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gricultura 1
1회
*경고* 지금 보고 계신 화면은, 조아라에서 지원하는 정상적인 경로의 뷰어가 아닙니다.해당 방식으로 조아라에서 제공하는 작품을 무단으로 추출하는 것에 사용하거나 협조할 경우, 저작권법에 위배되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되실 수 있으니,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작품감상을 부탁드립니다.(5년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 부과)----------------------------------------농사 공부, 배움의 시간***
눈을 뜨니 낯선 곳이었다.
리안은 눈을 비비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긴 어디지……?”
주변에는 각양각색의 기이한 봉우리들이 즐비했고 저마다 구름을 허리에 감고 있었다.
마치 중국 장가계 협곡에서나 볼법한 천하절경.
많은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널따란 봉우리의 정상에 자신이 서 있었다.
리안은 귀신한테 홀린듯 털썩 주저앉았다.
“부, 분명 우리집에서 잤는데?”
어젯밤 원룸에서 잔게 생생히 기억나는데 이 무슨 기절초풍할 일이람?
바지쪽으로 급히 손을 뻗어 휴대폰을 찾아봤으나 몸에 걸친거라고는 어젯밤 잘때 입었던 반팔 티셔츠와 스판 팬티 달랑 두 벌.
“꿈을 꾸고 있는건가?”
덜컥 겁이 났다.
꿈에서 깨기 위해 살을 마구 꼬집었다.
아팠다.
현실이란 소리?
리안의 안색은 더욱 굳었다.
“미치겠네.”
순간 그의 뇌리에 무언가 스쳐지나갔다.
“설마 여기 이세계? 나 이세계에 떨어진건가?”
최근 한국에서는 이세계를 다룬 소설과 만화가 많이 나오고 있었다.
그런 문화를 자주 접하던 대학생이다보니 판단이 이내 그쪽으로 흘렀다.
“이 이국적인 풍경. 여긴 한국이 아니야……”
자신의 처지를 인지하고 받아들이는데 오래걸리지 않았다.
이윽고 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세계 주인공이 될줄이야…… 말도 안돼.”
상황을 인지하자 살고자하는 본능이 치솟았다.
“지금부터 뭘하지? 뭘 먼저 해야 돼?”
리안은 황급히 주변을 돌아다녔다.
봉우리 정상은 상당히 드넓었다.
대략 축구장 여덟개 정도 합친 크기랄까.
밑으로 내려갈 길 없는 사방이 절벽이었다.
절벽 아래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놀라웠던 점은 봉우리 전체가 온갖 작물이 심어진 밭으로 장관을 이루었다.
게다가 한가운데에는 통나무로 지은 오두막과 헛간이 세워져 있었고 호수처럼 맑은 연못도 자리잡고 있다. 그곳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거대한 토굴의 입구도 보였다.
“잘 가꿔진 밭으로 보아 누군가 사는건 분명해.”
리안은 무심코 옆에 있던 나무에서 열매를 땄다.
사과처럼 붉고 동글동글하게 생긴 것이 참 먹음직스럽게 생겼다.
자신을 유혹하듯이 향기도 달콤한게 잘 익었다는걸 알 수 있었다.
“아 배고프다……”
하지만.
‘이세계에서 아무거나 주워먹으면 안될텐데. 독이 있을 수도 있고.’
이름 모를 과일을 버렸다.
그는 우선 오두막에 사는 인물이 누군지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살기 힘든 험지에 터를 잡고 사는 것을 보면 필시 대단한 능력을 가진 자가 분명하다.
오두막 집의 외관을 평가해 보자면 중국풍이 아닌 유럽풍이다.
하루아침에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된 리안은 경계심을 세웠다.
일단 멀리서 오두막집을 지켜보기로 했다.
밭 사이로 난 길에 납작 엎드려서 한참을 오두막만 바라보았다.
“하아, 대체 어쩌다 이곳에 온 것인지.”
문을 열고 나오는 사람이 성질 사납게 생긴 할배라든지 근육이 우락부락한 덩치 큰 사내가 아니라 인자한 아줌마 혹은 젊은 아가씨면 참 좋을텐데.
“만약 괴물이면 어쩌지? 그럼 큰일나는데.”
그는 긴장한 눈으로 뚫어지게 오두막만 쳐다보았다.
그러길 30여분.
내려쬐는 햇빛이 뜨거워서 자리에 못 있겠다.
그늘이 있는 곳으로 엉금엉금 기어가서 다시 납작 엎드렸다.
그후 또 한 시간쯤 지났을까.
오두막에서 누군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리안은 몸이 쑤셨다.
“답답해……”
그냥, 가서 확 열어볼까?
그러다 괴물이라도 나오면?
‘밭을 일구고 사는걸 보면 인심 좋은 농부일지도……’
머릿속에서 오만가지 생각이 오가는 사이 배가 점점 고파졌다.
꼬르륵.
꼬르륵.
꾹 참으려 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뱃속이 아우성을 친다.
아침밥을 꼬박 챙겨먹던 습관 때문이다.
리안은 하는 수 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갖 싱싱한 작물들과 곳곳에 듬성듬성 심어져 있는 과일나무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채소는 생으로 먹긴 그렇고……”
입맛을 다시며 고민을 반복하던 그는 결국 아까 버렸던 과일을 주워 들고 옷으로 흙먼지를 닦아냈다.
“밭을 정성스럽게 잘 가꾼 사람인데 설마 독나무를 심진 않았겠지?”
반들반들한 껍질부분을 살짝 깨물어 맛을 음미했다.
“으음…… 독은 없어보이는데.”
그의 눈이 번쩍 떠졌다.
“오, 맛있어. 사과처럼 아삭아삭하고 달콤해. 치즈맛도 나는 것 같고.”
안심한 그는 곧장 크게 한 입 깨물어 먹었다.
그 자리에서 주먹만한 과일을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잠시 배 상태를 점검한 결과 기분 좋은 포만감만 들뿐 어디 아프고 그러지는 않았다.
“또 먹어야겠다.”
그는 포복 자세로 기어가서 나무에서 과일을 하나 땄다.
그리고 손에 쥔 과일을 행복한 표정으로 아작아작 깨물어 먹었다.
다 먹고 나자 포만감에 온몸이 나른했다.
날씨도 선선하고 한숨자면 정말 좋겠다.
마침 배경도 장관이고……
“아아, 못 참겠다!”
뱃속이 든든해진 리안은 급 용기가 치솟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쪼그린 자세로 빠르게 오두막쪽으로 이동했다.
‘만약 걸려도 사정만 잘 설명하면……’
최대한 기척을 숨긴 채 조심조심 다가가 벽에 귀를 갖다대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음식 냄새라든지 그런 것도 없다.
애당초 꿀뚝에서 연기도 안나고.
창문은 굳게 닫혀있었으며 투명한 유리창을 통해 슬쩍 엿보려 했으나 실내는 어둡고 창문에 비친 태양의 반사광 때문에 눈만 부셨다.
‘비어있나?’
호기심을 못참은 리안은 용기를 내서 문앞으로 다가갔다.
문은 열리지 않게끔 바깥에서 고리가 걸려있었다.
이는 안에 아무도 없다는 증거.
고리를 풀고 안으로 들어갔다.
짐작대로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책장 및 벽난로가 있는 거실 그리고 나무로 만든 침상이 놓여있는 방 두 개가 전부였다.
집안이 참 단조롭다.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가구만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동그란 탁자에는 먼지가 살짝 묻어 있었다.
탁자뿐만이 아니다.
집안 전체에 먼지가 조금씩 내려 앉아있다.
특히나 벽난로는 불을 피운 흔적이 없이 깨끗했다.
“이 말인 즉슨……”
집주인이 몇 주 정도 집을 비운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돌아올지 몰라.”
혀를 차며 밖으로 나왔다.
그대로 오두막 옆에 자리잡은 토굴로 향했다.
지하로 향하는 토굴의 입구는 가까이서 보니 더 크고 넓었다.
그러나 깊이는 생각보다 짧았다.
입구에서부터 안쪽의 거대한 공터가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토굴 안으로 천천히 발을 들이던 리안은 곧 소스라치게 놀랐다.
볕이 스며드는 공동에는 한눈에 봐도 드래곤으로 추정되는 커다란 유골이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다.
박물관에 전시된 공룡의 뼈대처럼 크고 위엄있게 생긴 것이 마치 살아숨쉬고 있는 것만 같은 박력이 느껴졌다.
“드래곤이지? 드래곤이 맞을거야. 끝내주네…… 그렇다면 이곳 설정은 중세 중국이 아니라 판타지 세계란 말인가……?”
리안은 눈을 껌뻑이며 한참을 살펴보다가 문득 드래곤의 백골 옆에 자리잡은 조그마한 무덤을 발견했다.
평평한 무덤에는 달랑 비석 하나만 조촐하게 세워져 있었다.
알 수 없는 언어로 뭐라 적혀 있는데 잘 모르겠다.
드래곤의 백골 옆에 작은 묘라.
“살아생전에 서로 각별한 사이였나?”
드래곤과 인간의 가슴 따뜻한 우정이라든지?
“인간이 아닐지도 모르고 내 알 바냐.”
리안은 귀찮다는듯이 머리를 긁적이면서 토굴 밖으로 향했다.
“하아, 어쩌지……”
햇볕을 내려쬐며 지금까지 얻은 단서들을 종합해봤다.
머릿속에서 상황 정리를 하며 한참을 멍하니 서 있던 그는 주변 하늘을 둘러보다가 급히 몸을 숨겼다.
“오두막 주인은 날개가 달려 있거나 아니면 워프 마법을 부릴줄 아는 마법사야!”
이게 결론이다.
그때부터 리안은 높이 자란 채소밭속에 납작 엎드려서는 주변을 철저히 감시하기 시작했다.
“일단은 내가 먼저 놈을 발견해야해. 어떤 놈인지 먼저 파악을 해야……”
동서남북, 온 방향의 하늘을 꼼꼼이 살펴보거나 혹은 오두막 주변에서 포탈이 열리지 않는지 결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며 눈을 부릅뜨고 숨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서너시간쯤 지나자 처음의 기세는 온데간데 없고 점차 풀어지고 말았다.
“아 과일만 먹었더니 또 배고파…… 아우, 엎드려있으니까 힘들어…… 하…… 뭔놈의 개미가 여기까지 있는지 원. 가려워 죽겠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자리만큼은 끝까지 고수했다.
혼자 지루하고 힘든 싸움을 이어가는 가운데 어느덧 날이 어두워졌고, 그러는 동안에도 오두막 주인은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집안에 먼지가 쌓인걸 보면 여행을 떠난거 아니면 별장 같은 느낌일까.”
결국 그날 밤이 새도록 오두막 주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세계에 온지 2일째.
“드르렁, 쿠울……”
이른 아침까지 경계를 서던 리안은 자기도 모르게 잠들었다가 그날 오후가 되어서야 벌떡 일어났다.
“와씨, 언제 잠들었지?”
하늘은 벌써 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다급히 주변을 둘러보니 평화롭기 그지없다.
문이 굳게 닫힌 오두막은 여전히 정적이 감돌았다.
리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름모를 채소밭 근처의 바위에 등을 기댔다.
잠시 그렇게 주저않아 고민을 하고 있는데, 뱃속이 꼬르륵 거렸다.
뭐 먹을 것 없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근처에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과일나무가 보인다.
어제 먹었던 그 과일나무다.
포복자세로 열심히 나무까지 기어갔다.
그러곤 오두막 주인이 눈치를 못채게끔 최대한 안보이는쪽의 열매를 따서 한입 깨물어먹었다.
와그작와그작 씹어먹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두막 주인이 나쁜놈일지도 모르니 무기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그래, 없는 것 보다 낫지.”
제자리에서 과일 하나를 순식간에 먹어치운 리안은 곧바로 무기를 구하러 발걸음을 옮겼다.
재빨리 헛간으로 달려가 그 안을 들여다보니 깔끔하게 정리된 다양한 농기구들이 보였다.
놀라운 것은 철제 농기구가 아닌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하고 투명한 광물로 제작된 농기구들이 저마다 빛을 발하고 있었다.
자루 부분만 나무 재질일뿐이다.
“와우…… 여긴 무슨 보석 창고냐.”
리안은 괭이를 잠깐 집었다가 낫으로 바꿨다.
손에 쥐고 휘두르기에는 낫이 간편해보였다.
날카롭기도 하고.
허리를 숙인채 슬금슬금 채소밭으로 되돌아가 납작엎드렸다.
어제와 똑같이 계속 기다릴뿐이다.
‘존버가 승리한다.’
리안은 아직 힘이 넘쳐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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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
*경고* 지금 보고 계신 화면은, 조아라에서 지원하는 정상적인 경로의 뷰어가 아닙니다.해당 방식으로 조아라에서 제공하는 작품을 무단으로 추출하는 것에 사용하거나 협조할 경우, 저작권법에 위배되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되실 수 있으니,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작품감상을 부탁드립니다.(5년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 부과)----------------------------------------농사 공부, 배움의 시간
이세계에 온지 3일째.
이른 아침부터 깨어 있던 리안은 온몸이 쑤셨다.
바닥에 계속 엎드려 있자니 양팔꿈치가 저리고 아파서 꾸준히 팔을 풀어줘야했다.
심지어 풀독까지 오른 나머지 양다리에 두드러기까지 나버렸다.
대책없이 긁어대기만하던 그는 마침내 터져버리고 말았다.
“아이씨 못참겠네!”
그는 즉시 홀딱 벗고 오두막 근처에 자리잡은 연못으로 뛰어들었다.
물속에 들어가자마자 으악 하는 소리가 나올정도로 차갑고 깨끗한 물이었다.
물이 너무나 맑고 투명해서 바닥까지 보이는 물을 시원하게 퍼마셨다.
“하아, 좋다!”
다리의 가려움이 한결 나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행복한 표정으로 몇 차례 헤엄을 치던 그는 상쾌한 기분을 주체 못하며 크게 소리질렀다.
“아이엠 뿌리더어엄!”
삼일간 지속된 불안과 갈증이 이성을 집어삼켰다.
그뒤로 홀딱 벗고 채소밭을 마구 뛰어다녔다.
소리를 질러대면서.
다다다다닥!
“여긴 내 땅이야아아아! 아임 킹 오브 더 월드!”
그는 미쳐가고 있었다.
이세계에 온지 4일째.
리안은 점점 대담해져 갔다.
햇살이 내려쬐는 광활한 채소밭을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먹을만 하다 싶은 것들을 한움큼씩 따다 먹었다.
연못에 사는 통통하게 살이 오른 물고기도 그의 음식이었다.
불을 피울 도구도 없고 날 것으로 회쳐 먹었지만, 기생충 걱정보다는 배고픔을 해결하는게 먼저였다.
이름 모를 채소와 과일들이 넘쳐나는 이곳에서 육식이라고는 생선회 밖에 없었다.
“꺼억, 배부르다.”
리안은 가끔씩 알몸으로 선탠도 즐겼다.
타인의 시선을 걱정할 필요없이 이 경치 좋은 곳을 혼자 독차지하며 발가벗고 있는 것이 그나마 고독속의 행복이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 침상에 드러누웠다.
해볼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간이 배 밖으로 나와서, 그는 이제 언젠가 돌아올지도 모를 오두막 주인따위 신경쓰지 않았다.
혹시라도 주인이 나타나면 적당히 설명하면 되겠지 하는 긍정적인 생각뿐.
이세계에 온지 5일째.
연못에 들어가 한가로이 헤엄을 치던 리안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구석진 곳에 참호를 파보면 어떨까 하고.
태평한 생활속에 마음 한켠은 늘 불안했다.
불시에 큰일이 발생할지도 모르니 자신을 지킬만한 무언가가 필요했고, 그래서 떠올린 생각이 바로 참호였다.
참호를 파서 나뭇가지나 풀 같은 것으로 덮으면 비상시에 몸을 숨길 수 있는 아주 좋은 피난처가 될듯 싶었다.
“좋았어!”
리안은 곧장 헛간에서 삽을 꺼내 적당한 자리를 골라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렇게 또 하루를 보냈다.
이세계에 온지 6일째.
정오쯤 지나서야 마침내 참호를 완성했다.
아주 깊지도 않고 크지도 않다.
몸이 딱 들어갈 정도로만 적당히 파놨다.
나뭇가지를 잘라다 참호를 꼼꼼이 덮었다.
리안은 주변 지물들과 조금은 비슷해진 참호를 바라보며 보람찬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못 알아보겠지.”
잠시 후 연못에서 몸을 씻던 리안은 절벽에서 내려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봤다.
이 곳이 아무리 경치 좋고 평화롭고, 채소와 과일이 풍부하다지만 그의 모든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이 신선이나 살법한 심심한 곳에서 평생 살 수는 없는 노릇.
왕국 구경, 사람 구경, 이세계 구경을 제대로 하고 싶다.
따라서 탈출 방법을 전력으로 고민했다.
“1000미터가 넘는 아주 기다란 밧줄이라도 있으면 참 좋을텐데.”
헛간에 밧줄이 있었으나 전부 길이가 짧았다.
구름이 허리를 감싸는 끝없는 절벽을 내려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런 고민으로 또 하루가 지나갔다.
이세계에 온지 정확히 일주일째.
한가로운 오전.
팬티만 입고 서 있던 리안은 멀뚱히 푸른하늘을 올려다보는중이었다.
“날개라도 달려 있었다면…….”
그날 저녁.
여느때와 같이 맑은 연못에 들어가 몸을 씻으며 하루를 마무리하던 리안.
그의 눈앞에 난데없이 순백의 드래곤이 나타났다.
“헉!”
밤하늘을 날아오는 어떠한 인기척도 없었다.
말그대로 정말 갑자기 출현했다.
오두막 앞에 착지한 드래곤은 연못속에 있는 리안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넌 뭐지?”
그르릉 거리는게 노기가 느껴진다.
“…….”
리안은 꼴깍 침을 삼켰다.
속으로 두려웠으나 그동안 갈고닦은 노력의 성과를 보일때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집주인이 불시에 나타날때를 대비해 수없이 되뇌었던 그것.
리안은 발가벗은 몸으로 태연히 연못을 걸어나와 당당히 드래곤을 마주보고 섰다.
알몸이라 꼴이 우스웠으나 지금 잡걱정을 할때가 아니다.
오직 살기 위해 발악할뿐.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를?”
“네! 여기 주인분 되시지요?”
반가움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이쪽과 다르게 상대의 반응은 매우 싸늘하다.
“무슨 수작이지? 허튼짓 따위 집어치우고 본색을 드러내거라. 날 죽이러 왔느냐?”
“주, 죽이다니요?!”
뜻밖의 말에 당황스러웠다.
“절대 아닌데요? 전 그냥 순수한 나그네일뿐입니다.”
“누구를 바보로 아느냐!”
드래곤의 고함이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귀청이 따가워 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그놈의 수하란걸 내 모를줄 아느냐!”
“자, 잠깐만요! 혹시 다른 사람이랑 착각하신거 아니에요?”
“나의 안식처까지 침입하다니! 이 마족따위가!”
“마족?!”
분노한 드래곤은 기다란 목을 쭉 빼고 포효했다.
‘빌어먹을, 상황이 거지같이 굴러가네!’
리안은 급히 양귀를 틀어막으며 악을 쓰고 외쳤다.
“잠깐! 잠깐만요! 저 나쁜놈 아닙니다! 선량한 인간이에요! 여기와서 나쁜짓 같은 건 하나도 안했다고 장담합니다!”
필사적으로 호소했으나 하얗디 하얀 드래곤의 얼굴은 한층 더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뻔뻔한 놈! 악마의 얄팍한 수작에 놀아날줄 아느냐? 그놈과 한 패거리란걸 다 안다!”
“그놈이 대체 누군데요! 저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네놈과 말을 섞어봤자 짜증만 치미는군. 죽어라!”
드래곤은 드센 노기를 내뿜으며 입을 쩍 벌렸다.
크게 벌어진 입안 한중간에 차디찬 공기가 똘똘 뭉쳐지면서 빠르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이 창백해진 리안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제기랄, 이럴줄 알았으면 죽을 힘을 다해 절벽 아래로 내려 갈걸!’
리안이 질끈 눈을 감은 그때였다.
돌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큭! 제길!”
브레스를 쏘려던 화이트 드래곤이 갑자기 목이 막힌듯 컥컥 거렸다.
동시에 거대한 몸집도 점차 줄어들며 서서히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가는게 아닌가!
“음?”
잠시 후.
머리에 두 뿔이 나있는 알몸의 여자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살결이 희고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10대 후반에서 스무살 정도로 보이는 외모였다.
“어, 어떻게 된거지……?”
리안은 슬금슬금 다가갔다.
“저, 저기요, 괜찮으세요?”
떨리는 목청을 가다듬고 다시 말했다.
“똑똑. 계십니까? 똑똑. 어디 아프세요?”
여자는 눈을 감은 채 묵묵부답이다.
기절했나?
잠시 기다려보아도 응답이 없자 리안의 머릿속은 한없이 복잡해져만 갔다.
“뭐가 뭔지 모르겠네…….”
문득 여자의 새하얀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왼쪽 무릎 아래 정강이쪽이 크게 다쳐 피가 줄줄 흘러나오는게 아닌가!
“찢어졌나?”
비로소 깨달았다.
딴데서 처맞고 와서 몸이 아팠나보다.
그런 생각에 이르자 리안은 번쩍 눈이 떠졌다.
‘처치하려면 지금이 기회야!’
그는 헐레벌떡 뛰어가서 낫을 들고 잽싸게 돌아왔다.
“헉! 헉……!”
리안은 쓰러져 있는 여자의 알몸을 내려다보며 꿀꺽 침을 삼켰다.
‘이걸로 심장을 찌르면!’
낫을 허공에 휙휙.
몇 번인가 찌르는 연습을 하는 와중에 불쑥 불길함이 솟구쳤다.
상황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드래곤이 인간으로 폴리모프를 한 것 같은데, 만약 드래곤이라서 놈의 피부가 무쇠처럼 단단하다면……?
낫의 날이 허무하게 깨지면서 놈이 깨어난다면?
“그, 그땐 죽은 목숨인가!”
가슴이 철렁!
한 번의 실수도 용납치 않는 목숨이 달린 일!
입안이 바짝 마른다.
“안되겠어!”
고심끝에 심장을 찌르는 것을 관뒀다.
대신 다른 방법을 택했다.
그는 냅다 낫을 던지고 여자를 번쩍 들어안았다.
힘없이 출렁이는 풍만한 가슴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으나 별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예상외로 가볍네.’
양손에서 느껴지는 감촉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웠다.
자칫하다가는 손이 미끄러져 그녀를 놓칠 것만 같았다.
‘좋은 곳에서 피부 관리 좀 받았나봐. 아차, 농담할때가 아니지!’
그녀를 공주님 안기로 꽉 끌어안고 서둘러 절벽쪽으로 뛰어갔다.
다다다다닷!
‘절벽에서 떨어뜨리면 제 아무리 드래곤이라고 할지라도 살아남을 수 없겠지!’
마음 한켠에서는 드래곤과 대화를 하고 싶다는 욕구도 있었으나 아까의 상황을 생각하면 도저히 대화가 통할 상대가 아닌 것 같다.
대뜸 브레스를 쏴 날리려던 드래곤이 생각나 그의 발걸음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헉, 헉!”
이윽고 절벽에 다다르자 리안은 처음 결심과는 다르게 제자리에서 주저했다.
‘더, 던졌는데 살아나면 어쩌지? 다시 날아서 올라오면?’
그땐 또 죽은 목숨인데.
리안은 혀를 찼다.
드래곤이란 존재가 워낙 강력하다보니 철저히 죽이려면 불로 태우는 것 말고는 딱히 뾰족한 수단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현재 취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모조리 뒤가 찜찜한 방법뿐이었다.
드래곤이 되살아날까봐 두려운, 그런 미적지근한 방법들뿐……
“불 피울줄도 모르는데, 시부럴.”
절벽 밑으로 던지지도 못하고 고민만 거듭하던 와중에 불쑥 여자의 신음이 들렸다.
“으음…….”
그녀가 반쯤 눈을 떴다.
순간 리안은 소름이 끼쳤다.
“너는…… 뭐하는 것이냐……?”
그녀가 힘없는 목소리로 묻자 리안은 다급히 표정을 고치고 부드럽게 대답했다.
“정신이 좀 드십니까? 평생 올곧은 길만을 걸어온 사나이로서 가냘픈 여성분께서 다치신 것을 두고볼 수만은 없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침대에 눕혀드리겠습니다.”
“침대?”
“네, 누워계시면 나아질겁니다. 그럼 쏜살같이 달려가겠습니다!”
리안은 곧장 발길을 돌려 오두막으로 뛰어갔다.
그의 품에 안긴 여자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네가 뭔데? 넌 누구냐?”
“아까 말씀 드렸다시피 전 그냥 나그네일뿐입니다!”
“반데어자르가 보낸 자가 아니고?”
“반데어자르요? 전 그가 누군지 모릅니다! 아무 관계없어요!”
“그래……?”
“네! 정말입니다!”
숨을 헐떡대며 오두막안으로 뛰어들어온 리안은 조심스레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여자의 시선은 아리송한 것이 절반이요, 이 놈이 갑자기 뭘할지 경계하며 눈을 부라리는 것도 절반이었다.
“나한테 거짓을 고하면 널 죽이겠다.”
“제 말 한마디 한마디가 진심입니다. 제 사연 좀 들어보세요.”
리안은 모든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생각이었으나 여자는 언제 깨어있었냐는 듯 금세 정신을 잃었다.
긴장이 풀린 리안은 침대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후……. 기절해서 다행이다. 이제 어쩌지……?”
리안의 시선은 침대에 누운 여자에게 향했다.
‘짧게 몇 마디 나눴지만 분위기상 괜찮아 보이던데.’
드래곤이 한국어를 알아서 다행이야.
한숨을 돌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양동이에 물을 떠왔다.
그 다음 밖에서 채취한 식물의 줄기를 꼬와 여자의 다리를 지혈하고, 티셔츠에 물을 적셔 다리에 묻은 피를 정성스레 닦아주었다. 집안에 쓸 수 있는 천이라고는 자신의 옷가지뿐이었다.
‘살려면 이 길뿐이다!’
열심히 간호하면 기특해 보인 나머지 살려줄지도 몰라.
오늘밤 드래곤을 위해 희생하기로 마음 먹었다.
여자의 얼굴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주고 물을 쥐어짠 티셔츠를 이마에 얹어주며 밤을 새서 그녀를 보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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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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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바닥에서 눈을 뜬 리안은 매우 찌뿌둥한 아침을 맞이했다.
잠을 못자 정신이 몽롱했다.
연달아 하품이 흘러나왔다.
“아……, 살기 위해 별짓 다 했네…….”
창문을 통해 새어들어오는 햇살이 유난히 눈부시다.
커텐이라도 있으면 좋을 것을.
눈을 찡그린 채 침대를 바라보았다.
텅 빈 침대.
리안은 빠르게 눈을 비빈뒤 다시금 침대를 바라보았다.
없었다.
누워있어야할 여자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갔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뒤돌아서는 순간이었다.
활짝 열린 문쪽에 그녀가 서 있었다.
자신보다 앳돼보이는 소녀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리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눈부신 알몸으로.
허리까지 닿는 긴 흑발을 가진 그녀가 노란 눈동자로 자신을 경계하고 있었다.
“너, 정체가 뭐지?”
목소리가 차갑다.
“정체요?”
잠시 생각하던 리안은 재빨리 대답했다.
“저는 종족이 인간이고요 이름은 김리안입니다. 착한 사람이에요. 무기 같은 건 없습니다.”
“인간? 인간이라면…….”
그녀는 미간을 구기며 무언가를 생각하는가 싶더니 다시금 힘주어 리안을 바라봤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이곳에 올라올 수가 없을텐데?”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크흠! 잠시만요. 방금 막 자다깨서 목이 가라앉았네요. 크흠! 큼! 아아, 아. 이제 됐네요.”
리안은 방긋 웃어보였다.
그러나 그녀를 마주보자마자 시선을 둘 곳이 없어 황급히 벽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의아해하며 묻는다.
“왜 다른 곳을 보는 것이냐?”
티 없이 맑은 목소리에서 위엄이 느껴진다.
“아, 이건……, 제가 추하게 생겨서 실례가 될까봐요.”
“인간은 전부 똑같이 생겼던데 거기에 추한 자도 있단 말이야?”
“똑같이 생겼다뇨. 전부 다르게 생긴걸요.”
리안이 웃어보였다.
“그중에서 제가 제일 못생겼습니다.”
“그래? 몰랐구나. 나는 인간들 얼굴이 잘 구분이 안간다. 다 똑같이 생긴줄 알았어. 관심이 없어서겠지.”
“제 얼굴은 기억해주실거죠? 오늘부터 말입니다.”
“너를?”
여자가 웃음을 터뜨린다.
“인간은 말을 할줄 아니까 당돌한 말도 서슴지 않는구나.”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리안은 무척 아름답게 생긴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었으나 정면으로 봤다가 괜한 트집이라도 잡힐까봐 계속 벽쪽만 바라보았다.
“사과는 듣고 싶지 않아. 방금 물은 질문이나 어서 대답하거라.”
“여기 어떻게 왔는지 말이죠?”
“그렇다.”
드래곤, 즉 눈앞의 여자는 감사하게도 대화가 통하는 상대였다.
리안은 일절 거짓 없이 본대로 느낀대로…… 하려다가 살짝 과장을 섞어가며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그녀는 그의 말에 유심히 귀를 기울였다.
“지구라는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네.”
“눈떠보니 여기였고?”
“맞습니다 맞아요.”
“흐음…….”
리안의 설명이 끝나자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놈 때문에 우리 세계가 뒤틀린게 아닐까…….”
“놈이 누군데요? 혹시 세계를 파괴하겠다는 야망을 가진 아주 아주 강력한 흑마법사놈입니까? 아니면 대악마 디아블로라든지요?”
여자가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봤다.
“디아블로?”
“디아블로 모르세요?”
“그게 무엇인데?”
“아, 죄송합니다. 모르시면 이 세상에 없나보네요. 헛소리였습니다. 귀담아 듣지 마세요.”
“싱겁기는.”
“근데 저 질문 하나만 해도 되나요?”
“뭔데?”
“이곳을 떠나려면 날아가는 것 말고 걸어서 나가는 길은 없나요?”
그녀의 표정이 이내 싸늘해진다.
“그걸 알아서 뭐하게?”
“여기는 제 집이 아니니 떠나야 할 것 같아서요.”
“네가 알 필요 없다. 있어도 안알려줄거야.”
“왜요?”
“넌 앞으로 여기서 살아야 하니까.”
“예?! 무슨 말씀이세요?”
리안은 펄쩍 뛰며 그녀를 돌아봤다가 알몸이 눈에 들어오자 황급히 시선을 거두고 다시 벽을 쳐다봤다.
“저, 저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고 싶은데요.”
“꿈도 꾸지마. 넌 여기서 한발짝도 나갈 수 없어.”
“설마 저를 노예로 삼으시려는 거예요?”
리안의 말에 여자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노예긴 노예네.”
“저 일 같은거 잘 못해요. 화만 나실텐데…….”
“걱정 말거라. 배우면 돼.”
아름다운 그녀가 싱긋 웃는다.
“다른데 가지 말고 나랑 농사나 짓자.”
“농사요?”
리안은 눈을 껌뻑거렸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게 농사인데…….”
이렇게 리안의 이세계 농부 생활이 시작되었다.
* * *
웨류타뉴 제국의 황궁 그린윙 홀.
수많은 귀족들이 모인 대회의장에는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백발이 성성한 노황제 뮈드마르는 황금색 옥좌에 앉아 보고서를 꼼꼼이 훑어보는 중이었다.
“이런……!”
보고서의 마지막장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그의 안색이 좋지 못했다.
노황제는 오늘 대단히 중대한 사항을 선포하기 위해 제국 통치하에 있는 팔왕국의 왕들과 그들의 친족들까지 모두 불러모았다.
“예상보다 빠르다니.”
뮈드마르는 보고서를 덮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허, 큰일일세.”
노황제의 착잡한 표정에 그 누구도 감히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지금 인류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힘을 자랑하는 마왕과 전쟁을 벌이는 중이었다.
죽여도 죽여도 끝도 없이 불어나는 마족과 싸운지 어언 6년째.
아직까지는 전쟁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국력이 쇠약해진 것은 아니나, 장차 5~10년 뒤를 전망하는 보고서들이 황실로 속속 들이닥치면서 노황제는 최근 근심에 잠겨 있었다.
-마족의 영향으로 모든 땅이 말라죽어가고 있습니다. 우선 원활한 군량 확보를 위해서 황실은 하루빨리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폐하! 이대로라면 정확히 5년뒤 전국토에 대기근이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앞서 뮈드마르는 미래에 예고된 식량난의 대책을 세우기 위해 연일 자문단과 회의를 가졌었다.
그 자리에서 이 땅의 기반을 지킬 수 있는 특별 대책을 세웠고, 오늘이 바로 그 특별 대책을 공식으로 선포하는 날이었다.
“힘들고 바쁜 시기에 모두 와줘서 기쁘네.”
노황제의 인사말에 장내의 귀족들이 한 목소리로 화답했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황제는 흐뭇하게 좌중을 둘러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자네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한 건, 앞서 설명을 들어 잘 알고들 있을게야. 장차 우리 제국에 닥칠 기근에 대비하기 위해 내 특별 조치를 단행하려고 하네.”
황제가 손가락을 휘이 젓자 늙은 대신 한 명이 품속에 있던 두루마리 양피지를 꺼내 펼쳐들었다.
“모두 잘 들으시오! 지금부터 영지 소득과 농산물 가격 안정을 위한 특단의 대책과 더불어 황실 자문기관이 권장하고 장려하는 농업 생산력 향상 방안을 발표하겠소!”
늙은 대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농사의 농자도 모르는 귀족들에게 어떤식으로 농사를 지으면 생산력이 증대되는지, 그리고 그를 위해 필요한 도구와 제반시설은 무엇인지 하나부터 열까지 세세히 가르치며 구구절절 설명이 많았다.
무려 두 시간 넘게 계속 되었다.
고개를 꾸벅이며 조는 귀족이 대부분이었으나 황제도 역시 졸았기에 누구 하나 조는 것 가지고 뭐라할 사람이 없었다.
어떤 귀족에게서 고함이 터져나오기 전까지는.
“뭐요!? 혁신적인 농법을 개발한 자의 신분이 농노라도 그자에게 작위를 내려주겠다고요?”
“그렇소.”
“고작 농사나 짓는 천한자들 따위가 어찌 우리 귀족과 동등한 권리를 누린단 말이오!”
그의 외침에 힘입어 다른 곳에서도 불만이 터져나왔다.
“우리는 지금 전쟁중입니다! 목숨을 걸고 공을 세운 기사들을 위해 작위란 작위는 싹 다 끌어모아 퍼줘도 모자랄 판에, 후방에서 계집애처럼 농사나 짓는 농노들이 어찌 우리와 같은 길을 걸을 수 있단 말입니까!”
또 누군가 외쳤다.
“땅에서 자란 작물들은 더럽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작물이 자라면서 벌레, 짐승, 괴물, 온갖 것들의 대소변을 묻히고 자라나지 않겠습니까? 그딴걸 즐겨 먹는 귀족은 아무도 없습니다. 평민과 노예들만 호밀빵 같은걸 만들어서 먹지요. 그런 잡초처럼 가치없고 더러운 것을 연구한 자들이 귀족이 된다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칼도 아닌 흙이나 만지던 자들이 귀족이 된다니요. 우리 조상님들이 벌떡 일어나서 웃겠습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여기 테둘라 공의 뱃살을 보십시오! 이 얼마나 부티가 나고 아름답습니까? 태어났을때부터 고기만 먹고 자라 여태껏 야채 자체를 드셔본 적이 없는 분입니다! 덕분에 몸무게도 100kg을 넘기셨지요! 이 건강미 넘치는 뱃살이야말로 부유함의 상징……”
늙은 대신은 더는 못듣겠다 싶어 모두의 말을 잘랐다.
“자자, 그만하시오! 그러니까 당신들은 농업 정책은 따르겠으나 인재 육성 방침이 마음에 안든다 이거 아니오?”
“따지고 보면 그렇지!”
“그게 맞소!”
황실의 대책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귀족들이 나오자 늙은 대신은 급히 노황제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랍니다!”
그때까지 졸고 있던 뮈드마르는 대신의 말을 듣고 움찔하며 깨더니 이내 미간을 찡그렸다.
“여보게들!”
황제는 젊은 시절로 되돌아간듯 왕성하게 언성을 높였다.
“난 농업 인재 발굴과 새로운 농업 기술 개발을 독려하기 위해 이러한 정책을 권장한 것이네! 하든 안하든 자네들 마음이야! 5~10년 뒤에 영지가 망하든 말든 난 신경 안쓰겠어! 그때가서 내게 빵쪼가리라도 달랬단 봐!”
황제는 엄히 꾸짖어가며 선언했다.
“짐은 앞으로 새로운 농업 기술을 개발해 백명을 살리는 자에게는 전투에서 백명을 죽인 기사와 동등하게 취급하여 그에 걸맞는 상을 내릴 것이고, 만명을 살리는 자에게 기사 작위를, 백만명을 살리는 자에게는 백작 작위를 내릴 것이네!”
백작 작위란 소리에 장내의 귀족들이 소란스러워졌다.
“오, 세상에!”
노황제의 말은 열정적으로 이어졌다.
“또한 천만명을 살리는 자에게는 내 황실 자문단에 넣어줄 생각이야!”
그리고 황제의 마지막 말은 모두를 충격의 도가니에 빠뜨렸다.
“만약 새로운 농업 기술을 개발해 이 땅의 오천만명을 먹여 살린다면 그놈은 왕이야! 왕을 시켜도 될 놈이지!”
황제 뮈드마르의 선언은 귀족들에게 대단한 충격과 더불어 큰 변화를 불러 일으켰다.
처음에는 반대했던 귀족들 사이에서 몇몇은 금세 잔머리가 돌아갔다.
“갑옷과 군마 없이도 출세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좋은 기회 아닌가? 다칠 일도 없고 무엇보다 돈이 들어가질 않으니.”
곰곰이 고민하던 귀족들은 대부분 비슷한 생각을 품었다.
‘잘하면 내 자식도 왕이 될 수 있다는 소리잖아? 그것도 아주 쉽게!’
팔왕국을 통치하는 웨르타뉴 제국.
머지않아 전국토에 농업학교가 수백개씩 세워지며 농업의 바람이 휘몰아칠게 분명했다.
아무튼 귀족들이 저마다 들뜬 기분으로 웅성대는 가운데 늙은 대신이 황제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왕이라니요? 정말로 오천만명을 먹여살리는 자가 나타나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그에 뮈드마르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가능하다고 보나? 그만큼 열심히 하란 소리지. 인재 발굴 말이야. 솔직히 나도 고기가 제일로 좋아. 똥이 섞인 거름으로 키우는 야채를 누가 먹나. 그저 백성들 먹여 살리겠다고 농업을 장려하는거지. 다들 고기를 좋아해서 절대 오천만명이 될리가 없어. 오천만명을 먹여살리려면 귀족들까지 전부 야채를 즐겨 먹어야하거든. 단순 백성들 인구로는 어림없는 수치야. 껄껄.”
이처럼 황제를 비롯해 귀족들까지 고기만 좋아하는 세상.
이러한 세상에서 농사로 세상을 구할 자는 과연 누구일까?
* * *
리안은 너무나 뜻밖의 말이라 거부감이 앞섰다.
“이곳에서 농사나 짓고 살라고요?”
“좋지?”
“평생 지어요?”
“응. 마침 일손이 부족해서 허덕이던 참이었는데 잘됐어.”
“절 뭘 믿고요? 뭘 믿고 같이 농사를 짓자는 거예요?”
“아까 착한 인간이라며?”
“뽕일수도 있, 아니 거짓말일 수도 있잖아요?”
“그럼 나쁜 인간인가?”
여자는 목소리를 내려깔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의 분위기가 바뀌자 리안은 당황하면서 게 눈 감추듯 태도를 바꿨다.
“뭐, 농사를 안짓겠다는건 아닌데요. 정말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높은 곳에서 살면 제가 외출하는데 지장이 있지 않을까요? 인간은 못난다는거 아시잖아요.”
“나갈 필요가 뭐 있어? 나가지마.”
그녀는 매정하다싶을 정도로 아주 간단히 대답했다.
그 모습에 리안은 낙담하면서 말문이 막혔다.
‘재수없이 이세계에 떨어졌는데, 기왕 이 꼴이 난김에 영주도 해보고 예쁜 공주랑도 사겨보고 엘프도 봐야 하는거 아닌가! 평생 구경도 못한다고?’
리안은 울적했다.
“그래도 가끔씩 휴가는 주실거죠?”
“휴가? 그런게 필요해?”
“당연하죠! 인간들 세계에선 복지가 최우선입니다! 직장에서 틈틈이 휴가도 주고! 아파서 쉬는 동안에도 월급도 꽉꽉 채워서 주고! 여행도 보내주고 한다구요!”
여자는 정색을 했다.
“인간은 여러모로 까다롭구나.”
“까다롭다니요! 당연한겁니다!”
“음.”
여자는 무언가를 떠올리는듯 잠시 말이 없더니 입을 열었다.
“네가 오기 전에 야생에서 고블린을 한마리 잡아왔었지. 농사를 지으려면 손이 필요하니까 고블린처럼 두 발로 걷고 두 팔이 달린 아이가 필요했어.”
“음?”
리안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동안 고블린 같은 건 못봤는데 어디 갔죠?”
“일은 안하고 시끄럽게만 굴길래 잡아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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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회
*경고* 지금 보고 계신 화면은, 조아라에서 지원하는 정상적인 경로의 뷰어가 아닙니다.해당 방식으로 조아라에서 제공하는 작품을 무단으로 추출하는 것에 사용하거나 협조할 경우, 저작권법에 위배되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되실 수 있으니,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작품감상을 부탁드립니다.(5년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 부과)----------------------------------------농사 공부, 배움의 시간
철렁!
리안은 입이 쩍 벌어졌다.
“잡아……, 먹혔다고요?”
“농사를 가르치려고 했더니 이 놈이 글쎄 논밭을 망치기만 하고, 아무리 혼내도 장난기만 가득하고 일은 안하려드니 쓸모없어 잡아먹었다.”
“맙소사.”
여자는 이어 또다른 일을 회상하면서 말을 이었다.
“고블린을 잡아 먹고 난뒤에는 곧바로 오크를 한마리 데려다놨지.”
“오, 오크…….”
“먼 곳의 오크 마을까지 날아가서 적당히 괜찮은 녀석을 골라 발톱으로 낚아채서 여기로 데리고 왔어.”
리안은 꿀꺽 침을 삼켰다.
“근데 그 아이도 실패였어. 농사는 배우려 들지 않고 식성만 넘쳐나서 논밭의 모든 것들을 먹어치우지 뭐냐. 되려 골치 아팠지.”
“그, 그래서 또 잡수셨나요?”
“필요없어졌으니까.”
리안은 소름이 돋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헛기침을 했다.
여자는 리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앞서 두 일을 겪어본 바, 너는 영리하니 괜찮겠다 싶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내 피를 닦아준 네 옷가지가 보이더구나. 고블린과 오크에게서 볼 수 없었던 아주 기특한 행동이었어. 나는 그것에 기뻤고 널 일꾼으로 삼기로 정한거야.”
“그래서…….”
이제야 이해가 됐다.
리안은 시선을 돌려 방 한켠에 놓인 얼룩진 티셔츠를 바라보았다.
여자의 피로 얼룩진 티셔츠.
‘저 티셔츠에 감동했으면 가지고 있는 보물이나 좀 떨궈주지…….’
드래곤이면 레어에 금은보화가 가득할텐데.
‘일꾼이 뭐야, 일꾼이. 쳇. 뻑킹 이세계.’
문득 여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보아하니 농사가 싫은가 보지?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구나. 아깝지만 너도…….”
“잠, 잠깐만요!”
리안은 뜬금없이 팔뚝을 내밀고 조그만 알통을 자랑했다.
“벌써부터 몸이 근질근질 하네요. 뭐 부터 하면 되죠? 빨리 일 좀 시켜주세요.”
농사는 싫지만, 뭐니뭐니 해도 살아남는게 최고다.
* * *
“제일 말썽인 곳부터 처리하자.”
어젯밤 부상을 입고 나타났던 여자는 한쪽 다리가 성치 못했다.
한 손에 지팡이를 짚고 다리를 절며 리안을 채소밭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는 오이처럼 생긴 작물이 왕성한 기운을 뽐내며 자라고 있었다.
크고 윤기가 흐르는게 척 보기에도 대단히 싱싱하고 맛나게 생겼다.
리안은 신발을 신고 있지 않아 맨발이었지만, 흙이 너무 곱고 고와 뛰어다녀도 상관없을 정도로 편했다.
“일주일 넘게 돌보지 않았더니 잡초가 이리도 무성히 자랐더구나. 나는 다른 곳을 둘러보고 올테니 너는 여기서 잡초를 뽑고 있도록 해.”
“정말 쉬운 일이네요. 미친듯이 뽑아버리겠습니다. 걱정마세요.”
리안이 두 팔을 걷어 붙이며 으쓱대자 여자가 웃는다.
“알았다.”
여자가 떠나고난뒤 리안은 오이(?)밭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깊은 한숨을 흘렸다.
밭이 드넓어서 한숨이 흘러나왔고, 잡초도 개떡같이 많아서 슬쩍 짜증도 났다.
태어나서 농사일이라고는 쥐뿔도 안해봤건만 이게 뭔 고생이람.
“별 수 있나. 살려면 해야지.”
이내 쪼그리고 앉아 잡초를 뽑기 시작했다.
별다른 장비도 없다.
피로 얼룩진 티셔츠와 팬티뿐.
손으로 잡초를 뽑는데 갈수록 점점 손바닥이 따가워진다.
입에서는 연신 투덜투덜거렸다.
“아 하기 싫어. 아 하기 싫어. 아……, 죽갔네.”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제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원래 이세계에 오면 다들 칼 부터 배우지 않나?”
멍하니 푸른 하늘을 올려다 본다.
“정말 여기서 평생 살아야 하나……. 드래곤의 종 노릇이나 하면서…….”
푸념섞인 한숨이 쉬지 않고 훌러나온다.
얼마되지 않아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인간아. 벌써 지친 것이냐?”
“예?”
리안이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자 햇볕을 받아 더욱 눈부신 여자의 뿔과 나신이 보였다.
“아, 아뇨! 안지쳤습니다!”
벌떡 일어나서 다시 잡초를 뽑기 시작했다.
여자는 그가 뽑은 잡초더미를 보더니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인간이 낫군. 말썽도 안피우고.”
내내 불평을 하긴 했어도 일은 썩 잘해놓았다.
“열심히도 했구나. 힘들면 쉬었다 해도 좋다.”
리안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멋쩍게 웃었다.
“힘들진 않은데 배가 좀 고프긴 하네요. 계속 꼬르륵 거려요.”
“그래?”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그럼 잠깐 기다리거라. 내 잠시 나갔다오마. 마침 나도 배가 고프군.”
“맛있는거 사오세요! 아참 그리고 제 이름은 인간이 아니고 리안입니다!”
“리안? 그렇게 부르면 되는 것이냐?”
“성까지 해서 김리안인데 리안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러마.”
“저기. 저……, 어, 음. 뭐라고 불러드려야 할까요?”
“나 말이냐?”
“네. 스승님으로 부를까요 아니면 주인님? 또는 대장님? 어떤게 좋으세요?”
“편한대로 부르거라. 내 이름은 오드리아다.”
“역시 주인님. 이름이 정말 예쁘십니다.”
리안은 엄지를 추켜세우며 아양을 떨었다.
“앞으로 오드리아님으로 부를게요.”
“그러렴.”
오드리아는 곧바로 거대한 화이트 드래곤으로 변신하더니 날아가버렸다.
그 모습은 정말이지 동영상으로 촬영을 해서 몇 번이나 반복해서 보고 싶을 정도로 장관이었다.
제자리에서 탄성을 자아내던 리안은 상공을 훨훨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너튜브 조회수 3억은 기본이겠다…….”
리안은 그녀가 돌아왔을때 칭찬을 받을 생각에 더욱 열심히 잡초를 뽑기 시작했다.
“인간으로 폴리모프했을때는 나보다 어려 보이던데 실제 나이가 몇 살일까?”
그렇게 한참동안 잡초를 뽑고 있는데, 갑자기 채소밭이 바람에 세차게 흔들렸다.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 보니 드래곤이 날개를 펄럭이며 내려오는 중이었다.
그녀의 입에 짐승의 사체가 물려있었다.
짧은 네 다리와 꼬리가 달린게 마치 악어 비슷하게 생겼다.
‘다친 것 같더니 사냥은 잘 하네.’
리안은 짐짓 환하게 웃으며 오드리아를 맞이했다.
“다리는 괜찮으세요? 무리하신거 아니에요?”
“나를 뭘로 보는 거야? 쓸데없는 말은 하지말거라.”
그녀는 쌀쌀맞게 대답하면서 짐승의 사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냥 물어본 것 뿐인데 왜 저리 화를 내? 쳇.’
리안은 곧바로 화제를 전환했다.
“얘는 이름이 뭐예요? 처음보는 짐승이네요.”
“늪지에 사는 빌비오 엘리게이터란 놈이지.”
오드리아는 금세 뿔달린 젊은 여자의 모습으로 변했다.
리안은 가까이 다가가서 꼬리도 없는 주제에 꼬리를 흔들었다.
“몸이 불편하심에도 이렇게나 크고 세보이는 놈을 잡으시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최고예요 최고!”
그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인간은 참 별 것도 아닌 일로 호들갑을 떠는구나.”
리안은 여기저기 둘러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제 먹을거는요? 시장은 안 다녀오셨어요?”
“여깄잖니.”
“여기라니요?”
“보고도 모른척 하는거야?”
그녀는 한켠에 놔두었던 지팡이를 짚으며 빌비오 엘리게이터의 사체를 가리켰다.
리안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보고 저걸 먹으라고요?”
“싫으니?”
“노, 농담이시죠? 소나 돼지는 없어요?”
그러자 오드리아가 정색했다.
“내 특별히 너를 생각해 별미중의 별미를 수고해서 잡아왔는데 마음에 안드는 거야?”
리안은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저딴걸 어떻게 먹어! 먹어본적도 없는데.’
겉으로는 밝게 웃어보였다.
“아뇨. 끝내주게 맛나보이네요. 어떻게 먹으면 되는 거예요?”
“네가 하고 싶은대로 해먹으렴. 생살을 뜯어먹고 싶으면 뜯어먹고 조리가 필요하면 조리를 하고.”
“조리할래요. 불 피우실줄 아시죠?”
* * *
오드리아가 후 하고 입김을 불어넣자 마당에 쌓인 장작에 불이 붙었다.
리안은 그 모습이 신기했다.
“소(小)자 브레스인가요?”
“소자?”
“아! 그러니까 약하게 쏜 브레스냐고요.”
탕수육 소자 같은……
“마법인데?”
“입에서 나갔잖아요? 마법을 입으로도 부려요?”
“내 브레스는 이거야.”
그녀가 땔감용으로 쓸 나무를 들고 호 하고 불자, 입안에서 싸늘한 입김이 뿜어져 나오더니 나무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리안이 손뼉을 쳤다.
“아이스 브레스……!”
“잘 아는구나. 내 브레스는 모든 것을 얼려버리지.”
그녀는 웃으며 지팡이를 짚고 어디론가 떠났다.
홀로 남겨진 리안은 살짝 창백해진 얼굴로 다시금 오드리아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절대 저 분을 화나게 해선 안돼……. 심기를 건드렸다가는 얼어 죽을지도 몰라…….”
리안은 오드리아가 건네준 식칼을 이용해 빌리오 엘리게이터의 가죽을 찢고 구이용으로 살점을 잘랐다.
식칼은 빛까지 자르려는듯 날이 무척이나 예리했다.
‘역시 드래곤이 쓰는거라 그런지 식칼조차 명품 같네.’
이후 토막낸 살점들을 모닥불에 굽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냄새가 상상을 초월했다.
맛있어 보이기는 커녕 누린내 때문에 토할 것 같았다.
‘이딴걸 어떻게 먹어!’
반면에 오드리아는 지글지글 익어가는 고기 앞에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지 뭔가!
“인간들은 구워먹는걸 좋아하나봐. 생으로 먹는 것도 괜찮은데.”
“저 오드리아님?”
“응?”
“맛있어 보여요?”
“침이 고일 정도로 향기롭구나. 빨리 먹고 싶다.”
“아, 네.”
리안은 냄새를 피해 도망가고 싶은걸 꾹꾹 참아가며 고기를 다 구웠다.
‘누린내가 안나려면 한참동안 피를 빼야한다는데 대충 물로 씻고 바로 구워서 그런가…….’
어쨌거나 먹기 싫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던 오드리아가 접시를 비롯해 식사용 칼과 수저를 들고 나타났다.
본인이 쓸 것과 리안의 것이다.
모두 은으로 만들어져 있어 리안은 속으로 감탄했다.
“직접 사신 거예요?”
“부모님이 쓰시던 거야.”
“두 분 다 덩치가 크셨을텐데 쩨쩨하게 이런 작은 도구들을 쓰셨다고요?”
“매일 쓰셨어.”
“헐, 매일요?”
드래곤이 숟가락을 쓴다라…….
리안은 속으로 아리송했지만 더는 생각하기 귀찮았다.
좌우간 음식이 차려지고 식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리안이 식탁 앞에서 뜸을 들이며 한참을 주저하자 먼저 먹고 있던 오드리아의 얼굴이 굳었다.
“먹기 싫어?”
“아뇨.”
“왜 안먹어?”
“안먹긴요. 지금 제 뱃속에서 빨리 먹으라고 난리부르스를 추고 있습니다.”
리안은 칼과 수저를 사용해 구운 고기를 토막낸뒤 후다닥 입안에 던져넣었다.
그는 곧 지옥을 맛봤다.
‘존나게 맛없어!’
오만상을 찡그려가며 씹어대는 모습을 오드리아가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 화가난 얼굴로.
“맛 없어?”
“맛 있어요.”
“표정은 아닌데?”
“이빨이 아파서요.”
“이빨이 왜 아파?”
“뼈를 씹었나봐요.”
“뱉어봐.”
“예?”
눈앞에서 그녀의 가슴이 적나라하게 출렁거린다는 기분이 든 순간 오드리아의 손은 어느새 리안의 턱을 부여잡고 다른 손으로 입안에 든 음식물들을 끄집어 내고 있었다.
“어억.”
“가만히 있어.”
제대로 씹히지도 않은 음식물을 모조리 끄집어 내고 리안의 입안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오드리아.
치아를 직접 만져보고 흔들어보더니 인상을 썼다.
“거짓말을 했구나.”
리안은 속으로 뜨끔했지만 겉으로는 담담했다.
“착한 거짓말이에요.”
“거짓말에 착한 거짓말이 어딨지?”
“제가 맛없다고 하면 오드리아님께서 슬퍼하실까봐 그랬어요.”
“내가 왜 슬퍼해?”
“솔직히 이 고기는 제 입맛에 안맞아요. 평소 먹던 고기가 아닌걸요.”
오드리아는 선 채로 리안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나와 같이 살기로 해놓고서 이처럼 거짓말을 하면 앞으로 내가 어떻게 믿겠니?”
“저는 오드리아님에 비하면 아무런 힘도 없는 한낱 인간에 불과해요. 오드리아님의 말씀 한마디마다 두렵고 쩔쩔맬 수 밖에 없어요.”
“왜 무서워 해?”
“심기에 거슬리면 언제든지 절 죽이실 수도 있잖아요.”
“네가 말을 잘 들으면 죽이지 않아.”
“거봐요. 말씀을 잘 들어야 죽이지 않겠다고 하시니 저도 방금처럼 솔직해지지 못하게 돼요. 좋은걸 싫다고 하고 싫은걸 좋다고 할 수 밖에 없는걸요.”
“……!”
오드리아는 인간의 지능이 낮다고 생각해 리안을 다그쳐 교육을 하려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리안의 반론이 나름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드래곤의 자존심상 네 말이 옳다며 공감해주지는 못하겠고, 새침한 표정으로 바로 대화를 끝냈다.
“겁쟁이.”
오드리아는 자기 자리로 되돌아가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네 투정을 들어줄 생각은 없다. 건강하게 살고 싶다면 앞으로 이 맛에 익숙해지는게 좋을거야.”
어차피 리안도 현실을 받아들이겠다고 다짐하던 차였다.
‘이 세계의 모든 고기맛이 이럴거야. 하물며 왕이 먹는 고기조차 누린내가 심하게 나겠지. 이 세계의 상황이 중세 유럽과 똑같다면.’
리안은 손으로 구운 고기를 집어들었다.
둘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식어 있었다.
“열심히 먹어볼게요.”
누린내가 펄펄 나는 고기를 억지로 입속에 쑤셔넣었다.
오만상을 찡그리며 먹는 사이 그녀가 말했다.
“오늘은 내 몸이 편치 못하여 하루 쉬겠지만,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농사일을 가르칠거야. 준비하고 있거라.”
리안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녀를 바라봤다.
“비법을 막 알려줘도 되나요?”
“왜?”
“보통 나만 아는 비법 같은 거는 잘 안가르쳐주잖아요.”
“네게 알려주면 그만큼 내 몸이 편해지는데 뭐가 문제니?”
“아. 절 부려먹으려고 가르치시는 거군요.”
누린내 가득하던 고기에서 쓴맛이 났다.
‘얄짤없이 이곳에서 썩게 생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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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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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식사를 마친 후 오드리아는 곧장 드래곤으로 변신했다.
그대로 어디론가 떠나려고 했다.
“어디 가세요?”
“회복을 위해 빨리 레어로 돌아가서 쉬지 않으면 안된다.”
그녀의 말에 리안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가 레어 아니었어요?”
“레어는 북쪽에 있다.”
“정말요?”
리안은 불쑥 드래곤의 레어를 구경하고 싶었다.
헤어짐이 아쉬운척 그녀를 쳐다봤다.
“혼자 가시게요? 저는요? 저도 가고 싶어요. 데리고 가주세요.”
그녀의 커다란 입이 움직인다.
“넌 여기서 밭을 지켜야지.”
“밤에도 모시고 싶어요. 전 오드리아님의 충실한 종이라구요.”
그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오드리아가 피식대며 웃었다.
“거긴 아주 추운 곳이야. 인간은 1분도 버티지 못하고 얼어버릴거다.”
리안은 어쩔 수 없이 마음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얼어 죽는다니 어쩌랴.
“잘 지키고 있으렴.”
드래곤으로 변신한 오드리아는 저 멀리 훨훨 날아가버렸다.
홀로 남겨진 리안은 마당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았다.
“경치는 쥑이네.”
노을진 풍경을 바라보는 가운데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여기서 평생……, 살아야 하는건가. 하지만 갈 곳도 없고…….”
멍하니 혼잣말을 중얼중얼.
“오드리아도 그리 나쁜 드래곤은 아닌 것 같고, 기분만 잘 맞춰주면 나한테 잘 해준단 말이야. 음식 취향이 달라서 마음에 안들긴 하지만.”
이후 날이 완전히 저물고 시원한 밤바람이 뺨에 와닿았다.
리안은 그때까지 생각에 잠겨있었다.
“…심지어 오드리아는 드래곤이야. 드래곤을 주인으로 둔 것만으로도 영광이지. 이런 행운이 어딨어. 든든하잖아.”
이윽고 그는 결론지었다.
“까짓거 살아주지. 기왕 이렇게 된김에 여기에 뼈를 묻자고! 장례야 오드리아가 알아서 잘 치러주겠지 뭐! 나보다 오래살테니까.”
김리안.
그는 매사 낙관적이었다.
삶을 한탄하거나 불평하는 등의 부정적인 생각들은 반나절이면 잊혀지는 그런 사람!
좋은말로 긍정적인 놈!
다른말로 단순한 놈!
그렇게 지구인 김리안은 오늘부터 이세계 농부 김리안이 되기로 결심했다!
“남들은 이세계에 와서 칼을 들고 설치는데 난 농기구를 들고 설쳐주마! 두고봐! 농업계의 스페셜리스트가 되겠어!”
이후 채집한 과일로 대충 저녁을 때운 그는 침상에 드러누웠다.
천장을 마주하는 순간 갑자기 가족 생각이 나며 코끝이 찡해졌다.
“하아……, 엄마 아빠 보고 싶어서 오늘밤은 잠이 안올 것 같아. 어떻게 지내실……, 드르렁, 쿠울…….”
그는 눕자마자 곯아떨어졌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난 리안은 헛간에 가서 빗자루를 꺼내와 열심히 앞마당을 쓸었다.
이곳에서 살기로 결심을 굳힌 이상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행여나 오드리아가 변심해서 내쫓아도 절대 안나갈거야. 이제 여기가 우리집이야. 저 널따란 밭은 나랑 오드리아랑 공동명의로된 땅이고. 즉 내 땅이란 소리지.”
리안은 흡족한 얼굴로 음하하 크게 웃었다.
“그 기분 나쁜 웃음소리는 뭐지?”
“헙!”
뒤에서 불쑥 오드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급히 뒤돌아보니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을 쳐다보는 게 아닌가!
그녀의 오른손에 마대자루처럼 큼지막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어, 언제 오셨어요? 기침이라도 하시지.”
리안은 얼른 뛰어가서 그녀의 자루를 받아들었다.
그런데 이놈의 자루가……
“헛!?”
허리가 꺾일 정도로 엄청나게 무거운 것이었다.
두 손으로도 들리지 않았다.
잠시 낑낑대다가 포기했다.
“뭔데 이렇게 무거워요?”
“너 줄려고 가져왔다.”
“뭔데요?”
그녀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다.
“그냥 보물이야.”
“그냥 보물……?”
“생전에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인간은 탐욕적이고 값비싼 재화를 좋아한다고 하셨다. 나 몰래 여길 떠나려 한다든지, 나한테 거짓말을 한다든지, 날 실망시키지 말라고 주는거야. 앞으로도 쭉 지켜봐서 네가 잘한다 싶으면 또 갖다주마.”
“와우! 감사합니다! 근데 어떤 보물이길래 이렇게 무거워요?”
“보물이 산처럼 쌓인 보물산에서 손으로 퍼서 자루에 담았다.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몰라.”
드래곤의 손으로 펐다면 포크레인으로 푸는거나 다름없다.
서둘러 자루를 풀고 안을 들여다보자 각종 보물들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티아라, 보석함, 보검, 여성용 드레스, 팔찌 등등.
황금과 은으로 만들어진 보물들이 리안을 기쁘게 만들었다.
“이 정도면 왕국도 건설하겠는데요?”
그건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영지 정도는 살 수 있겠지!
어쨌든 리안은 크게 신이났다.
“전 평생 오드리아님만 모시고 살겁니다! 정말이에요! 오드리아님을 위해서라면 발바닥도 핥을 수 있습니다!”
오드리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발바닥을 핥는다니, 표현이 너무 재밌다.”
* * *
아침 식사를 끝마친뒤 오드리아는 리안을 데리고 밭으로 향했다.
“오늘부터 열심히 노력해야한다. 각오는 되어 있겠지?”
리안은 싱글벙글 웃으며 힘차게 대답했다.
“물론이죠! 어서 가르쳐 주세요!”
보물을 선물 받은 이후로 그의 표정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오드리아는 그에게 진지하게 임하라며 주의를 준 다음 말을 이었다.
“우선, 가장 기본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일들 몇 가지를 가르치겠다.”
그녀는 제일 먼저 밭의 경계 부분에 배수로를 파는 일을 시켰다.
하지만 리안은 무척이나 삽질이 서툴렀다.
군대에 있을때 빼고는 삽질을 해본적이 없는 그였다.
군대에 다녀왔다고 해서 모든 사내가 삽질을 잘 하는건 아니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오드리아가 마지못해 거들고 나섰다.
“이렇게 해봐. 이렇게란다. 그래, 그렇게.”
“오오, 잘 되네요!”
리안은 오전오후 가릴것 없이 매일 배수로를 파거나 보수했고, 오드리아가 옆에서 꼼꼼이 봐주면서 가르치자 그의 삽질은 단 3일만에 제법 쓸만해졌다.
배수로를 다 파고나자 다음날부터는 잡초를 뽑았다.
어제 뽑았어도 오늘 금방 자라는게 잡초이기 때문에 다른 일을 하는 종종 수시로 뽑아줘야만 했다.
축구장 8개 크기의 공간에 밭은 많고 일손은 두 명뿐이니 하루이틀 하고 끝날 일이 아니었다. 오드리아가 오랜기간 집을 비웠었기에 그동안 자란 잡초들이 밭길 사이사이, 채소들 사이사이, 여기저기 비집고 올라온 것들이 수두룩했다.
리안은 팔을 쭉쭉 뻗어 쑥쑥 뽑아나갔다.
잡초를 뽑은지 나흘째 되는 날.
무성했던 잡초가 확연히 줄어든게 눈에 보이자 오드리아가 기뻐했다.
그녀는 한시름 덜었다며 리안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리안은 그녀가 기분 좋은 틈을 타 슬그머니 물었다.
“오드리아님. 전부터 궁금한게 있는데 여쭤봐도 될까요?”
“무슨 얘긴데?”
“다리는 어디서 다치신거예요?”
그러자 오드리아의 입가에 머물던 미소가 한층 옅어졌다.
“넌 몰라도 돼.”
“왜요? 알려주면 안돼요?”
“바깥 세상 이야기다. 그곳 이야기는 들어봐야 네 머리만 혼란케 할뿐이야. 넌 평생 여기서 살아야 해.”
“이곳에서 나갈 생각 없어요. 다리를 크게 다치셔서 어떤놈이 그랬나 하고 궁금했을 뿐이에요. 또 알아요? 제가 나중에 복수해줄지?”
오드리아가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
“넌 그자에게 손도 못댈테니 신경끄렴.”
리안은 크게 서운했다.
“혼자가 아닌 둘이잖아요. 앞으로 어려움이 닥치면 둘이 헤쳐나가야죠. 오드리아님 곁에 이젠 제가 있다구요.”
그런 리안의 말은 오드리아에게 뜻밖의 감동을 안겨주었다.
부모를 여의고 백년이란 시간을 홀로 지낸 그녀에게 이처럼 큰 위로가 되는 말도 없었다.
“그래, 내가 잘못 생각했다. 우린 둘이야. 앞으로도 계속 둘.”
잡초 뽑기가 끝난 다음에는 무너진 이랑을 보수하는 일을 시켰다.
먼저 시범에 나선 오드리아의 괭이질 솜씨를 보고 리안이 감탄하자 그녀는 너도 할 수 있다며 응원을 해주었다.
앞서 대화 때문인지 그날따라 그녀의 분위기는 많이 부드러웠다.
“당장은 능숙하게 못할테니 쉬어가면서 해.”
또 삼일이 흘렀다.
이랑 보수 작업이 끝나자 오드리아는 돌이 많고 거친 흙이 있는 밭으로 향했다.
“흙속에 묻혀 있는 돌들을 파내 절벽 아래로 던져버리거라.”
이번 교육은 체력을 기르는데 중점을 두고 있었다.
밭과 절벽과의 거리가 꽤 멀고 길도 바퀴가 잘 굴러가지도 않는 흙길인지라 돌을 수레에 쌓고 운반하기란 여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오드리아가 드래곤으로 변신해서 수레 채 던져 버리면 그만있었으나 그녀는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다.
리안이 체력을 기를 수 있도록 혼자 끙끙대며 수레를 밀고 다니게 그냥 놔두었다.
리안은 너무 힘들고 괴로웠지만 한 가지 희망을 품고 꾹 참고 견뎌냈다.
“이거 열심히하면 저도 근육남이 될 수 있는거죠? 그렇죠 오드리아님!”
그로부터 두 달 후.
리안의 몸은 이전과는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오오, 이게 나야? 믿기지 않아!”
갓 이세계에 도착했을때는 피부가 하얗고 말랐던 몸이 지금은 햇빛에 그을린 구릿빛 피부, 물건만 집었다하면 힘줄이 불끈 솟는 팔뚝, 지방이 빠지면서 매끈하고 탄탄해진 허벅지.
리안은 몸이 좋아졌다는 걸 깨닫게 되자 전에 없던 자신감이 생기고 의욕도 하늘을 찔러 그저 농사가 신이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오드리아가 딱히 뭘 시키지 않아도 먼저 나서서 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렬했다.
“또 할 거 없나요? 아직 힘이 남아돌아요.”
“그만 쉬었다 하자. 무리하다 다칠거야.”
그런 그의 자세를 오드리아는 무척이나 기특하게 여겼고, 자신이 가진 지혜를 모두 나눠주고 싶은 욕심도 들었다.
이제야말로 이론 교육을 시작할때라고 생각했다.
“내일부터는 책을 들고 배울거다. 글자는 읽을 수 있겠지?”
“글자요? 한국어라면 읽을 수 있는데.”
그동안 오드리아의 말은 리안의 귀에 한국말로 들렸는데, 그것은 드래곤만이 쓸 수 있는 그들의 언어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입밖으로 꺼내어지는 단 한 글자조차 마력이 담긴 용언은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게 자신들의 모국어로 들렸다.
“언어도 얼른 가르쳐야겠군. 그래야 내가 없을때도 책을 볼테니.”
리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느 나라 언어인데요?”
머릿속으로 새로운 일정을 짜고 있던 오드리아가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봤다.
“내가 아는 언어는 용언 밖에 없다.”
“제가 용언을 배운다고요?!”
리안의 얼굴이 환희에 물들었다.
“대박!”
그리하여 다음날부터 바쁜 농사일속에 용언을 배우는 일도 병행했다. 오전에는 용언을 배우고 오후에는 밭으로 나가 돌을 고르고 잡초를 뽑고 고랑을 파며 해충을 잡았다.
용언을 배우기 시작한 첫 주에는 리안은 무척이나 고생을 했다.
인간과 드래곤은 신체의 구조가 매우 다르고 무엇보다 가진 마력에도 엄청난 차이가 있기에 마법의 힘을 사용하는 용언을 구사하기에는 평범한 인간인 리안은 여러모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처럼 발음해 보거라. 뜨웨이즈 이서라.”
“뜨, 뛔……”
몇 차례나 발음을 하고자 노력하던 리안은 이내 고개를 떨구며 낙담했다.
“발음을 하려고 하면 이상하게 목소리가 안나와요. 왜 그러죠?”
“드래곤의 피가 흐르지 않아 거부 당하는 걸지도 모르겠군.”
그녀가 말했다.
“포기하지 말고 계속 노력해보자.”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도록 리안은 발음을 못하고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글자를 쓰려고 하면 금세 잊어버리는 것이었다.
“전 배울 수가 없나봐요.”
오드리아는 시무룩한 그를 위로했다.
“아직 포기하기에는 일러. 내가 어떻게든 널 꼭 가르치마. 힘내렴.”
며칠 후, 오드리아는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지켰다.
리안이 마침내 용언을 배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녀는 리안의 체질을 바꿈으로써 문제를 해결했다.
방법은 바로 자신의 피부를 떼어내 리안에게 먹이는 것이었다.
물론 그러한 사실을 결코 리안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리안의 입장에서는 죽도록 공부를 하다보니 마침내 용언에 눈을 떴다며 크게 기뻐했고 오드리아가 그에게 용의 피와 비늘을 먹였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내 살을 떼어내 먹였다고 말하면 리안이 어떻게 변할지 두려워. 생전에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인간은 탐욕이 심해 귀한 것을 얻기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하셨어. 나를 죽여 더욱 강한 힘을 얻으려 할지도 모르고……. 리안하고 오래도록 같이 지내고 싶어.’
때마침 그녀는 다리에 부상을 입고 있었던지라 상처가 아물어가면서 찢어진 살에 내려앉았던 딱지와 허물들이 떨어지고 새살이 돋아나고 있던 중이었다.리안에게 피가 맺힌 딱지와 허물들을 먹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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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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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또 한달이 지나면서 여름이 가고 가을이 찾아왔다.
지난 몇 달 간 리안은 오드리아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단짝처럼 붙어지냈다.
오전에는 오두막 안에서 오드리아에게 용언을 배웠고, 오후에는 밖으로 나가 오드리아와 함께 밭을 돌보며 농업 지식을 차곡차곡 쌓아나갔다.
배움과 일을 병행하는게 힘들었으나 리안은 늘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는 아무 생각없이 할 수 있는 농사가 그저 재밌었다.
그와 더불어 바깥 세상을 향한 호기심도 끊임없이 늘어만 갔다.
어느날 리안이 절벽 밑에는 무엇이 있냐고 묻자 오드리아는 곧바로 눈을 흘기면서 차갑게 되물었다.
“나와 지내는 게 지겹니?”
“전혀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거예요.”
“지금 세상은 혼란으로 가득차 있어. 이곳이 제일 안전하니 딴생각하지 말고 부지런히 공부하거라. 때가 되면 알아서 구경시켜줄테니.”
그 무렵 리안은 밭일이 손에 익기 시작했고, 이젠 오드리아의 지시가 따로 없어도 스스로 잡초를 뽑고 고랑을 보수하며 돌을 치우는 등 매사 능동적으로 나서며 밭의 상태를 볼줄 아는 눈까지 어느 정도 생겨났다.
그쯤되자 오드리아도 기다렸다는듯이 보다 전문적인 기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오늘부터 밭에 생명을 불어넣는 법을 가르쳐주마.”
퇴비 만드는 법과 농업 용수 및 토양을 분석하는 공부였다.
특히 물은 지역마다 성질이 달라서, 투명한 물이라고 해서 함부로 밭에 줬다가는 열심히 기른 작물이 시들기 십상이었다.
석회질이 많은 물, 바닷물, 석유 같은 기름이 섞인 물.
그외에 광천수, 이온수, 증류수, 탄산수 등등.
오드리아는 지구의 인류가 오랫동안 쌓은 지식에 견줄 정도로 물에 관해 해박했고 심지어 맛만 봐도 어떤 물인지 정확히 짚어낼 정도의 놀라운 재주까지 가지고 있었다.
토양도 마찬가지였다.
토양의 성분을 파악하는 법과 특수 성분이 과하거나 부족할때 그 성질을 개선하고 관리하는 법까지 통달했을 정도로 그녀의 농업 지식은 박학다식했다.
새로운 기술을 배우기 시작한 리안은 매일 썩힌 낙엽과 나뭇재, 흙을 여러 포대씩 들어다 날랐다.
“이쪽에 놓으렴.”
“네!”
그녀가 시키는대로 썩은 낙엽과 나뭇재를 약간의 흙과 섞어주며 발효시켰고 가끔씩 뒤집어주어 연일 썩은내와 씨름해야했다.
만들어 내야 하는 양도 많고 과정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웃음이 나고 뿌듯했다.
농장의 변화에 자신이 일조하고 있고 또 자신의 손길이 닿은 결과물들이 하나씩 늘어나는게 눈에 보여서 정말로 일할 맛이 났다.
“후~ 힘들다!”
비료를 가득 실은 수레를 밭 근처에 가져다 놓은 리안은 이마에 흐르는 구슬땀을 닦으며 밝게 웃었다.
뒤에서 오드리아가 따라오는 중이었다.
한 손에는 야삽을 들고 있다.
“좀 걸릴테니 그늘 있는 곳에 가서 쉬고 있어.”
“저는 안해도 돼요?”
“거름 주는 법은 이미 가르쳤잖니. 여긴 나 혼자 하마.”
그녀는 야삽으로 비료를 퍼서 밭에 들어갔다.
리안은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그럼 토굴 청소 좀 하고 올게요!”
“힘들텐데 내일하지 그러냐? 곧 저녁이야.”
“아니에요. 일찍 끝내고 쉴게요!”
리안은 헛간에 잠시 들렸다가 청소도구를 들고 곧장 토굴로 향했다.
* * *
“춥다.”
토굴 안은 바깥 온도보다 낮아서 쌀쌀했다.
리안은 양팔을 문지르며 드래곤의 백골을 올려다봤다.
토굴에 올때마다 항상 느끼는거지만 거대한 위용을 뽐내는 드래곤의 백골을 볼때마다 경외심과 함께 숙연한 마음이 들게했다.
“잠시 청소 좀 하다갈게요. 잘 부탁드립니다.”
시선을 내려 그 옆에 자리잡은 묘비를 향해서도 말했다.
“잡초도 잘 뽑고 깨끗이 치우고 가겠습니다. 예쁘게 봐주세요.”
리안은 청소를 시작하면서 몇 달 전 일을 회상했다.
이세계에 온지 얼마 안됐을때였다.
당시 누린내 넘치는 식사를 마친 후 오드리아는 그늘진 야외에서 우아한 티타임을 가졌다.
리안도 그녀와 마주보며 차를 마셨다.
“으음…….”
차에서 향긋하니 적당히 쓴 맛이 났다.
오드리아가 직접 재배한 나무의 어린잎을 말려서 우려낸 차라는데 왠지 고급진 느낌이다. 비쌀 것 같았다.
리안은 입안의 누린내를 말끔히 잡아주는 느낌이 들어 벌컥 벌컥 마시고 한 잔을 더 따라마셨다.
그런 리안을 바라보는 오드리아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식사를 마친 뒤에는 꼭 차를 마셔야한다고 하셨지. 왕족의 피를 물려받은 공주의 기본적인 교양이라면서.”
“왕족?”
리안은 급히 차를 내려놓으며 그녀를 똑바로 마주봤다.
“오드리아님이 왕족이라구요? 부친께서 용족의 왕이었어요?”
“아버지는 인간이야.”
“예? 아……!”
그 순간 리안의 머릿속에 토굴안에서 봤던 묘비가 떠올랐다.
“혹시 저 토굴안에 있는 묘가 부친의 묘예요?”
“내 허락도 없이 들어간거야?”
오드리아가 쳐다보자 리안은 당황해하며 얼렁뚱땅 대답했다.
“안계실때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우연히 보게 됐어요. 보자마자 바로 나왔죠.”
오드리아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갑자기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어차피 해야할 이야기였으니 잘 됐다. 이참에 나와 같이 가보자.”
그녀가 앞장섰다.
리안은 서둘러 일어나 뒤따라 걸었다.
무심코 앞을 보며 걷는데, 탐스럽게 씰룩이는 오드리아의 엉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전라의 그녀는 피부가 너무나 새하얗고 투명했기에 조금전 의자에 앉아있던 그녀의 엉덩이 부분이 선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시선 둘 곳이 없던 리안은, 다리를 절며 앞서 걷는 오드리아의 어깨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오드리아님. 오드리아님은 왜 항상 알몸으로 다니시나요?”
“옷은 거추장스럽지 않니? 몸이 가려워.”
“그렇죠? 제가 생각해도 그래요.”
리안은 콧구멍을 벌렁이며 헤벌쭉 웃었다.
오드리아는 천진하게 말했다.
“가려우면 너도 벗고 다녀.”
“예? 아, 아뇨. 저는 괜찮아요.”
“불편하지 않아?”
리안은 턱을 긁적이며 뭐라고 대답할까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인간은 오드리아님처럼 피부가 단단하지 않아서 작은 나뭇가지에 스쳐도 상처가 나요. 오드리아님은 안그러시죠?”
“그런 불편함이 있었구나. 인간은 정말 나약한 존재야.”
짧은 비탈길을 내려가 금세 토굴 입구에 다다랐다.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거대한 드래곤의 백골과 그 옆의 묘비를 번갈아 바라봤다.
오드리아는 드래곤의 백골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 분은 나의 어머니란다. 모든 이에게 눈의 여왕으로 불리셨지. 그리고 이쪽의 작은 묘에는 아버지께서 잠들어 계셔. 한때 인간 왕국 로렐라이의 왕이셨지.”
“아……, 아버님이 인간이셨어요?”
리안은 감탄하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오드리아는 인간과 드래곤의 혼혈이었구나.’
그는 이어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오드리아님은 드래곤이라고 부르면 안되고 하프 드래곤으로 불러드려야 맞는건가요?”
오드리아는 개의치 않는 얼굴로 시원하게 말했다.
“내 몸에 인간의 피가 절반이나 흘러서인지 보통의 드래곤과는 여러 부분이 다르단다. 그중에서 제일 큰 차이를 보이는 건 어머니는 드래곤의 형태가 본 모습이지만 나는 현재 이 모습이 내 본 모습이지. 뿔을 빼고 아버지를 쏙 빼닮았단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행동거지도 인간과 다를바 없어.”
리안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폴리모프 하신게 아니었어요?”
“너랑 있으면서 공연히 마력을 소모할 필요가 없잖니. 일상에서 가장 편한 모습이 이 모습이고 이게 내 본래 모습이다.”
오드리아는 웃음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우리가 사는 이 협곡은 부모님께서 기반을 다져놓으신 곳이야. ‘왕과 여왕의 안식처’ 라고 부르지.”
“밭도 부모님께서 일구신건가요?”
“부모님의 손이 탄 작물들은 이제 없다. 현재 자란 작물은 전부 내 손으로 재배한거야. 지난 백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배, 백년이요? 그렇게나 오래요? 부모님은 언제 돌아가셨는데요?”
“300년 전에 아버지께서 먼저 돌아가셨어. 내가 일곱살때였지. 어머니는 100년 전에 돌아가셨다.”
리안은 잠깐 계산을 했다.
“정리하자면 오드리아님은 307년을 사신거네요?”
“그렇게 됐지.”
리안은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크게 감탄했다.
307살이 아직도 소녀처럼 청순하고 앳된 미모를 품고 있다니 그저 놀랍다.
“지금으로부터 백년전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나자 농사가 슬슬 버거워지기 시작했어. 날 도와줄 자가 필요했지만 아무나 이곳에 들일 수는 없고, 하는 수 없이 백년을 참고 지냈지.”
리안이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버님은 직업이 왕이신데 농사에 관심이 많으셨나봐요?”
“어머니께 듣기로는, 후대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은퇴하신 뒤 두 분이 함께 속세를 떠나 이곳에 정착하셨다고 들었다. 농사는 그때 처음 시작하셨어. 두 분 다 농사에 관한 지식은 없었지만 각종 농사의 정수가 담긴 책들을 잔뜩 싸가지고 오셨기에 큰 도움이 됐다 하셨지.”
“책. 하긴 책이 있으면 농사야 금방 배우죠.”
“그렇지도 않아.”
오드리아가 말했다.
“초반에 시행착오를 많이 겪으셨다 들었다. 그리고 작물의 씨앗이 필요하면 어머니께서 먼 곳을 날아 구해오기도 하시고, 농사를 하다 어려움에 처하면 또다시 어머니께서 종족을 가리지 않고 현인을 찾아가 지혜를 구하기도 하셨지. 자애롭고 위대한 눈의 여왕을 마다할 종족은 아무도 없었어. 모두가 기꺼이 지식을 전수해줬지. 그런식으로 말년에 농사를 즐거워하시던 두 분의 노력이 쌓이고 쌓여 현재 이곳에는 전 세계 어디를 가도 보기 힘든 희귀 작물과 절륜한 농작법이 존재한단다. 그리고 난.”
오드리아는 리안을 마주보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것들을 모두 터득했지.”
“대단하십니다.”
리안은 진심으로 존경을 담아 박수를 쳤다.
“그나저나 앞으로 공주님이라고 불러도 되죠?”
“나를?”
“사연을 듣고보니 공주님으로 불러드리는게 이치에 맞는 것 같아요.”
“그게 편하다면 그렇게 부르렴. 난 상관없다.”
용무를 끝낸 두 사람은 입구로 발길을 돌렸다.
나가면서 편히 잡담을 주고 받았다.
“두 분의 존함은 어떻게 되세요?”
“아버지는 베스로탄, 어머니는 나즈레티고라다.”
“뭔가 있어보이는 이름들이네요. 두 분이 어떻게 만나신거예요? 종족이 달라 만나기 힘들었을 것 같은데.”
“젊은 시절 아버님은 드래곤슬레이어셨다나봐. 어머님을 처리해달라는 의뢰를 받고 얼음 골짜기란 곳에 갔는데 거기서 두 분께서 눈이 맞으신게지.”
“낭만적이네요. 어? 그러고보니 당시 어머님의 연세가 그럼……?”
“음……, 아버지께서 젊으셨을적에 어머니는 이미 오천년을 넘게 사셨으니 인간의 나이로 치면 할머니쯤 됐겠지?”
리안은 멍하니 눈을 껌뻑거렸다.
“헐…….”
* * *
토굴 청소를 끝내고 밖으로 나와 이것저것 뒷정리를 하다보니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오드리아는 언제나 그랬듯 레어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자기전에 오늘 배운 것들을 복기하도록 해.”
“당연하죠. 조심히 들어가세요.”
“내일부턴 수확을 해야하니 일찍 자거라.”
그녀는 금세 드래곤으로 변했다.
날아오르기직전 파충류의 눈동자로 다시금 리안을 응시했다.
“절벽밑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하지도 말고.”
“이제 신경 안쓰기로 했어요. 헤헤.”
“잘 생각했다.”
잠시 후.
리안은 먼 하늘을 훨훨 날아가는 오드리아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레어에 가서 안녕히 주무세요오오오~!”
이윽고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씨익 웃었다.
“파티다!”
그는 잽싸게 방으로 뛰어들어가서 보물 자루를 열었다.
황금왕관을 꺼내 머리에 쓰고, 황금반지도 두어개 손가락에 꼈다.
또 뭐 입을게 없나 찾아보다가 투명한 액체가 담긴 작은 유리병을 발견했다.
“이건 뭐지? 황금도 아닌데 왜 보물들속에 껴있지?”
병 표면에 ‘마왕을 죽이는 성수’라고 쓰여있다.
용언을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게된 리안은 글씨를 읽을줄 알았다.
고대어든 현대어든 용언은 시대를 구분치 않고 다양한 종류의 언어를 해석하는게 가능했다.
“별게 다 있네.”
리안은 피식 웃으며 유리병을 선반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마당에 탁자와 의자를 설치하고 부엌에 가서 며칠전 오드리아가 담아준 맥주와 안주거리를 가지고 나왔다.
안주는 어젯밤 연못에서 잡은 물고기로 만든 회였다.
하루 숙성해뒀으니 그 맛이 기대가 됐다.
“오케이, 좋았어!”
순식간에 파티 준비를 끝마친 리안은 왕처럼 위엄있게 의자에 앉아 먼 곳을 바라봤다.
“자, 난 준비돼쓰! 어서들 시작하라고!”
그가 말을 마치자 기다렸다는듯이 아주 멀고 먼 곳에서 형형색색의 불꽃이 피어오르며 밤하늘을 수놓았다.
펑!
펑!
먼 곳에 있는 어느 왕국의 불꽃놀이 풍경.
날씨가 맑아 시계가 좋은 날엔 여기서 아득히 먼 곳의 성 꼭대기가 조망될 정도였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다.
먼 곳에 사는 인간들의 축제가 시작되었다.
리안은 몇 달 전 이곳에 가만히 서 있다가 인간들이 두 달에 한번씩 주기적으로 축제를 연다는걸 우연히 발견했고, 깨닫게된 그날부터 인간들이 축제를 열때마다 먼 곳을 바라보는게 취미생활이 되었다.
그들과 동떨어져 있었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상상하는 재미가 있으니까.
“자 다음 빨간 불꽃~!”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붉은 폭죽이 피어오르며 버섯 모양으로 터졌다.
“이번엔 파란색 가야지! 파란색 hit it! 빵 터져버려라!”
하도 많이 봐서 이젠 쏘아올리는 폭죽의 순서를 외울 정도였다.
“다음엔 나도 꼭 껴줘 얘들아! 같이 신나게 놀아줄게!”
리안은 즐거운 얼굴로 맥주를 쭉 들이켰다.
떠났던 오드리아가 되돌아온 것도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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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도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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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세에 관심을 두지 말라고 수차례 주의를 줬건만······!’
어둠속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오드리아.
부르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307년을 살았으나 부모가 남기고간 농장을 거의 떠나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그 말인 즉,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귄 인연이 리안이란 소리다.
그를 각별하게 여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강한 소유욕까지 느꼈다.
본디 드래곤이란 종족은 재화를 쌓아두는 것을 좋아한다.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면 일단 모으고 싶은 욕구가 바탕에 깔려있다.
인간의 피를 물려받고, 아버지로부터 인간의 윤리사상과 생활습관을 배워 비록 그 성질이 옅어지긴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완전히 인간처럼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괴물의 본능이 짙게 남아있다.
“둥둥빡! 둥둥빡! 둥둥둥둥 둥둥빡!”
리안은 흥에 취해 오드리아가 지켜보는지도 모르고 신나게 춤까지 춰댔다.
오드리아는 그의 춤을 볼수록 화만 솟구쳤다.
저 능글맞은 춤사위가 꼭 바깥 세상을 향한 갈망을 나타내는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심성이 워낙 곧고 착했던지라 그녀가 분노를 표출하는 방법이라곤 상당히 소극적이었다.
그렇다.
삐치는게 전부였다.
“재밌어?”
“재밌죠!”
“흥, 즐겁나보구나?”
“말이라고 해요? 당연히 즐겁······, 으헉!?”
정신없이 춤을 추던 리안은 화들짝 놀라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고, 공주님 아직 안가셨어요······?”
오드리아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먼 곳을 가리켰다.
“저곳에 사는 인간들과 지내고 싶니?”
“서, 설마요. 저는 여기가 더 좋아요.”
“날 떠나고 싶어 안달난 것 같던데?”
그녀의 냉담한 목소리에 리안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 그렇지 않아요! 그런 생각 절대 안했어요!”
“내가 뭘 보고 믿어?”
오드리아의 원망스러운 시선에 당황한 리안은 재빨리 일어나서 대꾸했다.
“그래도 몰래 자위는 안합니다!”
“무슨 소리야?”
리안은 황급히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허, 헛소리요.”
“어쨌든 좋다. 너, 절벽 아래가 궁금하댔지?”
“네?”
“낮에 절벽 아래가 궁금하다면서 내게 물었잖느냐.”
“그러긴······, 했었죠. 왜요?”
“보여주마.”
“보여준다고요? 어떻게요?”
“날면 되잖아.”
오드리아는 불현듯 드래곤으로 변신했다.
몸집이 거대해진만큼 목소리도 허공에 울려퍼졌다.
“내 등에 타렴. 절벽밑에 무엇이 있는지 현실을 깨닫게 해주마.”
그녀의 목소리는 잔뜩 성이 나있었다.
잠시 후, 오드리아는 리안을 태우고 밤하늘을 날아올랐다.
하늘높이 솟구친 그녀는 자연스럽게 날개를 접은뒤 머리를 아래로 향하며 수직으로 하강했다.
쉬이익!
“우왓!”
오드리아의 양뿔과 몸통에 걸린 밧줄을 두 손으로 꽉 붙잡고 있던 리안은 떨어질듯한 공포감과 극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공주님 천천히요! 너무 빨라요! 술이 확 깨네!”
“날 두고 다른 생각을 한 대가야!”
“그, 그만!”
“현실을 보여줄테니 고삐나 잘 붙잡고 있어!”
절벽의 허리에 감긴 흰 구름을 뚫고, 먹이를 사냥하는 매처럼 꽂히듯 한없이 밑으로 떨어지던 오드리아는 지상에 가까워지자 날개를 펴고 속력을 낮췄다.
“자 주변을 둘러봐.”
오드리아가 느리게 날자 리안은 그제야 움츠렸던 고개를 들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그녀가 시킨대로 주위를 살펴봤다.
강.
리안의 두 눈에 세차게 흐르고 있는 강물이 보였다.
절벽 아래에는 폭이 넓고 물살이 센 강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현실을 깨달았어? 내 도움없이 혼자서는 아무데도 갈 수 없다.”
하지만 절망감을 심어주려는 그녀의 의도와 다르게 리안은 주변 경치에 감탄할뿐이었다.
그는 환호성을 질렀다.
“하늘을 날으니까 정말 굉장해요! 놀이기구 따위는 상대도 안돼요!”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어.”
오드리아는 더욱 더 하강해 수면 위에 바짝 붙어 날았다.
“물속을 들여다보렴. 물속에는 인간을 물어 뜯어 먹는 식인어들이 잔뜩 살고 있지. 헤엄쳐서 떠날 생각일랑 꿈도 꾸지마.”
“와우! 그거 대단한데요!”
“대단해? 뭐가 대단해?”
그때였다.
눈앞에서 물살이 세차게 출렁이더니 돌연 고래처럼 덩치가 큰 물고기가 높이 솟아올랐다.
우으으으으응!
거대 물고기는 우렁차게 울부짖으며 수면 위를 날고 있던 오드리아보다 높이 치솟았고, 리안에게 한눈을 팔고 있던 오드리아는 갑작스레 출현한 녀석을 피할 생각에 급히 방향을 틀다 그만 날개 근육에 무리가 가고 말았다.
“큭!”
평소 같으면 민첩하게 회피하고 끝날 일이었으나 지난날의 상처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고가 닥치다보니 그 충격은 매우 컸다.
날갯죽지에서 아찔한 통증과 함께 근육 경련이 일어났다.
오드리아는 허공에서 지그재그로 휘청이다가 한순간 물속에 곤두박질쳤다.
풍덩!
꼬르륵!
리안은 물속 깊이 들어갔다가 다시 위로 솟구쳐 올랐다.
“어푸! 어푸!”
물가와 가까운 곳이라 그런지 다행히 물살은 세지 않았다.
양팔을 필사적으로 휘저으며 급히 주변을 둘러봤으나 오드리아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곧바로 잠수했다.
수심 2미터쯤 되는 깊이.
천만다행으로 오드리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언제 변신을 풀었는지 인간모습으로 가라앉으며 노란 광채가 나는 두 눈으로 리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숨을 참고 있는 그녀의 표정이 상당히 고통스러워보였다.
‘다쳤나?’
살기 위해 헤엄치지 않는 것을 보고 리안은 그녀의 양팔이 불편하다는걸 직감했다.
‘기다려요 공주님!’
서둘러 그녀에게 다가가려는 찰나였다.
식인어 한 마리가 쏜살같이 헤엄쳐와 리안의 옆구리를 콱 깨물었다.
그런데 아프지 않았다.
리안은 붉은색으로 얼룩진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식인어의 이빨이 천을 뚫지 못했다.
녀석은 콱 물기만 한 채 연신 몸통만 흔들어댔다.
‘어떻게 된거지?’
리안은 속으로 의문을 품었지만 지금 딴 생각을 할때가 아니었다.
다른 식인어들이 빠르게 몰려드는 중이었다.
리안은 신속히 옆구리로 손을 뻗어 식인어를 붙잡았다.
놈을 두 손으로 붙잡고 엄지 손가락으로 똥구멍을 따버린뒤 그대로 배를 갈라버렸다.
검붉은 피가 물속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죽은 식인어를 힘껏 던져버렸다.
그러자 빠르게 헤엄쳐오던 식인어들이 급 방향을 바꾸고 사체를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놈들은 신이난듯 동족의 살점을 마구잡이로 뜯어먹기 시작했다.
리안은 그 틈을 이용해 서둘러 오드리아에게 헤엄쳐갔다.
그리고 그녀 앞에 무사히 도착하자 두 팔로 떠받치듯 몸을 끌어안았다.
그 순간 오드리아의 두 눈빛이 살짝 떨리며 안도하는 기색을 엿볼 수 있었다.
‘리안······!’
‘제가 구해드릴게요. 조금만 참아주세요!’
리안은 힘껏 두 발을 튕기며 수면 위로 부상했다.
그는 재빨리 물가쪽으로 헤엄쳤고 이내 발을 딛고 걸을 수 있을 정도의 깊이까지 다다랐다.
“헉! 헉!”
얼굴이 물밖으로 나오며 숨통이 트이자 살 것 같았다.
물가를 향해 걸어가자 수심이 한층더 얕아지면서 두 손에 들고 있던 오드리아의 몸도 물밖으로 나왔다.
“다치신데는 없으시죠?”
리안이 묻자 오드리아가 물을 토해내며 그를 올려다봤다.
“콜록! 콜록! 너는?”
“전 없어요. 헉, 헉.”
리안은 다친 그녀를 공주님 안기로 들고 성큼성큼 물가로 향했다.
그는 힘들고 지쳤지만 미소를 잃지 않았다.
등근육의 일시적 통증으로 양팔을 못쓰게된 오드리아를 안심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늘에 대고 맹세할게요. 저는 절대 오드리아님을 홀로 놔두지 않을거예요. 우린 평생 함께예요. 죽을때까지.”
그 말에 오드리아는 무척 안심이 되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바보. 그걸 이제야 말하는 거야?”
“늦어서 미안해요.”
마침내 물밖으로 나왔다.
주변은 기이한 암석들과 아름다운 풍광으로 둘러싸여있었다.
한참을 방황하던 리안은 얕은 동굴처럼 움푹 패인 커다란 바위굴을 발견했다.
그 안으로 들어가 오드리아를 조심스레 바닥에 눕혔다.
그때 리안의 두 다리가 그녀의 시선에 들어왔다.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다리가 왜 그러니?”
오드리아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도 그럴것이 현재 리안의 양다리가 차마 두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허벅지부터 발등까지 온통 이빨 자국이 무성했고, 벌집처럼 뻥뻥 뚫린 크고 작은 구멍들을 통해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리안은 아프다고 울기는 커녕 멋쩍게 웃을뿐이었다.
“식인어들한테 물려서 그래요. 별거 아니에요.”
“왜 이게 별거아니야!”
오드리아는 인상을 찡그리면서 소리치더니 곧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내 탓이다. 내가 어리석었어······!”
“울지마요 공주님. 공주님이 우시면 저 큰일나요. 병사들한테 붙잡혀간다고요.”
“이 와중에도 농담이니?”
오드리아는 글썽이는 눈으로 그를 째려본다음 자조섞인 한숨을 토해냈다.
“내가 좀 더 현명했다면······, 난 아직 애야.”
“지금 이렇게 살았잖아요. 잠깐 쉬다가 몸이 괜찮아지면 집으로 돌아가자구요.”
지친 두 사람은 말이 없어지며 조용히 휴식을 취했다.
가만히 앉아서 호흡을 가다듬는 리안의 거친 숨소리만 들릴뿐이었다.
얼마뒤 바닥에 누워있던 오드리아가 갑자기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추워······.”
“추운 곳에 사시면서도 추우세요?”
“얼음은 물에 녹아······.”
“······?”
리안은 다소 이해가 안갔지만 서둘러 그녀의 몸 상태를 살폈다.
그의 얼굴에 근심이 서렸다.
온몸을 바들바들 떠는걸 보니 몸이 젖고 약해진 틈을 타 오한이 찾아온 것 같았다.
“어쩌죠? 불 피우는 법을 모르는데. 브레스 같은건 사용 못하시죠?”
“부, 불 피우면 안돼. 괴물이나 짐승들이 모, 몰려들거야. 그럼 누가 싸우니?”
“아······, 이런.”
리안은 다른 방법을 고민해보았다.
그러는 사이 피범벅이 된 양다리가 따갑고 화끈거렸다.
만약 보통 사람이라면 맨정신으로 버티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 고통을 꾹꾹 감내하던 그는 얼마뒤 손가락을 튕겼다.
“죄송합니다 공주님. 이 방법 밖에 없는 것 같아요.”
“어떤······, 방법······, 인데?”
추위에 바르르 떠는 오드리아의 목소리에 기운이 없었다.
눈도 반쯤 감겨있다.
리안은 안되겠다 싶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물에 젖은 티셔츠를 벗어던졌다.
그 다음, 오드리아의 알몸을 뒤에서 완전히 감싸안으며 비스듬하게 드러누웠다.
“무례를 용서하세요. 서로의 체온으로 몸을 녹이는 방법 밖에 없는 것 같아요. 참고로 이 방법은 제가 살던 지구에서 과학적으로 증명된 방법입니다. 진짜로요.”
진위여부와 상관없이 오드리아는 희미하게 웃을뿐이었다.
“그래······, 알았다······. 몸이 한결 따뜻하구나······, 너무 따뜻해······.”
리안은 오드리아를 존경하고 감사해야할 스승이라 생각할뿐 결코 이성으로 보지 않았다. 따라서 그녀의 알몸을 두고 이상한 생각을 하기보다는 그저 편안히 잠들어주기만을 바랄뿐이었다.
“리안아…… 조금전부터 딱딱한 무언가가 자꾸 엉덩이를 찌르는데 뒤에 뭐 놓았니……?
오드리아가 실눈을 뜬 채 힘없이 묻자 리안은 당황하며 엉덩이를 뒤로 뺐다.
“죄송합니다 공주님. 제 성기가 닿아서 그만……”
“성기가? 혹시 발기했어……?”
“공주님은 피부가 너무 고우세요. 좋은 향기도 나고……”
“인간 여자랑 닮았지? 하긴 아버지가 인간이니 나도 반은 인간이지.”
“죄송합니다.”
리안은 머쓱해하며 안고 있던 그녀에게서 살짝 멀어졌다.
그러자 오드리아가 등과 엉덩이를 도로 들이대며 뒤에 누워있는 그에게 바짝 달라붙었다.
“떨어지면 추워.”
리안은 즉시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죄송합니다.”
그녀가 쿡쿡 웃는다.
“너나 나나 똑같네. 나는 말이야. 널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줄 알아?”
“무슨 생각을 하셨는데요?”
“피로 범벅된 네 두 다리를 보고 참 맛있겠다는 생각을 했어. 지금 기운이 없기에 망정이지 만약 기운이 넘쳐 흘렀으면 충동을 참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나도 정말…… 상황이 이런데도 본능에 충실해 바보같이……”
리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침을 꿀꺽 삼켰다.
“히, 힘드실텐데 얼른 주무세요.”
“응……”
리안의 바람대로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깊이 잠들었다.
새근새근 자는 숨소리를 들으니 안심이 되었다.
“나는 잠이 안와······.”
반면에 리안은 정신이 또렷했다.
속된 말로 씹창난 양다리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찢어지는듯한 통증으로 간밤에 고생하던 그는 오랜시간 뒤척이다 뒤늦게 잠이 들었다.
그리고 아침에 눈을 떠보니 오드리아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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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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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님……?”
막 잠에서 깬 리안은 주변을 둘러보며 상체를 일으켜세웠다.
“공……, 으윽!”
일어서려는 찰나 하반신 전체에서 극심한 통증이 전해져왔다.
앉은 상태에서 다리를 쭉 뻗고 쳐다보았다.
온통 피범벅이었다. 말라서 피는 흐르지 않았으나 다리를 움직일때마다 욱신거리며 아팠다.
“어디 가셨지…….”
리안은 앉은 자세에서 밖을 향해 크게 외쳤다.
“공주님! 공주님! 고옹주우니임!”
외치고 나서 잠시 귀를 기울였다.
“…….”
잠시 후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쪽으로 오고 있다.
늘 들어왔던 익숙한 발걸음 소리.
리안은 안도하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나신의 오드리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어났어?”
“절 버리고 떠나신줄 알았어요.”
“그럴리가 있겠니?”
“몸은 괜찮아지신 거예요?”
“팔을 움직이는데 다소 불편함은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게다. 나는 신경쓰지마.”
그녀는 웃으며 바위굴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오른손에는 이름 모를 풀들이 한움큼 쥐어져 있었다.
“그게 뭐예요?”
손으로 가리키며 묻자 그녀는 대답대신 풀 하나를 자신의 입안에 넣었다.
그것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말했다.
“상처가 덧나지 않고 흉터없이 빨리 아물게 하는데 효험이 있는 약초란다. 운좋게도 근방에서 자라고 있더구나.”
“제 다리 때문에 뽑아오신거예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으로 짓이긴 약초를 뱉어내더니 그것을 리안의 상처부위에 붙였다.
“아악!”
“엄살은. 참아.”
“엄청 따가워요!”
“빨리 나으려고 아픈거야.”
그러면서 오드리아는 또 풀을 씹기 시작했다.
이후 그녀의 침으로 짓이겨진 약초들이 하나씩 늘어날때마다 리안은 움찔움찔 리듬을 타며 비명을 질러댔다.
이윽고 다리 전체에 붙이고 나자 리안은 바닥에 드러누워서 훌쩍거렸다.
“화끈거리고 아파요…….”
“움직이면 안돼. 한 시간 정도 그러고 있어.”
오드리아는 리안의 머리맡에 앉더니 한쪽 다리를 쭉 뻗고 자신의 허벅지 위에 리안의 머리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금만 참아. 곧 나을거다.”
“네, 공주……, 헙!”
리안은 무심코 오드리아의 얼굴을 올려다봤다가 봉긋하게 솟아오른 가슴의 밑둥을 목격하고는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그 모습을 본 오드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아뇨. 저, 정말로 감사하다구요. 감사합니다 공주님.”
리안은 눈을 껌뻑거리며 꿀꺽 침을 삼켰다.
“내 눈을 봐. 얘기할때는 눈을 보고 얘기해야지 어딜 보는거니?”
“이, 이게 편해요.”
“목이 불편해보여. 빨리 제대로 누워.”
오드리아는 두 손을 뻗어 리안의 머리를 억지로 돌려놓으려고 했다.
그러자 리안은 목에 힘을 주며 나름 저항하려고 했으나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올려다볼 수 밖에 없었다.
‘흑, 난 잘못 없어. 근데……, 헤헤, 좋구만.’
풍만한 젖가슴에 가려 그녀의 얼굴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 상태로 다리에 붙인 약초의 약효가 발휘될때까지 시간을 때울겸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처음에는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를 정도로 가슴에 빠져있었으나 구름처럼 폭신하고 안락한 오드리아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상태에서 화기애애하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보니 조금씩 마음이 진정되어 갔고 나중에는 완전히 평온을 되찾았다.
무엇보다 리안은 그동안 오드리아를 여자로 보지 않고 존경하는 스승님으로만 바라보았기에 마음속에서조차 그녀를 욕보이게 해선 안된다는 생각이 강했다.
“공주님. 이젠 정말 알고 싶어요. 반년전 저를 처음 만났을때부터 달고 계시던 그 부상, 누가 공주님한테 해를 가한거죠? 왜 아직도 낫지 않는 거예요?”
평소 같으면 인상을 쓰며 대답해주지 않았을 질문일터인데, 리안이 그녀의 허벅지 위에서 편안함을 느꼈던 것처럼 오드리아도 기분 좋은 대화를 주고 받으며 마음이 많이 열렸는지 가볍게 웃을 뿐이었다.
“너와 만나기 한달전 한 블루드래곤이 우리 ‘왕과 여왕의 안식처 농장’에 찾아왔었다.”
그녀는 벽쪽을 바라보며 회상에 잠겼다.
“자신을 라퀴어스 라고 소개를 한 그는 어머니와 친분이 있는 자였어. 그가 말했지. 세상은 마족에게 점령당하기 일보직전이라고. 그러니 우리 드래곤들도 세상 일을 등한시 하지 말고 나서야할때라고. 그때 나는 너무나 순진했어. 세상이 어렵다길래 마음이 아팠고 도움을 줄겸 그를 따라나섰다.”
“결국 그놈이 사기쳤나요?”
오드리아의 얘기에 숨 쉬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진지하게 몰입해 있던 리안이 그렇게 대뜸 묻자 오드리아가 풉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그 자의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세상은 유래없이 강한 마왕을 상대로 모든 종족이 하나가 되어 맞서고 있었지. 당시 나와 라퀴어스는 중요한 전투를 앞둔 브로디노 라는 지역으로 향했었다. 그곳에 주둔한 적군 진영에 마왕 반데어자르도 있었지.”
“마왕까지 나왔을 정도면 대단히 중요한 전투였나보군요.”
오드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전투가 시작되고 나서 7일 밤낮을 싸웠어. 일찍이 나드레 라 불리는 신을 죽이고 그 힘을 흡수한 반데어자르는 소문대로 엄청나게 강했다. 나와 라퀴어스, 그외 모두가 힘을 합해도 그자를 쓰러뜨리는게 불가능할 정도였어.”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전투가 끝나갈 무렵 라퀴어스는 큰 부상을 당했고, 나 또한 깊은 내상을 입었다. 그렇다고해서 우리의 노력이 헛된 것은 아니었어. 반데어자르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지. 허나 브로디노 지역은 결국 마왕군에게 점령을 당했고 나와 라퀴어스는 다른 이들과 함께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너를 만난거지.”
“아 그래서.”
리안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래서 저랑 처음 만난날 저를 마족으로 오인하셨던 거군요?”
“그래, 그런 이유였다.”
“마왕 그놈 대단하네요. 드래곤들을 상대로도 끄덕 없다니.”
“놈은 원래 보잘 것 없는 엘프였어. 엘프가 타락해 마왕이 된 것이지.”
“엘프요? 와 엘프 보고 싶다.”
오드리아가 실실거리는 그를 째려봤다.
“심각한 얘기중인데 왜 갑자기 딴얘기를 하는거니? 어쩔땐 듬직하다가도 또 어쩔때보면 철없는 아이같아.”
“삼백칠년을 사신 공주님 앞에서는 전 평생 갓난아기인걸요. 아마 제가 죽을때까지 철없어 보이실거예요.”
리안은 너스레를 떨며 말을 돌렸다.
“공주님. 만약 마왕군이 여기까지 침범하면 그땐 어쩌죠? 뭔가 대비책을 세워야하는거 아니에요?”
“걱정 말거라. 삼백년전 부모님께서 만들어두신 결계가 있어. 밖에서는 길을 알아볼 수 없고 설령 안다해도 절대 들어오지 못한다.”
얼마 후 리안의 두 다리에 생긴 상처는 금세 아물었다.
식인어에게 깨물린 흉터는 일부 남았지만 통증도 없고 걷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리안은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면서 활짝 웃었다.
“무슨 마법을 부리신거예요? 벌써 나았어요!”
“괜찮아졌어?”
“네! 바로 농사지으러 가도 되겠는데요?”
“오늘은 무리하지 말자.”
오드리아가 밝게 웃었다.
약초도 약초지만 드래곤의 침이 피부의 재생에 큰 영향을 준 것은 확실했다.
어찌됐거나 리안은 이후 드래곤으로 변신한 오드리아를 타고 하늘을 날아올랐다.
리안은 세찬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환호성을 질렀다.
“우리 종종 소풍도 다니면서 자주자주 이러고 놀아요!”
그 말에 오드리아가 밝게 미소지었다.
“싫어.”
그날 저녁.
리안은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었다.
낮에 봤던 오드리아의 가슴이 그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오해하지마시라.
결코 음흉한 상상을 하는게 아니다.
리안은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던 중이다.
‘공주님을 계속 벗고 다니게 할수 없어.’
여태껏 오드리아의 나신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매일 예술품을 감상하듯 그녀의 몸을 설레이는 마음으로 마주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첩첩산중에 갇혀서 외로이 지내신 분이야. 내가 그분을 잘 보살펴드려야 해.’
이번 사고를 겪으면서 오드리아를 생각하는 마음이 전에 없이 커졌고, 그와 더불어 존경심도 더 없이 커졌다.
리안은 그녀의 고귀한 품위를 지켜주고 싶었고 자신이 얼마나 존중하고 감사해 하는지 눈으로 보여주고도 싶었다.
‘여기가 도시면 옷가게에 가서 선물이라도 사다드리겠는데……, 흐음, 이거야 원 서프라이즈 이벤트도 못하겠네.’
그는 고민하면서 방안에 있던 보물자루를 바닥에 전부 쏟아 부었다.
“이건 안되고, 이건 별로고, 이건 쓰레기고.”
보물더미에 앉아 한참을 뒤적거리던 그는 마침내 금화속에 묻혀 있던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쾌재를 불렀다.
“이거다!”
활짝 웃는 리안의 손에 하늘거리는 푸른색 원피스가 쥐어져 있었다.
같은 시각.
화이트 드래곤의 레어는 얼어붙은 호숫가 중심에 자리잡은 커다란 빙산속에 있었다.
오드리아의 어머니가 눈의 여왕으로 군림하던 수천년전부터 레어로 삼은 곳이기에 내부는 화려한 멋이 우러났고 각종 보물로 가득차 있었다.
그 안에서 오드리아는 얼음벽에 전시된 ‘밧줄’을 응시하고 있었다.
척봐도 귀한 소재로 만들어진 특별한 갈색 밧줄이었다.
“아버지. 당신이 사용하시던 농기구 ‘라그레아닐’을 주고 싶은 사람이 생겼습니다.”
오드리아는 엉망진창으로 망가졌던 리안의 두 다리를 떠올리며 다시금 가슴이 아려왔다.
이어 자신을 공주님 안기로 든 채 멋지게 물가로 향하던 그의 남성다운 모습이 떠오르자 갑자기 가슴이 설레이고 입가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그녀는 벽에 걸려있던 라그레아닐을 집어들었다.
“리안에게 줄거예요. 이해해주실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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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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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오드리아는 담담한 표정으로 리안에게 라그레아닐을 내밀었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쓰시던 농기구 라그레아닐이다. 창고에서 썩힐바에야 네가 쓰는게 좋겠다싶어 가져왔어.”
리안은 라그레아닐을 받아들고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그의 눈으로 보기에는 1미터 조금 넘는 길이의 평범한 밧줄이다.
“뭔가 묶을때 쓰는 건가요?”
오드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먼 풍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말년의 아버지는 농사를 사랑하셨지만 사실 움직이는 것도 귀찮아 하시던 분이셨어. 왕들은 전부 뚱뚱해야 위엄이 산다며 일부러 살을 찌우시는 분이셨지. 잘 먹고 잘 산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리안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걷는 것도 힘들어하시던 분이라, 농기구 하나를 잘못 들고 밭에 오면 다시 창고로 돌아가는걸 매우 귀찮아 하셨다. 그래서 일을 쉽고 간편하게 하기 위해 당시 알고 지내던 드워프 장인에게 부탁하여 라그레아닐을 제작하셨지.”
오드리아는 손으로 라그레아닐을 가리켰다.
“왼팔이든 오른팔이든 편한쪽에 감아보거라.”
“이걸 감으라고요? 어떻게 감지······.”
리안이 무심코 왼팔에 갖다대는 순간이었다.
라그레아닐이 살며시 푸른빛으로 빛나며 제 스스로 움직였다.
뱀처럼 스르륵 움직여 왼팔의 손목에서 팔꿈치부분까지 돌돌 휘감았다.
리안은 밧줄에 감긴 자신의 왼팔을 보며 탄성을 질렀다.
“오, 마법 아이템! 아니 아티팩트인가?”
불편하게 꽉 조이지도 않고 스판끼도 있어 적당히 팔을 조여주니 착용감이 좋고 나름 멋도 났다.
“괜찮은 손목 보호대인데요?”
“손목 보호대가 아니야.”
오드리아가 말했다.
“라그레아닐은 모든 농기구의 집약체다. 머릿속으로 아무 농기구나 떠올려보거라. 그리고 그걸 강하게 원해봐.”
리안은 시키는대로 따라했다.
‘호미. 호미 갖고 싶다! 호미 갖고 싶다! 호미를 내게 줘! 호미줘 호미!’
그러자 밧줄에 푸른빛이 감도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리안이 머릿속으로 상상한 호미의 모양을 완벽히 구현하며 그의 손에 들어와 있었다.
리안은 허공에 호미를 휘두르며 기쁜 표정으로 소리쳤다.
“진짜 호미다!”
시험삼아 바닥을 파보니 아주 잘 파이는게 금속으로된 날 부분도 정말 튼튼했다.
“이 귀한걸 진짜 주시는 거예요?”
오드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짓는다.
“다음부터 다치지 말라고 주는거야. 라그레아닐은 무기로도 사용할 수 있다.”
“무기요?”
“칼이나 활, 창 같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는 무기로도 변할 수 있어. 한번 해보거라.”
“칼이나 활, 창이라······.”
리안은 눈을 감고 창을 떠올렸다.
잠시 후, 호미였던 라그레아닐의 모양이 길고 화려한 창으로 바뀌었다.
“쩐다!”
“쩐다?”
“그냥 우리나라 말이에요.”
리안은 창을 두 손으로 잡고 휙휙 찔러보았다.
그는 무척이나 기뻤다.
“나도 이제 무인으로서 이름을 날릴 수 있는 건가!”
오드리아가 다그치듯 말했다.
“농사에 쓰라고 준 것이다. 다른 용도로 사용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거라.”
“창으로 농사를 지어요?”
“농사를 짓다보면 괴물이나 산짐승들이 나타나 밭을 망치기 마련이지. 그때 그것들을 쫓아내라고 있는거야.”
“아아.”
리안은 납득했다는듯 고개를 여러차례 끄덕였다.
오드리아는 덧붙였다.
“그리고 어제와 같이 식인어들이 네 생명을 위협할때처럼 다급한 상황에서 널 지키기 위한 호신용 무기로 쓰는 것도 괜찮다.”
“그땐 칼을 휘둘러도 화내지 않으시는 건가요?”
“쉽게 말해, 네가 라그레아닐을 이용해 칼밥을 먹고살 생각만 없으면 무엇이든 괜찮아.”
“당연하죠! 전 평생 공주님과 농사만 지을 겁니다! 안심하세요!”
그 말에 오드리아는 흡족하게 웃었다.
“라그레아닐을 잘 다루려면 평소 훈련을 해둬야한다. 잠깐만 기다리거라. 내 금방 나갔다오마.”
“어디 가시게요?”
“네 훈련에 쓸 쓸만한 짐승이 있는지 주변을 돌아볼 생각이야.”
그녀는 곧바로 드래곤으로 변신해 훨훨 날아갔다.
그리고 얼마뒤 살아있는 멧돼지를 들고 나타났다.
날카로운 발톱에 붙잡힌 멧돼지는 꽤액꽤액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치는 중이었다.
리안은 휘둥그레 눈을 떴다.
“그놈을 죽이라고요?”
“빨리 잡아야할거야.”
오드리아는 밭 한가운데로 날아가더니 멧돼지를 풀어주었다.
“저 녀석이 우리가 농사지은 것을 망치기 전에 얼른 잡거라.”
“헉!”
리안은 양손바닥에 퉤퉤 침을 뱉고는 창으로 변한 라그레아닐을 꼬나쥐었다.
기세 좋게 외쳤다.
“맡겨주세요!”
그러나 리안은 멧돼지를 따라잡는 것조차 힘들었다.
멧돼지는 엄청나게 빨리 도망갔고 닥치는대로 밭을 짓밟고 다녔다.
라그레아닐을 활로 변신시켜 보았으나 화살이 없으면 쏘질 못했다.
화살은 직접 구해야했다.
열심히 농사지은 작물들이 푹푹 쓰러질때마다 리안은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저 돼지새끼가! 야이 돼지새끼야 이리와!”
한동안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오드리아.
그녀는 안되겠다 싶었는지 리안을 불러세웠다.
“기도비닉을 유지하면서 발이 빨라야 해. 네가 고생하는건 그걸 못해서다.”
그렇게 말하면서 리안에게 눈을 감으라고 말했다.
“딱 5초만 세보렴. 그리고 눈을 떠.”
“네. 일······, 이······, 삼······.”
정확히 5초를 세고 눈을 떴다.
리안은 깜짝 놀랐다.
걷는 소리조차 일절 안났건만 오드리아는 어느새 100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하신거예요? 설마 날아가신건 아니죠?”
“혼자서 넓은 밭을 관리하려면 발이 빨라야한다.”
그녀가 이어 말했다.
“오늘부터 빠르게 이동하는 마법을 가르쳐주마.”
“저도 마법을 배울 수 있는건가요?”
“이미 용언까지 배웠으면서 그런 의문을 갖는거야?”
“맞다. 그랬죠!”
오드리아는 은밀히 신속하게 이동하는 마법인 ‘헤이스트 플래쉬’를 종일 가르쳤다.
리안은 성실히 배웠으나 바로 능숙하게 사용할 수 없었고, 마법을 걸고 몇 걸음 걷다 저혼자 고꾸라져버리니 그날 멧돼지를 잡는 것은 포기해야만했다.
그렇게 날이 저물자 오드리아는 살맛나서 뛰어다니는 멧돼지를 붙잡아 우리에 가둬놓고 떠날 채비를 했다.
“늘 하는 말이지만 오늘 배운 것들은 자기전에 복습하고 자거라. 하기 싫겠지만 매우 중요한 일이다.”
“네네, 당연하죠. 꼭 하고 잘게요.”
리안은 잠시 오두막안에 들어갔다오더니 고이 접어놓은 푸른색 원피스를 그녀 앞에 내밀었다.
“저기 공주님. 이거······, 선물입니다.”
오드리아가 옷을 보더니 갸우뚱 거린다.
“선물이라니?”
“말그대로 선물이요. 오드리아님께서 이 옷을 입어주셨으면 좋겠어요.”
“나한테 옷을? 왜······?”
리안은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인간에게 옷이란건 피부를 보호하는 역할도 있지만 실은 그보다 더욱 중요한게 있습니다. 옷은 그 사람의 신분과 사회적 위치를 말해주죠.”
그는 이어 진심을 고백했다.
“저는 공주님을 존경하고 좋아합니다. 그래서 제가 더욱 존경하게끔 멋지게 꾸며드리고 싶어요. 이 옷을 입으시면 필시 멋있고 아름다우시리라 믿어요. 위엄도 사시고요. 처음엔 가려우시겠지만 입고 지내다보면 분명 익숙해지실겁니다.”
오드리아의 시선은 리안의 두 손에 놓인 원피스만 바라볼뿐 무표정이었다.
기쁜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몇 차례 눈만 깜빡이더니 조용히 선물을 받아들었다.
“옷은 거추장스럽지만 네가 권하니 입어보마.”
“감사합니다.”
그후 그녀는 고맙다는 말외에는 별다른 내색없이 그대로 떠났다.
리안은 저멀리 날아가는 그녀를 보면서 뒷머리를 긁적였다.
“별로 안기쁘신건가······. 하긴 레어에 보물이 많으시니 저런 옷을 받아봤자 덤덤하시겠지.”
레어로 돌아온 오드리아는 당장 얼음거울 앞에 섰다.
선물 받은 양어깨끈이 달린 원피스를 입고 한참을 뚫어지게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기만 하던 그녀.
그러다 어느순간 제자리에서 한바퀴 빙글 돌았다.
치맛자락이 둥글게 부풀었다가 산뜻하게 내려앉는다.
거울을 보는 그녀의 한쪽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리안의 선물······.”
난생처음 받아보는 선물이기에 그녀는 무척이나 기뻤다.
한참동안 거울앞에서 원피스를 만지작 거리던 그녀는 결국 들뜬 기분을 주체 못한 나머지 다시금 농장으로 향했다.
오늘밤 리안과 떨어져 있기가 싫었고 빨리 그가 보고 싶었다.
그 시각.
리안은 방안에서 라그레아닐을 가지고 놀던 중이었다.
“총으로 변해봐! 총! 총!”
아무리 총을 외쳐도 변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윽고 리안은 제 풀에 지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총은 안되는건가. 하긴 이세계물에서 총이 나오면 재미가 없더라고.”
라그레아닐을 왼팔에 감은 채 잠깐 멍하니 앉아있던 그의 시선에 엊그제 선반 위에 올려두었던 유리병이 보였다.
‘마왕을 죽이는 성수! 맞아 저런게 있었지!’
리안은 싱글벙글 웃으며 유리병을 집어들었다.
“강화다 강화.”
그는 혼자서도 주절대며 잘 노는 스타일이다.
머릿속으로 검을 떠올리자 라그레아닐은 즉각 날이 빛나는 멋진 칼로 변했다.
“와우······!”
리안은 유리병의 뚜껑을 열었다.
“마왕이 여기까지 올리는 없겠지만 만약이란게 있으니 미리 강화를 해놓자.”
지구에서 게임하던 버릇으로 강화니 뭐니 헛소리를 지껄여대며 칼날에 성수를 뿌렸다.
“+1, +2, +3······, 오오, 이로써 +10 무기가 됐단 말인가.”
그는 물기로 반들거리는 칼날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아니 +10 농기구지. 라그레아닐의 근본은 농기구니까.”
그때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리안아! 리안!”
“공주님이 돌아오셨나?”
리안은 벌떡 일어섰다.
라그레아닐을 던져두고 즉시 밖으로 뛰쳐나갔다.
“무슨 일이세요 공주님!”
거실로 나가자마자 출입문이 열리며 오드리아가 안으로 들어왔다.
“뭐하고 있었어?”
리안은 안으로 걸어들어오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입이 쩍 벌어졌다.
“저, 저기 실례지만 고, 공주님이세요······?”
“뭐야, 아직도 나를 몰라보는 거니?”
“아, 아뇨! 그건 아닌데······”
하늘거리는 푸른색 원피스를 입고 나타난 그녀는 청순하고 사랑스러운 매력을 발산하며 리안의 눈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예, 예뻐!’
리안은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푹 빠져버렸다.
‘버, 벗은 것보다 더 섹시하고 아름다우시잖아. 대체 뭐가 어떻게 된거지?! 내가 바란건 이런게 아니었는데!’
위엄있고 인자한 스승의 모습을 바랐는데!
‘사, 사랑한다며 고백하고 싶어! 저, 아가씨! 여, 연락처 좀······.’
리안이 첫눈에 반한 나머지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동안 오드리아는 대놓고 쳐다보는 그의 뜨거운 시선이 몸에 닿을때마다 부끄러워하며 어쩔줄을 몰라했다.
‘그, 그만 봐줬으면······.’
싫은건 아니었으나 이런 상황, 이런 기분은 그녀 역시 처음인지라 어찌 대처해야할지 몰라 그녀는 오로지 냉담한 표정만 지을뿐이었다.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던 리안을 그대로 스윽 지나쳤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갈거야. 그러니 일찍 잠들지 말고 늦게까지 수발을 들도록 해.”
그러면서 자신의 방으로 쏙 들어가더니 곧바로 문을 닫아버렸다.
쾅!
리안은 문 닫히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여기서 주무시고 가신다고?”
물론 여기있는 모든게 공주님의 것이니 잘 수도 있는 일이지만 다소 이해가 안갔다.
“상처를 치료하실려면 레어에서 주무셔야할텐데 괜찮으신건가······?”
한편, 방에 들어간 오드리아는 오늘밤 리안이 곁에 있어주면 좋겠다고 희망을 품었다.
“방문을 너무 세게 닫았나? 괜찮겠지……? 리안이라면 이해해 줄거야. 그나저나 방안에 들어와서 말을 좀 걸어줬으면…….”
그러나 밤사이 리안은 물을 가져다달라든지 부를때만 딱 나타나고 그외 별다른 행동은 하지 않고 곧바로 방을 나가기만했다.
“그, 급한 일이 있어서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벌써?”
“네, 넷!”
그는 쏜살같이 방을 빠져나갔다.
방에 홀로 남은 오드리아는 울상을 지었다.
자신이 바라는 것을 해주지 않는 그에게 실망했다.
“바보는 고쳐써도 바보라더니. 흥!”
하지만 리안도 나름 고충이 있었으니.
“떠, 떨려서 말도 못걸겠어. 겨우 옷 하나 걸쳤을뿐인데 왜 저리 예쁘신거야…….”
좌우간, 오드리아는 자정이 지나자 졸음이 쏟아지며 그날의 들떴던 기분도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미워.”
결국 그녀는 하품만 하며 기다리다 스르륵 잠이 들었다.
멍청이 리안은 슬쩍 방문을 열어 그녀가 자는 것을 확인한 후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 드디어 주무시는구나.”
그는 조심히 문을 닫은 후 방긋 웃었다.
“오예, 지금부터 자유시간이닷! 개꿀!”
* * *
다음날에도 리안의 배움은 끝이 없었다.
오드리아는 그에게 양질의 씨앗을 고르는 법 및 종자를 개량하는 법까지 가르쳤고, 그와중에도 틈틈이 헤이스트 플래쉬도 훈련시켰다.
일주일 가량을 밭에서 난동을 부리던 멧돼지와 씨름한 그는 마법을 배운지 열흘째가 되자 마침내 풍월을 읊게 되었다.
밭을 달리는 속도가 전에 비해 상당히 빨라졌고, 빠르게 달림에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깨달음을 얻고 나서 이틀 후, 리안은 드디어 멧돼지의 몸통에 창을 꽂아버렸다.
그간 그를 고생시킨 멧돼지는 꽤애액 비명을 지르며 뒤집어졌다.
“공주님 이거 봤어요? 제가 잡았어요!”
리안이 기뻐서 소리질렀으나 오드리아의 표정은 무덤덤 했다.
“이제 시작이야. 내일은 고블린을 잡아올 생각이다.”
“고, 고블린이요!?”
그런식으로 매일 공부와 훈련을 병행하며 4년이란 시간이 순식간에 흘렀다.
어느덧 리안은 라그레아닐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경지에 이르렀고, 다양한 농사법까지 두루두루 확실히 익혀 이제는 오드리아에게 농사에 관한 의견을 먼저 제시하고 지식의 뒤처짐 없이 그녀와 막상막하로 토론하는 실력까지 갖추게 되었다.
그즈음 리안과 오드리아는 품종개량에 몰두하고 있었다.
건강에 좋고 노화를 늦추는 새로운 작물을 개발해 드래곤보다 수명이 짧은 리안을 오래살게 하는게 목적이었다.
더불어 근 4년 가량을 같이 붙어있으면서 두 사람의 애정도 알게 모르게 커져있었다.
무언가 계기만 있다면, 두 사람은 기다렸다는듯이 활활 불타오를게 확실했다.
그러나 오드리아를 항상 존경하는 마음으로 깍듯이 대하는 리안의 태도가 둘 사이를 뜨거운 열탕속으로 빠뜨리는걸 매번 억제하고 있었으니······.
한편, 그 무렵 두 사람에게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왕과 여왕의 안식처 농장으로 향하는 대협곡 입구의 상공.
등에 악마의 날개가 달린 건장한 사내가 허공에 떠있었다.
“이딴걸 결계라고 쳐놓은건가. 애처롭군 오드리아.”
그가 앞으로 한 손을 뻗어 가볍게 힘을 발휘하자 대협곡 전체에 펼쳐져 있던 투명한 결계가 와장창 무너져내렸다.
길을 감췄던 대협곡이 본모습을 드러내자 사내, 마왕 반데어자르는 사악하게 웃었다.
“자, 그 계집의 힘도 먹으러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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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와요!”
리안은 하늘을 가리키며 기쁘게 소리쳤다.
“올해도 많이 왔어요!”
남쪽 하늘을 뒤덮은 고니떼.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흰 고니, 검은 고니, 흰색과 검은색이 섞인 고니. 노란 머리 고니.
녀석들은 거리낌없이 농장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산처럼 쌓아둔 수확물쪽으로 한꺼번에 몰려가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잘 먹네요.”
“그러게. 다들 배불리 먹고 갔으면 좋겠구나.”
“저기 싸우는거봐요. 지들끼리 싸우네.”
리안이 소리쳤다.
“이 녀석들아! 니들 먹을거 많으니까 싸우지말고 사이좋게 나눠 먹어!”
4년전, 이곳에 처음왔을때 물었다.
이 넓은 농장의 수확물은 전부 어떻게 처리하냐고.
그때 오드리아가 말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적에는 주로 로렐라이 왕궁에 보내줬지만 돌아가시고 나선 서서히 그쪽과 교류가 끊겼지. 지금은 아버지께서 젊은시절 데리고 다녔던 백조의 후손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백조요? 드래곤 슬레이어로 불리던 영웅이 백조를 데리고 다녔다고요? 늑대나 독수리 같은게 아니라 폼 안나게?”
오드리아는 점잖게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시절 아버지를 위기에서 구해준 영특한 백조라더구나. ‘디그’ 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어딜 가든 항상 데리고 다니셨대.”
“공주님도 디그를 봤어요?”
“내가 태어났을땐 디그는 이미 십년전에 죽고 없었어. 그 자손들만 보고 자랐지.”
다시 현재.
오전.
울창한 나무 아래.
시원한 그늘.
리안과 오드리아는 나란히 앉아 고니떼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꽥꽥!”
“꼬악! 꼬악!”
“삐이익!”
실로 오랜만에 농장이 시끌시끌했다.
수확물을 먹어치우는 녀석들을 보며 절로 웃음꽃이 피어났다.
리안이 이세계에 온지 4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오드리아의 미모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화장기가 없어도 하얗게 눈부신 아름다움과 우아함, 그리고 위엄을 갖춘 그녀의 모습은 예전 그대로 독보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반면에 리안은 많은게 달라졌다.
어깨는 전보다 두 배나 차이날만큼 딱 벌어지고 가슴은 망망대해처럼 넓고 튼실했으며 허리는 매끈하게 얇고 다리가 길어보였다.
체형은 커졌지만 근육이 잘 발달해 날렵해보이는 체격.
게다가 엄격하면서도 다정한 누나 같은 오드리아를 매일같이 졸졸 따라다니면서 성품이 비슷해진 덕분에 제법 의젓해지고 내적으로도 많이 성숙해졌다.
“후, 새벽부터 일했더니 피곤하다.”
리안은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공주님, 저 한숨 잘게요.”
고니떼가 수확물을 전부 먹어치울때까지 시간이 널널했다.
“공주님도 피곤하실텐데 잠깐 눈 좀 붙이세요.”
“응.”
리안이 바닥에 드러눕자 오드리아도 무심코 따라누웠다.
그다지 피곤하지는 않았으나 하나뿐인 말벗이 잔다고 하니 그녀 혼자 눈 뜨고 앉아 있어봐야 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막상 눕고보니 피로가 몰려왔다.
리안과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워 피곤한줄도 몰랐던 걸까.
그녀는 금세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꿈속.
화려한 결혼식장.
웨딩드레스를 입은 어머니와 멋지게 차려입은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드래곤과 인간의 결혼.
모두가 불가능하다 생각했지만 여기 성공한 커플이 있다.
많은 사람들의 축복속에 부모님은 입을 맞추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낮잠에서 깼을때, 오드리아는 가슴이 두근두근하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드래곤과 인간의 결혼.
그 당사자들의 결실인 오드리아는 서로 다른 종족과의 결혼, 특히 인간과의 결혼에 전혀 거부감이 없었다.
‘리안은 어떻게 생각할까?’
머리 위에서 내려쬐는 찬란한 햇살과 살랑이며 불어오는 바람이 그녀의 기분을 한층 더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
‘천년 후에 시집가나 내일 시집가나 어차피 내 서방은 리안이뿐인데 남남으로 허송세월 보낼 필요가 뭐 있겠어? 더구나 인간은 수명도 짧은데. 시간이 금이야.’
아이도 빨리 낳아야할 것 같은 조바심도 들었다.
인간보다 더한 괴물의 번식 본능.
마음만이 아니라 잘 여물어진 육체도 그녀를 부추기고 있었다.
그녀의 몸은 이미 임신을 하기 위한 준비를 완벽히 끝마친 상태였다.
오드리아는 꼬옥 주먹을 쥐었다.
옆에 앉아있는 리안을 돌아봤다.
잠에서 깬 그는 멍하니 고니떼를 바라보며 졸린 눈을 비비고 있었다.
푸짐한 식사를 끝마친 고니들은 하나둘씩 떠나가는 중이었다.
“고맙다는 말도 없네요 저놈들.”
리안이 웃는다.
그의 맑은 미소는 언제나 그녀를 설레이게 만들었다.
오드리아가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리안아.”
“네?”
“너도 이제…….”
그녀는 떨리는 목청을 가다듬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계속 혼자 지내면 외로우니 슬슬 좋은 배필감을 찾는게 어떻겠니?”
리안은 솔깃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바로 대꾸했다.
“소개시켜 주시게요? 누구 아는 사람있어요?”
오드리아는 바로 이맛살을 찌푸렸다.
“내가 바보야? 뭐하러 그런짓을 해?”
그렇게 쏘아붙이고는 그녀는 이내 얼굴을 붉혔다.
“그러니까 내 말은, 이곳에 너를 바라봐줄 인간 여자도 없고 사정이 그러하니…….”
평소와 달리 수줍게 말을 꺼내는 그녀를 보고 리안은 바로 직감했다.
‘헉, 공주님께서 혹시 나를……!?’
속으로 적잖이 놀랐지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잖아.
리안은 침착하게 그녀를 응시했다.
오드리아의 시선은 자신을 제대로 마주보지 못하고 아래로 향해있었다.
분명 부끄러워서 저러시는 거지?
‘만약 공주님께서 사귀자고 하면……, 난 뭐라고 대답해야하지?’
그동안 오드리아를 스승으로만 바라봤던 리안.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거절은 못할 것 같아. 나도 공주님을 많이 좋아하니까…….’
단 몇 초 밖에 안흘렀을 뿐인데 오드리아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동안 입안이 바싹 타들어갔다.
“너도 외롭고 그러니까 정 외로우면…….”
하지만 그때였다.
리안이 오드리아의 입술만 바라보며 정신이 팔려 있을때, 오드리아는 순간 불길한 기운을 감지했다.
이곳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무언가.
그녀의 미간에 주름살이 생겼다.
‘이건 분명 그자야. 어떻게 이곳까지……?’
그녀가 긴 시간 말이없자 리안은 팔을 흔들며 보챘다.
“어서 말씀해주세요. 무슨 얘기하려고 하셨어요?”
오드리아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봤다.
그녀의 떨리는 두 눈망울.
수줍음에 붉어졌던 혈색은 언제 그랬었냐는듯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오드리아는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으로 토해냈다.
“이곳에 인간 여자가 없으니 떠나도 좋아. 너도 이제 결혼할 나이가 되었잖니.”
“예……?”
리안은 망치로 한대 얻어 맞은 듯한 큰 충격을 받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 약속 잊었어요?”
“무슨 약속을 했다고?”
오드리아는 모질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인간은 굉장히 계산적이고 박정한 동물이라고 들었다. 나는 너를 좋게 생각하지만 실은 마음 한켠에선 신뢰하지 못하고 있지. 언젠가 나를 실망시키리라 믿으며 전부터 때가 되면 떠나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더욱 쌀쌀맞게 말했다.
“지금이 바로 그때야. 절벽 아래로 데려다줄테니 어서 떠나거라.”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공주님!”
말그대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통보였다.
“저한테 왜 이러세요!”
“네가 필요없어졌어.”
“?!”
리안은 기막힌 얼굴로 멍하니 서 있다가 갑자기 실성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그녀를 놀리듯이 엉덩이를 흔들며 말했다.
“안갈겁니다~ 여기서 평생 살거예요~”
“뭐?”
오드리아는 크게 화를 냈다.
“혼나기 싫으면 빨리 떠날 채비를 해! 시간이 없다!”
“시간이 왜 없어요? 보아하니 뭔가 숨기는게 있나보죠?”
리안은 영리했다.
지난 4년동안 오드리아가 감탄할 정도로 배움도 빨랐던 그였다.
“매일밤 저 먼 곳의 성을 쳐다보며 여길 떠나고 싶어했잖아!”
리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쳐다본지 오래됐어요. 여기가 내 집이고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분도 여기 살고 계시는데 어딜 떠나요?”
그 말에 오드리아는 큰 감동을 받았다.
하지만 내색하지 못했다.
“바보야! 빨리 떠나라고!”
“싫다니까요.”
오드리아가 손으로 붙잡으려고 하자 리안은 재빨리 피했다.
그는 그녀를 약올리며 오두막쪽으로 도망쳤다.
“절대 안떠나요! 여기가 내 집인데 왜 떠나!”
오드리아는 다리에 마법을 걸어 빠른 보법으로 그를 쫓아갔으나 리안도 똑같은 방법으로 뛰어다니며 그녀의 손길을 귀신같이 피해다녔다.
“너 정말!”
오드리아는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더욱 강한 힘을 발휘했다.
그녀의 오른팔이 크게 부풀어 오르며 순식간에 흰 비늘이 덮인 드래곤의 팔로 변했다.
그녀는 커다란 팔로 리안을 손쉽게 잡아챘다.
손안에 갇혀 꼼짝 못하게된 리안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반칙이잖아요.”
“화나게 하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리안하고 실랑이를 벌이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일분일초가 급했던 그녀는 농장의 가장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리안이 처음 이세계에 도착했을 당시 만들었던 참호.
오드리아가 생각하기로 그곳이 가장 안전해보였다.
그녀는 참호속에 리안을 집어넣고 나뭇가지를 덮어 마법을 걸었다.
참호를 덮은 나뭇가지들은 리안의 힘으로는 절대 열고 나올 수 없을만큼 무거워졌다.
“마왕군이 오는거죠! 그래서 이러시는거죠! 꺼내주세요! 같이 싸워요! 인간도 드래곤처럼 강하다고요!”
“인간은 약해.”
그게 끝이였다.
오드리아는 슬픔을 억누르며 그의 목소리를 마법으로 지워버렸다.
참호 밖에서는 리안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게 되었다.
“우린 그자를 이길 수 없어. 너라도 살아.”
오드리아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혼자서는 마왕을 절대 이길 수 없으리란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얼마 후 오드리아가 서 있는 곳 주변으로 강풍이 일었다.
세찬 바람에 사방에서 작물들이 뽑혀져 날아갔다.
오드리아는 굳건히 버티고 서서 눈에 힘을 준 채 상공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 양귀가 뾰족한 마왕이 떠있었다.
“그 얼굴 기억난다. 제대로 찾아왔군.”
마왕은 여유롭게 말하며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가 땅에 발을 딛자 그를 중심으로 죽음의 기운이 퍼져나가며 반경 2미터 이내 모든 생물들이 말라비틀어졌다.
“라퀴어스와 다니던 그 꼬마 드래곤을 잊을 수가 없어서 말이지.”
마왕은 사악하게 웃었다.
“그 꼬마를 잡아먹으면 더 강해질게 뻔한데 놓치긴 아쉬웠어. 그래서 이렇게 찾아왔다. 오드리아.”
압도적인 위압감.
공포감.
서늘함.
마왕이 발산하는 모든 것들이 오드리아의 가슴속에 예리하게 파고들며 매섭게 짓눌러댔다.
목소리가 떨릴 것 같아 입밖으로 소리를 내기도 두려웠다.
오드리아는 어서 덤비라는듯, 묵묵히 드래곤으로 변신했다.
“나와 싸우겠다고?”
마왕은 피식 거렸다.
“귀엽군.”
그는 돌연 입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목구멍 깊숙이 들어간 손은 곧 커다란 드래곤의 머리뼈를 끄집어냈다.
그것을 오드리아의 발앞에 던졌다.
“누구의 뼈게?”
마왕은 웃으며 말했다.
“라퀴어스다. 여기 오기전에 놈부터 처리했지. 실컷 포식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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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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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그것이 시작이었다.
순간 두려움이 솟구친 오드리아는 빠르게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입을 크게 벌리고 지상에 서 있는 마왕을 향해 냉기 브레스를 퍼부었다.
마왕은 웃음기를 지웠다.
“시간 낭비라니까.”
오드리아도 알고 있었다.
그의 말이 허세가 아님을.
과거 한 차례 겪어봤으니까.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꺼내줘요! 꺼내주라고요! 이봐! 거기 마왕군없냐! 나 여깄다! 나 여깄다고!”
참호속에 갇힌 리안은 구멍을 덮은 나뭇가지를 쾅쾅 때려봤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제 손만 아플뿐이었다.
그는 답답한 한숨을 토해냈다.
“밖에서 소리나는거 보니까 분명 뭔가 있어. 빨리 나가야하는데 미치겠네!”
마왕이 허공에 손을 휘두르자 냉기 브레스가 공기중으로 흩어져 버렸다.
오드리아는 재차 브레스를 쐈으나 허사였다.
마왕의 몸에 닿지도 않았다.
오히려 마왕의 반격에 오드리아는 도망다니기에 바빴다.
마왕이 연달아 쏜 마법 주문들이 그녀를 맹렬히 뒤쫓았다.
콰쾅!
쾅!
마왕은 처음 그 자리에서 단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상공을 향해 주문만 퍼부어댈 뿐이다.
“아름다워. 이제 보니 정말 아름다운 드래곤이었군. 죽이기 아까울 정도로.”
오드리아는 점점 지쳐갔다.
마왕이 쏴 날린 공격에 어쩌다 한대씩 맞을때마다 비명을 지르며 지면에 처박혔다.
설령 공격에 맞지 않아도 맞은 것처럼 뼈아팠다.
빗나간 마법들로 인해 리안과 몇 년을 공들여 기른 작물들이 산산이 파괴되고 사라져갔다.
‘안돼! 내 안식처가! 리안과의 삶이! 부모님의 무덤이! 더이상 망가지면 안돼……!’
오드리아는 절망속에서도 끝까지 힘을 냈다.
허나 마왕은 그녀보다 몇 십배는 강했다.
“꺄악!”
이윽고 마법에 수차례 난타를 당한 오드리아가 땅으로 추락했다.
변신할 기운도 없어진 나머지 뿔 달린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와 바닥을 나뒹굴었다.
“어?”
참호속에서 끙끙대던 리안은 갑자기 무언가 달라진 것을 느꼈다.
나뭇가지를 살며시 밀어봤더니 위로 쉽게 들리는게 아닌가!
‘공주님이 거신 마법의 위력이 약해졌어. 그렇다는 말은……!’
리안은 큰 불안을 떠안고 서둘러 참호를 빠져나왔다.
마왕은 주변을 시들게 하며 한 걸음 한 걸음씩 오드리아에게 다가왔다.
“들어봐 오드리아. 생각이 바꼈어.”
오드리아는 바닥에 쓰러진 채 꼿꼿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윤기나고 아름다웠던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은 헝클어지고 입가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내 비록 죽더라도 네놈만은 꼭 죽이고 갈 것이다!”
“어린 드래곤 주제에 기개가 있군. 하지만 말이야 비굴해지고 싶을땐 비굴해져도 돼. 목숨을 구걸해서 살아남는 자들도 많아.”
마왕은 코앞까지 다가오더니 멈춰섰다.
“싸우다 보니 네가 마음에 들었다. 나는 자비로운 군주다. 나의 아내가 되기로 맹세하면 목숨을 살려주지. 위대한 유전자를 물려받아 강한 힘을 가진 새끼를 낳아라.”
“날 모욕하지마라 이 쓰레기 같은 놈아!”
그녀는 마왕의 발등에 침을 뱉었다.
“난 이미 임자가 있는 몸이다!”
“임자가 있다?”
마왕은 잠시 턱을 어루만지더니 말했다.
“그럼 너 말고 또 다른 드래곤이 있다는건가?”
오드리아는 흠칫했다.
‘아뿔싸!’
마왕은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그놈은 어디에 숨어있지?”
말이 끝남과 동시였다.
“여깄다 개놈아!”
푸욱!
리안은 난데없이 나타나 마왕의 등뒤에서 칼을 꽂았다.
“커헉!”
칼에 찔린 마왕이 신음을 토해냈다.
장검으로 변한 라그레아닐은 마왕의 심장을 정확히 꿰뚫었다!
“다, 다른 기운은 못 느꼈는데! 큭!”
뜻밖의 상황에 마주한 마왕이 잠시 주춤하는 사이 리안은 바닥에 쓰러진 오드리아를 향해 밝게 웃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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