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 26

사진 속의 차원문은 무척이나 거대해 보였다는 것이었다.
거의 건물 하나 크기만 해 보이는데, 그 거대한 차원문에서는 인간으로 보이는 생명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설마 이건 지구에 저 차원문이 열렸다는 뜻인 걸까?
그게 아니고서야 클라인이 내게 이런 사진들을 보여주는 이유를 짐작할 수가 없는데.
아니, 그래도 조금 이상하다.
지구에 저런 차원문이 열렸다는 사실을 내게 알려주는 이유가 뭔데?
두 번째 사진에도 내가 의아함을 품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와중, 내 의문을 모두 해소해 줄 것이 나타났다.
“응?”
이번에 클라인이 내게 건네준 것은 사진이 아니라, 어디에 쓰는지 모르겠는 기묘한 기계 장치였다.
SF 영화에서 나오는 미래형 수류탄처럼 생겼는데, 이건 도대체 뭐 하는 장치인 걸까?
클라인에게서 기묘한 장치를 받아 이리저리 살펴보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어디에 사용하는 건지 모르겠다.
설마 진짜 수류탄 같은 폭탄인 건 아니겠지?
속으로 그리 생각하며 정체불명의 기계를 만지작거리던 그때, 눈앞에 반투명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우왁……?!”
[마력 분산기를 통한 차원문 무력화-공인되지 않음, 중앙 정부는 본 의뢰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 책임지지 않습니다.]
[임무를 수락하시겠습니까?]
내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는 지난번에 그 눈 덮인 평야에 갔을 때 봤었던 메시지와 흡사했다.
정확히는 평야에 가기 전, 그 짜증 나던 녀석이 있던 공간에서 본 메시지.
그제서야 나는 클라인이 내게 지구와 저 차원문의 사진을 보여준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때 그 평원의 마을을 대피시켰던 것처럼 나에게 지구에 열린 차원문을 닫으라는 것인 걸까?
그런 것이라면 내가 내릴 대답은 단 한 가지였다.
[임무를 수락하였습니다.]
수락.
다른 곳도 아니고 지구에 저런 일이 일어난 거라면 도와주는 게 맞지.
하지만 그런 동향 사람을 도와주고자 하는 마음보다 더 강한 이유가 하나 있었다.
지난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클라인이 내게 직접 부탁해온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부탁한 거라면 귀찮다거나 위험할 수도 있으니 그리 긍정적인 마음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클라인이 내게 한 부탁이라면, 당연히 들어줘야지.
오히려 이런 부탁을 받았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다.
“:-)”
임무를 수락하자 클라인은 더욱 기뻐하며 곧바로 내게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그렇지만 나는 곧바로 클라인의 손에 올라타지 않고 잠깐 클라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0?”
클라인이 내 행동이 무슨 뜻인지 의아해했지만, 나는 빠르게 차원항으로 달려갔다.
“잠깐 나갔다 올게!”
“어, 응? 잉간?”
집에서 뒹굴거리고 있는 아리스에게 잠시 외출을 알리고 다시 차원항 밖으로 나와 클라인의 손 위에 올라탄다.
내가 갑자기 다시 차원항 안으로 들어가서 당황했었던 걸까?
클라인은 내가 돌아오자 격한 반응을 보이며 슬며시 나를 언제나의 회색 안개 속으로 들여보냈다.
이젠 익숙해진 안개 속에서 침대를 찾아내 적당히 드러누워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회색 안개 속에 차원문이 열린다.
한 손에는 에포나를, 다른 손에는 마력 분산기를 들고 차원문을 지나친다.
차원문을 지나 밖으로 나오자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 나를 반긴다.
그동안 차원항에서 봐오던 것과는 다른 내가 알던 지구의 자연과 비슷한 풍경.
괴상하게 생긴 식물이나 꽃도 없고, 그냥 평범한 숲이 나를 반긴다.
정말 여긴 지구가 맞는 걸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내딛자 무언가 묘한 위화감이 느껴진다.
내가 알던 지구의 공기가 아닌 듯한,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감에 가까운 어떠한 감각.
너무 오랫동안 지구를 떠나 있어서 그렇게 느껴지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설마.
묘한 위화감을 느끼며 주위의 지형을 둘러보는 사이, 에포나는 바닥에 코를 박고 주위의 냄새를 킁킁거리며 맡는다.
그러한 에포나를 슬쩍 들어 올려 품 안에 인형처럼 껴안는다.
에포나는 살짝 발버둥 쳤지만, 그 이상의 저항은 하지 않고 내 턱을 살짝 핥는다.
어딘가 스산한 분위기의 숲속이어서 그런지 쿵쾅거리는 내 가슴이 조금은 진정되는 느낌이 든다.
아무튼, 이제 그 차원문을 찾아내서 이 마력 분산기를 던져넣으면 다 끝나는 일인데, 그 차원문은 어딜 가야 찾을 수 있을까?
일단 근처에서 주위의 지형을 파악할 수 있는 곳을 찾아보자.
그렇게 일단 하염없이 에포나와 함께 숲을 걷고 있으니 차원항에 떨어졌던 초창기가 떠오른다.
그때도 이렇게 에포나와 나, 이렇게 단둘이 숲을 걸었었는데.
그건 이 에포나가 아니었던가?
아니, 그 에포나를 만나기 전부터 나는 에포나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쩌면 이곳에 오기 전부터 나는 에포나와 함께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단지 내가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지.
그렇게 잠시 딴생각을 하며 숲을 걸어가던 그때, 에포나가 이빨을 드러내며 숲의 어딘가를 노려보더니 큰 소리로 짖기 시작한다.
“왕! 왕! 왕왕!”
“에포나?”
갑작스러운 에포나의 변모에 나는 긴장하며 에포나가 바라보는 곳을 바라봤다.
무슨 들짐승 같은 게 있는 걸까?
긴장한 채로 수풀 너머를 바라보자 조금씩 수풀이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이런 숲이라면 멧돼지 같은 게 나오려나?
부디 그냥 고라니 같은 평범한 초식 동물이면 좋겠는데.
긴장된 표정으로 수풀을 바라보던 그 순간, 에포나가 거칠게 꼬리를 바닥에 내리치고.
“왕!”
“고양이……?”
전에 어디선가 봤었던 듯한 외모의 고양이가 수풀 너머에서 튀어나왔다.
에포나는 고양이에게 당장이라도 달려나갈 기세였지만 내 손에 붙잡혀서 허공에서 다리만 동동거릴 뿐이었다.
고양이는 그런 에포나를 보며 잠시 눈웃음을 지은 것 같이 표정을 샐쭉 바꾸더니 마치 나에게 따라오라는 듯 꼬리를 살랑거리며 내 앞에 섰다.
“야옹.”
정말 나에게 따라오라고 하는 걸까?
고양이는 나를 힐끔힐끔 돌아보며 내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며 숲속을 나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뾰로통한 기색의 에포나를 쓰다듬으며 에포나를 달래며 뭐에 홀린 것처럼 조심스럽게 고양이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 * *
기사는 거친 한숨을 몰아쉬며 잠시 나무에 기대에 뜨겁게 달아오른 몸을 식히고 있었다.
마력으로 어떻게 몸의 열기를 식히려고 해도 조상 대대로 내려온 신체 구조상 쉽게 열기가 식지 않는다.
“제기랄.”
그 빌어먹을 괴물에게 당한 지 벌써 반년 가까이 지났다.
그 말은 기사가 이 미지의 세계에 떨어진 지도 벌써 6달이 넘었다는 소리다.
이곳이 말로만 듣던 신들의 전장인 것일까?
기사와 그와 함께 떨어진 다른 사람들은 처음엔 그런 생각을 했지만, 곧 그게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마력의 농도가 비정상적으로 낮은, 무척이나 이상한 세계.
이곳이 신들의 전장일 리 없다.
신들이 마력도 없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길 즐길 리는 없지 않은가?
마법이 펑펑 터져야 신들 입장에서도 보는 맛이 있을 것 아닌가.
어쨌든, 이 세계는 마력이 극도로 적은 덕분에 쉽사리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
원래 세계처럼 마법을 펑펑 써대려면 주기적으로 정착지를 이동해야 할 수준이다.
그 덕분에 기사는 이곳에 와서 자신이 가장 경멸하던 흑마법사들의 방식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생물의 시체에서 마력을 흡수하는, 매우 미개하고 잔혹한 방식을 말이다.
그 지옥에서도 그러한 방식을 사용하지 않았건만, 어쩔 수 없이 그러한 방식을 사용하게 됐다는 것에 기사는 좌절감을 느꼈다.
맨 처음, 이곳에 떨어지고 나서 기사는 한동안 마력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마력이 부족한 세상인 만큼, 마력을 사용할 일이 거의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젠 무언가가 바뀌었다.
1달 전부터 대기의 분위기가 바뀌더니, 괴상한 습격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원래 자신들이 있던 지옥의 분위기와도, 이 묘한 세상의 분위기와도 닮지 않은 낯선 누군가들.
그것들에 대항하기 위해선 기사는 그러한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지켜야 할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기사가 나무에 몸을 기대고 휴식을 취하던 그때, 정착지에서 한 주민이 나와 기사에게 다급한 소식을 알려왔다.
“기사님. 우물 방향에……”
“또 그놈들인가?”
“네. 또 나타났어요.”
그 녀석들은 휴식이라는 걸 모르는 모양이다.
그 언데드들도 휴식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는데 말이지.
기사는 한숨을 내쉬며 부어오른 관절의 고통을 억지로 무시하며 몸을 일으키며 주민에게 말했다.
“신호기는, 어떻게 되어가지?”
“거의 다 완성했습니다. 마력만 충분히 모으면 될 겁니다.”
“그래. 그건 그나마 다행이군.”
지금 마을 주민들이 모두 달라붙어 만드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연락할 신호기.
기사가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그 괴물에게 잡혀갔던 사람들은 이 정착지에 있는 사람들보다 몇 배는 많았다.
그렇기에 주민들과 남자는 이 세계의 어딘가에 그때 잡혀갔던 다른 사람들이 흩어져 있을 것이라 믿고 그들과 연락을 취할 수단을 만드는 중이었다.
혼자라면 고난을 이겨내기 힘들지만, 함께라면 고난을 이겨낼 수 있으니까.
신호기의 완성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좋은 소식을 뒤로한 채, 기사는 주민이 말해준 장소로 서둘러 발을 놀렸다.
마을 근처에서 물의 마력이 가장 밀집된 장소에 만들어진 우물로 향하니 그 녀석들이 우물을 둘러싸고 이상한 짓거리를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마치 흑마법사들이 우물에 수작을 부리듯 이 녀석들도 우물에 무언가 수작을 부리는 것일까?
굳이 저 녀석들이 무슨 짓을 하려는 지 지켜볼 필요는 없다.
기사는 그렇게 생각하며 얼마 남지 않은 마력을 가득 끌어모아 곧바로 습격자들에게 돌진했다.
“으.”
“악?!”
켄토르 일족의 자랑거리인 강력한 돌진이 기사가 지나간 자리에 있던 모든 것들을 날려버리고, 습격자들은 두 개의 목소리로 갈라진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언제 들어도 참 적응이 되지 않는 목소리다.
대부분의 습격자들은 방금의 일격으로 다진 고기가 되어버렸지만 그럼에도 살아남은 일부의 습격자들이 존재했다.
두 명의 사람이 하나로 합쳐진 것 같은 기형의 외모에 기사가 인상을 찌푸린다.
언제 봐도 참 적응이 되지 않는 외형이다.
아무리 봐도 자연적으로 저런 모습으로 태어나지 않았을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떤 미치광이가 저러한 모습을 만들어낸 걸까?
기사가 속으로 혀를 차던 그때, 어디선가 익숙한 냄새가 느껴졌다.
그 날 이후 언제나 그리워했던, 다시는 맡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딸 아이의 냄새.
기사가 갑자기 느껴진 딸의 체취에 순간 정신이 팔린 순간, 습격자의 몸에서 불길한 기운이 퍼져나간다.
“읏……?!”
“인류, 해방 전선에.”
“합류해라……!”
언제나 외치던 정체불명의 구호를 습격자가 외치더니.
펑, 하고 몸이 폭발하며 사방으로 이상한 기운을 퍼트리자.
그러자 주위의 식물들이 그 지옥에서 봤었던 것들과 비슷한 기괴한 모습으로 변형되기 시작한다.
기사가 혀를 내두르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 순간, 그리운 딸아이의 향기가 등 뒤에서 강하게 느껴진다.
자신도 모르게 기사는 너무나 그리운 이름을 입에 담으며 뒤를 돌아봤지만.
“블랑카?”
“네?”
기사의 등 뒤에 있던 것은, 기묘한 기운이 느껴지는 남자였다.
179화 인간들의 시선에서 바라본 인공 행성
“블랑카?”
“네?”
기사는 당장이라도 손에 잡힐 것 같은 이름을 내뱉었지만, 그의 뒤에 있던 것은 그가 바라던 사람이 아니었다.
단지 자신의 딸로 헷갈릴 정도로 전신에 딸의 향기가 진하게 묻어있는 남자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서, 습격자들에게서 느껴지던 기묘한 혐오감이 함께 느껴지는 남자.
어째서 블랑카의 체취가 저 남자에게서 묻어나오는 걸까?
설마, 저 남자는 블랑카와 만난 적이 있는 걸까?
평소에 스스로 냉정하다고 자부하던 기사였지만, 다시는 맡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딸의 냄새를 맡자 기사는 평정심을 잃어버렸다.
기사는 전후 설명도, 자기소개도 잊은 채로 눈에서 불꽃을 이글거리며 남자를 몰아붙였다.
“블랑카. 블랑카는 어디 있지?!”
“네? 아니, 저. 갑자기 무슨…….”
“대답해. 블랑카를 만난 적이 있잖아!”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갑자기 돌변하며 자신에게 진한 감정을 토해내는 기사의 모습에 당황한 것일까?
남자는 점점 기사의 기백에 밀려 겁먹은 표정을 지으며 한 발자국씩 뒤로 물러났다.
블랑카가 어쩌면 살아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기사는 남자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을 때까지 남자를 추궁했다.
당연하게도, 남자가 뭐라 말해도 지금 기사의 귀에 들어올 리 없었고, 남자의 대답이 들려온 건 기사의 머리가 조금 식고 난 뒤였다.
자신이 초면의 상대에게 어떤 무례를 저질렀는지 깨달은 기사는 조용히 남자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미안하군. 조금 흥분했던 모양이야.”
그래, 단지 블랑카와 비슷한 체취가 나는 사람일 뿐이다.
기사는 그런 식으로 합리적인 추론을 끌어내며 간신히 머리를 식혔지만, 조심스럽게 입 밖으로 나온 남자의 질문에 남자의 심장은 미친 듯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저, 혹시 블랑카를 아세요?”
“뭐?”
“아니. 말하는 걸 들어보니 블랑카의 지인이신 것 같아서요.”
남자는 기사가 마음속으로 내린 추론을 처음부터 완전히 부정해 버렸다.
그러니까 이 남자가 하는 말은, 블랑카가 살아있다고 말하는 것 같지 않은가?
억지로 외면하고 있던 기대감과 소망이 한꺼번에 보답을 바라며 들끓어 오르기 시작한다.
“정말로 자네는 블랑카를 알고 있는 건가? 내가 말하는 블랑카는 나와 같은 켄토르 일족에.”
“리베리아의 백은 기사단이며.”
“햇살보다 더 아름다운 금빛 털을 가지고 있고.”
“은근히 겁이 많지만.”
“그 누구보다 강인한 자랑스러운 나의. 나의…….”
눈앞의 남자와 하나씩 퍼즐 조각을 맞춰가며 정답을 확인하자 기사는 감정이 복받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건 품위 없는 행동인데.
그 사실을 인지해도 기사는 자신의 목소리에 울먹거림이 섞이는 걸 어찌할 수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나의. 나의 딸이라네.”
결국, 기사는 마지막 답안까지 확인하자 지금껏 닫아뒀던 감정의 둑을 터트렸다.
“살아있었군. 살아있었어. 그래, 그럴 줄 알았어. 고작 그런 일로 죽을 리 없지.”
남자는 그런 기사의 모습을 애매한 웃음을 지으며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뭐라 말하기 참 애매한 상황에 남자는 섣불리 말을 꺼내기보다 침묵을 택했다.
남자가 침묵을 택한 것은 옳은 선택이었던 걸까?
한바탕 감정을 쏟아낸 기사는 감정을 추스르며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자네가 내 딸을 구해준 건가? 그 끔찍한 사고에서.”
“제가 구한 건 아니에요. 구한 건 아마, 클라인일 거예요.”
“클라인?”
“대충…… 리베리아에서 말하는 신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거에요.”
“신? 설마, 블랑카가 신들의 전장에 들어갔다는 건가?”
“아, 네. 이쪽 식으로 이야기하면 그렇게 되겠네요.”
그럴 줄 알았다.
블랑카라면 신들의 전장에 들어갈 수 있을 줄 믿고 있었다.
다행이다.
자신이 블랑카에게 행했던 일들이 아무 쓸모 없는 고통만 준 꼴이 된 게 아니어서.
기사는 그렇게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기사는 자신이 블랑카의 안부를 물어보느라 눈앞의 사내와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크흠. 블랑카가 신들의 전장에 들어갔다니 안심이 되는군. 나의 이름은 로보 켄토르라고 하네. 자네의 이름은 무엇인가?”
눈앞의 남자가 블랑카와 꽤 오랫동안 생활했다는 건 당연한 사실이겠지.
그렇다면 저 남자 또한 신들의 전장에 들어갈 만한 자격이 있는 전사일 것이다.
그렇기에 기사는 먼저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그러자 남자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기사의 자기소개에 호응했다.
“아. 전 잉간이라고 합니다.”
“이, 잉간?”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은 기사의 상식 범위 내에 없는 이름이었다.
리베리아의 영웅은 아닌 것 같은데, 정말 자신이 들은 이름이 맞는 걸까?
어떻게 사람 이름이 잉간일 수 있지?
기사는 남자의 자기소개를 듣고 당황했지만 애써 티 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특이한 이름이군.”
“네. 평소에도 그런 소리 자주 들어요.”
그나저나 블랑카의 냄새가 이렇게 진하게 느껴질 정도라면 블랑카와 오랜 시간을 보냈다는 건데, 이 남자.
그러니까 잉간은 블랑카와 어떤 사이인 걸까?
말하는 걸 들어봐선 블랑카와 꽤 가까운 사이 같은데.
“그, 블랑카는 평소에 신들의 전장에서 어떻게 지내는가?”
그렇다고 직접 돌직구를 던지기엔 기사는 남자의 대답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기사는 블랑카의 일상을 물어보는 식으로 살짝 우회하는 길을 택했다.
“그냥. 숲에서 사냥하고…….”
“그리고?”
“그리고 스스로 훈련하고, 같이 지내는 사람들하고 대화하고. 그냥 평범하게 지내죠.”
“평범하게. 그거 좋군.”
그렇지만 너무 우회한 탓일까?
기사는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얻어낼 수 없었다.
“그, 같이 지내는 사람들은 얼마나 되는가?”
“얼마 안 돼요. 저까지 포함해서 3명?”
“3명. 그래, 자네까지 포함해서 3명이란 말이지…….”
역시나, 잉간하고 블랑카는 함께 지내는 것이 맞았다.
기사는 점점 그리 좋지 않은 예감이 들기 시작했지만, 억지로 진실을 파헤치길 거부했다.
그래, 신들의 전장에서 같은 숙소를 사용할 수도 있는 거지.
그렇게 기사가 스스로를 다독이던 그때.
“인류 해방 전선에.”
“합류하라.”
이젠 듣기만 해도 진저리가 솟아오르는 그 녀석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오늘의 습격은 모두 끝난 줄 알았는데, 아직 끝나지 않았던 걸까?
“인류 해방 전선……?”
“얼마 전부터 나타나서 귀찮게 구는 녀석들이라네. 곧 잔뜩 몰려올 테니 조심하게.”
잉간은 저자들의 목소리를 처음 듣는지 저들의 구호를 의문스럽다는 듯 따라 했다.
기사가 잉간에게 습격자들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한 그때, 녀석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와.”
“합류해라!”
이번에 나타난 녀석들은 꽤나 소규모여서 남아있는 마력을 모두 활용한다면 단번에 처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판단한 기사는 다시 한번 마력을 담은 돌진으로 습격자들의 진형을 갈아버렸다.
“크윽…….”
하지만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지 않아서일까?
뜨겁게 달아오른 몸이 비명을 질러댔고, 그 덕분에 몇몇 습격자들이 살아남아 반격을 하려 한다.
보기만 해도 썩 좋지 않아 보이는 기운이 맺힌 손이 기사와 잉간의 몸을 건드리려 한다.
기사는 황급히 녀석들의 공격을 피하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이대로면 녀석들의 공격을 정통으로 얻어맞는 상황.
바로 그때, 기묘한 일이 벌어졌다.
아까부터 느껴지던 기묘한 혐오감이 더욱 강하게 느껴지더니.
푹.
마치 보이지 않는 창에 꿰뚫린 것처럼 잉간을 공격하던 습격자들의 몸에 구멍이 뚫렸다.
또한, 기사를 공격하던 습격자들은 마치 실이 끊긴 마리오네트마냥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이건…….”
그 어떠한 마력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기사는 잉간에게 당혹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자네가 한 짓인가?”
“어…… 그런 셈이죠?”
잉간은 기사의 질문에 살짝 망설이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런 잉간의 모습이 의아하긴 했지만, 신들에게 선택받은 전사이니만큼 기사는 큰 의문을 품지 않았다.
“덕분에 살았군. 고맙…….”
기사가 잉간에게 감사 인사를 하려던 순간, 기사의 몸이 얼음물에 빠진 것처럼 떨려왔다.
어째서인지 몰라도 육체가 공포감을 느끼고 있다.
“윽……!”
그동안 쉬지도 않고 혹사당한 몸이 드디어 파업을 일으킨 것이다.
지금 여기서 쓰러지면 안 되는데.
겨우 블랑카의 소식을 알 수 있게 됐는데.
기사는 안간힘을 쓰며 버티려 했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기사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이 정도로 봐 줄게.”
“흐억……?!”
기사는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보랏빛 악몽 속에서 깨어났다.
누군가가 가볍게 이마를 툭 때린 것 같은 환상통이 머리에서 느껴진다.
잉간이 쓰러진 자신을 옮긴 것일까?
기사는 자신이 정착지의 치료소에 누워 있음을 깨달았다.
“괜찮아요?”기사를 간호하고 있던 걸까?
잉간이 잠에서 깨어난 기사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기사는 잉간이 자신의 몸을 마사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잉간의 마사지로 일단 응급 처치는 이루어진 걸까?
미친 듯이 쿵쾅거리던 심장이 조금 가라앉은 상태다.
기사는 묘하게 능숙해 보이는 잉간의 손길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꽤나 능숙한 솜씨군.”
“네. 워낙 많이 하다 보니. 저절로 손에 익더라고요.”
“누구에게 배웠지?”
“아. 그게.”
움찔-
별생각 없이 던진 기사의 질문에 잉간이 몸을 움츠린다.
그런 잉간의 반응을 보며 기사는 묘한 불안감을 느꼈다.
설마, 아니겠지?
* * *
클라인은 자신의 행동이 모두 녹화되고 있다는 것조차 잊은 채로 아바타의 앞발을 휘둘렀다.
정말 짜증 난다.
저 빌어먹을 차원 파괴자는 왜 자꾸만 자신을 방해하는 걸까?
나는 그냥 잉간이랑 놀고 싶은 건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태인 잉간이를 안내할 겸 잉간이 앞에 나타났더니만, 자꾸만 저 차원 파괴자 녀석이 시비를 건다.
잉간이의 품 안에 안긴 채로 자신의 아바타를 바라보며 비웃는 표정을 짓는 저 모습을 봐라.
으, 일단 길 안내는 해줘야 하니 지금은 그냥 두고 볼 수밖에 없는데.
괜찮아.
인간 정착지에 도착하면 잉간이하고 놀 시간이 생길 테니까.
그렇게 자신을 비웃는 차원 파괴자를 애써 무시하며 잉간이를 마을 근처로 안내하자 병사 계급의 인간과 잉간이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병사가 살짝 과격한 몸짓을 보였을 땐 자신이 나서야 하나 생각했지만, 잉간이는 무사히 원주민과 썩 괜찮은 관계를 형성한 것처럼 보였다.
전에는 낯선 사람들이 무서워서 울던 잉간인데, 저렇게 성장한 모습을 보니 클라인의 마음이 뿌듯해진다.
하지만.
“왕.”
아까부터 자꾸 자신을 비웃는 저 차원 파괴자가 너무 거슬린다.
슬쩍 잉간이 곁에 다가가려고 하면 저 빌어먹을 녀석이 촉수를 휘둘러 클라인을 막아 세운다.
잉간이 옆에 차원 파괴자가 딱 달라붙어 있어서 힘으로 제압할 수도 없다.
억지로 밀고 들어가면 잉간이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클라인이 불쾌한 표정으로 차원 파괴자와 대치하던 그때.
외래종들이 잉간이에게 접근해오는 것이 저 멀리서 느껴졌다.
잉간이가 다칠 수도 있으니 그 전에 멀리에서 처리해놓는 게 좋겠다.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슬쩍 발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어째서인지 차원 파괴자가 클라인을 방해했다.
클라인이 가지 못하게 촉수로 끈덕지게 클라인을 붙잡고 늘어진다.
도대체 어째서 이러는 걸까?
이러다가 잉간이가 다칠 수도 있는데.
결국, 클라인은 외래종들 일부를 놓치고 말았다.
외래종들은 당연하게도 잉간이와 원주민들을 공격하러 달려들었다.
클라인은 서둘러 외래종들을 요격하려 했지만.
“왕.”
차원 파괴자는 또다시 클라인을 방해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차원 파괴자는 잉간이와 공생하는 게 아니었나?
클라인이 그렇게 의문을 품은 사이, 원주민이 앞장서서 외래종들을 공격하지만, 일부가 또다시 살아남는다.
그렇게 남은 일부가 잉간이와 원주민을 공격하려는 절체절명의 상황.
그런 상황이 닥치자 차원 파괴자는 부랴부랴 잉간이를 공격하는 외래종을 공격했다.
물론, 클라인이 쏘아 보낸 공격은 방해하며 말이다.
“……냥.”
그 모습을 보자 아바타의 입에서 저절로 한숨이 터져 나온다.
도대체 뭘 원하길래 잉간이를 위험에 빠트리면서까지 저러는 걸까?
도저히 그 이유를 모르겠지만, 클라인은 한 가지 사실은 알 것 같았다.
저 차원 파괴자의 기강을 세게 잡아야 한다는 것.
누가 서열이 위인지 알게 해 줘야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지.
때마침 차원 파괴자가 잉간이에게서 거리를 벌린다.
그리고 차원 파괴자는 기다렸다는 듯 클라인을 바라보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아, 진짜 안 되겠다.
고작 차원 파괴자지만, 너무 열 받아서 안 되겠다.
제대로 본때를 보여주는 수밖에.
“왕!”
“냥!”
180화 [생명 도감] 외래종에 대처하는 인간들의 모습
“어, 그게 말이죠.”
아주 간단한 질문.
딱히 저렇게 꺼릴 것도 없는 아주 평범한 질문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대답하길 주저하는 걸까?
누가 봐도 변명을 준비 중이라는 걸 알 수 있는 잉간의 모습을 지켜보던 기사는, 가장 아니길 빌었던 최악의 시나리오를 떠올렸다.
“……블랑카냐?”
“어, 네.”
잉간은 뭔가 변명을 준비하려 했던 것 같지만, 기사가 단번에 정답을 맞히자 포기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단번에 정답을 맞혔지만, 기사는 단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그게요. 주변에서 마사지를 할 수 있던 사람이 저밖에 없었거든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제가…….”
“말이 길군.”
“…….”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면 저렇게 변명을 준비하지도 않았겠지.
기사의 머릿속에선 온갖 슬픈 생각들이 휘몰아쳤지만, 기사는 그 모든 가능성을 무시하며 하나의 답을 채택했다.
그래, 서로 마사지를 해주는 건 연인끼리나 하는 행동이지만, 일방적으로 마사지를 받는 건 하인들에게도 시키는 일이다.
거기에다가 이 인간은 순혈 켄토르도 아니다.
평범해 빠진, 오히려 미천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아무 특색이 없다.
결코, 자신의 딸아이가 그런 뜻으로 마사지를 알려준 게 아니다.
잉간의 말대로 치료 목적으로 알려준 거겠지.
“그래. 켄토르의 육체는 금방 지치니 말이야. 딸아이를 보살펴줘서 고맙군.”
“아하하…….”
기사는 그렇게 또 이번에도 더 자세히 파고드는 것을 멈췄다.
그러는 편이 훨씬 마음이 편하니까.
그 대신, 기사는 서둘러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자네는…… 신들의 전장 투사가 아닌가? 어찌하여 이런 곳에 온 거지?”
“클라인…… 그러니까 신이 시켰다고밖에 말할 게 없네요.”
“신의 명령이라고?”
“네. 보니까 뭔 차원문을 닫으라는 것 같던데…….”
잉간의 말을 들은 기사는 머리에 번쩍하고 번개가 치는 기분이 들었다.
신들께선 우리를 버린 것이 아니었구나.
그래,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이런 세상으로 우리가 이동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신의 인도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비록 리베리아 님이 직접 나선 건 아니지만, 이건 필시 리베리아 님의 은총이겠지.
“차원문이라고 한다면, 뭘 말하는지 짐작이 가는군.”
“아, 뭔지 아시나요?”
“자네도 아까 봤던 그 습격자들. 그 습격자들이 이곳에 오기 위해 만든 차원문이겠지. 위치도 대략 짐작이 가.”
“위치도요?”
“다른 생존자 마을을 발견해서 연락해오고 있었는데, 습격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할 즈음부터 연락이 끊긴 마을들이 꽤 있어. 그 마을들의 위치를 거슬러 올라가면 차원문이 있을 거야.”
“하긴. 차원문에서 먼 곳부터 습격을 받았을 리는 없으니까요.”
잉간은 기사의 말을 끄덕거리며 긍정한다.
기사가 잉간과 대화하던 사이, 심하게 달아오른 심장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모양이다.
기사는 조심스럽게 몸을 침상에서 일으켰다.
“신의 투사가 직접 왔다니 이제 좀 안심되는군. 자네에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자네의 이야기를 마을에 해도 되겠나?”
“제 이야기요?”
“신의 투사가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마을 주민들도 안심할 거야. 다들 계속되는 습격으로 많이 지쳤거든. 그 지옥에서 빠져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일을 당했으니…….”
기사의 이야기를 듣던 잉간은 무언가 묻고 싶은 것이 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 이야기를 하는 건 괜찮은데요.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니 원래 이곳에서 사시던 게 아닌 것 같네요?”
“그래. 우린 이곳에 도착한 지 아직 1년도 채 지나지 않았어.”
“그럼, 여긴 리베리아가 아닌 거네요?”
“그렇지. 그건 왜 묻는가?”
“……아니, 그냥요.”
이곳이 리베리아인지 물어보는 잉간의 목소리에는 희미한 기대감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마치 이곳이 리베리아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럼 자네는 지금부터 차원문을 찾으러 떠날 생각인가?”
“아마도 그렇게 되겠죠? 빨리 끝내고 집에 돌아가야 해서요.”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지?”
“네. 그렇죠.”
기사의 머릿속에 문득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지만, 기사는 애써 투레질을 하며 그 가능성을 배제했다.
“그래도 말이야. 확실한 위치도 모르는데 차원문을 찾으러 가는 건 어렵지 않겠는가?”
“가만히 있다고 차원문이 어딨는지 알 수는 없잖아요?”
“……어쩌면, 알 수도 있다네.”
“네?”
“지금은 무리지만, 차원문의 위치를 찾아낼 방법이 있다는 말일세.”
“정말요?”
기사의 말을 들은 잉간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며 기사의 얼굴을 바라본다.
기사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잉간에게 그 방법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가 자네를 속일 이유가 어딨는가? 원래는 마을 간 통신에 사용할 예정이었지만, 약간만 손본다면 차원문의 위치를 알아낼 수도 있는 장치가 있다네.”
“마을 간 통신에요? 그거, 설마. 무선 통신 이야기에요?”
“무선 통신? 아, 자네의 세상에선 마석 통신을 그런 이름으로 부르는가? 하긴, 말 그대로 선이 필요 없는 통신이니 말이지.”
기사의 이야기를 들은 잉간은 충격받은 것처럼 제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그걸, 그걸 만들 수 있는 거예요? 이 마을에서요?”
“그럼. 재료만 있다면 충분히 만들 수 있다네. 다만 이곳은 마력이 부족해서 장치는 만들었지만, 마력이 부족해서 지금은 마력을 모으는 중이지.”
“그. 그 방법. 저에게도 알려주실 수 있어요?!”
“어…… 딱히 비밀도 아니니 충분히 가능하지. 다만, 나는 그런 쪽 지식은 별로 없어서 말이야. 마을의 기술자에게 물어보게나.”
기사의 말을 들은 잉간은 기뻐하면서 동시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기쁜데, 뭔가 좀 우울하네요.”
“무슨 소린가?”
“아뇨. 그냥 혼잣말 같은 거예요. 그냥…… 그게 이렇게 쉬운 거였나 싶어서요.”
마석 통신을 만드는 법을 찾아 헤매기라도 하고 있던 걸까?
기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일단 잉간에게 마을의 구조를 소개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기사가 친절히 마을의 구조를 소개하던 그때, 어디선가 낯선 생명체가 나타났다.
“음?”
“아, 고양이…….”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생명체인데, 습격자들의 차원문을 타고 이곳에 흘러들어 온 것일까?
아니면 단지 이곳에서 원래부터 살아가던 녀석을 지금껏 발견하지 못한 걸까?
기사는 싱긋 웃으며 그 기묘한 생물에게 다가가는 잉간에게 물었다.
“저 생물이 뭔지 아는 건가?”
“어라, 모르세요? 원래 여기서 사는 아이인 줄 알았는데.”
“단 한 번도 저것과 비슷한 생명체를 본 적이 없다네. 자네는 저걸 어떻게 아는 건가?”
“제 고향에 저 아이랑 비슷하게 생긴 생명체가 있어서요. 고양이라고.”
“고양이? 흠, 특이한 이름이군.”
그리 사나운 생명체는 아닌 걸까?
잉간이 고양이라 부른 생명체는 나긋나긋한 울음소리를 내며 잉간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잉간과 고양이가 노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뭔가 꽤 묘한 기분이 든다.
“크흠.”
기사는 자신도 슬쩍 고양이를 만지고자 손을 뻗었지만, 갑자기 느껴진 위압감에 손을 허공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 압박은, 저 고양이가 발산하는 건가?
아까 느낀 기묘한 불쾌감보다도 더욱 심하게 몸을 짓누르는 감각.
기사가 황급히 손을 회수하자 기사의 몸을 짓누르던 묘한 압박감은 온데간데없고, 잉간의 손길을 즐기는 고양이의 모습만이 남았다.
그런 기사의 모습이 이상하게 보였는지 잉간은 고양이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공중으로 들어 올리며 말했다.
“만지고 싶어 하시던 거 같은데, 원하시면 만져도 될걸요? 보니까 사람 손길을 아주 좋아하는 거 같은데…….”
“……아니. 괜찮네. 동물들은 나를 싫어하거든.”
“그래요……?”
도대체 저 고양이의 정체는 뭘까?
그리고 저런 고양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어루만진다니, 저 정도는 되어야 신들의 투사가 될 수 있는 걸까?
“그나저나 이 아이, 원래 이곳에 없었던 거에요?”
“그래. 아마도 습격자들이 연 차원문을 타고 함께 넘어온 게 아닌가 싶은데.”
“……그래요? 그러면, 좀 아쉽네요.”
“아쉽다니?”
“여기 환경이 제 고향이랑 비슷해서요. 고양이까지 있는 걸 보고 완전 고향에 돌아온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네요. 잘 보면 뭔가 미묘하게 다르고.”
“이곳이 자네의 고향과 비슷하다고? 마력을 거의 사용할 수 없는 곳인데, 여긴…….”
“아, 제 고향은 마력이 없는 세상이거든요. 물론 저도 마력이 없고요.”
“마력이 없다고?”
마력이 거의 없는 수준이 아니라, 마력이 없던 거라고?
마력이 없는 사람이 존재할 수가 있는 걸까?
마력이 없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아닌가?
기사는 최초부터 느껴지던 묘한 불쾌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래, 이건 리베리아에서 마력이 적은 평민들을 볼 때마다 느껴지던 감각이었다.
그렇지만 기사는 눈앞의 잉간을 평민들처럼 경멸하거나 혐오할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잉간의 실력에 대해 더욱 경악할 뿐이었다.
마력이 없는 몸으로 신들의 투사가 될 정도의 실력이라고?
도대체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 걸까?
“자네는…… 대단하군.”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기사가 잉간의 실력에 혀를 내두르던 그때, 마을 외곽에 설치된 사이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건……?”
“습격자들이로군. 마을 소개는 조금 이따가 끝마치도록 하지.”
“어, 잠시만……!”
기사는 그렇게 외치며 잉간의 한쪽 팔을 붙잡고 훌쩍 자신의 등 뒤에 태웠다.
잉간이 있다면 마을 주민들의 희생을 줄일 수 있을 것이란 판단이었다.
잉간을 등에 태운 기사는 서둘러 사이렌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방벽 너머에서 비척비척 걸어오는 습격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기사는 언제나처럼 눈살을 찌푸렸다.
“쯧. 언제 봐도 기괴한 녀석들이군.”
기사는 그렇게 말하며 잉간을 등에서 내리려고 했지만,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잉간?”
잉간이 기사의 등 뒤에 탄 채로 습격자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경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습격자들을 처음 본 것도 아닐 텐데, 왜 저러는 거지?
기사가 그런 의문을 품은 순간, 잉간의 입에서 누군가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고모라?”
* * *
하하.
다시는 사람을 무시하지 마라, 이 차원 파괴자 녀석.
“냥.”
짜증 나던 차원 파괴자에게서 승리한 클라인은 승리의 포효를 허공으로 내지르며 달콤한 승리를 만끽했다.
클라인의 신경을 잔뜩 긁어놓던 차원 파괴자는 이젠 입을 잔뜩 내민 채로 클라인의 시선 구석에서 클라인의 눈치를 살피고 있을 뿐이다.
“왕…….”
자, 그럼 승자의 권리를 마땅히 누리러 가 볼까?
클라인은 패배자를 등 뒤에 남겨두고 사뿐거리는 발걸음으로 잉간의 흔적을 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클라인은 켄토르와 이야기 하고 있는 잉간을 발견했다.
“냥…….”
평범한 고양이인 척 클라인은 슬며시 잉간의 곁으로 다가갔고, 잉간은 클라인을 보며 미소지었다.
“0w0!”
무슨 말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클라인을 보고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건 아닌 모양이다.
클라인은 그대로 잉간의 손길을 느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 아바타를 이런 모양으로 만들기 정말 잘했다.
신체의 크기가 작으니 잉간의 정보가 이불처럼 자신을 포근히 감싸는 기분이 든다.
미니멀리즘 라이프, 정말 최고야.
클라인이 그렇게 잉간의 손길을 즐기던 그때, 낯선 정보가 슬며시 클라인에게 흘러들어왔다.
잉간과 함께 있던 켄토르가 클라인의 아바타에 슬며시 손을 뻗어온 것이다.
찌릿.
즐거운 한때를 방해받은 클라인은 켄토르를 노려봤고, 클라인의 마음이 잘 전달된 걸까?
켄토르는 다시 손을 거둬들였고, 클라인은 다시 행복한 시간을 즐겼다.
그때, 어디선가 경보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아바타의 수명이 다 되어가서 경고음이 울리나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라 클라인은 이게 인간 마을에서 나는 경고음이라는 걸 깨달았다.
외래종들이 또 습격해온 걸까?
클라인이 이번에 또 자신이 나설지 말지 고민하던 그때, 켄토르가 잉간을 등에 태우고 외래종들이 습격해오는 구역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잉간의 품에 안겨있던 클라인도 자연스럽게 잉간과 함께 이동하게 됐다.
잉간이 위험할 정도라면 내가 좀 나서야 하겠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외래종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확인하러 고개를 돌렸지만, 예상치 못한 풍경에 클라인은 머리가 새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냥……?”
인공 행성을 침략해온 외래종들의 정체가, 리만의 보호소에서 봤었던 그 기괴한 생명체들이었기 때문이다.
저게 도대체 왜 여기서 나오는 거지?
181화 잉간이 매드 무비 3
“고모라?”
습격자의 얼굴을 마주하더니 이상하다는 듯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잉간.
그렇지만 별다른 변화는 없고, 기사는 눈살을 찌푸리며 잉간에게 질문했다.
“설마. 아는 사람인가?”
“그게. 어…… 잘 모르겠네요. 여기에 있을 리가 없는데. 있으면 안 되는데…….”
기사의 질문을 받은 잉간은 무척이나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도대체 뭘 봤길래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기사는 잉간이 봤던 풍경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지만, 그곳에 있던 건 단순한 괴물들뿐이었다.
그래도 잉간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한 괴물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작은 소녀와 거대한 거한을 억지로 합쳐놓은 것 같은 기괴한 외형의 생물체.
특이한 점이 있다면 소녀의 부위에서 온갖 종족들의 특징이 관찰된다는 것 정도일까?
기사가 습격자들을 차분히 관찰하는 사이, 잉간은 다른 습격자들 또한 자세히 바라보며 기사가 모르는 이름을 입 밖에 내뱉기 시작했다.
“이보게나.”
“그리고 또, 롯.”
“이보게나. 잉간.”
“아, 예?”
“저자들이 누군지, 알고 있는 건가?”
“……아마도요.”
“아마도?”
누군지 안다면 아는 거지, 아마도 안다는 건 무슨 뜻인 걸까?
“보다시피, 저 사람들은 두 사람이 하나로 합쳐진 것 같은 모습이죠?”
“음. 그렇지.”
“아마도. 아마도 아닐 건데요. 저 사람을 만드는 데 쓰인 원본들이 아마…….”
“너의 지인들인가?”
“아뇨. 그냥…… 제가 구한 사람들이에요.”
“자네가 구한 사람들?”
“전에도 이번 일 같은 일을 해본 적이 있었는데. 분명히 좋은 곳으로 간다고 했는데…….”
그제서야 기사는 잉간이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기사는 비슷한 경험을 겪은 병사를 보기도 했고, 자신이 직접 체험하기도 했다.
언데드들의 무리에서 구해낸 사람들을 안전지대로 대피시킨 다음 날, 그 안전지대가 궤멸하는 일은 일상다반사였으니까.
그리고 그 다음에.
자신이 구했던 사람들을 다시 죽여야 하는 일 또한 말이다.
“대충 무슨 일인지 알겠군. 마음은 알겠지만, 지금은 적을 맞이해야 한다네.”
“네? 잠깐만요, 조금만……!”
“저것들을 다시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이라도 있는 건가? 정신 차리게. 저건 자네가 알던 이들이 아니라네!”
기사는 망설이는 잉간을 다그치지만, 잉간은 미련이 남은 눈빛으로 기사에게 외쳤다.
“……한 번만. 딱 하나만 시도해볼게요. 그러니까 그때까진…….”
무언가 시도할만한 방법이 있는 걸까?
자신감이 없는 말투치곤 묘한 자신감이 있는 목소리에 기사는 미간을 좁혔다.
“……좋아. 신의 투사인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뭔가 방법이 있는 것이겠지.”
“기회를 줘서 고마워요.”
잉간은 그렇게 말한 뒤, 누군가에게 기도를 드리듯 누군가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에포나.”
그러자 아까 느꼈던 불쾌감이 더욱 거세게 날뛰기 시작하고, 잉간의 손 위에 무언가가 탄생했다.
저건, 도대체 무엇일까?
마력의 덩어리처럼 느껴지지만, 마력이 아니다.
그 이상의 무언가다.
그리고 그것은 기사에게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자신의 육체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정보여서일까?
기사의 민감한 귀와 코가 비명을 질러댄다.
잉간은 도대체 저걸 가지고 뭘 하려는 걸까?
기사가 거부감을 최대한 억누르며 잉간을 바라보자, 잉간은 마치 주문을 외우듯 무언가 중얼거렸다.
“상태창.”
그러자 기사가 이해할 수 없던 덩어리는 순식간에 기사도 알 수 있는 모습으로 형태를 바꾸었다.
기사들이 마력창을 뽑아내듯, 잉간 또한 자신의 무기를 뽑아낸 것이다.
“……돌창?”
겉보기에는 평범한 돌창인데, 저것으로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걸까?
기사는 의아해하면서 일단 약속한 대로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잉간은 돌창을 들어 올리고 심호흡을 하더니, 곧장 습격자들에게 창을 겨누며 걸어갔다.
“집중, 집중…….”
잉간은 스스로를 다독이며 고모라라 불렸던 습격자 앞으로 다가갔다.
“인류 해방 전선에.”
“합류하라.”
습격자는 잉간의 노력이 쓸모없다는 듯 특유의 대사를 내뱉으며 잉간에게 달려들었고.
푹-
잉간이 내지른 창이 습격자의 몸을 꿰뚫었다.
뭔가 방법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걸까?
기사가 의아해한 순간.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그야말로 신의 기적이라고 해야 하는 일.
두 사람을 강제로 합쳐놓은 것 같은 접합부가 점점 벌어지더니.
마치 껍질을 벗는 것처럼 거인의 몸에서 기묘한 꼬마 아이가 떨어져 나온 것이다.
“고모라……?”
정말로 성공할 줄은 잉간 자신도 몰랐는지, 잉간이 나직이 소녀의 이름을 부른다.
하지만 소녀는 정신을 잃은 상태로 반응하지 않았고, 잉간은 다급하게 소녀의 숨을 살폈다.
“살아……있어.”
그리고 기사는 그 일련의 모습을 지켜보며 경외감이 들기 시작했다.
방금 잉간이 사용한 힘은 마력이 아니다.
마력 너머의, 이 세상을 구성하는 힘 그 자체.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은 온전한 자연과 신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힘.
“……리베리아시여.”
신의 힘을 목도한 기사는 그대로 무릎을 꿇고 그의 신을 향해 기도를 올렸다.
기사가 리베리아에게 기도하는 동안, 잉간은 다른 습격자들에게도 창을 꽂아 사람들을 분리해내기 시작했다.
잉간은 그대로 모든 습격자들을 정화할 기세였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창을 거두고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여기까지네요.”
습격자 무리의 대략 3분의 2가 사람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적들은 남아있는 상황.
잉간의 신호를 받은 기사는 자신의 공격에 휩쓸릴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습격자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잉간이 도와줄 필요도 없이 모든 습격자들이 격퇴되고, 기사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잉간에게 말했다.
“방금. 그건 도대체 뭐였는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신의 힘을 다루는 것으로 보였는데…….”
“신의 힘이요? 아,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네요.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에요.”
잉간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리 대꾸했다.
이어서 기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잉간에게 말했다.
“그런데 어째서 모든 습격자들을 정화하지 않은 거지?”
“정화하지 않은 게 아니라, 못한 거예요.”
“힘이 다 떨어진 겐가?”
“아뇨. 그러니까…… 이게 좀 설명하기 힘든데요. 아까 신의 힘이라 하셨던 게, 정보를 다루는 거거든요?”
“정보를 다룬다?”
“네. 정보. 이게 설명하기 좀 힘든데, 대충 생각의 힘이라고 생각하시면 이해하시기 조금 편하실 거에요.”
“생각의 힘이라…….”
잉간의 설명을 들었지만, 기사는 여전히 정보라는 게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제가 습격자들을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던 건, 습격자들이 억지로 정보가 융합된 상태인 덕분이에요. 억지로 정보가 융합된 덕분에 틈이 있더라고요.”
“흐, 흐음. 그래서?”
“저는 그 틈을 상태창으로 벌려서 두 개의 정보를 분리하는 작업을 한 거고요. 하지만 억지로 융합했어도 융합은 융합된 거잖아요? 그래서 그냥 틈을 벌리면 습격자의 몸이 펑 하고 터질 뿐, 원래대로 되돌릴 순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한 건가, 자네는?”
“저는…… 그렇게 정보가 융합되기 전의 정보를 알고 있으니까요. 제가 기억하고 있는 정보를 덧씌우는 방식으로 융합 해제의 충격에서 사람들을 지킬 수 있었어요.”
“그렇다면, 자네가 더는 불가능하다고 한 이유는…….”
“네. 더 이상 제가 아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잉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기사는 잉간의 등을 툭툭 건드려 격려하며 피해자들을 하나둘 자신의 등에 태우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죽었을 사람들을 살린 것만으로 대단한 거라네. 자네는 신의 투사의 이름에 걸맞은 일을 했어.”
기사와 잉간이 피해자들을 데리고 마을로 돌아오자, 마을 주민들이 다가와 자초지종을 물었다.
“다들 많이 쇠약해진 상태네. 치료를 부탁하네.”
다행히 마을 주민들은 새로운 주민을 맞이하는 데 별 거부감이 없는 눈치였다.
오히려 새로운 일손이 생긴 걸 반기는 눈치였다.
피해자들이 하나둘씩 치료소로 옮겨져 치료를 받기 시작하고, 잉간과 기사는 그들이 처음으로 구해냈던 소녀, 고모라 옆에 섰다.
침대에 누워 잠꼬대하듯 입을 오물거리는 소녀의 모습을 보니 금방 기력을 회복할 것 같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이들이 깨어나면, 물어봐야겠지.”
잉간은 고모라의 얼굴을 죄책감이 섞인 표정으로 바라보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피해자들이 편히 쉴 수 있게 잉간과 기사가 치료소를 떠나려던 그때.
“잉……간 형아……?”
“고모라?”
아이가 눈을 떴다.
* * *
도대체 뭘까?
어째서 리만의 보호소에 있던 그 아이들이 이곳에 있는 거지?
리만은 그 아이들이 보호소에서 치료를 받는 것이라 했다.
그런데 왜?
저런 생명체들은 절대로 자연적으로 탄생할 리 없다.
누군가가 의도를 가지고 정보 융합을 진행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클라인은 자신이 헛것을 봤던 것이라 생각했던 그 지하의 풍경을 떠올렸다.
두 인간을 억지로 하나로 합치려던 인간형 생명체.
그 아이가 결국 인간을 합치는 데 성공한 결과물이 이것들인 걸까?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도대체 리만이 무엇 때문에 인간들을 융합하고, 그 인간들로 인공 행성을 습격한단 말인가?
그리고 그 아이는 어째서 인간을 융합하는 일을 돕는 거고?
클라인은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협회장이 범인인 걸까?
아니면 이번에도 단순한 오해?
클라인은 여러 가설을 떠올렸지만, 그 모든 가설은 단 하나의 질문을 넘어서지 못했다.
협회장이 왜 그러는 걸까.
아무리 온갖 가설을 떠올려도 협회장이 그런 짓을 할 이유는 없어 보였다.
인간을 지적 생명체로 인정받게 하는 일이랑 인간을 융합시키는 일이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아무리 그래도 리만이 아무 이유 없이 이런 미친 짓을 저지르진 않을 것 아닌가.
리만에게 이 이야기를 해서 대답을 들어볼까?
하, 리만이 그런다고 순순히 대답을 해줄 리가.
리만이 정말 범인이라면 절대로 말해주지 않겠지.
차원문을 닫기 전에 차원문이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확인해야 하나?
단순히 잉간이와 데이트를 즐기려 내려왔는데, 갑자기 장르가 추리물로 바뀌어 버린 기분이다.
아아, 모르겠다.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
클라인이 그렇게 예상치도 못한 풍경에 혼란스러워하는 동안, 잉간이는 창을 들고 아이들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잉간이가 뭘 하려는 거지?
클라인은 잉간이의 어깨에 몸을 꽉 밀착하고 잉간이가 도대체 뭘 하는지 지켜봤다.
이어진 잉간이의 행동은 클라인을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냥……?!”
잉간이가 복잡하게 융합된 실험체들의 정보를 단번에 분리한 것이다.
요즘 잉간이가 정보를 다루는 연습을 많이 한다는 건 알았는데, 이 정도까지 성장했었나?
저 정도면 나보다도 더 정보를 잘 다루는 거 아냐?
클라인이 순간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잉간이의 정보 조작 솜씨는 무척이나 훌륭했다.
“왕.”
거기에다가, 분하지만 차원 파괴자가 잉간이에게 무척이나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이 실험체들을 융합한 상대방도 융합이 쉽게 해제되지 못하게 온갖 보안 장치와 악성 정보들을 실험체들에 심어둔 것 같은데.
잉간이의 차원 파괴자가 그 모든 정보들을 한 끼 간식거리로 만들며 잉간이의 정보 조작을 보좌하고 있었다.
으, 아바타의 몸으로는 정보 조작을 무척 제한된 정도만 할 수 있는 게 이렇게 아쉬울 수가.
그렇게 클라인은 가만히 잉간이가 활약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제 182화
182화 [생명 도감] 인간형 생물은 사회적 생물입니다
“고모라?”
아이가 눈을 뜨자 잉간은 다급하게 소녀의 이름을 불렀고, 소녀는 눈을 비비며 잉간의 이름을 불렀다.
잠에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비몽사몽한 표정으로 소녀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잠이 확 깬 표정으로 눈을 번쩍 뜨고 잉간의 얼굴을 바라본다.
“잉간 형아. 맞지? 진짜, 진짜 잉간 형이지……?”
“그래. 맞아.”
“진짜, 진짜지……?”
잉간은 아이의 등을 두드리며 다독였다.
자신이 보는 풍경이 꿈이 아님을 확신한 걸까?
소녀는 떨리는 손으로 잉간을 껴안고 눈물을 쏟아낸다.
“으흑, 흑. 으허헝. 잉간, 형아…….”
“그래. 괜찮아. 이제 다 끝났어. 괜찮아.”
잉간은 눈물을 터트린 소녀의 눈물이 그칠 때까지 소녀를 다독였다.
한참을 눈물 흘린 끝에 소녀의 눈물이 멈추고, 잉간은 조심스럽게 소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제 좀 괜찮아?”
“응…….”
“……혹시, 나랑 헤어지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겠니?”
“그게…….”
“힘들면 말해주지 않아도 돼. 괜찮아.”
“아냐. 괜찮아. 말할게.”
이제 눈물은 다 흘린 것일까?
소녀는 입술을 깨물며 자신이 겪었던 지옥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어.“잉간 형이랑. 헤어진 다음에. 다들 모여서 뭔가 엄청 커다란 건물로 갔거든. 다들 이제 안전한 곳에서 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단 말이야. 근데, 근데…….”
“그런데?”
“막. 이상하고, 무서운 사람이 나타나더니. 사람들을 막 베었어.”
“베었다고?”
“응. 검으로. 아저씨들이 맞서 싸우려고 했는데, 무슨 짓을 해도 멀쩡해 보였어. 막 다른 사람들이 때리고 있는데도 무시하고 막……. 배를 가르고…….”
“……그랬구나.”
“그러다가. 갑자기 막, 이해했다고 하고는. 우리를 따로따로 가뒀어.”
“그리고는?”
“그리고는. 그리고는……. 무서운 사람이 나타나고는. 기억이 안 나……. 미안. 그 뒤로 정신을 차려보니 여기였어…….”
“그랬구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줘서 고마워.”
잉간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고모라가 불안한 눈빛으로 잉간을 바라보며 잉간을 붙든다.
“저, 저기. 이젠 어떻게 해야 해?”
“괜찮아. 여기 사람들이 돌봐줄 거야.”
“……여긴 정말 안전해?”
“그건…….”
무언가 뾰족한 고모라의 질문에 잉간이 말끝을 흐리며 입술을 앙다문다.
그때, 기사가 앞으로 나서서 고모라와 눈을 맞춘다.
“그래. 이곳은 안전하단다. 이 켄토르의 이름을 걸고 장담컨대 말이야.”
“……아저씨. 누구?”
“이 마을을 지키는 수호 기사란다.”
“기사?!”
“그래. 기사.”
기사라는 말에는 어린이들을 흥분시키는 마력이라도 있는 걸까?
고모라는 눈을 반짝거리며 기사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 마을은 안전하니 안심하고 있으렴. 이곳에 있으면 네가 겪은 일을 두 번 다시는 겪지 않을 거란다.”
“진짜요……?”
“그래. 그렇고말고.”
기사의 호언장담에 고모라는 조금 안심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침대에 드러눕고, 기사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푹 쉬어라. 이젠 악몽에서 깨어날 시간이란다.”
그 뒤로, 기사와 잉간은 깨어난 피해자들에게 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조사했지만, 다들 고모라와 비슷한 이야기를 할 뿐이었다.
잉간과 기사가 생존자들의 이야기에서 건질 수 있던 것은 단 하나였다.
모두가 입을 모아 수상한 남자라고 이야기하는 기다란 검을 사용하는 남자.
아마 그 남자가 이 습격자들의 배후에 있는 존재겠지.
단순히 괴물들을 만드는 역할일지, 그 이상의 존재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피해자들 모두가 남자의 외형을 제대로 묘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분명히 두 눈으로 봤을 텐데도 마치 흐릿한 안개를 보는 듯한 추상적인 묘사밖에 할 수 없던 것이다.
무언가 인식을 방해하는 마법을 가지고 있는 걸까?
지금으로선 더 알아낼 수 있는 정보가 없기에 기사는 잉간을 마저 마석 통신기가 있는 건물까지 안내했다.
“자, 이게 내가 말하던 마석 통신기라네.”
“이게…….”
작은 창고 같은 건물 안에 고이 모셔둔 마석 통신기를 잉간에게 자랑하듯 선보인다.
잉간은 놀랍다는 듯 두 눈을 뜨고는 차분히 마석 통신기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냥. 그냥 커다란 마석 2개를 마석 회로로 이은 거네요?”
“그렇지. 말했잖는가. 만드는 방법만 안다면 간단하다고.”
“도대체 무슨 원리길래……?”
잉간이 마석 통신기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린 순간, 헛간 구석의 옷감 더미에서 누군가가 벌떡 일어난다.
“오, 오셨습니까?!”
“아. 오늘도 거기서 자고 있었군. 카를.”
“마력을 주입하는 일이 워낙 피곤하다 보니 말이죠……. 하하.”
“잘 알지. 카를. 마석 통신기는 언제쯤 다 충전될 것 같나?”
“거의 다 됐습니다. 내일 정오쯤에는 다 충전될 겁니다.”
“그거 다행이군. 그렇다면 카를, 부탁하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가능하겠나?”
“뭐, 뭡니까?”
“습격자들의 본거지가 어딘지, 역으로 추적할 수 있도록 통신기를 조금 손봐줬으면 좋겠군.”
“습격자들의 본거지 말입니까? 가능은 합니다만, 왜 그러십니까? 설마, 혼자서 돌격하실 생각입니까?”
기술자는 두 눈을 큼지막하게 뜨고 기사를 만류했지만, 기사는 손을 내저으며 기술자의 오해를 풀었다.
“그게 아냐. 신들의 투사께서 이 땅에 내려왔다네. 그 빌어먹을 괴물들을 몰아내기 위해서 말이야.”
“신들의 투사……요?”
기술자는 두 눈을 끔뻑이며 잉간을 바라보더니, 화들짝 놀라며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은다.
“아이고. 제가 귀하신 분을 못 알아봤습니다.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리베리아 님의 투사신데.”
“어…… 감사합니다.”
“감사는 제가 오히려 감사하죠. 그 괴물 놈들을 쫓아주신다니요.”
잉간은 자신에게 굽신굽신 허리를 숙이는 기술자를 쓴웃음을 지으며 바라봤다.
이어서 기사는 기사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잉간의 부탁을 전했다.
“그러고 보니 말이야. 투사께서 저 마력 통신기에 흥미가 있으신 것 같더군.”
“마력 통신기 말입니까?”
“그래. 저게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궁금해하시니까, 잘 알려드리게나.”
“아이고. 알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죠.”
기사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나서 잉간과 기술자와 살짝 거리를 뒀다.
기술자는 곧장 잉간의 소매를 붙잡고 끌어당겨서 마력 통신기의 원리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마석은 받아들이는 힘마다 각기 다른 성질의 마력을 저장하는데요. 그 성질을 이용한 겁니다.”
“각기 다른 성질의 마력?”
“네. 번개의 힘을 흡수한 마석은 번개의 마력을 가지게 되고, 불의 힘을 흡수한 마석은 불의 마력을 가지게 되잖습니까? 그것처럼 사람 목소리를 흡수시켜도 다른 성질이 나타난단 말이죠.”
“으흠.”
“그래서. 자. 이쪽의 마석은 흡수한 마력을 바로 방출하는 마석이고, 이 마석은 그렇지 않단 말입니다.”
“그래서요?”
“그래서. 저 사이에 놓인 회로로 이리로 지나가는 마력은 건드리지 않고, 이리로 지나가는 마력만 원래대로 되돌려 방출한다면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를 멀리서도 들을 수 있단 말입니다. 뭐, 상대방도 이 마력 통신기를 사용해야 하지만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대충 알겠네요. 그러니까 이 마석에 제가 뭐라 말하면, 제 목소리가 마석에 마력으로 흡수되어서…….”
“그렇죠.”
“반대편의 마석으로 이동해 저 멀리 어딘가를 향해 마력이 방출되고, 반대로 저 마석으로 흡수한 마력은 바로 이 마석으로 돌아오며 마력 회로를 작동시켜 다시 목소리가 된다. 뭐 이런 이야기. 맞죠?”
“정확합니다. 이야. 이해력이 빠르시네요.”
“……마석이 마력 말고도 다른 힘도 흡수하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군요?”
“그렇죠. 불의 마석이나 번개의 마석이 자연적으로 발견되니까 말입니다.”
기사는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를 기술자와 잉간이 화기애애하게 나누더니, 잉간은 기술자에게 마석 회로의 견본을 받아서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 부분이 정보를 흡수하고…….”
“저 부분을 통해서 원래대로 되돌리는 거죠. 마력 회로, 이게 다들 어려워하는데. 별 거 아닙니다. 그냥 블록 맞추기와 다를 게 없습니다요.”
“신기하네요.”
잉간이 기술자에게 더 이상 질문을 던지지 않게 된 것은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확실히 알겠네요.”
“아유. 아닙니다.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쇼.”
궁금증이 다 채워진 걸까?
잉간은 기술자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표했다.
“음. 볼일은 다 끝났나?”
“네. 덕분에요.”
“그럼 가세나. 슬슬 시간이 됐으니까.”
“어딜요?”
“당연히 밥 먹을 시간 아닌가? 자, 가세나.”
잉간이 창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기사는 득달같이 잉간을 데리고 식당으로 향했다.
여신의 투사가 온 걸 환영하고 감사하기 위해 오늘의 식사는 거의 잔치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불안감으로 가득 찼던 마을에 활기가 다시 돌기 시작하는 것을 지켜보며 기사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음 날 정오.
습격자들의 본거지가 어디에 위치해있는지를 마석 통신기가 무사히 감지해냈다.
* * *
따져야겠다.
자신이 융합을 해제한 인간들을 걱정스럽게 살피는 잉간이를 옆에서 지켜보고 클라인이 내린 결론이었다.
아까, 멀리서 봤을 때는 몰랐지만 지금 이렇게 가까이서 인간들을 살펴보니 뭔가 익숙한 생김새들이다.
바로, 리만이 제대로 보호해주겠다며 데려간 스노우 스톤의 키메라 인간들.
평범한 인간형 생물이었다면 클라인도 구분하지 못했겠지만, 어디 키메라 인간이 흔한가?
거기에 더해 잉간이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키메라 인간들이라면 스노우 스톤의 인간들밖에 없지 않은가?
이게 리만이 말하던 ‘보호’인가?
절대 아니다.
이건 단지 리만이 저 아이들을 뭔지 모를 생체 실험의 재료로 사용했을 뿐이다.
제대로 대답을 해주지 않을 걸 알지만, 그래도 따져야겠다.
내가 이 사실을 눈치챘다는 걸 알리는 것만으로도 리만의 행동에 제약을 가할 수 있을 테니까.
클라인이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 우울한 기색의 잉간이가 키메라 인간들 곁을 떠난다.
으, 진짜.
잉간이가 저렇게 우울해하잖아.
원래라면 그냥 아무 말 없이 조금 더 증거를 모았다가 따질 생각이었지만, 리만 때문에 잉간이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니 더 참을 수가 없다.
그나저나 이제 잉간이는 어딜 갈 생각인 걸까?
클라인은 조심스럽게 잉간이의 뒤를 쫓아 인간 마을 안을 달렸다.
잉간이가 도착한 곳은 창고처럼 보이는 작은 건물이었는데, 그 안에는 원시적 단계의 마도 공학 기계가 얌전히 놓여있었다.
정보를 마력으로 변환한다는 마석의 성질을 이용한 아주 기초적인 단계의 마도 공학 기계.
잉간이는 그런 기계도 무척 신기했는지 기계를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인간과 이것저것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냥?”
잉간이가 저런 걸 좋아했었나?
클라인은 요즈음 잉간이가 만들던 기묘한 장치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생각해보니 그것들이 전부 다 마력 대신 전기를 사용하는 원시적인 기계를 만들려던 흔적인 걸까?
이런 쪽으로는 잘 몰라서 잉간이가 뭘 하려는 지 몰랐네.
돌아가서 잉간이에게 관련 서적을 선물하면 좋아하려나?
이렇게 잉간이 가까이서 잉간이를 관찰하니, 멀리서 볼 때 몰랐던 게 새롭게 보인다.
솔직히 아바타를 사용하는 게 꽤 귀찮아서 몇 번 쓰고 방치하고 있었는데, 귀찮더라도 꾸준히 아바타로 잉간이의 시점에서 잉간이를 바라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잉간이가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듯이, 나도 잉간이를 더욱 이해하고 싶으니까.
클라인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잉간이는 마을 주민들과 함께 식사를 즐기고 마을 주민들이 마련해준 숙소에서 곤히 잠들었다.
평소에 비해 더 많이 활동해서 조금 지친 걸까?
잉간이는 빠르게 잠에 빠져들었고, 클라인은 조심스럽게 잉간이 곁으로 다가갔다.
차원 파괴자가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긴 하지만 뭐 어쩔 건가?
클라인은 차원 파괴자를 피식 비웃어주고 조심스럽게 잉간이의 품 안에 파고들었다.
아바타의 몸이기에 수면을 취할 필요는 없었으나, 뭔가 기분을 내고 싶었다.
따듯하고 포근한 잉간이의 온기가 클라인의 아바타를 뒤덮는다.
클라인은 잉간이의 품 안에 파고든 채로 잠자는 잉간이의 얼굴을 밤새도록 지켜봤다.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자는 동안 잉간이가 몸을 꼼지락거리거나 얕은 신음 소리를 내뱉는다.
나쁜 꿈이 아니라 좋은 꿈을 꾸고 있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다음 날이 밝아왔고.
클라인은 잔뜩 흥분된 기색을 감추질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잉간이가 클라인이 디자인한 지형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자, 잉간이는 과연 고향과 흡사하게 재현한 지형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여줄까?
183화 지구산 인간의 45%가 거주하는 지형
“그러니까 그 녀석들의 본거지가 어디라고?”
“그러니까…… 저쪽. 동쪽입니다.”
“동쪽?”
기사는 기술자가 내놓은 결과물에 의문을 품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동쪽이라면 지금까지 습격자들이 밀려오던 방향과 반대인데, 그게 어떻게 된 일일까?
“……아무래도. 근처의 마을은 모두 전멸한 것 같군.”
“네. 본거지를 찾는 김에 마석 통신기의 신호도 찾아봤지만, 근처에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더라고요.”
“흐음…….”
기사는 말발굽으로 지면에 적당한 지도를 그려본다.
상황이 좋지 않다.
지금 마을은 완전히 포위되어 섬멸되기 직전의 상황이다.
빠르게 본거지를 정리하는 게 아니라면 언젠가 몰려올 본대와 선봉대의 협공에 무너지고 말 것이다.
단순히 지성이 없는 괴물들이라 생각했는데, 기초적인 전술을 짤 정도의 지능은 있는 걸까?
“거리는. 얼마나 되지?”
“빛나는 봉우리에서 평민의 걸음으로 반나절 정도 동쪽으로 이동하면 도착할 겁니다.”
“꽤 멀군.”
자신이라면 하루 만에 빛나는 봉우리까지 도착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최소한 이주일 이상은 걸린다.
아무리 신의 투사여도 최소한 일주일 정도는 걸리겠지.
“……카를.”
“네.”
“내가 없다면, 마을이 얼마나 버틸 것 같지?”
“뭐, 이틀은 버티지 않겠습니까?”
“그럼. 내가 있다면 얼마나 버티지?”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일주일. 그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군…….”
신의 투사가 습격자들을 몰아내는 데 필요한 시간이 일주일이라고 가정한다고 해도, 과연 그때까지 자신이 마을을 잘 지켜낼 수 있을까?
“……이틀 정도면 버틸 수 있다고 했지?”
“네. 망치와 모루가 두드리는 것만 아니라면요.”
“마석을 준비해주게나. 쉬지 않고 달려야겠군.”
“……부디. 무사 하십쇼.”
“걱정하지 말게나. 신의 투사가 함께하는 데, 질 리 있겠는가?”
“그래도…….”
기사는 불안한 눈빛으로 기사를 바라보는 기술자를 안심시키기 위해 호탕하게 웃었다.
“나는 리베리아 님의 방패. 그대들의 검일세. 절대로 부러지지 않아.”
“알겠습니다. 금방 준비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쇼.”
기술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기사를 위해 마석을 준비하러 분주하게 움직이고, 기사는 건물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잉간에게 다가갔다.
“결과 나왔어요?”
“그래. 빛나는 봉우리의 동쪽에 위치해 있다더군.”
“빛나는 봉우리?”
“이 근방을 탐험하며 발견한 지형이지. 원한다면 지도를 빌려주겠다만, 내 자네에게 제안하고 싶은 게 있네.”
“뭐죠?”
“자네가 지도를 봐도 목적지까지 찾아가는 게 쉽지 않을 거야. 그러니 말일세, 내가 자네를 도와서 습격자들의 본거지까지 안내하는 건 어떤가?”
“어…… 마을은 어떻게 하시고요?”
“……어차피 습격자들의 본거지에 침입하면 저들도 마을을 신경 쓰긴 힘들 걸세. 빠르게 차원문을 닫는다면 더 이상 습격자들을 걱정할 필요도 없으니 말이야.”
“길 안내를 해주신다면, 저야 감사하죠.”
“알겠네. 그럼, 조금 있다가 마을의 동문에서 만나도록 하지.”
기사는 잉간에게 지금 마을이 처한 상황을 설명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어쩌면.
그들을 대신 희생해야 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기사가 그렇게 말하고 마석을 받기 위해 다시 건물 안으로 발을 옮긴 순간.
“헉……?”
보랏빛 촉수들이 자신을 공격하는 환상이 나타났다.
기사는 당황하며 곧장 마력창을 만들어 냈지만.
“기사님?”
“어. 크흠. 아무 일도 아닐세.”
순식간에 환상은 사라지고 기사 앞에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여러 개의 마석 덩어리들을 들고 있는 기술자만이 서 있었다.
“역시. 마석을 사용하시는 건 그만두시는 것이…….”
“습격자들이 사라질 때까진 어쩔 수 없네.”
마석에 별다른 가공을 거치지 않고 직접 마력을 흡수하는 방식은 사용자의 정신을 쉽게 피폐하게 만든다.
방금 봤던 환상도 그 일환인 것이겠지.
하지만 지금은 이런 방식을 써서라도 어떻게든 몸을 유지시킬 마력을 충당해야 한다.
“그럼. 다녀오겠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기사님.”
기술자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기사는 서둘러 동문으로 발굽을 놀린다.
문이라고 하기 뭐한 낡아빠진 목책 가까이 가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잉간의 모습이 기사의 눈에 들어왔다.
“슬슬 출발하지. 자, 내 등에 타게나.”
“아, 네.”
잉간은 자연스럽게 기사의 등에 올라타 자세를 잡았고, 기사는 곧장 다리에 마력을 불어넣으며 달리기 시작했다.
잉간을 배려해서 처음엔 어느 정도 속도를 늦춰서 익숙해질 시간을 줄 생각이었지만, 잉간은 아주 빠르게 기사의 등 위에 적응했다.
“뭔가 익숙해 보이는군. 켄토르의 등을 타는 건 평범한 승마와는 다른데 말이야.”
“네. 워낙 타고 다닐 기회가 많아서요.”
“……많았다고?”
“아. 그게.”
잉간은 말실수를 했다는 듯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고, 기사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기사는 마치 화풀이를 하듯 다리에 마력을 더욱 공급했다.
“우, 우왁?!”
잉간의 입에서 겁에 질린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마치 포탄이 쏘아지듯 기사의 몸이 앞으로 달려나간다.
달리는 길에 나무가 있든, 바위가 있든 뭐든 상관하지 않고 전부 부숴버린다.
평민들의 걸음이라면 2주는 걸려야 할 거리를 기사는 단 하루 만에 주파한다.
그렇게 믿을 수 없는 속도로 기사가 쏘아져 나가던 중, 기사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오기 시작한다.
“저길 보게나. 빛나는 봉우리라네.”
“빛나는, 봉우리요?”
기사의 목소리를 듣고 잉간은 빼꼼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본다.
그러자 저무는 노을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는 거대한 봉우리들이 잉간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유리?”
“그래. 유리지. 어째서 유리인진 모르겠지만 말이야.”
거대한 봉우리들은 전부 유리로 이루어져 있는 듯 태양 빛을 주위로 반사하고 있었다.
노을빛과 어울려져서 신비한 분위기를 선사하는 풍경에 잉간은 떡하고 입을 벌렸다.
“저거,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게 맞아요?”
“뭐, 그건 잘 모르겠군.”
잉간과 기사가 저 기묘한 지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덧 해가 저물고, 기사와 잉간은 빛나는 봉우리에 진입했다.
밤이 되자 하늘에서 빛나는 별빛들을 받아 반짝이는 봉우리들의 모습이 또 다른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일단 오늘은 여기서 잠시 쉬어가도록 하지.”
“그러도록 하죠.”
“이쪽으로 따라오게나. 전에 왔을 때 만들어둔 은신처가 있으니.”
기사가 잉간을 데려간 곳은 거대한 봉우리에 뚫린 구멍이었다.
빛나는 봉우리의 내부는 텅 비어 있어서 잉간과 기사가 충분히 머물 수 있는 거처가 될 것처럼 보였다.
“안이 비어 있네요?”
“그렇지. 더 기묘한 건, 보게나. 내벽의 재질이 보이지?”
“금속판하고…… 콘크리트?”
잉간은 빛나는 봉우리의 껍질을 구성하는 물질들을 살피며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가장 바깥은 통짜 유리로 이루어져 있고, 내부는 콘크리트 비슷한 암석 사이에 강철 벽이 세워져 있다니, 이런 구조물이 정말 자연적으로 생겨날 수 있는 걸까?
기사는 봉우리의 내벽을 쓰다듬으며 감상에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런 구조물이 자연적으로 만들어졌을 리가 없지. 이건 분명 신들의 흔적인 게 분명하네.”
“신들의 흔적……. 뭐, 저도 비슷하게 생각해요.”
잉간은 주섬주섬 바닥에 작은 모닥불을 피워 떠나기 전 챙겨둔 식량을 요리하기 시작한다.
잉간이 요리를 하는 사이, 기사는 주머니에서 마석을 꺼내 그대로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엑. 그거 먹을 수 있는 거였어요?”
“먹을 수 있지. 마력을 보충하는 가장 원시적인 방법이지만 말이야.”
인간이 할 짓은 아니고, 짐승들이나 할 법한 섭취법이라는 게 문제지만 말이다.
기사는 뒷말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잉간에게 접시를 받았다.
달그락, 달그락.
식기가 움직이는 소리만이 봉우리 안에 울려 퍼진다.
어색한 침묵을 견디지 못한 걸까?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잉간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블랑카가 가족 이야기를 했었던 적이 있어요.”
“……그런가?”
“음. 네.”
다시 정적이 찾아오고, 잉간이 다시 숟가락을 들었을 때에야 기사의 입이 열렸다.
“그 아이가. 가족에 대해 뭐라 하던가?”
“어…… 다들 자기에 대해 기대를 많이 하고 있다고 했었죠.”
“그것 말고는?”
“그리고…….”
“혹시, 그런 기대감이 싫다고 말하지 않던가?”
“그건…….”
정곡을 찔렸는지 잉간이 말문을 닫아버리고, 기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마치 한탄하듯 자신의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내기 시작했다.
“나는 말일세. 딸아이가 그 지옥에서 벗어났으면 했다네.”
“지옥이요?”
“리베리아 말일세.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우리의 힘만으로는 그 지옥을 벗어날 수가 없었지.”
“그……렇겠죠.”
“그래서 나는, 딸아이가 신들의 전장에 불려가길 원했다네. 그래서 딸 아이를 엄하게 키우기로 했지.”
“…….”
“딸아이가 힘들어하는 건 알고 있었다네. 그래도 그 아이가 지금 고통스러운 것으로 미래에 이곳을 벗어날 수 있다면 나는 그 아이를 계속해서 괴롭힐 생각이었지. 그래, 지옥에서 벗어난 블랑카의 모습은 어떻던가? 행복해 보이던가?”
“잘 지내고 있죠. 가지고 있던 부담감도 사라진 느낌이고.”
“그래? 그거 잘 됐군.”
기사는 다시 꽤 오랜 시간 동안 입을 다물었다.
“그, 잉간. 자네 말이야.”
“네.”
“딸아이를. 잘 부탁하네.”
“……네?”
“딸을 위한다며 딸을 불행하게 만든 멍청한 아버지의 부탁일세. 나는 못 했지만, 자네는 부디 블랑카를 행복하게 해주게나.”
진지한 기사의 목소리에 잉간은 기사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행복하게 하겠습니다.”
“그래. 그 아이는 이제 행복해야만 해. 못난 아비를 만나서 참 많이 고생했어.”
기사는 그렇게 한탄하듯 중얼거리며 잉간에게 또 다른 부탁을 했다.
“블랑카에게 나를 만났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게나. 괜히 과거의 악몽에 시달리게 하고 싶지 않아.”
“그래도 그건…….”
“그 아이가 내 이야기를 듣는 건 고통스러울 뿐일 거야. 부디 부탁하네.”
기사의 진지한 눈빛에 잉간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빛나는 봉우리에서의 하루가 끝을 맞이했다.
* * *
지구.
잉간이의 고향 행성이자, 최근 들어 꽤 많은 연구가 진행된 행성.
수많은 연구자들의 노고 덕분에 클라인은 예전보다 더 잉간이의 고향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지구의 인간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지형 같은 걸 말이다.
아직은 정보를 별로 얻지 못해서 지구의 성분 분석표와 보이저에 기록되어 있던 정보로만 연구가 진행됐지만 말이다.
어쨌든 지구에는 꽤 다양한 지형들이 있었고, 그중 클라인이 잉간이를 위해 만들기로 선택한 지형은 바로.
고산지대였다.
최근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지구의 인간의 45% 이상이 고산지대에 몰려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었다.
지구인들은 높은 곳을 좋아하는 걸까?
대부분의 지구인들이 고산 지형을 좋아한다니, 잉간이 또한 고산 지형을 좋아하지 않을까?
왜, 잉간이도 차원항에 마련한 언덕 위로 자주 등산하는 모습을 보여줬잖아.
그리 생각한 클라인은 잉간이에게 고산 지형을 보여주려고 마음먹었고, 각종 논문들을 뒤져가며 고산지대의 모습을 추측했다.
아직 직접 지구의 사진이 찍힌 적이 없지만, 정보 분석으로 지구의 지형 정보를 대략적으로 알아낼 수 있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지구인들이 몰려있는 고산 지대는 고산 지대 중에서도 유리 20%, 금속 20%, 암석 60%로 이루어진 지형이었다.
연구자들이 시뮬레이션으로 재현한 지형을 보니, 클라인의 입에서 감탄이 나올 만한 신기한 지형이었다.
저러니 대부분의 인간들이 저 지형에 거주하고 있지.
인간들이 이런 지형에 많이 거주하는 이유는 금속을 구하기 쉬워서가 아닐까?
그 때문인지 이러한 지형 근처에는 인간들의 공장이 많이 위치해 있다고들 한다.
뭐, 어디까지나 연구자들의 추측이지만 꽤 설득력 있는 추측이 아닌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잉간이를 위한 지형을 전심전력으로 만들었지만.
“냥……?”
어째, 반응이 썩 시원찮다.
싫어하는 건 아닌 것 같지만 그렇다고 완전 좋아하는 것도 아닌 애매한 상황.
오히려 처음 보는 지형을 관찰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뭐지?
설마, 논문의 추측이 잘못된 걸까?
아니, 속단은 이르다.
잉간이의 고향이 저런 고산지대가 아니었을 수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잉간이의 고향인 한국? 이라는 곳의 정보는 대부분 저런 고산지대가 차지하고 있었는데.
어쩌면 저런 풍경을 너무 많이 봐서 별 감흥이 없는 게 아닐까?
클라인이 그렇게 핑핑 머리를 돌리는 사이 잉간이는 은신처에서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기 위해 클라인은 잉간이 곁으로 다가가 품 안에 파고들었다.
즐거운 힐링 타임을 클라인이 즐기려던 그 순간.
“냥?”
클라인은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누군가가 클라인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아니, 이건 다르다.
누군가가 잉간이를 관측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 정보에 파장이 생기려면 거의 정보 생명체 수준의 정보량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하지만 주위를 아무리 살펴봐도 차원 파괴자 외의 다른 정보 생명체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기묘한 시선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마침내 날이 밝아왔다.
184화 [생명 도감] 차원문을 닫기 위한 잉간이의 모험
“거의 다 도착했군.”
기사는 초원 한가운데에 커다랗게 펼쳐진 차원문을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직 거리가 꽤 되는데도 저렇게 거대하게 보일 정도라니, 도대체 얼마나 커다란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지평선의 한자락을 잠식한 게이트와 그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오는 어마어마한 양의 습격자들.
단 두 명이 정말 저곳을 돌파할 수 있을까?
“우회할 곳은…….”
“없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정면 돌파라네.”
“아이고…….”
차원문을 닫는다고 저곳의 괴물들이 전부 사라지는 건 아닐 것이다.
단순 일점돌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차원문을 닫고 무사히 빠져나올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리 쉬운 일은 아니겠지.
기사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차분히 가장 방비가 적은 지점을 눈으로 살피며 탈출 계획을 머릿속에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돌아갈 때 사용할 마력을 고려하면, 도저히 돌진해서 돌파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직접 차근차근 저 습격자들을 없애나가며 돌파해야 한다는 건데.
“자네 혼자서 저 많은 무리를 돌파하는 건…….”
“가능……하려나요?”
아무리 잉간이 저 습격자들에게 매우 효과적인 무기를 가지고 있더라도 저길 돌파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특수한 힘을 가진 녀석들은 없으니, 그렇게 어렵진 않을 걸세. 어째서 기사가 전장의 제왕인지, 그 이유를 보여주지.”
하지만, 기사인 자신과 합쳐진다면?
충분히 돌파할 수 있다.
“너무 가까이 다가오는 녀석들만 처리하게나. 굳이 힘을 낭비할 필요는 없어.”
“넵.”
잉간이 긴장된 표정으로 기사의 등에 올라타 돌창을 길게 늘어트린다.
언제든지 삼킬 수 있게 마석을 입안에 넣어두고, 기사는 초원을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인류…….”
기사와 잉간을 발견한 습격자들이 구호를 외치기도 전에 기사는 습격자들을 스쳐 지나간다.
마력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평민 정도의 신체 능력을 가진 저 습격자들은 충분히 제칠 수 있다.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던 습격자들이 점차 밀도를 높혀가고, 게이트의 크기 또한 더욱 커져간다.
“흐읍……!”
더 이상 습격자들을 제칠 수 없는 상태가 되자 잉간의 돌창이 기사에게 덤벼드는 습격자들을 날려버린다.
살짝 잉간의 돌창에 스친 것만으로도 습격자들의 몸이 폭발해 사라지고, 기사가 지나갈 길이 열린다.
자신을 방비하는 것은 오로지 잉간에게 맡기고, 평소에 마력 갑옷이나 마력창을 위해 사용하던 마력까지 전부 체온의 냉각과 몸의 회복에 사용하며 앞으로 달려나간다.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정말 아주 조금.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크윽……?!”
무언가가 기사의 몸을 멈춰 세웠다.
심장을 붙잡히는 듯한 싸늘한 감각.
신체가, 몸에 새겨진 본능이 겁을 먹고 움직이길 거부한다.
겁을 먹은 다리가 서로 꼬이지만, 간신히 바닥에 나뒹구는 것만은 어떻게 제어한다.
그리고 그 공포감의 근원은.
정체불명의 남자였다.
습격자들의 무리 한가운데에 서서 가만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수상한 남자.
분명히 그자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기사는 남자를 바라보는 와중에도 남자의 얼굴을 기억할 수 없었다.
너무, 너무 많은 것이 겹쳐 보이는 듯하다.
하나의 얼굴에 수백, 수천, 수만개의 얼굴이 겹쳐져 보이며 뇌가 남자의 얼굴을 받아들이기 거부한다.
“무, 무슨 일이에요?”
“……저기.”
“네?”
갑자기 발걸음을 멈춘 기사가 이상했는지 잉간은 기사의 상태를 살피고, 기사는 간신히 몸에 남은 힘을 쥐어짜 수상한 남자를 가리켰다.
잉간은 기사의 손가락을 따라 남자를 바라봤고,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검……?”
무언가를 떠올리듯 잉간은 잠시 말없이 남자를 바라보고.
남자의 정체를 알아차린 듯, 적개심 가득한 눈동자로 남자를 바라보며 외쳤다.
“그, 미치광이?”
잉간은 대답을 기대하고 외친 것이 아닌 것 같지만, 놀랍게도 이 습격자들의 흑막으로 보이는 남자의 대답이 돌아왔다.
“초면에 그런 험한 말을 듣는 건, 조금 마음 아픈데.”
남자의 목소리는 수많은 사람이 동시에 말하듯이 기묘한 울림을 자아냈다.
그리고 그 울림은, 기사의 몸을 더욱 옥죄어들었다.
잉간은 남자의 대답을 듣고 인상을 찌푸리면서 조심스럽게 기사의 상태를 살폈다.
기사는 이제 네 다리로 굳건히 서 있는 것도 한계처럼 보였다.
잉간은 조심스럽게 기사의 등 위에서 내려와 바닥에 돌창을 꽂아 넣은 뒤, 남자를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이딴 짓을 해놓고 좋은 소리를 들을 거라고 생각했으면, 미치광이가 맞지.”
“다른 사람의 호의를 호의로 이해하지도 못하는 멍청이였군. 네놈은 뭔가 다를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마치 잉간을 알고 있다는 듯한 남자의 말투에 잉간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날 알아?”
“잘 알지. 이곳에 온 것도 네놈을 불러내기 위해서였으니까.”
“뭐?”
그게 무슨 말일까?
이곳에 침략을 해온 것이 잉간을 불러내기 위한 일이었다니?
“도대체 나를 왜?”
잉간은 진심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남자는 그런 잉간의 반응을 신경 쓰지도 않고 마치 3류 악당이 자신의 계획을 주절거리는 것 마냥 묻지도 않은 정보를 기사와 잉간에게 알려주기 시작했다.
“나는 너희 같은 멍청이들이 싫다. 싸울 힘을 주겠다는데도 입에 게거품을 물며 거부하는 멍청이들 말이지.”
“두 사람을 하나로 합치는 게 네가 말하는 힘이라면, 당연히 모두 다 거부하겠지.”
“혼자서 하지 못 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되는데, 왜 거부하는 거지?”
“정말 몰라서 하는 소리야?”
잉간은 남자와 대화를 하면서 어딘가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 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렀다.
그러는 와중에도 남자는 광인의 헛소리로 들리는 이야기를 계속 풀어나갔다.
“반대로 묻지. 그 빌어먹을 놈들과 싸울 힘을 준다는데, 거절하는 놈이 이상한 것 아닌가?”
“빌어먹을 놈들?”
“네가 알고 있는 그자들을 말하는 거다. 우리를 납치해서 가지고 노는, 그래. 네 주인인 클라인과 같은 자들.”
“……그 이름을. 어떻게.”
“알고 싶나? 그렇다면 인류 해방 전선에 합류해라.”
“역시 네가 그 빌어먹을 단체의 수장이었구나?”
“그래서. 다시 한번 질문하지. 그자들과 싸울 힘을 준다면 너는…….”
“안 해. 무조건 거절해. 그런 괴물이 되어가면서 그 사람들과 싸울 필요가 있어?”
잉간은 남자를 찌릿 바라보며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남자는 짜증 난다는 듯 혀를 차며 잉간을 노려봤다.
“역시 너는 이상하군. 그자들에게 어째서 분노를 품지 않는 거지?”
“그 사람들도 다 같은 사람이니까. 화는 나더라도, 충분히 대화로 해결할 수 있지 않겠어?”
“아니. 불가능해. 그건 네가 특별하니까 가능한 일이야. 네가 할 수 있는 걸 모두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마.”
“그냥 대화하는 게 뭐가 어렵다고?”
잉간은 남자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리 외쳤다.
그러자 남자는 이빨을 까득 깨물며 잉간을 노려봤다.
“평범한 사람은 그 자식들을 보기만 해도 견디지 못하거나, 인식하는 것을 포기하지. 왜 그런지 아나? 한 사람의 힘만으로는 그 막대한 정보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야.”
“그건, 조금씩 시간을 들여서 익숙해지면…….”
“익숙해져? 이건 그런 문제가 아냐. 태생부터 인식할 수 없는 것들이라고 그건. 그 빌어먹을 것들에게 복수하고 싶어도 볼 수조차 없는데, 어떻게 복수를 하겠어? 네가, 나의 고통을 알아?”
흉흉한 기운이 더욱 남자에게서 강하게 뿜어져 나오지만, 잉간은 겁 하나 먹지 않고 남자를 바라봤다.
“복수는, 우리의 정당한 권리다. 하지만 혼자서는 그 권리조차 찾을 수 없지. 그래서 나는 동포들에게 나와 같은 힘을 주기로 결심한 거야.”
“그 복수라는 것과 괴물을 만드는 게 무슨 연관이 있다고?”
“하나서는 이해하지 못한다면, 둘이 함께 이해하면 되는 거야. 나는 그 사실을 그 빌어먹을 수레바퀴에서 깨달았지. 그래서 모두에게 내가 깨달은 것을 알려주는 거고.”
“미친놈.”
“뭐, 남들에게도 내게 얻은 깨달음을 주는 방법을 찾는 게 조금 어려웠지만 그래도 성공했으니까. 단 하나의 문제가 있다면 둘이라면 그 빌어먹을 것들을 관측할 순 있지만, 접촉할 수는 없다는 거야.”
“얼씨구. 그래서, 해결법은 찾았어?”
“찾았지. 바로 내 눈앞에 그 해결법이 있으니까.”
“뭐?”
남자는 칼을 뽑아 들어 잉간을 가리켰고, 잉간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건지 불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설마, 나를 해부하겠다거나 그럴 생각인 건…….”
“안심해라. 대의를 위한 희생일 뿐이야.”
“아니, 나를 해부해서 도대체 뭘 얻는다고?”
“너를 모방한다면 내가 고민하는 문제들을 전부 해결할 수 있겠지. 너는 내가 원하는 것의 완성형이나 다름없으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잉간의 외침에, 남자는 기꺼이 대답했다.
“그야. 너도 나와 비슷한 존재니까.”
“뭐?”
“네놈도 여러 명이 중첩된 상태라는 거다.”
잉간을 경악하게 할 대답을.
* * *
거의 다 도착했다.
클라인은 지평선을 잡아먹은 차원문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으아, 이제 잉간이와 함께하는 시간도 끝이네.
실제로도 찰나의 시간이었겠지만, 이곳의 시간으로도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간 것 같다.
클라인이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던 그때, 잉간이의 주변에 실험체들이 속속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행히 잉간이는 손쉽게 리만의 실험체들을 제거하며 차원문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자, 그럼 이제 잉간이가 다치지 않게 주위를 잘 정돈해야겠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혹시라도 잉간이를 떨어트릴 가능성이 있는 것들을 배제하기 시작했다.
원거리에서 악성 정보를 토해내는 실험체를 먼저 무력화하고, 사방에 깔린 악성 정보로 이루어진 지뢰들을 차원 파괴자와 협력해서 박살 낸다.
여전히 차원 파괴자는 싫지만, 잉간이가 다칠 수 있는 상황에서 차원 파괴자와 싸울 정도로 내 속이 좁진 않으니까.
잉간이를 위해 주위의 위험 요소들을 제거하던 클라인은 기묘한 정보를 감지했다.
가히 정보 생명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수많은 정보들이 중첩된, 차원 생물의 정보였다.
차원 생물이 자신의 육체에 저 정도로 많은 정보를 담을 수 있는 걸까?
보통은 그 전에 자기 인식이 실패하거나 수많은 객체들로 나누어질 텐데?
그런 의문을 품고 그 정체불명의 정보가 실려 온 곳을 바라보니.
“냥?”
클라인은 자신도 모르게 아바타의 육체까지 움직이며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 있던 것은 리만의 보호소에서 봤던 환상에서 출현하던 인간형 생물이었기 때문이다.
그 아이가 어째서 이곳에?
클라인이 그런 의문을 품을 틈도 없이 잉간이를 둘러싼 환경이 순식간에 급변하기 시작했다.
잉간이가 타고 있던 켄토르는 너무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길 거부하며 바닥에 털썩 쓰러졌고, 잉간이와 그 정체불명의 인간이 서로 대치를 시작했다.
어떻게 하지?
저건 한눈에 봐도 심상치 않다.
잉간이와 저 인간이 싸운다면 잉간이가 지진 않겠지만 큰 상처를 입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애초에 저렇게 수많은 정보들이 중첩된 생물이라면, 평범한 차원 생물로는 죽여도 다시 복구될 것이다.
여기서는 내가 개입해서 저 아이를 치워 놓는 게 좋겠지?
저 아이를 채집해서 리만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알아내야 한다.
클라인은 정체불명의 인간을 제압하고자 적당한 양의 마력을 인간에게 쏘아냈지만.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일이 벌어졌다.
“보고 있구나?”
정체불명의 인간이 칼을 휘둘러 클라인의 공격을 막아내더니, 클라인의 아바타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렇게 외쳤기 때문이다.
이게.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185화 *알 수 없는 오류로 데이터가 손상되었습니다
“네놈도 여러 명이 중첩된 상태라는 거다.”
“뭐?”
그게 무슨 소리일까?
잉간이 저 남자와 동일한 존재라는 것이?
잉간도, 기사도 도저히 남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잉간의 모습을 지켜보며 남자는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뭐야. 그런 것도 모르는 거냐?”
“아니,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니까. 내가 뭐 너처럼 잔상이 남는 것도 아닌데?”
“너는…… 네 이름을 기억해?”
“당연히 기억…….”
“덧씌워진 이름 말고, 진짜 이름 말이다.”
잉간의 입이 남자의 뾰족한 질문에 닫히고 만다.
그런 잉간의 모습을 바라보며 남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차분히 설명을 이어나갔다.
“네가 어째서 이름을 잃어버렸을까? 너도 짐작하겠지만 그 개자식들 때문이지.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남의 정보를 바꿔버리는 살아있는 민폐 덩어리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는데? 고작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다른 사람을 그렇게 매도해도 되는 거야?”
“고작이 아니지. 무려 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거다. 이름이란 모든 지적 생명체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지. 자기 인식을 행하는 데 빠져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요소니까.”
“……그래서?”
“그런데 너는. 그 가장 중요한 정보를 너무나 손쉽게 변질 당했지. 정보 오염만으로 이름이 바뀐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야. 정말, 정말 오랜 시간 동안 오염을 당하는 게 아니라면 불가능하지.”
“세상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일이 다 벌어지고 그러는 법이지. 뭐.”
잉간은 최대한 삐딱한 태도로 남자의 말을 비꼬고 있었지만, 남자의 말에는 무시할 수 없는 설득력이 실려있었다.
“그렇다면 문제다. 네놈은 어째서 이름을 그렇게 간단하게 변질 당한 걸까?”
“몰라. 알 생각도 없어.”
“정답은 이거다. 넌 처음부터 이름이 없었다는 거다.”
“……뭐?”
“아무것도 없는 공백에 새로운 색을 입히는 건, 그냥 먼지 구덩이에 던져놔도 가능한 일이지. 네게 일어난 일은 그런 일이다.”
잉간의 이름이 처음부터 없었다고?
잉간은 무언가 떠오르는 것이 있었는지 굳은 표정으로 남자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자. 그럼 여기서 두 번째 문제다. 너는 어째서 이름이 없었는가?”
“나는 이름이…….”
“있었겠지. 그래. 이 세상에 이름을 가지지 않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어. 이름이 지어지지 않고 태어난 아기조차 ‘나’라는 스스로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뭐, 내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클론이다. 그런 소리야?”
“비슷해.”
“뭐?”
잉간은 남자의 말을 비꼴 생각이었겠지만, 남자가 잉간의 말을 그대로 수긍하자 놀란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본다.
“내가 나의 깨달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이 바로 그거였지. 다른 자아를 하나로 합쳤을 때, 서로의 이름이 충돌하여 자기 인식에 오류가 생겨나는 것. 내가 그 오류를 어떻게 해결했는지 아는가?”
“몰라. 알고 싶지도…….”
“두 사람의 이름을 표백시켜서 지워버렸다. 이름이 없다면 자기 인식에 오류가 생길 일도 없으니까.”
“정말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어. 그래서? 내가 이름을 잃은 이유가 네가 만드는 괴물들처럼 여러 사람이 합쳐져서라고?”
“그래. 이제야 말문을 좀 알아듣는군.”
“개소리를 지금까지 잘도 늘어놨네.”
“헛소리가 아니다. 떠올려 봐라. 네 고향에서 그자들에게 잡혀 올 때의 기억이 하나도 없지 않은가?”
“그건, 자고 일어나 보니…….”
“너는 괴한이 너를 납치해가는데 잠에서 깨어나지 않을 수 있나?”
“그건.”
“네 기억을 떠올리기만 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진실에서 눈을 돌리지 마.”
“윽…….”
무언가 떠오른 걸까?
잉간이 안색이 급속도로 안 좋아지며 머리를 부여잡는다.
그러다 한순간, 잉간의 표정이 풀리며 고개를 들고 남자를 노려본다.
그리고 남자는 그런 잉간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외쳤다.
“그 기생충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면 자기 인식조차 불가능한 모양이군. 네 정체는 슬슬 감이 잡히고 있어. 해부해본다면 더 확실해지겠지만.”
“꺼져. 누가 좋다고 해부당해준대?”
“대의를 위한 희생이다. 기꺼이 희생해라.”
“그럼 너 스스로를 해부해보던가.”
“시도해봤지. 너무 고차원의 구조여서 다른 사람에게 접목할 수 없을 뿐이었어.”
“미친놈.”
잉간은 다시 한번 욕설을 내뱉고, 남자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고 잉간을 겨눈다.
“마음 같아서는 곧바로 해부하고 싶지만…… 네 그 기생충은 만만한 상대가 아닐 것 같군.”
“기생충이 아냐.”
“기생충이지. 너의 기억을 먹어치우고, 너의 정보를 먹어치우고, 최후엔 너의 모든 것을 먹어치울 기생충이다.”
“이건, 에포나야.”
“이름이 붙어 있다고 해서 저것의 본질이 달라지는 건 아니지.”
남자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튕기고, 어디선가 솟아난 습격자들의 무리가 잉간과 기사를 둘러싼다.
“인해 전술로 밀어붙이겠다. 이거야?”
“하나의 힘보단, 여럿의 힘이 나으니 말이지.”
“철학자 나셨어.”
저 정도로 많은 습격자들이라면 아무리 잉간이여도 다 처리하는 데 한계가 있겠지.
기사는 몸을 비틀거리며 어떻게든 일어서 잉간에게 도움을 주고자 했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대량의 습격자들이 그대로 잉간에게 몰려오던 그때, 어느 한 지점을 기점으로 그 선을 넘은 습격자들의 몸이 일순간에 폭발했다.
“허어.”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남자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저 정도면 말 그대로 그 개자식들에게도 상처를 입힐 수 있겠어. 그런데 너는 어째서 싸우지 않는 거지? 너는 가축으로 살아가는 걸 원하는 건가?”
“아니. 그럴 리가.”
“그런데 어째서 싸우지 않는 거지?”
“싸우지 않아도 되니까. 싸우지 않는 거야.”
“아니, 싸울 수 있다면 싸워야 해. 싸우지 않고 사슬을 부순 노예는 존재하지 않아.”
“우리는 노예가 아니라 사람이야. 그리고 저들도 사람이고. 사람과 사람은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는 거라고.”
“아니! 저들은 우리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대화? 말이 통한다고 서로 대화가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통해. 말이 통하지 않더라도 대화할 수도 있고.”
“어리석군.”
“너는 미친놈이고.”
드디어 직접 공세에 나서려는 걸까?
남자는 습격자들이 가로막힌 보이지 않는 선을 뚫어내려는 듯 검을 뽑아 들고 천천히 잉간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잉간은 긴장된 표정으로 꿀꺽 침을 삼켰고, 남자는 순식간에 잉간과의 거리를 좁히며 검을 휘둘렀다.
잉간은 그런 남자의 속도에 반응하지 못한 듯 보였고, 그대로 남자의 검이 잉간의 목을 향해 휘둘러졌다.
하지만.
“크흑……?!”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대로 난폭하게 남자의 몸을 붙잡고 공중으로 던졌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는 듯 그 무언가는 남자의 몸을 붙들고 점점 힘을 주더니, 남자의 몸을 그대로 허공에서 쥐어짜 버렸다.
“으윽…….”
상당히 보기 역겨운 풍경이 주위에 처참하게 펼쳐지고, 잉간은 안색을 창백하게 하면서도 한시름 놨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만.
“역시. 정면 돌파는 무리인가.”
마치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는 듯 멀쩡한 기색의 남자가 습격자들의 무리 사이에서 걸어 나와 잉간을 바라봤다.
“부활?”
“아까 말했듯이, 정보 중첩 상태여서 말이야.”
남자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골치 아프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더 시간을 끌면 네놈이 준비하는 뭔가가 완성되거나, 그 녀석들이 이상 사태를 감지하고 본신으로 달려오겠지.”
“윽.”
잉간은 남자의 지적을 듣고 슬쩍 돌창이 꽂힌 지면을 몸으로 가리지만, 이미 전부 남자에게 들통난 것처럼 보인다.
“정보 조작은 너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앗?!”
무언가 잉간이 준비하던 한 수를 남자가 방해한 걸까?
잉간은 당황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그렇지만 이내 여유로운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외쳤다.
“이대로 시간을 끌면 네가 말했든 곧 클라인이든 누구든 지켜보고 있던 사람이 도착하겠지. 그냥 얌전히 포기하고 돌아가지그래?”
“그럴 수는 없지. 누구 몰래 여기까지 왔는데,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
“에포나의 방어를 뚫을 방법도 없으면서?”
“그래. 정공법으로는 무리지.”
그렇게 중얼거린 남자는 피식 웃으며 잉간과 기사의 눈동자를 동시에 빤히 바라봤다.
“일부러 시간을 끌던 건, 너만이 아니라는 거다.”
“뭐?”
“내가 어째서 지금껏 나의 계획과, 너의 정체에 대해서 나불댔는지 아나?”
“그건…….”
“내가 말한 이야기들이 꽤 중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았나?”
“뭐?”
“그러니까. 내가 제공한 정보를 잘 기억하고 있겠지?”
“윽?!”
남자가 주먹을 꽉 쥐는 것과 동시에 잉간이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무릎을 꿇는다.
남자는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습격자들이 지나가지 못하던 선을 산보하듯 넘어간다.
잉간은 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통스러운 듯 가슴을 부여잡고 있을 뿐이었다.
“뭐, 이걸로 네 자아를 침식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이거라면 네 기생충도 밖에 신경을 쏟을 틈이 없겠지.”
“으윽……?!”
그렇게 여유롭게 잉간 앞에 선 남자는, 그대로 다시 검을 휘둘렀고.
“허어.”
잉간은 땅에 박혀있던 돌창을 뽑아 들어 남자의 검을 막아냈다.
너무나 손쉽게 잉간의 무기가 박살 날 것 같았지만, 가느다란 돌창은 남자의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냈다.
“꽤나 단단하게 잘 뽑아냈군.”
“꺼……져.”
남자는 품평하듯 잉간의 무기를 평가하며 더욱 잉간을 밀어붙였다.
잉간은 두 팔로 남자의 공격을 방어하는 것이 한계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뚫을 수 없는 건 아냐. 이 세상에 뚫을 수 없는 건 존재하지 않거든.”
“윽……?!”
그때, 남자의 검과 잉간의 창이 맞닿은 부분이 검게 변해가며 잉간의 창을 침식해간다.
서서히 검은 부분이 늘어나며 잉간의 창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남자는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번 검을 휘두르고.
마침내 잉간의 창이 박살 나서 사방으로 흩어진다.
잉간은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주저앉고, 남자는 다시 한번 확실한 마무리를 짓기 위해 허공으로 뛰어오른다.
“윽…….”
잉간은 피하지 못할 것을 직감했는지 팔을 뻗어 남자의 공격을 방어하려 하지만, 너무나도 미약해 보이는 저항이었다.
그렇지만, 잉간이 최대한 시간을 끈 덕분인 걸까?
다시금 잉간의 몸에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튀어나와 남자를 날려 보낸다.
“쯧, 생각보다 빠른데.”
“이거 어쩌나. 비장의 한 수였을 텐데.”
잉간은 비틀거리며 일어서며 그렇게 비꼬았지만, 남자는 피식 웃으며 다시 한번 잉간에게 달려들었다.
“정말 그게 전부라고 생각해?”
“그렇게 생각해!”
이번에는 잉간 또한 창을 휘두르며 남자와 전투를 벌이기 시작하고, 사실상 2:1의 전투를 벌여서일까?
남자가 점차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이거, 머릿수에서 밀리니. 조금 힘들군.”
“지랄. 저렇게나 많이 데려왔으면서?”
여전히 습격자들은 잉간을 공격하기 위해 사방에서 몰려들고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 힘 때문에 일정 거리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증발해 버린다.
“역시, 5:1은 무리군.”
“그럼. 꺼져!”
“그러니까, 한 사람 정도는 내 편에 붙어도 괜찮지?”
“뭐?”
“내가 뿌린 정보를 들은 게 너뿐만은 아니잖아?”
남자의 말을 듣자마자 잉간은 무언가를 떠올린 듯 아차 하는 표정을 짓고.
“우리는 하나. 하나이자 여럿. 우리는 모두다.”
익숙한 목소리가 잉간의 뒤에서 들려오고, 남자가 잉간의 뒤에서 말발굽을 내려찍는다.
“로, 로보 씨?!”
“인류 해방 전선에 합류하라.”
두 번째 남자의 공격은 알 수 없는 것에 의해서 막혔지만, 두 번째 남자의 공격으로 생겨난 빈틈을 노리고 첫 번째 남자가 다시 들이닥친다.
“으윽…….”
새롭게 더해진 남자의 맹공에 잉간은 또다시 밀리기 시작하고, 마침내 처음으로 남자의 공격을 허용했다.
아주 살짝 머리카락이 베인 정도지만 처음으로 보이지 않는 것의 방어가 뚫린 것이다.
이대로 간다면 이기지 못한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걸로. 마무리.”
그리고 남자들은 담담하게 사실을 말하며 잉간의 앞뒤를 포위하고.
그대로 지면을 박차고 잉간에게 돌진했다.
전방의 검을 든 남자의 공격은 보이지 않는 것과 잉간의 창이 막아냈지만.
등 뒤에서 날라오는 돌진은, 아무 방해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허공에 핏덩이가 휘날렸다.
186화 [생명 도감] 클라인 님께 사과하는 영상입니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나다.
나는 우리다.
나는나는너는그는그녀는저자는이자는아이는어른은노인은모두는우리다.
우리는 인류 해방 전선이다.
인҇̀̍̏͛̒류̛̽͒́̿͆ 해̛́́̂방҇̐̊̅̑ 전͑̒̾̓͞선̛̐͗̀에̆͂͞ 합͆̍͂͞류҇͂̉͌̈̑하҇̄̆͑̓̚라̽̒̏̀̕.
꾸물텅 꾸물꾸물꾸물 꾸물텅꾸물텅
꾸물꾸물 인류 꾸물텅꾸물텅꾸물텅
해방 꾸물텅 전선에 꾸물꾸물꾸물텅꾸물꾸물꾸물꾸물 합류하라.
꾸물꾸물텅꾸물 꾸물텅 꾸물꾸물꾸물 꾸물텅
“아핫, 다 예상하고 있었다고.”
보랏빛 안개와 보랏빛 촉수가 내 주위를 휘감으며 내 몸에 엉켜있던 거미줄들을 뜯어낸다.
안개와 촉수의 주인으로 보이는 불길한 인상의 미녀는 히죽 웃으며 내게 다가와 묻는다.
“넌, 누구지?”
내가 누구냐고?
나는 우리다.
그리고 우리는…….
“아니. 너를 말하는 거야. 너.”
너?
나?
나는 우리.
나는, 그러니까.
“너는 누구지?”
나는 아버지다.
“누구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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