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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내가 주인 녀석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생각했던 게 다 착각이었다는 걸 깨닫기도 했고.”
“좋은 일이네. 착각은 빨리 깨달을수록 좋은 거니까.”
“거기에다가, 주인이 어떤 생각을 하고 다큐를 보여 줬는지 이해되지도 않고. 도대체 주인이 나를 데려온 이유가 뭔지도 모르겠고. 왜 나를 기르는지도…….”
“생각이 많아졌다는 이야기네?”
“뭐, 그렇지. 그런 생각이 겹치다 보니까 자꾸만 내가 뭘 해 봤자 안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다시 들기 시작하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블랑카에게 내 마음을 이야기했고, 블랑카는 가만히 맞장구를 쳐 주며 내 이야기를 들어 줬다.
내 이야기를 대충 다 들은 블랑카는 고개를 갸웃하며 내게 질문을 던졌다.
“저기, 잉간. 내가 이해한 게 맞는다면, 잉간은 주인의 행동에서 의도를 읽을 수 없어서 주인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거지?”
“응. 그렇지.”
“왜 꼭 주인의 행동에서 의도를 찾으려고 해? 별다른 의도가 없었을 수도 있잖아?”
“아니, 그건. 행동에는 의도가 있다고 보는 게 당연하잖아.”
“잉간은 모든 행동을 할 때 굳은 의지를 가지고 행동해? 아무 이유 없이 뭔가가 하고 싶어질 때도 있잖아?”
“그건.”
턱.
블랑카의 말에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야 그렇긴 한데,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블랑카의 말을 부정하려 했다.
“네가 그런 말을 해도 되는 거야? 네 입장에서 주인 녀석은 신이라며? 신이라면 모든 행동에 의도가 있을 거 아냐. 모든 게 가능하니까.”
모든 걸 알고 있고, 모든 걸 할 수 있는 존재가 신이 아니던가?
그런 존재가 곧바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고 굳이 다른 방식으로 빙 돌아간다면 무언가 의도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게 옳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블랑카에게 반론했지만, 블랑카는 고개를 내저으며 내게 말했다.
“신이니까, 아무 이유 없이 행동하는 거지. 그리고 잉간, 신님은 전능하지 않아.”
“뭐? 신이 전능하지 않다고?”
“잉간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배워 왔고 그렇게 경험했어. 신님은 전능하지 않다고.”
신이 전능하지 않다고?
나는 그런 블랑카의 말에 의문을 품으며 물었다.
“신이 전능하지 않다면, 어째서 신앙하는 건데?”
“전능하지 않다는 건, 무능하다는 말과 동의어가 아니니까. 그리고, 뭔갈 굳이 해 주시지 않더라도 늘 누군가가 지켜보고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게 얼마나 힘이 되는데.”
“그건…… 그렇지.”
“잉간, 잉간이야말로 주인은 신이 아니라며? 잉간은 늘 주인을 사람이라고 말해 왔잖아.”
“그렇지.”
“그럼, 전능하지 않은 게 당연한 거 아니야?”
너무나 당연한 블랑카의 말에 뭐라 반박할 거리가 없다.
그래, 주인 녀석은 신 같은 존재가 아니다.
단순한 사람이다.
사람이라면 가끔씩 실수도 하고,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을 할 때도 있는 법이다.
다큐멘터리의 임팩트가 너무 강했던 걸까?
무의식적으로 주인 녀석을 나와는 다른 존재라고 구분 지어 놓고 생각하고 있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도 내 고민이 바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래도 주인 녀석이 뭔 생각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되니까, 자꾸만 거리감을 느끼는걸.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해 보려고 해도 감정만으로 추측하긴 한계가 있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직접 물어보면 되지.”
“직접? 어떻게?”
“그건 나도 모르지. 일단은 뭐, 이것저것 시도해 보면 되지 않겠어? 대화하는 법을 모르겠다고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 주인이 네가 대화하고 싶다는 사실조차 영원히 모를 거 아냐?”
“그렇지. 그런데…….”
그렇지만 주인 녀석과 대화를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기만 하면 숨이 턱 막힌다.
아직 주인의 얼굴은커녕 몸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한다는 거야?
거기에 주인이 가끔씩 들려주는 목소리에 담긴 뜻 또한 알지 못하는데.
뭐, 주인의 종족이 사용하는 언어라도 어떻게든 공부해야 하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지만 블랑카는 무언가 생각이 있는 모양이다.
“자고로 신님과 대화를 하는 방법은 제단을 만들어서 제사를 지내는 거지. 그게 제일 효과적이야!”
“아니, 그런 걸로 대화가 될 리가…….”
“신님한테도 통하는 방법인데, 신이 아닌 사람에게도 통하지 않을까?”
아니, 자꾸 아까부터 무적의 논리를 들고 오네?
내가 블랑카의 무적의 논리를 뚫을 방법을 찾던 그때, 블랑카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리고 뭐, 나도 알아보고 싶은 게 있어서. 이건 일종의 실험? 같은 거라고 생각해 주면 안 될까?”
“실험?”
“솔직히 말해서. 나도 요즘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 네가 주인이라고 부르는 그 존재는 어쩌면 리베리아 님이 아닐 수도 있겠다고.”
“그건…….”
“이곳이 신들의 전장 같은 곳이 아니라는 것도 알겠어. 그래도 나는…… 이곳의 신님이 리베리아 님이라고 믿고 싶으니까. 그러니까…….”
블랑카는 우물쭈물하며 그렇게 자신의 본심을 털어놓았고, 나는 가만히 블랑카의 손을 붙잡았다.
“그래. 해 보자. 뭐, 해 봤자 손해 보는 건 없잖아? 어차피 이곳에서 남아도는 건 시간이기도 하고.”
“응. 고마워.”
“그, 제사를 지내려면 뭐 필요한 게 있어?”
“일단…… 신님의 모습을 묘사한 조각상하고, 신님이 보기 좋은 곳에 제단을 설치해야 하고…….”
블랑카는 손가락을 꼽아 가며 어떠한 것들을 준비해야 하는지 읊는다.
뭐 이렇게 준비해야 하는 게 많아?
“일단 제일 중요한 게…… 그 조각상? 을 만드는 거지?”
“응. 그게 제일 중요해.”
조각상이라.
내가 흔히 아는 조각상처럼 돌을 깎아서 만드는 건 거의 불가능한 수준일 것 같고.
나무를 깎아 만드는 것도 가능은 하겠지만,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은데.
그렇다면 남은 방식은 점토를 주물러서 조각상을 만드는 건가?
무점토를 활용하면 그리 어렵지 않게 조각상을 만들 수 있을 거 같은데.
“그, 신을 묘사한 조각상의 퀄리티는…….”
“그리 높지 않아도 돼. 누구나 봤을 때 대화하고 싶은 신이라는 걸 알 정도?”
“뭐, 인형 정도 퀄리티도 상관없는 거지?”
“응, 그렇지.”
뭐, 일단 만들면서 생각해 보면 되겠지.
일단 제일 먼저 할 일은 무점토를 만들 무오 점액을 채취하는 일이겠지.
최근에 무오 농장을 만들었으니 무오 점액을 얻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을 거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무점토를 만들기 위해 밖으로 나왔고, 즐겁게 하늘을 날아다니며 놀고 있던 아리스와 마주쳤다.
“아, 잉간!”
“무슨 일이야?”
“그냥 불러 봤어!”
헤헤.
아리스는 그렇게 헤실헤실 웃으며 내 곁으로 다가와 나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그, 파란 점액이 말이야. 엄청 신기한 게 막 먹어도 먹어도 커지지가 않는다? 다른 점액들은 먹으면 먹은 만큼 커지던데 걔는 혼자 그대로야!”
“그래? 신기하네.”
“응. 그래서 배부를 때까지 계속 먹을 걸 줘 봤는데 진짜 엄청 먹더라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너무 먹이지는 마. 배탈 날 수도 있으니까.”
“응, 그럴게!”
블랑카가 오늘의 사냥감을 찾기 위해 숲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아리스와 함께 배웅하고 집 옆의 밭에 먼저 들러 본다.
지금 밭에서 자라는 것은 불꽃콩과 쌀밖에 없다.
뱀넝쿨은 일종의 울타리로 이용하기 위해 울타리 부근에 심어 놨고, 붉은 후추는 그리 많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아서 창고에 씨앗을 보관만 한 상태다.
불꽃콩과 쌀들에 물을 주고, 달맞이풀 밀집 구역으로 이동해서 적당히 무오에게 줄 달맞이풀을 뜯는다.
달맞이풀들을 품 안에 한가득 들고 무오 농장으로 이동하자 다 완성되지 않은 울타리를 나갈 생각도 하지 않고 한가롭게 졸고 있는 무오 무리가 보인다.
내가 달맞이풀을 가져와 바닥에 던져두자 그제야 울음소리를 내며 슬금슬금 밥을 먹으러 이동한다.
“무오~.”
어린 무오들은 태어난 지 3일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팔뚝만 한 크기로 자라났다.
진짜 어마어마한 성장 속도다.
그만큼 먹는 양도 꽤 되지만, 그렇다고 해도 확실히 빠른 편인 것 같다.
“이제 슬슬 점액이 나오니까, 얘네들도 채취할 수 있겠네.”
“으엑, 난 얘네들 싫어. 점액이 자꾸 깃털에 달라붙는단 말이야.”
처음에는 무오 새끼들을 귀여워하던 아리스지만, 몇 번 무오 점액에 날개가 다 젖는 꼴을 당하고 나선 쉽사리 무오에게 접근하지 않고 내 등에 찰싹 달라붙어 있다.
무오의 몸에서 점액을 채취하는 건 무척 간단하다.
적당한 용기를 가지고 한가로이 누워 있는 무오의 몸을 쓸어내리기만 하면 된다.
지금껏 관찰한 바에 따르면, 전신의 점액을 채취해도 시간이 지나면 점액이 재생되지만 그렇게 재생된 점액을 다시 채취하면 다시 재생되는 시간이 참 길어진다.
적당히 하루에 한 번만 점액을 채취하는 게 제일 효율적이겠지.
누워 있는 무오의 몸에서 점액을 채취해 농장을 빠져나오고, 나는 아리스에게 마법 하나를 부탁했다.
“이거, 혹시. 이것도 사용할 수 있을까?”
“음…… 잠깐만…… 이렇게 하면 될 거 같은데……?”
만능 사전으로 검색한 영창을 몇 번인가 조용히 읊으며 감을 자던 아리스는 감을 다 잡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가능해! 자, 봐 봐. 땅이여, 솟아라. 물이여, 추락해라. 그 둘은 서로 떼어 놓을 수 없으니…….”
아리스가 영창을 시작하자 아리스의 몸에서 은빛 알갱이들이 피어나고.
“솟아오른 것과 추락한 것이 만나 아무런 일도 없게 되리니!”
은빛의 입자들이 땅으로 쏘아지더니, 단단한 바위였던 곳은 진흙투성이의 진창으로 바뀌었다.
“자, 어때?”
“이 정도면…… 충분하겠네. 아리스, 고마워.”
“흐흥. 이 정도는 간단하지!”
굳이 귀찮게 멀리 호수까지 나갈 필요 없이 아리스의 마법으로 만들어 낸 진흙을 퍼 담고 무점토를 만드는 작업을 시작한다.
진흙에 무오 점액을 붓는 단순한 작업이어서 그렇게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고, 나는 완성된 무점토를 가지고 주물거리기 시작했다.
음, 그런데 생각해 보니 주인 녀석은 어떻게 생긴 거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주인의 팔과 촉수뿐인데.
음…… 일단 팔과 촉수부터 만들어 보고 생각하자.
나는 그렇게 무점토를 다듬기 시작했고, 아리스는 그런 내 모습이 흥미로웠는지 내 옆에 다가와 털썩 주저앉았다.
“잉간, 뭐 해?”
“조각상…… 수준은 아니고. 흙 인형? 그래, 흙 인형을 만들고 있어.”
“흙 인형? 그게 뭔데?”
“음, 그러니까. 잠깐 기다려 봐.”
나는 잠깐 무점토 일부를 떼어 내 인간 형태의 흙 인형을 만들고 살짝 모닥불에 쬔 후, 아리스에게 흙 인형을 넘겨줬다.
“이렇게, 다른 사람 모습을 흙으로 작게 만드는 거야.”
적당히 형체만 잡은 것인데도 아리스의 눈에는 퍽 신기하게 보였는지 내가 만들어 준 흙 인형을 발로 붙잡고 이리저리 갖고 논다.
음, 저렇게 좋아하는데 하나 더 만들어 줄까?
이번에는 아리스를 닮은 형태의 흙 인형을 만들어 건네주자, 아리스가 눈을 반짝거리며 내게 말했다.
“나도, 나도 만들래!”
“음…… 만들기 힘들 텐데?”
“괜찮아. 마법으로 어떻게 해결하면 돼!”
뭐, 마법의 연습도 되고 괜찮겠지.
나는 아리스에게 무점토 몇 덩이를 건네줬고, 아리스는 들뜬 표정으로 마법으로 무점토를 주무르며 자신만의 흙 인형을 만들기 시작했다.
자, 샛길로는 그만 빠지고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야지.
그나저나 주인은 도대체 어떻게 생긴 걸까?
거대한 팔을 가지고 있으니 거인의 형태를 하고 있으려나?
하지만 꼭 그렇다고만 생각하기엔 촉수들이 걸린다.
“으음…… 그러니까, 이렇게 생겼으려나?”
나는 상상력을 총동원해 가며 주인의 모습을 흙 인형으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음, 일단 팔다리가 달린 사람으로 묘사를 하고.
촉수는…… 도대체 어디에 달려 있는지 모르겠으니 대충 머리카락에 달아 두자.
그렇게 머리카락이 촉수인 외형의 인형이 완성되었고, 나는 완성품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음, 이만하면 괜찮은 것 같은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완성품을 말리려 모닥불 쪽으로 다가갔고, 그제야 지금까지 아리스가 만든 인형들을 보게 되었다.
“뭐야, 이거……?”
“어때? 다 내가 만든 거야!”
아리스가 만든 인형들은 누가 봐도 나와 아리스, 블랑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치 피규어를 만든 것처럼 얼굴 표정까지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마법으로 이렇게 만든 거야?”
“응!”
“와…… 엄청 대단한데?”
마법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정말 감탄만이 나오는 퀄리티다.
“다녀왔어……. 음? 이건 뭐야?”
“어서 와. 아리스가 마법으로 만든 거야.”
“……그래?”
때마침 사냥감을 들고 복귀한 블랑카도 아리스가 만든 인형을 보고 관심을 보인다.
“어때, 이쁘지?”
“그러네…… 응. 이거, 어떻게 만든 거야?”
“그러니까, 마법으로…….”
블랑카는 인형에 관심이 있는지 아리스와 함께 슬쩍 구석으로 가서 무언가 대화를 나눈다.
“하나…… 더……?”
“가능…… 대가를…….”
“그건…….”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블랑카와 아리스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내 쪽으로 돌아왔다.
나는 블랑카에게 내가 만든 인형을 들어 보이며 리베리아 인형은 어떻게 만들지 물어봤다.
“리베리아 인형은 어떻게 만들어야 해?”
“아, 그건 내가 만들게.”
블랑카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내게서 무점토를 받아 들고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의 모습을 인형으로 만들었다.
리베리아 인형을 만들며 블랑카는 슬쩍 내게 한 가지 제안을 꺼냈다.
“그, 사냥하면서 생각해 봤는데. 이왕 제사를 지낼 거면 최대한 정성을 들여서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그래서?”
“혹시, 제단을 산 정상에 만드는 건 어떨까 싶은데…….”
“산 정상?”
나는 곰곰이 블랑카가 설명했던 제단의 재료들을 떠올려 봤다.
일단 무조건 통나무가 몇 개는 들어가는데, 내가 그 통나무들을 산 정상까지 들고 갈 수 있을까?
대답은 쉽게 나왔다.
“미안. 그건 좀 무리인 거 같은데…….”
“……역시 그렇겠지?”
블랑카가 됐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을 내쉬자, 그때 아리스가 번쩍 날개를 들어 올리며 내게 다가왔다.
“나! 그거 내가 할 수 있어!”
“뭐를?”
“통나무든 뭐든, 내가 정상까지 옮길 수 있어!”
“가능하겠어?”
“응, 나 마법 엄청 잘 쓰거든?”
뭐, 아리스가 가능하다면 맡기는 게 좋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날은 이만 휴식을 취하기로 했고.
“에포나, 이리 와.”
“왕.”
에포나를 껴안고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아침 일찍부터 블랑카와 함께 집 밖으로 나와 아리스가 통나무를 옮기는 걸 걱정스럽게 지켜본다.
“너무 무거우면, 그냥 버려도 돼!”
“괜찮아! 이 정도는 문제없어!”
공중에 통나무 4개를 단번에 들어 올린 아리스의 모습이 살짝 위태로워 보였지만, 아리스는 단숨에 통나무들을 산 정상으로 옮겨 놨다.
진짜 맨 처음에 비하면 마법 실력이 참 많이 상승했네.
이것도 다 반려넷 회원들의 조언 덕분일까?
돌아가서 반려넷에 올릴 글을 생각하며 나와 블랑카는 아리스의 뒤를 쫓아 산 정상으로 올라갔고.
“으에엑…….”
산 정상에 놓인 석상을 봤는지 에포나가 머리에 달라붙은 아리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에포나가 아리스에게서 떨어져 나왔고, 아리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내게 다가왔다.
“잉간…… 토할 거 같아…….”
“위험하니까 왼편은 바라보지 말라고 했잖아.”
“하늘 위에서는 정상이 다 보이는걸…….”
잠시 사소한 소란이 있었지만 어쨌든 우리는 산 정상에 적당한 제단을 만들었고.
“이걸 전부 저 위에. 자.”
블랑카의 지시에 따라 준비해 온 조각상들과 인형들을 제단 주위에 늘어놓았다.
“자, 그럼 이제 기도!”
“뭐라고?”
“그냥, 신께 전하고 싶은 말을 큰 소리로 외치면 돼! 다만, 질문은 계속 바뀌어야 해!”
“굳이 큰 소리로 외쳐야 해?”
“큰 소리로 외쳐야, 신님이 들으실 거 아냐?”
윽, 하긴 그렇긴 하지.
조금 창피하긴 하지만 이건 제사니까.
나는 그렇게 각오를 다지며 바닥에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큰 소리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나를 왜 이곳에 데려왔는지 대답해 주세요!”
첫 번째 외침은 묵묵부답.
“왜 우리한테 그런 다큐멘터리를 보여 줬는지 설명해 주세요!”
두 번째 외침도 고요한 정적을 뚫지 못했다.
세 번째, 네 번째.
계속해서 나는 내가 묻고 싶었던 것들을 하늘을 향해 외쳤지만 아무런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고.
결국 나는 자포자기한 상태로 적당히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세요!”
이번에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쾅.
하늘에서 무언가 제단을 향해 떨어졌다. 하늘에서 떨어진 무언가는, 무언가 적혀 있는 쪽지였다.
93화 *비공개된 영상입니다.*
“쪽지?”
하늘에서 쪽지가 떨어졌다.
필시 주인 녀석의 짓이겠지.
이게 주인이 내게 건네는 대답인 건가?
나는 슬며시 블랑카를 바라봤고, 블랑카는 맞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제단 위에 떨어진 쪽지를 주워서 그 내용을 확인해 본다.
도대체 무슨 문장이 쓰여 있으려나?
쪽지에 쓰인 내용은, 별거 없었다.
[클라인]
누군가의 이름을 나타내는 듯한 삐뚤빼뚤한 글씨 하나만이 쓰여 있을 뿐이었다.
“……클라인?”
클라인?
설마, 마지막으로 내가 던졌던 이름을 알려 달라는 질문에 대답을 한 걸까?
“잉간, 뭐라고 적혀 있어?”
“어, 그게…….”
나는 블랑카와 아리스에게 쪽지의 내용을 보여 줬고, 블랑카와 아리스 또한 나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
“그럼. 그때 그 커다랬던 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클라인이라는 거야?”
“음…… 아마도?”
아리스는 단순하게 신기하다는 듯 금세 흥미를 잃어버렸지만, 블랑카의 경우에는 좀 달랐다.
“클라인…… 그래, 이름이 클라인이었구나…….”
이곳에 있는 것은 리베리아가 아닌 클라인이라는 이름의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어서인지, 블랑카는 상당히 기운이 빠져 보였다.
“클라인. 클라인. 응. 클라인이네.”
리베리아가 아닌, 클라인.
블랑카는 과연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자신의 신앙의 대상을 리베리아에서 클라인으로 옮기고 있을까, 아니면 자신의 곁에 없는 신을 여전히 신앙할까?
블랑카가 무슨 결정을 내릴지는 모르겠지만, 결정을 내릴 때 마음이 허전하지 않도록 잘 신경 써 주자.
그나저나 클라인이라.
사람 이름이 클라인.
그거, 내가 그 고양이의 이름으로 지었던 건데?
본의 아니게 주인의 이름을 고양이에 붙여 버린 셈이 되었다.
어쨌든 이걸 대화에 성공한 것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지만 어째서 자기 이름을 알려 달라는 질문에만 대답한 것일까?
여전히 나는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을 내릴 수 없었지만, 전처럼 절망감이 들지는 않았다.
주인, 그러니까 클라인은 나와 대화할 의지가 없는 것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언젠가는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좋아, 그럼 오늘은 여기서 해산…….”
그렇게 선언하며 슬슬 산을 내려가려고 했던 그때.
콰광.
다시 하늘에서 굉음이 들려오고, 이번에는 제단 위에 올려놨던 인형들이 우수수 바닥에 쓰러졌다.
자세히 보니, 블랑카가 만든 리베리아 인형은 가만히 놔두고 내가 만든 클라인을 묘사한 인형만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내가 만든 인형이 퍽 클라인의 마음에 든 것일까?
어쨌든 클라인이 내가 만든 인형을 가져가는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클라인에게서 무언가 반응이 오는 일은 없었고.
우리는 산 정상에서 철수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다들 수고했어. 블랑카, 괜찮아?”
“응? 음. 괜찮은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블랑카는 쓴웃음을 지으며 잠깐 달리고 오겠다며 외출을 했고.
아리스는 인형 만들기에 퍽 재미가 들린 것인지 무점토를 만지작거리며 오늘도 무언가의 인형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는 슬슬 아리스에게 새롭게 마법 수업을 가르칠 겸, 휴식을 취하려 반려넷을 켰다.
[n그거 저임]
[인류 해방 전선에 합류하라!]
[ㄴ인분충일시 오늘 저녁으로 드래곤 스테이크 먹음]
[프로 금욕러다……. 주인 녀석이 드디어 행동 풍부화 포기한 것 같다…….]
[인류 해방 전선만이 우리의 미래입니다.]
오늘도 언제나와 같은 반려넷이었지만,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고 한다면.무언가 평소보다 더 인류 해방 전선의 게시 글들이 늘어난 기분이었다.
나는 적당히 눈으로 인류 해방 전선의 글들을 거르며 시간을 때울 만한 글을 찾아 클릭했다.
[프로 금욕러다……. 주인 녀석이 드디어 행동 풍부화 포기한 것 같다…….]
-행동 풍부화 대신 수술을 선택했다. X발. 갑자기 밖으로 꺼내서 뭔가 했더니…… X발…….
[댓글]
-땅콩 떼였누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게 적당히 좀 치지 그랬냐 ㅋㅋㅋㅋ
-? 손장난 하면 땅콩 떼어 감? 사생활도 없는 거임?
-주인 따라 다른데, 저 새끼는 자업자득임 ㅋㅋ 밥만 먹고 장난만 치는 새끼인데 저건 솔직히 자연적으로 떨어진 거라고 해도 인정이지.
-웃지 마라……. 너희들에게도 언젠가 닥쳐올 미래다…….
-└TS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
-진심 X 같은 새끼들. 니들은 안 이럴 것 같지? 명심해라, 행동 풍부화는 언제든지 닥쳐온다.
“진짜로 떼인 건가? 허…….”
도대체 얼마나 해 댔으면 주인이 땅콩을 떼어 버릴 생각을 할까?
저런 걸 보면 차라리 좀 살아가기 힘들더라도 이런 자연환경에서 사육당하는 게 더 나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슬슬 밥이나 할까…….”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프로 금욕러의 땅콩에 조의를 표하며 반려넷을 끄고 나는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한바탕 평야를 달리고 온 블랑카가 돌아오고, 언제나의 저녁 식사를 하려던 때.
뚝뚝.
하늘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하던 물방울은 어느새 굵은 빗줄기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까 이곳에 와서 비가 오는 걸 한 번도 본 적 없었는데.
이렇게 비가 오니 좀 색다른 기분이네.
그때까지의 나는 그 정도로만 생각하며 별다른 대비를 하지 않고 잠에 들었고.
다음 날 아침이 되고, 그날 밤이 되어도, 모레가 되어도.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도저히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내 머릿속엔 프로 금욕러가 남긴 최후의 유언이 떠올랐다.
“……행동 풍부화?”
* * *
“어, 어, 어떻게. 어떻게 하지?”
클라인은 차원항에서 잉간이가 하늘을 향해 뭐라 소리치는 것을 보며 당황했다.
잠깐만, 일단 시간만 좀 정지시켜 두고 차분히 생각하자.
그렇게 생각한 클라인은 우선 차원항의 시간을 정지시키고, 옆에서 그런 클라인의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파인만에게 도움을 구했다.
“어, 어떻게 해야 하지?”
“무슨 일인데?”
“음…… 뭔가, 애들이 나한테 말을 거는 것 같아서.”
“말을 걸어?”
“응, 봐 봐.”
파인만은 클라인의 옆에 다가와서 차원항 안을 들여다봤고, 클라인의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거, 사육자 숭배가 있는 녀석들한테서 가끔씩 나타나는 거 아냐? 확실히 너를 부르는 것 같네.”
“응. 그런데, 어. 어쩌지? 여기서 응답해 주지 않으면 무척 실망할 텐데…….”
“뭐, 적당히 아무거나 해 주면 되는 거 아냐?”
“이, 이런 기회를 그냥 놓칠 수는 없잖아! 잉간이와 대화할 수 있는 기회인데…….”
클라인은 마음 같아서는 잉간이가 하는 말을 당장 번역해서 듣고 싶었지만, 커다란 문제가 있었다.
우선 첫 번째로, 잉간이의 말은 클라인에게 통역되어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시스템이나 통역 마법은 사람의 말을 차원 생물에게 전하는 데만 사용할 수 있지, 차원 생물의 말을 클라인에게 전달할 수는 없다.
리만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기술력의 한계인가, 그렇게만 생각했지만 리만의 말을 듣고 나니 왜 그런지 이해할 것 같다.
사람이 차원 생물과 대화하는 걸 막기 위한 조치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잉간이의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지금 클라인이 차원항에 설치한 시스템은 차원항 안의 차원 생물들의 언어를 리베리아어로 고정시킨다.
그 말은, 지금 잉간이와 룸메이트가 뭐라 소리치는 것들도 죄다 리베리아어로 출력이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마력이나 시스템을 사용하지 않고 직접 리베리아어를 번역한다면 잉간이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리베리아어는 클라인의 보안 등급으로 접근할 수 있는 정보다.
정말로, 정말로 브리더 자격증을 따 놔서 다행이야.
“으음…… 그러니까, 이 단어가 이런 뜻이니까…….”
클라인은 마력망에 접속해서 리베리아어 사전을 보며 잉간이가 뭐라 말하는지 번역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던 파인만은 슬며시 클라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건 다 좋은데. 너, 그럼 네 대답은 어떻게 돌려줄 생각이냐?”
“응? 그야, 나도 리베리아어로…….”
리베리아어로 대답하면 된다고 말하려던 클라인은 그제야 자신의 계획의 허점이 생각났다.
“아, 목소리! 맞다!”
잉간이는 클라인의 외모를 일부분 관찰할 정도로 클라인에게 익숙해졌지만, 아직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지금 클라인이 리베리아어로 말해 봤자 잉간이는 클라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 그럼 어떻게 하지? 맞아, 글. 글로 써서 잉간이에게 대답하면…….”
클라인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종이와 펜을 가져왔지만, 종이에 펜을 그으려던 클라인의 손을 파인만이 잡았다.
“글자는. 안 돼. 절대로.”
“파, 파인만? 왜?”
“아무튼 안 돼. 내가 그런 식으로 들켰단 말이야.”
“그런 식으로 들켰다고? 잠깐, 설마…….”
끄덕.
파인만은 아무 말 없이 클라인의 말에 고개를 흔드는 것으로 그녀의 추측을 긍정했고, 클라인은 그런 파인만의 모습을 보며 충격을 받았다.
단지 글로 쓰는 것만으로도 정부에 들킬 수 있다니, 그게 말이 되는가?
“알다시피, 모든 건 마력망으로 이어져 있어. 말하는 건 괜찮지만, 절대로 문장으로 남기거나 정보로 가공해서 남겨선 안 돼.”
“그럼 어떻게…….”
“단어까지는 괜찮아. 하지만 단어 두 개부터는 안 돼. 단어 하나야. 단어 하나를 기억해.”
단어 하나.
클라인이 리베리아어로 쓸 수 있는 것은 오직 단어 하나다.
그리고 아마, 이번에 리베리아어를 쓴다면 다음번에 다시 단어로 대화를 시도하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단어 하나로 잉간이에게 무슨 대답을 해 줘야 하지?
잉간이가 자신에게 한 질문들을 바라보며 클라인은 고민했고, 문득 잉간이의 질문들 중 하나에 시선이 닿았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나의 이름.
문득, 클라인은 리만이 자신에게 해 주었던 충고를 떠올렸다.
이름, 그래.
뭐든지 대화의 시작은 통성명부터다.
“그러니까, 클라인을 리베리아어로 이렇게 쓰니까…….”
클라인은 조심스럽게 리베리아어 사전을 바라보며 자신의 이름을 쪽지에 적었고.
차원항의 시간을 다시 재생시키며 차원항 안으로 쪽지를 집어넣었다.
잉간이와 룸메이트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쪽지를 보며 뭐라 대화를 나눴고.
클라인은 그 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제대로 신 역할을 수행해 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어디 보자, 저 인형들이 제물인 거 같으니까…… 저기서 하나를 가져가면 되는 건가?”
클라인이 기억하는 바에 따르면, 리베리아식 제사에선 신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자신과 가장 닮은 인형을 가져가는 건데.
클라인은 제단 위에 놓인 인형들을 살폈고, 문득 인형 하나에 시선이 갔다.
클라인의 외형을 마치 대략적인 설명만 듣고 묘사한 것 같은 외형의 인형.
저 인형은 누가 만든 걸까?
클라인은 그 의문에 곧바로 대답할 수 있었다.
잉간이다.
저건 분명 잉간이다.
클라인이 잉간이를 이해하려 노력한 것만큼 잉간이도 클라인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클라인은 마음이 무척이나 흐뭇해졌다.
그래, 조급해할 필요 없어.
이대로 조금씩 조금씩 시행착오를 줄여 나가다 보면 언젠가 잉간이와 대화를 할 날도 오겠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슬며시 제단 위에서 자신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인형을 차원항 밖으로 꺼내갔다.
으흠, 흠. 이건 지난번에 잉간이가 준 거하고 같이 시간 동결 처리를 해서 잘 보관해 두자.
“그럼, 난 간다. 괜히 이상한 짓 하다가 혼쭐나지 말고.”
클라인이 그러는 사이, 파인만은 클라인의 집을 떠났고.
클라인은 털썩 소파에 드러누우며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너무 많은 사실을 단번에 알게 되다 보니 참 피곤하다.
클라인은 피곤한 몸으로 슬쩍 마력망에 접속해서 마지막으로 집 안의 공간들을 관리했고.
“어?”
그러다 무언가 잘못됐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날씨 제어 장치가 왜 이래?”
최근에 마력을 최소한으로 공급하고 있어서일까?
차원항의 날씨 제어 장치에 이상이 생긴 것이었다.
94화 *유료 광고 포함* 리퀴드사의 신형 날씨 조절 장치를 써 봤어요!
비가 내린다.
그것도 하루 종일.
처음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을 때는 그러고 보니 날씨가 아직까지 변한 적이 없었지, 하는 태평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다음 날까지 비가 내릴 때도 나는 곧 그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비는 쉽사리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거의 일주일 내내 쏟아지고 있었다.
“잉간.”
“아, 블랑카. 보고 왔어?”
“응. 별로 좋지 않아. 아마 내일쯤이면 호수가 여기까지 범람할 수도 있어.”
“아이고…….”
그렇게 비가 쏟아진 결과 당연히 호수의 수위가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졌고, 금방이라도 넘치기 직전의 상태가 되었다.
“일단, 대피해야겠지?”
“그래야겠지. 필요한 것만 빨리 가지고 이동하자.”
“그럼 밭은…….”
“일단 포기해야지. 아직 씨앗이 좀 남았잖아?”
“그렇긴 한데…….”
식량으로 남겨 둔 쌀들이 있긴 한데, 그래도 밭을 아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니 슬픈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집은 주인 녀석이 던져 준 소재로 만들었기 때문에 홍수가 나도 멀쩡하겠지만, 집 안의 가구들은 그렇지 않다.
용광로와 몇몇 시설들은 우리가 들고 이동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으니 그냥 놔둘 수밖에 없다.
블랑카와 한참 가지고 떠날 짐들을 정리하는 와중, 아리스가 몸에 묻은 물들을 털어 내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미안…… 날아서 가는 건 무리일 거 같아…….”
“그 정도야? 지금 상황이?”
“나 하나면 괜찮은데. 짐을 옮기는 건 무리야. 이게, 그냥 비가 아니어서…….”
“그냥 비가 아니라고?”
“응. 비이긴 한데, 마력이 자안뜩 섞여 있어서 자꾸만 마력이 흐트러져.”
“이런.”
아이고, 이렇게 되면 날아서 산 정상까지 이동하는 방법도 막혔다.
그렇다면 그 동굴을 통해서 이동하는 것밖에 없는데, 그 방법도 너무 늦으면 힘들어질 것이다.
이렇게 된 거, 빠르게 챙길 것만 챙겨서 밖으로 나가자.
“발화석, 챙겼고. 식량하고 젤리들, 챙겼고, 씨앗들 챙겼고. 저 마사지 기계는…….”
“두고 가도 돼. 응.”
“아니, 그래도 들고 가야 하지 않을까……?”
“네가 해 주면 되잖아? 저런 것보단 식량 하나라도 더 챙기는 게 나아.”
내 마사지만으로는 블랑카의 몸 상태를 완전히 보조해 줄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블랑카의 의견은 그렇지 않나 보다.
사소한 의견 충돌이 있었지만 우리는 필수품들을 챙겨서 서둘러 집을 나왔고.
“흡!”
블랑카가 마력 창을 휘둘러 하늘로 마력의 파장을 쏘아 보내 떨어지는 빗방울을 없애는 진기명기를 선보이는 가운데, 우리는 서둘러 바위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치잇! 칫!”
“노우울…….”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흘러가고 있음을 눈치챈 건 우리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늘 함께 다니는 식인 토끼들과 놀들 또한 우리와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바위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평소에 저 녀석들이 블랑카 근처에 다가오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지금 상황이 어떤지를 알 수 있다.
“다행히 식량 걱정은 없겠네.”
“치잇?!”
저것 봐라, 블랑카가 자기들을 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블랑카를 쫄래쫄래 따라다닌다.
우리 근처에는 비가 내리지 않아서일까?
바위산 가까이 다가갈수록 숲에서 도망친 작은 생물들이 더욱 우리의 뒤를 따라온다.
“으으!”
“어! 젤리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푸른 점액도 섞여 있었고, 아리스는 반가운 표정으로 슬쩍 푸른 점액을 어깨 위에 태웠다.
푸른 점액은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꼬옥 아리스의 깃털 사이에 파고들어 빼꼼 고개를 내밀었고, 아리스는 재잘거리며 내게 말했다.
“잉간, 여기 사는 모든 애들이 다 튀어나온 거 같아!”
그래, 그 말대로다.
식인 토끼들과 놀 무리 뒤편의 숲속을 잘 살펴보면 블랑카가 간간이 잡아 오던 표범들도 살짝 엿보인다.
거기에 저 멀리 바위산을 엿보면 펭귄 녀석들도 폴짝거리며 산 정상으로 이동하고 있고.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건 오로지 무오 녀석들뿐이다.
그 녀석들은 설마 물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걸까?
그 정도로 생명력이 질기면 그렇게 태평하게 살아가는 것도 말이 된다.
“좋아, 동굴에 도착하긴 했는데…….”
그렇게 꾸준히 발걸음을 옮긴 결과 마침내 우리는 산 정상으로 통하는 동굴 앞에 도착했지만, 동굴의 상황도 그리 좋아 보이진 않는다.
“어우, 물이…….”
당연하게도 바위산 정상에도 비가 내리고 있고, 바위산 정상에 쏟아지는 비들은 전부 동굴을 통해서 아래로 흘러 내려가고 있었다.
“포롱! 포롱!”
펭귄 녀석들은 평소에도 먹이를 잡기 위해 폭포를 오르내리던 녀석들이라서 그런지 아무렇지도 않게 저 물줄기가 쏟아지는 동굴을 오고 갔지만, 우리에겐 힘든 일이다.
“으음…… 이걸 어쩐담?”
블랑카 또한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고, 뭔가 다른 길이 더 없을지 찾아보려던 순간.
“잉간! 나, 가능할 거 같아!”
“응? 뭐가……?”
“그, 그, 그거! 차원 문? 인가 하는 그거!”
“차원 문을 열 수 있다고?”
그러고 보니 아리스는 지구에서 다시 차원 문을 열어서 나를 쫓아온 거였지.
그 뒤로 차원 문을 열려는 기색이 없어서 그때 이후로는 열지 못하는 건가 생각하고 있었는데, 차원 문을 열 수 있다고?
“그, 뭐냐. 그 드래곤 언니가 그랬거든? 차원 문은 이미지라고? 다른 곳은 몰라도, 저 동굴의 끝하고 끝을 잇는 건 상상하기 쉽잖아. 그치?”
“그래…… 보이긴 하네. 응.”
“그러니까, 아마도 가능할 거 같은데…….”
아리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바로 차원 문을 열기 위한 집중을 시작한 것인지 입을 다물고 가만히 동굴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상상하기 쉽다는 말은 정말이었던 듯,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고 차원 문이 열렸고.
아리스는 방긋 웃으며 내게 차원 문을 뽐냈다.
“어때?”
“역시 우리 아리스가 최고야. 응.”
“히히.”
칭찬을 요구하는 아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서둘러 차원 문 안으로 들어가 산 정상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혹시 산 정상의 호수가 넘치진 않았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넘치는 물들은 죄다 폭포가 되어서 산 아래로 내려가는 모양이다.
어떻게 간신히 산 위로 올라왔지만 비를 피할 장소는 보이지 않는다.
아, 그냥 집을 해체해서 들고 올 걸 그랬나?
어차피 별로 무게도 나가지 않는데 말이야.
가져온 목재들로 적당히 비를 피할 은신처를 만들 장소를 찾다가 문득 내 눈에 띈 장소가 있었다.
바로 정체불명의 조각상의 다리 밑.
조각상이 워낙 거대하다 보니 다리 밑에는 빗물이 들이치지 않았고, 그 자체로 훌륭한 은신처가 되어 준다.
“블랑카, 아리스. 이쪽으로!”
“응. 잠깐만.”
아리스는 가만히 차원 문을 지켜보며 우리의 뒤를 따라오던 숲의 생물들이 용기를 내서 차원 문을 따라오는 걸 보고 나서야 안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식량들도 다 올라왔어!”
아, 그 말만 안 했으면 참 훈훈한 풍경이었는데.
나는 피식 웃으며 가져온 짐들을 조각상 밑에 풀어놓고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여전히 시꺼먼 하늘은 도저히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일단, 일단은 좀 안심해도 되겠지?”
“뭐, 이제 여기서 비가 그치는 걸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지.”
“으하…….”
그나저나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일까?
이게 그 행동 풍부화인가 하는 그거냐?
이렇게 비를 내려서 도대체 내 행동에 어떠한 풍부함을 주고 싶은 건데?
나는 그런 불만을 가지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땅을 걷어찼지만, 당연하게도 주인 녀석, 아니, 클라인이 내 행동에 응답하는 일은 없었다.
긴장이 풀린 내가 가만히 털썩 바닥에 주저앉아 휴식을 취하던 그때, 갑자기 아리스가 당황하며 내게 날아왔다.
“이, 잉간!”
“응?”
“저기, 저기 좀 봐!”
호들갑을 떠는 아리스의 모습에 블랑카와 나는 의아해하며 아리스를 따라 산 아래를 내려다봤고.
“저건……?”
“저, 저게 도대체 뭐야, 잉간? 막. 막 글자들이 떠다니는데…….”
이전, 어항 밖에서 봤었던 것과 흡사한 풍경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고밀도의 정보들이 마치 바다처럼 둥둥 산 아래를 가득 채우며 숲을 집어삼키며 어항 전체로 퍼져 나가고 있던 것이다.
마치 지금껏 내린 비들이 전부 저렇게 바뀐 것 같은 모습이다.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 우리가 비라고 생각했을 뿐 지금 내리는 것은 진짜 비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깨닫고 조심스럽게 볼에 흘러내리는 빗물을 손으로 닦자, 무언가가 빗물 안에서 헤엄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 자리의 모두가 저 괴상한 풍경에 할 말을 잃고 그저 저 풍경을 바라만 보고 있었고, 오직 에포나만이 들뜬 모습으로 비를 맞으며 뛰어다닐 뿐이었다.
“…….”
비가 계속해서 내리며 정보의 바다는 지평선을 삼키려 출발했고, 나는 아리스와 블랑카를 조각상 밑으로 돌려보낸 뒤 비를 맞으며 가만히 정보의 바다를 바라봤다.
클라인, 클라인.
이건 나의 주인의 이름이다.
블랑카, 블랑카.
이건 블랑카의 이름.
아리스, 아리스.
이건 내가 지어 준 아리스의 이름.
그리고 잉간.
이것은, 나도 모르는 내 이름.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가 내 머리를 씻어 내리기라도 한 걸까?
내 몸에 달라붙어 있던 정체 모를 무거운 오물들이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 들었고, 그와 함께 그리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왕!”
에포나는 그런 내 곁에 딱 달라붙어 내 몸을 타고 흐르는 비인지 모를 것들을 핥아 댔고.
나는 가만히 에포나를 품 안에 안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에포나, 너는 내 이름을 기억하니?”
“왕!”
만약 이대로 이런 생활이 계속되면 내 이름을 완전히 까먹는 게 아닐까, 그런 공포심이 무심코 들어서 나는 조용히 에포나를 껴안으며 그렇게 속삭였고.
에포나는 걱정 말라는 듯 가만히 내 얼굴을 핥았다.
그래, 너는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구나.
“나중에, 나중에 내가 부탁하면. 그때 내 이름을 말해 줄 수 있어?”
“오……왕!”
에포나는 내 부탁을 듣고 가만히 고개를 갸웃하며 고민하더니, 그 정도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비가 그치면 아마도 나는 이름이 바뀌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먹겠지.
하지만 그래도, 나는 내 이름을 어떻게든 기억해 내야 한다.
클라인이 내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 주었으니, 나 또한 클라인에게 내 이름을 알려 주는 게 도리니까.
어느덧 하늘이 찢어진 듯이 내리던 빗줄기도 서서히 약해지고, 땅을 가득 채웠던 정보의 바다 또한 어디론가 사라진다.
“……응?”
그렇지만 정보의 바다가 빠져나가고 드러난 맨땅은 이전과 뭔가 달라졌다.
주로, 지평선 저 너머에서 보이던 초원이 보이지 않고, 그 대신 무언가가 넘실거리는 것이 보인다.
저건 설마……?
하지만 이곳에서도 제대로 보이지 않으니 직접 가 보기 전까지는 제대로 확신할 수가 없다.
이윽고 완전히 비가 그치고, 맑게 갠 하늘에 무지개가 걸린다.
나는 멍하니 무지개를 바라보며 손을 뻗었고, 마치 내 손짓에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무지개를 뚫고 클라인의 촉수가 나타났다.
클라인은 미안하다는 듯 내 주위의 땅에 젤리들을 여럿 놔두기 시작했다.
아니, 내가 지금까지 젤리를 탐하는 모습을 보여 왔어도 모든 걸 다 젤리로 용서하는 사람은 아니거든?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가만히 팔짱을 끼고 클라인의 촉수를 바라봤고.
클라인은 미안하다는 듯 어쩔 줄 몰라 하며 가만히 나의 눈치를 살폈다.
그 모습이 퍽 적잖이 우스워서 나는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고.
나는 가만히 손을 뻗어 촉수의 끝자락을 붙잡고, 촉수에 머리를 기대며 조용히 속삭였다.
“다음부터 이렇게 비를 내릴 거면, 예고라도 하고 내려 줘. 알겠지?”
내 부탁이 제대로 전달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알겠다는 듯 클라인은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고, 이윽고 허공으로 사라졌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폭우와 홍수는 끝이 났고, 피난 생활을 끝내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와 한숨을 돌렸다.
다행히 진짜 물이 아니었던 덕분인지 집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하늘에 그 전까지 보지 못한 새로운 무엇인가 나타났다.
[내일의 날씨: 맑음]
“무지개 대신, 일기예보라.”
이런 걸 예상했던 건 아닌데.
뭐,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피식 미소 지었다.
* * *
“으아아, 으아아. 으아……!”
날씨 제어 장치에 이상이 생긴 탓에 차원항에는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클라인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당황했다.
이대로라면 잉간이의 은신처가 물에 잠기고 말 텐데.
클라인도 그렇게 예상할 수 있는데 당사자인 잉간이도 그렇게 예상할 것은 당연한 바.
잉간이는 슬며시 은신처를 버리고 고지대로 피난을 가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일단 날씨 제어 장치는 고칠 수 있는데, 그럼 차원항에 들어찬 물은 어떻게 하지?
날씨 제어 장치를 멈춰 봤자 물난리가 난 차원항은 여전할 것이다.
정보 조작으로 복구하려고 해도 모든 차원항의 정보를 조작하는 것은 마력을 꽤나 잡아먹는 일이다.
뭔가, 뭔가 다른 방법은 없나?
클라인은 일단 차원항의 시간을 멈춰 두고 고민했고, 가만히 차원항을 지켜보던 클라인의 머릿속에 문득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어라? 잘 생각해 보면 지금 이건 차원항의 환경을 바꿀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지금 차원항에 들어찬 물들을 고밀도 정보로 바꾼다면, 굳이 차원항을 대규모로 들어내는 공사를 하지 않고도 지형을 바꿀 수 있다.
뭐, 지형을 바꾼다고 해도 그리 큰 공사는 하지 않을 거다.
그냥 차원항 한구석에 바다를 만드는 정도다.
잉간이가 살던 곳에도 바다가 있었고, 잉간이의 룸메이트들에게도 바다를 보여 주고 싶으니까.
우선 잉간이만을 반려 인간으로 삼긴 했지만, 저 룸메이트들도 일단은 지적 생물체들이잖아?
그리고 뭐, 제일 중요한 건 그거다.
바다를 만들어 두면 잉간이에게 수영복을 입힐 구실을 만들 수 있으니까.
“그러면, 이렇게. 날씨 조절 장치에 바다 조각을 갈아 넣고…… 그다음…….”
클라인은 조심스럽게 날씨 조절 장치가 쏟아붓는 빗방울을 고밀도의 정보와 혼합했다.
이렇게 되면 차원항에서 고밀도 정보가 비처럼 내릴 텐데, 차원항 생물들에겐 별다른 피해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정보 세척을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니 좋으면 좋을 것이다.
차원항에 고밀도의 정보가 쏟아지고, 바위산 아래를 가득 메우던 물들이 고밀도의 정보와 융합되며 거대한 정보 바다가 형성된다.
“이제, 여기에 마력을 흘려 넣어서 조작을 하면…….”
클라인은 정보 바다의 정보를 조작하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주위의 정보를 조정하고, 우선 차원항의 정보들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고밀도의 정보들이 촉매 역할을 해 줘서 그리 큰 마력이 필요하진 않았다.
이어서 클라인은 차원항 한구석으로 정보의 바다를 이동시키고, 고밀도 정보의 압축을 해제했다.
정보의 압축이 해제되자 주위로 정보들이 퍼져 나가며 자연스럽게 덧씌워지고, 한때 초원이었던 장소는 꽤 그럴싸한 바다로 바뀌었다.
“음, 바다 생물도 좀 구해 와야 하려나?”
그냥 이렇게 바다만 놔두는 건 심심하니 나중에 바다 생물들도 좀 구해 오는 게 좋겠다.
좋아, 이걸로 차원항 수정은 다 끝났으니 이제 남은 건, 잔뜩 겁먹었을 잉간이를 달래 주는 일이다.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잉간이를 찾았고, 바위산 정상에서 홀로 앉아 있는 잉간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누나가 미안해…….”
클라인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사과의 뜻으로 사료를 건네줬지만, 당연하게도 잉간이는 그것만으로 화가 풀린 것 같지 않았다.
아아, 어떻게 해야 하지?
클라인은 잉간이에게 손을 대지도 못하고 어쩔 줄 모르며 가만히 쩔쩔맸다.
클라인이 그렇게 쩔쩔매던 그때, 가만히 팔짱을 끼고 있던 잉간이가 먼저 행동에 나섰다.
“흐얏?!”
갑작스럽게 잉간이가 자신의 촉수를 붙잡고 기대는 감촉에 클라인은 새된 비명을 질렀다.
화, 화가 풀렸다는 뜻인 걸까?
그럼, 만져도 되려나?
클라인은 조심스럽게 잉간이의 몸을 쓰다듬었고, 잉간이는 클라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렇게 잉간이와 신체 접촉을 하며 잉간이의 감정이 클라인에게 흘러들어 오기 시작했고, 클라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겁먹긴 했어도 그렇게 화가 났다거나 두려워한 건 아닌 것 같다.
“미안……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게…….”
클라인은 그렇게 잉간이와 약속하며 조심스럽게 잉간이에게서 촉수를 떼었다.
다시는 차원항에 홍수를 일으키지 않겠다는 약속.
그 약속을 지키려면 역시 방법은 하나겠지?
“리퀴드사에서 새롭게 날씨 조절 장치가 나왔던가……?”
그건 바로, 기존에 사용하던 날씨 조절 장치를 신형으로 바꾸는 것이다.
“뭐야, 신형에는 일기예보 기능까지 붙어 있네?”
클라인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조용히 리퀴드 숍을 뒤적거렸다.
잉간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95화 바다를 처음으로 본 잉간이의 반응은?
“흐음…….”
비가 그치고 난 다음 날, 나는 아침 일찍부터 바위산에 올라서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며 신음을 흘렸다.
저 지평선에서 무언가가 자꾸 반짝거리는데, 원래 저 위치에는 초원이 있지 않았나?
거기에다가 저 빛은 아무리 봐도 물의 반짝거림인데, 설마 하지만 초원에 거대한 호수가 생기기라도 한 걸까?
어찌 됐든 기존의 어항의 모습과 상당히 달라진 것 같은데.
가만히 에포나를 쓰다듬으며 눈살을 찌푸리던 그때, 폭포에 던져둔 낚싯대에 무언가 잡히는 감각이 느껴졌다.
“잡혔나?!”
낚싯대가 꽤 묵직한 걸 보니 월척인 모양이다.
나는 방긋 웃으며 낚싯대를 잡아당겼지만, 낚싯대 끝에 딸려 올라온 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펭귄 녀석이었다.
“포롱?”
“……에라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펭귄 녀석을 놔주고 나는 낚싯대를 거둬들였다.
에이, 나는 역시 낚시가 어울리는 체질은 아닌 모양이다.
그래도 무오 점액을 바른 뱀넝쿨 섬유가 얼마나 튼튼한지 확인했으니 이 정도만 해도 만족이다.
비가 온 후폭풍으로 거세진 폭포의 물살뿐만이 아니라 펭귄 녀석의 몸무게를 버텨 낼 정도다.
이 정도로 질기다면 웬만한 상황에선 잘 끊어지지 않는다고 봐도 괜찮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낚싯대를 챙겨서 산 아래로 내려갔고, 때마침 블랑카와 함께 있는 아리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음, 그러니까. 여기서 화악! 하라는 게 무슨 뜻이야?”
“그러니까, 뭔가 화악 하고 오는 게 있잖아. 딱, 하고 봤을 때 말이야.”
“으음…… 아, 뭔가 알 거 같기도……?”
블랑카가 아리스에게 마력 조작에 대해서 알려 주고 있던 걸까?
블랑카와 아리스는 의성어가 난무하는 대화에 집중하느라 내가 다가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조용히 그 두 명의 곁으로 다가가 블랑카에게 말을 걸었다.
“뭐 해?”
“흐갹?!”
깜짝 놀랐는지 블랑카가 귀를 곤두세우며 뒷발을 허공에 걷어차고, 아리스가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등 뒤로 숨긴다.
“이, 잉간. 벌써 왔어?”
“어. 낚시는 내 취향에 맞지 않는 것 같아서. 근데 아리스하고 뭐 하고 있었어? 마력 수련이라도 같이하던 거야?”
“마력 수련? 아, 응! 그, 그러고 있었어!”
“……?”
블랑카가 분명히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게 틀림없는데, 도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거지?
고개를 돌려 아리스에게 슬쩍 눈치를 주자, 아리스는 날개를 얼굴 앞에 X 자로 들어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뭐…… 딱히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은 게 아닌 모양이니 더 캐묻지는 말자.
“그, 내가 위에서 지평선을 바라봤거든?”
“으, 응!”
블랑카는 내가 대화의 주제를 바꾸자 기다렸다는 듯 서둘러 대화에 올라탔다.
“그, 위에서 보니까 지평선 쪽에 뭔가 바뀌었더라고.”
“뭔가가 바뀌었다고?”
“막, 거대한 호수? 그런 게 생긴 거 같더라고. 그래서 말인데, 내일 한번 가 보는 게 어때?”
“거대한 호수라…… 비가 내렸으니 자연스럽게 생길 만도 한데…….”
블랑카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내 제안을 수락했다.
“그럼, 내일 먹을 식량을 따로 준비해야겠네?”
“그렇지. 뭐.”
적당히 젤리하고 고기를 구우면 되겠지.
아, 이런 소풍을 나갈 때는 역시 빵이 최고인데.
쌀로도 빵을 만들 수 있던가?
다음번에 쌀을 수확하면 한번 시도해 봐야겠다.
그리고 이렇게 짐을 챙겨야 하는 상황이 오면, 비가 내리는 동안 만들기 시작해서 비가 그치고 난 뒤 완성한 이게 활약할 차례다.
기존에 사용하던 바구니는 너무 커다래서 들고 다니기 힘들었다.
그 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뱀넝쿨 섬유를 짜서 그걸로 일종의 가방을 만들었는데, 내가 봐도 솔직히 잘 만들어진 것 같다.
“가방이라기보단, 보자기 뭉치 같아…….”
“아니, 물건만 담을 수 있으면 가방이지!”
아리스의 평가는 박했지만, 들고 다니기 편하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닐까?
블랑카가 내 눈을 피해 은근슬쩍 신단 한구석에 무언가를 놔두는 모습을 곁눈질로 지켜본 뒤, 나는 내일 먹을 음식을 준비하며 그날 밤을 보냈고.
다음 날 아침.
정말 오랜만에 나는 블랑카와 함께 숲속으로 발을 들였다.
이렇게 다 같이 초원으로 가는 것도 참 오랜만이네.
“아리스는 초원에 나가 본 적이 있던가?”
“응? 아니, 없어!”
“음, 그래? 여기 오기 전에도?”
“응. 맨날 집 안에만 있어서. 밖에 나가려고 하면 엄마하고 언니들이 막았어!”
“……그래?”
그러고 보니 아리스의 고향은 도대체 어떤 풍경이었을까?
아리스의 말을 들어 보면 거대한 나무들과 거대한 벌레들이 살아가던 환경인 것 같은데.
거기에 고블린들을 몇 번인가 부모님이 가져왔다고 했던 걸 보면 다른 인간형 생명체들도 살아가던 환경인 것 같고.
“그, 바깥의 이야기를 해 준 사람은 없었어?”
“음…… 가아끔 언니랑 몇 번 대화하던 걸 빼면 다른 사람들하고 대화해 본 적이 거의 없어!”
“부모님하고도?”
“응!”
아리스는 그때의 일이 별로 좋지 않은 기억이 아니었던 걸까?
이야기를 듣는 내가 놀랄 정도로 너무나 밝게 어두운 과거를 이야기한다.
“저기, 그. 아리스?”
“응?”
“혹시, 그. 과거 이야기를 하기 불편하거나 하면말하지 않아도 되는데.”
“왜 불편한데?”
“아니, 일반적으로 그리 유쾌한 기억은 아닐 것 같아서.”
그렇지만 아리스는 그런 내 걱정이 무색하게 방긋 웃으며 내게 말했다.
“그치만 나는 지금 잉간을 만나서 행복한걸? 그때 일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어도, 지금 생각하면 별거 아닌 거 같아!”
“……그래?”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 할 말이 없지.
그렇게 아리스와 떠드는 사이 숲을 지나쳐 초원으로 나왔고, 초원을 처음으로 본 아리스는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우와, 풀들이 엄청 많아!”
“그치. 막 풀들의 바다 같은 느낌이지.”
“바다? 바다는 잉간의 고향에 있는 그거 맞지? 바다는 이렇게 생긴 거야?”
“이 풀들처럼 물이 잔뜩 있는 거야.”
그러고 보니 아리스는 당연하게도 바다를 직접 보지 못했구나.
뭐, 나도 저 위에서 바라보기만 했지 눈으로 직접 본 적은 없긴 한데.
만약 내 예상이 맞는다면 저 초원 너머에 생겨난 것은 호수가 아니라 어쩌면…….
“좋아, 그럼 간다!”
“어, 응?”
내가 그렇게 잠시 멍을 때리는 사이, 아리스가 내 어깨를 붙잡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어서 블랑카는 전속력으로 지면을 박차고 달려 나가기 시작했고, 아리스는 그런 블랑카의 속도에 맞춰서 나를 붙잡고 하늘을 비행했다.
바람이 어마어마하게 불어온다거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아마도 아리스가 어떠한 마법으로 온도와 바람을 조절하고 있는 게 아닐까?
내게 들이닥치는 바람은 단순한 산들바람 수준으로 억제되고 있었다.
그렇게 초원 위를 날아서 지평선을 향해 달려가다 보니, 바위산 정상에서 본 것과 같은 반짝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수인 줄 알았지만, 서서히 거리가 좁혀지면서 그 정체가 드러났다.
“저건…….”
“저게, 바다야?”
그래, 저건 바다다.
바다라는 걸 모르는 아이도 이 모습을 보면 단번에 무엇이 바다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지평선을 삼켜 버린 거대한 물의 평원, 그리고 바람에 솔솔 섞여 드는 짭짤한 바다 내음.
한때 초원이었던 곳은 부자연스럽게 백사장과 바다에 자리를 빼앗긴 지 오래였다.
블랑카와 우리는 백사장 앞에서 멈춰 섰고, 가만히 거대한 바다를 바라봤다.
“잉간, 이건…….”
“아마도, 클라인? 이 한 짓이 아닐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건 언제나 그랬듯 클라인밖에 없겠지.
어째서 바다를 만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우리 앞에 바다 그 자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잉간, 잉간. 이게 잉간이 말하던 그 바다야?”
“응. 이게 바다인데. 그런데…….”
“잉간! 나 한번 들어가 봐도 돼?!”
아리스는 눈을 반짝이며 당장이라도 바다에 뛰어들려 했고, 나는 피식 웃으며 아리스를 잠깐 저지했다.
“일단 옷은 벗고 들어가자. 바닷물 때문에 옷이 상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
아리스는 내 말을 듣자마자 황급히 옷을 벗어 버렸고, 나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진짜, 깃털이 절묘하게 가리고 있다고 해도, 슬슬 아리스가 성장하고 있어서 깃털 아래쪽으로 슬며시 둔덕이 드러난단 말이지.
“야호!”
아리스는 그대로 푸드덕 하늘을 날아 바다에 뛰어들었고, 예상보다 물이 차가웠던 걸까?
몸을 부르르 떨며 물 위에서 푸드덕 헤엄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블랑카는 슬며시 내게 다가와 조용히 말을 걸었다.
“너는 안 들어가려고?”
“응? 짠물은 좀 별로여서. 나중에 다시 씻어야 하잖아?”
“그래? 나도 바다에 들어가고 싶은데, 그럼 나 좀 도와줄래?”
“응?”
“그…… 옷 좀 벗는 거, 도와줄 수 있어?”
블랑카는 귀를 새빨갛게 물들이며 내게 그러한 부탁을 했고, 나 또한 블랑카의 의도를 눈치채고 얼굴을 붉히며 조심스럽게 블랑카 뒤에 섰다.
“으, 응.”
나는 조심스럽게 블랑카가 늘 입고 다니는 조끼를 벗기기 위해 블랑카의 앞쪽으로 손을 뻗었다.
묵직하면서도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지고, 나는 얼굴을 붉히며 블랑카의 조끼의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그렇게 내가 블랑카의 탈의를 도와주며 미묘한 분위기를 쌓아 가던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천 조각이 툭, 하고 떨어졌다.
“우왓……?!”
하늘에서 떨어진 천 조각들은 누가 봐도 수영복들이었다.
아니, 이런 것도 가지고 있다고?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봤지만 당연히 클라인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 잉간. 나 좀 부끄러운데, 빨리…….”
“아, 응…….”
뭐, 어쨌든 입으라고 준 거니까 일단 입어 보는 게 클라인의 마음에 들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블랑카에게 수영복을 입혔고, 블랑카는 꼬리와 귀를 흔들거리며 슬며시 내 팔을 껴안았다.
“저기, 나 아직 오늘은 인간으로 변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은데…….”
블랑카는 그렇게 내게 바다에 들어가기 전 자신과 잠깐 시간을 보낼 것을 권유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블랑카의 손에 이끌려서 블랑카와의 시간을 잠시 즐겼다.
평소에 입지 않던 옷을 입어서 그런 건지 블랑카는 꽤나 부끄러워했고, 이후에 나는 바다에서 아리스와 함께 물 위를 둥둥 떠다녔다.
블랑카는 바다 깊숙한 곳으로는 들어가지 않고 적당히 물이 자신의 허리까지 오는 구역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나저나 이렇게 수영을 하면서 깨달은 건데, 이 바다에는 진짜 소금물 말고는 아무것도 없네.
아직 생명체가 투하되지 않은 것일까?
뭔가, 바다는 생명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하는데 없으니 좀 섭섭하다.
그렇게 우리가 각자만의 방식으로 바다를 즐기고 있던 사이, 갑자기 바다 저편의 지평선에서 거대한 빛이 솟아올랐다.
“뭐, 뭐야! 저건!”
거대한 빛줄기는 금방 꺼지지 않고 계속해서 고고히 지평선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자신을 찾아 주길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 * *
“네? 새, 생방송을 해 보라고요?”
“네, 클라인 님도 이제 꽤 구독자를 확보했고, 가끔씩 생방송을 해 보시는 게 어떨까 해서요. 이제 집 밖으로도 나가신다면서요?”
“그거, 그거하고 생방송은 다르죠! 제, 제가 어떻게 생방송을 해요!”
“생방송 준비는 저희가 다 해 드릴 테니, 클라인 님은 그냥 방송만 하면 되는 거예요.”
클라인은 리퀴드사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하며 버벅거렸다.
아니, 갑작스러운 제안은 아니다.
클라인은 이제 중견 쥬튜버로 분류할 정도로 성장했고 클라인급 되는 쥬튜버들은 다들 생방송을 하고 있으니까.
당연한 이야기를 당연하게 하는 것이었지만, 클라인은 도저히 리퀴드사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제, 제가 쥬튜브를 시작한 것도. 어, 생방송은 안 해도 되는 거여서. 그런 거였는데요. 그래서…….”
“요즘 많이 괜찮아지셨다길래, 그냥 언급해 본 거예요. 재활의 일환으로요.”
“어, 어…….”
“너무 부담되시면 이 이야기는 잊어 주세요. 뭐, 지금 이대로도 성장세는 괜찮으니까요.”
“네, 네. 이건 나중에…….”
생방송이라니, 생방송이라니!
클라인에겐 절대로 생방송을 진행할 마음도, 능력도 없었다.
지금도 간신히 집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된 것이지 비즈니스 관계나 파인만이 아니라면 제대로 대화도 하지 못한다.
생방송 이야기가 나온 것을 제외하면 리퀴드사와의 회의에서는 별다른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고, 회의를 끝마친 클라인은 털썩 침대에 드러누워 한숨을 내쉬었다.
뭐, 언젠가는 생방송을 진행해야 한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아직은 너무 부담이 심하다.
지금 이대로도 괜찮은데, 굳이 생방송을 할 필요는 없잖아?
그, 마력 후원도 그리 당기지는 않으니까 말이야.
애초에 내가 생방송을 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좋아해 줄 리가 없잖아?
영상으로 잘 다듬은 내용이 아니라 날것 그대로의 나를 보여 주면 당연히 다들 싫어할 텐데.
“아, 잉간이나 보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던 클라인은 방전됐다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쉬며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하루도 힘내서 살아갈 기운을 충전하기 위해 잉간이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겸사겸사 잉간이의 일상을 기록하기도 할 겸 말이다.
클라인은 카메라를 집어 들고 차원항 앞에 섰고, 차원항 안의 상황을 관찰하며 새된 탄성을 질렀다.
“와, 벌써 바다에 관심을 가진 모양이네?”
클라인이 기억하기로 지구에도 바다가 있었고, 리베리아에도 바다가 있었다.
잉간이가 살았다던 한국이라는 국가도 바다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는데, 역시 그래서 바로 흥미가 끌린 걸까?
“아, 아직 주문한 생물들이 오지 않았는데.”
잉간이를 위해서 바다에 풀어놓을 생명체들을 주문했건만, 주문한 생명체들이 오기 전에 이미 바다로 향할 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생물들이 올 때까지 시간을 멈춰 두긴 싫으니까, 그냥 지켜볼까?
가만히 바다로 향하는 잉간이 일행을 지켜보던 클라인은 잉간이와 차원항 한구석에서 시체를 먹어 치우는 슬라임들을 바라봤다.
솔직히 아직 클라인의 눈에는 인간형 생물들과 저 슬라임들의 모습이 거기서 거기로 보인다.
클라인이 진심으로 자신의 친구라고 인정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잉간이뿐이다.
저 슬라임들과 인간형 생물이 뭐가 다른 거지?
그냥 눈으로 관측하기만 해서는 그 차이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뭐, 클라인도 머리로는 인간형 생물과는 달리 슬라임과는 감정을 교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잘 이해되지 않는 건 사실이다.
애초에 지적 생명체라는 건 뭘까?
지적 생명체로 인정받을 만한 충분한 지성이라는 게 도대체 뭐지?
클라인의 머릿속에 계속해서 복잡한 질문이 던져졌고, 클라인은 고개를 내저어 고민을 털어 냈다.
그래, 대화다.
이 고민들도 전부 잉간이와 대화할 수 있게 되면 해결될 거야.
아직 내가 잉간이의 룸메이트들에게 정을 붙이지 못해서 잉간이와 같이 친구처럼 생각하기 어려운 거일 뿐이야.
응. 그래.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차원항 안을 내려다봤지만, 기껏 바다에 도착해 놓고 바다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는 잉간이의 모습에 기분이 살짝 언짢아졌다.
으, 지금 하려는 그건 평소에도 많이 하는 거잖아!
이왕 바다에 왔으면 내가 준비한 걸 전력으로 즐겨 줬으면 하는데.
클라인은 그렇게 툴툴거리며 슬쩍 차원항 안으로 미리 준비해 둔 수영복들을 던져 넣었다.
자, 이제 다시 바다에 집중하겠지?
그렇게 생각했지만 클라인의 예측은 빗나갔고, 클라인은 그런 잉간이의 모습에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으, 잉간이는 내가 원하는 대로 반응하는 장난감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이런 쓸모없는 집착욕이 생기는 걸 어찌할 수 없다.
이왕이면 잉간이가 도구를 만들어서 바다에 진출하는 모습도 보고 싶은데…….
하지만 당연히 이대로라면 잉간이가 바다에 진출할 이유는 없겠지.
왜, 생물 행동학에서도 차원 생물들은 기본적으로 동기가 없으면 행동하지 않는다고 했다.
사실 그건 사람한테도 적용할 수 있는 소리인 것 같지만.
어쨌든, 잉간이가 바다에 진출하려면 무언가 강력한 동기가 필요하다는 건데…….
“으음…… 뭐 없으려나?”
클라인은 곰곰이 잉간이가 바다로 진출할 만한 동기를 고민해 봤고, 문득 클라인의 머릿속에 한 가지 발상이 떠올랐다.
“이거다!”
잉간이가 바다에 관심이 없다면, 바다에 무조건 관심을 가질 만한 미끼를 설치하면 되잖아?
96화 애완 인간, 키우기 전에 공부하셨나요?
금방 빛줄기가 꺼질 줄 알았지만, 거대한 빛줄기는 계속해서 바닷속에서 일렁이는 등불처럼 자신의 위치를 알려 왔다.
수영으로는 도저히 갈 수 없는 거리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빛줄기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배를 타고 저기까지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일단 위험한 건 아닌 거 같은데.”
바다에서 나와 마법으로 몸에 묻은 소금기를 털어 낸 아리스는 빛줄기를 바라보며 그렇게 평가를 내렸고, 블랑카 또한 아리스의 의견에 동의했다.
“기사단에서 사용하던 신호기와 비슷한 거 같은데. 아리스 말대로 위험한 건 아닌 거 같네.”
“아리스, 혹시 날아서 저기까지…….”
“으음…… 힘들 거 같아. 저기, 바다 위에 그때 비가 내릴 때처럼 마력이 막 흩어져 있어서 힘들어.”
날아가는 것도 안 되고 수영을 하는 것도 안 된다.
아무리 봐도 클라인의 의도가 엿보이는 상황이다.
저 빛이 궁금하다면, 직접 배를 만들어서 와라.
전부터 이런 식으로 내가 직접 도구를 만들어서 행동하게 유도를 한단 말이지.
“그렇다면 역시 배밖에 답이 없다는 건데…….”
“배?”
내가 계획을 세우며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블랑카가 질색하는 얼굴을 하며 중얼거렸다.
“굳이 배를 만들어야 해? 귀찮은데…….”
“그렇지만 배가 없으면 저 빛까지 갈 수 없는걸?”
“아니, 그냥 빛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 않아도 되잖아?”
블랑카는 굳이 배를 만드는 귀찮은 일을 돕고 싶지 않은 모양인지 고개를 내저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손가락으로 빛기둥을 가리키며 억지를 부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걸! 지평선에서 빛기둥이 올라오는데, 저걸 어떻게 확인 안 해 봐!”
“아니, 그건 무슨 논리야……?”
“저건 거의 독방 안에 놓인 큼지막한 빨간 버튼이랑 동급이라고! 저걸 어떻게 확인 안 해 봐?”
솔직히 저걸 그냥 무시하고 지나간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빛기둥이 있으면 확인해 보고, 버튼이 있으면 눌러 보는 게 사람의 본능 아니던가?
블랑카도 버튼을 예시로 든 내 비유를 듣고 찔리는 게 있었는지 슬쩍 몸을 굳히며 고개를 내저었다.
“으…… 그래도 싫어! 귀찮단 말이야!”
“아니, 그냥 배를 만드는 게 어때서? 어차피 할 일도 많이 없는데 소일거리로 하자는 거지…….”
“나는 아무튼 싫어. 난 그렇게 말했다.”
내가 블랑카에게 억지를 부려서일까?
블랑카 또한 내게 지금껏 보여 주지 않던 억지를 부리는 모습을 보여 주며 배를 만들자는 내 제안을 거절했다.
갑자기 블랑카가 왜 이러지?
고작 배를 만드는 게 뭐 어때서?
블랑카는 그렇게 선언한 뒤로 갑자기 입을 꾹 다물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리스와 나는 덩달아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왜 블랑카가 화가 났는지 파악하려 애썼다.
“배가 싫은 걸까?”
“하지만 배가 싫을 이유가 없잖아? 싫다고 해도 저 정도로 반응할 정도는 아니고.”
“그치만 블랑카 언니는 다를 수도 있지!”
그렇게 소곤거리는 사이 우리는 집으로 일단 다시 돌아왔고, 서서히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블랑카는 집에 돌아오고 나서도 한동안 말이 없었고, 식사를 끝마치고 나서 곧바로 씻기 위해 호수로 향했다.
일단은 블랑카의 기분이 좀 풀릴 때까지 지켜보는 수밖에 없으려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블랑카를 따라갈까 말까 고민했지만, 곧바로 아리스가 블랑카의 뒤를 쫓아 나갔다.
자기에게 맡기라는 듯 아리스는 내게 히죽 웃어 보이고, 그대로 블랑카와 함께 호수로 떠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블랑카는 푹 한숨을 내쉬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잉간.”
“응?”
“그, 저기. 음. 오늘 밤은, 같이 자도 될까?”
“같이 잔다고?”
“그, 갑옷을 입으면. 인간 상태를 꽤 오랜 시간 유지할 수 있고, 아리스도 오늘은 내 자리에서 잔다고 해서…….”
“상관은…… 없는데. 갑자기 왜?”
“……그냥.”
그때, 내 눈에 바들바들 떨리는 블랑카의 손이 들어왔다.
겁을 먹기라도 한 걸까?
겁을 먹을 일이 도대체 어디에 있었다고?
그런 블랑카의 모습이 퍽 안쓰러워서 나는 슬며시 블랑카의 손을 잡고 고개를 끄덕였고, 블랑카 역시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간형의 모습으로 나와 함께 침대에 누웠다.
침대에 눕고 뭔가 말을 꺼낼 줄 알았지만, 블랑카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나를 등 뒤에서 꽉 껴안고만 있을 뿐이었다.
나는 차분히 블랑카가 먼저 입을 열 때까지 블랑카의 손을 어루만지며 기다렸고, 마침내 블랑카가 슬며시 입을 열었다.
“저기, 있잖아.”
“응.”
“내가 여기에 오게 된 상황, 자세하게 이야기했었나?”
“그건…….”
그건, 이야기했던 적이 없는 거 같은데?
리베리아에서 있었던 때의 이야기는 했어도 어쩌다 블랑카가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는 이야기한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냥 평범하게 다른 리베리아인들처럼 붙잡혀 온 게 아니었나?
“있지, 잉간. 나는 배가 싫어.”
“배?”
“물 위를 헤엄쳐 다니는 배도 싫고, 하늘을 헤엄쳐 다니는 배도 싫어. 아니, 하늘을 헤엄쳐 다니는 배가 제일 싫어.”
하늘을 헤엄쳐 다니는 배?
아, 우주선을 말하는 건가?
그래, 블랑카가 배를 싫어하고 있다는 건 지금까지의 태도로 대충 눈치챘는데, 어째서 배를 싫어하는 거지?
“내가. 내가 신님의 눈에 띄게 된 건, 사고 때문이야.”
“사고 때문이라면, 뭐. 배를 타고 가다가 충돌이라도 한 거야?”
“비슷해. 그때의 나는 하늘을 나는 배를 타고, 달에 있는 식량 기지로 향해서 보급을 받아 오는 평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어.”
“허어. 그래서?”
뭔가 내용이 굉장히 SF스럽긴 하지만, 평범한 보급 임무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겠지?
“진짜. 그날도 별다르지 않았어. 그냥, 그냥 평소랑 완전히 똑같은 날이었는데…….”
“……사고가 터졌구나?”
“응. 하늘 밖의 세상에서도, 그런 폭풍이 몰아치는지는 그날 처음 알았어. 단순한 폭풍이었으면 상관없었을 거야. 우리가 입고 있는 갑옷들은 하늘 밖의 세상에서도 활동할 수 있게 만들어졌으니까.”
우주에서 몰아치는 폭풍이라면, 뭐가 있지?
태양풍이라도 직격으로 얻어맞은 걸까?
“그, 그 풍경은. 그러니까, 그 풍경은…….”
블랑카는 자신이 봤던 폭풍을 묘사하려고 했지만, 제대로 묘사하기 힘든지 몇 번이고 말을 더듬었다.
“묘사하기 힘들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응. 아무튼, 그 폭풍은 엄청 이상했어. 그것도 보통 수준이 아니라. 사실, 그걸 폭풍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 폭풍 때문에 배가 망가져서 어디론가 흘러 들어갔어.”
“그래서……?”
“그리고, 그리고 있잖아. 그리고…….”
블랑카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가만히 내 몸을 꽉 껴안을 뿐이었다.
블랑카가 간신히 다음 문장을 내뱉기 시작한 건, 흥미롭게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에포나가 하품을 하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그리고, 그리고. 모든 게 일그러졌어. 모든 게.”
“모든 게?”
“의자, 창문, 대장님, 블레어, 카퍼, 클라크. 심지어 나까지. 말 그대로 모든 게 일그러지기 시작했어. 너무 일그러져서, 나조차도 내가 누군지 모르게 될 지경이었어.”
블랑카가 이야기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나 또한 블랑카가 겪은 것과 같은 일을 겪어 봤기에.
내가 내가 아니게 되고, 주위에서 밀려드는 수많은 정보들과 나를 분간하기 힘들어지는 그 느낌이 얼마나 지옥 같고, 두려운지 알고 있기에.
“눈앞에서 동료들이 하나씩 다른 것으로 변해 가는 게 너무나 무서운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내가 배운 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고, 아무도 응답을 하지 않아서…….”
블랑카는 내가 없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나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꽉 붙잡았고, 나 또한 가만히 블랑카를 꽉 껴안았다.
“아무튼. 그래서, 대충 배라는 개념 자체에 거부감이 생겨서. 그래서, 그랬던 거야. 미안해.”
“아니, 사과할 필요까진 없는데. 그럴 수도 있으니까…….”
“아니. 사과해야 해. 약점을 극복하지 않고, 네게 그런 소리를 한 건 내가 나약해서니까.”
블랑카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금 내게 미안하다고 사과했고, 나는 문득 다시금 깨달았다.
블랑카의 이런 모습이 정말 좋다.
약한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그 모습마저 극복하려 최선을 다하는 강함.
첫 만남 때는 그 의지가 한계 이상으로 몰려 있던 상황이어서 별로 좋게 보이지 않았지만 이렇게 사이가 깊어지다 보니 정말 마음에 드는 부분이다.
“좋아해, 블랑카.”
“어, 응? 갑자기?”
“그냥, 갑자기 말하고 싶어져서.”
“윽…….”
내가 갑작스럽게 고백을 하자, 블랑카의 손길이 부드럽게 내 몸을 쓰다듬는다.
“저기, 잉간…….”
“흐얏?”
블랑카가 슬며시 내 어깨를 이빨로 깨물며 내 귓가에 속삭여 오고, 그렇게 분위기가 고조되던 순간.
“얍!”
어디선가 지금까지의 대화를 다 지켜보고 있던 걸까?
아리스가 폴짝 침대 위로 뛰어들며 외쳤다.
“혼자서 하는 건 불공평해!”
“아, 아리스?”
그렇게 아리스까지 끼어들어 잠 이루지 못하는 밤이 지나갔고.
다음 날 아침 늦게 일어난 나는 오랜만에 도끼를 손에 들고 숲으로 향했다.
자, 이제 배를 만들 재료들을 모아 볼까?
* * *
[근데 요즘 왜 쥬스농장은 영상 안 올라오냐?]
-머임
[댓글]
-들리는 썰로는 브리더 자격증 정지됐다는데?
-└진짜? 출처가 어딘데?
-내 친구! 문제가 있다면 그 친구가 내 머릿속의 존재라는 거야…….
-곧 자가 증식할 예정이네.
“흐음…….”
클라인은 늘 이용하는 마력망 커뮤니티를 들여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언급이 늘어나긴 했는데…….”
인간형 생물에 대한 언급이 늘어나긴 했어도, 클라인이 보기에 그리 좋은 부류의 언급은 아니었다.
인간형 생물을 요즘 애완 생물로 많이 키운다더라.
그런 인식에서 시작된 커뮤니티의 관심은 그리 좋지 않은 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인간형 생물 사 오자마자 죽어 버렸는데 이거 뭐냐?]
-손 위에 올려놨더니 죽었음. 머임.
[댓글]
-자기 인식 실패!
-손 위에 올려 두니까? 죽지 않을까 쓰니야?
-마키나 아니면 차원 생물은 핸들링하기 어려움.
[인간형 생물 이거 괴롭히는 재미가 있네.]
-감정도 잘 느껴지고 반응도 즉각적이어서 괴롭히기 재밌네.
[댓글]
-그러지 마 나쁜 놈아 ㅠㅠㅠㅠ
-ㄹㅇ 괴롭히는 맛은 거의 최강임. 생명력도 은근히 질겨서.
기존의 인간형 생물 사육은 인간형 생물 커뮤니티 안에서만 돌던 화제였지만, 이렇게 잘 모르는 사람들까지 인간형 생물 사육에 뛰어들게 되면서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
인간형 생물의 특성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 데려와서 그냥 죽여 버리질 않나, 가끔씩 일부러 인간형 생물들을 괴롭힐 목적으로 구매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 차원 생물을 괴롭히는 녀석들은 언제나 존재하는 분탕 종자라고 생각하자.
특성을 잘 몰라서 죽여 버리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앞으로 브리더 협회 차원에서 적극적인 교육이 이루어진다면 크게 줄일 수 있는 문제니까.
하지만 가장 큰 문제점은 따로 있었었다.
바로.
[몰랐는데 우리 집 앞에 인간형 생물들 서식지 생겼더라?]
-환경 보존 사업으로 만든 행성에 누가 버렸는지 거기서 번식하면서 살아가더라. 솔직히 평균 기온이 영하여서 죄다 죽을 줄 알았거든? 어떻게 잘 적응한 모양이더라.
[댓글]
-그거 인간 맘들이 먹이 주는 걸로 살아가는 거임. 그거 전파 쏴 대기 전에 빨리 없애 놔라. 안 그러면 하루 종일 전파 쏴 대서 시끄러워 죽는다.
-아, 그냥 놔두면 전파를 쏴 대?
-ㅇㅇ 먹이에 독성 정보 섞어서 놔두거나 언데드 가져와서 풀면 쉽게 퇴치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언데드 푸는 거 추천한다. 그거 구경하는 거 은근히 꿀잼임.
-인간들이 전파를 쏴 대는 건 생물로서의 본능이니까 네가 좀 참아라.
-인간 새끼들이 본능을 누리느라 나는 행복 추구권을 침해받는다고 야발아.
유기되는 인간형 생물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뭐,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현상이다.
울타르나 탄탈로스들도 유기되는 일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를 지경이었으니까.
하지만 인간형 생물의 문제는, 구하기 쉽고 사육하기도 쉽다 보니 탄탈로스나 울타르에 비해서도 유기되는 양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이다.
최근 인간형 생물의 취급을 보면 거의 살아 움직이는 장난감 수준이다.
으, 원래 무관심에 가까워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던 거지, 유행하는 애완 생물들은 대부분 이런 길을 걷는다.
여기서 나아가서 어떻게든 인간형 생물들을 반려 생물의 위치까지 올려놔야 한다는 건데.
“책임이 너무 막중해……. 협회장만 아니었어도…….”
당연히 클라인 혼자서 이 일을 진행하는 건 아니지만, 클라인은 괜스레 리만 협회장을 탓했다.
리만이 인간형 생물이 지적 생명체에 준하는 지능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 주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마음이 불편할 일은 없었을 텐데.
그렇게 한숨을 내쉬던 클라인의 눈에 문득 게시 글 하나가 들어왔다.
[솔직히 애완 인간들 번식하는 거 보면서 헤으응 해봄]
-헤으응 해서 헤응 하더라…….
[댓글]
-변태 새끼
-슬라임이 분열하는 거 봐도 헤으응 하냐?
“흐엑…….”
뭐, 언제나의 어그로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다음 글로 넘어가려고 했지만, 문득 클라인의 머릿속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지적 생물이라는 건, 서로 교배가 가능한 종이어야만 인정받을 수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만약 인간형 생물이 지적 생물로 인정받는다면 사람과 인간이 번식을 하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닐 거잖아?
그렇게 생각하던 클라인의 머릿속에 교미를 하던 잉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잠깐만, 인간형 생물들은 직접적인 접촉으로 번식을 하니까, 만약에 잉간이가 지적 생명체로 인정받아서 사람들하고 교미를 한다면…….
“흐엑…….”
그런 커다란 것하고 직접적으로 접촉한다고?
“하와와…….”
머릿속에서 재생되던 살색 영상에 문득 자신을 집어넣고 손을 복부에 올려 두며 비교하던 클라인은 얼굴이 새빨개졌고, 잡생각을 몰아내고자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아무튼 지금 이대로는 좋은 상황이 아니다.
인간형 생물이 지적 생명체로 인정받으려면 넘어야 하는 난관이긴 하지만, 이 난관을 어떻게 해야 넘을 수 있을까?
클라인은 고민해 봤지만, 쉽사리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클라인은 계속해서 고민했다.
그것이 사람이 가져야 할 의무니까.
97화 흥미 유도에는 적절한 보상이 필요한 법입니다.
배를 만든다.
어렵게 느껴지는 일이기도 하지만, 의외로 쉬운 일이기도 하다.
흔히들 배 하면 떠오르는 거대한 형태의 배를 만드는 건 물론 무척 어려운 일이겠지만, 한두 사람 정도 탈 수 있는 작은 배를 만드는 일이라면 나 혼자서도 가능하다.
그래, 나 혼자서도 가능하단 말이다.
“잉간, 도와줄까?”
“아니, 괜찮……아!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어!”
그러니까, 내가 지금 괜한 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란 말이다.
사서 고생하는 건 언제나 있는 일이니 넘어가자.
적당히 숲을 둘러보며 쓸 만한 나무를 찾아내 베어 내서 다듬기 위해 집으로 가져오는 아주 간단한 일.
최근 그다지 몸을 크게 쓰지 않고 늘 하던 일만 해서 그런 걸까?
예전이었다면 이 정도로 힘들지 않았을 텐데, 왜 이렇게 나무를 옮기는 정도의 일도 힘든지 모르겠다.
그래도 집까지 거리가 그리 멀지는 않으니 참아야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끙끙거리며 나무를 옮겼고, 아리스는 하품을 하며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허억, 허억…… 다, 옮겼다.”
간신히 통나무를 집 근처의 공터에 내려놓고, 창고 안에 보관해 둔 공구들을 가지고 밖으로 나온다.
제일 첫 번째로 할 일은 나무껍질을 벗기는 일.
지난번에 뱀넝쿨들을 잘라 낼 때 썼던 낫으로 나무껍질을 벗겨 뽀얀 속살을 드러낸다.
뽀얀 속살을 드러냈으면 이제 적당히 유선형의 몸체로 다듬을 시간이다.
기억 속의 카누의 모습과, 만능 사전에 올라와 있는 소형 보트의 설계도를 참조해 가며 나무를 다듬는다.
그렇다곤 해도 우리가 아는 그 보트의 모습대로 깎아 낼 필요는 없다.
깎아 내는 부위는 오로지 카누의 밑부분이 될 부분뿐이다.
통나무를 반으로 갈라서 두 쪽으로 나누고, 둥그스름한 통나무의 아래쪽을 매끈한 유선형으로 다듬자, 슬슬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냥 도끼로 통나무를 찍어 내서 잘라 낼 뿐인 작업이지만, 실수하지 않게 조심조심 작업하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렸다.
내가 나무를 다듬는 작업을 하는 동안, 아리스는 집 주위를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줍고 있었다.
청소를 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청소를 하는 건 또 아닌 것 같다.
집과 집 바깥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바닥에서 무언가를 줍더니 아리스는 만족한 표정으로 수집한 것들을 들고 산으로 날아갔다.
슬슬 블랑카가 돌아올 때도 됐으니 이제 요리를 해 볼까?
마침, 오늘은 통나무도 있으니 꽤 재밌는 요리를 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일종의 진흙구이의 변형판인데, 통나무 안에 불을 피워서 그 안을 파내고, 그렇게 생겨난 공간에 나뭇잎으로 감싼 고기를 넣고 굽는 거다.
방금 생각난 요리법이지만, 꽤 괜찮아 보이는데?
그렇게 통나무 안에서 고기가 지글지글 익어 가고, 적당히 달맞이풀과 베리들을 뜯어 샐러드처럼 내놓는다.
달맞이풀하고 베리들만 그냥 먹는 것도 좀 질리는데, 나중에 소금을 더 보충해서 절임으로 만들어 두는 게 좋으려나?
충분히 다 익은 고기를 통나무 안에서 꺼내서 상 위에 올려 두고 다시 통나무 안을 파내는 작업을 계속 이어 나간다.
날이 어두워져도 불꽃을 옆에 두고 작업하기 때문에 작업을 그만둬야 할 정도로 위험하지 않다.
“그거, 배야?”
내가 그렇게 통나무를 다듬는 동안 블랑카가 돌아와 내 작업을 보고 짤막한 감상을 내뱉었다.
“배지. 3명까지는 문제없이 탈 수 있을걸?”
“뭔가 내 상상하고는 엄청 다르네. 좀 더 커다란 걸 생각했는데…….”
우리가 흔히 배라고 생각하는 형태가 아니라면 블랑카도 괜찮은 걸까?
블랑카는 슬며시 만들어지고 있는 카누를 쓰다듬었고, 피식 헛웃음을 터트렸다.
“저기, 잉간.”
“왜?”
“가끔 그럴 때가 있잖아. 막 엄청 겁먹고 두려워했는데, 알고 보니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 때.”
“그치. 가끔 있지.”
이곳에 오고 나서 참 많이 있었던 일이지, 그건.
“네가 만드는 배를 보니까, 내가 지금까지 겁먹고 있던 게 이렇게 하찮은 거였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
응? 잠깐만.
이거, 간접적으로 내가 만드는 배가 하찮다고 디스당한 건가?
내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블랑카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투덜대듯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괜히 겁먹고 틀어박히는 것보단 뭐라도 하는 게 낫다는 거야.”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왜 또 말해?”
“그냥, 그냥 지금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블랑카는 자신의 발언이 부끄러운지 그렇게 소리치고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나는 그런 블랑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그래.
어쩌면 생각보다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닐지도 몰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하늘에 잠시 손을 뻗었다 거둬들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통나무 안을 파내는 작업을 마저 진행했고, 세 사람은 충분히 앉을 수 있을 정도로 통나무 안이 비워졌다.
이 정도면 충분히 배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럼 이제 남은 건 수분을 말리고 물이 스며들지 않게끔 겉 표면을 코팅하는 작업뿐이다.
나무가 건조되면서 모형이 변형되지 않게끔 나뭇가지를 카누의 내부에 채워 넣는다.
“아리스. 조심해서 해야 한다. 알겠지?”
“괜찮아, 이 정도는 문제없다고!”
그리고 나는 아리스의 마력 조작이 어디까지 성장했는지 확인해 볼 겸 아리스에게 카누를 말려 줄 것을 부탁했고.
“이그니스 투 이그니스!”
아리스가 영창을 하는 것과 동시에, 내 예상을 뛰어넘은 화력의 불꽃이 카누 근처에서 일어났다.
어, 어? 저거 좀 위험해 보이는데?
다행히 그런 내 걱정이 무색하게 아리스는 완벽하게 마력을 제어해서 카누의 수분만을 날려 버리는 데 성공했다.
“좋아. 완벽해. 정말 잘했어, 아리스.”
“히힛.”
기분 좋게 웃음 지은 아리스는 내 뒤에 얼굴을 묻고 내게 질질 매달려 다니기 시작했고, 나는 피식 웃으며 아리스를 등 뒤에 매달고 무오 점액을 카누의 표면에 바르기 시작했다.
무오 점액은 적당히 횃불을 가져다 대는 것만으로도 단단히 코팅되어서 묘한 광택을 카누에 가져다줬다.
마지막으로 적당히 남은 나무를 쪼개서 노를 만드는 것으로 카누를 완성한다.
“물에 잘 뜨려나?”
“호수에 가서 띄워 보자!”
“그래 볼까?”
기껏 만들어 놓고 바다에 가져갔더니 바로 침몰해 버리면 곤란하니까, 미리 호수에 가서 시범 운행을 해 볼까?
아리스의 제안대로 나는 갓 완성한 카누를 들고 호수로 향했다.
통나무의 대부분을 비워 내서인지 카누는 그리 무겁지 않아 나 혼자서도 충분히 옮길 수 있었고, 호수 위에도 혼자서 문제없이 뜨는 걸 확인했다.
호수 위에 보트가 떠 있는 모습은 참 보기 좋네.
그럼, 이제 사람이 타도 문제없는지만 확인하면 되는데.
“첫 번째는 나!”
내가 먼저 카누에 오르기도 전에 아리스가 포르르 날아들어 카누 위에 올라탔다.
카누는 순간 무너질 듯이 출렁였지만, 금세 균형을 되찾았다.
“흔들흔들해서 재밌어!”
“그렇게 막 흔들지 마. 진짜로 침몰하면 어쩌려고?”
나는 슬며시 아리스의 뒤를 따라 카누에 올라타며 그렇게 말했고, 블랑카의 반대편에 털썩 걸터앉아 노를 손에 쥐었다.
아리스 또한 내 모습을 지켜보며 마법으로 노를 가져와 내 자세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오오, 움직인다!”
조심스럽게 노를 젓자 카누가 고요히 호수를 나아가기 시작했다.
“으음…….”
하지만 아리스는 날개로 노를 젓는 게 불편한지 마법으로 노를 움직이려고 하다,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짓궂은 미소를 씨익 지었다.
“……?”
내가 그런 아리스의 웃음에 의아해하는 사이, 아리스는 나를 바라보며 다리로 노를 붙잡았다.
마치 손을 사용하듯 아리스는 자유롭게 다리를 써서 노를 젓기 시작했다.
기인열전에나 나올 법한 감탄스러운 모습이었지만, 나는 순전히 그런 아리스의 모습에 감탄할 수 없었다.
내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건, 아리스가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흘끗흘끗 엿보이는 깃털 사이에서 드러난 자연산 절대 영역 때문이었다.
눈길을 주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눈길이 가는 광경.
“히힛.”
아리스는 노골적으로 다리를 움직이며 내게 자신의 매력을 과시했고, 나는 새빨개진 얼굴로 가만히 아리스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있지, 잉간.”
“어, 응?”
“조금 진정시켜 줄까?”
아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노 한쪽을 놓고 다리를 까닥까닥 흔들었고,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호수에서 아리스의 발재간을 경험하는 것으로 카누의 성능 테스트는 완전히 끝이 났다.
이제 남은 건 이 카누를 타고 바다로 나가는 일뿐이다.
그리고 드디어 빛의 기둥을 발견한 지 3일째 되는 날이 되어서야 우리는 카누를 타고 바다로 나갈 수 있었다.
“이, 이거 안전한 거 맞지?”
“괜찮아. 물에 빠져도 아리스가 도와줄 거야.”
“이거 생각보다 엄청 튼튼해! 막 엄청 덜컹거려도 침몰 안 하더라고!”
“그, 그래?”
아리스가 경험에 기초해서 인간형 상태의 블랑카를 안심시키는 사이 나는 천천히 노를 저으며 빛의 기둥을 향해 나아갔다.
사실 바다라고는 해도 그렇게 파도가 심한 편이 아니어서 거대한 호수를 나아가는 기분이 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빛줄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는 작은 섬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동화 속에 나오는 보물섬 같은 모습에 나는 더욱 노를 젓는 손에 힘을 넣었다.
“도착!”
“으엑…… 덜컹거려…….”
“도착!”
섬 위에 발을 들인 내 첫 감상은 무언가 위태위태하다는 것이었다.
뭔가, 단단한 지면이 아닌 무언가 위에 둥둥 떠 있는 발판을 밟고 있는 기분인데.
혹시 모르니까 빨리 빛의 근원만 찾아내고 후퇴해야겠다.
빛의 근원을 찾아내는 건 무척 간단했다.
얼마 크지도 않은 섬 한가운데에서 빛을 뿜어내고 있는 보물 상자가 있었으니까.
보물 상자는 별다른 잠금장치 없이 내가 건드리는 것만으로 빛을 뿜어내며 열렸다.
좋아, 이 안에는 뭐가 들어 있을까?
이렇게나 뭔가 있어 보이는데 뭐 대단한 게 들어 있겠지?
나는 그런 기대를 하며 보물 상자 안을 들여다봤지만.
“……응?”
보물 상자 안에는 대량의 젤리들만이 들어 있을 뿐이었다.
젤리……?
* * *
“오옷! 잉간이가 드디어 인공 섬 위에 도착했어요!”
클라인은 잉간이가 수제 보트를 타고 인공 섬에 도착하는 걸 보며 밝게 미소 지었다.
그래, 역시 동기를 부여해 주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다니까.
클라인이 설치한 인공 섬은 애완 인간용 장난감으로 자주 쓰이는 상품.
섬 가운데에 빛나는 보물 상자가 위치해 있어서 인간형 생물들의 흥미를 높이는 제품이다.
콘트라 프리 로딩이라는 개념을 알고 있는가?
행동 풍부화의 한 개념인데, 대부분의 생물들은 비효율적이더라도 자신이 직접 얻어 낸 먹이를 더 선호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보물 상자형 장난감에 먹을 것을 넣어 두면 사료를 잘 먹지 않던 인간형 생물이어도 금세 사료를 섭취하는 일이 일어난다.
그렇지만 이런 식의 장난감을 활용한 흥미 유도는 보상이 중요한데, 만약 제대로 된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때 사용한 흥미 유도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클라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이번 보상에는 특별히 신경을 많이 썼다.
“평소에 주던 사료의 5배는 되는 양이에요! 잉간이가 좋아하겠죠?”
벌써부터 신나서 집 한구석에 사료를 쌓아 둘 잉간이의 모습을 상상하니 클라인의 입가가 저절로 구부러진다.
클라인은 그렇게 기대하며 잉간이를 관찰했지만, 차원항 안에선 클라인의 상상과는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 어라?”
잉간이가 상자 안에 든 보상을 확인하더니, 확연히 실망한 기색으로 한숨을 내뱉은 것이다.
뭐, 뭐지?
사료가 질린 건가?
식욕은 보통 대부분의 생명체에게 가장 강력한 욕구일 텐데?
클라인이 당황하며 잉간이를 지켜보는 와중에도 잉간이의 기분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 이럼 안 되는데?
이렇게 되면 잉간이가 앞으로의 흥미 유도에 관심을 잃고 반응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건 그리 좋은 현상이 아니다.
뭔가, 뭔가 잉간이가 충분하다고 느낄 만한 보상을 선물해 줘야 하는데…….
당황한 클라인은 서둘러 주위를 살펴보며 잉간이가 좋아할 만한 물건을 뒤졌고, 그러는 와중에도 잉간이는 사료를 들고 후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마침내 잉간이가 보트에 올라타 섬을 떠나기 직전, 클라인은 간신히 잉간이가 좋아할 만한 물건을 찾아냈다.
“이, 이거다!”
그래, 이거면 잉간이가 좋아하겠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호의와 함께 차원항 안으로 새로운 보상을 집어넣었다.
98화 잉간이를 위한 외부 적응 훈련, 1일 차!
젤리다.
아무리 봐도 젤리다.
뭐 다른 효과가 있는 젤리들인가 싶어서 이리저리 뜯어봐도, 평소에 먹던 바로 그 젤리다.
이게 왜 여기 들어 있어?
설마 이게 끝이야?
정말로?
나는 클라인이 그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을 거라 믿으며 보물 상자 안의 내용물을 탈탈 털었지만, 정말로 젤리 이외의 것은 나오질 않았다.
“진짜, 진짜로? 이거밖에 없다고?”
“뭐, 당연히 대단한 게 들어 있을 리 없잖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 뭔가, 뭔가 성의라도 있어야지 이건…….”
아니, 나도 당연히 이 섬과 보상을 전부 클라인이 준비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뭔가 기분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알면서도 속아 주는 뭐 그런 거.
그렇게 속아 주면서 생고생을 하며 굳이 배까지 만들었는데, 고작 보상이 평소에 먹던 젤리 여러 개?
솔직히, 그냥 요상하게 생긴 돌멩이 하나만 들어 있었어도 분위기가 살아서 만족했겠는데, 이건 좀 너무 성의가 없는 거 아냐?
나는 그런 불만을 가지고 하늘을 올려다봤지만 반응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에휴, 그래. 충분히 즐겼으니 됐다.”
그래, 여기까지 오면서 재밌게 잘 즐겼잖아?
그거면 된 거야.
나는 그렇게 투덜거리며 젤리들을 주섬주섬 챙겨서 보트로 돌아가려 했지만, 번쩍하고 허공에서 촉수가 나타났다.
“:-0”
우물쭈물하는 듯한 목소리를 내며 촉수는 조심스럽게 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보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니까 급하게 준비라도 한 걸까?
촉수가 내게 내민 보상은 포장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정보 덩어리였다.
“:-u”
마치 휘파람을 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오고, 나는 조심스럽게 촉수가 내민 정보 덩어리를 받아 들었다.
이게 도대체 뭔데 그래?
내가 의아해하며 정보 덩어리를 관측하자 정보 덩어리는 꿈틀대며 나에게 익숙한 모습으로 외형을 바꿨다.
그렇게 모습을 바꾼 정보 덩어리는, 컴퓨터에 이어서 내게 익숙한 형태가 되었다.
“스마트폰?”
그래, 클라인이 내게 건넨 보상은 스마트폰이었다.
아니, 이게 진짜 스마트폰은 아닐 테고 다른 무언가가 분명하긴 할 텐데, 도대체 정체가 뭐지?
[반려넷 휴대용 단말기 설치 완료]
그리고 그 정체는 잠시 후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에 의해서 밝혀졌다.
반려넷 휴대용 단말기?
슬쩍 스마트폰을 건드려서 켜 보니, 익숙한 페이지가 화면에 주르륵 떠올랐다.
와, 이걸로 이제 집 밖에서도 반려넷을 즐길 수 있어!
“:-3”
선물이 마음에 드냐는 듯 클라인의 촉수가 내 주위를 돌아다니며 내 상태를 살피려는 듯 움직인다.
그런 촉수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으면서 촉수를 쓰다듬었고, 촉수는 기분 좋은 것처럼 내 손길을 즐겼다.
“그래, 이 정도면 선녀네.”
그렇게 촉수는 안심한 듯 어항을 빠져나갔고, 블랑카와 아리스는 내 손에 들린 휴대용 단말기에 관심을 가지며 다가왔다.
“잉간, 그게 뭐야?”
“반려넷. 그걸 집 밖에서도 사용할 수 있게 해 주는 거?”
“으음…… 그래?”
그렇지만 블랑카와 아리스에게는 그리 끌리는 보상이 아니었는지 둘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젤리를 가득 품 안에 안고 카누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다시 육지로 돌아와서 잠깐 바닷가에서 휴식을 취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물론, 휴대용 단말기를 얻은 김에 반려넷에 글을 올리는 것도 잊지 않고 말이다.
[바다 왔음]
-비 엄청나게 오더니 집 앞에 바다 생김.
(바다를 배경으로 V 자가 찍힌 사진)
[댓글]
-? 바다? 호수가 아니라?
-ㅇㅇ 바다
-그거 조심해라. 좋다고 놔두면 이제 자고 일어나면 집 앞에 화산도 생긴다.
-우리 이쁜이는 손도 이쁘네 ^^
성욕에 미친 유니콘이 댓글을 단 것 같지만, 그건 무시하고.
“에이, 설마.”
설마 화산이 갑자기 집 앞에 생겨나기야 하겠어?
주인 녀석이 생각이 있다면 그런 짓은 저지르지 않겠지.
[나도 집 앞 풍경 찍어서 올린다.]
(용암지대와 바다, 숲, 사막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지옥도를 찍은 사진)
-X발. 처음에 사막 생겨났을 때 좋아하는 게 아니었어.
[나도 집 앞 사진 찍어 올린다 ^^]
(청소가 하나도 안 되어 있는 오물투성이의 방 안 사진)
-착각인진 몰라도, 요즘에 저 쓰레기들이 살아 움직이려는 것 같다…….
[댓글]
-우화등선하더니 치매 걸림?
-아니, 진짜로 내 눈앞에서 움직일 때가 있다니까?
다들 딱히 나누고 있던 이야기가 없던 걸까?
내가 올린 사진을 보고 두런두런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더니, 다들 하나둘씩 자기 집 앞의 사진을 반려넷에 올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보니까 나처럼 자연환경이 그나마 갖추어진 사람은 극소수구나.
[이거 머에요?]
-모임 이거
[댓글]
-뉴비 왔냐?
-얘는 며칠 살 거 같냐?
-오늘 안으로 사라질 듯 ㅋㅋ
[뉴비들은 이 글부터 봐라]
-인류 해방 전선에 합류하라.
[댓글]
-인류 해방 전선이 모에요??
-‘인’
[정신을 차리니까 오크하고 한 방에 갇혔는데 어떻게 하죠?]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 글 남깁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댓글]
-오, 아랫글하고 서로 만났네 ㅋㅋㅋ
-둘이 이쁜 사랑 하세요 ^^
-죽이면 되지 뭘 고민하냐? 그린 스킨은 죽은 그린 스킨만이 착하다 ㅇㅇ
[정신 차리니까 여기사하고 한 방에 갇혔다. 나 좀 살려 줘라.]
-나진짜아무것도안하고밭에일하러가고있었는데갑자기정신차려보니여기사하고한방에갇혔다진심어떻게하냐?지금나노려보는게심상치않은데금방이라도나죽이러올거같음
[댓글]
-오크면서 여기사한테 겁을 먹네. 넌 그린 스킨의 수치다.
-아니지금마력검만들어서나노려보고있다니까?농부가어떻게기사를이겨요.
-이쁜 사랑 하면 되겠네.
-윗글하고 만났네 ㅋㅋㅋ
[여기가 그 신들의 전장 맞나요?]
-맞죠??
[댓글]
-그 행성 출신 또 왔네
-‘그 행성’
-너 백은 기사단의 블랑카라고 아냐? 그 새끼 도배글 X 같으니까 좀 닥치라고 말 좀 해 줘라.
그런데 게시 글들을 보다 보니, 뭔가 분위기가 바뀌는 걸 느낀다.
뭔가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 많아진 느낌?
전에는 보던 사람들만 보였는데, 지금은 딱 봐도 막 들어온 느낌이 나는 사람들이 많다.
반려넷이 설치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걸까?
그렇다는 건 주인 녀석들에게 반려넷이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일까?
그리고 어쩌면, 인간을 키우는 것이 저들 사이에서 꽤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또 하나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신입들이 늘어난 만큼 인류 해방 전선들 또한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인류 해방 전선에 합류하라]
[인류 해방 전선에 합류하라]
[인류 해방 전선에 합류하라]
[ㄴ인류 해방 전선일시 오늘 따듯한 밥 먹음]
[인류 해방 전선에 합류하라]
[인류 해방 전선에 합류하라]
어찌나 그 수가 늘어났는지 한 페이지 전체가 인류 해방 전선의 도배로 뒤덮일 정도다.
새롭게 늘어난 신입들을 그때 내가 봤던 것처럼 세뇌시키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인류 해방 전선의 목적이 무엇인지 감도 잡히질 않는다.
자기들 말로는 주인을 죽이는 방법을 알아내는 게 목적이라는데, 솔직히 하는 짓을 보면 그냥 생떼 부리는 아이들처럼 느껴진다.
[이거 행동 풍부화냐?]
-3일째 감자칩만 식사로 나온다. 심지어 물은 뭐 이상한 잠금장치 걸려 있는 상자 안에 들어 있다…….
[댓글]
-그건 행동 풍부화 아님. 고문이라고 하는 거임 ㅇㅇ
[땅콩? 그거 없어도 살 만하더라?]
-이젠 성욕이 뭐였는지도 기억 안 난다. 더러운 땅콩이 떼어지고? 귀여운 모습이 됐으니 이득이 아닐까?
[댓글]
-너 어제까지는 땅콩 다시 붙이려고 연금술 시도하지 않았냐?
-└안 되는 걸 되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수긍하고? 사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쓰니야?
그런데 인류 해방 전선의 세뇌는 저 늘 보이는 원로 멤버들에겐 통하지 않는 걸까?
어째 저 원로 멤버들은 세뇌를 당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네.
아니, 그것보다 인류 해방 전선은 세뇌를 어떻게 하는 거지?
막, 그 벌레를 다른 사람에게 직접 보내는 건가?
그런데 인류 해방 전선은 도대체 어떻게 그런 기술을 가지고 있는 걸까?
그리고, 어째서 주인 녀석들은 분명히 녀석들이 쓰는 글이 어떤 내용인지 알면서도 인류 해방 전선을 놔두는 걸까?
반려넷을 인류 해방 전선이 만들었을 리는 없잖아?
진짜, 인류 해방 전선은 생각하면 할수록 의문만 늘어 간다.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르고,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게시판에서만 떠드는 녀석들이면 좋은데 세뇌라는 이상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더더욱 골치가 아프다.
“으아, 모르겠다!”
지금은 당장 주인 녀석과 대화를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인간 해방 전선인지 뭔지는 나중에 클라인에게 물어보는 걸로 하자고.
그렇게 생각하며 우리는 카누와 휴대형 단말기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고, 나는 다시 슬슬 농장을 가꾸는 일에 집중하려 했다.
하지만, 뭔가가 이상하다.
평소처럼 잠에서 깨어나 씻고 밥을 준비하려고 했는데, 평소와 다를 건 하나도 없었는데.
어째서인지 갑자기 하늘에서 젤리가 떨어졌다.
평소처럼 내가 뭔갈 해내서 그 보상으로 받은 것도 아니고, 클라인이 실수한 것도 없던 거 같은데.
아무 전조 없이 젤리가 그냥 툭 떨어졌다.
갑자기 뭔데?
뭐, 그냥 젤리를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수도 있다.
내가 워낙 매력적이어야지.
근데, 이건 좀 선을 넘었다고 생각한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젤리가 하나, 둘, 셋, 넷…….
이젠 수를 셀 수도 없을 정도로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한다.
내 눈앞에 젤리의 산이 만들어져 가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이젠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뭔데?
도대체 뭘 하려는 건데?
너 평소에는 이러지 않잖아?
도대체 나에게 뭘 시키려고, 이렇게 젤리를 많이 던져 주는 거야?
그리고 클라인은 그런 내 의문을 거대한 젤리 산 옆에 작은 차원 문을 여는 것으로 답했다.
* * *
“안녕하세요, 차원항 장인! 클라인입니다! 오늘 제가 준비한 콘텐츠는요, 살짝 잉간이에게 미안할 수도 있는 콘텐츠랍니다?”
클라인은 카메라 앞에서 차원항 안으로 대량의 젤리를 집어넣으며 촬영을 시작했다.
“오늘 잉간이가 좀 고생할 수도 있으니, 미안하다는 의미에서 사료를 잔뜩 선물해 줄 생각이에요.”
지금까지와는 다른 패턴으로 사료를 선물해서 그런 걸까?
잉간이는 갑자기 쏟아지는 사료들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도대체 오늘 제가 잉간이와 할 훈련이 무엇이냐! 바로, 차원항 밖에 익숙해지는 적응 훈련입니다!”
클라인이 오늘 준비한 것은, 잉간이를 외부 세계에 익숙해지게 하기 위한 훈련.
잉간이는 이제 클라인의 손길에는 익숙하지만, 아직 차원항 바깥의 환경에는 그리 익숙하지 않다.
나중에 잉간이가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훈련이다.
평생을 차원항 안에서 살아가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 외부 적응 훈련은요, 반드시 핸들링 훈련이 제대로 된 인간들에게만 진행하셔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과도한 스트레스 때문에 인간의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답니다?”
그것 말고도 생활환경에 인간에게 유해한 것들이 있는지 확인하고, 다른 정보 생명체나 거대 차원 생물들을 키운다면 절대 진행해서는 안 되는 훈련이다.
특히, 정보 생명체를 키운다면 밖으로 나온 인간에게 기생할 가능성이 있으니 더더욱.
“이 외부 적응 훈련은요, 키우는 인간이 탈출했을 때를 대비한 훈련이랍니다. 이런 훈련을 시키면 오히려 더 탈출이 쉬워지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실 수 있는데. 그렇지 않아요. 인간형 생물이 차원항을 탈출하는 원인은 크게 여러 가지가 있는데요. 제일 큰 건 역시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차원항 안의 환경에 문제가 있을 경우예요. 그리고 그다음으로 많은 것이 외부 환경에 대한 호기심이죠.”
클라인은 그렇게 말하며 카메라로 집 안의 풍경을 비추었다.
“보다시피, 차원항 밖은 인간형 생물들이 살아가기 그리 좋은 환경이 아니잖아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어쩔지 몰라도, 외부 환경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밖으로 탈출하는 경우에는 이런 훈련을 진행시키면 흥미를 잃는 경우가 대다수예요.”
클라인은 그렇게 말하며 슬며시 잉간이 옆에 차원 문을 만들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자, 저는 이렇게 잉간이가 차원항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통로를 열어 두고 잠시 자리를 비울게요! 잉간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네요!”
클라인은 그렇게 말하며 방 안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조심스럽게 방 밖으로 나왔다.
괜히 잉간이가 자기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끔 말이다.
그리고 잠시 후, 차원항 밖으로 연결된 차원 문에서 잉간이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99화 지구산 인간과 차원 파괴자의 공생 관계, 쥬튜브 최초 공개!
이게 뭘까?
어디론가 통하는 차원 문 같은데, 아리스가 만들던 것과는 다르게 그 너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일단 뭐 용암지대나 물속으로 연결된 건 아닌 것 같다.
그랬으면 벌써부터 차원 문을 통해서 물과 용암이 잔뜩 쏟아졌을 테니 말이다.
“잉간! 무슨 일이야?”
“어, 그게.”
젤리가 쏟아지는 모습을 아리스도 봤는지 내 이름을 부르며 젤리의 더미 사이로 달려왔다.
아리스 또한 젤리 사이에 모습을 드러낸 차원 문을 보며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차원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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