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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사이코패스의 실수를 끌어낼 수 있을까?
나는 계속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봤지만.
답은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16화 손가락을 본 인간의 엄청난 반응? 인간 인지 훈련 2단계!
다음 날 아침.
내가 비축해 둔 식량까지 점액이 전부 가져가 버린 탓에 나는 결국 손대고 싶지 않던 것에도 손을 대는 수밖에 없었다.
사이코패스에게 주먹도끼를 만드는 걸 보여 준 대가로 받은 젤리 한 봉지.
인공 식품답게 열량이 꽤 높은 걸까?
아침부터 젤리를 우물거리는 게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배고픔은 꽤 가라앉았다.
자, 원래 오늘의 계획은 뭐였지?
손도끼를 만들어서 나무를 베어다가 쓸 만한 그릇과 도구를 만든다.
하지만 손도끼를 만들든 나무를 베든 그 전에 먼저 은신처 주위를 정리해야 할 것 같다.
점액이 나무를 박살 내며 이곳으로 끌고 온 덕분에 나무를 벨 필요가 없어진 건 좋지만.
워낙 난장판으로 내던져 놨기 때문에 그냥 숲으로 가거나 호수로 걸어가는 일조차 어려워졌다.
거의 재난 현장과 같은 모습이다 보니 그냥 마음 편히 걷다간 금세 다치고 말 것 같다.
지금까지 내가 한 번도 다치지 않은 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제대로 치료할 방법이 없는 이런 곳에서 다쳤다간 그대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을 가능성이 높다.
“왕!”
내가 깨어나자 따라 일어났는지 에포나가 반갑게 인사해 온다.
나는 에포나를 번쩍 들어 올려 배를 만지작거려 본다.
“왕? 왕!”
에포나가 깜짝 놀란 듯 발버둥 친다.
하지만 나는 에포나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꽉 에포나를 껴안고 배를 촉진했다.
내가 의사가 아니어서 뭐라 말은 잘 못하겠지만, 뭔가 단단한 게 만져지지는 않는 것 같다.
어제 삼켰던 마석은 배 속에서 소화가 된 걸까, 아니면 이미 몸 밖으로 빠져나간 걸까?
그러고 보니까 아직까지 에포나가 배변을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거 같은데.
뭐, 나도 에포나에게 굳이 내가 배변하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으니까 당연한 걸까?
“왕! 왕왕!”
이 정도면 문제없을 거 같은데.
내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에포나는 내 품 안에서 미끌텅 빠져나와 내게 항의하듯 짖어 댔다.
“미안해. 인마. 걱정돼서 그랬어.”
“왕!”
에포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과하자, 에포나는 짧게 한 번 짖고는 총총총 잔해들 사이를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일단 에포나는 혼자서 놀게끔 내버려 두고 빨리 청소부터 하자.
잔가지들은 한데 모아서 모닥불에 언제든지 넣을 수 있게 해 두고.
나뭇잎들과 토끼들의 뼈들도 한군데에 모아 두자.
토끼의 뼈는 어떻게 잘 갈면 바늘 같은 용도로 써먹을 수 있을 것 같다.
나뭇잎은 일단 제대로 된 그릇이 나오기 전까진 그릇 대용으로 써먹어야 하고.
이제 남은 건 뚝 부러진 커다란 나무줄기들인데.
점액에 부서져 이쪽으로 밀려온 나무줄기들 대부분은 내 몸통 굵기보다 얇거나 비슷한 굵기였다.
“영……차.”
바닥을 나뒹구는 나무들을 돌돌 굴려서 한쪽에 모은다.
나무들을 다 모으고 나니 집 근처에서 나뒹굴던 나무들은 총 11개.
이 나무들이 완전 통나무처럼 굵었다면 이렇게 모으는 것도 불가능했을 거다.
으드득.
최근 계속해서 혹사당하던 몸이 휴식을 요구하며 소리 지르고.
나는 털썩 나무들 옆에 주저앉아 주위를 둘러봤다.
재난 지역 같은 분위기였던 은신처 주위는 이제 그나마 좀 살 만한 풍경으로 바뀌었다.
꼬르륵.
한바탕 힘을 썼더니 벌써 배가 고프다.
에포나가 먹을 걸 제외하고 다시 한번 젤리를 입안에 털어 넣자 봉지 안의 젤리는 전부 다 떨어져 버렸다.
남은 봉지는 그릇으로 재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봉지를 들고 호숫가로 가려고 했지만.
스르르.
내용물이 모두 사라진 봉지는 그대로 연기가 되어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건 좀 너무하네.
이 정도는 허락해 줄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며 불만을 가득 담아 하늘을 바라봤지만, 지난번에 봤던 눈동자가 다시 나타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그 눈동자.
그 눈동자가 나를 관찰하고 있는 사이코패스의 카메라든, 아니면 정말 사이코패스의 눈동자이든.
나는 그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자세히 관찰해야 한다.
그게 무엇인지 알아야, 그것의 실수를 만들어 낼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것의 실수를 만들 수 있을까?
모르겠다.
아직까진 전혀 감도 잡히지 않는다.
단 하나 생각나는 것은 그 사이코패스의 의도대로 행동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지금 내가 머무는 동굴이 무척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완벽한 위치에 너무 완벽한 형태로 만들어져 있는 동굴.
아마도 그 동굴은 내가 머물 곳으로 사이코패스가 점찍어 둔 장소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내가 할 행동은.
간신히 만들어 낸 은신처를 버리고 떠나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냥 은신처를 버리고 갈 수는 없다.
아무 목적 없이 은신처를 버리기만 해서는 사이코패스가 당황하지 않을 테니까.
뭐든지 틈을 찾아내기 위해선, 그 대상을 잘 알아야 한다.
내가 틈을 찾아내려고 하는 건 이 세계 그 자체.
어쩌면.
어쩌면 말이야.
단단히 준비해서 계속해서 걷고 또 걷다 보면 사이코패스의 힘이나 능력이 닿지 않는 장소가 나오지 않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이곳에 떨어지고 나서 너무 움츠려 있었던 것 같다.
이제는 내 주위에 뭐가 있는지 알아볼 때가 됐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알아봐야 할 건 역시.
시선을 하늘로 올리고 늘 든든하게 비바람을 막아 주던 바위벽을 바라본다.
역시, 이 산 위에 뭐가 있는지 알아봐야겠지.
은신처를 떠나 계속해서 여행을 할 생각이라면 미리 산 위에 올라가서 어디로 갈지 확인하기도 해야겠고.
그렇게 생각하며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 나는 문득 무언가가 사라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해는 애초에 처음부터 없었고.
그렇다면 사라진 건.
“구름고래?”
지난번 나를 도와줬던 건지 뭔지 아직도 잘 이해할 수 없는 구름이 하늘에서 모습을 감춘 것이었다.
구름고래는 나를 도와줬던 걸까?
아니면 단순히 움직였을 뿐인데 내가 그 덕분에 살아난 걸까?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모르고만 있는 건 싫다.
모르고만 있기는 싫으니, 알기 위해서 움직이자.
으아, 적당히 쉰 거 같으니 이제 슬슬 움직여 볼까?
앞으로 내가 움직일 방향은 먼 거리까지 여행을 나갈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걸로 하자.
그러려면 내게 필요한 건 긴 여행에도 버틸 수 있는 보존 음식과 한낮의 더위에 버틸 그늘을 만들 수 있는 간이 은신처.
좋아, 일단 지금은 음식부터 좀 많이 비축해 두자.
지금 당장 먹을 음식도 없는데, 뭔 여행 준비를 한다고.
다행히 붉은 소금은 앞으로 한 번 정도 써먹을 양은 남아 있으니 그리 음식을 구하는 게 어렵진 않을 거다.
“에포나, 잠시 호수 좀 다녀올게!”
“왕!”
에포나의 배웅을 받으며 호숫가로 걸어간다.
이 빌어먹을 곳이 다른 건 몰라도 먹을 것 하나는 넘쳐 나니까.
그러니까 오늘 먹을 음식을 구하는 것 정도는 쉽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호숫가로 이동했지만, 나는 곧 내 그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없다.
주위를 둘러보고, 풀숲을 살펴보고 물속을 살펴봐도 아무것도 없다.
어제까지만 해도 폭발음을 내며 물 위로 튀어 오르던 새우들도.
물속에서 서로 잡아먹으며 군상극을 벌이던 날벌레들도.
심지어 그 흔한 무오의 울음소리마저 들리지 않는다.
설마 하지만 이건.
어제 그 점액이 숲을 휩쓸며 이 주위의 모든 동물들을 먹어 치웠다는 걸까?
괜찮아.
아직 산딸기 같은 비상식량이 남아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서둘러 숲속으로 발걸음을 옮겼지만.
더는 걷지 못하겠다고 생각될 만큼 숲을 방황하고 나서도 먹을 건 발견되지 않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나는 서둘러 만능 사전을 불러내 먹을 걸 검색해 보려 했지만.
[가장 가까운 폭탄꼬리새우]
-검색 결과 없음
[가장 가까운 무오]
-검색 결과 없음
[가장 가까운 먹을 것]
아무리 검색해 봤자 만능 사전은 내 눈앞에서 헥헥거리는 에포나를 가리키기만 할 뿐 내게 답을 내어 놓지 않았다.
이건 좀 큰일인데.
탈출 계획이니 뭐니 하는 걸 짜는 것보다 당장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지가 문제다.
다시 동굴로 돌아와 털썩 바닥에 주저앉자.
“왕?”
해맑은 표정으로 바닥에 기어 다니는 푸른 점액을 괴롭히는 에포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잠깐, 푸른 점액?
어제 그 요상한 장치에 빨려 들어가지 않고 남은 파편인 걸까?
에포나의 발을 피해 통통거리는 점액을 바라보며 꿀꺽 침을 삼킨다.
이제 보니까 저거, 뭔가 맛있는 젤리처럼 생겼는데.
먹어도 괜찮지 않을까?
점균류면, 버섯과 친척이니까 먹을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점액에 손을 뻗으려던 순간.
언제나 느껴 왔던.
그 압박감이 내 가슴을 욱신거리며 옥죄어 왔다.
그로 인해 내 온몸이 굳어진 순간.
콰직, 쾅.
동굴 밖에서 무언가가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려온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꿀꺽, 긴장감에 침을 삼키며 돌창을 집어 들고 밖으로 나간다.
동굴 밖으로 나오자 정체불명의 촉수가 주위를 휩쓸고 있는, 정신이 멍해지는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뭐야?
저건 또 뭐야?
마치 오징어의 다리 같은 촉수는 갑작스럽게 허공에 나타나 위아래로 흔들리며 굉음을 일으키고 있었다.
“끼잉…….”
에포나는 그 모습을 보고 겁먹었는지 쪼르르 동굴 안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저, 저게 도대체 뭘까?
도대체 왜 갑자기 저런 게 솟아났는지, 저건 도대체 뭔지 정체를 알 수 없으니 경계심이 무럭무럭 자라난다.
바짝.
돌창을 쥔 손에 힘이 가득 들어가고, 나는 조심스럽게 정체불명의 촉수에 접근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마치 신난 것처럼 촉수가 흔들리는 빈도가 더욱 늘어난다.
쾅, 쾅, 쾅.
촉수와 부딪친 지면이 움푹 파인다.
우와, 그냥 평범한 흙바닥이 아니라 바위 바닥인데 저 정도라니.
저 촉수에 정통으로 부딪치면 뼈가 부서지는 게 아니라 아예 으스러질 것 같다.
주춤, 주춤.
천천히 돌창을 촉수를 향해 내밀어 본다.
설마 쿡 찔렀다고 갑자기 미쳐 날뛰는 건 아니겠지?
갑작스럽게 촉수도 움직임을 멈춰 기묘한 긴장감이 만들어진다.
툭.
아주 살짝.
돌창의 끝이 촉수에 닿았지만, 촉수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뭐지?
갑자기 잠이라도 든 걸까?
다시 한번 더 툭, 툭.
이번에는 좀 더 힘을 실어서 툭이 아니라 꾸욱.
살짝 촉수가 밀릴 정도까지 힘을 실어서 촉수를 찌른 그 순간.
“으힉?!”
입에서 저절로 겁먹은 소리가 튀어나올 정도로 촉수가 사방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나는 순간 돌창을 놓치고 뒤로 물러섰고.
가만히 멈춰 서서 지금의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저건 도대체 뭐지?
보통 나에게 악의를 가진 생물 앞에 있을 땐 무언가가 느껴지기 마련인데.
저 촉수에게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저렇게 움직이고, 꿈틀거리는 모습을 봐선 아무리 봐도 살아 있는 것 같지만.
무언가 무기질 같은 느낌이 물씬 풍겨 온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냥 자리를 피할까?
시간이 지나서 저게 더 늘어나면 어쩌지?
아무리 봐도 내가 저걸 어떻게 못할 거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멈춰 있던 순간.
“:-)”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소리가 촉수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소리에 담긴 감정뿐.
그리고 또다시 가슴을 옥죄어 오는 압박감.
이거다.
그 사이코패스의 흔적이 닿은 게 나타날 때마다 느껴지는 이 압박감.
그렇다면 저 촉수 또한 필히 사이코패스의 손길이 닿은 것이겠지.
계속해서 사이코패스의 흔적과 마주해서 그런 걸까?
맨 처음보다는 압박감이 느껴지는 게 덜한 느낌이다.
그 전까지는 숨도 쉴 수 없고 고개도 까딱할 수 없는 정도였다면.
지금은 그냥 숨을 쉬지 못하는 정도?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고른다.
내가 숨을 고르는 와중에도 촉수는 계속해서 위아래로 흔들거린다.
마치, 먹이를 유혹하는 초롱아귀의 미끼처럼 말이다.
도대체 내게 뭘 원하는 걸까?
도대체 내게 뭘 원하길래 이런 짓을 하는 거야, 그 사이코패스는.
“:-)”
“으윽…….”
또다시 이해할 수 없는 소리가 들려오고.
무언가.
나는 사이코패스가 뭘 원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한 발자국을 내디뎠고.
만약 내가 생각한 게 틀렸으면 어쩌지?
두려운 마음이 무럭무럭 몰려왔지만, 나는 또다시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꿈틀거리는 촉수가 더욱 거세게 움직이며 바닥을 내리친다.
쾅.
바닥에 금이 가며 내게 불안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또 한 발자국.
마지막 순간까지도 나는 계속해서 내 선택에 의문을 품었고.
덥석.
나는 거센 숨을 몰아쉬며 삐죽 허공에 튀어나온 촉수를 맨손으로 붙잡았다.
이게 맞는 걸까?
과연 사이코패스가 내게 원하던 게 이런 게 맞는 걸까?
눈을 질끈 감고 내 선택의 결과를 기다린다.
“:-)! ^^! :-0!”
“흐윽……!”
그 어느 때보다도 거센 감정이 담긴 소리가 울려 퍼지고.
촉수가 몇 번 거세게 위아래로 흔들리더니.
툭.
허공에서 수많은 젤리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대한 촉수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그 자리에 남은 건 어안이 벙벙한 나와 수많은 젤리뿐이었다.
뭐야?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 * *
“안녕하세요! 차원항 장인 클라인입니다! 오늘 제가 선보일 콘텐츠는 바로! 대망의 핸들링 훈련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긴장되고 흥분되어 보이는 클라인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힌다.
클라인은 선물을 뜯어보는 어린아이처럼 잔뜩 흥분한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정체 모를 장난감 하나를 가져다 댔다.
“쨔안. 여러분. 보이세요? 이게 뭔지 아시겠나요? 네, 맞아요. 바로 마술용 가짜 손가락이에요!”
클라인은 가짜 손가락을 신체 말단에 끼우고는 꾸불텅꾸불텅 움직인다.
가짜 손가락을 가지고 놀며 클라인은 오늘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제가 왜 가짜 손가락을 샀느냐! 지난번에 인지 훈련으로 저의 존재를 인지시켰죠? 오늘은 인지 훈련 2단계를 할 거예요. 후후, 뭔지 슬슬 감이 잡히시나요?”
활짝.
클라인은 빛을 뿜어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네. 맞습니다! 가짜 손가락으로 하는 유사 핸들링을 해 볼 거예요! 가짜 핸들링을 할 거면 그냥 핀셋이나 집게로 하면 되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는데요. 훗날 진짜 핸들링할 때를 위해서 제 손가락과 가장 닮은 가짜 손가락으로 익숙해지게 하는 거예요.”
클라인은 비록 가짜 손가락으로 하는 유사 핸들링이라고 해도 처음으로 지구산 인간과 핸들링하는 순간이 퍽 기다려지는 모양이다.
“자, 그럼 설명은 끝! 슬슬 시작해 보겠습니다!”
방긋.
클라인은 웃으며 지구산 인간의 은신처 근처에 가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무언가가 은신처 근처에 나타났다는 걸 느낀 걸까?
지구산 인간이 경계심 가득한 모습으로 은신처 밖으로 나오고.
“흐으으…… 나왔네요! 여러분, 지금 나왔어요!”
텐션이 잔뜩 오른 클라인은 인간의 사소한 행동 하나에도 기뻐하며 가짜 손가락을 까닥까닥 움직였다.
난생처음 보는 물체를 본 지구산 인간은 조심스럽게 돌창을 가짜 손가락에 가져다 대고 쿡쿡 찌르기 시작했다.
“와, 와. 진짜. 진짜 귀엽네요. 와. 진짜 빨아들이고 싶은 귀여움이에요.”
소심하게 가짜 손가락을 쿡쿡 찌르던 인간은 점차 자신감을 얻은 걸까? 점점 가짜 손가락을 찌르는 힘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그 점의 어디가 클라인의 심장을 터트린 건지는 몰라도 클라인은 행복에 괴로워하며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와! 진짜! 아니, 제가 자꾸 너무 귀엽다, 와, 진짜, 이런 말만 하는 게 다 이유가 있어요.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제 자리에 있으면 여러분도 이럴 거라니까요?”
갑작스럽게 가짜 손가락이 발버둥 쳐서 놀란 걸까?
지구산 인간은 툭, 하고 돌창을 떨어트린 채로 단단히 얼어붙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클라인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발버둥을 치는 걸 멈췄다.
다시 경계심이 높아졌는지 지구산 인간은 제자리에 멈춰 섰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클라인은 안타깝다는 듯 지구산 인간을 부르기 시작했다.
“쮸쮸쮸, 이리 오렴. 이리 오렴……. 해치지 않아요. 누나가 잘해 줄게.”
클라인의 진심이 전해진 걸까?
지구산 인간은 쭈뼛거리며 한 걸음씩 발걸음을 내디뎠고.
“그렇지. 그렇지. 아이구, 잘한다!”
그때마다 클라인은 눈에 띄게 기뻐하며 잉간을 응원했다.
그리고 마침내.
지구산 인간의 작고 연약한 손이 가짜 손가락을 움켜쥔 순간.
“흐읏?! 으윽 윽! 우와! 오우, 와!”
클라인은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신음을 내며 또다시 발광했다.
물론, 지구산 인간이 다치지 않게끔 최대한 가짜 손가락이 떨리지 않게 제어하며 말이다.
“와. 와. 대박. 와.”
클라인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서둘러 인간에게 줄 간식을 찾았다.
“어, 이렇게 훈련에 성공하고 나면 먹을 걸 주면 됩니다. 아직 저를 확실히 인지하지 못했더라도 이렇게 먹을 걸 반복해서 주다 보면 점차 저를 인지하기 시작하거든요.”
툭, 투득.
너무 흥분한 클라인의 손가락은 인간에게 줄 간식마저 제대로 집지 못하고 평소에 주던 양의 몇 배는 되는 양의 간식을 투하했다.
“아무튼! 이걸로 인지 훈련 2단계는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와아아!”
짝짝짝.
카메라를 향해 신체 말단을 부딪친 클라인은 방긋 웃으며 인지 훈련의 성공을 선언하고.
“앞으로는 지구산 인간이 저에게 익숙해지게 계속 인지 훈련을 반복하면 됩니다! 아, 진짜 우리 잉간과 핸들링하는 날이 기대되네요.”
클라인은 방긋 웃으며 언젠가 다가올 그날을 기대했다.
언젠가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인식해서 맨손으로도 인간과 자신이 접촉할 수 있게 되는 날을 말이다.
17화 잉간이가 새로운 도구를 만들었어요! 뗀석기는 이제 그만!
“안녕하세요! 차원항 장인 클라인입니다! 오늘 제가 준비한 콘텐츠가 뭐냐면요. 자쟈잔~.”
클라인은 신체 말단을 부딪치며 또 다른 신체 말단을 움직여 카메라 앞에 평범해 보이는 돌멩이 하나를 가져온다.
“여러분. 이게 보이시나요? 잘 보이시죠? 평범한 돌처럼 보이겠지만, 이건 그냥 평범한 돌이 아니랍니다? 그 이유는~ 두구두구두구~.”
아무리 봐도 그냥 돌인데, 어째서 평범한 돌이 아니라는 걸까?
클라인은 자신의 발성기관으로 직접 효과음을 내며 설명을 시작했다.
“이건 무려 리베리아에서 발굴된 원시 문명의 흔적이랍니다? 그것도 그냥 원시가 아니라, 초초초원시! 네, 무려 신석기시대의 유물이랍니다? 이야, 신석기라니. 발달기에 들은 강의 이후로는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이죠?”
발달기에 듣던 강의 내용을 떠올리며 클라인은 잠시 샛길로 빠졌다.
“제가 발달기에 듣던 강의는 우주의 끝이 567광년? 그쯤이라고 했었거든요. 근데 요즘에는 또 600광년 너머의 세계도 발견하고, 심지어는 우주에 끝이 없다는 주장도 있더라고요.”
잠깐 샛길로 빠져서 잡담하던 클라인은 아차차, 하고 소리 내며 재빨리 본론으로 돌아왔다.
“아무튼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 유물은 리베리아의 신석기 문명이 사용하던 숫돌이란 겁니다. 후후, 슬슬 감이 잡히시죠? 쟈자잔~.”
클라인은 카메라 앞에 여러 종류의 돌멩이들을 들이밀었다.
“그렇습니다! 오늘 제가 준비한 콘텐츠는 바로~ 지구산 인간의 도구를 간석기로 업그레이드해 보자! 입니다!”
클라인은 손짓해 카메라 앞에 잉간이 사용하는 도구들을 촬영한 사진을 띄우며 설명을 계속했다.
“우리 잉간이 사용하는 도구를 보면요. 주먹도끼, 돌창, 통발, 최근에는 나무 접시까지. 참 여러 도구를 사용하는데요. 그런데 잘 보시면 한 가지 공통점이 보일 거예요.”
빠밤.
그런 소리와 함께 주먹도끼와 돌창만이 카메라 앞에 남는다.
“바로 사용하는 도구가 전부 뗀석기라는 거예요. 우리가 알기로는 지구의 문명은 뗀석기 시대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났는데 말이에요.”
클라인의 말대로 지구산 인간이 차원항에 들어와서 사용한 도구는 오로지 뗀석기밖에 없었다.
어째서 지구산 인간은 뗀석기만을 사용하는 걸까?
뗀석기 이외의 도구를 만드는 법을 몰라서?
그건 아닐 거다.
시스템을 설치해서 정보를 얻는 데 도움을 줬으니까.
클라인은 그 이유를 잉간이 아니라 주위 환경에서 찾았다.
“잉간이가 뗀석기를 사용하는 건, 간석기에 적합한 재료가 없어서가 아닐까요? 이것 봐요, 여기. 잉간의 집 안을 잘 들여다보면 토끼의 뼈를 모아 놨죠? 아마 잉간은 저 토끼의 뼈를 날카롭게 다듬어서 어떠한 도구를 만들 생각인 것 같아요.”
이번에 카메라 앞에 모습을 보인 건, 클라인이 바위산을 만들 때 사용한 암석.
“자, 그럼 여기서 제가 바위산을 만들 때 사용한 암석을 확인해 볼까요? 보세요. 쉽게 부스러지죠? 솔직히 말해서, 이건 뗀석기를 만들기에도 완전 최고라고 하기에는 어려운 암석이에요. 뗀석기를 만들기는 쉽지만, 쉽게 부스러지거든요.”
바스락.
클라인이 잠깐 힘을 가한 것만으로도 리베리아산 암석은 박살 나 부스러지고.
클라인은 암석 부스러기를 치우는 것과 동시에 아까 보여 줬던 돌멩이들을 카메라 앞에 올렸다.
“각 행성의 생물들마다 간석기를 만들 때 선호하는 암석이 다르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죠? 그래서 제가 준비했습니다! 이 암석들 중 잉간이는 어떤 걸 가장 마음에 들어 할까요?”
후훗.
벌써부터 열심히 간석기를 만들 잉간의 모습이 기대된다.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호의를 가득 담아 차원항 안으로 암석들을 집어넣었다.
* * *
이건 도대체 뭘까?
촉수와 기묘한 접촉을 나눈 뒤, 내 나름대로 조잡한 나무 접시를 만들고 기진맥진해져서 잠에 들었다 일어나 보니 동굴 앞에 기묘한 무언가가 설치되어 있었다.
5개의 돌이 공중에 둥둥 떠 있었고, 그 아래에는 무언가 네모나게 가공된 돌이 얌전히 놓여 있었다.
이건 또 그 사이코패스의 짓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겠지?
자연적으로 이 주위에서 보지도 못한 5개의 돌들이 둥둥 떠올랐을 리는 없으니까.
자.
그럼 이제부터 도대체 사이코패스가 내게 뭘 원하는지 알아내야 하는데.
슬쩍 시선을 돌려 젤리 더미에서 바둥바둥하는 에포나의 모습을 바라본다.
전날 촉수와의 접촉으로 내가 받은 젤리는 총 14개.
하루에 두 개씩 먹는다고 하면 총 일주일 동안 버틸 수 있는 양이다.
이걸로는 아직 부족하다.
도대체 사이코패스의 영역이 어디까지 되는지 알 수 없으니, 먹을 건 최대한 준비해 놔야 한다.
이번에도 아마 사이코패스의 의도에 제대로 따른다면 보상이 떨어질 텐데.
문제는 그 사이코패스가 뭘 원하느냐다.
슬쩍.
공중에 떠 있는 돌 주위를 돌아다니며 뭔가 내게 메시지를 남긴 게 없는지 확인해 본다.
없다.
지난번처럼 주먹도끼를 만드는 내 사진이 있다거나 하지도 않다.
도대체 이 돌들의 의미가 뭐지?
나는 그렇게 고민하다 문득 바닥에 얌전히 놓여 있는 네모난 돌을 집어 올렸다.
이 돌만 유일하게 가공된 게 뭔가 수상한데.
네모난 돌 표면은 마치 사포처럼 꺼끌꺼끌해서 숫돌을 만지는 것 같은 감촉이 느껴졌다.
잠깐, 숫돌?
무언가 이 네모난 돌이 숫돌이라고 하니 모든 퍼즐이 풀리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나는 만능 사전을 가져와 네모난 돌을 촬영해 봤다.
검색 결과가 나오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걸리고.
[숫돌]
-칼 등을 갈아서 날을 세우는 데 쓰는 돌.
그래.
역시 숫돌일 줄 알았다.
문득 지난번에 사이코패스가 내가 주먹도끼를 만들게 했던 걸 떠올린다.
이건 그때의 일의 연장선상이 아닐까?
그때는 뗀석기를 만들었으니 이번에는 간석기를 만들라고.
내가 생각한 추리긴 해도, 이 정도면 꽤 괜찮은 추리 같다.
어디 보자.
간석기는 그냥 돌을 갈면 되는 거였었나?
내가 쥬튜브로 봤던 영상에서는 물을 뿌려 가며 칼을 갈았었는데.
이게 쇠도 아니고 돌덩인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지?
그래.
나보고 간석기를 만들라는 건 알겠다.
그렇다면 저 5개의 돌멩이는 뭐지?
붉고, 노랗고, 하얗고, 검고, 투명하다.
저 돌멩이들로 간석기를 만들라는 뜻인 걸까?
하긴, 이 근처의 돌멩이들은 간석기를 만들기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다.
돌멩이들을 가공하기 쉬운 건 좋은데, 너무 쉽게 부스러지다 보니 날을 세워 봤자 금방 무뎌질 게 뻔하니까.
심지어 지금 사용하는 주먹도끼도 며칠 사용하지 않았는데 벌써 날이 다 나가 버렸다.
조심스럽게 허공에 뜬 돌들을 붙잡고 바닥에 내려 둔다.
좋아, 그럼 이제 뭘 만들지?
창, 칼, 도끼.
머릿속에 여러 가지 도구들이 스쳐 지나가지만 제일 먼저 만들어야 할 건 정해져 있었다.
그건 바로 송곳이다.
송곳이라고 하니 뭔가 이상하지만, 일종의 돌로 만든 드릴이라고 해야 할까?
내게 지금 필요한 건 돌에 구멍을 낼 수 있는 도구다.
돌에 구멍을 낼 수 있게 되면 지금보다 더 많은 도구를 만들 수 있을 거다.
굳이 돌뿐만이 아니라 다른 거에도 구멍을 낼 수 있을 거고.
나는 조심스럽게 바닥에 놓인 다섯 개의 돌멩이 중에서 가장 크기가 작은 노란 돌멩이를 골랐다.
노랗게 물든 돌멩이를 숫돌 위에 올리고 스윽스윽 갈아 본다.
오, 이거 생각보다 쉽게 갈리는데?
당연히 아무런 힘을 주지 않고도 돌이 갈린다는 건 아니다.
뗀석기를 만들 때보단 괜찮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이게 간석기가 뗀석기보다 더 만들기 쉬운 것인지, 내 체력이 뗀석기를 만들 때보다 늘어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와서 쉽게 지치지 않는 듯한 기분이 든다.
원래 방구석 생활을 하던 내가 맨몸으로 불을 피운다거나, 그런 건 당연히 체력이 달려서 하지 못하는 게 당연한데.
심지어 중노동을 하고 난 뒤에 찾아오는 근육통도 최저 수준에서 멈추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 세계에 뭔가 특별한 게 있는 걸까, 내 몸이 어떻게 바뀐 걸까?
개인적으로는 이 세계의 공기가 피로 회복에 도움이 된다는 설이 정답이었으면 좋겠다.
내 몸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바뀌었다는 건 좀, 그렇잖아?
그런 것을 떠올려 가며 나는 노란 돌멩이를 숫돌에 대고 내가 원하는 모양으로 벅벅 갈아 댔고, 거세게 돌멩이를 갈아댄 탓일까?
숯돌의 온도가 심상치 않을 정도로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나는 그래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꽤 괜찮은 형태의 결과물이 탄생했다.
후, 하고 바람을 불어 표면에 달라붙은 돌가루를 날려 보내고 결과물을 감상해 본다.
노란색의 뭉툭한 송곳.
너무 뾰족하게 했다가는 부러질 테니 적당히 조절했다.
시험 삼아 전에 내가 만들어 뒀던 주먹도끼를 가져와 노란 송곳으로 구멍을 뚫어 본다.
빙글빙글.
전에 내가 불을 피울 때 시도하던 것처럼 노란 송곳을 계속해서 돌린다.
바스락, 바스락.
돌가루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노란 송곳은 부서지지 않았다.
좋아, 이 정도면 괜찮아.
그렇게 생각한 순간.
“우왓?!”
화륵.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도 허공에 불꽃이 피어났고.
깜짝 놀란 나는 노란 송곳을 허공으로 던져 버렸다.
허공에 생겨난 불꽃은 금세 사라져 버렸고.
나는 바닥에 나뒹구는 송곳과 주먹도끼를 바라보며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건, 도대체 뭐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조심스럽게 노란 송곳을 다시 주먹도끼에 대고 돌려 본다.
이마에서 송골송골 땀이 솟아날 즈음이 되자.
화르륵.
다시 불꽃이 피어났다 사라진다.
나는 잠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다 다시 한번 송곳을 회전시켜 본다.
불이 피어난다.
또다시 송곳을 돌려 본다.
불이 또 한 번 피어난다.
내 기준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
돌과 돌을 부딪친다고 불똥이 튀는 건 이해할 수 있겠는데, 불이 허공에 피어난다?
이건 선을 넘은 거다.
뉴턴 아저씨가 이 광경을 보면 사과를 다시 사과나무에 매달 거다.
내 상식을 완전히 바꿔 버리는 풍경이었지만 이 상황을 손쉽게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있었다.
마법, 마력, 마나. 뭐든 간에 그거 비슷한 거.
내가 알지 못할 뿐, 어떠한 물리 현상으로 일어나는 일일 수 있겠지만 솔직히 이렇게 생각하는 게 더 편하잖아?
그럼 어째서 이런 마법인지 마술인지 뭔가가 일어났을까?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이 노란색 돌이다.
아무리 봐도 이 돌이 이 현상을 일으키는 원인인데.
다시 만능 사전을 가져와 노란색의 돌멩이를 촬영해 본다.
그러자 만능 사전의 화면에 나타난 것은.
[점화석]
-불의 마력이 퇴적되어 만들어진 돌. 강한 충격을 받으면 주위에 화염을 만들어 낸다.
“허. 허어…….”
설마 했지만 진짜였다.
그래, 뭐.
동물들이나 식물들만 이세계가 아니라 이거지?
이젠 돌멩이까지 이세계산이라.
도대체 왜 불이 피어났는지 이유를 알게 되니 뭔가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네.
안타깝지만 이걸 원래의 용도로 써먹을 수는 없겠다.
돌에 구멍을 내는 용도로 쓰다간 언젠간 내 머리에 불이 붙고 말 거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라이터로 활용할 수 있는 좋은 물건을 얻은 셈이다.
다시 한번 내가 뭔 판타지 세계에 떨어졌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렇게 생각하며 툭, 시선을 점화석 외의 다른 돌멩이들로 돌렸다.
하얗고, 검고, 붉고, 투명하다.
이 노란 돌이 이세계산 돌멩이라면, 다른 돌멩이들도 그런 게 아닐까?
그렇다면.
저것들은 도대체 무슨 효과를 가지고 있을까?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새하얀 돌멩이에 손을 뻗었다.
18화 잉간에게 인간형 생먹이 100마리를 줘 봤습니다! 과연 잉간이의 반응은?
하얗고, 붉고, 검고, 투명한 남은 4개의 이세계산 돌멩이들.
이 노란 돌이 불을 피워 낸다면 다른 돌멩이들도 그와 비슷한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새하얀 돌멩이에 손을 뻗었다.
아까처럼 무턱대고 돌멩이를 가공해서는 안 된다.
점화석의 화력이 그렇게 세지 않아서 다행이지, 화력이 셌다면 나는 진작에 호수로 달려가야 할 상황에 처했을 거다.
우선 이 돌멩이가 뭔지부터 알아보고 그에 맞춰서 가공을 해 보자.
가장 먼저 만능 사전으로 확인한 것은 새하얀 돌멩이.
마치 새하얀 눈을 연상시키게 하는 색상이다.
색도 새하얀데, 이건 뭐 빙결석이니 하는 그런 돌인 걸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만능 사전을 작동시키자.
[니사]
-프리가 행성에서만 발견되는 특수한 암석. 물이 묻으면 발광하는 성질이 있다.
새하얀 돌의 정체는 니사라는 이름의 암석.
물이 묻으면 빛이 난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는 것 같았다.
좋아, 다음.
다음으로 내가 선택한 것은 시뻘건 암석이었다.
이건 뭐 충격을 가하면 폭발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휘발석]
-아레테 행성에서만 발견되는 특수한 암석. 기체가 압축되어 만들어지며, 마력을 흘려 내는 성질이 있으나, 물리적 충격을 받으면 손쉽게 기체로 되돌아간다.
휘발석?
마력을 흘려 내는 성질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고, 중요한 건 물리적 충격을 받으면 기체로 되돌아간다는 거다.
뭔가 불안한데.
만약 이 돌을 구성하는 물질이 원래 독가스 같은 내게 유독한 기체라면?
이걸 가공하겠다고 문지르는 순간 돌멩이가 바로 독가스로 변하는 거다.
아니, 기체가 압축되어 만들어진다며 무슨 기체인지는 왜 안 써 놓는데?
나는 의아해하며 이 돌의 원형이 무엇인지 찾아보려 했지만.
이 이상의 정보는 도저히 찾아낼 수 없었다.
아니, 쓸모없는 정보는 잘만 쓰여 있으면서 왜 이런 중요한 정보는 빠져 있는 거냐고.
뭔가 묘한 구석에서 나사 빠진 사전이다. 진짜.
더 정보를 찾아봤자 내가 뭔가를 알아낼 수는 없을 것 같으니 일단 이건 넘기고.
다음으로 내가 선택한 건 투명한 돌이었다.
[마수정]
-리베리아 행성에서만 발견되는 특수한 암석. 마력을 흡수해 저장하는 성질이 있다. 순도 높은 마수정은 고가에 거래되지만, 순도 낮은 마수정은 의외로 행성 전역의 지표면에서 손쉽게 찾아낼 수 있다.
마수정?
또 판타지스러운 무언가가 나왔네.
마력을 저장하는 돌이라.
내게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다음.
마지막에 내가 선택한 건 뭔가 흑요석을 닮은 생김새의 돌이었다.
뭔가 좀 간지 나게 생겼는데, 뭐 재밌는 특수 효과가 붙어 있지 않을까?
[라크리모사]
-땅의 마력이 로드니움 반응을 거친 결과 탄생하는 암석. 인공적으로 합성되는 게 아니면 자연적으로 거의 탄생하지 않는다. 주로 [검열됨]을 만들 때 자주 사용된다.
중간의 [검열됨]이 무척 신경 쓰이는데.
도대체 이건 뭘 만들 때 주로 쓰인다는 거야?
뭐,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걸 제외하면 평범한 돌인가.
이게 이세계의 그 플라스틱 같은 거냐?
돌멩이들의 정체를 전부 확인하고 나니 뭔가 김이 식는 기분이다.
쩝.
점화석처럼 내가 이용할 수 있는 암석은 거의 없네.
굳이 어떻게든 써먹는다면 니사라는 돌?
이건 일종의 랜턴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머지는 뭐, 그냥 돌이잖아. 돌.
휘발석은 마력을 흘려 낸다지만 도대체 어떻게 써먹어야 할지 모르겠고.
뭐, 일단 사이코패스의 의도는 내가 이 돌로 간석기를 만드는 것 같으니까 가공이나 할까.
워낙 각 돌멩이들이 너무 작아서 하나의 돌멩이로 하나의 도구밖에 만들지 못할 것 같다.
니사는 일단 랜턴으로 써먹어야 하니까 놔두고.
남은 건 그럼 3개밖에 없는데.
일단 휘발석부터 가공해 보자.
혹시 유독 가스가 나올 수도 있으니 나는 동굴 한구석에 놔둔 가죽으로 코를 막고 작업을 시작했다.
스윽, 슥.
돌이라면 무겁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휘발석은 기체로 만들어져서 그런지 생각보다 가벼웠다.
뭐, 같은 크기의 다른 돌에 비해서 가볍다는 거지 결코 솜털처럼 가볍다는 건 아니지만.
혹시 유독가스가 나오면 어쩌나 하고 코를 막았지만.
그런 내 걱정이 무색하게끔 휘발석은 너무나 쉽게 숫돌에 갈려 나갔다.
숫돌에 휘발석을 갈 때마다 숫돌과 휘발석 사이에서 하얀 연기가 솟아올라 허공으로 사라진다.
마치 분필을 숫돌에 가는 것 같네.
휘발석은 그리 큰 타격을 버틸 수 없을 것 같으니 도끼나 창이 아닌 반달 돌칼을 만드는 데 사용하자.
지금 코를 가리고 있는 이 가죽도 언젠간 끈으로 가공해야 하니까.
그때 돌창이나 돌도끼로 가죽을 가공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나는 휘발석으로 반달 돌칼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동굴 한구석에 모아 둔 나뭇잎을 가져와 휘발석으로 만든 반달 돌칼로 잘라 내 본다.
스윽.
손쉽지는 않지만, 몇 번의 칼질 끝에 나뭇잎은 잘려 나갔고.
나는 내가 만든 결과물에 대만족했다.
혹시 나, 이런 손재주에 재능이 있었던 게 아닐까?
잘 지치지 않는 것도 내가 사실은 엄청난 육체를 가지고 있던 거지.
하지만 그렇다고 생각하면 이세계에 납치되기 전까지 그 재능을 가지고 방구석 백수였다는 걸 생각해 보니 기분이 우울해진다.
그때의 나는 도대체 뭘 하고 지낸 거야?
뭐, 손재주가 있다는 건 다 내 착각일 뿐이라는 게 맞는 거 같지만.
우울한 마음을 날려 버리려 마수정을 숫돌에 대고 갈기 시작한다.
유리같이 투명한 외관이어서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려올 줄 알았지만, 의외로 마수정이 갈릴 때 나는 소리는 그리 불쾌하지 않았다.
끼익, 끼이이익.
음.
그래도 조금은 불편하긴 하네.
마수정의 한쪽 면에만 날을 세우고, 노란 드릴을 가져와서 조심스럽게 구멍을 뚫는다.
원래라면 구멍을 뚫는 내내 불꽃이 일어났어야 했지만.
역시, 내 생각대로다.
마수정이 마력을 저장한다는 성질 때문일까?
노란 송곳이 아무리 거세게 회전해도 불꽃이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그럼 이 마수정이 마력을 머금었다는 건데, 깨지면 어떻게 되지?
폭발이라도 일어나나?
뭐, 내가 도끼를 박살 날 정도로 험하게 다루진 않겠지.
도끼가 박살 날 때 생기는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자.
그렇게 마수정 도끼날에 구멍이 뻥 뚫리고, 나는 포메라니안 가죽을 휘발석으로 잘라 내어 가죽끈을 만들었다.
조잡한 물건이지만, 도끼날을 고정하는 용도로는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거다.
도끼날 구멍에 끈을 집어넣고 적당한 크기의 나뭇가지와 하나로 묶는다.
내가 아는 매듭법은 신발끈을 묶는 매듭법밖에 없었기에 만능 사전에서 매듭법을 찾아가면서 말이다.
[절대 풀리지 않는 매듭]
이렇게 검색해도 검색 결과가 나오더라고.
진짜 묘하게 무능하면서 묘하게 유능한 사전이다.
자, 그럼 이제 마지막이다.
검은 돌.
그러니까 라크리모사를 집어 들고 숫돌에 스윽 밀어 본다.
무게는 휘발석보다 조금 더 무거운 수준인데, 갈릴 때 느껴지는 저항감은 마수정 정도다.
라크리모사에 날카롭게 날을 세워 창날을 만든다.
다 만들어진 창날과 기존에 쓰던 나무창을 도끼를 만들고 남은 가죽끈을 이용해 하나로 합친다.
꽈악.
단단히 매듭을 짓고, 밖으로 나가 지금 만든 도끼와 돌창을 시험해 보기로 한다.
우선은 돌도끼부터.
콱.
아직까지 주위에 방치된 통나무에 돌도끼를 내리찍는다.
둔탁한 타격음이 울려 퍼지며 돌도끼에 맞은 나무가 쩍 하고 떨어져 나간다.
음, 이 정도면 충분히 쓸 만한 것 같다.
그럼 이제 남은 건 돌창.
도끼가 박힌 자리에 잘 포장된 젤리를 노란 송곳으로 고정하고 그대로 창을 찔러 본다.
팍!
단번에 돌창은 젤리를 관통해 그 너머의 통나무에 박혀 들어갔다.
오오.
이 정도면 오늘 만든 도구들 전부 다 합격이다.
확실히 주먹도끼로 만든 조잡한 도구를 쓸 때보다 더 강한 위력이 나오는 것 같다.
“에포나, 어때? 쩔지? 나 좀 대단하지 않냐?”
방긋, 웃으며 에포나를 돌아보지만.
에포나는 어느새 짚더미에 몸을 눕히고 잠자고 있었다.
슬쩍 하늘을 올려다보니 이미 날이 어둑어둑해졌다.
아침에 일어나서 날이 저물 때까지 간석기를 만들고 있었네.
꼬르륵.
흥분이 식으며 지금껏 잠자고 있던 배고픔이 고개를 치켜든다.
후.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돌창에 뚫린 젤리를 주워 먹으며 호숫가에 가서 몸을 씻으려 하던 그때.
툭.
하늘에서 수고했다는 듯 젤리 몇 봉지가 후두둑 떨어졌다.
계속 이 정도의 관계로만 지내면 좋겠는데 말이야.
자꾸 사이코패스가 뭔가를 하려고 하지만 않으면 참 좋겠어.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호숫가로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겼다.
* * *
“음, 오늘 영상도 괜찮은데?”
클라인은 오늘 녹화한 잉간의 간석기 제작 영상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지구산 인간이 제목에 붙기만 해도 조회 수가 몇 배는 뛰는데.
그게 만약 쥬튜브 치트 키인 도구 제작 영상이다?
도대체 이번 영상은 얼마나 되는 조회 수를 뽑아먹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이거, 잘만 하면 조 단위까지 노려 볼 수 있지 않을까?
클라인은 그런 행복한 상상을 하며 편집을 하다 말고 잉간의 차원항을 바라봤다.
지난번에 슬라임이 과다증식하고 난 뒤로 잉간의 차원항엔 아직 먹이생물이 없다.
먹이생물로 넣어 주기 위해서 여러 생물들을 주문해 놨지만.
그 생물들이 도착하려면 적어도 일주일은 걸린다.
그 일주일 동안 차원항의 시간을 정지시키는 방법도 있지만.
그 일주일 동안 잉간으로 뽑아낼 수 있는 영상이 몇 갠데.
차라리 먹이생물이 오는 동안의 임기응변을 영상으로 남기는 게 더 낫지.
그래, 오늘 잉간이가 고생했으니 보양식이나 챙겨 줄까?
생먹이 OO마리를 줘 봤습니다, 하는 영상도 늘 인기가 있으니까.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슬며시 생먹이가 든 통의 뚜껑을 열었다.
* * *
“으갸갸갸갹…….”
땐석기를 만들 때보단 편하다는 내 생각은 단순한 착각이었던 걸까?
아침에 일어나니 그 어느 때보다 온몸이 쑤신다.
화끈화끈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나는 어떻게든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얼굴을 할짝거리는 에포나부터 우선 치워 두고, 나는 조용히 오늘 할 일을 떠올렸다.
일단 내 지금의 목표는 바위산의 정상에 도착하는 건데.
그렇다면 내게 필요한 게 뭐가 있을까?
쥬튜브로 봤던 산악인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보니까 항상 손에 무슨 곡괭이 같은 장비와 안전줄을 매달고 다니던데.
곡괭이는 여기가 설산이 아니니 그렇다 쳐도.
안전줄은 필요하지 않을까?
어제 가죽끈을 만들고 남은 가죽을 바라본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아서 더는 사용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안전끈을 만들어야 한다는 건데.
끈을 만드는 방법도 사전에 나와 있으려나?
지금 당장 떠오르는 건 짚으로 만드는 새끼줄인데.
일단 밖에 나가서 세수부터 좀 하고 생각해 보자.
혹시 모르니 돌창은 챙겨 두고.
비몽사몽 동굴을 나와 호수로 걸어가니 에포나가 총총거리며 내 뒤를 따라온다.
그래, 너도 슬슬 물 마실 때가 됐지.
호숫가에 도착해 주위를 둘러보지만 오늘도 다른 생물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고 점액이 휩쓸고 간 황량한 풍경 그대로다.
앞으로 한동안은 그 사이코패스가 전해 주는 음식에만 의존하는 수밖에 없으려나.
도대체 내게 뭘 시킬지를 모르니까 불안하단 말이지.
이게 성좌가 주는 미션을 수행하는 웹 소설 주인공들의 기분이었을까?
차이점이 있다면 그 녀석들은 먼치킨이었고, 나는 단순한 인간이라는 거다.
나는 왜 먼치킨이 아닌 걸까?
낳아 주신 부모님에게는 감사하지만 낳으실 때 인류 최강의 육체는 주시지 그랬어요.
그랬으면 아들이 이런 곳에서 이런 생고생을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그런 시답잖은 망상을 하며 세수를 하던 와중, 언제나처럼 사이코패스의 기척이 갑자기 느껴졌다.
“윽…….”
이제는 꽤 익숙해져서 잠깐 심장이 거세게 뛰는 걸 제외하면 괜찮다.
서둘러 세수를 끝마치고 주위를 둘러본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걸까?
또다시 나에게 뭔가 이상한 걸 시키려나?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툭, 투둑. 투두둑.
하늘에서 무언가 살덩이처럼 생긴 것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으아?”
초록색 살덩이들이 갑자기 하늘에서 나타나 바닥에 떨어진다.
뭐야?
괴생명체?
악어 같은 건 아닌 거 같은데?
먼저 가 봐야 하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내가 당황하고 있는 사이에도 초록색 살덩이들은 나로부터 10m 정도 되는 거리에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하고.
“크르르, 앙! 왕! 왕왕!”
에포나가 이빨을 드러내며 짖어 대기 시작했다.
꿈틀, 구불텅.
초록색 살덩이에서 앙증맞은 발이 튀어나오더니.
일어서려는 듯 졸래졸래 흔들리고.
벌떡.
흉악한 송곳니와 날카로운 손톱이 인상적인 잘 발달된 팔이 튀어나왔다.
저건 도대체 무슨 생명체일까?
초록색 피부에 돼지같이 불어난 살.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당연하게도 오크였다.
여긴 판타지 세계니까 오크가 나와도 이상하진 않잖아?
하지만 내가 알던 오크의 이미지와는 너무 다르다.
일단 첫 번째로, 신장이 너무 작고 몸집 또한 너무 작다.
내가 아는 오크는 거의 사람의 두 배만 한 덩치였는데.
아, 그건 오우거인가?
뭐, 어찌 됐건 저 녹색 살덩이들은 내가 아는 오크와는 너무 다르게 생겼다.
그럼 오크가 아니면 뭘까?
고블린?
그래, 차라리 오크보단 고블린에 더 가깝네.
이럴 때 만능 사전이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만능 사전은 당연히 동굴에 두고 왔다.
임시로 내가 고블린이라 이름 붙인 생명체들은 몸을 뒤집는 데 성공했고.
고블린들 또한 이곳이 낯선지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쾅.
마지막 고블린이 지면에 떨어지고, 더 이상의 고블린은 바닥에 떨어지지 않았다.
대충 봐도 한 50마리? 아니, 어쩌면 100마리 가까이 될 수도 있겠다.
한 마리 정도라면 그냥 무시해도 됐겠지만.
100마리 정도가 모이면 또 모른다.
비대하게 튀어나온 살과 잘 발달되지 않은 다리를 보아하니 이동 능력은 거의 없겠지만.
이 세계는 나 말고 모두가 마력을 쓰는 빌어먹을 세계라는 걸 떠올려야 한다.
자, 그럼 어쩌지?
그냥 도망쳐?
아냐, 어쩌면 대화가 통할지도 모른다.
저 녀석들도 사이코패스에게 납치당한 녀석들이잖아?
저 녀석들과 친해질 수 있다면 이곳을 탈출하는 방법이 보일 수도 있다.
그래, 일단 전투보단 대화를 해 보는 쪽으로 방향을 잡자.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서로 왁자지껄 뭐라 떠드는 고블린들에게 세수하고 먹으려고 한 젤리 한 봉지를 가지고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에포나는 내게서 떨어지지 않고 이빨을 드러낸 채로 그르렁거리며 내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왔다.
“저기, 안녕하세요?”
일단 말이 통하는지 확인해 보자.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네자 고블린들 무리가 순식간에 조용해진다.
노란빛의 섬뜩한 눈동자가 나를 훑고, 나는 조심스럽게 다시 말을 걸었다.
“제 말 이해하시겠나요?”
그렇지만 대답이 돌아오는 일은 없고, 경계심과 적대감 섞인 눈빛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대화가 통하지 않으면 플랜 B다.
나는 조심스럽게 고블린들에게 젤리가 든 봉투를 던져 줬다.
“저기, 이거 먹어 볼래요?”
말은 통하지 않지만 대충 뉘앙스는 느껴지겠지.
바닥에 떨어진 젤리가 먹을 거라는 걸 알고 있던 걸까?
그 젤리를 본 고블린들의 눈이 번쩍거리듯 무섭게 빛나고.
가장 가까이에 있던 고블린이 잽싸게 젤리를 낚아채 입안에 전부 털어 넣었다.
“호브! 호브호브!”
“호브!”
그러자 주위의 고블린들이 젤리를 독식한 고블린에게 뭐라 불평했고.
“호브, 호브!”
젤리를 독식한 고블린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뭐라 꿍얼댔다.
그러자 무섭게 이글거리는 고블린들의 시선이 내게 홱 돌아갔고.
초록색 살덩이가 꿈틀거리며 스멀스멀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저기, 여러분?”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분위기가 이상해져 간다는 걸 눈치챈 나는 돌창을 앞으로 내밀며 단단히 힘을 줬고.
“호브!”
“왕!”
에포나가 거세게 짖는 것과 동시에 제일 선두에 있던 고블린이 잽싸게 내게 뛰어들었다.
마치 개구리가 점프하듯 뛰어올라 순간적으로 반응하지 못했지만.
나는 어떻게든 돌창으로 고블린의 돌진 경로를 방어했고.
무언가 묵직한 것이 돌창에 꿰뚫리는 느낌이 나더니.
내게 뛰어오른 고블린은 그대로 돌창에 꿰뚫려 목숨을 잃어버렸다.
“호브! 호브!”
“호브!”
그러자 고블린 무리의 분위기가 더욱 거세지고.
나는 혀를 차며 슬슬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한두 마리나 열 마리도 아닌 무려 100마리다.
당연히 내가 저 녀석들과 전부 싸울 수는 없다.
그렇지만 고블린들은 손을 사용해 펄쩍거리며 우스꽝스럽게 뛰어다니며 나를 포위하기 시작했고.
내 예상보다도 더 빠른 고블린들의 속도에 나는 더 갈 곳을 잃어버린 채 고블린들의 포위망에 갇혀 버렸다.
젠장, 대화를 해 보려고 하지 말 걸 그랬다.
나는 저 녀석들을 이해할 수 없고.
저 녀석들 또한 나를 이해할 수 없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말이지.
한쪽이 다른 쪽을 이해하고자 해도, 다른 쪽이 이해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쓸모없다.
그 사실을 뒤늦게나마 깨달은 나는 후회를 해 보지만 이미 늦었다.
젠장, 여기서는 어떻게든 포위망을 뚫는 수밖에 없나?
하지만 어떻게?
“호브! 호브!”
나는 나를 바라보며 켈켈거리고 웃는 고블린들을 노려보면서 입술을 깨무는 수밖에 없었다.
* * *
“음. 역시 비축 식량이 많아서 그럴까요? 바로 사냥하지 않네요.”
클라인은 지구산 인간과 인간형 생먹이들이 대치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탄식을 흘렸다.
이왕이면 지구산 인간이 다는 아니더라도 몇 마리 정도는 사냥해 줬으면 괜찮은 그림이 나왔을 텐데.
처음의 한 마리를 사냥한 이후로는 그저 서로 노려보기만 할 뿐이다.
“뭐, 어쩔 수 없네요. 지구산 인간이 싸울 마음이 없는 것 같으니 생먹이 급여는 포기하겠습니다!”
자칫하면 생먹이의 이빨에 잉간이 다칠 수도 있으니 말이다.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잉간이 손쉽게 먹을 수 있게끔 인간형 생먹이들의 머리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친절한 제가 직접 손질해 줄 수밖에 없네요!”
19화 *공지* 오늘 업로드는 쉽니다. 창문이 깨졌어요 ㅠㅠ
고블린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입술을 깨문 그때.
털썩.
어디선가 그런 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마치 누군가가 무릎을 꿇고 쓰러진 것 같은 소리다.
그렇지만 저 고블린들은 무릎이 없는데, 누가 무릎을 꿇은 거지?
아, 무릎을 꿇은 건 나였구나.
내가 그 사실을 인지하는 동시에 피부가 오싹해진다.
무언가 의식 한구석에 구멍이 뚫린 것만 같은 몽롱한 감각이 이어지고.
무언가 바뀌었다는 생각에 나는 고개를 들고 고블린들을 바라봤다.
“호브?”
“호브?”
고블린들도 무언가가 일어났다는 걸 느낀 걸까?
서로를 바라보며 의아한 목소리를 낸다.
무언가 바뀌었는데, 그게 뭘까?
분명히 무언가 바뀌었는데 그게 뭔지 깨닫지 못하겠다.
인상을 찌푸리며 고블린들을 더욱 집중해서 바라보던 그때.
“아.”
지글거리며 스스로를 혹사하던 뇌가 드디어 새롭게 바뀐 현실을 인지했다.
고블린들의 머리가 없어진 것이다.
아니.
다르다.
처음부터 머리가 없었다.
저 고블린들은 이곳에 떨어졌을 때부터 머리가 없던 것이다.
내가 그렇게 깨닫는 것과 동시에 지금까지 잘만 움직이던 머리 없는 고블린들이 털썩 바닥에 쓰러진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분명히 저 고블린들은, 머리가 있었는데.
아니야.
저 녀석들은 처음부터 머리가 없었어.
그렇다면 나는 어째서 고블린들이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 걸까?
내가 인식하고 있는 현실이 2개로 나뉜 듯한 느낌.
그리고 내가 기존에 알던 현실은.
나중에 덮어씌워진 현실에 잡아먹혀 단 한 조각의 위화감도 남지 않았다.
내 이성은 전혀 이상할 게 없다고 외치지만.
내 본능은 이상하다고, 이게 뭐냐고. 겁먹은 채로 소리친다.
“끼잉…….”
에포나가 내 다리에 몸을 비비며 불안한 듯 낑낑거린다.
에포나의 감촉에 혼란스러워하던 내 이성과 본능은 간신히 평화를 찾고.
나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볼 여유를 얻을 수 있었다.
머리가 없는 고블린들의 사체가 잔뜩 주위에 쌓여 있다.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건 그 사이코패스뿐.
그렇다면 그 사이코패스는 왜 이런 짓을 한 걸까?
지금까지 사이코패스는 내가 무언가를 하면 그에 따라서 보상을 주는 방식으로 행동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무 의미 없이 고블린들의 사체를 내게 던져 줬다.
내가 고블린들과 싸우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게 아니었던 걸까?
지금 당장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먹이.
저 고블린들은 내 먹이로서 이곳에 던져진 거다.
슬쩍 시선을 하늘로 올려 태양과 같은 눈동자라도 찾아보려 하지만 사이코패스의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만약 저 고블린들을 먹지 않는다면 사이코패스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화내려나?
아니면 다른 먹이를 준비하려나?
그래, 사이코패스도 내가 먹을 수 없는 걸 먹이라고 넣어 준 건 아니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내 앞에 쓰러진 목 없는 고블린의 사체로 다가간다.
고블린의 사체 앞에 서서 가만히 고블린을 내려다본다.
어딘가 기묘한 곳에서 인간을 닮은 생김새에 우욱, 구토감이 치밀어 올라온다.
안 되겠다.
비록 실패로 돌아갔다고 해도, 대화를 나눠 보려고 했던 녀석을 먹는 건 무리다.
서로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알았으면서도 아직 내게 고블린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남아 있던 걸까?
고블린의 사체에서 물러나며 사이코패스의 반응을 기다린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사이코패스의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뭐라도 반응이 돌아오면 좀 마음이 편안할 것 같은데, 아무 반응이 없으니 더 불안하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돌창을 회수하러 돌아섰다.
윽, 끔찍한 감촉,
인상을 일그러트리며 고블린의 몸에서 돌창을 뽑아내자, 밝게 빛나는 돌멩이가 딸려 나왔다.
아, 이 녀석들에게도 마석이 있구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 에포나가 눈을 반짝거리며 마석에 달려들었다.
“왕!”
“에포나?!”
냠냠.
에포나는 그대로 고블린의 마석을 꿀꺽 삼켜 버리고, 나에게는 새침한 얼굴을 보여 준다.
지난번에 마석을 먹고도 괜찮았으니 배탈은 안 나는 것 같지만, 이렇게 막 먹어도 되는 걸까?
“에포나, 아무거나 막 주워 먹으면 안 돼. 탈 나.”
“왕!”
언제나처럼 내 말을 알아들은 듯 짖는 에포나지만, 아무리 봐도 내 말을 전혀 이해한 것 같지 않다.
배가 고파서 자꾸 뭘 주워 먹는 건가?
동굴에 돌아가서 적당히 먹을 걸 챙겨 줘야겠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동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음, 아직 밥을 먹지 않아서 배고플 텐데 생먹이를 먹지 않네요?”
클라인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클라인은 곧이어 차원 간 단말에 새로운 메모를 기록했다.
“지구산 인간은 인간형 생물을 먹이로 취급하지 않는 것 같네요. 식성은 프리가산 인간과는 확실히 달라요. 원시 문명이라고 해서 전부 다 같은 식성은 아닌 모양이네요!”
클라인이 지금 기록하는 건, 그동안 지구산 인간을 사육하며 알게 된 기존의 인간들과의 차이점.
마력을 쓰지 못한다는 점 때문일까?
지구산 인간은 기존에 자신이 사육하던 인간과는 다른 점이 정말 많았다.
일단 기초적인 무력 수준부터가 그렇다.
맨 처음 차원항에 들어왔을 때는 무오에게도 겁먹고 도망칠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생각보다 청결을 중요하게 생각하네요. 입고 있는 의복이 꽤 많이 오염됐는데 슬슬 스트레스를 느끼려나요? 갈아입을 옷도 준비해 줘야겠네요.”
클라인이 지금까지 보아 왔던 그 어떤 인간형 생명체와도 다른 연약함 때문일까?
다른 인간형 생물들은 제대로 된 습성을 파악하지 않아도 스스로 잘 살아남았는데.
지구산 인간은 제대로 된 습성을 파악하지 못하면 금세 죽어 버릴 것 같다.
지구산 인간에게 애정이 생겨서인지, 지구산 인간이 가져다주는 돈 때문인지 몰라도 클라인은 그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지구산 인간의 습성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그렇게 클라인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편견과 지식을 자신이 관찰한 지구산 인간의 습성과 비교해 가며 수정하던 그때.
쾅.
“우왁?!”
무엇인가 창문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클라인은 화들짝 놀라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고.
“뭐, 뭐지?”
시공의 폭풍이 요즘 심해졌는데, 폭풍에 휘말려서 뭔가 부딪친 걸까?
쥬튜버답게 카메라를 한 손에 쥐고 창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베란다에서 클라인이 발견한 것은.
“난파선……인가?”
시공의 폭풍에 휘말려 조난당한 것 같은 차원 생물의 난파선이었다.
* * *
털썩.
동굴로 돌아와 에포나에게 젤리를 조금 먹이고 나도 식사를 한다.
오늘 해야 할 일은 뭘까?
안전줄을 만들기 위한 실을 만든다?
슬쩍 만능 사전으로 실을 만드는 방법을 검색해 보고, 이 주위에서 실을 만들 수 있는 게 있는지 검색해 보지만.
[검색 결과 없음]
만약 실을 만들 수 있는 생물이 있었더라도 그 점액이 전부 먹어 치운 것이겠지.
나무 그릇은 이미 충분할 정도로 만들었다.
동굴 주위도 치울 만큼 다 치웠다.
모닥불에도 장작을 넣어 놨고.
곰곰이 생각해 봐도 더는 동굴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남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동굴 안에 틀어박혀서 얌전히 시간을 흘려보내는 걸까?
아냐.
할 수 있는 일이 없어도, 해야 할 일은 남아 있다.
나는 내가 떨어진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알아야 한다.
사실, 내가 안전줄을 만들려는 건 일종의 변명이다.
안전하다고 확신이 드는 동굴 안을 떠나기 싫다는 투정.
안전줄이 없더라도 바위산을 등산하지 못하는 건 아니니까.
나가기 싫더라도 밖으로 나가야 한다.
내가 직접 밖으로 나가는 게 아니라면, 그 사이코패스가 나를 끌어낼 테니까.
그렇게 되면 내가 직접 나가는 것보다 좋지 않은 상황이 되겠지.
이곳에서 탈출하려면 사이코패스의 지시에만 따를 게 아니라, 내가 먼저 움직여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슬쩍 시선을 에포나에게 향한다.
“왕?”
무슨 일이냐는 듯 나를 바라보는 에포나를 휙 안아 올리며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지금 이상으로 에포나를 이해해야 할 때가 오겠지.
그렇지만 아직은 아니다.
“에포나, 산책 가자.”
“왕!”
돌창을 집어 들고 에포나와 함께 바위산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오늘의 목표는 정상으로 통하는 길을 찾아보기다.
어쩌면 아직 바위산 정상에는 살아 있는 생명체들이 남아 있지 않을까?
점액이 덮친 곳은 바위산이 아니라 산 아래의 숲이었으니까.
산 정상으로 통하는 길을 찾으면 오랜만에 젤리가 아닌 고기로 식사를 할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몸을 움직이기 전에 먼저 검색하는 습관을 생활화하자.
그래야 몸이 편하니까 말이야.
지난번 간석기를 만들 때도 그랬지만, 먼저 정보를 찾아본 다음에 시도하는 것과 먼저 시도한 다음에 정보를 찾아보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실제로 어제 자기 전에 만능 사전을 둘러보니 간석기를 만들 때에도 물을 뿌려야 했었다.
간석기가 제대로 만들어진 게 솔직히 기적인 수준이다.
어디 보자, 바위산 정상으로 가는 길이라고 검색하면 나오려나?
[검색 : 바위산 정상으로 가는 길]
이번에도 검색하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리고.
[안내를 시작합니다.]
만능 사전은 몇 번인가 내게 보여 준 화면을 내 앞에 내밀었다.
허, 내비게이션 기능이 이런 거에도 작동하네?
맨 처음 기능을 시험하던 때 호수의 위치를 알려 줬으니 당연한 거려나.
터벅터벅.
만능 사전의 지시를 따라 지난번 버섯을 채취했던 장소에 도착한다.
만능 사전은 버섯이 자라나던 산비탈을 지나서 좀 더 산중턱으로 올라가라고 지시했다.
아직 이 정도라면 위험하다거나 하진 않다.
슬쩍 뒤를 돌아보며 에포나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며 산비탈을 오른다.
드문드문 바람에 흔들리던 작은 고목의 흔적도 사라지고, 생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바위투성이의 세계가 드러난다.
그렇게 먼 거리를 이동한 것도 아닌데, 머나먼 곳으로 여행을 간 것 같은 기분이다.
계속해서 만능 사전의 안내를 따라 산을 오르자, 산 중턱에 뻐끔 입을 연 동굴이 나타났다.
만능 사전의 안내는 동굴 안으로 들어가라고 나를 재촉하고 있었고.
나는 잠깐 자리에 멈춰서 저 안이 과연 안전할지 고민해 봤다.
동굴이 갑자기 무너진다거나 하는 건 제외하고, 지금 가장 위험한 건 역시 야생동물의 습격이겠지.
지금까지 내가 봐 왔던 녀석들은 죄다 숲에 서식하는 녀석들이어서 도대체 뭐가 동굴에서 나올지 모르겠다.
어쩌면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겠고.
그러고 보니, 이런 것도 가능하려나?
[검색 : 근처의 위험한 생물]
슬쩍 검색을 해 보자, 만능 사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오래 로딩되더니, 내비게이션 시스템을 작동시켰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목적지에…….]
뭐야?
갑자기 이게 왜 이래?
나는 의아해하며 서둘러 만능 사전을 껐다 켰고.
[검색 결과 : 0건]
아까의 검색 결과는 오류였다는 듯 만능 사전엔 아무것도 표시되지 않았다.
뭐야, 좀 식겁했네.
나는 다시 만능 사전의 내비게이션을 작동시키고 각오를 다졌다.
뭐, 동굴 안이니 그렇게 커다란 생물이 서식하진 않을 거다.
오류가 나긴 했어도 위험한 생물은 없다고 표시됐으니까, 안심하고 들어가자.
“에포나, 가자.”
나는 에포나의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은 금방 돌아오지 않았다.
“에포나?”
홱, 하고 에포나가 있던 장소를 바라보자 에포나가 내 등 뒤에서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한번 에포나의 이름을 부른다.
“에포나, 가자.”
“왕!”
그제야 에포나는 내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고.
나는 에포나와 함께 동굴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나는 곧바로 다시 돌아가야 함을 직감했다.
너무 어두워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라가려고 해도 이 상태라면 장해물에 부딪혀서 도저히 이동할 수 없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동굴을 빠져나오려 뒤돌아선 순간.
“으아!”
어디선가 봤던 기억이 드는 푸른 점액이 내 얼굴을 향해 덮쳐 왔다.
* * *
시공의 폭풍에 휘말리기라도 한 걸까?
클라인은 조심스럽게 난파선의 내부를 살펴봤지만, 자기 관측에 실패한 생명체들의 비참한 말로만 보일 뿐 살아 있는 생명체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아, 진짜.
뉴스나 쥬튜브 영상으로만 보던 시공 표류가 내 집에서도 일어나다니.
마음 같아서는 쥬튜브에 올리고 싶지만 이런 참혹한 영상은 쥬튜브에 올릴 수도 없다.
클라인이 한숨을 내쉬며 베란다에 처박힌 난파선을 폐기물 처리장에 던져 넣으려던 순간.
꿈틀, 꿈틀.
무엇인가 난파선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서둘러 클라인이 시선을 난파선으로 돌리자.
꿈틀거리며 잔해를 해치고 나오는 강철의 갑옷을 입은 인간형 생명체가 눈에 들어왔다.
뭐야, 뭐야? 살아 있는 거야?
클라인이 당황하며 일단 난파선을 탁자 위에 놔두고, 가만히 난파선 안의 생명체를 관찰한다.
몸의 형태나 느껴지는 마력으로 봐선 인간형 생명체인데.
거기에 강철 갑주를 입고 있고, 난파선의 형태로 봐선.
리베리아산 생명체인 걸까?
클라인이 머릿속으로 인간형 생명체의 정체를 추리하던 그때, 인간형 생명체는 가만히 일어서 주위를 둘러보더니 비틀거리며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어, 어. 이거 어떻게 하지?
당황한 클라인은 일단 인간형 생명체를 응급치료 장치에 집어넣고 치료 장치를 작동시켰다.
그냥 이대로 바깥에 방생하면 분명히 폭풍에 휩쓸려 죽고 말 텐데.
일단 폭풍이 잦아들 때까지는 내가 임시로 보호하는 게 맞겠지?
리베리아산 생명체는 따로 사육하는 데 특별한 허가가 필요하진 않으니까.
그렇다면 어디에 놔두지?
지금 남아 있는 차원항 재고가 없는데.
새롭게 차원항을 주문하기엔 구름고래에 쏟아부은 금액이 부담되고.
기존에 있는 차원항에 집어넣기엔 너무 약해진 상태다.
그렇다면 클라인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단 하나였다.
음, 역시 슬슬 잉간에게도 친구를 만들어 주는 게 좋겠지?
20화 오크 사육장 근황! 부족 하나가 사라졌다? + 귀여운 잉간이 영상은 덤!
“으음…….”
삐비빅, 삐비비빅, 삐빅.
클라인은 오늘도 차원항에 설정해 둔 타이머를 알람시계 삼아 잠에서 깨어났다.
클라인의 방을 가득 채운 수많은 차원항들에 먹이를 줄 시간이다.
“우리 잉간이는 잘 있나~.”
흘끔.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지구산 인간이 든 차원항을 훔쳐본다.
갑자기 등산이라도 하고 싶어진 걸까?
지구산 인간이 열심히 바위산을 오르는 모습을 보며 클라인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른 차원항들로 다가간다.
구름고래는 이제 차원항에 잘 적응한 것 같고.
오크 차원항은 자신이 자고 일어나는 사이에 세력 하나가 멸망한 것 같다.
오늘은 오크 차원항 영상을 편집해야 하려나.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인간형 생먹이들을 오크 차원항에 투하했다.
그럼, 다른 차원항들은 어떨까?
리베리아, 오르트, 65b-112, 프리가, 그 외 기타 등등.
차원항에서 자신이 먹이를 주는 것을 기다리는 인간형 생물체들을 보며 클라인은 피식 웃음 지었다.
이렇게 많은 생명체들이 자신이 먹이를 주는 것만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뭐랄까, 신이 된 기분이 들었다.
클라인이 탄탈로스나 울타르 같은 메이저한 생물들 대신 인간형 생물들을 키우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탄탈로스나 울타르와는 대등한 관계를 만들어야 하는데, 애완 인간 상대로는 일방적인 관계를 만들 수 있으니까.
지금이라면 억지로 사육자 숭배 현상을 일으키는 사람들의 기분을 알 것 같다.
하지만 그건 좀 너무 생물 학대 같으니까.
그런데 이제 슬슬 차원항들을 다 한 번씩 갈아엎어야 하려나?
처음에는 무개입 상태로 잘 지내던 차원항들도 이젠 너무 번식해서 자신의 도움이 없으면 생태계가 유지되지 않는다.
이것도 리퀴드사에 도움을 요청하면 지원해 주려나?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차원 간 단말을 켜서 자신의 쥬튜브 채널에 접속했다.
오늘도 역시 잉간이의 영상은 인기가 많네.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슬쩍 댓글 창을 확인했다.
[당연히 인간한테 인간형 생물 먹이면 안 먹지 ㅋㅋㅋㅋㅋ]
└[오크는 잘만 먹던데?]
└[ㅅㅂ 그린 스킨은 뭘 주든 다 잘 먹잖아]
[그린 스킨은 인간형 생물 아니라는 거임? 분류학적으로는 인간형 생물인데?]
[아니 ㅅㅂ 내 말은 그게 아니잖아]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도 싸움이 일어나는 쥬튜브 댓글 창은 언제 봐도 참 신비로운 공간이다.
다행히 이 댓글들은 말싸움 수준에서 멈출 것 같으니 굳이 손을 대지 않아도 되겠지.
[솔직히 인간 괴롭히지 말라는 댓글들 가식 떠는 거 같아서 웃김. 인간은 절대 지적 생명체 못 된다고 논문 떴는데 ㅋㅋㅋ 무오하고 인간은 동급이야, 이 맨맘들아 ㅋㅋ]
[지적 생명체가 아니라고 우리가 가지고 놀아도 된다는 건 아니죠.]
[응~ 지적 생명체 기준도 못 채우는데 그게 식물하고 뭐가 다름 ㅋㅋ]
아, 역시나 자는 사이에 이런 어그로성 댓글이 달렸네.
리퀴드사가 붙여 준 매니저도 열심히 일하고 있지만, 워낙 댓글이 많다 보니 가끔 이렇게 미처 거르지 못한 댓글이 노출될 때도 있다.
클라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어그로성 댓글들을 삭제하고, 서둘러 리베리아산 인간 사전을 펼쳤다.
클라인은 신체 말단으로 어제 구조한 리베리아산 인간이 들어 있는 검역항을 책상 위로 가져왔다.
어디 보자.
갑옷에 새겨진 문양으로 봐선 기사단 계급의 생명체 같은데.
음, 그러니까, 백은 기사단? 그건가?
백은 기사단이면 양식이 아니라 자연산이 확실하네.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검역항 내부에서 잠자는 인간을 관찰했다.
성별은 여성, 거기에 백은 기사단이라면 순수 혈통인 게 분명하다.
이것만으로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 요소는 충분하다.
꼼꼼히 리베리아산 인간의 상태를 살피던 클라인은 예상치 못한 사실을 하나 더 발견했다.
그것은 이 인간의 품종이 비교적 최근에 생겨난 품종이라는 사실이었다.
리베리아에서 새롭게 발견된 품종이 아니라, 양식장에서 만들어진 품종이 리베리아로 유입된 사례.
클라인도 최근에 뉴스로만 몇 번 들어 봤지, 이렇게 실제로 이런 사례를 보는 건 처음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 시장에서의 가격은 그냥 순수 혈통 품종보다 낮아지겠지만, 쥬튜브에서의 주목도는 더 높아질 거다.
리베리아산 인간종들은 다른 행성의 인간들과도 친화력이 높으니 지구산 인간과도 잘 섞일 수 있으려나?
그래도 곧바로 합사하는 건 무리고, 잉간의 차원항 한구석에 따로 공간을 만들어서 익숙해지게 하는 게 좋겠다.
새로 차원항이 도착하려면 적어도 몇 달은 걸릴 테니 이왕이면 잉간의 차원항에서 키우는 게 베스트다.
그게 영상감을 뽑기에 더 좋기도 하고.
어째 처음에 생각했던 생존이란 콘셉트가 희미해져 가는 것 같지만, 지금이 더 반응이 좋으니 괜찮겠지.
클라인이 그렇게 생각하며 차원 간 단말을 끄려는 순간, 문득 리퀴드사에서 자신의 채널로 도착한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리퀴드]
[쥬스농장에서 합방 제안이 들어왔어요. 잘 생각해 봐요.]
“쥬, 쥬스농장 님?!”
쥬스농장이라고 하면 구독자 13조의 초, 초, 초대형 쥬튜버가 아닌가?
이제 막 구독자 10억을 넘긴 자신으로선 도저히 말도 섞을 수 없는 쥬튜버다.
클라인 또한 처음에 인간 사육을 시작할 때 쥬스농장의 영상을 많이 참고했다.
그런 쥬튜버가 어째서 자신에게 합방 제안을 한 걸까?
클라인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리퀴드사가 자신에게 보내 준 쥬스농장의 메시지를 읽었다.
[안녕하세요. 쥬스농장입니다.]
[평소에 클라인 님의 영상을 즐겁게 챙겨 보고 있었는데요. 이번에 올리신 지구산 인간 영상을 보고 연락드립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해서, 제 농장에 와서 함께 합방을 진행하는 건 어떤가요? 클라인 님에게도 나쁘지 않은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제 농장의 최첨단 시설은 지구산 인간도 즐길 수 있다고 자부…….]
“와…….”
쥬스농장이 클라인에게 보낸 메시지를 간략히 요약하자면, 자신과 합방을 하게 해 줄 테니 자신이 운영하는 농장에 지구산 인간을 데리고 와 달라는 부탁이었다.
이건 정말 대박이다.
단번에 자신도 조 단위의 구독자를 보유한 쥬튜버가 될 수 있는 기회다.
하지만.
클라인은 쥬스농장의 제안을 그리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의 방을 나와서 쥬스농장의 농장으로 가야 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클라인은 고민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만.
방 밖으로 나간다는 마지막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래, 굳이 합방하지 않아도 괜찮잖아?
[클라인]
[죄송합니다. 제가 방 밖으로 나가는 건 좀 그래서요. 저도 합방을 너무너무 하고 싶은데, 진짜 방 밖으로 나가는 건 좀 그래서요. 죄송합니다…….]
잉간만 있으면 조 단위 구독자는 언제든지 확보할 수 있을 거야.
클라인은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자신과 애완 인간들의 요새 속에 오늘도 틀어박혔다.
* * *
“으!”
철푸덕.
내 얼굴을 향해 뛰어오른 푸른 점액은 허공에서 힘을 잃고는,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으! 으!”
어째서인지 화가 잔뜩 난 상태의 푸른 점액은 그대로 오도도도 내 발치로 다가와 신발을 통통 두드렸다.
내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에포나가 들뜬 모습으로 푸른 점액에게 덤벼들었다.
“왕! 왕!”
“으으!”
마치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듯, 에포나는 푸른 점액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곁눈질로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동굴 내부를 살펴봤다.
어둠에 어느 정도 눈이 적응되고 나니 어둠 속에 숨어 있는 푸른 점액들의 모습이 엿보인다.
빛을 싫어한다더니, 낮 동안에는 동굴 속에 숨어 있는 걸까?
안전하게 여길 빠져나가려면 무언가 조명 역할로 쓸 만한 물건을 가져와야 할 것 같다.
아직 날은 저물지 않았고, 은신처와의 거리도 그리 멀지 않으니 잠시 횃불을 가지러 가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에포나, 가자.”
“왕!”
푸른 점액을 가지고 놀던 에포나는 내가 부르자 부리나케 내 뒤를 따라왔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푸른 점액은 그대로 다시 동굴 안으로 도망갔고.
내가 다시 횃불 대용으로 쓸 물에 젖은 니사를 가져왔을 땐 조금의 흔적도 남지 않았다.
그나저나 이 니사라는 돌, 내 예상보다 더 빛난다.
내가 예상한 건 반딧불이의 어렴풋한 빛이었는데.
실제로 물을 묻혀 보니 거의 LED 전등처럼 환하게 빛난다.
니사를 횃불 삼아 동굴 안을 나아가자 천장에 달라붙은 푸른 점액들이 움츠러든다.
만약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동굴 안을 지나갔으면 저것들이 덮쳐 왔을까?
위험한 생물 탐지에는 걸리지 않았지만, 나는 아직도 그때의 그 거대한 점액의 모습을 기억한다.
혹시 모르니까 대비해 두는 건 나쁘지 않겠지.
푸른 점액에 뒤덮인 동굴을 지나, 빛이 쏟아지는 출구로 나온다.
살랑이는 바람이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고.
태양은 없지만, 바람을 타고 햇빛에 반짝이는 먼지들이 일렁인다.
슬며시 주위를 둘러보자 거대한 호수가 눈에 들어온다.
저게 내가 매번 보던 폭포의 수원지인 걸까?
그런데 이런 산 위에 저런 거대한 호수가 그냥 솟아날 수 있는 걸까?
저렇게 솟아난 걸 보니 가능한 모양이다.
호수를 따라 힘차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로 발걸음을 옮겨 본다.
발을 자칫 헛디디면 폭포로 떨어질 것 같은 위치로 이동해 조용히 폭포를 따라 시선을 옮긴다.
곧장 거세게 떨어지던 물줄기는 호수가 되고.
호수 주위로 드넓은 숲이 자라난다.
한동안 계속해서 넓고, 넓은 숲이 이어지다가 내가 맨 처음 떨어졌던 드넓은 벌판이 튀어나오고.
황금빛 벌판은 쭉쭉 지평선까지 뻗어 나가다가.
회색빛의 안개에 집어삼켜졌다.
그 모습을 보자, 내 입에선 저절로 허탈한 감탄사가 나온다.
도대체 끝이 어딘지 모를 사이코패스의 힘을 보면서 어렴풋이 상상하던 사실이지만.
아무래도 나는 이세계에 떨어진 게 아니라, 모형 상자 속에 떨어진 모양이다.
그 어느 곳으로 눈을 돌려도 회색의 안개가 지평선 대신 자리 잡고 있다.
어항에 들어간 물고기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이런 짓을 하는 상대에게서 내가 과연 빠져나갈 수 있을까?
허탈감이 천천히 전신을 침식해 가고,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사실 이세계에서의 삶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느꼈었다.
방 안에 있을 때와 다르게 무언가 이루는 느낌이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노력한다면 여기서도 탈출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이 위에 올라와 내가 알게 된 건, 당장 여기서 떨어져 자살하는 것만이 그 사이코패스에게서 벗어날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뿐이었다.
내가 뭘 해 봐도 사이코패스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순간 눈앞에 멀쩡하게 뛰어다니던 포메라니안의 모습이 떠오르고, 나를 재촉하듯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나는 한 발자국을 움직였지만, 더 이상의 걸음을 내딛지 못했다.
그래도 계속 살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계속 이대로 사는 게 의미가 있을까?
순간 머릿속에 그런 질문이 떠올랐고.
내가 그 질문에 답을 하러 발을 내디디려는 순간.
“왕!”
에포나의 울음소리가 내 귀에 들려왔다.
나는 슬며시 뒤를 돌아보며 에포나를 바라봤고.
에포나는 내 눈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짖었다.
그리고 나는.
가만히 뒤돌아서 에포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털가죽이 아닌, 꿈틀거리는 무언가의 감촉이 느껴진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강아지를 쓰다듬듯 계속해서 에포나를 쓰다듬었다.
에포나가 내게 뭘 원해서 내 옆에 붙어 있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건, 에포나가 내 곁에 있다는 사실뿐.
“왕!”
그러자 에포나는 즐거운 듯 짖었고.
나 또한 즐거운 듯 웃었다.
그래, 살자.
이곳이 어항 안이든 다른 세계든 뭐가 달라지겠어.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그 사이코패스가 질려서든 내 힘으로 탈출하든 해서 원래 세계로 돌아가야지.
따스하고 그리운 내 방으로.
다시 방 안에 틀어박히기 위해.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절벽에서 물러섰고.
이왕 산 정상에 올라온 김에 대충 돌아다녀 볼까?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산 정상을 돌아다니던 중.
나는 그것의 존재를 눈치챘다.
무언가 거대한 석상이 산 정상에 설치되어 있던 것이다.
어째서 지금까지 저것의 존재를 깨닫지 못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석상.
무언가 당장이라도 꿈틀거릴 것 같은 생동감 넘치는 촉수 조각이 참 인상적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시선을 발끝에서 위로 올렸고.
평범한 석상이라면 얼굴이 있을 부분을 바라봤다.
“으, 아?”
얼굴이 있어야 할 석상의 얼굴에는 석상의 얼굴이 있어야 할 석상의 얼굴에는 석상의 얼굴이 있어야 할 석상의 얼굴에는 석상의 얼굴이 있어야 할 석상의 얼굴에는 석상의 얼굴이 없었다.
이건, 도대체 뭘까?
분명히 두 눈 너머로 석상의 얼굴이 보이고.
나는 확실히 석상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데.
내 감각기관이 받아들이는 정보를 처리하는 뇌에서 그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데도 내 자그마한 뇌는 계속해서 저걸 이해하려고, 이해하려고 애썼고.
“으헉, 엑, 크헥…….”
과도하게 혹사당하던 뇌가 삐걱거리며 이상 신호를 보내온다.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할 수 없다.
완전히 낯선 새로운 것.
그렇지만 이해해야 하는 것.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 한 대가를 치르려던 그 순간.
폴짝.
에포나가 뛰어올라 내 목덜미에 달라붙었고.
무언가를 내 머리로부터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아직 내가 이해하지 못한 정보가.
이해해야 할 낯선 정보가.
에포나의 배 속으로 사라져 간다.
“크헉, 컥……!”
내가 숨을 몰아쉬며 털썩 바닥에 주저앉자, 에포나가 내 목덜미에서 떨어지고.
마치 왜 그런 짓을 했냐고 화내는 듯이 내 신발을 살짝 물었다.
나는 그저 에포나를 계속해서 쓰다듬으며 조용히 고맙다고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방금 그건 도대체 뭐였지?
문득 머리가 없는 고블린들이 나타났을 때를 떠올린다.
그때도 마치 지금과 비슷한 감각이 들었었지.
사이코패스와 관련된 것과 접촉할 때도 늘 그랬고.
그렇다면 저 동상은 설마, 그 사이코패스의 모습을 묘사한 걸까?
다시 한번 동상을 바라보려 했지만, 도저히 다시 동상의 얼굴을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머리가 녹아내리는 듯한 그 기괴한 감각은 다시 맛보고 싶지 않다.
도대체 왜 사이코패스는 자신의 동상을 여기 세워 둔 걸까?
뭐, 신이라도 된 듯한 기분을 느끼고 싶던 걸까?
하지만 아무리 사이코패스가 신과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결국, 그 녀석은 나를 납치한 사이코패스일 뿐이다.
절대로 그 녀석은 신 같은 게 아니다. 외계인 같은 거면 몰라도 말이지.
슬슬 해가 저문다.
나는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은신처로 되돌아갔고.
곰곰이 어떻게 해야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하지만 그 동상처럼,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라는 것은 존재하기에.
나는 결국 답을 찾지 못하고 그만 잠자리에 들려고 한 순간. 무언가 일어나는 듯한 기척이 느껴졌다.
언제나 느껴 왔던 그 사이코패스의 기척.
이번엔 도대체 뭘 하려는 거지?
나는 의아해하며 돌창을 손에 쥐고 물에 젖은 니사를 들고 동굴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동굴 밖으로 나온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허?”
하늘에서 천천히 내려오고 있는, 새하얀 우주복을 입은 누군가였다.
21화 순혈 리베리아산 인간을 보호하게 됐어요! 과연 잉간과의 첫 만남은?
하늘에서 천천히 우주복을 입은 누군가가 땅으로 내려온다.
그 모습은 마치 UFO에서 내려오는 외계인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멍하니 그 이질적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외계인이 입고 있는 옷이 우주복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저건 우주복이 아니라 새하얀 금속으로 이루어진 SF 소설 속에서 튀어나온 파워드 슈트 같은 디자인의 갑옷이다.
한참 열을 식히고 있는 건지 파워드 슈트의 틈새에선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얼굴을 덮은 바이저 틈새에선 푸른 불빛이 빠져나온다.
내가 지금까지 마주하고 상대해 온 건 판타지풍 이세계였는데, 지금 눈앞의 상대는 SF의 세상에서 빠져나온 것 같다.
도대체 저것의 정체가 뭘까?
로봇인지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슈트의 모습은 분명히 인간형인데, 평범한 사람의 몇 배는 되는 덩치에 묘한 위화감이 느껴진다.
뭐라고 해야 할까?
마치 본모습을 숨기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다.
내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며 돌창을 쥔 손에 힘을 주는 순간, 파워드 슈트의 바이저에서 변조된 듯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르겐 도르반?”
아, 역시 그렇겠지.
당연히 서로 말이 통할 리가 없지.
그래도 혹시나 저쪽은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냥 던져 보는 심정으로 외계인의 말에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저기, 누구세요?”
그렇지만 당연히 내 말을 저쪽이 알아들을 리 없었고.
바이저가 의아하다는 듯이 옆으로 기울어지는 것 이외의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한담?
그냥 포기하고 뒤돌아서 잠이나 자러 가?
하지만 갑작스러운 행동은 저 외계인을 자극할 수도 있다.
왜, 야생동물을 만나면 갑자기 도망친다거나 하는 행동은 하지 말라잖아?
내가 무슨 지원군을 부르러 간다거나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나를 공격해 올 수도 있다.
그때, 문득 머릿속에서 만능 사전의 존재가 떠오른다.
만능 사전이라면 저 외계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번역할 수 있지 않을까?
현재 만능 사전은 내 허리께에 잘 매달려 있는 상황.
하지만 내가 태블릿 PC를 작동시키는 걸 위협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을까?
저쪽이 SF 쪽 문명이니 더욱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싸울 마음이 없다는 걸 알려 줄 수 있지?
팔을 좌우로 펼쳐서?
아니면 무기를 바닥에 떨어트려서?
그래, 대대로 무장해제는 싸울 의사가 없다는 뜻의 표현이었다.
어차피 내가 돌창을 들어 봤자 저 갑옷을 뚫고 반격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으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양팔을 좌우로 펼쳤다.
그러자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던 외계인이 내 행동에 주목했고.
나는 조심스럽게 바닥에 돌창을 내려놨다.
“스테이? 돈 워리? 싸움 싫어요?”
당연히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렸고.
외계인의 시선이 완전히 내게 향한 것을 확인하고 나는 조심스럽게 허리께의 태블릿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아르카!”
내가 태블릿을 외계인에게 건네주려 한 순간, 외계인은 짧은 고함을 내질렀고.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던 외계인의 손에 기다란 창이 생겨났다.
중세 시대 기사들이 사용하던 마상창, 그러니까 랜스를 닮은 푸른빛으로 이루어진 기다란 창이 섬뜩하게 빛나고.
자동차 엔진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과 함께 어마어마한 속도로 외계인의 창이 내 목으로 다가왔다.
내가 도대체 뭘 자극한 것인지 도저히 알 수 없었지만,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닥쳐 올 고통에 대비했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질끈 감고 있어도 고통이 느껴지는 일은 없었고.
조심스럽게 눈을 뜨자, 투명한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허공에 멈춰 있는 푸른 창끝의 모습이 보였다.
아니, 저건 실제로 투명한 벽에 가로막힌 것이다.
외계인 또한 투명한 벽의 존재를 눈치챘는지 당황한 기색으로 연달아 투명 벽을 창으로 두드리고.
모두가 당황하며 이게 어찌 된 일인지 파악하던 그때.
[Liquid 1.9.2 통합 언어 팩]
만능 사전을 사용할 때 보이던 무기질적인 시스템 메시지가 눈앞에 떠오르더니.
“마법? 아냐, 이건 공간 자체가…….”
경악한 목소리로 뭐라 중얼거리는 외계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어, 안녕하세요?”
어차피 보아하니 외계인도 저 투명 벽을 뚫지 못하겠다, 나는 조심스럽게 인사를 해 봤다.
홱.
투명 벽의 이곳저곳을 만지며 무언가를 관찰하던 외계인의 시선이 내게 돌아가더니, 변조된 목소리여도 확연히 혐오감이 느껴지는 투로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지. 천것?”
천것이라니.
SF스러운 외관과는 다르게 뭔가 사극에서 나올 법한 단어가 나왔네.
아무리 내가 그동안 빨래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수염이나 머리도 못 깎아서 거지꼴이라지만.
그래도 천것이라고 부르는 건 좀 그런데?
일단 뭔가 새로운 정보를 얻어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안고 나는 대화를 이어 나가려 했다.
“그쪽도 무슨 회색빛 안개가 가득 낀 공간에서 여기로 떨어지신 건가요?”
“그래. 그랬지.”
“아하하, 그러셨구나. 저도 그런데.”
어째서인지 만능 사전에 쓰여 있던 대화의 기술, 동질감 형성하기를 써먹어 봤지만, 눈앞의 외계인은 나와 동질감을 형성하기 싫은 모양이다.
“내게 말을 걸지 말아라. 천것. 네가 지금 얼마나 큰 무례를 저질렀는지 아느냐? 이 투명한 벽만 없었다면 당장 네놈의 배에 창을 박아 넣었을 줄 알거라.”
보아하니 이 외계인의 고향은 신분제가 아주 강한가 보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천것이니 뭐니 하면서 사람을 하대하는 걸 보면.
보통은 낯선 장소에 떨어져서 처음으로 사람을 보면 좀 반갑다는 마음이 들지 않을까?
어쩜 저렇게 자연스럽게 저런 반응이 나올 수 있을까?
정말로 참 감탄스럽다.
나는 비아냥을 가득 담아 다시 한번 외계인에게 말을 걸었다.
“그쪽은 여기가 어떤 곳인지 아시는 모양인가 봐요? 그렇게 당황한 것 같지도 않네요?”
“당연히 알고 있지. 그것보다 자네는 어째서 기본적인 예의조차 지키지 않지? 설마, 기본 교육조차 받지 못한 건가? 그렇다면 이해가 가는군. 그렇게 무례를 저지르는 게 다 못 배워 먹은 놈이라는 것 하나로 설명되니 말이야.”
“아하하, 당연히 알고 계시는구나. 당연히……. 네?”
비아냥거림을 더 큰 비아냥으로 돌려주는 혐성에 내가 속으로 혀를 내두르던 그때, 뭔가 중요한 말이 스쳐 지나간 것 같다.
뭐? 여기가 어딘지 당연히 알고 있다고?
“잠깐만요. 지금, 여기가 어딘지 알고 있다고 하셨나요?”
“어째서 자네는 당연한 것을 자꾸 물어보는가? 당연히 여긴 신들의 전장이 아닌가?”
신들의 전장?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으면서, 묘하게 중요한 것을 모르는 것 같은 말이다.
“저기. 그 신들의 전장이란 혹시……?”
“자네는 무례한 걸 넘어서 기본 상식이라는 게 없는 것 같군. 신들의 전장을 모른다니, 자네는 혼자서 태어나고 혼자서 자랐는가? 유모가 자기 전에 들려주고, 음유시인과 학자들이 한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상식 중의 상식을 모른다니?”
“그 상식이라는 게 뭔지 몰라도, 제 세상에서는 그게 상식이 아니어서요. 실례가 아니라면 기사님의 지혜를 제게 베풀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적당히 영화에서 본 말투대로 외계 기사의 비위를 맞춰 보려 하지만, 외계 기사는 콧방귀를 뀌며 내 말을 무시했다.
“초면에 마력을 숨기는 자네 같은 비열한에게 알려 줄 지혜 따위는 없다네. 거기에 무장을 해제하는 척하며 마법을 쓰려고 한 무뢰한이라면 더욱더 말이지.”
“아니, 전 마법을 쓰려던 게 아니라…….”
“닥치게! 내 똑똑히 자네가 스크롤을 펼치던 모습을 봤으니! 지금 바닥에 나뒹구는 저게 스크롤이 아니면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네? 스크롤요?”
나는 버럭 화내는 외계 기사의 손끝이 가리키는 장소를 바라봤다.
그러자 거기엔 내가 깜짝 놀라 떨어트린 태블릿 PC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설마 저 외계 기사들의 세계에선 마법을 태블릿 PC로 발동시킬 수 있는 건가?
뭐 그런 사이버펑크틱한 판타지 세계가 다 있어?
파워드 슈트를 입은 기사들이 태블릿 PC로 마법을 쓰는 세계라.
참 기괴한 세계네.
아무튼 일단 오해는 풀어야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오해를 풀려 다시 기사에게 말을 걸었지만.
“저기, 기사님? 한 가지 오해가 있으신데요. 저는 마법을 쓰려던 게 아니라…….”
“닥치게! 자네 같은 무뢰한의 말을 더는 듣고 싶지도 않네!”
“아니, 기사님?”
쉬이이익.
기사가 입고 있는 전투복에서 어마어마한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다.
그와 함께 기사는 거칠게 내 말을 잡아끊고는 무언가 기묘한 발걸음으로 내게서 떠나갔다.
무언가 부스터를 써서 공중을 떠다니는 듯한 발걸음?
그런 기묘한 발걸음으로 내게서 떠나간 기사는 숲속으로 모습을 숨겼다.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며 투명 벽이 있던 자리를 주먹으로 두드려 본다.
통통.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유리를 만지는 듯한 감촉이 느껴진다.
이걸 설치한 건 역시 사이코패스겠지.
이번엔 또 나에게 뭘 원하는 거야?
문득 나에게 SF와 판타지가 섞인 혼종 기사가 한 말이 떠오른다.
신들의 전장이라.
저 기사가 말한 신들의 전장이 정확히 뭔지 모르겠지만.
아마 북유럽 신화의 발할라 같은 신화 이야기가 아닐까?
하지만 신화라고 하기엔 기사의 반응이 좀 묘했다.
기사의 말 중에는 학자들과 음유시인들이 한목소리로 이야기한다는 대목이 있었다.
음유시인이면 몰라도 학자가 신화를 이야기한다고?
거기에 더해서 묘하게 침착하고 올 것이 왔다는 듯한 기사의 말투.
어쩌면.
어쩌면 기사의 세계는 사이코패스가 잡아간 사람이 넘쳐 나는 세상이 아닐까?
거기에 더해서, 사이코패스에게 잡혀갔다 돌아온 누군가도 있는 거지.
그래서 이 세계의 이야기가 신화처럼 전해지고 있는 거일지 모른다.
비록 기사의 말투는 무척이나 짜증 났지만.
다시 한번 이야기를 나눠 볼 필요는 있겠다.
이 세계에서 탈출할 방법을 듣기 위해서는 말이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동굴로 돌아갔다.
* * *
“아, 최대한 싸우지 않았으면 했는데, 역시 싸우네요.”
리베리아산 인간이 몇 번인가 지구산 인간과 대화를 하더니, 곧장 달려드는 모습을 보며 클라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보통 리베리아산 인간은 다른 지역의 인간들과도 합사가 쉽지만, 이번에 보호하게 된 개체는 야생성이 강한 탓인지 꽤 높은 공격성을 보였다.
미리 차원 장벽으로 잉간과 리베리아산 인간을 분리해 두지 않았다면 대참사가 일어날 뻔했다.
“이렇게 인간들이 서로 싸우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요. 지금 상황에서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서열 때문인 것 같네요.”
이번 리베리아산 인간은 백은 기사단 소속의 순수 혈통 개체.
거기에 자연 발생 품종이 아니라 외부 유입 품종이라는 걸 생각하면, 리베리아의 생태계에서 꽤 높은 위치에 있었다고 생각하는 게 좋다.
당연히 지금도 리베리아산 인간은 자신이 상위 개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거기에 상대가 마력이 하나도 없는 지구산 인간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보이죠? 지금 입고 있는 갑옷이 고장 난 상태인데도 계속 입고 있는 거. 저게 다 서열 싸움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는 거예요.”
보통 억지로 인간형 생물들의 의복을 벗기면 스트레스를 받기에, 클라인은 리베리아산 인간의 갑옷이 고장 났어도 일부러 벗기지 않았다.
원래라면 곧장 고장 난 갑옷을 벗었을 테지만, 리베리아산 인간이 갑옷을 벗기도 전에 지구산 인간이 나타난 덕분에 리베리아산 인간은 갑옷을 벗지 않았다.
“지금 저 갑옷 안의 상태는 완전 찜통일 텐데요. 저것 봐요, 수증기가 막 피어오르잖아요? 거기에 목소리 변조 기능에, 은신 기능까지. 은신 기능은 갑옷이 고장 나서 그런지 실패했지만요.”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지구산 인간은 리베리아산 인간이 차원항 안으로 들어오는 걸 감지한 걸까?
마력이 없는 대신 마력을 느끼는 감각이 더욱 발달하기라도 한 걸까?
그러고 보니 맨 첫날 검역항에서 인지 훈련을 겪지도 않았는데 자신을 눈치채기도 했었지.
어쩌면 정말 지구산 인간은 마력 감지 쪽으로 감각이 발달한 것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마력이 없어서 인식 저해 마법이 아예 통하지 않는 게 아닐까?
리베리아산 인간의 은신을 눈치채지 못한 걸 보면 그게 더 맞는 것 같다.
클라인이 그런 것을 생각하는 사이, 지구산 인간과 리베리아산 인간은 차원 장벽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클라인은 그 모습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지켜봤다.
제발 여기서 서로 사이가 좋아지면 좋을 텐데.
그렇지만 클라인의 그런 바람은 통하지 않고, 리베리아산 인간이 먼저 자리를 떠나갔다.
“음, 보니까 서열 정리가 아직 안 됐네요. 리베리아산 인간이 먼저 떠났으니 리베리아산 인간이 진 게 아니냐? 하실 수 있겠지만, 잘 보세요.”
리베리아산 인간이 먼저 떠난 이유는 갑옷에 열이 가득 차서다.
즉, 지구산 인간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자리를 피한 것이다.
만약 서열 정리가 끝났다면 곧장 그 자리에서 열을 배출했겠지.
이렇게 아직까지 서열 싸움이 끝나지 않은 건, 차원 장벽으로 인해 물리적 충돌이 방지되었기 때문이라고 클라인은 추측했다.
물리적 싸움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 무엇보다 서열 정리에 가장 확실한 수단이니까.
하지만 지금 문제가 되는 건, 지구산 인간이 너무 약하다는 것이다.
지구산 인간과 리베리아산 인간이 서로 싸운다면 무조건 리베리아산 인간이 이기겠지.
거기에 더불어서 지구산 인간은 심각한 부상을 입을 것이다.
운 좋게 다치지 않더라도 지구산 인간이 받는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그 결과, 심하면 죽을 수도 있다.
물론 애완 인간의 소생은 클라인도 집에서 할 수 있는 간단한 일이지만 과도한 소생은 애완 인간의 정신 건강에 좋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구산 인간이 서열상 우위에 서더라도 과도하게 리베리아산 인간을 괴롭히거나 하지 못하겠지.
기본적으로 신체 스펙의 차이가 있으니 말이다.
즉, 지구산 인간이 서열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는 게 차원항의 평화를 위해 좋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지구산 인간의 서열을 더 위로 올려놓을 수 있을까?
클라인은 그 방법을 리베리아산 인간의 출신에서 떠올렸다.
“리베리아산 인간들의 특징은 여러 가지가 있어요. 다양한 품종, 외부 생태계에 대한 포옹. 하지만 가장 큰 특징은 따로 훈련하지 않아도 인지 훈련이 되어 있다는 점이에요!”
그래.
지금도 차원항에 들어가 있는 리베리아산 인간은 클라인의 존재를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즉, 리베리아산 인간의 내부 서열의 가장 위는 클라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클라인 자신이 개입하는 것으로 리베리아산 인간의 내부 서열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약물을 사용하면 금방이지만, 클라인은 그런 식으로 차원 생물들의 자유의지를 억압하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자, 그럼 차원항 서열 정리를 시작해 볼까요?”
클라인은 지구산 인간의 차원항을 바라보았다.
늘 그렇듯, 호의를 가득 담아서.
22화 리베리아산 인간과 잉간이의 신경전? 서열 정리 1일 차!
“서열 정리 첫 번째 단계는 바로, 무관심이에요!”
클라인은 잉간에게 줄 고기를 작게 다듬으며 그렇게 말했다.
“지금 리베리아산 인간의 머릿속에선 자신의 서열이 제일 높으니 저의 관심을 받는 건 자기뿐이라고 생각할 거란 말이죠. 제가 제일 먼저 깨야 하는 건, 바로 그 생각이에요.”
리베리아산 인간이 어떤 행동을 보이더라도 클라인은 절대 반응하지 않을 거다.
물론, 리베리아산 인간이 잉간이를 공격하려고 해도 말이다.
리베리아산 인간이 잉간이를 공격했을 때 반응하면 자칫하면 잉간이를 공격했을 때 자신이 반응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심어 줄 수 있다.
차원 장벽으로 잉간이와 리베리아산 인간이 물리적 접촉을 할 수 없게끔 막아 놨으니 잉간이가 다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렇게 리베리아산 인간의 기를 꺾고 나면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갈 차례예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잉간이의 서열이 위라는 걸 보여 줘야 해요.”
이때부터는 적절하게 리베리아산 인간과 지구산 인간이 서로 교류하게 해야 한다.
여기서부터는 본격적으로 리베리아산 인간에게 새로운 서열을 박아 넣어야 한다.
서열을 박아 넣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역시 먹이다.
마침 현재 잉간의 차원항에는 먹이생물들이 따로 존재하질 않으니 더욱 효과가 뛰어나겠지.
이렇게 먹이를 통한 서열 훈련은 효과적이지만, 너무 지나치면 훈육이 아닌 학대가 된다.
그러니 적당한 선에서 시도하다가, 효과가 좋지 않으면 재빨리 다른 방식으로 바꿔야겠지.
부디 약물이나 마법을 쓰는 일 없이 훈육이 끝나길 클라인은 기도하며 차원항 속으로 잘 다듬은 고블린 고기를 집어넣었다.
* * *
아무래도 나는 애완동물인지 뭔지가 된 것 같다.
외계 기사와 헤어지고 동굴에 돌아와 코 자고 멀쩡한 정신으로 생각해 보니 그런 결론이 튀어나왔다.
사실 애완동물인지 실험동물인지는 아직까지 불확실하지만, 좀 더 희망찬 쪽으로 생각하자.
솔직히 회색의 벽을 보자마자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의심이었지만, 어제까지는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외계 기사의 이야기도 있고, 한숨 푹 자고 생각해 보니 부정해 봐야 달라질 게 없다는 걸 깨달았을 뿐이다.
하지만 내가 애완동물이 됐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건, 어제 외계 기사가 흘린 이야기다.
뭐, 단순히 외계 기사 세계의 전설 수준에서 그칠 수도 있겠지만.
잘하면 이곳을 빠져나갈 힌트를 얻을 수도 있을 거다.
뭐, 그리 기대는 하지 않고 있지만 그래도 이야기를 나눠 보는 건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어제 내가 봤던 기사의 모습은 더러운 부르주아의 모습 그 자체.
단순히 몇 번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인민의 죽창을 꽂아 넣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게 했다.
실제로 싸웠다간 죽창을 얻어맞는 건 내가 되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저쪽이 고운 말을 쓸 생각이 없으면 이쪽도 곱게 나갈 생각은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비척거리며 오늘도 즐거운 하루를 보낼 준비를 한다.
어제 기사랑 대치해 보고 느낀 건데, 나도 방어구 같은 걸 하나 만들어야 할 것 같다.
갑옷 같은 건 아니더라도 방패 같은 것으로 하나 준비해 둬야 한다.
어제 투명한 벽이 없었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목을 꿰뚫려서 죽었을 거다.
내가 만들 수 있는 수준의 방패가 그렇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괜찮지 않겠는가?
적어도 공격을 한 번 정도는 막아 주고 부서지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동굴 한쪽에 나무 그릇에 잘 담아 둔 젤리에 손을 뻗어서 젤리들을 입안에 털어 넣는다.
이제 슬슬 젤리도 질린다.
신선한 고기가 먹고 싶다.
아니면 뭐 과일이라도 먹고 싶은데.
“에포나, 가자.”
“왕!”
내가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 동안 얌전히 바닥에 누워 나를 기다린 에포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발걸음을 옮긴다.
일단 오늘은 고무나무부터 채취하자.
외계 기사를 내가 숲 안에서 찾아낼 수 있을 거 같지도 않고, 먼저 찾아내고 싶지도 않다.
지금쯤이면 먹을 게 아무것도 없는 숲속에서 쫄쫄 굶고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동굴 밖으로 나서자, 정신 건강에 그리 이롭지 않은 풍경이 펼쳐졌다.
“흐윽……!”
동굴 밖으로 나오자마자 갑자기 허공에서 정체불명의 촉수가 또 튀어나온 것이다.
오, 오늘은 도대체 또 뭔데?
내가 몸을 움찔 굳히며 한 발자국 물러선 사이, 에포나는 쪼르르 동굴 안으로 몸을 피했다.
허공에서 튀어나온 촉수는 지난번과 달리 막 흔들린다거나 하는 일은 없고, 촉수 끝에 무언가가 매달려 있었다.
지난번 포메라니안의 고기를 내게 가져다줬을 때처럼, 무척이나 잘 손질된 고기.
순간 머릿속에 무척이나 불길한 상상이 하나 떠올랐지만 그건 아니겠지.
만약 그랬다면 그때처럼 가죽이 함께 있거나, 고기의 양이 더 많았을 거다.
내가 잊고 싶은 기억을 자극당해 가만히 서 있는 걸 무엇으로 착각했는진 몰라도 촉수는 고기를 양옆으로 흔들흔들 흔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나보고 이걸 먹으라는 건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왜 나에게 이런 걸 주는지 모르겠다.
지금까지는 내가 뭔가를 해야 먹을 걸 줬으면서?
지금까지 내 안에서 하나씩 세워지던 규칙이 와르르 허물어지는 기분이다.
설마, 어제 그 외계 기사랑 대치해서 수고했다고 주는 걸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도저히 사이코패스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기에 나는 그냥 뒤돌아서려고 했지만.
꿀꺽, 지글지글 불판 위에 구워지는 고기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심지어 이제는 소금까지 가지고 있는데, 그냥 버리긴 아깝지 않을까?
결국, 사이코패스에 대한 경계심을 맛있는 고기에 대한 욕망이 이겼고.
나는 조심스럽게 촉수에게서 고기를 가져갔다.
“:-)!”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목소리가 촉수에게서 터져 나오며 허공으로 사라졌고.
나는 푹 한숨을 내쉬며 고기를 잘 살펴봤다.
음, 아무리 봐도 이상한 고기는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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