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 20

으로 위험한 걸 떠올렸지만, 그걸 이야기하는 건 아니겠지.
그게 도대체 뭔데?
“그…… 내가 만드는 독액에 마력을 넣어서 네 몸에 집어넣는 건데…….”
“독액……?”
독액이라고?
그것의 정체를 들은 내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 가고, 내가 그리 내키지 않아 한다는 걸 깨달은 리키가 헐레벌떡 보충 설명에 들어간다.
“도, 독액이라고 해도 진짜 독은 아니고. 그냥 별 효과 없는 거야. 내가 따로 독액으로 가공하기 전의 원액? 이라고 할까?”
“아, 응…… 안전하다는 건 알겠는데. 그 독액을 어떻게 내게 마킹할 건데?”
“그건…….”
리키는 내 질문을 듣고는 수줍게 입을 열고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꼬리로 가리켰다.
“이걸로…… 깨물어서 주입하는 건데. 별로 안 아파. 살짝 따끔한 수준이니까…….”
리키는 그렇게 말하며 스스로도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 축 처져서 고개를 떨궜다.
“으음…….”
나는 리키의 제안을 골똘히 생각해 봤다.
그러니까 내 목인지 팔인지 어딘가를 깨물어서 내 몸에 독액을 주입하겠다는 건데.
아무리 독액이 안전하다고 해도 그리 썩 내키는 행위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래도 리키는 나 때문에 죽을 뻔했으니 이 정도는 해 주는 게 맞겠지?
리키가 나를 쉽게 찾을 수 있으면 만약의 상황에 도움이 될 테니 나에게도 이득이 되는 일이기도 하고.
나는 다짐을 다지고 조심스럽게 리키에게 말을 걸었다.
“많이 안 아프다고 했지?”
“응, 응. 그냥 살짝 깨물리는 수준일 거야.”
“그럼 뭐…… 좋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리키의 제안을 수락했고, 리키는 눈에 띄게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헤헤…….”
리키는 독을 주입할 때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듯 꼬리를 뻗어 내 몸을 둘둘 감싸며 자신의 얼굴을 내 얼굴 가까이 가져왔다.
이렇게 가까이서 리키의 얼굴을 보니, 진짜 아름답긴 하네.
아리스와 블랑카와는 다른,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아름다움이다.
문득 내가 멍하니 리키의 얼굴을 바라보던 것처럼 리키도 내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리키도 정신을 차렸는지 흠칫 몸을 떨더니 조심스럽게 내게 선언했다.
“그, 그럼 문다?”
리키는 그대로 팔을 내 뒤로 뻗고 얼굴을 천천히 내 목으로 가져왔다.
잔뜩 흥분한 것 같은 리키의 뜨거운 숨결이 목에 느껴지고, 이어서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리키의 입술이 내 목에 닿은 것이다.
문득 나는 망측하게도 이 감촉이 입술에 느껴지는 것을 상상했고, 나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다.
아, 나쁜 생각은 하지 말자. 착한 생각, 착한 생각…….
내가 그렇게 마음을 다스리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리키의 혀가 내 목을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등골이 울리는 것 같은 감촉에 내가 몸을 부르르 떨고, 드디어 리키의 이빨이 천천히 내 목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내 살갗은 너무나도 쉽게 리키의 침입을 허용했어야 할 것이다.
그랬어야 할 것인데.
“……어?”
리키의 이빨이 내 살갗을 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리키는 당황한 목소리를 내며 더욱 거세게 내 목을 물었지만, 여전히 리키의 이빨은 내 목에 들어가지 않는다.
“어, 어. 이게 왜 이러지……?”
리키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목에서 입을 때고 나를 바라봤고, 나는 그제야 이 사태의 원인을 깨달았다.
“아, 상태 창.”
“상태 창?”
“그러니까 지금…… 내가 물리 면역 상태여서 말이야. 아마도…… 어떤 수단으로도 내게 상처를 낼 수 없을 것 같은데.”
“어? 그럼 어떻게 하지……?”
리키는 이런 상황은 생각하지 않았던 듯 당황했고,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사과했다.
“미안, 어떻게 해제하는지는 나도 잘 몰라서.”
“어, 음…….”
“따로 독을 담아서 내가 마시거나 하는 방법은 없어?”
“……마셔?”
내가 별생각 없이 던진 말이 리키에게 무언가 좋은 방법을 떠올리게 한 것 같다.
리키의 표정이 점점 밝아지다가, 갑자기 새빨갛게 물든다.
이윽고 리키는 가만히 내 눈동자를 바라보더니 슬쩍 시선을 피하며 내게 말했다.
“그, 그것도 가능하긴 한데. 도, 독액에 마력을 담는 건 내 몸 안에서만 가능한 거여서…… 바깥에 노출되면 효과가 사라지거든…….”
“그럼, 어떻게 하지?”
“그러니까. 어……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한데. 그렇게 해도 괜찮지? 한다?”
“그게 무슨 방법인데……?”
그렇지만 리키는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결정을 내린 듯 가만히 내 어깨를 붙잡았다.
잔뜩 흥분한 듯 붉게 물든 리키의 얼굴이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니 리키의 흥분이 나에게까지 전염되는 기분이다.
나는 살짝 민망한 기분을 느끼며 가만히 리키의 눈동자를 응시했고.
“흡?!”
그대로 리키가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까 했던 못된 망상이 실제로 현실로 일어나고, 리키의 꼬리와 손이 나를 힘껏 끌어안는다.
나는 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쥐었다 폈다를 반복할 뿐이었다.
앙다문 내 입을 리키의 기다란 혀가 파고 들어와 부드럽게 문지르며 단숨에 열어젖힌다.
그리고, 무언가 뜨거운 액체가 리키의 입에서 뚝뚝 떨어지며 내 입안으로 들어온다.
고개가 뒤로 젖혀진 채로 나는 리키에게 입에서 입으로 독액을 주입당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한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음에도 독액 주입은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목구멍 안으로 뜨거운 액체가 떨어지는 감각과 부드러운 입술과 혀의 감촉이 머리를 어지럽힌다.
리키가 내 입을 틀어막은 덕분에 서서히 부족해지는 산소 또한 몽롱한 기분을 자아냈고, 나는 리키에게 먹히는 것 같은 감각을 맛보고 있었다.
어느덧 머릿속에는 몸 안으로 흘러들어 오는 독액의 감촉과 나를 껴안은 리키의 감촉만이 가득 자리 잡았고, 나도 모르게 이리저리 움직이는 부드러운 물체에 혀를 뻗었다.
그렇게 그 상태로 도대체 얼마나 있었을까?
무언가 뜨거운 것이 몸 안을 돌아다니는 감촉만을 남겨 두고 리키는 내 입에서 자신의 입을 떼어 냈다.
홍조가 짙게 피어난 얼굴을 한 채 리키는 사냥을 할 때와 비슷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멍하니 최면에 걸린 것처럼 리키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리키는, 이것만으로 부족했는지 다시 한번 내게 다가왔고.
슬금슬금 리키의 꼬리가 더욱 조여들며 옷 안으로 파고들려고 했지만 나는 저항 없이 가만히 리키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다시 한번 리키가 나를 포식하려던 그때.
“왕!”
불쾌한 듯 짖은 에포나가 리키와 내 머리를 가볍게 툭 치며 나와 리키를 제정신으로 돌려놨다.
“어, 어?”
리키는 순간 당황하며 구속을 풀며 나를 침대 위로 밀쳐 냈고,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침대 위에 쓰러졌다.
“미, 미안해. 괜찮아?”
리키가 무엇을 사과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대답했다.
“……괜찮아. 이걸로 샘샘이다?”
“어, 응…….”
나는 홱 고개를 돌리고 열기 때문인지 자꾸만 커져 가는 마음을 추스르며 리키에게 등을 보이고 반대편의 침대로 들어갔다.
리키 또한 스르륵 자신의 침대에 틀어박히는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뾰로통한 표정을 한 에포나를 바라보며 잠에 들었다.
그리고.
“위험한 곳에서 불장난을 하면, 내가 마음이 아파…….”
장난스러운 듯 그렇게 중얼거리는 보랏빛 여인의 포옹을 받으며 나는 기분 좋은 부유감에 빠져들었고.
“■■■은 내가 지켜 줄게.”
꿈에서 깨어나면 기억나지 않을 목소리를 들으며 그녀와의 만남을 즐겼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이번에는 마을 주민이 죽었다.
민트와 똑같은 모습으로.
133화 [생명도감] 야생 생물을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는 이유 (1)
“그러니까, 어떻게 죽었다고?”
“가, 갑자기 몸이 부르르 떨리더니 펑 하고 폭발하듯 터졌어요…….”
“그런데 어째서 저 시체는 으깨진 모습이죠?”
“그, 그건. 저도 몰라요. 사도님들에게 알리려 다녀와 보니 이렇게 바뀌어 있어서…….”
“……죄송합니다. 잠시 따라와 주시겠어요?”
“네, 네?”
전신에 피를 뒤집어쓰고 문어의 다리 끝에 손이 달린 기괴한 생김새의 주민이 립톤에 의해서 어디론가 끌려간다.
오늘의 제1용의자는 저 사람으로 결정된 걸까?
리키의 누명이 풀리고 벌써 4일이 지났다.
그사이에 벌써 마을 주민 중에서도 19명이나 되는 피해자가 나왔다.
전부 하나같이 무언가가 하늘에서 으깬 것 같은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그렇지만 사도들은 아직 도대체 누가 범인인지 확실하게 밝혀내지 못했다.
단지 그린티가 모습을 바꾸고 마을 안에 숨어 들어온 것 같다는 추측만을 할 뿐이다.
사도들은 그린티를 찾아낼 방법이 있다고 호언장담한 것과는 다르게 쉽사리 범인을 찾지 못했다.
그저 가장 의심되는 사람을 일종의 감옥 안에 가두고 감시할 뿐이었다.
아니,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만 사실은 조금 다르다.
감옥에 가둔 척, 그대로 마을 밖으로 추방해 버리니까 말이다.
처음에는 사도들도 그냥 감옥 안에 용의자를 가두기만 했다.
하지만 서서히 동시다발적으로 사건이 발생하면서 사도들은 모두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살인마가 마을 안에 숨어 있다는 생각을 넘어, 마을 주민들 중 살인마와 한패가 된 사람들이 있다는 수준까지 그들의 의심이 발전하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극도로 예민해진 그들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썩 좋아 보이는 방법은 아니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그들의 피해망상이 가라앉기만을 바랄 뿐.
그런데 오늘의 피해자는 아무 증인도 없던 이전까지의 살인 사건과는 다르게, 목격자가 존재했다.
목격자는 대화를 나누던 사람이 갑자기 펑 하고 터졌다고 했지만, 실제 시체의 모습은 무언가에 짓눌린 듯한 평소대로의 모습이었다.
증언의 신빙성에 의심이 생겼는지 사도들이 직접 추궁할 모양인 것 같은데, 그렇게 한다고 과연 진짜 범인을 찾을 수 있을까?
살인 사건이 끊이지 않고 계속 발생한 탓에 마을의 분위기는 전과 다르게 꽤 뒤숭숭해졌다.
전에는 지나칠 정도로 경계심이 없었다면, 지금은 다들 집 안에 틀어박혀서 잘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그런 상황에서 뭘 하고 있었냐면.
“이게 다 재앙이 닥쳐올 전조라니까요?”
“재앙? 무슨 재앙이?”
“이 마을이 통째로 날아갈 재앙이죠. 지금 일어나는 일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그럴 리가! 여긴 신님들이 직접 보호해 주시고 있다고!”
마을 경계에 나서느라 바쁜 사도들의 눈을 피해서 조금씩 마을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었다.
선동이라고 하니까 어감이 조금 이상한데, 조금씩 마을 사람들 사이에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불안감을 조성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 살인 사건은 재앙 비슷한 일이기도 하고, 아무리 용의자들을 감옥에 가둔다고 해도 끝나지 않는 살인 사건 때문에 대부분의 주민들은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뭐, 대부분 이렇게 신님이 직접 보호해 주고 있다고 말하면서 반발하긴 했는데 그런 사람들에게는…….
“신님들이라도 모든 걸 해낼 수는 없는 거죠. 지금까지는 신님이 이 재앙을 막아 주시고 있었지만, 슬슬 한계에 도달한 거죠.”
“한계에 도달했다고?”
“만약 신님들의 보호가 뻥, 하고 뚫린다면 그날로 이 마을은 사라질걸요?”
“그럴…… 리가…….”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내 말을 부정하면서도, 완전히 부정하지도 않았다.
도저히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살인 사건이 연달아 발생하니 신을 들먹이며 이 사건을 유일하게 설명한 내 말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서.
“여러분들도 알고 계시잖아요? 신님의 은총이 처음에 비해서 줄어든 거.”
“그렇긴 하지…….”
마을 중앙의 발전기로 추정되는 장치가 요즘 출력이 줄어들었다는 것도 내 의견을 지지해 줬다.
전에는 마을 바깥에 설치된 목책까지 보호를 해 줬지만, 지금은 꽤 줄어들어 상당히 좁아진 범위만이 보호를 받는다.
그렇긴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말을 그럴 리 없다며 애써 부정했지만, 내 말에 설득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도망친다고 해도 어디로 가야 하는데? 마을 밖으로 나가면 하루도 버티지 못할 거야…….”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고개를 내저으며 마을에서 도망쳐야 한다는 말에 부정론을 내비쳤고,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제가 아무 대책도 없이 이런 이야기를 꺼냈겠어요?”
“뭐, 무슨 방법이라도 있어?”
“신님들이 과연 자기가 보호하는 마을이 멸망하는 걸 지켜보고만 있겠어요?”
“그럼, 설마……?”
“2일 후까지가 기한이에요. 그 전에 도망쳐야 합니다. 제가 신호하면 그때 마을 어귀로 모이세요. 짐은 챙기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나는 조용히 그런 사람들에게만 내 정체를 암시하며 비밀 약속을 했다.
이러니까 뭔가 진짜 사이비 주교가 된 거 같은 느낌인데, 나는 진짜니까 상관없다.
일주일 동안 마을 사람들의 신뢰를 쌓아 봤자 얼마나 쌓겠는가?
2일 차에 최대한 마을 사람들과 대화하며 돌아다녔지만, 별 소득을 얻지 못한 내가 내린 결론이다.
모든 사람들을 구하려고 하다간, 모두를 구하지 못한다.
스스로 지옥에 남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내가 어떻게 구하겠는가?
내게 주어진 임무도 모든 사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많은 사람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설득을 포기한 건 잘못이 아닐 거다.
나는 충분히 노력할 만큼 했다.
지금까지 내가 말을 건 사람이 마을 전체 주민의 30%는 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사람 중에 내 계획을 말한 건 40% 정도밖에 없었다.
마지막 최후의 순간이 되기 전에 모두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선택을 하게 할 생각이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적은 수치다.
역시, 사도들에게 내 활동이 들킬까 봐 몰래 다니니 성과가 부진하다.
그러니까, 사도들 중에도 협력자를 만들어 놔야 할 텐데, 타이밍을 잡기 어렵다.
지금의 사도에게 잘못 말을 걸었다간 자칫하면 바로 마을에서 추방당할 거다.
사도를 끌어들이는 건 신중하게 진행해야 한다.
지금으로선 가장 설득할 만한 사도가 테틀리인데, 테틀리도 내가 마을을 떠나야 한다고만 하면 고개를 내젓는다.
이젠 정말 남은 시간이 얼마 없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슬그머니 움막을 나와 마을 중앙의 기계를 바라봤다.
범인을 찾아내기 위해 사도들이 선택한 건 최대한 SP를 모으기 위해 주위의 생물들을 사냥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면서, 사냥감의 몸에서 꺼낸 무언가를 중앙의 기계에 집어넣었다.
그들은 그걸 공물을 바친다고 표현했는데, 아무리 봐도 발전기를 돌릴 연료를 집어넣는 행동이다.
그리고 이 발전기의 연료로 쓰이는 건, 아무리 봐도 내가 지난번에 발견했던 파란 마석들이었다.
지금도 주머니 안에서 묵직한 존재감을 뽐내고 있는 바로 그것.
만약 이걸 저 발전기에 집어넣는다면, 전력이 부족해서 정지된 기능들이 되살아나지 않을까?
정지된 기능이 되살아난다면, 마을 사람들을 무사히 텔레포트 마커까지 데려갈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조용히 기계를 바라보던 그때.
“형아!”
“형아!”
작은 꼬맹이들이 쪼르르 내게 부딪쳐 왔다.
머리에 솟아나기 시작한 작은 뿔들이 조금 아프지만 나는 고통을 참으며 방긋 미소로 두 꼬맹이를 맞이했다.
요 며칠간 마을 주민들과 친해지려 노력했더니 필요 이상으로 친해져 버린 녀석들이다.
마을에 아이들이 꽤 많다고 생각했지만, 전부 상당히 성장한 상태여서 이 녀석들과 같이 놀 나이대의 친구들이 없었다.
이 녀석들이 유치원생이라면 다른 아이들은 고등학생 정도 되는 느낌?
그래서인지 조금 놀아 줬더니 순식간에 나를 형이라고 부르며 따른다.
둘 다 여자아인데, 그냥 오빠라고 좀 불러 주지.
“소돔, 고모라.”
그런 속내를 감추고 나는 방긋 웃으며 두 아이를 맞이했고, 두 아이는 내 앞에 멈춰서 내게 머리를 들이밀었다.
“형아, 형아! 이것 봐 봐!”
“뭐가 달라졌게~?”
뭐야, 이거?
갑자기 이런 고난도 문제를 내는 건 너무하다고 생각되는데.
그렇지만 다행히도 이번 문제는 난이도 하의 문제였던 것 같다.
아까 뿔로 찔렸을 때 뭔가 감촉이 다르더라니, 두 꼬맹이의 머리 위에 자라나던 뿔이 개화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전까지는 뭉툭한 혹이랑 다를 게 없었는데, 이 두 녀석의 부모가 가진 멋들어진 뿔처럼 되기 위해서 끝부분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야, 뿔이 자랐네? 밥 잘 먹었나 보네?”
나는 방긋 미소를 지으며 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그러자 소돔과 고모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오늘 있었던 일을 하나씩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있지, 오늘 고모라가 밥 남겼다?”
“안 남겼거든? 바보야?”
“바닥에 버리는 거 다 봤거든? 바보야?”
“바닥에 버린 거 아냐!”
“그게 바닥에 버린 게 아니면 뭔데?”
“바닥에 밥을 준 거야!”
“바보 맞네!”
나는 잠자코 두 아이의 대화를 들으며 조용히 생각했다.
이 아이들의 부모는 내 말에 부정적인 의견을 표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부모들에겐 내 계획을 전달하지 못했지만, 이 아이들에게는 말해 놔도 괜찮겠지.
“소돔, 고모라. 형이 할 이야기가 있는데.”
“응? 뭔데?”
“먹을 거야?”
“3일 후에, 형하고 다른 사람들하고 다 같이 어디 놀러 가기로 했거든? 형이 신호하면 마을 입구로 올 수 있지?”
“마을 바깥으로 놀러 가? 사도님들은 마을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고 하던데…….”
“그래서 사도님들 몰래 나갈 거야. 그러니까 그때까지 이 일은 나하고 너희 둘만의 비밀이야. 알겠지?”
나는 그렇게 말하며 가만히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댔고, 소돔과 고모라는 내 행동을 따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좋아. 착하네.”
그렇게 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난 뒤에 나는 좀 더 두 녀석의 잡담에 어울려 줬고, 두 아이가 먼저 돌아가고 난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사도들이 순찰에서 돌아올 때가 됐는데?
내 예상대로 마을 어귀에서 사도들이 걸어오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그런데 어째 평소와는 달리 한 사람이 부족해 보이는데?
“아, 잉간 씨.”
“무슨 일 있었어요? 그레이가 안 보이는데요?”
“죽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요.”
테틀리에게 다가가 어찌 된 일인지 묻자 그레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알려 왔다.
사도가 또 한 명 죽었다고?
분명히 이젠 사도들도 여러 명이서 다 같이 다니는 게 규칙이 됐을 텐데, 그러고도 범인을 잡지 못한 걸까?
“범인은 잡았나요?”
“범인은…… 없었습니다. 아무도 없었어요. 그냥, 그레이 혼자서 죽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죠?”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냥 그레이의 몸이 터졌어요. 단지 그뿐이에요. 어쩌면…… 저는 존재하지도 않는 살인범을 쫓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네요.”
테틀리는 허탈한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터덜터덜 자신의 움막으로 걸어 들어갔다.
범인이 사실 없을 수도 있다고?
그렇다면, 지금까지 사도들이 추방한 다른 사도들과 마을 주민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만약 정말로 범인이 없었고, 사람들이 애먼 사람들을 추방하던 거라면.
지금 테틀리의 기분은 어떨까?
상상만 해도 끔찍하겠지.
그렇다면 지금이 가장 테틀리를 설득하기 좋을 때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테틀리의 뒤를 따라 움막 안으로 들어갔다.
“범인이 정말 없다면,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나는 움막 안에서 머리를 움켜쥐고 괴로워하고 있는 테틀리에게 그렇게 물었고, 테틀리는 힘없는 목소리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지금처럼만 할 겁니다. 지금처럼…….”
“범인이 없다는 걸 알았는데도요?”
“범인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범인은 없어선 안 됩니다.”
범인이 없어선 안 된다라.
참 여러 가지 뜻을 담고 있는 말이네.
“그건 사도들을 위해서?”
“모두를 위해서입니다. 범인이 없는 것보단 존재하는 게 더 설득력 있으니까요.”
정확히는, 범인이 있어야만 지금의 체제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겠지.
이미 사도들은 범인을 잡기 위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자신들이 쫓던 것이 실존하지 않는 허깨비였다는 걸 알았어도 계속해서 강을 건너야 한단 것이다.
그리고 나는, 조용히 그에게 강물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하나 제안했다.
“7일 후, 그러니까 이젠 2일 후. 재앙이 들이닥칠 겁니다.”
“또 그 소리입니까?”
“범인이 없다면서요?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이 그냥 죽어 나가겠습니까?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는 법입니다. 이건, 재앙의 전조예요.”
일주일 후 일어날 재앙이 뭔진 아직도 모르겠지만 일단 이렇게 말한다.
조금 강하게 나가야만 테틀리를 설득할 수 있을 것 같기에.
“범인은, 있습니다. 아직 찾지 못했을 뿐이에요.”
“그렇게 부정하지 마세요. 지금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데는 이유 같은 건 없으니까요. 이유도 없고, 누군가의 의지 같은 것도 없습니다.”
뭐, 굳이 원인을 찾자면 있을 수 있겠지만, 이건 단순한 자연현상 같은 거다.
누군가가 의도를 가지고 일으킨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장 여기를 떠나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모두 죽을 거예요.”
“……신님들이 수호해 주실 겁니다.”
“저는 당신이 믿는 그 신이 보내서 왔습니다.”
“당신은. 신의 사도 같은 게 아니야!”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다고 믿기 위해, 테틀리는 자신이 그래야만 했던 이유를 만들어 내려 발악했다.자신이 이유 없이 그런 일을 했다고 믿고 싶지 않기에.
“그럼, 뭐죠?”
“너는, 너는…….”
테틀리는 나를 지칭할 만한 적당한 단어를 찾으려고 했지만, 결국 적당한 단어를 떠올리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제가 신의 사도라는 걸 믿지 않아도 괜찮아요. 저는 단지, 이 마을에 일어날 재앙을 막고 싶은 겁니다. 대피할 곳도 있고, 대피할 곳까지 갈 수단도 모두 준비되어 있어요. 단지 저를 따라오기만 하면 돼요.”
“당신은…… 신의 사도가 아니어야 합니다. 이건 그린티가 누군가로 변장해서 저지른 일이고, 새로운 스킬로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는 겁니다.”
테틀리는 힘없이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그건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테틀리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추방당한 사람들은 그린티와 모두 한패였던 거야. 억울하게 추방당한 사람은 없어.”
“2일 뒤 재앙이 일어날 겁니다.”
“재앙 따윈 없어. 모든 건, 사람이 일으킨 일이야.”
테틀리는 계속해서 내 말을 부정했고, 나는 가만히 테틀리를 지켜보며 말했다.
“굳이 모든 걸 책임지려 하지 마세요. 하늘에 책임을 돌리면 되잖아요?”
“하늘에, 돌려?”
“그러라고 있는 게 신 아니겠어요?”
이들에게 신은 실제로 존재하며 그들을 지켜 준다.
그렇다면 이번 일은 제대로 우리를 지켜 주지 못한 신의 잘못이 아닌가?
억지지만, 이렇게 주장한다면 지금껏 일어난 일은 그 누구도 범인이 아니고,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이 모든 일을 신의 잘못으로 해 버리면, 테틀리는 잘못한 것이 아니다.
테틀리가 이대로 방어 회로를 돌리고만 있으면 여전히 설득할 수 없을 것 같기에 나는 그에게 슬며시 샛길을 제시했다.
내 말을 들은 테틀리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더니,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네 진짜 목적이 뭐야. 너, 도대체 뭘 원하는 거야?”
“사람을 구하는 거죠.”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테틀리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내게 나가라는 듯 훠이훠이 손짓했다.
더 이상 말을 걸어 봤자 테틀리를 설득할 수 없을 것 같았기에 나는 가만히 테틀리의 움막에서 나왔다.
부디 테틀리가 정신을 차리고 내일이라도 내게 협력해 줬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신들이 마을을 보호해 준다라.
아무리 봐도 저 사람들이 마을을 보호하는 것 같진 않다.
오늘도 하늘에 새겨진 채로 분노의 감정을 잔뜩 뿜어내는 주인 녀석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잠깐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리키가 기다리고 있는 움막으로 돌아가자, 리키가 스르륵 내게 몸을 얽어 오며 내 이름을 중얼거렸다.
“잉간…….”
처음에는 내 허락을 구하더니, 이젠 내 허락도 받지 않고 내게 독액을 보충한다.
독액만 내 목구멍에 집어넣는 게 아닌 것 같은데, 나는 리키의 포옹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리키가 워낙 간절한 눈빛으로 다가오기도 했고, 어느새 나 또한 이 행위를 조금씩 즐기고 있었다.
그렇게 한바탕 독액의 보충을 끝마친 뒤, 나는 잠에 빠져들었고.
다음 날, 테틀리는 마을 사람 모두에게 범인이 없었음을 밝혔다.
그리고, 나와 리키를 감옥에 집어넣었다.
“이게 다! 이 두 사람 때문입니다!”
어째, 내 조언을 이상한 방향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134화 [생명도감] 야생 생물을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는 이유 (2)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일까?
“이게 다! 저 두 사람 때문입니다!”
내 조언을 도대체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테틀리가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열띤 목소리로 강연을 하고 있다.
“아침부터 갑자기 뜬금없이 이게 무슨 말이냐 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 저는 드디어 밝혀냈습니다. 지금껏 일어났던 살인 사건의 범인을!”
사도들의 대장 역할을 하던 테틀리가 당당하게 범인을 밝혀냈다고 하자 마을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그리고 테틀리는 다시 한번 나와 리키를 지목했다.
“이 모든 게 다 저 두 사람 때문입니다. 저 이방인들이! 이 모든 일을 일으켰습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예요?”
당연히 너무나 뜬금없는 테틀리의 발언에 마을 사람들은 경악하며 테틀리에게 설명을 요구한다.
바로 테틀리의 설명을 납득하지 않는 걸 봐선 평판작을 해 두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이 모든 살인 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한 때를?”
“그건…….”
“네. 그렇습니다. 저 이방인들이 우리의 터전에 방문하고 나서부터 시작됐습니다!”
“그, 그렇지만 단순한 우연일 수도 있잖아요!”
“과연 그럴까요?”
“네?”
“여러분. 저는 일단 우선 여러분들께 한 가지 사과를 하겠습니다. 지금껏 저희는 살인범을 찾아 헤맸지만, 살인범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죠. 그건 왜…….”
“저희는 가능한 한 모든 방법을 사용해서 살인범을 찾았습니다. 살인범을 찾지 못하는 게 불가능하다 생각될 정도로요. 그럼에도 살인범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뭐겠습니까?”
어라, 이건 좀 의외네.
끝까지 살인범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자신이 먼저 까 버리네?
“살인범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믿기지 않겠지만, 이게 사실입니다.”
테틀리의 고백에 마을 사람들이 눈에 띄게 동요한다.
“살인범이 존재하지 않는다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말 그대로입니다. 마을의 그 누구도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피해자들은 모두 불가사의한 힘에 의해서 사망했습니다. 범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럴 리가 없어요! 그냥 몸이 터져서 죽다니,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어요!”
“여러분. 우리는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시는 분들을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테틀리는 준비한 대본을 읊조리듯 조용히 마을 사람들에게 하나의 존재를 떠올리게 한다.
“네. 그렇습니다. 지금껏 있었던 일들은 모두 신이 내린 천벌이었습니다.”
테틀리의 말에 더욱 마을 주민들이 목소리를 높이며 서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흥분한다.
테틀리는 그런 상황을 말리려고도 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상황을 바라듯이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나와 리키에게 가져다 댔다.
“어째서 천벌이 떨어졌겠습니까? 우리가 잘못을 한 게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는 그 누구보다 신실하게 신님을 섬겼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잘못을 저지른 것이겠습니까?”
일순간 마을 사람들의 입이 조용해지고, 테틀리의 손가락을 따라 섬뜩하게 나를 바라본다.
“저들이 마을에 오고 나서부터 재앙이 시작됐습니다! 저들이 어째서 황무지에서 왔겠습니까? 잘못을 저질렀기에 추방당한 것입니다. 여러분!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죄를 범한 죄인을 마을에 들이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테틀리는 본격적으로 나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신에게 넘어갈 책임을 일부 떼어 내서 나에게 넘겼다.
자신들이 저지른 짓을 언급하는 것은 쏙 빼놓고 말이다.
“정말인 거야?”
“그러고 보니, 전에 누가 그러지 않았어? 이 모든 건 신님의 분노 때문이라고…….”
“맞아. 나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아.”
내가 마을에 퍼트려 둔 소문이 역으로 작용하며 테틀리의 주장에 신빙성을 더한다.
“저자들이 뭐라고 주장했습니까? 스스로를 신의 사도라고 주장했습니다! 신의 사도를 사칭하다니. 신님의 분노를 살 만한 죄악이 아닙니까?!”
분위기가 달아오른다.
테틀리의 주장이 사실이든 아니든, 사람들은 테틀리의 주장을 믿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던 사건을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하고, 진짜인진 몰라도 이해할 수 있는 증거를 그들에게 들이밀었으니까.
그리고 그 무엇보다 더 깊게 생각하기 지쳤으니까.
그들은 생각을 포기하고 테틀리의 주장을 가감 없이 받아들였다.
“쫓아내야 해! 범죄자를 추방해라!”
“너희 때문에 내 친구가 죽었어!”
테틀리가 유도한 대로 주민들은 잔뜩 성난 모습으로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그 상황에서도 주민들에게 반박할 수 없었다.
왜냐고?
그야, 입이 묶이고 팔다리가 묶인 상태였으니 말이다.
깨어났을 땐 이미 이런 상태로 마을 중앙의 급조된 기둥에 묶여 있는 상태였다.
“여러분. 진정하세요. 저들을 쫓아내는 것만으로는 이 재앙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테틀리는 마을 주민들을 말리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죄인을 마을에서 쫓아낸다고, 우리가 범한 죄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죄를 씻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공물! 공물을 바쳐야 합니다!”
이젠 테틀리가 유도하지 않아도 마을 주민들의 입에서 과격한 발언이 절로 튀어나온다.
테틀리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을 내놓았다.
“그렇습니다. 공물입니다. 죄인을 신님께 바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죄를 씻을 수 있습니다!”
“죄인을 바쳐라! 죄인을 바쳐라!”
테틀리는 당당하게 내가 묶여 있는 곳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손을 들어 올리더니, 그대로 내 목에 내리치는 자세를 취한다.
이윽고 테틀리의 손이 내 목에 내리쳐졌지만, 그 손은 내 목뼈를 부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안타깝게도, 지금 이 자리에서 죄인을 죽이는 건 신님이 바라지 않습니다. 신님은 더 많고 제대로 된 공물을 원하십니다. 신님께 제물을 바칠 제단을 준비합시다, 여러분!”
그렇게 테틀리는 멋들어지게 사람들을 선동해서 마을을 완전히 광기의 도가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나는 그대로 테틀리의 부하들에 의해서 감옥으로 쓰였던 장소에 집어 던져졌다.
“으엑…….”
“잉간, 이제 어쩌지……?”
리키는 앞으로 있을 일이 두려운지 몸을 움츠린 채 덜덜 떨었다.
이런 상황은 전혀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고작해야 테틀리가 우리에게 추방 명령을 내리는 걸 생각했지, 이 정도로 마을을 광기로 몰아갈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제한 시간 : 24시간 12분 9초]
이제 앞으로 남은 시간은 단 하루뿐이다.
더 시간을 끌었다간 우리까지 이곳에 일어날 재앙에 휩쓸릴 수도 있다.
“어떻게든 탈출해 봐야지. 어떻게든.”
다른 사람들을 구하든 뭐든, 일단 나부터 살고 봐야지.
그러려면 일단 이 감옥을 탈출해야 하는데, 지금 상태로는 솔직히 무리일 것 같다.
양손과 양팔을 모두 묶인 상태로 버려져 있는데, 뭘로 몸을 구속했는진 몰라도 구속이 풀리지 않는다.
그건 리키 또한 마찬가지인지, 용을 쓰며 구속을 풀려고 하지만 쉽사리 풀리지 않는다.
일단 이 구속을 풀어야 뭔가 할 수 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한 그때, 지금 이 순간 가장 반가운 울음소리가 감옥 구석에서 들려왔다.
“왕!”
잔뜩 배가 부른 상태의 에포나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에포나?”
“잉간, 저게 뭐야……?”
“어, 에포나?”
은신을 해제했는지 리키 또한 에포나를 보고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에포나의 정체를 묻는다.
나에게 에포나가 뭐냐고 물어봐도 에포나는 에포나라는 말밖에 해 줄 수 없는데.
에포나는 천천히 내게 다가오더니, 내 손에 걸려 있던 구속을 이빨로 물어뜯는다.
아무리 용을 써도 풀리지 않던 구속이 에포나의 입질 한 방에 뜯겨 나간다.
뭔가, 상태 창의 스킬을 이용한 구속인 걸까?
이어서 에포나는 리키의 앞에 다가가더니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살짝 으르렁거리더니, 그대로 리키의 구속 또한 해제한다.
에포나는 그대로 당당하게 내 품에 자리를 잡고 내 배를 핥기 시작했다.
“잘했어, 에포나.”
나는 에포나를 칭찬하며 슬며시 머리를 쓰다듬었고, 자유롭게 된 몸으로 감옥을 둘러봤다.
감옥 문을 살짝 당겨 보니 도저히 열릴 것 같지 않다.
리키가 힘으로 벽을 부수고 탈출하는 방법이 있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곧바로 사도들에게 탈출을 들킬 것이다.
현재 남은 사도들은 9명.
과연 리키와 내가 9명이나 되는 사도들의 공격을 버텨 내며 도망칠 수 있을까?
물리 면역이 부여된 상태의 나라면 몰라도, 리키는 무리일 것이다.
사도들의 상태 창만 무력화할 수 있다면 리키에게도 승산이 있겠지만, 그게 가능할 리가.
“에포나. 혹시 가능하겠어?”
혹시 에포나가 스킬들을 먹어 치운 것처럼 사도들의 상태 창을 무력화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에포나를 바라봤지만 에포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왕…….”
에포나가 바깥의 정보들을 잔뜩 먹고 다녀서 배가 불렀다고는 해도, 아직 완전히 힘을 되찾진 못했다.
조금만 더 힘을 모으면 상태 창 정도는 억지로 떼어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은 무리라는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사도들에게 들키지 않고 감옥을 빠져나갈 수 있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은 나는, 결국 정말 답이 없을 때만 사용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오늘은 쓰레기와 대화했어.]
[인류해방전선에합류하라]
[나는 리베리아 백은 기사단의 블랑카다.]
오늘도 언제나 똑같은 모습의 반려넷이다.
나는 휴대용 단말기를 불러내서 반려넷에 접속해 질문 글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라미아하고 독방 데이트 즐긴 썰 푼다.]
-지금 감옥에 갇혔는데 어떻게 탈출하냐? 마력 없음, 바깥에 상태 창 가진 놈들 9명 돌아다님, 들키면 못 이김. 24시간 내에 탈출 못하면 죽음.
언제나 할 일이 없는 반려넷 회원들이기에, 자극적인 제목을 단 글을 보고 순식간에 댓글들이 채워져 간다.
[댓글]
-그래서 지금 라미아하고 독방 데이트 하고 있다는 거지?
-응~ 방법 없어~ 기만자는 죽어~
-상태 창 무력화시키면 되겠네 ㅋㅋㅋㅋ
-저건 상태 창 무력화해도 못 이길 거 같은데? 애초에 상태 창 무력화해도 스탯이나 서클형이면 그대로 유지되잖아.
-스킬 시스템 사용하는 거면 무력화하면 가능성 있지 않냐? 그건 죄다 스킬로 강화하는 거여서 상태 창 사라지면 맨몸이랑 다름없잖아.
-요즘 세상에 누가 SP 쓰는 상태 창을 써요 ㅋㅋ
-왜, 주인이 흙수저일 수도 있지. 전에 보니까 음식 대신 영양분만 공급하는 곳도 있던데.
-그건 주인이 그냥 학대하려고 그러는 거 아님?
당연하게도, 제대로 된 대답은 돌아오지 않고 갑자기 상태 창에 대한 토론이 진행됐다.
그래도 뭔가 수확이 있긴 했네.
스킬을 사용하는 상태 창이라면 상태 창을 무력화하면 일반인과 다를 게 없어진다고.
하지만 상태 창 무력화도 일단 감옥에서 나가야 시도해 볼 수 있는 건데.
뭔가 좋은 방법이 없으려나?
내가 반려넷을 닫고 한숨을 내쉰 순간, 갑자기 감옥 한구석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리키와 나는 서로를 마주 보고, 나는 조심스럽게 리키에게 소리가 나는 곳의 상황을 물었다.
“저기, 뭔가 있어?”
“……누군가 한 명. 벽 너머에 있어. 어린아이…… 같아.”
리키는 그렇게 말하며 슬며시 내 뒤로 몸을 숨겼고,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이젠 벽이 서서히 흔들거리기 시작한다.
마침내, 벽이 흔들리며 한 사람 정도 지나다닐 수 있는 구멍이 뻥 뚫리고, 누군가가 머리를 들이밀었다.
“형아…….”
그곳에서 나온 것은,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된 상태의 소돔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135화 [생명도감] 지구산 인간과 차원 파괴자의 기묘한 공생 관계
“형아, 형아…….”
소돔은 눈물과 콧물을 모두 흘리며 구멍에서 빠져나와 천천히 내게 걸어와 안겼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소돔? 여긴 어떻게, 아니. 그것보단 무슨 일이야?”
“비밀 통로. 아주머니가 알려 줬어. 도와줘, 형아…….”
“도와 달라니? 무슨 일 있었어?”
그냥 나와 리키를 감옥에 가둔 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던 걸까?
나는 그런 의문을 품은 채로 소돔에게 역으로 질문을 던졌고, 소돔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내 예상을 또다시 뛰어넘는 것이었다.
“고모라가, 고모라가. 형아랑 친하게 지냈다고 잡혀갔어. 더러움을 정화해야 한대…….”
“고모라가 잡혀갔다고? 소돔,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좀 더 자세히 말해 줄래?”
지금 도대체 밖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가만히 소돔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었고, 소돔의 입에서 충격적인 이야기가 들려왔다.
소돔의 이야기에 따르면, 지금 밖에서는 더러움을 씻어 낸다는 명목으로 같은 주민들을 사냥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그 모든 일의 주범은 테틀리였고, 다른 사도들 또한 테틀리를 말리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고 했다.
아마 다른 사도들도 테틀리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겠지.
그들은 일종의 공포정치를 펼칠 생각인 것이다.
신에게 속죄한다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말을 따르게 하고, 반발하는 자들은 힘으로 찍어 누른다는 것인데.
사실 이런 일은 진작에 터졌어도 이상하지 않은 일들이었다.
신을 믿는 사람들과, 그 신에게 직접 힘을 부여받은 사람들.
그 둘을 좁은 공간에 가둬 둔다면 무슨 일이 생길진 아주 뻔하지 않은가?
“아무튼, 그래서. 롯 아주머니가 도와주셔서. 땅굴에 다들 숨어 있어.”
“땅굴?”
“응. 땅굴.”
롯 아주머니라면 분명히 거미의 몸을 하고 있던 키메라 인간이었지?
그냥 거미가 아니라 땅거미였던 걸까?
“아주머니가 형아라면 도와줄 거라고 해서 왔는데, 도와줄 수 있지? 그치?”
소돔은 그렇게 말하며 나를 올려다봤고, 나는 가만히 어찌해야 할지 고민했다.
아직 제한 시간까진 시간이 꽤 많이 남아 있다.
소돔이 말한 땅굴의 위치라면, 충분히 전부 데리고 나갈 수 있다.
하지만 중간에 사도들이 끼어들 가능성을 생각해야 하는데.
마을을 나가려면 무조건 목책을 지나야 하니 사도들에게 들키는 건 확정이다.
그렇다면 사도들과 맞서 싸울 수단이 필요한데, 그런 수단이 없다.
나와 리키 둘이서 목책을 빠져나간다면 들키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을 거다.
뭔가 머릿속에서 사도들과 싸울 수 있는 방법이 하나 떠오르긴 하는데, 상당히 위험한 방법이다.
자칫하면 내가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을 정도로.
안전하게.
나 하나만.
굳이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나와 리키 단둘이서만 여길 탈출해도 되지 않을까?
그렇지만 언제나처럼 멍청하게도 그러기가 싫었다.
나도 모르게 이곳의 주민들을 지구와 겹쳐 보고 있었던 걸까?
어쩌면 나는 이곳의 사람들을 구하는 것으로 지구에서의 일을 속죄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용기를 내지 못했던 그때의 일.
이젠 후회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냐고?
그럴 리가 있나.
솔직히 그때는 다시는 후회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
나는 신도 짐승도 아닌 평범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이 정도는 해야지.
이 정도는 해야 나중에 클라인의 곁에 섰을 때 부끄럽지 않지 않겠어?
클라인이 보기에 부끄럽지 않고 떳떳한 선택을 하자.
내가 클라인을 믿고 있는 것만큼 클라인도 나를 믿어 줬으면 하니까.
믿음을 받으려면 실적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결심을 했으니, 이제 결정을 내릴 차례다.
나중에 이 결정을 후회하는 날이 올 수도 있겠지만, 뭐 어때?
다른 선택을 해도 후회할 게 뻔한데 말이야.
“그래, 나만 믿어.”
“진짜, 진짜로?”
소돔은 콧물 범벅이 된 얼굴로 내 호언장담을 듣고 활짝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비밀 통로로 몸을 집어넣으며 우리에게 손짓했다.
“이리로 와. 내가 안내해 줄게!”
나와 리키는 그대로 좁은 비밀 통로를 지나 감옥 밖으로 빠져나왔다.
마을 중심부를 바라보니 뭔진 몰라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 무대가 한참 설치되고 있었다.
“이쪽이야, 이쪽!”
소돔의 안내를 따라 어둠 속을 움직이며 땅굴로 향한다.
그러다 문득 내 시선이 하늘로 닿았는데, 늘 보이던 것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늘에 새겨져서 격한 감정을 뿜어내던 사람들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고요한 별자리만이 하늘에서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지금까지 보이던 모습은 한때의 꿈이었다고 말하는 듯 말이다.
“형아, 빨리!”
“아, 응.”
소돔의 재촉이 하늘을 바라보며 잠깐 멈췄던 내 발걸음을 옮기게 하고, 나는 소돔의 뒤를 따라 땅굴 안으로 들어섰다.
땅굴 안은 빛 하나 없이 어두웠지만 소돔과 리키는 막힘없이 성큼성큼 땅굴 안을 걸어 나갔다.
나는 리키의 꼬리를 붙잡은 채로 두 명의 뒤를 따라갔고, 어느덧 커다란 공터가 등장했다.
그리고 그 공터에는 무척이나 낯익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하나같이 내가 슬쩍 말을 꺼냈던 사람들이다.
“이, 잉간 씨다!”
“진짜로 데려왔네…….”
그런데 어째 분위기가 그렇게 날 반기는 것 같진 않은데?
정확히 말하면, 내가 온 건 반갑지만 과연 내가 이 상황을 바꿀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더 깊은 상황이다.
아마 소돔에게 나를 데려오라고 한 사람도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던진 투정에 불과하겠지.
“리키. 여기가 마을에서 대충 어디쯤인지 알겠어?”
“응? 음…… 마을 외곽? 목책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야.”
리키의 말을 들어 보니 이곳은 중앙의 장치의 보호를 아슬아슬하게 받는 경계선인 것 같다.
여기서 직선거리로 텔레포트 마커로 달린다고 해도 적어도 수십 분은 달려야 할 텐데 그동안 마을 주민들이 마을 밖의 환경을 버틸 수 있을까?
“리키, 지난번에 말했던 그걸 한다고 해도…….”
“너무 멀어. 중간에 효과가 다 끝날 거야.”
리키는 내 어깨를 꼭 붙잡고 내 귓가에 그렇게 속삭였다.
내가 지금 리키와 나누는 이야기는 리키의 독액을 이용해서 잠시 동안 마을 사람들을 강화시키는 이야기였다.
리키 말로는 자신의 독액에 에너지 드레인을 부여해서 몸에 주입한다면 바깥의 환경을 잠시 동안 버틸 수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정말 잠시여서, 제대로 텔레포트 마커까지 도망치려면 마을 중앙의 장치를 원상 복구하는 게 우선이다.
“……소돔. 잡혀간 사람들은 어디에 있다고?”
“마을 중앙에. 기계 옆의 건물에.”
잡혀간 마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도 중앙을 돌파해야 한다.
이 사람들을 구하려면 결국 중앙 지역을 돌파해야 한다는 건데.
사도들이 버티고 있는 중앙 지역을 과연 내가 통과할 수 있을까?
물리 면역이 있다고 해도 그게 내가 사도들을 이기고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아까 감옥에서도 봤듯이 물리 면역을 무시하고 나를 구속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역시, 사도들의 상태 창을 무력화시켜야 한다.
“왕?”
그렇지만 지금의 에포나로는 무리다.
좀 더 많은 정보가.
좀 더 많은 영양분이 필요한데.
[제한 시간 : 18시간 32분 32초]
남은 시간은 18시간.
고작 하루도 남지 않았다.
그 시간 동안 바깥의 정보들을 에포나가 흡수한다면 충분히 성장할 수 있을까?
“왕!”
에포나의 대답은 아니요였다.
그렇다면 바깥의 정보가 아닌 더욱 커다란 정보가 필요하다.
이를테면, 상태 창 같은 거 말이다.
[개체명]
-잉간■
[생체 정보]
-마력 : 감지되지 않음
-건강 상태 : 양호, 약간의 정보 오염 감지됨
-예상 전투력 : 10등급
[조언자의 한마디]
-물리 면역이 부여된 상태지만, 정신이나 정보계 공격은 막아 낼 수 없습니다. 높은 문명 레벨과의 전투는 피해 주세요.
[현재 설치된 애드온]
-유해 정보 방화벽
-표준 언어 팩
-근력 강화 : 1단계
-물리 면역
-목표 안내
-영양분 보급
딱 봐도, 뜯어먹을 게 많게 생겼지 않은가?
일단 저 위의 개체명이니 생체 정보니 하는 부분은 건드렸다간 어떤 오류가 발생할지 모르니 놔두고.
내가 건드릴 수 있는 건 저 애드온 쪽뿐인 것 같은데.
방화벽? 저건 내 생존에 필수적인 애드온이니 패스.
언어 팩? 저게 없다면 리키와 최소한의 대화조차 하지 못할 거다.
저것도 패스.
근력 강화? 사도들의 시스템을 해제해도 평범한 인간이 아닌 키메라 인간들이다.
최소한 싸우는 시늉을 하려면 이건 필수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 목표 안내와 영양분 보급은 이젠 딱히 쓸 일이 없지 않나?
“……에포나?”
“왕?”
“이거, 먹어도 돼. 이 두 개만. 다른 건 먹으면 안 돼.”
“왕?”
에포나는 내가 상태 창을 들이밀자 정말로 먹어도 되냐는 듯 다시 한번 내 얼굴을 바라봤고, 나는 그런 에포나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왕!”
잘 먹겠습니다.
그런 말을 외치듯이 에포나는 그대로 두 이빨로 상태 창에서 영양분 보급과 목표 안내를 뜯어 갔다.
[경고, 시스템은 중앙정부의 자산입니다. 시스템을 마음대로 조작할 시, 포인트 정산 때 불이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경고 메시지가 내 눈앞에 떠오르긴 했지만 곧바로 그것마저 에포나의 입속에 들어간다.
내 눈앞에 표시되던 화살표들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어?”
“왕…….”
그렇지만 이 정도로도 부족했던 모양이다.
경고 메시지와 영양분 보급, 목표 안내까지 먹었는데 충분하지 않다면.
남은 애드온 중에서 불필요한 것을 먹여야 하겠지.
그리고 지금 내게 그나마 없어도 되는 애드온은 단 하나.
물리 면역뿐이다.
물리 면역.
있으면 무척이나 좋지만, 없다고 해서 내가 곧바로 죽진 않는다.
공격을 받지 않고 죄다 피하면 물리 면역이 없어도 괜찮은 거잖아?
그렇지만, 정말 만약에 실수로 공격을 얻어맞는다면 최악의 사태로 치달을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때로는 안전장치가 없는 위험한 곳에서 줄타기를 해야 하는 법이다.
“에포나. 물리 면역도…… 먹어.”
“왕……?”
에포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봤지만, 나는 미소 지으며 에포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에포나는 결심한 듯 상태 창에 달려들어 물리 면역을 뜯어냈고.
“왕!”
이전, 인간 농장에 끌려갔을 때와 맞먹는 수준까지 성장을 이루었다.
에포나가 즐거운 듯 꼬리처럼 보이는 촉수를 펼쳐 내 손을 휘감는다.
물리 면역이 사라짐과 동시에 무의식에서 느껴지던 안도감 또한 사라진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렇게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내가 정말 위험해지면 클라인이 나타나 주리라는 굳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근거 없는 믿음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나는 그 정도로 클라인을 믿고 있다.
내가 클라인을 믿는 만큼 나도 클라인에게 믿음을 받고 싶다.
그러니 이 정도 일은 나 혼자서 해내야지.
“리키.”
“응?”
“전에 이야기한 대로 부탁해.”
“……진짜로 갈 거야?”
리키는 불안한지 나를 바라보며 눈동자를 흔들었고, 나는 그런 리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호언장담했다.
“괜찮아. 나를 믿어.”
리키는 내 당당한 말에 잠깐 멍해졌다가 헤실헤실 웃으며 내 목에 자신의 손을 걸어왔다.
“응. 믿을게. 그러니까 가기 전에…….”
“으읍……?”
독액을 주입하려는 목적이 아닌 다른 의미의 입맞춤이 끝나고, 리키는 두 손을 꽉 쥐며 다짐했다.
“나, 힘낼게!”
그런 리키의 배웅을 뒤로하고 나는 조심스럽게 에포나와 함께 땅굴을 나섰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사도들을 죽이기 위해서.
136화 잉간이 매드 무비 2(놀랍게도 2탄이 나옴)
사도를 죽인다.
정확히 말하면, 사도들을 무력화시켜야 한다.
문제라면 물리 면역이 사라진 지금 상태의 나는 사도들의 목숨을 신경 써 줄 만큼 실력이 있다고 자신하지 못한다.
사실 죽여야 한다고 폼을 잡고 중얼거리긴 했어도 내가 정말로 사도들을 이길 수 있을지도 불분명하다.
그래도 내가 이렇게 발걸음을 옮기는 건 클라인에 대한 믿음과 일종의 오기 때문이다.
리키를 구조한 건 별로 뭔가 한 것 같지도 않고,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뭔가 한 건은 해내야지.
“왕!”
그런 생각을 하며 조심스럽게 땅굴을 나와 중앙 구역으로 향하자, 에포나가 어디선가 길쭉한 막대기를 주워 왔다.
어딘가의 움막에서 떨어져 나온 걸까?
창으로 쓰기엔 너무 뭉툭했지만, 이 정도면 내 몸을 지킬 무기로 쓸 수 있을 것 같다.
“고마워, 에포나.”
“왕!”
에포나의 머리를 쓰다듬고 조심스럽게 움막의 사이에 숨어 중앙으로 향하자, 어떻게 불을 붙였는진 몰라도 푸르게 타오르는 불꽃이 보였다.
아니, 불꽃이 아닌 건가?
자세히 바라보니 주위를 오고 가는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불꽃을 통과한다.
바닥에 마석으로 보이는 돌들이 여럿 깔려 있는 것을 봐선 마력이 일렁이는 것 같은 게 아닐까?
도대체 저기서 뭘 하려는지 상상도 안 간다.
그렇게 생각하며 사람들이 잡혀 있을 것 같은 건물을 찾던 중, 내 눈에 테틀리가 한 건물에서 나오는 모습이 들어왔다.
테틀리는 양팔이 스킬로 구속된 마을 주민을 들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테틀리는 마을 주민을 푸른 불길이 일렁이는 곳으로 던지더니,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외쳤다.
“이곳에 떨어지고 언제나 우리는 신들의 시선을 받아 오고, 신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하늘을 보세요! 신들의 모습이 보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신들의 모습을 두 눈으로 볼 수 있다는 대단한 은총을 잃어버렸습니다. 위험에서 지켜 주던 신들의 보호를 잃어버렸습니다. 이게 다 무엇 때문입니까?”
“죄악 때문입니다!”
“그 죄악은 누가 이곳에 가져왔습니까?”
“이방인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죄악을 이곳에 가져온 사악한 이방인은 우리가 봉인해 놨습니다. 그럼 이제 뭘 해야 합니까?”
“죄악을 정화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죄악에 더럽혀진 동포들을 정화해야 합니다!”
테틀리는 광기와 분노 서린 설교를 하며 마을 사람들을 더욱 거세게 선동하기 시작했다.
테틀리의 선동에 놀아나지 않는 사람이 없는 건, 이곳 주민들의 심리가 그만큼 극단으로 치달았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동조하지 않은 사람은 전부 잡혀갔거나 도망쳤기 때문이겠지.
일단, 마을 사람들이 잡혀 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곳은 발견했으니 들키지 않게 잘 숨어 가자.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마을 중앙에서 들려온 비통스러운 목소리가 내 발목을 잡아챘다.
“으흑, 흑. 제발, 제발 그만……!”
푸른 불길에 던져진 마을 주민은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호소했지만 그 누구도 눈 한 번 깜빡하지 않았고, 테틀리는 천천히 주민을 향해 다가갔다.
“정화의 의식을 치르겠습니다.”
테틀리의 손에 들린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마석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크기의 커다란 마석이었다.
저 마석으로 뭘 하려는 걸까?
도대체 뭘 하려나 지켜보고 있자 테틀리는 마석을 마을 주민의 몸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마을 주민이 표정을 서서히 고통스럽게 일그러뜨리더니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으윽, 윽, 아악……!”
처음에는 별다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을 주민의 몸에 기묘한 상처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마치 화상을 입는 것처럼 마석에 가까운 부분부터 타들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죄악이 정화되고 있습니다! 정화의 불꽃이 죄악을 불태우고 있습니다!”테틀리의 외침에 마을 주민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흥분한다.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마석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미친, 설마 이게 방사능 덩어리였던 거야?
지금도 주머니에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는 마석의 감촉이 서늘하게 느껴진다.
유해 정보 차단은 남겨 놨으니 괜찮겠지?
물리 면역이랑 방사능은 상관없을 거야.
아닌가?
방사능도 일종의 물리 대미지로 취급되나?
일단 최대한 빠르게 일을 끝내는 게 좋겠어.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을 주민들이 열광하며 시끄럽게 떠드는 틈을 타서 조심스럽게 주민들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움막으로 다가갔다.
움막의 입구는 포르테가 똥 씹은 표정으로 서서 지키고 있었다.
우회로는 없으니 강행 돌파를 해야 하는데.
다행히도 포르테의 육체는 나와 그리 다르지 않아 보였고, 하피의 특징이 일부 보이는 걸 봐선 몸의 강도가 그렇게 강하진 않을 거다.
기습으로 단번에 기절시키면 소란을 일으키지 않을지도 몰라.
“에포나. 가능하겠어?”
“왕!”
숨죽이고 에포나에게 상태 창을 먹어 치우는 게 가능하겠냐고 묻자, 에포나는 믿음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포나가 포르테를 향해 뛰어드는 것과 함께 나는 블랑카에게 배운 대로 포르테의 명치를 향해 봉을 내질렀다.
포르테는 내가 움막 사이의 어둠에서 튀어나오자 나를 발견하고 스킬을 사용하려 했다.
“[마비의 시선].”
하지만 포르테가 스킬을 사용하는 것보다 빠르게 에포나가 포르테의 상태 창을 뜯어 버렸다.
“왕!”
에포나의 입에 상태 창이 축 늘어져 펄럭거리고, 스킬이 사용되지 않아 당황한 포르테의 명치에 내 봉이 적중한다.
“케헥!”
포르테는 그대로 가슴에 든 공기를 모두 토해 내며 바닥에 쓰러졌고, 나는 서둘러 움막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 큰 소란은 피우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누군가가 눈치챘을 수도 있으니까.
움막 안으로 들어서자 스킬로 팔이 묶인 마을 주민들의 모습이 보이고, 방 한구석엔 겁에 질린 표정으로 앉아 있는 고모라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갑작스럽게 문이 열리고 내가 들어오자 주민들은 당황하며 무언가 외치려고 했지만, 나는 손가락을 들어 올려 주민들을 조용히 시켰다.
“조용히 따라오세요. 들키면 위험해요.”
마을 주민들은 지금 밖의 상황을 아는지 군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고, 그러는 사이 에포나는 마을 주민들의 팔에 묶인 스킬을 먹어 치웠다.
나는 조심스럽게 마을 주민들을 내가 왔던 루트로 안내했고, 고모라에게 조용히 소돔의 안부를 전했다.
“소돔은 무사해. 안전지대로 가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러자 고모라의 표정이 밝아졌고 나는 고모라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고는 다시 중앙 지역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건 강행 돌파뿐이다.
내가 잘해 낼 수 있을까?
긴장되지만 잘될 거라고 믿고 시작하자.
“가자, 에포나.”
에포나는 이번엔 짖지 않고 군중들 사이로 파고 들어갔고, 나는 천천히 밤의 그림자에서 광기의 빛 안으로 발을 들였다.
“정화가 완료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사이에 자칭 정화의 의식을 받던 남자의 몸은 화상으로 완전히 뒤덮여 간간이 신음만 흘리고 있었다.
먼 어딘가를 바라보는 듯한 테틀리의 시선이 나와 마주치고, 테틀리는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모르겠단 표정이네.
테틀리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내가 큰 소리로 소리쳤다.
“재앙이 이곳을 집어삼키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안전한 땅으로 대피해야 합니다! 재액을 피하고 싶다면 저를 따라오세요!”
누군가 몇 사람 정도는 내 말에 호응해서 수군거릴 줄 알았는데, 아무도 반응하지 않는다.
그 대신, 아무 말 없이 섬뜩하게 나를 바라볼 뿐이다.
“죄악의 근원이 탈출했습니다, 여러분! 이미 수많은 동포들을 타락시킨 것으로 모자라서, 신님의 말씀을 정면에서 부정하고 있습니다!”
“정화해야 한다!”
“정화해라!”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마치 테틀리와 한 몸이 된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소리쳤다.
아무리 봐도 뭔가 좀 이상한데?
지금껏 내가 봐 온 광신도들은 광신도이긴 했어도 자아는 남아 있는 듯 느껴졌다.
그런데 지금 마을 사람들에게선 한 점의 자아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하지만 그런 걸 고민할 시간도 없이, 테틀리가 성큼성큼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죄악의 근원을 정화해야 합니다! 바로 이 정화의 불꽃으로 말이죠!”
마지막까지 연출할 생각인지 테틀리는 마을 사람들을 뒤로 물리고 나와 단둘이 대치한다.
그래, 테틀리의 목표를 생각하면 이럴 줄 알았다.
나는 긴장된 표정으로 봉을 쥔 손에 힘을 꽉 쥐었고, 테틀리가 스킬을 사용하려는 순간, 아까처럼 에포나가 펄쩍 뛰어들어 상태 창을 뜯어냈다.
“흐읍!”
그리고 나는 그 틈을 노려서 테틀리의 명치에 봉을 박아 넣었다.
콰직, 하고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날 정도였으니 이 정도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겠지?
나는 그런 생각을 잠시 가졌지만 이어진 충격에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케헥, 켁…….”
다행히 전력으로 주먹을 맞거나 발로 차인 게 아니라 적당히 밀어낸 수준이어서 그런지 단번에 무력화되진 않았다.
그저 가슴에서 심상치 않은 통증만이 느껴질 뿐이다.
억지로 이를 악물며 일어서자, 멀쩡하게 서 있는 테틀리의 모습이 보였다.
어떻게 된 거지?
에포나가 상태 창을 뜯어내지 못했나?
그렇지만 내 곁에 달려온 에포나의 입에는 상태 창의 파편이 물려 있는데?
그리고 그 의문은 테틀리의 몸에서 꿈틀거리며 기어 나온 것에 의해서 말끔히 해결됐다.
에포나가 상태 창과 함께 물어뜯어서일까?
그것은 몸 반쪽이 뜯겨 나간 채로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해파리를 연상하게 하는 외모의 그것이 입이 없는데도 소리 지르자, 주위의 마을 사람들의 몸에서도 작은 해파리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테틀리가 마을 사람들을 이렇게 만든 걸까?
나는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테틀리도 저 녀석의 숙주가 된 것이다.
그리고 아마 저 녀석의 정체는.
“크르르르…….”
에포나와 비슷한 생명체겠지.
에포나는 으르렁거리며 입에서 해파리와 상태 창의 파편을 뱉었고, 테틀리는 머리를 움켜잡으며 비틀거렸다.
“무슨 짓을, 무슨 짓을 한 거야?”
테틀리는 스킬을 쓰려는 듯 무언가를 외치지만, 아무리 외쳐도 스킬이 발동되는 일은 없다.
에포나가 뜯어낸 상태 창 쪽이 스킬의 사용을 담당하는 부분이었던 걸까?
하지만 다행이라고만 할 수는 없는 것이, 스킬이 사라졌더라도 테틀리의 스탯은 그대로 유지되는 듯하다.
젠장, 이렇게 되면 테틀리의 스탯을 뚫고 대미지를 입힐 수 있을까?
다시 에포나가 상태 창을 마저 제거하는 걸 기다려야 하나?
하지만 에포나의 도움을 더 바랄 수는 없겠는 것이, 에포나는 꼬리의 촉수를 길게 늘여서 마을 사람들과 테틀리의 몸에 자리 잡은 생명체와 싸우기 시작했다.
에포나의 싸움은 쉽사리 끝날 것 같지도 않고, 내게 도움을 주기도 어려워 보인다.
그렇지만 그건 테틀리도 마찬가지.
완벽한 1:1 상황이다.
다른 사도들이 이변을 눈치채고 달려올 때까지 테틀리를 쓰러트려야 하는데.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됐어. 마력도 없는 녀석 따위는 신의 은총이 없어도 돼!”
테틀리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치어 죽일 기세로 그 어마 무시한 각력으로 내게 달려들었다.
“윽?!”
나는 황급히 봉을 이용해서 테틀리의 공격을 방어하려 했지만, 오히려 손에 들고 있던 봉이 테틀리의 돌격에 박살 난다.
그래도 봉이 미묘하게 테틀리의 궤도를 틀어서인지 테틀리의 공격은 나를 스쳐 지나갔고, 나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식은땀을 흘리며 가만히 테틀리를 바라봤다.
이번에야말로 끝을 내겠다는 듯 테틀리는 땅을 걷어차며 나를 다시금 조준했다.
뭔가, 뭔가 무기가 있었으면……!
상태 창만으로는 부족하다, 창이라도 있으면 블랑카에게 배운 걸 활용해 볼 수 있을 텐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무언가 쓸 만한 것이 없나 손을 뒤로 뻗었고, 내 손에 무언가가 닿았다.
에포나가 뱉었던 상태 창의 파편이다.
그리고 그걸 본 순간, 내 머릿속에 간단한 말장난 하나가 떠올랐다.
말장난이 내 머릿속에 선명한 이미지를 그려 내고, 나는 나도 모르게 절벽을 올라갈 때처럼 정보를 가공하기 시작했다.
스르르, 상태 창의 파편이 내 손안에서 형태를 바꿔 가고, 내게 익숙한 모습으로 변했다.
내가 직접 손으로 만들었던, 바로 그 창의 모습.
상태 창을 가공해서 내가 만들어 낸 무기를 보자마자 나는 이 무기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깨달았다.
“……상태 창.”
상태 창으로 만든 상태 창이다.
137화 [생명도감] 정보 생명체와 물질 생명체의 관계에 대해서
“……상태 창.”
상태 창으로 만든 상태 창.
내가 만들어 낸 무기에 감탄할 틈도 없이 나는 테틀리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기사의 공격을 방어하는 창병처럼 상태 창을 앞으로 내밀었다.
상태 창이 보이지 않는 걸까, 아니면 알면서도 그 정도는 박살 낼 수 있다고 자신했던 걸까?
테틀리는 그대로 지면을 박차고 내게 돌진해 왔다.
제발 이번에는 부러지지 말아야 하는데.
아냐, 이 정도로는 부러지지 않을 거야.
응, 그래야만 한다.
제발, 제발 테틀리의 돌격을 이걸로 멈출 수 있길.
그런 내 간절한 소원이 이뤄진 것일까?
테틀리의 돌격은 상태 창을 넘어서지 못했고, 그대로 테틀리의 몸이 상태 창에 꿰뚫렸다.
“이건, 이건 또 뭐야……?”
테틀리는 자신의 몸에 꽂힌 상태 창을 붙잡으려는 듯 손을 휘적거렸지만, 그 손은 허무하게 상태 창을 통과할 뿐이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테틀리의 몸은 상태 창에 관통됐음에도 그 어떠한 상처 하나 없었다.
상태 창이 몸을 관통했는데도 피가 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그저 제자리에 딱 멈춰 서 있을 뿐이다.
테틀리는 우선 상태 창에서 몸을 빼내려는 듯 움직이지만, 테틀리의그의 발은 그 자리에 고정되어서 움직이질 않았다.
그리고 그와 함께, 내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상태 이상 : 속박을 부여했습니다.]
상태 창으로 만들어서 이렇게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르는 것일까?
어찌 됐든 시스템 메시지는 내게 상태 창이 테틀리에게 상태 이상을 부여했다는 것을 알려 왔다.
내가 테틀리가 멈추는 걸 원해서 저런 상태 이상이 부여된 걸까?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테틀리는 핏발 선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고래고래 소리쳤고, 나는 아무 말 없이 테틀리를 바라봤다.
시끄러우니까 좀 조용히 해 줬으면 좋겠는데.
문득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또다시 시스템 메시지가 하나 떠올랐다.
[상태 이상 : 침묵을 부여했습니다.]
“……! ……!”
그러자 귀신같이 뭐라 외치는 테틀리의 목소리가 허공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내가 만들어 낸 상태 창의 효과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상태 창이라는 이름답게 찔린 대상에게 내가 원하는 상태 이상을 부여하는 효과다.
다만 상태 이상을 부여하는 효과 외에 물리적 충격을 가지고 있진 않은 것 같다.
하긴, 정보가 물리적 충격을 가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상태 이상 출혈 같은 걸 부여하면 물리 공격으로도 사용할 수 있을까?
아무튼 이걸로 테틀리를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남은 건 저 기계장치에 내가 가져온 마석을 집어넣는 일뿐인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상태 창을 테틀리의 몸에서 뽑아냈고, 상태 창을 뽑아내려 한 순간, 테틀리의 몸에 기생하고 있던 생명체가 고통스러운 듯 촉수를 이리저리 흔들기 시작했다.
슬쩍 에포나가 있는 곳을 바라보니 숙주가 무력화된 것이 꽤 크게 작용했는지 에포나가 해파리들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좋아, 에포나 쪽은 이대로 놔두면 금방 정리되겠네.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나만이 아니었는지 해파리는 에포나와 싸우던 해파리들 일부를 불러들였다.
“읏……?”
순간적으로 내게 덮쳐드는 건가 생각했지만, 해파리의 목적은 내가 아니었다.
해파리는 그대로 절반의 몸뚱어리에서 뻗은 촉수로 작은 해파리들을 휘감고 자신의 몸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렇게 작은 해파리들을 포식한 해파리의 몸이 점점 재생되기 시작하더니, 온전한 형체를 갖추었다.
이런, 받은 대미지를 회복한 건가?
본체가 회복되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 상처를 입혀 둬야 하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갑자기 상태 창에 어마어마한 압력이 들이닥쳤다.
나는 당황하며 상태 창을 붙잡으려고 했지만, 상태 창은 압력에 밀려나 그대로 테틀리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와 함께, 테틀리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크아악, 크악…… 으윽……!”
이런, 저 해파리가 상태 창의 효과를 제거한 건가?
나는 당황하며 다시 테틀리에게 상태 창을 찔러 넣으려 했지만, 그 전에 먼저 테틀리의 몸에 이변이 일어났다.
한계 이상으로 물을 담은 주머니처럼 테틀리의 몸이 점점 부풀더니 이곳저곳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기괴한 풍경에 나는 할 말을 잃고 가만히 테틀리의 모습을 바라만 봤고, 이윽고 구멍 뚫린 테틀리의 몸에서 정보들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한계 이상으로 부푼 주머니의 최후는.
펑.
그런 불쾌한 소리와 함께 테틀리는 단말마마저 남기지 못한 채로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바닥에 테틀리의 파편이 후두둑 떨어지고, 내가 그 불쾌한 풍경에 할 말을 잃고 가만히 서 있는 사이, 테틀리의 몸 안에 들어 있던 정보들이 바닥으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정보들의 무게가 테틀리의 시체를 짓눌러서일까?
그나마 남아 있던 테틀리의 시체가 찌부러지며 그 전에 내가 봤었던 시체들처럼 압사당한 것 같은 모습으로 변한다.
“……이건.”
이게 지금까지 있었던 살인 사건의 정체였던 걸까?
나는 고개를 들고 해파리를 바라보지만, 이건 해파리가 저지른 짓이 아닌 것 같다.
해파리 또한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다.
그저, 테틀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정보들이 그의 몸에 쌓였을 뿐이다.
끔찍한 풍경에 나는 잠시 정신을 놓아 버릴 뻔했지만, 간신히 다시 정신을 붙잡고 가야 할 목적지를 바라봤다.
정신 차리고, 해야 할 일을 하자.
나는 서둘러 마을 중앙의 기계로 걸어가 주머니에 넣어 둔 마석을 꺼내며, 바닥에 널브러진 마을 주민의 시체 위에 있던 마석도 살포시 주워 들었다.
그리고 나는 기계 안에 마석을 투입했고, 희미한 빛을 발산하던 기계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리키와 함께 있던 사람들도 이 빛을 봤으면 슬슬 탈출을 시작했겠지?
기계에서부터 약한 충격파가 퍼져 나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여전히 가만히 서 있는 마을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여러분. 재앙이 다가올 때까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이라도 대피해야 합니다. 아직 늦지 않았어요. 마을 밖으로…….”
“지금 신님의 말씀을 어기라는 거야?!”
“이방인이 우리들을 타락시키려 한다! 저자의 말에 넘어가지 마!”
나는 마지막으로 마을 주민들을 설득하려고 했지만, 해파리가 깃든 마을 주민들은 도저히 내 말을 들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저 이방인은 신님이 내린 시련이야! 저 꼬드김에 넘어가면 얼음 구덩이에 떨어질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저건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다.
역시, 저 해파리를 어떻게든 해야 하나……?
에포나를 흘깃 바라보자 에포나는 여전히 해파리들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래, 상태 창으로 해파리만 찌르면 어떻게 처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해파리를 처리하기 위해 상태 창을 근처의 주민에게 뻗었지만, 무언가 단단한 벽을 느꼈다.
마치 거대한 산이 내 앞을 가로막은 것 같은 느낌이다.
너무나도 단단하고, 또 방대한 정보의 벽이 마을 주민들의 몸에 달라붙어 있어서 도저히 이 벽을 깨트릴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젠장, 어쩔 수 없이 이 사람들은 포기해야 하나?
억지로 데려가더라도 뭔가 방법이 있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남은 제한 시간을 바라봤다.
[제한 시간 : 16시간 59분 48초]
아직 남은 시간은 많다.
시간이 다 지나가기 전에 뭔가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어둠 속에서 다른 사도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있다! 이방인이 탈출했다!”
그래, 이 정도로 난리를 피웠으니 당연히 사도들도 눈치챘겠지.
지금껏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사도들이 내게 적대감을 드러내며 달려오고 있었고, 나는 과연 내가 저 사도들을 모두 상대할 수 있을지 생각하며 입술을 씹었다.
에포나가 상태 창을 제거하지 않으면 무척 힘들 거 같은데…….
그래도 어떻게든 해 봐야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상태 창을 쥔 손에 힘을 쥐었고, 먼저 선공에 나서려고 한 순간.
“……어?”
무언가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사도들도 움직이지 않는다.
마을 주민들도 움직이지 않는다.
세계가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이는 건, 오로지 나의 생각뿐이다.
당연하게도 모든 것이 멈춘 세상에서 촉각이나 청각, 시각이 느껴질 리 없고.
세계의 잔상이 내 눈에서 사라진 뒤에는 아무것도 없는 칠흑이 내 주위를 감쌌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허공은 내 몸의 경계선을 희미하게 하며 내 인식을 무너트리려 몰아쳤다.
평소라면 에포나가 나를 도와줬겠지만 모든 것이 멈춘 세상에서 당연히 에포나만 움직일 수는 없는 법이다.
오로지 나 홀로 허공 속에 있었고, 나는 공포에 떨면서 필사적으로 나 자신과 에포나를 끊임없이 되새겼다.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상황인지 생각할 여유조차 없이 나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인식하기 위해 발버둥 쳤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무언가가 뒤틀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갑작스럽게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어, 어?”
다시금 되찾은 감각에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펑.
펑.
펑.
나에게 달려오던 사도들의 몸이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사도뿐만이 아니라 몇몇 마을 주민들의 몸도 터져 나가기 시작했고, 이는 내게 두려움을 넘어선 기괴함을 불러일으켰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하지만 언제나처럼 그런 걸 생각할 시간 따윈 없이, 내 눈앞에 붉은 시스템 메시지가 들이밀어졌다.
[제한 시간 : 17분 56초]
“……어?”
[위험 구역에서 벗어나세요.]
어째서인지 몰라도 10시간 넘게 남아 있던 제한 시간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단 17분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느냐를 생각할 시간도 없다.
지금 당장 도망쳐야 한다.
“에포나! 뛰어!”
“왕!”
나는 곧바로 에포나와 함께 마을을 벗어나기 위해 전력 질주하기 시작했다.
[제한 시간 : 10분 4초]
최대한 빠르게 마을을 벗어나려 하는데도 제한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점점 줄어든다.
[제한 시간 : 9분 36초]
그래도 어떻게든 간신히 리키가 마을 주민들을 차례차례 내보내고 있는 안전 지역의 끝자락까지 도달했다.
“어, 잉간!”
내 모습을 발견한 리키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지고, 나는 거친 목소리로 리키에게 소리쳤다.
“서둘러!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
“뭐?”
대피 작업은 거의 마무리 단계였는지 대부분의 주민들이 사라지고 남은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만큼 남은 시간 또한 얼마 되지 않는다.
[제한 시간 : 8분 16초]
10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모든 사람들을 구할 수 있을까?
지금 당장이라도 마을 사람들을 내버려 두고 리키와 함께 도망치고 싶었지만, 꾹 참는다.
그래, 최대한 빠르게 달리면 안전지대까진 빠져나갈 수 있어.
굳이 텔레포트 마커를 타지 않더라도 안전지대에 도착할 수 있으니까.
조급해하지 말자.
5분이면, 5분이면 도착할 수 있어.
[제한 시간 : 6분 59초]
5분, 5분이면…….
“끝!”
“달려!”
마지막 사람에게 리키가 독액을 주입하고, 나는 리키의 손을 붙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내가 앞서서 달리고 있었지만 리키가 속도를 내며 나를 거의 잡아끌다시피 달리기 시작했다.
[제한 시간 : 4분 30초]
그래, 이 정도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어!
그런 생각이 들자 안도감이 들기 시작했고, 내가 한숨을 내쉬려던 그때.
그들이 도착했다.
내가 클라인을 첫날 만났던 때 느꼈던 압박감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게 뭐에 홀린 것처럼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고.
하늘에서 서서히 커지는 유성우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니, 저건 유성우가 아니다.
클라인의 동족의 눈이다.
그들이 이곳에 다가오고 있다.
어째서?
이곳에서 일어나는 위험을 막기 위해서인가?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리키가 갑자기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거친 숨을 내뱉기 시작했다.
“리키?”
“아, 아악…… 윽…….”
“갑자기 무슨 일이야? 왜 그래?”
나는 갑자기 쓰러진 리키를 끌어안고 무슨 일인지 물었고, 돌아온 리키의 대답은 내 예상 밖의 대답이었다.
“눈이, 눈이 너무 눈부셔…….”
“눈부셔?”
“마력이 너무 많아서. 앞이, 앞이 안 보일 정도야…….”
설마, 클라인의 동족의 영향을 받아서 마력이 너무 증가한 걸까?
원인이 무엇이든 리키는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어 보였고, 나는 서둘러 리키를 품 안에 안았다.
“조금만 참아. 조금 멀리 나가면 괜찮아질 거야.”
리키의 팔이 불안한 듯 내 목을 껴안고, 나는 리키와 함께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나 리키를 안고 달린 것 때문에 아까만큼의 속도가 나오지 않는다.
[제한 시간 : 3분 1초]
남은 시간 3분.
괜찮아.
안전지대까지 얼마 남지 않았어.
바로 코앞이야.
조금만 더 가면 돼.
[제한 시간 : 1분 10초]
1분?
이제 1분밖에 안 남았다고?
지금 속도로는 무리인데?
아무리 속도를 높여도 안전지대까지 도달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러면, 이러면 안 되는데?
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형아!”
소돔과 고모라 두 꼬맹이가 어디선가 나타나 내 팔을 붙잡고 짐짝을 들고 가듯 나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두 꼬맹이는 확실히 나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나를 끌고 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확실히 제시간에 안전지대에 도착할 수 있을지 확실치 않아 보였다.
조금만 더 힘을 내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문득 시야 한구석에 낯익은 초록색 피부의 누군가가 들어왔고.
그 누군가는 그대로 꼬맹이들과 나를 걷어차 힘차게 앞으로 날려 보냈다.
[제한 시간 : 15초]
15초.
퍽, 하고 바닥에 넘어지자마자 나와 꼬맹이들은 다시 일어나서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다.
조금만 더 빠르게 가면.
[제한 시간 : 5초]
거의 끝.
[제한 시간 : 1초]
그리고 도착.
꼬맹이와 나는 제한 시간이 1초 남았을 때에서야 안전지대에 간신히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제한 시간 : 0초]
제한 시간이 끝이 나는 것과 동시에, 하늘에서 그들이 내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무언가가 일어났고, 정신을 차렸을 땐 그들은 다시 사라져 있었다.
“흐아, 겨우 도착했어.”
고모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내게 그렇게 중얼거렸고, 나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고모라의 말에 동의했다.
“어, 중간에 넘어졌는데 오히려 그 덕분에 도착할 수 있었네.”
리키는 여전히 마력 때문에 눈을 뜨지 못하겠는지 내 품 안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그리고 소돔은.
“형아, 빨리 가자.”
“잠깐만, 소돔이 안 보이는데?”
“소돔? 그건 누구야?”
“어?”
소돔은, 그 어느 곳에도 없었다.
고모라는 소돔의 존재를 잊어버린 것처럼 내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설마, 설마……?
불길한 예감이 든 나는 서둘러 고개를 돌려서 등 뒤를 바라봤고.
내 등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로.
그 아무것도 없었다.
마을 주민들이 세워 둔 목책도.
저 멀리서 반짝이던 작은 불빛도.
정체불명의 생물들이 가득하던 비탈길도.
그 무엇도 없이 날것 그대로의 자연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138화 [생명도감]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 야생 생물에게 먹이를 주지 마세요.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한때 키메라 인간들이 쌓아 올린 노력의 결정체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만약 그것이 폭발이나, 마법으로 보이는 것의 소행이었다면 내가 이렇게 충격을 받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건, 그런 것들과는 다르다.
말 그대로 아무 흔적도 남지 않고 모든 것이 사라졌다.
처음부터 이곳에 마을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거기에 더해서 더욱 나를 섬뜩하게 하는 것은 바닥에 쌓인 눈 위에 남은 발자국들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날것 그대로의 상태.
아무도 이곳에 다녀온 적 없다고 말하는 듯한 새침한 모습에 나는 기괴함과 공포심을 느끼고 있었다.
“이게, 이게, 어떻게…….”
내가 그 말도 안 되는 풍경에 할 말을 잃고 가만히 중얼거리고 있자, 고모라가 내게 다가와 투덜거렸다.
“으, 형아. 나 추워. 빨리 가자.”
“잠깐만. 소돔이 안 보이는데.”
“아까부터 자꾸 소돔, 소돔 하는데. 소돔이 도대체 누구야?”
“뭐? 네 언니…….”
“언니라니? 나는 언니가 없는걸?”
믿고 싶지 않던 현실이 코앞에 제시된다.
설마.
설마 소돔은.
나는 차마 내가 내린 결론을 확정 짓지 못하고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고모라의 말에 수긍했다.
“어, 응. 그래.”
나는 멍하니 리키를 품 안에 안은 채로 고모라의 뒤를 따라 텔레포트 마커로 발을 들였고, 안전지대에 바글바글 모여 있는 마을 주민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제한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10분 뒤에 복귀를 시작합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임무의 종료를 알려 오고 나는 리키를 조심스럽게 내 품에서 내려놓으려 했지만, 리키는 더욱 꼬리를 조여 오며 내게 매달렸다.
“저기, 리키?”
“아, 아직 힘들단 말이야.”
글쎄, 내 눈에는 완전히 회복한 것처럼 보이는데?
그래도 잠시 후면 헤어져야 하기에 나는 차마 리키를 떼어 내지 못하고 가만히 무릎 위에 올려 뒀다.
“저기, 고모라.”
“응?”
“……너희가 원래 있던 마을은 어디였지?”
“갑자기 왜 그래?”
“그냥. 좀 생각할 게 있어서.”
“어…… 그러니까, 리키 언니랑 같이 살고 있었잖아. 그건 왜?”
“그래……? 그럼, 우리가 저기엔 왜 갔었지?”
“출발 시간까지 기다리기 지루해서 다 같이 놀러 간 거지!”
“그럼, 마지막엔 왜 도망쳤지?”
“중간에…… 거대한 괴물이 튀어나와서!”
고모라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기억도 이렇게 변했을까?
키메라들의 마을도, 테틀리도, 사도들도, 소돔도.
그 모두가 아예 존재 자체가 사라진 기분이다.
존재가 삭제당한 것과는 다르다.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 되어 버렸다.
그곳에 마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 사람들은 리키와 함께 생활하던 것이다.
그곳에 사도들은 없었다.
그러니 사도들에게 다친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에 소돔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고모라는 원래 혼자였고, 그 누구도 소돔을 기억하지 못한다.
시스템이 경고하던 재앙이 이런 것이었을까?
모두의 기억에서 아예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것.
하지만 제한 시간이 끝나기 전에 내가 목격한 것은.
주인, 신, 거신, 거인, 기타 등등.
그들이 확실한 의지를 갖고 이곳에 다가오는 모습이었다.
아니, 애초에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건 그 사람들밖에 없잖아?
그들은 어째서 이런 짓을 저지른 걸까?
키메라 마을이 마지막엔 광기에 물들긴 했어도 존재 자체가 말소될 만큼 심한 짓을 한 거야?
그들은 그저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었을 뿐인데?
그 사람들은 어째서 이런 짓을 저지른 거지?
내 기준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주인들의 행동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내리고 고민에 빠져들었다.
“저기, 잉간…….”
“응?”
그때, 리키가 가만히 내 귀에 얼굴을 가져다 대고 내게 속삭여 왔다.
“그, 저 사람들이 하는 말이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 나, 나랑 저 사람들이 원래 같이 살았다는 게 무슨 소리야?”
어째서인진 몰라도, 리키는 다른 사람들처럼 기억이 날아가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왜 기억이 온전한 거지?
내가 의아해하던 찰나, 에포나가 가볍게 짖으며 리키의 꼬리를 깨물었다.
“왕!”
“흐얏?!”
리키는 이제 에포나를 느낄 수 있는 것인지 에포나를 바라보며 새된 비명을 질렀고, 에포나는 그런 리키를 바라보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내 다리 사이에 파고들었다.
나는 그런 에포나를 바라보며 잠깐 쓴웃음을 짓다가, 리키의 이름을 불렀다.
“리키.”
“응?”
“미안하지만, 더 이상 함께 다닐 수 없을 수도 있어.”
“어, 어? 왜?”
“아마도, 내가 돌아갈 곳과 리키가 새로 머물 곳이 다를 것 같거든.”
“시, 싫어. 그런 건 싫어. 나도 잉간이랑 같이 갈래.”
“그건…… 내가 원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어서 잘 모르겠네.”
아리스 때에는 아리스가 차원 문을 열어 날 따라오지 않았다면 클라인이 아리스를 데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내게 이번 임무를 맡긴 사람이 클라인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걸 생각하면.
아마 리키는 나와 헤어져서 다른 곳으로 가게 되겠지.
“싫어. 잉간이랑 떨어지기 싫은걸…….”
리키는 나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더욱 억세게 옭아맸고, 나는 아무 말 없이 리키를 꼭 안아 줬다.
예전의 나를 보는 것 같아서 참 마음이 많이 가지만, 이건 내가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미안.”
“떨어지기 싫어. 잉간이랑 같이 있고 싶은걸. 혼자는 싫단 말이야. 무서워.”
“미안. 그래도 이젠 내가 없어도 괜찮을 거야.”
“괜찮지 않아. 난 잉간이 좋아. 그래서 같이 있고 싶어. 너랑 떨어지는 게 무섭고, 네 품에 안겨 있으면 행복한걸…….”
리키는 훌쩍거리며 내 품에서 자신의 마음을 털어놨고, 나는 그런 리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화답했다.
“괜찮을 거야. 응.”
“내가 안 괜찮다고……. 이럴 줄 알았으면 안 따라왔을 텐데. 나빠.”
“미안.”
“사과만 하지 말고.”
“미안해.”
“내가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준댔잖아. 거짓말쟁이.”
“안전한 장소일 거야.”
“잉간 곁이 아니면 어디든 상관없는걸.”
그렇게 한참을 훌쩍이던 리키는 눈물에 젖은 얼굴로 가만히 내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러고는 천천히 꼬리와 팔을 뻗어 내 몸을 완전히 감싸더니 내 눈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그럼,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응.”
나 또한 팔을 뻗어 리키의 몸을 받아들였고, 리키는 그대로 내게 입맞춤했다.
리키의 기다란 혀가 꿈틀거리며 내게 자신의 흔적을 확실히 남겨 두겠다는 듯 입안과 때때로는 목까지 괴롭힌다.
멍해진 얼굴로 리키의 탐욕스러운 입맞춤을 받아들이고 있던 그때, 리키의 이빨이 내 혀를 깨물었다.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고, 리키의 몸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내 몸 안으로 주입되기 시작한다.
뜨거운 것이 주입된 내 몸은 자연스럽게 달아오르기 시작했고, 리키는 더욱 내게 독액을 주입했다.
마침내 길고 긴 입맞춤이 끝나고 리키가 내게서 입을 떼어 놓는다.
서로의 타액과 리키의 독액, 나의 피가 뒤섞인 분홍빛 액체가 선정적으로 서로의 입 사이에 늘어진다.
리키는 혀를 뻗어 분홍빛 액체를 핥고는 나를 와락 껴안았다.
“……벌이야. 앞으로는 몸이 뜨거워질 때마다 날 생각하게 될걸?”
글쎄, 딱히 몸이 뜨거워지지 않아도 계속 리키를 생각할 것 같은데?
나는 그런 생각을 입속으로 삼키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복귀를 시작합니다. 안전지대 밖으로 나가지 말아 주세요.]
회색 안개가 모든 것을 삼켜 버렸다.
그리고 다시 일어났을 때는,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짜증 나는 얼굴이 내 앞에 있었다.
“거신의 은총은 자는 사이 회수해 갔습니다. 최종 포인트 정산액은 5점이로군요.”
“……이제 다 끝났으니 돌아가도 되지?”
“언제든지요. 나가는 문은 저쪽입니다.”
빨리 집에 돌아가서 쉬고 싶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질문이 내 발을 붙잡았다.
“저기.”
“왜 그러십니까? 정산 내역을 확인하고 싶으시다면 옆의 모니터로 가 주세요.”
“아니, 그런 건 관심 없고, 한 가지만 답해 줄 수 있어?”
“뭐죠?”
“……내가 내려간 곳의 사람들은 왜 죽어야 했던 거야? 왜? 어째서 그렇게까지 완전히 사라질 필요가 있었어?”
내 질문을 들은 녀석은 잠깐 멈칫하더니, 어깨를 으쓱거리며 가볍게 대답했다.
“모릅니다.”
“모른다고?”
“어째서 그들이 죽을 필요가 있었는지는 임무를 내려 주신 거신들만이 알고 계시겠죠.”
“…….”
도대체.
도대체 뭐 때문에 그들은 모든 것을 부정당한 채 사라져야 했던 걸까?
만약 클라인에게 물어볼 수 있다면 클라인은 내게 어떤 대답을 들려줄까?
부디, 아무 이유가 없진 않았길 바란다.
* * *
“생태계의 균형 때문입니다.”
클라인의 눈앞에서 생명도감은 쥬튜브 영상을 촬영하고 있었다.
“인간들을 말소할 필요가 있었냐는 질문들이 많았는데요. 네, 이건 반드시 말소해야 했습니다.”
생명도감은 그렇게 말하며 스노우 스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들이밀었다.
“보이시나요? 인간들이 더 문명을 발전하거나 영역을 넓히지 않더라도 인간이란 변수가 추가된 것만으로 스노우 스톤의 균형은 크게 흔들립니다. 이렇게 제한된 마력으로 생활하는 생태계에선 생명체 한 마리도 큰 변수로 작용한답니다.”
이윽고 생명도감은 푹 한숨을 내쉬는 시늉을 하며 촬영을 계속했다.
“네. 저도 압니다. 그곳의 키메라 인간들에겐 죄가 없다는 걸요. 그저 살아갈 뿐이라는 걸요. 하지만, 단지 인간들이 불쌍하다고 스노우 스톤의 생명체들을 몰살시킬 수는 없는 법 아닙니까?”
생명도감은 그렇게 외치며, 클라인에게 손짓을 했다.
클라인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물러났고, 생명도감의 카메라가 클라인이 보고 있던 화면을 비췄다.
“저희도 당연히 인간들을 구조하고 싶죠. 하지만 이미 이곳의 인간들은 정보 오염이 심각하게 진행되어서 손쓸 수 없는 단계였어요.”
화면에는 잉간이가 열심히 마을 주민들과 친해지려는 노력을 하는 모습이 송출되고 있었다.
“그래서 저렇게 간접적인 방법으로 구조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직접 구조에 나서면 인간들이 정보 오염을 버티지 못하니까요.”
그렇게 중얼거린 생명도감은 카메라를 자신 쪽으로 되돌리고 카메라를 향해 말했다.
“그러니 여러분,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제발 야생 생물이나 야생 인간에게 먹이를 주시면 안 됩니다. 집에 데려갈 생각이 아니라면, 그건 야생 생물을 학대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요.”
클라인은 그런 생명도감의 모습을 보며 가만히 생각했다.
과연 자신이 내린 결정이 옳았을까?
과연 잉간이 외의 다른 인간들에게 신경 쓰지 않기로 한 결정이 옳았을까?
만약 인간들이 지적 생명체로 인정받았다면 이렇게 대피하지 못한 인간들까지 소각했을까?
지금 과연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인간들을 구했다고 할 수 있을까?
자꾸만 후회하는 것 같지만, 이미 결정을 내린 지 오래다.
하지만 더 후회한다면.
나의 결정에 더 후회한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할까?
어쩌면 더 후회하기 전에 빨리 결정을 되돌려야 하는 게 아닐까?
아, 진짜 생각이 많아지니 자꾸 이런 생각만 하게 된다.
그래, 이렇게 생각만 하는 것보단 후회해도 선택하는 게 맞아.
후회한다면 선택을 바꾸면 되지만 생각만 한다면 그러지도 못하잖아?
“하아…….”
자꾸만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다 잉간이 때문이다.
어째서인지 몰라도 키메라 인간과 딱 붙어 다니는 잉간이의 모습이 클라인의 마음을 자꾸 간지럽혔다.
으, 그냥 잉간이가 걱정돼서 우울한 거일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금 깊은 한숨을 내쉬려던 그때.
“……응?”
클라인은 스노우 스톤의 시간이 멈췄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저기, 생명도감 님. 오늘 감마선 폭풍 온다고 했어요?”
“네? 아뇨. 그런 건 없었는데요?”
“근데 어째서 스노우 스톤의 시간이 멈췄죠?”
“네?”
생명도감은 클라인의 말에 의아해하며 스노우 스톤을 살피기 위해 창가로 다가갔고, 클라인이 생명도감의 뒤를 따라간 순간.
“꺄앗?!”
[경고, 차원의 파동이 감지되었습니다. 안전 등급 5등급 이하 물건의 파손에 주의하세요.]
시스템 경고가 나타나는 것과 함께 차원의 파동이 클라인과 생명도감이 타고 있는 우주선을 뒤흔들었다.
스노우 스톤의 시간이 멈춘 건 이것 때문인가?
그런데, 차원의 파동이 자연적으로 만들어졌을 리는 없는데……?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살을 찌푸렸고, 창밖에 나타난 우주선이 그런 그녀의 눈을 사로잡았다.
“저건……?”
한눈에 봐도 항성급 크기의 우주선이다.
저런 우주선이 다가왔으니 당연히 스노우 스톤의 시간이 멈추지.
방금 차원의 파동은 저 우주선이 도착하며 일어난 파동인 걸까?
그런데 어째서 항성급 우주선이 스노우 스톤에 방문한 걸까?
중앙정부의 우주선도 아니고, 소각이 시작되기까진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는데?
그리고 그런 클라인의 의문은 항성급 우주선에서 날아든 통신으로 단번에 해소됐다.
“오랜만에 보네, 케플러. 클라인 양도 반가워요.”
항성급 우주선의 주인은 바로 리만 협회장이었다.
어째서 리만이 이곳에 온 걸까?
139화 [브리더 협회 공식] 유기하지 마세요. 대신 저희에게 맡겨 주세요.
“오랜만에 보네, 케플러. 클라인 양도 반가워요.”
항성급 우주선에서 전달된 통신의 주인은 리만 협회장이었다.
어째서 리만 협회장이 이곳에 온 걸까?
“아, 안녕하세요!”
“우리 사이에 뭐 그렇게 격식을 차려요. 편하게 말해요. 그치, 케플러?”
생명도감에게 들었던 이야기 때문일까?
클라인은 어째 리만을 대하기가 껄끄러웠고, 그런 태도가 표면에 드러났는지 리만 협회장은 눈웃음을 치며 생명도감을 바라봤다.
“둘이 사이가 꽤 친해졌나 봐?”
“뭐, 늙을 대로 늙은 괴팍한 할머니보단 파릇파릇한 마키나가 더 매력적인 건 당연한 거 아냐?”
“허, 우리 나이로 환산하면 나랑 비슷한 주제에.”
리만과 생명도감은 웃으며 서로 대화하고 있지만, 어째 날이 바짝 서 있는 말을 서로 주고받는 기분이다.
클라인은 그 사이에 끼어서 뭐라 하지도 못하고 애매한 웃음만을 흘릴 뿐이었다.
아,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갔으면 좋겠다.
그런 클라인의 바람을 알아줬는지, 생명도감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리만에게 질문을 던졌다.
“으, 너랑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 오글거려 죽겠네. 그래서 여기 온 목적이 뭐야? 뭐, 관광이라도 하러 왔어?”
그러자 리만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상하다는 듯 생명도감에게 대답했다.
“어라, 설마 못 들은 거야?”
“뭐 말인데?”
“중앙정부에서 통지하지 않았어? 입양자가 함께 도착할 거라고.”
“그래, 그랬는데. 잠깐, 그럼 설마 네가?”
“그렇지. 내가 바로 그 입양자야.”
리만의 말에 생명도감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을 떡 벌렸고, 리만은 희미하게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 많은 키메라 인간들을 제대로 보살필 수 있는 건 나 정도밖에 없잖아?”
“그래, 그렇긴 한데. 중앙정부에서 허가를 내렸다고? 너한테?”
“그래. 내렸지.”
“너한테?”
생명도감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다시 리만에게 되물었고, 리만은 한숨을 내쉬며 생명도감을 바라봤다.
“날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에코 테러리스트.”
“아니거든?”
“말이 안 되는데. 이건, 진짜로.”
도대체 리만이 과거에 무슨 짓을 저질렀길래 생명도감이 저런 반응을 보일까?
생명도감이 저렇게 경기를 일으키는 걸 봐선 평범한 짓은 아닐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협회장에게 과거에 탄탈로스와 울타르의 지적 생명체 지정을 위해 노력했다는 말만 들었을 뿐 정확히 무슨 일을 했는지는 듣지 못했다.
설마, 진짜로 에코 테러리스트 활동을 하고 다닌 건 아니겠지?
“중앙정부도 내 본심을 이해해 준 거지. 클라인 양도 그렇게 생각하죠?”
“네? 네, 어. 아마도요?”
그때 갑작스럽게 리만은 클라인에게 대화의 물꼬를 틀었고, 클라인은 당황하며 적당히 리만의 질문에 대답했다.
“정말. 순수한 아이에게 도대체 얼마나 겁을 준 걸까.”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고 이용해 먹으려고 한 것보단 낫지.”
다시금 리만이 한숨을 내쉬며 한탄하고, 생명도감은 그런 리만을 비아냥거린다.
어찌 됐든 생명도감은 한숨을 내쉬며 리만이 이곳에 온 걸 받아들였다.
“그래. 뭐, 정부도 생각이 있겠지. 그래서. 여긴 왜 왔는데?”
“왜 왔냐니, 아까 말했잖아?”
“뭘 꾸미고 있는 거냐고 말해야 알아들어?”
“걱정이 너무 많네. 공공의 이익을 위한 사업이라고.”
“공공사업?”
생명도감은 세상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들었다는 듯 괴상한 표정을 지었지만, 생명도감이 그러거나 말거나 리만은 클라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시작은 인간형 생물과 탄탈로스와 울타르부터, 최종적으로는 모든 애완 생물들을 위한 사업이지.”
“뭐, 유기 생물 보호소라도 차리려고?”
“비슷해. 앞으로는 모든 유기 생물은 브리더 협회에서 주관하게 될 거야.”
“브리더 협회에서?”
리만이 말하는 이야기는 상당히 스케일이 거대했다.
아마도, 인간형 생물을 시작으로 다른 생물들도 지적 생물로 인정받게 하고자 하는 리만의 목적이 담긴 사업이겠지.
클라인이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리만은 차분히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했다.
“대부분의 유기 생물은 사육자가 그 생물에 질렸거나, 더 이상 생물을 사육할 상황이 되지 못해서 발생하는 거잖아?”
“그렇지. 대부분은.”
“그들도 생물을 유기하는 게 잘못이고 불법이라는 걸 아니까 보이지 않는 곳에 유기하는 거고, 그것 때문에 대부분의 문제가 발생하는 거지. 솔직히 유기 생물이 언제 어디서 발생하는지 알면 관리는 쉽잖아?”
“그렇긴 한데, 솔직히 불가능한 일이지. 유기 생물이 언제 어디서 발생하는지를 전부 감시하는 건.”
“그러니까, 나는 유기 행위를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 올릴 생각이야.”
“뭐?”
“굳이 야생이나 이상한 곳에 가서 유기하지 말고, 우리에게 맡기라는 거지.”
리만의 계획을 들은 생명도감은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진심이냐, 너?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적당한 홍보가 있다면 충분히. 유기 생물이 늘어날 가능성도 있지만, 그건 일시적일 거야.”
“아니, 내 말은. 브리더 협회의 예산으로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이럴 때 쓰라고 우리가 세금을 내는 거잖아?”
“하. 정부에 허락까지 받았다 이거지?”
생명도감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흔들더니, 이해했다는 듯 허탈한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래. 정부에선 아주 좋아하겠네. 자격증을 만들 수 있다면 뭐든 만들고 싶어 하니까.”
“생명 보호 측면에선 좋은 일이잖아?”
“……그렇지. 생명 보호만 따진다면 말이야.”
으아, 뭔가 엄청난 스케일의 대화가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 같다.
리만 협회장은 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걸까?
자신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거대한 계획을 이야기하는 협회장의 모습을 보며 클라인은 다시금 협회장의 목표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를 깨달았다.
모든 인간을 지적 생명체로 인정받게 한다.
단순히 모든 유기 생물들을 받아들이는 보호소를 건설하겠다는 이야기도 이렇게 막연해 보이는데, 이건 어떻겠는가.
막연한 목표를 넘어선 공상 수준의 망상이다.
하지만 어쩐지 클라인은 그런 리만 협회장의 모습이 살짝 부러웠다.
협회장처럼 되고 싶다거나, 저런 삶을 살고 싶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허황된 목표일지라도 목표를 향해 전력으로 달려 나가는 자세가 부러웠다.
만약 나도 저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면.
넘어지더라도 꺾이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면, 방 안에 틀어박히지 않았을 텐데.
그렇지만 단지 부러울 뿐, 클라인은 리만을 닮고 싶진 않았다.
만약 자신이 리만과 같은 성격이었다면 잉간이를 만나지 못했을 테니까.
방 안에 틀어박히지 않았으면 잉간이를 만나지 못했을 테니까.
뭐, 이 생각도 나중이 되면 또 바뀔 수도 있으니까.
클라인이 그렇게 생각하던 사이, 또다시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경고, 차원의 파동이 감지되었습니다. 안전 등급 5등급 이하 물건의 파손에 주의하세요.]
또다시 차원의 파동이 주위 일대를 뒤흔들고, 새로운 우주선이 공간을 찢고 나타났다.
“슬슬 시간이 된 모양이네.”
리만의 거대한 우주선과는 달리, 아주 조그마한 우주선.
너무나도 작아서 잘못 보면 소행성으로 보일 정도의 크기다.
그렇지만 아마 저 우주선 안의 공간은 리만의 우주선의 몇 배는 되는 크기를 지녔을 것이다.
그야, 저 우주선의 주인은 중앙정부니까.
중앙정부의 우주선에서 마도서를 든 피곤한 인상의 남자 두 명이 내리더니, 한숨을 내쉬며 스노우 스톤으로 다가갔다.
잉간이는 어떻게 됐지?
슬쩍 시선을 내려서 스노우 스톤의 상태를 살피니 무사히 안전지대에 도착한 듯 보인다.
클라인이 그 모습을 보고 안심한 순간, 두 남자가 마도서의 페이지를 찢고 허공에 흩날렸다.
어마어마한 마력의 흐름이 스노우 스톤 상공에 모이더니.
그대로 키메라 인간들의 서식지를 덮쳤다.
그걸로 방역 작업은 모두 끝이 났다.
안전 지역에 모인 인간들의 숫자를 보니 상당수의 개체들이 저 소각에 휘말렸겠지.
너무 단번에 일어난 일이어서 잘 실감은 나지 않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그리고 생명도감은 그 모습을 촬영하며 조용히 설명을 시작했다.
“이번에 방역반이 선택한 건 존재 소각을 사용하는 방법인데요. 그만큼 이번 스노우 스톤의 생태계 파괴와 정보 오염이 심각했다는 거랍니다.”
생명도감이 설명하는 사이에 남자들은 마도서를 덮고 휘적휘적 우주선으로 돌아갔고, 순식간에 차원을 찢고 다른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냥 정보 오염과 인간들을 제거하는 것만으로는 원상태로 되돌릴 수 없으니, 인간들의 존재를 삭제해서 인과관계를 조정한 거죠. 인간들이 아예 스노우 스톤에 오지 않은 게 되었으니 당연히 인간들에게 잡아먹힌 생물들도 되살아나고, 인간들이 오염시킨 환경도 원래대로 돌아가는 겁니다.”
존재의 삭제라.
저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는 걸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최고 범죄자에게 가끔 사용된다는 건 알아도, 실제로 쓰인 적을 본 적이 없으니까.
저 아래의 인간들은 존재가 삭제될 정도의 범죄를 저지른 걸까?
중앙정부의 법률로 생각해 봐도 저 아래의 인간들은 그 정도의 짓은 하지 않았다.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 쳤을 뿐.
잉간이는 분명 최선을 다해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구하려 했겠지.
그렇다면 나는 과연 최선을 다해서 저 인간들을 구하려 했을까?
답은 아니요다.
잉간이만을 신경 쓰겠다고 다짐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이렇게나 자신의 선택이 후회된다.
그렇지만 리만처럼 멈추지 않고 벽에 들이박았다면?
분명 지금보다 더 후회할 만한 일이 벌어졌을 거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클라인의 마음에 남은 갑갑함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고, 클라인이 그렇게 끙끙대는 사이 리만의 우주선 안으로 키메라 인간들이 이송되어 갔다.
잉간이와 친밀하게 지내던 것으로 보이는 라미아형 키메라의 모습도 보인다.
문득 클라인은 저 아이라도 입양할까 생각했지만, 그러기엔 망설여지는 것이 많았다.
더 잉간이의 룸메이트를 늘리는 건 조금 꺼려지고.
더 이상 과도하게 리만과 엮이는 건 피하고 싶다.
리만은 그런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을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에 말려들게 하고, 그들이 어떻게 되든 계속해서 나아가는 사람.
리만과 더 엮인다면 벽에 부딪혀 넘어지거나, 위대한 영광을 함께 누릴 수 있겠지.
그리고 아마 벽에 부딪혀 넘어지는 게 백이면 백일 테고 말이다.
그러니 리만과 과도하게 엮이는 건 피하고 싶다.
하지만 자꾸만 잉간이의 아쉬운 듯한 표정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죄책감이 클라인의 마음을 간지럽혔다.
아냐, 내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리만 협회장이 잘 보살펴 주지 않겠어?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가만히 키메라 인간들을 바라봤고, 그런 모습을 바라보던 리만 협회장은 가만히 클라인에게 말을 걸었다.
“클라인 양.”
“아, 네?”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않았던 건 미안해요. 그렇지만 알다시피 제대로 된 설명을 하는 건 무리였어요.”
“네. 알아요…….”
“클라인 양은 분명 저를 불가능한 것에 도전하는 무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죠?”
“아, 아니에요. 그렇진…….”
“그 생각이 맞아요. 그런 무모한 짓을 하는 건 저 같은 멍청한 사람들이나 할 짓이랍니다. 하지만 그래도 클라인 양. 이것 하나만큼은 기억하세요.”
뭘 기억하라는 걸까?
어쩐지 설교를 듣는 기분으로 클라인은 가만히 리만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할 수 없는 걸 하지 않는 건 현명한 선택이지만, 할 수 있는 걸 하지 않는 건 안 좋은 선택이라는 걸요.”
“할 수 있는 걸 하지 않는 것…….”
“제가 클라인 양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클라인 양의 마음이 편한 선택을 하는 게 좋잖아요?”
리만의 말을 듣고 클라인은 다시 한번 라미아형 인간을 바라봤고, 가만히 리만의 얼굴을 바라봤다.
리만은 여전히 생긋 웃고 있었다.
그리고 클라인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요즘. 너무 줏대가 없이 휘둘리는 것 같아요.”
“클라인 양이 성장한다는 증거니까 좋은 일이네요.”
진짜, 이 아주머니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네.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입술을 삐죽 내밀고 또 하나의 결정을 내렸다.
“네. 할 수 있는 건 해야죠. 할 수 있다는 건, 해야만 한다는 거니까요.”
“후훗.”
자신이 세운, 잉간이에게 부끄러운 사람은 되지 말자는 줏대에 따라서.
* * *
그것은.
아니, 그는 가만히 그의 협력자가 마련해 준 공간에 앉아서 눈을 감고 있었다.
슬슬 돌아올 때가 됐는데.
그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협력자의 기척이 느껴졌고, 협력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걸로 첫걸음은 뗐네. 작은 친구.”
“데려온 건가?”
“응. 잠시 후면 네가 있는 곳으로 향할 거야.”
언제 들어도 불쾌한 목소리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가만히 고개를 들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을 바라봤다.
협력자의 시선은 분명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자신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것 때문일까?
그는 언제나 협력자의 행동에 미묘한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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