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 8
서, 저는 파인만 씨에게 의뢰를 맡기고 싶습니다.”
“응, 안 해.”
“하하하. 대답이 빠르시네요.”
“딱 봐도 이득이 될 게 없는 제안인데. 내가 뭐 하러 받아들여. 보나 마나 지구산 인간을 보호종으로 지정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정보를 찾아와 달라는 부탁일 텐데.”
“아하하…….”
정곡을 찔렸는지 쥬스농장은 가볍게 웃음을 흘리고, 파인만은 연초를 바닥에 던졌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쥬스농장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친구 때문인가요?”
“그래. 그럼 어쩔 건데? 왜, 내가 방해할까 봐 겁나?”
“아뇨. 그건…….”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딱히 내가 클라인을 위해서 뭔가 할 생각은 없으니까.”
그렇다고 널 위해 뭘 할 생각도 없지만.
파인만의 말에 숨겨진 뒷말을 쥬스농장도 눈치채고 가만히 사고 회로를 냉각시켰다.
“우정이 참 보기 좋네요.”
“할 말은 끝났지? 그럼 꺼져. 빨리.”
“착수금은 5장입니다. 완료하면 5장을 추가로 더 드리고요.”
“나 돈 많아.”
정말로 파인만이 자신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쥬스농장은 한숨을 내쉬며 파인만에게서 떠나갔다.
그런 쥬스농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파인만은 조용히 생각했다.
이번에 파인만이 친구를 위해 움직이지 않는 건, 파인만이 움직여 봤자 해결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지구산 인간이 보호종으로 지정되는 시간을 아무리 늦춰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아니라 문제를 미루는 방법이니까.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클라인이 직접 나서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파인만은 굳이 친구를 위해 행동하지 않았다.
이건, 클라인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니까.
“빨리 철 좀 들어라…….”
48화 마력이 없는 인간이 ‘이걸’ 만들었다? 이러면 잉간이도 블랙 스미스인가요?
큰 폭발에는, 커다란 불이 따른다.
나는 그 사실을 그 어느 때보다 실감하고 있었다.
마수정의 폭발로 화염을 더 강하게 만들자! 하는 1차적인 생각.
마수정의 폭발을 토기는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정상적인 사고.
그렇다면 집의 일부를 떼어 내서 잠시 풀무로 만들자는 기괴한 발상.
그 모든 생각들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풀무는, 솔직히 말해서 더 이상 풀무가 아니었다.
“핫햐!!”
어딘가의 만화 속의 미치광이 방화광이 불을 지를 때 이용하는 화염방사기 같은 물건이었지.
어찌 됐든, 충분한 화력을 확보한 나는 점화석과 마수정을 학대해 가며 용광로에 화염을 쏟아부었다.
그렇지만 돌뱀의 껍질은 시뻘겋게 달아오르기만 할 뿐, 도저히 녹아내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강렬한 열기에 얼굴이 시뻘겋게 익어 갈 때쯤, 나는 드디어 노력의 결실을 얻을 수 있었다.
또르르.
거푸집 위에 올려놨던 돌뱀의 껍질들이 녹아내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공기가 너무 뜨거워 환호성조차 지르지 못하며 나는 더욱 풀무의 화력을 높였고.
녹아내린 돌뱀의 껍질이 넘실거리며 거푸집을 채워 가기 시작했다.
작은 말뚝 모양의 홈에서 붉게 빛나는 액체가 넘실거리고.
나는 조심스럽게 풀무질을 멈추고 서둘러 근처에 놔뒀던 물속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머리가 그제야 식는 기분이 든다.
내 머리는 곧바로 식었지만, 용광로의 온기는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고 은은하게 빛났다.
이제 남은 건 용광로의 온도가 사그라들 때까지 기다리는 일뿐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용광로에서 장작을 조심스럽게 모조리 빼냈다.
젠장, 아침 일찍부터 용광로 앞에 앉아 있었더니 온몸이 땀으로 끈적거린다.
저렇게 뜨거운 용광로를 누군가가 건드릴 것 같지는 않으니까.
빨리 호수에 가서 몸을 씻고 싶은 생각만 든다.
나는 비척비척 에포나와 함께 호수로 발걸음을 옮겼고.
“왕!”
에포나가 나를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편안히 호수에서 몸을 씻었다.
정말로 이건 뭔가 잘못된 게 분명해.
편하게 살고 싶으면 생고생을 해야 하는 게 말이 돼?
젠장, 나도 아무것도 안 해도 삼시세끼 모두 챙겨 주는 곳에서 살고 싶다.
“아!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풍덩 호수에 드러누워 하늘을 향해 투정을 부려 본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입으로는 투정을 부려도, 나는 지금의 생활이 그리 나쁜 것 같지 않았다.
성취감이라고 해야 할까, 달성감이라고 해야 할까?
무언가 목적을 잡고, 목표를 이루는 과정이 내게 살아 숨 쉬는 생동감을 부여해 줬다.
뭐, 생각해 보면 그런 느낌을 느낀다는 것이 전에 방에서만 생활할 때는 도저히 사람처럼 생활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나는 어째서 방에 틀어박혔었더라?
무슨 일 때문이었지?
아무 이유가 없었나?
내가 어째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머릿속의 기억을 뒤지던 그때.
“흐윽……?”
무언가 이질적인 감각이 전신에 느껴졌다.
사이코패스의 압박감과는 달리, 전혀 다른 새로운 종류의 압박감.
사이코패스가 무겁게 심장을 억눌렀다면, 이건 내 몸을 끈적하게 휘감고 스며든다.
압박감에 휘감기며 허우적거리던 와중, 비릿한 피 맛이 입안에서 느껴지기 시작했다.
피, 피, 피.
온통 피다.
끈적한 피의 늪 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착각이 느껴지고.
바르르 몸을 떨며 폐부에 들어찬 피를 토해 내려 숨을 뱉은 순간.
“끼이이잉!”
어떤 짐승이 찢어지는 비명을 내지르며 최후의 숨결을 내뱉는 소리가 숲에서 울려 퍼졌다.
누군가의 비명을 신호 삼아 나는 벌떡 호수에서 거친 숨을 내쉬며 일어섰고.
피의 늪이라고 느껴졌던 호수는 언제나처럼 잔잔하게 빛을 반사할 뿐이었고.
나는 반사적으로 늘 곁에 있을 존재의 이름을 불렀다.
“에포나?”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숨 막힐 듯한 정적.
잠깐 자리를 비웠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에포나가 내 부름에 응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불안감이 무럭무럭 자라나기 시작했다.
“에포나!”
이번에도 에포나는 응답하지 않는다.
아까의 그 비명 소리가 에포나의 것이면 어쩌지?
만약 에포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거라면 어쩌지?
에포나, 에포나, 에포나.
나는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에포나의 이름을 부르며 에포나를 찾았다.
도저히 에포나의 흔적이 보이지 않아 불안감이 공포감으로 바뀌기 시작한 순간.
“왕!”
호수 안에서 뽀송뽀송한 털을 휘날리며 에포나가 뛰쳐나왔다.
“에포나, 에포나.”
이것이 내 눈에만 보이는 환상이 아닐까.
나는 두려워하며 에포나의 이름을 부르며 에포나를 껴안았고.
에포나는 부드러운 털가죽을 꿈틀거리며 내 포옹을 받아들였다.
에포나가 내 볼을 할짝거리는 감촉을 느끼며 나는 간신히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다행이다.
아까의 그 비명 소리가 에포나의 것이 아니어서.
그렇다면 그 비명 소리는 누구의 것이지?
블랑카에게 사냥당한 불운한 짐승의 것일까?
일단, 한 가지 확실한 건 더 호수에 머무르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는 것이다.
나는 서둘러 옷을 주섬주섬 입으며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그때, 에포나가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하며 숲속으로 달려갔다.
“왕, 왕!”
“에포나?”
에포나를 두고 갈 수는 없었기에 나는 서둘러 에포나의 뒤를 따라갔고.
에포나의 뒤를 따라간 곳에서 나는 사체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전날, 블랑카가 사냥해 왔던 표범과 같은 종으로 보이는 짐승의 사체.
표범은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지으며 혀를 쭉 내밀고 죽어 있었고.
그런 표범의 가슴에 무언가 파고든 듯한 구멍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에포나는 그런 표범의 사체를 등지고 의기양양하게 나를 바라보며 몇 번인가 짖었다.
“왕!”
“아니, 저걸 가지고 가자고?”
직접 사냥한 사체가 아닌, 죽어 있는 사체를 가져가는 건 조금 꺼려지는데.
병에 걸려서 죽은 것일 수도 있고, 가슴의 상처를 보니 무언가 기생충 같은 것이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그냥 사체를 무시하고 가려 했지만.
“끼잉…….”
에포나는 낑낑거리며 내 바지를 물고 늘어졌다.
그런 에포나의 모습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에포나의 머리를 쓰다듬고, 표범의 사체를 들쳐 멨다.
뭐, 뭔가 기생충이 있다고 해도 대충 구워 먹으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닐까?
공짜 고기를 얻었다는 게 중요하지.
내가 표범의 사체를 들쳐 메고 집으로 발걸음을 돌리자.
에포나는 잔뜩 신난 발걸음으로 내 뒤를 쫄래쫄래 쫓아왔다.
집으로 돌아와 보니 아직까지도 용광로는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 것 같고.
블랑카가 돌아올 때까지는 시간이 남을 것 같으니 미리 손질이나 해 둘까?
그렇게 생각하며 표범의 사체를 분해하자, 뭔가 기묘한 점을 눈치챌 수 있었다.
이곳에 와서 도축을 할 때마다 아무리 크기가 작더라도 마석이 튀어나왔는데.
이번에 발견한 표범의 몸은 아무리 뒤져 봐도 마석이 튀어나오질 않았다.
어제 블랑카가 가져온 표범에선 마석이 잘만 나왔던 걸 봐선 아예 마석이 처음부터 없었던 건 아닐 텐데.
누군가가 표범을 사냥하고 마석을 먹어 치운 걸까?
내 시선이 작은 마석을 와그작 씹어 먹는 에포나에게 향한다.
그러고는 표범의 몸에 있던 구멍과 에포나의 몸을 비교해 보고.
고개를 내저었다.
에이, 설마 에포나가 한 짓이겠어?
애초에 에포나의 이빨로는 표범의 가죽을 뚫지도 못할 것 같은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창고 안에 표범의 가죽을 염장하러 갔다.
가죽을 염장하고 나오니 에포나는 행복한 표정으로 침대 위에 드러누워 있었고.
나는 슬쩍 집 밖으로 나와 용광로의 상태를 확인해 보지만 여전히 내가 쉽사리 건드릴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씨앗들에게도 물을 주고, 그동안 쌓인 내장에 달맞이풀의 씨앗을 조금 뿌려 보고.
마지막으로 늘 하던 명상을 하며 시간을 때우자 숲속에서 듣기 좋은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성공했어?”
“직접 봐 봐.”
돌뱀 여러 마리를 잡아 오는 블랑카에게 나는 씨익 웃어 보였고.
블랑카는 내 미소를 보고 이번 3차 시도는 잘됐다는 것을 짐작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결과물은 다 같이 확인하려고 아직 안 건드렸지.”
나는 흙바닥에서 일어나며 집게로 사용할 나뭇가지를 쥐고 용광로로 다가갔다.
블랑카 또한 흥미로운 표정으로 돌뱀들을 집 안에 내려 두고 내 뒤를 따라왔고.
나는 조심스럽게 아직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용광로에서 거푸집들을 들어 올려 바닥에 던졌다.
내가 용광로에 집어넣었던 거푸집은 총 4개.
거푸집 하나당 못을 20개 조각해 놨으니 제대로 만들어졌다면 총 80개의 못이 만들어질 것이다.
뭐, 정확하겐 못이 아니라 일종의 덩이쇠지만 말이다.
나중에 톱을 만들 때, 거푸집 안에 집어넣기 위한 건데.
이왕 덩이쇠로 만들 거, 못으로도 사용할 수 있게끔 설계한 것이다.
나무 방망이로 거푸집을 두드려 부수자 거푸집 안의 내용물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프라모델을 조립할 때 프라모델 부품들이 딸려 오는 판처럼 금속의 선이 못 사이를 잇고 있는 모습.
나는 조심스럽게 툭툭 못들을 건드려 보지만, 딱히 뜨거움이 느껴지진 않는다.
블랑카 또한 못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모습이 신기한지 거푸집의 잔해에서 못 한 세트를 들어 올려 만지작거렸고.
“앗?!”
뚝.
그러다가 철망에서 못을 간단하게 똑 떼어 내 버렸다.
블랑카는 순간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지만, 나는 피식 웃으며 블랑카를 달랬다.
“내, 내가 망가트린 거 아니지? 원래 이런 거 맞지?”
“괜찮아. 원래 그러려고 한 거니까.”
나는 블랑카를 안심시키기 위해 내 손에 들린 못 한 세트를 또각또각 떼어 내려 했지만.
“으윽……!”
아무리 두께가 얇아졌다고 해도 금속은 금속.
도저히 내 힘으로는 손쉽게 못이 떼어지지 않아 나는 블랑카에게 외주를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블랑카는 금세 못들을 다 떼어 내고 내게 신기하다는 듯이 질문했다.
“화력을 올리기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올린 거야?”
“그거? 마-법을 썼지.”
“뭐, 마법?”
“진짜 마법은 아니고. 네가 지난번에 보여 줬잖아? 마수정하고 점화석을 이렇게 이렇게 하면 폭발이 일어난다는 거.”
나는 당당하게 블랑카에게 내가 만든 풀무라는 이름의 화염방사기를 보여 줬고.
풀무에서 불꽃이 튀어 나가는 모습을 본 블랑카는 기겁하며 내게 외쳤다.
“미쳤어? 미친 거지? 네가 마력이 없어서 이 정도에서 그치는 거지, 실수로 다른 마력이 스며들어 갔으면……!”
“어떻게 되는데?”
“어떻게 되긴! 이 주위가 죄다 날아가 버리겠지!”
블랑카는 경악하며 나를 타박했지만, 어차피 마력도 없는데 블랑카가 걱정하는 일이 벌어질 리 없잖아?
아무 근거 없이 무턱대고 일을 벌인 건 아니란 말이다.
확실히 만능 사전으로 알아보고 저지른 짓이라고.
하지만 뭐, 확실히 위험한 짓을 하긴 했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 물리적이 아니라, 정신적인 쪽으로 목숨의 위협을 너무 느껴서 그런가?
뭔가 물리적인 목숨의 위협에 무감각해진 기분이 든다.
그렇게 반성은 하긴 했어도, 그렇다고 불꽃 풀무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건 아니고.
“그래도 이게 아니면 화력을 올릴 방법이 없어서…….”
“그래도, 혼자서는 쓰지 마!”
“알겠어.”
블랑카는 내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지만 더 이상 나를 타박하진 않았다.
확실히 쇠를 녹일 화력이 확보된 이상, 이제 남은 건 톱을 만드는 일뿐이다.
오늘은 날이 너무 늦었고, 마지막 작업은 내일로 미뤄 두자.
내일이면 드디어 내 노력이 보답받는 날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저녁 식사를 끝마치고 잠자리에 들었고.
다음 날 아침.
“……?”
내가 만든 용광로 대신, SF 영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미래적인 디자인의 기계를 마주할 수 있었다.
이게 도대체 뭔가 하는 심정으로 가까이 기계에 다가가 보자.
허공에 홀로그램이 떠오르며 내게 자신의 정체를 밝혀 왔다.
[리퀴드 용광로]
-뭐든지 녹여 드리는 당신의 친구! 리퀴드 용광로!
그래.
어째서인진 몰라도 내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낸 용광로는 하루아침에 미래 문명의 용광로로 바뀌어 있었다.
무슨 두꺼비가 헌 집을 새집으로 교환해 주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
한 가지 확실한 건, 분명히 더 좋은 용광로를 얻었으니 좋아해야 하는데.
좋아해야 하는데…….
어째서인지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내 노력에 걸맞은 보상을 얻기 바로 직전에, 누군가가 보상을 가로채 간 느낌이다.
참 복잡한 마음이 들며 나는 왠지 모를 허탈함을 느꼈고.
“……망할.”
그렇기에 나는 욕설을 내뱉으며 용광로를 걷어차는 수밖에 없었다.
* * *
“여러분, 보셨어요? 방금 잉간이가 만든 거. 마력철 아닌가요?”
클라인은 별생각 없이 잉간이를 관찰하고 있었지만, 잉간이가 만들어 낸 결과물을 보고 감탄사를 흘리고 말았다.
마력철은 드워프처럼 금속의 세공에 익숙한 생물들이 때때로 만들어 내는 인조 금속인데.
일반적인 강철에 마력을 강하게 쐬어서 강철 전체에 마력을 머금게 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마력철은 물리적인 강도도 늘어날 뿐만 아니라 흡수한 마력에 무척이나 강한 저항력을 가지게 된다.
설명만 들어서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 마력철의 문제점은 강철에 마력을 덧씌우는 과정이 무척이나 위험하고 힘들다는 것이다.
철을 제련할 때 특정한 마력을 계속해서 불어 넣어야 하는데.
문제는 인간형 생명체들의 마력 조작 능력으로는 특정한 마력만을 계속해서 불어 넣는 게 힘들다는 것이다.
특정한 마력이 아닌 다른 불순한 마력이 중간에 섞이기라도 하면 마력철의 제련은 실패하고.
마력철을 만들 때 사용하던 마력의 성질에 따라서 여러 참사가 발생한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폭발 사고로 이어진다.
어찌 됐건, 지금 잉간이가 제련해 낸 강철들은 분명한 마력철.
“잉간이가 마력철을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었을 리는 없고. 역시 우연이겠죠?”
아마, 클라인이 잉간이에게 준 발화석을 이용한 풀무를 만든 결과 탄생한 우연의 산물이겠지.
하지만 그게 우연이든 아니든 확실한 것은, 잉간이가 마력철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뛰어난 드워프 장인들도 실패하는 것이 마력철의 제련인데, 어떻게 잉간이가 그걸 성공했을까?
클라인은 조용히 불꽃 풀무 안에서 휘몰아치는 마력을 관찰하며 하나의 추론을 내놓았다.
“제 생각에는…… 잉간이가 마력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다른 마력이 간섭할 여지가 없던 게 아닐까요? 마력이 아예 없으면, 마력 조작을 익힐 필요도 없으니까요.”
잉간이가 노려서 제련에 성공한 것은 아니겠지만, 클라인은 잉간이가 무척이나 뿌듯했다.
맨 처음 무오도 잡지 못해서 빌빌거리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이렇게 마력철을 제련해 내다니.
그래, 클라인은 잉간이가 노력하면 할 수 있는 아이인 줄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멍청한 모습을 보여 왔던 건 제대로 된 교육과 잉간이가 하고자 하는 의지가 부족해서다.
“큭큭, 이러면 잉간이도 블랙 스미스 자격이 생긴 게 아닌가요? 솔직히 마력철을 제련하는데, 블랙 스미스가 아니면 섭하죠.”
클라인은 지금 당장이라도 잉간이의 영상을 드워프 사육인 커뮤니티에 올리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진짜, 쥬튜브만 아니면 이걸로 드워프 커뮤니티에서 잔뜩 어그로를 끌 수 있을 텐데.
잉간이가 용광로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영상을 올리고, 참 수많은 훈수가 드워프 커뮤니티에서 쏟아졌는데.
마력철도 만들지 못하는 게 무슨 드워프냐는 글을 커뮤니티에 올리는 것 정도는 애교로 봐주지 않을까?
쥬튜버는 최대한 논란거리를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게 참 슬플 뿐이다.
이렇게나 열심히 잉간이가 노력했으니, 노력에 걸맞은 보상을 해 줘야지.
“블랙 스미스에게는 블랙 스미스에 어울리는 장비가 필요하겠죠?”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며칠 전 도착한 애완 생물용 용광로를 꺼내 들었다.
이게 있다면 잉간이도 이제는 힘들이지 않고 금속을 가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젠 불편하게 힘을 들이지 않아도 되니까, 잉간이가 좋아하겠죠?”
노력에는 그에 걸맞은 보상이 따라야 한다.
자신은 제대로 된 보상을 얻지 못했지만.
클라인 자신이 키우는 생물들은 언제나 노력에 따른 보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늘 그렇듯, 클라인은 호의를 담은 따스한 눈빛으로 차원항 안의 잉간이를 바라봤고.
“에그, 완전 시꺼메진 거 봐요. 아이고…….”
클라인은 완전히 새까매진 잉간이의 모습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역시, 이 정도 보상은 충분하지 않겠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잉간이에게 줄 다음 보상을 조심스럽게 냉장고에서 꺼내 왔다.
드래곤의 고기는 누구나 좋아하니까, 잉간이도 좋아하려나?
뭐, 살짝 보상이 과한 감은 있긴 해도 괜찮겠지?
노력에는 언제나 보상이 따라야 하는 법이니까.
보상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건 노력해야 할 이유도 없다는 뜻이니까.
49화 지구산 인간을 드래곤 스테이크로 낚아 봤습니다.
[???: 드워프는 마력철을 만들 수 있으므로 인간형 생물들 중에서 제일 뛰어남.]
[솔직히 마력철 만들었으면 블랙 스미스 맞지 ㄹㅇ ㅋㅋ]
[???: 마력이 없는 지구산 인간은 절대 대장간을 못 만듦.]
[드워프빠들 지들이 드워프가 된 것처럼 과몰입해서 훈수 두던데, 훈수 다 틀렸쥬?]
[진짜 훈수 오지게 두던 거 X 같았는데, 귀신같이 싹 사라졌네 ㅋㅋㅋ]
“큭큭큭…….”
클라인은 방 안에서 잉간이의 영상에 달린 댓글을 보며 오랜만에 소리 내며 웃었다.
드워프 사육자들.
그러니까 드워프형 인간을 키우는 사육자들은 어째서인지 일종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드워프형 인간이 가장 보호종을 많이 배출해서 그런 건지 무의식중에 남들을 깔보는 듯한 언행을 많이 하는데.
그런 언행이 자주 드러나는 곳이 쥬튜브 댓글 창.
특히, 용광로 제작 같은 드워프들의 주특기, 야금술에 관련된 영상에 자주 출몰해서 훈수를 던지고 사라진다.
그런 방식은 드워프족이 아니면 불가능하다느니, 드워프족이 쓰는 방식이 아니면 불가능하다느니.
다른 인간종들로는 그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데, 어째서 드워프를 키우는 사람들만 이러는 걸까?
어쩌면 여러 사람들이 다는 댓글이 아니라, 전부 한 사람이 다는 댓글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이런 드워프 사육자들의 패악질들로 커뮤니티와 쥬튜브 시청자들 사이에선 드워프 사육자들이 그리 고운 눈총을 받지 못했고.
클라인의 채널을 보는 시청자들 또한 최근에 달리기 시작한 훈수 글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탓에 클라인이 은근슬쩍 드워프 사육자들을 까는 내용을 집어넣자 클라인에게 동조하며 댓글 창을 점령한 것이다.
원래라면 분쟁이 일어날 법한 상황이지만, 드워프 사육자들을 깔 때만큼은 늘 싸우던 시청자들도 하나가 되어 단합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아, 잉간이를 보며 치유하는 것도 최고지만 가끔씩은 이렇게 즐기는 것도 필요하다니까.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필사적으로 메일함에 도착한 메시지에서 눈을 돌렸다.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던 쥬튜브 댓글 창도 끝이 나고.
클라인은 그제야 조심스럽게 메시지를 똑바로 바라봤다.
[차원 생물 환경 관리부]
-브리더 자격증 모의고사 결과.cwp
“으윽…….”
열심히 공부해서 온라인으로 모의고사를 보긴 했다만, 결과가 어떨지 두렵다.
그래도 계속 묵혀 둔다고 시험 결과가 바뀌는 건 아니니까, 더 현실도피를 하는 건 그만두고 빨리 확인하자.
“후우…… 괜찮아. 어차피 모의고사니까! 응!”
그렇게 스스로를 돋우며 클라인은 조심스럽게 메시지를 클릭했고.
신체 말단을 질겅질겅 깨물며 모의고사 결과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모의고사 결과를 읽어 내려가던 클라인의 얼굴이 서서히 밝아진다.
클라인은 파일 가장 아래쪽에 위치한 자신의 점수를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78.65/100]
78.65점.
재시험 커트라인이 85점이고, 합격 커트라인이 95점이었나?
내가 예상했던 점수보다는 더 높게 나왔네.
윽, 역시 인간형 생물들의 역사를 전부 외우는 건 힘든 일이다.
인간형 생물의 역사만 외우는 거면 모르겠는데, 4차원 생물이나 정보 생명체들의 기원까지 전부 외워야 하니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아니, 그 생물체들의 역사를 외우는 게 생물체들의 습성을 아는 데 도움이 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이렇게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그냥 각 생물체들의 습성만 따로 외우게 하면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각 생명체들의 역사를 공부하게 시키고, 또 습성을 다시 공부하게 시키는 불합리한 시험문제를 보면 더욱더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이라도 그냥 때려치우고 싶지만, 잉간이 때문에 그러지 못하겠다.
내 이기심으로 고향에서 데려왔으니, 행복하게는 못하더라도 고통받지는 않게끔 해 줘야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금 의지를 다졌지만,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공부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이대로라면 본시험 일정까지 합격점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장 불안한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자신이 집 밖으로 나갈 수 있느냐였다.
모의고사가 아닌 본시험은 중앙 구역에서 치르게 되어 있다.
부정 시험을 막기 위한 조치라는 것을 알아도 클라인에겐 그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였다.
잉간이를 위해서라고 수없이 자신에게 속삭이며 집 밖으로 나가려고 해도.
그때마다 클라인은 집 밖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노력해 봤자 어차피 실패할 게 뻔한데, 노력하지 않아도 되잖아?
밖으로 나가면, 그 녀석들이 또 괴롭힐 게 분명하다고.
집 안에서는 뭐든지 가능한데 뭐 하러 집 밖을 나가?
그러한 목소리들이 끊임없이 클라인의 귓가에 쉴 새 없이 울려 퍼지고.
클라인은 그때마다 목소리를 이겨 내지 못하고 번번이 다시 자신만의 요새 안에 틀어박혔다.
잉간이를 바라보며 위안을 얻으며 말이다.
잉간이만 있으면 자신은 요새 안에 틀어박혀 있어도 괜찮다.
하지만 요새 안에 틀어박혀 있으면 잉간이를 지킬 수 없다.
그런 자가당착은 도저히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클라인은 이번에도 문제에서 도망쳐 다른 생각으로 사고를 전환했다.
“지적 생명체의 의무는 개뿔…….”
클라인은 조용히 브리더 문제집의 서문을 읽으며 그렇게 투덜거렸다.
다른 생물을 이해하여 지적 생명체로 인정하는 것이 지적 생명체의 의무라니, 참 웃긴 소리다.
중앙 정부에서는 공식적으로 이걸 지적 생명체의 의무라고 선전하고 있지만, 이 슬로건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심지어 이 슬로건을 내건 정부마저 말이다.
언제나 차원 생물들의 생태를 이해해 지적 생명체로 새롭게 인정받는 동포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과학자들이 열심히 연구해서 새롭게 정말 모든 것을 알아냈다고 자부할 정도가 되어도.
온갖 이유를 들어 가며 절대로 지적 생명체로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뭐, 생물 하나를 둘러싸고 만들어진 시장을 무너트린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는 마키나를 지적 생명체로 받아들였을 때 모두가 알았으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니 마키나가 지적 생명체로 인정된 것도 마키나가 정보 생명체여서지, 물질 생명이었으면 절대 인정해 주지 않았을 것 같다.
만약에 내가 잉간이를 열심히 관찰하고 관찰해서 잉간이의 모든 것을 알아내게 된다면 잉간이도 지적 생명체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물론 정부에서는 내가 이해한 것은 한 개체에 관한 것이지 종 전체가 아니라며 거절하겠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잉간이가 동등한 지적 생명체가 되는 게 아닐까?
문득 클라인은 그런 생각을 했고, 자신과 잉간이가 동등한 생명체가 된다면 잉간이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할지 생각했다.
무슨 말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잉간이에게 부정적인 말을 들으면 꽤나 타격이 클 것 같다.
잉간이에게는 내 호의가 제대로 전해지고 있었을까.
차원항 안의 생활은 편안했을까.
그리고 또…….
따르르릉!
더욱 깊은 생각 속으로 가라앉던 클라인의 몸을 알람 시계의 알림이 붙잡고 끌어 올리고.
클라인은 서둘러 부엌으로 걸어가 드래곤 고기의 상태를 확인했다.
“음…… 어디 보자.”
지글지글.
맛있는 소리를 내며 익어 가는 드래곤 고기를 조금 잘라 입안에 넣어 본다.
딱히 양념을 더 추가하지도 않았는데 입안에서 풍부한 경험이 사르르 녹아내리고.
클라인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딱 좋게 정보가 익은 상태네.
이 정도라면 충분히 잉간이도 소화시킬 수 있겠지?
자고로, 드래곤 고기는 사람한테도 맛 좋은 식재료로 쓰였지만 차원 생물들의 보양식으로도 자주 쓰였다.
일부러 다양한 경험을 겪게 한다는 양식장에서 키운 드래곤이어서 그런지 마력과 품고 있는 정보가 엄청나다.
희로애락의 감정은 기본으로 느껴지고, 달콤 쌉싸름한 사랑과 애틋한 사랑이 뒤섞인 훌륭한 맛이다.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잉간이에게 줄 만큼의 고기를 잘라 내 동결 처리했다.
음, 그냥 고기를 내려보내는 건 별로 재미없는데.
그래, 이왕 특식을 주는 김에 핸들링 훈련도 겸하자.
잉간이가 내 몸을 인식하고 접촉할 수 있게 됐지만 그렇다고 나와의 접촉에 스트레스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니까.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주섬주섬 택배 상자의 산에 파묻힌 장난감을 찾아서 꺼냈다.
요즘 잉간이가 용광로를 만들고 활동량이 줄어든 것 같은데, 직접 잉간이와 놀아 주는 것으로 활동량을 늘려야겠다.
분명히 잉간이도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건 심심할 테니 말이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차원항 안으로 신체 말단을 집어넣는다.
늘 그렇듯, 호의를 듬뿍 담아서 말이다.
* * *
보글보글보글.
은빛 그릇에서 붉은 액체가 부글부글 끓는다.
소리만 들어서는 김치찌개를 끓이는 것 같은 느낌이지만, 저 그릇에서 끓고 있는 것은 내가 백날 녹이려고 해도 녹질 않던 돌뱀의 껍데기들이다.
내가 만든 용광로 대신 사이코패스가 던져 준 미래틱한 용광로다.
무언가 찝찝한 기분이 들긴 했어도, 일단 줬으니 고맙게 쓰긴 해야지.
기분이 나쁘다고 딱 봐도 엄청난 물건을 막 버려둘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나는 우는 얼굴로 용광로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 엄청난 용광로의 성능에 그저 감탄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어디 보자. 여기서…… 형태 변환? 주형틀 생성? 이건가?”
조심스럽게 홀로그램에 떠오른 안내대로 용광로를 조작하자, 은빛 그릇이 스르륵 모습을 바꾸기 시작했다.
맨 처음에 생각했던 뾰족뾰족하게 날이 서 있는 톱날의 모습.
내가 알고 있는 톱의 모습을 한 주형이 만들어지고, 은빛 그릇에 뚜껑이 덮인다.
이제 남은 건 용광로를 조작해서 쇳물을 냉각시키는 일뿐.
버튼을 누르자 용광로에서 경쾌한 벨 소리가 울리더니, 몇 초도 지나지 않아서 주형 판의 뚜껑이 벌컥 열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주형 판에서 은빛 철판을 떼어 내며 톱날의 상태를 살폈다.
완벽하다.
내가 생각하던 톱날의 모습 바로 그 자체.
문득 지난번에 고작 못 따위를 만들려고 생고생을 했던 내 고생은 무엇이었는지 허탈해진다.
아냐, 그래도 그런 내 노력이 있어서 사이코패스가 이런 용광로를 던져 준 게 아닐까?
어찌 됐건 훌륭한 톱날이 완성됐다는 건 변함없으니 나는 톱날과 나무를 합쳐서 꽤 그럴싸한 톱을 완성했다.
무언가 중간에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긴 했지만, 첫 번째 목표를 달성하긴 한 것이었다.
그래,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 거 아니겠어?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위안하며 기묘한 찝찝함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곧장 다음 목표를 만들기 시작했다.
다음 목표는 바로 수제 가구 만들기.
뭐, 곧바로라곤 해도 가구용으로 쓰러트린 통나무를 말리는 작업을 해야 해서 톱을 만든 지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작업을 시작했지만 말이다.
그사이에 나는 새롭게 3장의 표범 가죽을 더 무두질했고, 기존에 사용하던 도끼도 철로 업그레이드했다.
마수정 도끼는 이미 분해돼서 불꽃 풀무의 재료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불꽃 풀무 하니까 생각났는데, 발화석이 얼마나 닳았을지 걱정이 된 나는 조심스럽게 불꽃 풀무를 분해해서 안의 상태를 확인해 봤다.
처음에 내가 생각한 것은 얇게 바늘처럼 줄어든 점화석의 모습이었지만.
“어?”
실제로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전보다도 더 굵어지고 울퉁불퉁하게 변한 점화석의 모습이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고민하던 나는 만능 사전에 써져 있던 문장을 떠올렸다.
점화석은 불의 마력이 한데 압축되면서 생겨난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아마도 저 불꽃 풀무 안은 점화석이 만들어지던 환경과 비슷했던 것이 아닐까?
그 때문에 점화석이 소모돼도 다시 만들어지는 상태가 된 것이고.
이과가 들으면 그건 도대체 무슨 무한 동력이냐고 화낼 이야기지만.
여긴 판타지 세계니까 이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어찌 됐건 가구로 만들 통나무가 마르는 동안 블랑카와 나는 평소의 일상을 보내며 시간을 때웠고.
땅에 심은 씨앗들은 아직까지도 반응이 없었지만, 내장에 뿌린 달맞이풀의 새싹이 올라올 무렵.
나는 드디어 톱을 집어 들고 통나무로 수제 가구를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제일 먼저 뭐부터 만들려고? 역시 의자? 아니면 문?”
“뭐부터 만들 거냐고? 음, 지금은 비밀?”
블랑카는 내가 뭘 만드는지 퍽 궁금한 눈치였지만, 내가 장난기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비밀이라고 대답하자 더 이상 추궁하진 않았다.
블랑카 또한 예상외의 물건이 만들어지는 것을 기대하고 있는 걸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곧장 맨 처음 가구를 만들기로 생각한 때부터 계획한 것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딱히 만드는 데 특별한 노하우가 필요한 가구는 아니어서 작업을 시작한 지 하루도 걸리지 않아서 나는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었다.
“저기, 잉간. 이건 도대체 뭐야……?”
“딱 보면 모르겠어?”
“응…… 진짜 모르겠어. 도대체 뭐야?”
“당연히 에포나의 집이지. 뭐긴 뭐야?”
내가 제일 먼저 만든 가구는 에포나의 집으로 사용할 개집.
나무를 네모반듯하게 다듬을 수 없어서 울퉁불퉁한 어째 우스꽝스러운 모양새의 개집이 탄생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훌륭한 개집이 아닌가?
나는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내가 만든 피조물을 바라보고 있었고.
블랑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조용히 내게 한 가지 제안을 건네 왔다.
“잉간.”
“응?”
“가구를 만드는 건, 차라리 내가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무슨 소리야? 사냥하느라 힘들잖아? 요즘에는 마사지도 받지 않으니까, 함부로 몸을 혹사시키면 안 되지. 너는 푹 쉬고 있어.”
“아니, 그게 아니라. 잉간…….”
“솔직히 이 정도면 초보자가 만든 것치고는 잘 만들어지지 않았어? 괜찮아 보이지?”
“어, 음. 초보자치고는 괜찮긴 한데…….”
블랑카는 내 회심의 역작을 바라보며 뭔가 하고픈 말이 많은 표정이었지만, 결국 끝까지 뭐라 말을 꺼내진 않았다.
음, 내가 보기에도 꽤 괜찮은 결과물이다.
에포나도 내가 만들어 준 개집을 보면 좋아하려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방긋 웃는 얼굴로 에포나의 집을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내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뒹굴거리던 에포나가 화들짝 일어나서 나를 반겼고.
“에포나, 이거 봐 봐. 어때? 이쁘지?”
“왕!”
에포나는 내가 가져온 집에 흥미를 가졌는지 호기심 넘치는 표정으로 개집을 살폈고.
나는 방긋 웃으면서 에포나에게 내 첫 작품을 선물했다.
“이제부턴 네 침대로 쓸 거야. 어때? 멋지지?”
“……왕?”
나는 방긋 웃으며 에포나의 반응을 살폈지만, 에포나는 어째 애매한 반응을 보여 줬다.
“봐 봐, 여기에 짚을 넣어서 푹신하게 할 수도 있고. 네가 좋아하는 가죽도 집어넣을 수 있고…….”
분명 에포나가 아직 이 개집의 멋짐을 알지 못해서 그럴 것이라고 행복 회로를 돌리며 필사적으로 에포나에게 개집의 구조를 설명했지만.
홱.
에포나는 풀쩍 내 침대 위로 뛰어올라 강하게 짖었다.
“왕!”
마치 자기는 내 침대가 더 좋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 뒤로도 나는 끊임없이 에포나에게 개집의 멋짐을 알려 주려 했지만 에포나는 그때마다 고개를 내저었고.
결국 내가 야심 차게 만든 에포나의 집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흉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으아아…….”
에포나에게 건넨 선물을 거절당한 충격으로 내가 축 늘어져 있자 블랑카가 조심스럽게 내게 다가왔다.
“음. 그럴 수도 있지. 다음번에는 좀 더 이쁘게 만들면 에포나도 선물을 받아 줄 거야.”
“저거, 별로였어?”
“……솔직히 말해서. 응. 좀 구려.”
“으윽…….”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첫 작품을 박살 내기는 좀 그런데.
그렇다고 창고에 처박아 두기도 좀 그렇다.
나는 어떻게든 내 첫 작품을 활용할 방법을 찾아봤고.
그 결과.
“짜쟌, 이렇게 하면 제단을 모시는 집이 되지!”
“어…… 와아아……?”
나는 나의 첫 작품을 사이코패스를 모시는 제단으로 삼기로 했다.
사이코패스를 위한 작품이 됐다는 게 마음에 들진 않지만, 이건 블랑카를 위한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으니까.
아무튼 그렇게 내 첫 번째 작품이 그리 신통치 않은 반응을 얻은 날 밤.
나는 오랜만에 표독한 안개가 자욱하게 낀 악몽 아닌 악몽을 꿨다.
어딘가 들뜬 기색의 그녀가 헤실헤실 웃으며 슬며시 내 손과 그녀의 손을 꽉 깍지 끼더니.
슬며시 내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속삭였다.
“……고마워.”
그리고.
그녀 나름의 보상이 이어지고.
기상.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잠에서 깨어난 나는 조심스럽게 에포나를 내 하복부에서 치웠고.
아직까지 잠들어 있는 것인지 벽을 바라보며 귀를 쫑긋거리는 블랑카를 지나쳐 호수로 가 몸단장을 했고.
겸사겸사 몸에 달라붙은 오물을 떼어 냈다.
한결 개운해진 몸과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자 얼굴이 붉어진 블랑카가 나를 반겼고.
“아침은 뭐로 먹을래? 돌뱀볶음? 아니면 표범구이?”
“어, 음. 돌뱀볶음. 응, 그걸로 할게.”
“오케이.”
블랑카에게서 희망 메뉴를 받고 요리를 시작하려 한 순간.
드드드득.
내가 서 있는 세계가 뒤흔들리는 진동이 느껴지더니.
이제는 익숙해질 것 같은 사이코패스의 압박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야?
나는 인상을 굳히며 블랑카와 함께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자 블랑카와 내 눈에 각각 들어온 풍경은.
오랜만에 나타난 사이코패스의 손이 반갑다는 듯 우리에게 손짓하는 모습이었다.
오늘은 도대체 뭘 하려고 저러는 거지?
블랑카가 감격하며 무릎 꿇고 기도를 드리는 동안 나는 슬쩍 물러서서 사이코패스의 모습을 살폈고.
사이코패스는 손가락을 살랑살랑 흔들며 블랑카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사이코패스는 조심스럽게 블랑카에게 무언가를 던졌다.
도대체 뭘 던진 걸까?
지금까지의 패턴으로 봐선 무언가의 재료나 기괴한 아이템일 게 분명한데.
내가 긴장하며 블랑카가 둥그런 물체를 받는 걸 지켜봤지만.
블랑카의 손에 들린 동그란 무언가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폭발도 일어나지 않고.
이상한 냄새도 느껴지지 않고.
뭐 이상한 일이라곤 전혀 일어나지 않고.
얌전히 블랑카의 손에 공처럼 들려 있었다.
아니. 공처럼 들려 있는 게 아니라 공 아냐, 저거?
갑자기 공을 어째서 던져 준 거지?
내가 의아해하며 손가락의 행동을 계속 관찰하고 있자, 손가락은 블랑카에게 까딱거렸다.
마치 자신에게 공을 되돌려 달라는 듯한 움직임.
그것은 공을 받은 블랑카도 동일하게 느꼈는지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자신의 신이 자신에게 부탁을 해 왔다는 사실에 신이 났는지 행복한 표정으로 블랑카는 자신의 신에게 공을 되돌려주고.
갑작스럽게 집 앞마당에서 기묘한 캐치볼이 시작되었다.
손가락이 까딱거리며 블랑카에게 다시 공을 돌려주면.
블랑카는 특유의 뛰어난 신체 능력을 백분 활용해 가며 공을 가지고 놀았다.
이게 도대체 뭔 풍경인가 하며 가만히 블랑카와 사이코패스의 캐치볼을 바라보고 있으니.
도저히 블랑카와 사이코패스의 캐치볼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처음에는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봤지만, 계속해서 블랑카와 사이코패스 둘이서만 캐치볼을 하고 있으니 무료함이 닥쳐왔다.
나는 털썩 자리에 주저앉아 체육 시간에 반 아이들이 축구를 하는 모습을 구경하던 때처럼 블랑카의 모습을 구경했다.
그나저나 저 둘은 캐치볼이 질리지도 않나?
무언가 블랑카와 사이코패스가 나를 내버려 두고 둘이서만 캐치볼을 즐기고 있으니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관심을 가져 주지 않는 게 아쉬운 건 아닌데, 좀 짜증 난다.
아니, 사이코패스가 내게 관심을 가져 주지 않는 건 좋은 일이잖아?
그래도 이렇게 완전히 무시당하는 것 같으니 그렇게 기분이 좋지는 않은데.
그냥 집 안으로 들어가 버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사이코패스에게 접촉하기도 애매한 상황에서 나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이 상황을 관망했고.
한참 블랑카와 공을 주고받던 사이코패스는 슬쩍 내게도 손짓을 했다.
지금 나보고 캐치볼을 같이하자고 한 걸까?
저 사이코패스가?
그나저나 저 사이코패스는 도대체 뭘 하려고 우리와 캐치볼을 하려는 거지?
내 생각에, 저 사이코패스는 무척이나 할 일이 없어서 한가하거나, 백수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러니까 저렇게 심심함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렇게 우리를 귀찮게 구는 거지.
내가 사이코패스의 손짓을 받고도 움직이지 않자, 허공에서 사이코패스의 손가락이 더 나타나 무언가를 내 코앞에 흔든다.
무척이나 잘 구워진 듯 보이는 어떤 고기의 스테이크였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침샘이 자극된다.
내가 꿀꺽하고 침을 삼키는 것과 함께 사이코패스는 내게 공을 살랑살랑 흔들었고.
나는 저 사이코패스가 나를 음식으로 낚으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내가 고작 음식에 낚일 거로 보이나?
하지만, 뭐.
지금이 평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평일부터 사이코패스가 이런 짓을 하는 걸 보니 분명 친구도 없겠지.
얼마나 심심했으면 블랑카와 나에게 놀아 달라고 공을 가져왔겠는가?
그러니까, 음.
이건 내가 음식에 낚인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내가 불쌍한 사이코패스와 놀아 주는 거다.
나는 그렇게 합리화를 하며 사이코패스가 내게 던지는 공을 받아 들었다.
50화 키우던 인간이 ‘깨달음’을 얻을 때 대처법. ‘이걸’ 먹였더니 바로 ‘깨달음’을 얻었는데……?
음.
으음.
무척이나 안정적인 맛이야.
생김새는 소고기 스테이크인데, 맛은 완전히 닭고기 맛이 난다.
사이코패스에게서 빼앗은 스테이크를 나는 입안에서 음미했다.
단 한 번도 나는 미식가라고 자부한 적도 없고, 뭐가 맛있는지 맛없는지는 진짜 엄청난 것만 아니면 별로 구분 안 하는데.
이 스테이크는 그런 막입인 나도 저절로 고기를 음미하게 만든다.
단 한 번도 먹어 본 적 없는 종류의 풍미가 입에서 춤추고.
단순히 고기를 먹는 것뿐인데 몸에 활기가 도는 느낌이 든다.
“하아…….”
고기를 다 먹은 내가 아쉬움을 담아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자.
그런 내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손가락이 의아하다는 듯 몸체를 갸웃거렸다.
뭔가 기대하던 반응이 아니었던 걸까?
거, 막입이라 미안하게 됐네.
나에게 무슨 요리 만화에서 나오는 것 같은 리액션을 기대해선 안 된다.
그렇지만 손가락은 내 반응을 보는 건 부차적인 목적이었다는 듯 공을 살랑살랑 흔들었고.
맛있는 고기까지 얻어먹은 나는 더 이상 입을 싹 씻고 손가락을 무시하기가 힘들어졌다.
그래, 뭐 잠깐 놀아 주면 되겠지?
명절날 조카들 놀아 준다고 생각하자고.
투욱.
톡.
나는 맥없이 사이코패스가 던져 주는 공을 되돌려주지만, 그것만으로도 좋은 걸까?
마치 낙엽이 떨어지는 것만 봐도 웃는 나이인 것처럼 사이코패스는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냈다.
“:-)”
그래.
나는 지금 거대한 손가락과 캐치볼을 하는 게 아니라.
하와와 여고생쟝과 캐치볼을 하는 거다.
아니, 그렇게 생각을 해도 거대한 손가락과 캐치볼을 한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데?
바뀐 건 손가락의 주인이 하와와 여고생쟝이라는 사실뿐이다.
하지만 손가락의 주인이 여고생쟝이라는 게 중요한 게 아닐까?
나는 적당히 사이코패스가 만족할 때까지만 놀아 주려고 했지만.
사이코패스는 어째 지치거나 만족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신나게 공을 던져 댔다.
결국 사이코패스보다 내가 먼저 지쳐서 나가떨어졌고.
나는 대충 사이코패스에게 공을 던지고 블랑카와 교대하듯 자리를 바꿨다.
다행히 사이코패스가 이 명백한 거절의 동작을 알아보지 못하는 일은 없었다.
“:-(”
손가락은 아쉽다는 듯한 울음소리를 내며 슬며시 공을 거둬 갔고.
은근슬쩍 내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했다.
하지만 스테이크의 값은 이미 손가락과 놀아 주는 것으로 전부 치렀기 때문에 나는 슬쩍 손가락을 피했다.
그러자 갈 곳을 잃은 손가락은 블랑카의 머리를 쓰다듬고, 깜빡했다는 듯 블랑카에게도 내가 먹은 것과 동일한 고깃덩어리를 선물했다.
그릇도 없어서 블랑카가 양손으로 커다란 고기를 뜯어 먹는다는 괴상하면서도 조금 귀여운 풍경이 연출됐고.
조금씩 고기를 뜯어 먹던 블랑카의 몸이 본인의 마력으로 서서히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고기를 뜯어 먹던 블랑카도 자신의 몸이 갑자기 빛나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당황스러운 목소리를 흘렸다.
“흐앗?”
“블랑카, 왜 그래?”
“심장, 심장이…….”
블랑카는 심장이 욱신거린다며 가슴을 붙잡고 털썩 무릎을 꿇었다.
점점 반짝거리는 빛은 블랑카의 몸을 휘감아 가고.
나는 어찌할 줄 모르고 블랑카를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어쩌지? 일단 침대로 옮길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블랑카에게 손을 뻗었지만.
“:-I”
거대한 손가락이 쓰윽 뻗어 나와 내 행동을 제지했다.
순간, 나는 이것도 사이코패스의 짓인가 싶었지만.
거대한 손가락과 내 손이 맞닿았을 때 느껴진 감정으로 봐선 그것도 아닌 듯하다.
여전히 손가락은 나와 블랑카에게 악의라곤 단 한 점의 조각도 품고 있지 않았고.
호의 한 큰술에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기대감 한소끔만 느껴질 뿐이었다.
내가 손가락의 감정을 느끼며 혼란에 빠져 있던 그때, 번쩍거리며 블랑카의 몸을 감싸던 마력이 단숨에 사라져 버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그때, 블랑카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서 일어서고.
나는 블랑카의 무언가가 바뀌었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새파란 눈동자에 그녀가 자랑하는 머리색을 닮은 금색이 감돌고.
블랑카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블랑카? 괜찮은 거 맞지?”
“어, 응…….”
블랑카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조용히 그렇게 중얼거렸고.
블랑카가 무사히 잘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손가락은 블랑카의 머리를 쓰다듬고 사라져 버렸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블랑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야 하나?”
“뭐?”
“뭔가 새로운 경지에 도달한 느낌이야.”
블랑카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마력 창을 만들었고.
기존에 블랑카가 만들던 것의 몇 배는 되는 크기의 마력 창이 블랑카의 손에 나타났다.
마력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봐도 블랑카의 무언가가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설마 하지만, 나와 블랑카가 먹은 건 일종의 영약 같은 건가?
그런데 블랑카는 영약을 먹자마자 바로 깨달음을 얻는데, 왜 나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나?
지금 마력 없다고 사람 차별하는 거 맞지? 그렇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샐쭉 내밀었지만 블랑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 아니니까 다행이다.
“뭐, 나쁜 일은 아니어서 다행이네.”
나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그 전에 먼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블랑카에게 손목을 붙잡혔다.
잠깐, 이거 지난번에도 한번 경험해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잉간, 잉간…….”
블랑카는 또다시 내 이름을 부르며 나를 꽉 껴안는다.
어째서 또 스위치가 눌려 버린 건지는 몰라도, 별로 좋지 않다.
그날, 마지막에는 진짜 죽는 줄 알았으니까.
“저기, 블랑카? 조금 흥분한 것 같은데. 정신 차리자?”
“정신. 응, 정신 차려야지.”
아침부터 그런 지독한 꼴을 당하고 싶진 않았기에 나는 조심스럽게 블랑카의 이름을 불렀고.
블랑카는 지난번과는 다르게 조용히 중얼거리며 내게서 떨어졌다.
“흐읏, 흣…….”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나를 갈구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블랑카.
그런 블랑카의 얼굴을 보자 순간 심장이 덜컥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정신을 차리며 블랑카에게 말했다.
“이제 좀 진정했어?”
“아니. 전혀.”
“아하하…… 그래? 어, 어떻게 해야 진정할 것 같은데?”
물론 그 답은 블랑카도, 나도 알고 있었지만 나는 애써 답을 모른 척했고.
블랑카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정답이 아닌 오답을 일부러 고른 듯했다.
“잠깐, 잠시만 이대로 있으면. 곧 진정될 것 같으니까…….”
“그, 그래?”
블랑카는 다시 한번 나를 꽉 껴안았고.
나는 블랑카의 가슴에 짓눌리지 않게끔 까치발을 들며 동동거릴 수밖에 없었다.
반응하면 안 된다.
반응하면 안 된다.
반응하면 블랑카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까.
나는 필사적으로 마음의 평화를 유지했고.
블랑카 또한 나를 껴안는 것으로 마음의 평화를 간신히 되찾았다.
“후우, 후우…… 미안. 갑자기, 갑자기 충동을 참을 수가 없어져서…….”
명백히 불완전 연소한 얼굴로 블랑카는 이제 괜찮다며 내게 말했고.
나는 그런 블랑카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조용히 중얼거렸다.
“어, 참을 수 없으면. 딱히 참지 않아도 되는데…….”
“아냐, 아냐……. 지난번처럼 이성을 잃는 일은 절대 없을 거니까……!”
블랑카는 입술을 꽉 깨물며 그렇게 선언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블랑카의 선언을 대충 수긍했다.
“나, 나는 사냥하러 갈게!”
블랑카는 그대로 숲속으로 도망치듯 떠나 버렸다.
아니, 나는 생각보다 지난번의 일을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해도 블랑카 혼자서 너무 신경 쓰는 게 눈에 보인다.
블랑카가 생각하기에 내가 블랑카보다 서열이 위여서 일종의 하극상 같은 짓을 벌여서 충격을 먹고 자꾸만 거리를 벌리는 것 같은데.
이건 내가 뭐 어떻게 하든 블랑카의 반응이 바뀔 것 같지 않다.
내가 말 그대로 육탄 돌격을 하거나, 블랑카가 마음을 바꿔 먹거나.
그 두 방법 말고는 이 상황을 바꿀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전자의 방법은 내가 실행에 옮길 용기가 없어서 안 되는데.
블랑카가 마음을 바꿔 먹는 것도 한동안은 불가능한 일일 것 같다.
어찌 됐건 한동안은 블랑카와의 이 조금 불편한 거리가 계속 유지될 것 같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어느새 내 곁에 다가와 다리에 몸을 비비는 에포나의 털을 잠시 쓰다듬어 주고.
한숨을 내쉬면서 땅에 심은 씨앗들에 물을 주려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자, 나는 땅속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새싹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연둣빛 새싹(모든 새싹이 연둣빛은 아니었지만)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보며 나는 탄성을 터트렸고.
서둘러 새싹들이 죽지 않게끔 물을 듬뿍 뿌렸다.
그나저나 저 붉은빛 새싹은 붉은불꽃콩이었나?
이름에 걸맞게 새싹까지 붉게 물들어 있다.
붉은 새싹은 원래 자라나지 못하게 밟아 놔야 한다는데.
그런 시답잖은 농담을 속으로 하며 물 주기를 끝마치고, 달맞이풀을 심어 둔 곳으로 가 본다.
그러자 썩어 가기 시작하며 악취를 풍기는 내장 더미에서 피어나는 달맞이풀의 새싹들이 눈에 들어왔다.
무사히 새싹도 피어났겠다, 이제 남은 건 직접 재배하면서 각 작물들의 특성을 익히는 일만 남았다.
만능 사전만 봐선 알 수 없는 정보들도 있으니까 말이지.
혹시나 바람에 새싹들이 꺾이지 않게끔 나는 창고에 보관해 놨던 토끼 가죽들을 꺼내 와 일종의 가림막을 만들어 새싹들에 설치해 둔다.
자, 그럼 이제 뭘 할까?
아직 가구 제작용으로 말려 둔 통나무가 꽤 남아 있으니 가구나 만들어 볼까?
나는 잠깐 그런 생각을 했으나, 지금은 제단으로 사용되는 에포나의 집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직 나에게 가구를 만드는 일은 너무 어려운 일이다.
가구를 만드는 건 차근차근 쉬운 순서대로 실력을 먼저 키우고 난 뒤에 도전하자.
뭐, 나무 상자 정도는 나 같은 초보자여도 만들 수 있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톱을 집어 들었고, 그렇게 조심스럽게 나무 상자를 만들던 그때.
“……?”
무언가가 허공을 쓱 지나쳐 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뭐지?
의아해하며 슬며시 고개를 들고 무언가가 보인 곳을 바라보지만.
아무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고,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작업에 착수했다.
다시 상자 만들기에 집중하려는 찰나, 아까 봤었던 희끄무레한 흔적이 시야 한구석에 또다시 나타났고.
나는 서둘러 홱, 시선을 돌렸지만 내가 시선을 돌린 곳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역시 내 착각이었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역시 무언가가 강하게 느껴진다.
“뭔가 있는데.”나는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말했고, 그렇게 말하자 정말로 무언가가 집 안에 들어온 것 같았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계속해서 그 무언가가 있을 장소를 바라보지만.
아무리 바라봐도 그 무언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내 확신이 서서히 허물어져 가며, 역시 착각인가? 그런 생각을 가지자 강하게 느껴지던 무언가의 존재감 또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래, 역시 착각이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푹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작업에 착수하려 했지만.
또.
또.
또!
또다시 무언가가 자꾸만 내 의식의 한구석에서 느껴졌다.
“아씨, 도대체 뭐야?!”
작업에 집중하려 할 때마다 느껴지는 무언가의 존재에 나는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지만.
그 누구도 내 앞에 나타나지 않고 에포나만이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보이지도 않고, 그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지만, 분명히 무언가가 여기 있다.
아직까지도 별일이 일어나지 않는 걸 봐선 별다른 해는 없는 녀석 같은데.
이대로라면 내가 짜증 나서 화병으로 죽어 버리겠다.
반드시, 반드시 어떤 새끼인지 얼굴을 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이 방 안에 있는 것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희미한 인기척에도 집중하기 시작했다.
* * *
“아, 역시 잉간이한텐 효과가 없네요.”
클라인은 잉간이가 드래곤 스테이크를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지만, 역시 효과가 없다는 사실에 조금 낙담했다.
드래곤의 고기는 마력이 무척 풍부해서 훌륭한 보양식으로 쓰이지만.
역시 마력을 모으는 기관이 없는 인간한테 마력을 선물할 수는 없던 모양이다.
뭐, 이건 대충 예상하고 있던 결과니 적당히 넘어가고.
클라인은 잉간이와 공을 던지며 놀아 주려 했지만.
“어라?”
잉간이는 몇 번 공을 던지더니, 흥미가 없다는 듯 공놀이에서 관심을 잃어버렸다.
잉간이는 공놀이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잘 메모해 두고.
클라인은 리베리아산 켄토르에게도 드래곤 스테이크를 전달했다.
식사는 언제나 서열 순서대로.
클라인이 켄토르에게 스테이크를 전달하자, 조금 컸는지 켄토르가 고기를 갉작거리기 시작했고.
클라인은 그 모습을 보며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고, 잘라 줄 걸 그랬다. 너무 큰 모양이네요.”
그렇다고 먹던 걸 도중에 뺏어 가기는 미안하니까, 이대로 먹는 걸 지켜볼까?
그렇게 클라인이 생각하던 순간, 켄토르의 몸이 마력의 역류에 휩싸였다.
“어, 어라?”
클라인은 당황하며 서둘러 켄토르의 상태를 살폈고, 곧이어 켄토르의 상태가 깨달음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이미 몸은 완성이 됐는데, 가지고 있던 마력량이 부족해서일까?
드래곤 스테이크로 부족한 마력량을 보충하자마자 깨달음 상태에 돌입한 켄토르를 보며 클라인은 감탄을 흘렸다.
역시 순혈 리베리아산답다.
전투력 하나는 참 끝내주네.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켄토르가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어, 어? 안 돼! 건드리면 안 돼!”
켄토르가 어떤 상태인지 알지 못하는 듯한 잉간이를 서둘러 저지했다.
만약 클라인이 잉간이를 저지하지 않았으면 깨달음 중인 켄토르를 잉간이가 건드리는 대참사가 일어날 뻔했다.
인간형 생물체들이 깨달음을 얻을 때, 잘못 간섭했다간 깨달음은커녕 폐인이 될 수도 있으니까.
다행히 클라인이 잉간이를 저지한 것으로 켄토르는 무사히 깨달음을 얻었는지 역류하던 마력이 안정화됐다.
마력이 날뛴 탓인지 살짝 발정 스위치가 들어간 것 같지만, 잉간이가 적당히 해소해 줄 것 같으니 가만히 놔둬도 되겠지?
“크흠…….”
클라인은 서둘러 차원항에서 카메라를 돌리고, 가만히 켄토르와 잉간이를 지켜봤다.
하지만 이번에는 클라인이 기대하던 것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클라인은 안도와 안타까움의 한숨을 흘리며 촬영을 이어 나갔다.
이왕 보양식을 먹인 김에, 잉간이가 활기찰 때 최대한 영상거리를 뽑아내야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카메라를 바라보며 자세를 잡고, 오프닝 멘트를 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차원항 장인 클라인입니다! 오늘 제가 준비한 건 뭐냐면요, 으엑…….”
클라인은 평소 내던 감탄사와는 달리, 질색하는 소리를 내며 자신이 직접 채집한 정보 생물들이 들어 있는 상자를 카메라에 비췄다.
“요즘 슬슬 정보 생명체들이 많아지기 시작할 때가 됐죠? 정보 생명체를 좋아하시는 분들도 있으시고, 싫어하시는 분들도 있으시겠지만. 솔직히 지금 이 시기는 다들 싫으시죠?”
이 시기엔 야생 정보 생명체들이 발생하며 온갖 정보 오염을 사방에 흩뿌리고 다닌다.
당연히 클라인의 집도 마찬가지여서, 클라인도 정보 생물 퇴치제를 슬슬 꺼내서 설치한 상태였다.
“특히, 지금 이 시기는 ‘그게’ 나올 시기니까요. 솔직히 전 허상벌레들보단, ‘그게’ 더 짜증 난다니까요?”
클라인은 한숨을 내쉬며 ‘그것’의 짜증 남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작업에 집중하려 하면 자꾸 어디선가 나타나서 신경 쓰이게 하고! 잡으려면 잡을 수는 있는데, 잡기도 귀찮고…… 그렇다고 내버려 두면, 정보를 빨아 가거나 기생을 시도해서 참 귀찮단 말이에요. 솔직히, ‘그것’들은 멸종시켜도 생태계에 별문제 없다는데, 그냥 멸종시키는 게 모두가 행복한 길이 아닐까요?”
클라인은 그렇게 말하며 슬쩍, ‘그것’들이 잔뜩 들어 있는 상자의 안을 카메라에 비췄다.
“제가 미리 채집한 ‘그것’들인데요. 팔팔하게 움직이는 게 참 징그럽죠? 으, 역겨워.”
클라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시청자들을 향해 오늘의 콘텐츠를 드디어 소개했다.
“네. 이쯤 되면 슬슬 눈치채셨죠? 그렇습니다. 오늘의 콘텐츠는 바로! 짜증 나는 ‘그것’들을 잡아서 차원 생물들의 먹이로 주기! 입니다!”
짝짝짝.
스스로의 신체 말단을 부딪치며 소리를 내고, 클라인은 오늘의 콘텐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것’들이 우리 정보 생명체에게나 기생하거나 흡혈을 하지. 차원 생물들에게는 어떤 위해도 끼치지 못하거든요. 오히려, 차원 생물들에게는 좋은 먹이가 된단 말이죠?”
‘그것’들은 정보 생명체들에겐 꽤나 까다로운 해충이지만.
물질 생물들에게는 별거 없는 한 끼 식사에 불과하다.
아무리 정보를 많이 먹어서 통통해진 ‘그것’이라 해도 용써 봐야 마력을 조금 흡수하는 정도에 그치고 말이다.
그 때문에, ‘그것’은 물질 생물들에게 꽤 좋은 먹이로 쓰일 수 있다지만.
워낙 ‘그것’의 생김새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아 먹이로는 잘 쓰이지 않는다.
“아무튼! 그럼 지금부터 차원 생물들에게 ‘그것’을 줘 보도록 하겠습니다!”
각 차원항들에 그것을 풀어놓고 차원항의 거주민들이 그것을 사냥하는 모습을 클라인은 즐겁게 촬영했고.
이어서 잉간이의 차원항에도 그것을 투여할 차례가 되었다.
“자, 그럼 잉간이의 차례네요. 과연 지구산 인간은 ‘그걸’ 눈치채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요?”
클라인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잉간이의 차원항 안으로 ‘그것’들을 내려보냈다.
이번에는 호의뿐만이 아니라, 응원도 함께 담아서 말이다.
부디 잉간이가 ‘그것’들을 처리해 주길 바라며.
51화 잉간이에게 ‘그걸’ 줘 봤어요! 속 시원한 ‘그것’ 사냥 영상 보고 가세요!
무언가가 느껴지지만.
무언가가 느껴지지 않는다.
진짜 기묘한 감각이네, 이거.
뭐라고 해야 할까?
항상 의식의 구석에 무언가가 숨어 있는 듯한 기분이다.
무언가가 있다는 감각에 집중하면 확실히 무언가가 있다는 게 느껴진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감각이 흩어지면 금세 무의식 안으로 숨어 버리고.
내 의식이 건드리지 못하는 무의식에 숨어 있다가, 내 경계심이 옅어지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문제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할 때 자꾸 움직이는 게 느껴지니 신경이 쓰여서 집중하게 되고.
그 무언가가 다시 숨어 버리는 순환 고리가 반복된다는 거다.
이대로라면 이 무언가가 신경 쓰여서 뭘 하지도 못하겠다.
“으아, 제발 좀 나와!”
내 의식의 사각에 존재한다는 건, 내 시야의 사각지대에 존재한다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내 시야의 사각지대는 바로 내 뒤통수.
어딘가의 기묘한 모험을 하는 만화에 나온 것 같은 논리로 재빠르게 등 뒤를 휘적거려 봤지만.
당연히 내 손에 무언가가 잡히는 일은 없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생물을 도대체 어떻게 잡아?
그렇다면 생각을 조금 바꿔 보자.
지금까지 나는 그 무언가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바로 정신을 집중했지만.
일부러 다른 생각을 하며 그 무언가가 좋을 대로 움직이게 해서 위치를 알아내면 되는 게 아닐까?
눈으로 바라본다면 집중이 흐트러지는 일도 없을 테니까.
나는 슬며시 일부러 다시 상자를 만드는 작업에 집중하며 숨어 버린 무언가를 불러내 본다.
꾸물꾸물.
의식 한구석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최대한 눈치채지 못한 척을 하며 그 무언가에 집중을 보내지 않았고.
눈까지 꽉 감아 가며 최대한 그 무언가를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한 결과.
꾸물, 꾸물.
그 무엇인가가 무의식의 틈새에서 기어 나와서 활기차게 쏘다니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지만 나는 그것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고.
“잡았다!”
찰싹.
마치 모기를 잡는 것처럼 손으로 무언가를 후려쳤다.
손에 무언가가 닿는 느낌이 들자마자 나는 눈을 뜨고 서둘러 그 무언가의 정체를 확인했다.
이번에는 무의식의 저편으로 도망치지 못하게끔, 두 눈을 똑똑히 뜬 채로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바닥에서 바르작거리는 것의 정체를 확인하고 말문이 막혀 버렸다.
바닥에서 바르작거리는 무언가는, 그 사이코패스의 손가락같이 글자가 뭉쳐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사이코패스의 손가락은 ‘손가락’이라는 뜻의 문자가 덩그러니 움직이는 것이라면.
이건 뜻이 없는 온갖 문자들이 한데 뭉쳐져서 바둥대고 있었다.
그 기묘한 풍경에 나는 잠깐 멈칫하며 그 무언가를 붙잡지 못했고.
“키이이이익!”
문자의 집합체는 벌떡 일어서서 곧장 내 시야 밖으로 벗어나려 했다.
그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그 무언가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것은 내 예상보다 재빨랐고.
그대로 그것이 내 손아귀를 벗어나려던 찰나.
“크르르…… 왕!”
어느새 다가온 에포나가 그것을 물어서 단번에 제압해 버렸다.
“에포나, 고마워.”
“왕!”
감사의 뜻을 담아 에포나를 살짝 쓰다듬어 주고.
이번에는 놓치지 않도록 글자 뭉치를 에포나에게서 넘겨받아 한참 만들던 상자 안에 글자 뭉치를 던져 넣는다.
바르작거리는 모습이 바퀴벌레를 닮긴 했어도, 다행히 바퀴벌레처럼 벽을 기어오를 수는 없는 것 같다.
“으엑, 진짜 징그럽네…….”
나무 상자를 빠져나가려 하는 모습이 진짜 바퀴벌레가 생각나는 움직임이다.
그나저나 도대체 이건 정체가 뭐지?
사이코패스가 또 뭔가 집어넣은 걸까?
하지만, 이거는 뭔가 지금까지 사이코패스가 집어넣던 것과는 종류가 달라 보인다.
뭐라고 해야 할까?
무오 같은 녀석들과는 달리, 뭔가 사이코패스와 비슷한 느낌이 느껴진다.
그때, 문득 나는 어디선가 이것과 비슷한 것을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세계의 끝에서 보았던 세상 바깥의 세계.
그 세계에 넘쳐흐르고 있던 기괴한 생명체들.
당장이라도 생기가 가득한 이 세계로 들어오고 싶어서 버둥대던 바로 그 생명체들.
내가 생각하기에 눈앞의 글자 뭉치는 그 생명체들을 닮아 있었다.
움직이는 건 바퀴벌레를 닮긴 했지만 말이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글자 뭉치를 그렇게 정의 내린 순간.
“어, 어?”
꾸물텅.
단순히 글자들의 나열이었던 그 뭉치가 꾸물꾸물 형체를 이뤄 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꾸물텅 모습을 바꾼 글자 뭉치는, 내가 닮았다고 생각한 세상 바깥의 생물들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원래부터 이런 모습이었던 걸까, 아니면 이렇게 모습을 바꾼 걸까?
내가 의아해하는 사이에 나무 상자 안의 생명체는 촉수가 달린 생김새와는 다른 움직임을 보여 줬다.
촉수를 사용해서 움직일 것 같은 생김새지만, 어째서인지 상자 안의 생명체는 촉수를 사용하지도 않고 바퀴벌레처럼 빠른 속도로 상자 안을 돌아다녔다.
생김새와 괴리된 기괴한 움직임에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아니, 촉수를 달고 있으면 촉수를 사용하는 게 기본적인 예의가 아닌가?
무슨 다리도 없는 게 촉수도 쓰지 않으면서 돌아다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또다시 상자 안의 생물에 변화가 일어났다.
바퀴벌레처럼 돌아다니던 상자 안의 생물체가 능수능란하게 촉수를 사용해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우와악?!”
당연히 그 모습이 썩 보기 좋은 것이 아니었기에 나는 당황하며 조잡한 나무 판으로 나무 상자의 뚜껑을 닫아 버렸고.
나무 상자 안에서는 탈출할 구멍을 찾는 생물체가 콩콩거리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아, 잠깐만.
시야에서 이 녀석을 놓쳤는데, 이렇게 되면 다시 의식의 저편으로 숨어 버리는 건 아니겠지?
기껏 잡은 걸 다시 놓칠 수는 없다.
나는 집중을 풀지 않고 끊임없이 상자 안의 생명체의 모습을 떠올렸고.
다행히 상자 안의 생명체는 상자를 탈출하지 못했는지 촉수로 뚜껑을 콩콩 두드려 댈 뿐이었다.
근데 진짜 이건 정체가 뭘까?
만능 사전으로 검색을 해 보려 해도.
[검색 결과: 1억 4,328만 건]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양의 검색 결과가 튀어나온다.
다른 걸 검색할 때는 이런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왜 이러지?
너무 검색 결과가 많아서 도대체 어떤 정보가 옳은지 알 수가 없다.
블랑카는 뭐.
이런 걸 알고 있을 리가 없으니 제외하고.
자, 여기서 문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유자재로 변하는 무언가가 내 앞의 상자에 들어 있다.
이걸 어떻게 하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일까?
별다른 해는 없어 보이니 그냥 먹을 걸 줘 가며 애완동물처럼 키울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한밤중에 자다가 잡아먹힐 일 있나?
심지어 개를 키워도 자다가 발가락을 먹히는 일도 신문 기사로 간간이 나왔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걸 어떻게 그냥 놔둬?
그렇다면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그냥 이걸 죽여 버리는 것밖에 없는데.
여기서도 또 하나의 문제가 발생한다.
이걸 어떻게 죽이지?
그냥 푹 찌른다고 얘가 죽긴 할까?
무오처럼 웬만한 공격은 아무렇지 않게 버텨 낼 것 같은 비주얼인데.
몸이 뚫려도 죽은 척을 하다가 되살아날 것 같은 생김새다.
그래도 일단 시도는 해 보는 게 좋겠지?
조심스럽게 나무 상자의 뚜껑을 열고 돌창을 가져와서 정체불명의 생물의 몸 한가운데를 겨눈다.
“흡!”
기합을 내지르며 창을 내지르자, 움푹 생물체의 몸 한가운데가 움푹 파이지만.
아무리 힘을 줘 봐도 더 창끝이 들어가지 않는다.
“키에에에엑?!”
그렇지만 고통은 느끼긴 하는지 촉수를 사방으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젠장, 제발 촉수만 좀 꿈틀거리지 않으면 봐 줄 만하겠는데.
자꾸 저렇게 촉수를 꿈틀거리니까 징그러워 죽겠네.
촉수만 좀 꿈틀거리지 않을 수는 없나?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렸고.
“응?”
그와 함께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참 바르작거리던 촉수가 잠잠해졌다.
뭐야?
이거 갑자기 왜 이래?
순식간에 촉수가 잠잠해진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아까부터 이 녀석, 내가 추측하는 대로 변하고 있지 않아?
세상 밖의 생물체들을 닮았다고 생각하니 그런 모습으로 변하고.
움직임이 바퀴벌레를 닮았다고 생각할 때는 바퀴벌레처럼 움직이다가 촉수를 써서 움직여야 하지 않냐고 생각하니 촉수를 써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공격이 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니 내 공격이 통하지 않았고 말이다.
그렇다면 설마 하지만 이 녀석은 내가 생각하는 대로 모습을 바꾸는 생명체 같은 건가?
쿡쿡, 창끝으로 이 녀석을 찔러 대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고.
그렇다면 내 공격이 모두 잘 통한다고 생각하면 대미지가 제대로 박히는 게 아닐까?
단지 생각만 하는 거니까, 그렇게 생각해 보지 않을 이유는 없다.
저건 바람만 불어도 죽는 개복치다.
내가 툭 치기만 해도 죽을 거다.
나보다도 약한 생태계의 최하위다.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나는 다시 창을 내질렀다.
“흡!”
팍.
그러자 단번에 창이 상자 안의 녀석의 몸을 꿰뚫었고.
나는 내 생각이 옳았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상자 안에서 정체불명의 생명체는 그대로 죽어 가는 듯 보였고.
원래라면 이거의 사체를 어떻게 써먹을 방법을 찾아봤을 테지만.
워낙 생김새가 징그럽다 보니 도저히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고.
결국, 나는 나중에 밖에 가져다 버리려 사체를 나무 상자 안에 방치해 뒀다.
다시 내가 상자를 만드는 작업에 열중해 있던 사이, 내 의식 속에서 그것의 존재는 서서히 사라져 갔고.
마침내 내 의식 속에서 그것의 존재가 거의 다 지워졌을 즈음.
“여긴 안 돼.”
문득 귓가에 익숙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과 함께.
털썩.
내가 사체를 방치해 뒀던 상자가 바닥에 쓰러지고.
그 안에서 입가에 무언가를 잔뜩 묻힌 상태의 에포나가 튀어나왔다.
“에포나?”
“왕!”
에포나는 입가에 말 그대로 글자들을 잔뜩 묻히고 있었고.
나는 그제야 상자 안에 방치해 둔 무언가의 사체가 떠올라 에포나가 튀어나온 상자로 다가가 안을 살펴봤다.
그러자 그 안에 있던 사체는 사라지고, 활자 몇 조각만이 바닥에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이건 설마…….
“에포나, 지지! 지지! 그거 먹는 거 아냐!”
나는 서둘러 에포나가 삼켰을 정체불명의 생물을 게워 내게 하려 했지만.
에포나는 입을 앙다물고 내 얼굴을 바라보며 슬쩍 눈꼬리를 구부릴 뿐이었다.
* * *
“마력이 없어서 그런지, 진짜 감각이 뛰어나긴 하네요!”
대부분의 정보 생명체는 마력을 통해서는 잘 감지되지 않는다.
억지로 감지하려고 하면 감지할 수는 있지만, 대부분의 생명체들이 평소에 펼쳐 두는 마력 감지로는 탐지해 낼 수 없다.
하지만 지구산 인간에게는 마력이 없어서 그런 걸까?
클라인이 투여한 ‘그것’이 활동하려고 할 때마다 귀신같이 그것을 눈치채서 그것의 활동을 억제했다.
“음, 잉간이에게도 저게 짜증 나긴 한가 보네요.”
클라인이 잉간이에게 투여한 ‘그것’은 생물체의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숨어들어 흡혈을 시도하는 정보 생명체.
그것이 무의식과 의식을 넘나들 때 기존의 생명체의 감각기관에 탐지될 때가 많은데.
대부분의 생명체들처럼 잉간이도 그것이 자신의 감각에 감지되는 것을 무척이나 언짢아했다.
결국 잉간이는 감각의 근원을 찾아내려 하는 것인지 이것저것 시도를 하는 것처럼 보였고.
결국, 자신의 감각을 억지로 차단하는 식으로 그것을 의식의 영역으로 끌어냈다.
“조금 궁금하네요. 지구산 인간은 어떻게 정보 생명체를 사냥할지, 정말 기대돼요.”
고밀도 정보와 접촉할 수 있게 되었으니 충분히 잉간이도 정보 생명체를 사냥할 수 있겠지.
대부분의 정보 생명체들은 물리적인 공격을 받을 일이 없어서 물리적 공격에 취약하니까 말이야.
클라인은 곧바로 잉간이가 늘 들고 다니는 도구인 창으로 그것을 사냥하는 장면을 연상했지만, 클라인의 생각과는 조금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어, 어? 지금 이거. 정보 가공 맞죠?”
클라인의 눈에 펼쳐진 건, 물리적인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도 정보 생명체의 정보를 가공하는 잉간이의 모습이었다.
클라인이 ‘그것’을 지금 그것으로만 부르는 것은, 일부러 정보 가공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뭐, 아무리 정보 가공이 일어나도 ‘그것’ 같은 정보 생명체가 클라인을 위협할 정도로 바뀌진 않겠지만.
잉간이에게는 위협이 갈 정도로 정보 가공이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보 가공이란 일종의 정보 오염이 심화되어 잉여 정보가 덧씌워지는 걸 넘어서 기존의 몸을 구성하는 정보가 가공되는 걸 뜻하는데.
지적 생명체라면 단순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것’ 같은 단순한 정보 생명체의 정보를 가공해 버릴 수 있다.
“우와. 마법을 통해서 정보 가공을 하는 인간은 봤어도, 생각하는 것만으로 정보 가공을 해 버리는 인간은 처음 보는데요?”
지적 생명체가 아닌 차원 생물들 중에서 생각만으로 정보를 가공할 수 있는 건 드래곤 같은 극소수의 종들뿐이다.
대부분은 마력이나 물리적 접촉이 있어야 정보를 가공할 수 있다.
그런데 잉간이도 그런 일이 가능할 줄이야!
이게 지구산 인간의 특성인지 잉간이 혼자의 특성인지는 지구에 대한 연구가 좀 더 진행되어야 알겠지만.
중요한 건 잉간이가 단지 생각하는 것만으로 정보를 가공할 정도의 정신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잉간이는 마치 전에도 정보를 가공해 본 적 있는 것처럼 자유자재로 그것의 정보를 가공했지만.
자신이 정보를 가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진 못한 것 같았다.
“아, 지금 보이시죠? 물리력이 갑자기 통하지 않는 거. 저게 생각을 통한 정보 가공의 단점인데요, 실수로 저렇게 이상하게 정보를 가공할 가능성도 있단 말이죠.”
자신이 정보를 가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으면 저런 식의 가공은 하지 않았겠지.
그렇지만 잉간이의 정신력과 지금까지 보여 준 모습을 봐선 곧 요령을 깨달을 것 같은데?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일부러 차원항 안의 상황에 개입하지 않았고.
클라인의 추측대로 잉간이는 곧 정보를 가공하는 요령을 깨달은 것 같았다.
기존에 자신이 가공했던 정보를 다시 재가공하며 푹, 자신이 들고 있는 창을 그것에 찔러 넣는다.
“그런데 여러분, 이거 아세요? 물질 생물들이 정보 생명체를 사냥할 때. 물리적 공격이 통한다고 생각해서 정보 생명체에게 공격이 통한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물질 생물들이 정보 생명체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무기로 다른 생물을 찌르면 상처를 입힐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신체 기관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정보 생명체들이 물질 생물들에 의해 머리가 잘리면 죽는 것도 그와 같은 이유다.
정보 생명체들은 사실 머리를 잘려도 죽지 않지만, 물질 생명체들이 머리가 잘리면 죽는다는 사실을 강하게 믿고 있어서 일종의 정보 가공이 일어나는 것이다.
클라인 또한 이 사실을 브리더 자격증을 공부하며 책에서 배우지 않았다면 평생 몰랐을 것이다.
“으음…… 그런데 입을 가져다 댈 생각도 하지 않네요? 정보 가공이 너무 이뤄져서 그런가, 경계심을 너무 샀네요.”
‘그것’들을 잉간이의 먹이로 제공하는 건 이걸 마지막으로 그만둬야겠다.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촬영을 멈추려 했지만, 아직 ‘그것’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어라? 정보 가공에 실패한 걸까요……?”
클라인은 의아해하며 다시 차원항 안을 관찰하기 시작했고.
살아남기 위한 ‘그것’의 발버둥이 클라인의 눈에 들어왔다.
최대한 자신의 정보를 긁어모아서 정보의 유출을 막고.
가장 근처의 생명체의 무의식 속으로 몸을 숨기려 한다.
당연히, 그것에서 가장 가까운 것은 잉간이었고.
그것은 잉간이에게 기생을 하려 시도했다.
“이런, 떼어 내야 하는데…….”
클라인이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
퍼석.
잉간이의 몸에 달라붙으려 하던 그것이 박살 나 바닥에 떨어졌다.
마치 무언가에 몸을 꿰뚫린 듯한 모습.
그대로 그것의 몸은 허공으로 사라져 가고.
클라인은 멍하니 자신이 본 현상을 중얼거렸다.
“이건. 잉간이의 생존 본능? 뭐 그런 것 같은데요……? 무의식적으로 자신에게 기생하려는 걸 막아 낸 걸까요?”
무의식으로 정보 생명체의 정보를 치명적인 수준으로 가공할 수 있다니.
클라인은 잉간이가 생각보다 그리 정보 생명체에게 약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물리적으로는 여전히 약했지만.
“후우, 다 끝났다.”
이것으로 오늘의 촬영은 끝.
더 이상 잉간이를 괴롭히면 정보 오염이 더 심해지거나 잉간이가 스트레스를 받을 것 같으니까.
그러고 보니 잉간이가 슬슬 핸들링에도 익숙해지고 있는데 정보 세척을 해 줘야 할 때가 아닐까?
일단 오늘 쌓인 스트레스가 해소될 때까지 좀 기다렸다가 정보 세척을 해야겠네.
그럼 이제 남은 건 편집해서 영상을 올리면…….
잠깐 커뮤니티나 좀 하다가 공부할까?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이 자주 방문하는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나 모험가인데, 이거 의뢰한 놈 어떤 놈이냐?]
-이 시국에 정보 전쟁 지역 너머에서 뭘 찾고 싶다는데, 미친놈 아님?
돈은 존나 준다는데, 이거 수락하는 게 좋을 거 같냐?
[인간 사육이 절대 주류 문화로 못 올라오는 이유.txt]
-솔직히 제일 큰 문제는 사육항충들하고 브리더임 ㅋㅋㅋㅋ
반려동물 시장은 개 품종 듣자마자 얼마인지 이야기보단 귀엽네요~ 이 소리 튀어나오는데 여긴 우리 애가 귀엽다고 말해도 가격 이야기부터 튀어나옴. 키우는 놈들부터가 지들 키우는 걸 생물이 아니라 돈으로 생각하는데 ㅋㅋㅋ
[귀여운 갤주나 보고 가라.]
-오늘부터 갤주는 나다.
“진짜 미친놈들 많네…….”
클라인이 오늘도 커뮤니티를 둘러보며 시간을 낭비하는 사이, 오늘도 시간은 째깍째깍 흘러갔다.
52화 오늘은 잉간이 정보 세척하는 날! 잉간이는 과연 정보 세척을 무서워할까요? (1)
그 기묘한 존재가 사라지고 난 뒤, 한동안 사이코패스는 접촉해 오지 않았다.
나야 사이코패스가 접근하지 않으니 편하지만, 블랑카의 입장에선 신님이 자주 강림하지 않는 것이니 또 다르게 느껴지나 보다.
“내가 뭔가 잘못한 게 있던 걸까……?”
“글쎄? 뭐, 신님도 바쁜가 보지.”
블랑카가 그렇게 우울해져 있는 사이, 나는 조금씩 집 안을 나만의 가구로 채워 가고 있었다.
“그것보다, 이거 봐 봐. 어때? 전에 만든 것보다 더 괜찮아 보이지?”
“서랍장이라고 하기엔 너무 칸이 좁은 거 아냐?”
“서랍장이 아니라, 문인데…….”
“다, 다시 만드는 게 좋을 거 같아.”
“응…….”
비록 눈에 확 띄는 변화는 없었지만, 나는 착실하게 어제보단 발전된 일상을 보내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렇게 사이코패스의 개입이 없는 평화로운 일상이 계속됐고.
해가 10번 정도 떠오르고, 땅에서 자라난 새싹들이 무럭무럭 성장하고, 늙은 펭귄 녀석이 자신의 자식에게 자신의 영역을 물려주고 바위산을 떠났을 무렵.
에포나에게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털갈이라도 하는 것처럼, 사방에 자신의 털을 흩뿌리며 다니더니.
“왕!”
전보다도 존재감이 진해진 모습으로 에포나는 내게 방긋 웃는 미소를 보여 줬다.
에포나의 몸에서 털이 빠지던 건 파충류들이 탈피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었던 걸까?
에포나는 전보다도 더욱 성장한 것처럼 보였다.
일단 몸집이 전에 비해 확실히 더욱 커졌지만, 가장 확연한 변화가 있다면 이것일 거다.
전에는 가끔씩 때때로 감정이 격해질 때만 꺼내 오던 촉수를 평상시에도 꺼내 놓게 된 것이었다.
뭐, 촉수라고 해도 그다지 징그러운 외형은 아니다.
멀리서 바라보면 포메라니안에 기다란 꼬리가 달린 것처럼 보일 정도의 외형이다.
그, 베헤모스가 휘두르던 털로 만들어진 방망이를 참고하기라도 한 걸까?
원래 에포나가 휘두르던 촉수는 털 따윈 없는 매끈한 모습이었는데 말이지.
뭐, 지금 모습도 귀엽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전의 모습도 보다 보면 그 모습만의 귀여움이 있었다.
어쨌든 그렇게 평상시에도 에포나가 촉수를 꺼내 놓게 되면서 일상에 몇 가지의 변화가 생겼다.
우선 첫 번째로, 에포나가 내 일을 돕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전에는 에포나가 나를 늘 졸졸 따라다니긴 했어도, 몸이 포메라니안의 형태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에포나는 늘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는데.
“블랑카, 저기서 바구니 좀 가져다줄 수 있어?”
“바구니? 어떤 바구니를 말하는 거야?”
“그, 잔뜩 흙투성이가 되어 있는 걸로…….”
“왕!”
“아, 아냐. 됐어. 에포나가 가져왔네.”
“아, 응…….”
평소, 내가 블랑카에게 부탁하는 사소한 심부름을 자신이 대신하기 시작했다.
꼬리 같은 촉수를 어떻게 다뤄서 여러 물건들을 들고 오는 모습은 참 위태위태해 보였지만.
그 모습이 퍽 대견했기에 나는 에포나가 내 일을 도와줄 때마다 에포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럴 때마다 에포나는 즐거운 듯 꼬리를 거세게 흔들었고 말이다.
그리고 그다음.
에포나의 꼬리-촉수는 생각보다 꽤 강력했다는 것이었다.
웬만한 나무판 정도는 단번에 꿰뚫고, 그 단단한 무오의 피부도 한 번에 꿰뚫을 정도였다.
“오우, 야…….”
단번에 촉수를 뻗어 무오의 몸을 관통하고, 그대로 무오의 몸 안의 마석을 흡수하는 에포나의 전투 방식.
어쨌든 에포나 덕분에 나는 블랑카의 호위 없어도 전보다 더 깊숙한 숲속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혼자서 다니지는 마. 에포나가 대처할 수 없는 녀석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뭐, 그러지 않도록 그리 깊숙한 곳까진 들어가지 않으니까. 그치, 에포나?”
“왕!”
“그래도…….”
블랑카는 그래도 안심이 안 되는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지만.
이 주위는 블랑카 덕분에 그리 위험해 보이는 짐승들이 나오지 않으니까.
깨달음 비슷한 것을 얻은 블랑카가 요즘 사냥해 오는 짐승들의 양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전에는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사는 정도였다면, 요즘은 아껴 먹는다면 2일 치 분량이 나올 정도니까.
이 정도라면 농사를 짓지 않아도 그냥 사냥만으로도 먹을 걸 충당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뭐, 너무 고기만 먹는 건 건강에 좋지 않다고도 하니까.
어쨌든 그런 블랑카의 사냥 실력 덕분에 집 주위의 짐승들은 아예 씨가 말라 버린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 세 번째.
때때로 에포나가 자신의 촉수를 내 손에 꽉 휘감아 올 때가 생겼다.
에포나에게 있어서 이건 일종의 애정 표현인 걸까?
에포나가 한번 내 손을 휘감으면 잘 놔주지 않고 몇 분이고 내 손을 붙잡는다.
딱히 에포나의 스킨십을 거절할 이유도 없고, 나도 에포나와 스킨십을 하는 게 좋아서 거절하진 않지만.
이상하게도 에포나가 자꾸 내 손을 휘감는 타이밍이 블랑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가 많다 보니 조금 불편하긴 하다.
대부분의 경우, 에포나는 내 손을 휘감으며 쭈욱 블랑카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어찌 됐든, 자신이 필요한 일이 점점 줄어든다는 사실이 블랑카의 트라우마 비슷한 걸 자극하기라도 한 걸까?
“저기, 잉간. 내가 뭐 해 줄 건 없어?”
사냥을 하고 와서 피곤할 텐데도 자꾸 우물쭈물하며 내게 뭔가 심부름을 받고자 하는 일이 늘어났다.
물론 사냥까지 하고 온 블랑카를 내가 더 고생시킬 수는 없어서 블랑카에게 뭔가 부탁을 하는 일은 없었지만 말이다.
“괜찮아. 늘 사냥을 도맡아서 해 주는 게 얼마나 고마운데.”
“그, 그래?”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블랑카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지만, 블랑카에게 단번에 내 진심이 전해진 것 같진 않고.
나는 블랑카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꾸준히 틈만 나면 블랑카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 결과, 블랑카의 심리 상태는 꽤 안정된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저, 저기. 잉간…….”
“응?”
“저기. 그.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뭔데?”
평소 내게 부탁이란 걸 잘 하지 않던 블랑카가 갑자기 내게 부탁할 게 있다며 말을 걸어왔다.
도대체 무슨 부탁을 하려고 그러지?
“그. 예전에 해 주던 마사지 있잖아……?”
“아, 그거? 그건 왜?”
“응. 그거. 그러니까, 음. 그거 다시 해 주면 안 될까?”
블랑카는 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변명하듯 자신이 그런 부탁을 한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더 이상은 그 촉수? 를 이용하기 그렇고. 거기에다가, 그. 뭐냐. 지난번에 그런 일 있었잖아? 내, 내가 생각해 봤는데. 앞으로 그런 일이 없으려면 내가, 어. 남자의 몸에 익숙해지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어. 어…….”
숨넘어갈 듯이 순식간에 내뱉은 블랑카의 변명 아닌 변명을 요약하면 이런 건가?
대충 더는 저 빌어먹을 촉수 마사지기를 이용하지 못하겠다.
뒤에 있던 변명 아닌 변명은 어, 음.
맞는 말이긴 하네.
“어, 응. 뭐, 그 정도쯤이야…….”
블랑카가 부끄러운 듯 말해서 그렇지, 사실 마사지 정도는 별로 이상한 게 아니잖아?
그렇겠지?
“지, 진짜? 정말로?”
“뭐, 이상한 걸 부탁하는 것도 아니잖아?”
“……응. 그렇지.”
“……?”
어째서인지 블랑카가 내 시선을 피하지만.
뭐. 아프다는데 마사지를 안 해 줄 수도 없잖아?
그리고 그 마지막.
“후훗.”
나는 어째서인지 가끔씩 꾸던 보랏빛 악몽을 매일같이 꾸게 되었다.
꿈속의 내용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무언가가 내 몸을 잔뜩 만지작거린 것 같은 끈적한 감각만은 남아 있었다.
그런 평화롭다면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던 와중, 잠에서 깨어나자 정말 오랜만에 사이코패스의 기척이 진하게 느껴졌다.
이제는 사이코패스의 기운에 압박감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익숙해졌다.
이번에는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나는 긴장하며 슬며시 집 밖으로 나왔고.
평소와는 달리, 긴장된 기색의 사이코패스의 손가락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도대체 뭘 하려는 거지?
나는 가만히 눈을 치켜뜨며 손가락을 관찰했고.
사이코패스는 내게 이리로 오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오늘도 언제나처럼 하이 파이브 같은 걸 원하는 거려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무 의심 없이 손가락에게 다가갔고.
내가 멍하니 방심해 있던 순간.
홱.
손가락이 촉수처럼 쭉 늘어나며 내 몸을 휘감았고.
그대로 나는 손가락에 붙잡힌 채로 허공으로 끌려 올라갔다.
“어, 어?”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는 발버둥도 치지 못하고 그대로 손가락에 붙잡혀 당황스러운 목소리만 외쳤고.
“이, 잉간?”
“왕! 왕!”
저 아래에서 당황한 블랑카의 목소리와 거세게 짖는 에포나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이대로 나를 떨어트려 죽일 생각은 아니겠지?
나를 어디로 데려갈 생각이야?
그런 내 혼란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해서 내 몸은 하늘 저 높이로 상승했고.
이윽고, 사이코패스가 물건들을 집어넣거나 가져갈 때 사용하던 회색 안개 속으로 내 몸이 삼켜졌다.
잠깐 지독한 두통이 느껴진 후.
나는 꽉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러자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조금 전까지 내가 머물러 있었던 세계의 모습이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답은 간단했다.
사이코패스가 나를 어항 밖으로 꺼낸 것이다.
말로는 집에 보내 달라고, 이곳에서 꺼내 달라고 외쳤던 나였지만.
실제로 어항 밖의 세계로 나가게 되니, 내가 제일 먼저 느낀 것은 기쁨이 아닌 공포였다.
어항 밖의 세계는 너무나도 광대하고, 내게 수많은 정보들을 보내왔다.
인류의 그 어떤 단위를 써도 쉽사리 재지 못할 것 같은 거대한 평야.
그리고 그 평야 사이사이에 세워진 거대한 건축물들.
마지막으로.
그 모든 건축물들보다 거대하고 방대하게 느껴지는 사이코패스.
간신히 용기를 내며 사이코패스의 얼굴을 바라보고 싶어도, 내 시각이 닿을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내가 두려워하는 사이, 나를 손아귀에 쥔 사이코패스는 나를 들고 어디론가 성큼성큼 이동했다.
사이코패스가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내 시야에 보이는 풍경이 눈에 띄게 달라지고.
나는 내게 흘려 들어오는 수많은 정보들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 같았다.
마치 내가 아니게 될 것만 같은 위태로운 감각.
이 수많은 정보들 중에서 나만의 정보를 찾아내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고.
눈을 감고 한 가지 감각을 차단해도 내게 밀려드는 정보량에는 별반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눈을 감아서 다른 감각기관들이 더 민감해져서 덮쳐드는 정보량이 더욱 많아진 것 같다.
그렇게 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사이.
“괜찮아.”
낯익은 끈적한 목소리가 내 귓가에 달라붙었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내 앞에 보랏빛 그녀가 나타나 나를 꼬옥 안았고.
“나는 너만 바라보니까. 너도 나만 바라보면 돼. 알겠지?”
그녀가 내게 속삭이는 말이 어찌나 안심되던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수긍했고.
차츰차츰 그 수많은 정보 안에서 나만의 정보를 찾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마냥 나를 도와주는 것만인 것은 아닌 게,
“흐읏?!”
“흐응.”
그녀는 장난기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때때로 나의 정보에 그녀의 정보를 뒤섞는 짓을 저질렀다.
서로의 정보가 뒤섞이는 기묘한 감각에 그녀가 장난을 칠 때마다 새된 신음을 흘렸다.
나는 어떻게든 그녀의 장난을 견뎌 내며 간신히 나의 정보를 인식하는 데 성공했고.
그러자 그녀는 아쉬운 듯한 미소를 지으며 내 이마에 입을 맞추며 떠나갔다.
“흐억!”
다시 눈을 뜨고.
나는 어느새 내 몸을 휘감고 있던 촉수 같은 손가락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나를 거대한 구덩이에 내려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듯한 거대한 구덩이에서 나는 조용히 주위를 둘러보며 사이코패스의 흔적을 찾아보지만.
때때로 어디선가 진동이 울려 퍼지는 걸 제외하면 사이코패스가 어디 있는지 느낄 수 없었다.
나를 가지고 노는 게 재미없어져서 나를 버리려는 걸까?
사이코패스가 나타나질 않자 나의 불안은 점차 커져 갔다.
그리고 그 불안은, 무척이나 괴상하게도.
다시 나타난 사이코패스의 모습을 보자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구덩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더니, 구덩이 위로 사이코패스가 내가 잘 있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얼굴을 드리운다.
눈.
그 눈이 나를 내려다본다.
구름고래가 나를 도와줬을 때 마주쳤던 바로 그 눈이다.
하지만 그때와는 달리 나는 쏟아지는 정보들에 머리를 싸매는 수준에서 버텨 낼 수 있었다.
그나저나, 이 사이코패스는 도대체 내게 뭘 하려고 하는 것일까?
다시금 불안감이 차오르고.
내 불안감이 차오르는 것과 함께, 구덩이 안으로 무언가가 쏟아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정보였다.
너무나도 방대한 양의 정보.
방대한 것뿐만이 아니라 밀도마저 꽉 들어찬, 살아 숨 쉬기 일보 직전의 정보들.
질과 양 두 가지 면에서 너무나도 압도적인 정보들이 내게 쏟아지더니.
나는 그대로 정보의 파도에 휩쓸렸다.
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정보의 바다에 둥둥 떠다니며 정보들이 쉴 새 없이 내 몸에 부딪친다.
너무나도 나 자신과는 다르다는 것이 느껴지는 정보들이었기에.
나 자신과 헷갈릴 일은 없었지만.
대량의 정보에 휩쓸리는 일은 그리 좋은 기분을 자아내지 않았고.
마치 깊은 바닷속에 빠진 것만 같은 두려움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무언가라도 붙잡기 위해 나는 손을 허우적거렸고.
그때, 사이코패스의 몸이 슬며시 정보의 파도 속으로 밀고 들어와 내게 든든한 구명줄이 되어 주었고.
나는 정보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게끔 필사적으로 손가락을 붙잡았고.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와 수많은 긍정적인 감정들이 내게 온전히 전달됐다.
내가 떨지 않게끔 도와주려는 사이코패스의 호의가 느껴진 덕분에 나는 차츰 안정을 되찾아 갔고.
서서히 정보의 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사이코패스의 손이 나를 들어 올렸다.
사이코패스는 내게 미안하다는 듯이 젤리들을 내 품 안에 잔뜩 안겨 줬고.
나는 젤리들을 꽉 껴안으며 슬쩍 항의의 표시로 손가락을 걷어찼다.
“:-)”
그러자 언제나처럼 태평한 사이코패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사이코패스는 나를 다시 편안한 나의 집으로 되돌렸다.
“흐아…….”
낯익은 세계로 다시 돌아오자 긴장이 풀린 나는 털썩 바닥에 쓰러져 젤리들을 떨어트렸고.
낯익은 발굽 소리가 다급하게 내 쪽으로 달려왔다.
“잉간! 괜찮은 거야?”
“보다시피. 다행히 별일 없었어.”
“네가 신님에게 불려 가고 며칠 동안 아무 소식도 없어서 얼마나 걱정했는데……!”
“잠깐, 며칠? 몇 시간이 아니고?”
블랑카가 말하길, 이 안에서는 내가 사라진 지 벌써 3일째라고 한다.
이곳의 시간과 저 바깥의 시간이 서로 다른 걸까?
뭐, 그럴 것 같긴 했어.
이제 와서 이런 것으로 놀랄 리는 없지.
그나저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근데, 블랑카. 잉간이 뭐냐?”
“응? 잉간이 뭐냐니?”
“아니, 아까. 너 나를 잉간이라고 불렀잖아.”
“그야. 잉간은 잉간이니까 그렇지……?”
“뭐?”
아니, 얘는 갑자기 왜 내 이름을 잊어먹은 거야?
“내 이름은 잉간이 아니야.”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이름이 잉간인 인간이 있을 리 없잖아?
* * *
말 없는 것들의 말을 애쓰지 않고 알아듣는 자는, 새로운 영역에 발을 들이며 여행을 계속했다.
53화 오늘은 잉간이 정보 세척하는 날! 잉간이는 과연 정보 세척을 무서워할까요? (2)
사람 이름이 어떻게 잉간이야?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 리가.
블랑카가 갑자기 왜 나를 그렇게 부르는 거지?
나는 그러한 의문을 담아 살짝 불쾌한 얼굴로 블랑카를 바라보았고.
블랑카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마주 봤다.
“아니…… 하지만. 잉간이 그랬잖아? 내 이름은 잉간이라고…….”
“아니, 내 이름은 잉간이 아니라니까?”
“아니, 하지만…….”
블랑카는 억울하다는 듯이 내 얼굴을 바라보고, 나는 갑자기 블랑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일종의 농담?
아니면 화풀이?
하지만 블랑카의 표정으로 봐선 진짜로 내 이름을 잉간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은데.
지금까지 내가 봐 온 블랑카가 갑자기 이런 질 나쁜 농담을 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
블랑카가 가짜거나.
아니면 내 기억의 어딘가가 잘못된 것이거나.
잘 생각해 보자.
일단, 내 이름은 잉간이 아니다.
그건 단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전제 조건이다.
그럼, 지금까지 블랑카는 나를 어떻게 불러왔지?
……잉간?
아무리 내 기억을 뒤져 봐도, 블랑카는 처음부터 나를 잉간이라고 불렀었다.
그 외의 다른 이름으로 나를 부른 적은 없었다.
“잉간……?”
아냐.
맞아.
그 사실을 깨닫자 순간적으로 내 사고가 마비되고.
나는 필사적으로 잘못된 것은 블랑카의 기억이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하지만 내 기억마저 내가 세운 전제 조건과 동떨어진 증언을 하고 있는데?
모든 것이 나 자신을 부정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잉간, 괜찮은 거 맞지……?”
“그만.”
“어?”
“그렇게 부르지 마. 잠깐만.”
나는 창백해진 얼굴로 털썩 바닥에 주저앉아 내 기억을 필사적으로 뒤진다.
내 이름은 잉간이 아니다.
내 이름이 잉간이 아니라면, 진짜 내 이름은 뭐지?
내 이름이 잉간이 아니라면 진짜 이름이 뭔지는 알고 있을 거 아냐?
내 이름.
내 진짜 이름.
내가 불려야 하는 이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곳에 온 후의 기억을 뒤져 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 전.
방 안에 틀어박혀 있던 때의 기억까지 뒤져 본다.
없다.
아무리 뒤져 봐도.
분명히 내가 불리던 이름이 있었을 텐데.
없어.
없다고.
아무리 기억해 내려 해도 처음부터 없던 것을 기억해 낼 수는 없는 거다.
내 이름은 처음부터 없었어.
아니, 분명히 이름이 있긴 했었다.
하지만하지만하지만.
아무리 기억해 보려 해도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걸.
무저갱에 추락하는 듯한 한없이 끔찍한 감각이 등골에 느껴지고.
내가 누구인지 모르게 된다는 끔찍한 일에 나는 어린아이처럼 눈물 흘릴 수밖에 없었다.
“흣, 흐윽. 흐윽. 흣……?”
그렇게 내가 눈물을 흘리던 와중, 누군가가 가만히 나를 껴안고 토닥였다.
블랑카가 기도할 때처럼 무릎을 꿇고 나를 껴안고 내 등을 토닥이는 것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그건 나중에 생각해도 되는 거니까. 별일 아냐.”
“별일, 별일이 아니야?”
“응. 별다른 일이 아니니까. 침착해. 자, 후우. 후우. 따라 해.”
블랑카의 인도에 따라 가빠지던 호흡을 정돈한다.
호흡은 정돈했어도, 공포심이 남아 있는 것은 여전해서 나는 블랑카를 필사적으로 껴안았다.
“이름이 갑자기 기억나지 않아서 놀란 거지?”
“으, 응. 그런. 그런 거야. 흐윽…….”
“괜찮아. 누구나 가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진정해. 한숨 자고 일어나면, 다시 기억날 거야.”
“그, 그, 그럴까?”
“응. 그럴 거야. 그러니까, 진정해.”
한숨 자고 일어나는 것 따위로 생각날 리가 없는데도.
이런 상황에서 나를 안심시키는 블랑카의 속삭임은 너무나 달콤해서 스스로를 그렇게 속인다.
자고 일어나면 다 기억날 거라고.
이건 가끔 일어나는 발작과 비슷한 거라고.
그러니까.
다 괜찮을 거라고.
그렇게 자신을 속이자 정말로 괜찮아진 기분이 들었고.
나는 그제야 블랑카를 꽉 껴안은 손을 놓을 수 있었다.
블랑카가 살짝 아쉬운 듯한 기색으로 나와의 포옹을 끝내고.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블랑카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고마워. 블랑카. 고마워.”
“이제 좀 진정이 돼?”
“응. 갑자기, 갑자기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게 생각나서…….”
“그래. 누구나 그러면 당연히 당황할 거야. 괜찮아.”
블랑카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끝까지 나를 안심시키려 했다.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 결론을 뒤로 미루는 행동이었지만.
그것은 무척이나 내게 안심을 가져오는 일이었다.
한결 진정한 나는 분위기를 바꿀 겸, 문득 아까부터 마음에 걸리던 것을 블랑카에게 물어봤다.
“저기, 블랑카.”
“응?”
“묘하게 익숙해 보이던데. 뭐, 이럴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배우기라도 한 거야?”
나는 별생각 없이 던진 질문이었지만, 블랑카에게 있어서는 정곡을 찌르는 듯한 질문이었나 보다.
블랑카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더니, 슬픈 기억을 떠올리는 듯한 목소리로 조용히 내 질문에 대답했다.
“뭐…… 기사단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필수적으로 배워야 하거든.”
“어?”
“뭐, 실전에는 그리 쓸모없었지만 말이야. 아무리 진정하려고 해도, 실제 상황에서 진정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
무언가 지뢰를 건드려 버린 것 같네.
그러고 보니 블랑카가 이곳에 오게 된 계기가, 사고를 당해서였었지?
블랑카가 하던 말로는 동료들도 함께 있었던 것 같은데, 블랑카만이 이곳에 있다는 것은.
“……그래?”
“응. 그렇더라고.”
다시 어색한 침묵이 블랑카와 나 사이에 감돌고.
그 침묵을 깨려는 듯 블랑카는 나처럼 또 다른 주제를 꺼냈다.
“맞아. 그러니까…….”
“이름이 아직 기억 안 나니까, 지금은 그냥 잉간으로 불러도 돼.”
“응. 그럼. 잉간, 네가 사라지고 에포나가 집 안에서 나오지 않는데. 어떻게 좀 해 봐. 내가 아무리 먹을 걸 주려고 해도 네가 만든 개집……? 거기서 안 나오는걸?”
그리고 이번에는 블랑카가 지뢰를 밟을 차례였다.
“……에포나?”
에포나?
그건 또 누구야?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나와 함께 생활하던 사람은 블랑카밖에 없었는데?
블랑카는 내 반응을 보고 내가 에포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는지, 내게 에포나의 모습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 네가 개? 라고 말한 거하고 비슷한 건데. 막 모습이 자유자재로 변하는 생명체…….”
“개? 모습이 자유자재로 변하는 게 개라고?”
“아니. 모습이 개하고 닮았다는 거지. 네가 에포나라고 부르던…….”
또다시 내가 잊어버린 사실이 있던 걸까?
하지만 이번에는 뭔가 다르다.
아무리 기억을 뒤져 봐도 에포나라는 생물체와 내가 생활한 기억은 없다.
가만히 앉아서 기억의 모순을 뒤져 보면 무언가를 알아챌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가만히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모르겠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블랑카에게 에포나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려 할 때.
“왕!”
개가 아닌 다른 생물이 개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듯한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포메라니안인 척하는 무언가가 내게 반갑다는 듯 뛰어왔다.
나는 그런 정체불명의 생명체의 등장에 깜짝 놀라며 블랑카에게 외쳤다.
“저, 저게 뭐야?!”
“저게 에포나야. 잉간.”
“저게, 저게 에포나라고?”
블랑카가 에포나라고 소개한 생명체는 내 주위를 반갑다는 듯 뛰어다니고.
나는 그 기괴한 모습에 얼빠진 듯 괴생명체를 바라봤다.
내가 자신이 누군지 알아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걸까?
괴생명체는 나를 바라보며 불만스럽다는 듯이 꼬리처럼 흔들리는 촉수를 바닥에 내리쳤다.
“왕!”
불만스럽다는 듯 그렇게 짖어 봐도 괴생명체의 정체가 무엇인지 생각나지 않고.
오히려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 머리가 다시 지끈거리기 시작하자.
폴짝.
괴생명체가 뛰어올라 내 몸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어, 어? 블랑카, 이것 좀……!”
나는 당황하며 블랑카에게 도움을 구했지만, 블랑카는 쓴웃음을 지으며 나를 애써 무시하고.
그대로 괴생명체가 내 목덜미에 달라붙더니, 무언가가 내 목을 가볍게 문 듯한 따끔한 통증이 느껴진다.
“윽?”
에포나가 내 목을 깨문 것일까?
어째서인진 몰라도, 조금 전까지 불길하게 쿵쾅거리던 심장박동이 편안하게 가라앉고.
“……에포나?”
“왕!”
나는 조심스럽게 에포나의 이름을 불렀다.
에포나는 내게 방긋 웃어 보이더니. 약간 화가 난 것인지 슬쩍 내 목덜미를 다시 물고는 내 목에서 내려왔다.
조금 전까지 혼란스럽던 모든 상황이 단번에 정리된 것 같다.
나는 어째서 에포나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있던 걸까?
그 사이코패스가 내게 무슨 짓을 했던 걸까?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에포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블랑카는 조심스럽게 내게 다가와 내 상태를 물었다.
“잉간, 이제 좀 괜찮아?”
“어. 이제 괜찮아. 응.”
다시 원래의 기억들이 떠오르며 내게 찾아왔던 혼란은 완전히 사라졌다.
블랑카는 나를 여전히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그런 블랑카의 걱정을 해소하려고 일부러 활기차게 웃었다.
“괜찮으니까, 밥이나 먹자. 네 말대로라면 내가 3일이나 사라진 거라며? 3일 만에 밥 좀 먹어야지.”
“어, 응.”
블랑카는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지만, 나는 방긋 웃는다.
나 또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모르는데, 블랑카에게 제대로 된 설명을 들려줄 수 있을 리 없으니까.
그리고 그날 밤.
“……너무해.”
“흐윽……?”
나는 악몽 속에서 잔뜩 토라진 듯 보이는 그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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