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 19

뿐이랍니다.”
리만이 생명도감과 다르게 허가를 받지 못한 이유.
생명도감과 달리 리만은 이 세상을 바꾸려는 걸 멈추지 않았기에.
그렇기에 중앙정부에서 허가를 내리지 않은 것이다.
“사회 체제에 위협이 되는가. 바꿔 말하면 얼마나 중앙정부에 협력하는가.”
“……모험가의 랭크 시스템 같네요.”
“네. 맞아요. 모험가의 랭크와 무척 비슷하죠.”
잉간이와 대화하고 싶다면.
잉간이와 친구가 되고 싶다면.
잉간이와 함께하고 싶다면.
다른 인간형 생물들을 포기하고, 잉간이만을 선택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 선택은 무척이나 쉬운 선택이 아닌가?
“제가. 아니, 잉간이가 뭘 하면 되죠?”
“뭐, 적당히 제가 하는 일을 도와주시면 돼요. 그러다 보면 어느새 허가가 날 겁니다.”
“……잉간이가 싫어하는 건 하지 않을 거예요.”
“저도 억지로 시키진 않을 거니, 걱정하지 마시길.”
그렇게 클라인의 선택이 끝나고,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생명도감은 슬슬 통화를 끝내려는 듯 클라인에게 질문이 있는지 물어봤다.
“그럼 뭐, 더 궁금한 건 없으시죠?”
생명도감의 질문에 클라인은 별생각 없이 떠오른 의문을 던졌다.
“그런데, 이런 시스템이 있다는 건 중앙정부도 차원 생물들 중에서 지적 생물로 인정받을 만한 생물들이 있다는 걸 안다는 건가요?”
“당연히 알고 있죠. 중앙정부는 말 그대로 모든 걸 알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돌아온 생명도감의 대답은 클라인이 그런 질문을 던진 걸 후회하게 만들었다.
“……멋지네요.”
참으로 멋진 세상이다.
125화 [생명도감] 키메라 인간 구출 대작전, 지금 시작합니다. (1)
“오오…….”
저 남자의 제안을 받아들인 게 그리 썩 내키진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제안을 받아들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의 제안을 받아들인 덕분에 지금 내 눈앞에서 반투명한 창이 일렁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원 생물용 표준형 관리 시스템]
-현재 기능이 제한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관리자에게 허가를 받지 않으면 모든 기능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개체명]
-잉간■
[생체 정보]
-마력 : 감지되지 않음
-건강 상태 : 양호, 약간의 정보 오염 감지됨
-예상 전투력 : 15등급
[조언자의 한마디]
-전투에 부적합합니다. 적성 생물과의 충돌을 피해 주세요.
뭔가 어째 나쁜 말만 적혀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상태 창이 생겼으니까.
원래 주인공은 1화에서는 F랭크 버러지로 시작하는 게 정석이다.
“상태 창은 잘 보입니까?”
“응. 응. 엄청.”
그렇게 상태 창, 상태 창 노래를 부르짖은 끝에 나도 상태 창을 얻은 거다.
솔직히 낯선 천장을 다섯 번은 넘게 봤으면 상태 창이 튀어나올 때도 되지 않았어?
“참고로, 거신의 가호는 이번 임무가 끝나면 회수됩니다.”
물론, 남자는 내가 들떠 있는 모습이 꼴 보기 싫다는 듯 곧바로 동심을 박살 내 버렸지만 말이다.
“개체명은 잘 표시됩니까?”
“응. 잘 나와.”
잉간이라고 써진 글씨 옆에 살짝 노이즈가 보이지만, 별건 아니겠지?
그것마저 에포나가 슬쩍 촉수를 뻗어 노이즈를 먹어 치우니 보이지 않게 됐으니 말이다.
“그럼, 지금부터 가호를 하나씩 활성화시키겠습니다. 이상이 느껴지면 말해 주세요.”
남자 또한 상태 창을 조작하는지 허공에 손짓을 몇 번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언가가 내 몸을 짓누르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윽……?”
순간 비틀거리며 균형을 잃고 쓰러질 뻔했지만 간신히 균형을 잡고 굳건하게 버틴다.
[유해 정보 방화벽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묵직한 압박감이 처음 느껴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갑작스럽게 사라지고 내 눈앞에는 상태 창의 기능이 활성화됐음을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몸에 이상 없습니까?”
“없는 거 같은……. 억?!”
“그럼,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괜찮은 것 같다고 말하는 중간에 남자가 다시 상태 창의 기능을 개방하기 시작해서 혀를 깨물 뻔했다.
[표준 언어 팩이 활성화되었습니다.]
[근력 강화 : 1단계가 활성화되었습니다.]
[물리 면역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영양분 공급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목표 안내가 활성화되었습니다.]
[포인트 집계를 시작합니다.]
[현재 보유 포인트는 0입니다.]
“포인트……?”
나를 위한 안전장치로 보이는 기능들이 활성화됐다는 메시지들이 떠오르고, 마지막에 의미 모를 메시지가 하나 떠올랐다.
포인트?
저건 또 뭐야?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 남자는 친절하게도 내게 포인트에 대해서 설명해 줬다.
“거신들이 우리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나타내는 척도입니다. 보통은 임무를 수행할 때마다 포인트가 쌓이는 식이죠.”
“포인트를 쌓으면 뭐가 좋은데?”
“시스템의 기능을 더 해방할 수도 있고, 포인트가 만약 100점을 넘는다면…….”
“넘는다면?”
“아마도, 거신들의 세계로 불려 갈 겁니다.”
아마도라는 말이 조금 신경 쓰이는데?
마지막 설명을 할 때 다른 때와는 달리 고개를 돌린 것도 조금 수상하고.
뭐, 그러니까 포인트 100점을 모으면 주인 녀석들에게 불려 간다는 걸까?
100점이 무슨 판단 기준 같은 걸까?
뭐, 지금 당장은 궁금해해 봤자 쓸모없는 정보긴 하지만 말이다.
“준비는 다 끝났습니까?”
“준비할 것도 없는데 무슨 준비가 다 끝나?”
“다 준비하신 모양이군요. 잠시 후 임무가 시작되니, 행운을 빌겠습니다.”
아니, 적어도 무슨 장비 같은 건 쥐여 줘야지!
하다못해 부싯돌이라도 주든가!
나는 그렇게 소리치려고 했지만, 그보다 먼저 남자가 무언가를 조작하는 것이 빨랐다.
내 몸이 회색 안개에 집어삼켜지고, 그다음 순간 나는 새하얀 벌판 위에 서 있었다.
[퀘스트 시작, 키메라 인간들을 최대한 지정된 집결 지점으로 데려가세요.]
그리고 덩그러니 벌판 위에 버려진 나를 비웃듯 시스템 메시지가 다시 한번 내게 해야 할 일을 알려 왔다.
“하아…….”
진짜,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
일단 키메라 인간들을 내가 인솔한다는 것부터 막막하고, 그 라미아형 인간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도 고민된다.
보니까 무슨 거의 블랑카급의 힘을 가지고 야생동물처럼 주위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것 같던데…….
에휴, 내가 하겠다고 했으니 어떻게든 해야지.
적어도 진짜 맨몸으로 떨어진 건 아니잖아?
시스템의 보조를 받아서 어떻게든 해 봐야지.
내게는 만능의 단어, 상태 창이 있잖아?
“왕!”
아, 그리고 에포나도 있고 말이다.
어느샌가 내 곁에 나타난 에포나는 새하얀 벌판에 덮인 눈 같은 것들이 신기한지 신나게 짖으며 벌판을 마구 뛰어다녔다.
눈 덮인 벌판을 뛰어다니는 에포나의 모습은 영화의 한 장면 같아서 썩 보기 좋았다.
그래, 에포나가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어딘가 높은 지형이 없을까 주위를 둘러봤다.
[집결 지점]
[최중요 목표]
목표 안내가 활성화된 탓일까?
평범한 벌판 위에 시스템이 글자를 덧씌워 목표들의 위치를 안내한다.
덕분에 빠르게 목표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찾은 뒤가 문제인데.
일단 최대한 멀리에서 그 키메라 인간을 관찰해 볼까?
뭔가 좋아하는 걸 알아내서 선물로 들고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냥 맨입으로 설득하는 것보단 선물과 함께하는 게 더 효과가 좋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에포나와 함께 터벅터벅 목표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렇게 에포나와 단둘이 걷고 있으니 어항에 처음 왔을 때가 생각난다.
그때는 정말 에포나와 나밖에 없었는데.
당연히 지금의 삶이 더 좋지만 가끔씩 에포나와 단둘이 있던 때가 그립기도 하다.
“응?”
목표를 향해 걷다 보니 야트막한 언덕이 나타나 언덕을 오른다.
언덕을 오르던 내 눈에 문득 바닥에 달라붙은 얼음 결정으로 보이는 것들이 포착됐다.
이건 정체가 뭘까?
그냥 얼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크기와 모양이 일정한데.
조심스럽게 바닥의 결정을 들어 올리자 손가락에 찡한 차가움이 느껴진다.
인상을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결정을 살피니 어딘가 내가 알고 있는 물질이 떠올랐다.
동물들을 도축할 때마다 나오지만 쓸 곳이 없어서 거의 방치하다시피 놔두고 있는 마석들이다.
이 결정들도 마석처럼 모서리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는데 이것 또한 마석의 일종인 걸까?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가만히 결정을 바라보고 있으니, 에포나가 폴짝 뛰어올라 내 손의 결정을 삼켰다.
“에포나?”
“왕?”
깜짝 놀란 내가 에포나의 이름을 부르자 에포나는 입을 핥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마석도 잘만 먹던 녀석이니 이것도 먹어도 탈이 나진 않겠지.
“함부로 아무거나 주워 먹으면 안 돼.”
“왕!”
그래도 일단 에포나를 적당히 꾸중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그나저나 진짜 이곳의 풍경은 참 장관이다.
머리 위로는 수많은 별들이 쫙 펼쳐져 있고, 공기는 은은한 푸른빛으로 물들어 있어서 신비감을 더한다.
눈 덮인 풍경을 감상하며 설렁설렁 언덕을 올라가던 중,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눈과 결정 외의 다른 무언가를 발견했다.
“왕?”
새하얀 눈 사이에 폭 파묻힌 부드러운 솜털을 가진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버섯 같은 건가 생각했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와, 이건…….”
솜털은 마치 숨을 몰아쉬듯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완전히 솜털 가까이 다가온 나는 솜털을 바라보며 그저 감탄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솜털로 둘러싸인 무언가는 거의 자동차 크기였기 때문이다.
만져 봐도 되려나?
혹시, 식물이 아니라 동물 같은 건 아니겠지?
딱 봐도 부드럽게 생긴 솜털을 만질까 말까 고민하던 사이, 에포나가 자기가 먼저 확인해 보겠다는 듯 솜털에 뛰어들었다.
“왕!”
토옹.
쿠션에 뛰어든 것처럼 에포나의 몸이 솜털에 파묻히고, 에포나는 신난 듯 솜털 위에서 방방 뛰기 시작했다.
어, 에포나가 저렇게까지 건드리는데 별 반응이 없으니 괜찮은 거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조심스럽게 솜털에 손을 뻗어 솜털의 감촉을 느꼈다.
“와, 이거…….”
말도 안 될 정도로 가는 솜털들이 손에 얽혀 드는 게 참 묘한 기분이다.
갓 세탁을 끝낸 이불에 뛰어드는 기분을 손만 느끼는 것 같달까?
시간만 허락된다면 계속 만지고 싶어질 정도다.
에포나와 내가 그렇게 솜털의 감촉을 만끽하던 그때, 솜털에 무언가 변화가 일어났다.
갑자기 솜털이 부들부들 떨리더니, 벌떡 몸을 일으킨 것이다.
“키에에엑!”
외관에선 상상되지 않는 기괴한 울음소리와 함께 솜털은 땅속에 박혀 있던 뿌리를 들어 올리고 어디론가 총총총 뛰어갔다.
그리고 솜털이 떠난 자리에는 푸르게 빛나는 주먹 크기의 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결정들의 신비한 푸른빛과 달리, 어딘가 불길하면서도 아름다운 은은한 하늘빛이다.
거기에 더해서, 빛나는 돌은 주위의 검은빛 땅과 확연히 다른 재질로 이루어진 것 같았다.
“음?”
아름답지만 어딘가 건드리기 꺼려지는 돌을 내가 그냥 바라만 보던 그때, 빛나는 돌 주위의 눈들이 조금씩 녹기 시작했다.
저 돌이 빛만이 아니라 열기까지 발산하는 걸까?
“……선물로 가져가면 좋아하려나?”
그 키메라한테 이런 걸 선물해 주면 좋아하려나?
딱 봐도 추워 보이는 곳에서 따스한 돌을 선물해 주면 좋아하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빛나는 돌을 집어서 주섬주섬 주머니에 넣었다.
다시 나는 목표를 향해 걷기 시작했고, 목적지까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야트막한 언덕이 끝이 났다.
언덕 대신, 상당히 깊어 보이는 구덩이가 나와 에포나 앞을 가로막았다.
“여긴 또 어떻게 지나간담…….”
보아하니 목표는 이 구덩이 안이나 너머에 있는 것 같은데.
일단 지금 여기서 구덩이로 내려가기엔 경사가 너무 급하다.
적당히 위험하지 않은 장소를 찾아야 하겠는데.
구덩이의 가장자리를 살피며 진입할 수 있을 만한 장소를 찾던 그때, 내 눈에 기묘한 것이 들어왔다.
새하얀 눈이 덮인 구덩이 바닥 가운데에, 주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금속성의 물체가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구덩이는 저 물체가 떨어지며 생겨난 것일까?
마치 무언가를 담고 있던 상자처럼 보이는 물체 근처에는 관을 떠올리게 하는 여러 상자들이 잔뜩 널브러져 있었다.
또한, 저 상자에서 미약하게 열이 발생하고 있는 걸까?
상자 주위에는 눈들이 전부 녹아서 사라져 있었다.
음, 저기가 키메라 인간의 은신처려나?
주위에 딱히 몸을 숨길 만한 곳도 달리 없고, 미약한 열이 나오고 있으니 은신처로 딱 적합해 보이는데.
내가 그렇게 상자를 품평하고 있던 그때,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지면이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왕! 왕! 크르르…… 왕!”
그와 함께 에포나가 구덩이 반대편을 노려보며 거세게 짖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뤄 봤을 때, 설마 지금의 진동은…….
그런 내 추리가 맞았다고 외치는 것처럼 땅이 다시 한번 거세게 흔들렸고, 새하얀 무언가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반대편 구덩이에 떨어진 무언가는 새하얀 찹쌀떡을 2개 붙여 둔 것처럼 생겼지만, 이 먼 거리에서 봐도 크기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저 정도면 거의 3,4층 건물 크기인데?
구덩이 반대편에 떨어진 찹쌀떡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갑작스럽게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황천의 찹쌀떡으로 진화했다.
“흐익……?!”
갑자기 찹쌀떡의 몸을 덮고 있던 새하얀 털들이 촉수처럼 꿈틀거리며 사방으로 흔들거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울던 아기도 보고 울음을 그칠 것 같은 기괴한 모습에 나는 나도 모르게 새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런 내 목소리를 인식한 것일까?
찹쌀떡의 촉수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내 쪽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었다.
어, 어쩌지?
도망쳐야 하나?
당황한 내가 허둥대고 있던 그때, 무언가가 거대한 찹쌀떡의 몸통을 들이박았다.
찹쌀떡에게는 발성 기관이 없는지 찹쌀떡은 몸을 부르르 떨며 화난 듯 촉수를 흔들었지만, 찹쌀떡이 말을 할 수 있었다면 방금 분명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그 정도나 되는 공격을 날린 장본인이 누군지 보기 위해 나는 공격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봤고.
“어?”
두 눈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흉흉한 눈빛으로 찹쌀떡을 바라보고 있는 라미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최중요 목표]
매우 친절하게도, 목표의 위치를 표시해 주는 시스템 메시지를 머리 위에 단 상태로 말이다.
126화 [생명도감] 키메라 인간 구출 대작전, 지금 시작합니다. (2)
아까의 강력한 일격은 주위에 굴러다니는 결정들을 주워서 던진 것일까?
키메라는 마치 야구공을 다루듯 결정을 툭툭 던지더니, 다시 한번 찹쌀떡에게 투척했다.
자신의 영역에 누군가 침입해서 잔뜩 화가 나 있는 것일까?
아리스가 마력을 잔뜩 끌어 올릴 때처럼 키메라의 몸에 난 털들은 잔뜩 곤두서 있었고, 토끼 귀처럼 길쭉하면서도 펄럭거리는 귀는 빳빳하게 위로 솟아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화가 난 것은 키메라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르던 찹쌀떡은 키메라를 완전히 짓누르겠다는 것처럼 촉수를 뻗어 지면을 박차고 키메라에게 육박했다.
그렇지만 당연히 찹쌀떡의 몸통 박치기를 그대로 맞아 줄 리 없는 키메라는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움직여 찹쌀떡의 공격을 피했다.
이어서 찹쌀떡의 몸에서 길게 늘어진 촉수들이 키메라에게 들이닥치지만 키메라의 손에서 길게 솟아난 발톱이 촉수들을 베어 낸다.
키메라는 손톱을 크게 휘둘러 자신 주위의 촉수들을 박살 내고 공간을 확보한 다음, 뱀의 꼬리를 지면에 내리치며 그 반동으로 위로 펄쩍 뛰어올랐다.
공중으로 솟구친 키메라를 붙잡으려 촉수들이 솟아오르지만, 키메라의 몸에 솟아난 털들이 노란빛에 휘감기더니, 그 털에 닿은 촉수들이 날카로운 가시에 찔린 것처럼 체액을 흘리며 튕겨 나간다.
그대로 키메라는 찹쌀떡의 몸체에 안착했고, 붉은 눈동자를 빛내며 찹쌀떡의 몸체를 꽉 깨물었다.
그러자, 찹쌀떡의 몸이 흔들리며 촉수가 단번에 키메라를 저 멀리 날려 보내고, 키메라는 그대로 구덩이의 벽에 부딪혔다.
키메라의 입에서 길게 늘어난 송곳니가 원래대로 돌아가는 모습이 보였고, 키메라는 침을 뱉듯 파란빛의 체액을 바닥에 뱉어 냈다.
그리고 찹쌀떡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다급하게 키메라에게 촉수를 쏘아 대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진 차분하게 키메라의 퇴로를 차단하며 궁지에 몰아간다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아무렇게나 마구잡이로 공격을 가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어째서 찹쌀떡이 저렇게 다급해진 거지?
고작 키메라에게 한 번 깨물렸을 뿐인데.
다급해진 찹쌀떡과는 다르게 키메라는 느긋하게 찹쌀떡의 공격을 피하기만 할 뿐이었다.
이윽고 나는 어째서 찹쌀떡이 다급해졌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키메라에게 물린 부분의 촉수들이 시꺼멓게 변색되더니 바닥에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검게 변한 촉수는 다른 촉수들과 다르게 다시 재생되지 않았다.
설마, 아까 찹쌀떡을 깨물었을 때 키메라가 독 같은 걸 주입한 걸까?
새하얀 찹쌀떡의 몸을 점차 검정이 뒤덮어 가고, 찹쌀떡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지기 시작한다.
그러자 찹쌀떡은 최후의 발악을 하듯 몸에서 하늘빛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끼잉…….”
나와 함께 싸움 구경을 즐기던 에포나가 낑낑거리며 슬며시 바닥에 엎드릴 정도로 찹쌀떡의 상태는 심상치 않았다.
뭔가, 저 찹쌀떡이 지금의 공격에 성공하면 내가 있는 곳까지 영향이 미칠 것만 같은 느낌이다.
찹쌀떡은 힘을 모으기 위해서인지 키메라에게 휘두르던 촉수들도 거둬들여 촉수의 방패를 만들고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리고 키메라는 당연하게도 찹쌀떡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대로 순식간에 찹쌀떡과의 거리를 좁히더니, 찹쌀떡의 방어를 뚫으려는 듯 촉수의 갑옷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당연히 찹쌀떡은 필사적으로 촉수의 갑옷을 유지하려고 했고, 키메라와의 목숨을 건 줄다리기를 이어 갔다.
그리고 그 줄다리기에서 승리한 것은 찹쌀떡이 아닌 키메라였다.
키메라의 손톱이 촉수의 갑옷의 방어를 뚫어 내고, 찹쌀떡의 속살이 키메라에게 그대로 노출된다.
키메라는 그대로 찹쌀떡의 속살에 긴 송곳니와 손톱을 박아 넣고 착 달라붙는다.
그러자 기묘하게도 찹쌀떡의 몸에 모이던 푸른 기운이 어디론가 흩어져 버리고, 그 대신 키메라의 몸으로 파란 기운이 흡수되는 것처럼 보인다.
키메라가 에너지를 흡수하는 것도 있고, 몸에 퍼진 독이 마침내 제 임무를 완수한 것일까?
찹쌀떡은 시꺼멓게 변한 채로 무너져 바닥에 흘러내렸다.
그리고 키메라는 그대로 찹쌀떡의 사체를 파헤치며 오늘의 식사를 시작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거랑 대화를 하라고?”
아무리 봐도 내가 가까이 가기만 해도 입맛을 다시며 나를 먹어 치우려 할 것 같은 비주얼인데?
멀리 있어서 키메라의 몸이 제대로 보이진 않지만, 시뻘겋게 빛나는 흉흉한 눈동자만은 내 뇌리에 똑똑히 각인됐다.
일단 말이 통할지도 의문이고, 내가 겁을 먹어서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이건 내가 찐따여서 그런 게 아니라, 누가 와도 나와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전신에 피로 추정되는 체액을 뒤집어쓰고 붉은 눈동자를 빛내는 인간도 무서운데, 그게 평범한 외모가 아니다?
말 다 했지.
으, 그래도 무서워도 대화를 시도해 보긴 해야지.
상태 창을 믿고 용기를 내 보는 거다.
일단 먼저 저 아래로 내려갈 길부터 찾아보자.
일단 만나야 대화를 하든 말든 할 것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구덩이 아래를 바라봤고, 키메라의 모습이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어, 어디 갔지?”
저절로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올 정도로 키메라는 흔적을 남기지 않고 증발해 버렸다.
혹시, 찹쌀떡의 거대한 사체 안으로 들어간 것은 아닌가 생각했지만, 그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걸 봐선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그래, 키메라의 위치를 나타내 주는 표식이 있잖아?
그걸 찾으면 어디 있는지 보일 거다.
그렇지만 아무리 구덩이 안을 둘러봐도 표식은 얼굴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뭔가 시스템이 고장 나기라도 한 건가?
시스템마저 이러면 진짜 키메라를 찾을 방법이 없어지는데.
나는 한숨을 내쉬며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반려넷 단말기를 꺼냈다.
솔직히 말해서 별 도움이 되진 않을 것 같지만, 혹시나 도움이 될 수도 있잖아?
[솔직히 불법은 불법 아니냐?]
[물법이 불법보다 더 나은 3가지 이유를 알려 주마.]
[솔직히 무인도에 떨어졌을 때 동료로 다들 물법 선택할 거잖아?]
[불법은 운디네 소환도 못하잖아 ㅋㅋㅋ]
[인류해방전선에합류하라]
[오늘 처음 온 뉴비들 속지 마라. 이 새끼들 죄다 4원소 마법 마스터했다.]
아, 이 꼬라지를 보니 도움이 안 될 게 확실해 보이네.
오늘도 수백 번은 우려먹은 불법과 물법 떡밥으로 싸우는 반려넷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무공을 쓰는 사람들은 불법하고 물법을 본 적도 없는데, 토론에 참여하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
오늘도 참신하게 시간을 때우는 법을 개발하는 중인 이곳에, 나는 조심스럽게 사진 2장을 올렸다.
[행동 풍부화 시작됐는데, 이거 어떻게 해야 하냐?]
-(구덩이 아래의 참상을 찍은 사진)
-(등 뒤의 눈 덮인 벌판과 돌무더기들을 찍은 사진)
-눈떠 보니 여기인데 어떻게 해야 하냐? 나보고 뭔 뱀 인간을 찾으라는데, 그 뱀 인간을 발견하긴 했거든? 저 구덩이 아래에서 저거 사냥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뭐 흔적 같은 거 추적하는 법은 모르냐?
이렇게 대충 행동 풍부화를 제목에 적어 두면 남들 망하는 꼴이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잔뜩 들어온다.
이제 잠시 후면 내 상황을 놀리는 댓글들이 달릴 거고, 그 안에서 내게 도움이 되는 정보들을 골라내야 하는데…….
“응?”
그런데 어째, 댓글들이 내가 예상하던 것과 좀 다르다?
[댓글]
-뒤뒤뒤뒤뒤
-네 뒤에
-뒤에 저거 뭐냐?
-저, 저게 뭐꼬…….
“뒤?”
뒤에 뭐가 있다고 그러지?
나는 홱 하고 등 뒤를 돌아보지만, 새하얀 눈만 덮여 있을 뿐, 키메라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표식도 보이질 않는데, 뒤에 뭐가 있다는 거야?
-뒤에 아무것도 없는데, 뭔 소리 하는 거임?
-사진, 사진을 보라고. 두 번째 사진.
-두 번째 사진 바위 뒤편에 ㅇㅇ
사진에 뭐가 있다고?
댓글들의 설명을 보고 나는 주의 깊게 집중해서 두 번째 사진을 살폈다.
그리고.
“어?”
댓글들의 말대로 무언가가 사진에 찍혀 있었다.
돌무더기 사이에 새하얀 얼굴이 마치 심령사진처럼 떠올라 있었던 것이다.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고, 나는 서둘러 얼굴이 떠올라 있던 장소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곳에는 얼굴 따위는 존재하지 않고, 돌멩이들만이 굴러다닐 뿐이었다.
설마, 그사이에 구덩이를 올라와서 내 뒤까지 접근했던 거야?
표식이 보이지 않던 건, 키메라가 너무 내게 가까이 접근해서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가슴이 쿵쾅거리고, 공포감이 차오른다.
무슨 공포 영화냐고, 젠장.
“왕!”
내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심호흡을 하고 있자 에포나가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늠름한 모습으로 바위 위로 올라서서 짤막하게 짖었다.
그래, 침착하자.
어차피 내가 직접 만나러 가야 하긴 했어.
아직 각오가 덜 되긴 했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부딪쳐 보자.
나는 그렇게 각오를 다지며 조심스럽게 얼굴이 찍혀 있던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는 누군가가 질질 끌려간 것처럼 보이는 자국이 눈 위에 남아 있었다.
이게 아마 그 키메라의 흔적이겠지.
그렇다면 이 흔적을 따라가면 키메라가 나오다는 건데.
나를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이려나?
막 위협을 가할까?
아니면 바로 행동에 나설까?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 그리 호의적이진 않을 것 같은데.
그렇게 조심스럽게 눈밭에 남은 흔적을 따라가다 보니, 돌 더미 사이에서 살랑살랑 흔들리는 꼬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내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눈치챘는지 꼬리가 쑥 당겨지며 자신의 모습을 감췄다.
후우, 이 바위 건너편에 키메라가 있다.
나는 마지막으로 각오를 다지고 단번에 고개를 바위 너머로 내밀었다.
그리고 내 시선에 가장 먼저 잡힌 것은, 북슬북슬한 새하얀 털들이었다.
새하얀 털들이 바위틈에 눈이 쌓인 것처럼 폭 틀어박혀 있던 것이다.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상황에 조금 당황하면서도 슬며시 키메라에게 말을 걸어 본다.
“저기요?”
그러자 키메라가 내게 보인 반응은.
“히익! 잡아먹지 마세요!”
바위틈에서 겁에 질린 목소리를 내뱉는다는, 내 예상을 한참 뛰어넘은 반응이었다.
* * *
잉간이는 생각보다 시원스럽게 생명도감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잉간이가 자신 말고 다른 사람의 제안을 받아들인 게 조금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 정도는 참자.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가만히 생명도감을 바라봤다.
그런 클라인의 시선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몰라도, 생명도감은 방긋 웃으며 클라인에게 말을 걸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잉간이가 방역반에 휩쓸릴 일은 없을 테니까요.”
“그래요?”
“네. 방역반이 올 때까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예요.”
생명도감이 세운 계획은 간단했다.
잉간이가 방역반이 도착하기 전에 라미아형 인간을 구조하고, 애호 단체들이 지키고 있는 인간 거주지로 가서 인간들을 안전 지역으로 대피시키면 클라인과 생명도감이 구조한다는 계획.
간단하면서도 잉간이의 비중이 커다란 계획이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잉간이가 실패하면 모든 게 파탄 나는 계획이다.
뭐, 우리 잉간이가 실패할 것 같진 않지만 말이다.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화면에 잡히고 있는 라미아형 키메라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생각보다 상태가 양호해 보이네요? 저 키메라는 애호 단체에게 시스템도 받지 못한 거 아니에요?”
화면 속의 키메라는 어디 한군데 다친 곳도 없이 영양 상태가 아주 괜찮아 보였다.
그런 클라인의 질문에 생명도감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사실, 저 아이가 위험해서 구조하는 것보단 스노우 스톤이 위험해서 구조하는 거거든요.”
“스노우 스톤이 위험해서요?”
“저 아이는 몇 안 되는 스노우 스톤에 적응할 수 있는 아이거든요.”
외관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그 정도나 된다고?
클라인은 고개를 갸웃하며 생명도감에게 자신이 아는 상식을 말했다.
“스노우 스톤은 추운데, 어떻게 라미아가 잘 적응할 수 있죠? 라미아는 냉혈 생물이잖아요?”
“저 아이는, 흡혈귀의 특성도 섞여 있거든요.”
“흡혈귀요?”
“에너지 드레인. 아시죠?”
“아…….”
스노우 스톤은 방사능으로 가득 찬 공간.
주위의 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는 저 키메라로선 숨만 쉬고 있어도 에너지를 보충할 수 있을 것이다.
“뭐, 그래도 말씀하신 대로 추위에는 약해서 다른 생명체의 온기로 체온을 올리거나, 둥지 안에 있는 열원 주변에 있느라 둥지를 잘 안 나서지만요.”
“집순이다, 이거네요?”
“그렇죠. 성격도 대부분의 라미아들답게 아주 겁이 많아서 서식지를 잘 벗어나지 않는 편이에요.”
“겁이 많다고요?”
클라인은 생명도감의 설명을 듣고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근처에 다가오는 생명체를 모조리 공격하는 게 흉악한 게 아니라 겁이 많은 거라고?
“너무 겁이 많아서, 주위에 다른 생물이 다가오면 폭력적으로 변하는 겁니다.”
“아…….”
잠깐, 그러면 잉간이에게도 공격성을 드러내지 않을까?
클라인은 순간 불안해졌지만, 생명도감이 덧붙이듯 던진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뭐, 잉간이가 다른 생물들에게 위협적으로 느껴질 일은 거의 없잖아요? 그래서 잉간이가 필요하다 한 거예요.”
“하하…….”
이건 칭찬이야, 험담이야?
생명도감의 말을 듣고 클라인의 불안감은 사라졌지만, 어째 다른 방향으로 불안감이 남았다.
더 이상 잉간이의 룸메이트가 증가하는 일은 없을 거다.
아마도.
127화 [생명도감] 잔뜩 겁먹은 키메라 인간을 설득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
“히익! 잡아먹지 마세요!”
겁에 잔뜩 질린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새하얀 털 뭉치였다.
동글동글 잘 뭉쳐진 털 뭉치는 마치 털로 만든 구슬처럼 보일 정도였다.
“가, 가까이 오지 마요!”
버럭.
털 구슬이 겁먹은 목소리로 그렇게 외치고, 털 구슬 위쪽으로 뿅 하고 솟아 있는 토끼 귀가 쭈뼛 곤두선다.
기묘하면서도 귀여운 광경에 나는 피식 웃으며 한 발자국을 더 앞으로 내디뎠고.
“오, 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찰싹.
털 구슬에서 뻗어 나온 꼬리가 내 근처의 땅을 찰싹 후려쳤다.
꼬리가 후려친 지면이 움푹 파이고 먼지가 흩날린다.
그 무시무시한 괴력을 보고 나서야 나는 귀여운 풍경에 가출해 버린 경계심을 다시 집 안으로 불러들일 수 있었다.
그래, 저 키메라가 먼저 겁을 먹어서 그렇지 지금도 나 정도는 간단하게 씹어 먹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
나는 식은땀이 등에서 흐르는 것을 느끼며 가만히 양손을 들어 올리고 조심스럽게 키메라에게 말을 걸었다.
“안 잡아먹으니까. 너무 겁내지 마.”
뭔가 키메라와 나의 대사가 서로 바뀐 것 같지만, 일단 이렇게 말하는 게 키메라의 긴장을 풀어 줄 수 있겠지.
그러자 부들부들 떨던 토끼 귀가 쫑긋 솟더니, 스르르 아래로 내려가며 키메라는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진짜……?”
“진짜니까. 거기서 좀 나와 봐. 나는 너랑 이야기하러 온 거야.”
나를 잔뜩 경계하던 것과는 상반되게 키메라가 경계를 푸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그냥 말로만 괜찮다고 했을 뿐인데 털의 공이 풀리며 키메라의 얼굴이 빼꼼 드러났다.
붉은 눈동자와 하얀 머리만을 빼꼼 내밀고서 키메라는 불안한 듯 내게 다시 한번 되물었다.
“진짜지……?”
“응, 진짜로.”
여전히 키메라의 눈에는 불안감과 경계감이 서려 있긴 했지만, 나와 얼굴을 맞댈 정도까진 경계심이 덜해진 것 같다.
내가 다시 한번 나의 무해함을 주장하자, 그제야 안심이 된 듯 키메라는 털 공을 풀고 양손을 모은 채로 쭈뼛쭈뼛 바위틈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런 키메라의 모습을 본 나는 말문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우선, 멀리서 봤을 때엔 제대로 보이지 않던 키메라의 외모가 상당히 아름다웠던 것도 있지만, 키메라의 몸에 피로 추정되는 체액들이 잔뜩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키메라의 몸 바깥쪽과 꼬리 부분을 뒤덮은 새하얀 털은 스스로 오염을 떨쳐 내는 기능이라도 있는 것인지 눈밭처럼 깨끗했지만, 백옥 같은 피부에는 새파란 체액이 잔뜩 달라붙어 있어서 굉장히 이질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본능적인 두려움을 자극하는 모습?
아리스에게 느꼈던 바로 그 포식자의 기운이 키메라의 몸 전체에서 물씬 풍기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서 키메라의 몸집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커다랗게 발달한 짐승의 손은 서로 모으는 것만으로 키메라의 몸 대부분을 가릴 정도였다.
나는 그런 키메라의 모습을 보며 잠깐 침을 꿀꺽 삼키고, 심호흡하며 각오를 다지고 키메라에게 방긋 웃어 보였다.
“응.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보니 좋네.”
사실은 굉장히 무섭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내가 적대적인 모습을 보여 주지 않자 키메라도 안심이 되는지 조금씩 내게 다가오며 내게 먼저 질문을 던져 왔다.
“너, 넌 누구야? 이, 인간. 맞지?”
“어. 인간이고. 내 이름은 잉간이야.”
“이름이…… 잉간?”
내 이름을 들은 키메라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다시 되물었다.
“이름이 잉간이라고?”
“응. 잉간인데?”
“이상한 이름이네…….”
“안 이상하거든?”
아니, 이름이 두 글자여서 좀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 정도면 평범한 이름 아냐?
부모님이 지어 주신 소중한 이름인데 말이야.
내가 살짝 목소리를 높인 걸 화났다고 받아들인 것일까?
키메라는 움찔 몸을 굳히며 내게 곧바로 사과를 해 왔다.
“미, 미안…….”
“아냐. 사과할 필요까진 없어. 정 미안하다면, 네 이름도 알려 주겠어?”
“내 이름?”
내 질문을 들은 키메라는 무언가를 생각해 내려는 듯 골똘히 고민하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자신 없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리…… 리…….”
“리?”
“리퀴드……? 뭐, 그런 이름인 거 같은데…….”
“그런 이름인 것 같은데?”
아니, 이름이 리퀴드면 리퀴드지, 리퀴드인 것 같은데는 뭐야?
나는 키메라의 대답에 의구심을 갖고 고개를 갸웃거렸고, 키메라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중얼거렸다.
“나, 나도 잘 모른단 말이야. 그냥, 내가 있던 곳에 그런 글씨가 쓰여 있었으니 그게 내 이름이겠거니 생각한 거니까.”
“흐음…….”
“왜, 왜 그렇게 쳐다봐?”
“아니. 네가 다른 사람 이름 가지고 이상하다고 말할 처지는 아닌 것 같아서.”
사람 이름이 어떻게 리퀴드일 수가 있지?
그런 식이면 이름이 잉간인 사람도 있겠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키메라, 아니. 리퀴드를 바라보자 리퀴드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버럭 외쳤다.
“아니, 내 이름 리퀴드 아니거든? 다, 다른 이름이거든?”
“다른 이름이면, 뭔데?”
“리, 리, 리…….”
“리?”
“……리키드?”
“그것도 구린데?”
“리키! 내 이름은 리키니까, 응!”
아무리 봐도 이 이름도 지금 막 생각해 낸 것 같지만, 그냥 넘어가자.
아무튼, 자신을 리키라고 주장하는 키메라는 이제 완전히 나에 대한 경계심을 푼 것 같았다.
물론 나 또한 리키와 대화하며 서서히 공포심이 누그러졌고 말이다.
역시, 대화하기 전에 서로 얼굴을 마주쳤을 때가 가장 공포심이 강하지, 서로 대화하면 저절로 공포심이 줄어든다.
물론 여전히 포식자와 피식자 사이의 본능적인 두려움은 남아 있지만 말이다.
“그래, 그래서 리키는 여기에 왜 있는 거야?”
“어? 음, 그냥 정신을 차려 보니 여기였는데?”
“오고 싶어서 온 건 아니란 말이지?”
“당연하지. 이런 추운 곳에 좋아서 왔을 리가!”
그러고 보니 뱀은 냉혈동물이었나?
리키가 뱀처럼 냉혈동물인지는 몰라도, 추위에 약한 것처럼 보이긴 하네.
그렇게 투덜거린 리키는 마치 한풀이를 하듯 나와의 거리를 스멀스멀 좁히며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한탄하기 시작했다.
“원래 있던 곳은 좀 좁기는 해도, 밥도 제때 챙겨 주고 춥지는 않았는데. 어느 날 자고 일어나 보니까 여기에 떨어져 있었단 말이야…….”
“고생이 많았겠네.”
“응! 진짜, 처음에는 엄청 춥고, 막 체온도 떨어지고 그래서 진짜 죽는 줄 알았는데. 내가 있던 방에서 어떻게든 버티다가, 버티다가 더는 무리여서. 근처에 지나가던 녀석을 하나 사냥했는데…….”
“사냥했는데?”
“그 이후부터 막 몰려오고, 깽판 치고……. 진짜, 진짜 매일같이 몰려와서…….”
어느덧 리키는 내 곁에 똬리를 틀고 앉아서 자신이 신세를 한탄하기 시작했다.
낯선 곳에 갑자기 떨어졌을 때의 기분은 나도 알고 있기에,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리키의 한탄을 들어 줬다.
“그, 그래도 좀 살 만하다고 생각되니까 이 나쁜, 나쁜 곳은 막. 나를 막 괴롭히려고 이상한 것도 보내고…….”
“이상한 거?”
“그, 너도 봤잖아? 그 커다란 놈…….”
“아…… 그거?”
아까 리키가 사냥하던 그 찹쌀떡을 말하는 거겠지?
그나저나 그때부터 내가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어?
진짜 말도 안 되는 감각이네.
“용기를 얻어서 밖에 한번 나가 봤는데. 자고 있다가 그게 갑자기 나타나서 나를…….”
꿀꺽.
그 찹쌀떡이 어떤 식으로 먹이를 소화하는진 모르겠지만, 그리 좋은 경험은 아닐 게 분명하다.
“그 녀석을 몸 안에서 뚫고 나올 수 있어서 망정이지, 그대로 꼼짝없이 먹힐 뻔했다고…….”
“고생했네. 진짜.”
“그러니까. 진짜, 여기 엄청 싫어.”
리키는 그렇게 말하며 이젠 꼬리로 슬며시 내 팔을 휘감기 시작했다.
“저기, 리키. 꼬리가…….”
“아, 미안. 추, 추워서 그런 건데. 조금만 잡고 있으면 안 돼?”
“뭐…… 조금 정도는.”
리키의 부탁에 내가 수긍하자, 리키의 꼬리가 더욱 내 팔에 찰싹 밀착한다.
누군가에게 투정을 부릴 수 있어서일까?
리키의 표정은 처음보다 한결 나아진 상태였다.
나는 최대한 가려야 할 곳 대신 필요 없는 곳을 가린 리키의 가슴팍을 바라보지 않으며 슬쩍 리키에게 말했다.
“크흠, 저기. 리키?”
“응?”
“그래서 말인데. 내가 이곳에 온 건 사실 너를 데려가기 위해서거든?”
“나를 데려가기 위해서?”
“응. 좀 더 안전한 곳으로. 아마도, 네가 원래 있던 곳 같은 곳?”
“내가 원래 있던 장소……?”
나는 슬쩍 리키에게 내가 온 목적을 이야기했다.
이거 어째 생각보다 더 쉽게 일이 풀릴 거 같은데?
그렇지만 리키는 내 말을 듣고는 표정을 굳히더니, 조용히 중얼거렸다.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거면 별로 가고 싶지 않은데…….”
“응?”
“아, 아냐. 아무것도 아냐.”
어째 원래 있던 곳도 그리 좋은 환경이 아니었던 느낌이 든다.
뭔가 인간 농장 같은 곳에 있다가 이런 곳으로 흘러들어 오게 된 걸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고민하고 있자, 리키는 불안해하며 슬그머니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뭐, 원래 있던 곳으로 가기 싫으면 굳이 거기로 가지 않아도 돼.”
“지, 진짜?”
“응. 아마도 네가 원하는 곳으로 보내 줄걸?”
“다른 건 모르겠고. 일단 따듯한 곳이면 좋겠어…….”
나는 일단 리키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렇게 말했고, 리키는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그럼, 날 따라와 줄 수 있어? 여길 벗어나려면 다른 곳으로 가야 하거든.”
“여, 여길 나오라고?”
리키는 은신처를 떠나야 한다는 말에 난색을 표했지만, 곧바로 결의를 다지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그래. 여기가 좋아서 있었던 건 아니니까.”
나는 리키의 그런 중얼거림을 듣고 조심스럽게 리키의 꼬리를 풀고 천천히 구덩이 반대 방향으로 이동했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서 나는 리키에게 이리 오라는 듯 손짓했고, 리키는 조심스럽게 내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순조롭게 목적지까지 이동하나 싶었지만, 리키는 갑작스럽게 우뚝 제자리에 멈춰 섰다.
“왜 그래?”
“추, 추워……. 그리고. 어…… 무, 무서워…….”
“하나도 안 무서워. 괜찮아. 여기엔 널 해칠 게 하나도 없는걸?”
아니, 오히려 이 근방의 최상위 포식자인 것 같은데.
그렇지만 리키는 처음에 외출했을 때 잡아먹힐 뻔했던 일이 상당히 트라우마로 남았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긴 너무 춥고. 그, 그러니까. 그냥 나는 저 아래에서 기다리다가 네가 데리러 와 주면…….”
리키는 움직이지 않기 위한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고, 나는 그런 리키를 가만히 지켜보다 행동에 나섰다.
“그러니까, 나는 그냥……. 꺅?!”
조심스럽게 리키를 안아서 들어 올리자 리키는 새된 목소리로 비명 지르며 꼬리를 내 몸에 휘감았다.
상태 창이 내 근력을 강화시킨 덕분일까?
나는 가뿐하게 리키를 들어 올릴 수 있었다.
“이러면 이젠 안 춥지?”
나는 리키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렇게 물었고, 리키는 아무 말 없이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떨어지는 게 두려운 것인지 리키는 그대로 꼬리로 내 몸을 더욱 억세게 조이며 내게 달라붙을 뿐이었다.
리키가 먼저 각오를 다지고 움직이는 게 최선이었겠지만, 이대로 놔두면 리키가 그냥 저 아래에 계속 틀어박혀 있을 것 같으니 먼저 행동에 나섰다.
밖으로 나가는 게 두려워서, 나갈 기회가 있음에도 안에 틀어박히는 건 정말 좋지 않은 결정이니까.
“그으. 이, 잉간은 말이야. 잉간도 따듯한 거 좋아해?”
“따듯한 거? 추운 것보단 당연히 따듯한 게 좋지.”
“그, 그래? 나, 나돈데…….”
그렇게 리키를 품에 안아 들고 상태 창이 표시해 주는 목적지로 이동하는 동안 리키는 심심한 것인지 내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 댔다.
나 또한 그냥 걷기만 하는 건 지루했기에 리키와 대화를 하며 무료한 시간을 달랬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에포나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꽉 하고 내 발목을 깨물었다.
“왕!”
그 때문에 살짝 휘청거리자, 리키는 고개를 갸웃하며 내게 물어 왔다.
“왜 그래?”
“아니, 그냥 발을 잘못 내디뎌서…….”
에포나는 아직 리키를 받아들이지 못했는지 여전히 리키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감추며 슬쩍 뛰어올라 리키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에포나가 파고들어서 자극적인 부위가 더 강조되는 바람에 나는 최대한 아래로 시선을 돌리지 않으며 발을 놀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자, 다 도착하긴 했는데…….”
그렇지만 목적지는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평야처럼 보였고, 나는 내가 잘못 왔나 싶어서 다시 한번 상태 창을 열려고 했지만, 허공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개체명, 잉간. 인식되었습니다. 정보 은폐를 해제합니다.]
그러한 메시지가 떠오르는 것과 함께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글자들이 흩어지며 금속으로 지은 것 같은 막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딱 네 사람 정도만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작은 크기의 막사였다.
좋아, 이대로 리키와 함께 저 안에 들어가면 임무가 끝나려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막사 안으로 발을 옮겼고, 밖에서 보이는 것보다 더 넓은 막사 안의 공간에 놀랐다.
밖에서는 네 사람밖에 탑승할 수 없을 것 같던 막사가 안에 들어오자 거의 운동장 크기의 공간을 드러낸 것이다.
“밖보다 안이 크네…….”
나는 무심코 어딘가의 공중전화 박스 안에 들어갔을 때 해야 할 것 같은 대사를 내뱉었고, 그와 함께 또다시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주 임무 달성. 부가 임무를 시작합니다.]
부가 임무?
아, 그러고 보니 다른 인간들의 정착지가 이곳에 있다고 했었지?
아마 그 사람들을 데려오라는 임무겠지?
[제한 시간 내에 최대한 많은 인간들을 구출하세요.]
[임무 지역의 위치가 표시됩니다.]
“응……?”
그런데 어째, 임무의 내용이 심상치 않다.
내가 부가 임무의 내용에 당황하는 사이, 시야 한구석에 불길한 시스템 창이 하나 떠올랐다.
[제한 시간 : 6일 23시간 59초]
128화 잉간이 매드 무비(이게 마지막일 수 있음)
[제한 시간 : 6일 23시간 59초]
저 제한 시간이 다 지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뭔진 모르겠지만 구조라는 단어를 쓸 정도니 그리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지진 같은 게 일어나려나?
어쨌든, 저 제한 시간이 지나기 전에 빨리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시야 한구석에 나타난 목적지의 위치로 눈을 돌렸고, 막사의 창문 너머로 엿보이는 풍경을 보고 낮은 신음을 흘렸다.
“어…….”
인간 거주지는 이 막사가 있는 평야 너머, 공허한 허공을 지나 위치해 있던 것이다.
리키를 잠깐 안에 놔두고 막사를 빠져나와 제대로 목적지를 확인해 보자, 내가 지나야 할 길이 두 눈에 들어왔다.
“우주……?”
부유섬의 끝자락에 도착하면 이런 풍경이 보일까?
차이점이 있다면 내 앞에 펼쳐진 것은 바다나 하늘이 아닌 우주의 허공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조심스럽게 절벽의 끝자락에 서서 바닥을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우주를 향해 던져 본다.
우주를 향해 내던져진 돌멩이는 이곳의 미약한 중력을 뿌리치고 그대로 허공 속으로 사라져 갔다.
지평선이라고 해야 할까?
텅 빈 허공의 저 건너편에 희미하게 섬 같은 것이 보인다.
아마 저기까지 어떻게든 이동해야 하는데, 우주를 수영해서 건너갈 수는 없잖아?
저길 어떻게 건너가야 하지?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 내가 한숨을 내쉬던 그때, 내 뒤편에서 스르륵 리키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에서 쉬고 있지, 뭐 하러 나왔어?”
“호, 혼자 있기는 좀 싫어서…….”
리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내 한쪽 다리에 자신의 꼬리를 휘감았다.
혼자 있는 게 두려운 리키의 마음을 알기에 나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리키가 달라붙는 걸 허용했다.
“뭘 그렇게 보는 거야?”
“저 너머로 가야 한다고 해서. 어떻게 갈지 고민하고 있었지.”
“저기?”
리키는 내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나에게 말했다.
“저기는 너무 위험해 보이는데?”
“위험하니까, 거기에서 사는 사람들도 데려와야지.”
“내가 말한 건 그 뜻이 아닌데…….”
내가 가만히 저곳으로 넘어갈 방법을 찾고 있던 그때, 보기 좋은 시스템 메시지가 하나 떠올랐다.
[사용자 지원이 허가되었습니다. 텔레포트 마커를 활성화합니다.]
텔레포트 마커라면, 설마?
내가 그런 기대를 가지는 것과 함께 내 옆에 일렁이는 아지랑이 같은 것이 생겨났다.
안개 같기도 하고, 일렁이는 물 표면 같기도 한 기묘한 외관의 무언가.
이게 아마 그 텔레포트 마커인가 하는 거겠지?
자, 그럼 흐름상 이 텔레포트 마커는 저 너머의 땅과 이어져 있겠고, 이러면 어떻게 저기로 넘어가느냐가 해결된다.
그럼 이제 남은 문제는 얘를 저곳에 데려가느냐인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가만히 리키를 응시했고, 리키는 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바라봤다.
“나는 지금부터 저기로 갈 건데,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줄 수 있겠어?”
“여기서? 기다리라고? 혼자?”
내 말을 들은 리키는 질색하며 두고 가지 말라는 듯 측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기, 기다리지 못할 건 없는데. 그래도 이왕이면 같이 가는 게 좋지 않아? 혼자는 적적하기도 하고…….”
“혹시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지.”
“나, 나보다는 네가 더 위험해 보이는데…….”
윽.
하긴, 리키에게 위험한 곳이면 당연히 나에게도 위험한 곳이겠지.
오히려 리키에게 안전한 곳이 내겐 위험한 곳일 가능성도 있다.
“어디 마음대로 혼자 다니면 안 된다?”
“응. 옆에 꼭 붙어 있을게!”
결국 나는 리키와 함께 인간 정착지로 향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러면 혹시 모르니까, 잠깐만 가까이 붙어 줄래? 혹시 다른 곳으로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응!”
꼬리만 내 다리에 휘감고 한 발자국 정도 물러서 있던 리키는 내 말을 듣고 내게 다가왔지만, 무언가 생각난 듯한 표정을 하며 내게서 떨어졌다.
“아. 음…….”
“왜 그래?”
나는 그런 리키의 행동이 의문스러워 고개를 갸웃했고, 리키는 고개를 푹 숙이며 팔을 양옆으로 펼쳤다.
“그, 아까처럼. 그렇게…….”
“아까처럼?”
“그. 그거. 아까 안아 줬던 것처럼…….”
리키가 팔을 펼치면서 그대로 드러난 맨몸도 그렇고, 그 수줍은 행동은 참 파괴력이 강했다.
나도 모르게 저절로 침이 꼴깍 넘어가는 것을 느끼며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조심스럽게 리키를 안았다.
“이럼, 됐지?”
“응…… 좋아.”
리키는 내 품에 안긴 채 그대로 꼬리를 내 몸에 둘둘 감아 딱 달라붙었고, 나는 휘청거리는 걸음을 주의하며 텔레포트 마커 안으로 발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의식의 불연속 같은 쓸모없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은 채 그다음 순간 나는 다른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분위기는 맨 처음 섬과 별로 다른 것 같지 않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가만히 마커가 반짝이는 방향을 바라봤고, 의문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어?”
마커가 반짝이는 구역의 뒤편에는, 상당히 익숙한 형체들이 있었던 것이다.
마치 밤하늘을 수놓은 별자리처럼 끝없이 이어진 글자들.
저건 평범한 정보나 글자들이 아니다.
저건 클라인과 같은 종족이다.
당연하겠지만 아직 클라인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내겐 단순한 글자들의 나열과 뭉치로 보일 뿐이지만, 그 수가 상당히 심상치 않다.
지금까지 내가 봤던 주인들보다도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인간 정착지 건너편에 몰려 있었다.
“(◣_◢)!”
“(◣_◢)!”
“(◣_◢)!”
어째서인진 몰라도, 잔뜩 성난 것 같은 감정을 뿜어내면서 말이다.
무엇이 도대체 저 사람들을 저렇게 화나게 만든 걸까?
저 너머에서부터 닥쳐오는 어마어마한 감정의 격류에 내가 놀라움을 넘어 두려워하던 그때, 내 품에 안겨 있던 리키가 스르르 바닥으로 내려왔다.
“으…… 시끄러워…….”
리키에게도 저 목소리가 들리는 것일까?
아니, 리키는 저 목소리만을 듣고 있겠지.
블랑카가 클라인의 목소리에 담긴 감정을 느끼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리키에게 지금 이 감정의 격류는 단순한 치직거리는 잡음으로 느껴질 뿐이겠지?
“왕!”
내가 감정의 격류에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조금 괴로워하고 있자, 에포나가 폴짝 뛰어올라 내 목에 목도리처럼 달라붙었다.
내게 쏟아지는 감정의 격류를 일부분 에포나가 먹어 치운 걸까?
나는 한결 편안해지는 것을 느끼며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흠. 자, 이제 우리는 저 아래로 내려갈 건데.”
“저 아래?”
나는 하늘에 새겨진 사람들을 의식 한구석으로 치워 버리고 마커가 위치한 비탈길 아래의 공간을 가리켰다.
비탈길 아래, 일종의 분지 같은 지형이 형성된 곳에는 어떤 재료로 만들었는지 짐작조차 안 되는 움막이 여럿 늘어서 있었다.
움막들은 빛을 뿜어내는 장치를 중심으로 마을을 이루고 있었고, 몇 사람들이 무언가 일을 하는 모습이 조금이나마 엿보인다.
“쉽게 내려가긴 힘들 것 같은데…….”
“……그러게?”
그냥 비탈길을 내려가면 될 줄 알았지만, 어째 그것도 쉬워 보이지 않는다.
이곳에서 마을로 내려가는 비탈길은, 상당히 기괴한 모습으로 비틀려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주위의 새하얀 눈밭과는 확연한 다른 색을 자랑한다.
갈색은 기본이고, 붉은색, 파란색, 심지어 초록색까지 사방에 퍼져 있다.
도대체 왜 눈밭이 저런 색인지는 둘째 치고, 그것만 있다면 내가 이런 말을 꺼내진 않을 것이다.
정체 모를 무언가.
인간을 닮았으면서도, 인간이 아닌 것 같은 생기 없는 형상들이 마치 비디오가 되감기듯 반복적인 행동을 하며 군데군데 배치되어 있었다.
딱 봐도 가까이 다가가면 그리 좋은 일이 일어날 것같이 생기지 않았는데, 문제는 그런 녀석들이 사방에 널려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몇몇 구역은 아예 완전히 글자들로 변해 가기 시작한 곳도 존재하고,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다.
“일단, 내려가 보긴 해야 하는데…….”
내려가긴 해야 하는데, 도저히 저기를 그냥 내려갈 용기가 나지 않는다.
저걸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거지?
리키와 내가 기묘한 비탈길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던 그때, 에포나가 폴짝 내 목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당당한 발걸음으로 근처의 초록빛 눈밭으로 걸어가더니, 그대로 초록빛을 먹어 치웠다.
“왕!”
에포나가 초록빛을 먹어 치운 눈밭은 원래의 새하얀 눈밭으로 돌아왔고, 에포나는 자기만 믿으라는 듯 나를 바라보며 짧게 짖었다.
“이, 잉간? 저기. 갑자기 초록색이 사라졌는데……?”
내게는 에포나가 초록빛을 먹어 치우는 모습이 보였지만, 리키에게는 그냥 갑자기 초록빛이 사라진 것으로 보였는지 리키는 겁먹은 목소리를 냈다.
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에포나의 존재를 설명하려면 꽤 귀찮을 것 같고, 리키가 믿지 않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그냥 적당히 둘러대자.
“어, 음. 내가 한 거야.”
“잉간이? 그럴 리가 없는데?”
리키는 내가 했다는 고백을 듣고는 그럴 리 없다는 확연한 믿음이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무튼! 내가 한 거야! 걱정하지 말고 따라와!”
“아, 응…….”
나는 민망함을 감추려는 듯 강하게 외치며 앞장서서 비탈길로 향했고, 리키는 내 어깨를 붙잡은 채로 내 뒤를 따라왔다.
“아해가달려가오아해가달려가오아해가달려가오아해가…….”
“왕!”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외침을 반복하는 기괴한 형상의 무언가도 에포나가 먹어 치우고.
땅에서 솟아난 손들도 에포나가 먹어 치우고, 그냥 이상하게 보이는 것들은 에포나가 전부 먹어 치우고 있었다.
오랜만에 에포나가 배탈이 나지 않을까 걱정될지경으로 포식할 즈음, 나와 리키는 마을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기묘하게도 지금껏 오며 나무란 나무는 단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지만 나무로 지어진 목책 앞에 나와 리키는 멈춰 섰고.
나와 리키가 다가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인지 마을 안이 소란스러워지며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히익……!”
누군가가 점점 가까이 다가올수록 리키는 겁을 먹고 내 뒤로 몸을 숨겼다.
“왜 그렇게 무서워해?”
“무, 무섭잖아. 잉간은 저게 안 무서워?”
“다 같은 사람인데 뭐가 무서워. 그렇게 무서우면 나는 어떻게 따라다녀?”
나는 리키의 긴장을 풀어 줄 생각으로 리키에게 말을 걸었지만, 리키는 내 마음을 후벼 파는 말을 돌려줬다.
“그치만 잉간은 별로 안 무서운걸. 막, 몸에서 일렁거리는 것도 없고…….”
“……그래?”
나라고 마력이 없고 싶어서 마력이 없는 게 아닌데.
진짜 마력이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그, 그래도 그 덕분에 다른 사람하고 구별하기 쉬우니까…….”
어쩐지 상황이 반대가 되어서 내가 리키의 위로를 듣던 와중, 마침내 마을에서 보낸 사람이 서로의 얼굴이 보일 거리까지 접근해 왔다.
“엘프?”
마을에서 보낸 사람의 첫 인상은 엘프였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엘프의 이미지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외모.
하지만 무언가 다른 것이, 초록색 피부와 매부리코가 눈에 띈다.
마치 엘프와 고블린을 하나로 합쳐 놓은 것 같은 외형이다.
거기에 더해서 자세히 보니까 눈도 초록색과 붉은색으로 각각 다른 오드 아이다.
자, 그럼 어떻게 한담?
일단 자기소개를 한 다음에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면 되려나?
나는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첫 대화를 어떻게 할지 짜고 있었지만, 내가 시뮬레이션을 완성하는 것보다 빠르게 초록색 엘프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너희지? 너희가 살인범이지?”
“……네?”
아니, 무슨 마피아 게임도 아니고 이게 뭔 말이야?
129화 [생명도감] 스노우 스톤 인간 정착지의 일상
“너, 너희가 살인범이지?”
“……네?”
초록빛 피부의 엘프는 잔뜩 흥분된 기색으로 다짜고짜 우리에게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다, 다 알아. 너희가 들키지 않게 죽이고선 나한테 다 뒤집어씌우려 한 거.”
너무 당황스러운 엘프의 말에 도대체 어디까지 헛소리를 하려나 싶어 나는 반박하지 않고 가만히 엘프를 바라봤다.
마약 같은 거라도 했나?
아무리 봐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따, 따라와. 내가, 내가 살인범이 아니라 너희가 살인범이잖아. 자, 빨리!”
그러더니 엘프는 나와 리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목책을 열고 뚜벅뚜벅 마을로 되돌아갔다.
리키와 나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 소곤거렸다.
“일단 따라가는 게 맞겠지?”
“상태가 이상해 보이는데, 그냥 무시하면 안 돼?”
리키는 불안한 표정으로 내게 그렇게 제안했지만, 마을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건 확정이니 일단 저 엘프의 뒤를 따라가야 한다.
내가 그렇게 리키와 이야기를 나누며 잠깐 멈춰 선 사이, 초록 엘프는 우리를 돌아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빠, 빨리 따라와! 빨리……!”
심상치 않은 엘프의 표정에 나는 더 이상 엘프를 자극하지 않기로 하고, 순순히 엘프의 뒤를 따라 마을 내부로 진입했다.
가까이서 본 인간 마을의 풍경은 상당히 기묘했다.
일단 온갖 재료들이 섞여서 만들어진 움막은 그럴 수도 있다고 쳐도, 사방에 널브러진 비닐로 보이는 쓰레기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다.
아무리 봐도 이 마을에서 스스로 비닐봉지를 만들 능력이 있어 보이진 않는데.
불안한 걸음걸이로 마을 중심으로 향하는 남자의 뒤를 따라가며 조용히 그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상태를 관찰한다.
이런 오지에서 생활한다면 당연히 영양분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할 텐데,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는 영양실조의 흔적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잘 먹어서 살이 뒤룩뒤룩 찌기 시작한 사람들도 몇 명 보일 정도다.
어딘가 밖에서 물자를 지원받고 있는 걸까?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주위를 살피던 사이, 초록 엘프는 마침내 마을 중앙의 빛을 발산하는 정체 모를 기계 주위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내가, 내가 데려왔어! 이 새끼들이 범인이야!”
“저 사람들이 꼭 범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
“그래. 정황상 모든 증거는 네가 범인이라고 지목하고 있다고.”
“나는. 나는 범인이 아니라고! 내가 마고를 죽일 이유가 없잖아!”
그렇지만 어째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은데?
초록 엘프는 다급한 표정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하지만, 다들 초록 엘프의 주장을 그리 믿지 않는 눈치다.
“내가 한 게 아니라. 저 녀석들이 한 거야! 내가 한눈을 판 사이에 저 녀석들이 안젤라를…….”
“그만해. 그때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는 건 너도 인정하는 사실이잖아.”
“그렇긴 하지만……! 저 바깥에서 온 녀석들이니 몸을 숨기는 것쯤은…….”
초록 엘프가 뭐라 떠들면서 기계 주위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끈 덕분에 아무도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
리키는 사람들이 많아서 두려운지 아예 내 몸에 착 달라붙은 채로 내 뒤에 몸을 숨겼다.
그동안 다시 한번 마을의 모습을 살피는데, 멀리서 보던 것보다 인구가 더 많다는 게 눈에 들어왔다.
당연하겠지만 이곳에서 농사를 지을 수도 없으니 대부분 집 안에 틀어박혀 있어서 멀리에서 봤을 땐 대부분 잘 보이지 않았다.
집 안에 틀어박혀 있는 사람들도 영양 상태가 그리 나빠 보이진 않고, 심지어 어린아이들과 아기까지 보일 정도다.
이 정도로 커다란 마을이 이런 오지에서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 거지?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수렵 생활을 하는 것 같은데…….
내가 그런 의문을 품으며 마을을 관찰하던 사이, 기계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내게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다들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어서요. 그린티는 특히 더욱요.”
내게 말을 건 남자는 염소 같은 역관절 다리와 머리엔 산양의 뿔을 지니고, 길게 땋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샐쭉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살짝 빈정거리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살인범을 찾느라 정신없나 보죠?”
“뭐, 그렇죠. 워낙 참혹한 일이어서요.”
남자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긁적였고, 내게 손을 뻗으며 자기소개를 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12사도의 일원인 테틀리라고 합니다.”
“……12사도요?”
12사도?
그건 또 뭔 중2병 같은 호칭이야?
내가 그런 무례한 생각을 하며 테틀리를 바라보자 테틀리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신님께 힘을 받은 선택받은 사람들을 그렇게 부릅니다.”
그리고 난 테틀리의 대답을 듣자마자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아, 또 광신도 녀석들이구나.
어떻게 된 게 만나는 사람들마다 정상인 아니면 광신도밖에 없어?
유일하게 만났던 정상인들도 그렇게 멀쩡해 보이지 않고 말이야.
나는 전에 만났던 마법 소녀 아저씨를 떠올리며 적당히 인사에 화답했다.
“어, 만나서 반가워요. 저는 잉간이라고 해요.”
“잉간……? 특이한 이름이시네요. 뒤쪽의 아가씨는……?”
“히익……!”
테틀리는 내 등 뒤에 숨어 있는 리키에게 한 발자국 다가가며 그렇게 질문했고, 리키는 내 몸에 휘감고 있던 꼬리를 풀며 테틀리를 후려쳤다.
“어, 어?”
당연히 테틀리는 강력한 리키의 꼬리 휘두르기를 맞고 뒤로 날아가서 그대로 맨바닥에 처박혔다.
“리키?!”
나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리키를 바라봤지만, 리키는 완전히 얼어붙은 표정으로 입을 딱 다물고 몸을 부들부들 떨 뿐이었다.
아니, 아무리 무섭다고 해도 이렇게 다른 사람을 공격하면 안 되지!
이렇게 되면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기 더 어려워지는데…….
“아이고, 아가씨가 앙탈이 좀 심하네요?”
그렇지만 테틀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방긋 웃으며 바닥에서 일어났다.
리키가 힘 조절을 해서 친 것 같지는 않은데 테틀리는 그 어떠한 대미지도 입은 것 같지 않은 모습이다.
문득, 테틀리가 말했던 12사도의 뜻을 떠올린다.
신에게 힘을 부여받은 선택받은 사람들이라고 했지?
그렇다면 그 힘이란 아마도.
“……상태 창.”
[개체명]
-잉간■
[생체 정보]
-마력 : 감지되지 않음
-건강 상태 : 양호, 약간의 정보 오염 감지됨
-예상 전투력 : 10등급
[조언자의 한마디]
-물리 면역이 부여된 상태지만, 정신이나 정보계 공격은 막아 낼 수 없습니다. 높은 문명 레벨과의 전투는 피해 주세요.
아마, 이거겠지.
상태 창이 있다면 웬만한 상황은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상대도 상태 창을 가진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잘못해서 마을 사람들을 자극해서 싸우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겠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리키의 머리에 손을 올리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희 애가 겁이 많아서…….”
“아니에요. 뭐, 라미아에게 섣불리 다가간 제가 부주의했죠.”
다행히도 테틀리는 리키의 행동에 별다른 감정을 가진 것 같지 않다.
어휴, 시작부터 일이 꼬이지 않아서 다행이다.
“리키. 사과하고 인사해야지.”
“……미, 미안해요. 리키라고 해요.”
여전히 리키는 내 뒤에 숨어서 굳은 표정으로 짤막하게 인사와 사과를 건넸고, 테틀리 또한 가볍게 웃으면서 리키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런 해프닝이 벌어진 사이, 기계장치 근처에서 벌어지던 말다툼도 끝이 난 듯 보였다.
“그린티. 그렇게 아니라고 해도 그 상황에서 마고를 죽일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었어.”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는걸?!”
그린티가 필사적으로 외쳐 보지만 그 누구도 그린티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다.
“그린티. 넌 추방이야.”
그린티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지듯 추방 선언이 떨어지고, 그린티는 부들부들 떨며 땅을 내려다본다.
결국 그린티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 질질 끌려서 마을 밖으로 나간다.
그 일련의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테틀리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저 사람도 12사도 중 한 사람인가요?”
“그린티를 말하는 거라면. 그렇죠. 같은 동료라고 생각했는데, 동료를 죽여 놓고 끝까지 거짓말을 하는 모습을 보니 정이 다 떨어질 지경이네요.”
“저렇게 주장할 정도면 정말 범인이 아닌 거 아니에요?”
그런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그린티의 모습은 너무나도 절박했다.
나는 제일 먼저 든 의문을 테틀리에게 말했지만, 테틀리는 고개를 저으며 내 의견을 단칼에 부정했다.
“마고가 죽을 당시 마고와 함께 있던 건 그린티뿐이었어요. 그건 모두가 동일한 증언을 하고 있으니 확실해요.”
“그렇지만 그린티 말대로라면 마고를 죽이고 그린티에게 뒤집어씌운 다른 범인이 있을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그건 불가능해요.”
“어째서요?”
나는 어째서 테틀리가 이렇게 확신을 가지는 건지 의아했지만, 잠시 후 이어진 테틀리의 말에 저절로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이 근방에서 12사도를 죽일 수 있는 건 같은 12사도밖에 없으니까요.”
“아…….”
하긴, 상태 창을 가지고 있는데 다른 사람한테 죽을 리 없지.
무직 백수도 손에 넣기만 하면 재벌이 되고 세계관 최강자가 되는 게 바로 상태 창 아니던가?
“거기에 더해서, 마고의 시체는 완전히 으스러진 상태였어요. 만약 다른 사람이 죽였다고 해도, 그 정도의 힘을 낼 수 있을 리 없죠.”
이렇게 들으면 들을수록 그린티가 범인이 아닌 게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다.
“12사도가 10사도가 됐네요.”
“금방 신님께서 새로운 동료를 선택해 주실 겁니다.”
그렇게 내가 이 일련의 사건에 대해 짤막한 감상을 남기고, 이젠 테틀리가 역으로 내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잉간 씨하고 리키 씨는 여기엔 무슨 일로 오셨나요? 아니, 어디서 오셨나요?”
“어, 그게 설명하자면 조금 복잡한데 말이죠.”
여기서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지?
그냥 사실대로 말하면 의외로 다들 내 말을 잘 들어주지 않을까?
아니면 감히 신을 모독한다고 화내진 않을까?
여러 가지 계산이 머릿속에서 굴러가고, 나는 무난한 대답을 골랐다.
“그. 여러분들이 신께 선택을 받은 것처럼 저도 비슷한 걸 받아서요.”
“그래요?”
“네. 예언, 같은 건데 말이죠. 그게 좀 안 좋은 이야기여서요.”
“안 좋은 이야기라면?”
“음…… 7일 내로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재앙이 일어난다?”
“……재앙요?”
“무슨 재앙인지는 몰라도 그리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진다는 건 확실해요.”
[제한 시간 : 6일 22시간]
나는 시야 한구석에서 빨갛게 점멸하고 있는 제한 시간을 바라보며 그렇게 대답했다.
내 이야기가 믿기지 않는지 테틀리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여서 잘 믿기지 않네요.”
“그러실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믿으셔야 해요.”
뭔가 종말론을 설파하는 사이비 교주가 된 느낌이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설득해 봐야지.
이곳에는 괴담 동아리가 없으니까.
테틀리는 내가 강하게 주장하자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나를 이끌고 한 움막으로 걸어갔다.
“일단 이건 저 혼자서 결정할 문제가 아닌 것 같네요. 제 동료들에게도 이 이야기를 들려주시겠어요?”
“네, 그러죠.”
“민트! 이리 와 봐! 손님이 모두에게 할 이야기가 있대! 사도들을 모두 데려와!”
테틀리는 민트라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다른 사도들을 소집했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사도들을 설득하려고 했다.
일단 결과부터 말하자면, 당연하게도 사도들을 설득하는 건 실패했다.
그리고 민트가 죽었다.
130화 [인간 애호 협회] 스노우 스톤의 불쌍한 인간들을 도와주세요!
민트, 그레이, 테틀리, 타조, 아일레스, 립톤, 아마드, 포르테, 리스톤, 타라.
움막 안에 모인 12사도들의 이름이다.
뭐, 12사도는 아니고 10사도로 줄어들긴 했지만 말이다.
어찌 됐든 움막 안에 모인 사도들에게 테틀리에게 말한 것과 같은 이야기를 했고, 사도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니까, 당신 말을 요약하자면…….”
“여긴 위험하니까, 다른 곳으로 이주하자는 말이지? 신님을 들먹인 걸 빼고 생각하면 말이야.”
“뭐…… 그렇죠.”
내 설명이 모두 끝나자, 사도들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저마다 한마디를 던지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민트가 운을 띄웠고, 이어서 그레이가 내 설명을 간결하게 요약했다.
뭐, 살점을 다 도려내고 나면 저렇게 요약할 수 있겠네.
대부분의 사도들의 표정이 썩 진지해 보이는데, 어쩌면 바로 설득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그런 희망을 가지며 가만히 사도들을 바라봤지만, 당연하게도 그런 희망은 헛된 소망일 뿐이었다.
“정확하게, 일주일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데?”
“그건…….”
모른다.
그냥 위험 지역에서 벗어나라고만 시스템이 경고를 보낼 뿐이니까.
나는 민트의 날카로운 질문에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고, 그러자 민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기본적인 정보조차 주지 못하면 너를 믿을 수가 없어. 일단 너희가 어디서 왔는지조차 모르는데.”
“그, 신님들이…….”
“네 말이 사실이라는 증거가 있어? 말로만 신님이 보냈다고 하는 건 나도 할 수 있어. 확실한 증거를 보여 줘.”
“어, 음…….”
확실한 증거.
내가 저들에게 신들이 보내서 온 사람이라는 걸 입증할 만한 무언가.
내가 저들과 다른 존재라는 걸 밝힐 만한 무언가.
그 무언가가 내게 있는지 나는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없었다.
마법도 쓰지 못하는 녀석이 신의 사자라고 하면 지나가는 개가 웃겠다.
그나마 증거라고 할 수 있는 건 상태 창밖에 없는데, 문제가 있다면 상태 창은 나한테만 보인다는 것이다.
결국 제대로 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 나는 사도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그래도 만약 진짜로 신님이 보내는 경고라면 어떻게 해? 진짜로 여기에 있다가 위험한 일이 벌어지기라도 하면?”
“그렇다고 누군지도 모르는 낯선 사람을 따라가서 전혀 모르는 장소로 떠나자고? 신님들의 가호를 받을 수 있는 이곳을 버리고?”
“신님이 보낸 게 맞는다면, 신님의 곁으로 가는 건데 걱정할 필요가 있어?”
“만약 신님이 보낸 사람이 아니라면? 나는 저 사람 못 믿어. 마력도 느껴지지 않는데, 정말 신님이 보낸 사람이 맞긴 해?”
테틀리를 필두로 한 몇몇 사도들은 내 편을 들었지만, 민트와 같은 대부분의 사도들은 내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그렇게 내가 뭐라 끼어들 틈도 없이 사도들은 서로 갑론을박을 나눴고,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그래, 혹시 모르니까 방비 태세하고 순찰을 더 철저히 하는 것으로 하고, 최악의 사태를 대비해서 바로 도망칠 수 있게 짐을 싸 두는 거면 되지? 다들, 불만 없지?”
“응. 뭐, 그 정도면.”
“그 정도가 무난하다고 생각되네.”
그렇게 사도들의 회의는 끝이 나 버렸고, 내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으, 뭔가 사도들을 설득할 만한 증거를 제시하고 싶은데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줄 만한 증거가 없으니.
그렇게 사도들은 하나둘씩 움막을 떠나 밖으로 나갔고, 나 홀로 움막 안에서 한숨을 내쉬는 사이, 테틀리가 내게 다가왔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 일주일이 지나기 전에 신뢰를 쌓으면, 다른 사도들도 이야기를 들어줄 겁니다.”
“역시 그게 답이겠죠?”
역시, 적당히 신용을 쌓은 뒤에 다시 말을 꺼내야 하려나?
그렇지만 어떻게 해야 이 마을 사람들이 나를 믿어 주려나?
일단 적당히 마을 사람들과 섞여서 일상을 보내는 수밖에 없으려나?
하지만 일주일이라는 제한 시간이 또 마음에 걸린다.
과연 내가 일주일 만에 이곳 사람들의 신뢰를 살 수 있을까?
“저기, 테틀리 씨?”
“네?”
“테틀리 씨는 어째서 제 이야기를 믿어 주셨죠?”
“뭐,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뇨?”
“마력도 없는 사람이 저 지옥을 멀쩡하게 빠져나올 수 있을 리 없잖아요? 뭐가 됐든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는 거니까요.”
테틀리는 그렇게 말하며 에포나가 뚫어 줬던 비탈길을 가리켰다.
아, 저곳이 위험하다는 건 이 사람들도 이해하고 있구나?
“그리고, 한 사람 정도는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하니까요.”
“뭐, 맞는 말이네요.”
그러니까 나를 완전히 믿는 건 아니지만,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 아예 허투루 듣지도 않는다는 거지?
그래, 이렇게라도 내 이야기를 무시하진 않아 주니 다행이다.
“그럼, 제가 마을을 안내해 드릴 테니 따라오시겠어요? 적어도 일주일은 여기서 머무르실 생각이잖아요?”
“어, 그렇죠.”
“마고와 그린티가 사라져서 마침 움막이 남으니 잠잘 곳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겠네요.”
테틀리와 함께 움막에서 나오자, 움막 바깥에 딱 붙어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리키가 반색하며 내게 다가왔다.
리키는 테틀리를 보고 또다시 움찔했지만, 이제는 적당히 익숙해졌는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내 옆에 착 달라붙었다.
“이야기는 잘 끝났어?”
테틀리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지 않은 걸까?
리키는 내 귀에 얼굴을 딱 붙이고 소곤소곤 속삭였다.
리키의 숨결과 목소리가 귀를 만지작거리며 낯간지러운 느낌이 온몸을 간지럽혔지만, 나는 꾹 참으며 슬쩍 반격했다.
“그다지. 당연하겠지만, 내 이야기를 믿는 사람이 별로 없더라.”
리키가 내게 했던 것처럼 나도 리키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고, 리키는 흠칫 떨며 몸을 뒤로 뺐다.
“그, 그래?”
“응. 그래서 일단은 신뢰를 얻기 위해서 며칠은 여기서 같이 생활해야 할 거 같은데.”
“음…… 상관없어.”
어째 자기는 움막 밖으로 나가지 않을 거라는 선언으로 들리는데?
뭐, 리키의 성격상 주민들과 제대로 소통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으니 리키는 집에 놔두는 게 최선이겠지.
그렇게 리키가 수긍하고 나와 리키는 테틀리의 안내를 받아 마을 변두리에 위치한 움막으로 향했다.
사도들이 사용하던 움막이어서 그럴까?
다른 곳의 움막보다 더 시설이 괜찮은 느낌이 든다.
심지어 안에는 침대하고 따듯한 물이 나오는 화장실까지 있네?
“이런 건 어떻게 사용하는 거예요? 따로 동력을 공급받는 곳이 있어요?”
“신님들이 선물하신 기계가 에너지를 공급해 주거든요.”
“기계? 아, 마을 중앙에 있던…….”
“네. 그게 없다면 저흰 아마 몇 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죽을 겁니다.”
마을 중앙에서 밝으면서도 눈부시지 않은 기묘한 빛을 뿜어내고 있던 그 기계를 말하는 것이겠지.
일종의 발전기려나?
리키는 움막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그대로 침대 안으로 파고 들어갔고 이불을 둘둘 감아서 자신만의 은신처를 완성했다.
“잠깐 나갔다 올게.”
“빠, 빨리 와야 해……?”
“응. 그럴게.”
리키는 움막을 떠나는 내 뒷모습을 끝까지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웃으면서 리키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 움막을 나오자, 테틀리가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두 분이 참 사이가 좋네요.”
“네? 아니, 그런 사이 아니에요!”
“뭐가 아닙니까? 리키 씨가 잉간 씨를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은데요. 지금은 아니더라도 금방 그런 사이가 될 것 같은데요?”
“그건…….”
그건 단순히 리키가 내게 정신적으로 의존하는 상태라고 반론하려고 했지만, 더 말해 봤자 테틀리가 믿을 것 같지 않기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 거로 합시다. 네.”
그렇게 대충 대답하며 나는 테틀리의 뒤를 따라 제대로 마을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마을 바깥의 아무것도 없는 차갑고 어두운 벌판과는 달리, 안쪽은 밝고 활기찬 분위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 듯 보였고, 다들 희망에 차 있는 듯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둘러보며 가만히 테틀리에게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식량은 어디서 수급하는 건가요? 이만한 사람들을 먹여 살리려면 사냥으론 모자랄 거 같은데…….”
“솔직히 무리죠. 뭐, 저희도 사냥을 하긴 하지만 대부분 신님의 은총에 바치는 공물로 쓰거나 마을에 너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이 대부분이에요.”
“농사도 지을 수 없는 거 같은데, 그럼 도대체 어디서 식량을……?”
설마, 뭐 식인이라든가 그런 건 아니겠지?
내가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물어보자, 테틀리는 피식 웃으며 내게 대답했다.
“전부 신님들의 보살핌이죠.”
테틀리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들어 올렸고, 나도 테틀리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_◢)”
하늘에는 여전히 격한 감정을 뿜어내는 그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저거 보세요. 신님의 말씀을 알아듣진 못하지만, 신님들이 저희를 보호하고 있다는 건 확실하잖아요?”
“……그러네요.”
과연, 저들은 이들을 보호하는 것일까?
적어도 보호를 하고 있다면, 이런 감정을 내뿜지는 않지 않을까?
여기의 사람들이 저들의 감정을 느낄 수 없어서 다행이지, 느낄 수 있었다면 진작에 미쳐 버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웃는 면전에 그렇게 말을 할 수도 없기에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테틀리의 말에 동의했다.
“슬슬 시간이 됐는데 말이죠…….”
그런데 테틀리는 무언가 더 기다리고 있는 것이 있는지 하늘을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렸고, 잠시 후 테틀리가 기다리던 일이 시작됐다.
“어?”
“저게 바로 신님의 은총입니다.”
하늘에 새겨진 주인 녀석들 중 일부가 움직이더니, 하늘에서부터 무언가가 유성처럼 추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별똥별이 추락하듯 그것은 빛을 반짝이며 마을 중앙을 향해 추락했고, 무언가가 펼쳐지며 서서히 속도가 줄어들었다.
“에어 드롭……?”
그리고 그 모습은 영화나 게임에서 나오던 공중 보급을 닮아 있었다.
그리고 마을에 떨어진 공중 보급품의 내용은 갈색의 알갱이가 담긴 비닐봉지들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익숙한 일인지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공중 보급으로 다가갔다.
“아씨, 오늘도 이거네.”
“으, 이건 이제 좀 질리는데…….”
상대적으로 어려 보이는 주민들은 공중 보급의 내용물을 받아 가며 그렇게 투정을 부렸지만,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주민들은 그런 아이들을 훈계했다.
“어허, 신님의 은총에 그게 무슨 말이니! 감사할 줄 알아야지!”
“그래도…… 계속 같은 것만 먹는데…….”
“그렇게 말하다간 신님의 분노를 사서 밖으로 쫓겨날지도 몰라요!”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고, 테틀리는 흐뭇하게 웃으며 내게 말했다.
“하루가 지나면 썩어서 사라지긴 하지만, 그건 분명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신님의 뜻이겠죠.”
“신님의 은총은 매번 저런가요? 아니면…….”
“가끔씩 다른 형태의 은총이 내려올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저런 형태더라고요.”
테틀리는 그렇게 말하며 신들의 은총이라 말하는 배급 식량을 3개 주워서 내게 2개를 건넸다.
“마음껏 얼마든지 드셔도 됩니다.”
“아…… 감사합니다?”
아무리 봐도 비주얼이 개밥 그 자체여서 별로 먹고 싶진 않지만, 일단 주니까 먹는 척은 해야겠지.
나는 얼떨떨하게 웃으며 조심스럽게 입안에 개밥을 넣었고, 난생처음으로 클라인이 내게 주던 젤리를 그리워했다.
맛이 없는 건 아닌데, 그냥 건빵을 씹어 먹는 느낌이다.
그래, 말 그대로 생존을 위한 음식이라는 느낌?
젤리는 그나마 음식이라는 느낌이 들었다면 이건 그냥 열량 덩어리로 느껴진다.
“맛이…… 꽤 심심하네요.”
“청렴하게 살라는 신님의 가르침이죠.”
이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이 사람들이 광신도라는 사실이 다시금 느껴진다.
내가 지금껏 만난 광신도들 중에서는 그나마 제일 정상적인 사람들이지만, 역시 군데군데에서 광신도의 편린이 엿보인다.
“뭐, 마을 구경을 시켜 드린다고 했지만 이제 더 이상 볼 건 없네요.”
“저 가운데의 기계는…….”
“죄송합니다. 저 기계는 원칙적으로 사도들만 접근할 수 있어서요.”
하긴, 마을의 모든 걸 유지하는 장치라고 하니 외부인을 쉽게 들일 수 없겠지.
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리키가 머무르고 있을 움막으로 되돌아갔다.
뭔가 더 할 말이 있는지 테틀리도 나를 천천히 따라왔고, 나는 움막 안으로 들어서며 리키의 이름을 불렀다.
“리키, 나 왔어.”
하지만 리키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잠깐 자리를 비운 건가?
아니면 벌써 잠에 든 건가?
나는 의아해하며 조심스럽게 이불을 들쳐 봤지만 리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리키?”
리키가 어디로 간 거지?
성격상 먼저 바깥 외출을 하려고 하진 않았을 텐데.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테틀리와 함께 고개를 갸웃하던 순간, 움막 너머에서 리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잉간…….”
“리키? 왜 거기에 있……어?”
리키의 목소리를 듣고 다시 움막을 나와 나는 리키가 있는 곳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어?”
“이, 잉간. 이거, 이거…….”
완전히 으깨져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누군가의 시체 앞에서 피에 젖은 채로 떨고 있는 리키의 모습이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일까?
내가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무슨 일 있습니까……?”
테틀리도 이곳에 와서 이 충격적인 현장을 목격하고 말았다.
피투성이가 된 현장을 목격한 테틀리가 표정을 굳히더니, 천천히 리키 곁으로 다가갔다.
“리키 씨.”
“히익?!”
리키는 갑작스러운 테틀리의 목소리에 놀란 듯 꼬리를 휘둘렀지만, 처음과는 다르게 테틀리는 단번에 리키의 꼬리를 잡아채 공격을 방어했고.
“잠시 저 좀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차가운 눈동자로 리키를 바라보며 누가 봐도 용의자에게 할 법한 말을 던졌다.
아, 이거 좀 망한 거 같은데?
131화 [인간 애호 협회] 야생 인간, 과연 방역만이 정답일까요?
테틀리의 호출로 다시 처음에 모였던 움막으로 모인 사도들은 총 9명이었다.
그레이, 테틀리, 타조, 아일레스, 립톤, 아마드, 포르테, 리스톤, 타라.
민트만이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마도 그 시체의 정체는.
“이번엔 민트가 당했다고?”
사도들은 또다시 사망자가 나왔다는 소식에 충격을 감추지 못하고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움막 안에 어두운 분위기가 감돌았지만, 테틀리는 그 분위기에서도 입을 열고 천천히 리키 앞으로 다가갔다.
“리키 씨?”
“네, 네에?”
리키는 의자 위에 앉아서 자신의 꼬리를 꼭 껴안은 채로 벌벌 떨고 있었다.
어찌나 겁을 먹었는지 꼬리를 자신의 입에 문 상태일 정도다.
그리고 테틀리는 리키를 심문하듯 천천히 질문을 시작했다.
“다들 알다시피, 민트의 시체를 최초로 발견한 건 리키 씨입니다. 맞죠?”
“네, 네. 맞아요…….”
“리키 씨. 저는 리키 씨를 추궁하거나 범인으로 몰아가는 게 아니에요. 단지 리키 씨가 처음으로 시체를 발견했을 때의 상황을 듣고 싶은 거예요. 아시겠죠?”
“네, 네…….”
테틀리는 리키를 안심시키려는 듯 그렇게 말했고,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옆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리키가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눈친데, 저거?
일단 리키가 절대 범인일 리는 없으니 리키가 있었던 일을 그대로 말하기만 해도 괜찮을 거다.
“그, 그게요. 테틀리 씨하고 잉간 씨가 나간 다음에 그냥 방 안에 있었거든요? 이, 잉간 씨하고 테틀리 씨를 보면서…….”
“저하고 잉간 씨를 보면서요?”
“아, 네. 근데 잉간 씨는 잘 보이지 않아서 테틀리 씨의 위치로 잉간 씨의 위치를 추측한 거긴 한데, 그렇게…….”
“아니, 방 안에서 나가지 않았다면서요?”
그런데 어째 리키가 시작부터 횡설수설하는 것 같다.
이건 별로 안 좋은데?
너무 긴장한 건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리키를 좀 진정시켜야 하나 고민했지만, 리키는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닫고는 서둘러 부연 설명을 붙였다.
“그, 제가. 그, 보여서요. 그, 마력이요.”
“마력이 보인다고요?”
“어, 음. 그러니까. 설명하기가 힘든데, 아무튼 사람마다 마력이 다르니까 그걸로 파악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요…….”
그래서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 거구나?
나에겐 마력 따위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냥 그렇게 지켜보다가, 갑자기 누가 제가 있는 움막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음, 그래서요?”
“그래서 누군가 했더니, 민트 씨였어요…….”
자, 여기서 피해자의 모습이 첫 등장했다.
지금 이대로라면 아무리 봐도 리키가 유력한 범인으로 몰릴 텐데, 어떻게 하지?
“민트 씨가 왜 리키 씨의 움막에 온 건가요?”
“순찰……하다가 들렀다고 하시더라고요. 아무튼 그래서, 어. 제가 너무 겁을 먹어서 제대로 된 이야기는 못 했어요.”
“정확히 어떤 대화를……?”
“그냥. 어디서 왔느냐. 잉간 씨가 진짜 신의 사도는 맞느냐. 그런 거요.”
“그래서 리키 씨는 뭐라고 대답했죠?”
“어 그게…….”
어째서인지 리키는 테틀리의 질문에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흘낏흘낏 내 얼굴을 바라봤다.
“리키 씨?”
“네?”
“리키 씨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묻고 있습니다.”
“히익……!”
대답하지 않는 리키에 조바심이 났는지 테틀리가 조금 강하게 리키를 압박하자 리키는 새된 비명을 지르며 꼬리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러니까. 음…… 그냥, 그냥 잉간 씨가 진짜 신의 사도인지는 저도 모르지만, 어. 그게…….”
“진짜 신의 사도인지는 모르지만?”
“착하고, 어…… 믿을 만하고, 그리고 또…… 좋은 사람? 그냥 그렇게만 말했어요…….”
우물쭈물하던 리키가 한 말은 의외로 별거 없는 내용이었다.
그렇지만 본인에게는 상당히 부끄러운 일이었는지 리키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꼬리를 입으로 물었다.
“으으…….”
“네. 그 이후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 이후에요? 미, 민트 씨가 알겠다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움막을 나가서 돌아갔어요. 그리고…….”
“그리고?”
자, 이제 슬슬 민트가 죽음을 맞이한 시점에 가까워지는데……?
“뭔가가. 엄청나게 강렬한 마력이 근처에서 잠깐 느껴지고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서, 깜짝 놀라서 이불 안으로 숨었거든요?”
“……그리고요?”
“그런데. 그, 뭔가 피 냄새? 같은 게 나기도 하고. 뭔가 이상해서 조심스럽게 따라갔더니…….”
“민트 씨의 시체가 있었다. 이 말입니까?”
“……네. 그래서. 너무 놀라서 꼬리를 휘두르다가 넘어지고. 그래서 바닥에 누워 있었는데, 그러다가…….”
“저와 잉간 씨가 왔다. 이 말이군요.”
“네, 네. 그래요…….”
이걸로 리키의 증언은 모두 끝났다.
테틀리도 더 이상 리키에게 증언을 요구하지 않고 가만히 다른 사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 살인 현장의 목격자는 이렇게 말하는데, 각자 다들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말해 주겠어?”
“……지금 또 우리를 의심하는 거야?”
“알다시피, 사도를 죽일 수 있는 건 같은 사도뿐이야.”
“그래서 그린티를 쫓아낸 거잖아! 그런데도……!”
“그린티가 범인이 아니었거나, 공범이 있었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해. 뭐, 나는 후자의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하지만.”
테틀리의 말에 립톤이 반발했지만, 테틀리는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립톤 또한 살인범으로 의심받는다는 상황이 기분 나빴을 뿐인지 더 이상 반발하지 않고 한숨을 내쉬며 제일 먼저 자신의 알리바이를 댔다.
“일단, 나하고 타조하고 그레이는 다 같이 있었어. 그치?”
“응. 맞아.”
“신님의 은총으로 식사를 하고 있었지.”
립톤이 댄 일리바이를 타조와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확인해 준다.
저 세 명이 모두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면 저 세 명은 일단 용의선상에서 벗어났고.
“나는 아일레스와 아마드하고 같이 순찰하고 있었어.”
“그래, 포르테 말이 맞아.”
아일레스와 아마드, 포르테까지 용의선상에서 벗어난다.
그럼 이제 남은 건 타라와 리스톤뿐인데.
“나하고 타라는…… 민트하고 같이 순찰을 하다가 민트가 손님들에게 질문을 하러 간다면서 떠났지.”
“맞아. 그랬어.”
타라와 리스톤 또한 서로 함께 있었다며 서로의 알리바이를 증명해 준다.
이대로라면 사도들 중에서 민트를 죽일 만한 알리바이를 가진 사람은 없는데…….
“테틀리, 너는 뭘 하고 있었어?”
이어서 립톤이 테틀리를 바라보며 알리바이를 물었고, 테틀리는 나를 가리키며 자신의 알리바이를 댔다.
“나는 잉간 씨에게 마을을 소개시켜 주고 있었지. 마을 주민들이 목격했으니 거짓말 같으면 물어봐도 돼.”
“아, 나도 봤어. 움막 밖을 지나가는 게 보이더라.”
테틀리의 말에 그레이가 손을 들어 올리며 그 말을 보증해 준다.
자, 이렇게 모두의 알리바이를 확인했는데, 지금 상황에서 가장 수상한 사람은…….
“솔직히 말해서. 이건 아무리 봐도…….”
립톤이 그렇게 중얼거린 걸 시작으로 다른 사도들의 시선이 한군데로 집중된다.
의자 위에서 넋이 나간 채로 꼬리를 우물거리는 리키였다.
리키가 저지른 짓은 절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 당시의 알리바이를 증명할 수 없는 건 리키 혼자뿐이다.
“아무리 봐도, 저 외부인이 범인인 것 같은데?”
“……그린티의 말이 맞았던 거야?”
어느덧 분위기는 서서히 험악하게 변해 가며 리키를 완전히 범인이라고 확신하는 분위기가 되어 갔다.
리키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눈물 서린 눈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리키 씨.”
“네, 네?”
“리키 씨의 증언을 증명해 줄 증인이 있나요?”
“그건, 그러니까…….”
리키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말을 증명해 줄 증인을 떠올려 보지만, 워낙 움막이 구석에 위치해 있어서인지 리키를 본 사람이 없는 것 같다.
결국 리키는 작은 목소리로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없어요.”
“……그런가요? 그럼, 리키 씨. 죄송하지만…….”
“하, 하지만 정말 제가 하지 않았는걸요?”
“죄송하지만. 그 상황에서 민트 씨를 죽일 수 있던 건 리키 씨밖에 없습니다.”
“그치만. 하지만……!”
아, 이대로라면 진짜 큰일 나겠는데?
이렇게 되면 리키가 범인으로 몰려서 추방당할 분위기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같은 일행인 나도 공범으로 의심받게 되고 내 신뢰도는 그대로 수직 하락할 텐데…….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리키가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를 제출할 수 있지?
혼란에 빠진 내 머리는 그대로 별생각을 하지도 않고 손을 번쩍 들어 올리게 시켰다.
“저기요!”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자,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말했다.
“리키는 범인이 아니에요. 제가 보증할 수 있어요.”
“어째서죠? 죄송하지만, 그럴 성격이 아니라는 말로는 저희가 믿어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
“리키 씨의 말을 들어 보니, 민트 씨가 어쩌면 리키 씨에게 불편하게 들릴 수 있는 질문을 했던 것 같던데요? 어쩌면 그것 때문에 리키 씨가 우발적으로 민트를 살해했을 수도 있죠.”
“그건, 그러니까…….”
“꼭 그렇지 않더라도 아까 저를 공격했던 것처럼 겁을 먹고 우발적으로 공격했을 수도 있죠.”
안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리키를 변호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이대로라면 정말 리키가 범인이 되는데, 되는데…….
“바깥에서 생활하던 사람이고, 신의 사도와 함께 다닐 정도면 저희 사도에게 충분히 대미지를 입힐 수 있겠죠. 거기에다가 리키 씨의 온몸에는 피가 묻어 있었고요.”
그때였다.
테틀리가 결정타를 찌르려는 듯 날린 말이 나에게 한 가지 방법을 떠올리게 했다.
“……아니에요!”
“뭐가 아니라는 거죠?”
“리키는, 민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건 확실해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성격이니 뭐니 하는 건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네, 제가 제시하려는 건 확실히 확인할 수 있는 증거예요.”
최대한 시간을 끌며 머릿속에서 리키의 무죄를 입증할 방법을 조립한다.
그래, 좋아.
이렇게 한다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리키는. 리키는…… 사도를 죽일 정도의 힘이 없어요!”
내가 선택한 것은, 리키에게 물리적으로 사도를 죽일 힘이 없다는 논리를 꺼내 드는 것이었다.
“그, 테틀리 씨도 보셨잖아요? 리키의 전력을 다한 공격이 별로 강하지 않다는 걸요.”
리키는 아까 처음에도 테틀리를 공격했고, 시체를 발견했을 때도 테틀리를 공격했다.
두 번 다 테틀리는 별다른 대미지를 입지도 않고 리키의 공격을 받아넘겼다.
즉, 리키의 공격은 민트 같은 사도들의 방어력을 뚫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말했지만, 테틀리는 눈썹을 가늘게 뜨며 내게 합당한 반론을 해 왔다.
“그때는 전력을 다하지 않았을 수도 있죠. 물리적 공격뿐만이 아니라 마법을 사용했을 수도 있고요.”
“아니에요. 그게 리키의 전력이었어요!”
“그걸 어떻게 확인하죠?”
테틀리의 반론에 나는 또다시 반론했고, 잠깐 고민한 뒤 유일하게 리키의 무죄를 증명할 방법을 택했다.
“……직접 확인하면 되죠!”
“어떻게?”
“사도들하고, 리키가 싸워서 확인해 보면 되잖아요!”
“네, 녜?”
자신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발언에 리키는 깜짝 놀라며 나를 바라봤고, 나는 어떻게든 리키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며 테틀리를 응시했다.
그리고 테틀리는, 가만히 내가 한 제안을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그거 좋네요. 그럼, 그렇게 해보죠.”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살아남기 위해서 반드시 져야 하는 기묘한 시합은 이렇게 시작됐다.
132화 [리퀴드 코퍼레이션] 아직도 SP를 사용하는 상태 창을 사용하십니까?
살기 위해선 져야만 하는 싸움이 있다.
사도들은 리키와 사도가 싸운다는 계획이 세워지자마자 빠르게 리키를 데리고 마을 바깥의 공터로 나갔다.
경비를 위해 마을에는 그레이만을 남겨 두고 기괴한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 공터에서 리키와 테틀리가 마주 선다.
“진짜 싸우려고?”
“범인을 찾으려면 어쩔 수 없잖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끝까지 힘을 숨길 수도 있는 거잖아? 이런 게 효과 있을까?”
립톤은 그런 테틀리에게 부정적인 의견을 꺼냈지만, 테틀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단언했다.
“괜찮아.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을 거야.”
“아니, 그걸 어떻게 확신해?”
“내가 전력으로 죽이려고 할 테니까.”
테틀리의 대답을 들은 립톤은 더 이상 테틀리를 추궁하지 않았고, 리키만이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저 불안한 눈빛을 보니 아무 상의도 없이 이런 걸 시킨 게 정말 미안해진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 이 상황에서 리키가 용의자에서 벗어날 방법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 방법밖에 없었으니까.
물리적으로 범행이 불가능하다는 걸 입증하면 앞으로 범인으로 몰리는 일도 없을 테니까.
어째 살인 사건이 계속 일어난단 걸 전제로 계획을 짜는 것 같은데, 솔직히 한 번 일어난 것이 아니라 두 번씩이나 살인이 일어났으면 세 번째는 확정이라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만약 리키가 정말 위험한 상황에 처하면 그땐 몸을 던져서라도 어떻게든 끼어들어 봐야지.
상태 창에 써진 이 물리 면역 하나만을 믿고 말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미안한 눈빛으로 리키를 바라봤고, 리키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리키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테틀리는 리키의 반대편에 서고는, 조용히 선언했다.
“그럼. 지금부터 결투를 시작하겠습니다.”
“네, 네……!”
테틀리의 선언과 동시에 리키는 그대로 꼬리를 둘둘 말아서 전에 내게 보여 줬던 것 같은 털의 공을 만든다.
리키가 그러거나 말거나 테틀리는 염소 같은 다리를 빠르게 놀려 리키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그대로 털의 공을 파헤치려는 듯 손을 뻗었지만, 털의 공에서 뻗어 나온 리키의 꼬리가 테틀리의 손을 걷어 냈다.
리키는 아예 방어에만 전념할 생각인지 테틀리가 접근하면 꼬리를 휘둘러 쫓아 보내기만 할 뿐이었다.
테틀리는 그런 리키의 행동을 보며 눈썹을 살짝 찡그리더니, 그대로 주먹을 내질렀다.
리키의 꼬리가 또다시 테틀리의 공격을 걷어 내려 하지만, 테틀리의 공격에 전보다 더 힘이 실려 있던 걸까?
리키의 꼬리는 역으로 튕겨 나가며 그대로 테틀리의 공격을 허용했다.
“꺄악?!”
털의 공 안에서 깜찍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온다.
꽤나 강력한 일격으로 보였는데, 털의 공이 충격을 줄여 주는 걸까?
리키는 비명을 지르는 정도로 테틀리의 공격을 버텨 냈다.
통, 통통.
그렇다고 해도 아예 충격을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털의 공이 지면을 통통 튀어 가고, 테틀리는 공략법을 생각해 낸 것인지 씨익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대로 테틀리는 그 어마어마한 각력으로 털의 공을 공중으로 차올렸다.
콰직.
무언가 부서지는 듯한 불길한 소리가 들려오고, 털의 공이 허공으로 떠오른다.
나는 그 모습을 불안하게 바라봤고, 곧이어 테틀리가 허공으로 떠오른 공을 뒤쫓아 뛰어올랐다.
마치 축구공을 걷어차듯 테틀리는 리키를 그대로 바닥으로 내리꽂았고, 더 이상의 충격은 버티지 못한 것인지 리키가 신음을 흘리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으, 이 정도면 된 거 아냐?
누가 봐도 테틀리의 승리인데?
다른 사도들 중 몇 명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테틀리의 이름을 부른다.
“테틀리. 그쯤 해 둬. 네가 이겼어.”
그렇지만 테틀리는 고개를 내저으며 차가운 눈으로 리키를 바라보며 고했다.
“아니, 아직이야. 이 정도로는 죽지 않으니까.”
“뭐?”
“내가 말했잖아? 전력으로 죽이려고 할 거라고.”
비유가 아닌, 사실상의 선언.
사형선고를 내리듯 테틀리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리키에게 다가갔다.
리키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통에 신음하다가 테틀리가 다가오는 것을 보며 겁먹고 몸을 움츠리기만 할 뿐이다.
그리고 테틀리는, 그대로 리키의 목숨을 앗아 가려는 듯 주먹을 내지르려 했다.
여기서 막아야 하나?
여기서 끼어들어야 하나?
아니, 아직 괜찮은가?
진심이 아닐 수도 있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일단 끼어들자.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뛰쳐나가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크흑?!”
어마어마한 속도로 휘둘러진 리키의 주먹에 카운터를 얻어맞고 테틀리가 뒤로 붕 날아갔다.
이어서 리키는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켰고, 심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맨 처음 찹쌀떡을 사냥하던 때 내가 봤던 리키의 모습과 흡사했다.
붉은 눈동자가 더욱 붉게 물들고, 마치 피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리키의 눈에서 붉은 액체가 흘러내린다.
그리고 테틀리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거봐, 죽이려고 하니까 전력을 내잖아?”
테틀리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과 함께 리키가 날카로운 발톱을 테틀리에게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방어에만 집중하던 전과는 달리, 말 그대로 테틀리를 죽일 기세의 공격이다.
이번 공격은 테틀리도 방어하기 버거웠는지 조금씩 뒤로 밀려나고, 리키는 그대로 꼬리를 거둬들이며 테틀리의 몸을 향해 날렸다.
마치 카우보이가 올가미를 던지듯 리키의 몸이 테틀리의 몸을 칭칭 옭아매고, 그대로 리키는 테틀리의 몸에 거대한 손톱을 내리꽂는다.
하지만.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테틀리의 몸에 꽂혔어야 할 리키의 손톱이 튕겨 나가고, 테틀리는 리키의 머리를 잡아서 땅에 처박는다.
방금의 일격이 결정타였던 걸까?
리키는 정신을 잃고 바닥에 축 늘어지고, 테틀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방금 건, 전력이 맞았네.”
“리키!”
나는 서둘러 리키에게 달려가 상태를 확인해 본다.
리키의 몸엔 별다른 상처가 보이지 않는데, 단순히 정신을 잃은 것뿐일까?
내가 얼굴을 무릎 위에 올리고 리키의 상태를 살피고 있자, 립톤이 내게 다가와 무언가 중얼거렸다.
“[그레이트 힐].”
마치 게임에서 스킬을 사용하는 것처럼 립톤이 중얼거리자, 리키의 몸에 초록색 기운이 깃든다.
“이걸로 부상은 다 치료됐을 테니까, 곧 정신을 차릴 거예요.”
방금 그건 치유 마법이었던 걸까?
아니, 치유 마법하고는 뭔가 좀 다른 것 같은데?
방금 리키에게 깃든 건 마력이 아닌 일종의 정보 같았는데?
상태 창으로 사용한 스킬 같은 것일까?
일단 리키의 상태는 한숨 돌렸으니 나는 굳은 표정으로 테틀리에게 다가갔다.
“이걸로 검증은 다 끝났죠?”
“네, 확실하네요. 리키 씨는 사도를 죽일 수 없습니다.”
아까 그렇게 리키를 죽도록 패는 모습을 봐서 그런지 테틀리의 웃음이 전과 달라 보인다.
그런 내 떨떠름한 반응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몰라도 테틀리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어쨌든 리키 씨가 범인이 아니라면…… 더 귀찮아졌네요. 사도들 사이에 범인‘들’이 숨어 있거나, 아니면…….”
“아니면?”
“그린티가 몰래 돌아와서 복수한 것일 수도 있죠.”
“그린티가?”
테틀리의 추리를 들은 사도 모두가 말도 안 된다는 듯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테틀리는 생각해 보라는 듯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자신의 추리를 펼쳤다.
“그린티가 가진 스킬에는 분명히 변장 스킬이 있었잖아? 그걸 사용해서 다른 사람으로 변신해서 마을로 들어왔을 수도 있지.”
“그건…… 그러네.”
“우리들 중 누군가는 그린티의 변장일 수도 있어. 어쩌면 사도가 아닌 마을 주민들 중 누군가로 위장했을 수도 있고…….”
만약 테틀리의 추리가 사실이라면 사실상 범인을 구분해 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뭐, 변장을 간파하는 스킬 같은 건 없어요?”
“아쉽게도 그런 스킬을 익힌 사람은 없어. 그런 곳에 스킬 포인트를 투자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음, 스킬 포인트를 찍는 방식의 상태 창인 건가?
여러 가지 스킬이 있고 그중 원하는 스킬에 스킬 포인트를 투자하는 형태인 것 같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뭐, 공물을 모아 바쳐서 신님의 은총을 복구시키거나, 스킬 포인트를 모아서 간파 스킬을 찍는 수밖에 없겠지.”
“그럼…… 지금 당장은 밝혀낼 수 없다는 거네?”
“그래. 그런 거야.”
그렇게 지금 당장은 누가 범인인지 밝혀낼 수 없다는 테틀리의 사실상 항복 선언을 듣고 사도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리키를 품 안에 안아 들고 일어나서 테틀리에게 말했다.
“그럼, 저희가 범인이라는 의혹은 벗은 것 같으니 이만 들어가 볼게요.”
“응. 괜히 생사람을 범인으로 몰아간 거 같아서 미안하네.”
“……누가 봐도 그 상황에선 리키가 범인이라고 생각했을 테니, 어쩔 수 없죠.”
마음 같아서는 리키가 크게 다쳤으면 어쩔 거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나는 꾹 참은 채로 속마음을 숨겼다.
일단 최대한 협조하면서 신뢰를 쌓아야 한다.
괜히 트러블을 일으켜서 안 좋은 감정이 쌓이게 하는 건 별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리키를 들고 내게 배정된 움막으로 돌아왔다.
리키를 침대에 눕혀 두고 가만히 밖을 바라보고 있으니 어느새 에포나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에포나?”
“왕?”
에포나는 근처의 괴이한 것들을 잔뜩 먹어 치우고 왔는지 입가에 온갖 정보들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다.
“입에 그게 다 뭐야? 아이고.”
나는 에포나를 번쩍 들어 올려 입가에 묻은 정보들을 털어 냈고, 에포나는 기분 좋은 듯 갸르릉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나는 어항 안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때 의문사한 표범을 발견한 일이 있었지?
아마도 그때의 범인은 에포나였을 텐데…….
문득 무척이나 좋지 않은 생각이 떠오른 나는 가만히 에포나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네가 한 건 아니지?”
“왕!”
자기를 뭐로 보냐는 듯 화를 내며 에포나는 내 손가락을 깨물고 폴짝 뛰어내렸다.
그래, 에포나가 했을 리 없지.
보아하니 마을 주위의 먹을 것들을 먹는 데도 한세월이 걸릴 거 같은데, 뭐 하러 에포나가 마을 주민들을 습격하겠는가?
에포나는 다시 만찬을 즐기러 어둠 속으로 뛰쳐나갔고, 나는 가만히 리키의 꼬리를 쓰다듬으며 에포나의 뒷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히익?!”
그리고 그 순간, 리키가 깜짝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
“리키? 괜찮아?”
“어, 응. 괜찮아…….”
리키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바라봤고, 나는 리키의 손을 꼭 잡은 채로 사과부터 했다.
“미안해. 무서웠지? 네 누명을 벗기려면 그것밖에 방법이 없었어.”
“무, 무섭긴 했는데. 그렇게 사과하지 않아도 돼…….”
리키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 손을 놓지 않고 꼭 붙잡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저, 저기. 그럼 그렇게 미안하면 부탁 하나만 들어줬으면 좋겠는데…….”
“부탁?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면 뭐든 들어줄게.”
“뭐든? 뭐든지 한다고 했어?”
“응. 뭐든.”
솔직히 이번에 리키는 자칫하면 정말 죽을 수도 있었으니 이 정도는 내가 해 줘야지.
“그, 그럼. 하나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리키는 부끄러운지 양손을 맞잡고 수줍어하며 그렇게 말했다.
도대체 뭘 부탁하고 싶길래 이렇게 부끄러워하는 거지?
“그, 있잖아. 내가 마력을 볼 수 있다고 했잖아…….”
“응, 그랬지.”
“그, 그런데 잉간. 너는 마력이 없잖아? 그래서 네가 어디에 있는지 잘 안 보인단 말이야.”
“……그래서?”
설마 마력이 없으니 마력을 만들라는 소리를 하진 않겠지?
그렇지만 리키의 부탁은 그런 부탁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데. 내가 널 좀 쉽게 찾을 수 있게…… 마킹을 하고 싶거든…….”
“마킹?”
“쉽게 말해서, 내 마력을 네 몸에 흘려 넣는 거야. 위, 위험한 것도 아니고. 그냥 살짝 따끔? 한 수준이고. 살짝 혈액순환이 빨라지긴 하지만 그래도…….”
“마력을 어떻게 흘려 넣는데? 그게 가능해?”
그런 게 가능하다곤 블랑카나 반려넷에서 들어 본 적이 없는데?
내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리키는 우물쭈물하며 대답했다.
“그…….”
“그?”
“그…… 그거 있잖아. 그거.”
“그거?”
얼굴을 붉게 물들인 리키의 모습에 나는 순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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