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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랑카는 겁을 먹지도 않고 방긋 웃으며 점점 더 속력을 올렸다.
저 거대한 괴수가 두렵지도 않은 걸까?
갑옷을 입지도 않은 맨몸으로 달려 나가던 블랑카의 손에 전날 봤던 푸른 마상창이 만들어진다.
내가 아는 상식에서는 겁을 먹어야 하는 건 작디작은 블랑카인데.
“뿌우우!!”
오히려 지레 겁을 먹기 시작한 건 블랑카가 아닌 거대한 괴수였다.
블랑카에게서 거리를 두려는 듯 괴수는 뒷걸음치며 털을 길게 늘여 블랑카를 후려치려 한다.
딱 봐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두께의 괴수의 털들.
저기에 그대로 부딪친다면 교통사고가 일어난 것보다도 더 끔찍한 일이 발생하고 말 거다.
“리베리아 님. 당신에게 바치는 공물입니다!”
자신을 향해 거대한 털이 엄습해 오고 있는데도 블랑카는 아무렇지도 않게 기도를 끝마치고, 겁도 없이 괴수가 만들어 낸 털의 촉수에 뛰어들었다.
내가 예상했던 것같이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고.
블랑카의 마상창에 부딪친 괴수의 털이 갈가리 찢겨 나가는 모습만이 보였을 뿐이었다.
털의 촉수를 돌파한 블랑카는 그대로 괴수의 다리를 향해 돌진해 갔고.
푸른 기운이 블랑카의 몸에 잔뜩 모여드는 듯 보이더니.
블랑카의 손에 들린 마상창이 블랑카의 어깨까지 덮는 크기로 자라나며 그대로 괴수의 다리 하나를 날려 버렸다.
“뿌오오!!”
괴수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그대로 균형을 잃고 바닥으로 쓰러진다.
두 눈으로 보고도 도저히 믿기지 않는 광경이다.
현대 문명에 저 괴수를 가져다 놓으면 아마 탱크 정도는 출동해야 잡아낼 수 있을 거다.
그런 괴수를 아무것도 없는 맨몸으로 쓰러트렸다고?
아니, 저게 말이 되는 거야?
내가 경악하고 있는 사이 블랑카는 괴수의 뒤로 빠져나가 멈춰 섰고.
그대로 다시 뒤돌아서 괴수의 머리를 단번에 깨부쉈다.
내가 뭘 하기도 전에 그대로 괴수는 목숨을 잃어버렸고.
블랑카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꼭 모으고 바닥에 무릎 꿇었다.
“리베리아 님께 이 승리를 바칩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팔랑팔랑 젤리 몇 조각이 떨어져 내렸고.
블랑카는 말 그대로 말이 날뛰듯 기뻐하며 젤리를 소중하게 품 안에 껴안았다.
“잉간, 봤어? 리베리아 님이 응답해 주셨어!”
“내가 보기엔 그건 리베리아가 아닌 거 같은데.”
아무리 봐도 이 모든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사이코패스가 옜다 잘했다며 먹을 걸 던져 준 기분이다.
그러자 블랑카는 고개를 내저으며 마치 나를 설교하는 듯한 말투로 내게 말했다.
“직접 기적을 눈으로 보고도 믿지 않는 태도, 좋지 않아.”
“네 세계에선 진짜로 신이 존재했을지 몰라도, 이 세계에는 없어.”
내가 또다시 강한 부정의 뜻을 담아 고개를 내젓자, 블랑카는 진심으로 의아하다는 듯 내게 질문했다.
“잉간은 왜 그렇게 신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거야? 신님의 사랑도 잔뜩 받고 있으면서.”
글쎄, 왜일까?
어린 시절부터 배워 온 기독교적 세계관과 너무나도 다른 신이어서?
이것저것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이거겠지.
날 안락한 방 밖으로 끄집어낸 게 좆같아서.
단지 그뿐이다.
물론 그렇게 블랑카에게 말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단지.
“그냥. 그냥 내가 느끼기에 이 새끼는 신이 아니라고 생각될 뿐이야.”
이렇게 되도 않은 억지를 부릴 뿐이었다.
그렇지만 블랑카는 내 그런 억지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몰라도.
“혹시, 원래 세계에서 따로 믿고 있던 신이 있는 거야? 걱정하지 마! 리베리아 님은 굳이 자신만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으니까!”
속 편하게 웃으며 내게 포교를 하려 할 뿐이었다.
“원래부터 나는 무교였거든?”
나는 대충 그렇게 얼버무리며 대화를 끊어 버리고 재빨리 괴수의 사체 앞에 서서 대화 주제를 바꿨다.
“아까 외치는 걸 들어 보니까, 이게 뭔지 알고 있는 눈치더라?”
“이 마수의 이름 말이야? 뭐, 고향에서 많이 잡아 본 녀석이니까.”
“리베리아에선 이런 게 흔하다고?”
“자주 나오진 않았지만, 가끔씩 나오면 한 달 치 식량은 충분했지.”
아무리 봐도 일반 몬스터가 아니라 유니크 몬스터로 등장해야 할 녀석인데.
도대체 리베리아는 어떤 곳인 걸까?
지금까지 나온 정보를 종합해 보면 언데드들과 몇 년 동안 계속해서 전쟁을 벌이고.
그 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마력을 가지고 있고, 저런 괴수들이 평범하게 돌아다니는 곳이라니.
그곳의 사람들이 어째서 신들의 전장에 불려 가는 걸 간절히 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원래 살던 세상이 지옥 같으니 빨리 탈출하고 싶은 것도 당연하지.
그나저나 이 베헤모스인지 하는 코끼리 덕분에 여러 문제가 단번에 해결됐다.
일단 식량 문제는 앞으로 다시는 겪지 않아도 될 것 같고.
제일 중요한 건 실이다, 실.
거대한 덩치답게 털 또한 거대했지만, 잘 살펴보면 작은 실타래들이 하나로 뭉쳐진 결과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적당히 털 한 가닥만 잘라 가도 아마 실이 모자라서 고생할 일은 없을 거다.
지금 내게 필요한 모든 걸 채워 주는 아주 사랑스러운 괴수가 아닐 수 없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거대한 모발에 돌칼을 들이밀었지만 커다란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아무리 용써 봐도 베헤모스의 가죽과 털에 상처를 입힐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도 그놈의 마력 때문인 게 맞지?
마력이 없으면 아예 상처조차 못 입히는 거 맞지?
하지만 괜찮다.
맨 처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아니, 내가 달라진 건 거의 없지만 그때와는 다르게 내겐 친구가 있다.
“블랑카, 이것 좀…….”
“음? 뭐 하려고?”
“당연히 해체 작업이지. 이대로 저걸 놔둘 수는 없잖아?”
“아, 괜찮아. 그럴 필요는 없으니까.”
그럴 필요가 없어?
어째서?
블랑카의 말에 의아해한 것도 잠시, 나는 곧 블랑카의 말의 뜻을 깨달을 수 있었다.
거대한 괴수의 몸을 덮고 있던 털들에서 무언가 입자 같은 게 허공으로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괴수의 털들이 모조리 증발해 버리고 만 것이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내가 의아해하는 사이 털들은 모조리 사라져 버리고.
가죽과 털 하나 없이 매끈하게 피부만 남은 베헤모스의 모습이 드러난 것이었다.
“베헤모스의 털과 가죽은 전부 마력으로 만들어진 거거든. 그래서 숨통을 끊고 몇 분 지나지 않으면 마력이 흩어져서 사라져.”
그래.
음, 저렇게 거대한 덩치를 유지하기 힘드니 최대한 몸무게를 줄이려 한 베헤모스의 노력은 잘 알겠다.
애초에 진짜 털이 자유자재로 늘어나고 줄어드는 게 말이 안 되는 거지.
하지만 눈앞에서 원하던 게 전부 사라져 버렸다는 허탈감은 감출 수 없었고.
“망할…….”
나는 욕설을 흘리며 블랑카와 함께 베헤모스 해체 작업을 시작하는 수밖에 없었다.
* * *
“그렇죠. 저게 바로 켄토르의 주특기죠.”
차원항 안에 집어넣은 베헤모스를 켄토르가 단번에 처치하는 모습을 보며 쥬스농장이 만족스럽게 중얼거렸다.
자신이 설계한 대로 움직이는 로봇을 본 과학자의 기분이 마치 이럴까?
자신이 만들어 낸 품종이 저렇게 완벽하게 자신이 의도한 대로의 전투를 벌이는 걸 본 쥬스농장은 기분 좋게 사고 회로를 진동시켰다.
“야생화된 베헤모스의 천적이 실은 이 켄토르들이거든요. 뭐, 대부분의 인간형 생명체들이 이 베헤모스를 주식으로 삼기는 하지만요.”
오늘 쥬스농장이 특별한 먹이생물로 가지고 온 건 베헤모스.
원래는 오르트 구름에서 서식하는 우주 생명체지만, 쥬스농장이 계속해서 먹이생물로 개량한 결과 원형을 거의 잃어버리고 지상 생물이 된 품종이다.
마력 회수율도 꽤 높고, 유기체들의 식량으로 써먹기도 좋아서 전문적으로 사육하는 농장들이 꽤 많았었다.
원래는 자연환경에서 서식할 일이 없어야 하지만, 울타르나 탄탈로스도 유기하는 사람들이 있는 마당에 베헤모스를 유기하는 사람도 존재하는 법.
베헤모스의 두꺼운 마력 가죽을 뚫을 수 있는 생명체가 존재하는 행성에서는 평범한 먹이생물들 중 하나가 되었지만.
베헤모스의 마력을 뚫을 수 있는 생물이 존재하지 않는 행성에 베헤모스가 퍼져 나간다면?
토착 생명체들을 절멸시킬 정도로 베헤모스가 번성해, 아예 법으로 유해 생물이라 지정된 게 약 50년 전의 일.
그 때문에 베헤모스 유통은 법적으로 금지되었지만, 그 때문에 기존 베헤모스를 사육하던 농장들이 대다수 망해 버렸다.
그 결과, 베헤모스를 키우던 농장주들이 농장의 관리를 포기해 오히려 베헤모스가 더 야생으로 유입되는 결과가 발생했다.
뭐, 지금은 법도 개정되었고, 마리당 포상금을 걸어서 전문적으로 베헤모스를 사냥하는 모험가들도 있다고는 하는데.
워낙 번식 속도도 빠르고, 우주를 여행하는 능력도 갖추고 있어서 그 수가 쉽사리 줄어들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베헤모스를 쥬스농장이 먹이생물로 가져온 건, 일종의 전투력 측정기로 활용되는 베헤모스를 이용해서 지구산 인간의 힘을 대략 확인해 볼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보여요? 지구산 인간. 그러니까 이름이…….”
“잉간요. 잉간.”
“그래요. 잉간. 잉간이가 지금 바닥에 주저앉았잖아요? 저건 공포의 표시예요. 뭐, 이 정도는 클라인 님도 아시겠지만요.”
“아, 네. 저도 알죠.”
“소변을 지릴 정도까지 놀란 건 아닌 것 같네요. 하지만 분명히 공포의 신호가 나타나고 있어요.”
쥬스농장은 블랑카가 싸우는 모습을 구경하기만 하는 잉간이를 관찰하며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보통 대부분의 야생 인간형 생물들은 베헤모스를 두려워하지 않거든요? 어차피 좋은 먹잇감이 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그렇죠. 저도 베헤모스를 피딩할 때 그런 반응은 잘 못 봤거든요.”
“여기서 중요한 건, 지구산 인간이 겁을 먹었다는 거예요. 공포라는 건 생명체의 생존에 무척 중요한 감정입니다. 왜 생명체가 겁을 먹느냐? 자신에게 위협이 되고, 죽음을 가져올 수 있으니까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제가 살펴본 지구산 인간의 기억에서는 베헤모스 정도 되는 덩치의 생명체를 지구산 인간의 동족이 사냥하던 모습이 있었거든요. 그 말은, 지구산 인간에게 베헤모스는 사실 그리 큰 위협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렇다면 어째서 지구산 인간이 겁을 집어먹은 것일까?
쥬스농장은 그 이유를 단언했다.
“그렇다면 답은 이거 하나뿐이죠. 잉간이는 아직 교육을 덜 받은 개체다. 이겁니다.”
“교육을 덜 받았다고요? 제가 알기로 잉간이는 이미 성체인데…….”
“전투 훈련. 이런 걸 말하는 거죠. 인간형 생명체들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을 이전 세대의 교육에서 익히잖아요? 마수형이나 부정형 생명체들처럼 본능에서 익히는 게 아니란 말이죠.”
농장에서만 사육된 개체가 야생 개체들에서 관찰되는 특징을 나타내지 못한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
그 이유를 설명하려는 여러 가설들이 있었지만, 지금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건 인간형 생명체들은 지적 생명체들처럼 교육을 통해서 행동을 학습한다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정보 생명체들이 인간형 생물들을 숙주로 자주 이용하는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아, 그럼 설마……?”
“네. 아마 지구산 인간이 차원항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건 아직 교육을 받지 못한 개체여서일 겁니다.”
클라인은 그렇게 결론 내린 쥬스농장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제일 좋은 건 역시 저런 교육을 받지 않아도 되는 환경을 구성해 주는 거죠.”
“교육을 받지 않아도 되는 환경요?”
“그, 야생 환경에 가까운 환경이 야생 생명체들의 스트레스를 줄여 주는 것도 사실이지만, 야생에 가깝다는 건 그만큼 인공적인 환경보다 불완전하다는 거거든요.”
“그렇긴…… 하죠.”
“차원항을 굳이 야생처럼 꾸밀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그 생물이 야생에서 필요로 하던 게 뭔지 알고, 필요로 하는 기능을 가진 시설을 만들어 주면 되는 겁니다.”
확실히 야생 생물보다는 애완 생물의 수명이 더 길다는 통계도 있고, 인공적인 환경을 조성해도 기능만 충분하면 야생 생물들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는 건 쥬스농장의 영상으로 이미 충분히 입증된 사실이다.
“그렇지만 완벽한 인공 환경을 조성하는 게 사실 완벽한 야생을 만들기보다 더 어렵거든요. 야생이란 건 불완전하다는 데 의의가 있는 법이니까요. 그리고 돈도 많이 들고요. 그래서 이 방법은 초보자들에게 추천하는 방법은 아닙니다.”
클라인은 쥬스농장의 조언을 들으며 마음 한구석이 쿡쿡 찔리는 기분이었다.
클라인은 야생 환경에 가까울수록 애완 생물들이 더 스트레스를 덜 받을 것으로 생각하며 차원항을 꾸몄지만.
오히려 애완 생물들에게 스트레스만 주던 게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슬며시 클라인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았다.
어쩌면 자신이 야생과 비슷하게 차원항을 꾸미는 건 애완 생물들이 자신을 필요로 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가 아닐까?
자신이 아무리 야생과 비슷하게 차원항을 꾸며 봤자 야생을 재현할 수는 없는데.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클라인은 재빨리 잡념을 떨쳐 내고 쥬스농장에게 질문했다.
“그럼, 추천하는 방법은 뭔가요?”
“제가 추천하는 방법은 클라인 씨가 인위적으로 잉간이에게 교육을 시켜 주는 방법이에요.”
“교육요?”
쥬스농장의 입에서 나온 두 번째 방법은 클라인의 예상에 없던 발언이었다.
잉간이에게 교육을 시키라니?
“뭐, 시스템을 설치하라니 그런 소리가 아니에요. 그건 너무 비싸잖아요? 그냥 기초적인 지식을 알려 주는 것으로도 충분해요.”
“그렇지만 아직 핸들링 훈련도 끝마치지 못했는데요…….”
클라인이 직접 잉간이에게 말을 걸고 교육을 시도했다간 잉간이는 자기 관측에 실패해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 거다.
그렇게 생각한 클라인은 주저하는 기색을 보였고, 쥬스농장은 클라인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리베리아산 켄토르가 있잖아요? 그것도 순혈의. 리베리아산 생물들은 하나같이 사육자 숭배 현상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 점을 잘 이용해야죠.”
“사육자 숭배를 이용하라니요?”
“켄토르에게 잉간이를 교육시키게 하는 겁니다. 순혈 켄토르라면 전투 교육을 받았을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다른 개체에게 전투 교육을 실시하는 것도 가능하겠죠. 뭐, 이래도 안 되면 교정기를 설치하는 수밖에 없죠.”
“아아~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사육자 숭배를 질병으로 여기는 분들이 많지만, 저는 개체의 특성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쥬스농장의 제안은 클라인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방법이었다.
사육자 숭배 현상을 역이용하다니?
지금까지 클라인은 사육자 숭배를 치료해야 할 질병으로 여겨 왔지, 쥬스농장의 말대로 개체의 특성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기본적인 전투 훈련만 끝내도 잉간이가 더 쉽게 차원항에 적응할 수 있을 겁니다. 원래 맹수들은 아무 곳에나 던져 놔도 잘 적응해요. 힘이 세니까요.”
“우와…… 정말 좋은 조언 감사합니다.”
꾸벅, 클라인은 카메라가 촬영하고 있다는 것도 잊고 쥬스농장에게 허리를 굽혀 감사 인사를 표했다.
“아뇨, 뭘 이런 걸 가지고요. 같은 차원항 생활을 하는 거 아닙니까? 원래 처음에는 모르는 게 당연해요.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배워 나가는 겁니다.”
쥬스농장은 방긋 사고 회로를 발광시키며 클라인의 감사 인사를 받았고, 이윽고 카메라가 멈추고 영상 촬영이 모두 끝났다.
“이거, 꽤 괜찮은 영상이 나올 거 같네요.”
가져온 차원항을 정리하며 쥬스농장은 만족스럽게 중얼거렸고, 클라인 또한 쥬스농장의 생각에 동의했다.
이번 기회로 유입된 시청자들을 잡는 건 오로지 자신의 몫이겠지.
하지만 그와 함께 한동안 난장판이 날 댓글 창을 생각하면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리퀴드사가 노력을 하긴 하겠지만 누군가가 정보 오염이라도 살포하면 뒷정리가 힘드니까.
“뭐, 악플 달리는 건 신경 쓰지 마세요. 정보 오염은…… 쥬튜브가 알아서 막을 문제죠. 뭐.”
“아하하…… 그렇죠?”
“쥬튜브 댓글은 저한테도 번식법 훈수를 넣는다니까요? 그냥 신경 안 쓰는 게 제일 마음 편합니다.”
“막 어떤 식으로요……?”
“자꾸만 촉수형 공장을 추천하는 거 있죠? 촉수형은 모체를 너무 상하게 해서 효율이 안 나온다고 해도 알아듣지를 못하더라고요. 진짜, 요즘 애들은 치유 마법이면 뭐든 다 되는 줄 안다니까요.”
“아하하, 오늘 진짜 감사해요. 쥬스농장 님.”
이렇게 끝까지 먼저 자신에게 조언을 해 주는 쥬스농장을 바라보며 클라인은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런 클라인의 모습을 바라보던 쥬스농장은 헛기침을 하며 클라인에게 마지막 조언을 건네려는 듯 보였다.
“저기, 클라인 씨. 오해하지 말고 들어요. 제가 클라인 씨가 진짜 마음에 들어서 하는 제안인데요.”
“네, 뭔데요?”
“혹시 지구산 인간을 저한테 잠깐 보내실 생각 없으신가요?”
“……네?”
그렇지만 쥬스농장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것은 클라인이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소리였다.
잉간이를 자신에게 보내라니, 도대체 무슨 의도인 걸까?
30화 베헤모스를 잡은 잉간이의 수상한 행동? 잉간이는 과연 뭘 하려는 걸까요?
“저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클라인은 쥬스농장의 제안을 이해할 수 없어서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잉간이를 쥬스농장에게 보내라니?
클라인이 조심스럽게 질문하자, 쥬스농장은 사고 회로를 가볍게 진동시키며 클라인의 질문에 대답했다.
“아, 혹시 방금 제가 한 제안이 지구산 인간을 팔아 달라고 한 걸로 들렸나요?”
“뭐……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그렇게 생각할 것 같은데요……?”
“그런 게 아니에요. 지구산 인간이 탐나는 건 사실이지만,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시장에 풀릴 생명체인데 굳이 제가 여기서 클라인 씨의 애완 인간을 탐낼 이유가 없죠.”
그렇다면 자신에게 그런 제안을 한 이유가 무엇일까?
클라인이 의문스러운 눈길을 쥬스농장에게 보내자, 쥬스농장은 조용히 클라인을 설득하려는 듯 속삭였다.
“클라인 씨도 아시겠지만, 클라인 씨는 차원항 제작에선 일류일지 몰라도, 생물 사육에선 일류가 아니에요. 인정하시죠?”
“네…… 그렇죠.”
그 사실은 오늘 쥬스농장의 조언을 들으면서 더욱 클라인이 뼈저리게 느꼈다.
그저 쥬튜브 영상과 발달기에 배웠던 얕은 지식만으로 생물 사육을 진행하던 자신과는 다르게, 숫자와 통계에 의한 사육을 진행하는 쥬스농장.
쥬스농장은 오늘 하루 종일 클라인의 차원항 이곳저곳을 지적했고, 그것은 지적받기 전에는 클라인은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지만, 무척이나 합당한 지적들이었다.
자신은 보기 좋은 차원항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소중한 자신의 애완 생물들을 괴롭힌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나쁜 의도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아직 클라인 씨는 초보자고, 부족한 건 채우면 되는 거니까요.”
쥬스농장은 너무나 믿음직스러운 목소리로 클라인에게 그렇게 말했다.
“제가 말하고 싶었던 건, 클라인 씨가 제대로 된 차원항을 마련할 때까지 저한테 지구산 인간을 맡겨 두지 않겠냐는 거였어요.”
“제대로 된 차원항을요……?”
“네. 클라인 씨를 보면 제가 처음으로 브리딩 사업에 도전하던 때가 떠오르거든요. 재료비는 제가 지원해 드릴 테니 한번 디자인과 기능을 모두 잡은 차원항을 만들어 보시지 않을래요?”
“어, 어…….”
쥬스농장의 제안은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클라인에게도, 잉간에게도, 쥬스농장에게도 말이다.
“혹시 메인 콘텐츠가 사라지는 게 걱정이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새로운 차원항을 만드는 과정을 영상으로 제작해 올려도 되고, 저도 최대한 채널 운영을 도와 드릴 테니까요.”
마지막으로 현실적인 채널 운영의 문제까지 자신이 해결해 주겠다며, 쥬스농장은 클라인을 꼬드겼다.
지금까지 클라인에게 주어진 정보 안에서는, 지구산 인간을 쥬스농장에게 잠시 보내는 게 가장 좋은 이야기겠지.
“저, 저는…….”
당연히 클라인이 합리적이고 이성적 사고를 하는 지성인인 이상, 클라인 또한 마음속에서 이미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쥬스농장이 예상하지 못한 하나의 변수가 있었다.
그것은 클라인이 태생적이든 후천적이든 자신의 몸에 익히고 만 우유부단함.
결정을 내일로 미루고, 문제에 맞서 싸우기보단 방 안에 틀어박혀 자신만의 세상을 구축하는 나쁜 버릇.
그 버릇이 누구나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독점욕과 망설임과 결합되어서.
“죄, 죄송해요. 잘 모르겠어요……. 나, 나중에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연락드리면 안 될까요?”
클라인은 또 한 번의 선택을 미래로 미뤘다.
클라인의 대답을 들은 쥬스농장의 사고 회로가 불쾌하다는 듯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것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쥬스농장은 곧바로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돌렸다.
“뭐, 바로 결정할 만한 일도 아니니까요. 너무 늦기 전에 빨리 결정하는 게 좋을 겁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충분히 그럴 수 있어요. 저라고 해도 갑자기 애완 생물을 남에게 넘기라고 하면 주저할걸요?”
“여, 역시 그렇죠?”
“아, 그래도 너무 늦지 않게 결정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그편이 클라인 씨에게도, 애완 인간에게도 더 행복할 테니까요.”
무언가 경고로도 들리는 조언을 남기고 쥬스농장은 클라인의 방 안을 나갔다.
클라인은 쥬스농장이 떠나간 방 안에서 계속해서 쥬스농장의 지적을 곱씹었다.
누군가는 그런 클라인의 모습을 보면 말할 것이다.
고작 원시 문명 단계의 차원 생물들인데, 뭘 그리 고민하냐고.
어차피 지적 생물로 인정받을 확률이 희박한데, 그렇게 고민할 필요가 있냐고.
물론, 당연히 클라인도 원시 문명 단계의 생명체여도 언젠간 지적 생물로 진화할 가능성이 있으니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건 아니다.
그랬다면 지금 당장 차원항의 생명체들을 전부 고향으로 돌려보냈을 테니까.
솔직히, 원시 문명의 생명체들은 너무 많다.
원시 문명을 넘어서서 발달기에 접어드는 생명체들이 적을 뿐이다.
거기에 클라인이 주로 사육하는 인간형 생명체들은.
지적 생명체와 접촉하는 게 종족 자체의 한계라는 게 오랜 연구의 결론이다.
그렇다면 클라인이 이렇게 고민하는 이유는 뭐 때문이었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이 방 안에서 클라인은 하나의 신과 같은 존재여야만 했으니까.
도망치고, 틀어박히고, 결정을 미룬 끝에 도착한 이곳에서마저 클라인이 필요 없어서는 안 됐으니까.
인간형 생물들은 과도하게 스트레스를 받으면 심장마비로 죽거나, 스스로 자해해서 죽는다.
특유의 털 하나 없는 몸이 귀엽다고는 하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불쾌한 골짜기를 자극시킨다.
시스템을 잘못 사용하면 사육자에게 중상을 입힐 수 있는 흉포함도 가지고 있다.
마력이 강한 개체들 외에는 손쉽게 죽기에 사육난이도도 높다.
이처럼 인간형 생명체는 사육하기엔 조금 꺼려지는 조건이 많다.
하지만, 클라인이 인간형 생명체들의 매력에 사로잡힌 가장 큰 이유가 있었다.
대부분의 인간형 생명체들은 사육 환경에서 꾸준한 사육자의 간섭이 없으면 사육이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다른 생명체들은 대부분 언제나 같은 환경에 있어도 적응해서 잘 살아가지만.
인간들은 달랐다.
늘 새로운 환경을 추구하고, 환경이 변하지 않으면 스스로 환경을 바꿔 나갔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도 환경이 바뀌지 않는다면, 죽어 버렸다.
맨 처음 그 사실을 쥬튜브와 여러 논문들을 통해 배웠을 때 클라인은 인간형 생물들에 깊게 매료됐다.
어째서인지는 모른다.
그저, 그저 끌렸을 뿐이다.
단지 인간형 생물의 사육에는 사육자의 간섭이 필요 불가결하다는 것이.
인간형 생물들이 행복하려면 클라인이 꼭 필요하다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일까?
그 때문에 클라인은 자신의 방 안에서 인간형 생물 사육에 몰두한 것이었고.
클라인은 자신의 방 안에서 언제까지나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인간형 생물들은 클라인을 필요로 하고, 클라인 또한 인간형 생물들을 필요로 했으니까.
그렇지만 클라인의 방 안에 쥬스농장이 들어와 현실을 들이밀었다.
클라인은 잉간이가 든 차원항을 바라보며 조용히 생각했다.
내가 과연 인간들이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존재일까?
어쩌면 나는 필요 없는 불청객이었던 게 아닐까?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고.
클라인은 가만히 잉간이가 꾸물꾸물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며 고민에 빠졌다.
* * *
이 며칠 사이, 최선을 다해 고기를 운반해 봤지만, 거대한 베헤모스의 몸에 구멍 몇 개를 내는 정도로 끝났다.
뭐, 이 정도만 해도 몇 주 정도는 충분히 식사할 수 있지 않을까?
저 거대한 고기가 썩기 시작했을 때의 후폭풍이 두려워지긴 하지만, 그 전에 다른 생물들이 전부 먹어 치워 주길 기대해 보자.
마지막으로 베헤모스의 사체에 다녀왔을 때, 푸른 점액이 폴짝거리며 고기 위에서 뛰어다니고 있었으니 말이야.
결국 실을 찾겠다는 목적은 이루지 못하고 고기만 잔뜩 얻었다.
뭔가 운수가 좋은 것 같으면서도,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없다.
블랑카는 슬슬 전력을 다해 베헤모스를 사냥했던 반동이 오는 것인지 앓는 소리를 내며 내가 깔아 둔 짚에 드러누웠다.
“으갸아…… 죽겠다…….”
짚에 드러누운 블랑카는 힐끔 나를 쳐다보며 앓는 소리를 낸다.
나는 적당히 오늘 먹을 분량의 고기를 잘라 내 모닥불 위에 올리며 말했다.
“나 바쁘다.”
“히잉…….”
갑옷을 입고 있었을 때는 이상한 콘셉트를 잡고 말하더니, 갑옷을 벗으면 그냥 자기 생각을 그대로 드러낸다.
거기에 더해 요 며칠 사이 계속 내게 마사지를 받더니 이젠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자기가 먼저 마사지를 당당히 요구해 온다.
아마 베헤모스를 잡고 이 정도는 요구할 만하다는 생각이 자신 안에서 든 걸까?
뭐가 더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갑옷을 벗은 블랑카의 모습이 귀찮다는 건 알겠다.
블랑카는 계속해서 붓기 시작한 자신의 다리를 어필했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블랑카에게 말했다.
“밥 먹고 나면 해 줄게.”
“와아!”
내 허가를 받자 번쩍, 만세를 부르며 기뻐하는 블랑카.
그냥 말미잘을 이용하면 되는데 왜 굳이 나한테 마사지를 받으려는지 모르겠네.
물론 말미잘을 이용하기 싫다는 저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가긴 한다만.
대충 고기를 구워 식사를 끝마치자, 블랑카가 눈을 반짝거리며 털썩 바닥에 주저앉는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블랑카의 다리 마사지를 시작했다.
오일이나 뜨거운 물을 뿌리는 것도 아니고 그냥 맨손으로 하는 마사지인데, 이게 뭐가 좋을까?
계속해서 마사지를 하다 보니 이제 슬슬 요령을 잡은 것 같다.
“으읏…… 그래, 거기를 좀 더…….”
그렇게 블랑카의 다리를 마사지하던 중, 기분 좋은 듯 흔들리는 블랑카의 꼬리에 눈길이 갔다.
그러고 보니 말의 꼬리는 말총이라고 불리며 전략자원으로 이용됐다고 하지?
블랑카의 꼬리털을 조금 잘라서 활이나 가죽끈으로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블랑카의 다리를 주무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고, 조심스럽게 블랑카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블랑카?”
“흐응…… 으?”
맨 처음 나한테 마사지를 받았을 때와는 다르게 전력으로 마사지를 즐기는 블랑카.
나는 그런 블랑카의 모습에 어이없어하면서도 슬쩍 꼬리털 이야기를 꺼내 봤다.
“블랑카, 네 꼬리털 말인데.”
“꼬리털이 왜애……?”
“아니, 그냥 활을 만들 때 실 대용으로 네 꼬리털을 사용하면 되지 않을까, 해서.”
“응……? 뭔 소리야……?”
마사지를 받는다고 뇌 기능이 정지하고 있는 걸까?
내 말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한 블랑카를 위해 나는 간단히 내 요구를 설명했다.
“그러니까, 네 꼬리털로 활을 만들고 싶다고.”
“흐, 흐엑……?!”
바짝.
갑자기 블랑카가 털을 곤두세우더니, 내 손아귀에서 몸을 빼내며 새빨개진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뭐, 뭐라고?”
“꼬리털로 활을 만들고 싶다고 했는데. 왜?”
“어, 아? 어……! 아! 그래, 꼬리털? 꼬리털로 활을 만들고 싶다는 거지?”
“어, 그런데?”
“그치. 음. 다른 의미는 없는 거지. 음, 꼬리털, 꼬리털이라…….”
블랑카는 손부채질을 하며 슬쩍 한참 요동치는 자신의 꼬리털을 바라봤고.
애매하다는 듯 슬쩍 웃으며 내게 대답을 돌려줬다.
“그게, 꼬리털로 활을 만드는 건 좀 그렇다고 해야 할까…….”
“역시 좀 그러냐?”
“응. 좀 그래……. 아니, 뭐 나쁘지 않은 것 같기는 한데. 좀 그래. 좀 더 시간이 지나면 모를까…….”
음, 지금 내가 블랑카에게 한 제안을 인간 버전으로 바꿔서 생각해 보자.
네 머리카락으로 활을 만들고 싶다는 소리를 갑자기 들은 셈인 걸까?
음, 이건 확실히 나라도 좀 식겁할 것 같다.
하지만 그래도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실로 사용할 만한 물건이 보이질 않는데, 어떻게 안 될까?
“너도 활이 있으면 좀 더 사냥하기 쉬워질 거라며? 어떻게 좀 안 될까?”
“그렇긴 한데, 좀 부끄럽다고 해야 할까? 그건 마지막 수단으로 남겨 두고 싶다고 해야 할까나……?”
“내 생각엔 지금이 마지막 수단을 쓸 때인 거 같은데.”
요 며칠간 고기를 운반하는 것 말고도 만능 사전을 동원해 주위의 식물들과 동물들을 전부 조사해 봤지만, 실을 만들 수 있을 만한 생명체는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섬유를 만드는 재료로 쓰이는 생명체가 있었다고 해도, 지금의 내 문명 수준에서 만들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지금껏 모은 가죽으로 실을 만들려고 해도, 그 정도로 가죽을 가공할 기술은 나에게도, 블랑카에게도 없다.
“저기, 그냥 음. 그냥 실을 만드는 걸 포기하는 건…….”
“절대 안 돼.”
지금 내가 실을 원하는 건, 물통을 만들어서 장거리 여행을 하고 싶어 하는 것 외에도, 맨 처음 입고 있던 옷이 너덜너덜해지기 시작했다는 데 있었다.
슬슬 수선을 하지 않으면 위험할 정도까지 구멍이 뚫리기 시작했다.
빨리 실을 만들어서 옷을 수선하고 싶을 따름이다.
내가 슬며시 어디선가 돌칼을 꺼내 와 블랑카의 꼬리로 향하자, 블랑카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아직, 아직 마지막 방법이 남아 있잖아!”
“마지막 방법?”
“신님. 신님께 부탁해 보면 되잖아! 너는 신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까, 그 정도 되는 부탁은 들어주지 않을까……?”
“알다시피, 여기에 신은 없고 사이코패스만 있을 뿐이야.”
“만약 정말 신이 없다고 해도 그 사이코패스란 것에게 부탁을 해 볼 수 있잖아!”
“흠…….”
확실히, 지금까진 그런 생각을 해 보지 못했다.
지금까지는 사이코패스가 먼저 움직이는 걸 기다리기만 했지, 이쪽이 먼저 거래를 요청하는 건 생각도 못 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어떻게 해야 사이코패스에게 부탁을 하지?
지금까지 내가 신나게 소리쳐도 사이코패스는 단 한 번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는데?
“그야 제대로 형식을 지켜서 부탁을 해야 신님도 들어줄 마음이 들지!”
“형식을 지켜서 부탁을 해?”
“기도, 기도를 해야 신님도 우리가 뭘 원하는지 알 거 아냐?”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블랑카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게 리베리아께 기도를 하는 법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대충 돌로 적당한 제단을 만들어서 원하는 걸 기도하면 된다고?
그런 것을 한다고 사이코패스가 내게 관심을 가질까?
아니, 블랑카의 말은 의외로 일리가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건 제단을 만든다는 행동.
평소에 하지 않는 비생산적인 행동을 한다면 사이코패스도 흥미를 가지지 않을까?
제단을 만들면서 옆에 내가 원하는 걸 그림으로 그려 두면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더라도 흥미를 가질 수밖에 없겠지.
무척이나 말도 안 되는 블랑카의 제안이었지만, 어차피 지금 이 시간대엔 딱히 할 것도 없었기에 나는 블랑카의 제안을 수락했다.
“좋아, 제단은 대충 돌로 만들면 되지?”
“응, 거기에 공물도 필요해.”
공물은 대충 육포 조각으로 때우면 되겠지.
적당히 블랑카의 지시에 따라 만든 간이 제단 근처의 바닥에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린다.
“블랑카. 누가 봐도 실과 바늘이지?”
“실과…… 바늘? 아무리 봐도 울타리? 그런 거로만 보이는데?”
“그럼 네가 그려 봐.”
“자, 어때? 너보다는 나은 거 같은데.”
“……방망이야?”
“바늘이잖아, 바늘!”
블랑카와 나는 여러 번 시행착오를 겪으며 계속해서 바닥에 그림을 그렸고, 결국 두 사람 모두가 보기에 실과 바늘로 보이는 그림을 그리는 데 성공했다.
“그럼 이제 무릎을 꿇고, 경건하게 리베리아 님께 기도를 드리는 거야.”
나는 적당히 블랑카가 기도를 하는 모습을 곁눈질로 흘겨보며 자세를 비슷하게 잡는다.
진짜로 기도를 하지는 않고, 속으로 사이코패스를 욕하며 실을 달라고 중얼거린다.
어차피 기도는 블랑카가 다 할 테니까.
그렇지만 블랑카는 그런 내 모습이 아니꼬웠는지 고개를 저으며 내게 큰 소리로 기도를 할 것을 시켰다.
“그렇게 중얼거리면 신님이 알아듣겠어?”
“실 좀 주세요……?”
“더 크게!”
“실을 내놔!!”
아무도 듣고 있지 않다는 걸 아는데, 이렇게 외치는 건 뭔가 좀 부끄러운데.
그렇게 생각하며 적당히 블랑카의 장단에 어울려 주던 그때.
“어?”
회색빛의 안개가 스멀거리며 제단 위에 피어나더니, 육포가 사라지고 그 대신에 티셔츠가 팔랑팔랑 떨어졌다.
* * *
클라인은 계속해서 자신의 행동을 되짚어 봤지만,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았다.
잉간이를 다른 사람에게 주고 싶지 않다는 독점욕 때문인 걸까?
아니면, 서서히 냉정해지기 시작한 머리로 쥬스농장의 논리를 분석하며 어딘가 이상함을 깨닫기 시작해서일까?
어찌 됐든, 클라인은 어떻게 하는 게 자신과 잉간이에게 가장 좋은 길인지 결론 내리지 못했다.
단지 멍하니 잉간이가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볼 뿐.
그렇게 클라인이 잉간이의 모습을 지켜보던 와중, 잉간이가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돌들을 모아서 작은 구조물을 만들더니, 켄토르와 함께 무릎을 꿇고 뭐라 소리 지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저건, 몇 번인가 본 적 있다.
사육자 숭배 현상이 일어난 차원항에서 저런 짓을 하던데.
문득 클라인은 리베리아산 켄토르들은 야생 개체여도 사육자 숭배 현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건 아마 함께 생활하는 켄토르가 지시한 것이겠지.
클라인은 천천히 잉간이가 만든 구조물을 살펴봤고, 곧 땅바닥에 조잡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실하고…… 바늘? 인가?”
실과 바늘.
아마도 지금 잉간이가 제단을 만든 건 자신에게 실과 바늘을 바라는 게 아닐까?
그래, 너희는 역시 나를 필요로 하는구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나보다도 더 저 아이들을 잘 보살펴 줄까?
그건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저 아이들은 자신을 필요로 하고 있었고, 그 사실이 클라인의 자신감을 북돋아 줬다.
잉간이가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는 모습은 보기 싫다.
그러니까 좀 더 열심히 공부해서 잉간이를 행복하게 해 주자.
예전이었다면 바로 실과 바늘만을 투입했겠지만 쥬스농장에게 현상에 급급하지 말고 원인을 파악하라는 조언을 들은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클라인은 그 조언대로 잉간이가 어째서 자신에게 실과 바늘을 요구했는지 고민했고.
그 결과 클라인이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의복에 구멍이 난 걸 수선하려고 그러나?”
음, 의복이 많이 더러워지긴 했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3D 프린터로 인쇄한 의복을 차원항 안으로 투입했다.
31화 *공지* 앞으로 잉간이 차원항 업로드 주기가 길어집니다.
실과 바늘을 옷을 수선해 달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걸까?
사이코패스가 내게 육포의 대가로 선물한 것은 내가 입고 있던 티셔츠의 깨끗한 버전이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트레이닝복, 심지어 입고 있던 팬티까지 팔랑팔랑 떨어진다.
“어…… 음.”
뭐라 할 말이 나오질 않네.
블랑카와 내가 서로 입을 다물고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또다시 하늘에서 옷이 사락사락 떨어져 내렸다.
블랑카가 지금도 입고 있는 조끼와 원피스 형태의 속옷이다.
이젠 입에서 신음조차 나오지 않고, 블랑카와 나는 아무 말 없이 각자의 옷을 챙겼다.
블랑카는 어떻게든 사이코패스를 커버 쳐 보려 하지만, 그런 게 가능할 리 없고.
“리, 리베리아 님께서 실수하신 모양이야!”
“야, 블랑카.”
“으, 응?”
“뽑을게.”
“흐걋?”
블랑카는 최대한 발버둥 치며 꼬리털을 빼앗기는 걸 거부해 보지만, 꼬리털 하나 자르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 리 없고.
결국 블랑카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내가 꼬리털을 가지고 희희낙락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으으…… 그래서 좋아?”
“어. 너무 좋아. 딱 내가 원했던 게 이거야.”
너무 굵지도 않고, 너무 가늘지도 않으며 쉽게 끊어지지도 않는다.
왜 조상님들이 그렇게 말총을 전략물자로 통제해 왔는지 알 것 같다.
내가 그렇게 희희낙락하는 모습을 지켜본 블랑카는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렇게 물통을 만드는 데 집착하는 이유가 도대체 뭐야?”
“말했었잖아. 이 세상의 끝에 가고 싶다고.”
내가 그렇게 말하자 블랑카는 애매한 웃음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그거,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었어?”
“아니,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진짜로 세상의 끝에 가고 싶다는 거였는데?”
“아하하…… 그래?”
“아니, 사람을 무슨 술집에서 허풍을 늘어놓는 술 취한 아저씨를 보는 눈으로 보고 있어?”
물론 세상의 끝에 가고 싶다는 말이 허풍선이들이나 할 말이긴 한데.
블랑카는 어째 아무리 봐도 내 말을 믿지 않는 눈치다.
“뭐, 여긴 신들의 전장이니까 세계의 끝이 있을지 몰라도, 쉽게 갈 수 있을 거 같지는 않은데?”
“쉽게 갈 수 있어. 하지만 어려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내일 산에 올라가면 알게 될 거야.”
나는 블랑카에게 내일의 일정을 알리고, 적당히 가죽들을 한데 모아서 물통을 어떻게 만들지 생각해 본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최소한 기본적인 무두질을 해야 가죽 물통을 만들 수 있는 게 아닐까?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가죽들을 잘 살펴보면 미세하게 고기 살점이나 지방들이 달라붙어 있다.
이대로 물통을 만든다면 물통이 아니라 세균 배양 단지가 될 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만능 사전을 집어 들자 블랑카가 놀랍다는 듯 내게 질문했다.
“산? 내일 등산하는 거야?”
“그리 경사가 가파르진 않으니 괜찮을걸?”
“산은 좀 그런데…….”
“켄타우로스는 산이 별론가 봐?”
“나는 사티로스가 아니니까. 켄토르는 평원의 사랑을 받는 종족이지, 산의 사랑을 받는 종족이 아냐.”
“뭐, 이족 보행으로 걸을 수 있다면 한 30분이면 금방 정상이야. 안전한 통로도 있고.”
나는 그렇게 블랑카를 안심시키며 만능 사전을 계속 들여다봤다.
음, 그러니까 염장? 염장이든 뭐든 잘 부패하지 않게끔 방부 처리를 한 다음에 석회 물에 담가서 모공을 연다……?
모공은 도대체 왜 여는 거야?
수많은 무두질 방법이 만능 사전엔 쓰여 있었지만, 대부분 마력이 필요하거나 이상한 약품이 필요한 방법이었다.
젠장, 이 정보의 바다에서 내가 원하는 걸 찾아내려면 한참 시간이 걸리겠네.
내가 그렇게 만능 사전을 들여다보는 동안, 블랑카는 내가 만든 침대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신께 기도하고 있었다.
블랑카의 신이 블랑카에게 응답하려면, 나와 마찬가지로 꽤 오랜 시간이 걸릴 듯 보였다.
* * *
“언제나 영상 앞부분에서 이야기하는 거지만, 발달기에 접어든 문명은 저처럼 브리딩 자격증이 없으면 사육이 불가능합니다. 그럼, 영상 시작하겠습니다!”
언제나 쥬스농장이 자신의 영상 앞부분에서 하는 멘트가 화면 너머에서 들려오고, 클라인은 멍하니 쥬스농장의 영상을 잠깐 일시 정지했다.
방금 영상으로 클라인은 쥬스농장의 영상을 전부 한 번씩 돌려 봤다.
“흐아…….”
쥬스농장의 영상을 다시 돌려 보며, 클라인은 쥬스농장에 대한 존경심이 더 커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수많은 차원 생물들을 인공 환경에서 번식시켰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데, 품종 개량까지 혼자서 해낸다.
그야말로 브리딩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라고 불러도 될 수준이다.
쥬스농장의 사육법은 숫자와 통계에 의한 논리적인 사육법.
어떤 환경에 있을 때 차원 생물들이 도파민을 많이 만들어 내는지 통계를 내리고, 그 통계에 맞춰서 차원항의 형태를 조절한다.
그 때문일까?
쥬스농장이 사육하는 생물들은 아무리 원래 살던 환경과 다른 사육항에 있어도, 언제나 번식에 성공한다.
불의 정령을 바다 차원항에서 번식시킨 사례도 있을 정도니까.
그런 쥬스농장이 클라인에게 내린 평은 의욕은 좋으나 아직 미숙하다는 평이었다.
인간들이 살아가는 원래 환경을 재현하려는 시도는 좋으나, 어째서 생물들이 그런 환경에서 살아가는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쥬스농장의 지적.
그 말대로 클라인이 차원항을 꾸미는 건 쥬튜브를 통해 겉핥기로 배운 지식이 전부였다.
그래, 지금 자신은 아직 잉간이를 사육할 자격이 없다.
그런 클라인의 결론을 지지하듯 그녀의 쥬튜브에 달린 수많은 악플에 가까운 댓글들.
전부 쥬스농장과의 합방 이후 달리기 시작한 댓글들이다.
글쓴이도, 종족도, 댓글의 논지도 모두 다르지만, 딱 하나.
전부 같은 공통점이 있다.
[아직 인간형 생물 단독 사육은 좀 무리인 듯.]
[쥬스농장 님 말대로 좀 더 공부하셔야 할 듯하네요. ^^]
[공부도 제대로 안 하고 쥬튜브가 돈 된다니 부랴부랴 영상 찍기 시작한 티 나죠? 원시 문명이라고 다 같은 원시 문명인 줄 아나 ㅋㅋㅋ]
아직 클라인은 잉간이를 사육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는 것이다.
한참을 쥬스농장의 조언을 생각하며 몸부림치던 클라인은 조용히 잉간이의 차원항을 바라봤다.
자신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지만, 잉간이와 헤어지기는 싫다.
시스템을 바라보며 무언가의 정보를 힘껏 찾는 잉간이를 응시하던 클라인은 각오를 다졌고, 조심스럽게 이메일을 보냈다.
[클라인]
[저기, 브리더 자격증 공부를 좀 도와주실 수 있나요?]
언제나처럼, 대답은 금방 돌아왔다.
[리퀴드]
[그럼요, 당연하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준비하면 된다.
* * *
다음 날 아침.
동굴 안에 틀어박혀 있던 에포나는 어제 보여 줬던 모습과는 상반되는 모습으로 활기차게 동굴 밖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왕! 왕!”
어제 동굴에 틀어박혀 있어서 쌓인 에너지를 모조리 풀어놓듯이 에포나는 잔뜩 신이 난 모습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나는 피식 웃으며 어젯밤 만능 사전을 보며 적당히 만들어 본 활을 이리저리 만져 본다.
때마침 아침을 먹고 호수를 다녀온 블랑카가 그런 내 모습을 보더니 흥미를 가지며 내게 다가왔다.
나는 그런 블랑카에게 활을 건네주며 자랑했다.
“꽤 괜찮지?”
“직접 만든 거야?”
“내가 아니면 누가 만들어?”
“흐음…… 이 정도면…….”
블랑카는 활을 이리저리 만지며 강도를 시험해 보더니, 마력을 활에 불어 넣는다.
그러자 조잡한 활은 소설에 나오는 명궁에 뒤지지 않는 강도로 뒤바뀐다.
“평범한 활에 비해서 마력이 훨씬 더 잘 통하는데? 이 정도면 충분히 쓸 만해.”
“어…… 화살도 만들어야 하나?”
“화살? 아니, 화살은 필요 없어.”
블랑카가 마력을 부여한 활에 화살을 집어넣지도 않고 활시위를 당기자 마력으로 이루어진 화살이 만들어지고.
그대로 근처의 나무에 박힌 후 사라져 버린다.
그 말도 안 되는 모습에 나는 헛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참 마력이 당긴다.
왜 나만 마력 없어…….
내가 그렇게 시무룩해져 있는 동안, 블랑카는 바위벽에 세워져 있던 파워드 슈트의 바지 부분만을 착용한다.
잠깐 파워드 슈트가 빛나나 싶더니 순식간에 블랑카의 다리는 네발에서 두 발로 줄어들어 있었다.
“그거, 슈트의 기능인 거야? 아니면…….”
“마력을 이용한 신체 변형의 일종이야. 슈트는 그걸 보조해 줄 뿐이고.”
“그것도 마력이야? 뭐든지 죄다 마력이네.”
“네 세계에서도 뭐든지 전기를 이용하잖아? 우리 세계는 전기 대신 마력이라고 생각해.”
“그나저나 마력으로 몸 형태를 바꾸는 거야? 아니면 뒷부분을 잘라 내는 거야?”
“응? 당연히 몸 형태를 바꾸는 거지.”
“그래? 맨다리가 어떤지 궁금하네.”
역관절 형태로 되어 있을까?
아니면 사람의 다리 형태?
그것도 아니라면 말 다리만 남아 있는 형태일까?
지난번에 이족 보행 형태였을 때에도 슈트를 입고 있어서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는데.
내가 멍하니 슈트 안의 블랑카의 다리 모습을 상상해 보자, 블랑카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외쳤다.
“도, 도대체 뭘 물어보는 거야?!”
“응? 다리 형태가 어떤지 물어보는 거…….”
잘 생각해 보니까, 내가 한 말을 인간 버전으로 치환해 보면 무슨 변태가 할 법한 소리가 아닐까?
그 사실을 깨달은 나는 입을 중간에 다물었고.
블랑카와 나 사이에 어색한 공기가 감돌던 그 순간.
“왕!”
에포나가 펄쩍 뛰어올라 블랑카의 등에 올라탔다.
“흐힉?!”
아니, 너 일단은 강아지 아니었어?
무슨 고양이 같은 짓을 하네.
에포나는 블랑카의 등을 타고 올라 그대로 블랑카의 황금빛 머리카락 위에 올라탔고.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이겼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또다시 한 번 짖었다.
“왕!”
“으, 어. 잉간? 이거 어떻게…….”
“에포나, 이리 와.”
당황한 블랑카의 목소리가 퍽 재미졌지만, 겁먹은 모습이 불쌍하니 이만 구해 줄까?
그렇게 생각하며 내가 에포나의 이름을 부르자 에포나는 나를 잠깐 바라보더니 홱 뛰어올라 살포시 내 머리 위에 자리 잡았다.
“그럼, 슬슬 가 볼까?”
블랑카와 함께 전에 발걸음을 옮겼던 루트대로 등산을 시작한다.
“수, 숲의 요정님들이 여기에?”
“아, 저거 버섯이더라. 그것도 소금이 나오는.”
“버섯?”
등산을 하는 길에 지나친 뚜벅버섯 군락지는 다시 복구됐는지 나와 블랑카를 보고 놀란 버섯들이 서둘러 자리를 벗어나는 모습이 보인다.
맨 처음에는 무척이나 기괴하다고 생각한 버섯들의 모습도 계속 보다 보니 저렇게 도망치는 모습이 이젠 조금 귀여운 것 같기도 하다.
애초에 나한테 위험한 게 아니라는 걸 안 이상 무서울 게 없지.
무두질을 할 때 또 소금이 왕창 필요할 것 같은데, 이번에 돌아오면서 몇 마리 좀 따 가자.
이어서 정상으로 통하는 동굴 근처에 도착하자, 블랑카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무릎을 붙잡았다.
“더는 안 되겠어?”
“가능은. 한데. 조금만 쉬자…….”
음, 이 정도 경사는 괜찮을 줄 알았는데 이 정도도 이족 보행으로는 무리였던 것 같다.
어쩔 수 없지.
오늘 블랑카를 등산시킨 건, 단순히 내가 블랑카와 같은 풍경을 보며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일 뿐이니까.
그런 내 억지에 어울려 줬으니 이 정도는 해 줘야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슬며시 블랑카의 다리를 붙잡고 등에 업었다.
“어, 어?”
“으엑. 생각보다 무거워.”
“무겁다니!”
“갑옷. 갑옷이 무겁다고.”
도대체 마력이 뭐길래 그 거대한 하반신의 무게를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게 만든 걸까?
스피리추얼한 무언가인 걸까?
어찌 됐건 나는 블랑카를 데리고 천천히 동굴을 지나 산 정상으로 올라왔다.
“블랑카. 무슨 일이 있어도 왼쪽은 보면 안 돼. 알겠지?”
“왼쪽? 어째서……?”
“만약 실수로 왼쪽을 봤다면, 절대로 고개를 들지 마. 뭔가 있는 것 같아도 무시하고 다른 곳을 봐야 해. 알겠지?”
“그, 그래…….”
혹시나 블랑카가 지난번의 나처럼 거대한 동상의 얼굴을 볼까 단단히 주의를 주고 블랑카를 등에서 내린다.
블랑카는 이족 보행이 답답했는지 서둘러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에포나 또한 내 머리 위에서 내려와 동상이 있는 곳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세상의 끝에 가고 싶다는 네 말이 뭔지 좀 알 것 같네.”
들판 너머에 펼쳐진 회색의 안개를 바라보며 블랑카는 살포시 그런 감상을 내뱉는다.
“블랑카. 네 다리면 여기서 저 끝까지 며칠이면 갈 수 있어?”
“나 혼자서라면…… 4일? 아니면 5일? 넉넉하게 잡아서 5일 정도 걸릴 것 같네.”
하, 만약 나 혼자 간다면 한 달, 어쩌면 그 이상이 걸릴지 모르는 거리인데.
또 한 번 나 자신의 무력감을 느끼며 나는 조용히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보통, 대부분의 이야기에선 세상의 끝에 도달하면 다른 세계로 이어지잖아? 저승 세계든, 이면 세계든.”
“뭐. 그렇지. 동화 속 이야기지만.”
“그러니까 왠지 여기서도 그럴 것 같은 거야. 저 안개 속으로 들어가면 다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슬며시 그렇게 한탄하자, 블랑카는 내게 조심스럽게 현실을 들이밀었다.
“저기, 내 생각엔 저 끝에 도착한다고 해도…….”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지 않다고? 나도 알아.”
하지만 어떻게 하는가.
이미 그렇게 생각해 버렸는데.
그렇게 생각해야만 무언가를 이어 나갈 활력이 도는데.
다시는 따스한 방 안으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힘이 쭉 빠지는데 어떻게 하는가.
“눈앞에 저렇게 목표가 보이는데. 세상의 끝이 보이는데 포기할 수가 없잖아. 사실, 맨 처음 여기 올라왔을 때에는 다 포기하려고 했어. 그런데 저렇게 끝이 보이니까, 포기할 수가 없는 거야. 적어도 저기에 뭐가 있는지는 알아야 포기할 수 있을 거 같아.”
트루먼 쇼처럼 모든 걸 끝낼 비상구가 없더라도.
그래도 그 사실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
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좋다.
누군가가 가서, 확인해 주기만 하면 좋다.
내 생각이 맞았는지, 틀렸는지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슬며시 블랑카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려 했다.
“블랑카. 그러니까…….”
“……마력을 최대한 운용하면 사람을 태우고도 평소랑 비슷하게 이동할 수 있어.”
“어?”
“그러니까, 한껏 힘내면 너를 태우고 5일 만에 세상의 끝까지 갈 수 있다고.”
나는 블랑카에게 혼자서 저 끝까지 다녀와 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지만, 블랑카는 나 하나쯤을 데리고 저 끝까지 가는 건 쉽다고 선언했다.
“네가 가 보고 싶다며? 그럼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안 되지.”
“……고마워.”
“그 대신 마사지나 열심히 해 줘. 그…… 촉수 덩어리는 사용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래, 그럴게.”
나는 그런 블랑카의 배려에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사그라지던 의지를 다시 한번 다졌다.
32화 잉간이에게 전투 훈련을 시켜 봤어요! 잉간이의 싸움 실력은 과연?
블랑카와 함께 등산한 지 며칠이 지나고, 나는 무두질의 마지막 단계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리우테스 행성이란 곳에서 사용하던 방법이라는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잿물에 며칠간 가죽을 담갔다가 털을 밀어내라고 한다.
블랑카가 나를 데리고 세계의 끝까지 가 주겠다고 했지만, 역시 끝까지 가려면 물통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 때문에 등산을 하고도 나와 블랑카는 할 일 없이 무두질을 끝마칠 때까지 빈둥거릴 수밖에 없었고.
나와 블랑카는 그 남는 시간을 주위 지형의 탐사에 써먹기로 했다.
바위산에 올라서서 대략적인 지형은 알게 되었지만, 숲속이 어떤지는 그냥 보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다.
그렇게 숲속의 탐사가 시작됐고, 블랑카와 나는 이 근방에서 최상위 포식자라고 할 수 있는 게 우리 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식인 토끼와 놀, 간간이 보이는 무오와 푸른 점액.
여기까지는 기존에 나와 블랑카가 파악한 숲의 구성원들이었다.
하지만, 이 숲에는 내 생각보다도 더 많은 생물들이 살고 있던 모양이었다.
“으엑, 저게 다 뭐야?”
“언데드들이 사냥하는 모습 같네.”
베헤모스가 죽은 평원으로 나가자, 나는 숲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식인 토끼들과 놀들이 조심스럽게 구석에서 베헤모스의 사체를 파먹고.
뚜벅버섯들이 살점 속에 몸을 파묻는다.
그리고, 강철의 껍질로 둘러싸인 뱀이 베헤모스의 살에 구멍을 내며 꽤 끔찍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으엑…….”
나는 몸서리치며 저 끔찍한 광경을 눈에 담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블랑카는 익숙한 모습으로 괴물들의 행동을 살피고 있었다.
“징그럽지도 않아?”
“언데드들과 싸우게 되면 이 정도 풍경은 일상이어서.”
“엑…….”
“전장에서 쓰러진 드래곤이 언데드가 되었을 때를 생각하면, 그 어떤 상황도 두렵지도 않지.”
진짜 리베리아는 어떤 지옥인 거야?
블랑카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내 안의 리베리아의 이미지가 시시각각 악화된다.
“잘 지켜봐라. 저 뱀들이 무슨 습성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야 나중에 사냥하지.”
“저것도 사냥할 생각이야?”
“당연하지. 뱀 고기는 꽤 맛있다고? 특히 저렇게 커다란 녀석들은 말이지.”
“내가 보기엔 그냥 돌덩이처럼 보이는데.”
한숨을 내쉬며 상대적으로 귀여운 놀과 토끼들의 식사 장면으로 잠시 멘탈을 치유하고.
다시 한번 돌뱀들의 식사 장면을 감상해 본다.
으, 진짜 뭔 기생충이 들끓는 것 같아서 보기 싫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인상을 찌푸리던 순간, 상당히 신묘한 풍경이 베헤모스의 사체에서 펼쳐졌다.
돌뱀들이 들끓던 베헤모스의 사체의 일부가, 마치 돌뱀들의 피부처럼 딱딱한 강철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뭔데, 저거?
“허, 땅의 마력을 다루는 모양이군.”
“마법? 마법이라고?”
“마법같이 거창한 건 아냐. 단순히 마력을 한군데에 끌어모으는 재롱일 뿐이야.”
“그건 또 무슨…….”
내 입장에선 충분히 마법 같은 짓인데, 블랑카에게는 단순한 재롱인가 보다.
“일종의 정령과 비슷한 녀석이야. 주위의 마력을 자신의 마력으로 물들이는 거지.”
블랑카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베헤모스의 사체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야, 뭐 하려고?”
“당연히 사냥 아닌가? 처음 보는 짐승을 발견했으니 리베리아께 바쳐야지.”
“뭐?”
그건 도대체 무슨 논리야?
뭐, 저 베헤모스를 쓰러트린 블랑카니까 아무리 괴물들이 많다고 해도 당할 것 같진 않네.
그렇게 생각하며 블랑카의 싸움을 지켜보려 한 순간.
홱.
“으엑?!”
“잉간, 너는 좀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어!”
“잠깐?!”
블랑카가 홱 내 옷을 잡아채 나를 자신의 등 위에 태우고 베헤모스를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떨어질 것 같으면, 허리를 잡아!”
“흐에엑?”
그 말대로 나는 꽉 블랑카의 허리를 껴안고, 서둘러 블랑카에게 불평을 늘어놓는다.
“가, 갑자기 무슨 짓이야!”
“너는 너무 쫄아 있는 게 문제야. 네가 이 신들의 전장에서 어떤 위치인지 알아야 해!”
블랑카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나를 등에 태우고 돌진하기 시작했고, 나는 눈을 꽉 찡그리며 잔뜩 블랑카를 껴안은 손에 힘을 줬다.
“흡!”
블랑카의 입에서 기합음이 들려오고, 무언가 단단히 굳어 있던 것이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어서 들려오는 블랑카의 듬직한 목소리.
“그만 눈 떠도 돼.”
조심스럽게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니, 블랑카의 창끝에 머리가 꿰뚫린 돌뱀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평화롭게 사체를 뜯어 먹던 생물들은 블랑카의 돌격에 놀란 것인지, 전부 어디론가 흩어지고 있었다.
나를 위협할 만한 건, 단 하나도 없었다.
“너는 신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신님이 이 전장에 너를 해칠 만한 걸 넣어 놨을 것 같아?”
“신이 아니라, 사이코패스라니까? 내가 지금까지 몇 번을 죽을 뻔했는데!”
거대 점액이 출현했을 때도 그렇고, 벌판에 버려졌을 때도 자칫하면 죽었을지도 모른다.
동상의 얼굴을 봤을 때의 일은…… 그건 좀 애매하니까 제외하고.
그렇지만 블랑카는 나와는 생각이 다른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죽을 뻔했다는 것도, 전부 신님이 도와줬잖아? 그 두 개를 제외하면 네가 위험에 빠진 적은 없잖아. 아냐?”
“그렇긴 한데…….”
“신님은 너를 미워하는 게 아니라, 아끼고 있다고.”
마치 포교를 하듯 블랑카는 나에게 그리 말한다.
하지만 나는 대충 고개를 저으며 블랑카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그냥 오래 가지고 놀고 싶은 거겠지. 그 사이코패스가 나를 아끼다니?”
그렇게 단언하며 블랑카의 말을 부정했지만, 머릿속에 블랑카의 주장이 강하게 자리 잡는다.
어쩌면 정말로, 사이코패스에게는 나를 해치려는 의도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겁을 먹고 도망치는 괴물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블랑카는 무릎 꿇고 기도를 드린 뒤 내게 말했다.
“어쨌건 너는 너무 마수들을 만나면 필요 이상으로 겁을 먹는 경향이 있어. 겁을 먹어야 할 건 네가 아니라 저 녀석들인걸?”
“아니, 나는 너처럼 강한 게 아니잖아. 토끼나 놀 정도를 제외하면 전부 싸워서 질 자신이 있다고.”
“왜 굳이 목숨을 걸고 싸울 생각을 해? 네가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걸 보여 주면 대부분의 마수들은 알아서 도망간다고. 겁먹지 마. 너는 전장의 왕이야.”
전장의 왕은 무슨.
하지만 블랑카의 말도 꽤 일리 있다.
내가 너무 겁을 집어먹은 게 아닐까?
어쩌면 좀 강하게 나가면 저 괴물들도 나를 잘 건드리지 못하지 않을까?
“당당하게, 등도 쫙 펴고!”
“으엑, 아파.”
블랑카와 그런 대화를 나누던 사이, 갑자기 발아래의 살점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뭐지? 아직 돌뱀들이 남아 있나?
“왕?”
돌뱀들이 파 놓은 구멍 안에서 튀어나온 것은 해맑게 웃고 있는 에포나였다.
에포나의 입에는 잘게 부서진 마석 조각이 물려 있었다.
꿀꺽, 마석 조각을 삼킨 에포나는 폴짝 블랑카의 등 위에 올라탔다.
처음에는 무척 질색하던 블랑카도 이젠 에포나가 자신을 탈것으로 쓰는 데 익숙해진 모양인지 쓴웃음을 지으며 에포나가 떨어지지 않게끔 천천히 돌뱀의 사체를 들고 베헤모스의 사체를 빠져나왔다.
[메탈릭 스네이크]
-리우테스 행성 고유종. 어린 시절 먹어 치운 금속과 암석으로 단단한 껍질을 만든다. 또한, 주위의 암석을 자신의 껍질과 동일한 암석으로 바꾸어 나가는 습성이 있다.
오늘 블랑카가 처치한 돌뱀의 이름은 메탈릭 스네이크라는 것 같은데, 돌뱀이 더 입에 달라붙으니 앞으로도 돌뱀으로 부를 생각이다.
뱀 고기는 맛있다는 블랑카의 호언장담과는 다르게, 무척이나 단단해서 먹기 힘들었다.
혹시 조리하는 방법이 잘못됐나 싶어서 지난번에 만든 토기에 물을 넣고 삶자 그제야 좀 사람이 씹을 만한 고기로 변화했다.
잿물에 담가 둔 가죽은 아직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블랑카의 다리를 마사지해 주고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이 밝아 왔다.
블랑카는 아침 일찍부터 들판을 달리겠다고 나를 놔두고 숲으로 달려갔다.
보나 마나 어제 한 이야기의 연장선상이겠지.
자신이 없어도 당당하게 숲을 탐색해 보라는 뜻일 거다.
뭐…… 블랑카가 오기 전에는 나 혼자서 숲을 탐색했었지.
점액의 파도가 덮쳐 오고, 블랑카가 나타난 뒤로는 절대 혼자서 숲을 탐색하지 않지만 말이다.
그 점액에 잡아먹힐 뻔한 경험이 생각보다 내 뇌리에 깊게 각인된 걸까?
그래, 슬슬 이겨 내야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오랜만에 혼자서 숲속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여전히 숲속에 혼자서 가는 건 조금 꺼려진다.
그래, 뭐 굳이 숲속이 아니어도 되잖아?
지난번에 누군가가 육포를 훔쳐 먹었었지.
그리고 아침마다 숲이 아닌 산에서 들려오는 정체 모를 새소리.
숲보다는 바위산을 탐색하면서 새소리의 주인을 찾는 게 더 나을 거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제 손에 익은 창을 한 손에 붙잡고 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왕!”
오늘은 며칠에 한 번꼴로 있는 에포나가 동굴에 틀어박히는 날.
잘 다녀오라는 듯 에포나가 내게 짖으며 동굴에서 나를 배웅하고.
나는 조심스럽게 산을 등산하기 시작했다.
절대 위험해 보이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지 않고, 간간이 들려오는 새소리의 근원을 향해서.
“포로롱, 포로롱.”
서서히 새소리의 근원이 가까워진다.
원래 보통 이 정도까지 소리가 가까워지면 새들이 날아가는 게 정상이던데.
혹시 새의 목소리를 내는 다른 무언가라든가, 그런 건 아니겠지?
나는 안 좋은 쪽으로 째깍째깍 움직이기 시작한 생각을 최대한 붙잡으며 발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내가 바위산에서 발견한 것은, 바위틈을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낯익은 생김새의 생명체였다.
검정과 하얀색의 털.
짧고 뭉툭한 부리와 도저히 날아다니는 데 쓸모 있을 것 같지 않은 날개.
그래.
펭귄이 바위틈에서 폴짝거리며 지금껏 들려왔던 정체불명의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포로롱, 포로롱.”
물론 저게 내가 아는 펭귄은 아니겠지.
분명히 이세계식으로 뭔가 어레인지된 펭귄일 게 틀림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펭귄을 관찰하고 있으니, 펭귄 또한 나의 존재를 눈치챈 듯 보였다.
펭귄은 잔뜩 경계하는 눈치로 나를 바라보며 몸을 바짝 낮추는 것으로 위협의 태세를 취했고.
안타깝게도 펭귄의 위협은 내게 그리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아마도 0.001%로 발동하는 심쿵사를 노린 것 같은데, 이번에는 안타깝게도 발동하지 않은 듯하다.
피식 웃으며 나는 이만 자리를 비켜 주려고 했지만, 펭귄의 뒤편에서 반짝거리는 무언가가 엿보인다.
저건, 알인가?
이렇게 펭귄이 나에게 위협을 가하는 이유를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둥지가 바로 뒤에 있어서 저러는 걸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더 이상 펭귄을 자극하지 않으려 했지만.
“응?”
나는 어느새 펭귄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포로롱! 포로롱!”
“포롱! 포로롱!”
산이 떠나갈 기세로 마구 울어 대는 펭귄들.
으아, 이건 좀 무서운데?
나를 둘러싼 펭귄들의 기세에 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창을 쥔 손에 힘을 넣으며 마음을 다잡는다.
그래, 블랑카가 그런 것처럼 이번에는 좀 강하게 나가 보자.
강하게 나가면 저쪽이 먼저 겁먹고 물러서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돌아갈 길을 가로막고 울어 대는 펭귄에게 창을 들이밀며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워!”
입으로 소리치며 펭귄을 내쫓아 보려 하지만, 펭귄들은 겁먹지 않고 오히려 팔을 파닥거리며 더욱 소리칠 뿐이다.
어쭈, 해보겠다는 거지?
마치 펭귄들이 만든 링에서 결투를 벌이듯 펭귄 한 마리가 팔을 파닥거리며 내게 접근하고.
나는 자신만만하게 창을 쥔 손에 힘을 넣었다.
에이, 설마 내가 펭귄 따위한테도 지겠어?
어째 뭔가 해선 안 될 생각을 한 것 같으면서도, 나는 내게 달려드는 펭귄에게 맞섰다.
* * *
“안녕하세요! 차원항 장인 클라인입니다!”
꽤나 오랜 시간이 흐른 끝에, 클라인은 간신히 다시 카메라 앞에 섰다.
클라인이 이번에 촬영할 영상은, 쥬스농장의 피드백을 받아들이는 영상이었다.
클라인 스스로도 쥬스농장의 피드백이 옳았다고 생각하고, 댓글 창의 난리를 잠재울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고도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클라인이 여러 영상을 살펴보고, 브리딩 공부를 한 결과 무력이 강한 개체일수록 주위 환경의 변화에 적응을 잘한다는 자료가 있었으니까.
“오늘 제가 준비한 콘텐츠는 바로~! 자쟈잔~.”
클라인이 언제나처럼 효과음을 내며 카메라 앞에 가져온 것은 리베리아어로 써진 작은 책이었다.
“이게 뭔지 아시겠어요? 바로, 리베리아의 전통 무술 교본이랍니다!”
클라인은 교본에 새겨진 리퀴드사의 마크가 잘 보이게끔 카메라에 비추고, 방긋 웃으며 오늘 자신이 할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네, 그렇습니다! 오늘 제가 할 콘텐츠는 바로! 잉간이 전투 훈련! 입니다!”
클라인은 그렇게 말하며 지난번 쥬스농장과 함께 찍었던 영상 링크를 화면에 띄웠다.
“이때 쥬스농장 님께 참 좋은 조언을 많이 들었는데요. 잉간이가 차원항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게 전투 훈련의 유무일 수 있다고 들었거든요.”
클라인은 그렇게 말하며 리퀴드사에 부탁해서 얻은 여러 자료 화면들을 화면에 띄운다.
“제가 쥬스농장 님의 조언을 듣고 스스로 조사해 본 결과! 쥬스농장 님의 말대로 최소한의 전투 훈련을 받은 개체는 받는 스트레스가 적다고 나왔거든요.”
클라인이 잉간이에게 전투 훈련을 시키려는 방식은 쥬스농장의 조언대로 리베리아 인간을 통한 대리 교육.
이 경우 리베리아 인간의 서열이 높아질 수 있다는 문제가 있지만, 어차피 군체가 그렇게 크지도 않고 별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직접 클라인이 교육시키는 방식은 아직 핸들링이 불가능한 잉간이에겐 불가능하기도 하고 말이다.
일단은 우선 접촉이 가능해져야 뭔가가 가능할 것 아닌가?
“자, 그럼 잉간이가 뭘 하고 있는지 살펴볼까요? 어제만 해도 가죽을 다듬고 있던데…….”클라인은 그렇게 말하며 슬쩍 차원항 안에서 잉간이를 찾았고, 곧 클라인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엄멈머, 어머. 어머나……! 와……!”
잉간이를 찾는 클라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리베리아 인간의 등에 올라탄 잉간이의 모습.
순간적으로 클라인은 서로 교미를 하는 게 아닌가 착각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리베리아산 켄토르가 전투할 때 가끔 취하는 모습일 뿐이었다.
“크흠, 여러분. 저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노란 딱지는 제발……!”
화끈해진 얼굴을 잠시 식힌 클라인은 다시 잉간이를 관찰하기 시작하며 중얼거렸다.
“리베리아산 인간은 이제 완전히 차원항에 적응한 모습이죠? 백은 기사단 출신이어서 그런 걸까요? 그에 반해 잉간이는…….”
클라인의 눈에 잉간이가 움직이다가 가만히 앉아서 아무것도 감지되지 않는 허공에 말을 거는 듯한 모습이 보였다.
“아직 차원항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한 모습이죠? 하루빨리 잉간이가 차원항에 적응하기 위해서라도 잉간이에게 어서 전투법을 교육해야겠어요.”
어쩌면 차원항에 적응하지 못한 게 아니라, 차원 파괴자의 전조 증상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뭐, 정말 차원 파괴자라고 한다면 지금 클라인이 어찌할 수 있는 건 없고 적당히 약물로 차원항 내부를 소독하는 일밖에 없다.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최대한 빨리 차원항을 한번 청소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클라인이 잠시 멍을 때리는 사이, 잉간이가 바위산을 올라가기 시작했고.
잉간이는 먹이용으로 넣어 둔 바위폴짝새와 마주쳤다.
“오, 드디어 만났네요! 지난번 바위폭포고기처럼 단 한 번도 서로 만나는 일이 없을까 봐 걱정했다고요.”
클라인이 기대감을 가지고 지켜보는 가운데, 폴짝새와 잉간이가 서로 대치하기 시작했고.
곧이어 잉간이와 폴짝새 사이에 사소한 싸움이 붙은 듯 보였다.
평소의 잉간이라면 보통 여기서 도망쳤을 텐데, 맞서 싸우네?
점점 더 잉간이가 차원항에 적응하는 증거라고 클라인은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잉간이의 싸움을 살폈다.
“그래, 잘한다! 그렇지! 그렇게……!”
어차피 폴짝새가 잉간이를 다치게 할 일은 없으니 클라인은 굳이 개입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잉간이를 응원했고, 그 결과.
“우리 잉간이…… 풀 죽었어……. 어떡해…….”
처음에는 폴짝새를 잘 압박하는 듯 보이던 잉간이는 폴짝새의 접근을 허용해 흠씬 두드려 맞았다.
결국 잉간이는 폴짝새의 둥지에서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고.
그날 하루 종일 잉간이의 모습은 잔뜩 풀 죽어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잉간이가 아무리 약하더라도 폴짝새 정도는 이기지 않을까, 싶었는데.
폴짝새도 이기지 못할 줄이야.
클라인은 더욱더 잉간이에게 전투 교육을 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자, 그럼 리베리아산 인간에게 전투 교본을 전달해 보겠습니다!”
서둘러 리베리아산 켄토르에게 전투 교본을 전달해 줬다.
늘 그렇듯, 호의를 가득 담아서 말이다.
33화 마력이 없는 인간이 마력 순환법을 배우면 어떻게 될까? 잉간이가 달라졌어요!
나는 버러지다.
버러지.
펭귄한테도 지는 버러지.
자고 일어났는데도 여전히 펭귄에게 맞은 곳이 욱신거린다.
슬쩍 옷을 들추고 몸 상태를 살펴보니 전체적으로 펭귄 날개 모양의 자국이 남아 있다.
아니, 솔직히 펭귄 주제에 그렇게 세도 괜찮은 거야?
막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날개를 파닥거리던데.
일보로 내 공격을 피하고.
이보로 거리를 좁히고.
삼보로 사거리에서 벗어나는.
무슨 무협지에서나 볼 법한 신묘한 보법이었다.
내가 보기엔 분명히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무공 같은 게 있는 게 틀림없다.
그러지 않고서야 내가 펭귄에게 질 리가 없지.
그래, 내가 약한 게 아니라 상대가 너무 강한 거야.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하며 적당히 아침을 보내던 그때, 사이코패스의 기척이 느껴지는 것과 함께 동굴 밖에서 블랑카의 괴성이 들려왔다.
“리, 리베리화 님?!”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조심스럽게 동굴 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언제나의 촉수에게 무언가를 받고 황송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인 블랑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촉수는 잠시 블랑카의 머리를 쓰담쓰담하더니, 그대로 허공으로 사라졌다.
뭐야,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안 가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일단 그릇에 담긴 물로 세수를 하려던 그때, 블랑카가 잔뜩 신난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이, 이, 잉간! 봤어? 봤어?”
“어. 다 봤어. 심호흡 좀 하고. 진정한 거 같으면 다시 한번 진정해.”
블랑카는 내가 시키는 대로 후우, 후우 심호흡을 하고 전혀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모습으로 내게 외쳤다.
“신님이, 신님이 내게 직접 부탁했어! 무공비급도 전해 주고!”
“무공비급?”
뭔가 무협지에서 나올 법한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블랑카의 품 안을 바라보자, 무공비급이라 불린 것치곤 무척이나 세련된 생김새의 책 한 권이 보였다.
보통 무공비급이라고 하면 낡아 빠진 고서적을 떠올릴 텐데.
저건 무슨 학원에서 배부하는 학습지처럼 생겼다.
그렇지만 블랑카는 그런 무공비급의 생김새에 전혀 개의치 않고 들뜬 표정으로 무공비급을 팔랑팔랑 넘기기 시작했다.
“검술, 창술, 궁술에 체술까지. 심지어 마나 연공법도 있어! 리베리아의 모든 무술이 다 기록되어 있다고!”
“와. 그것참 대단하네.”
한바탕 폭풍같이 리베리아에 대한 찬양을 한 블랑카는 그제야 좀 진정됐는지 헛기침을 했다.
블랑카의 헛기침을 신호 삼아 나는 블랑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봤다.
“그래. 아침부터 도대체 뭔 일이야?”
“리베리아 님이…… 내게 말을 거셨어. 꿈으로, 꿈으로 내게 해야 할 일을 알려 주셨어.”
“꿈?”
“응. 다가올 시련에 대비해서 훈련하라고 하시더라고.”
다가올 시련?
어째 좀 불안한데.
혹시 지난번처럼 이상한 생물들을 소환해서 서로 싸우게 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그렇게 내가 속으로 도대체 다가올 시련의 정체가 무엇인지 추측하던 사이, 블랑카의 입에서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자, 그러니까 어서 수련하자!”
“그래. 열심히 해……?”
텁.
블랑카가 내 목덜미를 잡고 동굴 앞의 광장으로 나를 끌고 나온다.
잠깐만, 설마 하지만 그 훈련의 대상에 나도 포함되어 있는 거야?
“당연하지! 애초에 신님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너는 훈련을 좀 해야 해. 마력이 단 하나도 없는데, 근육마저 없는 게 말이 돼?”
“나는 싸우기 싫다고! 이거 놔!”
“신님께서 직접 부탁하신 일이야. 그럴 수는 없지.”
“안 돼요! 싫어요! 하지 마세요!”
초등학교 시절에 배운 몸을 지키는 말을 외쳐 봐도 블랑카는 나를 붙잡은 손에 힘을 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소년 만화에서 나오는 뇌가 근육으로 이뤄진 듯한 무지막지한 훈련을 시킬 거 같은데?
막 등에 타이어를 메고 모래사장을 한 달 동안 청소하는 훈련이라든가, 머리가 대머리가 될 때까지 가혹한 일정을 소화하게 할 것 같다.
그렇게 내가 필사적으로 바르작거리는 모습을 지켜본 블랑카는 피식 웃으며 나를 안심시켰다.
“무슨 근력 운동 같은 걸 시킬 거라고 생각하는 거 같은데, 그런 건 안 시키니까 걱정하지 마.”
“……진짜?”
“그래. 가벼운 이론 수업 정도야. 억지로 훈련을 시켜 봤자 별다른 효과도 없으니까.”
블랑카는 그렇게 말하며 내게 써 본 적 있는 무기의 종류를 물어봤다.
“한 번이라도 써 본 적 있는 무기는 있어?”
“무기? 창하고…… 칼? 뭐, 롱 소드 같은 거창한 게 아니지만.”
커터 칼이라든가, 반달 돌칼이라든가.
뭐, 둘 다 칼이라고 하긴 우스운 수준이지만.
그렇게 생각한 건 블랑카도 마찬가지인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검은 한 번도 잡아 본 적 없다는 소리고. 도끼는? 보니까 도끼는 몇 번인가 썼을 거 같은데?”
“도끼? 어…… 써 보긴 했지.”
나는 블랑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동굴 한구석에 잘 보관되어 있던 도끼를 들고 나왔다.
“나무를 몇 번인가 베어 본 게 다야. 그 이상은……. 블랑카?”
블랑카는 내가 들고 나온 도끼를 바라보더니, 경악의 표정을 지으며 할 말을 잃어버렸다.
얘가 갑자기 왜 이래?
“마, 마수정이라고? 이 정도로 커다랗고 순도도 엄청난 건 처음 보는데?”
“사이코패스가 간석기를 만들라고 던져 준 거야. 이게 어때서?”
나는 도끼를 블랑카에게 건넸고, 블랑카는 마수정 도끼를 살펴보며 경악을 터트렸다.
“순도가 이 정도나 되는 마수정은 거의 전설 속에서나 나오는 건데…….”
“순도가 높으면 뭐가 좋은데?”
“일단 저장할 수 있는 마력이 많아지고, 그만큼 마력을 이용한 기술을 사용했을 때의 위력이 높아지지.”
즉, 내가 써 봤자 아무 효과 없다는 뜻이다.
뭐, 블랑카가 써먹으면 어떻게 될지 몰라도 말이지.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무술 시범이나 보여 줄까?”
“아니, 난 괜찮은데.”
“지금부터 보여 줄 건, 미노스 일족의 비전무공이야. 뭐, 나도 신님의 책을 보고 따라 하는 거니 복잡한 기술은 쓰지 못하고 기본 기술만 흉내 내는 수준이지만…….”
블랑카가 내가 만든 조잡한 마수정 도끼를 들고, 가만히 마력을 모으기 시작한다.
뭔가, 뭔가가 일어나고 있다.
마력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런 내가 봐도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마력이 조잡한 도끼에 모여들기 시작하고.
“흡!”
그대로 블랑카는 도끼를 근처의 바위에 휘둘렀다.
뭐, 적당히 바위가 박살 나려나?
나는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벌어진 건 그런 안일한 일이 아니었다.
폭발.
블랑카의 도끼가 휘둘러진 바위가 말 그대로 화염과 함께 폭발해 버린 것이다.
바위 내부에서 폭탄이 터진 것처럼 시뻘겋게 달아오른 바위의 파편을 바라보며 블랑카와 나는 잠시 멍해졌고.
나는 경악하며 블랑카에게 말했다.
“도, 도대체 뭔 기본 기술이 저따위야?”
“아니, 원래 이런 기술이 아니라 그냥 내부에서 마력을 방출시키는 기술인데…….”
“내부에서 마력을?”
그때, 문득 짐작이 가는 부분이 떠올랐다.
마수정을 다듬을 때 마수정이 발화석의 마력을 머금었었지?
그 사실을 블랑카에게 전하자, 블랑카는 식겁하며 도끼를 내게 넘겨줬다.
“부, 불의 마력이 담겨 있다고? 그러니까 저렇게 되지! 원래는 저것보단 얌전한 기술이야!”
아니, 애초에 불의 마력이 담겨 있지 않더라도 돌도끼로 저 바위를 박살 낼 수 있었다는 게 말이 안 되는데.
어쨌든 저 무공비급에 담긴 기술들의 강력함은 잘 알겠다.
오늘도 리베리아에 대한 이미지가 하늘 저편 어딘가로 날아가는 걸 느끼며 나는 슬며시 블랑카에게 말했다.
“도대체 리베리아는 어떤 곳이길래 저런 기술을 아무나 쓰고 다닌 거야?”
“아, 뭔가 오해하는 거 같은데. 당연히 이런 기술은 아무나 쓰지 못하지. 이 책에 실린 건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일류 무공들이니까 이런 게 가능한 거야.”
블랑카 왈, 평범한 무공들은 아무리 강해 봤자 가문 대대로 전해지는 무공들의 10분의 1 수준의 위력이라는데.
그래도 여전히 리베리아가 지옥 같은 곳이라는 건 변하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나한테 저 무공들을 알려 준다고? 뭐, 나는 마력도 없고 내공도 없는데?”
“마력이 필요 없는 무공도 있고, 일단 무공을 배우면 기본적인 전투법을 익힐 수 있으니까.”
“그래?”
흥미가 생기긴 하지만, 과연 내가 무공을 익힐 수 있을까?
애초에 저 무공들이 마력이 전혀 없는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졌을 리가 없잖아.
그렇게 생각하며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자, 블랑카가 피식 웃으며 내 걱정을 해소해 줬다.
“네가 말하던 판타지 소설이나 무협 소설에서 나오는 훈련을 할까 봐 걱정되는 거잖아? 그런 건 아니니까 안심해.”
“뭐, 맨손으로 뜨겁게 달군 모래에 주먹을 넣는다거나…….”
“그런 건 아니래도? 솔직히 말해서, 너도 복수하고 싶잖아? 그 펭귄인가 하는 새들한테?”
“윽.”
갑자기 아픈 부분을 찔러 오네.
뭐, 복수할 수만 있으면 당연히 복수하고 싶지.
그렇지만 무공을 배운다고 과연 그게 가능할까?
“어…… 내가 무공을 배운다고 복수할 수 있을까?”
“당연히 가능하지. 왜 이렇게 겁먹었어? 네가 싸울 녀석은 증오심에 가득 찬 채로 살아 숨 쉬는 시체도 아니고, 단순한 새라고. 새. 당연히 이길 수 있지.”
그래, 기껏해야 새다.
무공을 배운다면 새 정도는 이길 수 있겠지!
무공을 배우지 않는다면 그깟 새도 이기지 못한다는 사실은 잠시 제쳐 두고.
중요한 건 미래니까, 응.
“가장 기초적인 창술을 알려 줄게. 이 정도만 알면 애송이는 벗어났다고 할 수 있는 거니까, 너도 손쉽게 따라 할 수 있을 거야.”
“오오.”
블랑카는 나에게 간단한 동작 몇 개를 시범을 보였다.
창끝을 최소한으로 움직여서 적의 동작을 제한하는 자세라는데, 무슨 원리인지는 모르겠다.
“모르겠으면, 그냥 외워. 이 자세만 익히면 방어는 완벽해. 이걸 기본형으로 두고, 여기서 발전하는 거야. 자, 이렇게…….”
무언가 무협지에 나올 법한 강의가 이어지고, 나는 블랑카의 지시를 들으며 그 지시대로 몸을 움직여 본다.
머리로는 아직도 블랑카의 강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째서일까?
어째서인지 머리는 이해하지 못했어도 몸이 저절로 움직이는 듯한 기분이 느껴진다.
혹시, 어쩌면 나는 무협에서 말하던 천무지체 같은 걸까?
그렇지만 블랑카는 그런 내 생각과는 다르게 생각하는지, 내 모습을 굉장히 애매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마침내 내가 블랑카가 지도해 줬던 동작들을 모조리 시연해 보이고, 블랑카가 평가를 내렸다.
“간신히 실전에서도 써먹을 수 있는 수준이긴 한데…….”
“수준인데?”
“뭔가, 뭔가 좀 이상해서. 다시 한번 시도해 볼 수 있어?”
“응?”
뭔가 석연찮았지만, 나는 일단 블랑카의 말대로 다시 창을 움직인다.
두 번째의 동작까지 모두 관람한 블랑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미 초식을 익힌 상태인데?”
“뭐?”
“아니, 정말로. 보법도 어째서인지 본능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고.”
“아니, 나는 무협지도 안 보던 사람인데, 초식을 이미 익혔다는 게 무슨 소리야?”
“그 말대로야. 원시적이지만, 분명히 네가 움직이는 모습은 초식이라고 부를 수 있어.”
블랑카 왈, 내 몸이 원시적 무공을 알아서 사용하고 있다는데.
그렇다고 내 몸이 천무지체 같은 특출 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란다.
단순히 기억 어딘가에 저장된 무공을 몸이 따라 하고 있을 뿐이라는데.
아니, 내가 상식적으로 블랑카에게 배우기도 전에 무공을 익혔을 리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어째서 내가 원시적인 무공을 사용하는 걸까?
블랑카는 그 이유를 언제나처럼 신에게서 찾아냈다.
“역시, 신의 사랑을 받아서인가?”
“아니, 이게 왜 신이랑 또 연관돼?”
“전에도 말했잖아? 신께서 네 성공을 바라니, 네가 성공하는 거라고.”
“그건 도대체 무슨…….”
지난번에도 말한 신이 원하니, 내가 성공하는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론.
내가 노력했으니 성공한 거지, 신이 원한다고 내가 성공한다는 게 말이 돼?
단순히 내가 영화에서 봤던 모습을 무의식중에 따라 했고, 그게 원시적 초식의 모습과 비슷했다는 게 맞는 설명이겠지.
나는 그렇게 블랑카의 주장을 부정했고, 블랑카 또한 더는 신 때문이라고는 주장하지 않았다.
그 대신 블랑카는 좀 더 본격적으로 창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기본기를 다지는 정도였지만, 나에게는 그 정도가 충분하다고 한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할 무렵, 블랑카는 그 정도면 괜찮다며 수업을 멈췄다.
“좋아. 이 정도면 충분해.”
“으아…….”
블랑카와의 수련이 어느 정도의 성과를 가져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내가 천무지체 같은 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내가 헉헉거리며 털썩 바닥에 주저앉자, 블랑카는 무공비급을 그제야 펼쳐서 탐독하기 시작했다.
나는 멍하니 휴식을 취하며 문득 떠오른 질문을 블랑카에게 던졌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그 책에 무슨 마나 연공법? 그런 것도 적혀 있냐?”
“마나 연공법? 아, 마력 순환법을 말하는 거라면 당연히 적혀 있지. 신님의 무공비급인데.”
“허.”
와, 뭔가 판타지 세계라면 있을 법해서 물어봤는데, 실제로도 있네.
무공에 마나에 SF에 좀비에…….
리베리아는 진짜 어떤 곳인 거야?
그렇지만 블랑카는 나와는 다른 것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저기, 한번 마력 순환법을 배워 보지 않을래?”
“마력 순환법? 내가 배울 수 있는 거야?”
“순환법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으니까. 호흡을 이용한 순환법은 아마 너도 배울 수 있을 거 같은데…… 배워 볼래?”
“배우면 무슨 효과가 있는데?”
“일단 건강에 좋고. 잘하면 마력을 얻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
“배울래!”
마력을 얻을 수 있다면 당연히 배워야지.
나는 눈을 반짝거리며 블랑카에게 지도를 요구했고, 블랑카는 무공비급을 바라보며 내게 순환법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그래, 그렇게 들이마시고…….”
최면을 거는 듯한 블랑카의 지시에 따라 천천히 숨을 들이마신다.
명상이라도 하는 것처럼 몸이 편안해지고, 머리가 상쾌해지는 기분이 든다.
“어때? 뭔가 느껴져?”
“……글쎄?”
하지만 아무리 블랑카의 지시에 따라 호흡을 해도 무언가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그러자 블랑카는 쓴웃음을 지으며 오늘의 성과를 정리하며 내게 조언을 건넸다.
“뭐, 원래 마나 순환법은 처음 배운 순간부터 효과가 나타나는 건 아니니까. 매일 꾸준히 반복하면…….”
“꾸준히 반복하면?”
“효과가 나타날 수도?”
“흐아…….”
“뭐, 명상한다는 느낌으로 매일 반복해 봐. 창술은 이제 기본기는 다 갖춘 것 같으니 꾸준히 연습하면 될 거야.”
마력 순환법은 완전히 꽝이지만, 그나마 오늘 창술 하나는 건졌네.
뭔가 지금이라면 그 펭귄 놈들에게 복수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이제 슬슬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결전의 시간은 내일이다.
다음 날, 나는 비장한 표정으로 창을 쥐고 산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블랑카는 그런 나를 응원하며 배웅해 줬다.
“포로롱, 포롱?”
“아아, 갈아입고 왔어요.”
전에 기억해 둔 펭귄의 서식지로 향하자, 나를 기다리고 있던 듯 낯익은 펭귄이 나를 마중했고.
나는 말없이 창을 앞으로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펭귄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내 도전을 받아들였고.
순수한 무(武)의 대결이 바위산에서 펼쳐졌다.
만물의 영장의 힘을 보여 주마, 펭귄 녀석.
* * *
“그렇지! 잘한다! 그래, 그렇게!”
클라인은 폴짝새와 1:1 대결을 펼치는 잉간이를 바라보며 잉간이를 힘껏 응원했다.
폴짝새와 이렇게 박진감 넘치게 싸울 수 있는 생물이 있을 줄이야.
폴짝새가 신묘한 보법으로 잉간이와의 거리를 좁히려 하면.
리베리아산 인간에게 전수받은 창술을 사용하는 잉간이가 포악한 창끝을 움직이며 폴짝새를 견제한다.
고수와 고수와의 싸움에서는 한순간이 승패를 가른다고 했었나?
그 말대로, 최약체와 최약체의 싸움에서도 한순간이 싸움의 결과를 뒤바꿨다.
“어, 어? 그렇지!!”
폴짝새가 체력이 줄어들어서인지, 발을 헛디뎌서인지 잉간이의 창을 피하지 못하고 바닥에 넘어지고.
나려타곤을 써먹었음에도 공격을 제대로 피하지 못한 순간 승부가 난 것과 다름없었다.
그대로 잉간이의 창이 폴짝새의 가슴팍을 찔러 드나 싶었지만.
멈칫.
잉간이의 창은 폴짝새의 가슴 한끝 앞에서 멈춰 섰다.
그러고는 만족스러운 듯 잉간이는 폴짝새에게 손을 내밀었고.
폴짝새 또한 잉간이의 손을 붙잡고 일어서며 기묘한 우애를 나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클라인은 감격의 눈물을 훔치며 중얼거렸다.
“우리 잉간이가 1:1도 이기고 많이 컸네요…….”
역시, 우리 잉간이가 제대로 전투법을 배운 적이 없어서 그렇지 이렇게나 잘 싸운다니까.
클라인은 잉간이의 전투를 지켜보며 잉간이의 전투력 수준을 무오 아래에서 원시 리베리아인 수준으로 상향시켰다.
그래, 솔직히 원시 리베리아인 정도는 되겠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잉간이의 성장을 기뻐했고.
폴짝새와 잉간이가 그렇게 헤어지는가 싶더니, 잉간이를 둘러싸고 그 싸움을 구경하던 폴짝새들이 한꺼번에 잉간이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잉간이는 처음에 당황하는 듯싶었지만, 곧바로 폴짝새들에게 겁먹지 않고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워낙 수가 많아서인지 잉간이가 서서히 밀리기 시작한 그 순간.
맨 처음 잉간이와 싸웠던 폴짝새가 큰 소리로 뭐라 외치니, 잉간이에게 덤벼들던 폴짝새들이 순순히 잉간이를 보내 줬다.
그런 기묘한 풍경을 즐겁게 바라보며 클라인은 슬슬 잉간이가 차원항에 잘 적응하는 것 같으니, 핸들링 훈련의 마지막 단계를 진행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클라인이 판단하기에, 잉간이를 더 잘 보살피기 위해서는 핸들링이 필수였으니까.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슬며시 작성 중이던 메시지를 누군가에게 발송했다.
[클라인]
[메시지 받으면 바로 답장해 줘. 지구의 정보를 최대한 모아 줄 수 있어?]
34화 핸들링 훈련 마지막 단계! 잉간이는 여행 중?
“핸들링은요, 무척 조심해서 해야 한답니다?”
클라인은 언제나처럼 카메라를 바라보며 설명을 시작했지만, 오늘 클라인이 설명하는 내용은 평소와는 조금 다르다.
오늘 클라인이 설명할 내용은 잉간이나 다른 차원 생물들이 아니라 핸들링에 관한 내용이니까.
“발달기에 접어들지 못한 차원 생물들은 별도의 교육을 받지 못하면 지적 생명체와 접촉조차 할 수 없다는 건 다들 잘 아시죠?”
클라인은 그렇게 말하며 슬쩍 자신의 신체 말단을 구름고래의 차원항 안에 집어넣는다.
그대로 클라인은 구름고래를 쓰다듬으려 하지만, 클라인의 신체 말단은 구름고래의 몸을 통과할 뿐이었다.
“뭐, 마키나족같이 물질 육체를 가지고 있으면 모를까, 저처럼 정보 생명체인 종족들은 인식되지 않으면 접촉이 아예 불가능하단 말이죠.”
그 때문에 클라인은 지금까지 가짜 촉수를 사용해 잉간과 소통해 왔던 것이었다.
클라인은 맨 처음 핸들링을 설명한다는 목적을 잃고, 접촉이 불가능한 것 때문에 생기는 고충을 한껏 푸념하기 시작했다.
“아, 저도 마구마구 쓰담쓰담하고 싶단 말이에요! 간신히 핸들링에 성공해도 정보 오염 때문에 너무 과도하게 핸들링을 하면 안 되고!”
뭐, 지금 클라인의 투정을 마키나가 듣는다면 화를 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물질적 충격에 면역, 수명 또한 존재하지 않고, 번식 또한 자유자재인 종족이 자신의 종족 특성이 싫다고 투정을 부린다?
바로 댓글 창이 불타오를 것이다.
그 사실을 클라인도 잘 알고 있기에 지금의 발언은 영상으로 만들 때 편집하겠지만 말이다.
“크흠, 핸들링을 조심해야 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차원 생물의 안전을, 다른 하나는 사육자의 안전을 위해서.”
클라인은 잉간이의 차원항을 다시 카메라 앞에 가져오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알다시피 대부분의 차원 생물에겐 지적 생명체의 정보를 온전히 받아들일 용량이 존재하지 않아요. 그 때문에 제대로 훈련받지 않은 상태에서의 핸들링은 별로 좋지 않은 결과로 끝나죠.”
애초에 대부분의 차원 생물들은 지적 생명체들의 정보를 유해한 것으로 인지하고, 차단하고 있다.
아예 육체 자체가 정보를 차단하느냐, 마력으로 정보의 인식을 막느냐의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거기에다가, 대부분의 차원 생물들은 하나 이상의 정보 생명체의 숙주가 된 상태죠. 그 때문에 우리가 정보를 흘려 넣어도 이미 자리 잡은 정보 생명체 때문에 무효화되는 경우가 많죠.”
뭐, 그것도 약물을 이용하거나 억지로 정보를 들이부으면 돌파할 수 있는 수준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정도 수준의 방어이기 때문에, 더욱 핸들링에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핸들링을 하다 실수로 정보 생명체의 정보에 우리의 정보를 덧씌우게 된다면? 원치 않은 번식이 이뤄지거나, 정보 생명체의 변질이 이뤄지게 되고. 그 결과…….”
펑.
클라인은 입으로 무언가가 터지는 흉내를 내며 고개를 내저었다.
“사랑하는 반려 생물의 머리가 물리적으로, 정보적으로 터지는 모습을 보기 싫다면 충분한 훈련을 한 뒤에 핸들링을 시도하시길 바라요.”
클라인은 문득 쥬스농장에게 들었던 잉간이의 정보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잉간이는 처음부터 정보 생명체의 숙주가 아니었다고 했지?
대부분 정보 생명체를 하나쯤은 지니고 있는 걸 생각해 보면 신기한 일이다.
잉간이와 함께 배송됐던 지구산 인간들은 정보 생명체를 가지고 있었는데 말이다.
어쩌면 정보 생명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덕분에 잉간이만 자기 관측에 성공한 게 아닐까?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음 설명을 시작했다.
“그럼 두 번째 이유! 사육자의 안전을 위해서라는 건 무슨 뜻이냐!”
클라인은 이젠 보기만 해도 그저 헛웃음이 나오는 그 사례를 가져오며 설명을 시작했다.
“여러분, 아주 잘 아시죠? 쥬튜버 크로노 사건. 불법 시스템을 사용한 끝에 자신이 사육하던 인간에게 중태를 입은 그 사건 말이에요.”
크로노 사건이 있은 지 이제 거의 1년이 넘어가지만, 애완 생물 사육의 위험성을 설명할 때 크로노 사건은 여전히 필수 요소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만큼 임팩트가 크기도 했고, 너무 어이없는 사건이기도 했으니까.
“만약 크로노 사건에서도 애완 인간이 핸들링 훈련을 받지 않은 상태였다면 단순히 차원항 하나만 박살 나는 선에서 끝났을 거예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인간은 핸들링 훈련을 받은 상태였고, 크로노는 961,123회 차 동안 쌓인 정보를 얻어맞고 중태에 빠졌죠.”
고작 인간 따위에게 그렇게나 많은 정보가 쌓였다는 게 대단한 걸까? 아니면 그렇게 많은 정보를 쌓은 크로노가 더 대단한 걸까?
그러고 보니 그 인간은 이후 시공의 폭풍에 휘말려서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했었나?
보나 마나 자기 관측에 실패하고 끔찍한 꼴을 당했겠지만, 어쩌면 그편이 더 그 인간에게 나을 수도 있다.
사육자에게 중상을 입힐 만큼 많은 정보가 쌓인 인간이라니, 호사가들이 아주 탐낼 테니까.
고급 요리로 요리되든, 다시 애완 인간이 되든 그리 좋게 끝나지는 않을 거다.
“어찌 됐든,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거예요. 핸들링 훈련을 끝마친 개체는 우리와 접촉이 가능해지지만, 접촉이 가능하다는 건 애완 생물들이 우리를 공격할 수 있다는 것과 같아요.”
뭐, 대부분의 애완 생물에게 쌓인 정보가 그렇게 많을 리는 없으니 공격당해도 별다른 증상은 없겠지만, 문제가 되는 건 애완 생물이 아니다.
“특히, 아직 정보 세척을 하지 않은 애완 생물은 어떤 정보가 담겨 있을지 모르니까요. 그중에 독성 정보나 독성 정보 생명체가 포함되어 있으면 큰일 날 수도 있답니다?”
좋아, 이 정도면 충분히 주의 사항을 안내한 것 같으니 본론으로 들어갈까.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자신의 팔을 걷어 올렸다.
“자, 그럼 지금부터 핸들링 훈련법을 설명해 드릴게요!”
핸들링 훈련의 최종 단계, 접촉 훈련은 아주 간단하다.
단지 차원항 안에 사육자 자신의 정보를 꾸준히 흘려 넣으면 될 뿐이다.
차원 생물이 사육자를 인지할 만큼의 정보를 흘려 넣으면, 그것으로 훈련은 끝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투여하는 정보량을 잘 조정해야 한다.
같은 종, 같은 품종이어도 각 개체들마다 하루에 받아들일 수 있는 정보량은 다르니 말이다.
자칫 잘못하면 사육자 숭배가 발병하기 쉽다.
그 점을 클라인은 명심하며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가락에 상처를 내고 차원항 안으로 자신의 정보를 투하하기 시작했다.
늘 그렇듯, 호의를 가득 담아서.
* * *
“완성했다!!”
펭귄과 기묘한 우정을 쌓은 다음 날.
리우테스식 무두질로 토끼와 놀 가죽을 다듬자, 꽤 쓸 만한 가죽이 탄생했다.
내가 만든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괜찮아 보이는 품질의 가죽.
뭐, 실제로는 어떤지 몰라도 일단 지금 당장은 괜찮아 보인다.
1년, 2년 넘게 사용하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적어도 몇 달은 버텨 주겠지.
이제 남은 건 이 가죽들을 엮어서 수통을 만드는 건데.
최소한 10일은 머물러야 하니, 10일 치 분량을 담을 수통을 만들려면…….
대략 이 정도?
나는 어림잡아 가죽들을 늘어놓고 수통의 크기를 재고, 수중에 가지고 있는 말총을 확인해 본다.
부족해도, 한없이 부족하다.
말총을 몇 가닥 뽑는 게 아니라, 한 움큼은 뽑아야겠는데?
“블랑카.”
“으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블랑카를 불렀고, 한참 무공비급을 읽던 블랑카는 푹 한숨을 내쉬며 내게 엉덩이를 내밀었다.
“이따가 자기 전까지 마사지해 줄게.”
“그런 문제가 아니라, 이건 수치심을 자극하는 거라고…….”
“수치심은 그리 생존에 필요 없는 감정이니까, 값싸게 팔아 버려.”
어딘가에서 본 듯한 명언을 중얼거리며 블랑카의 꼬리에서 꼬리털 한 움큼을 잘라 간다.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며 블랑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굳이 내 꼬리를 쓸 이유가 있는 거야? 가죽도 많은데, 하나 정도는 끈으로 가공해도 되잖아.”
“그렇지만 왜인진 몰라도 네 꼬리털이 제일 끈으로 효과가 좋은걸?”
그렇다.
나도 당연히 맨날 블랑카의 꼬리털을 뽑고 싶은 건 아니어서 짚을 꼬아 보기도 하고, 가죽을 잘라 보기도 하면서 대체품을 찾아봤지만.
아무리 봐도 블랑카의 털이 제일 효과가 좋은 걸 어떻게 해?
“으으, 꼬리가 허전해…….”
“그럼 빨리 털을 자라게 하면 되겠네.”
“그런 게 마음대로 되겠어?”
사족 보행 생물이 이족 보행 생물로 몸의 구조를 바꾸는 건 잘만 하면서 털은 자라지 못하게 하나?
아무리 마력이 존재해도 탈모는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블랑카에게서 뜯어낸 말총으로 바느질을 시작한다.
토끼 뼈로 만들어 낸 작은 바늘에 실을 넣고 만능 사전에 나온 대로 재봉을 실시한다.
생각보다 시행착오를 그리 많이 거치지 않고, 금세 재봉에 성공한다.
이제 남은 건 물통이 제대로 만들어졌는지만 확인하는 건데.
주르륵.
물을 물통에 넣자마자 가죽의 틈 사이로 물이 빠져나온다.
서둘러 물이 빠져나오는 곳에 다시 재봉질하며 구멍을 막고.
10번이 넘는 바느질 끝에야 나는 간신히 그나마 쓸 만한 물통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좋아, 이걸로 이제 여행을 떠날 준비는 다 끝냈다.
베헤모스의 고기와 젤리, 그리고 육포가 있으면 식량 문제는 해결이고.
물통만 적당히 주의하면 짐을 옮기는 문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블랑카 또한 내가 여행을 떠날 준비를 끝마쳤다는 것을 깨닫고, 슬며시 가져갈 짐들의 무게를 측정하기 시작했다.
“음. 좋아. 이 정도면 충분히 운반 가능해.”
“나를 태우고도 말이지?”
“그래, 네가 있어도 말이야.”
좋든 나쁘든, 나는 짐짝 취급이라는 걸 무심결에 깨닫는다.
내가 원해서 시작한 일인데도 짐이 된다니.
뭐, 늘 있었던 일이니까 상관없나.
중요한 건 그거다.
세계의 끝에는 과연 무엇이 있고,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은 있는 것인가.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문제 같지만, 그래도 답안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정해지지 않은 거니까.
“그럼, 출발은 내일 아침으로?”
“어. 오늘은 이미 늦었으니까.”
나는 그렇게 대답하며 블랑카에게 오늘분의 마사지를 해 주고 잠에 빠져들었다.
한 가지 고백을 하자면, 기묘하게도 나는 이곳에 와서 꿈을 꾼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맨 첫날, 바닥에 쓰러지고 다시 깨어났을 때 꾼 기묘한 꿈을 제외하면 말이다.
뭐, 적어도 원래 세계에 있었을 때처럼 악몽은 꾸지 않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자각몽?”
어느 순간, 나는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건 자각몽 같은 거창한 게 아닌 듯하다.
꿈을 꾼다는 사실은 알겠는데, 내 마음대로 꿈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보통 자각몽은 자기 마음대로 꿈을 조종할 수 있는 게 아니었나?
내가 꿈속에서 할 수 있는 건, 이곳에 떨어진 첫날 회색 안개 속에서처럼 한없이 걷는 것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건 자각몽이 아니라 자각몽을 꿨다는 꿈을 꾸는 거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새하얀 공간을 걷다 보니, 무언가 바뀌기 시작했다.
흐릿한 것은 생명의 색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지만, 길쭉한 것은 위험하지만 더욱 행복하다.
……?
내가 방금 뭐라고 생각한 거지?
뭔가 나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문장을 생각한 것 같은데.
흐릿한 것이 뭐……?
의아해하며 방금 내가 생각한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려 해 본다.
그리고.
“아.”
내가 생각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순간.
와르르.
당연한 사실을 당연하다는 듯 이해하자, 새하얀 세상 뒤에 숨겨져 있던 것들이 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한다.
내가 아는 그 어떤 문명과도 동떨어진 낯선 풍경.
생각을 이해하자 하얗고노랗고파랗고빨갛고행복하고연분홍의 풍경이 내 눈 안으로 강제로 밀고 들어오고.
풍경을 눈 안에 받아들이자, 휘끌거리는 뭉툭한 소리가 녹아내렸다.
생각 다음은 시각.
□□ □□은 청각.
청각 다음은 미각.
미각 다음은 후각.
후각 다음□ □□.
□□ □□□ □□.
“아, 윽. 에악?”
촉각 다음에 올 낯선 정보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만은 안 된다.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부류의 □□ □□□ □ □□□ □□□ □□□□려 하고.
새롭게 받아들인 정보들이 서로 녹아내리며 합쳐지고 나눠지며 나를 근본적으로 바꾸려 하던 순간.
“쉿.”
“□□ □□ □□”
꾸물거리고, 미끈거리며, 포근한 무엇인가 히죽 웃으며 내 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어째서 내가 그 생명체를 그녀라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꾸물텅 형체를 일그러트리며 내게 다가왔고.
낯선 감각에 저항하던 나는 그저 그 생명체가 내게 다가오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있어.”
그리고 그것이, 천천히 내게 손을 뻗어 촉수를 내 몸에 휘감기 시작하더니.
그녀의 얼굴이 내 얼굴에 가까이 다가오고, 천천히 그녀와 내 얼굴이 포개졌다.
끈적하고, 따듯한 무엇인가가 느껴지고…….
“흐억?!”
“왕!”
나는 내 얼굴을 핥고 있던 에포나에 의해서 잠에서 깨어났다.
도대체 무슨 꿈을 꾼 걸까?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꿈에서 느꼈던 감각이 느껴진다.
단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도시의 풍경을 묘사할 수 있을 것 같고.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색을 무슨 색이라 부르는지도 알 것 같다.
그렇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마지막에 내 영혼을 본질적으로 바꿔 놓으려고 했던 감각만은 떠올릴 수 없었고.
그와 함께 나에게 다가오던 그 정체불명의 생명체의 얼굴 또한 잘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혼란에 빠져 있는 사이, 에포나는 언제나처럼 기다란 혀로 입을 핥으며 가볍게 짖을 뿐이었다.
“왕!”
언제나의 에포나처럼.
35화 핸들링 훈련 마지막 단계! 훈련이 긴데, 참 긴데…….
“악몽이라도 꿨어? 얼굴이 창백한데?”
“어? 어, 좀 이상한 꿈을 꿔서.”
“이상한 꿈?”
“난생처음 보는 풍경과 기묘한 감각이 느껴지는 일종의 악몽?”
평소와는 달리, 일어나자마자 바쁘게 움직이지 않고 멍하니 동굴의 벽을 바라보는 내 모습을 보며 블랑카가 의아하다는 듯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멍하니 블랑카에게 내가 본 풍경을 설명했고, 블랑카는 눈을 반짝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분명 리베리아 님의 인도가 틀림없어!”
“아니, 그냥 악몽 같은데.”
“세계의 끝을 향한 여행을 떠나려는 이 시기에 네가 그런 꿈을 꾼 이유가 뭐겠어? 리베리아 님이 여행을 인도하시는 거지!”
블랑카는 눈을 반짝거리며 내가 꾼 꿈이 여신의 인도라고 설파했지만, 여전히 블랑카의 주장은 내 마음을 동하게 만들지 못했다.
“그냥 마음이 심란해서 그런 거겠지. 예지몽은 무슨.”
그게 예지몽이라면, 나는 당장 자살할 것이다.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로.
만약 내가 꾼 꿈이 정말 예지몽이라면, 나는 그 모든 끔찍한 감각을 겪어야 한다는 소리니까.
그나저나 마지막에 등장한 그 생명체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아무리 얼굴을 떠올려 보려고 해도 흐릿하게 지워진 것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이제 나에게 남은 건 이 동굴을 떠나서 세계의 끝을 향한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었고.
여행을 위한 짐은 이미 어젯밤 잘 꾸려서 동굴 밖에 놔뒀다.
이제, 출발만 하면 된다.
“후우, 그래. 이제 가자.”
“응.”
그렇지만 그 결정을 내리는 게 어찌나 두려웠는지.
원래 세계에서도 두려워서 방 밖으로 나가지 못한 녀석이 안락한 은신처를 버리고 낯선 세계를 탐험하는 건 무척 힘들었다.
비록 내 곁에 든든한 블랑카와 에포나가 있다고 해도 말이다.
천천히 블랑카와 에포나와 함께 숲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나는 마지막으로 내가 머물던 동굴을 뒤돌아 확인했다.
“포롱.”
저 바위산 위에서 내게 손을 흔드는 펭귄 녀석에게 나도 손을 함께 흔들어 주고.
나는 블랑카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굳이 숲속에서 블랑카의 체력을 더 소모할 필요도 없으니까.
어딘가 들뜬 듯 평소보다 더 폴짝거리며 돌아다니는 에포나를 가만히 바라보며 벌판으로 나간다.
그동안 블랑카가 숲 안에서 공포의 대상이 되어 온 것 때문인지 블랑카에게 덤벼드는 생명체는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어두운 숲의 끝자락이 보이기 시작했고.
블랑카의 머리색과 잘 어울리는 황금빛 벌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음. 역시 멋진 풍경이네.”
블랑카는 그런 벌판의 모습을 바라보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고.
나는 조용히 블랑카의 다리에 파워드 슈트 하체 부분을 착용시켰다.
“진짜 괜찮은 거 맞지?”
“이렇게 하체만 사용하는 거면 열이 그렇게 많이 발생하지 않아서 괜찮아.”
내 걱정 서린 의문을 블랑카는 아무렇지 않다면서 안심시키고, 자세를 굽혀 내가 등에 올라타기 쉽게끔 했다.
나는 그대로 에포나를 품에 꼭 껴안은 채로 블랑카의 등 위에 올라탔다.
“그럼, 출발한다!”
“어디, 어디를 붙잡으면 돼?”
“읏…… 그건…….”
블랑카는 순간 말문이 막혔는지 더듬거렸고, 나는 그사이에 파워드 슈트에 부착된 손잡이를 찾아냈다.
“그, 그냥 허리를…….”
“아, 손잡이 찾았다. 출발해도 돼.”
“그흐래?”
블랑카가 뭐라 말하려던 것 같지만, 곧바로 입을 다물고 귀를 몇 번인가 쫑긋거렸다.
그리고, 천천히 블랑카의 몸에 마력이 둘러지기 시작했다.
“오우…….”
마력은 블랑카의 몸을 강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어서 블랑카의 등에 실린 짐들까지 꽁꽁 옭아맨다.
에포나는 어느새 짐이 담긴 바구니 안에 폭 파묻혀서 안락한 여행을 즐길 준비를 끝마쳤고.
“그럼. 진짜 출발한다?”
이번에는 정말로 블랑카는 폭발적인 속도로 지면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진심으로 베헤모스에게 달려들 때만큼의 속도는 나지 않지만.
충분히 빠른 속도로 블랑카는 들판을 달려 나간다.
“너무 빠르면, 참지 말고 말해!”
“이. 정도면. 딱 괜찮아!”
“그래? 알겠어!”
이곳에 떨어진 첫날 순식간에 내 체력을 앗아 가던 뜨거운 열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느껴지는 건 오히려 선선해서 기분 좋게 느껴지는 시원한 바람.
순식간에 나와 블랑카가 머물던 숲이 자꾸만 작아져 가고.
이젠 완전히 백골로 변해 버린 베헤모스의 사체를 지나서.
어느덧 블랑카와 나는 밝게 빛나는 바다 한가운데에 도착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목적지는 보이지 않고, 서서히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블랑카와 나는 이쯤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하고 서둘러 근처의 풀들을 베어서 간단한 모닥불을 피웠다.
오늘의 식사는 베헤모스의 고기.
언제나 그렇지만, 사이코패스가 선물한 건 최대한 사용하고 싶지 않다.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언제나처럼 별다른 생각 없이 블랑카의 마사지를 끝내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다시 나는 꿈을 꿨다.
어제의 악몽처럼, 자각몽이지만 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꿈.
심지어 어제와는 달리, 내 마음대로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영화를 관람하는 듯한 마음으로 꿈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꿈의 배경은 무척이나 익숙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은 전혀 익숙하지 않았다.
일종의 학교처럼 보이는 기묘한 낯선 공간.
나는.
그러니까 내 시점이 빙의한 등장인물은, 이해할 수 없는 문자가 쓰인 책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문자를 바라보던 와중,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고.
내 감각을 무척이나 불쾌하게 만드는 향기가 코를 파고 들어왔다.
비릿한 피의 맛이 입안에서 느껴지더니.
아파.
내가 빙의한 등장인물이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사정없이 공격받기 시작했다.
미안해.
나는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책상에 엎드려서 고통을 감내하는 수밖에 없었고.
예전부터 이런 상황을 여러 번 겪어 왔던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아프다고.
나는 그저 단지 엎드려서 이 상황이 지나가길 바랄 뿐이었다.
이 고통이 내가 느끼는 고통인지, 등장인물이 느끼는 고통인지 모르겠다.
이젠 싫어.
내가 필사적으로 몸에 날카롭게 박히는 고통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감각이라고 속이려고 하지만.
날카로운 고통은 단 한 치의 거짓도 허용하지 않고.
그만할래.
나는 문득 주위의 풍경이 무척 익숙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늘 다니는 장소였고.
늘 당하던 일이었고.
늘 아팠다.
하지만.
늘 느껴지던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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