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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덮쳐졌고.
악몽을 꾸는 내내 꿈속의 그녀에게 촉수로 잔뜩 괴롭힘당했다.
그날 밤은 무척이나 길었다.
* * *
“안녕하세요, 차원항 장인 클라인입니다! 오늘 제가 준비한 콘텐츠는~ 쟈자쟌~.”
클라인은 언제나의 인사말을 카메라에 건네면서 촬영을 시작했다.
인사말을 끝마친 클라인은 통, 하는 소리와 함께 카메라 앞에 잉간이를 샤워시킬 대야를 올려놨다.
“네. 보시는 것만으로도 아시겠죠? 드디어 오늘! 잉간이가 첫 목욕을 합니다!”
짝짝짝.
클라인은 신체 말단을 부딪치면서도, 걱정이 앞섰다.
알다시피, 대부분의 차원 생물들은 목욕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목욕을 시킬 때마다 사방으로 마법을 난사하거나 주인의 손을 공격하는 정도는 양반이다.
때때로 자기 인식에 실패하는 차원 생물들도 발생할 정도니까.
하지만 차원 생물들이 그렇게 싫어하더라도 목욕을 시킬 수밖에 없다.
“솔직히, 차원 생물들이 싫어해서 목욕을 시키지 않는 주인분들도 꽤 있으신 거로 알아요. 하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기 위해선 목욕은 필요한 일이랍니다?”
지적 생명체가 관측하는 것만으로도 차원 생물들의 정보에는 정보 오염이 일어난다.
정보 생명체의 경우에는 정보 가공까지 일어날 수도 있다.
만약, 정보 오염을 너무 내버려 두면 정보 오염은 정보 가공으로 발전되고, 이윽고 악성 정보로 변화할 수도 있다.
“악성 정보는 한 개체에만 영향을 끼치는 게 아니라, 사육장 내부의 모든 개체들에도 영향을 끼친답니다? 더욱 악성 정보가 발전하면 사육자에게도 영향을 줄 수도 있고요. 아니면 정보 생명체로 발달할 가능성도 있고요.”
그 때문에 사육 생물들은 주기적으로 정보 세척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
더욱이 정보 세척은 차원 파괴자 같은 기생형 정보 생명체를 없애는 데도 효과적이니까.
뭐, 기생형 정보 생명체도 정보 오염 수준이 아니라 정보 가공 수준까지 침투한 정보 생명체는 어찌할 수 없지만 말이다.
“으, 그래도 잉간이는 마력이 없으니 그리 크게 난리 지친 않겠죠?”
그래.
가끔 정보 세척을 즐기는 차원 생물들도 있으니까.
잉간이도 부디 그러길 바라며 클라인은 조심스럽게 차원항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클라인의 손이 차원항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낀 잉간이가 조심스럽게 은신처 밖으로 나오고.
클라인은 잉간이가 경계하지 않게끔 평소처럼 잉간이와 놀아 주는 척을 했다.
“단번에 붙잡아야 해요. 첫 시도로 붙잡지 못하면, 잉간이가 스트레스도 더 받고, 경계심도 심해져서 붙잡기 힘들어지거든요.”
그동안의 핸들링 훈련의 결과일까?
잉간이는 생각보다 클라인의 손을 겁내지 않고 가까이 다가왔고.
클라인은 단숨에 잉간이를 잡아채 차원항 밖으로 꺼냈다.
가끔, 몇몇 차원 생물들은 차원항 바깥의 환경에 잠시 노출된 것만으로도 자기 인식에 실패할 때가 있으니 최대한 빨리 정보 세척을 끝내야 한다.
“자, 자. 미안해! 좀만 참으렴!”
클라인은 손안에서 잔뜩 놀랐는지 몸을 굳힌 잉간이에게 사과를 하며 잉간이를 자신이 준비한 대야 안에 놔뒀다.
“차원 생물들을 정보 세척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요. 그냥 우리가 샤워할 때처럼 고밀도 정보로 씻어 내면 된답니다? 마력을 지닌 생물한테는 속성 마력을 첨가해 주면 좋지만, 잉간이는 마력이 없으니 그건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콸콸콸.
잉간이가 들어 있는 대야 안에 클라인은 고밀도 정보를 한가득 붓는다.
잉간이는 고밀도 정보를 처음 봐서 놀란 상태로 고밀도 정보에 휩쓸리고.
클라인은 서둘러 고밀도 정보를 조작하며 잉간이의 몸에 달라붙은 정보 오염을 털어 내기 시작했다.
“직접 손으로 세척하는 건 그리 추천드리지 않아요. 놀란 차원 생물에게 공격받을 수도 있고, 스트레스를 더 줄 수도 있으니까요.”
클라인은 최대한 빠르게 잉간이를 씻기려 했지만, 잉간이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챘다.
처음 겪는 일에 과도한 혼란과 공포를 느끼고 있는 걸까?
정보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무언가 붙잡을 것을 찾는 듯한 모습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이야기가 다르죠. 주인의 손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생물이라면 이렇게 손으로 붙잡아 주는 게 더 안정감을 줄 수 있어요.”
클라인은 부디 잉간이가 자신을 의지해 주길 바라며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잉간이를 휘감았고.
다행스럽게도 잉간이는 클라인을 믿는 것인지 안정된 모습을 되찾아 갔다.
휴.
클라인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정보 세척을 더욱 서둘렀다.
서두르긴 했어도 떨어지지 않은 정보 오염이 없게 꼼꼼히 세척을 끝마친 클라인은 서둘러 잉간이를 고밀도 정보에서 끄집어냈다.
“이제! 차원항으로 되돌려 놓을 시간입니다. 빨리, 빨리!”
클라인은 허둥지둥 다시 잉간이를 차원항 안에 집어넣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흐아…… 어디 보자, 이제 어떤 정보들이 떨어져 나갔는지 확인해 볼까요?”
클라인은 조심스럽게 잉간이에게서 떨어져 나간 정보들을 확인해 봤다.
이렇게 오염된 정보들을 확인하는 것으로, 클라인이 어떤 정보들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는지도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디 보자. 뭐, 이건 대부분의 생명에게서 나타나는 거니까 무시하고……. 에, 이건 원시 무술에 관련된 정보인데. 설마 잉간이는 싸우는 법을 아예 몰랐던 거예요?”
클라인은 잉간이에게서 떨어져 나간 정보들을 확인하며 자신이 잉간이에 대해 가지고 있던 잘못된 정보들을 수정해 나간다.
그러던 와중, 클라인은 무언가 이질적인 정보를 하나 발견했다.
“잠깐만요. 이건…….”
클라인의 눈에 띈 것은 절대로 잉간이의 것이 아닌, 정보 생명체의 정보였다.
“아이고, 이것 봐요. 정보 생명체의 흔적이네요. 이래서 방역과 세척을 꾸준히 해야 한다는 거예요.”
정보 생명체는 꼭 사육 생물이 아니더라도 사육항의 환경에서 사육자의 관측으로 인해 탄생하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별다른 피해가 없지만, 가끔씩 독성 정보를 품은 정보 생명체가 탄생하는 경우가 있으니까 주의해야 한다.
“그럼, 지금까지 차원항 장인 클라인이었습니다!”
잉간이의 목욕을 끝마치고 뒷정리까지 마무리한 클라인은 카메라의 전원을 껐고.
한숨을 내쉬며 슬며시 벽에 걸어 둔 달력을 바라봤다.
다음 브리더 자격증 시험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한 달도 되지 않았다.
자신이 집 밖으로 나갈 수 있느냐는 둘째 치고, 시험 날이 다가오기 전에 브리더 자격증에 통과할 만한 실력을 갖추긴 해야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약간의 휴식을 취하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늘 그렇듯, 호의를 가득 담아서.
* * *
숱한 못을 넘어, 별자리 끝을 지나던 신호는 마침내 수신해야 할 대상을 잃어버렸고.
오지 않는 답장을 기다리던 여행객은 새로운 영역에 발을 들였다.
아무도 없는 고독한 여행의 끝.
여행의 끝에서 회한이라도 들었던 것일까?
고독한 여행객은 여행을 떠난 직후 한 번도 사용해 본 적 없는 황금빛의 악기를 연주했고.
차가운 우주의 어둠 속에서 고독한 여행객은 흥얼거리며 그의 부모가 들려준 노래를 사방으로 퍼트렸다.
아무도 듣는 이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던 여행객은 서서히 마지막 숨을 내뱉고.
어두운 우주를 떠도는 한 톨의 먼지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어둡지만 차갑지만은 않은 우주에서 여행객의 마지막 유언이 토해지고.
아무도 듣는 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여행객의 유언은, 그 근방을 지나가던 모험가의 몸에 새로운 정보로써 똑똑히 새겨졌다.
“여기는 13호. 13호. 고객님이 원하는 걸 발견한 것 같다.”
그렇게 여행자는 자신이 만들어진 목적을 완수하고 영면에 들어갔다.
시련을 견뎌 낸 강인한 육체만을 남겨 둔 채로 말이다.
54화 오크 차원항에 통일 부족이 탄생했어요! 오크 사육장 근황과 귀여운 잉간이 영상! (1)
사이코패스에게 차원항 바깥으로 끌려 나갔다 돌아온 내가 오랜만에 집에 와서 마주한 풍경은 무척 참담했다.
“뭐야, 집이 왜 이래?”
“그, 그게…….”
블랑카 혼자서 어떻게든 도축을 해 보려고 한 듯한 피와 내장투성이의 탁자.
이리저리 애쓰다 결국 도축을 포기했는지 그대로 시꺼멓게 타 버린 고기가 널브러져 있는 모닥불.
그야말로 개판 그 자체의 모습이었다.
“나 혼자서 어떻게든 해 보려고 했는데……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겠고…….”
“만능 사전으로 검색 좀 하지 그랬냐.”
“나, 나도 당연히 찾아봤지! 그런데, 그게 생각보다 쉽지가 않아서…….”
블랑카는 내게 혼날 거라고 생각하기라도 하는지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내 눈치를 살핀다.
나는 그런 블랑카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슬쩍 블랑카의 등을 잘했다는 의미로 쓰다듬어 줬다.
“이 정도면 잘했네. 나도 처음에는 이렇게 막 내장을 터트리고 그랬어. 칼솜씨는 오히려 나보다 나은걸?”
“그, 그래?”
“그래. 그러니까 물 좀 떠다 줄 수 있어? 일단 청소부터 좀 하게.”
“으, 응!”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블랑카에게 물을 담아올 토기를 건네줬고, 블랑카는 귀를 쫑긋거리며 호수로 달려갔다.
나는 블랑카가 내 시야에서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집 안의 풍경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으아, 이걸 도대체 어디부터 치우지?
일단 이 참혹한 내장들부터 가져다 버리고 생각해 보자.
주섬주섬 내장 덩어리들과 고깃덩어리들을 들고 달맞이풀을 심어 둔 곳으로 향한다.
에포나도 나를 도와주겠다는 듯 입에 내장 몇 점을 물고 나를 따라온다.
그러고 보니 달맞이풀은 얼마나 자랐으려나?
뭐, 고작 3일 만에 다시 보는 건데, 그리 많이 자라진 않았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시체 밭으로 향했지만, 3일 만에 뒤바뀐 시체 밭의 풍경을 본 나는 경악하는 수밖에 없었다.
“뭐야, 이거?”
단 3일.
내가 3일 전에 시체 밭을 봤을 때는, 그냥 새싹 하나가 솟아오른 정도였는데.
지금은 시체 밭의 절반 이상을 달맞이풀이 뒤덮고 있었다.
커다란 잎사귀가 자라나거나 한 건 아니지만, 마치 딸기 같은 식물처럼 새싹이 있던 곳에서 줄기가 잔뜩 뻗어 나가고 있었다.
고작 3일 만에 이렇게나 자라다니, 나는 달맞이풀의 성장력에 그저 감탄만 할 뿐이었다.
이렇게나 빨리 자라니까 블랑카의 고향에서 주식으로 삼을 만도 하겠네.
거기에다가 제대로 된 관리도 안 했는데 이런 수준으로 자랄 정도라니.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맛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풀때기가 고기보다 맛있을 것 같진 않으니까.
잘 자라는 건 편한데, 키울 때 다른 생물의 고기를 소모해야 한다는 게 참 아쉽다.
시체 밭의 상태를 확인한 김에 집 근처에서 자라나던 다른 작물들의 상태도 확인해 보러 발걸음을 옮긴다.
다행히 블랑카가 물을 주는 것을 까먹지는 않았는지 땅바닥이 흥건하게 젖어 있다.
“어디 보자. 애들 상태가…….”
새싹들이 이제 막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시기인 걸까?
달맞이풀처럼 엄청나게 자라나진 않았지만, 새싹이었던 모습과 비교하면 어마어마하게 자라났다.
그런데 자세하게 살펴보니, 붉은 후추와 쌀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뭔가 좀 이상하다.
일단 붉은 후추와 쌀은 평범하게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는데.
불꽃콩이 자라나는 땅 주위에는 수분이 완전히 말라서 쩍쩍 말라 가고 있고.
뱀덩쿨은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자기 혼자서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다.
불꽃콩은 뭐, 불의 마력이니 뭐니 하는 것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이름에도 불꽃이 들어가 있고.
그런데 뱀넝쿨은 진짜 뭐지?
내가 아는 식물의 움직임과는 달리, 너무나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주위에 무언가 사냥할 것을 찾는 뱀 같은 모습이다.
아니, 이름값을 하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식물이 저 정도로 활기차게 움직일 수가 있나?
사실 내가 키우는 게 식물이 아니라 몬스터였던 거 아냐?
그런 의문이 합당하게 느껴질 만큼의 움직임이었고, 나는 조심스럽게 나뭇가지를 뱀넝쿨 새싹에 가져다 댔다.
하지만 다행히 그런 의문은 내 과도한 걱정이었던 걸까?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흔들거리던 뱀넝쿨은 내가 가져다 댄 나뭇가지를 조심스럽게 쥐었다.
아까의 그 흔들거림은 지지대를 찾으려는 뱀넝쿨의 귀여운 발버둥이었던 걸까?
그런 생각이 들 만큼 뱀넝쿨의 힘은 너무나도 연약해 보였다.
뭐, 이 정도는 지구의 식물들도 충분히 보여 주던 거니까.
내가 너무 과민 반응을 했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뱀넝쿨의 옆에 지지대로 나뭇가지를 잘 박아 넣자, 블랑카가 물을 한가득 들고 돌아왔다.
“뭐 하고 있었어?”
“식물들이 잘 자라나 확인해 봤지.”
나는 그렇게 말하며 블랑카의 품 안에 들린 토기를 받아서 땅에 내려놨다.
촤악.
핏물로 더럽혀진 집 안에 토기에 담긴 물을 뿌리고, 창고 안에서 구멍이 뻥뻥 뚫리기 시작한 티셔츠를 가져와 걸레처럼 사용한다.
다행히 핏물이 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손쉽게 청소되긴 했지만, 나 혼자서 청소를 하려니 꽤나 힘들었다.
애초에 블랑카는 바닥까지 손이 잘 닿지 않으니까 말이지.
그렇다고 블랑카의 무릎을 이런 일에 혹사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완전히 너덜너덜해진 티셔츠를 꽉 짜서 핏물을 빼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뱀넝쿨을 키워서 섬유를 만들 수 있게 되더라도, 옷을 만들 정도의 기술을 확보하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거다.
지금 입고 있는 옷도 지난번에 사이코패스가 실 대신 선물해 준 옷이다.
맨 처음 입고 있었던 티셔츠는 진작에 너덜너덜해져서 이렇게 걸레로 전락한 지 오래다.
바지는 뭐, 아직까진 괜찮지만, 곧 티셔츠의 운명을 따라갈 것 같다.
구멍이 뚫려서가 아니라, 슬슬 곰팡이 비슷한 게 생겨나기 시작했으니까.
그동안 최대한 물빨래를 하는 식으로 나름대로 세탁을 해 왔지만, 더 이상은 무리다.
좀 더 세탁에 신경을 써야 옷을 넝마 조각으로 만들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뭐, 최후의 방법으로는 사이코패스에게 옷을 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있는데.
솔직히 말해서 그러기가 싫다.
사이코패스가 싫은 것도 있지만, 뭔가 내 힘만으로 최대한 해 보고 싶은 기분이 든다.
원래 세상에서 나는 일상을 방 안에서 아무것도 안 하며 흘려보냈었으니까.
매일같이 모니터만 바라보며 무료하게 시간을 때웠을 뿐이었지.
옷을 오래 입기 위해서도, 청결을 챙기기 위해서도 슬슬 비누 같은 청결용품을 만들 때가 됐다.
그리고 나도 이제 좀 제대로 목욕을 하고 싶으니까.
비누, 비누라.
비누는 어떻게 만드는 거지?
기름에 잿물을 넣고 섞으면 비누가 된다는 이야기를 언젠가 들었던 기억이 난다.
잿물은 지난번에 무두질을 할 때 만들어 본 경험이 있고.
문제는 기름인데.
콩이나 쌀 같은 작물을 키워서 기름을 짜내는 방법도 있지만.
그것들이 다 자라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테니 지금은 패스.
그렇다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역시, 동물성 기름을 이용해서 비누를 만드는 방식이다.
“블랑카, 지금 아직 무두질하지 않은 가죽이 좀 남아 있었나?”
“아니, 없을걸? 지난번에 전부 다 같이 무두질했었잖아? 갑자기 가죽은 왜?”
“기름. 기름이 필요해서.”
“기름?”
“비누를 좀 만들어 보려고.”
“비누? 그건 또 뭐야?”
“뭐?”
블랑카의 입에서 나온 것은 무척이나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다.
비누를 모른다니?
비누라는 개념은 로마 시대에도 존재하던 개념으로 알고 있는데.
리베리아가 로마 문명보다 더 발달했으면 발달했지, 더 뒤처졌을 것 같진 않은데?
“비누가 뭐냐면, 대충 더러움을 없애는 데 사용하는 건데. 그런 비슷한 거 없었어?”
“응. 리베리아에는 그런 게 없었지.”
“허어…….”
생각보다 리베리아의 문명이 덜 발전한 걸까?
아니면 우리 지구의 문명이 생각보다 더 발전한 걸까?
생각지 못한 곳에서 나는 잠시나마 국뽕, 아니, 행성뽕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런 감정은 이어진 블랑카의 말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야. 더러운 게 있으면 마법으로 해결하면 되는데, 뭐 하러 귀찮게 수고를 들여서 그런 걸 만들어?”
“아…….”
생각해 보면 그랬지.
저쪽은 마법이 실제로 존재하는 문명이었다.
블랑카가 말하길, 몸에 붙은 더러움 정도는 마력을 가볍게 흘려 보내는 것으로도 청소할 수 있다고 한다.
어쩐지 블랑카의 몸은 나에 비해서 항상 깨끗해 보이던 이유가 있었다.
나는 푹 한숨을 내쉬며 혹시 하는 심정으로 블랑카에게 한 가지를 물어본다.
“그럼. 너도 청소 마법을 쓸 줄 알아?”
“아니, 몰라!”
“그래. 그렇겠지…….”
응.
네가 청소 마법을 익혔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어.
이 무능한 부르주아 녀석.
“아무튼 비누를 만들려면 동물성 기름이 필요하거든? 오늘 사냥 나갈 때, 돌뱀보다는 표범이나 토끼들 위주로 잡아 와 주면 좋겠어.”
“응. 알겠어.”
그렇게 블랑카에게 심부름을 시키고, 나는 블랑카가 사냥에서 돌아올 때까지 뭘 해야 할지 생각한다.
문득 내 시선이 말라붙은 점토와 슬슬 망가지기 시작한 토기에 눈이 갔다.
슬슬 토기도 새롭게 만들어야 하겠네.
비누를 만들려면 좀 더 커다란 냄비로 쓸 만한 토기도 필요할 테고 말이야.
지금처럼 모닥불에 굽는 방식 말고, 지난번 용광로를 만들었을 때처럼 센 불에 굽는 방식으로도 토기를 만들어 봐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 내 귓가에 무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무오~.”
진짜, 저 무오 녀석들은 어디 써먹을 곳도 없으니 자꾸 숫자만 늘어나네.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리던 그때, 문득 머릿속에 무오를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은 게 떠오른다.
어라?
이거 꽤 괜찮은 것 같은데?
어차피 무오를 잡는 건 그리 어렵지도 않으니까, 시도해 볼 만하다.
“가자, 에포나.”
“왕!”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에포나와 함께 무오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잉간이가 뭘 하려고 하려나~.”
클라인은 다 풀어진 표정으로 한껏 느물거리며 잉간이의 차원항을 관찰하고 있었다.
평상시에도 클라인이 잉간이를 관찰할 때면 칠칠치 못한 표정을 하긴 했지만.
오늘 정도로 칠칠치 못한 표정을 지은 적은 없었는데, 어째서 그런 것일까?
그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흐흣, 흣. 96.7점……. 흐흣.”
바로, 브리더 자격증 모의고사의 결과가 무척이나 잘 나왔기 때문이었다.
커트라인인 95점을 무려 1.7점이나 넘은 압도적인 점수.
그동안의 노력이 보상받는 기분에 클라인은 기분 좋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잉간이를 관찰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95점. 넘었고~ 96점~ 있지, 잉간아. 누나가 커트라인을 넘었다? 엄청 대단한 거다, 이거?”
앞으로 브리더 자격증 시험이 있을 때까지는 중앙까지 향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고려하면 일주일 정도가 남았다.
이제 남은 건 시험 날까지 컨디션을 무너트리지 않고 잘 조절하는 거지만.
사실, 클라인에겐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하나 남아 있었다.
그것은 바로 집 밖으로 나가는 일.
시험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지만, 클라인은 여전히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큰맘 먹고 현관 앞까지 나가도, 집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눈앞이 컴컴해지고, 몸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독성 정보들이 부상한다.
하지만 클라인은 그렇게 조급해하지 않고, 오히려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클라인이 자격증을 따려는 것은 어디까지나 지구산 인간이 보호종으로 지정되는 경우를 위한 대비책.
아직 지구산 인간이 보호종으로 지정된다는 소식조차 들려오지 않는 상태다.
그 때문에 클라인은 마음 한구석으로 이번 기회를 놓쳐도 다음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오늘도 잉간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글들을 뒤지고 있었다.
[니들 솔직히 인간들 떡 치는 모습 보면 좀 야한 기분 들지 않냐?]
-나만 그럼?
일단 이건 신고해 두고.
[근데 엘프 품종 키우는 애들은 왜 키우는 거임?]
-그냥 귀가 뾰족해서? 그거 말고는 기본 인간 품종하고 다를 거 없잖아. 마력 많은 거 좋아하면 걍 드래곤을 키우면 되지, 왜 인간을 키움?
[댓글 2]
-마력 많은 거 키우고 싶은데, 드래곤 키울 여유는 없어서 키우는 거지 ㅇㅇ
-드래곤은 마력으로 갈아 버리기 귀찮잖아.
뭐, 엘프도 엘프만의 매력이 있다고는 하니까.
나는 잘 모르겠지만.
[존나 커여운 인간용 옷을 내 애완 인간에게 입혀 봤다.jpg]
-그리고 나도 입어 봄
[댓글 1,345]
-개 X 발 새 꺄
-ㅗㅜㅑ
-니 X발 마키나지?
-저 새끼 마키나 아님. 마키나면 내가 찾아가서 죽일 거니까, 아무튼 마키나 아님.
-저 새끼 DP 마키나 아니냐?
-통피잖아 ㅂㅅ
으엑, 눈만 버렸네.
클라인은 서둘러 이전 화면으로 돌아가며 진저리를 쳤다.
진짜, 마지막에 자기가 입은 모습만 인증 안 했으면 완벽했는데.
그나저나 인간용 옷이라…….나도 한번 잉간이에게 입혀 볼까?
다른 차원 생물들에게라면 몰라도, 인간형 생물체에게 여러 옷을 입혀 주는 건 꽤 긍정적인 활동이니까.
좋아, 나중에 이걸로 영상이나 한 편 찍어야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음 게시물로 넘어갔다.
이번에는 어떤 글이 있으려나?
클라인은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다음 글을 클릭했지만.
이윽고, 글의 제목을 보고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글의 제목이.
[속보) 지구산 인간 보호종 지정]
클라인에게 있어서는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55화 오크 차원항에 통일 부족이 탄생했어요! 오크 사육장 근황과 귀여운 잉간이 영상! (2)
“무오~.”
내 앞에서 무오가 태평하게 수풀을 뜯으며 울어 젖힌다.
그 모습을 보니 첫날 있었던 일이 떠올라 괜히 심통이 난 나는 슬쩍 무오를 발로 걷어찼다.
출렁.
무오의 몸은 한바탕 출렁였을 뿐, 무오는 내 투정을 신경 쓰지도 않고 풀을 우물우물 씹는다.
“왕?”
“참으세요. 에포나 군.”
죽일까, 마스터?
이런 환청이 잠깐 들려온 것 같았지만 나는 한숨을 내쉬며 에포나를 말렸다.
무오를 죽여 봤자 달맞이풀 재배에 고기를 쓰거나, 무오의 마석을 에포나의 간식으로 쓰는 것 정도밖에 하지 못한다.
오늘 내가 무오를 만나러 온 것은 무오의 고기가 아니라, 점액에 볼일이 있어서니까.
“으엑…….”
나는 잠깐 심호흡을 하며 각오를 다지고, 무오의 몸에서 분비되는 점액을 손으로 한 움큼 퍼 올렸다.
맨손으로 달팽이를 만지는 듯한 끈적한 감촉에 인상이 찡그려졌지만, 필요한 일이니 참아야지.
끈적한 점액을 따로 준비해 온 바구니에 옮겨 담는다.
“무오~.”
무오는 내 손길을 마사지라도 해 주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처럼 즐거이 울어 댄다.
무오의 덩치가 꽤 커다랗다 보니 다른 무오에게서 점액을 채취할 필요도 없이 준비한 바구니가 가득 찼고.
나는 더는 무오와 놀고 싶지 않았기에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에포나, 돌아가……자?”
“왕?”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가만히 나를 기다리고 있을 에포나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에포나는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달리 입에 다른 무오의 마석을 와그작와그작 깨물고 있었다.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니, 에포나의 촉수에 당한 것처럼 보이는 무오들이 주위에 잔뜩 널려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푹 한숨을 내쉬며 에포나를 타박했다.
“네가 다 먹을 것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다 죽여 놨어?”
“왕?”
처음에나 먹을 게 없어서 무오 고기를 먹었지.
블랑카의 합류 이후로는 에포나의 입맛이 높아졌는지 무오 고기를 줘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나도 무오 고기를 먹으라고 준다면 거들떠보지 않을 거긴 하지만.
그냥 여기에 사체를 방치하고 가는 것도 되긴 하지만.
뭔가 먹거나 어딘가에 이용하기 위해서 죽이는 게 아닌 것 같아서 그리 내키지 않는다.
“으음, 이걸 어쩐담…….”
그냥 달맞이풀의 비료로 써 버리기엔 조금 아깝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잔뜩 가지고 가서 이것저것 연구해 보자.
끓이고 지지고 볶다 보면 뭔가 새로운 쓰임새가 나오지 않을까?
하다못해 어떻게 해야 이걸 좀 맛있게 먹는지는 알아낼 수 있겠지.
다행히 여기서 집까지의 거리도 그리 먼 게 아니어서 몇 번 왕복하는 것만으로도 무오의 사체를 전부 옮길 수 있었다.
“영, 차.”
마지막 무오의 사체를 들고 집으로 돌아와 털썩 주저앉아 헥헥거린다.
뭐지?
뭔가 사이코패스에게 끌려 나가기 전에 비해서 체력이나 근육이 빠진 것 같은 느낌이다.
평소라면 이 정도는 충분히 해낼 수 있었을 텐데, 무오를 옮기는 와중에 한계가 닥쳐왔다.
조금 컨디션이 좋지 않은 건가?
몸 관리에도 신경을 좀 써야겠다.
아무튼, 무오들의 사체와 무오 점액을 집까지 옮겼으니 조금만 쉬고.
맨 처음에 계획했던 일들이나 시작하자.
나는 에포나를 쓰다듬으며 약간의 휴식을 즐기고, 지난번 용광로를 만들고 남은 점토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남은 점토는 수분이 완전히 날아가 바싹 말랐지만, 이 정도면 다시 물을 뿌리면 다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점토에 다시 물을 뿌려서 부드럽게 만들고, 나는 무오의 점액을 담아 뒀던 통을 가져왔다.
무오의 점액은 불에 쉽게 녹아내리지만, 말라붙고 난 뒤에도 끈적함을 남긴다.
문득 생각난 건데, 무오의 점액을 점토에 섞어서 토기를 만들면 어떨까?
무오의 점액이 풀처럼 토기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 주지 않을까?
뭐, 그냥 무오의 점액이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고 증발해 버린다고 해도 점액의 점성이 토기를 만들기 더 편하게 해 줄 테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충분히 부드러워진 점토에 무오의 점액을 섞어서 반죽을 했고.
그러자, 무언가 낯익은 감촉이 손아귀에서 느껴졌다.
이전까지의 점토의 감촉이 질퍽질퍽이었다면, 이건 말랑말랑?
그런 의성어가 어울릴 법한 감촉이었다.
더 자세하게 비유하자면 어릴 적 가지고 놀았던 클레이와 비슷한 감촉이다.
일단 이것 하나만으로도 무오의 점액을 이용한 개량은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손에 점토가 달라붙지도 않고, 내가 원하는 대로 모양을 만들기도 편하다.
나는 무오-점토를 주물거리며 기존에 만들던 토기보다도 더욱 커다란 크기의 그릇을 만든다.
그릇이라기보단, 흙으로 만든 냄비 같은 디자인의 토기를 빚어내고.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내가 만들어 낸 결과물을 바라봤다.
그리고 초벌구이를 하기 위해서 커다란 냄비의 모양이 무너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하지만 무오-점토로 결합력이 좋아진 덕분인지 토기의 모양은 흔들리지 않았다.
초벌구이라고 해도 특별한 건 아니다.
그냥 모닥불 근처에 놔둬서 수분을 어느 정도 빼는 작업일 뿐.
초벌구이로 수분을 날리고 나면 지난번 용광로를 만들었을 때처럼 숯을 이용해서 화력을 올려서 토기를 구울 생각이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토기를 모닥불 근처에 놔뒀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어, 어?”
타닥, 탁. 타닥.
무오-점토로 만든 토기에서 팝콘 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순식간에 토기의 물기가 모두 말라 버리고, 마치 유약을 바른 것처럼 토기 표면에 광택이 돌기 시작한 것이었다.
“어, 어라?”
나는 예상치 못한 무오-점토의 효능에 당황하며 이렇게 만들어진 토기를 만지작거려 봤다.
수분기는 단 하나도 느껴지지 않고, 전에 만들었던 토기들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다.
거기에 표면에 유리 같은 막이 코팅되어 있어서 물이 스며들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힘들게 화덕을 만들어서 화력을 집중시키지 않아도 바로 쓸 만한 토기가 나오다니.
이 무오-점토, 그러니까 줄여서 무점토는 꽤 쓸 만한데?
잘 생각해 보면, 이 무점토는 토기를 만드는 것 말고도 다른 용도로도 써먹을 수 있다.
그냥 열만 가하면 단번에 굳어 버리니, 일종의 시멘트처럼 사용할 수 있을 거다.
거기에 이 무점토로 벽돌을 만든다면 벽돌을 말 그대로 찍어낼 수 있을 거다.
이 정도로 쓸 만한 게 탄생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무오의 점액은 참 쓸 만하다는 게 밝혀졌으니, 이제 고기의 차례다.
막 만들어진 냄비에 물을 붓고 무오의 고기를 잘라서 냄비에 눌러 담는다.
펄펄펄.
수육을 만들듯이 고기를 끓는 물에 넣고 펄펄 삶는다.
한바탕 잔뜩 삶자, 무오 고기는 순식간에 녹아내리며 흐물흐물한 건더기로 변해 버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무오 국물과 흐물흐물해진 건더기를 살짝 입에 대어 봤지만.
“으엑, 에퉤퉤.”
역시나 도저히 사람이 먹을 게 되지 못했고.
그렇다고 무오의 고기에서 기름이 잔뜩 나오느냐.
그것도 아니다.
기름이 아예 나오지 않는 건 아니지만, 한 수십 마리는 잡아야 기름 한 통을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무오가 쓸모 있는 건 점액으로 무점토를 만드는 것 말고는 없는 건가?
내가 그렇게 투덜거리는 사이, 블랑카가 오늘의 수확물을 잔뜩 들고 집으로 복귀했다.
“잉간, 이 정도면 충분해?”
“당연히 이 정도면 충분하지.”
이 정도면 충분한 양의 기름을 뽑아낼 수 있겠다.
뭐, 그 대신 오늘 식사는 사이코패스가 선물한 젤리로 대체해야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무오 삶은 물을 버리고 냄비에 잘 손질한 수확물들을 집어넣었다.
블랑카는 앞으로 닥쳐올 미래도 모른 채, 싱글벙글 웃으며 나를 도와서 냄비에 수확물을 집어넣었다.
부글부글 끓는 냄비에서 느껴지는 향긋한 고기 냄새를 맡으며 나는 조용히 생각했다.
이 생활도 그리 나쁜 것 같지는 않다고.
이 어항 밖의 세상에 비하면, 솔직히 여긴 천국 수준이 아닌가?
부디, 사이코패스의 마음이 오래오래 바뀌지 않길 바랄 뿐이다.
* * *
[속보) 지구산 인간 보호종 지정]
클라인은 떨리는 손으로 게시 글을 클릭했고, 단숨에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그러니까 위 기사 내용 요약하면, 대충 지구산 탐사선이 자가 관측 불능 지역에서 발견됐다네? 자가 관측 불능 지역에서 발견된 거면 외우주 진출한 거잖아. 그럼 보호종 지정이지.
게시 글의 내용은 지구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이는 무인 탐사기가 외우주 지역에서 발견됐다는 기사였다.
지구산 탐사기가 외우주에서 발견됐다고?
파인만 말로는 지구인들이 외우주로 진출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했는데?
아냐, 그럴 리 없어.
언제나처럼 사소한 소식을 커다란 소식으로 보도하는 찌라시겠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꽈악 입술을 깨물었고.
클라인이 그렇게 마음을 가라앉히는 사이에도 게시 글에는 수많은 댓글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 지구는 마력 없다며?
-└드디어 제4형 보호종 등판인 거지. 아 ㅋㅋ 이거 진짜면 교과서 바뀌는 거 아니냐?
-진짜 지구산 탐사선 맞음? 마력도 없는 곳에서 외우주까지 탐사선을 보냈다고?
-기사 봐 봐. 무인 탐사선이잖아. 그럼 충분히 가능하지.
-근데 무인 탐사선이 외우주 진출한 것도 보호종으로 치냐? 유인 탐사선만 인정해야 하는 거 아니냐?
-응~ 세레스티아 3형 보호종 지정될 때 무인 탐사선이었어~ 선례를 따르면 100% 4형 보호종 지정임.
-출처가 없으면 뭐다?? 가짜 뉴스다??
-└중앙 뉴스 캡처한 건데 뭔 출처 타령이야?
이 기사를 보는 다른 사람들의 반응들 중 가장 많은 것은 기사가 진짜인지 못 믿겠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일반인들에게 지구란 단순히 마력이 존재하지 않는 멀리 떨어져 있는 행성 중 하나.
그 정도의 인식이었기에 지구의 생물체가 외우주까지 진출할 수 있나? 하는 의문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곧바로 아는 걸 자랑하고자 하는 백수들이 잔뜩 몰려들어 친절히 일반인들의 의문을 풀어 줬다.
클라인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얼굴을 감쌌고,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아직 지구산 인간이 보호종으로 지정됐다고 확정 난 건 아니다.
원래, 이런 증거가 발견되더라도 여러 번 검증하고, 이것저것 인증받아야 하는 게 많아서 보호종 지정까지는 시간이 더 걸릴 거다.
그러니까 지금까지와 달라진 건 없어.
나는 평소대로 생활하면 돼.
아직 아무것도 바뀐 건 없잖아?
클라인은 그렇게 스스로를 다잡으며 편집 프로그램을 열고 오늘 올릴 영상을 편집하기 시작했다.
원래 조금만 쉬고 공부를 다시 할 생각이었지만, 잉간이에 관련된 걸 하면 자꾸 기사의 내용이 떠오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 쿠빌라이의 아들, 보르후가 여기서 그대들의 쿠쿨이 되었음을 선언하노라!”
“으아아…… 통역 마법을 사 두길 잘했네요. 진짜, 진짜 그 찐따 같던 보르후가 맞나요? 정말 가슴이 웅장해지네요…….”
오크항 안의 4개 부족의 전쟁의 시발점이었던 쿠빌라이의 죽음.
가장 강대했던 부족의 족장이었던 쿠빌라이가 3개 부족의 초청을 받고 간 잔치에서 기습을 당해 죽고 난 뒤, 어린아이였던 보르후는 다른 부족의 습격을 피해 야산에 버려졌다.
야산에서 생존 기술을 익히며 힘을 키우고 복수심을 가다듬던 보르후가 멸망한 자신의 부족의 생존자들을 한데 모으고, 마침내 아버지의 복수를 하며 4개 부족을 하나로 통합하는 멋진 장면이지만.
그 장면을 편집하는 클라인은, 영상 속의 자신과는 다르게 무표정이었다.
최대한 지구산 인간의 보호종 지정에 대해서 신경 쓰려고 하지 않았지만.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다.
차원 보호종에 대한 법률은 무척이나 엄격하다.
새로운 법이 시행되기 전부터 사육을 해 왔어도 한번 보호종으로 지정된다면, 브리더 자격증이 없는 이상 사육할 수 없다.
만약 브리더 자격증이 없는 사람이 몰래 보호종을 사육한다면?
곧바로 경찰이 출동해서 사육자를 체포해 갈 것이다.
그리고 클라인에겐, 몰래 잉간이를 사육한다는 선택지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클라인이 지구산 인간을 키운다는 사실은 쥬튜브를 통해 널리 알려진 사실.
갑자기 잉간이의 출현이 뜸해진다면 당연히 구독자들이 경찰에 클라인을 신고할 것이다.
“후우…….”
클라인은 한숨을 내쉬며 편집을 완료한 영상을 쥬튜브에 업로드했고.
떨리는 손으로 다시 커뮤니티에 접속해서 새로운 소식이 들어온 게 없는지 확인해 본다.
아니, 새로운 소식이 들어왔을 리 없겠지.
적어도 몇 달은 걸려야 보호종 지정에 대한 새로운 소식이 들려올 것이다.
라고, 클라인은 생각했지만.
[속보) 지구산 인간 진짜 보호종 됨]
-ㄹㅇ
클라인을 반갑게 맞이한 것은, 이례적인 속도로 보호종 지정을 끝마친 중앙 정부였다.
뉴스 기사로, 정부 공식 발표로, 온 커뮤니티 게시 글에서.
클라인은 지구산 인간이 보호종이 됐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뭐야, 이거?
왜 이렇게 빠른 거야?
그래, 세상이 요즘 나에게 너무 상냥한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역시 이게 세상이지.
응.
아냐, 괜찮아.
일주일 후 브리더 자격증을 따면 아무 일 없어.
그치만 내가 브리더 자격증을 딸 수 있을까?
나 따위가?
온 세상이 내가 망하라고 울부짖는데?
용기를 내서 집 밖으로 나가 봤자 어차피 실패할 게 분명해.
이건, 세상이 내게서 잉간이를 뺏어 가려고 꾸민 함정인 게 분명한데 내가 저항할 수 있을 리 없잖아.
“하하…….”
클라인은 망연자실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제자리에 주저앉아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했고.
멍하니 댓글 창을 읽던 클라인의 눈에 댓글 하나가 들어왔다.
-이럼 클라인인가 하는 놈 쥬튜브 완전 망한 거네 ㅋㅋㅋ 아 ㅋㅋㅋ 쥬튜버들 날먹하는 거 꼴 보기 싫었는데 잘됐다 ㅋㅋ
-ㄹㅇ 인생 날먹하는 거 꼴 보기 싫었는데 잘됐잖어 ㅋㅋㅋㅋ
-아 누가 미탐사 지역에서 보호종 가져오래??
-아 가져올 당시는 보호종 아니었다고 ㅋㅋㅋㅋ
악의로 똘똘 뭉친 댓글들의 정보가 클라인의 몸에 쌓이며 악성 정보로 탈바꿈하고.
클라인 몸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악성 정보들 또한 부상하며 클라인을 괴롭혔다.
그리고 그날, 클라인은 처음으로 차원항 관리를 하지 않고 잠들었다.
클라인은 멍한 머리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습관처럼 쥬튜브 계정에 접속했다.
벌써 하루 만에 잔뜩 쌓이기 시작한 댓글들을 보며 클라인이 입술을 깨문 그때.
띠링.
클라인에게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쥬스농장]
4A-010-24A-3123-4B-6668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
쥬스농장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56화 지구산 인간 관련 소식과 향후 쥬튜브 운영 방안에 대해서
쥬스농장의 메시지를 본 클라인은 그때서야 모든 상황이 이해됐다.
정보 전쟁터를 뚫고, 아무것도 없는 빈 허공을 탐사하던 모험가가 어째서 있었는지.
어째서 중앙정부가 그렇게 빨리 지구산 인간을 보호종으로 지정했는지.
리퀴드사에 도움을 청해 봐도 이건 어떻게 도와줄 방법이 없다는 말을 들었는지.
쥬스농장.
정확히는 브리더 협회, 그쪽에서 힘을 쓴 것이겠지.
어째서 그런 짓을 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이미 일어난 일이니까.
이미 모든 일을 다 끝내 놓고, 어째서 쥬스농장은 자신에게 연락처를 보냈을까?
클라인은 그저, 알고 싶었다.
어째서 세상이 이렇게 자신에게 이빨을 드러내는지.
어째서 쥬스농장이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클라인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쥬스농장의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울리고.
쥬스농장이 클라인의 전화를 받았다.
* * *
“그거, 맛있어?”
“앗은 업은에, 어리긴 아까우이까…….”
내가 기름을 짜내고 남은 찌꺼기를 버리는 것이 아까웠는지, 아니면 젤리를 먹기 싫었는진 알 수 없지만.
블랑카는 분명히 맛없을 기름 찌꺼기와 삶은 고기를 내가 버리려고 하자 절대 사수했다.
“이왕 삶은 김에 육포로 만들려고 했는데.”
“맛있는 고기를 왜 육포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야, 고기라고 부르기 힘들 정도로 흐물흐물해졌으니까?”
국물은 뭐, 진한 고깃국물이니 괜찮은 맛이 날지 몰라도.
하루 넘게 푹 삶은 고기는 원래의 형체가 남지 않고 흐물흐물해진 지 오래였다.
국물 또한 지방을 체(티셔츠)로 거르는 과정에서 전부 버려졌으니까.
아무튼 블랑카는 그런 고기마저 버리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겠는지 필사적으로 고기를 사수했고.
나는 어떻게든 고기를 먹으려는 블랑카를 위해 남은 찌꺼기를 하나로 뭉쳐 완자로 만들어 줬다.
물론, 소금을 찍어 먹는다고 해도 그리 먹을 만한 맛은 아니었지만.
블랑카는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끝까지 음식을 다 먹으려고 애썼다.
그런 블랑카의 모습에 나는 어이없어하며 블랑카를 타박했다.
“육포로 만들면 버리는 것도 아니니까, 그쯤 먹지?”
“내가 사냥했으니, 더 늦기 전에 먹어야 한단 말이야.”
“종교적 의미로?”
“사냥한 자의 도리로. 먹지도 않을 걸 사냥할 수는 없으니까.”
뭐, 그런 신념을 가지고 있다니 더 할 말이 없네.
블랑카가 남은 음식을 어떻게든 먹으려고 노력하는 사이, 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양지바른 곳에서 굳어 가는 비누들을 바라봤다.
내 생각보다 이번에 꽤 많은 동물성 기름을 추출할 수 있어서, 일단 시범적으로 비누 4뭉치만 만들어 봤다.
비누 4뭉치를 만들고도 아직 기름은 남아 있어서, 이것들은 나중에 요리에 쓰거나 또 다른 곳에 사용할 곳을 찾아봐야겠다.
그나저나 참 비누의 때깔이 곱네.
비누가 완성되면 이제 좀 제대로 샤워도 할 수 있겠지.
서서히 좀 사람다운 생활을 할 요건들이 쌓이기 시작한다.
슬슬 나도 이곳에서의 생활에 완벽하게 적응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일까?
아마 비누는 오늘 안으로 다 완성될 것 같고.
비누가 마르는 동안 무점토나 더 만들어 둘까?
처음에는 묽은 점토에 무오 점액을 섞는 방식이었는데.
무오 점액에 마른 점토를 빻아서 섞는 방식으로 무점토를 만들면 어떻게 될까?
기존의 무점토보다 더 점도가 진한 무언가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그렇게 내가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며 한가로이 에포나를 쓰다듬던 그때.
벌컥.
하늘이 열렸다.
말 그대로, 하늘이 열리며 세상 바깥의 세상이 드러나며 사이코패스의 두 눈이 나를 바라봤다.
그 어떤 전조도 없던 일에 나는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서 사이코패스의 두 눈을 바라봤고.
에포나는 슬며시 사이코패스의 시선을 피해 창고 안으로 숨어 들어갔다.
뭐지?
무언가 평소와는 조금 다른데.
태양처럼 수많은 정보를 품고 있는 사이코패스의 눈은 평소와는 다르게 잔뜩 흔들리고 있었고.
평소와는 다르게, 거친 몸짓으로 사이코패스의 손이 어항 안으로 들어왔다.
화악.
너무나도 거친 손길에 거센 강풍이 몰아치며 블랑카와 나를 덮쳤고.
나와 블랑카는 강풍을 버텨 내려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게 눈을 감은 사이, 사이코패스의 손은 거칠게 내 몸을 잡아챘다.
“으윽!”
힘에 가감 없이 그대로 내 몸을 사이코패스가 우악스럽게 잡아채자 삐걱거리는 고통이 느껴진다.
나는 신음 소리를 내며 항의의 뜻으로 사이코패스의 손아귀를 두드려 보지만 사이코패스는 반응하질 않았고.
“그, 그만…….”
그대로 거칠게 사이코패스의 손가락이 내 몸을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
힘의 가감 따윈 없는 거친 손놀림에 내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가 다시 한번 떠오른다.
평소와 다른 사이코패스의 행동에 공포감이 더욱 차오른다.
“:-(”
또한, 평소와는 달리 부정적인 감정이 담긴 울음소리가 어항 안에 울려 퍼진다.
그런 울음소리 또한 나의 공포감을 더욱 증폭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나를 가지고 놀기 질린 걸까?
이제 나를 버리려고 하는 건가?
이대로 나를 짜부라트릴 생각인가?
그런 부정적인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휘몰아치고.
어떻게든 힘을 줄여 달라는 뜻을 전하기 위해 공포가 담긴 눈동자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우중충하게 흔들리는 사이코패스의 눈동자와 내 눈이 마주치고.
나는 사이코패스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조용히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째서 갑자기 이러는 거야, 응?
사이코패스의 눈동자에서 쏟아지는 정보들이 내 몸에 스며들고.
나는 사이코패스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두려움.
슬픔.
무력감.
어째서?
사이코패스는 자신의 몸에서 쏟아지는 감정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고 내게 쏟아붓고 있었고.
어째서 사이코패스가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이해하기도 전에,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눈치챘다.
나를 옥죈 사이코패스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그 사실을 깨닫자 더 이상 나를 옥죈 사이코패스의 손이 두렵지 않았고.
나는 조심스럽게 사이코패스의 손을 어루만졌다.
무언가 무척 슬프고, 두려운 일이 있었던 거구나.
사이코패스는.
이 사람은.
지금 나에게 위로를 구하고 있구나.
“……괜찮아. 응, 괜찮아.”
누군가를 위로하는 법은 잘 모르지만.
슬플 때마다 늘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던 말을 해 준다.
비록 내 목소리가 들리진 않겠지만.
내 의도만은 전해졌길 바라며.
그리고 나는.
이제야 무언가 이 사람을 이해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사람은 나랑 비슷하다.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해, 아무에게도 상처받지 않는 곳으로 도망친 사람.
이 사람은 사람의 감정을 모르는 사이코패스도 아니고, 악의로 똘똘 뭉친 악마도 아니다.
그렇다고 나에게 축복을 내리는 신이나 천사도 아니다.
그저.
사람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욱신, 머리가 잠깐 아프더니.
“어?”
비로소 나는 내 몸을 휘감은 것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글자 ‘손가락’으로 이뤄졌던 손가락이.
청록빛의 기운을 띠는 거대한 촉수로 뒤바뀌어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내가 나를 키우는 사람을 어느 정도 이해한 덕분일까?
하지만 여전히 얼굴과 몸 대부분은 글자로 이루어져 보였고.
내 눈에 본모습을 찾은 것은 그의 손과 촉수 일부분뿐이었다.
내가 그렇게 멍하니 새로운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
“:-I”
무언가 기분이 나빠진 듯한 사람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더니.
나를 살포시 바닥에 내려 두고 촉수들이 어항을 빠져나갔다.
“잉간, 괜찮아?!”
“어, 응…….”
나는 멍해진 상태로 걱정스러운 블랑카의 부름에 대답했고.
다음 날 아침.
나는 정말 오랜만에 낯선 천장을 마주했다.
* * *
“클라인 씨 말대로, 지구산 인간들은 참 재밌더라고요. 생존 본능을 자극받은 걸까요? 멸망의 위기에서 그렇게나 사방팔방 메시지를 보내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습성은 물질 생물보단 정보 생물에 더 가까운 종족 같네요.”
“…….”
“과학자들이 아주 좋아라 하더라고요. 이론으로만 존재하던 4형 보호종의 존재가 확인됐으니까요. 아, 과학자들이 말하길 탐사선의 이름이 보이저라고 하던데. 알고 계셨나요?”
“……기요…….”
“그 안에 꽤 재미있는 게 많던데, 덕분에 보호종 지정하기 꽤 수월했어요. 유머를 즐길 줄도 알고, 다양한 문화도 가지고 있더라고요.”
“저, 저기요……!”
“네, 말씀하세요. 클라인 씨.”
“처음부터.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던 거. 맞죠?”
“네. 제가 말했잖아요? 제가 뭘 안 해도 알아서 넘겨주게 될 거라고요.”
“…….”
쥬스농장이 잉간이를 감정했을 때.
그때 잉간이의 기억에서 보이저인가 하는 탐사선이 있다는 기억을 찾아낸 것이겠지.
그리고.
클라인과의 합방이 끝나자마자 모험가들에게 의뢰를 넣어서 보이저를 수색하게 한 것이다.
클라인은 다시 입술을 앙다물며 쥬스농장에게 따지듯 물었다.
“왜, 왜. 왜 그러신 거예요? 왜……?”
“왜라뇨. 전부 다 설명했잖아요? 클라인 씨?”
잉간이를 종마로 사용해서 품종개량에 사용하자던 쥬스농장의 제안.
클라인은 그 제안을 거절했고, 쥬스농장은 자신의 계획대로 움직였을 뿐이다.
그리고 쥬스농장이 그런 계획을 세운 이유는.
“당연히 전부 다 돈 때문이죠. 돈.”
“그렇다고, 그렇다고 해서…….”
“저는 분명히 기회를 드렸어요. 저랑 같이 사업을 할 기회를 걷어찬 건 클라인 씨예요.”
그래, 그랬다.
먼저 제안을 건넨 건 항상 쥬스농장이었다.
클라인은 그런 쥬스농장의 제안을 거절했고, 그 대가를 치를 뿐이다.
클라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 안에 틀어박혔으니까.
“클라인 씨. 저는 브리더예요. 브리더. 돈이 되는 게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다고요. 설마 제가 클라인 씨가 싫다고 이랬겠어요? 효율적으로 생각하세요. 클라인 씨.”
“……연락처를 준 건, 어째선데요.”
“당연히 새로운 제안을 하려고 하는 거죠. 제가 무슨 제안을 할지는 알고 계시죠?”
“그건…….”
“어제 바로 보호종 지정이 됐으니, 내일쯤이면 감찰관들이 찾아갈걸요? 더 늦기 전에 브리더에게 보내야 한다는 거, 아시죠?”
만약 클라인이 여기서 잉간이를 주지 않고 버틴다면.
클라인은 범죄자로 감옥에 들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잉간이를 빼앗기는 것은 무척이나 싫었기에.
클라인은 용기를 내서 지금 이 시점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을 해 봤다.
“3, 3일 후에 브리더 자격증 시험이 있거든요? 저도, 저도 자격증을 따면…….”
“네. 키우실 수 있겠죠. 그러니까 그냥 잠깐 맡겨 둔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클라인 씨가 브리더 자격증을 딸 때까지요.”
브리더 자격증 시험을 치른다고 바로 자격증이 발급되는 것은 아니다.
쥬스농장의 말대로 클라인이 곧바로 브리더 자격증을 딴다고 해도 며칠은 쥬스농장에게 잉간이를 맡겨 둬야 한다.
“저, 정말이죠? 정말, 정말로 잠시 맡으실 뿐이죠?”
“그럼요. 제가 뭐, 사기꾼도 아니고요. 어디까지나 클라인 씨가 자격증을 딸 때까지만인걸요?”
“조금, 조금만 생각하게 해 주세요…….”
“네. 다른 브리더에게 맡기시는 것보단 저에게 맡기시는 게 좋을 거예요. 제가 클라인 씨와 가장 가깝기도 하고, 시설도 제일 좋다고 자부하거든요. 효율적으로 생각하세요. 클라인 씨.”
클라인은 늘 그렇듯 선택을 뒤로 미뤘다.
뒤로 미룰 수도 없고,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도 말이다.
쥬스농장은 클라인과의 대화를 끝마치고 방긋 사고 회로를 진동시켰다.
“뭐, 이거면 사실상 임시 보호가 아니라, 입양이지. 뭐.”
쥬스농장은 클라인의 성격상 브리더 자격증을 진짜로 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집 밖으로도 나오지 못하는 소녀가 어떻게 브리더 자격증을 따겠는가?
쥬스농장은 그렇게 생각하며 곧 걸려 올 클라인의 전화를 기다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쥬스농장이 그러는 와중, 클라인이 뭘 하고 있었냐면.
그녀는 조용히 현관문 앞에 섰다.
잉간이를 위해서, 잉간이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반드시 자격증을 따야 해.
반드시 집 밖으로 나가야 해.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클라인은 집 밖으로 쉽사리 발을 떼어 놓지 못했고.
결국 클라인은 울부짖으며 현관문을 두드렸다.
“왜! 왜! 나가지 못하냐고! 멍청아!”
용기를 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용기가 나지 않는다.
임시 보호라잖아.
언제든지 자격증을 따면 되찾아올 수 있어.
고작 인간이잖아?
그냥 줘 버려도 되지 않아?
내가 굳이 집 밖으로 나가야 해?
자꾸만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가 클라인의 마음을 헤집어 놨고.
결국 클라인은 어떻게든 용기를 얻고자 잉간이의 차원항 앞에 섰다.
“잉간아, 잉간아…… 내가 어떻게 해야 해? 어떻게 하는 게 너한테 도움이 돼?”
당연히 잉간이가 대답을 돌려줄 리 없고.
클라인은 평소라면 하지 않을 짓을 하고야 말았다.
억지로 싫어하는 잉간이를 붙잡아 핸들링을 시도한 것이다.
잉간이는 힘 조절을 하지 못한 클라인의 손아귀에 고통스러워했지만, 클라인은 애써 모른 척하며 멘탈을 다잡으려 했다.
그렇게 클라인이 잉간이를 만지작거리며 멘탈을 치유하던 그때.
“어……?”
갑작스럽게 잉간이와 클라인의 정보가 서로 교감되기 시작했다.
클라인의 몸 안으로 흘러들어 오는 잉간이의 감정.
평상시의 클라인이었다면 첫 교감에 기뻐했겠지만.
그러기엔 클라인이 느끼는 잉간이의 감정이 심상치 않았다.
당연하게도, 지금 잉간이가 느끼는 감정은 공포심이었다.
애써 외면하던 사실이 클라인의 몸 안에 직접 흘려 넣어지고.
내가 뭘 하던 거지.
클라인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차원항에서 손을 빼냈다.
잉간이를 위한다고 말하면서 잉간이를 생각하지 않은 건 나 자신이었다.
그래, 보내자.
자신 같은 일반인보단 브리더에게 보내는 게 잉간이가 더 행복하겠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미뤄 왔던 선택을 했고.
더 움직일 이유를 잃어버린 클라인은 멍하니 잉간이가 없는 차원항을 바라봤다.
이걸로 끝이다.
이걸로 끝.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제 없고, 나는 제일 나은 선택을 한 거야.
그렇게 클라인은 자신을 합리화하며 시간을 무가치하게 흘려보냈고.
서서히 클라인이 마지막으로 행동할 수 있는 시간이 다가왔다.
브리더 자격증 시험이 바로 내일로 다가왔는데도, 클라인은 아직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래도 잉간이를 되찾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의 발로로 클라인은 현관문 앞에 섰지만.
여전히.클라인은 마지막 용기를 내지 못했다.
마치 누군가가 문을 벌컥 열어 주길 바라는 것처럼 현관문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당연하겠지만 생각만으로 문이 열리는 일은 없었고.
그렇게 차츰차츰.
클라인이 가진 마지막 기회가 사라지려는 순간이었다.
클라인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서 문손잡이에 손을 올렸고.
결국.
클라인 스스로 문을 열지 못했다.
“야, 나갈 준비나 해. 시험 보러 가야지.”
“어……?”
그 대신, 언제나처럼 파인만이 흙 묻은 발로 클라인의 방 안으로 침입했다.
“뭐 해? 잉간이 찾아야 할 거 아냐?”
클라인의 등을 떠밀어 주기 위해서.
57화 [쥬스농장] 지구산 인간 이슈에 관해서
“뭐 해? 잉간이 찾아야 할 거 아냐?”
“파인만……?”
파인만은 언제나처럼 성큼성큼 클라인의 방 안으로 들어와 클라인의 손을 붙잡았다.
“브리더 시험. 보러 가야지?”
“그치만…… 내가 잉간이를 키우면…….”
파인만은 클라인을 방 밖으로 이끌려 했지만, 클라인은 파인만의 손을 조심스럽게 놓으며 자신을 자책했다.
파인만은 그런 클라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클라인을 위로하는 대신, 더욱 질책했다.
“네가 데려온 거잖아? 네가 데려왔으니 끝까지 책임지겠다면서? 키우기 어려울 것 같으니 남에게 떠넘기는 거야?”
“그런 거 아냐! 나는, 잉간이를 위해서…….”
“나는 지금 잉간인지 하는 인간 이야기를 하는 게 아냐. 클라인. 네 이야기라고. 사람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적인 예의와 소양이 있잖아?”
“…….”
“잉간이를 위해서는 두 번째야. 제일 첫 번째는 너를 위해서라고. 한번 시작한 일은 끝까지 해야지. 브리더 자격증. 공부했으면 시험은 봐야 할 거 아냐?”
“……응.”
“아직 늦지 않았어. 가자. 빨리.”
파인만은 다시 한번 클라인의 손을 잡아당겼고.
클라인은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파인만에게 이끌려 현관문을 넘어섰다.
클라인은 지금까지 밖으로 나가는 일이 무척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단순히 클라인이 마음먹는 것만으로 방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 누구도 클라인이 방 밖으로 나가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방 밖으로 나가라고 떠밀면 떠밀었지.
너무나도 간단히 클라인은 집 밖으로 나갔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하냐는 듯, 조언을 구하려 파인만을 돌아봤다.
“파인만?”
하지만 파인만의 모습은 클라인의 눈에 보이지 않았고.
어느새 텔레포트로 사라진 것인지 클라인의 발밑에는 텔레포트 이용권 한 장이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파인만이 자신을 남겨 두고 사라졌다는 사실에 클라인은 순간 당황했지만.
클라인은 텔레포트 이용권을 집어 들며 각오를 다졌다.
그래.
기왕 집 밖으로 나온 거, 파인만의 말대로 브리더 시험이라도 봐 보자.
늘 파인만이 고치라고 지적하던, 하기도 전에 실패할 거라고 생각하며 포기하던 습관을 고칠 좋을 기회다.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외부 정보를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터미널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눈을 떠 보니 낯선 천장이 보였다.
상당히 낯익은 전개인데, 이거?
“에포나? 블랑카?”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지만, 에포나와 블랑카는 당연히 없고.
그 회색빛 안개 속처럼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가구도 없다.
그저 새하얀 독방의 벽만이 나를 비웃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새하얀 독방은 연구소를 연상시켰고.
그것은 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어째서 내가 이런 곳에 있는 거지?
정말로 나를 가지고 노는 데 질린 걸까?
하지만 어제 느꼈던 그 사람의 감정은 그런 게 아니었는데.
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어딘가 탈출할 구멍이 있나 확인해 보지만,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뭐, 내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 원래 있던 어항에서도 그랬으니까.
일단 무언가 변화가 생길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 보자.
이대로 나를 굶겨 죽일 생각은 아니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에포나와 블랑카를 그리워하며 잠에 들었다.
“…….”
표독한 보랏빛의 안개로 가득 찬 꿈을 꿨지만, 늘 나를 맞이해 주던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
필사적으로 나는 안개 속에서 그녀를 찾아 헤맸지만 나는 끝까지 그녀를 발견할 수 없었다.
정말 오랜만에 나는 외로움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고.
반사적으로 에포나를 찾았지만 당연히 에포나는 내 곁에 없었다.
이대로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는 걸까?
푹 한숨을 내쉬며 가만히 주저앉아서 무언가 일어나길 기다려 본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지구에 있었을 때의 풍경을 연상케 하는 주위의 모습에 나는 정말 오랜만에 지구를 떠올렸다.
내 방에서 컴퓨터와 가구만 빼내면 딱 이런 풍경이었는데.
그러고 보니 지금쯤 지구는 어떻게 되었을까?
어항 밖의 세계와 어항 안의 시간이 다르게 흘러가는 것 같던데.
그렇다면 만약 지금 내가 지구로 돌아가면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막 수백 년이 지나 있는 게 아닐까?
어쩌면 내가 사라진 지 몇 분도 지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둘 중 뭐가 됐든, 나로서는 차라리 이렇게 납치된 게 나을 수도 있겠다.
방 밖으로 나올 용기도 없던 버러지가 지구에 있어 봤자 방 안에서 썩어 가는 것 말고 뭘 더 하겠어?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자조 섞인 비웃음을 지을 때였다.
쿵.
쿵.
갑자기 독방이 거칠게 흔들리더니, 아무것도 없던 벽면에 동그란 문이 생겨났다.
드디어 뭔가 하려는 걸까?
나를 집에서 끄집어냈으니 그에 걸맞은 보상을 준비했어야 할 것이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가만히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고.
이윽고 문이 열렸지만, 문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내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철커덕, 철컥.
불길한 기계음을 내며 갈고리가 달린 기계 팔이 문에서 튀어나와 내게 달려들었다.
당연히 나는 정체 모를 기계 팔에 그대로 붙잡히고 싶지 않았고.
어떻게든 기계 팔로부터 벗어나려고 했지만.
멈춰멈춰멈춰멈춰멈춰멈춰멈춰멈춰멈
춰멈춰멈춰“으윽?!”멈춰멈춰멈춰멈춰
멈춰멈춰멈춰멈춰멈춰멈춰멈춰멈춰
독방 전체에 강력한 의지를 담은 인공적인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나는 목소리에 담긴 정보에 짓눌려 저항하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기계 팔에 사로잡혔다.
내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명백히 평소와는 다른 것 같은 사이코패스의 행동.
마치, 나를 가지고 놀던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바뀐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 느낌이 든다는 게 무척이나 내게 불길한 기분을 가져다줬고.
안간힘을 쓰며 기계 팔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그런 저항은 소용없이 기계 팔은 조심스럽게 내 목덜미에 바늘을 들이밀었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공포심을 자극하는 날카로운 바늘이 단단히 구속당한 내 목덜미에 박히고.
나는 날카로운 고통을 대비했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 마취를 당한 걸까?
주삿바늘은 무언가를 내 몸 안으로 흘려 넣고 빠져나갔고.
이윽고 기계 팔은 내 몸의 구속을 해제했다.
내 몸의 구속을 해제한 기계 팔은 내가 갇혀 있는 독방에서 사라지고.
그리고 마치,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것처럼 독방이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쥬스농장 통합 언어팩 ver 2.0.1]
그리고 이전, 블랑카가 내가 있던 곳에 도착했을 때 내 눈앞에 떠오르던 것과 비슷한 메시지가 눈앞에 떠오르고.
메시지가 사라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 내 앞을 가로막고 있던 벽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벽 너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다들 새로운 친구를 박수로 맞이해 주세요!”
“와아아아!!”
열렬한 환영의 박수와 수많은 인간들이었다.
이게 도대체 뭔데?
* * *
“순환계 정상 작동. 피부계 이상 없음. 배설계엔 사소한 막힘 존재. 신경계 멀쩡함…….”
쥬스농장은 가만히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하며 한가롭게 외부 활동용 의체를 움직여 우주선을 조종했다.
이제 앞으로 30분 후면 본체로 돌아갈 수 있다.
생각보다도 쉽게 지구산 인간을 넘겨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야.
클라인이 효율적이지 못한 선택을 할까 걱정했지만, 그래도 효율적인 선택을 해서 다행이다.
만약 감찰관에게 지구산 인간을 압수당했으면 회수하기 무척 힘들었을 테니까.
쥬스농장은 그렇게 생각하며 지구산 인간을 보관한 사육항을 사고 회로를 진동시키며 사랑스럽게 쓰다듬었다.
이걸로 드디어 마력 과다증을 해결할 방법을 손에 넣었다.
마력 과다증이 발현된 혈통은 무슨 수를 써도 마력 과다증이 발현되어서 폐기 처분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진짜, 폐기 처분할 때마다 사라지는 금액을 생각하면 얼마나 머리가 아팠는데.
일단 돌아가서 적당히 이미지 메이킹을 해 줄 영상을 하나 찍고.
번식 주기는 다른 인간형 종마들과 비슷하게 시키면 되겠지.
일단 첫 번째 접붙임은 약물이나 마법을 쓰지 않고 시도하는 게 좋겠다.
지구산 인간에 대한 관심이 식기 전까지는 약물이나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
쥬스농장은 약물이나 마법을 사용하기만 하면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드는 일부 사람들을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개체에게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잘 조절해서 사용한다고 해도, 약물을 쓰기만 하면 생물 학대라고 바락바락 악을 써 대니 쥬스농장이 조심하는 수밖에 없는 일이다.
차라리 쥬튜브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이런 귀찮은 일을 겪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다.
뭐, 쥬튜브를 시작하지 않았으면 쥬스농장의 사업이 이만큼 성장할 수도 없었겠지만 말이다.
쥬스농장이 그렇게 생각하며 잠깐 시스템 체크를 돌리던 사이, 어느새 쥬스농장의 우주선은 쥬스농장의 본체 가까이 접근했다.
[시스템 동기화. 육체 전환을 실시합니다.]
우주선의 보조 시스템이 무기질적인 음성으로 시스템 메시지를 내뱉고.
쥬스농장은 외출용 의체에서 정신을 빼내서 본체 안으로 되돌렸다.
자리를 비운 동안 별다른 일은 발생하지 않은 것 같고.
그놈의 탈주 개체들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네.
뭐, 차원 격벽에 이상은 없으니 시간이 지나면 발견되겠지.
쥬스농장은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탈주 개체들을 놔뒀다.
어차피 탈주 개체들이 몇 마리씩 발생하는 건 늘 있는 일이었으니까.
육체 체크를 끝마친 쥬스농장은 서둘러 우주선을 자신의 본체에 도킹시켰고.
쥬스농장은 지구산 인간이 잠자고 있는 사육항을 자신의 몸 안으로 들여놨다.
혹시나 클라인의 사육항에 정보 생명체가 살고 있었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쥬스농장은 서둘러 검역을 진행했다.
“음?”
검역 작업을 진행하던 중, 역시나 지구산 인간의 몸에서 정보 생명체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마력의 흔적을 봐선 차원 파괴자의 일종 같은데, 다행히 본체는 클라인의 차원항에 남아 있고 분신체만이 지구산 인간의 몸에 붙어 있는 상태인 것 같다.
쥬스농장은 당연히도 사육항을 박살 내고 싶지 않았기에 서둘러 차원 파괴자의 흔적을 지구산 인간의 몸에서 제거했다.
그렇게 쥬스농장이 방역 작업을 끝마치는 사이, 지구산 인간이 잠에서 깨어났다.
지금 당장 지구산 인간을 종마로 활용할 수는 없는 게, 아직 모체로 사용할 개체들의 해동이 완벽히 끝나지 않았다.
해동이 끝날 때까지 잠시만 어딘가에 지구산 인간을 보관해야 할 텐데.
슬쩍 지구산 인간의 바이탈을 체크하자 낯선 환경에 떨어져서인지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일단은 같은 인간형 개체들과 함께 놔두는 게 정신 안정에 도움이 되겠지.
서열 문제가 걱정되지만, 임시로 놔두는 것이니 큰 문제가 발생하진 않을 것이다.
쥬스농장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른 인간형 개체들과 지구산 인간을 구별하기 위한 인식 정보를 지구산 인간의 목에 박아 넣으려 했다.
우선 지구산 인간을 잠깐 마비시키고, 고밀도 정보를 주사하면 끝이다.
인식 정보를 지구산 인간에게 집어넣은 쥬스농장은 안심하고 지구산 인간을 기존 인간형 개체 사육항에 집어넣었고.
곧바로 지구산 인간의 일에서 신경을 끄고 다른 개체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쥬스농장의 본체는 넓었고, 돌봐야 할 생물들과 쥬스농장이 해야 할 일은 무척 많았기 때문이었다.
브리딩 일만 하는 거면 몰라, 쥬스농장은 때아닌 과학자 흉내까지 내야 했다.
비록 탐사를 직접 의뢰하고, 제일 먼저 발견을 알린 것이 쥬스농장이라고 해도, 이런 건 선생님들이 하는 게 맞지 않나?
나는 브리더지, 유치원 선생님이 아니란 말이다.
쥬스농장은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리며 자신의 최심부에 보관해 둔 보이저를 바라봤다.
58화 [쥬스농장] 지구산 인간이 도착했습니다. 임시로 인간 친구들 곁에 넣어 줬습니다.
뭐야, 저 사람 왜 저렇게 다녀?
외부 정보 꾸며 놓은 것 좀 봐 봐, 진짜 웃기지 않냐?
“흐으윽…….”
지금 클라인의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들은 환청인 것일까, 아니면 진짜로 주위를 오고 가는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일까?
클라인은 당장이라도 집으로 돌아가 쉬고 싶었지만, 잉간이를 떠올리며 조금씩 발걸음을 옮겼다.
설령 귓가에 들려오는 이 목소리들이 환청이 아니더라도 그깟 목소리 때문에 잉간이를 포기할 수는 없다.
이제야 잉간이와 교감을 나눌 수 있게 됐는데.
클라인은 그렇게 각오를 다지며 드디어 터미널에 도착했고.
주머니 안에 넣어 놨던 티켓과 개찰구를 바라보며 허둥지둥했다.
그러니까 티켓을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
역무원에게 보여 줘야 하나?
아닌가?
그냥 저 기계 안에 집어넣으면 되는 거였나?
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자칫 망신살을 당할까 두려워 클라인은 쉽사리 행동에 나서지 못하고 가만히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렸고.
“저기…….”
“흐겍, 엑. 네? 제, 죄송해요?”
“네?”
한참 시뮬레이션을 돌리던 클라인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클라인은 깜짝 놀라며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역무원에게 새된 목소리로 사과했다.
내가 여기 죽치고 있어서 민폐였던 걸까?
아니면 외부 정보를 뭐 이따위로 하고 다니냐고 훈계하는 걸까?
으으,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집에 있을 걸 그랬어.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올라오기 시작한 눈물을 최대한 억누르려 애썼다.
“아니, 혹시 텔레포트 터미널을 이용하시는 게 처음이신가 싶어서…….”
“네, 네?”
“혹시, 처음 이용하시는 건가요?”
“아뇨. 음. 그렇다고 할 수는 있는데요. 어…….”
“따라오세요. 자, 여기에 티켓을 가져다 대면 문이 열려요.”
“네에…….”
말을 더듬는 클라인의 모습을 부끄러움이라고 해석한 걸까?
역무원은 클라인의 모습을 보며 개의치 않다는 듯 방긋 미소 지으며 클라인의 부끄러움을 덜어 주려 애썼다.
“괜찮아요. 막 발달기가 끝나신 거 맞으시죠? 그런 분들은 터미널 이용법을 헷갈리시는 일이 많은걸요? 부끄러운 게 아니니까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지 역무원에게 말을 걸어 주세요.”
“네헤…….”
클라인은 발달기가 끝난 지 5년이 넘었지만, 굳이 그 사실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클라인은 발달기가 막 끝난 애들이나 하는 실수를 자신이 저지른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수치스러웠으니까.
“네.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네…….”
클라인은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드디어 터미널 안으로 발을 들여놨다.
* * *
“자! 다들 새로운 친구를 박수로 맞이해 주세요!”
“와아아아!!!”
도대체 이건 무슨 상황인 걸까?
독방의 문이 열리고 그 뒤에서 나타난 것들이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의 열렬한 박수라니.
무슨 사이비 종교의 집회도 아니고.
수많은 사람들이 열렬하게 나를 환영해 준다는 비현실적인 풍경에 잠시 정신이 멍해졌지만, 나는 최대한 빠르게 현재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대략 50명 가까이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내가 있던 독방과 같은 시설에 모여 있다.
그렇지만 내가 있던 방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 어디에 쓰는지 알 수 없는 구조물들이 여럿 설치되어 있다.
내가 그렇게 상황을 파악하는 사이, 이 무리의 리더, 그러니까 사회자가 방긋 웃으며 내게 다가와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자, 이리 와요. 모르는 게 많을 텐데, 우리가 다 설명해 줄게요.”
“어, 어…….”
덥석.
내 손을 붙잡은 사회자의 손에서는 단단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살로 만든 인형과 손을 붙잡고 있는 것 같은 기묘한 불쾌감이 느껴진다.
여전히 배경이 된 것처럼 사람들이 치는 박수 소리 또한 내 불쾌감을 자극했지만.
이 상황에서 내가 싫다고 말할 수 있을 리도 없다.
일단 정말 오랜만에 보는 인간다운 형태의 인간들이니까.
차라리 아예 블랑카처럼 모습이 다르다면 개지랄을 떨어 줄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럴 이유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일단 저 사람들도 내게 호의적으로 보이니까 상황 파악부터 하자.
우선은 여기가 어딘지부터 파악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슬쩍 머릿속으로 대화 시뮬레이션을 돌려 보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단어로 사회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 저기, 여긴 어디…….”
“아, 여기가 어딘지 궁금하신 거군요? 보아하니 생명의 샘이 아니라 바깥의 세상에서 오신 것 같네요.”
“아, 어. 네.”
뭔가 내 시뮬레이션대로 대화가 진행되진 않았지만, 그건 사소한 일이다.
그것보다 생명의 샘?
그건 도대체 뭐지?
나는 조심스럽게 사회자에게 블랑카에게 들었던 단어를 언급해 봤다.
“어, 여기는 신들의 전장이 아닌 건가요?”
“신들의 전장요? 하하, 여긴 그런 무서운 곳이 아니랍니다? 신들의 전장을 언급하시는 걸 보니 리베리아 출신이신가 보군요?”
“어. 네. 비슷해요. 그럼…… 그러니까 당신은…….”
“알파라고 불러 주세요. 알파.”
“네. 알파 씨는 리베리아 출신이 아닌 건가요?”
“그렇죠. 저뿐만이 아니라 여기 있는 모두는 그런 불완전한 세상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네……?”
“저희는 생명의 샘에서 태어난 축복받은 주민들이랍니다.”
리베리아를 언급하는 걸 봐선 바깥세상의 존재를 모르는 건 아닌 것 같고.
일단 여기가 내가 있던 어항 같은 공간이라는 사실은 확실히 알겠다.
그런데, 생명의 샘은 또 뭐야?
하는 말을 봐선 무언가의 시설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도대체 무슨 시설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 그렇군요. 그럼 여기는 도대체 어떤 곳인가요?”
“그 어떤 고통도 존재하지 않는 장소죠. 그래요. 바깥에서 온 자들의 말을 빌리자면, 천국이라는 단어와 가장 흡사하네요.”
“천국?”
“바깥에서 많이 고생하셨을 것 같은데, 여기서는 더 이상 먹을 것과 잠잘 곳 걱정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곳의 규칙에만 제대로 따르신다면요.”
“규칙요?”
그래.
그럼 그렇지.
무언가 다른 이야기가 숨어 있을 줄 알았다.
막 사이비 종교 같은 규칙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겠지?
“네. 규칙을 어긴다면 신님의 징벌이 내려올 겁니다.”
알파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며 갑자기 큰 목소리로 허공을 향해 외쳤다.
“규칙 하나!”
“이곳에서 일체의 폭력과 싸움을 금한다! 이곳은 고통이 없는 곳이니!”
그리고 그런 알파에게 호응하듯 다른 사람들이 큰 소리로 규칙을 외치기 시작했다.
“규칙 둘!”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정당한 보수는 정당한 노동에 뒤따르는 법!”
“규칙 그 마지막!”
“바깥의 사악한 것과 위험한 것들에게서 우리를 보호하는 신님께 감사를!”
“신께 감사를!”
“신께 감사를!”
우와.
사이비 종교 같은 느낌이 아니라 사이비 종교가 맞잖아?
여기서 내가 블랑카에게 말하던 것처럼 신은 없고 우리를 잡아 가둔 사람은 사이코패스라고 말한다면 100% 유혈 사태가 일어날 느낌이다.
“규칙이 그리 어렵지는 않죠?”
“아, 네…….”
“네. 그럼…… 아, 혹시 이름이?”
“잉간. 잉간인데요.”
“네. 잉간 씨. 잉간 씨는 앞으로 다음 승천자가 정해질 때까지 저쪽. 그래요, 저기 보이죠? 저 4명과 함께 생활하게 될 거예요.”
“네…….”
결국 여기가 어떤 곳인지는 알아내지 못한 것 같다.
내가 있던 어항이 아닌 다른 어항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겠지?
갑자기 왜 나를 여기로 옮겼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뭐, 어항 청소라도 할 생각인 건가?
그렇다면 일단 여기서 별다른 짓은 하지 말고 가만히 있는 게 최선의 선택이려나?
어차피 원래의 어항으로 곧 돌아갈 테니 말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알파의 안내를 받아 나와 함께 생활을 할 것이라는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반갑습니다. 잉간 씨. 같이 잘 지내봐요!”
“아, 네…….”
그나저나 여기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수려한 외모네.
화장을 한 것도 아닌데 전부 연예인 뺨치는 외모를 가지고 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인싸틱한 외모를 하고 있으니 자꾸 주눅이 드네.
나와 행동을 함께하기로 한 무리는 남자 2명에 여자 2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내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어쩔 줄 모르고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내 긴장을 풀어 주려는 의도일까?
나를 둘러싼 무리는 끊임없이 내게 말을 걸었다.
“이름이 잉간이라고요? 귀여운 이름이네요~ 얼굴하고 잘 어울려요.”
“그, 그런가요? 귀여운 이름은 아닌 것 같은데.”
“아하하…… 아, 밖에서는 무슨 일을 했어요? 잉간 씨도 막 전사였다거나?”
“전사보다는 마법사! 마법사 같은데요? 이렇게 귀여운 전사가 있을 리는 없잖아요.”
“어…… 그냥 백수였어요. 아무것도 안 하는…….”
“그, 그래요?”
하지만 내 필연적인 아싸 기질은 대화가 도저히 이어지게 하질 않았고.
결국 나를 둘러싼 무리는 어색한 웃음만을 흘릴 뿐이었다.
그렇게 서로가 어색한 웃음을 흘리던 와중, 알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님의 은총이 내려옵니다! 다들 신께 기도를!”
신의 은총?
의아해하며 알파의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자.
덜컥.
천장이 열리며 바닥으로 내가 지금껏 먹어 왔던 젤리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저게 신의 은총?
내가 그 모습을 바라보는 사이 알파와 그 무리가 젤리들을 주워 얌전히 바닥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씩 배급하기 시작했다.
“이런 건 처음 먹어 보시죠? 이게 신님의 은총이에요!”
“아…… 네. 그렇죠.”
“어때요? 맛있어요?”
“오…… 신의 은총. 맛있어요. 사랑해요?”
저렇게 해맑게 젤리를 자랑하는데 이미 먹어 본 거라고 말할 수도 없고.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젤리의 맛을 한가득 칭찬해 줬다.
그렇게 식사를 끝마치고 나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봤다.
두 번째 규칙에 따르면 노동 없이는 식사도 없다는데, 도대체 무슨 노동을 하는 걸까?
하지만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뭔가 노동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고.
그때, 또다시 알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지금부터 노동을 시작하겠습니다! 다들 각자 지정된 구역으로 이동하세요!”
알파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다들 일어서서 아무것도 없는 맨벽으로 향했고.
나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이끌려 아무것도 없는 벽을 마주 봤다.
덜컥.
벽면이 열리며 그 안에서 익숙한 형태의 기구 하나가 튀어나왔다.
흔히들 러닝 머신이라고 부르는 운동기구가 튀어나와 바닥에 펼쳐지고.
다들 일사불란하게 러닝 머신에 올라가 운동을 시작한다.
잠깐만, 이게 노동이라고?
운동이 아니라 노동?
내 상식과 다른 일에 나는 잠깐 멈칫했지만, 일단은 다른 사람들을 따라서 러닝 머신에 올라탔다.
어찌 됐든 야생 생활을 하면서 몸에 근육이 붙은 덕분인지 러닝 머신을 뛰어다니는 일은 무척 쉬웠고.
숨이 차오르기도 전에 알파의 목소리가 들려오며 노동시간의 종료를 알렸다.
“걷기 노동은 이제 끝! 신님께 기도를 올립시다!”
“신께 감사를!”
진짜 저렇게 외칠 때마다 사이비 종교를 보는 것 같은 불쾌감이 자꾸만 쌓인다.
이제는 슬슬 이곳의 사람들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니 이곳의 사람들은 체력이 부족한 것인지 고작 이 정도를 뛰었다고 헉헉대고 있었고.
달린 시간의 몇 배는 되는 시간이 지나고 다시 알파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야, 참 목청도 좋지.
“이제 건축을 할 시간입니다! 다들 지정된 구역으로!”
“신께 감사를!”
건축?
이제야 뭐 제대로 된 노동이 나오려는 모양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번에도 제대로 된 건축이 아니었다.
건축의 실체는, 시꺼먼 블록들을 레고처럼 쌓아 올려서 작은 탑을 만드는 일이었다.
러닝 머신이 벽에서 튀어나왔다면, 검은 블록들은 땅바닥에서 튀어나왔다.
다들 익숙해 보이는 손놀림으로 검은 블록들을 건성건성 옮기며 작은 탑을 쌓았다.
그렇지만 그 직후, 또다시 내 상식과 괴리되는 일이 일어났다.
탑을 다 쌓더니, 다 만든 탑을 와르르 무너트리고 다시 쌓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니, 이걸 왜 무너트려요?”
“당연히 다시 쌓으려고?”
“왜 굳이 탑을 다시 쌓는데요?”
“음…… 그게 이 시간의 규칙이니까?”
“네?”
“하루에 탑을 5번은 쌓아야 신님이 만족하시거든.”
아니, 그건 도대체 뭔…….
내 입장에선 도대체 이걸 왜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의 반복이었다.
그리고 그 말대로 다섯 번째 탑을 만들자 우리가 만들었던 탑이 그대로 허공으로 사라져 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알파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허공에 대고 이젠 익숙해진 외침을 외쳤다.
“신께 감사를!”
진짜 이해 가지 않는 일투성이네.
나는 혀를 차며 일단은 주위 사람들의 움직임을 따라 했고.
주위의 사람들은 이제야 한시름 놨다는 듯 한결 편해진 모습으로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화를 나누는 것뿐만이 아니라 몇몇 사람들은 야릇한 분위기를 풍겼고.
그러한 사람들은 방 한구석에 자리 잡은 은신처로 다 함께 들어갔다.
뭐, 딱히 할 게 없으니 그것밖에 시간을 때울 일이 없겠지.
이런 분위기는 뭔가 내 트라우마를 자극해서 싫다.
내가 필사적으로 주위의 야릇한 분위기를 못 본 척하며 푹 한숨만 내쉬던 그때.
“다들 집합! 사냥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다들 집합!”
사냥?
역시, 여기도 사냥 정도는 하는 건가?
하지만 이것도 뭐, 사냥 흉내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심드렁한 표정으로 알파의 안내에 따라 러닝 머신이 나오던 반대편 벽을 바라보고 섰다.
그러자 벽이 덜커덕 열리며 내게 낯익은 친구를 보여 줬다.
“무오~.”
무해의 대명사, 무오였다.
무오가 나타나는 것과 함께 내 앞에 창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일렁이는 불꽃이 창끝에 달린 쇠 창들이었다.
이거라면 마력을 쓸 수 없는 나도 무오를 사냥할 수 있겠네.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익숙한 모습으로 창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는데, 갑자기 알파가 내게 다가왔다.
“첫 사냥의 영광은 오늘 새 친구로 합류한 잉간 씨에게 돌립시다!”
“어, 저요?”
“괜찮아요. 생김새는 특이할지 몰라도 아주 온순해요. 그냥 가서 창만 꽂으면 됩니다.”
“아, 네…….”
나는 다른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한가롭게 바닥을 기어 다니는 무오 앞에 섰다.
기왕 이렇게 나섰으니 멋진 모습을 보여 주자.
좀 괜찮은 모습을 보여 주면 원래 어항으로 돌아갈 때까지 좀 편안하게 지낼 수 있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블랑카에게 배운 대로 창을 꼬나 쥐고.
그대로 단번에 무오의 심장을 향해 창을 내질렀다.
지금껏 수없이 해 왔던 일이기에 내 창은 단번에 무오의 심장을 꿰뚫었고.
무오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음, 이 정도면 꽤 괜찮았으려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슬쩍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고.
“어?”
아무 말 없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마주했다.
뭐지?
내가 그렇게 의아해하는 사이, 서서히 알파의 입이 열렸다.
“사, 사…….”
사? 사랑해?
“살해! 이, 잉간이 신의 짐승을 살해했다!”
“살해했다! 시해자다! 시해자!”
“야만적이야…….”
내가 생각하던 것과는 다르게 알파는 나를 규탄하는 말을 내뱉었고.
성난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나를 보면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갑자기 다들 왜 이래?
“저, 저기. 알파 님……?”
“잉간 님. 제가 뭐라고 말했었죠?”
“어…… 저걸 사냥하라고요?”
“아뇨. 첫 번째 규칙 말입니다. 제가 뭐라고 했었죠?”
“어…… 일체의 폭력과 싸움을 금한다?”
“기억하시네요! 저는 분명히 폭력을 금한다고 했습니다.”
“아니, 사냥 시간이라면서요?”
“아무리 사냥이어도, 어떻게 다른 생명의 목숨을 끊을 수 있어요! 그런…… 야만적인 짓을……!”
이 자식들, 도대체 뭐라는 거야?
나는 도대체 이 사람들이 나와 같은 언어를 쓰고 있나 의심이 갈 지경에 이르렀고.
알파는 한숨을 내쉬며 나를 봐준다는 듯이 내 등을 두드렸다.
“살해한 게 신의 짐승이고, 아직 규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으니 이번만 봐 드립니다.”
그러고는 알파는 성난 사람들을 진정시키려는 듯 큰 소리로 외쳤다.
“우리의 새로운 친구가 아직 규칙에 익숙해지지 못해서 저지른 죄악입니다. 모두에겐 다들 처음이 있지 않았습니까? 처음을 떠올리며 다들 잉간 씨를 너그럽게 용서합시다. 신님이라면 필시 그랬을 테니까요.”
“신께 기도를!”
진짜 돌겠네.
내가 이 상황에 황당해하는 사이 죽어 버린 무오의 몸이 빛의 입자가 되어 사라지고.
그대로 새로운 무오가 나타나 나직하게 울었다.
“다시 사냥을 재개하겠습니다! 사냥의 영광은 모두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추한 마음으로 사냥의 영광을 독차지하려 하면 안 됩니다!”
뭔가 나를 돌려 까는 듯한 말을 알파가 외치고, 사람들은 한 줄로 서서 무오의 몸에 창을 꽂아 넣기 시작했다.
무오의 몸이 고슴도치가 되고 나서야 알파가 무오의 앞에 서서 창을 높게 들어 올리고.
“이 목숨을 신님께 바칩니다. 목숨을 거둬 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신님밖에 없습니다.”
염병하네.
내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과 함께 알파의 창이 무오의 목숨을 빼앗아 갔다.
이것으로 사냥은 끝이라는 듯 창과 무오의 사체가 허공으로 사라졌고.
나는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맨 처음과는 조금 달라진 게, 내가 무오를 죽여서 그런 걸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알파가 앞으로 함께 지낼 사람들이라고 한 이들도 예외가 아니었고.
나는 최대한 다른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못 들은 척하며 벽을 바라봤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집에 돌아가고 싶다.
에포나가 보고 싶어.
블랑카도 보고 싶긴 한데, 에포나를 쓰다듬고 싶어.
에포나.
에포나, 에포나가 너무 보고 싶다.
내가 그렇게 에포나를 그리워하는 사이 서서히 어항의 조명이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신께 감사하며 취침합시다!”
“신께 기도를!”
저 개 같은 알파의 목소리가 취침을 선언하자 다들 귀신같이 바닥에 드러누워 잠들었다.
나는 혼자 구석에서 훌쩍거리며 에포나를 그리워했고.
“큭큭,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
이젠 사라진 줄 알았던 꿈속의 여인을 다시 만났다.
기분 좋은 듯 웃는 여인을 나는 아무 말 없이 포옹했고.
“어머?”
여인은 깜짝 놀란 듯 보였지만 이내 나를 그녀의 촉수로 꼭 끌어안으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네가 있어야 내가 있어. 그리고 내가 없으면 너도 없어.”
나는 그녀가 다시 사라질까 두려워 그녀를 더욱 거세게 포옹했고, 여인은 사랑스럽다는 듯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후훗, 조금 욕망이 쌓인 것 같네.”
그렇게 여인은 나를 질척하게 안으며 나를 그녀의 색으로 물들였고.
다음 날 아침.
“에포나…….”
나는 습관처럼 에포나의 이름을 부르며 잠에서 깨어났지만, 당연히 에포나가 있을 리 없었고.
“왕!”
나는 방긋 미소 짓는 에포나를 쓰다듬으며 에포나가 없어서 울적한 마음을 달랬다.
응?
에포나?
할짝.
에포나가 내 볼을 핥는 감각이 느껴지고, 나는 가만히 에포나를 들어 올려서 내 앞에 내려놨다.
“왕?”
눈앞에서 꾸물텅거리고, 작게 왕 하고 짖는, 정말 귀엽고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안정되는 이 작은 생명체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에포나 그 자체였다.
“에포나……?”
“왕!”
59화 [쥬스농장] 브리더와 보호종.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클라인의 눈앞에서 텔레포트 터미널이 작동을 준비하고, 클라인은 긴장된 표정으로 터미널 안으로 들어갔다.
터미널 안으로 들어서자 쏟아지는 시선이 따갑다.
여긴 네가 올 곳이 아니라며 모두가 자신을 질책하는 것만 같다.
또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구가 차올랐지만, 클라인은 눈을 꽉 감으며 터미널 한구석을 차지하고 앉았다.
윽, 빨리 출발해라.
사람이 이렇게 많은 곳은 불편해.
그런데 중앙 구역에 도착하면 지금보다 더 사람들이 많아지잖아?
역시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텔레포트 터미널이 작동할 시간을 기다렸다.
클라인이 속으로 지금까지 공부한 것을 되짚으며 마음을 가라앉히던 그때.
“아이고, 옆에 좀 앉을게요~.”
“아, 에? 네?”
“젊은 처자가 뭘 그렇게 중얼거려. 뭐, 시험이라도 봐요?”
넉살 좋은 미소를 지으며 처음 보는 아주머니가 클라인의 옆으로 끼어 들어왔다.
자신이 단 한 번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클라인은 제대로 거절하지 못하고 어버버 했고.
아주머니는 그대로 클라인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터미널이 출발하는 시간을 기다리기 무료한지 클라인에게 이것저것 말을 걸기 시작했다.
“중앙 구역엔 뭐, 시험 보러 가는 거예요?”
“네? 어…… 네. 그래요.”
“아이고. 젊은 처자가 노력하는 모습이 보기 좋네. 아이고, 우리 아들은 발달기를 졸업했다고 방에 틀어박혀서 하루 종일 놀기만 노는데…….”
“그, 그래요?”
“그래. 처자처럼 젊은이는 밖으로 나돌아 다녀야 한다고. 간접 정보는 몸에 별로 좋지 않다고 말을 해도 듣지를 않아요. 정말.”
아주머니는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의 아들 이야기를 꺼낸 거겠지만, 클라인에게는 불편함이 가득한 이야기였다.
클라인은 애써 억지웃음을 지으며 적당히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들어 주며 터미널이 작동할 시간만을 기다렸다.
클라인이 느끼기에 영겁의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텔레포트 터미널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텔레포트 터미널이 작동합니다. 정보 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옆 사람과 자리를 띄워 주세요.”
하나.
둘.
셋.
텔레포트 터미널이 작동하며 순식간에 클라인을 다른 은하단으로 이동시켰다.
클라인은 텔레포트 특유의 불쾌감에 잠깐 얼굴을 찡그렸고, 그러는 사이 터미널에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이번 터미널은 99-1a 은하단입니다. 중앙 구역으로 가실 분은 여기서 환승해 주세요.”
클라인은 비틀거리며 안내 방송에 따라서 다음 터미널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직 클라인이 중앙 구역에 도착하기엔 멀었다.
* * *
에포나야?
진짜 에포나라고?
나는 눈앞에서 지루한 듯 하품을 하는 에포나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봤다.
어째서 에포나가 여기에 있는 거지?
나를 데려올 때, 에포나도 같이 데려온 걸까?
아니면 어딘가에 숨어서?
나는 곰곰이 에포나가 어떻게 나를 따라왔는지 생각해 봤지만, 곧 생각을 포기했다.
뭐, 어때.
에포나가 날 따라와 준 거잖아?
나쁜 일도 아니고 오히려 내겐 좋은 일이잖아?
에포나는 에포나니까.
응, 어떻게든 했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피식 웃으며 에포나를 쓰다듬었고.
에포나는 내 손길을 즐기며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아, 좀 멘탈이 치유되는 기분이다.
저 사이비들을 상대하다 보니 마음이 많이 지쳤다.
역시 집 바깥은 위험해…….
내가 그렇게 에포나로 힐링하는 동안, 주위의 사이비들이 나를 바라보며 수군거린다.
“뭘 하는 거지……?”
“이상해…….”
“정신이 나간 건 아니겠지?”
음.
역시나 했는데 에포나의 모습은 저 사이비들에겐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뭐, 블랑카도 처음에는 에포나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으니까.
에포나도 굳이 저 사이비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밝힐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에포나를 품 안에 꼭 끌어안고 가만히 사이비들이 뭘 하는지 살핀다.
어제처럼 알파의 목소리가 들려오며 사이비들에게 식사가 배급되고, 어제와 변함없는 일상을 보낸다.
어제보다 더 나아지려는 의지도, 나아지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 일상.
매일같이 최소한의 운동은 하고 있으니 건강에는 별 이상이 없겠다만, 이런 일상이 지루하지도 않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슬며시 그나마 나와 말이 통하는 사이비 한 명을 붙잡고 그 점을 질문해 봤다.
“뭐? 매일 이렇게 지내는 게 질리지 않냐고?”
“네. 뭐…… 놀 거리도 없고. 그냥 밥만 먹고 운동하고, 사냥? 하는 게 끝이잖아요? 지루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가끔씩 신님이 즐길 거리를 넣어 주시니 그렇게 심심하진 않아. 그래도 뭐. 조금 심심하긴 한데, 여기에 있을 수 있다는 데 만족해야지. 바깥의 삶보단 나을 테니까.”
“즐길 거리요? 예시를 들자면…….”
“막, 가끔씩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는 물이라든가, 엄청 맛있는 음식도 내려 주고. 때때로 재밌는 장난감도 내려 주시거든.”
“아…… 네.”
그러니까 대충 지루하긴 한데, 가끔씩 뭔가 선물해 줘서 버틸 만은 하다는 건가?
평소에는 지루함을 대충…… 야시꾸리한 짓으로 때우는 것 같고.
적당히 의문이 풀린 나는, 또 하나의 의문점을 사이비에게 물어봤다.
“그런데 바깥, 바깥 하시는데. 바깥의 삶을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 바깥에 나가 본 적이 없으실 텐데…….”
“가끔씩 신님께서 바깥에서 너 같은 사람들을 받아들이시거든. 그 사람들에게서 바깥의 이야기를 들었어.”
“그래요?”
“나도 처음에는 너처럼 바깥의 삶이 궁금했는데,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마음이 바뀌더라. 바깥은 지옥이야, 지옥. 그런 곳이 바깥이라면 나는 나가지 않고 평생 여기서 살 거야.”
“……그런가요?”
바깥은 지옥이라.
뭐, 이 사람들이 말하는 바깥이 리베리아 같은 세상이라면 그렇게 말할 만하다.
매일같이 좀비와 싸워야 하는 좀비 아포칼립스 세상이라니, 생각만 해도 싫다.
문득, 나의 원래의 집인 지구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지옥 같은 세상에서 살아갈 바에는 이런 곳에서 지루하게 시간을 썩히겠다라.
그 마음을 나는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나 또한 지옥 같은 세상으로 나아갈 용기를 내지 못하고 방 안에서 썩어 가던 사람이었으니까.
나가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면서.
지상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나는 용기를 내지 못했다.
지상으로 내려간다는 건 지금의 안락한 삶을 포기한다는 것과 같았으니까.
아무 대가 없이, 아무 노력 없이 주어진 안락함이란 참 달콤한 것이었다.
그때의 나라면 이 사이비들을 긍정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억지로 방 밖으로 끄집어내진 지금의 나는 도저히 저 사이비들을 긍정할 수 없다.
스스로 노력해서 쟁취한 안락함의 기쁨을 알고 있기에.
그 기쁨을 포기하는 생활을 선택하기는 싫다.
역시, 나는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
청소인지 뭔지가 끝나면 다시 원래 내가 있던 어항으로 나를 되돌려 줄 거라고 믿고 있기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의 주인과 나를 사육하던 주인이 다른 것 같거든.
신의 은총이니 뭐니 하는 게 떨어질 때마다 최대한 감각을 날카롭게 해 봐도.
항상 느껴지던 주인 녀석의 느낌이 느껴지지 않았다.
가끔씩 무언가가 느껴진다고 해도, 무기질적인 기계의 구동음만이 들려올 뿐이다.
만약 이곳의 주인이 원래의 어항의 주인과 다르고, 나를 돌려줄 생각이 없다면?
어떻게든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내야지.
그리고 어쩌면.
나는 이미 그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에포나를 바라봤고.
“왕?”
에포나는 방긋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언제든지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가능하다고 말하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내켜 하는 것 같지 않으니 에포나를 이용하는 건 마지막 방법으로 남겨 두자.
에포나가 내켜 한다면 모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슬쩍 조심스럽게 사이비에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저 말고도 밖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 볼 수 있을까요? 뭔가 좀 흥미가 생기는데…….”
“밖에서 온 사람?”
내 질문을 들은 사이비는 표정을 괴상하게 일그러트리더니, 고개를 내저으며 내게 대답했다.
“지금은 아무도 없어. 전부 규칙을 어겨서 신님의 분노를 사서 여기서 추방당했거든.”
“추방당해요?”
“그래. 그러니까 너도 규칙을 너무 어기지 마. 규칙은 중요한 거니까.”
“규칙…….”
음, 이제 솔직히 물어볼 만한 건 다 물어본 것 같네.
마지막, 진짜 마지막으로 한 가지 궁금했던 것만 물어보자.
“그런데 알파 씨는 이곳의 정원이 50명이라고 말했잖아요.”
“응. 그렇지.”
“그런데 그…… 여기서 아기? 도 태어나긴 할 거 아니에요. 할 건 다 하니까…….”
“응, 그래서?”
“만약 아기가 태어나서 50명보다 늘어나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간단해. 기존에 있던 사람들이 승천을 하게 돼.”
“승천?”
“신님의 눈에 띄어서 저 천상의 세계로 승천하는 거야.”
그러니까, 50명보다 인구수가 늘어나면 사육자가 개입해서 인구수를 조절한다는 거지?
사이비는 그 대답을 끝으로 내게서 떠나갔고, 나는 곰곰이 사이비가 말한 것을 생각했다.
규칙을 어기면 추방을 당한다라.
그리고 인구수가 너무 늘어나면 승천을 하고.
추방과 승천에는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시간을 보냈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꾸 바깥에서 온 사람들을 물어보더라고요…….”
“불신자야?”
“불신자네.”
주위의 사이비들이 나를 바라보며 불신자니 뭐니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수군거리는 것이었다.
아까 대화를 나눈 사이비가 내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한 것일까?
내가 여기서 나가고 싶어 한다는 것을 사이비들이 아까의 대화로 눈치챈 게 틀림없다.
그래도 뭐, 규칙에 싸움 금지가 있으니 직접적인 폭력 사태로 번지지는 않겠지만, 역시 이렇게 대놓고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는 게 그리 기분 좋지는 않네.
나는 상처 입은 마음을 에포나를 쓰다듬어 치유하면서 시간을 보냈고.
이젠 알파마저 내게 음식을 배급할 때 혀를 차며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표시할 지경에 이르렀다.
역시 불신자는 꼴 보기 싫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 우웅. 내 몸에서 무언가가 퍼져 나가는 감각이 느껴졌다.
저 너머의 무언가에게 내 위치를 알리듯이 몸 안에서 수많은 정보들이 터져 나왔고.
에포나는 슬며시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내게서 터져 나오는 수많은 정보들을 조금씩 먹어 치웠다.
나는 당황했지만, 그렇게 당황하지도 않았다.
내 추측이 맞는다면 당연히 벌어질 일이었으니까.
내 몸이 네온사인처럼 푸르게 점멸하며 정보들을 뿜어내고.
천장이 열리며 하늘에서 기계 팔이 내려와 내게 다가온다.
나는 기계 팔을 피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몸을 맡겼고.
나는 에포나를 껴안은 채로 기계 팔에 들려서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사이비들이 성난 목소리로 시끄럽게 떠들며 의기양양하게 외치기 시작했다.
“불신자가 낙원에서 쫓겨납니다! 보십쇼, 여러분! 불신자에게 기다리는 것은 지옥으로의 추방뿐입니다!”
“불신자에게는 오직 지옥뿐!”
그래, 잘들 있어라.
나는 기계 팔에 끌려 올라가며 내게 남아 있는 마지막 가능성을 애써 무시했다.
이대로 원래의 어항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바깥에 무참히 버려진다는 가능성.
정말 그런 거라면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건 없으니까, 그런 경우는 생각하지 말자.
내가 그런 무서운 상상을 하는 와중에도 기계 팔은 나를 데리고 사이비들의 낙원을 빠져나갔고.
아무것도 없던 순백의 무지로 이루어진 낙원을 빠져나오자, 바깥의 세상이 눈에 들어왔다.
바깥의 세상은 수많은 기계장치로 이루어진 기계의 낙원.
기계들은 살아 있는 생물처럼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며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일으킨다.
나는 컨베이어 벨트에 실린 짐처럼 기계 팔에 이송되며 어디론가 나아간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도축장에 끌려가는 송아지의 기분을 떠올리게 된다.
정말, 정말 이대로 있어도 괜찮은 거 맞겠지?
내가 불안해하며 주위를 둘러보는 사이, 내 눈에 무언가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건……?”
거대한 금속의 평야 위에 잔뜩 늘어선 감옥으로도, 우리로도 보이는 여러 수조들.
그 안에 비치는 풍경은 다양했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들도 무척이나 다양했다.
블랑카처럼 말의 하반신에 인간의 상체를 가진 생물.
새와 인간이 섞인 것 같은 생김새의 생물.
전신이 불타오르고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인간형의 생물.
털로 만들어진 슬라임과 아주 기이다란 목을 가진 기괴한 생물체.
그리고 마치 드래곤이라는 착각이 들 만큼 거대한 도마뱀을 닮은 생물.
촉수, 털, 점액, 다족, 비늘, 깃털, 이빨, 외골격, 부정형…….
기계 팔에 매달려 이렇게 수많은 생명체들이 살아가는 사육장을 바라보고 있으니 신기한 기분이 든다.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를 모아 놓은 동물원을 구경하는 것 같은 기분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동물원이 아니다.
저 안에 들어 있는 것들도 단순한 동물들이 아니고.
저 안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들은 아마도 나와 같은 사람들일 것이다.
외형이 달라도.
출신 세계가 달라도.
나처럼 생각하고 말을 할 수 있을 사람들.
하지만 이 위치에서 저런 풍경들을 보다 보니 도저히 저 안에서 생활하고 있을 생물들이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말 못하는 짐승을 구경하는 기분이 들 뿐이다.
그렇게 수많은 생물들의 사육장을 바라보며 어디로가 이동하던 와중, 내 눈에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
사육장들 사이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들이 보였던 것이다.
내가 의아해하며 꿈틀거리는 것의 정체를 살펴보려 앞으로 몸을 기울인 그때.
“우왁?!”
앞으로만 나아가던 기계 팔이 그대로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슬쩍 아래를 바라보자 아까의 투명한 사육장과는 달리 내부가 보이지 않는 사육장이 보인다.
빼꼼히 사육장에 구멍이 열리며 기계 팔이 그 구멍 안으로 나를 집어넣고.
“으겍.”
“왕!”
사육장 안으로 떨어진 나는 엉덩이를 문지르며 주위를 살폈다.
여긴 또 어떤 곳이지?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펴봐도 다른 생물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고.
그 대신, 높게 솟은 탑 같은 구조물들만이 여럿 솟아 있을 뿐이었다.
내가 의아해하는 사이, 다시 하늘에서 로봇 팔이 나타나 무언가를 바닥에 내려놨다.
마치 시퍼런 얼음 같은 느낌의 네모난 구조물.
조심스럽게 네모난 구조물을 툭툭 건드려 본다.
얼음을 만지는 감촉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기묘하게도 공기의 벽을 만지는 것 같은 감각이 느껴진다.
이건 도대체 정체가 뭘까?
내가 그렇게 의아해하는 사이. 푸른 얼음처럼 생긴 큐브의 크기가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마치 얼음이 해동되는 것처럼 서서히 큐브의 크기가 줄어들더니, 그 안에 들어 있던 것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
큐브 안에 들어 있던 것은 깃털로 이루어진 깃털 뭉치였다.
이게 도대체 뭔가, 내가 파악하기도 전에 갑작스럽게 깃털 뭉치가 촤악 펼쳐지더니.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 누구?”
* * *
“보호종으로 지정했으면 브리더도 보호종을 사육하면 안 되는 것 아니냐, 그런 질문들이 꽤나 많이 들어와요. 그런 질문에 대해서 쥬스농장 씨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쥬스농장은 방송용 의체를 조작해 능숙하게 웃어 보이며 사회자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런 질문은 대부분 보호종 제도의 취지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 나오는 의문이에요. 보호종 제도가 뭡니까? 지적 생명체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생명체들을 보호하자는 취지에서 생겨난 제도잖아요?”
“그렇죠. 그게 보호종 제도죠.”
“일반인들이 보호종을 사육하지 못하는 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밀렵을 막기 위한 거예요. 과도한 밀렵으로 보호종의 개체 수가 줄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죠.”
“그렇죠.”
“일반인들은 차원 생물들을 애완용으로 키웁니다. 뭐, 지적 생명체의 의무를 지키기 위해서라며 키우시는 분들도 있는데, 일단 그것도 애완용이라고 취급하겠습니다.”
“네. 계속하세요.”
“하지만 브리더는 다릅니다. 브리더는 차원 생물을 번식시키고, 그 수를 늘리기 위해 키우는 거예요. 대부분의 보호종들은 멸종 근처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갑니다. 브리더들은 만약 자연환경에서 보호종들이 멸종했을 때를 대비해서 보호종들을 사육하는 겁니다.”
“보호종들이 멸종했을 때를 대비해서요?”
“정확히 말하면, 보호종이 멸종하지 않게끔 보호종을 사육하는 거죠. 멸종 위기에 처한 보호종들을 사육해서 개체 수를 늘리고, 자연에 방생한다. 그것이 브리더들이 보호종들을 키우는 주요한 목적이에요.”
“그렇군요. 쥬스농장 님의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쥬스농장 님, 이런 이야기도 있더라고요.”
“무슨 이야기죠?”
“브리더의 수가 늘어난 지금은 브리더들이 채집하는 수준이 거의 남획 수준이라고요. 이런 주장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쥬스농장은 전혀 아니라는 듯 의체의 손을 휘저으며 카메라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우선, 브리더들이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보호종을 채집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아, 그런가요?”
“네. 브리더 한 사람이 보유할 수 있는 개체 수는 보호종 하나당 최대 한 가정이 한계예요.”
“한 가정이라고 하면, 번식하기 위한 최소 조건을 말하는 거죠?”
“네. 일단 브리더들이 번식시키려면 한 가정은 필수로 있어야 하니까요. 애초에 브리더들이 채집하는 양은 그리 많지도 않고, 브리더들이 채집한 것보다 더 많은 개체 수를 야생에 방생하니 그런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네, 그렇군요. 그럼,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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