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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능 사전으로 살펴보면 바로 결과가 나오겠지만, 만약 결과가 이상하다면 나는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다.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는 거잖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동굴 깊숙한 곳에 촉수에게서 얻어 낸 고기를 놔뒀다.
좋아, 오늘은 고기 파티다.
슬쩍 주위를 둘러보며 고기를 구울 만한 적당한 돌을 찾아본다.
솔직히 나 혼자서 먹기는 어려울 양이지만, 남은 고기는 육포 비슷하게 만들면 되지 않을까?
육포 레시피를 만능 사전으로 찾아봐도 지금 내가 완벽하게 따라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대충 레시피들의 공통점을 찾아본 결과, 소금이 대량으로 들어간다는 건 알겠다.
맛을 신경 쓰지 않고 보관에만 신경 쓸 거라면, 그냥 소금물만 써서 육포를 만들어도 괜찮지 않을까?
지금 가지고 있는 소금의 양이 그렇게 부족한 것도 아니니까.
뭐, 사람이 먹지 못할 수준은 아니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불판으로 쓸 돌을 찾아내 다듬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 내게 중요한 건 장기간 먹을 음식이 아니다.
내게 필요한 건, 장기간 물을 보관할 방법과 벌판에서도 물을 구할 방법이다.
이 세계의 끝으로 가기 위해선 물을 구할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숲속으로 이동하는 거라면 그나마 물을 구할 방법이 있겠지만.
내가 가고자 하는 루트는 황금빛의 벌판이다.
숲을 통해서 빙 둘러서 세상의 끝까지 가려고 하면 도대체 몇 달 며칠이 걸릴지 모른다.
지금처럼 계속해서 사이코패스가 내게 먹을 걸 챙겨 준다는 보장도 없고.
내가 운반할 수 있는 음식의 양을 생각하면, 최대한 짧은 루트를 선택하는 게 맞다.
내가 맨 처음 이곳에 떨어졌을 때처럼 기온이 높지도 않으니 더더욱 벌판으로 나가야 한다.
물론 기온이 떨어졌다고 해서 손쉽게 내가 맨몸으로 벌판을 지나 세계의 끝까지 도달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니까 최대한 준비하고, 또 준비해서 출발해야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불판 준비를 끝마치고, 잠깐 호수에 다녀와서 소금물을 만들 물을 떠다 놓는다.
에포나는 어째서인지 오늘 동굴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무언가의 눈치를 보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끼잉…….”
뭐, 고기 냄새를 맡으면 알아서 밖으로 나오겠지.
적당히 정체 모를 고기를 돌칼로 잘라서 굽기 좋게 다듬는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모닥불 위에 올려 뒀던 돌 위에 물 몇 방울을 떨어트렸다.
치이이익.
수증기가 올라오며 돌판이 잘 달궈졌음을 알렸고, 나는 방긋 웃으며 서둘러 모닥불의 불을 껐다.
기름이나 버터 같은 건 없지만, 뭐 어때?
일단 고기를 굽기만 하면 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돌판 위에 잘 나눠 둔 고기를 올렸고.
치이이이익.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고기 굽는 냄새가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젓가락 같은 건 없기에 돌칼로 고기를 찍어서 뒤집는다.
이 정도면 충분히 익었겠다, 곧바로 한 입 고기를 베어 물고 싶었지만, 꾹 참고 소금을 조금 묻혀서 입안에 넣는다.
와, 대박.
내가 비록 한우를 많이 먹어 보지는 못했지만, 지금 먹는 이 고기가 한우보다도 더 맛있는 것 같다.
오랜만에 먹는 고기여서 그렇게 느껴지는지 몰라도 지금의 내겐 그 어느 음식보다 맛있게 느껴졌다.
정신없이 고기를 먹어 치우는 동안, 근처의 수풀이 살포시 흔들린다.
새하얀 광택의 갑옷이 수풀 안에서 엿보였지만, 나는 모른 척하고 고기를 먹는 데만 집중했다.
와구와구.
일부러 평소보다 더 소리를 내며 고기를 먹는 걸 잊지 않고 말이다.
기분 탓일까?
수풀 안에서 무언가 울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온 것 같다.
이제는 몸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빤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하얀 갑옷이었지만, 나는 여전히 갑옷을 모른 척하며 슬쩍 외쳤다.
“아, 이제 슬슬 배부른데?”
바이저 안의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었다면 환하게 빛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하지만 여전히 앞으로 나올지 말지 고민하는 기색은 역력해 보였고, 나는 방긋 웃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냥 버리는 것도 아까우니까, 너 먹을래?”
벌떡.
그런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온 것 같았고.
“흐, 흠. 네놈이 그렇게 말한다면…….”
나는 방긋 웃으며 바닥에서 폴짝거리는 푸른 점액에게 고기 몇 점을 떼어서 던져 줬다.
“으!”
푸른 점액이 기뻐하며 내가 하사한 고기를 몸 안에 흡수한 채로 총총 숲속으로 멀어져 갔다.
우뚝, 기쁜 기색으로 발을 놀리던 하얀 갑옷이 제자리에 멈춰 섰고.
나는 방긋 웃으며 하얀 갑옷의 기사를 반겼다.
“아. 안녕하세요? 식사는 하셨죠?”
나는 진심을 담아 인사를 건넨 거였지만, 기사는 내 인사를 받지 않고 제자리에 멈춰 서서 몸을 부들부들 떨 뿐이었다.
배는 이미 충분히 불렀지만, 나는 기사를 도발할 목적으로 에포나에게 주기 위해 남겨 둔 고기 일부를 질겅질겅 씹었다.
캬, 배가 불러도 역시 고기가 맛있긴 하네!
그 모습을 보며 기사는 역시 화가 났는지 버럭 소리쳤다.
“지금. 지금 나를 능멸하는 건가?”
“아뇨? 밥 먹을 때가 되어서 밥 먹는 건데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렇게 말한다.
기사는 여전히 힘이 넘쳐 나는 듯 쾅, 하고 발을 구르며 외쳤다.
“거짓말하지 마라, 이 무뢰한! 분명히 나를 눈치채고……!”
“저는 기사님처럼 눈치가 좋지 못해서요. 바로 뒤에 맹수가 있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랍니다?”
천연덕스럽게 기사의 분노를 흘려 넘기고,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역으로 기사에게 질문했다.
“그런 저와는 다른 잘난 기사님인데 여긴 무슨 일이신가요?”
단순히 내 손의 칼끝만 봐도 기사가 내게 이끌려 온 이유를 알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짐짓 모른 척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기사의 시선이 잠깐 칼끝의 고기로 향했다 다시 내 얼굴로 돌아온다.
그러고는 아직도 자존심을 굽히기 싫은지 홱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수, 숲을 순찰하다 연기가 피어올라서 무슨 일이 난 게 아닌가 와 봤네! 자네 같은 무뢰한이라도 지키는 게 내 사명이니 말일세!”
“아, 그러시구나. 뭐 순찰하면서 발견한 건 있어요?”
“아무것도 없었지. 하지만 나는 지금도 나를 지켜보고 있을 신께 충분히 흡족한 모습을 보였다고 생각하네.”
당연히 아무것도 없겠지.
그 점액 녀석이 숲에서 생명체란 생명체는 죄다 먹어 치웠는데.
“아, 신께 뭐 기도라도 하셨나요?”
“그래, 그랬지.”
빈정거리는 말투로 그렇게 말해 봤지만, 하얀 기사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 대답은 돌아왔나요?”
“돌아오지 않았네. 지금껏 이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말이야.”
그야 그렇겠지.
지금 여기에서 우릴 내려다보는 건 지금까지 댁이 믿어 온 신이 아니라 정체 모를 사이코패스니까.
나는 적당히 하얀 기사와 대화하며 미리 만들어 둔 소금물에 남은 고기를 푹 담갔다.
그 모습을 보며 기사는 헛기침을 하며 슬며시 본론을 꺼냈다.
“크흠. 그래서 말인데, 자네. 보아하니 육포를 만들 생각이군?”
“뭐, 그렇죠.”
“그렇다면 내가 도와주겠네. 육포를 만드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 대신, 내게도 양식을 조금만 나눠 주면 좋겠네.”
얼씨구.
고기를 굽는 동안에 머리를 한참 굴리긴 한 모양이다.
이렇게 거래를 걸어오려고 하는 걸 보니 말이다.
하지만 말이야, 원래 거래 커맨드는 우호도가 일정 이상으로 올라간 상대에게만 쓸 수 있는 법이다.
“아, 그러시구나?”
“그래. 그러니까…….”
“싫은데요?”
제안을 거절당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지 기사의 몸이 순간 굳는다.
“어제 그렇게 말해 놓으시고 뻔뻔하게 먹을 걸 얻어먹으시려는 건 아니죠? 무려 천것한테?”
“그, 그때의 일은 미안했네. 자네가 마법을 쓰는 줄 알고 민감하게 반응했다네.”
“심지어 먼저 공격도 하셨었잖아요. 마력도 없는 저한테.”
“그래. 이제 보니 알겠군. 자네는 마력을 숨기고 있던 게 아냐. 하지만 그런 상황에선 누구든지 자네가 마력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을 걸세!”
우물쭈물.
기사는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슬쩍 변명 섞인 사과를 해 왔다.
자기 자신도 어제 내게 했던 말이 좀 지나쳤다는 걸 아는 걸까?
“하지만 확실히 내가 신께 부끄러운 발언을 했다는 것도 사실이지. 어제의 일은 분명한 내 잘못이네.”
기사는 꾸벅 내게 고개를 숙이며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서 다시 한번 사과했다.
“그러니 부, 부탁하네.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나눠 줄 수 있겠나?”
고개를 숙이며 내게 먹을 것을 나눠 줄 것을 부탁하는 기사.
이 정도면 꽤 괜찮은 사과와 부탁이었다.
하지만 기사가 잘못 판단한 게 있다.
내가 뒤끝이 생각보다 좀 세다는 점이었다.
나는 잠깐 곰곰이 뭔가를 생각하는 척하다 환하게 웃으며 기사의 부탁에 대답했다.
“싫은데요?”
뭐, 내가 싫다는데 어쩔 거야?
23화 리베리아산 인간 품종을 모두 정리해 봤습니다. 서열 정리 2일 차
솔직히 말해서, 나는 어제 거의 죽을 뻔했다.
나를 죽일 뻔한 녀석이 고개 숙이고 사과했다고 그냥 순순히 사과를 받아 줄 만큼 마음 착한 녀석이 아니라는 거다.
아직도 어제의 일을 떠올리면 에포나를 쓰다듬고 싶어지지만, 나는 간신히 욕구를 억누르며 비아냥거렸다.
“사과 잘하시네요. 명문이에요, 명문. 사과문의 표본으로 박제해서 전시해도 될 정도네요.”
내가 대놓고 비꼬는 기색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기사를 칭찬하자, 기사가 발끈하며 내게 다가왔다.
“지금. 지금까지 나를 능멸한 건가?”
“능멸한 건 아니고요. 제가 어제 절 죽일 뻔한 사람에게 뭘 주기가 싫어서요.”
터벅터벅.
기사가 잔뜩 분노한 채로 내게 다가오지만 투명한 벽에 가로막힐 뿐이다.
기사는 주먹으로 투명한 벽을 쳐 보지만, 투명한 벽은 뚫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늘 물을 뜨러 가며 어제 기사와 나 사이에 투명한 벽이 나타나던 위치를 살펴봤을 때 깨달은 건데.
투명한 벽은 아마 저 기사와 내가 접촉하려 할 때만 나타나는 것 같다.
어제 투명한 벽이 있던 자리로 가 보니 아무 흔적도 남지 않았거든.
기사는 분을 삭이지 못하는지 연거푸 투명한 벽을 걷어찼고.
나는 기사가 더욱 화나도록 깜짝 놀라는 리액션을 취해 줬다.
내가 그렇게 기사를 놀리던 사이, 하얀 갑옷 사이의 틈새에서 수증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기사는 내키지 않는 모습으로 내게서 등을 돌려 숲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라, 기사님. 먹을 건 필요 없으시나요?”
“자네 같은 무뢰한에게 얻어먹을 음식 따위는 없네!”
쩝, 너무 놀렸나?
굶어 죽는 사람을 눈앞에서 방치하는 것도 좀 그러니 다음번에 찾아왔을 때는 그만 용서해 줘야겠네.
그나저나 진짜 사이코패스는 무슨 의도로 여기에 저 기사를 풀어 둔 거지?
나 혼자 발버둥치는 건 이제 질려서 신을 찾으며 발버둥치는 기사를 보고 싶었나?
그나저나 저 기사도 참 독하긴 하다.
이 상황에서 기도도 하고 그렇게나 신을 찾다니.
그런데 기사의 말을 들어 봐선 기사가 있던 세상에선 진짜로 기도를 들어주는 신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럼 슬슬 자기가 믿던 신과 자신을 납치한 놈이 다른 녀석이라는 걸 알 때가 되지 않았을까?
나라면 그렇게 생각할 텐데, 저 기사는 자신이 신께 부끄러운 짓을 저질렀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여전히 여기가 신들의 전장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언젠간 저 기사와 날 잡고 한번 이야기를 해 봐야겠다.
사이버펑크 판타지 세계의 이야기가 궁금하기도 하고 말이야.
기사를 괴롭혀서 기분도 좋겠다, 맛있는 고기도 먹었지.
거기에 에포나도 어째서인지 오늘은 내 품에 안겨 온다.
오늘 밤은 편안하게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에포나를 쓰다듬으며 잠자리에 들었다.
* * *
빌어먹을 천것 같으니라고.
감히 나를 이렇게 능멸해?
나는, 나는 켄토르란 말이다.
신들이 붙여 준 가문명을 갖고 있는 신들의 혈통인데.
감히 마력조차 없는 천것이 나를 능멸해?
블랑카는 그렇게 투덜거리며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숲속을 계속해서 걷고 또 걸었다.
이쯤이면 보이지 않겠지.
그렇게 생각한 블랑카는 천천히 자신의 얼굴을 가리는 투구를 벗어 던졌다.
쫑긋거리는 귀가 차가운 밤공기에 노출되며 부르르 떨렸고.
밤공기가 갑옷 안으로 들어오며 끔찍한 더위를 한결 낮춰 준다.
후.
블랑카는 지금 당장 나머지 갑옷도 모조리 벗어 던지고 싶었지만, 어떠한 적이 덮쳐 올지 모르기에 투구를 벗고 마갑의 기능을 정지시키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쫑긋.
귀를 한가득 세우고 다른 생명의 기척을 탐지해 본다.
방금 떠나온 원시인을 제외하면 그 누구의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마치 이 드넓은 숲속에 자신 혼자 남겨진 것 같다.
신들의 전장의 이야기는 그동안 질리도록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이렇게 와 보니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신들의 전장에 불려 갔다 돌아온 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도대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정적이 뭐가 두렵냐고 생각했는데.
당연하게 여겨 왔던 것들이 느껴지지 않는 감각은 블랑카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두려움이 차오르며 공포가 되어 가고, 블랑카는 숨을 몰아쉬며 꼬리를 내리쳤다.
고작 이런 것으로 꼴사납게 겁에 질릴 수는 없다.
지금까지 잘해 왔잖아.
언제나 가면을 쓰고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해 왔다.
남들에게, 남들에게 절대로 얕보이면 안 돼.
블랑카는 그렇게 각오를 다지며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몸에 무척이나 무리가 가는 자세이기 때문에 통증이 느껴졌지만, 오히려 좋다.
욱신거리는 통증이 공포와 배고픔을 잊게 해 주니까.
“전능하신 리베리아시여. 제가 가야 할 곳을 인도하고, 당신의 신도를 가엽게 여겨 주소서…….”
블랑카는 무릎 꿇고 리베리아에게 기도를 올렸지만, 리베리아가 응답하는 일은 없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기에 블랑카는 더욱 심한 공포를 느꼈지만, 그 사실을 부정하려는 듯 계속해서 기도문을 외웠다.
“전능하신 리베리아여, 전능하신, 전능하신 리베리아여. 부디, 부디 제게 응답을…….”
거의 울부짖듯 블랑카의 기도가 이어졌지만.
블랑카의 신은 여전히 그녀에게 응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블랑카는 필히 신이 보냈을 것인 환영을 보았다.
“어머니? 아버지?”
다시 리베리아로 돌아온 듯한 환상을 본 블랑카는 손을 휘저으며 환상 속의 부모님의 발을 붙잡았다.
“아니에요. 돌아온 게 아니에요. 죄송해요! 보세요, 저는 여기 있어요! 저는 신들의 전장에 도착했다고요! 아버지 말대로 신님의 눈에 띄었어요!”
블랑카가 애타게 부모님을 불러 봐도 환상이 대답하는 일은 없고, 블랑카 앞에 나타난 환상은 매몰차게 블랑카를 버리고 떠나갔다.
이윽고 환상이 끝났지만, 블랑카는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삐걱.
어디선가 무언가 틀어지는 소리가 들린 듯했다.
* * *
꿈틀거리는 무언가가 내 위에서 움직이는 감촉이 느껴진다.
눈을 비비며 짚더미에서 일어나 보니 에포나가 아침부터 내 위에 올라와 있었다.
“왕!”
“그래. 잘 잤다.”
얼굴을 핥으려 하는 에포나를 떼어 낸 뒤, 소금물에 담가 둔 고기를 확인해 본다.
음. 잘 스며든 건가?
하룻밤 동안 소금물에 담가 놨으니 잘 스며들긴 했겠지.
그럼 이제 남은 건 이걸 삶거나 굽는 건데.
아무래도 소금물로 한 번 더 삶는 게 낫지 않을까?
그게 훨씬 고기를 손질하기도 쉬울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이렇게 해서 탄생할 고기의 맛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겠지.
원래 레시피에서 맛을 담당하는 부분의 상당수가 빠져나가고 순전히 고기를 오래 저장하는 것만 신경 쓴 거니까.
중세 시대를 묘사한 웹 소설에 가만 보면 널빤지 같은 육포라는 표현이 쓰이는 걸 본 적이 있는데 그런 맛이 나려나?
오늘도 촉수가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지 조심히 살피며 밖으로 나왔지만, 오늘은 촉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젠 뭔가 아침부터 촉수가 모습을 보이는 게 더 마음이 편할 것 같은데.
아침부터 촉수가 보이지 않으면 항상 저녁이나 밤이 되어 갈 때쯤 이상한 걸 가져와서 내게 시켰으니까 말이다.
일단 씻으러 갈까.
언제나처럼 젤리를 챙겨서 에포나와 함께 호숫가로 향하던 와중 어제의 기사가 떠올랐다.
생각해 보니 2일 연속으로 아무것도 먹지 못한 건데, 조금이라도 나눠 줄 걸 그랬나?
만약 오늘 다시 마주하게 되면 먹을 것을 미끼로 그 신들의 전장이 무엇인지 이야기를 들어 보자.
오늘 일정은 씻고 통나무를 가공해서 나무 냄비를 만드는 건가?
육포를 만들고 남는 시간엔 적당히 고무나무를 찾으러 가면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호숫가에 도착하자, 평소와 호숫가의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다.
어째서인진 몰라도, 호숫가에 짙은 안개가 자욱하게 피어 있었다.
다른 곳에 안개가 핀 곳은 없었는데 어째서 호숫가에만 안개가 피었지?
그렇게 의아해하던 순간, 안개 너머로 사람의 모습이 엿보였다.
기사도 호숫가에 씻으러 온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무심코 한 발자국을 내디딘 순간.
“후우…….”
때마침 목욕하고 있었는지 갑옷을 벗은 기사의 몸이 눈에 들어왔다.
당연히 기사 또한 나를 눈치채고, 얼굴을 붉히며 가슴을 손으로 가렸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진 얼굴로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만 볼 뿐이었다.
“뭐, 뭘 그렇게 보는 거야!”
기사가 서둘러 몸을 내게서 돌리고 옷을 갈아입으며 버럭 화를 낸다.
무언가 투구를 쓰고 있었을 때하고 말투가 달라진 것 같지만,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나는 경악한 표정으로 기사의 몸을 가리키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켄타우로스?”
짐승의 뾰족한 귀가 기사의 머리 위에서 쫑긋거린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놀라운 건, 기사의 하반신이 인간의 것이 아니라 말의 하반신이었다는 것이었다.
물에 젖어도 윤기가 번지르르하게 흐르는 황금빛 털과 화난 것처럼 마구 흔들리는 꼬리가 내 앞에서 당당히 존재감을 뽐낸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신화나 만화 속에서나 나오던 켄타우로스가 내 앞에서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기사가 여자였다는 것도 놀랐지만, 켄타우로스였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분명히 갑옷을 입고 있었을 땐 다리가 2개였는데?
뭐지? 다리를 아공간에 집어넣기라도 했었나?
내가 그런 순수한 의문을 품고 있는 사이, 새빨갛게 물든 기사의 입에서 어이없다는 듯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천치도 신의 혈통은 알고 있는 모양이지?”
“신의 혈통?”
신의 혈통?
그건 도대체 또 뭔데?
아마 문맥으로 파악해 보자면 대충 켄타우로스라는 이름이 저 기사의 가문을 나타내는 거 같은데.
내가 의아해하는 사이, 눈앞의 기사는 평정심을 되찾았는지 어제 들었던 말투로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소개했다.
“나의 이름은 켄토르 블랑카! 자랑스러운 신의 혈통의 후계자! 원래라면 네놈 따위가 말을 걸 수도 없는 상대다!”
켄토르 블랑카.
그러니까 이름은 블랑카겠지?
자신을 블랑카라고 소개한 기사는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내 손에 들린 젤리로 향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그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것 같은데, 이걸 미끼 삼아서 이야기를 더 나눠 보자.
블랑카에게 내가 가지고 있던 원한은 어제 블랑카를 실컷 놀려 먹은 걸로 거의 다 해소됐으니까.
오히려 지금은 나보다 블랑카가 나에게 가진 원한이 더 많을걸?
“그렇게 튕기지 말고, 대화나 해 보자. 블랑카.”
“친한 듯 이름을 부르지 말아라! 또다시 나를 능멸할 생각인가!”
“어제는 미안했어. 화풀이가 좀 지나쳤다고 인정해. 그래서 사과의 뜻으로 먹을 걸 좀 가져왔어.”
블랑카는 또다시 투덜거리지만, 내가 슬쩍 먼저 굽히는 태도를 보이자 슬며시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흠. 기본적인 예의는 갖춘 것 같군.”
그나저나 도대체 저 말투는 어디서 배운 걸까?
갑옷을 입고 있을 때면 모를까, 지금 상태로는 어울리지 않는 걸 넘어서 우스꽝스럽다.
“그래. 도대체 뭐가 궁금하지?”
“신들의 전장이라는 건, 도대체 뭘 뜻하는 거야? 비유적인 의미? 아니면 말 그대로의 의미?”
“나는 자네가 이런 질문을 하는 의도를 도저히 모르겠군.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아는 기본적인 지식이 아닌가?”
“놀랍게도 나는 네 세상 사람이 아니어서 말이야.”
내 대답에 블랑카는 잠깐 인상을 찌푸렸다가, 곧바로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런가. 자네는 다른 세계에서 불려 온 전사로군? 뭐, 도저히 전사처럼 보이진 않지만 말이야.”
“뭐, 그래서 그런 거니까. 좀 자세히 설명을 해 봐.”
내 재촉에 블랑카는 잠시 목을 가다듬고는 신들의 전장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크흠, 신들의 전장은 말 그대로 신들이 자신의 마음에 든 투사들을 영원히 싸우게 하는 장소를 뜻하네. 물론 영원히 싸우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 지상에선 찾아볼 수 없는 안락한 휴식도 제공하지.”“뭐, 저승 세계 같은 개념이야?”
“아니. 신들의 전장은 살아 있는 채로 가는 곳일세. 보통은 죽기 직전의 전사들이 선택되긴 한다만.”
허어.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참 기묘하네.
아무리 봐도 저승 세계를 뜻하는 단어 같은데 살아 있을 때 가는 장소라니?
블랑카의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내 마음속에 세워 둔 가설에 힘이 실렸다.
“그런데 신들의 전장이 어떤 곳인지는 어떻게 아는 거지? 영원히 싸우게 된다면 다시는 지상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거 아냐?”
“안타깝게도, 신들의 전장에서 훌륭한 활약을 보이지 못하면 실망한 신들에 의해 다시 지상으로 돌아오게 된다네.”
흠.
정리해 보자.
블랑카의 세계에는 신들의 전장이라는 개념이 있고, 실제로 신들의 전장이라는 장소가 존재한다.
그 신들의 전장이란 장소는 자칭 신이라는 놈들이 잘 싸우는 전사를 선택해서 영원히 싸우게 하는 장소.
하지만 만족할 만한 싸움을 보여 주지 못한 전사는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이 블랑카라는 녀석의 말투로 봐선 신들의 전장에 올라가는 게 이 녀석의 세계의 가장 큰 명예라고 생각되는데.
그리고 블랑카는 현재 자신이 있는 장소를 신들의 전장이라고 생각한다.
대충 이 정도인가?
“그래서 너는 여기가 신들의 전장이라고 생각한다는 거. 맞지?”
“그렇다네. 분명히 내 영웅적인 모습이 심히 인상적이었던 게 틀림없어.”
“그런데 기도해도 신이 응답하지 않는다며? 뭐, 밤사이에 응답하기라도 했어?”
아픈 부분을 찌른 건가?
내가 어제 블랑카가 흘린 말을 지적하자, 블랑카는 입술을 꽉 깨물며 자신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내가…… 내가 그분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겠지. 하지만 괜찮아. 좀 더 잘한다면, 다시 나를 봐주실 거야.”
홱.
블랑카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대화의 주제를 바꾸려는 듯 내게 손을 내밀며 먹을 것을 요구했다.
“자네의 질문에 대답할 만큼 한 것 같군. 이제 자네가 약속을 지킬 차례네.”
“그래. 그래. 여기 있습니다요.”
툭.
바닥에 젤리를 던지는 것으로 투명한 벽이 나타나지 않게끔 하고.
블랑카는 서둘러 바닥에 떨어진 젤리를 주웠다.
분위기로 봐선 질문 몇 개에 더 대답해 줄 거 같은데, 슬쩍 더 물어볼까?
“그럼…….”
내가 슬며시 블랑카에게 질문을 더 던지려고 한 순간, 예상치 못한 소리가 블랑카의 배에서 들려왔다.
꼬르르륵.
무척이나 배고픈 듯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블랑카는 얼굴을 또다시 새빨갛게 물들였다.
“더, 더는 네놈과 대화를 하기 불쾌하군! 이제 돌아갈래!”
얼마나 당황했으면 각기 다른 말투를 섞어서 쓸까?
블랑카는 호수에서 열을 식히던 파워드 슈트 안으로 몸을 집어넣으려 서둘러 네발을 놀렸다.
블랑카가 슈트 안으로 들어가려 한 순간, 갑작스럽게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잠깐, 이건 설마……?
낯익은 압박감이 느껴지는 것과 함께 허공에 촉수가 나타났고, 촉수 끝자락에서 젤리들이 후드득 떨어져 내 주위에 떨어졌다.
갑자기 또 왜 나타난 거지?
내가 이번엔 뭘 했다고 젤리를 주는 거야?
내가 그렇게 의아해하고 있던 찰나, 블랑카의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베리아 님……?”
허탈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한 얄팍한 목소리.
내가 블랑카의 목소리에 의아해하며 시선을 블랑카 쪽으로 향하자.
다시 파워드 슈트를 입고 서둘러 숲속으로 달아나듯 뛰어가는 블랑카의 모습만이 보였다.
갑자기 도대체 왜 저러는 걸까?
내가 그 모습을 보며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촉수는 만족스러운 듯 흔들리며 허공으로 사라졌고.
나는 멍하니 바닥에 떨어진 젤리들을 주섬주섬 챙길 뿐이었다.
설마 하지만, 이 사이코패스를 자신이 믿던 신으로 착각하기라도 한 걸까?
아니, 어쩌면 진짜로 이 사이코패스들이 저 녀석의 세계에서 믿던 신일 가능성이 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신들의 전장이라는 장소는 내가 있는 곳 같은 장소를 말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어쩌면 내게 일어난 일은 블랑카의 세계에서는 일상생활처럼 일어나던 일이 아니었을까?
그렇기 때문에 신들의 전장이라는 전설 아닌 전설이 생겨난 것이고.
하지만 아직까지 이 모든 건 추측일 뿐이고 좀 더 정확한 정보를 알려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블랑카에게 들어야 한다.
블랑카를 쫓아가서 이야기를 들어 볼까?
아니, 무리다.
켄타우로스를 내가 어떻게 추격해?
다음번에 다시 만났을 때 한 번 더 먹을 걸로 꼬셔 보는 게 제일 낫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일단 동굴로 돌아왔고.
그날 밤.
“죄송, 죄송합니다……! 저, 저, 저 따위가 신의 사도에게 까불어서!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나는 울상이 된 채로 동굴 앞에서 내게 무릎 꿇고 사죄하는 블랑카를 만날 수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24화 리베리아산 인간과 잉간이가 친구가 됐어요! 서열 정리 종료!
통나무 속을 파내서 조잡한 냄비를 만들고, 그 안에 물을 담고 모닥불 위에 올린다.
냄비가 탈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이번 한 번만 쓰고 버릴 생각이니 망가져도 괜찮다.
이제 슬슬 나무 그릇이 아니라 흙 그릇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 근처의 흙은 죄다 부엽토나 그냥 모래다.
부엽토로는 당연히 만들지 못하겠고, 모래로 그릇을 만들 수 있나?
날이 밝으면 점토를 어디선가 구해 와서 그릇을 만들어야겠다.
그렇게 다짐하며 나무 냄비가 타지 않게끔 잘 지켜본다.
다행히도 거대한 고기가 잘 삶아질 때까지 계속해서 물을 부은 덕분일까?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고기를 모두 익히는 데 성공했다.
이제 남은 건 삶은 고기를 찢어서 말리는 것뿐.
근처에 널린 바위들 위에 고기를 찢어서 올려 둔다.
새 같은 게 없으니 누군가가 훔쳐 갈 걱정도 없으니 안심이다.
조심스럽게 슬쩍 고기 한 점을 주워 먹어 본다.
짭조름한 맛이 입안에 확 퍼지며 물이 당긴다.
진짜 말 그대로 저장 기간을 늘리기 위해서 모든 걸 포기한 맛이네.
물을 마시지 않으면 2개 이상은 먹는 게 불가능하겠다.
물에 담가서 소금기를 한 번 정도는 씻어 내야 하려나?
그랬다간 이렇게 염장을 한 의미가 사라지지 않을까?
일단 지금의 나로서는 이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육포 만들기를 끝마치자 날은 벌써 어둑어둑해졌다.
육포를 만들며 고기를 조금씩 주워 먹었기 때문인지 배는 그리 고프지 않았다.
짠 기 때문에 물을 워낙 마시기도 했고.
그럼 이제 슬슬 잘까.
그렇게 생각하며 동굴 안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누군가가 와장창 바닥에 나뒹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으극…….”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니 갑옷을 벗고 있는 상태의 블랑카가 머리를 문지르고 있었다.
내가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 있자, 블랑카는 비틀거리며 두 발로 일어섰다.
두 발?
인간형 모습이었던 건 갑옷의 기능이 아니었던 걸까?
“왕!”
에포나는 그런 블랑카를 바라보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짧게 짖었지만, 블랑카는 에포나를 눈치채지 못한 듯하다.
“아, 안녕하세요…….”
두 발로 서는 건 그리 익숙하지 않은지 블랑카의 다리가 부들부들 떨린다.
꾸벅.
전에 나와 비아냥을 주고받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마치 갓 세상에 나온 아기 양처럼 바들바들 떠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온다.
“어, 어…….”
블랑카가 이런 식으로 굽힐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기에 당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도대체 왜 블랑카가 이러는지 파악하기도 전에, 블랑카는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내 앞에 엎드렸다.
“죄송, 죄송합니댜……! 져, 저, 저 따위가…… 신의 샤도에게 까불어서!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블랑카의 입에서 터져 나온 사죄의 말은 절박함이 가득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된 걸까?
놀라움보단 동정심이 느껴질 정도로 정신적으로 몰려 있는 모습이다.
“죄송합니다……. 그러니 제발 버리지 말아 주세요…….”
나에게 하는 게 아니라 저 너머의 누군가에게 하는 듯한 애원.
나는 도대체 어떻게 블랑카를 대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아 블랑카의 흐느낌이 잦아들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이윽고 격렬하게 흔들리던 블랑카의 등이 좀 잠잠해지자, 나는 대충 말리던 육포 하나를 블랑카에게 던져 줬다.
“일단 좀 내가 알아듣게 말해 봐.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하다니 해도 딱히 와닿지 않으니까.”
“네에…….”
우물우물.
블랑카는 내가 던져 준 육포를 우물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기…….”
“왜?”
“실례가 안 되면 갑옷을 입어도 될까요? 갑옷이 없으면 안심이 안 돼서……. 투구만이라도 좋으니까요.”
“……그래.”
이대로 놔두면 평생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듣지 못할 것 같아 나는 적당히 허락해 줬다.
블랑카는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바닥에서 일으켰고, 잠시 수풀 안을 뒤적거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못난 모습을 보였네요. 사도님.”
곧바로 지난번에 봤던 하얀 바이저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나타난 블랑카의 모습은 전에 비하면 무척이나 안정되어 보였다.
물론 나를 영문 모를 호칭으로 부르는 건 여전했지만 말이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아서 블랑카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 신의 사도가 도대체 뭐야? 왜 날 그렇게 부르는 거야?”
나는 가장 먼저 지금까지 제일 거슬렸던 호칭 문제를 언급했다.
그 전까지는 천것이니 이것이니 이렇게 부르다가 갑자기 신의 사도라니.
천것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신의 사도도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사도님을 사도님이 아니면 어떻게 부르나요?”
“이름이 있잖아. 이름. 부모님이 지어 주신 멋진 이름.”
“그럼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사도님의 이름을 들을 수 있을까요?”
그러고 보니 통성명을 한 건 블랑카뿐이었구나.
그러고 보니 이곳에 떨어져서 내 이름을 누군가에게 밝힌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네.
이름을 밝히는 것 정도야 뭐, 상관없지.
“이름? 내 이름은 잉간이야. 잉간.”
“잉간, 요?”
내 이름을 들은 블랑카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한다.
블랑카는 곧바로 자신이 표정 관리를 못 했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수습에 나섰다.
“어, 어. 참 멋진 이름이네요!”
“글쎄? 나는 평범하다고 생각하는데.”
잉간이면 아주 평범한 이름이 맞지.
거의 김철수랑 맞먹는 급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던 와중, 문득 무언가 불쾌한 감각이 들었다.
뭘까?
무언가 어긋난 듯한 감각인데.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불쾌감의 원인은 찾을 수 없었고, 나는 적당히 흘려 넘기기로 했다.
“그럼 잉간 님이라고 부르면 되나요?”
“그냥 잉간이라고 불러. 님 자는 너무 과해.”
“알겠습니다. 잉간.”
사실 마음 같아서는 존댓말도 하지 못하게 하고 싶은데.
그것까지 하지 못하게 하는 건 무리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블랑카에게 가장 묻고 싶던 걸 물어봤다.
“도대체 뭔 일이 있었길래 갑자기 이러는 건지 제대로 설명해 봐.”
아까 호숫가에서 헤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상태가 그리 나쁘지 않아 보였는데, 어째서 갑자기 이렇게 된 걸까?
문득 촉수가 나타나서 내게 젤리를 줄 때 굳어 있던 블랑카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 질문을 받은 블랑카는 가만히 고개를 숙이더니, 한탄하듯 내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리베리아 사람들은 모두 신을 섬겨요. 신을 믿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정도로 힘들기도 하고, 신이 직접적으로 능력을 내려 주기도 하니까요.”
응. 전형적인 판타지 세계관이네.
“물론 저 또한 신께 기도를 올리는 게 습관처럼 굳어졌고, 리베리아 님 또한 언제나 제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와서는 아무리 기도를 해도 신이 응답하지 않았다. 뭐 그런 거야?”
“맞아요. 아무리 기도를 해도. 몇 번을 기도해도 리베리아 님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유일하게 한 번 응답을 받았을 땐, 저를 질책하는 내용이었어요. 분명히 제가 무언가를 잘못했던 거겠죠.”
흠.
매번 신의 응답을 받는 게 일상이었던 사람이 신의 응답을 받지 못한다면 버려졌다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려나?
그것까진 이해했다.
하지만 어째서 나를 신의 사도라고 부르는 걸까?
“그야 잉간 님이 신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까요.”
“신의 사랑? 하, 사랑? 괴롭히는 거라면 몰라도 사랑을 받고 있다고?”
신의 사랑은 개뿔.
무슨 좋아하니까 괴롭힌다는 어린아이의 논리도 아니고.
사랑해서 시련을 내린다는 그 개 같은 논리는 제발 꺼내지 말았으면 좋겠다.
“신들의 전장의 주인의 보살핌을 받고 있는데, 그게 신의 사랑을 받는 게 아니면 뭐겠어요?”
“한 가지 틀린 게 있는데, 여긴 신들의 전장이 아니고, 단순한 사이코패스가 만든 장난감 상자야. 알아듣겠어?”
“아뇨. 여기는 신들의 전장이 맞아요. 이곳에서 생활하시면서 느끼시지 않았나요? 하고자 하는 일이 전부 이뤄진다는 걸요?”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블랑카의 말을 듣고 곰곰이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떠올려 본다.
아무리 만능 사전의 도움이 있었더라도 맨몸의 백수가 아무것도 없이 불을 피우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해냈다.
주먹도끼를 만들 때도, 간석기를 만들 때도 그랬다.
내가 노력한다고 해도 불가능했을 일이,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건, 내가 노력했기 때문이 아닌가?
모닥불의 불꽃이 일렁거린다.
“리베리아 님은 전능하세요. 그러기에 모든 일이 그분이 바라시는 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니까, 너는 지금 리베리아인지 뭔지 하는 신이 내가 잘되길 바라서, 내가 하는 일이 전부 다 잘됐다는 거야?”
“네, 바로 그거예요!”
도대체 뭔 소리인지 이해가 가질 않네.
내가 지금까지 해 왔던 일 전부 다 신이라는 놈이 원해서 이루어진 거라고?
하, 그럴 리가.
나는 그렇게 블랑카의 말을 속으로 부정했지만,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다.
이런 종류의 문제는 어차피 믿음의 문제여서 내가 뭐라고 해 봤자 블랑카의 생각이 바뀔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슬슬 블랑카의 생각이 이해되는 기분이다.
나는 신의 사랑을 받는 존재였고, 자신은 그런 존재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따라서 자신은 신께 잘못을 저질렀고, 신이 응답하지 않는 건 자신의 잘못 탓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잘못을 사과해야 한다.
아마 이런 식으로 머릿속에서 사고 회로가 돌아간 게 아닐까?
어떤 식으로 생각이 움직였는지는 이해할 수 있겠다.
하지만 도저히 공감은 하지 못하겠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이, 블랑카는 고개를 푹 숙이며 중얼거렸다.
“이대로 있으면 저는 분명 신께 추방당할 거란 말이에요. 저는 신들의 전장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
“추방당하면 좋은 거 아냐?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거잖아?”
추방된다는 게 만약 사실이면 제발 날 추방해 줬으면 좋겠다.
싸움도 못하고 생존도 못하고 마법도 못 쓰는 놈을 관찰하는 게 도대체 무슨 재미라고?
그렇지만 블랑카의 생각은 나와 다른 모양이었다.
“신께 추방당한다니, 그런 수치가 어디 있어요? 신들의 전장으로 돌아가는 게 저희 가문의 염원이었는데, 간신히 돌아왔는데! 잘못을 저질러서 다시 추방당할 수는 없어요.”
“돌아와? 여기가 고향이라도 되는 듯이 말한다?”
블랑카의 말만 들어선 리베리아가 아니라 이곳이 고향이라는 느낌인데?
그리고 그 느낌은 틀린 게 아니었는지 블랑카는 자신의 가문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네, 맞아요. 저희 가문은 원래 신들의 전장 출신이에요. 그게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위대하신 선조님의 말씀이니 아마 사실이겠죠.”
“허어.”
블랑카는 그대로 때아닌 리베리아의 역사 강의를 시작했다.
리베리아의 모두가 언데드들의 무리에 맞서 싸우는 상황이었고, 그 가운데 가문의 선조가 신들의 전장에서 추방당해 리베리아에 도착했다는 것.
그리고 가문의 선조는 뛰어난 무용으로 공을 세우며 리베리아의 귀족이 되었다는 것.
리베리아의 신들의 전장이라는 전설을 듣고 그곳이 자신이 온 곳이라고 선조님이 깨달았다는 것.
선조는 죽을 때까지 다시 신들의 전장으로 돌아가길 원했고, 가문 대대로 신들의 전장에 불려 가는 걸 숙명으로 삼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신화 속에서 신들의 전장에 불려 간 이들을 닮기 위해 교육받아 왔다는 것.
“저는 켄토르예요. 제가 켄토르인 이상, 저는 가문의 명예를 드높여야 해요. 지금까지는 잘 그러지 못했어요, 늘 먹칠만 해 왔다고요. 그런 제가 간신히 신들의 전장에 도착한 거라고요!”
블랑카는 그렇게 투덜거리며 육포를 우물거리며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마치 술을 마시고 주정을 부리는 듯한 모습이다.
술은 없지만 분위기에 취한 걸까?
아니면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는 걸 그리워하고 있던 걸까?
나 또한 블랑카가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는 것에 맞춰서 내 부끄러운 과거를 가감 없이 털어놓기 시작했다.
“얀마, 너는 뭔가 하려는 의지가 있었지. 나는 그런 것도 없이 그냥 방에서 썩어 가는 인생이었어!”
평범한 가정에서, 평범 이하의 삶을 선택했던 나의 인생.
남에게 들려주기엔 그리 좋지 않은 이야기고, 들려주고 싶지 않은 흑역사지만.
그래도 나는 블랑카에게 내 과거를 이야기했다.
블랑카가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했으니 나 또한 이야기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으니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한다는 건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술 하나 없이 잔뜩 취한 블랑카와 나는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고 또 나눴다.
블랑카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서로 간에 존댓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솔직히 말해서 답답해! 선조님의 숙명이든 뭐든 다 때려치우고 싶어!”
“그럼 때려치워! 나는 공부를 때려치워서 인생이 망했지만. 너는 하나 정도 때려치워도 그리 인생이 망할 거 같지 않은데?”
“그래도 때려치우긴 싫은걸? 때려치우고 싶지만 때려치우긴 싫다는 거, 공감해?”
“공감은 못 하겠는데, 이해는 하겠다. 뭔 생각인지는 알겠어. 야, 그럼 이건 어때?”
“뭔데?”
“네 말대로 여기가 신들의 전장인지 뭔지 하는 곳이라면 신들 마음에 안 들면 원래 세계로 추방된다는 거 아냐?”
“그렇지.”
“그럼 내가 버러지 같은 짓을 할 테니, 네가 신들 보기에 괜찮은 짓을 하면 되잖아? 그럼 나는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너는 계속 여기 남을 수 있는 거지.”
“처음부터 제안하려던 게 그거였거든?”
“제안하려던 게 그거였어? 난 또, 밥 달라고 온 줄 알았지. 그동안 쫄쫄 굶었을 테니까.”
“배, 배, 배고프지 않거든?”
꼬르륵.
지금까지의 분위기를 깨듯 블랑카의 배에서 배꼽시계가 울려 퍼지고.
나는 피식 웃으며 동굴 안에서 젤리를 가지고 나와서 블랑카에게 건넸다.
“너무 센 척하지 않아도 된다니까. 겁쟁이 주제에.”
“겁쟁이 아냐!”
어느새 블랑카는 투구를 벗어서 바닥에 내려 둔 지 오래였다.
블랑카는 툴툴거리며 내게서 젤리를 받아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고.
나는 그런 블랑카의 모습을 곁눈질하며 동굴 안에서 쉬고 있던 에포나를 끌고 나와서 블랑카 앞에 들이밀었다.
“소개해 줄게. 얘는 에포나라고, 내 가장 친한 친구야.”
“에포나? 아무도 안 보이는데?”
“안 보이다니? 여기 멀쩡하게 있잖아. 자, 봐 봐. 어, 어? 에포나?”
다시 한번 블랑카에게 에포나를 소개해 주려 에포나를 번쩍 들어 올렸지만, 에포나는 발버둥 치며 내 품을 빠져나와 쪼르르 동굴 안으로 도망쳐 버렸다.
“왕!”
에포나가 싫다는 듯 거세게 한 번 짖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에포나를 소개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던 블랑카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포나는 내일 아침에 대충 소개해 줄게. 지금은 기분이 안 좋나 봐.”
“아, 응…….”
“그럼 오늘부터 우린 친구지?”
“친구…… 뭐, 그렇게 부를 수 있겠네. 마력도 없는 인간이 귀족과 친구를 맺다니, 영광인 줄 알아.”
“사도님 죄송합니다 하면서 울던 녀석이 누구더라?”
“그, 그건…….”
정말 오랜만에 대화를 나눌 상대를 만났다는 기쁨이 더해져서일까?
나는 블랑카에게 친구가 되자는 제안을 해 버렸고, 블랑카 또한 덜컥 내 제안을 받아 줬다.
좋아, 오늘은 이제 잘까?
그런데 블랑카가 잠잘 곳이 충분하려나?
“너, 잠은 어디서 자려고?”
“아, 나는 서서 자는 게 편해서.”
“서서 자?”
내가 의문을 품자, 블랑카는 아침에 봤던 말의 모습으로 하반신을 바꿨다.
“기사단에 들어가기 위해서 수련하면서 이렇게 자는 게 습관이 됐거든.”
“허어.”
뭐, 서서 자는 게 더 편하다니 굳이 챙겨 줄 필요는 없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었고.
그렇게 서로 떨어져 자던 중에 블랑카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히, 히이익!!”
“뭐, 뭔데?”
서둘러 동굴 밖으로 나와 보자 블랑카가 에포나 앞에 쓰러져 있었다.
뭐야, 설마 에포나를 보고 놀란 건가?
블랑카는 겁에 잔뜩 질린 표정으로 에포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덜덜 떨었다.
“저, 저게 도대체 뭐야!”
“아까 말했잖아. 에포나라고.”
“저, 저게 에포나라고?”
“응. 에포나야.”
“도대체 정체가 뭔데?!”
“에포나는 에포나지, 다른 건 없어.”
나는 방긋 웃으며 블랑카에게 말했고, 블랑카는 주춤거리며 내 말을 수긍했다.
“그, 그래?”
“그래. 에포나는 에포나니까, 걱정하지 말고 자.”
“어, 어…….”
“에포나, 이만 자자.”
“왕!”
도대체 에포나의 어디가 무섭다는 건지, 참.
겁쟁이가 아니라고 부정하지만 내가 보기에 블랑카는 겁쟁이가 맞다.
* * *
“음, 이 정도면 서열 정리가 다 된 거 같죠?”
클라인은 블랑카와 잉간이 같은 잠자리에서 자는 모습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리베리아산 인간들은 인지 훈련이 잘되어 있다니까요!”
만약 이번에 차원항에 들어온 게 리베리아산 인간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몇 배는 되는 시간이 필요했을 거다.
그러고 보니 인지 훈련을 잘 끝마친 개체는 주위의 다른 개체의 인지 훈련에 도움을 줬지.
그렇다면 이제 슬슬 인지 훈련을 마무리 지을 단계가 온 걸까?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오늘 편집한 영상을 쥬튜브에 업로드했다.
딩동.
쥬튜브에 영상을 업로드하는 사이 클라인은 리퀴드사에서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리퀴드]
[이번에 새로 차원 생물을 위한 신제품이 발매되는데, 먼저 리뷰 영상을 찍어 주셨으면 합니다. 오늘 내로 택배가 도착할 겁니다.]
“숙제 영상?”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영상을 찍어 주기로 계약서에 적혀 있었지.
뭐, 리퀴드사의 신제품이면 완전 기괴한 물건이 오지는 않겠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수락의 의사를 표시했다.
25화 잉간이의 차원항에 넣을 생물들이 도착했어요! 잉간이의 첫 식사는 과연?
“도착~ 도착했다~ 택배가 왔다~.”
클라인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기분 좋게 택배의 포장을 뜯고 있었다.
이번에 드디어 도착한 택배는 잉간의 차원항에 집어넣을 먹이생물들.
슬라임의 대량 증식 이후 완전히 박살 난 생태계를 복원하기 위해 주문했던 생물들이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그동안 지구산 인간이 사료에 완벽히 적응해서 더 생먹이를 주지 않아도 되긴 하지만.
이 넓은 차원항을 잉간이와 리베리아산 인간 두 마리가 사용하는 건 너무 차원항 낭비가 아닐까?
거기에 생먹이와 잘 짜인 생태계가 인간들의 스트레스를 줄인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고 말이다.
거기에 한 가지 더 클라인을 즐겁게 하는 건, 리베리아산 인간이 잉간과 한 무리가 되면서 차원항 안에 집어넣을 수 있는 생물이 더 다양해졌다는 것이었다.
잉간 혼자 있을 땐 혹시나 잉간이 다칠까 봐 집어넣지 못했던 생먹이들을 투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때문에 이전보다 더 다양한 먹이들이 준비됐지만, 전과 바뀌지 않은 것도 있다.
바위폭포고기처럼, 클라인이 야심 차게 준비했지만 잉간과 접촉하기도 전에 슬라임에 휩쓸려 사라져 버린 생물들이었다.
이번에 새로 들여온 생물들을 검역 차원에 집어넣으며 클라인은 자신의 쥬튜브 댓글 창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빨리 핸들링이 가능해지는 날이 기대된다는 반응이 대다수네.
당연히 클라인도 핸들링을 빨리 진행하고 싶었지만, 아직 인지 훈련의 마지막 단계를 진행하지 않았다.
이왕이면 잉간이는 인지 훈련을 한 번에 통과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던 클라인은 문득 쥬튜브 댓글 하나에 시선을 빼앗겼다.
[포상으로 준 간식들 모아 둔 거 너무 귀엽네요! 그런데 은신처가 좀 더러워진 것 같은데 청소해 줘야 하지 않나요? 보니까 정보 오염도 좀 진행된 거 같은데…….]
그러고 보니 잉간이에겐 아직까지 정보 세척을 해 준 적이 없었지?
핸들링만 성공한다면 빠르게 정보 세척부터 해 줘야겠다.
클라인이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먹이생물들이 모두 검역 차원으로 이동했고.
클라인은 이어서 리퀴드사에서 보내 준 애완용품을 카메라 앞에 올려 두고 언박싱 영상을 촬영하기 위해 카메라의 전원을 켰다.
“안녕하세요! 차원항 장인 클라인입니다! 오늘 제가 준비한 건 바로~ 자쟈쟌~!”
* * *
짹짹.
어디선가 한가롭게 지저귀는 새소리가 들려오고, 나는 눈을 비비며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새소리?
이곳에 떨어지고 나서는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던 소리인데.
비척거리며 동굴 밖으로 나오자, 블랑카도 잠에서 깨어났는지 긴장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새소리, 들었어?”
“여기 와서 처음으로.”
포로롱, 포로롱.
계속해서 새소리가 숲속에 울려 퍼지며 아침을 알려 온다.
그 사이코패스가 밤사이에 점액이 쓸고 지나간 생명체들을 보충해 온 걸까?
블랑카는 무슨 신의 축복이니 하면서 무릎 꿇고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처음 듣는 새 소리가 들려오는 걸 봐선 지난번과 완전히 같은 생명체들만 있을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완전히 다른 생명체들로 바꿔 놨을 가능성이 높다.
잠깐, 새소리?
문득 나는 어제 돌 위에 올려놨던 육포들을 떠올렸고, 서둘러 육포들의 상태를 살피러 뛰쳐나갔다.
“으아…….”
육포들의 상태를 확인한 나는 그저 탄식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바위 위에 올려놨던 육포의 대다수가 소실된 상태였던 것이다.
염장된 상태여서 야생동물이 먹기엔 부담됐을 텐데, 잘도 주워 먹었네.
서둘러 남은 육포를 수거하자, 겨우 30% 정도만 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숨을 내쉬며 남은 육포들을 한데 모으고 있자, 블랑카가 내게 다가왔다.
“그, 오늘 뭘 할 생각이야?”
“오늘? 뭐, 호숫가에 가서 점토 찾아보고. 점토를 찾으면 그릇을 좀 만들거나 실을 만들 재료 찾기?”
“그래? 그럼 내가 도와줄까?”
스윽.
슬쩍 블랑카의 몸을 훑어본다.
새하얀 털이 인상적인 블랑카의 하반신은 아무리 봐도 제자리에 장기간 앉아 있기 편해 보이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앉아 있을 수 있어?”
“시, 신께 기도드린다고 생각하면 괜찮을 거야.”
“힘들다는 이야기네.”
어젯밤 블랑카와의 대화를 통해 내가 파악한 사실이 하나 있다.
켄타우로스.
그러니까 말의 몸을 가진 인간은 굉장히 결함이 많은 결함품이라는 사실이다.
켄타우로스의 힘은 엄청나다.
나는 쓰지 못하는 마력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으니 기본적인 완력과 마력이 합쳐지면 거의 걸어 다니는 탱크 수준이 된다.
하지만 그건 켄타우로스의 엄청난 식사량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말의 형태를 한 하반신은 좁은 곳을 이동하거나 등산을 하기도 어렵고.
그 단점을 해결하기 위해 인간형으로 몸을 변화시켜도 그리 오랜 시간 유지할 수가 없다.
인간형으로 몸을 바꾸면 몸에 부담이 많이 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블랑카 말로는 1시간 유지하면 오래 버틴 거라고 한다.
그렇다고 계속 말의 상태로 있다고 부담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천천히 말의 상태로 돌아다녀도 다리 관절에 부하가 심하게 걸려서, 꾸준히 치유 마법을 받지 않으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란다.
물론 블랑카가 말하길 자신은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해서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다고는 하지만, 세세한 작업에 적합하지 않다는 건 확실하다.
오히려 켄타우로스들은 앉아서 쉬는 것보다 들판을 달릴 때가 더 편하다는 게 블랑카의 주장이다.
켄타우로스가 잘할 수 있는 건, 짐을 옮기는 일을 제외한 전투에 관련된 일뿐이라고 한다.
즉, 쉽게 말해서 블랑카는 싸우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보는 게 맞다.
“그럼 그때 얘기했던 것처럼 육포 만드는 법같이 내게 뭐 생존법 같은 걸 알려 줄 건 있어?”
“그, 미안해. 사실 그거 거짓말이었어…….”
“거짓말?”
“너무 배가 고파서……. 너도 육포 만드는 법을 그리 잘 아는 것 같지 않아서 대충 거짓말로 음식을 얻어먹을 생각이었어.”
“신화 속에 나오는 영웅처럼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며? 도대체 뭘 배운 거야?”
“그, 대부분의 영웅들은 그리 똑똑하지 않았거든. 그래서 그런 잔기술보단 전투 기술만 배웠지.”
진짜 쓸모없네, 이 녀석.
물론 나도 쓸모없는 건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이 녀석보단 더 쓸모 있다.
블랑카도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침울해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진짜 쓸모없네, 나. 리베리아 님이 버리실 만도 해…….”
“아냐, 괜찮아. 어차피 이런 작은 일은 너한테 안 맞는 것 같으니, 네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지.”
“내가 잘할 수 있는 일?”
“전투 기술만 배웠다며? 나가서 사냥해 오면 되지. 마침 저 위의 사이코패스가 짐승들도 보충한 것 같은데.”
“그, 그렇구나!”
“리베리아인지 뭔지 하는 여신은 용맹한 모습을 좋아한다며? 가서 용맹한 모습을 보여 줘야지.”
“응! 다녀올게!”
침울해져 있던 블랑카는 귀를 쫑긋거리며 그대로 숲속으로 달려 나갔다.
아, 갑옷은 필요 없는 건가?
나는 그런 블랑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조용히 생각했다.
저 녀석, 진짜 단순하네.
어제 이야기하면서 느꼈지만, 지금 블랑카의 상태는 상당히 불안정하다.
늘 믿어 왔던 신이 응답하지 않는다는 이상 사태에 이곳에 떨어지기 전 있었던 어떤 사건 때문일까?
슬쩍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도 쉽사리 대답해 주지 않던 걸 봐선 꽤 힘든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블랑카는 그로 인해 발생한 심리적 동요를 나를 신의 사자로 생각하고 나에게 의존하는 것으로 보완하고 있는 것 같다.
그 때문에 내가 뭔갈 시키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 옆을 졸졸 따라다니기만 하겠지.
그래도 블랑카의 이야기를 들어 봤을 때, 블랑카가 약한 것 같지는 않다는 게 다행이다.
이번에 블랑카가 가져온 수확물들을 보면 대충 블랑카의 강함이 감이 잡히겠지.
“에포나, 가자.”
“왕!”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돌창을 한 손에 단단히잡고 에포나와 함께 호숫가로 향한다.
만약 폭탄새우들이 돌아왔다면 몇 마리 잡아가기 위해 바구니와 붉은 소금도 챙겼다.
호숫가에 도착하자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근처에서 어떤 소리가 나는지 살폈다.
하지만 예전과는 다르게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새소리와 그 사이로 가볍게 울려 퍼지는 무오의 울음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내가 뭐 데어데블도 아니고, 역시 소리만으로 어떤 생물들이 돌아다니는지 파악하긴 어렵네.
일단 세수부터 할까.
언제나처럼 차가운 호수 물에 머리를 담그니 정신이 개운해지는 기분이 든다.
호수 물속에 머리를 담그고 슬며시 호수 안을 살펴보지만, 폭탄새우의 흔적은 엿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무언가 호수 깊숙한 곳에서 꿈틀거리는 게 보인 기분인데.
아무리 살펴봐도 뭔가 내가 잡을 만한 생명체는 보이지 않고, 나는 호수에서 나와 바구니 안에 넣어 놨던 만능 사전을 꺼냈다.
[검색 : 가장 가까운 점토]
이렇게 하면 점토가 어디 있는지 알려 주려나?
하지만 만능 사전의 검색 결과는 점토가 호숫가에 있다는 것 외에는 다른 걸 알려 주지 않았다.
계속 검색어를 바꿔 가며 검색을 해 봤자 목적지에 도착했다고만 반복할 뿐이다.
그럼 결국 내가 직접 점토를 찾아내야 한다는 건데.
점토는 일단 물살이 강한 곳에는 없겠지?
일단 퇴적 작용으로 만들어지는 거니까 말이야.
그럼 폭포에서 최대한 먼 호숫가 끝자락 쪽에 많이 쌓여 있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호숫가를 따라 물속을 살피며 모래사장을 사박사박 걸었다.
폭포에서 멀어질수록 점차 모래 입자가 얇아졌고, 거의 폭포의 반대편에 도착하자 내가 생각하던 진흙과 비슷한 흙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진흙들을 맨손으로 푹 퍼 올려 본다.
질퍽한 감촉이 손에 달라붙는 게 퍽 마음에 든다.
이 정도면 토기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무릎을 꿇고 맨손으로 바구니 안에 진흙들을 퍼 담는다.
바구니의 3분의 2쯤까지 퍼 담고 바구니를 번쩍 들어 올린다.
묵직한 무게감이 가슴팍에서 느껴지고, 나는 바구니를 등에 짊어지고 동굴로 되돌아간다.
“왕!”
동굴로 돌아오자 에포나는 그대로 짚더미로 뛰쳐 들어가고, 나는 바닥에 바구니를 내려 두고 땀을 닦는다.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봤지만, 태양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만들어진 육포의 맛을 볼 겸 육포를 입안에 넣고 질겅질겅 씹어 본다.
뻑뻑하고 짭짤하다.
아직도 블랑카는 돌아오지 않았다.
미리 떠다 둔 물을 마시며 나는 그릇을 만들기 시작했다.
진흙을 돌돌 말아서 띠를 만들고, 띠를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그릇의 모양을 잡는다.
어릴 적 학교에서 체험학습을 갔을 적의 기억을 살려 그릇을 빚는다.
생각보다 퍽 그릇을 빚는 게 재밌다.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속해서 그릇을 빚었다.
3번째 그릇을 빚을 즈음 날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고, 말발굽 소리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어 숲을 바라보니 블랑카가 자신의 등 위에 무언가의 사체를 잔뜩 올려 두고 걸어오고 있었다.
“많이 잡았어?”
“생각보다는 별로. 활이 없어서 사냥하기가 힘들어.”
블랑카는 한숨을 내쉬며 별로 사냥을 하지 못했다고 투덜거렸지만, 내 눈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뭔지 모를 너구리와 여우를 합쳐 둔 것 같은 짐승이 여럿, 식인 토끼도 여럿.
이 정도면 거의 며칠은 먹을 수 있는 양인데?
“이 정도면 거의 2일은 먹을 수 있을 거 같은데? 진짜 잘해 줬어, 블랑카.”
진심을 담아 칭찬하자 블랑카는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그래?”
“그래. 진짜 고마워. 블랑카.”
칭찬을 할 때는 진심을 담아서 눈을 바라보며 하라고 했었지?
애견 쥬튜브에서 봤었던 내용을 떠올리며 블랑카의 눈을 바라보며 칭찬하자, 블랑카는 슬며시 내 시선을 피하며 헤벌쭉 미소 지었다.
그릇을 빚던 손을 근처에 떠다 둔 물에 씻으며 블랑카의 등 위에 실린 짐승 사체들을 바닥에 내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포나가 총총총 다가오더니,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왕!”
그러고는 잘했다는 듯 블랑카의 발굽에 자신의 발을 올리고선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가 짚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흐엑? 방금 뭔가? 뭔가가 느껴졌는데?”
“에포나니까 놀라지 마.”
“에, 에포나라고? 방금 그 감촉이?”
“니들 세계엔 저렇게 생긴 게 없었냐? 자꾸 에포나 보고 놀란다?”
“저렇게 생긴 동물은 그 어떤 세계를 뒤져 봐도 없을 거야!”
“우리 세계에는 있더라. 좋아, 다 내렸어.”
블랑카가 사냥해 온 짐승을 모두 세어 보니 너구리 같은 짐승이 8마리에 식인 토끼가 12마리다.
이 정도면 블랑카가 아무리 많이 먹더라도 2일 정도는 먹을 수 있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슬며시 블랑카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저기, 블랑카.”
“응? 왜?”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도축은 할 줄…….”
“몰라!”
“몰라?”
“응, 몰라.”
당당한 블랑카의 모습에 할 말을 잃는다.
그래, 그 몸으로 도축을 하는 건 역시 무리가 있겠지.
젠장, 그럼 일단 그릇을 빚는 건 여기까지 하고 도축부터 진행할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동굴 안에서 반달 돌칼을 가지고 나왔다.
내가 돌칼을 가지고 나오는 사이 블랑카는 신음 소리를 내며 입구 근처에서 기지개를 폈다.
잡은 결과물을 등에 짊어지고 오느라 무리를 한 걸까?
힘들어 보이는 모습이 퍽 안쓰럽다.
내일은 짚을 가져와서 블랑카의 잠자리를 꾸며 줄까.
그렇게 생각하며 내 손을 씻을 물을 슬며시 블랑카의 몸에 뿌려 새하얀 털을 더럽히는 오물을 씻어 냈다.
“흐얏?!”
차가운 물에 놀랐는지 블랑카가 새된 교성을 질렀다.
“피가 좀 묻어서. 씻어 내 줬어.”
“그, 그래. 고마워…….”
다 빚은 토기들을 모닥불 속에 집어넣고 토기가 잘 구워지길 빈다.
나는 지난번처럼 만능 사전을 불러내 토끼와 놀(만능 사전이 찾아낸 이름)의 사체를 도축하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봤던 그 마법의 창으로 사냥을 한 걸까?
토끼와 놀들의 가슴엔 작은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그 커다란 창으로 이렇게 작은 토끼를 터트리지 않고 심장만을 찔러 죽이다니, 블랑카의 실력이 도대체 어느 정도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내가 돌칼로 도축을 진행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블랑카는 조용히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늘 나는 여신의 마음에 들었을까?”
“그럼, 당연하지.”
“고작 놀과 토끼 몇 마리를 잡았을 뿐인데?”
“나는 절대 못하는 일이야. 자신감을 가져.”
“그, 그래도 될까?”
“그럼. 당연하지.”
나는 계속해서 블랑카를 칭찬해 줬고, 블랑카 또한 내 칭찬을 바라며 계속해서 오늘 자신이 한 일을 무용담을 털어놓듯 이야기했다.
“그렇게 해서 단번에 세 마리나 되는 토끼를 잡았지.”
“이야, 대단한걸?”
“그치? 너도 봐서 알겠지만, 그 커다란 창으로 토끼를 터트리지 않는 게 얼마나……. 윽.”
그렇게 들뜬 표정으로 자신을 자랑하던 블랑카는 갑자기 고통이 느껴졌는지 얼굴을 찌푸리며 신음을 흘렸다.
“왜, 무슨 일이야?”
“아무것도 아냐. 그냥 좀 쉬면 괜찮아져.”
“잠깐 좀 보자. 너도 모르는 사이에 다쳤을 수도 있으니까.”
“아냐, 괜찮아!”
때마침 도축 작업도 다 마무리됐기에 나는 서둘러 블랑카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블랑카에게 접근했다.
새하얀 털가죽이 피부를 가리고 있어서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 모르겠네.
“다리가 아픈 거야?”
“윽, 어. 거기. 아, 아…….”
슬쩍 블랑카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혹시나 다리를 접질린 건 아닌지 확인해 본다.
접질렸다고 해서 내가 뭔가 해 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일단 상태는 알아야지.
다행히도 다리를 접질렸다거나 한 건 아닌 것 같다.
“이게 그 켄타우로스들의 고질병? 그런 거야?”
“뭐, 그렇지……. 윽.”
내가 조심스럽게 뒷다리를 건들 때마다 블랑카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온다.
블랑카가 별것 아닌 것처럼 켄타우로스들의 고질병을 설명해서 나도 단순히 근육통 정도일 줄 알았는데, 이건 좀 심한데?
켄타우로스의 체중을 받치기 위해 잔뜩 혹사당한 관절 부위가 염증이 온 것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비전문가인 내가 보더라도 충분히 이상하다.
“리베리아에 있을 때는 이럴 때 어떻게 했어?”
“마, 마사지로 피로를 좀 풀어 주고 한숨 자면 나아. 괜찮아.”
“마사지?”
슬쩍 블랑카의 하반신을 내려다보고, 거대한 하반신에 비해 짧다고 할 수 있는 팔을 바라본다.
아무리 봐도 블랑카 혼자서 마사지를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아무리 봐도 마사지를 혼자서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은데?”
“그래서 보통은 전문적인 시종을 따로 두곤 했어. 으으, 이제 괜찮아.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지니까…….”
“아니, 그냥 놔두면 안 될 수준인데? 잠깐만 기다려.”
“어, 어?”
마사지하는 방법은 만능 사전을 검색하면 나오려나?
무척 다행히도 켄타우로스족의 피로를 풀어 주기 위한 마사지법은 따로 문서가 개설되어 있을 정도로 유명한 모양이었다.
흠, 그러니까 대충 이렇게 하면 된다는 거지?
난이도가 그렇게 어려워 보이지도 않고, 적당히 안마하는 방식으로 하면 될 것 같다.
그나저나 이놈의 나X위키는 대중 매체에서의 항목은 절대 빠지질 않네.
“조금 간지러울 수도 있으니까, 잘 참아?”
“흐윽?!”
마사지를 시작하며 사전에 실린 대로 블랑카의 근육을 꾹꾹 누른다.
잔뜩 뭉친 근육을 자극하자 처음에는 고통스러운 목소리를 내던 블랑카였지만, 내가 계속해서 마사지하자 스르르 노근한 목소리로 바뀌어 갔다.
“흐아아…… 거기, 응. 거기가 좋아…….”
“여기?”
“응, 거기. 흐읏……!”
마사지하는 거, 뭔가 뽁뽁이를 터트리는 기분이어서 재밌네.
내가 근육을 자극할 때마다 바뀌어 가는 블랑카의 반응이 꽤 재밌어서 나는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마사지를 진행했고, 마사지는 꽤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끝났다.
후우.
이마에 땀이 흐를 정도로 집중해서 마사지했네. 이제 좀 몸 상태는 괜찮아졌으려나?
“이제 어때? 좀 괜찮아?”
“어, 응. 괜찮, 괜찮아…….”
블랑카는 편안한 목소리로 바닥에 축 누워서 그렇게 대답했다.
“앞으로는 매일 이렇게 해 줄게. 원래 리베리아에서도 이렇게 했을 거 아냐?”
“아니…… 리베리아에선 그냥 치료 마법 받고 말았지.”
“전문 시종들이 있었다며?”
“어. 그렇긴 한데. 그건…….”
“그건?”
“아냐, 아무것도 아냐. 응, 원래 자기 전에 맨날 마사지받았어. 응.”
홱.
어째서인지 블랑카는 내게서 얼굴을 돌린 채로 그렇게 대답했고.
나는 의아했지만, 블랑카가 마사지를 괜찮게 받은 것 같아서 만족했다.
“그럼, 나는 들어간다?”
“어, 응!”
블랑카가 편히 쉴 수 있게끔 나는 동굴 안으로 들어와 잘 준비를 했고.
“왕!”
어딘가 살짝 화난 듯한 에포나가 살짝 내 손가락을 깨물며 품 안에 기어들어 왔다.
다음 날, 토기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아침 일찍 깨어난 나는 그리 반갑지 않은 손님을 마주했다.
“시, 신님?!”
아침부터 허공에서 촉수가 튀어나와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던 것이었다.
“:-)”
26화 *유료 광고 포함* 리퀴드사에서 신제품이 나왔어요! 잉간이의 엄격한 점수는?
“:-)”
이제는 익숙해진 촉수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단순히 잠깐 몸을 움찔하는 선에서 정신 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블랑카는 이곳에 와서 촉수와 마주한 적이 거의 없었을 텐데?
문득 맨 처음 촉수와 만났을 때의 내 상태가 떠올라 불안해진다.
나는 서둘러 블랑카의 이름을 부르며 블랑카의 상태를 살펴봤다.
“블랑카, 괜찮아……?”
그렇지만 그런 내 걱정이 무색하게 블랑카의 상태는 좋은 걸 넘어서 거의 최고로 보였다.
“리베리아 님!”
방긋을 넘어선 헤벌쭉?
블랑카는 환희에 찬 표정을 한 채로 촉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저걸 보니 블랑카의 상태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런 블랑카의 행동이 조금 의외였던 걸까?
촉수는 블랑카의 행동에 깜짝 놀란 듯 잠깐 움찔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블랑카의 머리로 촉수를 뻗어 왔다.
나라면 당장 뒤로 물러섰겠지만, 블랑카에게는 신의 손길이나 다름없는 모양이다.
“아아, 리베리아 님. 저를 잊지 않으셨군요…….”
블랑카는 자신의 머리를 어루만지는 촉수의 손길을 받으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고,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조금 기겁했다.
저게 울 정도로 좋은 일인 건가?
아무리 블랑카를 이해해 보려 해도, 저건 도저히 공감할 수 없다.
내가 종교를 가져 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촉수는 부드러운 손길로 블랑카의 머리를 여러 번 쓰다듬더니, 내 시선을 눈치채고 나를 부르듯 촉수 끝자락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하아.
나는 푹 한숨을 내쉬며 촉수에 다가가 끝자락을 손으로 잡았고, 짜릿한 감정이 담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O!”
팔랑팔랑.
나와 악수를 하듯 촉수가 여러 번 흔들렸고, 나는 슬며시 촉수를 놓으며 당당히 두 손을 펼쳐서 먹을 걸 요구했다.
그러자 촉수가 가만히 멈칫거리더니, 허공에 생겨난 회색빛 안개 사이로 들어가 늘 먹던 젤리를 꺼내 왔다.
슬쩍 눈을 가늘게 뜨며 회색빛 안개 너머를 살펴보려 했지만, 각도가 좋지 않은지 회색 안개 너머의 세상은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빠르게 젤리만 받아 갈 생각이었지만, 교묘하게 촉수가 움직여 내 손목을 움켜쥐고 만지작거렸다.
쩝, 먹을 걸 받았으니 조금만 더 어울려 줄까?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잠깐 동안 촉수의 손길에 몸을 맡겼고, 내가 슬슬 손을 빼내려고 할 때쯤 촉수가 수그러들며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어디 보자, 오늘 받은 젤리는 고작 한 개? 평소에는 2, 3개씩 줬으면서 오늘은 좀 적다.
한숨을 내쉬며 동굴에 젤리를 가져다 놓으려 발을 돌리자,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블랑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이는데?
“왜?”
“이러고도 신이 자기를 괴롭히는 게 분명하다는 말이 나와?”
“문명인을 문명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숲속에 던져 둔 게 괴롭히는 게 아니면 뭐야?”
“너도 느꼈을 거 아냐? 촉수 너머로 느껴지는 신의 사랑을!”
“그게 사랑이든 뭐든, 나한텐 아냐.”
“도대체 왜 신님은 나보다 널 더 좋아하는 걸까……. 히잉…….”
블랑카는 시무룩해진 채로 땅을 조금씩 파헤쳤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어제 모닥불에 던져 놨던 토기들의 상태를 확인해 봤다.
하나는 완전히 금이 가서 못 쓰겠고, 남은 두 개는 꽤 괜찮아 보인다.
토기들의 상태를 확인하던 나는 문득 에포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포나?”
“끼잉…….”
에포나는 완전히 동굴 안에 틀어박혀서 몸을 바짝 낮추고 낑낑거리고 있었다.
마치 천적에게 들키는 것을 두려워하는 듯한 모습이다.
아까 촉수가 나타나서 겁을 먹은 걸까?
잠시 에포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에포나가 내 팔에 엉겨 붙는 감촉을 즐기고 동굴을 빠져나온다.
어차피 오늘 계속 저러고 있을 게 분명하니 굳이 건드리지 않는 게 더 낫다.
오늘 할 일은 블랑카를 위한 짚 침대를 만들고, 숲속에서 실을 만들 재료를 찾아보는 건가?
일단 우선 밥부터 먹자.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물에 담가 둔 고기들을 확인하려 발걸음을 옮겼다.
“저기, 내가 뭐 도와줄 게 있어?”
“없어.”
“지, 진짜?”
“이따 밥 먹고 도와 달라고 할 거니까, 그때까진 얌전히 있어.”
“응!”
블랑카는 쪼르르 식탁 대용으로 사용하는 바위 옆으로 달려가 대기한다.
어째 뭔가 상태가 전보다 더 악화된 거 같은데?
잘은 몰라도, 블랑카 머릿속에서 오늘 촉수에게 머리를 쓰다듬어진 건 신이 내린 포상으로 인식된 모양이다.
그 때문에 나에게 잘하면 자신이 믿는 신이 포상을 내려 준다는 생각이 더 강해진 것 같고.
하지만 뭐, 나한테 해가 될 것 같진 않으니 그냥 내버려 둬도 괜찮겠지?
그 사이코패스가 블랑카보고 나를 죽이라고 요구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손질해 둔 고기를 모닥불에 굽는다.
부드러운 살코기가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지고, 누구나 입맛을 다실 모습으로 변했다.
아무리 작은 동물들이라고 해도 20마리나 구웠으면 그 양도 꽤 된다.
이 정도면 내일까지도 먹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블랑카 앞에 고기들을 가져다 놨다.
“나는 하나면 충분하니까, 먹고 싶은 만큼 먹어.”
“저, 정말로?”
“토끼가 생각보다 살점이 많더라.”
이 고기들을 사냥해 온 건 블랑카니까 이 부분에선 블랑카를 존중해 주는 게 맞다.
아무리 블랑카가 나를 신의 사도로 믿는다고 해도, 배고프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나는 신의 사도였던 것이 되고 싶지 않으니 블랑카는 최대한 배부르게 지내야 한다.
뭔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친구들을 가져다 바치는 토끼가 된 기분이지만, 나는 토끼가 아니니 괜찮다.
블랑카가 우물우물 고기들을 집어삼키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블랑카를 처음 본 순간부터 가지고 있던 의문을 꺼내 놓았다.
“켄타우로스는 초식일 줄 알았는데.”
“켄타우로스는 어디까지나 말을 닮은 사람이지, 말이 아니거든?”
“생각해 보니 그러네. 가끔 그런 동족은 없었어? 풀만 먹고 살겠다는 사람?”
“그냥 밥만 먹기도 바쁜데 무슨 음식을 가려. 먹을 수 있으면 죄다 먹어야 하는데.”
“아, 리베리아는 지금도 언데드랑 전쟁 중이라고 했었나?”
“신님의 은총 덕분에 먹을 건 부족하진 않지만, 그런 상황에서 밥을 남기면 무진장 눈치 보이지.”
“허어.”
“거기에다가 풀은 잘 소화 안 된단 말이야. 역시 소화 잘되는 고기가 최고야.”
그렇게 수다를 떨며 블랑카가 밥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는 사이, 어느새 블랑카는 고기의 절반을 다 먹어 치웠다.
슬슬 배부를 테니 치울까?
그렇게 생각하며 고기에 손을 가져다 댔지만, 블랑카가 당황한 눈치로 중얼거렸다.
“어, 아직 모자란데…….”
“모자라다고?”
“응. 솔직히 이거 전부 다 먹어도 모자라.”
아니, 토끼와 놀 20마리인데, 그게 부족하다고?
나는 한 마리만 먹어도 괜찮은데, 도대체 얼마를 먹어야 하는 거야?
“배, 배부르게 먹으려면 지금의 한 3배……? 배고프지 않은 수준은 지금보다 2배 정도 더 먹어야 해…….”
블랑카는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자신의 식사량을 고백하고, 나는 그 어마어마한 식사량에 충격을 받았다.
아니, 도대체 하루에 필요한 열량이 얼마나 되는 거야?
그렇지만 내 몇 배는 되는 저 덩치를 유지하려면 그만한 음식이 필요한 것도 당연한가?
잘 이해되지 않는 식사량이었지만, 블랑카의 힘과 덩치를 보면 납득이 된다.
결국 블랑카는 마지막 고기까지 전부 먹어 치웠고, 슬그머니 내 눈치를 보며 사과했다.
“미, 미안.”
“아냐. 아직 먹을 건 남았고, 먹은 만큼 사냥하면 되니까.”
그래도 며칠은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식량이 단번에 사라지니 어이없긴 하네.
블랑카가 합류하며 사냥으로 얻을 수 있는 식량도 늘어나고, 사냥할 수 있는 생물도 늘어났지만 그만큼 식사량도 늘어났다.
그 때문에 실질적으로 비축 가능한 식량은 이전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아직까진 숲에 먹을거리가 넘쳐 나지만, 전처럼 거대한 점액이 나타날 수도 있는 거다.
그런 사태가 발생하기 전에 빨리 여행을 떠날 준비를 마쳐야 하는데.
일단 최소한 물통을 만들지 않으면 여행을 떠날 준비조차 하지 못할 거다.
그리고 물통을 만들려면 실 정도는 필수인데, 그 실을 구할 방법을 도저히 모르겠단 말이지.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먹은 흔적을 청소하던 와중, 또다시 촉수가 나타날 기미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벌써?
지금까지는 아무리 많아 봤자 하루에 한 번 정도만 나타나지 않았나?
속으로 의아해하며 촉수가 나타날 곳을 홱 돌아본다.
그러자 스멀스멀 회색빛 안개가 끼기 시작하고, 안개 속에서 나타난 것은 촉수가 아니라 촉수였다.
음, 내가 뭔가 말을 이상하게 했는데, 다시 한번 말한다.
촉수가 나타난 게 아니라, 다른 촉수가 나타났다.
“흐엑?!”
가만히 서서 내가 청소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블랑카가 갑작스럽게 나타난 촉수를 바라보며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나타났던 촉수가 오징어의 촉수 같았다면, 지금 나타난 촉수는 말미잘 같다.
거대한 말미잘처럼 생긴 무엇인가가 동굴 앞에 떡하니 나타난 것이다.
살아 있는 생물인 걸까?
나와 블랑카가 가만히 우두커니 서서 저 촉수의 정체를 확인하려 하자, 우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촉수가 갑자기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엑.
보기만 해도 팔다리에 오한이 솟는 기분이다.
하지만 뭔가 알아낸 건 있다.
저 기괴한 촉수들 사이로 무언가 금속 재질이 엿보인다.
살아 있는 생물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기계라는 걸까?
하지만 저 촉수의 움직임은 아무리 봐도 기계가 아니라 생물의 것인데.
기계와 생물, 그 사이에 있는 듯한 이상한 생김새가 묘하게 혐오감을 자극한다.
“이, 잉간. 저게 뭔지 알겠어?”
나는 블랑카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슬며시 만능 사전을 들어 올려 말미잘 비스무리한 촉수를 촬영했다.
[검색 결과 없음]
하지만 만능 사전은 결과물을 내놓긴커녕 아예 파업을 해 버렸다.
차라리 지난번 간석기를 만들 때처럼 검열됐다거나 하는 메시지를 띄우면 저게 사이코패스와 연관됐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을 텐데.
그런 메시지도 없으니 도저히 저 촉수의 정체가 짐작 가지 않는다.
뭐지? 설마 나보고 먹으라고 가져다 둔 걸까?
아니면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그것도 아니라면 설마 블랑카와 같은 경우일까?
슬며시 동굴 밖의 벽에 기대 둔 돌창을 붙잡고 촉수에 겨눈다.
블랑카 또한 긴장된 얼굴로 마력으로 만든 창을 손안에 만들어 냈고.
블랑카가 조심스럽게 마력으로 만든 창을 촉수 가까이 가져다 댔을 때였다.
“우왓?!”
갑작스럽게 또다시 회색 안개가 피어오르며 그 안에서 사이코패스의 촉수가 튀어나온 것이었다.
사이코패스의 촉수는 그대로 블랑카와 말미잘 같은 촉수를 빙 둘러서 자신의 안에 가뒀다.
“리, 리베리아 님?”
블랑카는 당황하며 순간적으로 마력의 창을 없앴고.
블랑카가 그렇게 당황하는 사이 거대한 촉수가 스르르 움직여 말미잘에 다가갔다.
툭, 툭.
거대한 촉수는 계속해서 말미잘 형태의 촉수에 자신을 담갔다 빼는 이상한 행동을 보였고.
블랑카는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 잉간.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어…… 일단 거기서 빠져나와 봐. 최대한 촉수를 자극하지 말면서.”
내 말대로 블랑카는 조심스럽게 뒤로 후퇴하려 했지만, 곧바로 허공에서 다른 촉수가 튀어나와 블랑카의 후퇴를 막았다.
블랑카는 자신이 신으로 여기는 촉수를 어떻게 찢고 나오지도 못하고 그 사이에서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27화 *유료 광고 포함* 리퀴드사에서 신제품이 나왔어요! 잉간이의 엄격한 점수는? 2
설마 하지만, 저 촉수는 블랑카가 말미잘 안으로 들어가는 걸 원하는 걸까?
블랑카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안색이 어두워진다.
흔들흔들.
촉수는 블랑카가 말미잘에 들어가지 않자 마음이 급해졌는지 블랑카의 몸을 이리저리 꾹꾹 눌러 댔다.
결국 블랑카는 각오를 다진 얼굴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뗐다.
“진짜? 진짜 들어가려고?”
“그, 그것이 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눈을 질끈 감은 블랑카가 말미잘에 한 걸음 다가서자, 촉수에서 예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
“흐익……!”
말미잘 안으로 발을 집어넣은 블랑카는 몸을 부르르 떨며 몸서리쳤고.
말미잘의 촉수가 꿈틀거리며 블랑카의 하반신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흐앗?!”
꾹꾹, 꾹꾹.
마치 내가 지난번에 블랑카에게 마사지를 해 준 것처럼 촉수가 블랑카의 몸을 기어 다닌다.
처음에는 징그러워하며 몸서리치던 블랑카였지만, 곧 표정이 풀어지며 애매모호한 표정을 짓는다.
“블랑카. 설마 하지만 그거……?”
“마사지. 마사지를 하고 있어…….”
저 끔찍한 외형의 말미잘은 아무래도 사이코패스가 집어넣은 일종의 마사지기인 모양이다.
설마 그 사이코패스는 켄타우로스의 습성을 알고 있던 걸까?
켄타우로스의 습성은 알고 있는데, 왜 내가 야생과는 맞지 않는다는 건 모를까?
맨 처음 회색 안개 속에서 냉장고와 침대가 나온 걸 보면 그런 물건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도 아닌데.
내가 속으로 사이코패스를 욕하는 사이, 말미잘의 마사지가 모두 끝난 모양이다.
거대한 촉수가 말미잘을 둘러싸고 있던 포위망을 풀고, 블랑카는 비틀거리며 말미잘을 빠져나왔다.
“어때?”
“확실히 많이 편안해진 것 같아. 거의 치유 마법을 받은 수준이야…….”
블랑카는 눈에 띄게 확 좋아진 자신의 몸 상태를 보며 놀라워하지만, 그리 기쁜 표정은 아니다.
그야 당연하다.
아무리 뻐근한 곳을 전부 풀어 주는 마사지기여도 저런 외형이면 절대 들어가고 싶지 않으니까.
블랑카가 사용했으니 이제 슬슬 마사지기를 치우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말미잘을 바라봤지만, 아무리 바라봐도 말미잘이 사라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거대한 촉수가 슬금슬금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고.
어라? 잠깐만.
설마 나까지 집어넣을 생각은 아니겠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서둘러 동굴 안으로 몸을 피하려 했지만.
툭, 무언가 부드러운 바위 같은 게 나를 가로막았다.
“블랑카?”
“신께서 원하시잖아.”
생긋.
블랑카는 오싹한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붙잡고 나를 말미잘로 끌고 갔고.
“나는, 나는 괜찮아! 나는 괜찮으니까……!”
“지금까지 많이 힘들었다며? 이번 기회에 피로를 싹 날려야지.”
나는 그대로 말미잘 속에 집어넣어졌다.
“흐악?!”
촉수의 감촉에 나는 순간 몸을 뒤틀었지만, 평소에 비슷한 감촉을 많이 느껴서인지 생각보다 빨리 촉수의 감촉에 익숙해졌다.
이윽고 촉수의 마사지가 시작되고, 나는 생각보다 더 편안한 촉수의 마사지에 놀라며 천천히 몸을 이완시켰다.
기분 나쁜데, 뭔가 기분 좋네.
결국 내가 말미잘의 풀코스 마사지를 즐기고 나서야 거대한 촉수는 말미잘을 놔두고 떠나갔다.
“어때?”
“확실히 시원하긴 하네…….”
음, 눈 딱 감고 비주얼만 무시하면 뭔가 괜찮은 것 같기도.
그래도 다행이네, 블랑카의 고질병을 어느 정도 치료할 방법이 생겨서.
블랑카가 내 마사지를 받는 것보단 저 마사지기를 쓰는 게 블랑카도, 나도 더 편하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블랑카에게 앞으로 저 마사지기를 계속 쓸 것인지 물어봤는데, 뭔가 반응이 묘하다.
“음…… 글쎄.”
“뭔가 불편했어?”
“아니, 음. 나는 저것보단 직접 손으로 하는 게 더 좋은 거 같아서 말이지…….”
“손으로?”
음, 역시 비주얼이 가장 큰 문제인가?
하긴, 나 같아도 가끔 사용하는 거면 몰라도, 매일 저 말미잘에 몸을 담그기는 싫을 것 같다.
“그러니까? 저건. 저건 가끔씩만 이용하는 거로 하고, 평소에는 네가 직접 손으로…… 해 줬으면 하는데.”
블랑카는 홱 돌아서서 동굴로 걸어가며 내게 그렇게 제안했고, 나는 별생각 없이 블랑카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래, 그러지 뭐. 내 손이 꽤 기분 좋았나 봐?”
“저, 저 말미잘에 몸을 맡기는 것보단 나을 것 같으니까!”
말미잘이 싫은 건 어쩔 수 없지.
* * *
“안녕하세요! 차원항 장인 클라인입니다! 오늘의 콘텐츠는~ 자쟈잔~ 리퀴드사의 신형 애완 생물 마사지기입니다!”
클라인은 방긋 웃으며 리퀴드사의 숙제 영상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마사지기는 켄타우로스나 베헤모스같이 자신의 몸을 지탱하지 못하는 생물을 위한 일종의 치료 장치다.
기존 리퀴드사가 판매하던 제품은 효과는 뛰어났지만, 디자인이 너무 인공적이어서 생물체들이 적응을 잘 못한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나온 신형 마사지기는 그 점을 보완하기 위해 디자인에 심혈을 기울인 제품이다.
그렇게 대본에 적혀 있던 것답게, 포장지를 뜯은 클라인의 눈에는 꽤 정교하게 디자인된 마사지기의 모습이 비쳤다.
“와, 이건 꽤 괜찮은데요? 진짜 살아 있는 생물 같아요! 봐 봐요, 진짜 촉수 같죠?”
클라인은 연신 마사지기의 디자인에 감탄을 표하며 마사지기를 이리저리 살폈다.
꿈틀, 클라인이 촉수를 마시지기에 집어넣자 마사지기가 반응해 움직인다.
“그럼 마사지기를 차원항에 넣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 잉간이 차원항에 리베리아산 켄토르가 입주했다는 것 아시죠? 켄토르는요, 이런 마사지기가 없으면 따로 다른 인간형 생물을 넣거나 주기적으로 치유 마법을 걸어 주지 않으면 금세 무릎 관절이 망가져요. 그러니까 켄토르를 키우시는 분들은 반드시 이 마사지기를 하나 구비해 두는 게 좋답니다?”
클라인은 이런 다른 보조 장치나 마법이 없으면 살아가지 못하는 생물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너무 외관을 꾸미기 위해서 생물로서 자연스러운 외형을 없애 버린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클라인은 지구산 인간이 더 마음에 들었다.
마법의 보조 같은 건 필요 없다는 기본적인 자연의 법칙을 보여 주는 것 같으니까.
뭐, 자신이 방구석에서 이렇게 구시렁거려도 바뀌는 건 없겠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잉간의 은신처 앞에 마사지기를 설치했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 잉간이가 리베리아산 인간을 마사지해 준 것 같은데.
그 모습을 촬영해서 남겨 두지 못한 게 참 아쉽단 말이야.
클라인이 차원항 안에 마사지기를 설치하자 처음 보는 물건을 발견한 인간들이 잔뜩 경계하기 시작한다.
클라인은 그 모습을 카메라로 촬영하며 조용히 설명을 시작했다.
“대부분의 생물들은 자기 은신처에 처음 보는 장치가 설치되면 경계만 하고, 잘 이용하지 않아요.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하면 되냐면요. 자, 이렇게…….”
클라인은 모형 촉수를 움직여 핸들링에 적극적인 리베리아산 인간을 마사지기 앞에 가져다 놨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에 잉간이가 모형 촉수와 핸들링을 했었지.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잉간이가 이제 자신을 어느 정도 신뢰해 주는 것 같아서 저절로 이죽이죽 웃음이 나온다.
클라인은 조심스럽게 리베리아산 인간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선에서 자극해 가며 마사지기로 들어가게끔 유도한다.
“자, 이렇게 마사지기 안으로 들어가도록 처음만 유도해 주시면 돼요. 마사지기 맛을 보면 다음부턴 자기가 알아서 사용할 거랍니다.”
마침내 리베리아산 인간이 클라인의 유도를 따라 마사지기 안으로 들어가고, 마사지를 즐긴다.
리베리아산 인간이 마사지를 즐기는 동안 클라인은 서둘러 리퀴드사의 마사지기 성능을 홍보하기 시작했다.
“이번 신형 마사지기는 미약하게 치유의 파장을 발산해서 관절염을 치료해요. 굳이 귀찮게 치유 마법을 걸어 줄 필요가 없이 마사지기만 가져다 놓으면 된답니다? 마사지 성능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게, 176억 종 이상의 생물들에게서 스트레스가 감소하는 게 확인됐거든요! 사용하는 생물의 사념에 맞춰서 마사지하니 오작동이 일어날 걱정도 없어요! 이 점이 기존 마사지기와 가장 다른 점이에요.”
클라인이 마사지기 홍보를 끝마치자 때맞춰서 리베리아산 인간의 마사지가 끝났고.
클라인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거부감이 줄어들었을 지구산 인간에게 촉수를 스르르 뻗었다.
오늘 아침에 유사 핸들링이 실패했다면 이런 시도는 하지 않았겠지만, 클라인은 이제 잉간이가 자신의 손길에 익숙해졌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그 순간, 리베리아산 인간이 지구산 인간을 붙잡아 마사지기로 끌고 가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본 클라인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푸핫. 지금 리베리아산 인간이 잉간이를 마사지기로 끌고 가네요? 어제 영상으로 찍지는 못했지만, 잉간이가 리베리아산 인간을 마사지해 줬거든요. 그거에 대한 보답일까요?”
지구산 인간의 정보는 마사지기에 입력되어 있지 않았지만, 애초에 사념파를 읽고 작동하는 방식이기에 문제없이 마사지가 이루어지는 듯 보였다.
“지금까지 차원항 장인 클라인이었습니다! 클바~.”
그 사실을 확인한 클라인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만 클로징 멘트를 치며 촬영을 종료했다.
“으아, 끝났다…….”
촬영을 끝마치고 클라인은 잠시 휴식을 취할 겸 자신의 쥬튜브 채널로 들어갔다.
딩동.
잠깐 확인하지 않은 사이에 메시지가 수만 통 넘게 와 있다.
클라인은 한숨을 내쉬며 적당한 메시지를 하나 클릭해서 열어 본다.
[클라인 님 제 인간이 아픈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사료하고 물은 꼬박꼬박 챙겨 줬는데 갑자기 토하면서 비틀거려요. 치유 마법을 걸어 봐도 자꾸 토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인간의 분변으로 완전히 더럽혀진 사육장 바닥에 사료와 물이 방치된 사진
“하아…….”
사육장 청소를 하지 않으니까 당연히 구토를 하지.
진짜, 이런 기본적인 기초도 되어 있지 않은 메일을 볼 때마다 화가 치밀어 오른다.
물론 자신도 인간 사육을 완벽히 알고 있는 건 아니다.
그 예시로, 자신도 지구산 인간을 처음에는 원시 인간 문명의 무력 정도는 지니고 있겠거니 하고 생각했지 않는가?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걸 지구산 인간을 키워 나가며 깨달았고.
이 사람들도 단순히 몰랐을 뿐이다.
그러니 이제라도 잘못된 점을 깨닫고 고쳐 나가면 된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여전히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지금이라도 메일 주인의 애완 인간이 고통받지 않게끔 조언을 보내 주었다.
문득 클라인은 지금 자신의 차원항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최대한 야생 환경에 맞게끔 환경을 조성했고, 먹이가 부족해 보이면 사료를 투여해서 먹이를 보충해 줬다.
물론 자신도 아직도 배우는 입장이기에 부족한 점이 있을 수 있다.
그래도 이만하면 꽤 괜찮은 차원항이 아닐까?
하지만, 어쩌면 저 인간들의 입장에선 다를지 모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인간들은 지적 생명체가 아니고, 클라인과 대화를 할 수가 없으니 클라인은 인간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다.
인간은 클라인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조건조차 만족하지 못했으니까.
그러니 클라인은 클라인이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무표정한 표정으로 오늘도 난리가 난 댓글 창을 정리했다.
[님들애완인간키우지마세요애완인간키우면체질이변합니다체질이변하면초식공룡처럼약해지고육식공룡처럼될수없습니다…….]
[님들애완인간키우지마세요애완인간키우면체질이변합니다체질이변하면초식공룡처럼약해지고육식공룡처럼될수없습니다…….]
[ㅅㅂ 마키나 새끼 존나게 도배하네.]
[지적 생물로 인정된 지 100년도 안 되는 종족 평균 수준이지 ㅋㅋㅋ ㄹㅇ 인터넷에서 도배하는 거 말고는 쓸모없는 새끼들.]
진짜, 영상 내용으로 싸우지 않으면 이번엔 자기들끼리 싸우기 시작하네.
오늘도 참 신비로운 쥬튜브 댓글 창에 클라인이 환장하는 사이, 리퀴드사에서 메일이 또 하나 도착했다.
[리퀴드]
[쥬스농장에서 다시 합방 제의가 들어왔어요. 이번에는 자기가 직접 클라인 씨 집에 방문하겠다는데요?]
“어?”
도대체 요즘 세상이 왜 이렇게 자신에게 친절한가, 의심되는 내용의 메일이 말이다.
28화 [쥬스농장] 원룸에 수억 마리의 인간을 키우는 미녀 쥬튜버가 있다? 차원항 디자인 수준이 장난 아닌데?
“이건…… 버리는 거고. 이것도 쓰레기고. 저건 마력 추출이 가능하고…….”
클라인은 부랴부랴 자신의 방을 가득 메우고 있던 쓰레기들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차원항들이 차지하지 않은 공간에 쓰레기들을 전부 몰아넣다 보니 평소 카메라가 닿을 일이 없는 장소는 쓰레기장과 같은 상태로 지냈던 덕분에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청소가 진척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흘낏.
클라인은 현재 시각을 확인해 가며 분주하게 신체 말단을 움직였다.
쥬스농장이 오기로 한 시간까진 얼마 남지 않았다.
제기랄.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은하단 변방에 집을 구해 둘 걸 그랬다.
어차피 집 밖으로 나올 일도 없는데 텔레포트 거점에서 5분 거리에 있어 봤자 뭐 해?
그냥 그때 중개업자의 말을 듣지 말고 좀 더 가격이 싼 곳으로 갈 걸 그랬다.
중개업자의 언변에 속아 넘어간 과거의 자신을 후회하며 클라인은 다급하게 청소를 진행했고.
“후!”
어떻게 간신히 쥬스농장과 만나기로 한 시간에 늦지 않게 청소를 끝마칠 수 있었다.
옷은 적당히 촬영용 의상으로 갈아입었는데, 이 정도면 되겠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긴장된 표정으로 초인종 소리를 기다렸고.
딩동.
마침내 쥬스농장이 클라인의 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어, 어서 오세요!”
“아이고, 드디어 얼굴 좀 뵙네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쥬스농장입니다.”
“크, 클라인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할 게 뭐 있어요. 저도 클라인 씨 덕 좀 보려고 오늘 온 건데.”
쥬스농장은 그렇게 말하며 허공에 띄워 둔 차원항들을 바닥에 내려놨다.
“제가, 저도 도와 드릴게요!”
“괜찮아요. 별로 무겁지 않아서.”
쥬스농장은 그렇게 말했지만, 바닥에 차원항이 닿자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와, 역시 대기업 쥬튜버답게 평소에도 마법을 쓰고 다니네.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도 빨리 대기업 쥬튜버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클라인의 방 안에 짐을 내려놓은 쥬스농장은 클라인의 방 안을 둘러보며 감탄사를 흘렸다.
“이야. 직접 보니까 꽤 괜찮은데요? 차원항 이쁘게 꾸미셨네.”
“헤헤, 그런가요? 쥬, 쥬스농장 님 채널 보고 많이 참조했어요.”
“내 채널? 내 채널은 이런 거랑은 거리가 먼데?”
“그, 인간이나 차원 생물들 특징이나 사육 꿀 팁들 많이 올려 주시잖아요. 처음에 차원항을 시작할 때 진짜 엄청 도움이 많이 됐어요.”
“그랬으면 다행이네요. 원래 그런 목적으로 촬영했던 영상들이니까.”
“헤헤…….”
늘 동경해 오던 쥬튜버에게 칭찬을 받아서 클라인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자신의 차원항들을 소개하며 쥬스농장을 방 안쪽으로 안내했다.
쥬스농장은 자신이 평소 만들던 효율 중시 차원항이 아닌 다른 형태의 차원항을 보게 되어서 그런지 흥미로운 표정으로 차원항들을 관찰했다.
“이건 오크 차원항이고요, 이건 인간 차원항이에요. 저건 하늘고래고요.”
“다음번에 차원항을 만들 땐 클라인 씨에게 디자인을 맡겨야겠네요. 와, 이 하늘고래 차원항은 진짜 멋진데요?”
“그렇죠? 만드느라 돈 좀 썼어요. 히히.”
하늘고래 차원항을 만들 때 클라인이 쓴 금액은 클라인의 마력 8개월 치와 맞먹는다.
리퀴드사의 지원이 없었다면 클라인은 아마 지금쯤 기본 배급품만으로 생활을 하고 있었을 거다.
그렇게 클라인이 차원항을 소개하는 동안, 쥬스농장은 주위를 둘러보며 한 생명체를 찾고 있었다.
“크흠. 저기, 클라인 씨?”
“네, 네?”
“슬슬 지구산 인간도 보고 싶은데, 그건 어디 있나요?”
“아, 그건 마지막에 보여 드리려고 했어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클라인은 쥬스농장의 금속 의수를 신체 말단으로 붙잡고 허공에 손을 뻗었다.
“조금 마력이 빠져나갈 거예요. 잠시만요.”
클라인과 쥬스농장의 몸에서 마력이 빠져나가고, 익숙한 마력을 확인한 보안장치는 보안을 해제했다.
차원이 갈라지며 클라인이 늘 촬영을 하는 공간이 나타나고, 클라인은 쥬스농장을 데리고 촬영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
그러고 보니까 촬영 방 안은 청소를 하지 않았지?
클라인은 엉망진창으로 남아 있는 촬영 방을 바라보며 탄식을 흘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쥬스농장은 쓴웃음을 흘리며 고맙게도 촬영 방 안의 참상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 대신 쥬스농장은 사고 회로를 번쩍거리며 탁자 위에 올려진 차원항을 가리켰을 뿐이었다.
“저게 그…….”
“네, 지구산 인간이 들어 있는 차원항이에요. 지금은 리베리아산 인간도 같이 들어 있지만요.”
“리베리아산 인간?”
“아, 켄토르종이에요. 지난번에 창문에 부딪혀서 기절해 있던 걸 구조했어요.”
“시공의 폭풍에 휘말리기라도 한 겁니까?”
“그렇게 보이더라고요. 에구, 빨리 전쟁이 끝나야 이렇게 야생 생물들이 휘말리지 않을 텐데요.”
지금 이 시기는 시공의 폭풍이 빈번해 자기 관측이 안 되는 야생 생물들이 폭풍에 휘말리는 일이 급증한다.
하지만 최근 빈번하게 발생하는 정보 전쟁이 시공의 폭풍을 더욱 만들어 내 야생 생물들의 피해가 더 커졌다.
쥬스농장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한숨을 내쉬며 클라인의 의견에 동조했다.
“정보 전쟁 때문에 정보 생명체 수입도 끊겼거든요. 그것뿐만이 아니라 외우주 탐사도 씨가 말라서 새로 생물들을 들여오기가 힘들어요.”
“아, 모험가들도 확실히 전쟁터를 지나가긴 부담되겠네요.”
“그런 점에서 클라인 씨는 참 운이 좋았습니다. 정보 전쟁이 발발하기 며칠 전에 지구산 인간을 구하다니…… 부럽네요.”
“뭐…… 제 친구가 전쟁도 두려워하지 않는 괴짜여서요.”
클라인은 지금도 한창 외우주를 떠다니며 탐사를 진행하고 있을 친구를 떠올렸다.
그녀가 클라인에게 배송했던 지구산 인간은 총 10마리.
하지만 배송 과정에서 자기 인식에 성공한 건 단 한 마리, 잉간뿐이었다.
원래는 여러 마리의 지구산 인간을 합사해서 키울 생각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지금처럼 단독 사육을 진행하게 되었다.
“그 친구분 연락처는 혹시…….”
“전쟁터에 들어가서 연락이 끊겼어요, 무사해야 하는데…….”
“아이고, 그거 큰일이네요.”
쥬스농장은 지구산 인간을 구할 루트가 사라졌다는 소식에 탄식을, 클라인은 친구의 안위를 걱정하는 탄식을 토해 냈다.
한바탕 탄식을 토해 내고,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클라인은 방긋 웃으며 쥬스농장을 지구산 인간의 차원항으로 안내했다.
“짜쟌~ 어때요? 귀엽죠?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 게 진짜 귀엽죠?”
“허어…….”
쥬스농장은 클라인의 잉간 자랑에 반응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지구산 인간을 살폈다.
쥬스농장은 지구산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정보를 하나하나 해체하며 살펴보기 시작했다.
지구산 인간의 DNA.
심지어 지구산 인간의 예전 기억까지 말이다.
그렇게 지구산 인간의 정보를 모조리 뜯어본 쥬스농장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자신이 관찰한 결과를 클라인에게 말했다.
“직접 보니까 알겠네요. 아슬아슬하게 원시 문명 끝자락에 걸쳐 있네요.”
“어…… 그럼. 법적으로는 문제없다는 거예요?”
“아직 행성계를 벗어나진 못했네요. 뭐, 이만하면 원시 문명으로 취급해도 될 것 같습니다.”
“후우…… 다행이다.”
“유일하게 법을 어길 가능성이 있는 부분은 뭐, 만약 이 생명체가 지적 생명체인 경우인데요. 어차피 지적 생명체 인정을 받으려면 의회에 들고 가서 투표를 받아야 하는데, 그건 클라인 씨가 의회로 들고 가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고요. 그리고 알다시피 최근 100년 동안 새롭게 지적 생명체 인정이 나온 적이 없으니 안심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네……. 휴, 분석 감사합니다. 제가 그쪽 분야는 자격증이 없어서…….”
“하하, 차원항 생활을 하실 거면 분석 쪽 자격증은 하나 따 두는 게 좋아요.”
쥬스농장의 보장에 클라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쥬스농장은 지구산 인간의 옆에서 걷고 있는 켄토르를 바라보며 슬며시 중얼거렸다.
“아, 제 농장 출신 혈통이네요.”
“아, 그래요?”
“리베리아산 켄토르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어요. 하나는 다른 유전자풀과 섞이면서 환경에 적응한 교잡종이고요, 다른 하나가 순수 혈통을 그대로 유지한 종인데요. 털색이나 무속성 마력을 가지고 있는 걸 봐선 순수 혈통종인 것 같아요. 이거, 꽤 귀한 건데 운 좋으시네요.”
“그런가요? 혹시, 돈으로 환산하면 어느 정도…….”
“대충 500만? 아니, 처녀 개체인 걸 감안하면 650까지도 뛰어오르겠네요.”
“650만……!”
650만이라니.
그 정도면 자신의 마력 한 달 치 분량에 맞먹지 않는가?
클라인이 입을 떡 벌리고 놀라워하는 사이, 쥬스농장은 클라인에게 조언을 건넸다.
“만약 판매하실 생각이 있으시면 지구산 인간하고는 분리해 두는 게 좋을 겁니다. 그편이 가격에 손상이 가지 않을 겁니다.”
“아, 저건 잉간이 친구로 놔두려고요.”
“군집을 만드시려고요?”
“군집까진 아니더라도, 혼자 놔두면 스트레스를 너무 받을 거 같아서요.”
“좋은 생각이에요. 기존 환경과 너무 동떨어진 환경인 것도 정신 쪽으로 위험한데, 혼자 놔두면 더 위험하거든요.”
“아, 역시 그래요……?”
슬쩍슬쩍 생각해 오던 거긴 한데, 역시 지구산 인간이 기존에 살던 서식지와 환경이 많이 달랐던 모양이다.
“그, 기존 서식지 풍경은 어떤지 좀 알려 주실 수 있나요……?”
“그건 이따가 합방 때 할 콘텐츠죠.”
“아, 맞다. 그랬죠! 그, 그럼 뭐부터 할까요? 우리?”
그러고 보니 오늘은 합방 영상을 촬영해야 하지.
그 사실을 깨달은 클라인이 긴장된 목소리로 쥬스농장의 지시를 기다리자, 쥬스농장은 피식, 사고 회로를 진동시키며 대답했다.
“일단, 방 청소부터 하죠. 이대로는 영상 못 찍겠네요.”
“아…….”
본격 차원항 훈수 방송이 시작되기까지 앞으로 몇 분 남지 않았다.
* * *
“그래서, 나는 오늘 뭘 하면 되지?”
“오늘? 오늘은 내 호위. 숲에 좀 가야 해서.”
“호위? 흠, 그건 내 주특기지! 맡겨만 두라고!”
방긋 미소 지으며 가슴을 두드리는 블랑카지만, 글쎄?
아직도 머릿속에 블랑카가 엎드리던 모습이 남아 있는 나는 그런 블랑카의 모습이 그리 믿음직스럽진 않았다.
그래도 뭐, 아마 이 숲에서 제일 강한 건 블랑카일 것 같으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만능 사전과 바구니, 돌칼을 챙긴다.
“오늘 뭘 하려고?”
“풀을 좀 베어서 말려 두게. 너도 이불 같은 건 있어야 할 거 아냐?”
“어. 그렇지. 그렇게 신경 안 써도 되긴 한데.”
준비를 다 끝마치고 블랑카와 함께 숲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포로롱, 포로롱.
으, 자꾸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려오긴 하는데 어디서 나는지 모르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숲속으로 더욱 들어갔지만, 문득 이상한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숲속으로 더 들어왔는데 새소리가 더 커지기는커녕 점점 멀어져 가는 것 같다.
어라, 설마 새소리의 근원은 숲속이 아니라 바위산 쪽이라는 걸까?
다그닥, 다그닥.
블랑카의 말발굽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오다 점점 조용해진다.
부드러운 땅바닥이 나를 반겨 오고, 그와 함께 지난번에 블랑카가 사냥을 한 흔적이 나를 맞이했다.
“어우, 이건…….”
도대체 무슨 짓을 하면 나무가 통째로 박살 나는 거지?
나무가 분쇄되어 바닥에 흩어져 있는 어마어마한 풍경에 내가 놀라워하자, 블랑카가 부끄러워하며 중얼거렸다.
“저, 저건 힘 조절을 잠깐 실수한 거야. 부끄러우니까 빨리 지나가자.”
도대체 저 풍경 어디에 부끄러워할 포인트가 있는지 모르겠네.
본인이 부끄럽다고 하니 빨리 지나치자.
“치이잇! 치잇!”
“그르, 그르를!”
“아, 토끼…….”
숲을 탐색하던 와중 토끼나 놀들의 모습이 몇 번 엿보인다.
하지만 토끼나 놀들은 블랑카의 모습을 보자마자 도망쳐 버렸다.
만약 토끼나 놀들이 도망치지 않는다면…….
“흡!”
콰직.
이렇게 단숨에 블랑카의 창에 가슴을 꿰뚫려 죽고 말 테니까.
내가 미처 토끼나 놀을 눈치채기도 전에 먼저 단숨에 벼락같이 뛰쳐나간 블랑카의 모습은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뭐가 보였어?”
“보이진 않았지만, 마력이 흔들렸거든.”
“아, 마력…….”
그놈의 마력, 마력, 마력.
토끼도 마력을 가지고 있고, 점액도 가지고 있고, 돌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왜 나만 없어?
왜 나만 마력 없어?
“저기, 혹시 인공적으로 마력을 얻는 방법 같은 건…….”
“마력을 늘리는 방법은 알고 있지만…….”
“진짜? 진짜로?”
“마력이 아예 없는 사람이 마력을 만드는 방법은 몰라. 미안…….”
“아, 그래…….”
마력이 없는 사람을 납치해서 서바이벌장에 던져 둘 거면, 적어도 마력이 없는 녀석들을 상대로 내보내야지.
뭔 마력이 없으면 아예 건드리지도 못하는 녀석들을 자꾸 내보내?
아까 잡은 토끼들도 이빨이 무슨 마력으로 코팅되어 있어서 마력을 담은 공격이 아니면 파괴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설명을 볼 때마다 뭔가 전 세계가 나를 따돌리는 기분이다.
심지어 마력이 없는 녀석은 마력도 못 얻는단다.
“그, 그래도 잉간은 손재주가 좋으니까…….”
“내가 뭔 원숭이냐? 손재주는 너도 배우면 늘어나는 거잖아.”
“크흠.”
내 기분이 침울해졌다는 걸 눈치채고 블랑카가 위로를 해 보지만, 어쭙잖은 위로는 더 상처를 주는 법이다.
블랑카가 때려잡은 토끼들과 놀을 바구니에 집어넣으며 숲을 빠져나간다.
그러자 나와 블랑카 앞에 이전과 변함없는 모습의 드넓은 들판이 나타나 반겨 줬다.
“오오, 멋진 들판!”
블랑카는 드넓은 들판을 보고 흥분했는지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뭐, 들판을 보면 뛰고 싶어지거나 그래?”
“이 정도로 멋진 들판이면 누구나 뛰고 싶어지지!”
글쎄, 난 아니던데.
나는 이 황금빛의 들판을 볼 때마다 맨 처음 쓰러졌던 기억이 떠오른다.
언젠가는 이 들판을 넘어서 이 세계의 끝으로 가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저 들판을 넘을 방법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저기, 블랑카.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사람을 태우고 달리는 건…….”
“하루 30분이 한계야. 그 이상은 무리.”
“그래?”
“그, 그리고. 등에 누굴 태우는 건 가족과 같은 관계가 아니면 잘 안 해 주는 거거든?”
“그래. 태워 달라고 안 할게.”
“아니, 태워 줘도 되긴 하는데. 너랑 나는 동료? 같은 사이니까…….”
태워 주고 싶다는 거야, 태워 주기 싫다는 거야?
나는 바닥에 바구니를 내려 두고 돌칼로 풀을 베어 바구니에 담기 시작했다.
그렇게 풀을 담던 와중, 언제나의 감각이 또 느껴지기 시작했다.
벌써?
오늘 왜 이렇게 자주 간섭해 오지?
평소와는 좀 다른데.
그렇게 생각하며 압박감이 느껴지는 초원 위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니 회색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저, 저건……?”
블랑카 또한 회색 안개를 눈치채고 바짝 몸을 긴장시킨다.
이젠 저 안개 속에서 뭐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촉수도 나오고, 먹을 것도 나오고, 이상한 기계도 나왔는데.
이젠 뭐 거대 괴수가 나오려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회색 안개를 바라봤고.
“뿌우우!”
회색 안개에서 나온 건, 잔뜩 화난 듯 보이는 거대한 코끼리였다.
어, 진짜 나오라고 빈 건 아니었는데?
29화 [쥬스농장] 양식 인간 사육자들 필독! 핸들링 없이 인간형 생물을 교육하는 법!
회색 안개에서 나온 거대한 괴수는, 코끼리라고 하기엔 너무 거대했다.
도대체 저게 뭐지?
매머드?
아니. 가장 거대한 매머드를 데려다 놔도, 저 거대한 괴수에 비하면 새끼처럼 느껴질 것이다.
매머드처럼 기다란 털이 자라 있는 모습이지만,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전신의 털이 꿈틀거린다.
건물만 한 크기의 코끼리 괴수가 잔뜩 성난 듯 울부짖으며 벌판에 내려앉는다.
“뿌우우우!!”
“흐윽……!”
단지 코끼리가 한 번 울부짖은 것만으로 숨이 턱 막혀 온다.
사이코패스의 압박감과는 조금 종류가 다른 압박감.
사이코패스의 압박감은 영혼이 보내는 위험 신호라고 하면, 이 코끼리는 몸이 위험 신호를 보내온다.
코끼리가 땅에 내려앉고, 나도 땅에 주저앉는다.
저 거대한 덩치와 맞서 싸운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서둘러 도망치려 했지만.
“오, 베헤모스를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네.”
“잠깐, 블랑카?”
잔뜩 들뜬 기색의 블랑카는 내가 미처 말을 걸 틈도 없이 벌판을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거기서 내 용맹한 모습을 신께 똑똑히 증언해 줘!”
아무리 봐도 풍차에 달려드는 돈키호테와 같은 꼴이 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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