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 16

“어, 갑자기 차원 문이 생겼더라고.”
“우와! 그럼 이 젤리들이 다 이 차원 문 너머에 있던 거야?”
“아, 젤리들은 하늘에서 떨어졌어.”
“에이, 뭐야.”
젤리로 가득 찬 세상을 상상하기라도 한 걸까?
아리스는 차원 문 안을 당장이라도 들여다볼 것처럼 눈을 빛냈지만, 내가 사실을 알려 주자 흥미가 급격히 떨어진 듯 투덜거렸다.
“잉간!”
“응? 블랑카?”
“뭔가가 집 쪽에서 잔뜩 떨어져서 달려왔는데, 이게 뭐야?”
“음. 나도 몰라!”
사냥을 나갔던 블랑카 또한 하늘에서 떨어지는 젤리들을 보고 당황했는지 헐레벌떡 집으로 돌아왔다.
일단, 우리는 조심스럽게 차원 문 근처의 젤리들을 치웠다.
그러는 동안에도 차원 문은 별다른 변화 없이 제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도대체 저 차원 문의 정체는 뭐지?
클라인 녀석이 또 뭔가를 내게 시키려고 하는 건가?
“아리스, 저 차원 문이 어디로 통하는지는 모르겠어?”
“음. 생각보다 가까운 곳? 일단 이곳은 아닌데, 그렇게 먼 곳은 아니야!”
이곳은 아니면서 그렇게 먼 곳은 아니다라.
도대체 어디로 이어져 있는 거지?
일단 이 어항 안은 아니라는 건데…….
자꾸만 궁금증은 늘어만 가고, 그냥 차원 문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차원 문 너머의 세계가 어떤지 탐사하고 싶을 지경이다.
하지만 그럴 수도 없는 게, 잘 생각해야 하는 게 있다.
차원 문이 나타나기 전에 저 젤리들이 잔뜩 떨어졌다.
왜 젤리들이 떨어졌을까?
지금까지 젤리들은 뭔가 내가 해냈을 때 보상이나 클라인이 실수했을 때 사과의 의미로 주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렇게 젤리를 그냥 잔뜩 준 이유는 앞으로 내가 고생을 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그 고생은 아마도, 저 차원 문 너머에 도사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으음……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뭘 어떻게 해? 뭐가 나오기 전까진 그냥 무시하면 되지.”
내가 쉽사리 차원 문 곁을 떠나지 않고 끙끙거리자, 블랑카는 아주 합당하고 합리적인 조언을 해 왔다.
그래, 맞는 말이다.
뭐가 나올지 두려우면, 확인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 그렇게 마음대로 되던가?
뭐가 나올지 모르는 상자가 있으면 반드시 열어 봐야 하는 게 사람 마음이다.
내가 차원 문 안을 탐험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블랑카는 한숨을 내쉬며 기가 막힌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렇게 호기심 가득한 사람이 어떻게 방 안에만 있었대?”
“그러게?”
그러니까 말이야.
그때, 조금만 용기를 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랬다면 지금과는 많은 게 달라졌겠지.
그래도 지나간 일을 후회해 봤자 어쩔 수 없는 거니까.
그렇게 우리가 차원 문을 둘러싸고 어쩔 줄 몰라 하며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디딜 용기가 부족해서 고민을 거듭하던 그때, 차원 문에 변화가 일어났다.
차원 문 바깥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해서 나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인지 차원 문은 차원 문 너머의 풍경을 비추기 시작했다.
이전, 어항의 끝에 가서 봤었던 어항 바깥의 세계.
그것과 똑같은 풍경이 차원 문 너머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저긴…….”
블랑카는 차원 문 너머를 바라보며 말끝을 흐린다.
그러고 보니 그때 블랑카는 어항 밖의 세계를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천국의 풍경으로 봤었나?
그렇다면 지금 블랑카에겐 저 풍경이 어떻게 보이는 거지?
푸른 하늘이 차원 문 너머에 펼쳐져 있으려나?
“……잉간. 그때 잉간이 봤던 풍경이 저런 거였어?”
“뭐, 그렇지.”
“그래. 뭐, 당연한 거였어. 응.”
블랑카의 눈에도 내가 본 것과 같은 풍경이 보이는 모양이다.
블랑카는 이것저것 고민이 많은 표정으로 차원 문을 바라보지만, 아리스는 저 풍경을 보고도 별생각이 들지 않는 모양이다.
“으, 굳이 저길 탐험해야 해?”
“잘하면, 이곳의 주인을 만날 수도 있으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클라인은 늘 어항 밖에 있다.
그렇다는 건, 어항 밖으로 나간다면 클라인을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항상 몸의 일부만 봐 왔지만, 만약 클라인의 몸 전체를 차분히 관찰할 수만 있다면 내가 클라인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아리스는 저 너머를 탐험하는 데 별다른 생각이 없는지 날개를 펼치며 기지개를 켤 뿐이었지만, 블랑카는 조금 다른 모양이다.
“저기, 잉간.”
“응?”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으니까. 조금만 있다가 따라갈게.”
블랑카는 쓴웃음을 지으며 내게 그렇게 말했고,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여 블랑카의 제안을 수긍했다.
아무리 블랑카가 강하다고 해도, 새로운 걸 받아들일 시간은 필요한 법이다.
블랑카는 생각을 정리하려는 것인지 숲속으로 사라졌고, 그동안 나는 전에 만들어 둔 가방에 점화석과 야영 도구, 그리고 젤리들을 챙겨서 차원 문 앞에 섰다.
“출발!”
“왕!”
그러자 아리스가 폴짝 내 등에 달라붙으며 그렇게 선언하고, 어느새 에포나는 차원 문 너머에서 내가 넘어오는 걸 재촉했다.
“후우.”
나는 차원 문 앞에서 잠시 심호흡을 하고, 조심스럽게 차원 문 너머로 발을 내디뎠다.
타박.
자연적인 느낌의 돌이나 흙바닥이 아닌 인공적인 느낌의 감촉이 발바닥에 느껴진다.
나는 감명 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꼭 말하고 싶던 대사를 외쳤다.
“이 한 걸음은 한 인간에겐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 전체에 있어선…….”
“뭐 해, 잉간?”
그렇지만 내가 그런 대사를 읊으며 감상에 빠질 틈도 없이 아리스가 나를 밀치고 차원 문을 빠져나왔다.
아니, 로망을 모르네. 로망을.
날 수 있는지 시험해 보려는 듯 아리스는 날개를 퍼덕이며 고개를 갸웃거리며 소감을 말했다.
“날 수는 있는데. 뭔가 느낌이 좀 이상해. 막, 끈적하게 달라붙는 느낌?”
“달라붙어?”
“응. 막…… 뭔가가 자꾸 달라붙어서. 점점 무거워지는 거 같은데…….”
공중을 자유자재로 날아 보던 아리스는 점차 날기 힘들어지는지 비틀거리며 바닥으로 내려왔고, 에포나는 그런 아리스에게 다가가 슬며시 아리스의 얼굴을 핥아 댔다.
“일단, 최대한 날아다니지 말아 봐. 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상황에만 하자고.”
“응.”
부서진 하늘과 검은 태양이 내리쬐는 황무지.
지평선은 끝도 없이 이어지고, 정체 모를 기괴한 구조물들이 황무지 전체에 늘어서 있다.
전에 봤을 때는 기괴한 괴물들도 돌아다녔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어째 그런 녀석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에포나가 어째서인지 몰라도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봐서 일단 에포나를 쓰다듬어 줬다.
그나저나 진짜 주위를 둘러봐도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다.
기괴한 구조물들을 기준점 삼아서 발을 옮기려고 해도 잠깐 눈을 감았다 뜨면 구조물들의 생김새가 바뀌어 있다.
방향의 기준으로 삼을 지형지물이 없으니, 내가 직접 지형지물을 만드는 수밖에.
내가 선택한 방법은 헨젤과 그레텔처럼 바닥에 젤리들을 하나씩 놔둬서 우리가 온 방향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황무지를 나아갔지만, 가도 가도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는 황무지 때문에 아리스는 벌써 싫증이 난 것 같다.
“다리 아파, 안아 줘!”
아리스는 투정을 부리며 내 품에 안겨 왔고,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아리스를 안아 들었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아리스는 진짜 가볍네.
잘못 만지면 부러질 것같이 느껴질 정도다.
그렇게 나는 아리스를 안고 계속해서 발을 멈추지 않고 황무지를 나아갔지만 여전히 황무지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으, 이만 돌아가고 싶지만 그냥 돌아가기엔 뭐한데.
슬슬 가져온 젤리들도 떨어져 가고 있으니, 뭔가 새로운 지형이 나온다면 그때 돌아가자.
나는 그렇게 목표를 정하고 계속해서 발을 옮겼지만, 쉽사리 다른 풍경은 나타나지 않았고.
“일단, 여기서 휴식할까?”
“좋아~.”
아리스가 내 품 안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할 무렵 나는 잠시 휴식을 취할 것을 선언했다.
가져온 젤리를 아리스와 나눠 먹고, 점화석으로 모닥불을 피우고 짚을 모아 만든 베개를 바닥에 놔둔다.
몇 분만 조금 자고 일어나서 다시 걷자.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리스와 서로의 몸을 이불 삼아 서로 껴안고 잠에 빠져들었고.
“흐흥.”
어딘가 뿌듯한 기색의 꿈속의 여인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꿈속의 여인은 아무 말 없이 나를 등 뒤에서 껴안고 놓지 않았고, 나는 그대로 그녀의 장난감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지켜 줄 테니까, 안심하고 있어. 응.”
꿈속의 여인은 그렇게 속삭이며 나를 희롱했고.
그녀의 장난이 점점 심해지며 내 인내심을 한계까지 몰아가던 그때.
나는 다시 잠에서 깨어났고.
“……어?”
어느새 내 앞에 놓인 대량의 젤리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 * *
“으음, 차원 문 밖이 어떤지 보이지 않아서 겁먹은 걸까요?”
클라인은 잉간이 차원 문을 들여다보며 뭔가 이것저것 고민하는 모습을 보며 그렇게 추측했다.
인간형 생물은 미지에 대한 호기심이 강하기도 하지만, 모르는 것에 대한 당연한 두려움도 꽤 강한 편이다.
그 때문에 이런 상황에 처하면 저렇게 기웃거리면서도 그 안으로 손을 집어넣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상황을 해결해 주려면 잉간이에게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해 주면 된다.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하면 대부분의 인간형 생물들은 선택을 내리니 말이다.
“혹시나 과잉 정보 때문에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까 정보 차단을 해 놨는데, 잠깐 해제하도록 하겠습니다!”
클라인은 그렇게 말하며 차원 문 너머의 풍경이 잉간이에게도 보이도록 정보 차단을 해제했고, 클라인의 예상대로 잉간이는 결심을 내린 것 같았다.
“오, 짐을 챙기기 시작하네요? 밖으로 나갈 생각인가 봐요!”
그 반면, 켄토르는 차원 문에서 흥미를 잃은 듯 보였다.
“역시 켄토르여서 그런 걸까요? 낯선 환경을 그리 좋아하지 않네요.”
클라인이 관찰 카메라로 지켜보는 동안, 잉간이는 짐을 다 준비했는지 하르피아와 함께 차원 문 안으로 들어섰다.
“조금 당황한 거 같네요. 예상했던 것과는 바깥이 다른 모양이죠?”
잉간이가 나온 장소는 클라인이 차원항을 놔둔 탁자 위.
최대한 잉간이에게 위험이 될 만한 물건들과 정보 생명체를 제거한 상태니 잉간이가 다치는 일은 없을 거다.
하지만 그 덕분에 잉간이의 흥미를 끌 만한 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상태.
잉간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무작정 한 방향을 향해서 걷기 시작했다.
“아,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탁자 끝까지 가 볼 생각인 걸까요?”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잉간이를 바라봤고, 잉간이를 관찰하던 그때 클라인의 눈에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응? 저건…….”
잉간이의 가방에서 떨어진 것일까?
잉간이가 챙겨 온 사료들이 불규칙하게 잉간이가 걸어온 길을 따라 떨어져 있던 것이다.
“아이고, 사료를 다 흘려 버렸네요.”
그저 그렇게만 생각하며 혀를 차고, 잉간이에게 사료를 전달해 줘야 하나 생각하던 그때, 또 한 가지의 특이점이 클라인의 눈에 들어왔다.
“어, 저건?”
클라인이 미처 제거하지 못한 정보 생명체를 잉간이에 기생하고 있는 차원 파괴자가 먹어 치우고 있는 모습이 포착된 것이다.
“역시, 지구산 인간하고 차원 파괴자는 일종의 공생 관계를 형성하는 것 같네요.”
지구산 인간이 물리적 위협으로부터 차원 파괴자의 유충을 지키면, 차원 파괴자는 지구산 인간에게 닥쳐오는 정신적 위협에서 지구산 인간을 보호한다.
저것 봐라, 지구산 인간이 휴식을 취하며 꿈을 꾸는 동안 취약해진 정신을 노리고 여러 정보 생명체들이 다가오지만.
“왕!”
그 정보 생명체들은 전부 차원 파괴자의 한 끼 식사가 될 뿐이다.
“좀 더 자세한 건 연구를 해 봐야 알겠지만 말이에요.”
음, 그나저나 잉간이가 가져온 식량은 괜찮으려나?
보니까 거의 다 바닥에 흘린 것 같은데.
클라인은 아직 잉간이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슬며시 방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음, 혹시나 먹을 게 부족하지 않도록 도와줘야겠네요.”
잉간이가 흘려 버린 식량들을 다시 잉간이에게 돌려주기 위해서 말이다.
늘 그렇듯, 호의를 가득 담아서.
100화 반려 인간이 주인을 신뢰할 때 보이는 행동
“젤리?”
젤리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클라인 녀석이 가져다 놓은 걸까?
나는 의아해하며 일단 젤리들을 주섬주섬 가방에 담았고, 아리스를 깨우기 위해 뒤를 돌아본 순간, 젤리들이 어디서 왔는지 깨달았다.
“어?”
내가 지나왔던 길을 표시해 놨던 젤리들이 모두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마, 그 사라진 젤리들은 지금 이곳에.
그 사실을 깨닫자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 든다.
잠깐, 이렇게 되면 돌아가는 길을 찾기가 어려워지는데.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지만 어딜 둘러봐도 차원 문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아냐, 괜찮아.
한 방향으로 쭉 걸어왔으니 왔던 대로 돌아가면 돼.
응, 그러면 될 거야.
일부러 잠도 걷던 방향으로 머리를 향하고 잔 거였잖아?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불안한 마음이 도저히 사라지지 않는다.
이대로 계속 나아가도 되는 걸까?
돌아갈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데?
나는 불안한 눈빛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평야를 바라봤지만, 당연하게도 그 어떠한 이정표도 보이지 않았다.
“으음, 잉간?”
그때, 아리스가 눈을 비비며 부스스하게 잠에서 깨어났고, 나는 애써 당황한 마음을 속으로 감추며 아리스를 반겼다.
“깼어, 아리스?”
“응. 무슨 일이야? 뭔가 당황한 거 같아서.”
“별거 아냐. 그냥, 그냥 표식이 사라졌을 뿐이야.”
“표식?”
내 말에 아리스도 우리 앞에 놓여 있던 젤리들의 정체를 눈치챘는지 나지막이 탄식을 내뱉었다.
“괜찮아. 차원 문의 마력을 느끼는 방법으로 대충 위치를 짐작할 수 있어.”
“그, 그렇지? 별로 위험한 상황은 아니지?”
“위험한 상황은 맞지. 누군지 몰라도 젤리들을 자고 있던 우리 옆에 가져다 놨다는 거잖아?”
“그건 클라인이…….”
“만약 클라인이 아니라면? 괴물의 장난이었다면 어떻게 할 거야?”
“그건…….”
그렇다면.
맞서 싸우는 수밖에 없겠지.
도망치려고 해도 숨을 장소도 없어서 불가능하다.
객관적으로 생각해서 이 상황은 무척 위험한 것이 맞다.
그렇지만, 아직 내가 진심으로 걱정하며 돌아갈 방법을 찾지 않는 것은 믿고 있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정말 위험해지면 클라인이 와서 어떻게든 해 주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다.
여전히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고, 내가 볼 수 있는 건 클라인의 신체 말단부뿐이지만.
그래도 지금껏 클라인이 내게 보여 준 행동은 내 신뢰를 사기 충분했다.
“일단, 갈 수 있을 때까지 가 보자.”
“그냥 돌아가는 게 나을 거 같은데.”
아리스는 불안한 모양인지 내 말에 일단 수긍하면서도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나는 그런 아리스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변하지 않는 풍경에 지루함이 호기심을 이기려 할 즈음,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
“저건…….”
도무지 끝이 날 것 같지 않던 황무지의 지평선이 서서히 내게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지평선이 어떻게 내게 다가올 수 있었냐면, 그 이유는 간단했다.
이 세계는 동그랗지 않고 평평하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황무지의 끝이 우리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내 발걸음으로 그렇게 많이 걷지도 않았는데 벌써 황무지의 끝이라니, 황무지가 생각보다 좁은 걸까?
마침내 나와 아리스는 양손으로 황무지의 끝자락을 만질 수 있을 거리까지 도착했고, 나는 조심스럽게 절벽을 살폈다.
황무지는 인공적으로 깎인 것처럼 급격한 절벽이 그 끝을 강제로 불러왔고, 절벽 아래는 너무나도 깊어서 손쉽게 내려갈 수 없을 것 같아 보였다.
절벽 아래의 풍경은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절벽 저 너머의 풍경은 흐릿한 허상처럼 내 시야에 들어왔다.
누군가가 사는 건물일까?
아니면 단순히 또 다른 거대한 절벽인 걸까?
너무나 거대하고, 나와의 거리가 멀어서 절벽 너머의 것들은 내게 제대로 된 추측을 선사해 주지 않았다.
나는 단지 저 거대한 구조물들이 주인 녀석들의 집 같은 게 아니겠거니 지레짐작만 할 뿐이었다.
“으…… 별거 없잖아!”
절벽 너머의 풍경과 절벽 아래의 풍경을 감상한 아리스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짤막한 감상을 내뱉었다.
그 말대로다.
뭔가 좀 신기한 거라든지, 기묘한 게 잔뜩 있을 줄 알았는데 정말 아무것도 없다.
이 어항이 있는 장소는 일부러 주위에 다른 것들을 치워 둔 걸까?
저 안개 너머의 구조물에 도달하면 무언가 다른 게 있지 않을까?
황무지를 지나 목적지에 도착했음에도 나는 여전히 새로운 세상이 궁금했다.
“그래서 잉간, 이제 돌아갈 거야?”
“음…… 여기까지 왔는데, 바로 돌아가긴 뭐하니까. 좀만 더 탐사하다 가자.”
“더 탐사할 것도 없어 보이는데…….”
아리스가 그렇게 툴툴거리던 순간, 내가 아직 돌아갈 생각이 없다는 걸 눈치채기라도 한 걸까?
네가 더 궁금하다면, 직접 가 보라는 듯 절벽이 변형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떨어지면 반드시 죽을 것 같은 깊숙한 절벽에서, 이제는 충분히 아래가 내려다보이는 절벽으로 말이다.
마치 공간 자체가 줄어든 것 같은 모습.
역시, 클라인이나 그에 준하는 누군가가 우리를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는 거겠지?
“내려가 볼까?”
“너무 멀어지면 돌아가지 못하지 않을까?”
아리스는 연신 차원 문이 있던 자리를 돌아보며 불안한 듯 내켜 하지 않았다.
쩝, 나는 더 가 보고 싶은데 그래도 역시 여기선 돌아가는 게 맞겠지?
아리스는 이미 충분히 지친 듯 보였고,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아리스의 의견을 택했다.
“……그래. 뭐, 탐험이 반드시 중요한 건 아니니까.”
나는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리스와 함께 돌아갈 준비를 했고, 나와 아리스가 돌아갈 기미를 보이자 다시 절벽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여기서 일직선으로 쭉 나아가면 되는 거 맞지?”
“응, 그러니까…….”
아리스와 나는 중간에 가다가 방향을 잃지 않게끔 서로 걷는 모습을 관측하기로 했고, 그렇게 다시 차원 문으로 돌아가려던 그때.
“:-)”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와 함께, 낯익은 촉수가 등장했다.
촉수는 잘 있었냐는 듯 상냥하게 우리에게 다가왔고, 나는 살포시 촉수에 내 손을 얹으며 여느 때처럼 교감을 나눴다.
여전히 그리 많은 감정이 전해지진 않지만, 그 정도로도 따스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언제나처럼 살짝 섬뜩하리만치 과도하게 느껴지는 클라인의 호의.
내 손을 쓰다듬던 클라인은 차원 문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방향을 가리키며 촉수를 까닥거렸다.
“:-0?”
마치, 돌아갈 거냐고 묻는 듯한 목소리다.
나는 그런 클라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뜻을 밝혔고, 클라인은 촉수를 까닥이며 잠깐 멈칫거리더니 그대로 우리 앞에 어항으로 돌아가는 새로운 차원 문을 열어젖혔다.
“:-D”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은 건지, 클라인은 차원 문을 열며 기분 좋은 목소리를 내었고, 나는 클라인의 유도에 따라 차원 문 안으로 들어가기 전 슬며시 고개를 돌려 클라인을 바라봤다.
여전히 내 눈에는 클라인의 촉수와 손만이 보인다.
그렇지만 클라인의 본모습을 보는 건 저 안개 너머의 구조물을 탐험하는 것과 비슷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아리스와 내가 차원 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함께, 잠깐의 외출은 끝이 났다.
어항 밖에는 별게 없다는, 별거 없는 정보를 얻은 채로 말이다.
* * *
“음, 잉간이는 바깥에 관심이 많아 보이는데, 하르피아는 별로 흥미가 없어 보이네요. 높은 구조물이 없어서 그런 걸까요?”
클라인은 잉간이가 바깥에 별게 없다는 걸 알게 되면 호기심이 줄어들 줄 알았지만, 잉간이는 질리지도 않고 계속해서 탁자 위를 모험하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정말 먼지밖에 없을 텐데도 질리지도 않는지 그 작은 발걸음을 꾸준히 놀리며 탁자의 이곳저곳을 쏘다닌다.
“근데, 이렇게 보니까 진짜 인간이 참 작긴 하네요. 표준 공간 규격대로라면, 아마 잉간이는 평생이 걸려도 집 안을 다 탐험하지 못할걸요?”
잉간이 입장에선 지금 상황이 어떻게 느껴질까?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을 하염없이 걷는 느낌일까?
잉간이가 힘차게 책상 위를 나아가는 모습을 보며 클라인은 막 생각났다는 듯 박수를 치며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여러분. 이거 아시나요? 애완 생물에게 주도적으로 산책을 시켰을 때의 반응을 보고 주인에 대한 신뢰도를 측정할 수 있다는 걸요.”
클라인은 그렇게 말하며 뿌듯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산책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을 때, 금방 산책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오는 경우는 신뢰도가 낮다는 뜻이에요. 그 반대로 겁먹지 않고 계속해서 산책을 이어 나가는 건 주인에 대한 신뢰도가 높다는 증거죠. 내가 산책을 계속하다가 무슨 일이 생겨도, 주인이 어떻게든 해 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에요.”
거기까지 말한 클라인은 이제 알겠냐는 듯 카메라를 바라보며 씨익 미소 지었다.
“그러니까, 즉. 잉간이가 저렇게 혼자서 열심히 돌아다니는 건…… 저에 대한 신뢰도가 높다는 증거겠죠?”
배시시.
클라인은 특유의 진심 어린 미소를 지으며 꿀이 떨어지는 눈빛으로 잉간이를 계속 관찰했다.
계속해서 탁자 위를 모험하던 잉간이는 마침내 탁자의 끝까지 도착했고, 드디어 가만히 멈춰 섰다.
“음, 내려갈 수 있을지 살펴보는 걸까요?”
하지만 잉간이가 내려가기에는 탁자와 바닥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다.
잉간이도 클라인과 같은 판단을 내렸는지 바닥을 내려다보며 무언가 깊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으음…… 내려가고 싶은 거 같은데. 살짝 도와줄까요?”
요즘 지어지는 집들에는 전부 공간 규격 조절 능력이 자동으로 부착되어 나오니까, 그걸로 잉간이가 있는 공간을 줄인다면 잉간이가 안전하게 바닥으로 내려갈 수 있지 않을까?
“어디 보자, 공간 설정이…….”
클라인은 마력망에 접속해 서둘러 집의 설정을 변경했고, 잠시 후 잉간이가 있는 공간의 크기가 변경된 사이즈로 적용되었다.
물론, 여전히 잉간이에게 있어서 저 탁자의 높이는 상당하지만, 하르피아의 도움을 받는다면 충분히 내려갈 수 있는 높이다.
잉간이는 공간의 크기가 바뀐 사실을 눈치챘는지 하르피아와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르피아는 더 이상 탐험을 계속하기 싫었던 걸까?
하르피아와 이야기를 나눈 잉간이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아, 슬슬 돌아가려는 모양이네요. 잉간이는 좀 더 산책을 하고 싶은데, 하르피아는 더 산책하기 싫은 모양인가 봐요!”
음, 원래 계획은 이번 산책으로 잉간이의 바깥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려는 거였는데, 잉간이는 이 정도로는 부족한 모양이다.
나중에 집 안에서 잉간이에게 위험할 수도 있는 걸 전부 치우면 이 방 말고도 집 안 전체를 탐험하게 해 줘야 하려나?
클라인은 그런 생각을 하며 조심스럽게 차원항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까지 돌아다니느라 힘들었을 테니, 집으로 돌아가는 건 내가 직접 도와줘야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한참 작은 발걸음을 옮기는 잉간이에게 촉수를 가져다 댔고, 잉간이와 교감을 시작했다.
“제가 잉간이를 키우면서 느낀 건데요. 잉간이에게 접촉하기 전에는 이렇게 먼저 교감을 하는 게 잉간이의 스트레스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더라고요.”
잉간이를 충분히 안심시키고, 클라인은 조심스럽게 잉간이 앞에 차원 문을 열었다.
그러자 잉간이는 잠깐 클라인을 바라보더니, 그대로 차원 문 안으로 하르피아와 함께 들어갔다.
“으으, 방금 봤어요? 방금 저를 막 쳐다봤는데…….”
진짜, 잉간이의 귀여움은 언제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다니까.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이번의 녹화를 마쳤고, 잠깐 휴식을 취할 겸 소파에 누워 마력망에 접속했다.
“응? 메시지?”
소파에 누워 휴식을 취하던 클라인은 리퀴드사에서 메시지가 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리퀴드사가 나에게 메일을 보낼 내용이 있었나?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가만히 메시지를 열었고, 예상치 못한 내용에 움찔 몸을 굳혔다.
“……합방?”
다시 한번, 클라인에게 합방 제안이 들어온 것이었다.
101화 *공지* 다음 주에 저 합방 나가요!
“그래서 뭐, 바깥은 별거 없더라. 절벽을 넘어가면 뭔가 보일 거 같기는 한데 말이야…….”
“흐음, 그래?”
바깥 외출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다행히 어항 안의 시간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다.
기껏해야 고작 하루? 그 정도의 시간이 흐른 듯 보였고, 나는 가만히 침대에 누워서 블랑카에게 바깥에서 있었던 일들을 들려줬다.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듣던 블랑카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럼, 다음번에는 나랑 같이 나가 볼래?”
“다음번에? 다음 기회가 있어야 말이지.”
“그래도 뭐, 언젠가는 찾아오겠지.”
어항 밖으로 통하는 차원 문은 우리가 돌아온 직후 사라져 버렸고, 어항 안에 남은 건 대량의 젤리들뿐이었다.
클라인 역시 젤리의 산은 좀 너무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대부분의 젤리들을 다시 회수하긴 했지만, 그래도 꽤 많은 양의 젤리들이 남은 상태다.
덕분에 한동안은 사냥을 나가지 않아도 되는 상태지만, 사냥이 생활 습관이 되기도 했고 블랑카도 사냥을 즐기고 있어서 아마 저 젤리들을 먹는 건 먼 훗날이 될 것 같다.
그래, 언젠가는 다시 기회가 찾아오겠지.
“그럼, 잉간…….”
블랑카는 이 이야기는 끝이라는 듯 내게 배를 보이며 드러누웠고, 나는 피식 웃으며 언제나처럼 마사지를 해 주려 손을 뻗었지만.
“……?”
무언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또 클라인인가?
아닌데, 이건 클라인의 느낌하고는 조금 다른 거 같은데?
무언가, 그 인간 목장에서 느꼈던 시선과 비슷한 느낌인데…….
“잉간? 무슨 일 있어?”
내가 손을 멈추자, 블랑카는 의아하다는 듯 내 이름을 불렀고, 나는 고개를 저으며 블랑카에게 대답했다.
“아냐, 아무것도 아니야.”
그렇게 언제나처럼 마사지를 끝내고 잠에 들 때까지도 누군가의 시선이 계속 따라다녔고.
다음 날 아침 일어나서도 그 무언가의 시선은 계속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히 뭔가가 나를 보고 있는데,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네.
무언가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을 바라봐도 그 무언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일단은 평소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오늘 해야 할 일은 무오 농장을 가꾸고, 아리스의 마법 훈련도 도와주고, 대충 집안일을 하는 거다.
그리고, 전부터 생각해 오던 일을 한번 시도해 봐야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 정체 모를 시선을 뒤에 달고 해야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일단, 나무가 엄청 필요하겠지?
그것도 평범한 나무가 아니라 그 뿌리고무나무같이 유연한 녀석들로 말이다.
집 근처의 농장들을 다 가꾼 나는 뿌리고무나무를 채취하기 위해서 짐을 주섬주섬 챙겼다.
“잉간, 어디 가려고?”
“고무나무들 좀 채취하려고. 같이 갈 거야?”
“응!”
또 푸른 점액하고 놀고 있던 아리스는 푸른 점액을 어깨에 올린 상태로 나를 따라왔다.
“으!”
푸른 점액은 나를 보자 식겁한 듯 아리스의 깃털 속으로 몸을 숨겼다.
아리스가 마석을 거의 퍼붓듯 먹여 댄 덕분일까?
어째 저 점액 녀석에게 지능이라는 게 점점 생겨나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나를 자꾸 피하는 것도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어서일까?
뭐, 그때 그 거대했던 점액들은 죄다 청소기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그 녀석의 찌꺼기 같은 거라고 생각해서 그렇게까지 악감정은 가지고 있지 않다.
언제 폭주할지 몰라서 불안한 눈으로 지켜볼 뿐이지.
전에 기억해 뒀던 고무나무 자생지로 향해서 고무나무의 뿌리를 잘라 낸다.
아리스는 벌목에는 관심이 없는지 적당한 나무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내가 벌목하는 모습을 지켜봤고, 가만히 내게 질문을 던졌다.
“저기, 잉간. 그런데 지금 나무는 왜 자르는 거야? 뭔가 만들려고?”
“어. 종이를 만들어 보려고.”
“종이?”
종이를 만들기 편한 나무는 목질이 연한 나무라고 어디선가 들어 본 기억이 있다.
고무나무 정도로 부드러운 나무라면 종이를 만들기 쉽겠지.
아리스는 종이를 만들어 보겠다는 내 선언에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종이는 갑자기 왜?”
“뭔가 글자를 적을 수 있는 게 필요해서.”
그냥 땅에 글자를 쓰는 것도 가능하지만, 이렇게 종이에 글자를 써서 전달하면 더 내 의도가 잘 전해지지 않겠는가?
클라인과 대화를 하고 싶다는 내 의도가 말이다.
뭐, 실패해도 종이를 가지고 만들 수 있는 것도 많으니까.
일단 기본적인 웬만한 가구들은 전부 다 종이로 만들 수 있을 정도다.
아리스 또한 내 의도를 눈치챘는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충분한 양의 나무들을 벌목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좋아, 이제 남은 건 나무의 섬유가 잘 풀리도록 고무나무의 뿌리를 찌는 건데.
뭔가 어째 뭘 만들든 간에 항상 찌는 것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뱀넝쿨 섬유도 그렇고, 비누 만들기도 그렇고 말이다.
그렇게 나무를 찌는 사이, 나를 따라다니던 정체불명의 시선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냥 나를 지켜보기만 하고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는데.
솔직히 오늘이 지나가기 전에 클라인이 한 번쯤 모습을 드러낼 것 같았는데 그러지도 않았다.
그래서 결국 그 시선의 정체는 뭐였던 걸까?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하늘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그러니까, 애완 생물 쥬튜버끼리 모여서 방송을 한다고요?”
“그렇죠. 그, 잉간이는 데려오시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영상만 준비하셔도 괜찮아요.”
클라인은 리퀴드사의 설명을 들으며 가만히 고민했다.
필시 집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됐다는 말을 듣고 기획한 게 분명한데, 과연 자신이 합방을 무사히 진행할 수 있을까?
“으, 그게요…….”
클라인은 별로 합방에 자신이 없다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리퀴드사는 그런 클라인의 떨떠름한 반응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몰라도 클라인을 안심시키고자 열정적으로 설명을 계속 이어 나갔다.
“아, 혹시 지난번 합방 때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돼요.”
“네?”
“이번 합방은 각 쥬튜버들이 그냥 자기 반려 생물들을 자랑하는 시간이거든요. 지난번처럼 클라인 님한테 부담이 갈 일은 없어요. 그냥 앉아서 준비한 영상을 같이 보면서 간간이 들어오는 질문에 대답하는 정도?”
리퀴드사가 말하는 지난번 합방이라는 건 쥬스농장과의 합방을 말하는 것이겠지.
그때, 클라인에게 잠시 동안 비난 여론이 형성됐던 것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니까, 클라인 님. 너무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아뇨. 그, 저기, 그게 아니라요…….”
“네. 말씀하세요.”
“그, 제가 합방에 좀 자신? 같은 게 없어서요……. 집 밖에 나갈 수 있다는 게 집 밖에서 제대로 방송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어서…….”
클라인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그렇게 말했고, 그런 클라인의 대답을 예상하지 못한 것인지 리퀴드사는 잠시 동안 대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제가 합방에 참가해도 그리 재밌는 풍경은 나오지 않을 거 같은데요……. 막 찐따처럼 말 더듬고 그럴 거 같은데…….”
클라인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고, 그제야 리퀴드사는 정신을 차렸는지 손사래를 치며 클라인을 안심시켰다.
“그 정도는 괜찮아요. 편집 팀에서 알아서 재미있게 편집해 줄 거니까요! 그러라고 있는 게 편집 팀인데요, 뭘.”
“그래도…….”
“그리고, 클라인 님은 좀 더 자신감을 가지셔도 돼요. 솔직히 말해서, 합방에 나가서 아무 말 없이 덜덜 떨고만 있어도 다들 재미있어할걸요?”
“네?”
클라인은 리퀴드사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서 벙 찐 얼굴을 했고, 리퀴드사는 피식 웃으며 클라인에게 말했다.
“비주얼이 그렇게나 좋으면, 뭘 해도 괜찮아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비, 비주얼이 좋다뇨…….”
리퀴드사의 말에 클라인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손사래를 쳤다.하도 리퀴드사가 그렇게 클라인을 띄워 준 덕분일까?
클라인은 슬며시 합방에 나가도 괜찮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 협회장이 부탁했던 인간형 생물의 인식을 향상시키는 데도 도움이 될 것 같고, 내가 나가도 민폐는 끼치지 않는다니까…….
그렇다면 한 번쯤은 나가 봐도 괜찮지 않을까?
“그러면…… 한 번 정도는…….”
“합방, 참가하시는 거죠?”
“아, 네…….”
“그럼, 저희 편집 팀 직원의 촬영용 의체를 보낼 테니까, 그걸로 잉간이의 일상을 좀 촬영해 주세요. 그냥 차원항 안에 집어넣으면 편집 팀 직원이 알아서 촬영할 거예요.”
“구,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요? 그냥 제가 평소대로 촬영하는 건…….”
“주작 논란을 막고, 또 주작 논란을 해명하기 위해서예요. 편집 팀 직원의 기억을 재생하는 방식이면 조작을 가하지 못하니까요.”
“아, 네…….”
클라인은 리퀴드사의 설명에 수긍하며 잠시 후, 3D 프린터로 배송된 편집 팀 직원의 촬영용 의체를 잉간이의 차원항 안에 집어넣었다.
오늘도 잉간이는 무언가 새로운 걸 만들 생각인지 나무를 잔뜩 베고 있었다.
음, 잉간이도 슬슬 환경에 익숙해진 거 같으니 새로운 생물을 더 넣어 볼까?
언제나 새로운 자극을 주는 게 더 좋으니까 말이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리퀴드사가 나눠 준 자료를 보며 합방에서 어떤 말을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미리 고민해 두지 않으면 분명 단단히 얼어붙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게 뻔하니까.
“음, 어디 보자. 출현하는 게스트들이 속삭이는혼돈에, 생명도감 님? 그리고…….”
그런데 이렇게 리퀴드사가 모은 사람들을 보니 참 쥬튜브에서 유명한 사람들이 잔뜩이다.
속삭이는혼돈은 비주류 애완 생물인 다곤으로 대기업까지 성장하신 분이고, 생명도감 님은 종합 생물 쥬튜버로 차원 간 방송에도 자주 출연하시는 분이잖아?
진짜 이 사람들을 어떻게 다 모은 거지?
리퀴드사도 참 대단하다.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게스트들의 목록을 살피며 건넬 말을 생각했고, 그러던 클라인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어라? 소행성 님?”
소행성이라면 탄탈로스 VLOG 쥬튜버인데, 최근에 한번 조작 논란이 터졌었지?
아까 리퀴드사가 말한 조작 논란을 해명하기 위해서라는 말은 이 사람을 뜻했던 거였구나.
보니까 트집을 잡고 싶은 사람들이 억지로 트집을 만들어 낸 수준이던데, 소행성 님도 참 힘드시겠어.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각 쥬튜버들과 무슨 대화를 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연습했다.
그리고 마침내, 합방 당일이 되었다.
“후우, 괜찮아. 별거 아냐. 준비한 대로만 하면 돼.”
클라인은 심호흡을 하며 조심스럽게 리퀴드사가 마련한 스튜디오 안으로 발걸음을 들였고.
“아, 안녕하세요! 지구산 인간 쥬튜브를 운영하고 있는 클라인이라 합니다! 잘 부탁합니다!”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서며 미리 준비해 둔 대사를 외치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어, 어라?”
그렇지만,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아직 촬영이 시작되기 전의 스튜디오에는 스태프들만 남아 있었고.
클라인은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스튜디오를 빠져나와 서둘러 대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 안녕하세요!”
클라인은 다시금 대기실 문을 열어젖히며 큰 소리로 인사를 했고.
그런 클라인의 인사에 대기실에 모인 쥬튜버들의 시선이 일제히 클라인에게 모여들었다.
클라인은 자신에게 모여든 시선에 당황하면서도, 미리 연습한 대로 조심스럽게 대기실 안으로 들어섰다.
이, 인사를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제 어쩌지?
102화 [반생소] 나의 반려 생물을 소개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크, 클라인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꾸벅.
클라인이 대기실 안으로 들어서며 인사를 하자 대기실 안의 모두의 시선이 클라인에게 박혔다.
이, 이제 어쩌지?
준비해 온 말은 전부 머릿속에서 새하얗게 비어 버리고 클라인은 어쩔 줄 모르며 입을 뻐끔거렸다.
하지만, 그런 클라인이 안쓰러웠는지 누군가가 클라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와, 진짜 클라인이에요? 그 차원항 장인?”
“어, 어. 네!”
클라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은 입구 근처의 의자에서 무료한 표정으로 단말기를 들여다보고 있던 한 남자였다.
“이야, 담당자님한테 이야기 들은 대로 실물이 훨씬 좋으시네요!”
“가, 감사합니다?”
클라인은 자신에게 친근감 넘치게 말을 걸어오는 남자에 당황하면서도 일단 고맙게 그 남자, 그러니까 생명도감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 자기소개를 안 했네. 만나서 반가워요. 나는 생명도감이라고 해요.”
“네, 알아요. 구독, 구독하고 있어서. 저도…….”
“아, 구독자셨어요? 이야, 클라인 님이 제 구독자라니. 이거 성공하고 볼 일이네요.”
생명도감.
쥬스농장과 동급, 아니 그 이상의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는 초대기업 쥬튜버다.
주로 업로드하는 영상의 내용은 차원 생명체들이지만, 차원 생물들에 한정하지 않고 그냥 생명체라면 뭐든지 다룬다.
보통 그러한 채널은 전문성이 떨어지거나, 계속 같은 주제만 반복하기도 하지만 생명도감은 그러지도 않는다는 것이 강점 중 하나이다.
쥬스농장이 브리더 쥬튜브의 전설이었다면, 생명도감은 생물 쥬튜브의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이 어째서 나한테 먼저 다가오는 걸까?
지난번 쥬스농장 때 호되게 당해서인지 클라인은 잠깐 그런 생각을 했지만, 잠시 생각하는 것만으로 어째서 생명도감이 클라인에게 호의적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생명도감 또한 리퀴드사의 지원을 받으며 쥬튜브를 운영하는 쥬튜버이니, 같은 회사 소속인 클라인에게 호의적으로 대할 이유는 충분하다.
아니, 사실상 이번에 여기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리퀴드사의 지원을 받는 쥬튜버들 아닌가?
“어때요, 긴장은 좀 풀렸어요?”
“아, 네. 아마도. 그런 거 같아요.”
클라인은 생명도감의 안내에 따라 생명도감 근처의 자리에 앉아 생명도감이 건넨 사탕을 우물우물 깨물었고, 생명도감은 그런 클라인의 모습을 보며 피식 미소 지었다.
“너무 긴장하지 마요. 이거 서바이벌 프로그램 아니니까요.”
“그, 그렇죠?”
“저도 처음으로 방송에 출연했을 때 클라인 님처럼 긴장했어요.”
생명도감의 노력 덕분일까?
바짝 긴장해 있던 클라인은 그제야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생겼고, 그런 클라인의 변화를 눈치챈 것인지 생명도감은 미소 지으며 클라인에게 말을 건넸다.
“아직 녹화 시작하려면 시간이 좀 남았거든요? 클라인 님이 크게 자기소개하는 거 보고 생각났는데, 저도 아직 다른 사람들하고 통성명을 다 못 끝냈거든요? 어디, 같이 인사나 하러 갈까요?”
“네, 네!”
클라인은 생명도감의 호의를 감사히 받아들이며 조심스럽게 생명도감의 뒤를 따라 대기실 안의 다른 쥬튜버들과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 안녕하세요! 클라인이라 합니다!”
“아, 네. 저는 돌리와둘리 채널을 운영하는…….”
미리 오늘 모이는 쥬튜버들의 목록을 리퀴드사에서 받아서 보긴 했지만, 이 사이에 내가 끼어 있어도 되는 걸까?
전부 하나같이 대기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쥬튜버들인데, 여기에 이제 막 억대 구독자를 넘은 자신이 끼어도 되는 걸까?
클라인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생각보다 괜찮은 쥬튜버들의 반응에 점차 긴장이 풀려 갔다.
“안녕하세요! 차원항 장인 클라인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소행성이라고 해요.”
그렇게 대화를 나누던 와중, 클라인은 마침내 소행성과도 통성명을 하게 되었다.
클라인은 자신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는 소행성을 보며 가만히 생각했다.
쥬튜브 영상을 볼 때마다 감탄했는데, 실제로 보니 진짜 눈동자가 엄청 아름답다.
코스모스인 특유의 성운을 닮은 눈동자가 정말 아름답다.
하지만 주작 논란에 한참 시달려서일까?
소행성의 얼굴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으, 진짜 내가 저런 논란에 시달렸으면 그냥 방 안에 틀어박혔을 텐데, 저 사람은 이렇게 정면으로 돌파하는구나.
클라인은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소행성의 얼굴을 바라봤고, 소행성 또한 빤히 클라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을 걸었다.
“저기…….”
“아, 네?”
“평소에 화장품 뭐 쓰세요? 피부가 엄청 아기 피부인데…….”
“어, 음…… 그냥 클렌징 폼으로 씻고? 감마선 방지 크림만 바르는 정도인데요…….”
“네? 그, 화장품을 안 바른다고요? 쥬튜브 영상 찍을 때도요?”
“어, 네…… 그냥 세수하고 촬영하는데요…….”
“와…… 진짜 탐나네요. 이게 진짜 자연 미인이라는 건가? 아니면 아툼인이어서 그런 건가?”
소행성은 그렇게 말하며 혀를 내두르듯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고, 클라인은 그런 소행성의 반응에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뇨.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제가 보기엔 소행성 님도 엄청 아름다운데요! 그, 눈동자가 막 석류를 생각나게 해서…….”
“후후, 칭찬 고마워요.”
그렇게 소행성과 통성명을 하고 드문드문 대화를 나누는 사이, 클라인은 목록에 적혀 있던 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챘다.
“어? 저기, 생명도감 님…….”
“무슨 일이야?”
“그, 속삭이는혼돈 님이 보이지 않아서…….”
“아, 속삭이는혼돈? 걔는…… 오늘도 지각하는 모양이네.”
속삭이는혼돈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걸까?
이제 슬슬 촬영 시간이 다가오는데 지금쯤 대기실에 도착해야 하지 않을까?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걱정스럽게 입구를 바라봤고, 생명도감이 한숨을 내쉬며 단말기를 손에 집어 든 순간, 대기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클라인의 초록빛 촉수와 대비되는 붉은 촉수들이 대기실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이고, 오는 길에 사고가 있어서…….”
“무슨 사고였는데?”
“아니, 눈을 떠 보니까 약속 시간 30분 전인 사고가 있었지 뭐야…….”
붉은 촉수의 주인, 속삭이는혼돈은 그렇게 능청을 떨며 생명도감에게 다가왔고, 생명도감과 이야기하던 속삭이는혼돈의 눈동자가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클라인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어, 어? 클라인? 클라인 맞죠?”
“네, 네?”
속삭이는혼돈은 클라인의 얼굴을 보자 방긋 웃으며 서둘러 클라인에게 다가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우와, 진짜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실물로 보게 되네요! 아, 맞다. 자기소개. 저는 속삭이는혼돈이라고 쥬튜브 하고 있어요. 언제 한번 같이 합방하실래요? 네?”
“어, 그게요. 어…….”
너무나 적극적인 속삭이는혼돈의 공세에 클라인은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고,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생명도감이 조심스럽게 속삭이는혼돈을 말렸다.
“저기, 너무 당황해하니까, 그쯤 들이대지? 그리고 클라인은 나중에 나랑 합방할 거니까, 손 떼.”
“네, 네?”
갑작스러운 생명도감의 참전 선언에 클라인은 놀랐지만, 속삭이는혼돈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클라인의 손을 놓고 물러섰다.
“아하하, 미안해요. 제가 진짜 클라인 님 팬이어서…….”
“아뇨. 아니에요. 제 팬이시라니 감사할 따름이죠…….”
으으, 팬 선언도 단순한 립 서비스겠지?
그래, 그럴 거야.
클라인은 그렇게 스스로를 다잡으며 헤실헤실 풀어지려는 입가를 꽉 눌렀고, 그런 클라인의 모습을 보며 속삭이는혼돈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클라인 님이 참가하시는 게 아니었으면 아마 오늘 합방은 전 참여 안 했을걸요?”
“네? 저는 속삭이는혼돈 님이 참여한다고 들었었는데…….”
“원래 섭외하시는 분들이 다 그렇죠, 뭐. 큭큭.”
클라인은 갑작스러운 속삭이는혼돈의 접근에 당황했지만, 워낙 친화력이 높은 혼돈의 성격 덕분에 곧 침착하게 혼돈과 대화할 수 있었다.
그렇게 클라인이 혼돈과 대화하며 시간을 보내는 사이, 마침내 촬영 시간이 되었다.
클라인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세트장으로 이동해 미리 지정된 자리에 앉아 긴장된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 미리 준비해 온 것만 잘하면 되는 거야.
그냥 잉간이 영상 보면서 같이 떠들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나의 반려 생물을 소개합니다! 반! 생! 소! 안녕하세요, 사회 역할을 맡은 생명도감이라고 합니다!”
사회자 역할을 맡은 생명도감의 선언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됐고, 준비한 영상을 보기 전에 시청자들을 향해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이 시작됐다.
“안녕하세요. 귀여운 탄탈로스 세 마리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소행성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촉수가 좋아서 촉수를 키우는 기어오는혼돈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쥬튜버들이 차례차례 자기소개를 끝내고, 이윽고 클라인이 자기소개를 할 차례가 왔다.
후우, 침착하게.
사전에 준비한 대로만 하자.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가만히 각오를 다졌고, 그렇게 각오를 다지던 클라인을 속삭이는혼돈의 촉수가 툭툭 건드렸다.
“저기, 차례 왔어.”
“아, 아?”
그렇게 각오를 다지던 사이 어느새 클라인의 차례가 왔던 걸까?
클라인은 당황해하며 입을 잠깐 동안 뻐끔거렸고, 서둘러 준비해 온 멘트를 입 밖으로 꺼내기 시작했다.
“아, 안녕하세욧! 저는 쥬튜브에서 지구산 인간 사육 채널을 운영하고 있는 차원항 장인 클라인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듯한 클라인의 멘트가 흘러나오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네, 각자의 개성 넘치는 자기소개, 잘 들어 봤습니다. 그나저나 클라인 양?”
“네, 네?”
“자기소개, 뭐예요? 아까 대기실 들어오면서 했던 인사말 그대로잖아요?”
“아니, 저. 그게. 준비해 온 게 이거밖에 없어서. 그…….”
“아니, 아무리 그래도 대기실에서 하던 인사를 그대로 하는 건 아니죠! 조금은 바꾸는 성의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맞아, 맞아!”
생명도감은 짓궂게 웃으며 클라인을 놀리며 분위기를 띄웠고, 다른 쥬튜버들도 짓궂게 웃으며 생명도감의 발언에 동조했다.
“해명해 주시죠!”
“어, 그게요. 음…….”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하며 쩔쩔매던 클라인은 말을 더듬으며 가만히 카메라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인사말을 바꾸지 않아서 죄송합니다?”
결국 클라인은 뭐에 사과하는지조차 모른 채 카메라를 향해 사과했고, 생명도감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슬슬 진행을 시작했다.
“자, 클라인 양의 공식 사과도 들었으니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내 반려 생물을 소개합니다! 나생소! 오늘 이곳에 모이신 쥬튜버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생각을 바꿔요?”
“각자 자기가 사육하시는 반려 생물들의 장점을 자랑하며 다른 분들의 마음을 바꾸시면 됩니다! 자랑이 끝날 때, 어떤 생물이 가장 마음에 들었는지 투표를 통해 결정하게 되는데요. 가장 많은 투표를 받은 반려 생물의 주인분께는 무려 반려 생물과 함께 떠날 수 있는 여행 상품권을 드립니다!”
생명도감의 말에 쥬튜버들이 박수를 치며 호응하고, 생명도감은 씨익 웃으며 세트장 중앙의 모니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각 참가자들에겐 우선 준비해 온 영상으로 매력을 어필할 시간이 주어집니다! 그 이후, 다른 참가자분들은 영상을 보며 떠오른 질문들을 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럼, 첫 번째 순서. 돌리와둘리입니다!”
생명도감이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튕겼고, 세트장의 불이 어두워지며 모니터에 돌리와둘리가 준비해 온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돌리와둘리는 분명히 드래곤들을 사육하는 쥬튜버였지?
어떤 영상을 준비했을지 기대가 된다.
막, 마법을 잔뜩 사용하는 드래곤의 모습을 보여 주려나?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영상에 집중했고.
“……어?”
예상과는 다른 내용이 시작부터 재생되는 바람에 나지막이 탄식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돌리와 둘리를 위한 특별식을 준비해 볼 거예요!”
영상 시작부터, 산 채로 손질되는 인간들의 모습이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103화 [반생소] 최고의 반려 생물을 뽑는 토론회
“드래곤들은 생먹이보단, 이렇게 가공한 음식을 더 좋아하거든요.”
영상 속에서 무표정한 인간들이 그릇 안에서 한데 뭉쳐지며 마력을 토해 내고, 인간들이 토해 낸 마력은 한데 뭉쳐 동그란 구슬 형태로 뒤바뀌었다.
“이렇게 식용 인간들을 사용하면 집에서도 쉽게 여의주를 만들어 줄 수 있어요!”
영상 속의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인간들을 갈아서 만든 여의주에 이것저것 정보들을 더하고는, 방긋 웃으며 폴리모프를 하지 않은 상태의 드래곤들에게 여의주를 건네줬다.
“돌리하고 둘리는요, 오리엔탈 드래곤이어서 물질 대신 정보와 마력이 주식이거든요. 이렇게 여의주를 만들어 주면 여의주 안에 든 정보들로 식사를 한답니다?”
화면 속의 남자가 뭐라 설명하지만, 클라인의 귀에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 당연한 것이다.
협회장이 알려 준 정보와 잉간이와의 교감으로 잠시 잊고 있었지만, 저게 원래 인간형 생물들의 위치다.
저렇게 인간으로 특식을 제공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상한 건, 인간을 반려 생물로 키우고 있는 내 쪽이다.
으, 전에는 이런 장면을 아무렇지도 않게 봤었는데 이젠 좀 버겁네.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가만히 영상이 끝나기를 기다렸고, 드래곤들의 일상은 어느덧 끝이 났다.
“확실히 좀 묘한 매력이 있긴 하네요. 특히, 뭘 생각하는지 모르는 저 멍한 표정이 말이죠.”
“그죠? 그게 진짜 귀엽다니까요.”
생명도감은 그렇게 말하며 능숙하게 진행을 이어 나갔고, 다른 쥬튜버들은 영상을 보며 궁금했던 점을 묻기 시작했다.
“그럼, 차원항이나 사육항 밖에 풀어놓고 키울 수 있다는 거예요?”
“네, 다만. 그렇게 하면 집 안 청소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해요.”
“드래곤들은 뛰어난 감각기관이 특징이던데, 저 아이들은 그렇지 않아 보이네요?”
“표정만 저렇지, 실제로는 엄청 민감합니다.”
그렇게 돌리와둘리의 차례가 끝나고, 계속해서 새로운 반려 생물들이 소개됐다.
“4차원에 서식해서, 이렇게 따로 장비를 갖춰야 하는 것만 제외하면 완벽한 반려 생물이라고 생각해요!”
“저기, 4차원 생명체는 우리가 관측하는 과정에서 외형이 달라진다는데, 그럼 저 모습이 진짜 모습이 아니라는 건가요?”
“……뭐, 보기에 귀여우면 된 게 아닐까요?”
느긋하게 대굴대굴 바닥을 굴러다니는 솜뭉치 같은 외모의 4차원 생물 블롭.
“솔직히, 탄탈로스보단 울타르가 더 귀엽지 않나요?”
“그렇다고 하는데요, 소행성 님? 탄탈로스파의 대표로서 한 말씀 해 주시죠!”
“대응할 가치가 없는 명백한 가짜 뉴스네요.”
언제나 반려 생물 인기 순위 1, 2순위를 탄탈로스와 다투는 울타르.
“일단, 가장 편한 건 먹이를 따로 챙겨 줄 필요가 없다는 거죠.”
“그럼, 키울 때 가장 불편한 건?”
“먹이를 자기가 알아서 찾아서 먹는다는 거? 실수로 잠금장치를 풀어 두면, 그대로 온갖 정보들을 먹어 치우거든요.”
마력망 안에서 살아가는 인공 생명체, 보카로.
그 외에도 수많은 쥬튜버들이 자신이 키우는 반려 생물들을 소개했지만, 그 안에 인간형 생물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먹이로는 주로 인간형 생물을 급여하는 편이에요. 그린 스킨들을 가장 좋아하더라고요.”
“사료에는 잘 반응하지 않아서 생먹이를 급여하고 있어요. 네, 식용 인간들요.”
“인간형 생물이 아니면 먹을 생각을 안 하더라고요. 덕분에 먹이 준비하는 저만 죽어 나가죠.”
그리고 간혹 인간형 생물이 언급되는 것은 전부 반려 생물의 먹이에 관한 이야기였다.
으아. 사람들에게 인식이 이런데, 어떻게 해야 인간형 생물들에 관한 인식을 바꿀 수 있을까?
아무리 고민해도 제대로 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클라인이 그렇게 고민하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차례가 지나갔고, 소행성의 차례가 되었다.
모니터에서 반갑게 손을 흔드는 소행성의 모습이 흘러나오고, 이어서 화면에는 한가롭게 잠자고 있는 탄탈로스의 모습이 재생됐다.
탄탈로스 특유의 길게 늘어진 외부 정보들이 바람에 살랑살랑 휘날리는 모습이 퍽 보기 좋다.
“성운아, 성운아, 성운아!”
들뜬 소행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한가롭게 자고 있던 성운이라 불린 탄탈로스가 고개를 들고 소행성을 바라본다.
마치 왜 불렀냐는 듯 성운은 뚱한 표정으로 소행성을 바라보고, 소행성은 배달 음식점 전단지를 성운 가까이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성운아, 오늘 뭐 먹을까? 엄마는 너무 고민돼서 못 고르겠어!”
“케엥.”
어이없다는 듯 성운이 짤막하게 짖더니, 소행성의 말을 완벽히 이해한 것처럼 소행성이 가져온 전단지들 중 하나를 고른다.
“이거? 오늘 이거 먹자고?”
“켕.”
“고마워, 성운아~.”
소행성과 성운의 일상은 그런 식으로 마치 성운이 소행성의 말을 알아듣는 것 같은 모습을 보여 줬다.
마치, 탄탈로스의 탈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러고 보니 탄탈로스와 울타르는 한때 지적 생명체로 인정됐었다고 협회장이 그랬던가?
그 사실을 알고 저런 모습을 보니 참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도대체 왜 탄탈로스와 울타르는 지적 생명체로 인정받지 못하는 걸까?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가만히 영상을 지켜봤고, 어느덧 영상이 모두 다 끝나고 질문 시간이 돌아왔다.
“그런데 말이에요, 아까부터 클라인 양이 질문이 있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더라고요. 클라인 양, 뭐가 그렇게 궁금한가요?”
“어, 저요?”
생명도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클라인이 신경 쓰였는지 스리슬쩍 클라인에게 마이크를 넘겼고, 클라인은 갑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스포트라이트에 당황했다.
어, 음. 뭐, 뭘 물어봐야 하지?
여기서 물어볼 게 없다고 빼는 건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일이겠지?
“어, 음…… 성운이는 그래서 어떤 음식점을 가장 좋아하나요?”
“아, 독특한 질문이 나왔네요! 소행성 씨, 그래서 성운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점은 어딘가요?”
“얘가 입맛이 좀 고급져서, 치킨을 참 좋아하더라고요.”
“아, 치킨이 고급진 요리예요?”
클라인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며 생명도감의 질문에 대답했고, 생명도감은 능숙하게 클라인의 대답을 잘 살려 줬다.
“이어서, 속삭이는혼돈 님의 차례! 속삭이는혼돈 님의 반려 생물을 소개합니다!”
생명도감이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튕기고, 모니터가 시꺼멓게 변한다.
“음, 이거 찍히고 있는 건가?”
속삭이는혼돈의 목소리가 어둠 너머에서 들려오고, 붉은 촉수가 꿈틀거리며 어둠을 지워 나간다.
“좋아. 잘 찍히네.”
속삭이는혼돈은 카메라를 향해 히죽 웃어 보이며 거친 손놀림으로 카메라를 이동시켰다.
“그러니까, 이걸로 대충 다곤이를 찍으면 되는 건가?”
속삭이는혼돈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거친 카메라 워킹을 선보이더니, 평범해 보이는 상자 앞으로 다가가 속삭였다.
“다곤. 일어나 봐.”
그렇지만 화면에 무언가 변화가 생기는 일은 없었고, 속삭이는혼돈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여기가 아닌가? 아닌데, 분명히 여기에 있는 거 봤는데?”
속삭이는혼돈은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붉은 촉수를 뻗어 어디선가 클라인이 애용하는 것과 같은 사료를 가져와 촉수 끝에 매달고, 조용히 다곤을 부르기 시작했다.
“응애, 우리 아기 다곤. 맘마 먹을 시간이야~.”
뭔가 좀 텐션이 이상하긴 하지만 말이다.
사료가 촉수 끝에서 흔들리는 것에 반응한 것일까?
아까까지 평범한 상자였던 것이 슬금슬금 형태가 풀어지더니, 문어처럼 생긴 생명체 하나가 나타났다.
“그래. 내가 너 거기 있는 거 봤다니까?”
속삭이는혼돈은 마치 콧노래를 부르는 것 같은 특유의 목소리로 속삭이며 다곤에게 사료를 쓰윽 건넸고, 다곤은 촉수를 뻗어 혼돈이 건넨 사료를 몇 번인가 만지작거리더니 덥석 낚아채 갔다.
“그래, 잘했어. 하이 파이브!”
우와, 진짜 텐션이 낮아지질 않네.
영상 내내 속삭이는혼돈은 이름에 걸맞지 않게 속삭이는 게 아니라 시끄럽게 떠들며 사운드를 가득 채웠고, 그 반대로 다곤은 간간이 촉수를 흔드는 걸 제외하면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네, 속삭이는혼돈 님, 그럼 다곤의 가장 큰 매력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당연히 촉수죠, 촉수! 일단 촉수를 가지고 있다는 것부터 멋짐과 귀여움과 예술 점수 1억 점을 얻고 시작하는 거잖아요? 그리고 또, 막 자기 마음대로 변신하는 모습이 상당히 신기하거든요.”
그렇게 속삭이는혼돈의 차례까지 끝나고, 마침내 클라인의 차례만이 남게 되었다.
“네, 마지막 차례죠? 차원항 장인, 클라인 님의 반려 생물을 소개합니다!”
화면에 잉간이의 모습을 몇 걸음 떨어져서 촬영한 듯한 영상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그 어떠한 부연 설명도, 어떠한 자막도, 어떠한 목소리도 보이거나 들리지 않는 클라인의 영상.
잉간이가 열심히 일하는 모습만이 화면에 나올 뿐이었고, 그것은 무언가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편집자가 어떻게든 영상을 살려 보려고 노력한 것일까?
다른 사람들의 영상에선 나타나지 않던 편집의 흔적이 클라인의 영상에서 엿보였다.
순식간에 잉간이가 일하는 장면에서 잉간이가 룸메이트들과 시간을 때우는 장면으로 넘어가고, 주요 장면들만 화면에 나왔다.
그리고 클라인의 영상 또한 끝이 나고, 질문 시간이 시작됐다.
제일 처음으로 클라인에게 질문을 던진 것은 소행성이었다.
“그, 인간형 생물을 반려 생물로 키운다는 게 흔한 일은 아니잖아요? 어쩌다가 인간형 생물을 반려 생물로 키울 생각을 하게 됐는지 궁금하네요.”
“처,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이었는데요. 잉간이랑 교감하다 보니 점점 잉간이가 마음에 들고, 많이 힘들었을 때 막 잉간이한테 위로도 받고 그래서…….”
“그쵸. 원래 반려 생물을 맞이하는 거엔 별다른 이유가 없는 법이죠.”
소행성의 질문을 시작으로 다른 쥬튜버들도 클라인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클라인은 성심성의껏 준비해 온 대로 침착하게 쥬튜버들의 질문에 대답을 했다.
“그, 인간들은 생각보다 민감하거든요. 그래서 쉽게 스트레스를 받는 편이에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과도한 핸들링은 자제하고, 차근차근 연습하며 익숙하게 한다면 핸들링뿐만이 아니라 차원항 바깥 외출도 가능해요.”
“먹이는 별로 가리는 게 없어요. 다만, 독성 물질을 잘 처리하지 못하니 그 점은 주의해야 해요. 그리고 수분을 반드시 따로 챙겨 줘야 하고요.”
“그, 인간들은 사회적인 생물이지만 의외로 개인적인 공간도 중요하더라고요. 다른 사회성 생물들처럼 개인 공간이 필요 없지 않고, 오히려 충분한 개인 공간이 필요한 편이에요.”
“네, 네. 초보자들에게는 그냥 순혈 인간들을 추천드려요.”
지금까지 자신이 공부해 오고, 잉간이를 키우며 알아낸 정보들을 차분히 설명했고, 클라인은 그때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형 생물에 별다른 관심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클라인에게 쥬튜버들이 던지는 질문은 정말 기초적인 것들이었다.
먹이는 뭘 먹느냐, 단독 사육은 불가능하냐…….
그래, 인간형 생물의 인식을 바꾸기 전에 우선 인간형 생물에 대한 정보를 더욱 알리는 게 중요하다.
일단 알아야 인식을 바꾸든 말든 할 것이 아닌가?
그렇게 클라인이 다시금 각오를 다지던 때, 클라인에게 슬며시 속삭이는혼돈이 질문을 던져 왔다.
“저기,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네?”
“그, 클라인 님은 인간형 생물을 키우시잖아요? 그럼, 인간형 생물이 먹이로 자주 쓰이는 게 불편하지 않나요?”
“아, 그건…….”
살짝 민감할 수도 있는 주제를 질문한 속삭이는혼돈.
클라인은 지금 이 타이밍이 자신이 준비해 온 발언을 하기 적당한 때라고 생각했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속삭이는혼돈의 말을 긍정했다.
“네. 전에는 아니었지만, 요즘에는 확실히 불편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솔직히 말해서, 인간형 생물을 식용으로 쓰지 말자고 주장하고 싶을 정도로요.”
다른 사람들에게 상당히 과격하게 들릴 수 있는 발언과 함께 말이다.
104화 [반생소] 여행 상품권을 차지한 반려 생물과 그 주인은 과연 누구?
“솔직히 말해서, 인간형 생물을 식용으로 쓰지 말자고 주장하고 싶을 정도예요.”
클라인이 속삭이는혼돈의 질문에 대답하자, 촬영장의 분위기가 단번에 가라앉았다.
클라인은 조금 당황한 듯한 생명도감의 표정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짓고, 변명하듯 뒷말을 덧붙였다.
“아예 인간형 생물을 식용으로 쓰지 말자! 그런 게 아니라, 지금처럼 인간형 생물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주지 말자는 거예요.”
“아, 하긴. 다른 먹이 생물들은 그걸 신경 쓰는데, 인간형 생물들에게는 그런 배려가 부족하긴 하니까요.”
“네, 그런 거예요.”
속삭이는혼돈은 클라인의 변명 아닌 변명을 잘 받아서 순간 얼어붙은 촬영장의 분위기를 잘 풀었다.
클라인은 그런 촬영장의 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클라인이 한 주장은 극렬 환경주의자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발언이었으니 말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소리지만, 이름 앞에 ‘극렬’이 붙는 만큼 극렬 환경주의자로 여겨지는 건 그리 좋은 일이 아니다.
그들은 대부분의 차원 생물들을 사람과 동등하게 대우해야 하며, 다른 생명체를 섭취해서 정보를 얻는 행동 또한 생명 학대라고 주장한다.
당연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주장이 아니며, 중앙정부에서도 그들의 활동을 그리 좋게 보지는 않는다.
그래서일까?
극렬 환경주의자들의 대부분은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잘 닿지 않는 외우주에서 거의 해적처럼 생활하며 그들 나름대로의 투쟁을 이어 나간다.
그런데 지금 문득 생각이 든 건데, 잘 생각해 보면 협회장의 주장도 극렬 환경주의자로 분류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협회장의 주장은 꽤 많은 차원 생물들이 지적 생명체로 인정받을 만한 사고력과 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니, 어찌 보면 극렬 환경주의자들의 주장하고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어쨌든, 클라인이 오늘 주장하려는 것도 자칫 잘못하면 극렬 환경주의자로 여겨질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극렬 환경주의자로 여겨지지 않는 그 미묘한 선을 아슬아슬하게 잘 지켜야 하는데.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준비해 온 주장을 입 밖으로 꺼내 놨다.
“그, 솔직히. 인간형 생물을 키운다고 하면 다들 이상하게 여기잖아요?”
“그렇긴 하죠. 저도 그런 이야기 많이 들었는걸요. 왜 굳이 다곤을 키우냐고요.”
클라인은 슬며시 운을 떼었고, 속삭이는혼돈은 그런 클라인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쳤다.
“저는요, 인간형 생물을 키우는 게 울타르나 탄탈로스 같은 메이저한 반려 생물들을 키우는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해요.”
“울타르나 탄탈로스요?”
클라인의 말에 흥미를 느낀 것일까?
생명도감이 슬쩍 끼어들어 클라인에게 말을 걸었고, 클라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 잉간이의 품종인 지구산 인간은 보호종으로 지정받을 정도잖아요? 지구산 인간 말고도 꽤 많은 종류의 인간형 생물들이 보호종으로 지정받았고요.”
“그렇죠.”
“그렇다는 건, 울타르나 탄탈로스와 그리 다르지 않은 지능을 가지고 있다는 거잖아요? 거기에 더해서, 약간의 훈련이 필요하지만 주인과 교감을 나눌 수도 있고요.”
클라인은 마치 홈쇼핑의 직원처럼 적극적으로 인간형 생물의 장점에 대해서 어필했다.
처음부터 바로 인간형 생물들도 사람과 비슷한 지능과 이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클라인이 노리는 건, 지금의 탄탈로스와 울타르가 있는 위치에 인간형 생물들이 올라가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탄탈로스와 울타르의 위치에 올라가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클라인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클라인은 슬쩍 눈을 낮춰서 그보다 몇 단계 아래의 위치를 노리기로 했다.
“드래곤들도 식용 드래곤이 있고 애완 드래곤이 있잖아요? 그런데 아무도 드래곤을 키우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잖아요.”
“그렇죠. 애완 드래곤은 흔하지 않아도, 이상하게 여기진 않죠.”
“제가 말하고 싶은 건 그거예요. 인간형 생물도 다른 반려 생물들과 비슷하게 취급해 줬으면 해요. 드래곤을 다른 생물의 먹이로 쓰는 경우가 있다고 해서, 드래곤이 먹히는 모습을 찍는 게 쥬튜브 대세가 되는 일은 없잖아요?”
드래곤 정도면 다들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겠지?
마지막으로, 클라인은 요즘 쥬튜브에 대세로 자리 잡기 시작한 인간형 생물들을 괴롭히는 영상들을 슬며시 언급했다.
이렇게까지 언급했으니 쥬튜브에 그런 영상들이 올라오는 일은 좀 줄어들겠지.
이 정도가 지금의 클라인으로서 잉간이의 친구들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최선이다.
그리고 그렇게 열변을 토하는 클라인의 모습을 생명도감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봤다.
“자, 이렇게 모든 참가자들의 반려 생물이 소개되었습니다! 다들, 새롭게 매력을 알게 된 생물이 있으실 텐데요. 지금부터 투표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클라인의 차례를 마지막으로 모든 소개 시간이 끝났고, 쥬튜버들의 앞에 투표지가 배분되었다.
으음, 솔직히 잉간이 말고는 다른 생물을 더 키우고 싶지도 않지만, 굳이 고른다면…….
클라인은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생물을 투표용지에 적어서 제출했고, 곧이어 투표가 완료되었다.
“네, 투표가 완료되었네요! 그렇다면, 여행 상품권의 주인이 될 반려 생물과 그 주인은 바로……!”
으, 뭔가 긴장되네.
솔직히 상품을 받는 건 기대도 하지 않지만, 그래도 잉간이에게 투표한 사람들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
잉간이의 매력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좋겠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것은 클라인뿐만이 아닌 모양인지, 클라인 말고도 다른 쥬튜버들도 긴장된 표정으로 생명도감의 발표를 기다렸다.
“이야, 이거 투표가 꽤 박빙이었네요. 1등하고 2등이 꽤나 치열했습니다! 1등하고 2등이 단 한 표밖에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네요!”
생명도감은 결과를 발표하기 전에 분위기를 띄울 생각인지 곧바로 결과를 발표하지 않고 느물거렸다.
“그런데 말입니다, 투표 결과에 살짝 수상한 부분이 있더라고요. 공정한 투표를 위해서 직접 해명을 들어야겠습니다. 클라인 양?”
“아, 네?!”
그때, 생명도감은 갑작스럽게 클라인의 이름을 불렀고, 자신의 이름이 불릴 줄 몰랐던 클라인은 당황하며 생명도감에 대답했다.
“그리고 속삭이는혼돈 님?”
“넵!”
이어서 이름이 불린 것은 속삭이는혼돈.
속삭이는혼돈은 당당한 표정으로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생명도감의 부름에 대답했다.
“제가 왜 두 분을 지명했는지 아시겠나요?”
“자, 잘 모르겠는데요……?”
“몰라요!”
“제가, 이 두 분에게서 투표 조작의 증거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아주 명백한 증거를 말이죠.”
“투, 투표 조작요?”
“아~.”생명도감의 선언을 듣고 속삭이는혼돈은 무언가 짐작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클라인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고, 클라인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생명도감은 피식 웃으며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아니, 어떻게 두 분이 서로를 찍습니까? 이건, 두 분이 서로 짜고 서로를 밀어준 거 아닙니까?”
“우리 둘이 마음이 통한 거죠. 같은 촉수 동지니까요!”
“아, 같은 아툼인끼리 연합했다. 이겁니까?”
“아니에요! 저는 그냥, 그. 손쉽게 핸들링하는 게 좀 부러워서…….”
클라인이 다곤에 투표를 한 것은 다곤과 속삭이는혼돈이 서로의 촉수를 휘감고 교감하는 모습이 꽤 부러워서였다.
잉간이하고 손을 붙잡고 교감을 할 수는 있지만, 아툼인이라면 누구나 촉수로 완전히 서로 얽힌 교감을 좋아하는 법이 아니던가?
“아, 참고로. 이렇게 투표를 조작하신 두 분은 각각 한 표씩 받으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클라인과 혼돈이 변명하거나 말거나 생명도감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클라인과 혼돈이 받은 표수를 밝혔고, 잠시 촬영장 내에 웃음바다가 번졌다.
“자, 그럼 이제 정말로 1위를 공개하겠습니다! 이곳에 모이신 분들이 가장 마음에 들어 한 반려 생물은 바로……!”
촬영장이 어두워지는 것과 함께 생명도감이 잠시 뜸을 들이고, 박수를 치며 1위의 이름을 불렀다.
“1위, 탄탈로스! 소행성 님입니다!”
생명도감은 그렇게 외치며 어디선가 여행 상품권 패널을 들고 와 소행성에게 넘겨줬다.
“이번 투표는 그야말로 탄탈로스와 울타르의 2파 전쟁이었습니다. 2위는 안타깝게 한 표 차이로 울타르가 차지하게 됐습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1등 싸움은 탄탈로스와 울타르의 싸움이었네.
그렇게 모든 촬영이 끝나고, 클라인은 한숨을 내쉬며 대기실로 들어가 슬며시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아, 이제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지만, 어디선가 나타난 생명도감이 클라인의 앞을 가로막았다.
“오늘 어땠어요, 클라인 양?”
“어. 음. 신경 많이 써 주셔서 덕분에 그럭저럭 괜찮았던 거 같아요…….”
“진짜, PD님이 오늘 클라인 양 엄청 칭찬하더라고요. 그냥 카메라에 잡는 것만으로 그림이 산다고.”
“가, 감사합니다……?”
“그, 클라인 양. 맨 처음에 대기실에서 내가 했던 말 기억나요?”
“대기실에서요……?”
무, 무슨 말을 했더라?
잘 기억이 안 나는데?
클라인은 당황하며 필사적으로 생명도감의 말을 기억하려 애썼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생명도감은 피식 웃으며 클라인에게 말했다.
“그, 나중에 같이 합방하자고 했잖아요.”
“아, 아. 그랬죠. 그러셨던 거 같아요.”
“그거, 농담 아니니까 메시지 잘 확인하고 있어요. 나중에 시간 되면 부를 테니까요. 튼튼한 외부 정보 준비하고요.”
“네, 네?”
“그럼, 조심히 들어가요!”
생명도감은 그렇게 합방 선언을 하고 순식간에 사라졌고, 클라인은 멍하니 제자리에 서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생각했다.
합방 제안?
진짜로?
초대기업이 먼저 자신에게 합방을 제안한다는 낯익으면서 익숙지 않은 상황에 클라인이 당황하는 사이, 붉은 촉수가 등 뒤에서부터 클라인의 몸에 얽혀 들었다.
“클라인 님!”
“소, 속삭이는혼돈 님?”
“다곤에 투표하셨다는 건, 클라인 님도 촉수의 매력을 안다는 거죠? 그쵸?”
“네?”
“진짜, 이렇게 마음이 통하니 너무 기쁘네요! 이 기쁨은 서로 합방으로 푸는 수밖에 없겠네요! 그렇죠?”
“네, 네?”
“그럼, 다음에 또 봐요!”
속삭이는혼돈은 클라인이 뭐라 반문할 틈도 주지 않고 합방 선언을 하고 생명도감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또 하나의 갑작스러운 합방 요청에 클라인이 멍해져 있는 사이, 누군가가 클라인에게 말을 걸었다.
“뭐 해요?”
“소, 소행성 님?”
“그냥 제자리에 계속 서 있으셔서, 괜찮아요?”
“아, 네. 괜찮아요.”
클라인은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괜찮음을 어필했고, 소행성은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고는 개인 정보를 가공해서 클라인에게 건넸다.
“오늘 재밌었어요. 제가 나중에 뭐 도울 일 있으면 연락해요.”
“네?”
“클라인 씨 보니까, 남 보는 것 같지 않아서 그래요. 노력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요.”
그렇게 클라인은 소행성의 연락처까지 얻어 냈고,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어안이 벙벙한 채로 집으로 돌아왔다.
뭘까, 오늘 있었던 건?
대기업 두 명에게서 합방 요청을 받고 또 하나의 대기업의 연락처를 받았다고?
리퀴드사의 매니저 말로는 이번 방송은 한 일주일 뒤에 편집되어서 마력망 방송을 통해 송출된다고 한다.
제대로 된 시청자들의 반응을 보려면 한 일주일은 필요하겠지?
뭔가,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얻어 온 게 많은 외출이었지만 그래도 역시 집이 최고야.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축 소파 위에 늘어졌고, 다 비어 버린 에너지를 충전하고자 잉간이의 차원항으로 비척비척 다가갔다.
내가 없는 동안 잉간이는 뭘 하고 있었으려나?
“우리 잉간이, 뭐 하고 있었어요……?”
클라인은 소행성의 말투를 따라 하며 차원항 내부를 살폈고, 생각보다 더 많이 바뀐 차원항 내부를 보며 깜짝 놀랐다.
“이건…….”
잉간이가 또 클라인을 부르던 것일까?
차원항 안에는 무언가가 잔뜩 그려지고 써진 종이들이 하늘을 향해 놓여 있었다.
105화 잉간이가 종이를 만들었어요!
늘 느끼는 거지만, 이 세상엔 공짜란 없다.
내가 뭔가 얻고 싶다면, 그에 걸맞게 엄청나게 일해야 한단 것이다.
아무것도 안 해도 얻을 수 있는 건, 하늘에서 떨어지는 젤리들밖에 없다.
내가 갑자기 왜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냐면, 당연히 뼈 빠지게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채취한 나무들을 삶고, 껍질을 벗겨 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냥 손이 많이 가는 요리라고 생각하면 됐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분리한 섬유들을 찧는 과정은 이야기가 달랐다.
급조한 절구로 껍질을 찧다 보니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
뭐, 아리스와 블랑카의 도움을 거절한 내 자업자득이긴 하지만, 그래도 힘든 건 힘든 거다.
어째서 물레방아의 발명이 그렇게 위대한 것으로 여겨졌는지 지금이라면 알 것 같다.
나도 이 종이만 만들고 나서 물레방아를 만들어 볼까?
일단 보기도 좋고, 만들어 두면 꽤 많은 곳에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으아, 죽겠다!”
그래도 일단 시작한 일을 중간에 힘들다고 포기할 수는 없으니, 끝까지 하긴 해야지.
어떻게 간신히 하루를 꼬박 바쳐서 섬유들을 찧고 나니, 나무껍질은 이제 단순한 섬유 뭉치로 변했다.
자, 그럼 이걸로 힘든 작업이 다 끝났느냐?
그것도 아니다.
이제 물에 섬유와 응고제를 넣고 섞은 다음에 종이를 포를 뜨고, 떠낸 종이들의 물기를 빼내는 작업이 남아 있다.
진짜, 참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다.
내가 그렇게 종이들과 씨름하는 동안, 아리스는 마법 연습과 점액과 놀며 시간을 때웠지만, 조금 지루해진 걸까?
부엌에 들어가 뭔가를 만지작거리더니, 내가 작업을 하는 동안 간단한 요리를 해 왔다.
내가 평소에 만들던 것과 비슷하지만, 어째 뭔가 더 디테일한 부분이 잘 살아 있는 느낌이 든다.
마법으로 요리를 보조해서 그런 건가?
“흐흥, 어때?”
“나보다 나은데? 요리는 언제 연습했어?”
“잉간 하는 거 보고 배웠어!”
진짜, 누굴 닮아서 이렇게 똑똑할까?
나는 그런 영특한 아리스의 모습에 미소 지으며 계속해서 작업을 이어 갔다.
냄비에 담아 둔 물에 찧은 섬유들을 집어넣고 냄비를 휘휘 휘저으며 섬유들을 물에 걸쭉하게 녹인다.
그 이후, 만능 접착제로 잘 쓰이는 무오의 점액을 함께 투하해 잘 섞으면 마치 게살 수프와 비슷한 모습의 무언가가 만들어진다.
“우와, 파랑이 같은 느낌이야!”
아리스는 무오 점액 덕분에 걸쭉해진 물이 신기했는지 흥미를 갖고 냄비 안의 내용물을 살폈다.
그러다가 자기도 한번 만들어 보고 싶어졌는지 슬며시 무오 점액을 가져다 점액을 만들어 푸른 점액하고 놀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곁눈질로 지켜보며 집 안에서 전에 만들어 둔 나무틀을 가지고 나왔다.
그럼 이제 남은 건 나무로 만든 틀을 살포시 그 안에 집어넣고 흔들어서 얇게 종이 포를 뜨는 일뿐이다.
이건 좀 다른 거에 비해서 편하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작업을 시작했지만, 이게 웬걸?
사실상 섬유를 찧던 작업보다 이게 더 어렵고 힘든 것 같다.
균일하게 종이를 만들려면 틀을 잡은 손에 넣는 힘을 균일하게 유지해야 하는데, 문제는 그러는 동안 허리를 계속 굽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하나 뜨는 데도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파 왔지만, 나는 기어코 오늘 내에 모든 작업을 끝내겠다는 의지로 모든 작업을 마무리했다.
이제 남은 건 이번에 만든 종이들을 누름돌로 눌러서 물기를 쫙 빼내는 것뿐인데, 이건 내가 힘쓸 필요가 없이 자연이 알아서 해 줄 것이다.
“아이고, 다 끝냈다!”
완전히 날이 저물고 나서야 작업을 완료하고 안으로 들어오며 나는 신음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켰다.
“다 한 거야?”
“응. 이제 내일 잘 말리기만 하면 다 끝난 거야.”
휴대형 단말기를 손에 들고 편안히 침대에 누워 있던 블랑카가 나를 반겼고, 나는 털썩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 진짜 죽겠다.”
“그러길래 도와준다고 했을 때 좀 받지 그랬어?”
“아니, 그러면 진짜 나는 아무것도 안 하는 거잖아.”
이런 거라도 내가 해야지.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블랑카에게 대답하자, 블랑카는 피식 미소 지으며 내게 말했다.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은데 말이야. 가만히 있어도 제대로 반응만 해 주면 괜찮은데.”
“아니,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
“큭큭.”
나는 얼굴을 붉히며 그렇게 외쳤고, 블랑카는 짤막한 웃음을 터트렸다.
어찌 됐든 이렇게 종이를 만드는 데 성공했으니 남은 건 맨 처음 생각했던 대로 클라인과의 대화를 시도해 보는 건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대화를 할 수 있을까?
당연하겠지만 영어나 한글로는 소통할 수 없을 테니까, 그림 같은 걸 그려야 하나?
그런데, 그림을 그린다고 해도 뭘 그려야 하지?
나는 클라인과 어떤 대화를 하고 싶은 걸까?
으음, 뭘 말해야 할지 잘 생각이 안 나네.
이건 일단 자고 일어나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흠뻑 땀으로 젖은 몸을 씻고 오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섰지만, 그 전에 아리스가 집 안으로 날아 들어왔다.
“잉간! 허리 아파?”
“어, 응?”
“막, 관절도 아프고. 몸이 찌뿌둥하지?”
그런데 어째, 아리스 이 녀석이 뭔가를 꾸미는 기색이다.
오늘 몸을 혹사해서 좀 아프긴 한데, 그걸 왜 물어보는 거지?
뭐, 치유 마법이라도 독학했나?
“그렇긴 한데, 그건 왜?”
“그럼. 내가 마사지해 줄게!”
“어?”
“몸이 찌뿌둥하면, 마사지가 최고라고 블랑카 언니가 그랬어!”
“아니, 그것보다. 마사지하는 법은 알고?”
“잉간이 하는 것도 봤고, 그. 만능 사전? 거기에 검색했더니 나오던데?”
허어.
이걸 어쩐담?
슬쩍 블랑카를 바라보니 블랑카는 이 상황이 재밌는지 아리스를 말릴 기미가 보이지 않고, 아리스는 도대체 뭐에 자극을 받았는지 아주 의욕이 가득하다.
“……그냥 마사지기 쓰면 안 돼?”
“안 돼!”
아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내 손을 붙잡고 나를 침대로 이끌었고, 능숙하게 내 옷을 벗겼다.
“그럼, 시작할게!”
“어, 응.”
아리스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날개와 다리로 내 몸을 꾹꾹 눌렀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리 시원하지 않다.
몸무게가 워낙 가벼워서인지 체중을 이용한 압박도 안 되고, 깃털과 발톱이 자꾸 피부에 쓸려서 조금 쓰라리다.
그 사실을 아리스도 눈치챘는지 잠시 후, 시무룩한 표정으로 내 등 위에서 내려왔다.
“잘 안 돼…….”
아리스는 그렇게 중얼거린 뒤, 내게 주섬주섬 옷을 건네고 선언했다.
“다음번에는 제대로 할 거야!”
그리고 아리스는 그대로 내 옆에 파고들어 왔고, 나는 피식 웃으며 아리스를 위로하며 잠에 들었다.
마침내 다음 날 아침이 밝았고, 누름돌에 눌러 둔 종이들에서 충분히 물이 빠졌다.
살짝 누르스름한 기운이 돌긴 하지만, 이 정도면 꽤 괜찮게 만들어진 것 같다.
남은 물기는 아리스가 마법으로 제거를 해 줬고, 이제 남은 건 이 종이로 클라인의 주의를 끄는 일뿐인데.
어떤 메시지를 적어야 클라인이 관심을 가지고 해석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그렇다면, 생각해 둔 걸 죄다 보내 보는 건 어떨까?
한글도 써 보고, 영어도 써 보고, 그림도 그려 보는 거다.
전부 시도해 보면 하나쯤은 반응해 주지 않겠어?
그러면 무슨 내용을 적느냐가 또 문제인데, 내가 클라인에게 말하고 싶은 내용이라면…….
음, 다시 한번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게이트를 열어 달라고 하는 거려나?
블랑카와 약속했던 것도 있으니 말이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종이들에 재 가루를 뭉쳐 만든 연필로 내가 적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아내기 시작했다.
그냥 밖에 나갈 수 있는 게이트를 좀 열어 달라, 너는 요즘 어떠냐.
살짝 어색한 친구들끼리 할 법한 질문들을 종이에 한가득 적어 넣고, 못난 솜씨로 어항 밖으로 외출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그런데 이런 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해 보이는데.
그래, 이런 건 어떨까?
수학과 과학은 온 우주의 기초 언어라고 해도 무방하니, 내가 알고 있는 수학과 과학 지식들을 적는 것이다.
대충 뭐, 수식 같은 걸 적어 넣으면 흥미가 생기지 않겠어?
아닌가?
오히려 흥미가 떨어지려나?
사람도 수식을 보면 흥미가 자꾸 떨어지잖아.
그래도 이런 식으로 과학과 수학적 지식들을 적으면 대우가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반려넷이나 이런 곳에서의 대우를 보면, 인간을 지적 생물로 인정하는 것 같지 않은데 이런 모습을 보여 주면 생각을 바꿔 먹지 않겠어?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내가 보내고 싶은 메시지들을 담은 종이들을 가지고 산 정상에 마련해 둔 제단으로 가져갔다.
클라인이 내가 보내는 메시지를 잘 볼 수 있게끔 말이다.
바람에 종이가 날아가지 않게끔 주위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들로 잘 고정하고, 클라인의 반응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본다.
내가 기분 좋은 바람을 맞으며 산 정상에서 때아닌 낮잠에 꾸벅꾸벅 빠져들 때쯤, 클라인의 반응이 돌아왔다.
“……응?”
내가 보낸 메시지에 대한 클라인의 반응은 내가 예상하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사회화 교본]
클라인은 내 메시지에 대한 대답으로, 내게 문제집을 선물했다.
갑자기 웬 문제집?
* * *
“으음…… 내게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걸까?”
클라인은 잉간이가 산 정상에 놔둔 수많은 종이에 적힌 뭔지 모를 그림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저 뭔지 모를 그림의 일부는 지구라는 곳의 고유 문자 같은데, 몇 개는 그냥 그림인 것 같다.
잉간이 나름대로 나와 소통하려고 노력한 거 같은데, 미안하게도 무슨 뜻인지 하나도 알아보지 못하겠다.
잉간이가 내 노력을 볼 때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그나마 알아보기 쉬운 그림을 바라보며 무슨 뜻일지 고민했다.
자, 그러니까…… 저 네모난 박스에 잉간이의 모습이 그려져 있으니 저 박스는 차원항을 뜻하는 거려나?
그리고 그 네모난 박스에 구멍이 뚫려서 그 밖으로 나가는 모습이니까…….
설마,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인 걸까?
그런 생각이 든 클라인은 문득 협회장과 자신의 계획이 성공했을 때를 떠올렸다.
인간형 생물들 또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한다.
그렇다면 당연하겠지만, 사람은 사람을 반려 동물로 키울 수 없다.
아마도, 잉간이와 헤어지고 잉간이는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래야만 하는 것이고,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그렇지만 그 당연한 사실을 떠올린 클라인은 그리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차라리, 지금처럼 잉간이가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하면 계속해서 같이 지낼 수 있을 텐데…….
클라인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고,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떠올리며 식겁했다.
진짜,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람?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을 해 버렸다.
내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서 잉간이를 희생시키는 건, 이미 충분히 저질렀잖아.
그러니까 내 욕심을 채우려고 잉간이를 희생시켜선 안 돼.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했고, 진지하게 잉간이의 미래를 생각했다.
만약 잉간이가 야생, 즉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이미 차원항에 익숙해진 잉간이는 적응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니까, 잉간이가 다시 고향에 맞게 사회화를 진행할 수 있도록 훈련을 시키는 게 맞지 않을까?
잉간이를 데려왔을 때와 돌려보낼 때의 시간도 꽤 차이가 날 것 같으니까, 잉간이의 문명도 그때 당시보다 더 발전했겠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마력망에서 사회화 교본을 뒤적거렸다.
음, 대충 3단계 문명 교본으로 훈련을 시키면 되려나?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차원항 안으로 사회화 교본을 집어넣었다.
늘 그렇듯, 호의를 가득 담아서.
106화 잉간이에게 공부를 시켜 봤습니다.
사회화 교본?
이게 도대체 뭘까?
클라인은 내가 자기에게 보낸 메시지의 대답이라도 되는 양 내게 이러한 책을 던져 줬다.
이건, 도대체 뭐지?
일단 내용을 좀 확인부터 해 보자.
조심스럽게 책을 펼쳐 보자, 책의 내용은 무언가 아주 익숙한 것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무언가에 관한 내용이 쭉 설명되고, 이어서 그 무언가에 대한 문제가 나오는 아주 익숙한 바로 그 구성.
“……문제집?”
아무리 봐도, 이건 문제집 그 자체였다.
자. 그래서 이 문제집의 내용이 무엇인지 보니, 아주 낯익은 내용들이 존재했다.
이것 또한 내게 익숙한 언어로 쓰인 것이 아니겠지만, 나는 문제집의 내용이 어떠한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중학교 시절 배웠던 난이도의 수학 문제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던 것이었다.
내가 수학 기호를 적어 넣어서 이런 문제집을 던져 준 걸까?
뭔가 내 의사를 전하는 과정에서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
일단, 목적은 이뤘으니 클라인이 던져 준 문제집을 가지고 산 아래로 내려갔다.
산 아래로 내려오자 무오의 점액과 푸른 점액을 번갈아 바라보며 뭔가 고민하던 아리스가 나를 반겼다.
“잉간, 그게 뭐야?”
“클라인이 던져 주더라. 뭔 문제집인 거 같은데…….”
“문제집?”
“응, 너도 풀어 볼래?”
나는 가만히 집 안으로 들어와 책상 위에 문제집을 펼쳐 놨고, 아리스는 쪼르르 내 곁에 날아와 앉았다.
워낙 머리가 뛰어나서일까?
아리스는 별다른 질문 없이 내 설명을 이해하는 듯 보였고, 시험 삼아 내 본 문제들 또한 간단히 풀었다.
나는 그런 아리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아.”
“왜, 좀 이해가 안 돼?”
“으, 응. 여기가 조금…….”
점점 문제집의 뒤편으로 향하자 내용도 점차 어려워졌고, 그 때문인지 아리스가 문제를 푸는 속도도 느려졌다.
조금 헷갈리기는 하는데, 아직까진 중학 수학 수준이어서 나도 쉽게 풀 수 있어서 나는 차분히 아리스에게 수학을 가르쳤다.
“으음? 음?”
“왜 그래?”
“아니, 뭔가 좀 이상해서……?”
그런데 어째, 점점 뒤로 갈수록 문제집에 이상한 내용이 섞인다.
내가 알고 있는 내용이 아니라, 난생처음 보는 지식들이 섞여 있다.
“어…….”
막,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이상한 법칙을 소개하기도 하고, 원주율에 끝이 있다고 가르치질 않나…….
내가 알고 있는 지식 사이에 섞여 있는 이상한 지식들을 바라보며 나는 합리적인 의심을 가졌다.
이건 설마, 클라인의 종족의 지식인 걸까?
대충 이게 클라인의 세계의 기본 상식 같은 걸까?
그래, 일단 클라인의 세상이 원래의 내 세상보다 더 발전한 것은 확실하니까, 당연히 이런 수학적 지식들도 더 발전했겠지.
그렇다면 어째서 클라인이 내게 이러한 지식들을 가르치냐다.
보통 애완동물에게 수학 교과서를 가르치는 사람은 없잖아?
“으음…….”
그렇다면 이건 내가 클라인과 대화하려 한다는 게 어느 정도 전해졌다는 걸까?
왜, 인간들도 유인원을 교육시켜서 언어를 익히게 하려 했던 실험을 하기도 했었잖아?
이것도 그런 종류의 일이 아닐까?
지금까지 내가 해 온 것처럼, 내가 클라인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일인 것이다.
서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대화를 하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니까.
“잉간?”
“아, 응?”
“그래서, 이게 뭐야?”
“어…… 그러니까…….”
잠깐 그런 생각을 하느라 멍을 때리던 나를 아리스가 깨우고, 나는 서둘러 다시 아리스와 함께 문제집을 풀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여기는 이걸 사용하면 풀릴 거 같은데?”
“어, 그런가?”
어째, 처음과는 다소 역전되어서 아리스가 내게 도움을 주는 상황이 되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문제집을 차근히 풀어 나간 결과, 얼마 걸리지 않아 나와 아리스는 문제집 한 권을 다 풀 수 있었다.
이렇게 오랜만에 머리를 혹사시키니 뭔가 학교를 다니는 느낌도 나고 좋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기지개를 켜려 했지만, 갑자기 집 안으로 들이닥친 클라인의 촉수에 식겁하며 뒷걸음질을 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내가 문제집을 푸는 모습을 관찰하고 있었는지 촉수는 내 머리를 쓰다듬고, 조심스럽게 내게 젤리를 건넸다.
아니, 진짜.
무슨 젤리 따위로 뭐든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도 아니고, 맨날 젤리만 보상으로 나온다.
좀 젤리를 줄 거면 뭔가 특색 있게 바꿔서 주면 안 돼?
그래도 받긴 하겠지만 말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촉수 끝에서 젤리를 휙 낚아채 갔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클라인은 내게 또 하나의 책을 건넸다.
[사회화 교본 ~심화편~]
내게 주어진 것은 이번에도 문제집이었다.
심화편이라고 적혀 있는 걸 보니 전보다 더 어려우려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일단 문제집을 받아 챙겼고, 그대로 다시 돌아가려던 찰나 클라인이 내게 무언가를 보여 줬다.
“……응?”
클라인은 촉수 끝에 무언가 그려진 종이를 들고 내게 흔들었고,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클라인이 건넨 종이를 확인했다.
종이에는 내가 클라인과 소통하기 위해 그렸던 것과 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클라인의 촉수는 내가 그림을 본 것을 확인하고는 문제집과 그림을 번갈아 가리켰다.
으음, 그러니까 클라인이 지금 내게 전하고 싶은 말은…….
음, 저 문제집을 다 풀면 밖에 외출할 수 있게 해 주겠다는 건가?
뭐, 좋아.
고작해야 문제집 하나 푸는 건데, 그게 그렇게 어려울 리 있겠어?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클라인은 자신의 뜻이 내게 전해졌다고 생각한 것인지 다시 한번 내 머리를 쓰다듬고 사라졌다.
자, 그럼 적당히 문제나 풀며 블랑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문제집의 첫 장을 펼쳤지만, 뭔가 잘못됐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수학, 맞지……?”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은, 내가 알고 있는 그 어떠한 수학적 지식과도 어긋나는 기괴한 지식들이었다.
1+1은 2가 아니라 1이라는 등, 광속이 공간에 따라서 변화한다는 등 이상한 소리로 가득했다.
그냥 단순한 오타나 장난이라고 치부하기도 뭐한 것이, 그러한 주장을 설명하는 가설과 수식이 너무 정교하게 짜여 있다.
아마도 저 수식대로 계산한다면 이 문제집에 적혀 있는 내용이 옳다는 결과가 나오겠지.
설명조차 제대로 알아듣기 어려운데, 당연하겠지만 내가 문제들을 제대로 풀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냥 문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해석하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였으니 말이다.
아리스 또한 이 문제집에 실려 있는 내용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겠는지 난색을 표하며 은근슬쩍 집을 빠져나갔다.
지금 클라인은 나보고 이걸 독학하라고 던져 준 거야?
나를 좋게 봐주는 건 좋은데, 이건 너무 과대평가를 하는 게 아니야?
뭔가 좀 제대로 된 설명을 해 주는 선생님이라도 붙여 주고 문제를 풀라고 하든가, 독학으로 이 문제집을 풀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나저나 클라인의 문명은 이 정도가 교양 상식으로 자리 잡은 건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대학 과정을 공부하게 시키진 않을 것 아닌가.
도저히 믿기지 않는 클라인의 문명의 스케일에 혀를 내두르며 나는 문제집을 내던졌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아, 모르겠다!”
그래, 나보고 커닝을 하지 말라는 말은 없었잖아?
앞부분의 설명을 보며 문제를 푸는 것도 힘들다는 게 문제지만, 다행히 내겐 아주 끝내주는 답안지들이 있잖아.
물론 그 답안지의 답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거 답이 도대체 뭐냐??]
-아무리 계산해 봐도 제시된 속도로 시간 내에 목적지에 도착 못하는데??
[댓글]
-순간 이동 한 거네.
-생각의 속도는 곧 정신의 속도, 정신의 속도는 곧 육체의 속도…….
-위에 무틀딱하고 3급 법사충 아무 말이나 지껄이네 ㅋㅋㅋ 모르면 모른다고 해 ㅋㅋ
-└수학 같은 거 몰라도 주먹만 무겁게 쥐면 대부분의 문제는 다 해결됨 ㅅㄱ
-3급 아님. 4급임.
-아무튼 정답을 말해 주자면, 저건 대충 시간을 뒤로 돌려서 해결해야 함.
“시간을 뒤로 돌린다고?”
아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시간을 어떻게 뒤로 돌려?
-시간을 뒤로 돌린다는 건, 뭔 소리죠?
-└보니까 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나아간다는 고정관념이 있는 거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거든. 시간은 공간과 같은 개념이야.
-??
뭔가, 뭔가 설명을 들으려고 반려넷에 질문을 던졌는데 반려넷의 설명을 들을 때마다 더 의문점만 늘어난다.
시간이 공간과 같다는 건 도대체 무슨 말이고, 애초에 시간을 뒤로 돌리는 계산은 어떻게 하는 건데?
나는 머리를 싸매 가며 반려넷의 조언을 구하며 열심히 문제집의 문제들을 풀기 시작했다.
적어도, 내가 조금이나마 클라인의 문명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길 바라며 말이다.
* * *
“잉간이에게 준 건요, 아주 기초적인 수학 지식이랍니다? 사람으로 따지자면…… 유전 지식에 포함되는 지식?”
클라인이 잉간이에게 처음으로 준 문제집은 말 그대로 아주 기초적인 지식을 담은 책이다.
원시 문명을 막 벗어나는 시점의 문명이라면 누구나 익히고 있을 기본적인 상식.
“사실, 저 정도의 지식은 잉간이도 이미 가지고 있을 거예요. 제가 먼저 저런 간단한 지식을 선물한 이유는요, 공부를 하면 보상을 받는다! 그런 개념을 잉간이에게 심어 주기 위해서예요.”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지만, 기본적으로 대부분의 차원 생물들은 공부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도 공부를 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당연히 차원 생물들도 싫어하겠지.
더욱이 사람에게 키워지면서 야생성을 잃기 시작한 생물들이라면 더욱더 말이다.
그러니, 우선 클라인은 잉간이도 알고 있는 간단한 지식들로 잉간이의 흥미를 끈 다음, 공부를 하면 보상을 받는다는 사실을 잉간이에게 인식시키려 한 것이다.
“아, 흥미가 있나 봐요. 하르피아하고 같이 공부를 하려는 모양이네요!”
그리고 그런 클라인의 의도대로 잉간이는 열심히 책을 보며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잉간이는 클라인이 건네준 내용을 전부 풀어냈고, 그때만을 기다리고 있던 클라인은 서둘러 잉간이에게 보상을 전해 줬다.
“이렇게, 보상을 전해 주고……!”
클라인은 잉간이에게 사료를 전해 주고, 조심스럽게 잉간이가 그린 그림을 복사한 것을 잉간이에게 전달했다.
“이건, 지난번에 잉간이가 저한테 요구한 걸 그린 거거든요? 이렇게 보상과 함께 건네준다면, 다음 보상이 이거라는 걸 대충 눈치채겠죠?”
언젠가는 잉간이를 떠나보내야 한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클라인은 그날이 오는 날이 최대한 늦춰졌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그런 클라인의 마음이 반영된 걸까?
클라인이 잉간이에게 전해 준 것은 원래 잉간이에게 적당한 수준의 교재에서 한 단계 더 올라간 교재였다.
“이건, 그러니까…… 보호종으로 지정받을 수 있는 문명 수준의 지식들이에요.”
잉간이가 돌아갔을 때, 이 정도는 알고 있어야 고향 사회에 적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사실, 클라인은 이것보다 한 단계 위의, 사람의 발달기 때 배우는 지식들을 잉간이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다.
나중에 잉간이를 사회에 데리고 나갔을 때, 잉간이가 빠르게 적응하길 바랐으니까.
잉간이가 빠르게 사회에 적응한다면, 고향으로 돌려보내지 않아도 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클라인이 가진 브리더 자격증만으로는 잉간이에게 그런 정보를 전달하는 건 불법이었다.
“아, 역시 좀 어려운 것 같죠?”
잉간이는 그런 클라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머리를 싸매고 클라인이 내준 지식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클라인은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저렇게 잉간이도 열심히 노력하는데, 나도 열심히 노력해야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카메라의 전원을 끄며 오늘의 촬영을 종료했다.
아, 이제 지난번 합방이 방송되기까지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앞으로 몇 시간 뒤면 클라인이 참여한 합방이 마력망 전체에 방송될 것이다.
으으, 사람들 반응이 좀 좋았으면 좋겠는데.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오늘도 무의식적으로 자신에게 온 메시지를 확인했고, 방금 막 도착한 따끈따끈한 메시지를 확인했다.
“소, 속삭이는혼돈 님?”
[속삭이는혼돈]
-야호! 오늘은 드디어 클라인이 마력망에 데뷔하는 날이야! 그래서 말인데, 오늘 방송. 나랑 같이 보지 않을래? 촉수들끼리 파자마 파티야! 다곤이도 데려갈게!
클라인에게 온 메시지는, 클라인의 예상보다도 일찍 도착한 속삭이는혼돈의 합방 요청이었다.
107화 [속삭이는혼돈] 초록빛 촉수가 매력적인 그녀의 집에 놀러 왔습니다. 우효~
“아, 모르겠다! 젠장!”
응, 이건 도저히 사람이 풀 문제가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문제집을 책상 위에 대충 던져두고 털썩 침대에 드러누웠다.
반려넷을 뒤져 가며 최대한 도움을 받아 어떻게든 문제를 풀어 보려 했지만, 도저히 내 머리로는 이해 가지 않는 문제가 너무 많았다.
앉은자리에서 단번에 풀 것이 아니라, 며칠에 걸쳐서 차분히 이론을 이해하면서 풀어야 할 문제들이다, 저건.
뭐, 클라인도 내가 하루아침에 저 문제들을 다 푸는 걸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루 만에 다 풀려고 하지 말고, 적당히 쉬어 가며 풀어야 탈이 나지 않겠지.
오랜만에 두뇌를 혹사해서인지 건전한 지끈거림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아, 일단 저녁밥만 만들어 두고 좀 쉴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밥을 하기 전에 잠깐 휴식을 취할 겸 슬며시 반려넷에 접속했다.
그, 슬슬 먹이를 던져 준 지 꽤 시간이 됐으니 다시 먹이를 던져 줄 시간이 되기도 했고.
“……팔뚝 정도면 되겠지?”
굳이 옷을 꺼내 입지 않아도 팔뚝 정도만 찍으면 알아서 자기들끼리 뇌내보정에 들어갈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제는 익숙해진 모습으로 슬며시 팔뚝을 걷어 올리고 사진을 찍어서 반려넷에 업로드했다.
사진을 업로드하고 다시 반려넷을 살펴보니, 언제나 그랬지만 뭔가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무슨 일이 있는 거지?
[방금 올라온 거 진짜냐??]
-진짜임? 뭔데?
[댓글]
-또 인분충들에게 속냐? 저 새끼들 주작하는 게 한두 번도 아닌데.
-아니, 그래도 이번엔 조작 아닌 거 같은데……?
-아, 보나 마나 지들 주인이 놀아 주는 장면이겠지. 그거 가지고 저 지X 하는 거고.
인분충?
인류 해방 전선을 이야기하는 건가?
인류 해방 전선이 무슨 글을 올리기라도 한 건가?
슬며시 반려넷에 올라온 게시 글들을 내려가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해 본다.
얼마 걸리지 않아 나는 지금의 이 소동이 벌어진 것으로 보이는 원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단결한다면, 우리는 압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
-주인으로 보이는 거대한 무언가가 쓰러져 있고, 그 거대한 무언가의 머리를 밟고 서 있는 인간의 사진
-단결한다면, 저들에게 복수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댓글]
-??
-인분충에게먹이를주지마세요인분충에게먹이를주지마세요인분충에게먹이를주지마세요인분충에게먹이를주지마세요
-사진 뭐냐? 이젠 조작까지 하냐?
-저거 주인 아니냐?
이 모든 소란의 원인은 인류 해방 전선에서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을 죽인 것처럼 보이는 사진을 올리면서 시작된 것이었다.
[인류 해방 전선이 궁금한 사람만 봐.jpg]
-주인들이 인간을 키우는 게 아니라 인간을 모시는 거란 주장이 담긴 사진
-주인을 심장마비로 죽이기 위해서 춤을 연습하고 있다는 한 회원의 글
-주인한테 싸움을 걸겠다는 글을 올리고 실종된 글
-주인을 죽였다면서 자고 있는 주인을 찍은 사진
-더 많은데 올리기 귀찮아서 여기까지 올린다. 저 새끼들 저런 식으로 주작한 게 하루 이틀이냐? 병먹금이나 하고 넷질이나 해라.
[댓글]
-ㄹㅇ 저거 가지고 술렁거리는 놈들 다 유입들이지 ㅋㅋ
-요즘 유입들 설랭 넷질하니까 저런 거에 선동당하는 거지.
-아니, 근데 저거 내가 보기엔 진짜인 거 같은데?
-우화등선하고 치매 오신 아재요, 이젠 인분충들이랑 똥칠하고 싶은 거예요?
-아, 치매 안 왔다고 ㅅㅂ. 그리고 진짜 쓰레기들이 움직인다니까? 이젠 속삭이기까지 해.
-정신병까지 있네, 허미. 우화등선해도 정신병은 못 막는구나…….
-X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류 해방 전선이 어떠한 녀석들인지 알기 때문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최근 늘어나기 시작한 신입들의 경우에는 반응이 꽤 달랐다.
[저 사진 진짜면, 우리도 가능한 거 아님?]
-저 개X 새끼들 죽여 버리고 탈출할 수 있는 거 아님?
[댓글]
-그러니까 저거 주작이라고~
-인류 해방 전선에 합류하세요. 인류 해방 전선은 언제나 당신의 합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입들은 인류 해방 전선의 주장에 혹하는 모습이 꽤나 보였지만, 그래도 반려넷의 여론은 역시 주작이라는 쪽으로 흘러갔다.
인류 해방 전선 쪽에서 더 이상의 사진을 내놓지 않는 것도 그에 한몫했다.
아무튼, 이건 잠깐의 소동으로 끝날 분위기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단말기를 닫고 가만히 저녁밥을 만들 준비를 하러 일어났다.
“이, 잉간!”
“응?”
“바, 밖에. 뭔가, 뭔가 이상한 게 있어!”
그때, 집 밖으로 빠져나갔던 아리스가 헐레벌떡 집으로 뛰쳐 들어오며 겁먹은 듯한 목소리로 그렇게 외쳤다.
이상한 거라니?
또 클라인의 짓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서둘러 아리스와 함께 집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저건……?”
호수로 향하는 길목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사람 크기의 촉수 덩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창을 집어 들고 조금씩 촉수 덩어리와 거리를 좁혔고, 내가 접근하는 것을 촉수 덩어리도 눈치챘는지 꿈틀거림이 멈췄다.
꿀꺽, 내가 침을 삼키는 것을 마치 신호로 삼은 듯 갑작스럽게 촉수 덩어리가 꿈틀거리며 모습을 바꿨다.
촉수 덩어리처럼 보이던 모습이 본모습인지, 지금의 모습이 본모습인지 모르겠지만 내 눈에 촉수는 마치 문어가 지성을 얻고 걸어 다니는 듯한 모습으로 보였다.
“잉간…… 저게 뭔지 알겠어?”
“아니, 하나도.”
아, 젠장.
만능 사전을 가져올 걸 그랬네.
나는 속으로 그렇게 후회하며 저 촉수 덩어리를 어찌해야 할지 고민했다.
일단 저 녀석도 클라인이 집어넣은 녀석이겠지?
그렇다면 저 녀석이 내 먹이로 넣어졌는지, 아니면 아리스나 블랑카처럼 친구로서 넣어졌는지 파악해야 하는데.
에포나의 반응을 보고 결정하려고 해도 에포나는 흘낏 나와 촉수를 바라보며 하품만 할 뿐이다.
내가 그렇게 고민하던 사이 갑자기 정체불명의 압박감이 어항 밖에서 느껴지기 시작했다.
클라인의 것과는 다른 압박감에 놀란 내가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자, 무언가가 하늘에서 엿보였다.
“>0<”
클라인과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하늘에서 울려 퍼졌고 내가 그 목소리에 움찔하며 몸을 굳힌 순간.
꾸물꾸물.
문어 인간은 저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에 반응하며 잔뜩 날이 선 듯한 기운을 거두더니, 꾸물텅 자신의 모습을 바꾸기 시작했다.
“어?”
이윽고, 나는 꾸물텅 뒤바뀐 문어 인간의 모습을 보며 얼빠진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문어 인간이 내 앞에서 내 모습으로 변하더니, 가만히 내 자세를 따라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저 녀석, 도대체 정체가 뭐야?
그리고 바깥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고?
* * *
“클라인~ 오랜만이야~!”
클라인에게 예고한 대로 속삭이는혼돈은 곧장 클라인의 집 앞으로 달려왔고, 클라인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속삭이는혼돈을 반겼다.
“바, 반갑습니다……!”
“왜 그렇게 긴장했어?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긴장해~.”
“그, 친구 말고 다른 사람을 집에 들인 적이 거의 없어서…….”
“어라, 나는 친구가 아니라는 거야?”
“네? 네? 아뇨, 그. 친구이신데요. 그, 아직 좀 어색해서…….”
“아하하, 그게 뭐야?”
속삭이는 클라인의 말에 속삭이는 혼돈이 웃음을 터트리며 그녀의 뒤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때 협회장이 파인만을 따라 집에 쳐들어온 게 아니었으면, 거의 없어서가 아니라 아예 없다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조심스럽게 속삭이는혼돈을 방 안으로 안내했다.
깨끗하게 정리된 클라인의 방 안을 본 속삭이는혼돈은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어라, 생각보다 깨끗하네? 영상에서 방 청소 타령을 엄청 해서 더러울 줄 알았는데…….”
“아, 최근에 청소했거든요. 친구가 도와줬어요.”
“그래?”
방 안으로 들어온 속삭이는혼돈은 조심스럽게 다곤이 들어 있는 사육항을 책상 위에 올려 두고 편안하게 바닥에 주저앉았다.
“저기, 그. 속삭이는혼돈 씨?”
“아, 유리라고 불러 줘. 채널명은 너무 길잖아?”
“유, 유리 씨?”
“유리.”
“유……리. 뭐 마시고 싶은 거 있어요?”
“요?”
“……유리, 뭐 마시고 싶은 거 있어?”
“옳지, 잘했어요. 음, 그냥 주스나 물이면 돼!”
클라인이 유리의 고집에 굴복하고 속삭이는혼돈을 이름 그대로 부르자, 유리는 방긋 웃으며 붉은 촉수를 뻗어 클라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째 최근에 만나는 사람들은 죄다 자기 이름을 부르는 거에 이상한 고집이 있는 것 같다.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쓴웃음을 짓고는 조심스럽게 냉장고에서 파인만이 사다 둔 주스를 꺼내 왔다.
그러는 사이, 유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마력망을 조작해서 곧 방송이 시작될 채널을 단말기에 표시했다.
“아, 진짜. 네 집에 와서 이렇게 같이 방송을 본다는 게 믿기지 않네.”
“그, 그래?”
“응. 진짜로. 그, 차원항 장인 시절부터 봐 왔거든.”
“그, 그때부터?”
클라인은 슬며시 유리에게서 떨어진 곳에 앉으려 했지만, 유리는 촉수로 자기 옆의 바닥을 두드리며 클라인을 불렀다.
결국 클라인은 유리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그 옆에 주저앉았다.
으아, 촉수가 막 서로 얽혀.
그런 클라인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유리는 촉수를 꿈틀거리며 들뜬 표정으로 클라인이 맨 처음으로 쥬튜브를 시작하던 때의 이야기를 했다.
“맨 첫 번째로 올렸던 영상이, 인간형 생물을 위한 차원항 만들기였지?”
“네. 아니, 응. 그랬었지.”
“그때는 얼굴 공개를 안 했었는데, 솔직히 나는 그때 목소리만 듣고 알아챘지. 아, 이 애는 상위 1%급 미소녀다.”
“네, 네? 아니, 그 정도는 아닌데…….”
“뭐가 아니야~ 그때 슬쩍슬쩍 드러나던 촉수부터 다 드러났는데.”
“초, 촉수부터?”
“이야, 오늘 이렇게 도내 상위 1%의 촉수 달린 미소녀하고 같이 파자마 파티를 즐긴다니. 완전 최고 아니냐고, 젠장~.”
으아, 진짜 요즘 왜 이렇게 다들 만나는 사람들마다 외모를 칭찬하지?
자꾸 그렇게 칭찬하니, 진짜로 그런 줄 착각할 것 같다.
“아무튼, 그때부터 봐 왔는데. 하루하루 성장해 가는 모습이 엄청 흐뭇하더라고. 막, 아이를 둔 부모의 마음? 그런 느낌이었어.”
“아하하…… 저, 저는, 아니. 나는 유리 네 채널을 보면서 엄청 배웠거든. 그래서 이렇게 네가 내 팬이라고 하는 게 믿기지 않아…….”
“와, 진짜? 엄청 영광인데?”
계속되는 유리의 적극적인 공세에 클라인도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어 가며 어색했던 분위기가 조금씩 풀려 갔다.
그러자 유리는 촉수를 뻗어 책상 위에 놔뒀던 다곤이 든 사육항을 가져왔다.
“나도 너처럼 차원항을 만들어 볼까~ 했는데, 난 손재주가 없어서 그런지 힘들더라. 뭐, 차원항을 만들 때 좋은 팁이 있을까?”
“그, 차원항 제작이 어려우면 그냥 완제품을 사는 것도 괜찮아. 완제품을 사 놓고 상황에 맞춰서 개조하는 식으로 맞추면 되거든.”
“오, 그래? 아무튼 그래서 사육항은 잠자는 곳으로만 쓰고 거의 방목하듯 키우고 있거든?”
“방목…… 나도 요즘 잉간이를 방목형으로 생활하게 해 주고 싶은데, 아직은 좀 무리일 것 같더라. 방목할 때 주의해야 할 게 많지?”
“많지. 일단 정보 생명체가 생기지 않게 청소는 철저하게 해야 하고, 또 반려 생물이 갈 만한 곳에서 위험한 건 전부 치워야 하고…….”
클라인과 유리는 반려 생물에 관한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웠고,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하던 유리는 막 생각났다는 듯 외쳤다.
“아, 맞다. 내가 요즘 다곤이를 키우며 든 생각이 있단 말이야.”
“어떤?”
“그, 다곤이 그리 사회성이 강한 종은 아니잖아? 그런데도 요즘 다곤이가 많이 외로워하는 거 같아서, 친구를 좀 만들어 주고 싶거든.”
“친구?”
“응, 그래서 말인데. 잉간이하고 다곤이가 서로 친해지게 해 주는 건 어떨까?”
“으음…….”
음, 다곤이와 잉간이를 같이 놔둬도 괜찮으려나?
클라인이 머릿속에서 잉간이와 다곤이의 습성을 서로 비교하며 같이 놔둬도 괜찮을지 고민하는 동안, 유리는 계속해서 다곤이의 안전함을 클라인에게 어필했다.
“그, 다곤이 육식성이긴 해도 자기와 비슷한 크기의 사냥감은 사냥하지 않거든? 거기에다가 지능을 가지고 있는 생명체는 잘 사냥하지 않는 습성도 있고. 거기에다가 다곤은 다른 종족들에게 친화적이잖아? 그러니까…….”
“음. 잉간이는 괜찮은데, 다른 룸메이트들이 괜찮을지 모르겠네. 괜히 서로 싸움이 일어나는 건 아닌가 해서.”
잉간이가 다곤이에게 먼저 싸움을 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잉간이의 룸메이트들이 자신의 영역에 침입한 다곤이에게 과민 반응을 할 가능성이 있다.
지금 잉간이와 함께 사는 켄토르와 하르피아는 마력과 전투력이 꽤나 높은 품종이다.
괜히 잘못 합사했다간 다곤이 다칠 수도 있다.
“아, 그건 괜찮아. 다곤이한테는 시스템이 설치되어 있거든.”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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