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 6
그 사실을 깨닫자 두려움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내 몸인데, 내 것이 아닌 것 같다.
맞다.
이건 내 몸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있다.
아파.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이곳에서 명확한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지?
익숙했던 풍경이 낯선 풍경으로 뒤바뀌고.
낯선 감각이 익숙한 감각으로 뒤바뀌며 서서히 세상이 녹아내린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도 나를 볼 수가 없다.
그렇다면 나는 존재하는 게 맞을까?
생각마저 꾸물텅 녹아내리던 순간.
“안녕.”
익숙한 누군가의 인사가 들려오고.
포근하고, 미끈거리는 촉수가 내 몸을 휘감으며 내 몸의 윤곽을 내게 알려 준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나를 관측하며 나의 존재를 증명하고.
곧이어, 나는 어제의 새하얀 공간에서 내가 그녀의 품에 안겨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 촉수에 집어삼켜진 상황을 안겼다고 표현할 수 있다면 말이다.
혐오감이 들어야 할 상황이지만 나는 어째서인지 안도감을 느꼈고.
천천히 그녀의 손가락이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느껴져?”
뭘?
“역시 아직은 무리구나.”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지난번처럼 천천히 내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포갰고.
“왕!”
나는 즐거운 아침을 알리는 에포나의 울음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슬며시 주위를 둘러보지만, 아직 날은 밝지 않은 것 같고.
블랑카 또한 곤히 자고 있었다.
어느새 모닥불도 꺼져 버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나를 보는 건.
몽롱하게 빛나는 에포나의 두 눈뿐이었다.
이날, 블랑카와 함께 또다시 해가 질 때까지 달렸지만 여전히 세상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여행을 떠난 지 2일 차.
나는 또다시 잠들었고.
다시 꿈을 꿨다.
전날 꿨던 꿈과 같았지만, 이번에는 다른 게 있었다.
지금껏 보이지 않던, 나를 괴롭히던 누군가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 끝은 전과 동일했다.
“느껴져?”
검은 촉수의 여인이 자신의 품 안에 나를 끌어안고 질문을 하고.
그녀와 내 얼굴이 포개진 뒤에 항상 꿈에서 깨어난다.
3일 차.
자신을 괴롭히는 누군가들이 외치는 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무슨 언어인지,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외치는 말에 모멸감과 우월감이 담겨 있다는 것은 알았다.
“느껴져?”
“모르겠어.”
다시.
이번에는 좀 더 끈적하게.
4일 차.
여전히 평원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잉간?”
계속 같은 풍경만 펼쳐진다.
“잉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세계의 끝에 도달해도 여길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면 어쩌지?
신인지 사이코패스인지 뭔가가, 완벽히 이 세상을 통제하고 있고.
그것이 자신의 마음대로 이 세계에서 신과 다를 바 없는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내가 아무리 그것이 신이 아니라 부정해도, 블랑카가 말하는 신과 다를 게 뭘까?
그건.
“잉간!”
“어, 어? 나 불렀어?”
모르겠다.
“괜찮은가? 안색이 좋지 않은데.”
블랑카는 요 며칠 사이 급격하게 어두워진 내 낯빛을 걱정했고.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블랑카의 걱정을 털어 냈다.
“괜찮아. 자꾸 악몽을 꿔서.”
“악몽…….”
그렇지만 블랑카는 여전히 나를 걱정했고.
나는 꿈을 꿨다.
“으, 아. 앗?”
전과 바뀌지 않은 꿈.
달라진 건, 내가 비명을 지를 수 있게 됐다는 것.
하지만 아무리 비명을 질러 봐도 누군가 도와주는 일은 없고.
“끄흑, 흑…….”
무언가가 몸을 훑고 지나가는 끔찍한 감촉이 추가되어 나는 목이 터지도록 비명을 질러 댈 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녹아내린다.
“시, 싫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어둠 속에서 나는 내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잔뜩 소리 질렀지만.
이윽고 나는 내가 소리를 내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나를 상냥하게 껴안는 그녀의 감촉.
“어때, 느껴져?”
“응. 느껴져. 느껴져…….”
간신히 되찾은 감각에 나는 눈물을 흘리며 내 몸을 기어 다니는 촉수를 어루만졌지만.
“아냐. 네가 느껴야 하는 건 이게 아냐.”
“뭐?”
“좀 더. 더 느껴 봐. 이해할 필요는 없어. 그저 느끼면 돼.”
“흐읍…….”
다시금 촉수가 나를 껴안아 왔다.
이번에는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5일 차.
마침내 이 끝날 것 같지 않은 여정도 끝나 가고.
블랑카와 나는 회색의 안개 앞에 도달했다.
“이게…… 세계의 끝…….”
블랑카는 감격하며 천천히 회색 안개에 손을 뻗었지만, 투명한 벽에 가로막혀 그 손은 안개에 스치지도 못했다.
없다.
트루먼 쇼처럼 비상구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곳은 세트장도, 실험장도 아닌 단순한 사육장.
당연히 생각이 있다면, 키우는 생물이 탈출하지 못하도록 장치를 마련해 놨겠지.
드디어 나는 두 눈으로 세계의 끝을 봤다.
드디어 나는 두 눈으로 내가 여기서 탈출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하하.”
억지로 공기를 쥐어짜 내서 웃어 보지만, 도저히 웃을 수가 없다.
“잉간…….”
“신이고 나발이고. 그냥 나 좀 집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X발…….”
나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부여잡으며 나를 지켜보고 있을 누군가를 향해 울부짖었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단지 블랑카가 살포시 내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와닿지 않는 위로의 말을 건넸을 뿐.
그렇게 나는 세계의 끝에 주저앉아서 있는 감정, 없는 감정을 모조리 토해 냈고.
블랑카는 가만히 내 등을 토닥이며 내 한탄을 들어 줬다.
그렇게 밤이 다가왔고.
또다시, 꿈.
“아, 아?”
마지막으로 꿨던 악몽과 달라진 건 없어 보였다.
한 가지 달라진 건, 회색 안개에 싸여 있던 등장인물들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등장인물들의 얼굴을 본 순간.
아.
산 정상에서 거대 석상의 얼굴을 봤을 때처럼, 온갖 정보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싫어.
더는 싫어.
몸이 발버둥 치며 어떻게든 정보의 파도에서 빠져나가려 하지만.
꿈속에서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리 없고.
내가 정보의 파도에 사로잡혀 꼼짝도 못 하자.
나보다 먼저 발달기에 접어들어 나를 괴롭히던 녀석들이 내 귓가에 속삭이며 무언가를 억지로 전달하기 시작했다.
도저히 내 뇌가 받아들이기 힘든 정보량에 나는 이 장소에서 도망치려 발버둥 쳤고.
꿈틀.
몸이 움직이며, 교실에서 벗어나 복도로 뛰쳐나갔다.
달리고 달려서, 나는 자그마한 방을 찾아냈고.
나는 어둠이 가득한 방 안에 틀어박혀 방문을 잠갔다.
방문을 잠그는 순간 찾아온 어둠은 또다시 내 감각을 빼앗아 가기 시작했다.
또다시 모든 감각을 빼앗기고, 나의 경계선이 허물어지려는 순간.
꿈틀.
무언가가 느껴졌다.
전날, 처음으로 악몽을 꿨던 그날 경험했던 기괴한 감촉.
몸이 아닌 영혼에서 느껴지는 듯한 감각.
그 감각을 인식한 순간, 나는.
“아아아아?!”
저절로 비명을 질렀다.
난생처음 느끼는 감각에 전신이 경련하며 혼란스러워하고.
“드디어 느꼈구나?”
그녀가 나를 덜컥 껴안으며 내 귓가에 속삭여 왔다.
혼란스러워하던 몸이 익숙한 감각과 온기를 느끼고 서서히 안정을 되찾아 간다.
“흐윽, 헉. 흐윽. 흑…….”
“그래. 들이마시고, 내쉬고. 침착하게 다시 집중해.”
천천히 유도를 따라 숨을 들이마시면서 뭔지 모를 감각에 집중한다.
그러자 다시 몸이 떨려 오기 시작하고.
“괜찮아. 나쁜 게 아니야. 오히려, 기분 좋을 거야. 자, 눈을 감고 가만히 느껴 봐.”
“아, 앗. 으읏, 읏? 흐앗? 아?”
꿈틀거리는 촉수가 끊임없이 내 몸을 자극하며 내가 나 자신을 잃지 않게끔 일깨워 주고.
몸의 모든 감각이,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새로운 감각을 받아들인다.
내 육체뿐만이 아니라 감정 또한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달아오른다.
기쁘고, 즐거우며, 두렵고, 행복하며, 불안하고, 초조하며, 불길하다.
그리고 그런 내 반응을 즐기듯 그녀는 내 얼굴을 쓰다듬었고.
“그래, 그렇지. 그거야.”
“흣, 흐읏. 으아…….”
천천히.
그녀의 촉수가 내 귓가로 파고 들어왔다.
“너무 한 번에 많이 먹으면 체하니까. 그러니까…….”
그리고 단번에.
푹.
“읏? 아? 에?”
“조금. 대신 먹어 줄게.”
머릿속을 복잡하게 가득 메우던 감정도, 감각도, 정보도.
머릿속을 휘젓는 그녀의 촉수에 빨려 나가고.
기묘한 감각에 내가 조금이나마 저항해 보려 팔다리를 휘둘렀지만.
“흑, 엑?”
그녀의 촉수가 내 팔다리를 단단히 붙잡고, 언제나처럼 나와 얼굴을 포갰다.
끈적하게.
숨도 쉬지 못하게.
달큰하게.
질척하게.
그리고.
기분 좋게.
악몽은 끝이 났다.
“왕!”
“흐억?!”
잠에서 깨어난 나는 벌떡 일어나며 내 위에서 잠자고 있던 에포나를 바닥에 떨어뜨렸고.
에포나는 항의하듯 내 손가락을 가볍게 깨물고 총총 풀숲 사이로 사라졌다.
난 도대체 무슨 꿈을 꾼 거지?
꿈의 내용을 생각하니 점차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나는 손부채질을 하며 머리를 식힐 겸 다시 세계의 끝을 살펴보려 했지만.
“어?”
내 눈에 보이는 건, 회색의 안개가 아니었다.
마치 깨달음을 얻게 된 것처럼, 회색의 안개 너머의 세상이 보이게 된 것이었다.
36화 지구산 인간을 쓰다듬으려 해 봤습니다.
한때 회색의 안개가 가득했던 세계의 끝은, 이젠 몽환적인 이물이 가득한 세상을 내비치는 창문이 되었다.
기괴한 이세계를 나타내는 상투적인 표현이 있지 않은가?
메마른 황야, 금이 간 하늘, 검은 태양.
다행히도 이 작은 어항에 태양이 없는 것처럼 바깥의 세상에도 태양은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히 하늘에 금이 간다는 이상 현상 또한 일어나고 있지 않았고.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냐?
메마른 황야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펼쳐져 있다는 게 문제였다.
거기에 더해, 메마른 황야는 생명체를 품고 있지 않다는 뜻이 아니었다.
지금껏 내가 이 어항 안에서 봐 왔던 생명체들이 기존 내가 알고 있던 생명체들을 뒤죽박죽 뒤섞은 것이라면.
어항 밖의 생명체들은 내가 아는 그 어떠한 생명과도 흡사하지 않았다.
그나마 유사한 생명을 찾아보자면, 다세포 생물을 지나 단세포 생물 쪽으로 내려가야 할 것이었다.
물론 단세포 생물이 그나마 약간의 유사함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지, 단세포 생물을 저 생명체들이 닮았다는 건 아니었다.
나는 바깥의 생명체들을 보며 그야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흐윽……!”
검은 하늘을 털래털래 걸어 다니고, 메마른 황야를 날아다니는 수많은 저 바깥의 생명체들.
단순히 제각기 자기 할 일을 하고만 있었으면 내가 저 생명체들에 공포를 느끼진 않았을 것이다.
내가 진심으로 바깥의 생명들을 두려워하는 건, 저것들이 이 어항 안으로 들어오려고 발악하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었다.
바깥의 황야가 황량한 이유는 황야의 생명체들이 전부 이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 발악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 정도로 어마어마한 숫자의 생명들이 어항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 아득바득 발버둥 치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건 당연한 일.
잡아먹는 수준을 넘어, 상대를 자신의 일부로 만들어 버리는 기괴한 풍경을 보며 내가 경악하던 그때.
푹신하고 미끈거리고 따스한 것이 살포시 내 다리에 몸을 부딪쳐 왔다.
“왕!”
“에포나…….”
마치 자신이 있으니 안심하라는 듯한 에포나의 모습에 나는 간신히 두 다리로 일어날 수 있었다.
도대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시나 지금까지 꿔 왔던 악몽.
악몽의 끝에 나는 기묘한 감각을 느꼈고, 그 감각이 무엇인지 이해했다.
굉장히 이상하고,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나는 내가 새롭게 정보 그 자체를 느낄 수 있게 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그 전부터 나는 정보라는 것을 보고 있었다.
내 몸의 감각기관이 만들어진 이유가 뭐겠는가?
당연히 이 세상에 넘쳐 나는 정보들을 받아들이고, 제멋대로 가공하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이 새로운 정보들은 무엇인가?
간단했다.
지금까지 늘 보고 있었지만, 내 머리가 이해하는 것을 거부하고 내쫓아 버리는 정보들인 것이다.
기존 정보들의 몇 배는 되는 밀도로 농축된 고밀도의 정보들.
내 머리는 그렇게 농축된 정보를 이해할 방법도, 의지도 없었다.
하지만 내가 꿔 온 악몽을 통해서 억지로 머리 어딘가, 어쩌면 영혼 한구석에 그 정보를 이해하는 법이 새겨졌고.
그렇게 나는 늘 봐 오면서도 보지 못하던 것을 이제야 보게 된 것이다.
어째서 내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걸까?
글쎄, 잘 모른다.
모르지만 알고 있다.
자고 있던 사이에 누군가가 머리를 만지작거린 듯한 불쾌감에 나는 인상을 찡그리고.
“잉간? 깨어났어?”
“블랑카.”
그사이에 잠에서 깨어난 블랑카가 밝은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오늘은 얼굴이 좀 괜찮네.”
“블랑카. 보여?”
“보이다니, 뭐가?”
“세계의 끝 말이야. 세계의 끝 너머에, 뭐가 있는지.”
그러자 블랑카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대답했다.
“당연히 푸른 하늘이 보이지. 신들의 전장은 저 드높은 천상에 위치해 있으니까.”
“……뭐?”
뭔가 이상하다.
블랑카는 어째 처음부터 푸른 하늘이 보였다고 말하는 말투인데.
“잠깐. 블랑카. 그러니까, 네 눈에는 이 바깥이…….”
“푸른 하늘.”
“푸른 하늘로 보인다고? 언제부터?”
“그야, 당연히 처음부터지. 네가 나를 산에 데리고 와서 세계의 끝을 보여 줬을 때부터.”
블랑카와 내가 인식하고 있는 현실이 무언가 어긋남을 느끼고,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왜냐하면, 블랑카와 내 인식이 서로 어긋난 이유가 블랑카와 내가 서로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딴 거 알고 싶지 않다고.
변해 버린 세상보다도, 변해 버린 내 정신이 더 두렵다.
아니, 생각해 보니까 세상은 변한 게 없었지.
나는 다시 한번 어항 안으로 들어오려 시도하는 생명들을 바라보고.
저 생명들을 똑똑히 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블랑카에게 다시 한번 물어봤다.
“저거. 저거, 안 보여?”
“저거? 구름 아냐?”
“하, 하.”
서로 대화가 통한다고, 서로 소통한다는 게 아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더욱 입술을 거세게 깨물고.
다시 한번 블랑카에게 바깥의 세계를 설명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사이코패스가 움직였다.
“으윽…….”
맨 첫날, 그 안개 속에서 느꼈던 것보다도 더 강렬한 압박감.
서서히 사이코패스에게 익숙해지면서 이런 감각을 다시 느낄 줄은 몰랐는데.
이번에는 또 뭘 하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거대한 촉수가 나타날 자리를 날카롭게 노려봤고.
하늘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그 사이를 통해 사이코패스의 손가락이 어항 내부로 들어왔다.
“……?”
다시 한번 말한다.
어항 내부로 사이코패스의 ‘손가락’이 들어왔다.
내가 말하는 건 말 그대로의 의미다.
‘손가락’.
그래.
거대한 손가락.
거대한 문자.
손가락이라는 의미를 가진 거대한 문자가 허공에 나타난 것이었다.
마치 만화에서 나올 법한 연출이다.
내가 그 말도 안 되는 연출이 현실로 이뤄진 것에 또다시 경악하던 때.
블랑카의 기쁨에 가득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 리베리아 님……!”
털썩.
블랑카는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자신의 신을 반겼고.
나는 정체 모를 사이코패스의 ‘손가락’을 경계하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
새로운 정보들을 받아들이는 몸이 됐음에도, 여전히 내 몸은 저 사이코패스의 언어를 해석하긴 버거운 모양이다.
단지 사이코패스의 감정만이 전달되는 소리가 틈새로 들려오고.
슬며시 거대한 손가락이 내게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움찔하며 뒤로 물러선 것을 보고, 거대한 손가락 또한 허공에 멈춰 섰고.
“전능하신 리베리아여, 그대의 종이 당신을 섬기노니…….”
나보다 더 손가락의 가까이에서 뭔지 모를 기도문을 중얼거리는 블랑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거대한 손가락은 무척 조심스럽게 블랑카의 등을 쓰다듬었다.
“아아, 리베리아 님……!”
그리고 블랑카는 몇 번인가 마사지를 해 줄 때 내게 보여 준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을 바라봤다.
손가락은 몇 번 블랑카의 등을 쓰다듬고 떠나가려 했지만, 블랑카는 아쉬운 표정으로 일어나며 손가락을 놓치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손가락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블랑카의 몸을 간지럽히듯 이리저리 흔들렸고.
이윽고 블랑카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러날 때까지 계속해서 블랑카의 등을 쓰다듬어 줬다.
“리베리아 님…….”
몽롱하게 눈이 풀린 블랑카를 뒤로하고, 이어서 손가락은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나는 블랑카와는 달리 저 손가락에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고.
손가락이 내게 한 걸음 다가오면, 나는 한 걸음 물러서는 상황이 계속됐다.
계속해서 뒤로 물러서던 내 발에 자기 전에 바닥에 놔둔 창이 걸렸다.
나는 필사적으로 바닥에 놔둔 창을 손에 쥐고 강하게 앞으로 내질렀고.
무언가를 슬쩍 찌르는 듯한 감각이 느껴짐과 동시에 나는 소리쳤다.
“오, 오지 마!”
내 의사가 잘 전달된 것인지, 손가락을 공격당한 고통으로 멈춰 선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눈앞의 거대한 손가락은 허공에 멈춰 섰고.
나는 내가 만들어 낸 숨 막히는 고요를 전신으로 느꼈다.
어, 어떻게 하지?
순간 너무 당황해서 창으로 저 손가락을 찔러 봤다.
솔직히 말해서 이따위 저항이 저 손가락에 상처를 낼 줄은 몰랐는데.
이제 어쩌지?
나는 두려워하면서 슬며시 손가락의 움직임을 살폈다.내가 내지른 일격은 예상외로 유의미한 상처를 줬는지, 손가락에 핏방울이 방울방울 맺혔다.
허공에서 손가락 몇 개가 더 나타나 지혈을 하려는 듯 손가락을 꽉 누르더니.
어항 안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춰 버렸다.
어, 어, 어, 어떻게 하지?
사이코패스는 지금 당장이라도 나를 벌레처럼 죽여 버릴 수 있다.
화가 났으면, 어떻게 하지?
납작 엎드려서 빌까?
아니, 어차피 이미 엎질러진 물.
그냥 끝까지 저항해?
나 따위가 저항한다고 뭔가 할 수 있기나 하고?
사라진 손가락이 도저히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으니, 도대체 뭘 해야 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
입술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지던 그때, 다시 하늘에서 손가락이 나타났고.
나는 이어질 손가락의 조치를 기다리며 질끈 눈을 감았다.
그 고블린들처럼 내 머리를 아예 없던 것으로 만들어 버릴까?
아니면 그냥 개미를 죽이듯이 짓눌러 죽여?
나는 바들바들 떨며 손가락의 행동을 기다렸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손가락은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
내가 의아해하며 슬며시 눈을 뜨자,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블랑카를 더욱 열심히 쓰다듬는 손가락의 모습이었다.
“허?”
“리, 리베리아 님…….”
손가락은 계속해서 블랑카를 쓰다듬고, 블랑카는 헤벌쭉 웃으며 손가락의 손길을 받아들인다.
손가락은 마치 내게 과시하듯 블랑카를 쓰다듬었고.
내가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상황을 파악하려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새로운 손가락들이 어항 안으로 들어왔다.
손가락들을 다 세어 봐도 10개를 넘어간다는 사실은 일단 무시하고.
손가락들의 끝에는 내가 최대한 무시해 오던 젤리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툭, 툭.
마치 야생동물에게 먹이를 뿌려 주듯 내 근처에 젤리들이 던져지고.
이윽고 손가락들이 한데 모여서 손바닥을 만들더니, 그 위에 젤리가 올려졌다.
“(o_o;;)”
꿀꺽.
나와 손가락 둘 다 동시에 침을 삼킨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나는 조용히 도대체 저 손가락의 의도가 무엇인지 생각해 봤다.
일단 나를 죽이려는 건 절대 아닌 것 같다.
나를 죽이려고 했으면 진작에 죽였겠지.
어째서?
피까지 나게 했는데, 화나야 정상이 아닌가?
그렇지만 아무리 봐도 저 손가락은, 내게 자신이 위험하지 않다는 걸 끊임없이 어필하고 있었다.
이것 봐라, 들고양이한테 먹이를 줄 때처럼 막 손가락을 까닥거리고 있지 않는가?
하지만 저게 함정이면 어쩌지?
안심하고 다가온 나를 단번에 짓누르려는 계획이라면?
나는 끝까지 계속해서 고민하며 블랑카와 손가락을 계속해서 바라봤고.
결국 결심을 내리고 조심스럽게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말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손가락 끝에 내 손을 가져다 대 본다.
그리고 마침내 손가락과 내 손이 서로 맞닿고.
내가 손가락을 붙잡는 순간, 강렬한 감정의 파도가 내게 들이닥쳤다.
손가락을 통해 내가 느낄 수 있던 감정은 순전히 단 하나였다.
기쁨.
그리고 순수한 호의.
어째서?
내가 손가락을 통해 느껴지는 감정에 혼란스러워하며 멈춰 서자 다른 손가락이 내게 슬쩍 젤리를 들이밀었고.
나 또한 슬며시 손가락에서 손을 떼고 가만히 젤리를 노려보다.
슬쩍.
젤리를 재빨리 품 안에 안고 손가락에서 종종걸음으로 떨어졌다.
“◝(⁰▿⁰)◜”
그러자 마치 폭탄처럼 기쁨을 가득 담은 소리가 어항 안을 뒤흔들었고.
손가락이 미친 듯이 꼼지락거리다 어항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사이코패스는 내가 생각하던 것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 * *
잉간이에게 자신의 손이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어필하려던 클라인의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자.
“끄핫! 끗! 으하……!”
클라인은 촬영 중이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몸을 뒤틀며 기쁨의 탄성을 터트리고 있었다.
원래라면 이쯤에서 핸들링이 가져다주는 이득을 설명했어야 했지만, 지금은 고작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최초로 잉간이와 핸들링에 성공했는데, 이 순간을 두고두고 즐겨야지.
“보셨어요? 보셨어요? 제 손에서 젤리 가져가는 거? 진짜 너무 귀여워서 진짜……!”
한바탕 발버둥을 끝내고, 클라인은 간신히 진정된 표정으로 다시 영상 촬영을 이어 나갔다.
“흠흠. 아무튼 핸들링은요. 차원 생물들이 받는 스트레스를 줄여 주는 효과가 있어요. 솔직히 사육하면서 생물들이 받는 가장 큰 스트레스의 원인은 사육자거든요. 그런데 사육자에게 익숙해진다면, 당연히 생물들이 받는 스트레스가 줄어들겠죠?”
클라인은 그렇게 말하며 아쉬운 눈빛으로 차원항 내부를 바라봤다.
마음 같아서는 좀 더 핸들링을 하고 싶다.
하지만 더 핸들링을 했다가는 잉간이가 스트레스를 받을 게 뻔한 일.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조금 참기로 하고, 카메라의 전원을 껐다.
핸들링에도 성공했으니, 이제 웬만하면 잉간이가 스트레스를 받는 일은 없을 거다.
일단 제일 먼저 목욕부터 시키고, 이왕 목욕하는 김에 차원항 청소도 하자.
그리고 또, 수고했으니 맛있는 것도 챙겨 주고.
그렇게 앞으로 잉간이를 어떻게 챙겨 줄지 계획을 짜던 클라인 앞에,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악플에 관련된 리퀴드사의 메시지려나?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메시지를 열었지만, 메시지의 주인은 클라인이 예상하지 못하던 사람이었다.
[파인만]
[ㅇㅋ. 시간 좀 걸릴 듯.]
[쥬스농장]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연락 주시겠어요? 클라인 씨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일 겁니다.]
정정하겠다.
메시지의 주인은 클라인이 예상하지 못하던 사람들이었다.
37화 *공지* 오늘 업로드는 쉽니다. 죄송합니다 ㅠㅠㅠ
클라인은 히키코모리다.
은둔형 외톨이, 날백수, 여러 이름으로 클라인을 부를 수 있겠지만 중요한 건 이거다.
클라인은 방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나갈 이유도 없고, 나가고 싶지도 않으니까.
뭐, 세간에서는 보통 이런 클라인 같은 사람들을 초-정보사회의 어두운 면이라고 부르긴 하는데.
그건 이미 100년 전부터 나오던 이야기니까.
애초에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사람이 지적 생명체의 30% 이상이라는 통계도 있고.
어차피 정부 입장에서도 제때 마력만 납부한다면 그리 신경 쓸 이유도 없으니까.
알다시피 정보 생명체라는 것이 수명이 거의 무한하고, 번식도 마음만 먹는다면 혼자서 가능한 생명체가 아니던가?
마키나족같이 물질 육체가 필요한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면 말이다.
어쨌든 클라인은 히키코모리였지만.
그것이 클라인이 세상 돌아가는 일을 잘 모른다는 뜻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클라인은 자신을 향한 악의에 무척 민감한 편이었다.
동영상 편집과 차원항 관리를 빼놓으면 할 일이 인터넷 서핑밖에 없는 백수여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어쨌든 클라인이 최근 돌아가는 일을 눈치채지 못한 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쥬스농장과의 합방.
그 이후 폭발적으로 늘어난 클라인의 구독자 수는 이제 거의 1,000억 명에 근접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악플 또한 늘어났다.
[솔직히 원룸에서 저렇게 많은 생물을 키우는 게 그리 좋게 보이진 않네요.]
[사실상 이거 야생 상태라는 변명으로 그냥 방치하는 거 아님? 오크 차원항은 서로 싸워서 개판이잖아.]
[지금 사육하시는 건 야생 생물이 아니라 애완 생물이잖아요? 그럼 환경을 야생 환경에 맞추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어찌 보면 타당한 비판을 하는 것 같아도.
잘 살펴보면, 억지를 부리는 댓글들이다.
오크들은 서로 싸우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받아서 자해한다.
하늘고래는 늘 꿈을 꾸며 살아가기에 별다른 놀잇감이 필요하지 않다.
사육자 숭배를 겪는 생물들은 억지로 치료하는 것보다, 그냥 놔두는 게 더 생물들의 행복에 이로울 때가 많다.
클라인도 아무 생각 없이 생물들을 사육하는 게 아니다.
충분히 자료를 찾아보고, 자신이 사육할 수 있을지 고민한 다음에 사육을 시작했으니까.
클라인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건 단 한 번뿐이었다.
파인만에게 지구산 인간의 존재를 들었을 때.
바로 그때 한 번뿐이었다.
클라인이 지구산 인간에게 자신의 처지를 이입했는지, 새로운 생물에 대한 호기심이었는지, 스스로를 과신했는지는 상관없다.
중요한 건 클라인이 지구산 인간에게 꽂혔고, 제대로 된 조사도 없이 잉간이를 데려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클라인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다른 영상들에 달린 악플들은 그냥 무시하고 억지 트집이라고 넘길 수 있었지만.
잉간이의 영상에 달린 댓글들은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쥬스농장이 직접 그녀의 사육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고.
클라인 또한 자신의 사육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클라인은 어느 정도의 악플은 받아들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클라인의 채널에 달리는 악플들엔 일정한 흐름이 있었다.
남들이 보기엔 단순한 트집으로 보일 수도 있고, 어쩌면 타당한 비판으로 보일 수도 있는 댓글을 달면서도.
그 결론은 하나같이 전부 똑같았다.
[차라리 쥬스농장 님이 사육하시는 게 더 나을 듯.]
[잉간이의 행복을 위해선 쥬스농장에 가는 게 더 나을 것 같네요 ㅠㅠㅠㅠㅠ]
전부 하나같이 잉간이를 쥬스농장에 보내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결론이었다.
이쯤 되니 클라인도 슬슬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상식적으로 학대받는 생물들을 구조하고 싶다면 다른 쥬튜버가 아닌 구호단체에 연락하는 게 맞지 않는가?
어째서 쥬스농장이 고작 자신이 눈치챌 정도로 이렇게 노골적으로 댓글 창의 의견을 조작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클라인은 댓글의 흐름을 막아섰다.
리퀴드사의 도움을 받고, 댓글들이 지적하는 요소를 고치고, 댓글들이 오해하지 않게끔 설명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일단은 댓글 창의 흐름을 잠시 멈춘 듯 보였다.
뭔가 모든 상황이 뒤바뀔 만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여론이 더 악화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클라인은 어째서 쥬스농장이 자신을 공격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이 모든 건 클라인의 피해망상일지 모른다.
쥬스농장이 자신을 공격할 이유가 도저히 없지 않은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일단 리퀴드사에 대처를 일임하며 채널을 운영하고 있었고.
[쥬스농장]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연락 주시겠어요? 클라인 씨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일 겁니다.]
클라인은 쥬스농장의 메시지를 보자 오히려 안도감이 들었다.
쥬스농장과 통화를 한다면 자신의 이 생각이 피해망상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 테니까.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쥬스농장의 제안을 수락했고.
언제나처럼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클라인을 위해 화상 통화가 이루어졌다.
쥬스농장은 지난번 합방 때와 별로 달라진 것도 없이 사고 회로를 진동시키며 클라인과 시시껄렁한 잡담을 나눴다.
요즘 차원항 생활은 어떠냐, 이번에 농장에서 새로 생물들을 수입했다, 새로운 농장을 하나 건설 중이다…….
클라인은 자신이 먼저 악플 이야기를 꺼내기 꺼려져서 그저 웃으며 쥬스농장의 말에 맞장구를 칠 뿐이었고.
결국, 먼저 본론을 꺼낸 것은 쥬스농장이었다.
“요즘 고생이 많죠?”
“고생이라뇨. 뭐, 평소와 같죠. 하하…….”
“제가 보기엔 요즘 채널 관리에 애로 사항이 많을 거 같은데요.”
“……그거, 쥬스농장 님이 하신 거예요?”
“글쎄요? 단지 저도 채널 관리에 고충이 좀 있어서 말이죠. 제가 그렇게 분탕 치지 말라고 해도 굳이 남의 채널에 찾아가서 분탕 치는 시청자들은 늘 있으니까요.”
쥬스농장도, 클라인도 서로 악플 이야기를 꺼내진 않았지만 굳이 이런 소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쥬스농장이 자신이 저지른 짓이라는 걸 인정한 꼴이었다.
“어째서. 어째서 그러시는 거예요?”
“차원항 후배한테 해 주는 조언이라고 생각하세요. 틀린 말은 없잖아요?”
“그렇죠. 잉간이에 관련된 건 말이죠.”
클라인은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버럭 화를 내야 해?
아니면 헤실헤실 웃으면서 그냥 넘어가?
클라인은 도대체 쥬스농장의 의도를 알 수 없었기에, 쥬스농장의 고백을 듣고도 쉽사리 행동할 수 없었고.
이번에도 먼저 본론을 꺼낸 것은 쥬스농장이었다.
“클라인 씨. 저랑 사업 하나 하실 생각 없으세요?”
“사업요?”
“5:5. 공평하게 서로 나눌 생각인데. 클라인 씨에게 그리 나쁜 조건은 아닐 거예요.”
갑작스러운 쥬스농장의 사업 제안.
쥬스농장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지만, 클라인은 충분히 쥬스농장이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지금 저에게 잉간이를 팔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런 게 아니고. 같이 사업을 하자는 거죠. 그렇게 노려보지 마시고, 제 이야기를 들어 보세요.”
클라인은 다소 신경질적으로 반응했지만, 쥬스농장은 여전히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 도대체 뭐라고 하는지 들어나 보자.
그런 생각으로 클라인은 입을 다물었고, 쥬스농장은 천천히 클라인에게 자신의 사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반려 생물 시장에서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게 뭔지 아세요?”
“……혈통 인증서?”
“아하하. 그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혈통 인증서를 받는 이유가 뭐예요? 결국, 마력 때문이잖아요?”
그렇다.
대부분의 소비자는 마력이 많은 생물을 선호했고, 그 때문에 마력이 많을수록 높은 가격에 거래됐다.
누구나 아는 사실을 어째서 쥬스농장이 말하는 걸까?
클라인은 잠시 그런 의문을 가졌고, 쥬스농장은 슬며시 클라인 앞에 인간형 생명체 하나를 내밀었다.
“이번에 제가 농장에서 품종 개량으로 만들어 낸 생물인데, 잘 보이시나요?”
쥬스농장의 손 위에서 불안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생명체는 평범한 인간형 생물체의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평범해 보이는 외견 너머로 강렬한 마력이 느껴진다.
아무리 봐도 인간형 생명체의 몸에 담길 수 있는 마력량이 아니다.
그런 클라인의 생각을 뒷받침하듯 서서히 인간형 생명체의 몸이 입자 단위로 분해되어 가는 모습이 보였다.
신체가 너무 강대한 마력을 견디지 못하고 마력으로 변하는 것이다.
“보다시피, 마력을 최대한 끌어낸다는 목표에는 성공했지만, 이번엔 너무 마력이 강해서 문제예요. 최대한 수명을 늘려 봐도 하루면 죽어 버리더라고요.”
“그래서요?”
“금방 죽어 버린다는 문제만 해결하면 참 좋은데 말이죠. 외모도 이쁘니 제대로 된 사육만 가능하면 아마 부르는 게 값일 겁니다. 그래서 제가 최근에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머리를 싸맸는데, 때마침 클라인 씨가 그 해결책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이쯤 되자 클라인은 쥬스농장의 목적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클라인은 조용히 쥬스농장의 목적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잉간이를 종마로 쓰겠다. 이거예요?”
“정답이에요. 마력이 너무 많은 게 문제라면, 마력이 없는 생물과 교배해서 마력을 줄이면 되잖아요?”
쥬스농장은 모범 정답을 공개하며 클라인에게 사업을 제안했다.
“제가 지구산 인간을 영원히 가지고 있겠다는 게 아니에요. 전에 말했죠? 클라인 씨가 적합한 사육장을 마련할 때까진 제가 지구산 인간을 맡겠다고.”
“네, 그랬죠.”
“그때 제안은 아직도 유효해요. 클라인 씨가 제 지도에 따라서 농장을 만들 때까지는 제가 잠시 데리고 있는 거죠. 어때요? 나쁜 이야기는 아니죠?”
“…….”
클라인은 가만히 눈을 감고 쥬스농장의 제안을 정리해 봤다.
쥬스농장은 잉간이를 이용해 품종개량을 하기 위해서 잉간이를 원한다.
아마도 지구산 인간을 독자적인 루트로 구해 보려 했지만 실패하고 유일하게 지구산 인간을 가지고 있는 자신에게 접근했겠지.
만약에, 만약에 클라인이 쥬스농장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쥬스농장은 클라인에게서 잉간이를 잠시 임시 보호했다는 영상을 올릴 것이다.
쥬스농장의 제안대로 클라인이 번식 농장을 만드는 동안은 쥬스농장이 잉간이를 관리하고, 클라인이 번식 농장을 다 만들면 쥬스농장이 잉간이를 돌려준다.
비는 시간 없이 잉간이를 활용하는 방법이다.
물론 시청자들의 비난 또한 피할 수 있는 방법이고.
시청자들의 눈에는 클라인이 잉간이를 팔아 치운 게 아니라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잠시 임시 보호를 보낸 것으로 보일 테니까.
쥬스농장은 클라인의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몰라도, 재차 클라인에게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인지 질문했다.
“어때요? 나쁜 제안은 아니죠?”
“네. 저에게 나쁜 제안은 아니네요.”
쥬튜브 채널 운영과 돈.
둘 다 잡을 수 있는 그럴싸한 계획이다.
만약 클라인이 돈을 보고 쥬튜브를 시작했다면, 지금 당장 쥬스농장의 제안을 받아들여야겠지.
그만큼 쥬스농장이 제시한 조건은 달콤했다.
쥬스농장이 대가로 제시한 금액을 보고 순간 클라인의 마음이 흔들렸을 정도니까.
하지만 클라인은.
“그럼, 제안을 받아들인다고…….”
“그런데 잉간이에게는 나쁜 제안인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클라인은, 도저히 잉간이를 파는 것 같은 짓을 할 수가 없었다.
클라인이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은 걸까?
쥬스농장은 잠깐 침묵하더니, 사고 회로를 붉게 점멸하며 중얼거렸다.
“저기, 클라인 씨는 왜 애완 생물을 키워요?”
“네?”
갑자기 지금껏 대화하던 주제와는 동떨어진 쥬스농장의 질문에 클라인은 당황하며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고, 쥬스농장은 클라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제멋대로 말을 꺼냈다.
“나는요. 돈 때문에 생물들을 키워요. 뭐, 차원 생물들이 귀엽기도 하고 새로운 생물을 번식시키는 게 재밌기도 하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브리더예요.”
“아…… 네.”
“난 또, 우리 클라인 씨가 브리더에 관심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
“네?”
“상식적으로 그렇잖아? 브리더 짓을 할 것도 아닌데, 그냥 개인이 힘들게 외우주에서 신종 생물을 구해 올 이유가 어디 있어?”
그제야 클라인은 쥬스농장이 무슨 의도로 방금 질문을 던졌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쥬스농장은 클라인이 혹시나 이 대화를 녹화하고 있을 때를 대비해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드는 것이었다.
만약 클라인이 이 녹취록을 퍼트려도 쥬스농장은 이렇게 변명하겠지.
어디까지나 브리더 지망생에게 제안을 하려던 것이었다.
브리더의 세계에서는 이렇게 사육 생물을 사고파는 게 일상이니까 말이지.
즉, 쥬스농장은 클라인의 거절을 듣자마자 발을 빼고 있는 것이었다.
어째서?
클라인은 쥬스농장이 악플을 유도하면서까지 자신을 압박해 놓고, 어째서 이렇게 빨리 포기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클라인의 의문을 읽은 것처럼 쥬스농장은 피식 사고 회로를 진동시키며 말했다.
“내가 왜 더 밀어붙이지 않나 궁금한 모양이죠?”
“……조금은요?”
“뭐, 딱히 숨길 것도 아니니까 말해 줄게요. 클라인 씨. 나는 이미 여론 조성을 다 끝냈어요. 남은 건 클라인 씨가 넘어지는 일뿐이죠.”
“넘어지는 일이라니. 그건…….”
“지구산 인간의 기억을 읽고 깨달았어요. 그거, 브리더 자격증도 없는 일반인이 키울 게 아니에요.”
“네?”
“내가 딱히 뭘 하지 않아도, 우리 클라인 씨가 알아서 넘어져서 공짜로 지구산 인간을 넘겨줄 텐데 뭐 하러 더 제안해요?”
쥬스농장은 그렇게 말하고 통화를 종료했고, 클라인은 통화가 끝나고도 한참을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마지막에 남긴 쥬스농장의 불길한 예언을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부정할 수 없었기에.
자신이 과연 잉간이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
쥬스농장이라면.
그 어떤 생물도 번식시키던 그의 솜씨라면 잉간이를 행복하게 하는 것 정도는 손쉽겠지.
“망할…….”
그 때문에 클라인은 욕설을 내뱉으며 괜히 멀쩡한 책상을 두드릴 뿐이었다.
아니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면 잉간이도 행복할 거다.
이제 막 핸들링을 끝냈다.
서로 교감하며 잉간이를 위한 환경을 조성한다면 자신도 잉간이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
그걸 위해서 브리더 자격증도 공부하고 있는 거잖아?
그래, 그럼 되는 거야.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일단 가장 먼저 할 일은…….
역시 청소겠지.
* * *
세계의 끝에서 손가락과 마주치고, 나와 블랑카는 곧바로 동굴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내가 확인하고 싶은 건 이미 다 확인했고, 이제 남은 건 내가 머릿속에서 결론을 내리는 일뿐이었으니까.
돌아가는 길은 이곳에 오던 길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를 괴롭히던 악몽 또한 더는 나타나지 않고 블랑카와 나는 편안하게 안락한 은신처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동굴로 돌아오자마자 짚더미 침대에 드러누워 휴식을 취한다.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던 블랑카는 피식 웃으며 내게 말했다.
“뭔지 몰라도, 머릿속에서 결론이 난 모양이네?”
“그래 보이냐?”
“응. 표정이 밝아졌는걸.”
벌떡.
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래. 결론 내렸지. 결론.”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본 블랑카는 위풍당당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신님이 있다는 걸 인정한 거지? 뭐, 아무리 너여도 그런 풍경을 보면 인정할 수밖에 없겠지만…….”
“아닌데? 그 새끼, 절대로 신 아닌데?”
“아니. 너도 봤잖아? 신님이 강림하는 모습을!”
“너한테는 그렇게 보였지만, 나한테는 아니야.”
그래, 확실히 그 새끼는 전지전능한 신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 사이코패스는 신 같은 게 아니다.
블랑카는 그런 내 주장을 들으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신같이 느껴졌다면서 왜 신이 아니라는 건데?”
“날 방 밖으로 꺼내 왔으니까. 아무튼 신이 아니지.”
그런 내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들은 블랑카는 얼굴을 괴상하게 구겼고.
나는 슬며시 내가 내린 결론을 입 밖으로 꺼냈다.
“내가 뭔 짓을 해도 여기서 나갈 수 없다는 것도 알겠어. 그리고 그…… 사육자? 인가 뭔가가 내게 그렇게 적대적인 게 아니라는 것도 알겠어.”
“그래. 그래서?”
원래 살던 세상에서 이럴 때 하는 말이 있다.
포기하면 편하다고.
내가 이렇게 마음을 바꾸게 된 건, 그 손가락과 접촉했을 때 느끼게 된 감정이 컸다.
그 사이코패스.
그러니까 나를 가둔 누군가.
그 누군가가 나에게 보내는 호의.
그건 지금껏 살아가며 느껴 본 그 어떤 호의보다 강렬했고, 따듯했다.
만약 그때 느껴진 감정이 부정적이었다면 당장 여기서 도망칠 방법을 계속해서 찾아봤겠지만.
나를 해치려는 것도 아닌데 굳이 도망칠 생각을 할 필요가 있을까?
에포나와 함께 보내는 일상도 퍽 즐거운데 말이다.
어째서 내게 호의를 보내는지 알 수 없어서 조금 두렵긴 하지만.
“그러니까 그냥 나도 포기하련다! 여기를 제2의 집으로 삼고 죽을 때까지 살아 보지, 뭐!”
뭐, 내 방이 겁나게 커지고 야생화됐다고 생각하지 뭐.
어차피 절대로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점에선 바뀐 건 없잖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거렸고.
그 다음 순간.
“어?”
내가 집으로 삼았던 동굴이 한순간에 증발해 버렸다.
뭔데, 이거?
38화 집이 갑자기 사라진 잉간이의 반응은? 차원항 청소 & 방역하기!
“어, 어, 어?”
뭔데?
뭔데 이거?
정신을 차려 보니 내가 은신처로 삼았던 동굴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아니, 정정하겠다.
동굴이었던 바위산의 일부가 그 사이코패스의 손가락에 들려서 허공에 둥둥 떠다닌다.
이게 어떻게 된 거람?
그 어떤 전조 증상도 없던 일에 잠시 내 뇌가 파업을 선언했고.
“끼잉…….”
에포나는 슬쩍 손가락을 피해 내 뒤에 몸을 숨겼다.
내가 몸을 굳힌 채로 허공에 둥둥 바위산이 떠다니는 모습을 지켜보는 사이.
손가락은 거대한 바위산을 그대로 들고 이 세상 밖으로 사라졌고.
뚜껑이 뜯겨 나간 은신처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었다.
어째서 손가락이 은신처를 뜯어 간 걸까?
역시 내가 손가락을 찔러서 화가 난 걸까?
눈물 맺힌 눈으로 손가락이 나타났던 허공을 바라보지만, 다시 손가락이 나타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블랑카 또한 갑자기 은신처가 사라진 것에 놀랐는지 온몸의 털이 잔뜩 곤두선 모습으로 황망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잉간. 이건, 그러니까…….”
“집이…… 내 집이…….”
아냐.
아직까진 괜찮아.
지금까지 모아 둔 식량을 전부 빼앗긴 것도 아니고, 그냥 은신처 지붕만 날아간 거다.
그, 맨 첫날 이곳에 떨어졌을 때처럼 어떻게 가림막을 만들어서 지붕을 만들면…….
그렇게 생각하며 동굴이 뒤흔들릴 때 사방에 흩어진 식량들이라도 한곳에 모아 두려 한 순간.
또다시 하늘에서 손가락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이번엔 또 뭘 하려고?
그렇지만 이번에 나타난 손가락은 동굴 주위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바위들과 통나무 조각들을 들어 올렸다.
나도 언젠가는 치워야지, 생각하고 있던 쓰레기들이다.
손가락들은 마치 청소를 하듯 은신처 주위의 쓰레기들을 치워 나가기 시작했다.
그제야 나는 비로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것 같았다.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도 사이코패스는 은신처 주위를 청소하는 게 아닐까?
뭐, 나도 슬슬 청소해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가질 정도니 나를 지켜보는 입장에선 어떻겠어?
원래 이런 건 거기서 사는 사람은 몰라도, 지켜보는 사람이 더 속이 타들어 가는 법이다.
그래, 방이 더럽다고 엄마가 잔소리를 하고 며칠 뒤 외출하고 돌아와 보면 방이 청소되어 있는 것과 같은 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일단 손가락이 청소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게끔 물러설 생각이었지만, 손가락들이 슬금슬금 내가 쌓아 둔 식량에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건, 그건 안 돼!”
당황한 내가 서둘러 손가락을 막으려 달려가 보지만, 손가락은 내 머리를 슬쩍 쓰다듬고 내가 모아 둔 식량들을 가져가기 시작했다.
“안 된, 안 된다고……!”
베헤모스의 고기를 들어 올리고 이곳저곳 살펴보더니 어디론가 가져간다.
내가 공들여 만들어 둔 주먹도끼들과 토기들도 가져간다.
눈앞에서 집이 무너진 이재민의 심정이 이럴까?
손가락은 무자비하게 은신처 안에 들어 있던 모든 것을 가져가기 시작했고.
나는 눈물 맺힌 눈으로 사이코패스가 내게 주던 젤리를 끌어안고 마지막 저항을 해 봤다.
“:-)”
그런 나를 비웃듯 손가락은 웃음소리를 흘렸고, 나는 결국 손가락에 붙잡혀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신세가 됐다.
“으으…… 가져가지 마……. 내 거라고, 그거…….”
내 마지막 저항이 너무나 손쉽게 제압되고 결국 손가락은 마지막 남은 젤리들까지 모조리 회수해 가져갔다.
툭.
손가락이 나를 바닥에 내려놓고,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분함에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읏, 으으…….”
진짜, 진짜 뭐냐고?
화난 거면 차라리 말로 하든가 공격했을 때 반격이라도 하지.
이렇게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할 때 음습하게 괴롭히는 건 진짜 뭐냐고…….
울먹거리며 털썩 바닥에 주저앉아서 속으로 사이코패스를 잔뜩 욕하던 그때.
다시 허공에서 손가락이 나타났고.
어째서인지 무척 당황한 듯한 손가락은 허둥거리며 내 주위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더니.
마치 우는 아이에게 떡을 물려 주는 것처럼 내게 젤리를 내밀었다.
“:-0”
흔들흔들.
눈앞에서 손가락이 젤리를 흔들고.
나는 코를 훌쩍거리며 눈을 비비고, 홱 손가락에게서 젤리를 낚아채 갔다.
그리고.
“더 내놔!”
퍽, 발로 손가락을 걷어차며 젤리를 더 요구했다.
지금까지 모아 둔 음식을 다 가져갔는데 젤리 하나로 퉁치는 건 수지에 맞지 않지.
평소라면 겁먹은 채로 물러났겠지만, 집을 통째로 뜯어낸 사이코패스에게 쌓인 불만과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마음이 내가 이렇게 생떼를 부리게 만들었다.
그러자 움찔 손가락이 떨리더니, 슬며시 내 품 안에 몇 개의 젤리를 더 안겨 줬다.
마음 같아서는 좀 더 젤리를 달라고 요구하고 싶지만 그랬다간 진짜로 화를 낼 수도 있으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술을 깨물고 종종걸음으로 손가락에게서 도망쳤고.
손가락은 아쉬운 듯이 허공을 몇 번인가 움켜쥐더니,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내 집…….”
하지만 은신처가 사라져 버렸다는 건 여전해서, 내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땅에 주저앉아 있자 블랑카와 에포나가 내게 슬며시 다가왔다.
“리베리아 님도 다 무슨 생각이 있으실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든 자신이 모시는 신을 변호해 보려 하던 블랑카도 이번 일은 어떻게 변호하지 못하고.
“이, 일종의 시련이 아닐까?”
“시련은 개뿔. 갑자기 집하고 전 재산을 다 가져가는 게 시련이야?”
“왜. 우리가 계속 동굴에만 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도 있지!”
신이 내린 시련이니 하는 소리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블랑카가 마지막으로 꺼낸 가설은 꽤 그럴싸하다.
지금까지 저 사이코패스는 나에게 재료를 던져 주거나, 뭔가 해야만 하는 상황을 조성해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나를 움직였다.
이번 일도 아마 그런 일의 일종이 아닐까?
지난번에 내가 뗀석기를 만드는 걸 보고 싶어 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내가 집을 만드는 모습을 보고 싶은 모양인가 보다.
“그러니까, 블랑카 네 말은 신이라는 작자가 우리보고 집을 만들라고 이런 시련을 준 거라고?”
“응, 그렇지!”
나는 푹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쓰윽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히 만능 사전은 회수해 가지 않은 것 같으니 어떻게 집을 만드는지는 만능 사전으로 찾아보면 될 것 같고.
남은 건 집터인데.
역시, 동굴이 있었던 저 자리가 최고겠지?
“블랑카, 너는 뭐 건축에 대해서 아는 거…….”
“몰라!”
“그래. 모르겠지. 영웅은 집 같은 건 안 지으니까.”
“응!”
집이라.
일단 한 가지 확실한 건, 동굴에서 강제로 내쫓은 거니 토굴을 만들어 놓고 집이라고 주장하는 건 먹히지 않을 거란 점이다.
바위산에 있는 또 다른 동굴로 거처를 옮기는 것도 마찬가지일 거다.
그렇다면 내게 남은 건 통나무집을 만드는 방법밖에 없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무척 힘든 작업일 거란 말이지.
일단 톱 비슷한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도구들로 나무를 다듬기는 힘든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어떻게 통나무집을 만들어야 할지 고민했지만, 문득 생각이 바뀌었다.
잠깐, 어째서 힘쓰는 일을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지?아무리 봐도 블랑카가 나보다 더 힘이 센데, 그냥 블랑카를 중장비로 활용하면 되는 거 아냐?
블랑카를 중장비로 활용할 생각을 하니 기존의 문제점이 전부 싹 사라져 버린다.
어쩌면, 정말 잘하면 블랑카를 이용한다면 하루 만에 집을 뚝딱 완성할 수도 있을 거다.
“블랑카, 네가 원래 살던 집을 대충이라도 그려 볼 수 있어?”
“응? 그러니까, 내가 원래 살았던 곳은…….”
천천히 블랑카의 의견을 들어가며 블랑카와 내가 거주할 새로운 집을 설계하기 시작한다.
내가 뭐 설계에 재능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내가 무슨 엄청난 집을 만들려는 건 아니잖아?
그냥 적당히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아늑한 집을 만들 생각이니 그렇게 큰 기교가 필요하진 않을 것 같다.
나는 애써 없는 머리를 블랑카와 서로 맞대고 만능 사전의 도움을 받아 가며 그럭저럭 쓸 만한 계획을 세우는 데 성공했고.
“음. 이대로 가자.”
“뭔가 비밀 기지 만드는 기분이네.”
“거기도 어릴 때 그러고 놀았나 보지?”
“정규 훈련 과정에 있었거든. 혼자 떨어졌을 때 살아남는 법이라고.”
나만의 집을 만든다는 행위에 기묘한 고양감이 차오르던 그때.
쾅.
사라졌던 거대한 바위산이 하늘에서 다시 나타나 원래 위치로 되돌아왔다.
되돌아온 은신처에 나와 블랑카가 가만히 멈춰 서서 상황을 파악하는 동안, 빼앗겼던 토기와 뗀석기들이 원래 위치로 돌아오고.
“X발.”
나는 나직이 욕설을 내뱉었다.
진짜, 도대체 뭘 시키고 싶은 건데?
되돌려 달라고 외치긴 했지만, 진짜 되돌려주니 묘한 기분이다.
뭔가 열정이 한가득 차오르던 타이밍에 찬물을 얻어맞은 기분이다.
블랑카 또한 나와 그리 다른 기분이 아니었는지 서로 머리를 맞대 가며 만든 설계도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내게 질문했다.
“어, 음…… 어쩔래?”
“……계획대로 진행해.”
“진짜? 동굴도 돌아왔는데 굳이…….”
“동굴은 대충 창고로 쓰면 되고, 다시 동굴에 들어가면 또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아, 하긴.”
전보다 의욕이 줄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나만의 집을 만든다는 게 꽤나 두근거리는 일이니까.
그렇게 나와 블랑카가 다시 의욕을 다지고 있을 때.
또다시 내 집 마련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번에 벌어진 건 의욕에 찬물을 끼얹는 종류가 아니라 공포심을 자극하는 종류였다.
“왕! 왕! 크르르…… 왕!”
갑자기 에포나가 벌떡 일어나 숲을 향해 거세게 짖어 대기 시작한 것이었다.
예전에 에포나가 숲을 향해 짖어 댔을 때 무슨 일이 벌어졌더라?
그 공포스러운 거대 점액이 밀려들어 왔었지.
“블랑카. 뭔가 와.”
“확실히, 뭔가 느껴지네.”
블랑카 또한 무언가 오고 있다는 것을 느꼈는지 꿀꺽 침을 삼키며 파워드 슈트를 전신으로 확대하고.
거세게 숲을 향해 짖어 대던 에포나가 슬며시 내 뒤로 숨는 것과 동시에.
“으!”
숲에서 자그마한 푸른 점액이 뛰쳐나와 털썩 바닥에 쓰러졌다.
뭐야, 그냥 점액에 놀란 거였나?
나는 순간적으로 그렇게 안심했지만, 곧 내 생각이 틀렸음을 알 수 있었다.
스멀스멀.
점액이 밀려오던 때처럼 숲속에서 무언가가 밀려온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땐 진짜 점액이 밀려왔고, 이번에 밀려오는 건 붉은 안개였다는 것이었다.
블랑카는 붉은 안개를 보자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붉은 안개……?”
“왜. 어디서 본 적 있어?”
“리베리아에서 몇 번인가 봤었지. 항상 언데드가 등장하기 전에 피어올랐는데, 어째서 지금…….”
“그러니까. 네 말은 언데드가 등장한다. 이 소리야?”
“아니. 꼭 언데드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어. 붉은 안개만 피어오르고 언데드가 나타나지 않은 때도 있었으니까.”
아씨, 그러니까 확실한 게 하나도 없다는 거네?
문득 회색 안개의 공간에서 나를 감싸고 있던 붉은 안개가 생각났다.
이 안개도 그런 안개의 일종일까?
어쩌면 해가 없을 수도 있다.
어쩌면 해가 있을 수도 있다.
선택을 내릴 시간이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고.
“끼잉…….”
나는 흘낏 내 발치에서 잔뜩 겁을 집어먹은 에포나를 바라보며 결정을 내렸다.
“일단 동굴 안으로 피하자. 뭔지는 모르는 안개 속에 있는 건 피하고 싶어.”
“그래. 알겠어.”
나는 에포나를 집어 들고 블랑카와 함께 동굴 안으로 몸을 숨겼고.
되돌려받은 잡동사니들로 최대한 입구를 틀어막았다.
이러고 있으니 진짜 그 거대 점액이 밀려오던 날이 생각나네.
그때도 이렇게 동굴 안에 틀어박혀 있었는데.
“잉간. 잠시만.”
“응?”
그런 내 생각을 방해한 건, 푸른 빛이 일렁거리는 블랑카의 손이었다.
블랑카는 조심스럽게 내 얼굴에 그 푸른 빛을 가져다 댔고.
나는 블랑카가 나쁜 짓을 하진 않겠지, 그런 안일한 심정으로 블랑카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살포시, 내 얼굴에 블랑카의 마력이 코팅된다.
“마법적 저주일 가능성을 대비해서, 조금 마력 저항을 부여했어. 너는 마력이 없으니까.”
“어, 고마워.”
블랑카가 내게 마력 코팅을 하는 사이에도 계속해서 붉은 안개는 밀려 들어왔고.
마침내 붉은 안개는 동굴 안으로 스며들어 오기 시작했다.
“끼잉, 낑…….”
에포나는 진심으로 저 붉은 안개가 두려운 듯 내 품으로 자꾸만 파고들었고.
나는 슬며시 에포나의 촉수를 쓰다듬으며 에포나를 안심시켰다.
그러자 에포나는 내 티셔츠 안으로 몸을 집어넣고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도대체 뭐가 이렇게 에포나를 두렵게 만든 걸까?
도저히 알 수가 없네.
그렇게 생각하던 와중, 붉은 안개가 마침내 블랑카와 내 곁까지 다가왔다.
그러자 블랑카는 늘 사용하던 기병창이 아닌, 언월도 형태의 마력창을 만들어 내고.
“흡!”
마치 무협지 속에 나오는 장수처럼 창을 휘둘러 바람을 만들어서 붉은 안개를 방에서 몰아내려 했다.
하지만, 붉은 안개는 안개처럼 보이지만 안개가 아니었는지 블랑카가 만들어 내는 바람에도 끄떡하지 않았고.
마침내 붉은 안개들은 블랑카의 몸에 접촉했다.
그러자.
“흐윽……?”
블랑카는 비틀거리며 털썩 무릎을 꿇었고, 나는 깜짝 놀라며 블랑카의 이름을 불렀다.
“블랑카, 괜찮아?”
“그래. 괜찮아. 그냥, 그냥 좀 놀랐을 뿐이야.”
“붉은 안개가 무슨 짓이라도 한 거야?”
“그래. 그래도 괜찮아. 단순한 환각 정도니까.”
“환각?”
그렇지만 곧바로 블랑카는 벌떡 일어서서 고개를 내저었고.
그러는 와중, 붉은 안개는 내게도 접근해 왔다.
단순한 환각이라니, 환각이 단순하다고 부를 수 있는 증상인가?
나는 숨을 참는 게 쓸모없다는 걸 알면서도, 내게 붉은 안개가 접근해 오자 숨을 잔뜩 들이마셨고.
마침내 붉은 안개와 접촉하고, 나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내 얼굴에 코팅되어 있던 블랑카의 마력이 붉게 물들며 떨어져 나간 걸 제외하면 말이다.
뭐지?
이게 환각인가?
하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는데?
내가 의아해하는 사이, 블랑카가 내게 다가왔고.
“잉간, 괜찮은 거 맞지?”
“어. 아무 일도 없어.”
환각이라든가, 환청이라든가, 뭐 몸이 결린다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붉은 안개는 그냥 평범한 안개였을 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환각을 겪은 거야?”
“그냥. 그냥……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듯한 기분이었어. 검은 공간에서…… 아무 감각이 느껴지지 않아서…….”
검은 공간?
블랑카가 설명하는 환각의 내용은 지난번 내가 꾸던 악몽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이미 그 악몽을 꿔서 환각을 겪지 않은 걸까?
나는 내 나름대로 그런 추리를 내렸고.
블랑카와 내가 이 붉은 안개는 그다지 위험하지 않다고 판단을 내리려던 순간.
“끼잉, 낑. 끼이잉…….”
갑작스럽게 에포나가 내 품 안에서 낑낑거리며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에포나, 에포나? 왜 그래?”
놀란 나는 서둘러 품 안에서 에포나를 꺼내서 상태를 살폈지만.
에포나는 꿈틀거리며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독을 들이마신 듯한 불길한 모습.
내가 어찌할 줄 모르고 에포나를 토닥거리자.
꿀꺽, 블랑카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오고.
블랑카는 두려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슬며시 내게 질문을 해 왔다.
“저기. 잉간. 구,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응?”
“그, 그. 네가 품에 안고 있는 ‘그건’ 대체 뭔가?”
“그거라니?”
블랑카가 갑자기 왜 이래?
갑자기 에포나를 까먹었을 리는 없는데.
“잉간. 미안하지만, 다시 한번 네 품의 그걸 살펴봐.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블랑카의 공포 섞인 부탁에 나는 슬쩍 내 품 안에서 벌벌 떠는 에포나를 바라봤고.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아무 문제 없다는 듯 대답했다.
“에포나잖아? 이게 왜?”
“그, 그게 에포나라고? 아냐, 그건 에포나가 아냐! 네가 지난번에 에포나라고 소개했던 생명체와 완전히 다르다고!”
블랑카는 필사적으로 내게 에포나가 에포나가 아니라는 걸 설득하려 했다.
블랑카 왈, 전에는 털이 달린 생명체에 촉수가 삐져나온 모습이었는데 이젠 털이 아예 없는 촉수 덩어리다.
블랑카 왈, 자신이 아는 에포나는 점액을 분비하지 않았다.
블랑카 왈, 에포나는 지금처럼 끊임없이 모습이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블랑카는 계속해서 내 품에 안긴 생명체가 에포나가 아니라는 이유를 설명했고.
블랑카의 설명을 끝까지 들은 나는 겁에 질린 에포나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그래. 그게 에포나인데, 왜 갑자기 그런 반응이야?”
그래.
갑자기 에포나의 모습이 달라진 게 아니다.
에포나는 원래 이랬으니까.
39화 잉간이 차원항 청소 & 방역 마무리! 잉간이는 어떤 걸 모아 두고 있었을까요?
알고 있었다.
에포나가 포메라니안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포메라니안은 없었을지 모른다.
내가 조용히 에포나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는 사이, 블랑카는 겁먹은 표정으로 에포나를 가리키며 나에게 외쳤다.
“잉간. 그건 에포나가 아냐.”
“아니, 에포나야.”
“마력 반응부터 완전히 달라졌어. 지금까지 네가 설명하던 에포나와, 지금 네가 품 안에 안고 있는 에포나는 완전히 다르다고!”
블랑카는 그렇게 말하며 에포나를 가리켰고, 붉은 안개에 휩싸인 에포나의 상태는 계속해서 악화되었다.
“끼잉…….”
마치 내가 애써 부정하고 있던 사실이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환상이 깨어지는 것처럼.
“네가 말했잖아. 맨 처음에 리베리아 님이 넣어 준 개에게 이름을 붙인 게 에포나라고.”
“그래, 그랬지.”
“그런데. 너는 지금 네 눈에 그게 개로 보여?”
“……아니.”
그 어느 개에도 촉수가 달려 있지 않다.
또한, 제멋대로 형태를 바꾸고, 보랏빛의 눈동자로 한밤중에 나를 바라보지도 않는다.
나는 조용히 진실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에포나의 상태는 더더욱 악화된다.
“끼잉, 케륵…….”
에포나가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내며 촉수로 내 손을 붙잡는다.
나는 에포나를 떨쳐 내지도, 붙잡아 주지도 못하고 그저 에포나의 감촉만을 느낄 뿐이다.
“잉간. 정말 미안하지만, 지금 네 눈앞에 있는 건 아마도 에포나가 아니라, 에포나의 가죽을 뒤집어쓴 다른 생물일 거야.”
그러는 와중에도 블랑카는 내가 필사적으로 피해 온 사실을 내게 들이밀고.
에포나의 상태는 블랑카가 입 밖으로 그 사실을 꺼내는 것과 동시에 더욱 악화됐다.
“잉간, 비켜 줘. 그게 네가 말하던 에포나가 아니라면 안전을 위해서 죽이는 수밖에 없어.”
블랑카는 슬며시 마력창을 만들어 내면서 내게 다가오며 에포나를 넘길 것을 요구했다.
에포나는 이제 포메라니안의 형상을 유지하는 것도 하지 못하고 서서히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는.
비통한 마음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으며 블랑카에게 대답했다.
“나도 알아. 나도 안다고.”
이게 포메라니안도, 내가 맨 처음 에포나란 이름을 붙인 개도 아니라는 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지금까지 일부러 방치하고, 잊으려 하던 사실이니까.
그 사실을 인정하자 이제 에포나는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몸을 부르르 떨고.
나는 그런 에포나의 촉수를 꽉 붙잡으며 외쳤다.
“에포나가, 에포나가 아니라는 건 잘 안다고! 하지만 어떻게 해? 얘밖에, 얘 말고는 아무도 의지할 상대가 없었는데!”
지금껏 에포나 덕분에 살아남은 수많은 순간을 떠올린다.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나는 에포나가 없었으면 진작에 죽었을 거다.
이 생명체의 목적이 뭐든 에포나는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 처음으로 내게 호의를 품고, 서로 교감해 준 존재다.
나를 잡아먹으려는 것이든 어쩌면 나를 그저 은신처로 이용하려는 것이든 상관없다.
에포나가 포메라니안이 아니라면?
그게 뭐 어쨌다고?
에포나가 맨 처음 만났던 그 강아지가 아니면 어때?
애초에 내가 처음부터 강아지를 만나긴 한 건지부터 의문스러운데.
중요한 건 지금껏 에포나가 나와 함께해 줬고,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생명체는 지금까지 나와 함께했던 에포나라는 건데.
비록 이게 내가 이름을 붙여 준 에포나가 아니어도.
이건 에포나다.
나와 함께해 주던 이게 에포나가 아니면, 에포나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에포나는 에포나니까.
“에포나는 에포나야. 에포나는, 에포나라고.”
“잉간.”
블랑카는 내게서 억지로 에포나를 뺏을 생각은 없는지 굳은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고.
“얘는 에포나야. 에포나라고!”
“끼잉…….”
서서히 형체가 사라져 가던 에포나는 내가 에포나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블랑카와 내가 알던 형체로 모습을 바꿔 간다.
에포나, 에포나, 에포나.
나는 에포나를 껴안고 붉은 안개 속에서 무릎을 꿇고 속으로 에포나의 이름을 중얼거렸고.
에포나는 내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핥으며 나를 위로하려는 것처럼 움직였다.
결국, 블랑카는 행동에 나서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며 마력창을 없앨 수밖에 없었다.
“정말. 정말 그래도 되는 거야? 어쩌면 그건…… 네가 알던 에포나를 잡아먹은 원수일 수도 있는데?”
“상관없어. 지금까지 나와 함께한 건, 이 아이고. 이 아이가 유일한 에포나야.”
꽈악.
꾸물텅거려서 늘 만질 때마다 감촉도, 형태도 달라지는 에포나지만.
나는 에포나의 모습을 반드시 기억하고자 에포나의 몸을 껴안으며 본심을 털어놨다.
“나는, 얘가 없으면 못 살 거 같다고…….”
다 죽어 가는 모습으로 간신히 숨을 내쉬던 에포나는 고비를 넘겼는지 포메라니안의 모습으로 내 무릎에서 조용히 잠을 자고.
붉은 안개도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블랑카는 그런 내 모습을 입술을 깨물며 측은하게 바라보고.
잔뜩 긴장했던 반동일까?
나는 잔뜩 몰려오는 수마에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동굴에 쓰러져 잠들었다.
그리고 다시, 꿈.
보랏빛의 표독스러운 안개가 내 주위를 메우고 있었고.
안개 속에서 악몽 속의 여인이 방긋 웃으며 나를 반겼다.
악몽의 여인은 나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며 우물쭈물하더니.
꼬옥.
나를 껴안으며 내 귓가에 귓속말을 속삭였다.
“고마워.”
그리고, 기상.
“왕!”
잠에서 깨어나자 아까 다 죽어 가던 모습은 꿈이었다는 듯 평소보다 더욱 활기차게 뛰어다니며 내 발치에서 에포나가 뛰놀았고.
블랑카는 복잡한 표정으로 그런 나와 에포나의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붉은 안개가 지나간 동굴 밖의 세상은 안개가 지나가기 전과 그리 바뀐 게 없었다.
나는 이 기묘하게 우울한 분위기를 털어 내고자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블랑카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 이제 슬슬 나무나 캐자. 일하자, 일!”
“그래. 그래야지.”
블랑카는 사전에 나와 이야기한 대로 근처의 나무들을 쓰러트려 통나무로 가공하기 시작했다.
으아, 이제 이걸 하나씩 가공하는 것도 다 일이다.
중장비급의 힘이 필요한 작업은 블랑카가 해 주겠지만, 그렇지 않은 작업은 전부 나 혼자서 해야 한다.
상상만 해도 아찔하지만, 어쩌겠어?
내 집 마련하기가 그렇게 쉬울 수는 없으니까.
어차피 통나무들을 바로 재료로 써먹을 수는 없고, 어느 정도 건조해야 건축 자재로 사용할 수 있단다.
지금까지 다른 도구들을 만들 때와는 달리, 통나무집은 한번 만들면 철거하기도 어렵고 다시 만들기도 어려우니 만들 때 실수를 하지 않게끔 주의해야 한다.
그렇게 블랑카와 함께 땀을 흘려 가며 날씨가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통나무들을 한곳에 모아 뒀고.
어딘가 후련한 기분을 느끼며 잠든 다음 날 아침.
“……?”
나는 통나무가 거대한 레고들로 바뀌어 있는 기적을 목격할 수 있었다.
아니, 이번엔 또 뭔데?
* * *
“자, 그럼 청소를 시작해 볼까요?”
클라인은 잉간이와 리베리아산 인간이 잠든 은신처에 신체 말단을 뻗으며 카메라에 속삭였다.
은신처의 제거는 최대한 빠르게 이뤄져야 한다.
자칫 잘못하다간 은신처에서 떨어져 나온 바위가 사육 생물들을 다치게 하는 일이 있을 수도 있고.
애완 생물들의 스트레스를 최대한 줄여야 하니 말이다.
슈슈슉!
클라인은 자신의 입으로 효과음을 넣어 가며 은신처를 재빠르게 들어 올렸고.
갑작스러운 일에 당황한 듯 보이는 잉간이와 켄토르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미안해~ 금방 끝나니까, 조금만 기다려!”
클라인은 애완 인간들이 듣지도 못할 사과를 하며 서둘러 은신처와 그 주위의 쓰레기들을 청소했다.
지난번 점액에 밀려온 잡동사니들과 땅속에 파묻은 오물들.
적당히 은신처 주위의 쓰레기들을 모두 정리한 클라인은 이어서 잉간이가 모아 둔 것으로 보이는 식량들을 살펴봤다.
“애완 인간들은 이렇게 먹이를 저장하는 습성이 있는데요. 먹이를 너무 많이 주게 되면 비축한 식량만으로 생활하게 되니까. 키우시는 인간들이 자주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싶으시면 주기적으로 비축한 식량을 치워 주시는 게 좋아요.”
뭐, 그건 사육장 안의 이야기고 이런 차원항에서는 이야기가 다르지만 말이다.
클라인은 조심스럽게 잉간이가 비축한 식량을 살펴보며 켄토르와 인간의 평균 식사 소비량을 떠올렸다.
이제 곧 부패가 시작될 음식들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잉간이와 켄토르 둘로는 비축한 식량을 처리할 수 없을 것 같다.
혹시라도 잉간이가 부패한 음식을 먹고 탈나지 않게끔 클라인은 서둘러 잉간이의 은신처에서 식량들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그런 클라인의 모습을 먹을 걸 빼앗으려 한다고 생각한 걸까?
잉간이는 필사적으로 클라인의 손가락에 매달리며 클라인을 막으려 했다.
“으아…… 보여요? 지금 이게 잉간이가 자기 식량 건드리지 말라고 위협하는 건데요. 와, 진짜 하나도 안 무섭죠?”
그렇지만 클라인의 눈에는 그런 잉간이의 위협이 귀엽게만 보일 뿐이었고.
필사적으로 자신이 준 사료를 지키려고 하는 잉간이를 허공에 들어 올리는 것으로 잉간이를 손쉽게 제압했다.
“조금만 참아. 바로 내려 줄게~.”
클라인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사료를 모두 회수해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잉간이를 풀어 줬다.
이대로 바로 잉간이의 은신처 안에는 뭐가 있었는지 확인해 보려 한 클라인이지만, 그런 클라인은 갑작스러운 잉간이의 행동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 어? 잉간이, 갑자기 왜 울어?”
잉간이가 갑자기 멈춰 서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어라, 어?
지금까지 모아 둔 먹이를 빼앗긴 게 그렇게 분했던 걸까?
어째서 갑자기 우는 건지는 몰라도 빨리 달래야겠지?
먹을 걸 빼앗겨서 우는 거니 먹을 걸로 달래면 되겠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잉간이 앞에 슬쩍 사료를 흔들거렸다.
“자, 자. 옳지. 옳지…….”
다행히도 잉간이는 클라인의 마음을 알아준 것인지 클라인이 내민 사료를 받아 들고 눈물을 그친 것으로 보였다.
클라인은 잠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잉간이는 마치 화를 내듯 클라인의 신체 말단을 발로 찼고.
“그래. 그래. 좀 더 줄게.”
클라인은 피식 웃으며 잉간이에게 사료를 좀 더 안겨 줬다.
핸들링 훈련을 다 끝내니 이런 교감도 할 수 있네.
돌발 상황은 다 끝났다고 판단한 클라인은 서둘러 카메라를 책상 위로 돌렸다.
책상 위에는 잉간이의 은신처에서 가져온 온갖 잡동사니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럼, 잉간이가 뭘 숨겨 두고 있었는지 살펴볼까요?”
제일 먼저 클라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상당한 양의 뗀석기였다.
“아, 이건 지난번에 제가 선물한 거로 만든 거네요!”
클라인은 들뜬 목소리로 잉간이와의 추억이 얽힌 잡동사니들을 하나씩 살펴봤다.
잡동사니를 살필 때마다 잉간이와의 추억이 떠올라 기분이 좋아진다.
클라인은 문득 잉간이가 자신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았음을 깨달았다.
이건 별로 좋지 않지만, 좋다.
클라인은 평소 정보 오염이 심해지지 않도록 사육하는 생물들에게 감정을 필요 이상으로 쏟는 편이 아니지만.
잉간이만큼은 도저히 감정을 쏟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잉간이와 교감하면 할수록 잉간이가 계속해서 클라인의 마음속으로 들어왔으니까.
이런 걸 반려 생물이라고 하는 걸까?
점차 잉간이가 특별해지는 걸 느꼈지만, 클라인은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과연 잉간이는 내게 키워지는 게 행복할까?
제대로 된 준비 없이 잉간이를 가져왔기 때문에 여전히 클라인의 머릿속에 달라붙어 있는 의문이다.
쥬스농장의 저주 아닌 저주가 떠오르고.
만약 잉간이가 자신에게 키워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클라인은 잠깐 그런 생각을 했으나, 곧바로 고개를 내저어 잡생각을 날려 버렸다.
리퀴드사의 조언에 따르면, 어차피 쥬스농장이 실질적으로 클라인에게 뭔가 할 수 있는 짓은 없다고 한다.
쥬스농장은 사육항 사육자고, 클라인은 차원항 사육자니 쥬스농장도 지금 이상으로 과격한 행동에 나설 수 없다는 거다.
사육항과 차원항은 분야가 다르니, 더 이상 쥬스농장이 클라인을 공격하면 역풍이 불 테니까.
그러니 클라인이 먼저 쥬스농장에게 잉간이를 넘기지만 않으면 쥬스농장이 잉간이를 빼앗아 갈 방법은 없다는 것이었다.
녹취록을 공개해도 서로의 이미지에 타격만 입고, 제대로 된 치명타를 입힐 수는 없으니 이건 그냥 넘어가는 게 좋다고 담당자는 조언했다.
쥬스농장이 댓글 창 테러를 사주했다는 것도 심증만 있고 물증이 없는 상황이다.
어차피 실질적으로 피해를 입은 건 없으니까.
그래.
지금 당장은 부족할지 몰라도, 잉간이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클라인은 뭐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잉간이가 들어갈 사육장을 만드는 데 얼마가 들든, 잉간이의 서식 환경을 공부하는 게 얼마나 힘들든.
클라인은 뭐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클라인은 너무 자신만만한 쥬스농장의 태도가 내심 마음에 걸렸다.
마치 반드시 무언가가 벌어질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냐, 내가 잉간이를 잘 사육하기만 하면 아무 일 없을 거야.
클라인은 그렇게 스스로를 위안하며 은신처와 잡동사니를 다시 차원항 안으로 집어넣고 리퀴드사에서 지원받은 약품을 카메라 앞에 들이밀었다.
“네, 그럼 이제 차원항 청소의 마지막! 차원 파괴자 방제를 할 시간이네요!”
클라인은 조심스럽게 차원 파괴자 퇴치제를 방출기에 집어넣고 차원항 안으로 내려보냈다.
붉은 안개가 차원항 안으로 퍼져 나가며 인식저해를 사용해 은신하고 있을 차원 파괴자의 유충을 제거하려 퍼져 나갔다.
방제가 이뤄지기까진 시간이 좀 걸리니 그사이에 클라인은 리퀴드사의 제품을 홍보하기로 했다.
“이번에 나온 리퀴드사의 신제품! HAL-6000! 기존 방제약이 독성 정보를 투여해서 차원 파괴자를 죽이는 방식이었다면. 이건 자기 인식을 이용해서 차원 파괴자를 없애는 약품이에요. 독성 정보가 없는 덕분에 마력 저항력이 낮은 생명체가 있는 차원항에도 사용이 가능하거든요.”
담당자 왈, 이번 신제품은 차원 파괴자의 인식 저해를 역이용하는 방식이라고 한다.
인식 저해와 의태로 차원항 안에 숨어 있을 차원 파괴자의 유충은 인식 저해 때문에 쉽사리 관측되지 않고.
차원항 안의 생물에게 관측되더라도 의태로 다른 생물로 인식되는데.
HAL-6000은 자기 인식을 뒤흔드는 방식이어서, 차원 파괴자의 인식 저해가 역으로 독으로 작용한다고 한다.
자기 인식을 가볍게 흔드는 것만으로, 자신을 인식하고 있을 생물이 없을 차원 파괴자는 자기 관측에 실패해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무해한 정보로 바뀌어 버린다는 것이다.
의태로 다른 생명체가 인식한다고 해도, HAL-6000은 의태를 일시적으로 무력화해 차원 파괴자의 의태를 풀어 버린다.
그렇게 되면 사육 생물들이 관측하던 차원 파괴자와, 본래의 차원 파괴자의 모습 사이에 괴리가 발생하게 되고.
그대로 차원 파괴자는 자기 관측에 실패한다.
이런 식의 원리라고 하는데, 솔직히 클라인은 과연 이게 제대로 통할지 의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독성 정보를 인식시키는 기존의 방식이 훨씬 효과가 좋을 것 같은데.
하지만 잉간이가 있는 차원항에 독성 정보를 풀어놨다간, 혹시라도 잔류 정보가 잉간이를 해칠 수도 있으니까.
그러고 보니 슬슬 잉간이도 정보 세척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아직 잉간이는 정보 세척을 감당할 만큼 자기 인식이 그렇게 뚜렷하지 않다.
정보 세척은 좀 더 잉간이의 자기 인식이 뚜렷해지면 하도록 하자.
사소한 정보 오염은 잉간이가 차원항에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까.
클라인이 그렇게 생각하며 신상 방제약을 홍보하는 사이 차원항의 방역이 모두 끝났고.
클라인 또한 촬영을 마무리하며 카메라를 떼어 내려던 그때.
“어?”
클라인의 눈에, 잉간이와 켄토르가 나무를 잔뜩 베어서 쌓아 두기 시작한 모습이 눈에 보였다.
저건, 인간형 생물들이 새롭게 거주 구역을 만들려고 할 때 보이는 현상인데.
이번 청소로 은신처가 그리 안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 걸까?
뭔가 좀 미안하네.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흥미롭게 잉간과 켄토르의 작업을 지켜봤고.
문득 클라인의 머릿속에 한 가지 발상이 떠올랐다.
통나무보다 더 나은 재료를 선물해 주면, 그거로 거주 구역을 짓지 않을까?
통나무보다 가공하기도 쉽고, 운반하기도 쉬울 테니 잉간이도 기뻐하겠지.
꽤 괜찮은 생각 같은데?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서둘러 차원항 안에 애완 생물의 사육항을 만들 때 주로 사용하는 즉석-결합체를 집어넣었다.
자신의 선물을 받고 기뻐할 잉간이의 얼굴을 상상하며 말이다.
언제나 그렇듯, 호의를 가득 담아서.
40화 지구산 인간에게 즉석-결합체 1만 개를 주면 생기는 일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어제 내가 블랑카와 함께 생고생해서 모은 통나무들이 전부 레고로 바뀌어 버린 기현상이 일어나 있었다.
또 사이코패스 너니?
불만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지만 언제나 그렇듯 대답이 돌아오는 일은 없다.
도대체 뭔 생각으로 통나무를 레고로 바꿔 버린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거대한 레고들에 손을 뻗어 본다.
묵직한 무게감을 기대했지만, 놀랍게도 그 거대한 크기에 어울리지 않게 레고들은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고.
나 혼자서도 통나무만 한 레고를 번쩍 들어 올릴 수 있을 정도였다.
거기에 이 거대한 레고들은 강도도 꽤 뛰어나 보인다.
처음에는 통나무를 다 빼앗겼다는 생각에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지만.
이 레고를 생각보다 괜찮은 건축 재료로 쓸 수 있다는 걸 깨닫고는 그럭저럭 괜찮아졌다.
하지만 그래도 문제가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거대한 레고들을 가공할 방법이 없는데?
블록들의 크기가 너무 커다란 바람에 이대로는 어디에도 써먹지 못하는 커다란 흉물이 될 뿐이다.
일단 블랑카의 힘으로 부서지는지 먼저 확인해 봐야겠다.
“블랑카, 마력 창으로 이거 부술 수…….”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슬며시 레고에 손을 올려 둔 순간.
레고는 갑자기 여러 개의 블록으로 와르르 무너졌다.
이게 어떻게 된 걸까?
내가 한 거라고는 단지 손을 올려 둔 것밖에 없는데?
잠깐, 설마?
설마 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여러 개의 블록을 손 위에 올려 두고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하나로 합쳐져라, 하나로 합쳐져라.
그러자 마치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내 손 위의 블록들이 하나로 합쳐졌다.
“오.”
설마 이 레고들, 내 마음대로 형태를 바꿀 수 있는 걸까?
그럼 어디 보자.
삼각형으로도 모습이 변하려나?
꾸물텅.
작은 블록을 손 위에 올려 두고 삼각형의 블록을 떠올리자, 한쪽 면이 경사진 블록이 2개 손 위에 생겨났다.
한참 동안 나는 블록들이 어떻게 변하는지 살펴봤고.
나는 정육면체 모양의 블록을 바닥에 내려 두며 결론을 내렸다.
그저 만지는 것만으로 자유자재로 변형되며, 별도의 접착제 없이도 서로 잘 달라붙는다.
내구성도 뛰어나고 무게도 거의 없는 수준이어서 운반하기도 쉽다.
이건 말 그대로 신이 내려 준 선물이다.
이곳에 오고 처음으로 마음속 깊은 곳에서 사이코패스에게 감사함이 우러나온다.
사이코패스가 이걸 선물해 주지 않았다면 며칠 동안 낑낑거리며 통나무를 다듬으며 생고생을 할 뻔했는데.
이 블록들만 있으면 아주 간단하게 나와 블랑카가 설계한 집을 만들 수 있다.
내가 들뜬 모습으로 블록들을 만지고 있으니 그사이에 호숫가에 다녀온 블랑카가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용으로 놔둔 티셔츠로 닦으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그렇게 좋아?”
“어, 너무 좋아. 지금이라면 사이코패스를 신이라고 불러 줄 수 있을 거 같아.”
“그, 그럼 지금 같이 감사의 기도를…….”
“아, 그건 싫어.”
오늘도 블랑카는 내게 아침 기도를 함께할 것을 제안했지만 나는 단칼에 거절했고.
그러는 사이 잠에서 깨어난 에포나가 내게 포르르 달려왔다.
바닥에 주저앉아 에포나의 부드러운 털가죽을 쓰다듬는다.
어제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고 나서, 에포나는 뭔가 좀 더 성장한 것처럼 보였다.
그 전까지는 가끔씩 털가죽에서 촉수가 빠져나오거나 형태가 일그러지는 식으로 위장이 뭔가 허술했는데.
지금은 말 그대로 포메라니안 그 자체가 되었다.
쩝, 처음에는 좀 징그러웠지만 촉수가 달린 모습도 나름 귀여웠는데 이젠 보지 못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에포나가 쪼로롱 내 손에서 벗어나 내 얼굴을 바라봤고.
슬쩍, 마치 메롱 하고 혀를 내밀듯이 입에서 보랏빛 촉수를 살짝 내밀더니 블록들 사이로 달려갔다.
“왕!”
블록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강아지처럼 에포나는 들뜬 모습으로 블록들 사이를 뛰놀았고.
나는 블랑카와 교대하듯 일단 좀 씻으러 호숫가로 발을 옮겼다.
호숫가에서 세수하며 나는 조용히 호수의 깊숙한 곳을 바라본다.
분명히 뭔가가 저 안에 살고 있는데, 뭔지 모르겠다.
낚싯대를 만들어서 던져 보면 물려나?
낚싯대 하니까, 물고기도 먹고 싶네.
지난번에 자기 전에 심심해서 물고기가 있는지 확인해 보니 물고기가 감지됐단 말이지.
오늘 집을 완성하고 나면 슬쩍 블랑카를 꼬셔서 말총을 얻어 내 봐야겠다.
물고기는 블랑카도 먹고 싶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기본적인 세안을 끝마치고 동굴로 돌아오니, 에포나가 으르렁거리며 블록을 물어뜯고 있었다.
저러다가 블록을 삼키면 큰일 날 수도 있겠는데?
“에포나. 그거 지지, 지지. 먹는 거 아냐!”
“왕?”
서둘러 에포나의 입에서 블록을 빼내자 상당히 놀라운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도저히 에포나의 이빨로 구멍을 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은데.
블랑카의 입에서 빼낸 블록에는 에포나의 잇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뭐야, 이거 어떻게 한 거야?
“에포나, 이거 뭐야?”
“왕!”
놀란 내가 에포나에게 블록을 들이밀어도 에포나는 강아지 특유의 모른 척하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을 회피했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냥 에포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에포나를 풀어 줬다.
설마 구멍이 났다고 고장이 난 건 아니겠지?
불안한 마음으로 블록을 만지작거리자 블록은 꾸물거리며 원상태로 복원되기 시작했다.
휴, 다행히 고장 나지 않은 것 같네.
나는 바닥을 굴러다니는 작은 블록들을 한데 모아 적당한 크기로 뭉치며 블랑카를 불렀다.
“블랑카, 어제 그린 설계도. 대충 기억나지?”
“응. 저쪽에 어제 그린 게 아직 남아 있어서 잊어 먹진 않을 거 같아.”
오, 땅바닥에 그린 설계도가 아직까지 남아 있다니 다행이다.
나는 블랑카에게 적당히 뭉친 블록을 던져서 건네주며 작업 지시를 내렸다.
“그럼, 지금부터 블록을 그 정도 되는 크기로 뭉쳐서 벽을 세우면 돼.”
“그냥 맨바닥에 놔둬도 되는 거야? 바닥을 파서 고정해야 하는 게 아냐?”
“놀랍게도. 그냥 바닥에 놔두면 알아서 고정되더라.”
“오, 역시 신님의 선물.”
블랑카에게 블록을 한가득 안겨 주고 나는 어제 그린 설계도대로 블록을 이용해서 나만의 집을 만들기 시작했다.
뭔가 블록형 샌드박스 게임에서 블록으로 집을 만드는 기분이 드네.
그냥 내가 상상하는 대로 모습이 바뀌는 재료가 있으니 건설은 무척이나 손쉽게 이뤄졌고.
에포나가 낮잠을 세 번째 취하고, 블랑카와 나는 중간에 한 번의 식사를 하고 나서 건설을 완료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집은 일반 가정집이나 오두막처럼 보이기보단, 어딘가의 SF 소설 속에서 나올 법한 모습이었다.
장식이라곤 하나 없이 네모반듯한 갈색의 건물.
그 모습은 마치…….
“뭔가 마구간 같네.”
“마구간이라니!”
블랑카의 말에 일단 버럭 화를 내며 아니라고 해 봤지만, 블랑카의 말대로다.
SF스러운 마구간.
그게 나와 블랑카가 만들어 낸 집의 모습이었다.
나라고 아름다운 집을 만들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블랑카와 내가 아무리 머리를 맞대도 제대로 된 디자인은 나오지 않았고.
결국, 블랑카가 지나다닐 수 있게끔 널찍한 통로를 우선시하고, 집 안에 짚 침대를 깔아 놓다 보니.
그렇게 SF 마구간이 탄생한 것이었다.
“쩝, 그래도 꽤 그럴싸한 모습이긴 하네.”
원래 나와 블랑카가 머물던 동굴은 창고로 사용하게 됐고.
동굴 앞에 떨어진 낙반을 집 안에 포함해서 일종의 식탁으로 삼았다.
집 한가운데에는 모닥불이 타오르며 조명 역할을 해 준다.
솔직히 말해서, 그리 썩 괜찮은 집은 아니지만.
드디어 이곳에 온 지 처음으로, 나의 집이라고 부를 만한 장소가 생긴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그래. 이젠 여기가 내 집이다.
각오는 했어도 그 사실을 깨닫자 다시 한번 뭔가 기분이 울적해졌고.
“끼잉…….”
에포나가 슬며시 내 다리에 얼굴을 부비며 나를 위로했다.
그래, 이왕 집을 만든 김에 사람이 살 만한 곳으로 만들어야지.
“블랑카, 뭐 불편한 곳은 없지?”
“응? 이쪽에 제단을 만들고 싶은데. 살짝 창문을 내도 괜찮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집 한구석에 제단을 만들기 시작한 블랑카에게 다가갔다.
블랑카는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이 손수 제작한 제단을 어디에 배치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었고, 나는 적당히 블랑카에게 조언을 던졌다.
“차라리 바닥에 놔두기보단, 창문을 뚫고 남은 재료를 이용해서 공중에 걸어 두는 건 어때?”
“오, 그거 괜찮네!”
블랑카는 내 제안을 받아들이고 희희낙락 제단을 만들기 시작했고.
나는 그 틈을 타서 슬며시 창고 안에 블랑카가 집어넣은 말미잘을 꺼내 와서 집 안에 들여놨고.
슬쩍 말미잘에 들어가서 휴식을 취했다.
음. 이게 좀 모습은 별로여도 한번 익숙해지면 꽤 괜찮다니까.
“왕!”
“으윽…… 그거 진짜 안 쓰면 안 돼?”
“어허, 으흐. 익숙해지면 괜찮더라, 야.”
그런 내 모습을 발견한 블랑카와 에포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불평하고.
내가 그 새로운 일상을 편히 즐기며 휴식을 취하던 그때.
번쩍.
블랑카가 만든 제단이 환하게 빛을 발했다.
“시, 신님?”
블랑카와 나 둘 다 멍하니 제단을 바라봤고,
회색빛의 안개가 블랑카의 제단을 집어삼키고, 무언가를 토해 냈다.
빨간 국물에 하얀 떡과 잘 익은 계란.
믿기지 않았지만, 제단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떡볶이?”
내가 알고 있는 떡볶이의 모습 그 자체였다.
* * *
차원 생물을 키우는 사육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자연환경과 흡사한 환경을 만들어서 관상미를 올린 형태의 차원항.
다른 하나는 인공적인 환경을 조성해서 관리를 손쉽게 하기 위한 목적의 사육항.
이 두 가지 형태가 현재 대부분의 차원 생물들을 키우는 주류 방식이었지만, 이 두 방식 사이엔 항상 논쟁이 있어 왔다.
어찌 보면 유치하게 보일 수 있겠지만, 매번 커뮤니티에서 벌어지는 논쟁을 요약하면 이것이었다.
차원항이 더 나은가, 아니면 사육항이 더 나은가.
차원항 사육을 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요약해 본다면, 대충 이 정도가 될 수 있겠다.
아무리 사육항이 자연환경의 기능을 다 충족시킨다고 해도, 자연환경에 가까운 환경이 더 낫지 않겠느냐?
싸움 또한 생물의 본능이니 적당한 싸움은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다.
클라인 또한 이 의견에 동의하는 편이었고, 최대한 주인이 사육항에 대한 개입을 최소화해야 사육 생물들이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육항 사육자들의 생각은 정반대였다.
야생 환경은 오히려 차원 생물들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환경이고, 자연 대신 인공적인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게 생물들을 위한 길이라고.
자연환경을 보지 못해서 스트레스가 쌓인다면 영상과 가상현실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면 된다.
생먹이? 사육 생물이 다칠 수도 있고 영양학적으로 완벽한 사료에 밀리는 먹이다.
스트레스는 적절한 약물 치료를 통해서 해결하면 되고, 번식 또한 음마들이나 인공 수정을 이용하는 대리 수정이 더욱 번식 확률이 높다.
이 두 사육 방식의 형태는 완전히 정반대지만, 둘 중 하나가 틀렸다고는 할 수 없는 게 사육항 사육자들과 차원항 사육자들의 주된 대립 원인이었다.
차원항과 사육항 둘 다 생물을 위한 사육법인 건 맞았고, 무엇이 더 생물에게 행복한 것인지는 철학적 논쟁으로까지 번지는 일이었으니까.
그 때문에 한번 두 사육자들 간에 논쟁이 벌어지면 쉽사리 싸움이 끝나지는 않았다.
[솔직히 브리더도 아닌데 사육항에서 생물 키우는 거 별로 안 좋게 보임. 돈 때문에 번식하는 브리더라면 몰라도, 생물이 좋아서 사육하는 거라면 차원항에 키우는 게 맞지 않냐?]
[어그로 또 왔네 ㅅㅂ]
[어그로 아님. 솔직히 몇 걸음 걸으면 벽에 부딪히는 독방에서 켄토르 키우는 거 보고 진짜 놀랍더라. 인간형 생물도 반려 생물로 키울 수 있다며? 니들은 반려 생물을 가둬 두고 키우냐?]
[그건 사육항 사육이 아니라 생물 학대고. 그렇게 따지면 차원항이야말로 브리더 아니면 키우면 안 되지. 진짜 자연환경 비슷하게 조성해 줄 수 있는 사람 아니면 차원항은 생물한테 진짜 안 좋은 환경이 맞다.]
[기계박이답게 사육항 옹호하네 ㅋㅋ]
[뭐래, 나 마키나 아니거든?]
[마키나가 아닌데 어떻게 글 올린 지 0.001초 만에 답댓글을 다냐고 ㅋㅋㅋ 기계박이 쉑 검거.]
클라인은 자주 이용하는 인간형 생물 사육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완벽한 자연환경을 만드는 게 아니면 차원항은 생물들한테 더 스트레스라.
이 댓글은 대부분의 차원항이 사육자가 개입하지 않는 걸 전제하며 만드는 걸 보고 단 거겠지.
클라인은 자신이 완벽한 자연환경을 조성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아예 처음부터 자신이 개입한다는 조건으로 차원항을 설계한다.
그 결과는 클라인의 방 안에 놓인 수많은 차원항들이었다.
클라인의 보호 아래에서 문명을 만드는 수많은 인간형 생명체들.
클라인은 충분히 자신의 차원항들을 바라보며 그 안의 인간들이 행복하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잉간이는?
클라인은 쉽사리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고, 언제나처럼 대답을 미루며 커뮤니티 글들로 시선을 옮겼다.
지난번에는 클라인의 댓글 창에서 시작된 싸움이 각 사육자들의 커뮤니티로 번져 정보 전쟁까지 벌어진 적도 있었다.
클라인은 커뮤니티에서 차원항 사육자의 대표 주자로 통하고 있었지만,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자신이 차원항 사육 방식을 사용하던 건 그게 인간형 생물들의 사육에 더 적합하다고 판단해서지, 굳이 차원항 사육만을 고집할 생각은 없었다.
만약, 잉간이의 사육에 사육항이 더 어울린다고 판단된다면 그 즉시 잉간의 사육장을 사육항으로 교체할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지금 이렇게 클라인이 잉간이의 차원항에 즉석-결합체를 집어넣는 것도 그런 생각의 일환이었다.
그래도 이왕이면 사육항보단 차원항을 더 반겨 줬으면 좋겠는데.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카메라를 작동시키며 잉간이의 차원항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꽤나 익숙하게 사용하네요?”
클라인은 잉간이가 즉석-결합체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모습을 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즉석-결합체는 수많은 정보들이 하나로 뭉친 일종의 정보 밀집체.
그 때문인지 자기 인식이 희미한 생명체들은 즉석-결합체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음, 생체 블록하고 즉석-결합체 둘 중 뭘 줄지 고민했는데, 이럼 즉석-결합체를 주길 잘한 것 같네요!”
클라인이 맨 처음에 잉간이에게 주고자 했던 것은 생체 블록.
파괴되어도 알아서 주위의 양분을 흡수해 원래 형태로 돌아가고, 가공도 쉽고 심지어 비상시에 섭취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아무래도 기계 생명체들이 아니면 익숙하지 않은 디자인이다 보니 잉간이가 사육항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확인해 볼 겸 즉석-결합체를 생체 블록 대신 선물한 것이었다.
다행히도 잉간이는 즉석-결합체를 잘 이용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고.
클라인은 기쁜 표정으로 그런 잉간이의 모습을 계속 관찰했다.
“가끔씩 그런 개체들이 있거든요? 나무나 돌같이 자연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가 아니면 과민 반응을 일으키는 개체들요. 혹시나 잉간이가 그런 개체는 아닌가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던 것 같네요!”
그 말인즉슨, 잉간이는 사육항에도 잘 적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 클라인은 원시 문명이면 다 같은 원시 문명으로 생각했지만.
최근에 브리딩 자격증 공부를 하며 자신의 그 생각이 큰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뗀석기나 간석기를 사용하는 극초기 원시 문명이 있는가 하면.
아직 내우주 항해에 머물러 있는 발달기 진입 직전의 원시 문명이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아주 간단한 예시로, 위성에 전략 기지를 건설한 리베리아인들이 있지 않은가?
뭐, 리베리아는 온갖 외래종들과 무단 투기가 이어지면서 순수하게 자신의 힘으로 문명을 발달시켰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말이다.
어쨌든, 클라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클라인의 차원항의 환경이 잉간이에게 맞지 않을 가능성이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오늘 이렇게 잉간이가 인공적 환경에 큰 거부감을 가지지 않는 모습을 보며 더욱 올라갔다.
그렇다면 클라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잉간이를 잘 사육할 수 있을까?
우선 첫 번째로, 잉간이 스스로가 차원항의 문명 수준을 끌어올리는 방법이 있겠다.
그 방법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잉간이가 바쁘게 활동하고 있으니 넘어가고.
다른 방법으로는 클라인이 차원항의 환경을 바꾸는 것이 있다.
하지만 어떤 환경으로?
클라인은 지구의 환경이 리베리아와 비슷하다는 것만 알지 그 이상의 정보를 모른다.
어쩌면 파인만이 말한 건 리베리아의 도시 지역과 비슷하다는 뜻이었을지 모른다.
아니면 사막, 바다, 혹은 지하.
무턱대고 주위 환경을 바꾸기에는 너무 정보가 부족하다.
환경을 바꾸는 것도 파인만이 돌아와 정보를 제공해 주기 전까지는 쉽사리 건드릴 수 없다.
하지만 그래도 잉간이가 선호하는 환경을 알아내기가 불가능한 건 아니다.
하지만 잉간이가 선호하는 환경을 알아내려면 꽤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클라인은 자신의 준비가 부족했음을 또다시 실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파인만이 돌아올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잉간이를 관찰하기만 할 수는 없다.
클라인이 직접 환경을 바꾸는 게 힘들다면, 잉간이가 환경을 바꾸는 데 도움을 주면 되는 것이다.
음, 역시 섣불리 도움을 주는 것보단 먹을 걸 선물해 주는 게 제일 큰 도움이겠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문득 잉간이가 매운맛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요즘 쥬튜브에서 또 한창 매운 음식 챌린지가 유행이던데, 슬쩍 지금이라도 세태에 야합해 봐?
문득 클라인은 이 상황에서도 쥬튜브 각을 뽑으려는 자신에게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지만.
이렇게 쥬튜브 각을 잡지 않으면 이 수많은 차원항을 유지할 수가 없으니까.
잉간이에게 선물할 매운 음식을 찾던 클라인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이 48b구역의 전통 음식이 매운 걸로 유명했었지?
이왕 쥬튜브 각을 잡는 거, 유행에 국뽕까지 한 스푼 더 끼얹자.
41화 사람이 먹는 음식을 인간이 먹을 수 있나요? 추억의 매운맛을 맛본 잉간이의 반응!
빨갛고 매콤하고 향기롭지는 않지만 참 맛있는 그 이름.
떡볶이.
그리 좋아하는 음식은 아니었지만, 이세계에 오고 나서 몇 번인가 그리워했던 음식이었다.
정확히는 떡볶이라는 음식보단, 떡볶이에 얽힌 추억이 그리운 거였지만 말이다.
어쨌든 나는 납치되고 나서 다시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은 음식의 등장에 당황할 따름이었다.
아니, 진짜 형이 여기서 왜 나와?
나는 도대체 이게 뭔 일인지 파악하려고 했지만, 블랑카는 이 일을 아주 간단하게 정리해 버렸다.
“신님의 선물!”
방긋.
클라인은 신줏단지를 다루듯 떡볶이가 담긴 용기를 조심스럽게 식탁 위에 올려놨다.
뭐, 지금까지 젤리를 던져 주던 것과 같은 일종의 포상이라고 해석하는 게 맞겠지?
떡볶이의 달짝지근한 향기가 내 식욕을 자극하고, 아직 식사하기 전의 배가 꼬르륵 울어 댄다.
내가 슬며시 블랑카 반대편에 걸터앉자, 블랑카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잉간, 이걸 굳이 지금 먹어야 할까? 좀 더 신님의 은총을 음미한 다음에…….”
언제나와 같은 블랑카의 헛소리가 더 진행되기 전에 나는 서둘러 떡볶이와 함께 동봉된 포크를 들어 올렸고.
블랑카는 그제야 부랴부랴 자신도 포크를 집어 들었다.
“첫 번째는 나, 응? 내가 먹게 해 줘!”
“응, 안 돼.”
꼬우면 헛소리하지 말고 바로 집어 먹었어야지.
나는 블랑카가 보는 눈앞에서 떡볶이를 입안에 집어넣고 우물우물 씹었고, 익숙한 그 맛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어떻게 된 건진 몰라도 진짜 어릴 적에 엄마가 집에서 해 주던 바로 그 맛이 나네.
그렇게 맵지도, 그렇게 달지도 않은 맹맹한 맛이지만 이 정도면 괜찮지.
쓴웃음을 지으며 떡볶이를 입안에 집어넣자, 블랑카는 그제야 자신도 떡볶이를 입안에 집어넣으며 맛 평가를 한마디 남겼다.
“으흠. 역시 신님이 내려 주신 요리!”
그놈의 신 타령은 맛 평가에서도 튀어나오네.
나는 무심하게 어묵을 집어 먹으며 블랑카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게 맛있냐?”
“응. 매콤한 소스하고 튀긴 고기가 잘 어우러져서 괜찮네. 내가 매운 음식을 잘 먹는 편은 아닌데, 이 정도면 괜찮은 거 같아.”
“……고기?”
그렇지만 블랑카의 맛 평가에서 무심코 지나갈 수 없는 단어가 들려왔다.
고기?
조심스럽게 떡볶이가 담긴 그릇의 내용물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고기처럼 보이는 건더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나마 비슷한 거라면 어묵인데, 아무리 그래도 어묵을 고기라고 하진 않겠지.
혹시 하지만, 역시나겠지?
나는 심호흡을 하며 잠깐 각오를 다지고, 그걸로도 모자라서 옆에서 뒹굴거리던 에포나를 무릎에 앉혀 두고 블랑카에게 질문했다.
“저기, 블랑카. 지금 네가 먹는 음식의 이름을 말해 줄 수 있어?”
“응? 딱히 정해진 이름은 없고,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마수 고기에 양념장을 넣고 볶은 고기? 그렇게 되겠네.”
“으흠. 그래?”
흠.
으흠.
음.
이번에는 좀 평범한 음식인가 싶더니, 또 뭔가가 이상하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내가 계속 어묵을 집어 먹고 있는데, 어째 어묵의 수가 줄어들지 않는 거 같다?
점차 머리 한구석에 걸리는 요소들이 늘어난다.
나는 가만히 포크에 찍혀 있는 떡이 사실 원래 무엇일지 고민하고.
잠깐 에포나를 바라본 뒤.
“머글랭?”
“왕!”
에포나에게 한 입 물려 주며 생각을 포기했다.
뭐, 어때?
때로는 아는 걸 포기하는 게 약이 될 때가 있다.
먹고 포만감이 드니까, 그냥 적당히 먹기나 하자.
오랜만에 익숙한 음식을 먹는 기분을 낼 수 있는 기회니까 말이다.
블랑카 또한 자신이 먹는 음식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잠깐 포크질을 멈추더니, 자신만의 결론을 냈다.
“역시 신님의 음식! 먹어도 먹어도 줄어들지 않아!”
“아하하. 그러게. 진짜 이게 뭔지 두려워지네.”
블랑카와 내가 인식하는 게 서로 다르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
블랑카의 눈에는 말 그대로 그 사이코패스가 신으로 보이고, 내게는 정체 모를 글자들로 보인다.
도대체 왜 이런 인식의 차이가 발생한 걸까?
뭐, 블랑카가 그 사이코패스를 신으로 믿고 있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겠지.
그런데 그렇다고 하면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블랑카는 그 사이코패스가 신으로 보여서 사이코패스를 신으로 믿고 있는 걸까?
아니면 사이코패스를 신으로 믿고 있어서 사이코패스가 신으로 보이는 걸까?
일단 블랑카가 전에 말한 이야기에서는 여기 오기 전부터 신이라는 걸 믿고 있었던 것 같은데.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블랑카가 슬며시 내 이름을 불렀다.
“잉간.”
“응? 왜?”
“잉간은 지금 먹는 음식이 뭐로 보이는데?”
“나? 떡볶이라고, 고향의 전통 음식으로 보이더라.”
“떡볶이? 어떻게 생긴 음식인데?”
“말 그대로 떡을 매콤한 소스에 볶은 거야. 우리 엄마는 떡보다는 어묵을 더 많이 집어넣었지만.”
내가 슬며시 추억에 잠겨 있자, 블랑카는 흥미롭다는 듯 내게 연이어 질문을 던져 왔다.
“부모님이 자주 해 주시던 음식이야?”
“아니. 그냥 가끔씩 먹는 정도였어. 내가 그리 떡볶이를 좋아하지 않았거든.”
“그래? 그런 것치곤 무척 그리워하는 거 같아 보이는데.”
“뭐, 내가 방에 틀어박히고 나서는 먹은 적이 없어서, 그래서 더 그리운 거 같아.”
그때, 블랑카와 대화하는 와중에 무언가 위화감이 들었다.
무언가 내가 굉장히 이상한 말을 한 거 같은데, 그게 뭘까?
나는 에포나를 쓰다듬으며 위화감의 정체를 밝혀 보려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정체가 무엇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뭔가 반드시 떠올려야 할 거 같은데, 떠오르지 않으니 자꾸만 다급해진다.
후,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잡생각을 몰아낼 겸, 서둘러 대화의 화제를 전환했다.
“그래서. 너는 언제 먹던 음식인데? 음식에 이름도 없는 걸 봐선 자주 먹던 건 아닌 거 같은데?”
“가끔씩 원정을 나갈 때, 마수의 독기를 정화하기 위해서 이렇게 요리해 먹었지. 해독초들은 대부분 매운맛을 가지고 있었거든.”
“그래? 그럼 매운맛에도 익숙하겠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가끔씩이야. 가끔씩. 켄토르가 매운 해독초를 먹을 일은 진짜 상황이 거지 같을 때 말고는 없거든.”
“그래? 뭐, 매운 해독초는 서민들 전용. 그런 거야?”
“그렇지. 아무래도 매운맛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 거기에 달콤한 해독초는 희귀하기도 하니까.”
“허, 그래?”
나는 그런 블랑카의 말을 들으며 문득 지금까지 가장 궁금했던 것을 블랑카에게 물어봤다.
“저기, 블랑카. 지금까지 네가 해 준 이야기를 종합하면 네 세계는 매일같이 언데드들이 덤벼드는, 마법이 있는 세계지?”
“그렇지.”
“그런데 좀 궁금한 게. 네가 말하는 걸 봐선 네가 입고 있던 아머드 슈트나, 동료들이랑 타고 다녔다는 우주선을 네 세계에서 만들 여력이 있어 보이진 않거든. 거의 좀비 아포칼립스가 시작된 세계던데…….”
“아, 그거? 그야, 우리가 직접 만든 게 아니니까 그렇지.”
“직접 만든 게 아니라고?”
직접 만든 게 아니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지?
“신님이야.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것도 신님이고, 물질적인 도움을 주시는 것도 신님이었어.”
“마법, 같은 것만 도와주는 게 아니었어?”
“뭐,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가끔씩 신님이 선물을 내려 주시는 경우가 있거든. 내가 입는 마법 갑옷도 그렇게 받은 거야.”
“허…….”
그러니까 블랑카의 말을 요약하면 대충 이런 건가?
기도를 하면 신님이 직접 기적을 일으킨다.
하지만 가끔씩 기도를 하지 않아도 신님이 선물을 던져 줄 때도 있는데, 선물의 내용은 매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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