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 29

스스로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그런 감정이 클라인의 결정에 충분한 영향을 줬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파인만은 클라인의 감정이 진심이라면 클라인을 막을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 해내지 못한 클라인을 방 밖으로 이끌어내는 일을 잉간이가 해내기도 했고, 파인만은 언제나 클라인이 원하는 일을 이루길 바라니까.
자신이 클라인이게 느끼는 것이 유사 모정, 가짜 모정과 비슷한 것이라는 걸 파인만도 알고 있지만.
어차피 아기를 만들 수 없는 몸인데, 이렇게라도 모정을 느끼는 게 나쁜 일은 아니잖아?
“파인만?”
“응?”
“뭘 그렇게 생각해?”
“……지구로 갈 때, 준비해야 할 걸 조금.”
“맞아. 그래, 지구! 저기, 파인만. 지구에 잉간이 말고 잉간이 룸메이트들도 데려가도 되겠지?”
“음…… 잘 모르겠네. 마력이 없는 공간에서의 차원 생물의 반응이 연구된 적은 별로 없으니까. 차원항을 가져가는 거라면 괜찮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적당히 크기 동기화 장치만 부착한다면 그렇게 큰 위험은 없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동행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자기인식을 도와줄 사람이 많으니 더 안전해질 것이다.
문득, 파인만은 클라인이 왜 잉간이의 룸메이트들을 함께 데려가려 하는지 궁금해졌다.
원래는 그냥 잉간이만 데려갈 생각이 아니었나?
파인만의 질문에 클라인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그. 혹시 위험한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안전하게…….”
“……아, 그래.”
그러니까, 잉간이의 고기 방패로 룸메이트들을 데려오겠다는 거지?
파인만은 조금 깬다는 듯한 눈빛으로 클라인을 바라봤지만, 클라인은 자신의 발언에서 이상한 것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뭐, 됐어.
언젠간 자기도 알게 되겠지.
확실한 건 잉간이에 대한 생각은 진심인 것 같으니까.
“그럼, 내일? 아니다. 모래? 그쯤 출발하는 거로 하자.”
“응!”
파인만과 지구로 출발할 일정을 잡은 클라인은 그대로 집으로 돌아와 곧장 잉간이의 차원항으로 향했다.
잉간이의 룸메이트들을 데려가려면 크기 동기화를 이뤄야 하는 법.
클라인은 서둘러 잉간이에게 준 것과 비슷한 동기화 장치들을 잉간이에게 건네줬다.
잉간이에게 건네두면 잉간이가 알아서 동기화 장치들을 배분해줄 거라고 믿었으니까.
클라인의 예상대로 잉간이는 클라인이 건네준 동기화 장치들을 룸메이트들에게 배분했다.
클라인은 그런 잉간이의 모습을 지켜보며 무언가 다른 점을 깨달았다.
자신의 것은 오른손에 끼웠는데, 룸메이트들의 손에 끼울 동기화 장치들은 전부 왼손에다가 끼운 것이다.
어쩌면 잉간이도 반지를 끼우는 손에 따른 의미가 있는 문화가 있는 걸까?
잉간이는 자기에게만 오른손에 반지를 끼워줬다.
잉간이의 문화에서 반지를 끼우는 곳에 따라 어떻게 의미가 달라지는지는 몰라도, 나만 반지를 오른쪽에 끼워준 거다.
그러니까. 응. 나를 특별 취급, 그 비슷한 걸 하고 있다는 게 아닐까?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히죽히죽 웃음 지었다.
하지만 이후 이어진 잉간이의 일상은 클라인을 살짝 심란하게 했다.
저런 모습을 보는 건 아직도 그닥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다.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눈을 뗄 순 없었기에 그 모습을 샐쭉한 눈으로 지켜보던 클라인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잉간이가 지적 생물로 인정받게 되면, 잉간이의 룸메이트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잉간이가 자신의 룸메이트들과 애착 관계를 형성한 건 맞다.
하지만 잉간이가 사람, 즉 시민권을 얻게 된다면 잉간이의 룸메이트들도 자동으로 시민권을 얻게 될까?
아니면 잉간이만이 시민권을 얻게 될까?
만약 룸메이트들이 시민권을 얻는다면 룸메이트들의 종족은?
거기에 키메라 인간의 경우에는 어떻게 취급되는 걸까?
만약 잉간만이 시민권을 얻게 된다면, 잉간이는 룸메이트들과 헤어지게 되는 걸까?
아니면 방금 전까지 함께 살았던 룸메이트들이 잉간이의 애완생물이 되는 걸까?
갑자기 들이닥치기 시작한 고민에 클라인은 머리를 감싸 맸지만 제대로 된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중앙 정부의 판단에 따라 모든 게 달라질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중앙 정부의 판단은 아마도 클라인 자신의 어필로 바뀌겠지.
또다시 클라인은 자신이 선택한 길의 무게감을 느꼈다.
나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잉간이의 무게뿐이다.
하지만 잉간이를 감당하려고 보니, 잉간이와 얽힌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렇다면 결국 클라인은 잉간이를 감당할 수 없다는 뜻일까?
모르겠다.
언제나와 같이 계속해서 고민해야겠지.
아직 클라인은 시작 지점에서 벗어나지도 않았다.
출발선을 떠나지도 않았는데 결승점에 도달하고 나서 벌어질 일들을 고민하는 건 뭔가 우습지 않은가?
일단 달려나가고, 그 다음에 생각하자.
어차피 긴 여행이 될 것이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은 많다.
그러니 조급하게 결정하지 말고 차분하게, 잉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선택을.
그렇게 클라인은 각오를 끝마쳤고, 마침내 결전의 날이 밝아왔다.
“그럼, 출발할까?”
“응.”
이제, 지구로 향할 시간이다.
203화 가속로!
포탈이 사라졌다.
어째서?
바깥에 뭔가 문제가 생긴 걸까?
아니면 내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한 걸까?
저 차원문은 일종의 포상? 개념으로 생겨난 것이니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전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겪은 적 있는 것 같은데.
그때는 왜 그랬더라?
살짝 희미해져 가던 나의 기억을 차원항의 진동이 되살려준다.
그래, 분명히 지난번에 차원항의 위치가 이동할 때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었지?
그렇다면 이번에도 차원항의 위치가 바뀌어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모양이다.
차원문이 닫힌 것도 차원항의 위치가 바뀌어서겠지.
조금만 기다리면 잠잠해지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안전한 곳에서 진동이 끝나길 기다리자 내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진동이 멈췄다.
하지만 사라진 차원문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는데, 그 대신 뭔가 기괴한 일들이 잔뜩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차원항 전체가 심하게 흔들리는 듯한 느낌이 한 번 덮쳐오더니, 차원항 내부의 생물들에 각종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가장 흔한 현상은 동물들의 크기가 제멋대로 바뀌는 것이었다.
내가 차원항 밖에서 봤던 그 사람들처럼 계속해서 크기가 변한다.
무오들은 그럼에도 느긋하게 풀이나 뜯어 먹으며 나지막하게 울어 재끼기만 했지만, 대부분의 동물들은 상당히 당황스러워하고 있었다.
제멋대로 커지는 자신의 몸에 적응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부딪히는 모습이었는데, 기묘한 변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몸 크기가 변화하는 동물들 중 유독 더 혼란스러워하는 동물들이 있었는데, 그 동물들의 몸이 점차 흐릿하게 푸른색과 황금색이 섞이며 변해가더니.
“윽…….”
이윽고 마치 자석이 서로를 끌어당기듯 흐릿해진 동물들끼리 서로 합쳐지더니, 두 동물이 하나로 섞인 듯한 기괴한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썩 보기에 좋지 않은 풍경이라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동물들의 융합은 종이나 숫자를 가리지 않고 무작위로 일어났다.
살인 토끼와 살인 토끼, 펭귄과 재규어…….
여러 생물들의 울음소리가 섞인 신음이 차원항 전체에 울려 퍼진다.
저걸 어떻게 해야 할까?
전에 그 피해자들에게 했던 것처럼 정보를 나누면 원래대로 돌아오려나?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 더 버티지 못한 것인지 몇몇 동물들의 몸이 부들부들 떨려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펑.
동물들의 몸에서 폭죽이 폭발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블랑카가 우주선에서 겪었던 그 광경이 무엇인지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핏덩이가, 살덩이가 사방으로 날아다닌다.
폭발음 대신 울려 퍼지는 끔찍한 비명.
더 끔찍한 것은 폭발이 멈춘 뒤에도 비명이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야 당연하다.
저건 폭발음이 아닌 비명이니까.
사방에 흩어진 핏덩어리와 살덩어리에서 흘러나오는 비명이 고통스러운 합주를 이룬다.
피로 물든 지옥도가 펼쳐지고, 갑작스러운 이상 사태에 놀란 블랑카와 리키, 아리스가 부랴부랴 집으로 되돌아온다.
“잉간! 괜찮아?”
“아, 응.”
나야말로 블랑카가 걱정됐는데, 다행히 블랑카는 이 참상을 보고 별다른 생각이 들진 않는 모양이다.
모두가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겠네.
그렇게 한숨을 뱉으며 시선을 방구석으로 돌린 순간, 내 눈에 그것이 들어왔다.
“우왁?!”
순간 당황해서 그것이라 표현하긴 했지만, 내가 잘 알고 있는 인물의 형체가 방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저, 속이…… 이상해요…….”
파랑이가 속이 이상하다면서 배를 부여잡고 몸을 부들거리고 있던 것이다.
“뭐야, 괜찮아?”
“으윽. 그리 괜찮진 않은데요. 기분 완전 별로예요. 으엑…….”
“어떤 기분인데?”
“영혼이 살찐 기분……?”
“그건 또 뭐야?”
파랑이는 그렇게 말하며 엄살을 피웠지만, 제대로 말할 수 있는 걸 보니 멀쩡한 모양이다.
그런데 이 녀석, 뭔가 황금색이 섞인 거 같은데?
마석을 먹어치운 결과 진화라도 한 걸까?
솔직히 이 정도면 슬라임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불러도 문제없는 수준 같은데.
일단, 이 녀석도 조금 상태가 안 좋아 보이긴 하지만 큰 문제가 없어 보이니 안심이다.
바깥의 동물들처럼 크기가 막 커졌다 줄어들진 않으니까 괜찮은 거겠지?
일단 바깥의 일이 수습될 때까진 집 안에 머무르는 게 안전해 보인다.
이번에도 보나 마나 클라인이 뭔가 실수를 저지른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적당히 시간을 때우던 그때, 차원항 전체를 뒤흔드는 파동이 느껴졌다.
고블린들을 없애던 그때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각이다.
클라인이 드디어 나선 거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말끔해진 차원항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까지 보였던 풍경은 잠깐의 악몽이라는 듯 사방에 흩어졌던 살점들은 모두 다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꾸륵?”
전부는…… 아니지만.
무언가가 수풀 속에서 움직이는 모습을 곁눈질하며 무오들의 상태를 살핀다.
무오들은 멀쩡했지만, 차원문은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다.
언제쯤 다시 차원문이 나타나려나?
아까의 소동으로 무너진 무오 농장을 수리하던 그때, 마치 어딘가의 파란 너구리가 꺼낸 문처럼 허공에 나무문이 나타났다.
뭐지?
새로운 차원문인가?
새로운 차원문으로 추정되는 나무문을 살짝 긴장하며 바라보고 있자 나무문이 슬그머니 열리고.
“:-)”
문틈 사이로 자그마한 클라인의 머리와 촉수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 * *
“출발!”
드디어, 출발이다.
클라인은 미리 준비한 짐과 잉간이가 들어있는 차원항을 파인만의 우주선 안으로 옮기고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그런 클라인의 모습을 대충 지켜보며 파인만은 무심하게 클라인에게 말했다.
“안전띠 매는 거 잊지 말고.”
“내가 애야?”
파인만의 지적에 클라인은 투덜거리면서도 파인만의 말대로 안전띠를 장착했다.
파인만은 클라인이 제대로 자리에 앉은 것을 확인하고 곧장 우주선을 출발시킨다.
“가속로까지 얼마 안 걸리니까, 그때까지 좀 자던가.”
“으응.”
파인만은 그렇게 말했지만, 클라인은 계속해서 차원항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직 위험 지역에 들어서진 않았지만 불안한 마음에 클라인은 잉간이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뚫어져라 잉간이를 바라봤다.
혹시나 모를 사고에 대비해 클라인은 최대한 잉간이의 몸짓 하나하나를 뇌리에 새겼다.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이 잉간이를 지켜줄 수 있게끔.
시간이 가는지도 모르게 잉간이를 바라보던 클라인은 갑자기 우주선이 멈추며 닥쳐온 충격에 작은 신음을 냈다.
“으겍.”
고개를 들고 창밖을 바라보니 가속로 진입로가 보인다.
이제 슬슬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되겠네.
클라인이 그리 생각하는 것과 함께 파인만은 가속로 사용 허가증을 시스템에 제출한다.
[시민 파인만, 확인되었습니다. 즐거운 여행 되십시오.]
“출발한다.”
“아, 으흐응?!”
파인만은 짤막하게 경고를 던지고, 곧장 가속로의 가속을 받아 우주로 우주선을 쏘아 보낸다.
또다시 클라인은 콧소리가 섞인 신음을 흘리며 의자에 머리를 살짝 부딪쳤다.
그대로 우주선은 은하계 외곽을 향해 쏘아져 나가기 시작했고, 창밖의 풍경이 시시각각 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세상이 멈춘 것 같은 모습을 보임과 함께 창밖으로 다른 우주선들의 모습이 보인다.
다른 우주선들 또한 주위의 풍경마냥 멈춘 것처럼 느껴지고, 클라인의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른다.
[속도 동기화가 완료되었습니다. 목적지까지 도착하기까지 남은 시간 : 25:74]
파인만은 가속로에 진입하자마자 눈을 감고 잠을 자기 시작했고, 클라인도 계속해서 잉간이만을 바라볼 수는 없었는지 조용히 눈을 감고 약간의 수면을 취한다.
“으음…….”
클라인이 다시 눈을 떴을 때도 우주선은 가속로를 빠져나오지 못했고, 파인만과 클라인은 간단한 식사를 진행했다.
창 밖의 풍경이 변하기라도 하면 좀 덜 지루할 텐데, 가끔씩 다른 우주선들이 사라지는 걸 빼면 아무런 변화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도 잉간이가 있으니 어느 정도는 지루함을 버틸 수 있었다.
마침내 시스템 메시지에 표기된 시간이 끝을 보이고, 서서히 우주선의 속도가 줄어들며 가속로를 이탈한다.
[어서 오세요, (전)우주의 끝에!]
마침내 우주의 끝이었던 곳에 도달한 파인만은 분주하게 우주선의 장비를 교체하기 시작한다.
이제 평범한 장비로는 자기인식에 지장이 생기는 외우주 너머의 공허로 진입할 차례다.
“젠장, 별로 안 좋은데.”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끝물이라고 아주 개판을 치는 모양이야. 정보 폭풍이 심상치 않아.”
“뚫을 수 있겠어?”
“뚫어야지. 뭐.”
투덜거리면서도 돌아가겠단 말을 꺼내지 않는 걸 보면 정말로 위험한 수준은 아닌 거겠지.
이윽고 우주선이 공허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하고, 파인만은 아예 우주선과 동기화하며 자기인식을 보충하는 데 힘쓴다.
“아, 젠장!”
계속된 정보 폭풍의 영향으로 벌어진 정보오염으로 발생한 정보 생명체나 위험한 자연현상들을 피해 우주선을 조종하는 파인만.
욕설을 내뱉으면서도 완벽하게 위험 요소들을 피해간다.
하지만 파인만의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피할 수 없는 위험 요소들도 있는 법.
그러한 것들은 파인만이 직접 마법을 사용해가며 우주선을 지켜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정보 폭풍의 영향을 아예 받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다.
“아이고, 이런.”
강렬한 정보 폭풍의 영향은 잉간이의 차원항 안에도 불어닥치며 내부의 차원 생물들의 자기인식을 뒤틀어놓는다.
다행히 잉간이와 그 룸메이트들은 클라인의 관측 덕분에 그리 큰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자기인식에 성공하지 못한 차원 생물들에게 정보 재해가 일어나며 차원항 내부에 끔찍한 참상이 벌어진다.
“아이고…….”
이대로 놔두면 주변에 정보오염을 퍼트리며 차원항을 완전히 망쳐버릴 것이다.
잉간이와 그 룸메이트들에 대한 보호책은 마련했어도 차원 생물들에 대한 보호책은 마련하지 않은 탓이다.
클라인은 서둘러 차원 생물들에 일어난 정보 재해를 복구한다.
간단한 인식 실패 정도여서 클라인의 수준으로도 충분히 복구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또다시 비싼 마력을 지불 해서 차원 생물들을 데려왔어야 했을 테니까.
계속해서 정보 폭풍은 심해지며 우주선을 갉아 먹고, 클라인은 우주선의 보호장비들의 내구도가 닳아가는 모습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음. 저기. 슬슬 크기 동기화를 해야 할까?”
“크기 동기화? 음. 조금 빠른 감은 있는데, 뭐. 해서 나쁠 건 없지. 오히려 더 여행하긴 편해질 테니…….”
“알겠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클라인은 조금 이른 시기에 차원항과 우주선의 크기를 동기화했다.
미리 준비해둔 우주선의 한 구역과 차원항이 동기화되고, 클라인은 잉간이의 동기화를 안정시키기 위해 차원항 안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에헤헤.”
차원항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잉간이가 클라인을 반기고, 클라인은 쑥스럽게 웃으며 잉간이의 손을 꼭 붙잡아 동기화를 갱신한다.
아직 지구에 도착하기까진 꽤 시간이 남았기에 클라인은 차원항 안에서 즐거이 시간을 보냈고.
“클라인! 도착했다!”
“아? 응! 지금 나갈게!”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단 파인만의 외침을 듣고 클라인은 서둘러 우주선으로 되돌아왔다.
잉간이의 고향, 지구.
보이저의 정보에선 참 아름다운 모습이었는데, 실제로 보면 어떨까?
클라인은 한가득 기대를 안고 창밖을 바라봤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지구는 클라인을 실망케 했다.
“어, 어라?”
시체처럼 창백한 행성,
그것이 바로 지구의 모습이었다.
204화 최초공개! 현재 지구의 모습은 과연?
“:-)”
나무문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클라인이었다.
차원문의 디자인을 새롭게 바꾸며 기능도 바꾼 걸까?
차원문 너머로 빼꼼 고개를 내민 클라인의 모습은 이전에 봤던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차원문을 통해 차원항 안으로 들어온 클라인은 내게 총총 다가오더니 까치발을 들고 내 머리를 만지려 했다.
그렇지만 키 차이 때문에 손이 닿지 않자 촉수까지 동원해서 발돋움하며 내 머리를 어루만졌다.
뭘 하려는 건지 내가 이해하기도 전에 클라인은 머리를 만진 거로 만족했는지 그대로 다시 차원문으로 사라져버렸다.
“뭘 하고 싶던 거야?”
당최 뭘 하려고 왔었던 건지 모르겠네.
클라인이 들어왔던 차원문도 클라인이 나가는 것과 동시에 사라져버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겠네.
한참을 기다려도 다시 클라인이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기에 이만 나는 집으로 돌아가 침대에 누웠고.
“이건.”
그리운 꿈을 꾸었다.
내가 아직 지구에 있을 적의 꿈.
“■■아. 계란말이 해놨다. 엄마 나가면 그걸로 밥 먹으렴.”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온 뒤, 누군가 나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제야 나는 묵직한 몸을 침대에서 끄집어내며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나선다.
탁자 위에 아직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달걀말이의 모습이 보인다.
적당히 밥솥에서 밥을 퍼와 달걀말이만으로 대충 식사를 때우고 시계를 바라본다.
오전 8시.
슬슬 출근하러 갈 시간이다.
빠르게 그릇을 설거지통에 집어넣고 몸단장을 마친 후 집 밖으로 나선다.
출근 시간대의 지옥철에 낑긴 채로 고통받으며 회사로 출근한다.
“■■씨, ■■씨.”
지옥철을 뚫고 회사에 출근해 업무를 보고, 마침내 꿀 같은 점심시간이 되자 누군가가 나를 부른다.
보랏빛 눈동자가 인상적인 그녀는 웃으며 내 이름을 부르며 내게 저녁 약속을 묻는다.
당연히 없다.
그렇게 이야기하자 그녀는 기쁜 듯 웃으며 나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러 간다.
평소에는 잘 의식하지 않고 있었지만 이렇게 달라붙으니 그녀의 몸에서 달큼한 향기가 흘러나온다.
여러 번 맡았던, 정신이 아득해지는 듯한 진득한 향기.
순간 내가 무엇을 하는지도 잊어버릴 것 같았기에 나는 고개를 흔들며 서둘러 정신 차렸다.
“■■. 피곤하면 퇴근하지 그래? 벌써 3일째인데…….”
모니터를 들여다보다 잠깐 까무룩 졸았던 걸까?
선배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보랏빛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그렇게 말한다.
고개를 흔들며 이것만 완료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며 모니터를 바라본다.
할 게 없어서 한가한 걸까?
선배는 내 곁에 자리를 잡고 무료한 목소리로 이번 프로젝트를 품평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난 이게 뭔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어. 우주 탐사선에 간섭할 기술이 있다면 그걸로 테라포밍이나 하지, 뭐 하러 탐사선을 업그레이드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부터 이어져 온 선배의 불평.
사실, 선배의 불평은 아주 근거 없는 트집이 아니다.
평시라면 다들 선택했을 합리적인 선택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창문 밖으로 보이는 멸망해가는 세상의 모습.
핵전쟁의 여파로 인류는 차분히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다.
테라포밍을 시도하기에는 인류가 가진 자원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렇기에 인류는, 우주로 쏘아 보낸 자신들의 탐사선들에 유서를 담기 시작했다.
“자가관측이니 뭐니 하는 개념을 볼 때마다 아인슈타인이 옳았다는 걸 느낀다니까.”
선배의 투덜거림을 뒤로 하며 보이저 시리즈에 추가할 데이터를 정리하는 작업을 계속한다.
선배는 그저 가만히 책상에 머리를 묻고 내가 작업하는 모습을 바라볼 뿐이다.
이윽고 밤이 찾아오고, 나는 슬슬 작업을 마무리하여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끝마친다.
집에 도착해 문을 열고 내 방으로 돌아와 가만히 백업해둔 인터넷과 창문 너머로 비치는 죽어가는 행성을 번갈아 바라본다.
벌써 네 번째 폭발이다.
지금 내려가 봤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신이 내려와서 세상을 다시 창세하지 않는 한, 세상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무력감을 느끼며 창문에서 눈을 돌리고 백업해둔 영상들을 보며 낄낄거리다 침대에 눕는다.
내일도 회사에 나가야 한다니, 정말 가기 싫다.
일하지 않고 인생을 날로 먹을 수는 없나?
스마트폰을 들어 올리고 쥬튜브 영상을 보던 와중 점점 피로가 몰려와 눈이 감긴다.
그리고 내가 다시 깨어났을 땐.
“윽……!”
내가 무슨 꿈을 꾼 거지.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꿈의 내용은 허공으로 흩어져 날아가 버리고, 욱신거리는 두통만이 내가 꿈을 꾸었다는 사실을 알려줄 뿐이다.
그립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의 꿈.
비척거리며 일어나자 낯익은 천장이 눈에 들어온다.
자기 전에 보았던,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던 바로 그 장소.
“어……?”
뭐지?
내가 꿈을 꾼 걸까?
아니, 꿈을 꾼 건 맞는데.
당황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자 내가 기억하던 그 방의 모습이 나를 반긴다.
심지어 내가 사용하던 스마트폰까지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배터리가 다 되었는지 전원이 들어오진 않았지만 말이다.
전기가 부족한 것인지 조명이 전보다 어두워진 것을 제외하면 내가 기억하던 모습 그대로의 방에 나는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려 애썼다.
처음에는 꿈이길 빌었는데, 정말 꿈이었던 걸까?
아니면 내가 단순히 잠에서 깨어나서 얼마 되지 않아서 혼란스러운 것일까?
어쩌면 이것도 내가 꾸는 꿈인 게 아닐까?
온갖 생각이 머리를 흔들어댄다.
이 모든 여러 경우의 수 중에서 나에게 가장 좋지 않은 경우는.
내가 지금껏 경험했던 것이 모두 꿈이라는 것.
내가 겪었던 그 모든 일이 꿈일 리가 없지만, 만약에 그게 정말 꿈이라면.
그래선 안 된다.
“……블랑카? 아리스? 리키?”
그녀들의 이름을 불러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에포나? 에포나?”
심지어 에포나마저 아무런 반응이 없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
늘 내 곁에 있어 준다던 그녀의 말은 거짓, 아니. 단순한 내 망상이었던 걸까?
내가 지금껏 겪어왔던 그 모든 게 단순한 한때의 꿈이었던 걸까?
몰려드는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나는 마지막으로 내가 의지할 이름을 부른다.
“……클라인? 클라인? 어딨어?”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어미를 찾는 아이마냥 클라인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두려움이 눈물과 함께 흘러넘치려 할 즈음.
똑똑.
누군가가 방문을 노크하더니, 낯익은 얼굴이 문틈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
클라인이, 내 부름에 응답한 것이다.
* * *
“예상하던 모습이랑 너무 다른데…….”
“뭐, 시간이 꽤 흘렀으니까.”
클라인이 봤었고, 추측했던 지구의 모습은 푸른 구슬 같은 모습이었다.
초록빛 식물들과 푸른 바다가 넘쳐흐르는 생명으로 가득한 행성.
하지만 지금 지구의 모습은 어떠한가?
우선 지구를 뒤덮은 먼지처럼 보이는 대량의 금속 덩어리들부터 시작해서 멀쩡한 구석이 없어 보인다.
초록빛 식물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지 오래인 걸까?
회색의 금속성 지면만이 그 모습을 당당하게 드러낸다.
그뿐만이 아니다.
바다 또한 대부분 사라지고 작은 호수처럼 보이는 것들만이 남아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요소들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가장 큰 변화.
그것은 지구의 위성이었다.
지구인들이 ‘달’이라고 불렀을 지구의 위성.
그것이 어딜 둘러봐도 클라인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대신, 회색의 금속 벌판 한가운데에 한때 달이었던 것의 잔해가 박혀 있었다.
“저거, 달. 맞지?”
“뭐, 보유 정보는 달 맞는데.”
“진짜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밀렵꾼들이 달을 떨어트린 걸까?
아니, 그런 짓을 할 리는 없겠지.
그럼 지구인들이 스스로 달을 지구에 떨어트렸다는 건데.
지구인들이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긴 하지만, 클라인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당연코 이것이었다.
“마력 없이 저런 게 가능하다고?”
“뭐, 가능한가 보지.”
클라인이 지구의 모습을 보며 경악하는 와중에도 파인만은 무덤덤한 모습으로 정체불명의 장치들을 작동시키고 있었다.
이어서 파인만은 클라인에게 자신이 생각한 추측을 말하기 시작했다.
“다른 외부 요소의 개입이 아니라, 지구인들이 저지른 일이겠지. 달을 떨어트린 것도, 지구가 저렇게 된 것도.”
“어째서? 왜 자기가 살아가는 땅을 망가트리는 거야?”
클라인은 도저히 파인만의 추측을 믿을 수 없었다.
그 어떤 생물이 자기가 살아가는 땅을 파괴해서 자신 또한 살아가기 어렵게 만든단 말인가?
클라인의 경악성에 파인만은 고개를 으쓱하며 적당한 예시를 하나 들었다.
“무오가 너무 늘어나면 초원이 황무지로 변하잖아? 그거랑 비슷한 거야.”
파인만은 클라인에게 자신의 서식지를 파괴하는 생물이 없다는 착각을 정정해줬다.
그 흔한 무오조차 수가 늘어나면 자신의 서식지를 파괴하지 않는가?
파인만의 생각에선 지구인들이 자신들의 행성을 파괴하는 건 별일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클라인은, 지구인들이 자신들의 행성을 자기 손으로 파괴할 정도로 멍청하리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잉간이의 동족인데, 자신들과 같은 지적 생물인데 그런 짓을 손으로 택하겠는가?
클라인이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 파인만은 클라인의 의문을 해소할 새로운 의견을 내놓았다.
“애초에 마력이 없으니 저렇게 되는 건 당연한 거지.”
“마력이 없어서?”
“그러니까 지구인들은 마력 대신 물질들로만 문명을 발전시킨 거잖아?”
“응. 그렇지.”
“마력은 가공하기 편하니까, 한 행성의 마력을 모두 사용하지 않더라도 다른 행성으로 이주할 에너지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지.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물질을 가공하는 건 무척 효율이 떨어지잖아?”
“그렇지…….”
마법으로는 단순히 주문 몇 마디만 외우면 되는 일을, 물질로 이뤄내기 위해선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잉간이가 불을 피우는 모습을 떠올린 클라인은 파인만의 설명을 단번에 이해했다.
고작 불 하나 피우는 것인데 잉간이는 온갖 고생을 해서 불을 피워내지 않았는가?
“그러니까 지구인들이 새로운 거주지. 다른 행성으로 이주하고 싶어도 에너지가 부족하다 이 말이지. 그걸 해소하기 위해서 저 지구인들은 자신들의 행성을 박살 내며 에너지를 모은 거고.”
“……그렇겠네.”
그렇게 자신들의 행성들을 박살 내가며 에너지를 모은 끝에, 그들은 결국 외우주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어마어마한 성과지만, 저렇게 고향이 망가져서야 의미가 있을까?
클라인이 굳은 표정으로 지구를 내려다보던 그때, 파인만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찾았다. 이 자식들.”
“누구?”
“밀렵꾼들. 역시 물리적 접촉으로 밀렵하고 있었네.”
파인만이 클라인에게 보여준 것은 거대한 가스 행성의 주위를 떠다니는 작은 우주선들의 영상이었다.
“저길 본거지로 삼고 드론들을 보내서 인간들을 납치하고 있더라.”
“밀렵꾼들이 저기에 있다는 거야?”
“아니. 저건 단순한 중계기지. 본체는 아마 좀 더 외곽에 있지 않을까? 그래야 인간들을 운송하지.”
예전에 파인만이 했듯, 자기인식을 통해 인간들을 납치하진 않는 모양이네.
하긴, 밀렵꾼인데 굳이 법을 지킬 필요는 없긴 하지.
파인만은 천천히 밀렵꾼들의 전초기지를 살피며 쉽지 않다는 듯 한숨을 내뱉었다.
“솔직히 말해서 본체를 처리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겠고…….”
“전초기지들만 어떻게 처리해도 되지 않아?”
“그렇긴 한데. 이 녀석들 봐봐. 지구에도 만들어놨네?”
“지구에도?”
“어. 이럼 저길 없앤다고 해도 지구는 멀쩡하니 밀렵하는 데는 아무 문제 없을 거야.”
클라인과 파인만은 처음에는 그저 간접적인 접촉만으로 밀렵꾼들을 막아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구에 밀렵꾼들의 전초기지가 위치한 이상 직접 접촉해서 전초기지를 박살 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된다면 이 일을 할 수 있는 건, 바로 잉간이와.
“마음 같아선 잉간이에게 시키고 싶긴 한데.”
“내가 갈 거야.”
클라인 자기 자신뿐이었다.
파인만은 우주의 전초기지를 박살 내고, 클라인은 잉간이와 크기 동기화를 통해 지구의 전초기지를 박살 낸다.
아주 간단한 계획이지만, 상당히 귀찮은 계획이다.
“네가? 지구에 너무 여파가…….”
“잉간이의 기억을 이용하면 되잖아. 네가 잉간이를 데려왔을 때 썼던 방식의 정반대.”
파인만이 잉간이를 데려왔을 때 썼던 방식의 반대.
파인만이 잉간이의 자기인식을 옅게 만들어서
잉간이를 납치했었다면, 이번에는 잉간이의 자기인식을 증폭시켜 잉간이의 기억을 통해 클라인과 잉간이를 지구로 내려보낸다는 계획.
당연하게도 파인만은 클라인이 그런 방식을 사용하는 걸 그닥 원치 않았지만.
“내가 갈게.”
“……그래라.”
파인만은 클라인의 고집을 꺾을 자신이 없었다.
그래, 지구에 정보를 압축한 클라인이 내려간다 해도 위험한 일은 없겠지…….
설마 지구인들이 클라인을 다치게 만들 정도의 기술을 가지고 있겠어?
그렇게 판단한 파인만은 고개를 끄덕여 클라인의 행동을 허락했다.
205화 지구에서 일어난 일
나무문 형태의 차원문에서 빼꼼 얼굴을 내밀었을 때처럼 클라인은 문틈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나 애달픈 순간에 나타났기에 그 모습이 환각이나 환영이 아닌지 의심될 정도였다.
하지만 환각이나 환영이든 뭐든 상관없을 정도로 내게 안도감을 선사했고, 나는 조심스럽게 다시 한번 클라인의 이름을 불렀다.
“클라인?”
“:-)”
클라인은 내 부름에 총총걸음으로 다가오며 화답했고, 나는 한결 안정된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볼 수 있었다.
그래, 지난번에도 클라인이 지구와 비슷한 환경을 만들어서 내게 보여주지 않았는가?
기억을 읽었든 뭐든 해서 이런 환경을 만들어낸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다른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이 풍경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안정을 되찾는 사이, 클라인은 정신 사납게 방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구경했다.
시야 한구석에서 자꾸만 빨빨거리는 게 꽤 거슬려서 컴퓨터를 구경하는 클라인을 등 뒤에서 붙잡는다.
체격 차 덕분에 클라인의 양팔 사이에 팔을 끼워 넣고 들어 올리는 것으로 간단하게 클라인을 붙잡을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놀랐는지 클라인이 허공에서 발을 동동거리고, 나는 클라인을 침대에 앉힌다.
“조금만 기다려 봐.”
“:-(”
클라인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아마 지금쯤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고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클라인을 얌전히 침대에 놔두고 컴퓨터의 전원을 켜보려 시도해본다.
일어나자마자 바로 컴퓨터를 켜려고 한다니, 뭔가 버러지 같은 일을 하는 거 같은데?
하지만 희미한 전등불에서 짐작 갔듯, 전력이 부족한지 컴퓨터의 전원은 아무리 버튼을 눌러도 켜지지 않았다.
쩝, 컴퓨터가 켜진다면 여기가 정말 지구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클라인의 손을 붙잡고 방 밖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방 바깥은 내가 기억하던 그 모습에서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폐허처럼 벽과 천장에 금이 쩍쩍 가 있고 쓰레기들과 잔해들이 가득한 모습.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내 기억 속의 대략적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어두침침한 조명 속에서 기억을 더듬어가며 지금 내게 도움이 될만한 물건들을 찾는다.
일단 냉장고부터 뒤져볼까?
냉장고를 열어봤지만 이미 누군가가 안에 든 내용물들을 가져간 듯 엉망이 되어있을 뿐이었다.
뭐, 먹을게 아직까지 남아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그것보다 내가 가장 먼저 찾으려는 것은 따로 있었다.
분명히 냉장고 근처에 보관함이 있었는데 어디 있더라?
내가 냉장고 주위를 뒤지며 필수품을 찾는 동안 클라인은 집 안의 온갖 것들을 신기하다는 듯 둘러봤다.
클라인은 처음에는 서랍장들을 마구마구 열어보더니 뭔가 글자가 적혀있는 종이를 발견하고는 진지하게 종이를 관찰하기 시작한다.
그러는 동안 나는 냉장고 근처의 벽에서 버튼의 흔적을 발견했다.
버튼의 흔적을 따라 벽을 더듬으니 미묘한 틈새가 느껴진다.
전력이 끊긴 덕분에 버튼을 눌러도 작동하진 않겠지.
하지만 덕분에 틈이 벌어져서 충분히 억지로 열 수는 있을 것 같다.
“……상태창.”
이제는 능숙하게 에포나의 도움이 없이도 허공에서 정보를 분리해내어 상태창을 만들어낸다.
상태창을 그대로 틈새에 끼워 넣고 거의 부수다시피 하자 숨겨진 공간이 드러난다.
“있다.”
역시, 정체불명의 탐사자도 여기까진 확인하지 못했는지 멀쩡하게 남아있다.
보호복과 산소통.
도시 밖으로 나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물건들이다.
보호복이 아직 멀쩡히 작동한다는 걸 확인하고, 나는 우선 보호복을 몸에 걸친다.
오랜만에 입는 보호복은 꽤 거추장스러웠지만, 그래도 이게 없으면 밖을 돌아다닐 수 없으니까.
챙길 걸 다 챙기고 뒤로 돌아서 클라인을 찾자, 클라인은 여전히 뭔가를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하고 등 뒤로 다가가 클라인이 보는 걸 함께 봐보니, 익숙한 얼굴들이 보인다.
클라인이 보고 있던 것은 나의 가족사진이었다.
나의 어린 시절을 담은, 즐거웠던 한때의 사진.
나의 부모님.
그리고.
어린, 나?
나. 인가?
나다.
“윽…….”
기억 속에 남아있는 얼굴이지만, 기억 속의 얼굴과 다르다.
나의 얼굴인데 나의 얼굴이 아니라면, 나와 나는 다른 것인가?
아니, 애초에 나는 잉간이 아니라.
나는 ■■■이고, ■■■이며, ■■■이다.
나는 하나인데, 나는 여럿인가?
아니, 내가 여럿일 리 없다.
그럼 왜, 나는 하나인데 이름과 얼굴은 여럿인 거지?
어째서?
생각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휘몰아치며 내 정신을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머리가 아파.
“:-0!”
클라인이 뭐라 소리치는 것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머리 아파.
“나는, 나는…….”
나는 ■■■.
나는 ■강■.
나는, 나는…….
“헉……?!”
찌직.
뭔가 찢어지는 것 같은 환청이 들려오는 것과 함께, 클라인이 서둘러 내 앞의 사진을 찢어버린다.
그리고.
“왕.”
어디선가 나타난 에포나가 살포시 내 다리에 얼굴을 비비고.
내 머릿속은 그제야 간신히 진정되었다.
나를 어지럽히던 것들이 말끔히 사라지고, 나는 가만히 에포나를 품 안에 안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괜찮아. 조금 놀랐을 뿐이니까…….”
클라인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계속해서 나를 살핀다.
서둘러 빨리 여길 벗어나야 한다.
이곳은 그립지만, 위험한 장소다.
내가 여럿의 내가 될 가능성이 있으니까.
에포나가 가까스로 묶어둔 여럿의 나가 다시 떨어질 위험성이 너무 크다.
이곳의 공기나 사소한 가구 하나하나가 나의 추억을 자극한다.
과거의 나로 돌아가기 전에 빨리 안락한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문을 열고, 벽에 희미하게 빛나는 비상구를 따라 밖으로 걸어간다.
마지막으로 보호복의 작동을 확인하고, 산소통을 장착하고 문손잡이를 잡는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그 끔찍한 곳으로.
있는 힘껏 각오하고 문을 열었지만 나를 마주한 것은 방사능으로 오염된 대지가 아니었다.
나를 마주한 것은, 푸른 잔디가 가득한 초원의 모습이었다.
나는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걸까?
* * *
잉간이가 곤히 잠든 순간.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잉간이의 자의식이 가장 옅어지는 순간이다.
그 말인즉슨, 별다른 저항 없이 잉간이의 기억을 이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괜히 깨어있을 때 잉간이의 의식을 엿보다간 잉간이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사실, 이런 짓은 중앙 정부가 그리 좋아하는 짓은 아니다.
오히려 불법 행위로 규정하는 행동이지.
하지만 이곳은 지구.
중앙 정부의 눈길이 닿지 않는, 밀렵꾼들이 판치는 장소다.
들키지만 않으면 범죄가 아니잖아?
뭔가 법을 어긴다는 찝찝함에 클라인은 속으로 합리화를 하며 조심스럽게 잉간이의 기억을 엿보기 시작했다.
자신이 모르는 잉간이의 과거라니, 어떤 모습이 펼쳐질지 기대된다.
“시작됐나?”
잠든 잉간이의 모습을 지켜보던 클라인은 잉간이가 꿈을 꾸기 시작했다는 징조를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잉간이의 꿈에 접속을 시도했다.
영화를 관람하는 기분으로 잉간이의 꿈에 들어간 클라인은 곧바로 잉간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 잉간이다.”
잉간이의 기억은 클라인의 방과 비슷한 공간에서 시작되었다.
그 이후 이어진 일들은 클라인에게 무척이나 익숙한 모습들이었다.
좁은 방 안에 자신의 몸을 가두고, 비생산적인 나날을 이어나가는 모습.
자신의 꼴사나운 과거를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긴 했지만, 잉간이의 과거라는 걸 아니 묘한 동질감이 드는 것 같다.
객관적으로 재미없는 광경이지만 클라인은 잉간이의 일상을 지긋이 관찰했다.
그때, 잉간이의 일상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
그런데 잉간이의 기억이 뭔가 이상하다.
연속되는 것이 아니라, 끊긴 필름을 억지로 이어붙인 것 같이 끊어져 보인다.
거기에 더해 기억의 내용도 앞뒤가 맞지 않고 뒤죽박죽이다.
아무래도 잉간이가 정보 중첩된 상태인 것이 기억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걸까?
뭔가 기억에 혼탁이 있다고 해도 이걸 바로잡을 수는 없다.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고, 기억의 혼탁을 바로잡는다는 건 잉간이의 정보 중첩을 풀어버리는 일과 마찬가지니 말이다.
잉간이의 기억이 점점 진행되며 잉간의 무의식이 흐릿해지고, 클라인은 그 틈을 노려 잉간이의 자기인식을 재구성한다.
꿈속에서 재구성된 잉간이의 자기 인식은 꿈속의 풍경으로 잉간이를 전송시킨다.
실제 기억과 달라진 부분을 클라인이 보충하자 전송이 완료된다.
이윽고 잉간이와 이어진 상태의 클라인은 잉간이의 전송에 휩쓸려 지구로 전송된다.
“우윽…….”
자신의 몸보다 수천 배는 작은 바늘구멍에 몸을 구겨 넣는 것 같은 기분을 맛본 클라인은 인상을 구기며 비틀거린다.
전송 직후의 불쾌감에서 벗어난 클라인은 서둘러 잉간이를 찾았다.
여긴 잉간이의 기억에서 봤었던 건물인 것 같은데, 뭔가 많이 망가진 느낌이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피던 클라인은 잉간이의 기억에서 봤었던 방을 발견했다.
“어?”
저 방 안에 잉간이가 있으려나?
클라인은 설레는 마음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방 안을 살폈고.
“아, 잉간이다!”
“클라인?”
잉간이를 발견한 클라인은 들뜬 마음에 탄성을 질렀고, 클라인의 목소리를 들은 잉간이도 클라인을 눈치챈 듯 클라인의 이름을 불렀다.
오오, 여기가 잉간이의 방이구나?
이미 잉간이의 기억으로 대충 살펴보긴 했지만, 직접 보는 건 또 다른 느낌이다.
별다른 장식이 하나 없이 정보 단말기로 보이는 기계와 침대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방.
클라인이 정신없이 잉간이의 방을 구경하는 게 거슬렸던 걸까?
잉간이는 클라인의 뒤로 접근해 클라인을 침대에 앉히고는 정보 단말기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뭔가 찾는 정보가 있는 걸까?
하지만 아무리 봐도 저 단말기가 가지고 있는 정보는 별 볼 것 없어 보이는데.
잉간이도 그리 생각했는지 정보 단말기에서 떨어지고는 클라인의 손을 꼭 붙잡고 방을 나섰다,
갑작스럽게 환경이 바뀐 것에 당황하면서도 익숙한 풍경이어서 그런지 잉간이는 빠르게 적응하고 주위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잉간이는 한동안 이곳에서 나가지 않을 것처럼 보이니 클라인 또한 이곳을 좀 더 깊숙이 탐사하기로 마음먹고 움직였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클라인은 최대한 잉간이의 종족이 사용하는 언어가 적혀있는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을 긁어모았다.
잉간이가 클라인의 목소리를 보며 공용어를 추측하듯, 클라인도 잉간이의 물건에 적힌 언어들을 보며 잉간이의 언어를 익히려는 것이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제대로 된 자격증이 없으면 범죄나 다를 바 없는 행동이지만, 뭐 어떤가?
들키지만 않으면 장땡인데.
“으음…… 상형 문자는 아닌 것 같고. 문명 발전 단계로 짐작해보면 표음 문자려나?”
클라인이 잉간이의 문자를 해독하려 애쓰던 그때, 클라인은 서랍 한구석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이건…….”
어린 인간의 사진들을 보관하고 있는 책.
아무리 봐도, 잉간이의 어린 시절을 기록해둔 앨범처럼 보인다.
“아기 잉간이다. 우와…….”
잉간이의 아기 때의 모습은 이랬구나.
클라인은 앨범의 사진들을 모두 머릿속에 영구 보관해버릴 기세로 진지하게 앨범을 보기 시작했다.
부모님처럼 보이는 인간들이 계속 등장하는 걸 봐선 잉간이의 문화가 대충 짐작이 간다.
일부다처제나 일처다부제가 아닌 일부일처제가 기본인 문화였을 듯하다.
거기에 더해, 아마 공동 육아가 아닌 개인 육아가 주가 되는 사회였을 것이고.
행복해 보이는 가족의 모습을 보니 뭔가 가슴이 술렁이는 기분이다.
나도 저런 가족을 이룰 수 있을까?
평범한 가족의 형태가 아니어도 좋다.
단지, 내가 겪었던 것과 비슷한 가족만 아니면 된다.
그러고 보니 요즘에는 아예 결혼하지 않고 반려생물과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다던데, 그것도 일종의 가족으로 봐도 되는 걸까?
그렇다면 나도 잉간이와 가족을 이룬 셈이 되는 걸까?
잉간이와 가족을 이룬다면, 나는…….
잉간이의 가족사진을 보고 마음이 복잡해진 클라인은 잉간이가 접근하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0~0”
클라인이 잉간이를 눈치챈 것은 아기 잉간이가 학교에 들어갔을 무렵으로 성장했을 시점이었다.
“이, 잉간아?”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이내 클라인은 잉간이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머리가 아프다는 듯 머리를 부여잡고, 심지어 자기 인식마저 흐릿해지고 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일까?
당황에 당황을 거듭한 덕분인지 클라인은 침착하게 잉간이의 상태를 살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어, 자기 인식이 옅어지는 건 아니네. 오히려 너무 과도하게 넘쳐서 충돌하는 거야…….”
자기 인식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기 인식이 너무 부족해져서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
또 하나는, 자기 자신을 너무 과하게 인식하여 자신을 이루는 요소요소를 모두 인식하게 되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지금 잉간이의 상황은 후자.
하지만 전신의 세포를 인식한다거나 하는 일반적인 증상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 어째서 잉간이가 이러는 거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던 클라인은 잉간이의 성질 하나를 떠올렸다.
“……정보 중첩.”
그래, 정보 중첩이다.
지금 잉간이는 정보 중첩이 풀리기 일보 직전의 상황인 것이다.
보통은 정보 중첩이 이뤄지면 중첩된 자기 인식이 서로 충돌하여 버티지 못한다.
하지만 잉간이는 차원 파괴자와의 공생관계도 있고, 마력을 만들어내는 기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덕분에 멀쩡했다.
대부분의 생명체는 고밀도의 정보를 마력으로 변환하는데, 정보 중첩이 이뤄진 생명체의 신체는 자신의 신체 또한 마력으로 변환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
중첩이 이뤄지자마자 마력으로 변화되지 않을 정도의 낮은 중첩이라면, 몸에서 생산되는 마력이 몸에 쌓이면서 위험 수치까지 정보가 중첩되어 일정 한계를 넘어서면 마력 변환이 시작된다.
하지만 잉간이는?
몸에 마력을 만드는 기관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아무리 중첩이 되더라도 마력 과다증 같은 질병에는 걸리지 않는다.
그럼, 지금 잉간이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은 무엇일까?
해답은 간단했다.
중첩된 정보들이 각자 다르게 자기 인식을 시작하며 정보의 중첩을 붙잡아두고 있는 연결고리가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대로 잉간이를 놔둔다면 스노우 스톤의 그 불운한 키메라 인간들처럼 펑, 하고 폭발하고 말 것이다.
다행히, 차원 파괴자가 그 약해진 연결고리를 붙잡아주고 있지만, 외부에서의 유입을 차단해야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
갑자기 잉간이의 자의식이 폭주하기 시작한 이유, 그것은.
“이, 이건가?”
아마도, 이 앨범이 원인이겠지.
클라인이 지금 주목하고 있는 것은 사진 속의 잉간이의 가슴팍에 달린 명찰처럼 보이는 무언가.
아마, 저 명찰에는 중첩되기 전의 이름이 쓰여 있는 게 아닐까?
그 덕분에 중첩된 정보들 사이에 불균형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고.
원인을 파악했으니, 클라인은 망설임 없이 행동에 나섰다.
서둘러 잉간이의 모습을 앨범에서 지워버린 것이다.
클라인의 선택이 옳았던 것일까?
잉간이는 차츰차츰 안정을 되찾아 갔다.
더불어 자기 인식의 안정에 온 힘을 쏟던 차원 파괴자도 모습을 드러내고 잉간이의 정보들 사이의 균형을 바로잡아준다
“0*0”
안정을 되찾은 잉간이는 인상을 찌푸리며 뭐라 외친다.
이제 괜찮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인 것 같지만 클라인은 도통 안심할 수 없었다.
이곳은 지구.
잉간이의 추억 속의 장소.
그렇다면, 지금처럼 잉간이의 자의식이 폭주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장소가 아닐까?
어쩌면 내가 괜히 잉간이를 지구에 데려온 건 아닐까?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불안한 표정으로 잉간이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언제든지 도움을 줄 수 있게끔.
206화 잉간이와 함께하는 즐거운 지구 산책 (1)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분명히.
분명히 바깥은 모든 희망이 사라진 죽음의 땅이었을 텐데.
어째서 초록빛 벌판이 내 눈앞에 장엄한 그 자태를 들어내고 있는 걸까?
멸망한 후의 지구가 다시 초록 벌판이 되는 클리셰는 익숙하지만, 그건 적어도 몇천, 몇 만 년의 시간이 흘러야 하는 것 아니었나?
아리스가 내게 푸른 벌판이 있었다고 말했을 때, 나는 기껏해야 작은 공원 정도의 크기를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지하도시에서 밖으로 나온 순간부터 지평선까지 시선을 가로막는 것 하나 없이 길게 뻗은 대평원이 나를 반겼다.
나는 보호복의 머리 부분을 벗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이건 내 예상을 전혀 다른 상황인데?
아니, 잠깐만.
조금만 진정하고 잘 생각해보자.
내가 있던 지하도시는 애초에 도시 한가운데에 지어졌었어.
그런데 왜 지금은 주위에 도시의 흔적이라곤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지?
답은 간단하다.
누군가가 도시를 밀어버리고, 이 풍경을 만든 것이다.
공기를 떠돌던 방사능을 어떻게 제거했다던가, 저 식물들을 어디서 구해왔냐는 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누군가가 지구의 환경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고 있다.
저 우주 정거장에 보관되어 있던 다른 방주들이 임무를 완수한 걸까?
그게 아니라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용의자가 존재하긴 한다.
하지만 정말 그 사람들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다.
아직 이곳이 정말 지구인지 확신할 수도 없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이렇게 초원에 떨어지니 첫날이 생각난다.
클라인에 의해 차원항으로 끌려왔던 첫날, 그때도 이런 막막할 정도로 넓은 초원을 마주했었지.
그땐 황금빛이었고, 지금은 초록빛이라는 것이 다르긴 하다.
그리고 또 다른 것은.
“:-o”
나와 함께 클라인이 있다는 것이다.
혹시나 클라인이 길을 잃을까 손을 꼭 붙들고 평원을 걷기 시작한다.
사박사박 수풀을 헤치며 일단 앞으로 나아가 본다.
걷다 보면 뭔가 길이 나올 것이라 믿으며.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 평원에서 한동안은 헤매야 할 것 같은데.
“:-)”
클라인은 뭔가 따로 생각해둔 목적지가 있는 걸까?
길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에 한숨을 내쉬자, 클라인이 나보다 먼저 앞서나가며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아무리 봐도 아무것도 없는 방향인데?
하지만 내 멋대로 걸어도 아무것도 없는 방향으로 가는 건 마찬가지니 나는 기꺼이 클라인의 손에 길잡이를 맡기고 걸음을 옮겼다.
차원항 첫날의 나였다면 진작에 지쳐 쓰러졌겠지만, 그동안의 고생을 통해 성장한 나는 오히려 클라인을 잠깐 안고 걸음을 옮길 정도였다.
처음에는 힘차게 발걸음을 옮기던 클라인이 작아진 몸에 익숙하지 않은 건지 금방 지쳐 쓰러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클라인은 계속 그 작은 손가락으로 나아갈 방향을 가리켰고, 그 손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던 그 순간.
“응?”
무언가 투명한 막을 지났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와 동시에 보호복에서 경고음을 울려대기 시작했다.
[경고, 방사능 감지됨.]
나는 서둘러 보호복을 다시 착용하고 주위를 살폈고, 초록의 평원이 끝나감을 깨달았다.
어느덧 내 시야에는 내가 기억하던, 빌딩의 폐허로 이뤄진 고철의 산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0!”
빌딩의 폐허를 보자 클라인이 잔뜩 흥분한 듯 뭐라 소리치는데, 안타깝게도 뭐라 말하는지 모르겠다.
목적지에 도착한 건가, 싶어도 여전히 손가락을 접을 기세가 보이진 않는다.
여기가 목적지가 아닌 걸까?
여기가 목표가 아니라면, 더 긴 거리를 걸어야 한다는 건데 솔직히 그건 불가능하다.
이 방사능으로 오염된 공간에서 먹을 걸 구할 수도 없고, 내 체력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리 생각하던 그때, 폐허의 정적 속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잉간~!”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바라보자, 완전무장 상태의 블랑카가 갈라진 아스팔트 위를 다그닥거리며 뛰어오고 있었다.
순식간에 나와의 거리를 좁힌 블랑카는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야. 무사했구나, 잉간.”
“어, 여긴 어떻게?”
“정신을 차려보니 이상한 건물 안이었어. 잉간도 그랬어?”
“어. 나도 그랬는데, 몸은 괜찮아? 막, 피곤하진 않고?”“걱정하지 마. 아주 끄떡없어.”
혹시나 방사능에 피폭된 게 아닌가 걱정했지만, 블랑카의 갑옷은 겉보기처럼 강화복에 있을 기능은 다 있는 모양이다.
블랑카가 안전하다는 걸 깨닫고 나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리스하고 리키는?”
“모르겠어. 마력을 추적하려고 해도, 이상하게 주위에서 마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아.”
이어서 블랑카에게 아리스와 리키의 행방을 물었지만, 돌아온 것은 모른다는 답뿐이었다.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어. 여긴 원래 마력이 없거든.”
“마력이 없다니?”
“아마. 아마도…… 여기가 내 고향인 것 같거든.”
“고향? 여기가 지구라고?”
내 대답을 들은 블랑카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말해주던 지구의 모습과는 정반대니 말이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블랑카에게 간략한 설명을 해주었다.
“전에는 너한테 말한 풍경이었는데, 자기들끼리 치고받다 이렇게 됐거든.”
“아, 그러고 보니…….”
내가 해준 지구의 이야기들 중 뭔가 짐작이 가는 게 있었던 걸까?
블랑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내 설명을 수긍했다.
“하긴. 정말 여기가 지구라면 마력이 아예 존재하지 않겠지. 리키나 아리스가 마력을 가지고 있어도…… 주위에 마력이 없으면 변환은 불가능하니까.”
“응? 그냥 몸 안의 마력을 쓰면 되는 게 아냐?”
“내부의 마력은 일종의 촉매 같은 거야. 바깥의 마력을 자신이 원하는 성질로 바꾸기 위한 거지. 외부에 마력이 없으면 기껏해야 신체 강화밖에 할 게 없을걸?”
“이런…….”
리키는 신체 자체의 성능이 뛰어나니 괜찮겠지만, 아리스는 조금 걱정이다.
아무리 아리스가 일반인보다 강한 육체를 가지고 있어도 마법을 쓸 수 없다면 꽤 고생할 테니 말이다.
거기에 더해서, 아리스가 날아다니는 것도 마력을 이용한 방법이 아니었나?
진짜 아리스가 걱정되긴 하네.
서로의 정보를 교환하자 그제야 내 옆에 있는 클라인을 발견한 걸까?
블랑카는 클라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내게 질문했다.
“옆에 있는 그건, 뭐야?”
“클라인. 직접 나랑 지구로 온 거 같더라고.”
“……같이 지구로 왔다고?”
“아마. 자고 있을 때 이동해서 잘은 모르겠지만 말이야.”
“흐음…….”
블랑카라면 클라인을 꽤 격하게 반길 줄 알았는데, 어째 반응이 별로다.
한때는 신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아니라는 걸 알게 되어서일까?
“여긴 뭐하러 온 건데?”
“……관광? 이겠지? 일단 클라인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걷다가 여기까지 온 거긴 한데.”
뭐…… 클라인이 나와 함께 지구에 와서 할 일이 뭐가 있겠어?
그냥 관광하러 온 거겠지.
“뭐, 순간이동이나 그런 건 못한대?”
“몰라? 내가 보기에는 육체적 능력은 그냥 보이는 그대로의 힘인 것 같은데. 마법도 못 쓰지 않을까?”
블랑카의 설명대로라면 클라인도 지구에서는 마법을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
내 설명을 들은 블랑카는 한숨을 푹 내쉬며 클라인을 정의했다.
“그러니까. 지금은 완벽한 짐 덩어리다 이 말이네?”
“그렇……지?”
블랑카는 클라인은 한참 동안 노려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네. 솔직히 마법을 쓸 수 있다거나 신체 능력이 뛰어나다고 하면 그냥 걷게 하고 싶었는데…….”
“응?”
“빨리 타. 어쨌든 네가 선택한 사람이니까…….”
아무래도 블랑카가 지구를 돌아다니는 동안 탈것 역할을 해줄 생각인 모양이다.
슬쩍 클라인을 바라보자 먼지를 털어내듯 머리카락과 촉수를 툭툭 털어내는 모습이 보인다.
내가 뭘 선택했다는 지는 몰라도 블랑카로썬 큰 결심을 한 것인 모양이다.
“고마워.”
“칭찬은 됐고, 보니까 클라인은 따로 가고 싶은 곳이 있는 모양이니 거기에 내리고 우리끼리 돌아다니자고.”
“가고 싶은 곳이 얼마나 멀지 모르겠지만.”
익숙하게 블랑카의 등 위에 올라타고, 이어서 클라인을 번쩍 들어 올려 내 다리 사이에 올려놓는다.
그냥 등 뒤에 놔뒀다간 떨어질 것 같으니 이렇게 해놔야지.
“:-*”
갑작스러운 시점 변화에 놀랐는지 클라인은 소리가 되지 못한 소리를 외치고, 우리는 그대로 클라인의 손가락을 따라 출발했다.
순식간에 도시의 폐허가 등 뒤로 사라지고, 삑삑거리는 보호복의 알림을 배경음 삼아 멸망한 지구를 달려나간다.
“흠, 아마 일종의 결계가 펼쳐진 게 분명해.”
“마법을 쓸 수가 없다며?”
“마력을 아예 덩어리로 몸 밖으로 꺼내는 게 가능하면 그런 식의 설치류 마법은 가능하지. 물론, 그게 가능한 인간은 없지만 말이야.”
“인간이 아니라.”
“너도 정답을 이미 알고 있잖아?”
그래, 그렇긴 한데.
아직 확신이 서지 않는단 말이지.
블랑카와 지구 이야기를 하며 달려나간 지 체감상 1시간쯤 지났을 때, 드디어 폐허의 세상이 끝나고 끝없이 펼쳐진 대양이 우리 앞에 등장했다.
“이게, 진짜 바다인 거군.”
“글쎄. 내 생각에는…….”
“네가 말하던 바다가 딱 이런 모습이 아니었어?”
“이게 바다가 맞긴 한데, 자연적인 바다는 아니거든.”
“자연적인 바다가 아니라고?”
“어.”
슬쩍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본다.
아직 해는 머리 위에 떠 있지만, 있어야 할 것이 제자리에 없이 텅 비어있는 느낌이다.
나는 어이없다는 듯 짤막하게 웃으며 이 바다의 정체를 알렸다.
“저거. 달이 떨어지면서 생긴 지형이거든.”
“달? 달이라고 하면 내가 생각하는…….”
“밤에 밝게 빛나는 그거. 응, 그거 맞아.”
내가 알던 바다는 달이 충돌할 때 이미 사라졌다.
그 후에 지구에 남은 건 거대한 구덩이에 채워진 빗물들뿐이다.
“저 바다. 그러니까 저 구덩이의 가운데에는 저걸 떨어트린 녀석들이 잠들어 있어.”
“……달을 인간 손으로 떨어트릴 수 있던 건가?”
“가능하더라. 뭔 기술인진 몰라도 뭔가 전파를 뿅뿅 쏴대더니 달이 추락하더라고.”
달을 테라포밍한다는 인류 최후의 발악은 그렇게 최후를 맞이했다.
하긴, 그런 게 가능했다면 진작에 화성으로 이주했겠지.
“진짜, 그때 완전 대박이었지.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라며 다들 달을 생중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생방송이 중단되는 거 있지?”
“그리고?”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은 방송을 보지 않아도 됐어. 지구에 있는 모두가 하늘을 바라보기만 하면 됐거든.”
이미 모두가 종말을 받아들인 단계여서 그런지, 별다른 혼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담담하게 자살을 준비하거나 파티를 준비했으니까.
추락하는 달을 바라보며 ‘건배’를 외치는 광경을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었다.
하긴, 하늘에서 달이 떨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게 그리 흔한 건 아니니 기념하고 싶어지는 것도 당연하다.
“하늘에서 떨어진 달은 곧장 자기를 끌어들인 시설로 달려갔지. 그렇게 된 결과가 저거야.”
“……내 생각대로라면. 달이 추락했다면 아예 행성이 조각나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데?”
“응. 그게 맞아. 근데, 아니더라고. 어째서인진 모르겠어. 그 연구소에서 발사한 광선이 뭔가 영향을 끼쳤나 보지.”
그나저나 달이 추락하는 광경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늘 위에서 바라보기만 해서 지상에서 바라본 풍경은 잘 모르겠다.
빈약한 상상력을 동원해서 그때의 풍경을 생각해보자면 점차 하늘이 어두워지지 않았을까?
그래, 마치 지금처럼.
지금처럼?
“응?”
아직 해가 지지 않았는데 점차 어두워지기 시작한 주변에 나는 의문을 가지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블랑카 또한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빠르게 내게 경고를 하려 했지만.
“잉간. 뭔가가 이상…….”
쿵.
하늘에서 무언가가 착지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알린다.
그리고 그것은.
“……드래곤.”
내가 줄곧 생각하던, 바로 그 생물이었다.
207화 잉간이와 함께하는 즐거운 지구 산책 (2)
“드래곤.”
아리스와 함께 그 인간농장을 탈출할 때, 그들은 지구로 향했다.
내게 지구를 재건시켜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들이 내 부탁을 지킬 가능성은 솔직히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망해버린 지구에서 그들을 대적할 자가 있을 리 없으니 그냥 그들 마음대로 행동해도 됐으니 말이다.
그리고 드래곤들이 무슨 짓을 해봤자 인류가 부흥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기묘한 흐름의 정체는 역시 자네였군.”
“어. 안녕하세요? 모습이…… 많이 바뀌셨네요.”
“마력을 최대한 아껴야 하니 말이지. 꼭 필요할 때가 아니라면 폴리모프는 하지 않는다네.”
거대한 드래곤.
크고 웅장하다.
뭐, 드래곤을 설명하는데 별다른 말이 필요한가?
짱 쎈 드래곤이 크와앙 울부짖었다로 끝내도 되는 것이 드래곤이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너무나 압도적인 비주얼에 내가 말문이 막힌 사이, 드래곤은 블랑카에게 시선을 향했다.
“그쪽의 기사는…….”
“리베리아의 백은 기사단의 블랑카라고 한다.”
블랑카 또한 드래곤의 외견에 위압감을 느낀 걸까?
딱딱하게 굳은 말투로 드래곤에게 자기소개를 했다.
블랑카의 자기소개를 들은 드래곤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누군지 알겠군. 그럼, 자네 품 안에 있는 그 아이는…….”
마치 블랑카를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로 드래곤은 클라인을 바라보며 내게 설명을 요구했다.
음, 이걸 어떻게 설명한담?
“이름은…… 클라인이라고 하고요. 그리고…….”
음, 그러니까…….
클라인을 어떻게 설명하는 게 좋지?
애초에 저 드래곤은 클라인의 동족을 무척 싫어하지 않았나?
클라인의 정체를 밝히면 위험하지 않을까?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드래곤은 뭔가 생각났다는 듯 외쳤다.
“그래. 생각났어. 자네와 함께 돌아다니던 정보 생명체가 있었지. 그 아이가 성장한 모습인 겐가?”
“네? 그건…….”
어째 클라인을 에포나로 착각한 것 같은데, 그냥 에포나라고 속이는 게 나으려나?
그렇게 생각하고 거짓말을 하려는 찰나, 어디선가 튀어나온 에포나가 꼬리로 내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
“왕!”
아무래도 클라인을 드래곤에게 에포나라고 소개하는 건 에포나가 허락하지 않을 것 같다.
“아니에요. 그건 에포나고, 이 사람은…… 어. 집주인……?”
“집주인?”
“집주인…… 네. 집주인이고, 그리고…….”
일단 클라인을 집주인이라고 소개하는 건 잘못된 게 아니지?
뭔가 어감이 이상하지만 맞는 말이긴 하잖아?
그런데 이것만으론 드래곤이 절대 납득하지 않을 것이다.
저 봐봐.
벌써부터 표정이 아리송하게 변했잖아.
나와 클라인의 관계.
남에게 나와 클라인이 무슨 사이냐 소개할 때 하고픈 말.
그건…….
“음. 집주인이고. 그리고…… 어, 친구?”
친구.
한참의 고민 끝에 내 입에서 튀어나온 단어였다.
“친구?”
내 설명을 들은 드래곤은 더욱 괴상한 표정을 짓더니, 믿지 못하겠다는 듯 다시 질문을 던졌다.
“정말, 정말 친구가 맞는가?”
“네…… 친구. 친구 맞죠. 뭐.”
그녀와 나의 관계를 친구가 아니면 뭐라 정의할 수 있겠는가?
내 확언을 들은 드래곤은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내가 봤던 그 누구도 그들에게 친구가 되자는, 아니 대화를 해보자는 제안조차 한 적이 없었는데. 자네는 정말…… 별났군.”
어라, 집주인이라는 소개를 했을 때부터 클라인의 정체를 대략 눈치챈 걸까?
다행히 드래곤은 화낸다거나 클라인에 대한 증오심을 불태운다거나 하는 일 없이 그저 나에게 어이없다는 눈빛을 보낼 뿐이었다.
묘한 정적이 바닷가에 찾아오고, 나는 슬며시 드래곤에게 아까부터 신경 쓰이던 것들을 질문했다.
“저, 근데. 맨 처음에 마치 저일 줄 알았다는 듯 말씀하셨는데, 그건 어떻게…….”
“아, 그거 말인가? 그야, 자네의 짝을 만났으니까.”
“네?”
“아리스. 였었지? 그 아이가 마을에 나타난 걸 보고 대충 추측했지. 그 아이는 자네와 떨어질 리가 없으니 말이지.”
“아리스가 마을에 있다고요?”
마을이라고 하면 생존자들의 마을을 말하는 것이겠지?
나는 서둘러 아리스의 안전을 드래곤에게 확인했다.
“아리스는, 아리스는 괜찮죠?”
“걱정 말게나. 마법을 쓰지 못하는 데 조금 불안감을 느끼고 있지만, 별다른 이상은 없어 보였으니. 애초에 그 아이를 해칠 수 있는 게 무척 적기도 하니 말이지.”
나는 다행히 아리스에겐 아무 문제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안도했다.
“때마침 기묘한 정보의 흐름이 흐르는 게 느껴져 혹시 자네인가 싶어서 와봤더니 자네를 여기서 발견한 거라네.”
일련의 흐름을 설명받은 나는 곧장 드래곤에게 생존자 마을로 데려다 달라 요청했다.
클라인이 원하는 장소까지 가는 길에 잠깐 들려서 아리스를 데려오면 되겠지.
내 부탁을 들은 드래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네. 자, 내 등에 타게나.”
“아, 네.”
드래곤은 그렇게 말하며 순순히 나에게 등을 내어줬고, 그 모습을 지켜본 블랑카는 놀랐는지 작게 딸꾹질을 했다.
“히끅.”
“왜 그래?”
“아니, 드래곤이 저렇게 저자세로 나오는 게 조금 놀라워서…….”
“조금. 나한테 빚진 게 있어서 그래.”
하긴, 드래곤도 아무나 자기 등에 태우는 건 아니겠지?
블랑카는 뻣뻣하게 굳은 몸을 이끌고 드래곤의 등 위로 올라탔고, 그와 함께 드래곤은 자신의 몸을 이끌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드래곤이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바다 한가운데였다.
설마 해저 도시 같은 걸 건설한 걸까?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드래곤에게 지금 어디로 향하는지 질문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죠?!”
“추락한 달로 가고 있다네!”
“추락한 달이요?”
“그래, 자네들이 달을 떨어트린 그 실험의 원래 목적 덕분인지, 지구에서 가장 깨끗한 장소가 되었다네!”
“허…….”
드래곤이 말하길, 어째서인진 몰라도 추락한 달은 마치 지구의 일부였던 것처럼 뿌리를 내렸다고 한다.
현재 지구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라는 판단 아래, 드래곤들은 지구 각지에서 사람들을 모아 추락한 달로 데려왔다고 한다.
“추락한 달을 연구한다면, 지구를 다시 되살릴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진전은 좀 있고요?”
“별로 없다네! 알게 된 건 그저 달 밑바닥에 처박힌 연구소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뿐이지! 그래도 괜찮다네, 언젠간 성과를 거둘 테니까.”
“부디 그랬으면 좋겠네요.”
드래곤과의 잡담이 끝나고, 마침내 추락한 달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마치 바다 한가운데에 솟아난 화산섬처럼 보였지만, 다른 점이 여럿 있었다.
“저건 뭐죠?”
달 주위의 바다에 개구리밥마냥 고철들이 잔뜩 떠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래곤은 내 질문을 듣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리의 골칫거리지. 언젠가부터 솟아나기 시작한 녀석들이야. 사람들을 납치하려 시도한다네.”
“녀석들이라뇨? 설마, 살아 있는 거예요?”
“살아있었던 것의 시체지. 원래는 저 근처의 바다는 평범한 바다였다네. 언젠가부터 저 녀석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며 시체로 뒤덮인 거야.”
“세상에나…….”
아무리 봐도 그냥 로봇의 잔해처럼 보이는데, 지구 어딘가에 작동이 중지되지 않은 살인 로봇 공장이 존재하기라도 하는 걸까?
“아무리 봐도 지구 출신은 아니란 말이지. 저 녀석들 말이야.”
“뭐, 외계인이라도 되나요?”
“아마도. 거의 확실해. 저 녀석들의 잔해에는 마력이 담겨있거든.”
“마력?”
마력.
이 세계에는 없고, 저 세계에는 있는 것.
지구산 물건과 아닌 물건을 구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마력의 유무를 판단하는 것이니 드래곤의 추측은 아마 거의 옳겠지.
그리고 아마 이 우주의 변방까지 찾아올 수 있는 기술을 가진 종족은.
아마도 클라인의 동족, 그들밖에 없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클라인에게 흘깃 눈길을 돌린다.
만약 정말로 저것들의 원흉이 클라인의 동족이라면, 클라인에게 동족들을 막아달라 할 수 있을까?
과연 클라인은 나를 위해서 자신의 동족과 싸우려 할까?
답은 그렇다다.
나는 이미 그녀가 나를 위해 싸우는 모습을 여러 번 지켜봤다.
그러니 부디, 이번에도 그녀의 호의에 기대는 수밖에.
어쩌면 클라인이 지구에 나를 데려온 것도 이것 때문일 수도 있겠다.
드래곤과 이것저것 잡담을 나누던 사이 어느덧 생존자 마을에 도착한 모양이다.
아기자기하게 지어진 마을이 보이기 시작하며 드래곤은 서서히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회색 땅바닥에 착지하자 우리는 서둘러 드래곤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아리스!”
제일 먼저 아리스의 이름을 부르자, 기다렸다는 듯 종종걸음으로 뛰어오는 귀여운 생명체가 보인다.
마력을 쓰지 못해서 잘 날지 못해 달리는 걸 선택한 모양인데, 그 모습이 꽤 입가에 미소를 자아내게 했다.
“잉간!”
가까이 다가와서 폴짝.
평소라면 단번에 날라와서 안겼을 거리를 힘차게 달려온 아리스의 모습을 보고 미소짓는다.
“몸은 괜찮지?”
“응. 완전 문제없어! 드레이크 언니가 잘 챙겨줬거든.”
드레이크라 하면 드래곤하고 같이 지구로 향했던 그 드래곤을 말하는 거겠지?
그렇다면 별문제는 없었겠네.
그리 생각하며 안도하는 순간, 본의 아니게 아리스와 나 사이에 끼게 된 클라인이 답답하다는 듯 내 가슴을 머리로 콩콩 두드렸다.
“:-*”
“저기, 아리스. 이제 좀…….”
“왜? 싫어!”
아리스는 기껏 얻은 자리를 뺏기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걷기 불편하니까, 조금만 다른 곳으로. 떨어지자는 게 아니니까…….”
“……응.”
여전히 아리스는 내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아리스와 나 사이에 꼭 끼어있던 클라인이 푸하, 하고 숨을 토해낸다.
분명히 아리스에게도 들렸을 텐데, 아리스는 클라인에게 잠시 샐쭉한 시선을 돌렸다 말았을 뿐이다.
이윽고 아리스는 내 뒤로 돌아가더니, 재주도 좋게 내 어깨에 목마를 타버렸다.
“흐흥.”
이 위치가 좋은지 아리스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린다.
머리 뒤편에서 아리스의 체온으로 기분 좋은 따스한 온기가 채워진다.
“아리스, 정말 이상한 점은 없지?”
“없어! 정말 괜찮아!”
아리스는 자신이 사소하다고 생각하는 거면 아예 언급을 안 하니 정말 아무 이상이 없는지 모르겠네.
드래곤은 괜찮게 지냈다곤 하는데, 마력이 없는 세계에 마력 과다증을 가진 아리스가 떨어진 이상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겠어서 불안하다.
심장 박동은 정상인 것 같고, 체온도 언제나처럼 같이 따끈따끈하다.
“아리스. 막 마력을 움직이는 데 힘든 건 없지?”
“없어!”
다시 한번 아리스의 건강을 물어보며 회포를 푸는 사이, 마을 안쪽에서 익숙한 외모의 여성이 걸어 나왔다.
“오랜만이야. 잉간.”
“아, 안녕하세요.”
“드레이크 언니!”
드래곤과 달리 폴리모프 상태의 드레이크는 반갑게 웃으며 나를 맞이했다.
“묻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아 보이는데. 안에 들어와서 하지 그래?”
“그럼 그럴까요?”
드레이크는 우리를 한 건물로 안내했고, 그 안에서 드래곤과 아리스의 이야기만으론 알 수 없던 것들을 물어보려던 찰나.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런.”
“무,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이겠어? 그 고철덩이들밖에 없지.”
“고철덩이라면, 설마.”
“그래. 오는 길에 봤던 그 녀석들 말이야.”
아무래도 썩 좋지 않은 타이밍에 마을에 방문한 것 같다.
208화 지구산 인간 거주지의 하루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지지만, 드레이크의 표정은 생각보다 꽤 침착했다.
딱히 바깥에 소란이 일어난 것 같지도 않은데, 이런 일이 자주 있어서 적응된 걸까?
“뭐, 그렇게 위험한 수준은 아니니까.”
“대비책이 다 있나 보죠?”
“당연히 이젠 다 있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 많은 기계들을 박살 냈겠어?”
“하긴, 그렇겠네요.”
추락한 달의 주변을 메울 정도로 많은 기계들과 싸워왔다면 대비책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그러고 보니 그 인간 농장에서 드래곤들이 싸우던 것도 로봇이었지?
어째 드래곤들은 로봇과 안 좋게 엮이는 일이 많은 것 같다.
“처음에는 뭐, 마력 덕분에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퇴치하지 못했거든. 그 때문에 나하고 드래곤이 나설 수밖에 없었는데…….”
“그럼, 지금은요?”
“직접 나가서 봐봐. 솔직히 지구의 인간들이 저 정도로 잘 싸울 줄은 몰랐다니까?”
도대체 어떤 방어선을 구축해놨길래 드레이크가 저런 소리를 하는 걸까?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가 마을의 방어선을 바라보자 놀라운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드래곤들과 함께 마을을 구축하며 문명도 상당히 복구한 것일까?
사람들이 몰려드는 기계들을 향해 쏘아대고 있는 것은 아무리 봐도 총기였다.
그것도 그냥 평범한 권총이니 소총이니 하는 게 아니라, 크고 아름다운 대공포와 기관총들.
“엑.”
자원이 부족해서 전쟁마저 일어나지 않던 게 분명히 기억 한구석에 생생히 잠들어 있건만, 어떻게 저렇게 대놓고 어마어마한 화력의 무기들을 사용할 수 있는 걸까?
아니, 이제 보니 내 기억 속의 무기들과는 뭔가 다르다.
아무리 봐도 발사하고 있는 총탄들이 내가 아는 총탄이 아닌 것 같은데?
총탄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저것들은 분명 총탄이 아니다.
저것들은 분명히…….
“정보?”
“정답. 정말 놀랐다니까. 인간들이 정보 조작을 저렇게 자유롭게 할 수 있을 줄은.”
사람들이 하늘을 뒤덮는 금속들을 향해 쏴대는 것들은 전부 정보들이었다.
그것도 아주 고밀도로 압축된.
드래곤들은 지구인들이 어떻게 정보를 조작하는지 신기해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기억 속의 한 정보를 떠올렸다.
결국, 어떻게든 완성을 한 모양이다.
정보 조작 장치를 말이다.
그걸 연구하던 연구소는 달과 함께 박살 난 줄 알았는데, 그 흔적을 찾아내어 기술을 복구한 걸까?
하늘을 뒤덮으며 몰려오던 기계들은 전부 마을을 침범하지 못하고 정보탄의 탄막에 휩쓸려 바다로 추락했다.
“완벽…… 하네요.”
이 정도의 방어선이라면 저 기계들이 마을을 위협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드레이크는 내 감상에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완벽하지 않아. 화력은 충분하지만 다른 곳에서 문제가 있거든.”
“다른 곳이요? 아, 혹시 보급 쪽 문제인가요?”
“비슷해.”
드레이크는 그렇게 중얼거리곤 나를 이끌고 한 건물로 들어간다.
건물의 안에는 내게 무척이나 낯익은 기계들이 즐비해 있었다.
바로, 건물 하나를 가득 메울 정도로 거대한 컴퓨터들이었다.
“컴퓨터네요? 이건…….”
“폐허 속에서 간신히 찾아낸 거야. 이거 덕분에 방어선을 만들 수 있었지.”
“컴퓨터가요?”
도대체 저 안에 무슨 정보가 담겨있었길래 이런 소리가 나오는 걸까?
“정보 조작 장치의 기본적인 설계도, 그리고 대량의 정보들.”
“대량의 정보라면?”
“아무 의미 없는 정보들이었지. 시시껄렁한 농담, 재미없는 영화, 그리고 더미 데이터들.”
드레이크가 말하길, 저 컴퓨터 안의 정보들을 해독하는데 무려 1년 이상이 걸렸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저 방어선을 구축하는데도 몇 년이 걸렸고.
“기관총이나 대공포는 드래곤이 폐허에서 가져왔고, 거기에 정보 조작 장치를 추가했지. 그렇게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지만, 문제가 있어.”
“문제라면?”
“……탄환으로 정보를 사용한다는 거야.”
“네?”
탄환으로 정보를 사용한다는 게 뭐가 문제인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정보인데.
그냥 돌멩이나 고철들을 정보로 변환시키면 되는 게 아닌가?
“애석하게도 우리가 발견한 건 일종의 프로토타입이야. 이미 가공된 정보를 조작할 수는 있어도, 가공되지 않은 정보는 불가능하더라고.”
“잠깐, 그럼…….”
“뭐, 최대한 정보를 복사해가며 비축분을 늘렸지만…… 아무래도 정보의 열화는 어쩔 수 없더라.”
나는 그제야 드레이크가 완벽하지 않다고 말한 이유를 깨달았다.
아무리 저 컴퓨터가 거대하고, 보관하고 있는 정보가 많다고 해도 언젠간 가공할 수 있는 정보들이 다 바닥날 것이다.
“드래곤이 틈날 때마다 폐허를 탐색하곤 있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는 상황이야. 인터넷을 복구하지 않는 이상 접근할 수 없는 정보들도 꽤 있고.”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뭐, 준비하고 있는 계획은 있는데. 그게 잘 될지는 모르겠네.”
준비하고 있는 계획이 있다곤 하지만, 드레이크는 어째 그 계획이 잘 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 듯한 표정이다.
“준비하고 있는 계획이라 하면?”
“달 밑바닥의 연구소를 찾아내는 거지. 거기라면 프로토타입이 아니라 완성본이 있을 거고, 인터넷도 복구할 수 있을 거 아냐?”
“그랬으면 좋겠네요.”
“물론, 거기까지 가려면 또 몇 년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드레이크와 내가 대화하는 사이, 기계들의 공습도 다 끝난 모양이다.
밖이 잠잠해지고, 이왕 밖으로 나온 김에 드레이크에게 마을을 소개받기로 한다.
“저긴 배양육 농장, 저건 비타민 합성 공장. 그리고 저긴 발전소.”
“발전소가 꽤 크네요?”
“위급할 때는 우리가 직접 불을 뿜어야 하거든. 어쩔 수 없어.”
“오우…….”
드래곤이 발전소에 직접 불을 뿜는 광경은 좀 보고 싶긴 하네.
그렇게 마을을 소개받으며 돌아다니던 도중, 나는 문득 큐비의 존재가 떠올랐다.
분명히 드래곤들과 함께 지구로 왔을 텐데 왜 아직도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거지?
나는 아직도 큐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의아해하며 드래곤들에게 큐비의 위치를 묻는다.
“저기, 큐비는 어디 있나요?”
“큐비? 아, 큐비는…….”
그러자 드레이크는 씁쓸한 미소를 짓더니 나를 이끌고 마을 중심의 한 건물로 데려갔다.
뭔가 드레이크의 저 미소가 불길한데, 설마?
불안감을 안고 드레이크를 따라간 건물에선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긴 뭐죠?”
“아이들을 보살피는 곳이지. 일종의 학교라고 하면 되려나?”
학생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모두들 별다른 이상이 없이 건강하게 잘 지내는 듯 보였다.
아이들이 서로 뛰어노는 모습을 바라보며 드레이크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방어선을 완성하고 나서부터 아이들이 태어나기 시작했어. 그전까진 아이를 낳고 싶어도 낳지 못했다는 게 정확하지만.”
“낳고 싶어도 낳지 못해요?”
“로봇 녀석들의 공격에서 지킬 힘이 없었거든. 저 녀석들, 아무래도 임산부나 어린아이들이 최우선 납치 목표인 것 같더라고.”
“아…….”
“그리고, 생존자 대부분 오랜 방사선의 영향 때문인지 불임이었거든.”
“불임…… 인가요.”
하긴,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몸에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
아무리 방호복을 잘 입는다고 해도, 몸 어딘가가 망가지는 게 필연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불임을 치료할 방법이라도 찾아낸 거예요?”
“음. 그건 아니지만. 큐비가 힘냈지.”
“큐비가 힘냈다고요?”
“아, 도착했다.”
큐비가 힘냈다고 하면 왠지 그것밖에 떠오르지 않는데.
머릿속에 남아있던 큐비의 강렬한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이, 드레이크는 나를 정원처럼 보이는 장소로 데려왔다.
그 정원의 가운데에는 어린나무 한 그루와 함께 누군가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자애로운 성모의 미소로 아이들을 보살피는, 악마의 꼬리를 가진 누군가.
드레이크는 동상을 바라보며 그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잉간을 소개했다.
“큐비, 잉간이 찾아왔어.”
“드레이크. 설마…….”
“그래. 보는 그대로야.”
큐비가 죽었다고?
어째서?
충격에 뭐라 말하지 못하고 가만히 동상을 올려다보는 사이, 드레이크는 가만히 큐비에게 일어난 일을 이야기했다.
“알다시피, 큐비는 서큐버스야.”
“그렇죠.”
“그리고 서큐버스는…… 서로 교배하지 못하는 생물종끼리 교배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생물이지.”
“그럼, 설마?”
“그래. 큐비가 지구인들의 어머니가 된 거야.”
드레이크의 설명은 상당히 놀라웠다.
큐비가 지구인들의 어머니가 되었다니?
“큐비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지구인들은 지하 벙커에 냉동된 소수의 생존자들을 빼면 진작에 멸종했을 거야.”
“그 정도였나요?”
“그 정도였지. 불임을 고치는 건, 우리도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허탈한 듯 그리 외친 드레이크는 교실 안에서 서로 장난치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이들을 돌보는 큐비의 모습은 참, 즐거워 보였어. 비유나 과장이 아니라, 큐비는 말 그대로 모두의 어머니였지.”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이 다음 세대가 되었고, 다음 세대가 낳은 아이들이 바로 저 아이들.
“큐비의 정보가 섞인 덕분인지 불임 문제는 완벽히 해결됐어. 다만, 이젠 큐비에게 문제가 생겼지.”
“수명…… 문제인가요?”
“응. 맞아. 그 농장으로 돌아간다면 모든 문제를 고칠 수 있었겠지만, 그건 큐비가 원하지 않더라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나?”
드레이크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묘한 감정이 들어 가만히 큐비의 묘지가 된 동상을 바라보게 된다.
성모가 된 서큐버스라, 멸망 전의 사람들이 들으면 웃겨 죽겠구만.
“뭐, 소개할 건 다 소개한 것 같네. 그럼…….”
큐비의 최후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 드레이크는 슬쩍 아이들과 놀고 있는 아리스와 블랑카를 바라보더니 내게 귓속말을 속삭였다.
“저 둘. 아니, 적어도 아리스는 따로 놔두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따로 하고 싶은 이야기요?”
“그래. 아리스에 대한 이야기야.”
아리스에 대한 이야기라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때, 드레이크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가 드레이크의 제안에 고개를 절로 끄덕 거리게 만들었다.
“아리스의 그…… 특이한 체질에 대해서 말이야.”
* * *
말과 새와 남자가 학교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곁눈질로 바라보며, 남자는 서둘러 마을을 나서 폐허로 향했다.
드래곤들의 눈마저 속이는 폐허 속에서 남자는 무전기를 들고 누군가를 향해 보고를 시작했다.
“……네 말대로. 밖에서 말과 함께 남자가 찾아왔어.”
“좋아. 그럼, 작전을 속행하지.”
무전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를 들은 남자는 망설이는 목소리로 다시 무전기 너머의 상대에게 되묻는다.
“정말, 드래곤들을…….”
“그들도 침략자와 다를 게 없어. 망설이지 마.”
“그래도, 그들은 우리를…….”
“전부 거짓이야.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같은 인류뿐이라는 거, 잊지 마.”
망설이는 남자를 무전기 너머의 존재가 북돋고, 흔들리는 남자에게 그들의 구호를 남기고, 남자는 그들의 구호를 생각하며 다시금 의지를 불태운다.
“인류 해방 전선에 합류해라.”
“인류 해방 전선에 합류해라.”
209화 지구인 관찰일기
“아리스의 체질이요?”
아리스의 체질에 대한 이야기라면, 마력에 관한 이야기인가?
아리스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마력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뭐 다른 문제가 있던 걸까?
“그래. 아리스가 가진 마력 과다증에 대해서 말이야. 지금은 안정된 것처럼 보이지만, 제대로 관리해야 할 게 몇 가지 있단 말이지.”
아리스의 증상이 다 호전된 줄 알았는데,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닌 걸까?
“관리해야 할 거라면?”
“일단, 아리스의 체질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어?”
“아뇨. 그냥 마력이 많은 체질 정도로…….”
내가 아리스의 체질에 대해 아는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마력이 많다는 것과 내가 알려준 호흡법이 아리스에게 도움이 됐다는 정도다.
나는 드레이크와 함께 정원 구석으로 가서 그 체질이란 게 무엇인지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아리스의 체질은 ‘마력 과다증’이라 불리는 병이야.”
“뭐, 그럴 것 같긴 했어요.”
마력 과다증이라.
내가 예상했던 이름을 크게 벗어나질 않네.
내가 그런 감상을 느끼는 사이, 드레이크는 계속해서 마력 과다증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마력 과다증이란 말 그대로 신체에 마력이 과다하게 쌓이는 증상을 의미하지. 보통, 마력 포션의 과다 복용으로 일어나나 가끔씩 태어났을 때부터 마력 과다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지. 그게 바로…….”
“아리스죠.”
“그래. 아리스가 바로 그 케이스지. 사실, 마력이 많은 것만으로는 별문제가 없어. 문제가 되는 건, 신체가 마력을 버티지 못한다는 거야. 자, 그럼 여기서 문제. 어째서 신체가 과도한 마력을 버티지 못하는 걸까?”
“어……. 글쎄요?”
마력을 보지도 못하는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지를 털어놓자, 드레이크는 내게 예시를 하나 들어 설명을 시작했다.
“그렇게 어려운 건 아냐. 사람을 거대한 마석이라고 생각하면 돼.”
“사람을 마석으로?”
“모든 생물의 몸 안에는 마석이 들어있으니, 사람을 거대한 마석으로 보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잖아?”
“뭐, 그렇죠.”
“아무튼, 그렇게 생각한다면 신체가 과도한 마력을 버티지 못하는 이유를 알겠지? 마석이 마력을 과도하게 쌓아 소멸하는 건 그리 이상한 이야기는 아니니까.”
“어……. 네?”
드레이크는 당연하다는 듯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뭔가 내가 마석이 사라지는 이유를 알고 있을 거란 전제로 말한 것 같은데, 마석에 마력을 너무 쌓으면 사라진다는 것도 지금 처음 알았다.
마석이 배터리 같은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그리 놀라운 사실은 아니지만, 뭔가 꼭 알아야 하는 정보를 모르는 느낌인데.
내가 제대로 설명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은 드레이크는 한숨을 내쉬며 좀 더 자세한 설명을 했다.
“그러니까. 마석은 주위의 고밀도의 마력을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마력으로 변환한단 말이지?”
“네. 그래서요?”
“그런데 말이야, 마석에 너무 많은 마력이 쌓이면 어떻게 되겠어? 자기 자신도 고밀도의 마력으로 인식해서 스스로를 마력으로 분해하겠지? 그런 거야.”
“아, 이해했어요.”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들으니 무슨 말인지 이해가 단번에 되네.
그러니까 사람도 몸에 마력이 너무 많이 쌓이면 마석이 자신의 몸을 분해해버린단 거지?
“자, 여기까지가 마력 과다증이 위험한 이유. 그럼, 어째서 마력 과다증이 발생하는 걸까?”
“어……. 마석의 성능이 너무 좋아서?”
“음, 그것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두 가지로 나뉘어. 하나는 네가 말한 것처럼 마석이 마력을 만들어내는 속도가 지나치게 빠른 경우. 다른 경우는…….”
“다른 경우는?”
“마력의 한계치가, 너무 낮은 경우.”
마력의 한계치가 너무 낮은 경우?
그건 또 무슨 소리지?
게임으로 치면 MP 한계치가 너무 낮은 건가?
나는 드레이크의 설명을 듣고 잠깐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런 건 또 아닌 모양이다.
“애초에 처음부터 신체의 정보가 너무 과다한 경우를 말하는 거야.”
“신체의 정보가 너무 과다하다니?”
“마석은 정보를 마력으로 바꾸고, 마력 또한 정보지. 이 정도는 알지?”
“그렇죠.”
“그럼, 신체가 가지고 있는 정보가 평균치보다 더 높다면? 당연히 한계치가 더 낮아지겠지?”
“잠시만요. 그게 무슨 소리…….”
“마석은 고밀도의 정보를 저밀도의 마력으로 변환시킬 뿐, 그게 마력인지 정보인지는 신경 쓰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이해한 게 맞는 느낌인 건가?
MP 한계치가 낮은 게 아니라, 한계치는 똑같은 데 사용 가능한 MP의 양이 적은 느낌이지만 말이다.
“대충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요. 그래서요?”
“그래. 여기서 아리스의 이야기를 할 차례인데……. 아리스는 그 두 가지 가능성 모두가 겹쳐진 것 같아.”
“두 가지가 모두 겹쳐졌다고요?”
“애초에 마석의 성능이 더 뛰어나기도 하고, 처음부터 신체의 정보가 더 고밀도란 이야기지.”
드레이크는 그렇게 말하며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 시의 아리스의 수명에 대해 이야기했다.
“지금처럼 마력을 몸 전체에 균등하게 배분하는 방식을 익힌 게 아니라면, 아마 몇 달도 더 살기 힘들걸?”
“그럼, 지금은 괜찮은 거죠?”
“지금도 완벽히 괜찮은 건 아냐. 균등하게 마력을 맞췄을 뿐이지, 꾸준히 마력을 사용해서 적정 수치로 마력을 유지시키는 게 중요해.”
뭔가 의사 선생님에게 꾸준한 식단 관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 같네.
주의해야 할 게 그것뿐이면 그리 심각한 이야기는 아니었던 거 같네.
“뭐, 사실상 네가 알려준 마력 순환법 덕분에 대부분의 문제가 해소된 상태니까.”
“그건 다행이네요.”
“그리고 또……. 음, 이건 일단 네가 보호자 역할이어서 알려주는 건데.”
“네?”
할 이야기가 다 끝난 게 아닌 걸까?
드레이크는 이제부터가 본론이라는 듯 나를 붙잡았다.
“아리스가 마력 과다증에 걸린 이유. 그게 조금 복잡해서 말이야.”
“과다증에 걸린 이유가 있어요?”
아까 드레이크가 이야기한 두 개의 이유로 끝난 게 아닌 걸까?
뭐, 다른 외부적 요인이라도 있는 걸까?
“내 생각에는 말이야. 아마……. 아리스는 쌍둥이였을 거야.”
“쌍둥이?”
갑자기 아리스가 쌍둥이라는 이야기는 왜 나오는 거지?
“그리고 아마, 다른 한쪽이 알 속에서 죽거나 서로 합쳐진 거겠지. 아니면 알끼리 서로 합쳐진 거거나.”
“네?”
“그러니까……. 음. 아리스는 너랑 비슷하다는 거야. 너처럼 여러 명의 생물체의 정보가 중첩되어 탄생한 거란 말이지.”
“어…….”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여서 뭐라 반응하질 못하겠네.
그러니까 아리스가 다른 형제나 자매와 합쳐져서 태어났다, 뭐 이런 소리인 거지?
아니, 그것보단 그 뒤의 말이 좀 신경 쓰이는데.
“그. 저처럼 여러 명의 정보가 중첩됐다니, 그건…….”
“뭐야? 설마 모르고 있었어?”
“아뇨. 음.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이 들지만 에포나의 부드러운 털의 감촉을 느끼니 조금 나아진다.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며 드레이크는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솔직히 나는 네가 가장 이해가 안 돼. 솔직히 너 정도로 정보가 중첩됐다면 진작에 죽었어야 정상이거든? 마력이 없어서 그런 거려나?”
“아마, 그런 거겠죠.”
만약 내가 마력을 느낄 수 있었다면 드레이크가 말한 것처럼 진작에 마력이 되어 허공에 흩어졌겠지.
지금의 내 상태는 언제라도 사라질 수 있는 찰나라는 걸 이젠 잘 알고 있다.
그러니 그 찰나가 끝나기 전에 부디.
이루고자 하는 걸 이뤄낼 수 있기를.
“뭐, 아리스가 너한테 친밀감을 크게 느끼는 것도 그래서인 것 같고……. 아무튼. 썩 좋은 유년기를 보내진 않았을 것 같으니 더 신경 써주라고. 알겠어?”
“이미 그러고 있어요.”
“그럼 다행이고.”
아리스가 먼저 과거 이야기를 해줄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지만, 아리스는 아직 과거 이야기를 내게 해준 적이 한 번도 없다.
언젠간, 아리스가 먼저 이야기를 해줄 때까지 기다리자.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드레이크와의 이야기도 모두 끝났겠다, 슬슬 날도 저물고 있겠다 우리는 드레이크에게 머물 숙소를 안내받았다.
드레이크가 안내한 숙소는 드레이크와 드래곤의 숙소였다.
“필요한 게 있으면 나를 불러. 어차피 나는 대부분 숙소에서 머무르니까.”
“아, 네.”
드레이크에게 숙소를 소개받던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잠시만 기다려봐.”
드레이크는 우리를 숨기려는 듯 방 안쪽으로 우리를 보내고, 혼자서 현관문을 열고 손님을 맞았다.
“무슨 일이지?”
“이번에 밖에서 다른 사람들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들어서요. 조금 대화할 수 있을까요?”
“미안. 다들 지쳐서 휴식을 취하고 있어서. 내일 상태를 보고…….”
“드레이크 님. 왜 저를 막으시는 겁니까?”
“네가 할 이야기가 뻔하니 그렇지. 그 사람들은 우리의 은인이야. 민폐를 끼칠 생각은 없어.”
“드레이크 님!”
뭔가 심상치 않은 대화가 문 너머로 들려온다.
뭔가 마을 주민이 우리와 대화하고 싶은 것 같은데 드레이크가 그걸 막는 느낌인데?
나는 조심스럽게 클라인을 방에 놔두고 슬쩍 고개를 내민다.
“드레이크 씨, 저희는 괜찮아요.”
“잉간! 잠깐…….”
“당신이 잉간이군요!”
고개를 내밀고 밖으로 나가자 굳은 표정의 드레이크와 활달한 인상의 청년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남성에게 인사를 건네며 드레이크에게 말했다.
“저도 마을 주민들과 대화하고 싶었거든요. 동향 사람들이 좀 그리워서.”
“그런 게 아니라…….”
내 말을 듣자 드레이크는 걱정스럽단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뭐가 그렇게 걱정스러운 걸까?
내가 마을 주민들과 대화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드레이크가 어두운 표정을 짓는 것과는 달리 남자는 반색하며 힘차게 걸음을 내게 옮겼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청년회장 폰은수라고 합니다.”
“네? 폰은수요?”
“네. 성이 폰이고, 이름이 은수입니다.”
이름만 들어선 한국 이름인데, 한국에 폰 씨란 성이 있었나?
아무리 봐도 영미권 쪽의 성씨인데.
그런 생각이 얼굴에 드러나 의아한 표정을 지었던 걸까?
폰은수는 머리를 긁적이며 자기 이름에 대한 설명을 털어놨다.
“아버지의 성을 따른 건데, 멸망 전에는 이런 식으로 이름을 짓지 않았나 보죠?”
“어……. 그런 식으로 짓긴 했는데. 문화권이 조금 다르죠…….?”
아무래도 문명이 복구되며 온갖 곳의 문화가 서로 섞이며 요상한 문화가 형성된 모양이다.
뭐, 세상에 이름이 잉간인 사람도 있는데 폰 씨가 뭐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지.
“드레이크 님과 드래곤 님께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만날 수 있어서 정말 영광입니다.”
“무슨 이야기를 들으셨길래……?”
“그야, 침략자들에게 크게 한 방 먹여주셨다면서요! 드레이크 님 말로는 그 어떤 영웅도 해내지 못한 일이라면서요?”
“어……. 그게.”
도대체 내 이야기를 어떻게 했길래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그냥 현대인의 감성을 가진 사람들하고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싶던 건데, 무슨 중세시대의 영웅담에 깊게 빠진 사람을 보는 기분이다.
슬쩍 드레이크를 바라보자 드레이크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젓고 있다.
음, 이 사람만 그런 거겠지?
그러니까 여기까지 들이닥친 거겠지.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고, 사실 한 방을 먹였는지도 잘 모르겠거든요……? 그러니까, 어. 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니, 말씀 편하게 하셔도 돼요.”
“에이. 제가 어떻게 그럽니까?”
“아하하…….”
아무리 봐도 이 사람, 그냥 나와 대화를 하고 싶어서 온 게 아니다.
드레이크도 그걸 알기에 나와 이 사람이 만나는 걸 막으려 했던 걸까?
밖으로 나온 걸 내가 후회하던 그때, 폰은수는 슬그머니 본론을 꺼내 들었다.
“저, 그래서 말인데.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
“네. 저희를 좀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그래, 이럴 줄 알았다.
210화 지구인들의 보물을 찾았습니다!
“저희를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도와달라니?”
도와달라니, 뭘?
폰은수가 내게 원하는 것은 마을의 발전을 도와달라거나, 뭐 그런 간단한 부탁이 아닌 것 같다.
저렇게 입이 헐도록 나를 칭찬할 만큼 뭔가 어려운 걸 부탁하는 것 같은데.
이어서 폰은수의 입에서 튀어나온 부탁은, 상당히 반응하기 애매한 것이었다.
“부디, 인터넷을 복구하는 걸 도와주세요!”
“……인터넷?”
“네. 인터넷 말입니다.”
인터넷의 복구라 하면, 드레이크가 말한 그 계획인가?
지하 어딘가 파묻혀 있을 연구소를 찾아내 복구한다는 내용의 그 계획 말이다.
드레이크가 말하길, 거기까지 가려면 몇 년이 걸릴지 모른다고 하던데.
폰은수의 부탁을 들어주는 걸 떠나서 과연 내가 그 계획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내가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당황한 웃음을 흘리던 그때, 드레이크가 한숨을 내쉬며 끼어 들어왔다.
“거기까지. 잉간을 끌어들이는 건 민폐라고 몇 번을 말해?”
“하지만 드레이크 님! 잉간 님이 있다면 굳이 장비가 완성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되잖습니까!”
“이건 우리의 일이고, 외부인에게 민폐를 끼칠 수는 없어. 그게 마을의 은인이라면 더욱더.”
드레이크가 단호하게 폰은수의 말을 가로막자, 폰은수도 더 뭐라 나서지 못하고 입을 다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조심스럽게 드레이크에게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질문을 던졌다.
“저기, 이게 도대체 뭔 이야기인지 자세히 설명을 좀…….”
“미안해. 네 이야기를 해줬더니 자꾸만 너를 끌어들이려 해서…….”
한숨을 내쉰 드레이크는 찌릿 폰은수를 바라보며 간략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아까, 인터넷 복구에 관한 계획을 설명했었지?”
“그랬죠.”
“그거야. 저 녀석은 네가 그 계획에 동참하길 원하는 거야.”
“……제가 함께한다고 뭐 달라지는 일이 있어요?”
지구에선 아리스나 블랑카도 제대로 힘을 쓸 수 없고, 나 또한 평범한 인간인데 도대체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나타냈고, 그에 대한 대답은 드레이크가 아닌 폰은수에서 돌아왔다.
“있습니다. 무척 달라진다고요!”
“은수.”
“간신히 연구소까지 통하는 길을 만들고도 그 안으로 진입하지 못한 이유가 뭡니까? 정보 방벽 때문이잖아요! 드레이크 님, 분명히 말씀하셨잖아요. 잉간 정도의 정보 조작 능력이 없으면 해제는 불가능하다고요.”
드레이크가 자신을 제지하기 전에 빠르게 쏘아낸 폰은수의 말은 핵심만을 잘 요약하고 있었다.
“확실히 그렇긴 하지만, 잉간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야.”
“그 시간은 또 자기 몸을 희생하면서 만들어낸 시간이지 않습니까? 저희가 모를 줄 아셨습니까? 얼마 남지 않은 정보를 늘리기 위해, 스스로의 몸을 갉아내고 있다는 걸요!”
잠깐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자기 몸을 갉아내고 있다니, 드레이크. 설마?
“드레이크. 이게 무슨 소리죠?”
“그건…….”
드레이크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내 시선을 피하고, 나는 문득 드레이크가 이야기했던 말을 떠올린다.
모든 생물은 하나의 거대한 마석과 같다는 말.
그것은 드레이크 자신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그렇다면 설마?
“부족한 정보를, 말 그대로 네 몸의 정보를 갈아 넣어서 보충하고 있었던 거죠?”
“……그런 건 아냐. 단지, 정보를 복사하기 위한 촉매로 사용했을 뿐이야.”
세상에나.
드레이크와 드래곤은 진짜 말 그대로 자신의 몸을 갈아 넣으며 방어선을 유지 시키고 있던 것이다.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잉간 님, 부디 저희를 도와서 인터넷을 복구할 수 있게 해주세요.”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좋아요.”
드레이크는 내게 도움을 청하는 걸 여전히 꺼려했지만, 나는 단번에 폰은수의 부탁을 수락했다.
“정말입니까?!”
“네. 같은 동향 사람들끼리 돕고 살아야 하는 게 아니겠어요?”
“잉간, 무리할 필요 없어. 아무리 너라도 그 정도의 정보 조작은…….”
“드레이크야말로 무리할 필요 없어요. 지구인이 지구를 돕는 건데, 전혀 무리가 아닌걸요?”
애초에 폰은수가 내가 아닌 블랑카나 아리스의 도움을 필요로 한 것도 아니고, 지구의 일인데 당연히 내가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적어도, 남들과는 달리 호사를 누렸으니 이 정도는 하는 것이 나의 의무가 아닐까?
반려넷의 회원들과 지구의 상황을 떠올리며 나는 그런 감상을 품었다.
그러고 보니 반려넷에 글을 올리고 싶긴 한데, 마력이 없어서 그런가 휴대용 단말기가 켜지질 않는다.
쩝, 어쩌면 마력이 없는 상황에서도 써먹을 괜찮은 팁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죠!”
“아, 네…… 근데 너무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이게 잘 될지는 저도 모르는 거여서…….”
내 확실하지 않은 대답을 듣고도 폰은수는 방긋 웃으며 드레이크에게 붙잡히기 전에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드레이크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며 미안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너에게 부담을 줄 생각은 없었는데.”
“원래 제가 했어야 할 일인데요. 뭘요.”
그냥 간단히 정보 조작을 시도하는 것뿐인데 뭘 그렇게 미안해한담?
다시금 내게 미안함을 드러내는 드레이크를 뒤로 하고 방으로 돌아오자 아리스와 블랑카가 내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음…… 연구소로 내려가는 데 내 도움이 좀 필요하다네.”
“도와줄 생각이야?”
“응. 아마도.”
“으, 지하는 싫은데. 거기, 뭔가 분위기가 이상해.”
내 말을 들은 아리스가 투덜거리며 불만을 표한다.
“지하에 가본 적 있는 거야?”
“응. 처음에 정신을 차렸더니 거기였는걸?”
아무래도 아리스가 지구에 떨어진 위치가 연구소가 있는 지하였던 모양이다.
꽤 좋지 않은 기억이었는지 깃털을 부풀리는 아리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싫으면 도와주지 않아도 돼.”
“싫지만, 잉간 혼자 보내는 거 더 싫어.”
“고마워, 그리고 미안. 요즘 자꾸만 내 일에 말려들게 하는 것 같네.”
블랑카와 아리스에게 그렇게 사과하자, 블랑카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갑자기 왜 그래? 우리 사이가 그런 사이는 아니잖아.”
“그래도. 그냥.”
블랑카의 웃음에 나 또한 함께 미소를 머금던 그때, 블랑카가 조용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리키의 안부를 묻는다.
“리키는 괜찮을까?”
“괜찮을 거야. 지구에서 리키가 위험할 일은 거의 없을걸?”
그 지옥 같던 황무지에서도 멀쩡하게 살아가던 리키다.
고작 지구 따위의 환경에서 위기에 빠질 리가 없지.
그래도 여전히 리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게 불안한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내 시선이 방 한구석에서 뭔갈 열심히 바라보고 있는 클라인에게도 향한다.
클라인이 들고 있는 것은 무슨 버려진 하드 디스크처럼 보였는데, 클라인은 그걸 들고 마치 책을 읽듯이 한참을 집중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
독서 비슷한 일이 잘 안되는 모양일까?
클라인은 간간이 머리를 두드리며 불만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그나저나 클라인이 나를 지구에 데려온 이유는 뭘까?
그냥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데려온 걸까?
내 눈에는 클라인이 지구에서 뭔갈 찾고 있는 것 같은데, 도대체 뭘 찾고 있는 걸까?
일단, 이 마을에 도착한 이후로 클라인은 더 이상 손가락으로 가고 싶은 곳을 가리키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클라인은 처음부터 이 마을에 오고 싶었던 걸까?
어째서?
그렇다는 건 클라인은 지구인들의 마을의 존재를 알고 있던 걸까?
모르겠다.
단어 몇 개와 목소리의 톤을 가지고 대화를 하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얼마 남지 않았어.
앞으로 한 걸음.
정말 짧은 거리만이 남았다는 생각이 든다.
* * *
분명 이 근처인데.
잉간이의 품에 안긴 채로 클라인은 주위를 둘러보며 그리 생각했다.
밀렵꾼들의 전초기지는 클라인의 예상보다 더 방대하게 지구 전역에 퍼져있었다.
하긴, 그 누구도 밀렵꾼들을 방해하지 않았을 테니 이 정도로 전초기지를 구축하는 것이 그리 어렵진 않았으리라.
그러기에 클라인은 전초기지를 하나씩 박살 내기보다, 아예 전초기지들을 단번에 박살 내는 길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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