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 30

전초기지를 관리하기 쉽게 하기 위함에서일까?
밀렵꾼들이 마력망을 닮은 시스템을 지구에 구축해놓고 알뜰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지구인들이 박살 내는 마키나들의 정보들에서 느껴졌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걸 구축했는진 몰라도, 그 시스템을 역으로 이용한다면 전초기지를 단번에 박살 낼 수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클라인은 잉간이와 함께 시스템의 근원지로 추정되는 장소로 향했지만,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시스템의 근원은 보이지 않았다.
단지 지구인들의 마을만이 존재하고 있을 뿐.
저 하늘 위에는 인공위성 정도가 존재할 뿐, 시스템의 근원으로 삼을만한 시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스템의 근원은 하늘이나 지상이 아닌 저 지하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인데.
클라인은 슬쩍 정보의 압축을 풀고 자신이 개입을 해야 하나 생각했지만, 다행히도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분위기다.
말하지 않아도 클라인의 마음을 눈치챈 걸까?
잉간이와 마을 주민들이 지하로 내려갈 준비를 시작한 것이다.
친구는 서로 생각하는 게 닮는다더니, 그래서일까?
“으음…….”
일단, 잉간이가 지하로 내려가려면 적어도 내일 해가 밝고 나서부터니 그동안 클라인은 시간을 때울 겸 폐허에서 발견한 물건을 손에 들었다.
바로, 잉간이의 동족이 사용하던 언어나 정보들이 들어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정보 저장 장치였다.
이 안에 들어있는 정보를 해독한다면 잉간이의 언어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잉간이와 대화하는 것도 꿈이 아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저장 장치 안의 정보를 이해하는 건 쉽지 않았는데, 꽤 중요한 정보라도 담고 있던 걸까?
저장 장치 안의 정보들은 이중 삼중으로 암호화가 되어 있어서 해독이 그리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간신히 해독을 한다고 해도 아무 의미 없는 문자열의 나열인 경우가 더 많았다.
도대체 이 안에 들어있는 내용은 도대체 뭘까?
폐허 아주 깊숙한 곳에 애지중지 꽁꽁 숨겨져 있었으니 지구인들에게 꽤 중요했던 정보들이었던 것 같은데.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안간힘을 써가며 어떻게든 날이 밝기 전에 저장 장치 안의 정보들을 해독하려 애썼다.
“으…….”
한참을 낑낑거리던 클라인은 문득 썩 괜찮은 생각이 떠올라 해독 방식을 다르게 해봤다.
전에는 그냥 저장된 정보를 억지로 뜯으려 했다면, 이번에는 전기적 자극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지구인이 사용하는 전기적 신호를 모방하여 클라인은 스스로의 몸에 정보들을 흘려보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암호화된 정보들을 해독할 수 있었다.
“됐다!”
하지만 어째, 정보가 해독되었지만 클라인은 또다시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장 장치 안에 들어있던 것은.
[가상화폐 AeJsdiqBASdsielALdff…….]
아무런 가치가 없어 보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정보들의 나열이었기 때문이다.
211화 마을 지하에 잠들어 있는 것
다음 날 아침, 나는 이른 시간부터 드레이크의 거처를 찾아온 폰은수와 얼굴을 맞대고 이번 작전의 개요를 설명받고 있었다.
“그러니까, 네가 말한 그 통로라는 곳이 사실은…….”
“저희가 일종의 광산으로 사용하던 곳이죠. 네. 뭐, 진짜 광산은 아니지만요.”
“허…….”
폰은수의 설명에 따르면, 사실 이미 연구소까지 가는 길은 뚫려있다고 한다.
그곳에서 로봇들이 자꾸 솟아 나와서 지금은 고철을 얻기 위한 일종의 광산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지하의 연구소까지 진입하려 했지만, 특수한 결계 때문에 불가능하더군요.”
“결계라면, 무슨?”
“음. 이게 설명하기 참 그런데요. 사실, 그걸 결계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네?”
도대체 어떤 형태의 결계길래?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폰은수의 설명을 기다렸다.
“그저 수많은 정보들이 사방에 퍼져있을 뿐이니까요. 그 때문에 어디가 길인지도 알 수 없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으음…….”
그러니까, 대충 고밀도의 정보들이 넓게 펼쳐져 있는 환경인 걸까?
이 사람들은 그 고밀도의 정보를 뚫지 못해서 애를 먹던 거고?
“잉간 님이 해주실 건, 그 정보들을 저희가 통과할 수 있게 조작하는 일입니다.”
“그것뿐이에요?”
“네. 잉간 님이 싸움까지 하게 만들 수는 없죠.”
“괜찮은데…….”
“아뇨. 괜찮습니다.”
지구의 일인데 너무 방관하고 싶지 않은데.
하지만 폰은수는 어째서인지 나를 철저하게 외부인으로 대우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묘한 거리감이 폰은수에게서 느껴진다.
“그럼, 조금 이따가 보시죠.”
폰은수가 떠나가고, 내 등에 착 붙어있던 아리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내게 속삭였다.
“저 사람, 싫어.”
“아리스?”
“기분 나쁜 눈으로 우릴 본단 말이야. 맨 처음 봤을 때부터.”
“처음 봤을 때?”
“응. 저 아래에서.”
아리스가 처음에 깨어난 위치가 저 지하였었지?
기분 나쁜 눈이 무엇인지 정확하겐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폰은수가 우리에게 보이는 감정과 속에 품고 있는 감정이 다르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뭐, 그렇게 위험한 감정은 아닐 것이다.
기껏해야 인간과 다른 외모에 대한 거부감이나 우리를 이용하려는 생각 정도겠지.
그 정도는 충분히 감내할 수 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다짜고짜 호의적인 감정을 갖긴 어려울 테니까.
아무리 내가 지구인이어도, 저들이 나를 받아들이긴 떨어져 지낸 기간이 길었으니까.
지하로 출발하기까진 아직 시간이 남았겠다, 나는 적당히 마을을 둘러보며 마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다.
다행히도 마을 사람들은 폰은수와 달리 내게 호의적으로 대하고 있었다.
“아이고. 우리 은수 녀석이 민폐를 끼쳐서 어떻게 해…….”
“민폐라뇨. 당연히 제가 할 일인데요.”
“우리 은수, 너무 안 좋게 보지 말았으면 해요. 마을을 참 아끼는 착한 청년이에요.”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나를 둘러싸고 하하 호호 담소를 나누며 내게 미안하다는 듯 사과를 건넨다.
“그렇다니까. 밖에서 왔는데도 젊은이들하고 잘 어울리고.”
“밖에서 오다뇨?”
“가끔, 드래곤님이 밖에서 생존자를 찾아서 데려온다우. 은수도 그렇게 마을에 왔지.”
멸망 이후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냉동 장치나 정지 장치들이 존재한다고 한다.
아니면 지하의 벙커에 소규모 사회를 만들어서 살아가던 생존자들도 아직도 남아있긴 한다고 한다.
폰은수는 그렇게 드래곤이 데려온 생존자들 중 한 명이라고 하고.
“밖에서 온 사람들이 마을 사람들하고 잘 못 어울리나요?”
“대부분 그렇지. 그, 뭐냐? 멸망 전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보니 또래 애들하고 잘 어울리지 못한다우.”
“아, 하긴.”
하긴, 나라도 자고 일어났더니 세상이 멸망해있다면 잘 적응하지 못할 거다.
“그런데 은수는 자기도 힘들 텐데, 다른 사람들도 돕고, 그 뭐냐? 청년회였나? 그런 것도 만들고 아주 대단하다니까.”
“청년회요?”
“뭐. 젊은이들끼리 모여서 만든 자경단 비스무리한 거지. 참 보기 힘든 참한 젊은이라니까.”
“그거 대단하네요.”
마을 주민들과 적당히 대화를 나누며 알게 된 사실은 폰은수가 마을에서 꽤 명망이 높다는 사실이었다.
다만, 특유의 그 물러서지 않는 급한 성격이 살짝 평가를 깎아 먹고 있을 뿐이었다.
“슬슬 출발합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폰은수가 내게 출발을 알려오고, 나는 그제야 함께 지하로 내려갈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모인 사람들은 전부 20대쯤 되어 보이는 청년들뿐이었다.
아까 마을을 둘러볼 때 나이가 꽤 있던 사람들도 많던데, 이 사람들이 마을 사람들이 말한 청년회인가?
꾸벅 폰은수가 데려온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지만, 마을에서의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감정이 느껴진다.
뭔가 날카롭게 서 있는 듯한 느낌.
위험할지도 모르는 장소로 향하기 전이어서 그런 걸까?
방탄복과 방탄모를 꽁꽁 싸매고 총을 든 마을 사람들의 모습은 어딘가의 특수부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 아이가 그…….”
드레이크나 드래곤에게 클라인에 대해 뭐라 설명을 들은 걸까?
폰은수는 내 다리에 꼭 달라붙어 있는 클라인을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드래곤도 어이가 없다는 반응이었는데, 뭐라 설명할 말이 없네.
나는 그저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정말로…… 외계인이 맞는 겁니까?”
“뭐……. 그렇죠?”
“……인간에게 우호적인 외계인도 있었군요.”
“아하하…….”
클라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폰은수는 뭔갈 깊게 고민했지만, 이내 원정의 출발을 선언했다.
“자, 그럼 이제 출발!”
바리케이드를 지나 마을을 나서 조금 걷다 보니 바닥에 벌레가 파먹은 것처럼 뻥 뚫린 구멍이 보인다.
저기가 폰은수가 말했던 광산이겠지.
“온다. 다들 준비해.”
광산 가까이 접근하자 우리를 눈치챈 것인지 광산 안쪽이 분주해진다.
마을 사람들은 서둘러 전투태세를 갖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광산 안에서 여러 로봇들이 뛰쳐나왔다.
“발사!”
폰은수는 침착하게 사격 명령을 내리고, 마을 주민들의 총구에서 발사된 정보들이 로봇들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광산 입구의 상황이 정리되고, 우리는 광산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대량의 고철들이 한가득 쌓여있는 걸 제외하면 평범한 동굴처럼 생긴 광산 안을 나아가며 나는 바짝 긴장했지만, 내가 나설 일도 없이 동굴에서 출현하는 로봇들은 전부 가까이 오기도 전에 박살 났다.
“이대로 계속 지하로 내려가면 앞으로 한 시간 안에 도착할 겁니다.”
“생각보다 그리 안 머네요?”
“공간이 이상하게 뒤틀려 있어서 그렇습니다. 내려갈 때보다 올라올 때가 더 오래 걸리더군요.”
공간이 뒤틀려 있다니, 도대체 저 지하의 연구소는 어떤 상태가 된 걸까?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는데.
한동안은 로봇들의 습격이 없을 거라 판단한 걸까?
폰은수는 무료한 시간을 때우려는 듯 내게 다가와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 사람하고는 어떻게 만나게 된 거죠?”
“음…… 납치당해서?”
“네? 그게 무슨……?”
“이게 설명하면 좀 긴데…….”
폰은수는 나의 이야기를 도무지 믿지를 못하는 눈치였다.
생각해보니 당연한 일이다.
지금 클라인과 나의 관계가 어찌 됐든 클라인과 나의 관계는 납치에서 시작된 것이니까.
나 또한 어쩌다 클라인과 나 사이가 호전됐는지 잘 모르겠다.
그저, 클라인의 마음과 감정을 나눈 영향이 컸을 거라 짐작할 뿐이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은 거야. 모두가 나쁜 사람은 아니더라.”
“그런가요…….”
그렇지만 폰은수는 나의 설명을 듣고도 여전히 납득하질 못했다.
쩝, 최대한 클라인과 폰은수가 만나게 하지 않는 게 좋으려나.
아직 폰은수나 마을 사람들 사이에는 클라인의 동족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테니까.
한 가지 확실한 건, 나와 클라인처럼 지구인들과 외계인들이 얼렁뚱땅 화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도착했습니다. 저기가 연구소 입구입니다.”
폰은수와 내가 그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드디어 연구소 입구에 당도했다.
“어우, 이건…….”
연구소의 입구를 보자마자 나는 어째서 폰은수가 내게 도움을 요청했는지 깨달았다.
내가 지금껏 봐왔던 고밀도의 정보가 안개처럼 보였다면, 연구소의 주위에 펼쳐진 정보들은 암흑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정보들이 응축되어 있는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난생 처음 보는 풍경에 내가 감탄사를 내뱉자, 폰은수가 내게 다가온다.
“가능…… 하시겠습니까?”
“어…… 좀 힘들어 보이긴 하는데, 가능은 하겠네요.”
“역시 그렇습니까? 괜찮습니다. 안심하고 정보 조작에만 집중해주세요. 앞으로 3일 정도는…….”
“한, 30분 정도?”
“네?”
“네?”
폰은수의 질문에 담담하게 정보를 풀어낼 때까지 걸릴 예상시간을 답하자 폰은수는 당황한 듯 얼빠진 목소리를 낸다.
“3, 30분이요?”
“네. 30분. 그게 왜…….”
30분 만에 작업이 끝난다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그냥 정보를 조작하는 일인데?
내 의문은 폰은수의 입에서 흘러나온 중얼거림에 의해 해소될 수 있었다.
“드래곤님이나 드레이크 님도 하루를 꼬박 새워야 했는데…….”
정보 조작이 그렇게나 어려운 일인 걸까?
그냥 적당히 하면 되는 거 아니었어?
폰은수의 반응이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나는 일단 빠르게 연구소 입구로 통하는 진입로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아무 의미 없는 노이즈들을 걷어내는 작업이기에 생각보다 그리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고 연구소의 입구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끝났네요. 자, 들어가죠.”
“세상에나…….”
폰은수는 입을 떡 벌리고 나에게 감탄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연구소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폰은수와 그 일행을 먼저 들여보내고 그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 두 번째 방벽이라고 할 수 있는 장애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침입자, 감지. 제, 거…….”
어딘가 고장 나 보이는 경비 로봇들이 우리를 맞이한 것이다.
“발사!”
짤막한 전투가 끝나고 다시 전진하기 시작하며 주위의 풍경을 둘러본다.
익숙한, 하지만 완전히 망가진 풍경.
끝도 없이 차오르는 그리움에 나도 모르게 슬며시 망가진 기계들의 모니터를 쓰다듬던 그때.
“응?”
파직.
작은 불빛이 모니터에 들어왔다.
눈의 착각인가, 잠깐 그렇게 생각했지만, 착각이 아니라는 듯 불빛은 점차 그 존재감을 더욱 키워냈고.
화면에 내가 알아볼 수 있는 글자가 나타났다.
[조 심 ㅎ ㅐ]
“조심해……?”
마치 내게 위험을 경고하는 듯 홀연히 모니터에 나타난 글자는 내가 눈을 한 번 깜빡이자 마치 환상이었다는 듯 사라져버렸다.
방금 그건 도대체?
“잉간 님?”
“아, 지금 갈게요!”
나를 부르는 폰은수의 부름에 서둘러 다리를 옮겼지만, 모니터에 나타난 글씨는 계속해서 내 마음을 어지럽혔다.
도대체 뭘 조심하라는 걸까?
심란한 마음을 숨기며 달려간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또다시 모습을 드러낸 대량의 정보들이었다.
이번에도 별생각 없이 정보를 조작하려던 그때, 역한 느낌이 강렬하게 들어 나는 순간 뒤로 물러섰고.
이윽고 나는 내가 조작하려 했던 정보들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었다.
“으…….”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정보들은 전부 심상치 않은 농도의 악성 정보들이었다.
그래.
인간이 인터넷을 만들며 탄생한 모든 악성 정보들이 내 앞에서 넘실대고 있던 것이다.
212화 인간 유적지에서 일어난 일
“이게, 이게 뭔…….”
“우윽…….”
본색을 드러낸 어마어마한 양의 독성 정보들에 충격을 받은 건 나뿐만이 아닌 듯하다.
이 자리의 모두가 구역질을 하거나 창백한 얼굴로 독성 정보를 눈에 담는 것을 꺼려한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독성 정보라고 부르긴 했지만, 이곳에 있는 정보들의 대부분은 인터넷에서 소위 ‘혐짤’이라고 불리던 사진이나 동영상들이니 말이다.
사람의 몸이 직접적으로 잘리거나 터져나가는 고어한 짤은 기본이고, 시궁창이나 질병에 걸린 환부를 찍은 사진들 또한 심상치 않게 보인다.
그렇게 누구에게나 단번에 혐오를 끌어낼 수 있는 사진이 있는 반면, 언뜻 봐서는 이게 왜 악성 정보인지 이해할 수 없는 정보들이 보인다.
평범해 보이는 문장들.
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그 안에 심상치 않은 악의가 담겨있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그 외에도 공포의 악마 하르카스의 모습을 묘사한 사진이라든지, 뭔가 쌓여있지 않냐고 질문하는 그림이라던지.
말 그대로 인터넷에 쌓인 인간의 악의가 모두 이곳에 모여있었다.
워낙 지독한 악의가 한가득 모여있다 보니 손을 대기도 꺼려진다.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폰은수가 슬쩍 내게 질문한다.
“제거……. 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가능은……. 할 거 같네요.”
마음 같아서는 당장 집어치우고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역겨운 풍경이다.
하지만 더 이상 우물쭈물하며 시간을 끌면 안 된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
자욱한 악성 정보들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 클라인의 안색이 시시각각 안 좋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둘러 여길 벗어나야 클라인이 좀 괜찮아질 것이다.
아무래도 정보생명체여서 그런 걸까?
클라인은 우리보다도 더 악성 정보의 영향을 민감하게 받는 듯 보였다.
몸을 부들부들 떠는 클라인의 허리를 껴안고 토닥여 클라인을 진정시키려 해본다.
다행히 클라인은 내 손길에 몸을 맡기고 조금씩 진정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
하지만 여전히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 건 분명했기에, 나는 클라인을 계속 다독이며 악성 정보들을 주위에서 몰아내려 시도했다.
보통 이쯤 되면 에포나가 튀어나와 내게 도움을 줄 텐데,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에포나는 내가 낑낑거리며 악성 정보들을 하나하나 밀어내고 있을 때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내 몸속 깊숙이 파묻혀 있을 뿐이다.
하지만 에포나의 도움이 없다고 악성 정보들을 처리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어차피 이 정보들로 뭔가 만들 것도 아니고, 그냥 지나갈 수 있는 길만 확보하면 되니 악성 정보들을 대충 하나로 뭉쳐 흩트려놓는다.
당연히 더 독해진 정보도 있고, 다시 가공할 엄두도 나지 않을 정도로 망가진 정보들도 생겨났지만 그게 뭐 어쨌는가?
어차피 길만 만들어내면 장땡인데.
그렇게 길만 만들어내는 것에 집중을 온전히 쏟을 수 있었다면 편했겠지만, 안타깝게도 상황은 그렇게 쉽게 흘러가지 않았다.
“온다! 다들 전투 준비!”
도대체 어디서 솟아나는 건지 계속해서 경비 로봇들의 습격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청년회가 로봇들의 공격이 내게 절대 닿지 않게 잘 보호해주고 있긴 했지만, 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자꾸만 집중이 흐트러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래도 멸망 전, 인터넷을 둘러보며 이런 악성 정보들에 익숙해져 있어서일까?
악성 정보들의 바다를 헤치고 길을 만들어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길이 열렸다. 다들 출발!”
다들 하나같이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일 초라도 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은 눈치다.
간신히 악성 정보의 바다를 지나자 이번에는 굳건한 철문이 일행의 앞길을 가로막는다.
“조금 뒤로 물러서십시오.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폰은수는 당황하지 않고 철문에 미리 준비해온 폭약을 붙인다.
“저걸로 뚫릴까요?”
하지만 워낙 철문의 두께가 두꺼워 보여 나는 불안한 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폰은수는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내게 호언장담했다.
“걱정 마세요. 겉보기는 작아 보여도, 웬만한 문은 저거 하나로 뚫을 수 있습니다.”
“그래요?”
“네. 두고 보시죠.”
잠시 후, 폭약이 폭발하며 자욱한 먼지가 인다.
폰은수의 호언장담대로 두꺼워 보이는 강철 문은 완전히 찌그러져서 박살 난 상태였다.
저 정도로 작은 폭약으로 저렇게 큰 폭발을 일으키는 게 가능한 거였나?
부서진 문을 보니 두께가 적어도 1m 이상은 되어 보이는데.
“좋아, 다들 주변 정리하고. 다시 출발…….”
하지만 폰은수의 웃음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완전히 박살 난 듯 보였던 문이 꿈틀거리며 원래의 형상을 되찾았기 때문이었다.
“이, 뭔. 무슨…….”
이런 현상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폰은수가 당황한 듯 중얼거리고, 블랑카가 무심하게 힌트를 던진다.
“아무래도, 상태가 고정된 상태인 것 같군.”
“블랑카?”
“리베리아에서 몇 번 저런 성유물을 본 적이 있지. 물리적인 충격으로 파괴하는 건 불가능할 거야.”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지금껏 블랑카를 없는 사람처럼 무시하던 폰은수였지만, 블랑카의 조언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굳은 표정으로 블랑카에게 말을 건다.
“열쇠를 가져와야지. 뭐.”
“장난치지 마시고요.”
“장난이 아냐. 저렇게 잠긴 문은 열쇠를 가져오는 것밖에 답이 없어. 아니면 뭐, 저 문의 마력보다 몇 배는 되는 마력으로 고정을 깨트리거나.”
“마력…… 입니까?”
“하지만 지구엔 마력이 없으니까……. 고정을 깨트리는 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저희가 가진 장비로는…….”
“글쎄. 힘들 거 같은데…….”
상태 고정이라.
블랑카와 폰은수가 저 문을 뚫어내기 위해 토의하는 사이, 나는 천천히 문에 다가가 손을 올렸다.
블랑카의 말대로 이 문을 열려면 엄청난 양의 마력을 쏟아부어야 할 것 같다.
마력이 아니라면 엄청나게 밀집된 정보가 필요한데…….
어떻게 해야 저 문에 흠집을 낼 수 있을지 내가 고민하던 그때, 클라인이 툭툭 내 옆구리를 건드렸다.
“응?”
“:-)”
악성 정보의 영향에서 벗어나서 괜찮아졌는지 클라인은 싱긋 웃으며 내게 무언가를 건넸다.
조금 전까지 클라인이 계속 만지작거리던 하드 디스크다.
하드 디스크?클라인이 내게 하드 디스크를 건넨 저의를 알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때, 한 가지 발상이 떠오른다.
엄청난 마력이 필요한 건, 마력으로 문의 정보를 수정하기 위해서잖아?
그럼 마력 대신 충분한 양의 정보로도 문의 고정을 풀 수 있는 게 아닐까?
나는 가만히 클라인이 건넨 하드 디스크를 쓰다듬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외부의 정보를 조작하는 건 익숙해도, 외부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건 생소한데.
저 문을 열려면 충분한 양의 정보가 필요하니 이 하드 디스크에 담긴 정보를 먼저 받아들여야 하는 게 아닐까?
아냐, 생각을 바꿔보자.
내가 상태창을 사용하는 것처럼 외부에 농축한 정보로도 충분히 저 문의 고정을 풀 수 있지 않을까?
상태창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을 하자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해졌다.
천천히, 상태창을 만들 때처럼 하드 디스크의 정보를 응축해서 가다듬고.
뽑아낸다.
“윽…….”
평소에 쓰던 상태창과는 담고 있는 정보의 양에 차이가 나서인지 묵직한 무게가 느껴진다.
들어 올리는 것도 버거운 무게여서 살짝 신음을 흘렸지만, 어떻게든 상태창을 문에 가져다 댄다.
그리고, 깊게 찔러넣는다.
단번에 문의 깊숙한 곳까지 침투한 상태창으로 문의 정보를 수정하려 시도한다.
딸깍.
마치 자물쇠가 열리듯 무언가 해제되는 감각이 손끝에서 느껴지고, 상태창에 깃든 정보들이 빠져나간다.
[시스템 재가동. 경고, 보안 등급 5레벨 이하의 방문객은 진입할 수 없습니다.]
문의 고정이 풀리며 문의 시스템이 재가동하고, 마치 초인종처럼 보이는 부분에 달린 카메라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데이터베이스 검색 중. 보안 레벨 0등급 확인. 관리자님, 환영합니다.]
그리고, 내가 무언가를 더 하기도 전에 문은 스르르 열리며 내게 길을 터줬다.
고개를 돌려 등 뒤를 바라보자, 청년회들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열렸네요?”
“이게 무슨…….”
“출입 권한이 제게 있었던 모양이네요. 아하하…….”
낯선, 낯설지 않은 장소.
머리가 더 아파오지만, 고개를 흔들어 잡생각을 털어낸다.
아직, 버틸 만하다.
떠올리지만 않으면 괜찮아.
폰은수는 내게 뭔가 묻고 싶은 게 있는 듯했지만, 나중으로 미룬 듯 우선 연구소 안으로 진입하는 걸 우선시했다.
“진입. 중앙 데이터센터를 찾는 게 우리의 최우선 목표다.”
“알겠습니다!”
청년회들이 분주하게 연구소 안으로 흩어지고, 폰은수는 익숙하게 연구소 안을 탐사하기 시작했다.
나 또한 기시감이 느껴지는 장소를 둘러보며 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때, 또다시 내게만 보이는 위치의 모니터가 치직거리더니.
[믿 지 마]
또 한 번 내게 경고를 날려왔다.
저 모니터를 다루는 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연구소 내부의 인공지능?
아니면 아직까지 연구소에서 살아남은 누군가?
내가 의뭉스러운 눈빛으로 모니터를 바라보던 그때.
“잉간 님, 잉간 님 어디 계십니까?”
“네?”
갑작스럽게 폰은수는 나의 이름을 불렀다.
서둘러 폰은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다가가자 폰은수는 내게 굳건히 닫혀있는 문을 가리키며 부탁했다.
“저 문을 열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저희는 진입 권한이 없다는군요.”
“저 문은…….”
“중앙 데이터센터로 향하는 문입니다.”
“아, 네.”
나는 폰은수의 지시에 따라 문 앞에 섰고, 기지의 시스템은 나를 인식하여 시원스럽게 문을 열었다.
연구소의 심층부로 진입한 폰은수는 이곳에 오는 건 처음인데도, 마치 미리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태연하게 연구소를 살피며 돌아다녔다.
“다들 주의. 저 앞에서 전투를 펼칠 수도 있다.”
다 부서져서는 경비 로봇들이 매복하고 있던 장소를 정확히 짚어내질 않나.
“분명 전등 스위치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전등 스위치를 찾아내 전등을 켜질 않나.
계속해서 의심이 쌓여갈 만한 행동을 내 앞에서 보였다.
그 사실을 지적한다면 미리 이곳의 자료를 봐뒀다는 말로 대응할 게 뻔했기에, 나는 슬며 블랑카와 아리스에게 귓속말을 속삭였다.
“아리스, 최대한 블랑카 곁에 붙어있어.”
“응?”
블랑카와 아리스는 내 지시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주위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마침내 폰은수와 우리는 목적지에 도달했다.
수많은 슈퍼컴퓨터들이 들어선, 연구소의 최심부.
전 세계의 인터넷을 백업한 바로 그 장소.
“여기가. 데이터센터…….”
중앙 데이터센터에 도착한 것이다.
데이터센터에 도달한 폰은수는 재빠르게 주머니에서 USB를 꺼내 근처의 컴퓨터에 연결했고, 무언가를 분주하게 찾기 시작했다.
나 또한 슬쩍 근처의 컴퓨터를 작동시켜 방대한 양의 자료들을 둘러보며 폰은수에게 질문했다.
“지금 찾고 있는 자료의 이름이 뭐죠?”
“정보 조작 장치. 정보의 에너지화. 뭐 그런 이름입니다. 아니면…….”
“아니면?”
“리만 가설. 네. 리만 가설에 관련된 자료를 찾으시면 됩니다.”
리만 가설이라.
그리운 이름을 들은 나는 키보드를 톡톡 건드려 단숨에 폰은수가 원하는 자료를 찾아냈다.
“찾았어요.”
“찾았다고요?”
“리만-에포나 방정식을 토대로 한 물질의 정보화 장치. 이거일 거예요.”
그리운 이름이 적힌 문서를 열자 내가 예상했던 내용이 주르륵 펼쳐진다.
정보를 물질화하는 법과, 물질을 정보로 바꾸는 법이 적힌 문서.
멸망이 예정된 세상에 헛된 희망을 심어준, 판도라의 상자.
“이게…… 바로 그…….”
내가 건네준 문서를 USB에 담은 폰은수는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USB를 바라봤다.
바로 그때.
[도망쳐.]
데이터 실의 한쪽 벽을 메우고 있던 모니터에 경고의 메시지가 떠오르고.
어디선가 나타난 로봇들이 천장에서 바닥으로 뛰어내리며 우리에게 총구를 겨눴다.
청년회가 서둘러 대응 사격을 하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로봇들의 총구가 불을 뿜고.
데이터 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모니터의 충고를 받아들여 빠르게 데이터 실을 빠져나오려 했지만, 이미 데이터 실의 입구도 갑자기 솟아난 로봇들에게 가로막힌 상태였다.
젠장, 이걸 어떻게 하지?
내가 혀를 차며 속으로 욕설을 토하던 그때.
“:-(”
클라인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213화 *업로드 오류* 신호를 다시 확인해 주세요
“:-(”
한 발짝 앞으로 나선 클라인은 꼭 쥐고 있던 손을 펼쳤다.
그러자 출구를 틀어막고 있던 로봇들이 실이 끊긴 인형처럼 바닥에 쓰러진다.
순식간에 우리를 습격한 모든 로봇들이 제압되고, 클라인은 발치에 쓰러진 로봇을 촉수로 분해한다.
무언가 찾는 게 있는 듯 클라인은 로봇의 내부를 뒤적거린다.
데이터 실에 있던 모두는 다양한 감정을 품은 시선으로 그런 클라인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게…… 외계인의 힘…….”
클라인이 너무나 간단히 로봇들을 제압하는 데 충격을 받은 걸까?
폰은수는 클라인을 바라보며 감상을 중얼거렸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청년회에 지시를 내린다.
“어흠, 다들 위치로! 인터넷 복구를 시작하자!”
제1 목표였던 정보 변환기를 얻었으니, 이제 인터넷을 복구할 차례다.
인터넷을 복구하려면 데이터 실을 연구소 밖에 연결해야 하는데, 지금은 데이터 실과 연구소의 연결마저 끊긴 상태다.
그걸 복구하기 위해 준비해온 재료들을 꺼내 청년회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하고, 나는 멀찍이 떨어져서 그 모습을 구경한다.
데이터 실과 연구소의 연결이 복구되고, 연구소 전체가 전율하듯 떨려온다.
“이제 연구소 시스템에 접근할 수 있으니, 보안 레벨이 문제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건 다행이네요.”
이어서 청년회는 연구소 밖으로 인터넷을 잇기 시작했다.
내가 도와줄 일은 모두 끝난 터라 지루한 눈빛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와중, 내 눈에 폰은수의 모습이 들어온다.
노트북을 챙겨서 어디론가 향하는 모습이었는데, 어딜 저렇게 급하게 가는 거지?
“은수 씨?”
“아, 잉간 님.”
그런 폰은수의 모습이 이상해 말을 걸어보니 조금 당황하는 모습이 보인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시나요?”
“아, 정보 송신실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정보 송신실?”
폰은수는 그렇게 말하며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키는데, 지도를 보자 기억이 조금씩 되살아난다.
으, 이건 별로 좋지 않은데.
고개를 내저어 기억을 침전시키려 하는 와중, 폰은수는 내게 정보 송신실의 역할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정보 송신실은 아까 데이터실에서 봤던 리만-에포나 가설을 이용해서…….”
“대충, 초장거리 정보 조작을 위한 곳이잖아요. 맞죠?”
“……그렇죠.”
“거긴 왜 가려고……?”
“……달을 지구로 끌어들인 장소가 그곳이니, 어쩌면 지구를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을 찾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폰은수는 잠깐 뜸을 들이며 내게 정보 송신실에 가는 이유를 설명했다.
지구를 원래대로 돌릴 방법이라.
그런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해본 적 없었는데, 폰은수의 말을 들으니 꽤 가능성이 있어 보이긴 한다.
“그럴듯한 이야기네요. 저도 따라가도 되죠?”
“네? 아…… 물론이죠.”
지구를 원래대로 돌릴 방법이 정말 있다면, 당연히 나도 도와야지.
하지만 폰은수는 내 도움이 그리 탐탁지 않은 듯 떫은 목소리를 내었다.
그래도 나를 억지로 떨쳐내는 건 이상하다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여 내 제안을 수락했다.
아까처럼 로봇들이 습격해올 수도 있으니,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블랑카와 아리스는 데려가는 게 안전하겠지.
클라인은 데이터 실에서 인터넷을 살펴보는 데 정신이 팔려있었다.
굳이 클라인을 방해할 필요는 없을 거라 생각해 세 명만 폰은수를 따라가기로 했다.
얼마 걸리지 않아 정보 송신실 앞에 도착하고,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리며 송신실 내부의 모습을 드러낸다.
폐허처럼 변한 바깥의 모습과는 달리,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내 기억 속의 모습에서 변한 것이 없다.
선배가 스스로 귀엽다고 주장하던 괴상한 촉수 모양의 스티커.
언제나 선배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불평을 하던 소파.
늘 내가 앉아서 업무를 진행하던 자리.
그리고.
언제나 푸른 하늘로 향해있던 거대한 송신탑.
그것만이 내 기억과 다른 풍경이었다.
모두가 인류의 희망이라 칭송하던 새로운 바벨탑은 잿빛 동굴에 갇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부러진 탑을 바라보며 내가 감상에 젖어 있던 사이, 폰은수는 컴퓨터들을 만지작거리며 송신탑을 재가동하려 한다.
그때, 폰은수가 내게 놀라운 사실을 하나 알려온다.
“아직…… 송신탑이 가동되고 있네요.”
“송신탑이 가동되고 있다고요?”
“네. 보세요. 분명히 가동되고 있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달이 추락하며 이 일대를 완전히 파괴했는데도 송신탑이 멀쩡히 작동되고 있다고?
서둘러 폰은수에게 다가가 모니터를 바라보자, 폰은수의 말대로 신호가 약하긴 해도 송신탑이 제대로 가동되고 있다 표시되고 있었다.
“기존에 송신하던 정보는 대부분 중단됐는데…… 딱 하나만 송신되는 중이네요.”
“그게 뭐죠?”
모니터에 표시되는 정보를 해독하자, 역으로 폰은수가 내게 질문을 던진다.
“그러니까…… 목적지가 어디냐면…… 우주?”
“우주?”
“……우주 정거장. 우주 정거장의 보수를 지원하는 것 같네요.”
송신탑에서 발신되는 정보들은 지금도 지구를 돌고 있을 정거장들을 유지 보수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아직도 우주 정거장들이 살아 있다면, 우주 정거장과 인터넷을 연결할 수 있다면 멸망 전처럼 전 세계에 인터넷을 연결하는 것도 꿈이 아니게 될 수도 있다.
어째서 아직도 송신탑이 정보를 발송하고 있는지, 지금 송신하는 정보를 더 자세하게 알아보기 위해서 방안을 더 둘러본다.
그때, 내 눈에 의자에 축 늘어져 있는 하얀 가운이 들어온다.
“우왁?!”
“무슨 일입니까?!”
“무, 무슨 일이야?!”
시체?
순간 당황한 나는 발을 헛디디고 바닥에 넘어지고, 소란을 들은 사람들이 내게 달려온다.
“시, 시체.”
“시체?”
“시체…… 아니, 잘못 봤나 봐.”
순간 백골이 된 시체가 널브러진 광경으로 보였지만, 내가 봤던 것은 단순히 의자에 걸쳐진 백의였을 뿐이다.
두근두근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조심스럽게 흰 가운을 살펴본다.
변명 같지만 내가 흰 가운을 시체로 착각한 이유가 분명히 눈에 들어온다.
마치 이 옷을 입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증발한 것처럼 옷들이 널브러져 있던 것이다.
누가 봐도 오래 방치된 시체처럼 보이는데, 이걸 보고 놀라지 않는 게 이상하지.
아무튼,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고 백의의 정체를 살펴본다.
책상 위에는 여러 쪽지가 널브러져 있고, 이상한 찌꺼기가 달라붙은 머그컵이 보인다.
그리고 가운의 가슴팍엔.
[이강인]
누군가의 이름이.
이름이.
쓰여 있다.
“……윽.”
심해지는 두통에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고 다시 흰 가운을 바라보니 가슴에 달려있던 명찰이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으…….”
여전히 지끈거리는 머리.
두통 때문에 울렁이는 시야 한 구석에서 폰은수가 USB를 컴퓨터에 밀어 넣는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USB의 모습이 어째 많이 이상하다.
우리가 아는 네모반듯한 그 모습이 아닌, 말랑한 젤리 같은 모습이다.
뭐라 폰은수를 제지하고 싶었지만, 내 몸 하나 가누기도 힘들었고.
“잉간?!”
블랑카와 아리스가 내 상태를 살피러 달려오는 순간.
우웅.
송신탑이 무언갈 송신하려는 듯 힘껏 힘을 응축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읏……!”
밝은 빛과 함께 송신탑에서 정체불명의 정보들이 쏘아져 천장을 뚫고 날아오르고.
[경고, 경고, 경고, 심각할 수 있는 악성 정보의 유입 감지됨. 경고. 경고…….]
기지 전체에 사이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는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익숙한, 그렇지만 조금 달라진 그들이 연구소 내부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인류 해방 전선에 합류하라.”
인류 해방 전선.
그들이 왔다.
* * *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정보 뭉텅이의 용도를 모르겠다.
클라인이 아는 상식에선 인간들이 정보를 화폐로 사용할 정도로 정보 조작에 통달한 것도 아닌데, 어째서 암호 화폐라는 이름이 이 정보에 붙어 있는 걸까?
무언가 실험을 하던 흔적인 걸까?
아니면 지구의 인간들은 물질 문명에서 정보 문명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었던 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지구에 남은 흔적들은 너무 물질 쪽으로 치중되어 있다.
그렇다고 이 암호 화폐란 것이 아주 희귀하게 발견되는 것도 아니다.
잉간이가 자고 있을 때 폐허를 간간이 돌아다니다 보면 쉽게 발견되는데, 맨 처음 발견했던 것처럼 암호 화폐만 가득 차 있기도 하고, 다른 잡다한 정보들과 함께 보관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분명히 물질 문명인데 어째서 물질적인 화폐가 아닌 정보로 이루어진 화폐가 자꾸 발견되는 걸까?
지금 클라인에게 있어서 최대의 미스터리였다.
클라인이 암호 화폐의 비밀을 알아내려 노력하는 사이, 잉간이와 지구인들은 마침내 지하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클라인은 얌전히 잉간이의 품에 안겨서 지하로 운반됐다.
잉간이의 룸메이트가 자신을 질투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클라인은 이 시간이 끝나면 이런 경험을 할 수 없으니 양보해 달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룸메이트들의 행동을 무시했다.
잉간이의 품 안에서 편안한 여행을 즐기는 와중에도 자꾸만 밀렵꾼들의 채집기들이 습격해오지만, 지구인들은 밀렵꾼들을 가볍게 격퇴하고 있었다.
원시적인 정보 가공 수단을 지구인들이 가지고 있는 것도 지구인들에게 유리한 요소지만, 그것보다 클라인은 묘한 인상을 받았다.
밀렵꾼들이 진심으로 밀렵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어째서일까?
여기까지 원정을 나올 밀렵꾼들이라면, 이 정도의 지구인 군락은 가볍게 짓밟을 수 있을 텐데.
개체 수의 과도한 감소를 걱정한 밀렵꾼들의 선택인 걸까?
아니, 그런 걸 생각하지 않으니 밀렵꾼이 밀렵꾼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밀렵꾼들은 지구인들을 잡는데 진심을 내지 않는 걸까?
지구인들을 잡는 게 밀렵꾼들의 목적이 아니었던 걸까?
클라인이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잉간이는 밀렵꾼들의 본거지로 추정되는 장소로 열심히 향하고 있었다.
잉간이가 이 묘한 시설의 주위를 감싼 정보들을 해체하는 동안 클라인은 밀렵꾼들이 지구에 근거지를 차린 방식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건…….”
지하의 시설에서 계속해서 감지되는 마력망과 비슷한 시스템의 존재.
그리고 지구의 자원을 사용해서 만들어지는 밀렵꾼들의 채집기.
밀렵꾼들이 지구인들의 시설을 점거해서 자신들의 것으로 사용하고 있던 것이다.
지구인들이 지적 생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레벨까지 문명을 발전시켰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던 거겠지.
클라인의 예상대로 이 시설 안에 존재하는 유사 마력망의 근원을 점거하기만 한다면 밀렵꾼들의 활동을 지구에서 중지시킬 수 있을 것이다.
지구 외부의 기지는 파인만이 알아서 박살 내는 중일 테니 말이다.
그렇게 클라인이 고찰하는 동안 잉간이는 두 번째 관문을 마주쳤다.
“윽…….”
보는 것만으로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혼탁한 악성 정보들의 바다였다.
악성 정보들의 냄새에 클라인은 코를 막고 잉간이에 기댔다.
잉간이의 정보를 느끼고 있으니 악성 정보들의 악취가 조금은 묻히는 기분이다.
잉간이도 빨리 여기서 벗어나고 싶었는지 빠르게 문을 열었고, 이번에는 정보적 변형이 일어난 거대한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보적 변형을 해제하려면 마력 없이는 꽤 많은 정보량을 요구하는데, 과연 잉간이가 정보량을 감당할 수 있을까?
잉간이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처음으로 잉간이의 발이 멈추고 난색을 표한다.
흠, 여기서는 내가 나설 차례네.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잉간이를 도우려 했지만, 아직 밀렵꾼들의 근원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여기서 직접 나섰다간 밀렵꾼들이 그대로 도망치거나 연결을 끊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원래의 목표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일단 시설 안으로 진입할 때까지는 잉간이에게 맡겨야 한다.
그래도 잉간이 혼자서는 힘들 텐데, 어쩌지?
그렇게 고민하던 클라인은 문득 암호 화폐의 존재를 떠올렸다.
그래, 이거다.
이 순수한 정보 덩어리라면 잉간이가 문의 잠금을 해제하는 데 충분한 양일 것이다.
클라인은 그리 생각하며 잉간에게 암호 화폐를 건넸고, 잉간은 다행히 클라인의 생각을 잘 눈치채준 듯하다.
세 번째 관문까지 돌파하자 드디어 시설 내부의 모습이 드러났다.
“……어라?”
그런데 어째, 이 장소의 풍경이 그리 낯설지 않다.
그래, 이 풍경은 분명…… 잉간이의 기억 속에 있었다.
정말 여기가 잉간이의 기억 속의 장소일까?
아니면 단순히 비슷한 장소일까?
잉간이의 상태를 살펴보지만 불안정하다거나 그런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래, 그냥 비슷한 장소일 것이다.
만약 여기가 정말 잉간이의 기억 속의 장소라면…….
당장 잉간이를 여기서 탈출시켜야 한다.
자칫하면 잉간이의 정보 중첩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 말이다.
잉간이와 함께 시설 내부를 탐험하던 클라인은 마침내 유사 마력망의 근원을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
유사 마력망의 정체를 확인한 클라인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저 정보들을 얼기설기 이어 붙어 유사 마력망을 만들어 내다니, 참 대단하다.
클라인이 유사 마력망에 감탄하던 그때, 침입자를 막기 위해서일까?
밀렵꾼들의 비장의 한 수로 보이는 채집기들이 잔뜩 몰려들어 잉간이를 포위했다.
“흥, 어림도 없지.”
유사 마력망의 근원을 발견한 클라인은 더는 거릴 것도 없겠다, 단숨에 정보를 조작하여 채집기와 유사 마력망과의 연결을 끊어냈다.
이 정도면 꽤 멋있는 모습을 보인 것 같은데, 잉간이의 반응은 어떠려나?
으음, 잘은 모르겠지만 잉간이도 충분히 감탄한 것 같다.
그럼, 마지막 발악도 막아 냈으니 빨리 서둘러서 마력망을 타고 올라 밀렵꾼들을 몰아내야 한다.
유사 마력망에서 밀렵꾼들을 몰아내는 일은 금방 끝났다.
애초에 외부의 침입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방비가 무척이나 허술했기 때문이다.
마치 클라인에게 어서 오라고 대문을 열어준 것만 같다.
이걸로 지구에서 클라인이 할 일은 끝.
당장 돌아가도 괜찮지만, 아직 파인만에게 연락이 오지도 않았고, 좀 더 지구에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클라인은 유사 마력망 속을 탐방하며 지적 호기심을 해소하기로 했다.
제일 먼저 도대체 이 암호 화폐란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겠다.
“으음…….”
암호 화폐에 알면 알수록 클라인은 점점 더 암호 화폐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자원이 고갈되는 상황에서 쥐어짠 에너지로 이 암호 화폐를 생산하는 데 적지 않은 에너지를 소모했다는데,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걸까?
아무리 유사 마력망을 살펴봐도 이 암호 화폐로 현실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 없는데?
클라인이 지구인들의 행동에 한참 의문을 품고 있던 그때.
“……?”
무언가 불쾌한 파동이 지구에 퍼져 나가고.
철컥.
인간들이 클라인에게 원시적 병기를 들이댄다.
뭔가 잉간이에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게 분명하다.
빠르게 잉간이를 만나러 가야 한다.
클라인은 인간들의 무기가 자신에게 상처를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고 빠르게 잉간이에게 달려가는 것만을 생각했다.
그런 클라인이 불쾌한 걸까?
자신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고 태연하게 방 밖으로 나가려는 클라인에게 인간이 뭐라 소리치고.
그리고 클라인은.
“어……?”
뜨거운 고통을 느꼈다.
214화 *손상된 파일입니다.*
“인류 해방 전선…….”
이번에도 또.
또 인류 해방 전선이다.
또다시 등장한 인류 해방 전선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일전에 봤었던 그 끔찍한 모양새는 여전했지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아무리 봐도 지구의 것으로 보이는 장비들로 무장하고 있었단 것이다.
방탄복에 어디서 주웠는지 모를 소총들까지.
전보다도 더 상대하기 골치 아파졌네.
“잉간.”
“일단, 여기서 나가야 해.”
블랑카는 당장 여기서 싸울 생각처럼 보였지만, 나는 블랑카를 가만히 제지하며 조심스럽게 출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인류 해방 전선이 지구에 온 이유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클라인을 그리 좋아하지 않을 거란 것이다.
빨리 클라인과 합류해서 지하를 탈출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우리를 쉽게 놔줄 생각이 없는지 민첩한 움직임으로 출구를 가로막고 우리에게 총구를 들이댔다.
“망할.”
몸 성히 빠져나가기 힘들어 보이는 풍경에 내가 욕설을 내뱉고, 폰은수가 뻔뻔한 걸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잉간 님.”
“너냐? 처음부터 저 새끼들하고 내통하고 있던 게?”
인류 해방 전선이 지구의 위치를 어떻게 알아냈는진 몰라도, 이렇게 쳐들어올 수 있던 건 분명 아까 폰은수가 설치한 USB의 짓이겠지.
존대 따윈 집어치우고 으르렁거리며 폰은수를 추궁하자, 폰은수는 시원스럽게 내 추측을 긍정했다.
“뭐, 그렇죠.”
“왜?”
나는 도저히 폰은수가 인류 해방 전선과 내통한 이유를 알 수 없어서 진심으로 의문스럽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폰은수는 오히려 역으로 내게 질문했다.
“역으로 제가 물어보죠. 저들하고 손을 잡아선 안 되는 이유가 있습니까?”
“저 새끼들이 얼마나 미친놈들인지 몰라서 그래. 남들 의견은 듣지도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고, 인체실험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는……”
“그건 외계인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뭐?”
“인체실험이니, 우리의 의사를 무시한다느니. 그런 건 전부, 클라인의 동족도 저지르는 짓이 아닙니까?”
“그건…….”
아니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
내 머릿속에 클라인의 도시에서 봤던 잔뜩 굶주린 인간들이 떠오른다.
클라인이 아닌 다른 외계인들은 인간과 대화하는 데 관심조차 없다.
폰은수의 말대로, 인류 해방 전선이 하는 짓은 클라인의 동족도 저지르고 있다.
“적어도 인류 해방 전선은 저희와 함께 싸웁니다. 하지만 저들은 어떻죠? 오히려 저희를 공격합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인류 해방 전선과 손을 잡는 게 났죠.”
“……그래. 그래서 도대체 뭘 할 생각인데? 저 녀석들하고 손을 잡아서?”
“지구에서 외계인들을 모두 몰아낼 겁니다. 그리고, 다시 지구를 살기 좋게 만들어야겠죠. 다시는 외계인들이 지구를 넘보지 못하게.”
“외계인이라 하면, 드래곤들도?”
“당연한 것 아닙니까?”
“뭐?”
당당하게 드래곤들마저 지구에서 몰아내겠다 말하는 폰은수.
어제까지만 해도 드래곤들과 친밀히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의 입에서 나올 이야기로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드래곤은 침략자가 아냐. 너도,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었어? 그들은 인간들을 위해……”
“드래곤이 인간을 위한다고요? 하, 아뇨. 절대 그런 게 아니에요.”
“그게 무슨 소리야?”
“마을이 어떻게 유지되는지, 알고 있어요?”
“……대충 자급자족할 정도의 인프라는 갖춘 게 아냐? 부족한 건 드래곤이 지구를 돌아다니며 물자를 수집하는 걸로 아는데.”
“지구에 남은 생존자 마을은 이곳, 달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생각보다 꽤 많아요. 드래곤은 그런 마을들을 약탈해서 물자를 가져오는 겁니다.”
“뭐? 잠깐, 너는 그 사실을 어떻게…….”
“어떻게긴요. 제가 마을의 생존자니 하는 말이죠.”
드래곤이 다른 마을을 약탈해서 달의 마을을 먹여 살린다는 건 조금 충격이었지만,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폰은수의 주장을 부정했다.
“그래. 그렇다고 해도 드래곤이 인간을 위하지 않는 건 아냐. 인간도 인간끼리 싸우고 약탈하는데, 드래곤도 그럴 수 있지. 어쨌든 드래곤이 한 짓은 다 이 마을을 위한 거였잖아?”
“마을을 위한 게 아닙니다. 그저 그들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 놀잇감이 필요한 거겠죠.”
“너무 부정적으로 드래곤을 바라보는 거 같은데.”
내가 보기엔 드래곤들은 그저 자신들에게 소중한 인간들을 지키기 위해 뭐든 하고 있을 뿐으로 보인다.
마치 클라인처럼 말이다.
“그래서.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의도가 뭐야?”
“저희와 함께 하시죠. 잉간 님.”
“아오…….”
젠장, 또 이 이야기야?
몇 번째 반복되는지 모를 이야기에 인상을 찌푸리며 폰은수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그 새끼들하고 엮일 생각 없어. 도대체 왜 자꾸 나를 끌어들이려 하는 거야?”
“그 외계인들에게 한 방 먹인 유일한 사람이 잉간 님 아닙니까? 저희가 힘을 합친다면 충분히 외계인들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너희 같은 놈들하고 손을 잡지 않아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어떻게요?”
“그건…….”
어떻게 지구를 지킬 것인가.
그렇게 묻는다면 내가 할 말은 별로 많지 않았다.
클라인과 함께, 클라인의 동족들의 생각을 바꾼다.
그게 내가 대답할 수 있는 최선이다.
오로지 클라인에 대한 신뢰로만 이뤄진 해결책.
솔직히 말해, 나 이외의 그 누구도 제대로 된 근거라 인정해주지 않을 것이다.
“클라인의 생각이 바뀐다면요? 아니, 그보다 클라인과 제대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까? 클라인은 믿을 수 없어요. 침략자들과 클라인이 다른 게 뭡니까?”
“……믿을 수 있어. 클라인은 다른 사람들하고 달라.”
“도대체 뭐가 다른데요?”
“……친구.”
“네?”
“클라인은, 내 친구야. 그게 달라.”
당연하게도 내 주장은 폰은수를 제대로 설득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게 당연한 거다.
말로 누군갈 설득하는 게 그렇게 쉬웠다면, 진작에 나와 클라인은 목적을 이뤘을 테니까.
말로는 그 누구도 설득할 수 없다면,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
행동으로 나와 클라인이 지구를 지킨다는 걸 믿게 만들어야 한다.
“결국, 저희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거군요.”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고 있었잖아?”
“어쩔 수 없네요. 정말 유감입니다.”
유감이면 이 총들부터 치우지, 폰은수는 손가락으로 우리를 가리키며 일촉즉발의 상태를 만들었다.
“마지막 기회입니다. 정말로…….”
“정말로.”
폰은수가 발사 명령을 내리기 위해 손가락을 까딱하고, 나는 흘깃 곁눈질로 근처의 모니터를 바라본다.
[도착 했 어]
도착.
지금까지 별로 하고 싶지도 않은 대화를 폰은수와 나누며 시간을 끈 보람이 있었다.
모니터에서 진행되고 있던 카운트다운이 모두 끝나고.
“다들, 발…….”
카가가각!!
금속이 비틀리는 소리가 들려오며 연구소 전체가 떨려온다.
천장에서 먼지가 떨어지고, 금속 천장이 움푹 파이며 찌그러지더니.
쾅.
거대한 무언가가 주위의 인류 해방 전선들을 깔아뭉개며 등장했다.
하늘에서 추락한 그것의 정체는 이족 보행형의 탑승물이었다.
달걀에 두 다리가 달린 것 같은 조금 우스꽝스러운 형태였지만, 충격 하나는 대단해서 인류 해방 전선의 진형이 완전히 붕괴된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달걀은 이리저리 우왕좌왕 날뛰다 스피커를 통해 내 이름을 부른다.
“잉간!”
“어, 어?”
“지금이야! 빨리!”
그래, 지금이 여기서 도망칠 절호의 기회다.
서둘러 달걀을 방패 삼아 출구를 향해 달려나간다.
“윽…… 다들 발사!”
황급히 폰은수가 발사 명령을 내리지만, 대부분의 공격은 달걀이 스스로를 방패막으로 삼아 막아낸다.
간혹 달걀이 막아내지 못한 공격은 아직 남아있는 마력으로 발동된 블랑카의 보호막이 막아낸다.
“탈출……!”
빠르게 송신실을 벗어남과 함께 달걀이 휘청휘청 걸으며 입구로 다가오고, 털썩 주저앉아 입구를 완전히 틀어막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그때, 달걀이 덜컹거리더니 덜컥 뚜껑이 열렸다.
저 안에 지금까지 내게 경고를 보내주던 사람이 있는 걸까?
“으, 윽……!”
생각보다 빠져나오기 어려운지 낑낑거리는 소리가 달걀 안에서 들려온다.
그런데 어째 목소리가 꽤 낯익다?
아니, 잠깐만.설마?
“푸하, 잉간!!”
“리키?!”
“으, 보고 싶었어!”
달걀 안에 들어있던 사람의 정체는 바로 리키였다.
지구 어딘가에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여기서 리키가 나온다고?
“리키, 지금까지 어디 있었던 거야?”
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내게 감겨드는 리키를 토닥이며 지금까지의 일을 질문했다.
리키는 아리스를 품 안에 꼭 껴안고, 꼬리로는 내 몸을 휘감으며 지금껏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 처음에 정신을 차리니까 어떤 이상한 방이었거든?”
“이상한 방?”
“막, 금속으로 이루어진 방이었는데, 밖에 나가보니 아무도 없고. 창문 밖에는 우주하고 땅만 보이는 거야. 그래서 엄청 불안했는데…… 잉간이 보이는 거야.”
“……내가 보였다고?”
“응. 모니터에, 잉간이 보이고 있었어. 그래서 그걸 쭉 보다 보니까, 막 이상한 사람들이 대화하는 것도 보이고. 막 그래서…….”
리키의 이야기는 놀라웠다.
상당히 횡설수설하듯 이야기했지만 이렇게 리키의 이야기를 요약할 수 있었다.
우주정거장에서 깨어난 리키가 아직 살아있는 위성의 감시망을 통해 나를 발견했고, 계속 나를 지켜보다 불길한 징조를 포착해서 기지와 연결된 컴퓨터를 조작해서 내게 메시지를 보냈다는 것이다.
“더는 보고만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서 막 여기저기 뒤졌더니, 저런 게 있어서…….”
“설마…… 그대로 떨어진 거야?”
“에헤헤.”
아니, 그렇게 배시시 웃을 일이 아닌데?
아무리 봐도 저걸로 지상까지 내려올 수 있을 것 같진 않은데?
리키의 능력이 위치 에너지 같은 물리적인 힘에도 통하는 걸까?
내가 알기론 그건 아니었던 거 같은데.
“아무튼, 일단 빨리 도망치자. 저게 오래 버티진 못할 거야.”
“응. 알겠어!”
일단 진지한 고찰은 나중에 하고, 저 문이 뚫리기 전에 빠르게 여길 벗어나야 한다.
서둘러 다시 클라인이 있을 데이터 실로 이동하는 와중, 여기저기서 인류 해방 전선의 모습이 포착된다.
이 녀석들은 이곳을 자신들의 기지로 삼을 생각인지 제멋대로 연구소들을 꾸미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다 쓰는지 모를 괴상한 고문 도구들과 누군가를 가둘 철창.
마치 이사 온 첫날 두근거리며 벽지를 바르듯 살덩어리들을 연구소 이곳저곳에 펴바르는 역겨운 광경들.
추억이 더럽혀지는 듯한 풍경에 당장이라도 저들을 막고 싶었지만, 지금은 클라인이 먼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데이터실 입구에 도착하고, 나는 빠르게 클라인의 이름을 부른다.
“클라인! 괜찮아?!”
다급하게 클라인의 이름을 부르며 데이터 실 안으로 들어선 나를 마주한 건.
새빨간 피.
그리고 그 가운데에 털썩 주저앉아있는.
“:-*”
“클라인?”
클라인의 모습이었다.
215화 *손■된 파■■니다*
“클라인!”
피투성이가 된 채로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클라인에게 서둘러 달려간다.
“:-*”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며 낑낑거리는 클라인을 품 안에 안고 어디 다친 곳이 없나 확인한다.
클라인은 자그마한 손으로 어깨를 꾹 누르고 있었는데, 손을 떼자 마치 총을 맞은 듯한 상처가 보인다.
이렇게 몸이 작아진 탓에 클라인의 힘이 약해진 걸까?
아니면 저 녀석들이 클라인에게도 통하는 무기를 만들어낸 걸까?
그나마 어깨를 다친 선에서 끝났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려나.
클라인의 생명에 그리 큰 지장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나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오고, 그제야 나는 주위를 살필 여유가 생겼다.
“윽…….”
클라인이 자신을 공격한 이들에게 반격을 가한 걸까?
데이터 센터 안은 인류 해방 전선의 시체가 가득했다.
내가 상태창으로 그들을 터트리듯, 클라인 또한 비슷한 일을 해낸 모양이다.
참혹한 풍경이었지만, 그들에겐 동정심이 들지 않았다.
그저 생리적 혐오감만이 남아있을 뿐.
“클라인, 일어설 수 있겠어?”
“:-(”
“괜찮아. 저기, 조금 아플 수도 있어. 알겠지?”
“:-0?”
나는 서둘러 주위의 정보를 조작하여 일종의 끈을 만들어내고, 클라인에게 말을 걸며 클라인의 어깨를 꽉 감싼다.
클라인에게도 지혈이 필요할지는 모르겠지만, 안 하는 것보단 났겠지.
“흡!”
“:-*”
상처가 자극되며 통증을 느꼈는지 클라인이 나를 콩콩 주먹으로 치지만, 나는 그런 클라인의 반응을 무시하고 클라인을 등에 업는다.
서둘러 밖으로 빠져나오자 클라인이 내려달라는 듯 촉수를 꾸불거린다.
조심스럽게 클라인을 땅에 내려놓자 클라인이 자신의 상처를 바라보더니 촉수를 상처 가까이 가져다 댄다.
“클라인?”
그리고 클라인은.
단숨에 촉수를 자신의 상처 안으로 밀어 넣었다.
꽉, 내 손을 단단히 붙잡고 스스로 상처 안을 촉수로 헤집던 클라인은 잠시 후 무언가를 자신의 어깨에서 뽑아냈다.
“:-#”
클라인의 어깨에서 뽑혀 나온 것은 이전 연구소 바깥에서 봤었던 질척질척한 악성 정보였다.
저걸 탄환처럼 가공해서 클라인에게 쏜 걸까?
“괜찮아. 괜찮아.”
고통에 몸부림치는 클라인을 토닥이며 진정시킨다.
내 품에 얼굴을 한참 동안 파묻고 있던 클라인은 겨우 진정했는지 조심스럽게 내 품을 빠져나온다.
“:-P”
괜찮다는 듯 내 손을 툭툭 건드리며 클라인은 살포시 웃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블랑카는 한숨을 내쉬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자, 그럼 이제 어쩌지?”
“일단…… 탈출해야 하지 않겠어?”
“내 생각에 지금 탈출하는 건 하책인 것 같아.”
“하책이라고?”
“그래. 잘 생각해보면 우린 지금 적의 심장부에 들어와 있는 거잖아?”
“그렇지.”
“어쩌면…… 본진을 칠 기회가 지금밖에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시간이 지나면 적들은 더 진형을 갖출 테니까.”
“……그러니까. 아직 넘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혼란스러운 지금 공격하자?”
“그래. 바로 그거야.”
“음…….”
블랑카의 말은 꽤 일리가 있었다.
인류 해방 전선이 연구소를 장악하는 꼴을 봐선 꽤 본격적으로 지구를 침략할 생각 같은데, 제대로 된 기지가 완성된다면 지하를 지나 이곳까지 도달하기 무척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바로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건데.
“그럼, 저 녀석들을 어떻게 쫓아낼 건데?”
“모조리 몰살?”
“그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그렇겠지?”
“그럼, 뭐 폭탄이라도 찾아서 터트릴래?”
내가 무슨 악마를 찢고 죽일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혼자서 연구소의 녀석들을 모조리 몰아낸다는 건 불가능하다.
적어도 이 녀석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뭐, 기지를 파괴한다거나 그런 것 말이다.
클라인한테 저지른 짓의 2배 정도는 되돌려줘야 하지 않겠어?
블랑카와 내가 머리를 맞대고 작전을 고민하던 그때, 리키가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저기. 연결을 아예 끊어버리는 게 제일 좋지 않을까?”
“연결?”
“응. 연결. 아직 완전히 연결된 게 아니어서 끊을 수 있어.”
“……그건 좋은데. 뭘 끊어야 하지?”
“음…… 송신탑?”
역시 송신탑을 끊어야 하나?
하지만 송신탑에는 지금 녀석들의 주력 병력들이 득실거릴 텐데, 그게 가능할까?
“아니면…… 인터넷?”
“인터넷?”
인터넷?
하긴, 저 녀석들은 지금 인터넷에 기생하듯 연결되어 있는 것이니 인터넷을 어떻게 건드리면 저들을 막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단순히 연결을 끊는 것만으로는 막을 수 없을 텐데?
“아.”
그때, 내 머릿속에 한 가지 발상이 스쳐 지나간다.
인터넷 또한 정보의 집합체의 일종.
그렇다면 힘들겠지만, 내 멋대로 수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인터넷엔 관리자란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럼, 데이터 센터로……?”
“아니,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어.”
“더 좋은 방법?”
“응. 이쪽으로, 따라와.”
데이터 실에서 직접 정보들을 수정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건 너무 난이도가 높고 오래 걸린다.
그것보다 더 빠르고 쉽게 인터넷을 조작할 수 있는 방법, 그건 바로.
[VR실]
“VR실……?”
가상 현실을 이용하는 것이다.
건물의 가장 구석에 위치한 VR실.
원래는 정보의 검색을 더 편리하게 하기 위해 설치된 시설이었지만, 연구원들이 몸을 움직이는 걸 싫어해서 버려진 비운의 시설이다.
“이걸 사용하면…… 좀 더 쉽게 정보를 조작할 수 있을 거야.”
“으음…… 난 잘 모르겠네.”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서 정보를 조작하는 게 상상만으로 정보를 조작하는 것보다 더 쉬운 게 당연하지.
VR실에 먼지가 내려앉은 채 방치되어 있는 장비들을 능숙하게 연결하고, 전원이 들어온 VR 고글을 머리에 쓴다.
“촉각 장갑, 좋아. 바이탈 센서도…… 제대로 작동하네.”
모든 장비가 제대로 작동함을 확인하고 곧장 인터넷에 접속하려 하는데, 아리스가 불안한 눈빛으로 중얼거린다.
“뭔가 불안한데…….”
“얼마 안 걸릴 거야. 걱정하지 마.”
그냥 인터넷에 접속해서 인류 해방 전선과의 연결 부위를 틀어막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그렇게 어렵지도, 위험하지도 않을 것이다.
불안해하는 아리스를 안심시키며 가상 현실에 접속을 시작한다.
우주 공간처럼 시커먼 공허가 나를 맞이하고, 저 멀리서부터 내게 몰려오는 정보의 파도가 형상화되어 나타난다.
가만히 정보의 파도가 나를 덮칠 때까지 기다리고, 그 다음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문자들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말 그대로 인터넷의 모든 자료들이 모여 있으니 취약점을 찾는 것부터 고역이네.
일단 말 그대로 인터넷의 정상으로 기어 올라가서 주위를 살펴보자.
잔뜩 쌓인 정보의 산을 낑낑거리며 등산하던 도중,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여긴 가상 현실인데 난 어째서 걷기만 하는 거지?
그냥 날아다니면 안 되나?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내 몸이 두둥실 떠오르고, 나는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며 빠르게 꼭대기로 날아올랐다.
“음…….”
높은 곳에서 인터넷의 정보들을 살펴보며 뭔가 수상한 곳을 찾아본다.
그때, 내 눈에 뭔가 수상한 게 들어온다.
마치 암세포마냥 스멀스멀 퍼지고 있는 묘한 정보들이었다.
너무 멀리 있어서 무슨 정보인진 알 수 없지만 뭔가 심상치 않은데?
빠르게 이상한 정보들로 다가가자 나는 그것들이 순수한 정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순수한 정보가 아니라 마력이 섞인 정보들이 서서히 주위로 자신의 마력을 퍼트리고 있는 것이었다.
현실이라면 마력이 섞여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여긴 가상 현실 안.
마력 또한 내가 볼 수 있게 시각화되어 나타난다.
지구의 사람들이 마력을 사용할 리 없으니, 이 정보는 인류 해방 전선의 것이겠지.
그렇다면 이 마력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인류 해방 전선이 침입한 곳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더 깊숙이?”
마력의 근원은 내 예상보다도 더 깊숙한 인터넷의 바닥에 위치하고 있었다.
하긴, 이 정도는 되어야 취약점이라 할 수 있겠지.
마침내 내 눈에 해방 전선이 침입한 근원이 눈에 들어오고.
“좋아, 찾았다……!”
그와 동시에.
“……어?”
무언가가 내 발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끔찍한 고통이 찾아왔다.
온 몸이 수십갈래로 나뉘는 듯한.
* * *
아파.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분명히, 저 인간들이 사용하는 무기로는 나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을 텐데.
어째서 이렇게 아픔을 느끼는 걸까?
그런 궁금증을 해결할 틈도 없이 클라인은 빠르게 행동해야만 했다.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은 누가 봐도 위험한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윽……!”
그래도 너무 아픈 건 아픈 거다.
클라인이 어깨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내자, 짜증 나는 인간들이 기쁨의 함성을 내지른다.
“!~~!!!”
한 번 공격이 성공했다는데 확신을 가진 인간들은 이어서 추가타를 날리려 하지만.
이는 성공하지 못했다.
“……너희들, 짜증 나.”
자신을 아프게 한 이들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찬 클라인이 곧장 반격을 가했기 때문이다.
그저 중얼거리는 것만으로, 저 흉측한 괴물체들을 연결하고 있던 미약한 정보 중첩은 바람에 날아가듯 흩어져 버리고, 그대로 허공에 고깃덩어리들이 비산한다.
“!!!!!!”
그런데 클라인의 반격에서 살아남은 인간들도 있는 것 같다.
리만의 실험체가 아니라 지구에 원래 거주하던 원주민인 걸까?
시끄럽게 소리치는 게 짜증 나 클라인은 순간 손을 뻗을 뻔했지만, 클라인은 머릿속에 잉간이를 떠올렸다.
지구인을 죽인다면 잉간이가 좋아할까?
그닥 별로 좋아할 것 같진 않다.
결국, 클라인은 한숨을 내쉬며 지구인들을 무시하려 했지만.
“!!!”
지구인들은 클라인이 손을 거둔 걸 방심한 것으로 착각했는지 클라인을 향해 공격을 가했고.
이번엔 제대로 경계하고 있던 클라인은 곧장 정보 방벽을 만들어내 지구인들의 공격을 막아냈다.
클라인이 공격을 막을 줄은 몰랐는지 지구인들이 뭐라 소리치고.
클라인은 이번에도 참지는 않기로 했다.
이대로 놔두다간 클라인이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이니 말이다.
“……반으로 갈라져 죽어.”
클라인이 정보를 조작하자 정보 조작에 내성이 없던 지구인들은 단번에 끔찍한 최후를 맞이한다.
털썩.
클라인은 지구인들의 시체가 만들어낸 핏물 사이에 주저앉아 어깨를 붙잡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클라인은 두려웠다.
인간들이 자신을 공격한 게 두려운 게 아니었다.
자신이 인간들을 죽인 게 두려운 것이었다.
잉간이가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까.
반격이라곤 해도 내가 잉간이의 동족을 죽인 건 사실이잖아.
잉간이가 날 싫어하게 되는 건 아니겠지?
어쩌면 반격하지 말고 잉간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게 정답이었을지 몰라.
불안에 떨며 클라인이 잉간이를 기다리던 그때.
“0o0!”
잉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쩌지.
뭔가 변명을 해야 할까?
아니, 오히려 그게 잉간이를 더 실망시킬 수 있어.
어떻게 하지?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클라인이 바짝 얼어붙어 잉간이의 판결을 기다리던 그때.
“0^0”
잉간이가 클라인을 가만히 껴안았다.
괜찮다는 듯.
받아본 적은 없지만, 부모님이 포옹을 해준다면 이런 느낌일까?
클라인은 잉간이의 품 안에서 안심감을 느끼며 조금씩 진정했다.
“아야…….”
잉간이의 응급처치를 받으며 클라인은 살짝 신음을 흘렸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그리 고통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꺄, 꺄악?”
그때, 잉간이가 클라인을 등에 업고 데이터실을 빠져나오고, 클라인은 아쉬움을 느끼며 잉간이의 등에서 내려왔다.
“윽…….”
곧장 클라인은 스스로 응급처치를 진행하여 몸에 박힌 악성 정보를 빼냈다.
한시름 놨겠다, 클라인은 조용히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했다.
그 인간.
그러니까 리만을 죽인, 그 인간이 다른 인간들에게 모종의 기술을 전수한 걸까?
클라인의 몸에 박힌 악성 정보에선 그 인간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구와 그 인간의 연결을 빨리 끊는 게 중요하다.
그 인간이 아무리 수많은 정보를 축적했어도 본질은 인간.
지구까지 물리적으로 이동할 수 있을 리 없다.
분명히 정보를 동기화하는 방식을 이용했을 건데, 지구에 그만한 정보를 감당할만한 정보가 있나?
고개를 갸웃하던 클라인은 지구에 유사 마력망이 있음을 깨달았다.
유사 마력망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클라인이 해야 할 일은 처음과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클라인이 추리를 끝내는 사이 잉간이는 머리에 묘한 장치를 뒤집어쓰고 유사 마력망에 접속했다.
잉간이도 나와 비슷한 결론을 내린 걸까?
클라인이 그렇게 생각하며 잉간이를 바라보던 그때.
“어?!”
클라인은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잉간이의 정보 중첩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216화 *손■된 파■■니다*
“잉간아?”
유사 마력망에 접속해 있는 잉간이의 정보 중첩에 이상이 생기자, 곧장 잉간이의 몸에 문제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삐, 삐, 삐이이-
바이털 센서에 표시되던 잉간이의 심박수가 여러 갈래로 나뉘기 시작하고, 잉간이가 고통스러운 듯 꼼지락거린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분명히 저 유사 마력망 때문에 뭔가 일어난 것일 텐데, 마력망과의 연결을 끊어야 하나?
아니, 그랬다간 돌이킬 수 없는 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다.
먼저 잉간이를 저렇게 만든 원인을 제거한 뒤에 마력망과의 연결을 끊어내야 한다.
하지만 밖에서 보기만 해선 그 원인을 도저히 탐색할 수 없다.
직접 클라인이 마력망과 연결되는 게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
하지만 클라인은 곧장 유사 마력망과 연결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지 알고 있었다.
잉간이처럼 물질 생물에 가깝다면 모를까, 정보 생명체가 정보 그 자체로 이루어진 유사 마력망과 연결되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무사히 유사 마력망과 연결됐다 빠져나간다 해도 그 이후의 자신이 이전의 자신과 동일성을 유지할 것이란 보장이 없다.
마력의 비중이 정보보다 높은 일반적인 마력망도 시스템의 보조 없이 직접 연결된다면 동일성을 보장하기 힘든데, 시스템의 보조 없이 정보로만 이루어진 유사 마력망에 접속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클라인은 해야만 했다.
더 늦는다면 잉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으니까.
각오를 다진 클라인은 조심스럽게 잉간이의 몸 위로 올라타 이마를 서로 맞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정보를 마력망으로 업로드하기 시작했다.
서서히 클라인의 정신이 유사 마력망 안으로 들어오고.
“윽……!”
클라인은 머리가 쪼개질 것만 같은 고통을 느끼며 신음했다.
사방이 온통 정보 투성이다.
외우주의 고밀도 정보들보다 더한 말 그대로 정보의 우주가 클라인 앞에 펼쳐진다.
분명히 지구인들이 이 유사 마력망을 만든 건 그리 오래 되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나 많은 정보를 쌓아 올릴 수 있던 걸까?
아직 유사 마력망은 완전히 복구되지 않았다고 알고 있는데, 이 정도나 되는 정보량이라니.
만약 유사 마력망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다면 그 누구도 지구에 제대로 간섭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들의 기술력에 대한 감탄은 여기까지 하고, 클라인은 서둘러 잉간이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최대한 받아들이는 정보량을 낮춰 빠르게 잉간이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지만, 클라인은 그 대신 조금 다른 방법을 택했다.
“차원 파괴자가…… 이리로 지나갔네.”
바로, 잉간이와 함께 있을 차원 파괴자의 흔적을 탐지하는 것이었다.
차원 파괴자가 자랑하는 은신술도 이렇게 순수한 정보들로 가득 찬 곳에선 소용없다.
이 정도나 되는 정보 사이에서 걸어 다니는 건 모래사장을 맨발로 걸어 다니는 꼴인데, 발자국이 남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거기에 더해서,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클라인은 차원 파괴자가 일부러 자신의 위치를 알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원 파괴자도 잉간이가 위험한 상황이라는 걸 눈치채고 있는 걸까?
차원 파괴자의 흔적을 쫓아 잉간이를 추적하는 와중, 마력망의 정보가 계속해서 몸에 쌓이는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잉간이의 문자를 모르기 때문일까?
온통 검열된 듯이 검게 칠해진 문자와 뜻 모를 사진과 영상들이 늘어난다.
평소라면 쓸모없는 정보라며 털어냈겠지만, 클라인은 그 모든 정보들을 잘 가공해서 소중하게 보관했다.
잉간이와 연관된 어떤 사소한 정보들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닷가에서 조개껍데기를 줍는 아이처럼 온몸에 정보들을 잔뜩 묻히고 흔적을 따라가던 클라인은 마침내 잉간이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 응?”
아니, 이걸 잉간이의 흔적이라고 하기엔 조금 묘하다.
보랏빛.
그러니까 차원 파괴자의 색으로 물든 정보들이 한가득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차원 파괴자가 괜히 주위의 정보를 침식하진 않았을 테니 이곳 어딘가에 잉간이가 있을 텐데.
두리번거리며 차원 파괴자의 영역으로 진입한 클라인은 주위의 풍경이 일그러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차원 파괴자가 바꾸기 시작한 풍경은 순식간에 어딘가의 우주선 안과 비슷한 풍경을 만들어냈다.
차원 파괴자는 어째서 이런 풍경을 만들어냈을까?
클라인이 고개를 갸웃하며 주위를 둘러보던 그때.
“앗?!”
식탁에 앉아서 태연하게 차를 홀짝이는 차원 파괴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예상치 못한 모습에 클라인이 소리를 지르고, 차원 파괴자는 눈살을 찌푸리며 클라인에게 말을 걸었다.
“생각보다 늦었네?”
“어?”
지금까지 클라인이 몇 번 차원 파괴자와 싸우긴 했어도 차원 파괴자가 먼저 클라인에게 말을 건 것은 처음이었기에 클라인은 당황한 표정으로 차원 파괴자를 바라봤다.
“너, 말할 수 있었어?”
“당연하지. 나를 무슨 말 못 하는 짐승으로 생각하던 거야?”
“어…… 응.”
당황한 클라인은 자신도 모르게 차원 파괴자의 말을 긍정했고, 차원 파괴자는 불쾌하다는 듯 클라인을 바라봤다.
“얘는 참…… 아무튼. 잉간이를 찾으러 온 거지?”
“응…….”
“그런 거면 잉간이는 저 안에 있어. 가봐.”
“어. 응…….”
너무 자연스러운 차원 파괴자의 태도에 클라인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파괴자가 안내한 방문을 잡았고, 그때 차원 파괴자가 한 마디를 덧붙인다.
“아, 맞다. 그리고.”
“그리고?”
“내 이름은 에포나야. 멀쩡한 이름이 있으니, 알아두라고.”
“에, 에포나?”
“그래. 그거야. 그거니, 파괴자니, 이상한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자기소개를 하는 차원 파괴자라니, 클라인은 정신이 아찔해지려 하는 걸 붙잡고 조심스럽게 잉간이가 있다는 방문을 열었다.
“잉간……아?”
방 안에서 클라인을 맞이한 것은 또다시 클라인의 예상 밖의 풍경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방 안에는.
“0w0?”
작은 잉간이가 클라인을 반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냥 잉간이도 귀여운데, 작아진 잉간이는 더 귀여워.
아니, 이게 아니라?
“어, 어?”
어째서 잉간이가 작아진 거지?
왜?
당황한 클라인은 문을 닫았다 다시 열었지만, 방 안의 풍경에는 변함이 없었다.
“푸하핫……!”
에포나는 그런 클라인의 모습이 적잖이 우스운지 마시던 차도 내려놓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잉간이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야?”
“보다시피, 뭐겠어?”
“귀여워졌어.”
“그건 맞지만, 네가 여기 온 이유를 생각해 봐.”
“……잉간이가 여러 명으로 나뉜 거야?”
“여러 명으로 나눴다는 건 조금 잘못된 표현이네. 원래대로 분리됐을 뿐이니까.”
잉간이가 여러 명으로 나뉘다니, 정보 중첩이 풀리는 속도가 생각보다 빠르다.
최대한 빨리 다른 잉간이도 찾아내야만 한다.
잉간이들을 합치는 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보자.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잉간이에게 손을 뻗었지만, 잉간이는 클라인의 손을 붙잡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서 클라인을 멀뚱멀뚱 바라봤다.
“잉간아?”
“0^0”
방 밖으로 나가기 싫다는 걸까?
작은 잉간이는 투정을 부리듯 문 앞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에포나는 잉간이와 클라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짤막한 감상을 남겼다.
“그 잉간이는 좀 겁이 많거든. 상냥하게 대하지 않으면 무서워서 도망칠지도 몰라?”
겁이 많다라.
클라인은 방 밖으로 나오기 싫어하는 잉간이의 모습에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잉간이와 만나기 전, 먼저 겁을 먹고 방 안에 틀어박혀 있던 자신의 모습.
잉간이가 없었다면 자신은 평생 그때 모습 그대로 용기를 내지 못하고 방 안의 세계에 갇혀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번에는 내가 잉간이에게 용기를 줄 차례다.
“음, 잉간아. 내 말 들려?”
“0w0?”
“그, 바깥으로 나가는 게. 생각보다 별로 안 무섭더라. 엄청 무서울 줄 알았는데 별로 무섭지도 않고…….”
작아진 잉간이를 작아진 몸으로 바라보며 시선을 맞추고 별 볼 일 없는 말재주로 잉간이를 설득하려 애쓴다.
그렇지만 클라인의 설득은 잘 통하지 않고 잉간이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으, 어떻게 해야 잉간이를 설득할 수 있지?
클라인이 끙끙 앓던 그때, 에포나가 조언 한마디를 던진다.
“그냥 무시해보는 건 어때?”
“무, 무시?”
“응. 그냥 무시하고 떠나봐. 인간관계는 원래 밀당이 중요한 법이잖아?”
잉간이에 관련된 일인데 설마 에포나가 거짓말을 하진 않겠지.
에포나의 말대로 클라인은 잉간이에게 더 관심이 없다는 듯 등을 돌리고 걸음을 옮겼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잉간이는 당황한 듯 목소리를 냈다.
“0ㅁ0!”
방문 앞에 선 잉간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끙끙거린다.
이렇게 해서 만약 잉간이가 따라오지 않는다면 무척 애매한 상황이 되는데.
클라인이 지금이라도 다시 돌아갈지 말지 고민하던 그때.
“0-0!”
작은 잉간이가 있는 힘껏 힘을 내며 방 밖으로 나와 클라인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잉간아!”
클라인은 그 모습을 보고 흐뭇하게 웃으며 잉간이의 손을 잡았고, 에포나는 무료한 목소리로 클라인에게 출구를 안내했다.
“출구는 저쪽이야. 저 문을 열고 나가면 돼.”
잉간이와 함께 클라인은 출구를 열고 밖으로 나왔고, 또다시 주위의 풍경이 일렁이며 변화하기 시작한다.
우주선 안에서 이번에는 어딘가의 가정집으로.
여긴 또 뭘까?
클라인이 의아해하던 그때.
“안녕.”
“꺄악?!”
거실에서 무언갈 만지작거리고 있던 에포나가 인사를 해왔다.
“뭐, 뭐야. 어떻게.”
“잉간이와 나는 한 몸이라는 거, 잊었어?”
그러니까 잉간이가 나눠진 만큼 에포나도 나눠졌단 소리인 거지?
클라인이 대충 에포나의 존재를 납득하는 사이, 에포나는 가위로 정성스럽게 사진을 오려가며 앨범을 만들고 있었다.
그 모습이 신기했던 클라인은 조심스럽게 에포나에게 질문한다.
“저기, 지금 뭐 하는 거야?”
“응? 아, 이거?”
클라인의 질문에 에포나는 자랑스럽게 앨범을 들어 올리며 대답했다.
“역사를 조금 바꾸고 있어.”
“……응? 잠깐, 그게 무슨 소리야?”
“어차피 잉간이의 과거는 나하고 잉간이밖에 모르는데, 이번 일을 기회 삼아서 조금 기록된 정보들을 바꾸는 거야.”
“아니, 그러면 안 되지!”
“왜 안돼? 그냥, 잉간이의 곁에 있던 게 나였다는 식으로 살짝씩만 바꾸는 건데.”
“아니, 당연히 하면 안 되는 거지……”
“잉간이에게 피해가 가는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
클라인은 에포나를 말리고 싶었지만, 딱히 에포나를 말릴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잉간이의 기억을 바꾸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기록한 정보를 바꾸는 거니 잉간이에게 피해가 가는 것도 아니다.
뭔가 클라인에겐 꺼림칙하게 느껴지는 행위였지만, 딱히 에포나를 막을 논리도 생각나지 않는다.
클라인이 우물쭈물하며 에포나를 바라보고 있자, 에포나가 마치 유혹하듯 혀를 날름거리며 말했다.
“왜, 너도 하고 싶어서 그래?”
“아니! 그럴 리가!”
“지금이 아니면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인데, 정말로? 네 마음대로 잉간이를 바꿀 기회야.”
“내 멋대로 잉간이의 정보를 수정하면 안 돼.”
“잉간이가 너만 바라보게 만들 수도 있고, 좀 더 귀여운 잉간이를 만들 수도 있는데?”
“잉간이는 내가 멋대로 다룰 대상이 아냐!”
클라인이 에포나를 노려보며 그렇게 소리치자, 에포나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래? 그러면 방 안의 잉간이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지 지켜볼게. 후후.”
“뭐?”
방 안에 있는 게 어떤 잉간이든 전부 잉간이의 모습 중 하나다.
절대, 절대로 클라인이 함부로 잉간이의 정보를 수정할 일은 없다.
클라인이 그렇게 생각한 순간, 잉간이의 방문이 벌컥 열리며 그 안에서 잉간이가 튀어나왔다.
“ಠ_ಠ!”
무척이나 화가 난 상태로 말이다.
217화 *손■된 파■■ 아닙니다*
“ಠ_ಠ!”
방 밖으로 뛰쳐나온 잉간이의 모습은 누가 봐도 화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까, 방 안에서 나오려 하지 않던 잉간이가 어린 잉간이었다면, 클라인의 앞에서 화내고 있는 잉간이는 그보다 더 성장한 소년기의 잉간이처럼 보였다.
뭐가 그렇게 화가 난 걸까?
방 밖으로 나오자마자 분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을 차며 잉간이는 에포나에게 뭐라 소리쳤고, 에포나는 싱긋 웃으며 잉간이를 달랬다.
“잉간아, 그만.”
“ಠㅁಠ!”
“그래……. 잉간아. 오늘은 네가 좋아하는 고기반찬이니까, 오늘은 같이…….”
“ಠ_ಠ!”
쾅.
잉간이가 방문을 닫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에포나는 익숙한 듯 부엌으로 향해 식사를 준비한다.
일련의 모습을 지켜본 클라인은 어안이 벙벙해진 모습으로 에포나를 바라본다.
“방금 건 무슨…….”
“뭐겠어? 잉간이지.”
“잉간이가……. 왜 저렇게 화난 거야?”
“이 세상에 화 하나 안 내는 생물이 어딨겠어? 잉간이도 사람이야, 사람.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너만을 위한 친구가 아니라.”
“그건, 나도 아는데…….”
이런 잉간이의 모습은 처음이다.
처음 보는 잉간이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클라인이 말끝을 흐리자, 에포나가 스르륵 다가와 클라인에게 말을 건다.
“그래서, 어때? 넌 저런 잉간이도 좋은 거야?”
“어?”
“너만 원한다면, 저 잉간이는 버려두고 다른 잉간이들만 모으면 되잖아. 네가 원하는, 너의 이상의 잉간이를 만드는 거야.”
달콤한 제안이었지만, 클라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에포나의 제안을 강하게 거절했다.
“화난 잉간이도 잉간이인데 어떻게 그러겠어? 난 그런 짓은 절대 안 할 거야.”
“흐응. 그래? 그러면 노력해서 화난 잉간이를 달래봐.”
에포나는 그렇게 말하곤 이젠 흥미가 사라졌다는 듯 다시 앨범을 만지작거리는 일에 몰두했다.
클라인은 조심스럽게 잉간이의 방문을 똑똑 두드리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 잉간아. 들어갈게?”
잔뜩 긴장한 채로 잉간이의 방 안으로 들어갔지만, 잉간이는 클라인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정보 단말기만을 들여다보며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클라인은 우물쭈물하며 잉간이의 뒤편에 앉아 잉간이의 게임이 끝나길 기다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잉간이는 휙 뒤를 돌아봤다.
“ಠㅁಠ!”
“이, 잉간아.”
잉간이는 클라인을 노려보며 무언가 소리치기 시작했다.
마치 클라인에게 지금껏 쌓아놨던 화를 전부 내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잉간이의 분노가 자신을 향한 적이 없었기에, 처음 느끼는 잉간이의 분노는 클라인의 가슴을 마구잡이로 헤집어놨다.
“……싫어!”
한참 동안 잉간이의 분노를 들어서일까?
클라인은 이해하고 싶지 않아도 서서히 잉간이가 말하는 말들 중에서 짤막한 단어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게, 전부 부정적인 단어라는 게 문제지만 말이다.
좀 더 자세한 잉간이의 분노를 들으면서 클라인은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잉간이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ಠ_ಠ”
마침내 잉간이도 지쳤는지 입을 다물고 가만히 클라인을 노려보기만 하고, 클라인은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미안해…….”
클라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미안하다고 하는 것밖에 없었다.
클라인이 지금 잉간이를 얼마나 아끼고, 잉간이 또한 클라인에게 호의적이든 변함없는 사실이 있다.
클라인과 잉간이의 첫 만남은 클라인의 억지로 인해 일어난 일이라는 것.
그 때문에 잉간이에게 상처를 줬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내가 못나서 그랬어.”
어린 시절과 다른 게 하나도 없이 그저 몸만 커버렸던 그때의 나.
자신의 기분만 생각하던 무척 이기적인 나.
전부 클라인 자신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첫 만남이 최악이었어도.
한쪽이 일방적인 잘못을 저질렀어도.
돌이킬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은 없다.
돌이키기 힘든 관계가 있을 뿐.
클라인 자신은 이미 그 사실을 배웠다.
잉간이에게서.
그러니 이번에도, 시간이 걸리더라도, 진심을 담아 노력하자.
“미안, 미안해.”
그런 클라인의 진심이 통한 걸까?
눈물을 꾹 억누르며 잉간이에게 사과하던 클라인을 바라보던 잉간이는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ಠoಠ”
이윽고 잉간이는 천천히 클라인을 꽉 껴안았다.
이게 클라인의 사과를 받아들였단 것인지, 그쯤이면 됐다는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적어도, 잉간이의 화가 많이 누그러졌다는 사실이다.
“저기, 음. 그러면 나랑 같이…….”
클라인은 잉간이에게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지만, 잉간이는 클라인의 손을 붙잡지 않았다.
그 대신, 먼저 방 밖으로 나가 클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ಠ_ಠ!”
“0ㅁ0!”
방 밖으로 나온 잉간이와 작은 잉간이가 서로를 보고 놀란 듯이 뭐라 대화를 나누고, 에포나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출구를 안내해줬다.
“출구는 저기. 다음 방에서 또 봐.”
“자, 가자. 잉간아!”
큰 고비를 하나 넘긴 클라인은 서둘러 모든 잉간이들을 모으기 위해 달려나갔다.
“>0<!”
즐거워 보이는 잉간이.
“^오^”
어딘가 음흉한 잉간이.
그리고 또, 기타 등등.
방을 지나치며 클라인은 잉간이의 여러 측면을 계속해서 마주쳤다.
그 때문인지 클라인은 점점 더 잉간이를 잘 이해하게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도 그런 기분이 드는 것만이 아닌 것이, 잉간이의 언어가 이젠 띄엄띄엄 읽히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미리 주워든 잡다한 정보들이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있었다.
하나같이 지구인들은 단또라는 생물로 음악을 연주한다던지, 민트초코라는 음식을 좋아한다든지 하는 쓸모없는 내용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거침없이 방을 지나다니며 잉간이를 모으던 그때, 다음 방으로 향하려던 클라인을 에포나가 심상치 않은 말로 멈춰 세웠다.
“다음 방은 저쪽이야. 이번 방은 네 반응이 기대되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너, 잉간이를 위한다고 했었지?”
“응. 당연하지.”
“그럼, 내가 했었던 말을 잘 생각해봐.”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클라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음 방으로 향했고.
“……아.”
이내 에포나가 자신에게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번에 클라인이 마주한 잉간이는.
“흑, 흐윽. 흑…….”
서럽게 울고 있는 잉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번 방에서 클라인이 만난 잉간이는.
“잉간이의 슬픔이야. 방이 꽤 큰 걸 봐선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나 봐?”
슬픈 잉간이가 있는 방은 다른 방들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지금까지의 방들이 가정집이었다면 이곳은 조금 전까지 클라인이 있었던 연구소를 닮았기 때문이다.
아니, 닮은 것이 아니라 방금 전의 연구소 그 자체다.
차갑게 얼어붙은 듯한 공허한 연구소에서 혼자 서럽게 우는 잉간이를 보며 말문이 막힌 클라인에게 연구복을 입은 에포나가 스르르 다가온다.
“내가 아까 한 말, 기억해?”
“아까 한 말이라면.”
“네 마음대로 잉간이를 만들 수 있다던 말. 기억하지?”
“……응.”
“어때, 잉간이를 위해서라면 이 잉간이는 버리는 게 좋지 않아? 이런 잉간이는 있어봤자 잉간이를 괴롭게 할 뿐인데?”
“…….”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클라인이 그러지 못할 만큼 이곳의 잉간이는 무척이나 괴로워 보였다.
어찌나 울고 있었는지 울고도 더 눈물이 나오지 않는 붉어진 눈을 쓱쓱 비비며 꺽꺽대고 있을 정도다.
“저 잉간이는 버려두자. 저 잉간이를 버리면 잉간이는 더 슬퍼하지도 않고, 즐거울 거야.”
에포나는 뱀이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클라인이 끌고 온 잉간이들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다양한 잉간이들이 모인 무리는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흐뭇해지는 효과가 있었지만, 만약 저기에 슬픈 잉간이가 끼어든다면 어떨까?
다른 잉간이들도 슬퍼하지 않을까?
슬픔이란 가장 전염력이 강한 감정이니까.
“……아냐. 그래도, 잉간이는 잉간이야.”
“정말? 단순히 네 고집 아냐? 봐봐, 잉간이들도 저 아이를 싫어하고 있어. 잉간이도 저런 감정은 느끼고 싶지 않아 한다고. 잉간이를 위한다며?”
에포나의 말대로 잉간이들은 슬피 우는 잉간이 근처에 잘 다가가려 하지 않고 있었다.
클라인은 이번에야말로 에포나의 말에 동의하고 싶었지만, 고개를 흔들며 에포나의 말을 부정했다.
“……저 잉간이만 내버려 두면, 잉간이는 계속 저기서 울고 있는 거잖아. 난 잉간이를 그렇게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아.”
“흐응, 그래?”
마음을 다잡은 클라인이 그렇게 말하자 에포나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었다.
각오를 다진 클라인은 슬피 우는 잉간이를 위로하기 위해 천천히 잉간이에게 다가갔다.
“저, 잉간아…….?”
“흑, 으흑. 흑…….”
클라인이 접근하고 있음에도 잉간이는 클라인을 눈치채지 못한 듯 계속 울고 있었다.
천천히 잉간이 곁으로 다가간 클라인은 잉간이의 눈물을 촉수로 닦아주며 잉간이에게 질문했다.
“뭐 때문에 그렇게 슬픈 거야?”
다음 순간, 클라인은 방금의 질문을 하지 말았으면 하고 후회했다.
“흑, 흐윽. 클라인, 클라인 때문에…… 흐윽…….”
“…….”
자신이 저지른 짓에 대한 대가가 정통으로 클라인을 습격했기 때문이다.
클라인이 잉간이와 함께 있고 싶어서 하는 이상, 절대로 이뤄질 수 없는 소원.
잉간이의 분노의 대상이 되었을 때보다 클라인은 지금의 상황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분노는 사과로 가라앉힐 수 있다.
하지만 슬픔은.
그 무슨 수를 쓰더라도 한 번 가라앉은 슬픔은 시시때때로 계속해서 솟아오른다.
클라인이 뭘 해야 잉간이를 달랠 수 있을까?
슬픈 잉간이가 원하는 것은 사과의 말도, 비난의 대상이 되어주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자신을 슬프게 하는 대상이 없어지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잉간이를 슬프게 하는 것은.
클라인 자신이었다.
“……미안해.”
결국, 클라인은 아무 의미 없는 공허한 한마디를 던질 수밖에 없었다.
정말, 정말로 에포나의 말이 옳은 걸까?
이 잉간이는 자신과 함께 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 걸까?
클라인의 손이 떨리며, 클라인은 잉간이게서 떠나고 싶었지만, 도무지 그럴 수 없었다.
자신 때문에 잉간이가 슬퍼한다지만, 울고 있는 잉간이를 그냥 두고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순적이지만,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클라인이 괴로워하면서 슬픈 잉간이 곁에 앉아 있던 그때.
“클라인.”
“어?”
즐거운 잉간이가 다가와서 클라인을 꼭 껴안으며 말했다.
“클라인이 슬프면, 나도 슬퍼.”
즐거운 잉간이가 그렇게 말하자 그에 동의한다는 듯 다른 잉간이들도 고개를 끄덕였고, 슬픈 잉간이 또한 클라인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렇지.
자신이 슬퍼하고 있는데, 다른 슬픈 사람을 위로할 수 있을 리 없다.
슬픈 잉간이를 위로하려면, 나부터 슬프지 않아야 한다.
슬픈 잉간이를 슬프게 만드는 건 나니까.
“……고마워. 잉간아.”
클라인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즐거운 잉간이를 꼭 안았고, 즐거운 잉간이를 느끼며 조금씩 마음을 가다듬었다.
마침내 클라인의 얼굴에 얕은 미소가 걸리자, 어느새 슬픈 잉간이는 울음을 멈춰 있었다.
“그럼, 같이 갈까?”
“……응.”
슬픈 잉간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클라인의 손을 잡는다.
잉간이는 기뻐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울고 있지도 않았다.
“출구는 저쪽.”
어딘가 심통 난 기색의 에포나의 안내를 따라 클라인은 다음 방으로 향했고.
마지막 방에 도착했다.
218화 시스템 검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마지막 방의 문을 힘껏,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간다.
마지막 방의 풍경은 클라인이 아주 잘 알고 있는 장소였다.
차원항 안.
그게 마지막 잉간이의 방이었다.
“…….”
마지막 잉간이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서 작은 강아지와 놀아주고 있었다.
클라인은 천천히 잉간이의 뒤로 향했고, 잉간이 또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클라인이 알고 있던 잉간이가 아무 말 없이 클라인을 바라보고 클라인도 잉간이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본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처음으로 건내는 말은 어떤 말이 좋을까, 괜히 이상한 말을 했다가 잉간이가 싫어하진 않으려나?
뭔가 있어 보이는 말이 좋을까?
잉간이와의 첫 대화이니만큼 뭔가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은데.
한참을 고민하며 고르고 고른 끝에 결국 클라인이 입에 담은 말은 이것이었다.
“아, 안녕!”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건네진 클라인의 인사.
그렇게나 고민했는데 클라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아주 간단하며 짤막한 인사였다.
잉간이는 그런 클라인의 인사를 듣고 피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응, 안녕.”
안녕하세요.
처음은 인사부터.
다음엔?
“어, 크, 클라인이라고 합니다?”
“전 잉간이라고 해요.”
다음엔 자기소개를.
자기소개를 하면 이제는?
“……저기!”
“네?”
“마, 말 놔도 되죠? 우리, 처음 보는 건 아니니까…….”
“그렇……죠. 아니, 그렇지……?”
“그, 그래! 그러자!”
말을…… 놔야겠지?
그럼, 그 다음에는.
“뭐 하고 있었어?”
“기다리고 있었지.”
“누구를?”
“너를.”
“아하하…… 그, 그래?”
“응. 쭉, 대화하고 싶었거든.”
“신기하네. 나도 그랬는데.”
음, 잘 모르겠다.
잘 모르겠지만, 일단 입에서 나오는 대로 잉간이와 대화한다.
“저기,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뭔데?”
“너무 많아서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어.”
“하나씩 말해봐. 시간은 많으니까.”
“그, 그래?”
“응. 이 안에선 말이야.”
“그러면…….”
엉망진창 생각이 가는 대로 하고 싶었던 말을 모조리 토해놓는다.
“이, 일단. 미안해! 이 말은 반드시 하고 싶었어.”
제일 먼저 사과부터 하고.
“그리고. 음, 고마워. 나 같은 걸 싫어하지 않아서. 그리고, 진짜 고마워. 네가 없었으면 나는…….”
마음속 깊이 담아두었던 감사 인사.
“아무튼. 그래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내가 널 많이…….”
“많이?”
“아, 아냐. 아무것도 아냐.”
그리고.
어째서인지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말도.
시시껄렁한 잡담도.
모두 토해내며 잉간이와의 대화를 즐긴다.
아무 목적 없는 대화가 이어진 끝에 서로의 입이 멈춘다.
길고 긴 대화의 끝에 난 결론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이미 두 사람은 결론을 내린 상태였으니까.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었다.
모든 대화에 목적과 결론이 필요한 건 아니니까.
때로는 그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대화의 목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어느새 클라인의 뒤편에 바글바글하던 잉간이들은 종적을 감춘 지 오래였다.
즐겁게 웃는 잉간이.
아이처럼 겁 많은 잉간이.
화난 잉간이.
슬픈 잉간이.
클라인과의 대화에서 잉간이는 클라인이 봐온 모습을 보여줬고, 때론 클라인이 보지 못한 모습도 보여줬다.
지금 클라인과 대화하는 사람은 그 다른 누구도 아닌 잉간이었다.
아무 목적 없는 즐거운 시간이 끝나고, 잉간이는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한 주위의 풍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지금 인류 해방 전선을 막으려면 인터넷을 끊어야 한다는 거지?”
“응. 아마 어딘가에 구멍이 나 있을 텐데…….”
“으음…….”
클라인의 이야기를 들은 잉간이는 턱을 어루만지며 클라인에게 자신이 봤던 것을 이야기했다.
“아마, 이 근처에 구멍이 있을 거야.”
“위치를 알아?”
“응. 뭔가 수상해 보이는 걸 발견한 다음에 정신을 잃은 거여서…….”
“아…….”
자신들이 들어온 구멍으로 잉간이를 상대하기 위한 트랩을 설치해둔 걸까?
아무래도 인류 해방 전선이 잉간이의 특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맞춘 함정을 파놨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에 잉간이가 이렇게 여러 명으로 나뉘었던 것은 단 하나, 잉간이가 이름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정보 중첩 과정에서 잉간이가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포기해버린 자신의 이름.
그것을 인류 해방 전선이 어디선가 찾아내서 잉간이에게 집어넣은 결과, 잉간이의 정보 중첩이 해제되기 시작한 것이다.
어째서 인류 해방 전선은 잉간이에 대해서 그렇게 자세하게 알고 있는 걸까?
수장인 그 인간이 잉간이처럼 정보 중첩이 이루어진 상태여서 그런 걸까?
잘은 모르지만, 확실한 건 인류 해방 전선을 그냥 놔둬서는 안 될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일단 그 녀석들이 잉간이를 괴롭혔으니까.
마침내 클라인과 잉간이의 주위를 감싸던 에포나의 공간이 다 사라지고, 클라인의 눈에도 잉간이가 말했던 수상해 보이는 정보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건…….”
지금 인류 해방 전선이 인터넷의 정보를 오염시킨 건 밀렵꾼이나 모험가들이 생물들을 채집할 때 쓰는 것처럼 대상의 주위의 정보를 먼저 일그러트려 자기 인식을 뒤흔드는 방식이다.
저런 방식을 어떻게 인류 해방 전선이 사용하는 걸까?
어쩌면 설마, 인류 해방 전선과 밀렵꾼들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는 걸까?
인류 해방 전선의 침입 루트가 워낙 광대하다 보니 일반적인 정보 조작으로는 저 구멍을 틀어막지 못할 것 같다.
주위에 퍼진 오염된 정보들이 인류 해방 전선이 인터넷에 머무를 수 있게 해주는 닻 역할을 하는데, 저걸 동시에 없애는 게 아니라면 몰아내기 힘들 것 같다.
“어떻게 하지……?”
클라인은 도무지 빠르게 저 정보들을 몰아낼 방법이 보이지 않아 조마조마했지만, 잉간이는 무언가 방법이 떠오른 듯 여유로워 보였다.
“무슨 방법이 있을까?”
“음, 하나 생각해둔 건 있는데.”
“방법이 있어?”
“응. 저걸 아예 제거하기보단…… 동화시키는 거지.”
“동화시킨다고……?”
“인터넷 안에 들어온 이상, 저것도 인터넷의 일부야. 인터넷의 일부로 동화시킨다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겠지. 저 녀석들이 움직일 수 있는 건 오염된 정보지, 인터넷 그 자체가 아니잖아?”
“그렇……네.”
억지로 제거하기보단, 인터넷의 일부로 만든다면 인류 해방 전선이 저 정보들의 제어 권한을 잃어버릴 것이다.
물론, 인터넷 자체를 통째로 빼앗길 위험성도 있지만, 인터넷은 인류 해방 전선이 삼키기엔 너무 방대한 정보다.
“그러면, 이렇게…….”
잉간이는 인류 해방 전선의 정보에 손을 대고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한다.
자신의 색으로 사방을 물들이던 오염된 정보가 순간 멈칫하더니, 순식간에 인터넷 모든 곳으로 정보가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인터넷이 침식당하는 듯한 풍경에 순간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오염된 정보의 짙은 색은 인터넷 전체로 퍼질수록 점차 옅어지더니, 마침내 원래의 인터넷의 색과 별로 다른 게 없어진다.
인류 해방 전선도 이변을 눈치챘는지 어떻게든 자신들의 색으로 인터넷을 물들이려 하지만, 인터넷은 그런 인류 해방 전선을 비웃듯 모든 것을 포옹한다.
애당초, 인류 해방 전선의 정보는 인터넷을 오염시키기엔 너무 빈약했다.
그들이 공들여 만들어낸 그 어떠한 정보 오염도, 인터넷의 밑바닥에 가라앉아있던 기괴하고 끔찍한 악성 정보들에 비하면 별 볼 일 없었다.
그렇게 인터넷을 장악하려 했던 인류 해방 전선은 인터넷에 널리고 널린 흔한 악성 정보들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된 이상 인류 해방 전선은 더 이상 인터넷을 통해서 지구로 침입하지 못할 것이다.
예상보다 너무나 간단히 모든 일이 끝나고, 서서히 메꿔지기 시작한 구멍을 바라보며 클라인은 중얼거렸다.
“……슬슬 끝이네.”
인터넷의 안이니까, 클라인은 잉간이와 대화할 수 있었다.
인터넷의 밖은 중앙 정부가 감시하고 있으니, 밖에서 잉간이와 대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직 중앙 정부는 잉간이와의 대화를 합법이라 규정하지 않을 테니까.
밖에서 지금처럼 대화를 하다간, 곧바로 감사관에게 철퇴를 얻어맞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기 기분이 우울해지네.
클라인이 그렇게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자, 잉간이가 쓰게 웃으며 클라인에게 말했다.
“뭐, 돌아가기 전까지 많이 대화하면 되지.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까진 모를 거 아냐?”
“하긴, 그렇네. 헤헤.”
그래.
아무리 중앙정부라도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을 실시간으로 감시할 수는 없다.
가끔씩 지구로 잉간이와 이야기하러 놀러 오면 되겠지.
“그럼, 슬슬 돌아갈까?”
“……응.”
꿈속에 떨어진 듯한 이야기는 끝나고, 이제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 * *
“으…… 머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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