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 13

오히려 전에 살짝 엿보이던 속살이 완전히 차단되어 처음의 내 목표는 달성됐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 옷도 걸치지 않은 아리스의 하반신.
깃털이 아리스의 중요 부위는 가려 주고 있지만, 깃털들이 미처 가리지 못한 부위가 있다.
마치 스타킹을 신은 것같이 깃털들이 미처 가리지 못한 허벅지 부위의 절대 영역.
상반신이 수수하다 보니 역으로 내 눈길이 하반신의 절대 영역에 집중됐고, 그것은 아리스의 육체미를 더욱 강렬하게 불태웠다.
아리스의 시선이 다시금 내 하반신으로 향했고, 아리스는 꿀꺽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히히.”
기분 좋은지 히죽거리는 아리스의 시선을 피하며 나는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대화의 화제를 바꿨다.
“크흠. 배, 배고프지? 빨리 요리해 줄게!”
“그, 그 모습으로?”
그러자 블랑카는 깜짝 놀라며 내게 말을 걸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옷 갈아입기도 귀찮고. 어느 정도는 입고 다녀야 주인 녀석이 만족할 거 아냐?”
“……저기, 그럼. 그럼 이것도 걸치고 요리할 수 있어?”
“뭔데?”
블랑카는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정체불명의 옷 하나를 건넸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블랑카에게 옷의 정체를 물었고, 블랑카는 헛기침을 하며 내 질문에 대답했다.
“아, 앞치마야. 요리하며 옷이 더러워지면 안 되니까…….”
“어, 응.”
나는 별생각 없이 블랑카에게서 옷을 받아 들고 걸쳤고, 곧바로 요리를 시작하려 했다.
하지만.
“흐익?”
갑자기 블랑카가 뒤에서 나를 꽉 껴안았고, 블랑카는 조용히 내게 속삭였다.
“내가, 내가 원래는 좀 더 아껴 먹으려고 했거든……?”
“브, 블랑카?”
“다 짜였을 테니까, 다 채우려면 며칠은 필요하잖아? 그래서 놔두려고 했는데, 이건 못 참겠어.”
“저기, 저기……?”
“지난번에 받은 정력제. 가지고 있지?”
나는 떨리는 손길로 조심스럽게 정력제를 블랑카에게 내밀었고, 블랑카는 정력제를 우악스럽게 뚜껑을 따고 조용히 선언했다.
“입 벌려.”
그대로 블랑카는 정력제를 자신의 입안에 털어 넣고, 나에게 정력제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먹였다.
그리고 그날, 나는 말을 길들이는 데 실패한 인류가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 * *
“좋아. 이렇게 하면 되겠지……?”
클라인은 혹시나 잉간이가 옷들을 이상한 것으로 여기고 버리지 않게끔 잉간이를 위한 쪽지를 작성했다.
그림으로 잉간이를 그리고, 이렇게 옷을 입는 모습을 그리면…….
뭐, 이게 입는 옷이라는 건 알아주지 않겠어?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되는 건 클라인이 입고 있는 이 후드 티와 비슷한 옷이다.
어제 쇼핑몰을 뒤적거리며 잉간이에게 입힐 옷을 검색하다가 발견한 옷인데, 문어 형태의 후드가 포인트다.
“이걸 입으면 커플 룩 비슷하게 보이겠네. 큭큭.”
상상만 해도 참 흐뭇해지는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좋아, 쥬튜브 섬네일은 클라인이 후드 티를 뒤집어쓴 모습하고 잉간이가 저 옷을 입었을 때의 모습을 대조하는 것으로 하자.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쪽지를 옷을 넣어 둔 상자 안에 집어넣고, 조심스럽게 상자를 차원항 안으로 투하했다.
아, 맞아.
지금 시간대는 켄토르가 사냥을 나가는 타이밍이니까 켄토르도 불러야지.
잉간이를 위해서 옷을 넣은 거지만, 잉간이 것 말고도 룸메이트들을 위한 옷도 넣어 놨으니까.
“켄토르여, 당신을 위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세요…….”
대충 이런 식으로 하며 되겠지?
사육자 숭배는 꽤나 귀찮지만 사육 생물을 컨트롤하기 쉬워진다는 장점도 있단 말이지.
클라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잉간이와 룸메이트들은 한자리에 모여서 옷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래, 그거!
그 옷이야, 그거!
잉간이가 클라인의 마음에 쏙 든 옷을 손에 들자 클라인의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지만, 잉간이는 이내 옷을 내려놨다.
쩝, 아쉽네.
그래도 괜찮아.
직접 잉간이에게 부탁하면 입어 주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던 클라인의 눈에, 잉간이의 이상 행동이 들어왔다.
“어, 어? 저건 잉간이 옷이 아닌데……?”
잉간이가 손에 든 것은 클라인이 장난삼아 넣어 둔 ‘여성용’ 의복.
발달기의 아이들이 입는 교복을 모티브 삼아서 만든 옷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잉간이가 입을 만한 옷은 아닌데?
클라인은 지구에 그런 습성이 있었나 생각해 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구엔 그런 습성은 없었다.
그렇다면 잉간이에게 그런 취미가 있다는 뜻일까?
클라인이 혼란스러워하는 와중에도 잉간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성용 의복으로 갈아입었다.
어째서 잉간이가 저런 짓을 하는 거지?
그렇게 고민하던 클라인은 문득 이번에 자신이 집어넣은 의복들이 죄다 형상 기억 정보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맞다! 마력 처리!”
새롭게 옷이 도착한 것에 너무 흥분해서 마력 처리로 포장지를 벗기는 것을 깜빡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잉간이처럼 고밀도 정보를 처리하는 능력이 발달되지 않은 켄토르와 하르피아의 눈에는 저 옷들이 제대로 보이겠지만.
고밀도 정보 처리 능력을 발달시켰어도, 아직 완벽하지 않은 잉간이의 눈에는 저 옷들이 미확정 정보로 보이는 상태일 것이다.
뭐, 켄토르와 하르피아가 옷을 착용해서 상태를 확정 짓는다면 잉간이의 눈에도 옷의 모습이 보이겠지만.
그냥 옷을 놔둔 상태라면 잉간이는 옷이 어떤 상태인지 모르는 것이다.
즉, 그러니까 지금 잉간이는 자신이 입으려는 옷이 여성용 의복이라는 걸 모른다는 건데…….
지금이라도 어떤 상황인지 알려 줘야 하나?
클라인은 그렇게 고민했지만, 잠시 후 여성용 교복을 입은 잉간이의 모습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뭐야, 저거?
잉간이는 분명 수컷인데, 어째서 웬만한 암컷보다 더 귀엽게 보이는 거지?
클라인은 숨을 들이마시며 교복을 입은 잉간이의 모습을 바라봤고.
이 모습을 카메라로 녹화하고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생각보다 엄청 잘 어울리는데?
“와, 엄청 귀여워…….”
클라인은 그런 잉간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헤벌쭉 웃었고.
그런 생각을 한 것은 클라인뿐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 모습은 켄토르에게도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걸까?
“어, 어?”
켄토르는 클라인에게 편집할 거리를 잔뜩 늘려 주는 일을 시작했다.
저, 정력제를 선물해 주길 잘했다.
하긴 켄토르가 서열이 더 높은데 하르피아만 행위를 한다는 게 말이 안 되긴 했지.
그렇지만 어째서인지 자꾸 클라인은 잉간이가 교미를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 한편이 불쾌했다.
애완 생물이 교미하는 걸 보고 정이 떨어졌다는 것과 비슷한 걸까?
아니, 아직까지도 내가 잉간이를 자신의 소유물로 여긴다는 사소한 질투다.
빨리 이 감정을 느끼지 않아야 할 텐데.
잉간이는 내 소유물이 아니니까 말이야.
그래도 역시 클라인은 계속해서 저 모습을 보기 거북해져서 잠시 카메라를 놔두고 메일함으로 들어갔다.
뭐, 새롭게 온 메일은 없으려나?
그렇게 생각하던 클라인의 눈에, 상당히 중요한 메일이 들어왔다.
[리만 협회장님]
-반려 생물 등록 건에 대해서.
협회장님이 직접 메일을 보냈다고?
어째서?
79화 [브리더 협회 공식] 반려 생물 등록제, 이래서 개정해야 합니다.
“헤으윽…….”
블랑카의 압도적인 체력을 온몸으로 받아 내고, 나는 침대에 축 늘어져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블랑카가 덮쳐들 때에도 나는 어째서 블랑카가 갑자기 그런 모습을 보였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모든 일이 끝난 뒤에서야 블랑카가 어째서 그런 짓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뭐야, 이거?”
에.
뭐야, 이거.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침대처럼 아무 오염 없이 깨끗한 옷의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중요한 건, 아무리 봐도 바지가 아닌 휑한 하반신의 감촉과 나풀거리는 치맛자락이 내 눈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잠깐.
설마, 설마 하지만…….
나는 창백해진 얼굴로 조심스럽게 내가 입고 있는 옷을 더듬었고, 내가 지금 어떠한 옷을 입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건, 교복?
아무리 봐도 내가 여성용 교복을 입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얼굴을 붉혔다.
“읏……!”
얼굴을 붉히며 주위를 둘러보자 지쳤는지 짚더미에 쓰러져 자고 있는 블랑카와 아리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장, 여장이라니.
그제야 나는 어제 아리스와 블랑카가 내게 보여 주던 기묘한 표정의 원인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서 여러 번 내게 정말 그 옷을 입을 거냐고 물어봤구나.
그리고 당연히 하반신이 치마니까, 아래쪽의 반응도 훤히 보였을 테고.
으아, 으아아.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도무지 멈추질 않는다.
그 무엇보다, 주인 녀석은 이 모습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입으라고 준 옷 대신 여성용 옷을 입는 모습을 보고 이상한 오해를 하진 않았겠지?
잠깐, 생각해 보니까 주인 녀석은 아무 때나 내 모습을 관찰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지금까지 블랑카와 아리스한테 쥐어짜이던 것도 다 보였다는 걸까?
나는 손부채질을 하며 일단 좀 씻고 옷을 갈아입으려 서둘러 호숫가로 향했다.
하룻밤을 새워서 조금 전까지 느껴지던 피곤함은 창피함에 묻혀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원래의 옷들을 들고 호숫가에 도착했을 무렵, 갑자기 하늘에서 주인 녀석의 촉수가 나타났다.
“:-S”
촉수는 쭈뼛거리며 내게 노란빛의 잠옷 하나를 건넸다.
지금, 나보고 이걸 입어 달라고 부탁하는 건가?
나는 진심이냐는 듯한 표정으로 가만히 촉수를 올려다봤고.
촉수는 포기하지 않고 내게 잠옷을 더 들이밀었다.
그래, 이 정도는 서비스해 줘야지.
다른 것도 아니고, 단순히 잠옷을 입어 주는 정도잖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잠깐 한숨을 내쉬고, 촉수에게서 잠옷을 받아 들었다.
먼저 호수에 들어가서 몸에 달라붙은 체액들을 씻어 내고 촉수에게 받은 잠옷으로 갈아입는다.
노란빛의 잠옷은 마치 동물 잠옷처럼 후드 부분이 문어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다.
“자.”
아리스와 블랑카에게 했던 것처럼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아 주인 녀석에게 내 모습을 선보인다.
슬슬 더 자지 않고 버티는 건 무리여서 하품을 했더니, 촉수가 바르르 떨었다.
그러고는 내 품 안에 젤리를 안겨 주고 떠나갔다.
음, 그래.
이 정도는 받아야 수지가 맞지.
그렇게 생각하며 이번에야말로 진짜로 자려고 했지만.
스윽.
하늘에서 다시 주인의 촉수가 내려와 내가 무언가가 그려진 쪽지를 선물했다.
웬만한 내용이면 그냥 무시하고 자러 갔겠지만, 주인 녀석이 내게 건넨 쪽지에는 내가 무시 못 할 내용이 그려져 있었다.
작은 인간이, 커다란 어항으로 보이는 곳을 촉수를 타고 나오는 그림.
나는 쪽지에 그려진 내용을 보고 슬며시 주인을 올려다봤고.
주인은 내 선택을 기다린다는 듯 내게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이건, 나보고 여기서 나가고 싶냐고 물어보는 것일까?
아니면, 잠깐 내게 바깥 구경을 시켜 주고자 하는 것일까?
나는 주인의 의도가 분명치 않아서 잠시 망설였지만.
이제 와서 주인 녀석이 내게 해가 되는 일을 할 리 없다는 생각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주인의 손바닥에 올라탔다.
기분 탓일까?
뭔가 전보다 손바닥이 좁아진 기분이다.
그리고 주인은 내가 쪽지를 이해한 대로 나를 바깥으로 꺼낼 생각인지 손바닥을 쭈욱 들어 올렸다.
그나저나 주인 녀석, 나에게 뭘 원하는 거지?
뭐, 사진이라도 찍을 생각인 걸까?
그래, 키우는 애완동물에게 옷을 입히면 찍고 싶은 게 사람 본능이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느긋하게 긴장을 풀고 있었지만.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
스멀스멀.
평소와는 다르게, 주인 녀석의 몸에서 내 몸으로 흘러들어 오는 정보의 느낌이 다르다.
기존에 느껴지던 정보는 따스하거나, 무관심했는데.
지금 내 피부를 찌르는 고밀도의 정보는 무언가 독기가 가득해서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다.
뭐지?
무슨 일이 있었나?
내가 의아하게 생각하던 그때, 내 몸이 어항의 밖으로 빠져나오고.
수많은 정보들로 가득한 어항 밖의 세상이 나를 다시금 반겼다.
저 수많은 정보를 받아들이기엔 아직까진 내가 너무나 연약했기에, 나는 본능적으로 주인 녀석의 정보들로 내 주위를 똘똘 감싸 나의 머리를 보호하려 했고.
바깥의 정보 대신 그나마 익숙한 주인의 정보가 들어오자 욱신거리기 시작한 두통이 멎었다.
그 대신 정체 모를 독기는 더욱 강렬해지기 시작했지만 말이다.
그때, 주인이 나를 촉수로 휘감아 바닥에 내려놨고, 다시금 방대한 정보들이 내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뭐, 전처럼 구토감이 올라올 정도는 아니다.
단지 속이 좀 안 좋아질 뿐이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와중, 나는 허공에서 반짝거리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거대한, 거대하고도 또 거대하고 거대한 거울.
태산만 한 거울이 나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고, 주인의 촉수는 그 거울을 휘감고 있었다.
내가 거울을 바라보며 저게 무엇인지 의아해하는 사이, 거울이 이리저리 이동하며 나를 비췄고.
촉수 하나가 다가와 내게 젤리를 건넸고, 나는 서둘러 젤리를 낚아채서 품 안에 안고 가만히 상황을 주시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나를 비추던 거대한 거울은 정신을 차려 보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자, 이제 볼일은 다 끝난 거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주인의 손바닥 가까이 다가갔지만.
갑작스럽게 주인의 상태가 이상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부들부들.
주인의 몸이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하더니 주인의 몸에서 느껴지던 독기가 이젠 살을 쿡쿡 찌르는 것을 넘어서 베어 내는 듯한 고통을 가해 오기 시작했다.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나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섰고, 주인은 이상한 괴성을 질러 대기 시작했다.
“:-C”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
내가 의아해하는 사이에도 주인의 몸에서 빠져나오는 정보들의 독기가 점점 더 짙어지더니.
“우왓?!”
그대로 내 발목을 휘감고 나를 삼켜 버렸다.
도망치거나 피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나는 그대로 시커먼 정보들 속으로 끌려갔고.
나는 또다시, 언젠가 봤었던 것 같은 악몽 속에 와 있었다.
악몽이라고 해도 내가 매일 밤 꾸는 보랏빛의 악몽과는 달랐다.
신비로운 기운을 자아내는 청록빛의 안개가 내 주위를 휘감고 있었고.
안개 속을 헤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와중.
나는 또다시 그녀가 되어 있었다.
아프고, 싫다.
두렵고, 무섭다.
자신이 뭘 하든 이 고통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지독하리만큼 끔찍한 무력감이 내 몸을 덮치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봤어.
다른 사람에게 호소하고, 도와 달라고 소리쳐도 봤어.
하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는걸.
유일하게 이 고통을 벗어날 수 있던 건 오로지 도망칠 때뿐이다.
어째서 다들 나를 괴롭히는 거야?
처음에는 다들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잖아.
처음에는 다들 괜찮은 사람들이었잖아.
왜 다들 나를 비웃는 거야?
왜 내가 노력하지 않았다고 욕하는 거야?
노력했어.
노력했다고!
그런데 왜 다들 나를, 나를 그렇게 말하는 거야…….
그녀의 생각과 감정이 내게 쏟아져 오며 나와 그녀의 구분을 희미하게 했지만.
‘정신 차려.’
표독스러운 목소리 덕분에 나는 간신히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래.
이 정보들이 아무리 생동감이 넘쳐도, 이건 나의 정보가 아니다.
그녀의 정보다.
그렇게 구분 지으려고 해도, 쉽사리 그 경계선이 지어지진 않는다.
간신히 어떻게든 지금의 나는 그녀의 몸 안에 있다는 식의 인식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그나저나 어째서 이런 정보들이 갑자기 흘러나오기 시작한 걸까?
모른다.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지금 주인 녀석이 무척이나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주인의 곁에 남기로 한 것.
그건, 주인이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아서.
지구 대신, 주인을 돕고 싶었으니까.
간신히 다시 일어나서 걷기 시작한 사람이 다시 쓰러지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뭐라도 해 주고 싶다.
하지만 어떻게?
내가 아무리 발악해 봤자 나는 그녀의 정보를 건드릴 수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그녀에게 끊임없이 말을 거는 것뿐,
그러니 나는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으니까.
괜찮다고, 잘할 수 있다고.
나는 그녀를 토닥이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런 내 마음이 전해진 것일까?
한없이 나락으로 추락해 가던 주인의 마음이 천천히 안정을 되찾아 갔고.
시꺼먼 독기는 다시 주인의 몸 안 깊숙한 곳으로 끌려 들어갔다.
팔과 촉수밖에 보이지 않고, 나의 몇 배는 되는 크기의 주인이지만.
지금의 내겐, 단순히 위로를 건네야 할 대상이었다.
그렇게 주인의 손을 꼭 붙잡고 씁쓸하게 쓰다듬자.
뚝뚝.
주인의 눈물이 넘쳐흐르며 바닥에 떨어지기 시작했고.
그래, 괜찮아.
너는 잘할 수 있어.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호의를 가득 담아 그녀의 손바닥을 어루만졌다.
* * *
“클라인 양. 세상을 바꿀 때 가장 필요한 게 뭔지 아나요?”
“뭐, 뭔데요?”
“관심이에요. 관심.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관심이 필요해요.”
리만이 클라인에게 보낸 메일의 내용은 간단했다.
이 편지를 보자마자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 달라는 내용일 뿐이었다.
협회장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던 클라인은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협회장에게 전화를 걸었고.
전화를 받은 협회장은 클라인에게 꽤나 영문을 모를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제가 클라인 양에게 도움을 주기로 결심한 것도, 클라인 양이 제 관심을 끌어서예요. 클라인 양이 잉간이를 키우기로 한 이유는 뭔가요? 지구산 인간이 클라인 양의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잖아요?”
“그, 그렇죠.”
“관심이 없으면 사람들은 행동하지 않아요. 말로도 떠들지도 않고요. 클라인 양.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이에요. 인간형 생물에 대한 인식을 바꾸려면 제일 먼저 뭐를 해야 할까요?”
“어…… 관심을 끈다……?”
“정답이에요. 클라인 양.”
리만 협회장은 방긋 웃으며 클라인을 화면 너머로 바라봤고, 클라인은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그런 의미에서 클라인 양. 클라인 양은 정말 잘해 줬어요. 솔직히 미니멀리즘하고 인간형 생물을 엮어서 관심을 이끌어 낼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그, 그런가요? 그냥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어서…….”
“그래서, 클라인 양. 어떤가요? 잉간이를 반려 생물로 등록하는 일은?”
리만 협회장은 온갖 잡다한 소리를 하더니 이제야 클라인에게 본론을 꺼냈고.
클라인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리만 협회장의 질문에 대답했다.
“솔직히 말해서, 무척 귀찮다고 해야 하나? 등록하기 엄청 힘들어요. 취지는 알겠는데, 이럴 거면 차라리 그냥 등록하지 않는 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바로 그거예요. 클라인 양. 지금의 반려 생물 등록제는 지나치게 너무 복잡해요. 좀 더 절차를 간략화하고, 사후 관리를 철저하게 하는 식으로 제도를 정비할 필요가 있어요.”
“그런가요……?”
“네. 여기서 질문 하나 더예요. 클라인 양. 클라인 양의 영상을 보고 인간형 생물을 반려 생물로 맞이하고 싶다는 문의가 얼마나 늘었을까요?”
“한…… 1,000건?”
1,000건도 진짜 많이 잡은 수치지만 말이야.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리만의 입에서 나온 것은 클라인의 상상을 아득하게 초월하는 수치였다.
“기존의 10만 배예요. 10만 배.”
“10, 10만 배요? 그렇게나?”
“그래요. 자, 그렇다면 클라인 양.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클라인 양처럼 반려 생물 등록제가 귀찮다는 사실을 알고 관심을 가졌어요.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될까요?”
“제도를…… 바꾸려 한다?”
“정답. 최소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제도를 바꾸려 하는 건, 저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 클라인 양.”리만은 그렇게 말하며 클라인을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오늘은 클라인 양이 이렇게나 대단한 일을 해냈다는 사실을 알려 주려고 전화를 하자고 한 거예요. 어때요? 좀 자부심이 생기나요?”
“저는 그냥 영상을 올렸을 뿐인데…….”
“맞아요. 그냥 영상이죠. 그 어떠한 의도를 담지 않은 순수한 일상을 담은 영상. 그래서 그 무엇보다 강렬한 힘을 담고 있고요.”
리만은 그렇게 말하며 클라인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그러니까 클라인 양. 부담 가질 필요 없이 지금처럼만 영상을 만드세요. 이대로 영상을 만든다면, 인간형 생물체의 인식은 금방 좋게 바뀔 거랍니다.”
“아, 네.”
“본론은 여기까지고요. 여기부턴 사족인데, 클라인 양. 혹시 결혼할 생각은 없나요?”
얼떨떨한 기분으로 리만의 칭찬을 듣던 클라인은 갑자기 180도 바뀐 리만의 이야기에 당황했다.
아니, 여기서 갑자기 결혼 이야기가 왜 나와?
“겨, 결혼요?”
“상대가 없어서 안 하는 거라면 내가 소개해 주고 싶어서 그래. 처자처럼 참한 사람이 그냥 홀몸으로 돌아다니는 게 너무 아까워. 뭐, 혹시 한 사람만 만나는 건 싫은 거야? 그럼 내가 두 사람, 아니. 세 사람까지도 소개해 줄 수 있는데.”
“아니, 아니에요! 결혼, 결혼은 그냥 개인적 문제 때문에 안 하는 거예요.”
“개인적 문제? 사지 다 멀쩡한데. 뭐가 문제라고?”
클라인의 변명을 들은 리만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고, 클라인은 씁쓸한 미소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 발달기에 좀 여러 가지 일을 겪어 가지고요. 독성 정보가 깊게 가라앉은 상태여서…….”
“아…….”
“그래서, 뭐. 태어날 아기가 불쌍하기도 하고, 가끔씩 발작? 비슷하게 독성 정보가 떠오를 때도 있어서…….”
“……미안하게 됐어. 내가 너무 무신경했네.”
“아니, 아니에요. 괜찮아요!”
클라인은 웃으며 리만의 사과를 받아넘겼고, 리만은 슬슬 전화를 끊으려는 듯 보였다.
“그래. 그럼 나중에 반려 생물 등록할 때 봐.”
“아, 네!”
그렇게 리만의 전화가 끊어지고, 클라인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간신히 전화가 끝났다.
그렇게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클라인은 문득 리만에 대해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리만은 어째서 그렇게 인간형 생물들의 인식 변화를 꾀하는 걸까?
분명히 뭔가 이득을 보는 게 있을 텐데.
뭐, 인간형 생물 농장이라도 가지고 있는 걸까?
클라인은 곰곰이 어째서 리만이 인간형 생물을 신경 쓰는지 생각해 보려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으하, 아무튼 이제 다시 잉간이나 촬영해야지~.”
클라인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차원항으로 시선을 옮겼고.
켄토르의 공격을 이겨 내고 피곤해하는 기색의 잉간이가 눈에 들어왔다.
으, 졸려 보여서 미안하긴 한데, 지금을 놓치면 셔터 찬스가 다시는 오지 않겠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잉간이에게 부탁을 담아서 슬쩍 문제의 잠옷을 건네 봤고.
“입는다, 입는다……!”
자신이 건네준 잠옷을 입고 하품을 하는 잉간이를 바라보며 탄성을 삼켰다.
아, 좀 더 가까이에서 바라보고 싶다.
차원항 너머로 관찰하는 게 너무 아쉬운데.
그래, 잉간이도 슬슬 바깥세상에 익숙해져야지.
그래야만 반려 생물 등록을 할 때 놀라지 않을 것 아닌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슬그머니 잉간이를 차원항 밖으로 꺼냈고.
즐거운 감상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리만 때문에 소모된 정신력을 클라인이 다시 채우던 그 순간.
“어, 어?”
갑작스럽게 클라인의 몸 안에 침전되어 있던 독성 정보들이 몸 밖으로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어라, 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설마, 몸을 압축한 것이 독성 정보의 활성화에 영향을 준 걸까?
클라인이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클라인의 의식 표면으로 독성 정보가 부상했고.
“아, 아. 아……!”
클라인은 독성 정보가 가져다주는 끔찍한 감각에 몸서리치며 비명을 질렀다.
싫어, 싫다고.
이런 거 싫어.
잊고자 했고, 묻어 두려고 했던 발달기의 기억과 감정들이 떠오르며 클라인을 괴롭혔다.
이 빌어먹을 독성 정보의 부상이 클라인이 방 안에 틀어박힌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는데.
요즘에는 좀 잠잠해졌나 싶더니 다시 이렇게 말썽이다.
독성 정보에 시달리는 클라인은 발작을 일으키며 부디 이 시간이 빠르게 끝나기를 빌 뿐이었다.
하지만 그때.
‘괜찮아.’
“어……?”
‘넌 잘할 수 있어. 힘내.’
희미한.
무척이나 희미해서 집중하지 않으면 사라져 버릴 정보가 클라인의 몸 안으로 흘러들어 오기 시작했다.
이건, 잉간이?
잉간이가 지금 내게 교감을 시도하는 건가?
클라인이 그렇게 당황스러워하는 사이에도 계속 잉간이의 목소리가 눈물 흘리는 클라인의 귓가를 간지럽혔고.
어째서일까?
아주 미약한 정보일 뿐인데.
그 미약한 정보가 클라인의 몸을 괴롭히던 독성 정보를 서서히 몰아내기 시작했다.
마침내 독성 정보는 다시 꽁꽁 묶여서 클라인의 몸 깊숙한 곳으로 가라앉았지만.
클라인은 도저히 잉간이와의 교감을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잉간…….”
호의를 준 적은 많아도, 이렇게 돌려받은 적은 없었는데.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따스한 눈길로 잉간이를 바라봤다.
80화 잉간이를 반려 생물 등록했어요! 그런데 접수 직원이 조금 이상하다?
나의 위로가 제대로 전해진 것인지 주인은 한결 안정된 모습으로 나를 차원항 안에 집어넣었고.
아리스와 내가 입은 잠옷과 어째서인지 교복을 제외한 다른 옷들을 모조리 회수해 갔다.
잠에서 깨어난 블랑카는 그 사실을 알고 무척이나 침울해했고.
그 우울해져 있던 기간 동안 블랑카는 다른 일보다 나와의 스킨십으로 우울감을 해소하려 했다.
처음에는 나도 어느 정도까지는 블랑카의 스킨십을 받아 주려 했지만,
매일같이 계속되는 블랑카의 스킨십에 제대로 집안일을 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고.
나는 결국 얼굴을 붉히며 아리스와 블랑카에게 선언하는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일주일에 한 번. 일주일에 한 번만 할 테니까. 그렇게 알아 둬.”
“하, 한 번? 일주일에 한 번은 너무…….”
블랑카는 울상을 지으며 내게 달라붙어 왔지만, 나는 시뻘건 얼굴로 버럭 소리 질렀다.
“다 말라 버린 걸레에서 더 쥐어짜는 일은 없다며? 최근 4일간 밥 먹고, 자는 걸 제외하면 맨날 그거만 했잖아! 하다못해 물고기도 금어기가 있다고!”
“그치만, 아무리 쥐어짜도 마르지 않으니까…….”
“정신적 소모가 있으니까, 아무튼!”
나는 그렇게 말하고 슬그머니 자기 이야기가 아니라는 듯 시치미를 떼는 아리스를 바라보며 아리스의 이름을 불렀다.
“아리스.”
“으, 응?”
“너도 마찬가지야. 너도 일주일에 한 번이야.”
그러자 블랑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아리스를 바라봤고, 아리스는 딴청을 피우며 블랑카의 시선을 피했다.
“도대체 언제 한 거야?”
“그…… 언니가 자고 있을 때. 슬쩍 침대에 들어가서…….”
“어쨌든. 아무튼 일주일에 한 번. 무조건 일주일에 한 번이야.”
“한 번은 너무 적고, 그럼 두 번……!”
블랑카는 끝까지 미련을 놓지 못하고 협상을 시도하려 했다.
하지만, 어디선가 나타난 촉수가 찰싹 블랑카의 등을 후려쳤다.
“히익!”
“왕!”
에포나가 그쯤 해 두라는 듯 가볍게 짖으며 내 발치로 걸어와 몸을 비볐고.
블랑카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더 이상 내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아무튼 그렇게 내가 선언하는 것으로 블랑카와 아리스의 기묘한 흥분 상태는 가라앉았고.
나는 그제야 미뤄 뒀던 일들을 시작했다.
4일 동안 잘 마른 뱀넝쿨을 거둬들이고 째서 기다란 실로 만들기 시작했다.
아리스가 도와줬음에도 하루가 꼬박 걸리고서야 나는 뱀넝쿨을 실로 바꾸는 작업을 끝마칠 수 있었다.
으아, 진짜 허리가 다 끊어질 듯이 아프네.
그렇게 살짝 출렁거리던 일상은 다시 본궤도를 되찾아 갔다.
언제나처럼 살짝씩 모습을 바꿔 가며 말이다.
그리고 그 모습엔 내가 자기 전에 주인의 손에 이끌려서 바깥의 풍경을 보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날처럼 주인에게서 독기가 뿜어져 나오는 일은 없었지만, 나에겐 여전히 주인은 무척이나 불안해 보였다.
막, 이것저것 챙겨 줘야 할 것 같고 말이다.
처음에는 과도하게 쏟아지는 정보들에 주위의 풍경을 관찰할 여유도 없던 나지만.
지금은 적당히 주위에서 내가 받아들이는 정보를 제한하는 방법을 깨닫고는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그 덕분에 나는 내가 들어 있던 어항이 있는 곳의 모습을 어느 정도 구경할 수 있었다.
거대한 방 안에 어항 하나만이 덩그러니 탁자 위에 놓여 있는 기묘한 모습이다.
기묘하게도 방 밖으로 나가는 문은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주인은 여길 오고 가는 걸까?
그리고 내가 뱀넝쿨 실들로 섬유를 만들기 위해 베틀 설계를 구상하던 어느 날.
평소와는 달리 주인 녀석은 나를 대낮에 어항에서 꺼냈고.
언제나의 그 회색 안개가 가득 찬 공간 속에 나를 놔뒀다.
흔들흔들.
나는 가만히 안개 속의 침대에 드러누워 주인이 이번에는 뭘 할 생각인지 추측해 봤지만.
언제나처럼 답은 잘 나오지 않았고 흔들리는 안개 속 세상이 내게 좀 더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지난번처럼 나를 이상한 곳에 데려가려는 건 아니겠지?
내가 불안해하며 침대에 드러누워 잠깐 눈을 감은 사이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한 걸까?
흔들림이 멈추고 슬며시 주인 녀석의 촉수가 내려와 나를 붙잡았다.
촉수에 이끌려 다시 안개의 세상 밖으로 나오자, 내 시선에 처음 보는 풍경이 들어왔다.
몇 번인가 나를 비추던 거대한 거울의 몇 배는 되는 크기의 거울이 나를 비추고 있었고.
“:-)”
“:-0”
“:-D”
주인의 것이 아닌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나도 모르게 저절로 익숙한 정보를 찾았다.
이곳에서 그나마 가장 익숙한 정보인 주인의 촉수를 발견한 나는 조심스럽게 촉수를 붙잡았고.
나의 불안한 감정이 전달된 걸까?
주인은 천천히 내 몸을 쓰다듬으며 나를 안심시키려 했다.
“:-O”
주인의 손길이 내게서 떠나가는 것과 동시에, 찰칵하고 무언가 작동하는 소리가 나더니.
“읏?!”
화악.
나를 비추던 거대한 거울에서 강렬한 빛이 터져 나왔고.
나는 갑작스러운 일에 깜짝 놀라며 허우적거렸다.
뭐야?
무슨 카메라 플래시가 터진 것 같은 느낌인데.
강렬한 빛이 나를 지나가고 나는 또 다른 기묘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고민했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주인의 촉수가 나를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그래, 여기서 할 거 다 끝난 거지?
그럼 이제 돌아가자.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슬며시 주인의 얼굴을 올려다봤지만.
어째서인지 주인은 나를 다시 안개 속의 세상에 집어넣지 않고 나를 들고 어디론가 이동했다.
뭐가 아직 더 남은 거야?
나는 불안해하며 주인을 꽉 붙들었고.
주인은 나를 어딘가의 공간에 내려놓았다.
설마, 나를 두고 가려는 걸까?
나는 당황하며 주인의 손가락을 붙들었지만 주인에게서 전해지는 정보는 평온했다.
“:-)”
마치 잠깐 어딘가 다녀오겠다고 말하는 듯이 주인은 내 머리를 쓰다듬고 훌쩍 떠나 버렸다.
뭐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거야?
나는 여전히 불안함을 가라앉히지 못했지만, 어디선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좀 얌전히 있으라고. 신입.”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내가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지 이곳에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했다.
더욱 정확하게 말하면, 그 사이비들을 제외하고 인간다운 인간들이 잔뜩 모여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를 부른 목소리의 주인은.
중후한 목소리와 근육질 몸매에 어울리지 않는, 마치 마법 소녀가 입을 법한 복장을 입고 있는 대머리 아저씨였다.
그 경악스러운 모습에 내가 차마 입을 떼어 놓지 못하는 사이, 대머리는 그윽한 눈빛으로 나에게 잔 하나를 내밀며 말을 걸었다.
“이리 와서 한잔하겠나?”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뭐에 홀린 듯이 대머리의 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후, 좋아. 그럼 가 볼까?”
클라인은 잉간이를 검역항 안에 집어넣고 조심스럽게 문손잡이를 잡았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그래, 잉간이가 말해 줬잖아.
나는 할 수 있어.
클라인은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당연하게도 그 누구도 클라인이 문을 여는 걸 막지 않았고.
클라인이 집 밖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건 무척이나 간단했다.
이렇게 간단한 걸 나는 왜 지금까지 꺼리고 있었던 걸까?
클라인은 피식 미소 지으며 힘차게 잉간이를 들고 지난번처럼 터미널로 이동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렇게…….”
클라인은 미리 마력망을 둘러보며 생각한 대로 한 치의 실수도 없이 무사히 개찰구를 통과했다.
그래, 어려운 거 아냐.
남들도 다 하는데, 나도 할 수 있어.
그래. 그럼 이제 텔레포트 터미널에 들어가서 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리면…….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클라인이 터미널 앞에 도착하는 것과 함께 텔레포트 터미널이 작동했고.
순식간에 계획이 어그러진 클라인은 허둥대며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했다.
어, 그러니까. 터미널을 놓쳤으면 어떻게 하면 되지?
여기서 기다리면 되는 건가? 아니면 옆 터미널로 이동해야 하나?
그렇게 허둥대는 클라인을 가엽게 여겼는지 누군가가 클라인의 둥을 가볍게 건드렸다.
“저기.”
“네, 넷?”
전에도 한번 신세를 졌던 역무원이었다.
역무원은 방긋 웃으며 클라인에게 가야 할 길을 알려 줬다.
“가장 빠른 터미널은 4번 터미널이에요. 아직 시간이 좀 남았으니 좀 천천히 가셔도 됩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클라인은 꾸벅 고개를 숙여 역무원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역무원의 안내대로 4번 터미널에 탑승했다.
그리고, 다시 터미널이 작동하고.
클라인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다시 중앙 구역에 도착했다.
지난번에 왔었던 대로 클라인은 브리더 협회 건물로 발걸음을 옮겼지만.
이번에는 지난번과 달리, 리만 협회장이 직접 클라인을 마중 나왔다.
“어서 와요.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아뇨, 별거 아니었어요. 고작 터미널을 타는 건데요…….”
“그렇죠? 별거 아니었죠?”
“네…….”
“촬영은 지금부터? 아니면 지금도 찍고 있나요?”
“아, 지금부터 찍을 생각인데…….”
“후후, 이 아주머니가 이쁘게 나오게 찍을 거라 믿어요.”
“노, 노력하겠습니다.”
클라인은 슬며시 카메라를 꺼내서 쥬튜브에 올릴 영상을 촬영하기 시작했고,
리만은 그런 클라인을 흐뭇하게 지켜보며 클라인을 직접 반려 생물을 등록하는 장소로 데려갔다.
이미 서류는 리만의 배려로 원격으로 제출했기에 오늘 클라인이 할 일은 잉간이의 마력과 외관을 데이터베이스에 등록하는 일뿐이었다.
“잉간아, 괜찮아. 위험한 곳이 아냐.”
클라인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조심스럽게 잉간이를 촬영대 위에 올려놨고.
검역항 밖으로 나온 잉간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클라인의 촉수에 달라붙었다.
“어머나. 잉간이가 잘 따르네요? 쉽지 않았을 텐데…….”
“그, 그런가요? 그냥 살짝 겁을 먹어서 그런 거 같은데…….”
“겁을 먹었더라도 이렇게 몸을 의지하는 건, 잉간이가 클라인 양을 무척이나 신뢰한다는 증거랍니다.”
“헤헤…….”
클라인은 헤실헤실 웃으며 리만의 칭찬을 받아들였지만, 이내 오늘의 목적을 깨닫고 조심스럽게 잉간이에게서 촉수를 떼어 내었다.
혹시나 자신의 정보가 잉간이에게 뒤섞이지 않게끔 말이다.
그리고, 찰칵.
마력 검사기가 사진을 찍는 것과 동시에 잉간이의 몸이 보유한 마력을 검사했다.
지체 없이 검사 결과가 곧바로 나왔고, 검사기를 조작하던 검사관은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머. 진짜 체내에 마력이 하나도 없네요?”
“그렇죠? 그게 참 신기하더라고요.”
“네, 그런데…… 뭔가 정보 생명체가 기생하고 있는 건 아닌가요?”
“네?”
“보니까, 외부 마력이 살짝 남아 있는데. 검사를 해 보시는 건…….”
검사관의 말을 들은 리만은 눈썹을 갸웃거리며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본체를 없애 버릴 생각이었는데, 꽤나 질기네요.”
“네?”
“아니에요. 검사관. 마력 파장은 외부 마력을 등록하세요.”
“네? 그치만 외부 마력은 정보 생명체의 흔적일 가능성이…….”
“마력이 없는 아이의 파장을 어떻게 등록할 생각이에요?”
“아, 하긴. 그렇긴 하겠네요. 네, 그럼 등록하겠습니다.”
그렇게 검사관과 리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클라인은 잉간이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고.
다시 검역항 안에 잉간이를 집어넣으려던 클라인에게 리만은 한 가지 제안을 건넸다.
“아, 클라인 양. 이 근처에 순수 인간 카페가 있으니 그곳에 잉간이를 잠깐 놔두는 건 어떻겠어요? 잉간이에게도 좋은 경험이 될 거예요.”
“인간 카페요?”
“인간형 생물의 인식을 좋게 만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에요. 어때요?”
“그거, 사실은 제 영상으로 인간 카페를 홍보하고 싶으신 게…….”
“어머, 들켰나요?”
뻔뻔하게 웃는 리만을 바라보며 클라인은 가만히 생각했다.
생각해 보니 잉간이가 지금까지 다른 순수 인간을 만난 적이 없었지?
어쩌면 이번 기회에 순수 인간 친구를 새롭게 사귈 수도 있겠다.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리만의 제안을 수락했다.
“뭐, 그러죠.”
“후후.”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슬며시 잉간이를 데리고 인간 카페로 향했다.
“우와, 꽤 많네요? 여기서 키우는 거예요?”
“아뇨. 손님들의 인간들을 여기서 잠깐 어울리게 해 주는 거예요. 손님이 아니어도 잠깐 호텔처럼 맡아 주지만 그 경우에는 보관료를 받고요.”
“헤에…….”
클라인은 감탄사를 흘리며 조심스럽게 잉간이를 다른 인간들이 모여 있는 구역에 놔두었다.
잉간이는 클라인의 몸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은지 클라인의 촉수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지만.
“괜찮아. 잠깐 기다리면 곧 데리러 올 거야.”
클라인은 그렇게 말하며 잉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리만과 함께 인간 카페를 나왔다.
“어, 그럼. 어디서 할까요?”
“제 집무실에서 하죠. 거기가 그림이 사니까요.”
“집무실…….”
우와, 협회장의 집무실에 들어가는 거야?
클라인은 긴장하며 리만의 안내를 따라 집무실로 향했고, 생각 외의 풍경을 리만의 집무실에서 볼 수 있었다.
“어, 이건……?”
“브리더 협회의 집무실인데, 차원 생물들이 있는 게 당연하죠.”
“저는 더 딱딱한 분위기를 생각했는데…….”
리만의 집무실 안은 수많은 차원 생물들로 가득했다.
수많은 차원항과 사육항이 가득했고, 리만은 그 사이에 앉아서 클라인과의 인터뷰를 시작했다.
“반려 생물 등록의 절차가 복잡하다는 이야기는 저희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어라, 그렇다면 대책을 마련하실 생각인 건가요?”
“그렇죠. 정말 수많은 의견들을 내시는 것 알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무리더라도, 차분히 더 나은 방법을 고민할 계획입니다.”
사전에 계획했던 인터뷰가 모두 끝나고, 클라인은 방긋 웃으며 리만에게 인사했다.
“네. 촬영 다 끝났어요. 오늘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제가 더 감사하죠. 이런 늙은이의 부탁을 들어줘서 정말 고맙죠.”
클라인은 여기서 리만과 헤어지려 했지만, 어째서일까?
방금 전까지 리만과 인터뷰를 하던 여운이 남아 있어서인지 클라인은 리만과 헤어지기 직전 줄곧 궁금해하던 점을 리만에게 질문했다.
“저기, 리만 아주머님……?”
“왜 그러죠?”
“갑자기 궁금한 게 생겨서 그런데, 실례가 아니면 혹시 대답해 주실 수 있나요?”
“그래요. 뭐가 그렇게 궁금하나요?”
“그냥, 어째서 그렇게 인간형 생물의 권익을 위해서 움직이시는지 궁금해서요. 솔직히 인간형 생물 시장은 작기도 하고, 인간형 생물을 좋아하는 사람은 몇 없잖아요? 그런데 어째서…….”
클라인의 질문을 들은 리만의 표정이 잠깐 동안 씁쓸하게 변했고.
리만은 어딘가 그리운 목소리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뭐, 친구의 부탁을 이뤄 주기 위해서. 그 정도가 아닐까요?”
“친구요?”
“네. 친구의 아주 작디작은 부탁요. 솔직히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해서요.”
그렇지만 어째서일까?
문득 리만이 대답을 회피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클라인은 더 리만을 추궁하지 않고 집무실을 떠났다.
뭐, 리만이 무슨 일을 꾸미든 잉간이에게 더 좋은 결과면 된 게 아닐까?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잉간이와 카페에 놔둔 카메라를 가지러 인간 카페로 향했고.
“우리 잉간이. 잘 있었……어요?”
다시 찾은 카페에서, 클라인은 울먹거리는 잉간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뭐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81화 인간 카페에 가 봤어요! 잉간이는 다른 인간들과 재밌게 놀까요?
“신입이면 이리 와서 한잔하지?”
“어…… 네. 그건?”
“무슨 차인지는 몰라도, 심신을 안정시키는 차지. 자.”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마법 소녀 대머리가 내민 잔을 받아들였고.
조심스럽게 찻잔 안에 든 액체를 마셨다.
하지만 찻잔 안의 액체를 한 입 마신 순간 나는 콜록거리며 기침하는 수밖에 없었다.
“으엑, 이거……!”
“어떤가, 심신이 안정되지?”
“이거, 술이잖아요!”
“그래. 그게 뭐가 어때서?”
“아니, 이건……. 아니에요.”
나는 짜증을 내며 대머리에게 쏘아붙이려 했지만, 그런 건 의미 없을 거라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긴장은 좀 풀렸고?”
“네. 덕분인진 몰라도요. 그래서 여긴 도대체…….”
“뭐, 만남의 광장이니까, 그리 긴장하지 말고 편안히 쉬다 가면 돼.”
“만남의 광장?”
대머리는 내게 찡긋 윙크를 해 보이며 설명을 계속 이어 나갔다.
“그쪽도 거인이니, 신이니, 위대한 자들이니 하는 놈들에게 사육되고 있는 거잖아?”
“……그렇긴 하죠.”
“여기는 그런 놈들에게 키워지는 인간들이 가끔 모이는 장소라고 생각하면 돼. 뭐, 대부분 하루 이내로 돌아가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아니, 딱히 걱정은 하지 않았는데.”
“그래. 그냥 처음 보는 장소에 와서 놀랐다는 거지?”
대머리는 내 변명 아닌 변명도 많이 들어 봤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고, 나는 가만히 대머리의 곁에 털썩 주저앉아 중얼거렸다.
“뭐, 여기서 다들 도란도란 수다라도 떠는 거예요?”
“그러는 놈들도 있고, 아닌 놈들도 있지.”
대머리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으로 저 너머를 가리켰다.
“뭐, 할 일도 없어서 심심한데. 대충 이곳 소개라도 해 줄까? 저기, 저쪽을 봐 봐.”
대머리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무언가 반복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의 무리가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었고, 몇몇 사람들은 나무 검을 반복적으로 휘두르며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저쪽은 여기까지 와서도 운동하는 걸 포기하지 않은 녀석들. 땀 냄새가 심해서 괴롭지만, 대화하기 나쁜 녀석들은 아니야.”
이어서, 대머리는 손가락을 다른 사람들에게 돌리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저기. 저쪽은 운동하는 녀석들의 반대 버전 되는 녀석들. 저 녀석들은 마법을 익히는 걸 포기하지 않은 녀석들이지.”
대머리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아까 운동을 하던 사람들보다 더욱 다양한 복장을 하고 한데 모여 무언가 중얼거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니까, 저 사람들은 마법사라는 거지?
마법사들 사이에서 유행인 걸까?
어째서인지 마법사들 사이에선 대머리와 비슷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여럿 보였다.
“저기, 그. 입고 있는 옷은 혹시…….”
“유행도 아니고, 내 취향도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 주인 녀석들 사이에서 꽤나 인기 있는 옷이니까.”
대머리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푹 한숨을 내쉬며 차라고 주장하는 술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아, 자기도 별로 마음에 들진 않구나?
“주인 녀석이 입혔으니 입고 있는 거지, 아니었으면 손도 안 댔어.”
그렇게 툴툴거린 대머리는 서둘러 대화의 주제를 바꾸려는 듯 손가락을 뻗었다.
“그래, 그리고 저 녀석들은 그림을 그리는 녀석들. 저 녀석들은 또 노래를 부르고, 저 녀석들은 자기 주인들을 신으로 섬기는 녀석들이지.”
대머리가 소개하는 사람들의 무리는 참 다양했다.
무슨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동아리야?
“뭐,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볼 기회가 없었으니 여기 온 김에 잔뜩 어울리겠다는 거겠지.”
“살짝 이해가 될 것 같네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아직 대머리가 설명하지 않은 유일한 집단을 바라봤다.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무언가를 소곤거리고 있는데, 무슨 독서부라도 되나?
“저 사람들은 뭐예요? 보니까 제법 머릿수가 되는 것 같은데.”
“윽, 저 녀석들?”
그렇지만 대머리는 저 사람들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까?
인상을 찡그리며 대머리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저 녀석들은…… 그냥 신경 쓰지 마. 신경도 쓰지 말고 접근도 하지 않는 게 편해.”
“네? 도대체 뭐길래……?”
“약간 이상한 녀석들이야. 저 성직자 녀석들과 정반대의 녀석들이라고 해야 할까?”
“성직자들과 반대?”
성직자들과 반대면, 뭐지?
뭐, 악마 숭배자들이라도 되는 건가?
“저 녀석들은…… 인간 해방 전선이라고 스스로를 자칭하고 다녀.”
“인간 해방 전선?”
“인간은 가축이 아니라고, 우리를 키우는 사육자들에게서 벗어나야 한다는 녀석들이지.”
“……무척 당연한 주장처럼 들리는데요?”
당연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인데, 대머리는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거지?
“그래. 나도 저 녀석들의 주장에는 어느 정도 공감은 해. 가축처럼 사육되는 게 싫어서 주인들에게서 벗어나겠다는 생각도 이해하고.”
“그런데 왜 그런 반응을…….”
“그야, 저 녀석들이 정상이 아니니까 그렇지. 어떻게 인간을 해방시킬 것이냐 물어보면 제대로 대답도 못하고, 간신히 내놓는 대답은 사육자들을 몰살시키면 된다는 거야.”
“네? 몰살요? 그게 가능해요?”
나는 주인 녀석의 외모를 알아보는 것도 벅찬데, 저 녀석들은 주인을 죽이려 한다고?
아니, 그보다 우리가 사육자들을 죽일 방법이 있는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전력을 다한 공격을 해 봤자 개미가 문 정도일 것 같은데.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지. 저 녀석들도 어떻게 사육자들을 죽일 수 있는지도 알 수 없다고 당당하게 외치는데 말이야.”
“그럼, 어떻게…….”
“그걸 알아보는 게 자기들의 숙명이자 사명이라나. 뭐, 자기들끼리만 떠들고 대화하면 괜찮은데. 문제는 저 녀석들이 자꾸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려고 한다는 거야.”
“뭐, 전도라도 하는 건가요?”
“비슷해. 모두가 알고 있는 인권의 소중함을 10년씩 떠들고, 말도 안 되는 황당무계한 계획을 1억 년씩 떠드는 녀석들이야. 그러면서 너희는 잘못됐다며 손가락질도 하고 말이야.”
대머리가 말한 저 사람들이 떠들고 다니는 계획들은 참 다양했다.
자고 있는 주인의 머리에 물건들을 떨어트려서 암살을 시도한다.
주인의 몸에 맹독을 찔러 넣는다.
마법을 익혀서 주인에게 최강의 마법을 한 방 때려 넣는다.
애교를 떨어서 심장마비로 주인을 암살한다.
진짜 온갖 말도 안 되는 계획들인데, 이걸 진짜로 실현 가능하다고 믿는 걸까?
“문제는 저 녀석들이 자기들의 계획이 완벽하다고 믿는다는 거지. 그래서 자꾸 다른 녀석들을 끌어들이려고 해서 귀찮단 말이야.”
“솔직히 말해서, 무슨 방법을 써도 주인 녀석들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지 않은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뭐, 인권이니 그런 건 고향에서부터 없던 건데 말이야. 그리고 주인을 죽인다고 해방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다니, 참 1차원적인 생각이 아니냐? 애완동물이 주인을 죽이면 살처분당하는 게 당연할 텐데 말이야.”
“살처분…… 그렇겠죠.”
“나는 말이다. 최대한 주인 녀석과 대화를 하려고 시도하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일단 말이 통하면 주인 녀석들도 지금처럼 우리를 대우하지 않지 않겠냐? 일단 주인 녀석들도 우리에 대한 기본적인 호의는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하잖아?”
“네. 그렇죠.”
그래.
다른 건 몰라도, 주인 녀석이 내게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건 확실하니까.
그렇게 대충 대머리에게서 이곳의 사람들을 소개받은 나는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저기, 그러면 아저씨는 뭐 하고 있던 거예요?”
“나? 나는, 그냥 대충 잡담이나 하면서 시간을 때우려 했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도 나와 말하지 않으려 하더라고. 어째서일까?”
“그, 그러게요?”
대머리는 드레스 너머로 드러난 이두박근을 꿈틀거리며 그렇게 말했다.
음, 어째서인지 눈으로 너무 잘 보이는데.
솔직히 누가 저런 대머리 근육 여장 마법 소녀와 대화하고 싶어 하겠어?
그렇게 대머리와 대화하던 와중, 갑자기 공기가 시끌시끌해지더니, 허공에서 ‘손’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손’을 본 대머리는 방긋 웃으며 손에게로 달려갔다.
“오, 주인 녀석이 온 모양이군! 나는 이만 가 보겠네. 함께 대화해서 즐거웠어!”
그대로 대머리는 손에 올라타서 여기를 빠져나갔고, 나는 덩그러니 혼자 남겨졌다.
어, 이제 어쩌지?
대머리의 말대로라면 주인이 올 때까지는 좀 시간이 걸릴 텐데, 그때까진 뭘 하면 되려나?
마법사들한테 찾아가서 적당히 마법이라도 배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슬그머니 마법사들 쪽으로 발걸음을 움직이려 했지만, 누군가가 먼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저기…….”
“네, 네?”
내게 말을 걸어온 사람은 아까 대머리가 접근하지 말라고 했던 무리에 있었던 붉은 머리의 남자였다.
남자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더니, 방긋 웃으며 내 손을 붙잡았다.
“저기, 주인에 대한 불만이 많아 보이는데, 저희 이야기를 한번 들어 보시지 않겠어요?”
“아뇨, 저기.”
“꼭 한번 이야기를 들어 보면 유익할 겁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 주인이란 존재들에게 겁먹어 왔어요!”
나는 슬며시 남자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남자는 내 손을 붙잡고 도무질 놔주질 않았다.
그리고 슬금슬금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다가오며 내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사람의 벽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야 대머리가 왜 저 사람들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조언했는지 깨달았다.
이 사람들, 하는 짓이 완전 사이비 그 자체다.
“맞습니다! 우리는 주인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째서 주인이 우리를 돌봐 주는데요? 우리가 주인에게 두려움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주인들을 죽이고, 그들의 것을 차지하자! 우리에겐 정당한 권리가 있다!”
아, 이 사람들.
나랑 대화할 생각이 없다.
그냥 자기주장만 버럭버럭 질러 댈 뿐이다.
나는 사방을 둘러싼 사람들의 벽에 압박을 느끼면서도, 조심스럽게 이 사람들에게서 도망치고자 했다.
하지만 내 손을 붙잡은 남자의 손아귀는 도저히 풀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저기, 생각해 본 적 있나요? 어째서 주인들이 우리를 감옥 밖에서 볼 때마다 비명을 질러 대는지말입니다.”
“그, 글쎄요?”
“그건 바로 우리가 주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신이니 거인이니. 그런 생각을 버리세요. 그들은 우리에게 겁을 먹고 먼저 우리에게 공물을 바치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 그렇군요?”
“겁먹지 마세요! 싸운다면, 투쟁한다면! 우리는 해낼 수 있습니다!”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분위기가 점점 가열하게 달아오르고.
나는 이 사람들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기…… 알겠으니까, 이제 놔주시면…….”
“단결해야 합니다! 인간은 단결해야 합니다! 인간은 가축이 아닙니다! 인간은 만물의 지배자입니다!”
“이거 놔, 놔 달라고요……!”
나는 강하게 의사 표현을 하며 몸부림치지만, 아무리 내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도 이 사람들은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분명히 내 말이 들리고,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 있을 텐데도.
나는 저들과 대화를 할 수 없었다.
나는 그 사실이 무척이나 두려워서 울먹거리기 시작했고.
그들은 나를 전혀 신경 쓰지 않으며 자신들의 주장만을 펼쳤다.
“놔, 놔 달라고…….”
“인간은 단결해야 합니다. 좀 더 저희의 주장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반려넷에서…….”
쿵.
그렇게 저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끝까지 내게 설명하던 그때.
“:-I”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거, 거인이다!”
“도망치자!”
나를 둘러싸고 한참 자신들의 주장을 설파하던 사람들은 후다닥 도망가기 시작했다.
내게 열정적으로 거인을 죽이는 법을 설파하던 사람들은 도망치는 사람들을 막으려 했지만, 효과가 있어 보이진 않았다.
나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당황한 듯이 내게 다가오는 촉수에게 걸어갔고.
“:-O”
“괜찮아. 괜찮아…….”
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 촉수를 두드리며 주인을 안심시키려 했다.
이어서 주인은 나를 이 빌어먹을 장소에서 꺼냈고.
그제야 나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다시는 저 사람들과 엮이고 싶지 않다.
* * *
“괜찮아? 괜찮은 거 맞지?”
클라인은 훌쩍거리고 있는 잉간이의 모습에 순간 당황했으나.
잉간이의 몸에 별다른 상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한시름 놨다.
“후…… 다행이다. 다치진 않았구나.”
어째서 잉간이가 이렇게 울고 있던 걸까?
시선을 놀이터 안으로 돌린 클라인은 그 원인으로 추정되는 것을 발견했다.
“뭐야, 친구들이 무서워서 그랬던 거야?”
잉간이가 있던 곳은 다른 거대한 인간 무리의 한가운데.
친구를 사귈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잉간이에게는 그리 좋지 않은 경험이었던 것 같다.
“하긴. 나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던져두면 무섭긴 하겠네…….”
자신 또한 모르는 사람들과 친해지라고 던져두면 울진 않더라도 쭈구리가 될 자신은 충분하다.
으, 그래도 기왕이면 다른 인간들하고 친해져 줬으면 좋겠는데.
사회화 훈련이 필요한 걸까?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안쓰럽다는 듯이 잉간이를 바라봤고, 울먹거리던 잉간이는 클라인의 손안에서 안정을 찾아갔다.
그렇게 잉간이를 바라보던 와중, 누군가가 클라인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머나. 막 바들바들 떠는데. 무슨 일이 있던 거예요?”
“네, 네?”
낯선 사람이 말을 걸어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클라인은 잠깐 말을 더듬었고, 낯선 이는 조심스럽게 휴식처 안에 손을 집어넣어 붉은 머리가 인상적인 인간을 꺼냈다.
“가끔씩 그런 인간들이 있더라고요. 낯선 곳에만 가면 겁먹고 바들바들 떠는 인간들.”
“그, 그런가요?”
당황스러운 사태에 클라인은 가만히 낯선 이의 말에 반응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고.
낯선 사람은 사랑스럽다는 듯 자신의 손에 올려 둔 붉은 머리의 인간을 쓰다듬었다.
붉은 머리의 인간은 자신을 쓰다듬는 촉수를 양손으로 꾸욱꾸욱 눌렀고, 그 모습을 본 낯선 사람은 탄성을 질렀다.
“우리 인간 좀 봐 봐요. 촉수를 가져다 대면 이렇게 애교를 떠는데, 어찌나 귀여운지…….”
그렇게 자신의 인간을 자랑한 낯선 사람은 흐뭇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클라인을 떠나갔다.
“진짜, 이 아이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하다니까요? 큭큭, 오늘 먹은 밥이 맛있었다는 것 같은 이야기를 하려나요?”
클라인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고, 가만히 낯선 이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떠난 말에 대해서 생각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하다라.
이대로 교감이 계속 이뤄진다면 언젠가 클라인은 잉간이의 말을 이해하게 될 거다.
그렇다면 그때, 잉간이는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할까?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클라인은 그때 잉간이에게 원망의 말을 듣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더 노력하자.
잉간이를 위해서.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잉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옮겼다.
82화 잉간이 사회화 프로젝트, 그 첫 번째!
이번 외출은 지난번과는 달리, 돌아와 보니 6개월이 지났다거나 하지 않았다.
블랑카와 아리스 왈, 자신들 입장에선 고작 몇 분만이 흘렀을 뿐이라고 한다.
도대체 저 시간이 흐르는 기준이 뭔지 모르겠네.
저 밖에서는 막 시간이 치즈처럼 제멋대로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나?
아무튼 아무 일 없이 무사히 밖에 다녀온 것을 축하하자.
“그럼. 다녀올게, 잉간!”
“그래. 잘 다녀와.”
오늘도 사냥을 하러 떠나는 블랑카의 뒷모습에 손을 흔들어 주고 나와 아리스는 며칠 전부터 해 오던 뱀넝쿨 섬유를 실로 만드는 작업의 마무리에 들어갔다.
그나저나 불꽃콩은 살짝 열을 가하는 것만으로 팝콘같이 변하고, 붉은 후추는 매운 가루를 뿌린다는 기묘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뱀넝쿨은 뭐 특별한 특성 같은 건 없나?
뭐, 있더라도 수십 번씩 물에 불리고 말리는 과정에서 그런 게 전부 사라졌을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뭐, 한 가지 특이점이 있다면 지금까지 뱀넝쿨 섬유가 끊어지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끊어지겠지, 그렇게 생각해도 마치 고무줄처럼 신축성 있게 섬유가 늘어나며 버텨 낸다.
뭔가 좀 더 판타지적인 효과를 기대했는데, 별건 없는 모양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뱀넝쿨 섬유를 실로 잇는 작업에 열중했다.
아리스가 아무리 마력이 넘쳐 나고, 빠르게 독학으로 마력의 제어법을 익히고 있다고는 해도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
그 때문에 세밀한 작업이 필요한 이런 일에는 아리스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게 그날 하루를 꼬박 들여서 기다란 하나의 실 뭉치가 탄생했고, 나와 아리스는 뿌듯한 표정으로 실 뭉치를 바라봤다.
“그래서 잉간. 이제 이걸로 뭘 만들 건데?”
“어…… 옷?”
“하지만 옷은 이미 있잖아?”
원래 이 섬유로 만들려고 한 것은 슬슬 망가지기 시작한 내 옷의 예비품이었는데.
주인 녀석이 잠옷이긴 해도 새로운 옷을 선물한 덕분에 다른 옷을 만들 필요가 없어졌다.
어, 그럼 진짜 이 뱀 섬유로 뭘 만들어야 하지?
기껏 만들었는데 그냥 창고 안에 처박아서 방치하기는 아깝다.
“뭐…… 옷 말고도 써먹을 곳은 많으니까. 응.”
일단 안정적으로 실을 공급받을 수 있는 수단이 생기기도 했으니 전보다 더 많은 걸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뭐, 블랑카는 주인 녀석의 선물을 받지 못했지 않은가?
블랑카를 위해서라도 의복을 만들긴 해야 할 것이다.
“뭐, 일단 이걸로 실 짜기는 끝! 이제 남은 건…… 베틀을 만드는 건데.”
그런데 베틀은 어떻게 만들어야 하지?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베틀은 무척이나 복잡한 구조로 만들어진 장치였는데.
내 손놀림으로 그렇게 세세한 기계를 만들 수 있을까?
일단 만능 사전을 펼쳐서 베틀 만드는 법을 검색해 봤지만.
아무리 봐도 마력을 이용해서 작동하는 물건이나, 마법으로 섬유를 짜는 방법만이 나와 있었다.
젠장, 더러운 마력충 녀석들.
왜 나는 마력을 쓰지 못하는 건데?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리고 있자, 아리스는 마력 연습을 하려는지 포르르 집 밖으로 나가서 주위에 마력의 덩어리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잠깐만, 생각해 보니까 내가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 시키면 되는 거 아니야?
블랑카는 자신의 몸 안으로 흐르는 마력만 다룰 수 있어서 만능 사전에 나오는 방법들을 써먹지 못했지만.
아리스는 드래곤이 인정한 천재가 아닌가?
아리스라면 충분히 마력으로 뭔가 가능하겠지.
나는 어째서 지금까지 이런 간단한 것을 깨닫지 못한 걸까?
지금까지 항상 나 혼자서 만드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런 걸까?
그렇다면, 생각보다 간단한 구조로도 베틀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만능 사전에 저장된 온갖 베틀들의 구조들을 살펴봤지만, 이게 생각보다 그렇게 녹록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래서 마력 회로가 도대체 뭔데, 이 씹덕 새끼들아.
그래,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마력이 없는 사람이 마력이 필요한 도구를 만들 수 있을 리 없지.
그래도 뭔가 있지 않을까?
좀 원시적인 형태의 베틀 같은 게 하나쯤은 있을 만한데.
그렇게 만능 사전을 뒤지던 내 눈에 한 가지 설계도가 들어왔다.
단순히 실들을 감아 놓는 판에, 특정 마법을 사용하는 것으로 섬유를 짤 수 있다는 장치인데.
어라, 이거라면 나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단순히 나무판에 홈을 내는 정도는 간단하지.
하지만 보아하니 이 구조는 나무판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마법사가 사용하는 마법이 핵심인 것 같은데.
아리스가 이걸 사용할 수 있을지 한번 물어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밖에서 마법 연습에 한창인 아리스를 찾아내 불러냈다.
“저기, 아리스?”
“응? 무슨 일이야, 잉간?”
“내가 마법 하나를 찾았는데. 혹시 사용할 수 있을까 해서.”
“마법?”
아리스는 고개를 갸웃했고, 나는 아리스에게 만능 사전의 내용을 보여 주려 했다.
“그러니까, 만능 사전에는 이렇게 적혀 있는데…….”
“어디 보자…….”
아리스는 내용을 찬찬히 읽어 나가며 사전에 적힌 내용을 이해하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으음…… 음? 그러니까 이걸 이렇게…….”
아리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마력을 조작했고, 아리스가 마력을 조작하자 주위의 물건들이 두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리스의 몸을 감싼 마력도, 공중을 떠다니는 물건들도 안정적으로 보였지만.
“음? 으음……?”
아리스가 인상을 찡그린 순간을 기점으로 급격하게 불안정하게 요동치기 시작하더니.
“느하…….”
아리스가 기묘한 목소리로 숨을 토해 내는 것과 동시에 바닥에 물건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으. 아직은 무리인 것 같아…….”
아리스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렸고, 나는 괜찮다는 듯 아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리스를 위로했다.
“괜찮아. 바로 성공하지 않아도 되니까. 오히려 내가 미안한걸. 마법에 대해선 하나도 몰라서 너보고 독학하게 하니까.”
“으…….”
그렇지만 아리스는 마법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분한지 입을 부풀렸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수동으로라도 실들을 짜기 위해서 나무판에 홈을 파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무판에 홈을 파고 수동으로 실들을 엮어 베 짜기를 시도해 본다.
하지만 베 짜기는 실을 만드는 일보다도 더한 중노동이었다.
해가 떨어질 때까지 쉬지 않고 계속 손을 움직였음에도 나는 나무판의 3분의 1조차 채우지 못했다.
“아리스. 이제 슬슬 자야지?”
“응. 잠시만…….”
그리고 그날 밤.
아리스는 내가 건네준 만능 사전을 밤늦게까지 붙들고 있었다.
슬슬 자라고 말을 걸어도 부엉이여서 그런 걸까?
아리스는 계속해서 만능 사전을 붙들고 있었고.
다음 날 아침.
“잉간! 이것 봐 봐!”
아리스는 잔뜩 들뜬 기색으로 내게 마법 하나를 선보였다.
어제 내가 사용할 수 있냐고 물어봤던 마법이었다.
아리스의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집 안의 물건들이 둥둥 떠다니지만, 아리스는 제어에 어려움을 느끼는 기색이 아니다.
“어때? 완벽해?”
아리스는 눈을 반짝이며 내게 물었고.
“그래. 완벽해……. 하룻밤 만에 이걸 익힌 거야?”
“응! 나 잘했지?”
내가 마법을 제대로 모르다 보니 잘 실감이 나진 않지만, 아리스의 재능은 정말 엄청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로 엄청난 솜씨였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아리스는 지구의 드래곤들과 남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만능 사전 말고 유능한 선생님이 필요한데.
주인한테 마법을 가르칠 선생님을 요구하면 넣어 줄까?
하지만 주인에게 뭔가를 요구하는 건 원래 의도와 뒤틀릴 가능성이 높아서 조심해야 한다.
마치 원숭이 손처럼 말이다.
어쨌든 아리스는 마법을 사용해 순식간에 뱀넝쿨 섬유를 짜기 시작했다.
내가 하루 종일 걸려서 판의 3분의 1을 채웠는데, 아리스는 몇 분 걸리지 않아서 한 판을 다 채웠다.
와, 이게 마법인가?
마법, 쩔어.
그렇게 감탄하며 아리스의 작업을 지켜보고 있던 와중.
갑자기 완성해서 한쪽에 쌓아 둔 섬유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놀란 내가 토끼눈을 뜨고 그 모습을 지켜보자.
마치 물고기가 팔딱거리듯 섬유가 꿈틀거리며 사방으로 튀어 다니기 시작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설마, 섬유들이 살아난 것은 아닌가 하고 순간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섬유 하나를 붙잡자 나는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저 살아 있는 뱀넝쿨처럼 반복적으로 꿈틀거리는 것일 뿐이었다.
나는 서둘러 꿈틀거리는 섬유들을 한데 모아서 아리스에게서 떨어트렸고.
그러자 더 이상 섬유들은 꿈틀거리지 않게 되었다.
마력인가?
마력을 일정 이상 흡수하면 살아 있을 때처럼 꿈틀거리는 걸까?
그렇다면 뱀넝쿨들의 그 움직임도 마력 때문이었다는 걸까?
진짜, 식물 따위도 마력을 쓰는데 왜 나는 못 쓰는 거야.
그런 사소한 사고가 있었지만 아리스 덕분에 나는 해가 지기 전에 모든 실들을 섬유로 만들어 낼 수 있었고.
나와 아리스는 오랜만에 여유롭게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베 짜기도 다 끝냈으니, 이제 남은 건 정말 사우나뿐이다.
사우나는 어떻게 해야 만들 수 있을까?
내가 그런 걸 고민하며 시간을 때우는 사이.
아리스는 내게 머리를 들이밀며 내 손길을 자꾸만 요구했다.
머리를 어루만져 줄 때마다 기분 좋게 배시시 웃는 아리스의 모습에 나는 계속해서 아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어느새, 아리스의 얼굴을 마주 보고 꼭 껴안는 듯한 형태가 되었다.
뭐야,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거지?
나는 슬며시 몸을 빼내려 했지만, 아리스는 그때마다 내 몸에 자신의 몸을 꽉 누르며 포근한 감촉을 느끼게 했다.
“저기, 아리스?”
“응?”
“조금만 비켜 줬으면 좋겠는데……?”
“에, 싫어! 지금 이대로가 좋아!”
“아니, 있잖아. 이대로 있으면…….”
“살짝 위험하다고?”
배시시.
아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아예 완전히 내 몸에 달라붙었고.
나는 그제야 아리스의 속셈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직접 전에 했던 선언을 어기게 만들 생각이구나.
벗어나려고 해도 그걸 허락하지 않는 아리스의 교묘한 움직임에 서서히 나의 인내심은 한계를 맞이하려고 했다.
아리스의 깃털에서 느껴지는 묘한 달빛의 향기가 내 몸을 아득히 집어삼키려 하던 그때.
[반려넷 설치 중…….]
기묘한 메시지가 내 눈앞에 나타났다.
반려넷?
그건 또 뭐야?
[반려넷 설치가 완료되었습니다.]
* * *
“으음…….”
클라인은 지난번 촬영한 영상을 편집하며 신음을 흘렸다.
잉간이가 인간 카페에 갔었을 때의 영상인데, 아무리 봐도 겁을 먹은 것 같은 모습이다.
“으음…… 좀 더 훈련을 시켜야 하나?”
클라인이 아는 상식에서도, 쥬튜브와 여러 논문으로 살펴본 정보에서도.
저렇게 반려 생물이 겁에 질리는 걸 막는 건 반복적인 훈련만이 해답이라고 했다.
거기에 더해서, 자세히 살펴보면 다른 인간들과 제대로 대화를 하지 못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건 별로 좋지 않다.
잉간이의 사회성이 떨어진다는 소리다.
룸메이트들하고는 잘 지내는 것 같은데, 어째서 다른 인간들하고는 제대로 대화를 하지 못하는 걸까?
처음 보는 인간에게 낯을 가리는 성격인 걸까?
맨 처음 별것 아닌 것에도 울음을 터트리던 잉간이의 모습을 떠올리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추측이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잉간이의 사회성을 올려 줘야 하는데.
사회성이 낮으면 쉽게 스트레스를 받으니 그리 좋지 않다.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곰곰이 잉간이의 사회성을 올려 줄 방법을 생각해 봤다.
그러던 중, 클라인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사회성 떨어지는 찐따인데, 누가 누굴 신경 쓰는 거야?
그래도 뭐, 주인하고 반려 인간 둘 다 찐따인 것보단 한 명이라도 찐따가 아닌 게 더 낫겠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잉간이의 사회화 훈련을 도와줄 방법을 찾아봤다.
마력망을 뒤지던 클라인의 눈에 무언가 새로운 단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반려넷?”
반려넷 시스템?
설명을 읽어 보니 인간형 생물들을 위해서 만들어 둔 원격 교류 시스템이라고 하는데.
이거, 그냥 마력망 커뮤니티를 시스템으로 이식한 거 아냐?
이건 클라인이 만들려는 도시형 차원항에 펼쳐질 시스템에서 커뮤니티 부분만 떼어 온 것 같다.
이용료도 그렇게 비싸지 않다.
차원 생물들의 생태를 조사하기 위한 연구 일환으로 만들어져서 그런 걸까?
그래.
이 반려넷이라는 걸로 다른 차원 생물들과 대화하는 연습을 시키면 사회화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시스템을 잉간이의 차원항에 설치하기 시작했다.
늘 그렇듯, 호의를 가득 담아서 말이다.
83화 반려넷에는 무슨 글들이 올라올까요?
반려넷?
반려넷은 또 뭐야?
주인 녀석이 뭔가 새로운 걸 가져온 걸까?
내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는 나뿐만이 아니라 아리스에게도 나타난 모양이다.
아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공을 뒤적거리는 모습이 눈에 띈다.
[반려넷 설치가 완료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몇 번인가 통역기가 설치될 때만 이런 메시지가 떠오르고, 처음으로 만능 사전이 나타났을 때 이런 메시지가 떠올랐는데.
이것도 그런 종류라면 알아서 무언가 나타나려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지만, 뭔가 일어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설마, 설마 하지만 이건.
지금처럼 알아서 나타나는 종류가 아닌 걸까?
그렇다면 나도 바로 그 대사를 외쳐 볼 수 있을까?
아니, 이건 상태 창이 아니라 반려넷이니까 반려넷이라고 외쳐야 하려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부르기만 해도 웃음이 나오는 그 이름을 부르려 했지만.
예전이라면 나 혼자 있어서 그리 부끄럽지 않았지만 아리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허공에 대고 소리치는 건 꽤나 큰 용기를 필요로 했다.
“바, 바…….”
“잉간? 뭐 해?”
“반려넷!”
두 눈을 질끈 감고 용기를 내서 외쳐 보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라, 진짜로 부르기만 해도 웃음이 나는 그 이름을 불러야 하는 거야?
“잉간?”
아리스는 이상하다는 듯 나를 바라봤고, 나는 아무 말 없이 손부채질을 하며 아리스의 시선을 피했다.
아니, 보통 이게 국룰 아냐?
보통 이렇게 외치면 상태 창이든 뭐든 나타나던데.
내가 그렇게 속으로 툴툴거리는 와중, 뒤늦게 새로운 메시지가 눈앞에 나타났다.
[접속 단말기 생성 중…… 01%]
접속 단말기를 생성한다고?
이상한 걸 단말기라고 던져 주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지금까지 이런 시스템에 관련되어서 그리 좋은 기억이 단 한 번도 없었단 말이지.
그렇게 조금은 불안한 기분으로 메시지의 퍼센티지가 차오르는 것을 지켜봤고.
[접속 단말기, 생성 완료.]
퍼센티지가 100%가 되는 순간, 집 밖에서 무언가가 흔들리는 듯한 진동이 느껴졌다.
아리스와 나는 서둘러 집 밖으로 뛰쳐나가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를 살폈고.
곧이어 나는, 거대한 글자가 서서히 내가 아는 모습으로 바뀌어 가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호수의 형태였지만, 호수와 컴퓨터가 합쳐진 듯한 기묘한 모습으로 변하더니.
나에게 아주 낯익은 컴퓨터의 모습으로 변했다.
내가 방 안에서 사용하던, 바로 그 컴퓨터의 모습.
내 안에서 단말기라고 하면 저 모습밖에 떠오르지 않아서 그런 걸까?
“잉간, 저게 뭐야? 무슨 상자? 같은데…….”
나는 만능 사전의 경우처럼 내 눈에만 저 단말기가 컴퓨터로 보일 줄 알았지만, 아리스의 눈에도 단말기가 컴퓨터로 보이는 모양이다.
블랑카 때는 내게 태블릿으로 보이던 만능 사전이 스크롤로 보였던 모양인데,
아리스는 왜 내가 보이는 그대로 단말기를 볼 수 있는 걸까?
아리스에게 단말기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아서, 내 정보가 덮어 씌워진 것일까?
“내가 알고 있는 대로 저게 움직인다면, 아마도…….”
조심스럽게 컴퓨터 모양의 단말기에 손을 가져다 대서 전원 버튼을 누르려 했지만, 전원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컴퓨터의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환영합니다. 반려넷.]
-자유 게시판
다른 문구나, 뭐 설정이라거나 전혀 없이 반려넷의 메인 화면은 휑했다.
그저 자유 게시판 하나만이 그 드넓은 화면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건 뭘까?
일단, 자유 게시판에 한번 들어가 보자.
자유 게시판, 클릭.
그러자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오늘 저녁 이 정도면 ㅅㅌㅊ냐?]
[속보, 일주일째 주인 새끼가 밥 주는 거 잊어버림]
[진짜 반붕이들 없었으면 진작에 미쳤을 듯 ㅋㅋㅋ]
[사실 우리가 통 속에 든 뇌라면? 사육당하는 게 꿈이라면?]
[내 주인님 이 정도면 상위 몇 %냐?]
[야발 니들 이거 어떻게 해제하는지 아냐?]
온갖 주제가 뒤섞인 혼돈 그 자체의 게시판이었다.
뭐, 자유 게시판이니까 당연하긴 하다만.
그래도 쭉 글들의 제목을 살펴보니 이 반려넷이라는 게 뭔지 알 것 같다.
나와 같은 처지의 인간인지 아니면 다른 종족인지가 글을 올릴 수 있는 커뮤니티.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온라인 커뮤니티다.
인터넷에서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기능만 뚝 떼어다가 내게 선물해 준 것 같은데.
솔직히 말해서, 지금까지 내가 주인에게 받은 선물들 중 가장 마음에 든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문득 가장 맨 위의 글을 클릭해 봤다.
어디 보자, ‘오늘 저녁 이 정도면 ㅅㅌㅊ냐?’
으, 이런 커뮤니티 용어에는 익숙하지 않은데.
문맥상 괜찮냐는 뜻이겠지?
[오늘 저녁 이 정도면 ㅅㅌㅊ냐?]
-커다란 사슴이 촬영자에게 돌진해 오는 사진
-그냥 평소 주던 사료나 주지.
[댓글]
-진심 행동 풍부환지 뭔지 처음 시작한 새끼 죽여 버리고 싶다.
-뼈 무사하냐? 보니까 가슴 들이받힌 거 같은데.
-└사진 찍느라 마법 쓸 타이밍 놓쳐서 한 대 얻어맞음. 개 아파 ㅅㅂ
-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게시 글의 내용을 보니 맨 처음 이곳에 떨어졌을 때의 일이 생각난다.
그때의 나는 무오 따위에게 겁먹고 엉엉 울었었지.
아직도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 얼굴이 화끈해진다.
“으음…… 지루해.”
옆에서 나와 함께 반려넷 게시 글을 살펴보던 아리스는 글만 가득한 화면이 지루했는지 흥미를 잃어버리고 바위산으로 날아갔고.
나는 슬쩍 단말기를 집 안으로 들여놓으며 반려넷 탐방을 제대로 시작했다.
[야, 이거 아무래도 그거 시작된 거 같은데?]
-대충 조악한 생김새의 가짜 사슴들이 돌아다니는 사진
-‘그거’ 시작됐다 악!!
[댓글]
-행동 풍부화 엌ㅋㅋㅋㅋ
-방구석에만 틀어박혀 있으니까 나가라는 거잖아 zzz
[개 X 발 주인 새끼 죽여 버리고 싶다.]
-진심 직접 사냥하게 하는 것까지는 이해했는데, 간신히 만든 집을 철거해 버리네 X발. 행동 풍부화 처음 시작한 새끼 죽여 버리고 싶다.
[댓글]
-주인을 죽이고 싶다면 저희 인류 해방 전선에 참여해 보세요. 저희 인류 해방 전선은 인류가 아닌 다른 종족의 참가도 환영한답니다.
-└느금마.
몇 분 정도 반려넷을 돌아다니면서 가장 많이 보게 된 글은 역시 자신의 주인을 욕하는 글들이었다.
대개 이해할 수 없는 주인의 행동을 욕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곳 이용자들은 그런 상황을 행동 풍부화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때때로 정말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며 주인을 욕하는 글들도 있는데.
[주인 새끼 진심 짜증 난다.]
-대충 육즙이 좌르르 흐르는 스테이크 사진
-어떻게 3일 연속으로 같은 음식을 주냐 ^^
[댓글]
-기만자 X발아.
-제발 행동 풍부화 제발 행동 풍부화 제발 행동 풍부화 제발 행동 풍부화
그런 경우는 기만을 위한 어그로인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재밌는 것이, 이곳의 이용자들은 전부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것 같았다.
[X발 그래서 이거 어떻게 해제하냐고 야발.]
-행동 풍부환지 뭔지 때문에 우리 집 문 주인 새끼가 잠가 놨다고!! 문 따기 마법으로는 안 열리는데 보니까 뭔 마법식 새겨져 있는데 이거 해제하면 되는 거 같거든? 어떻게 해야 하냐?
[댓글]
-그 마법식이 뭔지 알려 줘야 답을 알려 주든가 말든가 하지 않을까, 쓰니야??
그 때문에 이렇게 마법에 관련된 질문들이 심심치 않게 올라왔고, 무시당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성심성의껏 대답을 해 줬다.
뭐, 이 정도면 평범한 온라인 커뮤니티와 다를 게 없다고 생각되지만.
마지막의 분류 때문에 도저히 그렇게는 말할 수 없었다.
[인류 해방 전선에 합류할 동지를 찾습니다.]
-대충 상큼한 미소를 짓고 따봉을 드는 남자의 사진
-우리는 단결해야 합니다. 우리는 해방돼야 합니다!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다이렉트 메시지로 연락 주세요. 저희가 찾아가겠습니다.
[댓글]
-설
-레
-어
-라
-얍
[솔직히 주인이라는 호칭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봉사자나 노예, 혹은 하인이라고 부르는 게 정확하지 않나요?
[댓글]
-인해전 왔니?
-└저 인해전 아니고요, 솔직히 주인이라고 부르는 거, 무척 안 좋은 호칭이라고 생각해요. 패배감을 심어 주는 호칭이니까 봉사자로 바꿔 부릅시다.
-‘분’
-└분이 무슨 뜻이죠?
-‘분’
-‘찐’
-└한 글자로만 댓글 다시지 마시고, 진지하게 생각해 보세요. 봉사자들은 정보로 이루어진 생명체들이잖아요? 그렇다면 주인이라고 부르는 게 악영향이 될 수도 있다는 거예요.
-‘인’
인류 해방 전선.
전에 주인 녀석이 나를 데려갔던 곳에서 만났었던 이상한 녀석들.
그 녀석들은 반려넷에서도 자신들의 주장을 설파하고 있었고,
당연히 반려넷에서도 별달리 좋은 평가는 받지 못하고 있었다.
뭐, 이런 식으로 대충 반려넷을 살펴봤으니, 대충 반려넷의 분위기가 어떤지 알았다.
그냥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잡탕찌개. 그게 바로 반려넷이다.
대충 분위기를 알았으니, 나도 한번 글을 써 볼까?
오랜만에 지구 시절 생각이 잠깐 나기도 하고, 아리스를 위해서 정보를 얻어야 하니까 말이다.
어째서 아리스를 위하냐는 이야기가 나오냐고 할 수 있는데.
반려넷을 이용하는 모든 사람들은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저 사람들에게는 기초적인 정보여도, 막 마법을 배우는 아리스한테는 귀중한 정보가 될 수도 있겠지.
뭐, 정보의 진위 판별은 잘 가려서 해야겠지만 말이다.
자, 그럼 글쓰기 버튼 클릭,
첫 글이니까, 어떻게 쓰는 게 좋을까?
[마력 없는 인간이 납치돼서 서바이벌 찍은 썰 푼다.]
음, 이 정도면 되겠지?
나는 적당히 제목을 짓고는, 내가 맨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있었던 일들을 담담히 서술했다.
열사병으로 쓰러지고, 무오에게 겁먹고 울고, 에포나와 만나고.
그렇게 있는 사실 그대로를 적어서 반려넷에 올린다.
아, 이제 저녁이나 만들어야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잠시 단말기에서 눈을 떼고 오늘 먹을 저녁을 만들러 떠났고.
다시 돌아와서 댓글을 확인한 나는 내 예상보다 폭발적인 반응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마력이 없는 게 가능한지는 둘째 치고, 글 내용 사실이면 참…….
-인류 해방 전선 1승.
-응 주작~ 반려넷 문학 잘 보고 갑니다 ^^
-에포나 살려내!!
-에포나!!
-님 왜 자살 안 함?? 님 왜 자살 안 함?? 님 왜 자살 안 함?? 님 왜 자살 안 함?? 님 왜 자살 안 함??
나는 그냥 댓글 몇 개가 달리는 걸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수백 개의 댓글이 달렸다.
와, 나는 그냥 일기 쓰듯 올린 건데 이렇게나 반응이 좋을 줄이야.
진짜 지금 와서 되돌아봐도 저 사람들 말대로 그때의 나는 어떻게 버틴 거지?
내가 그렇게 추억에 잠겨 있는 사이, 내 글은 반려넷의 주요 떡밥으로 자리 잡고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주작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마력이 없는 문명이 어떻게 가능한지 토론을 나누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대부분의 글들의 결론은 하나로 모아졌다.
주인 녀석이 죽일 녀석이라고.
마력이 하나도 없는 사람을 마력이 필요한 환경에 던져 놓는 게 말이 되냐고.
이윽고 게시판은 주인 녀석을 욕하는 것으로 잔뜩 달아올랐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뭔가 그리 기분이 좋지 않았다.
주인 녀석이 욕을 먹어도 싼 짓을 하긴 했어도, 뭔가 욕을 해도 되는 건 나뿐이라는 생각?
그렇게 생각한 나는 주인에게 쏟아지는 온갖 욕들을 멈추기 위해서 슬며시 새로운 글을 작성했다.
[마력 없이 서바이벌도 할 만함.]
제목은 대충 이렇게 어그로 끌고, 내용은…….
그냥 지금 내가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가감 없이 담아서 쓰자.
자, 업로드.
내가 두 번째로 반려넷에 올린 글은 또다시 어마어마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주인에게 쏟아지던 욕이 멈췄다.
그 대신.
[댓글]
-? 기만자임?
-기만자네.
-기만자!!
-악!! 기만자!! 죽어!!
-난 왜 자살 안 함? 난 왜 자살 안 함? 난 왜 자살 안 함? 난 왜 자살 안 함? 난 왜 자살 안 함?
-기만 죽어!!
내게 욕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 * *
“으음…… 반려넷에 올라오는 글은 사육자가 볼 수는 없는 건가?”
클라인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반려넷에 대한 정보를 찾아봤지만, 수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반려넷에 대한 정보는 많이 공개되지 않았다.
그저 한 연구진이 인간형 생물들의 의사소통에 대해서 연구하려는 의도로 개발했다는 것만이 알려졌을 뿐.
“으음…….”
뭐, 인간형 생물들이 정보 생명체처럼 독성 정보를 살포하거나 정보 전쟁을 시작하진 않을 테니 괜찮겠지.
그리고 또 하나 문제 되는 건, 시스템으로 다른 차원항들과 연결됐기 때문에 차원항을 탈출할 가능성이 생겼다는 거지만.
잉간이는 차원 마법을 쓰지 못하니 그리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
쩝, 이왕 반려넷에 관련된 영상을 찍게 됐으니 좀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싶었는데.
잉간이가 반려넷을 하느라 활동성이 줄어들어서 그리 괜찮은 영상이 잡히지 않는데, 적어도 반려넷에 무슨 글이 올라오는지 촬영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던 클라인의 눈에 문득 방구석에 방치해 둔 상자 하나가 띄었다.
그 상자는, 쓰고 남은 아바타를 보관해 둔 상자였다.
잠깐, 아바타?
84화 잉간이의 숨겨진 취향을 알아낸 것 같습니다. 잉간이에겐 비밀이에요?
[댓글]
-기만자기만자기만자기만자기만자기만자기만자기만자기만자기만자기만자
-나는 이 정도면 괜찮은 편이라고 위안받았는데 아니었네 ㅅㅂ
-진짜 후진 전진의 정석이다 와…….
-[기만자는 볼 수 없는 댓글입니다.]
[아 ㅋㅋ 나는 금욕한 지 6달이 되어 가는데 저 새끼는??]
-룸메이트들하고 매일매일 광란의 파티를 벌이겠지……. 이게 주인 차이라는 거냐?
[댓글]
-진심 주인 차이 서러워서 울었다.
-근데 금욕은 왜 하는 거냐? 뭐, 신선이라도 되게? ㅋㅋ
-└‘행동 풍부화’
-└X발 이 새끼 파계승 새끼였네.
-└밥 먹고 음침하게 꼼지락거리기만 하니까 주인이 행동 풍부화 들어가지 ㅋㅋㅋ
[솔직히 ‘그 새끼’ 별로 안 부러우니까, 걍 평소에 하던 이야기나 하는 게]
-그런 게는 이미 죽었다. X발 나도 그거 하고 싶어 으게게게게으겍
[댓글]
-그거 하면 죽는 새끼가 말이 많네 ㅋㅋㅋ
-한 번 하고 죽기 VS 그냥 살아 있기
-└아 이건 ㄷㅈ이지 ㅋㅋㅋㅋㅋ
“어, 갑자기 왜 이러지?”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로 올린 글이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격한 반응이 나오니까 좀 당황스럽네.
내가 올린 글 어디가 문제 있었던 거지?
내가 쓴 글을 되짚어 보자.
으음. 진짜 문제없는 거 같은데?
그냥 블랑카와의 첫 만남을 간략하게 요약해서 설명하고, 아리스는 적당히 주인이 어느 날 데려왔다고 적었는데.
도대체 이 설명에서 저런 반응을 보일 이유가 뭐가 있지?
나는 의아해하면서 조심스럽게 반려넷에 글을 적었다.
[여러분들 반응이 좀 당황스럽네요;;]
-다들 룸메이트는 없진 않을 거 아니에요? 솔직히 생활환경은 평균 수준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만 어쩌면 당연하게도 내 게시 글은 잔뜩 성난 사람들에게 불을 더 지르는 꼴만 됐다.
[댓글]
-그 룸메이트가 켄토르하고 하피니까 문제지 야발 ㅋㅋㅋㅋㅋ
-암컷 켄토르하고 하피가 남성 인간하고 같은 공간에서 지내는데 발정이 왔을 때 과연 가만히 있을까??
-이 새끼 진심으로 자기가 평균이라고 생각하는 거 같은데??
-룸메이트는 없진 않을 거 아니에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서 했지? 그래서 했지? 그래서 했지? 그래서 했지? 그래서 했지?
-진심 숨 쉬듯 기만을 하는구나…….
-형아들 나 가슴이 아파…….
내가 반려넷 이용자들이 어째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깨달은 것은, 잠시 후 올라온 한 게시 글 때문이었다.
[‘생활환경은 평균’]
-악취가 나는 오물들이 잔뜩 묻어 있는 독실에 놓여 있는 말라붙은 지 오래인 물그릇의 사진
-이게 반려넷 ‘평균’이다 애송이.
[댓글]
-솔직히 너는 평균은 아니야.
-ㄹㅇ 너는 평균은 아님.
-이 새끼는 근데 언제쯤 죽냐?
-저 새끼 깨달음 얻어서 우화등선했잖아 ㅋㅋㅋ 그래서 굶어 죽지도 못함 ㅋㅋㅋㅋ
[오늘 반붕이들 이렇게 발작하는 이유.]
-X 같은 곳에 갇혀서 할 거라곤 이거밖에 없어서 지금까진 같은 반붕이들 보면서 위안 삼았는데 ‘진짜’가 등장해서 이젠 위안도 못 하잖어 ㅋㅋㅋㅋㅋ
[댓글]
-ㄹㅇ 제대로 된 곳에서 사는 새끼면 이걸 안 하지 ㅋㅋㅋ
-진짜들은 제발 현실을 살아 주세요…… 부탁이에요…….
아, 그러니까.
이 반려넷의 이용자들의 환경은 그 이상한 기계의 세상보다도 더 열악하다는 건가?
거긴 적어도 청소라도 잘되었지, 반려넷에 올라오는 글들을 살펴보면 도저히 사람이 살 곳으로 보이지 않았다.
저게 평균이라고?
이게 말이 되나?
어쨌든 나는 반려넷 사람들이 저렇게 분노한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고.
조용히 사과문을 작성했다.
[죄송합니다. 형님들.]
-제가 아직 세상 물정을 몰라서 그럽니다. 너그럽게 용서해 주세요.
내가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미안하다고 글을 쓴다.
때로는 잘못한 게 없어도 미안하다고 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니까.
[댓글]
-맨입으로? 맨입으로? 맨입으로? 맨입으로? 맨입으로? 맨입으로? 맨입으로?
-오빠 나 치킨 알지?
당연하게도, 그냥 말로만 사과한다고 그들이 사과를 받아 줄 리 없었다.
어떻게 해야 이 사람들이 화를 풀까?
아리스를 위해서라면 최대한 이 사람들하고 양호한 관계를 만들어야 하는데.
윽, 뭔가 첫 단추부터 잘못 꿴 듯한 기분이 든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골머리를 썩이던 그때.
[‘그 새끼’는 이 글을 봐라.]
-룸메이트 사진 찍어서 올리면 봐줄 생각 있음.
[댓글]
-ㄹㅇ 그래서 이쁘냐고
-어차피 비처녀들일 텐데 뭘 그렇게 보고 싶어 해 ㅋㅋㅋ
-진심 유니콘은 레전드다 진짜. 그렇게 살면 안 피곤하냐??
사진?
사진을 찍을 수도 있어?
아, 하긴.
찍을 수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자기 방의 사진을 찍어서 올리지.
-저기, 사진도 찍을 수가 있어요? 어떻게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슬쩍 댓글로 사진 찍는 법을 물어봤고.
-‘용언’
-대충 그냥 촬영! 이라고 외치면 됨.
-언령이다 언령
-진짜로 사진 찍어다 줄 거야??
아, 사진 찍는 건 내가 생각하던 그 방법이 맞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댓글들의 말대로 허공에 대고 외쳤다.
“촬영!”
그러자 허공에 반투명한 카메라 렌즈가 생겨났고.
찰칵.
그런 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지더니 단말기의 메인 화면에 새롭게 갤러리가 생겨났다.
좋아, 사진을 찍는 법은 알아냈고.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사진을 올리는 건데.
“잉간?”
때마침 아리스가 다 놀았는지 슬쩍 집 안으로 고개를 내밀었고.
나는 가만히 단말기와 아리스를 번갈아 바라보다 고개를 내저었다.
응, 아무리 그래도 아리스의 사진을 찍어다 뿌릴 수는 없지.
누군지도 모를 사람들에게 어떻게 우리 소중한 아리스의 사진을 뿌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가만히 아리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블랑카의 사진도 올리기가 좀 껄끄러운데.
그렇게 고민하던 내 머릿속에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조금 껄끄러운 방법이고, 창피하긴 하지만 블랑카에게도 아리스에게도 피해가 가는 일도 없잖아?
거기에다가 적당히 구도만 잘 잡으면 충분히 속일 수 있을 거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결심을 내렸고, 조심스럽게 아리스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아리스.”
“응? 무슨 일이야?”
“조금만 더 밖에 있다 와 주겠어?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때까지는 절대 집으로 들어오지 말아 줘…….”
“응?”
아리스는 내 기괴한 부탁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 부탁을 수락했다.
좋아, 아리스가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단단히 일러뒀으니까.
나는 심호흡을 하며 조심스럽게 창고 안에 대충 던져 놨던 ‘그것’에 손을 뻗었고.
눈을 질끈 감고 그것으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아직 거울을 만들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
지금 모습을 거울로 봤다간, 분명히 자살 충동이 심하게 일었을 테니 말이다.
그냥 천 쪼가리인데 이걸 입은 것만으로 왜 이렇게 얼굴이 달아오르는지 모르겠다.
“촤, 촬영!”
허공의 카메라 렌즈를 이리저리 돌려 가며 괜찮은 구도를 잡고 사진을 촬영한다.
조금 자세가 기묘해서 얼굴 윗부분이 대부분 잘렸지만, 오히려 좋다.
“하아…….”
난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람.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고작 인터넷 커뮤니티 때문에 이딴 짓을 하는 거잖아?
아냐, 고작 인터넷 커뮤니티가 아니야.
반려넷이야.
응, 그러니까 괜찮아.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조심스럽게 반려넷에 새로운 게시 글을 올렸다.
[‘그 새끼’입니다……. 이걸로 될까요?]
-교복을 입은 잉간이의 사진
-이 정도면 성의가 충분한가요?
으, 제발 효과가 있어라.
제발, 제발…….
나는 그렇게 속으로 빌며 반려넷의 반응을 살폈고.
[댓글]
-??본인이냐??
-ㅗㅜㅑ
-더 가져와!! 아니, 다 가져와!!
-50살 유니콘인데, 이거 100% 처녀다. 내 뿔이 반응하는 거 봐선 확실함.
-퍄퍄퍄퍄퍄퍄퍄퍄퍄퍄퍄퍄퍄퍄
[솔직히 ‘그 새끼’ 자꾸 언급하는 거 별로다.]
-우리 여사님이 니들 친구냐?? ^^7
[반려넷 일동은 뉴비의 반려넷 활동을 환영합니다.]
-그러니까 제발 사진 더 내놔!!
[아 ㅋㅋ 이러니까 주인이 룸메이트로 켄토르하고 하피를 넣어 놓지 ㅋㅋ]
-안전 그 자체네 ㄹㅇ
[댓글]
-보빌 수도 있잖슴
-└죽어.
[진심 교복 너무 좋다 와 진짜]
-진짜 다시는 교복을 못 볼 줄 알았는데 이렇게 보네…….
[댓글]
-나는 X발 수녀복 보고 싶다.
-나는 술집 종업원 제복.
-└너 리우테스 출신이지?
-└어케 알았누?
이번에도 내 예상을 벗어난 반려넷의 반응에 나는 경악했다.
으아, 이렇게나 효과가 좋을 줄은 몰랐는데.
좋아, 그럼 이 기세라면 마법에 대해서도 좀 관대하게 알려 주지 않을까?
[그, 사진 계속 올려도 되긴 하는데요. 부탁이 있어요.]
-제가 마력이 없어서 그런데, 하피한테 마법의 기초를 알려 주고 싶거든요. 마법의 기초를 상세히 알려 주신다면 그때마다 사진 올려 드릴게요.
혹시 아무도 반응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 이렇게 미끼도 뿌려 두고.
뭔가 자괴감이 들지만 필사적으로 무시하자.
아리스야, 내가 이렇게 널 위해서 노력한단다…….
[댓글]
-1:1 개인 교습 해 드립니다 ^^ 연락 주세요 ^^
-말만 해 ㅋ 뭐든지 알려 줄게 ㅋㅋ
-10서클 마법까지 ㅆㄱㄴ
-아직 서클 쓰는 씹틀딱도 있네 ㅋㅋ 대세는 상태 창인데 ㅋㅋㅋㅋ
그리고 이 욕망에 가득 찬 녀석들은 내 제안을 단번에 수락했다.
후, 좋아.
이제 남은 건 가끔씩 질문 글을 올리면서 아리스의 공부를 도와주는 일뿐인데.
이제 이 빌어먹은 옷은 빨리 벗어 버리자.
혹시나 블랑카가 돌아와서 이 모습을 볼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서둘러 교복을 벗으려 했지만.
끼익.
누군가가 문을 열어젖히는 소리가 들려왔고.
“아니! 이건 아무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순간 당황한 나는 홱 뒤를 돌아보며 필사적으로 변명을 생각해 봤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블랑카가 아니었다.
“냐앙……?”
다소 놀란 기색의 고양이였다.
내가 클라인이라 이름 붙였던 바로 그 고양이와 똑 닮은 모습의.
* * *
결국, 해 버렸다.
응.
나는 단지 반려넷에 올라오는 글들이 궁금했을 뿐이야.
그것뿐이라면 인간형 아바타를 만들어도 되었지만, 클라인은 굳이 전에 사용했던 지구산 생물의 외형을 또 사용한 진짜 이유에서 눈을 돌렸다.
아무리 클라인이 잉간이를 아낀다고 해도, 자기 반려 생물에게 쓰다듬받고 싶다는 건 조금 특이한 취향으로 여겨질 우려가 있으니까.
아니, 나는 그런 취향도 아니니까.
그냥 반려넷이 보고 싶은 거라고.
그리고 차원항 안의 풍경을 이런 시점에서 관찰하고 싶기도 하고.
클라인은 그 누구도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지 않은데 그렇게 속으로 변명 같은 생각을 하며 차원항 안을 달려 나갔다.
두 번째로 아바타를 사용하다 보니 이젠 자신의 몸을 움직이는 것처럼 자유롭다.
“애옹.”
응.
울음소리를 어떻게 내는지도 알겠고, 이제 남은 건 빨리 잉간이의 은신처를 찾는 일뿐이다.
그렇게 잉간이의 은신처를 찾아 헤매던 클라인의 감각에 잉간이의 냄새가 감지됐다.
좋아, 저쪽이다.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서둘러 숲속을 달렸고, 잉간이의 은신처가 눈에 들어올 때쯤, 무언가를 발견했다.
“……?”
작게 흙을 쌓아 둔 둔덕에 + 자 모양의 막대기가 꽂혀 있던 것이다.
이건 또 처음 보는 건데, 뭘까?
음, 켄토르가 만들던 제단과 비슷한 시설인 걸까?
이리저리 둘러봐도 그 어떠한 마력도 감지되지 않는데.
클라인은 잠시 제자리에 주저앉아 생각했지만, 곧바로 생각을 바꿨다.
중요한 건 이제 곧 잉간이를 만난다는 거니까 말이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잉간이의 은신처 입구로 다가갔지만, 잉간이의 은신처는 굳게 닫혀 있었다.
음, 이 몸으로는 저런 문을 열기가 좀 힘든데.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슬쩍 주위를 둘러봤다.
좋아, 내 모습을 보고 정보 오염을 당할 생명체는 없네.
그렇다면 살짝, 정보 가공을 시도해도 괜찮겠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나무 문의 정보를 가공했다.
닫혀 있던 문을, 열려 있는 문으로.
끼이익.
수정된 정보에 맞춰서 현실이 변화하고, 슬며시 나무 문이 열린다.
“(O_O)?”
은신처 안으로 들어오자 어딘가 당황한 듯한 잉간이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냐앙……?”
잉간이의 모습을 확인한 클라인은 얼빠진 울음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저건, 내가 전에 줬었던 교복?
내가 준 옷을 입어 주는 건 고맙지만, 잉간이에게 이런 취향이 있었던 걸까?
클라인은 이 상황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가만히 서서 잉간이의 모습을 감상할 뿐이었다.
그나저나 진짜 이렇게 꾸며 놓으니까 암컷 인간하고 구분이 가질 않네.
가발만 구하면 진짜 암컷 인간이라고 속여도 누구나 믿을 정도겠다.
“(OoO)!”
잉간 또한 잔뜩 몸이 굳어 있었고, 클라인이 슬쩍 먼저 움직여서 잉간에게 다가가자 잉간은 무슨 울음소리를 내질렀다.
음, 지난번처럼 쓰다듬는 건 안 하려나?
인간형 생명체에게 쓰다듬기는 자기보다 작은 생명체들과의 인사가 아니었던 걸까?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영상으로 공부한 소생물들의 움직임을 떠올리며 잉간의 발치에 몸을 비볐다.
슥.
그러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잉간이 클라인의 몸을 공중에 들어 올렸고.
“냐아-.”
클라인의 아바타 안으로 슬쩍 잉간이의 정보가 스며들어 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아바타에 담을 수 있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다 보니 클라인의 아바타 안으로 스며드는 잉간이의 정보도 극히 적었다.
잉간이는 클라인의 아바타 이곳저곳을 꼼꼼히 살펴보며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곧이어 한숨을 내쉬며 살포시 클라인을 바닥에 내려놨다.
으, 이번에는 정말 쓰다듬어 주지 않으려는 걸까?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기로 했다.
“냐~.”
자신을 내려놓는 잉간이의 손에 슬쩍 머리를 들이밀고 부비부비를 시작한 것이었다.
당장 클라인도 잉간이가 자신의 손에 이런 짓을 한다면 잉간이를 만지지 않고 배길 수 없는데.
잉간이라고 자신을 만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특히, 지구산 인간들에게 호감도가 높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그런 클라인의 생각대로 잉간이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클라인의 몸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냐아~.”
클라인은 기분 좋게 울어 젖히며 잉간이의 손길을 즐겼다.
으으, 잉간이도 내가 쓰다듬어 줄 때 이런 기분을 느낄까?
좋아, 앞으로는 나도 잉간이에게 스킨십으로 애정을 많이 표현해야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잉간이의 무릎 위에서 한 바퀴 뒹굴었고.
“왕.”
지금껏 자신을 묘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던 차원 파괴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 깔보는 듯한 시선을 받은 클라인의 머리가 급속도로 식어 가며 냉정해졌고.
클라인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으아아아아아.
나는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던 거지?
순식간에 냉정해진 클라인은 폴짝 뛰어올라 잉간이의 손길을 벗어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차원 파괴자는 사뿐사뿐 잉간이에게 걸어왔다.
“(O_O)?”
잠깐 놀랍다는 듯한 잉간이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이어서 차원 파괴자는 아까까지 클라인이 누워 있던 자리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마치 과시하듯 클라인을 바라보며 차원 파괴자는 잉간이의 손길을 즐겼다.
저, 저, 저놈이!
저 녀석, 100% 지성을 얻은 상태가 분명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런 눈빛을 지을 수가 없다.
클라인은 당장이라도 차원 파괴자를 밀쳐 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지만.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의 존엄성이 클라인을 뜯어말렸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차원 파괴자와 진심으로 싸우는 건 아니잖아?
차원 파괴자가 잉간이에게 도움이 되는 공생 관계이니까, 내가 참는 거다.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부루퉁한 표정으로 차원 파괴자를 바라봤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ㅇ<!”
“I _ I”
집 밖에서 하르피아와 켄토르의 소리가 들려왔고.
잉간이는 다급하게 뭐라 소리치더니 집 문을 잠그러 뛰어갔다.
“(O0O)!”
그러고는 잉간이는 창고 안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고.
클라인은 그제야 지금까지 방치하고 있던 첫 번째 목적을 떠올렸다.
그래, 반려넷의 게시 글을 보려는 게 목적이었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잉간이의 정보로 실체화된 단말기 앞으로 다가갔다.
으, 몸이 작아서 조작하기 힘들긴 하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니까.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게시판의 내용을 확인하려 했지만.
바로 그 순간.
“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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