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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적대적 자극으로부터 보호하는 시스템. 뭐였더라? 이지스 시스템이었나? 아무튼 그거. 그걸 설치해 놔서 싸움이 일어날 걱정은 안 해도 돼.”
이지스 시스템이면, 지난번에 켄토르와 잉간이의 첫 만남이 있을 때 클라인이 취했던 조치를 자동 적용시키는 시스템이었지?
뭐, 그게 있다면 싸움이 일어날 걱정은 하지 않아도 괜찮겠지.
거기에다가 잉간이의 사회성을 좀 더 키워 줄 필요도 있으니, 다곤이와 친해지게 하는 게 나으려나?
더불어 잉간이가 자신과 완전히 다른 종족에게 어떻게 반응하는지도 지켜봐야 한다.
만약 잉간이가 너무 거부감이 심하다면 잉간이를 대하는 전략에 수정을 가할 필요가 있으니까.
“그래, 그럼 괜찮아. 다곤이나 잉간이 둘 중 하나라도 너무 싫어하는 거 같으면 바로 분리하면 괜찮겠지?”
“응, 그럼 될 거야.”
그렇게 생각한 클라인은 유리의 말에 수긍했고, 유리는 조심스럽게 사육항에서 다곤을 꺼내서 잉간이의 차원항 안으로 집어넣었다.
클라인은 그 모습을 걱정과 기대와 함께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108화 [V-Log] 속삭이는혼돈 님과 함께 반생소를 시청해 봤습니다!
내 앞에서 내 모습으로 변한 문어 인간은 조심스럽게 내 행동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내가 팔 한쪽을 들어 올리면 그쪽도 팔을 들어 올리고, 팔을 내리면 그쪽도 팔을 내리는 식으로 말이다.
마치 내가 내 모습을 한 인형을 조종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것 같은 모습이다.
내 모습을 따라 한 문어 인간의 외양은 정말 나와 흡사했다.
나보다 눈이 좀 더 크고, 옷에서 점액이 흐르는 걸 제외하면 나와 저 문어 인간을 분간할 방법은 없어 보였다.
“……저기, 내 말 들려?”
“……?”
그렇지만 내 목소리까지 따라 할 수는 없는 걸까?
슬며시 말을 걸어 봐도 문어 인간은 고개를 갸웃할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단지, 싸우고 싶은 의사가 없다는 듯 양팔을 옆으로 들어 올리고 폴짝폴짝 뛸 뿐이었다.
아무래도 우리에게 적대적인 생명은 아닌 것 같고, 이성이 없는 생명도 아닌 것 같다.
계속해서 뭔가 몸을 움직여 기묘한 포즈를 취하면서 내게 무언가를 전하려는 것 같은데.
아, 말만 서로 통한다면 이렇게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될 텐데.
아직 완전히 경계를 풀기에는 저 문어 인간의 의도를 알 수 없어서 무리고, 뭔가 대화가 통할 만한 건 없으려나?
내가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문어 인간은 뭔가 다른 생각이 떠올랐는지 내 흉내를 그만두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몸의 색상을 이것저것 바꿔 가며 촉수를 구불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오징어나 문어들이 서로 의사소통을 할 때 몸의 색소를 바꾸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나는 평범한 인간이어서 문어 인간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기에, 난색을 표하며 슬며시 아리스를 바라봤다.
아리스 또한 문어 인간의 의사소통법이 난해한지 그저 멍하니 문어 인간의 몸이 발광하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몸이 발광하는 방법은 문어 인간의 비장의 한 수 같은 거였던 걸까?
우리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자 문어 인간은 몸을 축 늘어뜨리며 몸의 색상을 어둡게 바꿨다.
으음, 보아하니 아예 발성 기관이 없어서 말을 못하는 걸까?
그래서 저렇게 보디랭귀지와 색소 변화로 소통을 하려고 하는 것이고.
아예 말을 할 수 없는 상대하고는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하지?
뭐, 수화라도 가르쳐야 하나?
“어, 음. 잠깐만 있어 봐?”
“……?”
일단,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시도해 보기 위해 문어 인간에게 여기서 대기하라 하고 서둘러 집으로 뛰어갔다.
일단, 말이 안 통하면 그림이나 글로 대화를 해 보면 되겠지.
내가 클라인에게 시도하던 것처럼 나는 종이와 직접 만든 연필을 들고 다시 문어 인간에게 돌아왔다.
문어 인간은 그사이 아리스와도 대화를 시도하려고 했는지 아리스의 모습으로 변해서 멍한 표정으로 무언가 전하려고 하고 있었다.
당연히, 아리스 또한 그런 문어 인간의 모습에 당황하며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내가 무언가를 들고 돌아온 것을 눈치챘는지, 문어 인간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며 촉수를 꾸불거렸다.
“자, 이거 받아.”
나는 그런 문어 인간에게 종이와 연필을 넘겨줬고, 조심스럽게 종이에 글자와 그림을 그려서 문어 인간에게 넘겼다.
글자는 리베리아어로 넌 누구냐는 뜻의 문장을 적었고, 그림으로는 칼을 든 문어 인간의 모습하고 인간과 껴안고 있는 문어 인간의 모습을 그렸다.
대충 저 녀석이 나와 대화할 의지가 있다면 저 두 그림들 중 하나를 고르겠지.
내 그림을 받아 든 문어 인간은 리베리아어로 적힌 문장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고, 그 밑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서는 나와 그림을 번갈아 바라봤다.
문어 인간은 그림을 바라보며 한참을 고민하더니, 조심스럽게 내가 건넨 연필로 무언가를 끄적이고 내게 그림을 돌려줬다.
“음…….”
문어 인간이 내게 돌려준 종이에는, 내가 문어 인간과 껴안고 있는 그림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이건 나와 싸우고 싶지 않다는 뜻이 맞겠지?
좋아, 일단 이렇게 그림으로 대화할 수 있다는 걸 알아냈으니 이제 이것저것 물어볼 수 있겠다.
으음, 이제 뭘 물어봐야 하려나?
이름?
아니, 음성언어를 사용하는 종족이 아닌데 이름이 있을 리가 없지.
넌 누구냐고 물어봐?
넌 누구냐고 물어보면 사람이라고 대답하는 것밖에 대답이 돌아오지 않겠지.
으음, 이거 진짜 애매하네.
내가 가만히 문어 인간에게 던질 질문을 생각하며 고민하는 사이, 이번에는 문어 인간이 내게 역으로 그림을 그려서 질문을 던져 왔다.
“으음?”
그렇지만 문어 인간이 내게 던진 질문은 나도 대답할 수 없는 종류의 질문이었다.
문어 인간이 그린 그림은 아무리 봐도 클라인과 같은 주인들을 묘사한 그림이었다.
보니까, 내가 그 주인들을 알고 있냐고 물어보는 것 같은데, 당연하겠지만 그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아니요였다.
내 대답을 본 문어 인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몸의 색을 바꿨고, 나는 조심스럽게 문어 인간에게 새로운 그림을 내밀었다.
“그러니까, 이게 알겠다는 뜻이고. 이건 모른다는 뜻이야.”
내가 문어 인간에게 새롭게 건넨 그림은 네와 아니요를 표현한 그림이었다.
이렇게 계속 필담으로 대화하는 건 너무 어려우니까, 적어도 간단한 규칙을 정해 두는 게 좋겠지.
문어 인간은 내가 건넨 그림을 살피더니 제대로 내용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 말을 잘 이해해서 고개를 끄덕이는 거 맞지?
좋아, 이걸로 대충 의사소통은 어느 정도 해결될 것 같네.
어, 그럼. 이제 어떻게 하지?
일단 급한 불을 끄니 갑자기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한다.
문어 인간을 보고 겁을 먹기엔 지금까지 겪어 온 일이 하도 많아서인지 내겐 저 문어 인간도 단순한 사람으로 느껴졌고, 그 때문인지 더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그렇게 우리들이 뭘 하지도 못하고 뻘쭘하게 가만히 서 있던 와중, 문어 인간의 배에서 기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배가 고플 때 꼬르륵 소리가 나는 것처럼 말이다.
문어 인간은 얼굴을 붉게 물들였고, 나는 그런 문어 인간을 바라보며 가만히 중얼거렸다.
“어, 밥 먹을래?”
“……?”
“음. 그러니까…….”
나는 부랴부랴 종이에 그림을 그려서 문어 인간에게 보여 줬고, 문어 인간은 내가 그린 그림을 보며 살포시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러면…… 일단 따라와.”
나는 문어 인간에게 손짓하며 아리스와 함께 천천히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문어 인간은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나와 아리스를 뒤쫓아 오기 시작했다.
“저기, 잉간. 저거 집에 들여도 괜찮은 거야?”
“일단 말이 통하기도 하고. 우릴 해칠 의도는 없어 보이니까.”
“으음…….”
아리스는 여전히 저 문어 인간이 못 미더운지 고개를 갸웃했지만,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아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뭐, 일단 밥부터 먹이고 생각하자고.
보니까 이 녀석도 우리랑 같이 살게 될 거 같은데, 좋은 관계를 쌓는 게 좋지 않겠어?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문어 인간에게 먹일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음, 적당히 고기를 구워 주면 잘 먹지 않을까?
고기는 언제나 옳으니 말이야.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고기를 굽는 사이, 문어 인간은 집 안의 물건들이 신기한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살피기 시작했다.
막, 그릇이나 바구니를 촉수로 건드려 보며 구조를 살피더니 그런 물건들로 변신을 하는 걸 봐선, 문어 인간은 다른 사람이나 물건으로 변하는 걸 즐기는 것 같다.
“자, 이리 와.”
고기를 다 굽고 나는 한참 돌창을 살피던 문어 인간의 촉수를 큰맘 먹고 손으로 잡았고.
문어 인간은 내가 그럴 줄 몰랐는지 깜짝 놀라며 나를 바라봤다.
문어 인간의 촉수는 에포나나 클라인의 것과는 다른 감촉이었다.
에포나는 털이 겉 표면에 남아 있어서 복슬복슬한 느낌이고, 클라인의 촉수는 너무 커서 촉수라기보다는 거대한 고깃덩어리 같은 감촉인데.
문어 인간의 촉수는 말 그대로 문어 그 자체, 그러니까 흔히 촉수 하면 떠올리는 감촉 그 자체였다.
어쨌든 문어 인간을 끌고 와서 자리에 앉힌 나는 문어 인간 앞에 고기를 놔뒀고, 문어 인간은 가만히 나를 바라봤다.
“그거, 음식. 먹는 거. 음…….”
내가 막 손으로 뭔가 먹는 흉내를 내며 문어 인간에게 그게 음식이라는 걸 알리려 했지만, 문어 인간은 내 보디랭귀지를 잘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지금 그림으로 그려서 설명하긴 좀 어려울 것 같은데?
그렇다면 직접 시범을 보여 주는 게 더 설명하기 쉽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슬며시 문어 인간의 앞에 앉아 남은 고기를 먹기 시작했고, 문어 인간은 그런 내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다.
이윽고 이게 식사 행위라는 것을 깨달은 것일까?
문어 인간은 내 모습으로 다시 변신하더니 내 행동을 따라서 고기를 입에 넣기 시작했다.
한번 나를 따라서 입에 고기를 넣더니 꽤 입맛에 맞았는지 그 뒤부터 문어 인간은 내 모습으로 변한 채로 허겁지겁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아, 말이 통하질 않으니까 참 소통하기 어렵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문어 인간이 밥을 먹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잉간, 나 왔어! 오늘은 표범……?”
때마침 사냥을 끝마치고 돌아온 블랑카가 집 안의 풍경을 보더니, 사고가 정지한 듯 입을 다물었다.
“이, 잉간이 두 명?”
어,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 * *
“휴, 서로 잘 지내는 것 같네.”
클라인과 유리는 다곤과 잉간이의 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곤에게는 발성기관이 없어서 번역기가 통하지 않아 잉간이와 잘 지낼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다행히 잉간이와 잘 지내는 듯한 모습이다.
그럼, 잉간이하고 다곤이하고는 친해지게 잠시 건드리지 말고 가만히 놔두자.
그렇게 유리와 웃고 떠들던 사이 어느새 방송이 시작될 시간이 다가왔고, 시계를 본 유리는 탄성을 지르며 클라인을 이끌고 소파로 다가갔다.
“슬슬 시작한다!”
유리는 슬쩍 클라인과 팔짱을 끼고 소파에 앉았고, 클라인은 유리에게 이끌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지막 광고가 끝나고, 화면에 멋들어지게 잘 디자인된 반생소 로고가 떠올랐다.
“와, 오프닝까지 있네? 이 정도면 거의 방송사에서 만든 수준인데?”
“리퀴드사에서 직접 제작한 거니까 당연하지.”
“그런가?”
하긴, 리퀴드사가 직접 편집과 기획을 다 담당했으니 이 정도 퀄리티는 당연한가?
클라인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방송은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클라인은 그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오늘의 방송은 쥬튜버들을 홍보해 주기 위한 목적에 치중했는지 책잡힐 부분을 전부 잘라 내고, 쥬튜버들과 그 반려 생물의 매력을 살리는 데 집중한 티가 확 났다.
진짜 프로의 손길은 뭔가 달라도 다르구나?
방송 내용은 이미 다 알고 있지만, 편집이 가미되니 무척 재미있게 느껴진다.
“아, 짜증 나. 왜 이렇게 생명도감이 자꾸 나와?”
“어…… 사회자니까?”
“그래도, 좀 편집으로 지워 주지!”
속삭이는혼돈은 생명도감과의 친분을 자랑하듯 방송을 보면서 계속해서 생명도감을 질겅질겅 씹어 댔다.
그 모습을 보며 클라인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고, 클라인과 유리가 대화하며 방송을 즐기던 사이 소행성이 화면에 잡혔다.
최근에 소행성에게 있었던 일종의 생명 학대 논란이자 주작 논란을 해소하기 위해서일까?
소행성의 분량은 거의 편집을 가하지 않은 상태로 송출됐다.
솔직히 소행성의 논란은 거의 생트집 수준이어서 무시해도 될 텐데 말이다.
애초에 주작 논란의 주된 주장도, 탄탈로스가 저런 걸 알아서 할 수 있는 지능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이니 말이다.
가장 인식이 좋은 탄탈로스도 이런 판국인데, 인간형 생물의 인식을 바꾸려면 어찌해야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든 클라인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고, 그 모습을 발견한 유리는 클라인을 촉수로 쿡 찔렀다.
“흐얏?”
“뭘 그렇게 한숨이야?”
“어, 아니. 그냥, 나도 언제쯤 저렇게 성장할 수 있을까 해서…….”
본심을 그대로 말할 수 없기에 클라인은 유리의 추궁에 적당히 둘러댔고, 클라인의 대답을 들은 유리는 피식 웃으며 클라인에게 말했다.
“내 생각에는 아마 오늘이 지나면 저렇게 될 거 같은데?”
“오늘?”
“응. 이 방송이 끝나면 말이야.”
“에이, 그럴 리가…….”
클라인은 고개를 저으며 유리의 말을 부정했지만, 유리는 클라인이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듯 보였다.
그렇게 소행성의 차례도 지나가고, 속삭이는혼돈의 차례도 지나간 끝에 마침내 클라인의 차례가 시작했다.
“어?”
자신의 차례가 시작되자, 클라인은 당황스러운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고작 하꼬 쥬튜버인 클라인에게, 대기업 쥬튜버들과 맞먹는 수준의 분량이 주어진 것이다.
클라인이 자신의 분량의 방대함에 놀라는 동안, 시간은 흘러 마지막에 유리가 클라인에게 질문한 부분이 나올 차례가 되었다.
“아, 이건 좀 편집됐네.”
불필요한 논란을 잠재우고 싶던 걸까?
클라인의 발언 중 자칫하면 극렬 환경주의자로 몰릴 수 있는 발언들은 전부 잘려 나갔고, 클라인이 잉간이의 귀여움에 대해서 설파하는 부분만이 살아남았다.
으, 이걸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래도 인간형 생물도 드래곤과 비슷하다고 한 부분은 살아남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려나?
클라인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때, 유리는 슬며시 클라인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쉬워?”
“응? 뭐가?”
“네 발언이 엄청 잘려 나간 거. 보니까 할 말이 많았던 거 같은데.”
“응, 아니. 괜찮아. 핵심 주장은 잘 나왔고, 위험하게 느껴지는 발언들만 잘려 나갔으니까.”
“그래? 하긴, 네 발언이 좀 위험하긴 했지.”
유리는 그렇게 말하며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 듯 클라인을 바라봤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방송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반생소가 끝이 나고 엔딩 화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괜찮게 잘 뽑혔네. 생명도감이 너무 많이 나온 것만 빼면 완벽했어!”
“응. 재밌게 잘 편집해 주신 거 같네.”
“그럼, 슬슬 반응을 확인해 볼까?”
“반응?”
“응, 이렇게 귀여운 클라인이 방송계에 강림했으니, 당연히 좋은 반응이 있을 거 아냐?”
“별다른 반응 없을 거 같은데……?”
유리는 클라인도 평소 자주 이용하는 커뮤니티에 접속해 클라인의 이름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말로는 별 반응 없을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며 부정하고 있어도 클라인은 내심 반응이 꽤 괜찮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유리가 자꾸 그렇게 칭찬하고, 방송도 괜찮게 나온 것 같으니 기대를 하는 게 당연한 사람 마음 아니겠는가?
클라인은 빼꼼 고개를 뻗어 유리의 단말기 화면을 바라봤고, 천천히 유리가 읽고 있는 게시 글을 확인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으려나?
잉간이 이야기가 많았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던 클라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예상치 못한 게시 글이었다.
“엑.”
[솔직히 클라인 인간형 생물로 그거 할 것 같지 않냐?]
-저런 찐따형 미소녀가 인간형 생물을 키운다? 거기에 미니멀리즘 라이프를 즐긴다? 이건 합리적 의심이지 ㅇㅇ.
클라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클라인의 예상을 한참 넘어선 광기 그 자체였다.
109화 잉간이에게 새 친구가 생겼어요!
“이, 잉간이 두 명?”
사냥을 끝마치고 돌아온 블랑카는 내 모습으로 변한 문어 인간의 외양을 보고 당황했는지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
나는 그런 블랑카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으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했다.
“그러니까 다른 물체나 생명체를 흉내 내는 게 특기고, 본모습은 문어를 닮았고, 그래서 말을 하지 못하고…….”
“아마도 클라인이 새로운 룸메이트를 추가한 게 아닌가 싶은데.”
다행히도 블랑카는 금세 내 설명을 이해했다.
뭐, 그렇게 복잡한 일이 일어난 건 아니니까.
내가 그렇게 블랑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하는 동안, 문어 인간은 우물우물 고기를 먹어 치우고 있었다.
“말이 안 통한다는 게 조금 그렇긴 한데…….”
클라인이 직접 보낸 룸메이트라고 생각해서일까?
블랑카는 별다른 거부감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래도 블랑카의 말대로 계속 말이 통하지 않으면 같이 생활하는 게 무척 힘들 테니 빨리 우리가 사용하는 문자를 알려 주는 게 좋겠다.
그게 아니면 덩치 큰 동물을 대하는 것처럼 그냥 밥만 챙겨 주는 식으로 생활하든가 말이다.
일단, 오늘 처음 본 정체 모를 생물과 같이 살라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다.
한동안은 손님을 대우하듯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내면서 익숙해지는 게 양쪽 모두에게 좋겠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문어 인간은 밥을 다 먹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스르르 블랑카 쪽으로 향했다.
“으, 으응?”
내 모습을 한 문어 인간이 다가오자 블랑카는 묘한 소리를 내며 긴장된 표정으로 문어 인간을 바라봤고, 문어 인간은 슬며시 블랑카의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블랑카의 몸 이곳저곳을 살핀 문어 인간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그대로 블랑카의 모습으로 자신의 외형을 바꾸었다.
문어 인간은 그대로 블랑카에게 다가가 양팔을 벌리고 그녀를 껴안았고, 갑작스러운 문어 인간의 포옹을 받은 블랑카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어, 저기. 이건…….”
“네가 좋다는 거 아닐까? 친밀감의 표시, 뭐 이런 거.”
나는 피식 웃으며 그 모습을 지켜만 봤다.
이윽고 블랑카와 충분히 포옹을 했다고 생각한 건지 문어 인간은 블랑카를 껴안은 팔을 풀더니,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던 아리스에게 다가갔다.
“어, 어? 나도?”
자신도 문어 인간의 포옹을 받을 줄 몰랐던 것인지 아리스는 당황했고, 그러는 사이 문어 인간의 포옹이 아리스를 덮쳤다.
“으으, 미끈미끈하고 끈적거려…….”
문어 인간의 감촉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아리스는 문어 인간의 포옹을 받으며 그렇게 투덜거렸고, 문어 인간이 떨어진 뒤에도 한참이나 자신의 깃털에 달라붙은 점액을 떼어 내려 애썼다.
아리스와의 포옹을 끝마치자, 문어 인간은 이제 내 차례라는 듯 양팔을 벌리고 내게 다가왔다.
“나, 나도 해야 해?”
거부권은 없다는 듯 문어 인간은 그대로 나를 껴안았고, 아리스의 말대로 미끈거리면서 끈적거리는 기묘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런데 문어 인간의 외형이 블랑카다 보니 점액 말고도 부드러운 감촉이 얼굴에 느껴졌고, 나는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잉간.”
“아니, 이건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블랑카와 아리스는 그런 내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문어 인간이 포옹을 풀자마자 블랑카와 아리스는 나를 뒤에서 껴안고 문어 인간을 째릿 노려봤고, 문어 인간은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듯 천진난만하게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블랑카까지 문어 인간과 통성명을 끝마쳤으니, 이제 에포나의 차례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침대에서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는 에포나를 붙잡고 문어 인간 앞에 데려왔다.
“얘는 에포나라고, 내 가장 친한 친구야.”
“……?”
그렇지만 문어 인간은 에포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슬쩍 에포나를 내려다보니 에포나는 문어 인간에게 자기 모습을 드러내기 싫은 듯 고개를 홱 돌리고 있었다.
쩝, 에포나는 아직 문어 인간을 같은 가족이라고 인정하지 않은 모양이다.
아무튼, 저 문어 인간이랑 같이 살게 되었으니 좀 편하게 소통을 할 방법을 생각해 봐야 할 텐데.
일단 슬슬 밤이 다가오고 있으니 그것보다 먼저 잠자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역시 손님을 침대에 보내는 게 맞는 선택이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문어 인간에게 내 뜻을 전하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
“으음…… 잠자는 모습으로 보여?”
“잠자는 모습보다는, 살인 현장 같아, 잉간.”
“그래? 그럼 이걸 지우면?”
“아니, 그렇게 하는 것보단……. 에잇, 이리 줘 봐.”
내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답답했던 것인지 아리스가 내 손에서 종이를 뺏어 가서 발로 연필을 붙잡고 나 대신 그림을 그린다.
아리스의 귀여운 그림체로 그려진 그림은 누가 봐도 침대에서 자는 사람을 표현하고 있었다.
이야, 말 그대로 발로 그린 그림보다 더 못 그린 상황이네.
아무튼, 아리스가 그린 그림을 문어 인간에게 보여 주자 문어 인간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촉수로 그림을 가리키며 고개를 저었다.
침대에서 잘 생각이 아니라는 건가?
그럼 어디서 잘 생각이지?
내가 그렇게 의아해하는 사이 문어 인간은 또다시 모습을 스멀스멀 항아리의 모습으로 바꾸더니, 촉수를 뻗어서 이게 좋다는 듯 촉수를 까닥거렸다.
어, 그러니까. 자기는 잠을 이렇게 자니 신경 쓸 필요 없다는 건가?
그 말대로 문어 인간은 곧장 잠에 빠져든 모양인지 항아리 상태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고, 나는 조심스럽게 문어 인간이 변한 항아리를 탁자 위에 올려놨다.
“그럼, 우리도 이제 잘까?”
블랑카는 오늘은 곧장 잘 생각인지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고개를 흔들어 블랑카의 제안을 거절했다.
“나는 조금 이따가 자려고. 좀 만들 게 있어서.”
“이 시간에 뭘 만들려고?”
“별건 아니고, 그냥 그림으로 신호를 보낼 수 있게 하려고.”
“그림으로?”
뭐, 복잡한 건 아니고 간단히 예, 아니요, 배가 고프다…… 그런 일상 회화와 같은 것들을 그림으로 그려 둘 생각이다.
문어 인간이 말하고 싶은 게 생기면 곧바로 그림을 가리켜 우리와 소통할 수 있게끔 말이다.
나는 아리스의 검수를 받아서 적당히 그려 둔 그림을 탁자 위에 올려 두고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문어 인간은 내가 만들어 둔 그림 뭉치를 발견한 모양이다.
문어 인간은 흥미롭게 내가 그린 그림 뭉치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고, 이내 촉수를 흔들어 나를 부르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내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문어 인간에게 다가가자 문어 인간의 피부의 색상이 기묘하게 뒤바뀌기 시작했다.
가슴 부분이 새하얗게 탈색되기 시작하더니, 새하얀 도화지처럼 탈색된 가슴 부위에 검은 점들이 몽글몽글 찍히기 시작했다.
검은 점들은 서서히 무언가의 형상을 이루더니, 내가 그려 둔 그림으로 뒤바뀌기 시작했다.
항상 그림을 보여 주는 건 귀찮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저런 식으로 몸에 그림을 나타나게 해서 소통을 할 생각인 거구나?
“어, 대충 이해한 거야?”
그림들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하자, 내 말의 뉘앙스를 대충 이해한 걸까?
문어 인간은 알겠다는 뜻의 그림을 가슴팍에 띄웠다.
이 정도면 말이 통하지 않아서 답답한 상황이 오지는 않을 것 같네.
꽤 괜찮은 의사소통에 내가 만족스러워하고 있을 때, 문어 인간이 조심스럽게 내게 무언가를 질문해 왔다.
그러니까, 어디에, 간다?
오늘 뭘 할 거냐고 물어보는 건가?
“오늘은, 뭘 할 거냐면……?”
으음, 원래는 오늘쯤 종이로 집 안 가구를 더 업그레이드하거나, 물레방아의 설계도를 만들 생각이었지만.
이왕 문어 인간이 집에 온 김에 좀 외출이나 해 볼까?
그래, 오랜만에 다시 바다나 가 보자고.
문어니까, 역시 바다를 좋아하지 않겠어?
* * *
[솔직히 클라인 인간형 생물로 그거 할 것 같지 않냐?]
-저런 찐따형 미소녀가 인간형 생물을 키운다? 거기에 미니멀리즘 라이프를 즐긴다? 이건 합리적 의심이지 ㅇㅇ. ㅗㅜㅑ
[댓글]
-ㅗㅜㅑ 머꼴.
-도대체 어디 차원이길래 이런 소리를 로그아웃도 안 하고 하냐??
-ppap 캡처했습니다 ^^
-인간성욕은 부끄러운 게 아닌데??
-헤으응, 클라인 누나…….
-진심 그냥 들이박아 버리네 이 새끼 ㅋㅋㅋ
“어, 어, 음…….”
클라인은 자신의 예상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게시 글을 바라보며 할 말을 잃었다.
아니, 뭐. 커뮤니티의 성격이 성격이다 보니 그리 좋은 소리만 나오지는 않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래도 이건 한참 선을 넘은 글이 아닌가?
클라인뿐만이 아니라 커뮤니티 이용자들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댓글 창의 여론은 글 작성자에게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클라인이 난생처음 보는 수위의 게시 글에 당황하는 사이, 차갑게 내려앉은 유리의 목소리가 클라인의 귓가에 들려왔다.
“저기, 클라인.”
“어, 응?”
“저거, 내가 알아서 처리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처, 처리?”
“응, 클라인은 나중에 결과만 받아 보면 돼. 알겠지?”
유리가 말하는 것이 불법적이거나 폭력적인 뜻의 처리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클라인의 귀에는 어쩐지 유리가 저 사람을 죽여 놓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어, 저기. 너무 심하게만 하지 마.”
그 때문인지 클라인은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지만, 유리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클라인의 어깨를 붙잡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클라인, 이런 건 처음부터 강하게 나가야 하는 법이야. 이런 걸 그냥 놔두면 점점 더 악화되기만 할 뿐인걸?”
“그, 그래?”
진지한 유리의 모습에 클라인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유리는 만족한 표정으로 어디론가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어디에 메시지를 보내는 거야?”
“응, 아는 변호사님.”
순식간에 메시지를 보내는 것을 끝마친 유리는 방긋 웃으며 지금까지 보던 게시 글을 꺼 버리고 다른 게시 글들을 탐방하기 시작했다.
“자, 방금 건 잊어버리고! 다른 글들이나 보자고!”
“으, 응!”
“봐 봐, 반응 좋다니까? 다들 엄청 좋아하잖아.”
유리의 말대로 클라인에 대한 커뮤니티의 반응은 꽤 호의적이었다.
커뮤니티의 성향상 꽤 과격한 어투로 쓰인 글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아까의 글처럼 선을 넘는 수준이 아니라면 웃고 넘길 수 있는 것들이었다.
자신의 외모를 칭찬하는 글들을 볼 때마다 낯간지러운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래도 그런 글들을 보는 게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게시판의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것이 클라인의 외모에 대한 내용이었다면, 그다음은 잉간이에 대한 내용이었다.
주로 인간형 생물도 보다 보니 귀엽다는 등, 자기도 한 마리 정도 키우고 싶다는 등 호의적인 반응이었다.
하지만 간간이 보이는 몇몇 게시 글들은 그리 긍정적인 내용이 아니었다.
[근데 인간형 생물은 왜 키우는 거냐?]
-징그럽지도 않음?
[솔직히 인간형 생물들 징그러운데 죄다 박멸했으면 좋겠음.]
-위험종 지정해서 걍 다 때려잡으면 안 됨?
징그러운 인간형 생물을 왜 키우냐니, 인간형 생물도 위험종으로 지정해야 한다느니.
호의적인 여론이 7 정도라면, 부정적인 여론이 3 정도 되는 느낌?
그래도 이번 방송으로 잉간이의 매력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준 것 같아서 다행이다.
“내일쯤 되면, 너도 아마 대기업이라고 부를 수준이 될걸?”
“그건…….”
그건 너무 나간 이야기야.
클라인은 그렇게 말하려 했지만 유리가 들이민 화면을 보고 할 말을 잃어버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마어마한 속도로 상승하고 있는 자신의 채널 구독자 수였다.
“널 처음 본 순간부터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니까?”
“도무지…… 믿기지가 않네…….”
이게 진짜 현실일까?
지금 내가 꿈을 꾸는 건 아닐까?
그렇게 클라인이 멍하니 계속해서 올라가는 구독자 수를 바라보는 사이, 그런 클라인의 모습을 피식 미소 지으며 바라보던 유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잉간이하고 다곤이는 친해졌으려나?”
맞다, 그러고 보니 잉간이하고 다곤이가 있었지.
지금쯤이면 서로 친해졌으려나?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유리의 뒤를 따라 잉간이와 다곤이의 상태를 확인하러 발걸음을 옮겼다.
110화 잉간이와 다곤이가 바다에 갔어요!
문어는 바다를 좋아한다.
인간도 대부분 바다를 좋아한다.
그렇다면, 문어 인간도 바다를 좋아하지 않을까?
아리스토텔레스도 울고 갈 완벽한 삼단 논법의 활용이다.
“그러므로, 오늘은 바다에 갈 거야!”
“에, 굳이?”
그렇지만 어째 두 번째 명제부터 벌써 흔들리는 기분이 든다.
블랑카와 아리스는 바다에 가는 것이 그리 내키지 않는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바다에 가서 딱히 할 것도 없는데, 굳이 갈 필요가 있나?”
“맞아. 보니까 뭐 먹을 것도 없던데!”
“아니, 그치만 이쁘고. 그리고…….”
“털에 소금기가 달라붙는 그 끈적한 느낌이 별로야.”
“맞아. 맞아. 한번 깃털이 더러워지면 청소하기 얼마나 힘든데!”
블랑카와 아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털썩 침대에 드러누웠다.
쩝, 하긴 지난번 바다 외출이 그렇게 볼거리가 많진 않긴 했지.
그렇다고 나 혼자서 문어 인간과 바닷가로 갈 수는 없는데, 뭔가 블랑카와 아리스를 설득할 만한 게 없을까?
“어, 그러니까. 바닷물로 두부를 만들 수 있다? 염전? 도 만들 수 있고…….”
나는 필사적으로 지금 상태의 바다를 이용할 방법을 생각해 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리 썩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생물체가 살지 않는 바다는 그냥 짭짤한 물일 뿐이잖아?
으음, 나 혼자서 바다에 가기 싫은 것도 있고, 나 혼자서 바다로 향하는 건 너무 오래 걸리는데.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고민하던 때, 갑자기 문어 인간이 내 팔을 툭툭 건드렸다.
“응?”
문어 인간은 다시 블랑카의 모습으로 변하더니, 자기만 믿으라는 듯 가슴을 툭툭 건드렸다.
잠깐, 지금 우리가 무슨 대화를 하는지 알아들은 건가?
잘 생각해 보니까, 문어 인간은 말을 하지 못할 뿐 소리를 듣지 못하는 건 아니지?
그렇다면 나나 블랑카, 아리스에게 기본 적용되는 번역기가 제대로 작용하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잠깐, 너. 우리가 무슨 말 하는지 다 알아들어?”
내가 놀란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자 문어 인간은 긍정의 뜻의 그림을 자신의 몸에 띄우는 것으로 대답했다.
아, 문어 인간이 내 말을 할 수 없고, 내가 문어 인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문어 인간이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뜻은 아닌데, 나는 왜 이제야 그 사실을 깨달은 걸까?
아무튼, 문어 인간은 지금껏 우리가 무슨 대화를 하는지 알아들었다는 거고, 지금 우리가 바다에 갈지 말지로 고민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음…… 내가. 도와준다?”
계속해서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문어 인간은 무언가를 어필했고, 나는 암호를 해석하듯 문어 인간의 가슴을 바라보며 단어를 조합했다.
내가 도와준다?
문어 인간이 바다에 가는 걸 도와주겠다는 건가?
아까, 블랑카나 아리스의 모습으로 변했던 걸 생각하면, 만약 변신한 모습이 원본의 능력치도 그대로 복사한다면?
잘 생각해 보니 블랑카나 아리스 없이도 문어 인간의 도움을 받으면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다는 게 아닐까?
“나, 좋아한다. 너, 그리고 그것?”
그것은 바다를 뜻하는 말이겠지?
내가 바다를 뜻하는 그림을 적어 두지 않아서 그것으로 대체한 느낌이 들고.
자기도 바다에 가는 걸 좋아한다, 뭐 그런 뜻인 거 같은데.
뭐, 사실 나도 바다에 가려는 이유가 기왕 새 식구가 들어왔으니 친해질 겸 소풍을 나가려던 건데.
블랑카와 아리스는 싫다고 하니까, 그냥 문어 인간하고 단둘이서 외출하는 것도 괜찮겠네.
“그럼, 블랑카하고 아리스는…….”
“따라갈게!”
“응?”
그렇지만 어째서인지 블랑카와 아리스는 볼을 부풀리며 바로 태세를 바꿨다.
갑자기 뭐 때문에 마음이 바뀐 거지?
“그, 두부? 인가 하는 거 엄청 궁금하거든! 그러니까, 아무튼…….”
“나, 나도. 염전이 뭔지 궁금해!”
“어, 응. 그래……?”
뭔가 좀 이상하긴 하지만 아무튼 블랑카와 아리스도 따라온다니 다행이네.
적당히 먹을 걸 챙기자 문어 인간이 아리스의 모습으로 변해 날아오르려는 듯 날개를 퍼덕인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문어 인간의 몸은 제대로 떠오르지 못하고, 문어 인간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어, 저거 왜 저래?”
“으음…… 나는 법을 모르는 게 아닐까?”
나는 그런 문어 인간의 모습에 당황해 아리스에게 물어봤고, 아리스는 아주 당연한 사실을 대답했다.
모습을 복사한다고 해도 기억까지 복사하는 건 아니니 나는 법을 모르는 건 당연한 건가?
문어 인간이 평소에 날아다녔을 리는 없지 않는가.
거기에다가 아리스가 나는 방식은 날갯짓으로 난다기보단 뭔가 공기의 마력? 그런 걸 조작해서 나는 방식이다.
결국 문어 인간은 아리스의 모습으로 나는 걸 포기하고, 블랑카의 모습으로 변해 자신의 등을 두드렸다.
블랑카에게 부담을 주지 않을 겸, 나는 문어 인간의 제의를 받아들이려고 했지만, 블랑카는 그걸 허용하지 않았다.
“흡!”
“브, 블랑카?”
블랑카는 한 손만으로 내 몸을 번쩍 들어 올려 나를 자신의 등 뒤에 태웠고, 문어 인간을 째릿 노려봤다.
나와 문어 인간은 뭐가 잘못됐는지 모르고 고개를 갸우뚱거렸고, 아리스만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을 뿐이었다.
“……!”
문어 인간도 블랑카의 등에 타 보고 싶었던 걸까?
문어 인간은 개의치 않고 아리스의 모습으로 변해 블랑카의 등에 올라타려 했지만, 블랑카는 철벽 블로킹을 선보였다.
“등은 안 돼!”
나를 등 위에 태운 채로 그런 말을 해서 설득력이 떨어지긴 하지만, 문어 인간은 그제야 블랑카의 반응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약간의 소동이 있은 뒤, 우리는 바닷가를 향해 출발했다.
블랑카의 배를 껴안은 상태로 블랑카와 함께 바닷가로 달려가며, 나는 조용히 머릿속에 구상해 둔 계획을 수다를 떨듯 털어놓았다.
“내가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응.”
“그, 물레방아도 만들고. 뭐 이것저것 만든다고 했잖아?”
“그렇지?”
“그래서 말인데, 나중에 바닷가에 별장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해 봤어.”
“별장을? 왜?”
블랑카는 내가 세운 또 하나의 건설 계획을 듣고 질리지도 않냐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렇지만, 이 건설 계획에는 다 이유가 있단 말이다.
“아니, 내가 바다에 몇 번 오면서 느낀 건데. 집에서 여기까지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너무 길단 말이야. 그래서 얼마 즐기지도 못하고 바로 집으로 돌아가야 하잖아?”
“그치. 잠을 바닥에서 자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러니까, 대충 바닷가에 별장을 지어 두면. 나중에 놀러 왔을 때 신경 쓰지 않고 오래오래 놀 수 있을 거 아냐? 그냥 별장에서 자고 가면 되니까.”
“뭐, 취지는 좋네.”
“그치?”
“그런데 바닷가 근처에는 나무가 없는데, 어떻게 집을 지으려고?”
“그건, 다 생각해 뒀지. 무점토를 바닷가에서 만들어서 집을 짓는 거야. 근처에 모래들은 널렸잖아? 대충 무오 점액하고 큰 바구니만 들고 오면 된다고.”
내가 그렇게 미래의 계획을 이야기하는 동안, 블랑카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어?”
“아니, 그냥. 첫 만남하고 너무 사람이 달라졌다 싶어서.”
“그때는…….”
그때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난리 나 있던 때이기도 했고, 주인 녀석이 내게 보내는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때였으니까.
그때의 나를 떠올리자, 나는 자연스럽게 지구의 일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없어도 알아서 잘하겠거니 하고 드래곤들과 서큐버스를 보내 놨는데, 그게 과연 옳은 선택이었을까?
이곳에 남아서 클라인과 소통을 이루려는 내 선택은 과연 좋은 결정이었을까?
그냥, 전처럼 지구로 내려가는 게 두려워서 이 안락한 어항 속에 남는 걸 선택한 게 아닐까?
나의 변화는, 과연 긍정적인 변화였을까?
“있지, 블랑카.”
“응?”
“블랑카는,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다고 하면 돌아갈 생각이야?”
“나는…….”
블랑카는 가만히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아냐.”
“백은 기사단의 사명감은 어디로 사라진 건데?”
“네가 있으니까, 돌아갈 마음은 없어. 아리스가 그랬다며? 네 곁이 아니면 있을 의미가 없다고.”
“그랬……지.”
“그 말대로야. 네가 없다면, 내가 이 갑옷을 입고 있을 이유는 없어.”
무언가 기사 소설에서 나올 법한 블랑카의 말에 나는 얼굴을 붉히며 괜히 블랑카의 말을 부정하듯 투정을 부렸다.
“나에게 그 정도의 가치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이기적이니까, 남들이 가치가 없다고 해도 내게 가치가 있다고 느껴지면 손에 쥐고 있을 생각이거든.”
도대체 누가 블랑카에게 좀 더 이기적이어도 괜찮다고 말한 거야?
“뭐, 아리스를 보고 느낀 것도 있지만. 제일 큰 건 맨 처음으로 널 만났던 날 내게 했던 말이었지.”
아, 나구나?
어찌 됐든, 그렇게 블랑카와 수다를 떠는 사이 우리는 바다에 도착했다.
전에 만들어 둔 배는 쓸쓸히 모래사장에 처박혀 있는데, 저 모습을 보면 별장을 만드는 김에 항만 시설도 만들어 볼까 생각이 든다.
물론, 그렇게 본격적인 건 아니고 간단한 소꿉장난 수준 정도로 말이다.
“보라니까? 저기, 저쪽에 별장이 하나 딱 있으면…….”
내가 해안가의 풍경을 둘러보며 별장을 짓고 싶은 위치를 말하는 사이, 바다를 좋아한다는 문어 인간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던 걸까?
문어 인간은 드물게 기쁜 표정을 지으며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바다에 뛰어들었다.
저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내가 기분이 다 좋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바다에 오기 전 미리 준비해 뒀던 것을 꺼내 들었다.
* * *
“생각보다 엄청 사이가 좋아 보이네?”
“원래 다곤은 다른 종족이나 물건을 흉내 내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다른 종족과 공생하는 걸 좋아하거든.”
유리가 다곤을 키우는 것은, 다곤이 가진 촉수가 좋아서이기도 하지만 무척 얌전하고 평화로운 다곤의 성격이 마음에 들어서이기도 하다.
얼마나 다른 종족과의 교류에 거부감이 없으면, 대부분의 차원 생물들은 충분한 훈련이 필요한 핸들링을 별다른 훈련 없이 단번에 성공할 정도다.
뭐, 그건 상당히 둔한 다곤의 성격 덕분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어찌 됐든 다곤이 처음부터 별다른 전투 의지나 경계 태세를 보이지 않은 덕분일까?
잉간이는 다곤을 빠르게 자신의 영역권에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였다.
다만 잉간이의 룸메이트들은 살짝살짝 다곤을 견제하는 모습을 보여 줬는데, 이는 아마도 차원항 내부의 서열 때문인 것으로 보였다.
다곤이 그런 룸메이트들의 견제에 반응을 하지 않아서 다행이지, 만약 다곤이 반응했다면 한바탕 서열 정리를 위한 싸움이 벌어졌을 수도 있을 상황이다.
그런데 계속해서 잉간이를 관찰하다 보니, 잉간이가 무언가 특이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종이에 그림을 그려서 다곤과 대화를 시도하려 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곤은 음성언어 대신 신체 언어와 시각언어를 사용하는데, 그 때문에 잉간이가 사용하는 음성언어를 사용할 수는 없다.
그래서 잉간이도 시각언어를 이용해서 다곤과 대화를 해 보려는 것 같다.
진짜, 저런 모습이 참 귀엽다니까.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마치 도서관에서 책을 읽듯 유리와 함께 조용히 차원항 안의 모습을 관람했다.
그리고 그때, 그 모습을 지켜보던 클라인에게 한 가지 발상이 떠올랐다.
“어?”
어쩌면, 잉간이와 좀 제대로 된 대화라는 걸 나누면서도 정부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이다.
“왜 그래?”
“아니, 그냥. 애들이 너무 귀여워서. 헤헤.”
“뭐야, 그게?”
갑자기 탄성을 지른 클라인이 모습이 이상했는지 유리가 의아한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지만, 클라인은 머리를 긁적이며 유리의 질문을 잘 받아넘겼다.
일단, 유리 앞에서 이걸 시도해 볼 수는 없으니까 이건 유리가 떠나고 난 다음 기회에 시도해 보자.
클라인의 말이 유리에게 무언가를 떠올리게 한 걸까?
유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투정하듯 클라인에게 다곤을 키우며 있었던 고충을 털어놨다.
“진짜, 저렇게 귀여운데 왜 사람들은 다곤을 안 키울까?”
“음…… 일단, 사람하고 좀 비슷하게 생기기도 했고. 크기가 너무 차이 나서 아닐까?”
“진짜, 작은 생물들은 식용이나 공업용으로만 여기는 이 편견이 제일 무섭다니까? 있지, 다곤은 전용 사료나 전용 장난감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니까?”
“진짜? 인간은 그 정도까진 아닌데…….”
“인간은 어느 정도 시장이 형성되어 있으니까 그렇지. 다곤은 애완 시장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수준이어서, 다곤이한테 줄 장난감이나 사료도 다 내가 만들어야 했다니까?”
“아, 그건 영상으로 봤어. 그냥 취미인 줄 알았는데.”
“뭐, 이젠 취미이긴 한데. 시작은 그랬다고. 그런 면에서 난 클라인, 네가 참 부러워.”
“부러워? 뭐가?”
“네가 인기를 끌면서 애완 인간 시장도 크게 성장해서, 이것저것 용품들이 많이 나오잖아? 최근에는 뭐, 인간용 전자오락도 나온다면서?”
“드래곤용을 개량한 거지만.”
“아무튼, 그런 식으로라도 상품이 나오는 게 어디야. 우씨, 나는 대기업이 되었어도 다곤 시장이 하나도 발전하지 않더라고. 덕분에 광고도 잘 안 들어오고. 진짜, 잉간이하고 다곤이하고 귀여움에 별 차이는 없는데!”
유리는 그렇게 투덜거렸지만, 유리의 말을 들으며 클라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인간하고 다곤하고 별 차이가 없다라.
맞는 말이다.
인간형 생물들이 지적 생물로 인정받을 정도의 지능을 가지고 있다면, 인간형 생물과 비슷한 생물들도 그 정도의 지능을 가지고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인간형 생물의 지적 생물 지정을 위해서 노력하는 클라인은, 나중이 된다면 그런 생물들을 위해서도 노력해야 하는 걸까?
내가 하고 싶은 건 그냥 잉간이에게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 주는 건데?
클라인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고, 그런 클라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리는 조심스럽게 클라인에게 걱정 어린 당부를 건넸다.
“저기, 클라인. 네가 이제 슬슬 대기업이 될 거 같아서 하는 말인데 말이야.”
“응?”
“뭐, 이상한 사람들이 들러붙는 걸 조심해. 다곤 시장이 그렇게 크지도 않은데, 나한테 다곤 협회 사람이라며 찾아온 사람도 있었다니까?”
“그, 그래?”
“보통, 네 인기를 이용해서 단물만 빼먹으려는 놈들이니까, 그리 믿지 말고 적당히 흘려듣는 걸 추천해. 그런 놈들은 말로만 생물을 위한다면서 지 잇속만 챙기려는 놈들이거든.”
“응…….”
“인간형 생물은 다곤보다 더 시장이 크니까, 인간 협회든 뭐든 분명히 커다랗게 존재할 거라고. 그런 데랑 엮이면 너만 피곤해질 거야.”
“응, 새겨들을게.”
클라인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무래도 유리의 조언은 한발 늦은 것 같다.
111화 인간형 생물들이 바다에서 노는 법
바다에 왔는데 할 게 없다.
내가 바다에 없던 생명체들을 만들어 낼 수는 없는 노릇이고, 저 문어 인간처럼 수영하는 걸 즐기지 않는 이상 블랑카와 아리스가 즐길 게 별로 없다.
놀 게 없다는 아주 중대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사실 내가 희생하기만 하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지만, 그건 최후의 수단으로 써먹자.
나도 살아야 할 것 아냐?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고 싶지 않기에, 나는 바닷가에 오기 전 준비해 둔 것을 바구니 안에서 꺼냈다.
최후의 수단이니 뭐니 말은 거창하게 하긴 했어도, 실은 별건 아니다.
단순한 공일 뿐이다.
전에는 공을 만들려면 고무나무의 뿌리를 얇게 가공해서 대나무를 엮듯이 둥근 형태를 만들든가, 동물들의 장기를 이용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일단 공을 만들려면 유연하고 잘 가공되는 소재가 필요한데, 내가 종이를 만들기 전까지 내게 그런 소재는 무점토나 점토밖에 없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점토로 만든 공은 가지고 놀 수 없다.
그건 공이 아니라 바윗덩어리니까 말이다.
하지만 종이는 거의 점토에 맞먹을 만큼 자유자재로 변형이 가능하고, 방수를 부여하기도 편하다.
적당히 무오 점액으로 만든 풀을 겉 표면에 처바르기만 하면 되니 말이다.
그 덕분에 전에는 만들려면 한참 시간이 걸렸던 것들을 손쉽게 만들 수 있게 되었고,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공이다.
그냥 종이를 주물주물 뭉친 다음, 겉 표면을 풀을 묻힌 종이로 감싸면 될 뿐이니 말이다.
이렇게 공을 만들었으면 뭘 해야 하겠는가?
당연히 가지고 놀아야 할 것 아닌가?
축구나 야구 같은 건 인원수 때문에 불가능하겠지만, 적당히 족구나 피구 같은 건 3, 4명이서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족구라는 건 어떻게 하는 건데?”
“응, 족구는 말이야. 발을 써서…….”
그렇지만 그런 내 원대한 계획은 시작부터 틀어지고 말았다.
잠깐, 발?
나는 가만히 아리스와 블랑카의 다리를 바라봤고, 아무리 봐도 공을 다루기 적합하지 않은 두 쌍의 다리가 말없이 내게 존재감을 주장했다.
“잉간.”
“응?”
“혹시, 바보야?”
“아니, 그러니까…….”
진심으로 어이없다는 듯한 블랑카의 진심이 담긴 목소리가 내 마음을 후벼 판다.
아니, 괜찮아.
족구가 안 된다면 피구가 남아 있잖아?
“어, 그러니까. 피구는 손을…….”
“손?”
그렇지만 피구 또한 순식간에 해맑게 웃으며 날개를 흔들어 보이는 아리스에 의해서 순식간에 침몰하고 말았다.
“결국, 준비한 게 아무것도 없는 거랑 같네?”
“아니, 잠깐만. 잠깐 기다려 봐. 피, 피구는 굳이 꼭 손을 쓸 필요가 없으니까, 적당히 규칙을 바꾸면…….”
“흐응, 그래?”
“응, 손으로만 공을 잡아야 한다는 규칙을 제거하고, 몸에 공이 맞아도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잡으면 된다는 규칙을 넣으면…….”
나는 블랑카와 아리스의 신체에 맞춰 새로운 규칙의 피구를 제안했고, 다행히도 블랑카와 아리스는 내가 제안한 새로운 룰의 피구에 꽤 흥미가 있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이 공을 상대방 몸에 맞히면 된다는 거지?”
“응, 그런 건데.”
“응, 이해했어. 기사단에서 가끔씩 이런 훈련을 했었지. 모의전 대체도 가능하고, 전 방위적으로 마력과 체력을 단련할 수 있는 좋은 훈련법이야.”
“응?”
“모의전……?”
블랑카는 이런 훈련을 해 봤는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아리스는 모의전이라는 단어에 흥미가 팍 생긴 듯하다.
그러고 보니까 맨 첫날 블랑카와 아리스가 벌인 모의전에서 블랑카가 완전히 압승을 거뒀었지?
내 생각으로는 블랑카와 아리스가 다시 모의전을 펼친다면 블랑카가 여전히 이길 것 같지만, 아리스도 그때보다 더 많이 성숙해졌으니 좀 다른 양상이 나오지 않을까?
“몸에 닿은 공이 바닥에 떨어지면 패배라는 건, 말 그대로 바닥에 공이 닿지만 않으면 된다는 거지?”
“응, 그렇지.”
어째, 블랑카와 아리스는 피구라기보단 모의전을 펼칠 생각인 것 같다.
어느새 나를 빼놓고 각자 하나씩 규칙을 확인하는 모습이 살벌해 보일 정도다.
그렇게 블랑카와 아리스가 규칙을 확인하는 동안, 문어 인간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바닷속에서 우리들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공을 파괴하거나, 공을 바닥에 떨어트린 쪽의 패배. 이 규칙에 이의는 없지?”
“응, 없어.”
그냥 가볍게 피구나 즐길 겸 공을 가져온 건데, 정신을 차려 보니 블랑카와 아리스의 모의전으로 바뀌어 있었다.
둘이 즐거우면 괜찮으려나?
둘 다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으니 즐거운 게 맞을 거야, 응.
아리스의 모습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어느새 물 밖으로 나온 문어 인간이 아리스의 모습으로 내 등에 들러붙는 것과 동시에, 블랑카와 아리스의 두 번째 모의전이 시작됐다.
“흐흥, 전장을 제한해 두지 않은 잘못이야!”
아리스는 지난번처럼 공을 가지고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렇지만 블랑카는 그런 아리스의 모습에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아리스를 관찰하며 중얼거렸다.
“지난번에도 그러다가 큰코다친 거 잊어버리지 않았나?”
“그, 그때랑은 다르거든?”
지난번의 쓰라린 패배의 기억이 떠오른 걸까?
아리스는 얼굴을 붉히며 그렇게 외치고는, 허공에 공을 띄운 채로 공에 마력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블랑카가 평소에 도구들을 마력으로 강화하던 것과 비슷한 것일까?
아리스의 마력으로 강화된 공은 은빛으로 은은히 빛나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받아라!”
그리고 아리스는 그대로 블랑카의 몸을 향해 공을 쏘아 냈다.
아리스가 어찌나 강하게 공을 쏘아 댔는지, 내 눈에는 은빛의 궤적만이 간신히 들어왔을 뿐이다.
아리스는 이 한 수로 이겼다고 생각했는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지만, 그런 아리스의 미소는 곧바로 삐죽 일그러졌다.
“으으…….”
“어우, 묵직하네.”
“그거, 반칙 아냐? 그런 게 어디 있어!”
도저히 맨손으로 받아 내기 어려울 것 같은 아리스의 일격을, 블랑카는 마력창으로 공을 꿰뚫어 막아 낸 것이었다.
당연히 아리스는 공을 파괴한 쪽이 패배라는 규칙을 언급하며 블랑카의 실격패를 주장했지만, 블랑카는 창에서 공을 뽑아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공이 파괴되지 않았으니, 반칙이 아니지.”
블랑카가 어찌나 깔끔하게 공을 받아 냈는지, 창을 뽑아낸 구멍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다.
뭔가 억지 같지만, 블랑카의 말대로 공이 파괴되지 않았으니 반칙이 아닌가?
어찌 됐든 아리스도 일단은 블랑카의 주장에 수긍한 것 같고, 블랑카는 지면을 박차고 앞으로 달려 나가며 아리스에게 던질 공에 가속도를 더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아리스는 블랑카가 공을 맞히기 어렵게 공중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며 불규칙적인 회피 기동을 선보였다.
“흡!”
마치 투창을 던지듯 블랑카의 파란 마력으로 감싸인 공이 하늘로 쏘아지고, 아리스의 공격에 맞먹는 속도로 아리스의 옆을 스쳐 지나간다.
아리스의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에 아리스는 잠깐 당황한 듯 보였지만, 싱글벙글 웃으며 승리 선언을 했다.
“흥, 맞히지 못하면 소용이 없는걸? 이대로라면 내 승리야!”
“그럼, 제대로 맞히면 되지.”
블랑카는 아리스에게 쏘아 낸 공이 떨어질 곳으로 먼저 달려가서 공을 받아 낸다는 진기명기를 선보이며 히죽 웃으며 계속해서 아리스에게 공을 던져 댔고, 여유롭던 아리스의 표정에 점차 당혹감이 서리기 시작했다.
아리스는 블랑카의 공격이 적당히 멈추길 기다렸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블랑카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고, 결국 아리스는 먼저 행동에 나섰다.
“이익……!”
공기의 마력을 조작한 걸까?
엄청난 속도로 아리스의 옆을 스쳐 지나가던 공이 허공에 멈춰 서서 그대로 아리스의 통제 아래에 놓인다.
“이, 이젠 안 봐줄 거야!”
“언젠 봐주기나 했고?”
아리스가 진심을 내겠다고 선언한 뒤, 전에 봤던 것보다도 더 선명하고 강렬한 마력이 공에 모여든다.
그렇게 다시 강렬한 일격이 발해지지만, 블랑카는 이번의 공격 또한 손쉽게 창으로 받아 냈다.
“이익……!”
블랑카와 아리스가 말 그대로 가슴이 웅장해지는 싸움을 벌이는 동안, 나와 문어 인간은 그 모습을 팝콘을 씹으며 열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원래는 블랑카가 이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아리스의 화력이 상상을 초월한다.
이거, 잘하면 아리스의 공격이 블랑카의 방어를 뚫을 수도 있겠는데?
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인지 아리스가 지금껏 이상으로 공에 마력을 불어 넣는다.
블랑카의 방어를 단번에 뚫어 버리겠다는 생각인 걸까?
그렇지만 블랑카는 그런 아리스의 모습을 여유로운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고, 그런 블랑카의 모습에 자극을 받았는지 아리스는 더더욱 공에 마력을 불어 넣었다.
“이건, 막을 수 없을걸?”
아리스는 그렇게 외치며 자신만만하게 공을 블랑카에게 내던지려 했지만.
펑.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나더니, 한때 공이었던 것의 파편이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어, 어?”
“공이 터졌으니, 이건 내 승리네?”
공이 터질 줄 몰랐던 것인지 아리스는 당황한 표정으로 가만히 바닥을 내려다봤고, 블랑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당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승리 선언을 했다.
“터, 터질 만큼 마력을 불어 넣진 않았는데……?”
“원상태라면 그렇겠지만, 지금 공이 원래 상태는 아니잖아?”
“……아!”
그러고 보니 지금 공은 블랑카가 낸 보이지 않는 구멍으로 가득 찬 상태였지?
설마, 블랑카가 창으로 공을 방어하던 건 이걸 노린 거였나?
“으으윽…… 으윽……!”
아리스는 무언가 소리치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결국 푹 한숨을 내쉬며 결과에 승복했다.
“으, 다음에는 꼭 이길 거야!”
“그래, 그래.”
아리스는 그렇게 외치며 내게 위로를 받으려는 듯 포로롱 내려와 다가왔지만, 내 등에 착 달라붙은 문어 인간을 보고 움찔 몸을 굳혔다.
그렇지만 곧바로 울상을 지으며 내게 다가와 내 품에 폭 안겼다.
“잉간, 나 또 졌어…….”
“공만 터지지 않았으면 몰랐겠는데, 다음번엔 이길 수 있을 거야.”
“그치, 그렇지?”
아리스는 내 위로를 받고 곧바로 방실방실 웃으며 기분이 좋아진 듯 보였고, 슬그머니 내 뒤편의 문어 인간을 바라봤다.
“……어?”
그러던 와중, 아리스가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탄성을 내뱉었다.
“왜 그래?”
“으응, 아무것도 아냐!”
그런 모습이 어딘가 이상해서 나는 아리스에게 질문을 던져 보지만, 아리스는 고개를 흔들며 내 질문을 적당히 넘겼다.
그렇게 블랑카와 아리스가 모의전을 펼치는 사이, 어느덧 해가 저물기 시작해서 돌아갈 시간이 되었고, 나는 바닷물을 채취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으아…… 피곤해…….”
모의전의 여파인지 블랑카와 아리스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밥만 먹고는 축 침대에 늘어져 잠에 빠져들었다.
나도 슬슬 씻고 잘까?
두부는 내일 만들어도 되니 말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슬며시 침대에 누웠고, 잠에 빠져들기 전 마지막으로 내 눈에 들어온 건 문어 인간이 종이와 연필을 가지고 무언갈 그리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밝아 왔고, 잠에서 깨어난 나는 책상 위에 놓인 기묘한 물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건?”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은, 아무리 봐도 누군가가 그린 만화와 피곤한 듯 곤히 자고 있는 문어 인간이었다.
그런데 어째, 만화의 내용이 심상치가 않은데?
112화 [속삭이는혼돈]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또 봐요!
책상 위에 올려진 문어 인간이 그린 것으로 추측되는 만화의 내용은 심상치 않았다.
대사가 하나도 없이 실사체로 그려진 만화는 그냥 보면 평범한 만화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내용은 평범하지 않다.
“이건, 자기 자신을 표현한 것 같고…….”
일단, 이 만화의 주인공은 문어 인간 자기 자신인 듯 보인다.
자기에게 일어났던 일을 만화 형식으로 정리한 걸까?
만화의 첫 부분은 문어 인간이 바닷속에서 깨어나는 것으로 시작했다.
문어 인간의 고향은 블랑카의 세계처럼 꽤 다양한 종족들이 서로 함께 살아가는 세계였던 모양이다.
잠에서 깨어난 문어 인간은 곧바로 다양한 형태의 인어들과 대화를 나누며 집 밖을 산책했다.
만화의 내용을 보아하니, 문어 인간은 몸을 변형시키고, 반짝거리는 것이 의사소통 방법이지만 다른 종족들은 우리와 같이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인 걸까?
문어 인간과는 다르게, 다른 종족들이 육체 언어로 소통하는 모습은 그려져 있지 않았다.
문어 인간의 고향은 꽤 깊은 바닷속인 걸까?
흔히 우리가 상상하는 심해 속의 모습이 잠시 펼쳐진 뒤, 문어 인간은 더 높은 곳으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문어 인간은 수면 밖으로 올라왔고, 인간을 닮은 다른 생명체들과도 대화를 나눴다.
연필로 그려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어딘가 인간과는 다른 이질감이 느껴진다.
막, 내가 처음으로 고블린들을 봤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각이다.
바다 밑바닥에서 건져 올린 수산물이나 일종의 귀금속들을 지상의 사람들과 육고기나 채소 같은 음식들로 교환하는 형태 같은데, 아직 화폐가 나타나진 않았던 걸까?
문어 인간은 바닷속을 산책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지상을 구경하는 것도 꽤 좋아하는 것 같다.
다양한 생물의 형태로 변해 가며 문어 인간은 곧바로 바다로 돌아가지 않고 지상을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계속해서 문어 인간의 일상이 그려졌고, 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다음 페이지로 넘겼다.
특이해서 보는 맛이 있긴 한데, 계속 이런 것만 반복되면 지루하지.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드디어 낯선 무언가가 만화에 등장했다.
하늘에서 살아 있는 것 같으면서도 거대한 부유섬 같은 물체가 등장한 것이다.
식물이 뿌리를 내리듯 그 물체는 지면을 향해 기다란 촉수와 비슷한 무언가를 내려뜨렸고, 그 물체가 등장한 여파일까?
주위의 나무들이 뿌리째 뽑히는 모습이 묘사됐다.
보통, 평범한 사람이라면 저런 일이 일어나면 무서워하고 도망치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했지만, 문어 인간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오히려, 정체불명의 뿌리 같은 물체에 흥미를 가지고 가까이 다가가는 모습이다.
그건 나와 이야기하던 문어 인간만 그런 게 아니라 종족 전체가 그런지, 사방에서 온갖 물체와 생물로 의태하고 있던 문어 인간들이 의태를 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뿌리에 다가서는 모습이 꽤 장관이다.
문어 인간들은 일제히 저 뿌리에 다가갈 방법을 찾으려 하지만, 뿌리가 공중에 떠 있어서인지 도무지 방법을 찾지 못하는 모습이다.
새 같은 생물로 변하면 하늘을 날아갈 수 있지 않냐는 생각이 잠깐 들기는 해도, 잘 생각해 보니 문어 인간이 묘사한 그림 중에서 새같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 같은 생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벌레들도 비행 능력이 없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설마, 문어 인간들의 고향에는 하늘을 나는 생물이 존재하지 않았던 걸까?
어찌 됐건, 문어 인간들은 머리를 맞대고 하늘에 떠 있는 뿌리를 조사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바로 그때, 문어 인간들이 머리를 붙잡으며 하나둘씩 바닥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만화를 그린 문어 인간도 예외는 아니었는지 털썩 바닥에 쓰러졌고, 다음 장면은 내게 무척이나 익숙한 곳으로 바뀌어 있었다.
“회색 안개…….”
나 때는 침대나 냉장고가 있던 것에 반해 문어 인간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문어 인간이 원래 바다에서 사는 걸 고려라도 한 걸까?
물속에 안개가 껴 있는 기묘한 풍경을 자아내는 모습으로 회색 안개는 문어 인간을 반겼다.
문어 인간의 주위에 가득 몰려 있던 다른 문어 인간들의 흔적은 당연히 보이지 않았고, 문어 인간은 생각보다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가만히 주위를 관찰하며 돌아다녔다.
그렇게 문어 인간이 생각보다 빠르게 바뀐 환경을 받아들이는 사이, 또다시 상황이 바뀌었다.
다시 문어 인간이 눈을 뜨니 사라졌던 친구들과 처음 보는 친구들이 주위에 바글바글 몰려 있던 것이다.
어째, 저 모습에서 무언가가 떠오르는데.
“인간 농장?”
나는 그 농장에서 살아가던 사이비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계속해서 만화의 내용을 읽어 나갔다.
새하얀 벽들이 문어 인간들의 주위를 가두고 있었고, 유일하게 뻥 뚫린 곳은 시꺼먼 하늘뿐이었다.
자신들이 늘 봐 오던 하늘과 전혀 다른 풍경에 문어 인간들은 두려워했지만, 눈을 뜰 때마다 줄어드는 친구들을 신경 쓰느라 하늘까지 신경 쓸 여유는 그리 없어 보였다.
그렇게 계속해서 친구가 줄어 가던 어느 날, 마침내 주인공의 차례가 왔다.
늘 그렇듯이 정신을 차려 보니 다른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회색 안개와도, 고향과도, 지금껏 갇혀 있던 것과는 다른 방이었다.
또 새롭게 바뀐 풍경에 적응하기도 전에, 문어 인간은 거대한 무언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느꼈다.
불타는 듯한 별이 박힌, 거대한 산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던 것이었다.
거대한 산?
문어 인간은 정말로 거대한 산을 그려 놨는데, 그림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아마 문어 인간이 주인의 모습을 그렇게 인식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문어 인간의 주인은 클라인과는 다른 사람인 것 같다.
계속해서 그림을 둘러보니 내가 아는 문어 형태의 촉수가 아니라, 밧줄 같은 형태의 촉수가 묘사되었기 때문이었다.
“클라인, 아니. 다른 사람인가?”
문어 인간이 촉수를 그렇게 인식해서 다르게 보이는 거라는 가능성이 있지만, 일단은 문어 인간의 주인과 클라인은 다른 사람으로 판단하는 게 더 가능성이 높겠지?
어쨌든, 그 후의 이야기는 상당히 익숙했다.
나처럼 주인에게 온갖 사건과 사고를 겪어 가며 세상을 파악하고, 그곳의 규칙에 익숙해져 가고, 주인과 교감하는 내용.
아무래도 문어 인간의 주인은 문어 인간의 본모습의 촉수와 자신의 촉수를 서로 엮어서 교감하는 걸 즐기는 모양이다.
그래서, 뭐 더 볼 건 없나?
이후의 내용은 거의 일기 수준이라고 생각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죽 기록을 훑어보다, 무언가 이상한 그림을 발견했다.
“뭐야, 이건?”
지금까지의 실사체와는 다르게, 무언가의 상징을 그린 것 같은 기묘한 그림.
그림이라기보단 일종의 마법진을 그려 둔 것 같다.
내가 지금껏 보기로는 문어 인간들은 뭐 문자 같은 걸 사용하는 것 같지 않던데, 이건 도대체 뭘 묘사한 거지?
문어 인간도 자신이 그린 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듯 그 그림 다음부터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 놨다.
그리고, 또다시 그 기묘한 문양을 작게 축소한 그림에 이어, 그 문양이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났다는 걸 묘사하는 것 같은 그림이 나타났다.
사실, 이것까지만 해도 그리 이상한 건 아니다.
주인 녀석들의 문자가 적힌 종이 같은 걸 문어 인간이 봤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나를 더 기묘하게 한 것은, 문어 인간이 묘사한 그 문양이 적혀 있던 종이의 모습이었다.
“……인류, 해방 전선?”
문양이 그려진 종이에는, 이젠 익숙해져 버린 바로 그 녀석들의 문구가 적혀 있던 것이었다.
-인류 해방 전선에 합류하라.
그리고 그 부분을 그리는 것을 끝으로 문어 인간이 잠에 빠져들었는지 만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
어째서 인류 해방 전선이 문어 인간의 일상을 묘사한 만화에 등장한 것일까?
그리고 저 기묘한 문양의 정체는 도대체 뭐고?
인류 해방 전선은 그냥 반려넷에서 어그로나 끄는 녀석들이 아니었나?
내가 단 한 번도 예상하지 못한 내용에 혼란에 빠져 있는 사이, 문어 인간은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야, 야. 이거 뭔데? 여기에 그려진 거, 다 사실이야?”
나는 깨어난 문어 인간을 곧바로 붙잡고 서둘러 만화의 내용에 대해 물었고, 문어 인간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긍정했다.
“그, 마지막에 그린 기묘한 문양. 그걸 어떻게 발견한 거야?”
떨어졌다. 하늘에서. 갑자기.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졌다.
주인의 짓인 걸까?
아니면, 인류 해방 전선에게 그런 식으로 삐라를 살포할 능력이 있는 걸까?
둘 중 뭐가 됐든, 인류 해방 전선이 내 예상을 아득히 초월한 놈들이라는 건 확실하다.
주인이 그런 삐라를 뿌렸다면, 그 인류 해방 전선이라는 곳은 주인들과 한패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고, 스스로 뿌린 거라면 이 어항을 빠져나와서 다른 어항에 침투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니까.
그리고 만약, 인류 해방 전선이 주인들과 손을 잡은 게 사실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왜?”
어째서 인류 해방 전선이 주인들과 손을 잡은 거고, 주인들은 어째서 인류 해방 전선을 그냥 놔두는 걸까?
내가 예상치 못한 내용에 고민하는 사이, 문어 인간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촉수를 쫑긋 세웠다.
“무슨 일이야?”
갑작스러운 문어 인간의 변화에 내가 의문스러운 질문을 던지는 사이, 나에게도 문어 인간이 반응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윽……?”
이제는 익숙해진 주인 녀석의 압박감이 아니라, 문어 인간이 내려올 때 느꼈던 정체불명의 압박감.
설마, 문어 인간의 주인이 돌아온 걸까?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어항 전체가 흔들리며 하늘에서부터 붉은 촉수가 내려오는 모습이 창문 너머로 보였다.
문어 인간은 서둘러 집 밖으로 뛰쳐나갔고, 나 또한 문어 인간의 뒤를 따라 집 밖으로 나갔다.
붉은 촉수는 곧바로 문어 인간과 엮이며 교감을 나누기 시작했고, 나는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잠시 후, 교감을 다 나눈 모양인지 붉은 촉수는 문어 인간에서 떨어지더니 홱 하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흠칫 몸을 굳히며 내게 다가오는 붉은 촉수를 가만히 바라봤고, 붉은 촉수가 내게 다가옴에 따라 서서히 붉은 촉수의 정보들이 내게 흘러들어 오기 시작했다.
조심.
걱정.
그리고 경고?
누군가에게 향하는 것인지 모를 정보들이 내게 흘러들어 오고, 나는 겁먹은 표정으로 붉은 촉수를 바라봤다.
붉은 촉수는 내가 움찔 몸을 굳히자 가만히 나를 바라보더니, 그대로 문어 인간을 휘감고 어항을 빠져나갔다.
문어 인간은 촉수에 감긴 상태로 내게 작별 인사를 하듯 촉수를 흔들었고,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문어 인간은 어째서 또 데려가는 거지?
설마, 내게 이런 정보를 전해 줘서?
나는 붉은 촉수가 흘리던 경고의 정보들을 떠올리며, 가만히 하늘을 바라봤다.
설마, 너무 많은 걸 알아 버렸다고 경고하러 온 건 아니겠지?
당연하겠지만, 하늘을 바라본다고 해서 대답이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 * *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유리는 다곤이를 다시 사육항에 집어넣고, 아쉽다는 듯 촉수를 뻗어 클라인을 껴안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다음에 또 보면 좋겠는데.”
클라인 또한 유리와의 파자마 파티가 꽤 즐거웠는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그러자, 유리는 피식 웃으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 클라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곧 다시 볼 수 있을 거야. 후후.”
“곧?”
“준비하고 있는 게 있거든. 뭐, 나만 준비하는 게 아니라 여러 명이 준비하는 건데, 다들 널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으니까.”
“준비? 합방이라도 또 준비하는 거야?”
“비슷해. 뭔지는 안 알려 줄 거야! 뭘 준비하는지 알게 되면 깜짝 놀랄걸?”
클라인은 유리의 말에 의아함을 가졌지만, 더 이상 파고들지 않았다.
뭐, 때가 되면 알아서 알려 주겠지.
깜짝 파티라도 준비하는 걸까?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현관으로 나서는 유리에게 가만히 손을 흔들었고, 유리 또한 클라인에게 손을 흔들며 짐을 챙겨서 현관에 들어섰다.
“클라인.”
“응?”
“너는 어디까지나 그냥 쥬튜버야. 그러니까, 네가 너무 힘낼 필요는 없어. 그냥 평소처럼 귀여운 잉간이를 자랑하면, 다 알아서 해결될 거야.”
“……응.”
클라인의 집을 떠나기 전, 유리는 마지막으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클라인에게 그렇게 말했다.
요즘, 클라인이 인간형 생물의 권리를 위해서 활동하는 걸 이야기하는 것이겠지.
그래, 유리의 말이 맞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쥬튜버지, 사회운동가가 아니다.
사회운동 같은 건 협회장 같은 사람들이 알아서 하게 놔두고, 자신은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인간형 생물들을 위해 평소처럼 행동하면 된다.
그렇지만, 클라인은 유리의 조언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성과가 나타나기도 했고, 어째서인지 자꾸 잉간이를 생각하면 다급해지게 된다.
자꾸만 빨리 성과를 거둬서, 잉간이와 진정한 친구가 되는 날이 빨리 다가왔으면 한다.
협회장도 조급해하지 말라고, 시간은 많다고 이야기했지만 과연 그럴까?
사람에게는 시간이 많을지 몰라도, 잉간이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잉간이의 시간이 다 사라지기 전에, 빨리.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고, 유리는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고 클라인의 집을 빠져나갔다.
“그럼, 나중에 또 봐! 안녕~!”
유리가 사라지고, 클라인은 가만히 잉간이의 차원항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없을 때는 몰랐는데, 있다가 사라지니까 엄청 허전하네.”
잉간이도 자신과 같은 기분을 느낄까?
다곤이가 사라져서 허전한지 평소보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잉간이를 바라보며 클라인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루빨리, 잉간이와 같은 시선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날이 오기를.
113화 [생명도감] 특별한 손님과 함께하는 생태 조사! (예고편)
[인류 해방 전선에 합류하라.]
-산딸기를 사러 간 아이는 뱀과 사과를 비교해서 무엇이 더 손해인가? 그들은 길가에 놓인 산들바람에서 태어난…….
“도대체 뭔 소리야…….”
혹시나 하고 인류 해방 전선의 글들을 찾아봤지만, 역시나 인류 해방 전선의 글들은 이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언제나처럼 난해하고, 아무 뜻 없이 와해된 것처럼 보이는 언어 뭉치들.
나는 내 품에 포근히 안겨서 배부른 듯 트림하는 에포나의 등을 토닥이며 가만히 생각했다.
인류 해방 전선은 도대체 정체가 뭘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정체를 알 수가 없다.
처음에는 그냥 말로만 떠드는 집단인 줄 알았는데, 반려넷을 통해서 사람을 세뇌하질 않나, 다른 어항들에 직접 삐라를 뿌리질 않나.
그렇다고 뭔가 있다고 보기에는, 너무 어설프다.
주인 살해법을 찾는답시고 단체로 애교를 부리는 걸 연습하질 않나, 자신만만하게 주인들에게 덤볐다 실종되는 건 예삿일이고.
진짜, 도대체 저 녀석들을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 거지?
아, 모르겠다.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
인류 해방 전선에 대해서 좀 더 조사해 보고 싶지만, 그렇다고 인류 해방 전선과 접촉하긴 꺼려진다.
반려넷으로 세뇌를 하는 놈들이 실제로 만나서 무슨 짓을 할지 어떻게 알고 만나?
일단, 내가 먼저 뭔가 하기보다는 저쪽이 먼저 접근하기를 기다리거나 정보가 더 쌓이면 움직이자.
내가 굳이 인류 해방 전선이랑 싸울 필요는 없잖아?
잘 생각해 보면, 인류 해방 전선이 주장하는 건 인간 입장에서는 당연한 소리잖아.
모든 주인을 죽이자는 등 너무 과격한 주장을 하는 것만 빼면 말이다.
“반려넷에 올려 봐……?”
그래도, 인류 해방 전선이 뿌리던 삐라에 적힌 문양이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지는 좀 궁금한데.
그건 나중에 아리스의 마법 훈련법을 물어볼 때 같이 물어보면 되겠지?
그냥 반려넷에 올렸다가 괜히 인분충들의 관심을 끌면 골치 아파질 수도 있다.
거기에 더해서, 주인들의 눈에 들 수도 있다.
문어 인간이 내게 만화로 그린 내용도 감지하고 바로 개입하는데, 반려넷이라고 안전할 리가?
그런데 진짜 인류 해방 전선은 왜 멀쩡하게 반려넷에서 활동할 수 있는 거지?
아, 모르겠다.
인류 해방 전선에 관한 고민은 이쯤 하고, 오늘 뭘 할지나 생각해 보자.
두부, 그래. 두부를 만들기로 약속했으니 두부를 만들고, 또 물레방아의 설계도도 그려 봐야지.
이제 종이도 있으니 흙바닥에 대충 끄적여서 설계도를 그리지 않아도 된다.
“잉간? 그…… 문어 인간이 안 보이는데?”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집 밖의 텃밭에 물을 주고 있자, 그제야 깨어난 것인지 블랑카가 나를 불렀다.
“집으로 돌아갔어. 집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그럴 수도 있는 거였어?”
“뭐, 문어 인간이 마음에 안 들었나 보지.”
“누구 마음에?”
“클라인은 아닌 다른 누군가?”
내가 그렇게 말하자 블랑카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어쩌면, 마음에 들어서 데려간 거일 수도 있겠네.”
“아마 처음부터 이곳에 얼마 머무르게 할 생각이 아니었을 거야.”
나는 슬며시 그렇게 말해 보지만, 블랑카의 기분은 쉽게 나아질 것 같지 않았다.
나는 그런 블랑카의 손을 슬며시 붙들며 속삭였다.
“언제는 나만 있으면 된다더니, 마음이 바뀐 거야?”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그 옛날 생각이란 블랑카가 클라인과 이 어항의 진실을 깨닫기 전을 말하는 거겠지.
그때의 블랑카는 어항에 들어오는 게 선택받은 자의 특권이라고 믿고 있었으니까.
뭐, 어찌 보면 어항에 들어오는 건 선택받은 자들뿐이라고도 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블랑카는 머리를 긁적이며 슬며시 자신의 생각을 털어놨다.
“그냥, 요즘엔 그런 생각이 든단 말이야.”
“무슨 생각?”
“어쩌면 내가 있던 리베리아도 사실은 이곳 같은 장소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
“그건…….”
그렇진 않을 거라고 말하려 했지만, 나는 블랑카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솔직히 자연스럽게 그런 생지옥이 펼쳐졌다고 생각하는 것보단, 누군가의 개입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게 더 옳지 않아?
뭐,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지구도 누군가의 어항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드니, 그런 가정에는 끝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뭔가 그런 생각도 했었단 말이지. 나는 사실 리베리아 님께 버려진 게 아닌가 하고.”
“어허, 좋은 생각.”
“그래, 응. 지금은 그렇게 생각 안 해. 만약 그 생각이 사실이어도 내겐 잉간이 있으니까.”
변명하듯 그렇게 중얼거리는 블랑카의 모습을 보며 나는 가만히 생각했다.
블랑카의 이 기분을 풀어 주려면 역시 밖에 한번 데리고 나가는 게 좋으려나?
하지만 언제쯤 다시 밖으로 나갈 수 있을지 감도 잡히질 않는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블랑카의 손을 꼭 붙잡은 그 순간.
“어?”
마치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완벽한 타이밍에 밖으로 통하는 차원 문이 내 곁에 생겨났다.
* * *
“대충 그래서 이번 합방의 반응은요…….”
“네, 넵.”
클라인은 긴장된 표정으로 리퀴드사의 담당자에게서 시청자들의 반응을 전해 듣고 있었다.
자기가 직접 찾아봤을 땐 그리 나쁘지 않은 반응이었는데, 리퀴드사는 어떻게 판단했을까?
“엄청 좋네요. 네. 이거 보이세요? 지금 클라인 님 구독자 수가 일주일도 안 돼서 4배나 뛰어오른 거?”
“4, 4배나요?”
“심지어 아직도 성장세가 멈추지 않았으니, 좀 더 놔두면 5배까지도 거뜬하겠네요.”
담당자는 그렇게 말하며 클라인에게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아, 그리고 이건 잠깐 보시면 좋은 건데요.”
“이게 뭔데요?”
“그, 선을 넘은 발언을 한 사람들을 고소한다고, 속삭이는혼돈 님이 전했던 거 기억하시죠?”
“아, 네. 그럼요.”
“그거예요. 뭐, 누가 봐도 선을 넘은 정도만 고소했으니 역풍이 불진 않을 거예요. 별로 보고 싶지 않으시면 보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네…….”
클라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단은 서류를 품 안에 챙겼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관리자는 손뼉을 짝, 하고 마주치며 화제를 전환했다.
“아무튼, 그. 이번에 속삭이는혼돈 님하고 한 합방이 클라인 님 채널에서 처음으로 시도하는 V로그잖아요?”
“그……러네요. 지금까지 V로그는 한 번도 업로드 안 했으니까요.”
클라인은 지금까지 차원항 안의 내용이 주가 되는 영상을 올렸다.
얼굴을 드러내고 영상을 찍긴 했어도, 초반부나 촬영을 진행하며 가끔 얼굴이 보이는 걸 제외하면 거의 보이지 않는 수준이었다.
지금처럼 이렇게 자신의 얼굴을 촬영한 영상이 주가 되는 영상을 올리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클라인 님. 앞으로는 V로그를…….”
으아, 반응이 좋지 않았나?
그래, 역시 그럴 것 같더라.
누가 내 얼굴만 나오는 영상을 봐준다고.
클라인은 그렇게 지레짐작하며 우울해했지만, 이어진 내용은 클라인의 짐작과 완전히 상반된 것이었다.
“앞으로는 V로그도 좀 많이 올리죠? 아, 주 영상을 바꾸자는 게 아니라. 간간이 V로그도 올리자 이 말이에요.”
“바, 반응이 좋았어요?”
“합방이었던 거 감안해도 엄청 좋죠. 또 V로그 올려 달라는 댓글이 수두룩해요, 지금.”
담당자는 그렇게 말하며 클라인에게 댓글들을 보여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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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찐따눈나 찐따미 뭐냐고 ㅋㅋ
-나는 이 영상을 보기 위해 지금까지 이 채널을 구독했다.
-우리 찐따눈나가 새 친구를 사귀는 걸 보니 안심되네요. ^^
“자, 보세요. 반응 엄청 좋죠?”
“어…… 그러네요. 왜 그러지?”
“아무튼, 앞으로는 가끔씩 V로그도 좀 찍고 그래요. 그냥 셀카만 10분 동안 주야장천 찍어도 괜찮으니까요.”
“사람들이 그런 걸 볼까요?”
누가 사람 얼굴만 10분 동안 나오는 영상을 보고 싶어 해?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담당자의 생각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무조건 봐요. 무조건. 그러니까, 아시겠죠? V로그.”
“가끔씩. 네. 가끔씩 찍어 올릴게요.”
“이게, 기존에 올리던 영상에 비해서 후원금도 더 터지고, 추천 수나 조회 수도 더 나온다니까요? 무조건 찍는 게 좋아요!”
그렇게 한바탕 클라인에게 조언을 건넨 담당자는 숨을 고르더니, 또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럼, 쥬튜브 채널 이야기는 이걸로 끝내고요. 합방 요청이 하나 더 들어와 있어요.”
“합, 합방이 또요?”
“생명도감 님께 합방 요청이 하나 들어와 있는데, 이건 좀 특이하네요. 야방 합방이에요.”
“야방 합방요?”
야방이라면, 야외 방송의 줄임말이었지?
생명도감의 주력 콘텐츠는 야외에서 여러 생명들을 찾아내는 것이다.
아마 이번에 합방 제안을 한 것도 같이 그런 영상을 찍자고 제안한 것 같은데.
하지만, 클라인은 생명도감의 합방 요청이 상당히 꺼려졌다.
집 안에서 합방하거나, 스튜디오에서 합방하는 것까진 괜찮은데 아직 완전한 야방에 도전하는 것까진 무리다.
“그, 야방은 제가 좀 힘들 거 같은데…….”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슬그머니 담당자에게 거절 의사를 밝혔지만, 담당자는 클라인에게 생명도감의 연락처를 건네주며 말했다.
“생명도감 님이 꼭 하고 싶다고 강하게 부탁드려서요. 거절하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대화해 달라고 하셨거든요. 어떻게 안 될까요?”
“으음…… 대화만이라면, 뭐…….”
으, 진짜 미안하지만 야방은 아직 좀 부담돼서 힘들겠다고 말해야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담당자와의 대화를 끝내고 조심스럽게 생명도감과 화상 통화를 시작했다.
“아, 안녕하세요……!”
꾸벅, 클라인이 자신 앞에 나타난 생명도감의 환상에 고개를 숙이자, 생명도감은 피식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이고, 우리 대기업님이 이렇게 허리를 가볍게 굽히면 안 되죠!”
“대기업이라뇨, 생명도감 님에 비하면 말 그대로 하꼬인데요.”
“이야, 얼마나 욕심이 많으면 아직도 하꼬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 그런 뜻이 아니라요……!”
“하하, 그렇게 욕심이 많으신 클라인 님을 위해서 제가 제안을 하나 드리려고 하는데요.”
으, 좋은 사람인 건 알겠는데, 자꾸 이렇게 놀려 대니 상대하기 힘들다니까.
할 이야기라는 건 합방 이야기겠지?
“그, 죄송해요. 제가 아직 야방은 조금…….”
“이번에 제가 인간형 생물들 탐사를 하다가 재밌는 걸 발견해서요. 클라인 님에게도 보여 드리고 싶어서요.”
“인간형 생물을요?”
이번에 촬영하는 영상 주제가 인간형 생물인가?
그래서 나를 부르려는 거고?
으음, 인간형 생물이라니까 조금 흥미가 생기기는 하는데, 그래도 야방은 역시…….
클라인이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때, 생명도감의 입에서 의미심장한 말이 흘러나왔다.
“살짝 문제가 있는데, 이건 클라인 님 아니면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아서요.”
“문제요?”
“클라인 님 때문에 생겼다고도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도 할 수 있는 문제인데요.”
나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클라인은 심상치 않은 생명도감의 말에 의아함을 가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생명도감이 저런 말을 하는 거지?
괜히 저런 말을 하진 않을 것 같은데.
“이런 말을 듣고 따라갔는데, 막 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런 건…….”
“아니죠. 절대 아니에요.”
“그러면, 음…… 네. 한번 가 볼게요.”
음, 인간형 생물에 관련된 일이라면 얼굴을 비치는 것도 괜찮으려나?
클라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하자, 생명도감은 눈에 띄게 반색하며 클라인에게 준비해야 할 것들을 말했다.
“그러면, 좀 외우주로 나갈 거니까 감마선 차단제는 필수로 챙기시고요…….”
“네, 네.”
그렇게 생명도감의 설명을 들으며 짐을 챙기던 클라인은, 생명도감이 마지막으로 언급한 것을 듣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리고 혹시 가능하다면 잉간이를 데려오실 수 있나요?”
“잉간이를요? 잉간이는 왜…….”
“잉간이가 있으면 좀 더 인간형 생물들이랑 접촉하기도 쉽거든요.”
“으음…….”
으음, 잉간이를 야외에 데려가도 되는 걸까?
인간형 생물 서식지에 데려가는 것이니 환경이 위험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 문제가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클라인은 생명도감의 제안을 거절하려 했다.
“그리고, 잉간이가 문제를 해결할 중요한 열쇠거든요.”
“문제를 해결할 열쇠요?”
“인간형 생물들에 관련된 문제여서요.”
“으음…… 아직 바깥 적응은 끝낸 상태가 아니긴 한데…….”
“외우주가 아니고, 차원 생물 거주 구역이니 바깥 적응은 필요 없어요.”
“으음. 위험하진 않겠죠?”
“그냥 인간 카페에 간다고 생각하면 될 거예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신다면야…….”
그래, 나도 옆에 꼭 붙어 있을 거고 생명도감이 있는데 무슨 일이 있겠어?
거기에 잉간이도 차원항 바깥 세상에 흥미가 꽤 있는 것 같으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미리 잉간이에게 적응 훈련을 시켜 두자.
그렇게 생각한 클라인은 생명도감과의 통화를 끝마치고 잉간이를 위해 방 안에 이것저것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늘 그렇듯, 호의를 가득 담아서.
114화 잉간이를 위한 외부 적응 훈련, 2일 차! (1)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 갑자기 차원 문이 생겨났다.
순간적으로 나에게 그런 능력이 생겼나 착각할 만한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상태 창?”
“잉간, 뭐 하는 거야?”
“아니, 그냥. 잠깐…….”
그렇지만 당연히 그런 능력이 내게 생겨났을 리는 없고, 단순한 우연의 산물이었을 뿐이었다.
어찌 됐든 내 앞에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차원 문이 생겨난 건 확실하다.
나는 슬며시 블랑카의 얼굴을 바라보며 슬쩍 손을 내밀며 말했다.
“함께 가시죠, 기사님.”
“갑자기 뭐야? 그건 내가 해야 할 대사 같은데?”
블랑카는 피식 웃으며 내 손을 붙잡았고 후우후우 심호흡을 내쉬었다.
블랑카 입장에선 정말 말 그대로 리베리아와 이 어항 속이 아닌 다른 곳으로 나가는 것이니 긴장되겠지.
물론, 곧바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밖에서 사용할 짐들을 좀 챙겨 가야 하겠지만 말이다.
지난번에는 길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서 젤리들로 표시하다가 길을 잃어버렸으니, 이번에는 확실하게 길을 표시할 수 있게 준비를 해 가자.
“블랑카, 냄새가 어때?”
“윽, 이게 뭐야?”
“이걸로 흔적을 남기면 멀리서도 찾아낼 수 있겠지?”
“그렇긴 한데, 도대체 뭐로 만든 거야?”
내가 블랑카의 코끝에 점토 반죽을 들이밀자 자극이 강했는지 블랑카는 인상을 찡그렸다.
블랑카는 내게 점토의 재료를 물었고,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곧바로 답지를 가져왔다.
“별건 아니고, 그냥 점토에 동물 내장을 좀 섞은 거야.”
“동물 내장?”
“그, 내장을 터트리면 안에서 나오는 즙들 있잖아? 그걸 섞은 거야.”
“어쩐지 냄새가 엄청 고약하더라…….”
그렇게 블랑카와 내가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 사이, 짐을 챙기는 소란에 아리스가 잠에서 깨어났다.
“잉간? 이건 또 뭐야?”
“밖으로 향하는 문이 또 열려서. 너도 따라올래?”
“밖?”
아리스는 잠깐 밖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며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 길을 잃어서 굶어 죽을 뻔한 경험을 했으면 질색할 만도 하지.
아리스는 신음 소리를 내며 뭔가를 고민하더니, 내 뒤편을 바라보고는 움찔 몸을 굳히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으음…… 나는 오늘은 만들 게 있어서!”
“만들 거?”
“응!”
뭐, 지난번에 만들던 인형 같은 걸 만들 생각인가?
어쨌든 아리스는 동행을 거절했고, 오늘은 블랑카와 나만이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다 챙겼어?”
“밧줄도 챙겼고, 무기도 챙겼어.”
도끼와 밧줄, 그리고 불쏘시개와 침낭까지.
지난번의 경험을 토대로 나는 단단히 준비를 해서 블랑카와 함께 차원 문 앞에 섰다.
이번에 밖에 나가면, 지난번에 물러설 수밖에 없었던 그 절벽을 내려가거나 넘어가는 게 목표다.
그걸 위해서 밧줄도 챙겨 온 거니까.
“좋아, 출발!”
나는 그렇게 선언하며 조심스럽게 블랑카와 함께 차원 문 안으로 들어섰고, 이전의 그 황무지가 눈앞에 나타날 것을 기대했지만.
“어?”
무언가 전과는 달라진 바깥의 풍경이 나를 반겼다.
차원 문이 열린 위치가 달라진 것일까?
차원 문 너머의 세계는 내가 알던 황무지가 아니라 새하얀 대리석 같은 재질로 이루어진 평야였다.
“뭔가, 뭔가 바뀌었는데……?”
내가 달라진 풍경에 의아해하는 사이, 나와 블랑카가 들어온 차원 문의 빛이 희미해지더니 결국 사라져 버렸다.
당황한 내가 서둘러 차원 문이 있던 곳으로 손을 휘저어 봤지만 차원 문의 흔적은 전혀 찾아낼 수 없었다.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이거 어쩌지?
블랑카와 나 둘 다 얼굴을 굳히며 계획을 수정하던 그 순간, 갑자기 평야 멀리서 눈부신 빛이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마치 지난번에 바다에서 솟아난 빛을 보는 것 같다.
“저쪽으로 오라는 거겠지?”
“음, 아마도?”
빛줄기는 어떠한 장벽이나 구조물 뒤에서 솟아오르는 것처럼 허공에서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해도 먼 거리는 무언가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보여서 잘 보이지 않는다.
뭔가가 저 빛줄기와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는 건 확실해 보이는데.
“음, 일단 달려 볼까? 내 뒤에 타, 잉간!”
블랑카는 새로운 땅에서 있는 힘껏 달릴 생각에 기분이 좋은지 툭, 하고 자신의 등을 두드렸다.
뭔가 갑옷을 입고 있지 않을 때 다시 보고 싶은 몸동작이네, 이거.
나는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조심스럽게 블랑카의 등에 올라탔다.
“근처에 뭔가가 있긴 한데, 어째서인진 몰라도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진 못해. 그 틈에 포위망을 뚫고 나갈 거야.”
“포위망? 지금 포위된 상태야?”
“이 안에 들어왔을 때부터. 그럼, 출발한다!”
블랑카는 불길한 소리를 중얼거리고는 힘껏 지면을 박차고 빛의 기둥을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포위된 상태라니, 전에 봤었던 그 기묘한 생물체들을 말하는 걸까?
하지만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봐도 도무지 다른 생명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단지 이유 모를 안심만이 들 뿐이었다.
블랑카가 곁에 있어서 그런가?
내가 그렇게 주위를 경계하는 동안 그 무언가가 덮쳐 오는 일은 없었고, 블랑카는 빠르게 빛의 기둥을 향해 달려 나갔다.
“응……?”
그렇지만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것일까?
블랑카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과 함께 블랑카의 속도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무슨 일 있어?”
“뭔가가 몸에 달라붙는 기분인데……?”
“달라붙어?”
그러고 보니 아리스도 깃털에 무언가가 자꾸 달라붙어서 날기 어렵다고 했었지.
나는 블랑카의 새하얀 갑옷 표면을 잘 살펴보지만, 무언가가 달라붙은 흔적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기분 탓 아냐?”
“아니. 정말로 뭔가가 달라붙어서 달리는 걸 방해하고 있어.”
으음.
달리는 자동차에 날벌레들이 날아와 부딪혀서 달라붙는 것과 비슷한 거려나?
일단 지금 상태로는 뭔가 더 알아낼 수 있는 것도 없기에 블랑카는 발을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려갔고, 블랑카의 속도가 눈에 띄게 떨어질 즈음이 돼서야 내 눈에 원인으로 추정되는 것이 들어왔다.
“문자? 아니, 문자가 아니라…….”
누군가가 그린 낙서가 살아 움직인다면 이런 모습일까?
뜻을 가지지 못하는 글자들과 선들이 블랑카의 갑옷에 잔뜩 달라붙어 있었다.
이것들이 블랑카를 무겁게 하는 원인인 걸까?
“으으, 떨어져!”
블랑카는 낙서들을 떨쳐 낼 생각인지 마력을 방출하며 애써 보지만, 여전히 낙서들은 미동조차 없다.
어떻게 해야 저 낙서들을 떼어 낼 수 있을까?
지우개로 지우면 쓱 하고 지워지려나?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무심코 칠판에 그려진 낙서를 지우듯 손을 뻗어서 블랑카의 갑옷에 새겨진 낙서를 문질렀다.
“어?”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낙서가 지워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만으로 내 손에 닿은 낙서들이 스르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블랑카도, 나도 이 현상에 깜짝 놀랐지만 일단 내 손으로 저 낙서들을 지울 수 있으니, 이걸 잘 써먹어야지.
나는 그렇게 맨손으로 블랑카의 갑옷에 그려진 낙서들을 전부 지워 냈고, 모든 낙서들을 털어 내자 블랑카는 앞발을 들어 올리며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오오, 몸이 가벼워!”
블랑카는 나를 다시 등 뒤에 태우고 속도를 내기 시작했고, 나는 아까의 일을 곰곰이 떠올렸다.
내가 낙서가 지워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니 낙서가 지워졌다면, 낙서가 생기지 않으면 좋겠다고 계속 생각하고 있으면 낙서가 생기지 않는 게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계속해서 낙서가 생기지 않게 생각을 유지했고, 그런 내 생각이 옳았던 걸까?
블랑카의 몸에는 더 이상 낙서가 새겨지지 않았고 블랑카는 그대로 계속해서 속도를 높였다.
블랑카의 어마어마한 속도를 증명이라도 하듯 저 너머의 희뿌연 안개는 서서히 흐려지며 안개 너머에 숨기고 있는 것을 드러낼락 말락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저건…….”
“벽?”
이윽고 안개 너머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것의 정체는, 거대한 벽이었다.
아니, 사실 벽이 아닐지도 모른다.
거대한 건물일 수도 있고, 사실은 벽 같은 게 아니라 살아 있는 생물일 수도 있다.
내가 어째서 그렇게 생각했냐면, 거대한 벽의 재질이 주위와 너무 이질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살아 있는 생물의 가죽을 벗겨 내서 펴 바르기라도 한 것 같은 모습의 거대한 벽은 대리석 평야와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가 저 벽이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벽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날부로 이 세상 모든 것은 전부 우연의 산물이라고 여길 수 있다.
빛줄기는 저 벽의 너머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는데, 벽을 우회하는 건 어려워 보인다.
워낙 벽이 양옆으로 길게 뻗어 있어서 우회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이고, 한다면 절벽을 기어올라서 그대로 넘어가는 방법밖에 없어 보인다.
하지만 절벽을 오르는 것도 그리 쉬워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절벽 가까이 다가가니, 무언가 특이한 점이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털?”
털이라고 해야 할까, 실이라고 해야 할까?
거대한 벽의 겉 표면을 이루고 있는 가죽에 살포시 돋아난 털 같은 물체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마침내 벽의 바로 아래까지 도착한 우리는 벽이 저 털 같은 물체들로 뒤덮여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저 털 같은 물체들이 사실 털이 아니라, 수많은 글자들로 이루어졌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봐도 암벽 등반은 불가능해 보이는데.”
블랑카는 드높은 벽을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렸고, 나는 조심스럽게 밧줄을 꺼내서 위로 홱 던져 보았다.
당연하게도, 밧줄은 그대로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혹시나 벽을 붙잡고 등반할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벽에 손을 대자, 놀랍게도 벽은 푹신하게 내 손을 안으로 끌어당겼다.
마치 가죽으로 만든 쿠션을 만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붙잡을 곳 하나 없이 자꾸만 손이 미끄러진다.
이 벽을 우회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으려나?
그건 너무 시간이 오래 걸려서 하고 싶지 않은데.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 내게 무언가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잠깐만, 저 털 같은 것들은 전부 일종의 문자들로 이루어진 거잖아?
그렇다면 저것들도 블랑카의 몸에 그려지던 낙서들과 비슷하게 내가 조작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털들에 손을 가져다 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생각이 옳았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와, 이게 되네?”
가느다란 털들에 손을 뻗고, 발판으로 변하라고 생각하자 놀랍게도 털들의 모습이 변해서 글자로 이루어진 발판이 되었다.
한 사람 정도는 충분히 올라갈 수 있는 크기의 발판에 조심스럽게 발을 올려 봐도 무너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대로 저 털들을 계속해서 발판으로 바꿔 나가면 저 위까지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블랑카, 이거 봐 봐! 이거, 막 내 마음대로 움직이는데?”
“에, 그게 뭐야…… 무서워…….”
오오, 익숙해지니 손을 가져다 대지 않고도 털들의 모습을 바꿀 수 있다.
뭔가 나도 마법을 쓸 수 있게 된 것 같아서 재밌네.
이상하게도, 블랑카는 나처럼 문자들의 형태를 바꿀 수 없었다.
뭐지?
나하고 블랑카하고 다른 게 뭐가 있다고?
음, 너무 많아서 짐작이 가질 않네.
“자, 그럼 등반 시작!”
그래도 내 들뜬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고, 나는 들뜬 목소리로 그렇게 외치며 발판에 발을 올려놓으려 했지만.
“영, 차.”
“응?”
인간 형태로 모습을 바꾼 블랑카가 단번에 나를 공주님 안기로 품 안에 안고 발판 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저기, 왜 공주님 안기로……? 그냥 나 혼자서도 걸어갈 수 있는데.”
“혹시나 발을 헛디딜 수도 있잖아. 만약을 대비해서 그런 거야.”
으음, 확실히 내가 두 발로 걸어가는 것보다 이게 더 안전하기야 하겠지만, 뭔가 기분이 묘한데.
그러거나 말거나 블랑카는 나를 품 안에 소중히 꼭 껴안은 채로 절벽을 올라갔다.
나는 체념한 채로 털들을 가공해서 발판으로 만드는 것만 집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블랑카와 나는 절벽 위로 올라오는 데 성공했다.
“도착!”
“나는, 조금. 쉬고 있을게.”
인간형으로 변한 것이 좀 부담됐는지 블랑카는 서둘러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정상에 도착한 우리가 숨을 고르고 주위를 둘러보기도 전에, 늘 느끼던 압박감이 덮쳐 왔다.
어항 안에서의 느낌과는 또 다른 기묘한 기분.
“:-)”
클라인이 어항 밖으로 나온 나를 찾아낸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이렇게 어항 밖에서 클라인의 몸 전체를 보는 건 거의 처음 같은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나를 내려다보는 클라인의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115화 잉간이를 위한 외부 적응 훈련, 2일 차! (2)
“:-)”
오랜만에 나타난 클라인은 잘 지냈냐는 듯 내게 촉수를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적당히 클라인이 내 머리를 쓰다듬게 놔뒀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클라인의 손길이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만!”
살짝 신경질을 부리며 클라인의 촉수를 머리에서 떨쳐 내자, 클라인의 촉수는 시무룩하게 축 처졌다.
나는 그런 클라인의 촉수에서 시선을 돌리고 한 발자국 물러서서 고개를 들었다.
초록빛 촉수와 그녀의 손은 내 눈에 똑똑히 들어오지만, 어깨로 이어지는 부분부터는 흐릿하게 흐려지더니 글자의 덩어리로 바뀌어 버린다.
손과 촉수를 제외하면 내가 그녀의 몸을 이해한 것은 그녀의 눈동자밖에 없다.
태양과도 같은 눈동자가 글자의 뭉치에서 쌍성처럼 이글거리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내가 조금이나마 클라인을 이해하려 클라인의 다리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동안, 클라인은 촉수를 뻗어서 어디선가 움막을 가져왔다.
아니, 움막이라기보단 텐트라고 해야 하려나?
누군가 사용하던 것 같은 텐트를 클라인은 내 앞에 내려놓고, 내게 무언가를 건넸다.
언제나처럼 그 빌어먹을 젤리를 던져 주는 줄 알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른 듯하다.
“종?”
클라인이 내게 내민 것은 내가 손에 쥐고 흔들 수 있는 크기의 종이었다.
시험 삼아 종을 흔들어 보자, 납빛의 종이 딸랑딸랑 흔들리기만 할 뿐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건 도대체 뭐지?
나는 의아해하며 다시 한번 종을 흔들어 봤지만 놀라울 정도로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블랑카에겐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 잉간. 그거 좀 멈춰 줄 수 있어……?”
“응? 이거?”
“응. 너무 시끄러워서…….”
블랑카는 머리를 감싸 쥐고 내게 그렇게 부탁했다.
내게 들리지 않는 소리가 블랑카에게 들리는 건가?
나는 서둘러 종을 바닥에 내려놨고, 블랑카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진짜, 저게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가 들려?”
“누군가 비명 지르는 것 같으면서도, 폭발음을 뭉쳐 놓은 것 같은 소리? 제대로 설명은 못 하겠는데, 오랫동안 듣고 싶은 소리는 아냐.”
누군가 비명 지르는 것 같으면서 폭발음을 뭉쳐 놓은 것 같은 소리?
나는 블랑카의 설명을 쉽게 이해할 수 없어서 고개를 갸웃했고, 이어진 블랑카의 설명을 듣고서야 무슨 소리가 났는지 이해했다.
“막, 치지지직 치직 하고 소음이 울려 퍼지는데…….”
“아, 뭔지 알겠다!”
그러니까, 대충 티브이나 라디오 채널을 돌릴 때 나는 그 치직거리는 소리랑 비슷하다는 거지?
그런 소리가 종에서 울려 퍼진다니, 도대체 저건 정체가 뭐야?
일단 저건 건드리지 말고 가만히 놔둘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종에서 멀찍이 떨어지려 했지만, 클라인의 촉수가 끼어들어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재주도 좋게 종을 촉수로 움켜쥐고는 내 앞에 가져와서 흔들었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 울려 퍼지고 클라인은 내게 종을 건네는 것과 함께 젤리 하나를 선물했다.
나는 다시 클라인에게서 종을 받아 들고 곰곰이 클라인의 의도를 고민했다.
으음, 클라인은 지금 내가 이 종을 울리는 걸 원하는 건가?
나는 슬쩍 블랑카에게 귀를 막으라는 신호를 보내고 다시 한번 종을 흔들었다.
내게 들리지 않는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클라인은 기분 좋은 목소리를 내며 내게 젤리를 건넸다.
“:-)”
나는 클라인에게서 뜯어낸 젤리를 입안에 넣고 우물우물 씹으며 지금의 일을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러니까, 클라인은 나에게 종을 치면 젤리를 얻을 수 있다는 걸 알려 주려고 한 건가?
지금 이건 강아지를 훈련시킬 때 간식으로 보상을 주는 것과 비슷한 건가?
오늘의 목적은 다 완수했는지 클라인은 다시 내게서 종을 회수해 갔고, 나는 일단 블랑카와 함께 텐트 가까이로 다가갔다.
“소리, 괜찮았어?”
“으으, 귀가 저릿저릿해…….”
계속해서 시끄러운 소리를 들은 탓인지 클라인은 고개를 흔들며 투구를 벗고 인상을 찌푸렸다.
“방금 들어 보니까, 클라인 님이 말할 때 나는 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나더라.”
“클라인이 말할 때 나는 소리?”
그런 소리가 있었어?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는데?
“응. 신님의 목소리에 저런 소리가 섞여서 나더라.”
“허어…….”
잘 생각해 보니까, 지금까지 내가 클라인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생각했던 건 사실 진짜 듣는 게 아니었지?
내가 클라인의 목소리를 듣는 건, 클라인의 목소리 안에 담긴 감정과 뉘앙스를 느끼는 것일 뿐이다.
즉, 나는 클라인의 목소리를 듣는 게 아니라 클라인의 목소리를 느끼고 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는데, 종에서 나던 소리와 클라인의 목소리가 같다고 하면, 저 종에서 나는 소리는 클라인과 비슷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닐까?
왜, 버튼을 누르면 녹화된 소리를 재생하는 장난감들 있잖아.
그거랑 비슷하지 않을까?
클라인의 목소리는 내가 들을 수 없는 영역대의 목소리니 직접 검증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뭐, 전파 망원경 같은 걸 만들어서 클라인의 목소리를 녹음한다면 몰라.
나는 오랜만에 클라인에 대해서 좀 더 이해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문득 고개를 돌려 클라인을 바라보자 색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어?”
목소리를 이해해서 그런 걸까?
원래는 글자들로 보이던 클라인의 목 부분이 내 눈에 제대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햇빛을 오랫동안 받지 않은 것처럼 창백한 목덜미와 슬쩍 드러난 쇄골.
글자들 사이에 목만이 둥둥 떠 있는 모습은 왠지 공포 영화에서 나올 것 같은 비주얼이다.
내가 멍하니 클라인의 목덜미를 바라보고 있자, 내 시선을 눈치챈 걸까?
무언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던 클라인의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내 앞으로 다가왔다.
툭.
클라인의 손가락에 내 손바닥을 올리고 가만히 이마를 기댄다.
클라인의 감정과 몇몇 정보들이 내 안으로 흘러들어 온다.
예전이었으면 충분히 내 정보와 그녀의 정보를 서로 착각할 수 있을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어느새 나타난 에포나가 내 곁에서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고, 나 스스로도 충분히 나의 정보를 구분할 수 있으니까.
전에는 무섭고 두렵게만 느껴지던 행동이지만 이제는 안심되고 따스한 온기만이 느껴진다.
내게 호의를 보내는 그녀를 위해, 나는 내 호의를 받은 만큼 돌려줬다.
내가 호의를 돌려줄 줄은 몰랐던 걸까?
클라인의 손가락에서 당황하는 기척이 느껴지더니, 클라인은 내게서 손을 떼고 가만히 나를 내려다 봤다.
“:-0”
클라인의 촉수와 손이 손부채질을 하듯 격렬하게 흔들리고,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클라인은 내 앞에 새로운 차원 문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걸 끝으로 클라인은 내 앞에서 모습을 감췄고, 블랑카는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며 나를 가만히 뒤에서 껴안았다.
“왜 그래?”
“그냥, 뭔가 질투심이 나서. 신님한테 질투심을 느낀다는 게 이상하지만, 아무튼 그래.”
그런 블랑카의 투정에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나를 껴안은 블랑카의 손에 내 손을 겹치고 블랑카와 손발을 맞춰서 뒤뚱뒤뚱 차원 문을 향해 걸어갔다.
빼꼼.
차원 문 안으로 고개를 내밀자 익숙한 나의 집이 모습을 드러낸다.
“더 탐사할래? 아니면, 돌아갈래?”
“……돌아갈래. 더 이상은 못 참겠어.”
나는 애써 블랑카가 뭘 못 참겠는지 물어보지 않으며 블랑카와 함께 차원 문 너머로 들어갔다.
지난번처럼 곧바로 차원 문이 사라질 줄 알았지만, 어째서인지 차원 문은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서 고고히 떠 있을 뿐이었다.
뭐야, 앞으로는 원할 때 밖에 나가 볼 수 있는 건가?
나는 블랑카의 손을 꼭 잡은 채로 외출한 소감을 물어봤다.
“블랑카, 밖은 어땠어?”
“생각보다 별거 없더라. 역시, 집이 최고야.”
“그래?”
그런 블랑카의 소감에는 나도 동의한다.
뭔가 신기한 게 넘쳐 날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없더라.
그렇지만 아무것도 없더라도 나는 밖으로 나가는 걸 멈추지 않을 것이다.
밖에는 아름다운 것이 숨겨져 있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어디 보자, 별로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은 것 같네?”
집에 돌아와 보니 우리가 밖을 돌아다닌 건 한나절 정도밖에 안 되는 것 같다.
슬슬 해가 지고 있으니 빨리 밥부터 해야겠네.
“아리스, 돌아왔어.”
“어서 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집 안으로 발을 들였고, 무언가 자신만만한 표정의 아리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뭐지?
그러고 보니 오늘 뭔가 만든다고 했었는데, 그 뭔가가 잘 만들어진 건가?
그런 내 예상이 옳았다는 듯 아리스는 싱글벙글 웃으며 칭찬을 바라는 표정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잉간!”
“응, 왜?”
“오늘은 지난번의 굴욕을 갚아 줄 거야!”
“지난번의 굴욕?”
지난번의 굴욕이라니, 아리스가 무슨 굴욕을 겪었더라?
“이번에는 제대로 마사지를 해 줄 수 있다고!”
“마사지?”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아리스가 마사지를 해 준다고 했다가, 깃털하고 발톱 때문에 실패한 일이 있었지?
그걸 아직까지 마음에 담아 두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잠깐, 그렇다면 오늘은 그때 받았던 그 마사지를 다시 한번 받아야 하는 거야?
“탐험하고 오느라 힘들었지? 자, 어서!”
“어, 음…….”
솔직히, 그때의 마사지를 떠올리면 고통스럽기만 한데, 그래도 뭔가 대책을 마련해서 저렇게 자신만만한 거겠지?
언제나 그렇듯, 블랑카는 아리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방관할 뿐이다.
결국 나는 다시 아리스의 인도에 따라서 침대 위에 드러누웠고, 조금 있으면 닥칠 거끌거끌한 감촉을 견디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아리스가 무언가를 분주하게 준비하는 소리가 귓가에서 들려오고, 마침내 준비가 끝난 것인지 아리스가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준비 완료!”
이윽고 아리스의 마사지가 시작됐고, 거끌거끌한 감촉을 상상하던 나는 예상치 못한 감촉에 새된 목소리를 내었다.
“흐엑?!”
“잉간, 어때? 아프지 않지?”
미끈거리고 끈적한 점액의 감촉이 아리스의 몸에서 느껴진다.
내가 없는 동안 만든다는 게 설마 이런 거였어?
아무래도 아리스는 혼자서 마사지용 오일 비슷한 걸 만들어 낸 모양이다.
지난번에 문어 인간을 주의 깊게 살피더니, 거기서 영감을 받은 거려나?
“아프진 않은데, 아프진 않은데……!”
날개로 누르는 힘이 약하다는 걸 커버하기 위해 온몸의 체중으로 누르고 있어서일까?
점액이 듬뿍 묻은 아리스의 몸이 내게 밀착하자 기묘한 자극이 느껴진다.
아리스의 마사지는 뭔가 묘한, 평범하지 않은 마사지로 점차 바뀌어 갔다.
평소에는 너무 강한 자극이어서 고통으로 느껴지던 감촉도 기분 좋게 느껴진다.
“어때, 기분 좋아?”
“좋아, 좋은데…….”
그런데 어째, 아리스의 숨소리가 심상치 않다.
숨소리뿐만이 아니라 날개 놀림도 서서히 묘해져 가고.
“저기, 아리스? 그, 그만…….”
“응, 괜찮아. 힘 풀어도 돼.”
그렇게 아리스에게 마사지 아닌 마사지를 받던 나는 뒤늦게 참전한 블랑카에게마저 마사지 아닌 마사지를 받게 되었다.
그렇게 잠 못 이루는 밤이 지나가고, 나는 아침부터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마주해야 했다,
“:-(”
클라인이 잔뜩 우울한 기색으로 촉수를 늘어뜨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얘는 갑자기 또 왜 이래?
116화 우리 잉간이 보고 가세요(엄청 대단함)
“안녕하세요! 차원항 장인, 클라인입니다!”
오랜만에 클라인은 카메라 앞에 서서 손을 흔들며 녹화를 시작했다.
평소에는 대충 손과 오늘 준비한 콘텐츠만을 비췄겠지만, 오늘의 세팅은 조금 다르다.
일부러 평소보다 카메라를 뒤로 빼서 클라인의 얼굴까지 녹화되도록 한 것이다.
담당자님이 앞으로는 이렇게 영상을 만들라고 했으니, 한동안은 앞으로 이렇게 찍어야 한다.
별로 효과가 없으면 그냥 스리슬쩍 원래대로 돌려 버리면 되니까.
내 얼굴이 많이 나온다고 뭐 극적인 변화가 있겠어?
“오늘의 영상은 잉간이 외부 적응 훈련, 2탄! 입니다!”
어찌 됐든 클라인은 바뀐 촬영 세팅에 신경 쓰지 않고 평소대로 녹화를 진행했다.
“지난번에는요, 그냥 잉간이를 풀어놓고 지켜보기만 했었죠? 그때는 바깥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고, 탈출을 줄이기 위한 훈련이었다면, 이번에는 다릅니다!”
촉수를 쭉 뻗어 클라인은 미리 준비해 둔 마력 제어기를 카메라 앞으로 가져오며 선언했다.
“이번 훈련의 최종 목표는 잉간이와 함께 바깥 산책을 하는 거예요!”
클라인이 잉간이를 외부 환경에 적응시키려는 것은 생명도감의 부탁이 있기도 했지만, 제일 큰 것은 역시 잉간이와의 산책을 원해서다.
반려 생물을 키우는 사람이라면 다들 한 번씩 반려 생물과 함께 도시 산책을 나가는 꿈을 꾸지 않는가?
울타르나 탄탈로스가 아니면 보통은 이런저런 제약과 불편함 때문에 포기하게 되는데, 그래도 역시 로망은 로망이다.
거기에다가, 이런 훈련은 나중에 잉간이를 보내 줬을 때 잉간이에게도 도움이 될 테니까.
솔직히, 훈련을 받지 않으면 외우주에서 자기 인식을 할 수 없는 게 이상한 게 아닌가?
외우주에서도 무사히 살아갈 정도는 되어야 잉간이를 안심하고 보내 줄 수 있다.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짝, 하고 박수 치며 촬영을 계속 이어 나갔다.
“지난번엔 잉간이를 차원항 근처의 책상에 풀어놨었죠? 이번에는 아예 거실에 잉간이를 풀어놓을 계획이랍니다!”
클라인은 그렇게 말하며 거실 곳곳에 발광형 미끼를 놔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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