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 27

블랑카의 아버지.
“블랑카는 누군데?”
“나의 딸.”
“그래. 그리고 또?”
“나는 기사다.”
“아버지이자 기사. 그래, 너는 누구지?”
“나는.”
나는 블랑카의 아버지.
나는 자랑스러운 리베리아의 기사.
약자들의 방패이자 리베리아의 검.
그러니까 나는.
“이 정도면 충분한 거 같네. 자, 깨어날 시간이야. 악몽은 끝났어.”
나는…….
“나는 리베리아 백은 기사단의 로보다!”
금방이라도 잉간을 덮칠 것 같던 로보의 돌진은, 잉간을 아주 사소한 차이로 지나쳐갔다.
그리고 그대로, 남자의 몸에 로보의 돌진이 명중했다.
“크헉?!”
남자는 자기 자신으로 여겼던 것이 자신을 공격할지 몰랐던 것인지 꼴사나운 비명을 내뱉으며 핏덩이로 변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굉장히 분노한 기색의 남자가 습격자들의 무리 사이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고작 기생충 따위가 또……!”
“기생충이 아니라, 에포나라고 했지?”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며 품 안에 안겨있는 기묘한 생명체를 쓰다듬는 잉간의 모습.
저 생명체가 잉간이 말하던 에포나인 걸까?
어째서 에포나의 모습이 자신의 눈에도 보이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잉간. 올라타게나.”
“네?”
“우리의 목표는 저 남자를 쓰러트리는 게 아니지 않은가?”
“그렇……죠. 몸은 괜찮아요?”
“최고일세. 가세나.”
로보가 잉간에게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해서 괜찮다고 말한 이유는 그게 사실이어서였다.
어째서인진 몰라도 잠시 의식을 잃었다 깨어난 후로 전신에 마력이 넘쳐난다.
마치 마력 포션 속을 헤엄치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단번에 마력을 최대한 끌어내며 지면을 박차고 습격자들의 무리를 돌파한다.
“어딜……!”
남자는 로보의 그 어마어마한 스피드를 따라잡아 검을 내리치지만, 잉간의 돌창과 에포나의 촉수가 남자의 공격을 가뿐하게 막아냈다.
남자가 잉간과 로보를 막을 수 있던 기회는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이었다.
잉간과 로보는 순식간에 차원문 가까이 도달하고, 잉간은 잘 감춰뒀던 마력 분산기를 차원문 안으로 던져넣었다.
“에잇!”
마력 분산기가 차원문 안에 던져 넣어지자마자, 거대한 차원문이 순식간에 허공으로 흩어져간다.
“쯧, 젠장.”
남자는 그 모습을 보며 짜증 난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바닥을 걷어찼다.
평원을 가득 메웠던 습격자들의 무리도 계속되는 돌격에 상당수 줄어든 상태다.
“너, 졌어.”
“그런 거 같군.”
“그러니까 얌전히 항복하지그래?”
“하, 완전히 그 개자식들의 앞잡이 같은 발언이군.”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무언가를 재단하듯 검을 잉간에게 겨누며 고개를 삐딱하게 까닥거린다.
잠깐의 침묵이 평원에 내려앉고.
“더는 무리겠군. 젠장.”
투덜거리며 검을 들어 올려 허공을 베었다.
그러자 허공이 갈라지며 차원문과 비슷한 공간이 모습을 드러낸다.
“어, 어?”
그리고는 잉간과 로보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대로 차원문 안으로 몸을 던져넣었다.
순식간에 남자는 이곳에서 자취를 감춰버렸고, 남은 것은 정처 없이 주변을 돌아다니는 습격자들 뿐이었다.
갑작스럽게 모든 상황이 종료된 덕분에 로보와 잉간은 황망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전부, 끝난 건가?”
“어……. 전부는 아니더라도. 그런 것 같네요.”
잉간의 대답에 기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다 끝났으니, 이제 돌아갈 시간이군.”
“…….그렇네요.”
위험천만한 모험과 살 떨리는 전투는 이제 모두 끝났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 * *
보고 있구나.
클라인의 등골을 섬뜩하게 하는 중얼거림을 시작으로 그 인간은 클라인의 아바타를 공격해오기 시작했다.
서둘러 잉간이를 도와야 하는데.
클라인은 조바심을 내며 인간을 돌파하려 했지만, 인간은 클라인의 아바타를 쉽사리 놓아주지 않았다.
“크르르르……!”
잔뜩 성난 듯한 차원 파괴자의 목소리가 지상에서 들려온다.
흘낏 시선을 내려보니 사방에서 몰려오는 외래종들을 막아내고 있는 차원 파괴자의 모습이 보인다.
아직 잉간은 싸움을 시작한 것 같지 않지만, 인간의 몸에서 분리된 정보들이 의지를 가지고 잉간에게 덤벼든다.
그런 정보들은 모조리 차원 파괴자가 먹어치워 없애버렸지만, 몸에서 떨어진 잉여 정보들이 정보 생명체로 움직일 정도라니?
저건 목욕을 몇백 년간 하지 않은 사람에게서나 나타날 현상인데?
“냥?!”
“죽어!!”
아니, 그것보다 더 경악할 일은 따로 있지.
어떻게 저 인간이 공용어를 멀쩡하게 말하고 있는 걸까?
누군가에게 언어를 배우기라도 한 걸까?
거기에다가, 저 인간은 전파와 비슷한 수단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다.
정보를 가공해서 사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
클라인은 증오를 풀풀 뿜어내는 인간의 공격을 피하려 했지만, 미처 피하지 못한 꼬리 끝이 살짝 잘려나간다.
아바타를 통해 본신에 따끔한 통증이 전달되고, 클라인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래도 덫이 만들어질 때까진 잘 도망쳤다.
클라인은 슬쩍 뒤를 바라보며 인간의 위치를 가늠하고, 공간에 숨겨놨던 덫을 발동시켰다.
“윽……?”
일반적인 공격 마법은 저 인간에게 먹히지 않는다.
워낙 중첩된 정보량이 많아서 그대로 마법을 튕겨내 버리니까.
하지만 정보를 조작한다면 그건 먹혀들겠지.
클라인이 설치해놓은 덫은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허공에서 고밀도로 농축된 정보를 인간에게 쏟아냈다.
고밀도의 정보 속에 빠진 인간의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진다.
워낙 정보가 중첩된 상태여서 세부 정보를 수정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외부에 새로운 정보를 부착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그렇게 번 시간을 통해 클라인은 서둘러 인간의 정보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지금 클라인이 관측하고 있는 것은 진짜가 아니다.
수많이 중첩된 상태의 인간의 파편적인 모습.
보통은 그런 파편이라면 보유한 정보량이 그리 많지 않을 텐데도 클라인이 경악할 정도의 정보량이라니, 클라인은 눈앞의 인간이 진짜 인간인지도 의심되기 시작했다.
클라인은 서둘러 인간의 파편들 사이에 계속되던 관측을 차단했고, 서로에 의해 유지되던 단편적인 정보들은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다.
좋아, 이걸로 방해꾼은 처리했고, 잉간이는 지금 어떻지?
서둘러 잉간이를 바라보자, 인간이 에게 달려드는 수많은 외래종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저건 너무 많아도 너무 많은데?
저 녀석들을 단번에 모두 없애 버릴 수는 없다.
그래도 일단 시도는 해봐야지.
클라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서둘러 외래종 무리의 정보를 조작하던 그때.
“냥?”
퍼버벙.
어디선가 날라온 생명 도감의 드론이 외래종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와 더불어서 차원 파괴자 또한 외래종들의 정보를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클라인은 단번에 줄어든 다른 외래종들의 정보를 수정하며 남은 녀석들을 마저 처리했다.
이걸로 외래종들이 몰려오는 건 막아냈고, 남은 건 저 인간을 제압하는 건데.
챙!
클라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소리가 잉간이와 인간 사이에서 들려온다.
잉간이와 인간이 본격적으로 칼부림을 시작한 것이다.
차원 파괴자는 열심히 잉간에게 날아드는 공격을 방어하며 잉간이를 보좌한다.
하지만 그 때문에 몰려드는 외래종들을 막아내는 일의 집중이 흐트러진 걸까?
차원 파괴자가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외래종들이 여럿 출현하고, 클라인은 그런 외래종들까지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대로면 잉간이를 도와줄 수 없다.
아, 아바타가 아니라 원래 몸으로 온다면 그냥 바로 끝나는 일인데.
하지만 그럴 수는 없으니까.
클라인은 조바심을 내며 속으로 혀를 찼지만, 잉간이를 믿기로 했다.
잉간이라면 저딴 이상한 인간에게 지지 않을 거라 믿고 있었으니까.
클라인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불안한 눈빛으로 잉간의 전투를 바라보던 그때.
“냥?!”
잉간을 여기까지 데려왔던 켄토르의 몸에 인간의 정보들이 침투하더니, 켄토르의 정보를 바꿔가기 시작했다.
저건 분명히 악성 정보 그 자체인데, 악성 정보로 이루어진 정보 생명체는 들어봤어도 악성 정보로 이뤄진 인간이라니?
이윽고 악성 정보는 켄토르의 자기 관측을 완전히 강탈해서 인간의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잠깐, 이렇게 되면 잉간이 위험해지는데……!
지금 본신을 데려온다고 제때 잉간을 도와줄 수 없다.
어쩔 수 없다.
클라인은 잠시 외래종들을 놔두더라도 인간을 방해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클라인이 행동에 나서기도 전에.
꾸물텅.
켄토르의 몸에서 불쾌한 촉수들이 돋아나더니, 악성 정보를 그대로 전부 먹어치우며 자기 인식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저건, 차원 파괴자?
자세히 보니 잉간에게 늘 붙어 있는 차원 파괴자의 유충이 켄토르의 몸에서 부화하고 있었다.
충분한 양의 정보가 새롭게 들어와서 부화한 것일까?
정신을 차린 켄토르는 잉간에게 합세해서 인간을 공격했고, 잉간은 인간의 방어를 뚫고 차원문을 닫았다.
인간은 자신이 졌다는 걸 깨달았는지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본다.
그리고는 스스로 정보를 조작해 차원문을 열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차원문을 닫기 전에 차원문이 어디로 이어졌는지 조사한다느니, 그런 생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잉간이가 더 고생하기 전에 빨리 잉간이를 데려와야 한다.
그렇게 판단한 클라인은 재빠르게 아바타의 접속을 해제하고, 생명 도감을 찾았다.
“이게 뭐예요?”
“어, 그게. 나도 모르겠네. 내가 조사했을 땐 저런 녀석은 없었는데…….”
“저 정도로 정보가 중첩된 생명체를 감지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에요?”
“미안. 아마 잉간이가 내려온 직후 차원문을 통과한 거 같아.”
클라인은 더욱 생명 도감에게 뭐라 투덜거리고 싶었지만, 지금은 생명 도감에게 짜증 부릴 때가 아니다.
빠르게 잉간이를 안전한 곳으로 옮길 때지.
클라인은 분노를 감추지 않은 모습으로 서둘러 잉간이를 검역항 안으로 이동시켰다.
클라인이 간신히 한 시름 놓은 듯 보이자 유리와 소행성이 슬그머니 클라인에게 다가와 클라인을 진정시키려 한다.
“생명 도감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니까, 화 풀어.”
“맞아. 갑자기 그런 생명체가 나타나니까 깜짝 놀라서 엄청 분주하게 움직였는걸?”
“으으…….”
마지막에 잉간이를 도와주던 생명 도감의 드론들을 떠올리고 클라인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생명 도감이 잘못하지 않은 건 알지만 그래도 잉간이가 잘못될 뻔했다고 생각하니 화를 주체할 수 없다.
클라인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명 도감을 찌릿 바라봤다.
“……생명 도감 님.”
“으흠. 네.”
“제가 생명 도감 님 부탁을 들어드렸으니까, 다음번에는 제가 생명 도감 님께 부탁 하나 해도 되죠?”
“네?”
“되죠?”
“아휴, 물론 되죠.”
“방금 하신 말씀, 영상에 다 찍혔어요. 나중에 발뺌하지 마세요?”
그래.
적어도 이 정도의 확언은 받아두지 않으면 화가 풀리지 않는다.
촬영을 끝마치고 집에 돌아가서 생명 도감에게 뭘 부탁할지 곰곰이 생각해서 최대한 귀찮은 일을 부탁하자.
“아, 아무튼. 차원문도 닫았으니 외래종의 침공은 잘 막아냈네요!”
“근데, 그 녀석들 도대체 뭐였던 거야? 근방에 딱히 차원문을 열 만한 문명은 없던데…….”
“그러게. 어디서 온 걸까?”
인공 행성을 침략해온 정체불명의 인간들.
그 인간들이 어디서 왔냐는 유리의 의문에 클라인은 조용히 리만 협회장을 떠올렸다.
리만이 발뺌하든 뭐든, 이건 직접 물어봐야 한다.
이건 그냥 넘어갈 일이 절대로 아니니까.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잉간이를 담은 검역항을 껴안은 손에 힘을 꽉 넣었다.
187화 [공익 광고]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된 것은 이곳에 올 때와는 반대로 갑작스럽게 이뤄졌다.
기사와 함께 마을로 돌아와서 기쁜 소식을 알리고, 마을 주민들과 떠들던 순간에 익숙한 안개에 집어 삼켜진 것이다.
뭔가 급한 일이라도 있는 걸까?
조급하다는 느낌이 드네.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게 찝찝하지만, 위험한 일은 모두 끝났으니 괜찮겠지?
“왕!”
“수고했어. 에포나.”
회색 안개 속에서 에포나가 내 품에 파고들어 애교를 떨어댄다.
아까 에포나가 작은 에포나를 삼켰을 때는 놀랐는데, 분신을 하나로 회수한 거겠지……?
응, 그럴 거야.
그나저나 날 따라다니던 그 고양이에게 작별 인사는 하고 가고 싶었는데.
거기서 블랑카의 아버지를 만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클라인은 거기에 블랑카의 아버지가 있다는 걸 알고 나를 보낸 걸까?
뭐, 실제로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는 게 맞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또…….
평소에는 잘 하지 않던 생각까지 억지로 끄집어내며 심란한 마음을 가라앉히려 한다.
뭐. 이제 와서 그런 거로 충격을 받은 건 아니지만 내 정체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는 게 그리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것도 그 개자식이 자기 자신과 닮았다고 헛소리를 지껄인 거면 말이다.
그래도, 그 새끼의 말대로라면 내 기억의 뒤틀림을 설명할 수 있겠지.
지금껏 일부러 무시해왔던 뒤죽박죽 섞인 나의 기억.
블랑카와 아리스에게 털어놓았던 나의 과거가 정말 진실일까?
“에포나…….”
나는 침대에 드러누워 에포나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채로 에포나의 이름을 부른다.
에포나는 별말 없이 내 코를 핥을 뿐이다.
변함없는 에포나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린다.
내가 뭐, 여러 사람이 합쳐져 만들어진 사람이라고 해도 바뀌는 건 없잖아?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나다.
클라인과 에포나와 블랑카와 아리스와 리키와 관계를 쌓아 올린 건 여기 있는 나다.
자꾸만 이미 결론을 내린 질문을 자꾸만 되짚는 건 지금의 내 기분이 그닥 좋지 않아서겠지.
그 남자.
내가 그 남자를 좋아할 수 없는 이유는 수두룩하지만, 지금 내 마음 속에서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이유는.
그가 나와 클라인의 노력을 비웃었기 때문이다.
나와 클라인이 조금씩이라도 소통할 수 있는 이유가 내가 여러 사람이 중첩된 존재여서라고 했던가?
절대 그렇지 않다.
내가 무엇이든 간에, 클라인과 내가 이뤄낸 결과는 오로지 클라인과 나의 노력의 결과다.
내가 특별해서 클라인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식의 말은, 클라인에 대한 모욕이다.
나와 클라인이 얼마나 노력했는지도 모르면서 그런 소리를 지껄여?
그러니까 나는.
그 녀석을 좋아할 수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말이다.
* * *
합방은 모두 끝났고, 다들 각자의 집으로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클라인은 잉간이를 집으로 소중하게 데려간 뒤에, 굳은 표정으로 다시 집을 나섰다.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서.
리만.
도대체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물어봐야 한다.
지금까지 계속된 일들로 클라인은 이제 리만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를 더 믿고 놔두다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클라인은 브리더 협회로 곧장 달려가서 리만과의 만남을 요청했다.
약간의 기다림이 지나간 뒤에 리만은 방긋 웃는 얼굴로 클라인을 반기며 협회 로비에 나타났다.
“어머나, 클라인 양. 오랜만이네요. 연락도 하지 않고 찾아와서 조금 놀랐네요.”
“……협회장님.”
“협회장이 아니라 아주머니라고 부르라고 했죠?”
“……협회장님. 할 이야기가 있어요. 잠깐, 시간을 내어줄 수 있나요?”
평소와는 다른 굳은 표정의 클라인을 보며 리만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하지만 이내 어깨를 으쓱하며 클라인을 자신의 집무실로 안내했다.
리만은 클라인과 함께 집무실로 가는 동안 여러 주제로 클라인에게 말을 걸었지만, 클라인은 아무 말 없이 리만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집무실의 풍경.
리만은 언제나의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의자에 앉았고, 클라인은 가만히 서서 리만을 바라봤다.
“그래요. 클라인 양. 할 이야기라는 게 뭐죠?”
“지난번에 보호소의 그 아이들이 무엇인지 설명하셨잖아요?”
“그랬었죠. 설마, 그 이야기를 아직까지 하는 건가요?”
“아뇨. 제가 묻고 싶은 건, 어째서 그 아이들이 밖에서 돌아다니고 있느냐예요.”
“그게 무슨 소리죠?”
리만은 정말 모르는 건지, 시치미를 떼는 것인지 결백하다는 듯한 눈동자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클라인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이 촬영한 영상 일부를 리만에게 보여줬다.
인공 행성을 습격한 인간들을 촬영한 영상 말이다.
“인공 행성을 만들었더니 갑자기 저 아이들이 습격해왔더라고요. 저 아이들. 많이 익숙한 생김새가 아닌가요?”
리만은 클라인이 가져온 영상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지만 금세 원래의 표정을 되찾으며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신기하네요. 자연적으로 저렇게 진화한 인간들도 있었군요?”
“저게 자연적인 모습이라고요?”
“자연적으로 마력 가속로가 만들어지는 곳이 우주인데, 이런 일도 있을 수 있겠죠.”
능청스럽게 대답하는 리만의 모습에 클라인은 이를 악물며 외쳤다.
“그걸 지금, 저보고 믿으라고 하는 소리에요?”
“믿든, 말든. 그게 사실이니까요. 제가 뭘 하겠다고 클라인 양의 인공 행성에 그 아이들을 보내겠어요?”
“그게 궁금한 거예요. 도대체 왜 그러셨어요?”
“클라인 양. 대화라는 건 다른 사람의 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는 법이에요. 미리 결론지은 결과와 다른 대답이 나온다고 그걸 부정해선 안 되죠.”
마치 자신을 타이르는 듯한 리만의 태도에 클라인은 리만이 자신과 제대로 대화를 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클라인은 차갑게 식은 눈동자로 리만을 바라보며 또 다른 영상을 내밀었다.
“그럼. 이건 뭔가요?”
“……이게 뭐죠?”
리만은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시치미를 뗐지만, 클라인은 리만의 표정이 순간 흐트러지는 것을 잡아냈다.
“이 얼굴들. 어디서 많이 본 인간이 아니에요?”
“글쎄요. 저는 잘…….”
“협회장님이 잘 보호하겠다고 한, 스노우 스톤의 바로 그 아이들이에요. 저 아이들이 왜 저렇게 됐는지. 설명하셔야 할거에요.”
“단지, 비슷하게 생겼을 뿐이겠죠.”
“그럼 보여주세요. 협회장님이 보호한다고 하셨던 그 아이들을요.”
클라인은 물러서지 않고 리만을 더욱 몰아붙였고, 리만은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책상을 두드렸다.
만약 정말로 단순한 우연의 일치라면 저 아이들을 보여달라는 부탁을 거절할 이유가 없다.
클라인은 저 아이들을 이곳에 데려온 사람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렇지만 리만은.
그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그래요. 저 아이들은 클라인 양이 지하에서 봤던 그 아이들이 맞아요. 스노우 스톤의 그 아이들도 맞고요.”
“잘 보호하신다고 하셨으면서 왜……!”
“안타깝게도 급격한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거든요. 다들.”
거짓말이다.
그 극한의 환경에서 살아남던 키메라 인간들이 보호소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환경의 변화를 이겨낼 수 없었을 리 없다.
클라인은 트집 잡고 싶은 것이 참 많았지만, 일단은 가만히 리만을 노려보며 질문을 던졌다.
“그래요. 그 인간들이 전부 죽어서, 그 생체 실험인가 뭔가에 동원됐다고 쳐요. 그러면 왜 저 아이들이 인공 행성에 나타난 거죠?”
“잠시만요. 잠깐, 확인할 게 있어서요.”
리만은 클라인의 대답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무언가를 이것저것 조작하더니, 클라인에게 한 행성을 보여줬다.
“이게 뭐죠?”
“제가 연구하던 아이들을 모아둔 행성이랍니다. 정보 오염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을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한 곳이죠. 클라인 양이 봤던 그 아이들도 원래는 저곳에 있었답니다.”
“그게 어쨌다는 거죠?”
“방금 확인해 봤는데, 저곳에서 일종의 정보 재해가 발생했더라고요. 아마 그 일로 저 행성과 클라인 양의 인공 행성이 이어진 것 같네요.”
“그걸 지금 믿으라는 거에요?”
리만은 클라인에게 또다시 우연을 대답으로 내놨다.
리만 또한 클라인이 자신의 대답을 믿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하지만 세상엔 이렇게 알려질 거랍니다.”
“네?”
“클라인 양. 클라인 양이 원한다면 폭로해도 괜찮아요. 증거 영상도 있잖아요? 그러면 저는 이렇게 대답할 거에요. 뭐, 스노우 스톤의 아이들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듣겠지만, 거기서 끝날 거에요.”
“그게. 무슨…….”
“클라인 양도 다 알고 찾아오신 거 아니었나요? 제가 진실을 말하지 않을 거라는 걸요.”
너무나 당당하게 리만은 자신이 한 짓임을 밝혔다.
클라인은 그저 알고 싶을 뿐이었다.
어째서 스노우 스톤의 인간들이 저런 모습이 됐는가.
어째서 리만의 보호소에서 봤던 인간들이 인공 행성을 침략했는가.
만약 리만의 대답이 충분히 클라인을 납득시키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된다면.
클라인은 다시 리만을 믿으려 했다.
하지만 리만은.
클라인의 믿음 따위는 필요 없어 보였다.
“……잉간이가 다칠 뻔했어요.”
“그거 큰일이네요. 손해배상을 청구하세요.”
“잉간이가, 엄청 슬퍼했어요.”
“안타까운 일이네요.”
“……왜 잉간이가 그런 일을 당해야 했는지. 단지 그걸 알고 싶을 뿐이에요.”
“미안해요. 그건 말할 수 없어요.”
“말하세요. 당장.”
“대의를 위한 일이었답니다.”
클라인은 분노로 가득한 눈동자로 리만을 바라봤지만, 리만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전 이제 협회장님이 말하는 대의가 뭔지 모르겠어요.”
“인간형 생물을 지적 생명체로 인정받게 한다.”
“아뇨. 제가 보기엔 그건 협회장님의 대의가 아니에요. 단순한 변명이나 협회장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도구죠.”
“뭐, 그렇긴 해요. 저도 아무 사심 없이 인간을 지적 생명체로 만들려는 건 아니니까요.”
“그럼…….”
“그렇지만, 그건 클라인 양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잉간이를 위해서 인간을 지적 생명체로 만들고 싶다. 개인적인 목표를 이루기 위한 도구로 쓰려는 게 아닌가요?”
“그럼 협회장님은 도대체 뭐가 목적인데요?!”
클라인은 더 참지 못하고 리만을 노려보며 큰소리로 외쳤다.
리만은 그런 클라인의 얼굴을 웃으며 바라보고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중앙 정부에 진입하는 것.”
“……네?”
“중앙 정부의 일원이 되는 것도 잘 생각해보니 수단이네요. 그래요, 더 나은 세상을 만든다. 그게 제 대의랍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
무척이나 추상적인 목표이었기에 클라인은 리만의 대의를 이해할 수 없었다.
리만의 대답에 할 말을 잃은 클라인이 입을 다문 것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리만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클라인 양이 화난 이유는 다 이해해요. 하지만 그건 다 어쩔 수 없는, 대의를 위한 희생이었답니다.”
“……대의를 위한 희생이 필요하다면, 자기가 먼저 희생하지 그래요?”
“그게 필요하다면요.”
클라인은 자신이 리만을 이해할 수도, 대화를 나눌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리만은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일과 말만을 할 뿐이니까.
리만에게 있어선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으니, 리만은 사과하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클라인은 허탈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잉간이를 공격한 것도, 다 대의를 위해서에요?”
“잉간이를 공격하다뇨?”
“시치미 떼지 마세요. 지난번에 보호소에서 봤던 그 인간. 그 이상한 인간이 잉간이를 노리고 공격했다고요. 그 인간을 시켜서 잉간이를 공격한 것도 다 그놈의 대의 때문이에요?”
클라인은 그렇게 쏘아붙였지만, 리만은 정말로 클라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하지만 이내 클라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기 시작했다.
“아……. 무슨 일인지 알겠네요. 우연한 사고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네요.”
“네?”
“작은 친구의 의욕이 너무 넘쳐서 벌어진 일인 것 같네요. 후후.”
클라인은 전혀 납득하지 못했지만, 리만 혼자서 납득하며 웃음을 짓는다.
“과격한 건 좋지 않다고 말했는데, 살짝 조급해진 모양이에요. 클라인 양이 걱정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제가 잘 타이를게요.”
“…….”
그 어떠한 설명을 듣지도 못하고.
그 어떠한 사과를 듣지도 못했지만.
리만은 클라인에게 자신을 믿으라 말했다.
당연하게도 클라인은 여전히 리만을 믿을 수 없었다.
리만은 더 설명해줄 생각도 이야기할 생각도 없어 보인다.
리만을 멈추려면, 좀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
제대로 된 한 방이 아니라면 리만을 멈출 수 없다.
어떻게 해야 리만에게 제대로 된 한 방을 먹일 수 있을까?
클라인은 그걸 고민하며 조용히 집으로 돌아갔고.
다음 날.
리만이 죽었다.
188화 [브리더 협회 공식] 안전한 애완 생물을 찾는 당신께 추천하는 인간형 생물 35종
차원항으로 돌아와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대에 쓰러져 잔 것이었다.
고작 이틀밖에 시간이 흐르지 않았지만, 평소보다도 더 지친 기분이 들었다.
분명히 평소에 하지 않던 짓을 했기 때문이겠지.
처음으로 해야만 하기 때문에 누군가와 싸운 것이 아니라, 그러고 싶어서 싸웠다.
물론 해야만 하는 싸움이기도 했지만 내가 싸우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컸다.
누군가와 진심으로 싸운다는 게 이렇게나 피곤한 일이었구나.
그렇게 침대에 쓰러져 하루 종일 수면을 취한 내가 일어나자마자 한 일은.
클라인에게 불려간 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는 일이었다.
하긴, 갑자기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한 뒤에 며칠 뒤에 돌아와서 침대에 쓰러져 잠만 자면 그 누구라도 걱정하겠지.
“……고생했네.”
“어디 다치지는 않았지?”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야.”
리키와 아리스가 준비한 아침밥을 먹으며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자 다들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세 사람을 안심시키기 위해 과장된 몸짓으로 기지개를 피며 건강함을 어필한다.
“괜찮아. 에포나가 잘 지켜줘서 다친 곳은 없어.”
리키와 아리스는 그 정도로 넘어간 것 같지만, 블랑카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찌릿 노려본다.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거 같은데.”
“어?”
“표정. 아까부터 별로라고. 뭔가 고민하는 거라도 있어?”
“그게…….”
고민이라.
고민이라고 한다면 그 남자가 말한 이야기겠지.
그래, 혼자 계속 고민하는 것보단 털어놓고 뭔가 조언이라도 듣는 게 났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 남자에게서 들었던 내 이야기를 전달했다.
“그냥. 뭐, 딱히 그게 충격이라거나. 나는 누구? 같은 정체성의 고민 같은 게 생긴 건 아닌데. 그냥, 좀 궁금해지잖아. 내가 정확히 누구인지 정도는.”
말로는 별로 충격을 받지 않았다고 했지만, 사실은 꽤나 신경 쓰고 있던 걸까?
내가 기억하던 기억들이 사실은 나의 기억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한 불안감을 내가 슬며시 토해내자, 리키가 배후에서 나를 꽉 껴안는다.
“리키?”
“무슨 느낌인지 알아. 나도 겪어봤거든.”
리키도 이런 생각을 해봤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나는 순간 그리 생각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리키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리키는 말 그대로 누군가에 의해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키메라 인간.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리키가 태어났을 때부터 리키 안에 잠재되어 있었겠지.
“잉간 덕분에 이젠 그런 생각은 하지 않지만 말이야.”
“……그래?”
“응. 그러니까 잉간도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보기에 잉간은 이미 답을 찾은 거 같은데?”
“그렇긴 한데…….”
“가끔씩 무서울 때면 걱정하지 말고 꽉 안아줘. 헤헤. 그럼 무서운 기분이 싹 날아가거든.”
리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더 강하게 나를 껴안는다.
이것저것 강해지는 자극에 내가 얼굴을 붉히던 그때, 블랑카는 부족하다는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또, 더 할 말이 있을 텐데?”
“어? 더 없는데…….”
“진짜?”
“……진짜로.”
어라?
블랑카가 조금 화난 것처럼 보이는데, 왜 그러지?
설마, 로보 씨를 만났다는 걸 눈치챈 걸까?
에이, 설마.
내 이야기에서 블랑카의 아버지를 만났다는 걸 추론할 구석은 단 한 구석도 없었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불안한 마음으로 블랑카를 바라봤다.
“……아버지. 만났잖아.”
“어?”
“돌아왔을 때부터 냄새가 풍겼어. 왜 거짓말을 하는 거야?”
“엑.”
냄새가 났다고?
블랑카의 아버지와 그렇게 오래 붙어있진 않았던 거 같은데?
정곡을 찌른 블랑카의 말에 나는 당황하며 블랑카를 바라봤고, 블랑카는 한숨을 내쉬었다.
“뭐, 분명히 자기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아버지가 부탁한 거겠지만…….”
“그건 또 어떻게…….”
“뻔하지. 맨날 그랬으니까. 맨날 먼저 죄책감을 느끼고 먼저 거리를 두고. 진짜 바보라니까.”
블랑카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씁쓸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래. 아버지랑 무슨 일이 있었어?”
“어, 그러니까. 사실은…….”
더 이상 속이는 게 불가능하겠다 생각한 나는 조심스럽게 블랑카에게 숨기는 일 없이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내 이야기를 다 들은 블랑카는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음 지었다.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로보가 이야기했던 것과는 다르게 블랑카는 자신의 아버지를 그렇게 싫어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하긴, 가문의 기대가 부담된다는 말은 했어도 가문이 싫다는 말은 하진 않았지.
아니, 하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말한 건 아니었지.
“아버지를…… 그렇게 싫어하는 건 아닌 거지?”
“응?”
“아니. 네 아버지가 그런 식으로 말해서.”
“……그럴 리가 없잖아. 본심을 밖으로 꺼내는 게 서투를 뿐이지, 정말 훌륭한 기사의 귀감인걸.”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말한 블랑카는 아련하게 미소지으며 중얼거렸다.
“정말로 싫었다면. 부담을 느낄 리도 없었으니까.”“그건, 다행이네.”
“아무튼. 거짓말한 건 거짓말한 거니까 벌은 받아야지?”
“어?”
“아무 말 없이 혼자서 뛰쳐나가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맞아, 맞아!”
심상치 않음을 느낀 나는 서둘러 자리를 벗어나려 했지만, 어느새 내 몸에 감겨든 리키의 몸이 나를 단단히 붙잡는다.
“에헤헤.”
리키는 붉어진 볼을 긁적이며 수줍게 웃고, 나는 가만히 내게 쌓인 업보를 받아들였다.
내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듯한 하루가 지나가고.
다음날.
“완성……인 건가?”
나는 드디어 클라인과 소통할 수 있을지도 모를 장치를 완성했다.
* * *
“도대체 어쩌려고 그런 짓을 벌인 거야?”
“…….”
리만은 어둠 속에 홀로 앉아서 명상을 하는 중인 남자에게 타박을 준다.
하지만 남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명상에 집중할 뿐이었다.
그런 남자의 반응을 알아차린 건지 모르는 것인지 리만은 신경 쓰지 않고 할 말을 계속한다.
“클라인이 제대로 된 증거가 없어서 그렇지, 자칫 잘못했다간 중앙 정부가 나설만한 사항이었어. 남의 사유지에 차원문을 열고 습격하는 건 도대체 무슨 발상이야?”
리만의 질문에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스스로의 내면을 관조할 뿐.
그런 남자의 모습을 지켜보던 리만은 씁쓸하다는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제대로 된 단서를 찾지 못해서 조급한 네 마음은 알겠지만, 조금은 천천히 갈 필요가 있어. 괜히 다른 사람들에게 적대감을 얻을 필요는 없잖아?”
리만은 남자가 왜 이번 일을 벌였는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남자와 리만은 인간형 생물이 지적 생명체의 정보를 인식할 수 있으려면 일종의 정보 중첩 상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남자가 그랬고, 클라인의 잉간 또한 그와 비슷한 케이스로 보였으니까.
일반적인 인간들은 고밀도의 정보를 인식하지 못한다.
일정 이상으로 밀집된 정보는 인간들의 몸에서 전부 마력으로 변환되니 말이다.
인간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차원 생물이 그렇다.
차원 생물들이 지적 생명체들을 인식하려면, 최소한 하늘 고래 정도로 거대한 뇌를 가지고 있거나 드래곤들 정도로 마력의 변환에 뛰어나야 한다.
물론 드래곤들도 지적 생명체를 인식할 수 있는 개체는 극소수기 때문이다.
인간을 지적 생명체로 인정받게 만든다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일단 인간들이 지적 생명체를 인식하게끔 만들어야 했다.
리만과 남자는 정보의 중첩에서 발생하는 필수 정보의 밀집을 그 방법으로 생각했다.
인간이 고밀도의 정보를 마력으로 바꾸는 게 문제라면, 몸이 고밀도의 정보를 마력으로 바꾸지 않게끔 하면 되니 말이다.
필수 정보들을 밀집시켜 고밀도로 바꾼다면, 몸이 고밀도의 정보를 해로운 것으로 인식하지 않게 될 테니 말이다.
만약 여전히 고밀도의 정보를 마력으로 변환시킨다면, 마력 과다증에 걸린 인간처럼 신체가 마력으로 흩어져 사라질 테니 말이다.
그 때문에 리만과 남자는 스노우 스톤의 키메라 인간들을 연구하고자 했다.
사람의 정보로 잔뜩 오염당한 그들의 몸에 무언가 단서가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제대로 된 단서는 나오지 않았고, 가까워진 줄 알았던 골인 지점은 순식간에 멀어지는 듯 보였다.
하지만 리만은 그리 조급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시간은 언제나 충분한 것이었으니까.
시간이 오래 걸릴수록 리만 입장에선 자신이 중앙 정부에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이 단단히 다져지는 것이었다.
인간형 생물의 수가 더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리만의 지지층이 늘어나니까.
그들이 동료 시민으로 인정된다면 지금과 같은 폭발적인 인구 증가는 허락되지 않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남자는 달랐다.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떻게든 인간을 지적 생명체로 인정받게 하고자 했다.
시간을 단축시키고자 동료 인간들의 몸을 대상으로 생체 실험을 진행할 정도로 말이다.
이번 일도 마음이 조급해진 남자가 잉간의 정보를 확인해서 크게 시간을 단축시킬 생각으로 저지른 일이겠지.
하지만 그런 방식은 안 된다.
현재 잉간은 클라인의 사유재산이 아니던가?
중앙 정부는 시만의 재산과 생명에 위해를 가한 생물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너무 빠르게 골인하려고만 하면 모든 일을 그르칠 수 있다.
리만이 그리 생각하며 가만히 남자를 내려다보던 그때, 닫혀있던 남자의 입이 열렸다.
“……성과는 있었어.”
“뭐라고?”
“성과는 있었어. 그 녀석의 정보를 어느 정도는 들여다볼 수 있었거든.”
“뭔가, 해답을 얻은 거야?”
“그래. 아마도, 이게 정답일 거야.”
남자는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서 리만의 얼굴을 무표정하게 바라봤다.
“정보 중첩으로 발생하는 자아의 충돌 때문에 지금까진 자아를 삭제하는 방법을 썼지.”
“그렇지. 하지만 그래서는 단순한 인형에 불과하지.”
“정보 중첩이 일어날 때 각자의 이름이 충돌하여 오류를 만드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지금까진 이름을 동일하게 수정하려고 했어.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더군.”
“무슨 소리지?”
“아예 이름을 지워버리면, 이름이 서로 충돌하는 일도 없지. 그 기생충이 그 녀석에게 한 짓이 바로 그거였어.”
“이름이 지워진다면, 자기 관측이 가능하겠어?”
“두 자아가 서로를 관측하면 가능하더군. 잉간의 경우처럼 말이야.”
“확실히…… 가능성이 있겠어. 정보를 수정하는 것보단 정보를 삭제하는 게 더 쉬우니 말이야.”
“그래. 삭제하는 건 쉽지. 그리고…… 공백에 뭔갈 채워 넣는 건 더욱 쉽고.”
리만은 남자가 내놓은 해답에 감탄하며 구체적인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한편 남자는 리만이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을 되짚으며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이대로면 인간과 사람이 대화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겠네.”
“……이봐. 묻고 싶은 게 있어.”
“응?”
자신의 계획이 완성되는 그때를 떠올리며 리만이 미소를 짓던 그때,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리만을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내 이름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
“흐음. 글쎄?”
남자는 리만에게 자신의 이름을 물어봤지만, 리만은 고개를 돌리며 자신의 무지를 드러낼 뿐이었다.
남자의 이름은 수많은 정보에 휩쓸려 형체를 잃어버려 이젠 그 누구도 남자의 이름을 알 수 없다.
그 모습을 지켜본 남자는 피식 헛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역시. 넌 나와 소통하던 게 아냐.”
“그게 무슨…….”
무언가 체념한 듯한 남자의 말에 리만은 질문을 하려 했지만.
푹.
날카롭게 벼려진 정보가, 자신의 핵심 정보를 헤집어놓는 감각을 느끼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케흑. 컥. 크흑. 이게, 무슨…….”
“나와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보여도, 넌 나와 대화를 하던 게 아니었어. 그저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한 행동에 불과할 뿐.”
무릎을 꿇은 리만에게 남자가 검을 뽑아 들고 한 걸음씩 다가가며 중얼거린다.
“네가 출세를 위한 도구로 우릴 이용하는 건 이미 알고 있었어. 평화적인 방법으로 인식을 바꾼다고? 거짓말하지 마. 넌 오히려 인간을 가축으로 보는 인식을 굳혔을 뿐이야.”
“그게. 아니라…….”
푹.
남자의 검이 리만의 외부 정보를 뚫고 들어가고, 리만의 정보들을 헤집어놓는다.
“인간은 정보를 조작할 능력이 없다. 인간은 무해하다. 전부 네가 퍼트린 인식이지. 인간은 네놈들을 해칠 힘이 없다고.”
“그건, 사람들의. 인식을 좋게……!”
“아니. 그런 네 노력 때문에 우린 협상의 테이블에도 앉을 수 없어. 저들은 인간이 자신에게 대항할 힘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또다시 리만의 핵심 정보가 망가지는 감각을 느끼며 리만은 신음과 내부 정보들을 토해냈다.
남자는 그런 리만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증오를 토해냈다.
“내가 알려주마. 무언갈 바꾸는 건 어려워도, 무언가를 파괴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우리가 언제든지 너희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다는 걸 알려주마.”
“아, 윽…….”
“네 도움은 이제 필요 없어.”
신체 내부에서부터 퍼져나간 일격에 리만은 별다른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바닥에 털썩 쓰러졌고.
남자는 그대로 검을 휘둘러 리만의 목을 베어냈다.
모래알이 바다를 가르는 기적을 일으킨 남자는 이제 볼 일이 없다는 듯 무심하게 밖으로 걸어 나갔다.
핏방울을 뚝뚝 떨어트리며.
189화 !!!!!!!!!!!!!!!!
마석 통신.
리베리아인들이 모인 마을에서 배워온 기술.
이걸 응용한다면 전파를 수신할 수 있는 라디오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차원항에 돌아온 나는 곧장 라디오 만들기에 착수했다.
“어디 보자, 쓸만한 마석이…….”
그동안 마석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기에 마석은 꽤 많이 남아있었지만, 이 기세라면 금방 다 써버리고 말 것이다.
무오 농장을 좀 더 활성화시켜서 마석을 좀 더 수급해야 하려나?
아니, 애초에 무오로는 그렇게 썩 쓸만한 품질의 마석이 나오지 않는데.
블랑카나 리키가 사냥으로 잡아 오는 대형 동물들의 마석 정도가 쓸 만한 품질이다.
뭔가 질 좋은 마석을 따로 수급할 방법은 없는 걸까?
애초에 마석은 어떻게 생겨나는 거지?
지금까지는 대충 마력이 뭉쳐서 만들어진 게 마석이라 생각했는데, 이것저것 설명을 들으니 그게 또 아닌 느낌이란 말이지.
마력으로 마석이 생겨나는 게 아니라 마석으로 마력이 생겨난다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
그럼 마석은 어떻게 생겨나는 거지?
“……정보 조작을 해봐?”
뭐, 마석의 정보를 바꾸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마석을 이루는 구성 요소 정도는 알아낼 수 있겠지.
나는 별생각 없이 마석 하나를 집어 들고 정보 조작을 시도했다.
“어?”
그러자 마석에서 느껴지는 낯익은 감각에 나는 당황스러운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차원항 바깥의 고밀도 정보들을 조작할 때와 비슷한 느낌인데, 이거?
오히려 그보다 더 밀도가 낮은 덕분에 더 조작하기 쉬운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나저나 이렇게 손쉽게 정보 조작이 통한다는 건, 역시 그건가?
마석은 고밀도의 정보가 뭉쳐져서 만들어진다는 걸까?
하긴,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은 다 정보라고 할 수 있으니 뭐로 만들어지든 정보가 뭉쳐서 만들어지는 거라고 할 수 있겠지.
그렇다면 마석을 차원항 바깥에 방치해두면 어떻게 되려나?
잠시 밖을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블랑카의 몸에 과잉 정보들이 잔뜩 쌓였는데, 마석에도 그런 정보들이 쌓여 마석을 더 성장시키지 않을까?
아니, 잠깐만.
애초에 라디오를 차원항 안에 만들 이유가 있나?
차원항 바깥이 좀 더 클라인의 목소리를 잡기도 쉽고, 전파를 보내기도 쉽지 않을까?
그렇게 대충 라디오 제작 계획을 구상하는 사이, 아리스에게 부탁했던 마력 회로 제작이 모두 끝난 모양이다.
저 멀리서 아리스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쥐고 날아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완성했어?”
“응! 후후, 이 정도는 간단하지!”
리베리아인들의 마을의 기술자에게 부탁해서 메모해둔 마력 회로를 아리스에게 구현해달라 부탁했더니,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서 완벽한 회로를 그려왔다.
진짜 마법 쪽에 있어서 아리스의 재능은 엄청 대단하네.
선천적으로 마력이 넘쳐나는 아리스의 체질이 그녀의 재능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걸까?
“바깥에 나갈 건데, 따라올래?”
“바깥에?”
“응. 밖에다가 설치하려고.”
“흐음…… 나도 갈래!”
아리스는 깃털이 더러워지는 것 때문인지 살짝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따라왔다.
미리 만들어둔 발전기와 여러 마석 전선들도 주섬주섬 챙겨서 차원항 밖으로 나온다.
차원문 근처의 땅에 발전기를 설치하고, 조심스럽게 설계도대로 마석 라디오를 제작해본다.
라디오를 설치하는 작업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이제부터가 본론이다.
이제 라디오를 켜둔 상태로 클라인의 목소리를 잡아내고, 그 목소리를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음성 신호나 글자로 바꿔야 한다.
“일단, 대충 이 구역대의 신호는 죄다 잡음이라고 치고…….”
아직 클라인의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데 잡히는 수많은 신호들은 전부 무시하도록 라디오의 회로를 만지작거린다.
시끄럽게 쫑알대던 세상이 입을 다물고 잠잠해지고, 나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서 클라인의 목소리를 기다린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처음에는 신기한 눈치로 나를 지켜보던 아리스도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자 지루한 얼굴로 물어본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아리스에게 오늘의 예정을 전한다.
“글쎄? 클라인이 올 때까지?”
“클라인은 언제 오는데?”
“그건 모르겠네.”
내 대답을 들은 아리스는 한숨을 내쉬며 차원항으로 돌아가고, 나는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아서 클라인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기다린다.
여전히 소름 끼치는 정적만이 맴돌지만, 반드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올 것이라 믿으며.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진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클라인을 기다리긴 힘드니, 그 남는 시간에 정보 조작을 연습해본다.
“흐음…….”
차원문이 열려있는 거대한 고원의 바닥을 파헤쳐본다.
바닥을 파내는 것까진 간단하지만,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거나 파낸 바닥을 다른 것으로 바꾸는 건 거의 불가능하거나 성공해도 울퉁불퉁한 흉터가 남는다
눈에 띄는 성장은 없었지만 계속 이렇게 연습하면 뭐라도 더 나아지는 게 있겠지.
그리고 뭔가 거대한 점토를 가지고 노는 기분이어서 손을 멈출 수가 없다.
이게 뽁뽁이를 터트리는 거 같은 묘한 재미가 있네.
그렇게 주위의 땅을 너덜너덜하게 갈아엎으며 클라인을 기다리던 그때.
“응?”
어디선가 고밀도의 정보가 이쪽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마치 바다에 돌을 빠트리자 사방으로 파문이 일렁이는 것 같이 말이다.
누군가가 이 근처에서 움직이는 여파인 걸까?
그리고 그 누군가는 클라인일 가능성이 가장 높겠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빠르게 라디오 근처로 달려가 어떤 신호가 잡히는지 확인한다.
미처 거름망에 거르지 못한 잡음이 치직거리며 잔뜩 쏟아진다.
그리고.
“:-)”
이어서 들려온, 듣는 것만으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누군가의 감정.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내게 전해지는 감정을 내 눈에 보이는 정보로 관측할 수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듣게 된 클라인의 목소리는.
[♬~]
흥얼거리는 듯한 콧노래였다.
* * *
“흐흥, 흐흐흥. 흥~”
그리 썩 괜찮은 대답을 리만에게서 들은 건 아니지만, 클라인은 집으로 돌아오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제 잉간이를 다시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기분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잉간이, 잉간이~”
빠르게 외부 정보에 달라붙은 잉여 정보들을 털어내고, 클라인은 곧장 잉간이의 차원항이 있을 방으로 향했다.
진짜, 나는 그냥 잉간이랑 즐겁게 살고 싶을 뿐인데 어쩌다가 이런 일들에 엮여버린 걸까?
만약 내가 리만의 말을 무시했다면 이런 일에 휘말리는 일은 없었을까?
아니면 잉간이와 서로 대화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 이런 일에 휘말리는 건 필연이었을까?
이런 고민을 해야 한다는 현실에 클라인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잉간이의 방으로 발을 들였다.
“잉간이는 뭘 하고 있으려나~”
콧노래와 함께 방 안으로 들어선 클라인은, 어째서인지 잉간이가 차원항 밖으로 나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으응?”
설마, 클라인이 돌아오는 걸 기다리고 있던 걸까?
클라인을 기다리고 있던 것 같은 잉간이의 모습에 클라인은 헤벌쭉 미소를 지으며 잉간이에게 다가섰다.
먼저 잉간이가 이렇게 다가오는 일은 무척 적은데, 오늘은 참 운 좋은 날이다.
클라인의 기분은 하늘을 뚫을 것 같이 승천했지만, 그때 클라인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어?”
아무리 봐도 잉간이가 한 짓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잔혹한 참상이 소파 위에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소파의 외장재가 벅벅 찢어져서 스크래치로 뒤덮인 참혹한 모습.
저거, 수선하려면 마력이 꽤나 들겠는데?
반려생물을 키우는 가정의 가구가 남아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게 자신에게도 일어날 줄은 몰랐다.
잉간이는 얌전하니까 그러지 않을 줄 알았는데…….
클라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잉간이는 직접 만든 것으로 보이는 묘한 기계 근처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 클라인을 바라볼 뿐이었다.
“잉간아…… 소파는 그렇게 훼손하면 안 돼…….”
클라인은 촉수를 내밀며 잉간이에게 말을 걸었지만, 당연하게도 잉간이가 클라인의 말을 알아들을 리는 없었다.
언제나처럼 촉수로 장난을 거는 거로 알고 클라인의 촉수를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앞으로 그러면 안 된다고 잉간이를 단호하게 혼내고 싶었지만, 클라인의 촉수를 주물럭거리는 잉간이의 모습을 보니 있던 화도 전부 사르르 녹아서 사라진다.
클라인에게 무언가를 전하려는 듯 팔을 좌우로 펼치며 입을 뻐끔거리는 모습이 퍽 귀엽다.
“후우…… 스크래쳐를 사야 하려나?”
인간 사이즈에 맞는 스크래쳐가 있을지 모르겠네.
저렇게 주위의 정보들을 가공하는 것은 잉간이의 정보조작 능력이 상당히 상승했다는 증거지만, 마냥 기뻐할 수는 없다.
여기서 잘 타이르지 않으면 계속해서 집안의 가구들을 다 박살내고 다닐 테니 말이다.
앞으로 잉간이가 차원항 바깥에 점점 적응하며 활동 영역을 넓혀갈 것을 생각하면 말이다.
소행성 님에게 부탁하면 뭔가 적절한 조언을 해주지 않을까?
탄탈로스들도 집안 가구들을 망쳐놓는 덴 일가견이 있는 생물들이니 말이다.
클라인이 잉간이에게 잘못된 버릇이 들지 않게끔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때, 기묘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 아. 아. 아. 아.”
누군가가 규칙적으로 짧은 외침을 지르는 듯한 소리였다.
별다른 필터가 적용되지 않은 마키나의 목소리처럼 인공적인 목소리.
클라인의 목소리를 기계음으로 변환한 듯한 기묘한 목소리인데, 이건 어디서 나는 거지?
집 밖인가?
클라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목소리의 근원을 찾으러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클라인은 그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잉간이 곁에 있는 기계에서 흘러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건……?”
설마, 잉간이가 만든 기계에서 이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걸까?
인간형 생물들이 전파를 송신하는 습성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게 잉간이에게도 있을 줄은 몰랐다.
아니, 잉간이가 혼자서 전파를 송신하는 단계의 기술을 습득할 줄은 전혀 몰랐다.
클라인은 잉간이의 발전에 기쁜 마음이 들면서도, 이걸 어찌해야 하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잉간이가 전파를 송신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라서 따로 방음 장치는 마련해두지 않았는데.
인간들이 만드는 전파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연상시켜서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전파로 인한 소음공해가 야생 인간을 학대하는 이유의 60%나 차지할 정도다.
주위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면 빨리 방음 시설을 마련해야겠다.
제대로 된 방음 시설이 만들어지기 전까진 잉간이에게 전파 송신을 그만두게 해야 할까?
하지만 그랬다가 잉간이가 뭔가 오해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어떻게 하지?
클라인이 기쁨 반, 걱정 반으로 잉간이를 생각하던 그때.
“……어?”
클라인의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던 온갖 생각이 일순간에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소음공해니, 스크래쳐니, 그런 걸 생각할 여유 따윈 없다.
왜냐하면.
“흐흥, 흐흐흥, 흐흥~”
잉간이가 클라인의 목소리를 따라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0화 잉간이가 사람 말을 해요!
[♬~]
그리 훌륭하진 않지만, 듣는 것만으로 마음을 따스하게 만드는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정말로 흥겨운 기분으로 흥얼거리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는 것 같아 절로 피식 웃음이 나온다.
무언가 즐거운 일이라도 있는 걸까?
처음으로 듣게 된 클라인의 목소리였지만, 나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클라인과 교감을 하며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상상으로 자리 잡았던 부드러운 목소리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클라인은 내가 상상하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자, 이렇게 클라인의 목소리를 잡아냈으니 이제 이 대역대의 신호를 그대로 복사할 차례다.
복사한 신호에 맞춰서 라디오의 설정을 이것저것 건드리던 그때, 클라인의 모습이 안개 너머에서 스르륵 드러난다.
내가 클라인의 목소리를 이해해서일까?
문자 덩어리로 보여야 할 클라인의 머리카락이 내게 청록빛의 본모습을 드러낸다.
평소와는 달리 먼저 나와서 자신을 반기는 내 모습이 신기했던 걸까?
클라인은 우뚝 제자리에 멈춰 서서 나를 뚫어 저라 바라봤다.
“:-0”
[■?]
클라인의 입에서 경악이나 감탄사로 추정되는 짤막한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슬쩍 클라인에게 손을 흔들어 화답해보자 클라인은 뭔가 중얼거리며 촉수를 내게 뻗어 나를 쓰다듬었다.
[잉간■ ■■■■■■■]
당연하게도, 나는 클라인의 언어를 모르기 때문에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도 클라인이 뭐라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단 하나의 단어만은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잉간.
나의 이름을 클라인이 부른 것이다.이름 말고 다른 부분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보나 마나 ‘잉간아’로 시작하는 어떠한 문장이겠지.
내게 슬며시 다가온 클라인의 촉수를 평소처럼 만지작거리며 슬쩍 교감을 해본다.
“:-)”
느껴지는 것은 평소와 같은 따스한 호의.
역시, 내가 마중을 나와서 기분이 좋은 걸까?
개나 고양이를 키울 때 집에 돌아왔을 때 문 앞에서 반겨주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고 그러잖는가.
애초에 꼭 개나 고양이 같은 애완동물이 아니어도 집에 돌아왔을 때 누군가가 반겨주면 기분이 좋으니까.
좋아, 앞으로도 클라인이 돌아올 즈음에는 차원항 밖에서 먼저 클라인을 마중 나가기로 하자.
아무튼, 클라인의 목소리를 들었으니 이젠 이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보자.
“으음…….”
그러니까, 소리를 마력으로 변환시킨 후에 그 마력을 클라인의 목소리에 맞춘 주파수의 신호로 발신해야 하니……
음, 이렇게 하면 되려나?
조심스럽게 짤막한 외침을 클라인의 목소리로 변환시켜 발신해본다.
음성이 제대로 변환되어 발신되는 것일까?
클라인이 갑작스러운 소음의 근원을 찾아내고자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보인다.
잠시 후, 나에게서 소리가 흘러나온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클라인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민다.
좋아, 제대로 클라인이 들을 수 있게 소리가 변환되는 것 같다.
아까 복사해뒀던 클라인의 목소리를 다시 밖으로 방출하며 더욱 확실하게 클라인의 주의를 끈다.
“:-0”
[■!]
당연하게도, 클라인은 무척이나 놀란 목소리를 내며 나를 바라봤다.
나 같아도 애완동물이 갑자기 사람의 목소리를 내면 놀랄 것 같다.
혹시나 클라인이 기분 나빠하거나 무서워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렇진 않은 것 같다.
“:-)”
[■■■■■ ■■■■■]
애완동물이 말을 걸어와서인지 클라인은 크게 놀랐지만, 이내 들뜬 모습으로 계속해서 내게 뭐라 뭐라 말을 건다.
클라인 또한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으으, 마음 같아서는 지금 바로 클라인과 대화를 나누고 싶지만, 클라인의 언어를 내가 알지 못하니 그건 무리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해할 수 없는 클라인의 목소리를 따라 하는 것뿐이다.
이렇게 계속 따라 하다 보면 클라인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조금은 짐작이 가지 않을까?
그렇게 계속해서 클라인의 목소리를 따라 하다 보니 클라인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자신의 흉내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조금 낙담했다는 듯 촉수를 축 늘어트린다.
으, 이렇게 되면 구관조나 앵무새 같은 취급이 되는 게 아닐까?
내가 원한 건 나와 클라인이 서로 대화할 수 있다는 걸 알리는 건데, 이대로면 애완동물의 독특한 장기자랑에서 끝나버린다.
그렇게 끝나는 건 싫다.
나는 클라인에게 키워지고 싶은 게 아니라 클라인과 함께 살고 싶은 거니까.
클라인이 알아들을 수 있지만, 클라인의 말을 따라 하는 게 아닌것이라 생각될만한 문장이나 단어는 뭘까?
내가 클라인과 소통하고 싶다는 사실을 알릴 만한 말.
노래를 불러?
아냐, 노래는 앵무새도 부르는 거잖아.
독특한 울음소리로 생각할 수도 있어.
그럼, 도대체 어떤 말을 해야 클라인에게 내가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릴 수 있을까?
“……으음.”
아무리 생각해도 명쾌한 해답은 나오지 않았고, 간신히 내가 내놓은 대답은 고작 이런 것이었다.
[클라인.]
클라인의 이름을 부른다는 선택.
클라인의 언어로 말한 것이 아니기에, 클라인이 내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클라인이 내가 무슨 말을 말했는지 알 것이라 믿었다.
클라인이 내 이름을 불렀을 때, 내가 바로 눈치챈 것처럼.
“:-ㅁ”
[■■■ ■■■■■■■]
내가 클라인의 이름을 부르자, 클라인은 격한 반응을 부르며 촉수를 흔든다.
내 의도가 제대로 전해졌을까?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클라인을 부르려는 순간.
펑.
“앗?!”
발전기와 라디오에서 스파크가 튀더니, 불꽃이 피어오르며 망가져 버린 것이다.
너무 오래 혹사시켜서 그런가?
아쉽게도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돌아가야 할 모양이다.
나는 서둘러 라디오에 일어난 화재를 수습하고, 망가진 라디오의 잔해를 끌어모으고 차원항 안으로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좀 더 제대로 된 대화를 하고 싶었는데.
하는 마음을 담은 아쉬운 눈빛으로 클라인을 바라보며 말이다.
* * *
“어…….?”
잉간이가 내 목소리를 흉내 내고 있다.
어떻게?
아직 잉간이는 그 인간처럼 정보를 가공해서 목소리를 낼 정도의 실력은 없다.
도대체 어떻게 잉간이가 사람의 목소리를 내는 거지?
클라인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잉간이를 더욱 자세히 바라봤고, 클라인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잉간이가 클라인에게 손을 흔든다.
그 귀여운 모습을 보니 절로 웃음이 피식 터져 나온다.
“진짜, 귀여워 죽겠어.”
클라인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미소와 함께 잉간이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가끔, 인간이 발신하는 전파가 사람의 목소리와 비슷해서 귀신 소동을 일으키기도 하는데, 이것도 그와 비슷한 우연의 일치일까?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니?”
소곤소곤 잉간이에게 그렇게 중얼거리자 잉간이가 바쁘게 기계를 조작하더니 아까처럼 묘하게 변질된 나의 목소리가 되돌아온다.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니?”
“안녕하세요.”
“안녕. 하세요.”
몇 번 클라인은 잉간이에게 말을 건네보고, 그때마다 변조된 자신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며 잉간이가 어떻게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그대로 복사해서 되돌려 보내는 것일 뿐이다.
사람의 언어를 이해해서 말을 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하긴, 잉간이에게 글자를 가르친 적도 없는데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마음 같아서는 잉간이에게 공용어를 가르치고 싶지만, 그건 불법이니 불가능하다.
허가 없이 차원 생물들에 공용어를 가르치는 건 엄격히 금지된 일이니까.
그나저나 잉간이가 먼저 이렇게 말을 걸어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잉간이도 나와 대화를 하고 싶다는 뜻이겠지?
하루빨리 잉간이와 대화를 하는 날이 찾아왔으면 좋겠다.
그런데 잉간이와 대화를 하게 되면 무슨 대화를 해야 할까?
처음에는 일단 인사를 하고, 그 다음엔 무슨 대화를 나누지?
어, 내가 그동안 힘들게 한 게 없는지 물어봐?
응, 그건 필수적으로 물어봐야겠지.
그리고 또…….
잉간이와의 대화를 상상하던 클라인의 머릿속에 갑자기 예전의 일이 떠오른다.
분명히 실수였겠지만, 잉간이가 사랑해 음성이 녹음된 종을 연타하던 때의 일.
문득 그때의 일이 생각난 클라인은 자신의 방 안인데도 주위에 아무도 없는지 두리번거렸다.
지금 분명히 잉간이는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말하고 있으니까…….
“……사랑해.”
“사랑. 해.”
단순히 잉간이가 자신의 말을 따라 하고 있을 뿐이라는 걸 아는데도 입가에 미소가 멈추지 않는다.
아, 진짜.
난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람?
잉간이에게 이런 거나 시키고.
그래도, 음.
솔직히 좋긴 하네.
클라인은 다시 주위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잉간이에게 속삭였다.
“고마워.”
“고마. 워.”
“사랑해.”
“사. 랑해.”
헤실헤실.
클라인은 이유 모를 기쁨을 느끼며 웃었지만, 달아오른 머리가 식으며 객관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게 되었다.
반려 생물에게 좋아한다 말하게 하고 기뻐한다니, 조금 기분 나쁜데?
난 도대체 방금까지 뭘 하고 있던 거람.
아니, 그치만 잉간이가 사랑한다 말해주면 기분이 좋은걸.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은 소리를 듣고 싶은 건 누구나 당연한 거 아냐?
클라인은 그렇게 변명하며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잉간이의 목소리를 들으려 했다.
“……사랑해.”
“사랑. 해!”
“하아…….”
진짜, 나는 뭘 하고 있는 걸까?
클라인은 그리 생각하며 자괴감 섞인 한숨을 내쉬었지만, 이후 벌어진 일은 클라인의 머리를 또다시 텅 비게 만들었다.
마치 사랑해, 다음에 곧바로 말하듯이 잉간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클라인.”
“어, 어? 응?”
잠깐만, 방금 내 이름을 말한 거 맞지?
아니, 그것보다 방금은 잉간이가 스스로 말한 거 같았는데……?
그러니까, 어.
사랑해.
클라인?
당연히 잉간이는 사랑해라는 단어도 모르고, 우연의 일치로 두 단어가 겹친 거겠지만.
두 개의 단어가 겹치며 발생한 파괴력은 클라인을 혼란에 빠트리기 충분했다.
“자, 잠깐만. 어, 잉간아. 방금, 방금 그거 한 번만 더…….”
클라인은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로 허둥지둥거리며 그렇게 외쳤다.
하지만, 그런 클라인의 외침이 무색하게 잉간이의 기계에 무언가 고장이 발생했는지, 잉간이는 기계를 분해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잉간아……?”
클라인이 당황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와중에도 잉간이는 기계를 가지고 다시 차원항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한 번만 더 해주지.”
클라인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그렇게 중얼거렸고, 그와 함께 클라인은 한 가지 다짐을 다졌다.
잉간이가 공용어를 배우는 게 불가능하다면, 내가 리베리아어나 지구어를 배우면 되잖아?
물론 그것 또한 허가가 필요하겠지만 잉간이에게 공용어를 배우게 할 허가를 받는 것보단 더 쉽겠지.
반드시, 반드시 다시 잉간이와 대화를 하겠다는 각오를 클라인은 다졌다.
이런 건 생명 도감이 잘 알고 있으려나?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일단은 다사다난했던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다음 날.
[브리더 협회장 리만, 자택에서 숨진 채로 발견. 사인은 사육하던 인간…….]
“……어?”
리만이 죽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고.
[속보, 인간형 생물 유해종 지정.]
인간형 생물이 유해종이 되었다는 뉴스가 함께 흘러나왔다.
이게.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191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튼실하네.”
차원항 바깥에 마석을 가져다 놓으면 마석이 성장하지 않겠냐는 나의 추리는 아주 성공적으로 들어맞았다.
그냥 바깥에 마석들을 던져놓는 것만으로 마석이 성장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헤집어놓은 땅에 마석을 뿌려놨더니, 마치 감자가 자라듯이 마석이 더욱 커다랗게 성장한 것이다.
이거, 말 그대로 마석을 땅에 심어서 키울 수 있겠는데?
무오의 마석을 종자로 사용한다면 말 그대로 마석 농사를 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마석의 수급이 안정화된다면 라디오가 과부화되어도 꾸준히 새로운 라디오를 만들어서 클라인과 소통할 수 있을 것이다.
드디어 클라인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첫 단추가 끼워졌다는 생각에 나는 평소보다 더 열정적으로 활기차게 작업을 시작했다.
만능 사전은 물론이고,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문제집까지 들여다보며 어떻게든 라디오를 개량하는 데 힘쓴다.
개인적으로는 마석이 필요 없는 전자부품만으로 만든 라디오를 만들고 싶긴 하다.
하지만 내가 그런 라디오를 만들려면 원숭이가 셰익스피어를 쓸 만큼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라디오를 개량하는 한편, 나는 꾸준히 클라인과 라디오를 통해 목소리를 주고받았다.
평소에 클라인이 먼저 차원항에 찾아오던 시간대보다 먼저 차원항 밖으로 나가니 클라인이 오는 시간에 딱 맞춰서 클라인을 맞이할 수 있었다.
일단 계속해서 클라인의 목소리를 듣다 보면 뭔가 반복되는 단어를 통해 클라인의 언어를 배울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고 말이다.
노력의 성과일까?
나는 반복되는 클라인의 목소리에서 인사로 추정되는 단어를 외우는 데 성공했다.
“:-)”
[※※※~]
클라인이 나를 만나자마자 외치는 단어이기도 하고, 가끔씩 내가 클라인의 이름 뒤에 이 단어를 조합해서 부르면 굉장히 좋아한단 말이지.
아마도 안녕, 정도로 부를 수 있는 단어가 아닐까?
입으로 클라인의 언어를 내뱉으며 클라인의 언어를 말하는 연습을 하고 싶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어째서인지 몰라도 클라인과 대화하거나 기억 속에서 떠올릴 때까지는 멀쩡하게 단어를 말하거나 생각할 수 있는데, 글자를 쓰거나 혼자서 중얼거리려고 하면 의미가 없는 괴상한 웅얼거림으로 흩어져 버린다.
단순히 입으로만 발성하는 게 아니라 뭔가 다른 요소가 있는 걸까?
그리고 그와 함께 서서히 차원항 바깥을 돌아다니는 시간을 늘리며 주위에 흩어진 정보들도 조작하고 주위의 모습도 눈에 집어넣었다.
처음에는 모든 곳이 정보의 안개로 가려져 있던 바깥이 이젠 지평선까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조금만 더 바깥에 익숙해진다면 이젠 이 고원 너머의 풍경도 관찰할 수 있지 않을까?
아무튼, 그런 식으로 클라인과의 거리를 조금씩 좁혀나가던 와중, 블랑카가 볼을 부풀리며 나를 불렀다.
“잉간. 잉간,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응? 무슨 일이야?”
“갑자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 말인데, 너는 왜 그렇게 클라인과 대화를 하고 싶어 하는 거야?”
블랑카가 내게 꺼낸 질문은 다소 당황스러운 질문이었다.
어째서 클라인과 대화하고 싶냐는 게 무슨 뜻이지?
“그야. 그래야 동등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테니까…….”
“왜 클라인에게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은 건데?”
“계속 이런 애완동물 취급을 받기는 싫잖아?”
“정말로 그것뿐이야?”
“어?”
도대체 블랑카가 뭘 묻고 싶은 건지 모르겠네.
어딘가 뾰로통한 표정의 블랑카는 털썩 내 무릎에 머리를 베고 누우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클라인과 대화를 하게 되어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된다면, 무슨 말을 할 생각이야? 이곳에서 내보내 달라는 부탁은 하지 않을 거잖아?”
“그렇……지.”
그래.
클라인과 대화를 하게 되더라도 나는 클라인을 떠날 생각은 없다.
내가 원하는 건, 그녀가 내게 베풀어준 호의를 보답하는 거니까.
“그럼, 그렇게 사람으로 인정받는 거에 목을 맬 필요가 있어?”
“응?”
“단순한 보답을 하고 싶은 거라면, 지금 상태로도 가능하잖아. 길들어진 마수가 주인에게 충성을 표시하는 것처럼. 굳이 힘들고 위험한 일을 감수해가면서 클라인과 대화할 필요가 있어?”
“아니. 그래도 애완동물로 취급되는 건 조금…….”
“클라인이 애완동물이 아닌 사람과 동거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
“어?”
“지금까지는 애완동물로 여겨서 친밀하게 여겼을지도 모르지만, 사람으로 인정된다면 조금 다르게 생각할지도 모르잖아?”
“……그렇긴 하네.”
“더는 함께 있기 싫다고 밖으로 쫓아낼 수도 있고. 그런 경우를 대비한 대비책은 있어?”
“……없네.”
그런 상황이 된다면 우주적 노숙자가 되는 수밖에 없겠지.
블랑카의 지적은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내가 클라인에게 사람으로 인정받는다는 건, 지금까지의 관계를 완전히 허물고 처음부터 다시 관계를 쌓아 올리는 거니까.
애완견이 주인에게 말을 한다고 하면 기뻐할 사람들이 많지만, 애완견이 사람이 된다면 과연 모든 사람이 기뻐할까?
지금까진 자신이 키우는 가축이기에 책임을 져왔지만, 아무 대가도 없이 다른 사람을 책임질 사람은 거의 없지 않은가?
단순히 서로 대화할 수 있다고 사람으로 인정받는 게 아니다.
스스로 책임을 질 능력이 있어야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뭐, 내가 말한 건 부정적인 예시만 든 거지만. 적어도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으니 너무 조급하게 사람으로 인정받으려 하지 않아도 돼. 사람으로 인정받는다고 모든 게 다 끝나는 건 아니잖아? 요즘, 뭔가 조급한 거 같아서…….”
“미안. 그래도 난 빨리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은걸.”
“어째서?”
“……모르겠어. 그냥, 그냥 빨리 클라인하고 대화하고 싶은 기분이야.”
아직 제대로 준비가 되어있지 않을 수 있더라도, 조금 천천히 나아가도 괜찮다는 걸 알고 있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도무지 클라인과 대화하고 싶은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쓴웃음을 지으며 블랑카의 질문에 그렇게 대답하자, 블랑카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노려봤다.
“뭔가 생각나는데…….”
“응?”
“왜 그렇게 클라인하고 빨리 대화하고 싶은 건데?”
“모르겠어. 그냥? 그냥, 한시라도 빨리 대화하고 싶어서…….”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건데?”
“그건…….”
음, 클라인과 대화를 하게 된다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냐고?
클라인과 대화를 하는 것에만 집중했지 어떤 대화를 하느냐를 생각하질 못했네.
어디 보자, 일단 클라인과 처음으로 말문을 트게 되면…….
“……인사?”
“그건 당연한 거고. 인사하고, 그 다음엔?”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일단…… 고맙다고 말하고. 나를 거기서 꺼내줘서, 내가 바뀔 수 있게 도와줘서 고맙다고 하고…….”
“그 다음은?”
“어……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묻고 싶고. 좋아하는 영화는 뭔지, 그리고 또…….”
블랑카의 말을 듣고 내가 생각해낸 화젯거리는 죄다 클라인에 대한 것이었다.
하긴, 내가 클라인과 대화하고 싶다 처음으로 생각한 건 클라인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였으니 당연한 걸까?
블랑카에게 열정적으로 클라인과 무슨 대화를 나눌 건지 설명하던 와중, 블랑카는 한숨을 내쉬며 내 입에 손가락을 밀어붙였다.
“그만. 그만하면 알겠어. 그렇게 해서 대화를 나눈 뒤엔? 뭘 어쩌고 싶은데?”
“그 다음에는…….”
그 다음.
대화 다음에는.
사람으로 인정받은 다음에는.
내가 하고픈 것은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친구가 되고 싶어. 클라인하고.”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고,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블랑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이걸 어쩌지?”
“왜 그래?”
“진짜 친구가 되고 싶은 거야? 다른 게 아니라?”
“응. 친구가 되고 싶어.”
“……아무리 봐도 아닌데.”
“응?”
“지금 잉간이 엄청 익숙한 얼굴을 하고 있거든. 에휴…….”
블랑카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가만히 내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내 볼을 어루만지며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블랑카는 결론을 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까지 네가 먼저 다가간 적은 없으니까…… 이번만 허락해줄게.”
“응? 뭐를?”
허락한다니, 뭐를?
나는 블랑카가 뭘 말하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블랑카는 쓰게 웃으며 내 손을 꽉 붙잡았다.
“때가 되면 알려줄게. 아닐 수도 있으니까. 응.”
블랑카는 그렇게 중얼거리긴 했지만, 블랑카의 눈에는 강한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도대체 뭘 그렇게 확신하는 걸까?
* * *
“진짜요? 이게, 진짜라고요?”
“믿기지 않지만, 진짜랍니다.”
클라인은 생명 도감의 확언을 듣고 한참 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정말로 리만이 죽었다고?
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도대체 왜…….”
“뉴스에 나온 대로에요. 인간에게 살해당했다. 그거 말고는 없어요.”
“……인간이 리만을 죽일 수가 있어요?”
리만은 마키나의 합류 이전부터 살아왔던 초고령자였다.
나이를 먹을수록 핵심 정보나 내부 정보들이 압축되고 늘어나면서 웬만한 공격으론 상처도 나지 않을 텐데?
리만 정도가 되면 웬만한 악성 정보에도 면역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인간에게 죽을 수 있는 걸까?
인간이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육체적, 마력적 차이는 엄청나다.
보통이라면 인간에게 공격받는다고 해도 살짝 상처가 나는 정도일 텐데.
어떻게 리만이 죽은 거지?
도무지 사실을 납득하지 못하는 클라인에게 생명 도감이 한숨을 내쉬며 무언가가 적힌 서류를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읽어봐요.”
클라인의 의문에 대한 해답이 이 안에 들어있는 걸까?
클라인은 서둘러 서류에 적힌 내용을 훑어보기 시작했고,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크로노 사건?”
클라인이 보고 있는 이 서류는 크로노 사건을 정리해둔 문서였다.
이게 리만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거지?
“크로노 사건에서 탈출한 인간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소문은 들어본 적 있죠?”
“네. 유명한 괴담이니까요.”
“그게. 사실이었어요.”
“네?”
“어떻게 했는진 몰라도, 그 녀석을 보호하고 있었더라고요.”
생명 도감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클라인에게 낯익은 장소의 사진을 보여줬다.
리만의 집무실과 보호소에 숨겨져 있던 비밀 공간들이었다.
그리고 그 사진을 본 클라인은 뇌리에 한 인간을 떠올렸다.
“설마.”
“네. 그 녀석이에요. 그게, 크로노 사건의 인간이에요.”
잉간이를 납치하려고 하고, 리만의 보호소에서 모습을 드러냈던 그 이상한 인간.
그게 크로노 사건의 그 인간이라고?
그렇다면, 설마?
“왜 리만이 그 인간을 보호했는가. 그건 모르겠지만, 리만을 죽인 범인이 그 인간인 건 확실해요. 현장에 남겨져 있던 정보가 전부 그 인간을 가리키거든요.”
“왜…… 그런 걸까요? 왜 자기의 보호자에게…….”
그렇게 중얼거리던 클라인은 문득 리만이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을 떠올렸다.
작은 친구에게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잘 타일러 두겠다.
설마, 그거 때문에…….
“뭐, 둘 사이가 안 좋았나 보죠. 리만의 성격이라면 누가 죽여도 전혀 이상할 게 없잖아요?”
“……그런가요?”
자신 때문에 그 인간과 리만이 싸운 걸까?
그래서 리만이 죽은 걸까?
클라인은 리만의 죽음에 자신의 잘못이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다.
그런 클라인의 속내를 모르는 생명 도감은 한숨을 내쉬며 클라인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건넸다.
“아무튼. 그래서 인간형 생물이 유해종으로 지정되었다 이겁니다. 덕분에 브리더들은 전부 난리 났죠.”
“저기. 유해종으로 지정되면…….”
“아, 걱정 마세요. 이미 키우고 있던 인간을 못 키우게 되는 건 아니니까요. 잉간이는 무사할 거에요.”
“그래요?”
“단지 인간형 생명체의 은하간 이동이 금지될 뿐이에요. 덕분에 브리더들은 법령이 시행되기 전에 씨앗을 확보하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죠. 뭐, 대부분은 그냥 사업을 접을 생각이고요.”
유해종으로 지정된 생물은 무자격자의 사육이나 채집이 금지된다.
고작 인간 하나 키우겠다고 브리더 자격증을 딸 사람이 있을 리 없으니, 사실상 신규 고객들의 씨가 마른 셈이다.
“모든 인간을 유해종 지정하는 건 말도 안 된다고 항의하러 간 사람들도 있는 모양인데, 결정이 바뀔 것 같진 않고요.”
“네…….”
“아무튼. 클라인 씨에게 뭔가 악영향이 가는 건 없으니 안심하세요.”
그렇게 클라인은 안심시킨 생명 도감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낮은 목소리로 클라인에게 무언가 속삭였다.
“근데 말이에요. 이거, 좀 이상하지 않아요?”
“네?”
“정부가 움직이는 게 너무 빠르지 않아요? 보통은 몇 달 뒤에서나 움직이는 게 정상인데…….”
“그렇긴…… 하네요.”
그래, 평소 새로운 법령이 제정되는 속도를 생각하면 이번 일은 너무 빠르게 진행됐다.
그만큼 정부가 이번 사건을 중요하게 보고 있다는 걸까?
그게 아니면.
마치.
“이번 일이 일어날 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죠.”
“……그렇네요.”
192화 *광고나 다른 문의는 리퀴드 쪽으로 해주세요!
요즘 반려넷이 이상하다.
이상한 건 원래부터였지만, 특히 더 이상해졌다.
왜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됐냐면 말이지.
[요즘 인분충 놈들 어디 갔냐?]
-이 새끼들 다 어디 감? 요즘 안 보이는데 주인니뮤한테 깝치다가 죄다 구제 당했냐?
[댓글]
-자연도태 당한 거임 ㅇㅇ 내가 봄.
-솔직히 주인니뮤한테 깝치다 구제 당하는 건 자연도태가 맞다.
언제나 인류 해방 전선에 합류하라느니, 이상한 정보를 심어둔 게시글을 올리며 민폐를 끼치던 자들이 전부 사라졌기 때문이다.
반려넷 사람들 말대로 평소 수군거리며 세우던 반란 계획을 몸소 실천한 결과인 걸까?
뭐, 솔직히 진짜 그랬다고 해도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뭔가 석연치 않다.
인류 해방 전선.
그들이 만들어낸 흉물을 직접 본 사람으로서 저들의 실종은 단순히 넘어갈 일로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그때 내가 봤었던 그 괴물들의 원본들이 설마.
그때의 일을 떠올리다 보니 그 남자가 다시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자가 인류 해방 전선의 수장이겠지.
나를 해부해서 뭔가 알아보겠다고 하던 미친 녀석.
그 남자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여전히 다른 사람들에게 힘을 주겠답시고 괴물로 만드는 일을 하고 있을까?
솔직히, 나로서는 그런 괴물이 수백, 수천 마리가 있다고 해도 그 남자가 말하는 복수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지 않는다.
뭐, 그 인간도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으니 그런 말을 하는 거겠지.
굳이 그런 놈에게 내 신경을 더 쓰고 싶지는 않다.
[이름 승부존 연화 vs 흑잠]
-둘 중 뭐가 더 났냐?
[댓글]
-아저씨 그거 그냥 쓰레기라니까…….
-ㄴ본래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는 법이지.
[하와와 애기흑마쟝인거시야요]
-호에엥~~~
[댓글]
-미친놈…… 미친놈…… 미친놈…… 미친놈…….
-호에엥~~
-꼬추 잘라라.
-ㄴ흑마쟝은 이미 잘린 거시야요!
그리고 또 하나 기묘한 것이, 요즘 들어 꾸준히 유입되던 신규 이용자들이 죄다 자취를 감췄다는 것이다.
지금 반려넷에 남아있는 건 내가 맨 처음 반려넷에 접속했을 때 보이던 그 사람들뿐이다.
뭐, 그냥 별일이 아니라 반려넷이 망해가는 과정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런 무가치한 고민을 하기 보다는 오늘 뭐 먹을지 생각하는 것 같은 좀 더 생산적인 고민을 하기 위해 나는 단말기를 덮고 7번째로 개량해본 라디오를 들고 차원항을 나섰다.
이젠 라디오를 개량했다가 밖에서 부숴 먹고 다시 개량하는 것이 내게 하나의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영, 차.”
그러는 동안 하도 바닥을 파헤치다 보니 나 스스로도 느낄 정도로 정보 조작에 꽤 익숙해진 것 같다.
이젠 이미 가공된 정보의 정보를 살짝 수정할 수 있을 정도다.
전에는 그냥 정보 덩어리만 다룰 수 있는 수준이었는데 말이다.
오늘도 클라인을 기다리며 적당히 눈사람 비스름한 걸 만들고 있자, 주위의 정보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클라인이 돌아온 것이다.
“:-)”
어딘가 외출했다 돌아온 걸까?
클라인의 몸에는 정보 덩어리들이 먼지처럼 잔뜩 달라붙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클라인에게 손을 흔들어 주자 클라인 또한 촉수와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즐겁게 인사를 되돌려줬다.
요 며칠 동안 제대로 클라인을 관찰하며 깨달은 사실인데, 클라인의 종족은 그 문어 인간처럼 감정을 몸의 색을 바꿔서 표현하는 것 같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야광 물질의 창백한 청록색이 기쁠 때고,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다면 살짝 푸르딩딩한 색으로 바뀌는 것 같다.
옅게 빛나는 클라인의 촉수를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클라인이 이젠 익숙해진 물건들을 꺼내와서 내 주변에 늘어놨다.
지난번에 봤었던 녹음 벨들이다.
어디 보자, 이게 인사할 때 쓰는 단어였지?
분홍빛으로 표시된 종을 툭 건드리자 라디오에서 무기질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
언제나처럼 먼저 클라인에게 인사를 건네고, 나는 조심스럽게 처음 보는 종들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노랗게 색칠된 종에서는.
[▲ ♣♣]
이러한 소리가 흘러나왔고, 클라인은 싱긋 웃으며 내 앞에 얼음을 가져다 놓았다.
음, 이건 있는 그대로 얼음이라는 뜻일까 아니면 차갑다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함일까?
예전, 탄탈로스들과 있었을 때 했던 것처럼 나는 클라인에게 몇 가지 단어들을 배워나가고 있었다.
클라인은 애완동물을 훈련시키는 것과 비슷한 감각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매우 적극적으로 내게 여러 단어들을 알려줬다.
물론, 아직 입으로 발음하거나 글자로 쓰는 건 무리지만 이런 식으로 종을 통한 간단한 대화는 가능하다.
이렇게, [오늘] [좋아] [의문].
3개의 단어를 이용해서 대충 오늘 어땠냐는 질문을 할 수 있다.
물론 저건 내가 추측한 뜻이지 진짜 뜻이라곤 확신할 수 없지만 말이다.
내 질문을 들은 클라인은 조금 지쳤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
[부정]
클라인이 한숨과 함께 내뱉은 목소리는 내가 알기로 부정, 거절, 뭐 그런 뜻을 가진 목소리였다.
오늘 하루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는 뜻일까?
무슨 일을 하고 왔는지는 몰라도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다.
음, 힘내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아직 그런 단어는 모르는데 말이야.
내가 클라인의 힘을 북돋아 줄 방법을 곰곰이 고민하던 그때.
“으윽……?!”
온 세상이 뒤흔들리는 듯한 충격이 나를 덮쳐왔다.
갑자기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정보들이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생겨나 내게 쏟아져 내린 것이다.
꽤나 야심작이었던 이번 라디오는 당연히 정보의 폭주를 버티지 못하고 바로 박살 나버렸다.
이게 도대체 어쩐 일인지 내가 판단하기도 전에 나는 쏟아지는 정보들에 짓눌려 바닥에서 고통스러워할 뿐이었다.
에포나가 위험한 수준이 되지 않게 정보를 막아주고 있어서 한시름 놓긴 했지만, 여전히 제대로 몸을 가눌 수가 없다.
“:-【!”
내가 그렇게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바둥대고 있자 그 수많은 정보를 뚫고 클라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와는 다른 무척이나 화가 잔뜩 난 듯한 클라인의 목소리.
클라인이 고함을 내뱉자 잔뜩 쏟아지던 정보는 사라졌지만, 한꺼번에 너무 많은 정보와 접촉해서일까?
한꺼번에 피곤이 몰려오며 나는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로 눈을 감았다.
화가 난 클라인의 몸은 검게 물드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말이다.
* * *
중앙 정부는 모든 걸 알고 있다.
이것은 예시나 비유가 아니라 진실이다.
그렇다면 당연하게도, 미리 리만과 그 인간에 대한 것도 파악하고 있지 않았을까?
“잘 생각해 봐요. 리만이 정부와 친하게 지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인데 요즘 보면 정부와 아주 친하게 지냈잖아요?”
“그렇죠.”
“그것도 리만에게 이득 되는 방향으로 말이죠. 저는 도대체 정부가 왜 그러나 싶었는데, 이제 그 이유를 알 것 같아요.”
“무슨 이유요?”
“……정부는 리만이 그 인간에게 살해당할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혹은, 그 인간이 리만을 죽이는 것을 도와줬다.”
“그건 너무 음모론 아닌가요?”
“어차피 죽을 사람이니,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 놔둔 거죠.”
“글쎄요…….”
생명 도감의 추론이 꽤 설득력 있긴 했지만, 너무 나간 것 같은데.
클라인이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생명 도감은 피식 웃었다.
“뭐, 저도 진지하게 하는 소리는 아니에요. 그래도 정부가 미리 이번 사태를 예견하고 있던 건 확실해요. 인간이 유해종으로 지정된 속도를 보면 말이죠.”
“정부가 인간을 유해종으로 지정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단 말이에요?”
“아마도요. 그 이유는 저도 모르겠지만 말이에요.”
유해종.
중앙정부에서 지정한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적성 생물들.
유해종으로 지정된다면 방생은 물론이고 채집 또한 제한된다.
인간이 이번 사태로 사람을 해칠 수 있다는 게 알려진 이상 유해종 지정은 이상하지 않다.
이상한 건, 인간을 과연 유해종으로 지정해야 하느냐이다.
탄탈로스가 일으킨 사고로 죽는 사람도 한 해에 꽤 되는데, 탄탈로스는 유해종으로 지정되지 않았다.
그 외에도 유해종으로 지정된 생물들의 면모를 살피면 인간이 그 사이에 끼는 건 조금 이상하게 보인다.
도대체 왜 정부는 인간을 유해종으로 지정하려 했던 걸까?
도대체 무슨 이득이 있길래?
중앙 정부가 아무 이유 없이 움직였을 리는 없지 않은가?
“음, 유해종 지정을 목표했기보단 애완인간 시장의 축소가 목표였을 것 같지만요.”
“네? 그건 무슨…….”
“업계에선 유명한 이야긴데, 정부가 애완인간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그, 그랬어요?”
“네. 뭐, 저는 탄탈로스처럼 번식 제한을 두는 식으로 규제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유해종 지정을 할 줄은 몰랐죠.”
정부에서 애완인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처음 아는 사실이다.
클라인이 새로운 사실에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자, 생명 도감이 한숨을 내쉬며 슬슬 자리를 뜰 준비를 했다.
“브리더 협회장 선거도 준비해야 하고, 유해종 지정도 대비해야 하고……. 준비할 게 많네요.”
“아, 그. 인공 행성은 괜찮은 거예요? 유해종 지정이 되면…….”
“지정 전에 만들었으니 괜찮을 거예요. 외부로 유출되지 않게 잘 관리하면요.”
“아, 그런가요?”
“그리고…… 장례식 일정이 잡혔어요. 오실래요?”
“그건…… 생각해볼게요.”
그렇게 생명 도감과의 대화를 끝마치고, 클라인은 잉간이와 교감하는 것에 집중했다.
유해종 지정이 잉간이에게 영향이 없다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클라인이 그리 생각하며 최대한 리만의 죽음을 잊으려 하던 그때.
드디어 인간종 유해종 지정에 대한 자세한 소식이 전달됐다.
브리더들의 호소가 어느 정도 먹혀든 것일까?
새롭게 발표된 유해종 지정에는 어느 정도의 유예가 있었다.
“5등급 이하의 마력을 지닌 인간을 제외한 모든 인간?”
마력이 적은 인간들은 유해종에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뭐야, 그럼 잉간이는 아예 유해종으로 지정되지 않은 거니 계획했던 일들을 바꿀 필요가 없겠는데?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싱글벙글 웃었지만, 그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유해종 개정안이 발표된 다음 날, 클라인은 묘한 죄책감을 안고 리만의 장례식에 다녀왔다.
그 때문인지 클라인은 더욱 잉간이의 치유를 원하며 외부 정보를 제대로 털지도 않고 잉간이를 만나러 갔다.
“사랑해!”
사랑해라는 단어를 인사로 착각한 걸까?
클라인이 녹음벨을 가져오자마자 귀여운 인사말이 클라인의 귀에 들어온다.
굳이 잉간이의 오해를 정정해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클라인은 헤실헤실 웃으며 자신에게 인사하는 잉간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진짜, 보기만 해도 치유되는 기분이라니까.
클라인은 그리 생각하며 조용히 잉간이에게 공용어 단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얼음!”
“자, 이게 얼음.”
얼음 종을 울린 잉간이 곁에 얼음 조각을 선물하며 클라인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중앙 정부가 모든 걸 알고 있다면 내 이런 행동도 알고 있을까?
그렇다면 정부는 내 행동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클라인이 그렇게 생각한 그때.
“꺄악?!”
따르르르릉.
갑자기 온갖 곳에서부터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한 번도 이야기해본 적 없는 사람부터, 몇 번 인사를 나눴던 사람들까지.
수십 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클라인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이게 어찌 된 일일까?
클라인이 사태를 파악하기도 전에, 클라인의 눈에 잉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전화가 걸려오며 발생하는 정보들이 부담스러웠던 걸까?
잉간이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클라인은 잔뜩 화가 났다.
곧장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클라인은 모두의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아이고, 클라인 님! 쥬튜브 잘…….”
“안녕하세요, 저는…….”
“그, 혹시 지구산 인간…….”
“다들 조용히 해요!!”
잔뜩 분노한 목소리로 전화기 너머의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그리고는 아무 설명도 없이 전화를 모조리 끊어버렸다.
“잉간아, 괜찮아?”
그리고 서둘러 잉간이의 상태를 살피던 클라인은 잉간이가 의식을 잃은 것을 목격하고 가슴이 철렁했다.
다행히 잉간이는 잠을 자는 것이었고, 클라인은 한시름 놓으며 잉간이를 조심스럽게 차원항 안으로 되돌려 놓았다.
그리고 이빨을 까득 씹으며 자신에게 도착한 수백 개의 메시지를 바라봤다.
저들에게 딱히 잘못은 없겠지만, 제대로 된 용건이 아니라면 화를 토해내겠다 생각하며 말이다.
193화 잉간이가 맞선을 보기로 했어요!
“으, 아?”
“괜찮아?”
“……거대 문어가 블랙홀 안에 신혼집을 차리고 로봇과 결혼하는 꿈을 꿨어.”
“괜찮은 모양이네. 다행이다.”
내 헛소리에 블랑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리키와 아리스가 내 곁에 꼭 달라붙어 새근새근 잠자는 것이 느껴진다.
분명히 밖에서 기절했는데, 클라인이 나를 여기로 옮긴 걸까?
“클라인이 기절한 널 데려와서 얼마나 놀랐는데.”
“미안. 사고가 좀 있었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도 알아. 여기서도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여기서도 느껴졌다고?”
“응. 온 세상이 쩌렁쩌렁 울리던데?”
여기서도 그 충격이 느껴질 정도였다니, 진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람?
잔뜩 화가 난 클라인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클라인이 저지른 짓은 아닌 것 같은데.
“여긴 괜찮았어?”
“안 괜찮았지. 리키하고 아리스도 너처럼 쓰러졌는걸?”
“리키하고 아리스도?”
아, 그래서 리키와 아리스가 나와 함께 자고 있던 걸까?
하긴, 지난번에 단순한 녹음벨 소리에도 고통스러워하던데, 내가 쓰러질 정도의 소리였다면 두 사람에겐 더 고통스러웠겠지.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문득 이상한 점을 하나 깨달았다.
어라?
그럼 블랑카도 쓰러졌어야 하는 거 아닌가?
지난번에 가장 고통스러워하던 건 블랑카였는데?
“블랑카. 그럼 너는…….”
“조금 힘들긴 했는데. 버텼지. 나까지 쓰러지면 누가 여길 지켜?”
“버텼다고?”
“응.”
그 막대한 압력을 단순히 기합으로 버텨낸 걸까?
아, 차원항 안으로 들어오는 압력은 더 약화 되어서 들어왔을 테니 그런 걸 감안하면 충분히 버틸만한가?
근데 그러면 리키하고 아리스는 왜 쓰러진 거지?
여러 의문이 퐁퐁 샘솟았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흔들며 고민을 그만뒀다.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대단하네.”
“나는 너의 기사니까. 훗.”
진심을 담아 블랑카를 칭찬해주자 블랑카는 자랑스럽게 귀를 쫑긋거리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었고, 평소와 같은 일상을 시작하려 했지만 내 눈에 무언가 이상한 물체가 들어왔다.
저건 또 도대체 뭐 하는 물건이야?
마치 택배가 온 것 마냥 앞마당에 묘한 상자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지난번에 클라인이 케이크나 옷을 보낼 때가 생각나는데, 이번에도 그런 거려나?
“이게 뭐야?”
“아마도 클라인이 보낸 선물 같은데?”
“선물? 먹을 거야?”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아니면 뭐, 마석 같은 걸 주면 좋겠는데.
아리스가 희희낙락하며 상자를 여는 모습을 곁눈질로 지켜보며 나는 받아둔 물로 세수를 진행했다.
세수를 끝마친 나는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며 아리스를 불렀다.
“아리스. 안에 뭐 들어 있어?”
그렇지만 아리스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고,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아리스를 바라봤다.
“아리스?”
“어, 어?”
그러자 내 눈에 날개를 맞대고 새빨간 얼굴로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아리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리스, 지금 뭐 보는 거야?”
“어, 어? 그게. 어…….”
도대체 뭐가 들어있었길래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거지?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아리스에게 다가가자, 아리스는 재빨리 날아올라 내 얼굴을 자신의 날개로 가렸다.
“아리스?”
“이, 잉간은 보면 안 돼!”
“뭐야, 도대체 뭔데 그래?”
“안돼! 보면 안 돼!”
필사적으로 내 시선을 가리려는 아리스의 마크를 피해 슬쩍 상자 안의 내용물을 보려 하지만, 아리스는 마법까지 사용해가며 상자를 내 시선에서 감췄다.
이렇게까지 막으려고 하면 더 보고 싶어지는데?
살짝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물러서지 않고 아리스의 방어를 뚫기 위해 이리저리 기회를 엿봤다.
“아침부터 뭐 하는 거야?”
그때, 밖으로 나온 리키가 아리스와 내가 대치하고 있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졌는지 고개를 갸웃하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리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리키, 아리스 좀 잡아줘!”
“응? 알았어.”
“꺅?!”
리키가 스르르 꼬리를 뻗어 아리스를 뒤에서부터 꼭 껴안아 아리스의 움직임을 막는다.
리키가 만들어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는 아리스가 숨기던 게 무엇인지 확인하러 고개를 들이밀었다.
도대체 뭐길래 그렇게 막았던 거야?
“아, 안돼! 잉간은 보면 안 돼!”
아리스의 절규가 울려 퍼지고.
장난기 넘치는 얼굴로 상자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던 나는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어?”
그도 그럴 것이 상자 안의 내용물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상자 안에는, 야릇한 포즈를 취한 미녀들의 사진이 여럿 들어있었다.
이게 도대체 뭐야?
* * *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일이라고요?”
“5등급 이상의 마력을 지닌 인간이 유해종으로 지정되면서 브리더들이 다들 마력이 적은 품종을 찾느라 혈안이 됐거든요. 지금까진 높은 마력을 지닌 품종이 인기 있었으니 말이죠. 그래서 대부분의 브리더들이 내린 결론이…….”
“잉간이를 보내 달라는 거네요?”
“그렇죠. 종마로 말이죠.”
하아.
클라인은 한숨을 푹 내쉬며 짜증을 감추지 않고 전화 너머의 상대에 투덜거렸다.
“도대체 제 연락처는 어디서…….”
“그, 장례식장에 방명록 작성하셨잖아요? 아마 그걸 보고…….”
“아무튼. 그 사람들에게 전해 주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잉간이는 안 판다고요.”
클라인의 선언을 들은 리퀴드의 직원은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저기, 그런데요. 한 번만 다시 생각해보시면 안 될까요? 클라인 님?”
“제가 왜 그래야 하는데요?”
클라인은 아직 쥬스농장 때의 일을 잊지 않았다.
잉간이를 이용해먹고, 자신에게서 빼앗아가려고 했던 그때의 일.
간신히 잉간이를 지켰는데, 다시 그런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
거기에다가 기본적인 예의조차 지키지도 않은 사람들이고.
단호한 클라인의 태도를 지켜본 리퀴드의 직원은 간절한 목소리로 클라인을 설득하고자 시도했다.
“잉간이를 잠깐 빌려주는 게, 나쁜 일은 아니잖아요.”
“나쁜 일이 아니라고요?”
“딱히 문제 되는 일도 아니고, 가격도 제대로 지불한다고 하는데 조건을 보고 결정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 해서…….”
“조건을 엄청 좋게 제시했나 보죠?”
“네. 그러니까, 그게 어느 정도냐면요…….”
직원은 소곤소곤 클라인에게 브리더들이 제시한 금액을 이야기했다.
직원이 이야기해준 조건은 클라인의 눈을 동그랗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 정도나 제시했다고요?”
“네. 다들 절박하니까요. 마력이 낮은 인간하고 높은 인간을 교배한다고 반드시 낮은 인간이 나오는 건 아니지만, 마력이 없는 지구산 인간이라면 무조건! 마력이 없거나 폭발적으로 줄어들 테니까요.”
브리더들이 제시한 금액을 모두 합치면 클라인이 인공 행성을 하나 더 혼자서 만들 수 있을 정도의 마력이었다.
클라인이 눈을 동그랗게 뜬 것을 클라인의 마음이 흔들리는 징조로 해석한 것일까?
직원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어떻게든 클라인을 설득하려 애썼다.
“솔직히 액수가 너무 크잖아요. 저희가 지난번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게 잘 도와드릴 테니…….”
“잉간이가 싫어하는 건 하기 싫어요. 됐어요.”
클라인은 매몰차게 직원의 설득을 튕겨냈지만, 직원은 끈질기게 클라인에게 달라붙었다.
“잘 생각해 봐요. 잉간이를 대여해주는 게 잉간이 입장에선 나쁜 일이 아닐 수도 있다니까요?”
“네?”
“자신의 유전자를 더 많은 곳에 퍼트릴 기회니 잉간이도 싫어하진 않을걸요? 잉간이가 아예 성욕이 극단적으로 없는 인간도 아니잖아요?”
“…….”
잉간이의 입장에선 나쁜 일이 아닐 수 있다고?
클라인은 직원의 말을 반박하고 싶었지만, 반드시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생물체의 삶의 목적은 자신의 정보를 널리 퍼트리는 것이다.
그 관점에서 보면 자신의 정보를 널리 퍼트릴 수 있는 이번 기회를 잉간이가 반기면 반겼지, 싫어하진 않을 것이다.
“미적 관점이 사람하고 인간하고 그리 다른 것도 아니잖아요? 브리더들도 외형 인자도 중시해서 교배를 실시할 테니 잉간이에게 그리 큰 부담도 되지 않을 거예요. 정 안 되겠으면 서큐버스를 이용해서 대리 수정을 맡기면 되고요.”
“……싫어요.”
잉간이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는 직원의 설득은 클라인에게 상당히 잘 먹혀들었지만, 클라인은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앞서 이야기한 요소들 때문에 클라인이 걱정하는 것들도 있었지만, 사실 클라인의 마음에서 가장 큰 이유를 차지하는 것은 딱 한 가지 이유였다.
그냥 싫었다.
그냥 잉간이를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는 게 싫었다.
그리고 잉간이의 룸메이트들 말고 다른 인간과 잉간이가 교배하는 모습을 보는 모습도 보기 싫었다.
어째서인지는 클라인 스스로도 잘 알 수 없었다.
그저 싫은데, 그 이유를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그렇지만 직원에게 그렇게 이야기한다고 직원이 납득할 리 없었기에, 클라인은 적당한 이유를 지어냈다.
“잉간이에게 물어본 것도 아니잖아요? 전 잉간이의 자유의지를 침해하기 싫어요. 솔직히, 생물체를 물건처럼 사고파는 게 잘못된 거 아닌가요?”
사실 클라인이 생물체를 물건처럼 사고파는데 거부감을 가지진 않았다.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클라인이 살기 위해서 고기 같은 생물성 정보를 섭취하는 것도 문제가 되는 행동이니까.
지적 생명체들을 그런 식으로 다루는 건 조금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신념의 문제인 것처럼 말한다면, 직원도 더는 물고 늘어지지 않겠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클라인의 말을 들은 직원은 옳다꾸나하고 클라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그렇게 하죠!”
“뭐, 뭐를요?”
“잉간이에게 직접 물어보면 되잖아요? 잉간이가 원한다면 그걸 막는 게 자유 의지를 침해하는 행동 아닌가요?”
“그건…… 그렇죠.”
클라인이 주장한 바에 따르면 그렇긴 하다.
클라인이 떨떠름하게 직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직원은 방긋 웃으며 클라인에게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했다.
“브리더들에게 미리 잉간이와 교배할 상대의 사진을 보내 달라고 하면 되죠. 성적 흥분 같은 건 충분히 감지할 수 있잖아요? 잉간이가 그 사진들을 보고 교배하고 싶어 한다면 더 아무 말도 안 하겠습니다. 하지만 잉간이가 교배를 원한다면……!”
“으음…….”
클라인은 직원의 제안에 인상을 찌푸리며 한참을 고민했다.
자신이 제시한 논리에 자신이 빠진 꼴이어서 이걸 벗어나려면 그냥 싫다고 때 쓰는 것밖에 택할 길이 없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리퀴드를 난처하게 하고 싶지는 않은데.
지금까지 자신에게 리퀴드가 워낙 많은 도움을 줬고 말이다.
결국, 클라인은 한숨을 내뱉으며 리퀴드의 제안을 수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네…… 그렇게 해요.”
“정말이죠? 정말이죠? 이제부터 브리더들에게 연락할 거여서 취소할 수 없습니다. 클라인 님?”
그래, 잉간이가 좋다고 하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줘야지.
하지만 진짜 싫은데…….
클라인은 싫은 광경을 보게 될까 걱정이 됐지만, 그런 속내는 꾹 억눌렀다.
그래, 잉간이를 믿자.
잉간이의 객관적으로 봤을 때 룸메이트들도 꽤 괜찮은 유전자를 지닌 편에 속하잖아?
그러니까 잉간이가 흔들리는 일은 없을 거야.
클라인은 그렇게 스스로를 위안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감사합니다. 진짜 감사합니다!”
“만약 브리더한테 간 잉간이가 싫어한다면 그 즉시 중단하는 거예요. 알겠죠?”
“아휴, 당연히 그래야죠!”
클라인의 대답을 들은 직원은 한시름 놨다는 듯 연신 클라인에게 고개를 숙였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클라인은 한 가지 조건을 더 제시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뭔가요?”
“……아까, 저한테 전화를 걸었던 사람들은 후보자에서 제외해 주세요.”
잉간이를 괴롭혔으니 그 대가는 받아야지.
194화 잉간이 이상형 월드컵
“어?”
예상치 못한 상자 안의 내용물에 나는 얼빠진 목소리를 내며 그대로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리키는 그런 내 모습에 호기심이 생겼는지 슬쩍 몸을 빼 어깨너머로 내 손에 들린 사진을 바라봤다.
그리고 리키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변태.”
“아니, 이런 건지는 나도 몰랐지…….”
“보면 안 된다고 했는데…….”
아리스는 리키의 품 안에서 시무룩한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렸고, 리키는 아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리스를 달랬다.
“잉간이 잘못했네.”
“맞아.”
리키가 아리스의 기분을 풀어주는 사이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손에 들린 사진을 다시 상자 안으로 집어넣는다.
이걸 나한테 준 이유가 도대체 뭘까?
먹을 거나 기묘한 장치라면 뭔가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겠는데, 이런 걸 받으니 좀 당황스럽다.
솔직히 이 정도면 성희롱 신고를 해도 되지 않을까?
진짜로 이건 클라인의 의도를 짐작할 수도 없어서 황당하네.
혹시나 그거 하나만 이상한 사진이었을까 봐 다른 사진들도 확인해 보지만, 전부 다른 여성들의 사진들만 계속해서 튀어나올 뿐이었다.
첫 번째 사진처럼 이상야릇한 포즈를 취한 사진도 있고, 그냥 평범하게 사진을 찍은 것 같은 모습도 있다.
멍하니 사진들을 만지작거리다 보니 사진이 마치 엽서처럼 열 수 있는 구조라는 것을 깨달았다.
체모가 창백한 유령을 연상시키는 여성 켄타우로스의 사진을 열자, 무언가가 빼곡하게 적혀있는 것이 보인다.
[제니퍼]
-18세
-보유 마력량: 9등급
-키 167cm
마치 결혼 정보 회사에서 회원들의 프로필을 적어놓듯이 빼곡하게 적힌 누군가의 신상 정보가 눈에 들어온다.
이게 이 아이의 신상 정보인 걸까?
여러 정보들이 한가득 적혀있었지만, 나는 적당히 사진을 닫고 또 다른 사진을 하나 집어서 펼쳐본다.
이번에는 방금의 아이와 정반대로 활발해 보이는 외모의 하피가 찍혀있었다.
[제니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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