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 11

“잘 알고 있네요. 그래서 사육항에서 늘 차원 파괴자가 탄생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 거고요. 계속 생먹이를 급여하다 보면 차원 파괴자가 탄생할 가능성이 늘어나니까요.”
“그, 그런데 갑자기 이런 질문은 왜…….”
“클라인 양. 저 차원 파괴자가 갑자기 나타난 거로 보이나요?”
“네?”
지금 쥬스농장의 몸에서 날뛰는 차원 파괴자는 마지막 단계로 성장하기 직전으로 보인다.
아마 이 쥬스농장의 정보를 모조리 먹어 치우면 완전한 성체로 자라나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저 차원 파괴자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몸을 숨기고 있던 게 분명하다.
“클라인 양. 제 생각은요, 저 차원 파괴자의 숙주는 지구산 인간. 그러니까, 클라인 양의 잉간이라고 생각해요.”
“잉간이가, 숙주……?”
하지만, 하지만.
클라인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데?
지금껏 클라인이 방역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어째서 차원 파괴자가……?
“아마도 지구산 인간과 차원 파괴자는 독특한 공생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이 일로 클라인 양을 탓할 생각은 없으니 안심하세요.”
“네에…….”
“저 독특한 공생 형태는 개체 하나의 특징이 아니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최근에 지구산 인간을 심사하면서 재밌는 사실을 알아냈거든요.”
“그건……?”
“파인만이라고 했었나요? 클라인 양의 친구. 그 모험가가 가져다준 지구산 인간의 시체 9구를 분석해 봤어요. 그랬더니 무슨 결과가 나왔는지 아세요?”
“글쎄요……?”
“세상에나. 모든 시체에서 차원 파괴자의 유충이 발견됐지 뭐예요.”
“그렇다는 말은…….”
“네. 지구산 인간은 차원 파괴자들과 일종의 공생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보는 게 가장 합리적인 추론이죠. 어째서인지는 나중에 연구를 통해서 밝혀내야겠지만 말이에요.”
어째서 리만은 자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이번 사태에 대해서 클라인은 아무 잘못이 없다고 안심시키기 위해서?
클라인은 불안한 표정으로 리만을 바라봤고, 리만은 클라인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클라인 양. 저는 클라인 양을 칭찬하려는 거예요. 같은 생물을 사육했을 때, 한쪽에서는 차원 파괴자가 발현하지 않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차원 파괴자가 발현했다. 이것만 봐도 누가 더 생물을 잘 사육했는지 알 수 있겠죠?”
“그, 그런가요?”
“차원 파괴자가 숙주의 감정 상태에 크게 좌우된다는 사실은 클라인 양도 아는 사실이잖아요. 그렇죠?”
“그렇죠. 네…….”
단순히 칭찬만 할 것이라면 이 타이밍에 이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어째서, 어째서 자꾸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거지?
자꾸 불안하게?
내게 뭔갈 시키려는 걸까?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했고, 리만은 그런 클라인의 추리를 현실로 이끌었다.
“클라인 양. 제가 판단하기에 잉간이와 가장 유대 관계를 잘 쌓은 사람은 클라인 양밖에 없어요.”
“그렇지는…….”
클라인은 잉간이와의 첫 교감에서 느낀 잉간이의 공포심을 떠올리며 고개를 내저었지만, 리만은 계속해서 클라인을 다독였다.
“원래 첫 교감은 다 그런 법이에요. 교감을 할 만큼 잉간이와의 관계가 깊어진 건 사실이잖아요?”
“그렇긴 하죠…….”
“클라인 양만이 할 수 있어요. 오직 클라인 양만이 잉간이와 교감해서, 저 차원 파괴자를 진정시킬 수 있어요.”
“제, 제가요?”
“뭐, 제가 나서서 차원 파괴자를 처치하는 방법도 있는데. 그건 잉간이의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을 거니까요. 클라인 양, 잉간이를 위해서예요. 가서, 다시 한번 잉간이와 교감하세요.”
리만의 지시를 들은 클라인은 잠시 입술을 깨물며 고민했다.
정말 자신이 할 수 있을까?
이번에는 제대로 교감할 수 있을까?
온갖 생각들이 클라인의 머릿속에서 휘몰아치고.
“브리더 시험을 보기로 한 계기, 거짓말은 아니겠죠?”
“당연히. 당연히 아니죠……!”
결국 클라인의 생각은 리만이 했던 말 한마디에 붙잡혔다.
잉간이를 위해서.
그래.
이건 잉간이를 위해서다.
그러니 힘을 내자.
잉간이와 제대로 된 관계를 쌓기 위해서.
시도하기도 전에 거부당할 것을 생각하지 말자.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각오를 다졌고.
“……네. 해 볼게요!”
당찬 목소리로 리만에게 대답했다.
그리고 리만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흐뭇한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과연 클라인이 자신의 과제를 잘 해결할 수 있을지 생각하며 말이다.
잘해 낸다면, 그녀는 리만의 계획에 쓸 만한 패로 써먹을 수 있겠지.
리만은 그렇게 생각하며 잉간이를 찾으러 떠나는 클라인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자신의 발밑에서 고통에 신음하는 쥬스농장을 발로 툭툭 건드리며 말이다.
66화 지구에 대해서 몰라도 되는 77가지 사실
“보이저?”
“잉간, 저게 뭔지 알고 있는 거야?”
“네. 뭐. 알고 있죠.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좀 당황스러울 지경이네요…….”
그래.
내가 얼마나 수없이 보이저가 출현하는 다큐멘터리를 봤었던가?
인류의 마지막 흔적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느껴서 의욕을 올리려는 의도였는지 참 질리게도 틀어 줬었지.
뭐, 그렇게 다큐멘터리를 틀어 줘도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서 의욕이 나질 않았으니 말짱 꽝이지만 말이다.
보이저.
이게 1호인지, 2호인지는 저걸 뜯어보기 전까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내 눈앞에서 신호음을 흘리는 것은 아무리 봐도 보이저다.
내가 보이저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 같은 반응을 보이자 드래곤들이 내게 보이저의 정체를 물어 왔고.
나는 조심스럽게 보이저의 정체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음…… 제 고향에서 다른 세상을 탐사하기 위해서 쏘아 보낸 탐사선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다른 세상을 탐사하기 위해서? 어째서?”
그렇지만 드래곤들은 탐사선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정확히 말하면, 어째서 탐사선을 쏘아 보낼 필요가 있는지 의문스러워하는 것 같은데.
드래곤들의 말을 듣고 어째서 인류가 탐사선을 쏘아 보냈는지 대답하려 했지만, 생각보다 시원스러운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어라?
진짜 생각해 보니까 굳이 탐사선을 쏘아 보낼 이유가 없지 않아?
그냥 거기에 쓸 자원을 지구 내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쓰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어째서 우리는 그렇게나 바깥으로 탐사선들을 쏘아 댔던 걸까?
“어, 음. 다른 생명의 흔적을 발견하기 위해서요?”
“그러니까. 왜 굳이 그럴 필요가 있냐는 거지. 다른 생명체를 발견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닌데?”
“아니. 다른 행성에서 생명체가 발생하는 건 무척이나 희귀한 일이니까……?”
“희귀하다고? 그럴 리가?”
“네?”
그런데 무언가 드래곤들과 기본적인 생각에서 차이가 나는 기분이다.
뭐지?
“생명이라는 게 그렇게 희귀할 리가 없잖아? 당장 우주의 먼지 속을 유랑하는 생명체만 해도 100종은 넘어갈 텐데.”
“네? 그런 생명체가 존재한다고요?”
“일단 우리 드래곤들부터 우주를 방랑하던 생명체였으니까. 고작 생명을 찾자고 탐사선을 쏘아 보내는 게 이해가 안 가서 그래. 탐사선의 형태를 보아하니 무슨 자원을 찾기 위한 형태도 아니잖아?”
어.
생명체가 그렇게나 흔한 거라고?
과학자들이 그렇게나 노력해서 간신히 은하계 전체에 탐사선과 전파를 흩뿌렸어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는데?
“태양에도, 달에도, 별들의 먼지 사이에도 존재하는 게 생명체인데 말이야.”
“어, 저희 동네는 그러지 않아서 말이에요. 은하계를 전부 뒤져도 생명체가 제 고향에밖에 없어서.”
“뭐? 그게 가능한 거야? 은하계에 별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니까요. 참 신기한 일이죠? 우주의 신비란 참.”
다른 은하계라면 모를까, 우리 은하는 지구밖에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과학자들이 낸 결론이었지만, 다른 은하들엔 이렇게나 생명들이 넘쳐 날 줄이야.
“도대체 네 고향은 어떤 곳이길래…….”
“뭐,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했을 거 같은데요.”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조심스럽게 보이저에 손을 가져다 대었고.
보이저의 표면은 기계장치들이 가동하며 만들어 낸 열로 살아 있는 생물처럼 따스했다.
부드러운 손길로 보이저를 쓰다듬던 내 손에 무언가 담긴 상자가 걸렸다.
역시, 아직까지 남아 있는 건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알루미늄 상자를 열었고.
그 안에 얌전히 보관된 금색의 원반을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딘진 모르겠지만, 이 먼 곳까지 이걸 가져와 줬구나.
“잉간, 그건?”
이곳이 안전한 곳이라는 생각이 든 것인지 잠깐 휴식을 취할 준비를 하면서 드래곤들이 내 손에 들린 황금빛의 원반을 바라보며 의문을 표했고.
나는 사랑스럽다는 듯 원반을 어루만지며 조용히 대답을 토해 냈다.
“제 고향에서 보내는 초대장. 이라고 하면 될까요?”
“초대장?”
“아니, 초대장보단 유언장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적당하겠네요.”
내가 만능 사전을 얻은 날 밤, 가장 먼저 검색해 본 것이 지구의 정보였지만, 지구의 정보는 사전에 실려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지구로 돌아갈 방법도, 지구의 정보를 얻을 방법도 없다고 생각하며 포기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지구의 흔적을 발견해서 감상적이 된 걸까?
나는 아무 말 없이 골든 레코드를 동봉된 재생 장치에 집어넣고 재생을 시작했다.
“다들 제 고향이 어떤 곳인지 궁금하신 것 같으니까, 이걸로 설명해 드릴게요.”
머나먼 과거.
나의 조상들이 누군가 발견하길 바라며 남긴 우리가 존재했다는 증거들이 벽면에 재생된다.
나 또한 사진과 영상으로만 봤지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정보들이 주륵 펼쳐지고.
과거에서 전하는 인사와.
인간이라는 종의 정보.
지구의 위치.
그리고 우리가 지금까지 이룩했던 위업들이 흘러나온다.
모두가 아무 말 없이 인류가 보내는 유언장을 조용히 바라보고.
마침내 재생이 모두 끝나자, 저마다 제각각의 방법으로 감탄사를 터트렸다.
“마력이 존재하지 않는데, 저 정도로 문명을 발전시켰다고?”
“마력이 없는 문명이 존재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드래곤들은 마력이 없는 존재들이 저만큼이나 문명을 일궈 냈다는 데 감탄을 표하고.
큐비는 인간의 번식법에 관련된 정보가 흘러나오자 눈빛을 반짝이며 집중했다.
아리스는 화면에 비친 바다의 사진을 보며 흥분된 기색으로 내게 질문을 던져 왔다.
“잉간, 잉간! 그럼 저 바다라는 곳은 얼마나 큰 거야?”
아리스의 고향에선 바다라는 게 존재하지 않던 걸까?
바다라는 것에 큰 관심을 품으며 내게 바다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 왔다.
“지구라는 세상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엄청 커다래.”
“우와! 그럼, 그럼 잉간도 바다에 가 봤어?”
“나? 나는…….”
그렇지만 문득.
별생각 없이 던진 아리스의 질문이 내 치부를 찌르고.
“나는, 나는…….”
“잉간……?”
“미안, 나는 바다에. 가 본 적이 없어. 미안, 미안해…….”
나는 갑자기 터져 나오기 시작한 눈물을 억제하지 못하고 흘리기 시작했다.
그런 내 모습을 어떻게 이해한 것인지 몰라도 드래곤들은 나를 위로하려 했다.
“괜찮아. 장로님을 구출한다면 너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아뇨. 그게 아니에요. 고향으로 돌아가도 바다를 볼 수는 없어요. 저 기록에 적힌 내용들을 다시 볼 수는 없을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야?”
그렇지만 드래곤들은 내가 슬퍼하는 이유를 잘못 짐작했다.
내가 슬퍼하는 것은, 다시는 저 기록에 적힌 모든 것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다시 지구로 돌아가도.
저것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인간이라는 종이 남아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쿵.
에포나가 지면을 내리친 것인지 시설 전체가 진동하고.
나는 한탄하듯 그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던 사실을 조용히 건져 올리기 시작했다.
“어째서인진 몰라요. 그냥 평소대로 우주 정거장에서 지상의 뉴스를 보는데, 갑자기 전쟁이 났다고 하더라고요.”
나는 전쟁이 금방 끝날 줄 알았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전쟁은 금방 끝났다.
정거장의 창문으로 보일 정도로 거대한 불꽃과 함께 말이다.
그렇게 모든 신호가 끊겼고, 나는 나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해야 했었다.
나는 한탄하듯 눈물을 흘리며 나의 죄악을 고해성사하기 시작했다.
“내려갔어야 했어요. 저처럼, 저처럼 우주 정거장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그게 목적이었으니까요. 지상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다시 인류 문명을 복구하는 게. 그게 목적이었으니까요.”
내려갔어야 했다.
그 거대한 불꽃이 번지는 것을 보자마자 내려갔어야 했다.
인류의 멸망을 막고 싶었다면, 내려갔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우주 정거장의 내 방 안이 너무나 안락했기에.
우주 정거장을 떠나서 지상으로 내려가는 게 너무나도 두려웠기에.
나는 방 안에 틀어박혔다.
“제, 제가 있던 곳 말고도 우주 정거장은 더 많았으니까요! 그러니까, 굳이 제가 내려가지 않아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저, 저 같은 것보단 다른 사람들이 더 도움이 될 테니…….”
그래서 나는.
냉동인간 상태의 동료들을 깨우지 않았고.
다른 정거장의 사람들이 내려가는 것을 지켜만 봤다.
전쟁이 끝나고 시간이 지나자 다시 몇몇 위성들이 작동하기 시작했고.
인터넷도 어느 정도 복구가 되긴 했다.
지상에 내려간 사람들이, 일을 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슬슬 내려갈까?
내려가야 하는데?
그런 생각이 빈번히 들었지만.
나는.
끝까지 용기를 내지 못하고 틀어박혔다.
그저 단순히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바라보며, 인류가 남긴 쥬튜브만을 시청하며.
내가 해야 할 일에서 시선을 돌리고 시간만을 때웠다.
그리고.
다시, 지상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아니, 그건 전쟁이라고 부를 수 없는 수준이었다.
단순한 학살이었다.
식량 문제 때문일까?
아니면 단순히 내려간 사람들이 무언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걸까?
이유가 무엇이든 싸움이 벌어졌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내가 동료들을 깨우지 않아서.
내가 정거장의 물자들을 가지고 내려가지 않아서.
그래서 저렇게 된 걸까?
아니다.
내 잘못이 아닐 거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한편에선 내려가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마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남아 있었다는 게.
더욱 나를 괴롭게 만들며 방 안에 틀어박히게 했다.
그렇게.
시간을 말 그대로 썩혀 가며 방 안에 틀어박혀 있던 어느 날.
나는 정체불명의 숲속에 떨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이젠. 저 안에 새겨진 풍경은 다시 보지 못할 거예요. 지구로 돌아가 봤자…….”
나는 그렇게 고해성사를 끝마쳤다.
내 진실을 밝혔으니, 다들 어떤 반응을 보일까?
욕을 하며, 손가락질하고, 비웃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내게 올 비난을 기다렸지만.
“잉간.”
꼬옥.
나를 맞이한 것은 아리스의 따스한 깃털이었다.
“아까, 그 영상에서 봤어. 지구에선 이렇게 슬퍼하는 사람을 위로하는 게 맞지?”
내 얼굴을 자신의 날개에 파묻게 하고 아리스는 나를 토닥이며 위로했고.
나는 조용히 아리스의 호의에 파묻혀서 마음속에 담아 뒀던 감정들을 모조리 토해 냈다.
“집에 가고 싶어…….”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아리스에게 어리광 부렸고.
슬슬 한껏 동요했던 정신이 진정했을 무렵에는 도저히 고개를 깃털에서 들어 올리지 못하고 시뻘겋게 얼굴을 물들였다.
나보다 어린 아이한테 도대체 무슨 추태를 보여 준 거람.
“진정했어?”
“……응.”
아무튼.
아무튼 이걸로 휴식은 끝이다.
화끈한 얼굴을 최대한 보이지 않게 하며 손부채질을 하는 사이, 드래곤들이 내게 한 가지 제안을 건네 왔다.
“돌아갈 고향이 없는 게 문제라면, 우리랑 함께 가는 게 어때?”
“그건…….”
내가 돌아갈 집은 과연 어디일까?
지구?
아니면, 블랑카가 기다리고 있을 그 숲속?
내가 돌아가고자 하는 곳이 어딘지 결정을 내리지도 못했는데 드래곤들의 제안에 대답할 수 있을 리도 없었고.
드래곤들은 쓴웃음을 웃으며 나를 다독였다.
“괜찮아. 지금 당장 결정하라는 게 아니니까. 다른 곳에 가고 싶다고 하면 우리가 데려다줄게.”
“감사. 합니다…….”
어찌 됐든 휴식은 다 끝난 모양이고, 드래곤들과 나는 보이저를 떠나 이어진 통로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까부터 방해되던 신호가 갑자기 멈췄어. 그 덕분에 장로님의 신호가 느껴져.”
보이저는 마치 자신이 할 일을 다 끝냈다는 듯 더 이상 신호를 방출하지 않았고.
우리는 장로가 내보내는 신호에 따라 복잡한 통로를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장로가 갇혀 있을 위치에 도착했고.
“흐읍……!”
드레이크가 자신의 전력을 다해서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허공에 구멍을 뚫었고.
그대로 장로가 갇혀 있을 감옥의 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드래곤들이 그렇게 애타게 찾아 헤맨 장로는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서서히 장로의 모습이 드러나기만을 기다렸고.
“안 해! 안 한다고! 이 버러지들아!!”
“어?”
버럭 키보드를 내리치며 마우스를 집어 던지는 한 드래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 *
클라인은 조심스럽게 쥬스농장의 몸 위를 달려 나갔다.
잉간이는 어디에 있을까?
주위의 정보와 마력을 긁어 모아 봐도, 저 차원 파괴자가 너무 난동을 피우는 탓에 쉽사리 잉간이의 정보를 찾아낼 수 없다.
잘 생각해 보자.
쥬스농장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잉간이는 지금 드래곤들과 함께 행동하고 있다.
드래곤들의 목적은 뭐, 보지 않아도 뻔하다.
알파 개체를 찾아내서 이곳을 탈출하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먼저 알파 개체를 찾아내서 기다리고 있으면 알아서 잉간이를 데리고 드래곤들이 도착할 것이다.
저 차원 파괴자는 뭐, 쥬스농장이 알아서 막겠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서둘러 옮기기 시작했지만, 무언가가 그녀의 발치로 날아와 추락했다.
“우왓?!”
쥬스농장이 진압용으로 보낸 로봇이 차원 파괴자의 촉수에 맞아서 완전히 으스러져 있었다.
“흡수를 안 했다고?”
쥬스농장이 보낸 로봇이 파괴되는 것은 예상 범위 안이지만, 클라인을 놀라게 한 것은 차원 파괴자가 로봇을 먹어 치우지 않은 것이었다.
독성 정보가 안에 담겨 있는 것을 눈치채기라도 한 걸까?
클라인은 그제야 차원 파괴자가 전투하는 모습을 관찰했고, 차원 파괴자가 귀신같이 독성 정보가 들어 있는 로봇들을 제외해서 흡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저 차원 파괴자, 보통 녀석이 아니다.
내키는 대로 폭주하는 것처럼 보여도 자신에게 위험한 것은 흡수하지 않는다니.
어쩌면 모험가가 필요한 레벨의 차원 파괴자일지도 모른다.
일단, 차원 파괴자를 상대하는 것은 클라인이 할 일이 아니다.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서둘러 차원 파괴자를 무시하고 알파 드래곤이 있을 장소로 달려가려 했지만.
“꺄악?!”
어째서인지, 차원 파괴자는 주위의 로봇들을 무시하고 곧장 클라인에게 덤벼들어 왔다.
자신의 천적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인 걸까?
클라인은 자신에게 쏘아진 차원 파괴자의 촉수를 비껴 피했지만.
이대로 저 차원 파괴자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적어도, 클라인의 길을 막는 촉수 몇 개는 잘라서 약화시켜야 할 것 같다.
그렇지만 내가 잘해 낼 수 있을까?
싸우는 건 별로 자신 없는데.
아니, 지금은 해야만 한다.
잉간이를 위해서, 해야만 한다.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지그시 차원 파괴자를 노려봤고.차원 파괴자 또한 지그시 클라인을 관찰했다.
“흡!”
클라인은 일단 마력을 쏘아 내어 슬며시 차원 파괴자의 정보에 접촉했고.
생각보다 차원 파괴자의 몸에 삼켜진 정보들이 많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이 정도라면 클라인의 힘만으로 정보 가공을 시도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물리적 타격으로 정보를 흩어 놔야 한다는 사실인데.
웬만한 물리적 타격은 저 고밀도의 정보를 흩어 놓기 어려울 거다.
결국, 클라인은 자신의 몸의 마력을 소모해 가며 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연히 차원 파괴자는 그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지 않았고, 클라인의 몸을 향해 연달아 촉수들이 쏘아졌다.
“어딜……!”
하지만.
아직 성체가 되지 못한 차원 파괴자의 힘은 클라인의 촉수의 방어를 뚫어 내기엔 무리가 있었다.
물리적으로 클라인의 방어를 돌파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인지 차원 파괴자 또한 클라인의 정보를 가공하려 시도했다.
클라인의 몸에 차원 파괴자의 몸을 구성하는 정보들이 달라붙기 시작했고.
“으윽…….”
클라인은 자신의 몸에 달라붙은 정보들의 내용에 몸서리쳤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죽음이 농축되어 정제된 것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정보를 먹어 치운 거야?
클라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마법을 쏘아 보내려 했고.
바로 그 순간.
“어?”
차원 파괴자가 내보내는 정보들 중, 잉간이의 감정으로 추측되는 정보가 클라인의 몸에 섞여들었다.
‘집에 가고 싶어…….’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
잉간이의 감정을 느낀 클라인의 집중이 순간 흔들렸고.
“윽……!”
그대로 차원 파괴자의 촉수가 클라인의 빈틈 사이로 파고들어 클라인의 가슴에 적중했다.
클라인은 그대로 뒤로 넘어졌고, 차원 파괴자는 기분 좋다는 듯 촉수를 살랑거렸다.
방금 그건, 지금의 잉간이가 느끼던 감정이었을까?
만약 잉간이를 위한다면, 클라인이 잉간이를 건드리지 않고 도망치게 놔두는 게 맞는 일이 아닐까?
클라인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고개를 흔들어 털어 냈다.
아직 잉간이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은 것도 아니다.
직접 잉간이와 교감하고, 잉간이의 이야기를 들어 봐야 한다.
만약 잉간이가 자신을 싫어했다면 직접 사과를 해야 한다.
그것이 잉간이를 키우던 사람으로서의 의무니까.
그것이 사람으로서의 도리니까.
자신이 잉간이를 소중하게 여긴다면 그래야 하니까.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차원 파괴자의 촉수를 노려봤고.
차원 파괴자 또한 클라인을 노려보며 촉수를 흔들거렸다.
어째서인지, 클라인은 차원 파괴자가 방금 히죽 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67화 지구산 인간과 교감을 하는 법
“안 해! 안 한다고! 이 버러지들아!”
“어?”
아무리 봐도 방구석 백수가 버럭 소리치며 키보드와 마우스를 내던지고.
때마침 감옥의 벽을 부수고 들어온 우리와 장로의 눈이 마주쳤다.
“자, 장로님?”
“어, 어? 너희들이 왜 여기 있냐?”
드래곤들 모두 다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서로 어벙한 목소리를 내고.
“음. 일단 안으로 들어와라. 다리 아프게 뭐 하러 서 있냐?”
장로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우리를 자신의 감옥 안으로 초대했다.
마치 자신의 집에 놀러 온 친구들을 방 안으로 불러들이는 것처럼 말이다.
드래곤들의 기억 속의 장로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던 건지 드래곤들은 당황해하면서도 일단은 장로의 말에 따랐다.
장로의 감옥 안은 아주 낯익은 모습이었다.
컴퓨터와 책상, 침대, 그리고 냉장고.
내가 방 안에서 나오지 않던 시절의 바로 그 모습 그대로.
방구석 백수들의 방은 다 이런 모습인 걸까?
방을 둘러보며 내가 낯익은 기시감을 느끼는 와중에도 드래곤들은 진지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래서. 여긴 어떻게 온 거냐? 아니, 왜 온 거냐?”
“어쩌다 보니까요.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어요. 장로님, 장로님이 있다면…….”
“뭐, 여기서 나가게 해 달라고?”
드래곤들의 말에 코웃음을 치는 장로.
어째서인지 몰라도, 장로 드래곤은 딱히 이곳에서 나갈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네놈들이 여기까지 오기 위해 일으킨 소동을 생각하면, 지금이라면 여길 나갈 수도 있겠지.”
“그러니까, 장로님……!”
“그래서. 뭐. 여길 나가서 어찌하려고?”
“당연히, 고향으로 돌아가야죠!”
“고향? 이 녀석들아.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면 여기에서 살아야지, 고향은 무슨.”
“비록 제가 여기서 태어났다고 해도! 고향은 고향 아닙니까?”
“애초에 우리 고향은 우주의 먼지 속인데, 고향은 무슨. 여기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그냥 너희들도 돌아가라.”
장로는 손을 휘휘 저으며 드래곤들에게 축객령을 내렸고.
드래곤들은 으득 이를 악물며 장로에게 따져 물었다.
“짐승처럼 사육되는 삶이 더 낫다는 겁니까, 장로님?”
“그래. 탈출하지 않고, 얌전히 가만히 있기만 해도 알아서 다 챙겨 주는데, 뭐 하러 탈출을 해?”
“동족이, 동족들이 짐승처럼 도축을 당하는데도요? 그래도……!”
드래곤들은 끝까지 장로를 설득하려 애썼지만, 장로는 버럭 화를 내며 진실을 밝히는 것으로 드래곤들의 입을 다물게 했다.
“탈출해 봤자, 고향으로 돌아갈 방법이 없는데 탈출은 무슨 탈출! 도축당하는 동족들은 최소한의 희생이라고 생각해!”
“고향으로 돌아갈 방법이 없다니요……?”
허어.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탈출해 봤자 드래곤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방법이 없다니?
“나라고 처음부터 포기한 건 아니다. 이놈들아! 하지만 고향의 위치를 모르는데 어떻게 돌아가냐고!”
“고, 고향의 위치를 모른다고요? 그럴, 그럴 리가요! 저도 아는 걸 장로님이 모르실 리가…….”
“그래. 우리들의 고향은 드래고니아라는 행성이지. 고향으로 돌아가려면 그딴 누구든지 말할 수 있는 정보가 필요한 게 아냐. 이 우주에서 드래고니아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알리는 좌표! 그게 필요하단 말이다!”
“그, 그건…….”
“수백, 수천 년 동안 계산만을 해 왔다. 하지만 고향이 어딘지 알아낼 수 없었어! 왜? 이곳이 어딘지도 모르는데 다른 곳이 어딘지를 어떻게 알아내겠냐고! 수천 년 동안 계산해서 알아낸 건, 이곳이 어딘지. 그것 하나뿐이야!”
버럭.
장로 드래곤이 그렇게 소리치자, 격해진 감정 때문에 마력 조작이 흔들린 걸까?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벽처럼 보이던 곳이 희미하게 변해 사라지고.
그 너머로 한가득 쌓인 종이의 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닥에 널브러진 종이들엔 나로서는 이해조차 할 수 없는 수식들이 잔뜩 써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드래곤들의 표정이 허탈하게 변해 가고, 장로는 한숨을 내쉬며 드래곤들에게 말했다.
“그 녀석들이 말해 주지 않더냐?”
“그냥…… 뭐, 자기들도 그런 때가 있었다며 웃어넘기더라고요.”
어쩐지.
드래곤 100명을 모으기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장로를 찾아 헤맨 이유가 여기 있었구나.
다른 드래곤들은 탈출해 봤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거였어.
그렇게 드래곤들 사이에 우울한 기류가 깔리고, 드래곤은 조용히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럼. 그럼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으흠. 저기……?”
“그 빌어먹을 아저씨들처럼 도축되는 날만을 기다리라는 건가요? 그런 건……!”
“저기요? 제 말 좀 들어 보실래요?”
드래곤들이 우울한 표정으로 서로 목소리를 높이고, 나는 조심스럽게 드래곤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제야 장로의 시선이 내게 향하고, 나는 조심스럽게 한 가지 제안을 건넸다.
“그, 여길 탈출해 봤자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는 이야기 맞죠, 지금?”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는 건, 제가 해결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뭐?”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보이저가 해결해 줄 수 있는 거지만 말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장로에게 보이저와 골든 레코드에 실린 정보에 대해서 전했고, 장로는 놀라워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 그 보이저라는 탐사선을 분해해서 항적을 확인하고, 그 정보를 골든 레코드인지 뭔지 하는 거에 실린 정보와 합치면 지구까지 이동할 수는 있겠지.”
“그렇죠?”
확언을 얻었으니, 이제 남은 건 설득이다.
나는 방긋 웃으며 드래곤들을 돌아봤고, 드래곤과 드레이크는 입술을 깨물며 고민에 빠졌다.
“그렇지만 드래고니아로 가는 게 아니면 의미가…….”
“일단 여길 탈출하는 게 먼저야. 지구에서 드래고니아의 위치를 찾아내서 이동할 수도 있잖아?”
그렇지만 역시 일단 여길 빠져나가는 게 더 급했기에 드래곤들은 드래고니아 대신 지구로 향하는 데 별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장로는 한숨을 내쉬며 드래곤들에게 물었다.
“드래곤이 아무리 강인한 육체를 가지고 있어도, 바깥의 삶은 이 안처럼 위험이 없지 않아. 매년 동족을 제물로 바친다고 해도, 우주를 떠돌던 시절보다 동족의 수가 는 것도 사실이야. 굳이 여길 떠나서 어딘지도 모를 행성으로 가야겠니?”
“그래도, 가축으로 사는 건 싫어요.”
“맞아요. 힘든 건 이미 각오했어요.”
드래곤들의 각오를 들은 장로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더니 혀를 차며 끌끌거렸다.
“집을 떠나면 고생한다는 간단한 사실을 왜 깨닫지 못할까…….”
장로에겐 이미 이곳이 집이구나.
탈출할 수 없다는 생각에 포기했든, 이곳의 안락함에 포기했든 말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내게는 장로의 선택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장로의 모습은 방 안에서 썩어 가던 그때의 나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드래곤들의 결심은 보기 좋은 광경이긴 하지만, 그래도 확언받을 건 받아야 하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드래곤들에게 마지막 제안을 건넸다.
“그, 지구로 향하는 것에 대해서 말인데요.”
“응?”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이걸 들어주시지 않으면, 골든 레코드는 제공하지 않을 거예요.”
“무슨 부탁인데?”
“혹시, 지구로 가게 된다면. 아직 인류가 지구에 남아 있다면…… 인류가 다시 번성하는 걸 도와주세요. 드래곤은 수명이 길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하지 못했던 일을 나는 드래곤들에게 부탁했고.
드래곤들은 고개를 기꺼이 끄덕이며 내 부탁을 수락했다.
“물론이지. 그 정도는 셋방살이하는 입장에서 무조건 들어줘야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장로는 한숨을 내쉬며 드래곤들에게 말했다.
“그래. 그 골든 레코드인지 하는 거 챙겨서 밖으로 나와라. 늙은이가 젊은이들 앞길은 막지 말아야지…….”
장로의 말을 들은 드래곤들은 들뜬 기색으로 골든 레코드와 보이저를 챙기려 통로 안으로 사라졌고.
나 또한 드래곤들을 뒤따라가려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런 내 뒷모습을 바라보던 장로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자네는 어째 저 녀석들을 따라갈 생각이 없어 보이네?”
“……그래요?”
그러게.
어째서일까?
드디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데, 나는 왜 이렇게 가슴 한구석이 찝찝한 걸까?
집으로 돌아간다.
집으로?
나의 진짜 집은 어디지?
당연히 이곳은 아니다.
그렇다면 지구?
글쎄, 지구의 땅을 밟아 본 적도 없는 내 집이 지구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의 집은.
그 어항 속인 걸까?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어째서 내가 그렇게 찝찝한 기분을 품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아직, 아직 제대로 결정을 못 해서 그런 것 같네요.”
그래.
나는 아직까지 나의 진짜 집이 어딘지 제대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시간만을 썩히던 그 방의 나의 집인지.
억지로 끌려왔어도, 수많은 고통을 겪었어도, 살아간다는 기분을 느낀 그 어항이 나의 집인지.
나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문득, 어항에서 끌려 나오기 전 나에게 위로를 요구했던 그 거대한 손의 주인을 떠올렸다.
자유를 원한다면 당연히 드래곤들을 따라가는 게 맞는데.
나는 어째서인지 그 손의 주인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마지막으로 내가 건넨 위로가 잘 전달되었을까?
아마도 내가 확실히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건, 다시 그 손의 주인을 만나고 나서일 것 같다.
그리고 아마, 곧 다시 주인을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어째서인지 모르겠다.
다만, 이미 내 근처에 그녀가 와 있다는 느낌만이 들 뿐이었다.
그런 생각을 끝마치고 아리스와 함께 드래곤들을 뒤따라 시설을 나섰고.
이윽고, 잔뜩 지친 듯 여기저기 상처를 입은 상태의 에포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 에포나의 모습을 배경 삼아 장로는 골든 레코드에 적힌 내용과 보이저의 항적을 분석하며 지구의 위치를 계산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로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준비가 끝났음을 알려 왔다.
“다 됐다. 저 녀석이 워낙 차원 방벽에 상처를 내 놔서 뚫기 편하네.”
“저 녀석이 아니라 에포나예요.”
“그래, 에포나. 그래.”
장로는 투덜거리면서 바닥에 기묘한 외형의 마법진으로 보이는 것을 그렸고.
장로의 마력이 서서히 마법진에 채워져 갔다.
다른 행성으로 이동하는 마법을 발동시키는 건 장로에게도 버거운 일인지 마력이 차는 속도는 느렸지만, 확실히 조금씩 차올랐고.
장로의 마력을 감지한 것인지 에포나의 촉수가 이쪽으로 살짝 꿈틀거렸고.
마지막 힘을 쥐어짜듯 에포나는 더더욱 난동을 부리며 주위의 시선을 자신에게 끌어모았다.
“마법진 밖으로 나가면 마법에 포함이 안 되니까, 그렇게 알고들 있어!”
장로가 마지막으로 주의 사항을 말하고, 마법진의 마력이 4분의 3쯤 차올랐을 무렵.
갑작스럽게 에포나의 촉수가 거세게 날뛰며 누군가를 막으려는 듯 지형에 가려져 안 보이는 곳으로 쏘아졌고.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내 눈에 낯익은 무언가가 들어왔다.
무척이나 낯익은, 청록색의 촉수.
그리고 활자로 이루어진 몸과 태양처럼 밝게 빛나는 눈동자.
그리고, 서로의 눈동자가 마주쳤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고.
맨 처음 저 눈동자를 봤을 때와는 달리, 공포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기묘한 동질감만이 느껴졌을 뿐이었다.
잠시간 서로가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고.
거대한 활자로 이루어진 거인이 지면을 박차고 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에포나의 촉수는 그런 거인을 막아 내려 했지만.
활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더니, 에포나의 수비를 뚫고 내 코앞에 다시 형체를 이루었다.
그리고 거인은 주위의 다른 건 모두 무시하며 내게 손을 뻗었고.
그 여파로 드래곤들과 아리스는 머릿속으로 흘러들어 오는 정보를 감당하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나는.
내게 무언가를 전하고자 하는 거인의 의지를 느끼며 가만히 손을 뻗었고.
그렇게, 나와 거인의 손이 맞닿았다.
* * *
차원 파괴자는 잉간의 감정을 클라인에게 전달하는 게 효과적이라고 학습했는지, 싸움 내내 잉간이가 느꼈던 감정을 클라인의 몸에 쏟아부었다.
처음으로 낯선 곳에 떨어져서 느꼈던 혼란과 두려움.
자신의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자꾸만 발생하는 것에 따른 공포감.
거인의 손에 붙잡혔을 때 느낀 무력감과 목숨의 위기.
클라인이 잉간이를 괴롭게 했던 그 모든 것들.
잉간이의 부정적인 감정을 느낄 때마다 클라인은 점차 자신의 행동이 정말 옳은 것인지 확신이 가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잉간이를 방생하는 게 맞지 않을까?
저 앞에서 드래곤들과 함께 떠날 준비를 하는 잉간이를 놔두는 게 맞지 않을까?
잉간이를 괴롭히는 걸 멈추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끊임없이 클라인의 머리를 맴돌았고, 그런 잡생각을 떨쳐 내고자 클라인이 잠시 집중을 흐트러뜨릴 때마다 차원 파괴자의 촉수가 클라인을 공격해 왔다.
그리 커다란 상처는 입지 않았지만, 자꾸만 클라인의 몸에 정보 오염이 축적되어 가고.
클라인이 우물쭈물하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던 그때.
클라인과 잉간이의 눈이 마주쳤다.
클라인이 잉간이의 표정을 읽어 낼 수는 없었지만.
단지 잉간이의 얼굴을 바라본 것만으로 클라인은 각오를 다질 수 있었다.
자신은 지금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잉간이와 교감을 나눠야 한다.
설령 대화를 할 수 없더라도.
설령 잉간이가 클라인을 거부하더라도.
클라인은 잉간이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
지금까지 잉간이를 고통스럽게 한 것에 대해서.
지금까지 잉간이와 교감을 하려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지금까지 클라인이, 용기를 내지 못한 것에 대해서.
클라인은 사과해야만 한다.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생활비로 아껴 둔 마력까지 꺼내, 단거리 텔레포트를 사용했고.
차원 파괴자가 다급하게 클라인을 막아 세우려 했지만.
클라인은 차원 파괴자의 촉수가 클라인의 다리에 파고드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잉간이에게 손을 뻗었다.
잉간이가 손을 잡으려 하지 않는다면, 닿지 않을 거리에서.
그리고 잉간이는.
살포시 클라인의 손에 자신의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클라인과 잉간이는 서로의 감정을 나누기 시작했다.
68화 오늘부터 더 이상 애완 인간을 키우지 않겠습니다.
수많은 정보가 내게 쏟아져 내린다.
대부분은 아직 내가 접해 보지 못한 생소한 정보들이지만, 몇몇 정보들은 내게도 익숙한 것들이었다.
사람의 체온보다는 조금 낮아 살짝 차갑게 느껴지는 체온.
불안한 것인지 바들바들 떨리는 것이 느껴지는 촉수와 손가락의 진동.
그리고 잔뜩 느껴지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
불안, 초조, 자책, 분노, 체념…….
그렇지만 그 모든 감정들은 남을 향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찌르기 위해 벼려진 것들이었다.
역시, 자신의 위로는 전해지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전해졌음에도 이런 상태인 걸까?
둘 중 무엇이 됐든 무척이나 아쉽다는 건 확실하다.
이 사람의 마음과 목소리는 내게 계속해서 전달되는데, 어째서 나의 마음과 목소리는 닿지 않는 걸까?
“:-(”
목소리가, 들려온다.
한때는 괴성으로, 울음소리로 여겼던 소리가 목소리로 여겨진다.
뭐라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내게 뭘 전달하고 싶은지는 알겠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속삭이는데 알아듣지 못할 리가.
거대한 손의 주인은 내게 끊임없이 사과하고 있었다.
내게 미안하다는 감정이 전달된 것은 아니다.
내가 주인의 언어를 이해한 것도 아니다.
단지, 그녀가 내게 보여 주는 모습이 나와 무척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저지른 원죄를 사죄하며 방 안에서 끊임없이 중얼거리던 때의 내 모습과.
“:-(”
이렇게 계속해서 나에게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그녀의 모습이 무척이나 닮아 보였다.
그녀가 중얼거리는 것이 내게 전하는 사과라는 것을 깨닫자, 지금껏 이해하지 못하던 정보들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그녀가 사과할 때 어떤 목소리를 내는지 알게 되었고.
나는 그녀가 사과할 때 어떤 고밀도의 정보들을 몸 밖으로 내보내는지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조금이나마 그녀를 더 이해할 수 있었다.
촉수 끝자락과 손가락만 보이던 그녀의 몸이, 이젠 팔 전체까지 보이게 되었다.
지금까지 내가 그녀의 촉수라고 생각했던 것 일부는 그녀의 손가락이었고.
그녀의 손가락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그녀의 촉수의 끝자락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내게 얼마나 진심으로 사과를 해 오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지금 울고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모르는 아이처럼 펑펑 울면서 내게 사과를 전하고 있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녀 또한 내가 처음에 고통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거구나.
그녀는 나에 대해 모르고 있지 않았고, 그녀가 나를 알고 있기에 나 또한 그녀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더는 그녀가 우는 모습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웃을 때의 모습이, 그녀가 우는 것보다 더욱 좋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몸 밖으로 잡다한 정보들을 배출했고, 그 정보들이 나를 압박했기 때문이었다.
오로지 순수한 선의에서 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나는 그녀의 눈물을 멈추고 싶었고.
나는 조용히 그녀가 내 위로를 들을 수 있게끔 힘껏 그녀의 손을 붙잡고 나의 감정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서웠던 건 사실이지만, 지금은 오히려 고맙다고.
그 빌어먹을 무덤과 같은 방 안에서 나를 꺼내 줘서 오히려 고맙다고.
언제나 고통만 느꼈던 게 아니라 즐거운 순간들도 많았다고.
나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그녀에게 내 마음을 전달했고.
언제나 태양처럼 밝게 빛나는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오늘의 날씨는 조금 비가 올 기미가 보이긴 했어도, 여전히 맑고 화창했다.
그리고 약간씩 남아 있던 먹구름은 완전히 개어서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
방긋.
그녀가 웃음을 터트린 것 같았다.
물론, 아직 그녀의 얼굴과 표정이 자아내는 다양한 정보를 내가 이해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말이다.
“잉간! 충전 다 됐으니까, 시간은 그만 끌고 이리로 와!”
그리고.
내게 선택의 시간이 찾아왔다.
지구와 어항.
둘 중 어느 곳이 내 진짜 집인지를 선택해야 하는 시간.
지구에 간다면?
그래, 예전과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겠지.
용기를 내서 직접 대지를 밟고, 이전에 저질렀던 잘못을 속죄할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거대한 손의 주인을 두고 지구로 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내 위로가 그녀에게 전달되어 그녀가 활짝 웃었다고 해도.
그녀가 너무 휘청휘청 아슬아슬해 보여서.
방 안에 틀어박혀 있던 나처럼 보여서.
적어도, 그녀가 나를 방 밖으로 꺼내 주었으니까.
나 또한 그녀를 방 밖으로 꺼내 주는 게 맞지 않을까?
물론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녀를 응원해 주는 단순한 일뿐이지만.
그래도, 그런 단순한 일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기에.
나는 도저히 그녀를 두고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고.
장로는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결정을 내린 것 같군.”
“그렇죠. 뭐.”
장로는 내게 더 이상의 질문을 던지지 않고 마법진을 작동시켰고.
“잉간!”
“여기보단 지구가 더 행복할 거야. 아리스.”
아리스는 다급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내게 날개를 뻗었지만.
나는 미안하다는 듯 아리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고, 아리스는 그대로 마법진에 휩쓸려 차원 너머로 사라졌다.
그래.
아리스에겐 이게 훨씬 더 나을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고, 그녀는 머뭇거리며 내게 손을 다시 내밀었다.
내가 피식 웃음 지으며 그녀의 손 위로 올라선 순간.
에포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게 네 선택이라면, 믿을게.’
순간 누군가가 내 귓가에 그렇게 속삭인 듯한 기분이 들었고.
그와 함께 에포나의 촉수가 다시 한 번 나에게 쏘아졌다.
“윽…….”
에포나의 촉수가 내 살갗을 찢고, 내 몸 안에 무언가를 남긴다.
“>:-(”
그와 함께 손의 주인이 잔뜩 화난 듯한 목소리를 울리고.
에포나는 기분 좋은 듯이 나를 바라보며 살랑거리다, 갑자기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내가 알던 에포나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는 난폭한 움직임.
도저히 내가 알던 에포나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다.
아니.
실제로도 저건 내가 알던 에포나가 아닌 게 맞겠지.
뜨거운 피를 통해 내 안으로 들어온 무언가를 느끼며 나는 에포나의 의도대로 그렇게 생각을 바꿨다.
나의 주인이 잔뜩 고함을 지르며 정체불명의 촉수에게 무언가를 하려던 찰나.
“:-0”
손의 주인마저 예상하지 못한 사태가 벌어졌다.
정체불명의 촉수가 허공으로 녹아들듯 사라지며, 아무것도 없던 것이 되어 버린 것이다.
어째서인지 주인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바라보며 입을 떡 벌리고 있었고, 내 배에 났던 상처는 어느샌가 아물었다.
이윽고 주인은 내 시선이 닿지 않는 하늘을 바라보며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고.
가만히 주인의 손에 누워서 휴식을 취하려던 찰나.
“응……?”
파직, 파직.
내 근처의 허공이 포르르 떨리더니.
“잉간!”
허공에서 아리스가 내 이름을 외치며 차원을 찢고 내게 뛰어들었다.
“아, 아리스? 여긴 어떻게 다시…….”
“지구가 더 좋기는 무슨! 나는 잉간이 없으면 싫어. 잉간이 여기 남으면 나도 여기 남을 거야.”
아리스는 눈물을 잔뜩 머금은 눈으로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자신의 다리로 내 몸을 꽉 옥죄었다.
나는 살며시 아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조용히 속삭였다.
“너는 자유롭게 사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해서…….”
“자유든 뭐든, 나는 잉간 곁이 좋아.”
“그래…….”
나는 그렇게 내 품 안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아리스를 다독였고.
모든 일이 다 끝났다는 생각이 들며 긴장이 풀어진 걸까?
나는 조용히 거대한 손 위에서 아리스와 함께 잠에 빠져들었다.
악몽은 꾸지 않았다.
* * *
“미안해. 미안해. 정말 미안해.”
막상 다시 잉간이와 마주하게 됐지만, 클라인은 어떻게 잉간이에게 사과를 전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잘하지 못하는데 사람이 아닌 인간과 사과를 원만히 할 수 있겠는가?
그 때문에 클라인은 자신이 아는 유일한 방법을 사과의 방법으로 택했다.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감정을 전부 몸 밖으로 토해 낸 것이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아는 단어가 이 두 개밖에 되지 않는 것처럼 클라인은 이 두 단어만을 반복하며 잉간이에게 사과했다.
만약 이렇게까지 했는데 잉간이와 교감을 실패하면 어쩌지?
잉간이가 내 사과를 받아들여 주지 않으면 어쩌지?
만약 잉간이가 내 사과를 받아들여 주지 않으면 나는 잉간이에게 어떻게 해야 하지?
그냥, 그냥 잉간이를 보내 줘야 하나?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머릿속에서 뛰어다니다 클라인의 목소리에 섞여 그녀의 몸 밖으로 흘러넘치고.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그렇게 클라인이 계속해서 사과를 하는 와중에도 잉간이는 가만히 클라인의 손가락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고.
그것은 클라인에게 자신의 사과가 전해지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클라인의 눈물과 미안하다는 단어의 양을 더욱 늘렸고.
그렇게 클라인이 서서히 공황 상태에 빠지려고 할 때쯤.
“어?”
살포시.
잉간이가 클라인의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천천히, 클라인의 감정과 잉간이의 감정이 서로 뒤섞이며 서로에게 전달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클라인이 잉간이와 교감하며 느꼈던 잉간이의 감정은 오직 부정적인 감정이었다.
하지만.
오늘 클라인이 느끼는 잉간이의 감정은,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라.
그녀를 걱정하는 마음이었다.
“하하, 하…….”
잉간이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클라인의 손가락을 꼭 껴안으며 계속해서 클라인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나는 괜찮다고.
덕분에 고마웠다고.
너무 자책하지 말라고.
클라인은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지금까지 잉간이에게 보내왔던 감정은 잘 전달되고 있었다는 것을.
그래, 원래 애완 생물들이 다른 사람보다 더 주인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 아닌가?
자신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고 그렇게 말하는 듯한 잉간이의 모습에 어느새 클라인의 눈물은 멈췄고.
잉간이가 자신을 걱정해 줬다는 사실에 방긋 미소 지었다.
바로 그 순간.
드래곤들이 준비하던 마법진이 완성됐다는 사실이 클라인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클라인은 잉간이를 가지 못하게 억누르고자 하는 충동이 들었지만.
그 충동을 이겨 내고 잉간이를 억압하지 않고 자유롭게 놔뒀다.
잉간이가 자신을 떠나고 싶어 한다면, 그냥 떠날 수 있도록.
그렇게 생각을 하며 잉간이를 건드리지 않고 있긴 했어도, 자꾸만 마법진 쪽을 바라보는 잉간이 때문에 클라인은 애간장이 탔다.
만약 여기서 잉간이가 클라인을 떠나는 선택을 한다면, 아마 클라인의 마음엔 크나큰 상처가 새겨지겠지.
부디 아니길.
지금이라도 잉간이를 붙잡아야 하나?
그런 속삭임이 클라인의 귓가에 들려올 무렵, 마법진이 작동되어 사라지고.
잉간이는 얌전히 클라인의 손바닥 위로 몸을 올려놨다.
“흐으……!”
그 너무나 치명적인 모습에 클라인이 자신의 심장을 쥐어 잡았고.
잉간이의 귀여움에 클라인의 모든 정신이 팔린 사이.
“어?”
잊고 있었던, 차원 파괴자의 촉수가 잉간이에게 날아들었다.
잉간이가 차원 파괴자의 숙주라는 말을 들어서 차원 파괴자가 잉간이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방심하고 있던 걸까?
클라인은 제때 차원 파괴자의 공격을 막아 내지 못했고.
허공으로 잉간이의 핏방울이 휘날렸다.
“어, 아……?”
클라인은 곧바로 촉수를 뻗어 더 이상의 공격을 잉간이에게서 차단했고.
서둘러 잉간이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촉수가 그리 깊숙한 곳까지 찌르진 못해서 얕게 상처 입은 정도다.
으득.
마력 잔고를 다 사용하긴 싫어서 숨통까지 끊진 않았는데.
감히 잉간이를 건드려?
클라인의 몸에서 분노의 정보들이 터져 나오며 주위를 오염시켰고.
그런 클라인의 분노를 비웃듯 차원 파괴자는 더욱 격하게 흔들렸다.
클라인이 정말로 마력 잔고를 모조리 소모할 기세로 마력을 모으며 차원 파괴자의 숨통을 끊어 버리려던 순간.
“그 정도면 시험은 통과예요. 클라인 양.”
“어?”
클라인이 마력을 쏟아부으려고 했던 차원 파괴자의 존재 자체가 현실에서 지워져 버렸다.
저렇게 커다란 차원 파괴자의 존재를 소멸시키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마력이 필요한 거지?
역시, 부자는 뭐가 달라도 다른 건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멍하니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리만 협회장을 바라봤다.
“이걸로 대충 상황은 다 끝난 것 같네요. 어머, 그게 그렇게 자랑하던 지구산 인간인가요? 귀엽네요.”
“아, 네…….”
리만은 클라인의 손 위에 올려진 지구산 인간을 단숨에 치료하고, 방긋 웃으며 클라인에게 말했다.
“무척이나 감정적이고, 미숙하고, 그리 멋지다고는 할 수 없는 교감이었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그런 것조차 하질 못한다니까요?”
“그, 그래요?”
“그래요. 그나저나 클라인 양. 제가 꺼낸 이야기는 생각해 봤나요?”
“자, 잘 모르겠어요. 제, 제가. 저 따위가 할 수 있는 일일까요?”
클라인은 리만의 이야기에 자신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같이 나이도 어리고, 쥬튜버에, 방구석 백수를 도대체 뭘 믿고 협회의 직원으로 채용한다는 거지?
클라인은 불안한 미소를 띠며 그렇게 생각했고, 리만은 조용히 클라인에게 또 하나의 문제를 던졌다.
“클라인 양. 브리더 협회가 탄생한 목적이 뭔지 아시나요?”
“브, 브리더 협회요? 대폭발로 줄어든 우주의 생명체를 늘리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들었어요. 지금은 우주의 생명체를 보호하는 게 주된 목적이고…….”
“맞아요. 정확해요. 처음 의도는 아주 간단했어요. 차원 생물들을 잔뜩 번식시켜서, 우주에 방생하자! 그런데 말이에요, 시간이 지났더니 꽤나 재밌게 목적이 바뀌어 버린 거 있죠?”
“어떻게……?”
“브리더 협회가 너무 일을 잘한 나머지, 더 이상 우주에 방생을 하면 안 될 정도로 생물체들이 늘어난 거예요. 당연히 협회의 목표는 수정됐고, 차원 생물들을 잔뜩 번식시키는 것까지만 목표가 됐죠.”
“네…… 거기까진 공부해서 알고 있어요.”
왜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다시금 반복하지?
클라인은 잠깐 그런 의문을 가졌고, 리만은 한숨을 내쉬며 클라인의 의문을 해소해 줬다.
“나는요. 지금의 협회의 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아요.”
“네?”
“생명을 번식시킨다는 것에만 집착해서, 다른 데는 신경을 쓰질 않죠. 이번에 돌아가서 베이컨을 징계 위원회에 회부할 생각이긴 하지만, 사실 기존의 협회의 기준으로 보면 베이컨은 그리 잘못한 게 없어요.”
그 말이 맞다.
쥬스농장이 잘못한 것은, 잉간이의 관리에 실패해서 차원 파괴자를 깨운 것뿐이니까.
“클라인 양. 저는 지금의 브리더 협회를 바꿀 생각이에요. 베이컨은 뭐, 안타깝지만 그 신호탄이 되어 주는 수밖에 없죠.”
“네? 협회를 바꾼다니 어떻게…….”
“간단히 말해서. 차원 생물들을 사육하는 게 아니라, 반려 생물로 맞이하길 원하는 거예요.”
“반려 생물…….”
반려 생물이라면, 울타르나 탄탈로스 같은 생물을 뜻하는 단어가 아니던가?
사람과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생물들을 지칭하는 거로 아는데.
“쉽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요. 당연히 차근차근 진행해야 하는 일이죠. 그래서 클라인 양의 도움이 필요한 거예요.”
“제가 무슨 도움을 드릴 수 있다고…….”
“협회 내부의 정쟁을 도와 달라는 게 아니에요. 제가 원하는 건, 일반 대중들의 시선을 바꾸는 거랍니다?”
“대중들의 시선을 바꿔요?”
“클라인 양은 지금처럼 영상을 만들기만 하면 된답니다. 인간형 생물 같은 비주류 생물들도 반려 생물로 맞이할 수 있다는 인식을 대중들에게 심어 주면 된답니다. 어때요? 클라인 양. 저를 도와주시겠어요?”
“저는, 저는…….”
클라인은 자신 없다는 듯 고개를 내렸지만, 조용히 시선을 자신의 손 위에서 잠자고 있는 잉간과 어느새 날아온 하르피아에게 옮겼다.
클라인은 조용히 잉간이를 바라보며 각오를 다졌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리만의 제안을 수락했다.
“네. 한번 해 볼게요.”
대등한 관계.
서로 친구 같은 관계.
그것이 클라인이 잉간이와 함께 형성해 나가고 싶은 관계였으니까.
그리고 그걸 위해서라면, 호칭부터 바꿔 불러야 하겠지.
앞으로는 애완 인간이 아니라.
반려 인간으로.
69화 *공지* 잉간이 다시 받아 왔어요. 그리고 앞으로 쥬튜브 활동에 대해서 이야기할 게 있어요.
눈을 뜨니, 낯설진 않은 공간이었다.
이젠 살짝 그리워지기까지 한 회색의 안개로 가득 찬 공간.
나는 그런 공간에 놓인 푹신한 침대에서 눈을 떴고.
“으응…….”
내 곁에서 아리스가 곤히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나는 아리스가 깨어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일어나 주위를 살피며 에포나를 찾았다.
하지만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에포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랜만에 악몽을 꾸지 않아서 개운하긴 했지만, 오히려 나는 그 때문에 더 불안감을 느꼈다.
에포나, 여기 있는 것 맞지?
나는 살포시 입 밖으로 그런 목소리를 꺼내 봤지만, 당연하게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
그렇게나 날뛰었으니 조금 휴식이 필요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불안에 떠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잠시 기다리면 다시 활기찬 모습으로 왕왕거리며 뛰어다니겠지.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침대에서 곤히 자고 있던 아리스가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어났다.
“으응. 잉간?”
“좀 더 자지 그랬어. 엄청 피곤해 보이던데.”
“으하암. 아냐. 이젠 하나도 안 피곤해.”
하품을 하며 그렇게 말하는 모습에 퍽 설득력이 넘쳤지만, 나는 굳이 지적하지 않고 웃으며 아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분 좋다는 듯 내 손길을 즐기며 눈을 감고 있던 아리스는, 슬며시 내 이름을 불렀다.
“잉간.”
“응?”
“나, 잉간의 고향에 다녀왔어.”
“그래?”
“그러니까. 그…… 잉간이 원하면 고향이 어떤지 알려 줄 수도 있고. 진짜 잘하면…….”
“괜찮아. 굳이 알려 주지 않아도 돼.”
“정말로?”
“응. 정말로.”
“정말 궁금하지 않아?”
“뭐, 인간이 얼마나 살아남았을지는 궁금하긴 한데. 그래도 뭐, 알아서 잘들 하겠지 싶어서.”
인류는 언제나 그렇게 생존해 왔으니까.
멸망의 위기에서 언제나 외줄 타기를 하면서 말이다.
그래도 뭐, 아예 궁금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 되겠지.
“그, 잉간은 어엄청 큰 폭탄? 이 터지면서 모든 게 사라졌다고 했잖아?”
“응. 그랬었지.”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도 않던데? 막, 내가 살던 곳처럼 나무들도 많고 풀도 엄청 많았어!”
“그래?”
“응. 그래도 바다는 못 봤어. 지구에 가자마자 바로 잉간한테 돌아오느라…….”
그나저나 자연이 꽤 회복된 상태라.
이건 좋은 소식이기도, 나쁜 소식이기도 하다.
인간이 아예 없어져서 자연이 살아난 것일 수도, 아니면 자연이 살아나서 인간이 번성할 환경이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
그렇게 아리스와 대화를 나누던 사이, 사방의 안개들의 색이 꾸물꾸물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아리스는 그 모습이 조금 두려웠는지 내 옷소매를 붙잡았다.
나는 그런 아리스를 토닥이며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마. 색은 저래도, 딱히 위험한 건 아니니까.”
“진짜……?”
“응. 진짜로.”
냉장고 안에 든 젤리를 꺼내 아리스와 함께 먹으며 나는 시간을 때웠고.
얼마간의 기다림 끝에 마침내 붉은 안개가 물러나며 다시 원래의 회색 안개가 등장했고.
회색 안개들은 곧바로 나와 아리스 주위로 응집되기 시작했다.
이윽고, 회색 안개 때문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게 되자.
안개들이 흩어지며 나와 아리스를 낯익은 호수 앞에 내려놨고.
아리스는 입을 벌린 채로 주위를 연신 구경했다.
“여기가 잉간의 집이야?”
“응, 여기가 내 집이야.”
그래.
여기가 이제 나의 집이다.
아리스는 호수를 보는 것도 처음인지 눈을 반짝거리며 호수로 포로롱 날아 들어갔다.
“잉간, 이게 바다라는 거야? 물이 엄청 많은데?”
“아니, 그건 바다가 아니라 호수라는 거야.”
“호수? 둘은 뭐가 다른데?”
어린아이의 왕성한 호기심은 내가 다 따라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고.
나는 슬며시 아리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아리스, 물장난은 거기까지 하고. 앞으로 생활할 둥지를 소개해 줄게.”
“둥지? 진짜?”
“그래. 그러니까 빨리 나오렴.”
호수에 뛰어들어 물장난을 치던 아리스는 내 말을 듣자 곧바로 하늘로 날아올라 깃털에 젖은 물들을 털어 냈고.
그대로 내 곁에 착지하며 내 품 안으로 쏙 파고 들어왔다.
“높은 곳에 지어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꽤 안락하고 안전한 곳이야.”
“그래? 진짜로? 막 거대한 뱀이 나타나는 일이 없어?”
“응. 아마도? 그리고, 둥지에는 우리 말고도 다른 사람이 한 명 더 있을 거야.”
“다른 사람? 에, 그건 싫은데.”
아리스는 둥지에 다른 사람이 있다고 하자 불룩 입술을 내밀었고.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블랑카와 아리스가 친해지려면 좀 시간이 필요할 것처럼 보이네.
블랑카가 쉽게 다른 녀석하고 친해지는 스타일은 아니니까 말이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리스에게 블랑카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리랑 함께 지낼 사람은 블랑카라고, 하반신이 말처럼 생긴 사람이야. 무척이나 아름다운 금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어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거야.”
“금색의 머리카락……. 잉간은 이런 칙칙한 색보단 금색이 더 좋아?”
“응? 아니. 나는 갈색 깃털도 충분히 이쁘다고 생각해.”
“흐음, 그래?”
아리스는 무언가를 재 보는 듯 내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엄청 강해. 산만 한 크기의 코끼리를 혼자서 단숨에 잡을 정도야.”
“그건 나도 할 수 있어!”
“그래? 아리스도 참 강하네.”
“히히.”
“아무튼. 블랑카는 참 강했어.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말이야. 살짝 여린 부분이 있긴 했어도, 블랑카의 강함에 참 많이 도움받았거든.”
그렇게 아리스와 블랑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내가 기억하고 있던 길을 따라 걷던 와중, 무언가 이상한 것이 눈앞에 들어왔다.
마치 원시 부족이 만드는 토템처럼 여러 짐승들의 가죽과 뼈를 한데 엮어 만든 기괴한 장식물이었다.
이건, 블랑카가 직접 만든 건가?
의아해하며 기괴한 장식물을 더 자세히 살펴보니, 블랑카의 머리카락으로 실을 대체했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더 자세히 살펴보니, 전에 내가 바위산에서 만났던 펭귄 모습의 생물체들의 머리뼈가 주재료로 사용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으엑. 징그러워…….”
정체불명의 토템을 보며 나는 묘한 위화감에 빠져들었다.
블랑카가 어째서 이런 걸 만들었지?
설마, 이걸 만든 게 블랑카가 아닌 건가?
나는 의아해하면서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예전과는 꽤나 분위기가 달라진 숲을 마주할 수 있었다.
사방에 핏자국이 남아 있어서 마치 미치광이가 사는 숲속 같은 느낌이 든다.
마치 누군가에게 과시하듯 잔인하게 죽어 버린 펭귄들의 모습이 여기저기에서 엿보이고.
마침내 내가 그리운 나의 집에 도착하자, 기묘한 구조물들이 잔뜩 만들어져 있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일종의 제단으로 보이는 구조물들이 잔뜩 들어서 있었고.
집 안은 온갖 음식물 찌꺼기와 핏물이 가득해서 공포의 집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여기가 정말 내가 알던 그곳이 맞나?
아리스 또한 이곳의 분위기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지 내 팔에 바짝 달라붙으며 내게 속삭였다.
“잉간. 여기 별로야…….”
“어…… 나도 여기가 왜 이렇게 변했는지 모르겠네.”
그나저나 집 안을 뒤져도 블랑카가 나타나질 않는데, 사냥을 하러 자리를 비운 걸까?
그러고 보니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거지?
체감상으로는 한 일주일? 그 정도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내가 전에 심어 놨던 작물들은 어떻게 됐으려나?
그렇게 생각하며 전에 달맞이풀을 심어 놨던 곳으로 향하자.
“오우야…….”
밭 수준이 아니라 수풀 수준으로 자라난 달맞이풀의 무리를 보며 절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보아하니 몇 번인가 채취한 흔적도 있는 걸 봐선 블랑카가 여기 있는 건 맞는데.
그렇다면 다른 풀들은 어떻게 됐지?
내가 의아해하며 풀들을 심어 놨던 자리로 향하자.
누군가가 열심히 공들여서 만든 밭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조잡한 울타리로 삐뚤빼뚤 그려진 경계 안에 잔뜩 자라난 수많은 작물들.
제일 많이 자라난 건 뱀넝쿨로 보이고, 그다음으로는 붉은 후추와 불꽃콩들이었다.
쌀들의 경우에는, 거의 멸종 직전에 이르렀다고 말해도 될 정도로 참담하게 누군가에게 뜯어 먹힌 모습이다.
“잉간, 이건 다 뭐야?”
“다 먹을 수 있는 풀들이야. 내가 끌려오기 전에 농사를 지으려고 하던 건데…….”
다그닥, 다그닥.
아리스에게 여기서 자라나는 식물들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던 그때.
낯익은 말발굽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고.
나는 방긋 웃으며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바라봤다.
“블랑카!”
역시나 내 예상대로 하얀 갑옷을 입은 블랑카가 한 손에 마력 창을 들고 내게 달려오고 있었고.
험악한 기세로 내게 달려오던 블랑카는 내가 손을 들어 인사하는 모습을 보며 서서히 속도를 줄이더니, 밭 건너편에 멈춰 섰다.
“잉간……?”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블랑카가 내 이름을 불렀고.
나는 환하게 웃으며 블랑카의 이름을 불렀다.
“응, 나야! 블랑카!”
블랑카는 밭의 작물이 다치는 것도 신경 쓰지 않으며 내게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내 손을 붙잡았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내 손을 꽉 쥐었다.
“진짜, 진짜로 만져져. 진짜네. 진짜로 돌아왔네…….”
“저기, 블랑카?”
무언가 심상치 않은 블랑카의 모습에 내가 난색을 표한 순간.
“흑, 흐윽. 흐극. 흐으윽…… 보고, 보고 싶었어. 잉간……. 흐윽…….”
갑작스럽게 블랑카가 나를 꽉 껴안으며 펑펑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뭐야?
블랑카, 너 갑자기 왜 이래?
* * *
클라인은 잉간과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하르피아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잉간이 저 하르피아를 싫어하는 기색도 아니었고, 억지로 떼어 놓는 게 더 좋지 않겠지?
결국, 클라인은 쥬스농장에게 마력을 지불하고 하르피아를 입양했고.
쥬스농장은 그대로 리만의 손에 이끌려서 중앙 구역으로 끌려갔다.
“클라인 양. 베이컨은 제가 잘 처리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 네…….”
만약 클라인에게 쥬스농장을 더 처벌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면, 말 그대로 쥬스농장을 나락으로 떨어트릴 수 있겠지만.
왜, 직접 영상을 찍어서 쥬스농장을 저격하는 영상을 올린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클라인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
더 쥬스농장과 엮이기 싫었을뿐더러, 오랜 시간 집 밖을 돌아다닌 클라인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이었다.
진짜, 더 이상은 무리다.
지금까지는 잉간이를 위해서 버텨 왔지만, 잉간이도 되찾았으니 이제 다 끝난 거잖아?
“맛 좋은 레스토랑을 하나 알고 있는데…….”
“죄송, 죄송해요…….”
리만은 그런 클라인의 모습을 보며 아쉬워했지만, 굳이 클라인을 붙잡지는 않았다.
리만도 앞으로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으니까.
클라인은 잉간이와 하르피아를 검역항에 넣은 채로 집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리만의 호의 덕분에 클라인은 곧장 집으로 통하는 차원 문을 열 수 있었고, 간신히 집으로 돌아온 클라인은 한숨을 내쉬며 푹 늘어졌다.
몸 안의 잔여 마력이 완전히 바닥났고, 은행에 보관해 둔 잉여 마력까지 완전히 바닥을 드러냈다.
다음 달이 될 때까지 사용할 기본적인 생활 마력은 남아 있긴 하지만.
뭐 다른 곳에 사용할 마력은 전혀 남아 있지 않네.
그렇다면 잉간이를 위한 새로운 차원항을 제작하려면 적어도 한 달은 걸릴 텐데.
“리퀴드사에 부탁해 봐……?”
하지만 도시형 차원항을 만들기 위해 소모되는 마력은 말 그대로 상상을 초월한다.
아무리 리퀴드사의 지원을 받아 만든다고 해도 부담이 간다.
차라리 다음 달까지 기다려서 들어온 수입과 저장된 잉여 마력에 리퀴드사의 지원을 더해서 차원항을 제작하는 게 더 나을 거다.
그럼 다음 달까지 잉간이의 차원항을 어떻게 건드릴 수는 없다는 거고.
어디 보자.
그럼 다음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은.
클라인은 천천히 자신의 방 안에 가득 들어찬 수많은 인간형 생물들을 바라봤다.
앞으로 자신은 잉간이를 반려 생물처럼 키울 생각이다.
울타르나 탄탈로스 같은 생물들처럼 말이다.
지금은 차원항 안에서만 키우지만, 최종적으로는 차원항 밖과 안을 자유자재로 돌아다닐 수 있게끔 하고.
잉간이와 꾸준히 교감을 나누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잉간이에게 온 신경을 쏟아부어야 하겠지.
잉간이에게 온 신경을 쏟아붓고도 지금처럼 수많은 인간형 생물들을 키울 수 있을까?
답은 아니요다.
하늘 고래처럼 많은 관리가 필요하지 않은 차원 생물들을 제외하면, 나머지 생물들은 다른 곳으로 입양 보내는 게 최선이겠지.
그게, 저 생물들에게도 자신에게도 더 행복한 길일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바로 이 수많은 차원항들을 없애 버릴 수는 없는 일이니까.
이 생물들을 맡아 키울 사람들을 구할 때까진 시간이 걸리겠지.
마지막으로 남은 건, 새롭게 들어온 하르피아와 켄토르의 서열 문제인데.
클라인은 슬며시 잉간이가 사라진 차원항에 남은 켄토르를 바라봤다.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진 않지만, 잉간이가 사라진 탓이 커 보인다.
그 증거로, 잉간이가 사라진 자리를 채우려는 듯 더욱 클라인과의 소통에 몰두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보아하니 하르피아와 잉간이의 서열은 잉간이가 더 높아 보이고.
켄토르와 잉간이의 서열도 잉간이가 더 높은데.
잉간이가 나서서 서열을 정리할 수 있을까?
“내가 개입해야 하진 않겠지?”
일단, 클라인은 하르피아와 켄토르가 서로 자연스럽게 서열을 정리하는 것을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잉간이와 켄토르를 합사할 때는 잉간이가 다칠 수도 있어서 개입했지만, 켄토르와 하르피아라면 그리 큰 싸움이 일어나진 않을 테니까.
싸움이 일어나더라도 큰 부상이 생기는 일은 없겠지.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검역항의 검역을 모두 끝마친 잉간이와 하르피아를 차원항 안으로 집어넣었다.
“미안해. 바쁜 일만 다 처리하고 나면 더 신경 써 줄게.”
잉간이를 반려 인간으로 삼을 거라면, 준비해야 할 게 참 많을 거다.
잉간이가 스트레스받지 않고 살아갈 환경도 필요할 테고, 잉간이가 자신의 정보를 모두 인식할 수 있게끔 도와도 줘야겠지.
그리고 또 지구의 환경에 대해서도 더 공부해야 할 테고, 잉간이의 친구들도 반려 인간으로 맞이해야 할 준비를 해야 할 거다.
그렇다면 내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역시 청소려나?
이렇게 어지럽혀져 있으면, 차원항 밖으로 외출한 잉간이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정말 오랜만에 스스로의 손으로 방 안에 가득 찬 쓰레기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언제나와 달리, 변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득 담아서.
70화 잉간이가 떠나 있던 동안 차원항에서 있었던 일!
“으흑, 흑, 흐윽…… 잉간…… 잉간…….”
블랑카는 나를 꽉 끌어안은 채 흐느꼈고, 나는 내가 알던 블랑카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에 당황했지만.
일단은 가만히 등을 토닥거리며 블랑카의 울음이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
“잉간, 잉간…….”
마침내 블랑카의 울음이 잦아들자, 나는 꼭 블랑카의 손을 붙잡아 주며 블랑카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 진정했어?”
“진정, 진정 못 했어. 도대체, 도대체 어디에 있었다 이제야 온 거야?”
블랑카는 나를 타박하듯 그렇게 따져 물었고,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블랑카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대충 간략하게 설명해 줬다.
“그러니까, 다른 신님의 세계에 다녀왔다고? 다른 신님의 초대를 받아서?”
“내 말을 어떻게 해석하면 그렇게 되는진 모르겠지만, 뭐. 대충 그래.”
내 설명을 들은 블랑카는 또다시 눈물을 글썽이며 내게 외쳤다.
“나는. 나는 네가 완전히 없어진 줄 알아서……! 나 혼자 이곳에 남은 줄 알아서……!”
“미안, 미안해. 나도 가고 싶어서 간 건 아니야. 정말 미안.”
“신님도, 신님도 처음에는 응답하다가 갑자기 대답을 안 해 주고……! 그래서, 그래서 저렇게…….”
블랑카는 지금껏 있었던 일을 아이가 보고하듯 서투른 솜씨로 눈물을 닦아 가며 설명했다.
“진짜, 진짜로 엄청 노력했다고……! 나 혼자서 엄청 노력했어! 여섯 달, 여섯 달 동안 나 혼자서 엄청…….”
“잠깐, 여섯 달? 여섯 달이나 내가 사라져 있었다고?”
“그렇다고. 그, 네가 맨날 사용하던 두루마리를 검색해서 해 보려고 해도, 나 혼자서는 도저히 무리여서…….”
이대로 놔두면 날이 어둑해질 때까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설명할 기세다.
잠깐 블랑카를 진정시킬 겸, 나는 조심스럽게 아리스를 블랑카에게 소개시키려 했다.
“블랑카. 잠깐 좀 진정하고. 너에게 소개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
“소개하고 싶은 사람……?”
그제야 블랑카는 내 등판에 납작 달라붙어 있는 아리스의 존재를 눈치챈 것 같았다.
블랑카는 깜짝 놀란 목소리로 아리스의 종족명을 입에 담았다.
“하르피아? 하르피아가 여긴 왜…….”
“어라, 아리스의 종족을 알고 있어?”
“리베리아에서 몇 번인가 만나 봤어. 그리 흔한 종족은 아니어서…….”
“그래? 아무튼, 아리스는 내가 끌려갔던 곳에서 만났던 아이야. 아마도 앞으로 우리랑 함께 지내게 될 것 같아.”
내가 그렇게 말하자, 블랑카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이?”
“응?”
“잉간. 내 눈에는 저 하르피아는 아이가 아니라 준성체 수준으로 보이는데?”
블랑카는 그렇게 말하며 내 몸 뒤에 몸을 순긴 아리스의 깃털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직 솜털이 남아 있긴 하지만, 털갈이도 다 끝난 것 같고. 저걸 아이라고 부르는 건, 조금 무리가…….”
“아이 맞거든? 아무것도 모르면서, 막말하지 마. 아줌마.”
“아줌마……?”
그때, 지금까지 잠자코 내 등에서 블랑카의 이야기를 듣던 아리스가 까칠한 말투로 블랑카의 발언을 부정했다.
아리스의 까칠한 말투를 들은 블랑카는 당연히 울컥하는 표정을 지었고, 아리스는 다시 내 등 뒤로 몸을 감추었다.
나는 험악해지려는 분위기를 애써 진정시키며 아리스와 블랑카에게 말했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서 지금까지 뭔 일이 있었는지부터 천천히 설명해 줘. 할 말이 많잖아?”
“그렇긴 한데…… 잉간, 그 하르피아…….”
“아리스. 내 이름은 아리스니까, 마음대로 이름 바꿔서 부르지 마.”
“……아리스. 아리스와는 계속 그렇게 붙어 있을 거야?”
“뭐…… 아리스가 불편해하지 않는다면?”
일단 아리스는 아직 부모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나이인 건 확실하니까.
거기에 꽤나 괴팍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던 것처럼 보여서, 이왕이면 최대한 아리스의 어리광을 들어주려고 한다.
너무 딱 달라붙어 있어서 움직이기 조금 불편하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들어줄 수 있는 어리광의 범주에 포함되지.
그렇게 생각하며 아리스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 적당히 오물들을 치우고 탁자에 주저앉자.
“이, 이, 잉간!”
“응?”
갑자기 얼굴이 시뻘게진 블랑카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 잉간이 아리스를 아끼는 건 알겠는데. 너무 붙어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역시, 아무리 어리광이라고 해도 이렇게 이성끼리 몸을 부닥치는 게 그리 좋지 않게 여겨지는 걸까?
블랑카가 귀한 집 아가씨로 자랐다는 걸 생각하면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으려나.
거기에 나도.
음.
나도 남자인지라 자꾸만 이렇게 붙어 있다 보면 반응을 하게 된단 말이지.
최대한 어리광을 받아 준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신체 접촉을 하는 건 줄여야 하려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아리스를 타이르려 했다.
“아리스. 블랑카 말 들었지? 블랑카 말대로 앞으로는…….”
“나는 잉간이 좋아서 이렇게 붙어 있는 건데?”
“어, 응?”
“잉간이 좋아서 달라붙어 있는 거야. 나도 이런 스킨십의 의미 정도는 안다고! 큐비한테 배웠거든?”
큐비 그 자식.
도대체 아리스에게 뭘 가르치고 간 거야?
너무나 당돌한 아리스의 말에 나와 블랑카 모두 말문이 막히고.
“아무튼, 나는 안 물러날 거야.”
아리스는 그렇게 선언하며 마치 과시하듯 내 곁에 찰싹 달라붙었다.
블랑카도 더 이상 말로 해 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블랑카.
아직 애야.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잖아?
나는 복잡 미묘한 시선으로 블랑카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고.
블랑카는 푹 한숨을 내쉬며 어찌저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스스로의 힘으로 집안일을 하기도 벅찼지만, 블랑카는 어떻게든 집안일에 익숙해졌다고 했다.
물론, 거의 야생동물 같은 삶을 사는 방식이었지만 말이다.
블랑카는 내가 사라진 이유를 어떻게든 설명받고자 했고, 그 노력의 흔적이 집 밖에 만들어진 수많은 제단들이었다.
“반응이 없어서, 점점 과격하게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방식을 바꿨어. 그랬더니 효과가 있었어.”
“효과가 있었다고?”
“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내 망상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때의 난 그렇게 생각했는걸. 아무튼, 나는 나 혼자 여기 남은 이유를 어떻게든 만들어 냈어…….”
자신의 정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든, 어쩌면 진짜로 주인과 소통하며 얻어 낸 대답이든 블랑카는 자신 혼자 남은 이유를 찾아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내가 하던 일을 잘 가꾸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블랑카는 생각했다.
그래서 블랑카는.
“그래서, 저렇게 농사를 커다랗게 지은 거야. 네가 사라지기 전까지 농사일에 관심을 엄청 가졌잖아?”
“그래, 그랬지.”
그렇게 블랑카는 바깥에 펼쳐진 커다란 밭을 만들었고.
만능 사전의 도움을 받아 가며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밭을 가꿨다.
다행히 블랑카의 노력은 결실을 맺어서 서서히 밭이 그럴싸한 모습으로 바뀌기 시작했다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침입자들이 밭을 망쳐 놓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때의 블랑카에게 있어서는 무척이나 중대한 문제로 다가왔고 말이다.
“그 빌어먹을 놈들을 쫓아내려고 온갖 방법을 써 봤는데도, 효과가 없어서 결국 쌀? 은 지키지 못했어…….”
아까, 숲으로 들어오면서 본 온갖 토템들과 표시들은 블랑카 나름대로의 영역 표시였던 모양이다.
그렇게 원시적인 경고를 해도 통하지 않다니, 이 주위에 그럴 만한 생명체가 있었나?
나는 문득 그런 의문을 블랑카에게 제기했고, 블랑카는 한숨을 내쉬며 내 의문에 대답했다.
“숲에는 없을지 몰라도. 저 산에는 살고 있었지.”
“산? 아, 설마……?”
그 펭귄들?
하지만 내 기억 속의 펭귄들은 무척이나 신사적인 녀석들이었는데?
그 녀석들이 도적 떼 비슷한 짓을 저질렀다고?
아니, 잘 생각해 보면 첫 만남 이전부터 내가 만들어 놓은 육포를 좀 훔쳐 먹는 모습을 보여 줬었지?
“그 녀석들 말로는, 촌장님과 우정을 나눈 녀석이 사라졌으니 더 이상 봐주지 않겠다고 하더라고.”
“에, 그 녀석들 말도 할 줄 알았어?”
내 앞에서는 맨날 포롱포롱만 외쳤는데.
내가 의문을 담아서 그렇게 말하자, 블랑카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응. 말도 할 줄 알더라. 아무튼, 그 녀석들이 매번 게릴라전으로 밭을 습격하는 바람에 밭을 지키기가 어려워서…….”
그 결과가 지금의 쌀이 거의 멸종한 것처럼 보이는 밭의 상태인가?
“나는. 나는 최대한 노력했는데. 산으로 도망치면 내가 잡을 방법도 없고……!”
“그래. 블랑카는 노력했어. 참 잘했어.”
블랑카는 자신의 노고를 알아 달라는 듯 눈물을 글썽이며 지금까지 있었던 일의 설명을 끝마쳤고.
나는 조용히 블랑카의 노고를 칭찬했다.
“아무튼, 저 펭귄……? 들하고의 관계를 개선하는 게 지금 닥친 최고의 문제겠네.”
아무리 블랑카가 강하다고 해도 펭귄들이 작정하고 식량만 털어먹는다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는 게 이미 밝혀진 상황.
블랑카가 그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펭귄들을 잡아 족쳐서 본보기를 보이는 식으로 강경 대응한 덕분에 펭귄들과 블랑카의 사이는 무척 좋지 않다고 한다.
“다시 리더 녀석하고 일기토를 떠서 인정받으면……?”
“그건 너랑 놀던 그 녀석이 이상한 거야.”
“역시 그렇겠지?”
그런 방식으로 인정을 얻는 게 아니면 도저히 펭귄들과의 관계를 개선할 방법이 보이지 않는데.
이대로 계속 관계가 악화된 채로 있으면 귀찮은 건 우리다.
지금 나와 블랑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어떻게든 말로 잘 타일러서 관개를 개선하는 방법과.
아예 그냥 펭귄 녀석들을 전부 죽여 버려서 펭귄들의 세력을 이 산에서 몰아내는 방법이다.
그, 촌장과의 기묘한 우정도 있고 펭귄들을 학살하는 건 좀 꺼려지는데.
“일단, 가서 대화부터 좀 해 봐야 하려나?”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푹 내쉰 순간, 아리스가 번쩍 손을 들어 올리며 내게 소리쳤다.
“잉간, 저기 잉간! 이거, 내게 해결할 수 있어!”
“해결할 수 있다고?”
“응. 내가 잘 말로 타이를 수 있어!”
그러고 보니 아리스와 펭귄은 같은 조류? 라고 볼 수 있으니까.
일단은 동족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으려나?
다른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동족이 말을 걸면 뭔가 달라지는 게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잉간. 나한테 맡겨 줘, 응?”
아리스는 눈을 반짝거리며 자신에게 이 일을 맡겨 줄 것을 요청했고.
나는 가만히 아리스가 펭귄들에게 위해를 입을 가능성을 생각해 봤고.
고개를 끄덕이며 아리스의 제안을 수락했다.
“좋아. 어떻게 설득을 할 생각인진 몰라도, 위험해질 거 같으면 바로 도망쳐야 한다. 알겠지?”
“괜찮아. 하나도 안 위험해!”
아리스는 방긋 웃으며 그렇게 호언장담했고.
나와 블랑카가 뭐라 말리기도 전에 훌쩍 하늘로 날아올라 산으로 날아갔다.
불안한 마음은 없지 않지만, 일단 아리스를 보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기에.
나는 블랑카와 함께 집 근방에 쌓인 오물들을 청소하며 좀 사람이 살 만한 공간을 만들려 했고.
청소가 중간 정도쯤 진행됐을 무렵.
“잉간!”
위풍당당한 표정으로 아리스가 한 무리의 펭귄들을 이끌고 돌아왔다.
“포로롱, 포롱!”
“포롱?”
그리고 아리스가 이끌고 돌아온 펭귄들은 벌떡 바닥에 엎드리며 블랑카에게 사과를 건넸고.
블랑카와 나는 어안이 벙벙해진 모습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어라, 진짜로 성공할 줄은 몰랐는데?
도대체 무슨 대화를 나눈 것인지 펭귄들은 아리스가 살짝 움직임을 보일 때마다 벌벌 떨었고.
아리스는 방긋 웃으며 내게 자랑스럽다는 듯이 자신의 성과를 이야기했다.
“그, 갑자기 물고기가 전부 씨가 말라서 그랬대. 앞으로는 절대로 우릴 건드리지 않겠다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어, 어…….”
“좋아, 해산! 다들 산으로 돌아가!”
아리스의 명령이 떨어지자 펭귄들은 부리나케 산으로 도망쳤다.
진짜, 도대체 무슨 대화를 나눴길래 저러는 거지?
블랑카가 그렇게 애써도 계속해서 약탈을 시도하던 저 펭귄들이?
그렇게 생각한 건 나와 블랑카만이 아니었는지, 아리스가 위풍당당한 표정으로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아줌마는 못하던 걸, 나는 단번에 성공했네?”
그렇게 뽐내듯 블랑카에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내게 착 달라붙었다.
“우와, 잉간. 이게 우리 둥지야? 엄청 깨끗해졌다!”
“어, 응. 지금까지 청소했으니까…….”
당연하게도.
블랑카는 그런 아리스의 모습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듯 보였고.
블랑카는 폭발하기 일보 직전의 상태로 보였다.
“저기, 아리스? 아까도 말했지만 그렇게 이성끼리 붙어 있는 건…….”
“뭐야. 내가 부러운 거야?”
블랑카는 한숨을 내쉬며 아리스에게 말을 걸었지만.
아리스는 과시하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블랑카를 도발했고.
아리스의 도발을 들은 블랑카는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며 대답했다.
“부, 부럽다니! 그게 부러울 리가…….”
“나는 잉간이 좋아서 옆에 있는 거니까, 상관없잖아? 오히려 옆에 있으면 안 되는 건 아줌마 아냐?”
“저기, 아리스. 아무리 그래도 블랑카에게 아줌마라고 하는 건…….”
“뭐, 뭐라고?”
“잉간하고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 아니면, 뭐야? 혹시 질투하는 거야?”
나는 과격해지기 시작한 아리스와 블랑카의 말다툼을 말리려고 해 봤지만, 아리스는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아리스의 도발에 블랑카의 말문이 막힌 사이 아리스는 내 팔에 팔짱을 끼고 나를 끌고 침대로 향했다.
“잉간, 나 졸려. 낮잠 잘래.”
“저기, 아리스?”
“응?”
“그, 원래 잠은 다른 이성하고 함부로 자는 게 아니거든……?”
“알아. 좋아하는 사람이랑 자는 거잖아? 그러니까 잉간하고 자고 싶은 건데?”
나는 어떻게든 아리스와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잡아 보려 했지만.
뭉텅이로 던져지는 아리스의 해맑은 호의에 말을 잃고 아리스가 좋아하는 대로 끌려다닐 뿐이었고.
아리스가 볼에 홍조를 띠며 내 팔에 자신의 가슴을 꾹꾹 밀어붙이던 그때.
“야.”
지금껏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블랑카의 차가운 목소리가 집 안에 울려 퍼졌다.
아리스 또한 움찔 몸을 떨며 블랑카에게 시선을 돌렸고.
블랑카는 아리스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너 짜증 나니까, 그냥 한판 붙자.”
* * *
(쵸코크림슈크림: 나를 먹어!)
“초코크림슈크림……?”
으엑, 유통기한이 얼마나 지난 거야. 이거?
정보 생명체가 달라붙다 못해 자의식을 가지고 말을 하네.
클라인은 방 한구석에서 발견한 초코크림슈크림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고, 초코크림슈크림은 곧바로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아직 방 청소가 끝나려면, 한참 남았다.
71화 잉간이를 두고 벌어진 켄토르와 하르피아의 싸움! 서열 정리 제대로 당한 아이는 과연 누구?
“뭐?”
“짜증 나니까, 한판 붙자고. 이년아.”
아, 내가 이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를 낼 수 있었구나.
그 어느 때보다 블랑카는 분노한 상태였지만,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객관적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었다.
지금 내가 뭘 하는 거지?
아직 어린 꼬맹이 상대로, 질투를 하는 거야?
그것도 자기감정을 계속해서 인정하지 않고 숨기다가 꼴사납게?
본가의 집사장이 블랑카의 이런 모습을 보면 대성통곡을 하겠지만, 뭐 어떤가?
여긴 리베리아도 아니고, 정말 오랜만에 잉간을 다시 보는데.
이 정도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져도 되지 않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들끓는 욕망을 좀 발산하고 싶으니까.
이 정도라면, 리베리아 님도 인정하실 거다.
리베리아 님은 남녀 간의 교류를 권장하시는 분이니까.
블랑카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아리스를 바라봤다.
“어, 저기. 블랑카?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좋아. 어디서 싸우고 싶은데? 말만 해.”
당연하게도 잉간은 블랑카의 발언에 당황해서 어떻게든 아리스와 블랑카 사이를 중재해 보려 했지만.
아리스는 옳다구나 블랑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잉간.”
“어, 응?”
“해야만 하는 일이니까. 가만히 지켜봐. 너도 맨날 나하고 저 맹랑한 꼬맹이가 싸우는 모습을 보긴 싫을 거 아냐?”
“어…….”
잉간은 뭐라 할 말이 많은 눈치였지만, 블랑카의 진지한 눈빛에 말문을 잃어버렸고.
블랑카는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집을 나와 호숫가로 향했고, 아리스 또한 자신이 질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모습으로 블랑카의 뒤를 따라왔다.
잉간 또한 푹 한숨을 내쉬며 아리스와 블랑카의 뒤를 쫓았다.
블랑카와 아리스가 호수 앞에 멈춰 서고, 블랑카는 가만히 머릿속으로 하르피아의 대처법을 떠올렸다.
일격 이탈.
그것이 하르피아들의 기본적인 전술.
자신이 지금까지 단련한 육체와 기술이라면, 하르피아의 공격이 들어올 때 반격을 충분히 날릴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저 하르피아는 아직 제대로 된 전투 방식을 배우지도 못했을 텐데.
그런 상대에게 자신이 질 리가 없지.
블랑카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리스를 노려봤고.
아리스는 여유 만만한 표정으로 슬쩍 허공으로 떠오르며 블랑카를 도발했다.
“흥, 지금까지는 뺏길 걱정이 없어서 여유롭다가 경쟁자가 등장해서 그렇게 다급해진 거야?”
나의 등 뒤엔, 지켜야 할 사람이.
“잉간은 내 거야.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안 줘.”
나의 창끝엔, 무찔러야 할 적이.
평소대로의 기도를 끝마친 블랑카는 가만히 눈을 뜨고, 아리스에게 말했다.
“그게 아냐.”
“응?”
“잉간은 네 소유물이 아니니까, 모든 걸 네 중심으로 생각하지 말란 말이다. 꼬맹아.”
우웅.
블랑카의 몸을 감싼 갑주에 블랑카의 마력이 스며들며 작동을 시작하고.
블랑카는 기도를 끝낸 자신의 정신처럼 날카롭게 벼려진 창을 아리스에게 들이밀었다.
그것을 전투 개시의 신호로 삼은 것인지 아리스는 하늘 높이 날아올랐고.
버럭, 고함을 지르며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을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나보다 약하면, 얌전히 내놓기나 해!”
아리스의 몸 주위로 날카롭게 벼려진 마력의 창이 만들어지고.
하나, 둘, 셋, 다섯, 열…….
아리스가 만들어 낸 수백 개의 창들이 하늘을 완전히 뒤덮고.
그대로 블랑카에게 쏘아졌다.
“조금 아프긴 할 텐데, 죽진 않을 거야! 그대로 기절이나 해!”
아리스는 이미 자신이 이겼다는 것처럼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선언했고.
“흡!”
하늘을 뒤덮으며 블랑카에게 쏘아지던 수백의 창들은 블랑카가 기합을 내뱉으며 단 한 번 휘두른 창에 허공으로 흩어지고.
블랑카는 차가운 눈빛으로 아리스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애송이.”
“애송이, 애송이 아니거든……?!”
블랑카의 목소리를 들은 아리스는 더욱 화를 내며 허공에 더더욱 많은 창을 만들어 냈다.
수백의 창이 단 하나의 창에 막혔다면, 수천, 수만의 창으로 상대하겠다고.
아리스는 그런 생각을 한 듯했고, 블랑카는 그런 아리스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저 정도로 마력을 펑펑 써 대는데 마력이 부족할 기미조차 없다니, 도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마력량이지?
그렇지만 한 가지 다행인 건, 역시나 아직 어리기 때문에 자신의 마력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방금의 공격도 누군가가 사용하는 모습을 보고 따라 하는 것같이 어딘가 어설프고, 한 가지 공격만 반복하는 걸 봐선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아니, 마법을 쓰는 법은 알고 있지만 싸움에서 지금의 공격 말고 다른 마법을 응용하는 법을 모른다는 게 더 정확하겠지.
저 정도로 마력이 넘쳐 나면 그냥 생각만으로도 불을 만들어 낼 수 있을 정도일 테니까.
이대로 펑펑 마력을 쏘아 대기만 해선 자신의 방어를 뚫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될 때는 언제일까?
그렇게 되면 억지로라도 방어를 뚫기 위해 근접 공격을 시도하겠지.
바로 그 순간을 노리기만 하면 된다.
블랑카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번의 공격을 어떻게 방어할지 생각했다.
공격이 쏘아지는 순간 앞으로 돌진하며 공격을 피할까?
아니면 그냥 아까처럼 사선에 들어오는 공격만 처리해?
아니면 그냥 몸으로 방어할까?
블랑카는 그렇게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고민했고, 그런 블랑카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그것을 본 블랑카는 자신의 행동 방침을 굳혔고.
“이래도 나를 애송이라고 부를 수 있어……?”
잔뜩 화가 난 아리스의 고함과 함께 수만 개의 창들이 블랑카에게 쏘아졌다.
아무리 마력이 넘쳐 난다고 해도 그 방대한 마력을 제대로 조작할 수 있느냐는 다른 일이다.
아무리 아리스가 드래곤에게 인정을 받을 정도로 배우는 속도가 빠르다고는 했어도 수만 개나 되는 마력의 창을 전부 완벽하게 조종하는 것은 무리였고.
조준이 빗나간 마력의 창이 주위의 나무들을 박살 냈고, 블랑카는 가만히 아까처럼 창을 내질러 마력의 창들을 지우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수가 많아도 너무나도 많다.
그 수많은 마력의 창을 전부 막아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뒤늦게라도 회피를 선택하면 막아 낼 수 있을 정도.
그렇지만 어째서일까?
블랑카는 마력의 창들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선택하며 가만히 제자리를 지켰고.
결국 블랑카의 몸을 마력의 창들이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아리스는 히죽 웃었다.
조준이 빗나간 아리스의 창들이 지면을 두드리며 흙먼지가 일어나고, 아리스는 흙먼지가 걷히고 드러날 만신창이가 되어 기절한 블랑카의 모습을 기다렸다.
하지만.
“꺄앗?”
흙먼지를 뚫고 마력의 창이 쏜살같이 아리스의 날개를 향해 쏘아졌고, 아리스는 몸을 뒤틀어 간신히 마력의 창을 피했다.
완전히 마력의 창을 피하지는 못해서 날개 끝이 조금 상하긴 했어도 아리스의 비행에 큰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흙먼지가 걷히며 블랑카의 모습이 드러났고.
갑옷 이곳저곳이 파인 것을 제외하면, 블랑카는 그리 큰 대미지를 입은 것 같지 않았다.
블랑카는 허공에서 살짝 끝이 상한 아리스의 날개를 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역시, 애송이가 맞아.”
“뭐라고?”
“너, 지금 네가 왜 싸우는지 잊은 거 아냐?”
“그야, 당연히 내가 너보다 강하다는 걸…….”
“그게 아니지. 잉간의 옆에 계속 있고 싶어서 내가 건 싸움을 받아들인 거잖아?”
블랑카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슬쩍 몸을 비켜서 자신의 등 뒤에 누가 있었는지를 아리스에게도 똑똑히 보여 줬다.
블랑카의 등 뒤에는 놀라서 뒤로 넘어진 잉간의 모습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아리스는 충격받았다는 듯 입을 다물었고, 블랑카는 조용히 아리스에게 소리쳤다.
“싸울 대상만 신경 쓰는 게 아니라, 지켜야 할 대상까지 신경을 써야지.”
“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아리스가 풀 죽은 듯이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 지금껏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던 블랑카의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읏?!”
블랑카가 몸으로 받아 낸 충격량이 갑주를 타고 흐르며 블랑카의 발끝으로 이동했고.
블랑카는 그 충격량을 이용해 순식간에 아리스와의 거리를 좁혔다.
말 그대로 눈 깜빡할 사이에 벌어진 일.
블랑카는 그대로 아리스의 목을 잡고 지면으로 다시 추락했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푸른빛 마력에 감싸인 아리스는 그대로 블랑카의 발밑에 깔렸다.
“마력을 넣어서 보호막을 쳤으니 다치진 않았을 거야.”
“으으, 으…….”
블랑카는 승리를 확신하며 아리스에게 그렇게 말했고, 아리스 또한 자신이 패배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입술을 깨물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아리스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고, 아리스는 자신이 운다는 사실이 분해 울음을 멈추려 했지만 그 마음이 더욱 눈물을 흐르게 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그리고 블랑카는 그런 아리스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아직 어리다.
이렇게나 어리다는 사실을 깨닫자 블랑카는 자신의 마음을 지배하던 분노가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고.
블랑카는 조용히 아리스를 일으켜 세웠다.
“블랑카? 아리스? 엄청난 소리가 났는데, 괜찮은 거 맞지?”
그리고 그와 함께 잉간이 걱정된다는 듯한 목소리로 두 명에게 다가왔고.
블랑카는 슬며시 잉간을 보며 미소 지었다.
아, 역시 나는 잉간을 좋아하는구나.
블랑카는 그렇게 생각하며 잠깐 아리스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진작부터 자기감정에 충실했으면 이런 모습을 볼 일도 없었을 것 아니냐라.
그래, 확실히 그 말이 옳다.
여기는 리베리아도 아닌데, 굳이 그곳에서의 규율에 얽매일 필요는 없지.
잉간이 사라지고 난 뒤로, 내가 얼마나 잉간을 좋아하는지 깨달았다.
블랑카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에게 달려오는 잉간을 바라봤고.
조용히 잉간의 이름을 불렀다.
“잉간.”
“어, 응?”
“처음 본 순간부터는 아니더라도, 어느 순간부터 널 좋아하게 됐어. 나는 너를 사랑해.”
이제부턴 자신의 욕망에 솔직해져야지.
* * *
“어, 응?”
“아, 그리고 난 얘랑 좀 이야기하다 들어갈 테니까, 먼저 집으로 가 있어.”
“어, 응?”
“창고에 육포 있으니까 먼저 밥 먹고 있어!”
“어, 응?”
내가 지금 뭔 소리를 들은 걸까?
아리스 하나만 해도 신경 쓸 게 많았는데, 블랑카는 갑자기 내게 뭔 소리를 하는 걸까?
블랑카의 뜬금없는, 그. 심경 고백을 듣고 나는 순간 사고가 정지했고.
블랑카는 훌쩍거리는 아리스를 마을 처녀를 납치하는 산적 두목처럼 들쳐 메고 숲속으로 사라졌다.
블랑카와 아리스가 사라지고 난 뒤에도 나는 그저 제자리에 붙박여 서 있는 수밖에 없었고.
간신히 발걸음을 떼어 놓는 와중에도 사고가 제대로 돌아가질 않았다.
방금 나, 고백 들은 거 맞지?
블랑카가 너무 시원스럽게 지나가는 일을 말하듯 말해서 더욱 현실감이 없다.
아니, 뭐.
솔직히 말해서 그날 있었던 사고 이후로 나도 블랑카를 좀 의식했고, 블랑카도 나를 의식하는 게 눈에 보이긴 했는데.
그래도 이렇게 돌직구로 고백할 줄은 몰랐지.
아니, 고백이 이상한 일은 아니잖아?
이상한 건 아닌데, 어떤 얼굴로 블랑카를 대해야 할지 모르겠네.
그냥 평소처럼 대하면 되는 거 맞지? 그치?
혼란스러운 생각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고, 나는 생각을 가라앉힐 김에 창고 정리를 마저 하며 아리스와 블랑카를 기다렸다.
대충 육포를 뜯어 먹으며 아리스와 블랑카를 기다리던 그때.
욱신.
에포나였던 것의 촉수에 찔린 내 가슴이 욱신거리며 이상한 고동을 울렸다 가라앉는다.
일단 요리라도 좀 해 두자.
지금 있는 재료가 육포에 달맞이풀이라.
대충 배춧국 끓이듯이 끓이면 되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리스와 블랑카가 돌아올 동안 요리를 시작했고.
달맞이육포국을 완성하자, 그제야 아리스와 블랑카가 돌아왔다.
“잉간, 지금 뭐 만드는 거야?”
“어, 음. 달맞이육포국……?”
아리스는 블랑카의 눈치를 보며 슬며시 블랑카 뒤를 따라왔고.
블랑카는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를 차지하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아리스는 그 모습을 보며 삐죽 입술을 내밀었고, 블랑카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잉간.”
“어, 응?”
“잉간은 나를 어떻게 생각해?”
“소중한 친구이자, 어항 생활을 헤쳐 나가는 동료. 그리고…….”
“매력적인 이성?”
“……네.”
“응, 그거면 됐어.”
블랑카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내게서 달맞이국을 받아 갔고,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아리스 몫의 달맞이국도 펐다.
“아리스가 널 생각하는 게, 일반적인 친애를 넘었다는 건 알고 있지?”
“응. 알지. 음.”
그렇게나 적극적으로 들이대는데 모를 리가.
어린아이답게 자신의 감정에 그렇게나 솔직하니까, 도저히 오해를 할 수가 없을 정도다.
“내가 아리스와 숲에서 잉간에 대해서 이것저것 토론을 나눴거든?”
“어, 음. 그래?”
“아리스가 서열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일단 좀 짚어 줬고, 제일 중요한 건 이거야.”
“뭐, 뭔데?”
“내가 정실이고, 아리스가 첩이라는 거.”
푸흡.
무심코 아리스에게 줄 달맞이국을 엎어 버릴 것 같은 내용이었지만, 떨리는 손을 붙들고 아리스에게 달맞이국을 건넸다.
아리스는 무척이나 불만이 많은 표정이었지만, 블랑카의 말에 반박을 하지는 않는다.
나는 식은땀을 슬며시 흘리며 블랑카에게 도대체 이게 뭔 이야기인지 물었다.
“아니, 음. 첩이라니? 다른 건 다 제쳐 두고, 너는 그래도 좋은 거야?”
“리베리아 님은 일부다처제를 장려했으니까. 뭐, 아리스는 그런 개념이 없는 것 같지만, 잉간도 이게 더 좋잖아?”
“아니, 그건…….”
“싫어?”
“……좋긴 한데. 조금 당황스럽기도 하고.”
“좋으면 된 거잖아?”
“음. 그렇지……?”
블랑카는 그렇게 말하며 슬쩍, 내 손을 붙잡으며 내게 몸을 더 붙였다.
그러며 조용히 내 귓가에 대고 아찔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속삭였다.
“저기, 잉간.”
“으응?”
“나, 부탁이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꺼낼 부탁은 역시 그건가?
그때 있었던 사고를 사고가 아닌 사고로 제대로 다시 사고 치려는 건가?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이어질 블랑카의 말을 기다렸고.
블랑카는 얼굴을 붉히며 내게 부탁을 해 왔다.
“그, 예전에 해 주던 마사지 있잖아. 그거, 부탁해.”
“어, 응?”
“뭐야, 기대하던 것과는 다르다는 표정인데?”
“아니. 뭐 딱히 기대하던 건 아닌데.”
“사고 비슷한 거였긴 했어도 나는 먼저 했으니까. 그러니까 아리스가 먼저 하게 해 주려는 거야. 뭐, 보니까 아직 미성숙한 것 같아서 좀 더 기다려야 하겠지만.”
뭐가 미성숙한지, 뭐를 겪게 해 주겠다는지는 난 모른다. 모른다고.
나는 얼굴을 붉히며 그냥 고개를 끄덕였고, 블랑카는 방긋 웃으며 내 손을 붙잡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럼, 마사지 부탁해!”
“어, 일단 밥은 먹고…….”
“아, 맞다. 밥 먹어야지.”
그렇게 일단, 어찌저찌 블랑카와 아리스 사이의 서열이 확립되고.
아리스는 내 곁에서, 블랑카는 언제나의 위치에서 잠을 자던 그때.
“흐얏?!”
“꺄아악?!”
블랑카와 아리스의 비명이 한밤중에 들려왔다.
“뭐야? 뭐야? 무슨 일이야?!”
나는 당황하며 벌떡 잠에서 깨어나 아리스와 블랑카를 살폈고.
“촉수, 촉수가…….”
“맞다. 에포나…….”
아리스와 블랑카가 내가 이해 못 할 단어를 중얼거리는 와중, 익숙한 울음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왕!”
기분 좋은 울음소리와 함께 에포나는 아리스와 나 사이에 끼어 들어와 몸을 눕혔고.
나는 멍하니 에포나를 쓰다듬으며 아리스와 블랑카가 다시 진정하고 나서야 잠에 들었다.
그리고 그날 밤.
“정실은 나라는 거, 잊지 마.”
나는 오랜만에 악몽을 꾸었다.
평소보다도 더 농밀하게.
* * *
“다, 다 했다!”
간신히 방 청소를 모조리 끝마치고 클라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 방 청소를 하며 나온 쓰레기들을 마력 변환했더니 클라인의 마력의 10분의 1에 달하는 양이 나왔다.
내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쓰레기를 모아 두고 있던 거야?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고, 잉간이의 차원항 상태를 확인했다.
“서열 정리, 무사히 된 모양이네.”
다행히 새로 들어온 하르피아도 차원항 안의 서열에 완벽히 적응한 것처럼 보인다.
대충 1순위가 잉간이, 그다음이 켄토르, 마지막이 하르피아인가?
차원항 안의 상태를 살펴보니 하르피아와 켄토르가 싸움을 벌인 듯 호수 근처가 엉망진창이 되어 있다.
개인적으로는 켄토르가 단번에 서열 정리를 할 줄 알았는데, 물리적 충돌까지 필요했던 모양이다.
아마, 하르피아가 차원항에 들어왔을 때 켄토르가 조금 약한 모습을 보였던 게 원인이 아닌가 싶은데.
클라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켄토르와 하르피아와 함께 잠자는 잉간이의 모습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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