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 25
“거, 대도서관이 뭡니까? 마력망 계산기라는 멀쩡한 이름이 있는데.”
“그치만 아무리 봐도 도서관이잖아요. 거긴.”
“그렇긴 하지만…….”
생명 도감이 이야기하는 마력망 계산기란, 중앙 정부가 운영하는 하나의 시설.
외형은 클라인의 말대로 거대한 도서관이고, 실제로 안에 온갖 서적들이 보관되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실제로는 마력망의 코어를 공유하여 계산을 행하는 거대한 계산기다.
마력망의 코어를 이용한 계산기이기 때문에 사용 허가를 받는 건 어렵지만, 허가를 받기만 하면 말 그대로 모든 걸 알 수 있다.
그 성능이 얼마나 대단하냐면, 방 안의 먼지로 우주의 끝이 언제인지 추론할 수도 있고, 과거를 바꿨을 때 미래가 어떻게 변할지 추론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마력망 계산기의 사용 허가를 받은 이상 계산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클라인 님은 그냥 같이 와서 행성만 만드시면 되는 거예요!”
“으음…….”
그렇지만 인공 행성을 만들자니, 너무 스케일이 커서 쉽사리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클라인이 그렇게 고민하고 있자, 생명 도감이 씨익 웃으며 클라인에게 당근을 제시했다.
“이번에, 지구의 환경 데이터가 어느 정도 관측되었다는 거. 아세요?”
“네? 지구요?”
“네. 그러니까, 그 데이터를 이용해서 잉간이의 고향을 구현할 수도 있다는 거예요. 어때요, 끌리지 않아요?”
“으음…….”
잉간이의 고향을 구현할 수 있다고?
음, 확실히 잉간이가 좋아할 거 같기도 하고.
“어…… 그렇다면. 할게요.”
“정말이죠? 이야, 고마워요. 다들 거절해서 이젠 정말 클라인 씨 밖에 없었거든요.”
“네?”
어라?
뭔가 이상한데?
왜 다른 쥬튜버들은 생명 도감의 제안을 거절한 거지?
클라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품다가, 자신이 놓친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 합방이 아니라. 인공 행성을 만들 일꾼을 찾던 건…….”
“아휴. 당연히 아니죠. 당연히요.”
생명 도감은 당연히 부정했지만, 클라인은 도저히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었다.
아까, 소행성에게 부탁해달라는 말을 무척 어렵게 꺼낸 것도 설마……
“아무튼. 합방하기로 한 겁니다?”
“네. 그럴게요.”
“그럼, 나중에 일정이 정해지면 연락 드릴게요!”
생명 도감은 부랴부랴 전화를 종료했고, 클라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뭔가 오늘 하루는 참 지치네.
클라인은 지친 몸을 이끌고 비척비척 집으로 돌아왔다.
잉간이가 기다리는, 따듯한 우리의 집으로.
내가 없는 동안 잉간이는 무슨 일을 하고 있었을까?
제 170화
170화 잉간이의 마중 (귀한 거임)
“진짜 뭔데, 이거……?”
왜 마력회로에 전기를 흘려보내도 마법이 발동하는 걸까?
설마, 마력은 사실 전기와 다를 게 없던 걸까?
전기 해파리의 몸에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마력회로로 전기를 흘려보내자 마법이 발동되는 것을 보며 나는 당황했다.
그냥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기를 흘려 보내본 건데 진짜로 이런 게 가능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전기 해파리가 터져버린 걸 생각하면 전기로 마력회로를 작동시키는 건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다.
아리스가 마력을 집어넣었을 때도 멀쩡하던 해파리가 터져버린 걸 생각하면 말이다.
전기로 마법이 작동되는 건 일종의 오작동 같은 게 아닐까?
오작동으로 마법이 발동되는 거기 때문에 마력회로가 버티지 못하고 망가지는 거고 말이다.
“으음…….”
예상치 못한 효과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심스럽게 만능 사전을 작동시켰다.
다시 한번 마력회로의 내용을 읽어봐도 전기로 작동된다는 내용은 없는데?
외부의 마력을 주입받으면 오작동할 수 있다는 문구 외에는 별다른 설명이 없다.
정말로 전기와 마력은 같은 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게 너무 많다.
그렇다면 마력으로 전기를 만든다는 게 말도 안 되는 거잖아?
그렇다면, 다시 한번 실험해보면 되겠지.
만능 사전에 전자 회로는 적혀있지 않지만, 마력회로는 한가득 적혀있으니 말이다.
대충 적당히 만들기 쉬운 회로를 하나 만들어서 전기를 흘려보냈을 때 작동하는지 확인해보면 확실해지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만능사전에 적혀있는 가장 간단한 마력회로를 하나 만들었다.
[명령: 진동]
만능사전의 설명에 의하면 아주 약한 진동을 만들어낸다는 간단한 효과밖에 없는 회로라고 한다.
다만, 이 진동을 만들어낸다는 성질이 온갖 회로에 쓸 수 있어서 마력회로를 만들려면 필수적으로 익혀야 하는 회로라는데.
적당히 마석 전선으로 만능사전의 설명대로 회로를 만들고 다시 한번 발전기와 회로를 연결시켜본다.
제대로 회로가 작동한다면 주위에 미세한 진동을 일으킬 것이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은 채로 전기를 흘려보내자, 아까처럼 마석 회로가 밝게 빛나기 시작하더니.
내 눈으로도 분명하게 관찰할 수 있을 정도로 주위에 진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땅 위에서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게 두 눈으로 보일 정도다.
이야, 진짜 이게 왜 되는 거지?
내가 황당해하며 그 모습을 관찰하던 와중, 마력회로가 점점 더 붉게 달아오르는 모습이 보인다.
거의 용광로 속의 쇳물과 같은 색을 자아내던 마력회로는 어느덧 검은 연기를 뿜어내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더는 버티지 못한 것인지 청명한 소리를 내며 쪼개졌다.
당연하게도 더 마법이 작동되지 않았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박살 난 파편들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전기를 사용해서 마력회로를 가동시키는 것은 엔진을 과부화시키는 것과 비슷한 일인 것 같다.
멀쩡하게 작동시키는 것보다 더 빨리 회로의 수명이 다하는 것 같은데.
그나저나 진짜 왜 전기로 마력회로를 작동시킬 수 있는 걸까?
나는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명확한 답은 내릴 수 없었다.
그저 마석에 무언가 있는 게 아닐까 싶을 뿐이다.
사실 마석이 마력을 보관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안에 저장된 에너지를 마력으로 바꾸는 게 아닐까?
지금으로선 그저 추측만 할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잠깐 샛길로 샜지만, 어쨌든 이걸로 발전기가 잘 작동한다는 건 확실하다.
첫 번째 관문은 어찌어찌 잘 통과한 셈이다.
그럼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하는데, 상상만 해도 살짝 막막해지네.
아무 도움도 없이 나 혼자서 라디오를 만들어야 한다?
솔직히 말도 안 된다.
인터넷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나 혼자서 진공관과 스피커 등등 온갖 전자 회로를 만들어야 한다고?
솔직히 이건 아인슈타인이 환생해도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거기에다가 계속 손으로 발전하는 건 효율이 좋지 않으니 증기기관도 만들어서 발전소를 만들어야 하고.
다른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들 아닐까?
해야 할 일을 생각하니 그저 한숨만이 나오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내가 하기로 선택한 일이니 끝까지 하는 수밖에 없지.
중간에 그만두는 건 너무 꼴불견이잖아?
그래도 일단 오늘은 이만 여기까지 할까?
발전기까지는 어떻게 만들었는데 그 이후의 것은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아직 감도 잡히질 않는다.
휴식을 취하려 털썩 침대에 드러누우니 문득 지구가 떠올랐다.
지금쯤 지구는 어떤 상황일까?
지구의 시간은 어느 정도 흘렀을까?
그 드래곤들이 나와의 약속을 잘 지켜주고 있을까?
어쩌면, 지구로 돌아가지 않은 건 아직도 내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해서가 아닐까?
피곤한 탓인지 평소에는 잘 생각하지 않던 온갖 잡념들이 머리에서 뛰논다.
“으음…….”
한 번 시작된 잡념은 도저히 멈추지를 않고 계속해서 더욱 불어날 뿐이다.
이미 결론을 내렸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오늘도 과거의 선택을 후회한다.
이렇게 계속 노력해도 만약 클라인과 영원히 소통할 수 없으면 어떡하지?
마치, 과거에 하늘을 올려다보던 나의 선조들이 하던 걱정과 비슷한 심약함이 나에게 달라붙는다.
내 선택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나는 또다시 고민하지만.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있다.
“응? 잉간, 어디 가려고?”
“잠깐 외출 좀 하려고.”
“금방 돌아올 거지?”
“밥 먹기 전에는 아마도?”
슬며시 침대에서 일어나 차원항 밖으로 뚫린 차원문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에포나의 온기를 느끼며 가만히 차원문 밖의 캠핑장에 털썩 주저앉아 온갖 정보들로 가득 찬 하늘을 바라본다.
온갖 정보가 뒤섞여서 무엇이 무엇인지 구분하기도 힘들지만, 확실한 것은 있다.
내가 보는 풍경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것, 그건 확실하다.
후퇴한 것인지 더 앞으로 나아가서 보이는 풍경인지 확실하진 않지만, 그래도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와는 다른 풍경을 본다.
그러니 언젠가는 그녀와 같은 풍경을 보는 날이 오겠지.
너무 낙관적인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훨씬 더 로망이 넘치잖아?
나는 그리 생각하며 무언가를 기다리듯 가만히 허공을 지켜봤다.
그리고.
“:-)”
내가 기다리던 목소리가 하늘의 저편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와우.”
나는 미소를 머금은 채 나지막이 감탄사를 흘리며 내가 기다리던 목소리에 화답했다.
* * *
집으로 돌아온 클라인은 외부 정부를 씻지도 않은 채 곧장 잉간이의 차원항이 있는 방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워낙 오늘 많은 일을 겪어서인지 조금이라도 빨리 잉간이에게 치유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잉간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듯 잉간이의 이름을 부르며 방 안으로 들어온 클라인은, 예상치 못한 깜짝 선물을 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0^0!”
잉간이가 클라인을 마중 나온 것마냥 먼저 클라인을 반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소라면 차원항 안에서 분주하게 오가고 있을 잉간이가 어째서 차원항 밖으로 나와 있는 걸까?
설마 정말로 잉간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걸까?
잠깐 잉간이에게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고?
뭐, 실제로는 그냥 밖에 나오고 싶어서 나왔다가 나와 마주친 것에 불과하겠지만 상관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더 기분 좋으니까.
“흐흣, 잉간아. 그렇게 보고 싶었어?”
“0o0!”
클라인은 흐뭇한 미소와 함께 슬며시 잉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손가락을 뻗었다.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차원 파괴자가 슬며시 촉수를 이용해 클라인의 손가락을 살짝 튕겨냈다.
“응……?”
지금껏 모습을 보이지 않던 동안 힘을 축적한 것일까?
차원 파괴자의 몸에 깃든 정보와 마력들이 사람에게도 충분히 대항할 만큼 무시하지 못할 양이다.
윽, 이젠 좀 나랑 싸워볼 만하다 이거지?
클라인은 저 짜증 나는 벌레를 당장 치워버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잉간이에게 어떤 영향이 갈지 모르기에 꾹 참았다.
으, 진짜 잉간이와 공생하는 것만 아니라면 당장 제거해 버리는 건데……!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차원 파괴자를 바라봤지만, 차원 파괴자는 볼일 다 봤다는 듯 클라인을 비웃으며 슬며시 몸을 숨겼다.
저거, 마음만 먹으면 나한테서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있으면서 굳이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분명 나에게 시비를 걸려는 게 분명하다.
그래, 참자.
고작 벌레 따위에 진심으로 화를 내는 건 조금 꼴사납잖아?
클라인이 그렇게 화를 가라앉히는 동안, 잉간이는 좀처럼 기다려도 내려오지 않는 클라인의 손가락이 의아했던 모양이다.
“햣……?”
폴짝.
잉간이가 그 앙증맞은 발을 놀려 폴짝 뛰어오르며 클라인의 손가락에 자신의 손바닥을 마치 손뼉을 마주치듯 부딪힌 것이었다.
가볍고 가벼운 잉간이의 무게감이 손끝에서 느껴지고, 클라인은 그 천사의 깃털 같은 감촉에 그저 히죽 웃을 뿐이었다.
“얍, 얍.”
오늘처럼 잉간이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놀아달라 졸라오는 일은 드문데.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이 행운을 즐기기 시작했다.
클라인이 잉간이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그때, 클라인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과거라면 잉간이가 돌아가고 싶다고 한다면 그냥 돌려보낼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클라인은 자신의 안에서 잉간이라는 존재가 너무나도 커졌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잉간이는 내 소유물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잉간이와 떨어지고 싶지 않다.
클라인은 지금까지 자신이 잉간이에게 상당히 잘해왔다고 생각했지만, 잉간이와의 소통에 아주 조금씩 불안감이 남아 있었다.
잉간이과의 소통에 성공했을 때, 잉간이에게 돌아가고 싶다는 소리를 들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
이젠 도저히 잉간이가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었기에, 클라인은 잉간이가 그런 부탁을 해도 자신이 잉간이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을지 고민됐다.
해야만 하는 일을 알고 있지만, 그 일을 하기 싫다.
그러니 클라인은 그런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오지 않게끔 최대한 노력할 것이다.
잉간이가 지구의 풍경이 보고 싶다면 지구의 풍경을 보여주고, 잉간이와 함께 산책도 나갈 생각이다.
그러니 부디, 자신과 헤어진다는 말만은 하지 않길 원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말이다.
이번에 생명 도감이 만든다는 그 인공 행성의 풍경을 지구와 매우 흡사하게 만든다면.
그 누구도 지구와 분간이 되지 않는 풍경을 만든다면, 잉간이가 지구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을 때 대신 잉간이를 그곳으로 보내도 되지 않을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지만, 클라인은 도저히 그 유혹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정말로 그런 짓을 저지를 생각은 없지만, 가끔씩 잉간이도 고향의 풍경이 보고 싶은 날이 있을 거 아냐?
응, 그러니까 그런 날이 올 때를 대비해서 쉽게 갈 수 있는 곳에 지구의 풍경을 마련해두는 거야.
클라인은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하면서 조심스럽게 지구의 정보를 좀 더 검색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그 보이저라는 지구의 탐사선을 해독한 정보로 꽤 많은 사실이 밝혀졌던데, 그 정보를 이용하면 꽤 흡사한 풍경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클라인이 잉간이와의 교감을 끝내고 즐거이 지구의 풍경을 검색하는 동안 클라인의 마음에 잠깐 생겨났던 미혹은 스르륵 자취를 감췄다.
그래, 잉간이가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돌려 보내주는 게 맞다.
내가 잉간이와 떨어질 수 없다면, 내가 잉간이를 따라가는 게 더 맞는 일이겠지.
171화 [생명 도감] 인공 행성 만들기, 기나긴 여정의 시작
“와, 이게 다 뭐에요?”
클라인은 말 그대로 행성 하나 분량만큼 쌓여있는 수많은 소행성들을 보며 감탄사를 흘렸다.
그런 클라인의 모습이 흐뭇한지 생명 도감은 미소를 지었다.
“그냥 완성된 행성을 가져다 놓는 건 별로 재미가 없잖아요? 아예 처음부터 만들려고요.”
“차원항 만들기의 대형 버전이라더니, 진짜네요…….”
클라인이 생명 도감과 그런 대화를 주고받는 와중에도 마력망을 통해 계속해서 행성의 재료들이 전송되어 내우주 한켠에 켜켜이 쌓인다.
클라인이 혀를 내두르며 감탄하는 사이, 생명 도감이 불러모은 쥬튜버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한다.
“진짜, 소중한 주말에 부르는 건 너무한 거 아냐?”
“어차피 평일에도 일 안 하잖아?”
“아니, 기분이라는 게 있잖아. 기분!”
툴툴거리며 생명 도감의 야외 방송 플랫폼 안으로 유리가 들어온다.
입을 삐죽 내밀고 생명 도감과 티격태격하던 유리는 클라인을 발견하더니 재빠르게 표정을 바꾸며 생명 도감에게 했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상냥한 목소리를 내며 클라인에게 다가온다.
“진짜, 저 사악하고 못된 아저씨가 뭐 이상한 짓 하지 않았지?”
“으응? 그런 일은…….”
“보나 마나 합방이라는 이름의 강제 노동을 시키려고 했을 텐데, 내가 있는 이상 그런 꼴은 못 보지!”
유리는 그렇게 선언하며 클라인을 꼭 껴안는다.
클라인은 그런 유리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짓는다.
클라인도 그런 생각을 해서 슬쩍 물어보긴 했지만, 설마 진짜 그런 생각으로 합방을 제안했으려고.
“에이, 이번에는 지난번이랑 다르다고. 지난번엔 내가 생각해도 너무했다고 생각해서 이번엔 몸 쓰는 일은 따로 일해줄 사람들을 고용했다고.”
그런데 어째 생명 도감은 유리의 말을 부정하지 않는다.
유리의 말이 설마 농담이 아니었던 걸까?
클라인이 그런 불안감을 품으며 유리와 생명 도감을 바라보던 그때, 또 다른 쥬튜버가 생명 도감의 플랫폼에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제가 너무 늦진 않았죠?”
“아뇨. 딱 맞춰서 오셨는걸요?”
“그래요? 다행이네요.”
“이야. 솔직히 이번에도 오지 않으실 줄 알았거든요.”
“후훗, 그래요?”
이어서 생명 도감의 플랫폼에 도착한 것은 바로 소행성이었다.
소행성이 도착하자 생명 도감은 머리를 긁적이며 소행성에게 말을 걸었지만, 소행성은 웃으며 생명 도감과의 거리를 벌리고 유리의 뒤를 따라 클라인을 꼭 껴안았다.
“원래는 올 생각이 없었는데, 클라인 양이 고생할 거 같아서 오기로 한 거예요.”
“그, 그래요?”
“네. 양심이 있으시면 두 번 그러시지 않을 거잖아요?”
“그, 그렇죠!”
도대체 생명 도감이 과거에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유리와 소행성의 반응이 이럴까?
클라인이 그런 의문을 품은 사이, 생명 도감은 어정쩡하게 웃으며 짝, 하고 손뼉을 쳤다.
“자, 그럼 오늘 오기로 하신 분들은 모두 온 거 같으니까, 슬슬 촬영을 시작해볼까요?”
“네? 이게 다예요?”
클라인은 그런 생명 도감의 말을 듣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대규모 합방이라고 하길래 최소한 2명 정도는 더 있을 줄 알았는데 정말 이 4명이 끝이야?
그런 의문을 품고 생명 도감을 바라보자, 생명 도감은 클라인의 눈을 피하며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그, 제안은 했는데. 대부분 거절당해서…….”
“네? 어째서요?”
“그야. 지난번에 다들 호되게 당했으니 아무도 안 오지.”
“지난번에?”
클라인의 의문에 대답한 것은 생명 도감이 아니라 유리였다.
지난번에 다들 호되게 당했다니, 설마……?
“그때는 진짜, 어휴. 분명히 단순한 단체 여행이라고 해서 같이 갔는데, 알고 보니 여행이 아니라 강제 노역이었다고…….”
“아니, 내가 강제로 시켰던 건 아니고, 밥도 다 내가 쐈잖아? 가기 전에 미리 다 설명했고? 그 정도면 됐지!”
“그런 식으로 뻔뻔하게 나오니까 이번에 아무도 오지 않은 게 아닐까?”
그런 식으로 투덕거리는 생명 도감과 유리의 모습을 보며 클라인은 문득 예전에 봤었던 영상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생명 도감이 올리던 합방 영상들 중에서 여행이라 속이고 차원 생물 구조나 쓰레기 청소를 하는 영상들이 꽤 있었지?
내 취향이 아니어서 자세하게 보진 않았지만, 그런 뒷배경이 있던 거였어……?
한 번 그런 일을 겪었으면 다시는 합방을 하고 싶은 생각을 하지 않는 것도 당연하지.
클라인이 그렇게 생각하며 생명 도감을 싸늘하게 바라보자, 생명 도감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둘러 외쳤다.
“이, 이번에는 진짜 힘든 일은 안 시킬 거니까, 걱정하지 마. 진짜로.”
“진짜?”
“진짜지.”
유리와 소행성은 여전히 생명 도감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일단 여기까지 와놓고 더 의심하는 것도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는지 푹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촬영은 대충 적당히 저기서 할 거고. 오늘 할 건 인공 행성의 생태계를 짜는 거야.”
“육체노동은 정말 안 하는 거지?”
“진짜라니까. 왜 이렇게 못 믿어?”
끝까지 생명 도감과 유리가 투덕거리는 사이 어느덧 내우주 한켠에 쏟아지던 암석들의 폭포가 멈춘다.
그리고는 어디선가 나타난 마키나들이 천천히 암석들을 목적지로 옮기기 시작한다.
“아, 슬슬 공사를 시작하려는 모양이네요.”
생명 도감은 그렇게 외치며 들뜬 목소리로 외부 촬영용 드론들을 쏘아 보내서 공사 현장을 촬영하기 시작한다.
오프닝은 잠시 뒤로 미뤄진 걸까?
우선 저 현장부터 촬영할 생각인지 근처의 모니터에 생명 도감이 촬영하는 풍경이 비친다.
마키나들이 거대한 암석들을 중력장으로 묶고는 하나의 커다란 암석을 중심으로 뱅뱅 회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키나들에 이끌려 회전하는 암석들은 서로 충돌하며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한다.
작은 암석 덩어리들이 하나로 합쳐지며 소행성이라고 할 수 있는 크기까지 커지는 걸 지켜보며 생명 도감은 시청자들에게 설명하듯 중얼거렸다.
“뭐, 마력을 사용하면 단번에 압축할 수 있지만 저런 물리적 방식을 사용하는 이유는 간단해요. 제가 가난하거든요.”
“돈 많이 버시지 않으세요?”
“그건, 대도서관 이용권을 구매하느라 전부 써버렸어요. 지금은 거지랍니다.”
“아하하…….”
저렇게 말은 하지만 이렇게 마키나들을 고용해서 물리적인 공사로 행성을 만드는 것도 꽤 비용이 어마어마하게 들어갈 텐데 말이다.
클라인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암석들은 붉게 달아오르며 중심부의 거대한 소행성에 합쳐지기 시작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암석들을 몰고 다니던 마키나들 중 일부가 바윗덩어리에 집어 삼켜지며 행성의 핵에 삼켜져 버린다.
본체를 이런 곳에 데려왔을 리는 없을 테니, 괜찮겠지?
“어, 음. 저 정도는 오차 범위 안이니 괜찮겠죠.”
“뭐. 작업용 의체 하나둘 정도는 괜찮겠지.”
소행성과 생명 도감이 걱정하는 부분은 살짝 다른 모양이다.
마키나의 안전보다는 행성 제작에 오차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하는 모습이다.
역시 분체에 의식을 옮길 수 있는 종족들이어서 그런가?
소행성과 생명 도감이 핀트가 살짝 엇나간 걱정을 하는 사이, 유리는 고개를 갸웃하며 생명 도감에게 묻는다.
“근데, 저렇게 과격한 방식으로 만들어도 괜찮아? 보니까 아예 대기나 수분이 만들어지지 않는 방식인 거 같은데. 생명이 살 수 있는 조건 맞아?”
“아, 대기하고 수분은 나중에 생태계를 조성할 때 같이 추가하면 되거든. 그게 더 만들기 편하기도하고.”
“그래?”
하긴, 처음부터 대기 조성이니 뭐니 하는 걸 신경 쓰기보다는 그냥 황무지 행성을 테라포밍하는 게 더 편하긴 하다.
처음에는 일그러진 점토 덩어리처럼 보이던 붉은 행성의 모습이 차차 모두가 아는 원형의 일반적인 모습으로 변해가고, 생명 도감은 충분히 영상을 건졌다 생각했는지 슬며시 드론들을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일단, 인공행성은 잠시 동결시켜두고 계획부터 짜 볼까요?”
“뭐야, 이미 다 계산했다는 거 아니었어?”
“그건 행성의 궤도 이야기고, 생태계는 다 같이 모여서 구상해야지. 그러려고 합방을 하는 건데.”
“아, 하긴.”
생명 도감은 그렇게 말하고는 우리를 플랫폼 한켠에 마련된 방 안으로 데려갔다.
방 안은 비좁았지만, 방 한가운데에 위치한 오밀조밀한 탁자와 의자들이 무언가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건 나뿐만이 아니었는 듯 소행성이 피식 미소짓는다.
“뭐야, 동아리야? 학교에서 뜯어온 거 같네.”
“솔직히 인공행성 제작은 원예부가 할만한 일 같다고 생각해서.”
“아니. 원예부가 할 일은 아닌 거 같은데?”
“아무튼, 오늘 할 일은 아까도 말했듯이 앞으로 만들 인공행성의 생태계를 짜는 일이야.”
생명 도감은 그렇게 선언하고, 그러자 유리가 곧바로 손을 들어 올리며 자신의 의견을 표출한다.
“바다, 무조건 바다! 뭐 산성 바다라거나 슬라임 바다 말고 그냥 바다! 무조건 바다는 있어야 해!”
“오케이. 무조건 바다는 있어야 한다.”
생명 도감은 칠판에 분필로 글씨를 쓰듯 한쪽 벽면에 유리의 의견을 받아적는다.
아니, 의견을 받아 적는다기보단 그림을 그린다는 게 더 정확하겠네.
동그랗고 꾸물꾸물한 무언가를 그리고는 그 위에 생명 도감이 ‘바다(물)’라는 글씨를 적어넣는다.
“우와. 진짜 그림 못 그린다. 너 진짜 마키나 맞아?”
“그림 파츠는 기본 장착이 아니거든?”
생명 도감이 그렇게 툴툴거리는 것과 함께, 이번에는 소행성 또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나 제시한다.
“아, 그럼 위성도 하나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커다란 건 필요 없고, 적당한 크기?”
“오케이. 위성 추가. 그런데 중력 상의 문제 때문에 위성은 최대 2개까지가 한계일 거 같은데?”
“뭐, 하나여도 괜찮을 거 같은데? 그렇게 많이는 필요 없을 거 같아.”
이어서 쭈글쭈글한 감자 옆에 작은 달걀이 그려진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이제 내가 말할 차례가 됐다는 듯 유리와 소행성이 클라인 쪽을 빤히 바라본다.
클라인은 잠깐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미리 준비해온 자료들을 주섬주섬 꺼내서 슬며시 중얼거렸다.
“저, 저는 이런 모습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데요.”
“어떤 모습?”
“그, 지구라고. 잉간이의 고향인데요…….”
클라인이 책상 위에 펼쳐놓은 자료들은 마치 직접 촬영한 것처럼 자세하고 방대한 양의 사진들이었다.
유리는 클라인이 꺼내놓은 사진을 바라보며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최근에 지구 탐사가 있었나? 이런 자료는 어디서 난 거야?”
“그. 보이저 탐사선에 들어있던 정보들의 해독이 모두 끝나면서 공개된 자료들.”
“보이저? 아, 그때 화제가 됐던 그거 말이지?”
“응. 그거.”
클라인은 고개를 끄덕여 유리의 말을 긍정하며, 수줍게 모두에게 지구의 생태계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바다도 유리가 원하는 것처럼 물로 이루어져 있고, 소행성 님이 원하는 것처럼 위성도 하나 가지고 있거든요. 그리고 생태계도 다양해서…….”
유리와 소행성, 그리고 생명 도감은 그런 클라인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 열심히 준비해왔네?”
“잉간이 고향이어서 그렇게 조사한 거야?”
“어……. 네. 그렇기도 하고…….”
“지구 컨셉으로 잡자는 거. 괜찮아 보이는데?”
“그러니까. 조회수 어그로 끌기도 괜찮아 보이고.”
생명 도감과 유리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며 클라인의 제안을 긍정한다.
“그럼. 생태계는 지구의 생태계를 모방하는 거로?”
“결정! 그래. 그걸로 하자.”
휴, 다행히 다들 지구의 생태계를 재현하자는 의견에 별 거부감이 없는 모양이다.
별로라고 이야기하면 어떻게든 끝까지 설득하려고 준비한 자료들이 쓸모없게 됐지만, 기분 좋은 오산이다.
잉간이가 봐도 지구와 차이가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생태계를 구축하자.
잉간이가 내 곁에서 떨어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도록.
잉간이를 위해서라면 말 그대로 뭐든 해줄 수 있다.
172화 [생명 도감] 천 리 길도 일단 한 걸음부터
전에 내가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던가?
그 말은 틀렸다.
신은 실존했으며, 그는 라디오를 처음으로 만든 사람이다.
진짜, 도대체 뭘 어떻게 해서 라디오를 처음으로 발명했던 걸까, 그 사람은?
전기도 만들 수 있고, 회로도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라디오는 못 만들겠다.
뭐, 만능 사전에 마법을 이용한 라디오 비슷한 장치들이 기록되어 있기는 했지만 그걸 마석 회로로 구현하려고 하면 시도할 때마다 폭발해서 제대로 된 라디오를 만들 수 없었다.
클라인의 목소리, 즉 전파를 우리가 아는 음성 신호로 변환하는 기술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만들 수 있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인류 최초로 무선 통신을 만든 사람은 그야말로 신 그 자체다.
그냥 자고 일어나면 뿅 하고 라디오가 생겨 있으면 참 좋겠네.
그런데 생각해보니 라디오를 만든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
클라인의 목소리를 음성 신호로 변환한다고 해도 내가 아는 언어와는 다를 가능성이 높으니 클라인의 언어를 해독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미치고 환장하겠네.
아무튼, 발전기를 만들고 나서 한동안 나는 별다른 진전 없이 클라인이 던져줬던 참고서와 만능 사전, 그리고 반려넷을 참조해가며 어떻게든 라디오를 만들기 위한 실험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렇지만 실험의 결과는 언제나 공방에 괴상한 장식물이 하나 늘어나는 것으로 끝날 뿐이었다.
“흐으음…….”
일단, 라디오니 뭐니 하는 걸 만드는 건 잠시 포기했다.
우선 전파를 어떻게 해야 잡을 수 있는지부터 알아야 소리를 듣든 말든 할 것 아닌가?
전파 망원경들을 떠올리며 그것들을 본뜬 형태의 잡동사니들을 만든 결과, 말 그대로 원시적인 형태의 전파 망원경이라고 할 수 있는 걸 만들긴 했다.
다만 내가 듣고 있는 이 잡음이 무언가의 신호인지 그냥 전선이 튀겨지는 소리인지 알 수 없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다.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에 고민하던 나는 조금씩 차원항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차원항 안에서는 알 수 없는 사실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처음에는 블랑카나 리키는 밖에 나가는 걸 싫어했지만, 차원항 안의 모습을 밖에도 살짝 옮겨오니 전처럼 그리 꺼려하진 않았다.
이왕 캠핑 기구들이 있는 김에, 주위의 정보를 주물럭거려서 진짜 캠핑장처럼 꾸미니 꽤 그럴싸한 모습이 연출된다.
정보를 주물럭거리는 연습을 할 겸 시도해본 일인데, 생각보다 그럴싸하게 잘 연출된 것 같다.
지금으로선 답이 없는 문제를 붙잡고 끙끙대기보단, 지금 바로 조금이라도 더 나아갈 수 있는 일을 해야지.
나중에 클라인과 제대로 된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이 차원항 밖의 풍경에도 조금은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언덕 위의 캠핑장에서 언덕의 가장자리를 돌아다니며 주위를 둘러보고, 조금씩 안개 너머의 세상을 밝혀나간다.
단번에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래도 진실을 향해서 조금씩 나아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차원항 밖을 알게 된다고 해서 라디오를 만들 수 있게 되는 건 아닌지라, 나는 계속해서 내심 조바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응?”
“:-)”
클라인이 오랜만에 내게 무언가를 전하고자 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줬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가만히 고개를 갸웃하며 클라인을 바라보고 있으니, 클라인에게 내게 무언가의 사진을 하나 보여왔다.
클라인의 손에 들려 있던 것은.
“……지구?”
다시는 볼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던, 나의 고향의 사진이었다.
* * *
“완전 시커먼데, 저게 정상 맞죠?”
“네. 아직 대기하고 생명체가 없으니까요.”
클라인은 서서히 생명 거주 가능 구역으로 이동하는 인공행성을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직 대기가 없기에 기본 재료인 규산염질 암석의 색인 회색만 보일 건 예상했지만, 그래도 너무 색이 어두운 게 아닌가 싶다.
미리 봤던 예상 생성도와 조금 다른 거 같은데?
뭔가 생성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 게 아닌가 걱정했지만, 생명 도감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혹시 마키나의 신체가 섞여서 뭔가 잘못된 건 아니죠?”
“아하하, 일상용 육체라면 모를까 작업용 육체는 저 정도 압력과 열기로는 별로 변형되지 않아요. 기껏해야 표면에 살짝 상처가 나는 정도?”
“진짜요?”
“네. 아마 지금쯤이면 행성 내핵을 떠돌아다니고 있지 않을까요?”
으음,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클라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준비해온 작은 크기의 차원항들을 조심스럽게 탁자 위에 올려놨다.
“여기, 이건 바다 환경을 구현한 거고요. 이건 적도 지방…….”
클라인이 오늘 가져온 것은 보이저의 정보대로 만든 지구의 풍경을 담은 차원항들이었다.
인공행성의 생태계를 구현하기 전에 먼저 차원항으로 어떤 모습일지 확인해 보는 것이다.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것보다 마력이 적게 들고, 무엇보다 영상 각을 잡기 편하다.
생명 도감은 감탄사를 연신 내뱉으며 클라인이 가져온 차원항을 이리저리 살폈다.
“이야. 진짜 차원항 장인이라고 자칭할 만큼의 실력이네요. 볼 때마다 감탄밖에 나오질 않아요.”
“헤헤, 그래요?”
생명 도감의 칭찬에 클라인이 머리를 긁적이며 흐뭇해하던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유리와 소행성이 검역항을 잔뜩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다녀왔어~!”
“그래. 부탁했던 건 다 샀지?”
“응. 자, 여기 마로나.”
“아니, 부탁하긴 했는데. 이거 말고…….”
유리는 생명 도감의 물음에 아무렇지도 않게 개인용 아공간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생명 도감에게 건넸다.
생명 도감은 유리가 건넨 아이스크림을 우물거리면서 검역항 내부를 슬며시 들여다봤다.
“진짜 최대한 지구산 생물을 구해보려 했는데, 거의 못 구하겠더라. 일단 최대한 비슷한 놈들로 가져왔어.”
“어디 보자. 죄다 물고기네?”
“어. 육상은 소행성이 맡기로 했어.”
생명 도감과 유리가 그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클라인은 조심스럽게 유리가 가져온 검역항 안을 살펴봤다.
온갖 행성들에서 모인 여러 생명체들이 보이는 와중, 클라인의 눈에 이질적인 생명체가 하나 들어왔다.
“어, 저건……?”
“흐흐. 저거 구하느라 힘들었다고.”
클라인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유리는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콧대를 높이 세웠다.
“지구산 고래. 구하느라 엄청 힘들었어.”
“저건…… 어떻게 구한 거야?”
검역항 안에서 헤엄치고 있는 것은 바로 지구산 고래였다.
아직 제대로 된 연구가 이뤄지지 않아 제대로 된 이름도 없는데, 저걸 어떻게 가져온 걸까?
클라인의 의문에 유리는 어깨를 으쓱하며 간략하게 설명했다.
“요즘 정보 전쟁이 슬슬 끝나가서, 지구까지 원정 나가는 모험가들이 꽤 늘었다고 하더라고.”
“정말?”
“응. 뭐, 지구산 생물들 중에서 보호종 지정이 된 건 인간밖에 없잖아? 다른 생물들은 딱히 채집하는 데 제한은 없으니까.”
“그렇긴 하네.”
하긴, 인간들이 아닌 생물들은 지적 생명체도 아니고, 보호종도 아니니까.
그러니 직접적인 접촉을 하지 않고 쉽게 채집할 수 있을 것이다.
클라인이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찰나, 유리가 클라인도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알렸다.
“몰랐는데, 지구인들도 일종의 종족 연합이더라? 이번에 처음 알았어.”
“종족 연합? 지구인들이 그랬었나?”
“응. 저 지구산 고래를 지구산 인간들이 동급으로 취급했다는 거 같은데?”
“동급으로?”
지구인들이 지구산 고래들을 같은 사람으로 취급했다고?
그런 이야기는 정말 처음 듣는 것 같은데?
“막, 초창기 마키나들 합류하던 시절의 느낌? 그 정도 수준이어도 동등하게 취급하고 있다고 하더라고.”
마키나들이 합류하던 시절이라면, 몇몇은 같은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고 몇몇은 같은 사람이라 주장한다는 뜻인가?
하긴, 다종족 연합은 꽤 많은 문명에서 발견되는 형태니까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어디서 들은 거야? 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데.”
“이번에 골든 레코드? 그거 분석하다가 발견했다던데?”
“골든 레코드?”
“응. 인간들이 사용하던 언어를 담은 항목이 있는데, 그 부분에 고래의 언어가 함께 담겨있었다고 하더라. 그래서 이번에 새롭게 제기된 학설이라던데.”
“그랬구나…….”
지구가 다종족 연합이었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네.
그렇다면 지구인들도 다른 종족에 대한 거부감이 덜한 편이려나?
잉간이 혼자 거부감이 덜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잠깐만, 지구인들이 고래를 같은 사람으로 대우했다면 고래들도 지구산 인간들과 비슷한 수준의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걸까?
그렇다면 고래들도 설마 보호종으로 지정받아야 할 수준의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걸까?
“뭐, 아직 학계에서도 논란이 좀 있는 가설이어서 확실한 건 아냐. 그래도 구하기 힘들었어.”
유리는 그렇게 너스레를 떨며 클라인에게 슬쩍 손을 내밀었고, 클라인은 슬쩍 웃으며 유리와 손뼉을 마주쳤다.
그런 유리와 클라인의 모습을 지켜보던 소행성은 작은 한숨을 내쉬며 말끝을 흐렸다.
“육상 생물은 최대한 마력이 없는 아이들로 준비했어. 그런데, 조금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문제요?”
“응. 인간들을 어디서 구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지.”
“인간이요?”
“애초에 마력이 적은 인간들을 파는 곳이 없잖아? 지구산 인간을 빼면 말이지. 그것도 보호종에다가 정보 전쟁이 겹쳐서 잉간이 말고는 시장에 나온 아이들이 없고.”
“그렇긴 하죠.”
“그래. 최대한 기준을 낮춰서 마력이 적당한 아이들을 고른다고 해도, 그것도 문제야.”
“문제요? 뭐가요?”
“그런 아이들은, 이런 야생에서 적응하기 힘들고. 가장 큰 건 역시 가격 문제지.”
“아……. 그렇긴 하겠네요.”
인간형 생물들은 다른 차원 생물들보다 더 가격이 높은 경향이 있으니 말이다.
관리하기 어렵고, 번식시키기도 쉽지 않으며 찾는 사람이 많지도 않다.
클라인이 인간형 생물을 홍보하며 관심이 높아져 가격이 낮아지기도 했지만, 여전히 비싼 건 여전하다.
“비싼 값을 주고 브리딩 개체들을 사용하자니, 그 아이들이 잘 적응하지 못할 건 확실하고. 그렇다면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야생 개체들을 쓰는 것도 엄청 비싸단 말이지.”
“그렇죠…….”
“그렇다고 우리가 직접 채집할 수는 없잖아?”
소행성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쉰 순간, 생명 도감이 무언갈 깨달은 잉간이 마냥 중얼거린다.
“그거다.”
“응? 뭐가?”
“직접 채집하면 되겠네!”
“뭐? 누가?”
유리는 그 다음에 생명 도감이 할 말을 예상했는지 푹 한숨을 내쉬었고, 그와 함께 생명 도감은 당당하게 외쳤다.
“우리가 직접 야생 인간들을 채집하면 되는 거잖아?”
“……무척 별로인 생각 같은데.”
소행성은 또다시 생명 도감에게 부려 먹히는 게 아닌가 의심하는 듯 떨떠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생명 도감은 고개를 내저으며 무척이나 설득력 있는 설득을 시작했다.
“너, 또 우리 부려먹으려는 거지?”
“그렇게 느낄 수도 있어. 맞아. 그게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래도 우린 이 방법을 택해야 해.”
생명 도감은 유리의 날 선 목소리에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우리들을 바라보며 외쳤다.
“잘 생각해봐. 조금만 고생하면 영상을 최소 2~3개는 더 뽑아낼 수 있다고?”
“…….”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절대로 거절할 수 없는 이유를 말이다.
173화 [생명 도감] 인공 행성에 입주할 입주민들을 찾습니다!
“개같네.”
한 인간이 감시초소에서 추위에 덜덜 떨며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는다.
갑작스러운 욕설이었지만, 그 옆에서 함께 근무를 서는 듯 보이는 남성은 그런 남자를 별 신경 쓰지 않는다.
욕설은 내뱉은 남자도 다른 남자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고 거칠게 중얼거린다.
“야, 솔직히 이게 뭔 의미가 있냐?”
“이렇게 경계를 서야, 좀비 새끼들을 빨리 발견하지.”
“지랄. 우리 눈에 좀비들이 들어올 지경이 됐으면 어차피 모두 다 뒈지는 건데.”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이 X같이 추운 날에 모닥불도 없이 경계 근무를 서는데, 그게 가능하겠어?”
“내가 너무 무리한 요구를 했네. 미안.”
“알면 됐다.”
한바탕 불평을 쏟아놓은 남자는 하얀 입김을 내쉬며 자신들의 등 뒤의 풍경을 바라봤다.
“마력이 부족한 게 죄지. 죄. 하, 나도 귀족 가문이었으면 저 안에서 안락하게 근무하고 있었을 텐데.”
남자가 바라본 곳은 지금 그들이 지키는 장소.
이 행성에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인류의 쉼터다.
오래된 고성을 개조한 덕분에 고풍스러운 고대의 건축물들과 신들의 지혜를 빌려 만든 실용적인 건축물들이 뒤섞여 있다.
“넌 귀족가에서 태어났어도 수색 담당이었어. 짜샤.”
“아니거든? 불 속성 특화여서 발전소 담당이 됐을 거거든?”
두 남자가 그렇게 시시덕거리는 사이, 고성에서 누군가가 나오는 모습이 두 남자의 눈에 들어왔다.
“야, 대빵 왔다. 각 잡아라.”
“진짜? 아니, 다녀간 지 1시간도 안 됐잖아?”
“몰라. 보나 마나지 스트레스 풀려고 오는 거겠지. 괜히 트집 잡히지 않게 잘 준비해.”
두 남자는 서둘러 완벽한 모습으로 경계를 시작하고, 천천히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져 왔다.
“흠.”
무언가 품평하는 듯한 중얼거림이 들려오고, 말발굽 소리는 어느덧 멀어져 간다.
두 사람의 귀에 말발굽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어서야 두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 딸이 실종된 걸 왜 우리한테 화풀이하는데. 진짜.”
“그러게. 근데, 나라도 저럴 거 같다. 그렇게 참한 딸이 사라지면.”
“생각해보니 그렇네.”
두 사람은 이 개같은 근무 시간에 유일한 활력소가 되어주던 기사를 떠올린다.
평소에는 매번 갑옷을 입고 다녀서 성별조차 구분하기 힘들지만, 이 두 남자가 근무하는 감시초소에서는 달랐다.
이 감시초소에선 훈련장의 모습이 다 내려다보이는데, 그 기사는 훈련을 할 때면 투구를 벗고 훈련했기 때문이다.
비록 얼굴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 고된 근무의 활력소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하지만 그런 활력소는 이제 더 이상 없다.
최근, 기사들이 달의 보급소에서 물품을 받아오려 달로 향하던 중, 기사들이 탄 우주선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기사님이 그렇게 죽을 줄은 누가 알았겠냐. 진짜.”
“하…… 귀족이 되는 건 바라지도 않으니까 그냥 마력만 많았으면 좋겠는데. 그럼 종마로라도 쓰일 거 아냐…….”
“나도. 종마로라도 좋으니까…….”
두 남자가 오늘도 이뤄질 일 없는 망상을 하며 시간을 때우던 그때, 두 사람은 무언가를 감지했다.
“……들리냐?”
“들린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천천히 다시 쉼터 밖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허…….”
귀족이 아닌 두 사람의 눈에 간신히 잡히는 거리에서, 그 개같은 것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X발. 기사님들이 있었으면 여기까지 오기도 전에 쓸어버렸을 텐데.”
“그러게.”
두 남자는 한탄하면서도 차분히 좀비 녀석들의 수를 살피기 시작했다.
잡졸들 절반에 특수한 녀석들도 여럿 보인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처음 보는 형태의 기괴한 녀석들이 있었다.
“……뭐냐. 저건?”
“X같이 개 같은 거.”
마치, 두 개자식을 하나로 합쳐놓은 듯한 기괴한 모습.
여러 마리의 개자식들이 하나로 합쳐진 형태는 봤어도, 저런 식으로 합쳐진 모습은 처음 봤다.
반반.
몸의 중심을 기준으로 정확히 절반씩 각기 다른 개자식들로 보인다.
“경보나 울리자. 등급은…… 어…….”
“등급은?”
“전원 대피?”
특수한 녀석들만 해도 문제인데, 신형들까지 더해졌다.
어쩌면 정말로 오늘이 이 쉼터에서 보내는 마지막 하루가 될지도 모르겠다.
“리베리아 님. 제발 저 X같은 놈들을 없애주세요.”
“아니, 걍 뭐든 해주세요. 제발.”
그렇게 두 사람이 허탈한 표정으로 목에 걸린 장식을 어루만지며 기도를 한 찰나.
쾅.
기적이 일어났다.
하늘에서부터 떨어진 무언가가, 저 어마어마한 양의 좀비 떼들을 짓뭉개 버린 것이다.
“……리베리아 님?”
두 남자는 정말 자신의 기도를 신이 들어준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지만.
이내 그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지금 일어난 일은 기적 따위가 아니었다.
지금 일어난 일은, 기적이 아닌 재앙이었다.
“뭐야…… 저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보는 것만으로 구역질이 치밀어오르는 기괴한 촉수 뭉치였다.
* * *
“그렇긴…… 하겠네. 음.”
“그치?”
영상감.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늘 고민하는 것.
쥬튜브 채널을 운영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때라면 몰라도, 이젠 영상감을 떠올리는 게 상당히 힘들다.
예전에 하지 않은 소재이면서도, 인기가 있으며 별다른 문제가 없을 만한 소재라니, 정말 찾기 힘들다.
그 때문에 쥬튜버들 사이에 유행이 확 번졌다가 사그라지는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일단 유행을 타면 영상 하나는 만들 수 있으니.
확실히 몸이 조금만 고생하면 머리가 덜 고생해도 되는 거니까.
“그럼. 어디에서 채집할 생각인데?”
생명 도감이 꺼낸 최강의 이유에 다들 설득됐는지 소행성이 조심스럽게 생명 도감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러자 생명 도감은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글쎄? 그건 지금부터 생각해 봐야지?”
“아이고…… 일단 너무 먼 곳은 싫은데.”
“맞아. 이왕이면 터미널 한 정거장 거리 안에서 채집하자.”
생명 도감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유리와 소행성은 제일 먼저 거리의 제한을 뒀다.
“음…… 외우주로 나가는 건……?”
“여기서 그리 멀지 않으면.”
“좋아. 그럼 외우주도 된단 말이지?”
생명 도감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위의 지도를 살피며 인간형 생물의 서식지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여긴 어때? 마력 분포량이 적은 구역인데.”
“보호 구역이잖아. 봐, 옆에 한창 만들어지고 있는 행성계가 있는데?”
“으음…… 그럼 여긴?”
“거긴 사유지.”
“아, 왜 이렇게 안 되는 곳이 많아?!”
생명 도감과 함께 후보지를 물색하던 유리는 짜증이 나는지 머리를 쥐어뜯으며 외쳤다.
그러자 생명 도감은 별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탄탈로스 붐 때와 마찬가지로, 야생 인간들이 서식하는 곳에 알박기를 해두는 거겠지.”
“아, 그러니까 왜!!”
“브리더들에게 입장권을 팔아먹으려고?”
“아, 진짜. 개같은 놈들.”
유리가 새삼스럽게 자본 계층을 욕하는 사이, 클라인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저기…… 그럼 이건 어때요?”
“응?”
“마력이 적은 아이들로 구성하는 게 목적이라면, 리베리아는 어때요?”
“리베리아?”
“네, 리베리아.”
리베리아.
인구 밀집 구역 근처에 위치해 있는 작디 작은 인간형 생물체들이 거주하는 행성.
희귀 자원이 나오는 것도, 희귀 생명체가 생활하는 것도 아닌 별 볼 일 없는 작은 행성.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모두는 리베리아의 이름을 알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외래종이 일으키는 문제를 거론할 때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행성이 바로 리베리아다.
브리더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구든 리베리아의 이름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인구 밀집 지역 근처에 위치해있고, 대부분의 생명체가 살아가기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던 리베리아는 애완 생물을 유기할 때 누구나 손쉽게 버릴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 결과, 리베리아는 우주에서도 손꼽히는 각종 다양한 종족들을 품에 받아들이게 되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그렇게 된 행성이 어떻겠는가?
그야말로 개판 5분 전의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거기에 화룡점정을 찍은 것이 언데드 유출 사고,
그로 인해 리베리아는 말 그대로 지옥 그 자체가 되었다.
정부 또한 리베리아의 상황을 인식했지만, 희귀 생물이 존재하는 것도 아닌 리베리아를 굳이 마력을 써가며 정화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걸까?
그렇게 리베리아는 방치되었고, 현재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리베리아면, 뭐든 간에 원하는 아이를 발견할 수 있지 않겠어요? 거기에다가 누구 땅도 아니고.”
“리베리아라…… 거길 생각 못 했네. 거기서 데려온다면 채집이 아니라 구조라 불러야 하는 거 아냐?”
“이왕이면 좋은 일도 같이 하면 되죠!”
“괜찮은 것 같네. 여기서 그리 멀지도 않아. 위치가…… 응?”
그때, 지도를 들여다보던 소행성이 뭔가를 발견했다는 듯 중얼거린다.
“어머. 여기, 클라인네 바로 근처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말 그대로, 클라인의 집과 리베리아는 코가 엎어지면 닿을 거리였다.
“잉간이, 데려갈 거에요?”
“아뇨. 굳이…… 그런 곳을 보여줘야 할까요?”
이쁜 것만 보고 살아도 모자란 잉간인데, 그런 끔찍한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지.
“그럼, 리베리아에서 다시 보는 거로 하고. 한, 30분이면 되나요?”
“충분하지.”
목적지가 정해졌으니, 다들 짐을 챙기려 스르륵 방을 나선다.
클라인 또한 채집 도구를 챙기려 잠시 집으로 돌아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가 리베리아 앞에 모였다.
“모르는 분들은 없으시겠지만, 직접 접촉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여기가 아무리 정보 오염으로 개판 난 곳이라지만, 그렇다고 우리까지 더 망칠 필요는 없잖아요?”
생명 도감은 그렇게 말하며 채집용 드론을 출격시킬 준비를 끝냈고, 이어서 유리 또한 자신의 채집 장비를 가방 밖으로 꺼내 놨다.
“으, 너 아직도 그거 쓰냐? 징그러워 죽겠다.”
“촉수의 멋짐을 아직도 모르는 거야?”
“아니, 촉수도 촉수 나름이지. 그건 촉수가 아니라 크리쳐 수준이잖아?”
클라인은 생명 도감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내심 속으로 동의했다.
촉수를 좋아하는 유리의 장비답게, 유리의 채집 도구는 촉수 그 자체였다.
클라인이나 유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형태의 촉수와는 다른, 무언가 살덩어리 같은 형태의 촉수.
그런 클라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리는 계속해서 촉수형 채집 도구의 장점을 어필했다.
“한 번에 여러 마리를 포획할 수도 있고, 다른 곳으로 움직이는 것도 얼마나 편한데!”
“저거 하나로 차원 파괴자를 잡을 수 있을 정도라도, 저런 디자인이면 나는 절대로 안 살 거야.”
“육체의 매력을 모르는 기계 덩어리 수준 하고는.”
유리와 생명 도감의 언제나처럼 투덕거리는 사이, 소행성 또한 채집 도구의 세팅을 끝마친 모양이다.
“네. 저도 완료했어요.”
“소행성님 건…… 혜성?”
소행성이 가져온 것은 아무리 혜성의 핵을 꺼내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저걸로 도대체 어떻게 채집을 한다는 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소행성은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며 살포시 웃었다.
“후후. 작동을 시작하면 깜짝 놀랄걸요?”
“네…….”
그리고 마지막으로, 클라인까지 채집 도구의 세팅이 끝났다.
클라인의 채집 도구는 별다른 특색 없는 인간형 위장을 하고 있었다.
“와, 채집 도구마저 인간이네요. 진짜 참사랑 인정합니다.”
“왜 내 사랑은 인정 안 해!”
“촉수는 사랑할 대상이 아니라 불태울 대상이지.”
생명 도감과 유리가 그렇게 분위기를 띄운 사이, 채집 도구가 출발하는 모습을 촬영할 드론까지 제대로 배치되었다.
“카메라 연결, 마지막으로 확인하세요. 혹시나 카메라가 작동 안 하면 본인만 손해입니다.”
“확인. 잘 작동해.”
“확인했어요.”
“확인!”
마지막으로 채집 도구에 부착된 카메라의 점검을 끝마치자, 드디어 채집 도구들이 리베리아로 출발하기 시작했다.
174화 [속삭이는 혼돈] 촉수!
“……증명할 기회인가.”
남자는.
기사는.
딸을 잃어버린 아버지는, 하늘에서 내려온 기괴한 그것을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곳의 병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양의 언데드들이 몰려오는 절망적인 상황은 끝났지만, 이곳엔 새로운 위험이 나타났다.
바라보기조차 싫은, 지금껏 봐왔던 그 어떤 괴물보다도 역겨운 촉수의 덩어리.
등장과 함께 언데드들을 모조리 박살 냈기에, 한때는 그것이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존재인 줄 알았다.
그 생각이 착각임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끔찍한 것은 순식간에 본색을 드러내고 촉수들을 놀려 사람들을 잡아채기 시작했다.
마력이 없는 손쉬운 사냥감들부터 사냥할 생각인 걸까?
촉수는 일반 병사들과 민간인들부터 사냥하기 시작했다.
일반 병사들은 가지고 있던 창으로 어떻게든 저항을 시도해보지만, 아무리 공격을 가해도 상처 하나 입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사, 살려줘!!”
촉수에 묶인 병사들과 민간인들이 비명을 지르지만, 그 누구도 그들을 구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대로 촉수 뭉치 안으로 끌려 들어가 모습을 감췄다.
젠장, 그 사고만 아니었다면 저것을 어떻게든 해볼 수 있었을 텐데.
죽여버리는 것까진 무리여도 쫓아낼 순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자랑스러운 딸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언제나 그 아이가 신들의 전장에 들어설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 곳에서 목숨을 잃을 아이가 아니었단 말이다.
우주를 항해하는 것은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다.
신들의 지혜와 성물들을 빌려도, 자칫 잘못하면 큰 사고가 일어난다.
그리고 이번엔 그 일이 자신의 딸에게 일어났을 뿐이다.
뭐가 잘못됐던 걸까?
수송선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잘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운이 없었을 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딸을 보내지 말걸.
재능이 넘치는 아이에게 많은 경험을 쌓게 해주고 싶었다.
달에서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아이가, 이 지옥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길 원했다.
자신의 딸이 괴로워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딸아이가 이곳에서 벗어나길 원했다.
때마침 다들 피난을 갈 준비가 끝났다는 소식을 들고 전령이 찾아왔다.
“준비는 끝났나?”
“네. 성물들은 모두 챙겼고, 현재 주민들의 대피를 진행하는 중입니다.”
“대피 상황은?”
“귀족들은…… 모두 무사합니다. 평민 남성들은 대부분 괴물에게 잡혀갔습니다.”
“여자들은 어떻지?”
“빠르게 대피를 시작한 덕분에 대부분 무사합니다.”
“좋아, 그럼…….”
탈출을 시작하라는 명령을 내리려던 찰나, 성 전체가 뒤흔들리는 진동이 느껴진다.
다급하게 감시 카메라들을 바라보며 무슨 일이 있는지 확인하자,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 보인다.
피난민들이 위치한 곳을 촉수들이 습격한 것이다.“……당장 탈출을 시작하게.”
땅속을 뚫고 오기라도 한 것일까?
대피소의 바닥을 뚫고 솟아난 촉수들은 사람들을 붙잡고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귀족들이 마법을 사용하며 저항해 보지만, 촉수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남자의 명령을 받은 전령이 다급하게 뛰어가려던 순간, 카메라의 영상에 무언가 변화가 일어난다.
순식간에 대피소를 휩쓴 촉수들이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그는 대피소의 풍경을 바라보며 무언가 의아함을 느꼈다.
어째서 귀족들은 전부 무사한 거지?
이번에 촉수들이 잡아간 것은 평민들.
그것도 평민 여성들이었다.
남성은 충분하다는 걸까?
몇몇 남성들은 촉수에 끌려갔다가 다시 대피소 안으로 토해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귀족들이 얼마나 저항하든 촉수는 귀족들을 건드리지도 않았다.
그것이 노리는 것은 오로지 평민들뿐.
도대체 저 괴물은 무슨 생각인 걸까?
저렇게 저항하면 화가 나서라도 귀족들을 조금은 건드릴법하건만.
그들은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아서 신경을 쓰지 않은 걸까?
그런 의문을 품으며 가만히 카메라 화면을 바라보던 그를 전령이 재촉한다.
“켄토르 님. 가시죠.”
“나는 조금 있다가 따라가도록 하지.”
“켄토르 님……?”
전령은 그의 모습에서 심상치 않은 무언가를 느꼈는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말일세. 신들에 전장에 갈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생각이라네. 자네가 보기엔 지금이 딱 적절한 타이밍이 아닌가?”
“켄토르 님!”
“뭐, 지금껏 불려간 적이 없는 걸 봐선 이번에도 실패할 것 같지만 말이야.”
그가 그렇게 중얼거리던 사이, 촉수들은 어느덧 성 내부를 돌아다니며 미처 대피하지 못한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다.
더 시간을 끌었다간 대피하지도 못하고 모두 다 죽고 말 것이다.
“가게나. 나는 딸아이를 만날 예정이니까. 부녀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그가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전령이 굳은 표정으로 뒤돌아 떠난다,
전령이 떠나는 소리를 귀동냥으로 들으며, 그는 전신의 마력을 갈무리하기 시작했다.
유령의 빛을 연상시키는 그의 창백한 푸른빛의 마력이 그의 몸 전체에 휘감긴다.
노리는 곳은 단 하나.
저 괴이한 녀석의 본체.
작은 촉수들을 공격해봤자 어차피 금방 회복하거나 큰 데미지도 아니다.
본체를 공격한다고 해서 유의미한 데미지를 줄 수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지금 이 상황에선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마력창을 만들어낼 필요는 없다.
전신의 모든 마력을 끌어모아서, 나 자신을 하나의 거대한 창으로 만든다.
오랜 시간 동안 활동할 수 없는 그의 종족이 대대로 맡아온, 거인의 심장을 찌르는 화살의 역할.
마력을 전부 쏘아내고 돌격한 후의 일은 생각하지 않는다.
화살은 뒤를 돌아보지 않으니까.
“리베리아 님께 이 전투의 영광을…….”
마지막으로 신께 기도를 올리고.
그는 쏘아졌다.
성 정상부의 탑에서부터,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성 밖의 괴물에게 날아간다.
그의 몸에 휘감긴 마력이 날카롭게 벼려지며 그의 앞을 막는 모든 것을 박살 낸다.
세간은 말한다.
제대로 된 마법을 익히지 않고, 육체의 강화에만 모든 마력을 쏟는 켄토르의 전투법은 너무나도 비효율적이라고.
그렇지만, 효과는 확실하다고.
지금껏 단 한 번도 막히지 않은 그의 돌격.
그는 돌격의 위력만큼은 자신이 딸아이보다 앞선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 누구도 반응하지 못할 속도로 쏜살같이 쏘아진 그의 돌격은.
“개 같군.”
촉수 뭉치에 그 어떠한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마치 산에 머리를 들이박는 드워프 마냥, 그는 그대로 퉁겨져 바닥에 쓰러졌다.
전신의 마력을 전부 소모한 대가가 찾아온다.
손끝 하나도 움직이기 힘든 탈력감이 그의 몸에 찾아든다.
그때, 그제서야 그의 존재를 눈치챘다는 듯 촉수 뭉치에서 촉수가 그의 쪽으로 뻗어 나온다.
“푸흡.”
뭐가 전투의 영광을 바친다는 건가.
이건 싸움이 아니다.
멍청이가 벽에 들이박은 것이지.
자신의 꼴이 퍽 우스워 그는 웃음을 터트렸고.
그대로 촉수에 붙잡혔다.
마력 탈진의 반동으로 서서히 의식을 잃어간다.
자신의 딸이었다면, 자신과는 다른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라 생각하며 말이다.
* * *
리베리아의 대기권에 소행성의 채집 장비가 진입하자, 무언가 변화가 시작됐다.
평범한 혜성처럼 보이던 암석 덩어리가, 쩍 하고 쪼개지며 형체를 바꿔나갔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모습을 드러낸 소행성의 장비는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이 있었다.
저거, 무슨 만화에 나오는 캐릭터 아닌가?
“어때? 엄청 대단하지? 멋지지 않아?”
그러자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소행성이 살짝 들뜬 듯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을 걸었고, 클라인은 작은 목소리로 별생각 없이 중얼거렸다.
“이런 거 좋아하셨구나…….”
“어, 응? 아니, 딱히 좋아하는 건 아니고. 그냥 디자인이 멋져서…….”
그러자 소행성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아무도 시키지 않은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네. 저도 멋지다고 생각해요.”
“그, 그치?”
그런 소행성의 모습이 신선했기에 클라인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소행성은 한숨 돌렸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와. 지금 내숭 떤 거야?”
“우리한테는 다 드러냈으면서, 클라인한테는 멋진 언니로 보이고 싶나 보지?”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언제 내숭을 떨었다고…….”
생명 도감과 유리는 그런 소행성을 짓궂게 놀렸고, 소행성은 딴청을 피울 뿐이었다.
그렇게 떠드는 사이, 각자의 채집 도구들이 리베리아의 지표면에 착지한다.
“아이쿠.”
“왜?”
“언데드들을 밟아 버렸네. 이런.”
착지하던 곳에 언데드 무리가 있던 것일까?
유리는 자신의 채집 도구에 짓뭉개진 언데드들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청소할 때 귀찮겠네.”
유리는 그렇게 잠시 한숨을 내쉬더니, 곧장 촉수 덩어리를 능숙하게 조작하기 시작했다.
“오. 여긴 마력이 적은 아이들이 꽤 많은데? 거긴 어때?”
“꽝. 여긴 다들 마력이 너무 높네.”
“나도. 아직 못 찾았어.”
“저도요.”
아무래도 유리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적당한 마력량을 지닌 인간 거주지를 발견하지 못한 듯하다.
“일단, 적당히 먼저 채집하고 있을게. 종류는…… 모르겠네. 다들 워낙 혼혈이어서.”
유리의 채집 도구가 작동하기 시작하자 주위의 인간들이 겁을 먹었는지 달아나기 시작한다.
몇몇 인간들은 도구를 사용해서 채집 도구를 쿡쿡 찌르지만, 당연하게도 그런 것으로 채집 도구에 손상이 갈 리 없다.
오히려 이렇게 사납게 행동하면 채집하기 편할 뿐이다.
그렇게 한참을 인간들을 채집하던 유리는, 채집 현황을 확인하고 작게 혀를 찼다.
“성비가 맞질 않네.”
대부분의 인간형 생물들이 그렇듯, 이곳의 인간들도 위협을 느끼면 암컷과 아이들을 숨기는 모양이다.
그 덕분에 채집한 인간들의 성비가 완전히 무너진 상황.
어쩔 수 없이 유리는 인간들의 둥지로 보이는 장소를 살피기 시작했다.
“아, 찾았다.”
다른 곳보다 마력이 진하게 느껴지는 구역으로 촉수를 보내 보니 한 곳에 뭉쳐있는 인간들이 보인다.
마력 보유량이 적은 인간들과 상당한 양이 되는 인간들이 서로 섞여 있었지만, 유리는 손쉽게 촉수를 조작해 마력량이 적은 인간들만을 골라냈다.
“수컷은…… 더 필요 없고. 암컷만 조금 더…….”
한바탕 둥지 안을 헤집어놓고 유리는 더 둥지가 망가지지 않게 주의하며 둥지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조금 둥지의 일부가 부서지기도 했지만, 저 정도면 나중에 알아서 복구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고, 뭔가 미안하네.”
부서진 둥지를 바라보며 망연자실해 하는 인간 한 개체를 발견하고 유리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인간들이 스트레스를 최대한 적게 받는 방식으로 인간들을 채집하는 건 너무 오래 걸린다.
그렇다고 어중간하게 스트레스와 속도를 둘 다 신경 쓰면 괜히 신경만 쓴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순간 많이 받더라도, 최대한 빠르게 채집을 끝마치는 것이 좋다.
특히 이런 식으로 대량의 인간 군집을 채집하는 경우에는 말이다.
“음,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슬슬 채집 도구를 거둬들일 준비를 하던 유리의 눈에 채집 도구 옆에 나뒹구는 한 인간형 생물체가 보였다.
느껴지는 마력량은 적고, 채집 도구가 내려오며 발생한 충격 때문에 맛이 간 걸까?
뭔가 자신 때문에 저러는 것 같아서 살짝 미안해진 유리는 바닥에 나뒹구는 개체까지 채집하기로 했다.
이 언데드가 넘쳐나는 행성에서 저 상태로 바닥에 놔두면 배고픈 언데드에게 뜯어먹힐 게 분명하니까.
“좋아. 난 채집 끝났어!”
유리는 그 인간을 채집하는 것을 끝으로 채집의 종료를 선언했고, 생명 도감의 외침이 이어졌다.
“좋아, 나도 찾았다!”
이제 채집은 막 시작됐다.
175화 [생명 도감] 중형 야생 인간 군체 채집기
달려야 한다.
쉼터를 집어삼킨 괴물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곧 닥쳐올 괴물들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후욱, 후욱……!”
기사님이 희생하여 번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
빨리, 빨리 도망쳐야 한다.
단순히 의무감 때문에 그러는 것인지 공포감 때문인진 모르겠다.
중요한 건 두 감정이 합쳐지며 자신을 더 채찍질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전에 계획한 대로 근처의 다른 쉼터로 피난민들을 이끌고 가는 중이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도대체 왜 저 녀석들은 귀족님들은 무시하고 나 같은 버러지들만 노리는 거야.
속으로 온갖 불평불만을 내뱉으며 한참을 달리던 병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제자리에 멈춰섰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그야 당연하다.
저 괴물들이 평민만을 노린다는 걸 깨달은 귀족들이 그를 피난민 무리에서 내쫓았으니까.
그 끔찍한 촉수는 더 쫓아오지 않는 것 같지만, 아직 안심할 수 없다.
그 촉수와는 다른 의미로 끔찍한 괴물들이 다가오고 있으니까.
멀리서 그 괴물들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히익……!”
어떻게 내가 이동하는 위치를 정확히 알아내는지 모르겠다.
나와 다른 방향으로 도망친 동료들은 무사할까?
일단, 뛰어야 한다.
병사는 다시 한 번 힘을 쥐어 짜내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얼마 달리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앞에 죽음의 늪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곳은 언제나 눈이 내리는 얼어붙은 땅인데.
어째서인지 처음부터 존재한 것처럼 언젠가부터 생겨난 정체불명의 늪.
한 번 발을 담근 순간, 그 사람은 죽은 것과 다름없다.
다시는 그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테지만.
더 두려운 것은, 저 늪에 빠진 사람은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늪에 빠질 때의 상태 그대로, 숨이 쉬어지지 않는 고통을 느끼며 늪 속에 영원히 가라앉는다.
새하얀 눈밭에 숨겨진 죽음의 늪들이 시체를 태울 때 하얀 하늘로 흩날리는 잿가루처럼 보인다.
병사는 두려움에 발을 멈췄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가 병사의 공포심을 더욱 자극한다.
어쩔 수 없다.
죽기 싫으면 여길 지나가야 한다.
병사는 발밑을 주의 깊게 살피며 죽음의 늪을 피해 달린다.
괴물의 웅대한 울음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며 이빨을 악문 순간.
“도, 도와줘!”
익숙한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절망스러운 얼굴로 설원에 선 동료 병사의 얼굴이 보인다.
아까 귀족들에게 쫓겨날 때 자신과 함께 쫓겨난 동료다.
자신처럼 도망치다 이곳까지 오게 된 걸까?
그는 서둘러 동료를 도우러 달려가려고 했다.
“무슨 일이야?!”
“바, 발이 움직이지 않아!”
멈칫.
동료의 말에 병사의 발이 멈춘다.
그는 자신의 동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았다.
아주 작은 크기의 죽음의 늪을 밟은 것이다.
몸이 빠져들 정도의 크기가 아니어도 죽음의 늪을 한 번 밟는 순간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
눈앞의 동료도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닐 터.
단지, 현실을 부정하고 싶을 뿐이다.
“제발. 제발 도와줘. 이런 곳에서 죽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간절하게 울부짖는 동료를 돕고 싶지만 그럴 방법이 없다.
병사가 입술을 악물며 발걸음을 돌리려 한 순간.
그것들이 마침내 당도했다.
우우우웅.
마치 산이 진동하는 듯한 기괴한 소리를 내며 허공을 떠다니는 강철들.
어떠한 조각가가 강철로 생물을 만들려다 실패한 듯한 괴상한 모습의 괴물들은, 시뻘건 눈동자를 깜빡거리며 죽음의 늪에 붙잡힌 그의 동료를 바라봤다.
“아, 아…….”
그의 동료는 자신의 운명을 깨닫고 입을 벌리고 덜덜 떨었다.
그리고 병사는.
도망치기 시작했다.
“살려줘, 제발. 제발……!”
마지막으로 남자가 등 뒤를 돌아봤을 땐, 기괴한 강철의 괴물들이 붉은 광선을 눈에서 발사하여 그의 동료를 불태우고 있었다.
싫어.
저런 죽음은 싫어.
저렇게 끔찍하고 고통스럽게 죽긴 싫다.
눈물 맺힌 눈으로 주위를 제대로 살피지 않고 그저 앞으로 뛰어가던 병사는, 무언가가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곳에 있어선 안 될 열기가 잠시동안 느껴진다.
그리고 그가 향하던 설원이 무언가에 얻어맞은 것처럼 크게 폭발한다.
“흐아아악……!”
그 괴물이다.
운 좋게도 그 괴물의 공격이 빗나간 거다.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말 그대로 젖 먹던 힘을 다해 앞으로 달려갔다.
과도한 공포와 체력을 너무 많이 소모한 덕분일까?
쉬지도 않고 그저 달려가던 병사는 어느 순간 실이 끊어진 것 마냥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병사가 다시 눈을 떴을 땐, 낯선 천장이 그를 반겼다.
“허억……!”
“쉿. 진정해요. 여긴 안전하니까.”
잠에서 깨어난 그를 초라한 기색의 의사가 진정시킨다.
병사가 주위를 살펴보니 흙으로 만든 듯한 벽과 마력이 아닌 것으로 작동되는 전등이 보인다.
“여긴……?”
“운이 좋으셨어요. 쉼터 위에 쓰러져 있던 걸 동료들이 발견해서 데려왔습니다.”
“쉼터라고요? 여기가?”
“그 괴물 녀석들은 땅속에서 기어 나와서 그런지 땅 밑을 싫어하더군요.”
병사가 정신을 차린 곳은 지하에 건설된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쉼터.
의사가 말하길 이곳은 마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쉼터라고 한다.
혹시나 마력을 감지하고 괴물들이 찾아오는 일을 막기 위해 쉼터 안에서는 최소한의 마법만을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마법을 쓰지 않으면, 불은 어떻게 사용하는 겁니까?”
“여신님은 우리에게 마력을 쓰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안배를 마련해 주셨지.”
병사는 의사의 대답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의사의 뒤를 쫓아서 더 깊은 지하로 내려갔다.
이윽고 병사의 눈앞에 드러난 것은 아까 봤었던 금속 괴물과 비슷하게 생긴 무언가였다.
“저, 저건?”
“저 기계에 금속선을 연결하면 밝은 빛이 난다네. 아마도 저것 또한 성물의 일종이겠지.”
“세상에나…….”
“아까 불은 어떻게 피우냐고 질문했지? 저길 보게.”
의사가 가리킨 곳은 나무판과 막대기를 비비고 있는 기묘한 행동을 하는 남자였다.
병사는 저 행동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혹시나 남자를 방해할 수도 있으니 잠자코 그 모습을 지켜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막대기의 끝부분에서 무언가가 번쩍 빛나더니, 불이 생겨났다.
“세상에. 저건 도대체 어떻게 한 겁니까?”
마력을 사용하지 않고 불을 붙이다니, 그게 가능한 일인 걸까?
병사는 깜짝 놀라며 의사에게 설명은 요구했고, 의사는 끌끌 웃으며 친절히 설명했다.
“여신님의 축복이지.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행동한다면, 여신님께서 불을 내려주신다네.”
병사는 이 행성의 모두와 마찬가지로 여신을 믿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여신에게 무언가를 받거나 기적을 본 적이 없었다.
역시, 내 믿음이 부족해서 그랬던 걸까?
“몸을 씻고 싶다면 저쪽의 지하 호수에서 씻게나. 저쪽은 식당일세. 식권을 음식으로 바꿀 수 있지.”
“식권은 어떻게 얻습니까?”
“일을 해야지. 우리는 일하지 않고 먹는 사람을 지켜볼 만큼 여유롭지 않네.”
다소 냉정한 말일 수 있겠으나 병사는 그런 의사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
이곳은 뭔가 숨기는 곳 없이 깨끗하다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곳엔 귀족들이 없었다.
병사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자, 그럼 따라오게나. 무슨 일을 할지 알려…….”
의사는 병사에게 쉼터 안내를 계속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섬광이 터지더니, 세상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병사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로 그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안락했던 천장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불안한 구멍만이 뚫려 있었다.
창백한 하늘이 구멍 사이로 엿보이고 병사는 천천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곳에 있던 것은 거대한 돌덩어리였다.
지면을 뚫고 지하의 광장에 처박힌 하늘에서 떨어진 돌덩어리.
쉼터 모두가 움직임을 멈추고 돌덩어리를 바라본다.
하늘에서 떨어진 저 돌덩어리는 뭘까?
그냥 평범한 돌덩어리 같은데, 뭔가 이상하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불길한 예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거대한 돌덩이의 껍질이 갈라지며 그 안에 숨어있던 것이 드러난다.
마치 기사들이 입는 강화 갑옷을 연상시키는 모습의 괴인이 암석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비명이 울려 퍼졌다.
“괴, 괴물……!”
그 비명을 신호로 삼은 것처럼 괴인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상구! 다들 비상구로 도망쳐!”
의사는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순식간에 뭘 해야 할지 모두에게 지시했다.
다들 의사의 말대로 비상구로 도망치려 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 어 어?”
괴인의 몸에서 불길한 빛이 번지더니, 괴인의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이 괴인에게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불가사의한 힘에 사람들은 저항해 보지만 모두 헛수고였다.
불을 내려달라 빌던 사람이 외마디 비명을 남기고 끌려가는 모습을 뒤로 하고, 병사는 또다시 달렸다.
의사의 뒤를 따라 그저 어두운 땅굴을 하염없이 걷는다.
등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든 신경 쓰지 않고 걷는다.
마침내 땅굴의 끝이 나타나고, 그곳은 어딘가의 오두막 안이었다.
“자네는 잠깐 여기서 기다리고 있게나. 바깥에 비상식량을 보관해둔 장소가 있어.”
“알겠, 습니다.”
제대로 된 식사도 하지 못하고 하루 종일 달린 덕분에 병사의 안색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 사실을 눈치챈 의사는 병사를 오두막에 남겨두고 식량을 가져오겠다며 어디론가 떠났다.
그렇지만 한참이 지나도 의사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
날 두고 떠난 거구나.
병사는 그렇게 생각하며 내심 속으로 납득했다.
나를 쉼터에 받아준 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호의를 받은 거다.
병사가 그리 생각하며 쓴웃음을 짓던 그때, 문밖에서 의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보게!”
설마, 의사가 돌아온 건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병사는 감동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여기 있습니다!”
병사는 의사의 외침에 대답했지만, 의사는 병사의 외침을 듣지 못한 것인지 다시 외쳤다.
“이보게나!”
“네! 여깄습니다!”
다시 한번 병사는 의사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러자 갑작스럽게 문밖에서 의사의 비명이 들려왔다.
“흐, 흐억……! 사, 살려줘!”
“의, 의사님?!”
남자는 그냥 방 안에 틀어박힐지, 의사를 구하러 나갈지 고민에 빠졌다.
자신이 나가봤자 의사를 구하는 데 별 소용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의사는 이곳에 돌아온 것만으로 자신에게 어마어마한 호의를 베푼 것이다.
결국, 병사는 각오를 다지며 문을 열고 오두막 밖으로 뛰쳐나갔다.
“의사님!”
그렇지만 오두막 바깥은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을 뿐 그 누구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이게 어찌 된 일일까?
남자가 입을 멍하니 벌리며 주위를 살피던 그때, 눈보라 너머에서 희미한 사람의 실루엣이 보인다.
“이보게!”
그 실루엣에서 의사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병사는 별 의심 없이 의사에게도 걸어갔다.
“의사님. 다시 와 주실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병사는 의사에게 감사 인사를 표했지만, 의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보게나!”
그 대신, 맨 처음에 들었던 목소리를 다시 내뱉을 뿐이었다.
무언가 이상하다.
병사는 이상함을 느꼈지만, 의사가 아까 내지른 비명이 찝찝했다.
무언가 정신 마법에 당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빨리 구조해서 안전한 곳으로 의사를 옮겨야 한다.
병사는 그렇게 마지막 선을 넘어섰고, 실루엣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의사님……?”
그곳에 있던 것은 의사가 아니라, 창백한 피부의 알몸의 인간이었다.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눈보라의 저 너머를 바라보고 있는 인간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마치 인형처럼 말이다.
등골에서 기어오르던 불안함이 실체를 이루고 병사의 눈앞에 제시된다.
이건 인간이 아니다.
병사가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것의 머리가 한 바퀴 회전해 남자를 바라봤고.
“흐헉……!”
그것은 창백한 얼굴로 병사를 바라보더니, 끔찍한 입을 활짝 펼쳤다.
그것의 얼굴이 갈라지며 거대한 입이 병사에게 들이닥치고.
“흐, 흐억……! 사, 살려줘!”
의사의 마지막 단말마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176화 [생◑ 도감] ⊙ 텅 빈 인▣행성을 채워봅시다!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죠?”
생명 도감은 채집한 구역별로 따로 분류된 야생 인간들을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리베리아답게 온갖 품종들이 섞여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채집된 인간들은 싸우기는커녕 서로 똘똘 뭉쳐서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유리는 한 손으로 촉수 형태의 채집 도구를 가지고 놀며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그 정도면 충분할 거 같은데? 아예 행성 점유종으로 스타팅 할 생각은 아니잖아?”
“그렇지.”
“5000마리면 적당히 충분하지, 뭐.”
클라인은 그런 유리와 생명 도감의 대화를 가만히 들으며 석연찮은 기분이 들었다.
5000마리라.
그래.
틀린 말은 아니다.
아직 인간은 지적 생명체로 인정받지 못했으니까.
그렇지만 괜스레 그러한 호칭에 클라인의 마음이 불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냥 잉간이만 내 곁에 있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자꾸만 불편한 것들이 늘어간다.
두 귀를 막고, 두 눈을 감고 보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불편하다.
어째서 자꾸만 이런 불편함이 느껴지는 걸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클라인은 법을 어기고 싶었다.
중앙 정부가 제정한, 시민이라면 지켜야 하는 법.
클라인이 만약 리만이었다면 이런 감정을 자각한 순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선을 넘어갔을 것이다.
생명 도감이라면?
적당히 타협하고, 체념하면서 최대한 선 가까이 붙었을 것이다.
때로는 허가를 받아서 선을 넘는 것을 허락받고 말이다.
하지만 클라인은 도저히 그렇게 하지 못한다.
클라인은 선을 넘기엔 아직 겁이 많았다.
그리고 고집도 셌다.
클라인은 그저 선을 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선망할 뿐이었다.
그래서 클라인은 불편했다.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생명 도감이.
리만이.
법이.
“클라인?”
“아, 응?”
“어디 안 좋아? 표정이 좋지 않은데…….”
“아, 그냥. 오랜만에 밖에 나왔더니 조금.”
“내가 평소에 운동 좀 하고 살랬지?”
“아하하, 앞으론 그럴게.”
클라인이 굳은 표정으로 가만히 의자에 앉아 있자 유리가 그런 클라인을 걱정하며 다가온다.
클라인은 그런 유리가 내심 속으로 고마웠다.
클라인은 아직 유리에겐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제 조금.
조금, 불편할지도.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푹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우물거렸다.
유리는 그런 클라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클라인.”
“응?”
“화장실 가자.”
“어, 어?”
유리는 그대로 클라인의 손을 붙잡고 일어나 클라인을 질질 끌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유리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클라인이 당황한 눈으로 유리를 바라보고, 유리는 화장실 문을 꽉 잠그고는 클라인을 바라봤다.
“클라인.”
유리가 한 발자국 앞으로 걸으며 클라인의 얼굴 옆을 한 손으로 짚는다.
“으, 응.”
유리가 왜 그러는 것인지 알지 못한 클라인은 불안한 눈빛으로 유리를 올려다봤다.
그러자 유리는 클라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푹 한숨을 내쉬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확실하게 해.”
“어? 하고 싶은 말? 아니, 그런 거 없는데?”
“네가 말하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아냐고.”
유리는 그렇게 외치며 클라인의 말랑말랑한 볼을 붙잡고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살짝 잡아당겼다.
“불편한 게 있다면. 바로 말해줘. 난 클라인의 친구잖아?”
“……응.”
자신의 감정이 다 겉으로 드러나고 있던 걸까?
클라인은 머쓱해져서 촉수로 자신의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러자 유리는 피식 웃으며 너무나 귀엽다는 듯 까치발을 들고 클라인의 머리를 함께 쓰다듬었다.
“진짜. 무슨 생각하는지 얼굴에 다 보이는데,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미안…….”
“미안하면, 지금 당장 저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말합니다. 실시!”
클라인은 불편했다.
하지만 불편하다고 말하기 두려웠다.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바라볼까 봐.
그리고 불이익을 받을까 봐.
클라인은 두려웠다.
그래도 클라인은 말했다.
용기를 내어.
“그, 진짜 별거 아닌데. 응. 아까…… 생명 도감하고 이야기를 나눴잖아?”
“으응?”
“그게 조금…….”
“뭐야, 클라인. 지금 질투하는 거야?”
“아니, 음. 그런 게 아니라. 그…… 생명 도감하고 말할 때 인간을…… 마리라고 부른 게 조금…… 그렇다고 할까?”
“응?”
클라인의 말을 들은 유리는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던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무슨 말 하는지 알겠어. 미안. 내가 좀 무신경했네. 너한테는 조금 불편했을 수 있겠다.”
“아냐. 미안. 그냥 내가 살짝 불편한 거니까…….”
“으응. 아냐. 네가 불편하다면 하지 말아야지. 하긴, 넌 잉간이를 키우니까 불편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겠네.”
유리는 클라인이 더 당황할 정도로 클라인에게 사과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 가지 질문을 던져왔다.
“그럼, 인간 머릿수를 셀 때 앞으로 어떻게 부르는 게 좋겠어?”
“어…… 한 명? 이런 식으로?”
“오케이. 접수했어.”
유리는 그렇게 말하고 클라인을 데리고 다시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생명 도감을 불렀다.
“생명 도감!!”
“왜?!”
“우리, 앞으로는 인간 개체 수를 셀 때, 마리 말고 명으로 세자!”
“갑자기 무슨 소리야?!”
“클라인이 조금 불편하데!”
“그래? 그럼 바꿔야지, 뭐.”
생명 도감은 대수롭지 않게 유리가 전한 클라인의 부탁을 수용했다.
물론, 소행성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생각보다 너무나 쉽게 부탁을 들어주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클라인은 살짝 당황했다.
불편하다고 말하는 것이 이렇게나 쉬운 일이었나?
클라인이 조금 당황한 채 서 있자, 생명 도감이 클라인에게 다가왔다.
“전에 합방할 때는 모두 앞에서 잘만 말하더니. 지금은 왜 그렇게 우물쭈물해?”
“마, 말하지 마세요. 그, 그냥. 머리가 식었을 뿐이에요.”
리만에게 처음으로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주위를 살피지도 않고 그저 리만이 말하는 대로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러다가 선을 마주하고 머리가 식은 클라인은 그때의 일이 조금 부끄러웠다.
아니, 지금 클라인이 망설이는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과연 어디부터 어디까지 잉간이와 관련된 것이라고 해야 할지 고민됐으니까.
잉간이와 그 룸메이트들은 잉간이를 위한 일이 맞다.
그렇다면 룸메이트들의 동족들은?
아니, 어쩌면 잉간이 말고 다른 인간들도 잉간이와 관련 있는 일인 걸까?
지금 클라인 자신이 느끼는 불편함이 잉간이를 위해서인지 클라인은 쉽게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게 고민하는 클라인의 모습을 보며 생명 도감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머리를 좀 식히라곤 했어도, 이건 너무 식힌 거 아냐? 다시 조금은 달궈 보라고.”
“네…….”
클라인이 빨개진 얼굴을 감추며 털썩 의자에 주저앉자, 근처에 있던 소행성이 빙긋 웃으며 다가왔다.
“잉간이 때문에 그렇죠?”
“네…….”
“잘했어. 가족이잖아? 자기 가족한테 관련된 문제는 바로 해결해야지.”
소행성도 이런 경험이 있었던 걸까?
자신과 잉간이가 함께 지낸 시간보다 몇 배는 되는 시간을 함께 지낸 소행성.
문득 클라인은 갑자기 소행성의 마음이 궁금해졌다.
“저기, 소행성 님…….”
“응?”
“그, 소행성 님은 은하나 성운이하고 대화해보고 싶었던 적은 없나요?”
“있지. 아니, 늘 그러고 싶은걸? 그러니까 녹음벨 훈련도 시킨 거지.”
그렇게 대답한 소행성은 씁쓸하게 웃으며 클라인에게 말했다.
“네가 뭘 원하는지 나도 알고 있어. 나도 한때는 그랬으니까.”
“그, 그래요?”
“응. 리만이 접촉해온 것도 너와 같은걸?”
“엑.”
리만과 만났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고?
클라인은 당황했지만, 소행성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나도 아마, 너하고 비슷한 결론을 내렸다고 생각해. 그리고 너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야. 사랑하는 가족과 대화하고 싶다는 생각은 당연한 거잖아?”
“그렇죠…….”
“하지만 남의 가족을 위해서 일할 마음은 들지 않지. 다 그럴 거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극소수겠지.”
소행성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피식 웃었다.
“리만은 그 마음을 아주 잘 이용했지. 남을 위해 일하는 척하지만, 본질은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할 뿐이야. 나는 리만이 뭘 원하는지 몰라. 다만, 리만이 나를 이용했다는 건 알아. 있지, 서로 언어가 통한다고 꼭 대화가 통한다는 건 아니더라? 리만을 보면서 난 그 사실을 깨달았어.”
그렇게 중얼거린 소행성은 상냥하게 클라인을 꼭 껴안으며 속삭였다.
“리만이 뭐라 말하든, 네가 원하는 걸 해. 리만은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할 뿐이니까.”
“…….”
클라인이 입을 다물고 생각에 빠지자 소행성은 언제나의 미소로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행성이 떠나가고 클라인은 조용히 생각했다.
리만은 선을 넘는다.
그녀가 하는 일은 선을 넘거나, 선을 박살 내거나.
이 두 가지 일밖에 없다.
클라인은 선을 넘기 두려웠다.
하지만 선 밖의 풍경이 보고 싶었다.
그렇다면 클라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금방 나왔다.
선을 넓히면 된다.
내가 원하는 풍경이 선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선을 넓히면 된다.
이건 예전에 리만과 했었던 대화에서 내렸던 결론과 비슷한 결론이다.
리만이 이야기했던, 모두를 위한 정부를 만들겠다는 계획.
하지만 클라인은 리만의 진짜 목적이 그게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리만은, 클라인과는 조금 다른 무언가를 원하고 있었다.
클라인은 지금껏 자신이 불편하고, 리만의 행동을 보며 조급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이대로 앉아 있으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클라인은 소리쳐야 했다.
만약 소리를 쳐도 다른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면?
그땐, 자신이 직접 움직여야 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에게 알려야 한다.
그래도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앉아서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걸 내가 바랬던 것이라며 선물 받는 것보단 더 났다.
클라인은 이제 용기를 낼 것이다.
잉간이가 자신에게 집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그러니 자신은 용기를 내어서, 잉간이와 함께 집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게 자신이 잉간이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보답이니까.
“클라인~”
“응?”
“슬슬 시작한다, 빨리 와!”
그렇게 클라인이 생각하는 사이, 인공 행성에 생물들을 투입할 준비가 다 끝난 걸까?
클라인은 유리의 부름을 받고 대형 모니터 앞으로 다가갔다.
“지형 디자인은 클라인 양이 해줬습니다. 이야, 진짜 대단하더라고요.”
영상 촬영을 하고 있는지 생명 도감은 허공에 대고 떠들고 있었다.
클라인이 미리 만든 여러 개의 차원항의 지형을 바탕으로 인공행성, 가짜 지구의 지형이 만들어지는 모습이 보인다.
클라인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 장대한 풍경을 관람했고, 생명 도감은 이어서 준비한 생명체들을 인공행성에 풀어놓기 시작했다.
서서히 지구와 흡사한 생태계가 구축되기 시작하고, 클라인은 그 모습을 영화를 지켜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중간에 큰 문제가 하나 발생하고 말았다.
그것도 인간들에.
“어…… 이건…….”
그렇게 되자 그 자리의 모두는 슬쩍 클라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혹시. 이번에도 잉간이 좀…….”
“절대 안 돼요.”
인간들 사이에 생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잉간이를 원하는 것이었다.
클라인으로서는 썩 내키지 않는, 불편한 일이었다.
그래.
클라인은 불편했다.
그래서 용기를 냈다.
“좋아요. 그럼, 저도 잉간이하고 같이 내려갈게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위해.
* * *
“리베리아시여.”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골방 안에서 한 남자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신에게 기도를 올린다.
그 끔찍했던 날이 지나가고, 조금 덜 끔찍한 날이 시작됐다.
그 괴생명체들의 습격으로 대부분의 평민들이 사망했다.
그것만이면 별 상관없었겠지만, 켄토르가의 수장 또한 사망했다.
이건 큰일이었다.
그렇기에 남자는 이 어두컴컴한 골방 안에서 신을 찾았다.
부디 자신들에게 이 상황을 벗어날 힘을 달라고.
남자가 그렇게 기도한 순간.
“힘을”
“원하나?”
낯선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 누구야!”
당황한 남자가 몸을 돌려 정체 모를 침입자를 바라보자, 남자는 기괴한 얼굴을 찾아낼 수 있었다.
마치 두 사람을 억지로 하나로 융합한 듯한 기괴한 얼굴.
“흐, 흐악……?!”
“그 괴물들을”
“잡고 싶지?”
남자가 비명을 지르건 말건, 한 얼굴은 두 개의 목소리로 남자에게 물었다.
그 괴물들이라면 어제의 그걸 말하는 건가?
남자는 공포에 질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괴인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
“아.”
그제야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남자는 조심스럽게 괴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힘을 주겠다니. 설마, 그 괴물들을 죽일 힘을 주겠다는 거요?”
“그래.”
“당연하지.”
그 괴물들을 죽일 힘을 주겠다고?
말도 안 된다.
하지만 만약, 저자가 하는 말이 진짜라면?
어쩌면 이 지옥을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내게 힘을 주시오. 혼자서 그 괴물들을 죽일 힘을……!”
남자는 그렇게 외쳤지만, 괴인은 남자의 말에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혼자서는.”
“괴물을 잡을 수 없어.”
“그게 무슨 소리요?”
남자는 괴인에게 되물었지만, 괴인은 이번엔 대답을 해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혼자서는 무리지만.”
“둘이라면 가능하지.”
그리고 괴인은 천천히 손을 남자의 목으로 뻗었다.
“커헉……?!”
“그러니까.”
“둘이 하나가 되는 거야.”
그때, 남자의 눈에 괴인의 뒤편에 쓰러져 있는 다른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리고 괴인은 자신을 집어 들어 그 사람에게 질질 끌고 가고.
설마, 설마, 설마?
남자는 순식간에 자신에게 닥칠 미래를 떠올리고 도움을 요청하는 비명을 질렀다.
“거기, 아무도 없는가?! 경비병! 경비병! 누가, 좀! 도와……!”
그러자 남자의 비명에 반응하며 집 안의 모두가 외쳤다.
“인류 해방 전선에.”
“합류하라.”
인류 해방 전선에 합류하라.
177화 [생명 도감]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어요
최초에 빛과 땅이 있었다.
그 후에 하늘과 물이 내려와 자리 잡았다.
그 모습이 보기 좋으매, 풀과 나무들을 심었더라.
낮과 밤을 구별하기 위해 땅을 만들고 남은 재료들로 달을 창조하였더라.
물과 땅에서 번성하는 것들을 행성에 풀어놓자 보기 좋았노라.
또한, 땅을 정복하고 땅에 충만하여 새들과 물고기와 짐승들을 다스려 눈에 보이는 변화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인간들을 땅에 보냈노라.
이렇게 만들어진 것들을 보니 퍽 마음에 들어 창조주들은 휴식을 취하며 행성이 돌아가는 모습을 관람하느니라.
“……이게 뭐예요?”
“뭐, 신화 풍으로 창조 설화를 만들어 봤는데. 어때요?”
“구려.”
갑자기 연극 풍의 목소리로 생명 도감이 무언가를 읊는 모습은 상당히 우스꽝스러웠다.
곧바로 유리의 혹평이 날라오자 생명 도감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어. 나도 말하면서 구리다고 생각했거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생명 도감은 단번에 원래의 목소리 톤으로 돌아가서는 재밌는 걸 떠올렸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래도 이런 신화? 같은 걸 만들어서 뿌려놓으면 재밌을 거 같지 않아?”
“너 그런 취향이었어?”
“아니, 사육자 숭배를 원하는 게 아니라. 사육자 숭배를 막으려고 그러는 거지. 여기 있는 인간들은 전부 리베리아 출신이잖아? 이런 걸 만들어서 찾게 해주면 많이 안정될 거 같아서.”
“으음. 굳이 그래야 해?”
“잘못 하다가 차원 파괴자가 태어나는 모습은 보고 싶진 않거든.”
“하긴, 그렇네.”
유리와 생명 도감이 나누는 이야기는 리베리아산 인간들에게서 차원 파괴자가 태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검역항을 통해 대부분의 위험 물질들은 전부 사라졌지만, 리베리아같이 상당히 거대한 규모로 성장한 정보 생명체는 제거하기 힘들다.
제거가 힘들기도 하고 저런 종류의 정보 생명체는 숙주의 믿음이 흔들릴 때 차원 파괴자로 발전하기 쉽다.
“그럼, 적당히 유적이나 유물들을 조성해 주면 되겠지?”
“응. 리베리아 신앙은 연구가 많이 된 편이니까 마력망으로 주문할 수 있을걸?”
유리와 생명 도감이 마력망을 살펴보며 인공행성에 집어넣을 유물들을 살피는 동안 클라인은 생명 도감의 감시 드론이 보내오는 영상을 흥미롭게 관찰했다.
오랜만에 잉간이 말고 다른 인간들이 야생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꽤 흥미가 생긴다.
아무리 마력이 적은 인간들로 골라왔다곤 해도 마력이 없는 인간들은 없다.
그 때문인지 인간들은 능숙하게 마법을 사용해가며 주위에 적응하고 있었다.
대부분 숲속에 정착한 무리들이 많았지만 때때로 강가나 바다를 찾아내 근처에 정착한 무리들이 보인다.
어떻게든 물을 확보하려던 잉간이와는 달리, 마법으로 물을 만들어낼 수 있어서인지 굳이 물을 찾으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정착 초기부터 짐승들과 인간들이 싸우지 않게끔 일부러 짐승과 인간들의 위치를 멀리 떨어트려 놔서일까?
아직까지 다치거나 죽은 인간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완전히 뒤바뀐 주위의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힘들어하거나 종교에 몰두하는 인간들이 조금씩 보인다.
클라인은 멍하니 인간들이 마을을 만들며 적응하는 모습을 지켜봤지만, 이내 고개를 돌렸다.
잉간이도 아닌 다른 인간들이 적응하는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볼 정도로 흥미로운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무언가 이상한 것이 클라인의 눈에 들어온다.
“……응?”
마치, 차원문의 흔적처럼 보이는 잔류 마력들이 행성 이곳저곳에 보인 것이었다.
이 인공행성의 인간들은 차원문을 열 정도의 마력이 없을 텐데?
클라인은 의아하게 생각하며 행성을 둘러봤지만, 아무리 찾아도 차원문을 만들어낸 생명체를 찾을 수 없었다.
“으음…….”
혹시, 근처의 우주를 떠다니던 무언가가 행성에 침입한 것이 아닐까?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최대한 인간 무리를 살펴봤지만, 도저히 무언가 달라진 것을 찾아낼 수 없었다.
이렇게 많은 인간 무리에서 인간 한 개체를 구분하라니,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잘못 본……거겠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었다.
뭐, 만약 외부에서 다른 생명체가 침입한 것이어도 병원성 생명체만 아니면 괜찮다.
애초에 주위의 떠돌이 생명체들이나 야생 생명체들 또한 이용할 수 있게끔 인공 행성을 설계한 것이 아닌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유리와 생명 도감에게로 다가갔다.
“지금 보니까, 벌써 야생 생물들도 찾아오는 거 같던데요? 차원문의 흔적이 행성에서 보였어요.”
“어, 정말? 어디?!”
“몰라요. 차원문이 열리는 모습을 직접 본 게 아니어서.”
“아이고. 영상으로 찍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클라인의 말을 들은 생명 도감이 좋은 장면을 촬영할 기회를 놓쳐서 아쉬운지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빨리 손님이 찾아왔지만, 오히려 빠른 편이 좋을 수도 있겠네요.”
“네?”
“인간들과의 충돌을 생각하면, 일찍 접촉하는 편이 싸움이 일어날 가능성이 적으니까요.”
“하긴, 일정 수준 이상이면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전쟁을 벌일 수도 있으니까.”
세 명이 그런 대화를 나누던 사이, 방 안에서 잠시 잠을 자고 있던 소행성이 방 밖으로 나온다.
“저기, 여기 택배 왔는데?”
“아, 벌써 왔나 보네!”
유리가 소행성의 손에서 유적/유물 세트를 받아 작업용 드론들 안에 집어넣는다.
그러자 생명 도감이 약하게 불만을 표시해 본다.
“조금 상냥하게 다룰 수는 없어?”
“감각 동기화 끄던가, 그럼.”
유리는 생명 도감의 불만을 듣지도 않은 채로 드론을 사출구에 집어넣고 생명 도감을 재촉한다.
생명 도감은 한숨을 내쉬며 작업용 드론을 인공 행성으로 보내어 작업을 시작한다.
행성 곳곳에 가짜 유적들이 만들어진다.
인간들이 정착한 곳 근처에 인간들이 우연히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은 곳 위주로 유적들이 만들어졌다.
예상대로 몇몇 인간들이 정착지 주변으로 나갔다가 유적을 발견한다.
그러자 리베리아와의 연결이 끊겨 우울해져 있던 인간들이 기뻐하는 모습이 보인다.
좋아, 이렇게 되면 차원 파괴자가 탄생할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 행성에서 죽은 생물의 수가 너무 많아지기 전까진 말이다.
자, 이 정도까지 했으니 기초적인 공사는 모두 끝난 거겠지?
앞으로 남은 건 생태계가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멸종하지 않게 잘 보살피는 것뿐이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며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그때.
“어?”
인간 거주지 한 곳에서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뭐지?
뭔가 사고가 일어난 걸까?
쥬튜버들이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지표면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때, 기묘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불타는 마을에 차원문이 열리더니, 어디서 왔는지 모를 인간들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뭐지? 근처에 뭐 문명이 감지되는 곳은 없었는데…….”
생명 도감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의문을 토해냈다.
생명 도감의 말대로 이 인공 행성 주변에는 차원문을 열 만한 인간형 생물체의 문명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는 건 저 아이들은 외우주를 넘어서 차원문을 열었다는 건데, 그게 가능한 일일까?
정확히 이 인공행성의 좌표를 알고 있었거나, 아니면 이 행성에 마커가 부착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여긴 인공행성이다.
마커가 부착되어 있었거나 이곳의 좌표를 알고 있었을 리는 없다.
이곳은 조금 전까지 아무것도 없는 우주의 진공이었으니까.
“일단, 저건…… 막는 게 좋겠죠?”
“네. 이건 막아야죠.”
인공행성을 만들 때 쥬튜버들이 세운 규칙 중의 하나가 생물체들끼리의 싸움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었지만, 외부에서 침입한 생물들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아이고, 아직 관리 시스템이 완전히 설치가 안 됐는데.”
“차원 차폐막부터 칠 걸 그랬네.”
시스템을 사용할 수 없기에 생명 도감이 혀를 차며 직접 마력을 투사해서 차원문을 닫으려 하지만, 좀처럼 차원문이 닫히지 않는다.
“빨리 좀 해봐!”
“아니, 저게 생각보다…….”
끙끙거리는 생명 도감이 답답했는지 유리가 직접 나서서 마력을 흩트리려 하지만, 유리 또한 고개를 갸웃거린다.
“……뭐야. 이거?”
“그치? 생각보다 단단하지?”
“무슨 일이에요?”
“차원문이 생각보다 단단해. 부술 수 없는 건 아닌데, 그렇게 되면…….”
유리는 그렇게 말하며 흘깃 인공 행성을 바라본다.
만약 저 차원문을 부수기 위해 마력을 더욱 투사한다면, 기껏 만든 행성의 생태계가 완전히 개판이 될 것이다.
차원문에만 마력을 집중한다고 해도 차원문이 박살 나며 사방으로 마력이 튈 것이다.
그 이상의 세세한 조작은 정보 오염의 위험이 존재한다.
클라인과 쥬튜버들이 저 차원문을 닫을 방법을 궁리하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이세계의 인간들이 인공 행성의 인간들을 습격한다.
더 늦기 전에 차원문을 닫아야 하는데.
그때, 생명 도감이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짝하고 손뼉을 친다.
“아, 맞다!”
“왜, 뭐 좋은 방법이 떠올랐어?”
“잉간이!”
잉간이?
잉간이가 왜 여기서 나와?
클라인은 의문을 품고 생명 도감을 바라본다.
그러자 생명 도감은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거리며 클라인에게 자신이 생각해낸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니. 자. 들어봐요. 잉간이는 지난번에 스노우 스톤에서 이것저것 한 경험이 있죠?”
“그렇……죠.”
“그래서 사람한테 지시를 받는 게 익숙하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잉간이에게 차원문을 닫게 시키겠다고요?”
“그렇죠. 그거에요. 진짜 아주 간단해요! 잉간이에게 마력 분산기를 쥐여주고 차원문에 던져 넣으라고만 하면 되거든요.”
“싫어요. 잉간이가 다칠 수도 있잖아요. 그냥 시스템 설치가 완료될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거 아니에요?”
“시스템 설치가 완료되려면 저쪽 시간으로는 최소한 100년은 필요해요. 잉간이의 안전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제 드론들을 같이 보낼 생각이거든요.”
“그럼, 그냥 드론만 보내면 되는 거 아니에요?”
“안타깝게도 드론으로는 마력 분산기를 운반할 수가 없어서요.”
지난번에 잉간이가 많이 고생하던 모습을 지켜본 클라인은 잉간이를 저 아래에 내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저 차원문을 닫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이 잉간이의 도움을 받는 것이라는 건 사실이다.
“정보 조작만 못 할 뿐이지 드론을 내려보내면 제가 내려간 것과 거의 비슷한 성능일 거예요. 아바타를 내려보낸 거랑 비슷한 거죠. 그러니까…….”
클라인이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때, 생명 도감의 말이 클라인의 머릿속에 강하게 틀어박힌다.
잠깐만, 생각해보니까 그 방법이 있었네?
“……알겠어요. 잉간이가 받아들인다면, 내려보낼게요.”
“진짜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조건. 이요?”
“저도 아바타를 사용해서 아래에 내려갈게요. 그 정도는 돼야 안심될 거 같아요.”
“아바타요? 그건 조금…….”
생명 도감은 클라인의 아바타를 떠올렸는지, 조금 난감한 기색이다.
클라인이 사용하는 아바타에는 전투용 아바타처럼 악성 정보 차단 기능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클라인은 물러서지 않고 생명 도감을 찌릿 노려봤다.
“안전하다면서요? 그럼, 저도 내려가도 괜찮은 거 아니에요?”
“그렇긴 한데…….”
생명 도감이 여기서 포기하든, 아바타로 지상에 내려가는 것을 허락하든 클라인은 상관없었다.
전자라면 잉간이가 안전해서 좋고, 후자라면 잉간이와의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좋으니까.
생명 도감은 조금 고민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네, 그렇게 하죠!”
“그럼, 잠깐 잉간이를 데리러 갈게요.”
그렇게 말하며 집으로 뛰어가는 클라인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178화 [생명 도감] 차원문을 닫기 위해 투입된 비밀 병기의 정체는?
클라인이 내게 보여준 사진은 아무리 봐도 지구의 사진이었다.
내가 기억하던 것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지만, 시간이 꽤 지났을 테니 내가 기억하던 모습과 달라져 있는 것은 당연하겠지.
주로, 완전히 황무지로 변해있던 곳이 생명의 색으로 바뀐 변화니 그리 나쁜 변화는 아닐 것이다.
정말, 지구의 사진이 맞겠지?
그런데 클라인이 내게 지구의 사진을 전해준 이유가 뭘까?
설마, 나를 지구로 돌려보낼 생각인 걸까?
“:-)”
그렇지만 그런 건 또 아닌 모양이다.
만약 그랬다면 클라인이 저렇게 들떠 있을 리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 사진을 내게 보여준 의도는 정말 뭘까?
내가 의아한 눈빛으로 클라인과 지구의 사진을 번갈아 바라보던 그때, 또 다른 사진이 하늘에서 팔랑거리며 내려왔다.
평소 클라인이 차원항에 열어놓던 차원문과 비슷한 차원문의 사진이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차원항에 열린 차원문과 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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