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 21

“네 부탁이 아니었다면 나도 이런 발상은 하지 못했을 거야.”
“나는 단지, 버려진 사람들을 데려와 달라는 거였어.”
“그래. 당연한 이야기지. 그리고 모든 것의 시작은 당연한 것에서부터 시작되고.”
젠장, 또 장광설이 시작되겠군.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협력자의 장광설을 멈추기 위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에 데려온 녀석들은, 어느 수준이지?”
“정보 오염을 말하는 거야? 거의 몸이 버티지 못하고 터지기 일보 직전의 상태야.”
“……다행이군.”
“맞아. 더 늦기 전에 데려올 수 있어서 다행이야.”
딱 적당한 타이밍에 데려와서 다행이야.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희미한 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을 바라보며 선언했다.
“이제 슬슬 거의 다 도착했군. 대화를 나눠야 하니 이만 나가 주겠어?”
“아, 그러지. 좋은 시간 보내길 바라.”
좋은 시간이라.
그래, 좋은 시간이긴 할 거다.
이윽고 협력자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 그와 동시에 신선한 정보를 품은 인간들이 그의 공간으로 발을 들였다.
“여, 여긴…….”
이런 장소는 낯선 것인지 그들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피고 있었고, 그는 천천히 그들 앞으로 나서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인류 해방 전선에 합류한 걸 환영한다.”
“누, 누구……?”
“인류 해방 전선의 주인.”
“다, 당신이 여기 주인입니까? 여, 여기가 대체 어딘가요?”
그는 인간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천천히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절그럭.
늘 허리께에 차고 다니는 검이 흔들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자, 인간들은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신선하군.”
“네? 신선하다니, 뭐가…….”
너무 신선해서 악취가 느껴질 정도의 정보가 보인다.
그 빌어먹을 녀석들의 것과 동일한 정보들이.
이 정도로 신선하다면 거의 살아 있는 녀석들을 해부하는 것과 비슷하겠지.
그러니 빨리 신선도가 떨어지기 전에 녀석들의 정보를 해부하자.
“자, 잠깐. 뭐, 뭐 하려는……!”
“히, 히익……!”
부디, 다음번에는 이런 찌꺼기가 아니라 진짜를 해부할 수 있길.
내가 완전히 이해해서 다른 이들에게도 설명할 수 있게끔.
140화 쥬튜브 시작하고 처음으로 방송 접고 싶어졌습니다…….
회색 안개.
그리고 낯익은 폭포.
그 짜증 나는 녀석이 안내한 통로로 들어가자 나는 그립고 그리웠던 나의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제 다 끝났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놓이면서도 괜히 마음 한편이 쿡쿡 쑤셨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워낙 신경을 많이 써서 그럴까?
나는 리키를 떠올리며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쓸쓸한 발걸음을 터벅터벅 옮기려던 그때.
“응?”
무엇인가 근처의 수풀에서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뭐지?
블랑카가 내가 도착한 걸 발견하고 마중 나온 건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흔들리는 수풀을 바라봤고 그곳에서 희끄무레한 물체가 튀어나와 내게 덮쳐들었다.
“잉간!”
“우왁?!”
그것이 마치 태클을 걸어오듯 전력으로 내게 뛰어든 덕분에 나는 뒤로 넘어지려 했지만, 기다랗고 푹신한 꼬리가 나를 휘감아 붙잡았다.
이 목소리와 이 꼬리의 주인은 설마?
“헤헤, 잉간. 잉간이다…….”
“리키?”
다시 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리키가 내 눈앞에서 훌쩍거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가 그리도 좋은지 헤실헤실 웃으며 리키는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놀란 목소리로 리키에게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리키, 어떻게 여기에…….”
“잉간이 말한 대로 잉간 곁에 가고 싶다고 계속 생각했더니 여기였어! 처음에는 잉간이랑 떨어진 줄 알았는데, 잉간의 냄새하고 내가 남겨 뒀던 마력이 보여서 쫓아와 보니까…….”
역시, 클라인이 리키를 데려온 거겠지?
클라인이 리키를 데려온 이유가 뭘까?
나와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고 새로운 룸메이트로 넣으려고?
지난번 문어 인간의 경우도 있었으니 아직 완전히 리키가 나와 함께 지내는 게 확정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다시 볼 수 있으니 좋네.
“스읍, 후우. 흐읍, 후우…….”
헤실헤실 웃던 리키는 그대로 나를 껴안고 내 가슴팍에 머리를 묻고 숨을 들이마셨다.
나는 그런 리키의 모습에 살짝 당혹감을 표하면서도 조용히 리키를 타일렀다.
“저기, 리키. 이제 슬슬 집으로 가야 하니까 비켜 줄래? 이런 건 집에 가서 해도 늦지 않잖아?”
“지, 집에서? 어, 어, 어. 그건 너무 빠르지 않아?”
하지만 리키는 어째서인지 당황하며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리키의 반응에 갸웃하며 대답했다.
“빠르다니?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 않아? 그게 더 편하니까…….”
“어, 어, 어…….”
집에 가는 건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대답했고, 리키는 붉게 물들어 버린 얼굴을 토끼 귀로 푹 덮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 응…… 네가 그렇다면야…….”
리키는 그렇게 말하며 수줍게 몸을 일으켰고, 나는 그제야 겨우 바닥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리키는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내 몸에 감기려 했지만, 나와 리키 모두가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으악?!”
이제 더 이상 상태 창의 지원을 받을 수 없어서 강화되었던 내 근력이 원래대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당연히 나는 리키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다시 바닥에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잉간? 괜찮아?”
“괜찮아. 미안. 말하는 걸 깜빡했는데, 지금의 난 엄청 약할 거야.”
“어, 그럼 어쩌지?”
따로 떨어져서 걸어가면 해결되는 문제지만 리키는 내게서 떨어질 생각을 단 하나도 떠올리지 않았고, 그 대신 손뼉을 치며 대안을 제시했다.
“아, 그럼 이렇게 하면 되겠다!”
“어, 리키?”
리키가 택한 방법은 전에 내가 리키에게 해 줬던 것처럼 리키가 나를 공주님 안기로 안아 드는 것이었다.
진짜 이 자세를 당할 때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이 자세는 엄청 부끄럽다.
“그, 그냥 나 혼자서 걸어가면 안 될까?”
“싫어. 잉간이랑 떨어지고 싶지 않아.”
나는 살포시 리키에게 다른 방법을 제안했지만 리키는 단번에 내 제안을 거절하고 단호하게 외쳤다.
그래, 네가 그러고 싶다면 어쩔 수 없지.
나는 반쯤 해탈한 채로 리키의 품 안에 안겨서 리키에게 방향을 제시하며 집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얼마나 시간이 지난 상태려나?
최소한 일주일은 지났겠지?
지난번처럼 블랑카의 상태가 안 좋아지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아리스도 있으니 그때처럼 이상한 짓을 하진 않았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리키의 품에 안긴 채로 집으로 돌아오자 시무룩한 표정으로 내 문제집을 읽으며 뒹굴거리는 아리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리스.”
“응? 잉간?!”
나지막이 아리스의 이름을 부르자 아리스의 표정이 밝아졌지만, 내 쪽을 바라보더니 표정이 묘하게 변하며 푸드덕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아리스는.
“언니, 잉간이 또 여자 꼬셨어!”
있는 힘껏 블랑카를 부르며 숲속으로 날아갔다.
여자를 꼬셨다니, 그러니까 내가 마치 외도 현장을 목격당한 남편 같은 기분이 들잖아.
잘 생각해 보니 바람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블랑카에겐 리키를 어떻게 설명하지?
리키가 나와 함께 돌아올 줄 몰라서 딱히 변명 같은 걸 생각해 두지 않았는데.
아니, 변명을 왜 해?
내가 뭐 나쁜 일을 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블랑카도 아리스가 들어왔을 때 자기 입으로 한 말이 있으니 별말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겠지……?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푹 한숨을 내쉬는 사이, 이번에는 리키가 내게 어찌 된 일인지 물어 왔다.
“저기, 잉간. 방금 저 사람은……?”
“어? 어, 그러니까. 원래 나랑 같이 살던 아이고. 이름은 아리스인데…….”
“둘이 무슨 관계야?”
“어, 그건.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 말한다면 연인 관계라고 말하는 게 맞겠지만, 나는 쉽사리 입을 떼어 놓질 못했고 그러는 사이 죽음의 기수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잉간.”
“브, 블랑카?”
잘못한 게 없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무척이나 긴장되는 기분으로 살포시 블랑카에게 손을 흔들었고, 블랑카는 무슨 감정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잉간.”
“응, 블랑카.”
“일단, 거기서 좀 내려오지?”
“내려와? 아.”
블랑카의 지적을 듣고 나는 살포시 리키의 품을 벗어나려 하지만, 어째서인지 리키가 나를 꽉 붙잡고 놔주질 않는다.
“저, 저기. 리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싶어 리키의 얼굴을 바라보자, 리키는 털을 바짝 세운 채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이, 잉간. 저, 저 사람들 뭐야? 괴, 괴물 수준인데……?”
“괴물?”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리키의 한마디가 블랑카를 자극했는지 블랑카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발굽을 내디뎠고, 리키는 새된 소리를 내며 부랴부랴 변명했다.
“히익……! 나, 나쁜 뜻이 아니라요…… 마, 마력이 눈이 아플 정도로 많아서…….”
어느샌가 리키는 나를 내려 두고 내 뒤로 몸을 피했고,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블랑카에게 리키를 소개하려 했다.
“블랑카. 얘는 그러니까, 리키라고…….”
“잉간.”
“넵.”
“내가 전에 뭐라고 그랬지?”
“……리베리아 님은 일부다처제를 장려하셨다?”
“내가 생각보다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말했어, 안 했어?”
“했습니다…….”
블랑카는 그런 내 시도를 샐쭉 입술을 내밀고 날 타박하는 것으로 진압해 버리고 터벅터벅 리키에게 다가갔다.
“이름이 리키. 맞죠?”
“네, 네에…….”
“잉간이랑 어디까지 나갔어요?”
“네? 네? 그게 무슨…….”
“아, 그러니까. 그거 했냐고요.”
“아, 아, 아직 안 했어요!”
“아직?”
“히익……!”
마치 취조하듯 블랑카는 어느덧 리키를 바닥에 앉히고 리키의 인적 사항을 이것저것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순혈 라미아는 아니다? 그럼 어느 혈통이죠?”
“어, 그런 건 잘 몰라요. 부모님이 누군지도 잘 모르고, 그냥 철이 들었을 무렵에는 이상한 독방에 계속 갇혀 있었거든요. 헤헤, 그래서 그런지 좁은 곳이 마음 편해요.”
“그래요. 그럼, 잉간은 어떻게 만났죠?”
“어, 그게요. 그러니까…….”
처음에는 두려움에 떨던 리키지만 블랑카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두려움이 많이 사라진 걸까?
리키는 나와 있었던 이야기를 차분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아리스까지 블랑카의 등에 올라타서 리키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는다.
“그래서 마지막에 서로 헤어지는 줄 알고…….”
“서로 헤어지는 줄 알고?”
“그, 그러니까…….”
막힘없이 이야기하던 리키는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고 새빨개진 얼굴을 토끼 귀로 덮어 버렸고, 아리스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리키를 채근했다.
“어, 이 정도면 들을 건 다 듣지 않았어……?”
“잉간은 조용히 해.”
“네…….”
나는 슬며시 그 틈을 타서 상황 정리를 시도해 봤지만 블랑카의 말 한마디에 정리되었고, 리키는 모기만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요.”
“뭐?”
“……했어요.”
“뭘 했다는 건데? 응?”
“키, 키스했다고요!”
아리스의 채근에 리키는 큰 소리로 그렇게 선언하며 귀로도 모자랐는지 손으로 얼굴을 덮어 버렸다.
“마지막 순간에 키스라. 로맨틱하네.”
“부럽다…….”
블랑카와 아리스는 그런 리키의 모습을 바라보며 짤막한 감상평을 남겼고, 나 또한 화끈거리는 얼굴을 주체하지 못하고 슬쩍 자리를 비키려 했지만, 리키의 꼬리가 내 발목을 붙잡았다.
결국 나는 계속해서 이 기묘한 고문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고, 그 뒤로도 블랑카는 수많은 질문을 쏟아 냈다.
“독을 합성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건 정확히 어느 정도까지?”
“어. 그러니까. 적당히 독이라고 했지만 제가 레시피를 이해한 범위 안에선 뭐든지 만들 수 있어요. 제 마력이 허용하는 한은요.”
“자꾸 잉간이랑 붙어 있는 이유는 체온 때문이야?”
“네? 아, 음. 그, 그런 것도 있긴 한데…….”
“있긴 한데?”
“잉간이랑 떨어지면 불안해서요…….”
“허어.”
그렇게 웬만한 건 전부 물어본 블랑카는 마지막 질문이라는 듯 분위기를 잡고 리키의 이름을 불렀다.
“리키.”
“네, 넵!”
“너는 잉간을 어떻게 생각해?”
듣는 것만으로도 낯부끄러워지는 질문이 블랑카의 입에서 흘러나왔고, 리키는 수줍게 손을 꼼지락거리며 달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좋아해요. 아니, 사, 사랑해요.”
“흐으으음…….”
리키의 대답을 들은 블랑카는 깊게 한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잉간.”
“넵.”
“얼굴 이리 대.”
“네? 으읍……!”
“아, 나도!”
벌을 주는 것처럼 블랑카는 내 얼굴을 붙잡고 열정적인 입맞춤을 보냈고, 아리스는 블랑카의 뒤를 이어서 거의 산소 결핍 상태에 빠질 때까지 격렬한 키스를 계속했다.
그렇게 리키에게 과시하듯 내게 입맞춤한 블랑카는 천천히 리키를 바라보며 선언했다.
“리키.”
“넵.”
“이것 한 가지만 기억해. 내가 정실이고, 너는 첩이야. 알겠어?”
“아, 알겠어요! 브, 블랑카 씨!”
“블랑카 씨라고도 부르지 마.”
“그럼……?”
“언니라고 불러.”
“어, 언니……?”
“옳지.”
리키의 대답을 들은 블랑카는 만족스러운 듯한 미소를 지었지만, 그런 블랑카의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흐얏?!”
지금까지의 분위기를 와장창 무너트리는 새된 비명을 블랑카가 지르고, 에포나가 뚱한 표정으로 블랑카의 등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왕!”
블랑카의 등 위에서 짤막하게 짖은 에포나는 그대로 내 품 안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나는 그런 블랑카의 모습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옅게 지었다.
* * *
“어, 어쩌지? 어, 어떻게 하지……?”
지금, 클라인은 발달기 이후로 가장 큰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다.
도망쳐야 하나?
아니, 도망친다고 해도 금방 따라잡힐 거다.
그렇다면 정면에서 맞서?
그런다고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클라인은 말 그대로 일생일대의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말 그대로 대항할 방법이 없는 압도적인 존재의 공격을 받는 기분이다.
하지만 저항할 수 없다고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그들은 기껏 클라인이 쌓아 올린 행복을 박살 내고, 클라인에게 고통을 선사할 것이다.
무언가, 무언가 대책을 세워야 한다.
하지만 가장 믿음직스러운 친구인 파인만도, 심지어 잉간이마저도 이 상황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없다.
맞서 싸울 수 있는 건 오로지 클라인뿐이다.
클라인이 이토록 절망과 공포에 빠진 것은 방금 전 그녀에게 도착한 메시지의 내용 때문이었다.
도대체 어떤 메시지가 클라인에게 도착했는가 하면.
[헤론]
-이번에 올라온 영상 잘 봤다. 쥬튜버? 한다고 했을 땐 걱정했는데 이젠 잘나가는 모양이네? 이번 주에 너희 집에 묵으러 갈 거니까 방 청소 잘해 두렴.
-PS. 이번에 네 조카들도 오니까 진짜 청소 잘해야 한다?
“진짜 죽고 싶다…….”
친척들의 습격을 예고하는 선전포고문이었다.
141화 [V-Log] 청소하는 영상
“진짜, 혼자서 외출하기만 하면 새로운 여자를 꼬셔서 돌아오니, 참…….”
“죄송……합니다?”
“아냐. 잉간이 죄송할 게 뭐 있어? 잉간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그런 건데 뭘.”
리키를 받아들이긴 했어도 새로운 룸메이트가 늘어나는 건 그리 원하던 상황이 아니었는지 블랑카는 나를 바라보며 푹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화나지 않은 거지?
그렇게 블랑카가 푹 한숨을 내쉬는 사이 리키는 아리스의 손에 이끌려서 집 주위의 공간을 소개받고 있었다.
“있지, 저긴 밭이고. 저긴 또 무오 농장인데, 끈적거리니까 근처에 안 가는 게 좋아.”
“그, 그래요?”
“응. 묻으면 씻기 힘드니까 조심해야 해.”
그나저나 아리스는 리키가 안 무서운 걸까?
보통 새는 뱀을 무서워하지 않아?
아, 아리스는 그냥 새가 아니라 맹금류여서 그런 걸까?
오히려 리키가 아리스를 무서워하는 것 같은데.
나는 멍하니 둘의 모습을 지켜보며 오랜만에 찾아온 여유를 즐겼고, 블랑카는 내 곁에 털썩 주저앉으며 내게 말했다.
“이번에는 별로 안 지났어. 한 일주일 정도?”
“그거 다행이네.”
“그래서 잉간. 신님들이랑 한번 일해 보니 어때?”
“응?”
“왜, 계속 일하면 신님들하고 대화할 수도 있다면서? 가능할 거 같아?”
“아, 그거? 뭐, 그 사람이 말한 대로라면 언젠간 가능하겠지.”
“오오…….”
블랑카는 감탄사를 흘리며 이 이야기에 상당히 흥미가 있는 모습을 보였다.
나는 그런 블랑카의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꽤 흥미 있는 모양이네? 너도 신하고 이야기하고 싶던 거야?”
“응? 아니, 이젠 됐어. 그렇지만 뭔가 신화 속의 영웅담 같아서 재밌잖아?”
그러고 보니 블랑카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참 좋아했었지.
뭐, 블랑카 말대로 신화 속의 영웅담의 구조를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일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영웅담이라기보단, 심부름센터의 일상 같은 느낌이지만.”
“에이,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애초에 포인트 몇 점을 모아야 보상을 받을 수 있는지 그 녀석도 모르는 것 같던데? 아마 평생 심부름만 하고 살아도 점수를 다 채우지 못할 수도 있어.”
“하긴.”
“거기에다가…….”
“거기에다가?”
“아냐. 음, 아무튼 그래서 나는 별로야.”
클라인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명령을 받는 게 싫다.
그런 말을 꺼내려고 했지만 어째서인지 말하기 부끄러워져 나는 뒷말을 흐렸다.
그래, 내가 대화하고 교감하고 싶은 건 클라인이지 다른 주인 녀석들이 아니다.
다른 주인 녀석들이 하는 짓을 반려넷으로 지켜보다 보면 살짝 남은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진다.
“그럼 어떻게 하려고? 다른 방법도 없지 않아?”
“그건, 음…….”
그 마을에서 내가 봤던 것이 있다.
마석으로 작동하는 일종의 발전기와 같은 기계.
지금까지는 그런 게 가능할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마석을 이용해서 발전기를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발전기를 만들 수만 있다면 전기로 작동하는 전자 기기들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고, 전자 기기를 만들 수 있다면 일종의 라디오 비슷한 장치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라디오를 만들 수 있다면 아마도 클라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클라인의 목소리는 일종의 전파와 같은 것이니 말이다.
“몇 가지 방법이 생각나긴 하는데, 쉽진 않을 것 같네.”
그 마을에 다녀오기 전에는 먼저 물레방아를 만들고, 차근히 증기기관으로 발전시켜 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석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굳이 그렇게 먼 길을 돌아가야 할까?
왜, 보통 마석을 이용한 발전의 효율이 제일 좋다는 건 헌터물의 클리셰잖아?
그런데 당연하겠지만 쉬운 일은 아닐 것 같다.
만능 사전이나 반려넷의 도움 없이 오로지 나 혼자서 만들어야 하는 일이니 말이다.
머릿속에 남은 희미한 지식과 클라인이 내게 던져 준 문제집의 지식을 합치면 뭔가 나오지 않을까?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가만히 앞으로의 계획을 짜는 사이, 블랑카는 피식 웃으며 내게 말했다.
“뭐, 이대로도 괜찮을 것 같지만 말이야.”
“그렇긴 하지.”
그래, 급할 필요는 없다.
천천히 단계를 쌓아 올리다 보면 언젠간 결실을 거둘 수 있을 거다.
“밥은 먹었어?”
“이제 먹으려고 했지.”
“그래? 그럼 내가 만들어 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
오늘 저녁은 리키의 환영식을 겸해서 성대하게 차려야겠다.
어디 보자, 지금 있는 재료들이……
무오의 알에 고기 여럿, 늘 넘쳐 나는 달맞이풀, 소금과 어디선가 잡아 온 생선?
“생선은 어디서 났대?”
“아리스가 산에서 가져오던데?”
아, 그 펭귄들에게서 뜯어낸 거구나.
일용할 양식을 빼앗긴 펭귄들에게 조의를 표하며 나는 조심스럽게 요리를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리키와 아리스가 집으로 돌아왔고, 아리스와 블랑카가 뭐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리키가 슬그머니 내 옆으로 다가왔다.
“뭐…… 만드는 거야?”
“오늘 먹을 음식.”
“이게 요리라는 거지? 나, 요리하는 거 처음 봐.”
요리하는 모습을 처음 본다고?
하긴, 그 얼어붙은 세계에서 무언갈 요리할 수 있었을 리 없지.
리키는 호기심 넘치는 모습으로 내가 요리하는 모습을 계속 지켜봤고, 나는 리키가 지켜보는 가운데 무오의 알로 만든 오믈렛을 완성했다.
“쩝, 오믈렛은 케첩이 필수인데.”
꽤 그럴싸한 외견의 오믈렛이 완성됐지만, 케첩이 없다는 데 내가 한탄하고 있자 리키는 내게 케첩이 무엇인지 물어 왔다.
“케첩이 뭔데?”
“어? 음식에 뿌려 먹는 소스.”
“무슨 맛이 나는데?”
“살짝 새콤하면서도 달콤한 맛? 근데 갑자기 그건 왜?”
“자, 잠깐만 기다려 봐!”
리키는 그렇게 외치며 내가 오믈렛을 담아 둔 접시 앞으로 이동하더니 눈을 질끈 감고 무언가를 집중하기 시작했다.
리키의 입이 오물오물 귀엽게 움직이고 그에 맞춰서 머리의 귀도 까닥까닥 흔들린다.
“어?”
그리고 자신의 가슴팍에 보랏빛 문양이 나타나 빛을 내기 시작하자, 리키는 조심스럽게 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얼굴을 오믈렛 위에 가져갔다.
“붸에…….”
이어서 리키의 입에서 침과는 다른 보랏빛의 걸쭉한 액체가 흘러내리며 그릇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리키의 긴 혀를 따라 흘러내리는 액체의 모습은 무척이나 선정적이었고, 나는 그런 리키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릇 한편에 보랏빛 액체가 똬리를 틀고 자리 잡고 리키는 고개를 들고 생긋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어때?”
“어, 응? 뭐가?”
리키의 입에서 길게 늘어진 액체의 실이 묘한 배덕감을 자극했고, 나는 멍하니 리키를 바라보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리키에게 되물었다.
“그, 케첩? 이 있으면 좋겠다고 해서 비슷하게 만들어 봤어.”
“그런 것도 가능해?”
“몸에 무해한 성분으로 신맛하고 단맛을 자극하는 독을 만들면 되는 거니까.”
리키는 그렇게 말하며 내게 한번 맛을 봐 보라는 듯 슬쩍 손가락에 독액을 찍어서 내게 내밀었고, 나는 기묘한 감정을 느끼며 리키의 손가락을 바라봤다.
“자, 한번 먹어 봐!”
“어…….”
나는 얼떨결에 입을 벌리고 조심스럽게 리키의 손가락에 입을 가져다 댔고, 리키의 손가락이 내 입안으로 들어와 보랏빛 액체를 혓바닥에 묻혔다.
리키의 말대로 보랏빛 액체는 케첩과 유사한 맛을 냈고, 내 혀는 반사적으로 리키의 손가락에 묻은 액체를 핥았다.
“읏…….”
그제야 객관적으로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걸까?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토끼 귀를 축 늘어뜨린 리키는 살포시 내 입에서 손가락을 빼냈다.
리키는 이윽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부엌에 어색한 침묵을 가져왔고, 나는 이 상황을 타파하고자 머리를 거치지 않고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마, 맛있네.”
“그, 그래? 내, 내 몸에서 나온 거니 당연하지!”
그렇지만 오히려 역효과로 작용했는지 리키의 얼굴이 더욱 빨개진다. 리키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도망치듯 부엌을 떠났다.
어쨌든 그렇게 나는 꽤 화려한 저녁을 만들어서 내놓았고, 모두 다 같이 둘러앉아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리키가 만족스럽게 저녁을 먹은 걸 확인하고, 나는 흐뭇하게 몸을 씻으려 했지만 아리스와 블랑카가 나를 붙잡았다.
“씻는 건 나중에 해도 돼, 잉간.”
“맞아. 맞아.”
“어, 저기……?”
그리고 그런 둘의 모습에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직감했다.
“설마 안 된다고는 하지 않겠지? 일주일이나 참았는데?”
“그건, 그건 아닌데. 다, 다 같이 하려고?”
“응!”
내 두려움이 섞인 질문에 아리스가 해맑게 대답하고, 나는 그대로 침대에 밀려 넘어졌다.
그리고 침대에서는 이미 언질을 받았던 것인지 대기하고 있던 리키가 붉어진 얼굴로 나를 뒤에서 껴안아 붙잡았다.
“리키. 아까 말했던 거 부탁해.”
“어, 어느 정도로요?”
“최대한으로!”
“저기? 뭘 부탁한다는 거……?”
내가 듣지 못한 이야기가 셋 사이에서 오고 가고, 나는 겁에 질린 채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자 했지만.
그 전에.
“조, 조금 간지러울 거예요!”
“흣……?”
리키의 혀가 내 목을 쓰다듬더니, 그대로 리키의 이빨이 내 목에 푹 박히고 뜨거운 열기가 내 몸 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마치 몸이 타들어 가는 것 같은 강렬한 열기가 내 몸을 한바탕 휘젓고 다니자, 나는 그만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열기에 집어삼켜졌다.
그리고 다시 내가 깨어났을 땐.
“……어?”
완전히 녹초가 된 채로 곤히 자고 있는 세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뭐야,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야?
* * *
“도와주세요.”
“클라인? 갑자기 전화해서 무슨 일이야?”
“내, 내일 친척이 집에 온대. 제발 도와줘.”
유리는 다짜고짜 전화해서는 도와 달라고 말하는 클라인의 모습에 의문을 품었지만, 이어진 설명에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무슨 일인지 알겠네. 그런데 도와 달라니, 뭘 도와 달라는 거야?”
“그, 그러니까…….”
패닉에 빠져 있던 클라인은 전화를 해 놓고도 뭘 도와 달라 할지 생각하지 않았다는 듯 말을 더듬었다.
그런 클라인의 한심한 모습을 바라보며 유리는 한숨을 내쉬고 클라인을 진정시키기 시작했다.
“진정 좀 해. 친척이랑 사이가 안 좋아?”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럼 왜 그렇게 호들갑을 떨어?”
“……조카들도 데려온대.”
“아이고.”
유리는 클라인의 대답을 듣고 그녀가 왜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했는지 깨달았다.
조카들이 온다니, 저렇게 겁먹을 만도 하지.
유리 또한 조카들의 습격을 받은 경험이 있기에 쓴웃음을 지으며 클라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전에 조카들은 만나 봤어?”
“아니. 이번이 처음이야…….”
“널 닮아서 생각보다 얌전할 수도 있지 않아? 왜 그렇게 걱정해?”
“……한 명이 아니거든.”
“……몇 명이 온다는데?”
“다섯 명.”
“다섯 명? 혼자서는 무리겠네.”
다섯 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온다는 말에 유리는 쓴웃음을 지었고, 측은한 눈으로 클라인을 바라봤다.
“나도 애들은 익숙하지 않긴 한데…….”
“애, 애들한테 인기 많잖아!”
“그렇다고 애들을 실제로 상대하는 건 아니니까. 그런 식이면 너도 애들한테 인기 많다던데?”
“윽…….”
유리는 시무룩해져서 푹 한숨을 내쉬는 클라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떠올랐다는 듯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차라리 파인만? 인가 하는 친구한테 부탁하지 그래? 그 친구는 애들 좋아하는 거 같던데?”
“나도 연락해 봤는데…….”
“연락해 봤는데?”
“나보다 먼저 파인만 집에 갔던 거 같더라. 전화 거니까 외우주로 임무하러 떠났어.”
“아…….”
하긴, 다섯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보기 쉬울 리 없지.
유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클라인에겐 미안하지만, 이 부탁은 거절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유리가 그런 말을 꺼내기도 전에 클라인의 중얼거림이 유리의 가슴을 꿰뚫었다.
“나한테 친구는 파인만 빼면 너밖에 없단 말이야…….”
“치, 친구?”
“호, 혹시 친구 아니야……? 지난번에 그렇게 말해서…….”
“아냐. 친구 맞아. 그것도 절친이지.”
시무룩한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는 클라인의 찐따미가 유리의 가슴을 뒤흔들었고, 유리는 클라인이 불안한 표정을 짓자 곧바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저렇게 말하는데 도와주지 않을 수가 있나?
유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당장이라도 클라인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수는 없었다.
“마음 같아선 오늘 바로 네 집에 가고 싶거든?”
“응, 그런데?”
“근데, 오늘은 미팅이 있어서 무리일 거 같아. 아마 내일 점심은 되어야 갈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점심? 사, 사촌들은 낮부터 온다는데…….”
“미안. 조금만 버텨 줘.”
“으으…….”
유리는 미안한 듯 웃으며 클라인과의 통화를 종료했고, 클라인은 푹 한숨을 내쉬며 각오를 다졌다.
으, 그래.
애들이 나를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다.
이모님이 온갖 잔소리를 해 대고 내 멘탈을 순식간에 바닥내겠지만.
응, 그렇다고 죽진 않을 거 아냐?
그래, 몇 시간만 버티면 유리도 와서 도와준다고 했잖아?
응, 어쩌면 아이들이랑 놀아 주기 그리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클라인은 그렇게 행복 회로를 돌리며 조카들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날, 조카들을 마주한 지 10분 만에 클라인은 생각했다.
죽을 거 같다고.
142화 [V-Log] 살려 주세요
도대체 지난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리스와 블랑카가 나보다 늦게 일어난 적은 거의 없던 걸로 기억하는데?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되살려 보려고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필름이 끊긴 것처럼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일단 일어났으니 아침을 준비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지만, 심상치 않은 근육통이 내 몸을 덮쳤다.
“윽…….”
어항에 들어온 초기에 근육이 만들어지던 때 이후로는 이 정도의 근육통을 느껴 본 적이 없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는 일단 주위에 대충 널브러진 옷 더미에서 내 옷을 찾아 주섬주섬 챙겨 입고 몸을 씻기 위해 집을 나서려고 했다.
“으음…….”
내 기척에 잠에서 깨어난 것일까?
인간 형태로 침대에 널브러져 있던 블랑카가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어나고, 하품하며 원래의 형태로 돌아가 침대를 내려온다.
“어, 좋은 아침?”
살포시 손을 흔들며 블랑카에게 인사하자, 블랑카는 배시시 얼굴을 붉히며 수줍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좋은 아침.”
그리고 블랑카는 기지개를 켜며 내게 다가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살포시 잡았다.
“그런 취향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잉간도 마음속에는 한 마리의 야수를 키우고 있었구나?”
“어?”
아니, 그러니까 도대체 어제 뭔 일을 한 건데?
내가 한 짓인데 기억이 나질 않으니 뭔가 억울한 기분이 든다.
이게 그 쾌락 없는 책임인가 하는 그거야?
“저기, 그. 블랑카?”
“응?”
“실은,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줄 수 있어?”
“그, 그걸 내 입으로 말하라고?”
나는 큰맘 먹고 블랑카에게 물어봤지만, 블랑카는 얼굴을 붉히며 손사래를 칠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아리스와 리키도 잠에서 차례로 깨어났다.
“으응, 좋은 아침!”
아리스는 졸음이 가득한 눈으로 그렇게 말하며 포로롱 날아올라 블랑카의 등 위에 자리 잡았다.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어?”
아리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블랑카에게 물었고, 블랑카는 아리스에게 내가 말한 부탁을 전달했다.
그러자 아리스 또한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더니.
“그, 그게. 그러니까…….”
차마 입을 떼어 놓지 못하고 우물쭈물 내 얼굴만 바라볼 뿐이었다.
아리스와 블랑카가 이 모양인데 당연히 리키는.
진작에 토끼 귀로 얼굴을 덮고 푹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뭐야, 이 어색한 침묵은?
진짜로 어제 내가 뭘 한 거지?
그러는 사이 아리스가 마음의 준비를 끝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내 곁으로 다가와 까치발을 들고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니까. 어제 무슨 일이 있었냐면…….”
“응.”
소곤소곤.
속닥속닥.
그런 의성어가 어울릴 법한 아리스의 모습이었지만, 아리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찐득찐득 질척질척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어, 어? 내가?”
“응, 잉간이. 나 말고도 언니들도 들고 막…….”
진짜?
진짜 내가 그랬다고?
내 몸에 남은 이 격렬한 근육통은 괜히 남은 게 아니구나.
그런 생각이 들 만큼 평상시의 나로서는 도저히 생각조차 할 수도 없는 격렬한 내용들이 들려온다.
마침내 아리스는 말할 만큼 말했는지 얼굴을 붉히며 다시 블랑카의 등으로 돌아갔다.
그런 나와 아리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리키는 미안하다는 듯 꾸벅 고개를 숙이며 내게 사과를 해 왔다.
“미안. 새, 생각보다 독이 더 잘 드는 바람에 그런 거 같아…….”
“아냐. 어, 나쁜 의도가 있던 건 아니잖아?”
으, 적당히 도핑하는 수준이면 나도 받아들일 생각이지만 솔직히 이건 선을 넘은 수준이다.
이런 일을 두 번 했다가는 내 몸이 견디지 못하고 아작 날 것 같은 기분이다.
“아무튼, 이건 다시 하지 않는 걸로 하자.”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선언했지만 어째 반응들이 그저 그렇다.
블랑카와 리키는 우물쭈물하며 내 시선을 피하고, 아리스는 멋쩍은 듯 헤실헤실 웃는다.
“저기?”
“그. 독만 쓰지 않으면 괜찮지 않을까?”
“마, 맞아. 모,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하면…….”
“응, 응. 맞아!”
아무래도 이 세 사람은 이번 일이 썩 마음에 든 모양이다.
그렇게 어영부영 아침이 지나가고 나는 가만히 오늘 할 일을 떠올린다.
발전기를 만드는 걸 목표로 잡고 어떻게 해야 발전기를 만들 수 있을지 생각해 볼까?
음, 리키가 왔으니 집 내부 구조도 좀 바꾸고 이것저것 리키에게 맞게 가구들도 만들어야겠다.
이왕 집을 리모델링할 거면 새롭게 집을 하나 더 지어 볼까?
해야 할 일은 여전히 많다.
그렇지만 다급한 일은 없으니 조바심 내지 말고 하나씩 차분히 해 가자.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우선 밭과 농장을 관리하려 주섬주섬 물통을 들고 일어날 때, 블랑카가 리키를 불렀다.
“리키, 오늘 딱히 할 일 없지?”
“네? 아, 네. 그런데요…….”
“그럼 나 좀 따라와 봐. 사냥하는 법은 알고 있지?”
“네, 네. 알아요.”
아무래도 리키는 오늘 블랑카와 함께 사냥을 나갈 것 같네.
그럼 오늘 집엔 아리스와 단둘이 남는데, 슬쩍 아리스를 바라보니 내게 뭔가 하고픈 말이 있는 눈치다.
“아리스.”
“응!”
“나 좀 도와줄 수 있겠어?”
“당연하지!”
아리스는 곧바로 내 곁으로 다가오더니, 펄쩍 뛰어올라 목말을 탄다.
나는 피식 웃으며 아리스를 목말을 태운 채로 밭으로 향했고, 아리스는 내가 물통을 들어 올리자 알아서 물통에 물을 채웠다.
그렇게 아리스와 함께 간단한 집안일을 하며 시간을 흘려보냈고, 웬만한 집안일은 다 끝내자 아리스가 고개를 숙여서 내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잉간. 있잖아.”
“응?”
“나, 오늘 잉간이랑 같이 산책 나가고 싶은데.”
“단둘이? 어디로?”
“산. 괜찮지?”
뭐, 산이라면 아리스가 완전히 장악한 지역이기도 하고, 둘이서 가도 별문제는 없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리스의 제안을 수락했고, 아리스는 들뜬 표정으로 내 목에서 폴짝 내려와 창고로 달려갔다.
잠시 후 창고에서 나온 아리스는 어깨에 푸른 점액을 태우고 있었고, 푸른 점액은 나를 발견하더니 내게 꾸벅 고개……로 추정되는 부분을 숙였다.
그러자 아리스는 그런 점액을 흐뭇하게 바라보더니 점액에게 마석 몇 알을 던져 줬다.
“가자!”
아무래도 오늘 산책은 저 점액과 함께할 듯싶다.
아리스는 하늘로 날아올라 산으로 향하려다가, 문득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 다시 땅으로 내려왔다.
“왜 그래?”
그 모습이 의아해진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아리스는 씨익 웃으며 내 품에 뛰어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아리스를 안아 들었고, 아리스는 기분 좋은 듯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나도 한번 해 보고 싶었어. 헤헤.”
그렇게 중얼거리는 모습이 퍽 귀여워서 나는 살며시 아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분 좋은 듯 콧노래를 흥얼대는 아리스를 쓰다듬으며 나는 산으로 향하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산으로 향하며 나는 슬쩍 아리스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마법은 요즘 어때?”
“아, 맞다. 오늘 그거 보여 주려고 했어!”
“그거?”
“히히, 이따가 산에 가서 보여 줄게!”
별로 알려 준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벌써 이렇게 알아서 엄청 성장했네.
나는 그런 아리스가 퍽 대견해서 아리스의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었고, 그러자 아리스는 입술을 툭 내밀며 투덜거렸다.
“그렇게 바라보는 거 싫거든?”
“미안.”
딱히 여동생이나 남동생이 있던 것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자꾸만 아리스를 여동생처럼 보게 된다.
뭔가 일종의 부성애 같은 걸 느끼는 거 같은데 어째서일까?
아리스의 계속된 어필 덕분에 여성으로 느껴지기는 하지만, 자꾸만 무의식 한구석에선 아리스를 그렇게 여긴다.
우주정거장에 들어가기 전에도, 우주정거장에 올라간 후에도 부성애를 각성할 만한 일은 없었는데, 왜 그러지?
“저기, 잉간.”
내가 스스로의 마음에 의문을 품는 사이, 아리스도 내게 궁금한 것이 생긴 모양이다.
“잉간 아빠하고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어?”
“응? 그냥 평범했던 거 같은데.”
“평범하다니, 어떻게?”
“그냥. 평범하게 자식을 아끼고, 평범하게 서로 사랑하고. 그렇게.”
“그게 평범한 거구나?”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부모님을 자주 뵙지는 못했지만, 방에 틀어박힌 나를 걱정해서 문 앞에 먹을 걸 가져다 두던 기억이 난다.
우주정거장의 내 방 안에서 부모님이 보낸 편지를 읽으며 눈물지었었는데.
그런 추억을 떠올리던 나는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고, 그 위화감이 무엇인지 깨달으려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어진 아리스의 말이 그런 내 상념을 와장창 무너트렸다.
“그럼 내 부모님은, 평범한 분들이 아니었던 거구나.”
“그건…….”
생각해 보니 아리스의 가족은 그리 화목한 사이는 아니었었지?
아리스가 가끔씩 던지듯 추억하는 과거 이야기로 아리스의 과거가 그리 행복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최대한 언급을 피했는데, 이렇게 훅 들어오니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네.
나는 그저 말없이 아리스의 이마를 토닥였고, 아리스는 날개를 내 손에 가져다 대며 투덜거렸다.
“이거 싫다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리스는 가만히 내 손을 붙잡고 생긋 웃음을 지었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동굴을 지나 산 정상에 도착해 있었고, 아리스는 폴짝 내 품에서 뛰어내려 해맑게 웃었다.
“그럼 잉간, 봐 봐. 보고 제대로 놀라야 해?”
“그래, 한번 해 봐.”
“흡!”
아리스가 가만히 눈을 감고 집중하기 시작하자, 그녀의 몸 주위에 은빛 알갱이들이 떠다니기 시작했다.
뭘 하려고 하길래 저렇게 집중하는 거지?
뭐, 마법진이라도 그리려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리스의 몸에서 도망쳐 내게 다가온 점액을 어깨 위에 살포시 올려놨고.
쿵.
하늘에서부터 무언가가 떨어졌다.
“응?”
하늘에서 떨어진 건, 신선하게 팔딱거리는 정체 모를 생선이었다.
나는 바닥에서 흙먼지를 뒤집어쓰는 생선을 집어 들고 감탄사를 흘렸다.
“아리스, 이거 어떻게 한 거야?”
“응?”
그렇지만 아리스는 눈을 뜨고 생선을 바라보더니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이거 내가 한 거 아닌데?”
“뭐?”
아리스와 내가 서로를 바라보고 고개를 갸웃거린 순간.
쾅.
콰직.
콰직.
하늘에서부터 어마어마한 양의 물고기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게,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 * *
[헤론]
-나는 근처에서 급한 볼일이 생겨서 애들 먼저 보낼게. 잠깐만 좀 봐줘, 미안해~
“어?”
클라인은 친척들이 오기로 한 시각이 되기 몇 분 전, 자신에게 도착한 메시지를 바라보며 망연자실했다.
이모가 늦게 온다고?
잠깐, 그렇다는 건 나 혼자서 아이 다섯 명을 상대해야 한다는 거야?
이, 이모가 없는 상황에서 내가 제대로 아이들을 통제할 수 있을까?
이모가 있어도 잘 통제가 되지 않을 거 같은데?
그렇게 클라인이 믿기지 않는 현실에 망연자실해하는 사이에도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고, 마침내 종말의 때가 밝았다.
콩콩콩.
발랄한 노크 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오고, 클라인은 떨리는 눈으로 현관문을 바라봤다.
그냥 집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계속 문을 닫아 버리고 싶다.
“누나! 문 열어 줘!”
“언니! 문!”
하지만 발달기의 아이들을 그냥 문밖에 내버려 둘 수도 없었기에 클라인은 한숨을 푹 내쉬며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클라인 누나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해맑게 웃으며 자신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는 다섯 명의 아이들이 클라인의 시야에 들어왔다.
“어, 응. 반가워. 얘, 얘들아…….”
클라인은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당기며 반갑게 손을 흔들었고, 아이들은 방긋 웃으며 클라인의 집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래, 바로 인사를 하는 걸 봐선 그렇게 다루기 힘든 아이들이 아닐지도 몰라.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웃는 얼굴로 아이들을 맞이했다.
“이모한테서 이야기 많이 들었어. 벌써 성별을 정했다면서?”
“응! 나는 여자로 정했어!”
“나는 남자!”
“이야, 대단하네.”
클라인의 말에 클라인을 언니라 부르던 아이가 손을 들고 자신은 남자라고 말하고, 누나라고 부르던 아이는 여자가 되는 걸 선택했다 말한다.
아직 호칭이 헷갈릴 나이긴 하지.
클라인은 아이들의 호칭을 바로잡아 줄까 하다가 발달기 때 별것 아닌 어른들의 지적 한마디에 상처받았던 기억을 떠올리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는 사이, 아직 성별을 정하지 못한 것 같은 나머지 세 명의 아이들은 삐죽 입술을 내밀고 투덜거리듯 중얼거렸다.
“나도 곧 성별 정할 거야.”
“빠르게 결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급할 필요는 없어.”
클라인은 그렇게 말하며 아이들의 촉수를 쓰다듬었고, 아이들은 금세 기분이 좋아져서는 해맑게 웃었다.
어라, 생각보다 그렇게 힘들지 않은데?
너무 파인만의 경험담을 듣고 겁을 집어먹었었나?
클라인이 그렇게 생각할 만큼 아이들은 꽤나 얌전해 보였다.
클라인은 흐뭇하게 웃으며 조심스럽게 아이들에게 미리 준비해 둔 간식거리를 내놨다.
몽상 덩어리들이 담긴 접시를 클라인은 탁자 위에 놔두고 아이들을 불렀다.
“자, 먹고 싶은 만큼 먹어.”
“진짜?”
간식을 좋아할 나이답게 조카들은 클라인이 별다른 안내를 하지 않아도 알아서 탁자에 모여서 몽상 덩어리를 갉작거리기 시작했다.
후, 이렇게 먹을 걸 물려 두면 괜찮겠지?
클라인은 아이들이 얌전히 먹을 걸 먹는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부엌에서 내쉬었다.
하지만 서서히 몽상 덩어리가 줄어들어 가고, 배도 채운 아이들은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언니, 언니. 여기 영상에서 봤어! 쥬튜브 촬영하는 곳이 여기 맞지?”
“어? 응, 맞는데…….”
간식을 주워 먹고 클라인의 집 안을 탐험하기 시작한 조카들 중 한 아이가 잉간이를 놔둔 방의 입구를 찾아냈고, 아이는 잔뜩 들떠서 클라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클라인이 아이의 질문에 긍정하자.
“어디? 어디? 나도 볼래!”
“언니, 저 안에 잉간이 있는 거 맞지, 그치?”
조용하던 아이들이 단숨에 득달같이 들고일어나며 클라인에게 달라붙기 시작했다.
“잉간이, 잉간이 보고 싶어!”
“맞아, 잉간이 보고 싶어!”
아이들은 클라인을 둘러싸고 잉간이를 보여 달라 졸라 대기 시작했다.
으, 어쩌지?
벌써 간식은 다 떨어졌고, 이대로라면 아이들의 흥분이 가라앉지 않을 거 같은데?
“그, 쥬튜브 영상 보여 줄 테니까…….”
“싫어! 진짜 잉간이 보고 싶단 말이야!”
“맞아, 진짜 잉간이!”
그렇지만 영상으로 아이들을 진정시키긴 무리일 것 같다.
으으, 그래. 뭐 별일 있겠어?
잉간이를 차원항 밖으로 꺼내는 것도 아닌데, 단단히 주의 주면 괜찮을 거다.
그렇게 생각한 클라인은 한숨을 내쉬며 아이들에게 이야기했다.
“그럼, 눈으로만 보기로 약속하면 보여 줄게. 알겠지?”
“응, 그럴게!”
“응, 응!”
결국 클라인은 아이들을 잉간이가 있는 방 안으로 들였고, 아이들은 방 안을 이리저리 살피며 연신 탄성을 질렀다.
“우와, 언니. 이건 뭐야?”
“응? 나중에 잉간이 주려고 사 둔 바다 생물들.”
“우와!”
“잉간이 저기 있다!”
“손으로 만지지 말고, 눈으로만!”
“응, 응!”
그래도 클라인과의 약속을 지키려는 것인지 아이들은 탄성을 지르면서도 잉간이가 든 차원항을 건드리지 않고 바라만 봤다.
때마침 잉간이는 농장을 관리하기 위해서 집 밖으로 나와 있었고, 아이들은 잉간이의 모습을 주의 깊게 바라봤다.
그래, 이렇게 계속 바라보기만 해 주면 좋겠는데.
하지만 당연하게도 아이들의 집중은 오래가지 않았고, 두 아이를 제외한 다른 아이들은 차원항에서 시선을 떼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나 이 책상 알아. 안녕하세요~ 차원항 장인 클라인입니다! 이거 하는 책상이지?”
“아하하…… 응, 그렇지…….”
정신적 타격이 계속해서 들어오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이모하고 유리가 올 때까지 버틸 수 있겠네.
클라인은 그렇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늘 사고는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법이다.
“누나, 이거 잉간이 밥이야?”
“응. 잉간이 밥이야.”
“우와!”
“언니, 이건 뭐예요?”
“그거? 그건 하늘고래라고…….”
클라인이 잠시 한 아이에게서 한눈을 판 사이, 아이는 해맑게 웃으며 바다 생물들이 들어 있는 그릇에 촉수와 손을 집어넣고는.
“잉간아, 밥 많이 먹어야 해!”
그대로 잉간이의 차원항 안으로 바다 생물들을 잔뜩 집어넣기 시작했다.
“나도, 나도 줄래!”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그 아이를 따라서 너도나도 바다 생물들을 차원항 안에 집어넣기 시작했고, 그제야 클라인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했다.
“어, 어? 잠깐, 안 돼!”
당황한 클라인은 소리치며 아이들을 촉수로 붙잡아 차원항에서 떼어 놨지만, 이미 대다수의 바다 생물들이 차원항 안으로 쏟아진 상태였다.
“뭐, 뭐 한 거야!”
당황한 클라인은 아이들에게 소리쳤지만, 아이들은 해맑게 클라인의 외침에 대답했다.
“잉간이가 배고플까 봐 밥 줬어!”
티 하나 없는 순수한 호의를 가득 담아서 말이다.
143화 [V-Log] 1시간 동안 아이들하고 놀아 주는 영상
달리의 그림 속에 들어온 것 같은 초현실적인 풍경이 내 시야를 가득 뒤덮는다.
하늘에서 물고기들이 비처럼 우수수 떨어지는 풍경이라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일까?
반려넷에 물어본다면 행동 풍부화라는 대답이 돌아올 것이고, 광신도들에게 물어본다면 신의 축복인지 뭔지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나의 경우에는.
“……뭔가 실수했나?”
이 현상에 누군가의 의도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껏 겪어 온 바로 짐작하면, 그냥 실수로 이런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분명히 아무것도 없는 바다에 뭔가 채워 넣으려다가 실수했다거나 그런 일일 것이다.
나와 아리스가 멍하니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고기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물고기가 비처럼 내린다는 풍경은 비현실적이었다.
아리스가 그렇게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와중, 하늘에서 떨어진 물고기가 정통으로 아리스의 얼굴에 직격한다.
“으극!”
“푸흡……!”
아리스는 신음 소리를 내며 얼굴을 어루만지고, 그 모습이 퍽 웃겨서 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린다.
그러자 아리스는 째릿 나를 노려보고, 그와 거의 동시에 하늘에서 떨어진 물고기가 내 안면을 강타한다.
“윽……!”
“푸핫……!”
아리스와 나는 그렇게 서로의 모습을 보며 웃음보를 터트렸지만, 장대비가 쏟아지는 것처럼 들려오는 충격음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거의 땅이 메꿔질 정도로 하늘에서 물고기들이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고기의 홍수라고 해도 될 지경인 모습에 나와 아리스는 얼굴을 굳혔다.
그냥 비와는 다르게 이 물고기의 비는 질량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게 무슨 뜻인가 하면, 열심히 자라나기 시작한 밭을 완전히 망쳐 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간신히 꽤 안정적인 식탁을 차릴 수 있게 되었는데, 그걸 포기할 수는 없다.
다행히 아직 이 물고기 비는 산 근처에만 내리고 있으니 빠르게 집으로 돌아간다면 밭을 지켜 낼 수 있을 것이다.
“아리스, 일단 돌아가자. 빨리!”
“응, 알았어.”
아리스 또한 일단 빨리 집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인지 내 어깨를 발톱으로 붙잡고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꺄악?!”
도저히 회피할 수 없을 정도로 탄막처럼 하늘에서 쏟아지는 물고기가 아리스의 비행을 방해한다.
“아리스, 일단 내려오자! 지금 이 날씨에 나는 건 너무 위험해!”
“으윽……!”
결국 우리는 나는 걸 포기하고 지상으로 내려왔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서둘러 아래로 향하는 동굴로 발을 놀리자, 동굴 안에서 팔딱거리는 수많은 물고기가 나를 반긴다.
아리스를 등에 태우고 서둘러 발을 놀리며 아래로 내려가던 순간.
“위험해!”
아리스의 경고가 들려오는 것과 함께 입가가 피투성이로 물든 물고기가 물고기들 사이에서 튀어나와 내게 달려든다.
“읏……?”
나는 당황하며 몸을 움츠렸지만, 물고기의 공격을 피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물고기는 내게 닿지 않고, 그대로 허공에서 불타올라 재가 되어 사라졌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아리스가 주문을 영창하는 소리가 들리지도 않았는데?
나는 의아한 눈빛으로 고개를 돌려 아리스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러자 달빛으로 물든 아리스의 커다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빛나는 모습이 보였다.
온몸에서 빛나던 은빛 알갱이가 아리스의 눈으로 집중된 것 같은 모습이다.
이건, 도대체?
“아리스, 이건……?”
“내가 보여 주겠다고 한 거! 마안? 이라는 기술이라는 거 같더라!”
아리스는 그렇게 외치며 물고기들로 틀어막힌 통로를 째릿 노려봤고, 그러자 아까처럼 물고기들이 순식간에 불에 타서 사라졌다.
“봐 봐, 이렇게 주문을 외우지 않아도 마법을 쓸 수 있어!”
“칭찬은 이따 집에 가서 해 줄게!”
“응!”
나는 그대로 아리스를 등에 태운 채로 동굴을 빠져나왔고, 서둘러 산 밑으로 하산하는 와중 재난을 덩달아 겪는 뚜벅나무버섯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물고기들이 계속 부딪치는 걸 견디지 못하겠는지 버섯들이 일어서서 숲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그 순간.
하늘에서부터 떨어진 무언가가 뚜벅나무버섯의 머리를 단숨에 베어 물고 바닥에 떨어져 펄떡거린다.
“……상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의 정체는 다름 아닌 상어였다.
그리고 상어를 시작으로 하늘에서 더욱 다양한 괴수들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엄청난 크기의 상어는 기본이고, 개구리와 악어를 합쳐 놓은 것 같은 기묘한 생김새의 생물도 숲속 이곳저곳을 뛰어다닌다.
개구리를 닮은 생김새답게 물 밖에서도 어느 정도 생존할 수 있는지 녀석은 폴짝거리며 숲속으로 사라져 간다.
그래, 평범한 물고기들만 떨어질 거라곤 생각하진 않았지만 저건 물고기도 아니지 않아?
해양 생물이라는 범주 안에는 포함되는 건가?
그런 기괴한 괴수들 외에도 해파리처럼 보이는 생명체들이나 기묘한 생물체들도 계속해서 지상을 향해 추락하고 있었다.
설마 집에 돌아갔더니 저런 괴생명체들이 난장판을 만들어 놨다거나 하진 않겠지?
그런 불안한 마음을 안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자.
“아이고…….”
아니나 다를까, 집으로 돌아오니 물고기들이 펄떡거리는 개판, 아니 물고기 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이고, 죄다 상했네. 이거.”
하늘에서 물고기들이 떨어진 충격과 그 이후의 물고기들의 발버둥 때문에 밭이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내가 망가진 밭을 보며 한숨을 내쉬는 사이, 무오 농장을 살피러 갔던 아리스가 돌아왔다.
“잉간! 무오 농장이 좀 이상해!”
“농장이 이상하다고?”
밭은 몰라도 무오 농장은 멀쩡할 줄 알았는데, 거기도 난리라고?
서둘러 아리스와 함께 농장으로 가 보니 아리스의 말대로 무오들이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드러누운 채로 먹이나 먹으며 태평하게 울어 댔을 무오들이지만, 무오들은 끊임없이 몸을 뒤틀며 발버둥 치고 있었다.
뭔가 이상한 거라도 주워 먹었나?
복어 같은 걸 먹은 걸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무오들의 상태를 살피러 발을 내디뎠고.
“읏……?!”
무언가가 짜릿, 하고 내 몸을 관통하는 충격에 튕겨 나가며 뒤로 넘어졌다.
“잉간, 괜찮아?!”
아리스가 내게 날아와 나를 일으키고, 나는 머리를 움켜쥐며 신음을 흘렸다.
“방금 그건…….”
방금 그건 아무리 봐도 전기였는데?
설마, 저 무오들은 감전을 당하는 중인 걸까?
하지만 전기가 어디서 솟아난 거지?
의아해하며 무오들 사이를 좀 더 자세히 살피자.
“어?”
해파리처럼 보이는 생물체가 무오들 사이에 널브러져서 빛을 뿜어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설마 저 해파리가 전기를 만들어 내는 원인인 걸까?
“아리스, 저 해파리만 어떻게 좀…….”
“죽여?”
“죽이는 건…….”
만약 저 해파리가 전기를 만들어 내는 생물이라면 그냥 죽이기 아까운데?
내가 굳이 힘들게 발전기를 만들 필요 없이 저 녀석들을 사육하는 것으로 전기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지금 당장은 저 해파리의 전기를 막아 내거나 격리할 수단이 없다.
결국, 나는 눈물을 머금고 아리스에게 해파리를 죽여 달라 부탁했다.
아까 보니까 저렇게 생긴 해파리들 몇 마리가 숲속에 떨어지는 게 보였다.
이 소동이 끝나고 난 뒤 숲속을 뒤져 보면 살아 있는 해파리 몇 마리를 얻을 수 있겠지.
으아, 앞으로 한동안은 생선을 질릴 때까지 먹어야겠네.
아니, 그것보다 이 생선들이 다 썩으면 악취가 엄청날 거 같은데?
이 많은 생선들을 어찌 처리하나 고민하던 와중, 내 눈에 바닥에서 꼼질거리는 무언가가 들어온다.
“음?”
푸른 점액이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슬쩍 몸을 키워서 바닥에 널린 물고기들을 먹어 치우고 있는 모습이 내게 포착된 것이다.
너무 커지지만 않으면 뭐, 쓰레기 청소에 도움을 줄 테니 가만히 내버려 둘까?
마음 같아서는 아리스의 도움을 받아서 죄다 불태워 버리고 싶지만 아리스의 마력에도 한계가 있을 테니까.
일단, 물고기들의 몸에서 나온 점액들부터 어떻게 지워야겠네.
집 안까지 들이닥쳐서 팔딱거리는 물고기들을 집 밖으로 던지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물을 퍼 오기 위해 물통을 들고 호숫가로 향했다.
그리고 호숫가에 도착한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어?”
수많은 바다 괴수들이 한데 뭉쳐서 배틀 로열을 펼치고 있는 끔찍한 풍경이었다.
* * *
클라인은 일단 서둘러 촉수로 아이들을 휘감아 차원항에서 떼어 놓고, 서둘러 차원항 안의 상태를 살폈다.
당연하겠지만, 아이들이 그냥 마음대로 바다 생물을 뿌린 결과, 대부분의 생물체들은 땅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몇몇 생물들은 간신히 호수로 피신해서 목숨을 건지거나 처음부터 바다에 떨어졌지만, 대부분의 생물들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아무리 먹이 생물들이라고 해도 이런 식으로 죽이는 건 해서는 안 될 짓이다.
무엇보다 이번 일로 잉간이가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지, 잘못하면 잉간이가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클라인은 자신도 모르게 해맑게 웃고 있는 아이들에게 버럭 소리치고 말았다.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러자 해맑게 웃고 있던 아이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지더니, 겁먹은 눈동자로 클라인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냥, 잉간이 밥 주려고…….”
“인간은 민감해서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단 말이야…….”
그런 아이의 모습을 보자 순간 뜨겁게 폭발했던 머리가 차갑게 식어 가는 것을 느낀 클라인은 잠시 심호흡을 하며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일부러 악의를 가지고 한 행동이 아니라는 건 안다.
분명히 순수한 마음에 호의를 표현하려고 했던 행동이겠지.
그렇다고 해도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게 맞다.
모른다는 건, 기회를 줄 이유는 되어도 벌을 받지 않을 이유는 될 수 없다.
내가 낼 혼은 충분히 낸 것 같으니, 이제 혼을 낸 이유를 알려 줘야겠지.
더 혼낼 필요가 있다면 그건 이모님이 알아서 해 줄 것이다.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아이들을 다시 바닥에 내려놓고,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설명했다.
“저렇게 함부로 먹이를 넣으면, 차원항 내부의 균형이 깨진단 말이야.”
“균형이 왜 깨지는데?”
아까 클라인이 고함을 지른 탓일까?
아이들은 상당히 위축되어 보였지만 주춤주춤 클라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음, 너무 복잡하게 말하면 아이들이 알아듣지 못할 테니 적당히 아이들 수준에 맞춰서 설명하면……
“너희들, 간식 먹는 거 좋아하지?”
“응, 좋아해!”
“그런데 말이야, 배가 가득 차서 더 못 먹을 거 같을 때 누가 자꾸 간식을 주면 먹을 수 있겠어?”
“못 먹을 거 같아!”
“그래. 그러면 간식이 남겠지? 그런데 말이야, 만약 남은 간식이 방 안을 가득 채울 만큼 많으면 어떻게 될까?”
“어…… 그럼…….”
“다 먹지 못하고 간식이 썩어 버리겠지?”
“맞아, 그럴 거 같아!”
“그런 거야. 네가 잉간이를 좋아해서 밥을 많이 주더라도, 잉간이가 다 먹지 못하면 오히려 잉간이에게 안 좋은 일이 되는 거야.”
발달기 시절 자신이 바랐던 대로 클라인은 차분하게 아이들에게 설명했고, 아이들은 클라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아들은 듯 보였다.
“그럼, 이, 잉간이 아파?”
“아니, 이 정도로는 괜찮아. 하지만 함부로 대하다가 잉간이가 다칠 수도 있으니 조심해 달라는 거야.”
“응…….”
클라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고 서둘러 차원항 내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으, 대부분의 해양 생물들이 죽어 버려서 다시 주문해야겠네.
클라인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차원항 내부에서 물고기의 사체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사체만을 제거하기 어려워서 몇몇 사체들은 놔둘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도 대부분의 사체들은 다 제거한 것 같다.
후, 잉간이가 이번 일로 많이 놀라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한바탕의 소동이 끝나고 클라인은 아이들을 방 밖으로 내보냈다.
“생명도감 만났던 이야기 해 줘!”
“아니, 그거! 그, 속혼하고 합방했던 이야기!”
그냥 아이들을 방치할 수도 없는 법이기에 클라인은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이야기를 해 주며 시간을 때웠다.
으, 빨리 이모님이 오셔야 이 시간이 끝날 텐데……
클라인이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눈물을 흘리던 그때.
쿵쿵쿵.
“클라인~ 나 왔다!”
“이모!”
지금 이 순간, 그 어느 때보다 클라인에게 한 줄기 구원과도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헤론 이모가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144화 [조충지] 죽기 전에 한 번은 가 봐야 하는 여행지 TOP 8
고독.
대충 항아리 안에 온갖 독충들을 집어넣어서 한 마리만 살아남게 해서 만들어 내는 엄청 센 독.
호숫가의 풍경은 고독을 연상시킬 만큼 완전히 개판 그 자체인 상태였다.
내가 멍하니 지켜보는 와중에도 바다의 괴수들은 좁아터진 호수에 들어가고자 사투를 펼치고 있다.
거대한 상어가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뱀 같은 생명체를 통째로 삼키고, 그 거대한 상어를 물고기의 떼가 덮쳐 살점을 전부 발라낸다.
어디선가 번쩍, 강렬한 빛이 빛나더니 물고기들이 바싹 구워지고, 그대로 거대한 해파리의 몸 안으로 삼켜진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괴수들은 계속해서 서로를 먹고 삼키는 살육을 벌여 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싸움은 멈췄다.
더 이상 죽일 생물이 없어지는 것으로 말이다.
이 기묘한 고독 항아리 속에서 살아남은 것은 바로.
과거 뱃사람들이 두려워했던 크라켄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거대한 문어였다.
크라켄은 나와 아리스가 지켜보는 눈앞에서 사방으로 전기를 뿜어내던 거대한 해파리를 촉수를 이용해 두 쪽으로 찢어 버리고는 스멀스멀 해파리의 사체를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네모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더 싸울 상대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천천히 호수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크라켄의 크기가 워낙 큰 탓에 크라켄이 몸을 납작 낮춰도 거대한 머리 윗부분이 물 위로 드러나 분홍빛 섬 같은 모습을 연출한다.
“……저걸 어쩌지?”
그리고 지금까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나는 멍하니 그렇게 중얼거리는 수밖에 없었다.아무리 생각해도 저 크라켄이 호수 가까이 다가가는 걸 용납할 것 같진 않은데?
쫓아낸다고 해도 절대로 저 호수에서 나가지 않으려고 할 거고, 어떻게든 저 괴물을 잡아내야 하는데.
블랑카가 오더라도 저 괴물을 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블랑카가 베헤모스처럼 거대한 괴수를 단숨에 잡아내는 모습을 보여 준 적은 있지만, 그 녀석들은 죄다 코끼리 같은 거대한 네발 동물들이었다.
다리를 제압하면 그 뒤로는 별것 없는 녀석인데, 저 크라켄은 다르다.
다른 녀석들을 먹어 치우던 때 보인 모습을 보면 여덟 개의 다리로 공방 일체의 모습을 보였는데, 블랑카가 사용하던 것처럼 촉수에 마력을 불어 넣는 모습까지 보여 줬다.
진짜, 저걸 어떻게 잡아야 하지?
호수를 이 상태로 놔둘 수는 없으니 어떻게든 잡긴 해야 하는데, 블랑카와 리키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그렇게 고민하며 푹 한숨을 내쉬던 그때, 아리스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내 앞으로 나섰다.
“흐흥, 뭘 그렇게 고민해? 그냥 구워 버리면 되잖아!”
“구워 버려?”
“아예 호수를 끓여 버리면 저 문어가 밖으로 나오든가 안에서 삶아지든가 하겠지!”
“그게 가능해?”
아니, 당연히 호수를 끓일 수만 있으면 그 방법이 최고긴 하겠지만, 저 넓은 호수를 끓일 수 있을까?
아무리 아리스의 마력이 넘쳐 난다고 해도 그건 무리일 것 같은데.
“당연히 가능하지!”
하지만 자신만만하게 선언한 아리스는 허공으로 날아올라 은빛 눈동자로 호수를 바라봤고, 크라켄 또한 네모난 눈동자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아리스를 가만히 바라본다.
도대체 아리스가 어떤 원리로 주문을 사용하지 않고 마법을 사용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리스가 은빛의 눈으로 호수를 바라보자 호수가 불타기 시작했다.
그러자 크라켄은 슬쩍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더니, 보랏빛 마력을 몸에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자 크라켄의 몸에서 보랏빛 마력이 방출되며 호수 위로 퍼져 나가고, 보랏빛 마력이 지나간 자리의 불꽃이 사그라든다.
“으윽……!”
그러자 아리스는 분한 듯 이를 악물며 크라켄을 찌릿 노려보고, 아리스의 마력과 크라켄의 마력이 지지부진한 줄다리기를 시작한다.
보랏빛 마력과 불꽃이 호수 위에서 서로를 잡아먹기 위해 격돌하지만, 도무지 끝이 날 것 같지 않다.
결국, 이 대결은 아리스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짜증을 부리며 지상으로 내려오는 것으로 끝이 났다.
“으으……!”
크라켄의 마력을 이겨 내지 못한 것이 분한지 아리스는 입을 삐죽 내밀고 내 등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리스의 마법으로도 저 녀석을 어찌하지 못했으니 이젠 정말 블랑카와 리키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나?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 문득 내게 한 가지 방법이 떠오른다.
그것은 바로, 상태 창으로 호수의 정보를 바꿔 놓는 것이다.
크라켄이 마력으로 저항하려고 해도, 호수 자체의 상태가 바뀐 것이기 때문에 어찌하지 못하겠지.
하지만 이 방법도 문제가 있긴 한데, 가장 큰 문제는 내가 상태 창을 만들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바깥세상처럼 주위에 정보 덩어리들이 막 굴러다니는 게 아니라면 상태 창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아직 나는 정보 덩어리를 만들어 낼 방법을 모르니까.
으, 잡을 방법은 있는데 실천을 할 수가 없네.
그렇게 생각하며 푹 한숨을 내쉬던 그때.
“왕!”
어디선가 나타난 에포나가 짤막하게 짖으며 내 주의를 끌었다.
그러고는 몸을 거세게 흔들며 캑캑거리더니, 입에서 무언가를 바닥에 뱉어 냈다.
에포나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모자이크 처리가 된 것처럼 뿌옇게 흐려진 상태의 정보 덩어리였다.
“왕!”
에포나는 다시 한번 내게 짤막하게 짖고는 근처의 바닥에 몸을 깔고 엎드려서 나를 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런 에포나의 모습을 보며 나는 피식 미소 지었다.
“그래. 고맙다. 인마.”
“왕!”
알면 됐다는 듯 에포나는 꼬리를 흔들며 숲속으로 사라졌고, 나는 조심스럽게 정보 덩어리를 들어 올리고 마법의 단어를 외쳤다.
“……상태 창.”
마법의 단어를 외친다고 상태 창이 나타나는 일은 없었지만, 상태 창을 만들어 낼 수는 있었다.
다시금 내 손안에 익숙한 생김새의 창이 생겨난 것을 확인하고, 나는 아리스에게 말했다.
“아리스, 나를 호수 위로 데려다줘.”
“응, 알았어!”
아리스는 내가 뭘 하려는지 묻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내 어깨를 붙잡고 하늘로 날아올랐고, 나는 상태 창을 치켜들고 호수를 향해 조준했다.
크라켄 또한 이번에는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둘 생각이 없는지 촉수를 꾸불텅 물 위로 들어 올렸지만, 나는 잽싸게 호수를 향해 상태 창을 집어 던졌다.
크라켄은 상태 창을 막을 생각도 하지 않고 나에게 촉수를 곧바로 날려 왔지만, 아리스는 순식간에 고도를 높이며 크라켄의 공격을 피해 냈다.
그리고 호수에 떨어진 상태 창은 그대로 호수의 상태를 바꿔 놨다.
부글부글.
단번에 호수에서 수증기와 거품이 끓어오르며 크라켄의 몸을 붉게 익혀 간다.
크라켄은 촉수를 꿈틀거리며 서둘러 호수를 빠져나오려 했지만,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촉수를 몇 번 움직이지도 못하고 붉게 굳어졌다.
한번 상태가 수정된 호수는 그대로 말라붙을 때까지 끓어올랐고, 나와 아리스는 천천히 바닥에 내려왔다.
“해치웠나?”
부활의 주문을 외웠음에도 크라켄이 다시 움직이는 일은 없었고, 말라붙은 호수에는 폭포가 다시 쏟아지며 조금씩 물을 채워 갔다.
좋아, 가장 큰 골칫거리를 치웠으니 이제 집을 청소해 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바닥에 내려와 물을 담으러 호수로 발걸음을 옮겼지만.
“:-(”
“클라인?”
어딘가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 클라인의 손이 내려오더니, 내 앞에 펼쳐졌다.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나는 이게 무슨 뜻인지 깨달았고, 살포시 아리스를 돌아봤다.
그러자 아리스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블랑카하고 리키에겐 네가 설명해 줘!”
“응. 이번에는 빨리 다녀와야 해?”
그렇게 나는 아리스의 배웅을 받으며 클라인의 손 위에 올라탔고, 단숨에 차원항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차원항 밖으로 빠져나온 내 눈에 들어온 것은.
“;-0”
“:->”
어딘가 클라인과 닮았지만, 클라인과 다른 모습의 사람들이었다.
이건 또 누구야?
* * *
“아이고, 쥬튜브 대스타 아냐! 얼굴이 반쪽이 됐네.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니는 거 맞지?”
“어서 와요. 헤론 이모.”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
클라인은 환하게 웃으며 헤론을 맞이했고, 그런 클라인의 모습을 본 헤론은 다 안다는 듯 피식 웃으며 클라인을 쿡쿡 건드렸다.
그러자 클라인은 한숨을 내쉬며 가만히 헤론과 촉수를 서로 얽으며 중얼거렸다.
“엄청요.”
“엄살은.”
헤론은 그렇게 피식 중얼거리고는 아이들에게 다가가며 외쳤다.
“얘들아, 엄마 왔다!”
“엄마!”
그러자 아이들은 방긋 웃으며 헤론에게 달려들었고, 헤론은 능숙하게 아이들을 촉수로 붙잡고 입으로 소리를 내며 아이들과 놀아 주기 시작했다.
이제야 좀 쉴 수 있겠네.
헤론이 왔으니 애들이 아까처럼 날뛰진 않을 것이다.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긴장을 풀었지만, 헤론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곧바로 그녀의 몸을 굳게 만들었다.
“아, 맞다. 클라인. 이번에 내 삼촌이 쥬튜브 시작했거든?”
“이, 이모 삼촌이요?”
“응. 대충 강의 보고 만들었다더라? 근데 생각보다 구독자가 안 는대. 좀 조언해 줄 수 없어?”
“제, 제가 아직 남 조언할 단계는 아니어서…….”
“에이, 왜 그래? 완전 대기업이더만. 아, 맞다. 합방? 이란 걸 하면 구독자가 좀 는다던데, 해 줄 수 있어?”
“네? 합방요? 그건…….”
클라인은 헤론의 부탁에 식은땀을 흘리며 어떻게든 거절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으, 친척한테 쥬튜브 계정을 들킨 것도 쪽팔린데 친척이랑 합방을 하라고?
절대로 할 수 없다.
절대로.
만약 클라인이 그 이름 모를 친척과 같이 합방을 하게 된다면, 그날이 클라인이 자살하는 날이 될 것이다.
그냥 별것 없이 잉간이 영상만 찍는데도 이렇게 부끄러운데, 다른 쥬튜버들은 도대체 어떻게 버틴 걸까?
“그, 합방은요. 시작부터 하면 별로 효과가 안 좋아요.”
“그래?”
“네. 어…… 밀어주기? 그런 식으로 안 좋게 보일 수 있어서 어느 정도 구독자를 확보한 다음 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지금도 꽤 구독자는 되는 거 같은데.”
“어느 정돈데요?”
“봐 봐.”
헤론은 휴대용 단말기로 그 친척의 쥬튜브 채널에 접속해서 클라인의 눈앞에 가져왔고, 클라인은 친척의 쥬튜브 채널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조충지]
[검색하면 안 되는 검색어 랭킹 10]
[세상에서 가장 기괴한 요리 5가지]
[새벽에 듣기 좋은 음악 6가지]
일단, 대놓고 실명을 박아 놓은 채널명은 넘어가고, 도대체 무슨 목적의 채널인지 클라인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쥬튜브에 널리고 널린 랭킹 영상을 주로 올리는 채널 같은데, 영상 내용을 보니 더욱 가관이었다.
이건 그냥 다른 랭킹 영상을 복붙해 온 수준이 아닌가?
분명 처음 보는 영상인데도 뒷내용이 다 예측 가는 영상이다.
보나 마나 쥬튜브를 시작할 땐 이렇게 랭킹 영상으로 구독자를 확보한 다음에 채널을 변경하라는 강의를 보고 따라 하는 것이겠지.
솔직히 말해서, 클라인은 단호하게 당장 쥬튜브를 접으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때? 가능성 있어 보여?”
“어…… 조금만 더 채널의 주제를 확실하게 잡으면 괜찮을 거…… 같네요.”
하지만 저렇게 기대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헤론 이모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꺼낼 수 있겠는가?
결국 클라인은 대충 적당한 조언을 헤론 이모에게 던져 줬고, 헤론은 클라인의 조언을 들으며 방긋 웃었다.
“고마워, 삼촌에게 말해 주면 참 좋아할 거야.”
“그, 그래요?”
“근데, 지금 이 정도도 부족하면 합방은 어느 수준이 되어야 하는 거야?”
“어…… 지금의 50, 아니. 500배 정도?”
친척과 합방을 하고 싶지 않은 클라인은 다급하게 도저히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되는 수치를 불렀고, 헤론은 진지하게 클라인의 말을 타이핑했다.
“나중에 또 질문해도 되지?”
“그럼요. 이모랑 저 사인데요…….”
사실은 다시는 질문하지 않았으면 하지만, 클라인은 속내를 숨기고 애써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런 클라인의 모습을 지켜보던 헤론은 상냥한 얼굴로 가만히 클라인의 이름을 불렀다.
“클라인.”
“네?”
“많이 좋아졌네. 얼굴이 밝아졌어.”
“그래요?”
“응. 그래 보여.”
클라인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바라봤고, 헤론은 클라인의 시선이 향한 방향을 눈치채고 가만히 중얼거렸다.
“클라인.”
“네.”
“네 엄마한테 네 이야기 했다.”
“……뭐라고 했는데요?”
“그냥. 요즘 쥬튜버로 잘나간다고.”
“……엄마는 뭐래요?”
“잘됐다고 하더라. 응.”
“다른 말은 없고요?”
“응.”
잘됐다라.
근황을 말해도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던 과거에 비하면 많이 나아진 반응일까?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고, 그런 클라인의 모습을 지켜보던 헤론은 가만히 클라인을 포옹했다.
클라인 또한 아무 말 없이 헤론을 포옹했고, 그렇게 클라인이 오랜만에 헤론의 품의 온기를 느끼던 그때.
“저기…….”
“무슨 일이니?”
클라인의 동생 중 한 명이 슬금슬금 헤론에게 다가와 헤론의 귓가에 대고 귓속말을 속삭였다.
무슨 말을 하길래 저러는 거지?
조카의 말을 들은 헤론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클라인에게 말했다.
“클라인, 그. 애들이 그러는데…….”
“네?”
“혹시, 잉간이를 애들한테 보여 줄 순 없니?”
“아까…… 보여 줬는데요……?”
“그러니까…… 음. 차원항 밖으로 꺼내서 말이야.”
“그건…….”
“꼭 눈으로만 보겠다고 하는데, 잠깐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응?”
헤론은 멋쩍게 웃으며 클라인에게 부탁했고, 클라인은 그런 헤론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헤론이 아니라면 당장 거절했을 부탁이지만, 헤론이기 때문에 클라인은 차마 이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부모님에게 거의 버려진 상태로 방치되던 클라인을 어릴 적 키워 준, 거의 부모님이나 다를 바 없는 사람이기에 클라인은 헤론의 부탁을 거절하기 꺼려졌다.
그래도 잉간이가 다칠 수도 있으니 들어주기 그런데……
“부탁이야, 응?”
“……알겠어요.”
결국 클라인은 헤론의 부탁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잉간이도 바깥에 꽤 익숙해졌으니 보기만 한다면 잉간이가 다치는 일은 없을 거다.
“……눈으로만 봐야 해?”
“네!”
클라인은 다시금 아이들에게 경고를 하고 조심스럽게 잉간이를 차원항 밖으로 꺼냈다.
한참 사냥을 하던 중이었는지 잉간이는 먹이 생물의 사체 앞에 있었고, 클라인이 내민 손을 별 의심도 하지 않고 올라탔다.
으, 진짜 괜찮겠지?
클라인은 조심스럽게 잉간이를 거실에 풀어놨고, 조카들은 눈을 반짝거리며 탄성을 지르며 먼발치에서 잉간이를 바라봤다.
“잉간이다……!”
“꼬물대서 귀여워!”
저마다 각자 감상을 던지며 아이들은 잉간이를 바라봤고, 그 모습에 클라인은 속으로 안도했다.
그래, 그렇게까지 말했으니 이 애들도 충분히 알아듣겠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잠깐 잉간이에게서 시선을 떼고 부엌으로 향한 헤론의 뒤를 따라갔다.
“이모, 제가 요리할 테니 그냥…….”
“얘는 무슨. 요리할 줄도 모르는 애가 뭔 요리를 한다고 그래? 그냥 저기 얌전히 앉아서 기다리기나 해!”
“그래도…….”
“네가 요리하면 먹지도 못하니까, 자. 빨리!”
헤론의 축객령에 클라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부엌에서 돌아섰고, 그렇게 부엌에서 나선 순간.
“으아아앙!!”
촉수를 부여잡고 눈물을 터트리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클라인의 눈에 들어왔다.
그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145화 차원 생물들을 다룰 때 더욱 조심해야 하는 이유
“;-0”
“:->”
클라인이 아니지만, 어딘가 클라인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사람들의 모습.
클라인의 가족이라도 되는 걸까?
그들은 멀찍이 떨어져서 알아들을 수 없는 감탄사를 터트리며 나를 구경하고 있었다.
저들이 누구고, 클라인과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뭔가 위해를 가할 것 같진 않아 보이는데.
그것보다 클라인은 어디에 있지?
나는 클라인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내가 그럴 때마다 나를 관찰하는 사람들은 새된 목소리를 내뱉었다.
“;-0”
“:->”
저 사람들이 뭐라 말하든 신경 쓰지 않고 나는 계속해서 클라인을 찾아보았고, 저 멀리 감각의 안개 너머에서 희미하게 클라인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었다.
좋아, 지난번처럼 뭐 이상한 곳으로 끌려가진 않을 것 같네.
제일 먼저 클라인의 위치를 확인한 나는 그다음으로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여긴, 예전에 올라왔던 그 거대한 절벽 위인가?
내가 전에 사용했던 캠핑 도구들이 근처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이 보인다.
캠핑 도구들 외에는 그 어떠한 것도 보이지 않는 황무지가 쭉 펼쳐져 있다.
내 발걸음으로 여길 더 여행한다는 건 무리고, 일단은 캠핑장에서 적당히 시간을 때우며 클라인이 내게 뭘 원하는지 알아내야 하려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캠핑 도구들로 다가갔고, 캠핑 도구들이 마치 나보고 조립하라는 듯 분해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아, 이제 알겠네.
왠진 몰라도 클라인이나 다른 사람들은 내가 뭔갈 만들거나 조립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던데, 아마 이 캠핑 도구들을 조립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이곳에 데려온 건가?
뭔가 구경거리가 된 것 같아서 썩 기분이 좋진 않네.
그래도 뭐, 내가 편하려면 저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 줘야지.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깨작깨작 캠핑 도구들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0”
“:->”
그리고 그런 내 추리가 맞았는지 내가 텐트를 치는 모습을 보며 저들은 계속해서 감탄사를 내뱉었다.
도대체 이게 뭐가 그렇게 재밌다고 저 난리를 피우는 걸까?
진짜 저 사람들의 감성은 잘 이해하지 못하겠네.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며 텐트를 마저 조립했고, 슬쩍 클라인을 엿보지만 클라인은 이쪽으로 다가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이 기분 나쁜 쇼는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걸까?
좋아, 이제 텐트는 완성, 적당히 텐트 안에 들어가서 잠이나 잘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텐트 안으로 몸을 숨겨서 사람들의 시선을 피했고, 내가 텐트 안으로 들어가자 아쉬운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대로 그냥 잠이나 자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털썩 드러누웠지만, 무언가가 다가오는 기척에 눈살을 찌푸리며 일어나는 수밖에 없었다.
나를 구경하고만 있던 사람들 중 한 명이 내게 촉수를 슬며시 뻗어 온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이미 익숙해진 클라인의 정보와는 달리 처음 받아들이는 정보이기에 촉수와의 접촉은 내게 불쾌감만을 가져왔다.
으, 그래도 조금은 참아 주자.
클라인과 어떤 사이인진 몰라도 친밀한 관계처럼 보이는데, 적당히 놀아 주긴 해야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촉수를 피하지 않고 인상을 찌푸린 채로 가만히 바라봤고, 촉수는 조심스럽게 내 머리를 툭 건드렸다.
“으.”
살짝 힘이 과도하게 실려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지만, 그래도 고통스러울 정도까진 아니다.
촉수는 이어서 거칠게 내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당연히, 클라인의 섬세한 손길과는 다른 거친 손길은 나를 짜증 나게 했다.
으, 조금만 더 참아 주자.
이 정도는 허락할 수 있는 수준이니까.
그렇지만 내가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자 점점 촉수가 나를 건드리는 강도가 강해졌다.
처음에는 하나뿐이었던 촉수가 이젠 여럿이 되고, 머리뿐만이 아니라 몸 이곳저곳을 만져 댄다.
건드리면 안 될 곳까지 자꾸만 툭툭 건드리기에 나는 버럭 짜증을 내며 명백한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그……만……!”
몸을 뒤틀며 촉수들을 내 몸에서 떨쳐 내자 촉수들은 놀란 듯 뒤로 물러섰지만, 이내 다시 내게 다가온다.
툭, 하고 손으로 촉수를 쳐서 걷어 내려고 해도 압도적인 중량 차이 때문에 그것도 불가능하다.
그래도 아직까진 봐줄 만한 수준이다.
내가 거절의 의사를 표해도 자꾸만 건드리는 게 짜증 나긴 하지만,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 어쩔 수 없지.
그렇지만 이후에 벌어진 일은 명백히 더 이상 가만히 놔둘 수 없는 수준이었다.
“으읏……?!”
자신감을 얻은 것인지 촉수가 그대로 내 허리를 휘감고 나를 꽉 붙잡은 것이다.
당연히 자연스럽게 나는 촉수에 휘감긴 채로 공중으로 서서히 들려 올라갔고, 나는 몸을 뒤틀며 촉수에서 벗어나려 했다.
“이거, 놔!”
누군지 모를 촉수의 주인을 향해 소리쳐 보지만 당연하게도 대답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젠장, 말로 해서는 나를 계속 가지고 놀 것 같은데.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에게 거부의 의사를 표현하는 방법은 뭐가 있지?
아, 하나 있다.
고대부터 내려온 아주 효과적인 대화 수단.
폭력.
나는 마지막으로 양팔로 촉수를 밀어내 보고, 촉수가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한숨을 내쉬며 허공에 떠다니는 정보 알갱이들을 붙잡았다.
이게 통할지 확신이 없지만 이거라도 해 봐야지, 뭐.
“상태 창.”
정보 알갱이들이 뭉쳐지며 낯익은 감각의 창으로 바뀌고, 나는 그대로 상태 창을 날 붙잡은 촉수에 박아 넣었다.
오로지 싫다는 감정을 전달하는 데 집중하며 말이다.
“:-ㅒ!”
그러자 상태 창이 제대로 한 방 먹인 것인지 순식간에 촉수가 풀리며 누군가가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윽……!”
물론, 나 또한 공중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며 등을 부딪치고 낮은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촉수에서 벗어난 건 좋은데, 뒷수습을 어떻게 하지?
화나서 나를 공격하진 않겠지?
괜찮아. 그런 상황이 되면 클라인이 어떻게든 해 주겠지,
그런 근거 없는 믿음으로 슬며시 촉수가 거둬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와중, 익숙한 인기척이 느껴진다.
“:-0”
클라인이 돌아온 것이다.
클라인은 주위의 사람들과 뭐라뭐라 대화를 나누더니, 내게 손을 뻗었다.
부드러운 손길로 나를 손안에 쥐어 들고 클라인은 그대로 나를 자신의 몸 가까이로 가져간다.
이 정도까지 클라인과 가까이 접촉했던 적은 거의 없었던 거 같은데?
꼬옥.
클라인은 나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끌어안고 강한 감정이 실린 목소리로 뭐라 소리친다.
“:-(!”
무슨 말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썩 좋은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진 않다.
그래, 잘한다.
그대로 나 대신 화내 줘!
나는 그렇게 클라인을 응원하며 슬그머니 몸을 뒤로 기댔고, 클라인의 몸에 내 몸을 완전히 맡긴다.
툭.
클라인의 몸에 내 등이 파묻히고, 나는 무언가 기묘한 감촉을 느꼈다.
부드러우면서도 뭔가 단단함이 느껴지는 감각.
뭔가 부드러운 이불을 만지는 것 같은 느낌이어서 나는 멍하니 손을 뻗어 그 감촉을 즐기려 했다.
나는 한동안 클라인의 몸을 꾹꾹 누르며 그 부드러운 감각을 즐겼다.
그렇게 말랑말랑한 감촉을 즐기던 와중, 나는 문득 고개를 들고 클라인의 얼굴을 바라봤다.
여전히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클라인의 얼굴은 태양과 같은 눈동자만이 보이지만,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있다.
“:-*”
클라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는 사실이다.
클라인의 얼굴이 왜 저렇게 변했지?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하는데 문득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지금 클라인이 손을 올린 위치를 잘 생각해 보면 현재 내가 있는 이곳은……
“아.”
나는 내가 지금껏 만지던 것이 무엇인지 깨달음을 얻었다.
내가 깨달음을 얻은 순간, 지금껏 문자의 뭉침으로만 보이던 클라인의 가슴 부분이 형체를 이룬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나는 평소보다 다급한 클라인의 손길에 의해서 다시 차원항 안으로 돌아왔다.
“아, 잉간!”
차원항 밖으로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아리스가 곧장 나를 발견하고 해맑게 웃으며 내게 날아왔지만, 나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아리스는 그런 내 모습이 이상한지 고개를 갸웃하며 내게 말을 걸었다.
“잉간, 무슨 생각 해?”
“어? 그게…….”
나는 멍하니 깃털 사이에 숨겨진 아리스의 가슴을 바라봤고,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작은 편이 아니었네.”
“어?”
“아냐, 아무것도 아냐.”
블랑카와 리키의 것에 비교하면 작게 느껴지는 아리스의 가슴도 클라인의 것에 비해선 큰 편이라고.
클라인의 가슴은 무척 작구나.
* * *
“으아아앙!”
클라인과 헤론은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자마자 곧장 부엌에서 뛰쳐나와 아이들에게 달려갔고, 이내 촉수를 부여잡고 울먹거리고 있는 아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니?!”
“아파, 아파서…….”
아프다니?
클라인은 빠르게 아이가 붙잡고 있는 촉수를 자세히 살폈고, 이내 아이가 고통을 호소하는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급격하게 대량의 부정적인 감정이 주입되면서 악성 정보가 대량으로 생겨난 것이다.
따로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을 필요까진 없고 가만히 놔두면 자연적으로 나을 상처긴 하지만, 어쩌다가 저런 상처가 난 거지?
이 주위엔 이런 상처를 낼 만한 물건이 없을 텐데?
그렇게 생각한 것은 헤론도 마찬가지였는지 우는 아이를 달래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아이에게 묻는다.
“무슨 일이 있던 거니? 그래, 괜찮으니까.”
우는 아이는 헤론의 몸에 얼굴을 파묻고 훌쩍거리기만 할 뿐이었고, 헤론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다른 아이였다.
“그게요…… 잉간이를 만지다가 갑자기 저렇게 됐어요.”
“잉간이?”
잉간이를 만지다가 그렇게 됐다고?
잉간이가 이런 일이 가능해?
주위에 차원 파괴자의 흔적이 느껴지진 않는데?
아니, 그것보단 분명히 내가 잉간이를 만지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아까 클라인이 말했잖니. 잉간이를 만지지 말고 눈으로만 보라고.”
“그, 그냥 살짝 쓰다듬었을 뿐이에요…….”
“살짝 쓰다듬은 것도 만진 거잖니.”
헤론이 아이들을 달래면서 혼내는 사이, 클라인은 조심스럽게 잉간이의 상태를 살폈다.
아이들이 잉간이를 들어 올리다가 공격을 받아 놓쳤는지 잉간이는 바닥에 등을 부딪친 듯 인상을 찌푸리며 등을 만지고 있었다.
만약 조금만 더 높은 곳에서 잉간이가 떨어졌다면 자칫 잘못하면 골절, 심하면 잉간이가 죽을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아이들을 꾸짖고 싶지만 이모가 아이들을 혼내고 있으니 나는 참자.
어찌 됐든, 더 이상 잉간이를 밖에 내놓을 수 없다고 판단한 클라인은 잉간이를 다시 차원항 안으로 돌려놓고자 손 위에 올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아이들이 안타까운 듯 탄식을 흘렸다.
“아…….”
“조, 조금만 더 보면 안 돼요?”
“약속을 어겼잖니.”
“이번에는 진짜 만지지 않고 눈으로만 볼게요…….”
클라인이 완강하게 아이들에게 거부 의사를 표하자, 잉간이에게 촉수를 찔린 아이를 달래고 있던 헤론이 슬그머니 클라인에게 말을 건넸다.
“애들이 실수한 거니까, 이번에는 클라인 네가 지켜보면서 잉간이를 보여 주면 안 될까?”
그리고 그런 헤론의 말에, 클라인은 어쩌면 거의 처음으로 헤론에게 화 비슷한 것을 내고 말았다.
“잉간이는 장난감이 아니에요! 만약 잉간이가 사람이었다면 방금은 사과를 받아도 모자란 상황이었다고요!”
“클라인……?”
잉간이는 화를 내지 못하기에.
아니, 잉간이가 화를 내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기에.
그렇기에 클라인은 잉간이를 대변해서 헤론과 아이들에게 화를 냈다.
그렇게 소리 지르는 사이, 클라인은 자신도 모르게 잉간이를 가슴에 소중하다는 듯 꼬옥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런 클라인의 모습을 보고 헤론은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옅은 미소를 지으며 클라인을 바라봤다.
그러나 그런 미소는 잠시였고, 헤론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이들에게 다소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클라인 언니 이야기 들었지? 다들 잉간이에게 미안합니다, 하고 사과하렴.”
“미, 미안합니다…….”
아이들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헤론의 말을 순순히 따라 고개를 숙였고, 그 모습을 본 클라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아직 아이들이니 더 화를 내는 건 소용없는 일이겠지.
나중에 헤론이 돌아갈 때 더 혼내 달라고 꼭 부탁하자.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잉간이 대신 아이들의 사과를 받아 준 후, 차원항이 있는 방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잉간이의 차원항이 있는 방 안으로 돌아온 클라인은 그제야 잉간이를 어떻게 놔뒀는지 깨달았다.
이, 이렇게 잉간이와 밀접하게 접촉한 적이 없었는데, 잉간이는 괜찮을까?
클라인은 불안한 마음으로 서둘러 가슴팍에 끌어안은 잉간이를 바라봤고, 나지막한 신음성을 흘렸다.
“읏……?”
클라인의 가슴팍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잉간이가 클라인의 가슴을 꾹꾹 누르고 있던 것이다.
다른 애완 생물들이 했다면 무척이나 흐뭇하고 가슴이 따듯해지는 풍경이었겠지만, 잉간이가 그러니 뭔가 이상야릇한 기분이 든다.
그렇게 나쁜 기분은 아닌데, 뭔가 가슴이 간질간질해지는 기분.
가슴에서 느껴지는 잉간이의 자그마한 존재감에 클라인은 결국 얼굴을 붉히며 서둘러 잉간이를 차원항 안으로 돌려놨다.
으, 자꾸만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서 얼굴이 새빨개진다.
아이들과 헤론에게 그런 얼굴을 보여 줄 수 없다고 생각한 클라인은 얼굴에 부채질을 하며 열기를 식히려 애썼다.
지금 잉간이를 다시 보면 얼굴이 다시 달아오를 것 같기에, 잉간이의 차원항엔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말이다.
결국 클라인이 방 밖으로 다시 나온 건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
그리고.
딩동.
클라인의 현관문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클라인~ 나 왔어~.”
유리가 도착한 것이다.
146화 [V-Log] 떠드는 영상
“안녕하세요, 유리라고 합니다.”
“어머, 안녕하세요. 헤론이라고 합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일까?
클라인은 헤론에게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며 인사를 하는 유리를 바라봤다.
집에 도착한 유리를 헤론이 호들갑을 떨며 반기더니, 그대로 손을 붙잡고 끌고 와서 앉히고는 서로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무슨 상견례를 치르는 것도 아닌데, 이모는 왜 이렇게 난리야?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아이들과 함께 멀찍이서 유리와 헤론이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봤다.
“클라인의 친구…… 맞죠?”
헤론은 친구, 라는 단어를 말할 때 의문사를 붙여서 나지막이 유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네?”
유리는 자신에게 그런 질문이 들어올 줄 몰랐는지 잠시 멍해졌지만, 이내 웃으면서 헤론의 질문을 긍정했다.
“네. 친구. 친구 맞아요.”
“혹시, 클라인이 억지로 데려온 거 아니죠? 저 아이, 친해지면 남들이 기겁할 수준으로 거리를 좁히거든요.”
“아니에요. 제가 오고 싶어서 온 거예요!”
유리는 손사래를 치며 그렇게 말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헤론은 흐뭇한 미소로 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행이네요. 파인만 말고도 친구다운 친구가 생긴 거 같아서.”
그렇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헤론을 바라보며 유리는 슬쩍 클라인의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질문을 하나 꺼냈다.
“그, 정말로 친구가 하나도 없었어요? 파인만 말고는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그렇더라고요. 에휴, 간신히 친구가 생겼다 싶으면 지갑으로 이용당하거나, 너무 빠르게 거리를 좁혀서 살짝 거절당하면 혼자 상처받아서 먼저 떨어져 나가고…….”
“이, 이모! 그만……!”
클라인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학창 시절의 이야기를 하는 헤론을 제지하고자 외쳤지만, 헤론은 역으로 버럭 소리쳤다.
“그만은 무슨 그만이야? 내가 너 발달기만 생각하면 속이 터진다. 지금은 많이 좋아져서 이런 말 하는 거지만, 그때 내가 얼마나 마음고생 했는지 알아?”
“으윽…… 미안해…….”
발달기 때 아무리 힘들었다고 해도, 이모의 속을 썩인 건 맞기에 클라인은 신음을 흘리며 역으로 사과했고, 헤론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고, 그래. 미안하면 됐어. 방 밖도 나가고, 친구도 새로 사귄 모습을 보니 마음이 좀 놓인다. 방도 깨끗하게 치우고.”
그렇게 클라인과 헤론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며 헤론은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가족은 다 이런 느낌인가요?”
“응?”
“아, 저는 자연 양육이 아니라 인공 양육이어서.”
“어머, 그러니?”
“네, 그래서 뭔가 좀 신기하네요.”
유리가 자연 양육이 아니라 인공 양육을 통해 자랐다니, 이건 또 처음 아는 사실이네.
“부모님이 딱히 그리운 건 아니지만, 이렇게 가족의 모습을 보니, 부모님이 있었어도 괜찮았을 것 같네요.”
“어머, 그럼 내 딸 해 볼래? 이렇게 이쁜 딸 하나 더 가지고 싶었는데.”
“정말로요?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엄마.”
“엄마가 아니라 이모. 나는 네 진짜 어머니는 아니니까.”
“이모님?”
“그래, 옳지.”
유리와 헤론은 화기애애하게 떠들기 시작했지만, 클라인은 유리의 이야기를 듣고 어딘가 가슴 한편이 불편해졌다.
유리는 부모님이 그립지 않구나.
부모님을 아예 본 적도 없기에, 부모님이 그립지 않은 걸까?
그럼, 나도 차라리 인공 양육으로 성장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으면 그렇게 고통스럽지도, 외롭지도 않았을 텐데.
다른 사람들은 다들 자연 양육이 더 좋다고 하는데, 왜 나만.
꾹꾹 가라앉혀 놨던 악성 정보가 클라인의 심층 정보 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민다.
으, 더 떠올리지 말자.
더 떠올리면 나만 고통스러워질 테니까.
응, 그래.
그런 부모님은 없다고 치는 게 더 나아.
둘이 함께 만들어 낸 생명을 책임지지지 못하겠다고 도망간 부모 따위는 필요 없다.
클라인은 그렇게 애써 악성 정보를 꾹꾹 눌러 담았지만, 살짝 우울해진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클라인의 상태를 눈치챘는지 헤론이 클라인에게 손짓했다.
“클라인, 너도 이리 오렴.”
“어, 어?”
“자, 빨리!”
“빨리!”
유리는 방긋 웃으며 클라인에게 촉수를 흔들었고, 클라인은 그런 헤론과 유리의 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응…….”
클라인은 조심스럽게 유리의 옆에 앉았고, 클라인이 자리에 앉자마자 헤론이 벌떡 일어나며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그러고 보니까 아까 냉장고를 봤는데, 먹을 게 하나도 없더라.”
“응?”
“얘는 무슨 냉동식품으로만 생활하나 봐. 반려 인간한테는 맛있는 걸 잘만 주면서, 자기 먹을 건 신경도 안 쓴다니까?”
“내, 내일 주문한 거 도착할 거야.”
“가끔씩은 직접 마트에 가서 사 봐야지! 그렇게 맨날 주문만 하면, 잉여 정보 엄청 늘어난다?”
“압, 압축하면 되거든?”
“압축한다고 있는 잉여 정보가 사라지니?”
헤론은 그렇게 클라인을 타박하며 살포시 유리와 클라인이 있는 방 밖으로 나가며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마트 가고 싶은 사람. 손!”
“손!”
“마트! 마트 갈래!”
“손!”
살짝 지루한 표정으로 자기들끼리 놀고 있던 아이들은 마트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반색하며 헤론에게 몰려들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리와 클라인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그럼 저희도…….”
“얘는 무슨 손님이 장을 보려고 하니? 장은 이모가 봐 올 테니까, 집에서 쉬고 있으렴.”
“그, 그래도.”
“클라인, 너도 어차피 갈 생각 없잖아? 집에서 유리 심심하지 않게 같이 놀고 있으렴.”
헤론은 그렇게 선언하며 클라인과 유리가 미처 따라갈 틈도 없이 아이들을 이끌고 집 밖으로 사라졌다.
순식간에 집 안에 정적이 감돌고, 유리는 얼떨떨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아하하, 원래는 애들 봐주러 왔는데, 어쩌다 보니 놀러 온 꼴이 됐네.”
“그러게. 응…….”
예전이었다면 여기서 바로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겠지만, 클라인은 자연스럽게 유리와의 대화를 더 이어 나갔다.
“아, 맞다. 여기 오기 전에 무슨 볼일이 있었다고 했잖아. 무슨 일이었어?”
“아, 그거? 소행성 님 만나고 왔지.”
“소행성 님?”
“응. 별건 아니고, 생명도감이 제안한 걸…….”
거기까지 말하던 유리는 큰일 났다는 듯 입을 틀어막았고, 클라인은 그런 유리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
“아니, 이건. 어, 비밀이었는데.”
“괘, 괜찮아.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아니, 그러니까 너한테…….”
“나한테?”
나한테 비밀인 이야기라고?
유리의 대답을 들을 때마다 클라인에겐 의문이 더욱 쌓여 갔고, 유리는 헐레벌떡 대화 주제를 바꾸려 했다.
“나,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 그것보다! 맞아, 소행성 님이 네 이야기 하시더라.”
“무슨 이야기?”
“왜 자기랑은 합방 안 하냐는데?”
“지, 진짜 그렇게 말했어?”
“연락하라고 연락처까지 줬다더만, 많이 서운해하시던데? 생명도감하고 나하고는 합방했으면서 왜 자기하고는 안 하냐고.”
“그, 바쁜데 실례일까 봐…….”
“그랬으면 연락처를 주지도 않았겠지.”
“그치만 딱히 연락할 거리가 없는걸?”
뭔가, 뭔가 소행성 님은 대하기가 어렵다.
풍기는 분위기가 무척 어른스럽고 침착해서일까?
뭐, 소행성 님 말고도 다른 사람들도 대하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아무튼, 소행성 님이 너하고 꼭 합방하고 싶다니까, 언제 연락해 봐.”
“명분이 없는데 어떻게…….”
“그건 네가 알아서 만들어야지!”
“으으, 어려워…….”
클라인은 푹 한숨을 내뱉으며 탁자 위에 축 늘어졌고, 유리는 그런 클라인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며 촉수를 꼬며 무심히 중얼거렸다.
“뭔가 질투 나네.”
“응? 왜?”
“네가 엄청 신경 쓰는 게 보이니까. 거의 짝사랑하는 후배 느낌인데?”
“같은 여자인데, 짝사랑하는 후배가 뭐야. 비유도 참.”
클라인은 유리의 말을 듣고는 피식 웃으며 손사래를 쳤고, 유리는 빤히 클라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왜, 여자끼리 짝사랑할 수도 있지.”
“응?”
“거기에다가, 요즘에 너. 처음에 비해서 날 막 대하는 거 같더라?”
유리는 클라인이 되묻기 전에 그렇게 장난스럽게 덧붙였고, 클라인은 그런 유리의 발언에 활짝 웃으며 유리의 촉수를 붙잡고 대답했다.
“우린 친구잖아!”
“읏…… 친구. 친구 맞지.”
그런 클라인의 행동에 유리는 순간 얼굴을 붉혔지만, 이내 원래대로 돌아가며 피식 웃음 지었다.
그러고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그나저나, 진짜 이모님하고 사이좋아 보이더라.”
“이모님이 거의 부모님 역할을 다 했으니까. 뭐.”
“신기하네.”
“마음이 넓으신 분이어서. 지금 조카들도 전부 이모 친자식이 아니야.”
“친자식이 아니라고?”
“부모한테서 버려진 아이들을 맡아서 키우는 걸 좋아하시거든.”
“대단하시네.”
“응. 엄청 대단해.”
클라인의 설명에 유리는 진심으로 감탄하며 중얼거렸고, 클라인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했다.
“내가 방 밖에서 나오지 않을 때, 엄청 힘들게 해서 더 고맙고 미안해. 이모님이 아니었다면, 쥬튜브를 시작하지도 못했을걸?”
“쥬튜브를 시작한 게 이모님 때문이야?”
“아니, 파인만이 제안해서. 뭐, 파인만을 데려온 게 이모님이니까 이모님 덕분이기도 하지.”
맨 처음 쥬튜브를 시작했던 건, 방 안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뭐든 해 보라는 파인만의 말 때문이었다.
그냥 일기를 쓰듯 영상을 올려 보라는 파인만의 말에 정말로 아무 영상이나 올리며 쥬튜브를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그 당시 자신이 유일하게 하던 일인 차원항 관리를 찍어서 올리기 시작했다.
클라인이 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말하자, 유리도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초창기 영상은 그런 느낌이었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찍은 느낌? 그런 느낌도 난 좋더라.”
“그, 그걸 봤어?”
“말했잖아? 네가 쥬튜브를 시작할 때부터 지켜봤다고.”
“그냥 빈말인 줄 알았는데…….”
그렇게 클라인과 유리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던 와중, 귀여운 자명종 소리가 클라인의 배에서 울렸다.
“윽…….”
클라인은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했고, 그 모습을 본 유리는 생각났다는 듯 박수를 쳤다.
“아, 이왕 이렇게 된 거. 요리나 할래?”
“요리?”
“웅, 이모님이 네 요리를 드시면 좋아하시지 않을까?”
유리는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지만, 클라인은 그런 유리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 내가 요리를 잘 못해서…….”
“내가 도와주면 되지!”
“그, 그래?”
“아까 보니까 냉장고에 먹을 것도 많던데, 간단하게 볶기만 해도 괜찮은 게 나올 거야.”
유리는 그렇게 말하며 촉수로 자연스럽게 앞치마를 가져와서 클라인에게 건넸고, 클라인은 얼떨결에 앞치마를 받아 들고 유리와 함께 부엌으로 진입했다.
“자, 나는 명령만 할 테니 행동은 네가 직접 하는 거야.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는 거야. 알겠지?”
“으, 응!”
클라인은 불끈 주먹을 쥐며 고개를 끄덕였고, 유리는 싱글벙글 웃으며 클라인에게 요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자, 일단 처음에는…….”
아무리 요리를 못한다고 해도, 레시피대로만 하면 괜찮을 거야.
유리는 그런 낙천적인 생각을 하며 클라인을 지도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분명히 클라인은 자신이 지시한 대로 완벽하게 움직였다.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클라인에게 가공된 음식은 이렇게 변하는 거지?
유리는 클라인이 내놓은 기괴한 결과물을 바라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고, 클라인은 얼굴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자, 잘 못한다고 했잖아.”
“어? 아냐, 괜찮아. 이번 건 연습이라 치고, 다시 해 보면 되지!”
그렇게 유리가 클라인을 다독이며 어떻게든 제대로 된 음식을 탄생시키려 하던 때.
“응?”
클라인과 유리는 문득 잉간이가 차원항 밖으로 나왔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어라, 잉간이가 뭘 하려는 거지?
클라인은 그런 의문을 품고 가만히 잉간이를 바라봤고, 잉간이는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바깥에 내려놓고 차원항 안으로 돌아갔다.
잉간이가 내려 둔 저건 뭐지?
클라인은 의아해하며 조심스럽게 잉간이가 놔두고 간 것을 들어 올려 살폈고, 이내 그것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요리……?”
잉간이가 바깥에 내놓은 것은, 잉간이가 직접 손으로 만든 듯한 요리였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 걸까?
147화 잉간이가 직접 만든 요리를 선물해 줬어요!
“잉간, 무슨 생각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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