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 31
“잉간!”
지끈거리는 두통은 이미 사라졌지만, 말 그대로 몸이 여러 개로 나뉘었던 감각 때문인지 어질어질하다.
밖에서도 내 모습이 이상했었는지 아리스가 서둘러 내 이름을 부르며 내 안색을 살핀다.
나는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차리고는 아리스에게 블랑카와 리키의 행방을 물었다.
“리키하고 블랑카는?”
“잠깐 밖에. 적들이 좀 몰려와서…….”
인터넷을 탈취당하지 못하게 아예 물리적으로 방해하러 왔던 걸까?
서둘러 클라인과 리키의 상태를 확인하러 밖으로 나가려던 그때, 클라인의 작은 손이 내 옷깃을 붙잡는다.
“……?”
무슨 일인가 하고 클라인에게 고개를 기울이자, 클라인이 내 귓가에 무언갈 속삭인다.
“잉간.”
내 이름을 부르는 게 그렇게나 좋은지 클라인은 배시시 웃는다.
“왜, 클라인?”
“잉간, 잉간, 잉간~”
그저 내 이름을 부르고 싶었는지 클라인은 반복해서 내 이름을 부르며 즐거워한다.
내 이름을 부르는 게 그렇게 즐거워할 일인가?
그냥, 나와 말이 통한다는 사실이 즐거운 것이겠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리스는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 지금 클라인이 뭐라고…….”
“지구어. 내 고향의 말이야.”
“그런 게 있었어?!”
지구어는 자동 번역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인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리스에게 클라인과 내가 말한 언어의 정체를 밝힌다.
“당연히 있지. 지금까진 쓸 일이 없었지만.”
마을에는 드래곤들이 펼친 일종의 번역 마법이 작동하기도 하고, 드래곤들과 오래 생활하다 보니 다들 지구어가 아니라 리베리아어 같은 외계어로 대화하는 게 더 익숙해진 상태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지구에 왔는데 지구어로 대화한 건 방금 클라인과의 대화가 처음이네.
그렇게 생각하며 아리스를 바라보자, 아리스는 심통 난 표정으로 내게 달라 붙어왔다.
“나도 알려줘, 나도!”
“뭐, 나중에 시간이 되면.”
“응!”
아리스와 약속을 하고 밖으로 나오니 바닥에 인류 해방 전선들의 시체가 한가득 보인다.
블랑카나 리키의 공격으로 쓰러진 건 아닌 듯 보이는 게, 몸 어디에도 공격을 받은 흔적이 없다.
그저 조용히 잠자듯 바닥에 쓰러져 있을 뿐이다.
내가 시체들을 지켜보는 사이, 인류 해방 전선들의 시체가 서서히 투명해지며 어디론가 사라져간다.
인터넷의 연결을 끊어버린 효과일까?
아리스와 내가 천천히 주위를 살피며 복도를 걷던 그때, 블랑카와 리키가 모습을 드러냈다.
“잉간!”
“블랑카, 무슨 상황인지 알아?”
“나도 잘 모르겠어. 갑자기 엄청나게 몰려들어서 싸움을 대비했는데, 다들 갑자기 쓰러져서…….”
“……그래?”
“응. 로봇들도 전부 다 작동을 멈췄더라고.”
역시 그 로봇들도 인류 해방 전선과 연관이 있던 거구나.
그렇다는 건 인류 해방 전선이 지금 지구에서 사용 가능한 병력은 거의 없다는 소리.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하나다.
청년회.
그 녀석들과 이야기를 해볼 시간이다.
219화 *관리자의 검사를 기다리는 영상입니다
“……왜 이런 짓을 한 거야.”
리키가 막아둔 입구를 치우고 다시 송신실 안으로 들어온 우리를 마주한 것은 착잡한 표정의 드레이크와 드래곤, 그리고 폰은수였다.
우리가 인터넷을 가공하는 사이, 드래곤들도 연구소에서 벌어진 일들을 눈치챈 걸까?
기존 루트로 들어올 시간조차 없었는지 송신실의 천장에는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어깨에 부상을 입은 폰은수를 둘러싸고 추궁하던 드래곤들은 송신실 안으로 들어서는 우릴 보고 다행이라는 듯 외쳤다.
“무사했구나. 다행이네.”
“드래곤 씨.”
“어떻게…… 빠져나온 거지?”
그런 드래곤들과는 반대로 폰은수는 내 모습을 보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아무 말 없이 천천히 드래곤들에게 다가섰다.
“마을은 어때요? 뭐, 피해 본 건 없죠?”
“조금 전부터 갑자기 로봇들의 공격이 심해졌는데, 한순간에 모두 전원이 꺼져서 다운되더라.”
역시나 그 밀렵꾼들하고 인류 해방 전선은 서로 연관되어 있던 게 맞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슬쩍 클라인을 내려다봤고, 클라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폰은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저희가 인류 해방 전선이 인터넷을 조작 못 하게 막았는데 아마 그거 때문일 거예요.”
“어쩐지, 불길한 마력이 더 느껴지지 않더라.”
“저기, 저 사람하고 좀 대화해봐도 될까요?”
“딱히 질문해봐도 대답하지 않을걸? 우리가 지금까지 질문해도…….”
“너, 도대체 어떻게 거기서 빠져나온 거야.”
드래곤들은 폰은수가 나와 대화하려 들지 않을 것이라 말했지만, 드래곤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폰은수는 나를 향해 질문을 던진다.
나는 슬쩍 드래곤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폰은수 앞으로 다가갔다.
“대답해. 어떻게 거기서…….”
“내 질문에 먼저 대답해. 인류 해방 전선이랑 무슨 관계야?”
“…….”
내 질문에 폰은수는 입을 꾹 다물고 내 얼굴을 바라보고, 나도 폰은수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본다.
고민할 게 없을 텐데도 무언갈 고민하던 폰은수는 역으로 내게 다시 제안했다.
“내 질문에 대답해주면 말해주지.”
“클라인이 도와줬어. 왜?”
딱히 별로 숨길 것도 없기에 나는 당당히 폰은수의 질문에 대답했고, 내 대답을 들은 폰은수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빠진 한숨을 토해냈다.
“저게…… 널 도와줬다고?”
“친구니까.”
하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을 담담히 이야기하자 폰은수는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거짓말이 아니었군. 처음부터, 거짓말은 하나도 없던 거야…….”
“이제 네가 대답할 차례야. 인류 해방 전선과는 무슨 사이야?”
“선지자와 그 추종자. 였었지.”
“선지자……?”
선지자와 추종자라니, 무슨 종교를 이야기하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나만이 아닌지 폰은수는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뭐, 네가 생각하는 대로 거의 종교 수준이었으니까. 그들을 우리의 눈을 띄게 해준 선지자로 생각했거든.”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거야?”
“너희가 아는 것은 모두 거짓이다. 드래곤들과 저 기계들은 한편이고, 우린 외계의 존재를 없앨 것이라는…… 뭐, 그런 이야기.”
폰은수에게서 들은 인류 해방 전선의 주장은 지금까지 내가 봐온 그들의 주장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단지 지구의 사정에 맞춰서 가다듬고, 조금 더 덜 폭력적이고 사납지 않게 보이게 했을 뿐이다.
“도대체 왜 드래곤들을 배신한 건데? 내가 알기로 드래곤들이…….”
“마을 주민들을 다치게 한 적은 없지. 그래, 이 달의 마을은 말이야.”
“무슨 소리야?”
“나는 말이야. 다 보고 있었어. 드래곤들은 내가 모른다 생각했겠지만, 다 봤단 말이야. 인간들의 마을을 드래곤이 습격하는 모습을.”
“뭐?”
고개를 들고 드래곤을 바라보자, 드래곤은 내 시선을 피하면서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모두를 구할 수는 없었어. 자급자족할 단계까지 오려면 더 시간이 필요했고, 우리를 거부하는 이들도 있었어.”
“……일단, 믿을게요.”
결국, 드래곤이 마을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마을들을 약탈했단 소리다.
별로 기분이 좋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드래곤이 마을을 자신들의 장난감처럼 대한 건 아니다.
인간을 하등 생물처럼 여기는 것도 아니고.
만약 그랬다면 드레이크가 자신의 몸까지 갉아가며 마을을 지켰겠는가?
“뭐, 지금 생각해보면 인류 해방 전선이 말한 건 너무 과장됐다고 생각이 들긴 해. 드래곤이 마을을 덮치기 전에도 다른 마을끼리 습격해오는 건 일상이었으니까.”
“그런데 왜.”
“글쎄? 그때는 그렇게 믿고 싶었으니까. 그냥, 내가 드래곤을 싫어했던 거일 수도 있고.”
“……인류 해방 전선은 뭘 약속했지?”
“그 누구의 개입도 없는 인간들만의 세상. 드래곤도, 저것도 없는 세상.”
얼핏 듣기에는 좋지만, 인류 해방 전선이 원하는 것은 인류만의 세상이 아니다.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인류의 세상이 아닌 복수다.
클라인의 동족들에 대한 복수와 증오심.
그것이 인류 해방 전선을 움직이는 동력원이다.
클라인의 동족들이 아무 잘못이 없다는 건 아니지만, 인류 해방 전선이 하려는 일을 그렇다고 장려해야 할 일은 아니다.
“그럼, 인류 해방 전선과 지구에서 뭘 하기로 했어? 드래곤들을 쫓아내고 나서?”
“드래곤들을 쫓아내는 건 우리의 주된 목적이 아니었어. 단순한 부수입이었지.”
“그럼, 진짜 목적은 뭐였는데?”
“……외인. 그러니까 클라인을 죽이고, 당신을 납치하는 것.”
“뭐?”
“인류 해방 전선은 당신이 올 줄 알고 있었어. 정확하겐 클라인이 이곳에 올 걸 알고 있었지.”
“그걸 어떻게…….”
“글쎄. 그것까진 나도 모르겠군.”
단순한 예측인 걸까?
아니면 밀렵꾼들과 모종의 관계가 생각보다 더 깊숙이 얽혀있는 걸까?
어떻게 클라인의 움직임을 인류 해방 전선이 미리 알 수 있었을까?
클라인을 죽이려 했다거나 나를 납치하려 했다는 건 별로 놀랍지 않았다.
원래도 그 녀석들이 하려던 짓들이었으니까.
“그게 주된 목표였고, 그 다음으론 정보 가공 기술의 탈취가 목적이었지.”
“정보 가공 기술? 그걸 왜?”
“그들 말로는 마력이 없는 이들도 정보를 가공할 수 있어야 외인들을 죽일 수 있다고 하더군.”
인류 해방 전선과 밀렵꾼들의 관계를 고민하던 그때, 이어서 나온 폰은수의 대답은 꽤 충격적이었다.
클라인의 동족과 싸울 수단은 그 대장에게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젠 평범한 조직원들도 그럴 수 있게 무장한 걸까?
어쩌면 이제야 대화를 시작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기도 했지만, 나는 그것보다 걱정이 더욱 앞섰다.
그들이 분명히 그것들로 좋지 않은 짓을 저지를 것이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미 저질렀지.
클라인에게서 전해 들은 지금 인간들의 상황이 어땠더라?
중앙 정부에게 유해종으로 지정 당했다 했었나?
만약 여기서 더 문제가 일어난다면 유해종으로 지정하는 것을 넘어서, 아예 토벌령이 내려올지도 모른다.
젠장, 이렇게 되면 천천히 대화로 풀어갈 문제가 아니라 힘 대 힘의 문제가 되어버린다.
이미 압도적으로 힘의 차이가 나는 상대에게 힘으로 맞붙어봤자 상대가 유리한 테이블로 올라가게 된다는 걸 인류 해방 전선은 모르는 걸까?
아니, 알면서도 무시하는 것이겠지.
그들은 정말로 인류를 위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복수를 하고 싶을 뿐이니까.
설령 그 복수가 절대로 성공하지 못할지언정.
우리는 절대 힘과 폭력이 지배하는 협상장이 아니라, 감정에 호소하는 광장으로 나서야 한다.
저들이 ‘정부’를 자처하는 이상, 시민들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는 없을 테니.
우리는 우리가 유리한 곳에서 싸워야만 한다.
“그리고, 그거 말고는?”
“그거 말고는…… 모르겠군. 일단 드래곤들을 쫓아내는 것 외에는 모르겠어.”
“…….”
드래곤들을 쫓아내고 난 뒤의 일을 어떻게 해결할지 궁금했는데,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은 모양이다.
이 빌어먹을 행성을 그나마 살기 좋았던 예전으로 돌려놓을 방법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것조차 없어?
서로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는 모두 한 것인지 나와 폰은수는 입을 다물었고, 그 틈을 타서 드레이크가 천천히 폰은수에게 다가와 질문했다.
“넌, 우리가 밉니?”
“그래.”
“……지금까지 보여줬던 모습은 다 연기였던 거니?”
“그건, 아냐.”
대답으로 성립하지 않는 대답이 돌아왔지만, 드레이크는 그거면 됐다는 듯 슬프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랬으면 다행이네.”
“……날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마을의 규칙에 의거해서…… 너를 감옥에 가두게 되겠지.”
“하. 고작 그것뿐이야?”
폰은수는 드래곤들을 비웃듯 그렇게 외쳤지만, 드래곤들은 슬픈 눈빛으로 폰은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우린 괴물이 아니라 같은 사람이잖니.”
“빌어먹을.”
그런 둘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폰은수는 욕설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이봐, 처녀자리 B 방향, 45구역, A4-98. 거기에 그 녀석이 있어.”
“뭐?”
“가족 놀이는 오글거린단 말이야.”
내가 폰은수가 뭐라 말했는지 파악하기도 전에 폰은수의 머리가 퍼석, 하고 반으로 갈라진다.
방금 말한 건 설마, 인류 해방 전선의 본거지를 말한 걸까?
본거지를 말하지 못하게 무언가 제한이 걸려있었고, 폰은수는 그걸로 자결을 택한 걸까?
폰은수의 최후를 지켜본 드래곤은 한숨을 내쉬며 슬픈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오만했어. 속죄 같은 생각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드래곤.”
“어쩌면 난 말 그대로 가족 놀이를 하고 싶었던 거일지도 몰라.”
드래곤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쉬고, 송신실 안에는 불쾌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모습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송신실의 컴퓨터로 다가갔다.
“잉간? 뭘 하려고?”
“생각해놨던 게 있어서요. 가능하나 보려고요.”
“가능하나 보려고? 뭘?”
“당연히, 이 개판을 복구하는 거죠.”
“뭐?”
지구는 개판이 났고, 더 개판이 나는 건 막아냈다.
그러니 개판을 다 싸그리 청소할 방법을 시도해볼 차례다.
* * *
“미쳤군. 넌 미쳤어.”
“알아.”
“그들하고 싸워서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저들의 몸에 상처를 낼 수 있다고 해도 우리가 저들을 이길 수는 없다고. 저들은 말 그대로 버튼 하나로 우리를 다 쓸어버릴 수 있어!”
“그래, 우린 저들을 이기지 못하지.”
“그런데 어째서……!”
“하지만 나는 가능해.”
“뭐?”
“우리와 합류해라.”
“윽, 크윽. 으아악……!”
누군가의 외마디 비명이 차원항 안에 울려 퍼지고.
그것은 차원항 밖에 넘실거리는 그들의 피를 보며 싱긋 웃었다.
자신이 죽을 거란 생각도 하지 않던 자들이 마지막에 짓는 표정을 보는 게 어찌나 즐거운지.
지구에서 가져온 마지막 퍼즐 조각으로 모든 준비가 갖춰졌다.
그럼 이제 해야 하는 일은 단 하나만이 남았다.
복수?
아니, 지금부터 할 일은 복수가 아니다.
전쟁이지.
220화 *관리자에 의해 비공개 처리된 영상입니다
지구는 완전히 망했다.
드래곤들도, 뭐 지구 구석구석의 방주로도, 심지어 클라인의 동족들도 아마 지구를 원래대로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사실은 반드시 인정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모든 일을 시작할 수 있으니까.
지구를 원상복구 시키려고 하는 건 불가능하니, 그 대신 지구를 살기 좋게 바꾸는 게 우리의 목표다.
원래대로가 아닌, 더 좋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드래곤들이 스스로의 몸을 갉아가며 방사능에 찌든 지구를 정화하려 했지만 그건 아주 소수의 구역에만 적용되는 일이다.
온 지구를 정화하려면 드래곤들을 아예 통째로 갈아 넣어야 할 것이다.
내가 시도해보자 하는 것은 인류 해방 전선의 방식을 차용해보는 것이다.
인류 해방 전선은 인터넷을 장악해서 자신들을 지구로 옮겨오려 했다.
그것처럼 나도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조작하는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서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 그걸로 지구의 오염을 정화할 수 있을지 시도해보는 것이다.
“으음…….”
한참 동안 인터넷을 살펴본 내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가능하다.
충분히 가능하다.
인터넷의 힘을 사용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다만, 맨 처음 내가 내린 전제를 어기지 않는다는 가정에선 말이다.
어쭙잖게 과거의 모습을 복원하려고 인터넷을 사용했다간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더 나은 상황이 될 것이다.
연구소에 달이 처박힌 것처럼 말이다.
애초에 연구소에 달이 처박힌 이유가 달을 지구처럼 바꾸려던 시도 때문이었던 걸 잘 생각해야 한다.
지금의 지구를 부정하는 게 아닌, 지금의 상태를 기반으로 더 좋게 바꾸는 방식.
천천히 하나씩 바꾸는 거다.
우선 지구를 뒤덮은 빌어먹을 방사능부터 좀 어떻게 제거하고.
망가진 바다와 초원을 복구하고, 하늘을 뒤덮은 먼지들을 조금씩 걷어낸다.
신이 이르길, 태초에 빛이 있었다고 한다.
신조차 처음부터 모든 걸 완성하지 못했단 뜻이다.
조급해하지 말자.
뭐든지 천천히.
“……아니, 이상하잖아. 말 그대로 세상을 다시 만드는 수준의 정보 조작이라고. 혼자서 가능한 수준이 아니라고.”
“언제 제가 지금 당장 한댔어요?”
“뭐?”
“제가 하지도 않을 거고, 지금 당장 하지도 않을 거예요.”
드래곤들은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껌뻑거린다.
그런 드래곤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리고 지구인들이 조금씩 인터넷을 통해서 정보 조작을 할 거예요.”
“불가능해. 너니까 가능한 거지, 평범한 사람들은…….”
“드래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른 사람들도 모두 가능한 일이야.”
단칼에 불가능한 일이라 부정하는 드래곤들에게 나는 조금 굳은 표정으로 그들을 노려보며 현실을 상기시켰다.
“그래, 나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긴 하지. 하지만 단지 난 여러 사람이 뭉친 인간이야. 그 말은, 여러 사람이 뭉치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그렇지.”
“드래곤. 너무 가족 놀이에 심취하지 마. 인류는 너희의 이웃이지, 네 가족은 아니야.”
폰은수의 유언을 떠올리며 나는 드래곤들에게 경고를 던진다.
드래곤들도 폰은수의 말을 떠올렸는지 쓰게 입맛을 다신다,
그 모습을 대충 곁눈질로 흘겨보며 나는 천천히 화면에 인터넷망이 연결된 장소들을 표시한다.
“지금은 마을과 연구소만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전처럼 전 세계를 인터넷으로 연결한다면……. 정말로 지구 전체를 정보 조작하는 것도 가능할 거에요.”
인터넷으로 온 지구를 둘러싸고 모두가 조금씩 정보 조작을 하면 된다.
정보 조작을 위한 기술을 회수하는 데 성공했으니, 멸망 이전처럼 다들 조금씩 컴퓨터로 정보를 조작해서 오염을 정화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드래곤 씨가 더 잘 알고 있죠?”
이곳으로 달려오며 보았던 정화된 벌판을 떠올리며 그렇게 말하자 드래곤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수긍했다.
인류 해방 전선도 몰아냈고, 로봇들의 습격도 이젠 모두 멈췄다.
이제 남은 건 평화롭게 인터넷망을 재건해서 지구를 회복시키는 일뿐이다.
그리고 그건, 이제 더 이상 지구에 있을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조금 더 있어도 괜찮지 않겠어?”
그 사실을 눈치챈 듯 블랑카가 내게 다가와 조금 더 지구에 있길 권유한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흔들며 블랑카의 제안을 거절했다.
“여기서 내가 할 일은 모두 끝났으니까. 이제 돌아가야지.”
지구의 일은 내가 없이도 이제 잘 흘러갈 것이다.
하지만 클라인의 일은 그렇지 못하다.
아니, 위에 내가 중얼거린 건 다 겉치레다.
그냥 내가 원하는 거다.
지구보다 클라인의 곁에 남는 것을.
그렇게 생각하며 다 함께 연구소를 빠져나가던 때, 클라인이 슬쩍 내게 속삭여온다.
“아직, 조금 시간 남았는데.”
“다행이네.”
아무래도, 돌아갈 때까진 약간의 시간이 남은 모양이다.
“잉간.”
“응?”
“설명, 부탁해.”
그렇게 밖으로 빠져나와 숙소로 돌아와 클라인과 함께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블랑카가 삐죽 입을 내밀고 내게 설명을 요구해온다.
“정확히 뭘…….”
“전부 말이야. 전부.”
머리를 긁적이며 어떻게 해야 클라인과 내가 대화하고 있는 이 상황을 설명해야 할지 생각해본다.
블랑카 입장에선 클라인과 내가 멀쩡히 대화하는 이 상황이 얼떨떨하게 느껴지겠지.
내가 맨날 서로 대화를 할 거라 노래 부르다가 갑자기 클라인과 대화할 수 있게 된 상황이니까.
한참을 생각해도 설명해야 할 게 한 둘이 아니었고, 결국 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을 택했다.
“……클라인에게 직접 들어봐.”
클라인에게 설명을 떠넘긴 것이다.
* * *
첫 대화.
그리고 계속된 대화.
잉간이와 대화하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했지만, 이렇게 계속 대화를 이어나가는 게 즐거울 줄이야.
예상했으면서도, 예상하지 못한 즐거움이다.
그렇지만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즐거운 시간은 늘 끝을 맞이하는 법이다.
[처리 완료.]
폭발하는 기지를 배경으로 찍은 파인만의 인증샷을 바라보며 클라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지구는 한동안 안전할 것이다.
인간이 지적 생명체로 인정되기까지 충분한 시간을 벌어다 주겠지.
분명 처음 목표했던 것들은 다 이루었는데 마음이 좋지 않다.
하루만 더 지구에 있다가 가고 싶지만, 그랬다간 정말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 테니까.
슬슬 마법을 풀고 파인만과 함께 돌아갈 시간이다.
지구에서 있었던 일은 파인만에게도 말하지 못할 비밀로 남겨둬야겠지.
한여름 밤의 꿈처럼 말이다.
곤히 잠든 잉간이와 그 룸메이트들을 바라보며 클라인은 잉간이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자신을 친구라고 생각한다면, 자신의 친구들도 친구로 여겨달라는 잉간이의 말.
잉간이의 말대로 룸메이트들과 대화를 나눠봤지만, 클라인도, 룸메이트들도 그리 쉽사리 친해지기 어려웠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무언가 보이지 않는 벽이 서로 마음을 툭 터놓고 이야기하는 걸 가로막는 느낌이었다.
리만이 말했던 핵심 정보 단계에서의 족쇄가 이걸 말하는 걸까?
말 그대로 ‘본능’적인 거부감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클라인과 룸메이트들의 사이를 껄끄럽게 만드는 건 아니었다.
어째서인지 룸메이트들을 보고 있으니 유치한 질투심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유치한 질투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이, 클라인이 생각하기에 그 질투의 원인은 룸메이트들은 잉간이와 편히 대화할 수 있다는 점이었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클라인은 결국 잉간이의 친구들도 친구라고 인정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나저나 블랑카라고 했었나?
그 여자가 말한 말이 클라인의 머리를 자꾸만 맴돌며 괴롭힌다.
자기 감정에 솔직해지라니, 도대체 무슨 말이야?
이해할 수 없는 말도 그렇고, 자기가 뭐라도 된 것 마냥 의기양양하게 행동하는 모습이 별로다.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흐앗?!”
그런 생각을 하며 가만히 잉간이의 머리맡에 앉아있다 보니, 차원 파괴자.
그러니까 에포나가 클라인에게 맞장구를 쳐왔다.
갑작스러운 에포나의 출현에 클라인은 깜짝 놀라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기가 정실인 것처럼 행동하는 게 참…….”
“저, 정실?!”
“가장 먼저 만났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던데, 그런 식이면 내가 정실인데 말이야. 참.”
에포나는 그렇게 말하며 촉수를 꺼내 곤히 잠든 블랑카의 뺨을 쿡쿡 찔러댔다.
에포나의 촉수가 불쾌한지 블랑카는 악몽을 꾸듯 신음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클라인은 불퉁한 목소리로 에포나에게 말했다.
“뭘 하러 온 거야?”
“뭘 하러 오다니. 난 처음부터 여기 있었는걸?”
에포나는 능청스럽게 그리 말하더니, 스르륵 포메라니안의 모습으로 변하며 잉간이의 위에 자리를 잡았다.
“있지, 날 어떻게 생각해?”
“응……?”
“네 기준이라면 나는 블랑카나 아리스, 리키랑 비슷하게 취급받아야 하는 거 아냐?”
“그렇지…….”
클라인은 갑작스러운 에포나의 질문에 당황했지만, 에포나는 그런 클라인을 신경쓰지 않고 가만히 클라인을 바라보며 질문을 계속했다.
“그럼 말이야, 네 사회에서 나를 어떻게 여길까?”
“어?”
“한 가지 확실한 건, 나는 인간도 아니고. 너희가 말하는 시민의 범주도 아니지. 하지만 난 네가 생각하는 지적 생명체. 그러니까 ‘친구’의 범주에 들어가잖아?”
“그건…….”
“어라? 설마, 아냐?”
“아냐, 맞아. 너도……. 친구지. 응.”
아까 잉간이의 친구들과 나누던 대화를 다 지켜보고 있던 걸까?
클라인은 떨떠름하게 에포나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에포나는 스르륵 촉수를 들어 올리며 또 하나의 질문을 던져왔다.
“그럼. 인간들이 지적 생명체. 그러니까, 시민으로 인정받으면 나도 시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거야?”
“어?”
“나는 인간이 아닌, 잉간이의 친구고, 너의 친구잖아? 시민이 아닌 사람하고 친구를 맺을 수는 없으니, 나도 시민으로 인정받는 거지?”
“그건…….”
“너는 인간들을 시민으로 인정받게 하려 하니, 그럼 나도 인간이 되는 걸까?”
“…….”
클라인은 갑작스러운 에포나의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없었다.
확실한 건, ‘인간’만을 시민으로 인정한다면 에포나는 시민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중앙 정부가 인간의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잉간이의 친구들을 시민으로 인정해줄까?
엄밀히 따지면 잉간이와 잉간이의 친구들은 전혀 다른 종이다.
과연 중앙 정부가 잉간이의 친구들을 시민으로 인정해줄까?
만약 클라인이 잉간이의 친구들 또한 시민으로 인정받게 하려면, ‘인간’을 시민으로 인정받게 해서는 안 된다.
단순한 ‘인간’을 시민으로 인정해달라 하면 중앙 정부는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좀 더 자세한 분류.
그들은 그걸 원할 것이다.
예를 들어, ‘지구인’이라든지 ‘리베리아인’이나 ‘키메라 인간’ 같은 분류를 말이다.
그렇다면 중앙 정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한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점을 클라인이 생각하는 동안, 에포나는 그런 클라인의 모습을 아무 말 없이 지켜봤다.
고민하는 클라인의 모습을 즐기듯 말이다.
그렇게 날이 밝고, 클라인이 파인만과 함께 지구를 떠나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괜찮냐?”
“어?”
“뭔가 고민이 많아 보여서.”
“아하하, 조금 피곤해서.”
“내가 정보 압축은 좀 적당히 하라고 했잖아.”
“미안…….”
지켜보던 파인만이 클라인을 걱정할 정도로 클라인은 온갖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앞으로의 계획.
잉간이와의 대화는 참 즐거웠지.
인류 해방 전선이 더 인간의 이미지를 망치기 전에 뭔가 해야 할 텐데.
에포나의 이야기도 곰곰이 생각해봐야 하고.
직접 지구의 풍경을 보고 왔으니 차원항 안의 풍경도 좀 더 좋게 바꿔야겠지.
그리고 또…….
그렇게 복잡해진 머리로 간신히 집에 돌아온 클라인은 일단 털썩 침대에 드러누워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하다.
지금은 잠시 누워서 쉬고 싶어.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클라인은 마력망을 확인하지도 않고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휴식을 취했고.
쿵쿵쿵.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으음……?”
누가 이 시간에 찾아온 거지?
클라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천천히 현관으로 나갔다.
파인만이 찾아온 걸까?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클라인을 마주한 건.
“누구…… 시죠?”
“시민 클라인. 당신을 차원 생물 관리법 위반으로 체포합니다.”
“……네?”
중앙 정부에서 나온 감찰관들이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221화 *위원회의 승인을 기다림
차원항으로 돌아오고 나서 내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침대에 쓰러져서 곤히 자는 것이었다.
하도 신경을 쓸 일이 많아서인지, 아니면 이전에 해본 적 없는 규모로 정보 조작을 진행해서인지 꽤나 피로가 많이 쌓여 있었던 모양이다.
역시 침대 안이 최고야.
“응……?”
그렇게 생각하며 아리스나 리키와 함께 침대에서 뒹굴거리던 그때, 무언가 불길한 감각이 차원항 안에 느껴진다.
누군가 억지로 차원항 내부로 침입해오는 수상한 감각.
그와 동시에 블랑카가 일으킨 것으로 추정되는 폭음이 들려와 나는 서둘러 소리가 들려온 장소로 달려갔다.
“블랑카, 괜찮……?”
서둘러 블랑카가 괜찮냐고도 묻기도 전에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굳은 표정으로 침입자들을 잘근잘근 짓밟고 있는 블랑카의 모습이었다.
인류 해방 전선.
어째서인지 그들이 또다시 나타난 것이다.
여긴 분명 클라인의 차원항 안이니 저들이 이곳의 위치를 알아내기란 무척 어려운 일인데도 말이다.
적어도 차원항 밖에서 침입해오는 걸 생각했지, 이렇게 차원항 내부로 직접 들어오는 건 예상하지 못했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걸까?
“아, 잉간.”
“이건, 어떻게 된 일이야?”
“글쎄? 그냥 사냥이나 나갈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더니 갑자기 허공에 나타나서 덤벼들더라고.”
블랑카는 발밑에 나뒹구는 인류 해방 전선의 시체를 툭툭 걷어차며 방금 전의 전투의 감상을 말했다.
“마력이 부족한 상태를 가정했는지 그렇게 어렵진 않더라고.”
“으음…….”
마력이 부족한 상태라기보단, 블랑카가 인류 해방 전선의 생각을 벗어난 게 맞다고 봐야 할 것 같은데.
시체들의 정보를 열람한 결과, 예전에 봤던 녀석들보다 더 튼튼한 녀석들이었으니 말이다.
아니, 어쩌면 이 녀석들은 주력이 아닐 수도 있다.
처음에 그저 좌표의 확인을 위해 보내진 병력이라고 생각하는 게 더 옳겠지.
그리고 그 생각을 긍정하듯 허공에 기묘한 빛이 생겨나더니, 그 안에서 새로운 인류 해방 전선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으아…….”
그 모습을 보고선 블랑카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돌격할 준비를 시작하지만, 그보다 앞서서 아리스와 리키의 마법이 작렬한다.
리키의 손에 뭉쳐진 정체불명의 액체가 인류 해방 전선들에게 흩뿌려지더니, 아리스가 그대로 번개를 방전시킨다.
원래라면 사방으로 흩어졌어야 할 번개지만, 리키의 능력으로 에너지를 한쪽으로 유도하는 것인지 아리스의 공격은 전부 인류 해방 전선들에게 적중한다.
이대로 쓰러져주면 좋겠지만, 내 예상대로 두 번째의 침입자들은 꽤나 무장을 갖춘 것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묘한 방패를 만들어 공격을 막아낸다.
“저건…….”
내가 상태창을 만들어내는 것과 비슷한, 주위의 정보를 가공해서 보호막을 만들어낸 것이다.
자세히 해방 전선들의 몸을 살펴보니 묘한 형태의 수정이 붙어있다.
설마, 인류 해방 전선의 방식대로 만든 정보 조작 기계인 걸까?
그러거나 말거나, 블랑카는 단숨에 전신에서 마력을 뿜어내며 마력창을 내찌른다.
“읏…….”
하지만 블랑카의 공격 또한 보호막을 뚫지 못하고 가로막히고, 그 틈을 타서 인류 해방 전선은 반격을 날리려 하지만.
슥.
전보다 튼튼하게 결합됐다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정보의 이음새를 내가 끊어내어 순식간에 시체 덩어리로 변해버린다.
그걸로 모든 상황이 끝난 줄 알았지만, 또다시 인류 해방 전선은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젠장, 무슨 바퀴벌레도 아니고 어디서 자꾸 튀어나오는 거야?
혀를 차며 계속해서 인류 해방 전선을 막아내던 그때, 무언가 이상한 것이 내 눈에 들어온다.
처음에는 인류 해방 전선이 차원문을 연 줄 알았지만, 자세히 바라보니 차원문처럼 빛나는 공간 아래에 무언가 놓여 있다.
저건, 뭐지?
“블랑카, 포탈 아래에 있는 거. 회수할 수 있겠어?”
“포탈?”
“저 녀석들이 나오는 곳 아래 말이야.”
“아, 저거?”
블랑카의 눈에도 바닥에 놓인 무언가가 보이는 것인지 잠시 포탈이 잠잠해진 틈을 타서 그것을 회수해왔다.
“……반려넷?”
놀랍게도, 포탈 아래에 놓여있던 것은 반려넷에 접속하기 위한 휴대용 단말기였다.
문득 떠올린 생각이 맞다는 걸 말해주듯 단말기의 위치가 바뀌며 포탈의 위치도 따라 바뀐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이 반려넷 단말기가 어떤 식으로든 인류 해방 전선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래부터 반려넷에서 인류 해방 전선이 출몰해댔으니 어쩌면 당연한 건가.
일단, 이 단말기를 없애면 잠깐이라도 녀석들이 차원항으로 들어오는 걸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파직.
또다시 단말기와 연결된 통로로 해방 전선이 나오려는 기미를 보이기에 서둘러 단말기를 박살 내 연결을 끊어버린다.
그러자 예상대로 포탈이 사라지며 평온이 찾아오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온 내가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반려넷 단말기를 작동시키는 것이었다.
“이게 도대체 뭔 일이냐……?”
반려넷을 킨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그야말로 개판 그 자체였다.
아니, 평소에도 개판이긴 한데 이건 좀 종류가 다르다.
[인류 해방 전선에 합류해라] [인류 해방 전선에 합류해라] [인류 해방 전선에 합류해라] [인류 해방 전선에 합류해라] [인류 해방 전선에 합류해라] [인류 해방 전선에 합류해라] [인류 해방 전선에 합류해라] [인류 해방 전선에 합류해라] [인류 해방 전선에 합류해라] [인류 해방 전선에 합류해라]
딱 봐도 뭔가 평소와는 전혀 다른 반려넷의 상태.
인류 해방 전선의 광기에 반려넷 전체가 집어 삼켜진 듯한 모습이다.
물론, 변함없는 것도 있었다.
[이 새끼들 뭐냐?]
-이 무뢰배들 때문에 흑잠이가 다쳤음. X같네.
[댓글]
-잠시 후 인분충이 몰려올 글입니다.
-아저씨 그거 쓰레기라니까?
-인류 해방 전선에 합류해라.
[속보, 큰일 남.]
-X스하고싶음.
[댓글]
-중성화 수술도 소용이 없었네…….
-ㄴ마음의 X지가 솟아난거시야요 하와와.
[요즘 인분충들 왜 이렇게 날띄냐?]
-더위 먹었나?
[댓글]
-아직도 차단 안 한 바보 없지?
-ㄴ하지만 같은 반려넷 나카마인걸?
-인류 해방 전선에 합류해라.
몇몇, 계속 반려넷에 보이던 사람들은 인류 해방 전선에도 끄떡없이 태평하게 반려넷을 하고 있었다.
분명히 나처럼 계속해서 습격을 받고 있는 게 분명해 보이는데도 말이다.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신경 머리야?
반려넷을 잠깐 보고 나서 알 수 있는 건 확실했다.
반려넷이 인류 해방 전선에 잠식당했다는 것.
그리고 인류 해방 전선이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했다는 것.
아마 지금 반려넷에 인류 해방 전선에 관련된 글을 올리는 녀석들은 전부 습격을 받고 세뇌당한 것이겠지.
일단, 더 귀찮은 일이 일어나기 전에 반려넷을 차단해두자.
그리고 클라인에게 반려넷의 일을 전달해야 하려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또다시 묘한 감각이 느껴진다.
인류 해방 전선의 것과는 다른, 좀 더 위압적인 기운.
클라인의 동족의 기운인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인상을 찌푸리며 슬쩍 하늘을 올려다본 그때.
“……읏!”
어느 순간,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누군가가 서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거운 압박감이 느껴지며 신음을 흘리며 한 발자국 물러서 경계 태세를 취한다.
그런 내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것의 정체는 머리에 카메라가 달린 것 같은 기묘한 로봇이었다.
로봇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해 내가 인상을 찌푸리던 그때, 로봇의 스피커가 치직거리며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비 시민 잉간, 당신을 차원 생물 관리법 위반 행위의 참조인으로 체포합니다.”
“뭐……?”
로봇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는 내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소리였다.
이게 도대체 뭔 소리야?
* * *
“시민 클라인, 당신을 차원 생물 관리법 위반으로 체포합니다.”
올 것이 왔다.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리만과 잉간이에 대해서 대화를 나눴을 때부터 마음 한구석에서 저절로 각오하고 있었다.
이렇게 중앙 정부가 나설 것을.
하지만 클라인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중앙 정부가 나설 만한 짓은 한 적이 없는데?
아니, 있긴 하다.
하지만 그건 지구에서의 일인데, 설마……?
클라인이 감찰관의 말을 듣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감찰관은 다 알고 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지구에서의 일. 다 알고 있습니다. 귀찮게 하지 마시고 따라오시죠.”
“그, 그걸 어떻게…….”
“중앙 정부는 모든 걸 알고 있습니다.”
“…….”
사실 애초에 지구까지도 중앙 정부의 감시망 안에 들어가 있던 걸까?
아니면 자신이 지구에 갔기 때문에 지구가 중앙 정부의 감시를 받게 된 걸까?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는 것이다.
“저, 저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결국, 클라인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도망쳐봤자 바로 붙잡힐 것이다.
아니, 애초에 도망칠 힘이나 능력도 없다.
그런 클라인의 모습을 관심 없다는 듯 무료하게 바라보며 감찰관은 늘어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아마 위원회에 불려가지 않을까요? 위원회 직할로 내려온 명령이니.”
“위, 위원회 직할이요? 어째서요?”
“그야 저도 모르죠?”
위원회 직할이라니, 세상에.
윤리 위원회도 아니라 위원회라고?
도, 도대체 이제부터 어떤 일을 당하는 걸까?
문득 리만이 클라인에게 이야기했던 각종 고문들이 떠오르며 클라인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감찰관은 체크 리스트를 넘기며 클라인의 집 안으로 들어섰다.
“음……. 그러니까 다음은. 참고인으로서 비 시민 잉간을 체포하겠습니다.”
“이, 잉간이도요?”
“네. 차원항은 어디 있죠?”
“그게…….”
“아, 저건가요?”
감찰관이 잉간이를 체포하러 향하는 사이, 클라인은 잔뜩 고민했다.
설마, 자신뿐만이 아니라 잉간이까지 체포할 줄이야.
잉간이라도 탈출시켜야 하나?
하지만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지?
“……저기. 윤리 위원회가 아니라 위원회 직할이라고 하셨죠?”
“그런데요, 왜요?”
그래.
클라인을 체포하는 곳이 윤리 위원회가 아닌 위원회인 걸 오히려 다행으로 생각하자.
적어도 위원회에서 클라인의 목소리를 들으려 한다는 뜻이니까.
아무 변론을 듣지 않을 것이었으면 윤리 위원회에 회부해서 형사처분을 내렸을 것 아닌가?
이건 기회다.
위원회에 직접 잉간이가 지적 생명체라는 걸 인정받게 할 수 있는 기회.
설령 내가 처벌을 받더라도 잉간이가 시민으로 인정받기만 하면 나의 승리가 아닌가?
물러서거나 도망치지 말고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거다.
클라인이 그렇게 생각하며 각오를 다지던 그때, 고통스러운 감찰관의 비명이 들려왔다.
“아야……!”
“무, 무슨 일이에요?!”
깜짝 놀란 클라인이 서둘러 감찰관을 바라보자, 클라인의 눈에는 손가락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감찰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223화 *최고 의원회의 검토를 기다림
“잉간. 이것이 참조인의 이름이 맞는가?”
“네. 맞습니다.”
하얀 공간에서 어찌해야 할지 충분히 생각을 가다듬고, 또 한 번 가다듬던 무렵 드디어 하얀 공간이 흩어지며 나를 바깥으로 내뱉는다.
바깥으로 나온 나를 제일 처음으로 반긴 것은 도무지 외견을 종잡을 수 없는 4명의 거인이었다.
전신을 짓누르는 듯한 위압감이 느껴졌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애써 몸을 세우고 그들의 질문에 답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내 이름을 질문한 그들은 본격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참조인은 거짓을 말하지 않고, 청문회에 성실히 임하겠음을 선서하는가?”
“참조인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겠음을 선서합니다.”
“좋습니다. 참조인, 참조인은 시민 클라인과 대화를 하는 행동이 법을 위반하는 행동이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까?”
“어렴풋이요. 대충, 이런저런 반응으로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흐음. 불법임을 알고도 대화를 했단 말이죠.”
“네. 클라인이 아닌 제가 주도해서 말이죠.”
“……흐음. 그런가요? 저희가 아는 바로는 시민 클라인의 주도로 이뤄진 것으로 아는데.”
거인들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클라인을 흘깃 바라본다.
하지만 나는 당황하지 않고 당당하게 거인들에게 외쳤다.
“대화를 어떻게 한쪽만이 주도해서 오래 끌고 나갈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그렇네요.”
내 반론을 들은 거인들은 쉽사리 내 반론을 인정하고 내게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묻겠다. 참조인과 시민 클라인이 대화한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이 목적이었는가?”
“……그냥. 이라고 밖에 답할 수 없겠는데요.”
“그냥?”
“처음에는 좀, 약간 화났다고 해야 하려나. 그래서 뭔가 쏘아붙이고 싶었던 거였지만, 뭔가 점점 제대로 된 대화를 해보고 싶어져서……”
두 번째의 대답을 들은 거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내가 들을 수 없는 대화를 나누며 의견을 주고받는다.
내게 이런 걸 물어보는 이유가 뭘까?
내가 참조인인 것을 생각하면 클라인의 발언을 검증하기 위해서겠지.
저들은 클라인이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내게 접근했다고 생각하는 걸까?
하지만 클라인에게 아무 의도가 없었다는 건 바꿀 수 없는 사실이고, 거인들은 결국 딱 하나밖에 없는 대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참조인의 발언과 정보를 종합했을 때, 시민 클라인에게 내란의 혐의는 없음을 인정한다.”
내란?
갑자기 스케일이 왜 이렇게 커져?
그냥 나와 클라인이 서로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 왜 내란죄까지 나아가는 거지?
나는 거인들의 사고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어진 발언으로 거인들이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또한, 이것으로 시민 클라인에게 내려졌던 1급 관찰령을 해제하고, 3급 관찰령을 발령한다.”
“엑…….”
“또한, 시민 클라인에 대한 처벌을 발표하겠다. 시민 클라인이 단순한 시민 리만에 의한 피해자이며, 현재 일어나는 소요 사태를 주도할 의도가 없었음에 따라 차원생물 관리법 위반에 관한 것만 처벌하도록 하겠다.”
그거구나.
정보 조작 기술을 얻은 인류 해방 전선이 지금 난리를 치고 있고, 클라인이 고의로 인류 해방 전선을 돕기 위해 나와 대화를 하려 했던 게 아니냐는 거지?
처음에는 클라인을 어떻게 의심하던 중앙 정부도 지금의 문답으로 클라인은 순전한 피해자라는 것을 안 것 같다.
“판결. 시민 클라인에게 3달간의 벌금형을 내린다. 시민 클라인은 앞으로 3달간 수입의 50%를 정부에 제출해야 한다.”
처음에 내란이니 흉흉한 소리가 오가던 것과 걱정하던 것에 비해선 무척 낮은 형벌이 클라인에게 내려진다.
이걸로 청문회는 끝난 건가?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청문회의 대상이 클라인에게서 내게로 옮겨왔을 뿐인 것 같다.
“다음으로, 참조인 잉간의 처분에 대해서 논의하겠다. 본 의원은 참조인과 시민에게 기억 소거를 행해야 한다 주장한다.”
“본 의원은 참조인이 보유한 공적 포인트에 따라, 시민 승격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생각한다.”
“본 의원은 현상 유지를 제안한다. 기억 소거를 시민에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 그래.
시민과 대화하는 동물의 처우에 대해서도 결정을 해야겠지.
클라인에게 처벌을 내리고 그냥 그대로 방치한다면 사실상 그 처벌만으로 나와 클라인이 대화하는 것을 허용한 셈이니 말이다.
중앙 정부는 어떻게든 나를 다시 평범한 동물의 위치로 돌려놓고 싶은 모양이다.
나와 클라인의 의사를 무시하고 자기들끼리 뭐라 떠드는 모습이 퍽 보기에 좋지 않다.
과연 내가 저 사이에 파고들 수 있을까?
도무지 가능성이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해야만 한다.
이게 내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다.
지금 이 자리.
저들이 마련한 무대에서 조연으로나마 서 있는 이 순간.
지금이 아니라면 나는 저들과 다시 대화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저들이 정부를 자칭한다면, 규칙을 지켜야 하니까.
여긴 청문회장.
사람의 목소리를 서로 듣기 위한 장소다.
“역시, 시민 클라인과 참조인의 기억을 소거하는 게…….”
“그에 사용되는 마력을 생각해보게. 그것보단 그냥 감시를 강화하는 게 더…….”
“이의가 있습니다.”
조용히 손을 들어 올리고 의원들에게 이의를 표출한다.
내가 목소리를 낼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는지 의원들은 일제히 나를 바라보고, 클라인 또한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내야만 하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의원들은 가만히 나를 노려보다 무뚝뚝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어떠한 이의인가?”
나는 청문회에 선 참조인.
이 자리가 아니라면 나는 저들에게 다시 시민이 아닌 차원 생물로 돌아가겠지만, 이 자리에서만큼은 저들은 나를 시민으로 인정해야 한다.
여긴 시민들의 장소니까.
어쩌면 저들이 나를 아예 시민으로 취급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임시 시민권이라도 발급된 모양인지 의원들은 나를 제지하지 않았다.
“클라인, 그러니까 시민 클라인에게 내려진 판결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판결에 어떤 이의가 있는가?”
“클라인에게 씌워진 혐의부터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리고 나는, 저들을 향해 당당히 정면에서 승부를 걸었다.
저들이 내세운 모든 것에 내걸린 전제를 정면에서 부정한다.
“시민 클라인은 차원 생물 관리법이 아닌, 차원 생물 서식지에 관한 법률만을 위반한 것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저는 차원 생물이 아닌, 하나의 시민입니다. 그러므로 클라인은 차원 생물과의 대화를 금지하는 법안을 위반하지 않았습니다.”
저들의 주장은 내가 인간, 사람, 시민이 아니라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러므로 나는 저들의 주장을 틀렸다 주장한다.
나는 사람이며, 인간이고, 저들의 시민이 될 것이다.
“……시민? 참조인은 지금 지구인이 중앙 정부의 시민이라 주장하는 것인가?”
“아닙니다. 지구인은 중앙 정부의 시민이 아닙니다.”
이어진 의원들의 질의.
의원들은 내가 지구인이 중앙 정부의 시민이라 주장할 줄 알았는지 내 대답을 듣고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아마 내가 이런 대답을 할지 몰랐던 모양이지.
내가 지구인을 시민이라 주장할 생각이었다면 클라인은 처음부터 그 어떠한 법률도 어기지 않았다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지구인을 시민이라 주장할 생각이 없다.
아직까지는.
“시민은 참조인 잉간. 지금껏 시민 클라인과 대화를 나누고, 교감하고, 함께 살아온 지구인, 저 하나뿐입니다.”
“……그러므로 시민 클라인은 법률을 어기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자네는 중앙 정부의 시민 데이터에 포함되지 않았다. 자네에게 부여된 것은 청문회를 위한 임시 시민권이야.”
“임시 시민이어도 시민은 시민이죠. 임시 시민은 정부의 판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까?”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저는 시민입니다. 그러므로 중앙 정부의 판결은 틀렸습니다. 또한, 저는 중앙 정부의 실수로 시민 데이터에 등록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중앙 정부가 실수를 했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모순.
엉망진창인 억지 논리를 들이민다.
하지만 그래도 저들은 여기서 나를 내보낼 수 없다.
지금 이 순간만은 나는 저들의 시민이며, 나는 시민의 권리를 행사하는 중이니까.
의원들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증거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증거를 제시해라. 그대가 어째서 시민인지.”
“시민과 대화하기에 충분한 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민의 의무를 수행할 능력도 가지고 있습니다. 시민이 되고자 하는 의지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시민입니다.”
“그대의 말에 따르면 그대는 능력이 있음에도 시민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았다.”
“시민의 권리 또한 누리지 못했죠. 정부의 실수로 인해.”
권리 후에 의무가 오는가, 의무 후에 권리가 오는가.
그건 정부나 철학자들이 고민하라 하고, 나는 뭐든지 정부에게 트집을 잡아야 한다.
정부의 실수로 내가 시민의 권리를 누리지 못했기에, 시민의 의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뭔가 이상하면서도 뭔가 그럴듯한 주장.
그건 의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는지 의원들은 더욱 서로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대를 시민이라 인정한다면, 우리는 너무나 많은 생물들을 시민이라 인정해야 한다. 어째서 그대는 우리의 시민인가?”
결론이 제대로 나지 않은 걸까?
아니면 내게 넘어오고 있다는 뜻일까?
의원들은 또다시 내게 내가 시민이라는 증거를 요구했다.
내가 시민이라는 증거로 사용할 수 있는 게 또 뭐가 있지?
그러니까, 그러니까……
빠르게 내가 시민이란 증거를 찾던 그때, 내 머릿속에 한 가지 방안이 떠오르고, 나는 그것을 바로 실행에 옮겼다.
“다른 시민이, 저를 시민이라 인정했습니다.”
“다른 시민?”
“클라인. 시민 클라인이 저를 같은 시민이라 인정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당신들의 시민입니다.”
의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클라인에게 향하고, 클라인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딸꾹질을 내뱉는다.
“흐익?!”
“시민 클라인. 그대는 참조인을 같은 시민이라 인정하는가?”
“네? 그, 그게요……!”
“인정하는가?”
갑작스러운 일에 당황한 것인지 클라인의 눈이 빙글빙글 돌아가면서도 내 얼굴을 바라본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그것에 용기를 얻은 것인지 클라인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잉간이는…… 제 친구이고, 제 인생의 반려가 되어줄 사람이고…… 그리고 저와 같은 시민이에요…….”
“이해했다.”
이걸로 된 건가?
이걸로 된 거겠지?
클라인의 대답을 들은 의원들이 입을 다물고, 나와 클라인은 피가 바짝 마르는 기분으로 의원들의 대답을 기다렸다.
내가 저항할 수 있는 건 모두 했다.
이래도 안된다면, 그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리고, 마침내 의원들의 입이 열렸다.
“이 안건은 4인 의원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한바, 최고 위원들의 답변을 요청했다.”
“최고 의원들의 답변을 발표하겠다, 잠재적 시민 잉간이 지금껏 얻은 공적 점수와 시민 클라인의 요청으로 판단하건대, 잠재적 시민이 아닌 일반 시민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인정한다.”
“그건……”
“참조인 잉간. 아니, 시민 잉간. 그대의 주장을 인정하는바, 시민 클라인의 판결을 수정한다.”
성공한 걸까?
정말로?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너무나 시원스럽게 인정해버린 위원들의 모습을 보고 나와 클라인은 어안이 벙벙한 모습으로 얼어붙었고, 의원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해서 새로운 판결을 발표했다.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너무나 허탈하게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일어난 일.
하지만 여기서 만족해선 안 된다.
나 하나만을 생각한다면 여기서 멈춰선 안 된다.
클라인과 나만이라면, 여기서 멈춰도 되지만.
내게는 나의 연인들이 있다.
블랑카, 아리스, 리키, 에포나.
나의 소중한 사람들.
그 사람들까지 생각한다면 여기서 물러설 순 없다.
그렇게 나는 또다시 용기를 내어.
“시민 잉간, 한 가지 고발할 것이 있습니다.”
“……고발? 누구를?”
“저는, 중앙 정부의 잘못을 이 자리에서 고발하겠습니다.”
한 발자국 내디뎠다.
224화 [공익 광고] 절약은 시민의 의무입니다
“저는 중앙 정부의 잘못을 이 자리에서 고발하겠습니다.”
“중앙 정부의 잘못……?”
“저를 시민으로 인정했다는 건, 지금까지 제가 부당한 대우를 받아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죠. 그러므로 지금까지 제가 받은 피해에 대한 보상을 원합니다.”
정부가 나를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던 건 실수다.
그 실수로 인해 나는 피해를 입었다.
그러므로 중앙 정부에 피해 보상을 요구한다.
완벽한 논리다.정부에서 내 주장을 아니꼽게 여기고 불이익을 가해도 반드시 보상을 받아내야 한다.
겁먹을 필요는 없어.
시민으로 누려야 할 권리를 행사하는 것일 뿐이니까.
내가 이런 발언을 할 줄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는지 의원들이 또다시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기 시작한다.
“시민 잉간. 그대가 받은 부당한 대우가 무엇인가?”
“납치를 당하고도 제대로 된 보호를 받지도 못했고, 시민으로 누릴 정당한 권리를 누리지 못했죠.”
“윽…….”
클라인이 뭔가 찔리는 듯한 신음을 흘렸지만 무시한 채로 나의 억울함을 호소한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의원들이 옳다구나 하고 내 말을 단번에 수긍할 리 없었다.
“불가하다. 시민권을 취득하기 전의 일에 보상을 소급적용할 수는 없다.”
“그래도 제가 납치당한 건, 그때 당시 기준으로도 지금으로도 법을 위반한 것 아닌가요?”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희가 보상할 수 있는 건 납치로 인한 피해뿐입니다. 그 외의 건은 보상할 수 없습니다.”
뭐, 어차피 처음부터 소급 적용이 정말 이뤄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 보상을 받아낼 수 있게 됐다는 것부터 성공이다.
블랑카와 리키, 아리스까지 ‘임시 시민’으로라도 인정하는 것을 보상으로 요구하면 어떻게 되려나?
가장 좋은 건 지구인들을 시민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거지만, 이건 솔직히 무리다.
좀 더 시간이 지나고, 정부가 뭘 원하는지 알아내야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지구인 전부가 아니라 세 사람 정도라면, 충분히 보상으로 요구할 수 있지 않을까?
애초에 이런 주장에 대한 규정이 따로 마련되어 있을 리가 없다.
차원 생물이 시민으로 인정되는 경우가 그렇게 많진 않았을 테니까.
“그렇다면 보상은…….”
“그 건에 대해서, 최고 위원들의 전언이 있었습니다.”
“최고 위원들……?”
“시민 잉간은 자격을 증명했다. 최고 위원과의 면담을 허용한다.”
최고 위원과의 면담?
아니, 그보다 자격을 증명했다니?
지금까지의 문답은 모두 시험이었던 걸까?
한 가지 확실한 건, 생각보다 그리 나쁘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한참은 더 타협하고 거래해야 제대로 된 대화를 해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의원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과 함께 내 눈앞에 메시지 하나가 떠오른다.
[0등급 접근 권한을 임시 취득했습니다.]
이게 최고 위원들과 대화할 수 있는 허가인 걸까?
메시지가 떠오르자 주위의 풍경이 한 꺼풀 변화하기 시작한다.
평범해 보이는 방으로 보이던 풍경들에 눈이 솟아난다.
꽤 소름 끼치는 풍경에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주위의 눈들이 빙그르르 한 바퀴 회전하더니 일제히 내 얼굴을 바라본다.
수많은 눈들이 눈을 깜빡이고, 나 또한 눈을 감았다 뜬 순간.
나는 어두컴컴한 공간으로 이동해 있었다.
“시민 잉간, 방문을 환영합니다.”
어둠 속에서 천둥과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희미한 불빛들이 모여 작은 공 형태를 이룬다.
저게 최고 위원인 걸까?
이 중앙 정부의 실질적 지배자?
묻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나는 우선 조심스럽게 가장 묻고 싶은 것부터 질문했다.
“자격을 증명했다는 게 무슨 뜻이지? 설마, 모든 게 시험이었다는 거야?”
“시험, 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시험은 아닙니다. 그저, 당신의 대응이 저희의 기준을 충족시켰을 뿐입니다.”
“기준?”
“사업을 믿고 맡길 수 있다는 거죠.”
사업을 믿고 맡기다니.
그러니까 내가 중앙 정부가 보기에 쓸만해 보였다는 건가?
그렇게 최고 위원의 말을 더듬는 사이, 최고 위원은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안다는 듯 먼저 보상 이야기를 꺼냈다.
“함께 생활하는 잠재적 시민 3인, 아니……. 4인의 시민권을 인정해드리도록 하죠.”
“그건…….”
“그 네 사람만입니다. 다른 잠재적 시민들은 불가능합니다.”
뭔가 교섭을 해서 지구인들도 포함시켜보려 했지만, 다른 협상의 여지가 없다는 듯 최고 위원은 딱 잘라서 내게 보상안을 제시했다.
전체 시민들에 비해서 지구인들은 정말 새 발의 피 수준일 텐데 어째서 이렇게 거절하는 거지?
단호한 최고 의원들의 태도에 의문점이 생겨난 나는 조심스럽게 그 점에 대해서 질문을 던졌다.
“어째서 안 되는 거죠?”
“마력 때문입니다.”
“마력이요? 마력이 없는 게 문제인가요?”
“아니오. 그들이 마력을 사용하게 될 것이라는 게 문제입니다.”
“네?”
지구인들이 마력을 쓰게 되는 것이 문제라니, 무슨 소리지?
내가 여전히 의원들의 대답을 납득하지 못하자 의원들은 순순히 내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괜히 숨기는 건, 당신의 궁금증을 자극하는 꼴이 되겠죠. 쉽게 말해서, 우리는 마력을 절약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구인들은 마력을 쓰지 못하니, 상관없는 게 아닌가요?”
“설령 지구인들이 마력이 필요 없는 문명을 이용한다고 해도, 기본적인 마력망 유지비가 늘어나고, 이는 중앙 정부의 사업 계획을 망가트립니다.”
“지구에서 마력을 생산한다면요?”
“정보를 마력으로 바꾼다 해도, 인구 증가폭과 변환 효율을 생각해봤을 때 불가능합니다.”
지구인이 추가된다고 해서 정부 사업에 지장이 생길 정도로 마력이 모자란다면, 이미 진작에 마력 부족에 시달려야 하는 게 아닌가?
아니면, 지금 이 상태가 아슬아슬한 평행 상태에 올라선 상태인 걸까?
마력 소모가 문제라면 애초에 지구에 마력망을 설치하지 않으면 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으로 최고 의원들에게 반론해 봤지만, 돌아온 대답은 은근히 성실한 것이었다.
“안 됩니다. 지구인들을 시민으로 받아들인 이상, 우리는 모든 시민들을 동등하게 대우해야 합니다. 지구에만 마력망을 설치하지 않는 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어…….”
그러니까 최고 위원들의 말은 동등히 대우할 수 없으니 아예 시민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거 아닌가?
뭔가 옳은 말인 것 같으면서도, 이상하게 느껴지는 대답이다.
확실한 건 중앙 정부가 ‘시민’들에 대해선 정말 진심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또 하나의 제안을 던져본다.
“지구에 마력망을 설치하는 게 문제라면, 지구인들이 이미 마력망이 설치된 곳으로 이주한다면?”
지구에 지구인이 있는 게 아니다.
지구인이 있는 곳이 지구지.
어딘가의 망치의 신이 들었던 말 비슷한 말을 떠올리며 제안을 해보지만, 최고 의원들은 이것 또한 단칼에 거절했다.
“지구인들이 마력망 내에 융화되었을 시, 향후 지구인들의 인구 증가폭에 마력 생산량이 따라오지 못함.”
쩝, 지구인들은 마력을 쉽게 만들 수 없다는 게 문제네.
아니, 그보다 뭘 하든지 마력이 부족하다 하는데 왜 이렇게 마력이 부족한 거야?
마력이란 거,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게 아니었나?
나는 뭐만 하면 마력이 부족하다 외치는 중앙 정부에 불평을 투덜거렸다.
“마력이 도대체 왜 자꾸 부족해지는 건데?”
“마력은 유한하다. 마력은 순환하지 않는다. 순환하는 것처럼 보여도, 마력의 손실이 벌어진다. 그 결과, 우주의 마력은 점차 줄어든다.”
뭐……. 그러니까 엔트로피 증가니 빅 프리즈니 하는 그런 이유?
마력이 점차 줄어든다는 이유라면 저들도 어찌할 수 있는 게 없겠지.
저들을 설득하려면 좀 더 확실한 걸 가져와야만 한다.
나는 이런저런 마음을 담아서 중앙 정부를 살짝 비꼬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내 예상 밖의 것이었다.
“전지하지만, 전능하진 않나 보네.”
“그렇지 않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능한 분들이 그럼 마력은 왜 재생하지 못하는데?”
“가능하다. 우리는 마력을 재생시킬 방법을 가지고 있다.”
“뭐?”
마력을 재생시킬 방법이 있는데 왜 이렇게 궁상이야?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최고 의원들을 바라봤고, 최고 의원들은 덤덤히 그 이유를 읊었다.
“마력을 재생시키기 위해선 마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린 얼마 남지 않은 마력의 고갈을 대비해 마력을 모으는 중이다.”
“마력의 고갈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그렇다. 우리에겐 남은 시간이 없다. 시간을 늘릴 방법은 있지만, 그에도 마력이 필요하다.”
마력을 재생시키기 위해 필요한 마력을 모으기 위해 그렇게 절약을 하고 있다는 건가.
문득 은하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의문의 폭발로 인해 마력이 사라지고, 탄탈로스들이 멸종 위기에 빠졌다고 했었던가.
어쩌면 그건 폭발이 아니라, 중앙 정부가 마력을 수집하던 흔적이 아니었을까?
그나저나 마력 고갈이 얼마 남지 않았다니, 도대체 얼마나 가깝길래 중앙 정부가 이렇게 난리를 피우는 거지?
“그럼……. 그 마력의 고갈은 언제 일어나지?”
“약 13조 8만 5천 년 후. 우리는 그렇게 예상하고 있다.”
“……응?”
13조 8만 5천 년 후?
그게 곧 마력 고갈이 닥치는 거라고?
아니, 잠깐만.
솔직히 내겐 13조 8만 5천 년 후나 우주의 멸망까지 남은 시간이나 비슷하게 느껴지지만, 중앙 정부에겐 다르게 느껴질 수 있지.
왜, 우주적 시간으로 보면 13조 년은 꽤 짧은 시간일 수도 있지 않은가?
“마력의 재생에 필요한 마력이 모이려면 13조 5만 년 정도가 필요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지구인의 시민권은 그 후에나 인정할 수 있다.”
어째서 중앙 정부가 ‘잠재적 시민’ 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는지 알 것 같네.
13조 년 후에는 어차피 전부 다 자신의 시민으로 삼을 예정이었다, 이거지?
하지만 그렇다고 알겠습니다 하고 물러나기엔 남은 시간은 너무 길다.
저들에겐 짧을지 몰라도, 우리에겐 너무나 긴 시간이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지구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을 테니까.
“그러므로 시민 잉간. 조급함을 가지지 말고 기다려라. 빠른 시일 내에…….”
“죄송하지만, 그 주장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동의할 수 없다?”
“계산에 오류가 있는 것 같아서요.”
“계산에 오류가 있다니. 시민 잉간. 그대는 지금 중앙 정부가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인가?”
“네. 물론이죠. 지구인들을 시민으로 포함한다면, 13조 년? 그보다 더 빠르게 마력을 모을 수 있을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지구인들은 마력을 사용하지 않는 문명을 만들었습니다. 마력을 쓰지 않는 마력망, 인터넷도 만들었고요. 지구인들의 문명을 중앙 정부 전체로 확대하면 되는 겁니다.”
“……검토해보겠다.”
최고 의원들은 내 주장을 듣고 계산을 시작했는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허공을 바라본다.
나는 계산이 진행되는 사이 계속해서 추가 의견들을 제시한다.
“만약 지구의 문명 수준이 현재의 문명 수준이 못 미친다 해도, 중앙 정부의 도움이 있다면 빠른 시일 내에 더욱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을 겁니다. 마력을 쓰지 않는 문명을 이룬다면, 마력이 모이는 속도가 더 빨라지겠죠.”
“검토하겠다.”
과연 이 주장이 잘 먹힐까?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천천히 중앙 정부의 입이 열리는 것을 기다리고, 이윽고 최고 의원들이 입을 뗐다.
“검토 결과, 지구의 문명 발전 속도를 고려했을 때, 시민 잉간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확인.”
“그럼……!”
좋아, 받아들여졌어.
이대로만 가면 완벽한 승리인데…….!
“하지만 그것만으로 지구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할 수는 없음. 지구인의 공헌도가 지나치게 낮음.”
아니, 시민이 되어야 공헌도가 오르든 말든 할 것 아냐?
내가 혀를 차며 어떻게 공헌도를 올릴지 고민하던 그때, 중앙 정부에게서 한 가지 제안이 들어왔다.
“그러므로, 본 의원들은 시민 잉간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함.”
“제안이라면……?”
“시민 잉간이 직접 공헌도를 올리기 위해, 위험 요소를 제거할 것을 제안.”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제안.
“중앙 정부는 시민 잉간에게 인류 해방 전선의 토벌을 요청함.”
인류 해방 전선의 토벌.
225화 인류 해방 전선이 궁금한 사람들만 봐.txt
“인류 해방 전선의 토벌이라면…….”
“중앙 정부나, 다른 시민의 도움을 받지 않고 시민 잉간 혼자서의 힘만으로 인류 해방 전선을 토벌할 것을 요청함.”
최고 의원들이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내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른다.
[임무: 시민 잉간 단독으로 인류 해방 전선을 토벌할 것]
-기한: 1주일
마치 게임의 퀘스트처럼 떠오른 메시지.
아니, 혼자서 인류 해방 전선을 토벌하라는 것도 좀 힘들어 보이는데, 제한 시간이 있다고?
그것도 1주일?
이거, 불가능한 임무 아냐?
뭔가 항의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조심스럽게 최고 의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단독으로 토벌하라는 건 무슨 뜻이죠?”
“말 그대로, 다른 시민의 도움을 받지 않고 시민 잉간 혼자서 토벌을 진행하는 것이다.”
“다른 시민의 도움 없이 말이죠?”
“그렇다.”
다른 ‘시민’이라.
몇 가지 단서는 주어졌고, 저쪽도 말 그대로 불가능한 과제를 낼 생각은 아닌 듯하다.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약간의 불평 섞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쪽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토벌할 수 있을 텐데요.”
“마력의 절약을 위하여.”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큰 마력이 필요할 거라곤 생각되지 않는데.
내가 한숨을 푹 내쉬는 모습을 바라보며 최고 의원은 내게 추가타를 날려왔다.
“중앙 정부는 시민 잉간의 주장에 타당한 이치가 있다고 판단하는바, 임무의 성과에 따라 지구에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을 결정했다.”
“알겠습니다. 하겠습니다.”
“시민 잉간, 더 이상의 질의가 필요한가?”
“없습니다.”
“그럼, 다음 방문을 기다리도록 하지.”
여기까지 들으니 중앙 정부가 내게 이런 임무를 맡긴 의도를 알 것 같다.
이건 마지막 시험이자 경고인 걸까?
지구에 시민권이 부여된다고 해도 인류 해방 전선처럼 행동해선 안 된다는 경고.
뭐, 인류 해방 전선이 싫은 건 나도 마찬가지니 별 상관은 없다.
오히려 기회가 된다면 인류 해방 전선을 직접 쓰러트리고 싶은 정도니까.
다만 조금 마음에 걸리는 것은, 인류 해방 전선의 수장인 그 남자.
사실상 그 남자가 인류 해방 전선 그 자체지만, 그 남자를 쓰러트리기란 무척 어렵다.
아무리 잡졸을 전부 다 없앤다고 해도 그 남자만 남아있다면 언젠간 다시 인류 해방 전선이 재건될 것이니까.
중앙 정부가 내게 원하는 것도 그 남자의 토벌을 원하는 것 같고.
애초에 잡졸들만 제거한다면 그냥 궤도폭격 같은 걸 날리면 되니 절약할 정도로 많은 마력을 소비할 이유도 없잖아?
일단은 돌아가서 그 남자를 어떻게 쓰러트릴지 고민해보자.
뭔가 머릿속에 계획이 떠오르곤 있지만, 그게 정말 통할지는 모르니까.
[0등급 접근 권한이 회수되었습니다.]
눈앞에 메시지가 떠오르고, 주위의 풍경이 다시 원래대로 되돌아온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어느 순간 클라인과 함께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잉간, 어땠어? 이상한 짓을 당하거나 그런 건 아니지……?”
“아, 클라인.”
돌아온 직후, 클라인과 나는 멍한 채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린 클라인이 허둥지둥 내 몸을 살핀다.
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몸을 살피는 클라인을 안심시키며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전한다.
“그러니까……. 너 혼자서 인류 해방 전선을 격퇴해야 한다고……?”
“응. 뭐, ‘시민’이 아닌 사람들하고 협력할 수는 있지만.”
“어, 그런 거야?”
“괜히 ‘시민’을 강조했겠어?”
뭐, 내가 자의로 해석한 거라고 해도 난 그런 줄 알았다고, 중의적으로 해석 가능하게 한 정부 잘못이라고 우기면 정부도 그리 뭐라 하지는 못하겠지.
하지만 클라인은 여전히 안심할 수 없는 듯 불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그…… 인간을 쓰러트릴 수 있겠어?”
“그건…… 뭐, 생각해둔 건 있어.”
확실히 쓰러트릴 수 있다곤 단언할 순 없지만, 실패하더라도 도망칠 시간은 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방법이 있다고 말해도 불안한지 클라인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을 거두지 않았고, 나는 그런 클라인을 안심시키기 위해 가슴팍에 위치한 클라인의 머리를 슬쩍 쓰다듬었다.
여기서 더 고민해봤자 해결할 수도 없고, 도울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달은 클라인은 이내 한숨을 쉬며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그런데…… 괜찮아?”
“응? 뭐가?”
“너라면…… 지구인 한정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시민권을 부여하고 싶었을 것 같아서.”
“아, 그거? 괜찮아. 애초에 처음부터 그렇게 될거라곤 생각하지도 않았어.”
“그, 그래?”
“그래. 그리고 어차피 지구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한 거나, 모든 인간에게 시민권을 부여한 거나 마찬가지야.”
“응? 그건 무슨 소리?”
클라인은 내 말이 잘 이해가 안 되는지 고개를 갸웃거렸고, 나는 씨익 웃으며 클라인에게 대답했다.
“지금, 지구에 순혈 지구인만 사는 건 아니잖아?”
“응……?”
“드래곤들, 그리고 큐비의 피가 섞인 인간들이 살아가고 있지.”
“그, 그렇네?”
“그들이 지구인이 아닌 건 아니잖아? 지구의 인간만이 지구인이라는 주장은 할 수가 없어. 지구에 사는 사람이 지구인이란 거지.”
“그건…… 설마?”
“그래. 나중에 시민권을 확대시키고 싶으면, 지구 출신이 아닌 사람들을 지구로 받아들이면 되는 거야.”
다른 행성, 다른 세상의 인간들이 지구에 와서 살면 그게 지구인이지.
생물학적 이야기를 꺼내며 안된다고 트집을 잡으면 큐비의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면 된다.
큐비의 정보가 지구의 인간에 섞인 덕분에 너무 정보가 다른, 그러니까 성게나 말과 번식을 하려는 것만 아니라면 다른 세상의 사람들과도 자손을 남길 수 있게 됐다.
서로 번식할 수 있다면 같은 종이라는 주장이 이상하진 않잖아?
그게 아니더라도 자신 스스로나 상대방의 정보를 수정하는 것으로 충분히 번식이 가능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천천히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우주의 모든 인간들을 지구인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거야.”
그 과정이 쉽거나 빠르게 이뤄질 일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가능한 일이다.
그 때문에 내가 ‘지구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려 애썼던 것이고.
뭐, 중앙 정부가 이 사실을 모르진 않을 것이다.
알면서도 눈 감고 넘어가 준 것이겠지.
내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 정도의 인구는 감당할 수 있을 테니까.
지구가 수용할 수 있는 인구에도 한계가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구가 가득 찬다고 해서 포기할 줄 알았어?
지구가 가득 차게 된다면 다른 행성으로 진출하면 된다.
지구인이 사는 땅이 지구니까.
그때쯤 되면 인간들의 세력도 꽤 커졌을 테니 정부도 조금 억지스러운 주장이어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시민이고, 정부는 시민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으니까.
아무튼, 이렇게 토벌 후의 미래를 상상하는 건 김칫국을 들이마시는 일이다.
어떻게 일주일 안에 인류 해방 전선을 토벌할지 계획을 가다듬는 일부터 해야지.
자, 그럼 다시 차원항 안으로 돌아갈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무언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응……?”
잠깐만, 잘 생각해보니까 지금의 내 몸은 클라인과 비슷한 크기로 맞춰져 있잖아?
보니까 지난번처럼 클라인과 연결된 무언가 있지도 않은데, 어째서 크기가 비슷한 거지?
설마, 시민권을 얻었다고 크기가 자동으로 보정되는 걸까?
확실히 그럴듯해.
그런데, 그러면 어떻게 다시 차원항 안으로 들어가지?
“잉간? 무슨 일이야?”
“어, 그게. 몸 크기를 좀…….”
“크기?”
고개를 갸웃거린 클라인은 이내 내가 무슨 문제를 겪고 있는지 깨달은 듯하다.
“아, 그거라면…… 잠깐만…….”
클라인은 서둘러 시스템 창을 열어서 무언가를 조작한다.
그러자 스르륵 하고 나의 몸이 순식간에 축소되어 예전의 익숙한 풍경이 돌아온다.
클라인의 손바닥 위에 올라탄 채로 감탄사를 내뱉으며 클라인에게 묻는다.
“이건?”
“개인 공간에서는 신체 크기를 어느 정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거든. 원래는 정부한테 바로 들키니 사용 못 했지만……. 이젠 뭐…….”
해탈한 것처럼 쓴웃음을 짓는 클라인의 모습에 나 또한 쓴웃음을 짓는다.
시민권이 발급됐으니 이젠 전처럼 숨을 필요가 없다는 건가.
그런데 시민권이 발급된다고 해도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는 건 아닌데, 그건 어떻게 처리할까?
점진적으로 인식을 바꿔 갈까, 아니면 단번에 상식을 개변해버릴까?
뭔가 지금까지 봐온 행적으로는 상식 개변을 저지를 것 같아서 조금 무섭네.
“그럼, 다녀올게.”
“응!”
클라인의 배웅을 받으며 차원항 안으로 몸을 집어넣는다.
익숙한 차원항 내부의 풍경이 나를 반기고, 어두운 표정의 블랑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블랑카.”
“잉간?! 괜찮아?!”
어째 이 대화를 아까부터 반복하는 느낌이네.
하긴, 내가 생각해도 멀쩡히 돌아온 게 이상하긴 했어.
나도 교섭을 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난 아리스와 리키를 모아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전달했다.
“……그렇게 된 거야.”
“흐음……. 그러니까 잉간은 시민으로 인정받기 위해 공적을 세워야 한다 이거지?”
“그런 셈이지.”
“그 녀석들이 어딨는지 위치는 아는 거야?”
“알긴 알아. 진짜인지는 모르지만…….”
지구에서 폰은수가 죽기 직전 내게 남겼던 좌표.
아마 그게 인류 해방 전선의 본거지가 있는 좌표겠지.
“위치를 알아도 갈 방법이 없지 않아? 다른 시민의 도움을 받으면 안 된다며?”
“그렇지. 그렇지만, 너희는 아직 시민이 아니잖아?”
“……응? 그렇긴 하네.”
아직 블랑카나 아리스, 리키는 시민권을 취득하지 못한 상태.
그러니까 그 말인즉.
“아리스가 분명히, 차원문을 열 수 있었잖아?”
“응. 맞아!”
아리스의 차원문으로 단숨에 인류 해방 전선의 본거지로 쳐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뭐, 좌표만으로 차원문을 열긴 힘들 수 있지만 그걸 보조해줄 게 우리에겐 있으니까.
인류 해방 전선이 반려넷을 점령했다는 건, 역으로 반려넷을 통해 인류 해방 전선과 접촉할 수 있다는 것.
반려넷과 인류 해방 전선이 이어진 선을 잘 찾아내면 차원문을 여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서, 반려넷의 사람들을 아군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고.
“어떻게?”
블랑카는 그런 내 계획을 듣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외쳤고, 나는 블랑카에게 내 계획을 설명했다.
“지금까지 자기들을 괴롭히던 녀석들의 본거지로 향하는 차원문을 열어주면, 그 녀석들이 차원문을 탈까, 타지 않을까?”
“무조건 타겠네.”
“그치?”
인류 해방 전선이 각자의 집에 침입하던 짓을 반대로 되돌려줄 뿐이다.
뭐, 그 사람들을 내가 제어할 수는 없겠지만 마음대로 날뛰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전력이 되어줄 것이다.
“일단, 어떻게든 그 남자를 찾기만 하면 돼.”
“그 남자라면, 인류 해방 전선의 수장?”
“응. 그러면, 어떻게든 될 거야.”
“……제대로 된 계획인 거 맞지?”
“제대로 된 거야. 그 녀석들이 하던 짓을 되돌려줄 뿐인걸?”
“더 믿음이 가질 않는데.”
나와 그 남자가 마주한다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고 결판이 날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딱히 뭔가 준비할 필요는 없다.
이미 경험해본 걸, 역으로 되돌려줄 뿐이니까.
“자, 그럼…….”
충분한 휴식.
마음의 준비도 끝.
이제, 출발할 시간이다.
[인류 해방 전선 짜증 나면 개추 ㅋㅋㅋㅋㅋ]
-댓글:+999
226화 ■■■
[인류 해방 전선 짜증 나면 개추 ㅋㅋㅋㅋㅋ]
-따르고, 19구역, 87776, 전부, 이어라, 00900, 별 무리, 7, 11**3.
그 새끼들 본거지 알아냈으니까, 이번엔 우리가 역으로 분탕 치러 가자.
[댓글]
-자~드가자~자~드가자~자~드가자~자~드가자~자~드가자~자~드가자~자~드가자~
-나는 너희를 조질 거야~ 나는 너희를 조질 거야~ 나는 너희를 조질 거야~ 나는 너희를 조질 거야~
-일단 나부터 개추 ㅋㅋㅋㅋㅋ
-인류해방전선에합류하라
-평소에 게시판을 눈팅만 하던 사람입니다만 작금의 상황에 개탄을 금할 수가 없어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제가 알기로 여러분 모두 선량…….
“잘 타네.”
말 그대로 타오른다.
할 거라곤 반려넷밖에 없던 인간들이, 최근 몇 주가 넘는 시간 동안 인류 해방 전선의 도배질 때문에 제대로 반려넷을 하질 못했다.
보통 그렇게 되면 반려넷을 접는 게 맞을 텐데도 아직도 반려넷을 붙잡고 있는 이 폐인들 앞에 아주 흥미로운 주제를 던져주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렇게, 불타오른다.
반려넷 게시판의 모두가 내가 올린 글에 한데 모여들어 난동을 피우지만, 그 난동의 가장 큰 요인은 단 하나.
인류 해방 전선에 대한 분노다.
내가 올린 글이 진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재밌어 보이니까, 득달같이 달려들어 내가 남긴 링크를 타고 인류 해방 전선의 본거지에서 깽판을 칠 것이다.
[인증샷 남긴다.jpg]
[솔직히? 혼자 가도 이길 거 같은 사람만 개추 ㅋㅋㅋ]
[불법x물법 케미 뭐야 ㅠㅠㅠㅠ 막 서로 공동 전선 펼치고 그래ㅠㅠㅠ]
[쳇, 이번만이다! 이 대사 현실에서 들을 수 있어서 좋았으면 개추 ㅋㅋㅋㅋㅋ]
[근데 인분충은 #그거 맞냐?]
그 증거로, 멈춰있던 반려넷에 인류 해방 전선의 본거지에서 개판을 친 인증샷들이 속속들이 올라오고 있다.
피식 웃으며 글들을 둘러보던 그때, 내 눈에 심상치 않은 제목이 보인다.
[이 새끼 머냐?? 좀 이상한데??]
-일본도를 든 다크서클이 진한 남자가 잔햇더미에서 걸어 나오는 사진
불사랑은 좀 다른? 그런 느낌인데?? 얘 왜 안 죽음??
[댓글]
-ㄹㅇ 저거 죽여도 안 죽더라. 계속 싸우면 지진 않겠는데, 좀 위험해 보여서 후퇴함.
-ㄴ쫄았네.
-쫀 거 아님;; 전략적 후퇴임;;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구나.
그 남자, 인류 해방 전선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걸로 저 좌표가 정말 인류 해방 전선의 본거지인지 확인됐다.
폰은수가 죽기 직전에 남긴 좌표긴 하지만, 아무 검증도 없이 그냥 들이닥치는 건 위험하지.
그 검증을 위해서 반려넷을 이용했는데, 보기 좋게 성공한 것 같다.
“찾았어.”
“찾았어?”
“응, 봐봐.”
반려넷의 상황을 지켜본 지 2일째, 슬슬 다른 곳도 찾아봐야 하나 생각할 무렵의 성과다.
서둘러 블랑카에게 성과를 이야기하고, 곧장 달려갈 준비를 시작한다.
“차원문에서……. 곧장 앞으로 달려나가면 녀석들의 본거지가 있다네. 물리적으로 건물을 부숴도 다시 복구되는 것 같고, 정면 돌파밖에 답이 없는 것 같아.”
“돌파라면 맡겨둬.”
“무리하지 않아도 돼. 그 녀석과 마주하기만 하면, 순식간에 끝날 테니까.”
블랑카가 팔을 걷어붙이며 자신만만하게 외친다.
내가 준비한 계획대로라면 그 녀석과 몇 합이 넘는 전투를 펼칠 리 없다.
그저 한순간에 모든 게 결정 날 것이다.
그렇게 완전 무장을 끝마친 블랑카와 함께 밖으로 나가 아리스를 찾는다.
“으아…….”
아무리 아리스라고 해도 2일간 차원문을 여닫는 건 지쳤는지 리키의 몸에 빨래마냥 늘어져 지친 한숨을 내쉬는 모습이 보인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지으며 아리스의 이름을 불렀다.
“아리스.”
“잉간?”
“슬슬 출발하려고. 차원문, 열어줄래?”
“응. 알겠어!”
사전에 약속한 대로 아리스가 천천히 차원문을 열기 시작하고, 차원문을 연 아리스와 리키는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힘내.”
아무 말 없이 쓰게 웃으며 아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차원문 너머로 블랑카와 함께 들어선다.
차원문 너머로 진입한 세상은,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세상이었다.
분명히 여긴 어떠한 행성임이 분명한데도, 격리 공간처럼 새하얀 공간이 한가득 펼쳐져 있다.
그 공간에 들끓고 있는 수많은 인류 해방 전선들의 모습.
그리고, 거기서 날뛰고 있는 상당한 수의 반려넷 회원들.
“어이, 방해하지 말라고!”
“방해? 방해는 네가 하고 있는 걸 말하는 거다!”
어딘가 사이좋아 보이는 불과 물을 다루는 두 명의 마법사.
“판결, 사형.”
듣기만 해도 정신이 아득해지는 소리를 지껄이는 머리에 뿔이 달린 켄타우로스.
그 외에도 무협지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노인이라든지, 오크 기사와 여자 산적같이 반려넷에서 봤었던 인물들의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았지만, 여기에 놀러 온 건 아니니까.
“저기, 보이지?”
“그래. 잘 보여.”
수많은 인류 해방 전선들 너머, 거대한 빌딩이 하나 보인다.
저 빌딩이 인류 해방 전선의 근거지.
저기까지 저 수많은 해방 전선들을 뚫고 나아가야 한다.
아무리 내가 인류 해방 전선에 유효한 공격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하나하나 전부 싸우다간 저기까지 도착할 때까지 버틸 수는 없다.
그렇기에 블랑카의 빠른 다리가 필요한 것이다.
“가자!”
나 혼자서는 불가능한 거리를, 블랑카의 등에 올라타고 달려나간다.
마력을 방출하며 말 그대로 살육전차로 변하는 익숙한 블랑카의 질주.
이 정도나 되는 속도라면 단번에 저 빌딩까지 도달할 것 같았지만, 어째서인지 어느 순간 이후로 가도 가도 빌딩은 가까워지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블랑카가 먼저 지칠 게 분명한 상황이다.
나는 서둘러 뭔가 이상한 점이 있는지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음…….”
역시, 그 남자가 뭔가 수작을 부려둔 걸까?
주위의 정보가 묘하게 일그러져 있는 것이, 정보 조작의 흔적이 보인다.
주위의 정보를 찬찬히 훑어본 나는 이곳에 행해진 정보 조작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빌딩을 향해 달려오는 사람이 한 걸음을 내디디면, 빌딩 또한 한 걸음 멀어지게끔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얼마나 달려도 당연히 건물에 다다를 수 없는 게 당연하지.
서둘러 정보 조작을 박살 내자마자 빌딩이 가까워지기 시작하고, 서서히 빌딩의 입구의 모습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불쾌한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오싹한 느낌이 전신을 덮치고 지나간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어딜.”
어디선가 나타난 에포나가 내 등에 매달린 채로 촉수를 뻗어 남자의 정체 모를 공격을 방어해냈다.
하지만 남자의 목적은 내가 아니었는지 블랑카가 고통스러운 목소리를 내며 속도를 줄이기 시작한다.
“윽…….”
“블랑카? 무슨 일이야?”
“마력로가 당했어. 젠장. 이대로면 폭발할 수도 있겠어.”
블랑카의 갑옷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하고, 블랑카는 혀를 차며 투구를 벗어 던졌다.
빌딩까지 남은 거리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나 혼자서도 달려갈 수 있는 거리다.
“블랑카, 너는 여기서 갑옷을 수리해.”
“잉간, 그건…….”
“한순간에 끝날 일이야. 걱정하지 마.”
“……힘내.”
블랑카 또한 앞으로 있을 일에 자신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알고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응원한다.
천천히 빌딩의 입구까지 내려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남자를 향해 걸어간다.
검을 뽑아 든 남자는 아무 목소리도,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남자와 내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선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내가 아닌 남자였다.
“이해가 안 되는군.”
“무엇이?”
“어째서 그 녀석들의 편을 드는지,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이전에도 나눴던 듯한 대화.
그때의 이야기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던 게 분명해진 순간이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남자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너도 알고 있겠지? 그 녀석들이 인간들에게 어떤 짓을 저질러왔는지.”
“잘 알지. 직접 경험도 했고, 목격하기도 했어.”
“그런데 왜, 너는 복수를 하려 하지 않는 거지?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 네가 어째서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지.”
“아니, 이해해. 네가 어떤 감정일지, 전부 다 이해해.”
“이해해? 이해한다고? 네가 날 이해하면, 그런 행동을 할 수가 없어.”
“이해는 하지만, 동의하지 않을 뿐이라고 말했었지?”
눈앞의 남자는, 나와 다를 게 없다.
눈을 떠보니 어느 날 낯선 곳에 납치되었던, 불운한 희생자.
대화도 통하지 않는 낯선 존재에게 희롱당하던 피해자.
그럼에도 어떻게 살아가고자 발버둥 치던 인간.
그가 나와 이렇게 대화 비슷한 걸 시도하는 것도 동질감을 마음 한구석에서 느끼고 있어서겠지.
이 남자와 내가 다른 건, 별로 없다.
나였어도, 저 남자처럼 대우를 받았으면 저 남자처럼 됐을 것이다.
그 누구라도 잔뜩 분노하지 않는 게 이상한 환경이었으니까.
단지, 저 남자하고 내가 다른 건 단 하나뿐이다.
“어째서, 어째서 너는 그 녀석들을 돕는 거지?”
“운이…… 좋아서?”
“……운?”
운.
나는 운이 좋았고, 저 남자는 운이 나빴다.
나는 클라인을 만날 수 있었고, 저 남자는 그럴 수 없었다.
단지 그뿐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저 남자와 나는 전혀 달라졌다.
“……고작, 고작 그거 때문에 내가 그 지옥을 겪어야 했다고?”
그런 내 대답이 남자의 역린을 자극한 것인지 남자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담담히, 남자를 바라보며 최후통첩을 날린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인류 해방 전선을 해체하고, 테러를 그만둬. 그럼…….”
“뭐, 재판장에 나가서 처벌이라도 받으라, 이 소린가?”
“지구로, 지구로 가서 숨어 지내면……. 중앙 정부도 모를 거야. 지구인들에게 시민권이 부여될 거고, 천천히 다른 인간들을 지구로 부르면…….”
나는 이 남자와 싸우고 싶지 않다.
그 또한 불운한 피해자고, 그의 주장에 공감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마지막 제안을 남자에게 건넸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남자는 내 제안을 단칼에 거절해버렸다.
“지랄하지 마. 정부가 정말로 약속을 지킬 거라 생각해? 더 이상 네 이상론을 듣고 있기 힘들군. 정말로 대화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이상론이 아냐.”
“그게 이상론이 아니면, 뭐지?”
“나는 제대로 된 대안을 제시했어. 이건 이상론이 아니라, 좀 더 나은 방법이라는 거야. 네……. 테러리즘과는 다르게 말이야.”
역시, 나는 이 남자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고, 이 남자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결국, 싸우는 수밖에 없겠지.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린 남자는 천천히 검을 내게 겨누며 비아냥거린다.
“그래. 나를 죽여서 내 목을 정부에 바친다. 아주 좋은 계획이야. 네가 날 죽일 수 없다는 걸 제외하면 말이지.”
캉!
순식간에 휘둘러진 검을 에포나의 도움을 받아 한계치까지 강화한 상태창으로 막아낸다.
나는 이를 악물며 예전에 있었던 일을 상기시킨다.
“그래. 맞아, 솔직히 너와 싸워서 이길 순 없어. 클라인이 도와줬는데도 못 이겼잖아?”
“그럼, 얌전히 죽어.”
“근데, 너. 기억나? 전에 나를 함정에 빠트려 죽이려 했잖아.”
“뭐?”
“그, 지구에서 말이야.”
정보가 중첩된 존재는 자신의 이름을 소멸시켜 스스로의 존재를 유지한다.
그 때문에 원래의 이름을 되찾는 건, 무척이나 위험한 행동이다.
이건, 지구에서 인류 해방 전선이 내게 온몸으로 알려준 사실이다.
그리고 저 남자는 나와 같이 여러 정보가 중첩된 존재다.
그러니까.
“너는 나와 비슷한 인간이야. 그러니까, 내 이름을 네게 줄게. 이젠 더 이상 쓰지 않는 이름을.”
“……뭐?”
당연하지만 아무나 저 남자에게 이름을 붙여줄 수는 없다.
저 남자를 이해하고, 공감하고, 대화했던 존재만이 이름을 붙여줄 수 있다.
그리고 그건.
나다.
“이강인. 이 이름을 네게 줄게.”
나의 이름.
그리고, 이젠 너의 이름.
227화 새로운 시작에 도전하려 합니다
“이강인, 이 이름을 네게 줄게.”
“뭐?”
남자, 아니.
이강인은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내가 무슨 짓을 하려는 지 알고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그게 가능할 리가……!”
“이강인, 왜 그게 안 될거라 생각해?”
“이름을 붙이는 게, 그렇게 쉽게 이뤄질 리 있나……!”
“쉬워. 아주 쉬운 일이야.”
이름을 바꾸는 거면 몰라도, 이름을 붙이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관심만 있다면 누구든지 길거리의 돌멩이에 이름을 붙일 수 있으니까.
그저, 관심만 있다면 누구나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이강인이 지금까지 이름을 얻지 못한 건 단 하나 때문이다.
아무도 그에게 제대로 관심을, 대화를 하려 하지 않았을 뿐이다.
“너, 혼자서 그렇게 부른다고. 내가, 이 이강인이……!”
으르렁거리며 내 말을 부정하려던 이강인은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을 듣고 얼굴이 굳어진다.
슬슬 시작될 텐데.
이름을 얻은 중복된 정보들에서 쏟아지는 자기 인식의 혼란이.
“빌어먹을, 난 이강인이 아냐. 젠장…….”
이강인은 필사적으로 자신이 이강인이 아니라 부정하지만, 그렇게 부정할수록 자기인식에 오류가 커져만 간다.
나는 그저 씁쓸한 표정으로 버둥거리는 이강인의 발악을 지켜볼 뿐이다.
“나는 이강인이, 아냐. 이강인이 아니야, 이강인이……!”
“네가 이강인이 아니라면, 넌 누군데?”
“나는……!”
필사적으로 자기인식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부정하는 이강인은 내 질문을 듣고 말문이 막힌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자신이라 자칭할 수는 없는 법.
이강인은 결국 계속되는 정보 중첩의 흔들림을 이겨내지 못했다.
천천히, 이강인의 몸이 여러 갈래로 나뉘기 시작한다.
마치 사진을 여러 장 겹쳐놓은 것처럼 이강인의 모습이 포개진다.
“이강인. 나는. 윌리엄. 나는. 엘리스. 나는. 백현. 나는. 아이. 나는…….”
여러 개의 이름이 동시에 이강인의 입에서 튀어나온다.
수많은 정보에 둘러싸여 지금까지 밖으로 나오지 못했던, 스스로가 자신에게 붙인 자칭들이 폭발하듯 흘러나오는 것이다.
이대로 놔두면 이강인은 말 그대로 사방으로 흩어져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이강인은, 발악하듯 나를 노려보며 외친다.
“이런 짓을 저지르고도, 너는 무사할 줄 알아……! 되돌려주마. 네게 이 이름들을……!”
“할 수 있으면, 해봐.”
내게 이름을 되돌려주고 싶어도, 이강인은 그럴 수 없다.
그는 나를 이해하길 거부했으니까.
이강인은 내게 이름을 붙일 수 없다.
아주 쉬운 일을 하려고 하지 않은 대가.
이름을 되돌려줄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이강인은 이를 악물며 이번엔 나의 정보를 오염시키려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 또한 제대로 통하지 않았다.
“그때의 답례야.”
에포나가 차가운 눈빛으로 이강인을 바라보며 그 모든 공격을 막아낸 것이다.
“어째서, 어째서 나만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데……!”
이강인의 입에서 진심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그동안 가라앉아있던 감정이 솟아오르는 것이다.
“나라고 이런 걸 하고 싶었는 줄 알아?! 이것밖에 답이 없는데, 돌아가기엔 너무 먼 길을 왔는데!!!”
“틀렸어. 돌아갈 길은 언제나 있었어. 네가 돌아가지 않았을 뿐이야.”
착잡한 표정으로 이강인의 마지막 발악을 얌전히 막아내며 나는 그의 외침에 대답한다.
적어도, 이러는 게 맞다고 생각했으니까.
“다…… 안다는 듯 말하지 마……! 네가, 뭘 알아……! 네가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알아. 내가 널 모른다 생각해? 나는, 나는 네가 겪은 일을 이미……!”
나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찬 이강인의 외침이 터져 나오고, 마침내 이강인의 몸은 갈가리 찢겨나갔다.
사방에 이강인의 모습을 한 고깃덩어리들이 나뒹군다.
하지만 여전히 이강인은 살아 있었다.
증오와 분노로 가득 차 있던 얼굴이지만, 자신이 곧 죽는다는 걸 알고 있어서일까?
그 표정은 굉장히 평온해 보였다.
나는 천천히 창을 들어 올리고 이강인에게로 다가갔다.
상태창을 이강인의 머리에 겨누자 이강인은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졌군. 젠장.”
“미안하게 됐어.”
내심 속으로 생각하던 말을 내뱉고, 내 말을 들은 이강인은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집에…… 돌아가고…… 싶었을 뿐인데…….”
너무나 작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목소리지만 그 중얼거림은 어느 때보다 확실하게 내 귀에 들어왔다.
그리고.
푹.
“끝났어.”
이강인의 시체를 뒤로 한 채로 블랑카에게 다가가며 끝을 알린다.
한창 날뛰던 인류 해방 전선들은 마치 전원이 끊긴 것처럼 일제히 제자리에 멈춰선 상태다.
내 표정이 꽤나 볼만했던 걸까?
블랑카는 아무 말 없이 나를 꼭 껴안았다.
“다, 끝난 거야.”
“그래, 다 끝났어.”
아직 모든 게 끝나지 않았다는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생각하며 조금이라도 쉬고 싶은 기분이다.
한 건 별로 없지만, 무척 지쳤다.
지금은 잠시 이렇게 쉬어도 괜찮겠지.
응, 그럴 거야.
이 앞에 기다리는 것이 해피 엔딩이든, 배드 엔딩이든 험난한 길이 될 테니까.
천천히 새하얀 공간이 흩어져가고, 그 어느 곳의 하늘과도 닮지 않은 하늘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강인이 어째서 굳이 이 공간을 그렇게 변화시켰는지 알 것만 같다.
이런 하늘을 계속 보고 싶진 않았겠지.
하늘 위에 거대한 구조물과 중앙 정부의 선전이 떠다니는 모습이 그렇게 보기 좋진 않다.
지면 또한, 기묘한 구조물들로 가득 차 있다.
이건 마치, 누군가에 의해 꾸며진 듯한 기묘한 장소다.
나무도, 산도, 평원도 하나도 자연스럽지 않다.
그저 보기 아름다운 것만을 추구한 듯한 장소.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던 와중, 내 눈에 하늘에 새겨진 글귀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직접 만지며 체험하자! 귀여운 인간들이 잔뜩! 크로노 인간 체험 생태 공원!]
이 행성은 일종의 생태 체험장이었던 걸까?
한때 생태 공원으로 쓰이다가 방치된 듯한 행성이다.
어째서 이강인은 이런 곳에 본거지를 만든 걸까?
크로노라.
이강인의 기원에 대해서 들었을 때 들었던 기억이 있는 이름이다.
문득, 이강인의 유언이 머리에 떠오른다.
어쩌면 여긴, 이강인, 그 남자의 고향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간신히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이렇게 바뀐 고향의 모습에 이강인이 역린을 건드린 걸까?
진실은 이강인만이 알고 있겠지.
나는 단지 추측할 뿐.
문득 지구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중앙 정부가 시민권을 준다 했지만, 지구가 이런 식으로 바뀌면 난 어찌 반응할까?
이런 식으로, 동물원마냥 가둬두고 문명이 발전할 때까지 관찰한다면?
그건 분명히 내가 생각한 해피 엔딩이 아니다.
이런 꼴을 겪지 않기 위해선 빨리 지구의 문명 수준을 올려서, 그들에게 약속한 것들을 제공해야겠지.
저들도 지구가 금방 그 정도까지 문명을 발달시킬 수는 없을 거라 판단해서 허가를 내린 것일 거다.
인류의 문명 발전 기간은 꽤 길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불과 100년, 길어봤자 500년 만에 이룩한 성과는 기하급수적이다.
그렇게 달성한 성과를 기반으로 문명을 쌓아 올린다?
100년?
아니, 50년이면 충분할 수도 있다.
우린, 저들의 예상을 뛰어넘을 것이다.
뛰어넘어서, 이런 결말에 당도하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해피 엔딩에 당도할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힘내자.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 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중앙 정부가 나와의 약속을 모른 척한다거나, 이상한 조건을 덧붙이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시원스럽게 지구인의 시민권과 나의 시민권을 인정한 것이다.
물론, 세간에 공표되는 건 이런저런 문제가 해결된 후겠지만 말이다.
지금 단계에선 일단 ‘지구 안의 인간’과 나에 대해서만 시민권이 부여된 상태다.
애완 인간 시장, 인간들을 위한 공공시설과 제도…… 준비할 건 많다.
하지만 그건 내가 할 일은 아니다. 내가 할 일은 중앙 정부가 약속을 제대로 지키는지 감시하는 것, 그리고.
지구의 환경을 복구하여 다시 문명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반려넷의 인간들, 애완 인간들을 지구로 옮기는 일까지 해야 하고…….
그러니까,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아무래도, 더 이상 클라인의 집에 머무를 수는 없다는 것이다.
클라인의 집에서 지구를 오가며 지구의 상태를 볼 수는 없잖아?
지구에서 클라인의 집까지 차원문을 열 수도 없고, 지금 지구는 한가롭게 출퇴근해서 어떻게 정리될 곳이 아니니까.
분주히 오가며 짐을 정리하는 내 모습을 클라인이 여러 생각이 담긴 눈동자로 바라본다.
“……짐은 다 쌌어?”
“뭐, 처음부터 별 게 없었으니까.”
“하긴, 그렇네.”
맨몸으로 이곳에 왔으니, 당연히 가져갈 것도 별로 없다.
가져간다고 하면…… 그동안 생활하던 차원항 정도일까?
별로 좋지 않은 기억도 있지만, 그동안 생활한 추억이 담겨 있으니까.
일종의 기념사진, 그런 거다.
“뭔가…… 아쉽네.”
“뭐가 아쉬워? 보고 싶으면 다시 오면 되는데.”
“그래도.”
클라인은 내 얼굴을 바라보며 그렇게 쓰게 웃음 짓고, 계속해서 내 얼굴을 바라보던 클라인은 무언갈 각오하고 입을 열었다.
“저기…….”
“응?”
“나, 노력할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나를 바라보는 클라인의 눈동자는 각오로 단단히 다져져 있었다.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로 클라인은 나를 바라보며 자신의 각오를 털어놓는다.
“솔직히, 난…… 잉간이. 네가 최선이야. 조금 이기적일지 몰라도 난 너 말고 다른 인간들이 어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잘못된 건 아냐. 나도 비슷하게 생각하는걸? 너 말고 다른 사람들은 그리 좋아하지도 않고.”
“내가 지금까지…… 힘냈던 건, 죄책감 때문이었어.”
“죄책감?”
“나 때문에 리만이 죽은 게 아닌가,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다른 인간들이 힘들어진 게 아닌가…… 제대로 된 각오 같은 건 없었어. 그냥…… 할 뿐이었어.”
클라인이 리만의 죽음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는데.
나로서는 그냥 천벌을 받았다, 그 정도 소감이었는데.
“그런데, 그렇게 제대로. 진심을 다하지 않으니까, 잘 안되더라. 솔직히, 내가 한 건 아무것도 없잖아…….”
“그렇지는…….”
“그래서. 엄청 부끄러웠어. 너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자 다짐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진짜, 진짜 한심해.”
“클라인…….”
“그러니까. 나, 힘낼 거야. 힘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할 거야.”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 브리더 협회장 자리가 지금 공석이잖아?”
“그렇지.”
“거기에 나가보려고. 만약 떨어지더라도, 열심히 인식도 바꾸고. 이것저것 할 거야.”
“힘내야겠네.”
“응. 힘낼 거야.”
내가 정부와 협상을 했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게 끝난 게 아니다.
조금씩 생기는 여러 진통들이 있을 테고, 그것들을 조금씩 다잡으며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한다.
클라인이라면 분명 그 역할을 잘 수행하겠지.
나의 둘도 없는 소중한 친구니까.
“그러니까, 잉간. 힘내자.”
“그래. 같이 힘내자.”
하고 싶었던 말을 다 토해낸 것인지 클라인이 숨을 들이마시며 미소를 토해낸다.
그 모습을 보기 좋게 내밀며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내 손을 뻗었다.
“그럼, 갈까?”
“응!”
클라인의 집을 떠나, 지구로.
나 혼자가 아닌 클라인과 함께.
함께, 힘내자.
행복한 일상을 위하여.
해피 엔딩을 위해.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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