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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곧장 주먹도끼로 고무나무의 뿌리를 다듬기 시작했다.
내 생각에, 앞으로 이 나무는 굉장히 쓸 일이 많을 것 같다.
그냥 장작으로도 써먹을 수도 있고 지금처럼 여러 도구의 재료로 써먹을 수 있다.
거기에 이 정도 유연함이라면 일종의 로프 역할을 대신할 수도 있을 거다.
앞으로는 꾸준히 고무나무를 모으는 걸 일과로 삼아야 하려나.
마침내 나는 고무나무의 뿌리를 다 다듬었고, 드디어 통발 제작을 시작할 수 있었다.
만능 사전을 들여다보며 천천히 통발을 만들어 본다.
첫 번째로 만든 통발은 어딘가 허술하고 조금 건드는 것만으로 망가져 버렸다.
두 번째로 만든 통발은 여전히 허술했지만, 첫 번째보단 나아졌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뭔가가 더 나아졌다는 걸 알 수 없었지만, 나 자신에겐 그 점이 잘 느껴졌다.
그 때문일까?
나는 계속해서 통발을 만드는 데 집중할 수 있었고.
9번째 통발을 만들 즈음에는 꽤 괜찮은 결과물을 얻어 낼 수 있었다.
좋아, 이제 이걸 호숫가에 설치하면 된다.
미끼는 적당히 무오 고기를 쓰면 되겠지?
고작 새우 따위가 그렇게 까다로운 입맛을 가지고 있진 않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이제 슬슬 상하기 일보 직전의 무오 고기들을 내가 만든 9개의 통발에 전부 집어넣었다.
“뭐지?”
무오 고기를 분해하던 와중 고기 안에서 반짝거리는 돌멩이 같은 무엇인가가 나왔다.
소의 위석 같은 것일까?
나는 대충 반짝거리는 돌멩이를 방구석에 던져두고 호숫가에 통발을 설치하러 다녀왔다.
내가 호숫가에 다녀오자 슬슬 날이 어둑하게 저물기 시작했고.
포메라니안은 온종일 뛰어다니느라 지쳤는지 짚 위에서 곤히 잠자고 있었다.
나는 포메라니안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포메라니안을 쓰다듬었다.
“끄응, 끼잉…….”
잠꼬대를 하듯 낑낑거리는 포메라니안을 쓰다듬으며 나는 조심스럽게 포메라니안의 이름을 불렀다.
“포메라니안이니까 포메? 아냐, 이건 너무 성의 없고. 메라? 이것도 아냐. 그럼…….”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작명은 생각보다 꽤 오랜 시간 이어졌고.
“좋아. 지금부터 네 이름은 에포나야. 에포나.”
에포나.
에포나.
응, 괜찮은 이름이야.
나는 에포나의 이름을 속으로 되새기며 잠에 들었다.
* * *
“지금 인간이 만드는 건. 아마 주먹도끼라고 부르는 원시적인 도구인 것 같네요! 뭐, 실제로는 돌과 돌을 부딪쳐서 다듬은 거일 뿐이지만요.”
지금 인간이 보여 주는 모습은 클라인이 키우는 다른 인간들도 가끔씩 보여 주던 모습.
클라인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아까 지구산 인간이 바라보던 시스템 창을 떠올렸다.
분명히 원시적인 통발을 만들려는 모습이었지?
지금 은신처에 가지고 온 것도 고무나무의 뿌리고.
클라인은 그렇게 인간이 새로운 도구를 만들어 내는 모습이 정말 좋았다.
마치 퍼즐을 스스로 만들고 스스로 해결하는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
클라인이 인간에게 성능 좋은 시스템을 쥐여 주지 않은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너무 강력한 시스템을 쥐여 줬다간 분명 시스템의 힘에만 의지할 테니까.
하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는 클라인의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음…… 그런데 인간이 개를 먹지를 않네요. 뭐가 잘못된 걸까요?”
인간이 자신의 선물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인간이 개를 잡아먹지 않는지 고민하던 클라인은 깨달았다는 듯 신체 말단을 부딪치며 외쳤다.
“아, 손질을 제대로 안 해서 그런 걸까요?”
가끔 애완 생물을 키우다 보면 그런 경우가 있다.
야생성을 키워 주기 위해서 생먹이를 급여했지만, 생먹이 때문에 다치거나 오히려 겁먹고 제대로 식사를 하지 않는 경우.
마침 이 지구산 인간은 전에도 무오에게 겁을 먹고 제대로 사냥하지 못한 경력이 있으니 클라인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했다.
“어쩔 수 없네요. 친절한 제가 이렇게 손질을 해 주는 수밖에요!”
비록 개라는 생물에 다시 손대기도 싫고, 특유의 냄새와 울음소리 모두 클라인을 괴롭혔지만 그 정도는 참을 수 있다.
사랑하는 애완 생물을 위해서인데,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지 않은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차원항 속에 손을 집어넣어 개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제 선물을 좋아해 줬으면 좋겠네요!”
늘 그렇듯, 호의를 가득 담아서 말이다.
* * *
다음 날 아침.
오랜만에 숙면을 취하고 잠에서 깨어나 보니 에포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침부터 바깥에 산책하러 나간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동굴 입구를 바라본 순간.
어딘가 낯익은 동물의 가죽과 잘 손질된 고기가 놓여 있었다.
9화 인간에게 돌멩이 100개를 넣어 주면?? 인지 훈련 1일 차!
동굴 입구에 놓인 동물의 가죽과 손질된 고기는 무척 낯익었다.
작은 동물을 도축하고 나온 부산물인 것처럼 무척이나 적은 양이다.
“에, 에포나? 에포나……?”
떨리는 목소리로 에포나를 불러 보지만, 대답이 돌아오는 일은 없다.
주춤거리며 바닥에 덩그러니 놓인 가죽을 쓰다듬어 본다.
어제까지 내가 쓰다듬을 때의 감촉이 그대로 느껴진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지?
왜 이런 짓을 한 거지?
머릿속에 수많은 의문이 쏟아지고.
수많은 의문이 머리를 빠져나와 눈을 통해서 바닥에 뚝뚝 떨어진다.
온갖 의문을 바닥에 떨어트려서인지 나는 그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흐느낄 뿐이었다.
기껏 이름을 지어 줬는데.
이세계 생활을 함께 헤쳐 나갈 친구가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하고 갑자기 사라져 버릴 줄은 몰랐다.
“흐끅, 끄흑, 흐으윽…….”
“왕!”
또다시 동굴 안에 틀어박혀 서럽게 울고 있자, 있을 수 없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전의 내 삶처럼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을 울음소리.
나는 고개를 번쩍 쳐들고 울음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봤다.
“왕?”
그러자 그곳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혀를 빼꼼 내밀고 있는 에포나의 모습이 있었다.
“에포나. 에포나, 에포나!”
“왕, 왕왕!”
에포나의 이름을 부르며 에포나를 꼭 껴안자 에포나는 몸부림치며 내 품에서 훌쩍 빠져나갔다.
살아 있었구나.
다행이다.
참 다행이야.
에포나가 죽은 게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의 눈물이 더 넘쳐흘렀고.
내가 간신히 진정할 수 있던 건 그로부터 시간이 한참 흘러서였다.
에포나가 죽은 게 아니라면, 그럼 저 가죽과 고기의 정체는 뭐지?
스윽.
가죽을 들어 올려 에포나의 털과 비교해 본다.
아직 부드러운 털이 남아 있는 털가죽은 에포나의 것과 다른 점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 가죽과 고기는 포메라니안의 것이 맞다.
여기서 내가 내릴 수 있는 합리적 추론은 단 하나.
이건 에포나의 것이 아닌 다른 포메라니안의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이런 짓을 저질렀을까?
지금 당장 떠오르는 건 나를 납치한 그 사이코패스.
아니, 이걸 저지른 게 사이코패스가 아니면 그게 더 무섭다.
누군가가 내가 잠자고 있을 때 들어와서 가죽과 고기를 놔두고 갔다는 거니까.
그럼 그 사이코패스는 왜 나한테 이걸 준 거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가지 가능성은 애초에 그 사이코패스가 내게 에포나를 먹이로 줬다는 것.
에이, 이건 너무했지.
사람이면 그런 생각을 떠올릴 리 없지.
그래, 어째서라든가 어떻게? 같은 생각은 그만하자.
그런 걸 생각하다간 날이 저물 때까지 생각만 해도 시간이 부족할 테니까.
앞으로 어떻게 먹고살지 걱정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없는데 말이야.
자, 오늘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보자.
우선 밤사이에 불이 꺼지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호숫가에 설치한 통발도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훈제에도 도전해 볼까?
여기서 파리 같은 날벌레의 흔적을 발견한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고기를 가만히 놔둬도 고기가 썩지 않는 건 아니다.
당장 통발에 사용한 무오 고기도 상하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었으니까.
훈제하는 법은 적당히 연기에 고기를 씌운다는 것밖에 모르지만, 만능 사전에 검색해 보면 뭔가 나오겠지?
아, 훈제 고기를 만들면 그걸 보관할 그릇도 만들어야겠네.
뭔가 이룰 생각도 없이 그저 살아남고 싶을 뿐인데 왜 이렇게 해야 할 게 많을까?
“가자, 에포나.”
“왕!”
그래도 어쩌겠어?
그냥 죽을 수는 없으니 뭐라도 해야지.
나는 그렇게 자신을 북돋으며 동굴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와아. 제 선물에 감격한 걸까요? 저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
클라인은 자신이 준비한 선물을 발견하고는 혼자서 눈물을 흘리는 인간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슬슬 인간도 차원항 생활에 적응하고 있는 것 같네요. 아직 활발하게 활동하고는 있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더 활발해지겠죠?”
클라인은 그렇게 말하며 근처의 다른 인간 사육항 안으로 신체 말단을 집어넣어 핸들링을 시도한다.
클라인의 신체 말단부가 차원항 안으로 들어가자, 클라인에게 사육되는 인간들이 신체 말단을 향해 꾸벅 허리를 굽혔다.
그 모습을 본 클라인은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렸다.
“하아, 이 차원항은 핸들링 실패예요. 지금까지 인간 핸들링을 여러 번 시도하면서 느낀 건데요. 인간 핸들링이라는 게 은근히 어렵다니까요?”
클라인은 허탈한 표정으로 지금까지 있었던 핸들링 실패 사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다른 생물은 그냥 물리거나, 스트레스를 과도하게 주지 않는 것만 조심해야 하는데 인간형 생명체들은 다루기가 너무 까다로워요.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는데 속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니까요? 이것 봐요, 이거.”
클라인은 슬쩍 차원항 안에 카메라를 집어넣으며 투정을 이어 나갔다.
“이 아이들도 몇 달 전까지는 진짜 멀쩡했거든요? 적응 훈련도 거의 다 끝나 가서 이제 핸들링해도 괜찮겠거니 했더니 어느 순간 갑자기 이렇게 된 거예요. 뭐, 스트레스받아서 죽지 않은 건 다행이긴 한데 저를 숭배하는 것도 좀 그렇잖아요?”
사육자 숭배.
인간형 생물들이 스트레스를 필요 이상으로 과도하게 받았을 때 발생하는 현상이다.
주로 기존 토착 신앙을 가지고 있던 인간형 생물에게서 자주 발생한다.
“뭐, 몇몇 사육자들은 오히려 그게 더 좋다고 하는데. 글쎄요. 핸들링 훈련을 하다가 그렇게 되는 거면 몰라도 일부러 그렇게 만드는 건 학대라고 생각하거든요.”
클라인은 다시 카메라를 차원항 밖으로 꺼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아이들은 다음 주에 치료 약이 오는 대로 치료에 들어갈 예정이에요. 아무튼, 제가 이야기하려던 건 인간형 생물의 핸들링은 무척 어렵다는 거예요.”
클라인은 따스한 눈빛으로 지구산 인간이 든 차원항을 바라보며 신체 말단을 늘려 무언가가 담긴 통을 가져왔다.
“그래서! 이번 지구산 인간 핸들링은 조급하게 하지 않고 아주 천천히 진행할 생각이에요. 가장 기초적인 인지 훈련부터 차근차근!”
콩.
클라인은 작은 유리병의 뚜껑을 열고 책상에 그 내용물을 쏟아 낸다.
유리병 안에 들어 있던 건, 차원항을 꾸밀 때 사용했던 암석 가루들이었다.
“제일 기초적인 인지 훈련, 그 첫 번째! 행동 유도와 보상을 통해 사육자의 존재 인지시키기!”
클라인은 암석 가루 중에서 크기가 작은 가루들을 따로 골라내 아공간에 진공 포장했다.
“아까 지구산 인간이 주먹도끼를 만드는 거. 보셨죠? 주먹도끼는 일종의 소모품이어서, 몇 번 사용하다 보면 날이 나가서 다시 다듬어야 해요. 그렇게 되면 주먹도끼로 다듬을 돌이 굉장히 많이 필요하겠죠?”
그렇게 말하던 클라인은 발성기관으로 직접 효과음을 내며 다음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짜쟌~ 이렇게 제가 돌멩이들을 지원해 주는 거예요. 인간이 제가 선물한 돌멩이에 관심을 두면 그때 보상을 주는 거죠! 이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사육자의 존재를 대략 인지하게 되거든요. 이게 인지 훈련 제1단계!”
클라인은 방긋 웃으며 차원항 안으로 선물을 집어넣었다.
혹시 인간이 오해할 수도 있으니 돌멩이의 용도를 담은 사진과 함께.
“후후, 인간이 좋아해 줬으면 좋겠네요.”
늘 그렇듯, 호의를 가득 담아서.
* * *
호숫가에 설치해 둔 통발에 들어 있던 것이라곤 정체 모를 수생 곤충들뿐이었다.
그나마 새우가 들어 있었을 거라고 추정되는 통발은 폭발의 위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완전히 박살 나 버렸고 말이다.
하아.
그리 기대하고 통발을 설치했던 건 아니지만 단 하나도 건지지 못하니 맥이 빠지네.
“너도 기대했냐?”
“왕?”
에포나에게 말을 걸어 보지만 에포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호수를 첨벙첨벙 헤엄칠 뿐이었다.
꾸물텅.
순간 에포나의 모습이 묘하게 일그러져 보였지만, 그건 내 착각이겠지.
“돌아가자. 따라와!”
“왕!”
호수를 헤엄치던 에포나는 뽀송뽀송한 털을 휘날리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에포나가 뛰어다니는 모습을 곁눈질로 구경하며 동굴로 돌아가던 중, 무언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뭐야, 저건……?”
“왕?”
동굴 앞에 바위가 한가득 쌓여 있던 장소.
그곳에 마치 누군가가 블록을 쌓은 것처럼 돌멩이들이 뭉쳐져 있던 것이다.
전부 내 주먹보다 작은 크기의 돌멩이들.
한눈에 봐도 자연스럽지 않은 광경에 내가 의아해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자, 무엇인가 쓰여 있는 종잇조각이 보였다.
종잇조각을 집어 들어 그 안에 담긴 내용을 확인한 순간 등골이 오싹해진다.
종잇조각 안에 담겨 있던 건, 한참 주먹도끼를 만들던 때의 내 사진이었다.
감시당하고 있을 거라고는 예상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도대체 뭐지?
나한테 왜 이런 사진을 보낸 걸까?
도대체 뭘 원하길래?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도대체 왜 이런 사진을 보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뭔가 마음에 안 들었나?
나를 협박하는 건가?
너 따위는 언제든지 제거할 수 있다고?
나한테 도대체 뭘 원하는 건데?
한참 동안 돌아가던 머리가 마침내 내린 결론은.
내가 주먹도끼를 만드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건가?
계속해서 주먹도끼를 만들지 않으면 네놈을 죽이겠다, 뭐 이런 거야?
설마 그런 건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슬며시 돌멩이들에 손을 뻗자.
툭.
하늘에서 무엇인가 떨어졌다.
내 발치에 떨어진 무언가의 정체는, 안개에 둘러싸인 공간에서 먹었던 것과 흡사해 보이는 작은 젤리였다.
진짜?
진짜 맞는 거야?
그 젤리를 발견한 순간, 나는 그 사이코패스가 어째서인지 몰라도 내가 주먹도끼를 만드는 걸 원한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하늘과 바위산을 살펴보지만 감시 카메라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느껴진다.
피해망상일 수도 있겠지만 온몸의 감각을 총동원하니 누군가가 지켜보는 듯한 감각이 느껴진다.
온몸이 짓눌리는 듯한, 맨 처음 안개 속에서 느꼈던 것 같은 감각.
진짜 어떻게 나를 감시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살 떨리네.
모, 모닥불에 땔감을 더 넣는 정도는 뭐라 하지 않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주먹도끼를 만들기 시작했다.
더는 눈치를 볼 누군가가 없는데도 말이다.
* * *
애완 인간이 열심히 주먹도끼를 만드는 장면을 흐뭇하게 지켜본 클라인은 카메라를 고정해 두고 쥬튜브 계정에 접속했다.
최근 급격하게 상승하기 시작한 구독자와 조회 수.
이 모든 게 전부 저 지구산 인간 덕분이다.
클라인은 원래 키우는 생물에 이름을 잘 붙여 주지 않는다.
대부분 자신보다 수명이 짧기도 하고, 워낙 키우는 생물이 많다 보니 일일이 이름을 붙여 주는 것도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정도로 자신에게 돈을 가져다주는데, 이름 정도는 선물해 줘도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클라인은 쥬튜브 커뮤니티에 한 가지 글을 올렸다.
[구독자 이벤트]
-지구산 인간이 이제 차원항에 적당히 적응한 것 같습니다. 그 기념으로 인간에게 이름을 지어 주려고 하는데요, 구독자님들의 힘이 필요합니다!
-커뮤니티 댓글로 지구산 인간의 이름을 지어 주시면 그중 가장 추천 수가 높은 댓글 중 하나를 이름으로 선정하겠습니다! 이름을 지어 주신 구독자분께는 제가 소정의 선물을 전해 드릴 예정이니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음, 이 정도면 되려나?”
더욱더 성장할 자신의 채널을 생각하며 클라인은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댓글]
-근데 아직 생태계가 어떤지 밝혀진 것도 없는 행성 생물을 이렇게 막 데려와도 되는 거임? 지난번에 뉴스 보니까 이제 막 조사 시작 단계라던데.
[삭제하시겠습니까?]
물론, 자신의 채널을 흐리는 미꾸라지를 없애는 것도 잊지 않고 말이다.
10화 지구산 인간의 일상 ASMR 24시간
“다, 다 만들었다!”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던 대량의 돌멩이들을 주먹도끼로 만드는 작업이 끝나자 온몸이 다 쑤신다.
내가 주먹도끼를 만드는 모습에 만족한 걸까?
더는 누군가 나를 감시하는 듯한 압박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왕? 왕!”
내가 주먹도끼를 만드는 모습을 지루한 듯이 바라보던 에포나는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헥헥거리며 다가왔다.
꾸물텅.
또다시 에포나의 모습과 함께 주위 풍경이 일그러졌지만, 곧바로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피곤해서 그런 걸까?
분명히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래, 분명히.
“왕?”
에포나는 여전히 그 샐쭉한 혀를 내밀고 꼬리를 흔들고 있고.
그 무엇도 이전과 달라진 게 없다.
자, 이제 뭘 해야 하지?
타닥, 타닥.
모닥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나에게 해야 할 일을 상기시킨다.
아, 맞아.
훈제.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렇게 작은 고기를 굳이 훈제할 필요가 있을까?
그냥 한 끼 식사로 사라져 버릴 것 같은데.
차라리 훈제하는 것보단 소금으로 염장하는 게 더 편하기도 하고 오래갈 것 같은데.
문득 지금까지 이세계에 떨어져서 한 번도 소금에 입을 댄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오의 고기에서 살짝 짠기가 느껴지긴 했어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은데.
어떻게든 소금을 구할 방법을 확보해 두는 게 좋지 않을까?
일단 소금을 구하기만 하면 염장도 가능하고 굳이 맛없는 무오 고기를 억지로 먹지 않아도 될 테니까.
아니,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이 숲에서 소금을 구할 방법이 있느냐는 것이다.
검색 결과 없음으로 나오면 정말 좀 슬플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만능 사전의 전원을 켰다.
[검색 : 가장 가까운 소금]
이렇게 하면 호수를 찾아낸 것처럼 소금의 위치도 찾아내려나?
그렇게 생각하며 검색 버튼을 눌렀는데, 검색 결과는 내 예상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뚜벅나무버섯]
-리우테스 위성이 원산지인 버섯. 두 발로 걸어 다닐 수 있으며 나무 정령의 형태로 의태할 수 있다.
[가장 가까운 뚜벅나무버섯]
“버섯?”
버섯? 버섯이라니?
그것보다 두 발로 걸어 다니는 버섯을 버섯이라고 할 수 있나?
아무튼 분류학적으로 버섯인, 생명의 신비인 그거야?
소금기를 축적하는 식물은 들어 봤어도 버섯은 또 처음인데.
그것보다 도대체 어떤 식으로 소금을 만들어 내는 거지?
거참, 신기할 따름이네.
좋아, 일단 소금은 저 버섯을 채취하면 된다면 그 버섯들을 담을 바구니가 필요하겠지.
그것 외에도 이 대량의 주먹도끼들과 정체불명의 젤리도 보관해야 하니까.
소금을 구하러 출발하기 전에 먼저 가내수공업으로 바구니부터 만들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또 재료로 쓸 고무나무 뿌리를 찾아봤지만.
지난번 통발에 대부분의 나무를 소모해서일까?
남은 고무나무 뿌리는 얼마 되지 않았다.
“에포나, 네가 보기에 아직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지. 그치?”
“왕?”
“무리일 것 같다고? 너도 그렇게 생각하냐?”
“왕!”
박살 난 통발을 바구니 대용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 생각해 봤지만 새우가 워낙 완벽히 통발을 박살 내 놔서 무리일 것 같다.
그럼 포메라니안의 가죽으로 바구니를 만들어 봐?
하지만 어째서인지 몰라도 포메라니안의 가죽은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있고, 부족한 부분도 많아서 바구니로 가공하긴 힘들 것 같다.
그렇다면 소금을 구하기 위해서 바구니를 만들기 위해 숲에 들어가 고무나무 뿌리를 채취해야 한다는 건데.정말로 문명의 이기가 그리워진다.
그럼 더 꾸물거리지 말고 가 볼까?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다 에포나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적으로 에포나가 죽은 줄 알았던 그때의 풍경이 떠오르고.
바닥에 나뒹구는 볼품없는 나무창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저런 조잡한 창으로 에포나를 지킬 수 있을까?
조금만 더 준비하고 가자.
무슨 일이 있더라도 에포나를 지킬 수 있게끔.
이곳에 와서 얻은 유일한 친구를 잃어버리긴 싫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주먹도끼와 나무창을 엮어 일종의 돌창을 제작했다.
거기에 더해 주먹도끼를 지니니 조금 안심이 된다.
이 정도라면 살인 토끼든 뭐든 덤벼들든 괜찮겠지.
“가자, 에포나.”
“왕!”
만능 사전의 나침반 기능을 가동해 에포나와 함께 고무나무를 찾아간다.
쏴아, 쏴.
처음에는 음산하게만 들렸던 나무들이 흔들리는 소리도 이젠 제법 익숙해진 것 같다.
“무오~.”
숲 저편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는 무오의 울음소리도 들려오고.
“치이잇?”
수풀에 몸을 숨기고 나를 경계하는 토끼의 위협음도 들려온다.
털썩, 털썩.
첨벙, 첨벙.
펑.
아직 정체를 확인하지 못한 다른 생물들이 내는 소리도 이젠 그리 두렵지 않다.
저 생물들 또한 숲의 일부여서 그런 걸까, 아니면 나 또한 숲의 일부가 되어서 그런 걸까?
숲의 일부가 되긴 싫은데.
나는 과연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
만약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쯤…….
“왕!”
이 숲에서 가장 이질적인 생명체가 내는 울음소리가 내 상념을 깨트리고, 나는 그제야 내가 목적지에 도달했음을 깨달았다.
“후우…….”
이전, 고무나무를 채취할 때처럼 맨손으로 땅바닥을 파헤친다.
근육통이 몰려온 내 몸이 비명을 질러 댔지만, 나는 꾹 참고 계속해서 고무나무를 채취했다.
이미 한 번 겪어 본 작업이어서 그런지 확실히 채취하는 속도가 빨라진 것 같다.
이 정도면 충분하려나?
고무나무 세 뿌리 정도를 캐고 나서 나는 더 이상의 채취 작업을 중단했다.
더 캐 봤자 내가 동굴까지 운반하기도 힘들다.
다시 동굴로 돌아가려고 고무나무를 짊어진 순간.
“치이잇!”
“칫!”
“칫칫치잇!”
어디서 몰려왔는지 몰라도 대량의 식인 토끼들이 나를 둘러싸고 위협을 가해 왔다.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지만, 나는 서둘러 에포나의 위치를 확인했다.
“왕! 왕왕! 크르르…… 왕!”
에포나는 이전처럼 토끼들에게 맞서서 용맹하게 짖어 대고 있었지만.
“치잇! 칫!”
“치이잇!”
토끼들은 그런 에포나를 완벽하게 무시한 채 내게만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일단 에포나가 위험해질 것 같진 않으니 다행인데.
이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가지?
계속 고무나무를 채취하러 올 때마다 토끼들과 마주치는 걸 봐선 이 구역은 아마 토끼들의 영역인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저렇게 필사적으로 나와 싸우려고 하는 건데.
그냥 토끼들을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 빠져나가려고 노력하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는 있을 거다.
토끼와 나의 체격 차이가 워낙 나기도 해서 상처를 입는다고 해도 그리 심각하게 다치진 않을 테고.
하지만 그게 과연 맞는 선택일까?
앞으로도 계속해서 저런 동물들과 충돌할 일이 생길 텐데.
토끼한테도 겁먹고 물러난다면 다른 동물들은 어떻게 상대하려고?
무오에게도 겁먹고 울던 그때로 돌아갈 거야?
나는 각오를 다지며 돌창을 들어 올렸고.
“치이잇!”
그 순간, 식인 토끼들 중 한 마리가 이전처럼 내게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우왓!”
나는 반사적으로 돌창을 휘둘러 토끼를 격추해 버렸고.
“치, 치잇…….”
창대에 얻어맞은 토끼는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며 신음을 흘리다 털썩 쓰러져 버렸다.
수군수군.
설렁설렁.
그런 효과음이 눈으로 보이는 것같이 느껴지는 것처럼 토끼 무리에 동요가 퍼져 나갔고.
“치이잇! 칫!”
“칫! 칫!”
나를 포위하고 있던 토끼 무리는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지난번에도 그랬지만, 이렇게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확실해졌다.
나는 이제 저 녀석들이 두렵지 않다.
바닥에 엎어진 토끼에게 다가가 숨을 확인해 본다.
바닥에 내던져질 때의 충격으로 치명상을 입은 걸까?
토끼는 더는 숨을 쉬고 있지 않았다.
이건 의외의 수확이다.
오늘 식사는 개고기만이 아니라 토끼 고기도 먹을 수 있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흐뭇한 미소를 짓던 때, 나는 문득 에포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에포나? 에포나?”
목청껏 에포나의 이름을 불러 봐도 아무런 대답이 없다.
쏴아, 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낯익은 장소로 느껴졌던 숲이 괴물의 위장 속처럼 역겹게 느껴진다.
에포나, 에포나는 어디 있지?
나를 두고 가지 마.
네가 없으면 난.
또다시 혼자가 되는데.
나조차 나를 믿지 못하는데, 네가 날 믿어 줘야지.
에포나.
에포나.
에포나?
“왕!”
계속해서 밀려드는 불안에 숨이 막힐 지경이 됐을 즈음, 수풀이 흔들리며 에포나가 뛰쳐나왔다.
“에포나. 에포나 맞지?”
“왕?”
바닥을 기며 에포나와 눈을 마주친다.
에포나는 늘 그렇듯, 언제나의 에포나였다.
꽈악.
놓치지 않겠다는 듯 에포나를 껴안자 털가죽 안에서 무엇인가 꿈틀거리는 감촉이 느껴진다.
나는 꿈틀거리는 이질적인 감각을 애써 무시하며 중얼거렸다.
괜찮아.
에포나는 원래부터 이랬으니까.
“사라지지 말아 줘. 제발…….”
“왕!”
걱정하지 말라는 듯 에포나의 혀가 내 얼굴을 핥아 대고.
나는 꿈틀거리는 감각을 무시한 채 에포나를 꼭 껴안고 있었다.
내가 간신히 진정한 건, 에포나의 침으로 얼굴이 축축하게 젖고 나서였다.
간신히 진정한 나는 에포나와 함께 고무나무를 가지고 동굴로 돌아왔다.
아직 날은 저물지 않았다.
* * *
“구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이야, 이렇게나 많은 댓글이 달릴 줄은 몰랐는데요. 보내 주신 이름 모두 다 멋졌지만, 아쉽게도 인간에겐 이름을 하나만 지어 줄 수 있어서요.”
반갑게 카메라 너머로 영상을 보고 있을 구독자들에게 인사한 클라인은 추천 수가 가장 많은 댓글을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럼 보내 주신 이름들을 살펴볼게요. 가장 추천 수가 많은 게,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잉여 인간 해서 잉간?”
첫 번째로 추천받은 이름을 본 클라인이 웃음을 터트린다.
“푸핫, 잉간. 잉간이라뇨. 아니, 우리 인간이 아무리 멸종 위기적인 귀여움을 가지고 있어도 잉여 인간은 너무했죠! 잉간이라뇨!”
클라인은 웃으며 다음 차례로 넘어가려 하지만, 자꾸 클라인의 머릿속에서 잉간이 맴돈다.
잉간, 잉간.
잉간?
“그럼, 다음 잉간 이름은……. 푸흡.”
결국 클라인은 촬영 도중에 웃음을 터트리며 번쩍번쩍 빛을 냈고, 클라인의 웃음이 진정된 건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흘러서였다.
“아, 죄송해요. 자꾸 입에서 떠나질 않네요. 잉간.”
잉간이라는 어감이 클라인의 마음에 쏙 들었던 걸까?
클라인은 계속해서 잉간, 잉간이라고 되새기더니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네요. 이건 벌써 당선자가 결정됐네요. 잉간, 우승!”
와아아.
그렇게 소리 내며 클라인은 잉간이란 이름을 지은 구독자에게 보낼 선물을 카메라 앞에 가져왔다.
“이름을 지어 주신 구독자님께 드릴 선물! 물질 프린터 카트리지 4개월 치와 산소 이용권 4개월 치! 마지막으로 리퀴드사의 차원항 50 큐브 교환권입니다! 와아아! 이름을 지어 주신 구독자님은 차원 주소를 남겨 주시면 제가 직접 포장해서 전송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카메라에 손을 흔들며 클라인은 촬영을 종료하고, 한숨을 내쉬며 촬영 장비들을 정리했다.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쥬튜브였지만, 자신의 채널의 규모가 커지다 보니 신경 쓸 게 무척 많아졌다.
이렇게 신경 써야 할 게 많다면 그냥 시작하지 말 걸 그랬다.
그래도 괜찮다.
지구산 인간.
아니, 잉간이 꾸물거리며 뭔가 만드는 모습을 볼 때마다 계좌로 들어올 금액이 생각나며 기분이 좋아지니까.
뭐, 기분이 좋아지는 게 돈 때문은 아니지만.
처음에는 그냥 몇 번 촬영하다 관심이 식을 때쯤 분양 보내거나 종마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돈을 벌어 오는데 이 정도면 없던 애정도 생겨난다.
그래도 이제 한동안은 잠시 휴식기를 가져야 한다.
적당히 다른 영상들로 시간을 벌면 댓글 창도 좀 잠잠해지겠지.
댓글 창이 잠잠해지면, 그때 다시 영상을 올리면 되는 거다.
하지만 그래도 댓글 창이 잠잠해지지 않는다면?
클라인은 가만히 소파에 드러누워 있다가 조용히 메시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클라인]
[안녕하세요, 차원항 장인 클라인입니다. 지난번 제안하셨던 매니지먼트 이야기에 흥미가 생겼는데 자세히 대화할 수 있을까요?]
클라인은 메시지를 보냈고.
[Liquid]
[물론이죠. 언제쯤 시간이 나시나요?]
대답은 그리 늦게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빨랐다.
11화 지구산 인간의 일상 ASMR 24시간 2
“그러니까, 지구가 원시 문명을 벗어났을 가능성은 없다는 거죠?”
“그렇죠. 지금도 문명이 자리 잡고 있기는 한데,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최소 2번의 대량 학살이 있었거든요. 그것도 문명 존속이 위태로울 정도의.”
지금껏 자신을 괴롭히던 고민거리가 해결되어서일까?
클라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기지개를 쭉 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모니터 너머의 상대는 방긋 미소 지었다.
“그나저나 도대체 지구산 생물은 어디서 구하셨어요? 이건 저희도 구하기 어려운 건데…….”
“아는 친구가 모험가여서요. 뭐, 그 덕분에 돈은 돈대로 나가서 한동안은 절약해야 하거든요.”
“쥬튜브 수입이 꽤 될 텐데도요?”
“꽤 되어도요.”
클라인은 지구산 인간을 사느라 포기했던 다양한 생물을 떠올리며 울상 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화면 너머의 상대는 잘됐다는 듯 클라인에게 제안했다.
“그럼, 생물 구매 금액에 대해선 저희가 좀 지원해 드릴까요?”
“네? 지원요?”
“어차피 클라인 님 방송에 필요한 필요 경비 아닌가요? 원하시는 생물을 말씀해 주시면 저희가 최대한 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지구산 생물은 저희도 무리니 그 점은 양해해 주세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일까?
지구산 생물을 구할 수 없다는 말은 지구산 생물 이외의 다른 생물들을 모조리 구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클라인은 눈에 띄게 반색하며 슬쩍 자신의 욕망을 토해 냈다.
“그, 그럼 4차원 생명체도 구할 수 있는 건가요?”
“그럼요. 당연하죠. 저희가 누굽니까? 리퀴드 코퍼레이션이잖아요?”
맨 처음 계약 제안을 받았을 땐 이 정도로 조건이 좋지도 않았고, 계약이란 것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기도 해서 그냥 무시했었는데.
리퀴드사와 이런 계약을 맺을 수 있는 것도 전부 잉간 덕분이다.
클라인은 잉간에 대한 애정이 더 깊어지는 것을 느끼며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계약서는 어디에 있죠?”
그날 4차원 생명체 대신, 지구산 인간을 택해서 정말 다행이다.
* * *
지글지글지글.
적당히 토끼를 손질해 모닥불에 집어넣고 굽는다.
만능 사전에서 손질법은 봤지만, 제대로 손질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지글지글.
가죽도 제대로 잘 손질되지 않았고, 살점도 몇 덩이가 그대로 버려진 기분이다.
지글.
최대한 안전하게 먹기 위해서 거의 겉 표면이 탄 것처럼 보일 정도가 되어서야 나는 토끼 고기를 모닥불에서 꺼냈다.
주먹도끼로 적당히 고기 표면의 탄 부분을 제거하고 한입 베어 문다.
“우웩, 뭐야. 이거.”
원래 토끼 고기가 이런 맛인 걸까?
고기를 한입 베어 물자마자 강렬하게 느껴지는 지린내.
문득 토끼를 손질하다가 실수로 내장 중 하나를 터트렸던 걸 떠올린다.
그게 뭐 방광 같은 기관이라도 됐던 걸까?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아무리 지린내가 느껴져도 무오 고기보단 괜찮았단 것이다.
이게 도대체 얼마 만에 느끼는 부드러운 살코기의 맛인지.
최대한 지린내를 느끼지 않으려 애쓰며 토끼 고기를 섭취하던 중, 입안에서 무언가 딱딱한 것이 느껴졌다.
“아?”
입안에서 나온 것은 전에 무오의 몸에서 발견했던 밝게 빛나는 돌멩이와 비슷한 돌멩이였다.
무오의 몸에서 나왔던 것보다 훨씬 크기도 작고, 밝기도 낮지만 말이다.
뭐지? 외계 생물들에 기본적으로 붙어 있는 기관 같은 건가?
그러고 보니 나는 아직 이 토끼의 이름을 모르네?
다음번에 마주치면 만능 사전으로 이름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포나, 이거 먹을래?”
“왕?”
개들은 내장을 좋아한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듯해서 에포나에게 토끼를 손질하고 남은 내장을 줘 본다.
하지만 에포나는 킁킁거리며 몇 번 냄새를 맡더니 훽 고개를 돌려 동굴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 배가 고프지 않은 걸까?
뭐, 배가 고프면 알아서 먹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동굴 근처의 땅에 구덩이를 파고 내장들을 몰아넣었다.
그런데 이렇게 내가 머무는 구역을 좀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니 정말 참 더럽다.
고무나무를 다듬으며 생긴 나무 파편들과 주먹도끼 때문에 생겨난 돌 조각들이 잔뜩 동굴 주위를 굴러다니고.
이젠 거기에 내장 찌꺼기와 핏물이 더해진 상태다.
언젠가 날 잡고 청소를 하긴 해야 하겠는데.
하지만 지금 상태로도 불편함이 없으니 괜찮은 게 아닐까?
어째서인진 몰라도 이곳엔 파리 같은 생물이 존재하지 않으니까, 구더기가 기어 다니는 일은 생기지 않을 거다.
배도 채웠고 고무나무도 더 가져왔으니 바구니를 만들 차례다.
털썩.
적당히 동굴 앞에 앉을 자리를 만들고 주저앉아 바닥에 만능 사전을 켜 놓고 바구니를 따라 만들어 본다.
“왕!”
가끔씩 동굴 안에서 꾸벅거리던 에포나가 무언가를 쫓듯 달려 나가는 걸 제외하면 조용한 시간이 흐른다.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도, 적어도 이렇게 에포나와 생활할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살랑거리며 불어오는 바람이 기분 좋아 꾸벅꾸벅 자꾸 졸음이 쏟아지지만, 나는 서둘러 손을 놀린다.
적어도 오늘이 지나기 전엔 소금을 얻어 두고 싶으니까.
“흠, 이 정도면 괜찮은 거 같은데?”
쉬지 않고 손을 놀린 결과 그럭저럭 괜찮은 바구니가 탄생했다.
몸을 억지로 쑤셔 넣는다면 한 사람 정도는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사이즈다.
이리저리 툭툭 건드리기도 해 보고, 눌러 보기도 하며 강도를 시험해 본다.
오, 이거 꽤 튼튼한데?
이 정도면 꽤 높은 곳에서 떨어트려도 멀쩡할 것 같다.
그나저나 바구니의 강도를 시험해 보며 한 가지 단점을 깨달았는데.
그것은 바로.
“……너무 크게 만들었나?”
바구니가 너무 크다는 점이었다.
여러 가지 물품을 담을 걸 생각하고 좀 일부러 크게 만들었더니 이제 운반하는 게 문제다.
그냥 들고 다니기는 너무 어려워 보이고, 등에 메고 다녀야 하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내 머릿속을 벼락같이 스치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지게!
그래, 내가 왜 지게를 생각하지 못했지?
우리 조상, 선조님의 생활의 지혜를 담은 킹-갓 아이템이 아닌가?
좋아, 지금 당장 지게를 만들면…….
그런데 지게는 어떻게 만들지?
대충 Y 자 나뭇가지 2개를 묶으면 되려나?
만능 사전에 검색을 해 봐도 당연히 지게 만드는 법은 나오지 않는다.
으, 에라 모르겠다.
일단 내 마음대로 한번 도전해 보자.
바닥을 굴러다니는 나뭇가지 중에서 지게에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 나뭇가지들을 모아서 내 마음대로 묶어 본다.
그렇게 내 마음대로 지게를 만들어 본 결과, 지게 같은 것이 탄생했다.
지게가 아니라, 지게 같은 것.
아니, 그래도 지게 같은 것이니 그냥 지게하고 비슷한 효과를 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지게를 들쳐 메 봤지만.
툭.
후두둑.
그대로 지게 같은 것은 분해되며 내게 허탈함만 안겼을 뿐이었다.
“왕…….”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에포나를 바라보니 에포나는 측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지게 이거 그냥 대충 나뭇가지를 끼워 맞추면 되는 거 아냐?
그냥 어깨에 메고 다니는 게 왜 이렇게 복잡해?
이건 분명히 조상님들이 잘못한 게 틀림없다.
조상님들이 조금만 더 똑똑했다면 이것보다 더 간단하고 편리한 지게를 만들었을 텐데.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리며 한숨을 내쉬던 나는 한 가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생각해 보니까, 그냥 바구니에 끈을 매달아서 등에 지고 다니면 되는 문제 아니었어?
굳이 지게를 만들려 시도할 필요가 있었을까?
조심스럽게 바구니에 고무나무의 뿌리로 만든 끈을 연결하자, 아주 시원스럽게 훌륭한 가방이 되었다.
여기 바보가 있었네.
그래도 이걸로 소금을 얻을 준비는 다 끝냈다.
바구니가 떨어지지 않게끔 끈을 꽉 동여매는 동안, 바구니가 신기했던 걸까?
에포나가 폴짝 뛰어올라 바구니 안에 자리를 잡는다.
원체 에포나가 가벼워서 그런지 에포나의 무게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터벅, 터벅.
만능 사전의 나침반은 이번엔 숲속이 아닌 바위산을 가리키고 있었다.
바위산 기슭을 따라 등산을 시작한다.
설마 하지만 그 버섯이란 놈들이 절벽에서 자라는 건 아니겠지?
사전에는 별다른 설명은 쓰여 있지 않았는데.
그나저나 두 발로 걷는 버섯이라니,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단풍잎 RPG의 마스코트인 주황색 버섯과 닮았을까?
조그마한 요정 같은 모습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침반의 안내를 따라가다 보니, 다른 나무들이 없이 완벽한 돌 비탈로 이뤄진 장소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만능 사전의 안내는 이 장소를 가리키고 있었고.
그렇다면 여기 어딘가에 버섯들이 자라고 있다는 건데.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어딘가에서 자라고 있을 버섯을 찾아본다.
바로 그 순간.
“어?”
무언가 낯익은 물체를 돌 틈새에서 발견한 듯한 기분이 든다.
다시 고개를 돌려 산비탈의 돌 틈을 자세히 살펴보고 있으니, 아주 낯익은 형체가 드러났다.
산비탈에 누군가의 머리가 내게 뒤통수를 내민 채로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사람?
사람인 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나는 잠시 멍해졌고.
나는 앞뒤 생각하지 않고 곧장 그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
“저기, 괜찮으세요?!”
큰 소리로 바닥에 쓰러진 사람을 불러 보지만, 기절이라도 한 건지 대답하지 않는다.
만약 기절한 거라면 서둘러 구해야 한다.
지금 시간이 언젠진 몰라도 곧 날이 어두워질 테니 말이다.
그렇게 서둘러 바닥에 쓰러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 달려가던 중, 나는 무언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어라?
이렇게까지 가까이 가도 왜 몸통이나 하반신이 보이지 않고 머리만 보이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으니 뒤이어서 내 눈에 들어오는 다른 사실들.
피부색이 마치 썩은 나무껍질처럼 어두칙칙하다.
평범한 돌 크기인 줄 알았던 머리 옆의 돌이 보통 크기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세계의 생물들을 볼 때 느껴지던 미묘한 위화감이 풀풀 풍긴다는 점.
그 모든 사실을 깨닫고 내가 제자리에 멈춰 섰을 땐, 머리 또한 내가 다가오는 것을 눈치챘을 때였다.
내가 가만히 멈춰 서고.
머리는 자꾸자꾸 자라나고.
팔도 다리도 자꾸자꾸 길쭉길쭉하게.
도저히 현실이라고 믿기지 않는 풍경에 내가 꼼짝도 하지 못하고 멈춰 서자.
내게 뒤통수만 보이던 머리가 빙그르르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완전히 내게 맨얼굴을 보여 준 그것은.
씨익.
흉측한 웃음을 내게 지어 보였다.
도망칠까?
아냐, 맞서 싸워야 해.
그런 생각으로 가득 채워지고 있던 머리는, 그 미소를 보자.
“왕!”
나를 공백에서 건져 낸 것은 에포나의 작은 울음소리였다.
“허억?!”
숨을 몰아쉬고, 위를 올려다본다.
여전히 흉측한 미소를 짓고 있는 썩은 듯한 나무 인간의 모습이 보인다.
설마 하지만.
진짜 설마 하지만 저게.
떨리는 손으로 만능 사전을 작동시켜 본다.
그러자.
[뚜벅나무버섯]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은 결과가 튀어나왔다.
저게 버섯이라고?
저게?
내가 상상하던 귀여운 버섯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뭔 크리처가 튀어나왔다.
뚜벅버섯이라며?
뚜벅이잖아.
저건 뚜벅이 아니라 성큼인데?
저 기괴한 걸음걸이를 보는 것만으로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지만 나는 각오를 다졌다.
그래, 아무튼 저걸 잡아내면 소금을 얻을 수 있다는 거지?
그런데 저걸 도대체 어떻게 잡을 수 있을까?
내 몇 배는 되는 크기의 거인이 성큼성큼 산비탈을 내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조용히 고민에 빠졌다.
* * *
“……의 퇴치가 어려운 이유는 인식 저해를 사용해서 조기에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초기에 발견한다면 간단한 약품으로도 퇴치할 수 있답니다?”
정말 오랜만에 클라인은 카메라 앞에 앉아서 팔자에 없는 교수 흉내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약품을 사용할 수 없는 차원항도 있어요. 마력 저항력이 낮은 생물들은 약품을 견뎌 낼 수 없거든요. 진짜, 검역 장치까지 속이는 인식 저해라니 정말 대처하기 귀찮죠? 그래서 정기적으로 약물을 차원항에 사용하는 게 예방의 지름길이에요. 여러분도 잘 만들었던 차원항이 박살 나는 건 싫잖아요?”
클라인이 지구산 인간 영상을 올리는 걸 중단한 지 그리 오랜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쥬튜브 댓글 창을 흐리던 미꾸라지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새로운 콘텐츠를 반기는 구독자들만 남았다.
역시, 그 미꾸라지들은 자신을 시기하던 사람들이 분명하다.
회사 차원에서 앞으로 댓글 창 관리를 도와준댔으니 더는 자신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
촬영을 끝마친 클라인은 한숨을 내쉬며 잉간의 차원항 앞에 앉았다.
오늘도 한참 열심히 무언가를 만드는 모습이 보기에 퍽 귀엽다.
음, 차원항이 많이 지저분해졌는데 슬슬 청소를 해 줘야 할까?
마음 같아서는 직접 청소를 해 주고 싶으니 빨리 핸들링 훈련을 끝마치는 게 좋겠다.
그렇게 클라인이 잉간을 바라보며 힐링하는 시간을 가지던 때.
딩동.
클라인의 차원 간 단말에서 알림이 울려 퍼졌다.
[고객님이 주문하신 생물이 곧 도착할 예정입니다.]
“흐흥. 기대된다!”
기분이 좋아지는 메시지를 받은 클라인은 방긋 웃으며 침대에 누워서 신체 말단을 만지작거렸다.
지금까지는 돈도, 기회도 없어서 구하질 못했던 다양한 생물들.
지구산 인간의 먹이를 위해서라는 핑계라면 회사에서 얼마든지 지원해 준다.
이것 또한 잉간 덕분이라고 클라인은 생각하며 앞으로 다가올 즐거운 시간을 기다렸다.
12화 이번에 제대로 FLEX했습니다. 신규 차원항 제작 및 임시 합사!
거대한 거인이 성큼성큼 산비탈을 내려간다.
어딘가의 크리피파스타에서 나올 법한 외견에 순간 정신을 놓아 버릴 뻔했지만, 제대로 정신을 잡고 저걸 잡을 방법을 생각해 보자.
일단 지금 당장 저 버섯이 나를 공격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어쩌면 공격 능력이 없어서 도망치는 것일 수도 있고.
사전에는 그냥 의태 능력이 있다고만 써져 있고, 채취법도 그냥 바닥에 피어난 버섯을 줍기만 하면 된다고 적혀 있었는데.
설마 이번에도 마력이 필요한 건 아니겠지?
일단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거대 버섯의 뒤를 따라가는 일뿐이다.
슬쩍 내가 만든 조잡한 돌창을 버섯의 다리에 겨눠 본다.
이 길쭉길쭉한 다리, 딱 봐도 잘 부서지게 생겼는데 이걸 박살 내면 되는 게 아닐까?
기사들이 랜스 차징을 하는 것처럼 나도 온 체중을 창에 싣고 앞으로 돌격한다.
“으아아아아!”
힘을 내기 위한 기합을 내지르며 창끝을 버섯의 다리에 꽂아 넣자.
지난번에 무오의 몸에 창을 꽂았을 때와 비슷한 감촉이 느껴졌다.
즉, 마력이 없으면 이 녀석의 방어를 제대로 뚫지 못한다는 거다.
빌어먹을 마력충들 같으니라고.
정정당당하게 물리로 승부 봐야지, 뭔 마력 같은 걸 쓰고 있어?
일단 내 힘으로 이 버섯을 쓰러트린다는 건 불가능하고.
지금은 일단 버섯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다니며 기회를 엿볼 수밖에 없다.
거대 버섯은 성큼성큼 산비탈을 내려가더니 숲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른 나무들 사이에 몸을 숨기려는 걸까?
하지만 워낙 버섯의 크기가 크기도 하고 주위와 이질적이어서 금세 버섯의 위치를 찾아낼 수 있었다.
버섯은 나무들 사이로 몸을 집어넣더니 산비탈에서 봤던 모습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거인의 키가 줄어들며 덩그러니 땅 위에 머리만 자라난 모습으로 변하고.
나는 조심스럽게 버섯의 뒤편에서 버섯을 향해 다가갔다.
그렇지만, 또다시 버섯은 금세 나를 눈치채고 무럭무럭 자라나 내게서 도망치기 시작했고.
그렇게 때아닌 숲속에서의 숨바꼭질이 시작됐다.
어떻게 해야 버섯의 감지를 피할 수 있을까?
최대한 천천히 접근해 보기도 하고, 땅을 포복해 가며 접근해 보기도 해 봤지만.
그때마다 귀신같이 버섯은 접근을 눈치챘다.
뭔가 감지 마법 같은 거라도 쓰고 있나?
도대체 뭐지?
그것보다 나는 왜 버섯도 쓸 수 있는 마법을 못 쓰는 거지?
버섯보다 키가 작아서 그런 건가?
그렇게 계속해서 버섯과의 추격전을 벌인 끝에, 마침내 추격전의 끝이 찾아왔다.
계속해서 내게서 도망치던 버섯이 비틀, 비틀 흔들거리더니 순식간에 쪼그라들며 원래의 크기로 돌아간 것이다.
한눈에 봐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상황.
서둘러 버섯이 쪼그라든 장소로 달려가 살금살금 버섯에게 접근한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버섯은 내 접근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내 손이 닿을 때가 되어서야 버섯은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더 이상 커지지도 못하고 단순히 몸부림치는 버섯에게 내가 질 리가.
“잡았다!!”
결국 버섯은 몸부림치며 땅에서 뽑혀 나왔다.
그나저나 이렇게 보니 진짜 기괴하네.
내가 생각하던 발 달린 버섯처럼 커다란 머리에 작은 발이 달려 있는 생김새이긴 한데.
어…… 그 얼굴의 외견이라는 게 참.
며칠 정도 방치당해서 쭈글쭈글해진 시체의 얼굴 같다고 해야 할까?
무척이나 괴상망측한 모습이었다.
좋아, 아무튼 이거면 됐다.
슬쩍 하늘을 올려다보니 날씨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버섯 하나 채취하는 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그렇게 투덜거리며 버섯을 집어넣으려 바구니 안을 들여다봤다.
없다.
에포나가 없다.
“에포나? 에포나?”
바구니 안에서 얌전히 머무르고 있어야 할 에포나가 없다는 사실에 내가 당황하며 애타게 에포나의 이름을 부르짖자.
“왕?”
수풀 사이에서 입에 무언가를 물고 있는 에포나가 튀어나왔다.
“에포나.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야?”
“왕!”
“혼자 다니는 건 위험하니까, 혼자 다니지 마. 알겠지?”
에포나가 쓰다듬어 달라는 것 같기에 일단 에포나를 쓰다듬으며 타박한다.
그나저나 에포나는 도대체 뭘 물고 온 거지?
의아해하며 에포나의 입에 물려 있는 것의 정체를 확인해 본다.
에포나의 입에 물려 있던 것은 내가 지금까지 죽도록 쫓아다닌 버섯의 작은 버전이었다.
아직 어린 유체라도 되는 걸까?
아니,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에포나가 어떻게 이걸 얻었는지다.
도대체 어떻게 이 버섯을 에포나가 구한 거지?
“에포나, 이건 도대체 어떻게 얻었어?”
“왕?”
에포나는 늘 그렇듯 천연덕스럽게 내 손가락을 핥았고.
나는 피식 웃으며 에포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꿈틀거리는 털가죽의 감촉을 즐겼다.
뭐, 됐나.
운 좋게 버섯을 발견했나 보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에포나가 가져온 버섯을 바구니에 집어넣었고.
“돌아가자, 집으로.”
“왕!”
서둘러 에포나와 함께 동굴로 돌아갔다.
동굴에 돌아오자 날은 이미 어둑어둑하게 저물었고.
더 이상 뭔가 작업을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일단 버섯이 다시 자라날 수 없게끔 사전에 쓰여 있던 손질법대로 주먹도끼로 버섯을 갈라 그 안에 들어 있던 돌멩이를 꺼내 놨다.
이제 알았는데 이 돌멩이가 마석이라고 한다.
내가 생각하던 마석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모습인데.
뭐, 마법을 사용할 때 보조하는 역할이라니 내가 사용할 일은 전혀 없겠지.
즉, 나에겐 쓸모없는 돌멩이나 마찬가지라는 거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지막까지 아껴 놨던 다른 포메라니안의 고기를 꺼내 와 모닥불에 굽기 시작했다.
이미 잘 손질이 되어 있어서일까?
포메라니안의 맛은 토끼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내가 그렇게 때늦은 식사를 즐기고 있을 때.
“왕!”
“에포나?”
에포나가 내게 다가오며 포메라니안의 고기에 흥미를 가졌다.
“야, 이거 개고기야. 그래도 먹고 싶어?”
“왕!”
음.
뭐, 물고기도 주식이 물고기니 상관없으려나?
그렇게 생각한 나는 에포나에게 고기를 몇 점 떼어 줬고.
오랜만에 그나마 사람 같은 식사를 끝마쳤다.
털썩.
동굴 안으로 들어가 침대에 에포나를 끌어안고 쓰러져 잠에 든다.
내일도 부디 오늘처럼 별일 없는 하루이기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잠에 빠져들었고.
다음 날 아침.
동굴 밖의 풍경은 마치 눈이라도 내린 것처럼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이건 또 뭔데?
* * *
“안녕하세요! 차원항 장인 클라인입니다! 오늘 제가 준비한 건, 자쟈쟌~ 구름고래입니다!”
클라인은 간만에 카메라 앞에 서서 들뜬 모습으로 영상을 촬영하고 있었다.
억지로 끌어낸 텐션이 아닌, 속에서부터 피어오른 텐션으로 말이다.
리퀴드사와 매니지먼트 계약을 맺길 정말 잘했다.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아공간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구름고래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와, 진짜 너무 이쁘죠? 저도 지금까지 사진으로만 봤는데 실물을 보는 건 처음이에요. 와, 진짜 대박. 배 보여요? 배?”
클라인은 조심스럽게 카메라를 들어 올려 구름고래의 배를 촬영했다.
그러자 카메라에 마치 고래의 배에 구름이 달라붙은 듯한 모습이 잡혔다.
“마치 구름처럼 생겼죠? 이건 일종의 보호색인데요. 실제로는 구름이 아니라 솜털이라고 하더라고요.”
슬쩍.
얌전히 자신의 손길을 받아들이고 있는 구름고래의 배를 클라인이 쓰다듬어 본다.
구름고래 특유의 푹신푹신한 감촉이 느껴지자, 클라인은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와- 와- 이건 진짜. 진짜 대박이네요. 왜 이렇게 구름고래가 인기가 많은지 알겠네요. 진짜 대박…….”
동글동글한 눈동자.
사납지 않고 오히려 순수하다고 할 수 있는 선한 성격.
먹이로 몇 달에 한 번만 물을 뿌려 주기만 하면 되는 간편한 사육.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배에 자라난 푹신푹신한 솜털.
이러니 사람들이 구름고래를 애완 생물로 키우지 않고 베길 수 있겠는가?
클라인도 그 구름고래의 매력에 사로잡힌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고 말이다.
“그럼, 지금부터 구름고래를 위한 차원항을 만들어 볼까요?”
방긋, 웃으며 오늘의 메인 콘텐츠를 진행하는 클라인.
“일단 차원항 콘셉트부터 말해 드릴게요. 콘셉트는 바로 가스형 행성이에요! 제가 아무리 생각해도 구름고래는 암석형보단 가스형 행성에 더 어울리는 것 같아서요.”
클라인은 조심스럽게 차원 표준 규격 차원항을 꺼내 작업대 위에 올려놨다.
“차원항 규격은 차원 표준 30호 행성입니다! 이 정도는 되어야 구름고래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것 같아서요.”
클라인은 그렇게 말하며 조심스럽게 리퀴드사 마크가 잘 보이게끔 필요 설비를 카메라에 비췄다.
“역시 가장 먼저 설치해야 할 건 중력 발생 장치죠! 소형 차원항엔 중력이 기본 내장되어 있는 경우도 많지만, 행성 사이즈 차원항엔 없는 경우가 많으니 제대로 차원항 생활을 즐기실 거라면 반드시 구비해야 할 장치예요!”
클라인은 은근슬쩍 리퀴드사의 제품을 홍보하며 차원항 제작을 시작했다.
“여러분. 가스형 차원항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게 뭘까요? 저는 뭐라고 해도 색상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색상이 구리면 아무리 예쁜 생물들을 넣어 놓더라도 그다지 이쁘지 않거든요. 암석형 차원항의 지형이 가스형 차원항에선 색상인 거예요.”
그렇지만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기체의 색상은 기본적으로 칙칙하다.
그 칙칙한 색을 어떻게든 조합해서 괜찮은 색을 만들어도, 그렇게 되면 이상한 화학 반응이 일어날 때도 있다.
그렇기에 대다수의 가스항은 색깔이 칙칙할 수밖에 없는 게 정상이지만.
클라인은 달랐다.
“여기서 공개하는 가스항에 색상을 입히는 저만의 노하우! 그건 바로~ 쟈자잔~.”
클라인이 당당하게 공개한 것은 다름 아닌 정령들이었다.
“여러분. 정령을 사육할 때 자꾸 주위를 자신한테 동화시키는 것 때문에 차원항이 변하는 게 짜증 나시죠? 그런데 그 점을 역으로 이용하면 정령들을 일종의 색소 역할로 사용할 수 있답니다.”
클라인은 각양각색의 정령들을 카메라에 비추며 설명을 계속 이어 나갔다.
“각 행성별로 정령들의 색상이 다르다는 건 잘 아시죠? 그 점을 이용해서 정령들을 이용해서 대기의 색을 바꿀 수 있어요.”
정령들의 서식지를 잘 조화시키면 정령들로 그림을 그릴 수도 있지만, 이번 차원항은 그 정도로 정교하게 색상을 넣을 계획은 아니다.
하지만 아직 정령을 투입할 수는 없다.
클라인이 중력 발생 장치를 설치하고 차원항에 가스를 채우는 동안은 차원항에서 아무것도 살 수 없으니까.
이 부분은 편집으로 넘길 생각이지만, 그렇다고 차원항이 완성되는 동안 그냥 기다리기만 하는 건 별로다.
그렇게 생각한 클라인은 방긋 웃으며 구름고래를 데려왔을 때부터 해 보고 싶었던 것을 시도했다.
“구름고래는요. 이미 검역을 다 끝마친 상태거든요? 그런데 계속 검역 차원에 놔두는 것도 불쌍하니, 잠깐 임시로 다른 차원항에 놔두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름고래와 다른 생물의 합사.
순하디순한 구름고래가 다른 생물을 해치진 않겠지만, 그것보다 걱정해야 할 건 기존의 차원항에 있던 생물이 구름고래를 해치는 일이다.
그리고 클라인은 그 점에서 가장 걱정할 필요가 없는 차원항을 하나 알고 있었다.
“여러분. 구름고래는요, 야생에 있을 때 가끔씩 지면 근처까지 내려올 때가 있다는 거 아셨나요? 그때 구름고래의 몸에서 솜털이 떨어져 땅에 마치 눈처럼 쌓인다는데요. 그 솜털은 인간이나 다른 생물들에게 좋은 먹이로 쓰인다 하더라고요!”
물론 구름고래의 솜털뿐만이 아니라 고기도 다른 생물들이 노리는 먹이지만.
마력조차 없는 지구산 인간이 구름고래를 해칠 수는 없겠지.
클라인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구름고래를 손으로 들어 올려 익숙한 차원항 안에 투하했다.
“그럼 지구산 인간이 있는 차원항에 구름고래를 넣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구름고래가 마치 수영하듯 차원항의 하늘을 헤엄쳐 다니기 시작하는 것을 지켜보며 클라인은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 두 개가 함께 만났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 행복한 상상을 하면서 말이다.
13화 애완 인간에게 짠 음식을 줘도 되나요? 잉간의 구름고래와 소금 먹방!
또다시 어디론가 날려 보내진 걸까?
새하얗게 변한 동굴 밖 풍경을 보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하지만 옆에 에포나도 곤히 자고 있고, 전체적인 풍경은 변하지 않은 것 같으니 그런 건 또 아닌 듯하다.
조심스럽게 돌창을 한 손에 쥐고 동굴 밖으로 나서자 뽀득, 하고 눈을 밟는 듯한 소리가 났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눈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혀 차갑지도 않고, 이렇게 햇볕이 쨍쨍한데 녹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럼 이게 눈이 아니라면 도대체 뭐지?
밀가루?
바닥에 쌓인 하얀 뭉치들을 들어 올린 나는 그것이 일종의 털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사르륵, 사르륵.
하얀 솜털 사이를 거닐며 걷고 있던 도중, 나는 문득 모닥불이 괜찮을지 걱정됐다.
서둘러 모닥불을 피워 둔 장소로 향하자, 의외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아침만 되면 배가 등가죽에 달라붙어 있어야 할 모닥불이 잔뜩 트림을 내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소 장작을 잔뜩 넣어 놨을 때보다도 더욱 불길이 거세고, 그렇게나 불길이 거센데도 그을음이나 연기가 전혀 발생하지 않는 기이한 현상.
내가 그 모습에 의아해하며 일단 동굴 주변에 떨어진 솜털들을 한데 모으며 길을 내고 있던 그때.
“왕!”
내가 동굴을 나가서 잠에서 깬 걸까?
에포나가 힘차게 짖으며 솜털 위를 사뿐사뿐 달려 나갔다.
솜털 위에 한 줄로 흔적을 남기며 에포나는 솜털 속에 얼굴을 파묻기도 하고, 뒹굴기도 하며 이리저리 놀아 댔다.
피식.
뭔가 눈 오는 날 신난 강아지를 보는 것 같네.
나는 그런 에포나의 천진난만한 모습에 미소 지으며 계속해서 동굴 주위를 청소해 나갔다.
솜털 속에 파묻힌 바구니를 발견하고 안에 버섯들이 잘 들어 있는지 확인해 본다.
다행히 버섯들이 도망쳤다거나 그런 일은 없고, 두 버섯 모두 다 얌전히 솜털에 파묻혀 있었을 뿐이다.
일단 대충 주위 청소는 다 했고.
그럼 이제 도대체 이 솜털이 뭔지 알아볼 차롄가?
가만히 솜털을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어느 생물의 것인지 알 수 없다.
애초에 이게 식물인지 동물인지도 알 수가 없는데.
만능 사전에 검색해 보면 뭔가 나오려나?
털썩 바닥에 주저앉아 만능 사전을 작동시켜 솜털을 촬영해 본다.
아무리 만능 사전이라도 솜털 하나로 바로 검색 결과를 내놓을 수는 없었는지 약간의 시간이 걸렸고.
띠링.
만능 사전은 이번에도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내밀었다.
[구름고래]
-오르쿠스 행성이 원산지. 과거 오르쿠스 행성이 과도한 채광으로 소멸하며 자연산 구름고래는 멸종. 현재 시중에서 유통되는 구름고래는 오직 양식뿐이다.
구름……고래?
만능 사전의 검색 결과를 보자마자 나는 곧장 시선을 하늘로 올렸고.
희뿌연 구름 사이에서 고고히 떠 있는 태양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잠깐.
태양?
순간 섬뜩한 기분이 들어 다시 하늘을 바라보자.
나는 하늘에서 빛나고 있는 것이 태양이 아니라 누군가의 눈동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흐읍……!”
숨통이 죄어드는 기분이다.
지금까지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는 듯한 정체 모를 압박감의 정체는 저 눈동자였던 걸까?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무릎을 꿇는다.
몸을 움직이려고 해도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더는 저 눈동자를 보고 싶지 않은데, 시선을 돌릴 수 없다.
저 시선에서 벗어나야.
그래야만 하는데.
어떻게든 눈동자에서 벗어나려 있는 힘껏 몸에 힘을 불어 넣은 순간.
스르륵.
하늘을 떠다니던 구름이 움직여 눈동자와 내 사이를 가로막았다.
“허억, 헉! 허억……!”
구름이 눈동자를 가리는 것과 동시에 압박감이 사라지고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방금은 도대체 뭐지?
구름이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움직였는데?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기 두려웠지만, 나는 그래도 구름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서 다시 한번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윽고 나는 내가 다시 한번 착각을 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구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어떠한 거대한 생명체의 배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설마 하지만.
저게 구름 고래?
슬며시 하늘로 치켜든 만능 사전은 내 추측을 긍정해 주었고.
나는 그저 헛웃음만을 흘릴 뿐이었다.
하, 하하.
내가 거대한 구름고래의 모습을 보며 경악하는 사이, 구름고래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흰 솜털들이 팔랑팔랑 땅으로 떨어진다.
눈 오는 날 흐린 하늘을 바라보듯 그 장엄한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왕!”
에포나가 내 근처의 솜털 속에서 튀어나왔다.
입에 구름고래의 솜털을 한가득 문 채로 말이다.
“야, 그거 지지야! 지지! 먹는 거 아냐!”
당황한 내가 에포나를 붙잡고 솜털을 입에서 빼내려 하지만.
자꾸만 미끄덩거리며 에포나가 내 품 안에서 빠져나갔고.
꿀꺽.
에포나는 그대로 구름고래의 솜털을 삼켜 버렸다.
어, 어, 어쩌지?
이물질을 삼켰을 땐 하임리히법이었나?
아니, 그게 개에게도 통했었나?
내가 당황하고 있는 사이에도 에포나는 계속해서 주위의 솜털들을 삼켜 갔지만.
에포나의 숨이 막힌다거나 하는 문제가 발생하진 않았다.
그저 내가 에포나가 솜털을 주워 먹는 모습을 보니 배가 고파졌을 뿐.
그러고 보니 아까 만능 사전에 솜털을 포션이나 고급 식재료로 쓴다는 이야기가 쓰여 있었던 거 같은데.
“야, 그거 맛있냐?”
“크르르!”
“얀마. 아무리 그래도 네 거는 안 뺏어 먹어.”
슬쩍 에포나에게 손을 뻗자, 밥 먹는 개는 주인도 안 건드린다는 말답게 에포나가 내게 이를 드러냈다.
뭐, 그래 봐야 하나도 안 무섭고 오히려 귀엽지만.
슬쩍 근처의 땅에 떨어진 솜털 하나를 집어 입에 넣어 본다.
그러자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맛이 느껴졌다.
산딸기나 과일에서 느껴지는 자연적인 단맛이 아니라.
마치 누군가가 설탕을 뿌려 놓은 듯한 강렬한 단맛과 감칠맛이 입안에서 느껴졌다.
마치 원래 세계에 있었을 때 과자를 먹는 그런 기분이다.
더 쉽게 말하자면 허X버터칩 맛이 솜털에서 느껴졌다.
분명 맛있긴 한데, 이걸 맨날 밥으로 먹으라고 한다면 글쎄다.
뜨끈한 밥 한 공기가 그리워지는 날이다.
그런데 어째, 솜털이 끊길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솜털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겨도 단맛만 더 강해질 뿐이다.
이걸 그냥 꿀떡 삼켰다간 인간인 내가 고양이처럼 헤어볼을 토해 내게 될 거다.
에포나는 도대체 이걸 어떻게 먹는 거지?
또다시 의아해져서 에포나를 바라보자.
“왕?”
에포나는 너무나도 쉽게 솜털을 끊어서 삼키고 있었다.
마치 솜사탕처럼 에포나의 입에 들어간 솜털은 그대로 녹아서 스르르 사라진다.
뭐지?
왜 에포나는 잘만 먹는데, 나는 못 먹지?
종족 차별인가?
나는 한숨을 내쉬며 솜털을 먹는 걸 포기했다.
씹어도 먹을 수 없으니 적당히 껌 같은 용도로 쓸 수밖에 없겠네.
“무오오오~.”
숲 저편에서 무오가 평소보다 더 큰 목소리로 울어 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고 보니 다른 생물들도 이 솜털을 먹이라고 인식하는 걸까?
그렇다면 저쪽에도 때아닌 잔치가 벌어지고 있겠네.
나는 다시 하늘을 바라보고 싶었지만, 또다시 그 거대한 눈동자가 나를 지켜보고 있을까 봐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런데 저 거대한 고래는 어째서 갑자기 생겨난 걸까?
역시 나처럼 그 사이코패스에게 잡혀 온 거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일단 어제 얻은 버섯에서 소금을 정제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분명히 버섯을 꽉 눌러서 액체를 짜내라고 했었지?
지난번 만들었던 바구니를 아래에 두고, 나는 버섯을 있는 힘껏 쥐어짜기 시작했다.
그러자, 얼마 힘을 주지 않았는데도 버섯에서 희뿌연 액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비주얼이 뭐라고 해야 할까?
무척이나 공포 영화의 한 장면같이 연출됐다.
고통인지 뭔가로 일그러진 얼굴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희뿌연 액체.
마치 비통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 같은 모습이다.
“으아아…….”
그 기괴한 모습에 내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계속해서 버섯즙을 짜내자, 바구니에 떨어진 액체들이 단단하게 굳기 시작했다.
꽈아아악.
버섯이 말라비틀어진 걸레처럼 쭈글쭈글해지고 나서야 나는 버섯을 쥐어짜는 것을 그만뒀다.
툭, 투둑.
바구니의 밑바닥에 쌓인 허연 조각들을 떼어 내 살짝 맛을 봐 본다.
씁쓸하고, 짜다.
굳이 만능 사전으로 찍어 보지 않아도 소금이라는 걸 알겠다.
남은 조그마한 버섯도 쭉 짜내 보자, 색이 다른 액체가 흘러나왔다.
마치 피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붉은색의 소금.
이거, 진짜 소금 맞지?
조금 불안한데.
조심스럽게 붉은 소금을 혀끝에 대 보자, 불타는 듯한 통증과 짠맛이 느껴졌다.
“으극, 윽?”
“왕!”
켈록, 콜록, 컥.
내가 갑자기 바닥에 나뒹구는 모습을 본 에포나가 놀라서 내게 달려온다.
에포나는 어쩔 줄 모르며 내 주위를 맴돌지만, 나는 손을 들어 올려 에포나를 쓰다듬으며 안심시킨다.
와, 진짜.
매운 소금이라는 게 이런 건가?
아주 살짝 혀끝에 닿았는데도 이 정도라니, 통째로 입안에 쑤셔 넣으면 발광하는 정도가 아니라 쇼크사할 정도겠다.
“끼잉, 낑…….”
“괜찮아. 괜찮으니까…….”
다행히도 은은한 매운맛이 아니라, 순간 확 하고 혀를 괴롭히는 매운맛이었기에 나는 금방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이건 매운 향신료 수준이 아니라 거의 독이구먼, 독.
이건 다른 소금이랑 섞이지 못하게 어딘가에 따로 보관하든가, 그냥 버려 버려야겠다.
아니, 그럼 에포나가 지나가다가 먹을 위험이 있으려나?
아무튼, 이걸로 소금을 얻을 방법을 확실히 알아냈다.
소금이 생겼으니 뭔가 고기가 먹고 싶은데.
한번 숲속에 들어가서 토끼를 사냥해 볼까?
그런 생각을 하던 그때, 나는 문득 한 가지 발상을 떠올렸다.
아까 그 붉은 소금.
통발에 쓸 미끼에 잘 숨겨서 넣어 놓으면 그 빌어먹을 폭탄새우들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일종의 마비 가루처럼 써먹을 수도 있을 거 같은데.
그, 무슨 독이 든 열매를 강에 뿌려서 물고기들을 마비시켜서 사냥하는 방식 말이다.
뭔가 가능성이 커 보이는데?
적어도 내가 돌창을 들고 폭발하는 새우와 1:1 맞다이를 뜨는 것보단 더 성공 확률이 높을 것 같다.
머릿속에 뽀얀 새우의 속살이 떠오르며 저절로 꿀꺽 침을 삼키게 된다.
나는 더 지체하지 않고 새우 사냥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 * *
“와, 진짜 예쁘네요. 눈이 내린 것 같아요!”
클라인은 구름고래의 솜털이 지면을 뒤덮은 모습을 보며 즐거워했다.
아직 인간은 자고 있어서 이 풍경을 보지 못하겠지만, 인간도 이 풍경을 본다면 자신처럼 즐거워하리라.
슬슬 잉간이 깨어날 때가 됐을 텐데?
클라인이 그렇게 생각하며 차원항 안을 관찰하던 순간.
드디어 클라인이 기대하던 그 순간이 다가왔다.
“아, 아! 여러분들 봤어요? 놀랐나 봐요! 놀라서 움직이질 않네요!”
멍-하니 솜털이 깔린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잉간의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클라인은 그만 평소보다 좀 더 가까이 차원항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역시 모닥불부터 확인하네요. 풋, 지금 또 놀랐네요. 마력으로 타는 불은 처음 보나 보죠?”
지구산 인간은 또다시 평소와는 다른 모닥불의 상태를 보고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정말, 저런 모습을 볼 때마다 마력이 없다는 게 진하게 느껴진다니까.
클라인이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은 순간.
하늘을 올려다보던 인간과 클라인의 눈이 일순간 마주쳤고.
클라인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구름고래가 헤엄쳐 클라인과 인간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것이 의도된 것인지는 몰라도, 그 움직임은 클라인의 주의를 확실하게 끌었다.
“와, 이거 보여요? 진짜 너무 귀엽네요. 잉간이도 귀엽지만, 구름고래는 구름고래만의 귀여움이 따로 있어요.”
클라인은 차원항에 손을 집어넣어 구름고래를 만지려 했지만, 아직 잉간이 제대로 핸들링 훈련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손을 멈췄다.
클라인이 속으로 잉간의 핸들링 훈련을 빨리 완료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이, 잉간은 드디어 구름고래의 솜털에 흥미를 느낀 모양이다.
“아, 드디어 입에 넣어 보네요?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좋아할까요?”
클라인은 인간이 드디어 구름고래의 솜털을 입에 넣는 모습을 집중해서 지켜봤다.
구름고래의 솜털을 가공한 간식은 애완 생물들의 고급 간식으로 팔린다.
지구산 인간도 다른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단것을 좋아할까?
그렇지만 잉간은 몇 번인가 솜털을 씹어 보더니, 입맛에 맞지 않는지 솜털을 뱉어 버렸다.
“음. 지구산 인간은 달콤한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걸까요?”
클라인이 마음속에 지구산 인간의 취향을 메모하는 사이, 지구산 인간은 어제 사냥한 버섯을 바구니 위에 넣고 소금을 짜내기 시작했다.
“애완 인간에게 염분을 먹이면 건강에 좋지 않다는 이야기가 많은데요. 사실은 그렇지 않답니다? 애완 인간이 염분을 먹고 건강을 해치는 경우는 우리가 먹기에도 짠 음식을 계속 먹는 경우거든요. 오히려 적당한 염분은 애완 인간의 건강에 좋아요.”
클라인이 잠깐 토막 지식을 설명하는 사이, 지구산 인간은 어딘가 모습이 다른 버섯을 꺼냈다.
그 모습을 본 클라인은 당황한 표정으로 외쳤다.
“어, 저건. 아직 덜 자라서 조금 매울 텐데요……?”
뚜벅나무버섯은 아직 덜 성장한 상태라면 천적에게 먹히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독성을 내뿜는다.
물론, 그 독성은 사람을 죽일 정도는 아니고 그저 매운맛을 느끼게 할 정도다.
하지만 인간이 그리 선호하는 맛은 아닐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클라인이 지구산 인간을 불안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지구산 인간은 마침내 붉은 소금을 자신의 혀에 가져다 댔다.
그 결과는 모두가 예상했듯, 지구산 인간이 매운맛에 몸서리치는 것이었다.
“아, 저것 봐요. 맵나 봐요. 에구구. 좀 조심해서 먹지…….”
어떻게, 해독제라도 넣어 줘야 하려나?
클라인이 그렇게 생각하며 잠시 고민하자, 지구산 인간은 특이한 행동을 보였다.
붉은 소금을 자신의 손 위에 올려놓고 잠시 고민하더니, 들뜬 표정으로 이리저리 쏘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저렇게 들뜨다니, 설마 잉간은 매운맛 음식을 좋아하는 걸까?
“잉간은 매운맛을 좋아하는 걸까요? 다음에 특식을 넣어 줄 때 참고해야겠네요!”
클라인이 그렇게 사소한 오해를 하며 지구산 인간을 관찰하는 동안.
클라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차원항 구석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일어나기 시작했다.
14화 실수했습니다. 잉간이의 차원항에 대형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새우는 매운맛을 느낄까, 못 느낄까?
정답은 나도 모르겠다.
새우가 매운맛을 느끼기도 전에 기절해 버리니까 말이지.
붉은 소금을 슬쩍 호수 물에 풀어 버리자 근처를 헤엄치던 날벌레들이 둥둥 물 위로 떠오르고.
날벌레들뿐만이 아니라 붉은 소금을 들이마신 폭탄새우들까지 둥둥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역시 머리를 써야 몸이 편하다니까.
호수 물이 붉게 변하는 부작용이 있긴 했지만,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고.
즐거운 마음으로 호수에 떠오른 폭탄새우들을 건져 낸다.
캬, 살이 아주 토실토실한 게 한눈에 봐도 아주 맛있어 보인다.
즐겁게 폭탄새우들을 건져 내던 중, 갑자기 옆구리에 충격이 가해졌다.
“켁!”
얼얼한 고통을 참으며 서둘러 물속을 바라보자, 잔뜩 화가 난 듯 보이는 폭탄새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 녀석이 내게 몸통 박치기를 해 온 걸까?
내가 아무리 지난번에 이 녀석들에게 패배했어도.
이번엔 다르다, 이 녀석들아.
1:1이라면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내게 뛰어들 폭탄새우를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지만.
“악, 아! 아!”
펑, 펑, 퍼벙.
안타깝게도 이번에도 일대일 싸움이 아닌 일 대 다수의 싸움이었다.
사방에서 폭탄새우들이 튀어 오르며 내 몸에 부딪쳤고.
나는 새우들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서둘러 호수를 빠져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괜찮다.
이미 오늘 종일 먹고도 남을 양의 새우를 잡았다.
오늘의 수확물은 무려 폭탄새우 12마리.
하루에 여섯 마리씩 먹는다고 해도 이틀은 거뜬한 양이다.
동굴로 돌아오니 날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폭탄새우를 나뭇잎으로 감싸서 모닥불에 던져 넣는다.
안타깝게도 내가 만든 바구니는 그리 방수 성능이 좋지 못해서 새우를 찐다거나 하는 일은 하지 못할 것 같다.
냄비 같은 그릇도 일단 만드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내 못난 솜씨로 제대로 된 그릇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노력은 해 볼까?
나뭇잎에 감싸인 폭탄새우가 노릇노릇하게 구워지는 동안 주먹도끼를 조각칼 삼아 대충 나무 접시를 만들어 보려 한다.
대충 바닥을 굴러다니는 나뭇가지의 가운데를 벅벅 긁어내면 뭔가 접시 같은 용도로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뭔가 한정식집에서 나올 법한 모습의 접시를 만들 생각으로 나뭇가지를 벅벅 긁어내 보지만, 너무 크기가 작아서인지 번번이 실패한다.
역시 나뭇가지로는 안 되고, 줄기를 잘라 내야 하려나?
가장 근처의 나무와 내가 가지고 있는 주먹도끼를 번갈아 본다.
이걸로 나무를 베어 내려면 한세월이 걸릴 거다.
적어도 손도끼 모양으로 가공하지 않으면 안 되겠는데?
날이 밝는 대로 손도끼를 만들 생각을 하는 사이 폭탄새우들이 괜찮게 익었다.
에포나는 군것질로 배를 가득 채웠는지 새우들에 그리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진짜 안 먹냐? 딱 봐도 맛있어 보이는데.”
“왕?”
아직도 지치지 않는지 솜털 속을 파고드는 에포나.
그 모습을 배경 삼아 붉게 익은 폭탄새우를 까서 입에 넣으려는 순간.
쿵.
쿵.
쿵.
거대한 무언가가 발을 구르는 듯한 소리와 진동이 느껴졌다.
뭐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살펴본다.
하지만 뭐가 바뀌거나 이상하게 보이는 건 없었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건가?
하지만 금방 끝났고, 정말 지진이라면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저 최대한 동굴에서 멀어지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동굴에서 조금 거리를 벌려 두고.
다시 한번 즐거운 식사를 즐긴다.
폭탄새우의 크기가 거의 물고기만 하다 보니 살 또한 어마어마하게 두툼하다.
특히, 폭발을 일으키는 꼬리 부분은 어마어마하게 커다래서 꼬리 부분의 살만 먹어도 배가 부를 것 같다.
꼬리 살을 한 입 물자 갑각류 특유의 고소함이 입안에 퍼진다.
“으음!”
저절로 탄성이 흘러나오는 맛.
랍스터?
먹어 본 적은 없지만 랍스터에도 절대 꿀리지 않을 맛이다.
별다른 조미료를 넣지 않고도 이 정도인데, 여기에 소금을 뿌린다면?
꿀꺽.
경건한 마음으로 새우에 소금을 뿌리고 한 입 먹으려고 한 순간.
쿵.
쿠구궁.
진동을 넘어서 땅 울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뭐지?
진짜 지진인가?
하지만 뭔가 지진하고는 좀 다른 것 같다.
이건 땅이 흔들리는 게 아니라, 무언가가 밀려오는 듯한 소리인데.
새우를 잠시 내려 두고 천천히 주위를 다시 살펴본다.
이미 날은 완전히 저물어 모닥불의 불빛 말고는 주위가 보이지 않는다.
아니, 그래도 뭔가 실루엣 같은 건 보일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계속해서 숲을 바라봤지만, 시꺼먼 암흑만이 계속 보인다.
평상시라면 다시 식사를 계속했겠지만.
아까의 땅 울림도 그렇고, 내 감이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다.
무언가 위험한 것이 숲에 도사리고 있다.
무언가, 그것도 아주 커다란 게.
불안한 마음으로 슬쩍 모닥불에서 불타는 장작 중 하나를 집어서 숲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에포나가 나를 따라오려 하지만, 나는 에포나를 가만히 밀어서 동굴로 돌려보내고 홀로 발걸음을 옮긴다.
혹시나 에포나가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
쏴아, 쏴.
맨 첫날 나와 마주했던 숲처럼 그 어느 생명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기묘한 감각.
분명히 무언가 저 너머에 있다.
서서히 공포감이 스멀스멀 다리를 타고 오르며 내 발을 꽉 붙잡는다.
더 나아갔다간, 원치 않는 풍경을 보게 될 것이란 불안감.
그래도 나는 봐야만 한다.
그래야만 그게 무엇이든 대처할 수 있으니까.
꿀꺽.
불안한 마음으로 숲의 어둠에 머리를 들이밀려 한 순간.
저 너머에서 꿈틀거리던 존재는 내가 먼저 자신을 찾아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먼저 찾아내는 것은, 언제나 자신이라고 말하는 듯한 움직임.
“으엑……?”
저절로 입에서 얼뜬 목소리가 흘러나올 풍경.
꿈틀, 꿈틀.
정체 모를 역겨운 점액이 숲의 나무를 완전히 뒤덮고 있었고.
그 점액은 온갖 생물을 삼켜 가며 그 덩치를 불리고 있었다.
숲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던 이유가 있었다.
숲의 생물 모두가.
아니, 숲 그 자체가 거대한 점액에 질식당하고 있던 것이었다.
푸른빛의 점액 사이로 엿보이는 작은 토끼들의 유해.
지글지글 끓어오르며 점액 속에서 몸부림치는 무오의 모습.
거대한 나무도, 작은 생물도 차별 없이 더 큰 존재에게 집어삼켜진다.
내가 그 경악할 풍경에 잠시 얼어붙은 사이.
꿈틀, 꿈틀.
푸른 점액이 나를 눈치챈 것처럼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히, 히액……!”
그 기괴한 모습에 나는 비틀거리며 등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대처?
저건 그러한 걸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저건 일종의 자연재해나 다름없다. 그저 도망치는 게 살아남을 방법이다.
필사적으로 달리며 동굴로 도망친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여기도 안전하지 않다.
바리케이드를 세워 봤자 금세 저 점액의 파도에 휩쓸려 버리고 말 거다.
도망쳐야 한다.
하지만 어디로?
이곳이 안전한 장소인데, 안전한 장소에서 어디로 도망쳐야 하는 거지?
도대체, 도대체 어디가 안전한 거야?
계속해서 쌓이는 불안과 공포에 숨이 가빠지던 그때.
“왕!”
또다시 에포나의 울음소리가 나에게 안정을 되찾아 줬다.
나에 대한 걱정이 가득 담긴 에포나의 눈빛.
나는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히며 에포나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괜찮아. 별거 아냐.”
그래.
괜찮아.
별거 아냐.
그렇게 스스로를 속이며 나는 도망칠 장소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에 저 점액들, 그리 움직이는 속도는 빠르지 않다.
높은 곳으로, 높은 곳으로 도망치면 괜찮을 거야.
그러니까 산.
산이다. 산으로 도망쳐야 해.
가져가야 할 건?
바구니하고 주먹도끼 정도만 챙겨 가면 돼.
그리고 얼마간 먹을 식량도 잠깐.
그렇게 판단한 나는 서둘러 동굴에서 가져갈 짐들을 바구니에 담기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 짐을 챙기는 사이, 에포나도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음을 눈치챈 걸까?
“왕! 크르르…… 왕! 왕! 왕!”
에포나는 숲을 향해 이를 드러내며 짖어 대기 시작했다.
좋아, 짐은 다 챙겼어.
이제 산으로, 산으로 도망쳐야 해.
내가 바구니를 들고 달리기 시작하자, 에포나도 계속해서 짖어 대며 내 뒤를 따라왔다.
버섯을 따러 갔었을 때 들렀던 루트.
그 루트대로 이동한다면 그리 힘들지 않게 산을 올라갈 수 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달리고, 또 달렸다.
모닥불에서 챙겨 온 작은 횃불 하나에 의지해서.
하지만.
점액의 파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렸건만.
내 앞에 나타난 것은 산비탈이 아니라, 푸른 점액의 바다였다.
숲속에만 점액이 있던 것이 아니었다.
점액은 숲에도 있었고 산에도 있었고 모든 곳에 있었다.
내 눈으로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나는 내가 처한 상황을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안전한 곳은 없다.
도망칠 곳은 없다.
내게 남은 건 곧 다가올 끔찍할 최후를 기다리며 동굴에 틀어박히는 일뿐이다.
“왕?”
“아냐, 괜찮아. 괜찮아.”
몸이 부들부들 떨리지만 나는 애써 괜찮은 척 에포나를 쓰다듬는다.
아니, 괜찮은 척하는 게 아니다.
에포나라도 쓰다듬지 않는다면 그대로 좌절감에 무너질 것 같았기에.
단순히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에포나를 쓰다듬는 일밖에 없었기에.
그래, 그러니까.
뭘 해 봤자 무의미하게 돌아갈 걸 알더라도, 최대한 버텨 보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해 보자.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떨리는 손으로 만능 사전을 작동시켰다.
[청색점균류]
-리베리아 행성이 원산지인 점균류. 주식은 죽은 생물의 사체이며 대부분의 생태계에서 분해자 역할을 한다. 빛을 싫어하는 성질이 있다.
만능 사전으로 알아낸 저 점액의 정체.
어째서 점균류가 저렇게까지 성장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알아낸 사실이 있다.
빛을 싫어한다.
그 말이 무엇이냐.
아침까지만 버티면.
날이 밝을 때까지만 버티면 어떻게든 된다는 거다.
그러니까.
버티자.
어떻게든 버티면 될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주위의 잡동사니들을 이용해 동굴 입구를 막는 바리케이드를 치기 시작했다.
“우윽, 으…….”
뭔갈 해야만 한다고 생각해서 하고 있기는 한데.
이런 걸 해 봤자 아무 의미 없다는 생각이 자꾸 메아리친다.
뚝.
뚝.
추하게 눈물 흘리고, 콧물을 흘리면서도 나는 계속해서 손을 멈추지 않았고.
“에, 에포나. 이리 와. 어서.”
“끼잉…….”
나는 에포나를 동굴 안에 집어넣고 마지막으로 바리케이드를 닫았다.
바리케이드를 닫은 지 얼마 된 것 같지도 않은데.
이곳에 떨어지고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이제 좀 살 만하다고 생각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에포나와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푸른 점액이 들이닥쳐 바리케이드를 두드린다.
“우으, 윽. 꺼져……! 꺼지라고!”
쾅, 쾅. 쾅.
몇 번이고 계속해서 바리케이드를 밀어붙이던 점액.
부, 부술 수 없는 건가?
바리케이드를 부술 만큼 힘이 강하진 않은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일말의 기대를 했지만.
주르륵.
점액이 바리케이드를 부수지 않은 건, 그럴 필요가 없어서였다.
바리케이드 사이에서 점액이 흘러나오며 동굴 안으로 들어온다.
“오지. 마! 꺼져, 꺼져!! 제발……!”
“왕! 크르르! 왕!”
최후의 저항으로 돌창을 꺼내 점액을 쿡쿡 찔러 보지만.
당연히 점액이 돌창 따위로 대미지를 입을 리도 없고.
꿈틀, 꿈틀.
점액은 오히려 돌창을 홱 잡아채 갔다.
서서히 서서히 동굴 안을 채우는 푸른 점액.
나는 정말 최후의 수단으로 동굴 안으로 가져온 모닥불에서 횃불을 꺼내 훠이훠이 휘두르지만.
치이익.
가소롭다는 듯 점액이 횃불을 덮쳐서 불을 꺼 버리고.
그대로 내 팔을 집어삼켰다.
“으윽, 윽……!”
“끼잉, 낑…….”
어떻게든 팔을 빼내 보려 하지만 마치 단단한 바위 안에 팔이 갇힌 것만 같다.
어떻게든 팔을 빼내려 무의식중에 손으로 점액을 붙잡자.
“으읏……!”
쑤욱.
그대로 몸이 질질 점액으로 끌려들어 간다.
서서히 점액이 내 몸을 뒤덮고 끈적한 기분 나쁜 감촉이 느껴진다.
어떻게든 발버둥을 치며 점액에서 벗어나려던 그때.
점액이 추욱 늘어지며 내 바지까지 뒤덮었다.
꿈틀, 꿈틀.
기분 나쁜 감각이 연이어 이어지다 주머니 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마치 늪 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감각.
어떻게든 머리만은 사수하려고 하던 그때.
화악!
무언가가 번쩍거리며 빛나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어떻게든 간신히 고개를 들어 올려 빛의 근원을 살펴보자.
내가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던 마석이 점액 속에서 밝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점액에 통째로 집어삼켜지고 있다는 끔찍한 상황도 잠시나마 잊게 할 정도로 기묘한 풍경.
점액 속에서 마석이 밝게 빛나며 빛을 발하더니.
꿈틀꿈틀.
마석 주위로 점액이 모여들며 어떤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내가 그 형태가 완벽해지는 것을 보기 전, 더는 점액의 무게를 버틸 수 없어진 내 몸이 털썩 뒤로 쓰러지고.
“케헥. 켁.”
꽈악.
점액이 가슴을 압박하며 숨쉬기 괴롭다.
벗어나려고 몸부림도 칠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목 위로 타고 오르는 점액의 감촉을 느끼며 캑캑거리는 것뿐.
그리고.
스윽.
내 머리 위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움직일 수 없는 내 시선에 들어온 것은, 마치 인간의 형상처럼 생긴 점액의 모습이었다.
저건 도대체 뭘까?
내가 의아한 생각을 품기도 전에.
“으아, 아? 으윽, 윽? 케헥?”
인간 형상의 점액이 입을 열더니, 내 목소리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뭐지?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나는 더욱더 혼란에 빠져들었고.
인간 형상의 점액은 마치 미소처럼 보이는 표정을 씨익 지어 보이더니.
내 뺨에 손을 올리고 나를 꿀렁꿀렁 삼키기 시작했다.
숨이 막힌다.
머리가 어지럽다.
기묘한 아름다움을 지닌 비웃는 듯한 웃음을 보며 서서히 의식이 멀어져 가던 중.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사이코패스.
그 사이코패스인지 뭔지는 나를 이렇게 먹이로 주려고 키우던 게 아니었을까?
내가 먹어 치우던 다른 생물들처럼.
나는.
“으아? 아? 윽! 으아! 아!”
의식이 사라지려던 그 순간.
점액이 꿈틀거리며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신선한 산소가 내 뇌에 공급되었고.
내 의식은 끊어지지 않고 점액이 동굴 밖으로 빨려 나가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게.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몸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지만,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바리케이드를 치우고 동굴 밖을 확인한다.
그러자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정체불명의 기계가 주위의 점액을 빨아들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도대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 * *
“아이고, 실수했다! 슬라임이 너무 증식해 버렸네요!”
잠시 자리를 비웠다 돌아온 클라인은 점균류가 너무 증식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서둘러 차원항 안으로 슬라임 제거 장치를 투입했다.
그래.
단지 그랬을 뿐이었다.
15화 집에 하나씩 있는 ‘이걸’ 뿌렸더니 슬라임이 이렇게?? 간단한 슬라임 처리법 대공개!!
“으아! 아! 으아!”
인간의 형상을 한 푸른 점액은 기계로 빨려 들어가며 발버둥을 쳐 보지만.
기계가 빨아들이는 힘을 버틸 수 없던 걸까?
그대로 푸른 점액은 약간의 흔적만을 남기고 투명한 통 안에 갇혀 버렸다.
콩콩.
마치 이것 좀 열어 달라는 양 인간 형상의 점액이 유리 벽을 두드린다.
나는 그런 점액을 무시하며 주위를 둘러본다.
점액이 빠져나가고 점액의 몸 안에서 소화되던 것들이 사방에 널브러져 있는 역겨운 풍경.
마치 쓰나미가 휩쓸고 간 풍경 같다.
그것보다 에포나는?
아까부터 에포나가 보이지 않는데, 어디에 간 걸까?
그 잠깐 사이에 에포나가 소화됐을 리는 없을 거다.
에포나와 덩치가 비슷한 토끼들도 녹아내리는 데 한참이 걸렸는데.
“에포나! 괜찮은 거 맞지? 어디 있어!”
필사적으로 주위를 살피며 에포나의 안부를 확인하던 그때.
“크르르! 앙! 왕!”
무언가를 물어뜯는 듯한 에포나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서둘러 에포나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달려가 보니.
동굴의 구석에서 기계에 빨려 들어가지 않은 점액을 물어뜯고 있는 에포나의 모습이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점액이 아니라 점액 안에서 둥둥 떠다니는 돌멩이.
그러니까 마석을 와그작와그작 깨물어 먹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 어?
저거 먹어도 되는 거야?
당황하며 에포나에게 달려갔지만.
꿀꺽.
에포나는 기어코 점액의 몸에서 마석을 뽑아내더니 마석을 꿀꺽 삼켜 버렸다.
“에포나! 지지! 지지! 그거 먹는 거 아냐!”
고래의 솜털은 먹을 수 있는 거라고 해도, 마석은 다르다.
나는 기겁하며 에포나를 번쩍 들어 올려 억지로 입을 벌렸지만, 미끈미끈한 침만 손가락에 느껴질 뿐 도저히 마석을 뱉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으. 이거 어쩌지?
돌멩이니까 며칠 있으면 그냥 배출되려나?
혹시 모르니까 소화가 잘되게끔 등이라도 두드려 줘야겠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에포나를 번쩍 들어 올려 품 안에 안고 등을 토닥였다.
에포나를 토닥이며 주섬주섬 거대 점액이 만들고 간 난장판을 청소한다.
바구니는 멀쩡하고.
주먹도끼들과 돌창도 멀쩡하다.
소금과 붉은 소금은 나뭇잎으로 꽁꽁 싸맨 덕분인지 무사하고.
만능 사전은 흠집 하나 없이 무사히 주먹도끼들 사이에 처박혀 있었다.
심지어 모닥불 또한 무사하다.
아니, 장작이 사라졌는데도 허공에서 불타고 있는데?
뭐야, 이거.
무서워.
하지만 지금은 모닥불 따위를 신경 쓸 때가 아니다.
나는 필사적으로 잡동사니 사이를 뒤져 봤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나오지 않았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나는 필사적으로 현실을 부정해 봤지만.
다 소화되고 남은 새우의 껍질만이 내게 냉혹한 현실을 들이밀었다.
“내 새우…….”
소금도 뿌려 놨는데.
딱 한 입만 깨물면 되는 거였는데.
진짜 맛있어 보였는데.
시무룩해진 상태로 나뭇잎에 묻혀 있던 젤리를 꺼내 바구니에 담는다.
괜찮아.
다시 잡아서 맛있게 구우면 돼.
나는 그렇게 기운을 북돋우며 일단 모닥불을 동굴 바깥으로 옮겼다.
대충 주변 정리는 다 된 거 같네.
에포나가 내 목을 휘감고 있던 다리를 풀고 바닥으로 내려오고, 나는 아직도 숲 한가운데에서 웅웅거리고 있는 기계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 으아! 아!”
콩콩.
근처에 다가온 내 모습을 발견한 점액이 유리창을 두드리고.
나는 또다시 그런 점액을 무시하며 도대체 이 장치의 정체가 뭔지 고민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걸 생각해 보자.
일단 사이코패스가 보낸 물건은 확실하다.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건 그 사이코패스 말고는 누구도 떠오르지 않으니까.
그리고 저건 그 거대한 점액을 처리하기 위한 장치가 분명하다.
점액만 전부 빨아들인 뒤에는 귀신같이 멈춰 버렸으니까.
그렇다면 이 사실들에서 추론할 수 있는 건.
사이코패스의 마음이 바뀐 게 아니었던 걸까?
그 거대한 점액의 파도는 뭔지 모를 사이코패스의 실수고.
나를 점액에게 먹이로 주려고 했던 것도 아니었던 걸까?
거기에 한 가지 더 알 수 있던 건.
사이코패스는 아직 내가 죽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아직 나를 덜 가지고 놀았다는 걸까?
모르겠다.
아직도 저 사이코패스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일단 나에게 일종의 사육 비슷한 걸 하고 있다는 건 확실한 거 같은데.
내가 여기서 이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게 목적인지.
아니면 다른 생물에게 먹이로 주거나, 상상만 해도 섬뜩한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봤자 내가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었고.
만능 사전을 이용해서 저 기계의 정체를 알아보려고 해도.
[접근이 제한되었습니다.]
오로지 접근이 제한됐다는 메시지만 떠오를 뿐이었다.
그렇게 내가 기계의 정체를 알아내는 걸 포기하려고 하던 그때.
내가 이곳에 납치되어 온 첫날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안개가 어디선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며 기계를 감싸기 시작했다.
그 사이코패스가 기계를 가져가려는 전조 현상인 걸까?
나는 돌아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집중해서 안개를 관찰했다.
저 기계가 회수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내가 여기서 탈출할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회색 안개가 거대한 기계를 감싸며 내 시선에서 기계를 차단하고.
확.
순식간에 회색 안개가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안개가 쪼그라든다는 건, 안개 너머에 있을 기계도 쪼그라든다는 것.
무언가 정신이 몽롱해지며 금방이라도 시선을 돌리고 싶어졌지만.
나는 계속해서 안개가 줄어드는 모습을 관찰했고.
“허억?”
안개가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무언가를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절로 다리가 풀리며 나는 털썩 뒤로 주저앉았고.
안개가 사라진 곳에는 오로지 쫄래쫄래 숲속으로 사라지는 자그마한 인간형의 점액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 * *
“이번 일은 제가 멍청해서 생긴 사고예요. 아…… 진짜. 슬라임들의 특성을 생각했어야 했는데 그걸 잊어버렸네요.”
클라인은 푹 한숨을 내쉬며 카메라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청색점균류, 그러니까 슬라임은 대부분의 상황에서 분해자로 활동한다.
하지만 때때로 슬라임이 어마어마하게 번식해서 늘어난다면, 주위의 모든 것을 먹어 치우는 유해 생물로 바뀌어 버린다.
사실, 지구산 인간의 차원항에는 슬라임을 처리할 포식자가 별로 없긴 해도 이 수준까지 슬라임이 늘어날 정도는 아니었다.
애초에 슬라임이 분해할 영양분이 그렇게 많이 나오질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이렇게까지 슬라임이 늘어난 원인은 뭘까?
아주 간단하다.
클라인이 잠깐 넣어 놨던 구름고래의 솜털, 그것 때문이다.
“진짜, 과영양의 위험성을 그동안의 영상에서 그렇게 설명해 드렸는데도 제가 먼저 실수한 점에 대해서 사과합니다. 진짜, 제 입장에선 아주 잠깐이어도 차원항의 생태계에선 그게 아니라는 걸 깜빡했어요.”
아주 잠깐의 방심.
아주 잠깐의 실수가 다 만들어 놓은 차원항의 생태계를 뒤집어 놓는 경우는 수도 없이 많다.
하다못해 지열 발생기의 고장으로 화산활동이 일어날 때도 있으니 말이다.
한바탕 시청자들에게 사과한 클라인은 슬라임이 가득 들어 있는 슬라임 트랩을 카메라 앞에 가져왔다.
“이왕 이렇게 슬라임이 대량 증식한 김에 슬라임 이야기나 해 볼까요? 정식 명칭은 점균류지만, 솔직히 누가 그렇게 불러요? 다들 슬라임이라고 부르고 말지.”
주륵.
클라인이 슬라임 트랩을 개봉해 안에 든 내용물을 그릇에 쏟아 놓자 슬라임이 끈적하게 그릇을 전부 채웠다.
“우와. 많기도 해라. 솔직히 이 정도로 성장한 슬라임은 천적이 없는 수준이에요. 뭐, 드래곤이나 시스템의 도움을 받고 성장한 생명체가 아니면 말이죠.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건 트랩을 이용하면 손쉽게 제거할 수 있다는 거죠.”
쿡쿡.
클라인이 슬라임을 신체 말단으로 찌르자, 슬라임이 클라인의 손가락에 꽉 달라붙는다.
“보통은 분해 생물로 키우지만, 먹이 반응이 좋고 이렇게 핸들링하기도 쉬워서 애완 생물로 키우는 경우도 있어요. 저도 슬라임 차원항을 하나 가지고 있고요.”
클라인이 사육장 깊숙한 곳에 넣어 놨던 차원항을 꺼내 온다.
그러자 각양각색의 슬라임들이 왁자지껄 활동하는 차원항의 모습이 카메라에 비친다.
“어때요? 슬라임 차원항도 꽤 이쁘죠? 슬라임 차원항이라는 게 만드는 것도, 관리하기도 엄청 쉽거든요. 그냥 적당히 지형만 만들고 수분과 먹이만 가끔 던져 주면 돼요.”
클라인이 차원항의 뚜껑을 열고, 근처에서 먹이생물이 담긴 통에서 인간형 먹이생물을 꺼내 와 슬라임 차원항에 우르르 던져 넣는다.
“그냥 사료도 잘 먹고, 말린 오크나 생고블린 같은 생먹이도 잘 먹어요. 심지어는 음식물 쓰레기까지 먹는답니다? 그래서 슬라임을 이용한 쓰레기 처리 업체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음식물 쓰레기는 세균 번식의 위험이 있어서 추천하는 사료는 아니지만요.”
콰직, 콰드득, 우득.
그런 소리가 들려올 것 같은 풍경이 슬라임 차원항에서 펼쳐지고.
클라인은 차원항의 뚜껑을 닫고 다시 푸른 슬라임이 가득 담긴 접시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자, 그럼 슬라임 처리 방법을 설명해 드릴 거예요. 저처럼 슬라임 차원항을 따로 만드실 게 아니라면 너무 늘어난 슬라임을 처리해야 하는데요. 슬라임은 법정 지정 생태 교란종에 포함되기 때문에 함부로 방생하는 게 금지되어 있답니다.”
툭.
클라인은 푸른 슬라임이 든 접시에 정체불명의 액체가 든 스프레이를 가져와서 뿌렸다.
그러자 슬라임이 꿈틀거리며 움츠러들더니, 서서히 굳어지며 마침내 정육면체 모양의 큐브로 변했다.
“처리 방법은 무척 간단해요. 여러분들 집에 다 하나씩 마력 응고제가 있으시죠? 마력 응고제를 뿌리기만 하면 된답니다.”
클라인은 큐브로 변한 슬라임을 적당히 책상 위에 놔두며 설명했다.
“슬라임은 마나가 몸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생물이어서 마력 응고제를 뿌리면 이렇게 굳어진답니다. 굳어 버린 슬라임은 적당히 마력 폐기물 수거일에 내놓으면 됩니다! 뭐, 이렇게 장식품으로 써도 되고요!”
이 이야기는 끝이라는 듯 신체 말단을 부딪치며 클라인은 지구산 인간의 차원항에 손을 집어넣어 구름고래를 빼냈다.
“구름고래는 이제 차원항이 완성되기도 했으니 이만 빼내도록 하겠습니다!”
구름고래는 얌전한 탄탈로스처럼 클라인의 손길을 받아들이며 순순히 차원항을 빠져나왔고.
클라인은 이어서 구름고래 전용 차원항에 구름고래를 투입했다.
“어휴, 이렇게 손을 집어넣을 때마다 시간을 멈춰 두는 것도 좀 귀찮네요.”
클라인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애정이 가득한 눈으로 지구산 인간을 바라봤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바닥에 앉아 있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다.
풋, 눈앞에서 슬라임 트랩이 사라지는 모습을 봐서 놀랐던 걸까?
저런 몽총한 모습이 참 마음에 든다니까.
“그럼, 슬슬 차원항의 시간을 다시 움직여 보겠습니다!”
* * *
인간형의 점액이 숲속으로 사라지고.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내가 본 풍경을 떠올렸다.
어항처럼 생긴 물체가 쭉 진열되어 있는 방.
그래.
내가 봤던 풍경은 그런 풍경이었다.
저 장치가 온 곳이 그런 장소였던 걸까?
아니면 내가 있는 곳 바깥의 풍경?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어쩌면.
어쩌면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이 있을지 모른다.
그 사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에포나 이외에 내가 더 버텨야 할 이유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또 한 가지 꽤 중요한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를 납치한 사이코패스가 이 환경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는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 사이코패스도 실수한다.
점액들이 엄청나게 증식을 하고 사이코패스가 부랴부랴 점액을 치워 버린 게 바로 그 증거다.
사이코패스의 실수를 잘 이용한다면 여기서 탈출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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