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 22

“어?”
바깥에 나갔다 돌아와서는 대충 청소를 마무리하고 침대에 드러누워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내 모습이 이상해 보였는지 아리스가 내 몸 위에 엎드린 상태로 질문을 던진다.
나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아리스의 질문에 간단히 대답했다.
“그냥, 클라인에 대해서 좀 생각해 봤어.”
“클라인? 아, 그 커다란 사람?”
“뭐, 그렇지.”
음, 내가 맨날 클라인은 그저 사람이라고 노래를 부르고 다녀서인지 아리스에겐 단순히 큰 사람으로 보이는 건가?
어쨌든 나는 지금까지 생각한 것을 정리하듯 가만히 아리스에게 내 생각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여기에서 꽤 많은 일이 있었잖아?”
“응? 뭐, 그렇지.”
“하늘에서 막 비가 잔뜩 내리기도 하고, 젤리가 산처럼 쌓이기도 하고, 지금처럼 물고기가 내리기도 하고…….”
어째 이렇게 모아 놓고 보니 죄다 뭔가가 엄청나게 떨어지는 것밖에 없는 것 같네?
“내가 밖에 나가서 봤는데, 그. 좀 그렇더라고.”
“뭐가?”
“뭔가, 뭔가 느껴지는 게 있어.”
“그 느껴지는 게 뭔데?”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나는 머릿속에서 떠오르려 하는 한 가지 감상을 끄집어내고자 눈을 감고 끙끙거렸고, 마침내 한 가지 단어를 도출해 낼 수 있었다.
“그래, 허당!”
“허당?”
“허당, 다른 말로 하면 덜렁이.”
아리스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나를 바라봤고, 나는 지금까지 내가 봐 온 클라인의 모습을 설명하며 아리스에게 내가 그런 결론을 내린 이유를 설명하려 했다.
“잘 생각해 봐. 지금까지 일어난 사고들, 죄다 클라인이 무언가를 실수해서 일어난 사고들이잖아?”
“그건…… 모르겠네.”
“다른 의도가 있다고 하는 것보단, 그냥 실수라고 하면 모든 게 해결되잖아?”
누가 의도해서 하늘에서 물고기 비를 내리게 하겠어?
그냥 죄다 실수라고 생각하는 게 더 옳지.
이게 자연현상이라면 뭐 과학적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이곳의 모든 건 클라인이 관리한다.
자연은 실수를 하지 않는다지만, 클라인은 충분히 실수를 할 수 있다.
“실수가 한 번만 있었으면 이런 말도 안 하지.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있었잖아?”
“음…… 그렇긴 하네.”
“그리고, 너도 봤다시피 바깥이 그렇게 깨끗한 편은 아니잖아?”
막 온갖 정보 알갱이가 수북하게 널려 있고, 괴상한 생물체들까지 돌아다니는 환경이다.
그런 환경을 그리 깨끗하다 말할 수는 없지.
청소를 잘 안 하는 건, 나 같은 찐따들의 특징이 아닌가?
뭐, 나처럼 꼭 청소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 닥치면 청소를 하겠지만 그러기 전에는 귀찮으니 하지 않는 거지.
이 정도면 충분한 근거라고 생각하지만, 아리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내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글쎄, 고작 청소 하나 잘 안 되어 있는 걸로 허당이라고 하는 건 너무 과대 해석 아냐?”
“아냐, 무조건 허당이야.”
마지막으로 내가 클라인을 허당이라고 확신하게 만든 것.
그건 바로 지금까지 클라인과 교감하며 느꼈던 감정들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나와 교감할 때 클라인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은 당황감이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지난번에 내가 처음으로 클라인에게 먼저 내 감정을 보냈을 때는 당황하는 감정이 툭툭 떨어져 나오던데.
뭐, 오늘은 당황하는 대신 강렬하게 감정을 뿜어내며 듬직한 모습을 보여 줬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클라인이 허당기가 좀 많다는 건 확실한 것 같다.
아리스는 내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 것 같지만, 애초에 다른 사람을 설득할 생각으로 꺼낸 이야기가 아니니까, 뭐.
그나저나 블랑카와 리키가 슬슬 돌아올 때가 됐는데, 언제쯤 돌아오려나?
일단 치워 둔 물고기들이 상하기 전에 빨리 요리해 놔야겠다.
뭐, 적당히 구워 먹으면 먹지 못할 맛이 나오진 않을 거다.
가시가 많지만 않으면 웬만한 물고기는 구워 먹으면 맛있으니 말이다.
미리 선별해 둔 물고기들을 들고 부엌으로 다가가 손질을 시작하고, 그러는 사이 아리스는 마법으로 헝겊 조각들을 둥둥 띄우고 무언가 인형을 만들기 시작했다.
전에는 그냥 발로 붙잡고 낑낑거리며 만들더니, 마법의 컨트롤이 꽤 능숙해졌는지 이젠 콧노래를 부르면서 인형을 만들 정도다.
그러고 보니 아리스가 인형을 만드는 모습만 보고 그 결과물을 본 적은 없네?
어딘가에 따로 보관해 두고 있는 걸까?
나중에 한번 보여 달라고 해 봐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열심히 생선을 굽고 찌고 있으니, 블랑카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온다.
“잉간……!”
잔뜩 지친 듯한 블랑카의 목소리에 나는 잠시 요리를 멈추고 밖으로 나가 블랑카와 리키를 맞이한다.
“어서 와. 오늘은 어땠……어?”
“오늘, 완전. 월척……!”
밖으로 나온 나를 맞이한 건, 블랑카와 리키 둘이 함께 들어도 벅차 보이는 사이즈의 거대한 생선이었다.
그, 심해에 사는 풍선장어라는 심해어가 있지 않는가?
블랑카와 리키가 사냥한 것은 그 풍선장어를 어마어마한 크기로 늘려 놓은 듯한 괴수였다.
“이걸, 도대체 어디서 잡은 거야?”
“숲에서 난동 부리던 걸 잡았지. 후후. 리키가 독으로 갑피를 녹이고, 내가 마력창으로 단번에 숨통을 끊어 놨다고.”
블랑카는 무용담을 자랑하는 낚시꾼 같은 표정으로 오늘의 수확을 자랑했고, 리키는 아무 말 없이 내 등에 꼭 달라붙었다.
“그나저나, 하늘에서 물고기가 내리는 모습이 보이던데. 무슨 일이야?”
“아마, 클라인의 실수?”
블랑카에게도 하늘에서 물고기가 내리는 모습이 보였던 것인지 블랑카는 곧장 내게 그 일에 대해서 물었고, 나는 간략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을 했다.
그러자 그것만으로 블랑카는 납득하며 마력창을 뽑아내어 풍선장어의 배를 푹 찔렀다.
“블랑카, 지금 뭐 하는……?”
“조금만 기다려 봐,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으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여기서 그걸 하면……!”
간신히 청소해 둔 앞마당에 풍선장어의 피가 흩뿌려지고, 나는 다시 청소를 해야 될 생각에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블랑카는 풍선장어의 몸 안을 이리저리 헤집더니, 양손으로 무언가를 꺼내 왔다.
“이것 좀 봐 봐. 어마어마한 크기야.”
“그게 뭔데?”
“마석. 원래는 더 커다랬는데, 싸우다가 박살 나서 쪼개진 거야.”
“허어…….”
거의 수박만 한 크기인데?
마석이 이 정도로 커질 수가 있었구나?
지금까지 봤던 마석은 아무리 커도 계란 크기를 넘어가지 않았는데.
그 눈벌판에서 봤던 마석도 포함해서 말이다.
“그래서. 저걸 어디다 쓰는데?”
“음. 원래는 여러 마법의 준비에 쓰이는데…….”
“여기선 무쓸모다, 이 말이지?”
“그렇지, 뭐. 그래도 커다라니 이쁘지 않아?”
이쁘긴 한데, 쓸 곳이 없으면 걍 장식물일 뿐이잖아?
뭐, 적당히 푸른 점액 녀석한테나 먹이로 줄까?
아니, 잠깐만.
생각해 보니 저걸 이용해서 마석 발전기를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작은 마석보단 커다란 마석에 들어 있는 마력이 더 많을 것 아냐?
일단은 먼저 그 전기 해파리들로 발전기를 만들 수 있을지 시험해 본 뒤에 시도해 보겠지만 말이다.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리키와 블랑카가 몸을 씻으며 쉬는 사이 나는 마저 요리를 완성했고, 다 같이 둘러 모여 식사를 시작했다.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나는 가볍게 오늘 있었던 일을 리키와 블랑카에게 말했다.
“신님, 아니. 그러니까 네가 클라인을 찔렀다고?”
“클라인이 아니라 클라인과 비슷한 느낌이 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화났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랬어?”
“어…… 클라인을 믿고?”
“참, 간도 크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내가 저지른 짓이 참 위험했던 짓인 것 같다.
클라인을 믿고 저지른 짓이긴 해도 다분히 충동적인 행동이었고, 상처가 나진 않았지만, 만약 그 사람이 다쳤다면 클라인도 곤란한 상황이 됐을 수 있다.
애완동물의 실수는 주인에게 책임을 물으니 말이다.
음, 별생각을 하진 않았는데 진짜 클라인이 곤란해지진 않았겠지?
아무리 싫었다곤 해도 다른 사람을 공격한 건 잘못된 일이니까.
“사과……해야 하려나?”
하지만 어떻게 해야 내가 사과를 한다는 뜻을 전할 수 있지?
일단 서로 말이 통하지 않으니 편지 같은 걸 써서 보낼 수도 없고.
내가 그렇게 고민하던 와중, 리키가 조심스럽게 내게 한 가지 방법을 제안했다.
“그…… 선물을 보내는 건 어때?”
“선물?”
“응. 선물은 일단 호의의 표시니까…… 대충 무슨 뜻인지 알지 않을까?”
“선물이라…….”
이거, 꽤 괜찮은 생각 같은데?
잘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클라인에게 뭔갈 받기만 했지 준 적은 없는 것 같다.
이번에 도와줘서 고맙다는 마음을 담아 클라인에게 하나, 공격해서 미안하다는 뜻으로 누군지 모를 사람에게 하나 보내면 되나?
“선물로는 뭘 보내지, 그럼?”
클라인과 다른 사람이 좋아할 만한 선물.
뭘 보내도 전부 클라인이 가져다 놓은 건데, 뭔가 다른 걸 보내야 하지 않나?
“음…… 요리?”
“요리?”
그때, 블랑카가 내게 요리를 선물하는 건 어떠냐고 제안했다.
요리라, 요리.
원래부터 손수 만든 요리는 선물로 많이 쓰였으니, 적절한 선택이려나?
그럼 클라인에게 선물할 것과 다른 사람에게 선물할 것, 이렇게 두 개를 만들어서 보내면 되려나?
선물은 대충 클라인이 열어 둔 포털을 타고 나와서 놔두면 눈치채고 가져가지 않을까?
“근데, 몸 크기가 그렇게 다른데 내가 만든 요리가 간에 기별이 갈까?”
“신님인데, 그 정도는 알아서 크기를 키우지 않겠어?”
블랑카는 대수롭지 않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블랑카, 요즘에 뭔가 클라인을 대하는 게 전에 비해서 많이 험해진 느낌인데?
그렇지만 블랑카의 말이 맞는 말 같다.
존재를 없던 것으로 해 버릴 수 있는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고작 요리 하나 크게 만들지 못하겠어?
좋아, 뭘 보낼지 결정했으니 바로 행동에 나서자.
나는 적당히 클라인에게 선물할 요리를 만들러 부엌으로 들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요리를 완성했다.
클라인이 무슨 음식을 좋아할지 몰라서 일단 국, 튀김, 구이, 찜. 모든 방식으로 하나씩 만들어 봤다.
완성한 요리를 틈날 때마다 만들어 놓은 보자기로 감싸서 포장하고, 나는 조심스럽게 포털로 향했다.
“그럼, 다녀올게!”
잠깐 텃밭에 다녀오듯이 나는 차원 문을 넘어서 어항 밖으로 나갔다.
아까까지 내가 사용하던 캠핑 도구들이 그대로 있는데, 여기에 놔두면 잘 보이겠지?
나는 그대로 선물을 바닥에 놔두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고, 바닥에 쌓인 물고기들을 보존식으로 말리는 작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물고기들을 손질하던 와중, 갑자기 어항 전체를 뒤흔드는 파장 같은 것이 느껴졌고.
“어?”
한참 작업 중이던 물고기와 바닥에 널브러져 썩기 시작한 물고기들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갑작스러운 사건에 당황한 나는 눈을 끔뻑이며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역시 허당 맞다니까.”
148화 잉간이가 저보다 요리를 더 잘하는 것 같습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물고기들은 허공으로 증발한 것처럼 온데간데없이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문제가 있다면, 바닥에 버려진 물고기들의 사체뿐만이 아니라 먹기 위해서 손질하고 있던 생선들까지 전부 사라졌다는 것이다.
보아하니 분명 실수를 깨닫고 물고기들을 회수하다가 또 실수한 거겠지.
뭐, 그래도 전처럼 먹을 걸 다 털어 가진 않았으니까.
자, 그럼 이제 슬슬 발전기를 만들기 시작해 볼까?
“블랑카, 리키. 오늘 사냥할 때, 무슨 해파리처럼 생긴 게 보이면 가져와 줄 수 있어?”
“해파리? 아, 그…… 흐물흐물한 녀석들?”
“응. 굳이 찾아다닐 필요는 없고, 그냥 보이면 가져와 줘.”
아마 클라인이 물고기들을 싹 치울 때 같이 휘말려서 사라졌을 것 같지만, 그래도 일단 부탁은 해 놓자.
그렇게 블랑카와 리키를 숲으로 보내고, 나는 느긋하게 집안일을 시작했다.
발전기 모형이라도 만들고 싶어도 도저히 자석을 만드는 방법을 모르겠단 말이지.
전기를 흘려 보내면 대부분의 금속이 전자석으로 변한다는 건 알지만, 전기를 만들기 위해 전자석을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아니면, 아리스의 마법을 이용하면 어떻게든 되려나?
마법으로 전기 정도는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으으, 무리야.”
“무리야?”
“응. 도저히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어…….”
그렇지만 아리스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그리 좋은 대답이 아니었다.
보통은 이런 마법도 가능하냐고 물어보면 무조건 가능하다고 말하던데, 아리스가 무리라고 말할 정도라고?
“그, 잉간이 말하는 게 뭔지 알겠거든? 막, 작은 번개를 만들면 되는 거잖아?”
“응, 그렇지. 뭐.”
“다른 마법은 그냥, 내가 막 생각하면 생각하는 대로 이뤄졌거든?”
“그런데?”
“근데, 번개는 아무리 만들어 보려고 해도 허공으로 마력이 흩어지기만 할 뿐이더라…….”
쩝, 아직 아리스에게는 무리인 건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내게 사과하는 아리스를 달래고 나는 오랜만에 반려넷을 켜서 질문을 던졌다.
[본인 1서클인데 번개 마법 익혔다 ㅋㅋㅋㅋ]
-개 쉽네 ㅋㅋ 틀딱들 이게 뭐가 어렵다고 난리야 ㅋㅋ
[댓글]
-응 허언증.
-번개 마법은 적어도 7서클 이상은 돼야 쓰는데 구라 치지 마 ㅋㅋ
-└응~ 나는 익혔어~
-지랄하네. 다른 마법은 대충 마력을 때려 박아서 해결할 수 있지만, 번개 마법은 마력량과 마력 제어가 뒷받침되어야 쓸 수 있음. 1서클에 번개 마법을 쓸 수 있다면 그건 마신의 영역이지 ㅅㅂ
“엄청 어려운 거구나?”
역시, 이렇게 헛소리를 늘어놓으면 다들 알아서 대답을 해 준다니까.
적어도 7서클 이상은 되어야 쓸 수 있다고?
지금 아리스가 몇 서클인진 모르겠지만 7서클은 아니겠지?
뭐, 많아 봐야 3서클, 4서클 정도 되지 않겠어?
그렇다면 마법으로 자석이나 전기를 만든다는 계획도 지금은 불가능하다는 건데.
그렇다면 내게 남은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다.
정보 조작.
어떻게든 어떤 물체에 자석의 정보를 덮어씌운다면 그게 자석이 되는 게 아닐까?
하지만 당연하게도 내가 자석의 정보를 스스로 만들어 낼 정도도 아니고, 설령 자석의 정보가 있더라도 다른 물체에 그 정보를 덮어씌울 수 있을 정도로 정보 조작에 능숙한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지금은 할 수 있는 게 아예 없다는 것이다.
발전기 만들기는 일단 후순위로 미뤄 두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나 하자.
적당히 새롭게 방을 증축할 곳의 벽을 허물고 기틀을 잡는다.
언제까지 다 같이 침대에서 잘 수는 없잖아?
벽을 허물고 나온 그 정체불명의 재료를 가공해서 얇게 펴서 테두리를 두른다.
이제 남은 건 이 테두리를 준비해 둔 재료들로 메꾸는 것뿐이다.
지금껏 시간이 날 때마다 만들어 둔 무점토 벽돌들을 하나씩 쌓아 올린다.
무점토 벽돌 사이에는 역시 무점토를 발라서 단단히 고정시키며 천천히 벽을 쌓는다.
내가 그러는 모습이 퍽 재밌게 보였는지 아리스 또한 어느 순간 스리슬쩍 나를 도와서 벽을 쌓았고, 블랑카와 리키가 돌아오기 전에 지붕을 제외한 벽을 모두 쌓아 올릴 수 있었다.
“으음, 안 무너지겠지?”
“아마도?”
혹시 모르니까 오늘 하루 정도는 들어가지 말고 상황을 봐 볼까?
나는 가볍게 벽을 두드리며 그렇게 생각했고, 그러는 사이 블랑카와 리키가 돌아왔다.
“잉간, 부탁한 대로 모아 오긴 했는데…….”
“아, 있었어?”
“살아 있는 녀석들이 없었어. 미안.”
“아니, 뭐.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놀랍게도 클라인이 해파리를 회수하는 건 깜빡했는지 블랑카가 해파리의 사체들을 여럿 가져왔다.
음, 살아 있는 녀석들이 아니어서 아쉽지만 그래도 이 녀석들을 연구하면 몇 가지 알아낼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보나 마나 이 녀석도 다른 녀석들처럼 마력으로 전기를 만들어 내는 방식일 테니 말이다.
왜, 마법도 있으니 뭔가 연금술 같은 짓도 가능하지 않을까?
오랜만에 만능 사전으로 이것저것 알아봐야겠네.
“응? 잉간, 저긴?”
“아, 새롭게 방을 만들려고. 아무리 그래도 언제까지 다 같이 잘 수는 없잖아?”
“으음…… 딱히 상관없는데.”
“뭐, 굳이 침실로 쓰지 않아도 다른 용도로 써도 되니까.”
리키는 머리를 긁적이며 내 말을 부정했지만,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이윽고 블랑카가 해파리들 말고도 오늘의 수확물을 내놓는데, 뭔가 평소에 비해 양이 적은 느낌이다.
그렇게 생각한 건 블랑카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블랑카가 한숨을 내쉬며 내게 이야기했다.
“평소에 비해 동물들이 별로 보이지 않더라.”
“어제 있었던 일 때문인가?”
“아마 그거 때문인 거 같기는 한데, 뭔가 불길해서.”
“으음…….”
그러고 보니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거 같은데,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더라?
폭우가 내리던 날이었나?
아니, 그때는 오히려 온 숲에서 동물들이 뛰쳐나왔는데?
잠깐, 기억났다.
그 전에.
블랑카와 만나기도 전에…….
쿵.
“무, 무슨 일이지?”
내가 과거를 회상하던 순간, 저 멀리서 나무들이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설마.”
나는 반신반의하는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집 밖으로 나가 숲을 바라봤고, 어두워진 숲을 먹어 치우며 다가오고 있는 거대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야……?”
거대한 푸른 점액이, 다시금 출현한 것이다.
* * *
“이, 이, 이거. 선물. 선물 맞지?”
“저기, 진정해.”
“잉간이가, 잉간이가 나한테 선물 준 거 맞지?”
잉간이가 요리를 놔두고 간 직후, 클라인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는지 허공을 바라보며 멍을 때렸다.
그리고 잠시 후, 모든 상황을 파악한 클라인은 히죽거리며 잉간이의 요리를 회수하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유리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유리는 피식 웃으며 클라인을 차분히 진정시켰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클라인은 쿵쾅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잉간이가 선물을 하다니…….”
“그렇게 기뻐?”
“당연하지! 너도 다곤이 선물하면 엄청 기쁠 거 아냐?”
“그렇긴 한데…….”
유리는 클라인에게 그렇다고 해도 너무 흥분한 것 같다고 말하려다 뒷말을 삼켰다.
유리가 그러는 사이, 클라인은 혼자서 중얼거리며 이것저것 생각하기 시작했다.
“근데, 갑자기 왜 나한테 잉간이가 선물을 준 거지? 뭔가 있었나?”
지난번 잉간이의 룸메이트가 제안해서 일종의 종교 의식을 치른 것처럼 이거도 그런 것일까?
그런 거라면 좀 슬퍼질 거 같은데.
잉간이가 어째서 자신에게 갑자기 선물을 줬는지 고민하는 클라인의 모습을 보며 유리는 가볍게 자신의 추측을 던졌다.
“아까, 애들이 만지는 거에서 빼내 줬다며? 그거 고맙다는 게 아닐까?”
“음, 그런가……?”
“정 궁금하면 먹어 보든가.”
“머, 먹어? 이걸?”
이걸 먹는다고?
정지장에 바로 넣어서 영구 보관을 하는 게 아니라?
먹어서 없애기엔 너무 아까운데?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유리를 바라봤고, 유리는 한숨을 내쉬며 클라인에게 말했다.
“잉간이도 네가 먹어 주는 걸 더 좋아할걸?”
“그, 그런가?”
음, 역시 그런가?
직접 만든 요리를 방치하는 것보단 먹어 주는 게 더 기쁠 테니 말이야.
맞아, 확실히 먹지 않고 내버려 두면 마음이 참 아팠었지.
“그, 그럼 먹는다?”
물질에서 정보를 분리해서 섭취하는 건 오랜만이네.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보자기를 촉수로 풀었고, 그중 하나를 들어 올렸다.
엄청나게 적은 정보여서 그리 배부르거나 맛이 느껴지진 않겠지만, 잉간이가 만든 음식이니까.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잉간이의 요리를 삼켰고, 예상치 못한 맛에 당황했다.
“이건…….”
“왜? 어떤데?”
“……엄청 농후해.”
겉으로 보이는 정보량과 달리, 잉간이가 만든 요리에는 정보가 무지막지하게 압축되어 있었다.
마치 소금 한 조각에 바다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듯한 느낌?
그런 비유가 떠오를 정도로 잉간이의 요리에는 수많은 정보들이 농축되어 있었다.
재료가 특별한 것도 아닌데, 어째서 이 정도로 정보들이 압축된 걸까?
그리고 그 이유는, 클라인의 입속에서 분해되는 정보들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요리를 만들 때에 그 사람의 마음이 담긴다고 하는데, 그 말이 인간한테도 적용될 줄은 몰랐다.
잉간이가 요리를 하며 느낀 감정이 몸으로 퍼지며 클라인을 따듯하게 만든다.요리에 들어 있는 감정은 정말 풍부했지만 간략하게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었다.
클라인에 대한 호의와 고마움, 그리고 누군가에 대한 미안함.
자기 자신만을 위해 만들어진 요리를 먹는다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이었구나.
클라인은 다시금 잉간이에게서 새로운 사실을 배웠다.
클라인이 미소를 지으며 잉간이의 요리를 음미하고 있자 무슨 맛인지 궁금해진 걸까?
유리가 은근슬쩍 촉수를 잉간이의 요리로 뻗으며 외쳤다.
“어디, 도대체 무슨 맛이길래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그렇게 말하며 잉간이의 요리를 한 입 먹은 유리의 눈이 순식간에 크게 뜨인다.
그러고는 할 말을 잃었다는 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너보다 더 잘하는데?”
“이, 잉간이가 요리를 잘하는 거지, 내가 못하는 게 아니거든?”
“아니. 잉간이가 요리를 잘하기도 하고, 네가 요리를 못하기도 하는 거지.”
“으으…….”
그나저나 나에 대한 호의와 고마움은 무엇인지 이해하겠는데, 누군가에 대한 미안함은 무엇일까?
클라인은 고개를 갸웃하며 잉간이의 감정의 대상을 떠올리다가 손뼉을 마주치며 결론을 내렸다.
“아, 조카들.”
설마, 잉간이가 아이를 살짝 공격했다고 미안해하는 걸까?
그렇다면 이 요리는 클라인에게 보내는 감사 인사인 동시에, 조카에게 보내는 사과인 셈이다.
진짜, 잉간이가 사과할 필요는 없는데.
오히려 잉간이가 사과를 받아야 하는데.
클라인은 그런 잉간이의 마음씨에 쓴웃음을 지었다.
잉간이에 대해서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더욱 잉간이가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진짜, 이렇게 귀엽고 착한 아이를 이 세상의 그 누가 싫어할까?
클라인은 그렇게 잉간이를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자, 쉴 만큼 쉬었으니 다시 시작!”
“아, 응!”
“진짜. 왜 레시피대로 요리해도 자꾸 쓴맛이 섞이는지 모르겠는데, 안 되면 될 때까지 하자고!”
“응!”
그렇게 클라인은 유리의 지도를 받아서 다시 요리에 도전했지만, 결국 제대로 된 요리를 완성할 수 없었다.
어째서인지 자꾸만 쓴맛이 묻어 나오는 요리가 탄생하는 것이었다.
“으으…….”
“좀 더 연습하면 나아질 거야. 처음에 비해서 엄청 나아졌잖아?”
“그래도 못 먹을 수준인 건 마찬가지잖아…….”
“아냐, 꾹 참으면 먹을 수…….”
“먹을 수?”
“……있을걸?”
“으으으…….”
결국 수제 요리를 대접하겠단 계획은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유리가 직접 만든 요리를 내놓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그렇게 요리가 완성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헤론과 조카들이 돌아왔다.
“어머, 이게 다 뭐야?”
“배고프실까 봐 만들어 봤어요. 이모!”
“어머, 이거 고맙네.”
헤론은 웃으면서 유리의 안내에 따라 발걸음을 옮겼고, 클라인은 약간 시무룩해진 상태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하지만, 유리의 안내를 따라 식탁으로 향하던 헤론은 갑자기 클라인을 이끌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이, 이모?”
“역시, 이게 네가 만든 거지?”
“으…… 먹지 마. 내가 먹어도 못 먹을 수준이니까.”
헤론은 클라인이 연습한 요리들을 보며 방긋 미소 지었고, 클라인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작게 웅얼거렸다.
하지만 헤론은 클라인의 말을 듣지도 않고 클라인이 만든 요리로 손을 옮기더니, 그대로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이, 이모?”
“음. 이 정도면 먹을 만한데?”
거짓말.
내가 먹어도 먹기 힘든 수준이었는데.
뻔한 거짓말이었지만 클라인은 말없이 헤론의 어깨에 기대며 속삭였다.
“늘 고마워.”
“알면 됐다.”
이윽고 클라인과 헤론은 거실로 돌아와 유리와 아이들과 함께 다 같이 식사를 끝마쳤고, 식사를 끝마치자 아이들이 쭈뼛거리며 클라인의 앞에 섰다.
“저기, 언니…….”
“응?”
아이들은 슬쩍 헤론을 바라보더니, 헤론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자 우물쭈물하며 클라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누나 말 안 듣고 마음대로 행동해서 미안해……. 그리고 잉간이 만지면 안 된다고 했는데 만져서 미안해……. 그리고 또…….”
서툴지만 진심을 담은 아이들의 사과에 클라인은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괜찮아. 아직 어리니까, 그럴 수도 있지.”
“미안…….”
“사과는 내가 아니라 잉간이에게 해야지.”
“잉간이한테 미안해…….”
클라인은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잉간이에게 서투르게 사과하던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첫 관계가 좋지 않더라도, 사과하고, 노력하면 좋은 관계가 될 수 있다.
이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좋아. 잉간이한테는 이 언니가 잘 전달해 줄게.”
“진짜?”
“응. 그리고 잉간이도 아프게 해서 미안하대.”
클라인은 그렇게 말하며 잉간이가 만든 요리를 아이들에게 건넸다.
“이건?”
“잉간이가 미안하다면서 준 선물이야.”
“잉간이가 준 거야? 우와!”
아이답게 조카들은 순식간에 표정을 밝게 바꾸며 잉간이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한바탕 서로 사과를 주고받고, 마침내 이모와 조카들이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그럼, 몸 건강하게 있어야 한다? 너무 냉동식품만 먹지 말고!”
“알았어, 이모. 너무 걱정하지 마.”
그렇게 클라인의 친척들이 클라인의 집에서 떠나가고, 유리 또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소행성 님한테 먼저 연락하고! 알았지?”
“으, 응. 그럴게.”
그렇게 유리마저 클라인에게 당부를 전하며 떠나가고, 클라인은 갑자기 조용해진 듯한 집 안에 앉아서 정적을 즐겼다.
“으아…….”
오늘은 참 시끄럽고 힘든 하루였다.
하지만, 그리 나쁜 하루는 아니다.
149화 케이크를 먹듯 차원항을 쉽게 청소하는 법
거대한 점액들이 밀려오고, 나는 순간적으로 움찔 몸을 굳히며 마른침을 삼킨다.
내가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죽음을 느꼈던 상대여서일까?
나는 스멀스멀 공포감이 차오르는 걸 느끼며 가만히 중얼거렸다.
“이 정도 속도면. 얼마 안 걸리겠는데?”
숲에 동물들이 보이지 않던 건 다 저 녀석 때문이었나?
그때처럼 하늘에서 떨어진 물고기들을 먹어치우고 이 정도까지 성장한 것이겠지.
그때 밀려오던 점액의 속도를 생각해보면, 지금은 아마 다른 먹거리를 먹어치우느라 거의 움직이지 않는 상태일 것이다.
아직 저 녀석이 오기까진 시간이 남아 있으니 그 전에 대비해야 한다.
하지만 뭘 대비해야 하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 괴물을 막을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냥, 도망치는 게 맞나?
도망쳐서 클라인이 이 상황을 눈치챌 때까지 버티면 지난번처럼 도와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가만히 제자리에 서 있던 그 순간.
“잉간.”
블랑카가 가만히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 저 정도는 나 혼자서도 충분하니까.”
나를 안심시키려는 것인지 블랑카는 과장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렇게 말했고, 나는 푹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고마워.”
그래.
그때와는 다르다.
내 마음가짐도, 친구들도, 모든 것이 그때보다 나아졌다.
그러니 이번에는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지레 겁먹고 도망치지 말고, 제대로 맞서자.
평생 클라인의 도움만 받는 건 조금 볼썽사납잖아?
“그럼, 일단 고지대로? 아니면…….”
“집을 지키는 게 좋지 않겠어? 전부 다 처음부터 만들긴 힘들 거 같은데.”
“……그렇네.”
지금은 그때와 달리 잃을 것도 많다.
절대로 물러설 수 없다.
그렇다면 집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만들어야 하는데, 저 정도 크기의 점액이라면 물리적 방어선은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인다.
거대한 장벽을 세울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리키. 저 녀석에 효과적인 독이 있을 거 같아?”
“있기야 할 텐데, 크기가 너무 커서 효과를 보려면 어마어마한 양을 때려 붓거나 그만큼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할 거야.”
쩝.
리키의 독으로 일종의 경계선을 긋는 건 안 되려나?
리키 또한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듯 씨익 웃으며 뒷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하지만?”
“에너지 드레인을 적절히 이용한다면, 꽤 오랜 시간을 벌 수 있을 거야.”
“에너지 드레인?”
아, 그러고 보니 리키는 뱀하고 토끼만 섞인 게 아니라 뭔 흡혈귀? 같은 것도 섞였었지?
“지성이 없는 생물들은 본능적으로 에너지 드레인이 느껴지는 구역을 피하거든. 지난번에 마을 주민들에게 한 것처럼 독액에 에너지 드레인을 부여하면 꽤 오래 시간을 끌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대충 허브로 벌레를 퇴치하는 것처럼 리키의 독액의 에너지 드레인으로 저 점액이 다가오는 걸 늦추자는 거지?
주위에 다른 먹을 게 있다면 굳이 독액을 뚫고 들어오려 하지 않을 테니, 말 그대로 모든 게 사라지기 전까진 일종의 안전 구역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시간을 번다면, 우리가 날릴 수 있는 최강의 공격을 날릴 수 있겠지.
리키가 독액을 뿌리려 바쁘게 움직이고, 블랑카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마력을 모으던 그때, 어딘가 분주하게 오고 가며 무언갈 찾고 있는 아리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리스. 뭘 찾는 거야?”
“어, 파랑이가 안 보여서…….”
“파랑이?”
아, 그 조그마한 인간형의 푸른 점액을 말하는 건가?
마지막으로 봤던 건 물고기의 시체에서 배부르게 식사를 하는 모습이었는데, 그 뒤로 진짜 모습을 본 적이 없네?
설마 하지만, 그 푸른 점액이 지금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커다란 점액과 동일 개체는 아니겠지?
아리스는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집 안 이곳저곳을 뒤져도 점액이 나오지 않자, 시무룩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점액이 집 나갔나 봐…….”
“내가 먹을 거 너무 많이 주지 말라고 했지?”
“으으, 미안.”
“농담이야. 뭐, 어딘가에 잘 숨어 있겠지.”
지금까지 그 녀석이 내게 보여 주던 모습은 꽤 기묘하면서 예사롭지 않던 모습이었다.
마석을 아리스 덕분에 잔뜩 섭취해서일까?
뭔가 묘하게 점점 지능이 생기는 느낌이었는데.
단순한 착각이었나?
“그럼, 나도 블랑카 언니 곁으로 갈게!”
“응, 그래.”
아리스는 더 이상 점액을 찾는 데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인지 블랑카의 곁으로 날아가 블랑카를 따라 하며 마력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푸른 알갱이와 달빛 알갱이들이 서로 뒤섞이는 신비한 모습이 내 눈을 사로잡지만, 저걸 보고만 있을 시간은 없다.
좋아, 그럼 난 이제 뭘 하면 되지?
“……없네?”
“왕!”
이상한 짓 하지 말고 그냥 얌전히 있으라는 듯 에포나가 꼬리로 침대를 두드리며 나를 부른다.
아니, 그래도 뭔가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그래, 상태 창을 만든다면 꽤 도움이 될 거 같은데?
“왕!”
그렇지만 에포나는 얌전히 있으라는 듯 촉수를 뻗어 나를 붙잡고 침대에 던져 넣었고, 나는 가만히 에포나를 바라보며 침대에 털썩 쓰러졌다.
“왕.”
그때, 바들바들 떨며 점액을 두려워하던 에포나는 이젠 전혀 점액이 두려운 것 같지 않다.
아마, 지금 상태의 에포나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 인간 농장에서처럼 이 어항을 단숨에 깨트려 버릴 수 있겠지.
나 또한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했지만, 에포나나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거의 제자리걸음 수준이다.
클라인에 비교한다면 더더욱 그렇고.
내가 성장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때와 사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닐까?
바뀐 건 오로지 나를 둘러싼 상황인 게 아닐까?
갑작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며 기분이 살짝 울적해지려 하던 그때, 에포나가 가볍게 내 코끝을 깨문다.
“왕!”
걱정하지 말라고.
나는 충분히 성장했다고.
그렇게 위로하는 듯한 에포나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으며 에포나를 쓰다듬었다.
그래, 원래부터 전투는 내 담당이 아니었잖아?
단지 서로 성장한 분야가 다를 뿐이다.
응, 그럴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울적해진 기분을 몰아내던 와중, 리키가 독액을 다 뿌리고 왔는지 집 안으로 들어왔다.
“다 끝냈어.”
“수고했어. 아리스하고 블랑카는 마력을 모으는 중이야.”
“음, 그럼 나도 마력을 모으고 있을게.”
“그래?”
리키의 말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러자 리키가 순식간에 내게 미끄러지듯 다가와 나를 온몸으로 꼭 껴안았다.
“리키?”
“마력을 모으는 중이야. 말 걸지 마.”
리키는 헤실헤실 웃으며 내 뺨에 얼굴을 가져대며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리키에게 붙잡혀서 따끈한 생체 난로 역할을 하는 와중, 나무들이 우지끈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슬슬 오는 건가?”
집 밖으로 나가 저 멀리를 살펴보자 나무들을 부러트리며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거대한 점액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하늘에서 은은하게 비치는 달빛 사이로 푸른 점액 사이에 마치 거대한 심장 같은 것이 맥동 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 작은 푸른 점액이 보여 주던 모습을 생각하면 아마 저게 거대 점액의 코어나 핵 같은 부분일 것이다.
저길 단번에 박살 낸다면 푸른 점액을 무력화시키는 것도 가능하겠지.
그걸 위해서 지금 아리스와 블랑카가 마력을 모으며 푸른 점액이 다가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
푸른 점액은 파도가 밀려오는 것마냥 멈추지 않고 모든 것을 먹어치우며 이쪽으로 끊임없이 다가왔다.
그리고 마침내, 푸른 점액은 리키가 뿌려 놓은 독액들 앞에 당도했다.
과연, 정말로 효과가 있을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푸른 점액이 독액을 건너가려는 듯 움직였다.
하지만, 보랏빛의 독액이 푸른 점액의 몸에 닿자 움찔 움츠러들며 뒤로 물러났다.
마치 달팽이가 전기 울타리에 부딪혀서 움찔 몸을 뒤로 빼는 모습을 보는 것 같다.
푸른 점액은 지나갈 길을 찾으려는지 독액의 경계선 전방위에서 몸을 부딪혀 왔지만, 아직까지 리키의 독액이 뚫린 부분은 보이지 않는다.
좋아, 이대로라면 더 많은 마력을 모을 때까지 버틸 수 있어.
슬쩍 아리스와 블랑카의 모습을 바라보자 지난번에 잡아 왔던 풍선장어의 몸 안에서 나온 거대 마석에 마력을 불어넣으며 커다란 한 방을 준비한다.
좀 더 시간을 끌면 끌수록 더 강력한 한 방을 때려 박을 수 있다.
하지만 영원히 버틸 수는 없을 것 같아 보이는 것이, 푸른 점액이 독액에 닿을 때마다 조금씩 독액들이 푸른 점액의 몸 안으로 흡수되어 간다.
독액을 흡수한 점액의 몸은 검게 물들며 괴사하지만, 곧바로 다시 상처가 재생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 한 방으로 단번에 잡을 수 있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으면 금세 재생해서 덤벼들 것이다.
어느 정도까지 마력을 모아야 단번에 거대 점액을 해치울 수 있을지 모르겠으니, 방어선이 뚫리는 순간 공격을 시작할 계획이다.
긴장된 표정으로 경계선을 두드리는 거대 점액을 바라보던 그때, 무언가 기묘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응?”
다른 점액들보다 확연하게 더 색이 짙은 부분의 점액이 꿈틀거리며 가장자리로 향하더니, 사람의 형태를 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으, 으아!”
아리스가 그토록 찾던 파랑이다.
파랑이는 주위의 눈치를 살피더니, 그대로 거대 점액에서 분열하여 빠져나오더니, 독액 안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들어왔다.
“으아…….”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지 파랑이는 몸을 부르르 떨며 독액을 빠져나와 경계선 안쪽으로 들어왔다.
무사히 독액을 건널 수 있어서 만족했던 걸까?
파랑이는 독액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고, 홱 고개를 돌리고는 자신을 관찰하고 있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파랑이는 당황하며 허둥지둥하다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움켜쥐었다.
진짜,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내가 의아함을 품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파랑이는 흘낏 거대 점액을 바라보더니 각오를 다졌다는 듯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내 발로 가볍게 걷어차일 크기의 파랑이가 내 앞에 멈춰 서더니, 숨을 들이마시며 내게 덤벼들려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우아, 갸오!”
나를 위협하려는 듯 파랑이는 계속해서 손을 앞으로 뻗으며 으르렁거렸고, 나는 가만히 파랑이의 얼굴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딱밤을 날렸다.
“우아!”
점액인데도 통증을 느끼는 걸까?
파랑이는 인상을 찡그리며 머리를 꾹 누르더니, 눈을 내리깔고 내 시선을 피하며 쭈뼛대기 시작했다.
“너 뭐 하냐?”
그 기묘한 모습에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나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고.
“제, 제송해오!”
“응?”
이어진 파랑이의 대답은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잠깐, 너 말할 수 있는 거였어?
* * *
“흐아…… 이제 뒷수습해야지…….”
조카들이 모두 떠나가고 클라인은 한숨을 내쉬며 조카들이 엉망진창으로 어지럽힌 차원항 내부를 청소하기 시작했다.
대충 과잉 양분들을 죄다 치워 버리고, 살아남은 녀석들을 바다에 풀어 주자.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서둘러 바다 생물들을 바다로 옮겼고, 그러느라 차원항 한구석에서 꿈틀거리는 물체를 눈치채지 못했다.
클라인이 슬라임들이 대량으로 번식했다는 사실을 눈치챈 건, 이미 늦은 뒤였다.
“어, 어?”
순식간에 슬라임들은 차원항 전체를 뒤덮기 시작했고, 클라인은 서둘러 슬라임 제거기를 가지러 뛰어갔다.
150화 그 어리숙한 잉간이가 맞냐……? 잉간이는 진짜 전설이다…….
“제, 제송해오!!”
말했다.
어눌한 말투지만, 분명히 말했다.
내 말을 알아듣는 기미는 보였어도, 말을 할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너, 말할 수 있었어?”
내가 당황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파랑이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것인지 흡 하고 입을 틀어막는다.
그러고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지만, 이미 말하는 모습을 들킨 지 오래다.
“말할 수 있었으면, 왜 지금까지 말 안 했냐?”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내가 어이없다는 듯 그렇게 중얼거리자, 파랑이는 다시 한번 시무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죄송해요…….”
“아니, 미안할 것까지야. 그래서, 진짜 왜 말하지 않던 건데?”
“그…… 말할 수 있게 된 건 최근이었고…….”
“최근이었고?”
“드, 들키면 죽는 게 아닐까, 싶어서…….”
들키면 죽는 게 아닐까 싶었다고?
왜 그런 생각을 한 거지?
내가 파랑이의 대답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때, 내 뒤를 뒤따라 나온 리키가 가만히 바닥을 바라보며 뭐라 중얼거리는 내 모습이 이상했는지 내 쪽으로 다가온다.
“잉간, 뭐 해?”
“아, 그게…….”
내게 가까이 다가온 리키는 파랑이의 모습을 발견했고, 짤막하게 탄성을 질렀다.
“아, 얘는 아리스가…….”
“응. 걔야.”
파랑이는 리키가 이쪽으로 다가오자 잽싸게 리키 쪽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응?”
리키는 갑자기 파랑이가 자신에게 달려올 줄 몰랐는지 의아한 목소리를 냈고, 파랑이는 리키의 털에 몸을 숨기고는 내게 소리쳤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진짜, 그때 일은 진짜 죄송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아니, 그러니까 뭐가 그렇게 죄송하냐고…….”
그때, 문득 내 머릿속에 그 거대 점액이 폭주하던 날 마석을 먹어치우고 인간의 형상을 띠게 된 점액이 떠오르고, 나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파랑이에게 물었다.
“설마, 그때 그 녀석이 너냐?”
“네, 네! 진짜. 지금 상태로 그때로 돌아가면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 진짜로요! 그때는, 어. 진짜, 그냥 식욕대로 움직였거든요!”
그때의 그 녀석은 그 기묘한 청소기에 빨려 들어가서 죽고, 분체인지 뭔지만 혼자 살아남아 숲속에서 번식한 것들 중의 하나가 이 녀석인 줄 알았는데.
이 녀석이 그때 그 녀석이었어?
동굴 속에서 나를 잡아먹으려고 했던 점액의 모습이 떠오르고, 그에 따라 저절로 표정이 굳어진 모양이다.
파랑이가 움찔 몸을 굳히며 리키의 털 속으로 파고든다.
상당히 오래된 일이기도 하고, 그때의 본능대로 움직이던 점액과 이렇게 감정을 느끼고, 나와 대화하는 파랑이가 다른 존재라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어서 그다지 화가 나진 않지만, 저렇게까지 저자세로 나오는 모습을 보니 살짝 화가 나는 것 같기도 하네?
“말로만 미안하다 할 거야?”
“네? 아뇨, 당연히 아니에요. 어, 음. 그러니까…….”
“몸으로 갚아.”
“……네?”
“몸으로 갚으라고.”
“이, 잉간?”
내가 제시한 사과 방법에 파랑이가 말문을 잃고, 어째서인지 리키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나를 타박한다.
그렇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고 파랑이에게 이 조건을 계속 밀어붙인다.
“왜, 가지고 있는 게 몸 밖에 없으니 몸으로 갚아야지. 그거 말곤 뭐 다른 방법이 없잖아?”
“그, 그렇긴 해도…….”
“마, 맞아. 잉간. 우, 우리가 있는데 부족하진 않잖아?”
“너희가 있다곤 해도, 지금은 엄청 부족한 상황이니까. 이 녀석한테라도 도움을 받아야지.”
“부, 부족하다고?”
암, 부족하고말고.
이 녀석이 어느 정도까지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리스가 그렇게나 마석을 먹여 댔으니 마력이 아예 없진 않을 거 아냐?
만약 아리스와 블랑카의 공격이 실패하면 그때는 이 녀석의 도움이라도 절실할 것이다.
“그래서? 너는 뭘 할 수 있는데?”
“어, 저는. 저는…….”
내 질문에 파랑이는 곰곰이 고민하다가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뭐, 뭘 시켜도 다 할 수 있어요! 마음대로 몸을 변형할 수 있어서…….”
“지금 크기보다 더 커질 수도 있어?”
“네? 아, 그렇죠. 지금 크기는 별로 마음에 안 드시겠죠…….”
얘는 왜 더 커질 수 있냐고 묻는데 내 취향 이야기가 나와?
“그래서, 더 커질 수 있는 거야?”
“네. 네. 가능해요!”
“얼마나?”
“어…… 어느 정도 크기까지 바라시는데요?”
“음, 저 녀석 정도?”
나는 손가락으로 지금도 경계선을 넘어오려 발악하는 거대 점액을 가리켰고, 파랑이는 순간 경악하며 중얼거렸다.
“취, 취향이 독특하시네요.”
“취향? 무슨 소리야?”
“네?”
“저거랑 싸우려면 일단 최소한 크기는 비등해야지.”
“아, 아!”
그제서야 파랑이는 내 말을 제대로 이해했다는 듯 탄성을 내질렀다.
“모, 몸으로 갚으라는 게 저보고 일하라는 거였어요?”
“당연하지. 그럼 뭔지 알았는데?”
“그, 그건 말 못 해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길래 말을 못 한다는 거야?
어찌 됐든, 파랑이는 거대 점액을 바라보며 우물쭈물거렸다.
“그, 그런데요. 쟤랑 싸우라고 시키실 거면, 문제가 좀 있어서요…….”
“문제?”
“아무래도? 저랑 비슷한, 그러니까 저랑 쟤랑 둘 다 점액이잖아요? 거기에다가 쟤는 엄청 많이 모여서 막 노는 애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그러니까요. 쟤들이 너무 많아서, 자꾸만 저한테 목소리? 같은 걸 보낸단 말이에요. 그냥 무시할 수도 있긴 한데, 직접 쟤네들을 공격하는 건 뭔가 꺼려진다고 해야 하나……?”
그러니까 파랑이가 지금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러니까, 일하기 싫다?”
“아뇨, 아뇨, 아니에요! 그런 건 진짜 아니에요!”
“그럼, 뭔데?”
“진짜. 본능적? 솔직히 저는 쟤네들 동족이라고 생각 안 하거든요? 그런데도 막, 집중하지 않으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몸이 움직인단 말이에요. 아마, 쟤네들을 제가 공격하려고 하면 막 허공을 때린다거나 그럴 거예요. 제 입장에서 보면 제 몸을 제가 때리는 것과 비슷하니까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그, 먼저 쟤네들을 공격해서 수를 줄여 놓으시면…… 아마 그땐 목소리를 무시하고 행동할 수 있을 거 같은데…….”
파랑이는 그렇게 말하며 내 눈치를 살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파랑이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
“아, 알겠습니당!”
파랑이는 반색하며 내게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한 가지 의문을 품었다.
저 녀석은 도대체 왜 나를 자꾸 무서워하는 걸까?
맨 처음에 청소기에 빨려 들어가는 끔찍한 경험을 했다고 쳐도, 그건 내가 아니라 클라인이 한 짓이잖아?
뭐, 음식을 먹다가 탈이 나서 그 후로 그 음식을 입에도 대지 않게 된 것과 비슷한 걸까?
그렇게 내가 파랑이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리키는 어느 순간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바닥을 푹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꼬리를 입에 물고 몸을 배배 꼬며 뭔가 중얼거리는 것이 뭔가 이상해 보인다.
리키는 또 왜 저러지?
“한번에…… 몸 안팎을…….”
“리키, 무슨 일 있어?”
“어, 응?”
내가 말을 걸자 리키는 화들짝 잠에서 깨어나듯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봤다.
“아냐. 음. 그냥 잠깐 좀 생각할 게 있어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했는데?”
“그, 그건 말 못 해…….”
왜 둘 다 내겐 뭔 생각을 했는지 말 못 하는 걸까?
조금 전과는 달리 이 상황에서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눌 정도로 나는 상당히 침착해져 있었다.
그렇게 침착하게 에포나를 쓰다듬으며 거대 점액이 경계선을 넘어오는 순간만을 기다린다.
그리고 마침내, 계속된 거대 점액의 공격에 독액의 저지선이 뚫리고, 거대 점액이 해일처럼 밀려 들어온다.
그리고 그 순간만을 노리고 있던 블랑카와 아리스는.
“해방.”
마석에 응축시킨 마력과 스스로가 한 번에 뿜어낼 수 있는 모든 마력을 총동원해 거대한 마력의 급류를 쏘아냈다.
아직 아리스의 마력 제어가 확실하지 않고, 어중간하게 마력을 변환하기보단 그냥 통째로 마력을 들이붓는 게 더 위력이 강할 것이라는 판단에서 내린 결정.
과연, 이 일격으로 거대 점액은 움직임을 멈출까?
압도적인 마력이 말 그대로 거대 점액을 증발시키며 핵을 향해 나아가고, 곧장 그대로 거대 점액의 핵을 관통했다.
“좋아……!”
화력이 부족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화력은 넘치고도 남은 모양이다.
좋아, 그렇다면 이제 남은 점액들은 서서히 붕괴되어야 할 텐데……?
“어라?”
그렇지만 거대 점액은 핵을 꿰뚫리고 몸의 대부분을 잃었음에도 여전히 꿈틀거리며 조심스럽게 몸을 재생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반쪽 넘게 날아가 버린 핵마저 천천히 복구되는 기미가 보인다.
“화력이 부족했나……?”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쉽다는 듯 중얼거리지만, 리키는 고개를 저으며 내 추측을 부정했다.
“아니, 화력은 충분했어. 다만 마지막 순간에 저 녀석이 회피했을 뿐이야.”
“회피했다고?”
“마력이 닿기 직전, 핵을 옆으로 움직여서 직격을 피했어.”
아이고, 그래서 숨통을 단숨에 끊어 놓지 못한 거구나.
블랑카와 아리스는 방금의 일격을 날리고 마력을 완전히 소모했는지 지쳐서 헐떡대고 있다.
블랑카와 아리스는 더 이상의 전투는 불가능할 듯 보이고.
그렇다면, 약속한 대로 파랑이가 일할 시간이다.
“저, 저기. 미안!”
파랑이는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사과를 던지며 조심스럽게 거대 점액의 곁으로 다가가 손을 올리고.
그대로 거대 점액의 몸을 잠식해 나가기 시작했다.
약간 투명하던 거대 점액의 점체가 파랑이의 푸른 점체로 바뀌어가고, 거대 점액은 벗어나려는 듯 발버둥을 치지만 파랑이의 손길을 벗어날 수는 없다.
이윽고 마침내 파랑이가 장악한 푸른 점액들이 반파된 핵에 도달하고, 그때 처음으로 파랑이는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듯한 신음을 내뱉었다.
“으…….”
“무슨 일이야?”
“저항이…… 너무 거세서. 흡수하기 힘들어요…….”
“저항이 너무 거세다고?”
파랑이의 말에 거대 점액의 핵을 자세히 바라보자, 내 눈에 무언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응?”
자신의 정보를 덮어쓰고 있는 파랑이와, 파랑이의 정보를 밀어내고 역으로 파랑이의 몸에 자신의 정보를 덮어쓰려고 하는 거대 점액의 줄다리기가 말이다.
리키가 뭔가 독으로 도와주고 싶어도, 독은 피아를 가리지 않고 모두 공격하기 때문에 자칫하면 파랑이가 더 큰 데미지를 받을 수 있다.
이런,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그렇게 고민하며 인상을 찌푸린 순간.
“왕!”
“에포나?”
에포나가 지금이라는 듯 짤막하게 짖으며 내게 정보 덩어리를 토해냈다.
그런 에포나의 행동을 보고, 나는 내가 뭘 해야 할지 깨달았다.
“상태 창.”
언제나 그렇듯 내게 힘을 내게 해주는 마법의 주문을 외우고.
“조금 따가울 거야.”
“네?”
그대로 파랑이의 점체에 상태 창을 박아 넣었다.
파랑이와 점액이 서로 다툼을 벌이는 모습을 보며 뭔가 깨달은 게 있다.
뭔가, 정보를 덮어쓰고 추출하는 방법에 힌트를 얻은 것 같다.
나는 곧장 방금 얻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파랑이의 몸에서 파랑이가 덮어씌우고자 하는 정보를 추출해냈다.
그러고는, 상태 창으로 그 정보들을 복사하여 그대로 거대 점액의 핵에 상태 창을 꽂아 넣었다.
파랑이의 정보들이 거대 점액의 핵에 덮어 씌워지며 파랑이가 거대 점액의 몸을 장악하는 데 도움을 주자 교착 상태에 빠져있던 파랑이가 단숨에 밀고 올라온다,
그리고 마침내, 충분히 거대 점액의 몸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 걸까?
“흡……!”
파랑이가 힘을 주는 듯한 신음 소리를 내더니, 그대로 거대 점액의 몸이 수축하며 핵을 짜부라트려 버렸다.
그러자 파랑이가 장악하지 않은 나머지 부분의 점액들이 스르르 녹아서 사라지기 시작한다.
나는 잠시 동안 멍하니 점액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봤고,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히죽 웃었다.
예전에는 건드리지도 못하던 위기를 클라인의 도움 없이 이겨냈다.
그것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뭔가 기여한 채로 말이다.
흐흐, 클라인도 이런 성장한 내 모습을 보면 기뻐하겠지?
나는 그런 뿌듯한 감정을 느끼며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 * *
“어, 어라?”
서둘러 슬라임 청소기를 가져온 클라인은, 그 잠깐 사이 사라진 슬라임에 당황했다.
뭐지?
잉간이의 차원항 안에서 저렇게 증식한 슬라임들을 자연적으로 없앨 생물은 존재하지 않는데?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살폈고, 곧이어 이것이 잉간이가 저지른 짓임을 깨달았다.
“잉간이가. 했다고? 이걸?”
잉간이가 저 과다 증식한 슬라임들을 없앤 거라고?
물론, 이론상 잉간이의 룸메이트들의 능력을 활용한다면 가능한 일이긴 해도, 진짜로 그럴 줄은 몰랐는데.
맨 처음에 무오 하나 잡지 못해서 엉엉 울던 잉간이가 맞나?
진짜 잉간이는 전설적이다…….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뿌듯함을 느꼈지만, 왠지 모르게 이상한 섭섭함을 느꼈다.
잉간이가 성장한 건 좋은 일이지만, 이렇게 잉간이가 계속 성장하다가 잉간이가 나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면 어떻게 하지?
나는 이미 잉간이가 꼭 필요하게 됐는데.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는.
그렇다면 차라리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잉간이를.
“읏…….”
아냐.
나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던 거야?
잉간이는 내 장난감이 아니고, 내 멋대로 조종할 수 없어.
잉간이의 성장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지.
클라인은 고개를 내저으며 그러다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내가 잉간이가 없으면 안 되는 것처럼 잉간이도 내가 없으면 안 되게 만드는 거다.
잉간이의 마음속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면 되는 거다.
그 짜증 나는 차원 파괴자를 밀어내고 말이다.
“그나저나 진짜 대단하네…….”
클라인은 다시금 잉간이의 성장을 되새기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축하 선물이라도 줄까?
어떻게 잉간이에게 선물을 받고만 있겠어?
선물을 받았으면 나도 선물을 돌려주는 게 도리지.
“나도 직접 요리해 볼까……?”
잉간이가 손수 만든 요리를 주었으니 나도 손수 만든 요리를 선물해 줘야지.
내가 요리를 잘 못 한다는 건 알지만 유리와 요리할 때 마지막에 가선 그래도 꽤 먹을 만한 요리가 나왔다.
그러니 좀 더 연습한다면 잉간이에게 선물할 만한 퀄리티의 요리가 나오지 않을까?
좋아, 고생한 잉간이에게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줘야겠다.
151화 직접 만든 간식을 잉간이에게 줘봤어요!
한 건 해냈으니, 이제 남은 건 쓰러져 자는 것밖에 없다.
긴장이 풀리며 몰려오기 시작한 졸음을 이겨내며 블랑카와 아리스를 집 안으로 옮긴다.
사실, 아리스를 옮길 때는 나도 거의 잠든 상태로 리키의 품에 안겨서 옮겨졌지만 말이다.
파랑이?
몰라, 원래도 알아서 지내던 놈이니 어딘가에서 알아서 잘 자겠지.
대충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리키와 함께 침대에 쓰러져 잠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고, 나는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말끔하게 복구되어 있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클라인이 또 도와준 거구나.
나는 멍하니 그렇게 생각하며 적당히 아침을 맞을 준비를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아침이 아니라 점심일 수도 있겠다.
내가 분주히 아침을 준비하기 위해 오가는 사이 하나둘씩 잠에서 깨어났다.
“잘 잤어?”
“으응…….”
마력을 잔뜩 쏟아부은 탓인지 블랑카의 안색은 그리 좋아보이지 않았다.
그 반면, 아리스는 자는 것만으로 벌써 마력을 다 회복했는지 힘차게 날갯짓을 했다.
“얼리버드 기상!”
“흐극……!”
아리스는 힘차게 소리치며 잠에서 깨어났고, 그런 아리스의 목소리에 놀랐는지 리키 또한 벌떡 잠에서 깨어났다.
“다들 빨리 씻고 와. 밥 먹어야지.”
“응! 리키, 빨리 가자!”
“어, 응?”
아리스는 리키와 함께 목욕할 생각인지 리키를 이끌고 내가 만들어뒀던 목욕탕으로 달려갔다.
어째 리키가 하피 모양의 연을 매달고 가는 것 같은 모습인데?
그렇게 아리스가 난리를 피우는 동안에도 블랑카는 여전히 상태가 좋지 않은지 인상을 찌푸리며 바닥에 드러누워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힘들어?”
“그렇게까진…… 아니, 엄청 힘들어.”
그런 블랑카의 모습이 퍽 걱정스러워 조심스럽게 블랑카의 상태를 물어보자, 블랑카는 엄살을 부리는 것 같은 목소리로 끙끙 앓았다.
뭐, 누가 봐도 꾀병을 부리며 증세를 과장하는 중이라는 게 보이지만 나는 기꺼이 블랑카의 거짓말에 속아주기로 했다.
“그래? 그렇게 힘들면 오늘 하루는 집에서 쉬지 그래?”
“응? 아니, 그래도 사냥은 나가야지…….”
“리키하고 아리스에게 부탁하면 되잖아? 리키한테 사냥하는 법은 대부분 가르쳤잖아?”
“그렇긴 한데…….”
“만약에 길을 잃어도 아리스가 있으니 걱정 없잖아? 힘들 때 괜히 무리하다간 몸이 상할 수도 있어. 오늘은 그냥 푹 쉬어.”
“그, 그럼. 그럴까?”
블랑카는 꾀병으로 집에서 푹 쉬는 것이 뭔가 잘못을 저지르는 것 같은지 안절부절못한 표정으로 내 말을 긍정했다.
솔직히 오늘 하루 쉴 정도로 블랑카가 아픈 건 아니지만, 그래도 휴식이 필요한 상태인 건 분명하니까.
“그럼. 조금만 기다려. 아침 식사를 만들어야 하니까.”
“으응……”
그렇게 내가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사이 리키와 아리스가 돌아왔고, 아리스는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낯익은 얼굴을 데려왔다.
“잉간! 파랑이 다시 찾았어!”
“그거 다행이네.”
아리스의 어깨 위에 얌전히 자리 잡은 파랑이는 내 시선을 받자 움찔하고 몸을 움츠렸지만, 이내 조심스럽게 내게 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하세요.”
“오냐.”
“파, 파랑이가 말했어?!”
“어. 걔 말할 수 있더라?”
아리스도 파랑이가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은 몰랐는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들 빨리 밥이나 먹자. 자.”
전원 몫의 식사를 준비하고, 나는 파랑이 몫도 살짝 떼어내 던져주고 아침 식사가 시작된다.
금방 아침 식사가 끝나고, 나는 가만히 아리스를 불렀다.
“아리스. 오늘 할 일 있어?”
“오늘? 아니, 그냥 평소랑 같은데?”
“그래? 그러면 오늘은 리키하고 같이 사냥 나가 볼래?”
“사냥? 블랑카는?”
“몸이 좀 안 좋아 보여서 오늘은 좀 쉬게 해주려고.”
“그래? 응, 좋아!”
아리스도 사냥에 꽤 흥미가 있었는지 곧바로 내 부탁을 수락했고, 블랑카는 미안한 표정으로 아리스에게 사과했다.
“으윽, 미안. 내가 할 일을 대신 부탁해서…….”
“아냐, 나도 사냥 나가고 싶었어!”
그렇게 평소와는 반대로 블랑카가 집을 떠나는 리키와 아리스를 배웅한 뒤, 나는 블랑카를 침대에 눕히며 이불을 덮어줬다.
“그냥 이대로 오늘은 푹 쉬고 있어. 알겠지?”
“응…….”
블랑카는 내 말대로 털썩 침대에 드러누웠는데, 그 모습이 마치 소파에 퍼질러져서 텔레비전을 보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뭐, 블랑카는 텔레비전 대신 반려넷과 내가 집안일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있지만 말이다.
자, 그럼 일단 설거지부터 대충 해두고, 그다음엔 슬슬 비누가 떨어져 가니 미리 모아둔 기름으로 비누를 만들어 볼까?
그걸 다 끝내면 전에 만들다 놔둔 새로운 방의 공사를 마무리하자.
내가 분주히 집안일을 시작하자 블랑카는 뭔가 조금 미안한지 내 눈치를 조금씩 살피기 시작했다.
“저기…….”
“그냥 오늘은 푹 쉬어.”
“응…….”
그리고 블랑카처럼 부지런히 일하는 내 눈치를 살피고 있는 사람이 또 하나 있었다.
“저기…….”
“왜?”
“제, 제가 도울 일은 뭐 없나요……?”
“글쎄다. 음.”
비누를 만드는 건 비누가 점액에 어떤 작용을 할지 모르니 불가능하고, 이 녀석이 할만한 일들은 굳이 이 녀석에 맡겨야 하나 싶고.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녀석에게 맡길 일을 생각하고 있자, 블랑카가 파랑이의 정체를 내게 물어왔다.
“저기 잉간. 저건 아리스가 키우던 그 점액인……거지?”
“응. 그리고 전에 나를 잡아먹으려고 했던 녀석이고.”
“너를 잡아먹으려 했다고?”
“히, 히익……!”
내가 사실을 전하자 블랑카의 눈매가 가늘어지며 파랑이를 바라보고, 파랑이는 블랑카의 살기를 느낀 건지 와들와들 몸을 떨었다.
“뭐, 옛날 일이고. 어제 도와준 거로 없던 거로 하고 퉁치기로 했어.”
“정말로?”
“응. 뭐, 얘랑 목숨을 걸고 싸울 것도 아니고, 같이 살 건데 대충 적당한 선에서 받아줘야지.”
블랑카는 여전히 파랑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지만, 내가 괜찮다고 하니 더 뭐라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한편, 파랑이는 내 말을 듣고 살았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런 파랑이의 모습을 지켜보며 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한 가지 물었다.
“근데, 넌 왜 자꾸 날 무서워하냐?”
“네, 네?”
“아니. 솔직히 무서워할 거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나, 그때 그걸 무서워해야 하는 거 아냐? 왜 나를 무서워해?”
“그, 그게요. 뭔가, 뭔가 자꾸 보인단 말이에요.”
“보여?”
“그…… 처음으로 자아? 라고 할 만한 걸 얻고 나서부터 꿈이라는 걸 꿨는데요. 거기서 맨날…… 이, 잉간 님이 나와서 저를 괴롭혔단 말이에요……?”
“내가 널 괴롭히는 꿈을 꿨다고?”
“네. 네. 맨날 그런 꿈을 꾸다 보니 뭔가 실제로 마주쳐도 좀 무섭고. 막 그래요…….”
파랑이가 입 밖으로 내놓은 건 예상치 못한 내용이었다.
악몽 때문에 나를 무서워하다니, 진짜 말 그대로 매일같이 그런 악몽을 꾼 건가?
문득, 악몽이라고 하니 바닥에서 나른하게 하품을 하고 있는 녀석에게 눈길이 간다.
에포나는 내 시선을 받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고,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숙이고 에포나의 몸을 들고 속삭였다.
“너야?”
에포나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히죽 웃으며 내 품을 벗어나 집 밖으로 산책을 나섰다.
허, 참나.
그때 에포나도 무서워했던 거 같은데, 그때의 복수라도 하는 건가?
“아무튼, 그래서. 뭔가 할 일이 없냐고?”
“네, 네. 뭐, 시킬 일 없으세요……?”
“음. 그럼…… 창고에 지붕 재료 모아둔 거 있거든? 그걸로 지붕을 올릴 수 있어?”
“그, 그럼요! 당연하죠!”
집안일은 저 녀석이 얼마나 잘하는지 모르겠으니 대충 힘쓰는 일을 시키면 되겠지.
내 명령을 받은 파랑이는 곧장 창고로 꼬물꼬물 달려갔고, 잠시 후, 창고 바닥에서부터 파랑이로 추측되는 점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강물에 떠내려가는 것 마냥 내가 모아둔 지붕 재료들은 파랑이의 몸에 실려서 창고를 나왔고, 그대로 파랑이는 내가 틀을 잡아둔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단번에 점액을 부풀리며 손쉽게 지붕을 올렸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손이 닿지 않는 곳도 없고, 좁은 곳도 문제없이 통과할 수 있으니 말 그대로 건설의 신인데?
거기에 만약 사고가 일어나도 다치지도 않을 테니 노가다 현장에서 애타게 찾는 인재 그 자체다.
그렇게 파랑이와 내가 일하고, 블랑카는 하는 일 없이 휴식을 취하던 와중, 블랑카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래?”
“아니, 그냥. 나도 도와주고 싶은데,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걸 깨달아서.”
“그냥 오늘은 쉬라고 했잖아? 그리고 네가 할 줄 아는 게 왜 없어?”
“싸우는 법만 알지, 이런 가정적인 일은 하나도 모르니까……”
“그렇게 따지면 나도 싸우는 법은 하나도 모르는걸? 그냥 각자가 잘하는 일을 하면 되는 거야.”
“으으. 그래도…….”
진짜,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병이라도 나나?
진짜 잠시라도 일하거나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불안한 모양이네.
저렇게 힘들어하는데, 차라리 집안일을 아무거나 시키면 좋아하지 않을까?
어디 보자, 블랑카의 몸으로도 할만한 집안일이 뭐가 있더라?
“음. 그럼, 바깥에 밭에 물 좀 주고 와 줄래?”
“그, 그럴게!”
블랑카는 내 부탁을 듣자마자 단숨에 자리에서 일어나 싱글벙글 웃으며 집 밖으로 나섰다.
블랑카의 저런 모습은 솔직히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니까.
나 같으면 쉬라고 했으면 그냥 평생 쉬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비누 만들기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선 순간, 바깥에서 블랑카의 비명이 들려왔다.
“히, 히얏?!”
“무슨 일이야?!”
나는 서둘러 집 밖으로 뛰쳐나왔고, 블랑카가 비명을 지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클라인?”
클라인의 손가락이 갑자기 블랑카 근처의 허공에서 튀어나와 있던 것이다.
갑작스러운 일에 놀란 블랑카가 비명을 지른 거 같다.
나는 천천히 클라인의 손가락으로 다가가 손을 마주 댔고, 움찔 클라인의 손가락이 떨리는 걸 느꼈다.
언제나처럼 교감을 하기 위해 온 건가?
하지만 아직 시간이 되지 않은 거 같은데?
나는 클라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고, 내가 그러는 사이 클라인은 내게 무언가를 건네줬다.
“응?”
케이크
케이크케이크케이크
케이크케이크케이크케이크케이크
케이크케이크케이크케이크케이크
케이크케이크케이크케이크케이크
케이크케이크케이크케이크케이크
클라인이 내게 건네준 것은, 살짝 엉성해 보이는 케이크였다.
* * *
“으윽, 또 실패했어…….”
잉간이에게 수제 요리를 선물하고 싶다.
클라인은 그러기 위해서 열심히 요리를 연습했지만, 제대로 된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
적어도 잉간이가 먹었을 때 아프진 않아야 하니 클라인은 최대한 자신의 요리에서 묻어나오는 기묘한 쓴맛을 줄이는 걸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아무리 연습을 반복해봤자 클라인이 만든 요리에서 쓴맛이 나지 않는 일은 없었다.
최대한 쓴맛을 억제하는 데는 성공해도, 쓴맛을 없앨 수는 없었다.
“으윽…….”
젠장, 이러다간 평생이 걸려도 제대로 된 요리를 못 만들겠어.
분명히 레시피대로 요리를 만들고 있는데, 왜 이런 결과물이 나오지?
“……어쩔 수 없다.”
결국, 클라인은 자신의 힘만으로 요리를 만들려는 생각을 포기했다.
클라인이 선택한 것은, 공산품의 도움을 빌리는 것이었다.
“케이크 시트를 이렇게 올리고…… 여기에 생크림을 펴 바른다?”
마트에서 사 온 빵에, 마력망으로 주문한 생크림이다.
설마, 이렇게 만든 케이크에서 쓴맛이 나겠어?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단숨에 잉간이를 위한 케이크를 완성했다.
으, 뭔가 패배한 거 같지만, 그래도 일단 내가 만든 요리는 요리잖아?
그래, 잉간이에게 먹지 못할 요리를 먹일 수는 없지.
클라인은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하며 조심스럽게 잉간이에게 직접 만든 케이크를 건네줬다.
“먹는다, 먹는다……!”
자기가 만든 요리를 남이 먹어주는 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되는 걸까?
클라인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자신이 전달한 케이크를 입에 넣는 잉간이의 모습을 바라봤다.
부디, 맛있게 먹어줬으면 좋겠는데.
152화 케이크는 제발 사드세요…….
“케이크……?”
클라인이 내게 건네준 것은, 살짝 엉성해 보이는 모습의 케이크였다.
뭔가, 흔히 케이크 하면 생각나는 가게에서 파는 잘 디자인된 모습의 케이크가 아니라 아무런 토핑도 하나 없이 생크림만 올려진 케이크다.
거기에다가 케이크 시트라고 하나?
베이스가 되는 빵이 살짝 뭉개졌는지 한쪽이 조금 찌그러진 게 보였고, 생크림 또한 제대로 발리지 않고 군데군데 빈틈이 많아 보였다.
마치 처음으로 케이크를 만드는 사람이 만든 케이크 같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일단 케이크를 줬으니 거절할 수도 없고, 클라인에게서 케이크를 받아들자 클라인은 그게 목적이었던 듯 스르륵 손을 어항에서 빼냈다.
“먹으라고…… 준 거겠지?”
“아마?”
블랑카는 내 손에 들린 케이크를 가만히 살펴보더니,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뭐 이상한 건 아닌 거 같은데.”
“케이크잖아, 케이크.”
“케이크? 아, 이게 케이크야?”
“뭐야, 케이크 먹어본 적이 없어?”
“그런 요리가 있다는 건 알아도, 실제로 만들 만한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아, 하긴.
좀비 아포칼립스에서 케이크를 만들 정도로 자원이 넉넉할 리 없지.
“뭐, 대도서관에 보관된 서적들 덕분에 그런 게 있었다는 건 알 수 있었지만 말이야.”
“그건 다행이네.”
그나저나 갑자기 클라인이 내게 웬 케이크를 선물한 거지?
뭐, 전처럼 내가 뭔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은 건가?
나야 맛있는 걸 준다면 땡큐지만 말이다.
하지만 어째 서투른 케이크의 모습이 마치 클라인이 직접 만든 케이크처럼 보이는데,
느낌상 왠지 클라인은 요리를 잘 못 할 거 같단 말이지.
설마, 내가 선물한 요리의 답례로 클라인이 직접 케이크를 만들어 선물한 걸까?
음, 뭔가 그랬으면 좋겠네.
사실 그냥 케이크를 만든 김에 나한테도 줬다는 게 가장 가능성이 크겠지만, 진짜 클라인이 내게 답례를 한 거라면 꽤나 기분이 좋은 일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냥 기분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있을래.
“그, 잉간. 그 케이크는 다 같이 먹을 생각이지?”
그렇게 내가 케이크를 바라보며 뭔갈 골똘히 생각하고 있자, 블랑카가 헛기침을 하며 내게 케이크의 처우에 대해서 물어왔다.
“응? 아마도?”
“그, 그래?”
내 대답을 들은 블랑카의 표정이 시무룩하게 변하는 것이, 꼭 한 번 케이크를 먹어보고 싶다는 표정 같다.
얼굴에 다 드러나는데 아닌 척하는 모습이 퍽 귀여워 죽겠다.
나는 내심 그렇게 생각하며 싱긋 웃으며 블랑카에게 말했다.
“그래도, 먼저 몇 조각 정도는 먼저 먹어도 괜찮을 거 같네.”
“그, 그렇지? 그 정도는 괜찮겠지?”
내 대답을 들은 블랑카가 반색하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집 안으로 다시 되돌아간다.
나는 케이크가 망가지지 않게 조심하며 탁자 위에 살포시 올려두고, 케이크를 가르기 위해 부엌에서 돌칼을 하나 가져왔다.
클라인이 만든 케이크이니만큼 안에 뭐 이상한 재료가 들어있는 건 아니겠지?
잠시 그런 걱정을 하며 케이크를 가르지만, 정보 알갱이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 말고는 평범한 케이크다.
지난번에 먹었던 그 떡볶이처럼 보이는 사람에 따라 모습이 달라지는가 싶었는데, 이번에는 다들 똑같은 모습으로 보이는 거 같다.
내가 제일 먼저 관측했을 때 생크림 케이크를 떠올려서일까, 아니면 블랑카의 머릿속에 케이크의 이미지가 없어서일까?
뭐, 케이크의 외견이 뭐가 중요한가?
맛만 있으면 되는 거지.
단맛은 클라인이 가끔 던져주는 젤리나 리키의 독액으로 느낄 수 있다지만 젤리의 단맛은 솔직히 이젠 좀 질리고, 리키의 독액은…… 단 게 땡긴다고 마음껏 주워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주위에 열리는 과일들로 때우려고 해도 맨날 똑같은 베리들만 먹는 수준이다.
새로운 단맛의 출현은 언제나 환영할 일이다.
조심스럽게 케이크 일부를 잘라서 블랑카에게 덜어주자, 블랑카는 떨리는 눈으로 조심조심 케이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케이크의 끝부분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어때, 맛있어?”
나는 블랑카에게 첫 케이크의 소감을 물어봤고, 블랑카는 고개를 갸웃하며 케이크의 맛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음. 빵의 식감도 괜찮고, 생크림도 너무 느끼하지 않고 달콤해. 그리고…….”
결론은 그냥 평범한 케이크 맛이라는 소리지?
나는 안심하고 블랑카의 뒤를 이어서 케이크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바로 그 순간, 블랑카가 인상을 찌푸리며 신음성을 흘렸다.
“으음……?!”
케이크를 잘만 우물거리던 블랑카의 입이 멈추고, 블랑카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뭐 이상한…….”
블랑카에게 왜 그러냐고 질문을 던지려 했지만, 나는 금방 블랑카가 왜 그랬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윽……?!”
케이크에 독이 들어있었는지 의심이 절로 들 정도로 강렬한 쓴맛이 내 혀를 덮친 것이다.
약이나 채소에서 나는 쓴맛과는 다른 다 타버린 음식에서 나는 것 같은 고통스러운 쓴맛.
웬만하면 그냥 참고 삼키겠는데, 이건 내 몸이 완강하게 삼키는 걸 거부한다.
“으엑…….”
결국, 나는 바닥에 먹던 케이크를 뱉어내는 수밖에 없었다.
뭐야?
처음에는 분명 평범한 케이크의 맛이었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숨겨져 있던 쓴맛이 나타나 입안을 뒤덮는다.
분명히 겉모습은 그냥 평범한 케이크인데 어째서 이런 맛이 나는 거지?
빵이 탄 것 같지도 않고, 생크림도 신선해 보이는데?
뭔가 쓴맛을 내는 약을 탄 건가?
아니,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갑작스럽게 쓴맛이 확 밀고 올라오는데?
보통 여러 가지 맛이 나는 음식을 먹을 땐 그 전에 약간의 전조가 느껴지긴 하잖아?
그런데 이건 갑자기 중간에 내가 먹는 음식이 바뀐 것처럼 맛들이 전부 쓴맛으로 바뀌어 버린다.
진짜, 이건 왜 이런 거지?
클라인이 일부러 이런 음식을 준 건 아니겠지?
응, 분명히 실수로 그런 거일 거야.
내가 그렇게 경악하며 헐레벌떡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시는 와중에도 블랑카는 끝까지 케이크를 뱉지 않고 어떻게든 삼키려고 했다.
“블랑카, 못 먹겠으면 뱉어.”
“아냐. 그래도…… 입에 넣었으면 끝까지 먹어야지…….”
블랑카는 묘한 고집을 부려가며 어떻게든 간신히 클라인의 케이크를 목구멍으로 넘겼고, 기침하며 눈물이 맺힌 눈으로 중얼거렸다.
“이건. 도저히 못 먹겠어.”
“나도 마찬가지야.”
윽, 이건 그냥 버려야 하려나?
아리스도 이걸 좋아할 것 같지도 않고 리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클라인이 만든 음식이니만큼 그냥 버리는 건 조금 그런데.
“무, 무슨 일이에요?”
그때, 열심히 지붕 공사를 하고 있던 파랑이가 작은 아이 정도의 크기로 내게 다가온다.
음, 파란 점액들은 진짜 뭐든지 주워 먹었으니까 케이크도 잘 먹겠지?
나는 싱긋 웃으며 파랑이에게 케이크 한 조각을 똑 때어서 건넸다.
“케이크를 받았거든. 너도 좀 먹을래?”
“진짜요? 우와!”
파랑이는 잔뜩 들뜬 표정으로 내가 건넨 케이크를 양손으로 받아서 곧장 손 내부로 집어넣었다.
들뜬 표정으로 케이크의 맛을 몸 내부에서 음미하던 파랑이는 예정된 수순대로 갑자기 밀려드는 쓴맛에 얼굴을 찡그렸다.
“으엑, 엑…….”
몸 내부에서 맛을 느껴서인지, 파랑이는 나와 블랑카보다 더 고통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게 도대체 뭐에요…….”
“말했잖아. 케이크.”
“으겍…….”
결국, 파랑이는 도저히 케이크를 소화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인지 다시 케이크를 몸 밖으로 내뱉고 말았다.
“점액도 맛이 느껴져?”
“아뇨. 원래는 못 느껴요. 따로 몸을 변형하지 않는 이상은요. 근데, 근데 이건 좀 이상해요. 쓴맛이 그냥 머릿속에 새겨지는 느낌…….”
그러고 보니 파랑이의 머리는 어디일까?
푸른 점액은 온몸이 머리라고 말할 수 있지 않나?
뭐, 적당히 생각해보면 핵을 머리라고 말할 수 있으려나?
“제, 제 말 듣고 있어요?”
“응, 듣고 있어. 케이크가 너무 맛없어서 못 먹겠다는 이야기잖아?”
“그, 그래요…….”
으, 파랑이도 이걸 못 먹는다고 하면 이걸 도대체 어떻게 처리하지?
진짜 그냥 쓰레기통에 버리는 수밖에 없나?
아니, 역으로 생각해서 먹지 않고 장식품으로 만들어두면 클라인도 그렇게 기분 나빠하지 않지 않을까?
일단 자기가 준 선물을 소중하게 여기는 거잖아.
그렇게 내가 케이크의 처리를 고민하던 때, 에포나가 폴짝 탁자 위로 뛰어 올라왔다.
“아, 에포나.”
그리고는.
“왕!”
냠.
에포나가 남아 있던 케이크를 한입에 모조리 삼켜버렸다.
쓴맛이 느껴지지도 않는 걸까?
에포나는 잠깐 눈을 찌푸린 걸 제외하면 너무나도 태평하게 케이크를 모조리 먹어치웠다.
“왕.”
에포나는 잘 먹었다는 듯 가볍게 짖고 훌쩍 탁자를 내려와 다시 낮잠을 자러 침대로 향했다.
나는 그런 에포나의 모습을 지켜보며 무심코 중얼거렸다.
“음, 다행인가?”
케이크를 버리지 않아도 돼서 다행인지, 케이크를 먹지 않아도 돼서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 * *
“스, 슬라임도 안 먹는다고……?”
그래.
케이크에서 쓴맛이 어째서 나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잉간이와 그 룸메이트가 자신의 요리를 먹지 않는 건 이해할 수 있다.
솔직히 나도 먹기가 힘드니 말이다.
하지만, 하지만 클라인에게 상당한 충격을 준 것은 슬라임 또한 클라인의 음식을 뱉어냈다는 사실이었다.
말 그대로 못 먹는 게 없어서 뭐든지 소화 시키기 때문에 청소 생물로 활용되는 슬라임이, 케이크 하나 못 먹는다고?
“내, 내 요리가 그렇게 맛없는 거야?”
그러한 말도 안 되는 상황에 클라인의 자신감은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래, 나 주제에 무슨 요리를 한다고.
내가 만든 요리는 맛없으니까.
언제나 그래왔으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어도 내 요리는 도저히 못 먹겠다고 했으니까.
잉간이가 내 요리를 먹어주지 않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거다.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시무룩한 표정으로 가만히 차원항 안의 풍경을 바라봤다.
잉간이에겐 고생을 시킨 거 같아서 미안하네.
클라인이 그렇게 생각하며 무심코 시선을 다시 케이크로 돌린 순간, 클라인의 눈에 그것이 들어왔다.
“……응?”
잉간이와 공생 관계에 놓인 차원 파괴자가 클라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클라인도 차원 파괴자를 인식할 수 있게끔 은신을 푼 것이다.
뭐지?
은신을 해제하는 일이 거의 없는 차원 파괴자인데, 어째서 내게 모습을 보여준 거지?
퇴치당하고 싶단 뜻인가?
으, 그나저나 언제 봐도 짜증 나는 외형이다.
내가 개의 생김새를 징그러워한다는 걸 아는지 잉간이에게 줬었던 개의 모습으로 위장하고 있다.
클라인이 그렇게 생각하며 눈살을 찌푸리며 차원 파괴자를 바라본 순간, 차원 파괴자가 피식 비웃음을 흘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어, 응?”
잉간이에게 주려고 만든 케이크를 차원 파괴자가 홀라당 전부 집어삼켜 버렸다.
아니, 잉간이가 먹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쳐도 되지만 차원 파괴자가 내 케이크를 먹어치웠다고?
“너, 너한테 주려고 만든 케이크 아니거든?!”
클라인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을 차원 파괴자에게 성을 내고 말았다.
어째서인지 저 짜증 나는 녀석이 내가 만든 요리를 먹으니 더 짜증 난다.
순식간에 클라인의 케이크를 모두 먹어치운 차원 파괴자는 클라인을 비웃는 것처럼 짤막하게 음성을 내보내고, 그대로 잉간이의 곁으로 다가가서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윽, 나도 잉간이 곁에서 저렇게 자고 싶은데.
잉간이가 쓰다듬어주며 자는 거, 꽤 좋았단 말이야.
아니, 이게 아니라.
뭔가, 뭔가가 엄청나게 분하다.
클라인이 차원 파괴자를 바라보며 느꼈던 분함은 클라인의 마음에 불을 붙였다.
내 수제 요리를 먹은 녀석이 차원 파괴자만 있게 할 수는 없다.
반드시, 반드시 잉간이도 먹을 만한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서 잉간이에게 주고야 말 거다.
그렇게 각오를 다진 클라인은 다시 요리를 연습하기 위해 쥬튜브에 요리 강좌를 검색했다.
그렇게 쥬튜브를 살피던 클라인의 눈에 한 가지 영상이 눈에 들어온다.
[소행성]
[초보자도 쉽게 할 수 있는 간단한 쿠키 만들기!]
바로, 소행성의 영상이었다.
탄탈로스와의 일상을 찍어 올리는 쥬튜버인 소행성은 베이킹이 취미여서 그런지 이런 강의 영상도 가끔씩 찍어 올린다.
그때, 클라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유리의 말이 있었다.
‘소행성 님이 먼저 연락 좀 해달라고 하더라.’
지금까지는 어떻게 해야 먼저 소행성에게 연락을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서 클라인은 그냥 소행성의 연락처를 방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다르다.
먼저 연락을 할 명분이 생겼다 이 말이다.
“여, 여, 여보세요?!”
“어머, 클라인 씨. 오랜만이에요. 제 연락처를 잊어버린 게 아닌가 했어요.”
“그, 그게요. 뭔가 아무 용건도 없이 연락하긴 뭔가 좀 그래서…….”
“후훗. 유리한테, 이야기 들어서 알고 있어요. 진짜, 부담 가지지 말고 먼저 연락하면 좋은데.”
“죄, 죄송해요.”
“죄송할 게 뭐가 있어요. 그것보다 클라인 씨, 제게 뭔가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 거 아니에요?”
“네? 어, 그렇긴 한데.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클라인 씨가 아무 용건도 없이 연락하긴 그렇다고 했으면서 지금 이렇게 연락했잖아요?”
“아하하, 그랬죠…….”
먼저 이렇게 다른 쥬튜버에게 부탁을 하는 건 진짜 처음인데.
혹시 거절하면 어떻게 하지?
순식간에 클라인의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상상이 지나갔지만, 클라인은 용기를 다지고 소행성에게 외쳤다.
“저, 저기. 소행성 님!”
“네, 말씀하세요.”
“저, 저한테 요리를 알려주세요!”
생애 첫, 합방 제안을 말이다.
153화 죽은 해파리를 가지고 장난치는 잉간이
클라인의 케이크를 주워 먹은 파랑이가 잠시동안 축 늘어져서 휴식을 취해야 하긴 했지만, 어찌 됐든 파랑이 덕분에 새롭게 만든 방의 건설은 금세 끝이 났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방이 완성됐지만 어째 다들 썩 내켜 하지 않는 분위기다.
“굳이 따로 방을 써야 해?”
“응? 계속 같이 자는 거, 불편하지 않아?”
“아니, 하나도!”
“맞아. 하나도 안 불편해!”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어…… 그, 그래?”
아리스나 리키는 혼자 있을 공간이 있으면 좋아할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다.
결국, 기껏 방을 확장해놓고 새로 생긴 방에 들어가겠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현실이다.
“그렇다고 그냥 저대로 창고로 쓰기는 아까운데, 그냥 내가 쓸까?”
“진심이야?”
“노, 농담이지.”
가벼운 마음으로 내가 저 방을 쓴다 말하니 세 명이 내 옷깃을 꽉 붙잡아온다.
그 유형의 압력에 나는 말을 흐리며 다시 주워 담았고, 결국 아무도 저 방을 쓰지 않게 됐다.
그렇다면 용도를 아예 바꿔 버리자.
아무도 저 방에서 자고 싶지 않다고 하니, 일종의 공방으로 만들면 어떨까?
발전기를 만들려면 이것저것 연구할 게 많은데, 그 과정에서 꽤나 더러운 장면이 나올 가능성이 높으니까.
일단 블랑카가 가져온 전기 해파리도 좀 해부해야 한다.
그리고 리키의 독액 능력으로 어디까지 화학물질을 합성할 수 있는지도 알아봐야 한다.
발전기만 만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전기를 써먹으려면 여러 전자 부품들도 만들어야 하니 말이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부산물을 그냥 부엌에서 만들 수는 없잖아?
왜, 황산 같은 유독물질을 그냥 집 안에서 만들 수는 없지.
그렇다면 구조도 약간 좀 바꿔야 하겠는데, 일단 통풍이 잘되도록 구멍도 좀 더 뚫어두고, 안에 가구도 배치해야 하겠지?
내가 그렇게 해야 할 일을 생각하는 사이, 블랑카는 미안한 표정으로 아리스와 대화를 나눴다.
“미안. 내가 해야 하는 일인데 너한테 맡긴 거 같아서.”
“아냐, 내가 좋아서 한 거야!”
“정말로?”
“응. 다음에도 내가 사냥하고 싶어!”
“그럼 가끔 부탁할게.”
“좋아!”
블랑카와 아리스가 번갈아 사냥에 나가기로 한 모양이네.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하고, 다음 날 나는 공방으로 삼기로 한 곳에 들여놓을 여러 가구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일단 책상과 의자는 필수, 메스처럼 정교하게 사용할 수 있는 칼도 하나 만들어 놔야겠지?
목재로 사용하려고 베어둔 나무들이 지난 거대 점액의 습격 때 전부 사라진 덕분에 다시 나무를 베어서 근처에 놔둔다.
내가 나무를 베는 동안 클라인이 선물한 용광로가 자동으로 메스로 쓸 칼날을 벼려낸다.
아예 손잡이까지 금속으로 만드니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드네.
자, 이제 더 늦기 전에 해파리들의 사체를 해부할 시간이 됐다.
유리 접시로 멋을 내고 싶은 기분이 있었지만, 그런 걸 만들 능력은 없었기에 적당한 나무접시로 대신한다.
“음. 어디 보자.”
해파리의 사체를 접시 위에 올려두고 어디를 갈라야 할지 잠깐 고민한다.
세포를 관찰하느니 하는 건 내게 불가능한 일이고, 적당히 주요 장기처럼 보이는 부분을 관찰할 수밖에 없겠지.
원래 해파리는 내장이란 게 거의 존재하지 않지만, 이 해파리는 몸 가운데에 마석을 중심으로 얇은 막과 내장들이 형성되어 있다.
이 다른 세상의 동물들은 언제나 마석을 가지고 있네.
마력으로 거의 모든 걸 해결하는 동네여서 그런 걸까?
조심스럽게 해파리의 몸에서 마석을 분리하고 내부의 내장들을 살펴본다.
일단 해파리니만큼 심장이나 뇌 같은 기관은 존재하지 않고, 가지고 있는 건 단순한 내장이나 생식기관뿐이다.
겉보기로는 무슨 기능을 하는지 몰라서 직접 내장을 갈라서 내용물을 확인한 결과 내장과 생식기관으로 보이는 기관들은 확인했는데.
문제가 있다면, 도저히 그 용도를 알기 힘든 기관이 하나 있다는 것이다.
위장보다도 더 안쪽, 마석의 가장 윗부분에 씌워진 모자처럼 자리 잡고 있던 기관인데, 이 기관이 전기와 관련된 기관일까?
혹시, 전기가 튈까 조심하며 정체불명의 기관을 갈라보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단지 해파리의 내장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밀도로 이루어져 있을 뿐이었다.
이 정도면 거의 살코기 수준인데, 다른 기관들은 물풍선처럼 물로 가득 차 있던 반면 이 기관만은 다른 생물들과 다를 바 없다.
딱 봐도, 이게 이 해파리가 전기를 만들어내는 원인인 것 같은데.
문제가 있다면 아무리 살펴봐도 무슨 기능을 하는지 모르겠단 것이다.
해부해서 내장을 살펴보면 어떻게 전기를 만들어내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흠.”
음, 일단 아리스에게 부탁해서 마력을 흘려달라고 부탁해볼까?
마석에 착 달라붙은 기관이니 마력을 받으면 뭔가 반응할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남은 멀쩡한 해파리의 사체에서 정체불명의 기관을 떼어내 접시에 담고 공방을 나선다.
공방을 나서자, 에포나에게 쫓기고 있는 파랑이의 모습이 보인다.
“그, 그만……!”
“왕!”
울상을 지으며 에포나에게 쫓기던 파랑이가 방 밖으로 나온 내 모습을 보고 움찔 몸을 굳히고, 그 틈을 노려 달려든 에포나의 입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뭐 하냐?”
“도, 도와주세요!”
나는 피식 웃으며 에포나의 입에 매달린 파랑이를 슬쩍 들어서 탁자 위에 올렸고, 에포나는 입맛을 다시며 파랑이를 빤히 바라봤다.
“아리스 못 봤어?”
“아리스요? 아리스는 아마, 지금쯤이면 비밀기지에 있을걸요?”
“비밀기지?”
비밀기지?
아리스가 비밀기지를 만들었나?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파랑이는 자기가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닫고 합 하고 입을 막았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흐음.”
뭐, 나도 어렸을 때 이불을 의자 사이에 걸어두고 비밀기지라며 논 기억이 있으니까.
아리스도 그런 식으로 노는 거려나?
나중에 아리스가 직접 초대할 때까지는 가만히 모른 척하고 있어야지.
“언제쯤 올 거 같은데?”
“어, 금방 올 거예요. 아마…….”
쩝, 그럼 조금만 집안일을 더 하며 시간을 때울까?
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돌리려 했지만, 문득 한 가지가 머릿속에 생각난다.
“아, 맞다. 너 이거 아냐?”
“뭐, 뭔데요?”
“생각해보니까 그 거대 점액이 가진 마석이 어디로 갔는지 본 기억이 없어서. 넌 봤냐?”
“그, 그건…….”
별생각 없이 던진 질문이었지만, 파랑이는 먼가 켕기는 게 있는 모양이다.
어디 보자, 파랑이가 그 점액의 핵을 으깼고, 점액의 마석은 대게 핵에 들어 있으니까……?
“네가 먹었냐?”
“아뇨! 아직 소화가 안 돼서 언제든지 뱉어놓을 수 있어요!”
“먹었단 거네.”
“제,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냥 꿀꺽 삼켜버려서…….”
“나중에 창고나 바깥에 뱉어놔라.”
“넵……!”
그 점액을 잡느라 풍선장어의 마석을 소모했으니, 그거 대신 그 녀석의 마석으로 발전기를 만들어야지.
그런 사소한 소란이 지나간 후, 집 바깥에서 바람이 불어오더니 아리스가 콧노래를 부르며 마당에 내려왔다.
“아리스.”
“어, 잉간! 무슨 일이야?”
“조금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마력을 쓰는 일인데 괜찮겠어?”
“응! 당연하지!”
해맑게 웃는 아리스를 이끌고 근처에 뭐 망가질 게 없는 마당 구석으로 이동해 아리스에게 정체불명의 조직을 보여준다.
“여기에 마력을 불어넣을 수 있겠어?”
“가능은 한데, 여기에 마력은 왜?”
“그 해파리의 몸에서 나온 거여서. 혹시 여기에 마력을 불어넣으면 전기가 나오나 해서 말이야.”
“전기…….”
내 설명을 들은 아리스가 자신이 전기를 만들어내지 못한 것을 떠올렸는지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다.
“조금만 더 공부하면 너도 가능할 거야.”
“맞아. 난 엄청 대단하니까!”
그렇지만 아리스는 금세 원래대로 돌아오며 나와 몇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마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로 부어?”
“가장 최소치에서 점점 더 올리는 식으로.”
“알겠어!”
아리스의 마력이 해파리 안으로 흘러 들어가자, 마치 해파리의 기관이 살아있는 것처럼 수축을 반복한다.
음, 전기를 만드는 기관이라는 내 추측이 잘못됐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계속해서 아리스가 마력을 올리게끔 놔두자 기묘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응?”
해파리의 기관이 수축할 때마다, 주위의 돌멩이들이 허공으로 떠오르다 떨어지는 걸 반복했기 때문이다.
전기를 만드는 기관이 아니라 해파리가 헤엄치는 걸 도와주는 기관이었던 걸까?
마력을 집어넣었더니 만들라는 전기는 만들어내지 않고 주위의 물건들을 들었다 놨다 하는데?
“아리스, 잠깐 멈춰봐.”
“응.”
아리스가 마력을 불어넣는 걸 멈추니 더 이상 돌들이 움직이지 않는 걸 봐선 저게 일으킨 일이 맞는 거 같은데.
“방금 일어났던 일, 마법이라고 부를 수 있나?”
“마법까진 아니고 마력기관의 작동? 이렇게 부르는 게 맞는 거 같아.”
“그러면 저 기관의 역할은 주위의 물체들을 들어 올리는 역할인 건가?”
“아마도? 내가 느끼기엔 뭐 다른 기능이 느껴지진 않았어!”
“흐음…….”
만약 이 기관이 전기와 관련된 게 아니면 도대체 어느 부분이 전기와 관련된 거지?
혹시나 해서 아예 해파리의 모든 장기들에 아리스가 마력을 불어넣게 해봤는데, 마력에 반응하는 건 방금의 그 기관 하나뿐이었다.
대충 지금까지 알아낸 저 기관의 역할을 정리해보자.
마석의 윗부분에서 마석의 마력을 빨아들이고, 그 마력으로 수축과 이완을 반복한다.
아마, 이 수축과 이완은 주위의 물체를 움직이는 효과의 부가작용이라고 생각된다.
주위의 물체를 움직이는 효과는 그것 말고는 별다른 효과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모래 위에 놔두고 아리스가 마력을 부었을 때, 모래 알갱이들이 위아래로 왔다 갔다만 할 뿐 별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
진짜, 도대체 이건 뭐 하는 기관인 거지?
지금 가장 가능성이 높은 추론은 마력으로 주위의 물을 밀어냄으로써 추진력을 얻는 기관이라는 건데.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전기를 만들어내는 거지?
해파리가 설마 진짜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걸까?
전기 마법은 7서클 이상만 가능하다고 반려넷의 모두가 외쳤는데?
그렇다면 사람들은 해파리보다 못한 생물인 건가?
“아, 모르겠다.”
해파리를 해부하면 뭔가 깨닫는 게 있을 줄 알았지만, 깨달음을 얻기는커녕 머리만 더 복잡해졌다.
“그래, 만능사전을 이용하면……?”
결국, 나는 최후의 수단으로 만능사전으로 해파리를 촬영해 만능사전에 실린 해파리의 생태를 살펴보기로 했다.
지금까지 제대로 된 도움을 얻은 적은 없던 거 같지만, 그래도 마법에 관련된 부분에선 꽤 쓸만하니까.
[보름달 방전 해파리]
오호, 이 해파리의 이름은 이거구나?
그냥 방전 해파리인 게 아닌 걸 보면 다른 종류도 더 있는 모양이지?
원산지는 프리가 행성인 것 같고, 독립 생활을 한다?
특징으로는 전기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끝.
그 뒤의 내용은 진짜 쓰잘때기 없는 몰라도 되는 정보들로 가득할 뿐이었다.
전기를 만들어내면, 어떻게 전기를 만드는지도 알려 달라고!
전기 마법 쓰는 법, 방전 해파리, 전기 만드는 법.
모조리 검색하며 전기를 어떻게 만드는지에 대한 설명을 보려고 했지만, 전부 무의미했다.
전기 마법은 그냥 주문만 덩그러니 쓰여 있고, 방전 해파리 항목에도 아무런 설명이 없다.
전기를 만드는 법?
마법을 쓰면 되는데 뭐하러 그런 항목이 있어?
그럼 전기 마법을 쓰는 법은요?
이 주문을 외우면 돼! 다만, 7서클 이상의 실력이 있어야 가능해!
끝없는 무한의 순환고리다.
그나마 좀 힌트가 될만한 거라곤 원자를 마력으로 조작할 실력이 되어야 전기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건데, 도대체 전기 마법이 뭐길래 이렇게 정밀 조작이 중요하다는 거야?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대로 만능사전을 던져버리려 했지만.
“아.”
무언가 불현듯 머릿속에 깨달음이 찾아왔다.
유레카. 이거였구나?
154화 [소행성] 요리를 못하는 당신에게 알려드리는 10가지 비밀
마법이라고 하면 뭘 떠올리는가?
대충 주문을 외우면 뾰로롱하고 불꽃이 나오는 것?
나도 대충 그런 이미지로 마법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잘 생각해보면 아무리 마법이라지만 아무것도 없이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잖는가?
클라인이 내게 던져준 문제집과 반려넷의 사람들의 발언 그리고 만능 사전의 내용으로 미뤄보아, 마법에는 마력이 필요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마법을 쓰려면 마력이 필요하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클라인의 문제집의 내용을 떠올려보면 뭔가 좀 다르게 느껴진다.
클라인이 내게 던져준 문제집은 마력을 마치 중력과 같은 하나의 상수로 잡고 문제를 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말이지.
마력이란 걸 너무 초자연적인 무언가로 생각하지 말고, 충분히 과학적 지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무언가라고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문제집에도 실려있었듯 마력을 수학으로 계산해서 마법을 사용하는 건 불가능한 일도, 어려운 일도 아니다.
뭐, 나는 마력이 아예 없어서 불가능하지만.
아무튼, 내가 알고 있는 과학적 지식으로 마법적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거기에다가 지금까지 내가 발견한 힌트들을 모두 종합하면 전기 마법의 원리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전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대충 아주 간략하게 설명하면, 전자의 위치가 달라질 때 발생하는 힘이 전기다.
그러니까 그 말은 어떤 식으로도 전자의 위치를 이동시키면 전기가 탄생한다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마력으로 전자를 건드린다면?
그렇게 해서 전기를 만드는 것이 전기 마법 아닐까?
그렇기에 원자를 조작할 만한 정밀 조작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뭐,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라이트닝 볼트나 그런 마법은 이런 조작을 더 세밀하게 해서 이뤄내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가정한다면, 이 해파리가 어떻게 전기를 만들어내는지 알 것 같다.
도대체 무슨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없던 해파리의 고깔 모양의 장기.
마력을 부여하면 주위의 물체들을 위아래로 움직인다는 것만 알 수 있었는데, 아마도 이 기관은 주위의 전자들을 움직이기 위한 기관이 아닐까?
왜, 저 해파리가 사용할 수 있는 마력은 몸 안의 저 마석밖에 없다.
그렇다면 아리스가 가장 적게 퍼부은 마력보다 평상시 사용하는 마력량이 적었을 것이고, 그 결과 일종의 오류가 일어난 것이겠지.
전자만을 움직였어야 할 기관이 강한 마력을 바탕으로 주위의 물건들까지 움직이게 된 것이다.
뭐, 이 모든 건 아리스에게 직접 검증을 시켜보기 전까진 단순한 추측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나는 당장이라도 아리스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고 검증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이미 밤이 깊었기에 그런 마음을 꾹 억누르고 공방에서 나왔다.
음, 공방이 있으니 이렇게 밤늦게까지 혼자서 만능사전을 살필 수 있는 거 참 좋네.
그렇게 침대에서 곤히 잠든 리키와 아리스 사이로 파고 들어가 둘의 깃털과 보드라운 털을 베개 삼아 잠에 빠져든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밝자마자, 나는 곧바로 들뜬 표정으로 아리스를 이끌고 산 정상으로 향했다.
여기라면 만약의 사고가 일어나도 숲이 불탄다거나 하는 불상사가 발생하진 않겠고, 벼락을 막아줄 아주 좋은 피뢰침도 있으니까.
그나저나 저 동상은 꽤 익숙해졌다고 생각해도 얼굴을 바라볼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리네.
심지어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으음…… 그러니까. 엄청 작은 알갱이가 있고, 그 알갱이 주위를 도는 더 작은 알갱이가…….”
“전자라는 거지.”
“음…….”
그렇지만 당연하게도 내 부족한 설명으로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웠던 듯 아리스는 팔짱을 끼며 신음했다.
윽, 나도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마력을 사용하는 느낌이 어떤 느낌인지 모르니 제대로 된 조언을 할 수가 없네.
“음. 그래도 잉간이 말한 엄청 작은 알갱이가 뭔지는 알 것 같아.”
“아, 진짜?”
“으음, 그러니까 이렇게 하면…….”
아리스가 마력을 끌어올리며 무언가를 시도해본다.
해파리의 고깔에 마력을 부었을 때 마냥 주위의 돌멩이들이 서서히 공중으로 떠오르다가 다시 툭, 바닥으로 떨어진다.
“으음…….”
“뭔가 감이 잡혀?”
“뭐가 뭔진 알겠는데, 머리가 좀 아파서. 작은 알갱이들이 너무 많아!”
“아…….”
하긴, 쌀알 하나에도 원자가 얼마나 들어 있는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니까.
“흡……!”
그때, 아리스가 땅을 노려보며 무언가 힘을 줬고, 갑자기 솜털이 곤두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뭐지?
전기가 만들어진 것 같은 느낌은 아닌데?
아리스도 나와 마찬가지의 생각을 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뭘 한 거야?”
“그냥, 마력으로 잉간이 말한 작은 알갱이를 건드려 봤어.”
“원자를 마력으로 건드려 봤다고?”
잘 생각해보니까, 핵융합이나 핵분열이 이런 식으로 시작되는 게 아니었나?
어쩌면 방금 엄청난 대형 사고가 터졌을 수도 있었겠네.
최대한 매의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지만 아무리 봐도 뭔가 달라진 건 없었다.
단순한 기분 탓이었던 걸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대충 바닥에 널린 돌멩이를 걷어차려 했다.
“윽……!”
그렇지만 평소라면 금세 발길질에 치여서 어디론가 굴러갔을 돌멩이는 굳건하게 버티고 서서 내 발길질을 역으로 돌려줬다.
뭐야, 이거?
나는 고통으로 얼굴을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돌멩이를 주우려 했다.
하지만.
“어라?”
아무리 힘을 줘봐도 돌멩이는 바닥에 착 달라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나는 의아해하며 주위의 돌멩이들도 하나씩 들어 올리려 해봤고, 곧 주위의 돌멩이들이 전부 단단히 고정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방금 아리스가 마력으로 원자를 건드려서 이런 일이 발생한 걸까?
하지만 어떻게?
그때, 무언가 한 생각이 내 머리를 스치고 나는 주머니에 늘 잠들어 있는 금속 구슬 몇 개를 꺼내 바닥에 툭 던졌다.
그러자 금속 구슬은 그대로 자석에 달라붙는 것 마냥 바닥에 철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설마, 아리스가 방금 마력을 부여한 것으로 이 주위의 바위들이 전부 자석이 된 걸까?
그렇지만 슬슬 마법의 효력이 끝나가는지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던 돌멩이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간다.
“아리스, 아까 그거 다시 한번 해볼 수 있어?”
“응?”
“아까, 마력으로 원자들을 건드렸던 거 말이야!”
만약 아리스가 얼떨결에 자석을 만드는 마법, 그러니까 자화 마법을 익힌 거라면 대박이다.
굳이 귀찮게 새로운 형식의 발전기를 만들어낼 필요 없이 그냥 아리스가 자화를 부여한 물체로 발전기를 만들면 되니까.
“으음…….”
하지만 방금 있었던 일은 단순한 우연이었던 걸까?
아리스가 그 뒤로 몇 번이고 원자를 마력으로 건드려 봤지만, 아까와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으…… 더는 못하겠어.”
결국, 아리스가 먼저 항복 선언을 하며 검증을 포기하고야 말았다.
뭐, 이러면 어쩔 수 없지.
천천히 아리스의 마법 실력이 오를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래도 확실해진 건 있다.
내가 아는 지식, 즉 과학적 지식을 마법에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력이 정확하게 무슨 힘인지 모르겠지만, 그 어떤 것으로도 변할 수 있는 에너지라고 생각하는 게 좋겠지.
예를 들어서, 전기 마법을 쓰기 위해 마력으로 전자의 위치를 바꾸는 건, 전자에 위치 에너지를 더하는 것이잖아?
그런데 위치 에너지 같은 에너지가 마력으로 변하는 경우는 없는 걸까?
음, 이건 잘 모르겠네.
만약에 에너지가 마력으로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마력은 점점 줄어들기만 하는 걸까?
애초에 마력이 쌓이는 원리조차 모르는데, 내가 고민해봤자 알 수 없는 일이긴 하다.
그렇게 알아낸 것과 새롭게 모르게 된 것들이 쌓인 하루를 끝내고, 아리스가 마력 수련을 도와주며 별일 없는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던 와중.
“……응?”
지금까지와는 다른, 무언가 거대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지면 전체가 통째로 흔들리는 듯한, 공간 전체를 뒤흔드는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치 엘리베이터를 탈 때처럼 묘한 부유감이 느껴지고, 어항 전체에서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진동이 울려 퍼진다.
이건, 또 무슨 일이지?
* * *
“어머머, 저한테 합방 신청하시는 거예요?”
소행성은 클라인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합방 제안을 해오는 것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유리에게 그냥 지나가듯 이야기한 건데 제대로 말해 줬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네, 네……! 그, 혹시. 안될까요?”
“안되긴요. 당연히 되죠.”
클라인은 자신의 생각보다 순순히 제안을 받아들인 소행성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뭐 이런 거로 합방 요청을 하느냐고 짜증을 내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흔쾌히 수락해주셨네.
그런 클라인의 모습을 귀엽게 바라보던 소행성은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클라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요리는 갑자기 왜 배우고 싶으신 거죠?”
“어, 그게. 직접 요리를 만들어 주고 싶어서.”
클라인은 붉어진 볼을 긁적이며 수줍게 웃으며 그렇게 답했고, 그런 클라인의 모습이 심상치 않다고 느낀 소행성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슬쩍 더 추궁했다.
“수제 요리를 만들어 주고 싶은 사람이 생겼나 보죠?”
“네, 뭐…….”
“혹시, 첫사랑……?”
“네? 첫사랑이라뇨?”
“아니, 누가 봐도 좋아하는 사람에게 손수 만든 요리를 선물하려는 모습이어서요. 후훗.”
“네, 네?”
그제서야 클라인은 소행성이 요리를 만들어 주고 싶은 ‘사람’이라고 말했다는 걸 깨달았다.
클라인은 서둘러 양손을 내저으며 허둥지둥 소행성의 오해를 바로잡았다.
“아, 사, 사람이 아니라. 잉간이요! 잉간이한테 만들어 주고 싶어서…….”
“아, 잉간이요?”
그렇지만 소행성은 짓궂게 웃으며 클라인을 더욱 놀릴 뿐이었다.
“이 정도면 거의 잉간한테 사랑을 느끼는 거 맞죠. 뭐. 잉간이 좋아하잖아요?”
“잉간이를 좋아하는 건 맞는데, 그 호의가 그 호의가 아니라…….”
“푸훗, 그때 보면서도 느꼈지만, 진짜 놀리는 맛이 난다니까요.”
도대체 내 어디가 그렇게 놀릴 맛이 난다는 거람.
클라인이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며 살짝 샐쭉해진 사이, 소행성은 더 놀지 않고 슬슬 본론으로 들어갔다.
“음. 그래서 제게 요리를 배우고 싶으신 거면. 뭘 배우고 싶으신 거예요? 아예 초보자? 아니면 좀 고급진 요리?”
“어, 그게요. 제 경우는 뭔가 좀 복잡해서요…….”
“복잡해요?”
클라인은 머리를 긁적이며 소행성에게 자신의 대략적인 상태를 설명했다.
레시피대로 따라 하는 건 잘 하지만, 왜인지 몰라도 결과물에서 항상 정체불명의 쓴맛이 묻어나온다고.
그런 클라인의 설명을 들은 소행성은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는 듯 진지한 표정으로 턱을 만지다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이건 직접 보는 게 더 빠를 거 같네요.”
“직접 봐요?”
“제가 클라인 씨 집으로 갈까요, 아니면 클라인 씨가 저희 집으로 오실래요?”
“어, 네?”
“아, 저희 집에 요리 도구가 더 많으니 저한테 오시는 게 나을 거 같네요.”
“어, 그게…….”
“뭐에요, 설마 얼굴도 직접 마주 보지 않고 합방할 생각이었어요?”
“아뇨, 그런 건 아닌데…….”
클라인은 살짝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미안하다는 듯 살짝 소행성의 시선을 피했다.
“그, 제가 탄탈로스는 보는 건 괜찮은데. 직접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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