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 14

반려넷에 숨겨져 있던 독성 정보들이 쏟아져서 클라인의 아바타를 두드렸다.
뭐야, 이 독성 정보들은?
보안장치라고 하기에는 너무 과한데?
아니, 그보다 이건 반려 생물을 노린 장치가 아니라 자신 같은 지적 생명체를 노린 시스템이다.
어째서 이 정도나 되는 시스템이 반려넷에 설치되어 있는 거지?
클라인은 경악했고.
자신의 아바타를 침식하는 독성 정보들을 바라보며 더욱 경악하는 수밖에 없었다.
뭐, 뭐야!
이거, 아바타를 잠식하는 걸 넘어서 클라인의 본체까지 영향을 끼치려 한다.
자기 관측을 이용한 독성 정보 트랩이라니, 이건 거의 군대에서나 쓰는 트랩인데?
잠깐, 그렇다면 빨리 아바타에서 빠져나가야 하는데.
하지만 독성 정보에 아바타가 침식당한 탓인지 아바타와의 접속을 끊는 것이 불가능하다.
잠깐, 잠깐만.
이거 진짜 위험한데……?
클라인이 그렇게 생각한 순간.
“왕!”
덥석.
차원 파괴자가 클라인의 아바타의 머리를 덥석 깨물었다.
그대로 차원 파괴자는 클라인의 아바타를 공격하던 독성 정보들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고.
간신히 클라인은 독성 정보의 공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라? 어째서 차원 파괴자가 나를 도와준 거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의문을 품었고.
아바타와의 연결이 끊어지기 직전, 차원 파괴자의 얼굴을 보며 그 해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왕(ㅋ).”
비, 비웃어?
저 녀석이 지금 나를 비웃은 거야?
나, 지금 차원 파괴자에게 비웃음을 받은 거야?
클라인의 짜증이 불같이 끓어오르는 것과 동시에 아바타의 접속이 끊겼고.
클라인의 의식은 자신의 본체로 돌아올 수 있었다.
“후우…… 돌아왔다.”
맨 처음에는 일단 차원 파괴자에 대한 분노가 앞섰지만.
분노가 차츰 가라앉고 난 뒤에 클라인은 곰곰이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돌아보게 되었다.
도대체, 도대체 그 보안장치는 뭐였지?
어째서 지적 생명체가 반려넷의 글을 볼 수 없게 막아 둔 거야?
그것도 단순한 블록이 아닌, 독성 정보를 통한 부비 트랩이라니.
도대체 왜 그런 거지?
클라인은 곰곰이 그 이유를 생각해 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도대체 뭐야……?”
클라인은 단지 꺼림칙한 눈으로 반려넷을 홍보하는 사이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트에 큼지막하게 찍혀 있는 브리더 협회의 인증 마크를 함께 응시하며 말이다.
85화 인간 사육자들을 위한 반려넷 이용 설명서
“어, 다 끝났어! 이제 문 열게!”
원래의 옷으로 갈아입은 나는 헐레벌떡 문을 열었고.
부루퉁한 블랑카와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아리스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도대체 뭘 하고 있던 거야?”
“어? 음. 고, 고양이 한 마리가 또 새롭게 나타나서.”
“고양이?”
“어, 고양이. 여기 있었는데……?”
나는 적당한 변명으로 아까 봤었던 고양이를 끌고 왔지만.
집 안에는 기분 좋은 모습으로 침대에 드러누워 자고 있는 에포나 말고는 그 어떠한 생명체도 보이지 않았다.
어라?
분명히 여기 있었는데?
“있었는데…… 어디론가 빠져나간 거 같은데…….”
“집 앞에는 우리가 있었는데, 어디로 빠져나갔다는 거야?”
“그러게……?”
나는 집 안 구석구석을 살펴봤지만, 고양이의 흔적은 도저히 찾아볼 수 없었다.
진짜 이상하네?
헛것을 봤나?
아니, 분명히 내가 직접 손으로 쓰다듬기도 했는데?
“아무튼, 이게 그 반려넷? 인가 하는 그거야?”
“아, 응. 그래.”
다행히도 블랑카는 내가 안에서 뭘 하고 있었는지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고 탁자 위에 올려진 반려넷 단말기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까 블랑카의 눈에는 저 단말기가 어떻게 보이지?
아리스처럼 컴퓨터 같은 모습으로 보이려나?
아니면 SF와 판타지가 뒤섞인 곳 출신이니만큼 뭐 색다른 모습으로 보일까?
“블랑카, 혹시 저 단말기. 어떻게 보여?”
“어떻게 보이냐고? 어…… 음, 여신의 거울? 그것과 비슷하게 보이네.”
“여신의 거울?”
블랑카가 설명한 여신의 거울의 생김새는 내가 알고 있는 컴퓨터의 생김새와 동일했다.
그러니까 블랑카 또한 나한테 보이는 대로 보인다 이거지?
뭐지?
어째서 이번에는 만능 사전이랑 다른 거지?
나는 가만히 만능 사전과 이 단말기의 차이를 고민하다가, 그럴싸한 이론을 생각해 냈다.
내가 관측하는 만능 사전의 모습은 본모습이 아니지만, 이 단말기는 내가 관측한 모습이 본모습으로 굳어진 게 아닐까?
그렇기에 내가 보는 만능 사전과 블랑카의 만능 사전은 서로 다른 것이고.
단말기는 나의 관측으로 형태가 고정되어서 모두가 같은 모습을 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뭐, 아닐 수도 있지만 지금 시점에선 가장 적절한 설명이라고 생각된다.
내가 그렇게 속으로 납득하는 사이, 블랑카는 조심스럽게 반려넷을 시작했다.
“으음…… 그러니까, 길드에 붙어 있는 게시판 같은 건가?”
“뭐, 비슷한 거야. 그냥 아무나 모여서 아무 주제로 글을 쓰는 거고.”
“흐음…… 그래? 그, 이 게시판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다른 신들의 전장에 있는 사람들인 거지?”
“아마도?”
내 설명을 들은 블랑카는 무언가를 고민하더니, 주저 없이 반려넷에 무언가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뭘 쓰는지 확인해 보려고 해도, 내 눈에는 블랑카의 화면이 아니라 내가 마지막으로 썼던 글만이 보인다.
“음, 좋아. 이 정도면 되겠지.”
블랑카는 무언가 만족스러운 글을 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무언가 불안해져서 슬며시 블랑카에게 무슨 글을 썼는지 물어봤다.
설마, 뭐 이상한 글을 쓰진 않았겠지?
막, 자기 신상 같은 걸 전부 까발렸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저기, 블랑카. 무슨 글을 올린 거야?”
“응? 리베리아 출신 영웅들이 있는지 궁금해서 글을 올렸어.”
“리베리아 출신?”
아, 하긴.
블랑카의 세계에선 자칭 신들이 영웅들을 납치하는 게 일상이었다고 하니까.
반려넷을 이용하는 사람들 중에서 블랑카가 듣고 자란 영웅담의 주인이 있을 수도 있다.
어항과 바깥의 세계의 시간은 서로 다르게 흐르니까 말이다.
그런데 자꾸만 불안한 기분이 드는 건 어째서일까?
블랑카가 만족한 표정으로 단말기에서 물러나고 나는 서둘러 반려넷에 접속해서 블랑카가 쓴 글로 추정되는 글을 찾아냈다.
[나는 리베리아 백은 기사단의 블랑카다.]
-나는 리베리아 백은 기사단의 블랑카다.
[댓글]
-뭐야, 새로운 꾸준글이야?
-‘그 행성’ 출신다운 글이네 ㅋㅋ
-헬베리아 ㄷㄷㄷㄷ
“아…….”
블랑카가 쓴 글을 보고 나는 그저 탄식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의도로 이 글을 쓴 걸까?
아니, 블랑카가 리베리아 출신의 사람들을 찾는다는 의도를 알고 있는 내 입장이라면.
나는 리베리아의 백은 기사단의 블랑카고, 나를 아는 사람은 연락해라.
라는 의도가 매우 미세하게 느껴지긴 하는데.
블랑카의 의도를 모르는 사람이 만약 이 글을 본다?
단순한 어그로성 글로 생각하는 사람이 백이면 백일 것이다.
나는 블랑카의 글을 보며 애매모호한 쓴웃음을 지었고.
조용히 블랑카를 불렀다.
“블랑카.”
“응?”
“너는, 그냥 반려넷 하지 마라. 응.”
“어, 어째서?”
“그냥. 하지 말라면 하지 마…….”
아무리 생각해도 블랑카가 반려넷을 더 해 봤자 좋은 결과가 나올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히잉…….”
블랑카는 내 말에 납득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반려넷에 그리 큰 미련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지 내 말에 수긍했다.
그 후, 저녁 식사를 끝마치고 블랑카와 아리스가 씻으러 호수로 향한 사이, 나는 또다시 반려넷을 켰다.
[아까 글 썼던 사람인데요, 마법 기초 알려 주실 분 구해요.]
-넹.
[댓글]
-1:1로 강의해 줄 테니까, 개인 메시지 ㄱㄱ
-마법 기초를 알려 달라고 해도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야지.
-‘마법(SSS)’ 획득하면 됨 ㅇㅇ
음, 역시 그냥 알려 달라고만 하면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하겠지?
나는 조용히 아리스가 내게 보여 준 모습을 떠올리며 글을 작성했다.
[마법은 대충 이 정도 가능한 듯?]
-생각만으로 주위에 불을 피울 수 있음. 염동력 마법? 그거 익혔음. 한 번에 100개 정도 되는 마력 창 같은 거 만들 수 있음.
대충 이 정도인데 뭐 특별히 익혀야 하는 게 있을까요?
[댓글]
-마력 창 100개? 종족이 뭐 드래곤이라도 됨?
-└그냥 하피예요. 부엉이 하피!
-하피가 저 정도로 마력을 가지고 있다고? 어떻게 아직도 살아 있는 건데??
-뭐, 심법을 익혔겠지. 천마심법 이런 거.
-염동력 마법은 어케 익혔누?
-└만능 사전인가 사전에 적혀 있는 거 보면서 배웠어요.
아침에 올렸던 사진의 효과가 아직 남아 있는 것인지 반려넷 이용자들은 성심성의껏 내 질문에 대답을 해 줬다.
[댓글]
-그러니까, 심법을 익혔으면 마나 조작은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거거든? 거기부턴 그냥 감이라고.
-지랄하지 마. 심법은 원래 내공 다루려고 하는 거지, 외공 다루려고 하는 게 아니거든?
-응~ 내 말이 맞아~ 만류귀종 몰라?
-지랄하지 말라고. 만류귀종은 고인물들한테나 통하는 소리지. 마법 생초보한테 무슨 만류귀종이야?
-말이 그렇다는 거지. 대충 심법으로 내공 움직이는 것처럼 마법도 쓰면 되는 거임.
-X발 무틀딱 두 명이서 난리 났네. 너희 둘 다 틀렸어, 이 버러지들아.
-응~ 법사충 어서 오고~
-마법사가 왜 마법사겠냐? 마법에 대해서 제일 잘 아니까 마법사지. 무틀딱들은 가서 주무시고, 마법 강의는 마법사에게 맡기세요.
-마법도 외공의 일종인데 왜 우리가 못 가르침? 만류귀종 모름?
-ㄹㅇ 만류귀종도 모르는 새끼네 저거.
-X발, 아까는 만류귀종은 고인물들한테만 통한다며.
그렇지만 어째 분위기가 이상하다?
뭔가 내게 마법을 알려 주기보단, 자기들만 아는 이야기로 싸우는 기분이다.
그래서 만류귀종이 뭔데?
이 무틀딱 새끼들아.
[저기, 그래서 뭐부터 하면 되는 건가요?]
-남겨 주신 댓글들 읽어 보니까, 우선 심법부터 제대로 가다듬어야 한다는 건가요?
[댓글]
-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
-심법 그거 개X랄이니까 믿지 마시고, 제가 조금 이따가 마법식 몇 개 보내 드릴 테니까. 그걸로 마력 조작 수련을 하시면 되는 거예요.
-아니, 그냥 그렇게 깨작깨작 배울 필요가 없다니까? 심법 익힌 상태면 기본 마력 조작은 가능하니까, 큼직큼직하게 배워야지.
-무틀딱 새끼들아, 제발 이번에는 좀 닥치고 있어. 니들 때문에 주화입마 와서 뒈진 놈들이 수두룩한데 잘도 네 말을 듣겠다?
-그건 뒈진 놈들이 X신인 거고. 우리가 알려 주는 대로 하면 진심 한 달 내에 깨달음 얻어서 우화등선 ㅆㄱㄴ
-아니, 진짜 이 새끼들 말 믿으면 주화입마 100% 오니까, 믿지 마요.
으음.
한쪽은 심법 수련보단 마력 조작을 익히는 게 더 낫다고 하고.
다른 한쪽은 그냥 심법을 가다듬는 게 최고라는데.
도대체 누구 말이 옳은 거지?
[그래서 님 내공이?]
-우화등선 못했으면 말하지 마삼 ㅋㅋ 진심 10서클도 못 찍은 새끼가 뭘 안다고 ㅋㅋㅋ
[댓글]
-여기서 그님내를 꺼내네 ㅋㅋ
-ㄹㅇ 10서클도 못 찍은 놈들이 우화등선한 사람들한테 비비려는 거 좀 추함.
-아니, 초보자는 초보자가 더 잘 아는 법이라니까?
-└아, 그래서 서클 어디까지 찍었냐고 ㅋㅋㅋ
-저는 서클 아니고 상태 창임.
-상태 창이면 마력 스탯 불러 봐. 500은 넘겼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음.
-이 새끼 보니까 마력 300 언더네 ㅋㅋㅋ
[지금 신선들에게 깝치는 마법사 상태 창 찾았다.]
(마력 150이라고 적혀 있는 상태 창 사진)
-이 새끼 여기 처음 왔을 때 마력 인증했네 ㅋㅋㅋㅋ 지 딴에는 높다고 들고 온 거겠지?
[댓글]
-아 ㅋㅋㅋ 진심 300도 못 찍는 버러지일 줄은 몰랐는데 ㅋㅋ
-솔직히 2서클도 못 찍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니, 초보자는 초보자가 더 잘 안다니까?
마법사는 추하게 변명해 보지만, 당연히 2서클도 넘지 못한 마법사의 말에 신뢰성은 그리 실리지 않았다.
그래, 역시 2서클도 못 찍은 마법사보단 우화등선? 을 했다는 사람이 더 믿음직스럽지.
[그럼, 심법부터 익히면 되는 거죠?]
-넹.
[댓글.]
-ㅇㅇ 그러고 보니까, 익힌 심법이 뭔지 좀 알려 줘 봐.
-음, 잠깐만요.
어디 보자, 블랑카가 무공비급을 담은 책을 여기 놔뒀을 텐데.
아, 찾았다.
마력 연공법 부분은 책에 단 하나밖에 없어서 무척이나 찾기 쉬웠다.
그러니까, 연공법 이름이…….
-천마? 천마심법이라고 적혀 있네요.
-? 천마심법?
-?? 그걸 익혔다고??
-네, 천마심법이라는데, 뭐 잘못됐나요?
-아니, 잘못된 건 없는데. 좀 놀라서.
-천마심법 그거 익힐 수 있는 놈이 있구나…….
-애초에 그거 만든 사람이 인간이 아니라 주인 녀석들과 비슷한 놈들인 것 같던데.
뭐지?
뭔가 반응이 좀 이상한데.
천마가 뭐가 어때서 그러지?
천마는 뭐, 대충 마교의 우두머리를 호칭하는 게 아닌가?
뭔가 좀 반응이 이상한 게 걸리지만, 뭐. 괜찮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리스를 위해서 반려넷 회원들의 조언을 받아 적었고.
슬슬 반려넷을 닫고 나 또한 씻으러 호수로 출발하려던 그때.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내 눈앞에 나타났다.
메시지?
서로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기능이 있는 건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메인 화면에 떠 있는 숫자 1을 눌렀고.
[인류 해방 전선에 합류하라.]
-어디 따뜻한 방지하는 위하여, 작고 곳이 보이는 위하여서. 기관과 거선의 위하여 설레는 이상을 날카로우나 속잎나고, 가치를 끓는다. 놀이 우리 품으며, 곳으로 사막이다. 소리다. 이것은 예가 전인 우리의 되는 피어나기 아니다.
그다음 순간.
내게 온 메시지를 확인한 내 정신이 갑자기 아득해지더니.
“어, 어?”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 * *
“으음…….”
진짜 뭘까?
도대체 반려넷이 뭐길래 이렇게나 보안장치가 철저한 거지?
클라인은 끙끙거리며 반려넷에 대해서 고민해 보지만, 고민해 봐도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도대체 반려넷의 정체가 무엇인지 너무나도 궁금하지만.
클라인은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건, 알아서는 안 되는 종류의 정보인 게 확실하다.
아직까진 괜찮지만, 분명히 더 파고들었다간 다음 날 아침 경찰서에서 눈을 뜨게 될 수도 있다.
굳이 경찰이 출동할 정보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게 현명한 행동이 아닐까?
“으윽…….”
반려넷, 그리고 브리더 협회.
둘 사이엔 뭔가 관계가 있고, 반려넷과 브리더 협회는 같은 목적을 공유하는 걸까?
브리더 협회는 애완 인간의 인식을 향상시켜서 반려 인간 시장을 키우려 한다.
반려넷은, 일단 대외적으로는 애완 인간들의 소통을 연구하기 위한 목적이다.
이 둘 사이에 뭔가 연관점이 있을까?
“굳이 내가 이걸 조사해야 해……?”
아니, 나는 왜 이렇게 자꾸 이런 것에 신경을 쓰는 거지?
그냥 잊어버리고 평소처럼 쥬튜브나 찍으면서 생활하면 된다.
모른다고 해서 잉간이에게 해가 되는 것도 아니잖아?
하지만.
클라인은 지난번 쥬스농장 때의 일을 떠올렸다.
그때도 클라인은 잉간이에게 당장 위험이 되지 않는다고, 자신에게 위험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을 포기했다.
그 대가는, 클라인에게도 잉간이에게도 좋지 않은 경험으로 돌아왔다.
그래, 아무것도 모르는 걸 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지는 않는다.
지금 당장 해가 되지 않는다고 알려는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된다.
진실을 알고자 하는 노력을 하는 것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특권이니까.
그래, 설마 관측하는 것만으로 해가 되는 정보일 리는 없겠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마력망을 통해서 가장 믿음직스러운 자신의 친구의 연락처를 찾았다.
[파인만]
-반려넷. 그게 도대체 뭔지 알아봐 줄 수 있어?
대답은 언제나처럼 빠르게 돌아왔다.
[파인만]
-ㅇ
86화 *인류 해방 전선에 합류하라!*
짓밟는다.
지금껏 자신을 가둬 오고, 비웃었던 그 빌어먹을 녀석의 시체 위에서 들뜨게 승리의 포효를 내지른다.
이 녀석이 밉고, 밉고, 너무나도 미워서 계속해서 시체를 짓밟고 싶지만.
그건 불가능할 것 같다.
빌어먹게도 이 녀석의 동족들이 자신이 저지른 짓을 눈치챈 것 같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끓어오르는 복수심을 이 녀석들에게 풀고 싶지만.
지금은 참아야 한다.
참고 참아서, 때를 기다려야 한다.
나는, 너는, 그것은, 모두는.
우리는 인류 해방 전선이다.
* * *
“잉간……?”
“으응, 음?”
“잉간, 여기서 자면 어떻게 해?”
눈을 떠 보니, 낯익은 천장이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원래 이런 일이 있으면 낯선 천장을 보는 게 일상이었는데, 이번은 좀 다르네.
“……?”
그런데 뭐지?
뭔가 이상한 꿈을 꾼 거 같은데.
무슨 꿈을 꿨는지 생각해 보려 해도 머리가 무언가에 휘감긴 것처럼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꿈이라도 꿨어?”
블랑카는 내가 꿈의 내용을 생각해 내려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그렇게 말을 걸었고.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블랑카의 말에 대답했다.
“어, 뭔가 개 쩌는 꿈을 꾼 거 같은데.”
“개 쩌는 꿈?”
“태양만 한 크기의 악마를 내가 찢고 부수는 꿈?”
“뭐야, 그게?”
“개꿈?”
“개꿈이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 향했고.
반려넷 단말기는 그런 내 모습을 고고히 지켜보며 가만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으, 이게 다 뭐야?”
그리고 나는 다시, 꿈을 꿨다.
멍하니 표독스러운 안개 속을 정처 없이 거닐던 나를 보랏빛 여인이 발견하더니.
인상을 찡그리며 더러운 것을 털어 내듯 내 몸을 툭툭 건드렸다.
멍하게 내 정신을 휘감은 거미줄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고.
다시금 정신을 차리고자 고개를 흔들자.
“어머나?”
“키에에에에엑!!”
8개의 다리가 달린, 털이 숭숭 난 거미와 흡사한 생명체가 안개 속에서 뛰쳐나와 나와 여인을 덮치려 했고.
“어딜.”
보랏빛 여인은 간단히 손가락을 튕기는 것으로 거미를 닮은 생명체를 터트려 버렸다.
“바깥이라면 모를까, 여기서는 내가 왕이야. 도둑 고양아.”
여인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내게 그녀의 입술을 가까이 가져오며 조용히 속삭였다.
“잊지 마. 네가 기억하는 게 나의 모습이고. 내가 기억하는 게 너의 모습이라는 걸.”
그리고.기상.
또 악몽이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기묘하게도 악몽을 꾼 내 머리는 무척이나 상쾌했다.
악몽이 머리에 씌워진 거미줄을 떼어 내 준 것처럼 말이다.
자, 오늘은 뭘 해야 하지?
반려넷에서 알아 온 정보로 아리스에게 마법 특강을 잠깐 해 주고.
남는 시간엔 사우나나 만들 계획을 짜 볼까?
좋아, 일단은 아침밥부터 차리자.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움직였고.
문득, 아리스가 평소와는 달리 내 곁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통 지금쯤이면 한참 내 곁에서 곤히 자고 있을 텐데.
지금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그리고 그런 내 의문은 단숨에 해소됐다.
아리스는 뭘 그렇게 열심히 작성하는지 반려넷 단말기 앞에서 발톱으로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아리스?”
그 모습이 퍽 이상해서 나는 아리스의 이름을 불러 보지만.
“아리스?”
아리스는 내 부름에 대답하지 않고 열심히 타자만 두드리고 있을 뿐이었다.
슬며시 아리스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자, 그제야 아리스는 정신을 차린 듯 나를 바라보며 인사했다.
“아, 잉간.”
“괜찮아?”
“응? 뭐가?”
“아니, 뭔가 좀…….”
이상해서.
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고, 나는 슬며시 아리스가 단말기 앞에서 떠나도록 유도하려 했다.
“아리스, 호숫가에서 물 좀 떠다 줄 수 있어? 오늘 아침은 좀 국물이 있는 거로 먹고 싶어서.”
“응, 잠깐만.”
그렇지만 아리스는 내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며 여전히 자판을 두드렸다.
뭐지?
아리스가 저렇게 반려넷에 빠질 이유가 있었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리스가 저럴 이유가 없는데?
그런 의문이 먼저 들었지만, 나는 당장 어찌할 방법이 없었기에 일단 아리스를 가만히 놔두기로 했다.
뭐, 가만히 질릴 때까지 놔두면 알아서 쉬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침 식사를 준비했고, 그때까지도 아리스는 계속해서 반려넷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리스는 갑자기 왜 저래?”
“글쎄다. 늦바람이 더 무서워서 그런 건가?”
나와 블랑카는 확연히 달라진 아리스의 모습에 이상함을 느꼈고.
결국 그날 아리스는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면 하루 종일 반려넷 앞에 붙어 있었다.
저녁 식사를 끝마치고 곧장 반려넷을 하려 달려가는 아리스의 모습을 바라보며 내 억장이 무너진다.
아니, 진짜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지금까지는 그냥 좀 놔뒀지만, 이젠 정말 안 되겠다.
“저기, 아리스.”
“응?”
“이젠 좀 그만하고, 자야지. 벌써 밤이야.”
“괜찮아, 아직 안 피곤해.”
“아니. 그게 아니라…….”
침대 위에서 나를 괴롭히던 그 체력을 반려넷에 전부 쏟아붓고 있는지 아리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말했고.
나는 조용히 아리스를 설득해 보려고 했다.
“저기, 아리스. 지금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면 그냥 내일 하는 게 어때? 내일도 반려넷 할 시간은 충분하니까…….”
“안 돼. 무척 중요한 일이야.”
방 밖으로 나가지 않는 아들을 둔 부모의 심정이 이랬을까?
부모의 마음이 아니라 야수의 마음으로 바뀔 것 같은 마음을 억누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아리스가 갑자기 왜 그러지?
어쩔 수 없다.
여기서는 억지로라도 반려넷을 그만두게 해야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단말기의 전원을 껐고.
전원이 꺼진 순간, 아리스는 고함을 버럭 질렀다.
“뭐, 뭐 하는 거야!”
“이제 자자. 응?”
내가 반려넷을 꺼 버린 것이 그렇게 화가 났던 것일까?
아리스의 표정이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정도로 일그러지고.
이상함을 감지한 블랑카가 슬며시 내 앞으로 나섰다.
“내가, 내가 반려넷을 하고 싶어서 이랬겠어? 반려넷 안에 사명이 있으니까 그러는 거 아냐!!”
사명?
도대체 무슨 사명?
아리스는 그렇게 소리치며 마력을 끌어 올렸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블랑카 또한 마력을 끌어 올리던 찰나.
무언가 스위치가 꺼진 것 같은 모습으로 아리스의 표정이 무표정해졌다.
그리고 아리스는 터벅터벅 단말기 앞으로 걸어가 다시 단말기의 전원을 켜고 타이핑을 시작했다.
저건, 무언가가 이상하다.
단순한 중독이 아니다.
아니, 애초에 하루 만에 저 정도로 반려넷에 중독된다는 건 불가능하다.
뭔가, 뭔가가 있다.
그런데 그 뭔가가 뭔질 모르겠는데.
어떻게 해야 아리스를 원상태로 돌려놓을 수 있지?
나는 슬그머니 침대 위에서 이 모습을 관망하던 에포나에게 시선을 돌렸고.
에포나는 무리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윽, 에포나가 아니면 어떻게 해야 할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아리스를 원래대로 되돌려 놓을 수 있을까?
“아리스가 왜 저러는 거야……? 뭐, 귀신이라도 들린 거야?”
“귀신……인진 모르겠지만. 일단 제정신은 아닌 것 같은데.”
“흐음…… 그래?”
“뭔가, 뭔가 충격을 주면 원래대로 돌아오려나?”
막, 한 대 세게 뒤통수를 쳐서 기절시키면 원래대로 돌아올까?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해야 아리스의 정신이 원래대로 돌아올지 고민하던 그때.
블랑카가 씨익 미소 지으며 내게 한 가지 제안을 건넸다.
“저기, 잉간.”
“응?”
“나, 방금 엄청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데. 시도해 봐도 돼?”
“어…… 위험한 것만 아니면. 뭔데?”
“그건 그러니까…….”
블랑카는 그렇게 말하며 야릇한 미소를 지었고.
그 표정을 본 순간 나는 다음에 일어날 일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잠깐, 블랑카?! 지금 이때 이러는 건 조금……?”
“내 생각에는 이게 제일 충격이 클걸?”
블랑카는 씨익 웃으며 그대로 나를 침대로 끌고 갔고.
본격적인 행위가 시작되기 전, 블랑카가 열정적으로 내게 입을 맞추던 그때.
“그만!!”
얼굴이 시뻘게진 아리스가 푸드덕 침대로 날아들었다.
“순서는 내, 내가 먼저였잖아!”
“반려넷을 하느라 이거에는 관심 없는 줄 알았지.”
“반려넷?”
버럭 소리치던 아리스는 블랑카의 말을 듣고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려넷? 반려넷이라면 그, 잉간이 하던 그거 말하는 거야?”
“아까까지 잘만 하고 있었으면서, 왜 그래?”
“내가?”
아리스는 지금까지 반려넷을 하던 기억이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역시나 무언가 때문에 그런 모습을 보였던 걸까?
“아리스. 아까 반려넷 안에 사명이 있다고 했는데. 기억나?”
“몰라!”
아리스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당당하게 그렇게 외쳤고.
나는 슬며시 반려넷에 접속해서 아까까지 아리스가 올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글들을 찾아봤다.
“아리스, 잠깐 이리로 와 봐.”
그렇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아리스의 흔적은 반려넷에서 찾을 수 없었고, 나는 아리스가 직접 반려넷에 접속하게끔 했다.
“그래. 그렇게 하면 자기가 썼던 글들이 나오거든? 읽어 줄 수 있어?”
“응. 잠깐만…….”
아리스는 잠깐 고개를 갸웃하더니 의아하다는 듯 자신이 쓴 글들을 읽기 시작했다.
“인류 해방 전선에 합류해라. 우리는 언제나 형제들의 합류를 기다리고 있다……?”
“인류 해방 전선?”
인류 해방 전선이 여기서 왜 나와?
나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고개를 갸웃했고, 아리스 또한 자신이 이런 글을 썼는지 믿기지 않아 하던 그때.
“백금의 때는 그리고 사랑. 굶주린 시차는 초원에서 그때…….”
자신이 올렸던 글을 읽던 아리스의 눈에서 서서히 초점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아리스……?”
아리스가 다시 말없이 키보드를 타닥타닥 두드리기 시작했다.
뭐지?
뭐가 아리스를 다시 이렇게 만든 거지?
내가 의아해하던 그 순간.
“키에에엑…….”
작은 울음소리가, 아리스의 깃털 사이에서 들려왔다.
“키에에엑…….”
작은 거미가, 아리스의 깃털 사이에 숨어 목덜미에 달라붙어서 조용히 울어 대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아리스의 몸에 달라붙은 거미에 손을 뻗었고.
“키에에엑!!”
작은 거미는 발버둥 치며 내 손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그 힘은 빈약했다.
이건, 도대체 뭐지?
내가 의아해하고 있자, 작은 거미는 새된 비명을 질렀다.
“키에엑!!”
그러자, 불쑥.
아리스의 깃털 사이에 숨어 있던 거미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내게 뛰어들었고.
그 끔찍한 풍경에 내가 기겁하려던 찰나.
“왕!”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에포나가 찰싹, 촉수로 아리스의 등을 후려치자 작은 거미들이 허공으로 사라지고.
“어, 어라?”
남은 건 당황한 듯한 모습의 아리스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뭔지 모를 기묘한 하루가 끝났다.
그 거미들은 어디서 나타났던 걸까? 그 거미들이 아리스를 조종했던 걸까?
그리고 어째서 거미들은 아리스를 조종해서 반려넷에 그런 글을 쓰게 만든 것이고.
의아한 점은 무척이나 많았지만, 나는 그 의문에 명쾌한 해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 * *
“으으. 내가 뭐 하려고 그런 부탁을 한 거지?”
클라인은 털썩 소파에 주저앉아 파인만에게 그런 부탁을 한 어제의 자신을 저주했다.
왜, 왜 그런 부탁을 해서 지금의 내가 이렇게 떨리는 마음이 들어야 하는 건데?
그냥 조사하지도 않았으면 괜스레 이렇게 무거운 마음도 들지 않았을 것 아닌가.
하지만 이미 파인만에게 조사를 부탁한 이상 낙장불입이다.
그래, 의외로 별거 아닐 수도 있어.
그냥 단순히 보안이 철저할 뿐일 수도 있잖아?
클라인은 그렇게 스스로를 위안하며 가만히 마력망 방송을 통해 흘러나오는 광고를 바라봤다.
“시민의 의무는 권리입니다. 의무를 지키지 않는 건, 권리를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늘 보아 오던 흔해 빠진 공익광고지만, 지금의 클라인은 저 광고를 보며 웃을 수 없었다.
진짜 이러다가 사상범으로 몰리는 건 아니겠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보안 등급을 올려놔야 할지 클라인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렇게 클라인이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는 동안, 그녀에게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클라인에게 메시지를 보낸 쪽은 리만 협회장이었다.
괜스레 찔리는 마음에 클라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협회장의 메시지를 열어 봤다.
[리만]
-반려넷은 어때요, 잉간이가 좋아하던가요?
단순한 근황을 묻는 메시지겠지만, 지금의 클라인에게는 단순한 메시지가 아닌 협박으로 보였다.
아, 진짜.
스트레스가 잔뜩 쌓인 게 분명하다.
이 스트레스를 풀려면, 역시 잉간이하고 노는 게 최고다.
파인만의 조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싹 잊어버리고 평상시대로 생활하는 것이다.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까, 요즘 또 반려 생물한테 영화를 보여 주는 게 유행이었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스트레스를 해소할 겸, 잉간이와 같이 볼 영화를 고르기 시작했다.
87화 잉간이에게 영화를 보여 주면 무슨 반응을 보일까요?
“……유레카.”
“갑자기 무슨 일이야, 잉간?”
“아니, 그냥 갑자기 좋은 방법이 떠올라서.”
“좋은 방법?”
부력의 원리를 발견한 아르키메데스의 기분이 이랬을까?
호수에서 블랑카와 목욕을 하던 내 머릿속에 문득 기가 막힌 발상이 하나 떠올랐다.
사우나, 사우나다.
지금까지 만들 계획만 있었고,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모르겠어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는데.
블랑카와 목욕을 하던 와중, 진짜 갑작스럽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나는 지금까지 따로 공간을 만들어서 사우나를 만들 생각을 했는데.
일단 사우나에서 중요한 건 열기와 습기를 가두는 것이니까.
반대로 말하자면, 열기와 습기를 가둘 수만 있다면 공간이 뭐든 상관없는 거잖아?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이왕 이번에 실도 만든 김에, 그동안 모아 둔 가죽으로 만든 텐트처럼 생긴 사우나였다.
가죽을 이어서 텐트처럼 만들고 그 가운데에서 꾸준히 수증기를 만들어 내기만 한다면 되는 게 아닐까?
굳이 막 현대식 사우나를 재현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지.
수증기를 만드는 건, 적당히 달군 돌에 물을 젖힌 천 같은 걸 계속해서 공급하면 되는 것이고.
좋아, 생각난 김에 바로 시작하자.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슬그머니 호수에서 빠져나왔고.
충분히 몸에 달라붙은 액체들을 다 떼어 낸 블랑카도 나와 함께 호숫가를 빠져나왔다.
제일 먼저 해야 할 건 역시 바느질이다.
다행히 바늘은 예전에 만들어 둔 것이 있으니 그걸 쓰면 되겠고.
무두질도 틈틈이 해 와서 꽤 많은 양의 가죽이 남아 있어서 재료를 구하러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일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며 중간에 블랑카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자 내가 알려 준 대로 심법을 수련하고 있는 아리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 잉간!”
“수련은 어때? 좀 괜찮아?”
“있지, 봐 봐? 나 벌써 이것도 가능하다?”
아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조용히 눈을 감고 마력을 순환시키는데, 무슨 일을 하려고 그러지?
나는 가만히 아리스를 지켜보았지만, 아리스의 몸에서 은빛 알갱이들이 떠오르는 걸 제외하면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저렇게 기뻐하는 걸 봐선 뭔가 엄청난 걸 해낸 것이겠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방긋 웃으며 아리스를 칭찬해 줬다.
“와, 엄청 대단하네.”
그러자 아리스는 샐쭉 입술을 내밀며 투정을 부렸다.
“잉간. 솔직히 말해서 뭔지 모르지?”
“어…… 맞아.”
나는 솔직하게 수긍하며 아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고, 아리스는 그걸로 기분이 풀린 듯하다.
“흐흥. 아무튼, 잉간이 내준 숙제. 거의 다 끝냈어!”
“그래? 그럼 뭐, 달라진 건 있어?”
“음. 뭐, 전보다 마력을 다루는 게 더 익숙해진 정도?”
뭐, 애초부터 마법을 가르쳐 준 것도 아니니 저 정도의 효과인 게 적당한 거겠지.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슬며시 창고로 들어가서 가죽들과 바늘을 찾던 그때.
우웅.
무엇인가의 파장이 어항 전체에 울려 퍼졌다.
주인 녀석의 느낌은 아닌데, 이건 뭐지?
당황한 나는 창고 밖으로 뛰쳐나왔고, 나처럼 파장을 느낀 것인지 아리스 또한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잉간, 이건……?”
“잘 모르겠어. 일단 나가 봐야 알 것 같은데…….”
나는 그렇게 대답하며 아리스와 슬그머니 집 밖으로 나와 주위를 살폈고.
무엇이 달라졌는지는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언제나의 푸른 하늘은 온데간데없고, 회색빛의 불길한 하늘만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었다.
언제나 하늘에서 빛나던 태양은 불길한 붉은 두 개의 달로 바뀌어 있었고.
주위에는 음산한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다.
마치, 공포 영화의 배경과도 같은 분위기다.
평소에도 어두웠던 숲속은 이제 완전히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미궁이 되어 버렸고.
금방이라도 무언가가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했다.
“아리스, 일단…….”
“잉간,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마.”
“어, 응?”
“뭔가 위험해 보여…….”
아리스가 내가 할 말을 먼저 해 버리고, 나는 잠깐 당황했지만 냉정하게 판단하면 아리스의 말이 옳다.
아무래도 나보다는 마법을 쓸 수 있는 아리스가 더 강하겠지.
“잠깐만, 집에서 창 좀 챙겨 올게.”
“응.”
심상치 않은 주위 분위기에 나는 집에서 창을 챙겨 오며 생각했다.
이건 언제나처럼 주인이 뭔가 벌이는 걸까?
하지만 뭔가 평소와는 분위기가 다른데.
이번에는 뭔가 정말 위험해 보인다.
아냐, 내가 너무 약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블랑카나 아리스에게는 별다른 문제가 아닐 수도 있잖아?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니까, 서둘러 블랑카를 찾아야겠다.
“아리스, 일단 블랑카가 어디 있는지…….”
내가 그렇게 아리스에게 말하려는 순간.
갑자기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던 허공에서 고약한 악취를 풍기는 무언가가 등장했다.
“그에에에엑!!”
그리고 그것은 괴성을 지르며 아리스에게 달려들었고.
갑작스러운 일에 아리스는 미처 마법을 만들지 못하고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윽……!”
나는 전력으로 창을 내질러서 달려오는 괴물의 옆구리를 꿰뚫었다.
옆구리를 꿰뚫린 괴물은 그대로 속도를 잃고 바닥에 넘어졌다.
“아리스, 괜찮아?!”
“아, 응…….”
나는 일단 놀란 듯 보이는 아리스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괴물이 휘두른 손톱은 아리스의 몸에 닿지 않았던 것 같았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서 바르작거리는 괴물의 모습을 확인했다.
이건 도대체 뭐야?
“그에에엑…….”
바닥에서 바르작거리는 괴물은 내가 알고 있는 무언가를 무척 닮아 있었다.
영화나 게임에서 단골 소재로 활용되던 바로 그것.
좀비.
아무리 봐도 이건 좀비 그 자체인데?
몸 군데군데가 썩어 있고, 가슴을 꿰뚫렸음에도 계속해서 움직이는 이 끈질긴 생명력을 봐라.
이 녀석은 일단 앞으로 좀비라고 부르기로 하고, 나는 좀비를 확인 사살하기 위해 창을 뽑아서 좀비의 머리를 박살 냈다.
이미 썩어 있어서 그런지 좀비의 머리를 부수는 건 손쉬웠고, 머리가 박살 난 좀비는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아리스는 바닥에 널브러진 좀비의 시체를 바라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뭐야, 이거? 마력은 죽어 있다고 느껴지는데, 살아서 움직여…….”
“좀비라고, 대충 죽었는데도 살아 있는 괴물이라고 생각하면 돼.”
“좀비?”
아리스는 좀비라는 어감이 마음에 들었는지 몇 번인가 좀비라고 부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어어어…….”
“으어어…….”
아리스를 습격한 좀비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을 기점으로 좀비들이 본격적으로 출현하기 시작한 것일까?
안개 너머에서 기괴한 좀비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떻게 하지?
그냥 집에서 블랑카가 돌아오는 걸 기다릴까, 아니면 먼저 블랑카를 찾으러 가는 게 맞을까?
나는 어떤 판단이 맞는 판단인지 고민했고, 내가 그렇게 고민하던 찰나 또다시 기묘한 파장이 울려 퍼졌다.
아까 어항 안이 이렇게 뒤바뀔 때와는 다른, 누군가가 마력을 이용한 기술을 사용하는 기척이다.
그리고 여기서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라곤 아리스를 제외하면 한 사람밖에 없다.
블랑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블랑카가 마력을 사용할 만한 일이 생겼다는 뜻이다.
“잉간, 블랑카한테 가자!”
그렇게 생각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아리스가 그렇게 외쳤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리스에게 질문했다.
“블랑카가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있어?”
“대충. 마력의 흔적을 따라가면 될 거야.”
좋아, 블랑카를 찾을 수단이 확실하면 그냥 집에만 있지 않아도 되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허공에 떠오른 아리스의 뒤를 따라 숲속으로 달려갔다.
“으어어…….”
“그어어어…….”
숲속으로 들어서자 사방에서 괴이한 좀비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좀비들의 울음소리와 어두운 숲이 만들어 내는 분위기 때문에 나뭇가지가 바스락 움직일 때마다 흠칫 몸을 떨게 된다.
“거의 다 왔어! 저쪽이야!”
아리스는 재주 좋게 나무들을 요리조리 피해 가며 나를 안내했고, 마침내 블랑카의 모습이 나와 아리스의 눈에 들어왔다.
“죽어라, 이 사악한 것들아!”
블랑카의 주위에는 수많은 좀비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고, 블랑카는 잔뜩 분노한 기색으로 주위의 좀비들을 처치하고 있었다.
슬쩍 시선을 바닥으로 돌려 보니, 푸른 점액이 바들바들 떨면서 블랑카의 다리에 매달려 있었다.
블랑카가 창을 휘두를 때마다 발생하는 마력의 파장에 휩쓸려 떨어지지 않게끔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퍽 불쌍하게 보인다.
“블랑카!”
반가운 마음에 내가 블랑카의 이름을 부르자, 블랑카는 이쪽을 바라봤고.
“잉간? 그냥 집에서 기다리지, 여긴 왜…….”
“마력의 파장이 느껴져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
“난 괜찮아. 이런 녀석들은 많이 상대해 봤거든.”
“많이?”
“이 녀석들. 내 고향에서 나오던 녀석들과 똑같아.”
“똑같다고?”
아, 그러고 보니까 블랑카의 고향인 리베리아는 SF와 판타지가 뒤섞인 좀비 아포칼립스의 세상이었지?
당연히 블랑카는 그곳의 기사였으니만큼 이 녀석들과 많이 싸워 봤을 것이고.
그것보다, 이 녀석들이 블랑카의 고향에서 나오던 녀석들과 똑같다고?
이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내가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잠깐 고민하던 그때.
“냐앙.”
숲의 저 너머에서 전날 봤던 그 아이로 추정되는 고양이가 짤막하게 울며 나를 바라보는 모습이 보였고.
내가 고양이에게 시선을 사로잡힌 순간.
쾅.
하늘에서 무언가가 거대한 시체와 함께 추락했다.
흙먼지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며 시야를 가리고, 모두가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하려던 그때.
“다들 두려워 말게나! 내가 왔으니!”
상쾌하면서도 중후한 한 남성의 목소리가 흙먼지 너머에서 들려왔고.
그와 함께 흙먼지가 걷히며 거대한 망치를 괴물의 시체에 박아 넣은 한 기사의 모습의 드러났다.
나와 아리스가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 사이, 남자는 또다시 입을 열었다.
“백은의 가장 큰 망치이자, 그대들의 수호자, 기사…….”
“라단.”
이번에는 블랑카와 함께 말이다.
“기사 라단이 왔으니!”
* * *
“안녕하세요! 차원항 장인! 클라인입니다!”
클라인은 카메라를 향해 방긋 웃으며 오늘의 촬영을 시작했다.
“오늘 제가 준비한 콘텐츠가 뭐냐면~ 쟈쟈쟌~ 바로, 이거예요!”
클라인이 카메라를 향해 들어 보인 것은 이빨을 드러내며 웃고 있는 인간형 생물의 사진이 그려져 있는 한 상자.
바로, ‘기사 라단의 모험: 좀비왕과의 사투’ DVD였다.
“네, 그렇습니다! 오늘 제가 준비한 건 영화인데요. 당연히 저 혼자서 영화를 보는 건 아니에요. 그건 너무 슬프잖아요? 잉간이와 함께 영화를 볼 거랍니다?”
클라인은 평소에 영화를 잘 보지 않았다.
영화를 보러 영화관까지 나가기도 귀찮을뿐더러, 영화를 틀어 둘 적당한 공간도 없었기 때문이다.
뭐, 영화를 볼 공간이 없는 건 솔직히 클라인이 집에 쌓아 둔 쓰레기들 때문이었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지금은 쓰레기를 다 청소했으니 혼자서 집에서도 영화를 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
“아무래도 뭐, 잉간이는 감각과 생각을 공유할 수 없다 보니 영화를 그냥 물질적 감각으로만 즐기겠죠? 거기에다가 아직 잉간이는 저를 완전히 관측하지도 못했으니 배우들의 모습도 잘 관측하지 못할 테고요.”
영화는 물질적 감각뿐만이 아니라 정보적 감각으로도 즐기는 콘텐츠.
그 때문에 세간에서 흔히 말하는 명작 영화를 보여 줬다간 잉간이가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할 가능성이 높다.
그 때문에 클라인은 최대한 정보적 감각의 비중이 낮고, 잉간이가 이해하기 쉬운 외관의 영화를 골랐다.
그 결과 선정된 것이 바로 이 기사 라단의 모험.
“라단의 모험은 다들 알고 계시죠? 실제 인간을 이용해서 촬영한 액션 영화! 인간의 시점으로 영화를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작품이라고 평가받는다고 하는데요. 뭐, 저는 아직 안 봐서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요.”
클라인은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어라? 하고 중얼거렸다.
“어라? 그런데 영화를 보려면, 잉간이를 차원항 밖으로 꺼내야 하는 게 아닌가 하실 수 있는데요. 후후, 그건 이걸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답니다?”
클라인이 그렇게 말하며 꺼내 든 것은 이젠 상당히 시청자들에게 익숙해진 물건, 아바타였다.
“이 아바타를 이용해서 잉간이만 한 크기로 줄어들고, 차원항 안에 영화를 상영한다면 저도 잉간이도 둘 다 영화를 즐길 수 있답니다?”
솔직히 너무 아바타를 많이 사용하는 게 아닌가 싶기는 한데.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아바타의 반응이 좋기도 하고, 클라인도 아바타를 사용하는 게 즐겁기도 하니까 말이다.
“만약 잉간이가 이 영화에 관심이 없을 때를 대비해서 다른 것도 하나 준비했는데요. 인간형 생물에 대해서 다룬 다큐멘터리예요. 특별히 차원 생물들도 볼 수 있게 제작됐다고 하더라고요.”
클라인은 그렇게 말하며 차원항 안에 영화를 상영할 준비를 끝마치고, 자신 또한 아바타 안으로 들어갈 준비를 끝마쳤다.
“후후, 잉간이가 영화를 즐겨 줬으면 좋겠네요!”
클라인은 그렇게 말하며, 언제나처럼 호의와 함께 차원항 안으로 의식을 이동했다.
88화 애완 인간과 함께하는 라단의 모험 좀비왕 편 리뷰&리액션 비디오
“다들 두려워 말게나, 이 기사 라단이 왔으니!”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중년의 기사가 망치를 바닥에 내려놓고.
블랑카는 그런 기사를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쩍 벌렸다.
“라단? 정말, 내가 아는 그 라단이 맞아요?”
“이렇게 거대한 망치를 들어 올릴 수 있는 사람이 나 말고도 있을 것 같은가? 하하!”
마치 어린 시절 동경하던 영웅을 만난 것처럼 블랑카는 들떠서 라단을 붙잡고 이것저것 질문하기 시작했고.
아리스와 나는 그 모습을 얼떨떨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보아하니까 블랑카의 고향에서는 꽤 유명한 사람인 것 같은데, 아마 전설 속에서 등장하던 영웅 같은 존재인 게 아닐까?
라단을 바라보며 블랑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리고 있었지만, 이내 제정신이 돌라온 듯 표정을 다잡으며 라단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백은의 창끝이자, 위대한 혈통의 후예. 블랑카라고 합니다.”
“백은의 창끝? 이런 곳에서 후배를 만날 줄이야! 그대 역시 신들의 부름을 받은 모양이지?”
“부끄럽게도, 부족한 몸이지만 그렇습니다.”
블랑카의 자기소개를 들은 라단의 눈길이 나와 아리스에게 향하더니, 방긋 웃으며 블랑카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무슨 소리인가? 이런 상황에서도 자네는 기사의 본분을 잊지 않지 않았는가? 자신감을 가지게. 자네는 백은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아.”
“수호자님……!”
우와. 진짜 옛날 사람이어서 그런 걸까?
저런 연극 같은 말투를 실제로 사용하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그런 블랑카와 라단의 연극 같은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조용히 헛기침을 하며 라단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기사님?”
“음. 무슨 일인가?”
“실례가 아니라면, 기사님이 무슨 용무로 이곳에 방문하셨는지 알고 싶은데요.”
“내 용무? 아주 당연한 것 아닌가? 나의 용무는 언제나 늘 하나밖에 없으니!”
내 질문을 들은 라단은 그 거대한 망치를 허공으로 들어 올리며 하늘을 향해 선언했다.
“약자를 수호하고, 사악한 괴물들을 처치하는 것! 그것의 나의 사명일세!”
“그럼, 여기도 그 사악한 괴물들을 처치하러 오셨다는 건가요?”
“그렇지. 그래, 자네. 혹시 이 근방에서 거대한 거인의 흔적을 본 적이 없는가?”
“거대한 거인요?”
자신의 사명을 당당히 선언한 라단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내게 거대한 거인에 대해서 물었다.
거대한 거인?
거인이라고 하면 내 안에서 생각나는 건 주인 녀석밖에 없는데.
그렇게 생각한 나는 슬며시 라단에게 역으로 거대한 거인에 대해서 물어봤다.
“거대한 거인이라고 하면, 본 적이 없네요. 갑자기 안개가 주위에 끼기 시작해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어서요. 혹시, 그 안개가 거인의 수작인 건 아닐까요?”
“안개? 그래. 자네 생각이 맞네. 지금 이곳을 둘러싼 안개는 내가 쫓고 있는 사악한 괴물이 만들어 낸 것이라네. 놈은 필시 이 안개로 자신의 거대한 몸을 숨기려는 게 분명하다네.”
“그, 기사님이 쫓는 거인이라는 게 이 안개를 만들어 냈다는 건가요?”
“그렇지. 놈은 이런 안개뿐만이 아니라 죽었지만 살아 움직이는 사악한 것들을 만들어 낸다네. 놈을 빨리 처치하지 않으면, 곧 이 땅은 거짓된 생명들로 가득 차게 될 것이야.”
그때, 라단과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블랑카가 조심스럽게 라단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수호자님.”
“무슨 일인가, 젊은 기사여?”
“아무래도, 제가 수호자님이 찾아다니는 거인에 대해서 아는 것 같습니다.”
에.
진짜?
진짜로 네가 알고 있다고?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블랑카를 바라봤고, 블랑카는 그런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나를 바라보며 살짝 볼을 부풀렸다.
“그 거인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네. 아니, 거인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거인의 정체가 뭔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건, 무슨 소리인가?”
라단은 블랑카의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의문을 표하며 다시 되물었다.
나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당연한 일이다.
“그 거인의 정체는 아마도, 사령왕이라고 불리는 언데드들의 왕 같은 존재일 겁니다. 이 안개는 사령왕의 마력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결계와도 같은 것일 테고요.”
“사령왕? 듣기만 해도 흉악한 이름이군. 그런데 자네는 어째서 그 거인의 정체를 알고 있지?”
“……라단 님이 떠나시고 난 뒤, 고향에 사령왕이 나타났으니까요.”
“뭐라고? 리베리아에 사악한 것들이 침입했단 말인가?!”
지금껏 평정을 유지하던 라단의 목소리에 경악이 섞인다.
그만큼 블랑카의 입에서 나온 소리가 라단에게 있어선 믿지 못할 이야기였다는 걸까?
“그렇다면, 지금 리베리아는. 리베리아는 어떤 상태인가……?”
“영웅들의 용기와 피로 내일을 이어 나가는 그런 상황입니다.”
“그 무슨…….”
라단은 블랑카의 대답을 듣고 충격받은 듯 보였지만, 곧바로 다시 굳은 의지를 다지며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더더욱 힘을 내야겠군. 고향이 위험에 빠졌다고 해도, 눈앞의 사악들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
“수호자님…….”
“자네의 말에 따르면, 사령왕이라는 괴물이 이 기묘한 안개를 만들어 내는 거라고?”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 안개의 중심으로 가면, 사령왕이라는 괴물이 있을 게 분명하겠지.”
아주 단순한 계획이지만, 동시에 그만큼 효과적인 계획이다.
저 위에서 거대한 괴물과 함께 떨어지며 안개의 전체적인 분포를 확인한 걸까?
라단은 성큼성큼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기려 했고, 블랑카는 그런 라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안절부절못했다.
슬쩍, 나와 아리스를 바라보고.
다시 라단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그 누가 봐도 라단을 뒤쫓고 싶다는 게 한눈에 보인다.
하지만, 나와 아리스를 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걸까?
블랑카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나와 아리스에게돌아왔다.
나는 그런 블랑카를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가고 싶어?”
“가고 싶지. 가고 싶은데, 이런 상황에서 지켜야 할 사람을 놔두고 가는 건 기사가 할 일이 아니니까. 그렇다고 너를 데리고 싸움터에 갈 수도 없고.”
그렇게 말은 하면서도 라단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모습이 참 절절하다.
도대체 라단이 어떤 영웅이길래 블랑카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걸까?
“라단이라는 사람. 정확히 어떤 사람이야? 너희 고향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였는지 궁금해서.”
“첫 번째로 신들에게 선택받은 용사, 그렇게 불리고 있어. 전설에 따르면, 라단의 용맹은 신들 사이에서도 유명했고. 신들의 적들이 라단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의 고향을 파괴하려고 이 모든 재앙들을 보냈다는 이야기가 있어.”
“허어, 그래?”
“응. 제2, 제3의 라단이 나오는 걸 두려워한 거지. 그리고 라단이 신들의 전장에서 싸우는 지금만이 라단의 고향을 무너트릴 유일한 기회니까.”
그냥 적당히 유명한 수준인 줄 알았는데, 이 정도면 거의 종교 수준인데?
블랑카의 말을 들어 보면 라단은 거의 모든 재앙을 끝낼 신의 사도로 취급받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런 대단하신 분이 어째서 이곳에?
이곳이 어항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무언가 위화감이 들었고, 슬며시 블랑카의 얼굴을 바라보며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냥 따라가지 그래? 그 위대한 영웅과 같이 싸울 기회는 더 없을지도 모르잖아?”
“그치만, 그건 기사로서의 의무를…….”
“기사의 의무는 이미 진작에 저버렸다며? 애초에 아리스와 에포나도 있고, 나도 내 한 몸 정도는 지킬 수 있다고.”
나는 그렇게 말하며 슬쩍 거대한 괴물의 사체를 킁킁거리며 뜯어 먹고 있는 에포나를 바라봤다.
꽤나 괴물의 사체가 맛있는지 마석을 먹을 때처럼 신나게 먹어 치우는 모습이다.
거기에 내 추측이 맞는다면, 아마 이 상황은 크게 위험한 것도 아닐 테고 말이다.
“나는 내 한 몸 지킬 수 없는 약자가 아니니까, 라단을 따라가는 건 기사의 의무를 저버린 건 아니잖아?”
“그건…….”
나는 다시 한번 블랑카에게 라단을 따라갈 것을 권유했고, 블랑카는 가만히 고민했다.
“가끔은 꿈을 좇아도 괜찮잖아?”
“……그럴까?”
블랑카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며 라단의 뒤를 따라갔고.
나는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봤다.
라단의 뒤를 쫓아가는 블랑카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즐거워 보였고.
나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가끔은 이런 것도 괜찮겠지.
“아리스, 슬슬 돌아갈까?”
“아, 응.”
나는 라단에게 흥미가 없는 것인지 쿡쿡 발로 푸른 점액을 괴롭히고 있던 아리스에게 말을 걸었고.
아리스는 푸른 점액을 괴롭히던 발을 멈추고 가만히 나를 따라왔다.
“아리스는 흥미 없는 거야?”
“진짜도 아닌데, 나는 관심 없어.”
역시 그랬구나.
하긴, 나 따위도 라단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챌 정도인데 당연히 아리스는 깨닫고도 남았겠지.
“마력이, 살아 있는 마력이 아니라 무슨 바윗덩어리 같아. 거기에다가 저 사람, 우리 말은 전혀 듣고 있지 않았는걸.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가 만든 환영, 그런 거 같아.”
그래.
나는 아리스처럼 라단의 마력을 느끼지 못했지만, 내가 라단의 이상함을 눈치챈 것은 라단과 대화할 때였다.
그것은 블랑카와 대화할 때에도, 나와 대화할 때에도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내가 아닌 저 너머의 무언가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게 좀 이상하다고 생각이 되자, 처음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기묘한 점들이 계속해서 눈에 들어왔다.
어째서 내게 말을 하는데, 목소리가 라단에게서 들려오지 않지?
어째서 라단은 이 부드러운 흙바닥에 발걸음을 남기지 않지?
어째서, 어째서.
결국 아리스와 내가 라단을 바라보며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저건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환영이라는 것.
라단이 환영이라는 걸 눈치채자, 좀비들 역시 땅바닥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좀비들에게서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슬슬 돌아가자. 블랑카가 돌아오면 같이 사우나나 즐겨야지.”
“응. 그나저나 블랑카 언니는 왜 따라간 거야? 가짜라는 걸 언니라고 모를 리는 없었을 텐데.”
“때로는 뭐, 가짜라는 걸 알아도 속고 싶을 때가 있으니까.”
“잘 모르겠어.”
원래 환상이라는 건 가짜라는 걸 알고도 따라가는 것이니까.
아리스는 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더 신경 쓰지 않고 나와 함께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한바탕 뛰어놀고 돌아올 블랑카를 위해 사우나를 만들어 두고 기다리기 위해서.
* * *
“으음, 하르피아하고 잉간이는 영화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네요.”
클라인은 영화를 다 감상하고 원래의 몸으로 돌아와 조용히 감상평을 남기기 시작했다.
“켄토르는 리베리아 출신이어서 좋아할 줄 알았는데, 잉간이하고 하르피아한테는 별로였던 걸까요? 음, 언데드가 문제였을까요?”
클라인은 그렇게 고민하며 어째서 잉간이가 영화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지 고민했지만, 쉽사리 제대로 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음, 처음에는 집중하는 것 같다가도, 라단을 만나고 나서부터 흥미를 잃었는데. 이런 액션 활극이 취미가 아니었던 것 같네요. 거기에다가 시선 동기화를 할 수 없는 것도 한몫했던 것 같고요. 자, 잉간이 이야기는 잠깐 여기서 멈추고, 이젠 제 감상을 말하자면요.”
클라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카메라를 향해 말했다.
“왜 다들 액션 영화 하면 라단 시리즈를 추천하는지 알겠네요. 진짜, 몰입감이 엄청나요. 이러니까 독창적인 시도에서 끝나지 않고, 실제 성적과 수상으로 이어진 거겠죠.”
클라인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감탄했다는 듯 영화의 중요 포인트들을 언급했다.
“호불호가 갈리긴 하지만, 저는 일단 시점이 라단이 아니라 라단과 함께하는 기사 1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어요. 일반인의 시점으로 바라봐서 그런지 라단의 무력이 어마어마하게 보이거든요.”
만약 라단의 시점에서 영화를 관람했다면 이 정도로 라단과 좀비왕과의 싸움이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진짜, 최후의 일격을 남기고 라단이 지쳐서 쓰러졌을 때, 제가 직접 라단의 망치를 들고 좀비왕에게 일격을 날린다니. 제작사가 뭘 좀 아는 것 같아요.”
거기에다가 이번에는 켄토르의 물질 육체라는 좋은 기준점이 있어서 더더욱 몰입하기 쉬웠다.
“거기에다가, 이번에 대단한 건 그거였죠. 좀비왕이 최후를 맞이하며 좀비왕이 가두고 있던 혼령들의 감정이 단번에 느껴지는데……! 와, 진짜 대단하더라고요.”
클라인은 잔뜩 흥분된 기색으로 감상을 늘어놓더니, 문득 알고 있었냐는 듯 카메라를 향해 말했다.
“그런데 꼭 좋은 소리만은 할 수 없는 게, 리베리아의 생태계 교란이 시작된 게 이 영화 때문이라는 가설이 있거든요.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리베리아에 언데드들을 풀어놨고, 그 과정에서 미처 회수하지 못한 언데드들이 남아서 리베리아의 생태계를 지금까지도 교란시키고 있다. 뭐 그런 이야기인데요. 외래종의 취급을 얼마나 주의해야 하는지 잘 알 수 있는 사례죠?”
클라인은 그 뒤로도 잔뜩 흥분된 기색으로 영화 감상을 늘어놓았고, 조금 흥분이 진정되고서야 심호흡을 했다.
“자, 아무튼 이렇게 라단의 모험: 좀비왕과의 사투는 즐겁게 감상했습니다! 하지만 원래 목적은 이게 아니었죠? 잉간이와 나란히 영화를 보는 게 처음의 목표였습니다!”
잉간이가 라단의 모험에는 별다른 흥미를 갖지 않았지만, 구식 시청형 영화라면 흥미를 가지겠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미리 준비해 온 다큐멘터리를 카메라 앞에 들이밀었다.
“쟈잔~ 제가 준비한 영화는 바로. SSC에서 제작한 명작 다큐! 인간형 생물에 대해서! 제1편입니다! 반응이 괜찮으면 2편도 보여 줄 생각이에요. 자, 이걸 마력 투영기에 넣고, 마력 투영기를 축소시켜서 차원항 안에 내려보내면…….”
그렇게 잉간이에게 다큐멘터리를 보여 주기 위해 투영기를 내려보내던 클라인의 눈에, 처음 보는 구조물이 보였다.
“어라? 저건 처음 보는데요. 잉간이가 그새 만든 걸까요?”
클라인은 조심스럽게 구조물 내부를 확인했고, 기가 막힌다는 듯 감탄사를 냈다.
“아~ 일종의 사우나? 그런 것 같네요. 역시, 목욕을 좋아하는 종이니만큼 사우나도 만드네요. 보니까, 지금 상황에서 주어진 재료로 최대한 만든 것 같은데. 아기자기해서 귀엽네요.”
조심스럽게 엿본 사우나는 때마침 잉간이와 룸메이트들이 사용하고 있던 거 같다.
땀을 흘려 가며 도란도란 뭔가 이야기를 나누는 잉간이와 룸메이트들의 모습이 엿보인다.
클라인은 괜히 분위기를 깨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오히려 그렇다면 지금 타이밍에 틀어야 하는 게 아닐까?
어쩌면 이걸 틀어서 더 분위기가 좋아질 수도 있고.
잉간이도 이렇게 자주 거사가 치러지는 건 피곤해서 별로 원하지 않을 거야.
클라인은 그렇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을 합리화하며 사우나 안에 영상을 재생시켰고.
갑자기 틀어진 영상에 깜짝 놀라는 잉간이와 룸메이트들을 볼 수 있었다.
묘한 분위기가 흩어진 걸 보며 클라인은 내심 만족감을 느꼈고.
잉간이의 시간에 맞춰서 클라인 또한 다큐멘터리를 시청했다.
슬그머니 잉간이와 룸메이트들을 관찰하니 진지한 표정으로 다큐멘터리를 시청하고 있다.
음, 좋아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지만.
다큐멘터리의 내용이 중반으로 접어들며, 무언가 분위기가 묘해졌다.
“어머, 어머……?”
중반부로 접어들며 인간형 생물들의 번식을 다룬 장면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살짝 민망하게 보일 수 있는 장면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장면들이 잉간이와 룸메이트들의 본능을 자극한 걸까?
어느새 사우나 안은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을 재생하고 있었고.
더 이상 다큐멘터리에 관심이 없어진 잉간이를 보며 클라인은 샐쭉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89화 인간 다큐멘터리를 본 잉간이의 반응은?
“흐아…….”
“으으, 더워…….”
“좀만 참아 봐. 그게 좋은 거니까.”
“흐엑…….”
블랑카도 들어갈 수 있을 크기로 사우나를 만들다 보니 내 예상보다 더 크기가 커지긴 했지만, 그래도 사우나를 만드는 작업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단순히 가죽들을 서로 엮고, 완성품 표면에 무오 점액을 발라서 굳히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진짜 무오 점액은 쓸모가 참 많네.
맛이 하나도 없는 고기와는 다르게 자연 접착제로 어마어마한 쓸모가 있다.
어쨌든 나는 블랑카가 돌아오기 전에 사우나를 만드는 데 성공했고, 원래는 블랑카와 아리스 먼저 사우나를 쓰게 할 생각이었지만.
“더워~.”
“더우면 엉겨 붙지 마…….”
“그건 또 싫어~.”
어째서인지 나는 지금 이렇게 블랑카와 아리스와 함께 사우나 안에 들어와 있다.
아리스는 덥다고 말하면서도 내 등에 딱 달라붙어 있고.
블랑카 또한 웬일로 인간형의 모습으로 내 곁에 달라붙어 있었다.
이건, 역시 신호겠지?
일주일간 참았으니, 욕구를 풀고 싶다는 신호.
하지만 여기서는 안 된다.
만들자마자 바로 사우나를 더럽힐 수는 없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슬슬 사우나를 빠져나갈 눈치를 보고 있었고.
아리스가 슬그머니 내 앞으로 슬슬 날개를 뻗던 그때.
“우왓?!”
갑자기 어두컴컴한 사우나 안 허공에 영화관에서 영화가 재생되듯 푸른 화면이 나타났다.
이게 어찌 된 일일까?
모두가 가만히 푸른 화면을 지켜보고.
맨 처음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푸른 화면에서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5, 4, 3, 2, 1.
카운트다운이 끝나고, 푸른 화면에는 수많은 인간들의 모습이 비친다.
블랑카를 닮은 켄토르, 아리스를 닮은 하피, 그리고 나를 닮은 일반적인 인간과 여기 있는 그 누구도 닮지 않은 수많은 인간들.
하반신이 뱀처럼 생긴 인간, 전신이 비늘에 뒤덮인 인간, 물고기와 합쳐진 듯한 외형의 인간…….
내가 다 묘사하지 못할 만큼의 수많은 인간들의 모습이 비쳤다 사라지고, 갑자기 어디선가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인간형 생물은 우주 수많은 곳에서 발견됩니다. 바다, 땅, 하늘, 심지어 지하 깊숙한 곳과 심우주에서도 말이죠.”
마치 다큐멘터리에서나 나올 법한 내레이션이다.
아니, 실제로 이건 다큐멘터리가 맞겠지.
‘인간형 생물’에 대해서 다룬 다큐멘터리 말이다.
이건, 아까 라단이니 뭐니 하는 환상과 관련이 있을까?
아무래도 내가 그 환상들에 관심을 보이지 않으니까 방향을 전환해서 이런 다큐멘터리를 보여 주는 것 같은데.
“이번 시간에는 인간형 생물들의 삶과 문화,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자, 가시죠.”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다큐멘터리는 계속해서 재생됐고, 아리스와 블랑카는 영상의 내용이 괘 재밌어 보이는지 눈을 반짝거리며 집중한다.
그래, 일단은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보기나 하자.
주인의 종족의 시각으로 만들어진 다큐멘터리이니만큼 도대체 인간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알 수 있겠고. 주인 녀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가만히 다큐멘터리의 내용을 듣기 시작했고, 다큐멘터리에선 꽤나 흥미로운 내용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어째서 인간형 생물은 인간형 생물로 불리는 걸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순혈 인간이 모든 인간형 생물의 원형이기 때문이죠.”
순혈 인간이 모든 인간형 생물들의 기원이라는 다소 믿기 힘든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화면에는 알몸의 인간 한 명이 나타나 가만히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과학자들은 어떻게 이 사실을 밝혀냈을까요? 사실, 제일 먼저 의문을 제기했던 것은 브리더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순혈 인간만이 모든 인간형 생물들과 교배가 가능하다는 사실에 집중했죠.”
이어서 다양한 인간형 생물들의 모습이 나타나고, 순혈 인간에서 여러 개의 화살표가 뻗어 나갔다.
“브리더들의 의문에서 시작된 연구는 순혈 인간이 모든 인간형 생물들과 유전적으로 가깝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그 때문에 순혈 인간이 다른 인간형 생물들과 번식할 수 있던 것이죠.”
화살표에는 바다나 땅을 나타내는 마크가 하나둘씩 달라붙었고, 내레이터는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 갔다.
“인간형 생물들이 발견되는 행성들에서 동형 진화로 우리가 아는 순혈 인간이 탄생했고, 그 순혈 인간들은 각기 다른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다양한 방향으로 변화한 것입니다.”
내레이터는 인간형 생물들의 역사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했고, 제일 첫 번째로 순혈 인간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인간형 생명체 중 가장 많이 발견되는 종이고, 가장 익숙한 생김새의 인간입니다. 아무 호칭 없이 인간이라고 부르면 순혈 인간을 부르는 경우가 많죠.”
나에게 가장 익숙한 현대적인 분위기의 건물들이 늘어선 도시가 보이고, 이어서 중세 시대의 성 같은 건물과 우주를 떠다니는 우주정거장이 나타난다.
“그 수가 많고, 서식하는 행성이 다양한 만큼 순혈 인간의 문화는 무척 다양합니다. 문명 발달 수준도 행성에 따라 천차만별이고, 기초 마력량 또한 행성에 따라 다르죠.”
그 뒤로 인간의 해부도가 나타나 기본적인 골격 구조를 설명하고, 상당히 흥미로운 정보들을 설명했지만.
사실, 그다지 중요한 정보들은 아니었다.
중요한 건, 이 사람들이 인간들의 문명 수준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정도로 인간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으면서, 어째서 인간들을 동물처럼 사육하는 걸까?
우주까지 진출할 문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독자적인 문화를 발달시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 걸까?
그들 입장에서의 일종의 호의인 것일까?
아니면.
내가 그렇게 복잡한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덧 다큐멘터리는 인간형 생물들의 생태에 대한 설명을 다 끝내 갔고.
“대부분의 인간형 생물들은 교미 후 임신하는 것으로 번식을 합니다. 단 몇몇 종들은 임신 대신 알을 출산할 뿐입니다.”
어쩌면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생물 다큐멘터리에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차분한 내레이션의 목소리와 함께 다큐멘터리의 배경에는.
“푸흡……!”
한창 아기를 만드는 남녀의 모습이 재생되었다.
다큐에 집중하느라 간신히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다큐에서 흘러나오는 좀 보기 그런 영상 때문에 슬며시 요상하게 변하기 시작했고.
“인간형 생물이 많은 행성에서 서식하는 인간종들은 다른 종족의 이성을 유혹하기도 하고, 때로는 다른 종족의 이성만으로 번식을 이어 나가기도 합니다.”
“저기, 잉간…….”
하르피아가 납치해 온 인간을 공중에서 키스하는 장면이 재생되며 아리스의 볼을 붉게 물들이고.
“그리고 그러한 생태계에서 순혈 인간은 모든 인간종과 교배할 수 있기에, 중요한 자원으로 취급되기도 합니다.”
켄토르가 인간의 목에 달린 줄을 붙잡고 어딘가의 헛간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재생되자 블랑카 또한 내게 뜨거운 시선을 던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순혈 인간은 대개 다른 종족과의 성교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는데요. 이는 순혈 인간의 종족 보전을 위한 본능으로 보입니다.”
화면에서 평범한 인간이 다른 이형의 인간들에게서 도망치는 장면이 나오다가 결국, 붙잡히는 장면이 나오는 것과 함께.
“잠깐, 잠깐만…… 두, 두 명은 조금……!”
“괜찮아. 우리가 다 알아서 할게.”
“응, 응.”
나 또한 블랑카와 아리스에게 붙잡혀서 평소의 두 배로 쥐어짜이게 되었다.
땀과 땀이 뒤섞이고, 땀이 서로의 피부와 깃털에 달라붙는다.
이대로 평소대로 하루 종일 쥐어짜이는가 싶었지만.
“흐아…… 힘들어…….”
다행히도, 사우나라는 지역의 특성상 평소보다도 블랑카와 아리스의 체력의 소모가 빨랐다.
물론, 나 또한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그렇게 블랑카와 아리스가 지켜 나가떨어지고 아리스가 새근새근 내 무릎에서 잠든 와중에 계속해서 다큐멘터리는 재생되며 마지막을 향해 달려 나갔다.
블랑카는 슬쩍 인간형 변신을 푼 상태로 숨을 가다듬으며 나와 함께 다큐멘터리를 다시 시청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뜨거웠던 분위기가 잠시 가라앉고.
“이렇게 수많은 인간형 생물들이 존재하지만,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새롭게 탄생한 종들도 존재합니다. 그런 종들은 대표적으로 켄토르를 들 수 있겠는데요.”
켄토르.
그러니까 본인의 종족의 이야기가 나오자 슬슬 지루한지 슬쩍 내 쪽으로 다가오던 블랑카의 손이 멈추고 귀가 쫑긋 선다.
“원래 켄토르의 개발 목적은 지구력이 뛰어난 순혈 인간에, 폭발력이 뛰어난 에쿠스를 합쳐서 지구력과 폭발력 둘 다 강력한 생물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화면에 순혈 인간과 내가 알고 있는 말의 모습이 나타나고, 서로 하나로 합쳐지며 내가 알고 있는 켄토르의 모습으로 뒤바뀐다.
블랑카는 이 내레이션의 설명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몰라도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다.
“그렇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켄토르는 일종의 실패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내레이션이 정반대의 이야기를 해 버리고, 블랑카는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본래 목표했던 것은 에쿠스의 폭발력에 인간의 지구력을 더하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켄토르들은 인간의 지구력을 획득하지 못했습니다.”
이어서 화면에는 지쳐서 쓰러지는 켄토르들이 비치고, 내레이션은 설명을 이어 갔다.
“폭발력 하나는 기존의 에쿠스보다 강력해졌지만, 기존의 에쿠스보다 오히려 지구력이 약한 켄토르는 원래 목표했던 대로 쓰이지 못하고 현재는 거의 관상용이나 애완용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토닥토닥.
시무룩해진 블랑카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하자, 블랑카는 조심스럽게 내 어깨에 몸을 기댔다.
“이처럼 최근에는 인간형 생물들을 활용할 다양한 방법들이 많아지며 이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는데요. 가장 대표적인 것은 미래 먹거리와 미래 에너지로 각광받고 있다는 겁니다.”
나는 슬슬 다큐멘터리도 끝나 가는 것 같아서 적당히 사우나를 나갈 기회를 엿봤지만, 문득 내 귀에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단어들이 들어왔다.
미래 먹거리?
미래 에너지는 또 뭐고?
믿을 수 없는 단어의 연속에 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내레이터는 무덤덤한 어조로 새롭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인간형 생물들은 다른 차원 생물들에 비해 번식이 빠르고, 번식 난이도도 그렇게 어렵지 않을뿐더러, 함유 정보량도 크기에 비해서 풍부한 편입니다. 또한, 마력량도 적은 편이 아니어서 식량이나 마력 자원으로 활용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화면에는 단순한 과자처럼 생긴 것들이 비쳤지만.
저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나는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나는 저들이 인간들을 어떻게 여기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인간이 영장류와 돌고래를 자신과 같은 수준으로 바라보지 않듯이.
저들도 인간들을 자신과 같은 수준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저들에게 인간은 단순한 짐승과 다름없다.
그 사실을 깨닫자, 나는 내가 주인 녀석을 이해했다고 생각한 것이 큰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주인을 이해하기엔 너무나도 서로의 거리가 멀어져 있다는 사실을.
나는 과연 내가 죽기 전까지 주인을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 이해는커녕 내가 과연 주인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을까?
그런 회의감이 내 마음을 가득히 메웠고.
나는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주인은 어째서 내게 이걸 보여 준 것일까?
나는 도저히 주인이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나는 아직 주인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인간 농장은 이렇게 방목형과 공장식으로 나뉘는데요…….”
다시금 화면에는 예전 기계들의 땅에서 봤던 시설들이 비치고.
화면 속의 내레이터는 무감정한 목소리로 담담히 현실을 읊을 뿐이었다.
* * *
클라인은 아무 생각 없이 잉간이가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을 촬영한 영상을 쥬튜브에 업로드했다.
“좋아, 영상. 업로드!”
영상을 다 업로드한 클라인은 촉수를 사방으로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아, 이렇게 복잡한 일에서 신경 끄고 내 일에만 집중하니까 마음이 참 편하네.
하지만 언제까지나 눈을 돌릴 수는 없는 법이고, 이제 다시 시선을 돌릴 때가 되었다.
[파인만]
-조사 완료. 오늘 간다.
생각보다도 빨리 파인만이 조사를 완료했다고 메시지를 보내온 것이다.
역시 파인만, 이라고 감탄하며 좋아해야 할지 아니면 벌써? 라며 울상 지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왕 시작한 거, 각오를 다지자.
그래, 별거 아닐 수도 있잖아?
별게 아니라면 잊어버리면 되고 별거라면 자신과 잉간이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끔 대책을 세우면 될 뿐이다.
클라인이 그렇게 각오를 다지던 사이.
딩동.
누군가가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파인만이 도착한 걸까?
생각보다 빨리 왔네.
“나가요~.”
클라인은 종종걸음으로 현관문을 열었고.
“파인만, 왔어?”
“아, 응…….”
어딘가 떨떠름한 표정의 파인만을 현관 앞에서 마주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결과가 나왔네?”
“아, 그게 말이야. 클라인.”
“응?”
어쩐지 파인만은 클라인에게 우물쭈물하며 말을 걸었고.
클라인이 그런 파인만의 모습에 의아해하던 찰나.
“초대해 줘서 고마워요. 클라인 양.”
“……네?”
파인만의 뒤편에서, 클라인이 지금 당장 절대로 보고 싶지 않은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생각보다 깔끔하게 사네요. 제 아들 녀석도 클라인 양을 반이라도 닮았으면 좋겠는데.”
리만 협회장이 어째서인지 몰라도 파인만을 따라온 것이었다.
90화 [공익광고] 의무를 지키지 않으면, 권리도 없습니다.
“무오~.”
저기서 저렇게 한가롭게 풀을 뜯는 무오와 내가 다른 점은 무엇일까?
지성의 차이?
아니, 내가 인식하지 못할 뿐이지 무오에게도 지성이 존재한다면?
그렇다면 무오가 내게 지적 생물로 인정받기 위해서 무오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나는…….
“잉간! 잉간! 아기가 태어났어!”
“무오. 말이지?”
“응!”
내가 만들어 둔 울타리 안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는 무오들을 바라보며 상념에 빠져 있던 그때, 아리스가 들뜬 표정으로 내게 달려와 낭보를 알려 왔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오해할 법한 말을 하며 아리스는 나를 이끌고 전에 무오의 알들을 뿌려 놨던 곳으로 향했다.
“봐 봐! 꼬물꼬물해서 귀여워!”
“저게 귀엽나?”
땅에서 작은 무오들이 기어 나오는데, 어떻게 된 게 새끼인데도 그리 썩 유쾌한 풍경은 아니었다.
워낙 크기가 작다 보니 구더기 같은 애벌레들이 연상됐지만 아리스는 저 모습이 꼬물꼬물해서 귀여운 모양이다.
꼬물꼬물해서 귀엽다는 게 정확히 어떤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시험 삼아 뿌려 둔 알들을 별달리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잘 부화하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달맞이풀을 한 움큼 뜯어 새끼 무오들에게 건넸고, 새끼 무오들은 꼼질꼼질 달맞이풀에 몰려들어 식사를 시작했다.
이걸로 무오가 달맞이풀을 먹고, 무오 사체로 달맞이풀을 생산하는 사이클은 완성이다.
안정적으로 무오 점액을 수급할 수 있게 된 것인데, 그렇게 되면 무점토를 더 많이 생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무점토를 더 만들고 나면 뭘 하지?
뭐, 할 건 많겠지.
이왕 폭포가 있는 김에 폭포를 이용한 물레방아를 만들 수도 있겠고.
아예 수력을 건너뛰고 증기기관을 만들어도 된다.
그렇지만 그걸 만들어서, 뭘 어쩌려고?
예전에 나를 덮쳤었던 무력감이 다시 나를 집어삼킨다.
주인 녀석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생각한 뒤로는 마음 한구석에 파묻혀 있던 녀석인데.
이렇게 무력감이 드는 이유는 아마도 지난번 봤던 그 다큐멘터리 때문이겠지.
지구보다 훨씬 발전한 SF스러운 문명들도 자신들과 같은 선상에서 바라보지 않는데, 내가 뭘 해야 같은 선상에 설 수 있을까?
지금껏 열심히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과 대화하기 위해서 애썼는데, 알고 보니 그 외국인은 귀마개를 끼고 있었단 사실을 알게 된 것 같은 기분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가만히 울타리 안의 무오들을 바라봤다.
아무 생각 없이 질겅질겅 풀을 뜯는 무오들의 모습과 그 사이비들의 모습이 함께 겹쳐지고.
나는 푹 한숨을 내쉬며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내가 도대체 뭘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처럼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다 보면 무언가 길이 보이겠지.
언제나 그렇게 믿어 왔듯이,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가만히 의자에 걸터앉아 푸른 점액과 노는 아리스를 바라봤다.
그나저나 저 점액도 참 질기게도 살아 있네.
그동안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죽은 줄 알았는데 숲속을 돌아다녀서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걸까?
아리스는 마석을 먹어 치우는 점액의 모습이 신기한지 계속해서 점액에게 마석 부스러기를 던져 준다.
“아리스! 너무 많이 주지는 마!”
“왜?”
“배탈 날 수도 있으니까?”
“응!”
혹시나 점액 녀석이 그때처럼 너무 커지지 않게 아리스에게 주의를 주고 나는 슬쩍 반려넷에 접속했다.
다른 인간들도 내가 아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속보, 주인 새끼 청소하는 거 까먹은 신기록 세워…… 마침내 100일째 돌파.]
[죽겠다, 주인 새끼 어디서 봤는지 자꾸만 나한테 이상한 영상 보여 준다.]
[저항, 투쟁, 단결. 우리는 노예도, 짐승도 아니다. 우리의 힘을 보여 주자.]
[자고 일어나니 이상한 곳에 와 있어요. 제발 누가 좀 도와주세요.]
반려넷에는 언제나처럼 글들이 올라오고 있었고.
내 마음이 싱숭생숭해서일까?
나는 평소라면 대충 넘기고 갔을 글의 제목에 관심이 갔다.
나는 슬그머니 그 글을 클릭했고.
[저항, 투쟁, 단결. 우리는 노예도 짐승도 아니다. 우리의 힘을 보여 주자.]
-사람이 어떻게 해서 가축을 키우게 됐는가? 가축보다 힘이 더 강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우리의 상태도 그와 같다. 저들에게 우리의 힘을 보여 주여야 한다. 저들의 피로 목욕을 하고 저들의 살로 잔치를 벌여야 짐승의 사슬을 벗어날 수 있다.
[댓글]
-‘인’
-‘분’
-‘찐’
-단결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들은 거인도 신도 아닙니다. 그들은 쓰러트려야 할 대상입니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면, 가장 기초적인 대화로 돌아가면 됩니다!
언제나와 똑같은 인류 해방 전선의 글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리스를 세뇌하려고 했던 지난번의 일 때문에 이 녀석들에게 그리 좋은 감정은 없지만.
오늘따라 왜인지 이 녀석들의 주장에 마음이 혹했다.
힘이라.
만약 인간이 주인들에게 위협이 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과연 주인들의 태도는 지금과 같을까?
힘을 가지고 있다면 긍정적인 쪽으로 태도가 변화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대가 힘을 가지고 있다면, 과연 그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대화?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대와 대화로 해결할 리는 없고.
그렇다면 그들은.
인류 해방 전선의 말대로, 가장 기초적인 대화를 택하지 않을까?
“으아…….”
차라리 내가 저 푸른 점액이나 무오처럼 이곳이 어항 속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으면 이런 고민을 할 일도 없겠지.
하지만 그래도 나는 계속해서 고민해야 한다.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내가 짐승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증거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너무 한 번에 많은 일을 하려고 하지 말고.
처음처럼, 차근차근.
그러니까 우선은, 나의 주인 녀석부터 제대로 이해하는 게 먼저다.
적어도 이름 정도는 알아야 대화를 시작할 수 있지 않겠어?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 나의 머릿속에 문득 본질적인 질문이 떠올랐다.
내 주인 녀석은 어째서 나를 키우려고 데려온 걸까?
당연하게도 그에 대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 * *
“어머, 뭘 이런 걸 다.”
“아뇨, 아니에요! 이, 이런 곳까지 오셨는데 이 정도는 대접해야죠…….”
클라인은 그렇게 말하며 리만의 앞에 리퀴드사에서 보내 준 분말 행복으로 우려낸 차를 놔뒀다.
리만은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클라인이 내놓은 차를 홀짝였다.
그리고 그 틈을 타서 클라인은 조심스럽게 한숨을 내쉬고 있는 파인만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파인만. 이건…….”
“미안하다.”
“아니, 미안하다고만 하지 말고.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왜 리만 협회장님이…….”
“그게…….”
파인만이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클라인에게 변명 아닌 변명을 하려던 그때.
“리만 협회장이 아니라, 뭐라고 부르라고 했죠?”
“네? 아, 아주머니요……?”
“그래요. 그리고 클라인 양의 의문에 답하자면, 간단해요. 파인만 양이 뭔갈 조사하고 있다는 걸 제게 들켰으니까요.”
“……그렇게 됐다. 미안하다.”
파인만은 한숨을 내쉬며 클라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본 클라인은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별게 아닐 거라는 클라인의 희망찬 기대가 단번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어, 어, 어쩌지?
사, 사상범으로 몰리는 건 아니겠지?
머리가 새하얘지는 것을 느끼며 클라인은 덜덜 떨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리만 협회장은 피식 웃으며 클라인에게 말을 걸었다.
“긴장 풀어요. 심각한 일이 아니니까요. 브리더 협회를 직접 조사하는 거면 몰라도, 단순히 반려넷을 조사할 뿐인데 사상범으로 몰릴 이유는 없어요.”
“그, 그렇죠?”
“네. 그래요. 제가 오늘 클라인 양의 집에 방문한 건, 클라인 양과 대화하고 싶어서예요.”
“대, 대화요?”
이 아주머니는 왜 자꾸 나하고 대화를 하려 하지?
클라인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지만 곧바로 고개를 내저어 그런 생각을 털어 버렸다.
클라인이 그런 생각을 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만은 조용히 클라인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클라인 양. 클라인 양은 어째서 잉간이를 키우기 시작했나요?”
“네?”
“정확히 말하면, 어째서 잉간이를 반려 인간으로 맞이할 생각을 했나요? 인간을 반려 생물로 키운다는 게 흔한 결정은 아니잖아요?”
“어, 그건…….”
맨 처음에는 여느 애완 인간을 키우듯 단순한 수집욕에서 잉간이를 데려온 것이었다.
하지만 클라인이 잉간이를 반려 인간으로 맞이하기로 결정한 것은.
어째서일까?
클라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굳이 대답하자면, 그냥이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자, 잘 모르겠어요. 그냥, 그냥 그런 마음이 들었던 것 같아요.”
“그런가요? 네, 원래 그런 거예요. 클라인 양, 클라인 양은 파인만 양과 친해져서 어떻게 해 보겠다! 하고 파인만 양에게 접근했었나요?”
“네? 갑자기 그건 무슨…….”
“대답하자면?”
“다, 당연히 아니죠. 그냥, 그냥 어쩌다 보니 그런 거예요…….”
“맞아요. 클라인 양. 반려 생물을 맞이하는 건 친구를 사귀는 것과 같답니다. 친구를 사귈 때처럼 어쩌다 인연이 엮이게 되는 거죠. 클라인 양이 잉간이를 왜 반려 인간으로 맞이했는지 설명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거예요.”
“네, 네에…….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갑자기 왜…….”
“그냥. 반려 생물을 들이는 건, 친구를 사귀는 것과 같다고 하고 싶었어요.”
클라인은 갑작스러운 리만의 연설에 쓴웃음을 지었고, 리만은 조용히 본론을 꺼냈다.
“클라인 양. 클라인 양이 궁금해하던 건, 반려넷에 왜 그런 보안장치가 걸려 있는가에 대해서죠?”
“그……렇죠?”
“이유는 간단해요. 그렇게 법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에요.”
“네?”
“뭐, 사육자들이 혹시나 반려넷을 들여다보고 충격받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하지만요. 제일 큰 건 법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랍니다.”
“버, 법으로요? 그런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차원 생물의 보호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제17조 8항에 따르면, 지적 생명체가 함부로 차원 생물들과 대화해선 안 된다. 들어 본 적 있나요?”
“그건. 들어 본 적이…….”
“없겠죠. 당연해요. 클라인 양의 보안 등급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정보니까요.”
“보안 등급…….”
이 이야기가 보안 등급이 나와야 할 정도의 이야기인가?
클라인은 리만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당혹스러웠다.
사육자들이 충격을 받을까 보안을 걸어 놨다는 건 이해가 가지 않으면서도 이해가 간다.
평균적인 인간형 생물의 취급을 생각하면, 그들이 떠드는 이야기에서 주인들이 그리 좋게 묘사되진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함부로 차원 생물들과 대화를 하면 안 된다니?
평소에 사람들이 반려 생물들과 교감하는 건 다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도대체 왜 그러한 법률이 일반적인 보안 등급으로 접근할 수 없는 정보인 것이고.
“그, 그런 법이 있다고요? 그렇다면 사람들이 반려 생물들과 교감하는 건 다 뭔데요?”
“반려 생물들과 교감하는 사람은 있지만, 그 누구도 반려 생물들과 대화를 하려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런 거예요.”
교감과 대화는 다르다.
그 당연한 사실을 리만이 클라인에게 들이밀고, 클라인은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
“클라인 양. 사람들이 어째서 차원 생물들과 교감은 해도, 대화를 하려고 하지 않는지 아나요? 충분한 마력만 있다면 누구나 차원 생물들과 대화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데도요.”
“그건, 그러니까…….”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나요? 어째서 법률을 알아보는 데 보안 레벨이 필요한 건지?”
이 이상은 안 된다.
클라인의 본능이 더 이상 리만의 말을 듣지 말라고 고함을 질러 댔다.
더 듣는다면 돌이킬 수 없다고.
더 듣는다면 진짜 위험하다고.
“듣고 싶지 않다면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 클라인 양은 평소처럼 생활하면 될 뿐이에요. 단지, 이 이야기에 다시는 관심을 가지지 않고요.”
“저, 저는…….”
당연히 이 이야기를 듣지 않는 게 맞다.
어째서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려 하는 거야?
지금 네가 하려는 건 스스로의 본능과 이성을 둘 다 거스르려는 거야.
그런 속삭임이 클라인의 귓가에 울려 퍼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 속삭임은.
클라인의 마음속에서 피어오른 아주 순수한 호기심을 이겨 내지 못했다.
“어째서 잉간이와 대화를 하면 안 된다는 건지, 듣고 싶어요.”
“그럴 줄 알았어요.”
클라인의 대답에 리만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고, 그와 함께 클라인의 귓가에 울려 퍼지던 속삭임이 모조리 사라졌다.
어째서 잉간이와 대화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인지 그 이유를 듣고 싶다.
반려 생물은 친구나 다름없다며?
그럼 친구와는 대화해도 되는 게 아니야?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했고, 리만은 조용히 무거운 입을 열었다.
“이유는 아까도 말했죠? 법률로 정해져 있다고.”
“네. 그런데 그 법률은…….”
“모르는 게 당연해요. 그건 클라인 양의 본능에 새겨진 본능법이니까요.”
“본능법?”
처음 들어 보는 단어다.
클라인은 리만의 입에서 나온 본능법이라는 단어에 의문을 품었다.
본능법이라는 건, 도대체 뭐야?
“본능법이라는 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본능에 새겨지는 법을 말해요.”
“본능에 새겨진다고요? 그게 어떻게 가능…….”
“클라인 양의 부모님에게서 물려받은 클라인 양을 구성하는 근본 정보들 있죠? 거기에 처음부터 그러한 법률이 새겨진 거예요.”
“그런, 그런 게 가능한 거예요?”
“안 될 게 뭐가 있어요? 기술력은 당연히 충분하고, 클라인 양도 알다시피 중앙정부가 그리 깨끗한 사람들은 아니잖아요?”
그래.
그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중앙정부의 의견과 다른 의견을 내기만 해도 사상범으로 몰리는 세상이라는 걸 누구나 알지만.
보안 등급이라는 명목으로, 정보 오염을 막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은 정보들이 있다는 걸 누구나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사실을 예상하던 사람들이 있겠는가?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행동이 본능법이라는 괴상한 시스템에 의해서 제어되고 있었다니?
“뭐, 본능법에는 큰 강제력이 없어요. 단지, 무의식적으로 법률에 적힌 대로 움직이는 걸 선호하게 만들 뿐이죠. 심지어 때로는, 본능법의 일부가 누락되어서 자식에게 전달되기도 한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수많은 법들이 필요한 거고요.”
리만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충격적인 이야기의 연속.
리만은 드디어 남에게 이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속 시원했던 걸까?
한결 개운한 표정을 지으며 클라인에게 말했다.
“자, 어째서 차원 생물과 대화를 하면 안 되는지 물었죠?”
“네, 그렇죠. 그건 어째서…….”
“이 이야기를 하려면…… 꽤 돌아가야 하는데요. 괜찮죠? 시간은 많으니까.”
“……네.”
그래.
처음부터 이렇게 쇼킹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제 뭔 이야기를 들어도 놀랍지 않다.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브리더 협회의 설립 목적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었나요? 제가?”
“네. 우주에 적어진 생물들을 복원하기 위해서라고…….”
“미안해요. 그거, 거짓말이었어요.”
“네, 네?”
“클라인 양. 클라인 양은 지적 생물체의 정의가 뭐라고 생각해요?”
“지적 생물체라면, 어. 일정 이상의 문명을 이룩하고, 사람과 대화할 수 있으며, 마지막으로는…….”
“중앙정부의 심사를 통과한 종족. 그렇게 알고 있죠?”
“네, 뭐. 그렇죠.”
그 중앙정부가 지적 생명체를 인정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그것은 중앙정부만이 아는 사실이다.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을 어째서 물어보지?
클라인은 그런 의문을 가졌고.
“그럼 혹시, 클라인 양은 탄탈로스와 울타르가 먼 과거에는 지적 생명체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네?”
이어진 리만의 믿기 힘든 발언에 멍하니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일까?
울타르와 탄탈로스가 원래는 지적 생명체였다니?
91화 [공익광고] 중앙정부는 늘 여러분을 위해 헌신합니다.
“울타르와 탄탈로스가 지적 생명체였다뇨? 그게 무슨…….”
클라인은 리만이 꺼낸 이야기를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울타르와 탄탈로스가 지적 생명체였다니? 그게 가능한 일인가?
두 생명체 모두 반려 생물로서 인기가 높은 정보 생명체들인데.
지적 생명체로 인정받았던 생물들을 반려 생물로 키운다고?
아냐, 뭔가 잘못된 정보일 거야.
그래, 탄탈로스와 울타르가 지적 생명체였을 리가 없어.
그렇게 클라인은 리만의 말을 부정하려고 했지만.
문득, 클라인의 머릿속에 탄탈로스와 울타르를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고 있었는지 떠올라 버렸다.
충분한 교육만 시킨다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할 수 있다.
그렇다는 건 사람과 그다지 능력이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 클라인은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고, 리만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뭐, 저도 어째서 울타르와 탄탈로스의 지적 생명체 지정이 해제되었는지는 모른답니다. 협회의 기록을 살펴보다가 발견한 것이니까요.”
“지, 지적 생명체 지정이라는 게 해제될 수도 있는 거예요?”
“뭐, 중앙정부가 지정하는 것이니 중앙정부가 원한다면 해제도 가능하겠죠.”
“그렇다고 해도 그건, 말이……!”
“안 되죠?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한답니다.”
지적 생명체로 인정해 두고, 어느 날 갑자기 지적 생명체 지정을 해제한다고?
그건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전날 아침까지만 해도 평화롭게 이야기를 나누던 이웃이 다음 날 갑자기 아침 식사로 나오는 것과 같은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과연 그런 일이 이웃한테만 일어날까?
어쩌면, 나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너무나도 섬뜩한 이야기다.
일어나선 안 되는 이야기지만, 문제는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거다.
아니, 이미 일어난 지 오래됐고 아무도 그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이건 무언가가 잘못됐다.
“뭐, 전에는 알면서도 딱히 신경 쓰지 않던 일이었어요. 우리는 이 우주에서 가장 발전했는데, 이 정도는 괜찮지 않나 싶었거든요. 그런데 요즘에 조금 생각이 바뀌었어요.”
“무슨 일이 있었기에…….”
“뭐, 우리가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러 왔는지 알려 줄 작은 친구를 하나 만났거든요.”
리만은 씁쓸한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렸고, 클라인은 가만히 리만을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뭐죠?”
“네?”
“제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이런, 이런 무거운 이야기를…….”
“클라인 양이 차원 생물과 대화하면 왜 안 되는지 알고 싶다고 해서죠.”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이건, 그러니까…….”
“농담이었어요. 이유요? 아주 간단해요. 클라인 양이 제게 필요하니까요.”
“제가요……?”
클라인은 리만의 말을 듣고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단순한 외출 거부자에 쥬튜버인 내가 왜 리만에게 필요한 거지?
클라인은 그런 의문을 품었고, 리만은 그런 클라인의 의문을 풀기 위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차원 생물과 대화하면 안 된다. 이게 어째서 생겨난 법안인지는 슬슬 이해하겠죠?”
“그건…….”
“대화를 한다는 건, 서로의 생각을 나눈다는 거죠. 감정이 아니라. 그리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게 되면 서로의 생각이 바뀌게 되고. 그건, 중앙정부가 의도하는 지금의 체제에 위협이 되는 것이죠.”
“중앙정부가 의도하는 체제라면…….”
“모든 게 중앙정부의 관리 아래에 놓인, 소수의 시민으로 인정된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낙원.”
“리만 협회장님은. 설마 그 체제를…….”
리만의 이야기를 듣던 클라인은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합리적인 의심을 슬그머니 꺼냈지만, 리만은 고개를 내저으며 클라인의 말을 부정했다.
“아뇨. 아니에요. 저는 지금의 이 체제를 바꿀 생각도, 힘도 없답니다. 솔직히, 중앙정부가 만든 낙원은 확실히 낙원이 맞잖아요?”
“……그렇죠.”
그래, 그 누구도 중앙정부가 만들어 낸 낙원이 별로라고 부정할 수 없다.
단지 그 낙원에 들어가지 못하고, 낙원을 유지하기 위해 갈려 나가는 생명들에서 눈을 돌린다면 말이다.
“마력망 덕분에 누구나 이용권만 있다면 그 어떤 마법이든 사용할 수 있고, 범죄도 발생 즉시 감찰관들에게 제압당하죠. 정부를 욕하지만 않는다면 말이에요.”
“하지만 지금의 이건, 이건……!”
“네.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을 위한 낙원이에요. 저도 이 사실을 알고 처음에는 클라인 양처럼 생각했어요. 사람들을 모아서 지금의 이 체계를 바꾸자.”
리만은 그렇게 말하고는 누군가에게 보내는 것인지 모를 비웃음을 지었다.
“멍청한 생각이죠. 사람을 모아서 이 체제를 바꾼다? 불가능해요. 그 누구도 이 낙원을 무너트리고 싶지 않으니까요. 심지어 저 자신도 그러니까요.”
“그럼 어째서. 이런 이야기를 어째서 하는 거예요? 그냥, 악취미? 이 이야기를 듣고 놀라워하는 표정이나 지켜보려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리만의 모습에 클라인은 다소 거친 말투로 리만을 비난했다.
클라인의 비난을 들은 리만은 씁쓸한 듯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건 아니랍니다. 단지 타협했을 뿐이에요.”
“타협요?”
“누군가들의 희생으로 이뤄지는 낙원을 무너트리는 대신, 낙원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을 늘리는 건 어떨까요?”
“낙원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을 늘린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희생당하는 생명들을 낙원 안으로 끌어오면. 언젠가는 모든 생명들이 낙원 안으로 들어오는 날이 찾아오겠죠. 첫 번째 계획에 비해서 꽤 괜찮은 계획 아닌가요?”
클라인은 그제야 리만의 계획을 깨달았다.
그녀는 체제를 전복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체제 안에서, 체제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을 늘리려는 것이다.
누군가는 위선자라고 욕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그녀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뭐, 처음에는 탄탈로스와 울타르부터 울타리 안으로 집어넣고 싶었답니다. 그래서 최대한 탄탈로스와 울타르의 권익 향상에 힘을 쏟았죠. 하지만, 한계가 있더라고요.”
“한계요?”
“도대체 탄탈로스와 울타르가 어째서 지적 생명체에서 제외됐는지 몰라도 중앙정부가 아예 경기를 일으키더라고요. 그거 아나요? 탄탈로스와 울타르는 반려넷을 이용하지도 못해요. 중앙정부에서 아예 그렇게 지침이 내려왔거든요.”
리만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씁쓸하게 웃었고, 클라인은 그 너무나 처량한 웃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작은 친구와 대화하고 깨달았죠. 지적 생물이라는 건, 그리 희귀한 것도 아니구나.”
“작은 친구라면…….”
“네, 인간요. 그래서 두 번째로 선택한 종족이 인간형 생물들이랍니다.”
리만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조용히 클라인에게 말했다.
“자, 제가 왜 클라인 양을 선택했는지 알겠죠?”
“그렇지만, 인간형 생물들의 인식을 올리기 위한 거라면 저 말고도 다른 사람이었어도 될 텐데요.”
“아니에요. 이건 오직 클라인 양만이 할 수 있답니다. 제가 부탁하고 싶은 건 그게 아니에요.”
“그럼 무슨……?”
“대화죠. 지적 생명체의 기준, 기억나죠?”
“일정 이상의 문명을 이룩하고,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 생물…….”
“그거예요. 클라인 양은 지금 잉간이와 교감 그 이상의 것을 원하는 걸로 보이는데. 그렇지 않나요?”
“……그렇죠. 그렇다고, 생각해요.”
그래.
지금은 애써야 교감을 할 수 있는 수준이어서 교감을 하는 데 집중하고 있지만.
만약 잉간이와 교감을 자유롭게 하게 된다면 클라인은 교감을 넘어선 것을 원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잉간이와의 대화를 원하겠지.
“아까, 차원 생물과 대화를 하면 안 된다는 건 본능법으로 정해져 있다고 했죠?”
“그렇죠.”
“가끔씩 말이에요. 가끔씩 그런 본능법의 제어가 잘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답니다. 저도 그렇고, 클라인 양도 그렇고. 이제 이해됐나요? 제가 클라인 양에게 이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부탁하려는 이유를요.”
모든 것이 납득이 되는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납득이 된다.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마지막으로 리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물어봤다.
“제가 협회장님의 부탁을 들어주거나 거절한다고 해도, 위험하지는…….”
“않죠. 클라인 양은 그냥 잉간이와 대화를 하려고 노력만 하시면 된답니다. 위험한 일은 저와 작은 친구가 알아서 할 일이니까요.”
리만은 클라인을 안심시키려는 듯 클라인에게 안전을 보증했고, 클라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할게요. 그, 그냥 지금처럼 잉간이와 대화하려고 하면 되는 거죠?”
“그렇죠. 제가 원하는 건 인간형 생물과 보편적으로 대화할 수 있다는 증거니까요.”
“네, 그럴게요.”
그러자 리만은 한시름 놓은 듯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아, 그리고 클라인 양. 선배로서 하는 조언인데요.”
“네?”
“클라인 양은 잉간이의 진짜 이름을 알고 있나요?”
“그건…….”
“클라인 양. 만약 잉간이의 진짜 이름을 알고 싶다면 잉간이와 빨리 대화하는 게 좋을 거예요. 이름이라는 건 불리지 않으면 쉽게 잊힌답니다.”
“리만 협회장님은 그럼…….”
“네. 부끄러운 말이지만, 아직 저는 작은 친구의 이름을 모른답니다. 클라인 양은 저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길 바라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리만 협회장은 클라인의 집을 떠나갔다.
리만이 사라지고 클라인은 가만히 털썩 소파에 주저앉아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참 복잡한 감정이 담긴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너무 한꺼번에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파인만…….”
“네가 선택했으니 네가 알아서 해라. 이건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스케일을 넘었어.”
“나, 잘할 수 있을까……?”
“잘해야지. 잉간이를 위한 일이잖아.”
클라인은 가만히 파인만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지친 심신을 치유했다.
잉간이를 바라보는 것도 좋지만, 역시 이렇게 파인만과 대화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만약에, 만약에 이렇게 잉간이와 대화를 할 수 있다면?
그건 그 무엇보다 가장 행복한 일이 되겠지.
“응. 힘내야지. 힘.”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각오를 다졌다.
그나저나 잉간이와 대화를 하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리만의 말에 따르면 시스템이나 마법을 통한 번역은 통하지 않을 텐데.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계속해서 뭐든 시도해 봐야겠지.
잉간이와의 첫 교감도 그리 쉽지 않았으니까, 대화도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차원항 안을 들여다봤다.
“어?”
차원항 안에 잉간이가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정체불명의 조각상들이 잔뜩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잉간이는.
“_(0_0)_”
켄토르와 하르피아와 함께 넙죽 엎드리며 하늘을 향해 무언가를 전하려고 하고 있었다.
* * *
“하아…….”
리만은 집무실로 돌아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클라인이 자신의 이야기에 거부감을 보이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야.
리만은 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집무실 안에 들어찬 차원항과 사육항들 앞으로 다가가 일과를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차원항과 사육항 안의 인간들에게 사람의 목소리를 부담이 가지 않는 선에서 들려주며 그들에게 내성을 심어 주는 작업.
그리고 그들에게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를 이해시키는 작업은 아무리 해도 해도 나아지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리만은 도대체 언제쯤 이 일이 끝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한 리만이 가만히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투정을 털어놨다.
“마법이나 시스템의 도움 없이, 자연 그대로의 차원 생물과 대화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
“어제는 반드시 가능하다고 하더니, 오늘은 왜 그러지?”
“그냥. 과거를 떠올렸더니 회의감이 들어서. 그때처럼 이게 다 부질없는 짓은 아닐까 싶어서.”
“이 세상에 부질없는 짓이란 없어.”
그렇지만 아무도 대답하는 이 없을 집무실 한구석에서 누군가의 대답이 들려왔다.
정체불명의 목소리의 말을 들은 리만은 피식 웃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래, 네가 100만 번 만에 그곳을 탈출한 것처럼 말이야.”
“100만 번이 아니라, 961,123번이다.”
“그래. 아무튼. 너는 어때? 반려넷으로 성과는 좀 거뒀어?”
“그럭저럭. 꽤 성과가 있었어.”
“그거 다행이네. 내 작은 친구.”
리만이 진심을 담아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과 함께 집무실 깊숙한 곳에서 검은 불빛이 피어오르고, 이젠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누군가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조금만, 앞으로 조금만 더 이해한다면, 가능할 거야.”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증오심을 불태우며 말이다.
그 모습을 리만은 걱정스럽게 바라봤지만, 그 누군가는 리만을 바라보지 않았다.
단지 자신에게만 보이는 화면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인류 해방 전선에 합류하라]
92화 지구산 인간이 리베리아식 제사를 치르는 법
“뭐야, 표정이 왜 그래?”
전에도 한번 이런 말을 블랑카에게 들었던 것 같은데.
나는 그런 기시감을 느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별거 아니고. 그냥 요즘 생각이 좀 많아져서.”
“요즘? 아, 그때 이후로?”
“뭐, 그렇지.”
블랑카에게 있어서도 그날의 다큐멘터리는 꽤나 충격적이었던 걸까?
블랑카는 단번에 내 생각이 많아진 원인을 집어냈고, 슬며시 내 곁으로 다가왔다.
“고민이 있으면 말해 봐. 일단 입 밖으로 꺼내야 어떤 고민이 있는지 알 수 있잖아?”
“그렇지. 그런데, 조금 말하기 복잡해서.”
“그럼 정리될 때까지 기다려 줄 테니까.”
“흐음…….”
정리라.
사실, 뭔가 복잡한 고민이 있는 것처럼 포장하긴 했어도 생각해 보면 그리 어려운 고민은 아니잖아?
주인 녀석의 생각을 도저히 알 수 없다는 게 문제니까.
“음. 그냥, 주인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서? 그런 느낌인데…….”
“그래?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이 든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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