봐요 시종장. 당신을 처음 봤을때 첫인상이 어땠는줄 알아요?”
리사는 꾸짖는 목소리가 아닌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나긋나긋 차가운 음성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노련하고 빈틈없이 일을 잘하겠단 생각이 들었는데 내 생각이 틀리고 말았네요. 일부러 그런건지 뭔지. 대체 무슨 속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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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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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저 송구할 따름입니다!”
식은땀을 흘리며 깍듯이 머리를 조아리는 그에게, 리사는 붉은 입술을 슥 들이밀며 그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대로 쫓겨나 손자 기저귀나 갈며 생을 마감하고 싶으세요? 제가 많이 양보해 이번 일을 폐하께 말씀드리지는 않을게요. 앞으로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정신 바짝 차려서 일해주세요. 아.셨.죠?”
후 하고 귓가에 감미로운 입김을 불어넣자 시종장이 움찔하며 크게 대답했다.
“며, 명심하겠습니다!”
리사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듯이 웃으며 손뼉을 마주쳤다.
“자 그만 잊고 하던거나 마저합시다. 드레스에 피가 묻었으니 다른걸로 갖다주세요. 시녀도 새로 보내주시고.”
얼마뒤 리사는 새 드레스로 갈아입고 방을 나섰다.
파란 융단이 깔린 긴 복도를 걸었다.
황제가 기다리는 홀까지 걸어가는 동안 멋지게 차려입은 귀족 남성들이 다가와 그녀에게 치근거렸다.
“오오, 마치 절벽 위에 피어난 한송이 꽃을 보는 것 같습니다!”
“오늘 저녁에 잠시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아……, 딴게 아니라 농사법에 관한 고견을 듣고 싶을 따름입니다.”
“당신의 모습에 넋을 잃었습니다. 부디 손만이라도 잡아주십시오!”
그 때문에 리사의 조수 에밀리는 벌떼처럼 몰려드는 젊은 귀족들을 떼어내느라 진땀을 흘렸다.
“고귀하게 태어나신 분들이 왜들 이러십니까! 체통 좀 지키시라고요! 꺄악! 그, 그만! 밀지마요!”
이윽고 널따란 홀에 도착하자 황제를 비롯해 백여명이 넘는 문무대신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향했다.
황제가 흰 수염을 어루만지며 인자하게 웃었다.
“잘 왔소. 어서 이쪽으로 올라오시오.”
리사는 치마 앞섶을 두 손으로 붙잡고 천천히 그리고 우아하게 중앙을 걸어나갔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쏟아진다.
“신분이 천함에도 미모가 대단하구만!”
“저렇게 젊은 아가씨가 새 농기구를 개발했단 말이야?”
리사가 단상에 오르자 곧바로 식이 거행됐다.
한 대신이 그녀의 업적을 줄줄이 나열했다.
“…숏딕이라는 획기적인 농기구를 개발해 농업 발전에 큰 도움을 주었으며, 악마의 알이라 불리우며 가축사료로만 쓰이던 감자의 새로운 요리법들을 통해 감자의 보급화에 큰 공헌을 한바…….”
업적 소개가 끝나자 웨르타뉴 제국 황제 뮈드마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사는 그 앞에서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자네 덕분에 천 만명이 살았으이. 내 그 공을 높이사 상을 내리겠어.”
“감사합니다 폐하.”
황제는 웃음기를 지우고 엄숙히 물었다.
“그대는 일평생 짐에게 충성을 바치겠다고 맹세하는가?”
“맹세합니다 폐하.”
“또한 그대는 새로운 먹거리와 농법 개발에 성실히 전념하겠다고 맹세하는가?”
“제 몸과 열정을 아낌없이 바치겠나이다 폐하.”
“일어나라.”
황제는 손을 내밀어 리사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모두를 향해 말했다.
“짐은 일전에 약속한대로, 우리 백성 천만명을 먹여살리며 대기근을 예방한 리사 양에게 백작 작위를 하사함과 동시에 실버론의 영주로 임명하고, 아울러 황실 자문단에도 가입시켜 식량농업정책 자문관으로서 최고의 역량을 발휘하게끔 도울 생각이네. 이의 있는 자 있는가?”
모두가 한 목소리로 외쳤다.
“없습니다 폐하!”
“좋다.”
황제는 리사를 바라보며 엄숙하게 선언했다.
“리사 아스트리드여, 그대를 지금 이 시간부로 실버론의 영주, 웨르타뉴 제국의 백작, 황실 자문단의 식량농업정책 자문관으로 임명하겠다.”
“영광이옵니다 폐하.”
리사는 크게 기뻐하는 한편 속으로는 활활 불타는 황궁의 미래를 떠올렸다.
‘이제야 절반 왔다.’
전직이었던 무명의 연금술사에서 농업 기술 연구관으로 직업을 바꾸며 4년만에 황제로부터 영지와 작위를 하사받는 등 농업 전문가로서 출세가도를 달려온 그녀.
사실 리사의 가슴 깊은 곳에는 세상을 모조리 파괴하고픈 폭력과 광기가 숨을 죽이고 있었다.
“자 여기 있는 모든이에게 손을 흔들어주게.”
“네, 폐하.”
리사가 레이스 장갑을 낀 손을 흔들어보이자 홀안의 문무대신들이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버러지 같은 놈들.’
리사는 웃고 있었지만 눈앞의 인간들이 너무 증오스러웠다.
‘빠른 시일내에 몰살시켜주마.’
그녀에게는 오래전부터 야심차게 준비해온 계획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귀족과 백성에게 자신이 만들어낸 변종 작물을 먹여 체내에 질병을 심겠다는 구상.
섭취하자마자 바로 효력이 있는게 아닌 일정 시간이 지난 후 활동을 시작하는 질병이다.
황실 자문관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최대한 많은 사람을 살해하는게 목적.
‘빨리 완성해줄테니 기다려.’
그녀는 시한폭탄 같은 독성 변종 작물을 개발하는데 대략 1년 정도 걸릴 것으로 내다봤다.
완성 후 전국방방곡곡 널리 퍼뜨리는데 4년 예상.
재배기간 석달.
질병의 체내 잠복기간 대략 3년.
짐작대로라면 사망자들이 쏟아지는 첫번째 웨이브 시기는 빨라도 4년후쯤.
어쩌면 그 이상.
긴 시간을 인내해야한다.
참는게 어렵지 않았다.
전염병이 퍼지듯 하루가 멀다하고 수천명씩 죽게될 미래를 떠올리면 입가에 절로 미소가 드리워지며 힘이 났다.
‘계획이 늦어질수록 더 많은 사람이 죽지. 짜릿해.’
십대 초반부터 간직해온 그녀의 꿈.
오랜 시간 준비해온 그 꿈에 드디어 첫 날개를 다는 이 순간!
그녀는 새삼 각오를 다졌다.
먼 훗날, 제국 인구의 상당수를 몰살시키고 난 이후에는…….
‘나도 기쁜 마음으로 자살하겠어.’
리사 아스트리드.
빼어난 겉모습에 가려진 그녀의 정체는 잔인한 광기가 흘러넘치는 악녀였다.
* * *
지금으로부터 312년전.
화이트 드래곤 나즈레티고라의 레어.
차가운 얼음동굴 속에서 나이 지긋한 그녀의 남편 베스로탄이 이삿짐을 챙기고 있었다.
두 부부는 곧 왕과 여왕의 안식처 협곡으로 가서 농사를 지을 생각이다.
아내의 집에 들려 이삿짐을 챙겨주던 베스로탄은 우연히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투명한 유리병을 발견했다.
“허허, 이게 뭘꼬.”
그는 다른 방에 있던 아내를 불렀다.
나즈레티고라는 현재 임신중이었다.
지난 3년 동안 뱃속에 알을 지니고 있는 그녀.
고령이었던 그녀는 베스로탄을 만난지 수십년만에 간신히 아이를 가질 수 있었다.
“불렀어요?”
나즈레티고라가 만삭의 몸을 이끌고 나타나자 베스로탄이 물었다.
“이 병안에 들은게 무엇이오?”
“잘 모르겠는데?”
나즈레티고라 역시 처음 본다는둥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그러다 무언가 떠올랐는지 미소를 지었다.
“4천년 전엔가 엘프왕에게 선물로 받았던 요라하의 샘물 같은데요?”
“요라하의 샘물?”
“사악한 힘을 물리쳐주는 신성한 물이에요. 그 물에 닿으면 어떠한 악이든 정화할 수 있죠.”
“어떠한 악이든? 설마 마왕도?”
“글쎄요? 그건 해봐야 알겠네요.”
나즈레티고라는 그런 말을 남기고 하던 일을 마저하러 떠났다.
“흠. 신성한 성수인가…….”
홀로 남은 베스로탄은 볼록 튀어나온 뱃살을 긁적이며 붓을 들었다.
“잊어 먹으면 안되니 적어놔야겠어. 시종들도 없고 지금부터라도 정리하는 습관을 길러야지.”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머리를 갸웃거렸다.
“근데 우리 여보가 뭐라고 했더라?”
나이가 드니 기억력이 나쁘다.
몸이 무거운 아내를 다시 부르기도 그렇고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결국 종이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마왕을 죽이는 성수
베스로탄은 대충 지은 이름에 흡족했다.
“멋지고만. 뭔가 있어보여.”
그러면서 산처럼 쌓인 보물더미에 그냥 던져버렸다.
“아무튼 정리 하나 했다. 껄껄.”
그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봤다.
농장으로 들고가야할 짐이 한가득 쌓여있었다.
“저걸 언제 다 들고 가나. 에구 움직이기도 귀찮어. 매일 시종만 시켰는데 이젠 내가 다 해야하는구먼. 쯧.”
* * *
귓가에 세찬 바람소리가 들린다.
리안은 현기증을 느꼈다.
도대체 몇 번이나 텔레포트 했는지 모르겠다.
현재 하늘에서 떨어지는 중이었다.
“정신차려 이 자식아! 우리 죽는다고!”
베개처럼 꽉 붙잡고 있던 마왕을 흔들어보지만 소용없다.
놈은 눈뜨고 죽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죽기직전 덜컥 겁을 집어먹고 도망가려했던건지, 마왕은 텔레포트를 수십차례 남발했다.
그러한 이유로 리안은 1분 사이에 다양한 지역을 짧게 짧게 경험했고, 마지막은 어느 이름 모를 지역의 상공이었다.
“제기랄! 이대로 꼼짝없이 추락사하게 생겼네!”
마왕을 부둥켜 안고 빠른 속도로 떨어지던 그는 최후의 발악으로 도박을 시도했다.
지상에 거의 다다랐을때, 라그레아닐을 올가미로 변신시켜 나무에 걸었다.
결과는 대성공.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렸던 그는 무사히 땅에 착지했다.
반면에 수직낙하한 마왕은 그대로 머리가 터져 끔찍한 모습으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리안은 가까이 다가가서 마왕의 상태를 살폈다.
발로 툭툭 차보면서 생존여부를 확인했다.
“진짜 죽었나?”
라고 말하는 순간 죽은 마왕의 몸에서 빛이 났다.
“!?”
리안은 놀라 뒷걸음질쳤다.
그대로 도망칠까했지만 상황을 보니 위험해보이지 않았다.
근처에서 숨 죽여 지켜보는 가운데 다행히도 마왕의 몸은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피부가 녹으며 드러난 뼈는 타고 남은 재처럼 공기중으로 흩뿌려지며 사라졌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 마왕이 누워있던 자리에 노란 구체 하나만이 둥둥 떠있었다.
“저건 뭐지?”
리안은 가까이 다가가 영롱한 빛을 발산하는 구체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아름다워……”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그때, 구체는 갑자기 리안의 가슴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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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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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 세진 것도 아니고 초능력을 부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몸이 아픈 것도 아니고……
“어디로 갔지?”
아무 이상이 없다보니 방금전 그 구체가 자신의 몸속에 들어왔는지 안들어왔는지 헷갈릴 정도다.
“분명 들어왔던 것 같은데……”
문득 바닥에 떨어져있는 목걸이가 시선에 들어왔다.
금으로 만들어진 가느다란줄에 기하학적 문양의 동그랗고 작은 메달이 달려 있었다.
리안은 그걸 주워들고 거리낌없이 목에 걸었다.
“좋아보이네.”
마왕이 쓰던거니 비싼 아티팩트가 아닐까.
아무 생각없이 목에 걸고 길을 떠났다.
우선 이곳이 어디인지부터 파악하는게 먼저다.
날이 저물고 있는 숲속.
자신이 살던 대협곡에서 본적 없는 식물들이 주변에 많았다.
“불안하게시리 경치가 왜 이러지?”
리안은 나무와 수풀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오드리아의 가르침을 받아 세계 지도 및 세상 대부분의 식물종을 달달 외우고 있었기에 주변 환경을 보고 지역의 위치를 대충 짐작하는 수준까지 도달해 있었다.
같은종이라도 지역마다 색이 다르고 모양도 조금씩 차이나기 마련이다.
저지대, 고산지대, 적도, 극지방, 툰드라, 열대우림, 습한 곳, 건조한 곳 등등 기온과 일조량, 수분등에 의해 식물의 모양이 달라진다.
그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리안은 아주 놀랍고 절망적인 정보를 얻어냈다.
“이럴수가.”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농담이지……?”
숲속의 식물들은 그가 살던 대협곡의 정반대편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종들이었다.
즉, 지구로 치자면 한국의 정반대편인 아르헨티나에 왔다는 소리.
자신이 서 있는 이곳은 오드리아의 입과 책으로만 전해듣던 웨르타뉴 제국이려나?
“마왕 이 처죽일새끼!”
리안은 땅바닥을 치며 욕설을 퍼부었다.
“면상에 오줌이라도 싸갈길걸!”
* * *
리안에게 뜻하지 않게 인생의 목표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빨리 큰 돈을 벌어 오드리아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자는 꿈!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공주님은 날 찾기 힘드실거야. 그러니 내가 찾아가는 수 밖에.”
여기서 집까지 돌아가는데 경비가 많이 들테니 당장 닥치는대로 아무 일이나 해야했다.
“뭘로 돈 벌지? 농사를 짓자니 땅이 없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데.”
한숨을 풀풀 내쉬며 생각에 잠긴 사이, 날이 완전히 저물어 적당한 장소를 찾아 드러누웠다.
낙엽을 깔고 누워있자니 등이 시렵고 집 생각이 간절히 났다.
“공주님 보고 싶어……”
오드리아의 따스한 웃음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린다.
“슬프고 불안해서 오늘밤은 잠이 안올…… 드르렁, 쿠울……”
순식간에 곯아떨어졌다.
한밤중에 산짐승이 다녀간것도 모를 정도로 단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푹 자고 일어났더니 아주 상쾌했다.
“어우 간만에 늦잠자니까 개운한데?”
깍지를 끼고 쭉 기지개를 켰다.
농장에 있을때는 오드리아가 오는 시간에 맞춰 아침 일찍 일어나야했는데, 아무 신경을 안쓰고 오래 잤더니 피곤이 조금씩 남아있던 다른 날에 비해 정신이 맑고 몸도 가벼웠다.
“헛둘, 헛둘.”
상쾌한 표정으로 스트레칭을 하던 리안은 금세 울상을 지었다.
“공주님 보고 싶어……”
꼬르륵.
고요한 숲에 울려퍼질 정도로 뱃속에서 소리가 크게 났다.
“뭐 먹을거 없나.”
리안은 배를 어루만지며 주변을 기웃거렸다.
식물에 대해 잘 알았기에 숲은 그의 먹거리 시장이나 다름없었다.
신선한 공기.
귀신이 튀어나올 것처럼 음산한 숲.
사방에 아침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버섯과 산나물을 채취해서 생으로 입에 쑤셔넣었다.
쓰고 맛은 없었지만 몸을 생각해서 억지로 삼켰다.
움직여야 하니까.
그렇게 먹은 것 같지도 않은 식사를 끝마친 그는 곧바로 길을 떠났다.
우선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야 돈이든 떡이든 나오지 않겠는가.
“흐흥, 흥~”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숲을 나오자 포도밭이 그를 반겼다.
저 멀리 촌락도 보인다.
“나는야 럭키가이.”
오늘 내에 민가를 못찾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는데 리안은 한시름 덜었다며 웃음을 지었다.
아침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해 그런지 포도밭을 두고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냄새라도 맡아볼 생각으로 그는 포도밭으로 들어가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몰래 따먹을거 없나.”
그런데 나무에 달린 포도들이 참 맛없게 생겼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이 왜 이렇게 작지? 열매도 많이 안열렸고.”
쪼그리고 앉아서 흙을 만져보았다.
“질 나빠 보이네.”
킁킁.
흙에서 약간 쉰 냄새까지 났다.
“뭔가 이상한데.”
라그레아닐을 호미로 만들어 땅을 파보았다.
그때였다.
“너 누구야!”
난데없이 고함 소리가 들리길래 리안은 라그레아닐을 원래 모습으로 되돌려 왼팔에 감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가 난 방향을 쳐다봤다.
밀집모자를 쓴 사내 다섯명이 그에게 달려오는중이었다.
그들은 빠르게 리안을 둘러싸며 손에 쥐고있던 농기구로 위협을 가했다.
“이놈 봐라? 생긴게 우리랑 달라. 너 악마지!”
“잉잉 그려그려. 악마가 틀림없는 겨.”
“내가 악마라고요?”
리안은 황당한 나머지 헛웃음을 터뜨렸다.
주근깨 많은 소년이 낫으로 위협하며 외쳤다.
“이놈 옷 입은거 봐요! 피 묻은 허름한 티셔츠에 팬티만 입고 있어요! 어쩌면 무덤에서 기어나온 언데드일지도 몰라요!”
리안은 소년을 향해 짓궂게 장난을 쳤다.
“크아~! 잡아먹어주마!”
“허거걱!”
좀비 흉내를 내자 사람들이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쳤다.
“저, 저봐! 저놈 악마여!”
“찌, 찌를까?!”
“나 악마 아닙니다!”
리안은 양손을 펼쳐보이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오해들을 하고 계신거 같은데 나 사람입니다.”
“거짓말 마! 사람이 왜 그러고 있어! 어디출신이야?”
“그냥 멀리서 왔어요. 조난당했다고 생각해주세요.”
“조난?”
“저것봐! 대답 못하는 것봐! 무슨 꿍꿍이가 있으니까 말을 못하는거제!”
리안은 어째서 사람들이 지나친 경계심을 보이는지 의아했다.
자신이 무단으로 밭에 들어온건 분명 잘못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포도를 훔쳐먹은 것도 아니고 말로 몇마디 혼내고 끝내면 될 일 아닌가?
지금처럼 농기구로 위협당하는 상황은 조금 부당하게 느껴졌다.
리안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을 꺼냈다.
“마을에 촌장님 계시죠? 촌장님한테 갑시다. 가서 자세히 말할게요.”
어차피 눈앞에 보이는 마을에서 오늘 하루 묵기로 점찍어둔 상황이다.
이 마을에서 쫓겨나면 다음 마을을 찾는데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일.
촌장과 만나 오해를 풀고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들어가며 밥이라도 얻어먹고 싶었다.
“그게 좋겠어요! 이놈 말대로 일단 우리 아버지한테 데려가자구요!”
“그려, 촌장님도 보시는게 좋겠어. 이 사람이 밭에다 독을 뿌려놨을지도 모르니께.”
주근깨 많은 소년이 앞장서고 리안은 양손을 머리위로 들어올린 채 그 뒤를 따랐다.
다른 사람들은 리안의 등을 향해 농기구를 겨누면서 뒤쫓아왔다.
졸지에 끌려가는 모양새가 되었지만 리안은 느긋했다.
이세계에 온지 벌써 4년.
지난 4년동안 대협곡에서만 갇혀 살다시피 했기 때문에 현재 그의 눈에는 비치는 모든 광경이 그저 재밌고 신기할 따름이었다.
서양인처럼 생긴 사람들과 말을 섞으며 반응을 구경하는게 즐거웠다.
“근데 꼬마야. 내 말이 잘 들려?”
앞서 걷는 소년에게 묻자 소년이 뒤를 돌아보며 시큰둥하게 쳐다봤다.
“날 귀머거리로 아냐?”
“내가 하는 말이 머리로 이해되냐고. 니네 나라말 쓰는 것 같냐는 소리야.”
“니가 쓰는 말이 우리나라 말이지 우리나라 말이 아니면 쥐새끼 언어야?”
“그래?”
리안은 피식 웃으며 대화를 끝냈다.
현재 그가 쓰는 말은 용언.
누구도 그가 다른 언어를 쓰고 있음을 알아채지 못한듯 싶었다
이윽고 마을에 진입하자 본인들과 다르게 생긴 리안의 외모와 옷차림이 주민들의 이목을 끌었다.
순박하게 생긴 사람들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리안을 신기하게 쳐다봤다.
“어디서 온 사람이래?”
“저봐봐, 키 크고 덩치도 좋아보이는게 일은 잘하게 생겼구먼.”
“마족의 패잔병인가?”
촌장은 집앞에서 어떤 젊은 여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중이었다.
“피터 씨는 언제 데려올거야?”
“조만간 데려온다니까. 거 자꾸 캐묻네. 나 못 믿어?”
“믿든 안믿든 우리 마을과 거래하는 사람인데 얼굴 한번은 비춰야지. 빠른 시일내에 술 한잔 하자고 전해.”
“걱정마, 아저씨. 똑바로 전할테니까.”
“또 핑계대면서 못 온다고 하지 말고.”
“알아, 알아. 알았다고. 자 여기 포도값이나 받아.”
주근깨 소년은 개선장군 마냥 자랑스럽게 외쳤다.
“아버지! 우리 포도밭에서 이상한 짓을 하고 있던 놈을 잡아왔어요! 잘했죠!”
촌장과 여자의 시선이 동시에 소년을 쳐다봤다가 그 뒤에서 만세 자세로 서 있는 리안에게 향했다.
“무슨 일이냐?”
촌장이 묻자 소년의 일행중 연장자가 나서서 대답했다.
“포도밭에서 수상한 짓을 하고 있길래 붙잡았습니다.”
“뭔 수상한 짓?”
50대로 보이는 촌장의 시선이 리안을 마주봤다.
“우리 밭에서 뭐하고 있었소?”
벌 받는 자세처럼 손들고 있던 리안은 두 팔을 내리고 어깨를 주물렀다.
“밭 상태가 너무 안좋아보이길래 무슨 일인가 싶어서 좀 살펴봤을뿐입니다.”
“그런게 어제 오늘 일인가. 다 마족들 때문이지.”
젊은 여자가 웃는 얼굴로 끼어들었다.
“와 이 사람봐. 몸매 좋다.”
여자의 노골적인 시선이 리안의 전신을 훑는다.
단발머리를 연두색으로 물들인 젊은 여자.
여행자 차림의 행색으로 보아 이 마을 사람은 아닌듯 싶었다.
쾌활하면서도 섹시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간만에 눈이 호강 하네. 근데 변태인가? 왜 팬티만 입고 있어? 피 묻은 티셔츠는 또 뭐고?”
호기심 가득한 여자의 시선이 리안의 눈을 바라봤으나 리안의 눈은 촌장에게 가있었다.
“지나가다 밭을 구경했을뿐 의심 받을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밭을 잠깐 둘러보다가 이 마을에 들려서 촌장님을 찾아뵐 생각이었고요.”
“나를?”
“배고파서 밥이나 한끼 얻어 먹으며 담소나 나누고 싶었습니다.”
촌장은 가만히 생각하는가 싶더니 다른 이를 쳐다봤다.
“밭에 뭔가 이상한 점은 없었느냐?”
“꼼꼼이 둘러봤는데 아직은 아무 이상 없습니다.”
주근깨 소년이 외쳤다.
“아직 모르는 일이에요! 일단 가둬놓고 기다려봐요 아버지!”
“기다려 보거라.”
촌장은 뒷짐을 지며 여자를 쳐다봤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이 자가 평범한 사람 같아?”
“평범하진 않네.”
젊은 여자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보이는 촌장에게 거리낌없이 반말을 쓰면서 리안을 향해 실실 웃어댔다.
“그 어떤 남자보다도 섹시해.”
“농담하지 말고. 사람들을 많이 만나봤으니 상인의 눈으로 봐달라는게야.”
“실은 나도 잘 모르겠어. 근데 차림새만 보면 수상하긴 해.”
그 다음 이어진 여자의 말은 황당했다.
“혹시 부끄러움을 모르는 마족이 아닐까? 속옷 차림으로 여성들을 유혹하는 인큐버스 아냐?”
“올해 들었던 말중에 가장 미친 소리로군.”
리안은 기막힌 나머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여자는 뭐가 즐거운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촌장에게 말했다.
“이 마을 일이니까 난 몰라 알아서 해. 아무튼 사람인지 악마인지 확신이 잘 안서네. 일단 가둬놔보던지.”
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지켜보는게 좋을 것 같다.”
그는 리안을 마주보았다.
“험하게 다루지 않을테니 며칠만 갇혀 있어주게. 밭에 이상한 변화가 생기면 책임을 묻고 만약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풀어주겠네.”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아무짓도 안했으니까요.”
리안이 결백을 주장했으나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외부인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조차 그를 수상히 여기는 상황이었다.
“당신도 알다시피 요즘 어디를 가도 외지인한테 인심이 흉흉해. 다 마족 때문이야. 며칠만 참아.”
리안도 완강히 저항하지 않았다.
굳이 그렇게까지할 필요성을 못느꼈기 때문이다.
현재 빈털털이인 그는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장소라면 어디든 괜찮았고 조용히 생각할 공간이 필요했다.
‘며칠 공짜밥 먹으면서 앞으로 뭐로 돈벌지 구상이나 해야겠어.’
마음만 먹으면 이딴 촌구석 마을이야 언제든지 탈출이 가능했다.
그에겐 라그레아닐이 있고, 그와 더불어 황소 한 마리를 어깨에 짊어지고 가뿐히 뛰어다닐 수 있을 정도의 괴력까지 소유하고 있었다.
평범한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괴력이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잘 모른다.
오드리아와 함께 살면서 강해진 것으로 추측만할뿐 자세히는 알 수 없었다.
그동안 오드리아가 몰래몰래 자신에게 무슨 영약 같은 것을 먹이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아무튼 리안은 힘이 장사였다.
마치 드래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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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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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주변에 멈춰있는 짐마차와 짐칸에 실린 덜익은 포도자루가 눈에 띄었다.
‘행상인인가……?’
이후 사내들에게 붙들려 가축우리로 사용하던 헛간에 갇혔다.
바닥에는 지푸라기가 깔려있었다.
“탈출할 생각은 꿈도 꾸지마!”
주근깨 소년은 골목대장처럼 으스대면서 자리를 떠났다.
리안한테 겁을 준답시고 나름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아직 어려보여서 그런지 전혀 무섭지 않고 귀엽기만했다.
헛간 밖에는 중년사내 두 명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입구에는 문이 없었고 사람 허리 높이의 나무 울타리로 엉성하게 막아놓았을 뿐이다.
그 때문에 밖의 전경이 시원스레 잘 보였다.
“밥은 주죠?”
리안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며 묻자 보초 두 명은 화를 내기는 커녕 순순히 대답했다.
“그럼, 이따주지.”
“언제 줘요?”
“끼니때 알아서 줄거여. 잡담하면 혼나니께 저리가 있어.”
“저는 무조건 양 많이요. 많이 먹으니까 많이 줘요.”
“시끄러. 어서 들어가.”
리안은 꼬르륵 거리는 배를 어루만지며 안쪽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반찬은 뭐가 나오려나.”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며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는 와중에 문득 사내들의 잡담소리가 들려왔다.
“내 텃밭 말여. 뭔놈의 벌레가 그렇게 생기는가 모르겄어. 아니 이놈들이 알을 수천개나 싸질러놨나 잡아도 잡아도 계속 생기네 글쎄.”
“배추벌레?
“아녀. 그놈 말고 노랗고 파리처럼 생긴 놈 있어.”
“잎굴파리요?”
불쑥 목소리가 들리자 사내들은 뒤를 돌아봤다.
어느새 리안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약치면 금방 잡히는데.”
“무슨 약?”
“약 같은건 만드는 법도 모르고 살래도 비싸서 못 사. 영주님이 나눠 주시면 모를까.”
“집에서도 만들 수 있어요. 되게 간단한데.”
“그려?”
사내 둘은 귀가 솔깃했는지 눈을 빛내며 리안을 바라봤다.
“알면 좀 알려주바.”
“뭔데? 뭔데?”
“아까 여기 오다 보니까 마녀갈갈이 풀이 보이더라구요. 그 풀에 독성이 있어서 해충 잡는데 쓰면 아주 좋아요.”
리안은 친절히 제조법을 알려주었다.
“마녀갈갈이 풀에 아무 똥이나 섞어서 잘게 빻아가지고 술통에 하루 정도 담가놓으세요. 다음날 그 물을 골고루 텃밭에 뿌려주면 잎이 건강해지고 벌레도 없어질 겁니다.”
텃밭에 벌레가 많아 고민했던 사내는 그날 저녁 리안이 알려준대로 그대로 따라했다.
그리고 이틀 후.
사내는 크게 기뻐하며 리안을 찾아왔다.
“자네가 말해준대로 하니께 정말로 벌레가 없어지더구먼! 대단혀! 천재여 천재!”
그때부터 리안은 보초를 서던 사내들과 친해졌다.
사내들의 텃밭에 무슨 문제가 있으면 리안은 막힘없이 조언을 해주었고, 그가 말해준대로 따라하기만 하면 문제가 거짓말처럼 해결됐다.
어떤 문제든 리안에게 물어보면 직빵이었다.
“에, 그러니까 우리 마을이 말이여. 웨르타뉴 제국에 속해있다 이거여. 그리고 현재 제국을 통치하시는 분은……”
리안에게 고마움을 느낀 사내들은 자처해서 편의도 봐주었다.
집에서 가져온 음식을 몰래 나눠주기도 하고 심지어 리안이 밖으로 외출하고 싶다고 하면 몰래 내보내주기까지했다.
* * *
헛간에 갇힌지 어느덧 사흘째.
오늘도 한가하게 지푸라기 위에 누워 있던 리안은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오드리아와 강제로 헤어지던날, 그녀가 수줍어하며 무슨 말을 하려했던건지 줄곧 신경쓰였다.
‘그러니까 내 말은, 이곳에 너를 바라봐줄 인간 여자도 없고 사정이 그러하니……’
리안은 고추를 긁적이며 진지하게 고민해보았다.
“사귀자는 고백이 아니었을까? 설마 청혼……!?”
오드리아와 결혼하는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입이 귀에 걸리며 절로 행복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웃음도 잠시뿐.
그날, 그녀의 매정한 말이 뇌리에 스쳤다.
‘인간은 굉장히 계산적이고 박정한 동물이라고 들었다. 나는 너를 좋게 생각하지만 실은 마음 한켠에선 신뢰하지 못하고 있지. 언젠가 나를 실망시키리라 믿으며 전부터 때가 되면 떠나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입술사이를 비집고 한숨이 흘러나왔다.
“진심이 아닌걸 알지만…… 날 위해서 그랬다는 것도 알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아프네……”
사람의 기억이란, 시간이 지날수록 자세한 정황은 점점 소실되고 단순화 되어 뼈 아팠던 것만 남는다.
“혹시 그 고백도 고백이 아니라 다른 얘기였을려나…… 하긴 언젠가 내 똥싸는 모습도 보신분인데 나한테 무슨 연애 감정을 느끼시겠어.”
오래전 절벽 아래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피로 범벅된 네 두 다리를 보고 참 맛있겠다는 생각을 했어. 지금 기운이 없기에 망정이지 만약 기운이 넘쳐 흘렀으면 충동을 참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나도 정말…… 상황이 이런데도 본능에 충실해 바보같이……’
리안은 그날 오드리아가 자신과 다른 존재라는걸 실감했다.
“맞아, 맞아. 공주님은 인간다우면서도 사고방식이 인간과 전혀 달라. 따라서 그날 나한테 고백이나 청혼을 하려고 했던게 아니라 분명 다른 얘기를 하시려 했던거겠지. 그러니 김칫국 마시지말자 김리안. 공주님처럼 위대하고 멋지신 스승님이 나 따위랑 뭐하러 결혼하겠어.”
그러한 생각이 드는 한편, 마왕을 뒤에서 칼로 찔렀을때 그녀가 뭐라고 소리쳤는지도 궁금했다.
쓰러져 있던 오드리아가 기쁜 얼굴로 무언가 외쳤던 것 같은데 당시 리안은 너무 떨리고 흥분한 나머지 그녀의 말을 제대로 주워듣지 못했다.
“그때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 못들어서 안타깝네.”
어쨌거나 오드리아와 함께 지냈던 지난 4년은 정말로 즐겁고 꿈만 같았다.
그러니 반드시 돌아가리라.
왕과 여왕의 안식처 농장까지 돌아가는 길이 얼마나 험난한 여정이 될지 모르겠지만, 오드리아를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기어코 해내고 말리라!
“돈! 돈! 돈! 돈이 필요해!”
주먹을 불끈 쥐며 열심히 돈 벌자고 각오를 다지는 그때.
저 멀리 까만 밤하늘 아래, 춤추는 불빛들이 보였다.
도깨비불 마냥 노란 불빛 네 개가 허공에서 떠다녔다.
“뭐지?”
헛간 입구에는 사내 한 명이 보초를 서며 졸고 있었다.
리안은 즉시 달려가서 사내를 흔들어 깨웠다.
“아저씨! 아저씨!”
“으음…… 거기야 여보옹…… 으흐흐……”
뭔 꿈을 꾸는지 침을 흘리며 실실 웃는 그의 뺨을 찰싹 때렸다.
“아얏! 뭐, 뭐여!?”
정신이 번쩍 든 그가 돌아보자 리안은 팔을 쭉 뻗어 근처의 언덕을 가리켰다.
“저거봐요, 저거.”
“뭐?”
“저기 불빛 보이죠? 저거 뭐예요?”
사내가 빤히 쳐다보더니 이내 갸우뚱거린다.
“뭔 불빛 말이여? 안보이는데?”
“정말 안보여요? 저기 천천히 움직이는게 안보여?”
“아무것도 없이 시커멓기만한디 뭔소리여? 하늘에 별밖에 없잖여.”
“불빛 네 개가 진짜 안보여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하고 있네. 자꾸 뭔소리를 하는겨. 귀신 씌였어?”
“아오 답답해. 그냥 주무세요.”
“너도 빨리 자. 잠 못자서 헛것이 보이나벼.”
벽에 등을 기대고 앉은 채 연신 하품을 하던 사내는 금세 곯아떨어졌다.
리안은 헛간 밖으로 걸어나왔다.
“가서 확인해봐야겠어.”
이세계에 오고난 후 열심히 농사지은 덕분에 그의 몸은 건장해졌고 담력도 커져 있었다.
자신의 눈에는 잘 보이건만 다른 사람의 눈에 안보이는 저 불빛의 정체가 무엇인지 호기심이 일었다.
‘살짝 가서 보고만 와야지.’
리안은 빠르게 마을을 벗어나 가물거리는 불빛을 쫓아갔다.
이윽고 따라잡은 불빛.
불빛의 정체는 짐마차의 지붕에 달아놓은 등불이었다.
언덕을 오르며 느리게 어딘가로 향하는 짐마차.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리안은 눈을 부볐다.
희한한 광경을 봐서 잘못본줄 알았다.
마차를 끄는게 말이 아닌 통통하고 뿔달린 여자아이 한명이었던 것이다.
엉덩이에는 짐승의 꼬리가 달려있었다.
‘힘이 센 이종족 여자애를 데려다 쓰는건가……’
마부석을 쳐다봤다.
그곳에는 검은옷을 입고 머리에 둥근 모자를 쓴 빼쩍 마른 사내가 앉아있었다.
마차 지붕에 걸린 등불이 대롱대롱 흔들릴때마다 언뜻언뜻 얼굴의 피부색이 비쳤는데,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으나 분명한 것은 살색이 아니었다.
‘남색?’
저들의 정체가 궁금하긴 했으나 자세히 알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그저 잠깐의 신기한 구경거리일뿐.
이곳은 마법과 괴물이 난무하는 판타지 세상이다.
한밤중에 음산한 기운을 풍기는 마차가 돌아다닌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거니와 괜히 건드렸다가 무슨 고초를 겪을지 모르는 일.
‘너는 니 갈길 가라 나는 내 갈길 간다.’
라는 생각으로 결국 관심을 접고 돌아서던 찰나였다.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것인지 눈앞에 검은옷을 입은 마부가 서있었다.
“제가 보이십니까?”
“!?”
“반응을 보아하니 보이시나보군요.”
마부는 천연덕스럽게 말하며 턱을 어루만졌다.
“흐음, 인간이 저를 알아볼줄이야. 놀랍군요.”
리안이야말로 내심 크게 놀랐다.
조금전까지 마부석에 앉아있던 사내가 순간이동하듯 눈 깜짝할 사이에 나타났으니까.
게다가 자신이 엿보고 있는건 또 어떻게 알았을까?
외모도 남달랐다.
짧고 뾰족한 귀에 어두운 피부색.
길고 갸름한 얼굴을 가진 중년의 사내.
눈앞의 상대가 비범한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침착해. 당황한 모습을 보여봐야 이로울게 없어.’
리안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인간인가?”
“아참 소개가 늦었군요. 죄송합니다.”
마부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저는 마족 출신 어둠의 상인 라카제트 라고 합니다.”
“상인? 뭘 팔지?”
“한번 보시겠습니까?”
리안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라카제트는 자신을 따라오라며 그를 마차로 데리고 갔다.
전혀 위협적이지 않고 의외로 친절한 마족이었다.
언덕에 세워져 있던 마차에는 통통한 여자애가 홀로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애는 무감정한 눈빛으로 정면을 바라본채 우두커니 서있기만했다.
리안이 다가와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이 여자애는 누구지?”
“우마족 소녀입니다.”
우마족?
소를 뜻하나?
“마족들은 말 대신 우마족 소녀로 마차를 끄나?”
“저만 특별한 경우죠. 다 그런건 아닙니다.”
리안은 우마족 소녀의 얼굴에 대고 손을 흔들어봤으나 그녀는 정면을 바라보기만 할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왜 반응이 없지?”
“원래 우마족들은 둔해서 본인이 좋아하는 것 아니면 관심을 안가집니다.”
라카제트는 짐칸에 실린 커다란 서랍함을 탁탁치며 말을 이었다.
“찾으시는게 무엇인지 말씀해주십시오. 노예, 장비, 제물로 바칠 피 등등 웬만한건 다 있습니다.”
“그 전에 하나 질문.”
“네, 무엇이든 물어보시지요.”
“아까 나보고 보이냐고 물었는데, 당신은 인간한테 안보여?”
라카제트가 씩 웃는다.
“저를 볼 수 있는건 고위 마족과 천사들뿐입니다.”
리안은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아니 잠깐. 고위 마족 아니면 천사? 그럼 나는 뭔데 쟤가 보이지……?’
그때 죽은 마왕에게서 솟구쳐나온 노란 구체가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자신의 몸속으로 흡수된 느낌을 받았던 그 구체가.
‘설마 그것 때문에 나도 마족이 된건가?’
아니.
안보이는 마족을 볼 수 있게된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을때, 라카제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아주 흥미로운 분입니다. 제 눈썰미가 정확하다면 절대 놓쳐선 안되는 고객님이시죠.”
“나한테 뭐가 느껴지는데?”
“글쎄요. 무궁무진한 힘이 느껴진달까요. 물건을 많이 팔아주실듯한 기분 좋은 예감을 받았습니다.”
“난 한 푼도 없어. 그지다.”
“인간이 쓰는 화폐를 말씀하시는거라면 안심하십시오. 저는 대금으로 인간의 화폐나 보석따위를 받지 않습니다.”
“그럼 뭘 받는데?”
라카제트가 음산한 미소를 띄웠다.
“죽은자의 영혼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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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회
*경고* 지금 보고 계신 화면은, 조아라에서 지원하는 정상적인 경로의 뷰어가 아닙니다.해당 방식으로 조아라에서 제공하는 작품을 무단으로 추출하는 것에 사용하거나 협조할 경우, 저작권법에 위배되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되실 수 있으니,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작품감상을 부탁드립니다.(5년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 부과)----------------------------------------밭농사 준비, 농지 구매의 시간그 말을 듣자마자 돈이 없는 것보다 더 골치아팠다.
누군가를 죽여 영혼을 수집한다는건 애당초 하기도 싫고 꿈도 못꿔봤으니까.
게다가 오드리아와 약속까지 했다.
평생 밭농사만 짓겠다고.
‘네가 라그레아닐을 이용해 칼밥을 먹고살 생각만 없으면 무엇이든 괜찮아.’
리안도 그녀와의 약속을 끝까지 지킬 생각이었다.
“혹시 채소나 과일 같은건 안받나?”
“흐음, 채소 과일이라……”
“잠깐. 그 전에 내가 원하는게 있는지 봐야겠어.”
“찾으시는게 뭔지 말씀만 해주십시오. 바로 찾아드리겠습니다. 참고로 요즘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진귀한 무기와 방어구를 많이 가지고 있습지요.”
리안은 라카제트의 말을 흘려들었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하나뿐!
“날 여기서 정반대편 지역에 있는 왕과 여왕의 안식처 농장이라는 곳으로 데려다 줄 수 있어?”
“워프 말씀이십니까?”
라카제트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제 능력 밖의 일입니다. 저는 손으로 쥘 수 있는 물건만 팔뿐입니다.”
“아쉽군.”
리안은 혀를 찼다.
그러다 재차 무언가 떠오른듯 다시 고개를 들었다.
“땅은? 나한테 땅을 팔 수 있나?”
“마가 득실거리는 어둠의 땅을 원하십니까?”
“사양할게.”
“그렇다면 인간의 땅을 말씀하시는겁니까?”
“응.”
“이런이런 안타깝군요. 그것 또한 어려운 일입니다. 선한 기운이 흘러넘치는 인간의 땅은 제 손길이 닿을 수 없습니다.”
리안은 얼굴을 찌푸렸다.
“할 수 있는게 없잖아? 이봐 아저씨. 그래 가지고 장사되겠어?”
라카제트는 싱긋 웃어보였다.
그는 마차의 짐칸에 실린 서랍장을 돌아봤다.
오래된 약방의 전통 약장과 비슷하게 생긴 직사각형 모양의 서랍장엔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서랍이 많았다.
그중 하나를 열더니 안에 있던 물건을 밖으로 휙 내던졌다.
펑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자욱했던 연기가 순식간에 사라지자 알몸의 여엘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 여긴 어디죠?”
눈부신 나신을 자랑하는 여엘프의 겁먹은 목소리.
그녀는 불안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면서 잔뜩 움츠러 들었다.
“사, 살려주세요!”
“최근 마왕군이 열심히 싸워주는 덕분에 엘프 노예 구하기가 발에 채일 정도로 수월합니다.”
리안은 생애 최초로 엘프를 목격했다는 놀라움에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라카제트를 쳐다봤다.
“어쩌라고?”
“엘프 노예엔 관심이 없으십니까? 그렇다면 이런건 어떠신지요?”
그는 다른 서랍을 열더니 또다시 휙 내던졌다.
펑소리가 나고 연기가 사라지자 보석이 박힌 화려한 도끼가 나타났다.
“종족을 가리지 않고 수백만을 학살한 영웅이 쓰던 도끼입니다. 외관이 참으로 훌륭하지 않습니까?”
리안의 눈은 발가벗은 엘프의 몸에만 박혀 있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면서 물었다.
“살 생각은 없고 혹시나해서 물어보는건데 엘프는 얼마지?”
“영혼 천개입니다. 저 계집은 혈통이 좋거든요.”
더럽게 많이 받아쳐먹네.
리안은 속으로 그리 생각했다.
“메뚜기나 개미의 영혼도 괜찮아?”
“워워워. 죽었을때 누군가 슬퍼하거나 기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가치있는 영혼만 취급합니다. 그 감정을 공유하는 자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해당 영혼의 가치는 단순 1개가 아닌 열개, 백개씩으로 취급되기도 하고요.”
“메뚜기도 소중한 생명이야.”
“제게는 무가치한 생명이죠. ”
“짐승은?”
“그 역시 무가치합니다.”
“가차없네. 그럼 괴물은 가능?”
“인간과 괴물의 영혼은 특별한 가치가 있죠.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리안은 뒷목을 긁적였다.
‘얘를 잘 이용하면 희귀한 물건들을 구입할 수 있을듯 한데……’
자칭 어둠의 상인이라는 라카제트.
그와 인연을 쌓고 싶건만 영혼을 모으기 위해 누군가를 죽일일은 평생 없을것 같다.
‘어쩌지. 어떡하면 좋을까.’
그가 골몰히 생각하는 동안 라카제트는 여엘프와 도끼를 도로 서랍장 속으로 집어넣었다.
리안은 다시 처음 얘기로 돌아왔다.
“곡식이나 채소는 안받아?”
“음……”
잠시 고민하던 라카제트가 미소를 짓고 마주봤다.
“평소라면 받지 않겠지만 봐드리도록 하죠. 당신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고객님이니까요.”
그 말에 리안은 불쑥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마왕을 죽였다는걸 눈치챈건가?’
라카제트는 한점 흐트러짐 없이 서 있는 우마족 소녀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때마침 저 아이의 식비가 감당이 안되던 참이었습니다. 작물류를 가져오시면 저 아이의 먹이로 쓰도록 하죠.”
“다행이군. 가격은 어떻게 쳐줄거야? 영혼 한 개에 작물양은 얼마?”
“작물의 시세는 저 아이가 먹어보고 그때그때 판단하는 것으로 하는게 어떠신지요? 먹고 만족한 표정을 지으면 후하게 쳐드리겠습니다.”
“그런 방법이면 결국 당신 마음대로 가격을 정하겠다는거잖아. 저 소녀의 주인은 당신이라고.”
“그렇지 않습니다.”
라카제트가 말했다.
“우마족은 근면 성실하고 말이 많지 않으며 온순하지만 자신의 성격과 부합하지 않는 행위를 시키면 날카롭게 잘라버리는 고집도 갖고 있습니다. 저 아이에게 부정한 일을시키면 제 아무리 제 말이라할지라도 듣지 않을 겁니다. 우직한 뚝심이 있다고나 할까요?”
그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더욱이 상인은 신용으로 장사합니다. 의심받을 짓을 하여 특별한 고객님을 잃을순 없죠.”
리안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내 알았다는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영혼 한 개에 작물양이 어느 정도선일지 기준점이라도 잡아줘. 그래야 나도 준비하기가 쉽지.”
“음…… 종류와 상관없이 일단 200KG으로 정하겠습니다.”
“200KG!? 그렇게나 많이?”
“영혼의 가치에 비하면 싼게 아닐까요? 참고로 저 아이는 하루에 1톤을 먹습니다.”
“와우.”
“저 아이가 맛있어하면 영혼의 시세가 200KG 보다 낮아지는 것이고 맛이 없다고 하면 올리는 것으로 하죠.”
부당한 거래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시점에서 땅이 없어 작물 200KG을 생산해내는게 버겁게 느껴지지만 나중에 일이 잘되서 대지주가 된다면야 그땐 사정이 달라진다.
리안은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합시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혹시 특별히 구해다줬으면 하는 물품이 있으십니까?”
리안에게는 칼이니 방패니 노예니 다 필요없고 그가 바라는건 오직 하나였다.
“희귀한 씨앗이라든지 신비한 힘이 담긴 농기구라든지 뭐든 좋으니 농사에 도움이 되는 것들만 구해다줘.”
“오오, 놀랍군요.”
예상밖의 답변이었는지 라카제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는다.
“저는 세계 정복 같은 거창한 계획이 있으신줄 알았는데.”
“관심없어.”
“욕심이 없으신 분 같습니다. 좌우간 앞으로 볼 일이 많아질듯 하니 부르기 좋도록 존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김리안이다.”
“생소한 방식의 이름짓기로군요.”
“멀리서 왔으니까.”
리안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후 물었다.
“나중에 당신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하지?”
“불러주시면 제가 찾아오겠습니다.”
라카제트는 잠깐 기다리라면서 마차의 짐칸을 뒤적거리더니 잠시 후 붉은 보석이 박혀있는 반지를 내밀었다.
“반드시 마가 낀 땅위에 서서 이걸 손가락에 끼시고 속으로 제 이름을 외쳐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마가 낀 땅이라니?”
“지금 이곳처럼 마물의 기운이 흘러넘치는 땅을 말하는 것입니다.”
“꼭 그래야해? 다른 방법은?”
“저는 선한 기운이 존재하는 땅에는 가지 못합니다. 더럽고, 천박하고, 저주와 슬픔이 깃든 황폐한 땅에만 발을 디딜 수 있지요. 그런 고로 악의 기운이 걷힌 땅이라든지 신전이 세워진 인간의 도시에는 제가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리안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럼 우리 볼 일이 없겠네. 내가 마물들이 사는 땅에 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근데 딱히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리안은 시선을 들어 라카제트의 눈을 마주봤다.
“무슨 방법이 있는데?”
“이런 방법이 있지요.”
라카제트는 씩 웃으면서 두 손을 사용해 탁탁 떡치는 소리를 자아냈다.
“퇴폐적이고 음란한 기운이 남아있는 공간에서 절 부르시면 언제든지 찾아뵐 수 있답니다. 남녀가 막 거사를 치른 후끈한 방안이라든지 실외라든지 말이죠.”
“뭐?”
리안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욕정은 인간을 파멸시킬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남녀가 한데 뒤엉켜 욕정을 발산하는 장소처럼 음기가 강한 공간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음탕한 기운이 넘치는 공간. 제가 숨쉬기 딱 좋은 공간입니다. 그런 공간엔 신도 차마 보고 있기가 부끄러워 시선을 돌리고 말죠. 하지만 악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한마디로 신성한 땅에서 저를 부르고 싶으시다면, 아름다운 여인과 질펀하고 농후한 정사를 해주십시오. 그리 해주신다면 저는 어디든지 달려갈 수 있습니다.”
“정사가 끝난 뒤에 말이지?”
“네, 정사가 끝난뒤 방안의 열기가 식기 전에만 불러주십시오.”
“최소 몇 년은 부를 일이 없겠군. 난 솔로거든.”
“또 모르죠.”
라카제트는 히죽 웃으면서 반지를 내밀었다.
“자 받으십시오. 호출 도구는 공짜입니다.”
리안이 무심코 반지를 잡는 순간이었다.
마치 전류가 흐르듯 알 수 없는 기운이 자신의 몸속으로 흘러들어오는가 싶더니 난데없이 라카제트가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음?”
리안은 영문을 알 수 없어 갸우뚱 거렸다.
“뭐해?”
“죄, 죄송합니다. 으윽!”
라카제트는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리를 절뚝 거리며 다가왔다.
“실은 상인의 호기심이 발동해 감히 무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무슨 무례?”
“저를 알아본 리안님의 정체가 내심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무리를 해서라도 꼭 알고 싶었죠. 상인은 누구보다 빠르게 정보를 손에 쥐어야하니까요.”
“빙빙 돌리지 말고 똑바로 얘기해.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한건데?”
“리안님의 몸안에 깃든 힘의 정체를 알아볼 생각에 마력을 흘려보냈는데 그만 제가 당하고 말았습니다.”
“못됐네.”
“해를 끼칠 생각은 단언코 없었습니다.”
“난 그냥 일반 사람이야.”
“그렇게 보긴 힘들 것 같군요.”
라카제트가 아픈 허리를 곧게 펴며 리안의 눈을 마주봤다.
“오래전 장사차 마왕성에 방문해 마왕 반데어자르님을 만나뵌 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때 느낀 마왕님의 기운이 지금 당신에게서 느껴집니다.”
그의 말은 리안에게 놀라운 정보였다.
‘내게서 마왕의 기운이 느껴진다고? 역시 그 구체는 나한테 흡수됐단 말인가……!’
라카제트는 진정성있는 미소를 지었다.
“이미 한 차례 무례를 범했으니 더 이상 알려하지 않겠습니다. 언젠가 귀띔이라도 해주실 날이 있으리라 기대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마부석에 가서 무언가를 가져왔다.
"사과의 의미로 선물을 드리지요.”
돌돌 말린 스크롤과 볼펜만한 크기의 기다란 원통을 내밀었다.
“오른손의 이 스크롤은 고위 마족급 하나는 쥐도 새도 모르게 단칼에 죽일 수 있는 일회용 주문서이고 왼손에 들고 있는 이 작고 기다란 원통은 죽은자의 영혼을 주워담을 수 있는 영혼보관함입니다. 비록 보잘것 없는 선물이나 제 성의를 봐서라도 조금전의 무례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받을때 또 뭔짓하려는거지?”
리안이 거듭 의심을 거두지 못하자 라카제트가 멋쩍은 웃음을 터뜨렸다.
“앞으로 두 번 다시 그러지 않겠습니다. 믿어주십시오.”
라카제트는 어서 받아달라며 재차 권했다.
하지만 리안은 묵묵히 쳐다보기만 할뿐 반응이 없다.
그러다 말했다.
“여기서 하나 더 추가.”
“또 뭔가 필요하십니까?”
리안이 방긋 웃었다.
“다음에 만나면 첫 구매 70% 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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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회
*경고* 지금 보고 계신 화면은, 조아라에서 지원하는 정상적인 경로의 뷰어가 아닙니다.해당 방식으로 조아라에서 제공하는 작품을 무단으로 추출하는 것에 사용하거나 협조할 경우, 저작권법에 위배되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되실 수 있으니,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작품감상을 부탁드립니다.(5년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 부과)----------------------------------------밭농사 준비, 농지 구매의 시간***
“나중에 뵙겠습니다.”
라카제트는 마차를 타고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언덕 너머로 사라졌다.
리안은 손에 들린 스크롤과 영혼보관함을 보았다.
‘스크롤을 사용하시려면 상대에게 살의를 품은뒤 입으로 찢으시면 됩니다.’
리안은 미소지었다.
“쓸일이 있을까.”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어느덧 푸르스름하게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잠을 못자 정신이 몽롱했다.
라카제트와 우마족 소녀의 특이한 외모 때문에 밤새 동화속 나라에 다녀온 기분이다.
리안은 하품을하며 발길을 돌렸다.
느긋하게 마을로 향하면서 동네 분위기가 참 평화롭다고 생각하던때였다.
멀리서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한 마리도 아닌 여러 마리였다.
굉장히 다급해보였다.
그리고 한순간 푸히힝거리며 말발굽 소리가 사라졌다.
말에서 내린 것 같았다.
“설마…… 병사들인가?”
리안은 황급히 소리가 났던 방향으로 뛰어갔다.
언덕을 올라가서 납작 엎드리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중무장을 한 기사 여섯과 커다란 낫을 든 검은 악령이 싸우는 중이었다.
검은 로브를 걸친 악령은 허공을 붕 떠다니며 커다란 낫을 가차없이 휘두르고 다녔다.
후드를 뒤집어쓴 얼굴은 해골이었다.
몸집은 황소만큼 컸다.
그런 녀석을 상대로 기사 여섯은 상당히 고전하는중이었다.
“피해!”
“킴! 닥스! 오른쪽으로 가!”
“휴! 살았습니다!”
“라일 대장님! 제가 잡고 있을테니 뒤에서 치십쇼!”
“위험해! 넌 빠지고 킴이 들어간다!”
“에이 젠장할!”기사들은 간혹 위기에 닥칠때마다 당황하지 않고 능숙하게 빠져나갔다.
잘 짜여진 팀워크며 개개인의 칼솜씨까지…… 한눈에 봐도 제법 경험이 풍부한 자들 같았다.
“이야 멋지다.”
멍하니 구경하던 리안은 탄성을 자아냈다.
“이세계에 온지 4년째인데 기사는 처음보네.”
기사들은 초반, 궁지에 몰린 검은악령을 상대로 잘 싸워나갔다.
그러나 녀석의 저항이 심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기사들도 점점 지쳐가는 것 같았다.
나중에는 기세가 꺾인게 확연히 보일 정도였다.
“저놈 고위 마족쯤 되나?”
기사 여섯을 상대로도 거뜬한걸 보니 아무래도 강한 놈은 맞는 것 같다.
리안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스크롤을 쓰고 싶은 욕구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써 말어, 써 말어, 써 말어. 받은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쓰긴 아깝긴한데.”
라카제트가 분명히 그랬다.
영혼 열개나 백개 정도의 가치가 있는 놈도 있다고.
그런 놈이 바로 저 녀석이 아닐까?
“또 놈이 사라졌습니다!”
“바닥을 봐! 풀이 흔들리는걸 보라고!”
“저쪽이다! 라일 대장님 그쪽입니다!”
한순간 사라졌던 검은악령이 대장으로 보이는 사내 앞에 불현듯 나타났다.
놈은 크고 예리한 낫을 거침없이 휘둘렀다.
“큭!”
기사대장은 날렵하게 피했으나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그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사이 검은 악령은 재차 낫을 들어올렸다.
주변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안돼!”
“빌어먹을!”
“라일 대장님!”
한 사람의 목이 날아갈 위급한 상황.
리안은 혀를 차며 스크롤을 쥐었다.
“안되겠네. 로또를 놓칠수야 없지.”
오늘 처음 마주친 기사들을 구해줄 의리는 없으나, 기왕 쓸거 모두가 안죽고 기분좋게 집에 돌아갈 수 있도록 그냥 지금 써버리자.
리안은 즉시 검은 악령에게 살의를 머금었다.
놈을 똑바로 주시한 채 종이를 입에 물고 부욱 찢어버렸다.
변화는 곧바로 찾아왔다.
푸르스름한 새벽녘.
난데없이 우르르쾅쾅 요란한 굉음이 귀청을 때리며 검은악령에게 벼락이 내리꽂혔다.
콰직!
끼에에에엑!
벼락에 감전된 검은악령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내 벼락이 그치자 녀석의 몸은 공기중으로 흩뿌려지듯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어, 어떻게 된거야?”
기사들은 놀란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마법? 누가 썼어……?”
“난 아니야.”
“나도.”
“우리중에 마법을 익힌 사람은 아무도 없어.”
한 사람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죽었으니 됐어.”
기사들은 다들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죽었으면 된거야.”
“근데 뭐지? 신기하네.”
“후~ 이제 하나 끝냈네.”
모두 털썩 주저앉았다.
기사들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숨을 돌리는 가운데, 생각지도 못한 무언가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기사대장 라일은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체 뭐였지?”
한편, 언덕에 엎드려 있던 리안은 검은악령이 사라진 자리에 생겨난 영혼의 불꽃을 바라보던중이었다.
기사들은 전혀 눈치를 못챘다.
리안의 눈에만 보였다.
“오, 라카제트가 말한게 저건가.”
그는 볼펜과 비슷하게 생긴 길고 얇은 원통형 영혼보관함의 뚜껑을 엄지 손가락으로 딱 하고 땄다.
영혼보관함을 최대한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거리가 약 30미터 가량 떨어진 검은악령의 영혼을 청소기처럼 쑤욱 빨아들였다.
별 장애없이 무난히 빨려들어온 것을 확인한뒤 바로 뚜껑을 닫았다.
“제법 강한 놈이었으니 영혼 열개 이상의 가치가 있으면 좋겠다.”
리안은 조용히 미소지었다.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누구 안계십니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만약 어디선가 저희를 지켜보고 계시다면 정식으로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부디 부담갖지 말고 이쪽으로 와주십시오!”
기사대장 라일의 외침이었다.
바닥에 주저앉아있던 그의 부하들은 낄낄거리며 잡담을 주고받았다.
“누가 도와준게 아니라니까.”
“그럼 지 혼자 죽었냐?”
“모르지. 또 알어? 날씨가 변덕스러워서 벼락이 내려친건지.”
“그건 분명 마법 주문이었어. 어떻게 딱 그놈한테만 벼락이 꽂히냐? 말이 돼?”
부하들이 떠들어대는 동안 라일은 우두커니 서서 주변을 유심히 살폈다.
“정말 도와준 사람이 없는건가…… 하지만 어둠의 영주로 불리우던 리스갈이 갑자기 죽는다는게 이해 안돼……”
그때였다.
근처의 언덕 위에서 누군가 불쑥 일어섰다.
* * *
‘사례금을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리안은 정체를 드러냈다.
“사람인가?”
“저봐 사람이야.”
앉아있던 기사들은 벌떡 일어서며 언덕에서 수풀을 헤치고 내려오는 리안을 신기하게 쳐다봤다.
그런데 그들 눈에 리안의 행색이 기묘했다.
피로 얼룩진 셔츠에 팬티만 입은 모습.
기사들은 그를 더욱 희한하게 쳐다봤다.
“마을마다 하나씩 있는 또라이는 아니겠지……?”
“또라이가 싸움을 잘할리가 없잖아.”
이윽고 밑으로 내려온 리안은 기사대장 라일과 마주서자 근엄한 표정으로 뒷짐을 지고 헛기침을 했다.
“자다가 뛰어나오는 바람에 옷차림이 이럽니다. 셔츠에 묻은 피는 엊그제 멧돼지를 도축하다 묻었소.”
“아하, 그렇소?”
라일이 그제야 이해했다는듯이 미소짓는다.
그는 리안의 행색을 보고 편하게 말을 걸어왔다.
“당신이 우리를 구해준 사람이오?”
리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상황이 어려워보이기에 좀 거들었소.”
비록 자다 나왔다지만 리안의 행색이 너무나 조촐해 라일은 반신반의했다.
“어떻게 한거요? 뭘 했기에 놈이 한방에 죽은거요?”
“집안의 가보였던 마법 스크롤로 도움을 드렸소. 부친께서 전재산을 투자해서 산 굉장히 비싼 마법 스크롤이었지.”
리안은 무게감있게 말하면서 기대감을 내비쳤다.
‘너희는 다 필요없고 돈만 주면 돼.’
라일은 곰곰이 생각하며 턱을 어루만졌다.
“마법 주문서라…… 그랬군.”
“굉장히 비싼거요.”
“비싼 마법 주문서…… 음.”
그는 쉽게 납득했는지 부하들을 불러 모았다.
“다들 내 뒤에 열을 맞춰 서라. 이분께 예를 갖춰 감사를 표하겠다.”
“예!”
“넷!”
리안은 속으로 궁시렁댔다.
‘아니 그런거 필요없고 어서 돈이나 달라고.’
하지만 겉으로는 근엄한척 사람 좋은 미소만 지을뿐이다.
“허허, 뭘 이런걸 가지고. 감사 인사는 됐소이다. 사람이 사람을 도와주는거야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마땅히 해야할일 아니겠소? 물론 스크롤이 좀 비싸긴 했지만 감사 인사는 됐소이다. 넣어두시오 넣어둬.”
“아니오.”
라일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시간이 없어 약식으로 진행하는걸 이해해주시오. 일동 차렷!”
그가 크게 외쳤다.
“경례!”
뒤에선 기사들이 각자 쥐고 있는 칼날로 흉갑을 정확히 세번 두드렸다.
탁! 탁! 탁!
“바위처럼 굳건하게 버티고 버틴다! 스톤쉴드 기사단! 도와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바로!”
리안은 짐짓 멋쩍어 하며 손을 저었다.
“괜찮소이다 괜찮아. 사람끼리 돕고 살아야지.”
“그럼 조심히 돌아가시오.”
“뭐?”
라일과 부하들은 볼일이 끝났다는듯이 그대로 등을 돌렸다.
말그대로 입 싹 닦고 떠나는 모양새!
“이게 끝?”
기대와 다르게 흘러가자 리안은 어안이 벙벙했다.
“여보시오?”
라일이 뒤를 돌아본다.
“불렀소?”
“벌써 가는거요?”
“일이 바빠서 이만 가야하오. 도와줘서 고마웠소.”
“뭐, 바쁘다면야…… 알겠소.”
리안은 ‘보답은 없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입술만 달싹였다.
‘목숨을 구해준 값을 달라고 대놓고 말할 수도 없고……’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얼른 라일을 뒤쫓아갔다.
라일은 부하들과 함께 바닥에 널브러진 장비들을 줍고 있었다.
“어디로 가시오? 혹시 도시로 복귀하는거요?”
“다음 의뢰를 처리하러 체스터에 간다오.”
“의뢰? 지금 바로 가는거요?”
“시간이 많이 지체돼서 바로 떠날 생각이외다.”
“체스터란 곳은 도시요?”
“산 이름이올시다.”
“산……”
“혹시 그쪽에 볼일이 있소?”
만약 도시에 간다면 도움을 준 대가로 이들에게 호위를 부탁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산으로 간다라.
“산에서 얼마나 머물거요?”
“괴물이 잡힐때까지.”
“괴물 사냥? 설마 당신들 용병단이오?”
“우리가 그래 보이오?”
라일이 픽 웃는다.
“방금 스톤쉴드 기사단이라고 한걸 들었을텐데? 모두 기사단원들이외다. 이 지역으로 파병 나왔다가 용돈 벌이 좀 할 생각에 의뢰를 맡고 있소.”
“아, 실례했소이다.”
“난 괜찮으니 됐소.”
라일이 말했다.
“만약 우리랑 동행할 생각이면 잘 생각하시오. 우린 위험한 곳으로 가는 중이니까 자기 목숨 자기가 지켜야 한다오.”
부하중 누군가 웃으며 외쳤다.
“아까 같은 고급 주문서가 또 있걸랑 따라오시오! 당신 몫도 조금 챙겨줄테니까.”
다른 기사가 그에게 핀잔을 줬다.
“우리 먹을 것도 없는데 누구 마음대로 나눠줘?”
“그냥 해본 소리지 뭐. 하하하.”
리안은 혀를 찼다.
‘얘들 참 도움이 안되는 애들이네. 돈도 안주고.’
결국 그는 잘가라며 손을 흔드는 기사들을 뒤로하고 마을로 향했다.
“어이!”
헤어진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다.
라일이었다.
그는 가까이 다가오더니 자신의 이름이 적힌 손수건을 내밀었다.
“방금전엔 부하들이 보고 있어 고맙다는 말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소. 난 발티고의 라일 주니어 2세요. 이걸 받아주시오.”
“이게 뭐요?”
“나중에 혹시 발티고에 여행오거든 라일 가문을 찾아주시오. 이 손수건을 보여주면 섭섭지 않게 대접해줄거요. 내 목숨을 구해준 값이외다.”
“마음은 고마운데 손수건은 연인들의 이별 선물 아니오?”
“거참 급한대로 씁시다. 남 지적할 시간에 댁은 바지나 입고 다니시오. 하여튼간에 현재 이것말고 가진게 아무것도 없소. 그냥 받으시오.”
리안은 알았다면서 손수건을 받았다.
“꼭 들르시오. 내가 머물때오면 더 좋고.”
라일은 한번 씩 웃고는 그대로 뒤돌아서 떠났다.
* * *
태양이 서서히 떠오르며 주변이 점차 밝아졌다.
이른 아침 마을로 돌아가는 길.
라일에게 받은 푸른 손수건은 오른쪽 손목에 묶었다.
리안은 한적한 숲길을 걸으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공주님도 분명 날 찾고 계실거야. 내 위치를 알리려면 무조건 큰 도시로 나가서 광고를 해야해. 그래야 우리가 만날 가능성이 높아져.”
리안은 곧바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마을을 떠나자니 돈이 없고, 돈을 만들려니 이런 촌구석 마을엔 화폐란게 없어.”
마을 주민들은 물물교환을 통해 살림을 꾸려나갔다.
가끔씩 외지인을 통해 들어오는 화폐는 전부 촌장이 가지고 있다가 마을에 공동으로 필요한 물품이 있을때 쓰거나 발전 기금으로만 사용하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돈을 쥐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리안은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그 연두색 머리한테 뭘 팔아야 해. 행상인인 그 여자는 늘 현금을 들고 다닐테니까.”
* * *
“이 바지 입어봐.”
나른한 오후.
헛간 앞에서 일광욕을 즐기며 누워 있는데 사내 한 명이 허름한 바지 한 벌을 내밀었다.
“어디서 났어요?”
“내가 전에 입던거 가져온거야. 언제까지 팬티만 입고 돌아다닐거야?”
“4년동안 이러고 다니면 불편해서 바지 못 입어요. 아무튼 줘봐요.”
리안은 싱글벙글 웃으며 바지를 입어봤다.
완벽하진 않지만 적당히 맞았다.
그런데 기장이 무척 짧아 마치 7부 바지 같다.
“잘 입겠습니다.”
“당신들 딱 걸렸어!”
갑자기 주근깨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적이랑 내통했다고 아버지한테 가서 이를거야! 두고봐!”
보초를 서던 사내 두 명은 낄낄 웃기만했다.
“밭도 아무 이상없고 막말로 이 친구가 뭘 잘못했냐? 가서 일러봐라.”
“딘! 너도 일로와서 인사드려라. 배울게 많아. 선생님이야 선생님.”
“웃기지마! 당신들 악마한테 홀렸네! 홀렸어! 다 이를거야!”
가만히 지켜보던 리안이 속으로 생각했다.
‘우선 쟤 부터 구워 삶아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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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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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대표하는 촌장.
즉, 자신에게 땅을 내어줄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
현재 리안의 계획은 땅을 빌려 기른 채소를 연두색 머리 여자한테 팔아 돈을 만져볼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땅이 필수!
좌우간 누군가를 잡으려면 주변인부터 구워삶으란 말이 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소년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모조리 촌장에게 전달되고 그의 기분에도 영향을 끼칠 터.
아들이 잘되면 기쁘고 잘못되면 슬픈게 아비의 마음.
주근깨 소년의 호감을 사놓고 그 후 촌장에게 접근하면 협상이 훨씬 수월하리라.
그렇게 생각한 리안은 소년을 향해 밝게 소리쳤다.
“꼬마야! 내가 주근깨 좀 없애줄까? 주근깨 때문에 고민이 많을 것 같은데!”
“엿이나 처먹어! 주근깨따위 신경쓴적 없어!”
어쭈 저놈 입버릇 봐라.
리안은 다시 한번 밝게 소리쳤다.
“그러지 말고 잘 생각해보고 관심있으면 놀러와. 평생 그 얼굴로 살고 싶지 않을거 아냐.”
“살거다!”
딘이란 이름의 주근깨 소년은 크게 소리치고 후다닥 자리를 떠났다.
“마족한테 홀렸다고 다 일러바칠거야!”
그러나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힘차게 뛰어가던 그의 속도가 점점 줄어들었다.
‘꼬마야! 내가 주근깨 좀 없애줄까?’
딘의 머릿속에 리안의 말이 계속 맴돌았다.
“진짜인가……?”
과거 딘이 겪은 아픈 기억.
짝사랑 하는 제시 라는 소녀한테 주근깨 때문에 차인적이 있었다.
“주근깨 때문에 남자로 안느껴져. 내 동생 같아.”
그날 딘은 많이 울었다.
정말 서럽게 울었다.
현재 제시랑 친구처럼 지내고 있지만 아직 그녀에게 미련이 남아있었다.
다른놈이 채가지 않을까 하는 불안도 있다.
그렇기에 딘은 리안이 한 말에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씨, 거짓말이었단봐……”
결국 딘은 아버지에게 가는걸 멈추고 발길을 돌렸다.
다음날 오전.
밤새 고민하느라 한숨도 못잔 딘은 피곤한 기색으로 리안을 찾아갔다.
리안은 사내 두 명과 도란도란 둘러앉아 놀고 있었다.
“이건 공기놀이라는 건데요. 돌을 요렇게 던지고 주우면서……”
딘은 불쑥 나타나 그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가짜면 알아서해! 정말 가만 안놔둘거야!”
“음?”
리안이 뒤를 돌아보더니 딘을 발견하곤 웃는다.
“주근깨?”
“그래! 진짜 없앨 수 있어?!”
“완전히 없애는건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지금보단 나을거야.”
“어떻게 하면 되는데? 빨리 불어!”
“빨리 분다고 되는게 아니야.”
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랑 같이 마을 밖으로 나가자. 주근깨를 제거하는 효능이 있는 약초를 찾아봐야해.”
“거짓말마! 도망가려고 그러지!”
리안은 피식 웃으며 사내들을 쳐다봤다.
사내들이 낄낄거리며 딘을 향해 말했다.
“우리랑 있을때 밖에 나간게 하루이틀이 아닌데 도망갈려면 벌써 도망갔다 이놈아.”
“우리 마을이 아주 마음에 든대!”
이후 여차저차해서 리안은 딘과 함께 마을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도망갈 생각 꿈도 꾸지마!”
딘은 리안을 못미더워하며 약간 거리를 둔 채 손에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낌새가 이상하다 싶으면 때릴거야. 조심해.”
“그러든지 말든지.”
리안은 개의치 않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수풀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너 촌장 아들이라며?”
“그래서?”
“주근깨 없애준 값으로 나도 뭔가 대가를 받아야하지 않을까?”
“무슨 수작이야?”
“세상에 공짜는 없잖아.”
“포로 주제에 장난해?”
“그럼 다르게 말하지. 내가 널 도와주니까 너도 날 도와줘. 그게 사람간 예의가 아닐까?”
“예의?”
“어른들이 가르쳐주지 않든?”
“뭐, 받은 만큼 보답해주란 소리는 들었지만서도……”
말이 통했나보다.
딘은 잠시 우물쭈물 거리더니 물었다.
“나한테 뭘 원하는데?”
리안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저씨들한테 들었는데 행상인 그 여자, 세 달에 한번씩 여기 온다며? 그 여자가 오기 전까지 나한테 땅이 필요해. 너네 아버지한테 말해서 땅 좀 빌려달라고 해봐.”
“땅을 빌려달라고? 미쳤어?”
“얘기를 들어봐. 땅에서 자란 작물은 내가 6 만 먹을게. 넌 1 먹고 용돈 써라. 너네 아버지는 3 가져가라하시고.”
대화를 나누면서 틈틈이 주변을 둘러보던 리안은 우연히 쓰러진 거목을 발견했다.
굵고 큰 나무 기둥이 오솔길을 막고 있었다.
기둥 굵기가 리안의 가슴까지 올 정도로 무척 두꺼웠다.
“이건 왜 부러졌어?”
“저번에 비가 많이 왔을때 쓰러졌어.”
“왜 안치우고 여적지 나뒀냐?”
“어른들이 치운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하는데, 나무가 워낙 커서 최소 삼십명은 달라붙어야 하니까 다들 모일 시간도 없고 미루고만 있어. 언젠가 날 잡아서 치울거야.”
“그날 마을 잔치하겠네.”
리안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쓰러진 나무쪽으로 걸어갔다.
“될려나? 나도 이렇게 큰 건 안해봤는데.”
그는 손을 마주비비더니 두 손을 나무 기둥에 갖다댔다.
“뭐하려는 거야?”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딘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려고?”
“어쩌긴, 치워야지.”
“어떻게?”
“그냥 보고만 있어.”
리안은 씩 웃더니 끄응하면서 나무를 밀기 시작했다.
“끄응차!”
그러자 꿈쩍도 안할 것 같은 나무가 점점 움직이기 시작하는게 아닌가!
“말도 안돼!”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 딘은 제자리에서 넋을 잃었다.
리안은 나무를 힘껏 굴려서 길 바깥쪽으로 단숨에 치워버렸다.
“휴, 힘들다.”
일을 마치고 손을 털던 그가 딘을 돌아봤다.
딘은 입이 쩍 벌어진 채로 얼이 빠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얼굴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귀신 봤냐? 정신차려.”
딱 소리에 놀란 딘이 움찔하면서 정신을 차렸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얼굴로 리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당신 마족 아냐? 사람이라면 못해!”
“헛소리 말고 내가 이거 치워줬으니까 너네 아버지한테 꼭 말해라. 수고비나 좀 챙겨주라고. 많이는 안바라.”
리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 다시금 평범하게 약초를 찾으러 다녔다.
‘이 사람 힘이 천하장사잖아? 괴물이야 괴물!’
딘은 그때부터 눈빛이 달라졌다.
리안에게 매번 막말을 일삼던 기세가 한풀 꺾인 눈치였다.
조금 얌전해졌달까.
아무튼 리안은 자신을 신기하게 쳐다보는 딘을 데리고 다니면서 두 종류의 약초를 찾아냈다.
이후 마을로 돌아와서 딘에게 방법을 알려주었다.
“요거는 잘 빻아서 얼굴에 골고루 펴서 발라준다음 30분뒤에 떼어내면 되고, 요놈은 햇볕에 바싹 말린 다음 달여서 매일 끼니때마다 물처럼 마시도록 해. 둘 다 하루라도 거르면 안된다? 알았지?”
“시키는대로 하면 정말 주근깨가 없어지는거야?”
“완벽히는 못 없애도 효과는 있을거야.”
“완벽히 못 없애면 그게 뭐야. 하나 마나란 소리잖아.”
“걱정마. 전보다는 훨씬 깨끗해 보일테니까.”
딘은 리안이 건네준 약초들을 품에 안고 돌아갔다.
당일 저녁 무렵, 헛간에 촌장이 찾아왔다.
한 손에는 푹 삶은 닭고기와 포도주가 담긴 술병이 들려있었다.
“딘한테 들었네. 혼자서 나무를 치웠다고?”
“마을분들이 곤란해 하실 것 같아서요. 별거 아닙니다.”
“직접 가서 봤는데 정말 놀랐어. 주민들도 칭찬이 자자하네.”
그가 닭고기와 술병을 내밀었다.
“감사의 표시로 닭 한 마리 잡아왔어. 뜨끈허이 맛있을거야.”
리안은 감사하다고 말한 후 그 자리에서 닭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뱃속에 오랜만에 고기가 들어가니 반갑다고 환호성을 질러댔다.
“그동안 가둬놔서 미안했네. 요즘 마족이 하도 설쳐대는 바람에 우리가 오해했어. 밭에다 독을 뿌린줄 알았지.”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죠.”
닭고기가 연하고 맛있는게, 리안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어도 기분이 즐거웠다.
지난 나흘간의 감금생활에 대한 보답으로 충분하단 생각이 들 정도로 꿀맛이었다.
술병에 가득 들어있는 포도주도 마음에 들고.
술병을 따서 목을 축이는 와중에 촌장이 말했다.
“이제 자네 갈길 가게. 다시 말하지만 그동안 붙잡아둬서 미안했어. 마을 사람들을 대표해 사과하네.”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니 현재 온나라가 마족과 싸우고 있다면서요?”
“나도 마을 밖에 나가본지 한참돼서 나라 사정은 자세히 몰라. 여기 간간이 들리는 상인한테서나 전해 듣지.”
리안은 닭다리살을 맛있게 발라먹으며 촌장과 짧게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었다.
아쉽게도 촌장은 그가 말한대로 나라 정세는 잘 모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가까운 마을이 어딨는지, 영주는 누구인지, 마을의 특산품은 무엇인지 등등 마을 주변의 잡다한 정보는 확실히 얻을 수 있었다.
“이만 가볼테니 푹 쉬게나. 내일 떠날때 배웅이라도 해줄테니 우리집에 들렸다 가고.”
“예, 감사합니다.”
촌장이 뒷짐을 지고 돌아서려는 찰나 리안이 다시 불러세웠다.
“잠깐만요. 딘이 나무 얘기 말고 다른 얘기는 안하던가요?”
“무슨 얘기?”
리안은 방긋 웃었다.
“아닙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촌장이 떠난 후 리안은 다 먹은 닭고기 뼈들을 한쪽에 치우고 포도주가 담긴 술병을 음미하며 마셨다.
헛간 입구 밖으로 저 멀리 달이 보인다.
운치 있는 밤풍경.
행복한 포만감을 느끼면서 잠시 오드리아를 생각하다 딘을 떠올렸다.
“아따 이놈 간보네……”
아버지한테 말해 땅 좀 빌려오라고 시켰거늘, 방금 촌장입에서 그 얘기가 안나왔다.
“됐어. 때가 되면 말해주겠지.”
리안은 자유를 되찾았으나 당분간 마을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
갈곳도 없는 마당에 무턱대고 떠나봐야 손해다.
돈이 있어야 뭘하지!
좌우간 리안이 오드리아와 함께 지냈던 옛일을 회상하며 감상에 취해있을 무렵, 딘은 방안에 놓인 침대에 누워 얼굴에 빻은 약초를 꼼꼼이 펴바르고 있었다.
“속는 셈치고 당해주는거야. 거짓말이면 진짜 두고봐. 아버지한테 이를테니까.”
다음날 아침.
딘은 일어나자마자 거울부터 찾았다.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갸웃거렸다.
“흐음…… 주근깨가 옅어진 것 같기도 하고……”
그는 그날 하루종일 매 끼니때마다 리안이 시킨대로 말린 약초를 달여 마셨다.
이틀 후.
그는 또 일어나자마자 거울부터 들여다봤다.
“어제보다 더 희미해진 것 같기도 하고…… 효과가 있나?”
사흘 후.
그는 눈을 뜨자마자 머리맡에 둔 손거울을 쳐다봤다.
“어라? 여기 있던게 없어졌네?”
나흘 후.
“오, 뭐지? 이쪽도 없어졌네?”
그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닷새째 되는 날.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제시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딘아, 너 요즘 피부 관리해? 주근깨도 많이 없어지고 피부가 하얘진 것 같아.”
“그, 그래?”
짝사랑하는 그녀가 그렇게 말해주니 딘은 속으로 매우 기뻤다.
헛기침을 하며 시치미를 뚝 뗐다.
“관리는 무슨, 걍 나이가 드니까 저절로 좋아지나 보지. 나도 이제 애가 아니라 어엿한 사내라고.”
엿새째 되는 날.
아침부터 거울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딘은 확연히 달라진 얼굴 피부를 보고 두둥실 날아갈 것 같았다.
“앞으로 그분을 형님이라고 불러야겠어! 정말 대단하신 분이야!”
이윽고 이레째 되는 날.
주근깨가 상당부분 사라지며 얼굴에 큰 자신감이 생긴 딘은 저녁식사때 아버지에게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혹시…… 우리 마을에 노는땅 있어요? 영주님의 직영지 말고 마을 공유지중에요.”
“지력을 회복하려고 둔 휴경지는 있다만 갑자기 땅은 왜 찾아?”
“그게……”
딘은 입술을 머뭇대다가 말했다.
“노는땅이 있으면 리안 형님한테 함 맡겨보는게 어떨까요? 그 형님 농사에 대해 잘 아시는 것 같더라구요.”
말을 마치고 나서 재빨리 덧붙였다.
“재배한 작물은 자기가 다 갖지 않겠데요. 저 용돈 쓰라고 조금 나눠주고 아버지랑 마을분들 몫도 드리겠데요.”
“음……”
촌장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떠나라했더니 안떠나고 마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일을 거드는 걸 지켜보니 일머리는 있긴 하더구나. 엊그제 미렌 아줌마 옆에서 콩깍지 까는 걸 구경했는데 확실히 까는 솜씨가 남달랐어.”
순간 아버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건 분명 농부의 손이었지.”
딘이 이때다 싶어 보챘다.
“그러니 함 믿고 맡겨봐요. 네?”
* * *
다음날 아침.
딘은 조식도 거르고 잽싸게 헛간으로 뛰어갔다.
“형님! 형님!”
지푸라기 위에서 자고 있던 리안이 잠에서 깨며 인상을 찡그렸다.
“누가 형님이야?”
“당연히 형님이 형님이죠!”
리안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면서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갑자기 그러면 어색하지도 않냐.”
딘은 쑥스러워하며 코를 비볐다.
“형님 덕분에 자신감이 생겼어요. 가, 감사합니다.”
리안은 자다깨서 퉁퉁 부은 눈으로 미소지었다.
“주근깨가 있어도 넌 멋진 놈이야.”
“저, 정말요?”
“응, 멋진놈 더 멋져지라고 도와준 것뿐.”
리안은 재차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쭉 켰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아버지가 허락하셨어요!”
“뭘?”
“뭐긴요! 땅을 내주셨다고요!”
“그래?”
순간 잠이 싹 달아났다.
리안은 기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땅 어디야. 얼른 땅 좀 보러가자.”
얼마 후.
딘과 함께 땅을 관찰하던 리안의 얼굴에 금세 수심이 깊어졌다.
“희한하네. 땅이 왜 이러지?”
“뭐가요?”
“땅이 맥아리가 없어.”
“휴경지라 그런게 아닐까요? 지력을 회복중이라던데.”
“아냐, 그거랑 별개로 땅이 오염되어 있어. 이상하네.”
딘이 걱정스런 안색으로 물었다.
“농사 못 짓는거예요?”
“여기다 심어봐야 너희 포도밭처럼 상품성이 별로인 것들만 자랄거야.”
“그럼 어떡해요?”
“뭘 어떡해. 그래도 해봐야지.”
리안이 방긋 웃었다.
“나만 믿어. 멋지게 해낼테니까.”
그는 자신감있게 말하고 나서 발길을 돌렸다.
“우선 밥이나 먹으러 가자. 배고프다.”
딘은 건들건들 걸어가는 리안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의 말이 결코 허투가 아님을 확신했다.
‘이상하게 형님이 그렇다면 그런것 같아. 뭐든지 반드시 해낼 것만 같은 예감이 들어.’
딘은 발밑을 쳐다봤다.
“오염된 땅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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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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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심지 않은 휴경지에는 으레 잡초가 자란다.
잡초를 보면 땅의 상태를 알 수 있다.
습지를 좋아하는 A라는 잡초가 무성히 자라면 그 땅은 배수가 안되는 땅이다.
토양에 질소를 내뿜는 B라는 잡초가 많이 자라면 그 땅은 질소가 충분히 공급되기에 당분간 질소비료를 줄 필요가 없다.
토양의 산성을 중화시키는 C라는 잡초도 있다.
잡초는 어디서든 자란다.
척박한 땅에서도 굳건히 자라나 흙을 회복시켜준다.
하지만 촌장으로부터 받은 토지에는 잡초가 전혀 자라나질 않았다.
어째서 일까.
10년, 100년, 종자 상태로 땅속에 숨어 있다가 지상에 자리만 있으면 툭툭 기어나오는 녀석들이 웬일로 잠잠할까.
뽑고 또 뽑아도 며칠만 지나면 또 새로이 고개를 내미는 끈질긴 녀석들이 안보이니 리안은 의아했다.
“이건 생명체가 살아갈 땅조차 못된다는건데……”
지금으로선 이유를 알 수 없었으나 약간의 단서는 있다.
그것은 바로 최근에 만났던 라카제트의 발언.
‘이곳처럼 마물의 기운이 흘러넘치는 땅을 말하는 것입니다.’
라카제트가 말하길 자신은 마가 낀 땅에서만 돌아다닐 수 있다고 했다.
그런 라카제트가 한밤중에 마을 주변을 배회했다는 것은 즉, 이 땅에 마물이 서식하고 있다는 증거.
“어떤놈이지……”
부디 강력한 놈만 아니길.
“난 농부 타입이지 전투 타입이 아니라고요 마물님아.”
리안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거리를 걷고 있던중이었다.
무심코 옆을 돌아보니, 마당에 놓인 마루 위에 썰다만 호박 같은 야채와 식칼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집주인이 야채를 썰다가 잠시 자리를 비운 모양이다.
리안은 거리낌없이 마당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식칼을 쥐고 야채를 싹둑싹둑 잘랐다.
“마물, 마물, 마물, 마물……”
“어? 리안 씨?”
집주인 아주머니가 밖으로 나왔다.
리안을 보더니 밝게 웃음지었다.
“어쩐일이야?”
“지나가다 보이길래 도와드릴까 해서요.”
“아이구 고마워라.”
최근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 아니 정확히 말하면 마을 아낙네들 사이에서 리안은 슈퍼스타급 인기인이었다.
낮에 남자들이 밭에 나가면 마을에는 주로 여자들만 남아있었다.
외지인이나 다름없는 리안은 종일 할 일이 없다보니 마을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 다녔는데, 그렇게 돌아다니다보면 마을 여자들끼리 모여앉아 채소를 다듬는 광경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심심한데 저기라도 끼자.”
채소 다듬는거야 누구한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오드리아한테 매일 혼나가면서 배운 덕분이다.
아줌마들 무리에 다가가서 헛기침 한번 해주고 자연스럽게 끼어들어 콩깍지 몇번만 까주면 금세 서로 웃으며 친해졌다.
더구나 리안이 현대 지구인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보니 아낙네들과 죽이 잘 맞고 수다도 잘 떨었다.
“우리 남편은 꼬추 떨어진다고 이런 일 아예 안하는데 리안 씨는 엄청 잘하네. 나중에 부인한테 사랑 받겠어~”
“세상에, 나물 다듬는 저 섬세한 솜씨 좀 봐. 리안씨 남자 아니지?”
“거야 까보면 알지! 바지벗어봐 확인해보게!”
“어머 이 여편네 좀봐! 남편 없다고 별 말을 다 하네! 근데 궁금하긴 하다. 한번 까봐! 깔깔깔!”
마냥 일만 도와준건 아니었다.
장차 땅이 생길 미래를 염두해두고 집집마다 남아도는 작물의 종자들을 수고비 대신 받고 다녔다.
그리하여 열심히 수다를 떨고 손을 놀린 결과 리안은 어느덧 마을 내에 존재하는 종자란 종자는 전부 갖게 되었다.
총 35종.
35종의 다양한 종자들이 리안의 자루주머니속에 고이 잠들어 있었다.
나중을 위해!
“아주머니, 포도밭 말이에요. 언제부터 상태가 저랬어요?”
리안이 싹둑싹둑 야채를 썰면서 물었다.
아주머니는 리안이 썬 야채 조각을 소쿠리에 하나씩 펴서 담는중이었다.
“한 2년쯤 됐나. 촌장님이 나서서 이것저것 해봤는데도 안되는거야. 씨알이 작고 싱싱하지도 않으니 우리 마을서 나가는 포도는 죄다 잼으로만 쓴다대. 행상인 처녀가 그러더라구. 거기밖에 쓸데가 없다고.”
“속상하시겠어요.”
“암 속상하지. 혹시나 해서 땅신님께도 여러차례 제사도 지내고 그랬는데 매번 똑같아.”
마당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리안 씨 여깄었네?”
“안녕하세요.”
“어머나 오늘도 멋지게 생겼네. 호호호.”
푸근한 아주머니가 마당으로 들어와 그새 자리를 잡고 함께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리안 씨 땅 받았다며?”
“예, 받았는데 땅이 안좋아서 고민이에요.”
“땅이 왜?”
“아시잖아요.”
“우리 지역 땅을 예전엔 남들이 엄청 부러워했어. 땅이 굉장히 비옥해서 옆동네 사람들이 다들 금싸라기땅이라고 칭찬했었다니까.”
“혹시 마을 주변에서 이상한 괴물을 본 사람은 없었나요?”
“이상한 괴물?”
두 아주머니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리안을 쳐다봤다.
“기이한 현상이라든지 뭔가 불길한 조짐 같은건 없었는가 해서요. 땅이 갑자기 변할리도 없고.”
“있었나?”
“음……”
갑자기 한 아주머니가 무릎을 탁 쳤다.
“가만 생각해보니 있었네 있었어!”
아주머니는 마치 귀신 얘기를 늘어놓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을 짓고 오래전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옆집 마르코 씨한테 들은 얘기인데, 몇 달 전 비와서 저쪽에 있던 고목이 쓰러진 날 있잖아. 그날 밭에 나가서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저 멀리 숲쪽에서 무언가 희끄므레한게 슬그머니 기어가더란거야. 마르코 씨는 아무 생각없이 저게 뭔가 하고 가까이 가봤데. 가봤더니 글쎄!”
아주머니는 손뼉을 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거대한 뱀꼬리였다지 뭐야!”
“어머머, 어머머. 나도 들어본거 같아.”
다른 아주머니가 추임새를 넣었다.
“마르코 씨가 거대한 흰 뱀을 보고 헐레벌떡 도망쳤다는 그 얘기?”
“맞아, 맞아. 그거야 그거.”
“흰 뱀이요?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리안이 묻자 아주머니들이 동시에 대답했다.
“뱀이 없어졌어.”
“그 뒤로 별일 없었어. 그게 끝이야.”
마르코란 사람이 나중에 정신을 차린뒤, 다시 확인차 마을 주민들과 급히 현장에 가봤더니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거대한 흰 뱀이라……”
잠시 생각에 잠겼던 리안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그걸지도 모르겠네요.”
“뭐가?”
“아뇨, 그런게 있어요.”
평범한 사람이라면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면서 지나갔겠지만, 리안은 달랐다.
얘기를 듣고 어렴풋이 감이 잡혔다.
전문 농사꾼의 촉이 발동한 것이다.
‘비오는 날, 거대한 흰 뱀.’
오래전 오드리아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무무카르란 녀석은 지렁이과 마물이다. 녀석은 평상시에 지하 1km의 땅속까지 내려가서 얌전히 머물러 있다가 비가 오는 날에만 다른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지상으로 기어나오는 특징이 있지.”
“지렁이과면 좋은 녀석 아닌가요?”
“그랬으면 왜 마물이겠니. 무무카르는 땅속에서 머무는 동안 반경 20km 이내 지역의 모든 땅속 영양분을 흡수하고 독성물질을 배출한단다. 해당 물질에는 특수한 마력이 섞여있어 우리가 아는 농사법으로는 해결이 안돼. 무무카르를 찾아 죽이는 게 최선의 해결책이지.”
칼질을 하고 있던 리안이 벌떡 일어났다.
“서둘러야겠어요!”
아주머니들이 깜짝 놀란다.
“뭐, 뭘!?”
“왜 그래?”
“두 분 다 머리위로 두 손을 높이 들어주세요.”
“이, 이렇게?”
“손바닥 펴고?”
“네.”
짝!
짝!
리안은 두 아주머니한테 두 손을 마주치며 하이파이브를 하고 즉시 마당을 뛰쳐나갔다.
“촌장님한테 가볼게요!”
뒤에 남겨진 아주머니들은 멍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봤다.
“손뼉은 왜 친거야……?”
“저 동네 인사법인가?”
리안은 곧장 촌장의 집으로 달려갔다.
촌장과 만나 그가 추리해낸 것들을 말해주었다.
이윽고 사정을 전해들은 촌장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무무카르란 마물이 우리 마을 밑에 산다고?”
“아직 추정일뿐이지만 만약 존재한다면 이곳 아님 주변 어딘가의 지하에 살고 있겠죠.”
촌장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친 땅을 회복시키기 위해 그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어. 하지만 우리의 노력은 모두 실패했지. 하늘이 원망스러웠다네.”
그는 고개를 들어 리안의 눈을 마주봤다.
올해 50이 넘은 그의 눈빛에 강한 열의가 엿보였다.
“놈이 있는지 없는지 확실치 않은건 상관없네. 나중에 헛수고로 끝난다한들 일단 해볼 수 있는건 다 해봐야하지 않겠나. 아무것도 안하면서 절망하며 포기하는 것보다야 낫지.”
그가 목에 힘주어 말했다.
“원하는 날짜에 맞추어 주민들을 동원해주겠네. 언제든지 말만해주게.”
“감사합니다.”
리안은 환하게 웃으면서 촌장의 어깨너머를 바라봤다.
창문 밖.
때마침 바람이 거세게 불며 먹구름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바로 오늘입니다. 빨리 사람들을 모아주십시오.”
* * *
초저녁부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식물 줄기를 엮어서 만든 우비를 걸친 마을 주민들은 궂은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넓은 공터에 모여 들었다.
“인원 점검하겠습니다! 인원 점검! 1조 손들어주십쇼!”
“여기요!”
“2조!”
“여기 다 모여있응게 퍼뜩 하시오!”
“3조!”
“아저씨! 아저씨는 여깅게 이짝으로 와! 3조도 다 모였수다!”
잠시 후 인원 점검이 끝나자 촌장이 나서서 말했다.
“다들 이야기는 전해 들었을거야! 이놈의 괴물 자슥이 비오는 날에만 땅위로 나온다니까 오늘 반드시 발견해야한다네! 오늘 놓치면 또 언제 비올지 모르니 절대 놓쳐선 안돼!”
“발견하고 나면 그 담엔 어쩐다요? 우리가 괴물이랑 싸울 수도 없고.”
누군가의 질문에 리안이 세찬 빗줄기를 맞아가며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무카르는 공격적이지 않고 온순한 괴물입니다! 우리를 보면 겁먹고 땅속으로 도망치려고 할거예요! 녀석이 땅속으로 도망치기 전에 빨리 사람들한테 알려서 모두 발견장소로 모여주세요! 다 같이 놈을 처치하는 겁니다!”
“오메, 간만에 힘 좀 쓰겄구만.”
사냥이 시작됐다.
수십명의 주민들은 세찬 빗줄기를 뚫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얼마뒤 날이 완전히 깜깜해지자, 돕겠다고 나섰던 아이와 여자들은 혹시나 모를 사고에 대비해 모두 집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네 시간쯤 지났을까.
빗줄기는 더욱 굵어졌다.
한치 앞도 가늠하기 힘들었다.
처음에는 기세좋게 수색을 벌이던 남자들도 슬슬 버거워지고 있었다.
“이렇게 비 맞고 있어도 되는가 모르겄어. 낼 전부 감기에 걸려서 끙끙 앓겠수다.”
“나뭇가지 꼭 붙잡고 다녀. 자칫하다 날아가게 생겼어.”
“뭔 바람이 이리분데. 무섭구먼.”
그러한 와중에, 리안은 홀로 다니면서 무무카르를 찾고 있었다.
세찬 바람도, 거센 빗줄기도, 체력 좋은 그를 막지 못했다.
모두가 지쳐있을때 그는 그야말로 용맹한 아마존 원주민처럼 한 손에 창을 꼬나쥐고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어딨는거야 이 자식……”
몇 시간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조바심이 일었다.
놈을 잡지 못하면 그가 세운 계획들이 어긋나게 된다.
정확히 3개월 후 마을을 벗어나겠다는 계획!
“설마 없는건 아니겠지?”
제발 그러질 않길 바라며……
리안은 얼굴에 떨어지는 빗물을 훔치면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여깄다! 여기 찾았어!”
갑자기 먼 곳에서 희소식이 터졌다.
‘찾았다고?’
리안은 재빨리 그쪽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외침 소리를 들은 다른 사람들도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갔다.
“어디? 어디? 어디 그놈 면상 좀 보자!”
“저기야! 저기!”
현장에 도착해보니 상황이 다급했다.
사람들을 보고 놀란 무무카르가 땅을 파고 그 속으로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기다란 흰 지렁이처럼 생긴 녀석.
일반 지렁이와 다른 점이라면 몸통 두께가 무려 1미터에 달했다.
게다가 머리부터 꼬리까지의 길이는 최소 10미터 이상!
그런 녀석이 간헐적으로 몸 길이를 줄였다 늘였다 하면서 꿀렁꿀렁 땅속으로 기어들어가는 중이었다.
“저러다 도망치겠어! 우째요 우째!”
사람들은 징그럽고 거대한 무무카르의 위용에 겁을 집어먹은 나머지 근처에서 우물쭈물 서 있기만 했다.
“쳐, 쳐도 되는겨? 물면 어뜩하지?”
그때 리안이 나타났다.
“겁 먹지 마세요!”
리안은 신속히 달려와서 무무카르의 꼬리부분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힘을 써서 뽑아내려는 그때!
‘미끄러워!’
무무카르의 가죽 표면이 점액으로 끈적거렸다.
잡아 당기려고했더니 손이 쑤우욱 미끄러져 나갔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부딪히자 리안은 잠시 당황했으나 그의 머리는 빠르게 회전했다.
‘라그레아닐! 미끄럼 방지 장갑!’
그런게 가능한줄도 모르고 지레짐작으로 외쳐본 것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라그레아닐은 순식간에 장갑으로 변하며 리안의 양손에 끼워졌다.
“대단해!”
장갑을 착용하니 대체 무슨 재질로 만들어진 것인지 전혀 미끄러지지 않았다.
리안은 쾌재를 부르며 두 팔에 힘을 주고 무무카르의 꼬리를 힘껏 잡아 당겼다.
우지끈!
“으랴아아아앗차차차차!”
양팔에 힘줄이 팽팽히 솟아올랐다.
무무카르는 발악을 하며 잠시 저항하는가 싶었으나 결국에는 리안의 괴력에 못당한 나머지 점차 끌려나오기 시작했다.
“우와!”
이윽고 녀석의 몸뚱이가 절반 이상 밖으로 꺼내지자 넋놓고 지켜보던 사람들이 일제히 탄성을 자아냈다.
“리안이는 도대체 뭘 먹고 자란겨?”
“거인처럼 힘이 세구만!”
딘이 옆으로 뛰어와서 소리쳤다.
“형님! 진짜 멋지십니다!”
리안은 젖먹던 힘까지 쥐어짜내가면서 빨갛다 못해 터질 것 같은 얼굴로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패, 패에!”
“네? 형님 못들었어요!”
“패, 패라고! 존나 패라고!”
“존나?!”
딘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한테 소리쳤다.
“지켜보지만 마시고 존나 패시랍니다!”
“존나가 뭐야?”
누군가 웃으며 대꾸했다.
“실컷 두들겨 패라는 소리인가 보지 뭐! 자 리안이가 힘을 쓰는데 우리도 이러고 있을때가 아니야! 얼른 달려들어서 거들어줍세!”
“좋았어! 가자고!”
수십명의 사람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아아!”
그들은 저마다 날카로운 농기구를 쥐고 무무카르를 향해 용기있게 달려들었다.
* * *
마침내 무무카르가 죽었다.
리안은 놈이 움직이지 않는걸 거듭확인하고 나서야 몸통에서 손을 뗐다.
털썩!
그는 바닥에 쓰러져서 숨을 헐떡였다.
“헉, 헉! 허억……!”
완전히 지쳤다.
방금 전까지 무무카르의 몸통에 농기구를 꽂아넣던 사람들도 다들 지쳤는지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성공했다! 우리가 무무카르를 무찔렀어!”
누군가 외치자 모두들 한마음으로 환호성을 질러댔다.
빗줄기도 그들을 축하해주듯 전보다 많이 가늘어졌다.
“후우…… 죽갔네……”
리안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무무카르의 사체쪽을 쳐다보았다.
그곳에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영혼의 불꽃이 둥둥 떠있었다.
‘이로써 두 개째.’
힘들지만 기쁜 마음으로 바지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영혼보관함을 꺼냈다.
엄지로 뚜껑을 땄다.
영혼의 불꽃을 향해 영혼보관함을 내밀자 순식간에 빨려들어왔다.
바로 뚜껑을 닫았다.
리안은 바닥에 머리를 기대고 편히 누웠다.
어느새 세찬 바람이 그쳐있었다.
가랑비 내리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그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런 생활도 재밌네.”
머릿속에 오드리아가 떠올랐다.
“공주님은 뭐하고 지내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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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회
*경고* 지금 보고 계신 화면은, 조아라에서 지원하는 정상적인 경로의 뷰어가 아닙니다.해당 방식으로 조아라에서 제공하는 작품을 무단으로 추출하는 것에 사용하거나 협조할 경우, 저작권법에 위배되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되실 수 있으니,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작품감상을 부탁드립니다.(5년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 부과)----------------------------------------밭농사 준비, 농지 구매의 시간***
밤이 되었지만 마을 중앙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축제였다.
무무카르가 죽자 토지는 금세 생명력을 되찾았다.
시간을 두고 지켜볼 필요도 없었다.
무무카르가 죽은지 이틀 후, 그간 잘 보이지도 않던 지렁이, 무당벌레, 진드기 등 토양생물들이 눈에 띄게 늘어난걸 볼 수 있었다.
이에 촌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마을 기금을 써서 통크게 축제를 열었다.
“모두 그동안 마음 고생들이 많았어! 배 터지게 마시고 마음껏 즐기게들!”
촌장이 화끈하게 돈을 쓴 덕분에 곡예사들과 음유시인, 무희들이 마을을 찾아와 멋진 공연을 선보이는 중이었다.
촌장은 리안을 옆자리에 앉혀놓고 옆마을에서 온 사람들에게 자랑하느라 여념이없었다.
“이 친구가 없었으면 우리 마을은 계속! 계에에에속! 마물한테 피를 빨리며 살았을거야! 그런데 이 친구가 어느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덕분에……!”
농사를 짓고 살아서 체력들이 좋은지, 촌장이나 그의 지인들이나 다들 술고래였다.
술이 담긴 큰 항아리 한 개를 비우고도 이내 하나 더 가져와서 그릇으로 퍼마셨다.
“자 마셔 마셔! 자네는 영웅이야! 우리 마을의 영웅일세!”
리안도 주량이 꽤 되는편이라 남들이 계속 권하는 술을 마시는 것쯤이야 그리 문제가 되지않았는데, 취기가 오른 촌장이 자꾸 비행기를 태워주려고 해서 그게 유일한 부담이었다.
“이참에 그냥 우리 마을에서 살게! 저짝 언덕에다가 집도 지어주고 예쁜 색시도 붙여줄테니까 딴데 가지 말고 여기서 눌러 살어! 영웅니임~ 우리 영웅니임~ 아이구야 취한다~! 기분 좋구만! 껄껄껄!”
리안은 적당히 받아주다가 이만하면 됐겠지 싶을때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지에 싸서 말리면 되지 화장실을 뭐하러 가?”
“금방 다녀올게요.”
촌장은 완전히 취하더니 다른 사람이 됐다.
화장실을 못가게 만류하는걸 억지로 떼어내며 겨우 벗어났다.
“후. 기분 좋게 알딸딸하네.”
리안은 걸으면서 약간 비틀거렸다.
여기저기서 주는 술을 사양않고 받아마셨더니 머리가 어질어질 했다.
마을내에 공용 화장실은 없고 건물 구석에 가서 소변을 보고 나올때였다.
우연히 딘을 발견했다.
곁에 여자애 하나가 바짝 붙어 팔짱을 끼고있었는데, 딘을 바라보는 표정을 보아하니 사랑에 푹 빠진 얼굴이었다.
“쟤가 딘이 말하던 제시라는 앤가……”
살짝 취해보이는 딘 또한 여자애를 쳐다보는 표정이 헤벌쭉한게, 저것들 보나마나 조만간 사고를 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좋겠네 딘 녀석.”
흐뭇한 표정으로 저 둘이 어디로 가나 잠시 지켜보고 있었다.
역시나 딘과 여자애는 시끌벅적한 장소를 피해 유유히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역사적인 밤이네. 역사적인 밤이야.”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주변에 있던 나무 기둥에 몸을 기댔다.
거리 중앙에는 아슬아슬한 의상을 입은 무희들이 아름다운 음악에 맞춰 매혹적인 춤을 추고 있었다.
엉덩이를 흔드는 솜씨가 정말로 기가 막혔다.
잠깐 볼 생각이었는데 리안은 그만 시선을 빼앗겼다.
무희들의 춤은 넋을 놓게 만드는 흡입력이 있었다.
한참을 멍하니 구경하던 리안은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아우, 술 생각난다. 또 마시고 싶어졌어.”
그때, 가운데에서 열정적인 춤을 추던 메인 무희가 돌연 자신을 쳐다봤다.
무심코 하품을 하려던 리안은 흠칫하며 입을 꾹 닫았다.
무희가 빙글빙글 돌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 사이에 앉아있는 구경꾼들도 있고 서로가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으나 화톳불 때문에 얼굴만큼은 잘 보였다.
그녀는 사랑스럽게 윙크를 하더니 뜻모를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다시 빙글빙글 돌며 멀어져 갔다.
‘뭐지? 유혹하는건가?’
리안은 잠시 두근거렸으나 얼마 가지 못했다.
그냥 관객을 위한 서비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들뜨지 말자며 가벼이 넘겼는데……
자신을 향한 메인 무희의 추파는 이후에도 계속 되었다.
춤을 추면서 힐끗힐끗 리안을 쳐다보는 그녀.
몰래보는 것도 아니고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고 대놓고 말하듯이 계속 눈길을 보냈다.
“위험한데……”
리안은 두려웠다.
처음보는 여자가 나한테 반할리는 없고, 무희가 자신에게 호감이 있어서 눈길을 보낸다기 보다 오늘밤 용돈벌이를 할 상대를 찾고 있는게 아닐까?
그러나 현재 자신의 처지는 피눈물이 나는 상황이다.
통장에 잔고 0원.
자신은 저 여자가 바라는걸 줄 수 없다.
따라서 무희는 틀렸다.
돈벌이 상대를 잘못 찍었다.
자신 말고 다른 상대를 구하라고 넌지시 알리듯 리안은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물론 돈이 있어도 저 여자랑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상황에 여자랑 놀고 싶은 기분은 없다.
“빨리 돌아올 생각은 안하고 딴짓이나 하고 다니면 공주님이 실망하실거야.”
* * *
때마침 무희들의 춤이 끝났다.
여자는 무대에서 내려와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저 멀리 리안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황급히 그를 뒤쫓았다.
이젠 집처럼 여겨지는 헛간에 도착하자 리안은 곧바로 드러누웠다.
술도 취했고 그대로 자버릴 생각이었다.
눈을 감는 순간 낯선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자게요?”
리안은 다시 눈을 뜨며 입구쪽을 바라봤다.
헛간은 어두웠지만 달빛이 밝아 바로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아까봤던 무희가 웃는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젊고 예뻤다.
어딜가든 평균 이상은 할만한 외모를 가진 여자였다.
리안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옆으로 누웠다.
팔을 베고 눈을 감으며 무심하게 말했다.
“피곤해서 잘려고.”
“제가 쳐다보는거 몰랐어요?”
“……”
리안이 아무 대답이 없자 여자는 헛간 안으로 들어오더니 등뒤에 바싹 붙어앉으며 리안의 팔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멀리서 봤는데 몸이 꽤 좋아보이더라구요. 만져보고 싶었어요.”
여자가 가까이 있으니 코끝에 달콤한 향기가 감돌았다.
계속 맡고 싶은 기분 좋은 냄새다.
문득 오드리아가 생각났다.
‘공주님도 몸에서 좋은 향기가 나셨는데.’
리안은 순간 가슴 한켠에 마련된 오드리아의 자리를 밀어내려는 여자에게 짜증이 났다.
“손 치워.”
“차갑네요.”
그녀가 웃는다.
“전 당신한테 관심 있는데.”
“난 관심없어.”
“팔 단단한 것 좀 봐. 멋지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꾹꾹 팔을 누르자 리안은 귀찮다는듯이 그녀의 손길을 뿌리쳤다.
“나 거지야. 땡전 한 푼 없으니 다른 사람 알아봐.”
“화대값은 걱정하지마요. 다른분들이 이미 주셨으니까. 당신과 나는 마음 편히 즐기면 그뿐이에요.”
리안은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누가?”
“여기 마을 사람들이죠.”
“얼마나 줬는데?”
“닭 한마리랑 포도 몇 송이 받았어요.”
“뭐?”
‘겨우 그걸로?’ 라고 물으려던 찰나였다.
헛간 입구가 난데없이 커다란 나무판자에 가려지며 실내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사물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깜깜해진 실내.
리안은 당황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밖에서 낄낄거리는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리안아 선물이다! 그 여자랑 잘해봐!”
이어서 쾅쾅 못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리안은 급히 입구로 달려가서 문을 밀어보았으나 꿈쩍도 안했다.
그도 그럴것이 문이 밀리지 않도록 밖에서 건장한 사내 다섯이 몸으로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리안이는 힘이 세니까 악착같이 버텨라! 못질 다 해가니까 조금만 기다려!”
안에서 리안이 소리쳤다.
“박살내기 전에 문 열어요! 진짜 부서버릴거예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속에서 여자가 리안의 팔을 붙잡았다.
“축제에 찬물을 끼얹고 싶어서 그래요?”
그녀가 팔을 잡아당기며 이어 말했다.
“소란이 일어나면 사람들의 기분이 안좋아질거예요. 다들 즐겁게 축제를 즐기고 있을텐데 그들의 기분을 망가뜨리지 마요.”
리안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
잘 생각해보니 그녀의 주장은 나름 타당했다.
헛간이 부서지면 사람들이 놀랄 것이다.
동시에 즐거웠던 분위기도 식겠지.
여기에 더해서 술먹고 주정부리는 사람이라며 쓸데없는 오해를 살 수도 있고.
촌장 옆에 앉아서 그렇게나 술을 퍼마셨는데 안취했다고 우겨봐야 믿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젠장할.”
리안은 하는 수 없이 포기했다.
안쪽으로 걸어가서 그대로 지푸라기 위에 드러누웠다.
“난 할 생각 없으니까 당신도 바로 자.”
“제 이름은 미들렌이에요.”
“이름따위 안물어봤어.”
“왜 이리 차갑게 대하는거죠?”
그녀는 리안의 옆으로 와서 나란히 누웠다.
그러고 잠시 가만히 있는가 싶더니, 슬그머니 리안의 가슴쪽으로 손을 뻗었다.
탁!
리안이 그녀의 손등을 쳤다.
“건들지마.”
“부끄러워서 그래요?”
“……”
“대답 안할건가요?”
“……”
“리안님?”
“……”
“대답안하면 똥개라고 놀릴거예요. 그래도 좋아요?”
“……”
“진심이에요.”
“……”
“당신 이제부터 똥개라고 부를거예요. 정말로.”
“……”
희한하게 잠잠하다.
발끈할만도한데 전혀 반응이 없다.
“…혹시 자고 있어요?”
“드르렁, 쿠울……”
뜬금없이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는 기막혀하며 어이가 없었다.
“맙소사, 정말 잔단 말이야?”
여자는 손을 뻗어 리안의 얼굴을 더듬거렸다.
정말로 눈 감고 자고 있었다.
심지어 얼굴을 툭툭 때려도 깰 생각을 안했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자신을 침대 위에서 이 정도로 홀대하는 남자는 난생처음이었다.
자존심이 상한 나머지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재밌네, 이 사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쪽으로 걸어갔다.
때마침 문밑이 환해지며 좁은틈으로 무언가 굴러들어왔다.
밖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언니, 받으셨어요?”
“응. 고마워.”
“좋은밤 되세요.”
“너도.”
심지에 불이 붙은 향초였다.
여자는 그것을 주워들고 잠시 향기를 맡았다.
“아……!”
단지 향기만 맡았을뿐인데 심장이 두근두근 뛰며 욕정이 불끈 고개를 쳐들었다.
미들렌은 자고 있는 리안을 달뜬 기색으로 내려다봤다.
“부끄러워 말고 우리 같이 즐겨요.”
그녀는 향초를 구석에 내려놓고 리안의 바지를 벗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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