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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게 부족한 때에 먹을 걸 선물해 주기도 하고, 강력한 힘이 필요할 때 아머드 슈트 같은 무구를 선물하기도 한다.
물론 대부분은 그 상황에 쓸모없는 잡동사니가 선물되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때때로는 괴물도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너희 동네는 사람 살 만한 동네가 못 돼.”
“하하,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블랑카의 설명에 내가 혀를 내두르자, 블랑카는 쓴웃음을 지으며 내게 자조했다.
“조상님들의 숙원이 신들의 전장에 되돌아가는 것인 이유를 이제 알겠지?”
“그럼, 당연하지. 아, 그럼, 여기 와서 제일 좋은 점은 뭐야?”
“제일 좋은 거? 역시…… 맨날 갑옷을 입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거?”
블랑카와 내 시선이 벽에 세워진 아머드 슈트로 향한다.
부모님의 강요로 항상 저 갑옷을 입고 다녔다고 했었나?
“그러고 보니 저거, 온도 조절 장치가 고장 났다고 했나?”
“응. 그래서 전신을 덮으면 거의 쪄 죽을 것 같아. 어휴.”
“뭐, 고칠 방법은 없는 거야?”
“너무 심하게 망가져서 무리야. 아예 온도 조절 장치가 박살 났거든. 리베리아 최고의 대장장이에게 수리를 맡겨 봤는데, 무리라고 거절당했어.”
“……그래? 그건 좀 아쉽네.”
아니, 아쉬울 필요가 있나?
이곳에선 더 저 갑옷이 필요하지 않을 텐데.
블랑카 또한 굳이 갑옷을 고칠 생각은 없는지 피식 웃으며 대화의 화제를 바꿨다.
“그럼. 너한테도 물어볼게. 잉간, 너는 여기 와서 제일 좋은 게 뭐야?”
“나? 좋은 게 없는데?”
“그래도 하나만 꼽자면?”
진짜, 원래 내 방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이런 야생에 현대인을 던져두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야.
그래도 뭐, 여기 와서 전보다 더 좋아진 게 있다면.
역시, 방 안에 있을 때와는 달리 다른 누군가와 관계가 이어진 거려나.
그런 생각이 슬며시 나도 모르게 내 입 밖으로 뛰쳐나왔다.
“……에포나하고 널 만난 거?”
“뭐?”
“아냐, 잊어. 대충 체력! 체력이 더 늘어난 거!”
순간적으로 입에서 무척이나 부끄러운 소리가 나온 것 같다.
나는 서둘러 다른 이야기로 블랑카의 흥미를 돌리려 했지만.
“에헤헤, 그거 다행이네. 나도 그런데!”
“……그래?”
“응. 나도 너를 만난 게 갑옷을 벗어서 좋은 거 다음으로 좋더라!”
해맑게 웃는 블랑카의 얼굴에 나는 말문이 잠시 막히고.
블랑카 또한 내 침묵이 옮았는지 뻘쭘한 표정으로 각자가 입을 다물던 그때.
“아얏!”
“켕!”
에포나가 살짝 내 손가락을 깨물고, 내가 비명을 지르는 것과 함께.
번쩍.
또다시 블랑카가 만들어 둔 제단에서 빛이 나며 새로운 무엇인가가 나타났다.
“으엑, 뭐야. 이거……?”
“불닭……?”
새롭게 제단에서 나타난 건 시뻘겋게 타오르는 듯한 비빔면이었다.
아니, 이거 불닭 비빔면이잖아?
쥬튜브에서 매운 음식 먹방을 할 때 아주 인기가 넘치는 베스트 아이템.
이번에는 블랑카의 눈에도 불닭 비빔면으로 보이는 것인지 블랑카가 호기심 넘치는 눈으로 비빔면을 들썩거린다.
아마도 이것도 우리더러 먹으라고 준 거일 텐데.
뭐지? 우리가 매운 음식을 먹는 모습이 보고 싶은 건가?
여전히 사이코패스의 의도를 알 수가 없네.
“으엑, 냄새가. 냄새부터 매워…….”
블랑카가 불닭 비빔면의 냄새를 맡으며 경악하는 사이, 나는 조심스럽게 소스를 조금 찍어서 입에 넣어 봤고.
“으헥, 케핵?!”
“잉간?!”
나는 곧바로 물그릇으로 달려가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시는 수밖에 없었다.
“어우, 야. 저거. 사람이 먹을 게 아니다. 어우…….”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던 불닭 비빔면의 몇 배는 되는 강렬한 매운맛.
이건 도저히 못 먹겠다.
이걸 먹으면 분명히 며칠은 화장실을 갈 때 극한의 고통이 찾아올 거다.
아니, 어쩌면 이미 한 입 맛본 것으로 늦었을지 모른다.
나는 혀를 내두르며 불닭의 위험성을 경고했지만.
블랑카는 창백해진 얼굴로 비빔면을 한 움큼 입 앞에 가져다 댔다.
“야, 진짜 큰일 난다니까? 그냥 먹지 마!”
“그, 그래도 신님이 주신 음식인데. 한 입도 먹지 않을 수는…….”
블랑카는 꿀꺽 침을 삼키며 각오를 다지고, 자신의 몸에 마력을 두르며 결국 비빔면을 입안에 집어넣었다.
뭐, 그 결과는 딱히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아는 전개로 흘러갔고.
그런 나와 블랑카의 모습을 보고 만족한 것인지 사이코패스가 보낸 요리인지 뭔지 하는 무언가는 어느새 회색 안개가 집어삼켰다.
그리고 그날 밤.
예정된 고통에 잠깐 신음하고 벽 너머로 들려오는 블랑카의 눈물 섞인 비명을 애써 무시하며 에포나를 껴안고.
나의 집에서 처음으로 잠자리에 들었고.
“흐윽? 흣?”
“마사지는 나도 해 줄 수 있는데…….”
또다시 나타난 악몽 속의 여인의 촉수에 온몸이 칭칭 묶인 채로 마음대로 가지고 놀아진다는 어딘가 살짝 못된 꿈을 꾼 듯했다.
“흐어억……!”
다음 날 아침, 나는 숨을 들이켜며 잠에서 깨어났고.
슬쩍 하반신의 건강함을 확인한 뒤, 한숨을 내쉬며 아직까지 자고 있는 블랑카에게 들키지 않게끔 호숫가로 향했다.
오랜만에 빨래를 하며 아침을 보내던 와중, 나는 무언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
아무것도 없어야 할 하늘에, 동그란 무언가가 떠 있던 것이었다.
* * *
정보 생명체는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먹을 수 있다.
물질로 이루어진 음식도 그 안의 정보만을 빨아먹을 수 있고.
정보로만 이루어진 음식 또한 마음대로 먹어 치울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순수하게 정보로만 이루어진 음식을 더 선호하는 편이었고.
이번에 클라인이 잉간이에게 특식으로 주기 위해 준비한 음식 또한 정보로만 이루어진 음식이었다.
48b구역의 전통 음식, 이름하여 ‘추억의 매운맛’.
먹는 사람의 추억에 담긴 매운맛을 다시 느끼게 해 준다는 점에서 꽤나 인기가 높은 음식이었고.
쥬튜브에서도 꽤 조회 수를 잘 빨아먹는 음식이다.
클라인도 유튜브 초기에 조회 수를 빨아먹기 위해서 되지도 않는 먹방을 찍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너무 매워서 다 먹고 화장실에 가서 토했었지?
뭐, 추억의 매운맛의 유행도 이젠 다 지나갔지만 말이다.
그런데 최근, 꽤 재밌는 특성이 하나 알려졌단 말이지.
클라인은 조용히 보고 있던 커뮤니티의 글을 닫으며 카메라에 언제나의 인사를 건네며 영상 촬영을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차원항 장인 클라인입니다! 오늘 제가 준비한 콘텐츠는, 자쟈쟌~.”
클라인은 혹시라도 실수로 추억의 매운맛과 접촉하지 않게 조심하며 추억의 매운맛을 카메라 앞에 가져왔다.
“네, 그렇습니다! 이미 수백 번 사골이 빨아먹힌 바로 그것! 추억의 매운맛입니다~! 와아아!”
짝짝짝.
스스로 박수 소리를 내며 클라인은 카메라를 향해 오늘의 콘텐츠 설명을 시작했다.
“어째서 또 수백 번 우려낸 사골을 또 우리느냐! 그건 말이죠, 제가 최근에 재미있는 커뮤니티 글을 하나 봤단 말이죠?”
스윽.
클라인은 카메라 앞에 한 커뮤니티 게시 글을 비췄다.
[인간형 생물들도 우리가 먹는 거 먹을 수 있냐?]
-애완 오크가 허겁지겁 바닥에 떨어진 추억의 매운맛을 주워 먹는 사진.
-원래 못 먹는 거 아니었냐? 이거 뭐냐?
[댓글 5,234]
[??? 모임???]
[(대충 인간형 생명체가 몰라! 하고 외치는 사진)]
“짜쟌~ 네. 인간형 생명체는 추억의 매운맛을 먹을 수 있다는 글이었는데요. 과연 저 글의 내용이 사실일까요?”
이미 클라인은 다른 차원항의 인간들로 사실을 확인한 상태.
잉간이에게 무턱대고 사람이 먹는 음식을 줄 수는 없으니까.
“지난 제 영상을 보셨으면 알겠지만, 잉간이는 매운맛을 좋아하는 것 같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집 짓느라 고생한 잉간이에게 특식으로 추억의 매운맛을 줘 보도록 하겠습니다!”
클라인은 방긋 웃으며 조심스럽게 추억의 매운맛을 켄토르가 만들어 놓은 제단에 가져다 놨다.
“아, 맞다. 리베리아산 인간이나 사육자 숭배를 겪는 생물을 키우실 때의 팁인데요. 이렇게 사육 생물이 제단을 만들었다면, 뭔가를 넣고 싶을 때 제단에 넣어 준다면 사육 생물의 스트레스를 줄이는 데 큰 도움이 된답니다?”
사육 꿀팁을 전한 클라인은 그대로 잉간이와 켄토르가 추억의 매운맛을 맛보는 모습을 지켜봤다.
정보 그 자체로만 이루어진 음식인데도 잉간이와 켄토르는 맛있게 추억의 매운맛을 즐겼다.
“원래 물질 생명체는 정보 음식을 섭취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하지만 추억의 매운맛같이 섭취자의 정보를 읽고, 자신의 정보를 바꾸는 형태의 음식은 물질 생명체의 정보도 읽어 낼 수 있어요. 그 결과, 실제로는 밥을 먹은 게 아니지만 물질 생명체의 몸에는 새로운 정보가 새겨지는 거랍니다? 어찌 보면 이것도 일종의 정보 오염이라고 볼 수 있네요.”
클라인은 흐뭇하게 잉간이와 켄토르가 식사하는 장면을 지켜본다.
그때, 문득 클라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내 정보에 맞춰진 추억의 매운맛엔 잉간이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너무 매운 것 같으면 잉간이도 먹지 않을 테니 먹고 탈이 나는 일은 없겠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자신의 정보에 맞춰진 추억의 매운맛을 차원항 안으로 집어넣어 봤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 어? 아이고, 맵나 보다. 아이고…….”
잉간이는 재빠르게 맛만 보고 물러섰지만, 켄토르는 무식하게 몇 움큼을 먹어 치우더니 강렬한 매운맛에 몸부림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고. 이따 자기 전에 따로 치유 마법을 걸어 주든가 해야겠네요.”
뭔가 자기 때문에 켄토르가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아서 클라인은 켄토르를 걱정했다.
곧바로 클라인은 추억의 매운맛을 차원항에서 빼내고, 슬쩍 소스를 찍어서 먹어 봤다.
으윽, 이걸 옛날의 나는 어떻게 먹은 거람?
클라인은 그렇게 진저리를 치며 영상 촬영을 끝냈다.
그리고 클라인이 촬영을 끝마치자 때마침 벨 소리가 울렸다.
클라인이 주문했던 상품들이 도착한 것이다.
“네, 나가요~.”
클라인이 이번에 주문한 상품들은 차원항의 환경을 바꿔 줄 장치들.
전부 잉간이의 서식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장치들이다.
“잉간이가 좋아해 줬으면 좋겠네…….”
클라인은 조용히 택배의 포장을 뜯으며 문득 그렇게 중얼거렸다.
부디, 자신의 호의가 잉간이에게 민폐가 되지 않길 바라며.
42화 잉간이 차원항 환경 개선 프로젝트! 그 첫 번째는 과연?
전에 내가 기괴한 이세계물의 필수 요소로 검은 태양과 황량한 황야, 금이 간 하늘을 손에 꼽았는데.
그게 검은 태양을 보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는데 말이야.
티 하나 없던 하늘에 떠오른 검은 태양을 보며 내가 벙 쪄 있는 사이, 검은 태양이 깜빡거린다.
막 불이 들어오기 시작한 네온사인처럼 깜빡거리던 태양은 이윽고 자신의 빛을 사방으로 내뿜기 시작하고.
“윽.”
멍하니 태양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서둘러 눈을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검은 태양의 모습은 가짜였다는 듯 하늘의 태양은 새초롬하게 시치미를 떼며 고고히 빛나고 있었다.
갑자기 태양이 생겨난 이유는 도대체 뭘까?
뭐, 언제나 그렇듯 사이코패스의 짓이겠지만.
문득 떠오른 건데, 처음부터 태양이 없던 이유는 사이코패스가 태양을 붙잡는 데 시간이 걸려서 아닐까?
사람도 막 잡아 오는 녀석인데, 태양이라고 납치하지 못할 건 뭐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동굴로 돌아왔고, 어느새 깨어나서 동굴에서 아침 훈련을 하고 있던 블랑카와 마주쳤다.
보통 자기 전에 훈련하던데, 오늘은 어째 아침부터 훈련하네?
“야, 봤냐?”
“어, 어? 뭐어얼?”
훈련의 열기 때문인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블랑카는 새된 목소리로 내게 되물었고, 나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태양 말이야. 태양.”
“아, 아! 태양! 응! 봤지, 응! 천지창조의 순간을 내 눈으로 보게 돼서 정말…….”
블랑카는 허둥지둥 언제나의 신 찬양을 하기 시작했고, 나는 슬쩍 블랑카의 말을 중간에 끊으며 오늘 뭘 할지 질문했다.
“됐고, 블랑카, 넌 오늘 뭐 할 거야?”
“기도! 이런 광경을 보여 주신 리베리아 님께 기도를 드려야지!”
“그거 말고.”
“음…… 사냥?”
“사냥? 어쨌든 숲에 들어갈 거란 말이지?”
“그렇지. 갑자기 왜? 뭐 원하는 거라도 있어?”
블랑카는 갑자기 내가 오늘 뭘 할지 물어보는 게 이상한지 고개를 갸웃거렸고, 나는 블랑카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 전에 내가 보여 줬던 산딸기들 있지? 사냥만 하지 말고 그것들도 좀 모아 와 줘.”
“음…… 어느 정도?”
“그냥 보이는 만큼. 그렇게 많이 필요하진 않을 거야.”
“응? 먹으려는 게 아냐?”
“낚시 떡밥으로 써먹으려고.”
“낚시?”
블랑카는 고개를 갸웃하고, 나는 슬그머니 블랑카에게 활을 만들고 남은 말총을 내보였다.
“활 만들고 남은 거로 낚싯대나 만들어 보려고.”
“으엑…….”
블랑카는 또 자신의 꼬리털로 무언가 도구를 제작한다는 게 썩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을 찡그렸다.
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블랑카를 달랠 이야기를 꺼냈다.
“아까 만능 사전으로 찾아보니까, 물고기들이 호수에서 사는 거 같더라고.”
“물고기? 진짜? 내가 봤을 땐 호수에 아무것도 없던데?”
“뭐…… 만능 사전은 뭔가 있다고 했으니까. 대충 낚싯대를 던져두면 뭐라도 잡히지 않을까 해서. 지난번에는 내 팔뚝만 한 새우가 잡혔거든.”
블랑카는 내 이야기를 듣고 꿀꺽 침을 삼킨다.
자신의 꼬리털로 새로 도구를 만든다는 불쾌감과 맛있는 물고기를 먹고 싶은 식욕.
둘 중에 이긴 쪽이 어딘지는 너무나 명확해 보였다.
“크흠. 알겠어. 최대한 보이는 대로 모아 볼게.”
“오케이.”
블랑카는 그대로 숲속으로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고, 나는 조용히 낚싯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낚싯대라는 게 원체 단순한 구조다 보니 만능 사전을 보지 않고도 낚싯대를 만드는 일은 손쉬웠다.
낚싯대를 만들며 나는 조용히 생각했다.
좋아, 여기서 나가지 못한다는 걸 인정했고, 여기를 내 집으로 삼은 것까지는 좋다.
그럼 이제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만 신경 쓰며 유유자적하게 살아가?
그 방 안에서처럼?
무척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사이코패스가 나를 방 밖으로 억지로 꺼내서 화가 났지만 그와 함께 어딘가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안 돼.
바뀌어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방 안에 틀어박혀 있다가, 억지로 방 밖으로 끌려 나온 것이었으니까.
억지로 끌려 나온 게 마음에 들진 않지만, 이왕 끌려 나온 김에 전과 바뀌어 보자.
그렇게 생각하며 스스로 나서서 움직여 온 것이었지만.
이젠, 뭘 해도 꽉 막히는 기분이다.
마치 다시 방 안에 틀어박힌 것처럼.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낚싯대를 만드는 짧은 시간 동안 결론이 나올 리는 없었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낚싯대를 집어 들고 동굴을 나왔다.
뭐, 시간은 넘쳐흐른다.
적당히 낚시나 하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면 되겠지.
생각을 멈추지 않는 한, 언젠가는 답이 나올 테니까.
막 태어난 태양이 하늘 높이 떠 있을 때쯤, 나는 미끼로 사용할 젤리를 조금 챙겨서 호숫가로 향했다.
“왕!”
에포나는 곧바로 내 뒤에 바짝 붙어서 나를 따라왔고.
나는 적당히 낚싯대에 젤리를 미끼로 끼워 호수에 던졌다.
잔잔한 호수에 파문이 일며 작은 나뭇가지로 만든 낚시찌가 둥둥 호수 위에 떠다닌다.
에포나는 털썩 내 곁에 주저앉아 자신을 쓰다듬으라는 듯 나를 바라보고.
나는 피식 웃으며 에포나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생각에 빠져들었다.
나는 생각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생각을 멈추고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기만 한다면, 그건 짐승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
나는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다.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란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여기서 사람답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짐승이란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짐승과 사람이 다른 게 뭐지?
뭐, 파스칼 선생님의 말을 빌리자면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니까.
내가 짐승이 아니고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는 방법은, 내가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뿐인 걸까?
그렇게 따지자면 블랑카 같은 리베리아인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들도 나와 같은 인간이고,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리베리아인들은 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렇다면 리베리아인들은 신들에게 있어서 인간이 아닌 걸까?
하지만 나에게는 인간인데?
딱히 할 일이 없으니 자꾸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왜 대부분의 고대 철학자들이 직업이 없는 백수였는지 깨달을 것 같다.
할 일이 없는 사람도, 생각은 계속해야 하니까.
그렇다면 앞으로의 내 목적은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던 와중, 가슴이 욱신거리며 사이코패스가 나타났음을 내게 알려 온다.
하늘에 구멍이 뚫리며 사이코패스가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 허공에 휘휘 손을 내젓고, 다시 구멍 속으로 사라진다.
슬쩍 낚싯대를 확인해 보지만, 낚싯대에선 그 어떤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번엔 도대체 뭘 하려고 한 걸까, 저 사이코패스는?
하지만 아무리 사이코패스의 행동을 이해하려고 해 봤자, 나는 사이코패스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사이코패스를 사이코패스로 단정 짓는 것도 리베리아인들이 사이코패스를 신으로 생각하는 것과 동일한 게 아닐까?
사이코패스를 이해할 수 없다고 사이코패스라고 단정 짓는 것 역시 생각을 포기하는 행동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계속 이해해야 하는 걸까?
그렇지만 그건 너무 힘든 일이다.
차라리 그냥 생각을 포기하고 짐승으로 돌아가는 게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어째서?
이유는 모르겠다.
그저 그래야만 한다는 정체 모를 사명감만이 마음에 달라붙어 있을 뿐.
얼굴을 찌푸리며 정체 모를 사명감이 무엇인지 알아내 보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사명감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내긴커녕 내가 뭘 고민하고 있었는지도 희미해졌다.
내가 뭘 생각하고 있었더라?
아, 그래.
앞으로 뭘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지?
나는 절대로 짐승 따위가 아니다.
나는 인간이다.
그러니 나의 의무는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왕!”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해서 더욱 깊숙한 곳으로 나를 끌고 내려가던 상념을 에포나가 가볍게 짖어서 깨트린다.
“어, 어?”
그리고 나는 문득 낚시찌가 흔들린다는 사실을 깨닫고 서둘러 낚싯대를 들어 올렸지만.
“아이고, 꽝이네…….”
낚싯바늘에 꿰여 있던 미끼만 무언가가 홀라당 채 가 버렸다.
조심스럽게 투명한 호수 속을 바라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쩝, 오늘 낚시는 허탕인가?
하늘을 올려다보니 벌써 태양이 저물고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문자 그대로, 밝게 빛나던 태양은 서서히 빛을 잃으며 어둠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슬슬 돌아갈까?
지금쯤이면 블랑카가 오늘 사냥한 결과를 들고 돌아왔을 것이고,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밥을 먹기 위해선 지금부터 식사를 준비해야 한다.
“에포나, 가자.”
“왕!”
어째서인지 평소보다 더 달라붙어 오는 에포나를 품에 안고 아늑한 나의 집으로 돌아간다.
SF스러운 마구간이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숨을 후우후우 내쉬며 심호흡을 하고 있는 블랑카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블랑카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발굽으로 바닥을 여러 번 툭툭 걷어차고 있었다.
나는 그런 블랑카의 등을 툭 건드리며 말을 걸었다.
“오늘 수확은 좀 어때?”
“흐햣? 아, 와, 왔구나! 뭐어…… 언제나처럼 괜찮지.”
블랑카는 필요 이상으로 화들짝 놀라며 식탁에 놓인 오늘의 수확물을 가리켰다.
돌뱀 잔뜩에, 돌뱀 잔뜩, 그리고 산딸기들.“오늘은 돌뱀 특집이네?”
“들판을 좀 돌아다녔더니, 땅속에서 먼저 덮쳐 오더라. 그래서 매운맛을 보여 줬지.”
“여윽시 우리 블랑카가 최고다!”
“햣?”
언제나처럼 블랑카를 칭찬하며 등을 툭 건드렸지만, 평소와는 달리 블랑카는 몸을 잔뜩 움츠리며 새된 목소리를 냈다.
뭐야, 갑자기 왜 이래?
몸 상태가 안 좋나?
그러고 보니 얼굴이 평소보다 더 빨간 것 같은데.
“블랑카, 너…….”
“그, 그러고 보니 잉간! 너는 오늘 뭐 건진 게 있어? 오늘 물고기 먹을 수 있는 거 맞지?”
“미안. 하나도 못 잡았어. 꽝이야.”
“그,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블랑카의 몸 상태를 물어보려 했지만, 블랑카는 나보다 한발 빠르게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나는 굳이 블랑카를 더 추궁하지 않고 집 안으로 들어가려 걸음을 옮겼고, 블랑카의 옆을 스쳐 지나갈 때였다.
쏴아.
사이코패스의 등장과는 다른 기묘한 압박감이 전신에 느껴지고.
그 기묘한 감각을 느낀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압박의 근원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내 눈에는 하늘에서 고요하게 빛나는 거대한 달의 모습이 보였다.
아침에는 태양의 역할을 하던 무엇인가가, 밤이 되자 달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어떠한 흠집도 나지 않은 순수한 구 그 자체의 달이라는 게 이렇게 아름다웠던가?
저절로 입에서 달이 아름답다는 감탄사가 새어 나올 것 같다.
나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블랑카에게도 내가 본 풍경을 보여 주고자 했다.
“블랑카, 달이 참…….”
그렇지만 나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중간에 멈추는 수밖에 없었다.
달을 향해 뻗은 내 손가락을 블랑카가 난폭하게 잡아챘기 때문이었다.
“블랑카?”
욱신.
내 연약한 육체를 고려하지 않은 우악스러운 손아귀가 내 손목을 비틀고.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신음을 입 밖으로 흘리며 블랑카를 바라봤다.
“블랑카, 갑자기 왜 이래……?”
“…….”
그렇지만 블랑카는 손아귀를 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힘을 줘 가며 나를 밀어붙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블랑카의 모습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며 나는 입을 다물었고.
몽롱하게 빛나는 달을 배경 삼아, 눈을 시뻘겋게 부릅뜬 블랑카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 * *
대부분의 차원 생물들은 태양과 달이 있는 환경에 익숙해져 있다.
때때로 태양이 2개든가, 달이 2개라든가 아니면 달이 없거나, 심지어 태양이 없는 경우도 있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인간형 생명체들은 태양과 달이 있는 환경에서 살아왔고, 그런 환경에 익숙해져 있다.
뭐, 대부분의 경우에는 인공 불빛으로 낮과 밤을 조성해 주기만 하면 괜찮지만.
차원 생물들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위치에 인공 태양과 달이 있으면 스트레스를 덜 받게 해 주니까.
거기에 태양과 달의 마력은 대부분의 생물들의 생태에 큰 영향을 미친다.
사실, 클라인은 처음에 잉간이를 데려왔을 때부터 인공 태양을 설치하고 싶었다.
그러지 못한 이유는 단 하나.
돈이 없었으니까.
잉간이를 데려오는 것만으로 재정에 부담이 갔는데, 인공 태양까지 구매하는 건 그 당시 클라인에게 꽤 부담이 가는 일이었다.
물론 지금은 재정 상황이 그때와 완벽히 달라져 이렇게 뒤늦게나마 인공 태양을 구매할 수 있었다.
“흠…… 그러니까, 차원항의 벽면에 부착하면 알아서 차원항의 시간에 맞춰서 변화한다……. 마력 소모량은 대충 시간당 1,500아르카늄 정도……? 으엑, 뭐 이리 많이 들어?”
진짜 유지비 하나는 엄청나네.
그래도 뭐, 잉간이를 위한 일이니까 이 정도 지출은 할 수 있지.
클라인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차원항에 인공 태양의 설치를 완료했고, 이어서 다음 상자를 개봉했다.
“여기 들어 있는 건 말이죠. 쟈자쟌~ 마력 조절기! 랍니다~!”
이번에 클라인이 연 상자에 들어 있는 것은 마력 조절기.
차원항의 마력 농도를 조절해 주는 장치다.
원래 클라인은 지구산 인간의 고향에는 마력이 존재하지 않으니 차원항의 마력을 아예 없앨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제대로 된 생태계가 조성조차 될 수 없다는 문제가 있어서, 클라인은 차원항의 마력을 최저한도로 줄여 둔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클라인이 잉간이를 관찰한 결과, 잉간이에게 마력을 축적하는 기관은 없어도 마력을 받아들이는 건 다른 인간형 생물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대부분의 생물들처럼, 잉간이도 마력에 접촉하면 신진대사가 크게 활성화된다.
지금은 단순히 잉간이가 쉽게 지치지 않게 해 주고, 피로 회복을 빠르게 해 주는 선이지만.
만약 지금보다 마력을 더 늘린다면?
아마도 피로 회복이 더 빠른 수준을 넘어서 잉간이의 성장이 더욱 빨라지겠지.
이미 차원 생물 사육자들 사이에선 마력이 적은 생물을 사육할 때 일부러 고농도의 마력 환경에서 사육하는 방식이 존재한다.
차원항 적응을 빠르게 하고, 사육 생물을 빠르게 성장시켜서 핸들링을 쉽게 하기 위함인데.
지금까지 마력이 지구산 인간한테도 별다른 부작용 없이 잘 작용한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그 사실을 응용할 차례다.
“좋아, 그럼 마력 농도는…… 리베리아보다 조금 더 높은 수준으로 맞춰 두고.”
인공 태양 다음으로 차원항에 설치한 마력 조절기가 잘 작동한다는 것을 확인한 클라인은 슬며시 잉간이가 뭘 하고 있는지 확인했다.
“낚시……를 하는 것처럼 보이네요. 아이고, 거기는 물고기가 없는데.”
저대로 낚시를 하다간 평생 물고기를 낚지 못할 텐데.
조금 도와줄까?
머릿속에 잠시 그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곧바로 클라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인간형 생물들은 사냥감을 잡지 못해도 낚시라는 행동을 즐기며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습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다가 물고기가 없는 장소에 낚싯대를 던져둔 잉간이의 모습이 조금 귀엽기도 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멍하니 잉간이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그때.
“어, 어머? 엄멈머?”
클라인의 눈에 남사스러운 풍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제야 클라인은 자신이 간과한 사실을 떠올렸다.
리베리아산 켄토르에게 지금의 마력 농도로 활성화된 신진대사와 인공 달의 마력이 합쳐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말이다.
43화 돌발 상황! 이번 영상은 노딱 먹을 각오 하고 올립니다. 잉간이와 켄토르 사이가 수상한데?
“저기, 브. 블랑카?”
시뻘겋게 잔뜩 흥분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블랑카는 내 손목을 붙잡고 나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이른바 벽꿍이라는 자세인데, 만화에서 봤을 때는 감성을 간지럽히는 요소가 있었지만.
이렇게 실제로 당하니 두근거리는 마음은 전혀 들지 않고, 거친 블랑카의 숨소리만이 두려움을 자극할 뿐이었다.
“블랑카, 이거 놔줘. 아프단 말이야…….”
“잉간…….”
나는 겁먹은 목소리로 블랑카에게서 벗어나려 하지만, 블랑카는 내 이름을 속삭이며 나를 꽉 껴안았다.
부드러운 무언가가 가슴팍에서 생생하게 느껴지고, 나는 얼굴을 붉히며 다시 한번 블랑카에게 말했다.
“블랑카. 저기, 이것 좀 놔줄래? 응?”
이번에도 블랑카는 내 말에 반응하지 않고, 나를 꽉 껴안은 채로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 블랑카는 내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집어넣어서 나를 단단히 껴안았고.
블랑카와 나의 신장 차이 때문에 나는 공중에 동동 매달려 인형처럼 블랑카에게 껴안기는 수밖에 없었다.
“잉간, 잉간. 잉간…….”
블랑카는 정신을 놔 버린 것처럼 내 이름을 부르며 나를 꽉 껴안기만 하고 있었다.
내가 그런 블랑카의 모습에 어찌할 줄도 모르고 허둥지둥하던 그때.
블랑카의 억센 손이 내 손목을 붙잡고 자신의 머리 위에 내 손을 올려놨다.
“블랑카?”
“아무 말 하지 말고. 그냥 계속 쓰다듬어 줘. 알겠지?”
“어?”
그렇게 속삭인 블랑카는 내 손이 빗이라도 되는 것처럼 내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응, 거기. 응…….”
처음에는 뻣뻣하게 블랑카가 잡아끄는 대로 손을 움직였지만, 블랑카는 기분 좋은 곳을 내가 쓰다듬을 때마다 목소리를 내며 내 손길을 전력으로 즐기기 시작했다.
기분 좋다는 듯한 블랑카의 목소리에 나도 손을 내려놓을 생각을 하지 못하고 블랑카가 원하는 대로 블랑카를 쓰다듬었다.
갑자기 블랑카가 왜 이러는 걸까?
블랑카가 나를 억세게 구속하고 있어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있었지만, 내 손길을 갈구하는 블랑카의 모습이 너무나도 다급해 보여서 나는 차마 블랑카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 계속해서 블랑카의 머리를 쓰다듬자, 블랑카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내게 또 하나의 부탁을 건네 왔다.
“저기, 잉간.”
“응?”
“잘했다고. 너는 잘하고 있다고 말해 줘. 부탁이야…….”
어딘가 절박한, 어렵게 입 밖으로 튀어나온 블랑카의 본심.
그 본심에 담겨 있는 감정이 너무나도 강렬하고, 어떤 종류의 것인지 잘 느껴졌기에.
나는 블랑카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조용히 블랑카의 머리를 토닥이며 속삭였다.
“그래. 너는 잘하고 있어. 네가 최고야.”
“잘하고 있는 거 맞지……? 내가 필요 없는 거 아니지?”
“아냐. 네가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못하는걸? 전부 네 덕분이야.”
블랑카가 듣고 싶고, 내가 듣고 싶은 말을 블랑카에게 속삭여 준다.
그러자 블랑카는 절대로 나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나를 껴안은 손에 힘을 더욱 줬다.
“좀 더. 좀 더 칭찬해 줘. 응?”
“그래. 잘하고 있어. 너는 잘못하지 않았어.”
“나는 필요 없는 게 아니지? 신님, 신님에게도 내가 필요한 게 맞겠지? 필요 없다면서 쫓겨나지 않겠지?”
이전, 블랑카와 내가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했을 때에도 나왔던 블랑카의 본심.
그녀의 성장 환경 때문인지 블랑카는 극도로 버려지는 것을 불안해했다.
그녀의 신에게서 버려지는 것을 두려워했고, 기껏 도착한 신들의 전장에서 버려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리고 아마, 이젠 블랑카가 신의 사도로 여기는 내게서 버려지는 것도 두려워하는 게 아닐까?
어째서인진 몰라도 억눌러 왔던 블랑카의 감정이 단번에 폭발해서 지금 이렇게 내게 칭찬을 요구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래. 괜찮아. 나는 네가 필요하니까, 걱정하지 마.”
내 마음속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역시 에포나지만.
블랑카 또한 내가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사귄 친구라는 점에서 마음속으로 내가 의지하는 비중이 크다.
그러니 이 정도는 충분히 도와줄 수 있지.
그렇게 계속해서 블랑카를 토닥이며 위로하자, 블랑카도 슬슬 진정이 됐는지 횡설수설하며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어, 음…… 미안. 갑자기, 갑자기 감정이 주체가 안 돼서……. 그러니까…….”
“괜찮아. 이해해. 나도 그럴 때가 있었는걸?”
지난번에 블랑카가 나를 태우고 세계의 끝까지 데리고 가 줬는데, 고작 블랑카가 한탄하는 것 정도도 못 들어 줄까?
“네가 나를 얼마나 도와줬는데, 네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줘야지.”
“뭐, 뭐든지? 진짜로?”
“응. 뭐든지 해 줄게.”
나는 방긋 웃으며 블랑카에게 뭐든 해도 된다고 허가를 내렸고, 블랑카는 꿀꺽 침을 삼키며 내게 되물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블랑카의 부담감을 덜어 주려 애썼다.
“네가 평소에 도와주는 게 얼마나 많은데, 이 정도는 해 줘야지. 우린 친구잖아?”
“치, 친구 사이에 할 만한 일이 아닌 것 같기는 한데…….”
“친구 사이에 할 만한 게 아닌 게 어디 있어?”
“그, 그런가? 유, 육체적인 부탁도 가능한…… 거야?”
“육체적인 부탁? 뭐, 마사지?”
“어. 어. 응…… 그런 거…….”
육체적인 부탁이라면 뭐, 마사지 같은 걸 말하는 거려나?
아니면 지금처럼 이렇게 쓰다듬어 달라는 정도겠지, 뭐.
나는 그렇게 안일한 생각을 하며 대수롭지 않게 블랑카의 부탁을 수락했다.
“뭐, 육체적인 거라도 들어줄게.”
“지, 진짜? 시, 싫다면 싫다고 말해도 되는데……? 지금까지 해 주던 것보다 더한 걸 부탁할지도 모르는데……?”
꿀꺽.
맨 처음, 블랑카가 내 손목을 잡아챌 때처럼 시뻘건 핏줄이 선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무언가 블랑카와 나 사이에 기묘한 위화감이 맴돌았지만.
나는 그 기묘한 위화감을 눈치채지 못한 채로 어깨를 으쓱거리며 블랑카에게 대답했다.
“뭐, 나도 싫은 건 아니니까.”
내가 블랑카를 계속 마사지해 주던 건 블랑카를 마사지하는 시간이 이 세계에서 다른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어서였다.
내가 블랑카에게 그렇게 대답하는 순간, 꿀꺽하고 침을 삼키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끊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온 듯했다.
그리고 블랑카는.
나를 꽉 껴안고 있던 손을 풀더니.
손을.
“브, 블랑카? 어? 응?”
“부, 부탁이니까. 가만히. 가만히 있어……!”
자신의 아머드 슈트 안으로 집어넣어 무언가를 꺼내고.
그대로 손을 내가 예상치 못한 곳에 가져다 댔다.
이런 전개를 예상하지 못한 내 몸이 굳어지고, 나는 토끼눈으로 블랑카의 눈을 바라봤다.
“브, 블랑카?”
그리고, 나는 완벽한 사냥꾼의 눈을 마주쳤고.
“너, 너도 괜찮다고 한 거야. 그러니까…….”
“잠깐, 스톱. 멈춰, 야. 잠깐만……!”
나는 그대로 블랑카에게 덮쳐졌다.
* * *
“와, 오우. 오…….”
와, 속옷을 저렇게 이용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켄토르는 신체 구조상 제대로 된 속옷을 혼자서 착용할 수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켄토르들이 차원 마법을 이용한 일종의 정조대를 착용하고 있는데.
그 정조대를 저렇게 사용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니, 허리춤에 출구를 만들어서 다른 종과 교감을 나눌 때 사용하는 건 봤는데.
출구를 손에 쥐고 저렇게 사용하는 건 처음 봤다.
“하와와…… 너무 자극적인 거시야요…….”
차원항 안의 풍경을 더 찍으면 진짜로 쥬튜브 노딱을 먹을 것 같으니 은밀한 시간을 관음하는 것은 그만두고.
클라인은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이유를 조용히 떠올렸다.
“아하하…… 인공 달이 만월 상태로 세팅되어 있다는 걸 깜빡했네요…….”
마력을 가진 대부분의 생물들에게 있어서 만월 상태의 달의 마력은 일종의 신호로 작용한다.
주로, 번식 사이클을 자극하는 신호로 말이다.
뭐, 켄토르가 발정기에 그렇게 다른 성을 갈구하는 품종은 아니다만.
여기에 한 가지 더 문제가 겹쳐진 것이 클라인이 차원항의 마력 농도를 올려놨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평소보다 더 켄토르의 발정이 심각해진 것이었고.
그것이 지금 차원항에서 벌어지는 남사스러운 풍경이었다.
억지로 떼어 놔야 하려나?
하지만 적당한 성적 자극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하고.
음…… 잉간이도 그리 싫어하는 것 같지 않으니 괜찮지 않을까?
서로 좋아서 하는 건데, 그걸 클라인이 억지로 떼어 놓는다는 건 조금 우스우니까.
그렇지만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무언가 잉간이를 켄토르에게 빼앗긴 듯한 느낌.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꾸 차원항으로 돌아가는 시선을 억지로 돌리며 마지막 택배를 개봉했다.
지금까지 새로운 차원항들이나 사육 장치들이 들어 있어서 상자들이 꽤나 묵직했던 것과는 다르게.
이번에 클라인이 개봉하는 택배는 무척이나 가벼웠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택배에 들어 있는 것은 단순한 허가증이었으니까 말이다.
“쟈잔~ 큰맘 먹고 구매했습니다! 욕망의 카메라 30분 이용권! 네, 모두가 아시는 아르카나사의 초-히트 마법이죠? 애완 생물을 키우시는 분들이라면 한 번쯤은 다들 써 보셨거나, 써 보는 게 꿈이실 거예요.”
욕망의 카메라.
아르카나사에서 개발한 독심 마법의 일종으로 정보 생명체에게는 사용할 수 없지만, 대부분의 물질 생명체에겐 효과적으로 통하는 마법이다.
이름답게 대상이 현재 가장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알아낼 수 있는 효과를 가지고 있으며.
그 효과 때문에 애완 생물들이 지금 가장 원하는 걸 알아볼 때 주로 쓰인다.
마법의 효과는 아르카나가 개발한 마법답게 무척 뛰어나지만.
단 하나의 문제가 있다면 마법의 가격이 무척 비싸다는 것이다.
단 30분 사용하는 데도 클라인의 한 달 치 마력이 필요할 정도니까.
그래서인지 인기는 많지만, 정작 자신의 애완 생물에게 써 본 사람은 적다는 기묘한 마법이다.
클라인도 잉간이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구매하지 않았을 것이다.
클라인은 조심스럽게 욕망의 카메라의 포장을 개봉했고.
카메라 앞에서 이용권의 봉인을 해제했다.
“얍!”
복잡한 마법진이 펼쳐지며 클라인의 머릿속에 마법의 정보가 각인되고.
클라인은 신기하다는 듯 카메라를 향해 중얼거렸다.
“이거, 생각보다 복잡한 마법이었네요? 마법의 효과는 무척 단순한데 말이에요.”
이렇게 복잡하니까 유사품 마법이 시장에 등장하질 않지.
클라인은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리며 서둘러 마법을 발동했다.
그러자 클라인의 머리 위에 타이머가 나타나며 제한 시간을 알려 왔고.
“이용권 종료까지 삼십. 분. 남았습니다.”
“자! 그럼 빠르게 잉간이의 욕망을 확인해 볼까요? 지금쯤이면 슬슬 다 끝났을 텐데……?”
언제든지 눈을 가릴 준비를 하며 클라인은 조심스럽게 차원항 안을 확인했고.
클라인은 잉간이의 은신처 안을 들여다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카메라를 돌려야 하는 상황은 모두 다 끝난 것 같고, 어색하게 서로 멀찍이 앉아 있는 잉간이와 켄토르의 모습만이 눈에 들어온다.
클라인이 잉간이와 켄토르의 모습을 관측하자, 곧바로 잉간이와 켄토르 머리 위에 뭉게뭉게 구름으로 이뤄진 말풍선이 생겨난다.
“자, 이제 저 말풍선 안에 지금 뭘 가장 하고 싶은지가 나타날 텐데요. 켄토르는 지금…….”
흘낏.
켄토르의 말풍선을 바라본 클라인의 말문이 잠시 막힌다.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고 요리하고 있는 잉간이를 바라보는 켄토르의 말풍선을 바라보며 클라인은 멋쩍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만월이어서 그런 거겠죠? 뭐, 건강해 보여서 좋네요!”
클라인은 서둘러 켄토르의 욕망에서 눈을 돌리고 열심히 요리하는 중인 잉간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음. 저런 모습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잉간이가 나보다 더 요리를 잘하는 것 같단 말이야.
잉간이의 머리 위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른 욕망은 아주 단순했다.
커다란 침대에 드러누워서 자고 싶다.
단지 그뿐이었다.
“침대? 커다란 침대가 필요한 걸까요?”
클라인은 슬며시 잉간이의 잠자리로 시선을 돌렸다.
짚으로 이루어진 짐승의 것 같은 조잡한 잠자리.
음, 이건 확실히 침대가 필요하겠네.
이왕 소원을 들어주는 김에 제대로 들어줘야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말풍선 속의 풍경을 똑똑히 옮겨 담기 시작했다.
그때, 잉간이가 요리를 끝마쳤는지 접시에 고기를 담아서 켄토르가 기다리는 책상으로 향했고.
잉간이의 요리를 본 켄토르의 욕망이 곧바로 잉간이가 가져다준 요리를 먹는 켄토르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피식.
클라인은 그 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터트리며 차원항을 촬영하는 카메라를 종료시켰다.
좋아, 이걸로 오늘의 촬영은 끝.
이제 잉간이의 소원 속의 침대를 만들어야 할 시간인데.
클라인이 3D 프린터를 가동시키려던 찰나, 누군가가 클라인의 방문을 거세게 두드렸다.
“흐엑?!”
쾅쾅쾅.
문이 부서져라 울려 대고, 클라인은 갑작스러운 소리에 새된 비명을 질렀다.
이 시간에 도대체 누구지?
집세는 이미 냈고, 배달 올 것도 없고, 누군가를 초대한 적도 없는데?
클라인은 제자리에 단단히 굳어져서 방문을 바라봤고.
곧이어 방문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클라인이 긴장을 풀었다.
“나 왔다. 문 좀 열어 봐.”
“파인만? 파인만 맞아?”
“그래. 맞으니까 빨리. 피곤해 죽겠어.”
얼마 전, 지구의 정보를 가져와 달라고 의뢰한 클라인의 오랜 친구, 파인만이 돌아온 것이었다.
44화 지구산 인간에 대해서 몰라도 되는 75가지 사실
“아이고, 너는 아직도 이렇게 사냐?”
“뭐, 왜. 이만하면 깨끗한데.”
“차원항 있는 곳만 깨끗하면 다야? 청소 좀 하고 살아라, 좀!”
“청소한 건데…….”
클라인의 집 안으로 들어온 파인만은 곧장 클라인의 집 구석구석을 뒤지며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학창 시절부터 늘 있어 왔던 클라인과 파인만의 관계였다.
파인만은 지친다는 듯이 서둘러 화장실에 들어가 몸에 달라붙은 잉여 정보들을 씻어 내기 시작했다.
한바탕 파인만이 샤워하는 사이, 클라인은 쭈뼛거리며 파인만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쓰레기들을 숨기고 있었다.
잠시 후 샤워를 끝마치고 화장실 밖으로 나온 파인만의 눈에 들어온 것은 언제나처럼 배시시 웃음을 흘리는 클라인의 모습이었다.
“진짜, 요즘엔 쥬튜브 한다고 하길래 좀 나아졌나 싶었는데, 카메라가 안 닿는 곳은 이렇게 하고 살았구만?”
“아니, 다 나중에 치우려고 모아 둔 거야…….”
그렇다면 배송일이 1년 전인 이 택배 상자는 뭔데?
파인만은 그렇게 몰아붙이고 싶었지만, 멍청한 미소를 짓는 클라인의 모습에 그저 한숨만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모습도 발달기가 막 끝났을 즈음에 비하면 무척 발전한 것이라는 걸 알기에.
그때의 클라인은 진짜 방송에서 이야기하는 히키코모리 그 자체였으니까.
지금은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청소를 잘 하지 않는 것만 뺀다면 사람이 다 됐다.
파인만이 한숨을 내쉬며 털썩 쓰레기들 사이의 소파에 몸을 눕히자, 클라인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파인만에게 말을 걸어왔다.
“으흠, 그래서? 부탁한 건 알아봤어?”
“나 피곤해. 내일 말하면 안 돼?”
“안 돼. 내일은 나랑 같이 맛있는 거 먹어야지.”
“배달 음식 시키려고?”
“드래곤 고기…… 사 둔 거 있어…….”
“드래곤 고기? 요리도 안 하는 놈이 무슨 드래곤 고기를 사?”
“잉간이 먹이려고 했지. 헤헤.”
“너는 진짜…….”
지구산 인간이 그렇게나 좋은 걸까?
친구의 부탁 때문에 지구까지 다녀왔지만, 파인만은 도대체 지구산 인간의 어디가 좋은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력이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참 소름 끼친다.
파인만의 눈에는 지구산 인간이 생물이 아닌 움직이는 인형처럼 기괴해 보일 따름이었다.
빨리 정보를 알려 주지 않으면 계속 괴롭히겠네.
그렇게 생각한 파인만은 한숨을 내쉬고 소파에 널브러진 몸을 일으키며 하품했다.
“그래, 그래. 알았어. 지구를 조사해 달라고 했지?”
“응, 응. 그랬어.”
“일단 먼저 말하는데. 내가 말해 주는 게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어. 정보 전쟁 때문에 워낙 관측 결과가 뒤죽박죽이어서.”
만약 클라인이 지구산 인간을 더 가져와 달라고 했으면 파인만은 클라인의 부탁을 거절했을 것이다.
고작 관측을 할 뿐인데도 온갖 허위 정보들이 달라붙는데, 만약 물질을 정보로 변환하는 작업까지 하려고 했다?
지구산 인간이 아닌 지구산 인간을 닮은 무언가가 튀어나왔을 것이다.
“진짜, 미친놈들 아니냐고. 기계박이 새끼들. 지들은 정보전에 영향 덜 받는다고 정보 전쟁을 무슨 부먹이냐 찍먹이냐로 일으키냐고.”
“음, 그건 중요한 문제지.”
“지랄. 내 생각엔 마키나 새끼들, 저거 다 시위야. 지난번 회의에서 지들 주장 안 들어줬다고 징징거리는 거일걸?”
“음모론은 그만 펼치고, 지구가 어떤지나 빨리 알려 줘.”
“그래, 알겠어. 잠만 기다려 봐. 지금 가공 중이니까.”
클라인은 소파에 앉아 있는 파인만의 어깨를 붙잡고 앞뒤로 흔들며 파인만이 빨리 정보를 넘겨주는 걸 재촉했다.
파인만은 클라인에게 방해받으면서도 정보를 가공한다는 신묘한 기술을 선보였고.
잠시 후, 파인만은 클라인과 신체 말단을 휘감고 클라인에게 정보를 교환했다.
“잉간인지 인간인지 하는 애가 얼마나 귀여운지는 관심 없으니까 그만 보내라.”
“한번 봐 봐. 응? 진짜 귀여운데…….”
“지랄 말고.”
“넹…….”
잠시 후, 클라인에게 파인만의 정보들이 우수수 도착하고, 클라인은 그 정보의 방대함에 깜짝 놀랐다.
“뭐야? 이거 왜 이렇게 많아?”
“뭐긴 뭐야. 마력도 없는 놈들이 네트워크 시스템을 만들었으니까 그렇지.”
“뭐? 네트워크 시스템을?”
“진짜 나도 보면서 믿을 수가 없었다. 뭐, 원시적인 형태이긴 한데 일단은 네트워크라고 부를 수 있으니까.”
도저히 믿기지 않는 파인만의 말에 클라인은 서둘러 파인만의 정보를 확인했다.
파인만이 보낸 정보를 뜯어본 클라인은 파인만이 그 어떤 과장도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뭐야? 진짜 원시 네트워크를 만들었네? 어떻게? 마력도 없잖아?”
“난들 아냐. 마력이 없는 대신 과학기술이 엄청 발달했나 보지. 내가 보기엔 너보다 거기 애들이 과학 쪽은 더 잘 알 것 같더라.”
“에엑…… 아니, 아무리 그래도 발달기에 배운 게 있는데…….”
“너는 마력 없이 네트워크 만드는 법 아냐?”
“몰라!”
“지구산 인간들이 더 똑똑하네. 봐 봐.”
“그러네, 우리 잉간이 참 똑똑하네!”
얼씨구, 여기서 애완 인간을 꺼내 오네?
파인만은 피식 웃으면서 클라인을 위해 자신이 조사한 내용을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일단 네 추측대로 확실히 원시 문명의 끝자락에 있는 건 맞는 것 같더라.”
“그치? 그럴 것 같더라.”
“대충 습성은 다른 인간형 생물들과 다를 게 없는데, 중요한 게 그거야. 마력이 없다는 거.”
“뭐, 그렇긴 하겠지…….”
“보호종 지정이 외우주 진출이었나? 진짜 웃긴 게, 마력 없이 내우주 탐사를 모두 끝마쳤더라. 지구산 인간들.”
“에엑? 내우주 탐사를 끝마쳤다고? 마력도 없이?”
“자기 관측도 제대로 못하면서, 외우주 진출 직전이라는 게 진짜 신기하더라.”
클라인은 파인만의 말을 듣고 경악하며 외쳤다.
내우주 탐사는 마력의 도움 없이는 안전하게 진행할 수 없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 아니었던가?
도대체 어떻게 내우주 탐사를 진행한 거지?
클라인은 경악하며 속으로 그런 의문을 품었고.
그러다 문득 머릿속에 한 가지 이론이 떠올랐다.
그리고 파인만은 클라인의 머릿속에 떠오른 이론이 맞는다는 것을 확인해 줬다.
“그래. 진짜 웃긴 게. 마력이 없으니까, 행성의 수명을 깎아 가며 기술을 발전시키더라.”
“그게, 그게 가능한 거였어? 생존 본능이라는 게 있을 텐데……?”
“서식지를 신경 쓰면서 살아남을 능력이 안 되는 거겠지. 그러니까 앞뒤 생각하지 않고 기술 발전에 올인하는 거고.”
클라인이 떠올린 이론은 외우주로 진출할 마력이 부족한 생명체들이 외우주로 진출하는 방법을 다루는 이론.
마침 브리더 자격증을 공부할 때의 교재 가장 앞쪽에 보호종의 정의를 설명하기 위해서 서술되어 있던 이론이었다.
그 이론에 따르면, 외우주로 진출할 마력이 충분한 생명체들은 별다른 간섭 없이도 자연스러운 진화를 거치며 알아서 외우주로 진출하게 된다.
그것이 제1형 보호종.
그다음으로 제2형 보호종이 있는데, 제2형 보호종은 내우주까지 진출할 마력은 있으나 외우주까지 진출할 마력이 부족한 생명체들을 뜻한다.
그런 생명체들은 마력을 하나로 묶는 네트워크 기술을 발달시키기 전까지는 외우주로 진출할 수 없다는 것이고.
그다음, 내우주로 진출할 마력이 부족한 생명체들은 2형 보호종처럼 네트워크를 발달시키지만 내우주로 진출하는 것이 한계.
그렇게 된 생명체들은 내우주의 자원들을 이용해서 외우주로 진출할 에너지를 얻게 되고, 그것이 3형 보호종이다.
그다음, 4형 보호종.
마력이 존재하지 않아 내우주로 진출하는 것조차 자신의 행성을 갉아먹는 형태의 생명체들.
그런 형태의 생명체들을 4형 보호종이라고 보호종 이론에선 설명하고 있는데.
사실, 아직까지 4형 보호종은 단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다.
마력이 없는 생명체들은 생존 경쟁에서 이기지 못해 도태되어 내우주로 진출할 단계에 이르지 못한다는 게 하계의 정설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정설을 뒤집어엎는 지구산 인간이 발견되었고, 결국 그 지구산 인간들이 4형 보호종에 근접했음이 확인된 것이다.
“내우주 진출했으니, 뭐, 외우주도 곧 진출하겠지. 뭐, 보호종 지정되기 전에 네 그 잉간이가 먼저 수명이 다하겠지만. 수명 연장해서 키울 거면 빨리 자격증이나 따라.”
“으윽, 자격증…….”
파인만의 지적을 듣고 클라인은 움찔 몸을 굳혔다.
“그치만…… 자격증을 따려면 외출해야 하잖아……?”
“그러니까, 제발 좀 집 밖으로 나가라고!”
파인만은 진심을 담아 클라인에게 소리쳐 보지만, 이런다고 클라인이 집 밖으로 나갈 리가 없다.
어찌 됐든 파인만이 클라인에게 전달한 정보가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현재 클라인이 조성한 차원항의 환경이 잉간이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만약 내가 최대한 야생 환경하고 비슷하게 조성한다고 하면 어떤 모습이 될까?”
“도시형 차원항인가? 그렇게 만들어야겠지. 뭐.”
“으엑, 도시형은 자격증이 필요한데.”
도시형 차원항을 만드는 것은 브리더 자격증이 없다면 만들지 못하게끔 엄격하게 규제되고 있다.
몇몇 밀수업자들이 보호종의 서식처를 도시형 차원항으로 속여서 반입해서 그렇다고 하는데.
도대체 왜 그게 도시형 차원항을 규제한다는 결과로 이어지는지 모르겠지만, 법안이 그러니까 어쩔 수 있나.
클라인은 푹 한숨을 내쉬며 계속해서 지구의 정보를 읽어 들였다.
클라인이 그러는 사이, 파인만은 배를 채우기 위해서 클라인의 냉장고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파인만이 불평한 대로 정보 전쟁 탓인지 파인만이 가져온 지구의 정보의 이곳저곳엔 구멍이 뚫려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정보여도 클라인에겐 충분했다.
클라인이 무슨 인간을 지적 생명체로 인정해야 한다는 활동을 펼칠 것도 아닌데, 지구산 인간이란 종족의 모든 것을 알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그런 클라인의 모습을 지켜보던 파인만은 조용히 클라인을 불렀다.
“야.”
“왜?”
“인간 사육하는 거, 즐겁냐?”
“당연히 즐겁지. 안 즐거우면 뭐 하러 계속 사육을 해?”
“내가 보기엔 아닌데? 지금 너 전혀, 하나도 즐거워 보이지 않아.”
“어?”
파인만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야기는 클라인에게 당혹스러운 이야기였다.
클라인이 당혹스러워하든 말든, 파인만은 계속해서 클라인을 추궁했다.
“솔직히 말해 봐. 너, 지구산 인간 키우는 게 부담되지?”
“그건.”
“잉간인지 뭔지는 무척 귀여운데, 완벽한 환경을 만들어 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그렇잖아. 그치?”
“응…….”
클라인은 파인만의 추궁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파인만의 말대로 클라인은 요즘 잉간이를 키우는 게 조금씩 부담되기 시작했다.
쥬스농장의 지적, 쥬튜브 채널에 달리는 악플, 제대로 된 준비를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클라인이 느끼는 미안함.
이 모든 것들이 클라인에게 부담감으로 작용하고 있던 것이었다.
파인만은 클라인의 냉장고에 들어 있던 음료수를 마시며 조용히 말을 꺼냈다.
“그렇게 힘들어할 거면, 그냥 갖다 버려. 인마.”
“뭐? 지금 뭐라고…….”
“애완 생물이 뭐야? 너 좋자고, 너를 위해서 키우는 거잖아? 애완 생물을 위하는 거 다 좋은데. 너까지 해쳐 가면서 키우지는 말라고. 그건 생물 보호 단체가 할 일이니까.”
“그렇다고 그냥 유기할 수는 없잖아!”
“내가 언제 유기하랬냐? 더 잘 키울 수 있는 놈에게 가져다주면 되잖아. 왜, 지난번에 쥬스농장인가 하는 브리더랑 합방했다며? 걔한테 가져다주든가 보호 단체한테 가져다줘. 그럼 되잖아?”
“그건…….”
“네가 항상 말했잖아? 감당할 수 없는 생물을 키우는 것도, 생물 학대라고.”
파인만의 말에 클라인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클라인이 잉간이를 포기하지 않는 것은 쥬튜브 수익과 잉간이에 대한 애정이 컸지만, 또 한편으로는 책임감도 남아 있었다.
자신이 야생에서 데려왔으니, 자신이 책임지고 키워야 한다는 교과서적인 책임감.
하지만 클라인이 잉간이를 책임질 수 없다면?
그렇다면 역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보내야 하는 걸까?
하지만 클라인은 그 선택만은 하기 싫었기에, 고개를 내저으며 파인만에게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지금 브리더 공부도 하고 있고…… 당장은 감당할 수 없을지 몰라도, 감당할 수 있게 공부도 하는 중이고…….”
처음에는 분명히 준비되어 있지 않았지만, 지금이라도 준비하면 되는 것이 아닐까?
다른 생물들은 몇 년이 걸려도 불가능한 핸들링을 잉간이에게는 단 한 번에 성공했다는 사실이 클라인에게 자신감으로 작용하며 클라인이 잉간이를 손쉽게 포기하지 않게끔 했다.클라인은 물러서지 않고 마치 선생님에게 변명하는 아이처럼 파인만에게 자신이 잉간이를 키울 수 있는 이유를 하나씩 하나씩 설명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파인만은 피식 웃으며 클라인의 이마를 툭 건드렸다.
“그래, 그거면 됐다.”
“그리고 또……. 응?”
“네가 또 예전처럼 죄다 던져 버리고 아무 노력도 하지 않을까 봐 걱정했는데, 이러는 걸 봐선 굳이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
자신의 아이가 발달기를 무사히 끝낸 모습을 지켜보는 부모처럼 파인만은 흐뭇하게 클라인을 바라봤고.
클라인은 입을 삐죽 내밀며 파인만에게 투정을 부렸다.
“나도 이젠 옛날 같은 짓은 안 한다고…….”
“그래. 수업에 안 나가고 맨날 창고에 틀어박혀 있는 대신 이젠 집에 틀어박혀 있지.”
“윽.”
파인만에게 옛날의 흑역사를 들춰지는 사이, 클라인은 파인만이 가져온 지구의 정보를 모두 읽어 낼 수 있었다.
파인만이 가져온 지구의 정보를 읽은 클라인은 조용히 잉간이의 환경과 지구의 환경을 비교해 가며 결론을 내렸다.
지구산 인간이 지구의 대표종으로 자리 잡은 것은 지구에 마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만약 마력을 사용하는 다른 생명체가 하나라도 있었다면, 지구산 인간들은 행성 지배종의 위치를 빼앗겼을 것이다.
여러 문제가 산적해 있지만, 역시 가장 큰 문제는 하나였다.
“역시 너무 문명 수준이 차이가 나는데…….”
클라인이 맨 처음 생각했던 지구의 문명 수준은 수렵 문명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지금과 같은 차원항에 집어넣어도 그리 큰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었고.
하지만 그런 클라인의 판단은 틀렸다.
수렵 문명 수준이긴커녕, 지구의 문명은 외우주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는 문명이란다.
이렇게 되면 야생을 재현해 주겠답시고 만든 클라인의 차원항은 잉간에게 이롭기보단 더 독으로 작용할 것이다.
잉간이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상태라면 몰라도 지금 상태로는 야생 환경이 잉간이에게 스트레스를 준다는 게 확실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잉간이의 차원항을 갈아엎을 수는 없다.
클라인은 아직 행성 내 문명 수준의 차원항을 만들 자격이 없었으니까.
브리딩 자격증을 획득한 뒤라면 몰라도 도시형 차원항을 클라인이 지금 만든다면 바로 잡혀가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간단했다.
차원항의 문명 수준을 잉간이가 직접 올리면 되는 것이다.
이 도시형 차원항에 대한 법률은 은근히 허술한 부분이 있다.
사육자가 직접 도시형 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금지지만, 애완 생물이 직접 차원항 내의 문명 수준을 올리는 건 금지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애초에 애완 생물이 문명 수준을 올리는 걸 처벌할 방법도 없고 말이지.
문명 수준은 잉간이가 직접 올리는 방식으로 개선하는 수밖에 없겠고.
사실, 사육항을 이용한다면 전부 다 해결되는 문제긴 하지만.
과연 잉간이가 사육항을 좋아할까?
클라인이 지구의 문화를 살펴보기에, 지구산 인간들은 사육항을 그리 좋아할 것 같지 않았다.
그럼 이제 남은 문제는 사회적 관계인데.
역시 단 두 명만 차원항에 놔두는 건 잉간이가 외로우려나?
하지만 무턱대고 다른 인간형 생물을 집어넣었다간 또 다른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친구를 만들어 주는 건 신중해야 한다.
새롭게 친구를 찾아 주기 전까지 잉간이의 외로움을 줄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문득 클라인의 머릿속에 잉간이의 종족이 원시적 네트워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마력 네트워크를 이용한 커뮤니티에 거부감을 가지진 않겠지?
으엑, 또다시 돈이 엄청 깨지겠네.
그래도 잉간이가 나 때문에 고통받는 모습은 보기 싫으니까.
아, 그리고 핸들링도 몇 번 더 하면서 사람의 신체에 점차 익숙해지게 만들어야겠다.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각오를 다시 다졌고.
파인만은 그런 클라인의 생각을 몰래 공유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45화 애완 인간의 활동량을 늘리는 방법은? 활동량 부족으로 고민하는 사육자들 모두 모여라!
생각하는 것만으로 얼굴이 화끈해지는 그날 행위가 끝나고.
블랑카는 시뻘게진 얼굴로 피곤해져서 바닥에 축 늘어져 있는 내게 사과를 해 왔다.
“정말 미안. 정말 미안! 평소에 참던 게 갑자기 그날따라 폭발해서…….”
“아니. 어, 음. 불가항력? 그런 사태였던 거지? 응?”
“어, 응. 그, 그런 거야…….”
“괜찮아. 나도, 나도 음. 그리 나쁘진 않았으니까.”
“그, 그래? 무섭진 않았어? 아프거나?”
“처음에는 기분 좋았는데, 내 말을 무시하니까 좀 무섭긴 하더라……. 나중에는 아프기만 하고…….”
뭔가, 뭔가 이상한 대화인데?
나하고 블랑카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공기.
나와 블랑카는 그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고 아무 말이나 지껄였지만, 입을 열 때마다 오히려 어색함이 더 심해지는 것 같다.
“그러니까, 음. 미안. 앞으로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조심할게…….”
“어, 음. 응…….”
결국 블랑카는 이 어색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내게 사과를 하고 멀찍이 떨어진 식탁에 앉았다.
충분히 휴식을 취하기도 했겠다, 나 또한 이 어색함을 버티지 못했기에 머릿속에서 돌아다니는 잡념을 지우려 요리를 시작했다.
대충 돌뱀은 냄비에 물을 넣고 끓이는 것만으로 손질이 끝나서 요리하기 편리하다.
오늘은 소금도 함께 넣어서 삶아 볼까?
나는 그렇게 최대한 요리에 의식을 집중하며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도저히 다른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쁘진 않았다니, 나는 도대체 뭔 소리를 한 거야?
아니, 그보다 갑자기 블랑카가 왜 나를 덮친 걸까?
블랑카 말대로라면 갑자기 충동을 참을 수가 없어졌다는데.
그렇다면 평소에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에.
어째서?
“으헥……!”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덜컥하고 냄비를 붙잡고 있던 손이 삐끗해 버렸다.
치이익.
그대로 모닥불에 냄비 안의 내용물이 쏟아졌고, 나는 당황하며 짤막하게 탄식을 내질렀다.
“잉간? 괜찮아?”
“어, 괜찮아. 잠깐 엎지른 거니까.”
“혹시 힘들다면, 오늘 요리는 내가 해도 되는데…….”
블랑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다가오지만, 나는 손을 내저으며 블랑카의 접근을 차단했다.
“아냐, 괜찮아. 그냥 딴생각을 해서 그런 거니까, 넌 쉬고 있어.”
“그래도.”
“아니, 솔직히 도움이 안 되니까, 가만히 있어.”
“히잉…….”
블랑카를 돌려보내고 바닥에 쏟아진 돌뱀의 고기를 주워 마저 손질한다.
단단한 금속으로 이루어진 돌뱀의 껍질을 벗겨 내면 연약한 속살이 드러난다.
새우를 손질하는 것처럼 아주 간단한 작업이다.
그래, 평소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뭐 이상한 건 아니잖아?
딱히 성욕이라는 게 이상한 것도 아니고, 블랑카가 말한 것도 단순히 순간의 충동을 참지 못한 것이라는 뜻이겠지.
하지만 만약, 그런 종류의 이야기가 아니었다면?
어쩌지?
다시 내 생각은 원점으로 돌아왔고, 더 뭔가를 생각하기도 전에 그토록 많아 보였던 돌뱀이 모두 동이 났다.
슬쩍 시선을 블랑카에게 돌리자, 때마침 나를 바라보고 있던 블랑카와 눈이 마주쳤다.
딱히 누가 잘못한 것도 아니건만 블랑카와 나 둘 다 서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 젠장.
딱히 이상하거나 나쁜 일을 한 것도 아니잖아?
이렇게 불편해선 도저히 같이 못 살겠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대놓고 물어보자.
서서히 피로가 턱밑까지 차오른다.
지금 당장이라도 커다란 침대에 드러누워서 자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고 만약 그랬다간 내일까지 이 불편함이 계속되겠지.
나는 그렇게 각오를 다지며 조용히 접시에 돌뱀의 고기를 옮겨 담았고.
내가 음식을 가지고 오는 것을 발견한 블랑카는 꿀꺽 침을 삼켰다.
“리베리아 님의 은혜에 감사를 바칩니다.”
블랑카가 언제나처럼 식전 기도를 한 뒤 식사를 시작하고.
나는 가만히 블랑카 옆의 의자에 걸터앉아 블랑카의 이름을 불렀다.
“블랑카.”
“으, 으응?”
“아까, 그거. 있잖아. 평소에도 계속 참아 왔다는 거.”
“어, 응? 응. 내가 그렇게 말했지.”
“그렇다는 건. 너, 나 좋아하냐?”
말했다.
푸흡.
블랑카가 헛기침하며 뾰족한 귀를 펄럭거리며 나를 바라봤다.
나 또한 이런 걸 물어본다는 사실이 어색할 따름이었지만, 꾹 어색함을 누르며 블랑카를 재촉했다.
“그러니까. 그, 평소에도 계속 그렇게 생각했다는 거면…… 그런 거 아니냐고.”
“그건, 그러니까.”
나의 돌직구에 블랑카는 입을 뻐끔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뭔데, 뭐냐고?
아니면 아니라고 빨리 말해 줘.
방구석 백수였던 사람에게 이런 거 시키지 말라고.
백수여서 오해도 엄청 빠르게 한다고.
그러니까 아니면 아니라고, 빠르게 말해 줘.
최대한 수치심을 참으며 블랑카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블랑카에게 대답을 요구하고.
내 무언의 압박을 받은 블랑카의 입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 그, 그런…….”
그런?
“그런 거 아닌데요? 진짜로, 진짜로 실수한 거니까. 딱히, 딱히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 그래. 그런 거지? 역시……?”
“진짜, 진짜 죄송해요. 그렇지만 저도, 저도 처음이었으니까. 너무 좋아서 자제가 안 됐던 거고. 앞으로는 자제할 수 있으니까…….”
“그, 그래?”
블랑카 또한 한계 이상으로 몰아붙여진 탓일까? 다시 횡설수설하기 시작했지만.
블랑카의 말을 요약하면 단 하나로 압축할 수 있었다.
그런 거 아니니까, 지랄하지 마.
그래, 이렇게 확실하게 말해 주는 게 차라리 낫지.
아, 망할.
차라리 물어보지 말 걸 그랬어.
그렇게 생각하며 어색해진 테이블을 서둘러 벗어나려 했지만.
꽈악.
블랑카의 손이 또다시 덥석 내 팔을 잡아챘다.
“브, 블랑카?”
“그, 그래도 딱히 싫어하는 건 아니니까.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니까. 그러니까 아직은 이 상태가 좋거든요? 그러니까, 음. 앞으로 저를 싫어하거나, 그러지는 말아 줘요…….”
“어, 응.”
“자,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요!”
블랑카는 그렇게 쏘아붙이고는 서둘러 집 밖으로 나가 버렸고.
나는 털썩 의자에 주저앉은 채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고.
“왕!”
“아야야…….”
어딘가 화난 듯한 에포나가 내 손가락을 깨물고서야 간신히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크르르…….”
에포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블랑카가 나간 문을 바라보더니, 그대로 내 잠자리에 푹 몸을 파묻었다.
아, 몰라.
일단 자고 일어나서 생각하자.
나는 그렇게 더 이상의 생각을 포기하고 에포나를 껴안고 잠에 들었고.
“히야야약?!”
오밤중에 들려온 블랑카의 비명에 잠에서 깨어났다.
“블랑카?!”
서둘러 잠에서 깨어나 모닥불을 피우자, 털썩 바닥에 주저앉은 블랑카의 모습이 보였다.
“흐익, 헤엑. 흐윽. 제송해요…… 죄송해요…….”
“무슨, 무슨 일이야. 블랑카?”
“어, 어.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냐……. 그냥, 그냥 악몽을 꿨을 뿐이야.”
블랑카는 그 후로 한참의 시간이 흘러서야 진정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나는 블랑카의 등 위에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올라탄 에포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기, 블랑카. 그건……?”
“그, 글쎄?”
그러고 보니 블랑카와 에포나 사이가 그리 좋진 않았던 것 같은데, 어느새 에포나가 블랑카랑 놀 정도로 사이가 좋아졌네?
“언제 그렇게 사이가 좋아졌어?”
“음…… 지난밤?”
“왕!”
에포나는 오늘 블랑카와 시간을 보낼 생각인지 블랑카의 등 위에서 의기양양하게 짖었고.
“그, 그럼 다녀올게!”
“어, 응.”
블랑카는 아직 어제의 여파가 남아 있는 모습으로 숲으로 떠나갔다.
블랑카와의 관계가 완전히 예전처럼 돌아오려면, 약간의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
나 또한 조금 떨떠름하게 블랑카의 인사를 받으며 가만히 오늘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역시, 낚시나 계속할까?
지금 잘 생각해 보니까, 만능 사전은 바위산 방향의 호수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렇다면 물고기가 있는 곳은 바위산 아래의 호수가 아니라, 바위산 위의 호수였던 게 아닐까?
그러니 오늘은 바위산 위의 호수에서 낚시하자.
낚시 도구를 챙겨서 산 정상으로 통하는 동굴로 향하자, 오랜만에 푸른 점액을 만날 수 있었다.
“으아!”
아직까지도 그 기계에게 입은 대미지가 회복되지 않은 것인지 조그만 크기로 폴짝거리며 나를 위협한다.
물론, 전혀 나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기에 푸른 점액을 무시하며 산 정상으로 향했다.
“포롱? 포로롱?”
산 정상으로 향하는 길에 잠시 오늘도 수련에 열중하는 펭귄 녀석을 만났기에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펭귄은 꽤나 수명이 짧은 편인지, 지난번에 만났을 때와 비교해서 상당히 늙어 보였다.
몸 군데군데 깃털이 빠지는 걸 봐선, 이젠 할아버지 펭귄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다.
펭귄 녀석은 지느러미를 앞으로 맞부딪치며 내게 인사를 돌려주며 조용히 자신의 둥지를 지키러 떠나갔다.
기묘한 교감을 나누고 산 정상에 도착한 나는 조심스럽게 호수에 낚싯대를 드리웠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물고기가 반응할 느낌이 들지 않고, 역시 오늘도 허탕인가 생각하던 그때.
아까 마주쳤던 펭귄이 포로롱포로롱 소리를 내며 내 주의를 끌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 펭귄을 바라보니 펭귄 녀석은 그대로 폭포를 향해 뛰어 들어갔다.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의아해하며 조심스럽게 펭귄이 낙하한 폭포 근처로 다가가 보니.
입에 펄떡거리는 물고기를 문 펭귄 녀석이 그대로 폭포를 거슬러 올라왔다.
“연어……?”
펭귄의 입에서 펄떡거리는 물고기는 연어와 비슷하게 생긴 생김새의 물고기였다.
그러니까 저 연어처럼 생긴 물고기는 설마 하지만, 폭포에 서식한다는 건가?
그러니까 아무리 낚싯대를 던져도 물고기가 잡히질 않지.
근데, 저 폭포에 낚싯대를 던진다고 해서 물고기가 잡힐까?
아무리 생각해도 폭포의 물살에 낚싯대를 잃어버리는 결말밖에 예상되지 않는다.
“포로롱?”
펭귄은 내게 선물이라는 듯 물고기를 던져두고 다시 폭포 속으로 잠수해 갔고.
나는 가만히 폭포와 물고기를 바라보다 잔잔한 호수에 다시 낚싯대를 던졌다.
아무리 낚싯대를 던져 봤자 물고기가 잡히지 않을 걸 알지만, 일단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안도감이 드니까.
블랑카의 합류로 어느 정도 식량 수급이 안정화됐다지만, 그만큼 식량 소비량도 늘어나서 불안 요소는 여전히 남아 있다.
블랑카의 사냥 말고도 새롭게 식량을 얻을 방법을 확보해 놔야 한다.
만약 블랑카가 나와의 생활에서 감정이 상해서 나를 놔두고 떠나 버린다면?
나는 다시 전처럼 하루 먹고사는 것도 힘든 생활을 하게 될 것이고.
지금처럼 사이코패스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내려는 생각 따위는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애초에 일단 먹고살 만해야 다른 것에 신경을 쓸 여유가 생기지.
그나저나, 그 사이코패스의 정체를 알아내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지금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사이코패스가 내게 접근할 때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어 내는 것이다.
뭐라고 해야 할까?
그 사이코패스의 손가락이나 신체에 접촉할 때마다, 정체불명의 정보들이 내게 흘러들어 온다.
정보라고도 할 수 없는 단순한 찌꺼기에 불과하지만.
그 정보들을 하나로 뭉치면 사이코패스의 정체가 무엇인지 조금은 감이 잡히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그 ‘손가락’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알 수 있겠지.
한참을 호수에 낚싯대를 던진 채로 온갖 생각을 하다가 낚싯대를 거둬들인다.
미끼는 당연하게도 여전히 낚싯바늘에 얌전히 잘 걸려 있었다.
한숨을 내쉬며 펭귄이 선물한 물고기를 챙겨서 자리에서 일어난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다 문득 내 시선이 정체불명의 석상에 닿았다.
한때 내가 이해하지 못하던 정보가 가득하던 석상의 얼굴 부위에는, 이젠 ‘얼굴’이라는 글씨가 써져 있었다.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건 없다.
펭귄이나 슬라임도, 나와 소통이 안 될 것 같던 미지의 존재였는데 이젠 나와 어느 정도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존재가 됐다.
그리고 저 석상의 정보도, 이제는 아주 단편적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그러니 사이코패스의 정체 또한, 언젠가는 내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희망을 품으며 물고기를 들고 집으로 귀환했고, 문 앞에 마치 택배처럼 놓여 있는 거대한 침대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한 사람이 쓸 만한 사이즈가 아니라, 두 사람이 누워도 넉넉한 사이즈의 침대.
나는 문득 그 사이코패스가 어제의 일도 전부 지켜봤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여전히 하늘은 티끌 하나 없이 맑았다.
사이코패스가 내게 악의를 품고 행동하는 게 아니라는 건 알겠지만, 이런 뜬금없는 선물을 받을 때마다 기분이 묘해진다.
필요 없는 건 아닌데, 늘 항상 가장 필요한 것에서 조금씩 동떨어진 것을 선물해 온다.
“내 말이 들리면, 이딴 거 말고 총이나 하나 선물해 줘. 이왕이면 무한 탄창으로. 아니면 먹을 거나 내놓든가.”
나는 하늘을 향해 투덜거리며 커다란 침대를 집 안으로 집어넣었고.
다음 날 아침, 나는 블랑카의 제단에서 새로운 사이코패스의 선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씨앗?”
정체불명의 씨앗이 잔뜩 담긴 봉투들이 제단 위에 살포시 올려져 있던 것이었다.
* * *
“원래, 문명의 기초는 농사예요. 농사. 대부분의 문명들이 농사를 시작하면서 발전했답니다?”
클라인은 카메라에 대고 그렇게 설명하며 씨앗들이 담긴 봉투를 화면에 비췄다.
“네. 그렇습니다. 오늘 제가 보여 드릴 콘텐츠는~! 자쟈잔! 잉간이 농사짓는 날! 입니다!”
클라인이 화면에 비춰 보인 씨앗들은 원시 문명이 농경 사회로 진입할 때 키웠다는 작물들의 씨앗.
클라인이 지구의 정보를 살펴보며, 최대한 지구의 문명이 키웠던 작물들과 비슷한 작물들을 선정한 것이었다.
“제가 최근에는 일부러 사료를 급여하는 걸 최대한 줄이고 있거든요? 지금 이 상태라면 잉간이와 켄토르에게 필요한 식량이 부족할 거예요. 그 상황에서 이렇게 작물로 사용할 수 있는 씨앗을 준다면, 재배를 시도해 보겠죠?”
아니면 씨앗을 식량으로 이용하려고 하거나.
그런 경우에는 클라인이 직접 손으로 시범을 보이며 도움을 줘야 하겠지만 말이다.
“가끔, 이렇게 이야기하실 수 있어요. 차원항에서 농사가 무슨 소용이냐? 차원항에선 농사를 지을 필요가 없게 느끼는 게 맞지 않냐? 이렇게요.”
클라인은 그게 아니라는 듯 신체 말단을 좌우로 흔들었다.
“원래 차원항의 목적이 그렇기는 하지만, 때로는 예외를 둬야 할 때가 있어요. 식량 수급이 너무 원활하다 보면 사육 생물들의 활동량이 점차 줄어들게 되거든요.”
사육 생물들의 활동량이 줄어드는 것은 사육항에서 주로 관찰되는 현상이지만.
때때로 먹이 수급이 너무 원활한 차원항에서도 발생한다.
몇 걸음만 걸으면 먹이를 찾을 수 있고, 먹이를 비축하기도 쉬운 경우에 자주 발생한다.
“사육 생물들의 활동량이 줄어드는 것은 그리 좋은 현상이 아니에요. 문명 발전 속도도 느려지고, 여러 건강상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거든요.”
그렇다고 먹이 공급을 줄이는 것은 생물 학대나 다름없는 짓.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운동량 부족을 해결할 수 있을까?
클라인은 카메라를 바라보며 운동량 부족을 해결할 방법은 농사라고 단언했다.
“여기서 이렇게, 농사를 시작하게 하면 활동량 부족과 먹이 수급을 단번에 해결할 수 있어요. 농사라는 것은 꾸준한 신체 활동이 없으면 할 수가 없거든요.”
살짝 먹이 공급을 모자라게 하면서도 농사를 통해 먹이를 수급하게 해 주면, 꾸준히 활동을 하면서도 먹이가 모자란 상태에 놔두지 않을 수 있다.
“자, 그럼 이제 차원항 안에 씨앗을 투하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설명을 끝마친 클라인은 차원항 안에 씨앗을 집어넣고 푹신한 침대에서 잠자는 잉간이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리고 그런 클라인의 모습을 파인만은 흥미진진하게 구경하고 있었다.
늘 그렇듯, 호의를 가득 담아서 말이다.
46화 지구산 인간에게 씨앗을 줘 봤어요! 예상 밖의 결과? 이런 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재배 작물 319-6b호]
-우주 공간에서도 자랄 수 있게 개량된 작물. 주로 차원 생물들의 먹이로 사용된다.
[붉은불꽃콩]
-레닌을 원산지로 하는 콩과 식물. 작은 폭발을 일으켜 씨앗을 멀리 날려 보내는 특이한 생태를 가지고 있다. 꼬투리와 씨앗을 식용으로 사용한다.
[뱀넝쿨꽃]
-리우테스를 원산지로 하는 덩굴식물. 질긴 생명력 덕분에 교란 위험종으로 지정되었으며, 보호종이 서식하는 구역에 반입하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시체달맞이풀]
-리베리아를 원산지로 하는 식용식물. 시체가 넘쳐 난다는 리베리아의 특수한 환경에 맞춰서 진화한 식물로, 시체를 양분 삼아 자라난다.
[노리노 붉은 후추]
-노리노의 환경에 맞게 개량된 붉은 후추. 그러나 노리노의 환경에 맞춰진 탓인지 붉은 후추 특유의 정보가 사라져 농작물로서의 가치는 없어졌다. 단, 차원 생물들의 기호품으로서의 역할은 여전히 가능하다.
제단에 놓여 있던 씨앗들을 만능 사전으로 관찰한 결과, 사전은 이 씨앗들이 전부 일종의 농작물의 씨앗이라고 알려 왔다.
이건 또, 예의 그거겠지?
사이코패스가 내게 뭔갈 던져 주고, 내가 그것들로 뭔갈 하는 모습을 관찰하는 그거.
이번에는 내가 뭐 농사를 짓는 모습을 보고 싶기라도 한 걸까?
으음, 확실히 안정적으로 식량을 수급하기 위해서 농사를 언젠가 지을 생각을 하긴 했는데.
아직 제대로 된 도구들도 전부 갖추지 못했는데 농사를 짓는 건 좀 시기상조가 아닌가?
뭐, 토양에 돌 같은 것도 없으니 따로 땅을 갈아엎진 않아도 될 것 같다만.
그런데 농사라는 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시작해도 잘되는 거였나?
내가 지금까지 농사 비슷한 일을 해 본 건 전자파 차단용 선인장을 키웠을 때뿐이다.
그때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선인장이 죽어 버렸는데, 아무 정보도 없는 외계의 식물들을 내가 잘 키울 수 있을까?
실패한다고 벌칙 같은 걸 주진 않겠지?
여전히 사이코패스가 내게 호의를 보내는 이유를 모르겠으니, 도저히 사이코패스의 호의를 잃을 만한 짓을 하기 싫다.
후, 이런 생각은 그만 뒤로 밀어 두고 지금은 이 씨앗들을 어떻게 활용할지 생각해 보자.
지금 내 손에 들린 씨앗들을 전부 한 번에 파종하는 건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닐 것 같다.
만능 사전에 파종 시기가 적혀 있긴 하지만, 문제가 있다.
-녹색의 달에 파종해서 흙색의 달에 수확한다.
1월이니, 6월이니 써져 있는 게 아니라 이세계의 기준으로 시간이 기록되어 있던 것이었다.
물론, 만능 사전에 다시 검색해서 녹색의 달이 4월 달쯤이라는 건 알아냈지만.
나는 지금 이 어항의 시간이나 날씨 개념이 어떤지 전혀 모른다.
어쩌면 이 어항에선 1년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언제나 같은 날씨일 수도 있고, 아니면 날씨가 변화할 수도 있다.
아직까진 날씨가 변한 적은 없지만, 곧 날씨가 바뀐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으니까.
하루아침에 태양이 나타나는 세상인데, 비가 못 내릴 건 없지.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건, 태양이 지금이라도 생겼으니 시간을 조금이라도 챙길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나중에 해시계라도 만들어 볼까?
아무튼 한 번에 모든 씨앗을 파종하는 건 그리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 것 같다.
일단 조금씩 씨앗을 뿌려서 만능 사전의 도움을 받아서 재배한 다음, 어떻게 재배하는지 알 것 같을 때 본격적으로 농사를 시작해야겠지.
만능 사전의 도움은 솔직히 말해서 기대할 수가 없다.
농사하는 법? 언제나처럼 마법을 잔뜩 들이부으면 된단다.
진짜 언제나 중요한 부분에선 쓸모없네.
“블랑카.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농사에 관련된 마법은…….”
“몰라! 애초에 나는 따로 마법을 배우지도 않았고.”
“마력을 쓸 수 있으면서, 왜 마법은 못 써?”
“마법은 몸 밖으로 마력을 꺼내 쓰는 거니까. 마력으로 몸을 강화시키는 것과는 다른 거야.”
내가 보기엔 그 마력 창? 그것도 마법처럼 보이는데, 블랑카 입장에선 그게 아닌 모양이다.
블랑카 왈, 마력 창은 자신의 몸의 일부의 연장선상이라고.
무슨 신검합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네.
아무튼 농사일에서 블랑카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은 오로지 힘을 쓰는 일뿐이라는 것 같다.
애초에 블랑카는 사냥하러 다녀야 하니 농사일은 오로지 나 혼자서 해야 한다.
호수에 들러서 다 씻은 블랑카는 사이코패스가 준 씨앗에 흥미가 생겼는지 나와 조금 거리를 둔 채로 씨앗을 관찰했다.
그날, 내게 딱 잘라 아니라고 한 뒤로 블랑카는 일부러 나와의 사이에 어느 정도 간격을 두기 시작했다.
마사지를 해 달라는 일도 사라졌고, 언제나 나를 의식하는 듯한 모습이다.
그렇다고 다시 거리를 좁히라고 하기에는 그 꼴이 퍽 우스꽝스러워서 내가 먼저 말을 꺼내지도 못하겠고.
뭐, 그 전이 너무 허물없던 거고 서로가 남성과 여성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정도 거리감이 맞는 게 아닐까?
씨앗들을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살펴보던 블랑카는, 시체달맞이풀의 씨앗을 발견하고는 입을 열었다.
“어, 이거!”
“아는 거야?”
“응. 시체만 있으면 잘 자라서 이게 거의 주식이었거든.”
“……배추가?”
“뭐, 몸이 몸이다 보니, 식물만 먹어도 문제는 없거든. 그만큼 많이 먹어야 하긴 하지만…….”
그러고 보니 말은 원래 초식동물이었지?
워낙 블랑카가 고기를 먹어 치우다 보니 깜빡하고 있었다.
그런데 잠깐만, 블랑카가 지금 먹어 치우는 고기의 양도 심상치 않은데.
소화 잘되는 고기가 아니라 식물로 지금 먹는 양을 채운다고 하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식사를 해야 하는 걸까?
“이게, 진짜 잘 자라서. 그냥 시체에 뿌려 두기만 하면 알아서 크거든. 딱히 뭐 물을 준다거나 할 필요 없이.”
“시체? 굳이 식물을 키우려고 고기를 쓴다고? 그럴 바에는 그냥 고기를 먹으면 되지 않아?”
블랑카의 이야기를 듣던 나는 문득 생각난 의문을 표시했고, 블랑카는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뭐, 언데드들도 시체긴 하니까…….”
“아…….”
그러고 보니 리베리아는 언데드들이 잔뜩 몰려오는 좀비 아포칼립스 세계였지?
그런 세계라면 충분히 주식으로 먹을 만한 것 같기도 하네.
“시체라는 게, 살점이나 이런 게 온전한 시체여야 하는 거야?”
“응?”
“아니, 그냥 내장 정도만 있어도 잘 자라나 싶어서.”
“응. 그냥 내장 조각에 키워도 잘 자라.”
“그래?”
오호, 그렇단 말이지?
소중한 고기를 소비해 가며 맛대가리도 없을 게 분명한 풀을 만들 필요는 없겠네.
블랑카가 사냥한 동물들을 도축하고 나오는 부산물들을 이용하면 손쉽게 재배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런 풀때기보다 더 중요한 건 따로 있다.
바로 이 ‘재배 작물 319-6b호’라고 되어 있는 씨앗.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아무리 봐도 이건 쌀이다. 쌀.
꿀꺽.
머릿속에 따끈한 쌀밥의 모습이 떠오르며 저절로 침이 꼴깍 넘어간다.
단백질도 좋지만, 역시 탄수화물이 최고다.
지금까지는 어떻게 탄수화물을 구할 방법이 없어서 참아 왔지만, 다시 쌀을 먹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다른 씨앗들은 전부 망하더라도, 이 쌀만은 반드시 재배에 성공해야 한다.
만능 사전의 말로는 우주 공간에서도 재배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주의를 기울여서 나쁠 건 없겠지.
붉은 후추는 이름으로 봐선 향신료인 것 같은데, 후추니까 역시 매운맛이 나려나?
붉은불꽃콩은 뭐, 이름 그대로 콩인 것 같고.
쌀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작물은 이 뱀넝쿨꽃일 것 같다.
뱀넝쿨꽃, 내가 전부터 찾아 헤매던 실의 재료로 사용할 수 있는 식물이다.
뭐, 저 뱀넝쿨꽃을 키운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 베틀같이 실을 짜낼 수 있는 도구를 만들어야겠지만.
그건 뭐, 만들면 되는 거니까.
그럼 대충 씨앗이 어떤 건지 살펴봤으니 이제 남은 건 씨앗을 심는 건데.
달맞이풀은 내장에 심어야 하니 이건 패스.
물을 주기 편하게끔 호수 주위에 심는 게 나으려나?
하지만 씨앗을 많이 심을 것도 아니니까, 돌보기 편하게끔 집 근처에 심는 게 오히려 나을 수도 있겠다.
호수는 이 근방의 유일한 수원지다 보니, 꽤 많은 생물들이 오고 간다.
아침에 몸을 씻으려 호수에 들르면 항상 놀이나 토끼들의 발자국을 발견할 정도니까.
거기에다가 내가 만드는 조잡한 울타리로는 무오 같은 녀석들이 밀고 들어오는 걸 막을 수가 없다.
차라리 그 어떤 동물들도 다가올 생각을 하질 않는 집 주위가 물을 주기 힘들어도 더 나을 것 같네.
호수와의 거리가 그렇게 먼 것도 아니니까.
좋아, 슬슬 계획이 다 세워졌다.
그렇게 생각하며 씨앗들 중에서 먼저 심을 씨앗을 선별하려 하자.
“그럼, 잉간. 다녀올게!”
“응. 잘 다녀와.”
블랑카가 오늘 일용할 양식을 얻으러 사냥을 나갔고, 나는 조용히 문가에 서서 사냥 나가는 블랑카를 배웅해 줬다.
블랑카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블랑카를 배웅하고.
달맞이풀을 제외한 다른 씨앗들을 두세 개씩 주워서 집 근처 양지바른 곳에 묻었다.
어제 떠다 둔 토기에 담긴 물을 흠뻑 땅에 적시고, 잊어 두지 않게끔 작은 나뭇가지들로 씨앗들의 위치를 표시해 둔다.
자, 그럼 이제 씨앗이 발아할 때까지는 할 일이 없는데.
사냥을 블랑카가 모두 도맡아서 하다 보니 딱히 내가 할 만한 일이 없네.
블랑카가 사냥하는 데 따라가 볼까 생각도 해 봤지만 내가 있으면 방해만 될 것 같다.
그럼 낚시?
낚시로 낚일 물고기가 없다는 걸 아는데 낚시를 하는 건 좀 그렇고.
그럼, 집이나 꾸미고 있을까?
이것저것 쓸 만한 가구들을 만들어 보고 싶은데.
문제는 도구가 없네.
블랑카의 힘을 빌리면 나무를 다듬는 일 정도는 간단하겠지만.
블랑카의 힘을 빌릴 수 없으니 나무를 제대로 다듬을 도구가 필요하다.
슬쩍 시선을 창고 한구석에 방치된 도끼로 향한다.
저런 도끼로는 불가능하겠고, 역시 톱이 없으면 힘들겠네.
하지만 나무나 돌로는 톱을 만들 수 없을 것 같은데…….
철.
그래, 내게 필요한 건 철기다.
하지만 철을 도대체 어떻게 만들지?
아니, 철을 얻을 수 있는 장소는 이미 알고 있다.
슬쩍 시선을 돌뱀의 껍질을 모아 둔 장소로 향한다.
이름을 돌뱀이라고 짓긴 했지만, 아무리 봐도 이 껍데기는 쇳덩어리다.
이 돌뱀의 껍데기만 어떻게 가공하면 철제 도구를 사용할 수 있을 텐데.
과연 내가 나 혼자서 철을 가공할 대장간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언젠가 쥬튜브에서 그런 영상을 본 거 같은데.
맨몸으로 집도 만들고 뭐든지 다 만드는 아저씨가 결국 용광로까지 만들어서 철기 문명에 진입하던 영상.
그래, 까짓거 해 보지 뭐.
만능 사전을 뒤져 가면서 노력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어차피 널린 건 시간이다.
한 번에 안 되면 다시 한번 시도해서 될 때까지 도전해 보는 거다.
“왕?”
한가롭게 바닥에 드러누워 하품하는 에포나의 시선을 받으며 나는 만능 사전을 뒤지며 조용히 용광로를 만들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 * *
“어라? 바로 농사를 시작할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클라인은 자신이 생각한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잉간이를 바라보며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씨앗 일부만 땅에 심은 잉간이는 농사에는 흥미 없다는 듯 바쁘게 무언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으엑, 이러면 영상을 편집하기 좀 귀찮아지는데.
블랑카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영상을 찍겠다고 잉간이의 행동을 강제할 수는 없는 일이니 가만히 잉간이의 행동을 지켜본다.
점토를 잔뜩 모으기 시작하는데, 뭘 하려는 거지?
“아, 설마……?”
그때, 클라인의 머릿속에 다른 애완 인간들을 사육할 때의 일이 떠오른다.
거기서는 직접 점토를 모으지 않고 마법으로 점토를 만들어 냈지만,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다.
“혹시, 철을 가공하려는 걸까요?”
원시적인 형태의 용광로를 만들기 위해서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이겠지.
클라인은 마법도 사용하지 못하는 잉간이가 철기 시대로 넘어가려면 자신의 도움이 있어야겠거니 생각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도움 없이 철기 시대로 진입하려 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야, 진짜 너무 대견하네요. 여러분, 마력이 없는 인간의 철기는 어떤 형태가 될지 궁금하지 않나요?”
클라인이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추지도 않고 잉간이를 관찰하던 그때.
“야.”
“어, 응?”
“나 간다.”
주섬주섬 짐을 챙겨서 클라인의 집을 나가려는 파인만이 클라인을 불렀다.
클라인은 파인만의 선언을 듣고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로? 너 집 없잖아?”
“중앙 차원으로. 나 모험가잖아, 인마. 사람을 무슨 노숙자로 만들고 있어.”
“아, 맞다. 보고를 해야 했었지?”
“그래. 무진장 귀찮지만, 어쩌겠냐? 법이 이런데.”
“아하하, 그렇지…….”
클라인은 파인만이 중앙으로 향하게 한 이유가 된 법을 떠올렸다.
분명히 모험가들은 원정 후에 반드시 중앙 정부에 들러서 모험 결과를 보고해야 한다는 법안이었지?
어째서 서면이 아니라 반드시 대면 보고를 해야 하는지는 도저히 모르겠지만 말이다.
파인만도 중앙으로 떠나기 귀찮은지 푹 한숨을 내쉬며 짐을 챙기고.
클라인은 그런 친구를 배웅해 주려 촬영을 잠깐 중지하고 멍하니 파인만이 짐을 챙기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클라인의 시선을 받던 파인만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클라인에게 말을 꺼냈다.
“아, 맞다. 너 있잖아. 그 쥬스농장인가 하는 녀석하고 뭔가 있지?”
“어, 어?”
“딱히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미안한데. 그래도 이것만은 기억해라.”
“뭐, 뭔데?”
“지금처럼만 해. 지금처럼. 지금처럼 도망치지 말고 맞서 싸워. 알겠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책임감을 가지고 맞서 싸워. 알겠지?”
파인만은 클라인에게 일어날 일이 걱정된다는 듯 클라인의 어깨를 붙잡고 진지하게 조언을 건넸고.
클라인은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응. 그럴게.”
“지금 네 모습이 참 보기 좋아서 하는 말이니까, 절대 잊지 말고. 아, 그리고 이왕이면 자격증은 빨리 따 놔라. 보호종 지정까진 한참 남았을 것 같지만, 혹시 모르는 거니까.”
“아, 알겠어. 알겠다고!”
“그러니까 제발 좀 집 밖으로 나가고! 어, 운동도 안 하니까 이렇게 잉여 정보가 뒤룩뒤룩 찌지!”
“잉여 정보는 매일 잘 털어 내고 있으니까! 그만 가 봐!”
“밥도 동결 정보로만 먹지 말고! 좀 네가 가공해서……!”
“아, 좀!”
끝까지 잔소리를 늘어놓는 파인만을 클라인이 집 밖으로 밀어내고.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눈 뒤 파인만은 클라인의 집을 떠나갔다.
파인만이 떠나가고 휑하게 비어 버린 집 안에서 클라인은 조용히 잉간이의 차원항을 쓰다듬었다.
그래.
내가 이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
그러니까, 도망치지 말자.
도망치지 말자.
지금 이 순간도 계속 도망치고 있으면서, 또다시 도망치는 건 꼴사납잖아.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호의가 가득한 눈빛으로 조용히 잉간이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그저 그렇게 바라볼 뿐이었다.
47화 석기시대는 이제 그만! 철기시대로 넘어가기 위한 잉간이의 노력?
용광로 만드는 법 첫 번째!
일단 대충 점토를 모은다.
그냥 모으는 수준이 아니라, 집을 만들 기세로 긁어모아야 한다.
시멘트 같은 걸 내가 이용할 수 없는 이상,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건축 재료는 점토들뿐이다.
용광로를 만들 때도 점토를 써야 하고, 풀무를 만들 때도 점토를 써야 하고, 거푸집을 만들 때에도 점토를 써먹어야 한다.
으아, 한동안은 뼈 빠지게 일해야겠네.
일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 새로운 일을 만들어서 고생한다니.
무언가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일단 만들어만 두면, 화덕으로도 이용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바구니와 돌창을 챙겨서 에포나와 함께 또다시 호숫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왕! 왕!”
호숫가에 도착하자 에포나는 으르렁거리며 자신의 존재를 주위에 뽐내지만.
한가롭게 호수에서 물을 마시는 그 어떤 짐승들도 에포나의 위협을 듣고 도망치지 않는다.
“큭큭.”
“끼잉…….”
그런 에포나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풀 죽은 에포나를 쓰다듬었다.
좋아, 여기서는 주인이 대신 복수를 해 주는 게 맞겠지?
“으, 으아!”
“왕……?”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호숫가에서 물을 마시는 무오 무리를 쫓아내고자 소리를 질러 봤지만 무오들은 내 목소리를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오히려 에포나가 나를 측은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돌창으로 찔러 봤자 특유의 열받는 울음소리만 들려올 게 뻔한데, 그냥 무시하는 게 맞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순식간에 사고를 뒤바꾸며 에포나를 바라보며 대화를 나눴다.
“에포나야. 우리가 굳이 저 녀석들을 쫓아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왕!”
“그치? 어차피 하나도 안 무서운데, 귀찮게 그럴 필요는 없겠지?”
“왕, 왕!”
에포나도 내 의견에 동의한다는 듯 짖었고, 나는 슬그머니 무오 무리를 지나쳐 전에 찾아낸 점토 발굴지로 향한다.
그나저나 무오 녀석들, 수가 엄청 늘어난 것 같네.
딱히 블랑카도 무오를 그렇게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고, 이 근방에서 무오를 잡아먹을 포식자가 없어서 그런 걸까?
지난번에 보니까 놀과 토끼들이 합동으로 무오를 사냥하던데.
그 무오를 사냥할 토끼들과 놀을 우리가 다 사냥하고 있으니…….
너무 무오가 늘어나지 않게끔 무오를 좀 사냥해야 하는 걸까?
생각해 보니 이제 무오의 사체를 써먹을 방법도 생겼지 않은가?
솔직히 무오 고기를 먹을 바에는 풀때기를 뜯어 먹는 게 더 낫지.
일단 지금은 무오를 사냥하러 온 게 아니니 무오는 일단 내버려 두고.
지난번에 점토를 채취했던 지역에 도착하자 점토를 채취한 흔적이 아직까지 메꿔지지 않고 뻥 뚫려 있었다.
바구니를 꽉 채울 정도로 점토를 바구니에 담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바구니에 담긴 점토들을 집 근처 바닥에 쏟아 두고, 다시 한번 호수로 돌아가 점토를 또 가져온다.
호숫가와 집을 5번은 왕복하고 나서야 용광로를 만들 때 필요한 양의 점토들이 쌓였다.
이제 남은 건 기존에 계획한 설계도대로 용광로를 만드는 건데.
용광로의 원리는 간단하다.
화력을 높여서 열을 강하게 만들어서 철을 녹인다.
일종의 화덕과 비슷하지만, 올라가는 온도가 화덕보다도 높을 뿐이다.
뭐, 현대의 용광로는 이것저것 여러 가지 기능이 더 추가되어 있겠지만.
내가 그런 용광로를 만들 수도 없고, 현대의 용광로들의 기본 원리도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화력을 올릴 수 있을까?
간단하게 생각해서, 불에 산소를 많이 집어넣으면 된다.
그걸 위해서 지금부터 간단한 풀무를 만들 필요가 있다.
용광로의 형태는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다.
만약 내가 뭐 철광석에서 철을 분리해야 한다거나 하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지금 내가 가공하려 하는 것은 순수한 철로 이루어진 돌뱀의 껍질들.
나는 그냥 이 돌뱀의 껍질들을 녹여서 내가 원하는 모양으로 가공하기만 하면 된다.
물론 이 껍질들을 녹이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겠지만.
그렇다면 풀무 하나만 만들면 끝이 나는 걸까?
아니, 계속해서 용광로의 연료로 사용할 것이 필요하다.
즉, 숯을 구워야 한다는 것이다.
뭐 석탄이나 구름고래의 솜털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면 그걸 연로로 썼겠지만.
구름고래의 솜털은 푸른 점액이 죄다 먹어 치웠고, 석탄은 여기에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렇다면 여기서 정리를 해 보자.
1순위로 만들어야 할 것은 풀무와 숯.
풀무를 먼저 만드는 게 숯을 굽는 데 더 도움이 될 테니 숯보다도 풀무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만능 사전을 참조해 가며 풀무를 점토로 만들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만들려는 건 예전에 봤었던 쥬튜브 영상에서처럼 활을 이용한 풀무.
만능 사전은 언제나처럼 마력을 이용한 풀무 제작법만 잔뜩 소개해 줬다.
바람 마법이 자동으로 시전되는 풀무는 양반이다.
무슨 화염의 룬을 새겨서 풀무가 아닌 화염방사기를 만드는 방법이 소개되어 있질 않나.
그래도 내가 만들고 싶었던 풀무와 비슷한 풀무 도안이 하나 소개되어 있었기에 나는 그 도안을 참조했다.
우선 나뭇가지 하나를 4갈래로 쪼개서 일종의 프로펠러를 만들고, 그 프로펠러를 회전시켜서 바람을 만드는 방식이다.
뭐, 프로펠러를 만드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어서 괜찮은데.
문제는 풀무의 몸통을 점토로 만들어 내는 일.
전에 토기를 만들 때에도 느꼈지만 나는 손재주가 그리 있는 편은 아니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걸쳐서 나는 뾰족한 주둥이를 가진 풀무의 몸통을 만들어 냈고.
나는 서둘러 집 바깥에 발화석으로 불을 붙여서 풀무를 건조하기 시작했다.
중간에 만들어진 실패작 풀무들은 전부 박살 내서 다시 점토로 만들었고.
자, 이제 남은 건 숯을 구울 차례다.
맨 처음에 나는 숯가마를 만들고, 대충 풀무질을 하면서 숯을 구울 생각이었지만.
만능 사전을 찾아보다 나는 꽤 괜찮은 방법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무를 한데 쌓아 올리고, 그 주위를 점토로 덮은 다음에 꼭대기에 구멍을 하나 낸 다음 그 구멍으로 화염 마법을 사용하는 방식인데.
화염 마법만 점화석으로 대체한다면 풀무가 없이도 숯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럼 빨리 숯부터 만들어 보자.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쓰윽 주위를 둘러보며 숯으로 만들 나무들을 찾아봤지만.
최근에는 벌목을 잘 진행하지 않았기에 생각보다 숯으로 만들 나뭇가지들이 적었다.
쓱 하늘을 올려다보니 아직 블랑카가 돌아올 시간까지는 한참 남았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내가 직접 나무를 베는 수밖에 없겠네.
와, 진짜 톱 하나 만들어 보겠다고 이게 무슨 난리야?
나무를 베는 도구를 만들기 위해서 나무를 베야 한다니.
참 신기한 세상의 이치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오랜만에 창고에 잠들어 있던 돌도끼를 들고 나무를 베어 넘기기 시작했다.
한참 숯으로 가공할 만한 적당한 크기의 나무들을 베자 해는 금방 떨어졌고.
내가 나무들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자 어느새 블랑카가 두리번거리며 나를 찾고 있었다.
“잉간, 이게 다 뭐야?”
블랑카는 집 주변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정체불명의 구조물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고.
나는 베어 온 나무들에 진흙을 처바르고, 불을 붙이며 블랑카에게 설명했다.
“대장간을 만들어 보려고.”
“대장간? 그게 가능하겠어?”
“일단 해 봐야지, 뭐.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래? 아, 맞다! 오늘은 좀 커다란 거 잡아 왔어!”
“커다란 거?”
블랑카는 해맑은 표정으로 내게 자신이 사냥한 사냥감을 자랑해 왔다.
그러자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길게 엄니가 자라난 표범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았는데, 오늘부터 갑자기 나타났더라고. 여신님의 은혜일까?”
“허어…….”
으엑, 그 사이코패스도 무오가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무오의 개체 수를 줄이기 위해서 슬슬 중형 포식자들을 투입하기 시작한 것 같은데.
뭐, 일단 블랑카가 잡아 오긴 했으니 고기로 만들긴 하겠지만.
이렇게 커다란 포식자가 돌아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조금 불안해진다.
“밤에 덮쳐 온다거나, 그러진 않겠지?”
“그건 괜찮아. 이 녀석들, 생김새는 이래도 사실 초식이거든.”
“초식?”
“아, 잡식이라는 게 더 맞겠다. 시체를 파먹거나, 아니면 식물을 뜯어 먹는 녀석들이거든. 사람을 공격하는 일은 없다고 봐도 돼.”
“리베리아에서 봤었나 보지?”
“많이 봤었지. 신님의 은총으로 여러 번 내려왔었거든.”
음, 그러니까 대충 기회성 포식자라고 보는 게 맞는 걸까?
블랑카의 말을 들어 보면 평소에는 풀을 뜯어 먹으며 버티다가 만만한 녀석들을 사냥한다는 것 같은데.
그래도 여전히 나는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고,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본 블랑카는 조심스럽게 내게 제안을 건넸다.
“저, 저기. 그러면 있잖아. 잉간…….”
“응?”
“그렇게 걱정되면, 내 마력을 묻히고 다니는 게 어때? 그러면 확실하게 안전하긴 할 텐데…….”
“마력? 아, 지난번에 가스가 몰려올 때 해 줬던 거?”
“으, 응. 그런 거. 네가 싫지만 않으면 내가……. 흐약?!”
“왕!”
블랑카는 말을 끝내려 했지만, 갑작스럽게 자신의 등에 올라탄 에포나에 의해서 목소리가 끊기고 말았다.
에포나는 어째서인지 화가 난 듯한 소리를 내며 블랑카의 등 위에서 촉수를 마구 후려쳤고.
블랑카는 새된 목소리를 내며 몸을 뒤틀었다.
“미안, 미안해요! 아, 알았으니까……!”
블랑카가 한바탕 몸을 뒤틀며 어째서인지 모를 사과를 에포나에게 건네자.
그제야 에포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로 블랑카에게서 떨어졌고.
폴짝, 그대로 내 머리 위로 뛰어올라 자리를 잡으며 당당하게 외쳤다.
“왕!”
마치 이 녀석은 내가 지켜 준다는 듯한 울음소리다.
나는 피식 웃으며 에포나를 들어 올려 품 안에 안으며 에포나에게 속삭였다.
“그래. 네가 있으니 하나도 안 무섭다.”
“왕!”
당연하지.
그런 말을 하듯 에포나는 기분 좋은 목소리로 짤막하게 짓더니.
블랑카를 째릿 노려보며 내 침대 위로 펄쩍 올라갔다.
“으으…….”
그런 에포나를 바라보며 블랑카는 풀 죽은 듯한 모습으로 중얼거렸고.
나는 그런 블랑카를 바라보고 슬며시 말미잘에 몸을 맡기면서 피로를 풀며 그날 하루를 끝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난 나는 서둘러 숯을 묻어 둔 진흙을 분해하기 시작했다.
툭, 투둑,
나무 방망이로 단단하게 굳은 진흙을 박살 내자 시커멓게 잘 구워진 숯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제 모닥불 근처에서 건조시키던 풀무 또한 괜찮게 잘 만들어진 것 같고.
이제 남은 건 용광로와 거푸집을 만드는 일뿐이다.
적당히 용광로로 사용할 굴뚝 모양의 구조물과 거푸집을 만들고.
씨앗들에 물을 주며 블랑카에게 배운 명상법으로 대충 용광로가 완성될 때까지 시간을 때우고.
드디어 대망의 용광로가 처음으로 돌아가는 날이 밝았다.
블랑카 또한 용광로에 흥미가 있었는지 빨리 사냥에 나가지 않고 아침부터 용광로에 불이 붙는 모습을 지켜봤다.
“자, 그럼. 붙인다?”
카운트다운을 끝마치고 조심스럽게 숯에 불을 붙인다.
풀무질을 시작하자 불이 거세게 타오르며 시뻘겋게 용광로를 달구기 시작하고.
나는 조심스럽게 거푸집 안에 돌뱀의 껍질을 담아서 용광로 안에 집어넣었다.
“그럼, 이제 끝이야?”
“아니. 이제 계속 풀무질을 하면서 불이 꺼지지 않게 잘 지켜봐야지.”
“그래?”
블랑카가 사냥을 하러 자리를 비우고, 나는 필사적으로 풀무질을 하며 용광로의 온도를 높였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얼굴에 검댕이 달라붙는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때려치우고 호수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얼마 안 있으면 결과물이 나올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도저히 자리를 비울 수 없었고.
밤이 다 될 때까지 계속해서 용광로 앞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드디어 나는 내 노력의 결과물을 확인하려 조심스럽게 용광로의 뚜껑을 개봉했고.
그 결과.
“음…… 저기, 실패할 수도 있지. 너무 상심하지 마. 잉간. 다시 시도하면 되지!”
“어…… 그렇지. 음, 다시 시도하면 되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단 1도 변화가 없는 돌뱀의 껍데기였다.
순간 턱, 하고 심장이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고 새롭게 용광로를 제작해 본다.
화력이 부족했던 거니까, 좀 더 화력을 모을 수 있게끔 심혈을 기울여서 용광로를 만든다.
최대한 열이 새어 나가지 않게끔 외벽을 두껍게 만들고.
풀무질과 숯도 기존의 배는 되는 양으로 집어넣고.
전력을 다해서 용광로를 손봤지만.
이번에도 역시 돌뱀의 껍질은 살작 그을리기만 했을 뿐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두 번째의 시도마저 실패로 돌아가자 나는 슬슬 짜증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화력, 화력, 화력!
망할, 화력이 너무 부족하다.
만능 사전을 찾아봐도 화력이 부족하다면 불을 더 넣으면 된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만 해 댄다.
나는 너희 마력충들처럼 화염 마법을 쓸 수 없다고!
“으아아아아아!!!”
당장이라도 용광로를 만드는 걸 때려치우고 싶지만, 너무 많은 노력을 해 버렸다.
이렇게 되면 지금까지 들인 수고 때문에라도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다.
이래서 노력은 적당히 해야 하는 건데.
내가 속으로 투덜거리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화력을 올릴 수 있을지 고민하던 그때.
뜨거운 용광로의 열기 때문에 맛이 가 버린 내 뇌는 맛이 간 발상을 떠올렸다.
바람만 공급하니까 화력이 부족한 거라면, 바람하고 불을 같이 공급하면 되잖아?
전에 블랑카가 그랬었지?
마력석에 불의 마력을 여차저차하면 큰 폭발이 발생한다고.
* * *
“하아, 망할.”
중앙 정부에 원정 결과를 보고하고 나온 파인만은 한숨을 내쉬며 벤치에 걸터앉았다.
평소라면 대충 형식적인 질문만을 던졌을 공무원들이 오늘은 참 적극적으로 나섰다.
마치, 지구의 인간들을 보호종으로 지정하고 싶은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뭐, 아직 지구산 인간을 보호종으로 지정하기엔 증거가 부족하지만 말이다.
“브리더들이 단체로 나선 거려나. 하아…….”
그리고 파인만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 배후의 존재가 누구인지 손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브리더들.
그들이 지구산 인간을 손에 넣고자 이런 수작을 부린 것이겠지.
보호종으로 지정이 됐으니 보호종을 증식시킨다는 명목으로 정부의 보호를 받아 가며 지구산 인간을 구하는 원정을 꾸릴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정보 전쟁을 뚫고 브리더들도 지구산 인간을 구할 수 있게 되겠지.
보호종을 보호하기 위한 법이 보호종들을 더욱 브리더들의 밀렵에 취약하게 만드는 모순.
뭐, 파인만도 브리더들이 인공적으로 번식을 시키는 게 잘못됐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중요한 것은 그거다.
지구산 인간이 보호종으로 지정되면 더 이상 클라인이 잉간이를 키울 수 없게 된다는 사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클라인의 잉간이를 받아 갈 브리더는 아마…….
“아이고, 이런 곳에서 다 뵙네요. 파인만 모험가님.”
“……쥬스농장, 맞죠?”
“이야, 모험가님이 제 이름을 아시다니. 이것 참 영광입니다.”
“쥬튜브는 저도 자주 챙겨 보거든요.”
“아하하. 그거 감사하네요.”
쥬스농장.
파인만은 자신의 앞에 사고 회로를 진동시키며 나타난 쥬스농장을 가만히 바라봤다.
역시 마음에 안 든다.
그녀의 오랜 친구, 클라인과 쥬스농장이 모종의 갈등을 겪었다는 것도 마음에 걸리지만.
저 헤실거리는 웃음과 몸동작에서 느껴지는 정보들이 모두 마음에 안 든다.
“아하하, 파인만 님은 오늘 무슨 일로 여기에 오셨나요? 저는 오늘…….”
“야, 빙빙 돌려 말하지 말고. 그냥 본론부터 말해. 짜증 나니까.”
파인만은 자신에게 안부 인사를 건네는 쥬스농장을 딱 잘라 거부하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쥬스농장의 정보를 조금씩 해독하기 시작했다.
쥬스농장은 파인만이 무척 무례한 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으며 방긋 사고 회로를 반짝였다.
“우리 파인만 씨는 성격이 급하시네. 그런 성격, 효율적이지 못해요.”
“직선적인 게 가장 효율적인 거 아닌가?”
“빙빙 돌아가는 웜홀이 때로는 가장 짧은 길일 때도 있는 법이죠.”
“그래? 하지만 나한테는 아냐. 귀찮으니까, 빨리 용건이나 말해.”
파인만이 짜증 난다는 듯이 허리춤에서 연초를 꺼내 들어 입에 문다.
그러자 쥬스농장의 표정이 미세하게 일그러지고, 파인만은 피식 웃으며 연초를 더 깊이 들이마셨다.
“뭐, 그게 취향이시라면.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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